01.
푸른 새벽에 들어섰던 곳에서 붉은 노을이 질 때야 나서는 일이 올해로 꼭 7년째다. 서윤조는 지친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계단을 하나씩 오를 때마다 저문 하늘이 고개를 내밀듯 모습을 드러냈다.
봄을 앞둔 밤공기는 기묘하게 속을 울렁거리게 했다. 그 느낌을 누군가는 두근거림이라고 하던데, 저에게는 불쾌함에 가까웠다. 잠이 모자란 탓이려니, 하며 눌러쓴 모자를 더욱 깊게 누르고 늘 가던 방향과는 반대로 걸었다.
번화가는 월급날이라 그런지 여느 때와 달리 복작복작했다. 이 가난한 도시 ‘미자르’가 아주 잠깐 반짝하는 날이 아닐까. 윤조는 제 빈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번화가의 풍경을 눈으로 훑었다.
상점 불빛에 반짝이는 사람들의 얼굴. 호객하는 상인들의 외침. 흥겨운 음악과 그에 섞인 웃음소리. 값을 치르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풍경을 구경하며 윤조는 코끝을 매만졌다. 어떻게 해도 디저트 가게의 달콤한 냄새는 만족할 만큼 얻지 못해 아쉬웠다.
남들은 월급날이면 번화가로 뛰쳐나올 만큼 좋아하는데, 윤조는 제 처지가 더욱 확실해져 기분이 가라앉는 편이었다. 윤조가 인식하는 제 처지란 ‘은혜를 갚아야 하는 지갑’이었다. 도대체 은혜라는 건 갚아지기는 하는 걸까. 이런 되바라진 생각을 삼촌이 안다면, 역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않았어야 했다고 혼을 냈을 테다.
최근 윤조는 차라리 삼촌에게 거둬지지 않은 게 좋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생각하자니 그랬다. 서윤조는 인간 구실만 할 줄 알지, 하고 싶고 배우고 싶은 건 하나도 하질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어오는 돈은 모조리 사촌 동생들의 입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제가 그렇게도 가고 싶어 하던 학교는 동생들은 가기 싫어 빼먹는 곳이 되어 있었다.
윤조는 제 가슴을 꾹꾹 누르며 번화가의 안쪽으로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깊이 들어갈수록 사람들의 표정이 다채로웠다. 월급날 한정인 기분일 테지만, 제게는 그 짧은 순간조차도 부러운 것이었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왜 내 것은 없을까.
사람들을 구경할수록 냄새만 겨우 맡을 수 있는 디저트 가게를 서성이는 기분이 들었다. 괜히 기분만 망친 것 같아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할 일이 산더미였다.
터덜터덜 걷던 윤조의 발끝에 무언가가 채였다. 윤조는 허리를 숙여 자신이 밟은 종이를 집어 보았다. 학원 전단이었다.
“집사…?”
그게 뭐람.
학교에 다녀 본 적 없는 윤조로서는 처음 접해 보는 단어였다. 학교에 다녔더라도 미자르에는 존재하지 않는 직업이었기에 귀띔으로도 들어 보지 못했다.
윤조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전단에 있는 글자를 하나씩 읽었다. 자신이 지금 집으로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모두 돈으로 받을 수 있는 일이라는 설명이 대부분이었다.
당연하게 해야 했던 가사가 돈을 받을 수 있는 일이라니. 그게 무어라고 돈을 주다니. 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씀씀이인가. 윤조는 홀린 것처럼 전단을 탐독했다.
“저택…, 부자.”
집사라는 사치스러운 인력을 부릴 수 있는 부를 거머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월급날만 반짝하고 마는 이 가난한 도시 ‘미자르’에서만 평생 살아온 저로서는 ‘집사’를 부리는 ‘사람’에 대한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어릴 때부터 돈, 돈, 노래 부르는 삼촌 밑에서 자란 윤조는 돈은 곧 인심이라 여겼다. 그 부러운 인생을 누리는 사람 밑에 들어가면 얼마나 많은 인심을 베풀까, 그럼 저도 좀 편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운명일지도 몰라.
이렇게 제 발치로 굴러 들어온 운명을 어떻게 걷어찰 수 있을까. 윤조는 품속에 전단을 꼭 끌어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주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 * *
집사라는 직업을 알고부터 윤조는 저를 둘러싼 환경이 너무도 좁게 느껴졌다. 학교에 다니는 동생들도 시시해 보였다. 삼촌이 제게 갈취해 가는 월급도 푼돈처럼 여겨졌다.
집사 학원.
그곳만이 유일하게 저를 구할 탈출구처럼 보였다. 자각한 순간부터 윤조는 있는 돈 없는 돈을 끌어모아 집사 학원에 등록했다.
오늘은 학원에 다닌 지 꼭 3주째 되는 날이었다. 부푼 꿈과 달리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학원 등록은 그저 시작일 뿐이었고, 인력 사무소의 중재로 저택 배치 순서가 돌아오려면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야 가능할 듯했다.
게다가 수업 내용에도 차등이 있어 큰 비용을 지급해야 고급 과정을 들을 수 있었기에 윤조는 전과 다를 바 없이 그저 그런 인력일 뿐이었다. 오메가 집사에 대한 남다른 수요가 있지 않았다면 집사의 길은 단념했을지도 모른다. 듣자 하니 오메가 집사는 재수가 좋으면 팔자가 핀다고 했다. 윤조는 대체 오메가인 게 어떻게 팔자가 피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게 자신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늘 그랬다. 삼촌 밑에서 살게 된 이후로 윤조는 무엇을 하든 그게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쥐꼬리만 하게 남은 용돈을 쥐어짜 매달 복권을 살 때도 ‘내’가 당첨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난 7년간 단 한 번도 윤조는 ‘내’가 되질 못했다.
그래서일 거다. 고작 3주 다닌 학원에서 일자리가 났다고 호출이 왔을 때 믿지 못한 것은.
“쥐새끼처럼 밤마다 어딜 나가나 했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7년간 매달 벌어온 임금의 9할을 바쳤으면 도리는 한 게 아닐까.
윤조는 삼촌을 상대로 자신이 지나치게 순진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이 집을 나가는 것도 모자라 도시까지 떠난다는 말에 삼촌은 격노했다. 집도 절도 없는 너를 거둬서 여태껏 먹이고 입혀 사람 만들어 놓았더니 돌아오는 게 고작 이것이냐고.
아니 글쎄, 지난 7년간 동생들 먹이고 입힌 건 저인 것 같은데. 윤조는 따지고 싶은 말을 삼키고 죄인처럼 머리만 조아렸다. 까딱했다가 그 먼 길 가서도 돈을 보내라고 할지도 몰라서다.
윤조는 끝까지 순진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결국 삼촌은 돈을 보내라고 했을 것이다.
“그 학원이라는 곳을 도대체 믿을 수가 없다. 그 인력 사무소도. 순진한 너를 꼬여 어디 장기라도 팔아넘기려는 게 아니야?”
삼촌의 다그침에 결국 윤조는 자신이 배정받은 곳의 주소를 밝혀야 했고, 월급의 5할을 송금하기로 약속했다.
“삼촌. 꼬박꼬박 돈 잘 보낼게요.”
“부디 내가 그 먼 데까지 찾아가는 일은 없게 해라.”
“아무렴요, 푯값이 얼만데요.”
“알면 네가 잘해야지. 이렇게 표까지 사주는 삼촌이 세상 어디에 있겠어?”
“예, 감사합니다, 삼촌.”
그래도 삼촌이 보내주어서 고마웠다. 어쨌든 제 미래가 은혜 갚는 지갑으로만 전락하는 게 아니라 다행이었다.
윤조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제 갈색 머리가 검게 변해 삼촌에게 돈을 끊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도착하면 전화하는 거 잊지 말고.”
“예. 삼촌.”
한 달 월급에 달하는 기차표를 손에 든 채 윤조는 오랜만에 삼촌을 향해 웃어 보였다. 학원에서 배운 게 없어 아득해지기는 했지만 어떻게든 될 것이라 여겼다. 다 알고 저를 선택한 것일 테니 말이다.
“전화!!!”
막 기차에 올라탄 윤조에게 삼촌이 재차 소리쳤다. 윤조는 성실히 고개를 끄덕이고 안쪽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칙. 칙. 칙. 치익.
기차의 육중한 바퀴가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서서히 멀어지는 삼촌의 얼굴을 보며 윤조는 더없이 밝게 웃었다.
* * *
꼬박 3일을 달려 도착한 도시의 이름은 ‘두베’였다.
두베는 윤조가 살던 ‘미자르’와 함께 13구역으로 분류되어 있었지만, 성격이 전혀 달랐다. 누가 오든, 가든, 전면으로 개방된 미자르와 달리 두베는 출입권이 없으면 방문하기도 어려울 만큼 엄격한 도시였다.
윤조는 일만 하느라 제가 살던 미자르도 잘 몰랐기에 머나먼 두베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다. 어렴풋이 흘려듣기로는 미자르에서 보지 못한 것이 죄 모여 있는 곳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윤조는 말로만 전해 들은 두베를 빨리 보고 싶어 이전 역인 ‘메라크’에서부터 식당칸에 나와 있었다. 윤조가 머문 침대칸은 창도 조그맣고 창살이 덧대어 있어 바깥을 구경하기가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식당칸에는 근사한 냄새가 났다. 윤조는 처음 보는 음식을 일상인 듯 먹는 사람들을 지나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자릿세가 있는 모양인지 직원으로 보이는 이가 슬그머니 윤조를 향해 눈치를 주었다. 윤조는 뻔뻔하게 버틸까 하다가 언제 또 식당칸에 와 볼까 싶어 메뉴판을 펼쳐 보았다.
한참 메뉴판을 더듬던 윤조의 손끝이 가장 작은 숫자를 찾아 헤매었다. 이 또한 놀라운 숫자였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노력이 우습게도 직원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을 해 보이며 윤조의 주문을 받아 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향기로운 커피 한 잔이 배달되었다. 서비스인지 작은 쿠키도 하나 딸려 나왔는데, 어찌나 달콤한지 혀가 다 얼얼했다. 윤조는 이 맛을 더 음미하고 싶은 마음에 혀 위에 놓아둔 쿠키를 천천히 녹여 먹었다. 이렇게 달콤한 맛을 본 게 얼마 만이던가. 사치스럽기 그지없는 쿠키를 부스러기까지 긁어먹은 윤조는 커피로 아쉬움을 달래며 곧 나타날 두베의 풍경을 기대했다.
“우와….”
잠시 후, 두베로 여겨지는 풍경이 윤조의 눈앞에 나타났다.
미자르에서는 보기 힘든 높은 건물. 거기에 달린 빼곡한 창. 계획적으로 나뉜 도로. 그 사이에 일렬로 심긴 나무. 빠르게 달리는 차. 색색의 간판. 13구역의 수도라고 보아도 무방한 두베는 윤조가 아는 단어로 표현하자면 ‘신세계’에 가까웠다.
어떻게 이걸 모르고 살았을까.
윤조는 창으로 스쳐 지나가는 두베의 풍경에 홀려 창가에 붙어 앉았다. 3일간 제대로 씻지 못해 꾀죄죄한 얼굴이 창에 비쳤다. 멍청히 입을 벌린 제 얼굴도 모르고 윤조는 그저 감탄만 했다.
끼이이익.
곧 기차의 속도가 점차 줄어들더니 우뚝 멈춰 섰다. 윤조는 서둘러 일어나 침대칸으로 달려갔다.
채 다리도 다 펴지 못한 자그마한 침상 한구석에서 짐 보따리를 챙겨 들었다. 전에는 들어본 적 없는 부드러운 음성의 안내 방송이 기차 내부로 흘렀다.
“이번 역은 이 기차의 종착역인 두베, 두베역입니다. 소지하신 표에 맞는 출구를 찾아가시고, 내리실 때 잊으신 물건이 없는지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윤조는 안내 방송을 끝까지 듣고 침대칸을 나왔다. 질리도록 표를 확인했기에 단번에 8번 출구로 향했다.
드문드문하게 서 있는 사람들 사이를 가르며 집사 학원에서 받은 두베 출입권이 제대로 있는지 가슴께를 더듬어 보았다. 빳빳하게 제대로 붙어 있었다.
윤조가 있던 침대칸에는 미자르 다음 역인 알리오스에서부터 차례로 자리가 비워졌기에 출구로 몰려드는 사람의 수는 적었다. 윤조는 저와 비슷한 행색의 사람들을 보며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들도 저와 같이 몸 언저리를 더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 자. 뒤로 물러나세요.”
드디어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는 검표원으로 보이는 사람과 무기를 소지한 보안 요원이 함께 서 있었는데, 그들이 올라탄 탓에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뒤로 밀려났다. 대기자 중 덩치가 가장 작았던 윤조는 밀리고 밀려 맨 끝자리에 서게 되었다.
“다음.”
다행히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윤조는 3일 내내 끌어안고 잔 출입권을 꺼내어 검표원에게 보였다. 위아래로 훑어보는 검표원의 차림새가 미자르의 직원과는 다르게 정갈했다. 식당칸에서 본 사람들처럼 저와는 이질감이 느껴졌지만 아무렴 어떨까. 저도 이제 두베에서 살게 될 터였다.
검표원이 출입권에 인쇄된 어떤 마크를 기기를 통해 눌러 보더니 더는 미련 없이 시선을 거두었다. 낮은 한숨이 윤조의 작은 입 안에서 맴돌았다.
“통과.”
검표원의 확인이 떨어진 뒤에야 윤조는 기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게이트는 먼저 내린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윤조는 이리저리 어깨가 치이며 게이트도 지나 두베역을 나왔다.
역 앞에는 커다란 광장이 있었는데 게이트에서 보았던 숫자는 일부였는지 엄청난 사람들이 지나고 있었다. 윤조는 입을 벌린 채, 눈앞에 펼쳐진 압도적인 풍경에 넋을 놓았다.
광장을 중심으로 뻗은 대로는 끝이 보이지 않았고, 대로를 중심으로 늘어선 건물은 하나같이 새것처럼 반짝였다. 정갈하게 심긴 가로수는 푸르다 못해 눈이 시릴 지경이었다.
그 아래를 지나는 사람들 표정에는 웃음과 여유가 넘쳤고 차림새도 모두 우아했다. 이렇게나 인파가 빼곡한데도 마치 물이 흐르는 것처럼 유연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신기할 정도였다.
광장 한가운데 있는 분수는 또 어떤가. 이 사람 많은 곳에서 사치스럽게 자리를 차지한 분수는 오후의 볕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두베 사람들은 광장의 분수쯤이야 흔한 일상인 모양인지 등을 돌려 앉아 있거나 시선을 두지 않고 지나치기만 했다. 저 같은 사람이나 호화로운 풍경에 눈을 빛낼 뿐.
윤조는 들뜬 얼굴로 광장 변두리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를 향해 걸었다. 마치 구시대의 유물처럼 사용 흔적이 거의 없는 공중전화의 버튼을 딸깍거리던 윤조는 시선을 들어 광장을 응시했다. 제 구불구불한 갈색 머리가 금방이라도 검어질 것 같았다.
이렇게 빨리 다른 계산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번뜩 든 생각을 외면하기엔 생생하게 느낀 현실이 있었다. 굳이 삼촌에게 전화할 필요가 있을까. 출입권이 없으면 들어오지 못하는 이 도시에 삼촌이 저를 쫓아올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윤조는 잠시 망설이다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출입권과 함께 애지중지 챙겨 온 저택의 주소와 그와 함께 동봉된 차비를 챙겨 손에 쥐었다. 광장을 뒤로하고 분수를 등진 윤조의 걸음이 두베의 여느 시민과 다르지 않았다.
*
평생 제 돈 주고는 탈 일 없다 여긴 택시에서 내린 윤조는 자신이 두베 외곽까지 나왔다는 자각만 있었다. 어찌나 달렸는지 다른 구역으로 넘어가는 게 아닐까, 기사가 자신을 납치하는 게 아닐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도 그럴 게, 내려선 곳에 집이랄 것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슬러 받은 지폐를 돌려줄 요량으로 주머니에 챙겨 넣은 뒤, 윤조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주변이 어찌나 조용한지 걸음마다 소음이 따라왔다. 사박, 사박. 보드랍게 부서지는 소리를 벗 삼아 윤조는 ‘입구’ 혹은 ‘문’을 찾아 헤맸다.
반듯하게 깎인 나무를 따라 걷고 있자니 곧 커다란 ‘문’이 나타났다. 어쩌면 택시 기사도 문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대략적인 위치에서 내려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윤조는 대문 여기저기를 살펴 안쪽에다 자신의 방문을 알릴 만한 장치를 찾았다. 손끝으로 더듬어 찾은 버튼을 누르자 기차 안내 방송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누구시죠?
“안녕하세요, 저는 미자르에서 온 집사 서윤조라고 합니다. 오늘부터 귀댁에….”
-아아, 미자르.
“네, 오늘부터….”
-연락했다고 들었는데 어쩌자고 여길 왔나 모르겠네요.
“네…?”
-우리 주인어른께서 반려하셨어요. 오메가 마크를 알파 마크로 착각하셨지 뭐예요. 요즘 부쩍 오락가락하시네요.
“아….”
-연락 못 받았나 봐요?
“예, 그런 연락은 받지 못했습니다.”
윤조는 제게 개인적으로 연락할 수단이 있었나 잠깐 생각해 보았지만, 불현듯 제 앞으로 툭 떨어진 현실에 눈앞이 캄캄해져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아무튼 집사는 다른 도시에서 오기로 했어요.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을 텐데, 미안하네요.
거짓말이지?
윤조는 눈앞이 흐릿해지는 기분에 몇 번이고 눈을 깜박였다. 그럼 조심히 돌아가라는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저기, 잠시만요! 제가 3일이나 기차를 타고 미자르에서 왔는데요.”
-저희 쪽에서는 이미 다 끝난 얘깁니다.
“그럼 저는 어떡하라구요?!!”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죠?
맞는 말이었지만 틀렸다고 소리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윤조는 식은땀이 배어난 이마를 쓸며 반박할 말을 찾아보았지만 이내 툭, 끊기는 소리에 깊이 절망했다.
이 허허벌판에서 뭘 어쩌라는 얘긴지.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윤조는 다시 벨을 눌러 보았다. 저인 것을 알았던 모양인지 상대는 귀찮은 목소리로 응대했다.
-예, 말씀하세요.
“제가, 인력 사무소에 연락할 길이 마땅치 않아서 그런데요. 혹시… 괜찮으시면 사무소에 제가 여기 와 있다고 전해주시면 안 될까요? 저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정말 몰라서요. 부탁드릴게요.”
-그건 해 드릴 수 있겠네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해주세요.”
-네.
다시 툭, 끊긴 음성에 윤조는 두 눈을 내리감았다. 손등 위로 떨어지는 것이 제 눈물인가 했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후드득 떨어지는 건 지나친 게 아닐까. 평소 눈물이 많기는 했지만, 이건….
“미쳤어…?”
머리 위로 굵은 빗방울이 쏟아졌다. 잠시 비라도 피할까 싶어 벨을 바라보았지만, 도저히 열어줄 것 같지 않았다. 윤조는 경계처럼 서 있는 까만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내리는 비를 맞았다.
혹독한 신고식이었다.
*
윤조가 아는 욕은 얼마 되지 않았다. 어째 욕도 이리 배운 게 없을까. 정수리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알고 있는 온갖 욕을 중얼거리다, 요의가 생겨 이대로 싸버려도 모를 거란 생각이 들었을 즈음이었다. 매정하게 침묵을 고수하던 대문이 말을 걸어왔다.
-아직 거기 있어요?
“…그럼 어디 있겠어요, 이 허허벌판에.”
저도 모르게 뾰족한 대꾸가 나갔다. 윤조는 제 턱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손으로 쓸어내며 대문에 붙어 섰다. 빗소리 때문에 상대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하하,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인데, 나도 여기 고용된 입장이라 마음대로 사정을 들어줄 수 없네요.
그리 오래되지 않은 체류 기간이었지만, 윤조는 일찍이 두베의 인심을 파악했다. 이곳에서는 집도 절도 없는 이가 갑작스레 비를 만나도 우산을 던져주는 인정은 바랄 수 없는 듯했다.
-곧 오신다고 하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보세요.
“예, 감사합니다….”
두베 사람들의 ‘조금’이 얼마만큼의 시간인지 윤조는 알 수 없었다. 광장을 오가던 여유로운 표정의 사람들만 떠올랐다.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듯했다.
차차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가고 정신이 혼미해질 즈음, 조금의 시간이 지난 모양인지 차 한 대가 윤조 앞에 멈춰 섰다.
“뭣 하고 있어? 타지 않고.”
어느새 날은 깜깜해져 시야가 불분명했다. 윤조는 소리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들어 제게 말을 건 사람을 보았다.
“아, 뭐 해! 비 들어오잖아!!”
사람은 보이지 않고 동그란 차바퀴만 보였다. 윤조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제게 말을 건 사람을 확인했다. 어서 타라는 듯 손을 흔들어 보이는 남자를 향해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제 몸인데도 말을 듣지 않아 어정쩡하게 걷고 있자니 남자가 눈을 찌푸리며 보았다.
“으이그, 미련하긴.”
손이 굳어 차 문도 열지 못하자 남자가 팔을 길게 뻗어 문을 열어주었다. 윤조는 고장 난 기계처럼 덜그럭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높은 차체에 올라타 좌석에 등을 대자 따뜻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이게 무어라고 이리 위로가 되나. 문득 뜨거운 눈물이 솟아났다.
“울어?”
“아니요….”
“울면서 아니라긴. 자, 얼굴이라도 좀 닦아.”
남자가 건네준 휴지는 받자마자 젖은 손에 들러붙어 소용이 없게 되었다. 윤조는 참았던 설움을 쏟아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의 차는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일이 틀어진 모양이지?”
미자르의 집사 학원과 두베의 인력 사무소와는 조금도 관계없는 사람처럼 남자가 말을 건네 왔다. 윤조는 자신이 엄한 사람의 차에 탄 게 아닌가 싶어 퍼뜩 눈물을 그치고 물었다.
“저기, 근데 누구세요?”
“누구긴 누구야, 그쪽 구제하러 온 사람이지.”
“그러니까, 어디 소속분이세요?”
“알아서 뭐 하게?”
“…그러게요.”
남자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알아서 무얼 할까. 미련하게 붙들지 말고 다음 일을 모색하는 편이 제게 훨씬 득일 것이다. 그래 봐야 미자르로 돌아가는 일뿐이었지만.
눈앞의 어둠처럼 윤조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동경으로 반짝이던 시선도 흐려졌다. 더는 느긋하게 두베를 구경할 수 없었다. 택시에서 보았던 풍경은 거짓말 같았다. 남자의 트럭에서 본 두베의 밤은 미자르의 밤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근데 어쩌다 이리로 넘어왔어?”
“회사에서 일을 엉망으로 해서 넘어왔지요.”
“아니, 그게 아니라. 얼굴을 보아하니 여간내기가 아닌 듯한데. 집이라도 망했어?”
“네?”
“나도 망했거든. 내 얼굴 봐봐. 이런 트럭이나 모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지?”
윤조는 눈길을 돌려 남자를 보았다. 알파나 오메가처럼 특징적인 생김새가 있다면 모를까. 직업적으로 생김새가 나뉘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트럭 모는 사람들이 다 똑같이 생긴 것도 아닌데, 몰아야 하는 얼굴이 따로 있는 건가 싶어 윤조의 고개가 비스듬하게 기울었다. 그러자 남자가 콧방귀를 뀌듯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어릴 땐 저런 집에서 살았거든. 근데 집이 쫄딱 망해서 지금은 먼 사촌한테 도움받아 작은 회사 하나 운영하고 있어.”
“아… 예.”
자랑인가.
윤조는 흥미를 잃은 얼굴로 창밖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무엇 하나 특별할 것 없는 밤 풍경이 지겹게 이어졌다.
남자는 그 후 윤조에게 말을 걸진 않았지만 홀로 콧노래를 부르고는 했다. 슬슬 히터 바람에 잠이 들려던 윤조를 남자가 흔들어 깨웠다.
“내려. 도착했으니까.”
퍼뜩 정신이 든 윤조는 바깥을 급히 살폈다. 다시 돌아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전과 다름없는 풍경이었다.
“뭣해. 나 바빠. 어서 가야 한다고.”
“여기가 어딘데요?”
비는 그친 모양인지 사방이 조용했다. 윤조는 흘러나오는 콧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더운 숨을 푹푹 내쉬었다. 된통 감기에 걸린 게 틀림없었다. 알 만하다는 얼굴로 윤조를 본 남자가 휴지를 건네었다. 잠시 눈치를 보다가 코를 팽 풀었다. 한 번으로는 모자라 몇 번 팽, 팽, 코를 푼 윤조는 이곳이 어디인지 다시 물었다.
“어디긴 어디야. 그쪽 하루 묵을 곳이지.”
“아까 거기 아니에요?”
“흥. 보는 눈이 없구만. 여긴 그런 외곽지에 있는 저택과는 차원이 다른 곳이라고.”
눈을 비벼 보니 이전의 저택과는 다르긴 했다. 은은한 빛이 서린 입구가 비할 바 없이 우아해 보였다. 윤조는 열과 흥분에 들떠 남자를 돌아보았다.
“혹시 저 이 댁에서 일하게 된 거예요?”
“꿈 깨. 내가 뭐라고 했어? 하루 묵을 곳이라고 했잖아.”
“…아, 그랬죠.”
“우리 사장이 그쪽한테 미안해서 ‘배려’해주는 거야. 내일 이걸로 집에 돌아가.”
남자가 성의 없는 손길로 윤조의 짐꾸러미에 기차표 따위를 쑤셔 넣었다. 윤조는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 물었다.
“사장이라 하시면… 두베 인력 사무소 직원분이세요?”
작은 회사를 운영한다고 했던 남자의 말을 잊고서 한 질문이었다. 남자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핸들에 기대 윤조의 얼굴을 빤히 보며 웃었다.
“아프겠는데?”
“네?”
“단단히 아프겠어.”
“…이미 아픈 것 같은데요.”
“그래. 가서 푹 쉬어. 점심 먹고 역으로 가면 될 거야.”
“바로 들어가면 돼요? 저 또 문전 박대 당하는 건 아니죠?”
“걱정 마. 내 이름 대면 돼.”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데요?”
“염한석.”
“염… 한석.”
윤조는 그제야 남자가 두베 인력 사무소의 사장인 것을 알아채고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채 따지기도 전에 한석은 문을 열었고 윤조는 구르듯 바깥으로 튕겼다.
“윽…!”
바닥에 철퍼덕 떨어진 윤조는 도끼눈을 뜨고 한석을 올려다봤다. 그의 말이 가관이었다.
“아니 뭘 그렇게 떨어지고 그래?”
“그쪽이 밀었잖아요…!”
“밀어도 똑바로 섰어야지.”
“예…?”
기가 차 몸을 벌떡 일으켜 보았지만 그는 따질 사이도 없이 다급히 문을 닫고 트럭을 출발시켰다. 윤조는 미처 따라갈 힘도 없어 멀어지는 한석의 트럭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래, 따져서 무엇하겠나. 이미 이렇게 되어버린걸. 어서 이 아픈 몸을 누이고 싶은 생각만 들었다.
휘이이익.
비가 그친 뒤라 선선한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윤조는 오한으로 떨리는 몸을 끌어안고 대문으로 향했다.
또다시 커다란 대문 앞에 섰다. 새카맣던 외곽지의 저택과는 달리, 이번 저택은 대문이 새하얀 색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은근하게 빛이 나는 게 무척 우아했다. 그런 감상도 잠시, 스산하게 부는 바람에 윤조는 바르르 몸을 떨며 안쪽을 넌지시 살폈다. 이전의 충격 때문인지 쉬이 벨을 누르기 힘들었다.
주변은 여전히 조용해서 한석이 데려다 놓은 이곳이 두베인지 혹은 다른 도시인지 알 수 없었다. 두베와 그나마 가까운 도시라면 메라크일 텐데. 윤조의 얕은 지식으로는 메라크가 어떤 도시인지 그조차 알 수 없어서 무척 막연한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막 벨을 누르려던 윤조의 뒤로 누군가 말을 걸었다. 윤조는 깜짝 놀라 안고 있던 짐 꾸러미를 그대로 떨어트렸다.
퍽…!
눅눅하게 젖어 있던 짐 꾸러미가 흙바닥에 떨어져 질펀한 소리를 내었다. 윤조는 굳은 몸은 그대로 두고 눈만 돌려 제게 말을 건 사람을 보았다.
“서윤조 씨?”
“예, 제가 서윤조인데요….”
“안내받으신 분 성함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안내…?
윤조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는 불러볼 일 없을 것 같은 이름을 입에 올렸다.
“염, 한석이요.”
윤조의 대답을 확인한 남자가 사무적인 태도로 고개 숙여 인사하더니 대문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남자의 태도만큼이나 사무적인 소리를 내며 대문이 열렸다.
이 건조한 출입 허가가 무어라고 윤조는 감격한 얼굴로 열린 대문 너머를 보았다. 그사이에도 바람은 세차게 불어 윤조의 몸을 떨게 했다.
“층 흰 손잡이가 달린 곳은 제외하고 모두 쓰셔도 됩니다.”
윤조는 잘게 고개를 끄덕이고 대문 안으로 발을 옮겼다. 대문과 가까운 곳에 공사 중인지 줄이 처져 있어 오른쪽으로 붙어서 걸어야 했다.
공사 구간을 지나자 키 큰 나무가 저택 근처까지 양옆으로 늘어서 있었다. 바닥의 빛을 따라 윤조는 천천히 걸었다.
기이이익.
쿵.
대문 닫히는 소리에 윤조는 몸을 돌려 그 너머를 바라보았다. 제게 말을 걸었던 남자가 대문과 반대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윤조의 시선이 남자의 등과 어깨를 가로지르는 길쭉한 물체에 닿았다.
…총?
놀란 마음에 걸음을 멈춰 선 윤조는 눈을 비비고 다시 남자를 살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잘못 본 거겠지.
날도 어둡고 정신도 없어서, 잘못 본 것일 테다. 주문처럼 중얼거리며 바람을 헤치고 걸었다. 덜덜 떨리는 몸이 예사의 것이 아니었다. 저주와 같은 한석의 말대로 저는 오늘 된통 아플 것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윤조는 떨리는 제 몸을 끌어안았다. 이윽고 나타난 광장처럼 넓은 공간에 서자 키 큰 나무에 가려졌던 저택의 모습이 한눈에 나타났다.
“미쳤다….”
윤조가 아는 최상급의 표현이란 고작 이런 정도였다. 고상한 감탄사는 알지 못했다. 윤조는 입을 벌린 채 동그랗게 마련된 저택 앞마당의 하얀 바닥 위에 섰다. 눈앞의 풍경이 너무나도 꿈만 같아서 그곳으로 걸어가는 자신도 꿈 같았다.
윤조는 잔뜩 홀린 얼굴로 저택 현관을 향해 걸었다. 이 많은 창 중에서 어떤 창의 풍경을 보며 잠들면 좋을까. 훑어보는 것만으로는 감히 가늠하기 어려운 수의 창을 보며 생각했다.
어떤 방을 쓰지 말라고 했더라?
열 때문인지, 남자가 제게 남기고 간 말이 조금 헷갈리기 시작했다.
흰 손잡이가 달린 곳을 쓰라고 했던가?
흰 문이었던가?
가 보면 알겠지.
윤조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 * *
운전석과는 칸막이로 분리되어 있고 세상과는 커튼으로 단절되어 있다. 권정한은 시트에 온몸을 기댄 채 서서히 느려지는 속도를 느꼈다.
메라크에서의 생활은 끔찍했다. 아버지 권주흠이 때에 맞춰 저택을 나가주지 않았다면 애써 참아왔던 일을 실행했을지도 모를 만큼.
떠올리기 싫은 메라크의 생활을 지우려 정한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사이 차가 완전히 정차했다. 조심스럽게 열린 칸막이 너머로 집사가 말을 걸어왔다.
“진입로 바닥이 깨져 공사 중이라 조금 걸으셔야겠습니다.”
정한은 집사를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차에서 내렸다. 예정보다 이른 도착 때문인지 바깥이 우왕좌왕하는 느낌이 들었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개중 평정을 잃지 않은 보안 팀장이 한걸음에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정한은 그에게 눈길만 준 뒤 곧장 대문을 통과했다. 집사의 말대로 대문 바로 안쪽 진입로는 공사 중이었다. 마무리 작업만 남겨 둔 듯했지만 차가 지나기는 힘들어 보였다.
“바닥을 조심하셔야겠습니다.”
세 살 어린애를 다루듯 집사는 정한을 애지중지했다. 정한은 집사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빠르게 걸었다. 어서 혼자 있고 싶었다.
“알아서 쉴 테니까 따라오지 마.”
그림자처럼 따라오던 집사가 정한의 말에 잠시 주춤했다.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느껴졌다. 정한은 죽지 않겠다는 의미로 손을 저어 보였지만 집사는 의심을 접지 않았다. 의미 없는 대치가 잠시 이어졌다.
‘네가 내 죽는 꼴을 기어코 봐야 속이 시원한 모양이구나.’
눈을 뜬 병원에서 제일 처음 마주한 아버지의 말로 정한은 자신이 완전히 실패한 사실을 알았다. 아쉽지는 않았다. 괴롭게 들끓던 감정이 일순 가라앉은 성과는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버지를 마주하면서 다시 괴로워졌고, 지금에는 그를 멀리하게 되어 다행이었다. 이제 스스로 생을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살해당한다면 몰라도.
그런 정한의 뜻도 모르는 집사는 아버지처럼 완강하기만 했다. 아버지에게 고용된 탓이기도 할 테지만, 집사는 등급이 높을수록 고용인의 말을 법처럼 따르는 기질이 있었다. 마치 그렇게 태어난 사람처럼, 공장에서 찍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정한이 여태껏 보아온 모든 ‘집사’들이 그러했다.
이번 집사는 특별히 기능이 추가되었다. 바로 권정한의 감시다. 그가 오감으로 느끼는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정한은 아버지의 대리인이나 마찬가지인 집사의 시선이 불편했다. 그가 두베에서 제일가는 등급의 집사건 무엇이건 제게는 필요 없는 감시 인력일 뿐이었다.
“윤 집사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소리 없는 눈싸움이 오가는 와중, 보안 요원 하나가 집사를 호출했다. 집사는 그제야 고개 숙여 물러났다. 이때를 놓칠세라 정한은 등을 돌려 안으로 향했다.
아버지의 부재를 나타내듯 저택 분위기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정한은 오랜만에 찾아온 제 저택이 고요하고 깨끗해서 마음에 들었다. 이 기세를 몰아 부디 잠들 수 있기를 기대하며 계단을 올라 서둘러 걸었다.
얼핏 살펴본 복도 천장이 깨끗했다. 징그럽게 감시하던 카메라와 제 숨소리 하나하나를 엿듣던 도청기, 존재만으로도 숨이 막히게 하던 아버지도 나가버린 이 저택에 이제 저 집사만 없으면 될 듯했다. 물론 그것까지 내걸었다간 쫓아낸 모든 것이 돌아올 게 분명해 어떻게든 참아야 했다. 겨우 혼자가 된 저택에서 저 거머리 같은 집사만 견디면 되는 거였다.
적당한 타협점을 찾은 것에도 불구하고 정한은 아버지와 감시 장치를 지겨워한 만큼 집사에 대한 반감을 쉬이 가라앉히지 못했다. 이게 다 잠들지 못한 시간 때문이라 애써 자신을 달래며 문 앞에 섰다.
유려한 곡선으로 마감된 하얗고 긴 손잡이 위로 정한의 손이 닿았다. 정한은 문득 바닥에 고여 있는 물을 이상하게 여겼지만, 지금은 그저 등을 대어 눕고 싶은 생각뿐이라 곧 신경을 껐다.
달칵.
외부의 불빛이 흘러들어온 실내는 어렴풋한 실루엣이 느껴졌다. 방 안의 풍경은 떠날 때와 다름이 없는 듯했다. 이 뜻 모를 이질감은 오랜만인 탓이리라 생각했다.
침대로 곧장 걸음을 잇는 정한의 손목에서 시계가 풀렸다. 기분 좋은 무게감이 낙하하듯 손가락 끝에 걸렸다. 정한은 넥타이 매듭 위로 손을 가져가며 침대 옆 서랍장에 시계를 두었다. 둔탁한 소리가 잠시, 채 넥타이를 붙잡은 손끝에 힘을 주기도 전에 정한의 동작이 일시 정지했다.
무시할 수 없는 이질감이 본능적으로 빛을 찾았다. 스탠드 불빛이 반짝하고 침대 위를 밝혔다. 베개 위로 복슬복슬하게 솟은 털이 보였다. 하다 하다 개를 데려다 놓았나 싶어 정한은 얼굴을 찌푸렸다.
당신 딴에는 절박한 심정인 건 알겠으나 정한은 그저 귀찮게만 여겨졌다. 무엇보다 지금은 제 침대에서 세상모르고 잠든 개를 치워내고 자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구불구불한 갈색 털을 향해 정한은 손을 뻗었다. 어째 주인이 왔는데 고개 한 번 들어 보지 않나 싶었다. 손끝에 감긴 털이 개치고는 결이 좋다고 생각하며 가볍게 몸을 두드렸을 때였다. 체온이 지나치게 뜨겁게 느껴져 절로 고개가 갸웃했다.
정한은 뒤늦게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을 알았다. 순진하게 개를 데려다 놓았을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버지를 쫓아내려 제 발로 집을 나간 자신의 오판이었다. 그놈의 오메가 테라피. 정한의 손끝이 망설임 없이 이불을 집어 들었다.
스르륵.
침대 위를 점령한 채 누워 있던 것은 개가 아닌 사람이었다. 현재 정한의 몸으로는 알파인지, 오메가인지 혹은 베타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지만 전신이 누드인 것으로 보아 아버지의 목적이 짐작 가능했다.
정한은 전보다 더 얼굴을 찌푸리며 무례한 침입자를 내려다봤다. 삐쩍 마른 몸은 어째 작정한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정한은 이마를 짚으며 뻔뻔한 뒤통수와 봉긋한 엉덩이 두 쪽을 보았다.
“이봐.”
뻔뻔함은 당할 수 없다는 걸 아버지에게 전수하였는지 상대는 움찔거리지도 않았다. 정한은 대각선으로 엎드려 누운 맨몸의 정체 모를 이를 지겨운 눈으로 살피다가 침대 근처로 바짝 다가갔다.
“…….”
불쑥 뻗은 손끝을 접으며 침음했다. 흔들어 깨울 요량이었으나 개가 아닌 것을 인지하고 나니 손을 대기가 찝찝했다. 문득 이것을 노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반. 삐쩍 마르다 못해 비참하기까지 해 보이는 외관을 보아 어쩌면 치료 목적으로 데려다 놓은 오메가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반 들었다. 보면 볼수록 점점 모호해지는 침입자의 정체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정한은 버릇처럼 집사를 떠올리다 곧 단념했다. 겨우 떼어낸 이를 다시 부를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놈의 오메가 테라피를 하루라도 일찍 시작하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당장 쉬고 싶은 생각으로 결국 정한은 침입자에 대한 궁금증을 뒤로 미루기로 했다. 아쉽게 제 침대를 뒤로하고 방을 나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집사가 급히 복도를 걸어 다가왔다.
정한은 끔찍한 기분에 적의를 숨기지 않고 집사를 바라보았다. 저를 부르려던 집사의 입이 조용히 다물렸다.
“저거 치워 놔.”
할 말이 있는지 집사가 다시금 입을 열었으나 정한은 귀찮다는 손짓을 해 보이고 맨 구석방으로 향했다.
코너에 있어 유난히도 창이 많은 구석방은 외부 조명 탓에 온 벽이 얼룩덜룩해 보였다. 잘못 골랐다는 후회가 뒤늦게 밀려왔지만 지금은 그걸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하얀 침대 위로 정한의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제 큰 몸을 맡기기엔 넉넉하지 않은 침대에 쓰러지듯 몸을 누이고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찾아온 수마가 정한을 덮쳤다.
*
창으로 빛이 밀려 들어왔다. 정한은 제 이마로 쏟아지는 따뜻한 빛에 눈을 떴다. 기분이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기대한 만큼은 아니었다.
불감증 치료를 거부한 대가가 서서히 드러나는 것일 테다.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머리를 무겁게 만드는 둔통은 단지 메라크에서의 생활 때문만은 아닌 게 분명했다.
가장 바라지 않았던 결과에 앞으로의 일이 불 보듯 뻔해 한숨이 나왔다. 언제까지 거부할 수 있을까. 죽지는 않겠지만 불편해야 할 증상을 평생 달고 살 자신은 없었다. 적절한 때에 아버지의 뜻을 따르게 될 테지. 정한은 버틸 때까지는 버티고 싶은 마음이었다.
세면으로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제 침대의 침입자를 떠올렸다. 지금쯤이면 아버지 귀에 들어갔을 일인데 조용한 게 이상했다.
“도련님, 안에 계십니까.”
깨어난 이후로 계속 구석방에 있던 정한은 집사의 부름에 낮게 대답했다. 그제야 문을 열고 들어온 집사가 걸쭉한 액체가 든 컵을 건네었다. 식사 대신으로 먹는 영양 주스는 영 맛이 없었다. ‘페로몬 불감증’ 판정 이후로 모든 감각이 둔해진 모양인지 그 맛도 점점 느낄 수 없어서 한편으로는 다행인 일이었다.
“어제 말씀드리려 했던 일이 있습니다.”
정한은 말끔히 비운 컵을 집사에게 내밀었다. 컵을 받아든 집사가 정한의 눈짓에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어제 도련님 방에 있던 이는 한석 님 쪽 사람이었습니다. 인력 사무소의….”
아버지의 전언이라 여긴 예상과 달리 집사는 염한석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정한은 그제야 침입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했다는 생각도 뒤늦게 따라왔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간밤에 부탁하고 가신 듯합니다. 보안 요원에게 전해 듣고 아침에 한석 님께 재차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어쩌고 있는데?”
“예?”
“쫓아냈냐고 묻고 있잖아.”
“쫓아내지는 못했습니다. 취침 장소를 잘못 전달받은 듯해 이동을 권유하려 했습니다만….”
정한은 집사가 제 말을 들어 먹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상태가 조금 이상하여 그대로 두었습니다.”
“상태?”
“지난밤 비를 많이 맞았다고 들었습니다. 열 감기로 추측됩니다.”
손끝으로 확인했던 열감이 떠올랐다. 어제의 열기를 더듬듯 정한은 제 손끝을 지분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 정한을 보고 심기가 불편하다 여긴 집사가 곧 내보낼 테니 잠시 방에 머물러 달라 부탁했다.
“기다려.”
나가려는 집사를 급히 불러 세웠다. 비록 근신 중이기는 하나 환자를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좀 볼까 하는데.”
진정 상태가 좋지 않았던 모양인지 집사는 정한을 말리지 않았다. 이 저택에 저만큼이나 불필요한 침입자를 쫓고 싶어 할 사람이 바로 그일 텐데도. 정한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구석방을 나섰다. 고요한 복도는 어젯밤과 같은 인상이었다. 사람의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썰렁한 게 마음에 꼭 들었다.
오래지 않아 도착한 제 방 앞에 서서 잠시 아래를 살폈다. 문 앞에 고여 있던 물은 말끔하게 말라 있었다. 흔적도 없이.
“들어오지 말고 대기해.”
집사를 바깥에 세워 두고 문을 닫았다. 참견이 심한 집사였기에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저를 귀찮게 할 게 뻔했다.
방 안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적막했다. 정한은 납작하게 누워 있는 침입자의 미약한 존재감을 확인하고 이불을 걷었다.
지난밤과 자세가 바뀌어 있었다. 밋밋한 가슴과 선홍빛의 말간 유륜. 비쩍 마른 배와 작은 골반, 그 아래 고환 없이 늘어진 성기 따위가 눈에 들어왔다. 고환이 없는 대신 배 속에 자궁을 간직한 남성체 오메가인 게 분명했다. 오메가였지만 저와 배를 맞댈 상대가 아님을 확인하고 나니 온전히 환자로만 느껴졌다.
정한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남자의 얼굴에 닿았다. 괴롭게 일그러진 작은 얼굴 위로 갈색의 구불구불한 머리칼이 땀에 젖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붉게 부어오른 눈두덩은 운 듯했고, 느린 숨을 내쉬는 입술은 메마르고 거칠거칠해 보였다.
정한은 빠르게 남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벌려본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머리카락과 같은 갈색 눈동자는 불쑥 나타난 존재감에 놀라 움찔거렸다. 그러면서도 깨어날 수 없어 그대로 감기는 눈꺼풀이었다.
방을 가로질러 벽면 서랍장을 열자 와르르 쏟아져 나온 주사액이 손끝에 걸렸다. 그 안을 움푹 파고든 바늘이 꿀꺽꿀꺽 액체를 삼켰다.
일회용 알코올 스왑을 입에 물고 다시 침대로 돌아온 정한은 망설임 없이 남자의 팔을 잡아들었다. 물고 있던 알코올 스왑 껍질을 찢어 남자의 창백한 살점 위를 쓸었다.
조금 정신이 든 모양인지 남자가 가볍게 반항했지만, 바늘은 이미 찔러 들어간 뒤였다. 정한의 손자국이 난 남자의 팔이 침대 위로 아무렇게나 떨어졌다.
* * *
윤조는 손님에게 내어주는 방치고는 지나치게 큰 방에서 눈을 떴다. 천장에 조각된 화려한 문양을 보고 있자니 문득 꿈인가 싶게 비현실적인 기분이 들었다.
볼을 꼬집어 보려다 벌떡 일어나 앉았다. 지난밤 어떻게 이 침대 위로 자신이 무너져 내렸는지 퍼뜩 생각난 참이었다. 이보다 더 비현실적인 느낌이 있을 수 있을까.
윤조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제 몸 여기저기를 매만졌다. 어제 맞은 빗방울이 간밤에 바늘이 되어 다시 머리 위에서 떨어지듯 아프게 하더니, 정체 모를 그림자를 본 뒤로는 견딜 만해졌고, 곧 창밖의 맑은 하늘처럼 아픔이 가셨다. 마치 꿈처럼.
“일어났습니까.”
잠기운을 깨우듯 낯선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윤조는 퍼뜩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방향을 보았다.
집사 학원에서 보았던 정석 차림새로 서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무심코 침대에서 내려가려다가 집사의 손짓에 윤조는 뒤늦게 제 상태를 상기했다.
축축하게 젖은 옷을 대충 물에 빨아 널어 두었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희미했다. 열에 취해 본능적으로 움직인 참이라 옷을 어디에다 널어 두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 윤조의 당혹함을 읽었는지 집사는 윤조가 앉은 침대 발치를 가리켰다.
“옷이 젖어 당장 입을 수는 없을 듯해, 새 옷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입고 나오세요, 곧 기차 시간입니다.”
“아… 네.”
잠긴 목소리가 민망해 윤조는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언제 이런 집사의 융숭한 대접을 받아 볼까. 다른 건 몰라도 한석이 좋은 곳을 소개해준 건 고마웠다.
윤조는 방을 나서는 집사의 뒷모습을 감격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문이 닫히고 집사의 기척이 멀어진 뒤, 무릎걸음으로 기어 그가 마련해 놓은 옷을 집어 들었다. 보드라운 감촉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손에만 스쳐도 이런 데 입으면 얼마나 좋을까. 윤조는 처음 만나 본 문물을 반기듯 집사가 두고 간 옷을 뺨에 대어 비벼 보고 킁킁 냄새도 맡아보았다. 제게는 찾아보기 힘든 어른의 냄새가 나는 듯했다.
“기차 시간 다 됐다는 말 못 들었나?”
또렷하게 방을 울리는 새로운 목소리에 윤조는 그대로 굳어 손에 든 옷을 떨어트렸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몰라도 방에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윤조는 고개를 돌려 창가 테이블에 앉은 남자를 보았다. 제 쪽에서 시선을 거두며 찻잔을 기울인 남자는 도저히 집사로는 보이지 않았다.
차림새며 생김새며. 그래, 누가 보아도 이곳의 주인 같았다. 그제야 윤조는 지난밤 한석이 한 말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주인처럼 생긴 사람이 있었다, 이 세상에는.
“귀가 먼 건 아닐 텐데.”
“아… 예, 준비하겠습니다!”
홀딱 벗은 채인 제 상태도 잊고 윤조는 튕기듯 침대에서 일어났다. 남자의 시선이 잠시 그런 윤조에게 닿았다가 다시 찻잔으로 떨어졌다. 무미건조한 시선이었지만 어쩐지 의미가 있는 듯해 목덜미가 쭈뼛해졌다.
뒤늦게 찾아온 자각은 부끄러움을 동반했다. 어디 그뿐일까. 윤조는 유난히도 덜렁거리는 듯한 제 밑을 내려다보고 깜짝 놀라 침대 위의 옷을 집어 들었다. 이게 왜 이렇게 커져 있나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런 모습은 전에도 본 적 없었다.
“체력이 너무 떨어져서 약을 하나 더 썼다.”
“예…?”
“놀라지 마. 금방 꺼질 테니까.”
남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멍청히 서 있는 사이, 그의 말대로 밑이 가벼워졌다.
달칵.
남자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윤조는 그제야 그가 행동으로 자신을 채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욕실로 걸음 했다.
욕실의 하얀 손잡이를 붙잡기 전, 윤조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팔걸이에 두 팔꿈치를 기댄 채 저를 보고 있는 시선과 그대로 마주쳤다. 제법 떨어진 거리인데도 짙은 눈동자 색 때문인지 남자의 시선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내가 곧 약속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남자의 건조한 음성에 목이 바짝 타는 듯했다. 윤조는 냉큼 고개를 끄덕이고 욕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이 순식간에 쏟아졌다. 땀으로 진득하게 젖은 몸을 빠르게 씻어 내렸다.
*
긴 복도를 두고 정렬된 방은 모두 흰 문을 달고 있었다. 윤조는 방에서 나오고서야 자신의 실수를 눈치챘다.
모든 문이 희고 개중 손잡이까지 흰 것은 자신이 머물렀던 방이 유일했다. 고로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의 방에서 멋대로 잠들었다는 얘기였다.
몸 둘 바 몰라 쭈뼛거리던 것도 잠시, 이런 집에서 사는 그가 부러워졌다. 물론 제 주제라면 이곳 집사를 가장 부러워해야 했지만, 윤조는 이곳 주인이 제일 부러웠다.
덜 마른 옷은 집사에게 얻은 비닐에 넣고 출입권과 기차표는 그와 분리해 짐 꾸러미에 잘 챙겨 넣었다. 저택에서 받은 옷에는 중요한 물건을 숨겨 놓을 만한 안주머니가 없는 탓이었다.
두베로 오는 길이면 몰라도 미자르로 가는 길이니 무슨 일이 있을까. 이것만 잘 챙기고 있으면 그만이라 생각하며 처음보다 묵직해진 짐 꾸러미를 안고 윤조는 다시는 올 수 없을 저택 내부를 살피며 걸었다.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이어진 화려한 장식과 은근한 조명에 시선이 갔다. 저로서는 가치 모를 그림과 조각품이 걸음마다 이어졌다. 바닥의 카펫도 어찌나 보드라운지 미자르의 제 이불은 지푸라기나 다름없게 여겨졌다.
될 수 있다면 조금 더 저택을 구경하고 싶었다. 어제 몸만 괜찮았다면 실컷 구경했을 텐데. 잠도 자지 않았을 텐데. 윤조는 아쉬운 마음에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두베역 광장에서 보다도 더 미련하게 주위를 살폈다.
“와….”
기어코 걸음을 멈춰 선 순간이 찾아왔다. 윤조는 어젯밤 어두워서 보지 못했던 정원의 풍경을 마주하고서 가슴이 툭 떨어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비를 머금은 나무와 꽃이 어찌나 반짝거리는지. 마치 보석 같았다. 미자르의 들판과 산에서 보았던 자연의 풍경도 아름다웠으나 사람의 손길 하나하나가 닿은 가꿔진 정원이 제 취향이었던 모양이다.
“서윤조 씨.”
감상에 빠진 윤조를 다그치듯 집사가 이름을 불렀다. 윤조는 집사의 등에 붙을 듯이 걸음을 빨리했다.
키 큰 나무 길을 지나 대문에 다다랐다. 미리 대기해 놓은 듯한 차에서 보안 요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내렸다. 집사가 앞문을 열고서는 윤조를 향해 손짓했다.
“앞에 타도 되나요?”
“왜, 나랑 같이 뒤에 타게?”
언제 왔는지 남자가 등 뒤에서 나타나 윤조의 옆을 스쳐 지났다. 보안 요원이 기다렸다는 듯 차 문을 열었다. 남자는 윤조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고 그대로 차에 올라탔다. 윤조는 남자가 탄 뒷좌석의 문이 닫히는 걸 보고 저를 두고 갈까 싶어 냉큼 집사가 열어 둔 앞좌석에 올랐다. 그제야 닫히는 문에 안심했다.
“30분 정도 걸릴 예정입니다.”
집사는 친절했다. 행동에 군더더기도 없었다. 운전도 마찬가지였다. 집사의 능숙한 운전으로 차가 부드럽게 저택 대문 앞을 지나자 윤조는 한석의 트럭이 떠올랐다. 그때보다 시야가 훨씬 낮아졌지만 보이는 풍경은 천지 차이였다.
앞으로 30분.
그 이후로는 미자르로 향하는 풍경만 보게 될 것이다. 어쩌면 평생, 아까 보았던 정돈된 정원 같은 건 보지도 못하겠지. 어쩐지 지옥으로 끌려가는 듯한 기분에 윤조는 우울해졌다.
삼촌에게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도 막막했다. 쫓겨나면 어쩌지. 내가 누울 침대가 이미 사라지고 없으면 어쩌지. 덜컥 무거워진 마음에 윤조는 끄나풀이라도 붙잡으려 제 옆에 있는 집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런 멋진 저택에서 일하는 집사라면 등급이 상당할 것이라 예상되었다. 그에게 무엇이라도 배우고 알아 두는 게 좋지 않을까. 유리 칸막이 너머에 앉은 남자를 잊고 윤조는 운전에 열중한 집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고향이 어디세요?”
집사는 질문을 듣지 못한 듯 침묵하다가 윤조의 끊임없는 시선에 짧게 대답했다.
메그레즈.
두베로 오는 기차에서 정차해 보았던 곳이었다. 윤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질문을 이었으나 집사는 핵심만 되는 대답만 해 보일 뿐 윤조에게 정보를 줄 마음은 없어 보였다. 슬슬 윤조의 푸념이 이어졌다.
“경력이 상당하시네요. 사실 저는 학원 다닌 지 이제 겨우 3주 차거든요. 배치받은 건 처음인데 이렇게 일이 틀어졌으니…. 돌아가면 언제 일을 맡게 될지 모르겠어요.”
“…….”
“죄송한 질문인데 혹시, 첫 배치는 어느 정도 걸리셨어요?”
집사가 잠시 눈치를 주는 듯하더니 또 짧게 답했다.
3년.
그것도 고급 과정을 거쳐서. 윤조는 까마득한 기분에 눈앞도 어두워지는 듯했다.
“전 기초 과정도 겨우 들은 건데…. 고급은 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적어도 미자르보다는 좋은 도시로 가고 싶거든요. 근데 삼촌이 저한테 그 시간을 줄까요? 제 월급을 학원에 쓰는 걸 허락해줄까요…?”
말로 하니 제 상황이 암담해져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제가 두베 온다니까 동생들에게 헛바람 들었다면서 삼촌이 저한테 전보다 돈 더 보내라고 했거든요…. 전 그래도 좋으니까 그러겠다 했어요. 근데 이렇게 돌아가면 전 어떻게 되는 걸까요…? 전에도 엄청 쪼들렸는데, 이제 저한테 용돈이 생기기는 할까요…?”
감정에 격해진 윤조의 목소리가 커졌다.
“어떻게 오메가 마크를 알파 마크로 잘못 볼 수 있는 걸까요? 그 댁 주인께서 눈이 많이 안 좋으셨나 봐요. 좀 꼼꼼하게 보셨으면 좋았을 텐데….”
반응 없는 집사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윤조는 그치지 않고 말했다.
“삼촌이 저보고 운이 좋다고 했거든요? 당신 같은 사람 만나기 어렵다면서요. 네, 맞아요. 확실히 그래요. 저한테 삼촌이라는 가족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한때는 그랬을지도 모르나, 지금은 아니었기에 윤조의 목소리가 점차 줄어들었다.
“근데 요즘은 의문이 들었어요. 삼촌 말대로 내가 정말 운이 좋은 걸까….”
“…….”
“이번 일로 확실히 알았어요. 전 운이 없어요. 그냥 이렇게 살 운명인가 봐요. 뭣하나 남지도 않는 일을 평생 하고, 돌아와서는 동생들 뒤치다꺼리하고, 작은 용돈으로 만족하는… 그런 거요. 이게 제 운인가 봐요.”
거의 울 지경이 되었을 때였다. 도착을 알리듯 차의 속도가 줄었다. 윤조는 미련이 남은 눈으로 집사를 바라보았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오랜 경력의 집사는 윤조의 시선을 당연한 듯 무시하고 사무적인 목소리로 도착을 알렸다. 윤조는 그제야 한석이 안배해준 ‘배려’가 끝난 것을 알았다.
“고맙습니다, 옷 챙겨주셔서 감사해요. 이렇게 좋은 옷은 처음 입어 봐요. 데려다주신 것도 감사하고요. 제 푸념 들어주신 것도….”
조금이라도 더 머무르고 싶은 마음에 주절주절 감사 인사를 늘어놓던 윤조는 뒤늦게 남자의 존재를 떠올렸다. 고개를 돌려 유리 칸막이 너머를 바라보니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 저택 주인이 보였다. 높은 콧날과 서늘한 눈매가 한눈에도 알파인 것을 뿜어내고 있었다.
두베역 광장에서도 몇몇 알파를 보았지만, 저 남자만큼 알파라는 확신이 서는 이는 본 적이 없다. 미자르에서는 구경도 못 해 봤다. 저 같은 열성 오메가도 귀한 곳이었으니, 알파는 오죽할까.
윤조는 남자에게도 긴긴 감사의 말을 하려 했지만 이내 시계를 들여다보는 그의 행동에 감사하다는 인사만 전하기로 했다. 귓가에 파고든 이질적인 소음만 아니었다면 벌써 인사를 끝내고 내렸을 것이다. 윤조와 더불어 남자의 시선이 집사가 앉은 방향으로 돌아갔다.
펑!!!!!!!!
그곳에서 어마어마한 폭발음과 함께 불꽃이 튀었다.
펑!!!!!!!
폭발이 이어졌다. 귓가에 이명이 울릴 만큼 엄청난 소음에 윤조는 깜짝 놀라 어깨를 튕기며 차창에 등을 붙였다.
그때, 정차했던 차가 급하게 바퀴를 굴렸다. 윤조는 집사를 향해 소리치고 싶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자욱한 연기 속에 방향을 잃고 질주하는 반대편 차가 눈에 보인 탓이다.
끼이이이익!!!!
운이 없어도 정도가 있지. 윤조는 눈을 감으며 안전띠를 꽉 붙들었다. 폭발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소음이 귀를 찢을 듯했다.
강한 충격에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제 끝이다. 그렇게 운이 없더라니. 이런 결말을 맞이할 줄은 미처 몰랐다.
윤조는 더한 충격을 기다리느라 눈을 꼭 감은 채로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제 몸 어딘가가 짓눌리거나 찢어지는 고통은 느낄 수 없었다. 흔들리던 차체도 잠잠했다. 멀리서 총격 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일단 제 주변으로는 상황이 일단락된 듯했다.
천천히 눈을 떠 주변을 살폈다. 탁한 연기 속, 핸들에 고개를 묻고 있는, 아니 몸이 짓눌려 엎드려 있는 집사가 눈에 들어왔다. 제 운이 좋지 않다는 푸념은 투정이라도 된 듯했다.
축 늘어진 팔. 앞 유리를 물들인 피. 메케한 연기 냄새. 여유를 잃고 달리기 시작한 사람들의 발소리. 다가오는 사이렌. 차차 윤조의 모든 감각을 통해 상황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윤조는 문득 생각나는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깨어진 유리 칸막이 너머로 아무 일 없다는 듯, 평온하다 못해 느긋한 자세로 앉아 있는 남자가 보였다. 시계를 내려다보는 모습이 전과 다를 바 없어 윤조는 자칫 지금 일어난 일이 꿈인가 했다. 감사 인사를 전했던가? 혼란스러웠다.
“으으….”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윤조의 귓가로 집사의 낮은 신음이 들렸다. 윤조는 소스라치게 놀라 집사를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살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그를 병원으로 옮겨야 했다. 남자의 도움이 절실할 듯해 윤조는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저기요.”
그를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몰랐다. 집사 학원에서 배운 대로 ‘주인님’이라고 부르기엔 저는 그의 집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모르는 이름을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운을 떼었는데도 남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저기….”
칸막이의 깨진 유리로 이쪽 상황을 다 알 것 같은데도 남자는 태평했다.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냐는 듯이.
윤조는 안전띠를 풀고 차에서 내릴 결심을 했다. 바깥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집사를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쾅!
그사이에 또 커다란 폭발음이 일었다.
콰쾅!!!
연속으로 터지는 폭발음에 곳곳에서 비명과 울음이 넘쳐났다. 차창 너머로 우왕좌왕하며 달리는 인파가 얼핏 보였다.
윤조는 차량을 더듬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손짓을 살피며 문을 열 타이밍을 가늠했다. 한편으로는 내려도 괜찮을지 걱정이 되었다. 이 상황에 집사를 병원으로 데려갈 수 있긴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저 비협조적인 남자를 어찌해야 할까. 병원의 위치라도 알려주면 좋으련만. 그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도련님처럼 응당한 대접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의지할 곳은 자신밖에 없었다. 사실 늘 그런 인생이었기에 윤조는 남자의 태도에 실망하지 않았다. 다만 기이하게는 여겨졌다. 아무리 그래도 저도 위험한 상황인데 꼭 죽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어떻게 저리 태평할 수 있을까.
생각이 틀리지 않았는지 남자는 정말 태평하다 못해 이상했다. 차량 앞에서부터 불길이 일기 시작했는데도 남자는 꼼짝없이 앉아 바깥을 응시하고 있었다. 오로지 회색 연기뿐인 공터를.
진짜 미쳤나?
윤조는 홀로 조수석에서 쩔쩔매다 뒤늦게 집사 학원에서 배운 것을 상기했다. 조수석 앞 글러브 박스를 열어 천장 쪽을 더듬어 보니 반듯하게 고정되어 있는 권총이 손에 잡혔다.
달칵.
가벼운 터치로 총기를 손에 넣은 윤조는 재빠르게 차에서 내렸다. 아무래도 남자의 상태가 정상적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놀라서 정신을 놓은 게 분명하다. 고급 과정을 밟은 집사의 융숭한 대접을 받은 도련님이라면 그럴 만도 했다.
“꺄아아아!!”
“비켜!! 비켜!!!”
“살려주세요!!! 여기요!!!”
바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온갖 소음이 뒤섞여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거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재가 휘날리고 있어 시야가 불분명했다. 차에서 피어오른 연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윤조는 차에 바짝 붙어 서서 차체를 더듬었다. 손끝에 문손잡이가 달칵거리며 잡혔지만 안에서 잠겼는지 열리지 않았다. 차가 부딪치면서 뒷문이 잠긴 모양이었다.
불길은 더욱 매섭게 일었다. 집사는 살릴 수 없을 듯했다. 윤조는 남자만이라도 살릴 작정을 하고 차에 올라탔다.
운전석에서 넘어온 뜨거운 열기가 금방이라도 제게 들러붙을 듯했다. 언제 차가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라 윤조는 잔뜩 상기된 기분이었다. 살짝 정신이 나간 상태이기도 했다.
이 혼란한 와중에도 태평히 앉은 남자는 고고하기까지 해 보였다. 저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태도였다. 살려 달라 문을 두드리고 난리를 피워도 모자랄 판인데 말이다.
“저기요! 이리로 넘어오실 수 있겠어요?”
윤조의 말에 남자가 반응했다. 희뿌연 연기 사이로 남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좀 어렵겠죠? 그럼 제가 그리로 갈게요. 창을 깨야겠어요.”
남자는 키가 컸다. 저보다 20센티미터는 커 보였다. 윤조는 살면서 남자만큼 큰 사람을 보지 못했다. 게다가 남자는 키만큼 덩치도 컸다. 저 어깨로는 앞좌석으로 넘어오기는커녕 그대로 끼여 타죽고 말리라.
불 보듯 뻔한 상황에 윤조는 자신이 움직여 남자를 구하기로 하고 허리춤에 총을 꽂아 넣었다. 깨진 칸막이 사이로 머리를 집어넣자 남자가 더욱 눈을 찌푸리고 보았다.
“뭐 하는 짓이지?”
윤조는 제 왼쪽 어깨로 파고드는 날카로운 유리 파편을 느끼며 힘껏 몸을 밀어 넣었다. 고통을 감내하느라 이를 악문 탓에 남자의 물음에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남자의 시선이 윤조 옆에 인 불길로 향했다.
“뭐 하는 짓이냐고.”
보면 모르나. 윤조는 남자의 까만 눈동자에 서린 불꽃을 보며 달려들듯 몸을 밀어내었다. 어찌나 힘을 줬는지 튕기듯 뒷좌석으로 몸이 쏟아졌다.
“놀라셨죠?”
틀어박히듯 남자의 옆자리로 안착한 윤조는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남자를 향해 안심을 구했다. 성을 내어 봤자 불안만 더 돋울 뿐이라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윤조의 물음에도 반응 없이 그저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많이 놀라셨어요? 힘들겠지만, 정신 차리세요.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어요.”
아무래도 남자가 넋을 놓은 듯해서 윤조는 그의 팔을 다독이고 차창을 깨려 허리춤을 더듬었다. 언제 이렇게 손에 땀이 났는지 축축한 손에 총이 자꾸 미끄러졌지만 제 작은 실수에 남자가 동요할까 싶어 애써 침착을 유지했다.
총을 꺼내 손에 들고 오른발로 차 문을 박차 다리를 길게 뻗으며 몸을 뒤로 물렸다. 바짝 붙은 남자의 신체가 등 뒤로 느껴짐과 동시에 윤조는 창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모든 구역이 그렇지만 13구역은 특히 총격이 잦은 구역이었다. 미자르는 워낙 가난한 도시라 총을 소유하고 있는 인구가 적어 비교적 평화로웠기에 윤조는 집사 학원에서 총기에 대한 공부를 처음으로 해 보았다. 사실 이렇게 실물을 만져 본 것도 처음이었다.
그래도 정신이 나간 남자보다야 자신이 더 냉정히 대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딱 한 가지 걱정되는 것 말고는.
“혹시 이거 방탄인가요?”
방탄유리에 총이 어떻게 반응했더라?
아직 거기까지는 배움이 부족했던 터라 윤조는 저보다야 총기에 익숙할 남자에게 물음을 던져 보았다. 당연한 듯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남자는 차창에 기댄 팔에 관자놀이를 괴고 빤히 윤조를 바라만 보았다. 진짜 정신을 놓은 건가 싶어 윤조는 절망했다.
남자에게 도움을 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낸 윤조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창을 깨기로 마음먹었다. 손을 덜덜 떨며 설마하니 탄환이 튕겨 나오지는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을 때, 문득 남자가 말을 걸었다.
“그걸 쏴서 뭣하게.”
윤조는 어깨에 힘을 풀며 남자를 돌아보았다. 느긋한 남자의 얼굴 위로 어느새 바짝 다가온 붉은빛이 일렁거렸다.
“창을 깨야 밖으로 나가죠! 여기 있음 타 죽거나 터져 죽거나 둘 중 하나일 거예요.”
“그게 내가 바라는 건데?”
“네?”
“뭐 하나 했네.”
남자가 불쑥 팔을 뻗어 윤조가 앉은 쪽의 문을 열었다. 윤조는 허무하리만큼 간단하게 열리는 문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뒤늦게 남자가 한 말이 떠올랐다.
뭐가 어쩌고 어째?
“죽을 생각이에요?”
“살고 싶으면 어서 내리지 그래?”
남자는 가볍게 윤조의 말을 무시하고 열린 차 문을 향해 손짓해 보였다. 윤조는 남자의 태도가 어이없어 멍하니 보았다. 그 사이에도 몇 발의 총알이 열린 차 문에 박혔다.
여기 있든 나가든 살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래도 여기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다 밖으로 피신하는 게 낫지 않을까. 윤조는 다급한 눈길로 연기가 서린 바깥을 보다 남자를 향해 몸을 틀었다.
“만약 이대로 나가서 제가 살면, 생각날 거예요.”
“뭐가?”
“그쪽이요.”
“날? 왜?”
“살 수 있는데 못 살았잖아요.”
“그쪽도 못 살 수 있어. 그럼 생각도 안 나. 아니, 못 해.”
“살려면 내리라면서요. 그럼 살 거잖아요. 설마 저 죽으라고 떠미는 거예요? 그럼 같이 가요. 그쪽 죽고 싶다면서요.”
윤조의 말에 남자가 웃었다. 어떻게 이 상황에 웃을 수가 있을까. 윤조는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다잡고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의 얼굴만 보면 저택 창가 테이블에 앉은 것처럼 평온해 보였다. 윤조는 남자를 보면 자꾸만 꿈을 꾸는 듯해 눈을 비벼 보았다. 하지만 남자의 매끈한 피부 위로 타오르는 불꽃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현실이었다.
기어이 불길이 집사의 몸까지 번졌다. 될 수 있다면 그도 구하고 싶었으나 미약한 신음을 끝으로 집사는 이미 명을 달리한 듯했다. 윤조는 남자의 팔을 붙잡아 당겼다. 이렇게 입씨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같이 죽자는 거야?”
“네.”
“표정은 꼭 살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윤조는 남자의 말을 무시하고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푸푹!
한 발의 총알이 문에 또 박혔다. 아무래도 방탄이 맞았던 모양이다. 윤조는 문을 방패 삼아 바깥의 동태를 확인하고 안전한 곳을 향해 달리기로 마음먹었다.
문제는 이 덩치 큰 남자를 어떻게 끌고 가야 하나였다. 아무리 봐도 끌려올 것 같지 않았다.
“이대로 쭉 달려야 할 것 같아요.”
“죽기 딱 좋겠네.”
“죽고 싶다면서요?”
“그랬지.”
비협조적일 것 같던 남자가 윤조의 말에 웃음을 흘렸다. 윤조는 조심스레 남자의 팔을 잡아끌었다. 부드럽다 못해 미끄러질 것 같은 소재의 옷감이 기분 좋게 손끝에 감겼다. 두 뺨에 비벼 보았던 제 옷 감촉과 다르지 않았다. 이는 그의 취향이었던 모양이다.
윤조는 힘을 주어 남자를 당겼다. 마지못해 따라오듯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타당. 탕탕! 탕!! 탕!!
방향을 알 수 없는 마구잡이 총성에 윤조는 잔뜩 어깨를 움츠린 채 남자와 함께 뛰었다. 광장의 구조라고 해 봐야 눈으로 한 번 본 게 다였기에 윤조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달릴 뿐이었다. 살 만한 곳으로. 저만큼이나 광장을 떠나기 위해 달리는 사람들도 방향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삼촌 말 맞는 거 같은데?”
“네?”
“운이 좋네.”
윤조의 기대만큼 남자는 속도를 내지 않았고 총을 맞고 싶어 환장한 사람처럼 뭉그적거렸지만, 어쨌든 몸을 피할 수 있을 만한 건물에 이르렀다. 차츰 걷힌 연기에 도망가야 할 방향을 잃고 광장 안쪽인 역으로 들어와버린 것을 뒤늦게 알았지만.
“운이 좋긴 뭐가 좋아요? 죽으려고 들어왔는데!”
“죽고 싶다며. 잘됐잖아?”
조금도 농담의 기색이 없는 남자를 올려다보며 윤조는 입술을 깨물었다. 살고 싶었다. 이렇게 죽으면 억울해서 눈을 못 감을 듯했다.
그런 윤조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남자가 낯선 기척에 눈을 들었다. 윤조 역시 느낀 기척에 깜짝 놀라 천천히 몸을 돌렸다.
숨죽인 발소리가 천천히 다가왔다. 막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윤조는 허리춤을 더듬었다. 죽고 싶어 환장한 남자에게는 조금의 기대도 없었다. 윤조는 책자에서 본 대로 자세를 잡고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여긴가? 저긴가?
자꾸만 바뀌는 방향에 윤조의 눈동자는 이리저리 헤매었다. 이것만 해도 미칠 지경인데, 방아쇠를 당겨도 되는지 그 또한 의문이었다. 자신이 쏜 총에 누군가 생을 달리한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저 역시 죽음의 위기를 앞두고 있으면서도.
흔들리다 못해 덜덜 떠는 꼴사나운 모습을 구경하던 남자가 윤조의 손에서 총을 빼앗아 들었다. 윤조는 설마하니 그가 제 머리를 향해 총알을 박아 넣을까 싶어 깜짝 놀라 팔을 뻗었지만, 그는 키가 컸고 그만큼 팔도 길었다.
가볍게 방아쇠울에 손가락을 건 남자가 밑에서 두 팔을 허우적거리기 바쁜 윤조를 향해 입술 위로 검지를 들어 보였다. 그저 손짓일 뿐인데도 윤조는 입술이 딱 붙은 듯 남자의 명령에 반응했다. 남자는 윤조가 조용해진 것을 확인한 뒤, 윤조가 어찌할 사이도 없이 허공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윤조는 제 어깨 뒤로 번쩍이는 불꽃을 느꼈다. 총 세 발의 총성이 울리고 쓰러지는 소리도 꼭 셋이었다. 얼떨떨하게 선 윤조를 향해 시선을 내린 남자가 그제야 말소리를 내었다.
“정신 좀 차리지?”
얼이 빠진 윤조에게 총을 넘긴 남자의 뒤로 무수한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윤조는 그들이 위험한 존재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남자가 건넨 총을 질끈 움켜잡았다. 망설임 없이 생명을 앗아 가고 또 지켜낸 열기가 손바닥을 타고 생생하게 느껴졌다.
*
윤조로서는 두베역에서 일어난 테러가 누구의 소행인지, 또 어떤 목적이 있었는지 따위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남자의 태도로 보아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닌 듯했다.
두베의 두 얼굴을 이리도 빨리 보게 될 줄이야. 그래도 선택하라면 미자르보다는 이곳에 남고 싶은 기분이 더 컸다.
쏟아지던 경찰 인파가 저와 남자를 둘러싸고 테러범을 소탕하기 시작했을 때, 두려움 속에서도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어쩌면 남자가 총을 쏘았을 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그가 건네준 총을 쥐었을 때부터였을까. 언제가 되었든 윤조는 처음으로 자신을 지키는 든든한 울타리를 느껴 보았다.
기억도 없을 때 잃었고, 그 후로는 평생 가질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그 울타리를 이런 식으로 느껴 볼 줄은 미처 몰랐다. 하지만 감상과는 별개로 현실은 참혹했다.
물이 찍찍 솟아오르는 망가진 분수를 앞에 두고 윤조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전소한 차를 확인한 탓이었다. 그 안에 제 출입권과 미자르행 기차표가 있을 터였다. 제 전부라고 할 수 있는 걸 잃은 참이라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검문을 위해 둘러싼 경찰 인력을 앞에 두고 윤조는 남자의 곁에 찰싹 붙어 있었다.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오직 남자만이 제 신분을 증명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금방이라도 남자가 저 검문 행렬을 통해 바깥으로 빠져나갈 것 같아 윤조는 초조해졌다. 그가 저를 챙길 이유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한석의 배려는 끝난 지 오래였다.
그렇다고 그에게 저는 어쩌면 좋을지 묻자니 쌀쌀한 대답 혹은 무관심이 던져질 것 같아 윤조는 내내 떠들던 입도 꼭 다물고 있어야 했다. 전에 없이 눈치를 보며 남자의 뒤만 졸졸 따르는데 다양한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윤조와 남자의 곁을 지나쳤다. 윤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들의 면면을 살폈다.
광장에는 다양한 직업군이 몰려들었다. 불을 끄는 사람, 위급한 사람을 돌보는 사람, 남은 테러범이 없나 수색하는 사람, 검문하는 사람, 어깨에 카메라를 짊어진 사람, 마이크를 쥐고 열성적으로 떠드는 사람 등등.
직업이 이리도 많은데 어쩌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걸까. 모두 제자리에서 일하고 있는데 저 혼자 붕 뜬 것 같아 마음이 초조해졌다.
거기다 돌아갈 길도 막막했다. 가고 싶지 않은 미자르였지만 당분간 두베역이 폐쇄될 게 뻔하니 돌아갈 방법이 없었고, 있고 싶은 두베에도 있을 자격이 없었다. 누군가가 저를 고용하거나 자식으로 들이거나, 혹은 배우자로 맞이하는 일 외에는, 전혀.
이게 다 그 말도 안 되는 영감님 실수 때문이다. 어떻게 오메가 마크를 알파 마크로 착각하지? 바보 아냐? 얼굴도 모르는 영감을 욕하고 슬슬 부정적인 생각에 빠지려던 윤조는 남자의 움직임에 기민하게 발끝을 따라붙었다. 그 동작이 꽤 거슬렸던 모양인지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윤조는 저를 빤히 내려다보는 남자의 시선을 피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금방이라도 그만 따라오라는 소리가 나올 것 같은 입을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언제든 뻔뻔하게 굴 자신은 있었지만 제 처지가 처지인지라 몸을 사리게 되었다. 지금 이곳에서 서윤조의 처지란 전소된 차보다도 관심을 받지 못했다.
윤조는 미련스러운 눈길로 전소된 차를 바라보았다.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는데도 워낙 참담하게 불타 있는지라 단번에 찾을 수 있었다. 그 안에서 집사의 시체를 꺼내 가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중앙 병원으로 오라던 말을 들었는데 혹 남자가 그곳으로 가려는 걸까. 다시금 걸음을 잇는 남자의 뒤를 윤조는 놓치지 않고 따라갔다.
“알카이드 쪽이라는 얘기도 있고.”
“차가 꽉 막혀서 들어올 수가 없답니다!”
“예, 중앙은 허가 났습니다. 이미 와 있어요.”
“파견 요청했습니다만. 어렵겠습니까?”
사람들을 스치며 단편적으로 주워듣는 말이 귀에 콕콕 박혔다. 괜스레 불안해지는 기분에 윤조는 제 두 팔꿈치를 끌어안았다. 기분 탓인지 온몸이 쑤시는 듯했다.
남자가 다시 걸음을 멈췄다. 윤조는 남자의 뒤에 선 채, 더욱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청각을 곤두세웠다. 시선은 남자의 발끝에 머물러 있었다.
“당분간 역을 사용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여론에 따라서는 장기 폐쇄 가능성도 있겠지요. 총격 사건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니 말입니다.”
“현재 신원이 확인된 사망자만 서른이 넘습니다.”
생채기가 난 남자의 구두 위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튀어 있었다. 윤조는 설마하니 그게 피인가 싶어 시선을 고정했다. 그때, 누군가 제 팔을 잡아당기는 힘에 고개를 들었다.
“…….”
저를 붙들고 있는 건 남자였다. 순간 왼쪽 팔이 화끈해지는 느낌에 눈을 찌푸렸다. 그의 구두 위로 떨어진 피는 제게서 나온 모양인지 남자가 쥐고 있는 제 팔이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윤조는 놀란 마음에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사지가 멀쩡해도 어려운 참에 팔까지 망가진 건 아닌가 싶어 덜컥 겁이 났다.
“전화 좀 받아주지 그래?”
“네?”
“전화.”
남자의 부름에 윤조는 겨우 눈만 돌려 남자가 가리킨 그의 주머니를 보았다. 일정한 기계음 소리가 그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윤조는 조심스럽게 남자의 바지 주머니로 손을 찔러 넣었다. 방향을 잘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깊은 곳까지 손을 뻗은 모양인지 남자가 힐끗 시선을 주었다. 윤조는 서둘러 시선을 돌리며 손에 걸린 딱딱한 물체를 붙들어 올렸다.
“권주흠 씨한테 온 전화네요.”
“받아.”
“네? 제가요?”
“어. 받아서 집으로 간다고 해.”
간다는 말에 윤조는 주춤했다. 이 전화를 받으면 남자가 가버린다는 생각에 받기가 싫어졌다.
“뭐 해? 안 받고. 받을 줄 몰라?”
“알아요, 아는데….”
“왜, 내가 간다니까 못 받겠어?”
어떻게 알았지?
윤조는 시선을 들어 무언가 하기 바쁜 남자를 보았다. 화끈하던 팔을 감싸는 손길이 몇 차례 이어졌는데도 윤조의 시선은 남자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결국 전화가 끊겼다.
“그런다고 내가 안 가나?”
남자의 손이 윤조의 팔에서 떨어졌다. 윤조는 제 손에서 휴대폰을 채 가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그런다고 그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꼼꼼하게 붕대가 싸인 제 팔을 확인하며 윤조는 시큰거리는 눈가를 꾹꾹 눌렀다.
남자는 권주흠이라는 사람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잔뜩 귀찮은 표정으로 무어라 말하는 남자를 앞에 두고 윤조는 스트레쳐에 실려 가는 사람을 보았다. 구급 인력 근처에 있었던 모양인지 연이어 차에 실린 사람들이 곁을 떠나갔다.
“저, 어떻게 가요?”
윤조는 통화를 끝낸 남자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뒤늦은 질문이었다. 남자는 피가 말라붙은 손을 아랑곳하지 않고 주머니에 넣은 채 사이렌을 울리며 사라지는 구급 차량을 바라보았다. 또 무시인가 싶어 윤조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두베에 오고서는 왜 이렇게 일이 꼬이기만 하는 건지. 집사는 제 일이 아닌가 싶었다. 하긴, 죽은 집사 같은 고급 인력도 첫 배치는 3년 만에 받았다고 하는데. 아무리 두베라고는 하지만 남자처럼 부자인 사람이 그렇게 많지도 않을 테고. 빈자리라도 나면 모를까….
…빈자리?
윤조는 눈을 크게 뜨고 제 앞에 ‘툭’ 떨어져 있는 사실을 살폈다. 부자인 남자와 빈자리가 탐스러운 과실처럼 느껴졌다.
“저기….”
불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윤조는 멈출 수 없었다. 그런 윤조를 들여다보듯 남자가 고개 숙인 윤조의 이마에 손을 올려보았다. 윤조는 제 이마를 꾹 누르는 손길을 이해할 수 없어 눈을 깜박이다 용기 내어 물어보았다.
“집사, 필요하지 않으세요?”
남자의 손이 툭 떨어졌다. 볼일이 끝난 얼굴로 시선을 돌린 남자는 또 윤조를 무시했다. 윤조는 혀라도 깨물고 싶은 기분에 입술을 씹었다.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비릿한 피 맛이 번졌다.
“총 하나 다루지 못하는 집사는 필요 없는데.”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남자가 제 물음에 반응했다는 게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윤조는 더욱 큰 용기를 내어야 했다.
“아까는 죄송해요, 아직 사람을 한 번도 죽여 보지 않아서 망설였어요. 다음에는 잘할게요. 꼭… 죽일게요.”
내내 무표정하던 남자의 얼굴에 웃음이 돌았다. 제 말이 우스운 것 같진 않고, 어이가 없어 보였다. 윤조 역시 사람을 죽이겠다 선언한 자신이 어이없었다. 그래도 어쩌랴,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몇 살?”
웃음을 죽인 남자가 물었다. 윤조는 냉큼 대답했다.
“스무 살이요.”
“경력은.”
“실무 경력은 아직 없지만, 3주 동안 착실하게 학원 다녔어요.”
차라리 사람을 죽이겠다는 선언을 한 번 더 하면 더 했지, 처참할 정도의 자기선전이라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
윤조는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에 이마까지 열이 들끓는 듯했다. 부끄러움은 잠시다. 이대로 남자와의 대화가 끝나버릴까 싶어 윤조는 있는 말 없는 말 짜내기 위해 애썼다. 집사 경력은 없고, 또 배움도 짧았지만 그간 허투루 산 인생은 아니라는 설명은 하고 싶었다.
“아! 저 신상명세서에 제 다른 경력 있어요. 필요하시면 경력 증명서도 드릴게요. 다 챙겨 왔거든요.”
“그래?”
“네. 당장 보여 드릴 수 있… 아, 차에 있는데. 불탔겠죠…?”
뻔한 걸 물은 모양인지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도, 어쩌면 다시는, 남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윤조는 피가 맺힌 입술을 말아 물었다.
“남은 팔 하나 멀쩡하면 택시라도 잡아봐.”
“…네?”
“집에 가야겠어.”
윤조는 제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이내 마주친 남자의 시선에 확신이 들었다. 더는 눈치 보지 않고 남자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검문에 걸린 남자가 제 두베 시민 등록 번호를 읊었다. 그러고는 저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는 자신의 집사라고. 윤조는 제 입술이 피로 젖은 것도 잊고 남자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