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남자이며, 저택의 주인이고, 또 저를 고용한 이의 이름은 권정한이었다.
“서윤조입니다. 올해 스무 살이에요. 미자르, 출신이고요.”
윤조는 간략히 자신을 소개하며 그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했다. 주인님이라 불러야 함이 마땅했으나 이전의 집사가 그를 ‘도련님’이라 불렀기에 저도 그렇게 불러야 할까 싶었다.
“어떻게 부르면 좋을까요?”
윤조는 마비된 것처럼 얼얼한 팔을 쓰다듬으며 정한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정체 중인 도로를 따분하게 보았다.
“마음대로 불러.”
“정한 씨라 부르면 혼내실까요?”
“마음대로.”
정말 마음대로 불러도 되나 싶어 찔러 본 말인데 그는 용인할 듯했다. 도련님은 어딘가 낯간지럽고 배운 대로 주인님이라 부르자니 노예가 된 것 같아 싫었다. 이건 집사 학원에서부터 한 생각이었다.
윤조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제게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정한을 지그시 보았다.
“결정한 모양이야?”
“아직요.”
“왜, 정한 씨로는 성에 안 차?”
정한이 고개를 돌려 윤조를 보았다. 그의 말과 눈짓이 비꼬는 것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윤조는 정한의 속을 알 수 없는 까만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적당한 말을 찾았다.
그가 자신을 고용했으니 이 말이 맞을 것이다. 깔끔하고 부담 없는 말. 뜻 그대로의 말.
“사장님은 어때요?”
빤히 윤조를 바라보던 정한이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음대로 하라는 말과 함께.
그 후로 택시에는 침묵만 맴돌았다. 긴긴 정체를 뚫고 다다른 저택에서 윤조는 광장에서처럼 정한의 뒤를 졸졸 따랐다. 기다렸다는 듯 저택을 지키고 있던 보안 요원들이 정한의 곁에 붙었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회장님이 오시는 대로 바로 확인하라 하셨습니다.”
“병원에 안 가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대답 없이 빤히 보는 정한의 태도를 익숙하게 받아들인 요원이 그의 손에 묻은 피의 정체를 물었다. 정한은 대답 대신 간단하게 윤조를 가리키기만 했다. 윤조는 증거처럼 제 팔을 들어 보였다. 요원은 일말의 걱정도 담지 않은 시선으로 팔을 확인한 뒤 정한과 윤조 사이를 살폈다.
“한데 윤 집사님은 어디 계십니까. 내내 연락이 되지 않아 회장님께서 노하셨습니다.”
당연하게 있어야 할 존재가 보이지 않자 요원이 죽은 집사의 행방을 물었다. 윤조는 마음이 무거워지는 기분에 팔을 내리며 정한을 바라보았다. 그는 요원의 말에 답하지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자연스럽게 요원의 시선이 윤조에게 돌아왔다. 윤조는 죽은 집사를 인계해 간 구급 대원의 말을 떠올렸다.
“그… 중앙 병원? 거기에 안치한다고 들었어요.”
“안치라면….”
윤조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정한의 뒤를 따랐다. 무거운 윤조의 마음과 달리 망설임 없이 걸음을 잇는 정한의 등은 지나치게 무심해 보였다. 집사에 대한 대우가 깔끔하다 못해 잔인하기까지 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윤조는 곧 고개를 내저었다.
그 자리를 냉큼 꿰찬 저만큼 잔인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지금은 감상적일 때가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제 처지와 주제를 잘 알아야 할 때였다. 윤조는 피딱지가 앉은 입술을 슬쩍 핥고 금세 벌어진 정한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바쁘게 발을 놀렸다.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저택은 여전히 고요하고 우아했다. 광장에서 있었던 일이 문득 거짓말로 여겨질 정도였다. 변함없는 저택의 풍경을 곁눈질하던 윤조는 정한의 반듯한 등을 보며 어깨를 폈다. 자칫 움츠러들 것 같은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였다.
저택 내부는 바깥보다 더한 정적이 감돌았다. 윤조는 계단을 오르는 정한과 나란히 섰다. 비록 마음이 복잡하긴 해도 할 일은 해야 했다.
“시키실 일 있으시면….”
“알아서 할 테니까 너도 알아서 살아.”
“네?”
“귀찮게 붙지 말라고.”
윤조는 대문을 지키는 보안 요원처럼 우뚝 서서 제 방으로 들어가버리는 정한을 바라보았다.
쾅.
손잡이까지 온통 하얀 문이 닫혔다. 복도에 홀로 남겨진 윤조는 목덜미를 긁적이며 당황스러운 기분을 애써 잠재웠다.
‘알아서 할 테니까 너도 알아서 살아.’
정한은 쉽게 농담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알아서 살라는 건 그의 진심일 테다. 약간의 해석을 추가하자면 알아서 일을 찾으라는 것이겠지. 단 그를 귀찮게 하지 않는 선에서.
윤조는 다친 팔을 감싸 안은 채 긴 복도 끝을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할 일이 떠올랐다. 자신이 머물 방을 찾아 걸음을 떼었다. 언제든 사장님을 보필해야 했기에 너무 멀지는 않은 곳이어야 했다. 그렇다고 그를 귀찮게 할 만큼 가까운 곳은 아닌, 어정쩡한 위치.
그게 바로 자신의 자리였다.
*
윤조가 제일 처음 열어 본 방은 2층 복도 끝 방이었다. 2층의 여느 방과 다르지 않게 문이 희고 손잡이는 붉은색이었다. 길쭉한 손잡이를 붙잡고 양쪽으로 문을 열자 가장 먼저 침대가 보였다. 벽에 붙이지 않고 공간을 띄워서 여유 있게 배치한 침대와 그 주변 가구로 윤조의 시선이 머물렀다.
시험 삼아 열어 본 첫 방이었으나 윤조는 이곳을 제 방으로 삼기로 했다. 깨끗한 침구 위로 드리운 달빛이 꼭 마음에 들었다. 침대 뒤편으로는 정원이 보이는 창이, 오른편에는 1층 테라스가 보이는 창이 있었다. 끝 방이라 그런지 유난히도 창이 많았다. 이 또한 윤조의 마음에 쏙 들었다.
삼촌 집에 있던 윤조의 방은 빛 하나 들지 않는 골방이었다. 창 하나만 있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했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간의 설움을 보상하듯 눈에 보이는 것마다 창이었다.
탁.
방에 불을 밝히자 선명하던 바깥 풍경은 그림자처럼 사라지고 그곳에 제 모습이 비쳤다. 마치 거울처럼 깨끗하게 윤조의 모습을 담은 창으로 하나씩 커튼이 가려졌다.
은은하게 밝아진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자 별처럼 반짝거리는 조각들이 보였다. 저게 샹들리에였던가.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다. 윤조는 기억을 더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천장을 바라보다가 다른 곳으로도 눈을 돌렸다. 침대 왼편으로 좁은 복도가 나 있어 가 보니 작은 옷장과 손을 씻을 수 있는 세면대가 있었다. 안쪽에는 욕실이 있었는데, 윤조는 무심코 문을 열고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그렇게 갖고 싶었던 욕조가 매끈한 자태로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윤조는 냉큼 욕조에 들어가 앉아 욕조가 침대라도 되는 것처럼 몸을 기대어 보았다. 저는 물론 덩치 큰 이 저택 주인도 가뿐히 소화할 수 있는 크기였다. 넉넉한 깊이와 매끈한 재질에 감탄하다가 욕실에 온 김에 씻기로 했다. 현실감 없는 이 공간과 마찬가지로 도저히 믿기 힘든 테러 현장의 흔적이 차츰 씻겨 나갔다.
팔 하나가 불편한 게 어찌나 고된지, 씻고 나오니 침대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갈아입을 옷 따위는 찾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윤조는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졌다.
어제처럼 정신없이 잠든 뒤, 간지러운 기운이 느껴져 눈을 뜨자 창으로 해가 들어와 있었다. 때에 맞게 잘 일어났다고 생각하며 시계를 본 순간 윤조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발견한 빛이 아침이었다면 좋았겠으나 안타깝게도 이미 정오도 지난 시간이었다.
“어떻게 깨우는 사람이 없냐….”
윤조는 일으켰던 몸을 다시 침대에 눕히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삼촌의 집이었다면 한바탕 난리가 나고도 남았을 일인데 이리도 평화롭다니. 꿈속도 이보다는 조용하지 않을 듯했다.
의심스러운 마음에 귀를 기울여 보자, 안은 물론 바깥도 조용했다. 창마다 걸린 커튼 사이로 끼어든 빛만 아니라면 윤조를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팔을 뻗어 침대맡의 커튼을 활짝 열어 보았다. 침대 위로 쏟아진 한낮의 빛이 손길처럼 따뜻하게 제 몸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이렇게 길게 자본 적이 얼마 만인지. 주말도 없이 일했던 지난 7년이 까마득했다. 어제 본 샹들리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데, 자꾸만 믿을 수 없는 기분이 반복되었다.
짝!
의심이 지워지지 않아 기어코 얼굴을 때려보았다. 양 손바닥으로 때려 본 두 볼이 얼얼했다. 꿈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었다. 윤조의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이왕 늦은 것 느긋하게 준비하기로 했다. 이런 마음을 먹지 않아도 팔이 불편해서 여간 속도를 내기가 어려웠지만.
입을 옷이 없어 어제 입었던 것을 걸치고 방을 나섰다. 당장 정한을 만나 옷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늦잠 잔 것이 찝찝해 뒤늦게 생각이 많아졌다.
정한의 방 앞에 이르렀을 때는 오줌 마려운 개처럼 어쩔 줄을 몰랐다. 문을 두드려도 되는지, 아니면 불러야 하는 건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아 정한을 마주하는 일은 조금 더 뒤로 미루기로 했다.
근데 밥은 어디서 먹지?
눈을 뜨면 배부터 채우는 게 습관이라 윤조는 주방이 있을 만한 1층으로 내려가 보기로 했다. 넌지시 계단 아래를 살피며 내려가는데, 얼핏 인적이 느껴졌다.
난간으로 다가가 고개를 내밀고 밑을 보자 책을 읽고 있는 정한이 보였다. 그는 처음 봤을 때처럼 차를 마시고 있었다. 윤조는 은근하게 퍼진 따끈한 온기를 느끼며, 그에게 어떤 인사를 건넬까 고심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무난한 아침 인사를 하면 좋았을 테지만 이미 아침이 아니었다. 윤조는 제 인사에 알은척도 하지 않는 정한을 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제 목소리가 작은 것도 아닐 텐데, 이는 분명한 무시였다.
하긴 그가 제게 제대로 반응해준 것이 얼마나 있다고. 윤조는 빠르게 포기하려다가 제 옷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정한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저기, 사장님….”
찻잔을 내려놓은 정한이 고개를 들어 윤조를 바라보았다. 어찌나 시선이 냉랭한지 순식간에 계절이 봄에서 겨울로 바뀐 듯했다. 윤조는 제 꼴을 가만히 살피는 정한의 시선을 받으며 얼어버린 입을 풀려 애썼다. 하지만 애쓴 보람도 없이, 소리가 되어 나가지는 못했다.
“이리 와 앉아.”
정한이 턱짓으로 가리키는 자리에 윤조는 서둘러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그가 보아도 제 꼴이 말이 아닐 거라는 기대를 걸어 보았다.
“팔 내 봐.”
옷 이야기를 할 줄 알았는데 팔부터 내어 보라는 말에 윤조는 어리둥절했다.
“아직 잠결인가?”
“…아뇨, 다 깼습니다.”
정한이 두 번 말하지 않게 윤조는 재빨리 다친 팔을 내밀었다.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는지 뻐근하게 팔이 땅겼다.
“상의는 벗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정한이 팔 부분은 찢어 냈기에 상처를 보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다만 피와 먼지로 얼룩진 탓에 누가 보아도 위생 상태가 엉망이었다. 그렇게 결이 곱고 고급스러웠던 옷이 하루 만에 걸레짝이 되었다.
윤조는 정한의 말에 따라 상의를 벗어 그의 시야에 보이지 않게 의자 뒤편에 숨겨 두었다. 홀쭉한 배가 민망해 성한 팔로 배를 감싸며 정한에게 팔을 내밀었다.
기다렸다는 듯 정한이 테이블 밑에서 하얀 상자를 들어 올려 안을 열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치료 도구들이 나타났다. 윤조는 잠시 그것에 시선을 두다가 정한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정한의 커다란 손이 윤조의 팔 위를 유려하게 오갔다. 몇 번의 손길이 스치자 그가 어제 꽁꽁 싸 두었던 상처가 드러났다. 윤조는 슬그머니 미간을 좁히며 피딱지가 앉은 제 상처를 보았다. 생각보다 훨씬 큰 상처라 놀랐다. 계속 보고 있기가 괴로워 고개를 돌렸다. 정한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스미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
소리가 새어 나갈 것 같아 이를 악물고 눈을 내리감았다. 척척하게 젖어 가는 제 피부가 어떤 상태인지 궁금했으나 도무지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 몸에 깊은 상처가 난 적은 처음이었다.
“당분간 팔은 쓰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럼 일은 어떻게 해요?”
“내가 그것까지 알려줘야 하나?”
윤조는 눈을 내리깐 정한의 눈꺼풀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군더더기 없는 손길이 잠시간 이어졌다.
“…죄송해요.”
쓸데없는 질문이었고, 사과였다. 윤조는 대답 없는 정한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어젯밤 자신을 귀찮게 하지 말라던 그의 충고를 다시금 되새겼다.
그사이 소독과 치료를 끝낸 정한이 구급상자를 정리했다. 윤조는 감사 인사를 건네고 의자 뒤편에 둔 옷을 챙겨 들었다.
“곧 올 거야.”
“네?”
“앉아 있으라고.”
정한의 말대로 잠시 앉아 있자니 방문객이 찾아왔다. 현관과 이어진 응접실인 공간에서 윤조는 일어나야 할지 그대로 앉아 있어야 할지 몰라 어정쩡하게 엉덩이를 떼고 있었다. 정한은 관심 없는 얼굴로 방문객을 바라보기만 했다.
“입어 봐.”
겨우 정한의 입에서 말이 떨어진 뒤에야 윤조는 방문객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재단사였다. 재단사는 정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가지고 온 물건의 포장을 풀어내었다. 그러자 두 개의 의류 걸이가 나타났다.
바퀴가 달린 의류 걸이 안쪽에는 깔끔한 정장이 여러 벌 걸려 있었는데, 모두 디자인이 같았다. 누가 보아도 제 집사 유니폼이었다.
“먼저, 상의부터 입겠습니다.”
재단사가 옷걸이에서 상의를 꺼내어 윤조를 향해 펼쳐 보였다. 건네는 말이 자신이 아닌 정한을 향해 있음을 알고, 윤조는 서둘러 일어나 마네킹처럼 두 팔을 펼쳐 보였다. 재단사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셔츠를 입고 그 위에 조끼까지 걸쳤다. 자로 잰 듯 정확하게 몸에 맞았다.
“이번엔 하의를 입겠습니다.”
하의.
재단사의 말에 윤조는 잠시 멈칫했다. 상의야 그렇다고 쳐도 하의도 이곳에서 입어 봐야 하나 싶었다.
윤조는 빠르게 정한과 재단사를 훑어보았다. 윤조의 눈치를 읽은 재단사가 몸을 비스듬하게 돌려주었다. 반면 정한은 시선을 돌릴 생각도 없는지 앉은 그대로 윤조를 응시했다.
미동도 없는 정한의 눈동자를 보며 윤조는 홀로 웃었다. 어딜 감히 사장을 움직이게 할까. 윤조는 자신이 등을 돌리고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막 버튼을 풀고 바지를 내리려는데 아차, 하는 생각에 다시 버튼을 잠갔다. 윤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정한을 보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제게 머물러 있었다. 윤조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걸렸다.
“사장님 정신 건강을 위해서 잠시 눈을 감아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왜. 뭐 끔찍한 거라도 달고 있나 봐?”
“끔찍하다면, 끔찍한 것 같긴 하네요.”
“아닌 거 아니까 어서 벗기나 해.”
“어떻게 아세요?”
짧은 정적이 흘렀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재단사가 보내는 안타까운 시선이 느껴졌다. 윤조는 다시 담을 수 없는 말 대신, 입가의 웃음을 거둬들였다. 그런데도 가시지 않는 불편한 기운에 무표정한 정한의 얼굴을 살피다 이실직고했다.
“딴 건 몰라도 입었던 속옷은 다시 입을 수가 없어서요….”
“그래서.”
“…안 입고 있거든요.”
“그게 왜.”
정한의 건조한 대응에 윤조는 제 생각이 잘못되었나 싶었다. 하긴, 엉덩이가 무어라고. 윤조는 빠르게 긍정하고서 다시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가만히 듣고 있던 재단사가 바닥에 둔 꾸러미에서 무언가를 꺼내 윤조에게 슬며시 건네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금 윤조가 가장 필요로 하는 속옷이었다.
한데 왜 이리도 반갑지 않을까. 윤조는 제 피부에 자국 하나 남기지 않을 것 같은 매끄러운 속옷을 구겨 쥐고 등을 돌렸다. 앞보다야 뒤를 보이는 게 차라리 나을 거란 판단이었다.
급한 마음에 서두르다 실수하지 않도록 일부러 천천히 옷을 갈아입었다. 속옷을 너무 올려 입어 엉덩이를 쭉 빼야 했을 때는 조금 수치심이 일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그러려니 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얼굴이 달아오를 듯해서 애써 생각을 잠재웠다.
“전부 다 맞아요.”
속옷은 물론 바지도 불편함 없이 딱 맞았다. 윤조는 인형처럼 팔을 벌리고 정한에게 제 모습을 보였다. 기척을 느낀 재단사가 그제야 몸을 돌려 윤조를 살폈다.
“도련님 눈썰미가 대단하십니다. 수선할 곳이 한 군데도 없군요.”
재단사가 가볍게 손뼉 치며 웃었다. 윤조는 정한이 제 치수를 정확히 알아낸 것이 신기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제 정보라고는 이름과 출신이 고작일 텐데.
“이제 이 양말을 신어 보시지요.”
속옷이 들어 있던 꾸러미에서 양말을 건넨 재단사가 의류 걸이 밑단에 둔 상자 넷 중 하나를 열어 보였다. 윤조는 내심 상자 안의 물건을 짐작하며 양말을 꿰어 신었다.
“이건 실내용이고, 저건 실외용입니다. 실외용 밑창이 더 두껍지요.”
재단사가 마지막 물건을 건네었다. 윤조는 끝이 반짝반짝한 까만 구두 안으로 발을 넣어 보았다. 신데렐라를 발견한 기분이 이랬을까. 어떻게 이렇게 딱 맞지. 윤조는 눈을 크게 뜨고 정한을 보았다. 그에게 보란 듯이 발을 내밀어 보였다.
“어떻게 아셨어요?”
정한은 윤조의 궁금증을 풀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대답 없는 정한을 향해 들었던 발을 내리며 윤조는 민망하게 웃었다. 두 번째가 되자, 재단사는 익숙한 일인 듯 침묵을 무시했다. 그저 그의 일을 끝낸 순서에 맞게 인사를 하고 조용히 물러났다.
“고맙습니다, 사장님.”
윤조가 감사를 건네든 말든 관심 없는 얼굴로 정한은 덮어 둔 책을 다시 펼쳤다. 윤조는 그런 정한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의류 걸이를 살폈다.
의류 걸이에는 집사 유니폼 말고도 방에서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잠옷과 여벌 옷이 함께 걸려 있었다. 바닥에 둔 꾸러미에는 반듯하게 접힌 양말과 속옷이 가지런히 정리된 채 들어 있었는데, 모두 흰색이라 관리가 어려워 보였다. 슬쩍 귀찮은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사치스러움의 상징인 것 같아 이 무심한 색마저도 마음에 들었다.
팔이 허락하는 만큼 옷을 안아서 2층 방을 오갔다. 옷장에 옷을 챙겨 넣고 욕실 거울 앞에 서자 전에 본 적 없이 근사한 제 모습이 보였다. 윤조는 이리저리 몸을 틀어 제 모습을 비춰 본 뒤에야 욕실을 나왔다.
정한은 여전히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윤조는 정한의 독서를 방해하지 않도록 벽 쪽으로 붙어 걸으며 주방을 찾아 나섰다. 저택이 지나치게 조용해서 발걸음도 조심스러웠다.
응접실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니 넓은 주방이 나타났다. 그에 딸린 다이닝 룸도 보였다. 윤조는 2층 복도만큼이나 긴 식탁을 의미 없이 바라보다 냉장고 앞에 섰다.
냉장고를 여니 제 이름이 붙은 음식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삼시 세끼 챙겨 먹으라는 듯 층별로 나뉘어 각기 다른 음식이 포장되어 있었는데, 윤조는 아침 것까지 모두 꺼내어 주방에 딸린 아일랜드 식탁에 음식을 올렸다.
지금의 기분과 허기로는 두 끼를 모두 먹을 수 있을 듯했다. 그나저나 정한의 음식은 어디 있는 걸까. 잠시 그의 끼니를 신경 쓰다, 부질없음을 깨달았다. 냉장고 셋 중 하나에 있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귀찮게 하지 말라던 정한의 말대로 그의 식사를 따로 챙겨야 하는 수고로움은 덜게 될 테지만, 이래서야 제 할 일이 무엇이 있나 고민이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지도.
일 생각에 잠기려던 윤조는 일단 먹고 생각하기로 하고 수저를 챙겨 의자에 앉아 포장을 뜯었다. 어떤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는지 정갈한 글씨로 빼곡하게 정리된 메모를 떼어 내고 하나씩 음식에 손을 대었다. 처음 보는 음식도 있어 메모를 다시 읽어 보기도 했다. 재료도 상세하게 적혀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맛을 음미할 수 있었다.
슬슬 배가 차 갈 즈음, 윤조는 제 먹는 소리만 나는 주방을 멀뚱히 둘러보았다. 이렇게 평생 혼자서 밥을 먹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삼촌 집에서는 식탁이 꽤 시끌벅적했었다. 반찬 투정부터 시작해 가사의 세밀한 부분, 쥐꼬리만 한 월급 잔소리가 쉬지 않고 이어졌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며 차차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헷갈리기가 일쑤였다.
침묵이 이리도 맛있을 줄이야. 평생 홀로 먹어도 좋으니, 저 냉장고에 늘 제 음식이 놓여 있었으면 했다. 윤조의 젓가락질이 다시 바빠졌다.
*
거뜬하게 두 끼 분의 식량을 해치운 후, 뒷정리를 하려고 일어났다. 개수대에 그릇을 쌓는데, 한쪽에 놓인 서류가 눈에 들어왔다. 윤조는 부른 배를 매만지며 제 이름이 적힌 서류 상단으로 시선을 두었다. 보아하니 주방 담당자가 두고 간 서류인 듯했다. 신입의 입맛을 파악하기 위한 설문으로 추측되었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또 어떤 음식을 가리는지, 알레르기는 없는지, 음식의 간은 어떤 걸 선호하는지 등등. 세부적인 문의 사항이 많았다. 항목이 지나치게 많아 훑어보기를 포기하고 펜을 가져와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제 이름이 있는 상단에 또박또박 쓴 글씨를 이어 나갔다.
[가리는 것 없음, 알레르기도 없음, 간은 조금 센 편을 좋아합니다.]
작성한 서류를 있던 곳에 둔 뒤, 뒷정리를 마저 했다. 오로지 제 몫만 치우면 되는 일이라 그런지 설거지는 금세 끝이 났다.
정한은 여전히 응접실에 있었다. 종일 여기 있는 걸까. 윤조는 괜한 눈치를 보며 벽을 따라 걸었다. 자신이 왜 이렇게 걷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무의식이 이렇게 걸으라고 명령했다.
팔이 불편한 탓에 의욕대로 일할 수는 없겠지만 기본적인 것은 파악해 두는 게 좋을 듯했다. 정한의 말도 이 뜻이지 않을까. 윤조는 속으로 자신이 그의 집사답게 생각한 것을 뿌듯해하며 홀로 저택을 탐색하기로 했다.
1층 맨 끝 복도에 이르자 다용도실이 나타났다. 안이 넓어 웬만한 창고 두 개는 합친 듯했다. 윤조는 이 다용도실에 매일같이 출입해야 할 것을 예감했다. 제 옷처럼 정리된 세탁물 걸이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정말 이렇게 사는 사람이 있구나….”
입었던 옷이 매일매일 세탁이 되어 돌아오는 집이라니. 집사 학원 교재에서 보았던 내용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있었다.
슬쩍 훑어만 보아도 정한의 것이 대부분이라 그가 방에 없을 때 정리해 두는 게 좋을 듯했다. 윤조는 세탁물을 챙겨 정한의 방으로 올라갔다.
똑똑.
주인이 뻔히 없는 걸 알면서도 노크를 하고 들어섰다. 저도 하루 머물렀던 장소라고 생각하니 남다르게 여겨졌다. 이런 감상을 할 때가 아닌 걸 알면서도 윤조는 정한의 새하얀 침대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저기서 홀딱 벗고 잤다니. 그걸 가만히 내버려 뒀다니. 당시에는 집사가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생각만으로도 섬찟한 느낌에 등이 서늘해졌다. 윤조의 동그란 눈동자가 도망치듯 침대에서 벗어났다.
제 방 침대와는 비교도 안 되게 큰 침대 옆을 지나며 정한의 방 구조를 파악했다. 어떤 가구든지 공간을 두어 여유롭게 자리해 있었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꼭 주인과 닮은 듯한 방을 훑어보다 제 할 일을 시작했다.
몇 번 다용도실을 드나들고서야 정한의 방 정리가 끝났다. 윤조는 다시 저택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포부는 좋았다. 복도로 나선 걸음도 가벼웠다. 하지만 채 얼마 지나지 않아 슬슬 골이 아파졌다.
응접실에 붙박이처럼 있는 정한을 피해 우선 2층부터 둘러보기로 했는데, 어찌나 방이 많고 모습도 닮았는지 방금 나왔던 방을 들어갔던가, 나왔던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복도 한쪽에 화재 시 대피 안내표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었을 테다.
윤조는 손으로 대충 따라 그린 2층 지도를 가지고 방을 살폈다. 내부는 허무하게도 죄다 방일 뿐이었다. 제 방과 정반대로 떨어진 곳에 서재가 있는 예외만 하나 존재했다.
“이걸 다 읽으려면 평생 응접실에 앉아 있어야겠다.”
정한이 왜 엉덩이도 떼지 않고 내내 앉아 있는지 알 듯했다. 윤조는 들어선 서재에서 고개를 든 채 감탄만 했다.
저는 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쥐꼬리만 한 용돈을 받고 산지라 책 살 돈이 없었다. 조금의 여유를 포기하는 대신 책을 샀다고 해도 그다지 인생이 바뀌지 않았으리라. 어쩌면 지금이 서윤조의 인생에서 가장 잘 풀린 일이 아닐까. 채 반나절도 안 된 집사 경험이었지만 윤조는 감히 그렇게 생각했다.
“아…!”
막 서재 문을 닫고 나올 무렵이었다. 대략 한 시간에 걸친 2층 구조 탐색 끝에 집사 학원 매뉴얼이 번뜩 떠올랐다. 집사로 입주한 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까맣게 잊고 생고생을 하고 있던 셈이었다.
단숨에 1층으로 내려온 윤조는 어렵지 않게 주방 첫 번째 서랍에서 커다란 책자 하나를 찾아내었다. 저택에 찾아오는 각 담당자의 연락처를 비롯해 저택 내부의 지도와 시설이 깔끔하게 정리된 책자를 손에 쥐고 제 어이없는 실수를 한탄했다.
어쩜 이렇게 바보 같지.
한껏 제 실수를 비웃어준 뒤, 더는 실수하지 않도록 차분히 내부 지도를 살폈다. 저택은 건물 자체도 큰데 부지도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이게 다 한 사람의 소유라니 부럽기 그지없었다.
대강의 구조를 파악한 뒤, 윤조는 다시 저택 탐색을 시작했다. 단순히 방으로만 표시된 곳도 확인이 필요했기에 하나씩 둘러보아야 했다.
윤조는 전보다도 정한이 있는 응접실을 지나갈 때 조심했다. 숨도 멈추었고, 정한에게서 시선도 떼지 못했다. 어떻게든 그에게 거슬리고 싶지 않았고, 그의 시간을 존중하고 싶었다. 이 저택이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고, 그가 만들어준 자유로운 근무 환경도 더없이 좋았기 때문이다. 괜히 어설프게 굴다가 잃고 싶지 않았다.
정한의 시야에서 벗어난 뒤에야 윤조는 바짝 긴장한 등을 펴고 편히 걸었다. 1층에는 2층과는 다르게 방 내부가 꽤 다양하게 이루어져 있었다. 2층에는 빈방이 많았고, 개중 피아노가 더해져 있는 방도 있었지만, 이렇게 소파와 벽에 붙은 모니터 하나가 다인 방은 없었다.
윤조는 소파 등받이를 손끝으로 쓸고 지나며 창가에 붙어 섰다. 한낮인 바깥은 눈이 부시게 반짝였다. 어서 정원을 구경하고 싶었다. 책자에서 따로 빼 온 저택 도면을 펼쳐 테라스로 나가 정원에 이르는 길을 확인했다. 머릿속으로 동선을 정리한 뒤 다음 방으로 넘어갔다.
다음 방은 벽면에 온통 거울이 붙어 있었는데, 윤조는 제 모습이 비치는 벽에 서서 낯선 기구들을 훑어보았다. 정한의 덩치가 예사롭지 않다 싶었는데 이곳에서 그 몸을 유지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자신을 다듬는 사람이 왜 죽고 싶은 걸까. 해답도 없는 생각에 빠지려던 윤조는 세차게 고개를 내젓고 방을 나왔다.
마지막으로 남은 곳은 다른 보통 방과 비교해 문 크기부터 달랐다. 문이 한 짝인 것도 모자라 그 크기도 작았는데, 이는 지하실로 이어져 있는 문이었다. 윤조는 어서 정원을 보고 싶은 마음에 지하는 다음에 보기로 하고 테라스로 나섰다.
테라스와 이어진 문을 열려는데 퍼뜩 정한이 떠올랐다. 윤조는 서둘러 응접실로 향했다. 현관과 그에 이어진 복도 창에서 쏟아진 빛이 유난히도 눈 부시게 느껴졌다. 그것을 등지고 앉은 정한이 윤조의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사장님, 저 잠깐 정원 좀 보고 올게요.”
윤조는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정한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번만큼은 대답을 들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서 집사가 어디를 가든 내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는데.”
“허락을 받으려는 게 아니라요, 어….”
“왜. 내가 그사이 죽기라도 할까 봐?”
윤조는 잠시 망설이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윤조의 대답을 본 정한이 읽던 책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큰 키에 진 긴 그림자가 윤조의 발끝까지 자리했다. 꼭 이리로 오라는 것만 같은 무언의 명령에 윤조는 조심스러운 발길로 정한의 그림자를 밟으며 다가갔다.
“이 뒤가 궁금하거든.”
얼마 남지 않은 책의 결말을 가리키며 정한이 말했다. 윤조는 그가 궁금해하는 결말을 알아낼 때까지는 살아 있겠다는 말로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다녀올게요.”
사장님 안 죽게.
뒷말은 삼키고서 현관으로 서둘러 나갔다. 불쑥 나선 바깥은 시야가 어지러울 만큼 밝았다. 윤조는 눈을 감고서 잠시 빛에 적응한 뒤 작은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다시는 볼 수 없을 줄 알았던 빛나는 정원 속으로 순식간에 뛰어들었다.
“와….”
싱그러운 풀냄새가 그득한 길이 미로처럼 나타났다. 초록색의 향연을 따라 윤조는 홀린 듯 걸었다. 안쪽으로 들어서니 뼈대가 앙상한 벤치가 있었다. 아까까지 주인처럼 앉아 있던 새가 윤조의 등장에 날개를 펴고 날아갔다. 윤조는 하늘 위로 날아오른 새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하얀 뭉게구름이 그림처럼 둥둥 떠 있었다.
눈이 아릴 정도로 푸른 하늘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걸었다. 일부러 숨겨 놓은 듯한 작은 분수를 몇 개 발견하고는 혀를 내둘렀다. 정원에 들어와서야 볼 수 있는 분수라니. 두베역 광장의 커다란 분수보다도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윤조는 맑은 물에 손을 적시다가 남은 길을 마저 걸었다.
정원 끝에 이르니 어느새 대문이 보였다. 정원은 넓은 편이었지만 길이 단순해서 구경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만 돌아가려던 윤조는 대문 너머의 보안 요원이 생각나 걸음을 멈추었다.
어제는 경황이 없었는데 잘되었다 싶어 초소에 들러 인사를 하기로 했다. 그렇지 않아도 정원을 다 보고 난 뒤에는 방으로 돌아가 각 담당자에게 인사 전화를 돌릴 생각이었다.
사잇길로 빠져나와 대문으로 향했다. 바닥 공사가 끝났는지 입구가 깨끗했다. 윤조는 대문 앞에 선 보안 요원을 발견하고 서둘러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보안 요원은 고개를 까딱이기만 할 뿐, 반기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윤조는 낙심하지 않고 초소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다 막 초소에서 나오는 보안 요원 하나와 마주쳤다. 보안 요원은 모두 차림이 똑같았는데, 그는 남달랐다. 척 보기에도 직위가 있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일하게 된 집사 서윤조라고 소개하고 싶었는데 요원이 손을 들어 윤조의 입을 다물게 했다.
“…….”
윤조는 제 말을 가로막은 요원을 어이없게 보았다. 그가 등을 돌려 초소로 다시 들어가버렸을 때는 기가 차서 헛웃음까지 났다. 저를 어이없게 한 이가 곧 무언가를 가지고 나타나지 않았다면, 슬슬 돌아가야 하는 것도 잊고 가서 따질 뻔했다.
“저택으로 오는 모든 우편은 일차적으로 이곳에서 검사 후에 들어갑니다. 집사님은 하루 한 번 꼭 초소에 들르셔서 가져가시길 바랍니다.”
“아…, 네.”
“현재 저택에 상주하고 있는 인력이 집사님 하나뿐인 것을 늘 상기해야 할 겁니다. 무슨 일이 생기는 즉시, 수화기를 들어 3번 눌러주십시오.”
“네….”
“참고로 도련님 방은 1번입니다.”
고급 정보를 주어 고마웠다. 윤조는 할 말을 끝낸 보안 요원의 명찰을 가만히 주시했다. 그의 직위는 팀장이었고 성은 변 씨였다. 윤조는 변 팀장의 얼굴을 외운 뒤 우편물을 가지고 서둘러 저택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정한은 아직 살아 있었다. 소파에 앉은 뒤통수가 어찌나 반갑던지 저도 모르게 웃음까지 났다. 윤조는 현관에서 막 발을 들이려다 발끝을 멈칫했다. 실내용 구두를 신고 밖을 돌아다닌 걸 뒤늦게 깨달았다. 정원의 흙이 묻은 구두 바닥을 보고 혀를 찬 순간 기척이 일었다.
책을 다 읽었는지 정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단 쪽으로 걸어온 정한이 윤조를 발견했다. 윤조는 구두를 벗고 안으로 들어가 정한에게 가지고 온 우편물을 건넸다. 어쩐지 그가 이만 방으로 돌아가서 우편물을 건네주기 어려울 듯했다.
“방에 가져다 놔.”
정한은 윤조가 내미는 우편물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대로 계단을 올라갔다. 윤조는 정한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등을 돌려 제 엉망인 구두를 보았다. 여분이 있어 다행이긴 했다만 종종 이 실수를 저지를 것 같아 걱정이었다.
우편물을 따로 챙겨 두고 밖으로 나와 구두를 탈탈 털었다. 탁! 탁! 구두 밑창 부딪치는 소리가 공사장 소음과 맞먹을 정도로 요란했다. 이 우아한 저택과는 어울리지 않는 소리였다. 윤조는 잠시 주위를 살피다, 구둣솔을 찾아 들었다.
겨우 구두를 깨끗하게 하고 돌아와 정한의 방으로 향했다. 들어선 정한의 방은 예상대로 그가 없었으나 차라리 있는 편이 나을 듯했다.
윤조는 도대체 우편물을 어디에 두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정확히는 정한의 마음에 드는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옷이야 비슷한 걸 찾아 넣으면 그만이었지만, 이런 기호는 어떻게 맞춰야 할지, 올바른 판단을 하기가 어려웠다. 모든 것이 정한의 비유를 맞추기 위한 고민 또 고민의 연속이었다.
고심 끝에 윤조는 침대 옆 서랍장에 우편물을 가지런히 두었다. 못 보고 지나칠 자리는 아니라 가장 적당하다 여겼는데 슬쩍 걸음을 물리고 보니 또 어딘가 어설펐다.
윤조는 열을 맞춰 놓아둔 우편물을 노려보다가 등을 돌렸다. 말하지 않은 신체 치수도 다 아는 사장이었으니 제 의도도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호출을 당하면 되고, 정확한 답을 알게 되면 다행인 일이었다. 윤조는 나름대로 합리화를 하며 정한의 방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그가 오기 전에 방을 비워야 했다. 바통을 이어받듯 하얀 문손잡이를 꽉 붙들었다. 조심스레 열어 낸 바깥이 마치 탈출구 같았다.
밥을 그렇게 먹고, 한 일도 대단하지 않은데, 왜 이리도 피곤한 걸까.
윤조는 정한의 방을 나와 슬슬 노을이 지기 시작한 창밖을 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언제 이렇게 배부른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해서 웃음이 났다.
퇴근 시간이나 되어야 겨우 보던 하늘을 전혀 다른 장소, 또 전혀 다른 조건에서 보고 있자니 감상이라는 걸 하게 되었다. 그땐 하늘이 어떻게 변하는지도 모른 채 집으로 돌아가기 바빴다. 돌아간 집에서는 가사에 치이고, 빛 하나 들지 않는 방에 박혀 겨우 지친 몸을 쉬었다. 하루의 시작은 늘 이른 새벽이었으나, 푸른 하늘에 조각달이 걸려 있어도 고개를 들어 감상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가는 거였구나.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이 꼭 오늘 하루 저택을 돌아다니던 제 마음 같았다. 첫눈에도 마음에 들었지만 구석구석 살펴본 저택의 모든 곳이 좋았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물론 그 너머에 보이는 하늘까지도.
윤조는 제 얼굴에 붉게 드리운 노을이 푸른빛을 띨 때까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늘이 아름다워서 취해 있는 건 아니었다. 누구도 침범하지 않는 온전한 자신의 시간을 느끼고 있었다.
그 탓에 윤조는 정한이 제 뒤로 지나간 것을 몰랐다. 그가 홀린 듯 하늘만 바라보는 윤조를 향해 잠시 눈길을 주었던 것도. 평소보다 문을 천천히 닫아주었던 것도 몰랐다.
* * *
다음 날, 윤조는 아침도 먹지 않고 곧장 테라스로 향했다. 늘 일에 치여 산 탓인지 어제 자신이 지나치게 여유를 부린 것 같아 찝찝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물기가 촉촉하게 남은 얼굴로 주방을 지나 테라스로 이어진 복도를 걸었다. 2층 제 방에서도 보이는 곳이었지만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싶었다.
문을 열자 아침의 신선한 공기가 코끝을 찔렀다. 윤조는 잠시 발을 망설이다가 구두를 벗고 목재로 마감된 테라스 위를 걸었다.
테라스는 수영장과 이어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딛는 윤조의 하얀 양말이 흙먼지에 조금씩 오염되었다. 그것도 모르고 윤조는 오로지 수영장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수영장엔 물은 없었고, 꽤 오래 내버려 뒀는지 바닥에는 낙엽이 빼곡했다. 이걸 왜 썩혀 두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여름이 오기 전에 청소해서 수영해야지.
제대로 할 일이 생긴 것 같아 뿌듯했다. 물론 팔이 나을 때까지는 게으름뱅이처럼 지내야 할 테지만.
잠시 주변을 서성이며 할 일을 찾아다녔다. 수영장 옆에는 차양이 달린 선베드가 몇 개 놓여 있었는데, 모두 새것처럼 깨끗했다. 그 외에는 이렇다 할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윤조는 다시 저택으로 돌아갔다.
아침을 먹으러 주방으로 가려다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 이 저택에서는 잘 보기 힘든 한 짝짜리 문을 앞에 두고 윤조는 갈등했다. 지하실까지 보고 아침을 먹을 것인가, 아침을 먹고 지하실을 볼 것인가.
고민 끝에 빈속으로 지하를 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윤조에게 지하라는 곳은 그리 깨끗한 인상의 장소가 아니었다.
어서 보고 밥 먹어야지.
지하실 문을 열자, 한눈에도 바로 아래로 꺼지는 듯한 비스듬한 경사가 나타났다. 윤조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걸음마다 바닥과 천장에서 불이 들어왔다. 윤조는 자신이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다. 멀리서부터 천천히 불이 꺼지고 있었다.
괜히 신기한 마음에 불이 다 꺼지길 기다렸다가 왔던 길을 뛰어서 올라갔다. 문까지 이르러 아래를 보자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서부터 천천히 불이 꺼지기 시작했다.
미자르에 있는 삼촌 집에도 지하실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입구 쪽의 작은 불과 중앙의 큰 불이 고작이었다. 어찌나 잡다한 것이 많고 시야가 불분명한지 윤조는 삼촌의 심부름으로 지하실을 갈 때마다 벽을 더듬어 대느라 먼지를 다 뒤집어썼다.
마치 그때처럼 시야가 깜깜해졌을 때, 윤조는 다시 걸음을 떼었다. 넘어지지 않게끔 발밑을 든든히 밝히는 빛이 햇살을 맞는 것처럼 기분 좋았다.
마지막 계단이 끝나는 자리에서 새로운 문을 만났다. 이 저택에 달린 문의 개수는 도대체 몇 개일까. 이것만 떼어다 팔아도 돈 수백은 손에 쥘 수 있을 듯했다.
윤조는 거침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지하 같지 않게 산뜻한 공기가 윤조를 맞이했다. 삼촌 집 지하실 공기는 폐가 썩는 것 같았는데, 역시 부자는 다르구나, 하며 감탄했다. 다만 여느 지하실처럼 어지러운 건 매한가지였다. 규모만큼이나 물건이 많아 한눈에 퍼뜩 들어오지 않았다.
어느 정도냐면 벽과 기둥의 경계를 구분 짓기 어려울 만큼 하나의 넓은 공간처럼 보였다. 눈으로 본 느낌이 틀리지 않았는지 저택의 모든 공간을 터놓은 넓은 지하실은 마치 미로처럼 분별없이 기둥이 있었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저택 위층에서 본 미술품과 조각은 장난이라도 되는 듯 엄청난 수의 수집품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죄다 비싸고 의미 있는 작품이겠지만, 그 가치를 몰랐기에 윤조의 눈에는 그저 먼지만 쌓는 골칫덩이로만 여겨졌다. 발끝에 차일 만큼 마구잡이로 널려 있는지라, 이걸 언제 정리하나 싶어 까마득했다.
어마어마하게 쌓인 일을 앞에 두고 윤조는 응당 나타나야 할 사람을 떠올렸다. 저와 같은 개인으로는 그 어떤 신원 보증도 자격도 증명되지 않아 한석과 같은 중개인이 꼭 필요했다. 그가 와야 정한과 계약하여 완전히 이 집에 정착할 수 있을 테다. 그전까지 저는 유령이나 다름없었다.
오지 않으면 먼저 연락을 해야 했다. 왜 한석은 늘 자신을 기다리게 하나 싶어 입술이 삐죽 나왔다. 생각하자니 두베역 사고도 알았을 텐데 이리도 조용한 게 섭섭하기도 했다.
한석에 대한 불만을 떠올리며 정처 없이 걷던 윤조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계속해서 같은 풍경만 본 것 같아 이만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뒤돌았을 때였다. 부정하고 싶은 막연한 불안감이 윤조의 몸을 스쳤다.
난잡하게 펼쳐진 수집 공간의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들어온 문은 하나였지만 그곳까지 통하는 길은 여럿인 구조이기 때문이었다. 멋모르고 들어온 자신을 질책하며 윤조는 좌우를 살펴보았다. 얼핏 하나의 벽면처럼 여겨지는 눈앞이 아찔했다.
윤조는 기억을 더듬어 자신이 보았던 미술품을 찾아 길을 나섰다. 그런데 어째 가도 가도 아까 보았던 것이 다시 나타나곤 했다.
얼마나 돌아다녔을까. 수많은 방이 모두 합쳐진 공간에 덜렁 선 윤조는 마치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이마 위로 땀이 송골송골 솟고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그래도 설마, 하는 생각에 다시금 길을 더듬어 찾았다. 기분 탓일지는 몰라도 계속해서 안으로 들어가고만 있는 느낌이 들어 발도 멈추어 섰다. 그제야 현실적인 공포가 엄습했다. 윤조는 걸어왔던 길을 향해 등을 돌렸다. 처음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을 때처럼 또 길이 여러 갈래로 있었다.
“미쳤나 봐…. 왜 자꾸 길이 생겨…?”
이건 미아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자기가 일하는 집에서 길을 잃지? 윤조는 제 이마를 짚으며 호흡이 가빠지지 않게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지만 잘되지 않았다. 어릴 적 삼촌 집 지하실에 갇혔던 기억이 있어 이런 상황은 달갑지 않은 편이었다.
이를 어쩌면 좋지.
자꾸만 가빠지는 호흡에 손으로 호흡기를 막고 머릿속으로 찬찬히 생각했다. 미아가 어떻게 해야 했더라?
미아의 첫 번째 수칙.
자리를 벗어나지 말 것.
윤조는 그 자리에 그대로 쪼그려 앉았다. 제 두 다리도 꽉 끌어안았다. 그러지 않으면 또 제 발이 멋대로 저를 어딘가로 옮겨 놓을 듯했다.
엉덩이와 다리에 치이는 미술품들이 끔찍하게만 여겨졌다. 혹, 여기 있는 작품들이 이곳에서 길 잃은 사람들은 아닐까, 그래서 저택에 상주하는 직원이 저 밖에 남지 않은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상상까지 들었다.
자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윤조는 고개를 내젓고 제 동그란 무릎만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여기서 어떻게 나갈 수 있을까. 이곳을 가장 잘 알 듯한 사람을 떠올렸다. 집사도 죽었으니, 남은 건 하나였다.
각인처럼 눈동자에 새겨진 대답 없는 옆얼굴이 떠오른 순간 윤조는 낙담했다. 그 무정한 사장님이 자신의 부재를 언제 알아챌까.
당장 오늘은 아닐 듯했다. 어쩌면 내일? 아니다. 한 달, 1년, 혹은 제 몸이 이곳에서 백골이 되어도 모를 듯했다. 이 넓은 저택 어딘가에서 마음대로 살고 있으리라 생각하겠지.
바닥의 먼지 냄새와 점점 숨이 모자란 느낌에 패닉 상태가 된 윤조는 정한을 귀찮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잊고 소리를 내었다.
“사장님….”
쥐가 우는 것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가 시작이었다.
“사장님. 저… 갇혔어요.”
“사장니임…?”
당연하게도 정한은 대답이 없었다. 윤조는 천장을 향해 두 손을 모아 소리쳤다.
“사장님, 아직 자요?”
“좀 일어나시면 안 돼요?!”
“사! 장! 님!”
“권정한 씨!!!!”
“사장님!!!! 저 지하에 갇혔어요!!!”
윤조의 외침은 울음을 동반한 채 점점 커졌다. 그런데도 정한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어엉…. 이제 겨우 팔자 피나 했더니, 내가 지하에 갇혀 죽네…. 밥이라도 먹고 올걸….”
테러에도 살아남은 몸인데, 실은 죽을 운명이었던 모양이다. 윤조는 서러움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쪼그리고 앉은 몸을 꽉 껴안았다. 상처가 찢어진 듯 팔이 저릿하게 아팠지만 그게 대수랴. 굶어 죽게 생겼는데.
그래도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싶어 훌쩍훌쩍 울면서도 살길을 찾아 머리를 팽팽 돌리고 있을 때였다. 윤조는 제 뒷덜미를 붙드는 힘에 껑충 일어나 콧물을 쏟았다.
“사댱님…?”
눈물에 이지러져 보였지만 자신을 절망 속에서 건져 올린 이는 정한이 분명했다. 윤조는 팔이 아픈 것도 잊고 그에게 두 팔을 뻗었다. 하지만 정한은 매정하게 윤조를 멀찍이 내려 두기만 했다.
윤조는 먼지로 지저분한 손을 옷에 닦으며 코를 훌쩍였다. 정한의 매정한 태도는 아무려면 어떨까 싶었다. 이렇게 찾아와 준 것만 해도 고마웠다.
“고맙습니다, 사장님.”
“시끄러워.”
“네?”
“시끄럽다고.”
정한의 말끝에 한마디만 더 하면 잘라버리겠다는 말이 달린 듯했다. 윤조는 황급히 입술을 꽉 다물고 저를 냉랭하게 바라보는 정한의 시선을 피해 눈을 바닥에 깔았다. 말은 물론이었고 숨소리도 조심했다.
얌전히 입술을 말아 문 윤조를 확인한 정한이 등을 돌려 길을 앞장섰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 엉망진창인 미로의 지도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거침없는 걸음이었다.
“엣, 취!”
빠르게 걷는 정한의 뒤를 걷고 있자니 먼지를 다 뒤집어쓰는 꼴이었다. 정한의 호흡기는 윤조가 있는 위치보다 훨씬 위인 장점도 있었다. 윤조는 또 나오려는 재채기를 잠재우려 코를 틀어막았다. 어떻게든 조용히 있어야 했다. 잘리지 않으려면.
거의 입구에 다다랐을 때였다. 정한이 귀찮다는 듯 제 길을 막아선 석고상 하나를 옆으로 걷어찼다. 데구루루 굴러간 석고상의 코 부분이 부서졌다. 꼭 지금의 제 모습 같아 윤조의 어깨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겨우 도착한 입구에서도 윤조는 기쁨을 표하지 못했다. 감사하다는 말도 전할 수 없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간 정한은 어느새 문 너머로 사라지고, 멍하니 선 윤조의 자리에서부터 계단의 센서가 하나씩 꺼져갔다.
“미안하다구요….”
투정과 같은 사과를 중얼거리며 윤조는 계단을 올랐다. 발밑으로 빛이 반짝 들어왔다.
“에엣, 취!”
눈물과 먼지로 엉망인 얼굴을 쓸며 윤조는 참았던 재채기를 했다. 계단을 울리는 제 재채기 소리가 시끄럽다는 정한의 고함인 것 같아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순간 윤조는 제 모습이 안타까우면서도 우습게 느껴졌다. 이게 무어라고 마음이 이렇게 작아졌을까. 실제로 정한은 시끄럽다고만 했지 시끄러우니 이 저택에서 나가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 말만 안 떨어지면 됐다. 잘리지만 않으면 다 괜찮았다. 윤조는 한결 기분이 가벼워져 몸에 붙은 먼지를 탁탁 털고 당당히 계단을 올랐다. 그런데도 지하실 문을 열기 전 윤조는 조금 주춤했다. 물론 망설임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
문손잡이를 붙들고 훌쩍 돌린 그 너머, 일찍이 가고 없을 줄 알았던 정한이 서 있었다. 어둠 속에 선 윤조와 달리 하얀 셔츠 차림의 정한은 복도로 쏟아져 들어온 빛 때문에 눈이 부시게 느껴졌다.
“뭐 해? 안 나오고.”
정한의 채근에 윤조는 급히 지하실로 이어진 문턱을 넘어 정한과 나란히 섰다. 그는 미련 없이 지하실 문을 닫고 손에 들고 있던 열쇠 꾸러미로 문을 잠갔다.
“어떤 새끼가 열어 놨는지.”
“저는 아니에요, 사장님.”
“그래, 아니겠지. 아니어야 하고.”
윤조는 선득한 정한의 시선에 제 아픈 팔을 가만히 쓸었다. 동정을 살 생각은 없었지만 정한의 시선이 워낙 아픈지라 가장 약한 곳이 반응했다.
“보기보다 괜찮은가 봐?”
정한이 턱짓으로 윤조의 팔을 가리켰다.
“사장님 덕분에….”
“부러지면 가만있을까?”
꼭 부러트리겠다는 말로 들려 윤조는 제 팔을 꽉 붙들었다. 손끝에서 퍼진 아픔이 전신으로 퍼져갔다. 정한은 윤조의 다물린 입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등을 돌려 돌아갔다.
“후….”
윤조는 정한의 모습이 다 사라지고 난 뒤에야 한숨을 내쉬었다. 목전까지 들어온 칼날이 치워지는 느낌이었다. 역시 정한은 건들면 안 되었다. 앞으로는 절대 그를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윤조는 코를 훌쩍였다.
살 만해지니 잊고 있었던 허기가 뒤늦게 밀려왔다. 허기를 해결하기 전, 윤조는 몸을 씻기로 했다. 이래 봬도 이 저택을 총괄하는 집사로서 품위를 유지해야 했다. 그러니 이 정도 허기는 참을 줄 알아야 했다.
방으로 돌아와 먼지와 눈물을 다 씻어 내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렇게 사고를 칠 줄 알고 여분을 많이 주었나,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윤조는 방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거울 앞에 서서 제 모습을 정비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울었는지 눈가가 아직 붉었다.
그러고 보니, 정한도 눈이 붉었던 것 같은데. 윤조는 우는 정한의 모습을 상상해 보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눈물이 뭘까. 가끔 그는 피도 없는 사람 같았다.
탕. 탕. 탕.
이어지던 총성을 기억한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차가운 판단이었다. 그러면서, 팔을 치료해주는 손은 따뜻했다. 게다가 시끄럽다고는 했지만 어쨌든 1년 뒤가 아닌 바로 오늘, 저를 구해주기도 했다.
윤조는 지하실에 나타난 정한이 대단하게 여겨졌다. 저택이 아무리 조용하다지만 지하에서 나는 소리를 어떻게 들은 걸까. 혹시 청각이 남다르게 좋아 그토록 예민하게 구는 걸까. 그렇다면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홀로 고개를 끄덕이다 거울 속에 제 머리를 이리저리 비춰 보았다. 그새 조금 길었는지 단정한 느낌이 줄어 있었다. 윤조는 최대한 단정하게 보이려 흘러내린 머리를 귀 뒤로 말끔히 넘기고서 방을 나섰다.
꼬륵, 꼬르륵.
통 먹지 못한 속이 소란을 피웠지만 호들갑을 떨고 싶지 않았다. 집사 학원에서 배운 대로 조용히 속도감 있는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딱딱한 지하실 바닥을 헤매다 카펫을 밟고 있자니 그 촉감이 배로 좋게 느껴졌다.
계단에 이르러 윤조는 턱을 들어 눈만 내린 채 아래를 보았다. 저도 모르게 음식 냄새 찾으려 콧구멍을 벌렁거리다가 곧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게 아니라도 냉정을 찾아야 했을 것이다. 기척 없이 침입한 방문객이 현관에 서 있었으니 말이다.
“신세 좋다?”
그는 두베 인력 사무소의 염한석 사장이었다. 예상하고 또 기다렸던 방문이었던지라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다만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손님을 맞이해야 하는 건가 싶어서 아연했다.
아무리 소음을 싫어하는 주인이 있더라도 집사로서 해야 할 도리는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대비하지 못한 방문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앞이 까마득했지만, 이 또한 홀로 먹는 식사처럼 익숙해지리라 여겼다.
윤조는 조용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 한석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먼 친척의 도움을 받아 회사를 차렸다고 했으니 정한과 옅은 혈연관계일 테다. 그래서 그런지 한석도 키가 큰 편이었다. 정한에게는 비할 바 아니었지만.
“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이긴. 계약하러 왔지.”
한석이 보란 듯 품에서 계약서를 꺼내 윤조에게 펼쳐 보였다. 윤조는 쏟아지는 글자를 다 읽지도 않고 한석을 보았다. 그가 할 말이 있는 듯 보았기 때문이다.
“윤 집사 일은 안됐어.”
윤조의 등을 후려치듯 한석이 전 집사의 일을 입에 올렸다. 윤조는 제 양심 어딘가가 콕콕 찔리는 느낌에 한석을 바라보던 시선을 급히 내렸다.
“그건 내가 대충 마무리했으니 마음 쓸 거 없어. 그나저나 약삭빠르단 말이야. 그렇게 안 생겨서. 응? 그날 많은 교훈을 얻은 모양이지?”
도대체 내 얼굴이 어떤 얼굴이기에 자꾸 저런 말을 하는 거지?
윤조는 한석의 말에 의문이 들었지만 뱉어내진 않았다. 대신 불편한 내색을 보였다.
“뭐 어쨌든 이 댁엔 늘 집사가 필요하니까, 나야 수소문하지 않아도 되어 좋긴 한데.”
“네. 그거 다행이네요. 근데 저는….”
윤조의 말을 끊듯 한석이 응접실 소파로 향했다. 윤조는 휑하니 빈자리를 응시하다 한석을 따라 소파로 발길을 옮겼다.
“마음 놓지 말라고. 그쪽은 그게 문제야. 뭐든 홀랑 믿어버리는 거.”
“네?”
“이 순진한 눈 좀 봐. 그 얼굴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그래?”
또다시 나온 얼굴 얘기에 윤조는 표정을 굳혔다. 이번에야말로 좀 따져 볼까 싶어 말을 뱉기 전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데 한석이 선수 쳤다.
“이 댁 회장님이 보통 분이 아니셔. 쳐낸 집사만 해도 얼만지 몰라. 겨우 정착하나 했더니, 이 사달이 났네. 그제 죽은 집사가 내가 가진 인력 중에 최고급 인력이었거든.”
윤조는 죽은 집사의 이야기만 나오면 절로 입이 다물렸다. 한석이 이걸 알면 안 될 텐데. 이미 아는 것 같지만.
“3주. 하! 기도 안 차지.”
3주간의 학원 경력으로 고급 경력을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자신을 선택한 것은 정한이었다. 윤조는 저도 모르게 한석에게 이끌려가려던 흐름을 끊기 위해 어깨를 바로 폈다. 그 바람에 벌어진 상처가 저릿한 통증을 일으켜 정신을 들게 했다.
“뭘 그렇게 서 있어? 엄마야, 얼굴이 무섭네?”
윤조는 애써 웃어 보이며 한석이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자, 이거 보라고.”
한석이 바닥이 훤히 보이는 투명한 유리 테이블 위로 계약서를 꺼내 내밀었다.
“조건은 전과 같아. 우리 사무소로 10퍼센트 떼주면 돼.”
“10퍼센트라니요. 그렇겐 못 드려요.”
윤조는 단번에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돈도 중요하긴 했지만 한석이 괘씸해서 따지지 않고서는 넘어가기가 싫었다. 한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조를 보았다. 헛소리를 들은 듯이.
“뭐?”
“전 권정한 씨한테 스카우트된 거라 인력 사무소에 그만큼 떼어줄 이유가 없는데요? 막말로 염한석 씨가 제가 이 저택에서 일하게 된 데에 어떤 수고를 들였냐는 말이죠.”
윤조의 말을 듣던 한석이 제대로 발을 뻗었다며 비꼬았다. 윤조는 저를 그렇게 만들고서 수수료 떼어먹으러 나타난 한석을 비꼬고 싶었지만, 말이 길어져서는 이길 수 없을 것 같아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버티면 저라고 어쩔까 싶었다.
“이봐, 내가 입만 잘 놀리면 그쪽 집사 자격 박탈하는 건 일도 아니야.”
“아아, 3주 수업 듣고 얻은 자격이요?”
자격이 박탈당하면 복잡해질 사정을 윤조도 모르지는 않았으나, 지금에 와서는 그 자격이 필요한가 의문이 들었다. 방식은 달라도 어쨌든 두베 시민에게 고용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닐까.
“순진하다 했더니, 살길은 잘 찾아가네? 어디다 줄 대야 하는지 잘 안단 말이야.”
또 비꼬는 건가 싶어 윤조는 한석을 가볍게 흘겨봤다. 그가 두 무릎 위로 팔꿈치를 괴고 몸을 앞으로 내밀어 윤조의 얼굴을 살폈다. 또 그놈의 얼굴 얘기가 나올 듯했다.
“그래. 내가 일전에 너한테 미안한 일도 있고 하니, 이번은 이렇게 넘어가자. 5까지만 해. 그 밑으로는 안 돼.”
순순히 제 의견을 들어준 한석의 반응이 놀라워 윤조는 순진하게 눈을 크게 떴다. 그를 지적하듯 한석이 윤조의 뺨을 가볍게 손끝으로 두드렸다. 윤조는 급히 표정을 갈무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단단히 물었네, 물었어.”
“선택하신 건 사장님이세요.”
“너, 정한이 사장님이라 불러? 교육을 허투루 들었구나?”
“3주 다녔다고 했잖아요. 그것도 기초반.”
“아주 당당하셔. 그래, 뻔뻔하게 살아. 여기서는 그래야 살아남아.”
그렇지 않아도 윤조는 이 저택에서 평생 살아갈 것이라 다짐했다. 알아서 살라는 사장님 말씀을 신의 계시처럼 떠받들고 살 작정이었다. 제게 다시는 이런 기회가 찾아올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요.”
“뭐, 또.”
“저 여기 집사로 일하긴 하는데, 없는 사람이고 싶거든요.”
“그건 뭔 개소리야?”
윤조는 일그러진 한석의 얼굴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의 등 뒤로 며칠 전 보았던 뿌옇던 광장이 떠올랐다.
생각만큼 두베의 경계는 튼튼하지 못했다. 이는 윤조가 몸소 겪어 본 일이었다. 삼촌이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찾아올 것 같아 두려웠다. 그래도 저택을 둘러싼 보안 요원을 뚫기는 힘들 듯했으니, 이것 하나에 의지하기로 했다. 걱정해 보아도 일어날 일은 일어날 테니까.
누가 알았을까. 두베역이 폭발할 줄. 그 예쁜 광장이 아수라장이 될 줄. 이 저택의 집사가 될 줄. 윤조 자신조차 몰랐고 또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저 계약하면 미자르에도 연락 갈 거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전 미자르에 제 근황이 닿길 바라지 않아요.”
“그래서, 뭐 죽은 사람 취급해 달라는 거야 뭐야?”
“맞아요. 저 그날 죽었다고 해주세요.”
“얘가 큰일 날 소릴 하네. 그래, 그건 그렇다 치자. 그럼 넌 여기서 뭐로 있으려고? 무슨 자격으로?”
“혹시…. 그런 일은 안 하세요? 신분 하나쯤은 만들어주실 것 같은데.”
“소설을 많이 봤네.”
“저 책 제대로 읽어 본 적 없는데요.”
“암튼, 안 돼. 그런 나쁜 일 하면.”
“이게 뭐가 나빠요…. 사람 살자고 하는 일인데.”
한석이 두 손을 들어 만세를 해 보이며 고개를 내저었다. 윤조는 시무룩한 얼굴로 한석을 향해 손가락 열 개를 펴 보였다.
“얘가 이제 흥정을 하네? 이거 하려고 수수료 깎은 거야?”
“10 다 떼 가셔도 되니까 저 신분 하나만 만들어주세요.”
“나 그런 일 하는 사람 아니라니까?”
“그렇게 생기셨는데요…?”
“야. 그렇게 생긴 건 뭔데?”
“…아닌가?”
윤조는 눈을 내리깔며 한석의 눈치를 보았다. 곧 일어날 것 같던 한석이 고개를 들었다. 윤조는 한석의 시선을 따라 몸을 돌렸다. 정한이었다.
“일전엔 신세 졌다.”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 우리 집사님이랑 계약 중이었지. 너랑도 할 거 있어. 우리 집사님, 얼마나 줄 거야?”
역시 글렀구나. 꼼짝없이 미자르로 돈을 보내게 생겼다. 그렇다면 좀 많이 받았으면 좋겠는데. 전에 들어갈 뻔한 집사 자리만큼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만이라도.
윤조는 낙심한 마음을 나타내지 않으려 애쓰며 정한을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그의 입술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꼴인 줄도 모르고.
“글쎄. 얼마 줘야 하지?”
“대충 줘.”
놀리는 듯한 한석의 태도에 윤조는 입술이 바짝 탔다. 정한이 낮게 부르면 그에게 돌아가는 수수료도 적어지는데 뭐가 저리 즐거워서 실실거리는지 당최 알 수 없었다.
“윤 집사가 얼마 받아 갔더라?”
“윤 집사? 그만큼이나 주게?”
“그게 많나?”
“많긴 하지. 고작 3주짜리가 어떻게 30년짜리에 비빌 수가 있겠어? 뭐, 오메가인 게 경력 10년 먹긴 한다만.”
가만히 한석이 떠드는 말을 듣고 있던 윤조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 손을 들어야 했다. 정한과 한석의 시선이 윤조를 향해 쏟아졌다.
“뭐가 그리 궁금하실까, 우리 집사님은?”
“오메가가 경력 10년 먹는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몰라서 묻는 거야?”
“네. 몰라서 묻는 거예요.”
기가 찬 듯 웃는 한석을 보며 윤조는 웃을 수 없었다. 설마하니 처음 제시받은 임금과 계약금이 다 오메가였던 덕이었나 싶었다.
그게 10년짜리 연봉이었다. 생각보다는 짰지만, 고작 3주짜리를 오메가가 도대체 무어라고 이리 후하게 쳐주나 싶어 이해할 수 없었다.
“이봐요, 서윤조 씨.”
“네.”
“학원 기초 3주 들었다고 했지?”
“네. 나름 착실히 다녔어요. 삼촌한테 안 걸리는 한에서.”
“그놈의 삼촌. 쯧. 그러니 모를 수도 있다 싶긴 한데, 이건 너무 눈치가 없는 거 아니야?”
“왜요?”
두베에서는 오메가가 뭔가 다른가 싶어 윤조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한석의 눈이 윤조와 더불어 커지기 시작했다.
“얘 진짜 모르나 본데? 너 어디 갇혀 살았니?”
윤조는 열심히 눈을 굴려 제대로 된 대답을 내어줄 것만 같은 정한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저 아주 귀한 사람인가 봐요?”
정한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숨을 쉬듯 윤조를 응시할 뿐이었다. 어쩐지 멸시의 기운이 느껴져 윤조는 시선을 내렸고, 한석은 제 허벅지를 내려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마까지 지글지글 열이 오르는 기분에 윤조는 제 뺨을 벅벅 긁었다.
“야, 너 같은 열성 오메가 두베에 널렸어. 단지 너 같은 오메가가 뭐 하러 집사 일을 하냔 말이지.”
“오메가는 집사 일 안 해요?”
“네가 왜 3주 만에 배치받았겠어?”
“혹시 오메가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고 싶으신 거면 그건 잘못 아신 거예요, 그 댁 주인분이 마크를 착각하셨거든요. 알파를 원하셨어요.”
“그래, 알파도 귀하긴 하지. 근데 아냐. 너였어. 오메가를 원했다고.”
“네? 그럼 왜 절 문전 박대한 거예요?”
“왜긴 왜야, 그 댁 마님이 너 싫었으니까.”
“절요? 저 언제 보셨다고 싫어하시는데요?”
“야, 너 이제 재미없으니까 그만해. 진짜 갇혀 산 것도 아니고 왜 그래?”
윤조는 답답함에 자리도 잊고 가슴을 내칠 뻔했다. 한석이 저를 비웃는 이유를 도통 짐작할 수 없었다. 문득 학원에서 들은 팔자 핀다는 얘기가 떠오르기는 했지만, 삼촌의 감독하에 일터와 집만 오가는 삶을 살았던 윤조로서는 쉬이 이야기를 잇지 못했다.
“모르나 보네.”
보다 못했는지 정한이 거들었다. 그제야 한석이 웃음을 감추고 윤조를 빤히 보았다.
“이거 완전 천연기념물인데?”
“그건 무슨 뜻인데요?”
“바보라는 거야.”
“그만 놀리고 할 일 하고 가. 시끄러워.”
정한이 지겨운 얼굴로 등을 돌렸다. 한석이 급히 소파를 박차고 일어나 정한의 뒤를 따라갔다. 윤조는 결국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한 채 홀로 남겨졌다.
꼬르륵.
주변인의 부재를 기다렸다는 듯 배가 울었다. 어느새 점심시간이었다. 윤조는 오늘도 두 끼를 꺼내어 하나둘 주방 식탁 위로 옮겼다. 막 밥을 푸고 있는데 정한을 따라나섰던 한석이 털레털레 걸어와 윤조가 차려 놓은 식탁에 앉았다.
“너 때문이야.”
“제가 왜요? 전 조용히 있었는데요?”
“너 진짜 시끄럽다.”
“말을 거셔서 대답한 것뿐이에요.”
“그게 시끄럽다는 거야.”
“저한테 괜한 화풀이하지 마세요.”
“너까지 그러기야? 좀 네, 네 해주면 안 돼? 어째 이 집안 인간들은 한 번에 알았다 하는 법이 없어?”
“틀린 말을 하시니까요.”
“아오!!! 시끄러워!!”
제일 시끄러운 게 누군데.
윤조는 한석에게 들리지 않게끔 중얼거리며 밥을 조금 더 쌓았다.
“너 때문에 또 와야 하잖아! 멀어 죽겠는데!”
윤조는 또 남 탓 하는 한석을 한심하게 보았다. 이번만큼은 저도 아니다 싶었는지 헛기침을 한 한석이 정한을 씹어댔다.
“따라오지 말래. 꺼지라는 거잖아? 꺼져야지 어쩌겠어. 걘 아주 나를, 아니다. 걘 누구든 다 그랬어. 어릴 때부터 그래. 지 혼자 고고해.”
윤조는 누구에게나 같은 반응을 보이는 정한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일생을 차별만 받고 살았던 윤조에게는 정한의 엄정한 평등이 이상적으로 여겨졌다.
“식사하실래요?”
“생각 없어.”
“그럼 저만 먹을게요.”
“그거 너 혼자 먹으려고?”
“네.”
“그렇게 안 생겨서 엄청 먹는다?”
소식하는 얼굴은 따로 있나?
윤조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한석의 맞은편 자리로 반찬과 요리를 옮겨 앉았다. 잊을세라 한석에게 질문도 던져 두었다.
“그 오메가 얘기해주실 수 없어요?”
“7퍼센트.”
“됐어요, 사장님한테 물을게요.”
“어지간히 대답해주겠다.”
“그렇게 어려운 대답이에요?”
“쉽지. 쉬운데 너는 어려울 것 같아.”
“…….”
“궁금해 죽겠지?”
어디서 이런 걸 물을 수 있을까. 한석의 말대로 정한에게는 들을 수 없을 듯했다. 윤조는 앞으로의 두베 생활에 알아 두어서 나쁠 것은 없을 것 같아 눈물을 머금고 결심했다.
“6….”
식탁 위로 턱을 괸 한석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벼룩의 간을 빼먹지, 내가.” 하며. 윤조는 처음으로 한석에게 호감이라는 걸 느꼈다. 수수료를 떼어 가지 않는다면 벼룩이 되어도 좋았다.
“너… 히트 사이클 주기가 어떻게 돼?”
물어서는 안 되는 질문이라도 되듯 한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윤조는 그게 뭐 대수인가 싶어 냉큼 대답했다.
“아, 그거요? 한 10개월에 한 번인가?”
“뭐?? 10개월?!!!”
“저 열성이거든요.”
“알지. 근데 너같이 10개월이나 되는 애는 본 적이 없어.”
윤조는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미자르에 살던 시절, 주변인 중 윤조가 가장 주기가 짧은 편이었다. 10개월이 뭐야, 사촌 동생 중 하나는 2년에 한 번 찾아오곤 했다.
“너 빛 좋은 개살구였네?”
한석이 식탁 의자에 등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역시 운 좋은 놈이야. 법이 너를 살렸다, 하며.
“그렇게 안 좋은 거예요?”
“네 신상 명세서를 떠올려 봐. 오메가 마크 있지?”
“네.”
“열성인 건 기록될 거야.”
“마이너스 표시도 되어 있어요.”
“그렇지. 근데 네가 얼마나 마이너스인지는 수치상으로 기록을 못 하게 되어 있어. 그게 법이라는 거야.”
“왜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집사라는 직업에.”
윤조는 젓가락을 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맞았다. 열성의 정도는커녕 자신이 오메가인 것까지 집사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왜 학원 사람들은 팔자가 핀다고 했을까?
“미안하다. 4로 깎아줄게.”
“왜요? 그럼 저야 좋지만….”
마치 철없는 어린애를 보듯 한석이 한심한 눈짓으로 바라보았다. 윤조는 괜히 머쓱해져 밥을 떠먹었다.
“너, 네 삼촌이 왜 그렇게 홀랑 허락했을 것 같아?”
“돈을 많이 주니까요.”
“네 삼촌도 몰랐던 거야. 오메가 집사가 인기 있는걸!”
“제가 인기 있어요?”
“너 말고! 오메가!!”
“어쨌든 제가 오메가인 건 맞잖아요.”
“아휴, 그래 잘나셨어!”
한석이 답답한 듯 물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윤조는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한석을 보다 젓가락을 놀렸다. 밥이 달다 못해 쓸 지경이었다.
“햐, 맛 좋다. 이 집은 물도 맛있냐 왜.”
“계속 말씀해주세요.”
“알았어, 그렇게 잡아먹을 것처럼 보지 마.”
“제가 언제요?”
“어휴, 시끄러워. 네 사장이 왜 시끄럽다고 한지 알겠다.”
“…제가 얼마나 조용한데요. 사장님 앞에서는.”
“그래, 그래야지. 쟤 눈에 거슬리면 넌 그날로 끽이니까.”
“…그래서요?”
어련하다는 얼굴로 한석이 말을 이었다.
“오메가 집사는 집사 일만 하는 게 아니야.”
“그럼요?”
“그 영감탱이가 널 왜 선택했겠어. 왜 내가 수수료를 깎아줬겠어? 생각해 봐.”
“뭔가… 저는 모르는 나쁜 일이 있나 봐요?”
“빙고. 이제 좀 대화가 통하네.”
한석이 민망한 얼굴로 제 수염 자국이 난 푸릇푸릇 한 턱을 매만지며 시선을 돌렸다.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윤조는 씹고 있는 음식 때문에 제대로 듣지 못했다.
“너 아직 모르지?”
“알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래, 모르는 게 나아.”
정말 모르는 게 나은 걸까? 윤조는 떠오르는 생각을 그치지 않고 입에 올렸다.
“혹시…, 제가 그 저택에 들어갔으면요.”
“어.”
“그 영감탱이랑 잤어야 했나요?”
한석은 대답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요?”
“영감탱이가 원하는 만큼.”
“죽을 때까지겠다.”
“그래, 영감탱이가 죽을 때까지. 근데 거기서 네가 애 하나 낳으면 끝나는 거야.”
“애도 낳아야 해요?”
“뭐라도 낳아야 네 앞으로 떨어지는 게 많지.”
“재산이요?”
“그래.”
듣자 하니 이상했다. 그럼 정한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윤조는 무심코 시선을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각해 봐도 자신이 그의 아이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가 저를 안고 싶을까? 시끄럽다고 입을 틀어막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사장님이 저랑 자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
“왜, 이 집 재산이 탐이 나?”
“아닌 건 아니지만, 자식을 낳으면서까지 탐나는 건 아니에요. 그냥 저는 여기서 평생 집사로서 일하고 싶은 게 다예요.”
“그래, 정한이도 그걸 원할 거야.”
“정말 그럴까요?”
“어. 걘 너한테 요구하는 거 없어. 하지만! 기대하는 사람은 있겠지.”
“그게 누군데요?”
“네가 오메가인 거 알고 지금 조용히 있는 사람.”
도대체 한 번에 얘기해주는 법이 없는 한석을 향해 윤조는 얕은 한숨을 내쉬어 보였다. 지금 조용하다면 언젠가 시끄럽게 나타나겠지 했다.
“궁금하지 않아?”
“때 되면 찾아오시겠죠, 뭐. 그때 인사드리면 되나요?”
“너.”
“네.”
“우리 정한이가 사람 보는 눈이 있었어.”
“왜요? 저 좀 괜찮은 집사 같아요?”
“취소. 아닌 것 같아. 넌 너무 경박해.”
한석이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본인이야말로 어찌나 경박하게 일어나는지 그 소음이 주방을 울리다 못해 계단을 타고 정한의 귀에까지 들어갈 것만 같았다.
“조용히 하세요!”
“네가 제일 시끄러워!!”
한석이 괜한 짜증을 내고 주방을 나갔다.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 * *
저택의 구조를 파악한 뒤 윤조는 정한의 일과를 관찰했다. 고작 3주짜리 수업을 들은 게 다였지만 윤조는 착실히 집사 일을 해나가고 있었다.
정한의 하루는 특징 없는 저택 2층처럼 무엇 하나 특별할 게 없었다. 그는 종일 응접실에 있거나 서재에서 머무는 게 다였다.
이따금 날씨가 좋으면 테라스로 나가 선베드에 등을 기대었다. 책을 읽는 건 다른 장소에 있을 때와 다름이 없었고, 선베드에서는 자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통 그게 무슨 재미인지 궁금하여 묻고 싶은 마음에 입이 간질간질했지만, 열심히 참았다.
오늘 정한은 응접실에 있었다. 윤조는 식사를 끝내고 주방에서 나오던 길에 정한을 발견하고 그를 먼발치에서 관찰했다. 다리가 어찌나 긴지 오토만 위에 올린 발도 삐죽하게 나가 있었다. 미동 없이 오로지 책에만 집중하고 있는 정한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걸었다. 정한의 근처를 지날 때는 벽에 붙어 걷는 것도 모자라 요즘엔 뒤꿈치를 세우고 조심조심 걷는 편이었다.
“똑바로 걸어. 그게 더 거슬려.”
시선 하나 주지 않고 건네는 말에 윤조의 뒤꿈치가 명령대로 바닥에 착지했다. 윤조는 굽혔던 어깨를 펴고 정한을 보았다. 그의 손끝에서 얇은 책장이 팔락거리며 넘어갔다.
“식사는 하셨어요?”
“알아서 하니까 신경 쓰지 마.”
“요 며칠 영양 주스만 드신 것 같던데. 도통 제 식사 옆에 씹을 거리가 같이 놓이지 않더라구요.”
“신경 쓰여?”
“…아뇨. 신경 안 써요.”
신경 쓰인다고 하면 또 신경 쓰지 말라는 말로 대화를 단절시킬 것 같아 그렇게 대답했더니 정한이 고개를 들어 윤조를 보았다. 의외의 성과였다. 그와 대화하는 기술을 익힌 듯한 기분이 들어 조금 우쭐해질 즈음, 정한이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거짓말 못하네.”
“진짜 신경 안 쓰이는데요?”
“그럼 이만 할 일 해. 신경 안 쓰인다며.”
“…네. 그럼 저는 이만 제 일하러 가겠습니다, 사장님.”
의식이 있고 난 이후로 내내 바라는 것만 있던 삼촌의 품에서 자란 탓인지 제게 아무 기대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는 정한이 윤조는 낯설었다. 아직 정확한 액수가 정해진 건 아니지만 그는 제게 일정한 임금을 지급할 텐데, 도대체 뭘 믿고 저리 돈을 낭비하나 싶기도 했다.
물론 이 모든 건 윤조가 알 바는 아니었다만, 여태껏 살아온 삶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이런 대가 없는 보상은 복권만으로도 충분했다.
아… 복권!
두베에서도 미자르에서와 마찬가지로 복권을 사야 했다. 윤조가 열세 살 때부터 유일하게 행한 취미이자 사치였다.
복권을 어디에서 사면 좋을까.
윤조는 계단을 올라가려다 응접실 소파에 앉은 정한을 내려다보았다. 또 한 번 책장이 넘어갔다. 그에게 물었다간 그대로 잘릴지도 몰랐다. 윤조는 빠르게 단념하고 발길을 돌려 현관을 나섰다. 제 유일한 소통 창구를 향해서.
*
관찰을 통해 알 수 있는 정보는 한계가 있었다. 사실 윤조가 아는 정한의 정보라고는 현재 그가 어디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눈으로 보고 귀로 기척을 확인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정한의 직업은 무엇인지, 나이는 몇인지, 가족 관계는 어떠한지,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는 음식, 등등. 응당 집사라면 알아야 할 정보는 하나도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직접 입을 놀려 알아내기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알아서 살라던 정한은 정말 그의 말대로 윤조를 알아서 살게 내버려 두었기 때문이다. 고로 저 역시 알아서 해야 했다.
윤조는 자연스럽게 주변으로 눈을 돌렸다. 바깥의 보안 요원은 저보다도 정한과 접촉을 하지 않는 편이었고, 저택에 드나드는 각 담당자보다도 입이 무거워 보였다. 그나마 손쉬운 타깃을 향해 접근을 시도했다. 당연하게도 첫 목표는 저택에 드나드는 담당자들이었다.
윤조가 파악한 담당자는 아주 극소수였는데, 개중 그나마 안면을 익힌 건 주방 담당자였다. 주방 담당자는 이른 새벽, 홀로 저택을 찾아와 냉장고를 채워 놓고 홀연히 사라졌기에 날을 잡고 식탁에 앉아 기다려야 했다. 물론 그 노력의 결과는 처참했다.
그 외에도 옷을 세탁해 배달하는 빨래 담당자와 저택 설비를 수리하러 온 수리 담당자를 마주쳤지만, 윤조의 의도 있는 접근에 웃음으로만 대답을 때울 뿐, 무엇 하나 흘리는 게 없었다.
첫인사 전화 때만 해도 살갑게 받아주던 사람들이었는데, 그것이 예의를 차린 것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 섭섭함에 눈물이 찔끔 날 뻔도 했지만, 그들도 저와 같은 처지라 생각하며 애써 자신을 위로했다.
그런 와중, 대문을 지키는 보안 요원 하나가 교체되었다.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었으나 윤조가 모르는 새에 정한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었다. 윤조는 새로 들어온 요원이 저처럼 초짜에다가 다른 요원들과 다르게 살가운 구석이 마음에 들었다. 윤조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에게 접근했다.
당시 이 저택의 생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그는 윤조의 접근을 흔쾌히 받아주었고, 지금은 윤조의 두베 생활 창구가 되어 있었다. 정한에 대한 정보도 모두 그가 알아봐주었다.
하지만 그 역시 조심스러웠는지 직접 알아내지는 못하고 이따금 동료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말과 분위기를 파악해 윤조에게 귀띔해주는 것이 다였다. 그것만 해도 어찌나 고마운 일인지, 윤조는 금세 마음을 놓고 그를 가리켜 형이라 부르며 친분을 쌓아 갔다.
“명우 형.”
“어? 서 집사!”
명우는 꽤 호들갑스러운 성격이었는데 윤조는 부디 그가 정한의 눈에 거슬려 잘리지 않길 바랐다. 다른 요원들은 정한 못지않게 제게 냉랭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 했잖아요.”
“너야말로 날 형이라 부르지 마시지?”
명우의 호들갑이 꽤 컸던 모양인지 대기 중이던 요원이 초소에서 나와 고개를 삐죽 내밀어보았다. 윤조는 괜한 헛기침을 하며 저택 쪽으로 몸을 돌렸다.
“흠, 암튼. 저기, 박명우 요원?”
“예, 서 집사님.”
“이 근방에서 복권 살 만한 곳이 있습니까?”
“예?”
“복권이요, 복권. 두베에는 복권이 없습니까?”
“복권… 있죠, 있습니다.”
“그거 어디서 살 수 있습니까?”
“도련님은 아니시겠고, 그럼… 집사님이 필요하신 겁니까?”
“예.”
“그렇게 안 생겼는데….”
복권 살 것 같은 얼굴도 있나?
윤조는 알 수 없었다. 명우가 잠시 초소 쪽으로 고개를 돌려 안을 확인하고 작게 속삭였다.
“집사님이 이 저택을 나갈 일이 있겠습니까?”
“아마 없을 겁니다. 제 의지로는.”
운전도 못했고, 차도 없었다. 있다 하더라도 정한이 저택에 뼈를 묻을 듯하니 나갈 일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분명하네요. 제가 사다 드리겠습니다.”
“정말요?”
“예. 뭐 그 정도쯤이야. 대신, 당첨되면 10퍼센트만 떼어주십시오. 제가 좀 양심적입니다.”
“두베 사람들은 수수료를 참 좋아하나 봅니다.”
명우에게 간곡히 부탁하고 윤조는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다. 정한은 여전히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윤조는 버릇처럼 뒤꿈치를 들려다 곧 자세를 바로 했다. 명우와 노닥거리고 온 게 무어라고 정한에게 걸릴까 봐 마음이 쪼그라들어 등에 땀이 차는 느낌이었다.
발끝을 조심하며 조심조심 안으로 걸음 하는데 무례하게도 현관문이 활짝 열렸다. 윤조는 제 등 뒤로 쏟아진 빛을 돌아보지도 않고 두 눈을 감았다. 누군지 알 법했기 때문이다. 바라지 않은 예고를 하고 간 사람일 게 분명했다.
“올여름은 일찍 오려나 봐? 벌써 덥네. 어?! 우리 정한이 나와 있었네?”
한석이 품에서 계약서를 꺼내 팔랑거려 보였다. 윤조는 냉큼 한석에게 다가가 그를 응대했다. 이를 악문 채 제발 목소리를 낮춰 달라는 말도 속삭이며.
“이봐요, 집사님. 너랑 나랑은 달라. 그걸 알아줬으면 해.”
다르긴 뭐가 달라. 시끄러운 취급 당하는 건 같은데.
윤조는 한석이 뭐라 말하든 웃는 얼굴로 그의 계약서나 받아 들고 조심스레 정한에게 다가갔다.
“이건 집사가 할 일이 아니래도?”
한석은 윤조를 가볍게 치워내고 손에 들린 계약서도 가져갔다. 윤조는 계단까지 밀려나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려야 했다.
정한의 앞에 개처럼 무릎을 굽히고 앉은 한석이 여전히 책에 집중한 정한을 살살 건드렸다. 윤조는 입술이 바짝바짝 타는 기분에 제 허벅지만 움켜쥐었다. 한석에게 덤벼들어 더 큰 소란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아하하하, 아무튼 씀씀이가 좋단 말이야. 역시 사람이 배가 불러야 인심이 나는 거야. 우리 서 집사는 팔자가 폈네, 폈어.”
계약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한석이 떠드는 대로 팔자가 핀 것처럼 상당한 액수의 임금을 받게 되긴 했지만 윤조는 온전히 기뻐할 수 없었다. 그것도 다 사장이 살아 있을 때나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무심히, 혹은 미련 없이 불타는 차에 앉아 있던 남자를. 윤조는 도무지 잊을 수도 그를 이해할 수도 없었다.
죽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알기엔 아직 살아 본 날이 얼마 되지 않았고, 해 본 것이 너무 없었다. 정한의 곁에 있다 보면 알게 될까.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물론 신상까지도 죄 파악하고 싶은 윤조였지만, 죽고 싶은 마음은 끝까지 모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무튼 서 집사의 사장님, 권정한은 살아야 했다. 서윤조는 이곳 두베에서 살고 싶었으니까.
그런 윤조에게 조금도 협조할 마음이 없는 듯한 한석은 계약 건이 끝난 후에도 내내 정한에게 붙어 그를 귀찮게 했다. 저러다 또 죽겠다고 환장하면 어쩌나 싶어 윤조는 노심초사였다. 애써 입 다물고 살아온 얼마간의 제 노력이 물거품이 될 처지였다.
“말씀 끝나셨으면 잠시 괜찮으실까요?”
정한이 한석을 향해 꺼지라는 듯 손사래를 쳤을 때 냉큼 끼어들었다. 한석이 고개를 들며 불쾌한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정한의 표정을 살피고는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그래, 뭐가 그렇게 궁금하실까, 우리 집사님은?”
“제가 궁금해하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여기서 누가 몰라? 얼굴에 써 놓고 다니는데.”
“제가 그렇게 얼굴에 티가 나요?”
“어.”
한석의 말에 더해 거짓말 못한다는 정한의 말이 떠올라 뺨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버릇처럼 뺨을 매만지는 윤조를 내려다보던 한석이 물음을 채근했다. 윤조는 다시 독서 중인 정한을 확인하고 한석을 주방으로 이끌었다.
“저 신분 좀 만들어 달라고 했잖아요.”
“계약까지 한 마당에 그게 포기가 안 돼?”
“평생 포기만 하고 살았는데 여기까지 와서 포기하기 싫어요.”
윤조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한석이 눈썹을 긁으며 혀를 찼다. 그러고는 응접실 방향을 돌아보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네 사장님이 허락해줄까?”
“사장님을 설득해야 할까요?”
“그럼, 네 책임자는 저기 있는 남잔데. 나라고 어쩌겠어?”
“어쨌든 만들어주신다는 거죠?”
“10.”
“해주시면 얼마든지요.”
어쩐 일로 어른 같아 보이는 한석을 올려다보며 윤조는 활짝 웃었다. 그의 등 뒤로 정한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절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아.”
시끄럽다는 듯 말을 남기고 냉장고로 향한 정한의 움직임에 윤조와 한석 모두 입을 다물고 숨죽였다. 윤조는 이참에 정한에게 말할까 싶어 입술을 달싹였다. 한석이 윤조의 손목을 붙잡고 눈짓으로 신호를 주지 않았다면 벌써 말했을지도 몰랐다.
“서 집사한테 뭘 뜯어 가는 건데.”
들었나 보다.
애써 침묵한 보람도 없게 정한이 먼저 물었다. 윤조는 물을 마시는 정한을 향해 몸을 돌리며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고심했다.
“얘가 죽고 싶다잖아.”
한데 그 전에 한석이 먼저 나섰다. 전혀 예상치 않은 말로. 윤조는 지나치게 제 입장을 요약한 한석의 말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정한이 흥미롭게 윤조를 보았다.
“서윤조로는 살기가 싫대. 그래서 새 이름을 얻고 싶은 모양인데?”
“개명이 뭐가 어렵다고 너한테 수수료를 부담하겠다는 건데?”
“개명이 아니라, 아예 다시 태어나고 싶은가 봐. 너만 허락하면 얘 다시 태어나게 하고 계약하면 안 될까? 좀 사연이 복잡하거든.”
정한이 생각에 빠진 듯 말없이 윤조를 응시했다. 윤조는 손바닥에 들어차는 땀을 느끼며 정한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가 슬쩍 고개를 비틀어 한석을 향해 눈을 돌렸다.
“이름 외우기 귀찮은데?”
“아…. 그럼 이름은 그대로 할게. 대신 출신은 다르게. 직업은 이대로 유지하고. 자격증도 위조해야겠다, 그럼.”
“꼭 집사로 있어야 하나?”
괜히 얘기를 꺼냈다. 윤조는 금방이라도 저를 잘라버릴 듯한 정한의 눈짓에 크게 낙담했다. 한석도 곤란한 눈치로 윤조의 어깨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개로 들이든지.”
“네?”
“개가 신분이 뭐가 필요해?”
“정한아.”
“개로 해.”
정한의 말은 곧 법과도 같아서 윤조는 물론 한석도 꼼짝없이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윤조는 정한이 나선 주방에 멍하니 서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물론 될 리가 없었지만. 그건 한석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저, 정말 여기서 개로 살아야 해요?”
“아무리 그래도 개는 좀 그렇지.”
“그렇죠…? 농담하신 거죠?”
“하하하…. 살벌한 농담이긴 한데, 네 신분 만들려면 시간 좀 걸릴 테니까, 일단… 정한이 말대로 당분간은 개로 있자.”
윤조는 한석이 정한에게 합세하여 제게 농담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혼란한 머리가 어지럽기만 했다.
“염 사장님.”
“계약은 그때 다시 하기로 하고. 응?”
“저 진짜 개 됐어요?”
“네 주인님이 원하시잖아.”
“그렇긴 하지만….”
“미자르에는 내가 얘기해 둘게. 두베역 테러 때 죽은 거로 해서.”
한석은 미안한 얼굴로 웃어 보이고는 곧 할 일이 있다며 서둘러 저택을 나섰고, 윤조는 또 한동안 주방에 서 있었다. 딱히 개 취급을 받아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도대체 개로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뭘 이렇게 진지하게 고민하는 건지, 네 발로 걸을 것도 아닌데.
윤조는 한석의 말대로 당분간 개의 신분인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제 그가 두베역 사고로 조카가 죽었다고 삼촌에게 알려주면 끝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건 다 이뤄진 셈이다. 이 저택에서도 취급만 개였지, 결국 집사인 것은 변함이 없을 테다.
…없겠지?
막연한 불안감을 뒤로하고 윤조는 주방 입구로 나왔다. 독서 중인 정한이 보였다. 윤조는 어찌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아침에 배달 온 옷을 정리하기로 했다. 정한의 방에는 그가 없는 때만 드나들 수 있어서 지금이 적기였다.
주방 입구에서 정한이 앉아 있는 방향을 향해 빠끔히 고개를 내밀고 있던 윤조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그와 최대한 먼 거리를 유지하며 걸었다. 막 응접실 소파가 있는 곳을 지나려는데 그에게 계약과 관련해 감사 인사를 하지 않은 게 떠올라 우뚝 멈춰 섰다.
“…….”
그렇지만 막상 고개를 돌려 정한을 보았을 때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독서를 방해할 용기가 없었던 건 아니다. 그가 자신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개를 부르듯 윤조를 향해 가볍게 손짓해 보였다. 윤조는 무심코 그의 발치에 무릎을 꿇어야 하나 싶어 잠시 고민하다가 한걸음에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살짝 고개를 숙여 부름에 답하자 정한이 오토만 위에 얹어놓은 다리를 치우며 그곳에 앉으라고 했다. 윤조는 책을 덮어 옆으로 치우는 정한을 보며 조심스럽게 오토만 위로 엉덩이를 대었다.
그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마치 개에게 하듯. 윤조는 그가 자신을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아 가볍게 미소 지었다.
“안 보이나 봐?”
윤조가 웃기만 하고 팔을 내어주지 않자 정한이 재촉했다. 윤조는 정한이 뾰족하게 건네는 말과는 다르게, 잊지 않고 제 상처를 수시로 체크해주는 것이 고마웠다.
“덕분에 빨리 나았어요.”
“그랬겠지.”
“고맙습니다, 사장님. 치료해주신 거랑, …저 신분 바꾸는 거 허락해주신 것도요.”
빤히 팔을 들여다보던 정한과 시선이 마주쳤다. 윤조는 습관처럼 그에게 웃어 보였다. 최대한 경박스러워 보이지 않게 부드러운 미소로.
하지만 정한은 감흥 없는 시선으로 윤조의 걷어 올린 소매를 내려 정리하기만 했다. 단정하게 채워지는 단추를 보며 윤조는 생각했다. 대접받아 본 사람이라 그런지 저보다도 손길이 능숙하다고.
그러니 이 모자란 집사가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그런데도 정한은 자신을 데리고 있었다. 테러 때와 지하실에서 길을 잃었을 때에도 구해주었고, 일도 주었고, 신분을 바꾸는 것도 허락해주고, 수고롭게 수시로 상처를 치료해주기도 했다.
윤조는 정한의 차가운 모습도 많이 보았지만, 그의 따뜻한 행동을 통해 습득한 믿음이 있었다. 적정선까지는 그가 감내해줄 것이라는 믿음. 제 처지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가 저를 막연히 이해해줄 것이라는 그런 믿음이 있었다. 물론 정한이 마음만 먹으면 자신은 언제든 갈아 끼워지는 대체품이라는 사실 역시도 인지하고 있다. 그건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이었다.
“가 봐.”
정리를 끝낸 정한의 손이 그의 말처럼 딱 떨어졌다. 윤조는 오토만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 정중하게 그에게 인사를 전하고 응접실을 벗어났다.
다용도실로 향하는 걸음을 서두르며 괜히 팔을 쓸어 보았다. 머물렀던 온기가 언제 있었냐는 듯 정한의 흔적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소매를 당겨 코끝에 대고 깊이 숨을 들이마셔 보았다. 온기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윤조의 반듯한 코끝이 수색하는 개처럼 소매 위를 누볐지만 결국 원하는 것은 찾지 못했다.
분명 외면은 알파가 맞는데. 어째 그는 흔적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페로몬 관리를 잘한다는 것은 엄청난 우성이거나, 혹은 페로몬이 존재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밖에 없었다.
윤조가 아는 알파는 자신을 과시하는 성향이 강한 족속이었다. 미자르에서 본 알파만 해도 그랬다. 미약한 페로몬이라도 존재하면 알파라고 으스댔다.
반면 정한은 어느 것 하나도 속하지 않았다. 확실한 외면과는 반대로 정체는 참 모호했다. 직업은 또 무엇인지. 만날 집에 있는 것을 봐서는 백수인 듯한데, 정한과 백수는 매치가 어려웠다. 내심 의사일 것이라고 짐작은 하지만, 왜 계속 집에 있는 건지, 결국 생각은 도돌이표를 돌다 백수로 결론이 났다.
어느새 다용도실에 다다랐다. 윤조는 최대한 정한의 독서에 방해되지 않도록 2층 계단을 오가며 옷을 정리했다. 욕실에 비치할 수건과 그의 옷을 챙겨 서둘러 옷 방에 넣고 마지막으로 욕실에 들어섰다.
아침의 흔적이 남은 욕실을 무심코 둘러보던 윤조는 물방울 몇이 맺혀 있는 샤워 부스를 발견하고 어깨를 움찔했다. 생활감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라 그런지 이런 흔적을 발견할 때마다 놀라고는 했다.
괜히 의심을 사기 전에 서둘러 욕실을 나오자 세상모르고 누워 잤던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늘 도망치기 바빴던 시선이 오늘따라 오래 머물렀다.
“…….”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정한이 이 저택에서 접하는 물건 중 그 어떤 것보다도 진하게 향이 밸 침구를 앞에 두고 윤조는 잠시 망설였다.
그가 알파이건 베타이건, 심지어 오메가이건 그건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워낙 그에 대해 아는 게 없어 궁금했다. 윤조는 어찌할까 잠시 망설이다가 귀를 기울여 바깥 동태를 살폈다.
바깥은 조용했다. 들리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자신이 다용도실로 간 것을 정한도 모르지 않으리라. 그러니 정한이 이 방을 찾는 건 나중 일일 테고, 제게는 무언으로 허락된 시간이 있었다.
결심이 섰다. 이렇게 지체할 시간에 벌써 확인을 했으면 됐을 텐데. 윤조는 침대로 성큼 다가가 허리를 숙여 침대 한가운데로 코를 박았다.
“흐읍….”
한껏 숨을 들이마셨지만 이렇다 할 향이 느껴지지 않았다. 제아무리 열성이라고는 해도 이렇게 느껴지는 게 없다니 황당할 지경이었다.
“베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기척 없던 문이 열리며 정한이 나타났다. 윤조는 그대로 굳어 기침을 내뱉었다.
누가 보아도 수상한 꼴이었다. 윤조는 서둘러 허리를 일으켜 정한을 맞이했다. 그가 제게 시선을 주며 안으로 걸음 했다. 윤조는 서둘러 변명을 만들었다.
“침구를, 갈 때가 된 것 같아서요.”
“어제 갈았잖아.”
정확한 지적에 윤조는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어제 침구를 갈 때 코를 박아 볼걸. 왜 하필 지금 해 볼 생각이 나서 이 사달을 만들었을까. 스스로를 원망하며 윤조는 예의 그 경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그랬네요. 방이 워낙 많아… 잠시 헷갈렸습니다.”
정한은 윤조의 변명을 의심하지 않고 창가로 향했다. 이럴 때는 빈약한 집사 경력이 도움이 되었다. 윤조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겨우 제 몸만 빠져나올 수 있을 만큼 문을 열고 나와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침착함을 가장했지만 온몸이 정신없이 뛰고 있었다. 달아오른 얼굴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다시는 이런 짓 말아야지. 다짐했지만, 의도와 다르게 자꾸만 사고를 치는 윤조였다.
* * *
팔을 급하게 움직여도 땅기지 않을 정도로 완벽히 회복한 윤조는 본격적으로 저택을 돌보기 시작했다. 첫눈에 반한 것처럼 마음에 쏙 든 저택을 살피는 일은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즐거운 일이었다.
정한의 저택은 윤조가 관리해야 할 것이 차고 넘쳤다. 돌아서면 일, 일, 일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종일 책과 하늘만 보고 사는 따분한 사장의 심기에 거슬리지 않게 시간을 보내려면 몸이 바쁜 게 최고였다.
오늘은 정원을 다듬기로 했다. 일정한 기간마다 정원사가 찾아오긴 했지만, 그 시일이 가까워진 모양인지 처음 보았던 정원과는 모습이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2층 창에서 정원을 살피며 오늘 해야 할 할당치를 대략 정했다. 어찌나 잎이 반짝이는지 잠시 가늠하는 것만으로도 눈이 아렸다. 죽고 싶어 환장한 사장이 있는 저택에 매일매일 생명을 뽐내는 식물이 그득하다니. 아이러니였다.
1층으로 내려와 바깥 창고에 들렀다. 열쇠로 문을 열자 둔탁한 공기가 느껴졌다. 봄이 언제였나 싶게, 여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윤조는 내부로 들어서며 가볍게 코밑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걸음마다 희미한 흙먼지가 피어났다. 정리만 되어 있지, 따로 관리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실내등을 켜고 벽면에 걸린 도구를 훑어보니 잘 벼린 낫을 비롯해 낙엽 갈퀴, 모종삽, 둘둘 말린 호스 따위가 걸려 있었다.
개중 전지가위를 찾아 쥔 윤조는 허공에 자르는 시늉을 해 보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길이와 무게가 상당해 오늘 목표치를 조금 줄일까 잠시 고민했으나, 일찍 포기하기 전에 우선 잘라보고 판단하기로 했다.
모서리가 구겨진 밀짚모자를 눌러 쓰고 장화를 신은 채 정원 입구에 다다랐다. 수평을 맞추어 잘라 놓은 정원 길에 웃자란 가지를 찾아 나름대로 모양을 내어 잘라 보았다. 날카로운 날에 잘려나가는 가지의 느낌이 제법 괜찮았다.
착. 착. 착. 착.
윤조는 홀린 듯 걸음을 옮기며 가지를 잘라나갔다. 하늘 위로 뜨거운 해가 더욱 맹렬하게 열기를 뿜어내었다.
꽃이 핀 관목 지대에 이르렀을 때였다. 윤조는 집중하느라 내내 굽히고 있던 등을 펴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이마 위로 송골송골 피어난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잠시 앉을 곳을 찾다가 작은 바윗돌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작업한 만큼 바닥에 떨어진 가지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저건 언제 다 치우나. 슬쩍 귀찮게 생각하며 손부채를 부치는데 눈앞으로 웽- 하고 무언가 지나갔다.
목에 두른 수건을 들어 눈 밑을 콕콕 찍으며 소리가 난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눈 부신 햇살 탓에 그 정체는 바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금 웽- 하며 또 지나갈 뿐.
윤조는 수건을 내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제야 실체가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더운 제 숨과 뜨거운 볕과 그 사이에서 한가로운 비행 중인 벌.
어째 정원에 사는 벌도 주인을 닮았을까.
괜히 정한을 욕하며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더 많은 땀을 흘리기 전에 일을 끝내고 싶었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잎이 시든 붉은 꽃의 목을 꺾었다. 거름이 되라고 관목 속으로 꽃을 던져 넣는데 한가로운 벌이 얼쩡거리며 달라붙었다.
윤조는 정한이 곧잘 그러듯 손을 훠이훠이 저으며 벌을 쫓아냈다. 하지만 벌은 마치 지치지 않고 치근덕거리는 한석처럼 들러붙어 웽웽거렸다.
한석이라고 하니 생각났다. 얼마 전 그에게 연락이 왔는데 대강 신분이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어디 출신이 되고 싶냐고 묻는 말에 윤조는 기차역에서 본 13구역의 도시명을 찬찬히 떠올리다 조금도 연이 없어 보이는 지역을 골랐다.
‘페크다요.’
‘하고많은 지역 중에 왜 페크다야?’
‘그냥요.’
‘거기 미자르만큼이나 가난한 거 알지?’
‘그래요?’
‘넌 도대체 아는 게 뭐야?’
한석의 말대로 윤조는 모르는 게 많았다. 그래도 이 귀찮은 벌을 멀리해야 하는 건 확실히 알았다. 윤조는 애써 벌을 무시하며 시든 꽃의 목을 톡, 톡, 땄다. 어째 이 일대에는 꽃이 이리도 시들어 있나 싶어 관목의 뿌리를 살피려 안을 들여다보았다.
시커먼 덩어리가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돌인가 싶어 툭 건드렸더니 덩어리가 웽웽- 하며 울기 시작했다.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지만 내면이 이를 강하게 부정했다. 아니라고 부정하며 슬그머니 덩어리에서 손을 떼는 순간, 덩어리에서 귀찮은 벌들이 맹렬히 쏟아졌다.
윤조는 깜짝 놀라 엎드린 몸을 급하게 펴 정원을 달렸다. 머리에 쓴 밀짚모자가 뒤로 넘어가 목에 줄만 걸려 대롱대롱 흔들렸다.
“으아아!!!”
소리 지르며 달리는 윤조를 보고 저택 곳곳에 배치되어 있던 보안 요원들이 달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벌이에요!! 벌!!!”
뒤늦게 윤조를 향해 달려드는 벌떼를 본 요원들이 뒷걸음질 치며 도망갔다. 윤조는 어디로 달려야 벌이 자신을 포기할지 알고 싶었다.
이대로 집으로 들어가는 건 집사 자격 실격 같았다. 혹은 재수 없게 정한이 벌에 쏘여 쇼크로 사망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어떻게든 저택은 피해야 했다. 주변을 살피며 달리는 윤조의 발에서 장화 한쪽이 벗겨졌다. 윤조는 나머지 장화도 벗어 던지고 흙길을 마구 달렸다.
거의 정원 한 바퀴를 돌았을 때, 문득 저택 테라스 쪽 수영장이 떠올랐다. 여름이 오기 전 그 넓은 공간을 청소하고 물을 채우자고 생각했는데, 미리 해둘 걸 그랬다. 일의 순서를 제대로 정하지 못한 뼈아픈 실수였다.
“헉… 헉….”
슬슬 목에 걸린 밀짚모자의 줄이 거슬리고 눈물이 찔끔 나다 못해 맺혔을 때였다. 창고로 달려간 보안 팀장이 비장한 얼굴로 윤조가 달리는 앞에 나타났다. 윤조는 그가 손에 든 바주카포 같은 정체 모를 기구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곳에서 스멀스멀 흰 연기가 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많은 확률로 그것이 제게 쏘아질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강렬한 냄새로 쏘아질 줄은 몰랐다. 윤조는 달리던 발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부와아아앙.
쏟아진 연기가 삽시간에 시야를 가렸다. 마치 테러를 당한 그날처럼.
호흡기를 두 손으로 틀어막은 채 연기가 가시길 기다리는 얼마간, 웽웽 울리는 벌 소리가 차츰 줄어들었다. 윤조는 잠시 손을 떼었다가 독한 연기에 기침을 연달아서 했다. 서서히 바람을 타고 시야가 맑아졌을 때, 관찰하듯 들여다보는 팀장의 얼굴이 보였다.
“인체에는 해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샤워하는 걸 권장해 드리겠습니다.”
기뻐해야 하는 걸까. 윤조는 제 할 일을 끝내고 돌아가는 팀장의 등에다가 연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팀장을 필두로 달려왔던 몇몇 요원들도 하나씩 자리로 돌아갔다. 명우가 쉬는 날이라 다행이었다. 그가 있었다면 한동안 큰 놀림감이 되었을 테다.
윤조는 기침으로 벌게진 얼굴을 쓸어 올리다 벌처럼 맹렬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어지간히 소란스러웠던 모양인지 정한이 나와 있었다.
“…….”
정한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현관 앞 포치 기둥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어 엉망진창인 윤조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무언의 힐난인가 싶어 윤조는 잠시 정한을 인정머리 없이 바라보다 허리 숙여 인사했다. 소란을 일으켜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숙인 고개를 따라서 내내 아프게 목을 조이던 밀짚모자가 훌러덩 앞으로 쏟아져 바닥에 떨어졌다. 참 도와주는 게 하나도 없다 싶어 속으로 혀를 차며 모자를 주워들었다. 흙이 묻은 것을 털어내고 고개를 들자 정한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괜히 민망해져 얼굴을 쓸었다.
“들어오시라는데요?”
아직 돌아가지 않은 요원 하나가 불쑥 말을 걸어왔다. 윤조는 요원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설마, 드디어 잘리는 건가….
“오라고 이렇게 손짓하셨습니다.”
“사장님이요…?”
“네. 도련님이요.”
요원이 정한을 흉내 내듯 다시 손가락을 까딱거려 보였다. 꼭 개를 부르는 듯한 손짓이었다.
“여긴 제가 치울 테니까 가 보세요.”
“죄송해요….”
“도련님 기다리시겠어요.”
윤조는 쥐고 있던 밀짚모자를 그에게 넘기고 서둘러 저택으로 향했다. 애써서 조용히 살았는데 다 소용없게 되었구나 싶어 마음이 울적했다.
혼나는 건 기본일 테고, 심하면 교체된 보안 요원처럼 잘릴지도 몰랐다. 혼도 내지 않고 잘라버리면 어쩌지. 차라리 혼이 나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래도 나가라고 하면 기회를 달라고 빌고 또 빌어야지. 비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큰 결심을 하고 문을 열었는데 막상 정한을 마주하고서는 입이 쏙 닫히고 말았다.
“벗어.”
정한의 입에서 언제 해고의 말이 떨어질까, 한껏 눈치를 보며 기다리고 있는데 정작 그의 입에서 떨어진 말은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윤조는 제 죄도 잊고 퍼뜩 고개를 들어 정한을 마주 보았다. 응접실 소파 근처에 서 있던 둘 사이로 침묵이 감돌았다.
“못 들었어? 벗으라고.”
잘못 들은 것이 아닌지, 정한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나. 윤조는 때에 맞지 않게 생각했다. 내심 마음 한구석에 염두에 두고 있던 사실이 떠오른 것이다. 다름 아닌 자신이 오메가 집사라는 사실. 한데 왜 이런 타이밍에 그가 제 몸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윤조는 두 팔을 들어 슬쩍 제 몸을 감싸 안았다.
“거기가 아파?”
“네?”
“귀가 들리지 않기라도 해?”
그랬으면 차라리 나았을까. 윤조는 제 몸을 더욱 끌어안으며 정한을 경계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물론 그는 근사한 외모에 돈도 많고, 단지 백수인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저보다는 뭐든 다 괜찮아 보였으니 저도 해 볼 만은 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죽으려고 환장한 사람이 아이를 만들고 싶어 한다면, 그건 곧 삶의 의지를 불태울 자세가 되었다는 것 아니겠는가. 윤조는 제 몸을 끌어안던 팔을 놓고 정한을 받아들이듯 그를 향해 두 팔을 벌려 보였다.
“상태가 심각한 모양이네.”
“그렇긴 해요. 땀도 많이 흘렸고, 약도 뒤집어써서 샤워부터 하고 싶은데,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정한은 제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성큼 다가와 머리칼을 붙잡아 들었다. 윤조는 질끈 눈을 감고 제 입술을 머금을 정한을 기다렸다. 그런데 정한은 윤조의 두피만 샅샅이 뒤져 볼 뿐이었다.
“뭐 하세요…?”
“벌에 쏘였나 봤어. 네 상태 봐서는 한둘이 아닌 것 같은데?”
“…다행히, 쏘이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그럴 리가.”
마치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보듯 정한이 시선을 내려 보았다. 윤조는 정한의 손에 머리칼이 붙들린 채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서 벗어 보라 하신 거예요?”
“그럼. 다른 이유가 있어야 해? 내가 서 집사 벗은 몸 봐서 뭐에 쓰겠어.”
그래. 그렇겠지. 보통 그럴 것이다. 방금까지 벌에 쫓기다 온 사람에게 벗어 보라고 함은 당연히 그런 이유겠지. 어쩌다 생각이 그리로 튀어버렸을까. 그의 말대로 상태가 말이 아닌 듯하니, 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버릇과 같은 미소를 지으며 윤조는 보란 듯이 셔츠 단추를 열어 보였다. 하나둘, 손끝에서 풀어지는 단추를 기다리지도 않고 정한이 등을 돌렸다. 이제 와 왜 등을 돌리나 했더니 응접실 소파에 앉는 게 아닌가. 이게 정말 확인이 맞는 걸까. 감상과 같은 자세를 취한 정한을 보며 윤조는 셔츠를 벗었다.
“돌아봐.”
꼭두각시처럼 정한의 말을 들은 즉시 몸을 돌렸다. 상체에는 이렇다 할 흔적이 없는지 그의 반응이 건조했다. 슬쩍 눈치를 보며 다시 몸을 돌리려는데 그가 명령했다.
“바지.”
“바지도요?”
“그럼.”
윤조는 얕은 한숨을 삼키며 허리춤을 더듬어 벨트를 풀고 바지를 벗어 내렸다. 새하얀 팬티가 민망하게 얼굴을 드러냈다.
“다 벗어야지.”
“괜찮을 거예요.”
“어떻게 확신하지? 방금 네가 횡설수설한 거 기억 못 해?”
기억해서 이러는 거였다. 그건 명백한 착각에 자의식 과잉일 뿐이었지, 벌에 쏘여 정신이 나간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정한의 말을 무시하고 있을 수는 없어 윤조는 한숨을 삼키며 팬티를 슬그머니 벗어 내렸다. 허벅지까지 내린 팬티가 다리를 타고 조금씩 밑으로 향했다.
“돌아봐.”
어쩜 저렇게 말을 쉽게 할까. 윤조는 땀을 쏟으며 천천히 발끝을 돌렸다.
“어때요?”
제가 보아도 어딘가에 쏘인 흔적은 없었다. 윤조는 대답 없는 정한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기댄 채 미술품을 감상하듯 느긋한 표정으로 윤조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하얗게 드러난 성기를.
윤조는 제 밑으로 집중된 정한의 시선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가 소파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왔을 때도, 어찌해야 할지 도통 몰랐다.
“어디 쏘인 데가 있어요?”
서 있는 윤조를 축으로 정한이 천천히 주위를 돌았다. 꼼꼼한 시선은 윤조의 팔을 들어 겨드랑이 안까지 살펴보았다. 특히 목덜미와 어깨 부근을 유심히 보았다.
“팔을 들고 뛰던데. 원래 버릇인가?”
“…아뇨, 벌을 쫓으려고요.”
“좋다고 더 달려들었겠네.”
“본능적인 행동이었어요. 무서웠다구요.”
“어째 총보다 벌을 더 무서워해?”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광장에서의 일이었다. 윤조는 마치 그날처럼 시야가 뿌옇게 변하는 것 같아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잘 보이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달렸잖아, 무작정. 죽을지도 모르는데.”
“벌도 죽을 수 있어요.”
“어지간히.”
“우습게 보지 마세요. 전 사장님이 벌에 쏘일까 봐 저택으로 오지도 못 했다구요.”
“내가 죽을까 봐 늘 걱정인가 보지?”
“네.”
그건 사실이었다. 그가 죽지 않아야 이곳에서 오래 살 수 있었으니까. 윤조는 정한을 살폈다. 금방이라도 저를 비꼴 말을 할 줄 알았던 그가 잠잠했다. 이 말에는 토를 달지 않는 것을 보아 그도 인정하는 바인 모양이다.
“여태 이 정원에서 벌집 건드린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찾아낸 사람으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
또다시 때를 잊고 말대답을 하고 말았다. 윤조는 대답 없는 정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느꼈는지 종아리로 가 있던 정한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멀쩡한 정신으로 그런단 말이야?”
그가 인지하는 서윤조라는 인간은 도대체 어떤 인간이란 말인가. 윤조는 때도 잊고 사장 앞에서 말대답한 자신을 멀쩡하다 평한 정한을 향해 또 묻고 말았다.
“제가 어땠는데요…?”
“말해줘?”
“정신이 나가 보이긴 하셨을 것 같아요.”
“잘 아네.”
한 바퀴를 다 돈 정한이 셔츠를 건네주었다. 윤조는 땀으로 얼룩진 셔츠를 받아 들고 그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정한은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은 채 무심히 윤조를 지나쳐 가버렸다. 이제는 그게 그의 인사라는 걸 윤조도 모르지 않았다.
홀로 남은 윤조는 찾아올 사람도 없는데 서둘러 팬티를 끌어 올리고 옷을 챙겨 입었다. 그러고는 2층 제 방 욕실로 가 말끔히 땀과 약을 씻어 내렸다. 채 얼마 지나지 않은 하루가 유난히도 길게 느껴졌다.
* * *
윤조는 당분간 정원에 걸음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벌이 날개를 가진 것과 괴롭힌 이를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다.
다음 날, 초소에서 받아온 우편물을 정한에게 전달하기 위해 저택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윤조는 벌의 복수를 받았다.
따끔하게 엉덩이를 찌르는 느낌이 지나치게 강렬한 탓에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급히 입을 틀어막았으나 소란을 막지는 못했다. 하필 명우가 출근한 날이라 그 호들갑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정한의 앞으로 온 편지를 손에 쥔 채 윤조는 발을 동동 굴렀다. 명우의 소란에 찾아온 팀장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윤조를 보았다.
“어제에 이어 또, 대단하십니다.”
“제가 또 벌집을 건든 건 아니에요. 얘가 와서 혼자 쏜 거예요. 정말입니다, 팀장님.”
“어제도 그랬어?”
애써 입단속을 했건만. 윤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명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가 어깨를 내어주며 초소 쪽으로 윤조를 이끌었다. 오른쪽 엉덩이가 화끈화끈한 게 제대로 쏘인 듯했다. 얼얼하다 못해 뚝 떨어질 듯 아릿한 느낌까지 났다.
“어디 좀 봐야겠습니다.”
말과 태도는 냉랭한 팀장이었지만 저를 버려 두지는 않았다. 이대로 저택으로 보내버리지도 않았다. 윤조는 그게 너무나 고맙기만 했다.
저택과 대문 사이의 거리가 상당했으니 제 비명쯤이야 정한에게 새가 우는 소리 정도로만 들렸겠거니, 애써 위로하며 팀장과 명우 앞에서 제 새하얀 엉덩이를 까 보였다.
“이거 침만 빼서는 안 될 것 같은데?”
“그럼 어떡해?”
“일단 침부터 빼고, 이후는 도련님께 보이십시오. 꼭입니다.”
“사장님한테요?”
“네. 그럼 조처를 해주실 겁니다.”
달리 도리가 없어 일단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막상 저택으로 돌아온 뒤, 윤조는 정한을 피해 다녔다. 그 대가는 머지않아 찾아왔다.
분명 팀장이 빼준 벌침을 두 눈으로 확인했는데도 불구하고 쏘인 자리가 얼얼했다. 어디 그것뿐일까. 도무지 엉덩이가 가려워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자칫 흉이라도 질까 싶어 손을 대지 않으려 베개를 꽉 끌어안은 채 이불에 엉덩이를 비볐다.
슥, 슥, 슥.
춤이라도 추듯 열심히 엉덩이를 흔들어대어도 잠시뿐. 가려움이 극도에 달해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고 싶어졌다. 아무래도 정한을 찾아가야 할 듯했다. 그런데 시간이 시간인지라, 지금 찾아갔다가는 목이 잘릴 것 같았다.
윤조는 베개를 안은 채 끙끙거렸다. 허공에 엉덩이를 흔들어대며 가려움을 쫓아보려 했지만, 그게 되었으면 이렇게 진땀을 흘리지는 않았을 거다.
“…어제 쏘인 거라 할까?”
어찌나 가려웠는지,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떠올랐다. 정한의 말이 맞았다. 사람이 이렇게 정신이 나가는 거구나. 그러니 평소에는 절대 하지 않을 행동도 서슴지 않게 되었다.
“…….”
정신을 차렸을 땐 정한의 방 앞이었다. 윤조는 여전히 베개를 안은 채 마지막 이성을 붙잡고 있었다. 가려운 엉덩이 한쪽을 움찔거리면서.
“…사장님.”
제 입을 틀어막고 싶은 마음과 더는 못 참겠다고 아우성치는 엉덩이를 사이에 두고 윤조는 갈등했다. 이대로 돌아가자고 발끝이 왼쪽으로 향하다가도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왔다.
“사장님, 저 서 집사… 읏, 서, 서 집사입니다.”
가려움이 결국 이성을 이겼다. 실낱처럼 남은 이성이 문을 두드리는 것만은 어떻게 막아주었다. 다행히 정한은 잠들지 않았는지 윤조가 울기 전에 나타났다. 조용히 열린 문 너머, 기가 막힌 것을 보는 듯한 표정의 정한과 눈을 마주했다.
“제정신이 아닌가 보네.”
“네, 사장님. 저 지금 제정신 아닙니다.”
“왜. 발정이라도 왔어?”
“아뇨, 그건… 어, 한 달 더 있어야 할 거예요.”
정한이 의심스러운 얼굴로 윤조를 보았다. 윤조는 그가 자신을 멀쩡한 상태라고 인식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윤조는 급히 자신을 부정했다.
“저 제정신 아닌 거 맞아요.”
윤조는 긴말보다는 제 상태를 보이는 게 현명하리라 판단했다. 은근한 외부 불빛과 창을 타고 들어온 달빛이 고작인 어스름한 복도. 정한이 두 손으로 열어낸 문 앞에서 윤조는 안고 있던 베개를 바닥에 내리고 잠옷 바지와 팬티를 동시에 내렸다. 그러고는 뒤로 돌아서서 정한이 보기 쉽게 허리를 숙여 엉덩이를 쳐들었다.
“간지러워 미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미 미친 건지도 모르겠어요.”
윤조는 고개를 옆으로 빼 정한의 대답을 기다렸다. 저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인데 정한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움찔거리는 윤조의 엉덩이를 말없이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사장님….”
“들어와.”
뒤늦게 출입을 허한 정한이 등을 돌린 채 방으로 들어갔다. 윤조는 냉큼 팬티와 잠옷 바지를 추켜올리고 베개를 안아 들었다. 등 뒤로 문이 철컥 닫혔다.
윤조는 정한이 가리킨 자리에 엎드려 누웠다.
“벗겨줘야 하나?”
“아뇨, 제가 벗겠습니다.”
무릎을 세우고 일어난 윤조는 정한의 심기에 거슬리지 않게 재빨리 움직였다. 이젠 언제라도 그의 앞에서는 서슴없이 엉덩이를 깔 수 있을 듯했다.
엉덩이만 발라당 내어놓고 누운 곳은 정한의 침대였다. 문득 열에 취해 그의 침대에서 잠들었던 때가 떠올랐다. 쥐어뜯어버리고 싶을 만큼 엉덩이가 가려운 시점에 지나친 감상이긴 했지만, 그때의 암담한 현실과는 전혀 다른 지금이 신기하고도 감사했다.
한참 윤조가 감상에 빠져 있을 때, 정한은 윤조의 엉덩이 부근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열감이 오른 환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가 손끝으로 가볍게 환부를 매만질 때마다 윤조는 가려움이 가시는 기분에 이불을 그러쥐며 엉덩이를 흔들지 않게 주의했다.
“침은 본인이 뺀 건가?”
“보안 팀장께서 빼주셨습니다.”
“보안 팀장이면… 내게 오라고 했을 텐데?”
“…예, 그렇게 말씀하시긴 했습니다.”
“듣고도 안 왔다? 왜.”
“어…. 귀찮으실 것 같아서요.”
“혼나기 싫었던 건 아니고?”
“…….”
“혹은 잘리기 싫었다든가.”
“어쩜 그렇게 잘 아세요?”
“몰라서 묻는 거라면 애석하고.”
“정말 모르니 묻는 거예요.”
윤조는 제 처지도 잊고 정한에게 물음을 쏟아냈다. 환부를 꼬집듯 집어 든 정한의 손길이 아니었다면 재차 물음을 던졌을지도 몰랐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 또한.
“찢어버릴까.”
무얼 찢는다는 걸까. 윤조는 혹 보안 팀장이 벌침을 덜 빼낸 건가 싶어 당황했다. 그래서 환부를 찢어 침을 빼내겠다는 말로밖에 해석이 안 되었다.
“도려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윤조는 정한의 결정이 두려워 조용히 입을 다문 채 그의 의중을 살폈다. 그는 침대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윤조의 엉덩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험악한 진단과는 달리 어째 얼굴은 본 적 없이 즐거워 보였다.
설마하니 사장에게 가학적인 취미가 있었을 줄이야. 윤조는 슬그머니 엉덩이를 뒤로 빼려 했으나 정한에게 붙들린 힘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기척에 돌아보는 시선 또한.
“다행히 손은 안 댄 것 같네.”
“네, 덧날까 봐요. 전 몸에 흉 지는 거 싫거든요.”
“근데 팔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
“그게 사람 목숨보다 중요하진 않잖아요. 저한텐 나름, 영광의 상처예요.”
“…….”
“근데 이거 사라진다면서요. 저한테 거짓말하신 거예요?”
“아니, 사라져. 네가 또 무모한 짓만 안 하면.”
윤조는 제 행동을 무모한 짓이라고 단정한 정한에게 문득 섭섭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는 죽고 싶어 환장한 사람이니 그러려니 했다. 그의 세계를 자신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 역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 테고. 그러니 피차 이해 못 할 마음을 담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정한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윤조는 얌전히 엉덩이를 내어놓은 채 그가 제 살을 째든, 도려내든, 어떻게 하든 간에 상처만 남지 않길 바랐다.
인간 구실을 할 수 있을 때부터 끊임없이 노동에 시달렸던 윤조였지만 삼촌은 늘 몸을 깨끗하게 유지하길 권했다. 상처가 나면 안 된다고. 오메가는 그래야 한다고.
그땐 그 말이 어찌나 감동적이던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삼촌은 삼촌이구나 싶어 눈물도 찔끔 났었다. 그게 버릇이 들어 상처가 나는 일에는 몸을 사리게 되긴 했지만, 정작 행동은 제가 봐도 덤벙거리는 편이었다. 그러니 삼촌이 저를 가리켜 덜 여문 놈이니 뭐니 했었나 보다, 고 윤조는 생각했다.
“바로 째시는 거예요?”
서랍장 앞에 선 정한이 한참 돌아오지 않아 물어보았다. 마취라도 하고 째주었으면 했다. 설마 도려내는 걸까. 아무리 엉덩이라고 해도 그건 너무 아플 것 같았다.
정한은 윤조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거의 빈손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돌아와서는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윤조는 이를 악물고 최대한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내일 할 일을 떠올렸다.
내일은 제 방부터 시작해 2층 모든 방과 그에 딸린 욕실 청소 상태를 점검할 생각이었다. 정기적으로 청소를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사용하지 않는 곳이 많고 매일 눈이 가지 않는 터라 사람 손길이 수시로 닿아야 했다. 꼼꼼히 30분씩 투자하면 하루가 후딱 가 있겠지.
“힘 빼.”
딴에는 열심히 생각했는데 그것이 소용없게도 정한이 멀쩡한 왼쪽 엉덩이를 찰싹 때리며 겁을 주었다. 윤조는 이제 제 엉덩이에 칼자국이 나겠구나 싶어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봉긋하던 엉덩이가 푹 꺼졌다.
“차가워요…. 뭐 바르시는 거예요?”
“마취 크림.”
“정말 째는 거예요?”
“째줄까?”
“도려내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요.”
정한은 대답이 없었다. 이 중요한 타이밍에 대답하지 않는 정한이 원망스러워 윤조는 고개를 돌려 보았다. 무시무시한 칼날이 달빛에 비칠 것이라 예상한 것과 다르게 정한은 훌쩍 침대에서 일어나 서랍장으로 돌아갔다.
“뭘 두고 오셨나 봐요?”
“옆에 둔 거 수시로 바르고, 그래도 차도 없으면 다시 와.”
“침은요?”
“발라줘?”
“아뇨. 벌침이요. 침이 안에 더 있는 거 아니에요?”
“변 팀장이 뺐다며.”
“아까 째느니 마느니 도려내니 마니 하셨잖아요.”
늘 그렇듯 정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평소의 무응답과는 질이 다른 무시였다. 회피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놀린 건가…? 놀렸구나.
윤조는 뒤늦게 정한의 뜻을 읽고 어이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그가 제게 장난을 친 게 신기하기도 했다.
“지금 저 놀리신 거예요?”
“그만 떠들고 나가.”
“사장님, 지금 저한테 장난치신 거 맞죠?”
“네 엉덩이 치우라고.”
서랍장에서 무언가를 정리하고 온 정한이 침대로 성큼 다가왔다. 윤조는 냉큼 팬티를 올려 입고 침대에서 튕겨 나왔다. 정한이 놓아둔 연고도 챙겼다.
“고맙습니다, 사장님.”
“약값은 월급에서 깔 거야.”
정한의 말에 윤조는 덜컥 마음이 내려앉았지만, 곧 웃으며 농담처럼 대꾸했다. 그의 장난을 계속 받아주고 싶었다.
“얼마든지 까셔도 되는데, 이건 직원 복지에 해당 안 되나요?”
정한이 질린 얼굴로 윤조를 보았다. 윤조는 멈춰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한이 제게 장난쳤다는 사실 하나에 들떠 계속해서 입을 놀렸다.
“아님, 이젠 다치지 말라는 걱정을 사장님 나름대로 표현하신 걸까요?”
“서 집사.”
“네, 사장님.”
“도대체 내 수면 시간을 얼마나 방해해야 만족하겠어?”
스탠드 불빛을 등진 정한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웠다. 윤조는 정한을 올려다보던 시선을 내려 급히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침구 갈아 놓고 가.”
욕실로 들어간 정한을 뒤로 한 채 윤조는 누운 자리가 선명한 침대 위를 보았다. 민망한 마음에 코끝을 매만졌다. 두 볼이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 * *
정한이 준 연고 덕분인지 엉덩이의 가려움은 차차 가라앉아 며칠 지나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도 없어졌다.
윤조는 그 밤, 정한에게 창피를 당하고서 평소보다도 더 정한을 피해 다녔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이 넓은 저택에 단 두 사람만 사는데 어찌나 자주 마주치는지. 피하면 피할수록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정한과 마주쳤다.
정한은 언제나 그랬듯 윤조가 없는 듯이 행동했고, 윤조는 그의 심기를 거스를까 숨죽여 자리를 피하느라 겨우 점심시간인데도 등이 다 뻐근했다.
“이렇겐 못 살아….”
혼자만 느끼는 긴장이라니. 눈치라니. 억울했지만 그게 제 팔자고 운명이었다. 그 밤에 진 죄가 있으니 이 정도의 아픔은 달게 받아야 했다. 잘리지 않은 게 어디인가.
문득 반항심이 들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교체된 보안 요원을 떠올리며 윤조는 마음을 다스렸다. 이런 직장이 또 어디 있을까. 이미 삼촌에게는 죽은 조카이니 이젠 돌아갈 고향도 없었다.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고. 이제 제 고향은 두베였다. 이 저택에 사는 한 검은 머리가 될 일은 없어야 했다.
점심을 먹고 잠시 쉰 후에 수영장으로 향했다. 본격적인 여름이 찾아오기 전에 청소를 끝내야 했다. 아마도 저 말고는 아무도 쓰지 않을 것 같지만, 저만 써도 괜찮았다. 그 정도 수고로움이야 이 윤택한 환경을 누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수영장에 다다르고 보니 덜컥 겁이 났다. 이건 도무지 혼자서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틀은 꼬박 투자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사흘. 어쩌면…. 더는 생각이 깊어져 시기를 놓치기 전에 서두르는 게 좋을 듯했다. 윤조는 매일 그랬던 것처럼 바쁘게 움직였다.
바닥에 쌓인 낙엽과 쓰레기 따위를 쓸고 닦는 동안 의문이 생겼다. 일부러 버려 둔 것 같은 이 수영장을 저 하나를 위해 청소해도 되는 걸까? 실컷 청소하고 물을 다 받았는데 이게 무슨 짓이냐고 혼을 내는 건 아닐까? 약값도 까겠다고 했는데 수영장 물값도 까겠다는 건 또 아닐지. 분명 농담이겠지만 윤조는 정한에게 그 말을 들으면 그 밤처럼 움츠러들 것만 같았다.
이게 다 삼촌 때문이었다. 틈만 나면 돈을 달라 하고, 뭐만 하면 내놓으라고 닦달하는 삼촌 때문에, 농담도 농담으로 듣지 못했다.
윤조는 고개를 들어 정한이 이따금 사용하는 선베드를 보았다. 그 주위는 저택 주인이 사용하고 있었기에 깨끗했다. 다만 그 앞의 풍경이 참혹할 뿐이었지.
그래. 수영장 꼴이 너무 사나워서 그랬다고 하자. 감히 사장님 보시는 곳이 더러워서야 될 일인가. 이 어이없는 집사가 눈치까지 없어 죄송할 따름이라 하면 되겠다.
애써 합리화를 한 후, 계속해서 수영장 청소를 이어 나갔다. 독한 세제를 사용할 때는 마스크를 끼고 벽을 닦을 때는 몇 번 미끄러져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르렀을 때, 물을 받아도 될 만큼 청소가 끝났다. 윤조는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어 두 팔로 자신을 안고 등을 다독였다. 당분간 몸살로 수영은 꿈도 못 꾸겠지만 어쨌든 조만간 즐길 수 있었으니 그만이었다.
올여름, 서 집사를 찾으려면 수영장에 가면 된다고 소문이 날 만큼 놀아줘야지. 잔뜩 놀 생각으로 취해 있던 윤조는 위에서 바닥으로 끌어온 호스를 몽땅 치우고 배수구도 확인한 뒤에 물이 나올 것으로 추측되는 밸브를 향해 다가갔다.
수영장 벽면 중간쯤에 자리한 밸브의 안쪽도 쓱싹쓱싹 닦아둔 참이라 해가 지고 어둠이 몰려온 밤에도 반짝거려 보였다. 이 노력의 결실을 이제야 보는구나. 윤조는 제 키 높이 정도에 있는 밸브를 아무런 의심 없이 힘껏 돌렸다.
쿠구구구궁.
“어….”
천둥 같은 소리를 끝으로 수영장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윤조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잠잠한 밸브를 다시 돌리려 손을 뻗었다. 채 밸브에 손이 닿기 전, 거대한 물줄기가 사방에서 쏟아져 나왔다. 윤조는 정면에서 쏘아진 물살에 얼굴을 맞고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억…!”
무엇 때문에 그리 화가 났는지, 늘 몸에 상처 내지 말라 주의하던 삼촌에게 처음 주먹으로 맞았을 때보다도 더 아팠다. 윤조는 바닥에 넘어진 채 고개를 내저으며 정신을 다잡았다.
어지러운 머리가 겨우 진정된 뒤에야 몸을 일으켰다. 얼얼한 얼굴을 매만지며 시야를 확보하려는데 코를 너무 세게 맞았는지 눈물이 나서 눈앞이 구별이 안 되었다.
그 와중에 물살은 어찌나 거센지 벌써 이 너른 수영장에 발목까지 들어찼다. 윤조는 코를 붙잡고 사다리가 있는 방향을 찾아 몸을 돌렸다. 겨우 구석까지 걸어와 사다리를 붙드는데 손이 온통 붉었다.
코피였다.
애써 청소한 것이 아깝지 않게 윤조는 서둘러 사다리를 올라갔다. 코를 훌쩍거릴 때마다 피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왔다. 괜히 서러운 기분이 들었다.
“사장님….”
막 사다리를 다 올라왔을 때, 윤조는 심장이 멎는 듯했다. 하필 또 이렇게 마주치나 싶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무엇보다 윤조는 제 모습이 얼마나 그에게 꼴사나워 보일까 싶어 아찔했다.
등 뒤로는 쏟아지는 물소리를, 앞으로는 조용한 독서를 즐기려 손에 책을 쥔 정한을 두고 윤조는 갈팡질팡했다. 인중을 타고 도톰한 입술을 적시는 핏물도 그랬다. 방울져 떨어지는 것은 아무리 손으로 닦아 올려도 번지고 또 번지기만 할 뿐이었다.
책을 옆에 낀 정한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윤조의 코를 틀어막았다. 윤조는 자신이 울고 있는 것도 뒤늦게 알았다. 젖은 턱을 타고 선홍색 핏물이 고였다가 떨어졌다.
“너, 네가 사람 귀찮게 하는 거 알지?”
대답하지 말라는 듯 윤조의 뒤통수를 누르는 손과 코밑을 받치는 손에 힘이 더해졌다. 윤조는 꼼짝없이 정한의 두 손에 갇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섭섭해?”
초능력이라도 가진 걸까. 정한은 윤조가 느낀 감정을 정확히 읽어 내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그를 위해 숨죽이고 눈치 보며 지낸 시간이 몇 번의 사고를 통해 폄하되는 게 섭섭했던 찰나였다.
“넌 네가 내 눈치 보고 산다 생각할 것 같은데, 그거 아니야. 섭섭한 거. 그거 집사로 일하면서 느낄 감정의 카테고리가 아닐 텐데?”
“…….”
“넌 그냥 네 믿는 구석 하나 붙잡고 떼쓰는 거야.”
“제가, …뭘 믿는데요?”
“나.”
놀라운 대답이었지만 놀랍지 않기도 했다. 윤조는 저를 다 꿰고 있는 듯한 정한의 눈동자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제 등 뒤로 어느새 넘실대기 시작한 푸른 수영장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왈칵 쏟아질 듯한 제 마음과 닮아 있었다.
“내가 왜 널 데리고 있겠어.”
“…….”
“너도 알 텐데. 네가 얼마나 형편없는 집사인지.”
“…예, 알아요.”
“넌 단지 내 아버지 사람이 아니라서 내가 데리고 있는 거야. 그거 하나 때문에 네가 여기 있는 거라고.”
“…….”
“너 엄청 귀찮아.”
“맞아요, 저 엄청 귀찮으실 거예요.”
정한이 어이없는 얼굴로 웃었다. 비웃는 게 역력한 시선이 정말 귀찮다는 듯 윤조의 얼굴에서 떨어졌다. 윤조는 저를 놓아두고 가는 정한의 뒤를 따라갔다. 어느새 코피는 멎은 듯했다.
윤조는 피로 젖은 손수건을 손에 쥔 채 정한과 멀찍이 떨어져 섰다. 정한이 테라스 근처의 단지함을 열고 버튼을 누르자 물이 멎었다. 어이없을 만큼 간단한 조작에 머리가 핑 도는 듯했다.
정한은 그대로 윤조를 지나쳐 선베드에 몸을 기댔다. 그러고는 늘 그렇듯 책을 펼쳐 들었다. 윤조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정한의 옆에 있는 선베드에 엉덩이를 대고 걸터앉았다.
무시할 수 없었던 모양인지 정한이 책을 펼쳐 든 채 윤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윤조는 어깨를 움찔하며 손수건을 고쳐 잡았다.
“맞아요, 저 사장님 믿고 그랬어요.”
“아는 얘길 왜 또 반복하는 건데?”
“근데 그거 제 탓 아니에요. 사장님이 저 믿게 했잖아요.”
정한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윤조를 보았다. 금방이라도 책을 집어 던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전에 없던 감정이 그의 얼굴에서 읽혔다. 하지만 윤조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를 믿은 것은 맞지만 믿어서 떼를 쓴 건 아니었다. 믿는 구석 하나 붙잡고 멋대로 행동한 것도 절대 아니었다. 그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 눈치를 봤다. 너무 봐서 등이 다 뻐근할 정도였다.
그에게 떼를 쓸 수 있었다면 벌써 그에게 물어봤을 거다. 수영장 물을 어떻게 간편하게 받을 수 있는지. 이렇게 코피 쏟아 가며 멍청한 짓을 하지 않았을 거다. 그 물음 하나도 어렵게 만든 사람이 누군데, 지금 떼를 쓰고 있다고 혼내는 건지.
“사장님은 스스로 죽고 싶을지는 몰라도, 다른 사람이 죽는 건 두고 보지 않았잖아요. 저 구해주셨잖아요. 저 계속 무시하셨지만 결국 거기서 제 신분 보장해주고 여기서 일시켜주신 것도 다 사장님이에요. 그런 사람을 당연히 믿을 수밖에요.”
정한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윤조는 자신이 그를 다시는 보기 힘들 정도로 꼴사납게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의 말대로 섭섭함에 미쳐서 멈출 수가 없었다. 억울하기는 또 왜 이렇게 억울한지. 코피가 다시 쏟아지는 듯했다.
“제가 그동안 친… 사고는, 제가 모자란 탓이에요. 아시잖아요, 저 자격 미달인 거. 근데 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어요. 결과가 좋지 않았던 것뿐이었어요.”
“기가 막히네.”
“…그래도 어쩌겠어요. 이미 친 사고인데. 밑거름 삼아서 열심히 성장할게요. 조금만, 지켜봐주세요.”
“귀찮아. 알아서 살아. 내가 네 성장을 왜 지켜봐야 해?”
“알았어요, 귀찮게 안 할게요. 그럼 보지 마세요. 제가 사고 쳐도 구해주지 말고 죽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두세요.”
탁.
정한이 책을 덮었다. 윤조는 어깨를 움찔하며 손수건으로 코밑을 쓱 닦았다. 몸을 훑고 지나는 바람이 정한의 눈빛 때문인지 서늘하게 느껴졌다. 가볍게 턱을 떤 윤조는 저를 응시하는 정한과 눈을 마주한 채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집사가 아니라 개 한 마리가 집에 들어온 것 같아.”
“알아서 밥 먹고, 똥오줌 혼자 가리는 개요?”
“그래.”
“그럼 저를 개라고 생각하세요. 그렇지 않아도, 저… 여기서 집사이자 개인 건 맞잖아요. 그럼 좀 더 너그럽게… 저를 내버려 두게 되지 않을까요?”
“너 지금 나한테 너 귀찮게 하지 말라는 소리 하는 거야?”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책을 옆으로 치우며 정한이 선베드에 완전히 누웠다. 윤조는 그가 바라보고 있는 하늘을 같이 올려다봤다. 모양도 선명한 반달이었다.
“너 귀찮아.”
“네. 저도 알아요.”
“정말 개새끼가 따로 없어.”
“…….”
“내가 혹을 떼려다 붙인 것 같긴 한데.”
“…….”
“나쁘지 않아.”
윤조는 킁, 하고 코를 먹으며 정한을 보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밤하늘에 머물러 있었다.
“나쁘지 않다고.”
이렇게 잔뜩 혼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엉망진창인 집사가 그에게는 내칠 만큼은 아니라는 뜻 같아 기뻤다. 그의 ‘나쁘지 않다.’는 말은 곧 괜찮다는 말로도 여겨졌다.
“듣고 있어 서 집사?”
“네, 듣고 있어요.”
“그럼 꼬리라도 흔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엉덩이 흔들어 드릴까요?”
정한이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윤조는 홀린 듯 정한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다 결심하고서 일어났다. 정한이 급히 말렸지만, 윤조는 그의 앞에서 엉덩이를 보이고 실룩샐룩 흔들어 보였다.
“치워.”
늘 말만 하던 사장이 어쩐 일로 행동을 먼저 했다. 윤조는 정확히 벌침이 쏘인 오른쪽 엉덩이를 가격당해 그대로 수영장으로 밀리고 말았다.
“으아아악!”
풍덩!
열심히 채워 놓은 물밑으로 가라앉으면서도 윤조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정한이 치료 목적 이외에 몸에 손을 댈 만큼 친밀해진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또한 정한의 시점에서는 건방지게, 혹은 어이없게 볼 듯하지만.
윤조는 꼬르르륵 잠긴 아래에서 급히 수면을 향해 발을 굴렀다. 곧 닿을 듯한 수면은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았다. 점점 숨이 막혀 두려움에 심장 박동 소리까지 들릴 정도가 되었을 때, 윤조는 겨우 수면을 뚫고 올라왔다.
“사장니임!!”
“우흡, 살려주세요!!”
발을 젓는데 왜 자꾸 몸이 가라앉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윤조는 팔을 뻗으며 정한에게 도움을 청했다. 물에 잠겼다가 또 올라왔다가, 반복하며 마신 물의 양이 상당했고, 이제는 방향도 잃어 정한이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장난 그만하고 나와.”
“저, 흐읍, 장난, 아닌데!!!”
청소할 때는 보지 못했던 물귀신이 사는 것도 아닌데 발목을 누군가 잡아당기듯 자꾸만 몸이 가라앉았다. 그런 윤조의 상태가 진실하여 보였는지, 혹은 이 시끄러운 장난을 멈추려 한 건지 정한이 친히 몸을 일으켜 윤조의 손을 잡고서 수영장 밖으로 들어 올렸다.
윤조는 연신 기침을 하며 물을 뱉어냈다. 바닥에 몸을 엎드린 채 모자란 숨을 들이마시며 정한에게는 감사를 표했다. 따지고 보면 그가 저를 이렇게 만든 것인데 어찌 되었든 지금은 모든 게 감사했다.
“저, 몰랐는데…. 허읍, 수영을 못하나 봐요….”
겨우 정신이 들어 상체를 일으키자 황당하게 보는 정한이 보였다. 윤조는 그의 머리 뒤로 뜬 달을 보며 얼굴을 닦아 내었다. 정한의 눈가가 슬쩍 일그러졌다.
“해 본 적 없어?”
“네.”
“그럼 물을 왜 받은 거야?”
“사장님 독서 하시는데, 으흡, 너무 삭막하잖아요, 흑, 풍경이.”
딸꾹질이 났다. 금방이라도 열대야가 찾아올 것 같던 더위는 온데간데없이 윤조의 몸은 추위로 덜덜 떨렸다. 보다 못했는지 정한이 윤조의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너 놀려고 받은 거 아니야?”
“어떻게 그렇게, 윽, 절 잘 아세요?”
정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윤조는 거의 정한에게 끌려가듯 저택으로 향했다. 채 안으로 발을 들이기 전에 정한의 명령으로 그곳에서 홀딱 옷을 벗어야 했다. 정말이지 물에 빠진 개 꼴이다 싶어 윤조는 그가 건네주는 샤워 타월을 받으며 혼자 웃었다.
왜 웃느냐는 듯한 얼굴로 정한이 바라보았다. 윤조는 샤워 타월로 얼굴을 가리며 웃음을 감추었다. 청결한 타월의 보드라운 감촉과 따뜻한 향이 기분 좋았다.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보고 있는 정한의 시선도.
“사장님 저 괜찮아요.”
“그래 보여.”
“그럼 책 읽으세요.”
“바닥.”
“네, 다 치워둘게요.”
윤조는 정한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려 저택 안으로 발을 들였다. 몸에 두르고 있던 샤워 타월을 당겨 머리를 털었다. 정한과 단둘만 있는 저택이 그 어느 때보다도 마음에 드는 순간이었다.
* * *
활자가 벌레처럼 기어 다녔다. 정한은 눈이 피로한 건가 해서 책을 덮고 눈을 감아보았지만 울렁거리는 느낌은 가시지 않았다.
최근 들어 이따금 누군가 머릿속을 헤집는 것처럼 불편함을 느낄 때가 있었다. 3개월 차가 고비라더니 2개월 차가 넘은 지금, 시간을 더해 그 증상이 뚜렷해졌다.
정한은 내심 증상이 극에 달하는 3개월쯤에도 버틸 만하면 이대로 살아도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다만 복직은 어려울 테다. 저 역시도 이대로라면 복직은 어렵다고 여겼다. 자신을 죽이려던 손으로 무엇을 구할 수 있을까. 그런 제게 생을 맡기는 이가 느낄 불안 역시,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아버지 주흠의 태도는 여전했다. 저택을 나가고 저와 거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근본은 달라지지 않았다. 정한 역시 딱히 제 아버지가 어떤 액션을 취해주길 바라지 않았다. 다만 그를 대할 때마다 치미는 미련한 충동 때문에 괴로울 뿐이었다.
주로 깊은 밤, 잠들지 못해 서재나 방을 서성일 때, 미련한 생각이 움텄다. 한 번은 당신을 죽일까 봐 저를 죽였고, 한 번은 당신을 만나고 싶지 않아 사고로 죽기를 기다렸으니, 이제는 어찌해야 할까.
“헙!!!”
조금도 생산적이지 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정한의 신경을 건드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한은 제 방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2층 복도 끝 창이 비스듬히 열려 있는 게 보였다. 평소라면 듣지 못했겠지만, 창이 열린 탓에 소음이 들린 모양이다.
정한은 창을 닫으려 복도 끝으로 다가갔다. 소리가 난 근원지가 어디이고 누구인지, 보지 않아도 알았지만, 시선을 내려 그 행태가 어떤지 무심코 살피고 말았다.
“허업!!!”
소음의 정체는 제 개 같은 집사가 수영장에 몸을 던지는 소리였다. 윤조는 사방으로 튀는 물은 아랑곳하지 않고 튜브를 잔뜩 던져 놓은 수영장 한가운데로 뛰어들기를 반복했다.
저게 뭐가 재미있다는 건지. 쉬지도 않고 반복해대는 꼴을 보고 있자니 제 몸이 피로해지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정한은 윤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제 형편없는 집사는 제대로 하는 것도 없으면서 늘 바빴다. 하루의 일과를 정해 놓고, 오후 8시가 되면 스스로 자유 시간을 가졌다.
나쁘지 않았다. 오로지 놀려고 저 넓은 수영장을 청소하고 물을 받았어도, 정한은 그가 제시간을 어떻게 쓰든 관심 없었다. 마음대로 살라는 말은 진심이었다.
응당 의심스러울 말을 철석같이 믿고 또 따르는 윤조가 정한은 조금 신기했다. 그가 아버지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 생각 없이 순진한 면모가 그를 이곳에 있게 한 이유이기도 했다.
정한은 이따금 그를 이렇게 가만히 지켜볼 때가 있었다. 저 생각 없이 사는 집사를 보고 있으면 불편한 머릿속도 그의 머리와 동기화가 되기라도 하는지 깨끗해졌다.
“아훕….”
튜브를 놓쳐 다시 가라앉다가 겨우 올라와 붙잡고서는 헉헉대는 꼴이 정말이지 개가 따로 없었다. 그런데 살려고 아등바등하는 모습이, 우습게 보이지는 않았다. 때때로 재미있게도 여겨졌다.
정한은 한참 창가에 서서 퇴근 후 개인 시간 보내기 바쁜 윤조를 관찰했다. 종일 읽은 책보다도 흥미로워 보이는 건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다. 그저 물에 빠지고, 기어 올라와 다시 몸을 던지는 것뿐인데.
제 개 같은 집사 서윤조의 기행은 기대하지 않아도 알아서 정한의 앞에서 벌어지고는 했다.
윤조는 매일 아침 구불구불한 갈색 머리칼을 단정히 넘기고서 나타났다. 하지만 오후쯤 되면 어정쩡하게 긴 머리가 앞으로 넘어와 자주 시야를 가렸다.
그때마다 윤조는 귀 뒤로 머리를 넘겼는데, 정한은 응접실 소파에 앉아 윤조가 바닥 청소를 하며 머리 넘기는 모습을 자주 관찰했다.
윤조는 작은 얼굴에 맞게 귀도 작았다. 귓바퀴가 유난히도 동그란 편이었는데, 피부가 흰 탓인지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슬쩍 접히는 게 매우 말랑말랑해 보였다. 어째 보고 있으면 이가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오오….”
아는지 모르겠지만, 윤조는 혼잣말이 많았다. 자주 콧노래도 불렀다. 딴에는 조용히 있는 줄 아는데, 전혀 아니었다. 자그마한 몸이 어찌나 부산스럽게 움직이는지 모르고 싶어도 알게 되는 존재감이었다. 꼭 알아 달라고 시위라도 하듯이.
속을 썩이던 오염이 지워졌는지 홀로 감탄하고는 옆에 펼쳐 둔 책자를 대단하다는 듯 보았다. 무릎을 바닥에 댄 채 연신 감탄하던 윤조가 시선을 느꼈는지 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가 좀 시끄러웠나요?”
정한은 시선을 거두며 대답을 거부했다. 말해 봐야 입만 아플 것이다. 이미 그가 중얼거리고 흥얼거리는 말과 노래에는 적응한 참이었다. 아무리 책에 집중해도 떠나지 않던 둔통과 머릿속을 떠도는 벌레가 그의 말과 노래만 들으면 조금 잠잠해졌다.
“혹시 말이야.”
“네, 사장님.”
부름에 벌떡 일어나 다가온 윤조의 무릎에 먼지가 묻어 있었다. 정한은 의자에 기댄 채 윤조의 두 무릎을 보며 자신이 무심코 꺼내려던 말을 애써 집어삼켰다.
그의 말과 노래가 주문일 리 없었다. 머리에 진짜 벌레가 사는 건 아닐 테니까. 읽고 있던 책에 샤머니즘이 나오던 차라 떠오른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사장님?”
“아냐. 하던 일 해.”
“시키실 일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정한은 조금도 기대감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귀찮아서 한 행동이었는데, 윤조는 제게 신뢰가 생긴 줄 알고 기뻐했다.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 기뻐하고 낙담하는 에너지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정한은 슬쩍 고개를 내젓다가 그 에너지의 근원을 알 것 같아 소리 없는 탄성을 내었다.
서윤조. 이 저택의 개. 아니, 이 저택의 집사. 그는 대식가였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일어난 게 아니라 자지 못해 찾은 주방에서 담당자와 마주쳤다. 난감한 기색을 애써 감춘 담당자를 보며 정한은 불쾌해졌다.
이 집을 가꾸고 지키는 이들은 모두 아버지의 수족이었다. 저를 마크하던 집사를 제외하고, 그들에게 자신은 아버지나 다름없는지 유난히도 굽실거렸다. 정한은 그들의 인사를 좌지우지할 만큼의 관심이 없는 것도 모자라, 하루아침에 담당자의 얼굴이 바뀌어도 알아보지 못하였는데 말이다.
쌀을 씻던 중이었는지 담당자의 손등에 젖은 쌀알이 붙어 있었다. 정한은 담당자가 일하기 편하도록 제 용건을 속히 해결하고 주방을 나서려다 개수대 그릇에 담긴 쌀의 양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휴가 갑니까.’
‘네?’
담당자는 중년의 남성이었는데 손이 두툼하고 컸다. 그렇다고 해도 저는 먹지도 않는 쌀이건만 윤조 혼자서 저걸 다 먹는다고 생각하니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듯해서.’
‘집사님이 요청하셨는데, 혹 밥이 남았습니까?’
‘그건 내가 알 수 없는데.’
‘아…. 남는 밥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
저 많은 양이 오로지 제 집사의 배에 들어가는 것을 알아챈 정한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반찬은.’
‘반찬은….’
‘전과 비교해서 어떱니까.’
‘반찬도 전보다 훨씬 늘었습니다. 물론 남기는 것도 없고요. 혹, 양을 좀… 줄일까요?’
‘아니. 그대로 하세요. 더 넉넉히 해도 되고.’
그렇게 먹어도 몸이 마른 것을 보면 그만한 에너지를 쓰는 것일 테다. 정한은 윤조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을 떠올리며 모든 것을 이해했다.
최근에는 어떤가. 수영장에 물을 받은 이후로는 야식까지 추가되었다.
며칠 전, 정한은 채 물기가 덜 마른 머리로 주방 식탁에 앉아 냉장고를 뒤져 재료만 섭취하는 윤조를 목격했다. 오독오독 씹어 먹는 당근과 오이 소리를 들은 당시엔 그의 말랑한 귀를 봤을 때처럼 이가 간지러워졌다.
정한이 온 줄도 모르고 먹는 데 열중하던 윤조가 피곤한지 하품을 해대었다. 저렇게까지 놀 이유가 뭐지. 저렇게 배를 채워 가며 왜 눈을 뜨고 있는 걸까. 이해하기 어려운 한편으로 저 역시 그렇게 무언가에 몰두했던 과거가 있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늘 시선으로 저를 내버려 두지 않던 이전의 집사와는 달리, 윤조는 그의 존재 자체로 저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정한은 어쩔 수 없이 같이 지내는 윤조를 통해 제 많은 과거를 돌아보고, 또 현재를 직시하게 되었다. 그는 조금도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사장님. 다음 월급도 사장님이 가지고 있어주세요.’
한석에게 세탁된 신분을 받았으면서도 윤조는 불안해 보였다. 계좌 개설이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건지, 계약금과 첫 월급도 모두 저에게 맡겼다. 그가 소지하는 것은 약간의 용돈 정도뿐.
‘평생 그렇게 살아와서 이게 더 편해요.’
제게도 나름의 경력이 있다며, 증거는 불타버렸지만 열심히 살아왔던 시간을 읊어대던 윤조의 말로 미루어 보아 미자르에서의 삶이 그리 녹록지 않은 것은 짐작이 갔다.
모르는 것이 많은 것도, 그 순진해 빠진 마음씨도, 모두 이해 갈 만큼 그는 삼촌이라는 사람의 감시하에 지낸 듯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반대로 살아야 할 텐데, 윤조는 일정 수준의 삶을 유지하길 바랐다. 치열하고 또 바쁘게 지냈던 제 지난 시간과 반대로 사는 저와는 다르게.
윤조가 오후 내내 얼룩을 지워낸 카펫을 내려다보다 정한은 주방으로 향했다. 그 시끄럽고 부산스러운 집사도 잠든 밤. 정한은 이가 가려워 견딜 수 없어 방에서 나온 참이었다.
냉장고 문을 열자 윤조가 수영 후에 자주 먹는 스틱형의 채소가 있었다. 썰어 놓은 모양을 봐서는 주방 담당자가 아닌 윤조가 직접 칼질한 듯했다.
정한은 당근 하나를 집어 들고 씹어 보았다. 마비된 것만 같았던 혀에서 당근의 단맛이 슬그머니 퍼지는 느낌이 났다.
오독, 오독.
잇새로 씹히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찌뿌듯하게 남아 있던 둔통도 가시는 듯했다. 정한은 냉장고의 소음이 이는 것도 내버려 두고 문을 연 채 당근을 씹었다.
“토끼야 뭐야.”
수영 후라면 열량이 좀 있는 것으로 먹을 것이지. 정한은 오이로 손을 뻗으며 중얼거렸다. 오래 씹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채소의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정말, 그의 존재 그대로 나쁘지 않아서,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