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여느 아침보다도 눈 부신 날이었다. 윤조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을 열고 환기를 시켰다. 요 며칠은 내내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았다.
‘나쁘지 않아.’
그 말이 무어라고 자꾸 기분을 들뜨게 했다. 비록 개 취급을 받았지만, 지금으로서는 집사라는 이름으로 어깨가 무거운 것보다야 개처럼 구는 게 더 나은 듯도 했다.
긴장이 줄어들어 발뒤꿈치를 의식하지 않게 되었다. 숨도 참지 않았고, 벽에 붙지도 않았다. 더는 정한이 있는 공간이 어렵지 않게 느껴졌다.
정한에게 고르지 않은 인사말을 전할 수 있었다. 그는 특별한 대답은 하지 않았어도 물끄러미 바라봐주기는 했다. 그게 무시가 아니라는 걸 이제는 잘 알았다.
단장을 끝내고 방을 나선 윤조는 복도 끝에 있는 정한을 발견했다. 저 멀리 선 정한을 부를 수는 없어서 서재로 들어가버리는 등을 바라만 보았다. 그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걸음을 떼었다.
오늘 아침은 무얼까. 달콤한 기대를 하며 막 나타난 계단으로 발을 내리는데, 1층 창으로 그림자가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윤조는 목을 빼고 귀를 기울였다.
현관을 기준으로 분주한 발소리가 잦아드는 게 느껴졌다. 이 시간에 손님이 찾아왔나 싶어 윤조는 걸음을 서둘렀다. 여태껏 제대로 된 손님맞이를 해 본 적이 없어 아쉬웠던 차였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 분주했던 발소리의 증거처럼 상자가 잔뜩 쌓여 있었다. 윤조는 마침 상자를 내려놓고 허리를 펴는 보안 팀장과 눈을 마주했다.
“팀장님, 이게 다 뭐예요?”
“뭐긴요. 오늘 도련님 생신이지 않습니까.”
눈치 없다는 얼굴로 윤조를 내려다본 팀장이 얼빠진 윤조를 확인하고는 한심해하는 표정으로 바꾸었다. 집사가 되어 주인 생일도 모르냐는 눈짓이었다. 윤조는 팀장이 품에서 꺼내 든 생일 카드 뭉치를 받아 들고 헛기침했다. 민망한 기분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올해는 유난히도 많습니다. 아무래도 그 일이 있고 난 뒤라 그런 모양입니다.”
말을 해도 알아들을 수 없고, 차마 물을 수도 없는 것을 정확히 알고서 하는 말이었다. 윤조는 가볍게 입술을 씹으며 애써 웃어 보였다. 아는 척 해 봐야 우스운 꼴만 당할 것이 뻔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가져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안 팀장은 인사도 받지 않고 초소로 돌아갔다. 윤조는 그가 한참 멀어질 때까지 기다려 한숨을 내쉬었다.
나름 정한과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보다. 이제 한 걸음 뗀 것이나 마찬가지인 듯했다. 여전히 그는 뒤에 앉은 남자, 죽으려고 환장한 부자, 알파인지 베타인지, 혹은 저와 같은 오메가인지도 모를 사람이었다.
그래도 저에겐 시간이 많았다. 앞으로 평생 볼 사람이니까. 불쾌하게 남은 감정을 서둘러 털어내고 현관 앞에서 정리해야 할 것들을 분류했다.
일반적인 상자는 모두 개봉해서 내용물을 빼놓았다. 발송인의 이름을 체크해 두고, 집 안에 하나씩 들였다. 정한이 서재에 있는 사이에 그의 방에 예쁘게 장식을 해 두어야겠다 생각했다.
“권주흠?”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두베역 테러가 있을 때 정한에게 전화를 걸어온 사람이었다. 성이 같은 것으로 보아 높은 확률로 가족일 테다. 아버지일까? 그렇다면 살뜰하게 아들을 챙기는 모습이 좋아 보이고 또 부러웠다.
“그나저나 난 뭘 드린담….”
명색이 같이 사는 사람으로서 선물도 없이 생일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외출을 다녀올까 하다가 금세 마음을 접었다.
택시를 이용하면 번화가까지 가는 것쯤이야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뭘 알고 찾는다는 말인가. 길을 잃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여러모로 저택에 박혀 사는 사장님 덕분에 모르는 게 많은 윤조였다. 원래도 모르는 게 많긴 하지만.
“어쩌지….”
정한의 방까지 계단을 몇 번이나 오르내리며 선물을 정리한 뒤 윤조는 그 앞에서 고민했다. 한눈에도 고가의 선물들이 즐비했다. 한석에게도 선물이 와 있었는데, 어쩐지 그에게는 지고 싶지 않았다. 무조건 선물을 해야 했다. 근래에 가까워진 관계에 불을 붙여줄 땔감이 필요했다.
한창 선물을 뒤적여 보던 윤조는 가장 중요한 게 빠진 것을 발견했다. 케이크가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어찌나 기뻤는지 장소도 잊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주방에는 없는 재료가 없으니 방법만 알면 만들 수 있으리라. 윤조는 곧장 서재로 향했다. 노크를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대로 문을 열었다. 서재 데스크에 앉아 있던 정한은 놀라지도 않고 그대로 할 일을 했다. 윤조는 조용히 문을 닫고 들어서서 요리책을 찾아 벽면을 훑었다. 이렇게 많은 책 중에 요리책 하나는 있겠지 하며.
통화 중이었는지 간간이 정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조는 벽면을 훑으면서도 슬그머니 정한을 살폈다. 달갑지 않은 상대였는지 정한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계속 보고 있다가는 금방이라도 시선이 돌아올 것 같아 윤조는 다시 책 찾기에 전념했다. 정한의 통화는 계속되었다.
“뭐 찾는데? 도와줘?”
목적이 있어 보이는 방문을 무시할 법도 한데 정한이 말을 걸었다. 하지만 윤조는 방문 목적을 밝힐 수 없었다. 그의 배려를 감사하게만 여기기로 했다.
“괜찮아요, 제가 찾을게요.”
“그게 아니라, 빨리 나가줬으면 해서 그래.”
“아, 네. 어… 찾았어요. 저 나갈게요. 하던 거 하세요.”
민망함에 아무 책이나 뽑아 들고나왔다. 망했다 싶어 서재를 나오자마자 윤조는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아직 아침이니까 밤까지는 시간이 있을 테고, 그사이 정한이 서재에서 나오면 또 들어가자는 결론을 내었다. 그런데 윤조가 아는 권정한이라는 남자는 한 번 틀어박히면 꼼짝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그게 과연 가능할지는 미지수였다.
“하….”
어쩔 수 없다. 구원자를 찾을 수밖에. 윤조는 주방 담당자에게 제 모든 것을 맡기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나저나 무슨 책을 가지고 온 건가 싶어 책을 들어 보니, 이건 요리책보다도 더 있기 어려워 보이는 책이었다.
[남성체의 수유 방법]
잘못 본 건 아니겠지 싶어 안을 휘리릭 넘겨 보자 적나라한 사진으로 남성의 신체를 가진 오메가의 수유 방법이 안내되어 있었다.
“설마….”
사장님이 오메가였나?
기가 막히게도 놀라운 일이라 그의 생일도 까먹을 듯했다. 윤조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가정에 고개를 내젓고 주방 담당자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주방으로 가 연락처를 찾아내었다.
용기를 내어 주방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여나 자신의 깜짝 선물이 들킬까 싶어 서재에서 가장 떨어진 방에서 수화기를 들었다. 저택의 일이 아닌 개인적인 부탁이라 상대해줄까 걱정이 되었지만, 주방 담당자는 흔쾌히 윤조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오븐은 오래 사용하지 않아서 사용 전에 꼭 청소하셔야 할 것 같아요.
“네, 알겠습니다.”
-부디 건투를 빌어요.
주방 담당자가 보기에도 윤조가 어설퍼 보였는지, 평소 말이라도 걸라치면 이리저리 빠져나갈 때와 달리 응원까지 해주었다. 고마운 마음에 윤조는 주방 담당자가 있는 것도 아닌데 허공에 몇 차례 허리 숙여 인사했다.
빼곡히 받아 적은 메모를 쥐고 주방으로 향했다. 일단 배부터 채우자 싶어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에는 생일을 의식한 듯 평소보다도 호화로운 음식들로 채워져 있었다.
덕분에 호강한다 생각하며 윤조는 제 몫으로 따로 정리된 음식을 하나씩 식탁에 나열했다. 응당 이곳 주인이며 덩치도 큰 정한이 큰 반찬통을 차지할 법한데, 이 냉장고 안에서는 반대였다.
도통 정한이 먹는 모습을 보지 못했던 윤조는 애초에 그가 제 케이크를 먹어주리란 기대는 없었다. 초만 불어주어도 그만이었다. 생일 기분을 조금이라도 내는 게 제 선물의 목적이었다. 그러니 섭섭하지 않을 만큼 적당한 크기의 케이크를 만들어야지. 윤조의 젓가락 움직이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식사를 끝낸 뒤, 윤조는 곧장 케이크 만들기에 돌입했다. 재료는 부족함이 없었고, 모든 장비도 갖추었다. 그런데 만드는 사람이 초짜이다 보니 귀로 전해 듣고 글로 정리한 레시피가 도통 낯설기만 했다.
그래도 여차여차 적힌 대로 하고 나니 얼추 반죽이라는 게 만들어졌다. 윤조는 자그마한 성취감을 느끼며 예열한 오븐에 반죽을 넣고 그 앞에서 열심히 기도했다.
얼마든지 뻔뻔할 수는 있었지만, 반죽마저 제 마음대로 되리라는 욕심은 없었다. 첫 시도가 대실패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은 당연히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이게 망한다면 서둘러 차선책을 찾아야 했다.
미리 찾을까?
아무래도 마음이 불안해 윤조는 오븐 앞에서 몸을 일으켰다. 제 소통 창구를 만나러 가야 했다.
“명우 형.”
초소로 가는 길에 명우와 마주쳤다. 마침 이리로 오던 중이었는지 명우는 반갑게 윤조를 맞이했다.
“저택 오던 길이야?”
“어. 집사님 복권 드리려고.”
“오!! 내 복권!”
“네 덕분에 나도 요즘 사고 있잖아.”
“형도 나 10퍼센트 떼주는 거야?”
“내가 왜? 보태주는 거 있어?”
“하긴. 그건 그래.”
명우가 요원이 배치된 자리를 둘러보며 목소리를 죽였다. 혹여나 윤조와 나누는 대화가 팀장의 귀에 들어갈까 싶어 노심초사하는 모습이었다.
“날 눈엣가시로 봐.”
“왜?”
“몰라. 너랑 친한 게 마음에 안 드나 봐.”
“팀장이 나 싫어하는 것 같긴 했어.”
“그건 아닐걸? 싫으면 매일 우편물 찾으러 오는 널 맞이할 이유가 없잖아.”
글쎄. 윤조는 보안 팀장이 공사 구분을 잘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오늘 선물도 그래. 선배 하나가 그러던데, 작년에는 집사가 일일이 옮겨 갔다더라고.”
“그래? 올해는 무슨 바람이람?”
“암튼, 난 좀 조심해야겠어.”
“그래. 밉보여서 좋을 건 없지.”
명우가 웃으며 윤조의 어깨를 다독였다. 윤조도 명우의 어깨를 다독였다. 초짜끼리의 격려였다.
“넌 근데 왜 이리로 오던 중이었어? 도련님 심부름?”
“아니. 아… 맞다. 형, 혹시 이 근처에 케이크 가게 있어?”
“케이크? 글쎄. 케이크는 왜? 도련님 생신이라서?”
“응. 난 뭐 준비한 게 없어서 케이크라도 드리고 싶어서.”
“그럼 내가 알아봐줄게. 근데 너 외출할 수 있어?”
“가까우면 다녀오게.”
“아님 내가 퇴근하고 다녀와도 돼.”
“정말? 근데 그럼 내가 형한테 너무 미안한데….”
“다 돕고 사는 사이에 뭐야. 상사한테 잘 보이면 좋잖아.”
“그렇긴 하지만….”
“그렇게 미안하면 밥 한번 사. 너도 쉬는 날 있을 거 아냐.”
“내가 쉬는 날이 있어?”
“집사는 그런 거 없어?”
“몰라…. 사장님한테 물어볼까?”
“물어봐. 이 형이 두베 구경시켜줄게.”
두베 구경이라는 말에 윤조는 마음이 들떴다. 약속을 잡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날이 기다려졌다.
“어이쿠, 벌써 10분 지났네. 나 찾겠다. 윤조야, 나 갈게.”
“어, 형 고마워!”
“케이크 필요하면 말해. 내 퇴근 시간 알지?”
“어. 알아!”
명우에게 작게 손을 흔들어주고 저택으로 향했다. 모든 것이 해결되어 기분이 좋기만 했다. 한데 저택은 윤조의 좋은 기분이 싫은 모양인지 흐릿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 주변만 뿌옇게 흐릴 수가 있을까.
윤조는 빠른 걸음으로 저택으로 다가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뚜렷하게는 알 수 없어도 현관에 이르자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가슴도 쿵쾅거렸다. 이 귀를 자극하는 소리는 무어란 말인가. 윤조는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는 생각에 급히 문을 열어젖혔다.
현관 바닥까지 뿌옇게 번진 연기에 윤조는 깜짝 놀라 주방으로 달려갔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아까까지 단정했던 주방이 하얀 분말을 뒤집어쓴 채 윤조를 맞이했다.
소화기를 든 정한이 주방으로 들어선 윤조를 돌아보았다.
“서 집사.”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정한의 목소리에 윤조는 어깨를 움찔했다. 윤조가 대답하지 않자 정한이 다시 불렀다. 윤조는 뒤늦게 정신이 들어 급히 응답했다.
“예, 사장님.”
“뭐 하다 왔어?”
윤조는 바짝 마른 입술을 축이며 잠시 사람을 만나고 왔다고 했다. 정한은 그게 누구인지 묻지 않았다. 그저 윤조의 손에 들린 복권만 바라볼 뿐이었다.
*
선물 상자처럼 많은 사람이 저택을 찾았다. 오븐 하나가 불에 탔는데, 그걸 처리하러 온 사람들이 수십이었다. 윤조는 정한을 볼 낯이 없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예열까지는 괜찮았던 오븐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고장을 일으켰고, 급속도로 열이 올라 내부에서 불이 붙은 듯했다. 자주 사용하지 않았던 터라, 단순한 고장이라고 결론이 났지만 결국 윤조의 탓이었다.
정한은 도대체 윤조가 왜 오븐을 사용한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불이 난 사실보다도, 그걸 더 궁금해하는 듯했다. 윤조는 사실을 고할 수 없었다. 생일인 그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윤조는 주방 담당자가 오븐을 사용하기 전에 청소를 권장한 사실을 뒤늦게 상기했다. 다 그 탓이려니 하며 소화기 분말로 엉망인 주방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불탄 오븐은 요원들이 버려주었다. 정한은 알아서 하라는 듯 그 후로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최악의 생일을 선물한 것만 같아 그저 미안했다.
“그을음은 집사님이 청소하기 힘들 겁니다. 소방대원 하나가 업체를 통하는 게 좋을 거라 하던데, 제가 불러 드릴까요?”
가지 않고 남아 있던 보안 팀장이 윤조에게 말을 걸었다. 윤조는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해도 해도 안 사라진다 했다.
“당시 박명우 요원이 집사님을 찾았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보안 팀장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윤조는 마스크를 내리며 그에게 되물었다. 팀장은 윤조의 물음을 듣지 못한 듯 안내받은 업체에 전화만 걸었는데, 윤조는 괜히 불안한 마음에 명우를 찾아가려다 혹 저 때문에 상황이 더 나빠질까 잠자코 팀장의 통화가 끝나길 기다렸다.
“한 시간 내로 온다고 합니다. 곁에서 감독만 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변 팀장님, 잠시만요.”
팀장은 다 아는 듯한 얼굴로 윤조를 보았다. 윤조는 뿌연 연기를 발견했을 때만큼 다급하게 뛰는 가슴을 붙잡고 조심스레 물었다.
“저희 사장님께서 혹시 그 일을 아시나요? 제가, 누구랑 얘길 하다 왔는지.”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참견을 해주던 팀장이 다시 평소처럼 돌아가 제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윤조는 그 뜻이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 수 없어 눈을 급하게 깜박였다.
“저는 할 일이 있어 가야겠습니다.”
마치 명우에게는 할 일이 없어졌다는 뜻 같아 윤조는 팀장을 급히 불렀다. 하지만 팀장은 끝까지 윤조를 무시한 채 저택을 나가버렸다.
홀로 주방에 남은 윤조는 청소 업체가 찾아와 방문을 알릴 때까지 멍하니 서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다음 날, 더는 이 저택으로 오지 못하게 된 명우의 소식을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명우에 대한 미안함과 저 역시 같은 처지가 될까 두려운 마음이 윤조를 움츠러들게 했다. 그건 윤조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않아도 상대해주지 않던 사람들이 더욱 눈에 띄게 저를 피했다. 서윤조 집사와 얽히면 잘릴 위험에 처한다는 소문이 돌기라도 한 듯.
그나마 인사를 건네던 보안 요원들도 윤조를 그림자 취급했다. 팀장만은 전과 다름없이 저를 대하긴 했지만, 명우에 관한 이야기는 무시하기 일쑤였다.
더는 몰릴 곳도 없이 고립된 상태가 된 윤조는 울적함에 자주 방에 틀어박혔다. 정한과 마주치는 일은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 생각하면서도 정한이 있는 장소에 들어설 때면 티가 나게 도망을 다녔다. 어설프게 가까워진 거리는 전에 없이 멀어진 듯했다.
아직도 그날 정한이 자신을 돌아보며 서 집사라 부르던 목소리가 잊히지 않았다. 그 까만 눈동자도. 등 뒤로 피어나던 분말도.
윤조의 뒤꿈치는 다시금 들렸고, 길로 걷기보다는 벽에 붙어서 걸었으며, 수시로 입을 막고 숨을 죽였다. 매일 뛰어들기 바쁘던 수영장으로는 출입도 하지 못했다.
이 미친 생활을 며칠 했더니 좀이 쑤셔서 살 수가 없었다. 말도 못 하니 속에서 병이 나는 듯했다. 울컥한 마음에 정한의 방에 쳐들어가 차라리 자르라고 소리치고 싶기도 했다. 물론 모든 것은 상상에 그쳤다. 그의 앞에 서면 고양이 앞의 생쥐처럼 움츠러들 자신을 윤조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오늘도 생쥐처럼 숨어 살던 윤조는 새로 들어온 오븐을 겉으로만 구경하다 제 방으로 돌아왔다. 옷을 갈아입고 씻으려는데, 문득 책상 위에 놓인 그때의 흔적이 눈에 띄었다.
[남성체의 수유 방법]
청소 업체가 도착하기 전, 식탁에 둔 책을 발견한 건 천만다행이었다. 물론 정한을 비롯해 소방대원이며 보안 요원들도 죄 보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저로서는 부끄러운 일이 조금이라도 줄어든 게 어딘가 했다.
당시엔 보나 마나 정한이 서재에 있으리라 생각해 방으로 가져왔는데, 그 이후에도 정한이 자주 서재에 드나드는 탓에 갖다 두는 건 엄두도 내지 못했다. 마침 잘 되었다 싶어 윤조는 책을 가지고 서재로 향했다. 정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뒤꿈치를 들고 최대한 조용히 걸었다.
깊은 밤, 당연히 없을 줄 알고 연 서재 문 너머로 희미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돌이키기엔 이미 늦은 것을 알면서도 윤조는 반사적으로 열던 문을 제 쪽으로 당기고 말았다.
쾅!
살살 당겨야 하는 것을. 놀란 마음에 세게 닫고 말았다. 여기 좀 봐 달라고 소리친 것이나 다름없게.
왜 이렇게 바보 같지.
손에 든 책으로 제 머리를 내려치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더 꼴이 우습기 전에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했다. 윤조는 다시 문을 열고서 손이 미끄러졌네, 하며 정한이 들으라고 변명을 했다. 정작 데스크에 앉은 상대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지만.
어디에서 빼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대충 끼워둘 심산으로 가까운 책장으로 향했다. 정한의 눈치를 보느라 힐끗거리길 몇 번. 그 시선이 거슬렸던 모양인지 정한이 고개를 들어 윤조를 보았다. 하필이면. 또, 하필이면 이렇게 눈이 마주칠 게 무언가. 윤조는 어설프게 웃으며 인사를 해 보였다.
“아직 안 주무셨네요?”
미처 꽂지 못한 책을 뒤로 숨기며 윤조는 애써 웃어 보였다. 정한은 윤조의 인사에 대답하지 않는 대신, 의자에 깊게 등을 기대며 응시했다. 그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어 윤조는 쭈뼛거렸다.
지금만큼 그가 자신을 무시해주길 바란 때가 있을까. 윤조는 집사 된 자로서 자신이 먼저 사장을 등질 수는 없어,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정한과 시선을 마주했다. 내내 무표정하던 정한의 입가에 웃음이 핀 것도 그때였다.
보고 있던 서류를 덮고서 일어난 정한이 친히 걸음을 옮겨 윤조에게 다가왔다. 윤조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칠 것만 같은 다리를 붙잡았다. 뒤에 숨긴 책자가 손에서 미끄러질 듯했다.
“서 집사.”
“네, 사장님….”
“요즘 웃긴 거 알아?”
“뭐가, 그렇게 웃기신데요?”
정한이 허리를 숙여 윤조를 굽어봤다. 윤조는 제 눈앞에 드리운 정한의 그림자를 올려다보았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도 부담스럽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만 저택에서 나가라는 말이 그의 입에서 떨어질까 무서웠다.
“처음엔 팔을 부러트릴까, 했지. 그다음은 엉덩이를 찢어 놓을까, 했어.”
지은 죄가 많아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윤조는 더는 참지 못하고 정한의 시선을 피해 바닥을 보았다. 발끝을 꼼지락거리며 손에서 책이 미끄러지지 않게 신경 썼다.
“근데 계속 놔뒀잖아. 심지어 나쁘지 않다고 했지. 맞아, 안 맞아. 대답해 서 집사.”
“맞습니다.”
“내가 팔을 부러트리길 했어, 엉덩이를 찢어 놓길 했어. 가만뒀는데 왜 그래?”
“…….”
“죄지었어?”
“죄지었지요….”
“내가 모르는 죄도 있나?”
정말로 모르는 건가 싶어 윤조는 고개를 들어 정한을 보았다. 그제야 허리를 펴고 시선을 떨어트리는 정한이었다.
“…….”
예의 그 아래로 내려다보는 눈짓으로 다음 말을 기다리는 정한에게 윤조는 어디서부터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제 허물을 꺼내자니, 이는 해고를 위한 함정인가 싶어 의심도 들었다.
“이 저택에서 서 집사가 눈치 봐야 할 사람이 나 말고 또 누가 있기라도 하나?”
“아뇨, 전 오로지 사장님 눈치만 봅니다.”
“그래. 눈치 보는 건 맞네. 눈치도 안 본다 생각한 때도 있는데.”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저… 사장님 눈치 많이 보거든요?”
“그렇다고 하자. 그럼 말해 봐. 무슨 죄를 지어서 놀란 토끼처럼 나만 보면 도망치기 바쁜지.”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거예요?”
“어.”
그걸 왜 모르지?
윤조는 도무지 정한이 이해가 가지 않아, 저를 놀리는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이렇게 잘리는구나, 싶어 서럽기도 했다. 그냥 잘라버리지, 왜 또 구구절절하게 그 말을 하게 하는가 싶어 섭섭하기도 했다.
“제가, 오븐… 태웠잖아요.”
“그래서.”
“그래서는 뭐 그래서예요. 제가 오븐 태워 먹어서 저택 엉망으로 만들고, 사람들도 엄청 오게 하고, 그거 때문에 사장님 심기 불편하셔서 명우 형도 잘리고, …저는 그게 너무 미안하고, 저도 잘릴까 무섭고. 그런 거예요.”
이제 속이 시원할까.
윤조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정한을 올려다봤다. 정한은 도통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네 말의 대부분이 이해하기 어렵지만, 개중 내가 가장 이해 못 할 게 하나 있어.”
“그게 뭔데요? 이참에 다 알려 드릴게요.”
기어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윤조는 손에 든 책도 잊고 두 볼을 손등으로 벅벅 닦았다. 정한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자꾸 궁금한 게 생기네.”
정한이 팔짱을 끼고 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삼촌이 저를 혼낼 때의 모습과 겹쳐져 어깨를 움츠렸다.
“일단 이거부터 말해 봐. 오븐은 왜 만진 건데?”
“…만지면, 안 되나요?”
“만져도 되지. 근데 왜 만졌냐고.”
“뭘 좀 만들려구요.”
“음식이 모자라?”
“아뇨, 충분해요. 오븐을 쓴 건, 제가 먹으려고 쓴 게 아니었어요. 사실 먹을 수 있는지도 확신이 없었어요.”
생각지도 않은 대답인지 정한이 턱을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물었다.
“네가 먹을 게 아니면 뭣 하러 만든 건데?”
망쳐버린 케이크. 홀로 선물하지 못한 그의 생일. 잘려버린 유일한 소통 창구. 저를 피하는 사람들. 요 며칠간의 일이 우후죽순처럼 떠올라 다 흘렸다 싶었던 눈물이 다시금 비집고 나왔다.
“흡, 사장님 생일이었잖아요….”
“그게 왜.”
“그날 케이크 선물은 없어서, 제가 만들어 드리려고 한 건데, 제가 또… 사고를….”
“나 케이크 안 좋아해.”
그렇게 궁금해 마지않던 정한의 정보임에도 불구하고 윤조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게 할 말인가 싶어 화도 났다. 입술이 절로 삐죽 나왔다.
“죄송하네요.”
“그게 왜 죄송해?”
“좋아하시지도 않는 케이크 만든답시고 오븐 불낸 거요.”
정한이 웃었다. 윤조는 웃는 정한을 슬그머니 흘기며 이제 잘릴 제 팔자를 걱정했다. 어디로 가지. 미자르는 갈 수 없었고, 한석에게 비벼 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쓸데없이 죄송하단 말 하지 마. 하나도 죄송할 거 없으니까.”
윤조는 제 이마를 훌쩍 밀어버리는 정한의 손짓에 밀려 뒷걸음질 쳤다. 그 바람에 손에 든 책도 떨어트렸다. 아차 싶어 손을 뻗었으나 정한이 더 빨랐다.
“임신했어?”
“아니요?! 안 했는데요?!”
윤조는 펄쩍 뛰며 책을 집어 들었다. 정한의 시선이 윤조의 품에 안긴 책에 닿았다.
“근데 왜 그런 책 보고 다녀?”
“요리책 찾으러 서재에 왔다가, 사장님 귀찮으실까 봐, 아무 책이나 골라 간 거예요.”
“그게 하필 수유 책이라고?”
“네. 정말이에요. 저 임신 안 했어요! 아직 해 본 적도 없는걸요?”
“알아.”
“그걸 사장님이 어떻게 아세요?”
정한이 질린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윤조는 이때다 싶어 등 뒤의 책장에다 책을 끼워 넣었다. 그러자 정한이 그 책을 꺼내어 제대로 두라고 명령했다.
“어디에서 빼낸 건지 잊어버렸어요. 사장님이 잘 아시면, 사장님이 꽂아주세요.”
“이제 좀 제대로 돌아왔네.”
“뭐가요?”
“정신머리 나가 보인다고.”
“네?”
“또 쥐새끼처럼 굴어봐. 이젠 그 발목부터 부러트릴 거니까.”
“제 발목을요? 왜요? 그럼 일 못 하잖아요.”
윤조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정한은 멋대로 대화를 끝냈다. 윤조는 정한이 저 먼 책장까지 걸어가 책을 꽂아 넣는 것을 보며 안도했다. 분위기를 보아 그가 아직 자신을 자를 생각은 없는 듯했다.
“볼일 끝났으면 나가.”
“네, 사장님. 안녕히 주무세요. 먼저 가 보겠습니다.”
냉큼 서재를 나온 윤조는 버릇처럼 들려던 뒤꿈치를 내리고 서둘러 방으로 돌아왔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등이 축축했다.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식은땀을 닦았다.
일단은 잘리지 않아 다행이긴 했지만 그래서일까, 더더욱 명우에게 미안해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았다. 윤조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 * *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그날 명우가 사다 준 복권은 꽝이었다. 윤조는 평소라면 구겨버리고 말았을 복권을 책장에 꽂힌 책 하나에 잘 끼워 보관해 두었다. 앓는 이처럼 잊지 않을 생각이었다.
명우와 연락이 닿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보안 팀장은 명우와 연락이 닿을 수단을 알려주지 않았다. 보안상의 이유라고는 했지만, 어쩌면 정한의 지시였을지도 몰랐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주방에서 어쩐 일로 정한과 마주쳤다. 영양 주스를 내어줄까 싶어 서둘러 냉장고로 향했다. 그가 더는 쥐새끼처럼 굴지 말라 하였기에 움츠러든 마음을 툴툴 털긴 했지만, 여전히 긴장이 남아 있었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정한이 뒤에서 손을 뻗어 제 몫의 아침을 쏙 빼내어 가버렸다. 정한은 그 자리에서 주스를 몽땅 마시고 빈 병까지도 처리했다. 이만 문을 닫아 달라는 냉장고의 소음이 일지 않았다면 윤조는 자신이 할 일도 잊고 계속해서 정한만 바라봤을 테다.
“먹고 싶으면 말해.”
시선이 뜨거웠는지 정한이 윤조의 의도를 착각하고 물었다. 윤조는 냉장고 문을 닫고 서둘러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밥이 더 좋아요.”
“그래. 저거 맛없어.”
“근데 왜 드세요?”
“음…. 안 먹으면 죽으니까?”
“죽고 싶은 거 아니셨어요?”
“왜. 죽었으면 좋겠어?”
“아뇨. 죽지 마세요. 사장님 없으면 저 어떡하라구요.”
주방을 나서려던 정한이 발걸음을 멈추고 보았다. 윤조는 제 말이 오해를 살 수 있을 것 같아 급히 정정했다.
“사장님 아니면 누가 절 고용해주겠어요?”
“그렇긴 해.”
“…역시, 그렇죠? 그러니까 오래 사셔야 해요. 전 이 저택에서 평생 살 작정이거든요.”
정한이 고개를 내저으며 지겨운 얼굴을 해 보였다.
“내가 널 평생 봐야 한다는 뜻인가?”
“싫으세요?”
“좋을 것 같진 않아.”
“어떻게 하면 좋아하실까요?”
말하고 나니 또 오해를 살 수 있는 말 같아 정정을 시도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어떻게 하면 사장님이 저를, 괜찮은 집사라고 생각하실까요?”
“일단 괜찮은 집사가 되어야겠지. 그게 어렵다는 건 본인이 가장 잘 알 테고.”
놀리는 투의 말과 장난스러운 느낌이 나는 눈짓이었다. 윤조는 최근 들어 정한의 얼굴에서 감정이 읽히는 표정을 많이 본다 생각하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지금이라도 학원을 좀 다닐까요?”
“내가 보기엔, 다시 태어나는 게 빠를 거야.”
“그게 제일 어려운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안 어울리는 짓 말라고. 나는 그런 집사를 바라는 게 아니니까.”
“네, 그러시긴 하죠. 저도 알아요. 그냥 이대로만 지내도 괜찮을 거라는 거.”
“아는데 왜 바보같이 굴어?”
“제가 자꾸 사고를 치잖아요. 또 요 며칠 조용하다가 사고를 치겠죠. 그럼 이번에야말로 사장님이 제 발목을 부러트려 놓지 않을까요?”
“그래서 말인데 이참에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그럼 내가 서 집사를 좀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잖아?”
농담이라도 ‘그럴까요?’ 하고 동조할 수 없었다. 윤조는 저를 서늘한 눈길로 보는 정한의 시선을 피해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정한의 시선이 윤조의 발목으로 향했다. 당장에라도 부러트릴 듯이.
“남 해치는 취미는 없어.”
취미는 없다 해도 정한은 언제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남자였다. 사실 윤조는 아직도 방아쇠를 당길 만큼의 담은 없었다. 어째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자신이 집사 일을 할 성격이 아니라는 사실만 깨닫는 듯하다.
“정말 개가 따로 없다니까.”
정한이 제 근처에 있는 도자기 그릇을 당겨 뚜껑을 열었다. 윤조는 그 안에 무엇이 든 건지 몰라 턱을 들고 안을 보려고 했지만, 미처 확인하기도 전에 뚜껑이 다시 닫히고 말았다.
“내가 서 집사 좋아하는 건 없어도 싫어하는 건 있어.”
정한이 그릇에서 꺼낸 것을 윤조를 향해 가볍게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윤조의 손에 안착한 것은 고운 포장지에 싸인 사탕이었다.
“눈꼬리 늘어트리지 말고 입 삐죽 내밀지 마.”
“왜요…?”
“못생겼어.”
반박은 필요 없다는 듯 정한이 등을 돌려 주방을 나갔다. 윤조는 머리털이 난 이후로 못생겼다는 소리를 처음 들어 본바, 충격에 휩싸여 손에 든 사탕을 놓치고 말았다.
탁. 타닥. 탁탁.
충격은 온종일 윤조를 따라다녔다. 그 탓에 머리를 만지기 위해 하루 한 번 보는 게 겨우인 거울 앞에 자주 섰다. 손가락으로 눈꼬리를 당겨 내리고 입술을 내미니 누가 봐도 못생기긴 했다. 자신이 이런 표정으로 정한을 보고 있었다니 그 또한 충격이었다.
* * *
거울을 보며 웃는 연습과 입술 집어넣는 연습을 많이 하던 어느 날, 윤조는 이 정도면 되었다 싶어 정한에게 표정 검사를 받으러 갔다.
때는 막 노을이 지기 시작한 시각. 고요한 수영장에 미열을 머금은 바람이 잔물결을 일으키고, 정한은 선베드에 누워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 옆 선베드에 엉덩이를 대고 앉은 윤조는 제 기척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시선조차 주지 않는 정한을 부를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노을보다 뜨겁네.”
“제 시선이 그래요?”
“어. 뭔데. 용건만 말해.”
“저 좀 봐주세요.”
봐주기만 하면 끝이라는 듯 정한은 윤조를 슬쩍 봐주고 다시 눈을 돌렸다. 윤조는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입술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고 정한을 다시 불렀다.
“저 못생겼다 하셨잖아요.”
“그게 마음에 남아서 날 이렇게 못살게 구는 거야?”
“제가 지금 사장님 못살게 굴어요?”
“조금만 더 말 시키면 죽고 싶을 것 같은데.”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 마세요. 전 사장님이랑 같이 오래 살려고 열심히 연습했단 말이에요.”
“뭘.”
“표정 연습이요. 저보고 못생겼다 하셨잖아요.”
“그게 그렇게 마음에 남았어?”
“후…. 제 말 들어 볼 마음이 없으시죠?”
“어.”
“…알았어요. 전 그냥 못생긴 채로 살게요.”
“말을 똑바로 알아들어. 내가 서 집사한테 이유 없이 못생겼다고 했어?”
정한이 몸을 일으켜 윤조를 마주 보았다. 윤조는 정한의 허벅지에 올려져 있던 책이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붙잡으려다가 그에게 팔이 붙들리고 말았다. 툭, 떨어진 책과 마주친 시선에 윤조는 어깨를 움찔했다.
“말해 봐. 내가 그냥 서 집사한테 못생겼다고 했냐고.”
노을처럼 붉은 정한의 눈을 응시하며 윤조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눈꼬리 내리고, 입술 내미는 게, 싫다고 하셨어요.”
“잘 알아들었네. 근데 왜 내 말을 곡해해?”
“제가 사장님 볼 때 늘 표정이 그랬나 해서요. 저도 몰랐거든요. 그래서 웃는 연습 했어요.”
“지금은 평범해. 이게 내가 인지하는 서 집사 평소 표정이야.”
“그래요…? 제가 사장님 못난 얼굴로 보는 게 아니에요?”
“서 집사가 못생길 때가 언제냐면 쥐새끼처럼 굴 때야.”
“쥐를 되게 싫어하시나 봐요?”
정한이 어이없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팔을 붙잡고 있던 손도 놓았다. 다시 선베드에 등을 기댄 정한이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책 떨어졌어요. 주워 드려도 돼요?”
“마음대로 해.”
윤조는 몸을 일으켜 정한을 타 넘듯 제가 앉은 반대쪽으로 몸을 숙였다. 책을 들고 일어나 탁탁 털고 있자니 정한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차,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왜 이런 생각은 다 벌어진 후에 찾아오는 걸까.
“제가 좀 무례하게 굴었다는 거, 인지 중이에요.”
“늦게라도 아는 게 있어 다행이네.”
윤조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당연하게도 정한의 지적이 들어왔다.
“못생겼어.”
서둘러 표정을 풀고 선베드에 앉았다. 쥐새끼처럼 굴지만 않으면 그에게 싫을 것도 없으니 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뒤늦은 자각이었다. 사고도 그렇고, 제 표정도 그렇고 꼭 늦게 깨닫는다.
미리 걱정해 봐야 또 쥐새끼밖에 더 되겠나 싶어 윤조는 생각하기를 그만뒀다. 발목이 부러지지, 뭐. 또 못생겼다는 소릴 듣지 뭐. 차차 지내다 보면 이보다 더 뻔뻔해져서 정한이 혼을 내든 말든 무신경해지리라. 그렇게 또 뻔뻔하게 생각했다.
“뭐 읽으세요?”
책등에 제목이 적혀 있었지만 윤조는 읽을 수 없는 언어였다. 얼핏 봐서는 안쪽에도 모르는 언어로 적혀 있는 것 같았다. 그저 신기할 따름이라 질문을 던져 보았는데 정한은 또 말이 없다. 대신 윤조에게 새로운 책을 하나 내어주었다.
“심심하면 보든지.”
“말 걸지 말라는 뜻이죠?”
“이렇게 내 마음을 잘 알면서 왜 바보짓을 하고 다니나 몰라.”
윤조는 콧방귀를 뀌며 정한이 내어준 책을 받아 들었다. 서서히 주변으로 빛이 들어왔다. 먼 데서 벌레 죽는 소리가 타닥거리며 일었다.
구두를 벗고 발을 편히 올린 뒤 선베드에 정한과 같이 등을 기댔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읽어 내려간 책은 가장 최근의 역사를 기반으로 한 소설이었다.
지금과 같이 구역으로 나뉘게 된 시발점인 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은 윤조를 마치 그 시대로 이끈 듯이 흡인력 있었다. 깊은 어둠이 찾아온 줄도 모르고 책에 푹 빠진 윤조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는 책을 덮지도 못하고 그대로 끌어안은 채 울음을 삼켜야 했다. 그렇게 참았는데도 불구하고 기어코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흘렀다. 두 손을 급히 눈 위로 덮고서 울음을 참았지만 계속해서 눈물이 나왔다.
시선이 느껴진 건 그때였다. 윤조는 눈물로 범벅된 눈꺼풀을 들어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정한을 보았다. 마치 구경하듯 모로 누운 채인 그의 이마가 평소와 다르게 매끈하게 드러나 있었다. 두베역 테러 날. 반듯하게 차려입었던 그때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눈물이 많네, 서 집사는.”
“이것도 싫으세요?”
“싫다고 안 했는데?”
“그럼 다행이네요.”
“그렇다고 자주 울지는 마.”
나름의 위로인가 싶어 윤조는 정한을 빤히 보았다. 정한이 품에 안고 있는 책을 가리키며 물었다.
“읽을 만해?”
“네. 재미있어요. 슬픈데, 재미있어요.”
“서재에 그런 책 많으니까 심심하면 읽어 봐.”
“그래도 돼요?”
“수유 책도 읽어 봤잖아.”
“그건…, 읽은 게 아니라, 잘못 가져간 거예요!”
놀리는 정한의 말에 슬펐던 감상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홀로 열을 내는 윤조를 두고 정한은 다시 책을 들여다보았다. 윤조는 내내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고 기지개를 켰다. 도대체 몇 시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주변이 캄캄했다.
“사장님, 시간이 늦은 것 같은데… 안 주무세요?”
“너 들어가면.”
“저 지금 들어갈 건데요.”
“그럼 가든지.”
정한이 미련 없이 일어났다. 보던 책을 접고 그 옆에 쌓아둔 다른 책도 몽땅 들었다. 윤조의 품에 있던 책도 가져갔다. 윤조는 쫄래쫄래 정한의 뒤를 따라갔다.
막 저택으로 들어오니 눈이 부셔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윤조는 실눈을 뜨며 자꾸만 나오려는 웃음을 숨기려 애썼다. 정한이 자신을 기다려준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자리를 지켜주는 의리는 있는 모양이다.
“뭘 자꾸 헤실헤실해?”
그런 윤조가 거슬렸는지 정한이 계단을 오르며 물었다. 윤조는 정한의 뒤통수에 눈이 달렸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려 보았다.
“눈 없으니까 똑바로 보고 걸어. 넘어지지 말고.”
“네, 사장님.”
“대답은 잘하지.”
윤조는 아무리 연습해도 마음에 꽉 차게 들지 않았던 웃음을 환하게 지으며 서둘러 걸음 했다. 정한의 옆에 서서 그에게 다음엔 뭘 읽으면 좋을지 추천받았다. 매일 책에 코를 박고 있던 만큼 정한은 윤조가 좋아할 만한 책을 잘 골라주었다.
덕분에 윤조는 정한과 자주 서재에 앉아 책을 읽게 되었다. 이따금 모르는 말이나 알지 못하는 지식 따위는 바로바로 물을 수 있어 좋았다. 정한은 원하는 것을 누르면 뚝딱 나오는 자판기처럼 윤조의 모든 궁금증에 해답을 내어주었다.
“사장님 뭐 하는 사람이에요?”
윤조의 물음에 정한이 고개를 들어 보았다. 최근 묻는 족족 대답을 주는지라 이쯤 하면 대답을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가늘어지는 눈짓을 보아 시기상조였나 하는 후회가 들긴 했지만, 달리 무시하지 않는 걸 봐선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직업이 뭐예요?”
한때는 의사라고 생각했고, 한때는 백수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선생님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정한의 정체를 묻자 그는 읽던 책의 가름끈을 내리며 답했다.
“나? 서윤조 씨 사장님.”
“그게 직업이세요?”
“어. 지금은 그래.”
“아… 그럼 그전에는요?”
“그게 중요해?”
“중요한 건 아니지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됐네.”
Rrrrr.
더 묻고 싶어 하는 윤조의 마음도 모르고 전화가 울렸다. 개인 전화가 아닌 저택 전화라 윤조는 서둘러 소파 쪽으로 걸어가 테이블 위의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나가 보셔야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오랜만에 방문객이 찾아왔다. 그것도 보안 팀장이 직접 나가 보라는 연락을 준 방문객이. 귀한 손님인 게 분명했다. 윤조는 수화기를 내리고 정한을 돌아보았다. 기다렸다는 듯 나가 보라는 정한의 눈짓에 얌전히 서재를 떠났다.
급하게 계단을 내려가 현관문을 열었다. 키가 큰 젊은 남성 하나와 마찬가지로 키가 큰 나이 든 남성이 하나 있었는데, 윤조는 그들의 정체를 알지도 못하면서 누구인지 알 듯했다. 언젠가 한석이 예고한 사람이 드디어 찾아온 것이다.
“네가 그 집사로구만.”
윤조는 냉큼 허리 숙여 나이 든 신사에게 인사를 올렸다. 정한의 아버지, 권주흠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웃음을 흘렸다. 그를 비롯해 그의 비서로 보이는 남자를 안으로 안내하기 위해 서둘러 허리를 일으켰다.
3주간 배운 대로 두 사람을 응대하고 정한을 부를 작정이었다. 윤조는 긴장을 줄이기 위해 호흡을 천천히 나눠 쉬었다. 그런 윤조의 긴장을 구경하듯 느긋한 표정으로 들어선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던졌다.
“그래, 성과는 좀 있고?”
성과?
윤조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성과의 다른 뜻이 있나 싶어 눈만 깜박였다. 남자의 얼굴이 불쾌하게 일그러졌다. 좋지 않은 예감이 윤조의 몸을 감쌌다. 경계 섞인 남자의 페로몬과 함께.
“네놈이 열성인 것도 알고, 수치도 개차반인 거 안다. 평가하려는 건 아니니 얘기해 봐.”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어 윤조는 남자의 옆에선 비서를 보았다. 그는 최근 읽은 소설책에 나온 악역처럼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였는데, 인상에 걸맞게 윤조를 쌀쌀하게만 바라보았다.
“주둥이 붙었어? 왜 대답을 안 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해할 수 없어서 대답을 못 하고 있었습니다.”
“왜 이해를 못 해? 내가 뭘 어려운 걸 물었어?”
“무엇에 대한 성과를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듣자 하니 사람을 착각하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그와 저 사이에 무엇이 있어서 성과를 따지는 건지. 윤조는 슬슬 짜증이 나서 뾰족하게 입술이 나올 듯했다.
“너 여기서 하는 일이 뭐야?”
“집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누가 몰라서 물어?”
“일과를 말씀드려야 합니까?”
“하, 이놈 새끼. 꼭 지 같은 걸 데려왔네.”
남자가 씩씩거리며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중후한 나이에도 정한 못지않게 체격이 좋은지라 그 손짓 한 번이 꽤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윤조는 혹여나 제 어깨가 움츠러들지 않도록 힘껏 가슴을 폈다.
“어디, 그 대단한 일과 좀 말해 봐.”
“눈뜨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우편물 습득, 분리 작업 합니다. 그 후에 주방 신선도 체크하고, 세탁물 정리, 저택 청소, 그 외로는 주변 시설도 관리합니다.”
“그게 다야? 빠진 게 있잖아!”
윤조는 그제야 남자의 의도를 알 듯했다. 숨 쉬듯 하던 일이라 저 역시 잊고 있었던 일이었다. 윤조는 남자가 기대한 대답이라 생각하며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네, 사장님 죽지 않게 잘 감시하고 있습니다. 제 끊임없는 감시의 결과, 무사히 살아 계십니다.”
남자가 웃음을 지으며 비서를 보았다. 비서는 표정 변화 없이 전보다 더 가늘게 눈을 뜨고 윤조를 보았다.
“그래, 살아 있다니 다행이네. 근데 왜 살게 하지는 않지?”
“그건 제 담당이 아닙니다. 사장님 마음이지요.”
“쓸모없구나. 그 하찮은 경력에도 오메가라 데려왔다 여겼는데, 쓰레기를 주워 왔어.”
“…말씀이 좀 심하시네요?”
“너만큼 심한 게 이 저택 어디에 있어?!”
버럭 소리치는 남자의 고성에 윤조는 그만 곧게 펴고 있던 가슴을 움츠렸다. 남자가 비서에게 가볍게 손짓했다. 윤조는 제게 성큼 다가오는 비서를 피해 뒤로 물러났지만, 어찌나 행동이 재빠르고 힘도 센지, 그대로 비서의 어깨에 둘러메어져 저택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저기요!! 아니, 이보세요!! 내려주세요!!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비서는 옷을 구겨 쥐고, 발로 몸을 걷어차고, 주먹질해도 꼼짝을 하지 않았다. 명령의 주인을 알고 있는 탓인지 윤조가 비서에게 끌려 차에 던져지고도 보안 요원들은 못 본 체했다.
꼼짝없이 차에 갇힌 윤조는 창을 두드리고 소리를 질러 부당함을 웅변했다. 하지만 비서는 윤조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구겨진 제 옷을 털며 저택으로 들어가기만 했다.
“미친 거 아냐?!!! 뭐 저딴 또라이가 있어??”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사고가 정지했다. 바깥은 전과 다름없이 더운 여름이었다. 뜨거운 볕에 눈이 부신 푸른 정원도 거짓말처럼 보이는 때, 한가로운 나비처럼 바깥을 순찰하는 보안 요원을 향해 윤조는 다시 소리쳤다.
“저기요!!! 저 안 보여요?!!! 이봐요!! 나랑 눈 마주쳤잖아!!”
고급 차체에 흠집이 나든 말든, 윤조는 패닉 상태여서 차 문을 걷어차고 난리를 쳤다. 그런 자신을 마치 없는 것처럼 대하는 보안 요원들의 반응에 윤조는 다른 살길을 찾아 나섰다. 그 끔찍한 테러 현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지금 저를 지켜줄 울타리는 하나밖에 없었다. 윤조는 운전석으로 기어가 클랙슨을 눌렀다.
분명 바깥으로도 큰 소리가 날 텐데, 저택은 일상처럼 고요했다. 슬슬 두려움에 손이 떨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무리 그래도 정한이 초짜 집사보다야 아버지의 뜻을 더 들어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 보안 요원들처럼, 정한도 저를 어쩌지 못하는 게 아닐까.
나쁜 예감에 숨이 가빠졌다. 윤조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계속해서 클랙슨을 눌렀다. 슬슬 울음이 나오려는데, 눈 부신 햇살 사이로 정한이 얼굴을 구기고 나타났다. 귀가 아파 죽겠다는 듯이.
“사장님!!!!”
윤조는 차창에 붙어 정한을 불렀다. 정한의 뒤로 비서가 곤란한 듯 따라왔다. 윤조는 정한을 부르다 비서를 향해 따졌다.
“그렇게 사는 거 아니에요!! 요즘 세상에 납치가 웬 말이에요?! 차라리 총으로….”
내내 당겨대던 문손잡이가 덜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윤조는 상대에겐 들리지도 않을 힐난을 그치고 문을 밀치고 나가 정한을 향해 달려갔다. 어찌나 헐레벌떡 달려갔는지 구두 한 짝이 벗겨지고 말았다.
비서가 차의 문을 닫으며 윤조의 구두를 집어 들었다. 윤조는 정한의 뒤에 숨어 눈치를 보았다. 비서에게 또 붙들릴까 두려웠다. 차 안에서 그를 욕하던 패기는 온데간데없었다.
“뭐 해, 안 신기고.”
윤조는 정한이 제게 한 말이라 생각했기에 퍼뜩 이해하지 못했다. 신으면 신었지, 신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비서가 제 앞으로 와 무릎을 꿇고 신발을 신겨주었을 때가 되어서야 정한이 비서에게 명령했음을 알았다.
“넌 입 뒀다 뭐 해? 평소엔 사장님, 사장님, 잘만 부르더니.”
“…너무 놀라서 그랬어요. 이 대낮에, 그것도 집에서 납치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정한이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봤다. 윤조는 코를 훌쩍이며 구두 끝을 바닥에 톡, 톡, 찍어댔다. 또 못난 얼굴을 했나 싶어 표정 관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울었어?”
“아뇨, 울기 직전이었어요.”
다행히 못난 얼굴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윤조는 정한의 뒤에 찰싹 붙어 다시 저택으로 돌아갔다. 무심했던 보안 요원들을 흘겨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쓰레기를 뭐 하러 다시 주워 와, 주워 오길?”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계단 위에서 호통치는 목소리에 윤조는 그만 정한의 등허리를 붙들고 말았다. 남자, 즉 정한의 아버지 주흠은 자신이 알파인 것을 숨기지 않는 타입이었는지, 윤조가 잠시 자리를 비운 짧은 사이에도 저택에 형형한 페로몬이 퍼져 있었다.
불쾌할 만큼 따끔한 경계의 페로몬이 윤조를 힘들게 했다. 호흡까지 힘들어질 지경이라 더더욱 정한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윤조는 거의 정한의 등에 얼굴을 묻고 가쁜 호흡을 몰아쉬었다.
“저, 저. 약해 빠져서는.”
살면서 이토록 선명한 알파의 페로몬은 처음 느껴 보았다. 성페로몬보다도 경험하기 어려운 경계 페로몬을 먼저 경험할 줄은 미처 몰랐다. 윤조는 제 노출된 피부로 따끔하게 찔러 오는 주흠의 페로몬을 어떻게든 씻어 내고 싶어 당장에라도 수영장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만 하세요.”
정한의 말에 주흠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뿜어내던 페로몬을 그치기는 한 모양인지 더는 피부가 따끔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주흠의 흔적이 저택에 안개처럼 자욱해 호흡은 어려운 편이었다.
윤조는 잔뜩 땀이 배어난 손으로 정한의 셔츠를 구겨 잡으며 떨었다. 피부가 마비된 듯 몸이 불편했다. 귀도 먹먹한 게 이따금 이명도 울렸다.
“다음에 왔을 때도 똑같으면 끌어낼 테니 그리 알아.”
계단을 내려온 주흠이 윤조에게 들으라는 듯 말하고 저택을 나갔다. 다리가 후들거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도 윤조는 꼼짝하지 못했다.
“죽겠어?”
정한이 여전히 등을 대어준 채 물었다. 윤조는 코를 훌쩍이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지탱하려 애썼다.
“…죽을 정도는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해줄까?”
“…어, 저… 수영장에 가고 싶어요.”
“그거 괜찮은 생각이네.”
“근데요, 사장님….”
“어.”
이제는 제 땀으로 눅눅하기까지 한 정한의 셔츠를 당기며 윤조는 턱을 들었다. 정한이 고개를 돌려 윤조를 보았다.
“저, 못 걷겠는데요.”
그래서, 어쩌라고? 그런 대답을 예상하며 정한에게 떠밀리지나 않으면 다행이라 생각하는 와중 몸이 두둥실 떴다. 비서보다는 정중한 모양새로 윤조는 정한에게 들려 복도를 가로질렀다. 평소보다 높은 시야로 바라본 저택은 여느 때와는 조금 달라 보였다.
테라스로 나오자마자 훨씬 기분이 나아졌다. 윤조는 정한의 어깨에 얹고 있던 턱을 들며 기댄 몸을 떼어내려 했다. 그에게 등과 엉덩이가 붙들려 있지 않았다면 그랬을 테다.
“사장….”
풍, 덩!
이만 놓아 달라 부탁하려는데 정한은 예고도 없이 윤조를 수영장에 집어 던졌다. 고르르륵, 밑으로 가라앉은 윤조는 주흠의 협박성 짙은 페로몬을 느꼈을 때보다도 더 힘든 시련을 맞이했다.
“수영, 못, 흐흡!”
바닥을 찍고서 겨우 헤엄쳐 올라간 수면 위로 노란 튜브가 툭, 던져졌다. 윤조가 늘 수영을 할 때마다 사용하는 것이었다. 냉큼 그리로 팔을 뻗어 안았다. 흐린 시야 너머로 선베드에 앉은 정한이 보였다.
“하아… 하아….”
“좀 살 것 같아?”
“덕분에요….”
튜브에 매달려 풀 사이드로 헤엄쳐 갔다. 그곳에 팔을 기대어 발로 살살 헤엄쳤다. 지면의 뜨거운 열기가 기분 좋았다.
“근데요, 사장님.”
흘러가는 튜브를 바라보던 정한이 윤조의 부름에 시선을 돌려 보았다. 도움을 받았기 때문일까. 평소보다도 잘생겨 보이는 건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겠다. 윤조는 그만 정한을 부른 것도 잊고 그늘진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만 보았다.
“불렀으면 말을 해. 감상 그만하고.”
“제가 언제 감상했어요?”
“아니야?”
“…흠, 암튼, 아까 그분이요. 사장님 아버지 맞으시죠?”
“어.”
역시.
윤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까부터 얼얼한 손을 주먹 쥐어 보았다. 하도 창을 두드렸더니 부은 모양이었다. 손을 쥐었다 펴며 윤조는 주흠에게 들은 말을 물었다.
“저한테 성과를 내라고 하시더라구요. 제가 달리할 일이 있었어요? 전 무슨 말씀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서….”
“네가 신경 쓸 건 없어.”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다음에 오셨을 때도 그대로면 끌어내신다는데….”
“너한테 하는 소린 건 아네?”
“모를 수가 있어요?”
“서 집사라면 가능하다 싶어서.”
“치….”
윤조는 정한을 향해 물을 뿌리려다 참았다. 오늘 저를 버리지 않고 도와준 것이 그저 고맙기만 했다.
“정말 끌어내실까요?”
정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생각에 잠겨 보였다. 윤조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정한에게 제의해 보았다. 그의 성격이라면 귀찮아서 하지 않고 있을지도 몰랐다.
“알려만 주시면 제가 해 볼게요. 좋은 성과를 낼지는 모르겠지만, 시도라도 해 봐야죠.”
“…….”
“그것만이라도 알아주시지 않을까요?”
“너 사장 누구야?”
“네?”
“사장 누구냐고.”
“…권정한 씨요.”
“그럼 사장 말 들어. 누가 뭐라 하든 신경 쓰지 말라고.”
“그럼 사장님이 저 안 끌려가게 지켜주시는 거예요?”
“네가 귀찮게만 굴지 않으면.”
“오늘처럼 이렇게 막무가내로 끌려가도 저 지켜주셔야 해요. 계속 저 데리러 와주실 거죠?”
“알았으니까, 넌 너대로 계속 살아. 쫄지 말고.”
“네. 그럴게요. 사장님만 저 지켜주시면, 저 사장님한테 평생 충성하고 살게요.”
“그놈의 평생.”
“진짠데.”
윤조는 입술을 삐죽이며 손끝의 물을 튕겼다.
“못생겼어.”
선베드에서 일어난 정한이 윤조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지적했다. 윤조는 저택으로 들어가는 정한의 등을 보며 더욱 못난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웃었다. 제 땀자국으로 얼룩덜룩한 등을 보고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장님!! 같이 가요!!”
윤조는 힘껏 몸을 일으켜 지면 위로 올라섰다. 축축하게 젖은 몸으로 껑충껑충 뛰어 테라스 문을 열었다. 이미 저 멀리 가 있는 정한이었지만 그가 곧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 예상대로 머지않아 정한이 나타났다. 손에 커다란 샤워 타월을 든 채.
“뭘 자꾸 웃어?”
“비밀이에요.”
정한은 윤조의 비밀이 조금도 궁금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되묻지도 않았다. 저라면 벌써 물음표 수십 개는 띄웠을 텐데.
“다 닦고 와.”
“네에!!”
윤조는 젖은 갈색 머리를 닦으며 크게 대답했다. 피부에 닿는 타월의 감촉이 기분 좋았다. 자꾸만 웃음이 났다.
* * *
목이 탔다. 수면이 부족하니 수시로 입이 마른 탓이었다. 정한은 서재 천장에 두고 있던 시선을 내려 꼭 닫힌 문을 보았다.
지금쯤이면 수영을 끝낸 윤조의 야식 시간일 테다. 그가 기적적으로 서재에 들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토록 움직이기도 싫을 줄이야. 조용히 몸을 빛내는 전화도 받기 싫었다.
“어.”
하지만 저를 잘 아는 인물이 이런 시간에 걸어온 전화라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정한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한석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굉장히 미안한 목소리로 운을 떼었다.
-내가 내일 하려고 했는데, 요 입이 자꾸 간지러워서.
“무슨 일인데.”
-회장님께서 우리 집사님이 궁금하시다잖아.
“…윤조?”
-어. 전에도 서 집사 자료 제출하라셔서 내가 전부 냈거든. 근데 또 요구하시는 거야. 아주 상세히 요구하시더라고.
“그래서.”
-알려 드렸지, 별수 있겠어? 신분 위조한 것도 이제 아실 거야. 내가 사정은 다 말했는데, 이 비서가 제대로 전달했을지는 모르겠네. 부디 우리 회장님께서 서 집사가 오갈 데 없는 몸인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는데….
“…….”
-내가 우리 회장님 성정을 아니까, 조금 우려가 돼서 말이야… 뭐, 혹시 벌써 끌려 나가고 그런 건 아니지…?
이미 한 번 끌려 나갔던 몸이다. 저를 지켜 달라고 떼쓰던 윤조의 얼굴이 떠올라 정한은 웃음을 흘렸다. 정한의 웃음소리에 한석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저런, 하며.
-걜 어쩜 좋냐. 운도 더럽게 없지. 그래서 걔 지금 어디 있는데?
“왜. 이번에도 픽업하게?”
-그럼. 그 얼굴로 돌아다니면 위험하지.
“서 집사 얼굴이 어때서.”
-그냥 두기는 위험하잖아. 이 험한 세상에.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이어지는 품평에 정한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이만 통화를 끝내고 싶어 그가 오해하고 있는 사실을 정정해주기로 했다.
“서 집사 집에 잘 붙어 있어.”
-아, 그래? 그렇지? 아무렴. 네가 데리고 있는데.
“알면 신경 쓰지 마.”
-어어, 그래, 그래. 다른 건 아니고, 위조한 게 마음에 걸려서 그랬어. 그럼 끊을게, 쉬어.
한석의 전화를 끊고 정한은 서재를 나왔다. 물을 마시려고 간 주방에서 수박 삼매경에 빠진 윤조를 발견했다. 오늘 낮, 아버지가 보내온 수박이었다.
먹을 사람이라고는 집사 하나밖에 없는데 두 통이나 보내왔다. 뭘 알고서 보낸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정한은 윤조가 수박 두 통을 혼자서 다 먹을 수 있으리라 의심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가 식탁에 올려 둔 수박만 봐도 이미 반 통짜리였다.
“어! 사장님 오셨어요?”
수박에 빠져 있던 윤조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정한은 손짓으로만 그를 앉힌 뒤 냉장고에서 물을 꺼냈다. 그대로 주방을 나서려다 말고 다시 수박을 먹기 시작한 윤조를 살폈다.
시선을 느낀 윤조가 고개를 들어 정한을 보았다. 먹으라는 말을 할 수 없어 열심히 말을 찾고 있는 얼굴이었다. 정한은 윤조의 젖은 속눈썹이나 그의 목덜미에 붙은 덜 마른 머리칼로 시선을 두며 물을 마셨다.
“이 밤에 먹기엔 양이 좀 많죠…?”
민망했는지 쭈뼛거리는 윤조를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정한은 훌쩍 바닥을 보인 물을 마저 마시고 빈 통을 구겼다. 어째 물 한 통을 다 비웠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입이 말랐다.
“이리 주세요.”
“됐어. 먹기나 해.”
주방을 나서기 전 윤조의 뺨에 고인 수박 물을 손짓으로 알려주었다. 하얀 뺨을 붉게 적신 물이 거친 손길에 슥슥 지워졌다.
“…….”
그걸 보고 있자니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정한은 무심코 제 볼을 쓸어 보았다. 있을 리 없는 흔적이 제 손등에 배어나 번져 있는 듯했다.
“사장님?”
“어.”
“시키실 일 있으세요?”
“없어. 계속 먹어.”
“네.”
윤조는 그제야 안심한 얼굴로 수박을 베어 먹었다. 정한은 자신이 지나치게 윤조를 응시한 것을 뒤늦게 자각하고 서둘러 주방을 나왔다.
돌아온 서재에서 문을 연 채 걸음을 멈춰 섰다. 그때처럼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에어컨 바람일 뿐이었지만 장소의 생김새가 닮아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되었다. 그간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윤조의 뺨에 고인 수박 물을 본 순간 시작되었다.
정한의 시선이 서재 왼쪽 바닥에 한 번, 오른쪽 바닥에 한 번, 머물렀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3개월 전, 소식을 듣고 달려간 장소에서 정한은 왼편에 쓰러져 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저와는 조금도 피가 섞이지 않은 남이었지만 지난 20년간 어머니라 부르며 지냈으니 어머니가 맞긴 했다.
‘형….’
그 어머니가 데려온, 마찬가지로 피 하나 섞이지 않은 동생이 있었다. 정한보다는 훨씬 어린 나이였다. 그러니까 지금… 윤조의 나이와 비슷했다. 저와는 어느 하나 닮은 구석은 없었지만 20년간 키우다시피 했기에 나름대로 애착이 있는 녀석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몰라도 정한은 그만은 살려둘 생각이었다. 아버지가 정한의 위험을 직접 차단할 필요는 없었다는 얘기였다.
‘형, 나 살려….’
채 말을 끝맺지 못한 녀석이 눈앞에서 사살된 순간 뜨거운 피가 오른쪽 뺨에 튀었다. 정한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기에 녀석이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만 들었다. 그가 죽으면서 내내 자신을 바라본 건 몰랐다.
‘왜 그러셨어요.’
‘알면서 물어?’
‘제가 알아서 할 작정이었습니다.’
‘어지간히도. 내 언제 네가 끝을 보나 했다. 저게 주제도 모르고 너한테 덤비려 한 걸 도대체 언제까지 내버려 두나 했지.’
무참하게 두 생명을 앗아 간 총구로 왼편을 가리키며 아버지가 말했다. 정한은 뺨에 튄 혈흔을 손등으로 닦아 내며 한숨을 삼켰다.
‘꼭 죽이실 필요까진 없잖아요. 특히 예원이는.’
‘저게 제일 주제를 몰라. 널 진짜 형으로 알잖아!’
‘형 맞잖아요.’
‘그러니까 쟤 엄마가 못난 꿈을 꾸는 거지! 네가 그렇게 무르게 대하니까!!’
‘그럼 왜 데려오셨어요? 어머니 돌아가신 뒤로 오메가는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더니.’
‘네가 하도 심심해 보여서 데리고 온 것뿐이야! 난 네 엄마 말고는 없어. 또 알면서 묻지?’
아버지는 귀찮은 손길로 비서에게 총을 건네고 좌우를 가리켜 치우라 명령했다. 정한은 카펫에 둘둘 말린 두 시체가 제 곁을 지나쳐 나가는 동안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얼굴이 그게 뭐냐. 씻고 와.’
정한은 때때로 아버지 주흠이 제게 쏟는 감정이 ‘사랑’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날, 그때 당시 정한은 아버지의 감정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세상 유일하게 남은 어머니의 흔적. 바로 자신에게 가해질 해를 당신 손으로 서슴없이 제거하는 행위를 통해 깨닫는 건 꽤 기이하게 여겨졌지만.
아무튼 사랑에도 여러 형태가 있고 또 방식이 있었기에 사랑인 것은 인정할 수 있어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벌어지는 일을 모두 용인할 수는 없었다.
언제 뜨거운 피를 쏟은 사람이 존재했냐는 듯 깨끗한 바닥을 보며 정한은 속이 뒤집히는 듯했다. 그러다가 서리를 맞은 것처럼 정수리부터 서늘해지기도 했다.
한순간에 잃은 20년의 정 때문인지, 제 계획이 어그러진 이유 때문인지, 그 둘 다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날 이후로 정한은 계속해서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어느 날은 미치게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가, 또 어느 날은 그런 자신을 죽이고 싶어졌다. 아버지가 죽는 건 싫고, 죽이고 싶기도 하고, 죽일까 봐 두려워 그런 자신을 죽일까, 싶고. 이리저리 마음이 튀어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원이었다. 얼굴 위로 뚝뚝 떨어지는 아버지의 눈물은 지나치게 뜨겁고 또 무거웠다. 하지만 눈물은 식고 또 말라버리기 마련이었다.
문득 태평히 받은 한석의 전화가 마음에 걸렸다. 정한은 되도록 아버지와 부딪치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서로의 뜻이 완강한 만큼 주변이 황폐해졌기 때문이다. 지독하게 서걱거리던 한때는 한 번으로 충분했다.
정한은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제 뜻대로 들여놓은 것을 떠올렸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었기에 당신에게 심히 거슬리는 것일 테다.
그러니 아마도 다음 타깃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다음 타깃이 허리춤에서 얼굴을 빠끔히 내밀었다. 정한은 저를 보고 미소 짓는 윤조를 내려다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수박 물이 고여 있던 볼에 핏자국이 난 듯한 착각이 일었다.
“사장님…?”
“…놀랐잖아.”
“죄송해요. 불러도 대답이 없으셔서….”
정한은 윤조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다 희미하게 남은 붉은 자국이 신경 쓰여 눈을 찌푸렸다.
“왜요…? 저 뭐 묻었어요?”
지워지지도 않을 마른 자국을 엄지로 꾹꾹 눌러대자 윤조의 고개가 휙휙 뒤로 밀려났다. 정한의 거친 손길에 입술을 삐죽인 윤조가 씻고 오겠다며 서재를 나갔다.
정한은 윤조가 나가는 모습을 보다 소파로 가 걸터앉았다. 제대로 정신을 놓고 있었던 모양인지 윤조가 가져다 놓은 티 세트가 테이블 위에 있었다.
“차 우려 드릴게요.”
얼굴을 씻고 돌아온 윤조가 맞은편에 앉았다. 정한은 티 세트를 제 앞으로 가져가는 윤조를 보며 물었다.
“서 집사가?”
“네.”
홀로 수박 먹은 게 미안했던 모양이다. 차도 마시지 않았다면 영양 주스를 가져왔을까. 생각하자니 웃음이 나서 정한은 입술에 힘을 주었다.
“할 줄 알아? 차 마시는 꼴을 못 봤는데.”
“한 번 해 보려구요.”
“나 입맛 까다로워.”
“놀랍지 않은 사실이네요.”
정한은 윤조가 하는 양을 소파에 기대어 관찰했다. 딴에는 공부한 게 있는 모양인지 곧잘 흉내를 내었다만, 맛은 기대하기 어려워 보였다.
“드셔 보세요.”
“너부터 마셔 봐.”
“사장님 드리려고 우린 건데요?”
“먼저 마셔 보라니까.”
섭섭한 얼굴로 찻잔을 든 윤조가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닌데 고개를 돌려 잔을 홀짝였다. 당연히 얼굴을 구길 줄 알았던 예상과 달리 윤조의 눈썹이 껑충 뛰었다.
“드셔 보세요.”
“거짓말.”
“네?”
“지금 장난하는 거지?”
차로 사약을 우려내어 놓고 드셔 보라니. 혹시 서윤조가 저를 죽이러 온 첩자였나, 그래서 아버지가 그리도 그를 캐내려 했나, 별생각이 다 들었다.
“드셔 보시라니까요? 맛이 아주 일품이에요.”
정한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윤조를 흘겨보며 찻잔을 들었다. 조금 전 윤조가 홀짝거린 자리 위로 정한의 입술이 닿았다. 아주 소량으로만 입술을 적신 정한은 그럴 줄 알았다 싶어 곧장 찻잔을 내리고 입을 닦았다.
“왜요?”
“미각이 없어?”
“원래 차는 이런 맛인 거 아니에요?”
이 저택에서 지낸 지도 꽤 된 듯한데, 아직 차 맛도 모르는 집사라니. 정한은 사장인 제 탓이려니 하며 윤조를 위해 친히 차를 우려주었다. 그가 내린 차와는 차원이 다른 빛깔이 찻잔에 고였다.
“와아… 색이 되게 고와요.”
“감탄할 때가 아니야. 보고 배우라고.”
“네.”
“대답은 잘하지.”
“대답이라도 잘해야죠.”
윤조가 기쁜 얼굴로 찻잔을 들어 마셨다. 정한은 그의 감상을 기다렸다. 느긋하게. 한데 아무리 기다려도 좀처럼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돌아왔다.
“왜.”
“아니… 전, 제가 우린 게 더 맛있어서요. 전 고상한 취향이 못 되나 봐요.”
“그런가 보네.”
정한은 윤조의 손에 들린 찻잔을 빼앗으려 했다. 그러자 윤조는 몸을 돌려 제 찻잔을 사수했다.
“이 사약이나 마셔. 그건 내놓고.”
“싫어요. 사장님이 주신 건데…. 다 마실래요.”
기껏 우려준 것을 음미도 하지 않고 빼앗길까 한 번에 입에 털어 넣은 윤조가 뜨거움에 목을 붙잡으며 그제야 찻잔을 내려놓았다. 정한은 기가 차서 어느 하나를 지적할 수도 없었다. 그저 웃을 수밖에.
“요즘 자주 웃으시네요.”
“누가 재롱을 많이 피우거든.”
“제가요?”
정한은 대답하지 않고 소파에 깊이 몸을 묻었다. 무슨 할 말이 있는지 윤조가 몸을 앞으로 숙이며 바라보았다. 말해 보라는 손짓을 해 보이자 윤조는 그제야 이야기보따리를 펼쳐 보였다.
다름 아닌, 얼마 전 신간으로 들어온 소설 이야기였다. 저보다도 먼저 읽었기에 내용을 알고 있는 윤조가 스포일러를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린 모양이었다.
정한은 윤조가 본 소설은 오로지 그를 위해 구매한 것이라 읽을 예정에 없었으므로 기꺼이 경청해주었다. 다만, 그의 언변이 그다지 유창하지 못해서 이야기가 이리로 튀고 또 저리로 튀고, 그저 엉망진창이라 내용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윤조의 이야기를 따라가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와 동기화가 되었다. 어쩜 이렇게 단순할까. 정한의 눈꺼풀이 슬쩍 가늘어졌다. 아무래도 이 요망한 집사가 또 주문을 외우는 것 같다.
“끝이에요.”
슬슬 잠이 들려는데 이야기가 끝났다. 정한은 씁쓸하게 웃으며 제 무릎을 꽉 붙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종일 떠들어 보라 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랬다간 제 불면증에 대해 의문을 품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이 저택에 평생 살기 위해 아버지만큼 제 목숨을 애지중지하는 그였으니, 호들갑 떠는 꼴은 보기 싫었다.
“안 주무세요?”
“얘기 하나만 더 해주면.”
“제가 해 드리는 얘기가 재미있으세요?”
정한은 입술에 침을 바르고 거짓을 고했다. 꽤 재미있네, 하고.
“정말요? 제 얘기 재미있다는 사람 처음 봐요.”
“…그렇겠지.”
“네?”
“어서 해 봐. 지금 심정으로는 월급도 올려줄 것 같으니까.”
“그 정도예요?”
“안 해?”
“할게요! 할게요!”
정한은 소파 위에 길게 누워 취침 자세를 취했다. 조금 의아하게 보던 윤조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구석에 곱게 접어 둔 담요를 가져왔다.
“사장님 눈이 금방이라도 잠드실 것 같아서요.”
“그래도 계속 얘기해.”
“네. 이거 덮으세요. 에어컨 바람에 배탈 나면 어째요?”
정한은 윤조가 건네준 담요를 배 위에 올렸다. 그제야 안심한 얼굴로 앉은 윤조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실은요….”
저 몰래 또 먼저 읽은 게 있는지 그의 고백부터 시작되었다. 정한은 툭툭 끊어지는 의식을 느끼며 생각했다. 내 집사 서윤조는,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꽤 괜찮은 걸지도 모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