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열기가 몸을 감싸는 느낌에 참지 못하고 눈을 떴다. 창을 열고 잔 탓인지 방 안 공기가 더웠다. 여름은 여름인 모양이었다.
늦잠을 잤나 싶어 눈을 굴려 시계를 확인했다. 시침과 분침이 정확히 일자를 그린 아침 여섯 시. 어딘지 모를 안도감과 어이없는 기분이 교차했다.
윤조는 침대에서 뭉그적거리며 땀이 배어난 이마를 매만졌다. 이렇게 아침부터 더운 걸 보면 오늘 날씨가 대단할 듯했다. 제 컨디션 역시 대단할 듯하다. 안 좋은 쪽으로.
꼼짝도 하기 싫을 만큼 몸이 무거웠다. 후끈하게 열이 나는 게 감기라도 걸렸나 싶어 약을 찾을 요량으로 몸을 일으켰는데 머리가 핑핑 돌아 그대로 다시 누웠다.
맴, 맴맴, 맴맴.
열린 창 너머로 매미 우는 소리가 들렸다. 윤조는 눈을 감은 채, 제 몸을 짓누르는 듯한 감각에 진저리치며 더운 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쉬는 게 좋을 듯했다. 하루쯤은 정한도 그러라고 하지 않을까. 자격 미달인 집사라도 쉬는 날은 있을 거다. 그러고 보니 명우가 쉬는 날 두베 구경을 시켜준다고 했었는데. 명우의 연락처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아직도 사과하지 못해 무거운 마음이 응어리처럼 남아 있었다.
일어나야 한다 생각하면서도 눈꺼풀은 자꾸만 무거워졌다. 일찍 일어난 것이 소용없게도 윤조는 다시 잠에 빠지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때는 정오가 훨씬 지나 있었다. 일자로 뻗어 있던 시침과 분침이 서로 만나고 또 몇 차례 헤어지길 반복한 사실을 깨달은 순간 윤조는 침대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집사가 있든 말든, 정수리에 태양이 지글거리든 말든 내버려 두는 게 이 저택의 장점이라면 장점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관심 한 톨 없는 게 단점이기도 했다. 단둘만 사는 저택인데 어디서 누가 죽어 가도 모를 일이었다.
문득 가슴이 서늘한 기분이 들어 윤조는 잠옷 바람으로 방을 나섰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그렇게 덥더니 지금은 으슬으슬하니 추웠다. 에어컨 바람 때문만은 아닐 테다. 강렬한 예감이 윤조를 떨게 했다.
“사장님…. 안에 계세요?”
노크까지 해도 정한은 대답이 없었다. 윤조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을 살폈다. 다행히 상상도 하기 싫은 무서운 일은 눈앞에 펼쳐져 있지 않았다. 급한 안도를 하며 시선을 돌리는데 욕실 쪽에서 소음이 일었다.
설마.
깜짝 놀라 안으로 발을 들인 순간, 정한이 욕실에서 나왔다. 언뜻 보기에 맨몸인 것 같아 윤조는 곧장 시선을 들어 올린 채 뒤뚱거리며 등을 돌렸다.
“계신 줄 몰랐어요.”
“알았으면 쥐새끼처럼 안 들어왔을 건가?”
“하하하…. 또, 쥐라고 하신다.”
“꼴은 왜 그래?”
“아. 맞다.”
윤조는 정한의 상태를 잊고 무심코 등을 돌렸다. 다행히 정한은 허리춤에 수건을 감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계속 보고 있기에는 떳떳하지 않은지라 윤조는 슬그머니 시선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저, 외출 좀 할 수 있을까요?”
“어디 가게.”
“약국이요.”
“아파?”
“아픈 건 아니고요, 곧 히트 사이클 올 것 같아서요.”
확인이라도 할 듯 윤조를 향해 정한이 다가왔다. 역시 베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여전히 윤조가 의식할 만한 페로몬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장님….”
정한이 몸을 숙여 윤조의 목덜미 냄새를 맡았다. 윤조는 밤새 흘린 땀이 민망해 정한의 가슴을 붙잡고 밀어냈지만, 바윗돌처럼 단단한 근육만 만져질 뿐,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괜히 가슴에 얹고 있는 손이 민망해 윤조는 조심스레 손을 떼고 정한을 피해 옆으로 물러났다.
“땀 흘려서….”
정한의 코끝이 닿은 목덜미를 긁적이며 윤조는 아려오는 팔을 매만졌다. 오한이 일기 시작한 듯했다.
윤조와 같은 열성 오메가는 히트 사이클이 감기와 비슷한 증세로만 그치곤 했다. 그 탓에 ‘발정’이라고 할 만한 경험을 해 보지 못해 막연히 동경하는 이도 있었다. 윤조로서는 그 ‘발정’을 하지 못해 다행이라 여기는 편이었다. 여러모로 귀찮아 보이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힛싸라며.”
“네.”
“근데 돌아다니겠다고?”
“방금 맡아보셔서 아시겠지만, 아주 약해요. 몸이 조금 아픈 것 빼고는 일상생활에 지장도 없을 정도라 잠깐 다니는 건 괜찮을 거예요.”
“글쎄. 그건 내가 확인을 할 수 없어서.”
“아, 그럼… 사장님….”
베타라고?
생각하자니 주흠이 그렇게 페로몬을 터트렸을 때도 정한은 멀쩡했다. 그가 알파이든 오메가이든 우성이라면 버텼겠지만, 아니었다면 저처럼 어려웠을 테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가 어떤 우성일 확률은 있었다.
그런데 페로몬을 확인하지 못한다고 하니, 지금은 그가 베타라고밖에 설명이 안 되었다. 윤조는 정한이 베타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오메가라고 하는 편이 충격이 덜 하리라.
윤조는 정한의 신상을 캐묻지 않기 위해 물음을 삼키고 외출 허락을 다시 구했지만, 정한은 허가하지 않았다.
“일상생활에 지장 없으면 그냥 지내. 여기서 너한테 발정할 사람 없으니까.”
“그렇긴 하지만….”
“시중에 나온 억제제는 너한테 독해. 힘든 거 못 느꼈어?”
“알아요, 저도. 그래서 쪼개 먹는단 말이에요.”
정한이 기가 찬 듯 보았다. 윤조는 혼이 날 것 같은 분위기에 입을 쏙 닫고 못난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 애썼다. 눈치를 읽었는지 정한은 더 잔소리하지 않았다.
“멀쩡해질 때까지 쉬어. 괜히 돌아다니지 말고.”
정한에게 등이 떠밀리며 퇴출당하기 직전, 윤조는 다급히 제 오래된 물음을 던졌다.
“그래서 말인데요, 사장님. 전 쉬는 날이 없어요?”
“늘 쉬는 거 아니었나?”
“저 나름대로 일정이 있어요, 사장님. 매일 쓸고 닦고 얼마나 바쁜데요.”
부정할 순 없는지 정한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묻지 말고 마음대로 쉬어. 집을 나가서 며칠을 있다가 와도 좋아.”
위험하게 느껴지는 정한의 발언에 윤조는 단호히 선을 그었다.
“그렇게까진 필요 없어요.”
엄연히 그를 죽지 않게 감시하는 것 역시 제 할 일이었다. 나쁜 일을 시도해도 다시 살아날 확률이라도 있는 것. 그것이 제 존재 이유이기도 했다.
“그럼 마음대로 해.”
귀찮은 기색으로 문을 닫은 정한의 발걸음이 멀어졌다. 윤조는 정한의 손이 닿은 등이 간지러워 잘 닿지 않는 손으로 벅벅 긁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일단 배를 채우고 방에 틀어박혀 찜해 두었던 소설을 읽을 생각이었다.
쪼개어 먹는 억제제에 의지하지 않고 처음으로 온전히 맞이한 발정기는 막연히 불안하게 여겼던 것보다 훨씬 더 윤조를 들뜨게 했다. 휴가나 다름없는 일이라 열 달에 한 번 찾아오는 일이 아쉬울 정도였다.
꼬박꼬박 약을 챙겨 먹는 윤조와 달리 사촌 동생들은 일절 약을 먹지 않았는데, 평소와 다름없을 정도로 평범해 윤조의 미열마저도 부러워했다. 그래서일까. 윤조는 억제제에 기대지 않은 제 모습을 전혀 몰랐다. 하루만 방에서 푹 쉬고 나면 사라질 열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정한의 손이 닿은 등에서부터 시작된 간지러움이 차차 온몸에 퍼져갔다.
“으으….”
윤조는 손톱을 세우지 않으려고 애쓰며 침대에서 몸을 비벼댔다. 꼭 벌침에 쏘였을 때처럼 이리저리 엉덩이를 흔들다가 알아챘다. 역시 약을 먹어야 했다고.
이러다가 애먼 짓을 할 것 같아 정한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시간은 자정이 지난 지 한참이라, 그를 깨울 생각을 하니 까마득했다.
윤조는 정한의 방 앞을 서성거리며 갈등했다. 정한이 시키는 대로 했으니, 당연히 그에게 도움을 청해도 된다는 생각이 반. 고작 이 간지러움이 뭐라고, 자신이 지나치게 엄살을 피우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반이었다.
이 밤만 어떻게 보내면 될 것 같은데. 달빛이 내린 창가를 보며 마음을 굳혔다. 막 발길을 돌려 방으로 향하려는데 문이 열렸다. 윤조는 그대로 굳어 고개만 돌려 정한을 보았다.
“일찍도 온다.”
“네?”
“처음일 거 아냐.”
“힛싸 겪는 거요?”
“그래. 몸이 놀라지 않겠어?”
“네…. 그런 것 같아요. 놀랐는지 자꾸 가려워요.”
다리가 배배 꼬였다. 피부를 기는 듯한 미약한 성감이 윤조는 도무지 낯설기만 했다.
“딱히 서 집사한테 처방해줄 약이 내겐 없어.”
“그럼 어떡해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서 집사가 선택해.”
윤조는 땀이 배어난 손으로 잠옷 바지를 붙잡고 정한의 말을 경청했다.
“하나는 자는 거야.”
“그걸 못해서 지금 사장님 찾아온 거예요.”
“수면제를 줄게.”
“그럼 괜찮아질까요?”
“대부분 잘 자던데?”
“어떻게 아세요?”
“재워 봤으니 알겠지.”
“그럼, 남은 하나는요?”
“발정기 욕구를 해소해주는 거야.”
“어떻게요…?”
“글쎄, 내가 안 선 지 오래라 밑으로 도와주진 못하겠고, 손이라면 가능할 것 같은데.”
윤조는 제 귀로 들은 말이 정한의 입에서 나온 게 맞는지 믿을 수 없어 눈을 크게 떴다. 정한은 자신을 맞이할 때와 다름없는 얼굴로 윤조를 내려다보았다. 이 깊은 밤과 어울리는 평온한 표정이었다.
“서 집사 같은 경우에는 열성이니 한 번이면 될 거야. 오르가슴 한 번이면 수면제보다도 효과가 좋겠지. 나로서는 이쪽을 추천해. 수면제는 임시방편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근육통으로 며칠 몸이 고생하거든.”
다시금 갈등에 휩싸인 윤조는 저도 모르게 제 몸을 끌어안고서 피부를 벅벅 긁었다. 정한의 빤한 시선이 아니었다면 상처가 날 때까지 긁었을지도 몰랐다. 윤조는 두 손을 맞잡고 고민했다. 무엇을 선택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차선책으로…, 제가 혼자 하는 건 안 될까요?”
“그게 됐으면 이 세상 오메가들이 뭣 하러 약을 먹고 살겠어?”
“하하하….”
“남성체의 경우 자극점이 깊어서 서 집사 손 크기로 볼 땐, 간만 보는 게 겨우일 텐데.”
“…….”
“평소에 자위 안 해? 그럼 알 거 아냐. 만족 못 하지?”
“아, 그게….”
윤조는 꿈을 꾸듯 아득한 표정으로 정한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이런 대화를 하고 있담?
그렇게 생각하는 한편으로 정한이 내어주는 길을 따라가고픈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오르가슴 한 번이면 끝난다니까. 며칠 고생할 필요 없이.
“그 멍청한 표정은 뭐야?”
“제가 사장님 앞에서 엉덩이를 까고, 신음 흘리는 짓을 할 수 있을까, 가늠 중이었어요.”
“수면제 생각은 없나 보네.”
“이걸 추천하신다면서요?”
“언제 내 말을 그렇게 잘 들었어?”
“전 늘 사장님 말씀 잘 들었어요.”
“입술에 침이라도 바르지 그래?”
윤조는 냉큼 입술에 침을 발랐다. 그런 저를 어이없이 보던 정한이 들어오라는 듯 몸을 비켜섰다. 윤조는 저 멀리 보이는 정한의 침대를 향해 한 발 내밀었다.
온몸에 퍼진 간지러움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한곳으로 집중되는 듯했다. 엉덩이를 움찔거리며 윤조는 뒤를 돌아보았다. 문을 닫고 다가온 정한이 침대를 가리켰다.
윤조는 느릿느릿 걸음을 옮겨 정한의 침대 앞에 섰다. 발끝까지 바짝 붙여 선 침대 위로 엎드린 채 잠옷 바지를 벗어 내렸다. 반달처럼 엉덩이 반쪽이 드러났을 때, 손을 멈추고 허리를 폈다. 더러워지더라도 최대한 정한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 만큼만 더럽히고 싶었다.
“타월 가져올게요.”
윤조가 욕실에서 샤워 타월을 가지고 와 침대 위에 까는 동안, 정한은 손에 착 달라붙는 장갑을 끼고 나타났다.
“그러고 계시니까, 사장님 의사 선생님 같아요. 꼭… 병원에 치료받으러 온 느낌이에요.”
마치 항문 쪽 질환으로 의사를 찾은 환자처럼 윤조는 하의를 몽땅 탈의하고 정한의 손짓에 따라 침대 위로 엎드렸다.
“치료 맞아.”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할 것 같아요.”
“치료 맞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맞아.”
“네….”
정한의 말로 벌써 치료가 시작된 듯, 전보다 몸을 떠도는 간지러움과 열기가 축 가라앉은 듯했다. 하지만 정한이 장갑 낀 손으로 엉덩이를 벌린 순간, 단순한 착각인 것을 깨달았다. 긴장으로 얼은 몸에 감각이 둔해진 것뿐이었다.
“꽤 흥건하긴 한데, 이걸로는 모자라.”
그렇게 일일이 말해주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윤조는 민망한 기분에 침대에 묻은 얼굴을 매만졌다. 열이 올라 손끝이 홧홧하게 느껴졌다.
“서 집사.”
“네…?”
“대체할 게 없어서 그러는데, 침 좀 뱉어 볼래?”
수면제 먹을걸. 그놈의 근육통이 뭐가 대수라고.
윤조는 제 눈앞에 나타난 하얀 손가락을 본 순간 깊은 후회를 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넉넉히 뱉어.”
긴장한 탓인지 입 안이 삐쩍 말라 아무리 모아서 뱉어 보아도 정한의 손은 물러나지 않았다.
“저…, 입이 말라서 그런지 침이 잘 안 나와요, 사장님.”
그제야 물러간 정한의 손이 미련 없이 윤조의 주름 위로 향했다. 가늠하듯 빽빽한 주름을 따라 원을 긋던 손가락이 슬며시 틈새를 가르려다 멈추었다.
“서 집사만 괜찮으면 침 좀 뱉어도 될까.”
“저야 괜찮은데…, 사장님은 괜찮으시겠어요?”
“안 될 게 뭐야?”
윤조는 또 아득해지는 기분에 허공으로 멍하니 시선을 던지다 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렸다는 듯 가벼운 압박감이 축축하게 던져졌다. 고작 그 두 번의 침이 무어라고. 그 가벼운 두드림이 무어라고, 몸이 멋대로 반응했다.
윤조는 침음을 삼키며 몸을 움찔거렸다. 피부 겉을 기어 다니던 간지러움이 속까지 침투해 돌아다니는 듯했다. 오히려 전보다 더 심해진 느낌에 윤조는 정한을 돌아보았다.
정한은 건조한 눈길로 오로지 치료에 집중한 의사처럼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움찔거리는 윤조의 빠듯한 틈새로 파고든 정한의 손가락이 꿀꺽꿀꺽 삼켜졌다.
“잘하네.”
뭘 잘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윤조는 제 뒤를 가르고 들어온 손가락의 존재감이 지나치게 강렬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가 손가락 마디를 굽힐 때마다 눈앞이 번쩍번쩍 빛나는 듯했다.
“흐… 읏.”
집요하게 파고든 정한이 마뜩잖은 숨을 내쉬며 윤조의 왼팔을 잡아당겼다. 그리 세지 않은 힘이었지만 윤조의 몸은 바람 앞의 성냥처럼 기우뚱 넘어지며 모로 누웠다.
“…….”
윤조는 정한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어 눈짓으로 의사를 물었다. 어쩌면 괜한 선의를 베풀었다고 생각한 걸까. 그렇다면 저와 뜻이 같으니 그만두자고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윤조는 입술을 달싹이며 자신이 먼저 운을 떼려고 했다.
“다리 벌려.”
제대로 잘못 짚은 듯했다. 그만두기는커녕 드디어 본격적으로 시작된 참이었다. 윤조는 이 방에 들어올 때처럼 홀린 듯 제 다리를 벌려 보였다.
“이렇게요…?”
모으고 있던 다리를 슬그머니 벌려 보이자 왼쪽 다리가 허공에 떴다. 이 무슨 꼴사나운 모습인지. 윤조는 정한에게 다시 눈짓을 주었다.
“내 어깨에 걸쳐도 돼.”
말이야 쉽지. 집사 다리가 사장 어깨에 걸릴 일이 세상천지 어디 있을까. 윤조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허공에 뜬 발을 천천히 움직여 정한의 어깨에 슬며시 올려놓았다. 거의 무게를 싣지 않은 채로.
정한이 따분한 얼굴로 윤조의 발목을 붙잡고 제 오른쪽 어깨로 옮겼다. 윤조는 눈을 깜박이며 그의 의도를 읽으려 했다. 하지만 눈을 깜박일 때마다 발목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갈 뿐,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픔이 느껴질 정도의 힘이 가해졌는데도 불구하고 히트 사이클 여파 때문인지 정한이 주는 압박감이 묘한 흥분으로 다가왔다.
“이걸 느껴?”
“…안 느꼈는데요?”
“그럼 이건 뭔데.”
정한이 내내 꽂고 있던 손가락으로 지적하듯 내벽을 긁어 대었다. 윤조는 몸을 움칫거리며 침대 시트를 붙잡았다. 이 또한 윤조를 흥분케 했다.
“제대로 기대.”
발목을 압박하던 힘이 멀어졌다. 윤조는 그제야 완전히 마음을 놓고 정한의 어깨에 둔 발을 뻗어 편하게 기대었다. 그의 얼굴 옆에 전시된 제 발을 보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가늠할 수 없는 긴장이 몸을 굳게 했다.
“힘 빼.”
벌어진 다리 사이로 몸을 붙여 온 정한이 제 무게를 실으며 안을 쑤셔대었다. 꼭꼭 숨어 있던 물이 범람하는 샘처럼 윤조의 허벅지 안쪽으로 흘렀다.
“흐, 아, 흐… 읏. 아!”
“어디가 좋은지 말해 봐.”
“하아, 하… 흐… 읏. 거, 거기.”
“여기?”
“으응…, 으, 네, 거기요.”
그는 허투루 하는 말이 없었다. 정확히 짚어낸 ‘거기’에 윤조는 달뜬 숨을 내뱉었다.
“허…, 으읏….”
평소에도 유난히 긴 손가락이라고 생각했지만, 도대체 어디까지 닿나 싶을 정도로 안을 파고든 손가락이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자신을 휘저어 놓는 건 고작 손가락 하나인데 제 몸에 태풍이 몰아치는 듯했다. 금방이라도 그 매서운 기운에 휩쓸려 어딘가로 사라질 것만 같아 윤조는 두 팔을 뻗어 정한의 베개를 당겨와 끌어안았다.
“후으… 하아…, 후윽….”
베개에 고개를 묻고 숨을 들이마셨다. 정한의 냄새가 났다. 그가 쓰는 샴푸와 바디 워시 또 스킨. 그를 이루는 모든 생활의 냄새를 들이마시며 윤조는 흔들렸다. 배가 바짝 조이고 또 풀어졌다. 이대로라면 곧 끝을 볼 수 있을 듯했다.
“아, 으, 응, 흣…!”
닿을 듯 말 듯한 안타까움에 어깨를 떨었다. 종국에는 정한의 손목을 붙들고 제게 당기기까지 했다. 눈앞이 불투명해질 정도로 몽롱한 자극이 윤조를 충동질했다.
“바로 누워봐.”
윤조는 숨을 헉헉대며 오로지 정한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정한을 마주 본 채 그에게 보란 듯 다리를 벌려 보였다. 입가로 흥건하게 고인 침이 흘러넘쳤다.
“침 잘만 흘리면서.”
빈손으로 침을 닦아준 정한이 윤조의 등을 일으켜 안아 몸을 둥글게 만들었다. 그러자 윤조가 기대했던 곳까지 정한의 손이 닿았다.
“어으으윽!!”
허벅지 안쪽 근육과 납작한 아랫배가 덜덜 떨리며 정한의 손을 반겼다.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윤조는 무릎 밑을 당겨 안으며 더욱 몸을 접어 그의 손가락이 안으로 들어오도록 유도했다. 입으로는 기괴한 비명을 질러가며.
“어흑… 으윽! …허, 사장님, 거기… 으응, 거기, 거기, 만져… 흐읍, 주세요.”
윤조는 취한 사람처럼 둔탁한 발음으로 정한을 불렀다. 엉덩잇살이 짓눌리도록 파고든 정한의 손이 진동하듯 떨렸다. 덜렁거리던 윤조의 성기가 빳빳하게 힘을 받아 섰다. 손으로 주물러서는 발기하기 어려운 오메가의 성기가 탱탱하게 열을 올렸다.
“다 됐어, 조금만 더 해 봐.”
정한의 손끝에서부터 느껴 본 적 없는 열기가 온 신경을 타고 흐르는 듯했다. 신경을 불태운 열기는 심장에 고여서 윤조를 들뜨게 했다. 제게는 없는 줄 알았던 열이 이렇게나 생생하게 존재했을 줄은 몰랐다.
“아, 으응! 하… 잠깐, 흐읏, 잠…!”
지지할 곳을 찾던 손가락은 정한의 잠옷을 움켜쥐고, 발가락은 딱딱하게 오므라들었다. 윤조는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벌벌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침이 흥건한 입을 우물거리면서도 윤조는 이 열기가 끝나지 않았으면 했다. 언제 또 맛볼 수 있을까. 혼자서는 다시는 맞이할 수 없는 열이라는 걸 이제는 알았다.
“으응, 읏….”
오르가슴에 이른 윤조에게 꽉 물려 있던 정한의 손가락이 내벽을 쓰다듬듯 더듬었다. 윤조는 정한의 손길을 따라 간간이 몸을 떨며 남은 여운을 즐겼다.
“하아….”
땀에 젖어 몸에 들러붙은 상의의 축축함이 조금도 거슬리지 않았다. 저를 빤히 살피는 정한의 시선도 부끄럽지 않았다. 흥분이 가신 자리에 시원한 바람이 부는 듯했다. 윤조는 정한의 옷자락을 움켜쥔 손가락에 힘을 놓고 그대로 침대에 등을 대었다. 기분 좋은 낙하였다.
“이제 좀 편해?”
“…네.”
윤조의 대답 뒤로 정한이 천천히 손을 빼내었다. 자극으로 부풀어 오른 내벽을 스치며 빠져나간 손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윤조는 미련 없는 손길로 장갑을 벗어버리는 정한을 보며 일어나야 한다 생각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사장님, 저….”
“자. 어떤 상태인지 아니까.”
윤조의 미간이 좁혀졌다.
어떤 상태인지 안다?
갈팡질팡하던 마음에 확신이 생겼다. 정한은 오메가였다. 드물게도 신체가 발달한 오메가라 생각했다. 피어나는 동료 의식에 윤조는 전에 없이 정한이 가깝게 느껴졌다.
“사장님도 이렇게 기분이 좋으셨어요?”
“딱히 좋다고는 못 느껴봤는데?”
“그럼 어떤 걸 느끼셨는데요?”
“무거운 걸 떼어낸 기분은 있었어.”
“저도… 가벼워진 것 같긴 해요.”
너무 가벼워서 두둥실 뜬 것 같아요.
채 소리가 되지 못한 말이 윤조의 입 안에서 맴돌았다. 오랜만에 보는 천장의 조각. 윤조는 흐린 눈을 깜박이며 천천히 잠들었다. 그 어디에서도 살 수 없는 완벽한 수면제였다.
* * *
사장님이 오메가라니.
윤조는 정한이 허락하지 않은 동질감을 느끼는 동시에 동경하는 마음도 생겼다. 알고 있던 사실마저도 달리 보였다.
자칫 민망할 수도 있을 그 밤의 일에도 불구하고 정한은 전과 같은 태도였다. 오히려 너무 건조해서 그날은 꿈을 꾼 게 아닌가 했다. 어른스러운 정한의 배려가 윤조는 그저 감탄스러웠다.
어떻게 생색을 내지 않을 수가 있지?
제 월급에서 용돈을 주는 일에도 삼촌은 몇 날 며칠 생색을 내었다. 정한처럼 남을 스스럼없이 도와주고도 내색하지 않는 어른은 여태 본 적이 없었다.
윤조는 정한과 같은 오메가가 되고 싶었다.
“뭘 그렇게 봐.”
읽던 책도 내팽개치고 내내 턱밑에 두 손을 받친 채 정한을 보고 있던 참이었다. 요즘은 줄곧 정한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기에 당연하게도 서재에 머물고 있던 윤조였다.
“사장님, 되게 멋있는 거 아세요?”
생각하고 있던 말이 튀어나왔다. 정한은 윤조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눈을 찌푸려 보였다.
“저, 사장님 같은 오메가가 되고 싶어요.”
정한의 눈이 더욱 찌푸려졌다. 윤조는 제가 생각해도 주제넘은 말이라 생각했기에 급히 정정했다.
“물론 발끝도 못 미칠 건 아는데요, 사장님께 많이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정한이 읽던 책을 덮으며 의자에 깊이 등을 기댔다. 어디 더 해 보라는 듯한 시선에 윤조는 제 두 무릎에 괴고 있던 팔꿈치를 떼고 자세를 바로 해 보였다.
“제 주변에는 본보기 삼을 만한 어른이 없었거든요. 저는 열성이라 오메가라는 정체성이 희미하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의 긍지는 있어요.”
“그 본보기가 나라는 건가. 서 집사가 생각하는 오메가의 본보기?”
“네.”
정한이 기쁜 듯 미소 지었다. 윤조는 전에 없이 환하게 웃는 정한의 미소에 저도 기뻐 웃음이 났다.
“서 집사는 사람이 참 다채롭다.”
“제가 그래요?”
“어. 참 여러 가지 해.”
정한이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책을 펼쳤다. 윤조는 정한이 남긴 말이 그다지 좋은 뜻이 아닌 듯해 생각에 잠겼다.
정한의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면 그를 본보기 삼지도 않았을 테다. 제 모자란 식견으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듯하니 물어봐야겠다 싶어 윤조는 팔을 번쩍 들어 정한의 주의를 끌었다. 막 정한이 고개를 들어 봤을 때였다. 꼭 이럴 때면 불청객이 나타났다.
“나가 봐.”
“네, 사장님.”
윤조는 아쉬운 마음으로 서재를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 현관문을 열어 보니 주흠의 비서가 서 있었다. 윤조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쳐 계단으로 뛰어올랐다.
“무슨 일이세요?!”
“손님을 맞이하는 태도가 그게 무업니까.”
“손님이라니요? 저한테는 납치 미수범이세요.”
계단 중간쯤에서 버티고 선 윤조를 한심하게 본 비서가 손에 든 서류 봉투를 응접실 테이블에 올리며 말을 전했다.
“회장님께서 진척 상황이 어떠한지 알아 오라고 하셨습니다.”
“또 그 성과 말씀인가요?”
“네.”
“가서 전해주세요, 저는 제 사장님께 고용된 집사라 회장님 말씀을 따를 이유가 없다구요.”
“예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답변을 하시네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 비서가 현관으로 훌쩍 걸어갔다. 윤조는 비서가 걷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럼 저는….”
“잠시만요, 저건 뭐예요?”
윤조가 가리킨 서류 봉투를 응시한 비서가 짧은 한숨과 함께 답했다.
“성과에 도움이 되는 자료입니다. 집사께서 필히 숙지하시라 일러주셨습니다. 저는 모든 사항을 전달했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비서는 윤조의 인사도 받지 않고 저택을 떠났다. 윤조는 조용한 2층을 살피고 천천히 걸음을 내디뎌 응접실 테이블 위의 서류 봉투를 집어 들었다. 권 회장이 말하는 성과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정한도 말해주지 않던 그 성과. 그건 과연 무엇일까.
“뭔데.”
기척도 없이 나타난 정한의 등장에 윤조는 손에 든 봉투를 그대로 떨어트렸다. 어찌나 놀랐는지 가슴이 쿵쿵 뛰었다.
“기척을 좀 하고 나타나지 그러셨어요!”
바닥에 떨어진 서류 봉투를 주워든 정한이 곧장 내용물을 꺼내 보았다. 첫 장만 보고도 파악이 끝난 듯 미련 없이 도로 넣고 옆구리에 꼈다.
“그게 뭔데요?”
“필요 없는 거.”
“그럼 주세요. 제가 버릴게요.”
“못 봤지?”
“…네.”
“꾀쓰긴.”
정한은 윤조의 이마에 꿀밤을 먹이고 계단을 올라갔다.
그냥 봐버릴걸.
뒤늦은 후회를 하며 윤조는 정한을 따라가려고 했지만 혼자 있고 싶다는 정한의 말에 꼼짝없이 대기 상태에 머물러야 했다.
“청소하자, 청소.”
그게 내 본분이지. 성과는 무슨.
터벅터벅. 다용도실로 향하는 윤조의 걸음이 미련으로 무거웠다.
* * *
비서의 방문 이후, 윤조는 권 회장이 언제 들이닥칠지 저도 모르게 기다리게 되었다. 나타날 법도 한데 조용한 것이 마치 폭풍 전야 같았다.
권 회장의 방문은 어떻게 마음을 먹어도 깜짝 놀랄 것이고, 무엇을 대비해도 처참히 휘둘릴 것이었다. 그런데도 결국 정한의 울타리에 남으리라 믿었다. 윤조의 정한에 대한 믿음은 여름날 녹음처럼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이것 좀 드시면서 하세요.”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정원사 무리가 땡볕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하고 있기에 주방에서 간식과 마실 것을 챙겨 나왔다. 윤조는 땡볕처럼 번쩍번쩍하는 황금빛 쟁반을 푸른 잔디 위에 올려 두고 저는 멀찍이 섰다. 다가올 때부터 슬그머니 걸음을 물리는 사람들을 알아서다.
“아휴, 뭘 또 이런 걸 다. 집사님 같이 드시지요?”
이 저택을 드나드는 담당자 중 가장 연배 있는 정원사 하나가 윤조에게 살갑게 말을 걸었다. 제게는 무척 고마운 처사였지만 그를 제외하고는 다들 겁을 내듯 자신을 보고 있는 참이라 윤조는 말씀만 고맙게 받겠다 하고 저택으로 향했다.
현관 앞 포치 아래에 이르러서야 눈을 가늘게 뜨고 나무 그늘에서 잠시 휴식을 가지는 정원사들을 보았다. 저도 저렇게 수다를 떨 만한 동료가 있었으면 좋겠다 여긴 때가 있었다. 한데 요즘은 정한이 있어 그런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다.
소통 창구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질문의 내용을 구분만 한다면 정한은 대체로 대답을 잘해주는 편이었고, 그 외로도 다양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정한은 한 권의 책과도 같았다. 무지한 이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사전 같은 그런 책. 자신이 생각해도 기가 막힌 비유라 생각하며 윤조는 현관문을 열었다. 바깥과 달리 시원한 바람이 윤조를 반겼다.
구두를 정리하고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윤조의 걸음이 슬쩍 뜀을 뛰듯 가볍게 떴다. 폴짝폴짝 뛰어 도착한 주방. 바구니에 쌓아 둔 탐스러운 열매가 윤조의 눈을 사로잡았다.
행동도 거침없고, 말투도 매서운 권 회장은 아들을 살뜰히 챙겼다. 그가 살뜰히 챙기는 마음 씀씀이가 쓰레기로 여기는 집사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알면 까무러칠 테지만, 여러모로 윤조는 권 회장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수박을 비롯해 이름만큼 독특하고 맛 좋은 과일들이 저택을 찾아왔다. 오늘은 실하게 익은 향긋한 복숭아가 배달되었다. 받자마자 입에 침이 고일만큼 향이 좋아 그 자리에서 까먹고 싶을 정도였다.
정한은 본 척도 하지 않고 늘 먹는 영양 주스만 마셨다. 여름도 절정에 달하는데 아무리 영양을 고루 챙긴 것이라지만 그의 건강이 무척 걱정되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먹기를 강요하여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아 고민이었다. 나름대로 수명을 단축하는 방법일까. 섬찟한 생각이 들어 복숭아 껍질을 벗기던 손을 멈추었다.
“마음에 들었나 봐?”
생각이 현실이 된 듯 정한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윤조의 손등을 타고 복숭아 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 달콤한 과일을 탐낸 게 민망해 멋쩍었다.
“제가 그동안 먹었던 과일은 다 거짓말 같아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던 정한이 무슨 뜻인지 궁금한 얼굴로 보았다. 윤조는 훌쩍 벗겨낸 복숭아를 들어 보였다.
“이렇게 알이 크지도 않고 단맛도 옅어요. 대개가 그래요. 보통 물 탄 맛이 나요.”
“물 탄 맛?”
“이거 드시고 물 마셔 보세요. 딱 그 맛이에요.”
설명하다 보니 무심코 음식을 권유해버렸다. 윤조는 제 손을 빤히 보는 정한의 반응에 딱딱하게 굳어 급히 손을 내렸다.
“잘라 드릴까요?”
당황하면 당황한 대로 사태를 수습해야 마땅한데 왜 자꾸 일을 치는지 알 수 없었다. 윤조는 정한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복숭아를 보기 좋게 잘라 그에게 접시까지 내밀었다. 머릿속이 온통 혼란했다.
금방이라도 접시를 밀어 되돌려줄 것 같던 정한이 잠시 뜸을 들이다, 손을 뻗어 복숭아 하나를 집어먹었다. 윤조는 저를 응시하며 복숭아를 씹는 정한을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서 집사 손 맛이 나는 것 같은데.”
“…저 손 씻었어요!”
“아, 서 집사 몸 맛이라고 해야 하나?”
“네?”
“체온이 느껴져서.”
복숭아 한 조각을 깔끔하게 씹어 삼킨 정한이 윤조가 들고 있는 접시 위에서 하나를 더 집어 입에 물었다. 윤조의 눈이 더 할 수 없이 커졌다.
“내가 두 개나 먹어서 섭섭해?”
“아뇨.”
“근데 왜 토끼 눈이야?”
“누구라도 그럴걸요?”
“내가 먹어서?”
“네.”
“서 집사 모르게 나 많이 먹는데?”
“네…?”
“주스만 먹고 사람이 어떻게 살아?”
“…수명 단축하시려고 주스만 마시는 거 아니었어요?”
윤조의 말에 어이없게 웃은 정한이 마시던 물을 마저 마셨다. 미자르의 과일이 이런 맛이구나, 하며.
“맛없죠?”
“그렇긴 하네.”
물병을 내려 둔 정한이 복숭아 하나를 더 가져갔다. 윤조는 복숭아를 문 채 주방을 나서는 정한의 등을 보며 자신이 한쪽 눈은 감고 살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두 눈을 다 감고 살았을지도.
생각하자니 주방 식량의 신선도는 체크했지만, 얼마가 비고, 얼마가 채워지는지는 체크하지 않았다. 그건 주방 담당자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윤조는 허가 찔린 기분에 혀를 내둘렀다. 내심 혼자만 맛있는 밥을 먹어 미안했던 시간이 아까웠다. 아주 조금.
괜히 발끈하는 마음에 윤조는 정한을 따라 서재로 갔다. 복숭아 든 접시를 두 손으로 잘 받쳐 든 채로. 윤조의 등장에 정한이 더는 필요 없다는 식으로 손을 내저었으나 윤조는 그를 무시하고 데스크 위로 접시를 내렸다.
“아무렴. 그 덩치를 유지하려면 먹어야죠.”
“그렇게 먹은 지 오래된 건 아니니까 배신감 느끼진 마.”
이게 배신감인가?
윤조는 자신이 느끼는 이 당황스러움이 온전히 배신감이라는 이름으로 칭할 것은 아니라 생각했다. 그보다는 섭섭함이 컸다. 내심 그가 많이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배신감 느낀 건 아니에요. 그건 그렇고, 언제부터 드셨는데요?”
“글쎄…. 서 집사가 수영 끝내고 냉장고 뒤질 때였나?”
윤조는 그게 언제인지 알 것 같았다. 차마 야식까지 만들어 달라는 부탁은 어려워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허기를 채웠다.
그걸 봤다니. 그 게걸스러운 현장을 들켰다니.
그런데 생각하자니 이상했다. 군침 도는 냄새도 나지 않는 그 건강해 빠진 식사의 어떤 부분이 정한을 자극한 걸까.
“그걸 보고 먹고 싶어졌다구요?”
“먹고 싶다기보다는 씹고 싶어졌어.”
“음식을요?”
“서 집사가 음식이 아닌 다른 걸 씹고 있었으면 그걸 씹어 보고 싶었겠지. 애석하게도 그게 하필 음식이라 서 집사가 이렇게 배신감 느끼나 봐.”
“배신감 느끼지 않았다니까요? 그냥 전… 그간 너무 안 드시니까. 혼자 먹을 때마다 사장님한테 미안하고 또 걱정됐던 거예요.”
“그래? 그게 걱정하던 모습이었구나. 몰라봐서 미안하네.”
입술이 실룩거렸다. 슬슬 입이 나오고 눈이 처질 것 같아 윤조는 정한을 두고 등을 돌렸다. 제 얼굴이 어쩌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울어?”
“아뇨. 또 못났다고 하실 것 같아서요.”
“안 못났으니까 이거나 가져가.”
표정을 가다듬고 몸을 돌렸다. 왼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정한이 접시의 모서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접시로 손을 뻗던 윤조는 데스크 반대편에 비서가 가져온 서류 봉투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정한의 시선이 윤조의 눈길을 따라 돌아갔다.
“되게 궁금한가 보네.”
“저한테 주신 거니까 궁금할 수밖에요.”
“서 집사는 못 하는 일이야.”
“왜요?”
“정정할게. 저건 서 집사 일 아니야.”
“그건 제가 보고 판단할 일인 것 같은데요.”
“서 집사가 할 수 있다 해도 내가 시킬 마음이 없어.”
“제가 집사로서 부족함이 많아서요?”
정한이 눈을 찌푸리며 보았다. 못난 표정만큼 못난 소리였다 싶어 윤조는 제 입술을 말아 물었다.
“어울리지 않는 소린 건 잘 아네. 그렇게 보고 싶어?”
“네.”
“안 돼.”
마치 놀리는 듯한 정한의 말에 윤조는 보란 듯이 입술을 내밀었다. 금방이라도 못났다고 할 것 같던 정한이 문 쪽을 바라보았다. 윤조의 고개도 자연스럽게 문으로 향했다.
똑똑.
가벼운 노크가 이어졌다. 그 귀 좋은 정한이 눈치채지 못한 방문객이었다. 도대체 언제 왔을까. 깜짝 놀란 윤조는 서둘러 문으로 가려다 정한에게 손목이 붙들렸다.
“계세요?”
낯선 목소리였다. 윤조는 서랍에서 총을 꺼내 든 정한을 보며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어 눈만 굴려댔다.
“아무도 안 계세요?”
대답하지 않자 목소리가 커졌다. 위험한 인물은 아닌 듯해 윤조는 정한에게 붙들린 손목을 가볍게 당겼다. 차츰 목소리가 멀어지자 정한도 경계를 풀었는지 손목을 놓아주었다.
“어째 집사도 안 보여?”
서재 문을 열고 나오자 복도 끝에서 허리에 손을 얹고 창밖을 살피는 남자가 보였다. 윤조는 걸음을 서두르며 남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기척을 느낀 남자가 대번에 고개를 돌려 윤조를 보았다.
“여기 집사예요?”
윤조의 차림새를 살핀 남자가 뾰족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윤조는 깍듯하게 허리를 숙여 자신의 무례를 사과했다.
“응대가 늦었습니다. 제가 이 저택 집사입니다.”
“아, 뭐야. 진짜 너무 늦었잖아요. 벨 눌러도 대답 없고.”
대답이 없는 게 당연했다. 눌러도 울리지 않는 벨이었으니까. 윤조는 접객을 이어 나갔다.
“죄송합니다. 벨이 고장 난 모양입니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오셨습니까?”
남자가 상의 주머니 안쪽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연보라색의 명함에는 치료사라는 이름을 단 남자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설마하니 보안 팀장이 잡상인을 들인 건가 싶어 윤조는 의심을 감춘 채 남자를 보았다.
“맹한 집사가 있을 거라 하더라구요.”
“맹한…, 집사요?”
“응. 그 말이 맞네.”
“…….”
“여기 도련님은 어디 계세요? 난 그쪽이랑은 할 말 없고, 도련님을 만나야겠는데.”
“방문 목적을 알려주시면 제가 사장님께….”
“내 말 못 들었어요? 아님 맹해서 이해를 못 했나? 난 도련님이랑 얘기하겠다고.”
복숭아 물이 든 끈적한 손을 매만지며 윤조는 애써 웃음을 보였다. 이 정체불명의 남자를 목적도 모르고 정한에게 보인다고 해서 정한이 걱정되는 건 아니었다. 정한이 스스로 위험을 느끼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의 손에 들린 총이 알아서 처리해주리라 생각했다.
“이리로 오시죠.”
윤조는 남자를 뒤에 달고 반대편 복도 끝으로 향했다. 정한에게 방문을 알리고 대답이 떨어진 뒤에야 문을 열었다.
“필요하시면 언제든 부르시길 바랍니다.”
“참 못 알아들어. 용건 없다니까.”
남자가 안으로 들어서며 윤조가 붙들고 있던 문손잡이를 낚아채 문을 세게 닫았다. 홀로 복도에 남겨진 윤조는 남자가 내는 소음을 정한이 싫어할 것 같아 그것만 살짝 걱정했다.
“…….”
잠시 자리를 지키고 서서 귀를 기울였다. 총성이 나지 않는 것을 보아 그는 정말 정한을 위한 손님이었던 모양이다. 손이나 씻으러 갈까 싶어 발길을 돌리는데 안쪽에서 큰소리가 났다.
정한은 아닐 테고, 남자가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서재 문 쪽으로 가까이 붙었다. 도통 제대로 들리지 않는 소리에 윤조는 점점 몸을 기울이다가 아예 귀까지 붙이고 섰다. 그렇게 했는데도 말소리는 웅얼거리게 들릴 뿐이었다. 이렇게 방음이 잘 되는데 정한은 어떻게 현관 문고리 두드리는 소리를 듣는 걸까.
그나저나 발소리는 왜 이리도 크게 들리는지, 뚜벅뚜벅 다가오는 듯한 소리가 바로 앞에서 나는 듯했다. 그래, 바로 앞. 즉시 몸을 떼어야 했다. 하지만 위험을 감지한 순간은 늘 뒤늦기 마련이었다.
“엇…!”
그대로 당겨진 문을 따라 윤조는 서재로 굴러 들어갔다. 다가오던 발소리는 정한이었던 모양이다. 윤조는 정한의 앞에 납작 엎드려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문손잡이를 붙들고 선 정한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예상 그대로의 풍경을 본 듯 지루해 보이기도 했다. 윤조는 어설프게 웃으며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소파에 앉은 남자가 그런 윤조를 보며 비아냥거렸다.
“어쩌다 저런 집사를 들이셨어요? 정말 골치 아프시겠다.”
윤조는 정한에게 미안한 얼굴을 해 보이고 서재를 나가려 했다. 그러자 정한이 윤조의 손목을 잡아채 붙잡아 두었다. 문 너머의 정체 모를 방문객을 감지했을 때처럼.
“그렇게 궁금하면 들어 보든지. 쥐새끼처럼 엿듣지 말고.”
윤조는 단번에 서류 속 내용이 집으로 직접 찾아온 것을 알아채고 냉큼 싱글 소파로 가 엉덩이를 대었다. 남자가 기가 막힌 듯 보았지만, 그 모든 시선을 무시했다.
“우리 집사가 알아듣게 처음부터 설명해 봐.”
정한이 데스크에 살며시 몸을 기대앉았다. 넓은 소파의 한가운데에 앉은 남자가 정한의 말에 못마땅한 얼굴로 윤조를 흘기다가 목을 가다듬고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도련님께서 페로몬 불감증 진단을 받은 지, 근 3개월이 지난 시일에 이른 줄로 압니다. 식욕 감퇴는 물론 불면증, 성생활 불가까지. 여러 좋지 않은 징후가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치료를 거부하고 계시지요.”
친절하게 설명을 끝낸 남자가 윤조의 반응을 살폈다. 정한의 말대로 잘 알아들었는지 확인한 것이었다. 애석하게도 윤조는 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우리 집사님께서, 제 말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나 봅니다. 다시 말씀드릴까요?”
“설명 이전에 질문 먼저 드려도 될까요?”
“예, 말씀하시지요, 우리 집사님.”
비꼬는 남자의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윤조는 질문했다.
“페로몬 불감증이 뭔가요?”
어떻게 첫 문장부터 이해를 못 했나 싶은 얼굴로 남자가 정한을 보았다. 정한은 설명하라는 듯 남자를 향해 턱짓을 해 보였다. 윤조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남자를 보았다.
“말 그대로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는 저와 같은 오메가 치료사를 통해 고칠 수 있는 병으로, 흔하진 않지만 종종 심리적으로 강한 충격을 받으셨다든가, 신체적으로 큰 외상을 입었을 때 일어나곤 합니다.”
“그럼, 사장님한테 아무 냄새도 안 난 게 그것 때문이에요?”
“사장님… 아, 네. 불감증일 땐 본인 페로몬도 막히죠. 일명 베타 상태라고 할까요? 오히려 환자분 스스로는 지금 생활이 편하다고 여기실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지요.”
“밥도 안 드시고, 잠은… 잘 모르겠고, 그리고… 안 선다고 하셨어요.”
“예, 다 그 탓입니다.”
“근데 오메가가 서는 일은… 원래 혼자서는 힘들지 않나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남자가 윤조를 보았다. 전문가가 이것도 모르다니. 윤조는 그를 배려하여 눈짓으로만 다시 물었다. 그런데 그는 두 손을 양옆으로 들어 올리며 뭔 개소리냐는 듯 바라보았다. 윤조는 답답한 마음에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에게 설명을 해주어야 할 듯했다.
“굳이 서지 않으셔도 되잖아요. 우리 사장님이.”
“왜 안 서야 하죠? 수시로 좆 세우는 게 알파인데.”
“알파라뇨? 우리 사장님 오메가예요.”
남자가 두 손을 옆으로 펼친 채 몸을 틀어 정한을 보았다.
“어떻게 사셨어요?”
남자의 물음에 정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윤조는 머릿속이 뒤죽박죽되는 느낌에 잠자코 있었다. 말을 보태면 보탤수록 비웃음만 살 듯했다.
“대화가 통하기는 하세요?”
“그건 그쪽 알 바 아니고. 계속 이야기나 해. 우리 집사가 알아듣게.”
“참 어려운 주문을 하시네요. 비용이라도 청구하고 싶을 정도로.”
남자가 손을 바로 하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저는 권 회장님께 고용된 치료사로서 당장 오늘부터 이 댁에 출퇴근하며 도련님의 치료를 도와 드릴 예정입니다. 스케줄에 관한 건 일전에 비서분을 통해 서류로 보낸 것으로 압니다.”
남자의 스케줄이 왜 그 서류에 들어 있는 건지 알 수 없어 윤조는 정한에게 물었다.
“그거 제가 할 일은 못 된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원래 제 일인데 이분한테 넘어간 거예요?”
“맞아요. 오메가 집사가 쓸모없으니 저를 붙여주신 거죠.”
“저 쓸모없지 않아요.”
윤조는 남자에게 단호하게 말한 뒤 정한을 향해 몸을 틀어 제 의사를 확실히 밝혔다.
“사장님. 저 할 수 있어요. 시켜주세요.”
남자가 기가 찬 듯 웃었다. 제 일을 쉽게 보는 윤조에게 화난 듯도 해 보였다.
“제가 드린 프로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열성이라도 급이 다릅니다. 전 수치 65는 찍는 오메가고, 이 정도면 이 업계에서는 상위 5퍼센트 안에 드는 수치죠. 우리 집사님은….”
남자가 깔보는 시선으로 윤조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알아보지 않아도 한참 못 미치는 오메가인 건 알겠네요. 그렇지 않아요, 집사님?”
윤조는 청소년 시기에 처음 진단받은 제 페로몬 수치를 떠올려 보았다. 10이 될까 말까였다. 남자의 말대로 저는 한참 못 미치는 오메가인 건 맞았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윤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남자가 웃음 지었다.
“그것 보세요. 이 집사님으로는 평생 뒹굴어도 치료가 어려우실 거예요.”
“그런가?”
“아무렴요. 최근 들어 두통 더 심해지지 않으셨어요? 어디 눈을 붙일 수 있어야 사그라들기라도 하죠.”
윤조는 자주 붉다고 여긴 정한의 눈을 보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의 침묵이 곧 긍정을 뜻했기에 마음이 바짝 조여들었다.
“그렇게 고집 피우신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라고요. 조만간 기절도 하실 텐데. 이 저택 구조를 보면 계단 쪽으로는 접근도 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거예요. 어쩌면, 저보다 잘 아시지 않나요?”
기절…?
선뜻 믿기 힘든 말에 윤조는 잠시 아연했다. 하지만 곧 피부로도 느껴지는 무거운 침묵에 사실임을 실감했다. 윤조는 걱정을 담아 정한을 보았다. 아까까지 복숭아 좀 먹었다고 기뻐했던 자신이 바보처럼 여겨졌다. 정말 두 눈을 감고 있었나 보다. 그를 오메가로 착각하고 동경한 사실은 너무나도 바보 같아 아찔하기까지 했다.
정한이 남자를 향해 손짓했다. 소파에서 일어난 남자가 정한이 기대어 있는 데스크 위로 엉덩이를 대고 앉아 그를 옆으로 올려다보았다. 만들어낸 표정이라는 건 한눈에도 알 수 있었지만, 윤조의 눈에도 꽤 매력적으로 보였다.
정한은 남자에게 더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남자가 상체를 기울이자 정한이 그의 목덜미 냄새를 맡았다. 간지러운 듯 남자가 발끝을 까딱하는 게 보였다.
“제가 느껴지세요?”
“아니.”
“근데 왜 맡으시는 거예요? 수치가 의심스러우신 거면, 회장님이 지정해주신 병원에서 비서님 동행하에 받아 온 거니 거짓은 없어요.”
억울한 듯 말을 쏟아내는 남자를 건조하게 바라보던 정한이 시선과 같은 말을 뱉었다.
“그래, 그렇겠지.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돼.”
“그럼 저 왜 살피시는 거예요?”
“누구처럼 말이 많네.”
그 누구가 누구인지 알았는지 남자가 윤조를 흘겨봤다. 윤조는 남자를 피하지 않고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자 남자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짧게 혀를 찬 남자가 같은 취급은 받기 싫었는지 입을 다물고 정한이 이끄는 대로 몸을 내어주었다.
“팔 들어 봐.”
남자가 팔을 들자 민소매 아래로 매끈한 겨드랑이가 나타났다. 그곳에 코를 묻는 정한을 보며 윤조는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헤매었다. 정한의 몸짓이 이상하게도 야하게 느껴졌다. 그가 알파라는 걸 알게 되어서일까.
“뭘 찾으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체취.”
“아아…. 어떠세요?”
“글쎄. 아직 잘 모르겠네.”
“엉덩이도 보여 드려요?”
“그러든지.”
설마, 하는 생각이 윤조의 머릿속을 스쳤지만 남자는 거리낌 없이 바닥으로 내려와 그의 앞에서 엉덩이를 까는 것도 모자라 벌리기까지 했다. 윤조는 깜짝 놀라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열심히 일하나 봐?”
“저 정도면 깨끗한 편이에요. 알파들 좆이 어지간해야지 말이죠.”
손가락 틈새로 몸을 일으키는 남자가 보였다. 윤조는 그제야 눈에서 손을 떼었다. 복숭아 과즙의 끈적한 느낌이 축축하게 차오른 땀 때문에 계속해서 이어졌다.
“어떠세요?”
“음, 내 취향은 아니네.”
정한의 말에 남자가 주춤했다.
“아…. 그러세요?”
“어. 별로야. 네 체취.”
남자의 뒷모습이 전과 다르게 쭈뼛거려 보였다. 제 뒷머리를 긁적인 그가 정한과 한걸음 떨어져 섰다. 이런 거부는 처음 받아 본 사람 같았다.
“그럼 어쩔 수 없죠, 뭐. 취향이 아니라고 하시니…. 회장님껜 이대로 보고 드릴게요. 그리고….”
남자가 몸을 돌려 윤조를 보았다. 윤조는 반듯하게 등을 펴고 남자를 직시했다. 어쩐지 그가 제게 화풀이를 할 것만 같았다.
“집사님은 짐 좀 싸셔야겠다. 저랑 같이 나가실래요?”
“제가요? 왜요?”
“나 혼자 나가면 안 되거든요. 나올 땐 쓰레기도 하나 끌고 오라던데.”
쓰레기라는 말에 특별히 힘을 주는 게 느껴졌다. 그래 봐야 권 회장의 고함에는 미치지 못하는지라 윤조는 얼굴만 굳히고 말았다.
“가시죠?”
웃음을 짓는 남자의 눈에 반감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윤조를 끌고 나갈 듯 주먹을 움켜쥐던 남자는 곧 눈을 크게 뜨고 당황했다.
“저기, 도련님?! 이러시는 경우가 어디 있어요?!”
정한에게 뒷덜미가 들린 남자는 짐짝처럼 서재를 가로질렀다. 윤조는 정한이 한 손으로 남자를 집어 든 모습을 보며 영양 주스의 영양이 보통 영양이 아니라는 사실에 감탄했다.
“내 말 뭐로 들은 거야.”
문을 앞에 두고 남자를 내려 둔 정한이 그를 덮치듯 버티고 섰다. 윤조는 소파에서 일어나 쭈뼛거렸다. 정한의 등이 전에 없이 화가 나 보였다. 그가 폭력을 쓰는 건 보지 못해 알 수 없었지만, 제 발목쯤은 거뜬히 부러트릴 만한 덩치였기에 여차하면 그를 말릴 작정이었다.
“제대로 들었어요. 댁에 사람 드나드는 거 싫다 하셨지요? 여기 집사 하나도 온 저택을 싸돌아다녀서 골칫거리라고도 하셨어요.”
“그래. 그 집사 때문에 골이 아파. 그래도 뭘 몰라서 그런지 여태껏 이 저택 관리해 온 집사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 이렇게 내 말 곧이곧대로 듣고 날 방임하는 집사도 처음이고. 알아들었어? 나는 다른 누구도 원하지 않아.”
정한의 말은 남자가 아닌 남자의 뒤에 있는 존재에게 향하는 듯했다. 정한의 기세에 눌린 남자가 잠시 숨을 고르고는 미약한 저항을 해 보였다.
“데려가면 죽이기라도 하시겠어요…?”
“어쩌면.”
“그럼 그 건은 회장님께 넘길게요. 전 도련님께 들은 말만 전하겠습니다.”
“죽이겠다는 말도 전해.”
“어쩌면이라고 하셨잖아요?”
“마음 바뀌었어. 죽인다고 전해.”
남자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윤조는 정한에게 깍듯하게 인사하고 나가는 남자의 기척을 들으며 끈적한 손을 매만졌다.
“복숭아 가져가.”
정한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윤조를 스쳐지나 데스크에 앉았다. 윤조는 접시를 가지러 그에게 다가갔다가 여전히 데스크 위에 놓여 있는 총으로 시선을 던졌다.
“뭐 또 궁금한 게 있나 보지?”
시선을 오해했는지 정한이 서류 봉투를 당겨와 건네주었다.
“질문은 사절이야.”
“아… 전 그냥….”
“이만 나가.”
“네…. 사장님.”
말을 잘 들어야 했다. 그게 자신이 여기 있는 이유였다. 그를 방임하고 모른 척해야 했다. 그런데 윤조는 남자의 말이 자꾸만 걸렸다.
그가 아픈 것. 증상이 심해지는 것. 그러다 그 몸도 가누지 못해 기절을 반복하게 되리라는 것. 윤조는 저도 모르게 떠올린 풍경에 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기절한 정한이 계단에서 구르는 모습이 반복해서 떠올랐다.
그날 밤, 윤조는 일과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어지간해서는 잘 앉지 않는 자리에 어색하게 앉아 서류 봉투의 입구를 슬그머니 열어 보았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것이 손에 있는데 선뜻 열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윤조는 자신을 잘 알았다.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렇게 주저하고 있는 거였다.
사장님. 권정한의 몸이 걱정된다. 이미 병세가 나타난 듯하니 치료가 시급할 것이다. 그런데 그는 치료를 거부했고, 제게는 그 해법이 들려 있었다. 그가 이 저택에 들여놓은 유일한 사람이자, 유일한 오메가. 그건 서윤조 자신이었다. 자신이 그의 치료제라면 기꺼이 도움을 줘야 마땅했다. 그는 제 생명의 은인이며 새로운 삶을 만들어준 사람이니까.
한데 그 치료법이라고 하는 것이, 쉬이 수락하기에는 꽤 생각이 많아지는 것이라 꺼내 보기가 어려웠다. 꺼내는 즉시, 서류의 내용은 자신의 일과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윤조는 자신이 그럴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떤 내용이든 상관없이 그를 도우리라고.
“하… 한심한 놈.”
사람이 아프다는데, 고민하다니.
윤조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몇 차례 봉투 입구에 손을 깔짝거리다 두 눈을 꼭 감고 손을 집어넣었다. 손에 집혀 올라온 서류는 윤조의 마음처럼 무거웠다.
[오메가 테라피]
가장 먼저 보이는 글자는 눈에 새겨질 만큼 커다랬다. 그것만으로도 설명이 다 끝난 듯이.
윤조는 헛기침으로 제 소란한 마음을 잠재우고 서류를 한 장 뒤로 넘겼다. 소설책을 읽는 것처럼 천천히 빠져들었다. 깊어 가는 밤도, 밝아오는 새벽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