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서류의 마지막 온점까지 읽은 뒤 윤조는 자신이 왜 잠시라도 망설였는지 의아했다. 이미 저 역시 그의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다. 서류 초반에 나열된 방식은 히트 사이클 때 정한이 자신을 도운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물론, 후반으로 갈수록 각오가 필요한 듯했지만, 그 또한 치료의 일환일 뿐. 주저한 자신이 계속해서 한심해졌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한에게 선뜻 말하기는 어려웠다.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제 이 모자란 언변으로 치료를 거부하는 그를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잠들지 못한 몸으로 정한의 방 앞을 서성대다 계단에 걸터앉아 조용한 현관을 보았다. 문득 미자르에서 떠나던 날이 생각났다.
침대칸의 협소한 공간, 3일간 끌어안고 잔 출입권, 검표원의 사무적인 태도, 끝을 모르고 달리던 택시, 겨우 당도한 저택에서 문전 박대 당한 일, 빗속에서 한석을 기다렸던 시간, 미자르의 밤과 다를 바 없던 두베의 밤. 마치 옛날처럼 까마득했다. 삼촌에게 돈을 바쳐야 했던 7년의 세월은 꼭 남 얘기 같았다.
다 저 현관문부터다. 현재 윤조에게 갓 딴 복숭아처럼 신선한 일들은 다 저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대로 입을 다물고 정한이 바라는 대로 방임한다면 그의 아버지가 시끄럽게 찾아와 저를 끌고 가든 다른 오메가를 데려오든 할 테다. 그 소란을 혐오하고 상황을 지겨워할 정한과 사장님만 연발할 저. 불 보듯 뻔한 풍경에 윤조의 결심이 단단해졌다.
“뭐 해?”
“…사장님?”
서재에서 나타난 정한을 보고 윤조는 당황했다. 여태 자지 않고 있었던 게 저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여태 책 읽으셨어요?”
“잠이 안 와서.”
“역시…, 불면증이 심하신 거죠?”
“나 원래 잠이 없어.”
“그럴 리가요. 애기 때는 잤을 거 아니에요.”
정한이 윤조의 말을 상대도 하지 않고 지나치려 했다. 윤조는 급히 일어나 정한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뭔데.”
“저, 그 서류 다 읽어 봤어요.”
“기가 막히지? 요즘 같은 시대에 오메가 테라피라니.”
“왜요? 그거 말도 안 되는 거예요?”
“말은 되지.”
“효과는 있다는 뜻이죠?”
“왜 그러는 건데?”
“저, 하려고요.”
정한은 대답 없이 빤히 윤조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윤조는 반듯하게 등을 펴고 그에게 다시 한 번 제 의사를 전했다.
“전에 사장님이 저 치료해주셨잖아요. 기억하시죠?”
“그건 이거랑 달라.”
“전혀 다르지 않아요. 똑같아요. 저도, 사장님 돕고 싶어요.”
“서류 다 본 거 맞아?”
“네. 다 봤어요. 베타 섹스 해야 하는 거라면서요?”
정한이 가볍게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윤조는 그가 물러나지 않게 발끝이 닿도록 바짝 붙어 섰다.
“혹시 제가 사장님 취향이 아니라는 핑계는 대지 마세요. 사장님 제 냄새 나는 복숭아도 드실 수 있잖아요.”
멀어졌던 정한의 시선이 돌아왔다. 윤조는 어딘가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정한의 붉은 눈을 응시하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사장님 안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싫은 거 굳이 안 하시는 성격인 거 저 알아요. 좋지는 않아도 괜찮으니까 드신 거잖아요. 맞죠?”
정한이 대답하지 않아 윤조는 애가 탔다. 정한은 여전히 답이 없고, 그의 등 뒤로는 동이 텄는지 복도 창으로 보드라운 빛이 기어들어 오고 있었다.
윤조의 간절한 표정을 내려다보던 정한이 걸음을 내디뎠다. 그대로 스쳐 지나갈 것 같던 그가 윤조의 팔을 움켜쥐고 세게 이끌었다. 검붉은 카펫이 윤조의 맨발 아래에서 비틀렸다.
윤조는 정한에게 이끌려 그의 방에 들어섰다. 비스듬히 열어 둔 창으로 아침이 와 있었다. 조명을 켜지 않아도 시야는 밝은 방 안에서 정한이 윤조를 떼어 놓았다.
“벗어.”
마치 겁을 주려는 듯 건조하게 내미는 정한의 명령에 윤조는 망설임 없이 잠옷 단추를 벗겨 내었다. 정한과 윤조 사이에 사선으로 내린 빛기둥이 자리했다. 그 속에 훌훌 날리는 먼지가 언뜻 빛나 보였다.
“엄연히 달라. ‘괜찮다’에 그쳐서는 안 돼. 하고 싶어야지.”
“그렇게 핑계 만들지 마세요.”
“자신 없어?”
“오로지 사장님 취향에 기대는 일인데 자신이 있고 없고가 어디 있어요? 그럼 저도 사장님 제 취향 아니에요.”
“근데 왜 해.”
“아니, 지금이 아니라요, 사장님이 저한테 취향이 아니라고 하시면, 저도 그럴 거라고요.”
“바보야? 그렇게 패를 보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예, 저 맹해요.”
윤조의 말에 웃음을 흘린 정한이 뒤로 가라며 손을 내저었다. 윤조는 고개를 돌려 제 뒤에 자리한 것을 보았다.
어째서 이 침대에는 늘 벗고 올라가게 되는 걸까.
상의만 벗은 채로 윤조는 무릎걸음을 기어 침대에 올라앉았다. 정한이 침대 끝에 걸터앉아 더 뒤로 가라고 손짓했다.
“저, 누워요?”
“어.”
“바지는요?”
“이렇게 말 많을 거야?”
하겠다는 건가?
윤조는 정한의 말을 희망적으로 해석하며 침대에 등을 대었다. 밤새 활자를 들여다본 몸이 그제야 피곤하다며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정한이 치료사에게 했던 것처럼 윤조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았다. 내심 체취가 신경이 쓰였지만 이미 벗은 몸이었고, 당연하게 날 땀이었다.
“팔 들어.”
“겨드랑이를 좋아하시나 봐요.”
“아까 내 말 뭐로 들은 거야?”
“입 다물까요? 그러시지 않아도 저 지금 너무 졸려요….”
“나 아직 도장 안 찍었는데?”
“그래서 필사적으로 참고 있잖아요.”
졸음 때문인지 조금 신경질적인 대답이 나갔다. 윤조는 제 팔을 직접 들어 벌리는 정한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눈, 코, 입. 서로 자기주장 하기 바쁜 얼굴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흐릿해 보였다.
“빨리 맡아요. 진짜 잘 것 같아….”
“기가 찬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신 거 알아요.”
윤조는 손끝을 까딱여 정한을 재촉했다. 그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정한이 겨드랑이 사이로 코를 디밀고 냄새를 맡았다. 그의 숨이 느껴져 간지러웠다.
“간지러….”
정한의 코끝이 겨드랑이를 타고 피부를 따라 밑으로 향했다. 윤조는 치료사 남자가 했던 것처럼 그에게 엉덩이를 까 보여야 하나 싶어 바지를 벗으려 꿈틀거렸다.
“가만 좀 있지. 입이든 몸이든 둘 중 하나라도 얌전히 있을 순 없나?”
“엉덩이 보여 드리려고 그랬어요….”
“네 냄새 알아.”
“그래도… 확인은 하셔야죠.”
윤조는 몸을 돌려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내렸다. 그러고는 무릎에 힘을 주고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정한이 확인하기 쉽게끔 속옷이 허락하는 만큼 무릎을 벌려 보였다.
정한은 잠시 그런 윤조를 지켜보기만 하다가 몸을 숙여 접촉했다. 그의 손가락으로 추정되는 것이 벌어진 엉덩이 사이를 가볍게 매만졌다.
“바짝 말랐네.”
“보통 마른 게 정상 아니에요?”
“이젠 말라 있으면 서로 피곤해질 거야.”
“그럼… 하시는 거죠?”
정한이 옷을 입으라는 듯 엉덩이를 살짝 치며 몸을 물렸다.
“약 먹어.”
페로몬 분비를 활성화해주는 약은 치료사에게 필수품이었다. 윤조는 작게 대답하며 급히 옷을 추켜올렸다. 몸을 바로 하고 나니 정한이 바닥에 떨어진 상의를 집어 내밀었다. 윤조는 냉큼 옷을 받아 들고 팔을 꿰어 넣었다.
“서 집사.”
“네.”
“괜찮아?”
“뭐가요?”
단추를 채우며 윤조는 고개를 들어 정한을 보았다. 그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윤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번처럼 손가락 장난하는 거 아니야.”
“그게 장난이었어요? 치료였잖아요.”
“치료긴 하지, 근데….”
“다를 거 없어요. 전혀.”
윤조는 진정으로 다를 것 없다 생각했다. 정한은 생각이 많아 보였지만 치료에 돌입하면 차차 그 생각도 옅어지리라. 그것보다 윤조는 매일 챙겨 먹게 될 약이 걱정이었다.
“저 약 먹는 거 까먹을 것 같거든요. 사장님이 챙겨주시면 안 돼요?”
“서 집사.”
“네.”
“정말 여러 가지 해.”
“하하하….”
싫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게 어디인가. 윤조는 정한에게 이만 가겠다고 인사를 전하고 그의 방을 나섰다. 일찍 시작된 하루, 가장 힘든 일을 해결한 참이니 보상으로 잠을 자야 했다.
방으로 돌아온 윤조는 주름 하나 없는 침대 위로 몸을 누였다. 금방이라도 잠이 들 것 같았는데 홀로 있으니 생각이 많아졌다. 끝내 윤조는 몸을 일으켜 책상 앞에 앉았다. 서류의 첫 장을 다시금 펼쳐 보았다.
오메가 테라피는 잦은 접촉이 필수였다. 특히 초기의 접촉 빈도가 치료의 성공 여부를 좌우했다. 윤조는 비서가 전해주고 간 서류 속 스케줄 표에 따라 매일 밤 열 시에 정한의 방으로 찾아가기로 했다.
페로몬을 사용하지 않는 베타 섹스가 그 시작이었다. 베타 섹스는 그 자체만으로는 얼핏 간단한 시작인 듯했지만, 테라피의 과정 중 가장 큰 난관에 속했다.
페로몬을 써도 느끼지 못하는 정한에게 제 미약한 수치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단, 세워야 했다. 세워야 뭘 하든 말든 했는데, 그게 그렇게 어렵다고 한다.
이 단계에서 포기하고 나자빠지는 치료사가 많다고 하니, 윤조로서는 부담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경험 많은 치료사도 내빼는 일이 많다는데, 저 같은 초짜가 어떻게 정한을 세울 수 있단 말인가. 큰소리를 쳐 놓고 왔으니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내어야 할 텐데, 솔직히 말해서 자신이 없었다.
이래서 잠이 오다가도 달아난 건가.
윤조는 침대에 몸을 던지듯 누워 서류를 뒤적였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나열된 상세한 그림과 설명을 따라 해 보았다.
입을 벙긋거리고 이리저리 혀를 굴려 보기도 하고 허공을 쥐어 보기도 하며 흉내를 내었으나, 혼자서 해 볼 수 있는 일은 아니었기에 실전밖에 답이 보이질 않았다.
기력 없이 누워 있는 제 것을 매만져 보아도 불감증인 정한만큼이나 세우기 어려운 것이 남성체 오메가의 성기였다. 윤조는 바지 속에 손을 넣고 제 성기를 조몰락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어느새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천천히 잠에 빠질 때까지도 바지 속에서 들썩거리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물론 서지도 않았다.
이후 윤조는 배가 고파 눈을 뜰 때까지 정신없이 잠들었다. 눈을 떴을 땐 다행히도 아직 해가 남아 있었다. 바지 속에서 손을 빼고 욕실로 향했다. 잠을 자도 찌뿌듯한 피로를 뜨거운 물과 함께 씻어 내렸다.
주린 배를 안고 주방으로 가자 식탁 위에 못 보던 상자가 있었다. 아침 우편물을 가지러 가지 않은 게 생각나 잠시 당황하던 차, 상자에 붙은 쪽지가 눈에 들어왔다. 직접 배달이었던 모양이다.
[하루 한 알. 물과 함께 드시면 됩니다.]
권 회장의 비서로 추정되는 메시지였다. 윤조는 상자의 포장을 뜯다가 아랫면에 붙은 가격표를 보고 말았다. 무신경하게 붙은 가격표는 손으로도 쉽게 떼어졌다. 윤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자신이 아직 잠에서 덜 깼나 생각했다. 약에도 급이 있는지 서류에 예시로 있던 것은 장난처럼 여겨졌다.
“뭐가 이렇게 비싸….”
제 연봉만 한 금액이 적힌 가격표를 보고, 또다시 보았다. ‘0’이 줄어들기는커녕 더 늘어나는 듯해 그만 보기로 했다.
“어? 일어나셨어요?”
상자를 정리하고 내용물을 따로 챙기고 있는데 정한이 나타났다. 그는 어딘가 불편한 표정으로 식탁에 걸터앉아 윤조의 손에 들린 병을 보았다.
“약이 왔더라고요. 비서분이 오셨나 봐요?”
“그게 약이었구나.”
“뭔지 보지도 않고 아무 데나 두라고 하셨죠?”
대답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라 여겼는지 정한은 냉장고만 빤히 바라보았다. 윤조는 그의 시선을 따라 냉장고로 향했다. 입도 대지 않은 영양 주스를 발견하고는 냉큼 꺼내 컵에 따랐다.
“안 주무셨어요?”
“잠이 안 와.”
“역시….”
윤조의 반응에 정한이 웃었다. 재미있는 구경을 하는 것도 아니고 걱정이 되어서 한 말인데 그가 오해할까 걱정이 되었다.
“아직 식사도 안 하고 뭐 하셨어요?”
“잠을 못 자서 먹기도 싫어져.”
기다란 컵에 가득 따라 부은 영양 주스를 내밀자 그가 받아 들었다. 윤조는 그가 먹지 않고 그대로 컵을 내려둘까 싶어 유심히 그가 하는 양만 보았다.
“서 집사.”
“네.”
“아까부터 계속 천둥이 치는데.”
“네?”
“배에서 소리 난다고. 뭐라도 집어넣어.”
그의 말대로 배가 소란했다. 윤조는 냉장고를 열어 제 몫으로 마련된 반찬통을 꺼내고 아침을 먹지 않아 한껏 담긴 밥솥을 열어 밥을 펐다.
“같이 드실래요? 음식이 남겠어요.”
영양 주스도 먹기 싫어하는 정한이었기에 딱히 기대도 없던 말이었다. 그의 무응답도 예상했던 터라 윤조는 제 몫만 챙기고서 밥솥을 닫았다.
“잘 먹겠습니다.”
정한과 마주 앉아 홀로 식사를 시작했다. 내내 굶은 탓인지 밥이 물처럼 넘어갔다.
“서 집사, 그러다 죽겠어.”
“씹고 이써여.”
“그래. 그래야 할 거야.”
“사쟈닌도 드세여.”
“다 먹고 말을 해.”
입이 그득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빤히 윤조의 먹는 모습을 보던 정한이 주스로 손을 뻗었다. 그러고서 한 입, 두 입, 마시기 시작했다. 윤조는 잠시 놀란 눈을 뜨다가 속으로 웃으며 밥그릇을 삭삭 비워 갔다.
“한 그릇 더 먹을래요.”
“일일이 보고 안 해도 돼.”
“네.”
저녁으로 마련된 반찬도 몽땅 먹을 때까지 정한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박자를 맞추듯 천천히 주스를 비워낸 정한이 그릇을 정리하는 윤조에게 빈 컵을 내밀었다. 윤조는 기꺼이 컵을 받아 들었다.
“10시.”
의자를 밀고 일어난 정한이 윤조가 식탁에 따로 빼 둔 약통을 쥐고 주방을 나섰다. 세워야 한다는 압박감이 윤조를 덮쳤다.
*
어떻게 하면 세울 수 있을까.
다용도실에 도착한 세탁물을 정리하고 1층의 모든 바닥을 청소기로 빨아들이는 동안 윤조의 머릿속은 온통 저 생각뿐이었다. 자신이 청소기의 흡입구처럼 정한에게 달려들어 쪽쪽 빨아대는 장면이 도무지 상상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정한의 성기가 벌떡 서는 것 역시.
“하….”
이렇게 어려운 과제일 줄이야.
청소기의 먼지 통을 비우고 정리를 끝낸 다용도실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은 정한과 약속한 10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어서 씻고 그의 방으로 가야 했는데 바닥에 붙은 궁둥이가 도대체 떼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쩜 좋아….”
고민의 그늘은 윤조를 졸졸 따라다녔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당도한 정한의 방에서도.
“서 집사.”
“네.”
“내가 서 집사 잡아먹어?”
“제가 또 못난 표정 하고 있나요?”
“죽을 표정 같긴 해.”
정한이 배식하듯 윤조의 손바닥 위로 선홍색의 투명한 젤리 같은 약을 놓아주었다. 윤조는 그의 방 테이블 근처로 다가가 그 위에 놓인 물병을 기울여 물과 함께 약을 먹었다. 저 같은 열성은 꽤 장기간 복용을 해야 효과가 날 것이라 했으니 일찍 먹어두기로 했다.
비싼 만큼 값을 해야 할 텐데, 윤조는 제 페로몬이 얼마만큼 옅은지 잘 알고 있었기에 퍼뜩 상상되지 않았다. 그건 지금부터 해야 할 일도 마찬가지였다.
“사장님.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돼요?”
“언젠 서 집사가 나한테 솔직하지 않은 적 있나?”
“…그렇죠. 그래서 말인데, 저 사장님을 세울 자신이 없어요. 사실 전 누구도 세워 본 적 없거든요.”
“그래 보여.”
차라리 알았다고 답할 것이지, 그렇게 보인다고 하니 심통이 났다. 그렇지 않아도 샤워하면서 제 몸 여기저기를 뜯어본 윤조였다. 페로몬을 쓰지 않는 베타 섹스는 순전히 몸으로만 부딪쳐야 했기에 걱정이 앞섰다. 제 몸 어느 구석을 찾아보아도 죽은 것이 설 만큼 유혹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암튼, 전… 이게 최선이니까요. 열심히 서 보세요.”
“서 집사한테는 기대도 안 했어.”
“너무하시네요…. 그래도 나름 다리는 잘 빠졌다고 생각했는데.”
걸치고 온 가운 사이로 맨다리를 내밀어 보였다. 정한의 의미를 알 수 없는 눈짓이 느껴졌지만, 윤조는 보란 듯 요리조리 다리를 뽐내 보았다.
“그만해, 안타까우니까.”
“진짜 너무 하시네요. 사장님도 그다지….”
반사적으로 정한을 깎아내리려던 윤조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째 평소보다도 더 차려입은 정한의 모습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니, 누구는 가운 한 장 달랑 걸치고 있는데, 서야 할 사람이 지퍼 아래로 몸을 꼭꼭 감추고 있는 건 뭘까.
“사장님은 안 벗으세요?”
“벗어 봤자인 거 아니까.”
“…진짜 너무 하신다.”
윤조는 시위하듯 정한에게 못난 표정을 해 보였다. 그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윤조의 뒷덜미를 붙잡아 그대로 침대에 밀어붙였다. 밑이 휑하니 벌어진 채로 엎어진 윤조는 정한이 엉덩이를 두드리는 손짓에 앞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정한의 손에 허리끈이 붙잡힌 줄도 모르고.
활짝 벌어진 가슴을 가리며 윤조는 침대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침대 끝에 앉은 정한의 손끝에서 허리끈이 마저 끌렸다. 미련 없이 바닥에 허리끈을 던진 정한이 턱짓을 해 보였다.
치료사는 윤조 자신이었고 모든 리드는 제 몫이라 생각했는데, 세울 자신이 없다는 양심 고백 한 번으로 모든 주도권을 빼앗긴 듯했다.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하며 윤조는 가슴을 여미던 손을 떼고 어깨 뒤로 가운을 젖혔다.
“바로 누워.”
윤조는 통나무처럼 반듯하게 누워 천장을 보았다. 무심코 천장의 조각을 감상하고 있던 윤조의 눈앞으로 정한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불쑥 나타난 정한의 얼굴에 윤조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페로몬 내 봐.”
“네? 아직 그러면 안 되는데요…?”
“어차피 못 맡는데 내기라도 해 봐.”
어쩌면 좋지.
아무리 정한의 명령이라고 해도 정해진 순서가 있는 법이었다. 윤조는 어차피 그가 알지 못하니 낸 척하자고 생각했다.
“냈어?”
“네. 냈어요.”
윤조는 확인하듯 제 목덜미로 코를 가져간 정한의 반응을 기다렸다. 얼굴에 제 마음을 다 쓰고 다니는지라 그가 자신을 의심할 것이라 여겼는데 그는 의외로 잠잠했다.
“아아…!”
방심은 금물이었다. 페로몬을 쥐어짜듯 정한이 목을 물어왔다. 윤조는 몸을 버둥대며 정한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대로 더 몸부림을 치다간 자칫 살점이 떨어져 나갈까 봐 허공에다 급히 말했다.
“알았어요, 알았어. 낼게요. 낼 테니까, 이것 좀 놔요….”
미약한 페로몬을 방출하자 그제야 정한의 이가 떨어져 나갔다. 페로몬을 느끼지 못한다면서 이건 어찌 알고 그러는지. 윤조는 의심스럽게 정한을 보았다.
“불감증인 거 맞으세요?”
“어. 맞아.”
“근데 어떻게 아세요?”
“거짓말할 때 맥이 빨리 뛰어.”
윤조는 제 목으로 손을 가져갔다. 정한이 문 자리가 얼얼했다. 그곳에서 팔딱거리는 제 맥도 느껴졌다.
“거짓말한 건 죄송해요. …매뉴얼에 따르고 싶었을 뿐이에요.”
“매뉴얼이 중요하긴 하지. 근데 난 되도록 빨리 끝내고 싶어. 이왕 하기로 한 거.”
“많이 피로하신가 봐요?”
정한이 꾸밈없이 답했다.
“어. 자고 싶어.”
“먹고 싶기도 하고요?”
“그래.”
“살고 싶다는 말 같네요.”
“그런가…?”
“네.”
윤조는 이 오메가 테라피가 그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세워야 한다는 강렬한 의지가 불타올랐다.
“저, 사장님 열심히 세워 볼게요.”
“서 집사가 그럴 때마다 설 것도 안 설 것 같아.”
“그럼 입 다물게요.”
“그게 가능하다면 말이지.”
윤조는 제 입을 두 손으로 꾹 눌러 보였다. 일말의 기대도 없어 보이는 얼굴로 정한이 윤조의 몸을 탐색했다. 너무나 옅어서 보통의 상태에서도 피부 가까이에 코를 대어야 하는 열성 오메가의 몸을 꼼꼼히도.
윤조는 정한의 숨결이 닿을 때마다 간지러움에 몸을 떨었다. 긴장으로 바짝 선 젖꼭지의 냄새는 왜 맡는 것인지. 정한의 코끝이 스친 자리가 유난히도 간지럽게 느껴졌다.
“어디가 좋은지 기억해 놔.”
좋은 게 무엇인지 윤조는 알 수 없었다. 이따금 살이 떨릴 만큼 깜짝 놀라는 부위가 있기는 했다. 심장이 뚝 떨어질 것 같은 공포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정한의 코끝이 윤조의 마른 뱃가죽을 스쳐 지나 배꼽에 머물렀다. 윤조는 그의 입술이 있음 직한 아랫배에 꿀렁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 발을 뒤챘다. 다른 곳보다 아주 조금 긴 시간을 들여 머문 정한이 미끄러지듯 아래로 내려가 가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벌렸다.
“사장님, 제가 서야 하는 게 아닌데요….”
금방이라도 제 비좁은 속을 파고들어 올 것 같은 태세에 윤조는 급히 정한을 불렀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윤조의 밑에 머물렀다. 윤조는 천장 조각이 너울 치듯 흔들리는 기분에 시트를 붙잡고 제 엉덩이를 받쳐 드는 손길을 따라 다리에 힘을 실었다.
“거긴, 왜… 빠세요?”
느끼지도 못할 페로몬을 찾아다닌다 여겼다. 오늘은 아무런 수확도 없는 밤이 되리라 생각했는데, 뜨겁고 미끄덩한 혀가 엉덩이골 안쪽에 느껴지자 윤조는 당황했다. 정말 그가 자신을 세울 것만 같았다.
“사장님… 저, 그러시면….”
히트 사이클 때의 아찔한 기억이 떠올랐다. 윤조는 내심 그 느낌을 기대하며 정한을 막지 않았다. 들어오지 않고 계속해서 바깥에만 머무는 정한에게 재촉하고 싶은 기분이 들 찰나였다.
“여기가 제일 예민하긴 하네.”
탐색을 끝낸 정한이 엉덩이를 내려주며 허벅지를 타고 내려갔다. 윤조는 끓다 만 우유처럼 푹 퍼져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저도 사장님 봐 드려요?”
“서 집사와 달리 난 내가 원하는 건 잘 알아.”
“아… 그러세요?”
윤조는 제 다리를 들어 종아리 뒤편을 매만지고 발목을 쓰다듬는 정한을 보았다. 그의 눈길이 윤조의 발끝에 닿았다.
“거긴 괜찮을 것 같아요.”
“의외로 좋을 수도 있어.”
“정말 괜찮은데요….”
발등을 살피고 움푹 파인 안까지 뒤집어 본 정한이 윤조의 말대로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했는지 미련 없이 발을 놓아주었다.
“이제 어떡하면 돼요?”
“오늘은 이대로 가.”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많이 했어. 가.”
어쩐지 정한이 졸려 보여 윤조는 순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정한이 자극한 탓인지, 혹은 페로몬을 낸 탓인지는 몰라도 주워 입은 가운이 살갗에 스치자 정한의 손길이 닿은 것처럼 몸이 흠칫흠칫 떨렸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사장님.”
윤조는 바닥에 떨어진 허리끈도 주워들고 조용히 정한의 방을 나섰다. 종일 세워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던 것이 허무할 정도로 별것 아닌 시작이었다.
* * *
다음 날도 평소와 같은 일과를 보냈다. 오늘은 수영장에 떨어진 이파리를 청소하고 선베드에 앉은 먼지를 몽땅 닦았다. 그 노고를 알아준 듯 정한은 오후 내내 선베드에 앉아 있었는데, 윤조도 저녁을 먹고 그 옆에서 같이 책을 읽었다.
“굳이 입고 오는 이유를 모르겠네.”
10시가 되기 전에 슬그머니 일어나 방에서 씻고 오니 하는 소리가 저거였다. 그럼 헐벗고 저택을 활보하라는 얘기인가. 아무리 단둘만 사는 저택이라지만 그건 심리적으로 꺼려졌다.
약을 먹고, 가운을 벗고, 침대 위로 기어갔다. 스케줄을 무시하고 있으니 오늘은 무엇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지퍼 아래로 성기를 둔 정한을 보자면 어제와 다름없는 하루가 예상되었다.
“페로몬 내 봐.”
또 목이 물릴까 싶어 냉큼 페로몬을 내었다. 제법 아팠던 어제의 충격이 거짓말 같게도 정한의 잇자국은 남아 있지 않았다. 윤조는 그 언저리를 내려다보는 정한을 보며 어제보다 오늘이 조금 더 덥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뭐 하시게요?”
“오늘은….”
정한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어제 문 자리에 가볍게 입술을 대고 빠는 것이 대답 같았다. 윤조는 예감했다. 어제 자신이 유난히 반응한 자리를 그가 빨 것이라고.
이번만은 제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는지, 정한은 정답을 아는 학생처럼 망설임 없이 윤조의 예민한 포인트로 입술을 옮겼다.
“으읏….”
두 입술로 유륜을 한껏 머금은 정한이 혀끝으로 젖꼭지를 튕기며 윤조의 아랫배를 손으로 더듬었다. 윤조는 허리를 들썩이며 다리를 모아 무릎을 세웠다. 정한의 손이 미끄러지듯 아래로 향하며 윤조의 성기를 그러쥐었다.
“하으으, 으읏….”
정한의 입 안에서 유린당한 젖꼭지가 탱탱하게 부풀어 올랐다. 윤조는 자신이 침대 시트에 엉덩이를 비비고 있는 것도 모르고 정한의 어깨를 밀어내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리 사이로 손을 넣어 벌리라는 듯 힘을 주었는데, 윤조는 무심코 힘을 주어 버티다가 제 젖꼭지를 콱 깨물리고서야 다리를 열어주었다.
“사장님, 흐, 저는 설 필요가 없는데요…?”
정한의 귀에는 제 말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윤조는 가늠하듯 제 밑을 더듬는 손가락을 느끼며 어깨를 떨었다. 이렇게 기다렸던 건가 싶어 놀라운 마음이 반, 계획을 알 수 없는 정한의 속이 궁금한 마음 반이었다.
윤조의 젖꼭지를 놓아준 정한이 아래로 내려와 주인이 몸을 뒤척일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성기를 입에 물었다. 순간 윤조의 사고가 정지됐다. 그걸 왜 무나 싶어 묻지도 못했다.
“아… 흣….”
따져 묻기도 전에 관통하듯 찔러 들어온 손가락에 정신이 팔리고 말았다. 히트 사이클 때와는 달리 무자비하게 들이닥친 침입자가 안을 헤집듯이 돌아다녔다.
그때는 저를 위한 치료였고, 지금은 그가 치료를 받는 처지이니 방식이 다를 것은 이해했으나 이런 식일 줄은 몰랐다. 이렇게, 마구잡이로 쑤셔지는 일이 좋은 것인 줄도 몰랐다.
“아, 흐…! 으, 윽!”
윤조는 정한이 더욱 깊이 들어오도록 다리를 양옆으로 벌리며 밑을 내밀었다. 정한의 입에서 굴려지던 윤조의 성기가 제 젖꼭지처럼 탱탱하게 부풀어 올랐다.
“하아… 하….”
윤조는 까마득하게 여겨지는 천장을 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진득하게 피어난 제 페로몬이 느껴졌다. 마치 히트 사이클이라도 온 것 같았다.
“아…, 으으….”
“서 집사. 잘 기억하라고.”
기억. 그래 기억.
그가 하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겠지.
윤조는 흥분으로 달뜬 몸을 애써 지탱하며 그가 어떻게 혀를 놀리는지 어떻게 제 몸을 달뜨게 하는지 기억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시야는 자꾸만 흐려지고 머릿속은 온통 몽롱했다. 들이마시는 것이 죄다 제 페로몬뿐이라 갈증이 나는 듯도 했다. 윤조는 정한의 페로몬이 궁금했다. 그는 어떤 맛일까. 가늠도 할 수 없는 상상의 맛을 음미하며 윤조는 절정에 이르렀다.
“아아아아, 아! 흐으, 으윽….”
정한이 윤조의 성기를 말끔하게 빨아 뱉었다. 윤조의 흔들리는 몸을 따라 발기한 성기가 위아래로 덜렁거렸다. 후희를 즐기는 윤조를 돕듯 정한이 부풀어 오른 안을 손끝으로 긁었다.
“응으으… 하… 읏….”
윤조의 허벅지 근육이 덜덜 떨리며 정한을 옥죄었다. 남은 흥분마저 쥐어짜듯 못살게 구는 손이 안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며 빠져나왔다. 윤조는 무미건조한 정한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후으… 흐으….”
“기억했어?”
“…나름, 하긴 했는데.”
“기대는 안 해.”
“…….”
정한이 몸을 일으켰다. 저는 이렇게 널브러져 엉망인데 그는 매우 평온해 보였다. 윤조는 일어나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다리를 모은 채 비스듬히 누워 젖은 손을 닦고 있는 정한을 바라만 보았다.
“힘들면 자도 돼.”
“그럼 사장님은 어디서 자요…?”
“진짜 자게?”
“빈말이셨어요?”
“어.”
어이가 없어 웃음도 나지 않았다.
“내일 10시.”
“알아요.”
“알면 빨리 일어나.”
“시트 갈아 드려야 해요.”
“내가 할 테니까 가기나 해.”
“정말요…?”
“하기 싫어서 말만 한 거 아니야?”
“어떻게 그렇게 제 마음을 잘 아세요?”
윤조는 냉큼 일어나 가운을 챙겨 들었다. 사실 일어나라면 일어날 수 있었다. 시트를 갈 만큼의 체력도 있었다. 다만 다른 급한 사정이 윤조로 하여금 제 주인을 시켜 먹게 했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사장님.”
서둘러 방으로 돌아와 욕실로 향했다. 한껏 조이고 있던 밑을 풀자 허벅지를 타고 안쪽에 고인 물이 줄줄 쏟아져 나왔다.
“후….”
전에 없이 진한 페로몬에 윤조는 당혹한 얼굴로 제 얼굴을 쓸었다. 연봉만큼 좋은 약의 효과가 이렇게 일찍 찾아올 줄은 미처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늦게 먹을 걸 그랬다.
쏴아아.
샤워기 앞에 서서 오로지 저 혼자뿐인 흔적을 지워 나갔다. 점점 더 정한의 페로몬이 궁금해졌다.
그나저나 내일은 어쩌지….
막막한 생각으로 더뎌진 손끝에 유난하게 부푼 젖꼭지가 만져졌다. 흐릿한 거울 속. 정한이 깨문 탓에 붉게 열이 올라 있는 자리를 보며 윤조는 손끝으로 그 자리를 매만졌다. 찌릿한 것은 분명 아픔에 가까웠는데 뒤가 가려워지는 건 무얼까.
윤조는 잠시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다 엉덩이 사이를 더듬어 보았다. 제 젖꼭지처럼 열이 번진 자리에 끈적한 액체가 고여 있었다. 그 주변을 매만지니 정한의 손가락이 안에 있는 것처럼 급한 흥분이 일었다. 잠시 거울 속 자신을 보며 망설이던 윤조는 제 손가락 하나를 조심스럽게 밀어 넣어 보았다.
정한이 그랬던 것처럼 흉내를 내어 봤지만 도통 감흥이 없었다. 오히려 기분만 침울해질 뿐이었다. 용기를 내어 손가락을 하나 더 밀어 넣었을 때야 빠듯한 만족감이 일었지만, 그 또한 오래지 않았다. 더 깊은 곳이 긁히고픈 욕망만 피어났다. 윤조는 미련 없이 손을 빼고 내일을 기다리기로 했다.
* * *
저녁 10시를 기다리느라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윤조는 저택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과를 끝내고, 도통 시간이 가지 않아 수영장으로 몸을 던졌다. 페로몬 약 때문인지, 혹은 종일 정한의 손가락을 생각한 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몸이 더웠다.
튜브에 몸을 의지한 채 왕복 운동을 수차례 했다. 올여름 자주 수영장에 몸을 담근 윤조였지만 수영이 늘지는 않았다. 이렇게 학습 능력이 없는데 과연 정한을 세울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온종일 이 생각만 하네, 짐승도 아니고.”
윤조는 튜브에 누워 저물어 오는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치료사로 나선 이후로 종일 야한 생각뿐이었다. 히트 사이클 관련으로 치료를 받았을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젠 정한의 손가락도 달리 보였다. 그가 쥐고 있는 것이 과일이든 컵이든 책이든, 죄다 입을 벌리고 보게 되었다. 어찌나 길고 단단해 보이는지. 저도 모르게 밑을 조이기까지 했다.
“약 때문이야, 약….”
그놈의 페로몬 약 때문이다. 그렇다고 핑계를 대고 싶었다. ‘섹스’라는 행위에 눈을 뜬 것이 아닐 거다. 사실 섹스라고 하기에도 모호했다. 자기 위로 수준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불현듯 지난밤, 홀로 애썼던 일이 떠올라 손을 들어 살펴보았다. 물속에 잠겨 있다 나온 손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리 밝지 않은 조명에 비쳐 반짝거리는 제 손은 그렇게 작은 손은 아니었다. 살면서 손이 작아 불편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그걸 처음 느낀 순간이 하필….
자꾸만 더해지는 생각에 윤조는 고개를 내젓고 풀 사이드로 나왔다. 허기가 지는 듯해 뭘 좀 먹을까 하다가 배가 나와 보이기는 싫어서 과감히 포기했다.
사장님 권정한은 모를 것이다. 집사 서윤조가 먹을 것을 포기한다는 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미련스러운 눈길로 주방을 지나며 윤조는 젖은 뒷머리를 매만졌다.
고요한 저택의 계단을 올랐다. 서재에서 나온 듯 정한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단숨에 계단을 올라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통화 중이라 말을 걸지 못했다. 윤조는 뒤뚱거리는 장난스러운 걸음으로 정한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 기척이 거슬린 모양인지 정한이 제 방문을 열기 전 윤조를 돌아보았다.
“아직 생각 없어. 여전히 불편하고 불안해.”
꼭 제게 하는 말 같아 윤조는 눈을 크게 떴다. 윤조의 표정을 읽은 듯 정한이 고개를 가볍게 내젓고 방으로 들어갔다. 윤조는 서둘러 제 방으로 향했다. 곧 10시였다.
*
약을 먹고 물을 마셨다. 허기진 배 속으로 떨어진 선홍색 약이 빠르게 녹아 순식간에 몸에 퍼지는 듯했다. 윤조는 괜히 제 배를 쓸며 침대 끝에 앉아 있는 정한을 보았다.
“그냥 와도 돼.”
가운 허리끈을 붙잡은 순간 정한이 저지하듯 말했다. 윤조는 그의 눈짓을 따라 가운을 갖춰 입은 채 그 앞에 섰다. 의도를 알 수 없게 빤히 보는 시선에 괜히 민망해져 흘러내린 머리를 귓바퀴에 걸어 넘겼다.
“오늘은 뭐 해요?”
손가락. 손가락. 그의 긴 손가락. 윤조는 기대를 품은 눈으로 정한을 보았다.
“앉아 봐.”
정한의 명령에 윤조는 그의 옆에 엉덩이를 대려 했으나, 그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윤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창가의 테이블로 향했다. 거기에 앉으라는 건가 싶어 발을 옮기려는데 정한이 윤조의 손목을 붙잡고 아래로 당겼다.
“여기 앉으라구요?”
“어.”
정한이 의미하는 건 침대나 의자도 아닌 바닥이었다. 윤조는 정한을 앞에 두고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편하게 앉으려다가 가운이 벌어질 것 같아 무릎을 모으고 앉으니 꼭 벌 받는 꼴이었다.
“사장님 저 뭐 잘못했어요?”
“아니.”
“근데 왜 저 이러고 있어요?”
“불편해?”
“네.”
“그럼 서 집사 편할 대로 해 봐.”
“제가 뭘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죠.”
윤조의 말에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정한의 바지 지퍼가 열렸다. 윤조는 눈을 크게 뜨고 그게 무슨 의미인지 떠올려 보려 했지만, 제가 뭐라 더 생각하기도 전에 정한이 눈앞에 끄집어내 보였다.
“세워봐.”
정한은 저 지퍼 아래에 어마어마한 것을 숨기고 있었다.
그게 어떻게 감쪽같이 숨겨지는 거지?
윤조는 이미 선 것 같은 정한의 성기를 두고 미간을 좁혔다. 세우기에 앞서 저게 어떻게 바지 안에 들어가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막상 보니까 하기 싫어지지?”
“…아뇨, 사장님. 이걸 어떻게 넣고 다니셨어요?”
“뭐?”
“이게, 그 바지 안에 들어간다고요?”
“들어가니 넣고 다녔지.”
“이게, 안 선 상태란 말이죠?”
“어.”
“이게, 알파… 그렇구나….”
윤조는 순수한 감탄을 터트리며 정한의 성기를 이리저리 관찰했다. 손으로 들어서 보지는 못하고 고개만 요리조리 돌려보고 있자 정한이 팔을 당겨와 붙들게 했다.
“만지든 빨든 세워 보라고.”
“아…, 여기가 사장님이 좋아하시는 부위인가 봐요?”
“그래.”
“다른 곳은 없어요?”
“있긴 한데, 서 집사한테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아.”
“어딘지 말씀해주시면 안 돼요? 혹시 모르잖아요. 제가 그건 잘할지.”
잠시 생각에 잠긴 정한이 몸을 뒤로 물리고는 윤조에게 일어나라 손짓했다. 윤조는 냉큼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 그가 가리킨 자리를 보았다.
“허벅지가 성감대세요?”
“앉으라고. 여기.”
“제가, 사장님 허벅지에요?”
“어.”
윤조는 잠시 망설이다가 정한을 등지고 그의 허벅지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서 집사.”
“네.”
“뭐 해?”
“앉으라 하셔서 앉았네요.”
“그렇게 앉아서 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게요.”
윤조는 고개를 돌려 정한을 보았다. 정한이 짧게 혀를 차며 윤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대로 힘을 주어 당기는 손길에 윤조는 자연스럽게 몸이 돌아 정한이 원하는 대로 그의 허벅지 위로 안착하게 되었다.
“빨아 봐.”
정한의 입술 사이에 붉게 꿈틀거리는 혀가 보였다. 설마, 하는 마음에 물어보았다.
“혀가…, 성감대세요?”
“어.”
“여길 빨면 사장님이 선단 말이죠?”
정한은 대답도 귀찮았는지 혀를 내밀어 보였다. 윤조는 제 엉덩이에 눌리고 있는 정한의 성기를 신경 쓰며 조심스럽게 그의 혀를 빨았다.
미끈하고 축축한 덩어리의 촉감이 제 입 안에 있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혀가 이랬나, 싶게 낯선 느낌에 윤조는 정한의 성기를 관찰할 때처럼 요리조리 혀를 찔러보았다.
정한의 어이없는 시선을 느낀 것은 그의 혀 밑을 살살 간질이고 있을 때였다. 윤조는 건조한 정한의 눈동자를 마주하고서 그의 혀에서 입을 뗐다.
“진심이야?”
“…저, 이런 거 해 본 적이 없어요.”
얕은 한숨을 내쉰 정한이 입을 벌려보라고 했다. 윤조는 정한이 시키는 대로 입을 벌려 보였다. 당연히 그가 제 혀로 저를 가르칠 줄 알았는데 정작 입으로 들어오는 것은 그의 혀가 아닌 손가락이었다.
“잘 기억하라고.”
윤조는 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바람에 정한의 손을 삼키듯 쪽 빨게 되었다.
“서 집사는 대답도 잘하고, 삼키기도 잘 삼키네.”
밑으로도, 위로도 죄 정한의 손가락을 삼켰다고 생각하니 얼굴에 열이 올랐다. 사실 윤조는 정한이 제게 내어준 것이 손가락인 것을 알고는 조금 흥분했다. 그가 시키지도 않은 페로몬을 뿜을 만큼.
“느낌 알겠어?”
어찌나 손가락을 유려하게 움직이는지, 제 입 안에 있는 혀가 다 어색해질 지경이었다. 윤조는 제 혀를 감싸고 도는 정한의 손가락 두 개에 홀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입천장을 쓸며 빠져나간 손가락을 아쉽게 보며 입 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해 봐.”
정한이 시킨 대로 그의 입에 들러붙어 혀를 밀어 넣고 움직여 보았다. 맞물린 입술 사이로 진득한 침이 고여 흐를 때까지 열심히 움직였다. 윤조는 정한의 턱을 두 손으로 가볍게 붙든 채 키스에 심취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평가는 냉정했다.
“더럽게 못하네.”
“그렇게 못해요?”
“어. 못해.”
제 입가를 가볍게 닦은 정한이 윤조의 입술에 고인 침도 닦아주었다. 윤조는 막막한 기분에 정한을 우울하게 보았다. 고작 키스도 못하는데 밑은 도대체 어떻게 빨아야 한단 말인가.
“그래도 이쪽이 입보다는 직접적이죠?”
“그렇긴 해.”
“도전해 볼래요.”
“도전….”
기가 찬 듯 웃는 정한을 두고 윤조는 바닥으로 내려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렇게 해도 높이가 모자라 무릎을 세워야 했다.
“정말 꼼짝도 안 했네요.”
지퍼 사이로 꺼내 놓은 정한의 성기는 여전히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 윤조는 막막한 기분으로 정한의 물렁한 성기를 두 손으로 매만지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기 싫음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어떻게 그래요. 사장님 아픈데….”
“지금 그러고 있는 게 더 아픈 것 같아.”
“여기 감각이 있긴 하신 거네요?”
“뭐라도 좀 발라 봐, 생살 찢기는 느낌이니까.”
“아… 네.”
윤조는 입을 벌려 정한과의 키스로 끈적해진 제 침을 성기에 발랐다. 알파의 성기를 이렇게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다. 베타의 성기는 본 적 있지만, 그건 시시할 정도로 여겨졌다.
“말로만 들었지, 알파 고환은 처음 봐요….”
윤조는 정한의 기분을 살피며 그의 음경 뿌리에 양옆으로 뭉툭하게 난 알파 고환을 매만졌다. 그 아래에 축 늘어진 베타도 가지고 있는 고환은 윤조의 흥미를 끌지 않았다.
“왜. 너무 많아?”
“아뇨, 이게 들어간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에요.”
“그러니 열심히 늘려 놓으라고. 서 집사한테 노팅할 때 안에 박힐 거니까.”
“저한테 노팅하실 거예요?”
“난 노팅하려고 섹스하는 타입이라.”
“아… 그럼 저 힛싸 때는 피해주세요. 확률은 낮아도, 혹시 모르니까요….”
“그때까지 내가 이 지경이면 큰일인데?”
“그렇긴 하네요, 열 달이나 남았으니까요.”
“근데 언제 세워줄 건데?”
윤조는 잡담을 그만두고 제 침으로 축축한 정한의 성기를 잡아들었다. 전보다는 만지기가 수월하긴 했지만, 빈번히 말라가는 탓에 손만 버석거렸다.
“아무래도 빨아야겠어요.”
“참 일찍 깨닫는다.”
머쓱함에 씁쓸하게 웃고는 무릎걸음을 걸어 정한에게 조금 더 다가갔다. 고개를 숙여 아까까지 열심히 제가 주물럭거린 성기를 입에 담았다.
정한이 무리하지 말라는 듯 윤조가 깊이 삼키려고 할 때마다 어깨를 붙잡아 저지시켰다. 굳이 그가 그러지 않아도 윤조는 자신이 어설퍼서 그가 바라는 만큼은 삼키지 못할 것을 알았다. 실제로 눈을 들어 바라본 정한은 따분해 보였다.
저는 숨이 꺽꺽 넘어갈 만큼 좋았는데, 자신과는 극명하게 갈리는 반응에 윤조는 조금 의기소침해졌다. 하지만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음 날, 또 그다음 날도 윤조는 도전했고, 때마다 실패했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서 집사.”
“…네?”
닷새가 넘도록 밤마다 정한의 성기를 빨던 나날이었다. 윤조는 꼬박 열흘은 열심히 해 볼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 이후로는 다른 수를 찾아야겠다 생각했다. 물론 그 수가 뾰족하게 있는 건 아니었다.
“그만하고 이리 와.”
보다 못했는지 정한이 제동을 걸었다. 윤조는 눈꼬리를 늘어트리고 침대 위로 올라앉았다. 바닥에 눌려 붉어진 무릎이 보였다.
“누워. 그리고 내가 주는 거 빨고, 밑은 만져.”
그거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재 윤조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정한을 세우는 것이었으니 그것만 아니면 다 할 수 있었다.
“뭐 해, 안 빨고.”
“저 키스 더럽게 못한다면서요.”
“내가 할 테니까 장단이라도 맞추라고. 아님 시체처럼 가만있을 거야?”
“아뇨.”
“그래. 그럼 빨아.”
윤조는 제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정한의 혀를 열심히 따라다녔다. 그의 뒤를 따를 때처럼, 그가 감을 때는 감겨주고 그가 힘을 뺄 때는 따라서 뺐다. 그러면서 그가 제게 쥐여준 그의 성기를 만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따금 한쪽에 정신이 팔리면 박자가 틀리기도 하고 손에서 힘이 빠지기도 했지만 나름대로 애썼다. 그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윤조는 점점 정한과의 행위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의 밑에서 무릎을 꿇고 성기를 빨 때보다도 스스로 느끼는 성적 긴장감이 짙었다.
“으음….”
샤워 부스에 고인 수증기처럼 희끄무레하고 축축한 농도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윤조는 침대 위로 가라앉은 제 페로몬이 정한이 몸을 뒤척일 때마다 출렁이며 바닥으로 흩어지는 걸 느꼈다. 그가 만약 제 언어를 읽을 수 있다면, 당장 제 다리를 벌려보고는 놀렸을지도 몰랐다.
움찔거리는 밑이 조금만 힘을 풀면 물을 쏟아낼 것 같았다. 윤조는 제 다리를 교차해 가며 다른 생각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정한은 집요하게 제게 파고들었다.
“으응… 흐… 읍, 사장… 님.”
더는 참기 어려워 정한을 불렀다. 여전히 그의 밑은 깜깜무소식이었다.
“왜.”
윤조는 입 안에 고인 저와 정한의 침을 삼키고, 입가에 흐른 침은 혀로 쓸어 닦았다.
“침대, 버릴 것 같아요….”
윤조는 홧홧한 뺨을 손등으로 쓸며 시선을 돌렸다. 정한의 까만 눈동자가 윤조의 벌어진 가운을 스쳐 지나 밑을 살폈다.
“풀어 줘?”
“아뇨… 여기, 버릴 것 같다니까요…?”
일부러 못 알아들은 척을 하는 건지 정한이 윤조의 다리를 벌리게 했다. 울컥 쏟아져 나오는 물을 보고는 표정도 변하지 않고 말했다.
“버릇 들었네.”
“…제가 든 게 아니라, 사장님이 들인 거예요.”
“그래. 내 탓이라 하자.”
민망한 마음에 윤조는 다리를 모으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대번에 정한에게 발목이 붙들리고 말았다.
“이러고 가게?”
“안 가요, 사장님이 이리로 오세요.”
제 뜻과 달리 정한은 빤히 아래만 바라보았다. 뜨거워진 귓불을 느끼며 다급히 말했다.
“거기가 아니라, 여기로 오시라구요!”
윤조는 제 부푼 입술을 두드렸다. 하지만 정한은 끝까지 제 말을 듣지 않고 밑을 더욱 벌려보기나 했다.
“며칠 안 했다고 이렇게 쌓일 일이야?”
“…그런 거 아니에요.”
“약이 좋긴 하네.”
“그건 맞는 것 같아요….”
그래, 약 때문이지.
윤조는 흥건히 젖은 제 밑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정한의 시야를 차단하려 손을 내려 가렸다.
“그대로 붙잡고 벌려 봐.”
“네?”
“풀어야지.”
“괜찮… 읏….”
“벌리라고.”
명령보다 빨리 정한의 손가락이 침입했다. 망설임은 잠시였다. 윤조는 제 엉덩이를 붙잡고 양옆으로 벌렸다. 정한이 상을 주듯 손가락 하나를 더 밀어 넣어주었다. 전에 없던 만족감이 윤조의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으응…!”
윤조는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입 안을 들이닥치던 혀처럼 정한의 손가락이 빠르게 안을 쑤셨다 빠지며 부푼 부위를 긁어 댔다. 윤조는 제 입에서 침이 흐르는 것도 모르고 몸을 들썩였다.
“씹어 먹겠네.”
배 속에 저 자신도 모르는 커다란 입이 있는 듯했다. 그것이 수축을 반복하며 정한의 손을 씹어 먹으려 뻐끔거렸다.
“후…, 으읏!”
배가 조였다. 허리가 뒤틀리며 아랫배가 덜덜 떨렸다. 윤조는 급하게 치닫는 요의에 정한을 불렀지만, 그는 오히려 윤조의 다리를 짓누르며 힘을 실어 깊이 들어왔다.
“아으으윽!! 으응!! 흐, 아아!!”
더는 참을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을 때, 무언가 탁 터지며 배가 흥건하게 젖는 느낌이 났다. 윤조는 정한에게 눌린 두 다리를 바들바들 떨며 숨을 몰아쉬었다. 자신이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천천히 깨닫는 중이었다.
“…아, 어떡해요….”
죄송해요, 사장님.
윤조는 연신 정한에게 사과했다. 그 목소리는 너무도 작아, 심장 박동 소리에도 묻힐 지경이었다.
“손으로 이러면 앞으로 어쩌려고 그래?”
윤조는 연신 죄송하다는 말만 중얼거렸다. 섹스하다 오줌 싸는 인간이 있었다니. 그게 자신이었다니. 충격으로 다른 말은 나오지도 않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떨리는 몸이 진정되길 기다렸다. 배꼽까지 고여 찰랑거리는 액체가 느껴질 때마다 몸서리가 쳐졌다.
“서 집사. 울어?”
“…아뇨.”
부끄러워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정한을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무리 자신이 뻔뻔하다고 해도 오줌 싸고도 뻔뻔하게 볼 만큼 낯이 두껍지는 않았다.
“사장님.”
“어.”
“저 잠깐 혼자 있고 싶은데요.”
“나가라는 소리야?”
“제가, 다 치우고 갈게요. 잠시만, 혼자 있게 해주세요.”
정한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대신 조용히 방을 비워주었다. 윤조는 정한이 방을 나가고 나서야 얼굴에서 손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투명한 액체가 마치 일부러 쏟아 놓은 것처럼 축축하게 시트 위를 적시고 있었다.
“미친 새끼 아냐….”
윤조는 스스로를 욕하며 가운으로 몸을 닦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지나친 흥분 때문인지, 오줌 싼 충격 때문인지는 몰라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미친놈아, 미친….”
연신 욕을 중얼거리며 침대 시트를 갈았다. 다행히 가운 때문인지 안까지는 버리지 않은 듯했다. 윤조는 보통 때라면 다용도실 세탁 바구니에 넣었을 시트를 꽁꽁 싸 들고 제 방으로 향했다.
욕조에 시트와 가운을 던져 넣고 애벌빨래를 시작했다. 거품 가득한 욕조에서 발을 놀리며 내일 정한을 어떻게 봐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정작 정한은 윤조의 오해를 풀어줄까 말까, 재어 보다 잠든 것도 모르고.
* * *
윤조의 오해가 풀린 건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어느 오후였다. 어울리지 않게 정한의 시선을 피한 지 이틀째이기도 했다.
정한이 서 집사가 왜 저러나 생각하다 불현듯 그날 일을 떠올리지 않았다면 윤조는 어쩌면 평생 자신이 사장님 앞에서 오줌이나 싸지른 집사라 오해하고 살았을지도 몰랐다.
“그걸 왜 그렇게 싸는 건데요?”
“좋으니까.”
“…그건, 맞아요.”
윤조는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붉게 물든 뺨을 매만졌다. 매일 약을 먹다 보니 늘 페로몬이 몸에서 흐르는 듯했다. 그런데도 정한은 조금도 느끼지 못하니, 이것처럼 답답한 게 또 없었다.
“사장님도 좋으면 그렇게 싸세요?”
“난 노팅을 하지.”
“아아…. 그럼 제가 그 정도로 좋았다는 거예요?”
“어찌나 우리 서 집사가 금욕적으로 살았는지, 고작 손가락 두 개에 싸더라고.”
“…그, 그럴 수도 있죠!”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근데 보통은 손가락만으로는 안 가지.”
“사장님 손가락이, 좀 이상해요.”
“왜?”
“어…. 암튼 이상해요.”
윤조는 팔걸이를 붙든 정한의 손을 슬쩍 훔쳐보았다.
“안 하던 짓을 하네.”
“제가 뭘요?”
더 이야기가 길어질까 싶어 서둘러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윤조는 소파에 앉은 정한의 앞에 무릎을 대고 앉아 그의 지퍼를 직접 내려 언제 봐도 신기한 성기를 꺼내었다.
여름내 길어버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고 둥근 끝부터 혀 위로 미끄러트렸다. 매일 습관처럼 빨았더니 이제는 목구멍까지 수월하게 넣을 수 있었다. 원하는 만큼 움직이거나 숨을 멈추고 조일 수는 없었지만, 저 나름대로는 발전했다고 여기고 있다.
두 손으로 정한의 허벅지에 제 무게를 지탱한 채 이따금 눈을 들어 그의 상태를 살폈다. 입술을 오므려 성기를 쭉 빨아 당기며 관자놀이를 괴고 있는 정한을 보았다. 전만큼 건조한 시선은 아니었지만, 오늘도 글렀다는 생각이 든 순간 정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혀를 더 써봐.”
삼키고, 뱉고. 빨아 당길 때마다 혀로 기둥과 선단을 쓰다듬었다. 윤조는 삐딱하게 선 정한의 눈썹을 확인하고 오른손을 들어 입 밖으로 드러난 정한의 음경을 상하로 매만졌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뿌리 쪽이 힘을 받는 듯한 느낌이 났다.
윤조는 지치지 않고 혀를 썼다. 드디어 결실을 보는 걸까. 흥분으로 가빠지는 호흡을 애써 가라앉히며 입술까지 이용해 음경을 빨아올렸다. 그러자 정한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가 들이마신 숨만큼 윤조의 입 안이 불편하게 빡빡해졌다. 윤조는 눈을 번쩍 뜨고서 엉덩이를 뒤척였다. 발기다. 발기! 그렇게 기다린 발기가 찾아왔다!
윤조는 냉큼 정한의 성기를 뱉어내고 눈으로 확인했다.
“섰어요!!!”
어찌나 기쁜지, 박수가 절로 나왔다. 윤조는 정한에게 자랑하듯 그의 성기를 들어 보였다. 기념으로 파티하자고 하고 싶었다.
“아… 죽었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윤조는 곧 처음처럼 돌아가버린 정한의 성기를 보고 상심했다.
“죽인 거겠지.”
“제가요?”
“그럼 누구겠어?”
정한이 더는 볼 것 없다는 듯 지퍼 안으로 제 성기를 챙겨 넣었다. 윤조는 다급히 그의 지퍼로 손을 가져갔다. 다시 해 볼 생각이었다.
“됐어. 이만해.”
“왜요? 또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서 집사 입술을 봐.”
열감이 느껴지는 입술 끝을 지분대며 윤조는 정한의 표정을 살폈다. 빤히 지켜보는 눈짓이 더 따가운 듯했다.
“좀… 아프긴 한데, 못 할 정도는….”
“오늘은 여기까지.”
윤조는 제 까칠한 입가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은 반드시 세우리라, 다짐하며.
* * *
마음과 달리 정한은 잘 서지 않았다. 제 애타는 마음을 알면 이래서는 안 되었다. 윤조는 정한의 성기를 붙잡고 애원했다.
좀 서주면 안 돼…?
“그래도 조금 느낌은 있으셨잖아요. 저 알아요, 사장님이 이렇게 미간을 찌푸리면 얘가 꿈틀하거든요.”
정한은 더는 들어주기 힘들다는 얼굴로 윤조의 손에서 제 성기를 빼앗아 갔다. 윤조는 지난 이틀간의 시도가 물거품이 되는 기분에 정한의 앞에 쪼그려 앉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만 가. 오늘은 글렀어.”
“한 번만 더 해 보면 안 될까요?”
금방이라도 저를 일으켜 무릎을 털어주고 엉덩이를 걷어차 쫓아낼 것 같던 정한이 저도 답답했는지 윤조에게 제 성기를 들려주었다.
윤조는 처음 그를 입에 담았을 때처럼 긴장한 눈초리로 입을 벌렸다. 아까까지 제가 빨던 것이라 그런지 눅눅한 느낌이 났다. 혀를 타고 목젖까지 찔러 넣은 성기를 입 안의 부드러운 점막으로 감싸 안은 채 압박감을 주며 삼키듯 빨자니 혀뿌리에 침이 고여 그곳에 닿을 때마다 척척한 소리를 내었다.
“우… 음….”
빨아 당길 때는 조이고 머금을 때는 풀고. 이로 긁지 않게 주의하며 혀로 기둥을 따라 올려 붙고, 또 말아 물며 정신없이 집중했다. 어찌나 집중했던지 포갠 발을 깔고 있는 엉덩이가 움찔움찔할 정도였다.
서서히 힘을 받기 시작한 정한을 눈치채고도 윤조는 놀라거나 미리 기뻐하지 않았다. 다만 정한이 이 사실을 알고 있나 싶어 눈을 들어 그를 살피기는 했다.
정한은 소파 팔걸이에 팔을 기댄 채 윤조를 비스듬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윤조는 정한과 시선을 마주하며 제 늘어지고 모이는 입술이 그에게 어떻게 보일까, 조금 걱정했다.
못생겼다고 하지는 않으니 그럭저럭 볼만은 한 걸까. 그러니 저렇게 빤히 바라보는 것이겠지. 윤조는 정한과 눈을 맞추며 제 혀끝으로 정한의 선단을 간지럽게 핥아 올렸다.
“많이 늘었네.”
윤조는 웃음을 감추지 않고 다시 정한의 성기를 물었다. 이 일로 칭찬을 받은 건 처음인 듯하다. 씰룩거리는 입술을 애써 진정하고 다시 집중했다.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전에 없이 단단해진 정한이 느껴졌다.
조금만 더.
정한의 벌어진 양 허벅지에 손을 올리고서 깊숙이 파고들었다. 음경의 뿌리까지 닿은 입술로 까끌까끌한 음모와 탱탱하게 부푼 알파 고환이 느껴졌다.
토기가 일어야 함이 마땅한데 저 역시 흥분하여 침이 미끈미끈해졌다. 윤조는 금방이라도 정한을 삼킬 듯이 덤벼들었다. 그건 정한도 다르지 않았다.
“흠….”
정한의 얕은 신음이 시작이었다. 윤조는 제 머리칼에 감기는 손가락을 느끼고 고개를 들려고 했다. 하지만 윤조는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한에게 머리가 붙들린 채 그에게 끌려갔다.
“읍…!”
놀라서 그를 붙잡고, 그것도 모자라 소파 팔걸이도 잡아 봤지만, 정한의 발기한 성기는 윤조의 목구멍에 마구잡이로 꽂혔다. 기침할 사이도 숨을 마실 틈도 없었다. 눈과 코에서 물이 쏟아졌다.
윤조는 축축한 제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정한을 힘껏 밀어내려다가도 그의 사정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이내 손끝에 힘을 풀었다. 빈약한 제힘으로는 정한을 거스를 수 없기도 하였지만.
“으, 읍…! 흡. 허업, 흐웃….”
“하아…!”
담뿍 땀이 배어난 윤조의 머리카락 사이로 정한이 고개를 내렸다. 윤조는 그의 뜨거운 숨이 제 목덜미로 쏟아지는 것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후우….”
윤조는 정한의 품에 안긴 채 가만히 제 몸을 대어주고 있었다. 그가 제게 숨만 쏟아 내었다면 꿈쩍이라도 해 보았겠지만, 제 목구멍에 쏘아지는 게 무엇인지 알고는 얌전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윤조는 피할 길 없이 정한이 뿜어내는 정액을 몽땅 삼켜내었다. 천천히 윤조의 입에서 부푼 성기를 빼낸 정한이 소파에 등을 대고 망연히 앉은 윤조를 내려다보았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윤조는 얕은 기침을 하며 제 뺨에 흐른 눈물을 소매에 닦았다.
“토하고 싶어?”
윤조는 고개만 내저었다. 혀끝에 희미하게 감도는 비릿하고 농도 짙은 맛에 슬쩍 얼굴을 찌푸리긴 했지만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느껴지는 낯선 기운에 취하는 듯했다.
“그럼 다음으로 갈까?”
정한의 말은 선뜻 알아듣기 어려웠다. 윤조는 여전히 형형하게 선 정한의 성기를 보며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게도 정해진 수순이었다. 스케줄 표를 무시하고 행해진 치료였기에 이른 건지 혹은 늦은 건지, 그 시기는 알 수 없었지만, 드디어 정한과 베타 섹스를 할 수 있었다.
윤조는 정한에게 팔이 붙들린 채 일어나 침대로 왔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정한의 페로몬이 느껴지는 듯했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목구멍을 타고 오르는 그의 향에 뒤가 저릿저릿했다.
“사장님, 페로몬 나오는 것 같아요.”
“나도 느낀 참이야.”
“그럼, 이제… 제 페로몬 느껴지시는 거예요?”
정한이 윤조를 침대에 엎어 놓고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자주 물리던 자리에 이가 박혔다. 윤조는 어깨를 떨며 그의 판단을 기다렸다.
“안 나.”
“…아직 오메가 페로몬은 못 느끼시나 봐요.”
“내 페로몬도 형편없이 나오는 걸 뭐. 아직 멀었어, 서 집사.”
이게요? 냄새만 맡았는데도 뒤가 저린데요?
윤조는 묻고 싶은 말을 뱉어내지 못했다. 윤조의 가운만 들춰낸 정한이 엉덩이를 한껏 벌리고 그대로 성기를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
형태가 되지 못한 비명이 윤조의 입 속에 맴돌았다. 윤조는 시트를 붙잡고 제 배를 터트릴 듯 자리한 정한의 존재감에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어, 윽… 흐, 읍….”
마음 같아서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윤조는 제 배 속 가득 들어찬 정한이 어이없을 만큼 좋아서, 혹여나 그가 그만둘까 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내쉬는 숨으로는 정한의 페로몬이, 밑으로는 정한의 성기를 받으며 윤조는 극에 달한 흥분을 맛보았다.
“흐… 윽….”
자꾸만 새어 나가는 소리에 시트에 얼굴을 묻으며 참아보았지만,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윤조는 정한의 손길이 이끄는 대로 엉덩이를 더욱 쳐들고 무릎을 벌렸다. 정한이 깊숙이 쑤시며 들어올 때마다 한계치를 갱신하는 듯했다.
“으흡… 윽! 으응, 끄윽….”
이렇게 좋은데 왜 눈물이 날까. 윤조는 끅끅거리며 손끝이 벌게지도록 시트를 움켜잡았다. 몸 깊숙이 자리한 질구를 벌리며 당장에라도 정한이 쳐들어올 듯했다. 정한 정도의 알파라면 노팅이 아니라도 가능할 것 같았다.
“흐, 끅…. 으읏…!”
정한의 손가락이 닿지 않던 곳까지 찢어버릴 듯 성기가 쑤시고 들어왔다. 윤조는 다급한 숨을 내쉬며 그의 신경을 거스를 만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그 참는 소리가 거슬린 모양인지 정한이 윤조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들춰 얼굴을 찾아내었다. 윤조는 뜨거운 손가락 사이로 저를 빤히 내려다보는 시선을 찾았다.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저와는 달리 정한은 윤조가 그의 밑을 빨 때보다도 감흥이 없어 보였다.
“사람 소리 내. 개새끼랑 하는 거 같잖아.”
윤조는 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저는 사장님 말은 잘 듣는 집사였다.
“하아… 윽…! 아, 흐윽! 으응!”
전에 없이 커진 신음이 귀를 울렸다. 윤조는 매트리스를 누르는 압박감이 제 온몸에도 퍼지는 걸 느꼈다. 그가 더한 자극을 원하는 것도.
“어… 윽…!!”
비좁은 틈을 늘리려 정한이 찍어 누르듯 깊이 몸을 넣었다.
“아아악…!!”
눈물이 찔끔 났다. 벌어진 입에서는 침도 새어 나왔다. 윤조는 땀이 잔뜩 배어난 손으로 제 밑을 더듬었다. 전처럼 싸버린 줄 알았다.
“사… 흐… 사장, 님. 으윽! 저, 저 또 실수할 것 같아요.”
“싸고 싶으면 싸. 참지 말고.”
사장님이 싸라면 싸야지.
윤조는 완전히 마음을 놓고 정한에게 몸을 맡겼다. 정한이 제게 몸을 쑤셔 넣을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시트 위로 투둑, 투둑, 물이 쏟아졌다.
“흐으… 응….”
바짝 선 윤조의 성기가 덜렁거리며 사방으로 물을 흩트렸다. 윤조는 제 턱 끝까지 튄 물을 느끼며 어깨를 모아 긴 숨을 내쉬었다. 정한을 오물오물 씹어대는 제 내벽이 느껴졌다. 피스톤질 하기 바쁘던 정한도 윤조의 오르가슴을 즐겼지만 끝내 사정하지는 않았다.
“하윽…!”
더는 성과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정한이 몸을 빼내었다. 윤조는 제 깊은 곳에 틀어박혀 있다 빠져나간 정한을 느끼며 어깨를 떨었다. 미끈한 물이 그곳에서도 쏟아졌다.
“후으… 제가, 다… 치우고 갈게요, 사장님….”
제 무릎까지도 축축한 것이 느껴졌다. 윤조는 몸을 일으키려다 그대로 옆으로 쓰러져 누웠다. 정한의 밑을 빨 때부터 혹사당했던 무릎이 그를 직접 받아내는 일까지 하고 나니 더는 버티기가 어려웠다. 후들거리는 무릎을 안고서 윤조는 다시금 자신이 하겠다고,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다.
“됐으니까 그냥 가.”
“제가… 할 수 있는데, 사장님이 그렇게 부탁하시니, 저는, 하… 그냥….”
왜 말도 힘들까.
윤조는 저를 어이없이 보는 정한을 보며 웃었다. 비록 미완성이긴 했지만 그와 섹스했다. 드디어. 그 기쁨을 공유하고 싶었다.
“저한테 노팅하시는 날은, 파티해요.”
“울지나 마.”
“노팅하면 울어요?”
“서 집사는 울 것 같아.”
“저 안 울어요.”
“내 좆 빨다가도 울었는데, 노팅할 때 안 운다고?”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윤조는 반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한이 모르는 게 있었다. 저는 결코 싫거나 아파서 운 게 아니었다.
“이만 가지? 데려다줘야 할 정도면 말하고.”
“혼자 갈 수 있어요.”
“그거 고맙네.”
윤조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정한의 방을 나섰다. 가랑이가 뒤틀린 것처럼 얼얼했다. 정한이 빠져나간 지도 한참인데 불쑥 그가 느껴지는 기분도 났다. 윤조는 넋이 나간 얼굴로 제 방까지 이리저리 휘청거리며 걸었다.
겨우 당도한 방에서 윤조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는 것도 모자라 등을 대고 누웠다. 절로 벌어진 다리 사이가 홧홧했다. 이렇게 몸을 가누기 힘든 것도 오늘 하루뿐이겠지. 윤조는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며 씻는 것은 잠시 미룬 채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깊은 잠에 빠진 탓일까. 윤조는 정한이 제 방을 찾아온 것을 몰랐다. 다음 날 아침, 자신이 침대에서 눈을 뜬 것도 다 잠결에 자신이 알아서 한 줄로만 알았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조금 늦게 일어난 탓인지 정한을 마주친 건 정오가 다 되어서였다. 윤조는 손에 든 우편물을 뒤로 감추고 정한을 향해 웃어 보였다. 늦잠 잤다는 사실을 들킨 것만 같아 민망했다.
계단을 다 내려온 정한이 걸음을 멈추고 윤조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칭찬이라도 해주려는 걸까. 윤조는 지난밤 자신이 낸 성과가 뿌듯한 마음에 자꾸만 실실 웃음이 났다.
한데 정한은 가만히 윤조의 이마에 손만 올려다볼 뿐, 칭찬의 말은 조금도 해주지 않았다. 윤조는 등 뒤에 감춘 우편물을 매만지며 제 얼굴을 면밀히 훑는 시선이 따가운 것인지 간지러운 것인지 고민했다.
“배고파.”
“네?”
“밥 먹자.”
들은 말이 믿을 수 없어 윤조는 제 귀를 의심하다가 퍼뜩 정신 차렸다.
“…밥이요?”
“왜. 서 집사가 다 먹었어?”
“아니요!! 저도 밥 먹을 건데, 같이 드실래요?”
“그러든가.”
어떤 칭찬의 말보다 밥 먹자는 말이 더욱 기뻤다. 윤조는 우편물을 잊고 정한의 손을 맞잡았다.
“갖다 놓으란 거야?”
정한이 제 손에 같이 들린 우편물을 보며 물었다. 윤조는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이거 제가 갖다 놓을게요. 사장님은 식탁에 가 계세요. 먼저 드시지 마시구요! 알았죠?!”
윤조는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넘어진다고 혼을 내는 정한의 목소리도 정답게 들렸다.
계단을 다 올라간 윤조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가지 않고 서 있는 정한과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시선을 내려 주방으로 걸음 하는 정한을 보며 윤조는 그의 방으로 향했다.
“으흐흠.”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 * *
창으로 빛이 밀려 들어왔다. 정한은 제 이마로 쏟아지는 따뜻한 빛에 눈을 떴다. 은근하게 침범하다가 탁 터지는 빛이 온 시야를 물들였다. 방 안에 아침이 기어들어 온 지도 한참 지난 시각인 듯했다. 어쩌면 이미 정오가 넘었을지도 몰랐다.
정한은 침대에 꼼짝없이 누운 채, 윤조의 시선이 자주 머무르곤 하는 천장 조각을 바라보았다. 그다지 흥미로울 구석도 없는데 윤조는 자주 저 조각을 살폈다.
누군가를 밑에 깔고 있을 때 상대가 저를 보지 않는 걸 싫어하는 정한은 때마다 윤조의 머리를 당겨 저를 보게 했다. 그러면 윤조의 갈색 눈동자에 고여 있던 눈물이 쏟아지고는 했다. 작은 입이 벌어지며 내뱉는 소리가 귓가에 척척하게 감기는 듯한 착각에 정한은 제 귀를 매만지며 몸을 일으켰다. 맨살을 스치는 메마른 침구의 느낌이 어딘지 아쉽게 여겨졌다.
‘사장님….’
‘왜.’
‘저 좀 들어다가 제 방에 던져주시면 안 돼요…?’
‘여기서 자든지.’
‘그럼 사장님은 어떡해요?’
‘자려고?’
‘…못 걷겠어요.’
‘그럼 자.’
‘사장님은요?’
제 위에서 늘어져 있던 몸의 무게와 젖은 피부의 감촉 따위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대로 덮고 자고 싶을 만큼.
‘난 알아서 할 테니까 자고 싶으면 자.’
‘어떻게 사장님을 움직이라 하겠어요…. 저 갈 수 있어요. 기어서라도 갈게요.’
겨우 몸을 일으킨 윤조의 머리칼이 엉망이었다. 정한은 윤조의 젖은 목덜미에 들러붙은 그의 긴 머리칼을 손끝으로 떼어주고 그가 끙끙거리며 침대에서 내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제가 수시로 움켜쥐었던 엉덩이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사장님.’
윤조가 방을 나선 시각이 새벽 3시였다. 어제보다 1시간이 더 늦어 있었다. 정한은 자신이 그렇게 오래 윤조를 붙들고 있었나 싶어 잠시 놀랐다. 그가 기어가야겠다고 한 의미를 그제야 알아채었다.
자는 사이 윤조가 다녀갔는지 서랍장 위에 우편물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정한은 개중 하나를 집어 들고 그가 제 잠을 깨우지 않으려 살금살금 걸어 다녔을 모습을 떠올렸다.
한 번은 그의 기척에 잠이 깬 적이 있었다.
‘똑바로 걸으라 했지.’
헉! 하고 놀란 윤조가 제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또 그놈의 쥐새끼라 하시려고 했죠?’
‘아니야?’
‘아닌 건 아니지만… 좀 귀여운 동물로 해주시면 좋을 텐데.’
‘서 집사는 스스로 귀엽다 여기는 모양이지?’
‘…귀엽지 않은 건 아닌 것 같긴 해요.’
눈치를 보면서 할 말은 다 한 윤조가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쥐새끼처럼 슬그머니. 정한은 제 쥐새끼가 두고 간 우편물을 뜯어 보았다.
최근 자신이 오메가 테라피 중인 것을 안 병원에서 내방할 것을 권유하였다. 정한은 익숙한 제 동기의 이름을 손끝으로 튕기고서 나머지 우편물은 보류한 채 욕실로 향했다. 늦은 하루를 시작해야 했다.
*
저택은 고요했다. 늘 바라던 모습이었는데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아 주위를 살피게 되었다. 정한은 의식적으로 소음이 이는 곳을 찾아 발길을 향했다.
정한이 찾는 소음은 그다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현관 앞 포치 천장에 전구를 가는지 사다리를 세워 둔 시설 담당자와 윤조가 보였다. 정한은 계단 중간쯤에 서서 열린 현관문 너머를 응시했다.
“이렇게 밟고 있어도 될까요, 선생님?”
“아무렴요. 잡아주시기만 하셔도 되는걸요.”
“이게 더 안전할 것 같아요.”
“집사님 덕분에 일이 수월합니다.”
“에이, 무얼요.”
윤조가 담당자의 주문에 따라 바닥에서 조명을 들어 손을 뻗어 보였다. 천장이 높아 사다리의 높이도 꽤 된 탓에 윤조의 도움이 없었으면 담당자가 고생을 좀 했을 듯했다.
두 팔을 뻗은 윤조의 허리춤에서 셔츠가 삐죽하니 나왔다. 그 바람에 드러난 속살을 보며 정한은 계단을 마저 내려갔다. 기척을 느꼈는지 윤조가 고개를 돌려 보았다. 저를 발견하자마자 환하게 웃음 짓는 얼굴을 보며 정한은 어딘지 모를 만족감을 느꼈다.
금방이라도 사다리를 내팽개치고 제게 올 것 같은 윤조를 향해 정한은 검지를 들어 사다리를 가리켜 보였다. 정말 올 작정이었는지 사다리에서 발을 떼었던 윤조가 급히 원위치로 돌아갔다. 정한은 윤조가 머쓱하게 웃는 모습을 보다 주방으로 향했다.
영양 주스로 간단히 허기를 채우고 있자니 윤조가 나타났다. 어딘가 서두르는 기색의 그를 보며 정한은 주스의 바닥을 보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윤조가 말을 걸었다.
“왜 밥 안 드시구요?”
그놈의 밥. 제대로 된 식사를 하게 된 이후로 틈만 나면 밥을 외치는 윤조였다. 정한은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매끼 밥을 먹어야겠어?”
“하긴. 그렇긴 해요.”
어쩐 일로 순순히 넘어가주는 게 의심스러워 그의 의중을 읽으려 했으나 윤조 스스로 제 뜻을 밝혀 왔다.
“그럼 차 내올까요?”
아무래도 수상했다.
“서 집사.”
“네.”
“사고 쳤어?”
“네?”
“왜 이렇게 급해?”
“사고 안 쳤어요. 차 우리는 연습 많이 해서 검사받고 싶었단 말이에요.”
“그런 거야?”
“네. 아까 시설 담당자분한테도 대접했는데 맛있다고 하셨거든요.”
“그래?”
“어디 계실지만 말씀해주시면 준비해서 가져갈게요.”
마시지 않겠다고 하면 실망할 기세의 윤조를 보며 정한은 생각에 잠겼다. 그 얼굴을 보고 싶기도 한데, 평가자가 되어 괴롭히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어찌나 표정이 풍부한지 가만히 두기만 해도 알아서 재롱을 떠는 집사이니 말이다.
정한은 창밖의 맑은 하늘을 확인하고 테라스 방향으로 손짓했다. 윤조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올 때 내 방에 우편물도 가지고 와.”
“네, 사장님.”
정한은 응접실 테이블 아래에 둔 책 몇 권을 가지고 테라스로 향했다. 선베드에 앉아 잔잔하게 바람을 맞는 수영장의 표면을 보고 있자니 곧 윤조가 나타났다.
윤조는 제 지정석에 티 세트를 놓아두고 품에 낀 우편물을 넘겨주었다. 정한은 우편물을 하나씩 살펴볼 작정이었지만 봐 달라는 듯한 윤조의 눈치에 잠시 손에서 내려놓았다.
“어때요? 저 이제 좀 잘하죠?”
“스승이 잘 가르친 모양이네.”
“저한테 스승이 있었어요?”
“네가 보고 배운 사람이 스승이지.”
“사장님이요?”
“그래.”
“그럼 이건 제가 잘한 게 아니라 사장님이 잘한 게 되는 거예요?”
“따지자면 그렇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윤조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뒤늦은 자각이 들었는지 다시 입술을 말아 문 그가 완성된 차를 내밀었다. 곁들여 온 쿠키도 함께.
“저 여기 올 때 기차 타고 왔거든요. 그때 식당칸에서 커피를 주문하니까 쿠키를 줬어요. 그게 어찌나 달고 맛있었는지 몰라요.”
“그 저질 쿠키가?”
“드셔 보셨어요?”
“어.”
“정말요? 그럼 사장님도 기차 타 보셨다는 말이에요? 어디 가셨는데요?”
질문이 많기도 했다. 정한은 찻잔을 기울여 신중히 맛을 보았다.
“어때요?”
여러모로 기다리는 게 많은 윤조의 목이 금방이라도 빠질 듯했다.
“괜찮네.”
“괜찮기만 해요?”
“내 기준으로 괜찮은 게 얼마나 힘든 건 줄 알아?”
“그렇긴 하겠지만….”
“내가 좋다고 하면 큰일 나.”
“왜요?”
“글쎄 왜 그럴까.”
“혹, 제가 만든 차가 좋아지시면 저 평생 사장님께 차를 우려 드려야 할까요? 저 없으면 사장님 차도 못 마시는 거 아니에요?”
윤조가 생각하는 게 우스워 정한은 웃음을 보이는 대신 그가 내민 쿠키를 베어 먹었다. 기차에서 먹어 봤던 달아 빠진 쿠키와는 비할 바 없이 완벽한 맛이었다.
“서 집사는 그 기차에서 먹었던 쿠키랑 이 쿠키랑 어느 쪽이 취향이야?”
“기차 쿠키요.”
“뭐?”
“다시는 못 먹잖아요.”
“희소성을 더 상위 가치로 두는구나. 근데 또 기차 탈 일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아뇨. 다시는 없어요. 거기다 전 이제 두베 사람이니까, 그때처럼 간절할 수 없거든요. 여기서는 이런 고급 쿠키를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이유도 커요. 지금 그 쿠키를 먹으면 뱉어낼지도 모르겠어요.”
“배가 불렀다는 얘기네.”
“어쩌면요. 그래서 사장님께 늘 감사해요. 절 배부르게 해주셨잖아요.”
배부르게 해줬다라….
여러모로 해석이 가능한 말이었다. 정한은 눈길을 돌려 저를 보고 있는 윤조와 눈을 마주했다. 그가 앉은 자리에 해가 들어와 있어 얼핏 눈이 부셔 보였다. 그의 머리카락 색과 같은 갈색 눈동자가 평소보다도 투명하게 느껴졌다.
“잠은 잘 주무세요?”
자는 걸 뻔히 봤을 거면서 묻는 말에 정한은 눈을 가늘게 떴다. 윤조의 눈동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였다.
“덕분에.”
“머리는요?”
“괜찮아.”
뿌듯한 얼굴로 미소 지은 윤조가 제 몫으로 따라 놓은 차를 살짝 머금었다. 정한은 윤조의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고 다시 차를 음미했다.
윤조는 한동안 정한의 곁에 머물러 있었다. 정한이 우편물을 다 확인하고 그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린 것만 아니면 이렇다 할 대화는 없었다.
“왜 이렇게 한꺼번에 고장 나는지 모르겠어요.”
마침 저 멀리 사다리를 어깨에 이고 지나가는 시설 담당자를 보며 윤조가 중얼거렸다. 정한은 윤조가 쿠키를 먹느라 우물거리며 말하는 통에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가름끈을 내려 책을 덮고 윤조가 앉은 자리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막 쿠키를 입에 밀어 넣던 윤조가 손을 멈추고 보았다.
“왜, 왜요?”
“말을 똑바로 해야지.”
“아… 한꺼번에 고장이 나서요. 왜 그럴까, 하고.”
“한 번에 설치했으니까.”
“그렇겠죠…?”
윤조가 마저 쿠키를 입에 넣고 열심히 씹었다. 꼭 자리를 피하려는 것처럼. 정한은 윤조에게 몸을 기울인 채 그가 쿠키를 씹어 목구멍으로 삼키는 모습까지 지켜본 뒤에 말을 걸었다.
“솔직히 말해. 사고 쳤지?”
“저 요즘 얌전히 잘 살고 있는데요?”
“근데 왜 말을 더듬었어.”
“그건, 그….”
“그 뭐.”
윤조가 코끝을 매만지며 눈치를 보았다. 정한의 눈매가 더할 수 없이 가늘어졌다. 버티기 어렵다 여겼는지 이윽고 실토하는 윤조였다.
“사장님한테서 냄새가….”
“냄새?”
“페로몬이요….”
“왜. 싫어?”
“아뇨….”
“근데.”
“그냥….”
헛기침을 한 윤조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저 가 볼게요. 책 읽으세요.”
쿠키 바구니와 차는 그대로 둔 채, 윤조는 저택으로 돌아갔다. 정한은 서두르는 기색의 윤조를 보다 제 손목에 코를 묻고 향을 맡았다. 저도 의식하지 못했던 향이 희미하게 배어 나와 있었다. 지나치게 옅어서 피부에 직접 코를 대어야 할 정도인데 윤조가 느낀 것을 보면 그가 먹는 약 효과가 상당한 모양이었다.
정한은 식은 차로 손을 뻗으며 다시 책을 펼쳐 들었다. 향긋한 차로 축축하게 혀를 적시고 있자니 문득, 윤조가 궁금해졌다. 정한의 시선이 활자가 아닌 바람에 일렁이는 수영장으로 향했다.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는 수면에 산란한 빛이 번져 있었다. 이따금 바람이 세게 불면 출렁거리며 경계선을 빠져나와 바닥을 적셔댔다. 마치 그것처럼 때 이른 충동이 꿈틀거렸다.
베타 섹스의 영향 때문일까. 오메가의 페로몬을 느끼지도 못하면서 몸이 달았다. 정한은 펼쳤던 책을 덮고 몸을 일으켰다.
저택으로 돌아와 윤조를 찾아다녔다. 그는 멀리 있지 않았다. 현관 앞에 서서 갈아 놓은 전구를 확인하고 있었다.
“서 집사.”
부름에 고개를 내린 윤조가 정한을 향해 몸을 틀었다. 정한은 습관처럼 윤조의 목덜미로 손을 뻗어 제게 당기려 했다. 누군가의 부름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목을 물어봤을 테다.
“다 됐습니다, 집사님.”
막 정한의 손길이 윤조의 목을 감싼 순간이었다. 윤조가 저를 부른 소리에 깜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정한의 시선은 다가오려다 그대로 걸음을 멈춘 시설 담당자에게 향했다.
“아, 아이쿠. 도련님 안녕하십니까.”
넙죽 허리를 숙여 보인 담당자를 향해 정한은 손짓으로 물러가라 전하고 다시 할 일을 했다. 놀란 윤조가 가슴을 붙잡고 힘을 주어 밀어내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페로몬 내 봐.”
“여기서요?”
“그럼 어디서 낼까?”
정한은 윤조의 목을 두드려 재촉했다. 저 멀리, 서둘러 돌아가는 담당자의 등이 보였다.
“내고 있는 거 맞아?”
“…맞는데요.”
정한은 윤조의 목덜미에 이를 박고, 그것도 모자라 입술로 빨아 당겼다. 윤조의 몸이 자꾸만 움찔거렸다. 그를 붙들고 있는 정한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사장님….”
“왜.”
“안에서 하면 안 될까요…?”
곤란한 표정의 윤조와 눈을 마주하며 정한은 물었다.
“왜, 뭐 또 더하게?”
“사장님은, 요만큼 낸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저한테는 엄청 많아요.”
“그래서. 고작 이걸로 젖기라도 했어?”
그렇게 말도 많고 질문도 많던 제 집사의 입이 쏙 다물렸다. 정한은 은근한 희열을 느끼며 윤조의 붉은 뺨 언저리를 엄지로 쓸었다.
“10시까지 기다려야지.”
“기다리는 거, …아닌데요?”
“아니야?”
“네.”
솔직하지 못한 입술을 쏘아 봐주고 정한은 저택으로 들어갔다. 홀로 남은 윤조의 빤한 시선이 등으로 느껴졌다.
정한은 윤조의 페로몬이 궁금했다. 이토록 오메가의 페로몬에 흥미를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옅디옅은 열성의 페로몬에는.
만일 그런 날이 찾아온다면, 어떤 충동이 저를 사로잡을지도 궁금했다. 아마 그때엔 많은 것이 변해있으리라. 어쩌면 아주 이른 시일 내일지도 모른다.
정한은 막 계단을 다 올라 뒤를 돌아보았다. 현관문을 닫고 있는 윤조의 등이 보였다. 그는 곧장 응접실을 가로질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정한의 시선은 윤조의 모습이 사라지고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이미 변해 가고 있는지도. 정한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기다리는 건 자신이었다.
* * *
번쩍 눈이 떠진 순간 윤조는 묘한 이질감에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정한의 페로몬에 오늘도 여지없이 방으로 돌아온 그대로 쓰러져 잔 줄 알았다. 한데 이 어둠 속에서도 알 수 있는 넓은 공간감은 결코 제 작은 방이 아닐 거란 확신이 들었다. 불길한 예감이 얼굴을 스쳤다.
어둠 속을 찬찬히 응시하고 있자니 눈에 익은 천장 조각이 어렴풋이 보였다. 윤조는 이를 악물고 눈을 내리감았다.
기어이 사고를 쳤구나.
속으로 저를 욕하며 의식한 순간 삐질삐질 나기 시작한 땀을 느꼈다.
테라피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와 정신없이 잠드는 건 하루 정도면 충분하다 여겼다. 분명 내일은 더 나을 것이라 기대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하루가 이틀이 되고, 그 이틀이 벌써 보름을 넘겼다. 정한과의 일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을 간과한 탓이었다.
‘사장님, 저 이제 기어가는 건 고사하고 굴러가야 할 것 같아요….’
‘굴려줘?’
‘사장님 말씀이 왜 다른 뜻으로 들릴까요…?’
틀리지 않은 예감이었는지 정한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꼼짝도 하기 힘든 저와 달리 그는 여유가 넘쳐 보였다. 실제로도 그랬겠지만.
‘그냥 여기서 자.’
‘그럼… 사장님은요?’
‘한 번만 더 그 소리 하면 말도 못 하게 만들어줄 거야.’
정한은 그럴 수 있었다. 구르는 건 고사하고 말도 못 할 지경으로 만들 수 있었다. 윤조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정한이 저를 봐주고 있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그의 뜻대로 두었다면 두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도 이 침대를 벗어나지 못했을 테다. 윤조의 입은 자연스럽게 다물렸다. 현실에 순응해야 했다. 하루가 이틀 또 보름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그날 엉금엉금 기어가거나 정한의 발에 차여 굴러갔다는 건 아니다. 그에게 짐짝처럼 들려 방에 던져졌다. 바라던 바였는데 침대에 던져질 때의 충격이 상당했던지라 곧장 다른 생각이 들었다. 아주 오랜만에 검은 머리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상대가 정한이었기에 그다지 괘씸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어디에서 자든 신경 쓰지 않게 차라리 기절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만 잠깐 했다. 한데 그놈의 생각이 화근이었는지, 기어코 그를 신경 쓰지 않고 잠들어버렸다.
기절을 해야 했는데….
뻐근한 허리로 손을 가져가며 슬그머니 몸을 침대 끝으로 가져갔다. 그 조금의 움직임이 뭐라고 이불이 버석거리며 소리를 내었다. 윤조는 눈을 굴려 잠든 정한의 인영을 살폈다. 기분 탓인지 그가 잠들지 않고 저를 주시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겨우 다리 하나를 내리고 기듯이 바닥에 착지한 윤조는 사방을 더듬어 제 가운을 찾아 쥐고 몸을 일으켰다. 눈이 어둠에 적응했는지 방을 나오기 전, 돌아본 침대에 곤히 잠든 정한이 보였다. 윤조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조심스레 정한의 방을 빠져나왔다.
생쥐처럼 걸어 도착한 방에서 윤조는 그제야 크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가운을 의자에 걸어두고 곧장 욕실로 향했다. 욕조에 물이 차기를 기다리며 잠시 그곳에 걸터앉아 몸 상태를 점검했다.
제 온몸 곳곳에 흩뿌려지고 또 마른 흔적들이 버석거리며 만져졌다. 뒤는 손을 대어 보지 않아도 알 만했다. 실은 아직도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찌걱찌걱 소리가 나는지라 서둘러 안을 비우고 싶기도 했다. 생각만 해도 까마득한 작업이라 미리 지쳤다.
접어 안은 왼쪽 다리에 턱을 얹고 쏟아지는 물을 보았다. 뿌옇게 번진 온기가 솔솔 잠을 불러왔다. 윤조는 무릎에 대고 있던 턱에 힘을 주며 쏟아지는 잠을 잠시 맡기려 했으나 이내 발이 미끄러져 서둘러 몸을 일으켜야 했다.
기다리다 지겨워 반도 채워지지 않은 욕조에 들어갔다. 얼마 오르지 않은 수위를 보며 새삼스레 제 마른 몸을 훑어보게 되었다. 미자르와는 다르게 두베에서 먹는 양이 두 배는 넘는 듯한데 어째 살이 이리도 찌지 않았을까. 오히려 더 빠진 듯하다.
매일 10시부터 시작되는 야근 때문임이 확실했지만, 온전히 그것 때문에 살이 빠지는 건가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해졌다. 제 주 업무가 곧 그것인 듯해서 중심을 잘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큰 차도를 보이던 정한이 정체기에 들어선 것 같아 걱정이었다. 보름이 넘도록 이어진 강행군에도 정한은 아직 한참 멀었다고 했다. 제 페로몬이 약한 편이기는 했지만 비싼 약도 먹고 있는데 좀처럼 나을 기미가 없어서 이게 제 능력의 한계인가 싶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윤조는 정한이 인제 그만 치료사를 바꾸자고 할까 봐 내심 고민 중이었다. 제대로 된 치료사라면 오히려 자신이 권유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 생각을 하자니 입에 납을 단 것처럼 무거워지고 머리털이 쭈뼛 서는지라 자주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한번 시작한 일을 스스로 마무리하고 싶은 욕심이 컸다. 정한을 생각하면 그래서는 안 될 테지만.
물이 가슴께까지 올라왔을 때 윤조는 수도를 잠그고 등을 기대었다. 요즘엔 구석구석 씻지 않으면 저한테서 정한의 페로몬이 풀풀 풍겼기에 함부로 바깥을 돌아다니기가 민망했다.
윤조는 초소에 막 들어선 저를 보고 놀라던 보안 팀장을 잊을 수 없었다. 소문의 진상을 확인한 듯한 얼굴로 우편물을 건넨 팀장이 내일부터는 저택으로 직접 자신이 찾아오겠다고 전했다.
어쩐지 그게 더 만천하에 소문을 내는 듯해 윤조는 한사코 팀장의 배려를 거절했다. 제 기상 시간이 뒤죽박죽인 이유도 있었지만, 되도록 저택으로 외부인이 걸음 하는 건 지양하고 싶었다. 정한이 제 상태를 점검하듯 수시로 목덜미를 물어댔으니 더욱 그랬다.
손톱 사이, 발가락 끝, 귓바퀴 등등 손에 닿는 모든 곳에 남은 정한의 흔적을 지우고 나오니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윤조는 대충 물기를 닦기만 하고 침대에 올라가 이불을 당겨 덮었다. 어찌할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곯아떨어졌다.
*
새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뜬 윤조는 자신이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것을 알았다. 얼마 만에 제대로 된 시간에 일어난 건지 헛웃음까지 나왔다.
욕조에서 피로를 푼 게 효과가 좋았던 건지 몸이 가뿐했다. 반면 날씨는 희끄무레한 것이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했다. 윤조는 아쉬운 얼굴로 창밖을 보다 몸단장을 하고 방을 나섰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간단하게 차를 마셨다. 며칠 전 들여온 쿠키 상자가 벌써 바닥이 나 있어 양심껏 하나만 먹었다.
여유로운 아침을 잔뜩 만끽한 뒤에 우편물을 가지러 저택을 나섰다. 몸 상태가 좋았던 건 기분 탓이었던 모양인지 초소로 향하는 길에 허리가 무거운 느낌이 들어 자꾸 두드리게 되었다. 이 또한 보안 팀장의 시선에 어찌 보일지 알 수 없어 대문에 가까워진 뒤로는 손을 모으고 걸었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오늘은 이르게 오셨군요.”
“예… 그렇게 되었네요.”
허리를 두드리든 말든 어느 시간대에 가도 팀장은 저를 볼 때 어떤 ‘사실’을 가늠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윤조는 그저 하하하 웃으며 팀장이 건네주는 우편물을 받아 들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꾸벅 허리를 숙이고 서둘러 저택으로 돌아왔다. 허리가 금방이라도 비를 내릴 듯한 하늘처럼 계속해서 무게를 더했다. 깊은 새벽까지 정한에게 붙들려 있었던 이유도 있겠지만, 저 하늘도 한몫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그럴 나이는 아닌데, 하며 실외용으로 둔 구두를 솔로 싹싹 쓸어 내었다. 부드러운 가죽이 윤조의 손끝에서 온화한 빛을 띠었다. 이렇게 멋진 구두를 신고 아직 두베 시내를 걸어 보지 못했다니, 그것참 아쉬운 일이다. 당분간 정한의 치료에 전념해야 했기에 윤조는 아쉬운 마음을 고이 접어놓았다.
가볍게 묻은 흙먼지가 고작인 정리를 끝낸 뒤 윤조는 다용도실로 향했다. 아침에 배달 온 세탁물을 분류하여 장소에 맞게 정리했다. 2층에 가지고 올라가야 할 것들이 대부분이라 1층 정리는 빠르게 끝났다.
정한의 욕실에 떨어진 세제를 함께 챙겨 계단을 올랐다. 정한이 자고 있을 확률이 높았기에 문 앞에 가지고 온 것을 두고 저는 딴 일을 먼저 할 생각이었는데, 아까는 닫혀 있었던 문이 조금 열려 있는 게 보였다. 저만큼이나 정한이 일찍 일어난 모양이었다. 윤조는 정한의 방 앞에 세탁물 걸이를 세워 두고 조심스레 노크했다.
“사장님,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노크에도, 방문을 알리는 말에도 정한은 대답이 없었다. 서재라도 간 건가 싶어 윤조는 거리낌 없이 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세탁물 걸이를 들고 왔다.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늘 빛이 들거나 달빛이 고여 있던 정한의 방이 전에 없이 우중충한 느낌이 들어 윤조는 괜히 조명을 밝히고 할 일을 시작했다.
우편물을 침대 옆 서랍장 위에 둔 뒤, 요즘 매일 갈고 있는 침대 시트를 가장 큰 서랍장 아래에 넣고 욕실 수건을 챙겼다. 반이 넘게 비어 있는 세제를 채우고 세면대의 물기를 정리하고 나오니 창밖에 비가 내리는 게 보였다.
윤조는 정한이 열어 둔 창을 닫고서 바닥을 살폈다. 혹시나 들어온 비가 있나 싶어 꼼꼼하게 코너를 돌아가며 보았는데 다행히 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어….”
바닥의 카펫이 긁히지 않게 세탁물 걸이를 들고 방을 나서려는데 정한이 나타났다. 그는 통화 중이었는지 윤조를 보고서는 눈인사만 한 채 안으로 들어섰다.
윤조는 정한이 열어 둔 문으로 세탁물 걸이를 들고 그의 방을 나왔다. 침대에 걸터앉아 통화 중인 정한을 보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문 틈새로 점점 사라지는 정한의 표정이 전에 없이 밝고, 또 편해 보였다.
닫힌 문 앞에 선 윤조는 세탁물 걸이를 내려놓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한의 편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이었다.
꼭 페로몬을 인식하고 안 하고만을 성공 여부로 판단해야 할까. 전과 달리 그는 잠도 잘 자게 되었고, 밥도 먹게 되었고, 저렇게 잘 웃게 되었으니 조금 더디더라도 괜찮은 게 아닐까.
슬그머니 들었던 치료사 교체에 대한 고민이 사그라들었다. 자신이 잘하고 있다는 확신도 생겼다. 실제로 당사자인 정한이 더딘 차도에 대해 아무런 지적을 하지 않은 점도 컸다. 괜히 지레짐작으로 찔린 건 저 자신이었다. 윤조는 더는 초조해하지 않기로 했다. 제게는 이 저택에서 보낼 평생의 시간이 있었다.
‘그놈의 평생.’
지긋지긋하다는 듯 말하던 정한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진짠데.”
당시의 말대답을 다시 중얼거리며 세탁물 걸이를 다시 들었다. 가져온 물건을 죄 다용도실에 돌려놓으려 계단을 내려가고 있을 때였다. 윤조는 콧노래를 멈추고 자신이 목격한 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잘못 본 게 아닌 모양인지 복도 창에 저택으로 걸어오고 있는 우산 두 개가 보였다. 설마하니 권 회장이 온 건가 싶어 세탁물 걸이를 복도에 그대로 내려놓고 현관으로 달렸다.
“어찌 알고 마중을 나왔어?”
급히 호흡을 가다듬고 현관문을 열어 맞이한 이는 기대한 권 회장이 아니었다.
“가만 보면 너도 고생이 참 많아?”
보안 요원에게 접은 우산을 건네준 한석이 이 저택만의 기이한 방문 형식을 꼬집어 지적했다. 윤조는 최근 정한이 방문 벨 소리 하나만이라도 참아주게 된 게 어디인가 싶어 한석의 말에 동조하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정한이 말고 너 보러 온 거라, 어쩌나 했어. 마침 잘됐네.”
“절 보러 오셨다고요?”
“어. 서 집사. 너.”
제게 볼 일이 있다면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윤조의 입매가 절로 굳어졌다.
“…미자르에 무슨 일 있어요?”
한석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정말 미자르에 일이 있나 싶어 윤조는 가슴이 조여들었다. 설마, 삼촌이 알았다든가. 이미 삼촌이 와 있다든가. 그런 것만 아니었으면 했다.
“차라도 한 잔 내어주지 않겠어?”
“안으로 드세요.”
“참 빠르기도 하지.”
비꼬는 한석의 말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금방이라도 삼촌의 두툼한 손이 제 뒷덜미를 붙잡고 미자르로 끌고 갈 것만 같았다.
*
어떻게 손을 움직였는지 모르겠다. 윤조는 손이 가는 대로 차를 우리느라 한석이 저를 위해 가져온 것이라며 내민 것도 성의 없이 받아 들었다.
“아주 혼이 나갔네, 혼이 나갔어.”
놀리듯 웃는 한석에게 윤조는 찻잔을 내밀었다. 쿠키도 잊지 않았다.
“드세요.”
“으음, 향이 좋기도 해라.”
제게는 폭탄을 던져 놓고 한석은 여유롭기만 했다. 그와는 상관없는 일일 테니 당연한 태도겠지만 윤조는 한석이 전에 없이 얄미워 보였다. 그의 등 뒤로 주룩주룩 내리는 빗물이 꼭 제 등에 고인 땀 같았다. 붙이고 앉은 무릎을 움켜쥔 채 윤조는 한석의 입술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차만 음미하기 바빴다.
“숨넘어가겠네, 숨넘어가겠어.”
“그럼 좀 살려주시든지요.”
“많이 되바라졌네? 하긴. 그럴 만해.”
그럴 만한 건 무얼까.
윤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석의 말을 해석하려 했지만 될 리가 없었다.
“흥미로운 소식이 들어와서, 서 집사도 알아 두라고.”
찻잔을 비운 한석이 품에서 두 번 접어 포갠 서류를 내밀었다. 윤조는 조심스럽게 서류를 펼쳐 보았다. 익숙한 이름과 사진이 그곳에 붙어 있었다.
“미자르에 사는 사촌 동생 맞지?”
“…네.”
“둘이 쌍둥이인 걸로 아는데.”
“형… 쪽이네요.”
“그래, 그중 하나가 집사 하겠다고 했나 봐.”
“제가 여기서 사고로 죽은 줄 알고도요?”
“계약금이 좀 짭짤했어야지. 네가 오메가인 걸로 재미도 봤겠다. 마다할 게 뭐가 있겠어? 그쪽 아버지가 너한테 하던 짓이 아들한테까지 간 모양이던데?”
“그럴 리가요…. 그렇게 아끼던 애들인데….”
한석이 다시 서류를 가져가며 말했다.
“뭐, 덜 아픈 손가락은 있는 법이니까.”
“전 안 아픈 손가락이고요?”
“네가 네 삼촌 손에 있긴 했겠어?”
틀리지 않은 말이라 윤조는 씁쓸히 웃고 말았다. 그건 그렇고, 윤조는 한석이 제 집안 사정을 지나치게 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잘 알 수밖에. 알아 오라고 하시니 알아야 하지 않겠어?”
“누가… 요?”
“누구겠어?”
윤조는 퍼뜩 생각나는 사람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멍청히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윤조를 보며 한석이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으세요?”
“암만 얼굴이 예뻐도 바보처럼 굴면 미워지기 마련인데, 넌 참 밉지가 않다?”
“…….”
“네가 잡은 줄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제가 잡은 줄이면….”
윤조는 제게 유일하게 줄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을 떠올렸다. 그 줄 하나로 제 인생이 바뀌었으니 한석이 그리 표현하는 것도 수긍이 갔다. 하지만 기분이 불쾌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우리 사장님한테 그렇게 잘 보이고 싶으세요?”
“마음은 부정할 수 없어, 근데 난 바라지는 않아. 그건 어려운 일이거든. 근데 너는….”
말을 딱 그친 한석이 홀로 고개를 내젓고는 다시 사촌 동생의 이야기를 꺼냈다.
“얘가 두베로 올 뻔했어.”
“그럼 다른 데로 갔어요?”
“오긴 했어.”
“오긴 했다면… 혹, 저처럼 문전 박대라도 당했대요?”
“아니. 두베에서 제일 좋은 집에 갔지.”
“아… 그거, 잘… 됐네요.”
어쩌면 평생, 이대로 이 저택에 갇혀 사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것 같았다. 혹여나 밖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뒷감당을 어떻게 해야 할까. 살아 있어 다행이라는 말은 고사하고 머리를 쥐어뜯기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거짓말 되게 못하네.”
“그런 편이긴 해요.”
“잘 들어. 갔다고 했지, 산다고는 안 했어.”
“그럼요?”
“그 댁 어르신은 당신 뜻대로 일이 되지 않으면 좀… 미치시는 경향이 있거든?”
“걔가 사고 쳤대요…?”
저만큼이나 짧은 경력으로 들어간 사촌 동생이 저처럼 사고를 친 건가 싶어 윤조는 제 형편도 잊고 걱정하고 말았다. 정한이야 워낙 특이한 저택 주인이라고는 하지만, 두베 제일가는 부잣집이라면 얘기가 달라질 것 같았다.
“사고? 사고는 무슨. 아… 사고처럼 되기는 했다.”
“네?”
“내가 깊게는 얘기 못 해줘. 넌 그냥, 재수가 좋다는 것만 알면 돼.”
“네…. 그건 맞는 말씀이에요.”
“나한테 좀 고맙긴 해?”
“고마운 부분이 있긴 있어요.”
“그래. 그거 잊지 마. 나한테 좀 고마웠던 거.”
보자 하니 순전히 자기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는 것 같아 윤조는 정색하고 한석을 보았다. 그러자 그가 몸을 물리며 놀란 얼굴을 했다. 연극배우처럼 지나치게 극적인 자세였다.
“난 좋은 소식 전해주러 온 거라고!”
“도대체 그게 무슨 좋은 소식이에요? 전 이제 평생 여기 갇혀 살게 되었는데!”
“네가 왜 갇혀 살아? 허…! 벌써 너 가둬 두겠대? 엄마, 진도도 빠르다 얘.”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윤조는 머리를 긁적이다 자신이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래서 걔는 어디 있는데요 지금?”
한석이 윤조가 그랬던 것처럼 천장을 바라보았다. 제 머리 위에 있는 사람은 사장인 정한뿐. 윤조는 소름 돋는 기분에 제 무릎을 꽉 움켜쥐고 한석을 굳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자신을 여기다 앉혀 놓고 한석이 정한에게 제 사촌 동생을 소개해준 것일까. 그가 말한 두베 제일가는 부잣집이 여기였던 건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무슨 착각을 하는 거야. 암만 네 사장이 돈이 많아도 걔 아버지만 하겠어?”
“회장님이 두베 제일이세요?”
“여태 그것도 몰랐어?”
“네.”
한석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런 애랑 무슨 얘기를 하러 온 건지…. 하긴. 네가 눈치 있게 계산적으로 굴면 재미없었겠다.”
“저야말로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알아듣게 좀 말씀해주세요.”
“그걸 어떻게 내 입으로 직접 말해?”
“그럼 뭐 하러 오셨어요?”
“너한테 줄 대려고 왔잖아!”
“저한테 왜요?”
“요즘 정한이 어때?”
또 자기 궁금한 것만 묻는 한석의 말에 윤조는 얼굴을 찌푸리고 보았다. 윤조의 표정을 살핀 한석이 헛기침을 하고 다시 말했다.
“서 집사.”
“네.”
“서 집사는 이 저택에 누가 산다고 생각해?”
“저랑 사장님이요.”
“뭘 모르네. 아직도 몰라? 여기 얼마나 많이 사는데?”
“…무슨 소리세요. 저랑 사장님밖에 없어요.”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던 한석이 윤조가 기분 나빠하는 눈치를 읽고 급하게 웃음을 만들어 내었다.
“내가 따로 해줄 말은 없고, 서 집사는 이대로 살아. 그게 제일 좋은 결과를 만들 것 같아.”
“저 요즘 사장님 치료하는 거 아시는 거죠? 그 결과 말씀하시는 거 맞죠? 그렇지 않아도 초조해하지 말자고 생각하는 중이었어요.”
“뭐, 그것도 속하기는 해. 아무튼 다른 건 걱정 말고… 예를 들어 네 사촌. 삼촌. 그거 이제 신경 쓸 필요 하나도 없어. 말했지? 여기 어르신이 미치신다고. 그러니 넌 그냥 너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
“…네. 그럴게요.”
미자르로 돌아간 걸까. 혹은 집사 자격이 박탈당했거나. 권 회장이라면 어쩐지 그럴 것 같았다. 저만 해도 정한이 아니었다면 이미 이 저택에서 끌려 나가고도 남았을 테니까.
“나 잊지 말고.”
“어디 가세요?”
한석은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윤조는 의자를 밀고 일어서는 한석을 배웅하려 따라 일어났다.
“배웅할 거 없어. 나 알아서 갈게. 정한이한테는 나 온 거 말 안 해도 돼.”
한석이 더는 있기 싫다는 듯 서둘러 저택을 나갔다. 윤조는 한석이 나가버린 다이닝 룸에 한동안 앉아 있었다. 생각의 정리가 필요했으나 한석이 던지고 간 말이 워낙 많아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누구 왔어?”
때마침 나타난 정한이 주방으로 들어가며 넌지시 물었다. 윤조는 고개를 반듯이 들고 냉장고를 열고 있는 정한의 등을 보았다.
“서 집사, 내 말 못 들었어?”
“아… 염 사장님 오셨어요.”
“그래?”
“네. 잠깐 저한테 볼일 있으셔서요.”
이 정도만 말해도 더는 묻지 않겠지.
윤조는 정한이 식사를 하려나 싶어 그를 도와주려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한석이 마신 찻잔을 챙겨 들고.
“무슨 볼일?”
“네?”
“염한석이 너한테 무슨 볼일이냐고.”
“아… 제 사촌 동생이 두베에 왔다는 얘길 전해주셨어요.”
“그래?”
“네.”
다른 건 온통 모호한 말이라 윤조는 자신이 듣기에 정확하게 인지한 것만 밝혔다. 정한은 식사할 생각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영양 주스만 꺼내었다. 윤조는 개수대에 찻잔을 두다 한석이 제게 주고 간 것이 떠올라 다시 다이닝 룸으로 가려고 했다.
“그래서.”
“네?”
“그 사촌 동생은 지금 어디 있는데?”
주방을 나서려던 윤조를 붙잡듯 정한이 물었다. 윤조는 한석이 정신없이 늘어놓은 말을 종합해서 답했다.
“글쎄요…. 미자르로 돌아간 것 같아요.”
“그래?”
“네. 저처럼 집사 일하러 왔는데 잘 안 된 모양이에요.”
근데 그게 하필 회장님 댁이래요.
이 말이 하고 싶어 입이 간질거렸지만 참기로 했다.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오면 그다지 반기지 않는 정한을 알아서다. 그나저나 어쩐 일로 이렇게 캐묻나 싶어 윤조는 정한의 옆얼굴을 빤히 보았다.
“왜.”
“아. 염 사장님이 저한테 뭘 주셨어요.”
주스를 마시던 정한의 눈짓이 가늘어졌다. 윤조는 냉큼 다이닝 룸으로 가 한석이 가져온 것을 그에게 보였다.
“이걸 왜 나한테 주는데?”
“네?”
“서 집사한테 준 거라며.”
“아. 하하… 버릇 들었나 봐요.”
뭘 받아 본 적이 있어야 제 것이라 여기고 열어 봤을 텐데. 윤조는 정한에게 다시 물건을 받아 들고 포장을 뜯어 보았다. 바닥이 묵직한 병이었다.
“와인… 일까요?”
읽을 수 없었다. 알 수 있는 건 숫자뿐. 윤조는 정한에게 라벨을 보이며 그에게 눈짓으로 설명을 부탁했다. 영양 주스를 다 마신 정한이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아무 말 하지 않다가 윤조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서 집사 선물 맞네.”
“그래요?”
“어. 서 집사랑 닮은 거야.”
“이 와인이랑 저랑요…?”
설마하니 사람 몸 맛이 나는 와인이 있을까 해서 윤조는 경악한 얼굴로 와인을 보았다. 와인은 포도로 만든다던데, 설마 사람을…. 오메가를 담근 걸까…?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빤히 생각을 알겠다는 얼굴로 정한이 말을 덧붙였다.
“정 의심스러우면 바로 마셔 보든지. 나로서는 지금은 추천하지 않지만.”
“오메가로 담근 게 아니에요?”
“생각이 왜 그리로 튀어?”
“저랑 닮았다면서요.”
“그래. 닮았어. 달아서 방심하다간 훅 가지.”
“아…. 달아요?”
“어. 달아.”
다행이었다. 오메가를 담근 술이 아니라서. 윤조는 안도한 얼굴로 와인을 내려다보다가 정한이 한 말을 곱씹어 보았다.
‘달아서 방심하다간 훅 가지.’
눈이 깜박. 윤조는 와인을 식탁에 내리고 정한을 올려다보았다.
“사장님.”
불리고도 시선을 맞추지 않는 정한의 팔을 가볍게 붙잡았다. 그제야 겨우 정한과 눈이 마주쳤다.
“제가 달아요?”
묻고 나니 이상하다 싶었지만, 그가 혹여나 제 페로몬을 느꼈나 싶어 물어본 말이었다. 한데 정한은 대답 없이 그저 웃기만 했다. 윤조는 괜히 제 목덜미를 매만졌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자주 이를 대곤 하는 자리가 간지러웠다.
“이거…, 저 어떻게 마시는지 몰라요.”
“가르쳐 달라는 거야?”
“네. 같이 마셔주세요.”
정한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시간 약속을 잡진 않았지만, 언제일지는 뻔했다. 정한이 와인을 챙겨 가고 윤조는 주방 시계를 넌지시 살폈다. 일찍 일어난 탓인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
저택을 나와 인력 사무소로 돌아가는 길. 한석은 뿌옇게 흙먼지가 일어나는 길을 달리며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일찍이 권 회장의 명령으로 윤조의 뒷조사를 해 두었기에 망정이지, 자칫 저까지 파탄이 날 뻔했다. 제 인력 사무소에 거머리처럼 기어들어 온 윤조의 사촌 동생을 발견한 순간 한석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권 회장의 측근에게 연락을 넣었다. 돌아온 대답은 무척이나 의외였다.
‘댁에 들이라고… 하셨다고요?’
수화기 건너편의 음성이 건조하게 답했다. 그 후로 피를 말리는 시간을 보냈다. 저에게 혹여나 불똥이 튈까 전전긍긍했다. 다행히 권 회장은 너그러웠다. 저의 빠른 대처를 기특하게도 여겨주었다. 막상 전해 들은 결과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게 했지만.
‘던… 져?’
‘예, 달려오는 차량에, 던졌답니다.’
‘민 것도 아니고. 던졌다고?’
‘…그래야 확실할 테니까요.’
‘근데 왜 살려. 그 큰돈을 써 가며.’
‘애초에 숨만 붙이라고 하셨답니다.’
무서운 양반. 한석은 어깨를 떨면서도 권 회장의 저의를 궁금해했다. 이런 제안까지 오니 더욱 그랬다.
‘미자르에, 안내를 말입니까?’
목숨만 겨우 붙여 놓은 이의 소식을 굳이 찾아가서까지 전해야 할까. 한석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고 권 회장의 측근들과 함께 미자르로 향했다. 일부러 살려 놓은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이를 옆에 끼고.
아들의 처참한 몰골을 품에 안은 남자의 절규는 조금이나마 측은한 마음이 들게 했다. 한데 왜 그게 죄 윤조의 욕으로 돌아가는지는 제법 진창을 굴렀던 저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버러지 같은 자식 때문에 네가 이게 무슨 꼴이냐. 그놈 귀신이 붙은 게 분명하다. 그 썩을 놈이 죽어서도 우리를 뜯어 먹으려고!’
귀에 딱지처럼 들러붙는 말에 한석은 귀를 파고 더러워진 손끝을 후 불었다. 이 꼴을 보려고 미자르까지 왔나 했더니, 아들을 안고 우는 남자를 권 회장은 가차 없이 사지로 몰고 갔다.
‘벼, 병원비라니?’
‘보시는 바와 같이 인력 사무소의 보험으로도 충당되지 않는 금액입니다. 다달이 아래의 계좌로 입금하세요. 이 금액으로 7년 정도 납부 하면 변제가 가능할 겁니다.’
‘이… 이 돈이면, 그, 그놈 월급인데…! 이걸 다달이 어찌!’
‘최대한 형편을 살펴 드린 겁니다.’
‘못 내. 난 못 내!’
‘하면 소유하신 집이든, 멀쩡한 아드님 하나를 주시든 하셔야 할 겁니다.’
남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남자의 곁에 있던 쌍둥이 동생이 형을 징그럽게 보는 눈짓이 읽혔다. 다 네 탓이라는 듯.
‘우, 우리 아들은 안 돼! 차라리 나를…!’
‘아버님은 가치 없는 몸이니 대신할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도대체 우리 아들을 어디로 보내려고…!’
‘그나마 값을 쳐주는 곳으로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희 어르신께서 쓰신 돈이 얼마인데.’
‘…….’
‘마침 두베라서 살 수 있었지, 미자르였다면 꼼짝없이 죽었을 겁니다.’
차라리 미자르에 있어서 아들이 죽어버렸다면 나았으리라. 꼭 그런 얼굴로 안고 있던 아들을 밀쳐낸 남자가 무릎을 꿇고 빌었다. 제발 봐 달라고. 소용없는 짓을 하는 남자를 보며 한석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제 테두리 안에 있던 이도 눈 깜짝하지 않고 세상에서 지워버리는데 미자르 인간쯤이야, 개미 밟기보다도 쉬울 것이다.
그나저나 권 회장은 왜 윤조의 일에 간섭한 걸까. 미자르에 오면 그 의문이 해소될 줄 알았는데 점점 미궁에 빠지는 듯했다. 이리도 귀찮은 일을 무엇 하러.
지금 생각하면 꽤 간단한 결론이었음에도 당시에는 워낙 혼란하여 일찍 깨닫지 못했다. 권 회장이 반응하는 것은 오로지 정한의 일이었으니 자연히 정한과 윤조를 이어 봐야 하는 것을 말이다.
한석은 저를 통해 저택에서 일하게 된 이들을 살살 구슬려 확인해 보았다. ‘그 권정한이 왜 서윤조를…!’ 하는 의문이 우습게도 영 아닌 이야기는 아닌 듯했다.
연유야 어찌 되었든 저 같은 이는 미리미리 줄을 대어 놔야 했다. 그간 체득한 생존 방법이었다. 권 회장이 후에 어떻게 움직일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쓸모가 있으니 그런 수고를 들였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 비 오던 날, 정한의 저택을 떠올려 다행이었다. 두베역에 테러가 난 것도 제게는 행운처럼 여겨졌다. 한석의 얼굴에 웃음이 돌았다. 흙길이 지나고 곧 평탄한 도로가 나타났다. 그게 꼭 제 앞날 같았다.
*
할 일을 다 하고도 시간이 가지 않아 우편물과 함께 가져온 신문을 펼쳐 놓고 십자말풀이를 했다. 어찌나 모르는 말이 많은지 수시로 정한을 부르고 싶었지만 이래서야 공부가 되지 않을 것 같아 꾹 참고 매달렸다.
신문 내용상에 답이 있다는 힌트를 얻고 지면을 훑으며 탐독하기에 이르렀을 때였다. 심상치 않게 내리는 빗소리가 귀를 잡아끌었다. 하지만 곧 나타난 복권 당첨 번호에 신경이 쏠렸다.
그러고 보니 복권을 사지 않은 지도 오래다. 그림의 떡을 보며 입맛을 쩝 다시는데 천둥이 쳤다. 저택을 울릴 만큼 강한 천둥에 윤조는 들고 있던 신문을 구기며 고개를 들었다. 창밖에 엄청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윤조는 창가에 붙어 서서 바깥을 살폈다. 제 이 한 몸으로 이 저택을 지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바깥 시설이 걱정되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괜히 정원이 걱정되고, 빗물로 출렁거릴 수영장도 걱정되며, 저택을 둘러싸고 있는 보안 요원도 걱정이었다. 윤조는 잠시 창가를 살피다가 응접실 수화기를 들고 3번을 눌렀다.
“아… 팀장님? 저 서 집사예요.”
-안에 무슨 일 있습니까?
걱정이 되어 한 연락이 오히려 걱정을 산 듯했다. 윤조는 보안 팀장의 물음을 즉시 부정했다.
“아뇨, 아무 일도 없어요. 날이 궂어서 괜찮으신가 해서요.”
-괜찮습니다.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아, 네… 그럼 다행이에요. 혹 필요한 일이 있으면 전화 주세요.”
팀장은 알았다는 대답 없이 그저 끊겠다는 말만 했다. 윤조는 제가 괜한 오지랖을 피웠나 싶어 머쓱해졌다. 누가 봐도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제 할 일이나 해야 했다. 윤조는 저택 점검에 나섰다. 10시부터는 꼼짝없이 정한에게 붙들려 있을 테니 후회나 걱정이 없어야 했다.
꼼꼼하게 2층을 다 돌고 나니 시간이 제법 가 있었다. 바깥은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전보다 거세져 나무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윤조는 2층 복도 창가에 서서 낙엽과 쏟아지는 비로 엉망인 수영장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얼굴을 찌푸렸다.
기세를 보아하니 조만간 계속 비가 내릴 듯했다. 이러다가 훅 기온이 떨어질 테고, 이제 저 수영장과는 당분간 안녕해야겠지. 나름 수영장과 정이 들었던 윤조로서는 계절이 변하는 건 섭섭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계속해서 여름이길 바라는 건 아니었지만.
“어…?”
인제 1층을 돌아보려 하는데 눈앞이 깜박였다. 잘못 본 게 아니었는지 창에 비친 바깥도 깜빡였다. 그렇게 몇 번 깜박이더니 완전히 불이 나갔다.
정전이었다.
일대가 모두 정전인지 저택을 둘러싼 키 큰 나무 너머도 모두 암흑이었다. 윤조는 창틀을 움켜쥐며 까마득한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랜턴을 켠 보안 요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저도 무언가를 해야 했는데 아득한 어둠처럼 사고가 정지했다. 눈앞에 번쩍하는 번개가 내려치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정한을 찾아야 했다. 정한만 찾으면 다 될 것 같았다. 그가 안전한지만 알면 제 할 일은 다 한 것이리라.
하지만 막상 돌아본 자리가 온통 까만 어둠이라 앞길이 막막했다. 반딧불처럼 작은 불빛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지하실에 갇혔던 날처럼 정한을 부르기만 했을지도 몰랐다.
“사장님!”
불빛이 방향을 틀어 복도를 비추었다. 윤조를 발견한 정한이 성큼 다가왔다.
“왜 소리도 안 내?”
손목을 당기는 강한 힘에 윤조는 끌려갔다. 의도치 않게 그와 몸이 붙었다.
“불렀잖아.”
“…죄송해요, 못 들었어요.”
입으로는 사과했지만 전혀 들은 기억이 없어 윤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놀라서 소리를 못 들은 걸까. 그런 것치고는 그다지 겁먹은 것도 아닌데, 이상했다.
“어디에서 몇 번 부르셨어요?”
윤조는 저를 이끌고 복도를 걷는 정한의 뒤를 따르며 물었다. 그가 당당히 대답했다.
“주방에서 한 번.”
“…많이 부르셨네요.”
“그게 안 들려?”
“사장님은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생각하니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그런 한편으로 극한 상황에 정한이 저를 찾아주어 고맙기도 했다.
“이게 또 어디 엎어져 있는 건 아닌지, 뭘 깨 먹은 건 아닌지.”
“제가 사고 칠까 봐 찾으신 거예요?”
“사고 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정한이 걸음을 멈추고 문을 열었다. 윤조는 10시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정한의 방에 들어섰다. 천장이 깜박하더니 순식간에 시야가 밝아졌다.
“오…! 불 들어왔어요.”
“다행이네.”
때에 맞춰 돌아온 전기에 윤조는 뒤늦게 정한의 손에 들린 잔을 발견했다. 그의 손에 엇갈린 모양으로 들린 잔이 소파 테이블 쪽에 놓였다.
정한의 방에는 차를 마시기 좋은 작은 테이블 말고도 옆으로 기다란 소파 테이블도 있었는데 그 주변에는 작은 책장도 있고, 턴테이블도 있었다. 몇 장의 LP판도 보였지만 청소할 때만 만져 보곤 해서 그게 어떤 소리를 내는지는 알 수 없었다.
윤조는 정한이 가리킨 자리에 앉아 새삼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긴 소파가 하나뿐이라 정한이 옆에 앉았다. 무릎에 닿은 정한의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저보다 훨씬 위에 있는 무릎을 괜히 건드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장님은 어릴 때부터 컸어요?”
“크다니. 뭐가.”
큰 게 키 말고 무엇이 있다고 묻는지 의아했다. 윤조는 당연한 얼굴로 답했다.
“키요.”
“음, 나보다 큰 친구들은 못 본 것 같긴 해.”
“튀었겠어요.”
“그랬지. 여러모로.”
그 ‘여러모로’에 외모도 속하는 걸까. 윤조는 빤히 정한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안주 삼게?”
“네?”
“마셔 봐.”
그새 와인을 딴 정한이 잔을 내밀었다. 윤조는 집사 학원에서 얼핏 배운 적 있는 와인 마시는 법을 따라 하려다 말고 잔을 훌쩍 기울여 한 번에 잔을 비웠다. 그의 말대로 달콤했다. 술인 것도 모르게.
“진짜 달아요! 왜 이렇게 맛있어요?”
“그러라고 만들었으니까.”
“이걸 왜 이제 알았을까요?”
세상에는 맛있는 게 정말 많았다. 그걸 이제라도 알게 된 게 다행인 한편으로 아쉬운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마음에 들어?”
“네. 저 몰랐는데 이런 게 좋나 봐요.”
“마시는 족족 좋다고 할 것 같은데?”
“다른 것도 있어요?”
“많지. 원하면 다 맛보게 해줄게.”
“진짜요? 그래도 돼요?”
“어. 돼.”
정한의 즉답에 윤조는 감동했다. 세상 모든 와인을 맛보게 해주겠다고 한 사람 같지 않게 그는 덤덤한 얼굴로 윤조의 잔을 채우고 또 제 잔에 와인을 따랐다. 윤조는 건배를 제안한 정한에게 제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맑게 울려 퍼지는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정한은 와인에 별 흥미 없는지 입술을 적시는 정도로만 맛을 보았다. 반면 윤조는 또 훌쩍 잔을 비우고 정한에게 따라 달라고 내밀었다.
“천천히 마셔. 너 그러다 훅 가.”
“네.”
윤조는 대답만 잘했다. 정한의 경고에도 계속해서 들이마시기만 했다. 온몸이 달콤해지는 기분이었다. 기분이 어찌나 좋은지 머리가 빙글빙글 돌고 몸이 뜨거워질 즘에야 위기감이 들었다.
“저, 야근해야 하는데….”
“야근?”
어느새 빈 와인병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윤조는 중얼거렸다.
“네… 저… 야근해야 하는데, 머리가 무거워요.”
“그럼 기대든가.”
도대체 어디에? 하고 정한을 보았다가 시선이 뚝 떨어졌다. 온전한 정신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을 생각이 번뜩 들었다. 윤조는 정한의 어깨를 두고 그의 허벅지 위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사장님….”
“왜.”
“바닥이 돌아요….”
“잡아줘?”
“네, 그래주셨으면 좋겠어요.”
잡는다고 어찌 될 것도 아닌데 간절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이렇게 저를 안아 들 것까진 없는 듯해서 윤조는 정한의 손길을 무심코 밀어내려다 정작 그에게 안기고서는 얌전해졌다. 바닥이 더는 돌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외로 얌전히 취하네?”
“저 지금 취한 거예요?”
“본인이 취한 것도 몰라?”
“그냥, 좀… 어지러운 것뿐이었어요.”
“그래, 그렇다고 하자.”
시간을 확인하려 정한의 손을 들어 시계를 봤다. 9시가 훌쩍 넘었는데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잠들면 안 될까. 윤조는 자신이 속마음 그대로 중얼거린 것도 모르고 정한을 빤히 보았다.
“안 돼.”
“…뭐가요?”
“네가 생각하는 거.”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제가 암만 얼굴에 기분을 쓰고 다녀도.”
정한이 딱한 얼굴로 혀를 차고는 윤조의 흘러내린 머리를 가만히 쓸어 넘겨주었다. 윤조는 그 손길이 기분 좋아 실실 웃었다.
“염한석이 너한테 이걸 갑자기 줬을 리가 없는데. 뭐 부탁받았어?”
“부탁은요…. 그냥….”
취한 게 맞나 보다. 윤조는 제 혀가 멋대로 떠들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저한테 줄을 대야겠대요. 근데, 제 줄은 사장님밖에 없잖아요.”
“내가 네 줄인 건 알아?”
“그럼요. 너무너무 잘 알아요. 그래서 제가 사장님한테 그렇게 잘 보이고 싶냐고 하니까, 그건 엄청 어렵대요. 그렇다고 저한테 대는 게 말이 돼요? 그런다고 사장님 줄이 잡히는 것도 아닌데. 전요 가끔… 염 사장님 보면, 좀… 모자라나 싶어요.”
염 사장님은 저보고 모자란다고 하지만.
윤조의 말에 정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윤조는 이렇게 소리까지 내어 웃는 정한은 처음 본 듯해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웃으시는 거 처음 봤어요.”
“앞으로 많이 보게 될 거야.”
“그랬으면 좋겠어요.”
아, 근데 사장님 너무 씻기 귀찮아요.
윤조는 또 마음의 소리를 중얼거리며 정한의 어깨에 깊이 고개를 기댔다. 슬며시 피어나는 익숙한 향에 코가 반응했다. 윤조는 개처럼 정한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았다.
“사장님, 페로몬….”
그렇지 않아도 취기가 가시지 않은 몸에 불이 붙는 듯했다. 윤조는 두 팔을 뻗어 정한의 목을 끌어안으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정한이 제게 그랬듯, 그의 목에 이를 박고 입술로 빨았다. 그러자 기대했던 대로 정한의 페로몬이 쏟아져 나왔다. 오늘 야근은 쉬고 싶었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 저… 씻고 올게요.”
윤조는 정한의 품에서 몸을 일으켰다. 정한이 잡아주지 않으니 또 바닥이 빙글빙글 돌았다.
“씻지 마.”
“저, 더러워요.”
“안 더러워.”
“더러워요.”
윤조는 뻐꾸기시계처럼 반복해서 대답하며 방을 나서려 했지만, 기어코 정한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이러고 씻겠다고? 머리 깨져서 올 생각이야?”
“제 머리가 꼭 깨질 거라 생각하시네요?”
“아니라 장담할 수 있어?”
“…모르겠어요.”
듣자 하니 정말 제 머리가 깨질 일이 생길 듯했다. 윤조는 정한의 옆자리에 풀썩 앉으며 미리 씻어 놓을 걸 싶어 후회했다.
“그럼 어떡해요. 전 더러운데….”
정한이 지겨운 얼굴로 보았다. 윤조는 또 더럽다는 말을 중얼거리려다가 그에게 입술이 붙들렸다.
“보호자의 동석하에 씻는 건 어때.”
제 의견은 조금도 궁금하지 않다는 듯 정한이 말했다. 윤조는 정한의 손가락에 붙들린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포기했다. 대답을 들은 듯 자리에서 일어난 정한이 윤조의 앞으로 왔다. 윤조는 두 팔을 뻗어 그가 내어주는 어깨 위로 팔을 엮었다.
윤조를 훌쩍 안아 든 정한이 욕실 앞에 윤조를 내려놓고 물었다. 마치 다섯 살 어린애를 대하는 것처럼.
“혼자 벗을래. 아님 벗겨 줘?”
윤조는 망설였다. 홀로 벗을 수 있긴 한데, 바닥이 자꾸만 돌아가니 욕실에 들어가기도 전에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고심 끝에 윤조는 정한에게 팔을 내밀어 보였다. 그러자 정한은 더 묻지 않고 단추를 풀고 셔츠를 벗겨 내었다. 여태 벗으라고 하면 홀로 벗었는데 정한이 벗겨주니 색달랐다.
정한이 속옷을 벗기느라 제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는 발가락이 바짝 오므라들 만큼 긴장감이 일었다. 그렇게 어지러웠던 바닥인데 그 순간만큼은 술이 홀랑 깨버렸다.
“이렇게 보니 귀엽네.”
윤조가 두 발을 교차로 들며 속옷을 벗는 사이, 정한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윤조는 그가 손으로 건드리고 간 제 성기가 달랑거리며 흔들리는 걸 뒤늦게 느꼈다. 그의 손은 물론 입으로도 만져졌던 것인데 이상하게도 생경했다.
“술 깬 얼굴인데?”
“…아닌데요.”
깼다. 완전히. 윤조는 이대로 정신이 들었다고 제 방으로 돌아가 씻고 오기는 귀찮은 마음 조금, 그와 씻는 건 어떤 건지 궁금한 마음 대부분으로 거짓말을 했다. 그렇게 제 표정을 잘 읽던 정한은 이번엔 윤조의 말을 놀리지 않고 믿어주었다.
이제 정한의 차례였다. 아까까지 자신이 기대어 있느라 구겨진 셔츠가 벗겨지자 그 속에 숨겨져 있던 근육이 드러났다. 윤조는 홀린 얼굴로 정한의 몸을 훑었다. 지적하듯 정한이 턱 끝을 두드렸을 때야 자신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민망함에 잠시 시선을 돌린 사이, 저 역시 만지고 또 입에도 물어본 성기가 덜렁거리며 나타났다. 문득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애써 참았다.
“…….”
분명 참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술이 덜 깼는지 이미 행동한 뒤였다. 정말로 생각만 했는데 왜 손은 여기 있는 걸까. 윤조는 난감한 기분을 애써 감추고 그가 제게 한 말과 똑같은 말을 전했다.
“이렇게 보니 귀엽네요.”
정한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윤조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윤조는 뻣뻣해진 몸을 돌려 욕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정한에게 훌쩍 허리가 들려 샤워 부스로 옮겨지지 않았다면, 다시 돌아와 무릎을 꿇고 사죄했을지도 몰랐다.
“사장님, 너무 추워요.”
정한은 차가운 물 아래에 윤조를 두었다. 취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취하지 않았으면 그러지 않았을 거란 전제가 깔려 있었다. 윤조는 이제라도 무릎을 꿇고 그에게 사죄하고 싶어졌다.
“너 취했잖아. 아니야?”
“네, 저 취했어요. 취했는데… 추운 건 추운….”
건데….
말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윤조는 제 등을 덮는 온기에 잠시 말을 잃었다. 이렇게 라면 차가운 물도 괜찮은 것 같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물론, 아주 잠시다.
“추워요….”
정한은 뜨거운 물 대신 제 페로몬을 내어주었다. 윤조는 정한을 향해 몸을 돌려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소파에서처럼 그의 향을 들이마시고 있다 보니, 조금씩 몸이 더워졌다. 제 어깨에서부터 등을 훑는 정한의 손이 엉덩이에 머물렀다.
“여기서 할까?”
서늘하게 쏟아지는 차가운 물에도 숨은 점차 더워졌다. 샤워 부스를 가득하게 채운 정한의 페로몬이 금방이라도 저를 녹일 듯했다. 윤조는 정한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잘게 고개를 끄덕였다. 쏟아지던 물이 멈추었다.
“으응….”
차가운 타일이 엉덩이에 짓눌렸다. 윤조는 저를 들어 올린 정한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그에게 매달렸다. 미끄러져 내릴 것 같은 몸을 정한이 고쳐 안으며 윤조의 턱을 이로 잘게 지분거렸다. 때에 맞지 않게 간지러워서 웃음이 났다.
정한이 잇새로 씹던 턱을 놓고 혀를 굴려 윤조의 귓바퀴 안까지 핥았다. 윤조는 훅 끼쳐 오르는 소름에 어깨를 움찔거리며 정한을 밀어내었다.
“간지러….”
정한이 웃으며 반대쪽 귀도 핥았다. 그의 입술 사이에 물린 귓불이 쭉쭉 빨렸다. 윤조는 손끝으로 정한의 어깨를 매만지며 몸을 들썩였다. 정한의 혀가 제 살을 스치는 소리가 생생히 들렸다.
“하아… 왜 계속 거길, 빠세요?”
정한이 윤조의 오른쪽 귀를 문 채 답했다.
“왜, 다른 데 빨아줘?”
“…네.”
“어디.”
키스해 달라고 하고 싶었다. 한데 제 입으로 키스라고 하려니 생각만으로도 볼이 화끈해졌다. 잠시 고민하던 윤조는 정한이 전에 그랬던 것처럼 혀를 내밀어 보이려다 그가 놀리는 줄 알까 봐 빙 돌려서 말했다.
“사장님이, 좋아하시는 곳이요.”
“성감대?”
“…네.”
당연하게 제 혀를 빨아줄 것을 예상한 윤조는 정한이 저를 바닥에 내린 순간 일이 잘못된 걸 알았다.
“어쩐 일이야, 펠라를 다 요구하고.”
윤조는 정한의 어깨에 올린 손을 저도 모르게 움켜쥐었다. 제 앞에 무릎 꿇은 덩치의 사내가 어찌할 사이도 없이 제 성기를 그의 뜨거운 입으로 가두었기 때문이다.
“흐… 응….”
이상했다. 저는 이곳을 베타나 알파처럼 주요 성감대라고 느끼지 못했는데 정한이 제게 무릎 꿇고 빨아준다는 사실에 기묘한 흥분감이 일었다. 윤조는 발가락을 오므리며 제 성기를 삼킬 듯이 입 안으로 죄 빨아 넣은 정한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여유 있게 혀를 내밀어 윤조의 회음부까지 희롱하듯 핥아 대었다. 윤조의 내밀하게 모인 주름이 움찔거리며 알파의 성기를 기대했다.
“후으… 하아….”
기대었던 몸을 앞으로 숙이며 정한의 머리를 당겨 안았다. 윤조의 젖은 머리에서 흘러내린 물이 정한의 어깨와 등으로 떨어졌다. 이상했다. 이렇게 흥분이 되는 건, 이상한 거였다.
“사, …하, 사장님.”
그의 손가락 하나도 들어온 것이 없는데 그의 페로몬 때문에 오르가슴에 달할 것 같았다. 윤조는 엉덩이 근육을 움찔거리며 정한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이러다가 그에게 큰 실수를 할 것 같았다.
“사장님, 저, 실수해요. 실… 흐으, 이만 놓아주세요….”
이 좁은 공간에서 들리지 않을 리가 없는데, 정한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윤조는 온몸을 바들거리며 정한에게 애원했다. 그를 밀어버리면 그만인데 제 몸을 마비시킨 듯 꼼짝 못 하게 하는 힘이 저를 충동질하고 있었다. 다 그의 페로몬 때문이었다.
“사장님… 사장님, 제발….”
윤조는 정한과 벽 사이에 눌려 애원했다. 발끝으로 정한의 무릎을 꾹꾹 밟아도 보았지만, 강아지의 발길질 정도로만 여기는 듯했다. 정한은 말 대신 몸으로 명령하듯 윤조를 몰아세웠다. 윤조는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금방이라도 닿을 듯한 흥분의 끝을 맛보고 싶었다.
“으흣… 그만, 하아, 그만요.”
그만하라는 말을 꼬집듯, 정한이 손을 들어 윤조의 젖꼭지를 틀어쥐었다. 윤조의 무릎이 크게 떨렸다. 짓궂은 손이 가슴을 터트리듯 움켜쥐며 유두를 손끝으로 튕겼다. 한계에 달한 윤조는 잇새로 호흡을 씹으며 허리를 떨었다. 만족한 듯 정한이 그제야 물러가주었다. 이미 늦은 듯했지만.
“으…, 흐으….”
윤조는 흐린 시야 너머로 제가 쏟아내는 액체를 거리낌 없이 맞고 있는 정한을 보았다. 어째 그는 기쁜 듯이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그의 두 뺨과 붉은 입술, 그 아래의 단단한 턱, 뾰족한 목울대, 도드라진 가슴,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배와 그 아래의 무성한 털, 배에 붙을 듯이 발기한 성기, 근육질의 다리 위로, 남김없이 제 흔적이 쏟아졌다.
“하아, 진짜….”
물을 켜려는 윤조의 손을 다잡은 정한이 웃으며 몸을 붙였다. 윤조는 정한을 어찌 봐야 할지 몰라 시선을 헤매었다.
“내 좆물은 잘도 마시면서.”
“…이거랑 그건 달라요.”
“조금도 다르지 않아.”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정한이 다시 윤조의 성기를 물었다. 윤조는 수전에 올린 손을 내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성기는 물론이고 회음부와 그 너머의 주름까지 밀려 들어온 혀가 제 온몸을 삼킬 듯했다. 마치 입을 맞추듯 정한은 제 밑을 빨아댔다. 제가 그동안 한 것은 장난인 양.
“흐…, 하아….”
전보다도 이르게 찾아온 성감이 윤조의 눈가를 뜨겁게 달구었다. 윤조는 개처럼 저를 핥기 바쁜 정한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불렀다.
“사장님, 사장… 님.”
윤조의 손길이 정한의 어깨에서 목을 지나 귀를 감싸듯 잡고서는 고개를 들어 저를 보게 했다. 정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윤조로 하여금 대답을 종용하는 눈짓을 보내었다. 윤조는 숨을 헉헉대며 그에게 부탁했다.
“…넣어주세요.”
“뭐. 내 좆?”
윤조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무릎을 편 정한이 윤조의 몸을 돌려 샤워 부스에 붙어 서게 했다.
“미끄러지지 말고 잘 버텨봐.”
말은 그렇게 하면서 윤조의 허리에는 정한의 팔이 감겼다. 이마가 닿을 수 있는 자리에는 그의 손등이 자리했다. 윤조는 정한의 손에 이마를 기대고 짧게 웃었다. 이내 저를 가르고 들어온 거대한 압박에 혀를 씹을 뻔했지만.
“윽…! 흐, 하아! 흐으! 으윽!”
미끄러지지 않으려 버티고 선 윤조의 몸이 전에 없이 긴장으로 단단해졌다. 정한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숨을 내쉬더니 성기를 빼내고 윤조에게 몸을 돌리게 했다.
“안아.”
윤조는 제 머리끝까지 쾅쾅 울리던 충격에 홀리어 정한이 시키는 대로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당겨 안았다.
“으흑….”
윤조의 엉덩이를 붙잡아 든 정한이 제 위로 앉히듯이 눌러 내렸다. 등 뒤로 딱딱한 타일이 닿았다. 이내 쓸리듯 흔들린 윤조는 정한의 허리에 다리를 두르고 아이처럼 매달렸다. 몸이 미끄러져 내릴 때마다 금방이라도 정한이 제 질구를 찌르고 들어올 듯했다.
척, 퍽! 퍽, 퍽.
윤조는 악다문 잇새로 앓는 소리를 흘려보냈다. 그러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소리를 지르고 싶을 때는 정한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그곳을 빨았다. 그러면 제 안을 무자비하게 쑤시고 들어오는 그 어떤 충격도 흥분으로 치환되고는 했다.
“사… 흐, 읏, 응…!”
윤조는 정한의 페로몬을 마음껏 들이마셨다. 그의 목을 타고 흐르는 물도 혀로 핥았다.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나서 이를 세워 그의 목을 깨물기도 했다. 그러면 정한이 웃으며 더욱 페로몬을 내어주었다. 죽을 것처럼 황홀한 흥분이 윤조의 몸을 떨리게 했다.
* * *
눈이 번쩍 떠진 순간, 윤조는 급히 얼굴을 찌푸렸다. 밝은 빛이 여과 없이 눈을 찔러 들어온 탓이었다. 이렇게 사방이 밝은 것을 보면 정한도 저처럼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다. 윤조는 고개를 들어 제 상태를 파악했다.
어떻게 이러고 잘 수 있지?
윤조는 자신이 정한의 옆에서 잠들어 있을 줄로 알았다. 설마하니 자신이 베고 있는 것이 정한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다운 부부처럼 팔베게 따위를 하고 있었다면 그나마 나았을 테다. 윤조는 정한의 품에 안기어 머리뿐만이 아니라 온몸을 죄 기대고 있었다.
앉은 자세 그대로 잠이 든 정한이 대단한 건지, 어떻게 이러고 있는 건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자신이 대단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윤조는 천천히 눈을 돌려 정한을 보았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은 정한의 얼굴이 조금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이대로 조용히 그의 품을 벗어나면 될 듯한데, 자세가 자세다 보니 무척 어려워 보였다.
얼마간의 갈등 후에야 결심이 들었다. 윤조는 숨을 죽이고 조심스럽게 몸을 떼어 냈다. 이놈의 이불이 자꾸만 바스락거려 마음이 조급해졌다.
“…….”
이불 소리가 아니더라도 제 체온이 멀어지니 자연스럽게 정한의 눈꺼풀이 들렸다. 까만 눈동자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윤조를 직시했다. 잠든 기색이 전혀 없는 눈짓이었다.
“죄송해요….”
“뭐가 죄송한데.”
정한의 낮은 목소리가 그의 몸을 타고 저까지 울리는 듯했다.
“깜박 잠들었어요.”
윤조는 머쓱하게 웃으며 정한에게서 조금 더 물러났다. 하지만 정한이 허리를 둘러 안는 바람에 다시 그에게 배를 붙이게 되었다. 제 축 늘어진 성기가 그의 배꼽에 닿을 만큼 꽉 눌렸다.
“잠들었으면 그냥 자.”
“그래도….”
“너 때문에 한 번씩 깨잖아.”
잠든 그를 깨우지 않으려 했던 수고가 허무해졌다. 그의 말대로 그냥 자는 게 좋을 듯했지만, 이렇게 깬 상태로 정한과 나란히 자는 건 상상이 되지 않았다. 윤조는 여전히 기절이 아니고서야 정한의 옆에서 잘 생각이 없었다.
“오…, 오늘만 갈게요.”
“고집은.”
윤조는 웃는 낯으로 정한의 어깨를 붙잡고 그에게 이만 놓아줄 것을 눈짓으로 말했다. 그가 허락하듯 허리에 두른 팔을 놓아주었다. 괜히 민망한 마음에 계속해서 정한을 살피며 침대 밑으로 내려왔다.
“그럼 주무세요, 저 이것만 챙겨서 바로 나갈 테니까.”
테이블 아래에 둔 빈 와인병과 컵, 소파 밑에 둔 제 구두 그리고 욕실 앞에 주인을 잃고 구겨진 옷가지를 챙겼다.
방의 불을 끄기 전, 윤조는 정한의 침대를 돌아보았다. 그에게 불을 끄겠다는 사인을 주려고 한 건데 시선이 마주친 순간 말을 잃고 말았다. 어쩐지 그가 제게서 한 번도 시선을 떼지 않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윤조는 버릇처럼 웃어 보였다. 정한은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윤조를 응시하기만 했다. 그가 눈짓으로 무슨 말을 전하는지 해석할 수 없었다. 뒤늦은 취기가 올라오는 걸까. 윤조는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러다 이 방에 토라도 하는 게 아닌가 해서 급히 인사를 건네었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사장님.”
불을 끄고 나와 복도를 걸었다. 기어코 홀딱 벗고 저택을 돌아다니는구나, 하며 품에 든 자질구레한 물건을 고쳐 안았다.
평소와 달리 하늘이 밝지 않은 걸 보니 아직도 한밤중인 듯했다. 윤조는 쏟아지는 비를 보며 저택이 마치 커다란 샤워 부스 같다는 생각을 했다. 숨결에 섞인 와인 냄새도 한몫했다. 그때 그 몸을 끌어내릴 듯이 무거워지던 느낌. 저를 추켜세우던 정한의 손길은 허리와 허벅지에 자국처럼 남아 있는 듯했다.
“후… 하….”
윤조는 방에 들어서기 전, 가만 서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코끝에 감도는 달콤한 향에 제 옆에서 같이 술을 마시던 정한이 떠올랐다. 딱 한 잔뿐이었지만, 그가 입술로 머금던 잔의 경계나 와인병을 쥔 손, 동그랗게 고인 잔 속을 바라보던 시선 따위가 연이어 생각났다.
“왜 이렇게 울렁거려….”
자꾸 술 생각을 해서인지 속이 울렁거렸다. 윤조는 가슴과 배 사이를 매만지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취하는 기분은 꽤 이상했다.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싫지 않았던 기분 때문인지, 세상 모든 와인을 맛보게 해줄 기세인 정한의 재력 때문인지는 몰라도, 며칠 연속해서 비가 내리는 동안 윤조는 곧잘 와인을 마시게 되었다. 단, 정한의 방이 아닌 장소에서 즐겼다. 이는 취할 정도로는 마시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윤조는 이 이상 그에게 취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날은 자신이 생각해도 좀 추했다. 그는 볼만하다고 했지만.
안주는 없었다. 정한이 이것저것 추천해주었으나 윤조는 오로지 와인만 즐겼다. 사실 비밀스럽게 정한의 페로몬을 안주 삼고 있었기에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정한이 와인을 내어주는 이유도 있었지만, 안주인 그가 없었다면 제아무리 맛있는 와인이라도 손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매번 어디서 가져오시는 거예요?”
“왜. 같이 갈래?”
“저도 갈 수 있는 곳이에요?”
“그럼. 근데 서 집사 무서워할 것 같은데. 괜찮겠어?”
“제가… 이 저택에서 무서워하는 곳이 있었어요?”
“죽기 싫다고 엉엉 울었잖아.”
때마다 정한이 출처 모를 와인을 가지고 갑자기 나타났기에 일었던 호기심이었다. 그 엉망진창인 지하실에 와인이 있었다니. 그때만 생각하면 정한을 보기가 부끄러웠지만 용기를 내어 그와 함께 지하실에 가 보기로 했다. 정한과 같은 길잡이가 있으면 더는 죽기 싫어서 울 일도 없을 테다.
“사장님은 여길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발밑만 반짝이는 계단을 내려가, 여전히 엉망진창인 지하실 입구에 들어섰다. 정한은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이었고, 윤조는 이따금 발치에 걸린 작품에 넘어질 뻔하다가 정한의 등허리를 붙잡고 걷게 되었다.
“어릴 때 자주 놀았거든.”
“여기 언제부터 사셨는데요?”
“태어났을 때부터.”
“아아….”
그럼 그럴 만하긴 한데, 어릴 때부터 이런 곳에서 놀 수 있다니 담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이 너처럼 자주 길 잃어서.”
“동생이 있으셨어요??!!!”
지하실을 울리는 제 목소리에 윤조는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그에게 형제가 있다는 사실이 퍼뜩 그려지지 않았다. 그것도 동생이라니. 남자일까, 여자일까, 알파? 오메가? 윤조의 머릿속으로 여러 성별의 사람이 그려지고 또 지워졌다.
“있었는데, 이젠 없어.”
“그럼….”
“죽었어.”
“아…. 죄송해요.”
“왜 죄송해?”
“그… 괜한 걸 물은 것 같아서요.”
“괜찮아,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도 될까. 정한의 등만 봐서는 그의 속내를 읽기 힘들었다. 그를 정면에서 봤다고 해도 알기 어려웠을 테지만. 윤조는 부디 그의 말처럼 그가 아무렇지도 않았으면 했다.
“근데요 사장님.”
“어.”
“여기 있는 와인은, 제가 관리해야 하는 거죠?”
상당히 깊은 곳까지 다다랐을 때 문득 든 생각이었다. 윤조는 정한이 새로이 나타난 문을 열쇠로 여는 것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와인도 얼마 전에 처음 마셔 본 집사가 관리라는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그 이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무엇보다 이런 건 다 차치하고 제 일을 제대로 떠올리지 않은 자체가 민망했다.
“관리하는 사람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마.”
“관리하는 사람이 있어요? 전 왜 한 번도 못 봤죠? 관리 대장에서도 못 본 것 같은데….”
“봐서 뭐 해. 반갑다 인사하게?”
“그래도 여기 드나드실 텐데…. 인사는 해야죠.”
“아버지가 따로 필요해서 넣은 사람이라 네가 신경 안 써도 돼.”
윤조는 퍼뜩 한석이 제게 모호하게 하고 간 말을 떠올렸다. 이 저택에 많은 사람이 산다고 했던가. 그는 늘 말을 이상하게 했기에 조금 단어를 바꿔 보면 이 저택에 많은 사람이 온다고 해석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랬던 걸까. 어쩌면 와인 담당자 말고도 자신이 모르는 담당자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더 있죠? 제가 모르는 담당자들.”
“그래 봐야 얼마 없을 거야.”
“왜 그렇게 조용히 왔다 가세요?”
“내가 싫어하니까.”
단순한 이유였지만 모든 것이 수긍되는 말이었다. 윤조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사실이 상기되었다. 그는 저와 같은 집사 하나를 겨우 참아줄 수 있는 인내심의 소유자라는 것을. 물론 서 집사를 참는 인내력이란 꽤 대단한 것임을 윤조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두 병의 와인을 고른 뒤 저장고를 나섰다. 지하실 계단을 오르며 윤조는 문득 피어난 의문을 정한에게 던졌다.
“근데요, 사장님. 왜 회장님은 댁에 와인 저장고를 안 두시고 사장님 저택에다 두셨을까요?”
“원래는 여기서 지내도 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럼 이제 여기서 지내면 안 되신 거예요?”
“어.”
“왜요…?”
“내가 쫓아냈거든.”
“…….”
“꼴 보기 싫어서.”
그게 부자 사이에 가능한 일인가? 보통 반대가 아니던가? 윤조는 와인병을 고쳐 안으며 정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두 눈썹을 가만히 찌푸렸다. 한석도 그렇고 정한도 그렇고, 심지어 한 번 본 권 회장도 그렇고, 참 알아듣기 어려운 말만 했다. 보통 상식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윤조는 대충 마음으로 이해하기로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왜 반응이 없어?”
대답 없는 윤조를 돌아본 정한이 지하실 문을 열며 말했다.
“뭐라도 반응을 해야 할 거 아냐. 넌 이게 이해돼?”
“이해 못 해야 하는 거예요?”
“보통은 이해를 못 하더라고.”
“저도 사실… 정확히 이해한 건 아니에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뭘 노력을 해. 물으면 되잖아.”
“그럼 대답해주시나요?”
“그건 내 마음이지.”
윤조는 오랜만에 못난 얼굴을 해 보였다. 정한은 꾸짖는 대신 윤조의 뺨을 가볍게 꼬집고 품에 들린 와인병을 채 갔다. 허무하게 비어버린 손을 움켜쥐며 윤조는 정한의 뒤를 따랐다.
응접실 소파에 자리 잡은 정한을 따라 윤조는 자연스럽게 그 옆에 앉았다. 어떤 것을 먼저 마실지 고르라는 정한의 눈짓에 윤조는 제 앞에 있는 투명한 병을 골랐다. 문득 삼촌 집 지하실에도 많던 병이 떠올랐다.
“삼촌 집에도 지하실이 있었어요.”
“내가 서 집사를 통해 은연중에 느낀 그 쓰레기 삼촌?”
“…네.”
정한이 와인을 따며 계속 이야기해 보라는 듯 눈짓을 주었다. 윤조는 제 잔을 끌어와 정한의 앞에다 두었다.
“거기에 종종 갇혔어요. 사촌 동생들이 절 가뒀거든요.”
“왜 그런 짓을 하는 건데?”
“지하실에 두는 물건은 거의 다시는 쓸 일이 없어져버리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걔들한텐 내가 그랬거든요. 없어지면 좋은 사람.”
와인을 따르려던 정한이 손을 멈추고 보았다. 윤조는 머쓱하게 웃었다.
“얼마나 싫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먹을 게 부족한데, 입 하나가 더 늘었으니. 전 이해해요.”
“지나치게 이해심이 많네.”
쪼르르륵 수위를 높이는 잔을 보며 이제는 흐릿하기까지 한 기억을 들추었다.
“그래도 삼촌이 늘 꺼내줬어요. 웃긴 게, 그게 좀… 고마웠어요.”
“하나도 안 웃겨.”
정한이 소파에 등을 기대며 긴 다리를 꼬았다. 윤조는 제 속이 그것처럼 꼬이는 듯했다.
“그래서 그런가, 얼마 전에 염 사장님 뵙고 나서 괜히 고마워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걔가 뭐랬는데?”
“사실을 이야기해주셨어요. 전 알고 있는 걸 다시금 깨달은 거고.”
“사실?”
“저나 동생들이야 그땐 어려서 몰랐다지만, 삼촌한텐 전 그 집 노동력이잖아요. 근데 어떻게 버리겠어요, 다시 주워 와야지.”
“…….”
“그게 뭐라고 고마워했는지. …정말 바보 같다, 나.”
윤조는 정한이 따라준 와인을 맛도 보지 않고 꿀꺽 마셨다. 달지 않다는 설명을 들었는데도 혀끝에 감도는 맛이 달았다.
그렇게 단맛에 이끌려 잔을 비우다 보니 맛만 본다는 게 어느새 훌쩍 병을 비워버렸다. 윤조는 그간 미자르의 삼촌 집에서 섭섭했던 것을 두서없이 나열했다. 정한이 알아들을 것이란 기대는 없는 푸념이었다.
“염 사장님이 그랬어요. 내가 삼촌 손에 있긴 했었냐고. 맞아요. 정말 그 말이 맞아요.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들을 땐 마음이 따끔했어요. 근데 그거 오래 안 갔어요. 옛날 같으면 많이 속앓이했을지도 몰라요. 바보처럼 전전긍긍했겠죠. 근데 지금이라서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지금 그 말을 들어서 다행이에요.”
“…….”
“그래도, 이제 염 사장님이 더는 미자르 얘길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이젠 내가… 그 사람들 지하실에 둘 거니까.”
말로 하니 정말 사라진 것처럼 마음이 개운해졌다. 윤조는 웃는 낯으로 정한을 보았다.
사실 미자르에 대한 이야기는 되도록 정한에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제 구질구질한 모습밖에 남은 게 없어 그렇게 보이기 싫었다. 그런 한편으로 그에게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뿐이었지만, 그게 전부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후….”
윤조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바닥이 빙빙 돌았다.
“왜. 또 돌아?”
“네. 근데, 이거 이제 좀 괜찮은 것 같아요. 나쁘지 않아요.”
“인제 그만 마셔.”
“그럴게요. 근데 그건 좀 주세요.”
“뭐.”
“사장님 페로몬.”
“내 페로몬?”
“네. 사실 그거 제 안주거든요.”
내일이면 허공으로 발길질할 말이 풀린 잇새로 쏟아졌다. 윤조는 제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고개를 돌려 보았다.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한이 손으로 쓸어 넘겨주었다. 그의 손이 머리칼을 스칠 때마다 살랑이듯 제 얼굴 위로 흐르는 페로몬이 느껴졌다. 윤조는 턱을 들어 정한의 손목에 코를 붙이고 숨을 들이마셨다.
“아주 빨아 먹을 기세네.”
정한이 머리칼을 쓰다듬던 손으로 뒷머리를 붙잡고 강하게 당겼다. 윤조는 정한에게 이끌리며 순식간에 차오르는 취기를 느꼈다. 하나 그것이 술에 취한 건지, 그의 페로몬에 취한 건지, 헷갈렸다.
“사장….”
코끝이 닿는가 싶더니 이내 입술이 먹혔다. 윤조는 정한에게 덥석 안기며 폭 터진 페로몬에 어깨를 떨다,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 아직… 10시….”
아닌데, 라는 말은 정한에게 삼켜졌다. 정한의 뜨겁고 미끄러운 혀가 목구멍을 찌를 듯이 쑤시고 들어왔다. 고작 키스일 뿐인데도 섹스를 하는 기분이었다.
“사, 흐읍, 하….”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윤조는 정한을 불렀다. 그가 지나치게 제게 페로몬을 많이 주고 있었다. 빽빽하게 제 주위를 감싸는 페로몬에 윤조는 샤워 부스에서처럼 몸이 끌어져 내리는 듯했다. 기어이 소파에 등을 댄 윤조는 제 위를 올라탄 정한의 몸을 밀어내려 애썼다. 이렇게 많은 안주는 필요 없었다. 몸이 이상해질 것 같았다.
“흐… 하, 사장….”
윤조가 정한의 어깨를 꼬집듯이 붙들었을 때였다. 그제야 떨어진 정한의 입술이 뜨겁게 입술 표면에 닿았다. 윤조는 들이마시는 숨마다 저를 잠식하듯 침투하는 정한의 페로몬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직, 10시… 하아, 아니에요.”
정한이 웃으며 윤조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혀를 들이밀지는 않고 입술만 슬며시 댄 채 시선을 내려 윤조를 보았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 윤조는 눈을 굴리며 정한을 살폈다. 아무리 살펴도 알 것 같지 않아 막 입을 열어 그에게 다시 물음을 던지려 했을 때 정한의 입술이 쪽, 하고 떨어졌다. 그가 손을 들어 제게 손목의 시계를 보였다.
“10시네.”
막 10시 하고도 1초가 지나는 순간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허리춤이 가벼워지며 밑이 서늘해졌다. 눈 깜박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윤조는 멍하니 하얀 양말만 신고 있는 제 다리가 그의 두 손에 들리는 모습을 보았다.
“아아….”
들어 올린 두 다리를 얼굴 양옆으로 내리누르며 정한이 윤조의 몸을 덮었다. 윤조는 제게 가해지는 익숙한 압박에 벌어진 밑을 오므렸다. 그의 페로몬에 반응하여 이미 젖은 그곳에서 찌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정한이 다 안다는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았다. 윤조는 그 시선에 부끄러워하면서도 정한의 목을 껴안았다. 이를 세워 그를 깨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여기서… 하시게요?”
정한은 대답 없이 윤조의 엉덩이를 벌리며 엄지로 주름을 쓰다듬었다. 윤조는 크게 침을 삼켰다. 그의 손짓 때문인지 자신이 기대하는 일 때문인지 자꾸만 제 몸이 벌어지려 했다.
“으응….”
윤조가 열심히 자신을 다잡는 사이, 정한의 엄지가 덜컥거리며 들어올 듯 걸리다가 빠져나갔다. 윤조는 애가 타는 마음에 정한의 옷을 꽉 움켜쥐었다.
“말해 봐.”
“뭘요…?”
“어쩌고 싶은지.”
“…어쩌긴요.”
윤조는 정한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채 중얼거렸다. 그의 손가락도 닿지 않는 그곳. 자신이 곧잘 거기라 부르는 곳을 짓눌러 달라고.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정한이 치고 들어왔다.
“으읏!!”
정한은 윤조의 엉덩이를 틀어쥐고 자신이 원하는 만큼 좁히고 또 벌렸다. 윤조는 오로지 정한에게 매달려 그에게 흔들렸다.
“하, 흐… 으! 흣….”
“후우… 하아, 하아.”
잠시의 휴식도 없이 정한은 창밖의 비처럼 세차게 내렸다. 윤조는 정한의 허리에 감고 있던 다리를 바르작 떨었다.
“사장님….”
“왜.”
“후으… 저, 으읏…, 더워요….”
“그만 줄까?”
“…아니요, 더… 주세요.”
밤은 자꾸만 깊어졌다. 비도 지겹게 내렸다. 마치 그 비처럼 정한이 제 안에 내렸다. 비싼 가죽 소파 위로 희멀건 액체가 파편처럼 튀었다.
“후… 흣….”
정한이 몸을 물리자 안쪽에 고여 있던 농도 짙은 정액이 크림처럼 흘렀다. 제 실낱같은 집사의 자격 같은 것이 내일 이걸 어쩌지, 하는 생각을 잠시 떠올렸지만 이내 정한의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제 무릎처럼 수그러들었다.
“너 그러다 내일 못 걷는다.”
윤조는 고개를 들어 정한을 보았다. 언제 자신이 바닥에 앉아 있었는지 놀란 참이었다. 그에게 답을 하고 싶었는데 입에 물고 있는 성기 때문에 여의찮았다. 윤조는 제 벌어진 다리 사이에서 흘러나온 액체가 바닥의 카펫을 적신 것도 뒤늦게 알았다. 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귀찮게 청소할 생각하지 말고 버려. 사줄게.”
정한은 꼭 제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 같았다.
“그럼 이만 올라와. 나 입 심심해.”
정한이 윤조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일으켜 안았다. 윤조는 제게 푹 잠기듯 들어찬 정한을 느끼며 그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엉덩이를 틀어쥔 손이 저를 위아래로 흔들어댔다. 맞물린 입술이 떨어질세라, 윤조는 정한의 목을 꽉 껴안았다. 그러자 정한이 직접 허리를 쳐올리며 윤조를 흔들리게 했다.
처음 두베에 온 날, 담뿍 내리던 비처럼 정한의 페로몬이 쏟아졌다. 윤조는 제게 내리는 정한을 온몸으로 맞고 또 삼켰다. 제 오메가의 그릇이 너무도 작아 정한이 금방이라도 넘실거리면서 쏟아질 듯했다.
“서 집사.”
부름에 눈을 뜨니 정한이 보였다. 윤조는 흐린 시야를 깜박이며 정한의 말에 귀를 기울였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그저 제 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길이 좋고, 배 속이 터질 것처럼 가득 찬 기분이 좋았다. 함부로 알아서 안 되는 감각을 알아버린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