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며칠 비가 쏟아진다 했더니 정원수가 쑥쑥 자라 보기 좋지 않았다. 없는 솜씨를 발휘할 시기가 온 듯했다.
저번처럼 벌집을 건드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윤조는 전지가위를 들고 정원을 누볐다. 두 볼이 붉게 익고 모자 테두리 안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을 때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웃자란 가지를 자르는 중, 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들어 보니 보안 팀장이 서 있었다.
윤조는 제 눈높이에 닿은 팀장의 허리춤을 발견하고 어깨를 움찔했다. 무심코 떠올린 풍경에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알싸한 향이 혀끝에 풍기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장시간 계신 듯합니다.”
“아, 제가요?”
“예. 이만하시고 들어가시지요. 저희도 교대는 해가면서 일합니다.”
팀장의 배려에 윤조는 자신이 그를 보고 든 불온한 생각이 미안해졌다. 땀을 닦는 척 시선을 피했다.
“안 들어가십니까?”
“이 줄만 하고 들어갈게요.”
팀장이 곤란한 눈치로 저택을 바라보았다. 윤조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련님께서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윤조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의아하게 보는 팀장의 시선을 피해 윤조는 서둘러 답했다.
“아… 그래요?”
“예.”
“시키실 일이 있으신가 봐요.”
시킬 일이 없다는 걸 안다. 있어도 이렇게 부르는 경우는 어지간해서는 없었다. 다 알고 있었어도 윤조는 변명처럼 그렇게 말했다.
“저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랬을 테다. 윤조는 찌뿌듯한 허리로 슬그머니 손을 가져가며 머쓱하게 웃었다.
“그럼 어서 들어가 보시지요.”
“네….”
제 할 말을 끝낸 팀장이 초소로 돌아갔다. 윤조는 저택을 향해 몸을 돌리며 더운 숨을 훅 내쉬었다. 빼곡한 창살 너머, 닿지 않는 시선을 찾듯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건 당연한 챙김이었다. 그렇게 인식하고 넘어가면 그만일 텐데 정한이 이렇게 대놓고 자신을 챙길 때마다 윤조는 허리가 뻣뻣하게 굳었다.
그의 앞에서 허리를 그만 두드려야겠다. 기어가겠다, 굴러가겠다, 그만 말해야겠다. 그러면서도 입가에는 웃음이 피어났다. 뻣뻣해지는 건 잠깐이었고, 곧 수줍어졌다. 수줍은 건 민망한 것과는 달랐다. 윤조는 확실히 이 차이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마치, 자신이 꼭….
“꼭?”
윤조는 고개를 갸웃했다. 문장이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윤조는 더운 열기에 퍼뜩 생각을 접었다.
계절이 가을에 접어들긴 했어도 아직 낮은 더운 편이었다. 그 탓에 이대로 수영장에 뛰어들어도 될 만큼 땀에 푹 절었다. 허리 때문이 아니라 조금만 더 볕 아래에 있었다면 큰일 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에 두른 수건으로 이마에 난 땀을 닦으며 걸음을 옮겼다. 졸졸 흐르는 분수와 하얀 벤치를 지나 미로 같은 정원을 빠져나왔다. 얕은 경사를 올라 창고에 이르자 나무 사이를 비행하던 새가 창고 처마 끝에 앉아 윤조를 내려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말이 통할 것 같은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윤조는 조심스럽게 새를 향해 손을 뻗어 보았다. 금방이라도 제 손 위로 날아 앉을 것 같던 새는 무심히도 윤조의 손가락만 바라보았다. 높이가 맞지 않는 건가 싶어 깨금발을 들었다. 장화를 신은 윤조의 발끝에 얕은 흙먼지가 일었다.
“아….”
모래를 밟은 소리 때문일까. 새가 훌쩍 날아올랐다. 그대로 숲을 향해 날아간 새를 보며 윤조는 아쉬운 얼굴을 했다.
괜히 입맛을 다시며 창고에 들어섰다. 모자를 걸고 사용했던 도구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밖으로 나와서는 젖은 머리를 흩트리고 몸에 묻은 흙도 털었다. 손에 배어난 풀 냄새가 기분 좋았다.
어젯밤 머리맡에서도 이런 풀 냄새가 났었다. 비스듬하게 열어 둔 창 너머로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의 향내가 넘실거리며 밀려들어 왔다. 괜스레 지난밤이 떠올라 윤조는 얼굴을 붉혔다. 그만해야지 하면서도 계속해서 곱씹었다. 정한의 입술과 혀가 제 몸 이곳저곳을 기어 다니는 착각이 일었다. 심지어는 자신이 보았던 정한의 많은 얼굴도 떠올랐다.
제 바로 앞에서 밭은 숨을 쉬던 얼굴. 사정할 때 찌푸리는 미간, 키스를 한 뒤 입술을 핥을 때 짓는 표정, 귓가에 울리는 낮은 목소리.
“후….”
슬슬 페로몬이 피어나는 듯해 급히 갈무리했다. 귀 끝까지 달아오른 윤조는 두 손으로 제 귀를 비비며 저택으로 향했다. 자꾸만 몸이 흠칫거리며 떨렸다.
사실 윤조는 지겹게 내리던 비처럼 요 며칠 내내 한 생각에 사로잡혀 미친놈이 된 게 아닌가 싶어 괴로웠다. 종일 침대를 뒹구는 생각만 한지라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 걸까 걱정도 했다.
해를 보지 않아서 그랬던 거다. 비가 와서. 그리고 매일 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여겨 왔는데 또 여지없이 이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테라피가 끝날 때까지는 숙명이라 여길 수밖에 없는 듯했다. 그래도 바깥을 좀 돌아다니니 평소보다 산뜻한 기분이었다. 윤조는 아침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에 들어섰다.
몸 곳곳에 남은 정한의 흔적을 다시 더듬지 않도록 주의하며 씻고 나오니 저택에 손님이 와 있었다. 윤조는 복도를 걷다 밑에서 들리는 작은 대화 소리에 등을 쭈뼛 세웠다. 설마하니 권 회장은 아니겠지, 하며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자 낯선 이가 둘, 정한을 찾아와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정한이 내어온 듯한 티 세트와 쿠키가 널려 있었는데, 윤조는 어찌해야 할까 망설이다가 뒤늦게라도 접대를 해야겠다고 판단했다. 서둘러 걸음을 옮기려는데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제정신이야?”
정한의 것이 아닌 손님의 목소리였다. 윤조는 난간을 움켜쥐고 조심스레 아래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숨죽여 귀를 기울였다.
“충분히.”
“너 그러다 여기 무리 와.”
“알아.”
“그래, 알겠지. 내가 너 알라고 하는 소리 아니야. 내 말은 아는 놈이 왜 그러느냐는 거지. 또 실려 오고 싶어?”
“살려줄 거잖아.”
“언제부터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있었어?”
“이번에 나 살렸을 때부터?”
“존나 늦네, 이 새끼. 10년을 봤는데.”
여자의 말에 옆에 앉은 남자가 웃어댔다. 정한도 웃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분위기는 좋아 보였다. 친한 사이끼리 나누는 농담인 걸까. 윤조는 실려 간다는 말과 살려줄 거라는 말에 들었던 걱정을 잠시 내려놓고 다시 귀를 기울였다.
“솔직히 말해. 복상사가 꿈이지?”
복상사?
윤조는 미간을 좁히며 웃기 바쁜 남자 때문에 들리지 않는 여자의 말을 신경 썼다. 매우 중요한 말 같은데 띄엄띄엄 들려서 이어갈 수가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윤조는 저 웃음소리 가득한 사이에 끼어들기로 했다. 난간에서 몸을 떼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그사이 용건이 다 끝난 모양인지 채비하는 소리가 들렸다. 윤조의 걸음이 다급해졌다.
현관으로 향하던 정한의 손님들이 윤조의 기척에 등을 돌려 보았다. 아까까지 정한과 함께 웃었던 건 거짓말이라도 된 듯 경직된 시선이 쏟아졌다. 윤조는 걸음을 멈춰 섰다. 뒤이어 배웅을 나오던 정한도 그 자리에 섰다.
어쩜 그리도 빤히 보는지, 얼굴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윤조는 분위기를 환기하려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 손님 앞에 섰다. 위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두 사람 다 저보다 키가 컸다. 정한의 주변인은 왜 이리 다 큰 걸까.
“인사가 늦었습니다. 집사 서윤조입니다.”
“아, 네….”
호탕하게 웃던 남자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인사 같은 반응을 해 보였다. 옆에 선 여자는 윤조를 가만히 보다 팔짱을 끼고는 정한 쪽으로 몸을 돌렸다. 윤조는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게 있나 싶어 걱정되었다.
“돈 많아, 똑똑해, 잘생겨, 좋다고 달려드는 오메가도 많아. 가진 게 너무 많아서 그런가, 이 새끼 양심이 없네?”
“상당히 없지.”
맞장구친 남자도 여자와 마찬가지로 팔짱을 꼈다. 윤조는 저도 따라서 팔짱을 낄 것만 같아 제 두 손을 맞잡았다.
“꿈 이루겠는데?”
“이루겠어.”
“걱정이다, 걱정.”
“진심으로 걱정이다, 걱정.”
앵무새처럼 여자의 말을 따라 하기 바쁘던 남자가 시선을 돌려 윤조를 보았다. 윤조는 저를 순식간에 훑는 눈짓에 등허리가 바짝 서는 기분이 들었다. 생긴 모습으로 추측하길 그는 알파로 짐작되었다. 여자도 물론.
“내 말 허투루 듣지 말고, 꼭 와라.”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게.”
“이게 남 일이냐?! 뭐? 긍정적?!”
“아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잖아. 그렇다는 대답이랑 다를 거 없지. 그럼 우린 이만 갈게.”
남자가 여자를 달래며 현관으로 이끌었다. 윤조는 무의식적으로 두 사람을 따라가려다 정한에게 붙들렸다.
“조만간 보자.”
포기하지 않은 듯 여자가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윤조는 저를 보지도 않는 두 사람에게 꾸벅 인사를 해 보였다.
“친구분이세요?”
“대충.”
친구면 친구지, 대충은 무얼까.
윤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단을 오르는 정한의 등을 보았다. 그러다 퍼뜩 떠오른 단어가 생각나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저기, 사장님.”
Rrrrr.
복상사가 뭐예요?
정한의 휴대폰이 울리지 않았다면 제 궁금증을 뱉어냈을 테다. 엿들은 걸 들키지 않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이 모자랐다. 다행이었다. 윤조는 걸음을 멈춰 선 정한을 보며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뭐라 하려 했어?”
정한이 전화를 받지 않고 그대로 두며 물었다. 윤조는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제야 전화를 받은 정한이 계단을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윤조는 정한의 뒤에서 조금 떨어져 걷다가 슬그머니 서재로 향했다. 그런데 정한도 서재로 같이 오는 바람에 사전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정한이 계속해서 통화를 이어갔기에 서재에 머물지도 못했다. 나중에 찾아봐야지, 했는데 결국 까먹었고 그 단어조차도 잊고 말았다. 아주 중요해 보였는데 알 수 없어 아쉬웠다.
* * *
정한의 대충인 친구들이 다녀간 지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윤조는 다이닝 룸의 큰 식탁을 두고 주방에 딸린 아일랜드 식탁에 저녁을 차렸다. 막 주방으로 들어오던 정한이 통화를 끝내는 걸 보았다.
“요즘 자주 전화하시네요.”
자신이 마련한 자리에 앉는 정한을 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별다른 반응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윤조는 궁금증이 일었지만 더는 묻지 못했다. 정한이 곧장 식사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윤조는 그의 속도에 맞추어 천천히 포크를 들었다.
이전까지 윤조는 자신이 음식을 빨리 먹는 편인 줄 몰랐다. 정한이 오랫동안 식사를 거부한 이유로 씹는 시간이 보통 사람보다 긴 탓도 있었지만, 저는 빨라도 너무 빨랐다. 도대체 맛은 알고서 삼키는 거냐며 묻던 정한의 말에 충격을 받아 윤조는 요즘 음식을 꽤 음미하며 먹고 있다. 그 덕분에 전에는 몰랐던 맛을 발견하고는 했다.
“서 집사, 면허 없지?”
“아… 네.”
시간만 주신다면 당장 따 올게요. 그렇게 말해야 할까. 윤조는 제 보잘것없는 집사로서의 능력에 양심이 찔려 밥 먹는 것도 잊고 정한의 눈치를 보았다.
“안 어울리는 짓을 하네. 다 알고 고용한 건데.”
“그렇긴 한데… 제가 생각해도 전 해도 해도 너무한 것 같아서요.”
딱히 윤조의 말을 부정하지 않은 정한이 궁금증을 자아내듯 질문의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윤조는 테이블 매트를 매만지며 정한의 입술을 빤히 응시했다. 시선을 느끼고 있을 거면서 대답 없는 그가 조금 얄미웠다.
“아직 확정이 안 나서.”
“사장님이 허투루 저 바람 넣으실 분은 아닌 거 알아요.”
“고맙네. 그렇게 말해줘서.”
“그럼 대략이라도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준비가 필요한 일인가 싶어 물어보았다. 그러자 정한은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서 집사가 할 일은 없어. 오히려 지금보다 나아질지도 몰라.”
“그게 뭔데요?”
“저택 지키면 돼.”
“…보안 인력이 모자란대요?”
정한이 아니라고 손짓하며 말을 이었다.
“그걸 왜 서 집사가 해?”
“지키라고 하셨잖아요.”
“음, 내가 말을 잘못했네. 지킬 거 없어. 서 집사는 그냥, 나 올 때까지….”
“어디 가세요?”
“아직 미확정이라고 했어.”
“아… 죄송해요.”
“아무튼, 서 집사는 이 안전한 울타리에 갇혀서 나 기다리면 돼.”
“…개처럼요?”
“이참에 목줄이라도 살까 싶어.”
농담처럼 웃음 지은 정한이 식사를 다시 이어 나갔다. 윤조는 손에 든 포크를 내리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10시가 되기 전까지 열심히 가라앉혀 둔 마음이 흔들리며 불온한 찌꺼기가 사방으로 흩날리는 듯했다. 윤조는 제 페로몬이 새어 나가지 않게 서둘러 단속했다.
“…….”
시선이 느껴져 눈을 드니 정한이 빤히 보고 있었다. 제 이런 모든 마음을 꿰뚫는 듯한 시선이었다. 윤조는 괜히 정한이 자주 깨물곤 하는 목덜미를 매만지며 포크를 들었다. 방울토마토가 자꾸만 미끄러져 접시 위를 뱅뱅 돌았다.
* * *
윤조의 불온한 상태는 계속되었다.
슬슬 수영장을 정리해야 할 시기인 것 같아 아쉬운 발걸음으로 테라스에 이르렀다. 과연 바람이 꽤 매서웠다. 볕은 따뜻했으나 하루가 다르게 바람이 차가워지는 듯했다.
윤조는 뜰채로 건져낸 튜브를 풀 사이드에 올리고서 일일이 바람을 뺐다. 바람 뺀 것을 하나씩 볕이 잘 드는 곳에 널어놓는데 이것 참, 별것 없는 모양인데 꼭 사용 후의 콘돔 같다고 무심코 생각해버렸다.
혀를 차며 생각을 지우려고 했지만, 늘어진 제 앞에서 콘돔을 묶는 정한을 기어이 떠올리고 말았다. 그의 긴 손가락이 유연하게 움직이며 꼼꼼하게 묶어낸 매듭이 꽉 물리고 제가 비워야 하는 쓰레기통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낙하. 거기에 떨어져 나는 뭉텅하면서도 청량한 소리란.
‘근데, 사장님. 왜 갑자기 콘돔 쓰세요?’
‘그냥.’
‘그냥이요?’
‘어.’
그냥이라고 하니 별수 없었다. 그의 뜻을 제가 뭐라고 싫다 할 수 있을까. 윤조는 제게 전만큼 남아 있지 않은 정한의 흔적이 아쉬웠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얼마간 자진하여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되었다. 그러면 그는 또 입이 심심하다며 저를 올리곤 했다. 그가 양손으로 제 무릎을 살살 쓸어주는 건 좋았지만, 윤조는 정한이 부족했다. 정확히는 그의 페로몬이.
이런 와중, 더욱 페로몬에 목마를 일이 생기고 말았다. 정한이 저택을 나서게 된 것이다. 윤조는 내심 정한을 믿을 수 없어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살폈다. 저를 방심시키고는 냉큼 죽어서 돌아오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가 죽으려고 환장한 사람이었다는 걸 그간 잊고 있었다.
“같이 가요.”
“잠깐 갔다 오는 거야.”
“말은 그렇게 하시고 저 몰래 영원히 가시면 어떡해요?”
알아듣지 못했는지 미간을 좁히고 보던 정한이 뒤늦게 헛웃음을 지었다.
“안 죽어.”
“못 믿겠어요.”
“요원 하나 데려갈 테니까, 있어. 진짜 목줄 채우기 전에.”
살아 돌아오겠다는 말보다 목줄 채운다는 말은 믿음이 가서 윤조는 정한에게 세운 의심을 급히 접었다.
“꼭 살아서 오셔야 해요!”
“눈물겨운 배웅 인사네.”
계단을 내려가는 정한의 뒤를 졸졸 따라붙고, 차에 올라탄 그에게 몇 번이나 다짐을 받아냈다. 보안 팀장이 윤조를 뒤로 물리지 않았다면 아직도 그는 대문을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괜찮으시겠죠?”
훌쩍 떠나가는 까만 세단의 뒤꽁무니를 보며 중얼거렸다. 늘 정한을 눈에 두고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저택 안에 함께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물리적인 거리가 생기니 마음이 불안해 견딜 수 없었다.
“집사님께서는 우리 보안 요원에 대한 신뢰가 없으신 모양입니다.”
팀장의 말에 윤조는 난감한 기색을 띠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가 그렇게 오해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워낙… 사장님이 멋대로시잖아요.”
멋대로 안 쓰던 콘돔도 쓰고. 나가지도 않던 바깥도 나가고.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합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에 윤조는 당황했다.
“…고맙습니다. 알아주셔서.”
“고마우실 거 없습니다.”
동조는 잠깐일 뿐, 윤조는 다시 냉랭해진 팀장을 향해 웃음 지어 보이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이제 정한을 목 빠지게 기다릴 일만 남아 있었다.
말이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것이지 실은 별것 아니라 생각했다. 이 안락하고 안전한 저택에서 가만히 숨만 쉬고 있으면 시간이 절로 갈 텐데, 그게 뭐 어렵다고. 그렇게 여겼다. 완전한 오판이었다.
텅 빈 저택을 지키고 있는 건 꽤 고역이었다. 윤조는 본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끝내고도 정한이 돌아오지 않자 저택 대문 앞에 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랬다가는 보안 팀장이 불쾌하게 여길 것이 뻔해 열심히 참았다.
“언제 오시는지 물어볼걸….”
이렇게 끝도 없는 기다림이라니.
윤조는 응접실 소파에 퍼질러 누워 째깍째깍 달리는 괘종시계를 바라보았다. 정한이 저택을 비운 지 고작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미친 거 아냐…?”
잘못 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형편없이 조금 지난 시간이라 윤조는 작은 충격을 받았다. 시간을 보낼 일을 해야 했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윤조는 구겨진 옷을 손으로 쭉쭉 편 뒤, 시간을 순식간에 지워줄 책을 찾아 서재로 향했다.
이것은 글이요, 이것은 종이라.
그렇게 재미있던 소설책도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윤조는 정한의 데스크에 앉아 읽히지도 않는 소설책의 첫 장을 몇 번이나 읽고, 또 읽다가 포기하고 엎드려 누웠다.
“…사장님 냄새난다.”
희미하게 정한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서재에는 정한의 페로몬이 남아 있을 일이 없었지만, 그가 오랜 시간을 보내는 장소라 그런지 배어 있었던 모양이다.
윤조는 개처럼 코를 킁킁거리며 정한의 냄새를 찾아다녔다. 배 속이 간질거리는 성적인 언어는 아니라도 정한의 냄새를 맡고 있자니 마음이 들뜨는 기분이 들었다. 매일 밤 그의 페로몬에 절여져 있다 보니 중독이라도 된 걸까.
정말 중독자라도 된 것처럼 윤조는 저택 곳곳을 돌아다니며 정한의 흔적을 더듬어 갔다. 그러다 아침에 보내버린 침대 시트가 아까워 무릎을 쳤다. ‘찰싹!’ 하는 아픔이 정신을 들게 했다. 거기다 대고 코를 박고 뭘 어쩌겠다는 건지. 불온하게 제 흔적을 더할 듯한 확신이 들어 급히 생각을 지워냈다.
그로부터 대략 두 시간 뒤, 정한이 돌아왔다. 윤조는 응접실 소파에 자리를 틀고 내내 현관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정한의 도착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사장님!!!”
차가 서기도 전에 윤조는 정한을 불렀다. 그는 여느 때처럼 차가 정차하자마자 스스로 문을 열고 내렸다. 윤조는 단숨에 정한에게 달려갔다.
“정말 살아서 오셨네요?”
“그게 궁금해서 튀어나와 있었어? 서 집사 정말 목줄 채워야겠네?”
“꼭 그런 건 아니에요. 마침, 소리가 들려서….”
정한은 윤조의 변명은 들리지도 않는 듯 곧장 저택으로 걸어 들어갔다. 윤조는 그와 동행했던 보안 요원에게 인사를 해 보이고 정한의 뒤를 따랐다.
“어디 다녀오신 건지 여쭤봐도 돼요?”
“이미 물어 놓고 그래?”
“전에 말씀하신 거요. 그게 확정된 거예요?”
“어.”
“그럼 저… 저택 지켜야 해요?”
정한이 계단을 오르던 발길을 멈추었다. 윤조는 따라서 그의 뒤에 섰다. 정장을 빼입은 정한의 뒷모습에 새삼스러운 감탄을 했다.
“…….”
정한이 몸을 돌려 윤조를 내려다보았다. 윤조는 조금 흘러내린 정한의 앞머리를 만져주고 싶어 손을 망설였다.
그가 말했다.
“지키는 게 어려워?”
“어렵지는 않아요. 그저 제 일과를 보내면 되니까요. 단지… 사장님이 걱정될 뿐이에요.”
“그렇다면 전혀 걱정할 것 없다는 얘길 해주고 싶은데.”
“이제 죽고 싶지 않으세요?”
“모르겠어.”
윤조는 정한의 대답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은 정한의 대답이 그의 진심으로 여겨졌다.
“애초에 서 집사가 걱정할 건 없었어. 난 타살을 기다리는 사람이었지, 자살할 의지는 없었거든.”
“그럼….”
“말 그대로야. 모르겠어. 이제 그런 것도 생각 안 해. 필요 없는 질문 같아.”
정한이 다시 계단을 올랐다. 윤조는 이제 홀로 이 저택을 나서는 그를 붙잡을 말이 더는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무척 다행인 일이었다.
“다음 주부터 출근할 거야. 서 집사는 평소대로 해. 나 신경 쓰지 말고.”
막 계단을 다 오른 정한이 윤조가 제게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설마하니, 오늘 취직 면접에 갔던 건가 싶어 윤조는 환하게 웃음 지었다.
“취직되신 거예요?! 전 그것도 모르고!! 축하드려요!! 우리 파티 할까요?”
“취직….”
정한이 헛소리를 들은 듯 미간을 좁히고 보았다. 윤조는 냉큼 그에게 다가갔다.
“일자리 구하신 거 아니세요?”
“복직이야.”
“아, 복직…. 복직이면, 원래 직업이… 있으셨나 봐요? 무슨 일 하시는데요?”
이제는 알려주겠지 싶어 윤조는 슬그머니 물어보았다. 정한이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윤조는 그 옆에 붙어 걸었다.
“뭘 거 같아?”
“음… 회장님 회사? 거기 다니세요?”
“내가 거길 왜.”
“그럼요?”
정한에게 던져 볼, 짐작하는 바가 있었지만 윤조는 되도록 그와 오래 말장난을 하고 싶어 참았다. 한데 정한은 대답해주지 않고 그의 방 문손잡이를 붙잡고 섰다.
“어….”
곧 10시에 만날 사이이긴 했지만, 이대로 그가 들어가버리면 그의 직업을 정확하게 아는 일도, 말장난도 끝나버릴 듯했다. 윤조는 애가 탔다.
“와, 나쁘다…. 사장님도 아시는 거죠? 여기 일하는 분들이 저한테 아무 대답도 안 해주시는 거.”
문손잡이에 둔 손을 내리며 정한이 돌아보았다.
“그래?”
“네. 그래서 복권도 못 사고 있어요.”
그를 붙잡고자 한 말이었는데 저택 담당자들의 푸념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동안 사지 못한 복권이 떠올랐다. 떠올랐으면 그대로 떠올라 하늘로 날아가버릴 것이지 왜 입으로 튀어나왔을까.
“복권?”
“…네. 제 유일한 취미거든요.”
차라리 혀를 깨물고 말지.
정한이 생각난 게 있는지 아, 하고 기억을 떠올리는 모습을 보며 윤조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래도 어쩌랴, 이미 말해버린걸. 아무런 수확 없이 수치만 당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윤조는 곧 뻔뻔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래서 말인데, 저 복권 좀 사러 나갔다 와도 될까요? 어차피 사장님 저택에도 안 계시니까요. 퇴근하시기 전까진 돌아올게요.”
윤조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정한이 다시 문손잡이를 붙잡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금방이라도 정한을 삼켜버릴 듯 문 틈새가 빠끔히 벌어졌다.
“안 돼. 내가 널 언제 필요로 할 줄 알고. 내 허락 없이 나가지 마.”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윤조의 말은 동강이 난 채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가 절 정말 집 지키는 개로 만들 작정인가 보다. 윤조는 제 눈앞에 닫힌 하얀 문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불합리한 처사라며 그에게 따지고 불쾌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윤조는 딱히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왜일까. 이상하게 기분이 좋기까지 했다.
“그럼 사다 주시기라도 하세요.”
웃음을 억누른 채 웅얼대고 있자니 닫힌 문이 슬쩍 열렸다. 윤조는 고개를 기울여 문틈으로 나타난 정한을 보았다. 옷을 갈아입던 중이었는지 그의 긴 목 밑으로 가슴골이 보였다.
“10시.”
“알았다는 대답, 하시려던 거 아니었어요?”
“알았으니까 10시.”
“…네.”
미련 없이 닫힌 문을 앞에 두고 윤조는 코끝을 매만졌다. 잠깐 사이에도 문틈으로 새어 나온 정한의 페로몬을 킁킁거리고 싶은 걸 참아야 했다.
오해를 사기 전에 어서 자리를 떠야 하는데 그의 말을 곱씹느라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윤조는 애써 몸을 틀어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자꾸만 어깨가 으쓱거렸다.
* * *
약속한 시각이 지났는데도 정한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직원 상담실에서 받는 상담이 길어지는 모양이었다.
한승주는 연신 시계를 들여다보기 바쁜 이무헌에게 자신이 알아서 할 테니 가 보라 일렀다. 최근 페로몬 불균형으로 병원을 찾는 이가 많아 무척 바빠진 무헌이었다.
“그럼 부탁할게.”
정한의 불감증 완치 결과가 나온 뒤라 무헌은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문제는 제게 있었다. 이 망할 알파가 겁도 없이 극약을 먹어대어 복상사를 꿈꾸고 있었기에 얼른 그 꿈을 깨주어야 했다.
똑똑.
무헌이 돌아가고 얼마 후, 정한이 나타났다. 문을 열고 들어온 훤칠한 알파를 승주는 감흥 없는 눈길로 올려다보았다.
“상담 잘 받았어?”
“어. 선배 여전하더라.”
“등 좀 얻어맞았겠다?”
정한이 어깨를 으쓱이며 무헌의 부재를 물었다.
“걔 요즘 바쁘잖아. 우리 병원에서 응급실 다음으로 제일 북새통이지 아마?”
정한은 관심 없는 얼굴로 승주가 턱짓으로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긴 다리를 둘 곳이 없어 옆으로 몸을 돌려 앉은 정한이 대뜸 본론부터 물었다.
“결과는.”
“처참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이 비서한테 아직 말 안 했지?”
“네 꼴이 한심해서 차마 아버님 뒤로 넘어가실까 싶어 아직 함구 중이야.”
“잘됐네. 그럼 조작 좀 해주라. 너도 봐서 알겠지만, 나 이미 완치잖아.”
겨우 방문을 허락받았던 저택에서의 만남 이후부터 승주는 정한이 제게 건네는 폭탄 발언에 자신이 뒤로 넘어갈 것 같았다.
정자를 싹 말려 죽이다 못해 그의 약한 심장까지 멈출 만큼 독한 알파 피임약의 복용도 그러하고, 지금의 검사 결과 조작 발언도 그러하고. 도대체 이 인간이 왜 이러나, 하고 승주는 생각에 잠겼다.
“왜 대답이 없어?”
그에게 일어난 새로운 변화. 그를 이렇게 움직이게 한 원인이 무엇일까. 승주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오래 생각해 보지 않아도 승주는 그 해답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네던 얼굴. 발그레한 두 볼이 인상적이었다.
“어떤 식으로 조작하라는 건데?”
“완치가 아닌 걸로.”
“왜, 테라피 계속 이어 가게?”
제 물음을 정한은 부정하지 않았다. 승주는 한껏 흥미로워져 자세를 앞으로 내밀어 정한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보아하니 단순한 몸 정은 아니겠고.”
정한이 딴청을 했다. 그의 용건은 끝났으니 이만 가겠다는 눈치였다. 승주는 이대로 정한을 보낼 수 없어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네 뜻은 알았어. 조작쯤이야. 얼마든지 해줄 수 있지. 단, 피임약 복용은 중단해. 또 실려 오고 싶지 않으면.”
“살려줄 거잖아.”
“역시 복상사가 꿈이지?”
정한이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대로라면 그가 제 말을 듣지 않을 것 같아 승주는 살짝 애가 탔다.
“알파 피임약 부작용 너도 나만큼이나 잘 알 텐데, 굳이 네가 그걸 챙겨 먹는 이유가 뭐야?”
“먹이기 싫어서.”
미친놈인가 싶었다. 오메가의 피임약 부작용 따위가 무어라고 제 심장을 바친단 말인가. 승주는 혀를 차며 정한의 오메가를 다시 떠올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순진한 눈짓. 마른 몸이 정한과 대비되어 보였다.
어떻게 보아도 정반대의 사람이 분명했다. 흥미로울 법하긴 했지만, 저렇게 깊어질 일일까. 문득 목 끝까지 채워 입은 집사 유니폼 아래에 저 권정한이 어떤 낙인을 찍어 놨을지 궁금해졌다. 온전한 부분이 남아 있기는 한 걸까.
“콘돔은 뒀다 뭐 해?”
“써봤는데, 별로야.”
“뭐. 촉감이? 혹시 안 서? 못 싸? 너 그런 루저였어?”
“윤조가 불편해해.”
윤조.
사람 이름 두 글자가 이렇게 낯간지럽다니. 승주는 제 몸 여기저기를 긁고 싶어져 팔짱을 꼈다.
“암튼, 시도한 건 칭찬 해줄게. 그래도 그 윤조라는 친구, 약 먹이기 싫으면 콘돔 써. 아님 이 비서한테 지금이라도 전화 넣고.”
고집스럽게 대답하지 않는 정한을 보며 승주는 의문이 들었다.
“근데 왜 굳이 조작까지 해가며 테라피 하려고 해? 그냥, 하면 되잖아. 네가 좋다고 하면 안 넘어올 오메가가 어디 있어?”
승주는 저를 매섭게 쳐다보는 정한의 눈짓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설마하니, 그 오메가에게 퇴짜를 맞은 건가. 믿기 힘든 가정에 승주의 미간이 좁혀졌다.
“차였어…?”
“내가?”
“아니지? 그래, 아니겠지. 근데, 왜. 아버님 때문에 그래?”
“거기서 아버지가 왜 나와?”
아닌가.
승주는 정한의 아버지인 권 회장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무조건 트러블이 날 것 같았다. 권 회장의 눈에 저택에서 부리는 집사가 제 아들의 배필로 눈에 찰 리가 없었다.
“그럼 뭔데?”
“좀 알아보려고.”
“뭘?”
“나. 그리고 윤조.”
그만 묻고 닥치라는 소리를 이리도 징그럽게 하나 싶어서 순간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참았다. 조만간 참지 못하고 그에게 달려가 물어 댈 것 같지만, 그의 심장이 우선이었기에 약속 하나만이라도 확실히 받아 두어야 했다.
“테라피 중인 오메가가 임신하기 쉽긴 하다만, 스케줄만 잘 따르면 걱정 없는 거로 알아. 네가 굳이 피임약 챙기는 이유는… 노팅 때문이지? 너 노팅 좋아하잖아.”
“별게 다 소문나네.”
“암튼 그 노팅 좀 자제하고….”
“노팅 안 해.”
“그럼? 뭐, 스케줄 어기고 윤택한 임신 환경이라도 만들어주셨어?”
무언의 긍정이었다. 승주는 제 이마를 짚었다. 수치 낮은 오메가의 임신을 걱정할 정도라면, 도대체 얼마나….
“너 진짜….”
승주의 미간이 급격히 좁혀졌다. 어쩌다 권정한이 저렇게 되었지? 하는 생각이 머리를 휩쓸었다.
“발정 났어?”
뭘 잘했다고 웃는지. 승주는 머리 뚜껑이 열리는 듯했다. 그가 병원으로 실려 오고 난 이후로 오랜만이었다.
“콘돔 써. 콘돔! 그 쉬운 애 두고 뭐 하냐?”
기가 차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무헌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도 저처럼 목에 핏대를 세웠을 테다.
“네 정액 그 친구한테 한 방울도 흘리지 마. 테라피 횟수! 빈도! 다 줄여. 휴식일도 꼭 지키고! 임신하기 좋은 환경 절대 만들지 마. 그럼 정 급할 때 피임약 없이 해도 괜찮을 거야. 노팅을 해도 끄떡없을 거다. 너 듣고 있어?”
“…….”
“듣고 있냐고!”
다 아는 얘기를 굳이 지적해준 보람이 있어야 할 텐데, 정한은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승주는 가슴을 치고 싶었다. 차라리 그가 실려 올 각오를 하는 게 더 속 편하지 않을까.
“얘기 끝났어?”
“…그래.”
용건 끝난 정한의 얼굴은 매우 뻔뻔해 보였다. 승주는 정한을 올려다보며 속으로 그를 욕했다. 어디 실려 오기만 해 봐라, 엉덩이부터 걷어차 줄 테다, 하며.
“이무헌한테 잘 얘기해줘.”
제가 속으로 어떤 욕을 하는 줄도 모르고 정한은 무헌이 가져다 놓은 검사 봉투를 지적하듯 톡톡 두드렸다.
“적당히. 내가 컨트롤 가능한 범위로.”
시위하듯 대답하지 않고 있었더니 정한이 다시 봉투를 두드렸다. 마뜩잖았지만 겨우 복직한 그의 마음이 어지러워질까 이내 승낙했다. 권 회장의 귀에 들어가 봤자, 저도 무헌도 고달파질 테고.
“내가, 어? 귀찮아서 해주는 거다. 알았어?”
“고마워.”
웃음이 묻은 목소리와 목적을 달성한 얼굴이었다. 승주는 아연히 정한을 올려다보다 고개를 내저었다.
“간다.”
미련 없이 돌아서는 정한을 향해 승주는 제 할 일을 잊지 않았다.
“콘돔 써!!!”
정한은 태평히 제게 손만 흔들어 보이고 사라졌다. 승주는 틈이 나는 대로 그에게 잔소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
잘 넘어간다 했더니, 성질을 못 이긴 승주가 틈만 나면 들이닥쳤다. 정한은 뭐라도 얻어 가려고 저를 살살 구슬리다가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쳐대는 승주를 앞에 두고 조용한 제 호출기만 바라보았다. 지나친 배려였다.
“내가 어디서 봤는데, ‘그 사람’들은 애 가지기를 싫어하더라?”
“그 사람?”
“각인하는 바보들.”
“…….”
“넌 원래 애한테 관심 없긴 하지만, 극단적으로 피임에 열정적인 걸 보면…. 야, 너 아니지?”
승주는 멋대로 말하고 멋대로 결론 내었다. 피임약까지 먹어대며 하는 게 단단히 돌아버린 게 분명하다며 각인 전초 증상일 거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아예 반응을 말았어야 했다. 정한은 귀찮은 마음에 응급실로 돌아가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그거 사람 미치는 거 알지? 그쪽이 너 아니면 넌 그냥 인생 저당 잡히는 거야.”
일명 광증. 제 분야는 아니었어도 익히 잘 아는 것이었다.
“어? 너 지금 피하는 거야?”
“일하러 간다. 넌 안 가?”
찔렸던 모양인지 승주가 미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조심해. 넌 둘째 치고 너한테 붙들려 살 그 친구는 무슨 죄야?”
정한은 끈질기게 따라붙는 승주의 말을 흘려들었다.
“그 친구는 알아? 너 각인까지 생각하고 있는 거? 나라면 무서워서 도망갔다.”
무시해야 했는데, 승주의 말이 너무나 우스워 정한은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도망은 무슨. 서윤조는 스스로 목에 목줄을 차고 붙들고 있어 달라 할 위인이었다.
“야, 맞지? 너 도망갈까 봐 무서워서 밑밥 까는 거지?”
“적당히 해라.”
“아, 좀 말해주면 덧나?”
정한은 고개를 내젓고 걸음을 이었다. 오늘따라 한가한 응급실이 곧 눈앞이었다. 승주가 코웃음을 치며 정한의 가운을 붙들었다. 이것만 말해주면 응급실에서 소란을 떠는 일은 없을 거라는 협박이 담긴 손짓이었다.
“근데 그 친구 몇 살이야? 되게 어려 보이던데.”
딴에는 배려한 질문이라는 게 느껴졌다. 정한은 승주의 손을 제 가운에서 떼어내며 답했다.
“스무 살. 곧 생일 지나면 스물하나 돼.”
“너 잠시 죽으면서 양심을 저세상에다 두고 온 거지. 그렇지?”
“그런가 봐.”
“허…!”
기막혀하는 승주를 뒤로하고 정한은 응급실로 향했다. 그 후로 정신없이 밀려드는 환자와 이따금 들이닥친 승주를 상대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가 있었다. 그럭저럭 괜찮은 하루였다.
상담 보고서와 근무 일지를 작성해 직원 상담실에 전달한 후 퇴근길에 올랐다. 마치 학생 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퇴근해?”
나가는 길에 승주와 마주쳤다. 오늘 어찌나 자주 보는지 오랜만에 온 병원에도 불구하고 정한은 벌써 승주에게 질렸다.
“너도 퇴근?”
“어.”
차 문을 열려다 퍼뜩 생각난 게 있어 승주를 불렀다.
“왜.”
“복권 어디서 사?”
“뭐?”
“복권.”
“보, 복권?”
“복권 몰라?”
“알지. 아는데 너는 모르는 단어인 줄 알았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 것 같아 정한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빤히 저를 훑어보던 승주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다가왔다.
“크게 돈 쓸 일 있어?”
“돈 쓸 일이 있는데 왜 복권을 하겠어?”
“그렇지? 그런 불확실한 거에 뭐 하러.”
“어디서 사는지나 말해 봐.”
“여기 병원 맞은편에 가면 빨간 간판 있는 골목 하나 있거든? 거기 돌아서 들어가면 복권이라 적힌 가게 있어. 종류별로 다 팔아.”
“종류가 따로 있어?”
“어. 꽤 많아. 뭐 어떤 거 하려고?”
정한은 기억 속의 복권 종이를 떠올려 보았다. 희뿌연 연기 사이로 보았던 윤조의 손에 들린 복권.
“이만한 종이에 모서리마다 새 같은 게 그려져 있어.”
“아아, 뭔지 알겠다. 그거 제일 흔한 거야. 많이 하기도 하고. 그냥 복권 주세요, 하면 바로 줄 정도? 가서 말해 봐.”
정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차 문을 열었다. 그러자 승주가 냉큼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섰다.
“나 따라가도 돼?”
“어딜.”
“너 복권 사는 거 구경할래.”
“그걸 왜?”
“언제 또 보겠어.”
정한은 승주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사수했다. 흥미로워하는 승주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서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자주 보게 될 거야. 오늘이 아니어도.”
“뭐?”
“간다.”
복권도 사야 했기에 더는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차에 오르는 정한의 뒤를 잡듯 승주가 소리쳤다.
“야, 콘돔!!”
공간을 쩌렁쩌렁 울리는 외침에 정한은 치를 떨며 서둘러 병원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승주가 알려준 복권 가게에서 복권을 사고 저택으로 돌아오니 윤조가 또 밖에 나와 있었다. 마중 나온 개처럼 훌쩍 뛰어와 달려드는 모습이 퍽 반가웠다. 정한은 저도 모르게 윤조의 머리에 손을 얹고 쓰다듬었다.
“식사하실래요?”
“나 알아서 먹을게. 신경 쓰지 마.”
병원에서 가지고 온 지저분한 것들을 어서 씻어 내고 싶었다. 되도록 윤조를 만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계단을 올랐다. 방 앞까지 따라온 윤조가 더 시킬 일이 없는지 물었으나 정한은 정말 그에게 시킬 일이 없었기에 고개만 내저었다.
“참, 부탁한 거.”
“네?”
빤히 제 얼굴만 보는 윤조를 앞에 두고 정한은 복권을 건네었다. 개나리색 봉투 안에서 복권을 꺼내 든 윤조가 기쁘게 웃었다.
“진짜 사 오셨네요?”
“어느 분 부탁인데.”
“고마워요, 사장님!”
정한은 작게 고개만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왔다. 아직 오후가 한참 남은 시간. 정한은 승주에게 내내 들은 잔소리를 떠올리며 서랍장을 열었다. 최근 가장 손이 많이 간 약병을 매만지다 다시 안으로 굴려 넣었다.
어찌 되었든 당장 중지해야 할 수준은 아니라니 다행이었다. 승주나 무헌이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통제하지 않아도 될 충동을 허락받은 듯해 한편으로는 여유롭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말 안 듣는 환자의 심리를 이해하게 될 줄이야. 정한은 저를 비웃으며 욕실로 향했다. 수전을 켜자 쏟아지는 뜨거운 물이 온몸을 적셨다. 윤조와 보내지 않은 하루가 순식간에 씻겨 나갔다.
*
저녁 10시가 되자 어김없이 윤조가 찾아왔다. 정한은 윤조를 눕혀 놓고 그의 몸을 매만졌다. 방금 씻은 몸이 따끈따끈하고 축축해서 기분 좋았다.
“으… 응….”
흉곽을 붙잡고 두 손으로 쓸어내리자 윤조가 가볍게 허리를 튕기듯 들었다. 엄지가 젖꼭지를 스칠 때마다 그가 반응했다. 윤조는 별것 아닌 그저 쓰다듬는 것만으로도 좋아했다. 꼭 주인의 손길을 기다렸던 강아지처럼, 제 몸 구석구석이 만져지는 걸 즐겼다.
“오늘따라, 오래 만져주시네요….”
“싫어?”
“아뇨…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정한은 윤조의 몸을 손끝 발끝 놓치는 것 없이 매만지고 또 쓰다듬었다. 윤조의 몸이 페로몬으로 달아오를 때가 되어서야 그의 얼굴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
풀어진 눈가가 흥분으로 젖어 있었다. 어쩌면 오늘이 제멋대로 굴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한은 집착적으로 윤조의 모든 곳을 눈에 담았다.
“왜 그렇게 빤히 보세요…?”
평소와 조금 다르다 느꼈는지 윤조의 질문이 많아졌다. 정한은 윤조의 두 뺨을 쓸어 올리듯 쥐고서 입술 위로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싫은데….”
“네?”
싫었다. 애처럼 떼를 쓰고 싶을 정도로.
“아니야.”
고개를 내젓고 윤조의 입술을 머금었다. 저를 따라 더듬거리며 오물거리다 입술을 벌리는 게 무척 사랑스러웠다. 정한은 윤조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깊이 혀를 찔러 넣고 개처럼 안을 핥았다. 숨이 막혀 제 가슴을 치는 손을 알면서도 그만두지 않았다. 발을 동동거릴 때까지 몰아세운 뒤 입술을 떼자 밭은 숨이 뺨을 두드렸다.
정한은 윤조의 숨을 조금만 틔워주고 다시 입을 맞추었다. 그의 몸이 바르작거리며 떨렸다. 이번에는 두 손목을 모두 쥐고서 압박하듯 눌렀다.
“우읍….”
윤조는 키스할 때 코로 호흡하는 게 서툴렀다. 정신을 어디 다가 두고 있는지 코로 숨을 쉬는 걸 잊는 듯했다. 숨이 꺽꺽 넘어가서야 겨우 호흡을 틔우고 매달렸다. 따라오기 바쁘던 그가 홀린 듯 혀를 감아 오며 목을 끌어당겼다. 정한은 이 순간을 매우 좋아하는 편이었다.
“으음….”
윤조는 집중력이 좋았다. 키스에 빠지면 잠시 다른 것은 잊고는 했다. 그러다 슬슬 홀로 몸을 배배 꼬기 시작하며 정신이 흐트러졌다. 정한은 자연스럽게 윤조의 다리를 벌리고서 그 사이로 자리 잡았다. 기다렸다는 듯 제게 몸을 바짝 붙인 윤조가 페로몬을 뿜어내었다. 정한은 모르는 척 윤조의 페로몬을 들이마시며 그의 은밀하고 직설적인 언어를 흥미롭게 읽었다.
“사장님….”
부어오른 입술이 중얼거렸다. 정한은 윤조의 입가에 흐른 침을 핥고서 그 밑으로 내려가 그의 살 곳곳을 맛보았다. 말 그대로 윤조를 맛보았기에 정한의 입술과 혀는 매우 바빴다. 그가 안달 나서 이만 넣어 달라고 조를 때까지 정한은 윤조의 따끈하게 열이 오른 살점을 빨고 잇새로 씹고 또 흔적을 내었다. 흐릿해져 가는 곳은 덧칠하듯 진하게, 진한 곳은 간지럽게 혀로 쓸면서.
“사장님… 이만….”
간절히 바라는 것 대신 턱을 붙잡고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윤조는 제 몸이 꿰뚫릴 것이라 예상했던지 어딘가 아쉬운 눈짓을 보냈다. 정한은 그가 이런 눈을 하면 짓궂게도 더 애태우고 싶어졌다. 안달하는 모습을 봐줄 요량으로 몸을 떼려는데 다급한 손길이 밑을 붙들었다.
정한은 제 성기를 꽉 붙든 손을 내려다보았다. 윤조의 배 위로 길게 선액을 흘리고 있던 제 성기가 꺼떡거리며 당겨졌다. 정한은 미간을 좁히며 윤조의 손길에 따라 제 몸을 그에게 가까이 붙였다.
“서 집사.”
그에게는 제 말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정한은 다급히 숨을 뱉는 윤조를 내려다보며 그가 꼭 히트 사이클과 같은 증세를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지나치게 페로몬을 많이 내고 있었다.
“빨리….”
윤조가 떨리는 손으로 제 젖은 밑을 향해 성기를 갖다 대었다. 정한은 윤조의 봉긋한 엉덩이 양쪽이 그의 물로 흥건하게 젖은 것을 보며 또다시 싫은 기분을 느꼈다. 이걸 어찌 참으란 말인가.
“사장, 님….”
비협조적인 정한을 다그치다 못한 윤조가 성기에서 떼어낸 손을 제 엉덩이로 가져가 벌려 보였다. 정한은 꽉 다물려 있다 물리적인 힘에 벌어지는 윤조의 속살을 보며 제 끊어질 듯한 인내를 느꼈다.
“어서요….”
벌어진 주름 사이로 점성을 가진 액체가 이슬처럼 맺혀 흘러내렸다. 정한은 입 속의 혀를 굴리며 갈등했다. 저걸 마실 것인지, 바를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한 머리가 성급한 몸을 이기지 못하고 결론부터 내렸다.
“아…!”
질척하게 들러붙는 내벽이 기가 막히게 좋았다. 정한은 제 밑에서 턱을 들고 입을 벌린 윤조를 당겨 안으며 천천히 몸을 빼었다. 그의 내벽에 고인 물이 제 성기를 삼키듯 감싸며 놓아주지 않는 듯했다.
“읏…!”
정한은 윤조의 머리칼을 그러쥔 채 다시 몸을 밀어 넣었다. 깊숙하게 처박힌 성기를 야금야금 씹어 먹는 작은 몸이 기특했다. 그간 열심히 가르친 보람이 있었다. 이걸 쉬어야 한다니. 또 싫다는 생각이 머리를 차갑게 했다.
“사장… 읏… 흐, 하, 으읏!”
흔들리는 몸을 지탱하려 윤조가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정한은 그의 눈가에 차오르는 눈물을 보았다. 흥분으로 달아오른 뺨과 달콤한 숨, 끈적한 침. 저로 인해 벌어지는 모든 것을 낱낱이 관찰했다.
질끈 눈을 감은 윤조의 눈꼬리에서 눈물이 맺혀 흘렀다. 정한은 윤조의 숨을 삼키며 그 눈물을 따라 고개를 기울였다. 시트 위로 툭 떨어진 눈물이 진하게 자국을 내고, 또 냈다.
“아! 흐, 으! 흐… 으응….”
정한은 윤조의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린 눈물을 핥았다. 윤조의 몸이 바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눈꼬리에 이르러 남은 눈물을 빨아내자 시트도 놓아버리고 저를 붙들었다. 정한은 제 팔을 꽉 붙든 손과 그의 몸처럼 떨리는 안을 느꼈다. 이게 그리도 좋을까. 속으로 웃으며 그의 반대쪽에 흐른 눈물도 핥아주었다.
“으응….”
팔을 붙든 윤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정한은 몸을 일으켜 윤조의 허리를 바짝 들어 올렸다. 윤조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잠… 아! 으아! 악! 읏…!”
정한은 윤조의 허리를 든 채 위로 쳐올렸다. 좁아진 안이 빡빡하게 정한을 압박했다. 처음 길을 낼 때처럼 긁어 올리는 정한의 눈길이 흥분으로 짙어졌다.
“흐, 읏…! 뜨, 뜨거워요. 하… 사장, 님. 뜨거…, 워.”
다급히 시트를 당겨 잡는 윤조의 손길이 허무하게 미끄러졌다. 정한은 윤조의 덜렁거리는 성기를 보며 웃었다. 어쩜 저런 것도 귀엽나 싶었다.
“빨, 라요. 너무… 아아! 빨라, 흐읏! 흐윽….”
윤조는 제 허리를 감고 있는 정한의 팔을 뜯어내듯 밀어내었다. 그런 주제에 온몸이 붉게 물들어서는 학학거리기 바빴다. 정한은 저를 조이며 수축하는 윤조의 뜨거운 속을 벗어나기 아쉬워 짧게 혀를 찼다.
“힘들어?”
대답도 힘든지 윤조는 잘게 고개만 끄덕였다. 정한은 윤조가 이르게 지치기 전에 잠시 쉼을 주기 위해 그의 허리를 내리고 슬슬 사정을 준비했다.
몸으로 눈치를 배운 윤조는 허리가 바닥에 닿자 슬그머니 다리를 벌리고 가슴을 폈다. 정한은 윤조를 꽉 끌어안은 채 오로지 사정을 위해 움직였다. 윤조의 머리칼을 그러쥐고 그의 귀를 빨며 그가 내는 소리를 남김없이 들었다.
그리고 더는 참기 어려운 지점에 이르렀을 때 정한은 윤조의 눈을 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고인 제 얼굴이 낯설면서도 반가웠다. 이걸, 왜 매일 못 봐야 하는 건지. 수개월 전으로 돌아가 스스로 심장을 멎게 할 자신을 말리고 싶어졌다.
“흐으, 하아… 하아….”
윤조가 뱉어내는 따뜻한 숨을 마시며 정한은 더욱 피치를 올렸다. 내내 조용하던 침대가 삐거덕거리며 울었다. 윤조의 입술이 벌어졌다.
“아아…!”
허리를 감싼 윤조의 다리가 정한을 힘껏 제 쪽으로 당겼다. 부여잡은 어깨로는 손톱이 박히도록 매달렸다. 저보다 먼저 오르가슴에 오른 윤조가 허리를 덜덜 떨며 정한을 쥐어짜댔다.
“으으… 흐….”
감당하기 어려운 압박감이 밀려왔다. 정한은 제 밑에서 떨고 있는 윤조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그가 그토록 바라는 정액을 배 속에 쏟아주었다.
‘너도 모르는 거지? 확신이 없는 거야. 그치?’
‘…….’
‘어째 한마디를 안 흘리냐.’
‘알아보겠다 했잖아.’
‘그거 닥치라는 뜻 아니었어?’
‘잘 아네.’
‘하… 그것만 말해. 너 확신이 있는 거야, 아님 그냥….’
‘…….’
‘아, 말 좀 해 봐! 너 결정 난 거야 아닌 거야! 너 하는 짓 봐선 맞는 것 같은데? 맞지?’
‘…….’
‘좀 알려주면 덧나냐!’
‘가라.’
‘그래, 간다 가!’
정한은 이미 제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윤조의 마음도 어느 정도 짐작하는 바였지만 그 스스로는 깨닫지 못했기에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제게 어떠한 신호를 보낼 때까지 내버려 둘 작정이었다.
되도록 윤조에게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그는 자신의 사장님, 권정한이란 인간을 지나치게 믿고 따르니까. 제 말과 행동에 휘둘려 후회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은 더디겠지만 온전한 그의 판단으로 낸 선택을 믿고 흔들림 없이 달려오도록. 그러면 정한은 그에게 제 인생을 쥐여줄 생각이었다.
알고 싶은 건 단 하나. 과연 그때가 언제인지였다. 윤조에게 어느 때에, 어떤 순간에 제 마음을 깨달을 계기가 생길지, 정한은 알고 싶었다. 그래서였다. 그와의 내밀한 관계를 이어 나갈 수단을 버릴 수 없었다. 물론, 그를 취할 사심이 그보다 앞서 있었지만.
정한은 불쑥 떠오른 승주와의 대화를 불쾌하게 여기며 윤조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그의 페로몬을 들이마셨다. 참아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늘어나고 있었다.
“아….”
윤조가 생각난 듯 중얼거렸다. 정한은 고개를 들어 윤조의 얼굴을 살폈다. 몸을 움직이자 그에게 처박고 있는 제 성기를 타고 스멀스멀 정액이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콘돔, 안 했는데….”
“하고 싶어?”
윤조가 눈치를 보듯 저를 향해 눈동자를 굴렸다. 정한은 그 눈짓이 매우 귀엽다고 생각했다. 푹 젖은 속눈썹이 깜박이며 말을 찾았다. 빤히 알 것 같은 머릿속이었다. 정한은 윤조의 관자놀이에 깊게 입을 맞추며 물었다.
“싫어?”
“…….”
“싫으면 싫다 해도 돼.”
“…싫어요.”
나도 싫어.
정한은 대답을 삼키고 웃었다. 버릇처럼 따라 웃는 윤조의 얼굴을 보며 정한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가슴이 뻐근했다. 이 알싸한 아픔이 피임약의 부작용 때문인지, 제 이 두근거리는 마음 때문인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전자가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 * *
윤조는 스무고개 같은 물음으로 정한과 말장난하며 그의 직업을 알아내었다.
“의사! 맞죠?”
“알고 있었으면서.”
“몰랐어요. 제가 추리해서 맞춘 거예요.”
빤히 얼굴을 들여다보던 정한의 시선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제 어설픈 거짓말을 웃지도 않고 바라보는 눈동자 때문인지, 코가 절로 벌름거릴 정도로 진했던 페로몬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윤조는 정한에 대해 요즘 자잘하게 알아 가는 게 많았다.
책을 자주 접하는 것부터 알아봤어야 했을까. 그는 수시로 공부를 했다. 보고 있자면 저도 무언가를 하고 싶어졌다.
정한은 운동도 꾸준히 했다. 퇴근하고 돌아와 두 시간은 훌쩍 뛸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는 말을 걸기가 조금 무서웠다. 달리면 기분이 상쾌해진다던데. 왜 그에게서 이따금 고뇌가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병원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걸까, 내심 걱정을 했다.
윤조는 그저 달리는 정한의 뒤에서 고개만 빠끔히 내밀고 구경할 뿐이었다. 무게에 맞지도 않는 아령을 들다 떨어트려 시선을 받는 건 한 번으로 족했다.
그 외로 그는 조금, 잔소리가 많았다. 주로 건강에 관해서였다. 특히 제게 먹는 것에 관한 잔소리를 많이 했다. 그래 봐야 제발 좀 씹고 삼키라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더.”
딴에는 열심히 씹고 삼키는데도 그에게는 한참 모자랐던 모양인지 어떨 때는 씹은 걸 검사받기도 했다.
“이건 그만 먹어.”
이젠 먹지 않아야 할 것도 골라주었다. 윤조는 아직 상당히 남은, 매우 비싼 페로몬 분비약이 정한의 손짓 한 번에 쓰레기통으로 버려지는 걸 안타까운 눈으로 보았다.
“왜요…?”
“장기간 복용하면 간에 무리 와.”
“간…, 간이요?”
“여기.”
“윽…!”
정한이 굳이 배 한 쪽을 꾹 눌러 위치를 알려주었다. 윤조는 그 자리를 잘 기억해 두기로 했다. 정한을 믿지 않는 건 아니지만, 저를 보며 짓던 웃음이 너무나도 짓궂어 그가 출근한 이후 서재를 뒤적여 보았다. 과연 정한이 짚어준 곳에 간이 있긴 했다. 꽤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서.
윤조는 떨떠름한 얼굴로 두꺼운 책을 덮고 정한이 누르고 간 자리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그렇게 한참 한 부위를 만지고 있자니 최근 들어 정한이 유난히도 집착하는 곳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복직 이후, 병원 사정으로 당분간 출근 스케줄이 유동적으로 됨에 따라 낮 치료 시간이 생기고부터였다. 낮 치료는 밤 치료와 달리 비교적 가벼운 편이었다. 할애하는 시간도 그리 길지 않았는데, 정신없이 잠들게 되는 밤 치료와 달리 종일 시달리고는 했다.
오늘은 어디냐 하면….
윤조의 손길이 차마 그곳에 닿지는 못하고 허공에 머물렀다. 급히 고개를 내젓고 할 일을 시작했다. 이제 모든 일이 손에 익어 금세 끝이 날 테지만, 이 짧은 시간만이라도 다른 곳에 집중하고 싶었다. 종일 젖꼭지만 생각할 수는 없었다.
“후….”
갖은 노력에도 기어이 느끼고 만 감각에 한숨이 삐져나왔다. 윤조는 정한이 씹어 놓고 가버린 제 젖꼭지가 옷에 쓸리는 느낌을 더는 참을 수 없어 우뚝 섰다. 그렇게 저택을 청소하다가 가만히 서서 아린 기운이 가시길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러다 떨어지겠어요….’
‘안 떨어져.’
뜨거운 혀로 살을 쭉쭉 빨아 당기면서도 발음이 뭉개지지 않았다. 윤조는 대략 두 시간 전, 집요하게 제 가슴을 빨고 간 정한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어릴 때 젖을 못 먹었나?
다음에 회장님을 만나면 물어나 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물론 실현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또 야한 생각을 했더니 슬슬 페로몬이 피어 나와 휴식을 하기로 했다. 요즘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참 핑계가 많은 듯하다. 응접실 소파에 기대어 앉아 높은 천장을 구경하며 남은 할 일을 정리하는데 또 정한이 생각났다.
낮 치료는 밝은 분위기만큼 스킨십도 가벼웠다. 어느 하나 정한이 꽂히는 부위를 물고 빠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직접적인 삽입은 하지 않았다. 완벽히 차려입은 정한의 밑에서 윤조는 그저 엉덩이만 치켜들고 제 속을 느릿하게 채우다 빠져나가는 손가락만 느꼈다. 어찌나 감질나는지 이가 아득바득 갈렸다.
그게 다 저를 배려하는 것임을 아는데도, 제 볼일만 끝내고 가버리는 정한이 얄미워졌다. 오늘은 일도 못 하게 젖꼭지를 씹어 놓고 갔다. 윤조는 정한이 괘씸하여 괜히 허공으로 발을 차고 다시 청소에 돌입했다.
정한은 여전히 윤조의 페로몬을 느끼지 못했다. 대신 그의 페로몬 분비는 꽤 정상적인 수준까지 온 모양인지, 그가 지나간 자리에서도 윤조는 정한을 느낄 수 있었다.
정한이 없는 동안 윤조는 저택 곳곳에 남은 정한의 페로몬을 발견하고는 했다. 정말 개가 된 게 아닌가 싶어 정한을 무시하려고도 했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코를 킁킁거리고 있었다.
응접실을 지나 다용도실 앞까지 이르렀을 때였다. 저택을 울리는 벨 소리에 윤조는 들고 있던 청소기를 내리고 현관으로 훌쩍 달려갔다. 발소리를 죽이고 옷에 붙은 먼지를 털어 낸 뒤, 문을 열었다. 그곳에 반갑지 않은 방문객이 서 있었다.
“어쩐 일이세요?”
“여전히 인사 태도가 좋지 못하시네요.”
권 회장의 비서였다. 윤조는 떨떠름한 얼굴로 비서를 향해 다시 인사해 보였지만, 그는 윤조를 무시한 채 저택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비서는 권 씨 부자와 비슷한 덩치인지라 긴장하지 않으려고 해도 긴장이 되었다. 언제든 저를 훌쩍 들어 납치할 것 같은 굵은 팔뚝을 보며 윤조는 제 긴장이 들키지 않기를 바랐다.
“회장님께서 전하라 하셨습니다.”
“이게 뭔가요…?”
“수고비입니다.”
“아….”
일전에 보내왔던 오메가 치료사를 통해 자신이 정한의 치료사가 된 것을 알았을 테니, 이런 수고비도 보내온 것이겠지만. 하필이면 왜 지금 전해주는 건가 싶어 윤조는 의아했다. 다 끝나고 주어도 됐을 일이다.
설마.
퍼뜩 떠오른 생각에 윤조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굳혔다. 의중을 읽는 듯한 비서의 시선이 윤조의 얼굴을 훑었다. 윤조는 급히 표정을 풀었다. 매우 어설펐지만.
“이제… 괜찮으시대요? 사장님, 다 나으셨어요?”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페로몬이 전만큼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네, 그건 저도 알아요. 근데… 제 페로몬은 못 느끼시는데요?”
“검사 결과로는 우성 오메가 페로몬은 감지할 수준까지 오신 듯합니다. 집사님의 수치가 워낙 낮아서 집사님 페로몬을 느낄 정도라면 완치를 뜻하겠지요.”
페로몬 수치가 낮은 것을 은근히 흠잡는 비서의 말에도 윤조는 끄떡하지 않았다. 제게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한때는 그가 나아가는 게 제 자랑처럼 느껴졌는데. 이 마음은 도대체 무얼까. 숨이 턱 하니 막혔다.
“그럼… 이제 치료는 끝난 건가요?”
“그건 도련님의 판단 여하에 달렸습니다. 담당의 소견으로는 완치까지 치료를 계속하는 편이 안정적이라고 합니다.”
“아직 끝나진 않은 거네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건 도련님의 판단에 맡깁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윤조는 비서를 배웅하고 봉투 안을 들여다보았다. 권 회장은 덩치만큼 손도 큰지 상당한 액수의 수고비가 빳빳하게 누워 있었다. 기뻐야 하는데, 어째 조금도 기쁘지 않을까. 윤조는 돈을 받은 것이 아닌 꼭 돈을 빼앗긴 사람처럼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이를 어쩌지….”
일단 이 돈을 어딘가 보관해야 했다. 제 월급과 마찬가지로 이 수고비 또한 정한에게 맡겨야 했지만, 이걸 줌으로써 입에 올리게 될 이야기가 싫었다.
윤조는 잠시 돈다발을 손끝으로 매만지다 제 방으로 올라갔다. 어디 괜찮은 자리가 없을까 안을 뒤지다가 옷장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 이 방범 삼엄한 집에 도둑이 들 리는 없고, 저만 까먹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제 옷장에 저만 아는 자리에 숨겨 놓았는데 왜 제 것 같지가 않은 건지. 이렇게 큰돈을 받았는데도 왜 기쁘지가 않은 건지. 윤조는 자신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옷장 문을 닫는 윤조의 눈꼬리가 무겁게 내려갔다.
*
밤이 되자 정한이 돌아왔다. 윤조는 비서의 방문을 이야기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다가 그만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내일 출근은 좀 이를 거야. 굳이 배웅 안 나와도 돼.”
“네.”
정한의 입에서 조금이라도 딴소리가 나올까 싶어 윤조는 계속해서 긴장한 상태였다. 말을 길게 잇고 싶지 않아 짧게 대답한다는 것이 그만, 평소답지 않게 딱딱하게 답하고 말았다.
“…….”
나오지 말라면 더 나올 집사가 순순히 알았다 대답하는 게 이상해 보였는지 정한이 제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말고 윤조를 향해 성큼 다가왔다. 그의 손이 가슴을 빠르게 훑어 내렸다.
“아…!”
“내가 괴롭히고 간 서 집사 맞네.”
“그럼 제가 아니면 누구예요?”
“정신 빠져 있잖아. 무슨 일 있어? 또 사고 쳤어?”
“사고 안 쳤어요….”
“그럼.”
“아무 일도 없어요.”
한 번만 더 캐물었다면 말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한은 깊이 묻지 않고 넘어가주었다. 윤조는 내심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이게 무어라고 말하지 못하나 싶어 홀로 답답했다.
“배웅 나갈게요.”
“마음대로 해.”
윤조는 제 앞에서 닫힌 문을 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말을 해야 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밤이 깊어지고도 잠들지 못한 윤조는 결국 거의 잠을 자지 못한 채로 정한을 배웅했다.
“어제부터 상태가 왜 이래?”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윤조를 보자마자 정한이 한 소리 했다. 윤조는 어설피 웃으며 인사를 하느라 흘러내린 앞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
수면 부족으로 뻣뻣한 눈을 깜박이며 정한을 보았다. 깔끔하게 넘긴 머리. 드러난 반듯한 이마. 이마에서부터 코끝까지 이어진 단단한 생김새는 한때나마 오메가로 착각한 것이 민망할 정도로 알파다운 모습이었다.
“아파?”
“아뇨.”
“어디 봐.”
겉옷을 걸고 있던 손으로 가방을 옮기며 정한이 윤조의 이마에 손을 올려 보았다. 환자를 돌보듯 얼굴을 가까이해 이곳저곳 살피던 정한이 딱히 병증을 찾아내지 못했는지 눈을 가늘게 뜨기만 했다.
“잠을… 못 잤어요.”
“왜. 밤새 책이라도 읽었어?”
“네….”
무얼 읽었냐는 정한의 물음에 윤조는 예전에 읽었던 책 이름을 입에 올렸다. 정한 역시 읽은 책이라 함께 계단을 내려가며 책 이야기를 했다. 정한은 꽤 인상 깊게 읽은 모양인지 말을 많이 했다. 윤조는 주인공 이름도 헷갈리는 참이라 그의 말에 맞장구만 겨우 칠 뿐이었다.
머지않아 나타난 현관문이 이리도 반가울 줄이야. 윤조는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 현관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깥 공기가 두 뺨을 두드리며 저택으로 달려 들어왔다. 정한은 윤조가 열어 둔 현관을 그대로 통과해 요원이 대기해 놓은 차로 단숨에 걸었다. 윤조는 잰걸음으로 정한의 뒤에 따라붙었다.
정한이 차에 올라타기 전 윤조를 돌아보았다. 윤조는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하려 허리를 숙이려다 제게 가까이 붙은 정한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말았다.
“미리 잠 좀 자 둬.”
속삭이듯 제게만 말을 남긴 정한의 몸이 멀어졌다. 윤조는 엉거주춤하게 허리를 굽힌 채로 인사말을 중얼거렸다. 이어 정한이 탄 차가 빠르게 저택을 벗어났다. 대문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윤조는 허리를 바로 폈다.
잠을 못 잔 탓일까. 볼이 홧홧했다. 윤조는 보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헛기침을 하고서 저택으로 발길을 돌렸다. 정한의 구두만큼이나 깨끗하게 닦인 윤조의 구두가 아침 볕에 반짝였다.
*
정한은 그 이후로도 꾸준히 윤조를 찾았다. 차츰 그의 일이 바빠진 탓에 매일 같은 치료는 하지 못했으나 어찌 되었든 관계는 이어 나갔다.
윤조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자신이 말을 했든 하지 않았든, 선택하는 건 정한이었으니 저는 가만히 있어도 되었다고. 구차한 핑계였다. 비서의 방문을 이야기하지 않은 죄는 오래지 않아 찾아왔다. 집사 된 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기에 이리 속을 끓게 된 것이다.
정한의 치료가 낮과 밤에 상관없이 일주일에 두 번 정도로 줄어들었을 때였다. 윤조는 이렇게 관계의 횟수가 줄어들다 어느 날 문득 정한이 자신을 찾지 않게 되었을 때 무슨 말로 그의 의사를 확인해야 할지 난감했다.
비서의 방문을 이야기할걸. 그랬다면 그에게 어떤 신호라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말도 하지 못하고, 언제 끝이 나는지 몰라 그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 한마디를 하지 못해서 이렇게 괴롭다니.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오늘은 기필코 물어야지.
하지만 다짐했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입술만 벙긋거릴 뿐, 정작 소리가 되지는 않았다. 목을 물어 페로몬을 감지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을 빼먹을 때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제게 ‘페로몬’이란 금기어가 생긴 듯했다.
이쯤 되니 윤조는 자신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 수밖에 없었다. 이건 확실히 이상한 거였다. 하지만 깊이 생각하자니 더욱 답답해지는 마음이라 제 마음을 파헤쳐 보고 싶진 않았다. 이 낯선 감정과 상황을 대비할 각오를 다지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어느 날 문득 그의 방에 더는 출입하지 못하게 되어도 괜찮아야 한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그의 방 천장 조각을 구경하지 못하게 되어도 괜찮아야 했다. 또 어느 날, 그의 페로몬마저 맡지 못해도 괜찮아야 한다고, 각오했다.
* * *
계절은 무르익어 수영장 표면에 낙엽이 보란 듯이 둥둥 떠다닌 때가 되었다. 이른 퇴근을 하였음에도 정한은 윤조를 찾지 않았다. 윤조는 버릇처럼 10시를 가리킨 시계를 바라보다, 미련하다 싶어 한숨을 폭 내쉬고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어썼다.
왜 안 찾지?
이제 끝난 걸까?
물어볼까?
끝났다고 하면 어쩌지?
어떡하면 좋을까.
그, 페로몬….
이제는 조절도 능숙한지 온 저택을 돌아다녀도 찾기 어려운 그 페로몬….
윤조는 저를 괴롭히는 일련의 생각을 집어치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속이 답답해졌다. 이불 때문인가 해서 이불을 걷어 내어도 속이 계속 더웠다.
“더워….”
열이 나나 싶어 이마에 손을 얹어 봤지만 이렇다 할 열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숨이 더울까. 윤조는 침대 위에서 뒤척대다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여름도 다 끝났는데 꼭 땡볕에 몇 시간이고 서 있는 기분이었다.
적막한 계단과 응접실, 주방, 또 복도를 지나 순식간에 테라스까지 나왔다. 조금 먼발치서 일렁거리는 수영장의 푸른 물이 보였다. 보름달이 고여 있는 빛나는 물. 그것이 저를 유일하게 살릴 구원처럼 보였다. 윤조는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풍덩!
바닥까지 발이 닿았는데도 시원해지지 않았다. 윤조는 발을 박차고 수면까지 헤엄쳤다.
“후우…!”
숨을 뱉고, 잔뜩 들이마신 뒤, 또 가라앉았다. 몇 차례 반복했지만, 속에서 들끓는 열은 식을 줄 몰랐다. 슬슬 지치는 느낌에 물가로 어기적어기적 헤엄쳤다. 여름 동안의 성과가 있기는 한 건지, 튜브가 없어도 빠져 죽을 위험에서는 벗어난 듯했다.
“하아… 하아….”
풀 사이드에 걸터앉아 호흡을 가다듬고 있자니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저택을 둘러싼 방풍림도 그에 따라 몸을 떨어 대었다. 곳곳에 배치되어 있을 보안 요원들의 외투도 이 바람을 견딜 두께일 테다.
“하아….”
꼭 혼자서 시간을 역행하는 듯 윤조의 속은 계속해서 더워졌다. 얼핏 제 몸에서 수증기가 솟아나는 듯도 했다.
물살에 흩어지는 달빛을 보며 윤조는 생각에 잠겼다. 최근 지나치게 속에 담아두는 말과 생각이 많은 탓일까. 어울리지도 않게 애를 끓고 있으니 마음에도 열이 나는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이유가 없었다.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고 다시금 물로 뛰어들었을 때였다. 미약한 소음이 윤조의 신경을 잡아끌었다. 채 깊이 가라앉기 전 돌아본 곳에 정한이 서 있었다.
“어디 갔나 했네.”
“찾으셨어요?”
윤조는 풀 사이드에 팔을 얹고 물속에 잠긴 발은 가볍게 헤엄치듯 교차했다. 그늘져 있던 정한의 얼굴이 그가 다가오면서 밝게 드러났다. 출근 때와는 다르게 평소의 자연스러운 차림새와 머리였다.
윤조에게는 지금과 같은 정한이 익숙했다. 그런데 마음에 담고 있는 열 때문인지 그가 반갑지 않았다. 미리 잠을 자 두라든지, 오늘은 늦으니 먼저 자라고 말해주는 출근하는 정한이 더 좋았다. 이렇게 모호하기만 한 정한은, 정말로….
“왜 미운 얼굴이야?”
“제가 그래요?”
“어.”
“…더워서 그런가 봐요.”
“지금 이 날씨가 덥다고?”
“왜 이렇게 더운지 모르겠어요.”
정한이 의심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윤조는 저를 물속에서 건져내는 정한의 손에 이끌려 풀 사이드에 퍼질러 앉았다.
“좀 봐야겠어. 일어나 봐.”
일어나고 싶었지만 그럴 기력이 없었다. 보다 못했는지 정한이 바닥에 무릎을 대었다. 윤조는 고개를 들어 정한과 시선을 마주했다. 앞으로 기울어지는 정한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제 속을 들여다볼 것 같았다.
윤조는 알고 싶었다. 왜 이리도 더운지. 정한이 제게 명쾌한 해답을 내어줄 거라 기대했다. 그래서 그가 제게 가까이 다가왔을 때도 저지하지 않았다. 환자의 병증을 찾을 때처럼 그저 저를 살필 줄로만 알았다. 한데 정한은 이 모든 예상을 뒤엎고 윤조의 고개를 당겨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조금도 예상치 못한 정한의 행동에 윤조는 당황했다. 무심코 그를 밀어내려다 더욱 세게 물리고 말았다. 정한의 완치를 두려워했던 윤조는 의식적으로 페로몬을 감추고 다녔는데, 이렇게 목이 물리면 어쩔 수가 없었다. 젖은 살결 위로 정한의 숨이 닿았다. 윤조는 그곳만 타는 듯 뜨거운 기분에 정한이 물러나자마자 손으로 매만졌다.
“힛싸 온 것 같은데?”
의심할 여지없는 표정으로 정한이 말했다. 윤조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정한을 보았다. 제 몸에서 떨어진 물이 웅덩이를 그리듯 고여 정한의 무릎을 적신 게 보였지만 몸을 물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사장님, 제 페로몬….”
“내가 말 안 했나?”
“제 페로몬, 느껴지세요?”
“응. 좀 됐는데?”
“왜…, 말씀 안 하셨어요?”
“그게 중요해?”
“…중요, 하죠.”
“별게 다. 중요한 건 따로 있어. 서 집사. 힛싸 왔다고.”
“저요…? 그럴 리가요. 저 열 달에 한 번 와요.”
“그간 먹어 둔 게 좀 많아야지. 일찍 온 거 아냐?”
정한의 말은 스위치처럼 윤조를 반응하게 했다. 윤조는 제 팔을 감싸 안으며 정한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흥미로운 기색이 번져 있었다.
“후… 저 그럼 어떡해요? 약국, 닫았을 것 같은데.”
예고 없이 찾아온 히트 사이클에 윤조는 당황스러웠다.
“그냥 푹 자. 자고 나면 괜찮을 거야.”
수면제를 주겠다는 뜻일까.
윤조는 문득 일전에 제게 수면제보다 오르가슴을 추천했던 정한의 말이 생각나 섭섭해졌다. 물론 그가 저를 도와줄 의무는 없다. 자신이 오랫동안 그의 치료사를 자처했다고 해서, 그 역시 그래야 할 필요도 없는 거다. 그런데 섭섭한 건 섭섭한 거였다.
윤조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바닥을 딛고 일어났다. 자꾸만 못나게 입술이 튀어나오고 눈꼬리가 처지려고 했다. 정한을 보지 않은 채 그에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이만 주무세요, 시끄럽게 해 드려서 죄송해요.”
설마 우는 건 아니겠지?
윤조는 열에 들뜬 제 몸을 안으며 얼굴을 쓸어 보았다. 얼굴이 젖어 있어 우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시야가 흐린 걸 보면 섭섭해서 우는 듯도 한데, 제발 그것만 아니었으면 했다.
“서 집사.”
정한이 들어가려는 윤조를 붙잡아 세웠다. 윤조는 불을 삼킨 것처럼 속이 뜨거웠다. 숨을 띄엄띄엄 내쉬는 윤조의 앞으로 정한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서 집사, 나 보여?”
“네… 보여요. 사장님… 이잖아요.”
“그걸 묻는 게 아니야.”
정한의 얼굴이 빗물에 젖은 것처럼 얼룩져 보였다. 더 심해지기 전에 어서, 잠이나 자야지. 윤조는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팔을 붙든 정한의 손을 떼어 내려고 했다. 하지만 마음과는 반대로 오히려 그에게 더욱 붙들리기만 했다.
왜 이렇게 마음대로 되는 게 없을까.
“이거 좀….”
놔 달라고 말하고 싶은데 혀가 붙었는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윤조는 제 몸을 감싸는 체온에 기대어 벅찬 숨을 들이마셨다.
“더워….”
“더운 사람이 이렇게 떨어?”
떨고 있었던가.
윤조는 제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제 속에서 피어난 불씨가 온몸으로 번져 날뛰는 것만 알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타죽을 것 같아 다시금 물에 뛰어들고 싶어졌다. 윤조는 저를 끌어안은 정한을 밀어내려 팔을 허우적거렸다. 그러면 그럴수록 도리어 붙들리기만 했다.
“하… 저…, 저 좀, 던져주세요.”
사장님, 저 좀….
허공에 몸이 들리는 듯해 정한의 어깨를 붙들고서 부탁했지만, 그는 제 말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풀벌레 소리가 계속 이는 것으로 보아 아직 밖인 듯한데, 도대체 정한은 어쩌려는 걸까. 윤조는 제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 정한이 미웠다. 그렇지 않아도 속이 답답해 죽겠는데. 그가 이렇게 버티고 있으니 원망까지 들었다.
“사장니임… 나… 진짜 더워….”
새파랗게 질린 입술도 모르고 윤조는 덥다고 주장했다. 더는 윤조의 말을 들어주기 싫다는 듯 정한이 제 페로몬을 내어 윤조를 눌렀다. 발정 난 오메가가 가장 반길 알파의 페로몬을.
“흐으…!”
정한의 페로몬으로 시야가 조금 밝아졌다. 윤조는 애원하듯 그에게 페로몬을 갈구했다. 정한은 윤조의 주문대로 페로몬을 조금 더 내어주었으나 윤조가 원하는 만큼은 주지 않았다. 그것참 야속하다고 생각하며 윤조는 몸부림을 쳤다.
“가만히 있어.”
“좀… 안 되나…?”
“말을 똑바로 해.”
“잘, 하고 있는데…. 잘 알아, 들… 후으… 사장님….”
“왜.”
“…주세요.”
페로몬을 주지도 않고, 수영장에 던져주지도 않는 정한이 미웠다. 윤조는 정한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으면서 그를 흘겨보았다. 이런 윤조를 아랑곳하지 않고 정한은 어딘가로 계속 향했다.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걸음을 멈춰 선 정한이 훌쩍 윤조를 내려놓았다. 그곳이 차가운 물이 있는 수영장이 아니라 윤조는 계속해서 정한의 힘을 벗어나려 반항했다.
“있으라 했어.”
“수영장….”
“달라며.”
“…안 주면서….”
“그러게 누가 멋대로 젖으래!”
이를 악문 듯한 정한의 말끝을 쫓듯 윤조는 눈을 굴렸다. 익숙한 시야였다. 늘 앉던 자리보다는 오른편인, 정한이 자주 기대어 앉는 선베드. 정한은 그곳에 자신을 둔 모양이다.
“찢어버릴 수도 없고.”
윤조의 몸에 찰싹 달라붙은 잠옷을 벗기던 정한이 기어이 역정을 내었다. 윤조는 제 밑에서 끙끙대는 정한이 우스워 홀로 웃음을 흘렸다.
“일단 이거 덮고 있어.”
정한이 제 윗옷을 벗어 상체를 덮어주었다. 윤조는 더워 죽겠는데 뭘 옷을 덮어주나 싶어 치워 내려다가 손목이 꽉 붙들려서 얌전히 있기로 했다.
“욕 나오네, 진짜. 앞으로 집에서 바지 입지 마.”
그럼 뭐 입고 다녀요?
떠오르는 말을 묻지 않고 윤조는 허공에 흩어진 정한의 페로몬을 맡으려 개처럼 킁킁거렸다. 그사이 겨우 윤조의 하의를 벗겨낸 정한은 엉덩이가 들리도록 윤조의 두 다리를 들어 옆으로 벌렸다. 그렇게 달라고 할 때는 주지 않던 페로몬이 넘실거리며 윤조의 피부와 호흡기로 쏟아졌다. 윤조는 입을 크게 벌리며 허공을 베어 먹을 듯 정한을 삼켰다.
“하아… 흐….”
“좋아?”
“으응…, 좋… 아.”
정한의 낮은 웃음소리가 났다. 윤조는 저를 내리누르는 힘이 그의 악력이 아닌 페로몬이었으면 했다.
“하윽…!”
하지만 곧 정한의 뜨거운 살이 철퍽거리며 들러붙었을 때, 윤조는 마음을 바꾸었다. 이 또한 원한다고. 윤조는 순식간에 제 배를 가르고 들어온 정한의 뜨거운 살덩이에 눈을 질끈 감았다. 감질나게 드나들던 낮의 손가락 장난이나, 자정을 넘지 않는 최근의 가벼운 섹스와는 강도부터 달랐다. 미쳐 있었다고 해도 좋았을 한때처럼 정한이 저를 압도했다. 어찌나 반가운지 절로 눈물이 고였다.
“아, 아윽! 으, 흣!”
연이어 밀어닥친 정한의 힘에 밀려 윤조는 자꾸만 선베드 위로 올라갔다. 정한이 팔을 이끌어 선베드의 가장자리 위로 손을 놓아주었다. 윤조는 그곳을 꽉 붙들고 제 몸을 고정했다.
“아아…! 읏! 흐… 후으… 더, 흣….”
정한이 밀어내면 붙이고 그가 붙이면 밀어내었다. 부딪치는 힘이 어찌나 센지 선베드에 등이 닿을 때마다 격통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따위 고통쯤이야, 현재 윤조에게는 또 다른 흥분일 뿐이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차라리 그가 속을 끄집어내어 손으로 주물러주었으면 했다. 꼬집고 주먹으로 치고, 밟아도 좋을 듯했다. 윤조는 이보다 더 격렬한 자극을 바랐다. 괴롭힘에 가까운.
“더요…, 더….”
“더?”
“응…, 흣. 더, 더 세게…, 아아!!”
윤조는 등 뒤로 퍼지는 싸한 아픔과 발정으로 요동치는 안이 쑤셔지는 쾌락에 눈을 질끈 감았다. 바랐던 만큼은 아니어도 그에 근접한 충격이 밀려왔다.
“흐윽….”
어쩌지.
“흐… 좋아….”
눈물이 뚝뚝 흘렀다. 알파를 통해 히트 사이클을 보내는 일이, 이리도 좋을 줄이야. 이렇게 길이 들어버렸는데 다음 사이클은 어찌할까. 당장 섭섭해질 일도 많은데, 히트 사이클마다 정한을 아쉬워해야 할 걸 생각하니 또 울적해졌다.
“흐, 읍….”
이제는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보이는 정한의 얼굴이 전에 없이 매서워 보여, 그것 또한 서러웠다. 윤조는 가슴을 움찔거리며 정한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을 마주하다가는 제 마음에 고인 뜨겁고 질척거리는 말이 쏟아질 것 같았다.
“누가 고개 돌리래.”
윤조는 제 턱을 붙잡아 돌리는 정한과 눈을 마주한 순간 크게 눈을 깜박였다. 고여 있던 눈물이 눈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내가 그렇게 가르쳤나?”
“흐읍….”
“그래? 대답해 봐, 서 집사.”
윤조는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젖은 머리칼이 허공에 물을 흩뿌렸다.
“날 봐야지.”
윤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 시야에 정한을 가두었다. 그가 저를 어떤 식으로 흔들든 간에 그가 제게 맺혀 있어야 했다.
“하아…, 흐….”
침대 한정으로 정한은 윤조가 제게서 시선을 돌리는 걸 싫어했다. 흥분으로 턱이 들려 시야에서 벗어나면 기어코 머리를 잡아당겨 자신을 보게 했다. 눈을 맞춘 채 사정하는 걸 가장 좋아했고, 과격한 정사로 윤조가 우는 건 더 좋아했다.
“아으으…. 읏…!”
“서 집사…. 고개 들어.”
“어, 흣…! 으윽… 사장, 님….”
윤조는 나름대로 정한에 대해 많이 안다 생각했다. 한데 그는 자신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오로지 그를 통해서 알게 된 좋아하는 것들이, 윤조에게는 꽤 많았다.
뜨거운 혀가 눈물을 핥아 오르다 눈꼬리를 쪽 빨아 당길 때 느끼는 짜릿함. 큰 손이 몸을 쓸 때 느끼는 저릿함. 배 속에 그가 빠듯하게 채워질 때의 고양감. 입술의 부드러움. 까만 눈동자에 맺힌 제 하얀 몸. 귓가로 퍼지는 습한 숨. 그리고 그 모든 하나하나에 깃든 페로몬까지.
이전에는 몰랐었던 감각을 그가 죄 일깨워주었다. 모두 그를 치료하면서 시작되었다. 그의 페로몬을 느끼게 된 순간에는 강렬해졌고, 그가 완전하게 되었을 때는 이 강렬한 향을 잃고 싶지 않아 조급해졌다.
“사장님, 때문이에요….”
버릇처럼 나와버리는 눈물은 물론, 이렇게 몸이 때에 맞지 않게 달아오른 것, 그의 페로몬에 집착하게 된 것, 저답지 않게 마음에 말을 담아 둔 것, 못나게도 서럽다고 생각하는 것, 죄 정한의 탓이었다.
“사장님이 저, 이렇게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흐읍… 저 그렇게, 무섭게 보지 마세요….”
“기꺼이, 봉사, 해주고, 있, 는데…, 누구보고, 후우… 무섭다는 거야.”
봉사라면, 그가 기꺼이 제 히트 사이클에 응해주고 있다는 말일 게다. 그렇다면 무섭게 여겨지는 그의 표정은 제 마음이 만들어낸 해석이라도 되는 걸까. 윤조는 더더욱 자신이 엉망으로 느껴져 정한이 미워졌다.
“사장님 때문이야….”
“입 좀 다물지?”
울음이 났다. 그러면서도 사정없이 저를 쑤시고 드는 충격이 좋아 저택을 울리는 탄성도 내질렀다.
“아…! 으, 아!! 으윽!”
윤조는 엉덩이가 들린 채 정한에게 내리꽂혔다. 금방이라도 질구를 뚫고 들어올 듯 맹렬한 정한의 기세에 등줄기로 소름이 돋으면서도 좋아서 멈추게 하기 싫었다. 윤조는 정한의 어깨로 손을 올려 그를 제게 당겼다.
“아직도, 크읏, 내 탓이야?”
윤조는 정한의 목에 매달려 고개를 끄덕였다. 정한이 벌을 내리듯 윤조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윤조의 젖은 살결 위로 정한이 깊게 잇자국을 내며 페로몬을 종용했다. 쥐어짜듯 윤조의 모든 향을 착취한 정한이 윤조의 등을 일으키며 끌어안았다.
“흐읏…!”
전과는 달랐다. 윤조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정한이 평소에 사정하는 과정과 전혀 다른 움직임에 윤조는 덜컥 겁이 나 그에게 꼭 매달렸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던 모양인지 배 속이 터질 것처럼 아렸다. 윤조는 순식간에 제 안에서 부푼 정한의 성기를 느끼고 그에게 벗어나려 했지만, 이미 한 치도 도망갈 수 없을 만큼 꽉 붙들린 몸이었다.
“아아악!!!”
질구를 뚫고 들어온 정한의 성기가 배를 찢을 듯이 파고들었다. 엉덩이를 빼 도망가지 못하도록 알파 고환도 박혀 들었다. 이기적인 알파의 침입에 윤조는 속절없이 당했다.
“아… 으윽! 흣! 아악…!”
숨이 넘어가도록 소리를 지르며 정한의 등을 손톱으로 긁어 대었다. 제 히트 사이클은 뒷전이 된 지 오래였다.
“아!! 흐윽…! 흐… 읏! 흐…, 아아!”
완전하게 자리를 튼 정한이 천천히 몸을 쳐올렸다. 윤조는 정한이 미쳤나 싶어 그의 머리를 붙들고 잡아 뜯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몸에서 미끄러질 때마다 깊이 처박히는 통에 꼼짝없이 매달려 있어야 했다.
“하윽… 사장니임… 아파요…. 흐으, 아파….”
“입 다물라 했지.”
괴롭힘을 바랐지만, 이런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서러움과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윤조는 기어이 엉엉 울었다.
처음에는 그렇게도 다정하게 풀어주더니, 이제는 아프다는데 입이나 다물라고 하고. 어엉. 서러워서 살 수가 있나.
윤조는 자신이 뭐라 떠드는지도 모르고 울기 바빴다. 그런 윤조를 올려다본 정한이 윤조의 젖은 머리를 빗기듯이 쓸어 넘기다 끝을 힘주어 틀어잡았다.
“으읏….”
“입.”
경고성 짙은 정한의 음성에 윤조는 울음을 그치고 정한을 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보통 때와 달리 기름처럼 번들거려 보였다. 그 모습이 짐짓 낯설면서도 그이기도 한 알파의 진짜 얼굴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윤조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정한의 눈짓에다 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만 울음이 끅끅 넘어와 가슴이 움찔거렸다.
“저 새끼들이 다 듣잖아.”
“…저 새끼들이 누군데요?”
아주 뒤늦게서야 윤조는 자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인지했다. 이 근방에 24시간 배치되어 있을 보안 요원들이 속속들이 떠올랐다. 뜨거운 열이 얼굴을 덮쳤다.
“좀 더 아플 거야. 그래도 견디면 베타 섹스는 시시해질걸.”
제 민망한 주의를 끌기 위한 배려일까, 그의 욕심일까. 윤조는 그 어느 것도 확신하기 어려웠다. 저 역시 원하는 것 같기도 하면서, 두렵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정한은 할 것이고, 그에게 붙들린 저는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씹을 거 줄까?”
입에 주먹이라도 밀어 넣을 것 같던 정한은 주먹 대신 제 혀를 물려주었다. 윤조는 정한의 혀를 빨고, 이따금 그가 크게 움직여 아플 때면 깨물기도 하면서 그의 노팅이 끝나길 기다렸다.
“사장님….”
키스에 정신이 팔릴라치면 정한이 윤조의 몸을 들었다가 슬며시 놓았다. 그럴 때마다 윤조는 배 속이 뚫리는 느낌에 이를 갈다가 정한의 혀에 현혹되어 그의 침을 받아 삼켰다. 마약성이 있는 진통제처럼, 그의 침을 삼킬 때마다 저릿한 아픔이 가셨다.
“사….”
윤조가 무슨 말을 할지 아는 것처럼 정한이 입술을 꽉 덮고서 놓아주지 않았다. 윤조는 혀를 깔짝거리다가 정한의 등을 꼬집었다. 그제야 윤조의 입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정한의 혀가 입천장을 긁으며 빠져나갔다.
“도대체…, 언제, 싸시는 거예요…?”
“아파?”
“그럼… 아프지 않겠어요…? 그 커다란 게, 으읏… 들어왔는데. 하아… 으…, 왜 또. 아아….”
“견디라고 했잖아.”
정한이 웃으며 윤조의 젖은 머리를 넘겨주었다. 윤조는 정한의 웃는 얼굴을 보며 입술을 실룩거렸다. 그가 다시 제 혀를 내어주었다. 윤조는 정한에게 덥석 매달려 그가 제 젖꼭지를 빨 듯 집착적으로 빨았다.
“이제, 으음, …서 집사. 끝난 것 같은데.”
“조금만….”
“아프다 할 때는 언제고.”
윤조는 조금 더 정한에게 매달려 있었다. 이렇게 그를 먹으면 그가 제 일부가 되고, 그의 페로몬을 찾지 않아도 되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왜 웃어?”
“…그냥요.”
대략 2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정한은 윤조의 질에 침입해 있었다. 페로몬에 미쳐 있을 때는 생각지도 않았던 사실이 퍼뜩 떠올랐다. 당연한 사실을 왜 이제야 떠올린 건지, 윤조는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배불렀네, 서 집사.”
정한이 그의 정액을 머금은 윤조의 배를 살살 어루만졌다. 윤조는 다리를 벌리고 앉아 제 히트 사이클이 잠재워진 것 이외의 사실에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사장님.”
“어.”
“저…, 임신하면 어떡해요?”
“임신? 안 해 그런 거.”
조금의 가능성도 염려하지 않는 정한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지, 하며. 윤조는 정한의 손길을 따라 밑으로 줄줄 쏟아지는 그의 정액을 느끼며 제 처지를 뒤늦게 떠올렸다. 저 같은 열성 오메가. 그것도 수치가 밑바닥을 기는 오메가가 노팅 한 번으로 임신이 되기는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었다.
“…하긴, 어렵긴 하겠네요.”
윤조는 제 배에만 집중해 있는 정한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 같은데 평소보다도 냉정해 보이는 정한의 태도에 괜히 머쓱해졌다.
“서 집사. 힘을 줘야지.”
멍청히 앉은 윤조를 향해 정한이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윤조는 여느 때와 같이 정한의 정액을 뱉어내기 쉽도록 등을 뒤로 기대고 밑으로 힘을 주었다. 그가 제게 담뿍 싸질러 놓은 정액이 찔끔거리며 새어 나갔다.
“남은 건 손으로 긁어야겠다.”
“괜찮아요, 이 정도는.”
“배앓이해. 아프고 싶어?”
우리 서 집사는 어찌나 엄살이 심한지. 놀리듯 중얼거리며 정한이 윤조의 축축한 밑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윤조는 발가락을 움츠리며 그가 제 안에 뱉어 놓은 흔적을 손으로 빙빙 돌려가며 긁어내는 모습을 보았다.
페로몬 덩어리나 다름없는 정액이 계속해서 정한의 손끝에 달려 나왔다. 윤조는 정한이 덮어준 그의 옷을 매만지며 바람에 실려 풍겨 오는 향에 취하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에게 또 이런 수고를 하게 할 순 없었다.
“뭔데 그건.”
참다못해 옷으로 코를 틀어막고 있자 정한이 눈을 들어 물었다. 윤조는 온전한 진실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거짓도 아닌 사실을 전했다.
“추워서요….”
내벽을 긁던 정한의 손이 윤조의 말과 함께 바깥으로 완전히 빠져나갔다.
“끝났어요?”
“어. 옷 챙겨서 들어가.”
“여기 청소하고 갈게요, 사장님 먼저….”
“들어가라고 했어.”
단호한 정한의 말에 윤조는 코를 훌쩍이며 몸을 일으켰다. 정한이 찢어발기듯 벗겨 놓은 제 바지를 챙겨 들고 비틀거리는 걸음을 이었다.
저택으로 들어가기 전, 정리를 끝냈는지 몸을 일으킨 정한을 확인하고 윤조는 재빨리 문을 열었다. 빠르게 저택으로 들어서서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정한이 조금도 제 흔적을 남겨 놓지 않은 무미건조한 공기였다. 오늘과 같은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한, 당연히 마주해야 할 현실이기도 했다.
순간 몸 여기저기에 튀어 있고, 또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정한의 페로몬이 아깝게 느껴졌다. 아쉬운 마음에 제 몸을 끌어안으며 숨을 들이마시자 그가 뛰어들 듯 빨려 들어왔다. 온몸을 두드리고 지나간 히트 사이클의 고된 여파가 순식간에 가시는 듯했다.
이러니 중독이 될 수밖에. 생각이 날 수밖에. 아쉽고 섭섭할 수밖에. 윤조는 정한을 탓하며 제 방으로 향했다. 들끓던 열은 가라앉았지만, 윤조는 제 속에서 새로운 욕망이 불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