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오메가 테라피의 치료 과정 중 끝이자 꽃이라고 불리는 노팅도 했건만, 정한은 치료 종료를 알리지 않았다. 이미 윤조의 미미한 페로몬도 감지할 만큼 돌아온 게 분명한데도.
어쩌면 오늘. 어쩌면 내일. 정한이 이제 됐다고 할지도 모른다. 윤조는 정한의 입에서 ‘수고했다.’는 말이 언제쯤 나올지 몰라 발을 동동거렸다. 그렇게 노팅하면 파티 하자는 말을 달고 살았으면서 저부터 파티 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그야 볼일을 다 봤으니 상관없겠지만, 저는 달랐다. 정한에게 점점 윤조가 필요 없어진 것에 반해 윤조는 정한이 필요해졌다.
그놈의 페로몬.
윤조는 정한의 눈치를 보는 날이 길어질수록 억울함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씩씩거렸다.
이런 부작용은 왜 적어놓지 않은 거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몇 번이나 고쳐 읽은 서류를 살펴보았다. 어디를 보아도 상대 페로몬 중독에 관한 이야기는 단 한 줄도 나와 있지 않았다.
“아… 짜증 나.”
언제 치료가 끝날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에 더해, 정한의 페로몬이 끊어지지 않게 눈치 보는 일까지 생기니 그야말로 딱 죽을 맛이었다.
쿵. 쿵. 쿵.
책상에 이마를 박으며 윤조는 생각에 빠졌다. 어떻게 저 사장을 구슬릴 수 있을까. 가진 게 없어 이렇게 서러울 때가 있었나. 선베드에서 정한에게 노팅 당한 날처럼 윤조는 억울하게 중얼거렸다. 이건 다 권정한 탓이라고.
그렇게 끙끙 앓는 날이 며칠이었다. 윤조는 갈색 잎이 수북하게 떨어진 수영장 이곳저곳을 뜰채로 쑤시고 있었다. 퇴근하고 돌아온 정한이 어제처럼 아무 신호도 없이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버려 낙담한 마음이었다. 하루가 멀다고 쑤셔 댈 때는 언제고 이제 좀 괜찮다고 내버려 두다니. 슬슬 이가 갈리려고 할 때, 윤조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어딜 보는 거야. 위를 봐야지.”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자 정한이 2층 복도 끝 창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윤조는 손에 든 뜰채를 물 밖으로 꺼내고 가볍게 손을 털었다.
“시키실 일 있으세요?”
“곧 10신데.”
“…아, 아까 말씀 안 하셔서요.”
“서재로 와.”
“서재요?”
“어.”
대답을 끝낸 정한이 미련 없이 창을 닫아버렸다. 요즘 고민 중인 일 때문인지 정한의 태도가 살짝 불쾌하게 느껴졌다. 정말 제멋대로인 도련님이 따로 없었다.
윤조는 입술을 삐죽이며 하던 것을 마저 했다. 축축하게 젖은 낙엽을 한데 모아버리고 뜰채는 내일 빛이 잘 들어올 자리에 세워 놓았다.
근데 왜 서재에서 보자고 할까.
윤조는 자신이 기대한 일이 아닐 것 같은 예감에 어깨를 늘어트리고 터벅터벅 걸었다. 긴 복도와 긴 계단을 올라, 또다시 복도. 서재 앞에 선 윤조는 씻고 왔어야 했나 싶어 잠시 망설이다 그대로 문을 열기로 했다. 예상대로 매번 10시에 하는 일 때문은 아닌지 정한의 옷차림도 저와 비슷했다.
“왜 그러고 와?”
“네?”
“내가 왜 서 집사한테 10시에 보자고 했겠어.”
“서재로 오라고 하셔서요….”
“정답게 책이라도 읽을 줄 알았나?”
“지금이라도 씻고 올까요?”
“됐어. 그냥 와.”
기회를 날린 건 아닐까. 윤조는 급한 후회를 하며 정한이 앉은 데스크 앞으로 다가갔다.
“서 집사.”
“네.”
오늘이었나. 그놈의 끝이. 윤조는 정한의 입술을 뚫어지게 보았다. 저와는 달리 느긋하게 앉은 정한이 금방이라도 제게 끝을 알릴 것 같았다.
“사장님.”
쿵. 쿵. 쿵. 머리를 찧어대며 했던 생각이 두서없이 튀어나왔다.
“제가 사장님 고용해도 될까요?”
정한이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무슨 소리냐는 듯이 보았다. 윤조는 말을 더듬지 않도록 호흡을 주의하며 제 생각을 전달했다.
“사장님, 불감증 이제 괜찮아지셨다 들었거든요. 그럼 이제, 테라피 안 할 거잖아요.”
“누가 그래?”
“지금 그 말씀 하시려고 저 부른 거 아니세요? 노팅까지 했으면 볼 장 다 본 거잖아요. 그렇죠?”
“이론상 그렇긴 하지.”
“네. 그래서 제가 생각해 봤거든요.”
“뭘.”
“이제 사장님이랑 안 하게 될 건데, 전 사장님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정한이 턱을 괴며 윤조를 응시했다. 윤조는 정한의 시선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 어려웠다. 비틀어지듯 올라가는 한쪽 입꼬리는 비웃음이라도 되는 걸까. 윤조는 마음이 졸아들었다.
“그래서. 날 고용하겠다…?”
“…네.”
“날 지금 남창으로 만드는 건가?”
“제가 남창이었어요?”
“의사였지.”
“그러니까, 제가 그랬듯 사장님도 제 의사 해주세요. 저 아무래도 사장님 페로몬에 중독된 것 같아요. 말했죠? 다 사장님 때문이에요.”
“중독이라…. 그건 끊어야 하는 건데?”
“좀 즐기면서 살면 안 돼요?”
어이가 없는지 정한이 웃음을 보였다. 윤조는 혀가 바짝 마르는 기분에 침도 삼키지 못하고 정한을 빤히 보았다. 가슴이 기이할 정도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
“얼마나 줄 건데?”
미친 소리 말고 꺼져.
집사 따위가 지금 누굴 고용하겠다고?
온갖 모진 말을 각오하고 있던 윤조는 제게 협상의 의지를 보이는 정한을 놀란 눈으로 보았다. 그가 대답을 재촉하듯 데스크를 살짝 두드렸다. 윤조의 어깨가 가볍게 떨렸다.
“많이는 못 드려요. 제가 아직 복권에 당첨되지 않아서요.”
“근데 날 고용하겠다고?”
“수고비 받았어요. 회장님한테. 잘했다구요.”
“앙큼하게 뒤에서 아버지랑 거래하고 있었어? 너 아버지 사람이야?”
“아니요. 그냥 주셨어요. 그래서 감사히 받았어요. 근데 그거 저 못 쓸 것 같아요. 사장님 고용해야 하거든요.”
“…….”
“저 그거 사장님한테 다 쓸 만큼의 용의는 있어요.”
정한의 표정은 여전히 뜻을 읽을 수 없었다. 윤조는 숨도 쉬지 못하고 저를 빤히 보는 정한의 시선을 받아 내었다.
“…….”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윤조는 슬슬 현실을 인정하고 물러나려 했다. 정한이 몸을 앞으로 기울여 금방이라도 무어라 말할 것 같은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면 먼저 포기했을 것이다.
“알았어.”
“…네?”
“고용해.”
쿵. 쿵. 쿵. 이마를 찧는 것도 아닌데 큰 소리가 귀를 울렸다. 그것이 제 놀란 가슴이 뛰는 소리라는 걸 윤조는 정한이 저를 두고 서재를 나선 이후에야 알았다.
* * *
다음 날 저녁 10시. 정한이 찾아왔다. 윤조는 저처럼 가운을 입고 나타난 정한을 올려다보고 히죽 웃었다. 무릎 위로 껑충 올라가 있는 가운 차림이 유난히도 어울리지 않았다.
“왜 이렇게 작은 걸 입고 오셨어요?”
“어차피 벗을 건데 그냥 올 걸 그랬나 봐?”
정한이 허리끈을 풀고 벗은 가운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윤조는 제 책상 의자에 정확하게 걸쳐진 가운을 보고 감탄했다.
“농구 잘하시죠?”
“글쎄. 근데 이런 잡담도 다 받아줘야 하나?”
“싫으세요? 그럼 이것도 돈으로 쳐 드릴까요?”
정한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윤조는 또렷하게 제게 감정을 보이는 정한의 얼굴을 살폈다. 그 시선마저도 정한은 불쾌해했다.
“뭘 그렇게 봐?”
“사장님이요.”
“누가 몰라서 물어?”
흔쾌히 고용을 승낙한 때와 달리 정한은 어딘가 짜증이 나 보였다. 그게 고스란히 보일 만큼. 윤조는 선명하게 내비치는 정한의 감정을 흥미롭게 보았다.
“사장님, 표정 되게 많아지신 거 아세요?”
“표정 없다는 소린 들어 본 적 없는데.”
“그래요? 그럼 제가 뭘 몰랐나 보네요. 전 사장님한테도 표정이 있는 걸 늦게 발견했거든요. 아, 지금 저 엄청 노려보신다.”
정한은 시끄럽다는 듯 윤조의 팔을 잡아끌어 침대에 던졌다. 윤조는 제 좁은 침대에서 정한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오는 게 마치 꿈처럼 믿기지 않았다.
“근데요.”
“말 진짜 많네.”
“이것만 말하면 안 돼요?”
“해.”
윤조는 정한이 제 잠옷 바지를 잡아 벗기는 걸 보며 물었다.
“치료는 끝난 거예요?”
“글쎄. 언제 또 재발할지 몰라서. 잠정적으로는 휴지 기간이겠네.”
“아… 그게 재발하는 거였어요? 그럼, 그때도 제가 치료해 드릴게요.”
정한이 웃으며 윤조의 상의로 손을 가져갔다. 윤조는 제 배를 슬쩍 긁고 들어온 정한의 손가락에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든지. 서 집사는 여기서 평생 살겠다고 했으니까.”
“네. 평생 살 작정이에요. 사장님이 저 자르지 않는 한.”
“잘 보여야겠네.”
“그래야겠죠? 안 그래도 요즘 좀 까불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제 나름대로 사장님이랑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하나 봐요.”
“너 말고. 내가.”
“사장님이요? 왜요?”
윤조는 정한의 손짓에 따라 팔을 들었다. 상의가 쑥 위로 당겨지며 정한이 잠시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잠깐 사이에 대답해준 것도 아니면서 그는 가슴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며 제 할 일만 하려고 했다. 윤조는 다급히 제 궁금증을 뱉어내었다.
“저 대답 못 들었는데.”
“중독이라며.”
“맞아요.”
“너랑 수다 떨려고 온 거 아니야.”
“…죄송해요.”
윤조는 입술을 꼭 깨물고 더는 말하지 않겠다는 손짓을 해 보였다. 정한은 믿지 않는 얼굴로 윤조의 목덜미로 손을 넣어 당겨 올렸다. 턱이 들린 사이로 정한이 고개를 묻었다. 목이 물릴 것을 대비해 조금 긴장한 채로 따끔한 충격을 기다렸다. 하지만 정한은 그대로 입술을 내려가기만 했다. 그가 심술궂게 대하는 젖꼭지도 지나치고 숨결이 닿는 것만으로도 벌벌거리는 아랫배도 지나갔다.
윤조는 정한이 슬그머니 제게 풀어준 페로몬을 느끼며 그의 손에 벌어지는 제 다리 두 쪽을 보았다. 길쭉한 종아리가 옆으로 빠듯하게 벌어지다 다시 모이며 위로 들렸다.
윤조의 방은 정한의 방에 비하면 꽤 좁은 편이라 조명 하나의 밝기가 세게 느껴지는 편이었다. 몸에 난 옅은 점 따위도 선명하게 보일 적나라한 빛 아래에서 정한은 꽤 오랫동안 윤조의 다리 사이를 보았다.
“왜 그렇게 보세요…?”
“젖꼭지 색이랑 같네.”
“네?”
“여기.”
정한이 윤조의 밑을 어루만지며 답했다. 윤조는 제 마른 주름 위를 거침없이 쓰다듬는 엄지를 느끼고 다리를 움찔거렸다. 그에 정한의 페로몬이 조금 더 짙어졌다. 윤조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침대 시트를 가볍게 움켜쥐었다. 기대만으로도 밑이 바짝 조여들었다.
“근데 원래 털이 없는 건가?”
“아뇨. 삼촌이 오메가는 거추장스럽게 털 달고 다니면 안 된다고 어릴 때부터 관리하라 하셨어요.”
“검사도 받고 그랬겠네?”
“…어떻게 아셨어요?”
“여차하면 팔아버릴 심산이었나 본데?”
“네?”
“아무튼, 덕분에 내가 편하게 됐어.”
윤조는 삼촌 이야기에 정신이 쏠려 정한이 제 밑으로 고개를 묻은 것도 몰랐다. 촘촘한 주름 사이, 스미듯 젖어 든 그곳으로 정한의 뜨거운 혀가 닿았을 때야 사태를 파악했다.
어….
어?
너무 놀란 탓인지 말도 나오지 않았다. 윤조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손가락만큼이나 자극적으로 저를 더듬는 움직임에 빠져들었다.
“아아….”
고작 세 치 혀일 뿐인데, 왜 이리 뜨겁고 진득하니 좋은 걸까. 윤조는 정한의 머리칼로 손을 뻗어 매만졌다. 그를 고용했으니 이 정도 무례는 저질러도 되리라 생각했다. 그 역시 머리를 당겨 제 성기를 목구멍에 쑤셔 박아대지 않았던가.
“으응….”
윤조는 고개를 뒤척이며 정한의 머리를 안 듯이 붙잡은 채 제 밑으로 힘껏 당겼다가 놓았다가 반복했다. 진정하라는 듯 정한이 윤조의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다독였지만, 이 뭉근하고 진득한 감촉이 어찌나 좋은지 절로 엉덩이도 들썩이게 되었다.
“아… 음… 으응….”
오므라든 발가락에 침대 시트가 이리저리 집혀 당겨졌다. 윤조는 다급하게 정한을 바라보았다. 이 좋은 느낌은 삽입을 갈구하게 했다.
“사장님….”
정한이 눈을 들어 윤조를 보았다. 뻔히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알면서도 그는 모른 척 계속해서 혀를 움직이기만 했다.
“으응… 사장, 님….”
윤조는 정한에게 할 말을 잊고 잠시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정한이 속살을 벌리고 들어와 점액을 삼켜대자 늘어진 성기에 빳빳하게 힘이 들어갔다. 그가 제 주름에 입을 맞추듯 입술을 대고 빨아들인 순간에는 마음과 달리 그만하라는 말이 절로 터져 나왔다.
“정말 그만해?”
말은 그만하라면서 고개는 세차게 좌우로 흔들어 대었다. 정한의 웃음이 느껴졌다. 윤조는 저도 어쩌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젖은 입가를 닦으며 나타난 정한이 입을 맞추었을 때는 이것을 원했고, 그가 제 젖꼭지를 빨 때는 또 그것을 원했다.
“아…!”
실컷 방심하도록 유도한 정한이 배신하듯 순식간에 밑을 찔러 들어왔다. 윤조는 고개를 젖히며 시트를 그러쥐었다.
“어딜 봐. 나 봐야지.”
헤매던 시선이 가로채였다. 윤조는 정한에게 머리칼이 붙들린 채, 채 언어가 되지 못한 낱말을 흘리며 흔들렸다. 정한은 윤조가 버거울 만큼 페로몬을 쏟아주었고, 윤조는 그것을 다 집어삼키고 싶은 마음에 계속해서 매달렸다.
그렇게 매일을 매달리고, 또 매달리다 지쳐 나가떨어졌을 때. 윤조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단순히 그의 페로몬만 필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페로몬이야 그냥 달라고 하면 받을 수도 있었다. 자신은 정한을 치료하는 과정에 중독된 것이다. 저는 몰랐고, 제안을 받은 정한은 이미 알고 있는 중독. 윤조는 기가 차 정한에게 돈을 주려고 옷장을 열다 헛웃음을 지었다.
이걸 왜 이제 깨달았을까.
“꼭 이렇게 매번 돈을 줘야겠어?”
“왜요? 화대 받는 것 같아요?”
“내가 이 정도 몸값이라고는 생각 안 해.”
“더 드려야 해요?”
“내가 서 집사한테 돈 받아서 뭐 하겠어?”
“사탕이라도 사드세요.”
“됐어. 이 돈은 가지고 있다가, 다 끝나면 줘.”
“목돈을 좋아하시나 봐요?”
정한이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듯 윤조의 말을 무시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윤조는 아래만 겨우 가리고 있는 차림새로 정한을 올려다봤다. 그는 섹스를 노팅하려고 하는 사람이었다. 처음 고용된 날부터 오늘까지 그는 매일 제게 노팅했다. 마치 어서 떨어져 나가라고 작정한 사람처럼.
“용케 서 있네?”
첫날은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로 겨우 옷장을 열어 정한에게 돈을 내밀었다. 그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제 정액이 덕지덕지 묻은 지폐를 아무렇게나 움켜쥐고 방을 나섰다. 그러기를 몇 번. 오늘에 이르러서는 아예 말로 거부하고 나서는 통에 윤조는 다시 옷장을 닫았다.
“이제 좀 익숙해진 것 같아요.”
“그럴 리가.”
다가온 정한이 앞에 섰다. 그의 진한 페로몬이 온몸을 핥듯이 끈적하게 들러붙는 듯했다. 윤조는 다시 열에 들떴다. 방금까지 그에게 안겼던 일이 거짓말 같았다.
“아직도 이렇게 떨면서.”
윤조는 정한의 한쪽 팔에 허리가 둘러 안겨 침대로 옮겨졌다. 장난으로 밀어버릴 줄 알았는데, 퍽 다정한 처사였다.
“어째, 이 중독 치료가 조금 도움이 되긴 해? 더 중독되는 건 아니고?”
“그러게요. 사장님, 복권 사 오세요….”
페로몬 중독인 줄 알았더니, 섹스 중독이었다. 그것도 정한과의 섹스. 윤조는 다른 누구도 떠올릴 수 없었다. 심지어 제 손이나 어떤 도구조차도.
이 단순한 사실을 깨닫는 충격이란. 문전 박대를 당했을 때만큼이나 캄캄한 구멍이 제 발밑에 생긴 듯했다. 윤조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헤어 나오기 힘든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 * *
권 회장이 준 수고비에서 정한에게 주어야 할 몫이 절반가량이 되었을 무렵, 윤조는 여전히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가장 큰 고민은 제 중독의 근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였다.
이래서야 가산을 탕진하고 다달이 들어오는 월급도 그에게 바치게 생겼다. 윤조는 이 저택의 유일한 말벗이자 제 울타리이기도 한 정한에게 상담을 청하기로 했다. 홀로 생각해서는 도저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오셨어요?”
“나날이 퀭해지네. 오늘은 쉴까?”
“…아, 그게.”
“이거 먼저 받아.”
퇴근하고 돌아온 정한이 품에서 어떤 상자를 꺼내어 윤조에게 내밀었다. 윤조는 우편물을 확인할 때처럼 빠르게 상자를 열어 포장을 벗겼다. 응접실 소파에 앉은 정한이 로봇처럼 일하는 윤조를 가만히 응시했다.
“서 집사.”
“네.”
“지금 무슨 생각해?”
“사장님께 드릴 말씀을 정리 중이었어요.”
“그래,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윤조는 그늘이 앉은 눈을 들어 정한을 보았다. 제 방 침대가 좁아서 종종 제 몸이 밖으로 튀어 나가거나 미끄러지곤 했는데, 그때마다 정한은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저를 끌어올려주었다. 그때처럼 이번 역시 저를 구해주리라. 윤조는 정한을 믿었다.
“사장님.”
“어.”
“저 페로몬 중독인 줄 알았는데요. 그게 아니었어요.”
“그럼?”
“저… 섹스 중독인가 봐요.”
정한은 대답 없이 빤히 윤조를 바라보았다. 윤조는 정한이 건네준 물건을 이리저리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제가 복권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나 봐요. 전 중독에 약한 사람이었어요.”
“복권이 뭐라고 중독까지 나와? 그거나 먹어.”
정한이 퉁명한 말투로 윤조의 손에 들린 물건을 가리켰다.
“이게 뭐예요?”
“서 집사 같은 열성 오메가가 나 같은 우성 알파의 페로몬 샤워를 받고 나면 쇼크를 일으킬 수 있어.”
“지금 제가 쇼크 상탠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사장님 냄새만 개처럼 맡고 다니고, 종일 사장님이랑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
“아아…. 그렇구나. 쇼크. 이게 쇼크 증상이었어요. 난 또…. 혹시나, 제가….”
“네가 뭐.”
윤조는 정한의 물음에 숨을 삼켰다. 저도 모르게 흘릴 뻔한 말에 놀라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중독이고 쇼크고 모두 해소할 방법이 보였지만, 정한을 좋아하게 된 거라면 그것참 해결 방법이 없어 보였다. 윤조는 깊이 안도했다. 그를 좋아해서 이렇게 미쳐 있는 게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실제로 윤조는 정한이 준 약을 먹은 뒤로 미칠 듯한 욕구가 줄어들었다. 여전히 정한의 냄새를 찾아 코를 킁킁거리기는 했지만, 시도 때도 없이 하던 섹스 생각은 현저히 줄었다. 그것만 해도 조금 살 것 같았다.
“약이 되게 신기하네요. 이것도… 비싼 거겠죠? 전에 먹은 약처럼?”
“효과가 좋아?”
“네. 요즘은 확실히 생각을 덜 해요.”
“수고비 다 까먹지 않아도 되겠네?”
“그건 저도 확신이 안 서요. 이제 돈이 요만큼만 남아서 살짝 쫄리거든요.”
“복권은 확인해 봤어?”
“그래서 말인데…, 사장님은 왜 꽝만 사 오세요?”
기가 찼는지 헛웃음을 지은 정한이 팔짱을 끼고 윤조를 향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윤조는 제 앞에 훌쩍 나타난 정한과 금방이라도 코끝이 닿을 것 같아 목에 힘을 주었다.
“서 집사가 사면 당첨될 것 같아?”
“어쩌면요. 사장님보다 확률이 있을 것 같아요.”
“나가고 싶어?”
“…저, 여기 오고 한 번도 밖에 못 나가 본 거 아시죠?”
“그래서 묻는 거 아냐. 나가고 싶냐고.”
“네. 나가고 싶어요. 나가서 시내 구경도 하고 싶고….”
“하루 휴가 줄까?”
“정말요? 근데 여기서 두베 시내까지 얼마나 걸려요? 제가 알기로는 차로 한 30분은 달려야 하는 거로 아는데.”
“맞아.”
“그럼, 택시를 불러야 할 것 같은데, 여기까지 올까요?”
“왕복으로 오가면 택시비 상당할 텐데? 수고비 거덜 나는 거 아냐?”
“제 월급이요, 사장님한테 있잖아요. 아님… 자전거 타고 다녀올까 해요.”
“오늘 안에 올 수 있겠어?”
“올 수야 있겠죠. 힘들겠지만….”
“사서 고생한다, 참. 날 고용해 보는 건 어때?”
“기사 해주시게요?”
“액수에 따라 안내도 가능해.”
어쩐지 정한에게 말려드는 느낌이 들었지만, 면허는 물론 차도 자전거도 없는 윤조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윤조는 미소를 머금은 정한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물었다.
“얼마면 돼요?”
* * *
주말, 정한이 쉬는 날에 맞춰 윤조는 저택을 나섰다. 뒤에 앉으라는 정한의 말에도 윤조는 조수석에 앉았다. 두베 시내를 안내해 달라는 수고비를 더 주었을 뿐인데 그가 제 집사 노릇을 하고 나서서 보안 요원들 보기가 창피했다.
“창 열어줘?”
“네.”
내내 차창에 붙어 있었더니 정한이 창을 열어주었다. 어렴풋이 그러고 있으니 진짜 개 같다는 말이 들렸지만, 윤조는 무시하고서 바람을 맞았다. 여기저기 가을을 입은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려 아름다웠다.
“뭐 하고 싶은데?”
“글쎄요. 일단 걷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아요.”
“어쩐 일로 먹는 게 뒷전이네.”
“그건 당연한 거구요. 그리고… 미술관 같은 데도 가고 싶어요.”
“집에 널린 게 작품인데? 지하실에서도 봤잖아. 굴러다니는 거.”
“그러니까 정돈된 걸 보고 싶어요. 알지는 못하지만….”
“설명해줄까?”
“다 아세요?”
“대충은.”
“대충이면 안 돼요. 전 교양을 쌓고 싶단 말이에요.”
“그게 한 번 본다고 되나?”
“자주 나오면 되죠.”
“가산을 탕진할 모양이네.”
“그래서 말인데, 이참에 면허를 딸까 해요. 명색이 집산데, 운전도 못 하는 건… 권 씨 집안 집사의 수치예요.”
정한이 권 씨 집안이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웃었다.
“그래 그럼 면허 따. 대신 나한테 배우고 어딜 가든 나랑 동행해야 해.”
“저 놀러 나올 때마다 따라오실 거예요?”
“어.”
뭘 들은 건가 싶어 윤조는 고개를 돌려 정한을 보았다. 혹여나 그가 오늘 외출을 불쾌하게 여긴 건가 싶어 찬찬히 관찰해 보니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핸들을 두드리는 손가락만 봐도 그렇다.
윤조는 목줄을 채우겠다던 정한의 말을 떠올리며, 그의 눈에 자신이 정말 똥강아지로 보이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하긴 자신이 생각해도 저 홀로 차를 몰고 두베 시내를 오갈 상상이 되지 않으니, 그가 보기에는 얼마나 불안할까. 딴에는 제 집사라고 걱정해주나 싶어 기분이 좋았다.
“두베에 이렇게 사람이 많았어요?”
저택 주변에서는 외부인 하나를 보기가 그렇게 어려웠는데, 두베 시내로 가까워지자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눈이 다 어지러웠다. 윤조는 미자르에서 두베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 조금도 변함없는 반응을 보이며 천천히 중심부로 향했다. 사람이 많은 탓에 차의 속도가 줄었지만, 그만큼 구경할 거리도 늘었다.
한 건물 앞에 이르러 정한이 차를 세웠다. 주차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제멋대로 세워 놓은 꼴이라 윤조는 그가 차에서 내리는 걸 보고서도 따라 내리지 않았다. 잠시 어디를 가겠거니 했다.
똑똑.
보닛을 빙 둘러서 온 정한이 윤조가 앉은 조수석 창을 두드렸다. 윤조는 내리라고 손짓하는 정한을 보고 안전띠를 풀었다. 어쩌자고 건물 입구에다 차를 세우는지 연유를 알 수 없었다.
“왜 여기다가….”
차에서 내리자 안에서 누군가 뛰어나왔다. 정한은 그와 몇 마디를 하고서 윤조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리 오라는 손짓이 또 이어졌다.
“여긴 어딘데요?”
“다른 건 몰라도 옥상은 쓸모 있는 곳.”
“네?”
“따라와 보면 알 거 아니야.”
거침없이 안으로 향한 정한을 따라 윤조는 걸음을 옮겼다. 정한을 발견하는 족족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 많아 윤조는 점점 정한의 등에 붙게 되었다.
“다 아는 사람이에요?”
“난 모르겠는데.”
“근데 왜 인사할까요?”
“반갑나 보지, 뭐.”
윤조는 제게도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에게 꾸벅꾸벅 허리를 숙였다. 정한이 뒷덜미를 붙잡아 당기지 않았다면 온종일 인사만 했을지도 모른다.
“반갑나 봐?”
“그건 아니에요.”
“그럼 반응하지 마.”
“…네.”
역에서처럼 게이트도 통과해 들어선 곳은 보통 장소가 아닌 듯했다. 윤조는 사람들이 저마다 목에 달랑거리며 무언가를 달고 다니는 공통점만 발견했을 뿐, 정한이 자신을 데리고 온 곳이 어디인지 조금도 추측할 수 없었다.
“타.”
총 열두 대인 엘리베이터. 개중 아무도 서지 않은 엘리베이터 앞에 정한과 섰다. 잠시 후, 기다리던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윤조는 정한과 나란히 올라탄 엘리베이터에서 넌지시 바깥을 보았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저렇게 많은데, 왜 여기는 대기는커녕 타지도 않는지 알 수 없었다.
“여기는 왜 안 탈까요?”
“안 타는 게 아니라. 못 타는 거야.”
“왜요?”
“우린 놀러 온 거잖아.”
“그럼 저분들은 뭐 하러 여기 왔는데요?”
“돈 벌러.”
“아아….”
알아들은 척 고개를 끄덕였지만, 손님보다 직원이 더 많은 경우가 떠오르지 않아 여전히 이 건물에 대한 정체는 모호했다. 생각에 빠지려던 윤조의 어깨를 정한이 가볍게 두드렸다. 윤조는 빠른 속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느끼며 정한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뒤를 가리켜 손짓했다.
“혹시 고소 공포증 있으면 지금이라도 말하고.”
그가 가리킨 뒤로 지면이 멀어지는 게 보였다. 윤조는 정한에게 말 대신 행동으로 대답을 보였다. 서둘러 다가선 엘리베이터 벽면에 이마를 대고 아래를 보았다. 이렇게 높은 곳에 오른 것은 처음이었다.
“다행히 없나 보네.”
“옥상에 간다고 했죠?”
“어.”
“혹시 여기가 두베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에요?”
“애석하게도, 그런 모양이야.”
알쏭달쏭한 정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엘리베이터가 멈추어 섰다. 윤조는 차가운 벽에서 이마를 떼고 정한을 따라 내렸다.
“옥상이라면서요?”
“옥상 맞잖아. 하늘 보면 몰라?”
윤조는 정한이 가리킨 하늘을 향해 눈동자만 올렸다가 곧장 내렸다. 그걸 몰라서 물은 게 아니었다.
“옥상에 왜 정원이 있어요?”
“그러게 말이야. 취향 한번 얄궂지?”
“얄궂긴요. 사치스럽기만 한걸요?”
옥상에 정원이 있을 수 있다니. 집사라는 직업의 존재를 알았을 때만큼이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협소한 제 세계가 한 발짝 넓어진 기분이었다.
“그래서 싫다는 건가?”
“아뇨? 전 사치가 좋아요. 제가 사장님 저택을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아시죠?”
“그게 사치인가?”
“그럼요. 사치의 결정체죠.”
윤조는 잘 가꾸어진 옥상 정원을 거닐며 감탄했다. 정한의 저택만큼이나 다양한 나무와 꽃이 정성스럽게 손질되어 있었다.
“집에도 있는 걸 뭘 그리 보고 있어? 이거나 봐.”
정한이 팔을 끌어 정원 밖으로 나섰다. 정원 밖은 윤조의 목까지 오는 유리 난간이 길게 이어져 있었는데 탁 트인 시야 너머로 도시 전체가 나타났다.
“와…!”
윤조는 저도 모르게 난간에 붙어 서려다 정한에게 붙들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발아래를 보았다. 빽빽하게 들어찬 건물과 차량, 또 사람들이 보였다. 마치 장난감처럼.
올려다볼 줄만 알았지, 이렇게 내려다볼 수 있는 건 몰랐다. 저택의 정원, 또 이곳 옥상 정원도 모두 훌륭했지만, 윤조는 제 발아래에 깔고 있는 두베의 풍경이 더 훌륭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꽤 볼만하지?”
정한에게는 꽤 볼만한 것이 제게는 평생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윤조는 시야에 닿는 모든 곳곳마다 제 세계가 확장되는 기분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장님.”
“어.”
“고마워요.”
“마음에 드나 보네.”
“네. 정말, 마음에 들어요.”
윤조는 제 옆에 선 정한을 바라보았다. 그에겐 발아래에 내리깐 풍경이 조금도 놀랄 것이 되지 못한 모양인지 관심도 없는 얼굴이었다. 윤조는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 넘기고 다시 아래를 보았다.
“이리 와봐.”
윤조는 제 팔을 툭 치고 난간을 따라 걷기 시작한 정한의 뒤를 따랐다. 건물의 한 모서리에 이르러 정한이 발을 멈춰 섰다.
“저쯤일걸?”
“저택이요?”
“어. 보여?”
“글쎄요….”
“잘 봐봐. 저기 있잖아.”
윤조는 눈을 가늘게 뜨는 것도 모자라 깨금발을 들어 목을 길게 뺐다. 하지만 도통 저택을 찾을 수 없었다. 정한이 저를 뒤에서 안아 들기까지 했는데도 찾지 못했다.
“내 손끝 잘 봐. 그대로 쭉 보는 거야.”
윤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정한의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그러자 눈에 익은 하얀 건물이 보였다.
“찾았어?”
“네, 저거 맞죠?”
“맞아.”
“여기서 보니 엄청 작아요. 밑에서 보면 한눈에 담기도 어려운데. 기둥이며 벽이며, 어느 하나 소홀한 곳 없이 예쁜 조각도 그저 하얀 덩어리로만 보여요.”
“그래, 멀리서 보면 단순한데 가까이서 보면 눈 돌릴 곳이 많지.”
어딘가 뜻을 내포한 듯한 정한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호기심을 끄는 건물을 발견했다.
“근데 저기 뒤에, 저 벽 같은 건 뭐예요?”
“어디.”
“저기요.”
저택과 떨어진 뒤편에 본 적 없는 거대한 벽이 늘어서 있었다. 울창한 숲 너머에 어떤 비밀이 있는 걸까. 윤조는 정한의 대답을 기대했다.
“아마 검문소일 거야. 메라크 쪽.”
“아… 검문소가 저렇게 커요?”
“일견 삼엄해 보이지만 별것 아냐. 두베역 뚫린 거 겪어 봤잖아.”
“그래도… 저렇게 벽을 세워 놓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래서 섭섭해?”
“그런 건 아니구….”
윤조는 고개를 돌려 정한을 내려다보았다. 빤히 저를 올려다보는 정한의 눈동자에 제 모습이 맺혀 있었다. 딱히 연상하려 한 건 아니었지만, 저를 감싸 안은 팔 힘과 익숙한 향을 느낀 순간 윤조는 뻣뻣하게 몸을 굳히고 말았다.
“…….”
굳은 윤조를 바닥에 내려준 정한이 머리칼을 흩트리고 물러났다. 윤조는 제 흐트러진 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리고 두베 구경을 이어 갔다.
공사 중인 두베역도 보고, 한석의 인력 사무소 위치도 파악하고, 정한이 일하는 병원도 알게 되었다. 역과 그리 멀지 않은 중앙 병원을 가리키기만 한 정한이었지만 윤조는 그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한 바퀴를 훌쩍 돌아 다시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출발인 듯했다. 윤조는 남은 두베 구경이 더욱 기대되었다. 하지만 막상 건물을 나와 내려다보았던 세상에 발을 디뎠을 때는 막막해졌다.
“날을 잘못 잡은 게 아닐까요?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걸어요?”
“대개가 이래. 일부러 이런 날 잡아서 온 거 아니야.”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건 아니었어요. 하도 저택에만 있었더니 낯설어서요.”
“미자르가 작긴 하지.”
“네. 두베에 비하면 엄청 작은 도시예요. 여기 사람들 다 합치면 미자르 사람들 될 정도로.”
“그렇게 작나?”
“사장님이 상상하는 것보다 작을 거예요.”
“알카이드만 한가?”
“알카이드가 얼마만 한지 모르겠지만, 아마 그보다 작을 거예요. 13구역에서 제일 작을걸요?”
“도시가 아니라 마을인 거 아냐?”
“아마도요. 제가 그 작은 우물에서 살았어요. 여기 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생각하자니 파란만장한 시간이었다. 뒷좌석에 앉아 죽기를 기다리던 남자와 이렇게 거리를 걷다니. 그때는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아!”
정한에게 그 이야기를 하려던 윤조는 행인에게 어깨가 치여 밀려났다. 순식간에 정한과의 사이가 벌어졌다. 정한이 키가 크지 않았다면 그를 잃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되게 작네. 미자르처럼.”
윤조는 헤매는 기색 없이 곧장 다가와 저를 끌어 옆에 둔 정한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말과는 달리 윤조는 행인들의 키와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저 그렇게 안 작아요. 다들 저랑 비슷하잖아요.”
“너 작아.”
“사장님에 비하면 작긴 하지만, 다른 분들도 저랑 비슷한걸요?”
“여기서 다른 사람이 무슨 상관이야. 너랑 나, 둘만 보면 작잖아.”
말이 길어져 봤자 작다는 소리만 더 들을 것 같아 윤조는 알았다고 넘겼다. 그랬더니 계속해서 작은 취급을 당했다. 조금이라도 멀어지려고 하면 바짝 당겨대고, 한눈을 팔았을 땐 머리통이 붙들려 정한을 가까이 마주 봐야 했다. 윤조는 또 때에 맞지 않게 침대 위를 떠올려 뻣뻣하게 굳었다.
“목줄 채울까?”
정한의 숨이 입술 위를 기었다. 윤조는 제게 한껏 몸을 숙인 정한을 올려다보며 겨우 숨통을 틔었다.
“…사장님 커서 금방 찾아요.”
“내가 널 못 찾을까 봐 그래.”
“제가 사장님 찾는다니까요?”
“전제가 틀렸어. 너로 시작하는 게 아니야, 나로 시작해야지. 내가 너 안 보이면….”
윤조는 제 머리통에 얹어진 정한의 손에 힘이 가해지는 걸 느꼈다. 구경하느라 들뜬 마음에 그에게 지나치게 말대꾸했다는 생각이 들어 윤조는 급히 반성했다.
“네, 잘 붙어 다닐게요.”
“잡아.”
윤조는 정한이 내민 손으로 시선을 내리고서 물었다.
“손을요?”
“지금은 목줄이 없으니까.”
“괜찮으시겠어요?”
“넌 안 괜찮은가 봐?”
“전 괜찮아요.”
좀 부끄럽긴 하지만.
윤조는 히죽 웃으며 정한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누군가의 손을 잡고 걸어 본 적이 있던가. 아주 어릴 때의 기억을 뒤져 보아도 없는 듯했다.
그 후로 윤조는 정한에게 잘 붙들려 다녔다. 원했던 복권도 제 손으로 샀고 가장 대기 줄이 긴 식당에 줄도 섰다. 수고비를 받은 만큼 정한은 불평 없이 윤조의 곁에 있어주었다. 마치 집사처럼.
겨우 들어온 식당에서도 정한의 보살핌을 받았다. 말 그대로 보살핌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정한이 모두 해주었다. 윤조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앉아, 그가 주문하고 제게 차려주는 모든 것을 지켜만 보았다.
“어떻게 그렇게 잘하세요?”
“평생 받아온 걸 흉내 낸 것뿐이야.”
“제가 기가 막히시겠네요.”
“기가 막히지. 어디서 이런 게 나타나서 내 마음에 들었나 싶어.”
정한이 웃음을 지으며 냅킨을 반듯하게 폈다. 윤조는 또 제 몸이 뻣뻣하게 굳는 듯했다. 조금도 야한 생각이 들 구석이 없는데 왜 이러나 싶었다. 그러다 이내 숨이 터지며 유난하게 한곳이 반응했다.
윤조는 무릎에 가지런히 올리고 있던 손을 들어 제 가슴께를 더듬었다. 두근두근. 낯설게 뛰는 가슴이 선명히 느껴졌다.
“이런 집사를 또 어디서 구하겠어? 운전 못해서 사장 혼자 출근하게 만들지, 시내 구경하겠다고 사장을 고용하질 않나. 신선해.”
푹.
정한이 포크로 찍어댄 이름 모를 채소처럼 윤조의 가슴도 그렇게 푹 찔렸다. 윤조는 숨을 멈춘 채 제 가슴에 퍼진 알싸한 고통을 빤히 살폈다. 페로몬 중독에서 섹스 중독에 이르기까지, 저를 괴롭혔던 모든 의문의 해답을 찾은 듯했다.
이미 한 번 생각했던 바였기에 그리 놀랍지는 않았으나 이토록 감정이 신체를 괴롭힐 만큼 강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윤조는 멈추었던 호흡을 천천히 터트리며 식사를 시작했다.
눈이 돌아갈 만큼 화려한 음식들이 차례로 테이블에 올랐다. 윤조는 정한이 잘라주고 또 추천해주는 음식을 그저 받아먹기만 했다. 조금도 음미할 수 없었다. 혀끝에 닿는 모든 음식에서 맛이라는 게 나질 않았다.
식사를 끝내고 나오자 해가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윤조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여전히 대기자가 늘어선 식당 앞에 섰다.
“뭘 그렇게 멍하니 서 있어?”
뒤이어 나온 정한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눈앞에 나타났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 정한에게 붙들렸다. 하마터면 행인의 발을 밟을 뻔했다.
“음식이 마음에 안 들었어?”
“아뇨, 맛있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못 먹어?”
“많이 먹었는데요?”
“내가 서 집사 배를 아는데?”
“원래, 이런 데서는 그래야 한다고 들었어요.”
“누가 그래?”
“누가 그랬어요. 기억은 안 나지만….”
정한이 의심스러운 얼굴로 윤조를 살폈다. 윤조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뻔뻔한 얼굴을 해 보이며 어서 미술관에 가자고 졸랐다. 그제야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는지 정한이 의심을 지우고 길을 안내했다.
“서 집사, 내 얘기 듣고 있어?”
주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도 감탄스럽던 호화로운 거리에 흥미를 잃었다. 우아한 사람들에게서도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눈앞의 비싸고 가치 있는 미술품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윤조의 눈을 잡아끄는 것은 오로지 정한뿐이었다.
“아까부터 계속 나만 보는데, 내 얼굴에 뭐 묻기라도 했나?”
“아뇨. 안 묻었는데요.”
“그럼. 왜 계속 보는 건데?”
다른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윤조는 제게 찾아온 이 어지럽고도 빨려드는 기분을 계속해서 즐기고 싶었다. 역시 저는 중독에 약한 인간이었다.
“내 설명이 재미없어?”
“그런가 봐요.”
“뭐?”
“사장님 얼굴이 제일 재밌어요.”
정한이 기가 찬 듯 웃었다. 그런데 기분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혼내기는커녕 오히려 보란 듯이 윤조에게 감상할 시간을 주었다.
관람 방향을 따라 흐르는 사람들 사이로 버티고 선 둘은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다. 정한의 키만큼 크고, 눈이 어지러울 정도의 화려한 색채의 그림은 두 사람의 시선을 조금도 끌지 못했다.
“이제 좀 만족해?”
“조금만 더요.”
정한이 팔짱을 끼며 윤조의 감상을 조금 더 기다려주었다. 그러고 한참을 감상한 뒤에야 윤조는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꾸만 웃음이 나서 버티고 있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재미있어?”
“네.”
“다른 게 눈에 들어오기는 해?”
“아뇨.”
“그럼 나가자.”
다른 것에는 관심이 가지 않아 그대로 미술관을 나왔다. 어느새 온통 하늘이 붉어져 있었다. 윤조는 제 마음처럼 발그레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방심했다간 금방이라도 풍선처럼 두둥실 뜰 것만 같았다.
“배는.”
“배는 왜요?”
“배고프지 않아? 아까 먹는 거 시원찮았잖아.”
“그러게요. 배가 하나도 안 고파요.”
“별일이네.”
정한의 말대로 별일이었다. 그가 좋다고 느낀 것뿐이었는데 배가 고프지 않았다. 해결 방법 없는 감정에 빠진 건데도 불구하고 자꾸 웃음이 나고 기분이 들떴다.
“이제 뭐 하고 싶은데?”
“집에 갈래요.”
“밤 되면 볼 거 더 많을 텐데. 이대로 가긴 아쉽지 않아?”
“또 오면 되죠.”
더 놀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은 쉬어야 할 때였다. 이 들뜬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라앉히고 싶었다. 이렇게 홀로 방방 뜨다가 그에게 말해버릴 것 같았다. 정한은 늘 제게 해답을 주는 사전 같은 사람이었으니 어떤 결론을 내려줄지도 몰랐다.
윤조는 지금으로서는 그가 내려줄 결론이 그리 긍정적이라는 기대는 없었다. 그에게는 단지, 독특하고 신선한 집사에 그칠 테니까. 실제로 그의 말로 인해 가슴이 아팠던 것부터 깨달은 마음이었다.
“슬슬 풀 냄새 나요.”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그 많던 사람도 드문드문하고 빛도 줄었다. 윤조는 창틀에 팔을 기대어 연신 바깥을 구경했다. 정한이 창을 열어주었기에 윤조의 머리칼이 계속해서 바람에 날렸다.
“그러다 벌레 먹는다.”
“벌써 몇 마리 먹은 것 같아요.”
정한이 가볍게 팔을 잡아끌었다. 어찌나 손이 따뜻한지 그가 닿은 자리에 불이 붙은 듯했다.
“너 오늘 이상한 거 알지.”
“제가요?”
티가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정한이 지적할 줄은 몰랐기에 급히 마음이 졸아들었다.
“계속 그렇게 이상해 봐.”
“제가 이상한 게…, 싫으세요?”
“또 말 반대로 알아듣네. 계속 이상하라고.”
“…제가 이상한 게 좋으세요?”
정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을 들은 느낌이었다. 어쩐지 그가 제 이 상태를 허락한 듯했다. 하긴, 그는 기꺼이 제 얼굴을 감상하도록 두지 않았던가. 생각난 김에 윤조는 다시 정한을 감상했다.
“간지러워 죽겠네.”
“긁어 드릴까요?”
“아니. 꽤 괜찮으니까 그대로 있어.”
이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윤조는 정한의 말을 해석하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다고 완벽한 해답이 떠오르지는 않겠지만, 알쏭달쏭한 느낌은 알 듯했다.
굽은 길을 차가 부드럽게 꺾어 돌았다. 윤조는 흔들림 없이 정한을 응시했다. 기분 탓인지 차의 속도가 줄어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