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22)

08.

최근 윤조는 페로몬 불감증이던 정한의 증상을 그대로 겪고 있었다. 잠을 잘 수 없고,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증상은 같았으나 괴로웠던 정한과 달리 윤조는 항상 기분이 좋았다. 이 기분으로는 기절해서 계단을 굴러도 아프지 않을 듯했다.

마음이 들뜨다 못해 이마가 따끈따끈할 정도로 몸이 뜨거웠다. 정한이 제 마음에 불이라도 붙인 듯했다. 무형의 에너지가 계속해서 타올랐다. 어지러울 정도로.

윤조는 정한이 출근한 뒤, 그가 모자라다 싶으면 저택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그의 흔적을 찾았다. 정말 개라도 된 듯 정한을 훑고 다녔는데, 그는 우성이면서도 으스대는 여타의 알파가 아니었기에, 그 흔적을 찾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 탓에 윤조는 종일 그와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찾다, 찾다 지쳐 널브러질 즈음이면 정한이 돌아왔다. 기약 있는 기다림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윤조는 현관 앞을 서성이다 정한의 차 소리를 듣고 서둘러 뛰어나갔다. 앞머리가 휘날리도록 달려가 도착한 곳에 정한이 딱 맞게 차에서 내렸다.

“오셨어요?”

정한은 요즘 바빴다. 종일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기에 그를 배웅하고 또 마중하는 때가 아니면 그의 눈에 들기에도 어려웠다.

이렇게 기를 쓰고 나오는 보상을 주듯 정한은 곧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흐트러진 머리를 아무렇게나 슥슥 빗으며 저택으로 향하는 정한의 옆에 서서 그를 구경했다. 이제는 간지럽지도 않은 모양인지 정한은 제 시선을 지적하거나 알은체도 하지 않았다.

“식사 준비할까요?”

“알아서 먹을 테니까 하고 싶은 일 해.”

하고 싶은 일은 하나였다. 그를 챙기고 곁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이걸 말했다간 오히려 못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윤조는 그가 방으로 들어서며 닫아버리는 문 앞에 조용히 설 수밖에 없었다.

잠시 그 앞에서 서성이다 서재로 향했다. 정한은 주로 서재나 응접실에 머물렀고, 요즘은 줄곧 서재에 있는지라 당연한 예상이었다.

예상대로 한참 서재에 의미 없이 앉아 있다 보니 정한이 왔다. 그는 윤조가 서재 안의 소파나 스탠드 따위가 된 듯 조금도 의식하지 않고 자기 할 일을 했다. 윤조는 책을 꺼내 읽는 시늉도 없이 정한을 보았다. 종일 보고 싶었던 마음을 채우느라 앞뒤 상황을 잴 수가 없었다.

“뭐라도 읽든가.”

어느 정도였냐 하면, 정한의 말도 제대로 듣지 못할 정도였다. 윤조가 멍하니 자신이 들은 말을 열심히 추측하고 있을 때, 정한이 고개를 들며 그런 윤조를 바라보았다. 윤조는 저를 빤히 보는 정한의 시선에 제 가슴을 붙잡았다. 이러다 튀어 나갈 것 같았다.

정한이 손에 든 펜을 놓으며 일어났다. 윤조는 가슴을 붙잡은 채, 정한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정한이 서재 안쪽에서 둘둘 말린 큰 종이를 펼쳐 들었다. 그러고는 고민하는 듯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윤조는 그를 고민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잠시 궁금했으나, 곧 그의 뒤태에 홀려 감상하기 바빴다.

“서 집사.”

“…….”

“서윤조.”

“…네?”

“이리 와봐.”

정한이 저를 이름으로 부른 것도 모르고 윤조는 벌떡 일어나 그의 곁에 섰다. 익히 알고 있는 정한을 이루고 있는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윤조는 저도 모르게 정한의 페로몬을 찾아 콧구멍을 벌렁거리다가 그가 가리키는 손짓에 뒤늦게 반응했다.

“여기 어떠냐고 물었어.”

“여기요? 여기가 어딘데요?”

“내가 가진 땅 중 하나. 시내랑 가장 가깝긴 한데, 저택만큼 주변 풍경이 아름답진 않아. 근데 그건 뭐, 가꾸기 나름이고.”

“어떻게 가꾸실 건데요?”

“주변을 사면 되는 거잖아.”

“주변이면, 여기… 이 건물들이요?”

“어. 한 이쯤까지 사서 밀어버리면 되겠다.”

정한이 펼쳐 든 지도에서 ‘이쯤까지’라며 가리킨 자리가 지나치게 광범위한 듯해 윤조는 슬그머니 그의 손가락을 그의 땅 주변으로 옮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서 집사 나무 좀 알아?”

“여기다 심으시게요?”

“어.”

윤조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정한을 올려다보았다. 오랜만에 정한이 부자라는 사실이 상기되었다. 그의 거침없는 태도는 세상 반대편에 있는 나무 이름을 대어도 심어줄 듯했다.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나무까지도.

“글쎄요, 전 잘 몰라서….”

“그래 그건 차차 생각하고. 여기 어떤 것 같아?”

“어떤지 말씀드리면 되는 거예요?”

“어. 좋다 아니다, 둘 중에 하나만 말해 봐.”

땅을 보는 눈이 제게 있을 리 없었다. 이 기회를 빌려 정한에게 하고 싶은 말만 떠올랐다. 말할 생각을 하니 입술이 실룩거리고 난리였다. 윤조는 애써 땅을 보는 척 주변을 살피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좋은 목소리로 전하고 싶었다.

“상당히 본격적이네?”

“그럼요, 사장님이 물으신 건데요.”

“이 거리면 자전거로 오가기도 괜찮을 거야.”

“시내까지요?”

“어. 내 병원이랑도 가깝지. 여차하면 달려올 수 있을 정도로.”

“음… 그러네요.”

윤조는 피어나려는 웃음을 죽이며 고심하는 듯한 얼굴을 해 보였다. 대답을 기다리는 정한이 신중한 표정으로 윤조를 내려다보았다.

“좋아요.”

“좋아?”

“네…. 좋아요!”

“그래, 알았어.”

정한이 지도를 접고 데스크로 향했다. 윤조는 자신이 말하고도 놀란 가슴을 애써 다독이며 소파로 가 앉았다. 그러고서 하는 일은 전과 같았다. 정한은 이제 책이라도 보라는 소리도 하지 않았다. 그저 윤조를 내버려 두었다. 윤조로서는 그의 방임이 감사하기만 했다. 그가 왜 제게 방임해주어 좋다고 했는지 알 듯했다.

“주무시게요?”

일을 끝냈는지 정한이 서재를 나가려 했다. 윤조는 새 옷에 달린 태그처럼 자연스럽게 정한의 뒤에 붙어 걸었다.

“너 잠 좀 자. 눈이 그게 뭐야?”

“제 눈이 왜요?”

“본인 상태를 몰라서 물어?”

“제가 어떤데요?”

정한이 걸음을 멈추었다. 윤조는 홀린 듯 그를 따라 걷다 등에 코를 박았다. 기가 찬 듯 웃은 정한이 돌아보았다. 허리까지 숙여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본인이 가장 잘 알지 않아?”

“…정신이 나가 보이나요?”

정한이 웃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윤조는 제 뜨거운 뺨을 비비며 시선을 내렸다. 그를 마주 보고 있기가 벅찼다. 그러자 정한이 턱을 붙들고서 저를 보게 했다. 익숙한 악력과 눈동자에 비친 하얀 얼굴을 확인한 순간, 등허리가 저릿하게 울었다.

“이것도 나쁘지 않아. 오히려 귀엽지.”

“…….”

“근데 말이야, 서 집사.”

“…….”

“대답.”

“네…, 사장님.”

“그게 다야?”

“네…?”

“그게 다냐고.”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걸로 만족하냐고 물었어.”

“…….”

“서 집사는 배가 작네.”

정한의 말에 윤조는 제 배를 매만졌다. 그가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이 배를 말하는 게 아닌 건 윤조도 알고 있었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정한이 제게 이걸로 만족하냐고 묻는 이유는 퍼뜩 떠올리지 못했다.

“잘 생각해 봐.”

정한이 윤조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고 돌아섰다. 윤조는 순식간에 멀어진 정한의 기척을 눈으로만 보았다. 가슴속에 웅크리고 있던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

정한이 숙제처럼 남기고 간 말 때문일까. 기대 없이 묻어 놓은 욕심이 꿈틀거리며 깨어났다. 정한의 말은 마치 그를 욕심내어도 좋다는 뜻 같았다. 그저 바라보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탐을 내어도 좋다고, 허락하는 듯했다.

윤조는 제멋대로 해석해버린 정한의 말을 가지고 발을 굴렀다. 당장에라도 그에게 달려가 정답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후에 있을 결과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만약 정답이라면 그 뒤는 어떻게 될까. 고심할 것도 없이 불 보듯 뻔한 결말만 보였다. 욕심은 내어도 좋으나, 가질 수는 없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을 듯했다. 정한은 제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으니까. 자신이 생각해도 당연한 결말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멈춰 있느냐, 하면 그건 또 싫었다. 윤조는 찬찬히 자신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왜, 어떤 책에서 그러지 않았던가. 사랑은 거울을 보는 것이라고. 저 역시 자신과의 대면을 시작으로 진정한 사랑에 도달할 듯했다.

윤조는 정한을 세워야 했던 날처럼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요목조목 따져 보았다.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자신이 정한을 넋 놓고 보았을 때와 같은 매력이란 게 느껴지지 않았다. 가진 거라고는 몸뚱이가 고작인데, 이래서야 정한을 꼬실 수가 없었다.

기껏 허락이 떨어졌는데 가진 게 없다니. 이 기회를 날릴 수 없었다. 당연한 결말을 배신하고 싶었다. 욕구가 강해질수록 마음이 덜컥거리며 조급해졌다. 그를 감상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될 듯한 위기감까지 들었다. 전에 없이 바쁜 정한을 보고 있자니 더욱 그랬다. 윤조는 제 욕심에 떳떳해지고 싶었다. 더는 사고만 치는 집사에 그쳐서는 안 됐다.

정한이 출근한 오후, 윤조는 일을 끝내고 책상 앞에 앉았다. 빈 노트를 펼쳐 놓고 양심껏 제 장점에 대해 써나갔다.

< 밥을 잘 먹는다. (가리는 것 없음)

수영장 한가운데로 뛸 수 있다. (튜브 통과 가능)

카펫 얼룩을 잘 지운다.

다리가 좀 봐줄 만하다.

얼굴도 그럭저럭 봐줄 만하다.

밥을 잘한다.

야채수프를 10배로 만들 수 있다.

…꽤 뻔뻔하다.>

쓰다 보니 문득 자괴감이 들었지만, 제 현주소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 중에서 무엇을 더 잘할 수 있을지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이 처참한 현주소에서 잘해 봐야 좋을 게 없는 듯했다. 꽤 뻔뻔하다는 항목도 지워야 할 판이었다.

겨우 써 내려간 제 장점을 빗금으로 하나씩 지울 때였다. 저택을 울리는 벨 소리에 윤조는 어깨를 퍼뜩 폈다. 정한도 없는데 웬 손님일까. 윤조는 펜을 놓고 일어나 서둘러 현관으로 달려갔다.

숨을 고르고 현관문을 열자, 초로의 여인이 저와 비슷한 차림으로 서 있었다. 윤조는 단번에 그녀가 권 회장의 집사인 걸 알아챘다. 권 회장의 집사는 이전에 이곳에 있던 죽은 윤 집사의 분위기와 많이 닮아 있었다. 고급 인력이라는 게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황윤정입니다. 권 회장님 댁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무어라 인사해야 좋을지 말을 고르는 사이, 권 회장의 집사가 먼저 명함을 건네었다. 윤조는 황 집사의 빳빳한 명함을 앞뒤로 빠르게 훑어보았다. 신기해서 눈이 번쩍 떠졌다. 집사가 명함을 가질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아, 저는 명함이 없어서… 빈손으로 인사드려서 죄송합니다. 서윤조 입니다.”

“반가워요.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윤조는 문득 아득해지는 기분에 어깨를 늘어트리고 황 집사를 보았다.

“좋은 얘기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

“그럴 리가요. 귀여운 집사가 들어왔다고 회장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맹한…, 집사가 아니구요?”

황 집사가 대답은 하지 않고 웃음만 지었다. 윤조는 그린 듯한 황 집사의 눈웃음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최대한 포장해서 말해준 것이라는 걸 이제 알았다.

“그런데, 사장님은 출근하셨는데요.”

“예, 압니다.”

“아, 그럼….”

용건이 제게 있다는 얘기였다. 역시, 반갑지 않은 방문인 걸까. 윤조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황 집사를 빤히 보았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 네, 들어오세요.”

윤조는 냉큼 안쪽으로 들어서며 황 집사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황 집사는 시종일관 인자한 태도였다. 그녀가 권 회장의 집사만 아니었다면 윤 집사에게 그랬듯 직업적인 물음을 쏟아냈을지도 몰랐다.

윤조는 입술을 꾹 닫은 채로 황 집사를 위한 차를 우렸다. 어째 정한에게 처음으로 선보였을 때보다 더 떨렸다. 황 집사가 찻잔을 기울여 차를 머금었을 때는 숨도 멈추었다.

“날이 부쩍 쌀쌀해져서 그런지 몸을 따뜻하게 하는 차는 언제 마셔도 좋네요.”

“입에 맞으세요…?”

“네, 맛있습니다.”

윤조는 속으로 안도하고서 저도 차를 머금었다. 향긋한 꽃내음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이제 이야기를 꺼내도 될까요, 집사님?”

윤조가 찻잔을 내려놓자마자 황 집사가 운을 떼었다. 어쩐지 다시는 차에 입을 대지 않을 듯한 황 집사의 꼭 다물린 입매를 보며 윤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매도 먼저 맞는 게 좋다고, 어서 용건을 듣고 싶었다.

“집사님 덕분에 도련님의 상태가 호전되어 최근에는 완치에 가까운 상태라고 전해 들었습니다.”

“아, 네….”

“회장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저야말로 사장님을 도울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지나치게 기뻐 수고비를 더 주려고 찾아온 걸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도저히 제게 있을 용건이 떠오르지 않아 별생각이 다 들었다.

“또 도와 드릴 일이 생겼다면 어쩌시겠어요?”

“사장님을요?”

“네.”

최근 정한이 바쁜 것을 떠올린 윤조는 환히 웃음 지었다. 무엇이든 그에게 보탬이 된다면 응당 기뻐할 일이었다.

“물론이죠. 얼마든지요.”

“다행입니다. 집사님의 의견이 꼭 필요한 일이었거든요.”

“황 집사님도 함께하는 일인가요?”

“예.”

윤조는 황 집사의 이야기에 갈피가 잡히지 않아 가만히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도련님께서 큰일을 겪으신 걸 알고 계실 겁니다.”

“큰일이라면….”

“스스로 약물을 주입하셨지요. 순식간에 심장이 멎었습니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집사님이 여기 있을 일도 없었을 겁니다.”

내심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자세한 정황은 처음 접한 탓인지 제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다. 윤조는 표정을 관리하지 못하고 잔뜩 얼은 얼굴로 황 집사를 보았다. 새하얗게 질린 윤조와 달리 황 집사의 표정은 인자한 느낌 그대로였다.

“당시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합니다. 이렇게 전처럼 돌아오신 게 어찌나 꿈 같은지요. 그러니 이리도 서두르시는 거겠지요?”

“네…?”

“회장님께서는 이 기세를 몰아 도련님께서 더욱 안정되시길 바라십니다. 한 번 아드님을 잃으실 뻔했으니 그 마음이 저도 이해되는 바입니다. 하여 이런 실례를 무릅쓰고 집사님을 찾았습니다.”

윤조는 황 집사의 말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정한의 안정에 자신이 주체가 되는 일은 없으리란 직감이 들었다.

“저….”

“앞으로 집사님은 저와 함께 도련님 결혼 준비를 해나갈 겁니다. 도련님께는 비밀로 부탁드립니다.”

거대한 포크. 그 아래 사랑이란 소스에 푹 절인 저와 같은 애송이 하나가 사정없이 찍혔다. 마치 정한의 말로 제 마음을 깨달았을 때처럼, 윤조는 가슴이 아팠다. 그때야 잠시 고통스럽기는 했어도 곧 기분은 달콤해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계속해서 아프기만 했다.

“집사님. 제 말 듣고 계십니까?”

“…네, 듣고 있어요. 그러니까… 결… 혼이요?”

“예. 결혼.”

“이렇게… 갑자기요?”

“갑자기라니요. 집사님이 이 저택에 오기 전에 이미 오가던 이야기였습니다.”

“사장님이…, 결혼 예정이셨어요?”

“예.”

“아…, 그러셨군요….”

“많이 놀라셨나 보네요.”

윤조는 아연한 얼굴로 황 집사를 보았다. 정한이 결혼 예정에 있었다니. 놀랐다. 충격적으로. 하지만 그가 제게 욕심낼 기회를 준 것보다도 현실감 있는 얘기였다.

“도련님 같은 분이 여태 혼자이신 게 이상하지 않으셨나요?”

“아… 제가 그런 쪽으로는 생각해 보지 않아서요.”

“이제라도 아셨으니 다행입니다.”

문득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터무니없는 착각을 해버렸다. 정한에게 정답이랍시고 제 욕심을 꺼내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거창하게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되도록 간단하게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

“집사님?”

“아…. 죄송해요. 준비… 하셔야 한다고.”

“네.”

“죄송한 말씀인데… 결혼을 왜 집사가 준비하나요?”

“도련님과 같은 분은 예외가 없는 한 보통 이런 식으로 결혼을 진행합니다.”

윤조는 황 집사의 말을 곱씹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왜… 비밀로 하자고 하시는 거예요?”

“신경 쓰실 테니까요. 그게 싫어서 애초에 제게 일임하신 일입니다.”

“…결혼을, 말이죠?”

“이해하기 어려우십니까? 이해하지 못하시면 그냥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집사님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안 될 일도 아니니까요.”

“…네. 제 이해가 필요하진 않죠.”

“그럼 그런 줄로 알고 진행하겠습니다.”

침묵한 윤조의 얼굴을 살피던 황 집사가 가방을 열어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곁에서 보셔서 아시겠지요? 집사님께서 보시기에 어떤지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윤조는 황 집사가 테이블 위에 올리는 다섯 장의 사진을 멍하니 보았다. 그녀를 저택에 들인 뒤로 제 세계에 금이 가더니 순식간에 박살이 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울렁거렸다. 뜨거운 열기가 금방이라도 넘어올 듯 목구멍을 간질였다.

“S 건설 차남입니다. 피아니스트지요. 도련님께서 피아노 좋아하시는 건 아시죠?”

“…….”

“집사님?”

“아…, 어, 죄송합니다.”

“다시 말씀드릴까요?”

“아뇨, 다 들었습니다. 피아노….”

“네. 아시죠?”

2층 방에 피아노가 있는 건 알았지만 정한이 좋아하는지는 몰랐다. 윤조는 황 집사가 가리킨 사진 속 남성을 보며 아는 척 잘게 고개만 끄덕였다. 밝은 인상의 남성은 여유가 넘쳐 보였다. 여느 두베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우아하기도 했다.

“이분은 아실지도 모르겠네요. K사 아나운서입니다. 대대로 교육자 집안이라 명망이 높습니다.”

한눈에도 매력적인 여성의 사진을 보며 윤조는 땀이 배어난 손을 무릎에 올렸다. 얼마 전, 정한이 보여주었던 두베의 풍경이 떠올랐다. 다 제 것처럼 여겨지던 때가 언제 있었나 싶었다. 저택의 뒤편으로 보이던 거대한 벽. 자신은 그 너머에 있을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 너머보다 더 멀리 있을지도.

복잡한 마음으로 앉은 윤조를 앞에 두고 황 집사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어느 그룹의 장녀니, 차남이니 하는 말과 들어 본 적도 없는 직업들이 계속해서 나열되었다.

“어떠신가요. 이 중에서 어떤 분이 도련님께 가장 어울릴 오메가인지 아시겠습니까?”

“글쎄요… 제가, 어떻게 고를 수가 없네요.”

“그런가요? 역시 좀 평범했습니까?”

윤조는 깜짝 놀라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제가 뭐라고 이분들을 평가하겠어요.”

“그래서 못 고르시겠습니까?”

윤조는 작게 고개 끄덕였다. 윤조의 대답을 확인한 황 집사는 미련 없는 손길로 사진을 모아 정리했다.

“더 괜찮은 후보를 추려오도록 하죠. 아무래도 집사님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하네요. 제 불찰입니다.”

“아, 저….”

“도련님 같은 주인을 모시는 집사라면 응당 그래야지요. 이해합니다.”

“…….”

“그럼 조만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어라 말할 힘도 없었다. 윤조는 몸에 밴 행동으로만 움직였다. 침착한 얼굴로 황 집사를 배웅하는 일이 다였지만 순간순간이 벅찼다.

황 집사가 몰고 온 차를 향해 깊게 숙인 허리를 펴며 한숨을 내쉬었다. 희뿌옇게 핀 먼지를 보며 생각했다. 그날 정한이 한 말은 나태한 저를 채찍질하는 말이었을까, 하고.

하긴, 바쁜 그가 보기에 한가하다 못해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자신이 그럴 만해 보일 것 같기도 했다. 그 충고를 어쩌자고 그렇게 해석했을까. 윤조는 울컥 치밀어 오른 열을 억지로 삼키고 저택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저택에 돌아와 식은 차를 치우고 계단을 올랐다. 마음이 어지러워 자꾸만 발을 헛디뎠다. 끝내 벗어버린 구두를 손에 들고 터덜터덜 복도를 걸었다. 겨우 도착한 방에서 윤조는 곧장 책상으로 다가가 삐뚤빼뚤한 글씨가 적힌 노트를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부끄러웠던 적이 있을까.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수치심에 가슴까지 두근거렸다. 윤조는 한 손으로 제 못난 글씨를 구겨 쥐고 그대로 노트에서 뜯어내었다. 누가 보기라도 할까 잘게 찢기까지 했다. 밭은 숨을 내쉬는 윤조의 상기된 얼굴이 곧 우울하게 늘어졌다.

“…….”

멍하니 선 윤조의 시선이 종이를 찢느라 붉어진 제 손끝으로 향했다. 어렴풋이 번져 있는 잉크를 지분거리며 생각을 환기하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이렇게 잘되지 않는 일들이 제게 많을 것이라, 윤조는 짐작했다.

* * *

종일 정한을 생각하며 둥둥 떴던 마음이 누군가 총이라도 쏜 듯 푹 꺼졌다. 윤조는 납작하게 누운 제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어찌나 적나라하게 비참한지 웃음도 나지 않았다. 개중 다시 들여다보기도 부끄러운 욕심은 외면하다 못해 제 가슴 깊은 곳에 숨겨 놓았다. 자신조차 찾기 어려울 만큼 꼭꼭.

약속대로 윤조는 정한에게 황 집사의 방문을 알리지 않았다. 결혼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황 집사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야기가 나가는 즉시 일사천리로 일이 빨라져 내일이라도 그의 곁에 웬 모를 오메가가 앉아 있을 듯했다.

그건 공포였다. 섬찟하리만큼 확실한 감각이 등을 덮치는 것도 모자라 숨까지 조였다. 윤조는 방어 본능으로 저를 덮치는 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했다. 오로지 눈앞에 주어진 일에만 집중했다. 그렇게 있으면 황 집사가 찾아온 일은 마치 없는 일인 듯했다. 자신이 외면한 현실을 믿고 싶었다. 제 세상은 아직 깨어지지 않았다고.

오늘 윤조는 수영장 청소를 하기로 했다. 여름 동안 종일 반짝이던 물을 빼고, 미끈거리는 벽을 닦고, 한정 없이 쌓이던 낙엽을 치웠다. 수영장 청소는 처음 물을 받았을 때만큼이나 힘든 일이었다. 윤조는 지친 몸으로 풀 사이드에 걸터앉아 민얼굴을 드러낸 수영장 바닥을 보았다. 얼룩처럼 남은 물이 심히 거슬려 잠시 몸을 움찔거렸으나 어찌나 지쳤는지 꼼짝도 하기 싫어 내버려 두었다.

멍하니 앉아 지는 노을을 구경했다. 곧 정한이 올 텐데, 이런 흐트러진 모습이어선 안 되었는데, 도무지 움직일 힘이 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있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미루고 또 미루었다. 두려워서 외면 중인 생각처럼.

걷어 올린 바지와 윗단추를 풀어낸 셔츠 칼라 사이로 파고든 찬바람을 느꼈을 땐, 이미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윤조는 빨갛게 익은 손을 바닥에 딛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충분히 쉬었다고 생각했는데 수영장의 온 물을 머금은 듯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엣, 취!”

저택은 지나치게 따뜻했다. 바깥과 온도 차가 심한 탓에 재채기가 났다. 재채기를 할 때마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머리가 울리는 건 덤이었다.

윤조는 복도 벽에 기대어 제 이마 위로 손을 올려 보았다. 손이 차갑기 때문일까. 제 이마에 들끓는 열이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된통 감기에 걸린 게 분명했다. 속으로 혀를 차며 걸음을 옮겼다. 자꾸만 시야가 울렁거렸다.

방으로 돌아와 뜨거운 물로 몸을 씻고 정한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다행히 늦지 않게 몸을 단장하고 응접실에 이르렀다. 잠시간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다가 시간이 되어 현관문을 열었다. 어렴풋하게 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오셨어요.”

황 집사가 다녀간 이후, 윤조는 나름대로 자신이 전과 다르지 않게 지냈다고 생각했다. 정한의 앞에서는 특히.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신체적인 아픔까지는 숨길 수가 없었다. 이렇게 정한이 바로 알아보고 제 얼굴을 들여다보는 걸 보면 말이다.

“얼굴이 왜 이래?”

“감긴가 봐요.”

“그럼 안에 있지 왜 마중을 나와.”

“…그게 제 일인걸요.”

정한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팔을 잡아끌었다. 윤조는 따뜻하다 못해 열이 차는 듯한 저택으로 돌아왔다.

“방에 가 있어. 곧 갈 테니까.”

머뭇거리는 윤조의 등을 정한이 가볍게 밀어 계단을 오르게 했다. 윤조는 못 이긴 척 계단을 올랐다.

침대에 앉아 기다리고 있자니 정한이 왔다. 윤조는 제 앞에 무릎을 꿇다시피 앉은 정한을 보고 놀랐다. 자신이 일어나든 그를 일으키든 해야 했는데 제 이마에 닿은 손에 꼼짝할 수 없었다.

“뭘 한 건데?”

윤조는 제 빈손을 그러쥔 정한을 보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 작은 소리를 알아들은 정한이 혀를 찼다.

“그놈의 수영장….”

수영장을 청소할 때마다 어디 하나 탈이 나니 마땅히 변명할 구석이 없었다. 윤조는 웃음으로 상황을 얼버무렸다. 정한은 그만둘 생각이 없는 듯했지만.

“일 중독이야? 요즘 왜 이렇게 열심이야?”

“재미있어서요. …깨끗해지는 거.”

“당분간 쉬어. 손도 대지 마. 알았어?”

“그렇지 않아도 꼼짝도 못 하겠어요….”

다그치듯 말하던 정한이 입술을 굳히고 빤히 보았다. 윤조는 눈만 깜박이며 꼭 제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정한의 시선을 견뎠다.

“밥은.”

“생각 없어요.”

쯧.

정한이 글자처럼 혀를 찼다. 윤조는 정한의 좁아진 미간을 보며 웃었다. 그가 제 걱정을 하는 듯해 좋았다. 단순하게.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이렇게 웃을 일이 많았다.

윤조는 정한의 손길에 이끌려 침대에 누웠다. 정한이 덜 마른 머리와 불편한 옷을 지적했다. 저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었나. 윤조는 잔소리하는 정한을 보며 계속 웃었다.

“있어. 그대로 잠들어도 좋고.”

“어디 가세요…?”

“가긴 어딜 가, 너 아픈데. 주사 맞을 줄 알아.”

턱 아래까지 이불을 올려준 정한이 훌쩍 방을 나섰다. 윤조는 제 방에 희미하게 남은 정한의 향을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어찌나 무거운지 정한을 보는 것도 겨우 했다. 그가 오면 다시 눈을 떠야지. 그리고 오래오래 봐야지, 했다. 한데 윤조는 정한이 돌아오고도 눈을 뜨지 못했다. 피부에 바늘이 꽂힌 것도 몰랐고, 정한이 입을 맞춰 약을 먹여준 것 또한 몰랐다. 깊은 새벽, 훌쩍 들린 눈꺼풀 너머의 세상이 캄캄해서 가슴이 서늘한 것만 알았다.

“…….”

거짓말처럼 열이 식어 있었다. 눈꺼풀에 매달려 있던 졸음도 도망갔다. 누가 쫓아내기라도 한 듯이.

꼭 이 저택에서 처음 깨어났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이렇게 홀가분했었다. 아픔이 달아나서 다행이기만 하던 때와 다르게 이번엔 달아난 아픔이 아쉽게 느껴졌다.

조금 더 정한을 걱정시키고 싶었다. 혀를 차도 좋았고 미간을 찌푸려도 좋으니 그가 신경 쓰는 사람이고 싶었다. 윤조는 제 철없는 생각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다 손에 닿는 따뜻한 온기에 시선을 내려보았다.

어둠에 적응한 눈이 서서히 손끝에 닿은 온기의 정체를 밝혀주었다. 윤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로 걸렸다가 빠져나갔다.

“…….”

순식간에 손바닥 안으로 땀이 찼다. 조용하던 가슴도 빠르게 뛰었다. 윤조는 급히 눈을 깜박이며 조심스럽게 손을 떼어 냈다. 정한을 깨우기 싫었다. 그런데 정한은 선잠이 들었던 모양인지 물러나는 윤조의 손목을 단번에 그러쥐었다. 윤조는 깜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고개를 든 정한과 눈이 마주쳤을 때는 숨도 멈추었다.

“어디 봐.”

정한의 잠긴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윤조는 훌쩍 다가온 정한의 온기에 눈을 내리감았다. 이마를 덮은 손이 미끄러지듯 얼굴을 쓰다듬으며 멀어졌다.

“약 잘 듣네, 서 집사.”

“…너무 잘 낫죠.”

“다행이지. 왜 아쉬운 말이야?”

“…그러게요.”

“좀 더 자.”

“씻고 싶어요….”

“완전히 나은 거 아냐. 더 자.”

“…….”

“정 찝찝하면 닦아줄까?”

“아뇨, 제가….”

“있어.”

어찌할 사이도 없이 정한이 일어났다. 그가 간결한 손짓으로 스탠드를 켜고 욕실로 들어갔다. 윤조는 정한을 붙잡으려다 제 팔에 치렁치렁하게 달린 장애물을 발견했다. 빛을 따라 시선을 들어 보니 반쯤 배가 홀쭉한 링거액이 보였다. 이래서야 아플 틈이 없었다. 윤조는 허무하게 웃으며 정한을 기다렸다.

잠시 후 나타난 정한이 침대에 걸터앉아 링거를 정리해주었다. 윤조는 묵묵하게 제 할 일을 하는 정한을 가만히 구경했다. 이렇게 된 이상 그의 보살핌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았다.

“목은 어때.”

정한이 목덜미를 닦아주며 물었다. 윤조는 목을 큼큼거리다 괜찮다고 답했다. 아무리 어두웠어도 의사 앞에서 거짓말을 할 순 없었다. 어디 아픈 곳이 없을까. 윤조는 생각에 잠겨 몸을 꼼지락거렸다. 정한이 제 상체를 닦고 하체까지 내려갔을 때에야 겨우 정신이 들었다.

“…….”

윤조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정한을 보았다. 그와는 참 여러 가지를 했는데, 왜 이제야 부끄러운 걸까. 그에게는 어디서든 엉덩이를 보여도 이상하지 않을 때도 있었는데, 지금 그가 제 다리를 벌리고 허벅지 안쪽을 닦는 일이 왜 이리도 낯 뜨겁게 느껴지는지 알 수 없었다.

“여기 멍들었네.”

“…아, 어디 부딪혔나 봐요.”

부끄러움에 달아오른 저와 달리 빈약한 몸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담담하기만 했다. 멍이 든 자리를 매만지는 손길도 그랬다. 윤조는 정한이 자신을 어떻게 만지는지 알고 있었기에 지금 그의 손길에 그 어떤 의미도 담기지 않은 걸 알 수 있었다.

“살 좀 찌웠다 싶었는데, 그새 빠졌네.”

“제가… 살이 쪘었어요?”

“아주 살짝.”

정한은 그 미미한 차이를 어떻게 아는 걸까. 손에 자가 달린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아세요?”

발끝까지 남김없이 닦아 낸 정한이 이불을 덮어주다 윤조의 물음에 웃음을 터트렸다. 윤조는 그가 왜 웃는지 몰라 시선을 헤맸다.

“왜, 왜요?”

“오랜만에 들어서, 그거.”

“어떻게 아시냐는 거요?”

“어.”

“이게 웃겨요?”

정한이 웃음을 머금은 채 옷장에서 새로 꺼내 온 속옷과 잠옷을 건네주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을 작정인지 몸을 닦아 낸 수건을 챙기기 시작했다. 윤조는 홀로 입술을 삐죽였다.

“빨리 입고 자. 또 떨지 말고.”

“네에….”

윤조는 불퉁하게 대답하며 잠옷만 매만졌다. 자면 그가 돌아갈 것 같았다. 그를 깨우지 않았어야 했는데. 아쉬움에 점점 입이 나왔다.

“왜. 옷 입혀줘?”

윤조의 부루퉁한 입을 오해한 정한이 반가운 제안을 했다. 이번에야말로 윤조는 정한의 손길을 거절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가 제 맨몸을 보았을 땐 부끄러웠지만.

“그, 그렇게 꽉 올리는 게 어디 있어요?!”

속옷을 바짝 당겨 올렸을 때도 부끄러웠다. 윤조는 여러 가지 이유로 얼굴이 벌게졌다. 어서 속옷을 당겨 내리고 싶은데 정한이 버티고 있으니 그럴 수가 없었다. 손까지 빨개진 듯했다.

“미안.”

정말 실수였던 듯 정한이 태연한 손길로 속옷을 밑으로 당겨주었다. 윤조는 다시 열이 나는 것처럼 몸이 따끈따끈해졌다. 괜히 씩씩거리며 스스로 입겠다고 나서려는데 정한이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눈썹을 삐딱하게 세웠다. 윤조는 그가 제 속옷 앞섶만 보고 있는 게 신경 쓰여 손으로 슬며시 가렸다.

“왜, 왜요?”

“서 집사.”

“…네.”

“야한 생각 했지.”

“네?”

정한이 몸을 기울여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손등이 눌리자 자연히 성기도 꾹 눌렸다. 윤조는 압박하듯 저를 누른 정한의 몸을 치워 내려 뒤척였다. 그가 맡은 향을 저 역시 맡지 않았다면, 벌써 그를 밀치고도 남았을 테다.

“맞잖아.”

“…….”

“페로몬.”

정한이 웃으며 윤조의 뺨을 두드렸다. 윤조는 전에 없이 빨갛게 익었다.

“아… 아파서 그래요.”

“아파서? 나랑 할 때 아팠어?”

“네…?”

“아픈데 왜 페로몬을 내냐고. 연상할 게 있어야 할 거 아냐.”

“아뇨, 사장님이랑 할 때 안 아팠어요. …노팅할 때는 아팠지만. 그것도 점점… 익숙해졌고.”

왜 이런 이야길 하고 있지?

윤조는 뒤늦게 정한의 어깨를 밀어내고 앉았다. 잠옷을 입으려는데 정한이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입혀 달라며.”

“제가 입을게요.”

정한은 순순히 윤조를 놓아주었다. 윤조는 정한의 앞에서 서둘러 잠옷을 입다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그가 팔을 잡아주지 않았다면 무릎에 큰 멍이 들었으리라.

쯧.

정한이 또 글자처럼 혀를 찼다. 윤조는 민망하게 웃으며 다시 잠옷을 입었다. 옷 하나 입는 게 이렇게 어려울 일일까. 겨우 닦은 땀이 다시 나는 듯했다. 부끄러움에 오른 열은 약도 없는지 떨어지지도 않았다.

“시트 갈아줄게. 저기 앉아 있어.”

“시트까지요? 저 이쪽에서 자면 돼요.”

“해줄 때 받아.”

윤조는 정한에게 팔이 붙들려 책상 의자에 앉았다. 정한이 창을 살짝 열고 시트를 갈기 시작했다. 도련님이 어쩜 저런 일도 잘하나 싶어 윤조는 의자 등받이에 팔을 기대고 감탄했다. 저보다 각을 잘 맞추는 듯했다.

“그래서.”

“네…?”

“왜 야한 생각 했는데.”

저를 골탕 먹일 작정인지 정한이 또 이 화제를 입에 올렸다. 윤조는 앵무새처럼 같은 답을 말했다.

“아파서요.”

“안 아팠다며.”

“…꼭 사장님 생각을 했어야 해요?”

막 시트 갈이를 끝낸 정한이 손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윤조는 정한의 눈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럼 또 뭐가 있는데.”

먼발치에 선 정한이 삐딱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윤조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애써 변명을 만들어 냈다.

“채, 책에서 봤거든요. 여, 여러 잠자리 자세가 있다면서요?”

“그게 불현듯 생각났다는 거야? 그 순간에?”

“…네.”

“그런 책이 서재에 있었나?”

“그럼요, 수유 책도 있는데….”

정한이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윤조는 이제 끝났나 싶어 안심하려 했다. 불쑥 다가온 정한이 그 책은 왜 보았냐고 묻지만 않았다면.

“왜긴요…. 있으니 봤죠.”

“어디, 나도 봐.”

“뭘 봐요. 사장님은 다 아는 거예요.”

“그걸 서 집사가 어떻게 알아?”

“…알죠. 모르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제가 사장님이랑…, 그, 한 게 얼만데.”

빤히 변명하는 윤조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정한이 웃음을 지었다. 거짓말을 죄다 꿰고 있는 웃음이었다.

“서 집사가 이제 나를 속이려 하네?”

“…그런 책 없는 거 아시죠?”

“어.”

“근데 왜 자꾸 물으셨어요?”

“왜냐면….”

정한이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했다.

“어떻게 아시냐와 같아.”

“네?”

“귀여워서.”

“…….”

“그리고 서 집사 페로몬, 그냥 평범한 거였어. 성 페로몬이 아니라.”

“…….”

“얼마나 아팠으면, 그걸 헷갈려?”

민망함과 부끄러움, 또 수줍음과 두근거림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서 집사, 또 열나는 것 같다. 누워, 재워줄게.”

정한의 손에 이끌려 다시 침대에 누웠다. 이번만큼은 그가 돌아갔으면 했다. 정작 그 순간이 온다면 아쉽겠지만. 윤조는 갈팡질팡하는 마음으로 정한을 보았다.

“내가 너무 놀렸나? 말이 없네.”

“그렇게 놀리시는데 어떻게 말을 해요? 계속 웃음만 살 텐데.”

“귀엽다니까.”

“사장님… 한텐 귀엽겠지만, 전 부끄러워요.”

정한은 조금도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미안하다고 했다. 진심 없는 사과에 윤조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그러자 정한은 달콤한 사탕을 건네듯 윤조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그럼, 요 며칠 저택을 빛낸 포상 겸, 지나치게 놀려 미안한 사과 겸, 뭐든 줄 테니 말만 해.”

“…정말요?”

“어.”

윤조는 신중히 생각했다. 정한이 ‘뭐든’이라고 했기에 부피가 자꾸만 커졌다. 그가 제게 줄 수 있는 게 무얼까. 퍼뜩 생각나는 것이 있었지만 그건 제 숨겨 둔 욕심이라 씹어 삼켜야 했다.

“큰 건가 봐? 오래 생각하네?”

“많이 커도 돼요?”

“물론.”

윤조는 정한에게 향한 시선을 들어 제 방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변하지 않는 지금. 그와 저, 단둘인 저택. 제게 이것만큼 간절한 것이 없었다.

“…이 저택이요.”

이 저택을 가지면 그도 가질 수 있을 것 같고, 그와 함께인 시간 즉, 평생도 가질 수 있을 듯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를 여기다 가둬버리고 평생 저만 보고 싶었다. 아무도 데려가지 못하게.

“그렇게 여기가 좋아?”

“네. 좋아요. 전부터 말씀드렸잖아요. 저 여기서 평생 살 거라고.”

사장님이랑, 둘이.

윤조는 뒷말을 삼키고 정한을 보았다. 과연 정한이라도 이 막무가내는 어쩔 수 없는지 생각이 많아 보였다.

“음….”

머릿속에서 계산 중인지 정한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눈이 마주치자 웃음은 짓는데, 그리 편한 웃음은 아니었다. 윤조는 자신이 실언한 듯해 다른 걸 말하려는데 정한이 먼저 운을 떼었다.

“여기가 그렇게 좋단 말이지?”

“…네. 그렇긴 한데, 진짜 달라는 건 아니었어요, 사장님. 농담이에요, 농담.”

“아냐, 줄게.”

“에이, 농담이라니까요?”

“줄 테니까, 받아.”

“그럼 마음만 받을게요.”

“마음도 받고, 저택도 받아.”

“아뇨, 아니에요. 죄송해요. 월급이나 올려주세요.”

정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윤조는 아차, 했다. 월급은 지나치게 현실감 있었다. 받지 않아도 될 만한 걸 말했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다.

“시간 좀 걸릴 거야. 기다려.”

다행히 정한은 제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은 듯했다. 그의 농담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좋겠다, 서 집사.”

“농담이라고 했어요.”

정한이 돌아가려는지 스탠드를 끄고 문까지 걸어갔다. 윤조는 어둠을 빌려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농담인데.”

정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잘 자라는 말만 남겼다. 윤조는 정한의 밤 인사 끝에 남은 웃음을 느끼며 입술을 삐죽였다.

홀로 남은 방. 정한의 방과 다르게 밋밋한 천장을 보며 윤조는 생각했다. 계속 이대로였으면 좋겠다고. 이것이 진짜였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현실은 윤조를 배신하듯 찾아왔다. 저택을 깨우는 벨 소리와 함께.

*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윤조는 황 집사와 짧은 티타임을 가졌다. 그녀가 가지고 온 케이크가 정한의 결혼식에 쓰일 케이크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혓바닥을 박박 긁어 뱉어버리고 싶었다. 입 안에 퍼진 맛을 잊기 위해 뜨거운 차를 꿀꺽꿀꺽 삼켰다. 이 경박한 행동이 황 집사에게 어떻게 평가되고 있을지까지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자, 그럼….”

윤조는 황 집사가 제게 내민 새로운 오메가 후보를 앞에 두고 침묵했다. 응접실을 가르고 들어온 햇살이 테이블 위의 사진을 반짝반짝 비추었다. 윤조는 그 위에 가볍게 피어오른 먼지로 시선을 돌렸다. 그게 꼭 저 같았다.

“아무래도 집사님께서 도련님의 결혼 방식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신 것 같네요.”

황 집사는 정한의 결혼 방식을 도통 이해하지 못하는 윤조를 배려하여 정한이 직접 오메가를 선별할 수 있게끔 조치하겠다 하였다. 조금도 반갑지 않은 배려였다.

윤조는 원치 않는 배려에 대한 보상으로 결혼 진행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했다. 황 집사가 제게 태블릿으로 건네준 많은 선택지를 고르고 또 골랐다. 결혼식 장소, 시간대, 장식할 꽃의 종류, 요소요소에 쓰일 음악 등등. 항목이 하나씩 체크될 때마다 정한의 결혼이 가까워졌다. 당장 내일 결혼해도 될 만큼.

“그럼 이제, 도련님 의사와 날짜만 정하면 되겠네요. 수고하셨습니다.”

달아난 줄 알았던 열감기가 다시 찾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면, 황 집사가 가져온 케이크에 독이라도 들었던 걸까. 정한의 결혼 케이크라는 이름이 붙은 독.

“조만간 또 찾아뵙겠습니다.”

윤조는 뒤틀리다 못해 그대로 굳어버린 듯한 속을 안고 황 집사를 배웅했다. 배가 터질 듯했다. 정한의 말이 맞았다. 작아서 이조차도 담지를 못했다.

“조심히….”

“네, 그럼 이만.”

목을 타고 저릿한 충동이 치밀었다. 끝까지 배웅하는 것이 예의겠지만, 윤조는 더는 참을 방법을 몰랐다. 황 집사의 차가 채 대문을 빠져나가기 전, 윤조는 다급히 저택으로 뛰어 들어갔다. 현관에 이르렀을 때는 배가 쥐어짜지는 듯 울컥거렸다.

윤조는 발을 헛디뎌 가며 방금까지 황 집사와 앉아 있던 응접실을 지나쳤다. 어찌나 땀이 나는지, 자꾸만 손에서 문손잡이가 미끄러졌다. 거의 울 지경에 이르렀을 때, 윤조는 애써 자신을 진정시킨 뒤 신중히 화장실 문을 열었다. 금방이라도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 것만 같았다.

“우욱…!”

황 집사의 배려로 미리 맛본 정한의 결혼식에 쓰일 케이크를 게워냈다. 더는 나올 게 없을 때까지 붙들고 있었으나, 속이 후련해지지는 않았다. 미운 것이 둥둥 떠다니는 변기의 뚜껑을 덮고 물을 내렸다. 그 앞에 주저앉은 윤조는 더러워진 입가를 닦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외면하면 외면할수록 현실이 잔인하게 찾아오는 듯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외면하고 싶었다.

윤조는 붉게 충혈된 눈을 깜박였다. 축축하게 젖은 속눈썹이 느껴졌다. 혹시라도 맺혀버릴까 소매로 눈두덩을 꾹 눌렀다. 아직은 울 수 없었다. 울게 된다면, 그땐 정말 외면할 수 없을 테니까.

*

검문소를 지나기 전, 권 회장에게 전화가 왔다. 황 집사는 속도를 늦추며 통화에 응했다.

“예, 회장님.”

-제정신이야?

저택을 나오기 전 보낸 만남의 결과를 그새 확인한 모양이었다.

-황 집사 손이 떨린 게 아니고?

“같이 늙어 가는 처지에 놀리십니까?”

-그럼 이게 진짜란 말이지?

“예. 전부 집사님 뜻입니다.”

-정신 줄을 놨구만. 어째 의심도 안 해?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런 수가 보이지 않는다고.”

-흥. 그건 두고 볼 일이지.

황 집사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 어서 오기나 하라는 권 회장의 명령에 따라 속도를 높였다.

메라크의 도로는 단순하고 따분한 편이었다. 황 집사는 끝도 없이 이어진 길을 보다 라디오를 켰다. 팟! 하고 터지듯 소리를 뿜어낸 라디오에서 신경을 잡아끌 소식을 알려주었다.

황 집사는 차창에 팔을 기댄 채 제 맞은편에 앉아 있던 어린 집사의 얼굴을 떠올렸다. 파리하게 질려서는 아닌 척 애쓰는 게 꽤 고달파 보였다.

그게 애쓴다고 참아지던 건가.

오래된 감정을 더듬다가 마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최소한의 연민에만 그치기로 했다. 오늘, 그 어린 집사에게 고독한 밤이 찾아와 안 되었다고.

*

한참을 주저앉아 있다가 몸을 추스르고 일어났다. 윤조는 세면대에 기대어 제 창백한 얼굴을 거울로 확인했다. 어째 속을 비워냈는데도 안색이 이 모양일까. 고개를 내저으며 수전을 켜자 차가운 물이 금세 두 손바닥을 채웠다.

몇 차례 입을 헹구고 또 입가를 닦는데 물소리 사이로 이질적인 음이 느껴졌다. 윤조는 빨갛게 언 손끝으로 수전을 내리고 귀를 기울였다.

Rrrrr.

전화벨이었다. 홀로 있을 때면 반갑지 않은 것들만 찾아온 탓에 윤조는 전화벨을 못 들은 척하려다가 뒤늦게 화장실에서 나왔다. 젖은 손을 아무렇게나 옷에 닦고 수화기를 들었다.

-서 집사?

생각지 않은 발신인의 목소리에 윤조는 깜짝 놀라 말을 잃었다.

-왜 대답이 없어?

“아… 네. 사장님.”

-무슨 일 있어?

“아뇨, 아무 일도 없어요. 사장님한테 전화 올 줄은 몰라서요.”

-내 목소리 못 알아들은 건 아니고?

“그럴 리가요. 제가 어떻게 사장님 목소리를 못 알아들어요….”

-그럼 다행인데.

귓가에 바로 울리는 정한의 목소리가 간지러워 윤조는 홀로 웃었다. 목소리 하나에 이렇게 기분이 달라지다니, 스스로가 우스웠다. 잠시 침묵이 자리한 사이로 조용한 저택과는 다른 소란이 끼어들었다. 오가는 고성에 윤조는 문득 정한이 걱정되어 그가 제게 물었던 말을 되물었다.

“사장님, 왜 이렇게 시끄러워요? 무슨 일 있으세요?”

-일은 무슨. 병원이 다 그렇지.

“아, 그렇겠네요….”

-근데, 조금 다르긴 해.

정한이 드물게도 한숨을 내쉬었다. 윤조는 정말 그에게 일이 생겼나 싶어 바짝 긴장했다.

-나 나쁜 의사다. 안 그래?

“네?”

-환자 앞두고 한숨이나 쉬고.

“아… 뭐, 그럴 수도 있죠. 저도 저택 뒤편 낙엽 쓸 때 한숨 나와요. 쓸어도 쓸어도 계속 떨어지거든요.”

정한이 웃었다. 윤조는 정한의 웃음을 따라 미소 지으며 전화기의 숫자 버튼을 매만졌다. 그의 목소리를 가까이서 듣고 있자니 괜히 몸이 배배 꼬였다.

-나도 서 집사랑 같아.

“네…?”

-낙엽처럼 계속 환자가 나타나네.

“아, 그럼….”

잠시 뜸을 들인 정한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작게 중얼거렸다.

-오늘 못 들어갈 것 같아.

윤조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수화기를 꽉 붙들었다.

“혹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요?”

환자가 많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정도라면 꼬박 밤을 지새워야 한다는 뜻 같아 윤조는 자신이 무엇이라도 정한을 도울 수 있었으면 했다.

-집 잘 지키면 돼.

“그거면 돼요?”

-그게 얼마나 어려운 건데. 그 넓은 집을 혼자.

“보안 요원분들 계시는데요, 뭘….”

-아니, 그 넓은 집에서 혼자 잘 수 있겠냐고.

“그럼요… 어린애도 아니구….”

-무서우면 전화해.

“안 무서워요.”

-진짜야, 무서우면 전화해.

“받으실 수는 있어요?”

-노력할 거야.

빈말은 아닌 듯했다. 윤조는 제게 마음을 써주는 정한의 말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곧 그를 찾는 부름에 아쉽게 전화를 끊어야 했지만.

-문단속 잘하고.

“네, 사장님.”

걱정하지 말고 몸 잘 챙기라는 말을 이으려는데 전화가 끊겼다. 윤조는 순식간에 온기를 잃은 수화기를 내려다보았다. 생생하게 이어졌던 순간이 너무나 쉽게 끊어져 기분이 이상했다.

정한의 목소리로 간지러웠던 귀를 매만지다, 식은 찻잔과 크림이 묻은 접시를 챙겨 주방으로 향했다. 정한이 퇴근하기 전까지 늘 혼자였던 저택이었지만, 그가 오지 않음을 안 이후로 기이하게 넓게 느껴졌다. 어쩐지 주변 온도도 서늘해진 것 같아 팔을 문지르며 개수대에 찻잔을 내렸다.

수전을 켜자 물이 빠르게 쏟아졌다. 기분 탓인지 평소보다도 소리가 크게 울렸다. 정한에게 무섭다는 핑계로 전화를 걸고 싶어졌다. 그런데 생각하자니 정한의 전화번호를 몰랐다.

모르는 건 왜 이리도 자주 나타나는 걸까.

정한에 대해서 다 알 것이라는 듯이 저를 대하던 황 집사가 떠올랐다. 윤조는 황 집사가 건네는 많은 물음의 해답을 몰랐다. 모르는데도 모른다고 할 수 없었다. 순간 눈앞이 아득해지며 가슴이 답답해졌다. 금방이라도 깊은 생각에 빨려 들어갈 듯해 서둘러 식기를 씻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는 식기가 오래도록 씻겼다.

*

정한의 퇴근 시간에 이른 시각. 윤조는 계단을 내려가 응접실 소파에 앉았다. 그가 돌아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버릇처럼 몸이 기다렸다.

미련한 눈길로 현관문을 보고 있는데 예기치 않게 벨이 울렸다. 윤조는 정한이 왜 자신이 불안할 때 벨 소리를 죽여 놓았는지 알 듯했다. 저건 사람을 미치게 하는 소리였다.

깜짝 놀란 가슴을 다독이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벨을 누르고 찾아올 사람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윤조는 다시 울리는 벨 소리에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현관문을 앞에 두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조금의 각오가 필요했다.

“…변 팀장님?”

문손잡이를 힘껏 붙든 채 문을 열어 내자 그 너머에 예상치 못한 사람. 아니, 사람들이 서 있었다. 윤조는 버티고 선 듯한 보안 요원들을 보고 당황했다.

“뉴스 보셨습니까.”

저택에는 뉴스를 접할 만한 매체가 많았지만 모두 윤조의 관심 밖이었다. 그나마 신문을 좀 보긴 했으나 그마저도 십자말풀이나 복권 당첨 번호 확인이 고작이었다.

“집사님?”

“아, 네.”

“뉴스, 보셨냐고 물었습니다.”

윤조에게 ‘뉴스’란 세상사의 일이 아니었다. 정한이 퇴근하지 않는 일 정도가 제게는 ‘뉴스’였다. 그는 지금 윤조에게 전혀 뉴스거리가 되지 못하는 일을 묻고 있었다. 팀장과의 묘한 괴리감을 느끼며 윤조는 조심스레 답했다.

“아뇨, 근데 무슨 일 있나요?”

“아직 모르셨나 보군요.”

아무래도 팀장의 뉴스가 정한이 퇴근하지 못하는 제 뉴스와 관계가 있는 듯해 윤조는 다급히 팀장에게 다가섰다.

“혹시 병원…, 사장님께 일이 생겼대요?”

팀장이 진정하라는 듯 윤조를 향해 두 손을 펴 보였다. 윤조는 제 가슴께를 그러쥐고 팀장의 대답을 애타게 기다렸다.

“병원도 도련님도 아무 일 없습니다. 아직 두베역 공사가 한창이지 않습니까. 거기서 사고가 난 모양입니다.”

“아….”

“마침 시찰 중이던 고위 관계자들이 많이 다친 듯합니다. 이 때문에 테러일 가능성도 있다 하더군요.”

“그렇군요….”

윤조는 금세 관심을 잃고 반사적으로 응답했다.

“기껏 세워 올린 구조물이 무너지는 바람에 앞으로 사상자가 계속 나올 듯합니다. 하루 이틀로 끝나지 않겠지요.”

“큰일이네요….”

그건 그렇고, 요원들은 왜 찾아왔을까. 윤조는 이게 더 궁금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생각합니다. 예방만큼 중요한 게 없다고요.”

웃음을 띤 팀장이 요원들을 둘씩 짝을 맞추어 나누었다. 각각의 위치를 지시하고는 다시 윤조를 보았다.

“특별 단속 하라는 도련님 명령입니다.”

“네?”

“새벽에도 한 번, 출입문 점검을 할 예정입니다. 최대한 주의하겠지만, 혹 소음이 일더라도 무시하시고 주무시면 됩니다.”

“아… 지금, 문단속하러 오신 거예요?”

“네. 오늘 혼자 계시지 않습니까.”

주인이 없다고 이렇게 호들갑을 떨 일인가 싶으면서도 정한의 걱정이 기분 좋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윤조의 허락이 떨어지자 요원들이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요원들이 저택의 수많은 창과 출입문을 점검하는 동안, 윤조는 응접실 한가운데 서서 팀장의 무전을 흘려듣고 있었다. 서서히 범위를 좁히며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한 요원들이 처음 등장 때처럼 까맣게 모였다.

“그럼, 평안한 밤 되십시오.”

마지막으로 현관문이 닫혔다. 홀로 남겨진 윤조는 괜히 코끝을 매만졌다. 북적거리던 인원이 빠진 자리가 유난하게 느껴졌다. 정한이 없는 저택이 더욱 실감 났다.

윤조는 천천히 등을 돌려 계단을 올랐다. 딱히 할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어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그 탓일까. 잠이 오지 않았다. 애써 눌러 둔 생각이 덜컥거리며 떠오르려 했다. 그때마다 윤조는 몸서리치며 뒤척였다. 어서 자야 했다. 잠이 들어야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새벽에 있을 거라던 출입문 점검 소음을 들었을 때까지도 윤조는 잠들지 못했다. 그건 커튼 사이로 아침이 찾아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윤조는 새가 우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서둘러 단장을 하고 복도로 나왔다. 저택이 조용했다. 아직 정한은 오지 않은 듯했다.

윤조는 침착하게 하루를 시작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과를 보내며 시간이 어서 가길 바랐다. 하지만 정오가 되어도 정한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내심 퇴근까지 기다리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면서도 불쑥 가슴이 답답해져 현관을 기웃거리게 되었다. 저택을 날카롭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아니었다면 이번에야말로 나가고 말았을 테다.

윤조는 구두가 벗겨질 정도로 다급히 걸어가 수화기를 들었다. 찰칵거리며 손에 감긴 수화기 너머, 귀에 익은 소음이 흘러나왔다.

“사장님?”

-기다렸어? 바로 받네.

“…아, 마침 옆에 있었어요.”

-그래?

정한의 낮은 웃음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윤조는 그에게 말을 거는 듯한 말소리를 기다렸다가 물었다.

“저기, 언제 오세요?”

-오늘도 못 갈 것 같아.

“아….”

윤조는 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아슬아슬한 경계선이 느껴졌다.

-그래서 말인데, 나 속옷이랑 옷 좀 챙겨서 보내줄래?

숨통이 트이는 듯한 말에 윤조는 언제 울상이 되었나 싶게 급히 웃음 지었다.

“네, 그럴게요. 중앙 병원으로 가면 돼요?”

-네가 오려고?

“그럼 누가 가요?”

-서 집사가 올 필요 없어. 보안 요원 보내.

“제가 가면 안 돼요…?”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여기가 워낙 복잡해서.

“저 잘 찾아갈 수 있어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게 제 일이잖아요. 사장님 보필하는 거.”

잠시 뜸을 들이는 정한을 누군가 불렀다. 윤조는 조급한 마음에 찾아가겠다는 제 말만 전하고 수화기를 내렸다. 숨을 죽인 채 잠잠한 수화기를 한동안 노려보았다. 정한은 다시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못 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곧장 정한의 방으로 가, 그의 옷 방을 뒤졌다. 넉넉한 양의 속옷과 양말 또 여벌 옷 따위를 챙기다가 다시 되돌려 놓았다. 종류별로 딱 하나씩만 챙겨 안았다. 혹여나 그가 당분간 저택에 오지 못한다면 또 갈 일이 생기도록.

윤조는 사심만 가득 담은 가벼운 가방을 메고 저택을 나섰다.

“어디 가십니까, 집사님?”

정한은 정말 바빴던 모양인지 보안 팀장에게도 연락하지 못한 모양이다. 윤조는 가방끈을 꽉 붙잡고 정한의 명령이라는 듯이 제 마음을 읊었다.

“사장님이 오늘도 못 오신다고 저보고 옷을 가져오라 하셔서요.”

“아, 그렇습니까? 그럼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곧 차를….”

“아뇨, 택시 불렀어요.”

“예?”

“계세요. 혼자 다녀올 수 있어요.”

보안 요원과 함께 가면 바로 돌아와야 할 게 뻔했다. 어쩌면 정한을 보지 못할지도 몰랐다. 윤조는 애가 탔다.

“중앙 병원 어디로 가야 하는지만 알려주시겠어요?”

제 거짓말이 들킬까 속사포처럼 말하는 윤조를 빤히 보던 팀장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윤조는 속으로 안도하고 대문 앞에서 택시를 기다렸다.

정한의 저택은 두베 시내와 그리 멀지는 않았지만, 승객의 수요가 적어 왕복 요금을 내야 했다. 윤조로서는 이 시스템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그렇게 돈을 쳐주지 않으면 오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버스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자전거로 갔다가는 정한에게 화를 살지도 몰랐다.

“저기 오는군요.”

까만 택시가 가벼운 흙먼지를 날리며 저택 앞에 섰다. 윤조는 냉큼 택시 뒤편에 올라탔다. 잠시 멈칫한 팀장이 앞문을 열고 허리를 숙여 곧 탈 것처럼 택시 기사를 바라보았다.

“중앙 병원 응급실로 부탁드립니다.”

팀장은 택시 기사의 대답을 듣고서도 몸을 물리지 않고 그를 잠시 살폈다. 글러브 박스에 붙은 기사의 신상도 눈으로 훑었다. 혹 자신이 택시를 잘못 부른 건가 싶어 윤조는 잠시 긴장했다.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확인을 끝낸 팀장이 곧 저를 향해 인사를 건네었다. 윤조는 안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기사님.”

기사에게도 인사를 하고 나서야 팀장은 문을 닫고 물러났다. 그제야 택시가 저택 앞을 떠났다. 윤조의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피어났다.

*

한참을 달려 도착한 병원 앞에서 윤조는 당황했다. 정한의 말을 들었어야 했나, 잠시 후회도 되었다.

응급실 앞은 채 끼어들 틈도 없이 인산인해였다. 윤조는 가방끈을 꽉 쥐고 다른 입구가 없나 싶어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때 누군가 윤조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윤조는 제 옷차림을 훑어보는 남자와 눈을 마주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예의 차린 웃음을 지은 남자가 용건을 말했다.

“권정한 선생님 댁 집사님 맞으시죠?”

“아… 네.”

“따라오세요.”

윤조는 남자에게 손목이 붙잡혀 끌려가듯 들어갔다. 안까지 확실히 들어서자 남자가 손목을 놓아주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할 겸 허리를 숙였으나 그럴 시간도 없다는 듯 남자는 바쁘게 걸었다. 따라오라는 말이 들리지는 않았어도 명령처럼 등에 보였다.

복잡한 길을 요령 있게 뚫는 남자를 놓치지 않으려 윤조는 바짝 긴장하고 걸었다.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바깥에 있던 사람들은 우스울 정도였다.

“이쪽입니다.”

복잡한 구간이 끝나자 그나마 한산한 장소가 나타났다. 윤조는 응급실을 돌아보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응급실 풍경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보안 팀장의 말대로 하루 이틀 일로 끝나지 않을 듯했다.

“저기, 선생님. 사… 아, 권정한 선생님은 어디 계세요?”

“수술 중이십니다.”

“아…, 그렇군요.”

윤조는 자신의 방문이 괜한 짐이 된 것 같아 미안해졌다. 제 사심을 챙기자고 옷도 적게 가지고 온 것도 철없이 느껴졌다. 가벼운 가방끈을 움켜쥐며 윤조는 제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안에서 차 한잔 하고 가시라 했습니다. 그럼 이만.”

이윽고 나타난 적막한 복도, 그중 정한의 이름이 붙은 문 앞에서 남자가 짧게 인사를 건네고 돌아갔다. 윤조는 가만히 정한의 이름을 훑어보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불을 밝히고 들어선 정한의 개인 방은 서재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벽면에 빼곡한 책과 커다란 데스크, 또 그 앞에 마주 보고 앉을 수 있는 소파까지 꽤 익숙한 모습이었다. 윤조는 어깨에 둘러멘 가방을 소파에 내리고 찬찬히 방을 둘러보았다.

여벌의 가운이 걸린 옷걸이가 눈에 들어와 얼른 다가서자 정한의 향이 미약하게 풍겼다. 제 방문이 짐이 된 것만 같아 미안했던 마음이 언제 있었냐는 듯 기분이 들떴다. 찾아오지 않고서야 알 수 없는 정한의 이면을 보게 되는 건 퍽 설레는 일이었다.

윤조는 주인 없는 가운의 팔을 붙잡고 매만지다, 깔끔하게 정리된 데스크로 시선을 돌렸다. 커다란 모니터와 그 앞에 놓인 납작한 키보드를 손으로 더듬었다. 어쩜 먼지 한 톨도 없을까. 윤조는 제 손이 지난 자리를 신경 써서 보았다. 다행히 자신이 더럽히지는 않은 듯했다.

모니터 옆 연필꽂이에 꽂힌 볼펜과 샤프가 눈에 들어왔다. 모양이 기이한 막대도 몇 있었는데 어떤 용도인지는 알 수 없었다. 데스크 모서리에는 두 팔로 안아 들어도 휘청일 정도의 커다란 서류 산이 있었다. 얼핏 봐도 빼곡하게 적힌 말이 저는 읽을 수 없는 말이라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 흔한 액자 속 사진도 없고 장식품 하나 없는 게 정말 정한의 방이 맞았다. 윤조는 더는 살필 것 없는 구경을 끝내고 소파로 향하려다 서류 더미 아래에 끼인 길쭉한 종이를 발견했다. 저택에서 습관적으로 정리하다 보니 무심코 종이를 빼내어 가지런히 모으게 됐다. 윤조는 정리한 종이를 정한의 데스크 한쪽에 반듯하게 놓았다. 다시 소파로 가려던 윤조의 걸음이 멈칫했다. 방금 자신이 매만진 종이 위로 눈길이 닿았다.

포개어져 있던 종이가 엇갈리며 다시 윤조의 손에 들렸다. 윤조는 종이 오른편에 그려진 인물의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사진 속 주인공은 피아니스트라고 소개받은 정한의 결혼 후보군 중 하나였다.

비록 읽을 수 없는 글자일 뿐이었지만 윤조는 이 종이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다. 황 집사가 제게 말한 조치가 이것이었나 보다. 이런 우연을 가장한 만남이 반복된 뒤 정한의 옆에 서게 될 오메가가 정해지는 거였다.

윤조는 보고, 들었던 많은 후보를 떠올렸다. 그 빛나는 자리에 자신이 설 곳은 보이지 않았다. 빛 속에서 부유하던 먼지. 그게 자신이었다. 지난밤, 잠을 뒤척이게 하던 생각이 엄습했다.

연주회 티켓을 제자리에 돌려놓은 뒤 서둘러 정한의 방을 나왔다. 차 한잔을 마실 겨를도, 내심 그를 기다려 볼까 했던 기대도 사라졌다. 떠밀리듯 나선 복도에서 윤조는 멍하니 섰다. 병원은 바쁜 사람들이 많은지라 이런 윤조를 눈여겨보는 이는 없었다. 다만 제 차림새가 유난하여 스스로 버티기가 어려웠다. 이만 저택으로 돌아가는 편이 좋을 듯했다.

윤조는 왔던 길로 가려다가 그 복잡한 곳에서 자칫 사고를 칠 것 같아 발걸음을 돌렸다.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무작정 나선 걸음이었지만 제대로 된 길이었는지 일반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정문을 찾아 걷던 윤조는 사람들이 잔뜩 앉아 있는 곳을 발견하고 그들의 시선이 닿은 벽면을 보았다.

이 많은 인원이 보기에는 그리 크지 않은 화면 속. 그곳에서 보안 팀장이 말하던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윤조는 화면을 확인한 순간 또 한 번 팀장과의 괴리감을 느꼈다. 두베역 폐쇄가 무기한으로 이어질 거라는 자막이 팀장의 뉴스라면, 윤조에게는 그 소식을 전하는 사람 자체가 뉴스였기 때문이다.

사진 속 정지한 얼굴이 아닌, 화면 속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지나친 현실감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정한과의 모습까지 그려졌다. 윤조는 그 상상에서 도망치듯 병원 내부를 가로질렀다. 저기 출구가 보였다. 숨을 가쁘게 내쉬며 오로지 유리문 너머의 빛만 보고 걸었다.

“아!”

어찌나 서둘러 나왔는지 행인과 부딪치고 나서야 윤조는 걸음을 멈추었다.

“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윤조는 허리를 굽실거리며 훌쩍 밀려난 행인을 보았다. 행인은 제 어깨에서 흘러내린 가방을 고쳐 올리며 윤조를 가볍게 훑어보았다. 불쾌하기보다는 반가운 시선이었다.

“괜찮아요, 집사님. 집사님도 실수할 수 있죠.”

집사를 부려본 태도로 윤조의 사과를 받아준 행인은 학생으로 보였다. 교복을 입은 두 사람이 끊겼던 수다를 이으며 윤조의 앞을 지나쳤다. 윤조는 멀어지는 학생들을 응시하다 택시 정류장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택시 정류장은 병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윤조는 다시 걸음을 이었다. 그사이에도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이 여럿 지나갔다.

정류장에 이른 윤조는 그곳에 비친 제 집사 유니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옷을 받았을 때만 해도 이런 기분을 느낄 줄 몰랐다. 당시에는 거울에 이리저리 몸을 비춰 보며 나름 뿌듯해했었다. 한데 지금은 그때와 달리 제 어깨가 너무도 작아 보였다.

윤조는 제 옷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급히 어깨를 펴고 묻지도 않은 먼지를 털 듯 제 소매를 탁탁 털어내었다.

탁. 탁.

그 소리가 옛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형, 우리 어때?’

‘예쁘네….’

‘그치? 역시 교복은 맞춰 입어야 해.’

미자르의 사촌 동생들이 처음 교복을 입었던 날이 떠올랐다. 키가 클 것을 대비해 품이 넉넉한 것을 샀으면 했는데, 꼴이 우습다고 몸에 꼭 맞는 것을 기어코 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새것을 사야 했을 때 어찌나 마음이 쓰리던지.

딴에는 참 열심히 산 것 같은데….

학교에 다니지 않아서 그런 걸까. 그래서 가운을 입고, 마이크 앞에 서고, 피아노를 치고, 회사를 이끄는 사람이 되지 못한 걸까. 집사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우스웠다. 면허도 없어 택시나 기다리는 집사 아니던가.

이윽고 마주하고 만 현실이 들이닥치듯 밀려왔다. 뿌옇게 얼룩진 정류장 벽에 비친 제 모습이 저택 거울 속에서 보았을 때와 달리 그저 초라하게만 보였다. 이 화려하고도 우아한 도시인 두베에서 자신이 그나마 번듯해 보이는 저택으로 어서 돌아가고 싶었다.

윤조는 정류장으로 성큼 걸어 들어가 몸을 숨기듯 기대어 앉았다.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를 보았다. 길가를 따라 흩날리는 마른 낙엽이 발치로 굴러왔다가 잠시 머물 사이도 없이 훌쩍 날아갔다. 윤조는 마치 그 낙엽이 된 양, 서늘하게 제 몸을 파고드는 바람을 느꼈다.

손으로 더듬어 본 옷이 행인들과 비교해 지나치게 얇은 걸 뒤늦게 깨달았다. 겨우 한 시간 남짓한 외출 시간을 예상했기에 보안 팀장도 윤조의 가벼운 옷차림을 지적하지 않았을 테다.

윤조는 자신이 얼마나 정한의 방에 머물렀는지, 병원에서 나오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을 지체했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아스팔트의 먼지를 머금은 바람이 차고, 하늘이 조금씩 붉어지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어서 돌아가고 싶은데 그조차 여의치 않았다. 몇 번 택시가 앞에 섰지만, 목적지를 듣고는 손을 내저은 탓이었다. 세 차례의 거절 뒤에 겨우 승차를 허가한 택시에 올라타 얼은 몸을 녹였다.

“집사님 옷이 까매서 그림자인 줄 알았지 뭐야.”

택시 기사는 넉살 좋은 웃음으로 윤조를 대했다. 윤조는 감사하다는 말을 하며 제 몸을 끌어안았다. 은은하게 울리는 음악 소리에 몸이 풀어지는 듯했다.

“내가 거기 몇 번 지난 적 있는데. 그런 멋진 저택에 사는 사람은 누굴까, 했거든. 그 댁 집사님 맞지?”

“네. 맞아요….”

“집사를 태우는 건 처음이야. 신기하네.”

다들 그러더라구요, 저 같은 건 처음이라고….

윤조는 작게 중얼거리며 차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온통 붉어진 하늘이 보였다. 서서히 붉어져 이내 순간을 압도한 노을. 이를 처음으로 느긋이 본 때가 떠올랐다. 정한의 집사가 되었던 날. 불편한 팔로 보았던 창 너머가 꼭 저랬다.

생각해 보면 제 온전한 시간을 가지게 된 건 그리 오래지 않았다. 자신을 가꿀 시간이 없었다. 그러니 자책해서는 안 됐다. 아무리 모자라다 느껴져도, 그건 제 탓이 아니어야 했다.

애써 다독인 마음이 허무하게도 차창에 비친 윤조의 얼굴이 곧 밉게 일그러졌다. 참았던 마음이 어쩔 사이도 없이 툭 터졌다. 윤조는 제 손등 위로 떨어진 눈물에 놀라 그대로 고개를 숙여 울음을 삼켰다. 한데 그러면 그럴수록 울음이 새어 나왔다.

“잉? 집사님?”

윤조의 기척을 느낀 기사가 말을 걸어왔다. 윤조는 코를 훌쩍거리며 제 무릎을 꽉 움켜쥐었다. 젖은 손등이 미끈거렸다.

“아니, 왜 울고 그래?”

윤조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제 울음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런데도 도무지 진정하지 못하자 기사는 편히 울라고 잠시 윤조를 내버려 두었다. 윤조는 택시 기사의 친절에 기대어 한차례 긴 울음을 쏟아낸 뒤에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죄송해요.”

말을 잇지 못할 정도의 울음은 지나갔어도, 눈물은 계속해서 떨어졌다. 윤조는 그간 제 마음에 고여 있던 눈물을 막지 않고 흘려보냈다.

“나한테 죄송할 건 없는데. 어휴, 짠하게도 운다. 주인한테 혼났어?”

“…아뇨.”

“아니긴. 혼났네, 혼났어. 왜 택시를 타나 했더니 버려 두고 갔구만?”

버리고 가는 주인도 있나. 제 주인은 집사 혼자 잔다고 사람을 시켜 문단속도 하는 사람이었다.

“아니에요. 저희 사장…, 주인님 그런 사람 아니에요.”

“그래?”

“네. 아니에요. …차라리 혼났으면 좋을 정도로 좋은 분이에요.”

백미러로 저를 확인하는 택시 기사의 눈짓에 의심이 서려 있어 윤조는 마음이 졸아들었다.

“정말이에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분이에요. 나쁘게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아, 그럼. 오해 안 해.”

윤조는 택시 기사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안심했다. 자신이 어느 저택의 집사인지 알게 된 택시 기사가 괜히 저택의 주인을 나쁘게 알게 될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물어. 어디서 괴롭힘 당하고 그런 건 아니지?”

“예…?”

“아니, 집사님 나이가 꽤 어려 보이는 게, 꼭 내 아들 같아서 그래. 누가 괴롭히는 거 아니지?”

“…아니에요. 그냥, 제가… 저를 괴롭히는 거예요.”

“집사님이 집사님을?”

“네, 제가….”

윤조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손등 위로 눈물이 투둑, 떨어졌다.

“제가, 못난 주제에 욕심이 많아서 그래요.”

“어디서 잘난 집사를 본 모양이지?”

잘난 집사. 제 질투할 대상은 오로지 집사일 뿐. 윤조는 자신의 터무니없는 욕심을 비웃었다.

“네…. 그렇게 잘난 집사를 본 적 없어요.”

“집사님은 젊다기보단 어린 사람인데. 그럼 열심히 하면 돼. 어린 게 재산이야. 저어기 두베 제일가는 회장님도 집사님 나이가 부러울걸?”

글쎄, 권 회장이 자신을 부러워할 일이 있을까. 윤조는 코를 훌쩍이며 기사의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욕심 날 나이야. 나도 젊을 땐 그랬어. 거기서 한 10년만 투자해 봐. 이렇게 울 일도 없어져.”

“…10년.”

“그래, 10년.”

10년이면 정한에게 아이가 다섯은 생길 것 같았다. 윤조는 입술을 깨물며 또 고개만 끄덕였다.

“집사님?”

젖은 손을 닦던 윤조는 기사의 부름에 고개를 들어 보았다.

“이거 내가 좋아하는 노랜데, 볼륨 좀 높여도 될까? 괜찮지?”

“아…, 네. 괜찮아요.”

“힘내라구.”

“…네. 고맙습니다.”

잔잔하게 흐르던 이전 음악과 다르게 마치 등을 두드리는 듯한 활기찬 음악이 차 안에 울려 퍼졌다. 윤조는 남은 눈물을 닦고서 창밖을 보았다. 어느새 까만 밤이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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