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다음 날도 정한의 퇴근이 요원하여 윤조는 다시 중앙 병원으로 향했다. 쭈뼛거리지 않고 타인의 도움 없이 정한의 방에 잘 찾아 들어가 큰 가방에 넉넉하게 챙겨 온 옷을 그대로 두고 나왔다. 어제와 같은 일이 생길까 함부로 살피지 않았고 제 모습이 비치는 곳으로는 시선도 두지 않았다.
“하….”
택시를 타고 오며 머릿속으로 그렸던 일이 생각보다 빠르게 또 홀가분하게 끝나서 얼떨떨했다. 어딘가 허무한 기분까지 들어 택시 정류장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사실 정한의 말대로 이번만큼은 보안 요원을 보냈어도 될 일이다. 겁먹은 생쥐처럼 바짝 긴장해서 굳이 또 스스로 온 이유는 뻔했다. 그렇게 울고서도 정한이 보고 싶어서였다.
그런 주제에 막상 찾아온 병원에서 도망치듯 달아나고 있으니 꼴이 우스웠다. 참 미련하다 싶어 자신을 비웃고 있는데 옆자리에 누군가 앉았다. 저와 같이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이려니 하며 쌩쌩 지나기만 하는 일반 차량을 훑어보는데, 시야에 걸리는 긴 다리가 눈길을 끌었다. 앞으로 쭉 내민 다리가 왜 이리도 익숙한지. 거기다 저 구두는…. 윤조는 다리를 따라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옆 사람을 보았다.
“어쩜 그렇게 빨라?”
“…사장님.”
“내 앞에서만 어설프게 굴었나 싶을 정도로 재빠르더라, 서 집사?”
앞을 보고 있던 정한이 고개를 돌려 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요 며칠 괴로웠던 마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듯했다. 벌어지려는 입을 애써 다물며 윤조는 인사를 해 보였다.
“잘 계셨어요?”
“아니. 못 계셨어.”
“많이 바쁘셨나 봐요. 잠은 좀 주무셨어요?”
“아니, 못 잤어.”
“아… 식사는요?”
“식사가 다 뭐야. 배고파 죽겠네. 서 집사 밥 먹었어?”
“네.”
“그래…?”
먹었어도 먹지 않았어야 했는데, 입이 생각과 다르게 말하고 말았다. 윤조는 뒤늦게 제 입을 틀어막았다. 저를 보고 웃은 정한이 훌쩍 일어났다.
“그럼 차 마실까? 어제 차 안 마시고 갔던데.”
윤조는 막 제 앞에 선 택시를 보다 쭈뼛거리며 일어났다. 정한이 택시 쪽으로 미안한 인사를 해 보이고 머뭇거리는 윤조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저기가 좋겠다.”
윤조는 정한이 가리킨 도로 맞은편을 보았다. 어제는 보이지도 않던 귀여운 카페가 보였다. 어쩐지 정한과 어울리지 않아 입술을 슬며시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근데 이렇게 나와 계셔도 돼요?”
“서 집사까지 이러기야?”
“죄송해요.”
“죄송은 무슨.”
정한의 손이 가볍게 머리를 스쳤다. 윤조는 제 흐트러진 머리를 고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정한을 힐긋거리기나 했다. 곧 나타난 횡단보도에서는 시선이 눈치채여 급히 눈을 돌려야 했다.
“왜, 재미있다며. 이제 재미없어?”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봐. 보라고 있는 얼굴인데.”
“…기분 나쁘실까 봐.”
“내가 기분 나쁘다 했어?”
“…아뇨. 그러시진 않았어요.”
“이상하네, 서 집사.”
“네?”
“며칠 못 봤다고 내외라도 해?”
“…….”
“섭섭하네.”
섭섭하다는 사람이 어깨동무를 해 왔다. 윤조는 제게 걸친 것이나 다름없는 정한의 팔이 무겁다고 생각하면서도 치워내지 못했다. 제 오른쪽 어깨로 삐죽 나온 정한의 손이 뺨을 두드렸을 때는 꼼짝없이 얼었다.
“왜 이렇게 멍해?”
“어… 그냥….”
“그냥?”
집요한 정한의 시선에 윤조는 택시를 타고 오며 들었던 라디오를 떠올렸다. 왜 하필 이 부분이 떠오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얼핏 핑계로는 좋아 보였다.
“…가을 타나 봐요.”
“그런 것도 해?”
“그러게요….”
가만히 얼굴을 살피던 정한이 속아주듯 웃었다. 마침내 신호가 바뀌었다. 윤조는 정한의 품에 거의 갇힌 것이나 다름없는 모양새로 횡단보도를 건넜다.
“서 집사, 혹시 날 집에서 쫓아내고 싶은 건가?”
도착한 카페에서 주문을 끝내자마자 정한이 의자에 등을 깊게 묻으며 말했다. 윤조는 정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눈만 동그랗게 떴다.
“그 가방 뭐야. 어제는 꼭 오늘 돌아오라는 듯이 달랑 옷 하나만 두고 가더니.”
“아…, 일이 길어지는 것 같은데, 제가 융통성 없이 군 것 같아서요. 계속 집에 연락하기도 번거로우실 것 같고….”
“어째 변명조네.”
“사장님 쫓아내려고 그런 거 아니에요.”
“농담이야.”
“네….”
“가을 엄청 심하게 타나 보다.”
윤조는 웃고 말았다. 정한이 제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고 여기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가을을 탄다는 말에서 굉장한 이질감을 느끼고 말았다.
“왜 웃어?”
“웃기잖아요.”
“뭐가?”
“제가 가을 탄다는 거요.”
“그럴 수도 있지.”
“서 집사가요?”
듣고 있던 정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윤조는 정한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보았다. 이 별것 아닌 시간이 요 며칠 얼마나 어렵게 느껴지던지. 제 미련한 욕심만 아니면 이렇게 웃을 일이 많을 텐데, 싶었다.
“서 집사.”
웃음을 그친 정한이 얼굴에서 표정을 지운 채 윤조를 보았다. 윤조는 테이블 위로 떨어진 뽀얀 햇살로 시선을 내렸다. 이곳에도 부유하는 먼지가 있었다. 그 사이에 자리한 정한의 손이 마치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윤조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불렀잖아.”
“아…, 네. 사장님.”
“서 집사, 무슨 일 있어?”
“아뇨. 일은요.”
“그래?”
정한이 테이블에 턱을 괴고 윤조의 얼굴을 빤히 살폈다.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턱을 붙잡고서 빛 속으로 끌고 갔다. 윤조는 제 얼굴로 쏟아진 빛보다 정한의 시선이 더 뜨겁다 느끼며 그의 손을 어떻게 떼어낼지 골몰했다. 아마, 그럴 수 없겠지만.
“저….”
차를 내어온 직원이 쭈뼛거리며 말을 걸지 않았다면 정한의 시선을 견디기 어려웠을 테다. 그에게 말해버릴지도 몰랐다. 윤조는 그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제 욕심만 아니면 웃을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직원이 차를 내려놓고 모든 세팅을 끝낸 뒤 돌아갔다. 윤조는 향긋한 차 향을 맡다가 정한의 찌를 듯한 시선에 서둘러 변명부터 뱉어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저 사고 안 쳤어요.”
“사고 쳐도 돼. 저택에 불을 내도 상관없어.”
“네?”
“무슨 일인지나 말해.”
“저 아무 일도 없어요….”
“없는 사람이, 그런 얼굴이야?”
“…정말인데.”
제 얼굴이 어떤가 싶어 매만져 보았으나, 이렇게 해서는 알 리가 없었다. 정한의 의심스러운 눈짓이 계속되었다. 윤조는 차를 머금으며 정한의 의심을 회피했다.
“안 드세요?”
“뭔지 말해주면.”
“진짜 아니라니까요. 없는 걸 어떻게 말씀드려요?”
“말하라고 했어.”
“그럼 드시지 마세요. 없으니까.”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하려 윤조는 투덜거렸다. 그러다 차만 덜렁 있는 게 어색해 슬쩍 정한의 눈치를 보았다.
“말할 생각이 든 거야?”
“그게 아니라…. 여긴, 쿠키를 안 줘요?”
“뭐?”
“쿠키.”
정한이 잠시 의심을 접고 쿠키와 케이크까지 주문해주었다. 윤조는 제 속을 뒤집어 놓았던 정한의 결혼 케이크가 생각나 케이크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이건 왜 안 먹어?”
“전 쿠키가 더 좋아요. 사장님 드세요. 배고프다고 하셨잖아요.”
“나 케이크 싫어해.”
“아… 그랬죠.”
윤조는 오르지 제 몫이 된 케이크를 꺼림칙하게 보았다. 이제 저도 케이크를 싫어하게 된 것 같은데, 이걸 말할 수는 없었다. 또 그놈의 이유를 말해야 했으니까.
“먹기 싫음 먹지 마.”
정한이 케이크 접시를 한쪽으로 치우고 쿠키를 더 주문해주었다. 윤조는 냉큼 쿠키로 입 안을 채웠다.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로 앉아 있던 정한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돌았다.
“서 집사.”
윤조는 정한이 또 어떤 말을 시킬까 두려워 계속해서 쿠키를 입에 넣고 있었기에 고개만 끄덕였다.
“이 주변 어떤 것 같아? 살기에.”
정한의 말을 퍼뜩 알아들을 수 없어 윤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정한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웃음소리를 내었다.
“좋을 것 같으면 끄덕이고, 아니면 저어.”
윤조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도 있고, 쿠키가 맛있는 카페도 있고, 정한의 병원도 있다. 나쁠 게 없어 보였다.
“그래, 알았어.”
살기 좋은 땅. 아름다워야 할 미관. 몇 번이고 고심하고 또 확인하는 일. 윤조는 퍼뜩 정한이 제게 조각처럼 내민 퍼즐을 맞추었다. 그의 계획이 꼭 신혼집을 위한 일이란 결론이 들었다. 생각과 함께 울컥 치밀어 오른 마음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아 서둘러 쿠키를 입에 밀어 넣었다.
“그렇게 맛있어?”
쿠키를 씹어 삼키며 윤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한이 살피듯 실내를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환한 쇼케이스에 한동안 머물렀다. 윤조는 쿠키 접시로 다시 손을 뻗었다.
“천천히 먹어. 다 네 거야.”
말로만 그쳐도 될 것을 강경책처럼 정한이 손을 가지고 갔다. 윤조는 제 왼손을 붙든 정한을 보며 뻑뻑한 입 안을 느꼈다.
“손도 작네.”
“…사장님이 큰 거예요.”
작다고 놀리는 손을 감싸다 못해 손가락 사이사이까지 침범한 정한이었다. 윤조는 삐죽하게 나온 정한의 긴 손가락을 보며 제 손을 가져가려 했지만, 어찌나 붙든 힘이 강한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Ppppp.
침묵만 남은 테이블 위로 귀를 찢는 듯한 호출음이 울렸다. 그제야 정한이 짧게 혀를 차며 꽉 붙들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윤조는 서둘러 제 몸 쪽으로 손을 당겼다. 옥죄던 느낌이 지나치게 반가운 것이라, 때에 맞지 않게 실수할 뻔했다.
“가 보셔야 하죠?”
“그런 것 같아.”
“가요, 바래다 드릴게요.”
“무슨 소리야. 난 됐어. 서 집사는. 더 먹고 갈래?”
“아뇨. 다 먹었어요.”
“다 먹었으면 일어나. 바래다줄게.”
“저 알아서 잘 갈 수 있어요.”
정한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일어났다. 윤조는 무심결에 같이 일어나 카페를 나왔다.
“서 집사 택시비는 어떻게 했어?”
“저 돈 있어요.”
“그거 다 나한테 청구해. 그리고 앞으로 이거 써.”
“이게 뭔데요?”
“귀찮게 지폐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윤조는 정한에게 받은 카드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온통 알 수 없는 글자들이었지만,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 듯했다.
“이거, 사장님 카드잖아요. 제가 왜 사장님 돈을 써요?”
“서 집사 나한테 월급 맡기잖아. 그럼 내 돈이 서 집사 돈이지.”
“…그게 그렇게 돼요?”
“그렇게 되네. 어, 저기 택시 온다.”
정한이 보안 팀장처럼 앞문을 열어 기사의 얼굴과 신상을 확인한 뒤에야 목적지를 알려주었다. 그러고는 뒷문을 열어 윤조를 뒤에 태웠다.
“서 집사.”
“네.”
“너….”
Pppppp.
정한의 호출기가 울었다. 윤조는 혀를 차는 정한을 보며 웃었다.
“어서 가 보세요. 차 맛있었어요.”
“조심해서 가.”
“네.”
“옷 가져다줘서 고마워.”
“제 일인걸요.”
“딱딱하긴.”
정한이 택시에서 물러났다. 그제야 차가 천천히 정류장을 돌아 나갔다. 윤조는 멀어지는 정한의 모습을 보았다. 그러다 차창에 비친 제 웃는 얼굴을 발견했다. 두 무릎이 흠뻑 젖도록 울었던 어제와는 다른 오늘이었다.
만난 것만으로도 이렇게 좋을 수 있을까.
윤조는 이 기쁨을 잃고 싶지 않았다. 어제처럼 제 욕심에 아파하며 우는 일은 싫었다. 그가 결혼하더라도 집사와 사장으로 잘 지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할 듯했다.
하지만 돌아온 저택, 황 집사가 기다리고 있다는 보안 팀장의 말에 윤조의 마음은 전에 없이 혼란해졌다. 황 집사의 방문이 지나치게 이른 탓이었다.
“어서 가 보시지요.”
윤조가 쭈뼛거리며 들어가지 않자 팀장이 조심스럽게 윤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윤조는 시야에 나타난 팀장의 얼굴을 발견하고 어깨를 떨었다.
“집사님?”
“아…, 네….”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말과는 달리 윤조의 행동은 굼떴다. 꼭 길을 잃은 사람처럼 더듬듯 걸어 도착한 현관 앞. 윤조는 제 가슴 위로 손을 얹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전에 없이 불안하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킨 뒤에야 문을 열 수 있었다.
“늦었습니다. 기다리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병원에 다녀오신 길이라 들었습니다.”
윤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황 집사가 앉아 있는 응접실 소파 앞에 섰다.
“도련님께선 잘 계시던가요?”
“네, 잘 계셨습니다.”
“다행입니다.”
차를 내어 오려 양해를 구하고 주방으로 향했다. 굳은 손을 주무르며 윤조는 차근차근 챙겨야 할 것들을 눈으로 찾았다. 긴장을 엿보이고 싶지 않았다.
“계속 기다리시게 하네요.”
테이블 위로 조심스럽게 찻잔을 내리고 황 집사의 맞은편에 앉았다. 천장을 보고 있던 황 집사가 천천히 고개를 내려 윤조를 보았다. 어쩐지 황 집사의 얼굴에 미소가 배어 있어 윤조는 제 긴장이 괜한 것이었나 싶어졌다.
“연내로 결혼을 성사하라는 회장님의 명령이 있으셨습니다. 이게 다 집사님 덕분입니다.”
그 잠깐의 여유도 참지 못하겠다는 듯 황 집사의 말이 윤조를 치고 들어왔다.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윤조는 급히 시선을 내리며 웃어 보였다. 잘되었네요, 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덧붙이며.
“회장님께서 집사님을 어찌나 기특하게 보셨는지요.”
황 집사가 전에 없이 환히 웃음을 지으며 가방에서 눈에 익은 봉투를 꺼냈다. 윤조는 어렵지 않게 봉투의 정체를 예상했다.
“수고비인가요?”
“네. 지난번 수고비는 비할 바 없이 넉넉하게 넣으셨습니다.”
이번만큼은 수고비 명목으로 권 회장에게 대가를 지불받고 싶지 않았다. 윤조는 황 집사가 테이블 위로 미끄러트리듯 둔 봉투를 가져가지 않고 바라보기만 했다.
“받으세요. 그간 고생하셨지 않습니까.”
“제가, 뭘….”
“비밀도 잘 지켜주셨고. 어려운 결정도 척척 내려주셨죠.”
“아뇨, 그건… 수고라고 할 수 없어요. 응당 제가 할 일이었습니다. 이 돈은 받을 수 없습니다.”
윤조는 황 집사 앞으로 수고비 봉투를 밀어주었다. 지나치게 힘을 주어 찻잔이 달그락거리며 흔들렸다.
“혹시 따로 원하는 게 있으십니까?”
“황 집사님. 전 정말…, 사장님 결혼 일로 수고한 게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럼, 저희 쪽에서 드리는 퇴직금이라 생각하세요.”
“…네?”
“예상 못 하셨습니까? 도련님의 결혼 얘기를 들은 순간부터 생각하셨어야죠.”
윤조는 그대로 굳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황 집사를 바라만 보았다. 어떻게 그 순간에 끝을 예감했어야 했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 댁에 오메가가 들어옵니다. 집사님의 존재가 어떻게 느껴질까요?”
귓가에 빗소리가 났다. 문전 박대를 당했던 그날처럼 윤조는 오갈 데 없이 막연히 무언가를 기다리는 기분이 되었다. 그때야 운이 좋아 저를 데려온 사람도, 새로운 일자리도 구했지만, 지금은….
아니, 그보다….
“알아들으셨나 보네요.”
“제가 치료사인 거, 많은 분이 아시나 봐요…?”
“이쪽 일이, 워낙 감추기가 어려운지라…. 딱히 흠은 아닙니다만, 알고서는 넘어가기 어렵죠.”
“그럼….”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세요.”
“싫으… 시겠네요.”
“싫죠. 어느 오메가가 좋아하겠습니까?”
제 주인님은 집사를 버리는 사람이 아닌데. 새로 올 주인님은 집사를 버려야 하는 사람이었다. 윤조는 혼란함 속에서 저를 관찰하듯 보고 있는 황 집사에게 섭섭함이 치밀었다.
“그럼…, 처음부터 그걸 아시고 절 찾아오신 거네요?”
“이렇게까지 둔하신 분인 줄 몰랐습니다.”
“…제가 처음 뵐 때 말씀드렸잖아요. 저, 맹하다고….”
“그게 제 탓입니까?”
“아뇨…, 집사님 탓은 아니에요. 그래도… 같은 집사인데, 조금만 저한테 친절해주셨으면… 그게 섭섭해서 그랬어요.”
“…….”
“죄송해요…. 황 집사님 탓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황 집사는 이야기가 길어지는 게 싫은지 더는 대꾸하지 않고 제 할 말만 전했다.
“저 역시 서 집사님의 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다른 좋은 댁을 소개해 드리지요. 고용 안정도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윤조는 고개를 내저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전처럼 떼를 쓴다고 해서 끝날 일이 아닙니다.”
떼?
윤조는 눈썹을 찌푸린 채 황 집사를 보았다.
“일전에 집사님께서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자신은 도련님 소속이니 회장님 말씀을 들을 이유가 없다. 지금도 그런 떼를 쓰는 거 아닙니까?”
잊고 있던 제 막무가내였다. 권 회장의 막무가내만큼이나 상대를 황당하게 하는 떼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윤조는 그때처럼 떼를 쓰는 게 아니었다. 그럴 수 없었다.
정한은 언젠가 결혼할 것이고, 저는 그와 수없이 배를 맞춘 오메가였다. 이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런 오메가를 집사라는 이름으로 곁에 둘 사람, 저 역시도 어려울 것을 알았기에 다른 방법을 찾고 싶은 거였다.
“아니요. 저 떼쓰는 거 아니에요. 지금 상황이 어떤지, 다 이해하고 있어요. 다 알아요. …그런데요, 집사님.”
윤조는 떨리는 제 손을 감추려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 여기 남고 싶어요. 이 저택에서 사장님 집사로 일하고 싶어요. 그 방법은 없을까요, 황 집사님? 제발… 부탁드려요.”
가만히 윤조의 이야기를 듣던 황 집사가 짧은 한숨을 내쉬고 가방을 열었다. 윤조는 실낱같은 희망에 눈을 빛내며 간절하게 황 집사를 바라보았다. 황 집사가 가방에서 꺼낸 사진을 테이블 위에 차례로 늘어놓았다. 윤조는 의아한 얼굴로 사진을 살폈다. 갑자기 과거로 돌아간 듯했다.
“집사님, 이건….”
“자세히 보세요.”
윤조는 황 집사의 말대로 테이블 위의 사진을 찬찬히 살폈다. 머리로 깨닫기 전에 마음이 먼저 알아챘는지 순식간에 얼굴이 굳었다.
“맞습니다. 모두 알파죠.”
윤조는 튀어나올 듯 박동하는 제 심장을 느꼈다. 두려움과 슬픔으로 숨이 찬 듯 뛰어댔다.
“집사님이 이 댁에 남는 유일한 방법은 집사님께 새로운 알파가 생기는 것입니다. 각인이 확인되면 이곳에 머물러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각인… 이면.”
“더는, 다시는, 저희 도련님께 반응하지 않게 되지요.”
“…….”
“얼마나 안전한 장치입니까.”
안전.
윤조는 황 집사의 말을 중얼거렸다.
“자. 이제 선택하세요.”
빌어먹을 선택이 또 찾아왔다. 윤조는 주먹을 꽉 쥔 채 눈을 감았다. 오늘 낮에 본 정한이 떠올랐다. 제 옆에 슬쩍 앉아 말을 걸 때의 장난스러움과 제 이상을 감지하고서 의심하던 눈짓, 택시가 사라질 때까지 정류장에 서 있던 모습이 차례로.
제 부끄러운 욕심쯤이야 씹어 삼키면 그만이었다. 이제 울지 않고, 웃을 일만 있는 줄 알았다. 택시 차창에 비친 제 얼굴처럼. 하지만 눈을 떠 바라본 세상은 바람과는 달리 지독하기만 했다.
“이번에도 고르지 못하겠습니까? 이조차 제가 조치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요?”
윤조는 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알파를 고를 여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숨쉬기도 싫은 기분이었다.
“집사님….”
“네.”
“저….”
“둘 다 싫은 모양이군요.”
윤조는 순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싫었다. 그 어느 것도. 다른 저택의 집사가 되는 일도, 낯선 알파와 각인을 하는 일도, 싫었다.
“그럼 뭣 하나 손에 쥐지도 못하고 쫓겨나게 될 겁니다. 사촌 동생분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습니까?”
왜 여기에서 사촌 동생의 이야기가 나오는 걸까. 윤조는 퍼뜩 고개를 들어 황 집사를 보았다.
“회장님께서는 서 집사님이 도련님 테라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방해되는 요소를 모두 차단하셨습니다.”
“그게…, 제 사촌 동생인가요?”
“네. 실제로 동생분이 두베에 오고서 집사님을 수소문해 다녔습니다. 인력 사무소의 염한석 사장에게도 캐내려고 했었지요.”
언젠가 한석이 제게 와서 횡설수설하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시엔 이해하기 어렵던 말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회장님께는 그런 일… 무척 쉬운 일입니다.”
윤조는 아득해지는 기분에 두 주먹을 꽉 쥐었다. 황 집사가 말한 ‘차단’이라는 말이 거슬렸다.
“절 미자르로 보내시나요?”
“그렇게 곱게 말입니까?”
“네…?”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을 거라 예상은 했습니다만, 이건 너무 덜 전했네요.”
“무슨….”
“염 사장이 뭐라 했습니까. 이제 걱정할 일은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네, 그랬….”
“걱정거리를 없애는 것만큼 확실한 게 어디 있을까요.”
윤조는 숨을 멈춘 채 황 집사의 말을 되짚어 보았다. 어떻게 해석을 해도 하나의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부디 아니길 바라는 결론만이 떠올라 괴로웠다.
“제가, 치료에 집중하라고. 단지, 그 이유만으로. 정말…, 그랬다고요?”
황 집사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윤조를 바라보기만 했다. 모든 것을 긍정하듯이. 윤조는 제 두 손을 맞잡고 테이블 위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네 사촌. 삼촌. 그거 이제 신경 쓸 필요 하나도 없어.’
한때는 저를 안심하게 했던 한석의 말을 떠올렸다. 윤조는 호흡을 짧게 끊어 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 그랬어요?”
“관용을 베푸셨습니다.”
관용. 이 또한 관용일까. 윤조는 한때 제 가족이라 여긴 이들의 어렴풋한 얼굴을 떠올리려 했다.
“상대가 그리도 모진데 왜 정을 주십니까?”
“뭘 아신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악랄한 사람이었습니다.”
“직접 보기라도 하셨어요?”
“네.”
황 집사의 말에 윤조는 등허리를 바로 펴고 시선을 마주했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눈이었다.
“전 회장님의 집사입니다. 제가 보지 않고, 듣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집사님도 그러시지 않습니까? 도련님에 대해서, 다 아실 텐데요.”
아니, 몰랐다. 아는 듯하면서도 모르는 게 자꾸만 늘었다.
“그 구질구질한 인간들 걱정할 때가 아닙니다, 집사님.”
“걱정이 아니라….”
“한때의 연민이라도, 사치스럽다는 걸 알아두세요. 지금은 회장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때입니다.”
“…….”
“인정하기 싫으시겠죠. 그런데 사실입니다. 회장님이 집사님을 지키신 거예요.”
유감스럽게도 황 집사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 경비 삼엄한 저택에서도 삼촌의 존재는 제 마음 한구석에서 불안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한석이 제게 이제 걱정할 일이 없다고 하지 않았다면 두베 시내를 구경할 수 있었을까. 윤조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을 수 있었다.
“…예, 감사하네요.”
손끝, 발끝. 신체의 모든 말단에 힘이 빠졌다. 망연히 앉은 윤조를 채찍질하듯 황 집사가 테이블을 두드리며 주의를 집중시켰다.
“집사님.”
“…네.”
“집중하세요. 지금은 그 쓰레기들 따위를 생각할 때가 아닙니다. 집사님 거취에 관한 얘기 중이었습니다, 우리.”
“예…. 그랬죠.”
“그럼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죠. 집사님, 선택하셔야 합니다. 이곳에 남을지, 떠날지.”
정한과는 떨어지기 싫었다. 그러니 다른 댁에 집사로 가서는 안 된다. 이대로 고집을 부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 또한 안 된다. 그러면 죽어버려 멀리서도 보지 못할 테니까.
그럼 남은 하나는….
“마음을 정하신 모양이네요.”
“잠시만요.”
“네. 시간을 드리지요.”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윤조는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또 내쉬었지만 계속해서 호흡이 되지 않는 느낌에 가슴을 붙들었다.
“집사님?”
“잠… 잠시만요.”
들키고 싶지 않았다. 정한에게 품은 제 마음을. 그러면 그럴수록 저는 더 손쉬운 상대가 될 테니까. 윤조는 적어도 미자르의 사촌 동생만큼 쉽게 처리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 남기 위해 다른 알파와의 각인을 고민하는 것부터 틀려먹은 게 아닐까. 윤조는 저를 가만히 지켜보는 황 집사의 눈을 보며 깨달았다. 괘씸한 제 마음은 일찍이 황 집사와 권 회장에게 간파된 뒤라는 것을.
“사장님….”
사장님께는 혹시 이것도 비밀인가요. 사장님 옆에 올 오메가만 아는 사실인가요. 그래서 마음 넓은 사람처럼, 이런 집사도 받아들인 척하게 되는 건가요. 묻고 또 따지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정한을 부르는 호칭 하나를 입에 올린 순간 윤조는 무너졌다.
“이리 쉽게 보이셔서 어찌합니까.”
그간 어떻게 참은 마음인데. 쉽다고 하니 허탈했다.
“…죄송해요.”
“죄송할 게 뭐 있습니까. 우리야 일이 편해서 좋지요.”
윤조는 제게 손수건을 내미는 황 집사의 손을 보았다. 흐릿한 시야 너머가 도무지 믿고 싶지 않았다.
“결정하셨습니까.”
윤조는 황 집사의 손수건을 거절하고 제 젖은 턱을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훑었다. 그런데도 눈물이 자꾸만 흘러 고개를 푹 숙였다. 테이블 위, 바닥, 제 실내용 구두까지 빗물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포기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윤조는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제 선택지에 없는 것이었다.
“할게요. 시키는 대로 할게요. 그러니까… 약속 지켜주세요. 저 미자르로 끌고 가서 죽이지 마시고, 여기 있는 그 어떤 알파 집에 보내버리지도 마시고. 저 여기 있던 그대로. 사장님 옆에…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해주세요.”
울음을 삼켜 가며 제 의사를 전달한 윤조는 떨리는 손으로 무릎을 꽉 움켜쥐었다. 황 집사는 당분간 대답이 없었다. 긴 침묵 후, 윤조의 울음이 잠시 사그라들었을 때, 조용한 음성이 달래듯 귀를 파고들었다.
“그럼 이제 골라보시죠.”
뿌연 시야 너머, 사진을 가리키는 황 집사의 손이 보였다. 윤조는 프로필을 읊으려는 황 집사에게 손을 내저어 보이고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는 사진을 골라 그녀에게 쭉 내밀었다.
“정말 이걸로 괜찮겠습니까.”
총 일곱 장의 사진 중 가운데 있는 사진이 이가 빠진 듯 자리를 비웠다. 윤조는 그 빈자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정이 정해지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황 집사가 인사를 하며 훌쩍 일어섰다. 윤조는 황 집사를 배웅하려 서둘러 얼굴을 닦았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황 집사가 배웅은 되었다며 손을 내젓고 저택을 나갔다. 윤조는 제 눈물만 남은 테이블을 보다 화장실로 향했다.
세면대 가득 차가운 물을 받아 얼굴을 담갔다. 그런데도 자꾸만 뜨거운 눈물이 나왔다. 문전 박대를 당한 날보다도 더욱 거센 물줄기가 귓가를 때렸다. 세면대에서 넘친 물이 발치를 적셨다.
*
황 집사는 저택을 나오자마자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도 도통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았다. 이러다가 벼락 맞지, 하며 차로 가려는데 이 눈치 빠른 양반은 빈틈이 없었다.
“예, 회장님.”
-오늘 만난다고 했었나?
“끝내고 나오는 길입니다.”
-고단하겠구만. 오늘은 쉬어.
“그렇지 않아도 이대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햇살에 반짝이는 정원의 조경을 보며 황 집사는 차로 걸었다. 차 문을 열기 전, 이 말은 꼭 하고 넘어가고 싶어 잠시 버티고 섰다.
“그간 회장님의 많은 행적을 지켜봐 왔지만, 이런 기분이 드는 건 처음입니다.”
-왜, 징그럽기라도 해?
“잘 아시네요.”
황 집사는 크게 웃는 권 회장의 목소리에 잠시 휴대폰을 귀에서 떼었다.
-그래, 어찌 되었어.
“회장님 뜻대로 되었습니다.”
내심 놀란 듯 잠시 뜸을 들인 권 회장이 곧 호쾌하게 웃었다.
-아무렴, 아무렴. 우리 정한이가 틀릴 리가 없지. 고생했어. 황 집사.
황 집사는 차에 올라타 내내 긴장했던 몸을 기대었다. 사람을 코너로 모아 진심을 엿보는 일은 언제고 유쾌하지 않았다.
“다음부턴 이 비서 시키세요.”
-아, 그놈이 이 비서를 싫어하더라고.
황 집사는 기가 차서 웃었다. 저를 보낸 게 딴에는 배려랍시고 한 거였다.
-그럼, 내 정한이 더 데리고 있으라 할 테니까. 그사이 잘해 봐.
“회장님.”
-또 그놈의 그만하라는 소리면 나 더 안 들어.
“…예, 알겠습니다. 목이나 잘 닦아두세요.”
-그 사람, 참….
황 집사는 권 회장의 전화를 끊고 차창 너머로 펼쳐진 저택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당분간, 어쩌면 평생,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를 저택이었다. 아쉽지 않게 눈에 담은 뒤 시동을 걸었다. 가벼운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기 시작한 황 집사의 차가 도망치듯 저택을 빠르게 벗어났다.
*
홀로 저택을 지키는 밤. 윤조는 자주 슬펐고, 잠시간 멍했다. 다행히 잠은 잘 잤다. 생각을 그만두고 싶어 회피한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잘 잤으니 그만이었다.
변함없이 찾아온 반짝이는 아침. 이것을 지키려고 자신이 무엇을 내던진 건지 아직 실감이 없었다. 손에 익은 일을 기계처럼 해내고 잠시 쉬는 틈에 찾아온 기습이 아니었다면 어제 들은 엄청난 말은 꿈이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빨리요?”
-생각이 바뀌셨습니까?
황 집사의 전화였다. 알파와의 각인이 이틀 뒤로 예정되어 있다는 소식이었다. 윤조는 딱딱하게 얼어 황 집사가 있는 것도 아닌데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알겠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처음 정한의 결혼 소식을 알게 된 때와 비슷한 두근거림이었다. 이건 공포였다. 윤조는 떨리는 손을 다잡으며 어느새 노을이 지기 시작한 바깥을 보았다.
오늘도 정한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대로 그를 보지 못한 채, 온전한 자신으로서는 그를 느낄 수 없게 되어 만나는 건 조금 슬플 것 같았다. 아니. 많이 슬플 거다.
윤조는 가슴이 답답해져 저택을 나섰다. 붉은 노을이 까만 밤하늘을 가져오고도 저택 주변을 서성였다. 그러다 정원 입구에서 보안 팀장과 마주쳤다.
“산책을 오래 하시네요.”
“사장님이 안 계시니 심심해서요.”
“그러고 보니, 도련님 얼굴을 뵌 지도 꽤 된 것 같습니다. 워낙 이런 일엔 단련되신 분이라, 안부 묻는 것도 잊었네요. 집사님이 보시기엔 어땠습니까. 잘 계셨습니까?”
“잠도 잘 못 주무시고, 식사도 제때 못 하시긴 하지만… 괜찮아 보이셨어요.”
“괜찮아 보이셨다니 다행입니다.”
팀장은 정한의 부재를 많이 겪은 듯했고, 저보다 세상 뉴스에 밝으니, 어쩌면 정한의 귀가 일을 짐작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조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물어보았다.
“사장님이요, 언제… 오실까요? 내일은, 오실까요?”
“사고 현장에서 아직도 구조자가 하나둘 나오고 있다니까 어렵지 않겠습니까? 상시 대기 상태겠지요.”
“아…, 그렇군요.”
“제가 알기로 장장 열흘간 돌아오지 못할 때도 계셨습니다. 그때는 엄청났죠. 회장님께서 기다리다 못해 직접 행차까지 하셨으니까요.”
“…회장님이요?”
“예. 도련님 보고 싶으시다고 직접 보러 가셨습니다.”
“아….”
“회장님이 좀… 특이하시죠?”
윤조는 조용히 웃기만 했다. 특이하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정한의 아버지라는 게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닮은 구석이 없는 사람. 윤조에게 권 회장은 그랬다.
“제가 말이 많았네요.”
팀장은 민망한 얼굴로 인사를 건네고 다시 순찰을 나섰다. 누구보다도 깐깐하게 굴던 팀장의 입이 풀리다니, 자신이 여기서 지낸 지도 꽤 된 모양이란 생각이 들었다. 까만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팀장의 뒷모습을 보던 윤조의 시선이 그의 머리꼭지 위로 뜬 13구역의 상징인 북두칠성에 머물렀다.
“…맞겠지?”
무심코 팀장을 불러 확인하려던 윤조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그림자를 아쉬워하며 그가 다시 돌아오길 기다렸다. 발견한 별자리를 힐긋거리며 정원을 거닐고 있자니 멀리서 발소리가 다가왔다. 윤조는 냉큼 정원 입구로 나가 팀장의 눈에 들었다. 무전을 하던 팀장이 윤조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아직도 계십니까?”
“저게 궁금해서요.”
팀장이 윤조의 손길을 따라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저거, 북두칠성 맞죠?”
“네, 맞습니다.”
틀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13구역에 살면서 북두칠성도 알아보지 못하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윤조는 내심 다행이라 여기며 이만 저택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팀장의 말이 아니었다면 벌써 허리를 숙여 밤 인사를 했을 테다.
“그러고 보니 도련님께서 그러시더군요.”
“네?”
“참 멀리서 왔다고.”
“…….”
“저 미자르에서 두베까지.”
윤조는 팀장이 보고 있는 일곱 개의 별자리를 보았다. 팀장의 말 때문일까, 전보다도 반짝거려 보였다.
“저한테 한 말씀은 아닙니다만….”
“그럼….”
“지나다가 들었습니다. …제가 또 말이 많았네요. 도련님껜….”
“네…. 비밀로 해 드릴게요.”
“고맙습니다, 집사님.”
팀장을 기다리길 잘한 듯하다. 정한을 만난 것도 아닌데 꼭 그를 만난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정한이 자신과 함께이지 않은 순간에 저를 떠올려준 사실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좋은지, 윤조는 다음 날도 정원으로 나와 북두칠성을 보았다.
윤조의 시선이 자연히 미자르라 이름 붙은 별에 머물렀다. 저 먼 곳에 다시 돌아가지 않으려고 둘러, 둘러, 지금에 이르렀다. 이제는 떠나기 싫어 여기 남아 있다. 곁에 있고 싶어서. 하루에 몇 시간, 혹은 몇 분. 어쩌면 몇 초. 그 짧은 순간을 위해서.
그렇다 하더라도 좋았다. 팀장이 엿들은 정한의 순간마저도 좋으니, 그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내일 있을 무서운 일쯤이야 아무렴 어떨까. 차라리 어서 내일이 지나 정한이 돌아오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윤조는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복권 당첨의 행운을 빌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진실한 기도였다.
그때, 대문 쪽에서 가벼운 소란이 일었다. 윤조는 귀를 쫑긋 세우며 정원 입구로 나섰다. 정차한 차에서 정한이 내리는 게 보였다. 믿을 수 없어 별을 돌아보았다. 이렇게 빨리 들어줄 거면 일찍 빌 걸 싶었다.
“뭐 해, 거기서?”
정한은 쉽게도 윤조를 찾았다. 윤조는 쭈뼛거리며 정한에게 다가갔다. 생각지도 않은 정한의 등장에 너무 좋은 나머지 몸이 굳어버린 듯했다.
“나 안 반겨줘?”
윤조는 딴에는 열심히, 남이 보기엔 억지로 정한에게 다가갔다. 요원들이 차에 가까이 선 정한을 기다리느라 대기하는 게 보였지만 윤조의 걸음은 도통 속도가 붙지 않았다.
“역시 나 쫓아내려던 거 맞구나? 이젠 꼬리도 안 흔드네.”
“제가, 언제 꼬리를 흔들었어요?”
“꼬리가 있냐부터 물었어야지.”
보다 못해 훌쩍 다가온 정한이 윤조의 등허리를 훑었다. 윤조는 깜짝 놀라 등을 바짝 펴고 정한을 보았다. 정한이 웃으며 윤조의 머리를 흩트렸다. 그의 소매에서 살랑거리며 퍼지는 향에 윤조의 눈꺼풀이 가라앉았다. 이 당연한 일상에서 느끼는 정한도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마지막.
“사장님. 이제, 오신 거 맞죠?”
“어. 맞아.”
“그럼… 파티 해야죠!”
“파티?”
“네, 파티…!”
“지금?”
“네. 지금. 꼭 지금이어야 해요.”
정한의 눈 밑에 피곤한 그늘이 보였지만 윤조는 애써 외면했다. 잠시 윤조를 내려다보던 정한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윤조는 신이 나 껑충 뛰며 정한과 함께 계단을 올랐다. 그제야 차를 가져간 보안 요원이 저 멀리 사라졌다.
현관으로 달려가 환대하듯 문을 활짝 열었다. 정한이 기분 좋게 웃으며 저택으로 들어섰다. 아까까지만 해도 텅 비어 있던 저택이 그의 한 걸음으로 꽉 차는 듯했다. 윤조는 저 역시도 저택에 들어서서 있는 힘껏 현관문을 꽉 닫았다. 오늘만큼은 그 누구도 저를 방해할 수 없었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
영롱하게 맺힌 붉은 액체를 보며 윤조는 턱을 괴었다. 정한에게 듣기로 11구역의 ‘카프’라는 지역에는 한눈에도 다 담기 힘든 드넓은 포도밭이 있는데, 그곳에서 난 와인이라 했다.
밭의 크기만큼 양조장의 규모도 엄청나다는 설명에 무심코 구경하고 싶다고 하자, 정한이 그곳까지 기차 여행을 권했다. 그 달아빠진 쿠키도 먹어 보자며. 윤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와 단둘이 카프에 갈 것은 기대하지 않았다.
‘딱 한 잔이야. 그 이상은 안 돼.’
파티에 쓸 와인을 가지러 지하실에 다녀온 뒤, 정한은 씻기 전 윤조에게 와인 한 잔을 따라주었다. 그게 지금 저기 있는 붉은 액체였다. 윤조는 방 안에 흐르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며 잔으로 손을 뻗었다.
얼마 남지 않은 오늘이란 시간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면 용기가 필요했다. 지금에는 삼키는 것만 할 줄 알았기에 제 용기가 가장 빛났던 때를 떠올렸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어떻게 그의 탓을 하고, 그를 고용하고, 그에게 중독되었다는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고작 얼마 전인 과거의 자신이 신기하고도 낯설었다.
이 와인 한 잔이 그때의 용기를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윤조는 정한이 제게 따라준 와인에 염원을 담아 꿀꺽 삼켰다. 그런데 바람과 달리, 배 속에 가라앉은 말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윤조는 결국 한 잔만 마시라는 정한의 권고를 잊은 채 와인 한 병을 몽땅 비우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바닥이 돌아서 도무지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마저… 그랬지. 돌았지….”
열 오른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윤조는 혼자 웃었다. 그렇게 웃고 있자니 인기척이 났다. 눈을 들어 보니 정한이 보였다. 윤조는 전보다 더 크게 웃었다. 어이없다는 듯 저를 내려다보는 정한의 표정이 우스웠다.
“취했어?”
“네에….”
정한이 윤조의 몸을 소파 안쪽으로 밀며 걸터앉았다. 휑하니 비어버린 병을 들어 본 정한이 주인의 음식을 훔쳐 먹은 개를 혼내듯 손에 든 병을 눈앞에 가져다 대며 물었다.
“한 잔만 마시라니까 한 병을 마셔?”
“화났어요…?”
“내가 왜 너한테 화가 나?”
“눈썹이 이런데.”
윤조는 손을 들어 눈썹을 비쭉하게 그려 보였다. 정한의 눈썹이 더욱 뾰족해졌다.
“파티하자며.”
“해요.”
“취해서 누워 있는 주제에.”
“그럼 사장님도 누우세요.”
팔을 끌어당기자 단단한 바위 같은 몸이 못 이기듯 윤조의 몸을 반쯤 깔고 누웠다. 윤조는 끙끙대며 자리를 찾아 몸을 뒤척이다, 모로 누워 정한의 어깨에 턱을 댔다. 제 숨에서 진한 와인 향이 났다.
“카프…, 거기 갈 때요.”
“어.”
“사장님, 저랑 둘이 가요.”
“너랑 나 말고 또 누가 있었어?”
“…그러니까요.”
저는 그게 당연하다 생각했거든요.
윤조는 정한의 어깨에 입술을 묻으며 웅얼거렸다.
“똑바로 말해.”
“사당님….”
“너 혀 꼬인다. 그러게 누가….”
“저 있잖아요….”
정한이 짧게 한숨을 쉬며 응답했다. 윤조는 혀가 꼬이다 못해 말려 들어갈 것 같았다. 겨우 떠오른 말이 삼켜질까, 그 대신으로 정한의 어깨를 물었다.
“무슨 뜻이야?”
정한이 제 어깨를 살살 깨무는 윤조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윤조는 슬며시 눈을 들어 정한을 보았다.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인지 다 알던 제 주인이 이번에도 잘 알아주었으면 했다. 한데 정한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윤조의 앞머리를 가볍게 틀어쥐고 이렇게 말했다.
“전엔 잘만 보이더니. 요즘은 도통 모르겠네.”
“…….”
“알고 싶어서 그런가.”
“전엔 알기 싫으셨어요?”
“누가 불필요한 정보까지 주더라고.”
“이젠 필요한 것도 모르신단 말이네요?”
“어.”
“그럼….”
“말로 해. 이런 앙큼한 짓 하지 말고.”
윤조는 정한의 어깨에서 입술을 떼고 허공에다 한숨을 내쉬었다. 와인을 그렇게 마셨는데 아직도 목구멍에서 말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조금 더 마셔야겠어요.”
윤조는 얼른 일어나 앉아 정한의 몫까지 와인을 따랐다. 마찬가지로 일어나 앉은 정한은 윤조가 건네준 잔을 받아 들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윤조는 쨍 소리가 날 정도로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파티해요, 파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목구멍에 걸린 말이 올라올 때까지 윤조는 와인을 들이부었다. 바닥이 돌고 몸이 뒤집혔다. 아차, 하는 순간 목구멍에서 범람한 말이 어떤 것인지는 윤조도 몰랐다.
*
정신을 차렸을 땐 아침이었다. 절로 바보 소리가 나왔다. 윤조는 푹 가라앉은 목소리로 자신을 욕하며 이불에서 얼굴을 빼고 나왔다. 환한 빛이 눈을 찌르고 들어왔다.
얼핏 시야에 걸리는 빛의 세기로 보아 이른 아침인 듯했다. 일종의 직업병이라도 되는 걸까. 늦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정한의 출근을 돕기 위해 일어나려 했다.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는데, 허리 밑으로 욱신욱신한 둔통이 느껴졌다. 낯설지 않은 감각이었다.
설마, 하며 일어나 앉아 몇 번 눈을 깜박이자 흐린 시야가 찬찬히 맑아졌다. 가슴에 낭자하게 퍼진 입술 자국이 보였다. 씹힌 듯한 젖꼭지는 유난히 왼쪽이 부풀어 있었다. 윤조는 마저 이불을 걷어 제 밑을 보았다. 울혈처럼 퍼진 붉은 자국은 손으로 문질러보아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 게 어디 있어….”
온몸은 지난밤의 흔적으로 비명을 지르는데, 도무지 기억이라는 게 없었다. 억울해 미칠 것 같았다.
“어어엉….”
윤조는 고개를 들어 우는소리를 냈다. 그러다 아주 뒤늦게 천장의 조각을 발견하고, 자신이 정한의 침대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퍼뜩 돌아간 시선 끝은 텅 비어 있었다. 윤조의 눈동자가 빠르게 시계를 찾아 헤맸다.
“아….”
직업병은 무슨.
정한이 출근하고도 한참 지난 시간이었다. 윤조는 혀를 차며 침대에서 발을 내려 욕실로 걸었다. 불쑥 억울함이 치밀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기어이 말이 넘쳐서 입 밖으로 나온 듯한데, 정작 중요한 기억이 없으니 이건 말이 아직도 목구멍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샤워 부스에 들어가 수전을 켜고 따뜻한 물을 맞으며 맺히기도 전인 눈물을 씻어 냈다. 그러다 불현듯 떠오른 광경에 고개를 물리며 눈을 깜박였다.
‘10년이면 부끄럽지 않을까요?’
다리 사이에서 불쑥 고개를 든 정한이 기가 찬 목소리로 답했다.
‘인제 와서 부끄럽다는 거야?’
‘아니이….’
제 목소리는 옹알이처럼 이어졌다. 정한의 얼굴은 다시 사라졌고 시야에 천장 조각이 맺혔다. 그러고서 다시 떠오른 장면은 정한의 가슴 위였다.
‘저택에 혼자 있으면 얼마나 무서운지 아세요?’
‘전화하랬잖아.’
‘전화번호 몰라요. 모르는데 어떻게 전화해요?’
‘묻지 그랬어.’
‘버릇 들었잖아요. 사장님이 처음에 무섭게 대해서. 묻는 거 내가 무서워하게 됐잖아요.’
‘잘만 물어 놓고.’
‘묻는 게 얼마나 용기가 필요한데요!’
‘매번 용기를 낸 거야?’
‘그럼요! 지금도 용기 내려고 얼마나 마셨는지 아세요?’
‘쑤실 때마다 배에서 물소리 날 정도로 마셨지.’
‘네, 그러니까…. 저한테 잘해주세요.’
‘어떻게.’
‘상 달라고 했잖아요.’
‘또 달라고?’
‘네.’
‘욕심이 많네. 서 집사는.’
‘내가 무슨 욕심이 있어…. 나처럼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다구…. 억울하네. 저 상 백 번은 받아야겠어요!’
‘알았어, 백 번 천 번 줄게.’
미친놈인가?
윤조는 제 머리를 그러쥐며 벽을 짚었다.
상은 또 무슨 말이지?
대가로 페로몬을 요구한 건가…?
아무래도 어제 대단한 주정을 한 듯했다. 그걸 받아준 정한은 얼마나 좋은 주인인가. 윤조는 젖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다시 물줄기 밑에 섰다. 이렇게 여유 부릴 틈이 없었다. 곧 황 집사와의 약속 시각이었다.
*
씻고 나와 소파에 포개어져 있는 유니폼을 집어 들려는데, 그 위에 메모가 놓여 있었다. 긴 숫자가 눈에 들어온 순간 윤조는 바로 그 뜻을 이해했다.
유니폼을 안아 들고 정한의 방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손에 든 메모의 번호를 누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배경음이 흘렀다. 넓은 공간을 울리는 듯한 병원 소리였다.
-일어났어?
“사장님….”
-몸은 어때?
“어… 괜찮아요.”
할 말을 생각하고 전화해야 했는데 마음이 앞서고 말았다. 윤조는 제 덜 마른 머리끝을 매만지며 열심히 말을 찾다, 그에게 어제 하려고 했던 말을 뒤늦게 떠올렸다.
“아 참, 사장님. 저 내일 좀 쉴게요.”
-내일?
“네.”
-그래. 쉬어. 나도 쉬는데 잘됐네.
“아, 그러세요? 근데 내일…, 평일인데.”
-나도 좀 쉬어야지. 그간 병원에 붙들려 있던 게 얼마야. 그나저나, 내일 뭐 하려고?
“그냥, 쉬려고요.”
-놀러 갈까? 시내도 괜찮은데.
솔깃한 제안이었으나 오늘 각인을 하고 나면 몸과 마음이 상당히 지칠 테니 홀로 쉴 시간이 필요했다. 윤조는 아쉬운 마음을 삼키며 대답했다.
“아뇨. 그냥… 쉬고 싶어요.”
-혹시 지금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거면 오늘부터 쉬어도 돼.
“괜찮아요. 저 쌩쌩해요. 아파서 그러는 거 아니고… 정말 그냥 쉬고 싶어서 그래요.”
-그래, 그럼 마음대로 해.
곧 정한을 찾는 호출에 통화가 끝났다. 윤조는 정한의 메모를 제 방으로 가져가 명우의 복권을 끼워 놓았던 책에 함께 넣어 두었다. 새것과 마찬가지로 빳빳한 복권 종이를 씁쓸하게 매만진 뒤, 정한의 번호를 눈으로 외우려는데 전화가 왔다. 윤조는 책장에 책을 끼워 넣고 서둘러 수화기를 들었다.
-30분 전입니다.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어디서 보고 있기라도 한 건지 황 집사는 제 일거수일투족을 다 꿰고 있는 것만 같았다. 윤조는 가운을 걸친 제 차림을 살피고 서둘러 둘러댔다.
“네, 그럼요. 다 했어요.”
-늦지 않게 도착하시길 바랍니다.
“…네.”
툭, 끊긴 전화의 수화기를 내리며 윤조는 씻으면서 느꼈던 얼얼한 통증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전에 없이 목을 물어뜯어 놓은 정한이었다. 살짝 혈이 비칠 지경인 걸 보아, 어제 제 주정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윤조는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옷장으로 향했다. 빳빳한 셔츠를 꺼내어 걸쳐 보았다. 다행히 셔츠 칼라에 가려지는 상처를 확인하고 안도했다. 온몸에 빼곡하게 퍼진 잇자국에 대한 변명은 어떻게 할 수 없어 미안한 일이었으나, 윤조는 이게 꼭 제 부적처럼 느껴졌다. 많이 울어두었다고는 해도, 이토록 담담할 수 있는 건 기억도 희미한 어제의 흔적 덕이라고.
잠시 정한이 남겨 놓은 흔적을 따라 눈길을 옮기던 윤조는 다시 옷장 안을 살폈다. 약속 장소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
가진 옷 중 가장 좋은 옷이 집사 유니폼이었다. 어디를 봐도 집사로만 보일 뿐이라 달갑지 않은 만남임에도 불구하고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어디 가십니까?”
대문을 나서려고 하니 보안 팀장이 초소에서 뛰어나와 곁에 붙었다. 윤조는 유난하게 놀란 듯한 팀장을 보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네, 잠시 외출 좀 하려구요.”
“어디 가시는 거냐 물었습니다.”
“잠깐 나가는 것도 안 되나요?”
윤조의 물음에 팀장이 곧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윤조는 눈을 가늘게 뜨며 팀장의 얼굴을 살폈으나 제대로 읽어낼 리가 없었다.
“언제 오십니까.”
“사장님 퇴근 전에는 올게요.”
“멀리 가십니까?”
“글쎄요….”
“차를 내어 드리겠습니다.”
“저 운전 못해요.”
“가시는 곳까지 바래다 드리지요.”
“아뇨, 마중 오신다고 하셨어요.”
가만히 윤조의 말을 듣던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생활이라는 것을 그제야 눈치챈 듯.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네. …아 참, 저 우편물 다녀와서 가져갈게요.”
“제가 가져다 놓겠습니다.”
“아… 그럼.”
“다녀오십시오.”
윤조는 팀장에게 인사를 해 보이고 황 집사가 지정해 놓은 장소를 향해 걸었다. 늘 차로만 다녔던 터라 이렇게 걷고 있는 게 어색했다.
대략 10분 정도를 걸어 나가니 커다란 나무가 나타났다. 윤조는 그 아래에 서서 어느 방향에서 나타날지 모를 차를 기다렸다. 잠시 흙길을 걸었다고 그새 뽀얗게 앉은 먼지가 발등에 보여 닦으려는 찰나, 차바퀴 소리가 났다.
윤조는 허리를 들어 제 앞에 선 차를 보았다. 정차한 차에서 내린 남자가 윤조를 발견하고 싱긋 웃었다. 윤조는 손에 든 손수건을 구겨 쥐며 당황했다. 이렇게 직접 마중 나올 줄은 미처 몰랐다.
“서윤조 씨?”
“네, 제가… 서윤조입니다만.”
보닛을 돌아 훌쩍 다가온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윤조는 손수건을 품에 넣고서 남자의 손을 맞잡았다. 낯선 향이 목을 따끔하게 찔러왔다. 윤조는 정한이 남긴 흔적으로 뻗으려는 손을 다잡았다.
“타시죠.”
열린 앞좌석의 문이 마치 사자의 아가리 같아 보이는 건 왜일까. 윤조는 고개를 작게 숙이며 차로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자꾸만 목이 시큰거렸다.
*
남자의 차를 타고 오랫동안 달렸다. 두베역에서 탄 택시처럼 꼭 경계를 넘어 다른 지역으로 갈 듯 오래도 달렸다. 윤조는 내내 창밖으로 시선을 두고 있다가 집은 물론이고 인적도 드물어졌을 때가 되어서야 일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을 했던 걸까. 생각하자니 이렇게 품을 들일 이유가 없었다. 고작 이런 집사에게. 윤조는 조심스럽게 눈길을 돌려 운전 중인 남자를 보았다. 인사 말고는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은 남자가 윤조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보았다. 꾸며낸 듯 웃어 보이는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소름이 끼쳐 윤조는 재빨리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바깥은 춥고, 안은 더워서입니까.”
“…네?”
“땀을 흘리시네요.”
“아….”
“히터를 좀 낮춰 드릴까요?”
“예,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윤조는 손수건을 꺼내 제 이마를 훔쳤다. 저도 인지하지 못했다. 이렇게 앞머리가 다 젖도록 땀에 젖어 있었을 줄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
“다 잘될 겁니다.”
“…저기.”
“네. 말씀하세요.”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저, 사장님 오시기 전에 가야 하거든요. 말씀을 안 드리고 나왔어요.”
“말씀드리지 말라고 들었지 않습니까?”
“네, 그렇긴 한데… 너무 멀리 가는 거 같아서요. 도대체 어디까지 가시려고….”
“이미 메라크입니다. 검문소 지날 때 들었을 텐데요.”
검문소를 지났다니. 윤조는 자신이 도대체 얼마나 정신을 놓고 있었나 싶어 놀랐다.
“도착까지는 아직 한참 가야 하니 눈이라도 붙이세요.”
아, 어리석은 서윤조.
윤조는 저항할 기운도 내지 못한 채 그대로 축 늘어졌다. 자신의 어리석음이 제 온몸을 짓누르는 듯했다.
차창 너머, 끝없이 펼쳐진 논과 멀리 드문드문한 산이 보였다.
사람이 살긴 하나?
윤조의 눈에 비친 메라크는 누구 하나 죽어도 아무도 모를, 그런 곳 같아 보였다.
긴 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윤조는 차창에 비친 남자의 얼굴이 이따금 자신을 돌아보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공포에 휩싸였다.
시야는 탁 트이다 못해 황량하고, 차에도 단둘뿐인데 갑갑해서 숨이 찼다. 차츰 거친 바닥을 달리는 차바퀴 소리보다 윤조의 숨소리가 커질 때, 차가 정차했다. 그 움직임이 제법 격정적이었던지라 윤조는 놀란 나머지 그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악!!!”
“왜 그렇게 놀랍니까.”
“…죄송해요.”
최대한 남자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 사과를 한 뒤,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정한의 저택과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꽤 멋진 저택에 들어와 있었다. 남자의 집일까. 윤조는 그제야 눈을 돌려 운전석을 보았다. 언제 내렸는지 자리가 비어 있었다.
“내리시지요.”
열린 문 너머로 남자가 고개를 내밀어 말했다. 윤조는 축축하게 젖은 손으로 손잡이를 당겨 열었다.
탁.
차 앞문이 동시에 닫혔다. 내내 긴장하고 있었던 탓인지 다리가 후들거렸다. 애써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서서 남자를 보자, 그가 문을 향해 손짓했다. 이대로 들어가면 죽은 목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윤조는 남자가 이끄는 방향과 반대로 발을 뒤로 물렸다.
“서윤조 씨?”
“저…, 죄송한데.”
“네.”
“다,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요.”
“뭘 말입니까. 혹시 제가 마음에 안 들어서 퇴짜를 놓으시는 겁니까?”
“아뇨, 아니요. 다음… 다음에요. 이렇게 멀리 올 줄은 몰랐거든요. 지금 가도 온 만큼 가야 하니까 어… 시간이 안 맞아요. 저, 사장님 퇴근 마중을 나가야 해서요. 안 그러면, 꼬리가 없다고….”
윤조는 횡설수설하며 자꾸만 뒷걸음질 쳤다. 남자는 팔짱을 끼며 느긋하게 그런 윤조를 구경했다. 어쩜 저럴까. 윤조는 남자의 태도에 걸음을 멈추었다. 금방이라도 달릴 태세로 쥔 주먹도 힘없이 늘어트렸다.
“눈이 큰 사람은 겁이 많다더니.”
“…….”
“괜찮다고 말했지 않습니까.”
“이게… 어디가 괜찮은 거죠? 전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그쪽 성함도 몰라요.”
“윤지원입니다.”
“…아, 예.”
“또 뭘 알려 드릴까요.”
“여기는….”
“메라크, 두베에서 남쪽에 있는 도시지요.”
“그건 알아요. 제가 알고 싶은 건….”
“이 저택은 제 집이 아닙니다. 저를 고용하신 분의 몇 번째 되는 별장 정도겠네요.”
“별장…? 고용…?”
“설마 제 얼굴도 보지 않은 채 고르진 않으셨겠죠?”
“…….”
“제가 운이 좋았네요. 그럼 이만 들어가시죠. 여기서 나눌 이야기는 아니니까요.”
그게 마지막 이야기가 되면 어찌하나. 윤조는 남자를 믿을 수 없어 다시 뒷걸음질 쳤으나 제 뒤를 막는 힘에 붙들려 끌려갔다. 허공에 발이 뜬 채 남자의 옆에 섰다. 미처 돌아볼 사이도 없이 사라진 완력에 숨이 조이는 듯했다.
“괜히 힘 빼지 맙시다.”
“…….”
“마중 가야 한다면서요.”
남자가 작게 중얼거리고 앞섰다. 윤조는 제 앞에 난 계단을 터덜터덜 걸었다. 분위기를 보아 죽지는 않을 것 같긴 한데, 막상 각인을 하자니 그 또한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겨졌다.
별장에 들어서기 전, 윤조는 걸음을 멈춰 섰다. 이제 다시는 느끼지 못할 정한이 그곳에 있는 것도 아닌데 미련하게 뒤를 보았다. 남자가 손목을 잡아끌어 문을 닫았을 때야 윤조의 시선이 마지못해 떨어졌다.
*
모니터를 보고 있던 정한의 시선이 벽시계로 향했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오늘따라 초침 소리가 유난히도 거슬렸다. 청각이 예민한 편이긴 했지만 제 반응도 유난한 듯했다. 아마 지난밤에 있었던 일 때문이라 정한은 자신을 진단했다.
모든 감각이 곤두서서 특정한 무언가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필요한 건 이곳에서 30분 떨어진 제 하얀 저택에 있었고, 그곳으로 가려면 저 초침이 수백, 수천 번은 째깍거려야 했다. 그러니 자꾸 귀에 들어올 수밖에.
잠시간 벽시계에 머물러 있던 정한의 시선이 글씨로 빼곡한 모니터로 돌아갔다. 시간을 지우듯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방을 채웠다. 그렇게 얼마나 일에 집중했을까.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아니, 쳐들어왔다.
정한은 제 앞에 선 승주와 무헌을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정한의 눈짓에 잠시 주춤한 무헌이 결심한 듯 말을 뱉어내었다.
“너, 그 사람. 스무 살이라며?”
그 오래된 정보가 이제야 무헌의 귀에 들어간 게 어이없어 웃고 말았다.
“양심을 저세상에 고이 두고 왔다더니, 정말인가 보네.”
승주가 제 차례라는 듯 무헌의 어깨를 두드리고 소파에 자리를 틀고 앉았다. 정한은 따분한 얼굴로 벽시계를 보았다.
“너 요즘 바쁘더라?”
“바쁜 거 알면 자리 좀 비워주든지.”
“그 와중에 손 주무를 시간은 있고?”
정한은 반문 대신 눈썹을 구기며 승주를 보았다.
“누가 봤다던데? 너 여기 앞에 카페에서, 조물조물.”
하필 그걸 봤다니. 정한은 보란 듯이 제 양손을 깍지 끼는 승주를 보며 한숨을 삼켰다.
“그냥 본 거야.”
“아아. 그 손가락 사이사이로 넣어 보던 게 그냥 본 거야?”
잔뜩 의미를 담아 묻는 승주를 퇴치하려 정한은 지극히 사실이었으나, 완전한 사실만은 아닌 정보를 전했다.
“어. 예뻐서.”
승주가 발작하듯 발을 구르며 소리 질렀다. 귀를 찌르는 고음에 정한은 눈썹을 찌푸리다 소파 테이블에 둔 물건이 신경 쓰여 그것을 치우려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늘 소식도 행동도 굼뜨던 무헌이 이럴 때만 재빨랐다.
“오늘 거야?”
“아니. 지난 거야. 이리 줘.”
“근데 이거 날짜 왜 이래?”
무헌의 말에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처럼 승주가 흥미로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정한은 급히 무헌에게 다가갔다.
“10월 27일이면, 다음 주잖아. 아냐?”
“잘못 봤겠지. 내놔.”
“어디. 나도 좀 봐.”
신문은 정한의 손을 스쳐 승주에게 안착했다. 정한은 승주의 손에 인질처럼 붙들린 신문을 포기하고 소파에 걸터앉았다. 무헌이 잽싸게 승주의 뒤로 가 같이 신문을 들여다보았다.
“진짜네? 너 뭐야? 미래에서 왔어?”
“어.”
“정말…?”
똑같은 얼굴로 저를 보는 두 사람이 저와 함께 공부했던 동기가 맞나 싶어 정한은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승주의 손에 들린 신문을 빼앗아 제 데스크에 던져 놓자 무헌이 펄쩍 뛰며 다시 신문을 집어 들었다.
“진짜? 야, 이거 정말 미래 신문이면 그것도 나와 있겠네? 복권!!!”
정한은 진심인가 싶어 무헌을 돌아보다 승주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무헌이 제 좁은 방을 돌아다니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
“너 복권 사잖아.”
“어.”
“설마, 그동안 이런 식으로 부를 축적해 온 거야? 너 진짜 미래에서 왔어?”
“너까지 왜 이래?”
“아니… 그렇잖아. 다음 주 신문이 왜 여기 있냐고.”
이럴 때 호출은 왜 안 울릴까. 윤조와 있을 때는 그리도 자주 울리던 호출이. 정한은 제 흘러내린 앞머리를 넘기며 혀를 찼다.
“저거 내가 의뢰해서 만든 거야.”
“그걸 왜 만들어?”
“그냥.”
“그냥? 너 할 일 없니?”
“할 일 많아.”
“근데.”
정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뒤, 10월 27일은 윤조의 생일이었다. 오로지 그만 당첨될 수 있는 복권. 이것만큼 그의 생일과 어울리는 선물이 어디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없을 듯했다.
물론 복권 당첨은 부수적인 선물이었다. 그에게 행운을 맛보게 해주고 싶은 소박한 마음뿐이었고, 실질적인 선물은 따로 있었다. 정한은 최근 병원 일과 더불어 윤조의 생일을 준비하느라 내내 바쁜 상태였다.
“혹시 말이야.”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승주가 모든 걸 꿰뚫어 본 사람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그 친구 기 살려주려고 그래?”
“기?”
“기죽을 만하잖아. 너네 집이 보통이어야지.”
정한은 코웃음 쳤다.
“이게 웃겨?”
“어. 웃기네.”
“너 이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들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야.”
정한은 윤조가 그런 흔해 빠진 고민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월급은 저에게 맡기고, 큰돈을 쥐자마자 저를 고용한 걸 보면, 그는 돈이란 것에 가치를 두지 않는 듯했다. 사치스러운 게 그리도 좋다면서 기꺼이 준다는 저택도 마다하던 그가 아니던가.
“가진 자의 여유야, 아니면 없이 살아본 적 없어서 서민의 애환을 모르는 거야?”
정한의 미온적인 반응에 승주가 비아냥거리듯 말을 보탰다. 정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둘 다 아냐.”
“그럼. 그건 왜 해주려는 건데? 돈 그거 그냥 줘도 되잖아.”
정한은 턱을 괴고서 제 밑 입술을 매만졌다. 지난밤 윤조가 깨물어댄 자리가 욱신거렸다.
“그렇게 주면 뭐가 달라져?”
“달라지지 한참.”
“왜. 직접 받을 자존심은 없대?”
정한은 승주의 말에 기분이 상해 빤히 쳐다보았다. 제 눈치를 읽은 승주가 어깨를 움츠리며 곧 미안하다는 듯이 손을 들어 보였다. 그 미안함도 잠시뿐. 이대로 두면 또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승주였다. 더는 윤조가 오해받지 않게 이것만은 말해주는 게 좋을 듯했다.
“당첨의 기쁨.”
“뭐?”
“그걸 선물하고 싶었다. 왜.”
“고작, 그거…?”
“고작 그게 안 돼서 애가 주마다 안달이 나잖아.”
승주가 입을 벌린 채 고개를 내저었다. 정한은 조용한 무헌이 신경 쓰여 돌아보았다. 무헌은 당첨 번호를 메모한 종이와 신문을 번갈아 보며 확인하고 있었다. 그가 염불처럼 외는 번호가 귀를 간질였다. 신문을 덮으려다가도 다시 확인하기를 몇 차례 반복한 뒤에야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주 부탁한다, 친구.”
가슴에 찔러 넣은 종이를 두드리며 소파에 앉은 무헌이 다시 신문이 있는 데스크 쪽을 바라보았다. 불안했던지 재차 확인하러 몸을 일으킨 무헌의 가슴을 승주가 눌러 앉혔다.
“잠깐, 이무헌 가만히 좀 있어 봐.”
“왜. 너도 이러고 있지 말고 어서 받아 적어.”
“그걸로 백 장을 응모해 봐라, 당첨이 되나.”
“왜?”
“너한테는 없는 미래니까.”
“왜…? 왜 나한테는 없는데…?”
“넌 정한이 마음에 없잖아.”
무헌이 이해 못 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정한은 두 사람을 향해 이만 나가 달라고 손짓해 보였다. 승주가 굼뜨게 자리를 뜨며 실실 쪼개는 웃음을 보내었는데, 정한은 그 웃음을 무시한 채 순식간에 엉망이 된 제 방을 정리하기만 했다.
“야, 권정한.”
“아직도 안 갔어?”
목만 들여놓은 승주를 보며 정한은 무헌이 펼쳐 놓은 신문을 곱게 접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꼭 윤조가 십자말풀이 할 때를 연상케 했다.
“너어.”
“말 똑바로 해라. 늘이지 말고.”
“흠, 너.”
“어.”
“오늘 좀 달라 보이는 거 알아?”
“고백은 사절할게.”
“아니거든! 그게 아니라. 너. 설마…, 각인한 건 아니지?”
“왜. 좀 돌아 보여?”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승주의 머리 위로 무헌이 나타났다. 정한은 바깥에서 그들을 볼 사람들이 걱정되어 서둘러 원하는 대답을 내어주었다.
“했다면?”
소리라도 지를 것 같던 승주도 무슨 소리냐고 물을 무헌도 조용했다. 정한은 괜히 그것도 거슬려 두 사람을 빤히 보았다.
“어쩐지, 눈이 형형하더라. 꼭 미친놈처럼.”
“진짜야…? 확실하게 말해 봐. 화 안 낼게.”
“정확히는.”
“정확히는?”
“미수에 그쳤어.”
“미수?”
“피임약을 안 먹어서. 혹시라도 임신할까 봐.”
각인은 노팅을 동반해야 했기에 특별히 조심해야 했다. 히트 사이클의 오메가에게 노팅하는 것만큼이나 임신 확률이 높은 위험한 일이었다.
“아휴, 징그러운 놈. 그래서, 걔 목만 다 뜯어 놨다는 거야?”
기어이 승주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정한은 딱 질린 얼굴로 승주와 무헌을 보았다.
“차라리 고환을 자르자고 칼 들고 협박하던 의사가 있어서.”
잠시 윤조에게 고용되었을 때, 귀신같이 제 상태를 눈치챈 승주가 칼을 들고 찾아와 응급실을 뒤집어 놓았었다.
“야, 그건 네가 미친놈처럼 하루가 멀다고 매일 노팅하고 다녀서 그렇지! 죽으려고 환장해서!”
“그래서 참고 있잖아.”
정한은 제 목소리 뒤로 지겹게 따라붙는 초침 소리에 혀를 찼다. 다시 소파에 앉으려던 두 사람이 눈이 마주치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무헌이 문손잡이를 붙잡고 승주가 그 사이에 섰다. 쟤 돌았다는 말이 얼핏 들렸다.
“잘하고 있어, 그대로 쭉 먹지 마. 하지도 말고!”
방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승주의 칭찬을 끝으로 문이 닫혔다. 정한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아직 남은 퇴근 시간을 지겹게 바라보았다.
째깍.
째깍.
어젯밤 보충해 온 윤조의 페로몬이 벌써 바닥이 난 듯했다. 미수에 그친 각인이었지만, 어쩌면 정신적으로는 이미 각인이 된 게 아닐까.
각인의 충동에 허덕이는 저와는 다르게 윤조는 요즘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간 정한이 겪어 본 윤조의 행적으로는 벌써 제게 달려들고도 남았을 일이었다. 알고자 하니 정말 안 보이게 된 건지, 윤조는 바짝 제 뒤를 따라붙을 듯하다가 어느 순간 벽이 생긴 듯 멈추었다.
눈빛은 전과 다름없이 반짝이는데. 아니, 오히려 불길이 이는 듯한데, 그게 다였다. 닿을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정한은 평행선을 그리는 듯한 윤조와의 사이를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말로써 그를 취하는 건 너무도 쉬운 일이었으나, 그의 믿음을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와중, 어젯밤 벌어진 파티는 정한을 매우 혼란하게 만들었다. 윤조의 행동을 어찌 해석해야 할지 알 수 없음과 동시에 참아온 인내가 뚝 끊어질 위기에 처했다.
‘한 번만. 한 번만 더요.’
‘너 숨넘어가거든?’
‘그래도 좋으니까 한 번만 더요.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세요? 별님한테도 빌었다구요….’
벽이 생긴 거리감은 온데간데없이 그는 제게 그 어느 때보다 착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찌나 사람을 흔들어 대는지 아버지처럼 막무가내로 굴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었다. 끝내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목을 다 뜯어 놓긴 했지만.
그 외에도 윤조는 알 수 없는 소리를 많이 했다. 되묻거나 뜻을 물으면 꼭 얼버무리며 딴소리를 해대는 통에 정한은 수시로 바닥을 뒹구는 빈 와인병을 노려보았다. 꼭 물어도 제대로 된 답이 돌아오지 않던 그때가 생각났다.
정한은 승주가 얘기하고 간 카페의 일을 떠올렸다. 그날 예쁜 손만 보았던가. 그의 눈에 드리운 그늘도 봤었다. 금세 얼굴을 풀고 제게 함구하기에 대단한 일은 아니라고 여겼다. 그래서는 안 됐던 걸까. 어쩌면 자신이 놓친 게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필 승주가 이런 말도 하지 않았던가.
‘기죽을 만하잖아. 너네 집이 보통이어야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제 개 같은 집사가 그 흔해 빠진 고민을 하고 있었다면. 그가 제게 달려들지 않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어쩌면 지금 윤조에겐 복권 당첨이나 집 따위의 선물이 아닌 단 한마디의 말이 필요할지도.
그런데 정말 이딴 고민을 한단 말인가. 그 서윤조가? 제 변변찮은 집사 자격에도 당당하다 못해 뻔뻔한 사람인데. 믿을 수 없어 부정하면서도 딱히 집히는 게 없으니 승주의 의견에 마음이 기울었다.
째깍.
째깍.
정한의 시선이 벽시계의 초침에 닿았다. 지겨운 시간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꽃이나 사갈까.”
오늘, 정한은 평행선을 부수기로 했다.
*
“이쪽으로.”
정한의 저택으로 비유하자면 응접실 같은 곳을 안내받았다. 의자를 직접 빼내준 남자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윤조는 이 틈에 도망갈까 싶어 엉덩이를 들썩였으나, 기다렸다는 듯 문설주에 기대고 나타난 덩치를 발견하고 곧 마음을 접었다.
“드시지요.”
남자가 직접 내어 온 차를 앞에 두고 윤조는 망설였다. 죽이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이 바로 몇 분 전인데, 사실 죽일 것 같기도 했다. 남자가 보란 듯이 같은 티 포트에서 따른 차를 입에 대고 나서야 윤조도 차를 머금었다.
꿀꺽.
머금기만 한다는 것이 그만 한 모금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진정되었으면 해서 마신 차였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윤조는 찻잔을 내려다보며 계속해서 의심했다.
“독 없습니다. 수면제는 몰라도.”
“네…?”
“같이 마셨으니, 누가 먼저 잠드느냐의 차이겠네요.”
무슨 미친 소리지?
윤조는 눈을 찌푸리며 남자를 보았다. 남자가 테이블 위로 두 팔을 올려 제 턱을 괴었다. 윤조는 저를 빤히 보는 남자의 시선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눈을 헤맸다.
“여기까지 왜 왔습니까. 그렇게 불안해하면서.”
“그걸 왜 말씀드려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각인할 알파를 앞에 두고 할 소리는 아니라는 건 아시네요.”
“…….”
“각인 과정을 거치면 전 하루라도 빨리 서윤조 씨와 아이를 가질 겁니다.”
“…왜, 왜요?”
“일을 쉬게 하고 싶어서요.”
“…….”
“전처럼 그 저택에 머물지는 못할 겁니다. 서윤조 씨에게 가정이 생기는 거니까.”
“아… 저는.”
“왜, 그 저택 알파의 얼굴을 매일 봐야 합니까?”
“…….”
“전처럼 페로몬 한 톨도 느끼지 못할 알파를 왜요. 본다고 뭐 달라지겠습니까?”
고작 한 모금의 차에 다량의 수면제가 들어 있던 모양인지 벌써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이성이 자꾸만 입을 다물라고 시키는데 남자의 말에 술에 취한 것처럼 혀가 굼뜨게 말을 이었다.
“제가, 한때는 우리 사장님 페로몬에 중독됐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아니었어요. 페로몬…, 아쉽죠. 저 우리 사장님 페로몬 엄청 좋아하거든요. 근데, 그게 다가 아니에요. 아니, 오히려… 아주 작은 일부예요. 그 정도쯤은.”
출퇴근? 아이? 웃기는 소리 같았다. 윤조는 입술을 꽉 물고 남자를 보았다.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무를 수 있습니다. 보아하니 꽤 흔들리는 듯한데.”
“…아뇨. 아까 도망치려고 한 건…, 아니, 사실… 지금도 도망가고 싶어요. 근데 이건 제 결심이 흔들려서가 아니라… 단순한 공포 때문이에요. 상황에 대한 공포. 힘으로 밀어붙이고, 낯선 곳으로 데려오셨잖아요.”
“부정할 순 없네요. 그럼 이대로 계속 진행하겠다는 겁니까? 눈뜨고 나면 마음이 바뀔지도 모릅니다.”
“제 결심은 변하지 않아요. 지금도, 미래에도 잘 선택했다 할 거예요. 말씀대로예요, 본다고 달라지지는 않지만, 못 보면 달라질 것 같거든요. 지금도 너무 보고 싶어요. 어제 오랜만에 사장님 봤는데…. 제가 그만, 바보같이 취해서 기억이 안 나요. 좀 잘 봐둘걸…. 더 기억해 놓을걸….”
“…….”
“하…, 죄송해요. 제가, 죄송한 소리를 계속하네요.”
시야가 울렁거렸다. 윤조는 자꾸만 흐트러지려는 몸을 바로 하려 테이블을 붙잡았지만, 곧 그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쏟긴 차가 뜨겁게 손을 적셨다. 윤조는 그 아픔도 모른 채 잠들었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끝나 그저 정한을 보기만 하면 되는 상태가 되었으면 했다. 지금은 오로지 그것밖에 바라는 것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