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정한은 퇴근 시간에 이르러 조수석에 가득 찰 크기의 꽃다발을 샀다. 봉투에 넣은 복권과 윤조의 의견이 필요한 새로운 집에 대한 자료가 든 태블릿도 챙겼다. 돌아가서 할 일이 참 많았다.
각인 미수의 여파 때문인지, 멋대로 굴기로 작정한 탓인지는 몰라도 자꾸만 마음이 들썩였다. 머릿속으로 순서를 정하다가 뒤엎길 반복했다. 아무래도 도착과 동시에 그에게 꽃다발을 내밀고 무릎을 꿇을 것 같았다.
초조한 마음으로 달려온 저택. 응당 있어야 할 이가 보이지 않아 정한은 살짝 당황했다. 낮에 들은 전화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정한은 어서 윤조를 확인하려 보안 요원에게 차를 넘기고 현관으로 향했다.
끼이익.
현관문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아침에만 해도 부드럽게 열렸는데 이상하다 싶어 잠시 눈길을 두다 안으로 들어섰다.
“…….”
저택이 전에 없이 조용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정한은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들어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곧 나타난 제 방을 지나쳐 윤조의 방 앞에 섰다. 복도 창이 열려 있었는지 유난히 공기가 서늘했다. 정한은 잠시 그곳에 시선을 두다 윤조의 방을 노크했다.
똑똑.
재차 두드려 보았으나 대답이 없었다. 정한은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꼭 오후는 없이 아침만 맞이한 풍경처럼 온 창이 다 열려 있었다. 사람 온기라고는 하나도 없이 싸늘했다.
“서 집사.”
정한은 꽃다발을 윤조의 침대에 올려 두고 욕실 쪽으로 걸었다. 적막을 읽었으면서도 귀를 의심했다.
“서윤조.”
안이 비어 있었다. 정한은 발길을 돌려 제 방으로 향했다. 아침에 제 침대에서 곤히 잠들어 있던 얼굴을 기억한다. 한데 지금은 어째서 먼 기억 같을까. 정한은 말끔하게 정리된 침대를 손으로 쓸다,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배열된 서랍장 위의 우편물을 확인하고 그대로 돌아 나왔다.
정한의 걸음은 망설임 없이 서재로 향했다. 잠들었겠지. 소파에서 늘어지게 잠들어 침을 흘리고 있겠지 했다. 그런데 막상 당도한 서재는 빛을 모르는 것처럼 캄캄하기만 했다. 불을 밝혀 안까지 살폈으나 윤조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정한은 초조한 얼굴로 등을 돌렸다.
“윤조야.”
다용도실을 뒤지고, 주방도 살폈다. 고요하던 저택에 수없이 윤조의 이름이 불렸다. 정한은 마른 입술을 축이며 눈을 헤매었다. 어디를 살펴도 몇 번을 불러도 윤조는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방을 나와 테라스로 향한 복도를 걷다 그 옆으로 난 방에 들어섰다. 벽면에 설치된 대형 모니터에 제 모습이 비쳤다. 병원처럼 초침 소리가 들리는 것도 아닌데 예민하게 구는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정한은 테이블 위의 리모컨을 들어 제 예민함을 지우듯 서둘러 화면을 밝혔다. 그러자 지하실 풍경이 퍼뜩 떠올랐다. 일전에 아버지가 감시 카메라를 모두 치웠을지 확인 작업을 하다 지하에 갇힌 윤조를 발견했다. 그때처럼 그가 또 어느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으면 했다. 하지만 바람과 달리, 윤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미련 없이 방을 나선 정한은 곧장 테라스로 향했다. 이제는 쓰지도 않는 수영장 밑바닥을 살폈다. 빼곡하게 쌓인 낙엽 사이에 찾는 얼굴이 있을까 꼼꼼히 눈으로 훑어보았지만, 특징 없는 지하실 풍경과 다를 바 없이 수영장 바닥 또한 별 소득 없는 살핌이었다.
쿵, 쿵, 쿵, 쿵.
초침 소리처럼 심장이 뛰어댔다. 실제적인 각인을 하지도 않았는데 광증이 난 것처럼 가슴이 조여들었다. 정한은 숨을 헉헉 내쉬며 제 시야에 도무지 맺히지 않는 윤조를 찾으려 눈을 헤맸다.
“무슨 일이십니까?”
상태가 이상해 보였는지 보안 요원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정한은 홀린 듯 정원으로 달려 들어갔다. 순식간에 정원 끝까지 이른 정한은 제 이마를 짚고 섰다. 아침에 안아 본 온기가 언제 손을 빠져나갔을까. 꿈이라도 꾼 듯했다.
“도련님?”
뒤따라온 요원이 조심스레 물음을 건네었다.
“뭘 찾으시는 겁니까…?”
“서 집사….”
“네?”
“서 집사 못 봤어?”
“아, 집사님…. 그러고 보니 오늘 종일 뵙지를 못했습니다.”
질주하던 자동차의 엔진이 꺼지듯 정한의 들뜬 호흡도 불안으로 두근거리던 가슴도 조용히 가라앉았다. 정한은 차갑게 식은 얼굴로 요원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교대 시간 언제야.”
“저, 저는 오후 4시에 교대했습니다.”
정한은 요원의 어깨를 밀어 길을 트고 초소로 향했다. 기별도 없이 들이닥친 정한의 등장에 놀란 보안 팀장이 느긋하게 앉아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무슨 일이십니까, 도련님!”
“서 집사 어디 갔어.”
“아, 서 집사님. 연락… 안 하셨습니까?”
“연락?”
“오늘 이르게 나가셨습니다. 도련님 오시기 전에 온다고 하셨는데. 곧 오시겠지요.”
정한은 태평해 보이는 팀장을 보며 웃었다. 윤조는 제게 말도 하지 않고 나갈 이가 아니었다. 불길한 예감이 자꾸만 저를 삼킬 듯했다.
“상세히 얘기해 봐.”
정한의 반응에 그제야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팀장이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12시경, 대문 앞 왼쪽 길로 걸어가셨습니다. 마중 나와 있는 사람이 있으니 차는 필요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중?”
“예. 마중….”
“누구를 만난다는 말도 없이, 그저 마중?”
“…예.”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개를 조아린 팀장이 다급히 제 목을 틀어쥐었다. 정한은 빤히 팀장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뒤늦게 제 페로몬을 갈무리했다.
“이 근방 CCTV 어디까지 잡히는지 봐봐. 12시경이라고 했지?”
식은땀을 흘리며 기침하기 바쁘던 팀장이 서둘러 부하를 시켜 저택 인근 상황을 모니터에 띄우게 했다. 팀장의 말대로 정오에 가까운 시각, 윤조가 홀로 걷고 있었다. 하지만 저택의 부지가 끝나는 지점에 이를 때까지 그를 마중 나온 인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 저택을 파악하고 있는 인물이 그를 불러낸 게 분명했다.
“말해.”
“예?”
“시치미 떼지 말고 말해.”
“도련님…, 정말 모릅니다. 저도, 집사님이 갑자기 나가신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그런데 도련님이 오시기 전에 온다고 하셔서….”
“너 아버지 개잖아. 그간 서 집사 감시한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근데 내버려 뒀다고? 하필 저 뜬금없이 행동한 오늘?!”
정한은 놀란 팀장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쩔쩔매며 제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도련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감시가 아닙니다. 저는, 도련님의 치료를 돕기 위해, 그 치료사가 되는 집사님을 보호한 겁니다.”
“그걸 내가 믿으라고?”
“정말입니다, 도련님! 집사님 주변에 접근하는 인물이 없게 철저하게 보호하라 하셨습니다. 믿어주십시오!”
“근데 왜 이번에는 내버려 둔 건데.”
“내버려 둔 것이 아니라…! 회장님께서, 이제 좀 풀어 두라고 하셨습니다.”
“풀어 둬?”
“집사님이 위험할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정말입니다! 믿어주십시오, 도련님!”
무릎까지 꿇는 팀장을 보며 정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 쪽이 아니라니, 달리 생각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그러기엔 제 마음이 자꾸만 불안하다 외치고 있었다.
“최근 내가 없을 때 이 저택에 드나든 사람, 누가 있지?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봐.”
윤조가 외부 사람과 접촉할 만한 일이 없었기에 당연히 찾아왔으리라 생각했다. 집히는 게 있었는지 팀장의 눈이 커졌다.
“화, 황 집사님이 자주 오셨습니다.”
“황 집사…?”
“예, 오셔서 잠시 서 집사님과 대화하다 가셨습니다.”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고?”
팀장이 무릎을 꿇은 채로 잠시 정한의 눈치를 보았다. 정한은 허리를 굽혀 팀장의 얼굴을 직시했다. 그의 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카, 카메라는 물론, 도, 도청 장치까지 모두 그때 다 치웠습니다. 도련님께서 다시 저택으로 오신 뒤로 듣지 않고, 들을 수 없었습니다. 정말입니다.”
“아쉽게 됐네. 지금은 그게 간절한데.”
“…….”
“황 집사란 말이지.”
“…그 외에는 없습니다.”
팀장이 모르는 일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으나 지금은 다른 수가 없었다. 정한은 오히려 황 집사라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버지밖에 없었는데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미자르로 달려가야 하나 싶었으니까.
정한은 바로 황 집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황 집사는 아버지의 오랜 집사였기에 저와도 긴 시간 함께 했던 인물이었다. 이 저택과의 인연도 상당했다. 그 황 집사가 아버지의 어떤 명령을 받고 윤조를 찾은 걸까. 정한은 도무지 좋은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신호음만 가던 전화가 끝내 음성 안내까지 이르렀다. 정한은 이를 갈며 초소를 나왔다. 눈치 있게 차 한 대를 빼놓은 팀장이 허리를 굽히며 자동차 키를 건네었다.
“그저께 들어온 놈입니다. 밟는 대로 밟힐 겁니다.”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정한은 팀장에게 자동차 키를 받아 들고 곧장 아버지의 회사로 달려갔다. 차를 달리며 조수석 앞 글러브 박스를 열어 천장을 더듬었다.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손끝에 전해지자 머리가 핑핑 돌았다. 낯설지 않은 감각이었다.
*
잠든 얼굴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황 집사는 어린 집사의 얼굴로 손을 뻗다 그만두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붉게 열이 오른 손을 차가운 수건으로 몇 차례 닦고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적당한 온도와 적당한 습기. 고요하고도 평온한 향이 넘실대는 실내를 확인한 뒤, 방을 나섰다. 품에 넣어 둔 열쇠를 꺼내어 문손잡이에 끼워 돌리자 달칵, 거리며 잠기는 소리가 났다.
빈 복도를 걸어 임시 거처로 둔 방으로 향했다. 머지않아 있을 권 회장의 호출을 대비해야 했다.
책상 위에 젖은 수건을 한쪽에 두고 서랍을 열어 권총을 꺼내 허리춤에 찼다. 그러고는 까맣게 잠들어 있는 휴대폰으로 손을 뻗었다. 부재중 전화가 상당히 많이 와 있었다.
황 집사는 개중 기다리던 이름을 찾아내고 입술을 꽉 물었다. 때가 되었다는 듯이 그 이름이 빛을 발했다. 황 집사의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렸다.
*
회사는 물론 아버지의 임시 자택도 비어 있었다. 정한은 목덜미가 뻐근해지는 느낌에 급히 차를 세우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어느새 캄캄한 하늘에 달이 고여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아버지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예, 도련님.
정한은 짐작하는 방향으로 차를 몰며 다시 황 집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부러 순회 돌기를 기다렸다는 듯 바로 받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아 절로 입술이 비틀렸다.
“아버지 어디 계십니까.”
-메라크 별장에 계십니다.
짐작이 맞아떨어졌다. 정한의 차는 더욱 속도를 내며 달렸다.
“윤조는 왜 만났습니까.”
-회장님 명령입니다.
“무슨 명령.”
-오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
“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정한은 전화를 끊고 경계지의 검문소 앞에서 차를 세웠다. 급히 속도를 줄인 차처럼 정한의 가슴도 들썩였다. 아버지의 손이 윤조에게 어디까지 뻗쳐 있을지 몰라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출입 등록이 되지 않은 차량입니다만, 잠시 서류를 작성해주실 수 있습니까.”
정한은 욕을 읊조리며 차에서 나와 검문소를 향해 걸었다. 경계 페로몬을 뿜어내는 정한을 이상히 여긴 보초의 총구가 금방이라도 등에 붙을 듯했다. 정한은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러면 그럴수록 목덜미가 뻐근해졌다. 윤조에게 물리고 싶은 그 목덜미가.
“이제 됐습니까.”
정한의 신분을 파악한 보초의 태도가 전과 달라졌다. 이 경계지까지 뻗어 있는 아버지의 힘이 지긋지긋했다. 정한은 제게 허리를 납작 굽혀 보이는 보초를 뒤로하고 다시 차에 올라탔다.
두베의 포장된 도로가 아닌 흙먼지가 날리는 메라크의 길바닥 위로 정한의 까만 차가 빛처럼 달렸다. 핸들을 붙잡은 손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변명을 들을 사이도 없이 아버지의 머리를 날려버릴 것 같아 참고, 또 참아야 했다.
데려가면 죽이겠다던 말은 여전히 유효했다. 아니 오히려 확실해졌다. 정한은 왜 그토록 승주가 제게 각인을 말렸는지 알 것 같았다. 미수에 그친 일인데도 이렇게 눈이 뒤집힐 줄이야. 그렇게 어렵게 여겨지던 패륜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 보였다. 윤조는 제 옆에 누워 있을 인물을 떠올리며 슬며시 고개를 돌렸으나 옆은 텅 비어 있었다.
왜 없지?
의도를 알 수 없는 부재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자신이 또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긴. 각인을 앞두고 수면제를 먹일 이유가 뭐란 말인가.
역시 죽이는 거구나.
씁쓸히 웃으며 무거운 눈을 비볐다. 잠든 사이에도 울었는지 눈가가 축축했다. 괜히 울적한 마음에 몸을 일으키고도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이런 굼뜬 놈을 봤나?!”
공간을 울리는 음성에 윤조의 등이 움찔했다. 윤조는 코를 훌쩍거리다 침대에서 내려와 문에 붙어 섰다. 아무래도 아는 목소리 같았다.
“홀랑 엿 바꿔 먹어도 모를 놈!”
누군가 대답을 하는 것 같은데 그 말은 들리지 않고 오로지 권 회장의 목소리만 들렸다. 집사 하나 죽이는데 직접 행차까지 하다니, 그 정성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윤조는 터덜터덜 침대로 걸었다.
저택의 제 방보다도 좋아 보이는 곳을 둘러보며 윤조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 호랑이 같은 양반이 자신을 어떻게 죽일지 궁금했다. 칼로 도륙을 할까. 아니면 깔끔하게 총으로 머리를 터트릴까. 윤조는 자신이 죽는 모습을 상상하다가 퍼뜩 정한을 떠올렸다.
정한을 보려고 이곳까지 온 저였다. 그를 평생 보기 위해서, 그 엄청난 결심을 했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죽을 거면 정한에게 고백이라도 해야 했다. 어디 고백뿐일까. 그간 저를 괴롭혔던 모든 물음에 대한 사연과 고민도 말해야 했다. 그가 앞으로 만날 오메가에 대한 고발도 빠져서는 안 됐다.
이럴 줄 알았다면 일찍이 그에게 상담할 걸 그랬다. 그러지 않아 일이 엉망이 된 것 같았다. 말할걸. 그는 제 사전이었는데…. 침통한 기분에 빠지려던 윤조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내저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권 회장의 소굴에서 벗어날 궁리를 했다. 이곳이 메라크의 어디인지, 저택과는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당장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슬쩍 돌려 본 문손잡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기대도 없었다. 이 문으로 나섰다가는 그대로 붙잡힐 것이다. 윤조는 빠르게 단념하고 다른 탈출구를 모색했다. 그래 봐야 창문밖에 없었지만.
왜 그리도 많은 소설책에서 창을 통해 도망가는지 알 듯했다. 정말 이것밖에 없었다. 윤조는 창에 붙어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글자로 보았던 묘사보다도 까마득했다. 바닥이 잔디인 것 같은데 확신은 없었다. 다리 하나는 각오해야 할 듯했다. 그래도 이대로 머물러 있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윤조는 조용히 창을 열고 아까까지 베고 있던 베개를 가져와 창 밑으로 던졌다. 미약한 소음에도 주변에는 이렇다 할 경계가 느껴지지 않았다. 정한의 저택처럼 경비가 삼엄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하나를 던지고서 또 하나. 소파의 쿠션까지 모두 던지고 나니 땀이 뻘뻘 났다. 다음으로는 침대 시트를 이어 작은 옷장을 끌어와 그곳에 묶고 창 아래로 늘어트렸다. 시트의 여분이 모자라 바닥까지 닿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자리에서 뛰어내릴 수 있을 만큼이면 될 듯했다.
창을 타고 나서기 전, 윤조는 더 챙길 것이 없는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테이블 위에 포장된 쿠키가 여럿 있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 외에는 이렇다 할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 가야 할 때였다.
윤조는 결심하고서 창을 넘어 시트를 움켜쥐었다. 옷장이 윤조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을 긁으며 끌려와 창틀에 덜컹거리며 붙었다. 윤조는 그 소음에 깜짝 놀라 시트를 놓칠 뻔했다.
“흐읍…!”
죽기 살기로 매달려 발을 허우적거리다 돌출된 장식에 발을 대었다. 멀리 창으로는 확인하지 못한 보안 요원이 보였다. 윤조는 깜짝 놀라 그대로 시트를 놓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추락한 윤조는 자신이 제법 적당한 자리에 베개와 쿠션을 던져 놓은 걸 알았다. 충격의 여파로 기침이 나오려는 걸 참고서 바닥을 기었다. 다행히 몸은 멀쩡했다. 떨어지는 순간에는 심장도 같이 떨어지는 듯했는데, 아직 제게 운이 있는 모양이었다.
엉금엉금 기어, 나갈 만한 통로를 찾으려는데 발소리가 들렸다. 숨을 멈추고 바닥에 더할 수 없이 납작 엎드렸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그대로 손 머리 위로 올립니다.”
윤조는 요원이 시키는 대로 제 두 손을 천천히 뒤통수에 대었다. 딱딱한 것이 제 등을 꾹 누르는 게 느껴졌다. 그게 무엇인지 바보라도 알 수 있을 만큼 선명한 위협감이 들었다.
요원이 무전을 하려 품을 뒤지는 동안 윤조는 고개를 들어 요원에게 감정에 호소하려 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얼굴에서 눈만 나와 있던 요원이 동작을 멈추었다.
“…윤조?”
윤조는 눈을 깜박여 상대가 누구인지 기억하려 했으나 눈만 봐서는 이 어둠 속에서 알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추측 가능한 것이라고는….
“명우 형…?”
“윤조, 너 왜 여기….”
윤조는 얼른 일어나 명우의 입을 막았다. 명우가 따라서 윤조처럼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또 다른 발소리의 등장에 식은땀이 흘렀다.
“형, 왜 여기 있어…?”
발소리가 멀어진 뒤에 윤조는 명우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왜긴. 여기서 일하니까 있지.”
“어…? 형… 잘린 게 아니라…?”
“내가 왜 잘려? 야, 너….”
다시금 다가온 발소리에 명우가 말을 줄였다. 윤조는 제 손을 잡는 명우의 손을 꽉 붙들었다. 심장이 지나치게 뛰었다. 한차례 다가온 발소리가 멀어진 뒤 명우가 조용히 일어나 윤조의 몸을 잡아끌었다. 윤조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명우에게 끌려갔다.
“나 잘린 줄 알았어?”
“어, 나 때문에….”
“잘렸으면 내가 여기 있겠어?”
“그럼…? 사장님이 형 자른 거 아니야?”
“사장? 아… 도련님? 도련님이 내 존재를 알기나 할까? 팀장이 여기 페이 더 세다고 이리로 보내줬어. 출퇴근 시간이 길긴 한데, 여긴 별장이라 거의 비어 있거든. 오늘은 회장님 오셔서 바쁘긴 하다만….”
“아….”
“나야 그렇다 치고. 넌 왜 여기 있어?”
윤조는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했다. 명우가 걱정스러운 눈짓으로 팔을 붙잡았다. 적당한 말을 찾아 고심하던 윤조의 입술이 조심스럽게 달싹거렸다.
“회장님이…. 날 죽이려고 해.”
“회장님이…? 왜?”
이유를 말하려니 눈물이 났다. 윤조는 서둘러 눈물을 닦고 명우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사장님 좋아해서.”
“…그렇다고 죽여?”
“그런가 봐.”
“미친…. 그래서 너 지금 도망가는 거야?”
“어, 형… 나 좀 살려주라. 못 본 척해줘. 나 여기서 나가야 해. 안 그럼 죽어….”
명우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윤조는 고마워서 또 눈물이 났다. 훌쩍거리는 윤조를 다독인 명우가 바닥을 기며 길을 안내했다. 윤조는 그의 뒤에 찰싹 붙어 갔다.
“이 주변에 아무것도 없어. 숲은 넘어가야 민가가 좀 나올 거야.”
“두베는?”
“두베? 두베 가려고?”
“어. 북쪽으로 가면 되겠지?”
“야, 여기서 가려면….”
지지직. 무전의 잡음이 울렸다. 놀란 명우가 제 가슴을 쓸고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윤조는 이만 그와 작별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고마워, 형. 내가 형한테 미안한 것도 많고, 고마운 것도 많아. 꼭 연락할게. 팀장님한테 졸라서 꼭….”
말이 길었는지 명우가 윤조의 입을 틀어막았다. 윤조는 다급히 고개만 끄덕이고 명우가 등을 떠미는 힘에 밀려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그곳은 개구멍이라도 된 모양이었다. 윤조는 좁은 틈에서 멀어지며 방향을 가늠하려 하늘을 보았다. 저 멀리 북두칠성이 보였다. 막연하게나마 저 끝에 닿으면 저택이 있을 듯했다. 윤조는 북두칠성을 머리에 둔 검은 숲을 향해 걸었다. 부디 제 운이 두베의 저택에 닿을 때까지 함께하길 바랐다.
*
메라크의 별장은 두베의 저택과 물리적인 거리가 상당했다. 그 탓에 권 회장은 정한이 저택을 나간 뒤로 늘 좌불안석이었다. 어떻게든 제 시야에 아들을 두고 싶었던 권 회장은 스스로 저택을 나가 줄 수밖에 없었다. 정한이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감시 카메라와 도청기도 마찬가지였다.
이 둘이 아니더라도 살아 있는 감시자인 집사가 늘 곁에 붙어 있었고, 저택의 모든 담당자와 보안 인력이 눈과 귀가 되어 소식을 전해줄 것이었다. 이 정도의 대비책이면 괜찮으리라고 황 집사는 권 회장을 달랬다. 하지만 애써서 달랜 수고가 우습게도 대비책의 한계는 빠르게 찾아왔다.
정한이 메라크의 별장에서 돌아온 다음 날. 두베역에서 테러가 발생했다. 그리 놀랍지 않은 소식이었으나 저택에서 걸어온 뜬금없는 전화에 황 집사는 가슴이 철렁했다. 정한이 두베역에 갈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정한이가 왜 거길 가!!”
“어떤, 손님을 배웅한다고 하였습니다.”
“손님? 그 밤사이에 손님이 찾아와?”
“한석 님의 손님이라고 했습니다. 하여 따로 보고하지 않은 듯합니다.”
“염한석이, 이 새끼가….”
“윤 집사에게 연락해 보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윤 집사에게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 탓일까. 계속해서 놀라운 소식만이 찾아들었다.
“뭐가 어쩌고 어째?”
“손님을 다시 데려오셨는데, 그분을 집사로 고용하신 듯합니다.”
“한석이 놈 손님이라고 했지?”
“예. 회장님.”
“그 인력 사무소 집사겠구만. 그 집사 이력이나 알아 와.”
“그것이….”
한석의 입으로 전해 들은 집사의 이력은 말하기도 부끄러울 만큼 처참했다. 눈에 띄는 사실 하나가 아니었다면 권 회장은 당장에라도 저택으로 쳐들어가 난장을 피웠을 테다.
“오메가?”
“예. 오메가라고 합니다. 도련님께서 테라피를… 시도하시는 게 아닐까 합니다.”
내내 찌푸리고 있던 권 회장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돌았다.
“흥. 저도 괴로웠던 모양이지. 메라크에서도 도통 잠들지 못했다고 하니.”
“하면 어찌할까요.”
“일단 그대로 둬. 딴짓 못 하게 잘 감시하고.”
오메가인 집사. 오로지 그 사실 하나가 그 처참한 이력의 집사를 저택에 머물게 했다.
“왜 소식이 없어?”
권 회장의 인내는 뙤약볕 내리는 계절처럼 바짝 말라 갔다. 가늠하고 또 가늠한 후에야 쫓기듯 나온 저택을 찾은 뒤에는 폭발이 임박한 활화산처럼 이글거렸다.
“어디서 그런 걸 데려왔나 몰라. 쓸모도 없는걸!”
씩씩거리던 권 회장이 몇 번이나 살펴본 집사의 이력을 다시금 훑었다.
“황 집사.”
“예. 회장님.”
“이놈 요즘 꼴이 어떤 줄 알아?”
“어땠습니까.”
“그럴싸해. 주인이 어찌나 빗어 놨는지, 아주 윤기가 철철 나더라고?”
“저택에서 일을 하게 되면 그럴 만하지요.”
“어디 그뿐이야? 이놈이 정한이 손을 탔다니까?”
황 집사는 권 회장이 내미는 하얀 저택의 얼토당토않은 오메가 집사, 서윤조의 얼굴을 그때야 제대로 보았다. 증명사진으로만 보던 얼굴은 꽤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때.”
황 집사의 손에서 몇 장의 사진이 넘어갔다. 개중 환하게 웃는 사진에서 손이 멈추었다.
“고운 얼굴이네요.”
“흥. 꼴에 오메가라고.”
“오메가치고도, 꽤….”
“치료사 하나 알아봐.”
“예, 그럼 집사도 새로 알아보겠습니다.”
“아니, 아니. 그럴 필욘 없고.”
“치료사를 알아보시라면서요. 집사를 내치시려는 게 아닙니까?”
“아무래도 이상해.”
권 회장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턱을 괴었다.
“제 동생 죽을 때도 빤히 서 있던 놈이, 그 오메가를 뒤에 감추더라고?”
“도련님께서, 그러셨습니까?”
“내 말 했잖아. 고놈이 정한이 손을 탔다고.”
“…….”
“고 앙큼한 놈이 뒤에 딱 숨어서는….”
당시를 회상하듯 멀리 시선을 던진 권 회장이 제 단단한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두고 봐야겠어.”
두고 본다던 권 회장의 인내 덕에 저택의 상황은 흥미롭게 진전되었다.
“데려가면 죽이겠다?”
“예. 그리 전하라 하셨습니다.”
분한 듯 이를 악물며 보고를 올린 치료사의 말에 권 회장이 껄껄 웃었다. 당시만 해도 황 집사는 정말 권 회장이 죽기를 작정한 것처럼 일을 몰아갈 줄은 몰랐다.
“이만하면 되셨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서 집사님 데려다 놓겠습니다.”
“사람이 공평해야지.”
“예?”
“정한이도 진짜인지 봐야 하지 않겠어?”
“회장님. 도련님 지금 저택 나가시려는 것도 아시지 않습니까.”
“혼자 살긴 지나치게 넓지. 옮길 만해. 평생 거기서 살았으니 질릴 만도 하고.”
“그게 아니라는 거 아시면서, 왜 모른 척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난 내 귀로 똑똑히 들어야겠어.”
“들으실 수 있겠습니까? 도련님이 제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진짜가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황 집사는 자신이 권 회장의 의도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아무리 봐도 일이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왜 이렇게 몰아가세요. 이러다 정말… 회장님 다치실까 걱정입니다.”
“…….”
“회장님.”
“아휴. 늦다, 늦어.”
“하… 이미 회사와 자택도 다 들르셨다고 합니다. 이곳까지 족히 세 시간은 걸리니 늦으시는 게 아닙니다.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누가 몰라서 그래? 여태 질질 끈 게 늦다는 거야. 일찍이 찾아왔어야지!”
황 집사는 답답한 마음에 제 가슴을 쳤다.
“회장님,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속도로 달리지는 않습니다. 목적지에 다다르는 방법도 제각각이지요. 그때도 엇갈리셔서 도련님이 괴로워하지 않았습니까. 왜 같기를 강요하세요.”
“늦어.”
권 회장이 지겨운 얼굴로 현관문을 응시했다. 황 집사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화기 너머로 느껴지던 그 분노를 어떻게 할까. 황 집사는 혀를 딱 차고 권 회장을 향해 몸을 틀었다.
“방탄조끼라도 주시지요.”
“천하의 황 집사가 겁을 먹은 게야? 그렇게 모시던 사모가 죽어나던 날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더니.”
“그때야 피 하나 섞이지 않은 남인데, 이번엔 다르지 않습니까. 회장님도 아시는 감정입니다.”
“녀석이 와봐야 아는 일이지.”
“저는 확신합니다. 도련님이 저 죽이실 거예요.”
“미워는 하겠지. 그리 칼질을 해댔는데, 그 칼을 부러트리고 싶지 않겠어?”
“보십시오. 회장님도 인정하시는 바 아닙니까!”
권 회장이 껄껄 웃으며 등을 돌려 계단을 올랐다.
“안에 들어가 있을 테니 오면 데리고 와.”
“회장님!”
“지겹다, 지겨워.”
뒷짐을 진 채 2층으로 올라가는 단단한 등을 보며 황 집사는 얼굴을 찌푸렸다. 계단 끝에 서 있던 요원 둘이 회장의 뒤를 따랐다. 황 집사는 제 가슴과 배를 더듬으며 보안 팀장을 찾아가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그 고민이 소용없다는 듯 수화기 너머의 분노가 현관문을 걷어차고 나타났다.
*
긴 시간을 달려 도착한 별장 앞에서 정한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조금이라도 진정하고 싶었다. 윤조가 어디에 있는지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눈에 띄는 족족 깡그리 죽여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성을 무너트린 분노가 정한을 계속해서 움직이게 했다. 오랜만에 들어선 메라크의 별장. 그 화려한 실내의 반짝이는 조명 아래, 초조한 얼굴로 저를 기다리고 있던 황 집사의 멱살을 잡아들었다.
“어디 있습니까.”
황 집사의 넥타이가 비틀리며 정한의 손길에 조여졌다. 핏발을 세운 황 집사의 눈이 다급하게 계단으로 향했다. 정한은 황 집사를 내팽개치고 계단을 올랐다. 바닥에 쓰러진 황 집사가 다급하게 뒤를 따라오며 정한을 불렀다.
“도련님! 도련님!!”
정한은 제 바짓단을 붙든 황 집사를 돌아보았다. 계단을 기듯이 올라온 황 집사가 절실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았다. 정한의 시선이 황 집사의 등허리에 자리한 불룩한 이물질에 닿았다.
“도련님! 일단 좀 진정을 하시고….”
“이것도 회장님 명령입니까.”
“아닙니다. 도련님, 부디….”
“그럼 소임을 다하세요. 어쭙잖게 끼어들지 마시고.”
“도련님, 제발….”
“저택에 자주 오셨다 들었습니다.”
“…….”
“이럴 줄 몰랐다고는 하지 마세요.”
정한은 황 집사의 손을 치워내고 다시 계단을 올랐다. 끈질기게 뒤따라온 발소리가 등에 붙었다. 곧 제 앞을 가로막고 선 황 집사를 보며 정한은 제 주먹을 꽉 쥐었다.
“도련님, 부디 그 총만 제게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황 집사님 허리에 찬 총이나 치우고 말하세요.”
“도련님….”
정한은 황 집사의 어깨를 밀어 옆으로 치워내고 아버지 주흠이 자주 머무는 방의 문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 데스크에 서서 문 쪽을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아버지를 만나면 어떻게 할까. 장장 세 시간의 거리를 두 시간 만에 주파하며 온갖 상상을 해 보았지만 명확하게 떠올리지는 못했다. 저를 죽일 때만큼이나 구체적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제게 급한 건 아버지의 처벌 따위가 아니었다.
“윤조, 어디 있습니까.”
정한은 씨근덕거리는 호흡을 애써 다잡으며 윤조의 행방을 물었다. 중요한 건 오직 그뿐이었다.
“불러도 오지 않던 놈이, 눈이 뒤집혀서 나타났구나.”
“윤조 어디 있냐 물었습니다!”
“어리석게도, 각인이라도 한 게야?”
그 말 때문일까. 정한은 정말 제 눈이 뒤집힌 듯했다. 앞뒤가 구분되지 않고, 제게 총구를 겨누는 이들이 등에 붙는 것도 상관하지 않았다. 오로지 저 입에서 듣고 싶은 말만 원했다.
“어디 있냐고.”
벽에 부딪힌 목이 손끝에서 비틀어졌다. 정한은 자신이 제 아버지의 목을 조르고 있는 걸 인지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같은 말을 물었다. 어떻게 해야 대답이 나올까. 정한은 답답한 마음에 대답은커녕 숨도 쉬지 못하는 목구멍에 총구를 박아 넣었다.
“말하라고.”
“커… 흑, 윽…!”
“도련님, 도련님 진정하세요. 도련님!”
“말해!!”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도련님, 저를 따라오세요!”
황 집사가 팔에 매달려 부탁했다. 정한은 그제야 손을 떼고 물러났다. 바닥에 쓰러진 주흠이 연신 기침을 하며 정한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한은 제 아버지의 손길을 무시한 채 황 집사를 앞세우고 돌아섰다.
“정한아…!”
정한은 아버지의 부름을 무시하려 했으나 바닥을 기며 저를 붙잡는 손길에 잠시 눈을 돌렸다.
“날 죽이고 가야지….”
“회장님, 제발!!!”
황 집사가 소리를 지르며 주흠의 몸을 붙잡아 요원들에게 넘겼다. 정한은 다시 발걸음을 이었다.
“권정한…!!”
“아버지 궤변 들을 생각 없으니까 입 다무세요.”
“그래서 네 속이 어떻게 풀려!”
황 집사가 열어 둔 문을 앞에 두고 정한은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황 집사가 어서 나가자고 재촉했다. 정한은 열린 문 너머, 조용한 복도를 응시하다 천천히 몸을 돌렸다.
“왜 그리 죽지 못해 안달 나셨습니까.”
“네 속이 풀려야 하니까.”
“그게 아버지 죽음이라 생각하세요?”
“그래.”
“…윤조는 왜 데려가셨습니까.”
“데려가면 죽인다기에.”
등 뒤에선 황 집사가 숨을 크게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정한은 아버지가 정말 궤변을 늘어놓는다 싶어 다시 가려고 했다.
“온갖 것을 다 해 봤겠지. 찾다, 찾다, 내 아들한테 손도 대었고.”
정한은 흐리멍덩한 눈으로 허공을 보고 있는 주흠을 보았다. 어쩐지 평소와 다르게 제 아버지가 작아 보였다.
“그렇게 했어도 너는 나를 안 보고 살지 않느냐. 나를 보기가 고통스러운 게지.”
“…….”
“이걸 어떻게 풀 수 있을까. 네가 외면하고 포기한 답은 하나밖에 더 있겠어?”
“미친 소리 그만하시고….”
“내 지켜보았지. 네가 얼마나 그 오메가에게 진심이 되는지. 정말 나를 죽일 만큼 빠질지. 내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래서, 뭘 얻으신 겁니까. 이렇게 빠진 저를 보셨으니 아실 거 아니에요.”
“이번에야말로, 날 죽여주겠지. 내 아들이 아닌 나를.”
부글부글 끓던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정한은 표정 없는 얼굴로 제 아버지를 보았다. 천천히 고개를 든 주흠의 얼굴이 기이하게 비틀어졌다.
“너는 또 나와 부딪칠 거거든. 네가 마음에 둔 그 오메가를 내가 그냥 두고 볼 것 같아? 우리는 또 엇갈리고, 나는 너를 괴롭게 할 거다.”
“…….”
“나는 다 의심스럽다. 저놈이 다른 뜻이 있어 네게 붙은 건지. 너에게서 무엇을 빼앗을지. 나는 확인이 필요해. 암만 네가 진실하게 보았다고 해도 사람을 어찌 믿어! 손에 쥘 게 많으면 변하는 게 사람이야. 함께한 시간이 얼만데 너를 죽이려던 네 새엄마를 봐라. 나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해. 그게 내가 너를 지키는 길이야.”
“그래서, 지금 제가 아버지를 죽이면 그 의심은 어디로 갑니까. 저를 지켜야 하신다면서요!”
“의심도 남지 않게 내가 바닥까지 쥐어짰다.”
“…윤조를요.”
“그래. 난 내 할 일을 다 했어.”
숨을 쉬는 법을 잊어버린 듯했다. 정한은 제 귀를 어지럽히는 이명에 눈을 찌푸렸다.
“데려가. 의심할 것도, 변할 것도 없더구나.”
“그 전에, 아버지를 죽이고 말입니까.”
“그래. 아주 잘 아는구나.”
“제 그다음 삶은 생각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정말 아버지를 죽이고 잘 살 거라 생각하세요?”
“잘 살 거야. 어디 한번 해 봐. 속이 다 시원할 테니까. 내가 네 오메가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 윽…!”
정한은 주흠의 멱살을 움켜쥐고 그를 단번에 집어 들었다. 거구의 사내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제 마음 편하게 하겠다고 하셨어요? 아버지 마음 편하려고 하는 거겠죠.”
“…….”
“내가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할 것 같습니까?”
“…….”
“…병원 가세요. 아버지. 처넣기 전에.”
큰 눈 부릅뜬 몸을 던지듯 밀어내었다. 피가 몰려 검붉게 변한 얼굴이 바닥에 쓰러지며 연신 기침을 뱉었다.
“아버지 말씀대로 언젠가는 또 부딪쳤겠죠. 하지만 전과 같은 일은 없을 겁니다. 그땐 이미 제가, 아버지 소관의 아들이 아닌 다른 이의 것이 되어 있을 거거든요. 난 이제 함부로 못 죽습니다.”
호흡을 진정한 주흠이 정한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정한은 그 뜻을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참말이지?”
“…….”
“정한아, 참말이지?”
“…….”
“정말 안 죽을 거지?”
간절히 대답을 구하는 눈을 외면하며 정한은 제 마른 입술을 핥았다. 제겐 이미 지나간 일이었는데, 아버지는 아직 그 시간에 살고 있었던 모양이다.
“확실히 말을 해 봐. 응? 정한아.”
문득 가슴을 긁고 지나가는 감정의 이름이 무엇인지, 지금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정한은 전보다 훨씬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드렸어요. 못 죽는다고.”
“…그래, 그럼 됐다. 그럼, 되었어….”
정한은 잠시간 아버지를 바라보다 등을 돌려 방을 나왔다. 황 집사가 서둘러 곁에 붙어 안내했다. 긴 복도의 끝 방. 저택에 있는 윤조의 방과 같은 위치였다. 황 집사가 먼저 그 문 앞에 서더니 품에서 열쇠를 꺼내었다.
“가둬뒀습니까.”
황 집사가 제 젖은 뺨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한은 황 집사의 눈물을 바라보다 한숨을 삼켰다. 열쇠를 문손잡이에 꽂은 황 집사가 힘을 주어 열쇠를 돌렸다. 달칵. 아주 가벼운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렸다.
“아직, 잠들어 계실 겁니다.”
“수면제도 먹였군요.”
“놀라실 듯하여….”
“왜. 제가 진짜 아버지를 죽여버려 내 오메가가 저한테 겁이라도 먹을까 걱정하셨답니까?”
황 집사가 열쇠를 챙겨 넣으며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정한은 바닥에 툭, 툭, 떨어지는 황 집사의 눈물을 보았다.
“황 집사님.”
“예, 도련님….”
“다시는 아버지의 명령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오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황 집사가 고개를 조아리며 한 걸음 물러났다. 정한은 차가운 문손잡이를 붙잡고 문을 열었다. 기시감일까. 저택에 있는 윤조의 방도 아닌데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정한은 환하게 열린 창을 향해 곧장 다가갔다.
작은 옷장에 어설프게 묶인 매듭, 그 아래로 나풀거리는 침대 시트. 까맣게 그늘진 바닥. 이제야 발견한 듯 당황한 보안 요원의 엉거주춤한 거동. 지지직, 귀를 간질이는 무전 소리. 등으로 달려드는 발걸음.
정한은 고개를 들어 제 옆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황 집사를 보았다. 당혹한 얼굴이 침대로 향했다. 이미 없는 것을 알면서도 이불을 뒤적이고 바닥을 살피는 꼴이 영락없이 저택에서의 저 같았다.
“도련님….”
바닥에 주저앉은 황 집사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정한은 창틀을 꽉 붙든 채 캄캄한 창밖 풍경을 보았다. 까드득 소리가 나며 손톱이 나무 창틀을 긁었다.
“…….”
차갑게 식은 가슴이 다시금 들끓었다. 정한은 뻣뻣한 목덜미를 느끼며 별장과 마주한 검은 숲을 바라보았다.
“여기 메라큽니다.”
“…예.”
“아는 사람 하나도 없어요.”
“…….”
“이 밤에! 이 외딴 별장에!!”
다급히 일어난 황 집사가 크게 허리를 숙였다. 사과 따위는 받고 싶지 않았다. 받을 사람은 따로 있었고, 저 역시 무릎이 닳도록 용서를 빌어도 모자랐다.
“찾으세요. 못 찾으면 그땐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정한은 황 집사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방을 나섰다. 뜨거워진 가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
검은 숲을 가로질렀다. 똑바로 걷는다고 걸었는데 제대로 가고 있는지 확신이 없었다. 별도 보이지 않을 만큼 빼곡한 나무 사이를 걷고 또 걸으며 윤조는 차로 달려왔던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도저히 사람의 걸음으로는 닿을 만해 보이지 않았다. 슬슬 날은 추워지고 산짐승 우는 소리가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두 팔로 몸을 껴안고서 보폭을 크게 내디뎠다. 걸음을 빨리하면 몸에서 열이 나지 않을까. 차가운 코끝을 훔치며 숨을 짧게 나뉘어 쉬었다. 차가운 공기가 목을 바짝 얼리는 듯해 침을 삼키기도 힘들었다.
갈 길도 먼데 벌써 지치는 느낌이 들어 윤조는 조금 비관적이었다. 이렇게 부정적인 인간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세상에 홀로 뚝 떨어진 것만 같아서 자꾸만 나쁜 생각이 들었다. 종일 정한을 보지 못한 탓일까.
불쑥 떠오른 정한의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불어온 바람이 아니었다면 엉엉 울어버렸을지도 몰랐다. 차갑게 눈가를 얼리는 바람 때문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탁, 탁, 탁.
일부러 바닥을 세게 누르며 걸었다. 발가락이 얼어서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방을 뒤져 볼 걸 그랬다.
이불이라도 말고 올걸.
소용없는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데, 멀리서 차바퀴 소리가 났다. 윤조는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달렸다. 몸을 안고 있던 팔을 앞뒤로 흔들며 발이 아픈 것도 모르고 달렸다. 그러자 곧 숲이 끝났다. 숨을 헉헉대며 빛을 찾아 고개를 돌리는데, 저 먼 데서 털털거리며 달리는 트럭이 보였다.
이번에도 트럭이 자신을 정한의 저택으로 데려다줄 것만 같은 예감에 윤조는 서둘러 트럭을 따라갔다. 어찌나 달렸는지 목에서 핏물이 다 올라올 듯했다. 입이 얼어 소리를 제대로 지르지 못한 까닭이었다.
사이드 미러로 달려오는 윤조를 발견한 운전자가 트럭을 서서히 멈추었다. 윤조는 더욱 힘껏 달려 운전석 옆에 섰다. 허리를 숙인 채 무릎을 지지대 삼아 숨을 몰아쉬었다.
“어허! 귀신인 줄 알았네! 이봐요, 괜찮아요? 여긴 홀로 어쩐 일이야?”
“하아, 하아.”
“아이구, 숨넘어가겠다. 있어 봐, 물이 어디 있을 텐데.”
운전자가 트럭에서 찾아낸 물을 받아 든 윤조는 그것에 약간의 신맛이 나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꿀꺽꿀꺽 마셨다. 운전자가 혀를 끌끌 찼다.
“보아하니 탈주한 집사로구만.”
“…예?”
어떻게 자신의 정체를 알았는지 윤조는 눈이 돌아갈 듯했다. 설마하니 자신이 지명 수배라도 당한 게 아닐까 싶었다. 권 회장은 그럴 수 있는 사람 같았다.
“어디 그쪽 같은 사람이 한둘이었어야지.”
“…이런 사람이 많아요?”
“뻥이야, 나도 딱 한 번 봤어.”
하하하하, 크게 웃는 운전자의 웃음에 동조할 수 없었다. 윤조는 굳은 얼굴로 운전자를 보았다.
“주로 두베 것들이지, 아마? 메라크를 별장처럼 쓰는 부자들이 많아. 종종 데리고 온 집사들이 이렇게 도망을 치는데, 죄 붙잡히고 말지.”
“왜… 도망가는 건데요?”
“아, 애를 뱄는데 지우려고 하니까 지키려고 도망을 가지. 그러고서 애를 낳고 떳떳하니 찾아가는 거야. 재산 달라고.”
“아….”
운전자가 가늠하듯 윤조를 위아래로 훑었다. 윤조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이를 가질 만한 일은 수도 없이 해 봤지만 생기지 않았다. 의사인 정한이 그럴 일이 없다고 했으니 이건 확실했다.
“아뇨, 저… 임신 안 했어요.”
“그럼 뭐야, 이 밤에 그렇게 산발이 되어 도망 다니는 이유가.”
“…제가 산발이에요?”
윤조는 그제야 제 꼴을 알아채고 급히 머리를 빗어 대었다. 운전자가 춥다며 차에 타라 이르지 않았다면 밤새도록 머리를 단장했을 테다.
“아… 따뜻해.”
“꽤 걸은 모양이지?”
“모르겠어요, 그냥… 계속 걷기만 해서.”
“어디 갈 곳은 있고?”
“제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알아 뭐 하겠어,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선을 긋는 운전자의 말에 윤조는 잠시 주춤했다. 최대한 부담스럽지 않은 부탁의 말을 떠올렸다.
“…근데, 어디까지 가세요? 전 가시는 곳까지 가도 되는데….”
“방향이라도 알아야지. 집사님 가는 길이랑 반대면 어쩌려고 그래?”
“아… 저, 두베에 가려고요.”
“역시 두베로구만? 설마 걸어서 가려는 건 아니지?”
윤조는 씁쓸하게 웃었다. 방향이 같았던 모양인지 운전자가 천천히 차를 몰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다는 명우의 말이 사실인 듯 헤드라이트 불빛만 유일한 길을 달리고 또 달렸다.
차 내부는 따뜻하고 몸은 노곤해서 금방 졸음이 밀려왔다. 자면 안 된다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눈꺼풀이 무거워져 윤조는 기어이 차창에 머리를 박고 말았다. 마침 도착했는지 차가 멈추고 운전자가 안타깝게 웃으며 다 왔다고 했다. 윤조는 서둘러 트럭에서 내려 운전자에게 크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고맙습니다, 어르신.”
“두베는 진짜 먼데. 다시 또 걸을 생각이야?”
꽤 먼 길을 달려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두베는 먼 모양이었다. 윤조는 막막함을 감추고 애써 웃어 보였다. 가히 딱히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하루 자고 가. 이러다가 큰일 나겠어, 몸도 약해 보이는데.”
“아니에요, 저 튼튼해요. 감사합니다, 어르신. 이 은혜 잊지 않을게요.”
“아휴, 마음이 쓰여서 어쩌나. 저, 이거라도 걸쳐. 응?”
운전자가 차에서 얇은 담요를 가져와 건네주었다. 윤조는 감사히 받아 들었다.
“저기 좀 나가면 정류장이 하나 나올 거야. 거기서 기다렸다가 버스 타. 하루에 두 번 오는데, 시간은 내가 잘 모르겠네. 돈은 있지?”
“아…, 그게.”
운전자가 품을 뒤져 돈을 꺼냈다. 동전이 몇 개 그의 손에 떨어졌지만 이내 손이 거둬졌다. 불쑥 나타난 남자 하나가 운전자의 손을 꽉 그러쥐고는 노려보았다.
“아, 우리 형이야. 인사해, 여기는….”
남자는 윤조를 잠시 노려보다가 운전자를 잡아끌고 들어갔다. 고작 버스비일 뿐이라는 운전자의 말에 버럭 성을 낸 남자의 음성에 놀라 윤조는 서둘러 길을 나섰다.
‘탈주 집사를 도울 생각을 해? 미쳤어?!’
아무래도 운전자가 본 집사가 한둘이 아닌 듯했다. 윤조는 제 옷이 보이지 않도록 담요를 펼쳐 어깨에 둘렀다. 설마 이래서 담요를 준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머나먼 길을 떠났다. 윤조는 침착하게 운전자가 가리킨 길을 따라 걸었다. 벗 삼은 달빛이 이따금 구름에 가려져 덜컥 두려운 마음을 먹게 해도 걸음을 쉬지 않았다. 깊은 어둠 속으로 윤조의 작은 등이 천천히 삼켜졌다.
*
정한은 윤조가 머물러 있던 2층 창문 아래로 가 발자국을 추적했다. 혹여나 아직 이 별장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희망을 품고서. 하지만 희망은 희망일 뿐. 기대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마른 잔디 아래로 기듯이 난 흔적 끝에 별장 보안 팀장이 한 요원을 붙들고 나타났다.
“이자가 집사님을 밖으로 빼냈다고 합니다.”
붙잡혀 온 요원의 두 팔에서 베개와 쿠션이 우수수 떨어졌다. 정한은 잠시 그것을 의아하게 보다가 요원을 향해 다가갔다.
“나쁜 뜻은 아니었습니다….”
채 무어라 묻기도 전에 제 앞에 무릎 꿇은 요원을 붙잡아 일으켰다. 깜짝 놀라 몸을 바르르 떤 요원이 자라처럼 목을 넣으며 시선을 피했다.
“말해. 내가 이해할 수 있게.”
“집, 집사님이 도움을 청하셨습니다.”
“너 윤조 알아?”
“예, 저… 두베, 도련님 저택에서 일했습니다. 당시 집사님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정한은 눈을 가늘게 뜨고 요원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다. 오븐을 태우고서 의기소침해져 쥐새끼처럼 도망 다니던 때. 먼 기억 속 윤조가 변명이랍시고 알 수 없는 소릴 했던 게 떠올랐다. 그가 제게 특정한 이의 이름을 입에 올린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박명우]
요원의 가슴에 새겨진 이름 위로 정한의 엄지가 지나갔다. 이런 이름이었던가. 꽤 오래전 일이라 분명하지 않았다.
“도저히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회장님께서….”
요원이 옆에 선 황 집사의 눈치를 보았다. 정한은 그의 몸을 흔들어 저를 보게 했다. 요원이 바짝 긴장한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회장님께서 자기를 죽일 거라 하여… 도와주었습니다.”
정한은 요원의 몸을 놓고 황 집사를 돌아보았다. 황 집사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지나갔다. 일단 그건 나중에 묻기로 하고, 윤조부터 찾아야 했다.
“그래, 어디 간다는 말은 없었나?”
요원이 황 집사의 눈치를 보더니 깨금발을 들어 귀를 달라 부탁했다. 정한은 기꺼이 몸을 숙여 귀를 빌려주었다.
“두베에 간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북쪽으로 가겠다고….”
정한은 몸을 바로 하고서 요원을 내려다보았다. 우선 윤조가 두베로 오기로 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건 곧 저를 향해 온다는 것이었으니까. 그건 그렇고…. 요원의 말을 되짚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왜… 웃으십니까?”
“서 집사가 북쪽을 알까?”
“예?”
정한은 제 머리 위로 훤하게 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장과 마주한 검은 숲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 북두칠성이 보였다. 지금은 저기에 걸어 보는 수밖에 없는 듯했다.
“고맙다, 박명우 요원.”
요원이 기쁜 듯이 웃고는 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한은 숲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근데, 윤조가 여기서 나간 지 얼마나 되었지?”
“한 시간… 은 넘었습니다.”
기가 막힌 대답이었다. 정한은 주먹을 꽉 쥔 채 보안 팀장을 향해 눈짓을 주었다. 별장 관리가 이리도 허술할 일인가 싶었다. 이 사람들의 무엇을 믿고 맡길 수 있을까. 하지만 이 너른 메라크에서 윤조를 찾으려면 믿을 수밖에 없는 듯했다.
“별장을 기점으로 동서남북 다 둘러봐야 할 겁니다. 절대 겁주지 말고, 내 이름을 파세요. 발견 즉시 나한테 전화해서 연결합니다. 알았습니까.”
“네!!!”
대답은 확실한 요원들 사이를 가르며 정한은 검은 숲으로 향했다. 저는 무조건 북쪽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숲이 꽤 큽니다. 이곳 사람들도 낮이 아니면 방향을 가늠하기가 어렵지요. 보시다시피 잎이 빼곡해서 하늘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팀장이 숲의 입구에서 말리듯이 정한을 붙들었다. 정한은 그러거나 말거나 앞으로 향했다.
“숲에도 끝이 있을 겁니다. 차로 그곳까지 달려 인력을 배치하세요. 일정 간격으로 대기 인원을 두고 나머지는 이동합니다. 숲 안으로 들어오지는 말고 바깥으로.”
“예, 알겠습니다. 그럼 도련님, 이게 필요하실 겁니다.”
정한은 팀장이 건네준 무전을 받아들고 서둘러 숲으로 들어섰다. 윤조의 한 시간을 따라잡아야 했다.
“서윤조!!!”
하얀 숨이 퍼지며 숲을 울렸다. 정한은 큰 보폭으로 달리며 계속해서 윤조를 불렀다. 메아리처럼 돌아오지 않는 부름은 바람에 부서져 사그라지길 반복했다.
“서 집사님!!!”
별장에서 쏟아져 나온 요원들이 비추는 손전등으로 숲은 혼란하였다. 정한은 계속해서 북쪽, 두베로 향했다. 윤조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가슴이 졸아들었다. 제 가슴속 초침이 째깍거리는 듯했다.
“서윤조!!!”
가슴이 기이하게 뛰었다. 이것이 불안 때문인지, 각인에서 오는 광증 때문인지, 혹은 그 외의 것 때문인지, 정한은 그 어떤 진단도 내릴 수 없었다.
“집사님!!!!!”
바람이 지나치게 차가웠다. 어둠도 더욱 깊어졌다. 사방은 온통 나무와 바람뿐. 정한은 이 까마득한 어둠을 홀로 걸었을 윤조를 생각하며 가슴을 그러쥐었다.
“윤조야… 어디 있어.”
중얼거리는 목소리조차도 바람에 휩쓸려 갔다. 정한은 숲을 가르며 달렸다. 얼마나 더, 또 어디를 향해 가야 할지 알 수 없었으나 더 빨리, 또 더 멀리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목에 피가 맺히도록 부르는 이름은 바람에 날리기만 할 뿐, 주인을 데려와 주지 않았다.
* * *
운전자가 알려준 정류장을 지나친지 한참이었다. 새벽이 밝아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아침이 찾아왔다. 윤조는 기계처럼 걷던 걸음을 멈추고 구름 사이로 드러난 해를 보았다. 고작 그게 무어라고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한참 해를 보고 있는데 먼 데서 끼익 끼익하며 다가오는 형체가 보였다. 윤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정체를 살폈다. 자전거였다.
“저기요!”
운전자와 헤어진 뒤로 줄곧 잠겨 있던 목청이 탁 트였다. 윤조의 부름을 들은 자전거가 멈추어 섰다. 윤조는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갈 여력이 없어서 크게 소리쳤다.
“어디까지 가세요?”
자전거가 다시 다가왔다. 자전거의 주인은 머리가 허리까지 긴 여자였다. 윤조는 수상쩍은 제 모습이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자전거와 거리를 두고 섰다.
“제가 두베로 가야 하는데, 혹시 방향이 그쪽이시면 제가… 어, 자전거를 운전해도 될까요?”
“내가 뒤에 타라고?”
“제가 끄는 편이 덜 죄송할 것 같아서요.”
“타.”
“네?”
“타라고.”
눈짓으로 가리킨 뒷자리를 향해 윤조는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엉덩이를 대자 끼익, 끼익, 바퀴가 굴러갔다. 점차 속도가 붙어 윤조는 자신이 앉은 자리를 꽉 붙들었다. 망토처럼 멘 담요가 펄럭이며 날았다.
“두베까지 간다고?”
“네.”
“걸어서?”
“달리 방법이 없어서요.”
“차를 타면 되잖아.”
“…돈이 없어요.”
“그거 안 됐네. 근데 어차피 이 근처에는 버스도 잘 없거든.”
“네….”
“두베라….”
힘 좋게 달리던 자전거의 속도가 조금 느려졌다. 윤조는 지겹게 봐 온 논을 보며 코끝을 매만졌다. 여자의 머리칼이 자꾸만 얼굴을 때렸다.
“거기 살아?”
“네? 아… 네.”
“근데 왜 여기 있어? 납치라도 당했어?”
“어떻게 아셨어요?”
끼이이익!
급히 브레이크를 잡은 자전거가 덜컹거리며 섰다. 윤조는 여자의 등에 얼굴을 찧었다가 급히 몸을 일으켰다. 여자가 돌아보았다.
“뭐?! 납치?!”
“아… 그게.”
“진짜?”
“아뇨, 납치는 아니고….”
“놀랐잖아.”
“하하. 예… 저도 놀랐어요.”
다시 자전거 바퀴가 돌아갔다. 윤조는 차라리 납치라고 해서 동정을 살까 싶어졌다. 아주 오랜만에 검은 머리가 될 것 같았다.
“종일 걸어도 모자랄 것 같은데.”
“각오는 하고 있어요.”
“어쩌다 여기 온 거야?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했어?”
“기분은 그래요. 갑자기, 뚝.”
“집에 전화라도 해 보지?”
“웃긴 얘기긴 한데요….”
“어.”
“전화번호를 몰라요.”
끼이이익!!
다시 자전거가 섰다. 이번에는 용케 여자의 등에 얼굴을 찧지 않았다.
“뭐?”
“이건 진짜예요. 몰라요. 전화할 일이 없거든요. 받기만 했지….”
어제 받은 정한의 전화번호만 외웠더라도. 윤조는 아쉬운 마음을 애써 삼켰다.
“주소는 알지?”
“…대충.”
우편물을 보며 눈으로 익혔던 주소는 어렴풋이 기억났다. 정확하지는 않아도.
“뭐야, 진짜 하늘에서 떨어졌어?”
모자란 사람을 보는 듯한 시선에 윤조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쪽 정말 대책 없다.”
“네, 제가 생각해도 그래요.”
고개를 내저은 여자가 다시 페달을 밟았다. 어찌나 오래 달리는지 이러다 두베에 닿을 듯했다.
“근데, 어디까지 가세요? 꽤 많이 달린 듯한데.”
“큰길 나올 때까지 가줄게.”
“아… 감사합니다.”
“거절하지는 않네. 그래, 거절하지 마. 호의를 베풀면 넙죽 받으라고. 그래야 그쪽, 두베에 갈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네, 그럴게요. 고마워요.”
여자는 그 뒤로 말이 없었다. 가끔 힘이 드는지 학학거리며 숨을 몰아쉬기만 했다. 윤조는 그녀의 호의를 넙죽 받기로 했다. 지친 다리를 쉬고 눈을 감고 잠시 졸았다. 다행이게도 떨어지지 않고 큰길에 당도했다.
“이 길 따라서 쭉 가면 될 거야. 메라크는 길이 단순해. 죄다 논이라서.”
각인할 예정이었던 알파의 차를 타고 왔을 때도 줄곧 같은 길을 달렸으니 여자의 말이 맞을 거다. 윤조는 깊이 허리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
끔찍한 밤이 지나고 밝은 날이 찾아왔으나 여전히 윤조의 행방은 묘연했다. 정한은 차 보닛에 걸터앉아 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도통 머릿속이 멍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도련님, 숲 너머에 있는 민가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고 합니다.”
정한은 지난밤부터 한시도 제 곁에서 떨어지지 않은 황 집사를 눈만 돌려 보았다. 마주친 시선에 잠시 멈칫한 황 집사가 조금 뒤로 물러서서 다시 보고를 이었다.
“어젯밤에 마주친 듯합니다.”
“어젯밤에 보았는데 지금 연락했다? 늦어도 너무 늦은 거 아닙니까.”
“탈주 집사라 오해한 듯합니다.”
메라크에서 종종 나타나는 탈주 집사는, 이곳에 별장을 소유한 이들의 집사가 제 아이를 지키려 도망가는 걸 뜻했다.
“자기는 조금도 도운 게 없으니 마을을 헤집지 말라 했습니다. 인근 별장마다 연통을 넣는 모양입니다.”
“도운 게 없다니, 이렇게 도와주고서 말입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어지간히 딱해 보였나 보네요.”
정한은 이를 악물며 황 집사를 보았다. 황 집사는 시선을 내린 채 제 두 손만 꼭 붙잡고 있었다.
“…윤조 옷을 보고 오해한 듯한데, 덕분에 행방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 집사님이 맞으실 겁니다.”
“숲 너머 민가면….”
“북쪽으로 가고 계시네요.”
“…기특해라.”
북쪽도 다 알고.
정한은 보닛에서 훌쩍 몸을 일으켰다. 현재 위치는 숲 너머의 민가에서 살짝 벗어난 지점이었다. 지나치게 온 게 아닌가 했는데 윤조의 이동 속도가 생각보다 빨라 더 과감하게 움직여도 될 듯했다.
“검문소에는 연락해 뒀습니까.”
“예, 통과 없이 그대로 모셔 두라 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 도움을 받네요.”
“회장님께서….”
“아버지 기분은 관심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사과는 아껴 두세요. 받아야 할 사람 따로 있으니까.”
정한은 눈앞의 민가로 향했다. 이미 탐색 중이던 요원 몇몇이 보고를 올렸다. 윤조는 이곳을 지나지 않았는지 기대한 소식은 없었다. 하지만 정한에게는 아무 소식 없는 사실마저도 큰 수확이었다.
“도련님, 이제 어디로 갈까요.”
이 비서가 지도를 넘겨주며 물었다. 정한은 메라크의 지도를 받아 들고서 별장에서부터 이곳 민가까지 이어진 길을 살폈다.
윤조가 막연히 길을 나설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메라크의 모든 길은 단순했으니 굳이 꺾지는 않으리라. 물론 그가 길을 안다는 전제이긴 했으나 오는 동안 길을 살폈다면 돌아가는 길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을 테다. 정한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황 집사님. 윤조 여기까지 데려온 사람은 누굽니까.”
“예? 아… 그게.”
황 집사가 전에 없이 당황하며 제 두 손을 매만졌다. 정한은 지도를 접고 황 집사에게 다가갔다.
“그 사람 불러오세요.”
“저…, 도련님.”
“나중에 물으려 했는데 지금 묻죠. 윤조 어떻게 데려왔습니까. 저 아니고서는 꽤 경계심이 있을 텐데. 특히 아버지 사람이라면.”
황 집사가 눈을 들어 이 비서를 보았다. 정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 비서를 향했다. 이 비서도 황 집사 못지않게 쩔쩔매었다.
“아버지 어느 병원에 계신지 나한테 말하지 마세요. 부르시지도 않았는데 찾아갈 것 같으니까.”
“예, 도련님….”
“그래서.”
안도한 듯 숨을 돌린 황 집사와 이 비서가 눈을 크게 뜨고 봤다.
“어떻게 데리고 왔냐 물었습니다. 대답 계속 기다려야 합니까. 윤조는 계속 움직이고 있는데?”
“아…, 도련님.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도련님!”
“사과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라 했습니다.”
정한은 제 앞에 무릎 꿇은 황 집사와 이 비서를 내려다보았다. 모래바람이 메마른 바닥을 휩쓸었다. 정한은 두 사람의 무릎 위로 얼룩진 흙을 보며 혀를 찼다. 곧 이어진 이 비서의 실토에는 제 혀를 씹어 먹어버리고 싶었다.
*
자전거 주인의 도움을 받은 뒤로 윤조는 계속해서 걸었다. 날은 쉬이 어두워지고 간절한 아침은 더디게 찾아왔다.
기계적으로 발을 옮기면서 이따금 졸았던 탓인지, 쭉 걸어가면 그만이던 길이 꼬여버리고 말았다. 어째 마주치는 사람도 하나 없었다. 윤조는 도움이 절실한 얼굴로 걷고 또 걸었다.
해가 정수리를 지나쳐 배에서 밥을 달라고 아우성을 칠 때였다. 수확이 끝난 메마른 땅을 앞에 두고 윤조는 바닥에 퍼질러 앉았다.
“하….”
흙먼지를 덮어쓴 구두에 생채기가 그득했다. 바짓단도 엉망이었다. 일어날까. 저걸 털까.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내저었다. 유니폼이 대수일까. 지금은 몸이 편한 게 우선이었다.
품을 뒤져 정말 힘들 때 먹으려고 아껴 둔 쿠키를 꺼냈다. 저택에서 떨어질 때 부서진 모양인지 거의 부스러기나 다름이 없었다. 그것도 아까워 한 톨도 흘리지 않게 손에 모아 훅훅 빨아먹고 있자니 어디서 개 한 마리가 나타나 어슬렁거렸다.
나타나라는 사람은 안 나타나고, 저와 처지가 비슷해 보이는 개가 나타나다니. 거기다 개는 제 이 빈약한 식량에 숟가락을 얹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미안, 내가….”
너무 배가 고파.
윤조는 힘이 없어 입술만 벙긋거렸다. 하나만 더 먹었으면 좋겠는데. 처연한 자세로 앉은 개의 눈망울을 보고 있자니 홀로 먹는 게 천하의 몹쓸 놈이 된 기분이었다.
“너, 내가 이걸… 어떻게 사수해 왔는지 알면….”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중얼거리다 윤조는 제 손바닥 위로 쿠키를 쏟았다. 아직 여유분이 있으니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아니, 괜찮아야 했다.
“먹어.”
손을 내밀어 보이자 개가 헐레벌떡 달려들어 손바닥을 핥아대었다. 윤조는 개의 부드러운 혓바닥이 간지러워 웃었다.
“너 집이 어디야?”
다 먹은 쿠키가 아쉬웠는지 연신 손에 코를 박고 냄새 맡기 바쁜 개의 등을 쓸었다.
“주인은?”
주인이라는 말에 개가 고개를 들었다. 윤조는 연분홍빛의 혀를 보며 개의 얼굴을 붙잡고 쓸었다. 슬쩍 이를 드러내던 개가 품에 안기고는 얌전해졌다. 다른 쿠키의 냄새를 맡은 게 분명했다.
“안 돼. 이건….”
킁킁, 킁킁. 들이마시는 숨이 다급했다. 어쩔 수 없이 쿠키 하나를 더 꺼내어 개에게 나눠주었다.
“나는, 주인이 있어. 돌아가면 먹을 쿠키가 많아. 자랑하는 건 아냐. 이렇게 해야…,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
저만큼이나 안타까운 개의 등을 쓰다듬다가 덜컥 걸리는 게 있어 털을 헤집어 보았다. 빨간 목줄이 털 사이에 숨어 있었다. 윤조는 목줄을 따라 개의 턱밑을 살폈다. 이름표가 보였다.
“너… 주인이 있었어?”
윤조는 이름표를 꽉 붙들고 개의 얼굴을 제게 당겨보았다. 순식간에 쿠키를 해치운 얼굴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진하게 웃었다.
“너 주인이 있구나. 돌아갈 곳이 있었어. 다행이다. 나도 있어, 단지… 멀 뿐이야.”
대답하듯 개가 짖었다. 윤조는 개가 짖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방금 발견한 이름표에서 본 이름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별아!”
개가 순식간에 품에서 뛰어나갔다. 윤조는 보드랍던 털과 온기가 멀어진 게 아쉬워 빈손을 움켜쥐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주인이신가 봐요.”
“예, 근데 우리 애한테 뭘 줬습니까?”
“네? 아… 쿠키를 좀….”
“이놈이 또. 그렇게 밥을 먹고!”
온 동네 사람한테 간식을 뜯어 먹는다고 개를 욕하는 건지 자랑을 하는 건지 모를 주인의 말을 들으며 윤조는 씁쓸하게 웃었다. 멋대로 유기견이라 생각해서 제 피 같은 양식을 나누어준 게 후회되었다. 여자의 말대로 호의나 받을 것이지, 지금 자신이 호의를 베풀 처지가 아니었는데 말이다.
“아니, 근데. 행색이 왜 그래요?”
“네?”
“못 먹고, 못 자고, 못 씻고?”
“…제가 그렇게 더러운가요?”
“우리 별이 꼴이구만.”
윤조는 주인의 발치에서 안아 달라고 앞발로 무릎을 콕콕 찍어대는 개를 보며 웃었다. 자신이 저 꼴이라니.
“따라와요, 우리 별이 간식 준 값 치러줄게.”
거절하지 않아야 할 호의가 돌아왔다. 고작 쿠키 두 개에. 윤조는 냉큼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개. 아니 별이가 이름표를 달랑거리며 따라왔다.
*
따뜻한 물에 몸을 씻고 나오니 식탁에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깨끗한 옷을 얻어 입은 것도 모자라 직접 차린 음식까지. 윤조는 울컥하는 마음에 그 자리에 서서 앉지 못했다.
“뭘 그리 서 있어. 와서 먹지 않고.”
도저히 닿을 것 같지 않은 정한과의 거리가 정말 하늘의 별이라도 된 것처럼 아찔했던 밤. 잠시 쉬려고 하면 온몸이 쑤시듯 아팠다. 입은 쩍쩍 마르고 눈꺼풀은 무겁고 발은 터질 것 같았다. 그런데도 걸어야 했고, 방향은 모호하고, 두베는 멀었다.
“왜 울고 그래, 나 참.”
윤조는 벌떡 일어나 다가온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저보다 키가 작은 남자는 다리를 약간 절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손도 불편해 보였다.
“맛은 보장 못 해.”
남자의 손에 이끌려 식탁에 앉았다. 차린 게 별로 없다는 말처럼 정말 차린 것은 없었지만 저에게는 진수성찬이었다. 윤조는 남자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전한 뒤 숟가락을 들었다. 이상하게 조용하다 싶어 고개를 돌리자 별이가 구석에 앉아 몸을 말고서 노곤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온 동네를 쏘다녀. 가끔 딴 집에서도 자고 오고 그래. 오늘은 어째 그쪽을 만나서 제대로 집에 데려오긴 했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윤조는 붉게 타오른 바깥 풍경을 보다 남자의 재촉에 식사를 시작했다.
“사연이 있는 듯한데.”
남자는 사실만 말하는 사람인지 이렇게 배가 고픈데도 밥은 맛이 없었다. 윤조는 시장을 반찬 삼아 밥그릇을 싹싹 비운 뒤 답했다.
“네, 근데 너무 길어서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그럴 테지. 근데 어딜 가던 길이야? 이 허허벌판에 차도 없이?”
“차도 없고, 면허도 없어서요. 그러니 걸어갈 수밖에요.”
“어딜 가는데?”
“두베요.”
“두베? 걸어서 두베를 간다고? 어허….”
“다들 그런 얼굴을 하시네요. 그래도 처음보다는 나아졌어요. 가까워졌다는 증거겠죠?”
애를 쓰며 웃는 윤조를 안타까이 보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 지었다.
“설거지 제가 할게요.”
남자의 그릇도 비어서 윤조는 식탁을 정리하고 그릇을 씻었다. 이 좁디좁은 개수대를 보고 있자니 그동안 얼마나 저택 생활에 몸이 익었는지 실감 났다.
“날도 어두운데 자고 가. 밤길 위험해.”
“아니에요, 밥도 든든하게 먹었고, 쉬기도 많이 쉬었어요.”
“내 말 들어. 내일이면 우리 여보가 오거든? 그때 차 타고 가.”
윤조는 마지막 그릇을 내려놓고 남자를 돌아보았다. 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보가 일을 갔어. 내가 얼마 전에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내 일까지 이어서 하느라고 오늘은 안 돌아와. 그러니까, 내일까지 기다려 봐. 내가 꼭 데려다주라고 할게.”
“아….”
“아이구, 또 울어?”
쿠키를 나누어준 것뿐인데 지나치게도 다정한 호의였다. 윤조는 눈물을 훔치며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그렇게 고마우면 내일 아침이나 좀 해줘. 손이 불편해서 영, 맛이 안 나.”
오로지 손 때문에 요리가 맛이 없다는 듯한 핑계에 윤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쉬어. 눈에 잠이 그득하네. 소파 한쪽뿐이지만, 길바닥보다는 낫겠지.”
남자는 편히 쉬라는 듯 제 할 말만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윤조는 거실에 홀로 남아 딱딱하고 여기저기 듬성듬성한 소파에 몸을 뉘었다. 머리를 대기만 했는데도 졸음이 쏟아졌다. 꿈도 쫓아오지 못할 깊은 잠으로 윤조는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
이 마을도 아니었다. 정한은 지도 속의 한 마을에 크게 엑스를 그었다.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다 어느새 깜깜해진 길을 응시했다. 가리는 것 하나 없이 시야가 탁 트인 이곳에서 사람 하나 찾기가 이리도 힘들 줄이야.
잘못 들어선 걸까. 제 예측이 빗나간 걸까. 계산이 틀렸던가. 정한은 제 뻣뻣한 눈두덩으로 손을 올리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 멀리, 다른 마을에서 온 연락을 받는 황 집사와 요원들의 조를 나누고 있는 이 비서가 보였다. 정한의 시선이 한동안 두 사람에게 머물렀다.
‘각인을 하면 이곳에 남을 수 있다…?’
‘…예.’
‘그래서 그리도 순순히 따라온 거라고?’
‘…예, 도련님….’
두 사람의 입을 통해 알아낸 그간의 사정은 참담했다. 얼굴에 제 감정이란 감정은 다 써 다니던 이가 그토록 꽁꽁 제 마음을 숨기고 겨우 드러낸 것이 고작 그늘일 뿐이라니. 그렇게 만든 게 저였다니. 정한은 자신이 끔찍하게 여겨졌다. 꽃다발이 아닌 참회의 눈물로 그의 앞에 무릎을 꿇어도 모자랐다.
어쩌면 좋을까. 저를 다 주어도 이 죄가 용서될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도 윤조는 북쪽, 두베로 향하고 있다. 이 사실에 안도하는 자신이 조금 혐오스러웠다.
“도련님.”
정한을 발견한 이 비서가 서둘러 다가왔다. 정한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제 앞에 선 이 비서를 물끄러미 보았다. 이 끔찍한 사람들도 보기 싫은데, 윤조를 찾으려면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싫었다. 지겨운 모래바람. 마치 그것을 보는 듯 정한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도련님….”
이 비서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팔을 붙잡았다. 정한은 그의 손을 떼어내고 차를 향해 걸었다.
“도련님, 식사라도 좀 하시지요.”
“괜찮아.”
“아니면 잠시 눈이라도 붙이세요. 예?”
“괜찮다니까.”
“도련님!”
보다 못했는지 이 비서가 길을 가로막고 섰다. 정한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이 비서를 보았다. 소란을 일으킨 탓인지 황 집사가 놀란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숨을 이상하게 쉬시잖아요…. 식사 안 하셔도 되니까, 조금이라도 쉬세요. 예?”
“뭘 쉬어. 내가 뭘 잘했다고.”
“도련님….”
정한은 이 비서의 몸을 밀치고 다시 걸음을 이었다. 이제는 가슴이 어떻게 뛰는지, 제 호흡이 어떻게 이상한지도 몰랐다. 느낄 사이가 없었다. 이 순간에도 윤조는 멀어졌고, 시간은 흘렀다. 그가 제 눈에 보이지 않게 된 날부터 멈추지 않는 초침이 계속해서 귓가에서 울렸다.
* * *
정신없이 잠들고 일어난 아침. 윤조는 메뉴를 고심하다 얼마 없는 재료를 보고 미자르를 떠올렸다. 오랜만에 제 10배 수프를 만들기로 했다. 맛도 10배, 양도 10배인 야채수프는 윤조가 가장 잘 만드는 요리였다.
“이게 무슨 냄새야?”
늘어지게 자던 남자가 별이와 함께 나타났다. 윤조는 제 냄비 속을 들여다보는 남자를 향해 설명했다.
“야채만 넣은 수프예요. 저녁까지는 넉넉히 먹을 수 있을 거예요.”
“냄새가 좋은걸?”
“맛도 좋아요.”
“자신 있어 보이네?”
“네. 그나마 제가 잘하는 거거든요.”
네 말이 사실이라며 남자는 그릇을 싹싹 비우고, 또 한 그릇을 추가해 먹었다. 윤조는 뿌듯한 얼굴로 저도 한 그릇을 더 먹었다.
“오랜만에 만들어서 조금 긴장했는데, 그래도 여전히 맛이 좋아 다행이에요.”
“음식 할 기회가 없었어?”
“아뇨. 많았어요. 근데….”
“근데?”
“내놓기 민망해서요.”
“이게? 맛이 좋기만 한걸. 혹시 야채를 못 먹는 어린애가 있어?”
“아뇨. 그렇지는 않아요.”
“그럼 해줘. 이 맛있는 걸 왜 안 해줘.”
“…그럴까 봐요. 부끄럽긴 하지만.”
“괜찮다니까는. 어디 귀한 댁 도련님만 아니면 되었지.”
“…….”
“…도련님이야?”
“하하….”
“그럼 좀 생각해 봐.”
“네.”
남자가 호로록 수프를 마셨다. 그 후로 낮 동안 윤조는 남자의 집에 머물렀다. 그간 챙기지 못한 허드렛일을 보상처럼 해내며.
별이는 집을 나선 뒤로 정오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서 또 맛있는 것을 얻어먹겠거니, 하고 있을 때, 아기를 안은 누군가가 찾아왔다.
“잠깐만 부탁해. 요 앞에 금방 다녀올게.”
자연스럽게 손이 불편한 남자 대신 윤조가 아기를 돌보게 되었다. 아기는 봐 본 적이 없어 난감했던 윤조였지만 막상 품에 안고 보니 그 난감함도 사라졌다.
“예쁘다….”
“잘 때야 예쁘지. 울어 봐. 세상에 그런 악마가 따로 없어.”
아기를 자주 봐 왔던지 남자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서 소파에 늘어져 누웠다. 꼭 감은 눈을 보아 낮잠을 청할 모양이었다. 윤조는 잠든 남자의 얼굴을 보며 애써 무시한 의문을 떠올렸다. 아무리 꼴이 더러웠다고는 해도, 누가 봐도 집사인 제 차림을 의심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첫날 만났던 운전자의 형이 제게 보였던 적의는 아직도 생생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제게 집사인 것도 묻지 않았고, 임신을 논하지도 않았다. 윤조는 남자처럼 모른 척하고 있었지만, 이곳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슬슬 마음이 조여들었다.
“뭘 그렇게 봐?”
시선을 느낀 건지 남자가 왼쪽 눈만 뜨고서 물었다. 윤조는 뜨끔한 마음에 아기를 고쳐 안으며 시선을 피했다.
“내가 그 도련님이랑 닮기라도 했어?”
“아뇨. 전혀요.”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윤조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근데 왜 봐?”
“왜…, 묻지 않으시나 해서요.”
“뭘?”
“저, 집사인 거 아시잖아요.”
“그게 왜?”
“여기 메라크에서는 집사를 별로 반기지 않는 것 같아서요. …도와주면 안 되는 듯했어요.”
“안 될 게 뭐 있어. 자기들이 어쩔 거야. 그러게 아랫도리 단속을 잘하셨어야지. 안 그래?”
아랫도리…. 윤조는 민망한 얼굴로 웃었다.
“거기다 그쪽, 임신은 아닐 거 아냐.”
“아… 네.”
“홀몸 아니고서야 그렇게 척척 일을 떠맡진 않지.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남자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저도 할 말이 있었다는 듯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쪽한테 알파가 느껴져.”
“네…?”
“그쪽, 임자 있지?”
“…아뇨, 없어요.”
“있는 것 같은데….”
가늠하듯 실눈을 뜨고 보던 남자가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그러고는 별이처럼 주위를 돌며 킁킁거렸다.
“저기….”
“사실 내가 그쪽 처음 봤을 때 긴가민가했거든?”
“네?”
“오메간데 왜 알파가 느껴질까?”
“…….”
“누가 주기적으로 그쪽한테 영역 표시라도 하나 봐?”
영역 표시. 그 단어가 의미하는 것이 퍼뜩 떠올라 당황했다. 어떻게 그걸 타인이 느낄 수 있을까, 신기하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정한과 한 지 며칠이나 지났는데.
“맞지?”
“아… 그게.”
“혹시 도련님이야?”
점쟁이인가.
윤조는 신기한 눈으로 남자를 보았다. 손뼉을 마주친 남자가 싱긋 웃었다. 윤조는 괜히 부끄러운 마음에 재차 아기를 고쳐 안았다.
“좋을 때네.”
“아뇨, 그… 아무 사이 아니에요.”
“아무 사이 아니긴. 여기 이 목만 봐도 알겠는데.”
남자가 불쑥 손을 내밀어 윤조의 목덜미를 두드렸다. 정한이 물어 놓은 자리였다.
“이거, 도련님이 그쪽한테 각인한 거 아냐?”
알파든 오메가든 광증처럼 상대에게 매달리게 되는 것이 각인. 마음을 얻지 못하거나 변심할 때엔 죽는 것이 나을 만큼 온몸과 마음이 괴로워지는 것이라 제 목숨을 주는 것과 다름없었다. 일반적인 부부도 하지 않는 각인을 정한이 제게 했다니. 윤조는 남자의 말이 터무니없게 느껴져 말을 잃었다. 그러자 남자가 멋대로 오해했다.
“했네, 했어. 그래, 최근에 열이 좀 나지 않았어?”
최근. 윤조는 남자의 말에 멍하니 허공을 보았다. 최근에 너무 많은 일이 있어 생각을 좀 해 보아야 했다. 눈앞이 깜깜하고 혹독했던 최근의 일 중 열이 났던 일이 하나 떠올랐다.
이곳 메라크로 오던 날, 그러니까 정한과 마지막으로 잔 날이었다. 그때 앞머리가 다 젖도록 열이 나긴 했지만, 긴장한 탓이라 생각했다. 각인으로 인한 열이라고는 결론 낼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분이 저한테 왜 각인을 하시겠어요. 각인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데….”
“그래?”
“네.”
“흠,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암튼 난 그쪽이 임자 있다고 생각해서 안 물었어. 따로 사연이 있나 했지.”
“그러셨군요….”
“여기에 별장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집사한테 각인할 이유가 없잖아? 그쪽 말대로.”
“…….”
“근데, 그쪽한테는 유난하게 느껴졌단 말이야. 탈주 집사가 아닌 거지.”
“네…. 저 탈주 집사 아니에요. 그냥 길 잃은 집사예요.”
이런 집사를 본 적 있을까. 아마 없을 거다. 윤조는 이제 본 적 없는 집사가 되는 것에 익숙했다. 남자가 웃음을 띤 채 물었다.
“그 도련님한테 가는 거지?”
“네.”
“그럼 기다리고 있겠다.”
“…그러실까요?”
“어쩌면 찾아다닐지도 몰라. 보통 잇자국이 아니거든.”
“…….”
“도련님 얘기만 나오면 의기소침해지네. 자신감을 가져. 난 여태 매끈한 목을 가진 집사들만 봐 왔으니까.”
“…….”
“모르긴 몰라도, 도련님도 그쪽한테 상당한 애착을 두고 있을 거야. 장담해. 우리 별이 간식 걸게.”
그랬으면 좋겠다, 하고 윤조는 생각했다. 정한이 제 소식을 알기에 충분한 시간이 지났고, 또 어떤 사연일지 다 파악했을 테니, 제 마음을 모르고 싶어도 알았을 거다. 이 모든 것을 안 그는 어떤 얼굴로 저를 맞이할까.
“왜 얼굴이 빨개?”
부끄러워졌다. 말로 하지 않은 고백을 이미 그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얼굴이 달아올랐다.
“생각해 보니 맞는 거 같지?”
“아뇨, 그게 아니라….”
“맞다니까 그러네. 우리 여보도 내 목을 그렇게 뜯어 놓진 않았어.”
“하하….”
윤조는 웃음으로 무마하려다 남자의 끈질긴 시선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별이 이놈은 종일 보이질 않네.”
남자가 투덜거리며 조용한 창밖 너머를 살폈다. 그의 말대로 별이의 털끝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아기의 엄마가 돌아왔다. 이곳 사람들은 진실만을 말하는지 정말로 그리 오래지 않은 시간이 지난 뒤였다. 잠든 아기를 건네준 뒤, 윤조는 소파에 앉아 잠시 졸았다. 저택에서 일할 때보다 더한 허드렛일을 해서 그런지 쉬이 몸이 피로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어제 이곳에 왔을 때처럼 해가 지고 있었다. 별이가 돌아온 모양인지 발톱으로 문을 긁고 있어 열어주었다.
“어서 와.”
자그마한 등을 쓰다듬으며 윤조는 희망했다. 자신이 별이를 맞이하는 것처럼 정한도 저를 반가운 손길로 쓰다듬기만 해주어도 좋을 것 같다고.
“요놈이 온 걸 보니 밥때가 되었구나…!”
남자가 배를 두드리며 방에서 나왔다. 윤조는 서둘러 주방으로 향했다.
저녁으로는 또 야채수프를 먹었다. 지겨울 법도 한데 남자는 흔쾌히 또 두 그릇을 먹었다. 윤조는 떠나기 전 든든히 배를 채우기 위해 세 그릇을 먹었다.
밤이 찾아오고 하늘에 별이 떴다. 남자의 ‘여보’는 돌아오지 않았다. 윤조는 슬슬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런 윤조와 달리 남자는 태평한 얼굴로 이따금 창밖을 내다보았다.
“오늘 안 오면 내일까지 기다려 봐. 걸어가느니, 차 타는 게 낫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윤조는 제 머리가 검어지는 기분에 목덜미를 긁적이며 슬그머니 엉덩이를 뺐다. 한쪽에 턱을 대고 엎드려 있던 별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윤조는 제 마음이 들켰나 싶어 놀란 얼굴로 별이를 보았다.
“왔네, 왔어!”
절뚝거리며 남자가 문을 박차고 나갔다. 윤조는 멍하니 서서 홀로 웃었다. 누구보다도 여보의 귀가를 기다렸던 남자의 의중을 자신이 오해한 모양이었다. 괜히 자신이 불안해할까 애써 표정 관리를 한 걸 말이다.
윤조는 별이의 뒤를 따라 털털거리며 집 앞에 선 트럭을 마중했다. 트럭에서 훌쩍 뛰어내린 여보는 남자를 냅다 끌어안고 잘 지냈냐고 물었다. 어찌나 다정한지 보고 있는 저까지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그사이를 참지 못하고 별이가 저를 봐 달라는 듯 캉캉 짖었다.
“요놈, 고새 또 통통해진 것 좀 봐. 작작 좀 먹어 인마, 그러다 배 터져.”
남자가 허리를 접어 가며 웃었다. 남자의 웃음을 보던 여보가 뒤늦게 윤조를 발견했다. 윤조는 허리를 숙여 머리를 한쪽으로 땋은 남자의 여보를 향해 인사해 보였다.
“근데 이분은….”
“힘들어?”
“힘들긴, 충분해!”
여보가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남자를 보았다.
“그럼 운전 좀 해.”
“엉?”
“이 사람, 두베까지 좀 데려다줘.”
“두베?!”
“어.”
“지금?”
“지금.”
“아 지금 가도 두베에 못 들어가. 검문소 닫혔어.”
“아! 그렇지.”
윤조는 깜짝 놀라 물었다.
“검문소요?”
“그럼, 두베로 넘어가려면 검문소를 통과해야지.”
“아….”
이 중요한 사실이 왜 지금 떠올랐을까. 윤조는 난감한 얼굴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윤조의 반응을 지켜보던 남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두베 시민은 맞아…?”
“네. 맞아요. 근데… 제 신분을 증명할 만한 걸 전부 집에다 두고 왔어요.”
“에이, 시민 번호만 있으면 됐지. 번호만 대면 알아서 조회해줄 거야.”
“정말 그럴까요…?”
“그렇겠지! 시민인걸?”
두베역 테러가 있었을 때는 특수한 상황이었고. 이번에는 과연… 어떨까. 윤조는 확신할 수 없었다. 점차 윤조의 얼굴이 굳어 가자 남자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허허 웃고는 팔을 잡고 안으로 끌었다.
“그럼 내일 아침에 가는 걸로. 응?”
윤조는 또 하루 남자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낮에 깜박 졸았던 소파에 몸을 누이고 불안한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바닥에 있던 별이 깡충 뛰어올라 윤조의 허리에 자리를 틀고 앉았다. 윤조는 별이의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으며 애써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고단한 몸이 금세 잠을 불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