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22)

11.

깨끗하게 빤 집사 유니폼을 걸치고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세탁법도 틀렸고, 햇볕에 바짝 말리기도 해서 뻣뻣하게 느껴졌지만, 윤조는 만족했다. 언제 이 옷을 입고 부끄러웠던 적이 있었냐는 듯,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이 오늘따라 괜찮아 보였다.

“가는 걸 아나 봐.”

트럭 운전자에게 받은 담요를 별이가 물고서 놓아주지 않았다. 윤조는 별이에게 담요를 주기로 했다. 어차피 검문소만 지나면 두베였고, 두베에서는 제 집사 유니폼도 아무렇지 않게 될 테니 괜찮으리라 여겼다.

“자, 남은 쿠키도 다 줄게.”

담요는 물론 쿠키까지 몽땅 별이에게 준 뒤, 윤조는 남자와 함께 집을 나왔다. 대기하고 있던 여보의 트럭에 올라탄 윤조는 차창 밖에 선 남자에게 마지막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잘 쉬다 가요.”

“조심해서 가.”

“네. 들어가세요.”

남자가 손을 내젓자 트럭이 출발했다. 윤조는 사이드 미러에 비친 남자의 모습이 작아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응시했다.

“여기서 얼마나 걸릴까요?”

마을의 입구를 지나 쭉 뻗은 길을 달리기 시작했을 때, 윤조는 운전에 열중한 여보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앞만 본 채 핸들을 고쳐 쥐기만 할 뿐, 제 물음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여보가 내내 말이 없었던 것 같아 의아했다. 어젯밤만 해도 그는 남자 못지않게 수다스러웠고, 제게 꽤 친절하게 굴었는데 말이다.

혹 자신이 무언가 실수라도 했나 싶어 윤조는 제 아침 행적을 더듬어 보았다. 특별히 마음에 걸릴 만한 일은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경직된 그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불편했다.

“저기, 혹시….”

“왜 집사인 거 말 안 했습니까.”

“…네?”

“말할 수 없었겠죠. 탈주 집사니까.”

“아…, 전 탈주 집사가 아니에요.”

“어떤 탈주 집사가 자기를 탈주 집사라 인정한답니까?”

여보가 씨근덕대며 비아냥거렸다. 윤조는 놀란 마음에 제 안전띠를 붙잡았다. 속도를 내기 시작한 트럭의 성난 떨림이 느껴졌다. 이 차가 검문소로 가고 있는 게 맞을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내 남편이 사람이 착해서. 종종 이런 일을 저지릅니다.”

“저 정말 탈주 집사 아니에요. 믿어주세요.”

“어디 한두 번이어야지.”

“…….”

“지금 저리 집에서 쉬는 것도 근처 별장 주인이 마을 헤집어 놓은 것 때문에 주민이랑 싸워서 그런 겁니다. 그 댁 집사를 도와줬거든.”

윤조는 난감한 얼굴로 여보를 보았다. 그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 차 있었다.

“그 까만 집사 옷만 보면 내 가슴이 얼마나 졸아드는지.”

“…….”

“오늘 아침, 그쪽이 내 트럭에 탄 걸 누군가 보기라도 했다면, 또 우리 집은 시끄러워지겠지요. 어느 별장의 고매하신 분이 찾아와 휘저어 놓고, 우리는 마을 사람들의 눈총을 받고.”

여보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계속해서 속도를 올렸다. 어서 저와 떨어지고 싶다는 듯. 기어이 울먹거리는 그를 보며 윤조는 크게 결심했다.

“절 도와주셔서 피해를 보시는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아요.”

“안 좋다마다요. 다정한 이웃이 있으면 원수 같은 이웃도 있는데. 그 원수들이 찾아와 있을까 어찌나 걱정되는지. 몸도 성치 않은데….”

원수 같은 이웃. 별이가 온 마을을 쏘다니며 간식을 얻어먹고 다니는 마을에 원수가 있었다니. 이틀 정도의 단편적인 시간으로는 속사정을 알 수 없던 모양이었다. 윤조는 씁쓸한 얼굴로 남자를 보았다.

“그럼 저 안 도와주시면 되잖아요.”

“어찌 그럽니까. 우리야 싸움으로 끝나지만, 그쪽은…!”

윤조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이 착해 빠진 부부를 어쩌면 좋을까.

“저 여기서 내려주세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꽤 많이 온 것 같아요. 여기서부터는 걸어갈게요. 저 안 도와줬다고 하세요.”

제 말을 믿지 않는 듯 여보는 앞만 보며 차를 몰았다. 윤조는 먼발치에서 보일 듯 말 듯한 검문소의 벽을 발견하고 남자의 팔을 급히 붙들었다.

“저거 검문소 맞죠?”

“맞긴 한데. 걸어가려면 한참인데….”

“괜찮아요. 저 여기서 내려주세요.”

“아니, 그래도….”

“가 보세요. 저도 걱정돼요.”

초조하게 핸들을 고쳐 잡은 여보가 핸들을 꺾어 길가에 트럭을 세웠다. 숨을 죽이듯 시동이 꺼진 트럭의 떨림이 멈추었다. 차창 너머로 흙먼지가 뿌옇게 피어났다.

“고마워요. 그리고 저 정말… 탈주 집사 아니에요. 근데 아무리 제가 아니라고 해도 제 이 유니폼이 오해를 불러일으키니까….”

“…미안합니다.”

“왜 미안해하세요. 전혀 미안하실 것 없어요. 제가 오히려 죄송해요. 정말 신세 많이 졌어요. 이대로 쭉 가면 되는 거 맞죠?”

고개를 끄덕이는 여보에게 묵례를 하고 차에서 내리려는데 그가 제 팔을 붙들었다.

“아니, 이대로는 위험한데.”

윤조는 길게 난 도로와 그 양옆에 빼곡하게 심긴 나무를 보았다. 평화로워 보이다 못해 단조롭기까지 했다. 위험할 구석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는 말이다.

“집사를 잡아가면, 포상금을 준다고….”

“네?”

“함부로 돌아다니다간 큰일 나요. 특히 이 주변은 경계지 근처라 집사로 재미 쏠쏠하게 본 사람들이 많아서,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거야.”

“아….”

“끝까지 갑시다.”

여보가 결심한 얼굴로 다시 시동을 걸었다. 윤조는 고마운 마음에 입술을 꾹 깨물고 여보를 보았다.

“이게 또 말썽이네.”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는 소리만 반복해서 났다. 윤조는 헛웃음을 짓는 여보를 보며 괜히 미안해졌다.

“자주 이러니까, 그런 표정 하지 마요.”

빤히 윤조의 마음을 알겠다는 듯이 여보가 말했다. 윤조는 제 굳은 입매를 매만지고 어설프게 웃었다.

“한 시간만 기다려요. 그 정도면 고치니까.”

“아… 한 시간이나요?”

한 시간이면, 그가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지나치게 오래 걸리는 듯했다. 윤조는 제 눈에도 보이는 검문소의 높은 벽을 보며 여보에게 제 결심을 이야기했다.

“검문소까지 다녀가면 집에 너무 늦게 가실 것 같아요. 저 걸어서 갈게요. 설마 무슨 일 있겠어요? 여기 민가도 없어 보이는데.”

“그래도 모를 일인데, 조금만 기다려요.”

“저 탈주 집사 아니라서 잡혀도 풀릴 거예요.”

“모르는 소리. 그게 더 위험하지.”

“네?”

“탈주 집사는 잡아가면 돈이라도 받는데, 거긴 돈 나올 구석도 없다는 얘기잖아요. 그럼 그쪽 뭐가 돈이 되겠습니까?”

“아….”

“내 말 듣고 가만있어요. 원수 같은 이웃이라도 간 쓸개 떼서 팔지는 않으니까.”

괜찮다는 말로 웃어넘기기에는 지나치게 현실감 있는 말이라 조금 더 신세 지기로 했다. 윤조는 트럭에서 내려 적당한 바윗돌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트럭은 운전석이 있던 자리가 들려서 신기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윤조는 흥미롭게 여보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비가 오려나. 꼭 비 오기 전에 이런다니까.”

자주 있었던 일인지 여보는 익숙하게 움직였다. 뚱. 땅. 뚱. 땅. 금속을 두드리는 마찰음이 고요한 길을 가로질러 금방이라도 검문소 벽에 닿을 듯했다.

*

정한은 막 당도한 마을 어귀에서 차를 세웠다. 본래 가려던 길에서 꽤 옆으로 비켜 간 마을로, 무심코 지나쳤다가 홀로 다시 찾아온 것이다. 조금의 실마리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Rrrrr.

차에 잠시 앉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매만지는데 전화가 왔다. 정한은 액정에 뜬 이름을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 아버지.”

아버지의 담당의가 부탁하지 않았다면 받지 않았을 전화였다.

“말씀하세요.”

-그래, 잠은 자면서 다니는 게야?

“…….”

-잠을 자야, 사람이 생각을 바로 하지.

누가 할 말을 하는 건지.

정한은 약병으로 손을 뻗어 진통제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조수석에서 구르고 있는 생수통을 열어 물을 삼키자 순식간에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식사는 제때 하고? 거기 먹을 게 뭐 있나 몰라. 그러게 황 집사를 붙여서 갔어야지. 왜 혼자 갔어, 혼자 가기를.

정한은 핸들에 두 팔을 대고 이마를 기댔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멍한 머릿속을 들쑤시는 것 같아 눈을 감자, 며칠 한숨도 자지 못한 몸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듯했다.

-걱정 마. 곧 찾아. 메라크 이 코딱지만 한 땅에서 도망가 봤자지.

“…….”

-정한아. 정한아?

그동안 윤조에게 있었던 일을 알게 된 이후, 정한은 낯설지 않은 기분에 시달려야 했다. 아버지는 자신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저를 죽였던 때처럼, 정한은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그런데 마냥 그때와 같지는 않았다. 제가 아버지에게 장담했던 바와 같이 저는 죽을 수 없는 몸이라 이따금 빙빙 도는 총구가 제게 향하기도 했지만, 꼭 한 뼘씩 비켜 나갔다.

이번에야말로 아버지의 소원대로 당신을 죽일 것만 같아 참고, 또 참았다. 이유인즉, 윤조를 찾으려면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구차하게도 그래야 했다.

“아버지.”

-어, 그래 정한아.

윤조를 잃은 날부터 끊임없이 저를 괴롭히던 목덜미의 둔통을 문지르며 정한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웬 개 한 마리가 바짓단에 붙어 매달렸다.

“이만 끊을게요. 가봐야 합니다.”

-그, 사람 더 풀어 줘?

구차하다 정말. 정한은 자신을 비웃었다.

-북쪽으로다가 더 풀면 되지?

“…네. 그럼 끊을게요.”

-정한아.

“저 잘 있습니다.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잡니다. 윤조 찾으면…, 따로 찾아뵐게요.”

-…고맙다.

멋대로 바지를 물어댄 개가 정한이 반응하지 않자 저를 봐 달라며 캉캉 짖었다. 정한은 전화를 끊고 바닥의 개를 들어 올렸다. 한 손에 훌쩍 잡힌 개의 얼굴을 들여다보자 연분홍빛 혀가 날름 나왔다.

“너 이름 뭐야. 주인은 있어?”

검지로 목 부분의 털을 헤쳐 보자 이름표가 달랑거리며 나타났다.

“…별이.”

별님에게 기도했다던 윤조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는 제 귀가를 어떤 마음으로 기다렸을까. 그가 한 결심은 저조차도 감당하기 어렵게 느껴졌다.

홀로 견뎠을 윤조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정한은 머리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무엇이라도 터트려 진정하고픈 충동이 들었다. 그런 저에게 경고하듯 개가 캉캉 짖었다. 정한은 뻣뻣한 눈을 깜박이며 연분홍빛 혀에서 길게 늘어지는 침을 보았다.

“미안. 줄 게 없네.”

개를 내려놓고 정한은 마을로 들어가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마치 안내하듯 개가 옆에 따라붙었다.

“요놈! 밥때 됐는데 어딜 돌아다녀?”

꼭 아버지의 걱정과 같은 말이 등 뒤에 붙었다. 정한은 소리가 난 방향으로 돌아보았다. 거기에 키가 자그마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가 개를 향해 이리 오라 손짓하자 개는 캉캉거리며 짖기만 할 뿐, 제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아, 고놈 꼭 있어 보이는 건 귀신같이 알아요.”

남자가 더딘 걸음으로 다가와 민망한 얼굴로 웃었다. 정한은 윤조를 묻기 위해 말문을 트려 했다. 그런데 남자는 지나치듯 옆으로 향하더니 개처럼 주위를 돌며 코를 킁킁대었다.

“무슨 짓입니까.”

발치에서 파닥거리는 개를 집어 든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한을 보았다.

“야채수프…?”

정한의 고개도 남자와 같이 갸웃했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가 개를 바짝 안아 들며 소리쳤다.

“도련님…!”

미친 사람인가.

정한은 남자에게서 등을 돌리고 마을로 들어가려 했다. 미친 사람에게 물어봐야 제대로 된 말이 돌아오지 않을 듯했다. 그때, 정한은 제 옆을 쏜살같이 지나치는 마을 주민을 보았다.

“마을을 아주 파탄 낼 작정이야?!”

주민은 남자에게 화가 난 모양인지 금방이라도 그를 물어뜯을 듯이 달려들었다. 남자의 품에 안긴 개가 날카롭게 짖어 댔다. 정한은 매서운 이빨을 드러낸 개를 보며 잠시 상황을 두고 봤다.

“이번엔 아니래도?”

“병이야, 병! 사람 좋은 것도 병이야!!”

“아니라니까?! 저기 오셨어!!”

“벌써 찾아와?!”

남자의 손짓에 마을 주민이 정한을 돌아보았다. 정한은 도통 대화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면서도 그토록 찾아 헤맨 실마리가 잡힌 것 같아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번에 데려온 집사님은 저기 도련님이 찾아다니는 분이시라고!”

개가 대답하듯 캉캉 짖었다. 정한은 남자에게 성큼 다가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여기 집사가 왔습니까.”

“왔죠. 꼬질꼬질하게 우리 별이처럼 나타나서 내가 주웠지요.”

정한은 가빠지는 호흡을 애써 가다듬고 물었다.

“그 집사 지금 어디 있습니까.”

“우리 여보가 검문소까지 트럭으로 바래다주러 갔는데? 지금 가면 얼추 맞을…, 어휴, 빠르기도 해라.”

정한은 남자를 지나쳐 차로 향했다. 조금도 지체할 사이가 없었다.

*

잘되지 않는지 낑낑거리던 여보가 허리를 펴고 한숨을 내쉬었다. 윤조는 괜히 저 때문에 이 사달이 난 것 같아 미안했다.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고 트럭 근처에서 쭈뼛거리는데 마침 지나가는 차 한 대가 반갑게도 멈춰 섰다. 윤조는 혹시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도로 쪽으로 향했다.

작은 승용차에서 장정 넷이 내렸다. 얼핏 위압적인 모습에 윤조는 걸음을 멈추고 여보를 돌아보았다. 연장을 놀리던 그가 차 문 닫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았다. 윤조는 그의 얼굴이 사색이 되는 것을 보고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집사님이네?”

연장을 움켜쥔 여보가 트럭에서 내려와 앞을 가로막고 섰다. 윤조는 기가 막힌 일이다 싶어 저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오기 전에 고장 난다는 말이 정말 맞는 모양인지 어느새 하늘이 어두워져 있었다.

“여긴 그런 사람 아니니까 갈 길 가요.”

“형씨가 주인은 아닐 거 아냐.”

“아니긴 한데, 그런 거 아니라고.”

여보의 말에도 장정 넷은 둘러싸듯 다가왔다. 윤조는 여보가 제 등 뒤로 보내는 수신호를 보고 곧장 검문소 방향을 향해 달렸다. 놀리듯 휘파람을 부는 장정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간 평화롭게만 느껴졌던 메라크의 풍경이 삽시간에 삭막한 풍경으로 바뀌었다. 윤조는 돌아볼 사이도 없이 뛰고 또 뛰었다. 여보가 장정 몇을 붙든 모양인지 승강이하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뛰다가 애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새 따라붙은 장정 둘이 윤조를 놀리면서 웃어 대었다.

“헉, 헉, 헉….”

이렇게 달리다간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점점 좁혀지는 거리에 윤조는 도로를 따라 달리던 것을 그만두고 나무숲으로 방향을 꺾었다. 그러자 뒤에서 누군가 무어라 외쳤는데, 그게 무슨 소리인지 제 숨소리와 심장 뛰는 소리에 가려져 알아들을 수 없었다.

*

집사랑 엮이면 좋을 게 없었다. 그게 탈주 집사이든 아니든.

정욱은 제 입술이 터져 나가라 장정 둘을 막고 있는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마음만 착해 빠진 남자를 사랑했더니, 생각과 몸이 따로 움직였다. 가끔은 저도 답답했다. 무시하면 그만일 것을. 왜 이렇게 애를 쓰고 있나. 도와줘 봤자 좋았던 일이 뭐가 있었다고.

아무래도 혼자서 둘은 어려웠다. 하나를 겨우 붙들어 놓자, 놓친 하나가 차를 향해 달려갔다. 일행을 따라갈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집사가 숲으로 들어가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쫓는 사람이 하나 더 늘어난다면, 붙잡히는 건 시간문제일 테다.

“악, 씨발! 미쳤나!!!”

도로로 뛰던 사내가 제 앞을 쏜살같이 스쳐 지난 차를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정욱은 숨을 학학대며 차라리 치였으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했다.

사내는 상당히 놀란 모양인지 손을 떨며 씨근덕거렸다. 이 틈에 저놈에게 연장을 던질까 말까 고민했다. 심장이 터질 뻔한 대신으로 머리를 터트려주자고 말이다. 귀를 찢는 브레이크 밟는 소리만 아니었다면, 가던 길을 꺾어 다시 돌아온 차가 아니었다면, 분명 그리했을 테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나타난 까만 차에서 키 큰 남자가 내렸다. 정욱은 곧장 제게 다가오는 남자에게 위압감을 느끼고 움츠러들었다. 여태 본 그 어떤 사람보다도 키가 컸다. 그에게서 형형히 느껴지는 페로몬 또한 그러했다. 제법 먼 거리였는데도 탁한 것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너, 씨발 뭐야!!!”

“별이 주인입니까.”

성큼 다가온 남자가 사내의 말을 무시하고 제게 물었다. 정욱은 붙들고 있던 장정의 멱살을 놓고서 남자에게 달려갔다. 집에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별이 우리 갠데, 어찌 압니까? 집에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남편분이 키가 작고 다리를 조금 절고 있었는데.”

정욱은 이를 악문 남자를 올려다보며 사정을 물었다.

“혹시 마을 사람들이 찾아갔답니까?! 아님, 집사….”

무시를 당한 사내가 욕을 뱉으며 다가왔다. 정욱은 무언가를 참는 듯한 남자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보며 주춤거렸다. 바람에 날아가기는 했지만 그에게서 나는 페로몬이 지나치게 독했다.

“사람을 칠 뻔했으면 사과를 해야 할, 악…!!”

빽 소리를 지르며 남자에게 달려들려던 사내는 남자가 쏜 총을 맞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빗나가긴 했지만 정욱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일부러 그런 것을.

“바쁘니까 조용히 좀.”

총 앞에서 입을 다문 사내가 팔을 붙들고 씩씩거렸다. 정욱은 제게 시선을 돌린 남자를 보고 움찔했다. 그가 원하는 것을 알 듯했다. 이럴 때는 이실직고 하는 게 상황 종결의 지름길이었다.

“총 넷. 집사를 잡으러 왔습니다. 여기 둘이고, 나머지 둘은 집사를 쫓아갔습니다. 저택에 돌려주면서 사례를 받거나, 찾는 집사가 아닐 경우, 그 몸을 어떻게든 팔 겁니다.”

“그래서 어디 있는데.”

남자가 친절했던 태도를 버리고 짧게 물었다. 정욱은 집사가 달려간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남자가 고개를 돌려 쭉 뻗은 길을 바라보았다. 그의 긴 목덜미가 유난히도 붉어 보였다.

“도중에 숲으로 달려갔는데, 그 숲이….”

“안내하세요.”

“예?”

정욱은 남자에게 손목이 붙잡혀 끌려갔다. 남자의 차 앞에 서서 제 트럭을 돌아보았다. 어차피 달리지 못하니 자리를 비워도 괜찮다지만, 저 망할 녀석들이 해코지를 할까 신경 쓰였다. 제 생각을 읽은 것처럼 남자는 차 문을 열다 말고 네 장정들이 몰고 온 차의 바퀴를 터트렸다. 그리고 이쪽으로 달려드는 두 사람에게 주저 없이 총구를 들이댔다. 그는 정확하게 놈들의 다리 한쪽씩을 무릎 꿇렸다.

“악!!! 씹, 미친 새끼!!”

절규가 이어지는 와중 남자는 태연하게 차 문을 열고 제게 탈 것을 권유했다. 정욱은 홀린 듯 조수석에 올라탔다. 보닛을 둘러 온 남자가 운전석에 앉아 제 목덜미를 꽉 움켜쥐었다. 고통을 참는 표정이었다. 유난히 붉어 보이던 게 잘못 본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진정이 되었는지 남자가 곧 차를 몰았다. 정욱은 이렇게 좋은 차는 처음 타보는지라 상황도 잊고 차를 둘러보았다. 맹렬히 속도를 내던 남자가 물었다.

“길 안내하라고 했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정욱은 자신이 눈으로 본 자리에 이르러 남자에게 신호를 주었다. 트럭과 그리 멀지 않은 자리였다. 어이없이 보는 남자에게 정욱은 재빨리 해명했다.

“여기서 저기, 나무숲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숲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길에 불이 붙은 듯했다. 금방이라도 숲을 밀어내어 집사를 찾아낼 듯이. 정욱은 불쑥 제 쪽으로 팔을 뻗은 남자를 피해 차창에 몸을 붙였다. 저도 꽤 담이 큰 사람인데, 이 남자의 몸짓은 모든 부분에서 위압감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몸을 사리게 되었다.

“쯧.”

글러브 박스 안쪽을 더듬던 남자가 혀를 찼다. 찾던 것이 없었는지 다시 글러브 박스를 닫고 탄창을 꺼내 총알의 개수를 확인했다. 꼭 두 발만 남은 총알이었다. 정욱은 그 총알이 누구의 다리에 박힐 것인지 알았다. 집사는 절대 아니었다.

“이 차 타고 집에 가세요.”

“예…?”

“내가 미처 답례를 못 해서.”

남자가 차에서 내리며 차 키를 가리켰다. 정욱은 남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멍하니 그가 하는 양을 보다 뒤따라 내렸다.

“저, 저기!”

“내 집사 지켜준 보답이니까 사양 말고 하세요.”

“아, 그….”

“더 필요합니까?”

“아뇨! 넘칩니다, 넘쳐요. 그게 아니라, 여기 숲이….”

남자가 또 제 목덜미를 매만졌다. 슬쩍 이까지 갈아대는 게 고통이 상당해 보였다. 정욱은 어서 그에게 숲의 주의점을 알려주기로 했다.

“이 숲은 오래전에 늑대들 것이었습니다. 두베로 통하는 길이라 검문소 측에서도 늑대를 내버려 뒀죠. 메라크에서 몰래 들어가려던 사람들 알아서 잡아주니까. 근데, 검문소에서도….”

“더 짧게 안 되겠습니까.”

“아무튼! 피해가 커서 사냥을 했거든요. 근데 아직 남아 있을….”

남자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제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숲으로 달려 들어갔다. 정욱은 망연히 서서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는 남자의 흔적을 보았다. 우거진 수풀이 서로 몸을 비비며 조금 전 누군가 지나갔음을 알려주었다.

“그나저나….”

정욱은 제 입가를 긁으며 남자가 답례라고 남겨준 차를 돌아보았다. 집사를 도와서 어디 쓸모가 있냐고 했던 이웃들 앞에 당당히 몰고 갈 생각을 하니 절로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남자처럼 보닛을 빙 돌아 운전석에 앉았다. 아직도 남아 있는 남자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정욱은 코를 찡긋거리며 핸들을 꽉 붙들었다.

*

눈을 뜨자 흐릿한 하늘이 보였다. 아까까지 달리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지금은 왜 누워 있는지 퍼뜩 이해가 가지 않았다. 멍하니 눈만 깜박이던 윤조는 저를 뒤쫓는 장정들을 피하다 자신이 어딘가로 굴러떨어진 것을 뒤늦게 생각해냈다. 그 이후로는 기억이 없었는데, 아마 그때의 충격으로 잠시 정신을 잃은 듯했다.

기침을 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발목 부근에 뻐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미처 일어서지는 못하고 앉은 채로 기어 적당한 곳에 등을 기대었다. 신경을 긁는 듯한 통증이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윤조는 제 발목을 살피며 얼굴을 찌푸렸다. 얼핏 봐도 퉁퉁 부은 게 단단히 잘못된 듯했다. 이 발목으로는 한동안 걷기도 힘들 테다. 무엇보다 저를 쫓아오던 이들이 언제 저를 찾아낼지,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이 숲을 나갈 수나 있을까. 주변은 온통 낙엽으로 뒤덮여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도 모호했다. 전보다 더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윤조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더 가면 될 것 같은데.

그러면 보고 싶은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지금 여기에 있는 건지. 허탈함과 억울함이 밀려왔다. 자꾸만 시큰거리는 눈가를 꾹꾹 누르며 윤조는 애써 울음을 참았다.

탕!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총소리가 났다. 이어 새소리 같은 비명이 들렸다. 남성의 목소리였다. 윤조는 제 다친 다리를 끌어안고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다. 고요한 숲을 흔들어 놓은 총소리는 저까지도 흔들어 놓았다. 가슴이 기이하게 뛰기 시작했다.

*

정한은 자신이 짐승처럼 숲을 뒤지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멀리, 제 앞길을 가로막으려던 이들과 비슷한 차림을 한 이의 뒷모습을 발견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 집사 잡았어?”

정한은 남자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고개를 뒤로 꺾은 채 물었다. 놀라서 소리도 내지 못한 남자가 입술을 달싹거리다 제 턱에 붙은 금속의 정체를 깨닫고 눈동자를 떨었다.

“잡았냐고. 묻잖아. 혀에 구멍 났어?”

남자가 잘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들이 아직 윤조를 잡지 못했다는 사실에 정한은 급히 안도했다. 별 볼 일 없어진 이의 다리에 총알을 하나 박아 넣고 정한은 다시 숲을 뒤졌다. 목덜미가 뜨겁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며칠째 목덜미를 괴롭히던 통증이 이 숲에 들어오고부터는 전신으로 번진 듯했다.

“하아… 하….”

숲은 사방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돌아가는 것도 문제였다. 황 집사가 저를 추적해 오리라 믿는 수밖에 없었다. 흐려지는 시야를 바로잡으며 정한은 차분히 숲을 살폈다. 제 씨근덕거리는 숨소리가 거슬리는 것 말고는 숲은 조용했다. 꼭 아무도 없는 것처럼.

바람이 나뭇잎에 부딪히는 소리 이외에 귀를 거슬리게 하는 이질감이 하나 느껴졌을 때였다. 정한은 몸을 돌려 헐레벌떡 뛰어가고 있는 인영을 발견했다. 그의 곁에 윤조가 없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총을 겨누었다. 마지막 한 발이었다. 신중해야 했는데도 이성은 죽은 지 오래였다.

“아아악!!!”

바닥에 고꾸라진 인영이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정한은 인영이 쓰러진 지점을 향해 걸었다. 그사이에도 극렬한 고통이 몸을 괴롭혔다.

“으윽…. 어떤, 씹… 헉…!”

바닥에서 끙끙거리던 이가 정한을 발견하고 입을 크게 벌렸다. 정한은 통증으로 터질 것 같은 눈을 꾹 눌러 짚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고개를 내저어 댔다.

“살, 살려주세요!!”

“내 집사 봤어?”

“제, 제발 살려만…!”

“묻는 말에 대답해. 내 집사 봤냐고.”

숨이 넘어갈 듯 헐떡거린 남자가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비명 같은 이명이 귀를 찔렀다. 정한은 제 귀를 퍽퍽 때리며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째깍거리는 초침 소리가 미치게 했다. 그사이를 침범하듯 바닥에서 낙엽 위를 기는 애처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으윽…!”

기어서 도망가려던 남자의 허리를 밟아 세운 정한은 윤조를 마지막으로 본 지점을 물었다. 그는 자신도 길을 잃어 알 수 없다며 눈물을 뚝뚝 흘려대었다.

“쓸모없긴.”

정한은 제 발끝에 걸린 남자를 치워내고 윤조를 찾기 위해 다시 숲을 뒤졌다. 윤조를 쫓아간 게 두 명이라고 했으니, 더는 윤조에게 위해를 가할 만한 인물은 없을 테지만, 시간을 더해 어두워지는 숲이 그에게 위험으로 다가올 듯했다. 그리고….

“씨발.”

빗물이 뺨을 적셨다. 울면서 바닥을 기는 징그러운 소리를 뒤로하고 정한은 지끈거리는 목덜미를 주물렀다. 그곳에서 열이 새다 못해 터져 나올 듯했다. 이 아픔을 잠재울 수 있는 이가 필요했다. 정한은 한때 이 숲의 주인이었던 짐승처럼 그 이름을 불렀다.

*

또 한 번의 총성이 울렸을 때, 윤조는 아픈 발목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을 길게 빼고 숲을 살폈다. 뚜렷하지는 않지만 사람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비탈진 길을 걸어 올라갔다. 걸음 한 번에 온몸에 저릿한 통증이 일었지만, 그것이 대수일까. 이 뛰는 가슴은 어서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다.’

‘…그러실까요?’

‘어쩌면 찾아다닐지도 몰라.’

정한일까. 기다리다 못해 찾아다니는 게 과연 정한일까.

‘도련님도 그쪽한테 상당한 애착을 두고 있을 거야. 장담해. 우리 별이 간식 걸게.’

그랬으면 좋겠다. 아니, 그럴 것이다. 제 오판으로 인해 저 역시 총성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겠지만, 윤조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확신을 느꼈다. 정한이었다. 그가 제 귓가에서 세 번이나 울렸던 그 총소리가 분명했다.

“으윽….”

다친 발목으로 비탈길을 오르는 건 녹록지 않았다. 쏟아지기 시작한 비와 미끄러운 낙엽이 저를 자꾸만 바닥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메아리처럼 찾아든 이름이 몇 번이고 고꾸라진 뒷덜미를 붙들어 일으켰다.

“하아.”

겨우 올라선 곳에서 윤조는 허리를 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밑이나 이곳이나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저택 지하실도 아닌데 사방이 다 똑같았다. 이 와중에 어둠을 몰고 온 비구름은 더욱 세차게 비를 뿌려대었다. 저는 조금도 달갑지 않았는데 숲은 해갈하듯 빗물을 죄 빨아들이고 있었다. 꼭 그 소용돌이에 저도 빨려들어 갈 것 같았다.

“서윤조!!!”

터무니없이 내리는 비에 아연한 사이, 윤조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정한이었다. 정말 정한이었다.

“사장님?!”

윤조는 활짝 웃음을 지으며 부름에 대답하였다. 사방은 온통 어둠뿐이었지만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기에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다만, 극악한 시야에 선뜻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그쳐버린 이름 또한 그랬다. 욱신거리는 발목이 아니라면 꿈이라고 여겼을지도 몰랐다.

윤조는 저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소리를 감지하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분명 정한의 목소리였는데, 제 간절한 염원이 만들어 낸 환청은 아니었을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어떻게 이 숲에 온단 말인가. 무슨 수로.

끈질기게 저를 쫓아다니던 이들이 기어코 저를 잡으러 온 게 아닐까. 윤조는 뒷걸음질이라도 쳐서 눈앞의 어둠을 벗어나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으라는 듯 발이 붙어버린 것 같았다.

“아….”

마음보다 몸이 먼저 알기라도 한 걸까. 윤조는 어둠에 잠식된 수풀을 가르고 나타난 인영을 알아보고 숨도 쉬지 못했다. 거칠게 숨을 들이마신 정한이 저를 끌어안았을 때도 꼼짝할 수 없었다.

“죽겠네.”

숲을 가르던 포효 같은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음성이었다. 정말 죽을 듯이 낮게 깔린 목소리에 윤조는 가슴이 저릿했다. 정한이 귓가에서 숨을 들이마셨다. 목덜미와 귓바퀴를 스친 입술이 뜨거웠다.

“죽겠다고….”

윤조야.

윤조는 저를 부르는 정한의 부름에 그제야 제 숨통을 틔웠다. 곧 그에게 입술이 먹혀 다시 숨이 막혀버렸지만.

“으, 읍….”

정한이 개처럼 입 안을 핥고 혀를 빨아대었다. 그곳으로만 호흡할 수 있는 사람처럼 간절하게도. 윤조는 빗물과 함께 넘어오는 정한의 타액을 삼키며 그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저 역시 간절했다.

“흣….”

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한은 계속해서 몸을 붙여 왔다. 금방이라도 이곳에서 그에게 밑이 꿰뚫려도 이상하지 않은 언어들이 넘쳐났다. 숨이 모자라 가슴을 내려치는 손을 붙든 정한이 그제야 입술을 떼어내었다.

“하아… 하….”

윤조는 제 얼굴 곳곳의 냄새를 맡는 정한을 믿을 수 없이 보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 어떤 뜻인지, 모르고 싶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선명한 그의 페로몬이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괜찮아…? 다친 데 없어?”

낮은 목소리가 그의 페로몬처럼 전율이 돋게 했다. 윤조는 등허리가 바짝 서는 느낌에 침을 꼴깍 삼키고 그에게 괜찮다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정한이 엄지로 볼을 쓸어주며 말했다.

“울지 마, 기운 빠져.”

언제부터.

그러니까 언제부터 울고 있었을까. 그리고 또 언제부터 그는 제게 키스를 하고 싶었던 걸까. 윤조는 정한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꺽꺽대며 울었다. 참았던 눈물이 숲을 적시는 비처럼 쏟아졌다.

“윤조야.”

울음이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정한이 말했다.

“우는 건 침대에서만 하지?”

윤조는 정한의 말에 웃음을 지으면서도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울음을 달래려 다시 입을 맞추는 정한의 얼굴을 붙잡고 저도 깊게 입술을 묻었다. 그의 입 속에 혀를 찔러 넣고, 그를 안고, 그에게 제 몸을 붙였다. 정한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그가 제게 한 것처럼 윤조 역시 그를 개처럼 핥고 혀를 빨았다.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갈증이 났다. 그가 제게 흘려댄 언어처럼 저도 그러고 싶었다.

“나가서. 응?”

제 마음을 읽은 정한이 입술이 떨어진 사이로 말했다. 윤조는 쑥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뒤늦게 이성을 찾은 서로를 보며 잠시 웃었다.

“아… 사장님 근데, 어… 나쁜 사람들이 있어요. 그리고….”

“괜찮아.”

총소리가 났는데. 윤조는 말을 이으려다 말았다. 정한이 괜찮다면 괜찮은 거였다. 또한 그들이 어떻게 되었든 이제 저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이제 나가야지.”

“네, 근데 어떻게 나가요? 사장님, 길… 아세요?”

“아니, 몰라. 정신 놓고 달려서.”

“아….”

“오면서 연락해 놓긴 했는데….”

휴대폰을 꺼내 든 그의 미간이 심각하게 구겨졌다.

“왜요…?”

“아무래도 이건 안 될 것 같아.”

방전되어 까맣게 죽은 화면을 보이며 정한이 씁쓸하게 웃었다. 윤조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얗게 덩어리진 숨이 빠르게 흩어졌다.

“일단 이거부터 입어.”

아까까지 열기로 뜨거웠던 몸이 거짓말 같게도 빗물에 몽땅 식어 손끝이 딱딱했다. 윤조는 제 떨리는 몸을 끌어안으며 정한이 제게 벗어준 그의 트렌치코트를 보았다.

“이걸 왜요?”

“너 감기 잘 걸리잖아. 젖은 거 벗고, 이거 입어.”

“그럼 사장님은요?”

정한은 그새 흠뻑 젖은 제 셔츠를 보이며 웃기만 했다. 윤조는 고개를 내저었다. 곧 반항할 사이도 없이 정한에게 옷이 벗겨지고 또 입혀졌지만.

“그건 이제 입을 일 없으니까 버려.”

정한이 담뿍 젖은 윤조의 유니폼 상의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떻게 그가 준 옷을 버릴 수 있을까. 윤조는 손에 든 옷을 뒤로 감췄다.

“버리라니까. 그거 이제 입을 일 없다고.”

“이게 왜 입을 일이 없어요?”

“너 이제 내 집사 아니니까.”

“…저 잘렸어요?”

코트를 여며주던 정한이 헛웃음을 지었다. 윤조는 코를 훌쩍이며 제 앞에 거의 무릎 꿇다시피 앉은 정한을 보았다. 피치 못한 일로 며칠 무단결근 좀 했기로 서니, 그새 잘라버리다니. 정한의 결정이 믿기 어렵기도 했지만 섭섭함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너 이제 백수야.”

“정말… 저 자르셨어요?”

설마. 그가 저를 잘랐을까. 아무래도 권 회장이 제가 마음에 안 들어 잘라버린 듯했다.

“회장님이죠? 회장님이 저 자르셨죠?”

“무슨 소리야?”

“…사장님이, 저… 저 찾으러 왔잖아요.”

“그게 왜.”

“사장님이 회장님한테 대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저… 잘린 거고.”

정한이 기가 막힌 얼굴로 제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제 그가 저택에서 쫓겨날 차례인가, 하고 윤조는 멋대로 생각했다. 정한이 보지는 않지만, 저를 위해 사주는 소설책에도 자주 나오는 이야기였다.

“네 사장 누구야.”

“권…, 정한 씨요.”

“근데 왜 권 회장이 널 잘라?”

정한의 입에서 나온 권 회장이란 말이 굉장히 차갑게 들려 윤조는 어깨를 움찔했다.

“내가 너 잘랐어. 왜? 너 이제 내 집사 시킬 마음 없으니까. 너 다른 거 하라고. 하고 싶은 거나 생각해. 뭐든 하게 해줄 테니까.”

이건 좀 신선한 전개라 생각하며 윤조는 웃었다. 두베 제일가는 부자인 권 회장이 아들에게 꼼짝을 못 하는 걸까. 하긴, 저택에서 쫓겨난 것도 권 회장이었다. 윤조는 정한을 대단하게 보다가 퍼뜩 드는 걱정에 얼굴을 굳혔다.

“근데….”

“근데.”

“그럼 저… 여기, 어떻게 있어요? 딴 데 취직자리 알아봐주시는 거예요? 아무래도 고용이 쉽지 않을 텐데….”

윤조는 지극히 객관적인 걱정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한이 또 기가 막힌 얼굴로 웃었다.

“그래, 나랑 계약서 다시 써.”

“어떻게요…? 저 뭐로 고용하시려구요? 치료사…?”

“난 너 고용 안 할 거야. 그것 말고 네가 여기 있으려면 뭐가 남았겠어?”

“…입양은 아니실 거고.”

“그래.”

윤조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정한의 눈치를 보았다. 정말 이걸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들썩거렸다.

“결혼해.”

답답했던지 정한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정말 그거였다니. 윤조는 놀란 마음에 제 가슴 위로 두 손을 포갰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나랑 결혼해.”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마침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정한이었다. 윤조는 저를 간절하게 바라보는 정한을 보며 크게 고개 끄덕였다.

“해요! 지금 당장 해도 좋아요!”

“지금은 안 돼. 여길 나가야 하는 걸 잊지 마.”

“아… 그렇지.”

정한이 몸을 일으키며 제 무릎을 털었다. 어딘가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왜요…?”

“이 엉망인 상태에서 청혼할 줄은 몰랐어.”

“그럼요?”

“나가서 다시 하자.”

“할 게, 참… 많네요.”

뺨을 붉힌 채 코끝을 매만지는 윤조의 얼굴을 그러쥐고 정한이 입을 맞추었다. 힘껏 닿았다 떨어진 반동에 윤조는 잊고 있던 통증을 느꼈다.

“아…!”

휘청이는 몸을 붙잡은 정한의 얼굴이 굳었다. 어째서 이 어둠 속에서도 그의 얼굴은 훤히 보일까. 굳은 정한과 달리 윤조는 조금 태평한 감탄을 했다.

“괜찮다며.”

“아… 그게.”

“어디 봐.”

윤조는 제 앞에 다시 무릎 꿇은 정한에게 다리를 들어 보였다. 시간을 지체해 봐야 저택으로 돌아갈 시간만 늦어질 뿐이었다.

“접질린 것 같아요.”

“그러네.”

“아…!”

정한을 만난 당시만 해도 아픔을 느낄 사이가 없었는데, 지금은 그의 손길이 스치기만 해도 비명이 절로 나왔다. 윤조는 금세 그에게 엄살을 피우고 있는 자신이 우스웠다.

“발목을 쏠 걸 그랬나.”

“네?”

“아냐. 자, 업혀. 더 늦기 전에.”

아무리 그래도 업혀 가는 건 그가 힘들 것 같아 잠시 고민했다. 그 고민이 무색하게도 짐승 울음소리가 들려 윤조는 정한의 등으로 냉큼 달려들었다.

“지금 뭐예요?!”

“뭐가?”

“못 들으셨어요?”

“아무것도.”

귀 좋은 정한이 듣지 못했다면 자신이 잘못 들은 게 분명했다. 윤조는 급히 안심하고서 유난하게 내리는 비를 보았다. 기세가 조금 꺾이긴 했으나 쉬이 그칠 것 같지 않았다. 부디 출구를 찾을 수 있길, 윤조는 간절히 바랐다.

“꽉 잡아.”

시야가 훌쩍 높아졌다. 윤조는 정한의 목을 껴안으며 짙어지는 어둠 속으로 눈을 헤매었다. 막막함에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윤조는 정한의 눈가를 이따금 쓸어주며 그가 체온을 잃지 않도록 딱 붙어 있었다.

“춥진 않아?”

등으로 쏟아지는 비가 매섭긴 했지만, 윤조는 오히려 이 빗속에서 힘을 써야 하는 그가 걱정이었다.

“사장님은요? 괜찮아요?”

“나야 늘 괜찮지.”

그의 말대로 윤조는 정한이 정말 괜찮았으면 했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그는 제 걸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큰 보폭과 빠른 속도로 걷고 있었다. 나무 밑만 골라서 다니는지 꽤 비를 맞지 않기도 했다. 윤조는 막힘없이 걷는 정한의 발걸음을 보며 괜한 말을 보태 그를 걱정하기보다 온전히 그를 믿기로 했다.

“근데 왜 안 물어?”

“뭘요?”

“내가 아는 너는 묻고, 묻고 또 물어서 지금쯤 속이 시원해지고도 남았어야 하는데.”

“물어도 돼요?”

숲을 나가면 물을 말이 참 많겠다,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윤조는 잠시 고민하다가 정한의 귀에 바짝 얼굴을 붙였다. 입술이 몇 차례 달싹거리며 뜸을 들였다. 물을 말이 너무 많았다.

“그럼… 사장님, 저 언제부터, 흠… 좋아한 거예요?”

예상했던 물음이 아니었던 모양인지 정한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윤조는 목을 길게 빼고 정한을 보았다. 생각에 잠긴 그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글쎄.”

“네?”

“꽤 됐는데.”

“얼마나요?”

“너보다는 훨씬 전.”

윤조는 괜히 코를 훔치며 다시 정한에게 가자고 손짓했다. 그는 잘 훈련된 말처럼 다시 길을 나섰다.

“또 물어도 돼요?”

“어, 물어봐.”

길을 찾느라 바빠 보이는 정한을 보고서도 윤조는 궁금한 게 많아 멈출 수 없었다. 그가 대답하기 편한 것만 고를 생각이었는데 떠오르는 게 죄 이런 것뿐이었다.

“결혼, 흠… 결혼 생각은 언제부터….”

“뭐?”

“아니… 대뜸 결혼부터 하자고 하시니까….”

“처음부터.”

“네?”

“너 좋다고 생각할 때부터.”

“제가 그렇게 좋으셨어요?”

“네가 내 옆에 있으면서 어떻게 해야 가장 안정적일까, 생각하면 답이 나오지.”

윤조는 정한이 제게 보이는 마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한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온몸이 녹진해질 정도로 뜨거운 향이 느껴졌다. 없는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듯했다.

“…사장님.”

“응?”

“사랑해요.”

정한의 귀에 작게 속삭인 말은 저도 고이 간직하고 있었던 마음이었다. 윤조의 고백에 정한이 웃음을 지었다.

“내가 더 사랑할걸?”

“아닌데…. 제가 더 사랑할 거예요.”

“나야. 내가 더 커. 윤조 넌, 늘 내가 널 더 사랑한다고 생각해.”

“왜요…?”

“난 네가 넘쳐서 내가 모르는 곳으로 흘러가버리지 말고. 네가 나한테 잠겨서 못 떠났으면 좋겠거든.”

윤조는 정한의 말을 가만히 곱씹어 보았다. 그의 깊은 사랑과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에게 이번 일이 매우 큰 트라우마라도 된 듯했다. 윤조는 마음이 저려와 정한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 그의 관자놀이에 입술을 꾹꾹 묻고 있는데, 또 짐승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사장님, 이 소리….”

더욱 선명하게 들리는 울음소리에 윤조는 정한의 목을 바짝 껴안았다. 정한이 혀를 차고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중얼거렸다.

“저 새끼가 눈치 없이.”

“뭐 있는 거 맞죠…?”

“고작 늑대야.”

“고작 늑대요?”

“어. 고작 늑대니까 걱정 마.”

고작 늑대.

윤조는 정한의 말에 안도하고서 어지러운 숲으로 눈을 돌렸다. 어둠이 바로 눈앞까지 다가온 듯했다. 늑대 울음소리도 빈번하게 들렸다.

“정말…, 괜찮은 거죠? 고작 늑대 맞죠?”

“어, 맞아. 걱정하지 말고 계속 묻기나 해.”

불안을 애써 삼키고 윤조는 그에게 질문할 거리를 생각했다. 한데 그놈의 늑대에 신경이 쏠려 질문 거리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을 생각하던 중 검문소 벽처럼 막막한 질문이 떠올랐다.

“그, …회장님은 어떡해요? 저 죽이고 싶을 만큼 싫어하시는데….”

정한이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질문을 잘못 고른 듯했다. 윤조는 소설 속 주인공들이 둘 사이를 반대하는 부모에 맞서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흔한 결말처럼 저도 행복하게 마무리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매우, 어려울 것 같지만.

“얘기하자면 좀 긴데…. 너도 꼭 알아야 해.”

“네. 저 싸울 준비 돼 있어요.”

정한이 웃으며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예상 밖이었다. 소설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만 이어졌다. 이미 결말이 정해진, 저만 몰랐던 이야기이기도 했다.

“내가 아버지께 큰 충격을 드린 탓이야. 그게 결과적으로 널 괴롭히게 됐어.”

“…….”

“미안해, 윤조야.”

마음의 병을 얻은 권 회장이 요양에 들어갔다는 사실에 놀란 것도 잠시, 윤조는 자책하는 정한의 목소리에 뿔이 났다.

“그게 왜 사장님 때문이에요? 사장님도 괴로웠잖아요. 회장님 때문에.”

“윤조야.”

“회장님이 나빠요!”

“…….”

“자식한테 죽여 달라는 부모가 어디 있어요? 그런다고 사장님 속이 시원해져요? 회장님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 분 같아요.”

윤조의 말에 웃음을 짓던 정한이 잠시 뜸을 들이고서 말했다.

“그 하나만 아시는 분이, 나만 아셔서 그런데… 종종 찾아뵈어야 할 것 같아. 물론 혼자 갈 거야.”

“지금 저한테 허락받으시는 거예요?”

“어.”

“제가 싫다고 하면 안 가실 거예요?”

“어. 안 가.”

윤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지 말라고 하면 정한은 안 갈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제 마음대로 천륜을 끊자니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종종 찾아뵈면서 둘을 알려 드리세요.”

“뭐?”

“하나만 아시니까….”

어이없이 웃는 정한의 웃음 끝에 커다란 날갯짓 소리 같은 게 끼어들었다. 정한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윤조는 목을 길게 빼고 정한과 함께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저긴가 본데.”

정한의 걸음이 빨라졌다. 귀를 울리는 소음과 바람에 윤조는 정한을 바짝 끌어안았다. 머지않아 먼발치에 있는 강렬한 빛줄기를 발견했다. 숲을 더듬듯 헤매던 빛도 두 사람을 발견하긴 마찬가지였는지 더는 헤매지 않고 발치에서 멈추었다. 눈 부신 빛 속으로 정한이 걸었다.

“저게 뭐예요?”

채 눈도 뜨지 못하고 윤조는 거대한 날개의 정체를 물었다.

“헬리콥터.”

“와… 저 처음 봐요.”

“하나만 아시는 분이 급했나 보네. 이 구역 비행 금진데.”

“네?”

“가자.”

길게 내려온 사다리를 타고 새카만 사람들이 내려왔다. 기다렸다는 듯 비가 뚝 그쳤다.

헬기의 빛줄기를 따라, 사방에서 엄호하는 요원들의 안내에 따라, 윤조는 정한과 함께 무사히 숲을 벗어났다. 급한 안도가 절로 한숨을 불러왔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도련님?”

둘의 구출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 중, 눈에 익은 두 사람이 서둘러 다가왔다. 상황이 상황인 탓일까. 좋은 기억은 없는 이 비서와 황 집사를 마주하고도 윤조는 괜히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정한의 어깨에 조용히 고개를 묻고 있었다. 정한의 얘기로 모든 사정을 알았다 하더라도 워낙 저를 힘들게 한 사람들이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집사님은 어떠십니까?”

황 집사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윤조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들었다. 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 생각했다.

“전 괜찮아요.”

“일단 차로 가시지요.”

“이쪽입니다.”

이 비서가 안내하고 나섰다. 윤조는 정한에게 업힌 채 차로 향했다. 빙 둘러싼 요원들이 개미 떼처럼 따라왔다. 괜히 쑥스러운 마음에 윤조는 정한의 목을 꽉 껴안았다.

“머리 조심해.”

윤조는 황 집사가 대기해 놓은 차량 뒷좌석에 앉혀졌다. 정한의 등이 멀어지니 한기가 확 끼쳤다. 제 몸을 감싸며 정한이 앉을 수 있게 옆으로 몸을 옮겼다.

“도련님!”

“괜찮아.”

무슨 일인가 해서 고개를 빼고 내다보니 정한을 붙잡은 이 비서의 표정이 심각해 보였다. 그의 손을 물리고서 비틀거리는 정한의 등도 심상치 않았다.

“도련님!!!”

“도련님! 도련님?!!”

윤조는 아픈 발목도 잊고 튕기듯이 차에서 나와 쓰러진 정한을 붙들어 안았다. 뜨거웠던 향이라 느꼈던 게 죄 열이었던 모양인지 그의 온몸이 불덩이 같았다.

“사장님! 사장님 왜 이래요? 눈 좀 떠봐요!!”

저를 잡으려는 장정들을 만났을 때보다, 메라크의 긴 밤을 걸었을 때보다, 죽음을 피하려 창을 넘었을 때보다, 다른 알파와 각인을 결심했을 때보다, 그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도 커다란 공포가 엄습했다.

“나 무서워요, 사장님. 네…?”

수차례 뺨을 두드려도 정한은 꿈쩍하지 않았다. 그를 부르는 모든 이의 말에 대답하지도 않았다. 분명 비가 그쳤는데. 그의 얼굴 위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집사님, 잠시….”

황 집사가 윤조에게 양해를 구하고 정한을 살폈다. 윤조는 옆으로 물러나 눈물로 흐려진 눈가를 꾹꾹 눌러 닦았다. 황 집사는 침착하게 정한의 맥과 호흡을 확인한 뒤, 가슴에 귀를 붙였다.

“일단, 걱정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은 듯합니다. 긴장이 풀리셔서 그런 것 같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이에요?”

“네. 어서 가시죠.”

“차로 모시겠습니다.”

이 비서가 정한을 들어 안았다. 윤조는 이 비서를 도와 정한을 차에 태웠다. 자신이 앉았던 뒷좌석으로.

“이 비서가 도련님 돌보세요. 서 집사님은 앞에 타셔야 합니다.”

“제가 사장님 볼게요.”

“뒷자리는 위험합니다. 앞에 앉으세요.”

단호한 황 집사의 말에 윤조는 별수 없이 앞좌석에 앉았다. 고집을 부려봤자 정한이 병원에 도착할 시간만 늦어질 뿐이었다. 안전띠를 매고 뒤를 보자, 이 비서가 몸을 구겨 가며 뒷좌석 바닥에 앉아 정한의 몸을 고정하고 그를 돌보고 있었다.

“바로 앉으시지요. 위험합니다.”

운전대를 잡은 황 집사가 눈짓을 주었다. 윤조는 마지막으로 정한을 눈에 담은 뒤, 몸을 바로 했다. 맺혀 있던 빗방울을 털어내듯 까만 세단이 메라크의 텅 빈 도로를 빠르게 가로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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