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시한폭탄의 타이머처럼 째깍거리던 귓가의 소음이 그친 건, 윤조의 기척을 들었을 때였다. 수많은 빗방울과 숲을 훑는 바람 그리고 나뭇잎이 몸을 비비는 소음 사이에서 그의 작은 목소리를 인식한 순간 오로지 그것만 들리게 되었다.
그의 숨, 그의 목소리, 그의….
‘아….’
감탄스럽게 저를 보는 윤조를 향해 계속 달렸다. 그런데 그는 제 손에 닿지 않고 멀어지기만 했다. 제 숨을 틔워주지 않았다. 이대로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이 이어졌다. 그가 없으면. 그가 제게 닿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정한은 제 목을 틀어쥐었다.
“꼴좋다.”
눈을 뜨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비아냥거리는 승주의 목소리에 정한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독한 꿈이었다.
“열흘간 응급실에 처박혀 있을 때도 멀쩡하던 인간이, 쓰러져서 나타나?”
“…나 쓰러졌어?”
“기억 안 나?”
기억이 희미했다. 분명 윤조와 숲을 나와 그를 차에 태운 것까진 기억이 났는데, 그 뒤로는 뿌연 시야처럼 흐릿했다.
“윤조는?”
“너 깨는 거 보겠다고 버티고 버티다가 좀 전에 나가떨어졌어.”
“…….”
“어디 그 친구뿐이야? 병원도 난리였어.”
그때를 떠올린 듯 승주가 질린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오죽하면 내 귀에까지 들어왔겠어. 덕분에 내가 행차한 거긴 하지만.”
알 만하다 싶어 정한은 속으로 웃다, 윤조의 상태를 물었다.
“자?”
“어. 코 잔다, 왜.”
“발목은.”
“발목 그거, 다친 것도 아니지.”
“그럼?”
“감기야. 몸살기도 좀 있고. 그래도 너보다 상태 좋으니까, 네 몸 걱정이나 하셔.”
“그래?”
“으이그, 금세 안심하는 거 봐.”
“…….”
“가려고?”
“어.”
승주의 말대로 윤조가 저보다 괜찮은 상태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도통 몸을 일으키기가 어려웠다. 머리가 지나치게 무거웠다. 눈을 찌르는 통증도 여전했다.
“아프지?”
“…어.”
“아니라곤 못 하네.”
“나 왜 이래?”
“왜 그러긴. 안 먹고, 안 자고, 그 비를 죄다 맞고 돌아다녔으니 몸이 견딜 수 있겠어? 거기다 너 꼬박 진통제만 먹고 버텼다며?”
승주의 말대로였다. 몸이 버티지 못할 이유는 충분했다. 하지만 다른 이유 또한 있을 것이다. 정한은 굳이 자신이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던 승주의 소견을 듣고 싶었다.
“다른 거 있잖아.”
빤히 보던 승주가 고개를 내저었다.
“졌다, 졌어.”
“빨리 말해.”
“너, 전에 우리한테 각인 미수에 그쳤다 한 거 기억해?”
창가에 기대 있던 승주가 가까이 다가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승주의 시선이 정한의 목에 잠시 머물렀다.
“그거 미수 아닌 거 같아.”
“그럼?”
“각인 중이라고 해야 하나?”
“각인 중…?”
“하려다 만 게, 안 한 게 되지는 않았나 봐. 그러니 이리 아프지.”
“각인통이라는 거지?”
“추정이긴 하지만, 네 이 고통이 각인통이 아니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
“무헌이도 그래?”
“걔 소견이야.”
정한은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승주와 눈을 마주했다.
“웃음이 나?”
“내가 웃어?”
“어. 너 웃어. 자기가 웃는 것도 모를 만큼이야? 어디 마비라도 왔니?”
기습적으로 옆구리를 찌른 손에 정한은 이를 악물었다. 제 반응을 즐기듯 야비하게 웃는 얼굴을 쏘아봤다.
“엄살은, 쯧. 그나저나 야, 권정한. 너 어쩔 거야? 이제 돌이킬 수 없어.”
“그걸 왜 돌이켜.”
“하…, 정말. 내 주변에서 각인하는 멍청이가 나오다니. 그게 다른 누구도 아닌 너라니.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한탄하던 승주의 눈썹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꿈틀거렸다. 정한은 저를 뾰족한 눈길로 바라보는 승주에게 할 말을 하라고 턱짓을 해 보였다.
“너 확실하게 각인 끝내고 오래. 병원장님 명령이야. 그리고 이거.”
“뭔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허락해주는 거야.”
정한은 승주가 제 손에 쥐여준 것을 들여다보았다. 소포장 된 흰 알약. 윤조에게 고용되었을 때 다 쓰고 없던 그것은 알파 피임약이었다. 꼼짝도 할 수 없었던 몸을 단숨에 일으켜 앉았다. 제 엉망인 상태를 보는 승주의 혀끝이 바빴다.
“옆방이야.”
“고맙다.”
“지금 하라는 건 아닌 거 알지?”
가치 없는 승주의 말을 상대하지 않고 정한은 제 병실을 나와 윤조의 이름이 적힌 문 앞에 섰다. 들어가기 전, 잠시 제 엉망인 머리를 손으로 빗어 넘겼다. 비록 꿈결이라도 그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조용히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승주의 말대로 윤조는 잠들어 있었다. 뒤척임도 없었는지 반듯하게 누운 얼굴이 무척 메말라 보였다. 정한은 안타까운 눈으로 윤조의 얼굴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손으로 쓸어 보았다. 홀쭉한 볼과 메마른 입술, 생기를 잃는 눈가가 목을 따끔하게 했다.
고요히 잠든 얼굴만 바라보던 정한은 작게 오르내리는 윤조의 가슴 위로 가만히 손을 대었다. 따뜻한 체온과 규칙적인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손바닥 아래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두근거림은 그 어떤 증거보다도 그가 제 곁에 있음을 실감하게 했다.
정한은 윤조의 호흡을 따라 그의 가슴을 다독였다. 자신의 안도를 그가 알아주었으면 했다. 혹여나 그 역시 깊은 잠에서 헤매고 있다면, 이 손길을 따라 그 숲을 벗어나라고.
노을로 물든 병실 안. 정한은 오랫동안 윤조의 곁에 머물러 있었다. 이따금 욱신거리는 눈을 눌러대며 그의 긴 여정이 서둘러 끝나기를, 기다렸다.
* * *
칠흑 같은 사방.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맹렬히 다가오고 있었다. 윤조는 예고편을 본 것처럼 저 너머에서 다가오는 이의 정체를 알고 미리 기대에 부풀었다.
그르르르.
하지만 기대와 달리 정작 얼굴을 드러낸 건 모습도 보이지 않았던 울음소리의 주인이었다.
그럴 리가.
멍하니 선 윤조를 향해 누런 이를 드러낸 짐승이 빠르게 덮쳐 왔다.
“…허.”
번뜩 눈을 뜬 윤조는 창밖에서 들리는 사이렌 소리에 깊이 안도했다. 고작 늑대 따위, 눈만 뜨면 사라질 것이었다. 윤조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두근거리는 제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나저나 정한은 깨어났을까. 그가 깨어나면 저도 깨워 달라고 했는데, 아직 소식이 없는 걸 보면 그는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했다. 윤조는 정한의 자는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꼭 결박이라도 된 듯 꼼짝할 수가 없었다. 한동안 끙끙대며 몸을 꼼지락거리는데, 문이 열리며 발소리가 다가왔다.
문득 이 역시 꿈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발소리의 주인이 우습게 보았던 늑대면 어쩌지, 하고 조심스럽게 눈을 돌리자 보고 싶었던 얼굴이 그림자를 드리우며 나타났다.
“깼어?”
“…….”
“몸은 좀 어때. 괜찮아?”
그를 반기고 싶고, 그의 말에 대답하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윤조는 입술만 벙긋거리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환하게 웃었다.
“깬 거면 좋겠는데.”
침대에 걸터앉은 정한이 손을 붙들었다. 따뜻하고 단단한 힘이 느껴졌다. 윤조는 무기력하게 누운 채 겨우 눈꺼풀만 들어 올렸다. 온몸에 힘이 빠져 도통 움직일 기력이 나지 않았다.
“중간에 몇 번 깼었는데. 기억나?”
전혀 기억에 없었다. 윤조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정한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감기에 몸살에. 아주 끙끙 앓았어.”
“…….”
“하루는 꼬박 더 쉬어야 할 거야.”
그는 제게 이 말을 몇 번이나 한 걸까. 윤조는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며 정한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저를 찾아온 건 정한이었고, 그는 무사하다. 이것만은 꼭 기억하고 싶었다.
“그만 버티고 자. 악몽 꾸지 말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는 손길이 익숙했다. 몇 번이고 꾸었던 꿈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어차피 꿈일 테니 또 그놈의 늑대가 나타나면 힘껏 걷어차 줘야지. 윤조는 씩씩하게 생각했다.
“잘 자, 윤조야.”
그래도, 이번 꿈에는 그가 나왔으면 했다. 윤조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정한의 얼굴을 응시한 채 다시 잠들었다. 따뜻한 손은 윤조의 의식이 완전히 멀어지고도 떨어지지 않았다.
*
더는 자는 것도 지겨울 만큼이 되었을 때야 윤조는 완전히 깨어났다. 무거웠던 몸도 홀가분해졌다. 오랜 수면 탓에 머리가 조금 멍한 것 빼고는 전과 다름이 없었다.
그간의 헤어짐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정한은 한시도 곁을 비우지 않았다. 윤조 역시 바라던 바였기에 그의 옆에 꼭 붙어 있었다.
똑똑.
퇴원 절차를 밟고 잠시 정한을 따라 그의 방에 들른 윤조는 노크 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데스크를 뒤적이던 정한이 혀를 차며 눈썹을 구겼다. 꼭 방문자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처럼.
윤조는 정한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문을 열고 들어온 두 사람을 보았다. 발목이 불편한 탓에 어기적거리며 일어서자 정한이 곧장 윤조의 뒷덜미를 붙잡아 앉혔다. 정한이 방어하듯 앞을 가로막고 선 탓에 두 사람의 모습이 순식간에 가려졌다.
“너 보려고 온 거 아냐.”
“그러니까 나가라고.”
“거 되게 감싸네. 앞으로 자주 볼 사인데.”
정한의 몸을 피해 고개를 빠끔히 내민 승주가 인사를 건넸다. 승주는 저택에 왔었던 정한의 친구이자, 이번에 정한을 담당한 의사였다. 안면만 튼 사이인데도 어찌나 허울 없이 대하는지, 몇 년은 아는 사이인 듯했다.
“역시 잠이 최고지. 이거 받아.”
승주가 커다란 상자를 내밀었다. 윤조는 정한의 것이라 여기고 스스럼없이 받아 들었다. 그 옆에, 마찬가지로 저택에 찾아온 정한의 친구인 이무헌이라는 남자는 길쭉한 상자를 내밀었다. 그건 정한이 대신 받아주었다.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
승주의 말에 윤조는 상자 상단에 있는 투명한 포장 부분을 들여다보았다. 케이크였다.
“아, 사장님 이거….”
무심코 정한이 케이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에 올리려다 급히 입술을 다물었다. 승주가 다 안다는 얼굴로 싱긋 웃었다.
“정한이 거 아니고, 네 거야.”
“제… 거요?”
“응. 생일이잖아.”
생일…?
그런 걸 챙겨 본 게 언제였나. 윤조는 어안이 벙벙해서 고맙다는 인사도 못 하고 멍하니 있었다.
“혹시 자기 생일 몰랐어?”
“아… 그게, 잘 챙기지 않아서요….”
“그럼 이제 챙기면 되겠네.”
“이건 와인이에요. 입에 맞았으면 좋겠는데.”
무헌이 끼어들 듯 말했다. 윤조는 뒤늦게 두 사람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축하해요. 이제 스물한 살이네.”
“고맙습니다….”
“스물한 살. 이야!!! 좋겠다. 앞날이 창창!!”
호들갑스럽게 구는 승주를 보며 정한이 이마를 짚었다. 윤조는 승주와 함께 스물한 살을 같이 연발하는 무헌을 보며, 두베에서는 스물한 살이 특별한 의미가 있나 싶어졌다.
그래서 돌아가는 길, 운전 중인 정한에게 스물한 살이 된 기념으로 파티를 하자고 했다. 정한은 그놈의 파티라고 하면서도 흔쾌히 승낙해주었다.
윤조는 끌어안은 케이크 상자의 안쪽을 들여다보며 비밀스럽게 웃음 지었다. 정한의 가짜 결혼식 일로 다시는 먹지 못할 것 같던 케이크가 이번 일로 다시 먹을 수 있게 된 듯했다. 승주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근데 제 생일은 어떻게 아셨을까요?”
“걔들이 나한테 관심이 많아. 내가 관심 있어 하는 것에도 관심이 있지.”
“그래서, 흠… 저한테도 관심이 있으셨던 거네요?”
“어. 굳이 찾아와서 눈도장 찍는 거 봐. 징그러워.”
“왜요? 전 축하받아서 좋은데….”
정한이 잠시 눈길을 주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건 고맙긴 하다고.
“기억해. 걔들이 너 따로 불러내도 절대 나가지 마. 무조건 나랑 동석해.”
“절 따로 불러내실까요?”
“대비해서 나쁠 건 없잖아.”
“사장님을 되게 좋아하나 봐요?”
“좋게 말하면 그렇겠지. 그냥 날 놀리려는 거야.”
그 놀리고픈 마음을 조금 알 듯했다. 자신이 서 집사였던 시절, 그가 제게 자주 보였던 기가 차거나, 열 뻗친 표정을 떠올리며 윤조는 음흉하게 웃었다. 그 웃음을 눈치챈 듯 정한이 윤조의 실룩거리는 입매를 엄지 끝으로 매만졌다. 곧 얼얼해질 볼을 예상하고 윤조는 긴장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정한은 케이크 상자에 올려 둔 손을 가져가 얌전히 입만 맞추었다.
쪽.
윤조는 얼떨떨한 얼굴로 정한에게 붙들린 제 손을 보았다. 혼을 낼 줄 알았는데, 이 간지러운 포상은 무어란 말인가. 윤조의 두 뺨에 붉은 꽃이 피었다. 그와는 이미 손으로 헤아리기도 힘든 긴 밤의 역사가 있었는데도 이런 간지러운 스킨십에 쉬이 부끄러워지고 마는 윤조였다.
톡. 톡.
가로수 사이를 달리자 마른 잎이 이따금 차창을 두드리며 떨어졌다. 그것처럼 정한의 입술이 쪽, 쪽, 손등에 닿았다. 윤조는 귀 끝까지 붉어져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그가 저를 놀리는 것에는 따라잡을 수 없을 듯했다.
정한의 뽀뽀 세례는 저택에 도착하고도 이어졌다. 윤조는 고작 일주일 걸린 저택까지의 여정이 꼭 한 달은 걸린 것 같은 기분에 새삼스레 저택을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보니까 엄청 크….”
보닛을 빙 둘러온 정한이 윤조의 두 뺨을 붙잡고 입을 맞추었다. 손등에 내려앉던 뽀뽀처럼 잠시 쏟아지고 말 것이라 여긴 게 무색하게도 정한은 깊어지기만 했다. 윤조는 무전을 받고 모여든 보안 요원들에게 부끄러워 정한을 밀어내려 했지만, 안고 있는 케이크 때문에 꼼짝없이 정한의 키스를 받아 내었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겨우 정한의 입술이 떨어졌을 때. 윤조는 그에게 당겨졌던 힘에 휘청거렸다. 그러고서 마주한 보안 팀장과는 머쓱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집사님.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네, 그간, 흠… 안녕하셨어요….”
저택 구석구석까지 배치해 있던 모든 인원이 모인 듯했다. 정렬하듯 선 보안 요원들이 연신 헛기침을 하며 둘 데 없는 시선을 헤매고 있었다. 윤조는 요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정한을 슬그머니 흘겨보았다. 지겹게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정한이 인사를 끊어내듯 손을 붙잡아 당겼다. 속절없이 정한에게 끌려간 윤조는 넙죽넙죽 허리를 굽혀 요원들에게 남은 인사를 전했다.
“언젠 들리는 것도 싫다면서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윤조는 불만을 토로했다. 정한이 ‘내가 그랬나?’ 하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선베드에서 할 때 그랬잖아요.”
“그거랑 이건 다르지.”
“뭐가 달라요?”
“달라.”
“그럼… 앞으로도 계속 이러실 거예요?”
“어. 출퇴근마다 할 거야. 걔들도 익숙해져야 해.”
“…부끄러운데.”
“너도 익숙해져.”
저택으로 돌아온 탓일까. 윤조는 오랜만에 제멋대로인 도련님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파티하자며.”
정한이 꼭 달래는 목소리로 윤조의 품에 들린 케이크 상자를 가져갔다. 제게는 품에 안아야 할 만큼 큰 것이 그에게는 한 손으로 훌쩍 들고도 가뿐해 보였다.
“안 와?”
명령을 받은 개처럼 윤조는 정한의 뒤를 쪼르르 따라갔다. 와인을 안은 손으로 케이크를 옮긴 정한이 뒤에서 걷는 윤조의 손을 붙잡아 당겼다.
윤조는 정한의 옆에서 걸으며 오랜만에 돌아온 저택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희미하게 쌓인 먼지가 거슬렸다. 파티 이전에 청소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소할 생각하지 마.”
심장이 떨어질 정도로 놀랐다. 윤조는 걸음을 멈춘 채 제 마음을 고스란히 읽은 정한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한이 그 단골 멘트를 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윤조는 정한의 앞을 가로막듯 서서 물었다.
“이젠 잘 보이나 봐요?”
“어. 그러네. 잘 보여.”
“그럼 제가 청소 말고도 하고 싶은 게 있는지도 아시겠네요?”
빤히 얼굴을 들여다보던 정한의 입술 끝이 슬며시 올라갔다. 윤조는 정한의 대답을 기대했다.
“안 돼.”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윤조는 정한의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왜요? 숲에서 나가면 하자고 했잖아요. 나왔는데 왜 안 해요?”
“너 아직 환자야. 휴식이 필요해.”
“저 괜찮아요! 그리고 오늘… 내 생일인데.”
“그래도 안 돼.”
“…치.”
윤조는 정한의 손에 들린 와인 상자를 넌지시 바라보았다. 저거면 가능할 듯했다.
“취하지 마. 저번처럼 수작 부려도 안 넘어가.”
“수작 아닌데.”
“아니긴.”
순 제멋대로야.
윤조는 입술을 삐죽이며 정한의 손을 놓았다. 제 방으로 가려던 윤조의 뒷덜미를 정한이 붙들었다.
“어디 가?”
“제 방이요.”
“네 방 여긴데?”
윤조는 정한의 손에 이끌려 그의 방 앞에 섰다. 매끈하고 하얀 문손잡이 위로 윤조의 시선이 닿았다.
“여기가 제 방이라구요?”
“그럼. 따로 잘 거야?”
“…그건, 아니긴 한데.”
“그럼 열어. 네 방.”
윤조는 문손잡이에 손을 얹고 정한을 보았다. 열에 들떠 잘못 들어섰던 방이 이제 제 방이 되다니. 얼떨떨했다.
“파티 안 할 거야?”
정한이 케이크와 와인을 들어 보였다. 윤조는 잠시 쭈뼛거리다 정한의 턱짓에 힘껏 문을 열고 들어섰다.
떠날 때와 다름없는 모양새인 정한의 방. 아니, 이제 그와 저의 방이 익숙한 향을 가득 품은 채 맞이해주었다. 멈추었던 시간이 흐르듯 그늘진 방 안에 빛이 들었다. 윤조는 방을 둘러보며 안으로 걸음 했다.
“청소할 생각 하지 마.”
아직 거기까지 생각이 닿기도 전이었다. 윤조는 웃으며 소파에 걸터앉았다. 이 뽀얀 먼지 속에서 그와 파티 할 생각이었다. 이따금 재채기하며, 또 이렇게….
“휴식… 으음… 하라면서요….”
케이크에는 통 관심이 없는 그에게 종일 입술이 물리면서.
“왜. 여기도 쉴까?”
어째 그는 전보다 더 제멋대로인 듯하다. 불만스럽게 정한을 보던 윤조는 이대로는 아쉬워서 떼를 조금 쓰기로 했다.
“근데요…. 나 오늘 생일인데, 선물 안 줘요…?”
정한은 당연히 선물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을 테고, 그럼 저는 그를 선물로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뭐 갖고 싶은데?”
역시. 윤조는 활짝 웃으며 정한에게 그를 달라고 했다.
“난 이미 네 건데?”
“…네?”
“나 말고 딴 거.”
“아….”
이게 아닌데.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윤조는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러고 보니, 페로몬을 줄줄 흘리고 있는 저와 달리 그는 정말 할 생각이 없는지 페로몬 한 톨도 내어주지 않았다. 괜히 서러운 생각이 들었다.
“…나 진짜 괜찮은데.”
불퉁한 얼굴로 눈을 내리깐 윤조는 심상치 않은 정한의 바지 앞섶을 발견했다. 아무리 그가 말로는 안 된다고 해도 반응하는 몸을 어찌할까.
“하고 싶으면서….”
발끝으로 정한의 바지 앞섶을 꾹 눌렀다. 소파 팔걸이에 등을 대고 정한에게 갇혀 있던 윤조는 은근하게 발끝에 힘을 주며 정한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안 할 거예요?”
정한은 생각이 많아 보였다. 윤조는 설마하니 자신이 아닌 그에게 문제가 있나 싶어 얼른 발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사장님이죠?!”
“응?”
“사장님이 안 좋은 거죠? 그래서 안 하는 거 맞죠?!”
“…….”
“맞네! 어디가 안 좋대요…? 그때 쓰러진 거 때문에 그래요?”
거의 울 듯이 매달리는 윤조를 보고 정한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그게 아니라. 내가 못 참을 것 같아서 그래.”
“왜 참아요? 하면 되는데.”
“아니, 지금 넌 못 버텨.”
정한의 단호한 말에 윤조는 슬그머니 제 몸을 끌어안으며 그를 살폈다. 분위기를 보아, 당분간 또 누워 지내야 할 듯한 예감이 들었다. 며칠 잠을 자지 않아도 될 만큼 질리도록 누워 있었던 탓에 그건 조금 사양하고 싶었다. 어디 그것뿐일까. 허리가 접힐지도. 기어 다녀야 할지도. 벌어진 다리가 평생 모이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정말, 그의 말대로 조금 더 건강해질 때까지 쉬는 편이 좋을 듯했다.
“그럼 하던 거 계속할까?”
정한이 다시 윤조의 얼굴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며 다가왔다. 코끝을 맞대고서 가만히 윤조를 내려다보던 정한이 속삭였다.
“어쩌면 네 생일을 축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날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때가 꿈 같아.”
“…….”
“윤조야.”
“네….”
“잘 버텨줘서 고마워.”
“…….”
“생일 축하해.”
윤조는 정한을 끌어안고 그의 뺨에 얼굴을 대었다. 가슴이 벅찼다. 뜨거운 섹스도 놀랄 만한 선물도 없는 생일이었지만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
“저번 사장님 생일은 내가 축하해줬잖아요. 기억해요?”
“어떻게 잊겠어? 거대한 촛불을 붙여줬잖아. 소화기로 꺼야 할 만큼.”
“…암튼, 이번엔 사장님이 나 축하해줬으니까 우리 이대로 평생 서로 생일 축하해줘요. 혹시 그날 싸워도 축하는 꼭 해주기.”
“그게 무슨….”
“약속.”
싸울 것을 가정하고 하는 약속이라니 어이가 없다며 정한이 웃었다. 그러면서도 윤조가 내미는 새끼손가락을 무시하지 않았다.
“근데요, 사장님. 저는 참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러는데요.”
“또 무슨 수작을….”
“저 그거 하면 안 돼요?”
정한은 자세한 얘기도 듣지 않고 안 된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윤조는 이미 소파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올라와.”
“전 참을 수 있어요. 사장님처럼 이성을 잃지 않을 거예요.”
“서윤조. 오늘 네 생일이야. 네 생일인데 왜?”
“그러니까요…. 달라는 거예요.”
정한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아직 윤조의 생일 지나려면 한참 더 있어야 했다.
“한 번이야.”
“그건 제가 정할 거예요.”
“그래, 뭐 어차피 한 번만 해도 힘들 테니까.”
“두고 봐야죠.”
윤조는 정한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포기한 듯 소파 등받이에 기댄 정한이 빤히 윤조를 내려다보았다.
“대신 사장님은 손쓰기 없기.”
정한이 그건 어렵다는 듯이 보았다. 윤조는 어디 적당한 것이 없나 싶어 슬쩍 주변을 둘러보다 그의 넥타이로 시선을 두었다. 정한이 기꺼이 넥타이를 끌러주었다.
“이러니까 선물 같지 않아요?”
넥타이로 결박한 손목을 가리켜 물었다. 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윤조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정한의 벌어진 허벅지를 양손으로 쓸어 올렸다. 과연 제 장담대로 이성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 어떤 맛있는 케이크나 달콤한 와인보다도 간절한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잘 먹겠습니다.”
윤조의 손끝에서 정한의 바지 지퍼가 지이익, 하고 내려갔다. 기다렸다는 듯 볼을 때리며 튀어나온 성기를 윤조는 덥석 물었다. 채 목 끝까지 삼키기도 전에 혀뿌리에 침이 고였다.
“우음….”
윤조는 정한의 허벅지를 꽉 움켜쥐고 그에게 바짝 들러붙었다. 목구멍을 조이며 침을 깊게 삼키자 정한의 옅은 신음이 귓가로 쏟아졌다. 윤조는 그치지 않고 제 입 안에 뻐근하게 들어찬 성기를 정신없이 빨았다.
“윤, 윽….”
불끈거리는 허벅지 근육을 움켜쥐며 윤조는 웃음 지었다. 대단히 근사한 생일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윤조는 눈을 찌르는 빛에 잠에서 깨어났다. 꿈인가 싶었던 일을 확인하기 위해 옆자리를 더듬어 보았다. 꿈이 아니었던 모양인지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서늘한 느낌으로 보아 시간도 꽤 지난 듯했다. 도대체 정한은 언제 저택을 나섰던 걸까.
‘윤조야.’
머리맡에 앉은 정한의 기척에 눈을 떴다. 스탠드 불빛에 눈살을 찌푸리는 윤조의 얼굴을 정한이 가만히 쓰다듬었다.
‘잠시 다녀올 데가 있어.’
정한의 손목에 코를 박고 향을 들이마시던 윤조는 이불 속에서 손을 빼내어 그를 붙잡았다. 그때 정한이 웃었던가. 기억이 희미했다.
‘아버지 뵙고 올게.’
달갑지 않은 눈을 하고서 입술은 웃고 있는 걸 보자니 그의 속이 말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정한이 안쓰러워 윤조는 그의 손을 붙잡고 깊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정한이 개를 쓰다듬듯 엄지로 입가를 어루만져주었다. 지난밤 그가 차려준 생일상을 세 번이나 먹은 것에 대한 칭찬처럼.
‘조금 먼 데 계셔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어디 계시는데요? 혹시 메라크예요?’
‘아니, 두베야.’
‘아… 그럼.’
‘일어나서 밥 먹고, 놀고 있으면 올 거야.’
그래. 그러면 정한이 돌아올 것이다. 새벽에 있었던 일을 완벽하게 기억해낸 윤조는 이불을 걷고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홀쭉한 배를 매만지며 욕실로 향했다.
희미하게 남은 술기운을 씻어내고 나오니 어느새 10시가 넘어 있었다. 파티의 흔적으로 엉망인 테이블을 잠시 외면하고 빈 배를 채우기 위해 방을 나섰다.
“헉…!”
훌쩍 열어 낸 문 너머에 동상처럼 서 있는 사람을 마주하고 윤조는 깜짝 놀라 다시 문을 닫았다. 헛걸 봤나 싶어 다시 문을 열려는데 조심스러운 노크가 들려왔다.
“누, 누구세요?”
“식사 준비되었습니다.”
왜 묻는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제 할 말만 하는 건지. 윤조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다시 문을 열었다. 마주쳤던 당시와 그대로인 자세의 사람을 훑어보니 저택을 드나드는 담당자들과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식사하시는 동안 방 청소를 하겠습니다.”
청소할 생각하지 말라던 건 이 뜻이었나.
윤조는 머리를 긁적이며 방을 나왔다. 양 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들어선 담당자를 띄엄띄엄 돌아보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1층에 이르니 저를 맞이했던 사람 말고도 저택 곳곳에 청소 중인 사람들이 보였다. 제 잠을 깨우지 않고 어떻게 숨죽여 일했던 건지 무척 신기했다.
식사는 주방이 아닌 다이닝 룸에 차려져 있었다. 윤조는 양껏 배를 채운 뒤, 산책도 할 겸 청소하는 사람들을 위해 저택을 비워주기로 했다.
“헉…!”
현관문을 열고 나오자 그 앞에 또 동상처럼 서 있는 이가 있었다. 윤조는 놀란 가슴을 누르며 보안 팀장과 인사했다.
“그간 초소에서 받아 둔 우편물입니다.”
저택으로는 일절 발길 하지 못했는지 우편물의 양이 상당했다. 두 손으로 받아 든 우편물 위로 팀장이 조심스레 쪽지 하나를 올려주었다. 윤조는 긴 번호를 눈으로 읽고서 물었다.
“이게 뭐예요?”
“박명우 요원 연락첩니다.”
“어? 제가 이게 필요한 걸 어떻게 아셨어요?”
“도련님께서 알려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아….”
지난밤 정한과 그간의 일을 이야기하다가 명우의 이야기도 나왔었는데 이렇게 빨리 행동해주었을 줄은 몰랐다. 윤조는 팀장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팀장님.”
“제게 고마워하실 것 없습니다. 박명우 요원을 메라크 별장으로 보낸 게 저인걸요.”
“페이가 좋아서 추천하셨다 들었어요.”
“아닙니다. 집사님한테서 떼어 놓으려고 보낸 겁니다.”
“네…?”
“도련님 치료에 집중하시라고 사사로운 친분을 쳐냈습니다.”
“…….”
“당시 집사님께서 이 저택에 마음 붙일 유일한 사람이었을 텐데, 죄송합니다.”
“…그래도 덕분에, 도움을 받았어요. 이제 다시 연락할 수 있게 됐고. 혹시… 회장님 명령이셨어요?”
팀장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조아렸다. 윤조는 알 만하다 싶어 그에게 더 죄송할 것 없다는 말을 하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청소 중인 방에 우편물을 가지고 들어갈 수는 없어서 예전에 쓰던 제 방으로 향했다. 번호를 받은 김에 명우에게 연락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올라온 2층도 1층과 다름없이 청소하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제 방이었던 곳 역시 이미 청소에 들어가 있었다.
“이건 어찌할까요?”
윤조의 기척을 느낀 담당자 하나가 퍼뜩 무언가를 품에 안고 다가왔다.
“이게 어디 있었는데요?”
“침대에 놓여 있었습니다.”
윤조는 담당자가 품에 안은 마른 꽃에서 시선을 떼고 침대를 보았다. 이곳에 있었으나 자신이 못 보았을 때라면, 대략 일주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혹시 그날, 정한이 꽃다발을 사 들고 이곳에 왔던 걸까.
윤조는 담당자가 건네는 꽃다발을 안아 들고 방으로 들어섰다.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는 침대 끝에 서서 괜히 그 위를 쓸어 보았다.
“큰방으로 옮길 것이 있다면 말씀 주시지요.”
바스락거리는 꽃다발을 고쳐 쥐며 윤조는 담당자를 돌아보았다. 이 방에 있는 제 소지품이라고는 옷장에 걸린 집사 유니폼과 얼마 남지 않은 수고비와 함께 넣어 둔 정한의 카드, 제 신분증 그리고 책상에 꽂힌 것들이 다였다.
“다른 건 제가 가져갈게요. 여기 이 꽃이랑, 저기 우편물, 또… 옷장에 든 거 전부 가져가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책장의 책을 꺼내어 정한의 전화번호와 명우가 사준 꽝 복권을 챙겼다. 혹시나 또 다른 걸 넣어 뒀던가 싶어 책을 팔랑거려 보았다. 그러자 기억에도 없는 것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노란 봉투를 보아하니 복권인 듯했다.
윤조는 허리를 숙여 봉투를 집어 들었다. 안을 열어 보자 예상대로 복권이 있었다. 꽃다발과 복권. 모두 정한이 그날 사 온 것이었나 보다. 윤조는 그 복권도 챙겨 주머니에 넣었다.
*
꽤 먼 길을 달려 도착한 곳은 어릴 때 몇 번 와 보았던 별장이었다. 정한은 황 집사가 내어주는 차를 마시며 넓은 마당과 그 위의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같은 두베의 하늘인데도 더 멀리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몸은 좀 괜찮고?”
정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제게 물을 것이 많아 보였던 아버지는 이상하게도 말이 없었다. 당신답지 않게 눈치를 본다고 생각하며 정한은 홀로 웃었다.
잔이 비워지면 일어날 작정을 하고서 차를 음미했다. 침묵하는 아버지를 대신해 황 집사가 말을 걸어왔다. 딴엔 답답했던 모양이다.
“식은 올릴 예정이세요?”
정한은 슬그머니 자신에게 눈짓을 주는 아버지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윤조에게 기쁨을 나눌 만한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거추장스러운 행사 따위 저 역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집사님께서는….”
“윤조가 원한다면 하겠지만. 아마 저와 같은 의견일 겁니다.”
“그럼 이건 필요 없겠네요.”
“그게 뭡니까?”
황 집사가 손에 든 태블릿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정한은 무심코 내용을 살피려다 번뜩 떠오른 기억에 손을 멈추고 황 집사를 보았다.
“일전에, 제가 집사님을 만나면서 들었던 의견을 그대로 보관해 두었습니다.”
“그게 의견이라 할 수 있습니까?”
“그럼…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여나 두 분 결혼 준비하실 때 도움이 될까 싶어 남겨 둔 것이지 다른 뜻은 없습니다.”
정한은 황 집사가 굳이 남긴 데이터를 자신이 지우려다 말고 도대체 어떤 말로 윤조를 괴롭혔나 싶어 하나씩 살펴보기로 했다. 생각보다 평범한 웨딩 플랜 중, 눈에 익은 것이 하나 보였다.
“옥상 정원에서 결혼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아뇨, 없습니다. 참고로 시간대는 밤 아홉 시였습니다.”
황 집사에게 들은 시간대가 의외라 정한은 질문 내용을 다시 살폈다.
“선택지에 시간이 왜….”
새벽까지 있는 건 무슨 경우인가 해서 정한은 눈을 찌푸리고 보았다.
“제 생각엔, 회장님께서 집사님이 이 일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도록 넣으신 것 같습니다.”
정한은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모르는 척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보며 황 집사가 씁쓸하게 웃었다.
“행진에 쓰일 음악과 효과를 선택하는 부분에선 불꽃을 선택하셨더군요.”
“…밤 9시 옥상 정원과 어울리네요.”
“네. 두베에서 자주 볼 수 없는 불꽃놀이를 한다면 아주 성대한 식이 되겠지요.”
이렇게 선택해 놓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니. 윤조가 얼마만큼 패닉 상태였던 건가 싶어 웃음도 나지 않았다.
“이걸 보니 더더욱 결혼식은 할 생각이 들지 않네요. 분명 떠올릴 테니까.”
말을 잃은 황 집사에게 태블릿을 건네주었다. 즉각 모든 자료를 삭제한 황 집사가 어느새 빈 정한의 찻잔을 보고서 다시 채우려 했다.
“이만 됐습니다.”
그만 갈까 해서 일어나려는데 문득 윤조의 말이 떠올랐다. 하나만 아는 이에게 둘을 가르쳐주라고. 정한은 빤히 제 눈치를 살피는 아버지를 확인하고 황 집사에게 차를 다시 부탁했다.
기쁜 얼굴로 차를 우리는 황 집사와 얕은 한숨을 내쉬는 아버지의 시선을 받으며 정한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푸른 하늘 위로 한가로운 구름이 두둥실 떠 가는 게 보였다.
*
더는 챙길 것이 없었기에 윤조는 곧 방을 비워주었다. 전에 없이 분주한 복도를 거닐며 명우에게 전화하기 위해 마땅한 장소를 물색했다. 어째 점점 사람이 늘어난다 생각하며 시선을 돌리는데, 마침 청소를 끝낸 듯 문을 닫고 나오는 담당자 하나를 발견했다.
“서재 청소는 끝났나 봐요?”
“네. 끝났습니다. 혹시 시키실 일이 있으십니까?”
“아뇨, 없어요.”
윤조는 서둘러 서재로 들어가 수화기를 들었다. 빠르게 번호를 누르고 신호음을 기다렸다.
-여보세요.
“명우 형?”
-어? 이게 누구야?!
명우가 특유의 명랑한 목소리로 반겨주었다. 윤조는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아 명우와 잠시 수다를 떨었다.
-너 가고 내가 베개랑 쿠션 몰래 치워 뒀는데 그게 딱 걸려서 도련님 앞에 불려갔지 뭐야.
“아… 어떡해. 많이 혼났지?”
-혼은 무슨. 근데 어찌나 무섭던지 몸이 덜덜 떨리더라.
“미안해.”
-미안할 게 뭐 있어. 어떻게 보면 내 실책인데, 다 용서해주신걸?
“그래도….”
-그렇게 생각할 거 없어. 덕분에 나 포상 휴가 받았잖아.
“포상 휴가?”
-지금 한가하게 전화 받는 거 보면 모르겠어?
“사장님이 휴가 줬어?”
-어. 월급도 올려주셨다?
호탕하게 웃는 명우의 목소리에 윤조도 웃음 지었다. 이제 그의 꽝 복권을 버려도 될 듯했다. 윤조는 통화를 끝내고 주머니에 챙겨 온 명우의 복권을 꺼내어 쓰레기통에 구겨 넣었다.
똑똑.
정한에게도 전화를 걸어볼까 고민하는 참에 누군가 방문을 알렸다. 윤조는 청소가 덜 끝났나 싶어 무심코 서재를 둘러보았다. 대답이 없자 다시 노크 소리가 났다.
“네.”
문을 열자 눈에 익은 사람이 서 있었다. 누구였더라. 윤조는 인사하는 것도 잊고 눈을 가늘게 뜬 채 기억을 해내려 애썼다.
“뵌 지 꽤 되었지요?”
“…아!”
그는 제 집사 유니폼을 지어준 재단사였다. 윤조의 반응에 재단사가 기쁜 얼굴을 해 보였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집사님 옷을 가져왔습니다. 이곳에서 입어 보시겠습니까? 밑은 어지러운 듯하여….”
그제야 그의 뒤로 빼곡히 선 의류 걸이가 보였다. 이 많은 걸 다시 1층으로 가져가는 것도 일인 것 같아 윤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일견 눈으로 보았던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옷이 서재를 가득 채웠다. 유니폼이 없어졌으니, 옷이 필요한 건 분명했지만 선택지가 지나치게 많은 듯했다. 윤조는 책처럼 빼곡한 옷의 틈바구니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서 몇 개를 골라야 해요?”
“고르는 게 아니라, 싫은 게 있으시면 치우라 하셨습니다.”
싫은 게 있을 리가.
윤조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재단사를 보았다. 웃음을 감추듯 고개를 숙인 재단사가 찬찬히 보라고 일러주었다. 명령을 받은 집사처럼 의류 걸이에 걸린 옷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모두 정한이 고른 옷인지 그의 느낌이 많이 나는 옷들이었다. 그건 곧 제 취향이기도 했다.
“한 번 입어 보시겠습니까?”
막 손에 집힌 옷을 가리키자 재단사가 흔쾌히 다가와 탈의를 도와주었다. 위아래 모두 옷을 바꿔 입은 뒤, 의류 걸이 끝에 달린 거울 앞에 서서 제 모습을 비춰 보았다.
“도련님 말씀대로 그간 체중이 좀 빠지셨네요. 한데 곧 찌우실 거라 하셔서 이전 치수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여유 있는 품이 나름대로 느낌이 있었다. 지저분하게 길어버린 머리만 아니라면 완벽했다. 윤조는 제 긴 머리 귀 뒤로 넘기고서 좌우로 몸을 돌려 보았다.
“어때요?”
“잘 어울리십니다.”
윤조는 그 외에도 총 다섯 벌의 옷을 더 입어 보았다. 어느 하나 싫게 느껴지는 게 없어 곤란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죠? 다 예쁜데.”
“그럼 전부 옷 방에 넣어 드릴까요?”
그게 가능한 일인가?
윤조는 눈을 크게 뜨고 재단사를 보았다. 그는 꼭 제 마음을 읽은 듯 느긋하게 고갯짓을 해 보였다.
“그럼….”
“다 넣어두겠습니다.”
“…네!”
자신이 대답하고도 얼떨떨해서 웃었다. 재단사는 또 할 일이 남았는지 의류 걸이를 한쪽으로 몬 뒤, 상자 꾸러미를 가져와 보기 좋게 진열해주었다.
“발목을 다치셨다고 들었습니다.”
“괜찮아요. 뛰지만 않으면.”
“그럼 신어 보시겠습니까?”
윤조는 재단사가 내밀어주는 구두에 발을 넣어 보았다. 부드럽게 발을 감싸는 가죽의 느낌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조금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발목이 껑충 나올 만큼 바짓단을 들어 올리자, 그 진가가 드러났다.
“마음에 드십니까?”
“네!”
“그럼 이건 어떠십니까.”
온통 새하얀 운동화였다. 윤조는 재단사가 내어주는 족족 발을 넣어 보았다. 어느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 없이 전부 마음에 들었다.
“어쩌죠…?”
“이건 싫으십니까?”
마지막 신발을 신은 채 윤조는 고개를 내저었다. 바닥에 무릎을 대고 있던 재단사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것도 다 넣어 드리겠습니다.”
윤조는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재를 가득 메웠던 의류 걸이가 큰 방에 달린 옷 방으로 하나둘 이동해 갔다.
어느새 썰렁해진 서재 한가운데서 윤조는 소파로 향했다. 반듯하게 자세를 잡고 앉아 테이블 위의 수화기를 들어 정한의 번호를 꾹꾹 눌렀다. 이만하면 실컷 논 것 같으니 거리낌 없이 전화해도 되겠지, 하는 계산이었다. 무엇보다 어서 그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
-어, 윤조야.
“사장님!!”
윤조의 외침에 정한이 웃었다. 윤조는 몸을 일으켜 텅 빈 서재를 향해 시선을 두었다. 그 많던 생일 선물에 대한 감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고맙다는 말밖에는.
-뭐 하고 있었어?
“옷 입어 봤어요.”
-그래?
“네. 사장님, 고마워요. 이거 생일 선물 맞죠?”
-아닌데?
“어? 아니에요?”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어디야?
“서재요.”
-잘됐네. 내 데스크 위에 태블릿 있거든? 그거 열어 보면 색칠하는 거 있을 거야.
“잠시만요.”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라 윤조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데스크로 향했다. 황 집사와 있었던 일 때문인지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윤조는 잠시 망설이다, 낚아채듯 태블릿을 안고 소파에 다시 앉았다.
“가져왔어요.”
태블릿을 켜고 정한의 지시 내용을 따랐다.
“그러니까 좋아하는 색을 고르고, 배치도 하라는 거죠?”
-어. 네가 원하는 대로. 그거 하고 있으면 나 도착할 거야.
“오는 길이세요?”
정한은 운전 중이었다. 윤조는 그의 운전에 방해되지 않게 그를 기다리는 동안 열심히 색칠 놀이를 하겠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색칠 놀이의 소재는 선으로 그려진 방 풍경이었다. 슬쩍 화면을 넘겨보자 각기 다른 방이 나왔는데, 제일 첫 페이지는 침실인 듯했다. 적당한 색을 골라 빈 곳을 누르니 칸이 채워졌다. 윤조는 방마다 색을 바꾸기도 하고, 하나씩 통일하기도 하며, 여러 시도를 해 보았다. 임시로 지정된 가구 배치는 딱히 손을 댈 필요가 없어 보여 그대로 뒀다.
처음에는 꽤 흥미로웠지만, 반복하다 보니 기대와 달리 지루한 작업이었다. 그만할까, 하며 무심히 화면을 넘기던 윤조의 손이 한곳에서 멈추었다. 무료하던 색칠 놀이가 순식간에 재미있어졌다.
“설마 이게 선물이라고…?”
맨 뒤 페이지에 있던 수영장 그림을 앞에 두고 윤조는 제 두 뺨을 감싸 안았다. 설마, 하면서도 정한이라면 가능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윤조는 확신을 가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 구석으로 향했다. 언젠가 정한이 보았던 돌돌 말린 지도를 펼쳐 보았다.
‘이 주변 어떤 것 같아? 살기에.’
병원 앞 카페에서 정한이 물었던 말이 떠올랐다. 지도를 보면서 가리켰던 자리가 그가 말한 ‘이 주변’이었다. 윤조는 제 눈치 없음에 잠시 혀를 깨물었다.
“그럼 여긴 어째…?”
지도를 돌돌 말고 서재를 올려다보았다. 빼곡하게 꽂힌 책을 보며 이 저택을 주겠다던 정한의 말을 생각했다. 이 저택도 주고 새로운 집도 주면 도대체 정한에게 남는 게 무엇일까.
“…내가 있지.”
명쾌한 결론이었다. 그럼 된 거였다. 저는 그의 곁에 평생 있을 테니. 윤조는 웃으며 말끔하게 만 지도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다시 소파로 돌아와 태블릿 속 수영장 내부의 색을 골랐다. 뭐니 뭐니 해도 파랑이지, 하며. 저택에는 없는 이 귀여운 파라솔은 노란색이 좋을 것 같았다. 윤조는 이리저리 색을 대입하다, 다시 첫 방부터 꼼꼼하게 골랐다.
한참을 고민하며 골랐지만, 정한은 돌아오지 않았다. 윤조는 미지근하게 열이 오른 태블릿을 데스크에 올려 두고 정한의 의자에 걸터앉았다.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좌우로 빙빙 몸을 돌리다 구석에 놓인 신문을 발견했다. 어제 날짜인 신문이었다. 십자말풀이나 할까 싶어 생각 없이 신문을 펼치던 윤조는 퍼뜩 떠오른 게 있어 주머니를 뒤적였다. 노란 봉투를 열어 복권을 꺼내 들었다.
“10, 27….”
하나씩 번호를 맞춰 보던 윤조의 얼굴에 흥분이 자리했다. 잘못 본 건가 싶어 몇 번이나 다시 보았으나 달라지는 게 없었다.
“어… 어…???”
윤조는 의자가 뒤로 넘어갈 정도로 급하게 일어났다.
“어!!!!!!”
미쳤어!!!
소리 지르고 싶은 입을 틀어막고 복권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정한을 다시 만났을 때만큼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고 있었다.
어쩌지. 어쩌지.
도무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서재를 오갔다. 정한을 기다리는 1분 1초가 너무나 더디게 느껴졌다. 윤조는 참지 못하고 다시 정한에게 전화 걸었다.
-어, 윤조야.
“사장님!!!”
윤조의 외침에 정한이 잠시 주춤하고는 되물었다.
-무슨 일 있어?
“사장님!! 나 드디어 ‘내’가 됐어요!!!”
-뭐?
“저 됐다구요!!!”
-응?
“복권이요!!! 저 복권 1등 됐어요!!”
수화기 너머로 정한의 낮은 웃음소리가 전해졌다. 윤조는 그 웃음소리를 잘 들으려 수화기를 귀에 꼭 붙였다.
-축하해.
“사장님이 저 주려고 사 둔 거 맞죠?”
-어 맞아. 네 거야.
윤조는 소파에 드러누웠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와….”
-그렇게 좋아?
“그럼요! 사장님 10퍼센트 떼 드릴게요.”
정한이 전보다 크게 웃었다. 윤조는 수화기를 붙든 채 다시 몸을 일으켰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사장님 어디세요? 저 사장님 손에 뽀뽀해줄래요.”
전에 없이 크게 웃는 정한의 웃음소리에 윤조는 계속해서 마음이 들떴다.
“어디냐니까요?”
-집 앞이야.
윤조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저 나갈게요!”
정한의 대답도 듣지 않고 윤조는 서재를 뛰쳐나갔다. 구르듯이 계단을 내려가 현관문을 박차고 나오니 정한의 차가 막 정차했다. 윤조는 한달음에 차로 달렸다.
“사장님!!!”
차에서 내린 정한에게 껑충 뛰어들었다. 그와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윤조는 정한의 두 뺨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맞물린 입술 사이로 정한의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이리 웃나 싶었지만 저만큼 그도 기쁜 것이라 여기고 말았다.
한참 정한에게 매달려 쪽쪽 거리다가 떨어진 윤조는 뒤늦게 보안 요원을 발견했다. 당황한 윤조를 보며 정한이 웃어댔다. 윤조는 빨갛게 익은 얼굴로 보안 요원에게 눈인사한 뒤, 정한에게서 물러났다.
“손에는 안 해줘?”
정한이 놀리듯 손을 내밀었다. 윤조는 잠시 그를 흘겨보다 얌전히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정한이 답례하듯 윤조의 손을 가져가 입을 맞춰주었다. 간지럽게 닿은 정한의 입술 자국 위로 윤조는 또 제 입술을 내렸다. 다시 제 손을 가져가는 정한을 보며 윤조는 웃었다. 이러다 끝이 안 날 것 같았다. 기다리고 있는 보안 요원에게도 못 할 짓이었다.
“들어가요.”
그에게 할 말이 많았다. 윤조는 정한보다 조금 빨리 걸어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안 그래도 돼.”
“마음이 급해서 그래요. 묻고 싶은 게 많거든요.”
다른 곳은 사람이 많으니 서재로 가야겠다고 생각한 윤조는 막상 들어선 저택이 조용해서 놀랐다.
“응?”
텅 빈 1층을 둘러보다 목을 빼고 2층을 보았다. 담당자들이 죄다 사라지고 없었다. 조금 전까지 저택을 분주하게 오가던 이들은 마치 환영이라도 된 것 같았다.
“왜 그래?”
“아니… 아까까지 되게 많았는데.”
“다 했나 보지.”
사람 많은 걸 싫어하는 저택 주인의 귀가가 그들의 마감 시간이었던 게 아닐까. 윤조는 제 생각에 확신하며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든 저택이 전처럼 반짝거려 좋았다.
“근데 내가 됐다는 게 무슨 뜻이야?”
계단을 오르며 정한이 물었다. 윤조는 뿌듯한 마음에 한껏 광대를 올리고 답했다.
“저 어릴 때부터 좋은 일엔 ‘내’가 되는 일이 없었어요. 내가 당첨됐으면, 내가 학교에 갔으면…. 이런 거요. 근데 이번에 당첨이 됐잖아요? 내가 된 거죠.”
“그런 뜻이었구나.”
정한이 윤조의 머리를 흩트리며 좋았겠다, 하고 말했다. 윤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슬그머니 그에게 애정을 표했다.
“사장님도 내 거.”
팔에 매달린 윤조를 보며 정한이 맞아, 하고 답했다.
“이 저택도 내 거.”
“그렇지.”
“태블릿에 있는 것도 혹시 제 거예요…?”
그 역시도 맞다며 정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고 그에게 확인까지 했으면서도 윤조는 선뜻 믿기 어려웠다.
“정말요? 수영장 있는 집?”
“그 수영장이 왜 있겠어.”
“나 놀라구!”
“그래.”
“정말로 그게 생일 선물이라구요?”
“그게 뭔지 용케 알았네? 똑똑해라.”
“미쳤어….”
윤조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감탄을 했다.
“그럼 사장님은 어떡해요?”
“음?”
“나한테 이렇게 다 주면 사장님 뭐 해요?”
“나한테 왜 그것만 있다고 생각해?”
의도한 대답이 아니었기에 윤조는 잠시 말을 잃었다. 또한, 놀랍기도 했다. 어쩐지 그가 제게 내어준 것은 그의 아주 작은 일부 같아서.
“나 빈털터리 될까 봐 걱정했어?”
“…아뇨. 내가 있다고 대답해야죠.”
“아, 정답이 정해져 있었어?”
“네.”
“그래, 너 있음 됐지.”
“…치.”
“걱정했네, 뭐.”
“맞아요. 걱정했어요. 우리 사장님, 이러다 야채수프만 먹고 살아야 하나… 싶어서.”
“야채수프?”
정한이 걸음을 멈추고 보았다. 생각난 게 있는지 기억을 더듬는 듯한 그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그러다 결국 떠올리지 못했는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미자르에 살 때 자주 먹던 거예요.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 해 먹던 건데. 원하시면 해 드릴 수도 있어요.”
“해줘. 원해.”
“먹고 놀라지 마요.”
“한땐 영양 주스를 주식으로 삼던 사람이야. 뭐든 먹을 수 있어.”
“그거 맛없어요?”
“먹어 볼래?”
“아뇨…, 안 먹어도 될 것 같아요.”
저택 냉장고에 맛있는 음식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입을 버리고 싶진 않았다. 윤조의 찌푸린 미간을 보며 웃던 정한이 방으로 들어갔다. 윤조는 정한의 뒤를 따르며 권 회장을 만나고 온 이야기를 물을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나 좀 씻을게.”
“아… 네.”
망설이고 있자니 타이밍을 잡기가 어려웠다. 언제쯤 권 회장을 편하게 얘기할 수 있을까. 아마 정한은 평생 그런 날이 오지 않아도 될 거라고 할 것 같지만, 윤조는 언제고 기회가 있다면 편해지고 싶었다.
정한이 벗어 놓은 옷을 정리하고 그가 나오기를 기다리다, 제 방에서 가져온 꽃다발을 침대에 두었다. 수북한 꽃송이가 싱그러웠을 때, 무척 아름다웠을 거란 생각을 했다. 물론 지금처럼 마른 모습도 아름다웠다.
그에게 뭔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을까.
윤조는 진지한 고민을 시작했다. 그에게도 자신이 느낀 기쁨을 선물하고 싶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마른 꽃잎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어찌나 깊이 빠졌는지 정한이 샤워를 끝내고 나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뭐야?”
불현듯 나타난 목소리에 윤조는 퍼뜩 고개를 들고 보았다.
“웬 꽃?”
“제 방에 있던 거예요.”
“아, 그거.”
다가온 정한에게서 시원한 향이 풍겼다. 금방이라도 어딜 나서도 될 만큼 완벽하게 단장한 정한을 올려다보던 윤조는 냉큼 꽃다발을 들어 안았다.
“이거 저 주려고 하신 거죠?”
“어. 그새 잊고 있었네. 그때도 앞뒤 못 가리고 결혼해 달라고 조르려 했거든. 넌 이미 메라크에 가 있었지만. 이리 줘. 다시 줄게, 정식으로.”
윤조는 정한의 손길을 피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의아하게 보는 정한에게 말했다.
“이게 좋아요. 메마른 꽃도 좋고. 그때, 그 숲에서 한 청혼도 좋아요.”
윤조는 그 당시, 애가 탄 정한의 마음처럼 바짝 마른 꽃의 향기를 맡았다.
“정말 그걸로 돼?”
“그럼요. 사실 지금도 좀 감당이 안 돼요.”
“왜?”
“너무 좋아서요.”
정한의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윤조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정한을 껴안았다. 그를 안고 있어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사장님 이제 큰일 났어요. 내가 평생 물고 안 놔줄 텐데.”
“왜 하필 무는 거야?”
“집사는 아니어도, 이 저택 개로서의 자격은 아직 유효하잖아요.”
“그걸 기억하고 있어?”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살다 살다 개가 된 날이었는데. 윤조는 고개를 들어 채 닿기 힘든 정한의 입술 대신 그의 턱을 깨물었다. 정한은 깨물리고도 뭐가 그리 좋은지 머리를 쓰다듬으며 귀엽다고 해주었다.
“어떡해요?”
“왜. 딴 데도 물고 싶어?”
“그렇기도 한데… 자꾸 실감이 안 나요. 저 아직 그 숲에 있는 거 아니죠? 너무 좋은 일만 있어서 이상해요.”
“꿈같아?”
“네. 제가 물어야 할 게 아니라 물려야 할 것 같아요.”
빤히 윤조를 내려다보던 정한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실감하게 해줄까? 꿈이 아닌 거.”
“물어주시게요?”
“어.”
윤조는 정한의 눈동자에 맺힌 제 모습을 보았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야 할 때가 찾아온 듯했다. 셔츠 아래로 정한의 단단한 근육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도 저처럼 대답을 정해 놓고 있었던 모양인지 같은 웃음을 지었다. 아직 눈 부신 한낮. 여전히 물을 말은 많았고, 그의 아침 일정도 궁금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윤조는 두 팔을 뻗어 정한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미 벌어진 채로 맞물린 입술이 욕심껏 서로를 빨았다. 윤조는 제게 넘어오는 정한의 타액을 삼키며 허리를 옥죄어 오는 손길에 콧소리를 내었다.
“흐응….”
정한의 페로몬을 감지한 피부가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의 커다란 손이 등을 쓸어 올리고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도 그의 체온에 피부가 녹아내릴 것 같았다.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윤조는 깨금발을 들어 정한에게 매달렸다. 더욱 깊이 맞물린 입술이 서로를 뜯어 먹을 듯 얽혔다.
윤조는 불끈거리는 정한의 등 근육을 매만지며 이따금 눈을 떠 그를 살폈다. 짙은 속눈썹이 오로지 제게만 집중해 있었다. 코끝을 간질이는 숨, 타액의 미끈거림, 저를 갈구하는 혀의 놀림, 쏟아지는 음험한 그의 언어. 그 모든 것들이 저를 미치게 했다. 무엇보다 슬며시 들어 올린 눈꺼풀 아래에 나타난 까만 눈동자는, 다시 그에게 반한 듯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사랑해요….”
저를 보고 있는 것을 응시한 정한이 움직임을 멈추었을 때, 윤조는 제 마음을 참지 못하고 뱉어내었다. 그는 넘치는 저를 보지 못해서 곧 잠기도록 쏟아주었다. 윤조는 정한에게 허덕이며 그에게 매달리고, 또 매달렸다. 흠뻑 젖은 엉덩이가 서랍장에 부딪혀 철퍽 소리를 내었다.
“아, 응….”
윤조의 셔츠를 등에서부터 끌어올린 정한이 손을 앞으로 옮기며 침대에서 매만질 때처럼 흉곽을 따라 애무했다. 그의 두 엄지 끝에서 잔뜩 흥분한 젖꼭지가 짓눌렸다.
“흐으….”
윤조는 정한의 입술 위로 신음을 흘렸다. 정한이 웃으며 마저 셔츠를 벗겨 올렸다. 엉망이 된 머리칼 사이로 정한이 잠시도 놓치지 않고 다가와 입술을 물었다. 윤조는 그가 저를 한 꺼풀씩 벗겨내는 손길에 온몸을 맡겼다. 이미 어찌할 사이도 없이 그에게 잠식된 몸이었다.
“누가 마음대로 싸래.”
연신 입을 맞추던 정한이 묵직하게 바닥에 떨어진 윤조의 바지를 발로 치우며 말했다. 윤조는 제 등에 닿는 서랍장의 딱딱하고 차가운 감촉마저도 자극적으로 느껴져 입을 벌린 채 정한을 보았다. 그의 검지와 중지가 가랑이 사이를 가르고 들어와 느릿하게 주름을 매만졌다.
“응? 윤조야. 누가 싸래.”
생일날만 해도 그를 마음껏 좌지우지했던 저였는데. 지금은 손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윤조는 이 상태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제 주름을 벌리고 들어오는 손가락 역시.
“아아….”
“좋아?”
“으응….”
정한이 웃으며 입을 맞춰주었다. 윤조는 떨어지는 정한의 입술이 아쉬워 그의 어깨에 다시 매달리려 했다. 찌걱대며 쑤시고 들어온 손가락이 아니었다면 분명 그리했을 테다.
“아, 읏….”
정한이 가늠하듯 속살을 눌러 벌렸다. 윤조는 그의 손짓 하나하나에 반응하며 몸을 움칫거렸다.
“흐… 응…, 그냥, 넣어주면 안 돼요?”
싼 벌이라도 받는 듯했다. 윤조는 제 자극점에 닿을 듯 말 듯한 손가락이 아쉬워 그의 손목을 붙들고 애원했다.
“너 찢어져.”
아닌데. 이렇게 젖었는데.
윤조는 정한의 말을 부정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윤조의 끈질긴 애원에 정한은 그만 손을 빼고 그토록 바라던 것을 꺼내 보였다.
“뭐예요…? 왜, 왜… 어… 노팅해요?”
페로몬에 취해 시야가 흐린 탓인지 정한의 발기한 성기가 전에 없이 부풀어 보였다. 윤조는 제 왼쪽 다리를 들어 올리는 정한을 두렵게 보았다.
벌어진 가랑이 사이로 붙어선 정한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가 회음부부터 질펀하게 젖은 주름까지 귀두로 문질러댔다. 정한이 제 귀두를 주름 사이로 움푹 쑤시고 뺄 때마다 윤조는 제 오른발 끝을 세웠다.
“흐읏!”
위태하게 선 몸을 정한이 안아 들었다. 윤조는 서랍장의 도드라진 손잡이를 짚으며 정한의 허리에 다리를 둘렀다. 겨우 찾아온 여유가 애석하게도 그가 저를 제 위로 앉히듯 삽입한 순간, 두 다리가 미끄러지며 허공에서 바르작거렸다.
“아아…!”
의도치 않게 깊이 들어간 정한의 성기에 윤조의 몸이 극렬하게 떨렸다. 그의 말대로 찢어질 것 같았다. 불에 덴 듯 뜨거운 느낌이 배 속을 가르고 올라왔다. 윤조는 정한의 어깨를 꽉 끌어안고 발을 버둥거렸다.
“아파?”
아프냐고 물으면서 정한은 제 허리를 쳐올렸다. 윤조는 비명도 지르지 못해 그저 입술을 씹으며 그에게 매달렸다. 몇몇 서랍장이 윤조처럼 덜컹거리며 앞으로 튀어나왔다. 정한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아, 아…! 아아… 사장, 흐으… 님…!”
다른 것은 볼 것도 없이 정한은 바로 극점을 긁어댔다. 뭉개듯 콱 누른 뒤 바로 빠지고, 또 콱 누르길 수차례 반복했다. 무서울 만큼 제 몸을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윤조는 흥건하게 젖은 제 배를 느끼며 자꾸만 그의 허리에서 미끄러지는 다리를 애써 엮었다.
“윤조야, 나 봐야지.”
매달리는 것이 겨우인 윤조의 턱을 쥐고 정한이 시선을 맞추길 종용했다. 윤조는 숨을 헉헉대며 정한을 보았다. 그의 까만 눈동자가 정말 저를 삼킨 것만 같았다.
“사….”
“사랑한다고?”
윤조는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제 극점을 눌러 비비는 자극에 허리를 떨었다. 미칠 것 같았다. 그가 자위하듯 제 성기를 그러쥐고 흔들었을 때는 머리가 이상해질 듯했다. 인정사정없이 꽂히는 밑으로는 크림 같은 거품이 맺혀 떨어지고 그가 주물러 대는 제 성기에서는 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이 와중에도 그는 사정할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으응… 흐.”
“괜찮은 거 아니잖아.”
정한이 뺨에 붙은 머리칼을 떼어주며 말했다. 윤조는 제 입술에 다정하게 닿는 정한을 느끼며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은 게 아니긴 한데, 못 버틸 것도 아니었다.
“계속하자고?”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윤조의 두 뺨을 그러쥐고 정한이 입을 맞추었다. 쪽, 소리 나게 닿았다 떨어진 입술이 싱긋 웃었다. 윤조는 미약한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저를 안고 침대로 향하는 정한을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더, 그에게 안겼다.
“빨아.”
윤조는 아까까지 제게 처박혀 있던 정한의 성기를 보고 눈을 들었다. 그의 형형한 눈이 명령처럼 윤조를 움직이게 했다. 윤조는 입술을 벌려 그의 미끈거리는 성기를 입에 물고 고개를 앞뒤로 오갔다. 누운 채라 마음만큼 움직이지 못하자 정한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웁… 흡… 우읍…!”
목구멍까지 치고 들어온 귀두가 깊이 박혔다가 느리게 빠져나갔다. 정한이 곧 사정할 듯했다. 윤조는 젖은 눈을 깜박이며 연신 정한을 응시했다.
“마실래?”
윤조는 긍정의 의미로 눈을 크게 깜박였다. 그의 정액을 말끔히 마실 작정이었다. 생일날에도 배부르게 먹은 그의 정액. 입 안 가득 풍기는 그의 냄새는 윤조가 아주 좋아하는 것이었다.
“후… 하아….”
저를 보며 사정하는 정한의 표정이 볼만했다. 윤조는 눈을 크게 뜨고 정한이 제게 보이는 낱낱의 순간을 보았다. 목구멍으로는 진득한 정액이 꾸물거리며 흘러갔다.
말끔히 요도 입구까지 빨아낸 윤조를 칭찬하듯 정한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윤조는 얼얼한 입가를 혀로 쓸며 제 배에 앉은 정한을 보았다. 그가 한숨처럼 웃었다.
“미쳐 가지고.”
“…왜요?”
정한이 허리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 달래듯 입가를 혀로 핥아주고 몸을 일으킨 그가 사정 후에도 여전히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제 성기를 훑고서 말했다.
“미쳐서, 너한테 쌀 뻔했잖아.”
“싸면 안 돼요?”
“어, 안 돼.”
“…왜요?”
“너 임신하면 안 되니까.”
윤조는 가슴이 저릿한 느낌에 손끝을 달싹거렸다. 정한이 다시 허리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
“난 앞으로 최소 2년간 아이를 가질 마음이 없어. 물론 네가 원한다면, 앞당겨 볼 생각은 있긴 해.”
“아, 아이요?”
“어. 우리 아기.”
우리 아기.
윤조는 멍하니 정한을 보았다. 임신은 곧 아기가 생기는 것을 뜻했다. 새로운 가족이자, 책임져야 할 생명. 윤조는 아직 제 할 일이 까마득하게 남은 것을 떠올리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그래, 너 너무 어려.”
“해야 할 것도 많아요.”
“어, 나도 너랑 오래….”
정한이 웃으며 볼에 입술을 묻었다. 윤조는 그가 제게 하는 귀엣말을 들으며, 과연 그가 만족할 만큼 섹스를 하게 될 날이 올까, 생각했다. 어쩌면 괜찮은 사람이 될 만한 10년 뒤가 되어도, 그는 아직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용케 2년이라는 유예 기간을 두었다.
“그럼 그런 거로 알고, 열심히 피임하자.”
“…네.”
대답이 마음에 든 듯, 만족스러운 얼굴로 정한이 몸을 일으켰다. 윤조는 늘어지게 누워 그가 하는 양을 보았다. 당연히 콘돔을 찾으리라 생각했는데 정한은 다른 서랍장을 열었다. 의아한 마음에 윤조는 손끝을 까딱거렸다. 그가 서랍장에서 꺼낸 무언가를 입에 물었을 때는 이해하지 못해 저도 몸을 일으켰다.
“뭐예요?”
그가 주로 약을 넣어 두는 서랍에서 꺼낸 것이니 약이 분명했다. 정한이 제 눈앞에서 쓰러진 뒤로 윤조는 내심 그를 걱정하고 있었기에 그가 약을 먹는 일이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피임약.”
이로 약을 문 채 긴 다리로 저벅저벅 방을 가로지른 정한이 물과 함께 약을 삼킨 뒤 대답했다. 알파 피임약도 있었구나, 하며 윤조는 다시 등을 대고 누웠다. 이젠 외운 듯한 천장 조각을 눈으로 더듬고 있자니 정한이 돌아왔다.
“30분.”
곁에 누운 그가 뺨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윤조는 영문을 알 수 없어 눈만 깜박여댔다. 그러자 정한이 몸을 타고 오르며 벌어진 입술을 힘껏 빨았다. 진득하게 들러붙었다 떨어진 입술은 곧 턱을 물고, 귓불을 씹어댔다.
“으응….”
윤조는 제 몸을 덮고 있는 두꺼운 근육 덩어리를 매만지며 목덜미가 빨렸다. 정한이 자주 이를 대는 곳에 이가 박혔다. 따끔할 사이도 없이 그가 혀로 빨아대는지라 간지러워 웃음이 났다.
“흐으… 거, 거기….”
가슴을 주무르는 정한의 손을 붙잡고 윤조는 제 젖꼭지를 세게 눌렀다. 정한이 웃으며 윤조의 부푼 유두를 비틀어 잡았다. 윤조는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그가 조금 더 세게, 저를 괴롭혀주었으면 했다.
“씹어줘?”
윤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한의 입 속으로 제 유두가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차지게 살을 빠는 소리가 났다. 그의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점성 있는 타액이 실처럼 늘어나고 젖꼭지가 더할 수 없이 부풀어 갔다. 그의 잇새에 물려 흔들릴 땐 허리를 튕기며 교성을 질렀다.
“그렇게 좋아?”
정한이 유난하게 부푼 오른쪽 젖꼭지를 손끝으로 튕기며 물었다. 윤조는 대답 대신 가쁜 숨을 내쉬며 제 배 위로 선액을 흘리고 있는 정한의 성기를 내려다보았다.
“25분.”
제 시선을 눈치챈 정한이 말했다. 윤조는 그제야 그가 의미하는 바를 알았다. 정한은 남은 시간 동안 윤조가 거기라고 말하는 곳곳을 매만져주었다. 그사이 윤조는 차츰차츰 농도를 더해 가는 정한의 페로몬을 느꼈다. 한 겹 한 겹 덧씌워진 그의 페로몬이 조금도 반항하지 못하게 저를 지배했다.
“1분.”
손끝도 까딱할 힘이 없게 되었을 때, 젖은 입가를 닦으며 다가온 정한이 입술을 열고 혀를 찾았다. 윤조는 성기처럼 쑤시고 들어온 정한의 혀에 이리저리 치이며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그의 타액만 겨우 삼켜대었다.
정신없이 혀를 빨던 정한이 윤조의 성기를 그러쥐다 회음부로 느릿하게 손을 옮겨 갔다. 흥건하게 젖은 주름까지 미끄러져 간 손이 기별도 없이 침입하고는 마치 그의 혀처럼 안을 쑤셔대었다. 찰팍거리며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아….”
윤조의 주름에 꽂혀 있던 왼손 엄지가 공간을 내듯 아래로 당겨 벌리며 그대로 성기를 밀고 들어왔다. 고환까지 넣을 기세로 힘껏 허리를 처넣은 정한이 빠르게 성기를 빼고 다시 쑤셔 박았다. 윤조는 정한이 제게 몸을 붙일 때마다 정이 박히는 듯한 충격에 진저리를 쳤다.
“아아!! 아!! 아읏!!!”
늘어진 몸이 바짝 긴장하며 그를 조여댔다. 윤조는 정한의 어깨로 손을 올려 그에게 매달렸다. 그가 밑을 쑤시듯 다시 혀를 밀고 들이닥쳤다. 윤조는 신음을 뱉을 사이도 없이 그를 삼키기 바빴다. 어지간해선 점잖게 있던 침대가 삐걱대며 울었다. 윤조는 제 몸이 튕겨 나갈 것 같아 정한의 어깨와 등을 계속해서 붙잡았다. 자꾸만 미끄러지는 통에 그의 피부를 손톱으로 긁는 꼴이었지만.
“하아. 윤조야, 더, 후… 벌려야지.”
방어적으로 자세를 취한 굳은 몸을 정한이 제 무게로 눌러 벌렸다. 질구를 두드리는 정한의 귀두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윤조는 고개를 쳐들며 소리를 내질렀다.
“아! 앗, 읏!! 사, 사장님!”
그런데도 제 뜻만큼 들어차지 않았던 모양인지 정한이 엉덩이를 그러쥔 손을 마구잡이로 벌리며 더 깊은 속을 내어놓으라고 했다. 윤조는 정한의 성기가 제 극점을 짓누를 때마다 그의 혀를 씹으며 몸을 떨었다.
“기, 깊, 읏… 아윽!”
기어이 질구를 뚫고 들어간 성기에 윤조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의 페로몬이 필요했다. 들썩거리는 아랫배를 느끼며 윤조는 정한을 보았다. 정복하듯 틀어박힌 성기를 거칠게 뽑아낸 정한이 윤조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왜 울고 그래.”
“흐으… 흐….”
“무서워?”
무섭지 않았는데 무서웠다. 노팅도 겪어 보았는데 왜 이런 기분이 들까. 윤조는 가슴을 들썩이며 제 눈물에 입술을 대는 정한에게 고개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의 혀가 느릿하게 살결을 핥으며 눈두덩을 덮고 빨았다.
“예뻐 죽겠네.”
윤조는 정한의 뜨거운 혀가 지나고서야 눈을 떴다. 그새 맺힌 눈물이 또 눈가를 타고 흘렀다. 이번에는 손으로 눈물을 훑어준 정한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마주 대었다. 저를 달래듯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진 입술이 웃음 지었다.
“겁내지 말고, 내가 주는 거 먹어.”
“…….”
“응? 윤조야.”
코끝에 살랑거리는 정한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윤조는 그가 보란 듯이 내미는 유혹을 덥석 집어삼켰다.
“아아…!”
유혹의 대가처럼 더욱 깊이 찔러 들어온 성기에 윤조는 화들짝 놀라면서도 정한의 페로몬을 크게 들이마셨다. 온몸이 녹진녹진하게 녹아 갔다. 더할 수 없이 부푼 그가 질구를 타고 올라 그 안을 쑤셔대었어도 흐물흐물해질 만큼.
“안에… 사장님이, 싸는 거 느껴져요.”
윤조는 정한에게 바짝 안긴 채 그가 제 안에다 싸지르는 정액을 간지럽게 느끼고 있었다. 그의 알파 고환까지 들어찬 내벽이 움찔거리며 조여들었다. 그를 먹고 있으면서도 더 먹고 싶은 마음이었다. 온몸이 그에게 젖어 꼭 자신이 그가 된 듯했다. 몸을 씻어 내어도 당분간 그의 향이 가시지 않을 정도로.
“목이, 왜 이렇게 뜨겁지….”
윤조는 제 목을 꽉 물고 있는 정한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한의 페로몬이 지나치게 진하여 현기증이 났다.
“사장님 왜 말이 없어요…?”
꿈틀거리는 정한의 성기가 느껴졌다. 다 뱉어낸 정액에도 노팅 시간은 그의 피임약이 듣는 시간만큼 길었기에 조금의 틈도 없이 제게 박혀 있어야 했다. 윤조는 정한의 어깨를 손톱으로 콕콕 찍으며 그의 얼굴을 보려 했다. 사랑하는 눈을 보고 싶었다.
“사장… 님.”
고개를 든 그의 입가에 옅은 혈흔이 번져 있었다. 윤조는 무의식적으로 정한의 입술을 혀로 핥고서 물었다.
“피나잖아요.”
“네 피야.”
“네…?”
정한의 말 때문일까. 목이 아까보다 더 뜨거워진 듯했다. 제 질에 꽂혀 꿈틀거리는 그의 성기처럼 박동하는 듯도 했다. 윤조는 제 목덜미로 손을 가져가려다 온몸이 저릿하게 떨리는 느낌에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설마.
“사장님…, 지금 저한테….”
“여차하면 널 가둘지도 몰라.”
“…….”
“목줄 채워서 가두고, 네 밑이 짓무를 때까지 쑤시고 핥고.”
“…….”
“미쳐 날뛸 거야.”
“진짜예요…? 정말 지금, 각인한 거예요?”
“좋아하면 큰일 난다 했지?”
아득해지는 기분에 윤조는 시선을 들어 천장 조각을 봤다. 그의 말대로 큰일이 났다. 각인이라니. 그것도 일방적인 각인이라 하면, 그의 전부를 제게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언젠가 저를 노심초사하게 했던 그의 목숨까지도. 윤조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느끼며 다시 정한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문다는 게, 이 뜻이었어요?”
“어.”
일방적인 각인으로 인한 광증에 괴로울 사람이 산뜻하게 입만 맞추고 몸을 일으켰다. 윤조는 정한과 이어진 밑이 빠질까 서둘러 엉덩이를 들었다. 밀착하여 조인 아래가 빠듯했는지 정한이 미간을 좁히며 한숨처럼 말했다.
“협박이 덜 통했나 봐?”
가늠하듯 윤조의 상태를 살핀 정한이 흘러내린 앞머리를 넘기고 보았다. 윤조는 그가 협박하지 않아도 애초에 그를 광증으로 괴롭게 놔둘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협박과는 달리 그는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이었으니까.
“노팅 끝나기 전에 하지? 얼마 안 남았어.”
느긋함을 가장한 초조한 시선이 기분 좋았다. 윤조는 정한의 팔을 더듬다, 그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나도 사장님 가둬도 돼요?”
“어. 가두고, 원하는 만큼 빨아먹어.”
윤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한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요. 물어줄게요.”
두 팔을 들어 제게 몸을 포갠 정한을 끌어안고, 혀로 자신이 물 자리를 핥았다. 간지러웠는지 배 속의 정한이 꿈틀거렸다. 이를 박아 넣었을 때는 과연 그도 숨죽여 제게 붙들려 있었다. 윤조는 희미한 지배욕을 느끼며 정한의 등을 어루만졌다.
그가 제게 남긴 각인이 뜨겁게 반응했다. 윤조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느끼며 정한의 목덜미에서 물러났다. 길게 늘어지다 끊어진 침이 입술 끝에 맺혔다. 이를 놓치지 않고 정한이 혀로 핥았다.
“내 개가 언제 이렇게 커서 날 물어뜯게 됐을까.”
정한이 농담조로 웃으며 말했다. 윤조는 제 얼굴을 쓰다듬는 정한의 손을 깨물었다. 그와 각인으로 이어진 탓일까, 가슴이 계속해서 두근거렸다. 그건 정한도 마찬가지인지 제 가슴을 매만졌다. 윤조는 다시 두 팔을 내밀었다. 마주한 가슴이 똑같이 뛰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목줄은 언제 사러 가요…?”
정한의 웃음이 온몸을 울렸다. 윤조는 정한과 이마를 마주 대고 저를 고요하게 유혹하는 향을 들이마셨다. 이미 그의 정액으로 가득한 곳이 철퍽거렸다.
“하….”
윤조는 더운 숨을 내쉬며 남은 노팅을 즐기는 정한에게 몸을 맡겼다. 쾌감을 느끼는 그의 흥분이 욱신거리는 목으로 전해졌다. 저와 다름없이 뜨겁게 달아오른 숨이 입술 위로 쏟아졌다. 윤조는 정한의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으며 그가 들어 올린 제 엉덩이를 힘껏 조였다. 그의 신음이 입 속에 쏟아졌다.
“후… 서윤, 조.”
크게 숨을 들썩인 정한이 저를 완전히 안아 들었다. 윤조는 정한의 페로몬에 취해 흐물흐물하게 녹은 몸을 그에게 기댔다. 서로에게 파묻혀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예뻐죽겠어요?”
“어.”
윤조는 제 콧잔등을 베어 문 정한을 밀어낼 힘도 없었다. 그저 늘어진 채 제 얼굴을 빤히 살피는 정한의 시선에 얼굴만 붉혔다.
“왜 자꾸 깨물어요…?”
“맛있을 것 같아서.”
다음 타깃인 듯 그가 귓바퀴를 매만졌다.
“…나 먹고 싶어요?”
“어떻게 알았어?”
“아… 정말이에요?”
“가끔 그럴 때 있어.”
꼭 베어 먹을 것처럼 윤조의 입술을 깨문 정한이 담뿍 젖은 머리칼을 손가락에 걸며 고개를 제게 당겼다. 윤조는 흡입하듯 제 혀를 빨아대는 정한에게 몸이 붙들렸다. 줄 끊어진 인형처럼 그의 품에 안겨 오랫동안 귀염 받았다.
“자꾸 너 달라고 여기가 울어.”
정한이 보란 듯이 턱을 들어 목덜미를 보였다. 윤조는 제 잇자국이 난 정한의 목덜미를 조심스레 더듬었다. 피가 비친 자리가 무섭게 뛰고 있었다. 저와 다름없이.
“…가져가세요, 그럼.”
손 하나 까딱할 힘도 없으면서 윤조는 정한을 허락했다. 그는 사양하지 않고 다시 윤조를 안았다. 윤조는 그의 아래에서 짓눌리며, 또 그가 빨아대는 가슴이 뾰족해지다 못해 짓무를 때까지 안겼다. 온통 축축한 침대 위를 벗어날 수 없었다.
“마셔.”
각인이란 무얼까. 왜 이리도 몸이 식지 않을까. 윤조는 정한이 내어주는 물을 마시고 몸을 뒤척였다. 잠시 물을 가지러 자리를 비운 정한이 서재에서 태블릿도 가져온 모양인지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 윤조가 열심히 숙제해 놓은 것을 살폈다.
“왜 이렇게 점잖아?”
“길게 봐야죠… 평생 살 건데.”
“살다가 질리면 이사해도 돼.”
그럴 일이 있을까. 한땐 제 방에 창 하나 생기는 게 소원이었던 윤조는 이 저택의 수십, 수백 개의 창으로도 이미 벅찬 마음이었다.
“파라솔은 노랑이네?”
“귀엽잖아요.”
정한이 웃으며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윤조는 엎드린 몸을 굴려 정한의 몸 위로 올라갔다. 그의 뛰는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며, 미뤄 뒀던 질문을 떠올렸다. 슬쩍 눈치를 보는 윤조를 알아챈 정한이 뺨을 간질였다. 말을 해도 괜찮다는 듯이.
“어떠세요? …회장님.”
“평범해 보였어.”
“평범… 이요?”
“어. 이빨 빠진 호랑이 같다고 해야 하나.”
윤조에게 있어 정한의 아버지, 권 회장이라고 하면 벼락 같은 소리를 내는 사람이었기에 평범하다느니, 이빨 빠진 호랑이 같다느니, 하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조금 안쓰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얼까. 배가 불러 인심이 넉넉해진 것일까. 윤조는 저도 제 마음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정한의 유일한 가족이라 마냥 밉게만 볼 수 없는 건지도 모른다.
“둘을 아시기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그래도… 편해 보이긴 했어.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보다.”
“다행이네요.”
윤조의 머리칼을 손으로 빗겨주던 정한이 생각난 듯 물었다.
“결혼식 할래?”
윤조는 고개를 들어 정한을 보았다. 생각지도 않았던 질문에 윤조는 정한의 가슴에 턱을 대고 그의 의중을 살피려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봐야 알 수 없겠지만.
“하고 싶으면 하고.”
“사장님은 하고 싶은 마음 없죠?”
“어.”
“근데 내가 하고 싶으면 할 거죠?”
정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조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턱시도 입은 그를 보고 싶긴 했지만. 결혼식이라고 하니, 어딘가 가슴이 답답해졌다. 제가 없는 그의 결혼식을 많이 상상한 탓일까.
“천천히 생각해 봐.”
천천히 생각할 것도 없었다. 윤조는 고개를 내저으며 싫다고 답했다.
“그래. 알았어. 혹시 마음 바뀌면 말해.”
“네.”
미련 없는 윤조의 대답에 정한이 웃었다. 윤조는 제 입술을 더듬는 손을 이로 잘근거리다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정한과 나누는 미래 이야기에 제 앞일도 빠질 수 없었다.
“사장님.”
윤조의 부름에 정한이 어디 얘기해 보라는 듯 뺨을 가만히 쓸어주었다. 윤조는 정한의 손에 기대어 제게는 어렵게만 여겨지는 부탁을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전에 황 집사님 오셨을 때요.”
순식간에 눈매가 날카로워지는 정한을 보고 있자니 이야기의 시작을 잘못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때 절실히 깨달은 것이니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생각했어요. 잘나고 싶다고.”
“잘나고, 싶다?”
“네.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속상했거든요. 다들 어찌나 대단한지…. 아니, 일단 사장님부터가, 나한테 너무 대단해요.”
“윤조야.”
“그래도 난 어리잖아요. 시간이 많다구요.”
정한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10년만 기다려주세요. 그동안 사장님은 전력 질주 말고 걷기만 해줘요. 내가 꼭, 사장님 옆에서 같이 달리게 될 테니까.”
“10년 뒤에 말이지?”
“네. 누가 그러던데요. 10년을 노력하면 된다고.”
정한은 제 말을 비웃거나 의심하지 않았다. 그저 그러라고만 해주었다. 한풀 꺾인 긴장에 윤조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럼 뭐부터 하고 싶은데?”
“음… 학교, 가고 싶어요.”
어쩐지 정한은 예상한 듯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알아봐 볼게.”
“저 같은 나이에도 다닐 수 있을까요? 저… 학교, 다닌 적이 없어요.”
“갈 수 있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다니게 해줄게.”
정한은 정말 그렇게 해줄 것 같았다. 윤조는 제 뺨을 계속해서 쓰다듬는 정한의 손을 붙잡았다.
“하자고?”
“네…?”
“하자는 거네.”
“아, 그….”
“안 그래도 내일 출근이라 아쉽거든.”
“아쉽….”
채 말을 다 잇기도 전에 정한의 중지가 밑을 가르고 들어왔다. 그가 손끝을 깔짝거리자 찰박찰박 물소리가 났다. 윤조의 붉어진 귓바퀴에 입을 맞추며 정한이 웃었다. 손가락이 하나, 둘, 늘어났다. 윤조는 정한의 가슴 위에 밭은 숨을 내쉬었다.
* * *
향긋한 차 향이 코를 찔렀다. 윤조는 고개를 돌려 향이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부신 눈을 잔뜩 찌푸리고 올려다본 자리에 정한이 있었다. 잠결인 저와 달리 목 끝까지 차려입은 정한은 그날을 떠올리게 했다.
‘기차 시간 다 됐다는 말 못 들었나?’
또렷하게 방을 울리던 목소리. 어찌나 냉담하던지 지금은 낯설기까지 했다. 잠에서 깬 윤조를 발견한 정한이 그때와는 전혀 다른 온도로 말을 걸어왔다.
“깼어?”
“네….”
“생각보다 열은 안 나더라. 밤새 해서 그런가.”
각인 후에 열이 날 거라며 정한이 걱정했다. 그렇게 말하는 정한도 각인통이 없는지 홀가분해 보였다.
“사장님은요?”
“나도 괜찮아.”
“아… 다행이다. 근데… 어디 가세요?”
혹은 어디를 다녀왔다든가.
윤조는 이불을 만 채 정한과 가까운 침대 모서리까지 굴러갔다. 그 모습을 보던 정한이 찻잔을 내리며 웃었다.
그에게 만져지고 싶은 마음에 윤조는 상체를 감싼 이불을 내리고 보았다. 정한이 찻잔을 들어 다시 차를 음미했다. 윤조는 제 목과 가슴에 상흔처럼 흩어진 자국을 눈으로 훑는 정한을 응시했다. 정말 이쯤이면 올 것도 같은데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차만 마셨다.
“치….”
기어코 일어나 앉은 윤조는 제 엉망인 머리를 쓸어 넘기고 길게 하품했다. 온몸이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지만 밤새 걷기만 해서 아픈 것과 달리 행복하기만 한 고통이었다.
“왜 보고만 있어요?”
“출근해야 해서.”
“…아, 맞다. 근데, 그거랑… 이건 좀 다른데.”
“출근해야 하니까 여기 있는 거야.”
정한의 말뜻을 알아들은 윤조는 자신이 더 아쉬워하며 이불을 끌어안았다. 찻잔을 다 비운 정한이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아쉬운 듯 혀를 차는 게, 곧 그가 저택을 나설 시간인 모양이었다.
“윤조야.”
“네.”
“이거 빈칸 채워 놓을래?”
정한이 테이블에 서류 봉투를 올려 두며 말했다. 윤조는 목을 길게 빼고 이곳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테이블 위를 넌지시 보았다.
“그게 뭔데요?”
이불을 말고 정한에게 총총히 다가갔다. 경계할 줄 알았던 정한은 제 다리 위로 훌쩍 걸터앉는 윤조를 아무런 저항 없이 팔로 감싸 안아주었다. 윤조는 제 머리칼을 귀에 걸어주는 정한의 손길을 받으며 서류 봉투를 집어 들었다.
“다시 계약하자고 했지?”
“이거 계약이에요?”
“어. 종신 계약.”
“종신? 제가 종이고 사장님이 신이에요?”
슬며시 눈을 찌푸린 정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 반대면 반대지.”
“그럼 내가 신?”
정한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윤조 네 말로 하자면 평생 계약.”
“아아… 난 또.”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윤조는 뒤늦게 정한의 뜻을 이해하고 서둘러 봉투를 열었다.
[혼인 신고서]
이미 절반이 빼곡하게 채워진 서류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입이 마르는 기분에 티 포트의 차를 빈 잔에 따라 꿀꺽꿀꺽 마셨다. 조금 진정한 뒤에 정한을 보았다.
“이거….”
“어. 맞아.”
정한이 윤조의 입술에 맺힌 차를 짧게 머금었다. 윤조는 재차 입을 맞추는 정한의 입술이 간지러워 웃었다.
“그럼 사장님이랑 저, 부부가 되는 거예요? 나… 가족이 생기는 거예요?”
“어.”
윤조는 멍하니 서류 속에 적힌 정한의 이름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남편이자 가족이 된 이름. 제 든든한 울타리.
“한 일주일 걸릴 거야.”
“어서 일주일 지났음 좋겠어요.”
저 역시 그렇다고 대답한 정한이 시간을 확인했다. 윤조도 그의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시간이 촉박했다. 아쉬움에 얼굴을 찌푸리는 윤조의 귓불에 정한이 입을 맞추었다.
“가야겠다.”
허리를 감싼 온기가 물러났다. 윤조는 이불을 그러쥔 채 정한을 올려다보았다. 아쉬움이 뚝뚝 묻어났는지 정한이 제 표정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퇴근 시간 맞춰 병원에 올래? 맛있는 거 사줄게.”
윤조는 크게 고개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아 참, 오늘 복권 당첨금 수령해야 할 거야.”
“어디로 가야 해요?”
“집에 있으면 올 거야.”
“직접 찾아와요?”
“어. 변 팀장한테 말해 놓을 테니까, 벨 울리면 문 열어 줘.”
“네.”
직접 찾아와서 주는 당첨금이라니. 복권 회사의 서비스가 상당하다고 생각하며 윤조는 바닥에 뒹구는 잠옷을 대충 걸쳐 입고 정한의 출근길을 배웅했다.
“올 때 전화해.”
“네. 다녀오세요.”
바쁘게 사라진 정한의 차를 끝까지 지켜보다 홀로 남겨진 윤조는 긴 하품을 하고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다.
조금 더 자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몸을 움직이기로 했다. 욕실에 들어선 윤조는 수전을 켜고 쏟아지는 물 아래에 섰다. 제 온몸을 감싸고 있던 정한의 향이 그의 부재처럼 아쉽게도 씻겨 나갔다.
*
주차장을 울리는 구두 소리에 정한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평범한 걸음이라면 무시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저를 덮칠 듯이 달려오는 소리라면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에이! 걸렸네.”
조금 전까지 자신이 있던 자리로 착지하듯 선 승주가 아쉬운 얼굴로 손을 털었다. 정한은 맞지도 않은 등이 얼얼한 기분으로 승주를 보았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오자마자 만난 것이 한승주라니.
정한은 속으로 혀를 차며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이어 승주의 분신처럼 나타난 무헌까지 합세해 정한은 그야말로 시달렸다. 칼라 너머에 숨겨 온 윤조의 잇자국을 들킨 탓이다.
“권 선생이 우리 스물한 살 골수까지 빼먹었네.”
정말 빼먹었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나 먹고 싶어요?’
조심스럽게 묻던 윤조의 말이 생각나 정한은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웃네, 웃어.”
“빼먹었네, 빼먹었어.”
실컷 놀려 먹으라고 상대를 하지 않았더니 둘은 곧 떨어져 나갔다. 정한은 조용한 제 방에 이르러 일을 시작하기 전, 개인적인 용무를 먼저 끝내기로 했다.
-어어? 우리 정한이가 웬일이야?
여긴 또 언제 우리가 됐을까.
정한은 데스크에 몸을 기대며 뽀얗게 일어난 먼지를 비추는 창가로 시선을 두었다.
“윤조 학교 좀 보낼까 하는데.”
-윤… 조? 아, 서 집사?
“어. 고등 과정 밟을 수 있게, 좀 알아봐줘.”
-아… 근데, 걔 학교 안 나왔잖아.
“그게 무슨 상관인데.”
-아, 그럼, 그럼. 아무 상관 없지! 없으면 만들면 그만이니까. 하하, 음… 근데 일정한 자격은 요구할 거야. 그래도 괜찮겠어?
“오히려 있어야 해. 있는 데로 알아봐.”
-그래…? 아니, 왜?
“멋모르고 그냥 들어가면 힘들 거라서.”
-아… 진지한가 보네? 진짜 공부할 모양이야? 근데 걔 학교 보내면… 그….
뒤늦게 상황을 판단한 한석이 연신 헛기침을 하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새로운 집사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필요 없어. 학교나 알아봐줘. 되도록 빨리.”
-어, 알았어. 정한아. 연락 줘서 고맙다.
“아, 그리고….”
-그리고?
“학생 정원에 알파 비율이 낮았으면 좋겠는데.”
-어, 어. 아무렴….
멋쩍게 웃는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정한은 하루를 시작했다. 각인통으로 괴로웠던 때가 언제였냐는 듯 거짓말처럼 말끔한 기분이었다.
*
딩동.
응접실에서 혼인 신고서를 작성하고 있을 때였다. 저택을 울리는 벨 소리에 윤조는 퍼뜩 고개를 들고 펜을 놓았다.
당첨금이 제 발로 찾아왔다!
윤조는 기쁜 얼굴로 달려가 현관문을 열었다.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당신의 당첨을 축하합니다!”
집사처럼 차려입은 복권 회사 직원들이 마라카스를 흔들며 노래를 불렀다. 윤조는 놀라서 가만히 서 있다가 저도 같이 양 주먹을 흔들었다. 노래가 끝나자 머리 위로 꽃가루가 뿌려졌다.
“서윤조 씨.”
“네! 제가 서윤조예요.”
“수령 확인 사인해주시겠습니까.”
조개처럼 입을 벌린 돈 가방 안에서 직원이 서류를 꺼내 내밀었다. 윤조는 자잘한 글씨를 대충 눈으로 읽은 뒤, 혼인 신고서에 사인했을 때처럼 제 이름을 또박또박 적었다. 서명이 끝나자 직원이 윤조에게 돈 가방과 당첨 확인증을 건네주었다.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도 하시는 모든 일에 행운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순식간에 두 팔 가득 묵직한 돈 가방과 당첨 확인증을 껴안게 된 윤조는 돌아가려는 직원들을 급하게 불러 세웠다.
“이거 가져가셔야죠.”
주머니에 고이 챙겨 놓은 당첨 복권을 내밀자 직원이 놀란 얼굴을 하며 서둘러 복권을 받아 갔다. 요란한 등장과 달리 복권 회사 직원들은 조용하고 또 빠르게 사라졌다.
신난 걸음으로 저택에 들어가려던 윤조는 바닥의 꽃가루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돈 가방과 당첨 확인증을 한쪽에 내려놓고 빗자루를 가져와 현관 입구에 흩뿌려진 꽃가루를 쓸어 담았다. 저 멀리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 보안 요원들이 보였다. 윤조는 기쁨을 눌러 담은 웃음을 지으며 신나게 비질했다.
-액자가 필요하다고?
저택으로 돌아와 정한에게 곧장 전화를 걸었다. 그는 바쁘지 않은지 흔쾌히 통화를 받아주었다.
“네. 전 액자만 있으면 될 것 같아요. 당첨금은… 사장님 하실래요? 10퍼센트 말고 100퍼센트로 하세요.”
참 이상하게도 묵직한 당첨금보다 당첨 확인증이 더 마음에 들었다. ‘내’가 되는 목표가 당첨금보다도 더 컸기 때문일까. 윤조는 테이블에 둔 까만 돈 가방을 슬쩍 밀어내고 당첨 확인증을 손으로 조심스레 쓸었다. 금박으로 새겨진 당첨이라는 글자가 매우 흡족했다. 이 금박이 빛바래지 않게 액자에 넣어 둘 생각이었다.
-돈은 네 통장에 넣어줄게.
이 정도의 푼돈은 흥미도 없어 보이는 정한의 말에 윤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묵직한 가방이 통장의 형태가 되어 손에 있다면 그 또한 당첨 확인증처럼 흡족해 보일지도 몰랐다.
-혼인 신고서는 다 썼어?
“네.”
-그럼 이제 뭐 할 거야?
글쎄 뭘 할까.
마침 밀어 둔 돈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이걸로 그에게 뭔가 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 없다 여긴 것의 쓰임새가 이렇게 빨리 떠오를 줄이야.
“음… 책 읽을까 해요.”
얄팍한 거짓말에 속은 정한이 몇 권의 책을 추천해주었다. 윤조는 그 목록들을 잘 기억해 두기로 했다. 언젠가 반드시 읽을 생각이었다. 곧 그에게 일이 생겨 끊긴 전화를 아쉽게 보다가 초소로 전화를 걸었다. 보안 팀장이 잠깐의 뜸도 없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
-네, 집사님. 무슨 일이십니까.
“저, 혹시… 황 집사님…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
-예? 누구요?
놀랄 만했다. 윤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려운 이름을 다시 입에 올렸다.
“…황 집사님이요.”
-물론 알려 드릴 수 있죠. 한데….
“사장님께는 비밀이에요.”
-네, 알겠습니다.
어렵지 않게 황 집사의 연락처를 알아낸 윤조는 수화기를 든 채 수십 번 고민하고서야 번호를 누를 수 있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연락인지 황 집사는 평소답지 않게 말을 더듬어 댔다.
“제 주변에서 자문할 수 있는 분이 황 집사님이 유일해서요.”
-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요.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제가 그리로 가겠습니다. 마침 제 위치가 좋네요. 그래도 한 시간은 걸릴 예정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괜찮아요.”
꼭 한 시간이 지난 뒤 황 집사가 저택을 찾아왔다. 손에는 눈에 익은 태블릿을 가지고.
“그간 잘 계셨습니까.”
“네. 황 집사님도 잘 계셨어요?”
“예, 덕분에….”
메라크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평소와 다르지 않게 이성적이던 사람이 지금은 전에 없이 쩔쩔매는지라 윤조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은 황 집사가 민망하게 웃었다. 윤조는 평소와 다름없이 황 집사를 응접실 소파로 안내했다.
“도련님은 모르시는 일입니까?”
“네.”
“혹, 도련님도 준비하시지는 않으셨을까요?”
“그럼 두 개 끼고 다니죠, 뭐.”
태평한 윤조의 대답에 황 집사가 짧게 웃었다. 웃음이 끝난 뒤 찾아온 침묵에 윤조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 집사가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제가 부탁드린 건데.”
“그런 말씀 마세요. 저로서는 불러주신 것만으로도….”
말을 잇지 못하고 감정을 추스르는 황 집사를 보며 윤조는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기분이 이상해졌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집사님.”
“네…. 저기, 근데… 이런 건 얼마나 할까요?”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든 황 집사가 윤조가 내민 화면을 보고는 입력이라도 된 듯 곧장 대답했다. 역시 사람을 잘 골랐다는 생각을 하며 윤조는 서슴없이 많은 디자인의 반지를 요목조목 따져 보았다.
“이런 걸 좋아하실까요?”
“집사님 마음에 드시는 게 곧 도련님 마음에도 드는 것일 테지요. 실착을 원하시면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껴 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직접 껴보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아 윤조는 황 집사와 함께 저택을 나섰다. 그런데 채 대문을 벗어나기도 전에 보안 팀장이 황 집사와의 동행을 경계하며 목적지를 물어대는지라 윤조는 꽤 곤란해졌다.
“아… 반지를, 보러 가신다고요?”
“네. 다 본 뒤에 사장님 만나서 저녁 먹고 올게요.”
팀장이 황 집사를 힐긋거리며 윤조의 눈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부디 끌려가는 것이면 지금이라도 말해 달라는 듯. 윤조는 고개를 내저으며 팀장에게 태블릿으로 미리 봐 두었던 반지를 내밀어 보였다. 이러다 동네방네 소문이 다 날 것 같았다.
“이게 괜찮네요.”
“그렇죠? 안 그래도 이거 먼저 볼 생각이에요.”
이쯤이면 믿어주겠지, 하고 이만 가려는데 하나둘 모여든 보안 요원들이 서로 의견을 내었다. 황 집사가 들으라는 듯 한숨을 내쉬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거수로 투표했을지도 몰랐다.
“이만 가겠습니다. 거기서도 한나절 걸릴 것 같으니 말이지요.”
황 집사가 팀장에게 더는 말을 걸지 말라는 듯 단호히 말하고서 앞좌석의 문을 열었다. 윤조는 냉큼 그 자리에 올라탔다. 그때까지만 해도 윤조는 제 비밀스러운 계획이 순조롭다고 믿었다.
“황 집사님. 해가 언제 없어졌죠…?”
실착을 하자 더 고르기가 어려워 헤매었더니 어느새 정한의 퇴근 시간이 지나 있었다. 제게 휩쓸려서 끌려다닌 황 집사도 아차 하는 얼굴로 걸려오는 전화를 보았다. 액정에 뜬 도련님이라는 세 글자가 이렇게 두렵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제가, 죄송한 게 많아 사과드린 차에 시간이 늦어졌다고 할까요?”
황 집사가 급히 변명을 만들어 내며 물었다. 그사이에도 전화는 계속해서 울었다. 윤조는 제 계획이 처참히 망가졌음을 직감했다.
-어딥니까.
뾰족한 수를 내지 못한 채 황 집사가 전화를 받았다. 윤조는 수화기 너머로 서늘하게 깔리는 정한의 목소리에 어깨를 움찔했다. 이미 저택에서는 자신이 황 집사에게 끌려간 것으로 단정이 난 모양이었다.
“저, 저 바꿔주세요.”
황 집사가 미안한 얼굴로 전화를 건네주었다. 윤조는 정한과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이실직고하는 수밖에 없었다. 곧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온 정한이 한껏 예민해진 얼굴로 제 손을 잡아당겼을 때는 황 집사에게도 미안해졌다.
“죄송해요…. 보다 보니 예쁜 게 많아서…. 집사님이 참 많이 아시더라구요…. 나온 김에 다 보고 싶은 마음에….”
황 집사를 돌려보내고 정한이 예약해 놓은 식당으로 가는 중이었다. 윤조는 죄인처럼 중얼거리며 정한을 힐긋거렸다. 운전에 열중한 정한은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다. 대신 제 목덜미가 욱신거렸다. 뒤늦게 정한이 느껴지는 듯했다.
“마음에 드는 건 있었어?”
제 눈치를 읽은 듯한 온화한 목소리였다. 윤조는 급히 안도하고서, 정한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있긴 한데… 너무 많아요. 열 손가락에 다 끼워도 될 것 같아요.”
가만히 웃음 짓던 정한이 글로브 박스를 열어 보였다. 그러자 그 안에 새하얀 상자와 총이 나타났다.
이건 무슨 뜻일까.
매치하기 어려운 조합에 잠시 당황한 윤조는 곧 총의 정위치를 생각해내고 상부에 총을 고정했다. 이제 남은 것은 상자. 윤조는 서슴없이 상자를 꺼내 열어 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주려고 했는데. 선수 치려고 했어?”
“선수라뇨. 나도 주고 싶어서 그랬는데.”
상자 속 반지를 꺼내 오늘 하루 수도 없이 끼워 본 자리에 넣어 보았다. 해가 지는 것도 모르고 골랐던 그 어떤 반지보다도 마음에 들었다. 만약 자신이 골랐다면 그도 이렇게 느꼈을까. 윤조는 손을 들어 정한에게 보란 듯이 흔들어 보였다. 복권 회사 직원들의 마라카스처럼.
“어때요?”
“예쁘네.”
“근데 사장님은요?”
어찌나 눈썰미가 없는지 이미 반지를 끼고 있는 손을 뒤늦게 발견했다. 핸들을 돌리는 그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이 반짝거렸다. 원래 끼고 태어난 것처럼 그에게 아주 잘 어울렸다.
“사장님도 예쁘네요.”
“그래?”
“네.”
가만 보고 있자니 분한 마음이 들었다. 어째 제 계획은 이렇게 허무하게 어그러지는데, 그는 왜 어그러진 계획도 다 성공시킬까. 왜 이토록 쉽게 저를 놀라게 할까. 윤조는 주먹을 꽉 쥐며 어서 학교를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10년만 지나 봐요. 내가 다 선수 칠 거니까.”
보란 듯이 얘기했지만, 배를 울리는 허기진 소리에 우습기만 했다. 윤조는 꼬르륵 우는 제 배를 붙잡고서 정한을 보았다. 그가 웃고 있었다. 보란 듯이.
“금방이야. 조금만 참아.”
“…네.”
황 집사님도 배고프겠다.
윤조는 반짝거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다음에 밥이라도 사야겠다 생각했다.
“착해빠져서는.”
정한이 꼭 제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윤조는 놀란 눈을 뜨고 정한을 보았다. 그가 얼빠진 윤조의 콧잔등을 간질이고 곧 차를 세웠다.
“그래도 잘 써먹을 줄을 아니 다행이네.”
“써먹다뇨….”
“기쁘게 써먹혀줄 거니까 필요하면 연락하는 건 괜찮아. 다만, 황 집사가 너한테 저자세라고 해서 마음 쓰지는 마. 알았어?”
“네…. 근데, 써먹는 거 아니에요. 도움을 청한 거라구요.”
“그래, 도움은 청해도 돼.”
윤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전띠를 매만졌다.
“설마 아버지한테도 그럴 생각인 건 아니지?”
“권 회장님이요? 제가요? 아휴, 그건….”
글쎄. 살다 보면 도움을 청할 일이 있지 않을까.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답 없는 윤조를 불안하게 여긴 정한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날 대동해야 할 거야.”
“…그럴게요.”
“안 한다는 말은 안 하네? 사람 불안하게?”
“미리 연락할게요.”
“안 되겠다. 휴대폰 사자.”
“네?”
“마침 보이네.”
“저기, 밥은요? 예약했다면서요.”
“이거 할 시간은 돼. 어차피 다 빌렸으니까.”
그 말에 안심하며 윤조는 정한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 홀린 듯이 이끌려 간 곳에서 그와 같은 기종의 오로지 그의 번호만 저장된 휴대폰을 선물 받았다.
“한 명쯤은 넣어도 되잖아요….”
“박명우?”
“어떻게 아셨어요?”
뻔하다는 얼굴로 정한이 허락을 표했다. 윤조는 반짝반짝한 휴대폰을 이리저리 조명에 비춰 보았다.
“근데 이거 사진도 찍을 수 있어요?”
“어. 찍어 볼래?”
정한의 도움으로 윤조는 여러 장의 사진을 찍어 보았다. 신기해서 배가 고픈 것도 잠시 잊었다.
“사장님 찍을래요.”
“나?”
“네. 퇴근까지 사장님 엄청 보고 싶단 말이에요.”
“뭐…, 어렵지 않지.”
윤조는 정말 어렵지 않게 증명사진 같은 정한의 사진을 얻었다. 좀 웃지,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앞으로 더 많은 얼굴을 얻을 수 있으리라.
“이제 밥 먹으러 가요. 나 많이 먹어도 돼요? …점심을 안 먹었거든요.”
“그래. 점심 거까지 다 먹어.”
정한이 윤조의 머리를 흩트리며 웃었다. 아, 이 얼굴을 사진에 담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윤조는 아쉬운 마음에 정한의 웃는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보았다.
“왜 그렇게 봐? 밥 말고 나 먹고 싶어?”
“뭐…, 그건 디저트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정한이 차를 출발시켰다. 반짝이는 도심을 가르는 두 사람의 얼굴에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 * *
서로의 남편이 된 정한과 윤조의 겨울은 뒤늦게 월동 준비를 하는 다람쥐처럼 바빴다. 그간 윤조는 정한을 따라 새롭게 살게 될 집을 자주 구경 갔는데, 조금씩 완성되어 가는 집을 볼 때마다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봄이 되면 들어갈 집이었기에, 집이 완성된다는 건 곧 제 입학시험이 코앞에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정한이 알아봐준 학교는 주로 정한의 병원과 가까운 곳에 분포해 있었다. 윤조는 정한이 건네준 여러 학교 자료에서 다른 어떤 정보보다, 교복 생김새부터 먼저 살폈다. 개중 언젠가 정한의 병원 앞에서 부딪친 학생들이 입고 있던 교복을 발견했다.
‘여기가 마음에 들어?’
‘네.’
‘딴 덴 안 봐도 돼?’
‘전 여기가 좋아요.’
‘그래. 여기로 하자.’
오로지 교복의 모양과 넥타이에 홀려서 학교를 골랐는데, 꽤 성적이 좋은 학교였는지 얼핏 봐도 입학 기준이 높아 살짝 겁을 먹은 상태였다. 윤조는 이렇다 할 교육 과정을 거치지 못했기에 학교에서 지정해준 테스트에 일정 점수를 얻어야 했다. 기초는 혼자서 다질 만했는데 조금이라도 심화가 될라치면 헤매는지라 정한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연인이자 남편으로서의 정한은 참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된 정한은 어찌나 혹독한지 윤조는 때때로 눈물이 찔끔 났다. 하루는 그의 말이 너무 매정하게 느껴져 이젠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냐고 물었다가 더 크게 혼이 났다. 그때 뺀 눈물 콧물이 13구역에 흐르는 모든 강과 맞먹었을 테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저택은 봄의 목전에 이르러 있었다. 두 사람이 이 저택에 머물게 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새집의 완공일과 시험일도 물론.
4월 입학을 앞두고, 3월에 있을 시험에 매진하던 윤조는 요즘 매일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다. 기필코 한 번에 들어가야 했다. 고문과도 같았던 지난겨울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사장님….”
최근 정한은 혼인 신고까지 한 마당에 아직도 자신을 사장님이라 부르는 윤조를 ‘길들이는 중’이었다. 윤조는 사장님이라는 이름이 익숙하다 못해 입에 붙은 터라, 도통 호칭을 고치지 못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그가 일부러 저를 가리켜 ‘여보’라든지, ‘자기’라고 지칭할 때도 알아듣지 못했다. ‘윤조’라는 제 이름밖에 모르는 개처럼.
한번은 화가 난 정한이 제게 일부러 ‘서 집사’라고 지칭했는데, 이때만큼은 저는 이제 집사가 아니라고 기민하게 반응했다가 된통 혼이 났다. 집사는 아니면서 왜 자신은 사장으로 만드냐고 말이다.
맞는 말이었다. 정한은 애초에 맞는 말밖에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제 슬슬 그를 지칭하는 말을 정해야 할 것 같은데, ‘사장님’만큼 그에게 어울리는 것을 찾지 못했다.
“사장… 님….”
정한은 저를 부르는 소리를 들어 놓고도 반응하지 않았다. 윤조는 입 속의 혀를 이리저리 굴리며 그를 부를 마땅한 말을 탐색했다. 어느 하나 사장님만큼 마음에 드는 게 없으니 다 불러보는 게 좋을 듯했다.
“여보, 자기….”
그제야 눈을 들어 본 정한이 용건을 말하라는 듯 두 손을 깍지 끼고 보았다. 윤조는 정한의 긴 손가락이 서로 교차한 모양을 보다, 그의 반지에 시선을 두었다. 조금 한심한 말을 해야 해서 용기가 필요했다.
“저… 1학년부터 하면 안 될까요…?”
말이 끝나자마자 정한이 손을 풀고서 관자놀이를 괴었다. 왼쪽 눈이 그의 손에 당겨져 뾰족하게 올라갔다. 윤조는 혼나는 학생처럼 테이블 아래로 두 손을 내리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고작 고등 과정에 꼬박 3년을 쓰겠다고? 대학도 가고 싶다며. 거기서는 6년을 써야 해.”
고작 고등 과정….
윤조는 정한의 말을 중얼거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에게는 고작인 것들이 제게는 큰 산과 다르지 않았다. 차라리 늑대를 만나는 게 낫지.
“그럼 거의 10년이고…, 딱 됐네, 뭐….”
“아, 의사 시험 한 번에 합격할 자신이 있다?”
“…1년 있잖아요. 한 번쯤 떨어져도 괜찮아요.”
“3학년도 포기하는 사람이, 그게 가능할까?”
너무해.
괜히 그와 같은 길을 걷겠다고 다짐한 걸까. 윤조는 테이블에 이마를 대고서 앓는 소리를 내었다. 제 무덤을 판 듯했다. 그렇다고 윤조는 자신이 판 땅에 몸을 누이고 그 위에 흙을 덮을 생각은 없었다. 흙을 채우고 단단한 지반을 만들면 만들었지. 묻히지 않을 것이다.
“그럼 2학년.”
“이왕 하는 거 3학년 해.”
“평균 95점은 좀….”
“하나씩 틀리면 되네 뭐.”
“…너무해.”
기어코 나간 말에 정한이 웃었다. 그렇다고 2학년으로 깎아주지는 않았다.
“할 수 있어.”
“떨어지면 슬플 거예요.”
“할 수 있다고 했어, 내가. 나 믿지?”
“믿어요. 근데….”
내가 나를 못 믿겠다구요….
윤조는 입술을 깨물고 정한을 보았다. 정한이 잠시 고민하더니 너덜너덜한 스케줄 표를 들어 보였다. 수정되고 또 더해지고 반복한 스케줄 표에는 겨우내 빼곡한 제 공부 일정이 쓰여 있었다.
“이것 봐. 네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거기다 이미 3학년으로 신청해서 넣었다고.”
“…바꿀 수 없냐는 거예요. 제 말은.”
정한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스케줄 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래. 그렇게 네가 부담되면, 알아볼게.”
“정말요?”
“어. 신경 쓰지 말고 공부해.”
“…….”
“왜 그래? 설마 중등 과정의 1학년을 뜻한 건 아니겠지?”
“아니. 저… 청개구린가 봐요.”
정한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썹 한쪽을 세우고 보았다.
“막상 사장… 아니, 여보 자기가 그러라고 하니까…. 학년이 아쉬운 건 뭘까요?”
정한이 스케줄 표를 들어 다시 윤조를 향해 보여주었다. 군데군데 얼룩처럼 남은 것은 커피와 코피 자국이었다.
“아쉽지.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메라크에서 도망칠 때만큼 열심히 한 건 이번 공부가 처음이었어요.”
“그래. 그러니 난 네가 3학년이 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흔들리고 지쳤던 마음이 단단해진 기분이 들었다. 윤조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계획대로 하겠다고 했다. 정한이 그 새를 놓칠세라 책을 펼쳐 보였다. 당근 다음에 바로 채찍이라니. 한숨을 내쉬면서도 윤조는 흔쾌히 정한이 건네는 채찍을 받아 들었다.
* * *
출근과 동시에 마주하는 얼굴이 썩 반갑지 않아 정한은 얼굴을 찌푸렸다. 멋대로 제 방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경우는 무언가 싶어 문을 연 채 나가라고 손짓하니 오히려 손사래를 쳤다.
“뭔데. 아침부터.”
“보고 싶어서 왔지.”
호로록.
요란한 소리를 내며 커피를 들이켠 무헌이 덧붙이듯 말했다.
“요즘 바쁘다며?”
“여기 안 바쁜 사람도 있나?”
“유난하게 바쁜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정한은 넥타이를 슬쩍 끌어 내리며 소파에 걸터앉았다. 이 둘을 내보내려면 어쩔 수 없이 상대해야 했기에 그들이 저를 물어뜯길 기다렸다. 그런데 둘 다 커피만 마실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왜 바쁜지 모르는 모양이네.”
“애석하게도, 그렇게 됐다.”
승주가 아깝다는 듯 혀를 차며 등을 기댔다. 그러고는 저 보란 듯이 방을 둘러보았다. 정한은 승주의 시선을 따라 제 방을 살폈다. 삭막하기 그지없는 곳에 윤조의 웃음꽃이 여럿 피어 있는 것 말고는 딱히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 승주는 꼼꼼하게도 보았다.
“그새 또 두 개가 늘었네?”
그걸 외워 두고 있는 게 조금 끈질기다고 생각하며 오늘 가져온 하나를 떠올렸다. 휴대폰을 장만한 뒤로 사진 찍는 것에 재미를 들인 윤조가 결과물을 족족 액자로 만들어주는지라, 저로서는 거추장스러움을 감수하고서 둔 것이었다. 물론 정한은 윤조의 정성을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액자에 갇힌 얼굴을 자주 들여다보고 수시로 먼지를 닦았다. 윤조가 제 당첨 확인증 액자를 들여다보는 빈도만큼이나.
“그나저나, 집은 어떻게 됐어? 오면서 보니까 거의 완성된 것 같던데.”
“아니. 멀었어. 다음 달은 돼야 할 거야.”
“그래? 날도 좋은 봄날이네? 딱 좋아.”
“오려고?”
“섭섭하게 식도 안 했는데, 집들이라도 해야지. 안 그래?”
부르지 않으면 쳐들어올 것이 분명했기에 각오는 하고 있었던 일이다. 그래도 선뜻 허락하고 싶지 않아 침묵하고 있었다.
“야아… 좀 가자. 엄청 좋아 보이던데. 어?”
“허튼소리 안 하면.”
“허튼소리?”
“스물한 살이니 뭐니 하는 거.”
“아아. 그거? 그럼, 그럼. 안 해 이제. 하도 해서 재미없어.”
틀어막은 입이 머지않아 윤조가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게 된다는 걸 알면 또 놀려댈 테지만, 하나라도 막은 게 어디냐는 생각을 했다.
“용건 끝났으면 이만 가지? 둘이 되게 한가하네?”
“간다, 가!”
꼬리 긴 두 사람이 커피 향을 남기고 돌아갔다. 정한은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켰다. 공기가 조금 서늘해진 것을 확인한 뒤에, 오늘 아침 출근길에 윤조에게 받은 액자를 가져와 책장 상단에 두었다. 최근 긴 머리를 잘라 시원하게 목덜미를 드러낸 윤조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턱을 들고 있는 사진이었다.
정한은 액자 유리 위로 윤조의 갈색 머리칼을 매만지다, 바람이 불어 들어오는 창으로 시선을 던졌다. 코끝이 간지러운 봄바람일 뿐인데 왜 윤조의 목소리가 떠오르는 걸까. 여보 자기 하며 부끄러워하는 얼굴도 생각났다. 새빨간 귀 끝도. 눈 부신 바깥을 보며 정한은 서둘러 이 시간이 지나길 바랐다. 밤새 끌어안고 잔 두 손 안의 체온이 벌써 그리웠다.
*
시험 전까지는 금욕할 작정이었는데, 어젯밤 그간 쌓인 스트레스로 끙끙 앓았더니 정한이 안아주었다. 윤조는 오로지 정한의 손에 자신을 맡겼다. 온몸이 나른해질 만큼 몸이 풀린 뒤에야 앓는 것도 없이 푹 잠이 들었다. 어찌나 잘 잤는지 정한의 출근도 겨우 배웅했다. 벅찰 때마다 하나씩 만들던 제 사진 액자를 챙겨주며.
달갑지 않아 할 줄 알았는데 정한은 제 액자 선물을 잘 받아주었다. 그의 방에 어떤 식으로 장식되어 있을지, 시험이 끝나면 놀러 가 볼 생각이었다.
그래, 시험. 그 시험이 정말로 코앞에 있었다.
윤조는 일과표대로 하루를 시작했다. 샤워로 잠을 깨우고 냉장고에서 아침을 내어 먹었다. 과일로 남은 배를 완전히 채운 다음 커피를 잔뜩 내렸다. 얼음과 함께 찰랑거리는 까만 액체를 고이 모시고 서재로 갔다.
데스크 위에 공부할 준비를 끝낸 뒤, 바로 시작하려다가 서랍에 둔 휴대폰을 꺼내어 갤러리를 열어 보았다. 손바닥만 한 정한을 넘겨보다가 마음에 차지 않아 한숨이 났다. 그를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계속해서 보려면 10년이 걸렸다. 포부는 좋았다만 요즘 서재에서 홀로 공부하고 있자면 그 시간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정한의 말을 빌리자면, 공부하기 싫어서 신세 한탄 중인 것이다.
확실히 그랬다. 그는 틀리는 법이 없었다. 윤조는 휴대폰을 다시 서랍에 넣어 두고 기지개를 켰다. 집중하는 데까지는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Ppppp.
점심도 잊고 완전히 공부에 빠져 있다 보니 금세 정한의 퇴근 시간이었다. 윤조는 서랍을 열어 알람을 끄고 데스크 위를 간단히 정리한 뒤 기지개를 켰다. 온몸이 찌뿌듯했지만, 꽤 보람이 있었다.
Rrrrr.
잠시 후, 정한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어지간한 일이 있지 않고서야 1분도 늦는 법이 없었다. 윤조는 소파에 드러누워 정한의 전화를 받았다. 눈을 감고서 인사를 건네는 그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들었다.
-몸은 좀 어때?
“음….”
-음?
윤조는 허기로 홀쭉한 제 배를 쓸며 눈을 감은 채 웃었다. 멈추지 않고 내려가 그보다 더 아래에 닿은 손이 밥보다 다른 것을 원하는 듯했다.
“금욕 주간이긴 한데….”
-어제 모자랐나?
“한 번만 했잖아요.”
혀를 찬 정한이 잠시 침묵했다. 윤조는 자신이 너무 까불었나 싶어 말을 취소하려는데, 기쁘게도 그가 제게 당근을 내밀었다.
-애피타이저야, 디저트야. 골라 봐.
“음….”
마음 같아서는 둘 다 조르고 싶었지만, 지금은 양심이 있어야 할 때였다. 윤조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고심 끝에 답했다.
“애피타이저.”
-빨리 가야겠네.
“운전 조심해요.”
-천천히 오라는 거야?
“조심해서 빨리.”
정한이 웃었다. 그는 정말 제대로 밟은 모양인지 평소보다도 이른 시간에 곧 도착한다는 말을 알려 왔다. 윤조는 냉큼 일어나 서재를 나왔다.
복도로 나선 윤조의 시선이 창밖 하늘에 머물렀다. 푸른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 계단을 내려가 현관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봄을 앞둔 밤공기는 기묘하게 속을 울렁거리게 했다. 한때는 불쾌한 기분이기만 했는데, 이제는 다른 누군가처럼 두근거리는 기분이었다.
멀리 대문이 열리고 있는 게 보였다. 윤조는 발끝을 까딱이며 다가오는 차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눈 부신 빛이 윤조의 몸을 빠르게 훑었다.
“사장님!”
차를 세우자마자 내려선 정한에게 윤조는 덥석 안겼다. 그와 입을 맞추고 그리웠던 냄새를 맡았다. 정한의 목에 매달려 연신 킁킁거리던 윤조는 지나치게 몸이 높이 들리는 느낌에 바짝 힘을 주었다. 하지만 제 미약한 힘은 참으로 보잘것없어서 반항도 잠깐이었다. 시야가 껑충 뛴다 했더니 갑자기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어!!!”
정한의 어깨에 둘러 메인 윤조는 성큼성큼 계단을 오르는 그의 움직임에 따라 몸을 들썩였다. 요원들이 차를 가져가는지 차바퀴 구르는 소리가 났다.
“애피타이저라니까요?”
“그래, 애피타이저.”
“사장님이 애피타이전데?”
“누가 아니래?”
아닌 거 같은데.
제 축 늘어진 손끝에서 반짝이는 반지도 그렇다고 말하는 듯했다. 윤조는 정한의 등에 코를 박고 흔들렸다. 아무렴 어떨까. 곧 세상이 뒤집혀 흔들리게 되어도, 심지어 디저트가 된다고 해도 그와는 무엇이든 좋았다.
정한은 곧장 방으로 향해 윤조를 소파에 던져 놓았다. 채 침대까지 갈 인내심은 없던 모양이다. 윤조는 그의 등에 수도 없이 부딪힌 코를 붙잡고서 저를 덮칠 듯이 눌러오는 그림자를 올려다보았다.
“자기야.”
정한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진지해, 윤조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그러자 대답을 요구하듯 정한이 조금 더 다가왔다.
“네, 여… 여보 자기.”
“병원에 와서 공부할래?”
“…병원이요?”
“너무 보고 싶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역시 똑똑한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윤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윤조의 대답에 기쁘게 웃은 정한이 제 넥타이를 끌어 내리며 기듯이 다가왔다. 윤조는 정한의 목을 끌어안으며 저를 물어오는 입술을 가볍게 빨았다. 열어 둔 창 너머로 간지러운 봄바람이 넘어 들어왔다.
“더 벌려야지.”
“으읏….”
어찌나 간지러운 유혹인지, 금욕 기간인 것도 잊게 했다. 4월에 학교에 들어가, 면허도 따고, 중간고사니 기말고사니 하는 시험에 치이기도 해야 했는데. 지금 이 눈앞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후우… 한 번 더 할까?”
“네… 한 번 더…, 으응… 빼지 말고….”
믿음직한 남편이 저를 어떻게든 이끌어주리라 믿을 수밖에. 그에게 뜨겁게 반응하는 제 각인의 흔적이 창을 넘어 들어오는 봄바람처럼 믿음을 불어 넣어주었다. 윤조는 불안한 마음은 잠시 뒤로 미룬 채, 그와 제 몸이 이끄는 대로 시간을 맡겼다.
“후우… 하아….”
“하…….”
지나치게 맡긴 탓인지 소파 위에서 뒤엉킨 두 사람은 디저트까지 몽땅 맛본 뒤에야 만족한 듯 긴 숨을 내쉬었다. 서로 얼굴을 마주한 채, 담뿍 젖은 몸을 끌어안고, 웃음과 같은 한숨을 몇 번이나.
“근데요….”
“어, 왜. 한 번 더 하자고?”
“…어떻게 아셨어요?”
정한이 대답 대신 콧잔등을 간질이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저를 들어 안고 침대로 향했다. 채찍을 휘두르기 일쑤이던 믿음직한 남편의 이성이 무너진 순간이란, 제법 달콤했다.
“이러면, 한 번 더 아닌 것 같은데….”
“맞아.”
“나 저녁 공부 안 해요?”
“어. 하지 마.”
윤조는 정한의 목을 껴안고 그의 뺨에 깊게 입을 맞추었다. 10년이 11년이 되어도 괜찮겠지. 조금 더디게 그의 옆에 서더라도 이미 그와는 평생 함께였다. 다가온 날에는 오늘의 일을 미친 듯이 후회하게 되었지만.
* * *
시험 당일, 윤조는 긴장한 나머지 저택을 나서기 전 화장실로 달려갔다. 정한은 윤조가 아침으로 먹은 것을 죄다 게워내는 것을 보고 자신이 지나친 부담을 주었나, 저라도 제대로 이성을 붙들었어야 했나 싶어 잠깐 후회했다.
애써 걱정을 감춘 저와 달리 윤조는 오히려 속이 비어서 홀가분하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 얼굴에 방심했다. 정한은 윤조가 평소처럼 씩씩하게 잘 이겨내리라 여겼다.
시험을 끝내고 돌아온 밤, 더는 저녁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니 보상으로 긴 잠을 잘 거라던 윤조는 새벽녘에 베개에 얼굴을 묻고 홀로 울었다. 숨죽인 울음소리를 듣기 이전에 정한은 두근거리는 제 목덜미를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다.
“윤조야.”
고개도 들지 못하고 우는 어깨가 안쓰러웠다. 정한은 제 얼굴을 감추려는 윤조를 당겨 안았다.
‘노력한 만큼 나오겠죠.’
씩씩하게 말하던 얼굴이 눈물에 푹 젖어 있었다. 울음으로 열이 찬 몸이 품에서 떨렸다. 가슴을 저미는 듯한 둔통에 정한은 윤조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결과 나온 후에 울어도 늦지 않아.”
“…떨어지면.”
“그땐 다시 하면 돼.”
“…….”
“그래도 돼.”
익히 그의 간절함을 잘 알고 있던 저였다. 그의 노력과 진심을 누구보다도 믿었다. 어쩌면 윤조 자신보다도.
“좀 괜찮아?”
“네….”
겨우 울음을 그친 윤조는 다 잊을 것처럼 긴 잠을 잤다.
그리고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 출근 배웅처럼 전화가 걸려 왔다. 제 말대로 결과가 나온 후에 울기로 한 모양인지 평소처럼 씩씩한 음성이라 마음이 놓였다.
미뤄 뒀던 데이트를 하며 결과가 나오길 꼬박 일주일을 기다렸다. 입학 결과 발표가 나는 날은 병원을 쉬었다. 도저히 그를 혼자 둘 수가 없었다. 결과 전화도 마찬가지였다. 응당 제 몫이 되었다. 윤조는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정지 버튼이 눌린 사람처럼 온몸을 멈추고 저를 보았다. 정한은 응접실 소파에 앉아 울리는 전화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처음에 있었던 보안 팀장의 전화와 두 번째 있었던 시설 담당자의 전화 이후, 꼭 세 번째 전화였다. 정한은 오후 두 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확인한 뒤 수화기를 들었다. 저와 같은 예감을 한 모양인지 윤조가 삐걱삐걱 걸어와 품에 안겼다.
-중앙 고등학교입니다. 서윤조 학생 댁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실례지만, 보호자신가요?
“네, 제가 보호잡니다.”
정한은 윤조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수화기에 귀를 기울였다. 계속해서 대답만 하는 정한이 답답했는지 윤조가 슬그머니 수화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한은 그의 머리를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뭐래요?”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윤조가 매달리듯 물었다. 정한은 그가 마음 졸이지 않게 바로 웃어 보였다.
“교복 맞춰야겠네.”
놀라서 굳은 윤조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제야 실감한 모양인지 벌떡 일어난 윤조가 소파 위에서 방방 뛰었다. 그가 집사였던 때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물론 그는 이미 제 집사가 아니었지만.
“와!! 학교 간다!! 학교!!”
정한은 새집에 가더라도 집사를 들일 생각이 없었다. 그는 제 마지막 집사였다. 이제는 남편이자 인생의 동반….
“…윤조야.”
정한은 제게 달려들어 입술을 문 윤조의 등을 차분히 쓰다듬었다. 이만하면 진정할 법도 한데 그는 오히려 어서 혀를 내어놓으라는 듯 더욱 세게 입술을 깨물어댔다.
아무래도 조만간 그의 개로서의 자격을 상실시켜야겠다. 정한은 윤조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움켜쥐며 저를 물어오는 제 개 같은 남편의 혀를 빨았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키스였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