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화 (13/22)

01.

“아 참, 모레 인터뷰 가야 해.”

정한이 한 학교와의 통화 내용 중에는 합격 통보뿐만 아니라 보호자를 동반한 인터뷰 고지도 있었다. 합격 기념으로 지하실에서 잔뜩 가져온 와인을 벌써 두 병째 비운 윤조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과연 이 대화를 그가 기억할까, 의심될 만큼 취한 상태였다.

“인터뷰요…?”

“어. 별건 아니고, 미리 인사하는 거야.”

“아, 난 또….”

소파 위에 길게 늘어져 누운 윤조가 중얼거렸다. ‘나는 비밀이 많은 남잔데, 어떻게 잘 포장할 수 있을까요?’ 하고.

정한은 바닥에 앉아 등을 기댄 소파 끝에서 저를 보고 있는 동그란 눈을 응시한 채 웃음 지었다. 확실히, 그는 정말 비밀이 많은 남자였다.

“신분도 위조했지, 전직 집사 출신이지… 거기다 지금 학교 옆에 있는 병원 의사가 남편이잖아요.”

“그러게.”

“거기다 이 예쁜… 저택에서도 살고 있다구요.”

“곧 이사 갈 거야.”

“아… 맞다. 이사 가지…. 그럼 더 비밀스럽지 않을까요? 근거리에 어마어마한 집이 있는데. 미자르 출신… 아니, 저 출신이 어디였죠?”

윤조가 손가락을 접어 가며 자신의 위조된 고향을 찾아대었다.

“알카이드… 미자르… 알리오스… 메그레… 즈? 메그레즈였나?”

“페크다.”

“아아, 맞다. 페크다. 우리 사장님은 어쩜 이렇게 똑똑하지?”

윤조가 정한의 머리를 안고 귓바퀴에다가 마구잡이로 입술을 비볐다. 슬슬 그가 이를 드러내어 저를 깨물 것 같아 정한은 소파에 올라가 윤조의 몸을 제 아래로 깔았다.

“너 이제 개 아냐.”

“…왜요?”

“개 하기 싫어한 거 아니었어?”

“제가 그랬어요?”

“어. 그랬어.”

“음… 이젠 괜찮은데.”

“왜?”

“할 수 있는 게 없어지면 섭섭하잖아요.”

“뭐?”

“사실 집사도… 자격증도 있고, 나름대로 경력도 있었는데, 이제 아니니까….”

“대신 학생 얻었잖아.”

“그러니까요. 학생 됐으니까 그건 괜찮아요. 근데, 개를 가져가면….”

정한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내가 너 남편 자리도 줬잖아.”

“그렇긴 한데… 다다익선이라고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잖아요….”

배운 말을 써먹는 윤조가 귀여워 정한은 그와 이마를 마주 대고 꿍얼거리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요?”

“귀여워서.”

“그럼, 귀여워도 해주지….”

“그럴까?”

눈을 접고 웃는 윤조의 뺨에 입을 맞추며 정한은 그의 셔츠 안으로 손을 넣었다. 와인으로 출렁이는 말랑한 배를 매만져주고 납작한 가슴을 두 손으로 움켜쥐자 간지러웠는지 그가 발을 구르며 웃어댔다.

“으하하하.”

정한은 그치지 않고 윤조의 가슴을 주물렀다. 엄지와 검지로 젖꼭지를 비틀어 쥐고 유난하게 뜨거운 목덜미의 냄새를 맡았다. 성기로 피가 몰리며 바지 속이 빠듯해졌다.

“으응….”

윤조 역시 저와 다르지 않았는지 조르듯이 매달리기 시작했다. 정한은 윤조의 잠옷 바지를 벗겨 내리고 그의 가랑이 사이로 깊게 코를 박았다. 뜨거운 체온과 그의 살냄새, 제가 미쳐 있는 페로몬을 담뿍 들이마셨다.

부드러운 실크 위로 자리한 정한의 입술이 벌어지며 윤조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 소파에 드러누운 주인처럼 나태하게 늘어져 있던 성기가 속옷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정한을 애태웠다.

몸을 들썩이는 윤조의 움직임에 정한의 입 속으로 그것이 빨려들 듯 들어왔다. 정한은 머금은 윤조의 성기를 혀로 어루만졌다.

“으으….”

소파 가죽을 움켜쥔 윤조가 성급하게 몸을 뒤집었다. 입에서 길게 늘어진 침이 뚝 끊겼다. 정한은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윤조가 하는 양을 보았다.

속옷을 끌어 내려 엉덩이를 들이민 윤조가 급한 숨을 내쉬었다. 정한은 제 얼굴 앞에 전시된 하얀 엉덩이를 보고 웃음 지었다. 흥건한 물이 그의 엉덩이골을 타고 소파 위에 침처럼 늘어졌기 때문이다.

정한은 윤조의 엉덩이를 벌려 쥐고 그의 젖은 물을 핥았다. 개가 된 건 저였다.

“후으… 아… 좋아….”

열이 오른 선홍빛 주름이 정한의 손끝에서 속살을 드러내며 벌어졌다. 정한은 그곳에 제 입술을 대고 안쪽으로 혀를 넣었다. 닿는 곳곳 미끈한 물이 흘러내렸다. 그가 애원하기 시작했다.

“사장님… 으응… 넣어주세요….”

급히 조여드는 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한은 혀로만 그를 달랬다. 말 안 듣는 아이에게는 사탕을 줄 수 없었다.

“하아… 사장니임….”

윤조의 손톱에 긁힌 가죽이 비명을 질러댔다. 정한은 계속해서 그의 말을 무시하고 부푼 주름만 핥았다. 이젠 제 혀를 밀어 넣어주지도 않았다.

“흐… 흑… 여보.”

“어, 윤조야.”

“하… 진짜… 여보, 으응… 자기, 빨리, 흐으… 주세요.”

정한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윤조의 허벅지에 걸려 팽팽하게 벌어진 속옷을 잡아 내렸다. 소파 바닥에 납작하게 누운 몸을 뒤집자, 달뜬 숨이 터져 나왔다.

“하아….”

발그레하게 물든 볼. 흥분으로 젖은 눈가. 헐떡이는 가슴과 셔츠 아래로 빠끔히 얼굴을 내민 배꼽. 그 밑으로 고개를 들기 시작한 성기까지. 빠짐없이 눈에 담은 뒤에야 정한은 윤조의 무릎 뒤를 들어 올려 그의 몸을 열었다.

“잡아.”

윤조에게 제 다리를 붙들게 한 뒤, 정한은 팽팽하게 발기한 성기를 꺼내 들었다. 새빨갛게 열이 오른 윤조의 입술이 빨고 싶다는 듯 벙긋거렸다. 정한은 그의 입술 대신, 마찬가지로 움찔거리는 그의 주름 사이로 중지를 푹 찔러 넣었다.

“하…!”

윤조가 턱을 들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정한은 제 손가락 하나도 맛있게 빠는 윤조의 내벽을 느끼며 안쪽의 여린 살을 긁어 올렸다.

“아아…!!”

윤조가 제 안은 다리를 더욱 세게 당겨 안으며 몸을 열었다. 손가락을 옥죄던 입구가 벌어지며 더 큰 것을 원하듯 뻐끔거렸다.

정한은 손을 빼내어 제 발기한 성기를 붙잡고 비볐다. 선액과 뒤섞여 금세 젖은 성기가 손에서 놓자마자 꺼떡거리며 배에 들러붙었다.

“후….”

정한은 긴 숨을 내쉬며 제 셔츠를 벗어 올렸다. 끙끙대는 윤조의 신음이 들렸다. 문득 그를 조금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급할 때면 여보 자기를 남발하는 윤조인지라 정한은 쉬이 무너졌다.

“여…, 흐, 여보… 아아….”

정한은 윤조의 어깨 위로 두 팔을 지지하고 그가 원하는 것을 떠먹여주었다. 휩쓸리듯 감싸고, 또 매달리듯 들러붙는 그의 젖은 내벽이 한숨이 나올 만큼 좋아서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정한은 윤조의 얼굴에 시선을 둔 채 계속해서 허리를 쳐올렸다. 윤조는 얕은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또 이를 악물기도 하며 저를 한순간도 소홀함 없이 먹어대었다.

“후우… 서윤조.”

급박한 사정감이 일었다. 정한의 부름에 윤조가 제 입 안의 혀를 깔짝거리며 바라보았다.

“하아, 하….”

오로지 그의 입 안에만 있는 혀인데, 정한은 꼭 제 성기가 간지럽혀지는 기분이었다. 흥분에 찬 정한을 올려다보는 윤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우리 자기, 싸겠다….”

저를 익히 알고서 하는 말이었다. 정한은 급히 몸을 물리고 윤조의 가슴을 저지하듯 꾹 눌렀다. 술에 취한 윤조는 매우 위험했다. 괜히 그가 메라크로 떠나기 전날 각인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던 게 아니다.

“왜애….”

반쯤 감긴 눈이 웃음을 지었다. 정한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손바닥 아래로 박동하는 그의 심장이 느껴졌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재촉하는 듯한 간지러운 떨림이었다. 정한은 윤조의 뺨을 붙잡고 길게 입을 맞추었다.

쪽.

끈적한 침으로 붙었던 입술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이른 사정과 더불어 노팅의 위험까지 느껴져 정한은 저를 구속하기로 했다.

“콘돔 가져올게.”

거추장스러운 하의까지 모두 벗어낸 뒤, 서둘러 서랍장으로 향했다. 늘 콘돔을 넣어두는 서랍을 열자 안이 텅 비어 있었다. 혹시나 하고 다른 곳도 열어 보았지만, 마찬가지로 콘돔은 보이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정한의 등 근육이 예민하게 불끈 섰다.

언제 다 썼을까. 떠올려 보려고 해도 저조차도 종잡을 수 없는 횟수와 빈도인지라 특정 지을 수가 없었다. 정한은 놀리듯 꺼떡거리는 제 성기를 내려다보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정한은 금세 유혹에 이끌려 서랍장 구석에 있는 약통을 꺼내 들었다. 비상용으로 둔 알파 피임약이었다. 이 핑계로 노팅을 할 수 있겠다, 하며 물을 찾아 몸을 돌리는데 어째, 어서 오라고 칭얼거려야 할 소파 너머가 잠잠했다.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며 소파로 다가가 아래를 살폈다. 아까까지 저를 조르던 이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정한은 소파 등받이를 꽉 움켜쥔 채 아쉬운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손에 든 피임약은 쓰레기통에 버리고 윤조의 곁에 섰다. 계속해서 꺼떡거리는 성기가 제 또 다른 이성처럼 저를 꼬여냈다. 끝내 유혹을 이기지 못한 정한은 윤조와 제 체액이 뒤섞여 뿌리에 옅은 거품이 낀 성기를 붙잡고 강하게 추켜올렸다.

정한은 윤조의 얼굴과 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자위했다. 터질 듯 검붉게 열이 오른 선단은 엄지로 쓸고 음경을 훑을 때는 요도 구멍이 벌어질 만큼 힘껏 당겼다.

“흣.”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윤조와 각인한 뒤로 정신적으로 많이 안정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타인에 한한 것이었는지, 그에게만은 쉽게 흥분하고 쉬이 이성이 혼탁해졌다.

“하….”

손만으로는 부족하다 싶어 정한은 소파에 무릎을 대고 올라 윤조의 늘어진 다리 한쪽을 들어 올렸다. 젖어 있는 좁은 틈으로 제 성기를 밀어 넣자, 거칠기만 한 제 손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부드러운 감촉이 저를 감쌌다. 침입자를 밀어내려 틈을 좁히는 압박에는 저릿한 지배욕이 일었다. 정한은 윤조의 늘어진 성기를 매만지며 천천히 허리를 흔들었다.

“후… 하….”

윤조는 깊은 잠에 빠진 듯했다. 정한은 느긋하게 윤조를 음미했다. 그의 입술을 머금고 싶은 마음을 애써 씹어 삼키며.

세상모르고 잠든 윤조의 나직한 호흡처럼 정한은 느리고 또 평온하게 움직였지만, 오히려 그를 깨우지 않아야 한다는 제약 때문인지 감각이 예민해졌다.

그가 오롯이 느껴졌다. 저를 어떻게 무는지, 얼마나 뜨거운지, 불룩하게 부풀어 유난히도 느끼는 자리는 물론이고, 성기를 넣고 뺄 때마다 마찰하는 소음까지. 정한은 윤조가 제게 주는 지나치기까지 한 어지러운 감각에 휩쓸렸다.

“후우….”

이대로 곧 사정할 것 같아 정한은 급히 성기를 빼고 그의 평평한 배 위에서 쥐고 흔들었다. 몇 번 만지지도 않았는데 요도 끝에서 정액이 왈칵거리며 쏟아졌다.

“하.”

오목한 배꼽에 고인 제 혼탁한 욕구를 보며 정한은 턱에 맺힌 땀을 쓸어 올렸다. 진동하는 정액 냄새와 그 아래 희미하게 깔린 윤조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목이 탔다. 정한은 다급히 잔에 남은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이어 병까지 낚아채 코르크를 뽑아 그대로 입을 대고 마셨다. 자꾸만 갈증이 일었다. 어떤 갈증인지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기에 정한은 꼼짝 않고 제 몸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겨우 몸이 식어 갈 즈음, 꼴이 말이 아닌 윤조의 배로 고개를 돌렸다. 더러워진 배를 말끔히 닦고 그를 안아 침대로 향했다. 벗고 자는 것 따위야 그다지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배만 잘 사수하여 그를 계속해서 재웠다.

“잘 자, 여보.”

늦은 인사를 입술 위에 남기고 정한은 욕실로 향했다. 그를 깨우지 않으려면 차가운 물이라도 뒤집어써야 할 것 같았다.

* * *

인터뷰 당일. 윤조는 시험 날처럼 잔뜩 긴장했다. 뻣뻣한 저를 대신해 정한이 많은 것을 해주었다. 옷을 입는 것부터 시작해, 먹는 것, 차에 타는 것, 심지어는 내리는 것까지.

“그냥 인사하고 오는 거야. 떨어지는 거 아니고.”

“제가 잘 속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미자르가 페크다가 된 것뿐인걸. 그리고 네 출신에 관해 물을 일 없어.”

“그럼 좋겠지만….”

“없어. 있다고 해도 내가 자를 테니까 걱정하지 마.”

윤조는 정한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걸음을 내딛게 된 윤조를 이끌고 정한이 교정을 가로질렀다. 시험 당일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풍경이 그제야 하나둘 보였다.

봄을 맞이한 교정은 푸른 잎과 노랗고 붉은 꽃이 만발해 무척 아름다웠다. 곳곳에 유명인으로 추측되는 석상이 있는 것도 볼만했다.

“설마 이제 본 건 아니겠지?”

석상이 나타날 때마다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자 정한이 말했다. 윤조는 머쓱한 얼굴로 웃었다. 곧 건물 입구가 나왔을 때는 그 웃음이 싹 사라졌지만.

“긴장 풀어.”

정한의 말을 모두 믿고, 여차하면 그에게 전부 의지하면 되었지만, 학교 관계자를 눈앞에 둔 순간, 윤조는 걷잡을 수 없는 긴장의 늪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오셨습니까.”

인사를 건네는 말에도 허리만 굽신거렸다. 바짝 언 윤조를 달래듯 정한이 등을 쓸어주었다.

자신을 교감이라 소개한 이가 누가 봐도 인터뷰 당사자가 분명한 윤조를 확인한 뒤, 곁에 선 정한에게 시선을 두고 그에게 저와의 관계를 물었다.

“형… 이십니까?”

긴가민가한 얼굴로 묻는 교감의 옆구리를 곁에 있던 안경 쓴 관계자가 찔러 대었다.

“남편입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교감이 아차 하는 얼굴로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숙지하고 있었는데 그만….”

당황한 교감을 두고 안경을 올려 쓴 관계자가 두 사람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윤조는 정한이 제 형으로도 보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 순식간에 긴장을 잊어버렸다. 덕분에 인터뷰도 순조로웠다. 겁먹은 것이 허무하게도 정말 별것 아닌 형식상의 절차였다.

“아무래도 아직 어린 학생들이 많다 보니 학업에 지장이 없도록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예, 말씀하시죠.”

실컷 윤조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 가던 관계자가 전과는 다르게 조심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며 운을 떼었다. 풀어진 마음을 혼내듯 불쑥 찾아온 긴장에 윤조는 정한의 손을 붙잡았다. 관계자의 눈길이 윤조의 반짝이는 네 번째 손가락에 닿았다.

“졸업까지, 임신은 자제해주시길 바랍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라 윤조는 멍하니 관계자를 바라보았다. 정한을 붙잡은 손에서도 힘이 빠졌다.

“기혼자가 입학하는 경우는 처음인지라, 저희 쪽에서 드리는 의견이 참견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서윤조 학생에게도 다른 학생들과 다르지 않은 교칙을 적용해야 마땅하다고 회의 결과가 났습니다.”

“예, 물론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예외는 없게 해주십시오.”

정한의 대답에 관계자가 기쁜 듯 웃었다. 윤조는 정한을 붙잡은 손을 물리며 테이블에 놓인 입학 허가증을 바라보았다.

“흔쾌히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오히려 더, 감사하네요.”

관계자와 정한이 악수하였다. 윤조는 얼떨결에 일어나 저도 악수를 했다.

“그럼, 개학식 날 봅시다, 서윤조 학생.”

“네, 선생님….”

진짜 선생님을 불러 본 적은 처음이라 윤조는 조금 쑥스러워졌다. 눈치 빠른 정한이 관계자가 복도 끝으로 사라지자마자 물었다. 그렇게 쑥스러웠냐며.

“당분간 부끄러울 것 같아요.”

“선생님 부를 때마다 얼굴 붉힐 거야?”

“어쩌면요.”

“그거 남 보여주기 싫은데.”

“네?”

돌아가는 길. 고요한 복도를 걷던 정한이 걸음을 멈추고 윤조의 두 뺨을 붙들었다. 이 신성한 학교에서 하면 안 되는 일이 퍼뜩 떠올라 급히 정한의 손을 붙잡아 내렸다.

“학생이다 이거야?”

“네. 이제 학생이에요.”

“그래, 여기서는 학생답게 해.”

윤조는 관계자에게 받은 학교생활과 관련된 자료를 끌어안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건물을 나와 다시 정원을 가로질렀다. 이제 매일 보게 될 정원인데도 윤조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한 석상에 눈길이 머물렀다. 어쩐지 석상과 교감의 생김새가 닮아 보였다. 문득 그가 한 인상 깊은 말이 떠올랐다.

“근데 남들이 보면 사장님이 제 형으로 보이나 봐요?”

“부부로 안 봐줘서 섭섭해?”

“그게 아니라, 좀 놀라워서요.”

“뭐가?”

“제가 사장님을 형이라고 불러도 되더라구요. 그걸 이제 깨달은 거 있죠?”

정한이 찝찝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윤조는 제게 새로운 단어가 생긴 것 같아 기쁘기만 했다. 사장님이 제일 좋고, 여보나 자기도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형’은 정말 가족 같고 다정하게 느껴졌다.

그 때문일까. 윤조는 정한이 제게 주입하듯이 훈련한 ‘여보’나 ‘자기’보다도 ‘형’을 더 입에 올리게 되었다. 단, 형을 부르는 상황이 꼭 그를 설득할 일이 있을 때 버릇처럼 나오는지라 정한이 ‘형’을 싫어하게 된 건 꽤 가슴 아픈 일이었다.

“형….”

“안 돼. 병원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마.”

“형은 내가 부끄러워요?”

“그게 아니라, 너 교복 입고 나타나면….”

윤조는 정한의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학교가 끝난 뒤, 정한의 병원으로 가 그의 방에서 그의 퇴근을 기다린 후, 같이 집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그런데 정한은 교복을 입고서는 절대 병원으로 오지 말라고 했다.

“그럼, 옷 벗고 있을까요? 이걸 원하는 거예요?”

빤히 바라보던 정한이 어이없는 얼굴로 웃었다.

“거긴 내 일터야.”

“네, 그렇죠. 근데 왜 제 교복은 안 된다는 거예요?”

뭐든 제게 해답을 알려주던 남자가 입을 꾹 다물었다. 윤조는 정한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몇 번 눈을 깜박여 보이자 이유는 알려주지 않고 한숨을 내쉬며 오라고 허락해주었다.

“같이 집에 가면 정말 좋겠다.”

“그렇게 좋아?”

“그럼요. 제가 그 학교 고른 이유가 뭐겠어요?”

“교복 예뻐서.”

“…아니에요. 아닌데?”

“아니긴.”

“벼, 병원이랑 제일 가까워서 고른 거예요.”

뻔뻔한 윤조의 말을 정한이 비웃었다. 윤조는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이제 교복만 맞추면 된다고 화제를 돌렸다.

“내일 올 거야.”

“누가요?”

물은 것이 민망하게도, 당연한 사람이 찾아왔다. 단출하게 의류 걸이 하나만 가지고 나타난 재단사를 윤조는 무척 반갑게 맞이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윤조 님.”

재단사의 색다른 인사도 반가웠다.

“계절마다 모두 세 벌씩 준비했습니다. 그에 맞는 운동화와 가방도 맞춰 왔으니, 천천히 보시지요.”

응접실 소파에 기대어 앉은 정한을 두고 의류 걸이에 걸린 교복을 기웃거리고 있자니 집사 유니폼을 받았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와 장면은 같은데 분위기는 180도 바뀌어 있는 정한이었다.

윤조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재단사와 정한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왜 웃어?”

“옛날에 여기서 홀딱 벗은 게 생각나서요.”

재단사가 헛기침하며 시선을 돌렸다. 정한이 짧게 혀를 찼다. 지금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타인이 있는 앞에서 제게 탈의를 명령하는 일이란.

“이제 입어 볼게요.”

더는 재단사를 곤란하게 할 수 없어, 의류 걸이에 걸린 셔츠 하나를 빼 들었다. 부드러운 촉감이 기분 좋게 손끝에 감겼다. 푸른색 넥타이는 초콜릿처럼 녹아내릴 듯했다.

“격식을 갖춘 이전 유니폼과는 달리, 교복은 활동성을 우선시했습니다.”

재단사의 말대로 교복은 집사 유니폼과 달리 품이 넉넉했다. 이 정도면 키가 더 자라지 않을까 생각될 무렵, 윤조는 목에 걸고만 있던 넥타이를 어찌할 바 몰라 헤매었다.

“왜 그러십니까?”

“넥타이를 어떻게 매는지 몰라요.”

“알려 드릴까요?”

윤조의 대답 이전에 정한이 나섰다. 윤조는 소파에서 일어나 제게 다가온 정한을 올려다보았다. 정한이 윤조의 어깨를 뒤에서 붙잡고 의류 걸이에 달린 긴 거울 앞으로 데려갔다.

“잘 봐.”

윤조는 거울과 정한의 손을 번갈아보며 서서히 매듭이 만들어지는 모양을 보았다. 제게는 반복 학습이 최고라는 걸 알고 있는 선생님이라 그런지, 정한은 따로 인지의 여부를 묻지 않고 몇 번이고 반복해주었다. 슬슬 감을 잡아간 윤조가 자신이 매어 보겠다고 했다.

“어….”

충분히 눈으로 익혔다 여긴 것과 다르게 실제로 매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윤조는 엉뚱한 방향에서 튀어나온 대검을 손에 쥐고 정한을 돌아보았다. 가만히 둘을 지켜보던 재단사가 웃음을 감추려 몸을 돌렸다.

“천천히 하면 돼.”

“네….”

고작 넥타이. 천천히 매면 될 일이었다. 매듭을 풀어 넥타이를 당겨 뺀 윤조는 남은 계절의 옷도 모두 입어 보았다. 성장기 지난 성인의 이점이었다.

“시계도 필요하실 것 같아 한번 준비해 보았습니다. 보시겠습니까?”

윤조는 냉큼 재단사가 내미는 상자를 들여다보았다. 총 세 종류의 시계가 있었는데, 윤조는 개중 가장 단순한 디자인을 골랐다. 정한은 조금 더 화려한 것을 추천했으나 이미 제 결혼반지만으로도 학생치고는 화려한 것 같아 그만두었다.

재단사가 선별해 온 가방을 메고 운동화까지 신고 나니 당장 등교를 해도 좋을 듯했다. 윤조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제 월급으로 사 입힌 사촌 동생들의 교복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예뻤다.

“마음에 들어?”

“그럼요. 교복 보고 고른 건데.”

“교복 보고 고른 거 맞네.”

아차 싶어 입을 막고 정한을 보았다. 그가 웃으며 재단사에게 옷을 옮길 것을 지시했다.

윤조가 다시 평상복으로 돌아간 뒤, 의류 걸이의 옷이 착착 2층으로 향했다. 재단사의 걸음마다 흔들리는 옷을 보며 윤조는 제 마음도 그렇게 흔들리는 듯했다.

“아… 어떡해.”

등교 첫날의 마음도 꼭 그러했다. 가슴이 요동쳤다. 정한이 미적거리는 윤조의 등을 밀며 차로 향했다. 어서 타라고 차 문까지 열고서 기다리는 정한을 보며 윤조는 어렵게 발을 떼었다.

차에 타기 전, 보안 요원들이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건네었다. 윤조는 가방끈을 붙잡은 채 저도 인사를 해 보였다.

“늦겠다. 어서 타.”

윤조는 시계를 내려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한의 출근 시간과 제 등교 시간이 맞물려 다행이었다. 어느 하나가 이르게 나서야 했다면 미안했을 테다.

손을 흔드는 요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윤조는 첫 등굣길에 올랐다. 학교까지는 대략 30분. 이 30분 동안 부디 제게 안정이 찾아왔으면 했다. 30분 후에는 정한도 곁에 없을 테니 말이다.

윤조는 가방을 품에 안은 채 긴장된 마음을 가라앉히려 심호흡했다. 그런 윤조를 눈치채고 정한이 조용한 음악을 켜주었다. 그런데도 긴장이 가시지 않아 창을 열고 바람을 맞았다. 곱게 단장한 머리가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

“학교에서 길 잃으면 어쩌죠?”

“옆에 아무나 잡고 물어봐.”

“아, 그럼 되지. 제가 수업에 못 따라갈까 봐 걱정이에요.”

“시험을 왜 쳤겠어, 네가 합격한 건 따라갈 수 있다는 증거야.”

“아… 그렇지.”

“다른 걱정은 없어?”

“네. 없어요.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불어오는 바람만큼이나 마음이 어지러웠다. 정한이 정신 사납다며 창을 닫지 않았다면 윤조는 그의 위로에도 안심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헝클어졌을지도 모른다.

“아아…. 어떡해.”

30분이 이리도 빨랐나. 정신을 차리니 학교 앞이었다. 윤조는 교문으로 들어가는 교복 무리를 보며 우는소리를 냈다. 생애 첫 학교인 탓일까. 꼭 초등 과정의 학생처럼 분리 불안 증세가 왔다.

“같이 갈까?”

“…아뇨, 그랬다간 졸업할 때까지 친구가 안 생길 거예요.”

“잘 아네.”

“다녀올게요.”

“생각보다 별것 아닐 거야. 메라크에서 두베까지 걸어온 사람이 학교쯤이야, 뭘.”

“그렇긴 한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윤조는 홀로인 것이 익숙한 사람이었다. 여러 사람과 함께인 것이 서툴렀다. 특히 제게는 마냥 어렵게 느껴지는 두베 사람들과.

“우리 씩씩한 윤조가 어디 갔나 몰라.”

“…….”

“부적 줄까?”

“부적이요?”

“어. 나쁜 거 쫓아주는 부적.”

“네, 주세요.”

정한이 번잡한 교문을 잠깐 응시한 뒤, 윤조의 목을 당겨 깊게 입을 맞추었다. 윤조는 깜짝 놀라 정한을 밀어내려다가 저를 쓰다듬듯 달래는 정한의 부적을 천천히 삼켜내었다. 그가 제게 한숨처럼 덧씌운 페로몬은 덤이었다.

“별것 아냐.”

“…네, 고작 늑대예요.”

“음?”

“소리만 요란하지 제게 아무 위협도 안 된다구요.”

정한이 그렇다고 대답하며 입을 맞추었다. 윤조는 간지럽게 닿았다 떨어진 정한의 입술에 다시 제 입술을 대었다. 채 떨어질 사이도 없이 정한의 입술이 따라붙었다.

“으음….”

깊어지는 입맞춤에 이러다 등교도 출근도 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건 정한도 다를 바 없이 느낀 모양인지 제게 쏠리듯 넘어온 몸을 제자리로 돌렸다.

“끝나고 바로 와.”

“네. 다녀올게요.”

윤조는 차에서 내려 정한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들여다본 뒤 교문으로 향했다. 정한의 부적 덕분일까. 저택을 나설 때와 달리 윤조는 씩씩하게 걸었다. 행렬을 따라 걷다 다른 학년 건물에 들어서긴 했지만.

이르게도 범한 실수에 윤조는 잠시 패닉에 빠졌다가 정한이 제게 알려준 해결책을 찬찬히 떠올렸다.

‘옆에 아무나 잡고 물어봐.’

마치 귓가에서 속삭이는 듯한 정한의 목소리를 따라 윤조의 눈길이 돌아갔다.

“저기….”

“네?”

“3학년 건물, 어디로 가야 해요?”

“아, 3학년 건물이요?”

다행히도 때마침 곁을 지나던 재학생의 도움으로 늦지 않게 반에 이르렀다. 윤조는 깊이 안도하며 빈자리에 앉아 동태를 살폈다. 수업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벌써 공부하고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질 수 없다 싶어 제 책가방을 열어 교과서를 꺼내었다. 이미 집에서 훑고 왔지만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학교 관계자와 인터뷰할 때 입학시험은 기초 능력 테스트나 마찬가지라는 얘기를 들은 탓이었다.

걱정이 앞서 교과서의 글씨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 때였다. 곁에 선 기둥 같은 그림자가 느껴져 고개를 들자 같은 반으로 여겨지는 아이가 둘, 서 있었다. 공부하거나 무리를 지어 수다 떠는 아이들 틈에서 제게 관심을 둔 유일한 인물들이었다.

“안녕.”

“어… 안녕.”

“처음 보는 얼굴이네? 전학 왔어?”

“어….”

글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윤조는 열심히 말을 골랐다. 어째 입학 인터뷰 때보다도 더 떨렸다. 묻는 건 참 쉬운 일이었다. 물음표에 대응할 마침표를 찍기는 너무나 힘들었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온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떠오르는 말을 마구 던져댔을지도 몰랐다.

“서윤조 학생. 앞으로 나오세요.”

더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구세주처럼 나타난 선생님은 윤조의 상황을 간략하게 잘 설명해주었다. 호기심 어린 눈짓을 받으며 윤조는 낯선 학교생활의 첫발을 떼었다.

*

윤조가 교복을 입은 채 병원에 드나들기 시작하면 승주와 무헌에게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재수가 없으면 오늘 당장 그들에게 놀림감이 될 수도 있었다. 정한은 나름대로 각오하고서 제 일과가 끝난 뒤 방으로 향했는데, 그곳에서 맞이하고 있는 건 윤조 혼자였다. 다행히, 아직 그 시끄러운 단짝에게 들키지 않은 듯했다.

“사장님!”

기척에 고개를 든 윤조가 손에서 펜을 내려놓고 달려들었다. 정한은 제 지저분한 몸이 신경 쓰여 윤조를 물러 내려다가 그의 환대를 거절할 수 없어, 그를 안고 높이 들었다.

학교의 상징이 빼곡히 그려진 푸른 넥타이가 정한의 턱 끝에서 간지럽게 흘러내렸다. 거추장스럽다는 듯 윤조가 제 넥타이를 풀어내었다. 그의 손끝에서 미끄러진 넥타이가 테이블 위에 똬리를 틀었다.

“어땠어?”

“정말 별거 아니었어요.”

물가에 내어놓은 아이처럼 종일 신경이 쓰였는데, 그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안도가 되었다. 정한은 제게 인사처럼 입을 맞추는 윤조를 안고 안쪽으로 향했다. 그를 데스크 위에 앉히고 가운을 벗었다.

“누가 괴롭히지는 않고?”

“아뇨. 다들 착해요.”

“그래. 다 착해야지.”

의미심장하게 웃는 정한을 윤조가 잠시 의아하게 보았다. 곧 제 목덜미에 입을 맞추는 저를 보고 별 뜻 없다 여겼는지 그가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윤조는 몰랐다. 정한이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한은 윤조가 느끼지 못할 알파 페로몬을 찾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혹여나 남아 있을 타인의 언어를 찾아 예민하게 그의 몸 구석구석을 더듬었다.

“일터라면서요….”

셔츠 안으로 침입한 손을 밀어내며 윤조가 말했다. 정한은 소리 없이 웃으며 윤조의 흐트러진 옷을 바로 해주었다. 다행히 걱정할 내용은 없었다.

“친구는 만들었어?”

정한은 윤조를 사이에 두고 데스크에 두 팔을 기대었다. 숨이 닿는 거리에서 윤조가 웃음 지었다.

“그냥 반 친구요.”

“그냥 반 친구?”

“네. 적당한 거리가 있는 친구.”

“그래? 그래도 자주 보면 특별히 친해질 거야.”

“그럴까요? 근데….”

“제일 친한 건 나로 해.”

어쩐지 윤조는 특별히 친한 친구를 만들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정한은 미리 못 박아 두었다. 윤조가 눈을 접어 가며 웃었다. 그의 잇새로 귀엽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대답 안 해?”

고개를 젖혀가며 웃은 윤조가 정한의 두 뺨을 감싸 쥐며 입을 맞추었다. 정한은 도대체 이게 어디가 귀여운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윤조에게 예쁨 받는 것은 좋았으므로 그의 입맞춤을 계속해서 받아주었다.

“이러다 하겠는데.”

윤조가 제 입술을 벌리고 안을 더듬기 시작했을 때, 정한은 급히 제동을 걸었다. 옅게 풍기는 윤조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아쉽게 갈무리되는 것 역시도.

“그래서.”

정한은 아쉬움으로 후회를 만들기 전에 계속해서 윤조의 학교생활을 궁금해했다.

“또 어땠는데?”

재촉하듯 윤조의 볼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윤조가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정한은 제 데스크에 윤조를 두고 그가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숙제와 넥타이 따위를 챙겼다.

집에 갈 준비가 다 되었는데도 윤조의 이야기는 그치지 않았다. 듣자 하니 이제 겨우 1교시가 끝난 지점이었다.

“배고프지?”

“네!”

역시 먹는 것에는 기민하게 반응하는 윤조였다. 정한은 제 짐을 비롯해 윤조의 짐도 모두 챙겨 들고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 2교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사장님 채찍 교육이 정말 도움 많이 됐어요.”

“당근은 왜 빼먹어?”

“그건… 음….”

수십의 채찍에 커다란 당근 하나가 내밀어졌으니 그가 그리 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지라 정한은 더 따져 묻지 않았다.

윤조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침 등굣길에 우울한 얼굴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던 이가 맞나 싶어 정한은 떠들기 바쁜 윤조의 뺨을 꼬집어 보았다.

“왜요? 제가 너무 말이 많았어요?”

“아니. 아침이랑 달라서 우리 윤조 맞나 했어.”

“아침엔 좀 꼴불견이었죠?”

“그럴 수도 있지 뭐.”

“맞아요. 그럴 수도 있어요.”

윤조는 금세 자신을 긍정하고 다시 떠들었다. 이제 겨우 3교시. 정한은 주차장을 나서며 생각했다. 과연 그가 오늘 일과를 제게 다 말할 수 있을지에 대해. 식사를 끝내고 돌아온 저택에서도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걸 보면, 잠이 들기 직전까지도 그의 이야기는 계속될 듯했다.

“아 참! 미자르에서 온 선생님이 있었어요. 되게 반가웠는데, 제 출신이 바뀌어서 알은척할 수가 없었어요.”

“아쉬웠겠네.”

“네. 여기 두베에서 미자르 사람 만나기가 어디 쉽겠어요?”

“페크다 사람은 없었어?”

“아직 못 만났어요.”

“다가오면 대충 대하면서 멀리해.”

“네. 페크다 잘 모르니까….”

잠시 시무룩해진 윤조가 하다 만 숙제가 생각났는지 서둘러 가방을 뒤적였다.

“어려운 문제가 있어서, 사장님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완전히 까먹은 거 있죠.”

윤조에게 이끌려 서재로 향했다. 그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숙제를 봐주었다. 특별히 어려운 문제만 도움을 청한 윤조는 곧 숙제에 푹 빠진 듯했다. 정한은 잠시 그런 윤조를 구경하다가 저도 오랜만에 책을 읽기로 했다.

그 후로도 윤조의 방과 후 이야기보따리는 매일 풀리곤 했지만 길이는 점점 짧아졌다. 생활 사이클이 정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한은 요즘 숙제에 골몰하는 윤조와 함께 서재에 머무는 시간을 좋아했다.

책 속의 활자보다도 오랜 시간 정한의 눈동자에 맺힌 윤조의 얼굴은 숙제의 난이도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책보다 재미있어 눈을 뗄 수 없었다. 그의 페이지는 차츰 넘어가고 있는데 저는 계속해서 그대로였다.

천천히 또 끈기 있게 저를 향해 달려오는 그를 기다리는 이 시간. 정한은 윤조가 정한 10년의 세월이 변치 않고 즐겁기를, 아마도 그럴 테지만, 좀처럼 넘어가지 않는 책장을 매만지며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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