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머지않아 새집 공사가 마무리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윤조는 괜히 섭섭한 마음에 잠들기 전, 저택을 둘러보기로 했다.
집사였던 시절, 창문 단속을 할 때처럼 꼼꼼하게 방마다 문을 열어 보았다. 그런다고 섭섭한 마음이 가시는 건 아니었지만.
이제는 걸음 하지도 않는 다용도실부터 한때는 평생 혼자서 밥을 먹어야 하나 싶었던 주방에도 들렀다. 괜히 냉장고 문을 열어 보기도 했다. 2층에 이르러서는 다 똑같아 보여 헷갈렸던 방도 어렵지 않게 살폈다.
“아직 안 잤어?”
복도에서 정한과 마주쳤다. 그는 오늘 일이 있어 서재에 오래 머물렀는데, 그가 취침할 시간까지 자신이 돌아다닌 모양이었다. 윤조는 그제야 늦은 시간을 확인하고 정한의 곁으로 향했다.
“새집 다 지어 간다 해서, 좀 둘러봤어요.”
“섭섭한 모양이네.”
“그럼요. 여기 다 제가 쓸고 닦았는데.”
평생 이곳에서 산 정한만 할까 싶다만. 윤조에게는 스스로 구한 제 첫 직장이자, 마음을 붙이고 살게 된 첫 집이라 의미가 남달랐다. 그런 윤조를 가만히 보던 정한이 남은 방을 같이 둘러봐주기로 했다.
윤조는 신이 나 정한의 손을 잡고 2층 방을 어슬렁거렸다. 개중 피아노가 있는 방에 이르렀을 때는 휙 둘러본 다른 방보다는 조금 더디게 걸음을 옮겼다.
새집에는 피아노가 없을 텐데.
그러고 보니 예전에 황 집사가 정한이 피아노를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윤조는 괜히 피아노 주변을 맴돌았다.
“쳐 볼래?”
어쩐 일로 정한이 제 마음을 잘못 읽었을까. 윤조는 서둘러 고개를 내저었다.
“칠 줄 몰라요.”
“모르면 모르는 대로 쳐도 돼.”
“그럼 소음밖에 더 돼요?”
“글쎄.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
“전 듣는 사람이고 싶은데….”
“쳐줘?”
“네!”
냉큼 정한의 옆에 붙어 그를 피아노 쪽으로 밀어내었다. 떠밀리듯 피아노 의자에 앉은 정한이 건반을 두드리며 조율이 어떠니 하는 말을 중얼거렸다. 저로서는 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라 가만히 그가 하는 양을 보았다.
한참 피아노를 뚱땅거리던 정한이 결심한 듯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잠시 후, 그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내심 로맨틱한 음이 흘러나올 줄 알았던 윤조는 갑작스레 시작된 발랄한 음에 당황했다. 건반 위를 빠르게 오가는 손가락을 훑어볼 사이도 없이 집중한 정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때문일까. 일찍이 끝난 연주에도 윤조는 반응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별로야?”
“아뇨. 어, 그게….”
어쩌지. 웃음이 났다.
“별로구나.”
“아뇨! 그게 아니라….”
“그럼?”
곡이 정한과 너무 안 어울렸다. 생각하자니 웃음이 또 나왔다. 정한이 심각한 얼굴로 건반 위에 올린 손가락을 그러쥐었다. 윤조는 다급히 두 손을 내저었다.
“그게 아니라! 귀여워서 웃은 거예요. 사장님 손은 이렇게 크고 긴데, 엄청 귀여운 소리를 내잖아요.”
“귀여운 거 싫은데.”
“귀여운 걸 어떡해요?”
정한이 기운 빠진 웃음을 지었다.
“너랑 어울리는 곡 친 거야.”
“저요?”
“어. 그러니까 내가 귀여운 게 아니라, 네가 귀여운 거야.”
“그렇게 귀여운 게 싫어요?”
정한은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윤조는 정한의 팔을 붙잡고 그의 턱 끝까지 얼굴을 들이밀어 보였다. 그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그래서, 무슨 곡인데요?”
“안 알려줘.”
“왜요? 나랑 어울린다면서.”
“인제 보니 아닌 것 같아.”
“치….”
불퉁하게 입술을 내민 윤조를 밀어낸 정한이 맞춰 보라며 다시 한 번 연주해주었다. 윤조는 열심히 웃음을 참으며 귀를 기울였다. 건반에서 튀어 오른 음이 저택을 뛰어다니는 듯했다.
“자. 맞춰 봐.”
감도 잡히지 않았다. 윤조는 자신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에 빠졌다. 심각한 표정의 윤조를 살핀 정한이 그제야 웃음을 보이며 답을 알려주었다.
“강아지 왈츠.”
“아….”
“개 자격 미달이야.”
“그렇다고 뺏어 가지 마세요.”
급히 제 개 자격을 사수하는 윤조의 콧잔등을 간질인 정한이 한 곡 더 연주해주었다. 윤조가 기대했던 로맨틱한 곡으로.
윤조는 홀린 듯 건반 위를 오가는 정한의 손가락을 보았다. 제 몸을 단숨에 휘저어 놓는 그의 긴 손가락이 제 귀까지 매혹했다. 괜히 뒤가 저릿해져 침을 꼴깍 삼켰다. 몸에서 솔솔 피어난 페로몬이 어떤 말을 흘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주중은 안 된다며. 주말까지 기다려.”
연주를 끝낸 정한이 말했다. 그에게 박수를 보내려던 윤조는 손을 내리고 그를 놀란 눈으로 보았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은근한 제 페로몬이 뒤늦게 느껴졌다.
“학업에 지장 없게. 시험에 지장 없게.”
고대했던 학교생활이었지만 막상 수업을 따라가기란 벅차고, 다가올 시험이 걱정되어 정한에게 저를 통제해주기를 부탁했다. 입학시험을 준비할 때처럼 서로 의견을 절충해 주중에는 금욕적인 생활을 유지하기로 했던 게 고작 얼마라고 이리도 쉽게 휩쓸리고 말았을까.
“뭐… 가끔 일탈도 하고 그래야 사람이….”
윤조는 코끝을 매만지며 제 페로몬을 갈무리하지 않고 계속해서 흘려대었다. 그러자 정한이 턱 끝을 잡아 쥐고 입을 맞추었다. 윤조는 저를 순식간에 감싸는 정한의 페로몬에 웃음 지었다. 꼭 그것처럼 저를 틀어쥔 정한의 손이 뜨겁게 목덜미를 더듬었다. 윤조는 균형을 잃고 허우적거리다 건반을 눌러 짚었다.
쾅!
생애 처음 내어 본 피아노 소리는 꽤 끔찍했다. 그 뒤로 곡처럼 이어진 소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급히 맞물린 흥분이 때 이른 끝을 맞이했어도 둘은 그칠 줄 몰랐다. 파정의 여운이 가라앉기도 전에 성기를 빼낸 정한이 윤조를 건반 위에 앉혔다.
쿠앙!
엉덩이로 깔아뭉갠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윤조는 건반 사이로 스며든 정한의 정액을 보고 놀랐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정한이 윤조의 다리 사이를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어떡해요…?”
“어떡하긴.”
태평하게 대답한 정한이 건반을 짓누르며 윤조를 제 두 팔 사이로 가두었다. 윤조는 제가 움찔거릴 때마다 제 좁은 틈으로 새어 나가는 그의 정액을 느꼈다. 흥미롭게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정한이 하의만 탈의 중인 윤조의 입술을 머금었다.
“으음….”
윤조는 그가 제 혀를 강하게 빨 때마다 밑을 조였다가 풀어대길 반복했다. 더는 눌릴 것도 없는데 자꾸만 건반이 소리를 내었다.
둥, 당당.
윤조는 몸을 들썩이며 정한의 목을 끌어안았다. 정액으로 질퍽한 사이를 가르고 정한이 다시 삽입했다. 윤조는 허리에 닿는 딱딱한 피아노를 지지 삼아 정한에게 매달렸다. 그가 저를 쳐올릴 때마다 새로운 음이 늘어갔다.
두당, 당, 땅!
발끝이 오므라들었다. 윤조는 정한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페로몬이 격렬한 연주처럼 저를 삼킬 듯했다. 종잡을 수 없는 연주가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하아, 하, 아….”
건반에 난타당한 엉덩이를 움켜쥔 정한이 깊숙하게 치고 들어왔다. 달랑거리던 윤조의 다리가 허공을 가르며 뻣뻣하게 펴졌다.
“아아…!”
윤조는 정한의 허리를 다리로 그러안으며 제 안에 쏘아지는 정액을 느꼈다. 간지럽게 내벽을 두드린 백탁의 액체는 그가 몸을 빼자 건반에 고이다 못해 바닥에 점을 찍듯 흘러내렸다.
“한 번 더…?”
정한이 이마에 입을 맞추며 물었다. 윤조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에게 몸을 맡겼다. 그 후로 또 한 번의 연주가 끝나자 더는 버틸 힘이 없었다. 녹진한 몸과 홀가분한 기분이 잠을 요청했다.
빨갛게 부어오른 엉덩이를 주무르는 손을 느끼며 윤조는 두 눈을 감았다. 뭉근한 열기가 이불처럼 몸을 감쌌다. 윤조는 순식간에 잠에 빠졌다. 제멋대로인 연주만큼이나 달콤한 잠이었다.
* * *
두베 시내의 새집이 완공되고 수일 후, 주말을 맞이해 두 사람은 본격적인 이사를 시작했다.
“특별한 것만. 알았지?”
“네.”
짐을 직접 옮길 필요는 없었기에 딱히 할 일이 없었던 윤조는 정한의 말에 따라 특별히 가지고 가고 싶은 것만 체크하기로 했다.
“난 테라스에 있을게. 끝나면 와.”
“금방 갈게요.”
“천천히 해.”
마음에도 없는 소리.
계단을 내려가는 정한을 보며 윤조는 웃었다. 그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바라본 뒤에야 인부들로 북적거리는 저택을 돌아다녔다.
어디 빼놓은 게 없을까 싶어 이리저리 기웃거렸지만, 딱히 챙겨 갈 물건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계속 빈손이었다. 이만 정한의 차를 타고 새집으로 갈까, 하다가 퍼뜩 생각난 게 있어 서재로 향했다.
“이쯤에 있을 텐데….”
책장을 훑어 내리던 윤조의 눈이 번뜩였다. 누가 볼세라 냉큼 꺼내어 품에 안은 책은 [남성체의 수유 방법]이었다. 하고많은 책 중에 왜 이 책이 떠올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러모로 정한과의 사연이 있던 터라 남겨 두고 가기 싫었다. 무엇보다….
“아직 멀었어?”
기다리다 못했는지 정한이 불쑥 나타났다. 윤조는 책을 안은 채 정한을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윤조가 안은 책 표지로 향했다. 지루해 보이던 얼굴이 순간 흥미롭게 변했다.
“호, 혹시나 필요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잖아요.”
“올지도 모르는 게 아니라, 오겠지.”
“…네.”
“그거면 됐어?”
윤조의 고갯짓에 정한이 대신 책을 손에 쥐고 서재를 나섰다. 윤조는 정한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복도가 워낙 복잡해 손잡기는커녕 옆에서 걸을 수도 없었다.
“생각보다 짐이 많네.”
“그러게요. 사장님 옷이 진짜 많아요.”
걸음을 우뚝 멈춘 정한이 몸을 돌려 보았다. 윤조는 또 제 호칭이 거슬렸나 싶어 서둘러 말을 고쳤다.
“자기, 옷이 많네요.”
“좀 버릴까?”
“왜요? 사장님 옷 다 예쁜데, 왜 버려요?”
“어차피 다 입지도 않는걸?”
계단으로 가려던 걸음을 튼 정한이 큰방으로 향했다. 윤조는 그가 무슨 생각인가 싶어 서둘러 따라갔다.
큰방 안쪽의 옷 방을 정리 중인 인부들에게 정한이 대충 손짓하며 안쪽의 옷은 다 버리라고 지시했다. 막연한 지시에 서로 눈짓을 주고받은 인부 중 하나가 쓰고 있던 마스크를 걷어 내고 정한에게 물었다.
“어디만큼 안쪽을 말씀하시는 건지….”
정한은 제게 말을 건 인부가 선 자리에서부터 옷 방 맨 끝까지 것을 모두 버리라고 했다.
“처리 비용은 따로 청구하세요.”
“알겠습니다.”
윤조는 조금 아까운 마음으로 옷 방을 바라보다 정한을 따라 방을 나갔다.
“어떻게 보지도 않고 버리세요?”
“어차피 또 쌓일 테니까.”
말을 보태 봐야 그의 옷처럼 쌓이기만 할 뿐이라 더 이상의 참견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 가면 되지?”
“네.”
현관문을 나서자 보안 요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새집은 저택과는 다른 보안 시스템이었기에 그들과는 이제 얼굴 볼 일이 거의 없었다. 이따금 순회 차 도는 요원들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마주칠 일은 어려우리라.
“왜?”
걸음이 더딘 윤조의 기척을 알아챈 정한이 발을 멈추고 보았다. 윤조는 그의 손에 들린 수유 책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언제든 올 수 있어.”
섭섭한 마음이 보였는지 정한이 한 걸음 다가와 손을 붙잡았다. 윤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현관 앞 포치를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이 현관문을 통해 그간 얼마나 제게 많은 일이 찾아왔는지. 그로 인해 자신이 지금 어떤 것을 얻고, 어떤 사람을 가지게 되었는지, 너무 잘 알아서 헤어지기가 아쉬웠다.
“계속 비어 있을 거 생각하니까 미안해요. 사람이 안 살면 아무리 가꿔도 티가 나는데….”
“그럼 주말마다 여기서 지내든지.”
그럴까, 하다가 그땐 새집에 정을 붙여 저택에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이래저래 저택에게 미안해졌다.
“누구 없을까요? 여기서 살 사람.”
“글쎄. 이 저택 감당할 사람이 두베에 몇이나 있을까 모르겠는데?”
윤조는 정한의 손을 잡고 포치를 벗어나 저택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한눈에 담기 어려운 이 어마어마한 저택을 감당할 사람. 딱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마땅한 사람이 하나 있긴 한데.”
“안 돼.”
“왜요?”
“그럼 너 여기 놀러 못 와.”
“그땐… 쫓아내죠, 뭐.”
정한이 기가 찬 듯 웃었다. 정한도 쫓아냈는데 저라고 못할까 싶었다. 그렇다고 정말 쫓아낼 생각은 아니었지만.
“아니, 그렇잖아요. 원래 여기서 사셨는데….”
“음… 글쎄.”
“지하에 회장님 와인도 있고, 제가 그거 좀 많이 마시기도 했는데….”
윤조는 정한의 팔을 붙들고 부탁하듯 말했다. 권 회장이 저택에 다시 돌아오게 되면 마음껏 찾아오는 일은 어렵겠지만, 먼지가 쌓일 일도, 텅 비어 낡아 갈 일도 없을 듯했다. 무엇보다 이 저택에 사람 사는 온기가 있었으면 하는 게 전직 집사 되는 자의 마음이었다.
“말씀은 드려볼게.”
“텅 비고 쓸쓸해질 저택보다는 나을 것 같아요.”
정한이 졌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만 드려서는 안 되고, 꼭 들어오시라고 설득해야 할 테다. 윤조는 전보다 가벼워진 마음으로 요원들과 인사를 하러 나섰다.
“이제 또 언제 뵐까요.”
보안 팀장이 아쉬운 얼굴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리 많은 교류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나타나준 팀장에게 여러모로 고마운 마음이 있었다. 윤조는 팀장이 건네는 손을 맞잡고서 될 수 있는 한 자주 오겠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는 조금도 믿지 않는 얼굴로 저를 보았다.
“아까 하시는 말씀 다 들었습니다.”
윤조는 당황하여 변명하듯 덧붙였다.
“저택이 빈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저희에게 많은 숙제를 주고 가시는군요.”
“그럼 지금이라도 무를까요…?”
“아, 제가 무어라고….”
팀장이 정한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윤조는 팀장을 따라 정한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엉뚱한 곳에 가 있었다. 팀장과 자신이 맞잡은 손으로. 윤조는 슬그머니 제 손을 놓는 팀장을 보며 웃었다.
“그럼, 건강히 지내십시오.”
“네, 팀장님도, 팀원분들도 모두 건강하세요. 그간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무서운 삼촌이 찾아오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고 지냈어요.”
대부분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을 했지만, 팀장만은 제대로 알아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윤조는 차에 타기 전, 보안 요원 뒤로 자리한 저택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창과 창. 이 선물 같은 곳을 떠나 이제 또 다른 선물이 있을 장소로 향해야 했다.
재촉하지 않고 제 작별을 기다린 정한의 차에 올랐다. 문이 닫히자, 잠시의 미련도 없이 차가 미끄러지듯 저택을 빠져나갔다.
두베 시내까지 꼬박 30분을 달렸다. 그간 윤조는 저택이 있는 방향을 향해 이따금 고개를 돌리며 그리운 얼굴을 했다. 그러나 완공된 새집에 도착했을 때, 언제 섭섭함과 그리움으로 미련이 뚝뚝 남았나 싶게 윤조는 잔뜩 들떴다.
“손바닥 뒤집듯 하네.”
반박할 수 없는 정한의 말에 윤조는 그저 웃음만 지었다.
“들어가자.”
차고에서 나와 일부러 대문에서부터 구경하며 들어가기로 했다. 튼튼한 대문을 지지하고 있는 담벼락은 목을 젖혀야 겨우 전체를 올려다볼 수 있었다. 그간 학교생활에 열중하느라 발길이 뜸했던 탓인지 이 담벼락을 포함하여 생소한 것들이 많이 늘어나 있었다.
“카메라가 저를 따라다녀요.”
대문 앞에선 윤조를 인식한 CCTV 카메라가 이동하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려대었다. 윤조는 그 외에 또 한 대 달린 고정된 카메라를 보고서 앞으로 이 둘을 초소의 보안 요원들처럼 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얘를 팀장이라고 해야겠어요. 똑똑해 보이니까.”
저를 따라다니는 카메라를 가리키며 말했더니 정한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럼 쟨 뭔데?”
“팀원 1이죠, 뭐.”
싱거운 대답에 윤조의 머리를 흩트린 정한이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담벼락 너머의 집은 정원과 같은 나무숲을 지난 뒤에야 모습이 보이는 구조였다. 윤조는 숲속 같은 길을 걸으며 계속해서 좌우를 살폈다. 언제 이 나무를 다 심었는지, 마지막으로 왔을 때와 전혀 다른 인상에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그러다 지쳐. 대충 봐.”
뒤처진 윤조의 손을 붙잡고 정한이 성큼성큼 안으로 향했다. 작은 계단을 오르자 저 너머에 푸른 수영장이 나타났다. 윤조는 저도 모르게 소리 질렀다.
“와!!!!”
정한이 숙제로 내어준 태블릿에 있던 수영장과 똑같았다. 출렁이는 푸른 물은 없었지만 반짝거리는 타일이 너무나 예뻤다.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 홀린 듯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직접 매만져 보자 풀 사이드에 선 정한이 넌지시 굽어보았다. 윤조는 제 머리 위로 드리운 정한의 그림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눈을 들어 머쓱하게 웃었다.
“물 받아줘?”
“에이, 지금은 좀 추워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윤조는 물이 나올 만한 곳을 찾아 눈을 돌렸다. 그러다 뒤늦게 자신이 지정한 색으로 펄럭이는 파라솔을 발견했다.
“오!”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윤조를 가만히 지켜보던 정한이 보다 못했는지 선베드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손에는 여전히 수유 책이 들려 있는 채였다.
“예쁜 개나리색이에요, 그죠?”
“어. 색 잘 나왔네.”
“빨리 여름 왔음 좋겠다. 그럼 여기서 종일 살 텐데.”
생각만으로도 행복해졌다. 드문드문 지뢰처럼 자리한 시험만 아니라면, 마음 놓고 놀 생각만 했을 텐데. 여름쯤엔 기말에 치이고 있을까. 윤조는 조금 우울한 얼굴을 하고서 정한의 곁에 앉았다.
“올해는 참을래요. 대학 시험도 있고….”
“적당히 쉬는 시간도 가져야지.”
“…그럴까요?”
“그럼. 여름 한정으로 하루 30분은 허락해줄게.”
“그 정도만 되어도 좋을 것 같아요.”
정한이 허리를 안으며 제 곁에 바짝 몸을 붙였다. 윤조는 고개를 숙여 정한과 입을 맞추었다. 짧게 닿는 것이 아쉬웠는지 곧 그가 뒷머리를 당기며 깊게 혀를 찔러 넣었다. 윤조는 정한의 가슴 위로 몸을 기대었다. 그와 저 사이에 끼인 수유 책이 조금씩 구겨져 갔다.
불어오는 바람 사이로 정한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따스한 볕만큼이나 느긋한 그의 마음이 읽혔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듯. 윤조 역시 집을 더 구경하고 싶었기에 곧 떨어진 입술을 아쉽게만 보았다.
“이제 들어갈까?”
선베드에서 일어나 정한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 잔디에 놓인 디딤돌 위를 껑충껑충 뛰어 현관문 앞에 이르렀다.
“열어요?”
“어. 열어 봐.”
“후. 떨려요.”
“다 아는 거잖아.”
“그래도.”
윤조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육중한 현관문을 힘껏 열었다. 작은 태블릿 속의 세상이 크게 확대되어 눈앞에 나타났다.
“우와….”
정한의 말대로 집의 구조는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사뭇 느낌이 달랐다. 거기다 자신이 고른 색을 어찌나 잘 구현해 놓았는지, 거슬리는 것 하나 없이 모든 가구와 어우러져 스스로를 칭찬하고 싶었다.
“누가 골랐는지 몰라도 벽이 참 예쁘네요.”
능청스러운 제 칭찬에 정한이 웃어대었다. 윤조는 너른 거실을 훌쩍 둘러보고 정한이 제일 먼저 들어간 주방도 살폈다. 그가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어 물을 마셨다. 원래 사는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사장님은 왜 이렇게 다 자연스러워요?”
냉장고와 인접한 바 테이블 아래 스툴을 꺼내어 걸터앉았다. 정한이 바 테이블 위로 마시다 만 물병을 올리고서 턱을 기대어 보았다.
“내가 설계했으니까. 누구보다 잘 알지.”
“아아, 그렇지.”
이 집이 그가 제게 준 선물이란 것을 잠시 잊었다. 자신이 한 것이라고는 고작 색칠 놀이뿐. 윤조는 스툴에서 내려와 정한의 선물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여기는… 서재.”
저택의 서재와는 달리 안쪽에 개인 데스크는 없었고, 정한과 공부하기 좋은 큰 테이블만 놓여 있었다. 윤조는 책으로 빼곡한 벽면을 둘러보다 창가에 놓인 긴 소파에 걸터앉았다.
창 너머로 숲이 보였다. 이름 모를 나무들뿐이었지만, 한 해, 두 해, 살아가면서 알아 갈 나무들이었다.
“여기 있는 책은 저택 서재에 없는 책이에요?”
윤조를 따라 들어온 정한이 테이블에 기대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없는 것들 위주로 골라 넣었는데, 우리가 읽은 책은 다 있어. 또 네가 읽었으면 좋겠다 싶은 것들도.”
마지막 말을 강조하듯 정한이 수유 책을 책장 한쪽에 끼워 넣었다. 윤조는 그 자리를 잘 봐두었다가, 2년 뒤에 관심을 가져 보자고 생각했다. 아마 그때쯤엔 대학 시험을 무사히 통과해 대학에 다니거나, 혹은 시험에 낙방해 시험공부에 매진 중이라 임신은 먼 얘기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방은 안 봐?”
“볼 거예요.”
정한이 이리 오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윤조는 냉큼 일어나 정한의 손을 맞잡았다. 그의 손에 이끌려 들어선 곳은 저택에도 있었지만 거의 들어가 본 적 없는 운동 기구가 있는 방이었다. 윤조는 벽면의 거울만 흥미롭게 보다가 서둘러 나왔다.
서재와 운동 방 사이에 작은 문은 샤워 부스가 달린 욕실이었다. 윤조는 자신이 고른 타일을 만족스럽게 매만지고서 빠르게 욕실 구경을 끝냈다.
정한이 재촉하듯 윤조의 손을 이끌고 또 다른 방으로 향했다. 안이 텅 비어 있었지만, 벽면을 두른 가구를 보아하니 드레스 룸이었다. 저택에서 끊임없이 실어 나르던 옷을 떠올리며 윤조는 정한의 옷을 버리고 온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대망의 안방. 정한이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가라는 듯 턱짓을 해 보였다. 윤조는 정한이 어깨를 붙든 힘에 밀려 안방으로 툭 떨어지듯이 들어섰다.
정한이 특별히 주문한 거대한 침대가 한가운데 떡하니 놓인 공간은 태블릿으로 보았을 때와 달리 그 부피가 상당해서 언뜻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윤조는 침대를 빙 둘러 걸어 보며 넓이에 놀랐다.
“수영장이에요.”
“보통 운동장이라고 하지 않아?”
“네?”
“아냐. 맘에 들어?”
“네. 몇 번이고 굴러도 되겠어요.”
보드라운 침대 시트를 매만지며 윤조는 속으로 웃었다. 어떤 식으로 구를지는 오늘 밤, 아니면 아주 조금 뒤가 되면 알 수 있을 듯했다. 엉큼한 제 마음을 알았는지 정한이 훌쩍 다가왔다.
“꼭 세 번 반. 구를 수 있어.”
“굴러보셨어요?”
“디자이너가 그렇게 설명하던데?”
“아아….”
김이 샌 기분에 윤조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내밀었다. 정한이 윤조의 뺨을 다독이며 제가 원하는 말을 그제야 해주었다.
“진짠지 알아보자.”
“…언제요?”
“지금은 좀 힘들고.”
“왜요?”
“곧 짐 도착해. 우리 집 비워줘야 할 거야.”
“아….”
“배 안 고파?”
“고파요.”
“가자. 예약해 둔 데 있어.”
“또 다 빌렸어요?”
당연한 듯 고개 끄덕이는 정한을 보며 윤조는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의문을 살짝 던져 보았다.
“저택도 그렇고, 식당도 그렇고… 사람 많은 거, 왜 싫어하세요? 혹시, 사람이 싫으신 거예요?”
무슨 소리냐는 듯 내려다본 정한이 헛웃음을 지었다.
“싫은데 왜 살려?”
과연. 그렇다. 허를 찌른 정한의 대답에 윤조는 멍청히 입만 벌리고 있었다.
“병원 와 있는 것 같아서 싫어진 거야. 예전엔 괜찮았어.”
“아아… 일종의 직업병이네요?”
“뭐, 그런 셈.”
짐이 도착할 시간이 가까워졌는지 정한이 집을 나서며 시계를 확인했다. 그의 곁에 서서 잠시 거실을 둘러보던 윤조는 거실 유리문 너머에 있는 테라스를 소홀히 봤다는 걸 깨달았다. 정한의 손을 슬그머니 놓으며 테라스 쪽으로 가자 수영장이 있는 곳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나타났다.
“이런 나무는 도대체 어디서 구하셨어요?”
테라스로 쭉 걸어 나오니 커다란 나무가 긴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윤조는 고개를 바짝 들고 바람에 몸을 비비는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정한이 좋아할 풍경이었다.
“테이블 몇 개 좀 둘까 해. 이대로도 좋긴 하지만.”
“네. 차 마시기 딱 좋은 곳이네요.”
정한이 웃으며 윤조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이만 가야 할 시간인 듯했다. 하지만 그 전에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되었다.
“고마워요, 사장님.”
정한이 윤조의 뺨에 입을 맞추며 웃었다. 선물을 받은 건 자신인데 오로지 주기만 한 그가 더 기뻐하는 듯했다.
“방이 부족하진 않아?”
“부족하긴요. 전 침대랑 수영장, 또 이 나무만 있으면 돼요.”
“냉장고는?”
“아. 그것도.”
윤조는 제 배를 매만지는 정한의 손을 붙잡았다. 짐이 도착했는지 바깥이 조금 소란스러운 느낌이 났다. 몸을 더듬던 손길이 아쉽게 떨어졌다.
“3시간 뒤에 오시면 될 겁니다.”
인부들이 바쁘게 안으로 들어왔다. 윤조는 정한과 함께 차를 가지러 차고로 이어진 계단으로 나섰다가 차고 앞까지 이사 차가 늘어서 있어 차는 포기하고 걷기로 했다.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며 메뉴를 정했다. 주메뉴는 조금의 의견 충돌이 있긴 했지만, 디저트는 단연 만장일치였다. 디자이너의 말대로 세 번 반은 구를 수 있는 침대 위에서 먹는 디저트는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을 만큼 맛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등교하지 않는 주말인데도 윤조는 평소처럼 눈을 떴다. 처음으로 맞이한 새집에서의 아침은 꽤 평범했다. 천장 조각이 없기 때문일까.
윤조는 평평하고 단조로운 천장을 응시하다 정한의 품으로 굴러 들어갔다. 정한의 가슴 근육을 주물럭거리고 있자니 그가 느리게 눈을 떴다.
“더 자. 종일 하품하지 말고.”
졸음기 하나도 없는 눈으로 정한이 말했다. 윤조는 제 허리를 당겨 안는 정한의 손길에 잠시 떼를 쓸까 하다가 그의 말을 듣기로 했다.
“모빌이라도 달아줘?”
막 잠이 들려는 찰나, 정한의 말에 윤조는 웃음을 터트렸다. 천장 조각을 아쉬워 한 저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윤조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를 보면 그만이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깜박이며 윤조는 정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제는 없는 거 몰랐어요.”
“그랬어?”
“네. …자기만 봤는데.”
정한이 웃으며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윤조는 정한의 간지러운 숨결에 어깨를 움츠리면서도 제 얼굴로 쏟아지는 그의 입술을 밀어내지 않았다.
이러다 또 하겠다, 싶은 찰나 정한이 눈꺼풀 위로 손을 덮어 내리며 자라고 일러주었다. 윤조는 정한에게 안겨 길게 하품했다. 등을 다독이는 손길이 금세 단잠을 불러왔다.
*
정오가 한참 지난 시각에 일어나 느지막이 하루를 시작했다. 밀린 공부에 앞서 꼼꼼히 하지 못한 집 구경에 나설 생각이었다. 테라스로 나와 맨발로 잔디를 밟아보기도 하고, 수영장 쪽으로 가 풀 사이드를 거닐기도 하며, 나름대로 새집 적응을 하고 있었다.
종국엔 정한에게 뒷덜미가 붙잡혀 서재에 앉게 되었지만.
“따라가기 벅차다며.”
“맞아요. …하루하루 부끄러워져요.”
“그럼 해야겠지?”
“…네.”
윤조는 이따금 밤새 시달린 허리를 두드리며 열심히 정한의 채찍을 맞았다. 정한의 곁에서 달리기 이전에 반 아이들을 따라잡으려면 매일 전력 질주를 해야 했다.
“근데요, 형.”
“뭘 부탁하려고 형이야?”
“부탁이 맞긴 한데. 형도 좋을걸요…?”
“뭔데.”
“우리, 주말만 하잖아요. 새집에 온 기념으로… 주말마다 장소를 바꾸는 건 어때요? 그럼 더 빨리 여기 정들겠는데….”
빤히 보던 정한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 서재는 빼고.”
“왜요?!”
단연 서재를 제일 먼저 원했던 마음이라 윤조는 저도 모르게 큰소리를 내었다. 정한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보았다.
“지금도 딴생각하는데, 기억이 생겨 봐. 시도 때도 없이…. 안 돼.”
“치….”
“그럼 오늘은 식탁?”
식탁.
식탁이라 하면, 주방. 벌써 등 뒤에 닿을 냉장고의 선득한 차가움이 느껴졌다. 윤조는 제 투정을 순식간에 잠재우는 정한의 말에 입술을 꽉 깨문 채 웃음 지었다.
“자, 그럼 집중.”
“네에.”
“대답은 잘하지.”
뺨을 꼬집는 손이 아프지 않고 간지러웠다. 기시감처럼 느껴지는 순간에 윤조는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저택과 전혀 다른 곳으로 이사 왔어도 그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실제로 그와 단둘인 일상은 여전했다.
똑똑.
딴생각에 열중인 윤조를 향해 정한이 경고성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윤조는 잘만 하는 대답 대신 그의 말과 펜 끝에 집중했다.
째깍, 째깍. 그와의 변함없는 시간이 새겨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