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3화 (15/22)

03.

학교와 집이 가까워지니 등교 시간도 느긋해졌다. 그렇다고 걸어가지는 않았다. 날이 궂을 때도 있었고, 정한의 병원은 윤조의 학교에서 조금 더 가야 했으므로 윤조는 늘 정한의 차를 타고 다녔다.

그러고 있자니 슬슬 욕심이 났다. 집사였던 시절 없는 자격에 마음이 아팠던 기억에 더해, 최근 반 친구들에게 들은 말까지 있어 윤조는 남들보다 일찍이 시작한 시험 준비로 바쁜 와중에 난데없이 불타오르고 말았다.

“주말에만 할게요.”

“대학 가서 따도 늦지 않아.”

“반 친구들은 벌써 다 땄대요. 여긴 열여덟 살에 따도 된다면서요?”

어찌나 씩씩거렸던지 저도 모르게 콧김까지 났다.

“그렇긴 한데.”

“걔들도 하면 나도 할 수 있어요.”

“네가 못한다는 게 아니야. 면허 따는 데 할애하는 시간이 지금은 불필요하다는 거지.”

“그러니까 주말에만요. 딱 1시간만요. …형이 가르쳐준다고 했잖아요. 기억 안 나요?”

“이럴 때만 형이지?”

“이럴 때만이 아니라…!”

“생각 좀 하고.”

“따기만 할게요. 네?”

정한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금 내뿜는 윤조의 콧김에 이기지 못하고 허락하였다.

“어어어어!!”

그 허락이 문제였을까, 제 콧김이 문제였을까. 둘 다일까. 아니, 정한은 아무 잘못도 없다. 그는 이 미래를 예견했을 테다.

쾅!

그와의 퇴근길. 집에 도착하기 딱 100미터 전. 윤조는 조금 욕심을 내어 자신이 차고에 차를 넣어 보겠다고 우겼다. 정한은 도로와 달리 한적한 골목을 확인한 뒤에 허락을 해주었는데, 이게 문제의 발단이었다.

“괜찮아?”

“네… 괜찮아요.”

사람을 치지 않은 게 어디일까, 하면서도 담벼락에 찌그러진 범퍼처럼 제 마음이 구겨진 듯했다.

“일단 내려, 내가 할게.”

꼼짝없이 얼어버린 윤조를 대신해 정한이 차를 빼주었다. 윤조는 대문 옆 담벼락에 갈린 차를 보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문을 지키고 있는 팀장이 그런 윤조를 가련하게 바라보았다.

이 차가 얼마더라….

윤조는 반지도 몰랐고 차도 모르는 사람이라 아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사장님….”

말끔하게 주차를 끝낸 정한이 윤조의 부름에 급히 다가왔다.

“왜, 어디 아파?”

“아뇨… 아니에요.”

“놀랐나 보네. 가서 차 한잔 마시면 괜찮을 거야.”

윤조는 정한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통장에 얼마가 있더라.

열심히 제 당첨금을 떠올려 보았다. 한데 거기에 찍힌 ‘0’의 수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많아 봐야 저 차만 할까. 일단 제 전 재산을 바치는 수밖에 없는 듯했다.

이렇게 당첨금을 한순간에 날리다니 조금 허무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그 돈이라도 있는 게 어디일까. 윤조는 내심 안도하며 따뜻한 차를 내어주는 정한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사장님….”

막 맞은편에 앉으려던 정한이 고개를 들고 보았다. 윤조는 잠시 그에게 앉아 있으라 하고는 안방으로 들어가 제 서랍장을 뒤졌다.

얼마 없는 짐 속에 고이 보관해 놓은 통장을 꺼내어 ‘0’을 세어 보았다. 총 아홉 개. 다행히 앞자리까지 더하면 넉넉하게 갚을 수 있을 금액으로 추정되었다.

“이걸로 어떻게, 안 될까요?”

가진 것을 전부 내밀어 보이자 정한의 반응이 떨떠름했다. 역시, 부족했던 걸까. 윤조는 낙담한 얼굴로 통장을 보았다. 또 한 번 당첨의 행운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듯했다.

“무슨 뜻인데 이거.”

“제가 차를…, 또 담벼락을…, 벽돌 떨어진 거 봤거든요….”

“그래서.”

“그러니까 이걸로 어떻게….”

“이거, 네 등록금 할 거라며.”

“그렇긴 한데….”

“차 그거 얼마 안 해. 벽돌도 달랑 하나고.”

“얼마… 안 해요?”

“어. 그러니까 넣어 둬. 어차피 버리려고 했어.”

“그 차를요? 사장님… 그거 자주 타고 다녀서 가져온 거 아니에요?”

“눈에 보이는 아무거나 가져온 거야. 저택에 차 많은데, 뭘.”

“아… 그래도, 이렇게 입 닦는 건 좀….”

“신경 쓰지 마. 원래 그러면서 배우는 거야. 다음에 가져올 차도 마구 긁어도 돼. 걔도 버릴 거거든.”

“…….”

“사람만 안 치면 돼. 알았어?”

“네….”

정한이 제 앞에 놓인 통장을 밀어주었다. 그는 늘 저를 믿게 하는 사람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곧이곧대로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우겨댄다면 정한이 섭섭해할 것을 알기에 그를 믿고 넘어가기로 했다. 10년 뒤에 돈을 벌어 그에게 차를 한 대 사주지 뭐, 하고.

의도치 않게 차를 구겨 놓은 탓에 다음 날은 걸어서 학교에 갔다. 졸지에 정한도 걷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꽤 신선한 느낌이라 당분간 걸어 다니기로 했다.

함께 길을 걷는 게 어찌나 즐거운지. 봄바람이 살랑살랑 코를 간질이고 바람에 날리는 꽃잎이 아름다워 이따금 발을 멈춰 서게 했다. 차창 너머로 바라만 보던 것이 머리 위로 쏟아질 때의 황홀함이란.

거기다 그간 가지 못했던 골목 곳곳에 있는 식당에도 들를 수 있어 좋았다. 식당 선별 기준은 반 친구들의 추천이었다. 어찌나 정한의 취향과 동떨어졌는지. 윤조는 제 의견 피력을 조심스러워하면서도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었다. 반 친구들이 겪는 건 다 해 보고 싶었다.

기꺼이 제 호기심 해소에 동참해준 정한은 오늘, 작은 의자에 앉아 그 큰 덩치를 잘도 버티고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도 얼굴 한번 구기지 않고 저와 장단을 맞춰주는 정한이 윤조는 어른이라 생각했다. 저 역시 어른이었지만 스스로도 미성숙하다 인지하고 있었기에 정한이 더욱 어른스러워 보였다.

쪽.

집으로 가는 길. 잡은 손을 흔들며 걷다 제 손등에 입을 맞추는 건, 어른스럽지 않기도 했지만.

쪽.

윤조는 정한이 제 손등에 입을 맞출 때마다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넥타이도 빼고, 그 위에 카디건도 걸쳤지만, 저를 알아보는 친구들이 혹시나 있지 않을까 했다.

쪽.

그치지 않고 입을 맞추던 정한이 윤조의 고개가 돌아가자 살갗을 이로 긁어댔다. 제 시선을 받아내고 나서야 정한이 손을 내려주었다.

“이럴 땐 되게 어린애 같다니까….”

“왜. 어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네. 사장님 저랑 잘 놀아줘서요.”

“나 애들이랑 잘 놀아.”

“그래요…?”

“어. 응급실에 애들이 얼마나 많이 오는지 알아?”

“아… 어? 그럼 제가 애라는 거예요?!”

정한이 웃으며 손을 앞뒤로 흔들었다. 윤조는 반박할 말을 찾아 씩씩거렸지만, 그를 어른스럽다 여긴 것부터가 자신이 애인 것을 자처한 것이라 곱게 입만 다물었다. 그래야 어른이 될 것 같았다.

“재미없네.”

“나 놀리는 거죠?”

“어.”

장난스럽게 웃는 정한의 얼굴을 윤조는 기쁘게 바라보았다. 차를 타고 다닐 땐 그는 늘 운전만 하고, 저는 제 하루만 떠들어 댔는데, 이렇게 그와 걷게 되니 서로에 관한 말만 하고 있어 좋았다. 부디 걷기 힘들지 않게 날씨가 이대로 좋았으면 했다. 그 바람이 아쉽게도 다음 날은 비가 왔고, 오랜만에 차고를 나선 차는 신나게 먼지를 씻어 내었다.

* * *

그로부터 며칠간 비가 내렸다가 그쳤다가 반복했다. 빗물을 머금은 잔디가 쑥쑥 자라나고 공기는 날로 따뜻해졌다.

오늘은 해가 쨍쨍하게 뜬 관계로 오랜만에 걸어가기로 했다. 2주 뒤에 있을 시험을 미리 대비하느라 한동안 몸을 움직이지 않았더니 걷고 싶은 기분이었다.

“오늘 카페 갈까 해요.”

“카페?”

“네. 병원 앞에 있던 거요.”

“아…. 그래.”

“쿠키 먹어야지.”

“저녁 먹어야 하니까 너무 많이 먹진 말고.”

“네에.”

머리를 쓴 핑계라고 해야 할까. 단 게 자꾸 생각났다. 정한의 방에 제아무리 많은 액자가 놓여 있다고는 해도, 생활감이라고는 조금도 없는지라 제 과자 부스러기를 남기기가 민망했다.

거기다 반 친구들이 말하지 않았던가. 카페 소음을 배경으로 하는 공부가 꽤 쏠쏠하다고. 윤조는 오늘 말로만 들은 일을 실행해 볼 작정이었다.

방과 후, 윤조는 병원이 아닌 병원 앞 카페로 향했다. 예전에 정한과 함께 기다렸던 신호등에 서서 건너편의 아기자기한 카페 간판을 바라보았다. 그때만 해도 마음이 참 무거웠는데, 이제는 그 달콤한 쿠키를 먹기 위해 가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신호가 바뀌기 전, 윤조는 학교 마크가 무늬처럼 새겨진 넥타이를 풀어 주머니에 넣었다. 정한의 병원 근처에 오면 넥타이를 푸는 게 버릇이 되었다. 학교에 기혼자는 혼자였기에 괜한 눈요깃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삐비비비빅.

신호가 바뀌었다. 윤조는 단숨에 카페로 가 유리를 통해 내부를 살폈다. 카페에는 적당히 사람이 차 있어 분위기가 아늑해 보였다. 윤조의 입가에 만족한 웃음이 피어났다.

문을 열자 딸랑거리며 종이 울었는데, 그때도 이런 소리가 났나 싶어 긴가민가했다. 정한과 앉았던 자리가 비어 있어 그곳에 가방을 내리고 앉아 메뉴판을 살폈다.

얼음이 가득 든 커피에 쿠키는 기본이었고…. 고개를 든 윤조의 시야 저편, 쇼케이스에 가득한 케이크가 보였다. 입맛을 다시던 윤조는 퍼뜩 떠오른 정한의 말에 눈을 깜박였다.

‘저녁 먹어야 하니까 너무 많이 먹진 말고.’

그렇긴 한데…. 저 예쁜 걸 어찌 안 먹을 수 있을까. 윤조는 주문을 받으러 온 직원에게 커피와 쿠키, 또 케이크 하나를 주문했다.

주문한 케이크와 쿠키는 천천히 먹을 작정이었는데, 커피 맛을 보다 보니 순식간에 동이 났다. 윤조는 달콤한 입맛을 다시며 다시 쇼케이스에 눈을 두었다. 공부를 지나치게 한 탓이려니 하며 잠시 고민했다.

“손님. 뭐 찾으시는 거 있으십니까?”

“아, 그게….”

주문을 망설이는 윤조를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 직원이 케이크를 여럿 추천하였다. 윤조는 개중 짠맛이 난다는 케이크 하나를 추가로 주문했다.

케이크에서 짠맛이 난다니.

경험해 봐야 마땅했다. 주문을 받고 돌아서는 직원을 보며 뜻 모를 감정이 들었지만 아무렴 어떨까. 담벼락에 차를 긁은 경험도 큰 재산이라고 했던 정한의 말처럼 이 또한 경험이니 재산이 될 터였다.

“뭐야… 다 맛있어.”

과연, 경험은 제값을 했다. 또다시 접시를 깨끗하게 비운 윤조는 더는 케이크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정한이 앉았던 자리로 옮겨 앉아 책을 펼쳤다.

단것을 먹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카페에 퍼진 커피 냄새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이 적당한 소음 때문일까. 어느 것이든 친구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윤조는 순식간에 공부에 빠져들었다. 정한의 퇴근 시간은 대략 2시간 뒤. 윤조의 손목시계가 깜박거리며 시간을 알려 왔다.

*

우려했던 바와 달리, 윤조의 병원 출입은 호기심 많은 두 친구의 레이더에 걸려들지 않았다. 봄의 한중간에 오도록 그들은 윤조를 직접 마주치지 않았고, 윤조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학교 마크가 새겨진 넥타이를 풀고 왕래한지라 그를 보게 된 직원들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도 언젠가 걸리겠지, 하며 포기는 하고 있었다. 지겹게 놀려댈 친구들 생각에 괜히 얼굴을 찌푸리다 퇴근 시간을 알리는 시계를 확인하고 곧장 병원을 나섰다.

병원 앞 카페에 있겠다던 윤조의 말에 따라 정한은 평소 잘 건너지 않는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를 기다렸다. 정한의 눈길이 자연스럽게 카페로 향했다.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저 창가에 앉아 있는 게 윤조인 듯했다. 서둘러 가고 싶은 마음에 저도 모르게 발을 까딱였다.

삐비비비빅.

신호음과 함께 신호의 색이 바뀌었다. 정한은 큰 보폭으로 횡단보도를 가로질렀다. 윤조가 있는 창에 서서 그가 저를 보기를 잠시 기대했지만, 공부에 빠진 그는 제게 전혀 눈길을 주지 않았다.

정한은 빠르게 포기하고 곧장 카페로 들어갔다. 종이 달랑거리며 울었다. 이런 소리가 났던가. 잠시 생각하며 윤조의 맞은편에 조용히 등을 대고 앉았다.

그는 여전히 제게 조금의 신경도 나눠주지 않고 공부에 몰두해 있었다. 글씨 쓸 일이 없어 손이 느렸던 게 언제였냐는 듯 지금은 잘도 써 내려갔다. 정한은 제게 다가오려는 직원을 향해 저지의 손짓을 해 보이고 느긋하게 윤조를 구경했다.

그새 자란 머리가 그의 귀 끝에 아슬아슬하니 걸려 있었다. 집중한 얼굴은 언뜻 몽롱해 보이기도 했다. 속눈썹 위로 내려앉은 주광색 빛이 그가 눈을 깜박일 때마다 동그란 뺨 위로 흩어졌다.

그나저나 저 입가의 생크림은 어찌하면 좋을까. 정한은 윤조의 입술을 빨고 싶다고 생각하며 어서 그가 자신을 눈치채길 바랐다.

“하….”

고전했던 문제를 막 끝낸 윤조가 시계를 확인하고 퍼뜩 고개를 들어 창을 바라보았다. 윤조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번졌다. 제 앞에 앉은 이가 창에 비친 탓이다.

“어?”

그제야 윤조가 고개를 돌려 정한을 보았다. 자신을 눈에 담자마자 환하게 웃음 짓는 얼굴. 정한은 그 웃음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자신이 그 눈에 맺히자마자 웃음 짓게 하는 사람인 게 행복하기도 했다.

“언제 왔어요?”

“방금.”

“기척 좀 내지.”

아쉬운 기색의 윤조를 보며 정한은 그의 입가에 묻은 생크림을 손끝으로 닦아주었다. 정한으로서는 별생각 없이 닦은 것이었는데 윤조는 대단한 것이 들킨 양, 두 뺨을 발갛게 물들였다.

“두 개 먹었어요.”

“잘했어.”

“세 개 먹을 뻔했는데….”

“그래, 잘했어.”

민망한 얼굴로 코끝을 비빈 윤조가 테이블 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한은 윤조의 필통을 챙겨주고 일어났다.

“그럼 간단한 거 먹어야겠네.”

“왜요? 저 배 다 꺼졌는데?”

“그래?”

“네.”

하긴. 그럴 만했다. 종일 공부에 매달려서 그런지 그는 예전보다 훨씬 많이 먹었다. 그런데도 살이 찌기는커녕….

“키가 컸나?”

이 또한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정한은 윤조에게서 떨어져 넌지시 그의 키를 가늠했다. 의식하고 보니 조금 자란 것 같기도 했다.

“나 키 큰 것 같아요?”

“조금?”

“그럼 큰 거겠네요. 사장님 눈에는 자 있잖아요. 자.”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면서 사장님 눈을 좀 빌리고 싶다고 말하던 윤조가 퍼뜩 생각난 듯 말했다.

“이제 2주 남았어요.”

“시험?”

“네. 그럼….”

잠시 말을 그친 윤조의 시선이 느껴져 정한은 걷던 걸음도 멈추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우리 이제 진짜 금욕 기간 들어가요?”

지나던 행인이 윤조의 말에 정한을 눈으로 훑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곧장 눈을 돌리긴 했으나 슬쩍 불쾌해진 기분에 정한은 윤조의 흘러내린 카디건을 올려주며 다시 걸음을 이었다.

“오늘은 집밥 먹자.”

“집밥이요? 사장님이 해줘요?”

“어.”

“와. 그럼 엄청 건강식이겠다.”

조금의 기대도 없는 딱딱한 윤조의 말에 정한은 반박하지 못하고 웃었다. 간을 하긴 하는 거냐며, 소금을 가져와 찍어 먹어야겠다고 했던 어떤 날이 있었다.

“간해줄게.”

“진짜죠?”

“어.”

“금욕도 하구요?”

싱거운 식사보다 금욕으로 시무룩해진 뺨을 매만지며 정한은 서둘러 윤조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

2주 뒤, 윤조가 치르게 될 시험은 다른 여러 친구와 경쟁하는 첫 번째 시험이었기에 그의 각오가 남달랐다. 시험 전 2주간의 금욕 기간은 입학시험 후 불안에 떨었던 기억을 바탕으로 윤조가 스스로 만든 기간이었다. 그런데 첫 시험이 오기도 전에 그때의 불안함을 잊은 모양인지 윤조는 이따금 안달 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정한은 모른 척 뒤척이는 윤조를 내버려 두었다. 그에게 휘둘렸다가는 저도 후회할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각인한 이후, 한 번 불이 붙으면 만족의 정도를 모르고 서로에게 몰두하는지라 그의 학업에 지장을 줄 게 뻔했다.

“따로 잘까?”

“그건 더 싫어요.”

금욕 기간 선언을 하고 꼭 사흘째. 지나치게 이르게 찾아온 금단 현상이었다. 일상으로 하고 있는 주중 금욕은 잘 참던 윤조가 2주라는 기간이 생기니 더욱 몸이 단 듯했다.

정한은 저를 뒤에서 안은 윤조의 손을 붙잡고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가 제 등에 붙어 제 냄새를 맡으며 잠들길 기다렸다. 몸이야 달아올랐어도 종일 공부에 시달린 피로 때문인지 윤조는 곧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남은 저만 꽤 괴로운 밤이었다.

정한은 그 외로도 윤조의 기사 노릇, 방과 후 선생 노릇을 톡톡히 해내었다. 사실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일과였는데, 금욕이라는 게 제법 큰 제약이었는지 시험 기간을 포함한 총 3주 차에 접어들 무렵, 저도 슬슬 아랫배가 뭉치는 느낌이 들었다. 때마침 윤조의 시험이 끝나지 않았다면 따로 자다 못해 남편을 두고 혼자 빼는 일을 만들었을지도 몰랐다.

-끝이에요, 끝!

정오가 훌쩍 지난 시각, 시험이 끝났는지 윤조에게 전화가 왔다. 정한은 바삐 움직이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환한 창밖을 보았다.

“고생했어.”

-여보 자기 덕분이에요.

기분이 좋았는지 잘도 여보 자기를 찾는 윤조였다. 정한은 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이만 퇴근하고 싶은 충동에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그를 안고 싶었다.

-보답으로 10배 수프 해 놓을게요.

무언가 잔뜩 사 갈 모양인지 윤조가 어딘가로 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그럼 저녁에 봐요. …여보.

작게 소곤거리는 여보 소리에 정한은 밑이 뻐근해지는 기분이 들어 난감했다. 미련 없이 끊긴 전화를 바라보다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 호출을 받을지 몰라 서둘러 진정을 해야 했다.

정한은 이럴 때 쓰이는 특효약을 잘 알았다. 한승주와 이무헌을 떠올리자마자 피가 싸하게 식었다. 지나치게 식어 소름까지 돋았다.

그로부터 5시간 뒤, 정한은 평소보다 더디게 가는 시간에 이를 갈며 초침이 퇴근 시간을 지나는 순간 병원을 총알같이 튀어 나갔다.

차고에 차를 대고 계단을 올라 집 안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소리를 듣고 주방에서 나온 윤조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사장님!”

왜 지금은 사장님인지. 정한은 이제 그의 호칭에 관해서는 포기 중이었으므로 조금만 아쉬워하고 저를 반기는 윤조를 끌어안았다. 그에게서 고소한 수프 냄새가 났다.

“씻고 올게.”

귓바퀴에 입술을 묻은 뒤, 정한은 윤조를 떼어 놓았다. 안방 욕실로 향하다 문득 침대 위에 점점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웃었다.

풀다 만 넥타이를 잡아 든 채 허리를 굽혀 넌지시 정방형의 비닐을 집어 들었다. 안쪽에 미세한 돌기가 느껴졌다. 이런 건 또 언제 샀나 싶어 서랍을 뒤져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몸이 급했기에 마저 넥타이를 풀어내었다.

종일 뒤집어쓴 먼지를 씻어내고 말끔하게 단장한 뒤에야 찾은 식탁은 단출하면서도 귀여웠다. 말은 다르게 나갔지만.

“많이 준비했네?”

“그럼요. 보답인데.”

제법 꾸며낸 듯한 플레이팅을 보며 정한은 의자를 빼 앉았다. 수프만으로는 부족하다 느꼈는지 윤조는 빵과 고기도 구워 놓았다.

“잘 먹을게.”

정한은 느긋하게 식사를 시작했다. 앞치마 벗는 것도 잊고 오로지 제 감상을 기다리는 윤조를 조금 놀려주고 싶었다.

느린 제 속도를 따라 입을 벌린 윤조의 표정이 지나치게 귀여웠다. 수프 그릇으로 다시 숟가락을 내린 정한을 향해 윤조가 기어코 역정을 내었다.

“아, 좀 빨리 먹어 보지!”

“알았으니까, 입.”

입술을 두드려 보이자 윤조가 제 입을 닫고 인내심 있게 보았다. 그제야 정한은 윤조가 그리도 자랑하던 10배 수프를 맛보았다. 부드럽고, 고소하며, 그렇다고 너무 묽어서 어딘가 허망하지 않은, 있을 건 다 있는 꽉 찬 맛이었다.

“맛있네.”

“괜찮아요?”

“어. 빵 찍어 먹으면 맛있겠다.”

“추천해요.”

“넌 안 먹어?”

“간 보다가 배가 다 찼어요.”

긴장했는지 입맛도 없다며 윤조는 턱을 괴고 정한의 저녁 식사를 구경했다.

“먹는 게 좋을걸?”

“왜요? 그렇게 맛있어요?”

“맛도 있고. 그러다 못 버틸 것 같기도 하고.”

괴고 있던 턱을 손에서 뗀 윤조가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나 너 안 재울 생각인데. 내일 주말인 거 알지?”

“아….”

“그게 진짜 보답이지.”

멍하니 바라보던 윤조가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나 제 수저와 그릇을 가져왔다. 제 몫보다 훨씬 많은 양의 수프를 떠 온 윤조를 향해 정한은 슬그머니 고기가 있는 접시를 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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