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혹여나 미리 실망하여 다음 시험에 지장을 줄까, 오답 체크를 하지 않았더니 후폭풍이 상당했다. 윤조는 이르게도 나온 제 성적표를 보고 절망했다.
방과 후 먼저 돌아온 집에서 정한에게 보일 오답 노트를 작성할 때는 허탈함에 한숨 한 번에 한 글자를 써 내려가느라 문제 하나 작성하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순 말장난이네.”
“…아뇨, 이건 제가 숙지를 못한 거예요.”
“문제 푸는 스킬을 익히면 돼. 거기다 몇몇 문제는 조잡한 느낌까지 있을 정도니까, 윤조 네가…, 윤조야?”
정한이 어떤 위로를 해주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충격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성적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좋게 말해 중하위권이었고, 실질적으로는 하위권이었다.
입학시험은 정말 자격 요건만 갖춘 시험이었던 모양인지 실전은 참담했다. 금욕은 기본이고 코피까지 추가되어야 중간은 할 듯했다.
“문제가 안 좋아. 아니, 더러워.”
“그걸 반 애들은 다 맞추잖아요. 전 그걸 못한 거고….”
인내심 있게 저를 위로하던 정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못했어. 이번엔.”
“네….”
“이제 어떤지 알았으니까 다음엔 잘할 수 있을 거야.”
“또 못하면요…?”
“그땐 다음에 잘하면 돼.”
“…그러다 이 성적으로 졸업하겠어요.”
“그게 어때서?”
“네…?”
“거긴 경험하러 간 곳이잖아. 성적 내려고 간 곳 아냐. 네가 성적 내야 하는 데는 따로 있어. 학교에서는 시험에 대한 감만 익혀도 돼.”
그가 의사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제 든든한 지원자이기 때문일까. 그 어떤 것이든 간에 윤조는 딱 맞는 처방 약을 받은 것처럼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네, 그래도… 다음엔 성적 잘 내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그래. 너무 얽매이지만 않으면 돼.”
실컷 당근을 먹여준 정한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곧 채찍을 꺼내 들었다. 어찌나 정신을 빼놓고 있었는지 오답 노트도 엉망이었다. 윤조는 차근차근 정한과 함께 중간고사 패배 요인을 파악했다. 깊어 가는 봄밤, 머리를 맞댄 두 사람의 얼굴이 진지하게 빛났다.
* * *
차창으로 날아드는 꽃잎이 없어 허전했다. 하루하루 창밖의 풍경이 달라져 갔다.
때는 시험 성적의 충격이 겨우 가신 어느 날이었다. 정한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주말에, 집으로 손님 좀 초대해도 될까?”
윤조는 보닛 앞을 지나는 사람을 보다 정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조심스러운 기색이 신경 쓰였다.
“손님이요?”
“어.”
“누구?”
혹시 권 회장일까.
저택에 돌아간 그가 아들 사는 곳을 궁금해할 건 당연하다 생각하면서도 윤조는 조금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그래서 정한도 저렇게 조심스러우리라. 한데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잠시 생각을 해야 떠올릴 수 있는 주인들이었다.
“아… 여보 친구들?”
“어.”
마뜩잖은 얼굴로 핸들을 돌린 정한의 얼굴 위로 헤드라이트 불빛이 지나갔다. 윤조는 정한의 얼굴을 응시한 채 웃음 지었다.
“언제든 환영이죠.”
“환영하지 마. 그냥, 왔어요, 하고 있어.”
친구들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는 정한의 말에 윤조는 계속해서 웃음만 지었다. 주말이 되어 찾아온 두 사람의 앞에서도 계속.
“두베 시내 한복판에 이토록 한가하게 지어 놓은 것 좀 봐.”
뒷짐을 지고 들어선 승주가 연신 감탄을 하다 혀를 차다 반복했다. 무헌은 들어오자마자 윤조에게 휴지 꾸러미를 안겨주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정한의 미간이 급격히 좁아졌다 풀어지는 걸 윤조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세상….”
한숨을 내쉬며 스툴에 걸터앉은 승주가 이 집의 개가 되고 싶다고 중얼거렸다. 윤조는 딴엔 눈치가 있어서 사실 이미 개가 있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들에게 정보를 주면 줄수록 정한이 괴로워하는 걸 알기 때문이다.
“적당히 보고 나와. 밥 줄게.”
“뭐 줄 거야? 나 고기!”
정한이 대답 없이 현관문을 나섰다. 윤조는 자연스레 제게 꽂힌 시선을 향해 웃어 보였다.
“고기?”
“네, 고기.”
되도록 두 사람을 집 안에 두고 싶지 않다는 정한의 의견에 따라 바깥에서 바비큐를 하기로 했다.
석양이 지는 오후, 속을 비우고 나타난 무헌과 어깨에 이고 온 술을 한 아름 껴안은 승주와 함께 윤조는 파라솔로 향했다.
“이게 다 뭐야?”
차고를 통해 집으로 들어온 두 사람이 수영장을 뒤늦게 발견했다. 풀 사이드에 선 승주가 금방이라도 뛰어들 듯이 아래를 내려다봤다. 윤조는 저도 모르게 승주에게 팔을 뻗었다가 무헌에게 저지당했다.
다행히 승주는 떨어지지 않았지만, 무헌이 왜 이러나 싶어 윤조는 그를 의아하게 보았다. 곧 무헌이 웃으며 정한을 가리켰다. 연기가 풀풀 나는 사이로 정한이 이리 오라 손짓했다.
“여름에 놀러 와야겠네.”
“여긴 주인 따로 있으니까, 얼씬할 생각도 마.”
“그래? 누가 주인인데?”
윤조는 정한이 지정한 앉은뱅이 의자에 걸터앉아 손을 들었다. 윤조를 보고서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인 승주가 더는 미련을 갖지 않고 파라솔 아래로 왔다.
“뭘 이렇게 많이 차렸어?”
“많이 먹고 입 다물라는 거지.”
“잘 아네.”
정한의 대답에 윤조는 눈을 크게 떴고, 그의 친구들은 배를 잡고 웃었다. 두 사람의 입맛에 맞게 꽤 메뉴를 고심했으면서, 윤조는 말과 다르게 행동으로는 친구들을 아끼는 정한을 즐겁게 구경했다.
고기가 대강 구워져 가자 무헌이 음식마다 덮어 둔 커버를 하나씩 벗겼다. 윤조도 덩달아 도왔다. 향긋하고 달콤한 술이 한 잔씩 오가고, 맛 좋은 고기로 배를 그득하게 채웠다.
“그만 먹여.”
“왜. 맛있다잖아.”
윤조의 잔에 와인을 따르던 승주가 정한을 향해 혀를 내밀어 보였다. 윤조는 정한의 친구들과 친분을 쌓게 되어 마냥 기분이 좋았다. 와인도 어찌나 맛있는지, 권 회장의 저장고에 있는 와인 못지않았다.
“윤조야, 억지로 마시지 마.”
“억지로 마시는 거 아니에요. 맛있는데?”
“봐. 이 학부모야.”
학부모라는 말에 정한은 눈썹을 찌푸리고 윤조는 크게 고개를 내저었다.
“형이에요, 형.”
교감도 정한을 가리켜 학부모라 하지 않았다. 형이라고 했지.
“형?”
“네. 형이라고 봐요. 학부모 아니에요.”
“아아, 밖에선 형이라고 해?”
“아니이…. 보는 거 말이에요. 밖에서는 남편이죠. 남편인데 남편이라고 하지, 남편을 왜 형이라고 하겠어요.”
윤조의 말에 일리 있다며 무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이라고 하면 안 놀라?”
“글쎄요. 보통 아… 하고 말던데.”
윤조의 ‘아…’를 흉내 내며 승주가 웃었다. 윤조는 그게 뭐가 웃긴가 싶어 열 오른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술이 계속해서 당겼다.
“그만.”
“조금만 더요.”
정한의 만류에도 윤조는 조금만 더, 하고 몇 잔을 더 홀짝거렸다. 온몸이 술이 되는 기분이었다. 잔뜩 술기운이 오른 윤조는 테이블 근처의 더운 기운을 피해 비척비척 걸어 선베드에 몸을 맡겼다.
파라솔 너머의 총총한 별을 보고 있자니, 문득 메라크의 밤이 떠올랐다. 제 길잡이가 되어주었던 북두칠성. 이젠 눈을 감고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개중 한 별이 인사하듯 반짝였다. 미자르였다.
미자르.
미운 기억이 많았지만, 그래도 제 고향이었다.
“저 사실 페크다 사람 아니에요.”
옆 선베드에 앉아 있던 승주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페크다 맞나? 메그레즈였나? 아무튼, 저, 미자르 사람이에요.”
“아, 그래? 미자르에서 왔어?”
“네. 근데 공식적으로는 페크다. …메그레즈였나?”
“공식적인 건 뭐야?”
윤조는 별이 총총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사실….”
승주가 윤조의 말을 기대하며 모로 누웠다. 윤조는 고개를 돌려 승주를 보았다. 비밀 이야기가 잇새를 타고 흘러나갈 것 같았다. 간질간질한 게 어찌나 재미있는지 혼자서 자꾸 웃음이 났다.
“취했네, 취했어.”
“아, 여기가 너무 간지러워요.”
“그럼 비밀인 모양인데, 말하지 마.”
“궁금하지 않으세요?”
“궁금하긴 한데, 내일 네가 후회하는 것보다는 나아.”
윤조는 승주를 보며 감탄했다. 정한의 담당의일 때도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멋지게 느껴졌다. 저도 어서 정한의 곁에서 같이 일하게 됐으면 좋겠는데….
“이제 겨우 시험 하나 쳤는데, 언제 그 날이 올까요?”
“시험?”
“네. 저 학교 다니거든요.”
“어디?”
“여기 앞에.”
“두베 대학?”
“아뇨. 중앙 고등학교요.”
때마침 나타난 무헌이 승주가 앉은 선베드에 걸터앉으며 되물었다.
“어디라고요?”
“중앙고요.”
“아… 고등학교?”
윤조를 훑어본 승주가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윤조는 슬쩍 불길한 기분이 들어 선베드에서 몸을 일으켰다. 멀리 정한이 집에서 나오는 게 보였다. 저를 줄 얼음을 가져오고 있는 참이었다.
“교복 입겠네?”
승주가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윤조는 당연한 소리를 하는 승주를 보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얘기 중이야?”
막 도착한 정한이 윤조에게 얼음 담긴 컵을 내밀었다. 정한을 발견한 승주와 무헌이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윤조는 정한이 내민 컵을 받아 들며 제 곁에 앉는 그에게 슬쩍 기대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뭔가 사고를 친 듯한데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윤조, 고등학교 다닌다며?”
코끝에 닿을 만큼 꽉 찬 얼음 컵을 기울이는데 승주가 의미를 담은 듯한 목소리로 정한에게 물었다. 윤조는 잠시 뜸을 들이는 정한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어.”
그가 대답하자 승주의 눈이 빛났다. 미자르보다도 더.
“중앙고면… 파란 넥타이?”
“맞아.”
“아하… 거기로구만. 그 예쁜 교복….”
불길한 예감에 긴장했던 것도 잠시, 제 이야기가 나온 것은 그때뿐, 그 후로는 그들의 학창 시절 이야기가 나왔기에 윤조는 자신이 잘못 느낀 것이라 여겼다. 나중에는 이야기에 심취해 하하 호호 웃기 바빴다.
정한에게는 들을 수 없었던 그의 학창 시절 이야기가 어찌나 재미있는지, 윤조는 계속해서 승주와 무헌에게 묻고 또 물었다.
두 사람은 정한을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다. 정한의 말이 사실이었다. 그들은 정한에게 참 관심이 많았다.
밤은 깊어 가고, 더웠던 몸이 밤바람에 식을 찰나, 승주와 무헌이 이만 가야겠다며 일어났다.
“학교 열심히 다녀요. 좋을 때다.”
“네. 오늘 즐거웠어요.”
“나두. 조만간 또 봐. 병원 오면 연락해.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그렇지 않아도 너 자주 온다는 소리 들리더라.”
절대 제 친구들과 따로 보지 말라던 정한의 말이 생각나 그를 힐끗거렸다. 그는 길어지는 인사를 지겨워하고 있었다. 윤조는 승주의 제안을 대충 얼버무리고 인사를 건넸다.
“그럼 조심히 가세요.”
“어어어, 나올 거 없어. 들어가, 들어가. 남은 밤이 얼마라고.”
두 사람이 돌아가니 시끌벅적하던 마당이 전에 없이 조용하게 느껴졌다. 윤조는 터덜터덜 걸어 어지러운 몸을 선베드에 누였다. 가라앉았던 취기가 다시 올라오는 듯했다.
“들어가 있을래?”
“아뇨. 찬바람 좀 쐬고 싶어요.”
“속은?”
“괜찮아요. 그냥… 좀 어지러워요.”
“그럼 있어.”
“네… 미안해요, 여보.”
정한이 홀로 뒷정리를 시작했다. 윤조는 괜히 미안한 마음에 몸을 틀어 정리 중인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일인 것도 아닌데 그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정한은 바쁘게도 오갔다. 마신 술이 저렇게 많았던가. 병 치우는 소리가 어찌나 오래 나는지, 윤조는 깜박 졸 뻔했다. 졸음을 쫓으려 몸을 뒤척이다 텅 빈 수영장이 눈에 들어왔다.
“어서 여름 왔으면 좋겠다….”
튜브를 가져왔던가. 잠시 생각에 잠긴 윤조의 귓가에 정한의 작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윤조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귀를 기울였다.
“…으면 몰라, 억울하네.”
“네?”
“아냐.”
정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윤조는 다시 태평히 여름을 그리워했다. 긴 시간 정리에 몰두한 정한이 내는 소리를 벗 삼아.
* * *
하루가 무섭게 날이 더워지고 있어 윤조는 들떴다. 머지않아 여름이 찾아올 듯했다.
요즘은 카페에서 시원한 커피나 차를 마시며 공부하는 걸 즐겼다. 어쩐지 정한은 병원에 오지 않는 것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괜히 공부하다가 병이 옮을 수 있다나 어쩐다나. 아무튼, 오늘도 방과 후, 어김없이 귀여운 간판이 달린 카페로 향하는 중이었다.
“어!”
길을 가며 풀어낸 넥타이가 그만 횡단보도를 건너는 도중 주머니에서 빠졌다. 그걸 신호를 다 건너서 발견한 윤조는 얼마 남지 않는 신호 시간을 보고 발끝을 머뭇거렸다.
망설이지 않고 달렸으면 가능했을 거리였으나, 잠시 주저하는 사이 타이밍을 놓쳤다. 반대편에서 큰 보폭으로 걸어와 넥타이를 주워준 사람이 아니었다면 타이어 자국이 난무한 넥타이를 주워야 했을 테다.
“고맙습니다.”
정장 차림에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정중히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어찌나 멋지게 느껴지는지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 멋진 차림새가 눈에 들어온 탓일까. 윤조는 종종 제 주변을 맴도는 같은 차림새를 발견하고 말았다. 멋지다 여긴 것은 잠시, 선득한 공포에 윤조는 카페에 꼼짝없이 앉아 정한이 오기를 기다렸다.
“요즘 붙박이네?”
일을 끝내고 돌아온 정한이 맞은편에 앉았다. 윤조는 곧장 그의 손을 테이블 위로 올려 붙잡고 작게 속삭였다.
“기분 탓이었으면 좋겠는데, 누가 자꾸 따라다녀요.”
“뭐?”
“…요 며칠, 아니 혹은 더 오래됐을지도 몰라요. 까맣게 입은 사람들이 계속 주변에 있어요. 사장님이랑 다닐 때는 안 보이는데.”
“까맣게 입은 사람?”
“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차려입고, 전부 선글라스를 꼈어요.”
정한이 윤조의 손을 꼭 잡아 쥐고 흥미로운 얼굴로 웃었다. 윤조는 최근 반 친구들에게 부잣집 자녀 납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참이라 자신이 그 표적이 된 게 아닌가 싶어 걱정이었다. 자신이 사는 집이 보통 집이 아닌 것은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까.
“네 앞에 직접 나타난 적 있어?”
“넥타이를 주워줬어요. 그때부터 그 사람들이 보였고….”
“그전에는 낌새도 못 느꼈고?”
“…네.”
“그럼 일부러 보이나 본데?”
“…어떡해요? 저 납치당하는 거예요?”
“뭐?”
“두베에는 돈 많다고 납치해서 돈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서요. 미자르에서는 데려가면 숟가락 하나 더 놔야 해서 절대 그런 일 없어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정한이 손을 내저었다.
“납치 아냐. 오히려 널 그런 사람들로부터 보호하는 거면 몰라도.”
“…절 보호한다구요? 아, 혹시 사장님이?”
“아니. 아버지가 보낸 거야.”
“권 회장님이요? 왜요?”
“너 걱정되나 봐.”
“저를요?”
“넌 나거든.”
권 회장에게 정한과 같은 사람이라면…. 그 하나밖에 모르는 양반의 하나라는 뜻이었다. 윤조는 얼떨떨한 얼굴로 정한을 보았다.
“경호니까, 신경 쓰지 마.”
“사장님은 아셨어요?”
“어.”
“그럼 말 좀 해주지….”
“너 신경 쓸까 봐. 나로서는 있는 게 안심되기도 해서 치우라고 하진 않았어. 혹시 불쾌해? 그럼 치우고.”
“아뇨! 치우지 마세요. 저도 그게 안심이니까.”
“그럼 다행이고.”
정한을 통해 경호원의 정체를 알게 된 뒤로 윤조는 그들을 발견할 때마다 반갑게 인사를 보냈다. 고마운 마음에 무엇이라도 대접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서로 간의 거리가 멀었다. 언젠가는 꼭. 윤조는 반짝이는 선글라스를 보며 은근한 미소를 보내었다.
* * *
윤조가 그렇게 노래하던 여름이 찾아왔다. 정한은 아침 택배로 도착한 상자를 맹렬한 기세로 뜯는 윤조의 등을 보며 찻잔을 기울였다.
“오….”
상자 속 비닐을 다 벗긴 윤조가 주문했던 물건을 꺼내어 높이 들어 보았다. 축 늘어진 노란색의 고무가 바닥에 철퍼덕 소리를 내며 펼쳐졌다.
“엄청 크네?”
“네.”
“바람은 뭐로 넣으려고?”
“아.”
뒤늦게 생각난 듯 윤조가 상자 바닥을 뒤졌다. 정한은 계속해서 찻잔을 기울였다.
“…안 샀어요.”
“입으로 불기엔 힘들어 보이는데.”
“그럼….”
“다음에 해.”
표정이 보이지 않아도 아쉬움이 느껴지는 뒤통수였다. 정한은 다 비운 찻잔을 치우고 윤조의 곁에 널브러진 상자와 테이프 따위를 치웠다.
“주문해 놓을 테니까 불 생각 하지 마.”
“네….”
저 빈약한 대답을 믿을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정한은 윤조의 손에 들린 튜브를 빼앗아 들었다.
“어!”
“가서 공부해.”
“아….”
“아님 튜브 없이 놀든가.”
정한이 보기에 윤조는 튜브가 없어도 충분히 안전하게 놀 수 있을 듯했다. 그런데 그로서는 늘 튜브를 끼고 놀아서 그런지 불안한 눈치였다.
정한은 튜브를 등 뒤로 감추며 윤조에게 어서 선택하라고 눈짓을 보냈다. 잠시 고민하던 윤조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훌쩍 일어났다.
“30분만 놀게요.”
“그래.”
크게 체력을 소모하지 않으면서 스트레스를 풀기 좋은 시간이었다. 정한은 윤조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튜브를 올려 두고 혹여나 그가 자칫 위험에 빠질까 싶어 서둘러 바깥으로 나갔다. 손에는 비치 타월과 책을 든 채였다.
선베드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준비 운동 중인 윤조를 보았다. 마음이 급했는지 대충하고서 쪼르르 풀 사이드로 달려가 가슴을 물로 적셨다. 교복 소매도 짧아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스크림 하나는 꼭 물게 된 계절인데도 차가웠는지 화들짝 놀라며 잠시 망설이는 윤조였다.
정한은 웃음을 감추며 책을 펼쳐 들었다. 첫 장의 흥미로운 전개에 눈을 빼앗기기도 전에 정한은 물속 깊이 가라앉은 윤조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푸우!!!”
고래처럼 물을 뿜고 올라온 윤조가 머리칼을 뒤로 넘기고서 활짝 웃었다. 이제야 제대로 놀 기분이 된 모양이다.
흠뻑 젖은 몸으로 나와 와다다다 달려 뛰어드는 걸 보고 있자니, 다이빙대를 만들어 둘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홀로 노는 건 1등인 윤조가 만들어낸 물보라가 발치에 간지럽게 떨어졌다.
정한은 이제 막 주인공이 한 발을 떼기 시작한 책 속의 이야기를 내버려 둔 채, 제 앞에서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윤조에게 푹 빠졌다. 무던히 반복적이고, 그리 특별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저 바라만 보아도 그 어떤 책보다 재미있었다.
“나 조금 탄 것 같지 않아요?”
튜브도 빵빵하게 몸을 부풀리고, 덩달아 수영 실력도 부쩍 늘어난 어느 날. 차고의 계단을 오르던 윤조가 생각난 듯 말했다.
“그런가? 어디 봐.”
저택에서야 해가 다 지고 놀았으니 탈 일이 없었지만, 이곳에서는 해가 조금이라도 남은 시간에 매일같이 뛰어드니 타지 않고 버틸 리가 없었다. 정한은 차고의 둔탁한 조명 아래에서 제 속옷을 슬쩍 끌어 내려 보이는 윤조를 보며 웃었다.
“이렇게 봐서는 잘 모르겠네.”
가방을 왼손으로 옮기며 패스워드를 눌렀다. 문이 열리자 윤조가 그 속으로 몸을 쏙 집어넣었다. 정한은 느긋하게 그의 뒤를 따랐다.
채 문이 닫히기도 전에 윤조가 가방을 벗고 교복 바지를 훌쩍 내렸다. 정한은 그가 여느 때처럼 수영장으로 달려가리라 생각하며 바닥에 떨어진 그의 교복 바지를 집어 들었다.
“이것 봐요.”
속옷을 허벅지까지 끌어 내린 윤조가 제 엉덩이를 보였다. 희미한 경계가 보였다. 딱 그의 손바닥만 한 삼각형의 수영복만큼.
“그러네. 탔네.”
정한은 괜히 윤조의 살갗 위를 손톱으로 긁어 보았다.
“이러다 엉덩이만 하얘지겠어요.”
그것참 볼만하겠다. 정한의 웃음을 다르게 해석한 윤조가 눈썹을 좁히며 울상을 지었다.
“우습죠?”
“아니. 섹시해.”
“…그래요?”
“어. 실컷 태워. 엉덩이만 빼고.”
정한은 윤조의 엉덩이 한쪽을 주물럭거린 뒤, 안으로 향했다. 속옷을 끌어 올리고 양말 신은 발로 졸졸 따라오던 윤조가 제 손에서 교복 바지를 가져갔다.
“30분만 하고 올게요.”
해가 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태울 요량으로 윤조가 서둘러 움직였다. 정한은 아직도 밝은 바깥을 바라보았다. 윤조를 기다리는 노란 튜브가 바람에 몸을 흔들고 있었다.
*
주말이 되자 윤조는 본격적으로 해가 쨍쨍한 시간을 골라 수영장에 뛰어들었다. 정한은 노란 파라솔 아래, 자신의 지정석인 선베드에 누워 좀처럼 진전이 되지 않는 독서를 하고 있었다.
주말이고, 날씨도 좋으니, 오늘은 1시간을 투자하겠다고 제게 허락을 맡듯 혼잣말을 중얼거린 윤조는 연신 물속을 헤매었다.
“푸하아…!”
바닥을 찍고 수면으로 올라 가쁜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연이어졌다. 정한은 도무지 읽히지 않는 활자를 뒤로하고 윤조가 뱉어내는 소리와 말에 귀를 기울였다.
햇빛에 반짝이는 물에 젖은 피부, 귓바퀴를 타고 떨어지는 물방울, 턱으로 고이는 물줄기, 가쁜 숨을 내쉬는 붉은 입술, 꼭 그것처럼 붉게 자리한 젖꼭지.
빤히 윤조의 면면을 훑어보던 정한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괜히 갈증이 나는 기분에 윤조가 저 마시려고 옆에 두고 간 주스로 손을 뻗었다.
막 한 모금을 마시고 책으로 다시 시선을 두려는데 윤조가 저 멀리서 뛰어 수영장 한가운데로 몸을 던졌다. 물살에 치여 구석으로 몰린 노란 튜브가 기어이 반쯤 물 밖으로 나왔다. 정한의 발치도 그만큼 젖어 들었다.
축축하게 저를 적신 물을 아랑곳하지 않고 정한은 다시 윤조를 관찰했다. 물속에서 튀어 올라온 몸이 잠시 숨을 마시고 아래로 들어갔다. 튜브와 같은 색의 노란 엉덩이가 물속으로 꼬로록. 정한은 아쉬운 얼굴로 윤조의 등장을 기다렸다.
“푸우!!!!”
꽤 긴 시간 잠수했다가 나타난 윤조가 가슴을 크게 부풀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제 잠수 시간이 만족스러웠는지 매우 상쾌한 얼굴이었다.
정한은 윤조가 제 머리를 털며 풀 사이드로 향하는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그 눈짓이 지나치게 빤했던 모양인지 시선을 눈치챈 그가 돌아보았다. 잠시 풀 사이드에 두 팔을 기대고 저를 올려다보던 윤조가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여유 있는데, 왜.”
윤조는 제 말에 대답하지 않고 의미심장하게 웃기만 했다. 곧 물 밖으로 나온 그가 발치에 섰다. 그러다 사방으로 튄 물을 발견하고 미안한 얼굴을 했다. 그러면서도 옷이 젖도록 저를 타고 올라와 책 든 손 사이로 고개를 밀어 넣었다.
정한은 책을 높이 들고 윤조가 하는 양을 보았다. 고개를 돌려 페이지를 확인한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페이지가 그대로네요.”
정한은 어느새 윤조와 마찬가지로 흠뻑 젖었다. 마주한 입술이 아까 마신 주스보다도 시원했다.
“달다….”
입술을 핥은 윤조가 완전히 정한에게 올라타며 입술을 가르고 혀를 빨았다. 정한은 책을 옆으로 치우고 윤조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가 왜 시간을 확인했는지 이제 알 듯했다.
정한의 입에 남은 달콤한 주스를 모두 맛본 윤조가 입술을 떼어 내었다. 정한은 윤조의 턱을 타고 흐르는 물을 닦으며 그의 입가에 잘게 입을 맞추었다.
“사장님 다리에 물 많이 튀었던데. 왜 안 혼냈어요?”
“즐거우면 됐지.”
“그래도….”
“내가 너 혼내는 사람이야?”
“음… 혼내주지.”
정한은 느긋한 손길로 저를 꼬여내려 애쓰는 윤조의 입가를 매만졌다. 그의 입술은 불에 덴 듯 뜨겁고, 여름처럼 축축했다. 저를 바라는 그의 밑도 이럴까. 확인하고 싶어졌다.
제 뜻을 읽은 윤조가 손가락에 입술을 비비고서 말했다.
“주말이니까, 1시간은 놀아… 아니, 혼나도 될 것 같아요.”
정한은 기꺼이 그의 변덕을 허락해주기로 했다. 윤조의 어깨에 미리 가져온 비치 타월을 두르고 그의 빽빽한 수영복을 힘껏 끌어 내렸다.
매일 꾸준히, 엉덩이만 남기고 살을 태운 윤조의 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머지않아 잦아들 여름의 흔적을 정한은 마음껏 취하기로 했다.
노란 파라솔 아래, 그것처럼 물든 윤조의 몸이 정한에게 단단히 붙들렸다. 정한은 물이 맺힌 윤조의 가슴을 베어 물고 빳빳하게 선 젖꼭지를 삼키듯 빨았다. 남은 하나는 아쉽지 않게 쥐고 주무르며 그의 허리를 당겨 제게 바짝 붙였다.
흡착하듯 들러붙은 입술도 모자랐는지, 윤조가 머리를 끌어안았다. 정한은 물고 있던 그의 젖꼭지를 콱 씹고 빨았다. 예민하게 반응하여 바짝 선 가슴이 그가 임신이라도 하게 되면 얼마나 부풀지 기대가 되었다.
“아아…!”
가쁘게 숨 쉬는 가슴을 어루만지고 허리를 쓸자 흥분에 찬 신음이 쏟아졌다. 정한은 빠듯하게 열이 찬 제 아래를 느끼며 계속해서 윤조의 피부에 제 흥분을 남겼다. 유난하게 뜨거운 목덜미를 핥을 때는 금방이라도 바지 안에 싸버릴 듯했다.
“왜 이렇게 진해?”
“글쎄요…. 곧 힛싸라도 올 모양이죠.”
바지 지퍼를 뚫을 듯 팽팽하게 선 성기 위로 윤조가 제 엉덩이를 비벼대었다. 정한은 차곡차곡 제 이성을 무너트리는 윤조의 턱을 붙잡고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취해 있는 시선이 느릿하게 얼굴을 훑었다. 정한은 윤조의 입술로 시선을 내려 뜨겁고 달콤한 살을 빨았다.
혀로 입 속을 찔러 대자 윤조가 노골적으로 허리를 흔들어 대었다. 그는 때때로 제 혀를 또 다른 성기로 여기는 듯했다. 정한은 제 축축한 바지 지퍼 위로 손을 가져갔다.
“으응, 빨리….”
어깨에 팔을 두른 윤조의 재촉이 심해졌다. 정한은 입맞춤으로 윤조를 달래며 흥건하게 젖은 제 성기를 꺼내어 곧장 윤조의 속을 꿰뚫었다.
“읏. …하.”
순간 몸을 굳힌 윤조가 긴 한숨을 내쉬며 제 페로몬을 뿜어내었다. 윤조의 직설적인 언어를 읽은 정한은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흐으…, 하….”
쿨쩍, 쿨쩍. 몸을 쳐올릴 때마다 윤조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정한은 윤조의 목덜미를 손으로 감싸며 그가 한숨을 내쉴 때마다 입을 맞추었다. 달뜬 호흡이 차차 빨라지고, 그때까지도 조용하던 선베드가 삐거덕거리며 울었다.
“아, 으, 으, 응….”
“하아… 후….”
정한은 윤조의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비치 타월을 끌어 올려주며 그를 제 밑으로 눕힐 궁리를 했다.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윤조가 거부하듯 가슴을 누르며 스스로 리드해 갔다. 정한은 선베드에 등을 대고 기어이 그의 어깨에서 흘러내린 비치 타월을 옆으로 치웠다.
끼익, 끽, 끼익.
저를 밑에 깔고 허리를 흔드는 윤조의 붉어진 눈가에서 정한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따금 절정에 닿을 듯 숨이 넘어가는 목울대에서도. 그 밑에 자신이 씹어놓은 울혈이나, 통통하게 부푼 젖꼭지, 두 배 사이에서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그의 성기까지.
“하…!”
정한은 고개를 젖히며 급한 호흡을 찾았다. 저를 삼킬 듯이 빨아 당기는 윤조의 내벽에 꼼짝할 수 없었다. 혼나고 있는 건 자신이 아닐까. 치밀어 오르는 사정감을 참으며 정한은 제 입술을 씹었다. 저 멀리서 한가롭게 우는 매미 소리가 들렸다.
매앰, 매앰, 매앰.
더운 바람이 젖은 이마를 쓸고 지났다. 정한은 윤조의 엉덩이를 붙들고 제게 힘껏 당겼다. 순식간에 페이스를 빼앗긴 윤조의 허리가 급격히 무너졌다. 정한은 제 가슴 위로 쓰러진 윤조를 끌어안은 채 그의 몸을 구기듯 안고 저를 쑤셔 넣었다.
“앗, 아, 아읏, …아!!”
“하아, 하, 하아….”
흔들리는 몸을 추스르며 윤조가 입술을 찾았다. 열기로 뜨거운 입술이 맞물리기 전, 윤조의 안이 급격히 조여들었다. 정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윤조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덩달아 사정한 제 정액이 그의 내벽에 분수처럼 쏘아졌다.
“흐으….”
끝에 닿은 흥분에 몸을 떤 윤조가 뒤늦게 입술을 물어왔다. 정한은 제 긴 한숨을 삼킨 윤조의 등을 다독이며 느릿하게 후희를 즐겼다.
첩…, 쩍, 척.
정한의 성기가 윤조의 몸에서 조금씩 밖으로 얼굴을 보일 때마다 끈적한 정액이 맺혀 흘렀다. 음경을 따라 고환을 타고, 선베드의 틈 사이를 적시고, 바닥에 고일 때까지 정한의 후희는 계속되었다.
“1분… 남았어요.”
정한은 윤조의 젖은 머리를 넘기고 그의 관자놀이에 입술을 묻었다. 아쉬움으로 끙끙대는 몸을 안고 잠시 고민하다 운을 떼었다.
“내일 거 당겨쓸래?”
“…그래도 돼요?”
“그럼.”
윤조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채 식지 않은 숨이 다시 맞물렸다. 끈적한 정액으로 범벅이 된 윤조의 내벽이 음미하듯 조이며 정한을 삼켰다.
매앰, 매앰.
물속도 아닌데 계속해서 젖어 가는 몸이 삐거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뒤엉켰다. 이따금 주인 잃은 노란 튜브가 바람에 몸을 떨고, 시끄럽던 매미 소리는 윤조의 울음에 묻혀 곧 들리지도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