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5화 (17/22)

05.

여름을 채 즐기기도 전에 시험이 찾아왔다. 시험 기간, 혹은 금욕 기간은 왜 이리도 자주 찾아오는 걸까.

윤조는 풀 사이드에 걸터앉아 물장구를 치며 투덜거렸다. 잘나게 되기가 쉽지 않으리라고는 생각했지만, 남들보다 몇십 배는 달려야 하는 탓인지 쉬이 지쳤다.

게다가 앞으로 남은 시험은 죄 큰 시험밖에 없었다. 이 답답한 마음은 비단 푹푹 찌는 날씨 때문만은 아닐 테다.

손에 든 책을 잠시 내려놓고 윤조는 파라솔 아래에 한가롭게 누워 있는 선베드를 보았다. 저택과 달리 보안 요원이 있어 소리를 죽일 일도, 몸을 감출 일도 없이, 집 어디에서든 정한과 몸을 마주 댈 수 있어 좋긴 했지만, 눈이 닿는 곳마다 정한과의 섹스가 떠오르니, 금욕 기간이 원망스러웠다. 정한이 왜 그리도 서재를 사수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마저도 없었으면 제 계획이 20년으로 늘어나지 않았을까.

어쨌든 그건 그거고, 그땐 참 좋았다. 미련한 눈길로 선베드를 보던 윤조는 다시 책을 들었다. 빤히 눈을 뜨고 글자를 읽어나갔다.

지나치게 날이 좋은 탓일까. 미련한 제 성격 때문일까, 좀처럼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럴 때는 채찍을 찾을 수밖에. 윤조는 푸른 수영장을 뒤로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정한은 서재에 있었다. 요즘 그는 윤조의 대학을 알아보는 중이었다. 두베의 학생들은 가고자 하는 대학에서 지정한 시험을 쳐야 했다. 윤조처럼 온전히 고등학교 과정을 다 마치지 못한 경우에는 합격 기준이 더 높았다. 개중 적당히 맞춰서 갈 수 있는 학교를 찾는 게 정한의 목표였는데, 그의 기준에 마땅한 대학이 없는 모양인지, 여러모로 따져 보고 있었다.

운 좋게 고등학교에 들어오게 되었지만, 윤조는 자신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실제로 지난 중간고사만 해도 반에서 거의 하위권에 머문 성적이었다. 딴에는 입학시험만큼 열심히 했는데 어찌나 그렇게 다들 공부를 잘하는지, 정한의 위로가 없었다면 한동안 우울감에 빠져 지냈을지도 몰랐다.

“제가 갈 수 있는 학교가 있어요…?”

정한의 맞은편에 앉아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노트북을 잡아먹을 듯 보고 있던 정한이 시선을 들어 제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 곧 웃음이 돌았다.

“학교야 많지. 내 마음에 안 들어서 문제지.”

“어떻게 마음에 안 드는데요?”

“멀어.”

“…제 성적 때문에 그런 게 아니구요?”

도시의 중심보다 변두리의 학교가 성적이 낮은 건 당연한 사실이었다.

“성적이야, 맞추면 되는 거고. 걱정 마. 3학년으로 무리하게 들어간 것도 이 시간 벌려던 거니까. 괜히 학교 다니면서 시간 낭비할 바에 바짝 공부해서 대학가는 게 나아.”

“네… 그렇긴 한데.”

“너 잘하고 있어. 남들 10년도 넘게 투자한 시간을 3개월 만에 따라잡은 것만 봐도 가능성 있다는 증거야.”

그런가.

윤조는 조금 기분이 나아져 정한을 따라 웃었다. 하지만 정한이 노트북을 돌려 제게 보여준 학교를 확인하고서는 다시 얼굴이 굳었다.

“어때?”

이름만 보아도 아는 학교였다. 반 친구들의 입에도 자주 거론되던. 그 친구들에게도 어렵게 여겨지는 학교에 과연 자신이 갈 수 있을까. 축 늘어진 윤조의 입꼬리를 보고 정한이 급히 손을 내저었다.

“충분해. 길게는 2년, 짧게는 1년.”

“…그건 사장님 기준이죠, 전 좀 어려워요.”

“그럼 3년. 지겨워서 합격하고 말걸?”

3년이나 부여받은 시간에 윤조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지금 고등학교에 들어온 것처럼 제게 운이 따를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 희망이 헛되게도 학교 시험에 열중하는 동안 윤조는 제 낮은 성적으로 인한 회의감에 물들었다.

“너 거기 가?”

시험 후에는 방학이었고, 1학기도 끝나게 되니 3학년 건물 곳곳에 대학 유인물이 제공되었다. 정한과 최근에 얘기했던 대학이라 무심코 관심을 두게 되었는데, 불쑥 나타난 반 친구 하나가 흥미롭다는 듯 말을 걸었다. 윤조는 아니라고 고개를 내저으려다가 제 손에서 유인물을 가져가는 친구의 말에 귀를 쫑긋했다.

“나도 여기 갈 건데.”

“그래…?”

“여긴 학교 성적 많이 보잖아. 근데 넌 성적이 없으니… 커트라인 맞추려면 힘들겠다.”

“아… 그렇지 뭐….”

“한 번에 합격하고 싶지?”

“그럼 좋겠지만… 이번이 아니어도 괜찮아.”

“막상 떨어지면 꽤 충격일걸?”

말뿐인데도 가슴이 철렁거렸다. 각오하고 있는 일인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윤조는 저를 관찰하듯 바라보는 친구의 시선을 피했다.

“괜찮아. 난 공부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이번엔 당연히 떨어질 거라 생각하고 있어.”

“그래?”

“그리고… 저번 성적 받고 면역됐거든. …정말 괜찮아.”

“너 그거 진짜 네 성적이라고 생각해?”

“그게… 무슨, 말이야?”

유인물을 다시 제자리에 넣은 친구가 말했다.

“너 적어도 우리 반에서 중간은 할걸? 어쩌면 조금 더 위일지도 모르고.”

“놀리지 마.”

“놀리는 거 아냐.”

“…….”

“진짠데? 너 지금 그 성적. 절대 네 거 아냐.”

“…알아듣게 좀 얘기해 봐.”

대단한 걸 알려준다는 듯 제 어깨를 감싸 안고 귓가에 속삭이는 친구의 말은 충격과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윤조는 그간 제가 한 공부가 허무해졌다. 딴에는 꽤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하위권에 자리한 이유가 있었다.

“그럼 선생님이 알려준 대로 문제가 나온다는 거야?”

“어.”

“왜…? 왜, 알려주는 건데?”

“돈 때문이지 뭐겠어?”

이유를 듣고도 윤조는 이해할 수 없어 눈을 헤매었다. 선생님이 도대체 왜, 하는 의문이 계속해서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1학기 다 끝나가도록 눈치를 못 채더라?”

“그걸… 어떻게 알아….”

“담임이 너한테 얘기 안 해? 얼마에 사가라고?”

“아니, 그런 말씀… 없으셨는데….”

제겐 그저 인자하게 웃기만 하는 담임의 얼굴을 떠올리며 윤조는 입술을 씹었다.

“흐음… 이상하네. 그 돈벌레가.”

“돈벌레?”

“하긴, 넌 이 학교 성적이 필요 없을 테니까.”

윤조는 자신이 디디고 있는 바닥이 덜그럭거리는 느낌에 제 바지춤을 붙잡았다. 손에서 배어난 땀이 빠르게 스며들었다.

“돈이 있어도, 성적이 필요해도, 그런 거… 필요 없어.”

“그래? 그럼 열심히 해 봐. 그래서 언제 붙을지는 모르겠지만.”

친구의 말이 의미심장해 윤조는 눈을 들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 친구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넌 그게 비단 이 고등학교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해?”

“그럼…?”

“집에 돈 뒀다 뭐해. 좀 편히 살아.”

설마. 윤조는 저도 모르게 친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진짜야? 정말 그래? 대학 시험도 다 유출…!”

윤조는 제 입을 틀어막는 손에 놀라 꼼짝없이 얼었다. 친구가 제 입술에 손가락을 세우고 쉿! 하고 소리 내었다.

“정보 제공이라고 해. 알았어?”

우스운 말이었지만 윤조는 눈짓으로 대답해 보였다. 그제야 손을 떼어준 친구가 전보다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공유해줄까?”

쥐덫 앞에 놓인 치즈처럼 유혹적이고 치명적인 말이었다. 윤조는 크게 침을 꿀꺽 삼킨 뒤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괜찮아. 그런 거 싫어.”

“뭘 빼고 그래?”

“그게 아니라….”

“똑같이 나오는 거 아냐. 정보는 말 그대로 정보일 뿐. 어차피 공부해야 해.”

친구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윤조는 제 발끝에 닿을 듯한 친구에게서 물러서려 했지만, 뒤에는 벽뿐이었다.

“나도 이 대학 지망이기도 하고. 같이 공부하면 우리 좋은 시너지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때?”

“…….”

“뭐 하러 대학 시험 따위에 시간을 허비해? 가서 공부할 게 얼마나 많은데.”

“그래도 자격이 있어야….”

“출발선이 조금 다른 게 뭐가 문제야? 따지고 보면 너도, 멋대로 우리 트랙에 뛰어들었잖아. 아냐? 다를 게 뭐가 있어?”

“…….”

“진짜 공부는 대학에 들어가서 하면 돼.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자는 거야, 내 말은.”

윤조는 눈앞의 치즈를 두고 고심했다. 향긋한 냄새가 느껴져 덥석 물고 싶어지기도 했는데, 그건 정한이 바라는 방식이 아닌 듯했다. 저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막상 친구가 멋대로 약속을 잡은 날에는 일단 가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

주말 아침, 식사 후 정한과 차를 마시던 도중이었다. 윤조는 조심스레 친구와의 약속을 입에 올렸다. 찻잔을 매만지는 정한의 손가락에서 결혼반지가 반짝였다.

“친구?”

“네. 같이 공부하자고 해서요.”

정한에게 새까만 거짓말을 하는 건 참 못 할 짓이었다. 그 친구와 공부하기로 한 것은 맞았지만, 정보 공유가 주목적이었기에 온전한 진실은 아니었다.

가슴이 따끔따끔했다. 친구의 집에 가겠다는 제 말을 흥미롭게 여기는 정한의 눈짓을 받으니 더욱.

“집에 갈 만큼 교류 있는 친구가 있을 줄은 몰랐네.”

“대학, 같은 곳에 지망해서 얘기하다가 그렇게 됐어요.”

“그랬구나. 이름이 뭐야?”

“어? 이름이 뭐더라?”

정한에게 학교 이야기를 할 때도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 모두 반 친구로 지칭했던 윤조는 제게 말을 건 친구의 얼굴만 기억할 뿐 이름을 알 리가 없었다.

“…윤지원이요.”

하필 왜 이 이름이 떠오른 걸까. 저를 메라크로 데려간 그 알파의 이름이. 윤조는 정한을 속인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윤지원. 음, 알았어.”

제 무거운 마음이 더욱 미안해지게도 정한은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직접 친구의 집 앞까지 데려다준 정한을 두고 차에서 내릴 때는 발이 무거워 그대로 이실직고하고 싶어졌다.

결국엔 이름도 모를 반 친구의 집, 그의 방까지 들어오게 되었지만.

“이걸로 확인될 거야. 내 정보가 정확한 거.”

“이게 정보야?”

얇고, 보잘것없는 몇 장의 종이가 윤조의 손끝에서 넘어갔다. 이 얄팍한 것과 싸웠다니 허무한 마음이 들었다.

“어. 그거 보고 원래 하던 대로 하면 너 당장 상위권으로 치고 가는 건 시간문제일걸?”

“내가?”

“그럼. 너처럼 점심시간에도 공부하는 애는 우리 반에 없잖아. 성적이 안 나오는 게 이상하지. 넌 어째 의심도 안 하냐?”

“…….”

“그렇게 순진하게 구니까, 이런 거에 홀리지.”

윤조의 왼손을 잡아 든 친구가 손끝으로 결혼반지를 튕겼다.

“무슨….”

“난 이런 거 싫더라. 치사하잖아.”

“저기, 그 말 무슨 뜻으로 하는 거야?”

“너 사실 담임한테 정보 살 만큼 넉넉하게 못 받는 거지?”

윤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친구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쩐지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는 듯한데. 그 오해가 괘씸하게 느껴지는 것도 같은데. 저 당연한 태도를 보고 있자니 무엇부터 반박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남은 시험 정보도 다 줄게. 대신 너….”

“잠깐. 잠깐만.”

반박할 수 없다면 오해를 멈추기라도 해야 했다. 윤조는 두 손을 들어 친구의 앞에 펼쳐 보였다. 꼭 개를 진정시키듯이.

“나랑 만나.”

아. 그만하라고 했는데.

윤조는 혀를 차며 손을 내렸다. 정한이 자주 내던 소리였다.

“매주 어렵다면 격주도 괜찮아.”

어떻게 얘기하면 좋을까. 등교 첫날, 전학생이냐고 묻던 아이들의 물음에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랐을 때처럼 막연했다.

“겁먹을 거 없어. 그냥 주말에 여기 와서…, 나랑 시간 보내다 가면 돼.”

윤조는 제 눈앞의 친구를 요목조목 살폈다. 각인으로 인해 그의 페로몬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생김새로 보아 그는 알파였다.

“놀랐어? 나 꽤 눈치준 것 같은데.”

눈치라니. 그런 걸 안 본 지 오래라 윤조는 까마득한 얼굴로 친구를 바라보았다.

“뭐, 그게 네 매력인 것 같긴 하지만.”

쑥스럽다는 듯 얼굴을 붉힌 친구를 보며 윤조는 제 왼손을 매만졌다. 정한과 나눠 낀 반지가 차가운 이성처럼 만져졌다. 이렇게 넋 놓을 때가 아니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미안한데, 내가 혹여 눈치를 챘어도 변할 건 없어. 난 사실 네 정보가 필요하지 않고, 무엇보다….”

“내 방식이 서툴렀다면 미안해. 근데 나 진심이야. 올해만 지나면 어른이고, 그럼 나도 너 여기서 지내게 할 수 있어. 우리 아빠가 너 하나쯤은 허락해줄 거야.”

차근히 오해를 풀고 싶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어딘가 단단히 잘못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과연 제 몇 마디 말로 그의 뿌리 깊은 생각을 바꿀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게 정한과 제 사이를 설득해야 한다는 사실이 꽤 충격으로 다가왔다.

“…….”

문득 서글픈 기분에 윤조는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가슴이 아팠다. 다 제가 못난 탓이었지만, 저로 인해 정한도 오해를 받는 것 같아 속이 상했다.

“나 믿어도 돼. 진심이라니까? 너한테 이런 거 끼우고 너 홀리는 말만 하는 사람과 난 달라.”

이게 듣자 듣자 하니까. 윤조는 고개를 들어 친구를 노려보았다.

“내가 너무 직설적이었나? 근데 사실인 걸 어떡해. 나도 그 사람처럼 하라면 할 수 있어. 너한테 좋은 말만 하고 네 환심을 살… 읍!”

윤조는 친구의 입술을 틀어쥐었다. 더는 들어주기 힘들었다.

“넌 절대로 내 환심 못 사. 난 네 진심 같은 거 궁금하지도 않아. 네가 날 어떻게 오해해도 좋은데, 그걸 나한테 보이지는 마. 눈길 줄 생각 전혀 없으니까.”

심장이 뛰는 건지 목덜미가 뛰는 건지, 윤조는 온통 두근거리는 몸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친구의 입술을 잡은 제 덜덜 떨리는 손을 놓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뭐야, 너 그 사람 좋아해?”

절망적인 반응이었다. 이게 보통 두베 사람들의 시선일까. 윤조는 입술을 씹으며 친구를 올려다보았다.

“난 지금 네가 알파인지, 베타인지 모르는 몸이야. 알아들었어?”

“…뭐?”

“난 한 사람한테밖에 반응 안 해. 이게 내 진심이야.”

친구는 제 말에 충격이라도 받은 건지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윤조는 이 틈에 나가려고 문으로 향했다.

“거짓말.”

훌쩍 다가온 친구가 윤조의 말이 모두 거짓이라 단정했다. 윤조는 문손잡이를 사수하고 다시 설명을 시도했다. 앞으로도 반에서 볼 친구인데 이대로 불편하게 끝내서는 안 되겠지, 라는 순진한 생각을 하며.

“아니라면 내가 왜 여기 왔겠어? 네가 나한테 그간 어떤 말을 속살댄 건진 몰라도, 난 그거 하나도 못 느꼈어. 오로지 내 목적은… 저기, 저 정보. 네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는 것뿐이었고. 지금은 그게 필요하지도 않아. 그리고 무엇보다… 난 네 이름도 몰라.”

불편하지 않으려고 진실을 얘기했는데 더 불편해진 듯했다. 윤조는 일그러지는 친구의 얼굴을 보며 자신이 지나치게 솔직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미 문손잡이를 붙잡은 손목이 붙들리고 그의 얼굴은 숨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 뒤였다.

“너 그 자식이 각인도 하라 했어?”

“누구보고 그 자식이래?!”

“각인하라 했냐고!”

“본인이 먼저하고 해 달라 부탁했다. 왜?”

“내가 그걸 믿을 것 같아? 어떤 알파가, 하. 페크다 출신한테 각인을 해?”

“…….”

“너, 지금 그 사람 저택 집사였다며. 오메가 집사가 뭔지 나도 알거든?”

“그런 거 아냐.”

“확실해? 너 무급으로 몸 대주는 건 아니고? 고작 이 반지 하나에?”

자신이 당한 모욕이야 잘못 판단한 죗값이려니 할 수 있었지만, 정한을 욕보이는 일은 참을 수 없었다. 윤조의 이가 갈렸다. 정곡을 찔렀다는 얼굴로 자신만만하게 웃는 친구의 이마에 제 이마를 쾅! 하고 찍었다.

“아! 너 미쳤어?”

“사과해! 우리 사장님 모욕한 거 사과하라고!!”

“사장님? 역시 내 생각이 맞잖아? 틀린 말도 아닌데 내가 왜 사과해?”

“사과해!!! 네 말 다 틀렸으니까!!!”

새빨갛게 열이 올라 외치는 윤조의 말에 친구가 잠시 주춤했다. 윤조는 씩씩거리며 어디 그의 정신이 바로 들게 물어줄 자리가 없나 보았다. 멀리서 울리는 벨 소리가 아니었다면 윤조는 당장 친구에게 달려들어 그의 귀를 물어뜯어 버렸을지도 몰랐다.

딩동.

대답이 없자 벨이 한 번 더 울렸다. 윤조는 씩씩거리며 친구를 보았다. 친구가 귀찮은 얼굴로 문 너머를 보았다. 친구의 방은 2층이었고, 정원을 끼고 있는 집이라 집사와 비슷한 인물이 있으리라 막연히 예상했다. 그런데 이리도 조용한 걸 보면 집에는 그와 저 둘뿐인 모양이었다.

딩동.

세 번이 마지막이라는 듯 그 후에 벨이 미친 듯이 울었다.

딩동. 딩동. 딩동. 딩동. 딩동. 딩동. 디디디딩동!

윤조는 기묘한 예감에 제 목덜미를 붙들었다. 일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건 친구도 마찬가지인지 목덜미를 붙든 윤조를 보고서는 스스로 문을 열어주었다. 윤조는 열린 문으로 냉큼 나갔다.

쾅!

대문에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윤조는 그것처럼 닫히는 눈앞의 문을 보았다. 비겁하게 잠기는 소리도. 윤조는 제 예감이 틀리지 않은 것임을 깨닫고 서둘러 친구의 집을 나섰다.

정원을 가로질러 대문으로 향하자 그 너머에 정한이 있었다. 동물원에는 간 적도 없는데, 쇠창살 너머의 사자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윤조의 주춤거림에 정한이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어서 나오라고 손을 까딱거렸다.

철컥.

대문을 열고 나가자 정한이 제 두 팔을 꽉 붙들어 쥐고 곳곳의 냄새를 맡았다. 저야 알파의 냄새를 몰랐지만, 그는 알 수 있었으니, 친구가 제게 남긴 메시지를 다 읽었을 것이다.

“…….”

윤조는 이를 악문 정한을 조심스레 살폈다. 정한이 형형한 눈빛으로 윤조의 얼굴을 훑었다. 친구의 위협은 저도 반항할 수 있을 만큼 별것 아니었다면, 정한의 침묵은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무릎 꿇고 싶게 했다.

“차에 가 있어.”

욱신거리는 목덜미를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윤조가 차에 타는 것까지 확인한 정한이 등을 돌려 열린 대문을 바라보았다. 윤조는 차창 너머로 정한이 멀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이어 닫힌 대문 앞에 보초하듯 선 장정도.

윤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가 누구인지 살폈다. 권 회장이 제게 붙인 경호원이었다. 이 일이 권 회장의 귀에도 들어가겠다 싶어 이마를 짚었다. 방금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할 뻔했는지도 잊고 이름도 모를 친구의 미래를 측은해했다.

꼬박 30분이 지난 후에 정한이 친구의 집에서 나왔다. 자신이 그곳에 머문 시간보다도 긴 시간이었다. 윤조는 그의 몸에서 풍기는 강한 경계 페로몬을 느꼈다. 하지만 말할 입이 없어 따끔한 몸을 끌어안은 채, 죄인처럼 고개만 숙였다.

“윤지원 아니던데.”

“…네. 사실, 이름을 몰라요.”

시동을 건 정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미 자신이 친구의 집을 찾은 목적도 알았을 그라 더더욱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어디 봐.”

뭘 보자는 건지 알 수 없어 윤조는 조심스럽게 눈만 들어 보았다. 그러자 정한이 제 턱을 조심스럽게 붙잡고서 얼굴 곳곳을 꼼꼼하게 보았다. 놓친 게 있을까, 목덜미까지 빠짐없이.

“손.”

윤조는 얌전히 정한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이리저리 손을 살피던 그가 손목에 남은 붉은 손자국을 발견하고 입술을 씹었다.

뾰족하게 느껴지는 정한의 기운에 윤조는 손끝을 떨었다. 윤조의 반응을 보고 급히 페로몬을 숨긴 정한이었지만 밀폐된 공간이다 보니 그 기운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미안.”

“…사장님이 왜 미안해요.”

“함부로 보냈어.”

“저 성인이에요. 어디든 갈 수 있어요. 제가 선택해서 간 건데, 거기 상황이 어떻든… 그걸 사장님이 모두 통제할 수는 없는 거예요.”

“…….”

“미안해요. 제가, 성적에 눈이 멀었어요. 거짓말한 것도… 부끄러워서 그랬어요. 다른 뜻은 없어요.”

“알아. 그래서 미안해. 네가 많이 부담됐을 거야.”

윤조는 정한의 손을 붙잡고 고개를 내저었다.

“3년이나 줬잖아요. 그런데도 내가 모자라서 마음이 흔들리고 조급해진 거예요.”

“윤조야.”

정한의 부름을 잠시 무시하고 윤조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오늘 깨달았어요. 남들은 그냥 나 신세 고친 페크다 출신이라 보고 있다는 거요. 성적이 내 마음만큼 나오지 않아 속상했는데, 고작 이걸로 속상해할 때가 아니었어요. 나 진짜 열심히 할 거예요. 아무도 나 무시 못 하게.”

그래야 정한도 욕보이지 않을 테다. 윤조는 입술을 꼭 깨물고 정한을 보았다. 정한은 대답 없이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만 했다. 윤조는 두 팔을 뻗어 정한에게 안아 달라 청했다. 그의 목덜미에서 뜨겁고 진한 페로몬이 느껴졌다.

“왜 안 가고 있었어요? 역시 내 거짓말이 티 났나 봐요?”

“미심쩍긴 했지.”

“역시… 다 티 났어.”

딩동.

그 청명한 벨 소리가 무섭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윤조는 대문 쇠창살 너머로 마주한 정한의 시선을 떠올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적어도 권 회장처럼 죽이지는 않겠지, 하는 믿음이 있었다.

돌아온 월요일. 반에서 빈자리를 보았을 때는 선득한 두려움이 밀려왔지만.

“괜찮았어?”

“네. 괜찮았어요.”

그 친구 학교를 안 나왔던데요.

윤조는 하고픈 말을 삼키고 창밖만 보았다. 출발선이 다른 시험에 집중해야 했다. 저는 더 멋있어지고, 홀로 당당히 잘나야 했으니까.

하지만 이튿날, 특별한 일도 없이 또 결석한 자리를 확인하고 쓸데없는 걱정이 들었다.

방과 후, 이젠 단골이 되어 찾은 카페에서 조심스럽게 황 집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채 두 번이 가지 않게 전화를 받은 황 집사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 목소리에 권 회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덜컥 떨어졌지만, 윤조는 끝까지 확인하기로 했다. 만약 정한이 그랬다고 하더라도 받아들이기로.

“회장님, 계시면 좀 바꿔주실 수 있을까요?”

-회장님이요? 네, 지금 같이 계시긴 합니다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예,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윤조 님.

잠깐의 정적 후, 권 회장이 전화를 받았다. 벼락처럼 소리만 질러대어 전화 목소리도 우렁찰 줄 알았던 권 회장은 의외로 나긋하게 윤조의 전화에 응했다.

“저… 멀리, 보내셨어요? 아님, 영영, 보내셨어요?”

주어 없이 떠보기만 하는 윤조의 말에 권 회장이 껄껄 웃었다. 이 앞뒤 없는 놈이라고 하며.

-너나 정한이한테 뒷말 돌기 딱인데 뭣 하러 내가 없애겠어? 다른 학교로 치우기만 했으니 걱정 마. 조만간 그 꼴 보기 싫은 책상도 치울 거야.

꼴 보기 싫은 건 아니었지만, 자신이 신경 써서 보고 있는 책상은 또 어떻게 안 건지, 윤조는 간담이 서늘했다. 그래도 어쨌든 죽이지만 않았다면 다행이었다.

“네… 감사합니다. 회장님.”

-내가 아니면 정한이가 했을 거다.

“…….”

-내가 나서는 걸 가만두는 건, 정한이도 동의한다는 거야.

“…….”

-어떤 걸 조심해야 하는지 알겠지?

“…네.”

-쓰레기다 싶으면 날 찾아. 버리는 건 나한테 버려. 그럼 알아들었을 줄 알고 끊으마.

윤조의 대답은 필요 없다는 듯 권 회장이 통화를 끝냈다. 윤조는 이어 황 집사가 보내온 번호를 제 휴대폰에 저장했다. ‘쓰레기통’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

방학을 앞둔 기말시험은 중간과 다를 바 없는 성적을 내었다. 보이지 않는 벽이 여실히 느껴졌다.

정한은 학교를 바꾸어도 좋고, 학교에 이의를 제기해주겠다고도 했지만, 윤조는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제게는 고등학교 성적보다 대학 시험이 중요했으니, 작은 시험에 목매기 싫었다.

“대학 정보도 있다고 했어요.”

“알아봤는데, 그건 그 친구가 거짓말한 것 같아.”

“그래요? 그럼 다행이네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확실하게 처리해 둘게. 너 시험 볼 때 지장 없게.”

“…네.”

“마음 놓고 공부해. 이런 건 신경 쓰지 말고.”

“고마워요.”

“아냐, 내가… 미안해. 잘 알아봤어야 했는데.”

“직접 학교 다닌 나도 눈치 못 챘는데요, 뭘.”

어쩐지 정한이 학교에 다녔다면 알아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윤조는 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시험에 관한 일이 일단락 난 이후, 입학 당시보다도 불타오른 윤조의 굳은 다짐은 잠꼬대로까지 나타났다. 멋있어질 거라는 둥, 잘날 거라는 둥, 다 죽었다는 둥, 떠들어대는 윤조의 잠꼬대를 들으며 정한은 이따금 잠에서 깨 윤조를 응원하듯 등을 안아주었다.

언제나 제 편이 되어주는 따뜻한 위로와 든든한 쓰레기통의 힘을 얻은 윤조는 전에 없이 공부에 빠졌다. 금욕 기간이 아닌데도 절로 금욕할 정도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