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목표를 높게 잡을수록 공부가 더 재미있어졌다. 할 게 많을수록 흥분되었다. 윤조는 공부에 중독된 것만 같았다. 원래도 중독에 약한 사람이었으니 스스로 납득하기도 빨랐다.
방학을 맞이한 윤조는 정한의 출근 이후, 줄곧 서재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집을 관리하는 몇몇 담당자들이 예정된 시간에 드나들 때도 서재만큼은 출입하지 못하게 했다.
밤낮도 잊고 공부에 매달린 결과, 윤조는 전에 없이 홀쭉하게 말라 갔다. 먹는 족족 에너지를 써대니 매일 앉아만 있는데도 살이 찔 틈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맞이한 금욕 기간이었다. 더는 사고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지쳐 잠드는 밤에는 꼼짝도 하지 않고 누운 그대로 아침에 눈을 떴다.
정한은 쉬라는 소리도, 입학시험 전처럼 저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제 중독 상태를 조용히 관망하기만 했다.
전력 질주 같은 중독 상태에 빠진 탓일까. 한 달째에 들어서자 윤조는 번아웃 상태에 이르렀다. 꼬박 열이 올라 종일 누워 있게 된 하루가 계기였다.
윤조는 제 곁에서 잠시도 자리를 비우지 않는 정한을 보며 눈만 깜박였다. 그를 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방학인데, 어디 놀러 가지 않을래? 그리 길게는 못 가겠지만.”
“…놀러요?”
“어. 예를 들어 카프라든가.”
“…카프.”
드넓은 포도밭. 맛있는 와인. 시원한 냇물. 정한에게서 들은 카프에 대한 배경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마침, 두베역 공사도 끝났겠다.”
정한이 보란 듯이 집으로 배달된 두베역 홍보 팸플릿을 들어 보였다. 시설을 증설하면서 새로운 열차도 생긴 듯했다. 반짝반짝 빛을 내는 푸른 기차를 보며 윤조는 희미한 흥미를 느꼈다.
“가서 포도도 따고. 와인도 많이 마시자.”
“식당칸 쿠키도 먹구요?”
“어.”
그거 꽤 재미있을 것 같았다. 윤조는 늘어진 몸을 일으켜 눈을 빛냈다.
“좋아요.”
“다행이네. 안 간다 했으면 섭섭할 뻔했어.”
“왜요?”
“전에 카프 가고 싶다고 해서 밭을 좀 사 놨거든.”
“네?”
“사람 많은 거 싫잖아.”
“아….”
“게다가 거긴 마음대로 따 먹을 수 있어.”
이 계획적인 남자.
윤조는 얼마든지 따먹어도 되는 포도밭을 상상하며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입만 벌리고 있어도 포도알이 알아서 떨어졌으면 했다. 아마 그 ‘알아서’ 하는 건 정한이 할 테지. 윤조의 얼굴에 오랜만에 생기가 돌았다.
“그럼 언제 가요?”
“내일.”
싫다고 했으면 어찌했으려고. 윤조는 정한을 어이없게 보면서도 그가 준비한 카프 여행을 제대로 즐겨주고 싶었다. 다른 생각할 틈도 없이 날을 잡아준 그에게 감사했다. 내일, 새로 생긴 푸른 열차를 타고 11구역, 카프로 향한다.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들떴다.
“며칠 있어요?”
“3일 정도 머물다 올 거야.”
“가는 데는 얼마나 걸리는데요?”
“하루면 돼. 옷 넉넉하게 챙겨.”
당장 내일 아침 출발이었으므로 윤조는 정한과 함께 여행 가방을 싸기 위해 옷 방으로 왔다. 정한이 고르는 옷과 비슷한 색으로 골라 그가 열어 둔 가방에 차곡차곡 챙겨 넣었다. 축 늘어져 있던 게 언제였냐는 듯 윤조의 콧노래가 옷 방에 울렸다.
* * *
다음 날 아침, 택시를 타고 두베역으로 향했다. 이른 새벽에 잠이 깨버린 윤조는 뒤늦게 졸음이 밀려와 비몽사몽인 상태로 정한을 따라다녔다.
택시에서 내려 그의 손에 붙들려 걷느라 두베역을 구경하는 것도 뒷전이었다. 짐을 부치는 정한의 팔에 이마를 대고 길게 하품했다. 온통 새것투성이인 냄새에 속도 좋지 않았다.
“구경해야 하는데, 이렇게 잠이 와서 어째요?”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빼앗긴 듯이 바라본 정한이 윤조의 두 뺨을 그러쥐고 입을 맞추었다. 사람 많은 플랫폼에서 그가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춘 덕에 윤조는 잠이 홀라당 깨고 말았다.
“이제 잠이 좀 깨?”
벌겋게 익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사람은 없었지만 은근한 시선이 느껴졌다.
윤조는 정한의 손을 붙잡고 그의 옆에 딱 붙어 있었다. 저지른 건 정한인데 왜 자신이 움츠러드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억울함에 그를 바짝 올려다보자 또 여지없이 입술이 닿았다. 소리는 내지 않고 꾹 누르듯이 닿은 입술이 슬쩍 벌어지며 혀를 내어 핥았다.
“그러고 보니까요….”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이었다. 정한이 웃음을 지었다. 그의 입술 움직임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우리 안 한 지, 한… 달.”
정한의 웃음이 깊어졌다. 그의 인내를 무어라 평해야 할까. 그의 눈동자에 맺힌 제 하얀 얼굴이 푸른 불꽃처럼 흔들리는 듯했다. 그 불꽃이 제게도 있는 건지 아닌지 그건 카프에 닿아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분명 제게도 있었다. 그의 잇새로 느껴지는 숨이 달콤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분명.
Trrrrr.
예정된 시각, 긴 신호음과 함께 저와 정한을 카프로 보낼 푸른 열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왔다. 거대한 쇳덩이가 몰고 온 바람이 온몸을 쓸기 전, 정한이 저를 막고 섰다. 윤조는 정한의 품에 안겨 코끝을 매만졌다. 조금 부끄럽긴 했지만, 그의 보호가 기분 좋았다. 들어선 새 기차의 반짝이는 모습 또한, 윤조를 기분 좋게 했다.
정한을 따라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그가 예약해 놓은 침대칸으로 갔다. 새 기차는 미자르에서 타고 온 기차와는 차원이 달랐다. 가림막으로 쓸 커튼이 고작이던 침대칸에서 어떻게 3일을 버티고 온 건지. 호텔 객실처럼 분리된 침대칸을 둘러보며 윤조는 감탄했다.
“제가 어떤 침대에서 쪽잠을 자고 왔는지 알면 놀라실 거예요.”
“나 자봤어.”
윤조는 정한의 맞은편 침대에 엉덩이를 대며 놀랐다.
“사장님이요? 사장님이 그런 침대칸을 왜 써요?”
잠시 뜸을 들인 정한이 나쁜 기억이라는 듯 낮게 중얼거렸다. 윤조는 정한의 작은 목소리를 제대로 듣고도 믿기 어려워 되물었다.
“소매치기요?”
“어. 그래, 소매치기.”
“사장님이요?”
“왜. 난 소매치기 안 당할 것 같아?”
“네.”
“맞아. 내가 당한 건 아니지. 이무헌이 당했지.”
“아….”
그렇다면 가능할 것 같았다. 정한의 말로는 여행을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짐은 물론이고 돈과 휴대폰까지 모두 털렸다고 한다. 듣자 하니 소매치기의 수준을 넘어선 듯했지만 윤조는 따로 지적하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오셨어요?”
“음… 역무원한테 빌렸어.”
“역무원이 그렇게 큰돈을요? 그것도 두 사람을?”
“정확히는 셋.”
“아, 한 선생님도 계셨나 봐요?”
“어. 그때 이무헌 머리 다 뽑히는 줄 알았어.”
뻔히 그려지는 풍경에 윤조는 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셋이나 되는 승객의 침대칸 비용을 역무원이 뭘 믿고 도와줬다는 걸까.
“알았다. 회장님한테 전화하셨죠?”
“통화가 됐다면 침대칸이 아니라 뭐라도 날려 보내셨겠지. 우리 헬기처럼.”
“아… 혹시 사장님도 전화번호를 모르셨어요? 저처럼?”
정한이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요?”
“둘은 마땅히 연락할 사람의 번호를 외우고 있지 않았고, 나는….”
잠시 말을 멈춘 정한이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맡겼던 짐을 가져온 승무원이 짐을 놓는 자리에 가지런히 정리해 둔 뒤 사라졌다. 좋은 침대칸을 이용하니, 생각지도 못한 자잘한 서비스가 많았다.
“사장님은요?”
귀중한 정한의 이야기를 놓칠세라 윤조는 승무원의 등장에 끊어졌던 대답의 꼬리를 이어나갔다.
“나야 물론 알고 있었지. 알긴 했지만, …전화하기 싫었어.”
“왜요?”
“그때 좀….”
“회장님이랑 싸웠어요?”
“내가 애야? 싸우게?”
유난한 반응에 윤조는 싸웠구나, 하며 속으로 웃었다. 그렇다고 빈털터리가 됐는데도 연락 안 하다니. 무슨 배짱인가 싶었다. 윤조는 혹시나 제게도 같은 일이 생길까 해서 미리 말해 두기로 했다.
“혹시 또 소매치기 당해서 빈털터리가 되면요.”
“그럴 일 없어.”
“그래서 ‘혹시’라고 했잖아요. 그때, 만약 나랑 싸웠더라도 꼭 전화해줘요.”
정한이 어이없이 웃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윤조는 싸운 거 맞네, 뭐, 하고 중얼거리며 침대 한가운데 놓인 틴 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뚜껑을 열어 보니 소포장이 된 쿠키가 여럿 들어 있었다. 파란 기차 마크가 인쇄된 포장지는 무척 고급스러워 보였다. 이걸 아까워서 어떻게 먹나, 하며 윤조는 정한을 보았다.
“드실래요?”
“아니. 생각 없어.”
그렇다면 기념으로 챙겨 가야지.
틴 케이스를 짐 가방 위에 올려 둔 뒤 정한의 곁에 앉았다. 당연한 듯 제 턱을 붙잡고 입을 맞춘 정한이 침대칸의 반투명한 문을 바라보았다.
블라인드를 내려 완전히 가릴 수 있었지만 아직은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듯했다. 윤조는 조금 아쉬운 얼굴로 정한에게 사건의 자초지종을 계속해서 물었다.
“그래서, 역무원이 사장님의 뭘 믿고 돈을 빌려줬어요?”
“내 시계.”
“시계요?”
“어. 승주가 내 시계 벗겨서 줬어.”
“아….”
그 풍경 역시 보지 않아도 알 듯했다.
“그거 다시 받으러 갔어요?”
“뭐 하러. 귀찮게.”
“그래도… 기차표보다는 훨씬 비쌌을 텐데.”
“영영 못 돌아올 수도 있었는데. 그거면 싸게 치인 거지.”
“그래요?”
“어.”
“그 정도로 심하게 싸웠어요?”
“왜 얘기가 그리로 새?”
“아니… 그냥.”
슬그머니 옆으로 떨어지며 괜히 딴청을 했다. 그러다 퍼뜩 다시는 하지 못하리라 여긴 일을 떠올렸다. 왜 저 고급 쿠키를 보고도 생각하지 못했을까. 윤조는 벌떡 일어나 정한의 앞에 섰다.
“식당칸 가요.”
“배고파?”
“아뇨. 커피 마시러.”
“그 저질 쿠키 먹으러?”
정한은 제 말을 아주 정확히 해석했다. 윤조는 먹을 생각이 전혀 없는 정한과 함께 식당칸을 찾아 나섰다.
침대칸 복도 창으로 두베역을 벗어난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났다. 윤조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참 느리게도 간다, 여기저기 많이도 들른다, 생각했던 낡은 기차와는 전혀 달랐다. 자꾸만 비교하게 되는 마음에 그만 시선을 거두고 맞잡은 정한의 손을 당겨 다시 복도를 걸었다.
식당칸에는 사람이 즐비했다. 서로 이야기하기 바쁜 친구, 식사에 몰두하고 있는 아이,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 노부부, 그리고 마주 앉지 않고 서로 같은 의자에 나란히 앉은 저와 정한 같은 연인까지. 아주 다양한 군상이 있었다.
“배고프면 식사해도 돼.”
“커피면 돼요. 제일 싼 거. 여보는요?”
여태 사장님이라 부르다 ‘여보’라는 소리에 정한의 시선이 잠깐 윤조에게 머물렀다. 저나 정한을 아는 사람 앞에서는 편하게 사장님이라 불러도 되었지만, 바깥에서 그를 사장님이라 부르면 마음씨 나쁜 사람들이 오해하고는 했다. 예를 들어, 아직도 이름 모르는 전학 간 그 알파처럼. 윤조는 그 이후로 괜한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다.
“글쎄 나는, 음… 차가 좋겠네.”
정한이 자주 마시는 차를 골라 윤조의 커피와 함께 주문했다. 잠시 그의 옆에서 노닥거리고 있자니 주문한 커피와 차가 나왔다.
“어… 쿠키가….”
아쉽게도 이 푸른 열차에서는 그 달아빠진 쿠키를 맛볼 수 없는 듯했다. 일부러 가장 값싼 커피를 주문했는데, 침대칸에 있던 틴 케이스 안의 쿠키가 함께 나왔다. 어찌나 부드럽고 살살 녹는지. 저질 쿠키가 조금도 아쉽지 않은 맛이었지만, 어딘가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정 아쉬우면 올 때 다른 기차 타도 되고.”
“그건 3일 타야 한다면서요. 이건 하루면 되는데.”
그렇다고 고생하고 싶지는 않았다. 단호한 윤조의 대답에 정한이 웃었다. 머쓱한 마음에 멀리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는 윤조의 뺨을 정한이 매만졌다. 찻잔의 온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끝 모르고 달렸던 지난 한 달간의 보상 같은 여행의 시작이었다.
*
꼬박 하루를 쉬지 않고 달린 기차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섰다. 카프역은 두베와 달리 따로 신분증 검사를 하지 않았다. 다른 칸에 탄 사람들은 하는지 모르겠지만, 누구도 검사를 핑계로 앞을 막아서는 사람은 없었다.
플랫폼에 미리 승무원이 대기시켜 놓은 짐을 정한이 챙겨 들었다. 윤조는 정한의 손만 잡고서 자그마한 카프역을 나왔다.
포도로 유명한 곳답게 여기저기 포도를 이용한 장식물이 많았다. 정한이 미리 불러 놓은 택시의 갓등도 포도 모양이었다.
꽤 귀여운 모양이라 윤조는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내 찍었다. 정한이 윤조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웃었다.
“짐은 이게 전부입니까?”
“네.”
“그럼 타시지요.”
택시 기사가 트렁크에 짐을 옮겨주었다. 윤조는 어서 포도밭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올라탄 택시 창에 바짝 붙어 앉았다.
축제가 있다더니, 역 앞은 물론이고 달리는 길마다 사람들이 많았다. 정한이 밭을 산 이유가 여실히 실감 되었다.
한참을 달린 끝에 흙길이 나타나고, 곧 포도밭이 펼쳐졌다. 키 작은 나무의 행렬이 꼭 자를 대고 자른 것처럼 균일했다. 윤조의 감탄에 택시 기사가 아직 놀라기는 이르다며 곧 절경이니 기대하라고 말했다. 윤조는 정한이 짐 가방에서 미리 제 몫으로 꺼내어준 밀짚모자를 움켜쥐며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듯이 창밖에 집중했다.
그때, 포도를 정수리에 인 택시가 오르막길을 살짝 올랐다가 하강하듯 내려갔다. 마치 신호처럼 덜컹, 거리는 소리가 난 이후 줄지어 나타난 포도밭에 윤조는 전보다 더 크게 감탄했다.
“와… 너무 예쁘다.”
빼곡하고, 또 아기자기하게 구분되어 있는 포도밭 저 너머에 커다란 호수가 보였다. 거기서 부서지는 햇살과 바람에 춤추는 초록 이파리, 그 사이사이로 얼굴을 내민 실하게 익은 붉은 포도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윤조는 넋을 놓은 채 도대체 어느 포도밭이 정한이 산 포도밭일지 궁금해했다.
“얼마나 더 가야 해요?”
“조금 더 안이야.”
“조금 더 안….”
기분 탓일까. 왜 야하게 들리지.
윤조는 자신이 그간 지나친 금욕을 한 탓이라 생각하며 다시 창밖으로 눈을 두었다. 곧 기차처럼 서서히 속도를 줄인 택시가 정차했다.
“다 온 거예요?”
“어.”
냉큼 택시에서 내린 윤조는 눈을 찌르는 빛에 밀짚모자를 푹 눌러 쓰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온통 포도밭이라 어디가 제 밭인지 알 수 없었다.
그사이 짐을 내린 택시 기사가 즐거운 여행 되라며 인사를 건넸다. 윤조는 정한이 그에게 두둑한 팁을 챙겨주는 걸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어디예요?”
택시가 일으킨 흙먼지를 손으로 저어내며 윤조는 눈앞의 포도밭을 서성였다. 아마도 여기인 듯한데, 확신이 없었다. 그러면서 차곡차곡 가까이 다가간 걸음이었다. 금방이라도 닿을 듯한 거리에 윤조는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정한이 뒷덜미를 붙잡아 당기지 않았다면 발밑의 얕은 수로를 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빠졌을 테다.
“거기 아냐.”
“여기 아니면요?”
휙 돌린 고개에 미끄러진 모자를 붙잡으며 윤조는 정한의 옆에 바짝 붙었다. 어서 포도를 맛보고 싶었다.
“저기 건너.”
더는 길이 좁아 차가 들어갈 수 없는 길 건너를 향해 정한이 손짓했다. 윤조는 달릴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는 붙잡은 뒷덜미를 놓아주지 않았다.
“짐부터 가져다 놓고.”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어디서 자요?”
“저기서.”
마찬가지로 길 건너, 정한이 가리킨 통나무로 된 이층집. 윤조는 이런 나무집은 처음이라 금세 호기심이 생겼다. 읽고 이해하고 외우고 푸는 것 하나 없이, 보이는 정보 그대로만 받아들여도 되니 어찌나 편하고 즐겁기만 한지.
“열쇠 가져가.”
정한이 열쇠를 손에 들려주었다. 열쇠 끝에는 포도 넝쿨이 새겨진 나무 조각이 대롱대롱 달려 있었다. 윤조는 짐을 끄는 정한보다 앞서 걸었다.
“여기죠?”
“어.”
경계처럼 둘러싼 울타리 사이에 비스듬히 열린 나무문을 밀고 들어가 잔디가 깔린 마당을 가로질렀다. 통나무집은 마당 크기에 비해 좁은 면적이라 정한과 둘이서 지내기에 안성맞춤으로 보였다.
얕은 계단을 올라 열쇠로 문을 열어 보니, 바깥에서 보기보다 내부가 무척 넓었다. 깊다고 해야 할까.
윤조는 새집을 구경했을 때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두베의 집과는 전혀 다른 인상의 집이었는데, 어떻게 정한이 이곳으로 골랐는지 알 수 없었다. 윤조가 아는 한 이곳은 정한의 취향과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할머니 집 같아요. 가 본 적 없지만. 왜, 책에서 할머니 집은 이런 러그도 있고, 흔들의자…!”
책에서만 보던 흔들의자가 창가에 놓여 있었다. 윤조는 모자가 날리도록 달려가 앉았다. 생각만큼 편하지는 않았지만, 한 번 앉으면 잠이 들 때까지 흔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에 들어? 집에 들여놓을까?”
“사장님이 이걸 두고 볼 수 있을까요?”
“네가 좋아하는 거면 괜찮아.”
“그런 전제가 붙어야 하잖아요. 나만 사는 것도 아닌데, 둘 다 좋아야지. 그리고, 이런 건 가끔 만나야 좋고 그런 거예요.”
정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창가에 기대어 앉았다. 그의 등 뒤로 쏟아지는 눈 부신 빛을 보고 있자니 잊고 있던 일이 불쑥 떠올랐다.
“포도!”
“그래, 보러 가자.”
정한이 샀다는 포도밭은 그리 큰 면적은 아니었다. 이곳 토박이들이 좀처럼 땅을 주지 않아서 고전이었다고. 이것도 대여 개념이라고 했다. 관리는 고집스러운 본래 주인이 하고, 저와 정한은 할애받은 공간 안에서 원하는 만큼 즐기면 되었다. 윤조는 고작 요 며칠을 위해서 그 귀찮은 과정을 거친 정한에게 그저 고마웠다.
“다 먹을게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돼. 여기서 딴 포도로 만든 건 개인 셀러에 넣어 두라고 했으니까.”
“개인 셀러?”
“어, 여긴 다른 지역 사람들이 개인 셀러를 만들어 놓더라고. 이번같이 축제 있을 때나, 가족 행사 때 와서 셀러에 저장한 와인 이용하는 개념?”
“아하… 그럼 다음에 오면 여기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 마실 수 있는 거예요?”
“물론.”
언제든 카프에 올 이유가 생겼다. 게다가 개인 셀러라니. 저택 지하의 거대한 와인 저장고만큼이나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윤조는 탐스러운 포도알을 손으로 쓸며 맛있게 숙성되어 제 배에서 출렁거릴 날을 기대했다.
“권정한 씨?”
어떤 걸 제일 먼저 먹을까, 하며 포도를 살피고 있는데, 농장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이 나타났다. 정한을 확인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미리 수확해 놓은 포도를 슬그머니 내밀었다. 윤조는 감사하다고 인사하며 포도를 맛보았다. 입 안에 달콤한 침이 고이다 못해 흐를 것 같은 맛이었다. 하나둘, 입에 넣다 보니 소복하게 쌓여 있던 포도송이가 빠르게 부피를 줄여나갔다.
“어, 그럼….”
관계자는 조금 퉁명스러운 말투로 포도밭과 양조장, 그리고 자신이 일하는 농장에 대한 역사를 소개했다.
윤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포도를 집어 먹었다. 끝내 포도송이를 매달고 있던 줄기만 앙상하게 남았을 때, 내내 퉁명스럽던 관계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정한 씨, 그리고 동행자분. 이쪽으로 오시지요.”
전보다는 유연해진 태도의 관계자가 계속해서 윤조와 정한을 안내했다. 정한이 계약한 농장은 카프에 있는 모든 농장 중에서 규모가 가장 컸다. 그만큼 양조장도 컸는데, 때가 때인 모양인지 견학을 온 사람들도 많았다.
사람이 많아지자 정한이 손을 잡아 왔다. 윤조는 모자를 꾹 누르고서 관계자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서 철제로 된 계단을 올랐다. 아래를 빠끔히 내려다보니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가 줄지어 있었다. 입을 벌리고 놀라는 윤조를 보며 관계자는 앞으로 더 놀랄 것이 있다고 으스대었다.
“우와… 끝이 있긴 해요?”
지하로 내려와 포도밭만큼이나 끝도 없이 이어진 오크통 앞에서 윤조는 중얼거렸다. 이걸 다 누가 마신단 말인가. 저는 물론이고 두베 사람들 전체가 평생을 마셔도 남을 듯했다.
윤조는 관계자의 허락을 받고 오크통이 전시된 지하의 사진을 찍었다. 어쩐지 권 회장에게 자랑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에게 이 사진을 보낼 만큼 간이 크지는 않았다.
“눈으로만 봐서 어디 성에 차겠습니까? 맛도 보러 가시죠.”
관계자의 말에 정한이 웃었다. 조금 투박하긴 했지만, 윤조는 관계자의 농장 사랑이 마음에 들었다. 그의 자부심만큼 와인 역시 만족스럽게 맛이 좋았다. 홀로 한 송이를 다 뜯어 먹었던 포도가 이런 와인이 되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까 와인 마시면서 생각했는데요.”
양조장을 나와 호수로 구경 가는 길, 윤조는 포도밭마다 피어 있는 꽃을 살피며 정한에게 말했다.
“만약 사장님이 의사 선생님이 아니고 포도 농장 사장이었으면 전 기를 쓰고 농사일하겠다고 했을지도 몰라요.”
“내가 무엇이든 내가 되고 싶은 거야?”
“아뇨. 제가 아는 세상이 사장님뿐이라는 뜻이에요. 다들 대단하고 부러워요.”
“왜, 너도 열심히 하고 있잖아. 나랑 한 달이나 안 할 만큼.”
윤조는 코끝을 매만지며 웃었다.
“아무튼, 제 궁극적인 목표는 아침이고 저녁이고 모든 때에 사장님 옆에 있는 거였거든요?”
“왜, 이제 여러 세상이 있는 거 알았으니 눈 돌리겠다는 거야?”
“아…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정한이 웃으며 잡은 손을 꽉 붙들었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는 건 어림도 없다는 듯.
“데려와 줘서 고맙다고 말하려는 거였어요. 전 미자르 우물에만 사는 개구리였는데, 제 몸이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커다란 오크통을 보게 됐잖아요. 거기다 회장님 와인만 빌려 마시고 있었는데, 이젠 어떤 사람이, 어떤 과정으로, 또 어떤 곳에서 만들었는지 아는 와인도 마시게 됐고.”
숨이 차서 잠시 말을 멈추었다. 윤조는 제 모자 끝을 들어 올리는 정한의 손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마주한 정한이 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그가 제 남은 말을 삼키듯 입을 맞추었다. 기어코 윤조의 머리에서 미끄러져 내린 밀짚모자가 등 뒤로 훌러덩 넘어갔다. 윤조는 제 허리를 감아 오는 정한의 손에 훌쩍 몸이 들렸다.
호수 구경도 가야 하고, 저녁에는 축제 구경도 해야 했는데, 이대로 숙소로 들려가 침대에 던져질 것 같았다. 윤조는 다급히 정한의 어깨를 붙들었다.
“…호, 호수.”
“어. 호수.”
정한의 저음이 몸을 떨리게 했다. 윤조는 정한의 어깨를 붙든 손을 지분대다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한 달을 참았는데, 지금부터 하면, 집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어찌 될지 뻔했다. 제동을 걸어야 했다.
“…호수도 봐야 하고, 축제 구경도 해야죠. 카, 카프까지 왔는데.”
의지를 대변하듯 숙소로 향하던 정한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윤조는 정한의 등 뒤를 가리켰다. 고개를 돌려본 그가 짧게 혀를 찼다. 윤조는 흘러내린 모자를 다시 눌러쓴 뒤, 정한의 손을 잡고 그를 호수로 이끌었다.
양조장과 비교해 호수로 이어진 길은 인적이 드물어 고요할 줄 알았는데, 막상 근처로 가니 인파로 바글바글했다. 사람은 물론이고 호숫가 근처의 식당마다 펼쳐진 색색의 파라솔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적당히 마셔, 저녁에도 마셔야 하니까.”
“네에.”
한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아 호수를 구경하며 다른 농장에서 생산된 와인을 마셨다. 다 같은 카프 땅인데 왜 저마다 맛이 다른 건지. 노을이 지기 시작할 무렵 시작된 축제에서 맛본 갖가지 와인들도 특색 있게 달랐다.
“자기, 이름 외우고 있죠?”
“어.”
“회장님한테 하나 사서 보내도 될까요? 이거 엄청 맛있는데….”
정한이 무슨 소린가 하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윤조는 자신이 무심코 입에 올린 이름에 놀라 제 입을 틀어막았다.
“아버지 생각을 왜 했을까?”
“어… 그간 제가 저택에서 신세 졌으니까요…?”
“단지 그런 이유야? 아버지랑 따로 연락하고 그런 건 아니고?”
정한은 명우의 연락처 하나만을 허락해주었지만, 그 뒤로 따로 체크하거나 검열하지는 않았다. 윤조는 문득 제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쓰레기통’이 찝찝해졌다.
“전에, 그… 그, 뭐야. 그 전학 간 친구가 그, 전학을….”
“전학이 아니라 죽였을까 봐 연락해 봤어?”
어쩜 이렇게 잘 알지.
자신이 개떡같이 말해도 그는 찰떡같이 잘 알아들었다. 배부르게 마신 술이 홀딱 깨는 기분에 윤조는 제 눈가를 문질렀다. 그 바람에 먼지가 들어갔는지 눈이 가려웠다. 가만 보던 정한이 윤조의 손을 잡아끌어 눈가에 바람을 훅 불어주었다. 순식간에 간지러웠던 것이 날아가며 눈이 개운해졌다. 윤조는 웃으며 정한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표정을 굳힌 채였다.
윤조는 정한을 빤히 바라보다 시선을 돌려 주홍빛으로 현란한 축제의 광경을 슬쩍 훑었다. 이렇게 다들 술에 취해 흥겨운데 왜 저만 혼나고 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축제의 흥분을 가라앉힐 만큼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 소리를 한 건 인지하고 있었기에 어서 그의 기분을 풀어야겠다는 본능이 앞섰다.
“맞아요. 형 말 맞아요. 그래서 연락 드렸어요. 다행히 안 죽이셨더라구요….”
“형까지 나오는 거 보니 많이 찔린 모양이네.”
“형이 자꾸… 그렇게 보니까.”
“내가 어떻게 보는데?”
윤조는 제 양쪽 눈을 위로 끌어 올리고 정한을 흉내 내었다. 정한은 아니라고 했지만 누가 보아도 성난 모양이었다.
“제가 이런 말 하는 것도 좀 우습긴 한데, 사장님 인제 그만 회장님이랑 화해하세요.”
“왜 갑자기 또 사장님이야?”
“아, 그럼. 형… 자기, 여보…. 아, 아버… 아버님이랑 화해해요.”
“아버님?”
어째 말을 하면 할수록 정한의 화를 더 북돋우는 듯했다. 윤조는 제 입술을 부여잡고 침묵을 행사했다.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지루한 권 씨 부자의 싸움에 등도 터지기 싫었고. 취기는 계속해서 올라왔다.
“윤조야.”
“…….”
“여보?”
“…….”
“자기.”
“…….”
“말 안 할 거야?”
“…눈이 동그래지면.”
“내 눈이 뾰족해?”
윤조는 제 입술을 붙든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정한이 제 눈매를 매만졌다. 그렇게 해서는 알 수 없었는지 윤조의 눈에 비친 제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윤조는 가까이 다가온 정한을 보고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며 웃었다.
“그렇게 좋아?”
“응….”
“…취했네.”
얕은 한숨을 내쉰 정한의 눈매가 그제야 둥글게 마모되었다. 그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술 취한 제 남편을 꼭 붙들고 그 취한 남편이 지정해 둔 와인을 산 뒤, 굳이 자신이 안고 가겠다는 고집을 뿌리치고 축제 현장을 가로질렀다.
윤조는 자신이 어디로 끌려가 무엇을 당할지 알면서도 정한을 막지 못했다. 아니, 막지 않았다. 저 또한 그러고 싶었으므로.
*
돌아온 통나무집은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은 것처럼 따스했다. 두꺼운 나무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정한이 저를 벽으로 이끌었다. 윤조는 정한의 목에 매달려 그의 입술과 혀를 정신없이 빨았다. 목에 걸린 모자가 거추장스러웠다.
윤조는 제 목에 걸린 모자 끈을 움켜쥐고 정한의 입술이 떨어질 찰나 서둘러 제 얼굴 위로 들어 올렸다. 어딘가에 나동그라졌을 밀짚모자를 주우려는 듯 정한이 몸을 낮췄다. 윤조는 그럴 필요 없다고 하려 했지만, 곧 제 바지 버튼을 열어 지퍼를 내린 정한을 보고 말리려던 손을 멈칫했다.
단번에 윤조의 바지와 속옷을 끌어 내린 정한이 성기를 들어 그 사이로 촉촉하게 젖어 있는 틈을 향해 혀를 밀어 넣었다. 윤조는 허리를 굽히며 다급한 숨을 내쉬었다.
“하아…!”
바지의 다리 한쪽을 벗겨낸 정한이 밀착하듯 윤조의 가랑이 사이로 붙었다. 윤조는 벽에 등을 댄 채 정한이 벌리는 대로 무릎을 열고서 제 좁은 틈으로 밀려 들어오는 성기 같은 혀를 받아들였다. 쑤시듯이 침범해 온 뜨거운 살덩이가 녹진하게 젖은 안을 빨아 먹었다. 윤조는 젖어 가는 정한의 입가를 손으로 더듬었다.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덥고 습한 기운이 손끝에 전달되었다.
“아아… 정한 씨….”
양조장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불렀다. 그는 사장님, 형, 여보, 자기, 많은 이름이 있었지만, 이름으로 불러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왜 하필 이때 그를 이렇게 부르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조는 내리깔고 있던 정한의 속눈썹이 천천히 들리며 저를 응시하는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한의 까만 눈동자, 그 속에 담긴 석양빛의 길쭉한 몸이 움찔거렸다. 정한이 혀를 깔짝대며 안을 긁고 나갔기 때문이다.
“그거 색다르네.”
젖은 입술이 웃었다. 윤조는 다시 제 밑에 입을 맞추는 정한을 불렀다. 그는 더욱 깊고 또 느긋하게 차올랐다. 아직 삽입하기도 전인데 지나치게 몸이 젖어 갔다.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액을 정한이 보란 듯 손으로 쓸어 올렸다. 윤조는 정한의 손끝이 제 몸을 스치는 일련의 행동마저도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정한, 읏… 정한 씨….”
정한이 대답하듯 안으로 쑤셔 넣은 혀를 흔들어 대었다. 윤조는 제 깊은 안이 벌어지며 그를 기대하는 걸 느꼈다. 배 속이 근질거렸다. 강렬한 충동이 툭 터지듯 허벅지 사이를 가르고 쏟아졌다.
“하…!”
발치의 바지와 속옷 위로 얼룩이 생기며 젖어 갔다. 윤조는 숨을 가쁘게 내쉬며 정한을 멍하니 보았다.
“…….”
정한이 제 목울대를 따라 흐른 윤조의 흔적을 손등으로 쓸어 닦았다. 윤조는 정한의 젖은 입가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미끈거리고 온통 제 냄새로 축축했다. 그의 숨이 손가락을 스칠 때마다 배 속이 조여들었다.
“…정한 씨.”
왜 보고만 있어요?
묻고 싶었다. 그의 숨이 그저 제 손가락을 스치기만 해서. 윤조는 정한의 입술을 더듬으며 그를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가만히 저를 관망하기만 하던 정한이 혀를 내어 입술을 간질이는 손가락을 핥았다.
이리저리 혀를 치대던 정한이 키스하는 것처럼 혀로 손가락을 감았다. 그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간 손이 뜨겁게 삼켜지고 이내 뱉어졌다. 입을 벌린 채 정한이 하는 양을 보던 윤조는 저를 보며 미소 짓는 정한의 얼굴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허벅지를 따라 손을 쓸어 올린 정한이 엉덩이를 받치며 윤조를 안아 들었다.
윤조는 정한에게 매달려 그의 혀를 정신없이 빨았다. 머리를 감싸는 손길에 윤조는 조금 더 그에게 밀착했다. 계단을 오르는 느낌이 났다. 바닥이 삐거덕거리며 요란하게 울어댔다.
그에게 안겨 도착한 곳은 2층 어느 방이었다. 침대에 저를 눕힌 정한이 무릎걸음으로 기었다. 제 등이 닿을 때부터 삐거덕거리던 침대가 불편한 소음을 내었다. 윤조는 제 다리 사이로 파고든 정한을 안으며 삐걱이는 침대 소음을 즐겼다. 그가 저를 마구잡이로 흔들 때 울리는 소음에는 웃음까지 났다.
끼익, 끼익, 끽, 끼익, 끼익.
정한이 키득거리는 윤조의 입술을 물었다. 그의 숨결에서도 페로몬이 느껴졌다. 윤조는 웃음을 그친 채 정한을 응시했다. 혀끝으로 가만히 입술을 쓸던 정한이 윤조의 몸을 뒤집었다. 윤조는 정한의 손짓에 따라 엉덩이를 세우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아아…!”
그가 제게 짓누르듯 들어왔다. 금방이라도 질구에 닿을 듯 깊숙이.
“후….”
허리와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린 그의 페로몬이 피할 사이도 없이 저를 적셨다. 윤조는 정한을 들이마시고 또 내쉬었다.
“하아, 아아, 아, 하….”
더는 침대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베개 위로 쏟아지는 제 신음 때문일까. 아니면 그와 제 살이 부딪히는 소리 때문일까. 어쩌면 이따금 지르는 제 비명 같은 흥분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아!”
온몸이 축축하게 젖었다. 마치 그에게 빨린 사탕처럼. 침대 시트를 붙잡는 윤조의 손짓이 허무하게도 계속 어긋났다. 그가 지나치게 깊게, 또 빠르게 들어온 탓이다. 그런데도 조금의 고통 따위는 느낄 수 없었다. 그야말로 그에게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으, 응! 흐! 아!”
윤조의 아랫배를 높이 안아 올린 정한이 바닥을 찧듯 몸을 쑤셔 넣었다. 정한의 팔에 들린 윤조는 다리를 허우적거리며 헤매다가 겨우 바닥에 발을 디뎠다. 그것도 잠시, 자꾸만 발이 미끄러졌다. 제 성기에서는 이미 물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나친 자극에 숨을 쉬는 것도 잊었다.
“윤조야, 숨 쉬어야지.”
그가 제 폐를 어루만지듯 흉곽을 더듬었다. 윤조는 축축하게 젖은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겨우 숨을 들이마셨다. 느긋하게 흉곽을 쓸어내던 정한이 젖꼭지를 꼬집듯이 붙잡고 앞으로 당겨대었다. 그의 손톱에 짓눌린 고통이 기분 좋았다. 윤조는 허리를 떨며 그를 담은 안을 바짝 조였다. 그에게서 기분 좋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만큼의 페로몬 역시도.
“하아….”
목이 뜨거웠다. 그를 느끼는 목덜미가 웅웅 울어댔다. 제 몸도 그렇게 우는 듯했다.
“힘들어?”
“아니요… 좋기만 해요….”
후들거리는 윤조의 다리를 붙든 정한이 몸을 바로 눕혀주었다. 윤조는 아무렇게나 늘어져 누워 침대 헤드 위로 길쭉하게 난 창을 향해 시선을 두었다. 구역마다 하늘이 다르기라도 한 걸까. 이곳은 별이 포도알처럼 빼곡했다.
“별이, 많아요.”
윤조의 말에 정한이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의 외부로의 관심은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만큼이나 순간적이었다. 윤조는 곧 제 두 다리를 벌리고 들어선 정한을 끌어안았다.
다시 침대가 삐거덕거렸다. 윤조는 이따금 별을 응시하고, 턱이 붙들려 그에게 혀가 빨리고, 그의 부름에 대답하며, 페로몬에 취해 혼몽한 시선을 헤매었다. 몇 번이나, 또 얼마나 그에게 안겼는지는 알 수 없었다.
“흐… 으읏….”
지나친 격정이었다. 저를 뒤에서 안고 있는 정한의 팔에 갇힌 채 윤조는 몇 번째일지 모를 오르가슴에 다다랐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성기 끝에서 물이 흘렀다. 질펀하게 젖은 시트가 불쾌할 사이도 없이 제 몸도 그렇게 젖어 있었다.
“하아….”
신음과 함께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정한이 깊은 곳에 성기를 박아 넣은 채 사정했다. 윤조는 제 배 속을 간지럽게 두드리는 정한의 정액 줄기를 느꼈다. 곧이어 빠져나가는 뜨거운 덩어리도.
배 속이 온통 그로 가득 차 출렁거렸다. 윤조는 배가 무거워 그를 조금 비워내고 싶은 마음에 두 팔로 침대 바닥을 디디며 기었다. 사실 비우는 건 핑계고, 조금 쉬고 싶었다. 그에게는 영락없이 도망으로 보였으리라.
“어디 가.”
도망가는 윤조의 발목을 그러쥐고 정한이 힘껏 당겼다. 윤조는 그대로 정한에게 끌려가 다시 꿰뚫렸다. 정액으로 그득한 안이 넘치며 쑤셔졌다. 윤조는 침대 시트를 붙잡으며 소리 없는 신음을 삼켰다.
* * *
눈언저리를 간지럽히는 열기에 몸을 뒤척였다. 베개 밑으로 머리를 집어넣고 조금 더 잠을 청하려는데 새소리와 사람들의 재잘거리는 수다 소리가 창 너머로 들려왔다. 아무래도 더 자는 건 힘들겠다 싶었다.
윤조는 아직도 제 코끝에서 느껴지는 정한의 페로몬에 눈을 떴다. 온몸 곳곳 정한이 느껴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제 기상을 눈치챈 정한의 체온이 등을 덮었다. 허리를 옥죄는 팔과 귓가를 간질이는 입술이 이만 일어나 자신과 놀아 달라 재촉하는 듯했다.
“몇 시예요…?”
끔찍한 목소리였다. 윤조는 목을 가다듬으며 베개에서 머리를 빼내 정한을 보았다. 저는 이렇게나 엉망인데 그는 어찌나 멀끔한지 묘한 배신감이 들었다.
“11시.”
“아직 멀었네….”
적어도 오후 2시까지는 잘 작정이었는데 3시간이나 빨리 일어났다. 윤조는 다시 잠을 청하려고 베개 밑에 머리를 집어넣었지만, 척추를 따라 입을 맞추는 정한의 장난에 그만 간지러움을 느끼고 말았다. 버둥거리는 윤조의 몸을 끌어안은 정한이 금방이라도 또 제 속을 파고들 듯 두 팔을 내리누르고 보았다. 윤조는 제 벌어진 가랑이 사이를 들여다보는 정한에게 고개를 내저었다.
“부었네.”
“아프진 않아요.”
“그럼, 내가 얼마나 쏟아부었는데.”
그가 저를 안으려 폭격처럼 내린 것들을 떠올렸다. 온몸에 진동하는 그의 페로몬과 정액 냄새를 보아 아주 꼼꼼히 몸을 씻어야 할 듯했다. 그렇지 않으면 카프에 놀러 온 많은 이들에게 지난 밤 제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광고하는 꼴일 테니.
“씻을래요….”
“물 받아 놨어.”
“계획적이야….”
정한이 웃으며 손을 붙잡았다. 윤조는 침대에서 뽑히듯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뒤뚱거리는 윤조의 등을 다잡은 정한이 2층 욕실이 아닌 1층 욕실로 이끌었다. 다를 게 있나 싶어 별 기대 없이 들어선 욕실에서 윤조는 웃음을 터트렸다.
1층 욕실에는 일반적인 욕조가 아닌 오크통이 놓여 있었다. 윤조는 냉큼 오크통에 몸을 담갔다. 통 끝까지 차 있던 물이 윤조의 침입으로 넘쳐났다.
“으아….”
따뜻한 물에 온몸이 녹는 듯했다. 윤조는 머리끝까지 몸을 가라앉혔다가 고개를 빼고 정한을 보았다. 문설주에 기대어 있던 정한이 이만 씻으라 하며 문을 닫고 나가주었다. 윤조는 꽤 긴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몸을 씻었다.
꼬르륵.
제 온몸에서 피어나는 정한의 흔적을 오크통에 녹여내고 나니 홀쭉한 배가 밥을 달라고 비명을 질러댔다.
“진짜 계획적이야.”
씻고 나오자 정한이 소풍 바구니를 옆에 두고 대기하고 있었다. 척 보아도 먹음직스러운 식량이 그 속에 담겨 있을 듯했다. 삐죽하게 목을 빼고 있는 와인병은 덤이었다.
“널 잘 아는 거라고 해 두자.”
“그렇긴 해요.”
윤조는 덜 마른 머리로 정한과 함께 나들이를 나섰다. 햇볕이 따뜻했다. 바람은 상쾌하고, 온몸은 삐거덕거렸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양조장과 호수의 반대편으로 걸었기에 온통 새로운 것들만 구경했다. 10분쯤 걸었을까. 드디어 정한이 봐 둔 시냇가에 이르렀다.
커다란 나무 아래에 포도송이가 그려진 커다란 천을 깔고 앉아 느긋하게 배를 채웠다. 계획적이고 저를 아주 잘 아는 남자가 넉넉하게 음식을 챙겨와 준 덕분에 윤조는 부른 배를 두드리며 만족한 얼굴로 웃을 수 있었다.
“더는 못 먹겠어요.”
다 먹은 뒤에 하는 말이라 조금 비겁하긴 했다. 정한은 먹은 자리를 정리하고, 윤조는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유유하게 흘러가는 구름을 보았다. 졸졸 흐르는 냇물 소리와 시원한 바람이 뺨을 스치자 잠이 솔솔 밀려왔다.
“잘 거야?”
“아뇨… 안 자요. 자기랑 놀아야 해요….”
윤조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지극한 여유를 즐겼다. 정한이 새처럼 제 입술을 몇 번 쪼아댔다. 저를 깨우려고 그러나 싶었는데 곧 얼굴 위로 모자를 얹어주었다. 윤조는 정한이 만들어준 그늘에 숨어 곤한 낮잠을 잤다. 배를 덮는 손길이 이불처럼 따뜻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단잠을 잔 덕인지 몸이 개운했다. 이 또한 정한의 계획에 있던 걸까. 벌써 하루가 지나버린 일정이 아까워져 윤조는 벌떡 일어나 정한과 함께 카프 구경에 나섰다.
카프에서 두 번째로 큰 양조장에 견학 갔다. 계약한 양조장과 달리 일반 견학이라 사람들에게 무척 치였다. 사람 많은 건 질색하는 정한이 인내심 있게 참아주었다. 밤이 찾아오면 또 취했고, 돌아와서는 인내의 보답처럼 그에게 안겼다.
잠이 올 때 자고, 마음껏 먹고, 마시고, 취하고, 사랑을 나누다 보니 또 하루가 훌쩍 갔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조바심 없이 느긋하게 눈에 보이는 것들에 감탄하고 보니 어느새 돌아가야 할 날이 되었다.
통나무집 앞에서 택시를 기다리며 윤조는 포도밭을 보았다. 이곳에서 영근 열매가 몇 년 뒤 어떤 맛으로 자신을 맞이하게 될지 기대되었다.
그때쯤에 자신은 뭘 하고 있을까. 10년의 계획대로 잘 따라가고 있을까.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는 마음의 여유를 찾으러 오는 것이 아닌, 여유를 즐기려고 찾아왔으면 했다.
“왔다.”
포도송이를 얹은 택시가 도착했다. 역에서 만났던 택시 기사였다.
“여행은 즐거웠습니까?”
“네. 맛있고, 재밌고, 즐거웠어요.”
기사가 기분 좋은 얼굴로 트렁크에 짐을 실었다. 택시에 타기 전, 윤조는 마지막으로 포도밭을 돌아보았다.
“아쉬워? 더 놀다 갈까?”
“그냥 좀 봐 두려구요.”
“사진으로 남길래?”
“음… 다음에 와서 직접 볼래요.”
“그래, 그러자.”
정한이 택시 문을 열고 윤조를 안내했다. 윤조는 택시에 올라타 차창 너머의 풍경으로 눈을 두었다. 두 사람을 태운 택시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카프역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