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8화 (20/22)

08.

무헌이 처방해준 약은 괴롭던 몸을 빠르게 진정시켰다. 의사란 얼마나 멋진 직업인지, 윤조의 열망이 더욱 불타는 계기가 되었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중간고사 성적은 그럭저럭 나왔다. 중간까지 끌어 올린 성적이었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아서 이상했다. 큰 감정의 동요 없이 윤조는 계속해서 대학 시험 준비에 매진했다.

12 월을 맞이한 어느 날이었다. 윤조는 여느 때처럼 서재에 박혀 공부 중이었다. 퇴근하고 돌아온 정한이 맞은편에 앉아 공부를 봐주다가 걸려온 전화에 몸을 일으켰다. 누구인지 묻지 않아도 정한이 제 앞에서 자리를 비우는 상대는 뻔했다.

윤조는 정한의 옷자락을 당기며 통화해도 괜찮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저도 잠시 쉬고 싶었던 참이었다. 정한이 마뜩잖은 얼굴로 앉아 전화를 받았다. 윤조는 테이블에 엎드린 채 정한의 왼손을 매만지며 놀았다. 제 것보다 큰 반지를 돌리며 저도 모르게 통화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이번 주말 말입니까.”

잠시 생각하던 정한이 윤조의 손을 붙잡으며 그러겠다고 했다.

“아뇨. 저 혼자 갑니다. 답례는 필요 없습니다.”

답례?

윤조는 고개를 들며 정한을 빤히 보았다. 그의 시선은 제 손을 붙든 윤조의 손에 머물러 있었다.

“그럼, 그때 뵙죠.”

건조한 통화를 끝낸 정한이 그제야 윤조를 향해 시선을 두었다. 호기심으로 가득 찬 얼굴을 보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뭐가 궁금한데.”

“주말에 저택 가세요?”

“어. 연말이고 하니 식사하자고 하시네.”

자신이 둘이 되라고 그를 권 회장에게 보내기는 했지만, 윤조는 때때로 홀로 남아 있는 일이 마음에 걸렸다. 결혼까지 한 마당에 언제까지 안 보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권 회장은 정한의 아버지였고, 다른 의미로는 제 아버지가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윤조는 잠시 망설이다가 운을 떼었다.

“나도 갈까요…?”

“아냐. 굳이 갈 필요 없어.”

“저택… 궁금하기도 한데.”

정한이 진심이냐는 얼굴로 빤히 보았다. 윤조는 냉큼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저택도 궁금하고 보안 요원들이 잘 지내는지도 궁금했다.

“자주 간다고 해 놓고 한 번도 안 갔잖아요.”

“거기 누가 있는지 알잖아.”

“몰라서 하는 소리 아니에요. 제가 계셔 달라 부탁한 거 잊었어요?”

“…….”

“그리고, 답례는 뭐예요?”

정한이 달력처럼 둔 윤조의 스케줄 표를 들여다보았다. 복용 중인 약 체크도 하고 있는지라 입학시험 때만큼이나 꽉 차 있었다. 약속 날인 주말에 시선을 둔 정한이 한숨과 함께 이실직고하듯 말했다.

“전에, 카프에서 사 온 와인에 대한 답례.”

“그럼 가야겠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정한이 웃었다. 매일 평화로운 일상만 반복되니, 권 회장과 만나는 자극적인 일을 경험하는 것도 좋을 듯했다. 막상 당일이 되면 그런 생각이 들지는 의문이었지만.

“이제라도 가기 싫음 물러도 돼.”

다가온 주말. 정한을 따라 차고로 향하며 윤조는 고개를 내저었다. 막상 당일이 되었는데도 갈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30분 걸리는 저택까지의 거리가 차츰 20분, 10분이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과연 대문이 열릴 때는 얼떨떨하니 저도 모르게 정한의 손을 붙잡았지만.

“오셨습니까, 도련님.”

오랜만에 돌아온 저택은 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풍경이었다. 윤조는 차창 너머의 풍경을 감탄스럽게 보다가 뒤늦게 정한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 윤조의 방문은 몰랐던 모양인지 마중 나왔던 보안 요원들이 주춤거리며 놀랐다.

“윤조 님 아니십니까?!”

개중 유난하게 반응한 보안 팀장이 한 발 가까이 다가왔다. 윤조는 괜히 쑥스러워져 머리를 긁적였다. 평생 오지 않을 사람을 대하는 듯한 반가운 인사에 이렇게 불쑥 찾아온 자신이 속없는 사람인가 싶어졌다.

“그간 잘 계셨습니까?”

“네, 잘 있었어요. 학교도 열심히 다니고. 어… 다들 건강하시죠?”

면면을 둘러보는 윤조의 시야 끝에 황 집사가 걸렸다. 윤조는 환히 웃으며 황 집사와 눈인사를 나누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꽤 미안한 일이 있었던지라 조금 민망하기도 했다.

“그럼 안으로 드시지요. 바람이 차갑습니다.”

황 집사의 중재로 윤조는 보안 요원들과의 인사를 마무리하고 정한과 함께 권 회장이 기다리고 있는 저택으로 들어섰다. 저택은 전과 다름없는 모습이었지만 주인이 바뀐 탓인지 분위기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어째, 이젠 눈도 침침한 모양이야.”

계단 끝에 서 있던 권 회장이 기척에 돌아보며 그렇게 말했다. 벼락처럼 소리 지르고, 저를 쓰레기처럼 대하던 때와는 달리 무척 부드러워진 인상에 윤조는 저도 모르게 웃음 지었다.

“겁 없는 건 참 마음에 들어.”

“저 겁 많아요.”

“많은 놈이….”

말을 이으려던 권 회장이 정한의 눈치를 슬쩍 보고는 말을 줄였다.

“아, 뭐해. 천장 무너져?”

잇지 못한 말을 떼어내듯 입가를 손끝으로 긁은 권 회장이 황 집사에게 눈짓을 주었다. 윤조는 황 집사의 안내에 따라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와아….”

이 긴 식탁은 오늘을 위해 존재한 게 아닐까. 사람은 셋인데 식탁 위의 음식은 저택 모든 사람이 먹어도 될 듯했다.

“뭘 잘 먹는지 알아야지, 원.”

다시 입가를 긁적인 권 회장이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윤조는 정한이 빼준 의자에 앉으며 가리는 것 없이 다 잘 먹는 제 식성을 자랑했다. 기가 찬 듯 웃는 권 회장이 맞은편에 앉았다.

예전에는 그렇게도 무섭게 보이던 양반이 편하게 느껴져 기분이 이상했다.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게 된 영향일까. 어쩌면 정한과 동화되어 그의 아버지인 권 회장을 가깝게 느끼게 된 것일지도.

아무튼 음식은 맛이 좋고, 처음 보는 식재료도 넘쳐 신기했다. 음식에 관심 없는 정한에게는 10배 수프를 만들어주어도 되었는데, 이런 고급 식재료로 만든 음식만 먹는 권 회장이라면 10배 수프를 절대로 권해서는 안 될 듯했다. 그야말로 권 회장은 도련님 같았다.

“어째, 한잔할 테야?”

“아뇨, 차 가져왔습니다.”

“운전이야 할 사람 널렸지.”

식사를 끝내고 부른 배를 두드리던 윤조는 정한이 집으로 가고 싶어 하는 눈치를 읽었지만, 권 회장의 와인 저장고가 조금 탐이 나서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벌써 일어서서 저를 데리고 나갈 것 같던 정한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윤조는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럼 그런 줄로 알고. 잠시 지하에 다녀올까 하는데.”

다시 자리에 앉은 정한을 확인한 권 회장이 윤조를 슬쩍 바라보았다.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네.”

윤조는 잠시 갈등하다가 의자를 밀며 일어났다. 정한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듯 손목을 붙잡았지만 뭐 어떤가 싶었다. 식사도 불편하지 않았고, 배도 그득했다. 기분이 참 좋았다는 뜻이었다.

“제가 골라도 돼요?”

“그럼.”

“저도 갈래요.”

따라오라는 듯 권 회장이 앞장섰다. 탐탁지 않게 보던 정한도 합류했다. 세 걸음 정도 떨어져서 오는 정한을 돌아보며 윤조는 권 회장의 뒤를 따랐다.

지하실 문 앞에 먼저 당도한 황 집사가 문을 열어주었다. 권 회장이 서슴없이 계단으로 발을 내디뎠다. 윤조는 점점 신이 난 기분에 총총거리며 그를 따라 내려갔다.

“저 저택 처음 왔을 때 여기서 길 잃었어요.”

자랑은 아니었지만, 문득 그때가 생각나서 말했다. 계단을 다 내려선 권 회장이 눈썹을 찌푸리고 물었다.

“혼자 온 게야?”

“네. 그럼 누구랑 와요?”

“정한이는 어쩌고.”

“그땐, 그, 사장님이….”

매우 예민했던 때라.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윤조는 웃음만 지어 보였다. 어색하게 웃는 윤조를 확인한 권 회장이 더는 깊이 묻지 않았다. 어지러운 지하실 내부가 나타났을 때는 혀를 차며 정리를 해야겠구만, 하고서 저장고 쪽으로 거침없이 향했다.

“와인은 입에 맞으셨어요?”

와인 저장고에 이르러 어디 골라보라는 듯 안으로 손짓한 권 회장에게 윤조는 조심스레 그의 의사를 물어보았다. 권 회장이 단번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카프 여행이 어떠했는지 물었다. 언젠가 정한이 저와 연락을 단절하고 여행을 갔다가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왔는데, 그게 11구역이었다는 이야기도 하며.

윤조는 새로운 정보에 눈을 빛내며 카프에서 본 아름다운 풍경을 설명했다. 마치 그때로 돌아간 듯 신이 나서 떠들다 보니 저도 모르게 다음에 같이 가자고 해버렸다. 자신이 말하고도 놀라서 얼떨떨한 얼굴로 권 회장을 보았다. 빤히 윤조를 보던 권 회장이 금방이라도 꿀밤을 먹일 듯이 주먹을 꽉 쥔 채 말했다.

“책임질 말을 해.”

“…뭐, 어때요. 가면 되지. 못 갈 게 뭐가 있… 어요?”

정한의 반응을 살피자 그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윤조는 화제를 돌릴 겸, 이왕 마시는 거 권 회장의 추천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 권 회장은 그간 윤조가 제 와인 저장고에서 빼내 간 와인의 이력을 읊어 대며 제 취향을 기가 막히게 맞췄다. 언젠 뭘 좋아하는지 모른다고 해 놓고.

“입만 달아서는.”

“단 게 많이 들어가요.”

“많이 먹을 수 있는 게 기준이야?”

“중요한 기준이죠.”

정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권 회장이 정한을 빤히 보았다. 그의 웃음을 처음 발견한 듯이. 윤조는 헛기침으로 웃음을 갈무리하는 정한을 보며 웃었다. 그제야 알았다. 권 회장이 전과 같이 무섭지 않은 이유. 방법은 달랐어도 어쨌든 그 역시 정한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저와 같은 사람.

“뭘 그리 웃어?”

“좋아서요. 회장님도 좋으시죠? 좋아하는 사람이랑 있으니까.”

권 회장이 얼떨떨한 얼굴로 웃었다. 윤조는 어색한 부자 사이에 서서 어서 마시고 싶으니 추천을 해 달라고 졸랐다. 윤조에게 휩쓸린 권 회장은 총 다섯 병이나 되는 와인을 안고 지하실을 나섰다.

다이닝 룸은 일찌감치 정리되어 있었고, 황 집사를 비롯해 이 비서까지 응접실에 둘러앉아 잔을 기울였다. 윤조는 권 회장의 취향이 참으로 독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홀짝홀짝 받아 마셨다.

슬슬 그 맛을 알아 갈 무렵, 권 회장이 근황을 물었다. 윤조는 불온하게도 이 응접실에서 정한과 했던 여러 가지 일을 떠올리던 중이라 권 회장의 말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어떠냐고 물었어.”

술 때문일까. 권 회장의 말투가 꼭 예전 정한의 말투처럼 느껴졌다. 윤조는 저도 모르게 사장님 같다고 말하며 제 근황을 쭉 늘어놓았다. 이따금 정한이 그만하라는 듯 제 허벅지를 꽉 붙들었지만 한번 말이 터지니 그치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제 이야기를 경청하는 사람이 이렇게도 많으니, 신이 날 수밖에.

“되게 멋진 거 같아요. 조금 시간은 걸리겠지만, 꼭 의사 되려고요.”

“내가 의사 아들을 키워 봐서 아는데….”

권 회장이 정한을 슬쩍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야근도 많고, 두베처럼 사고 잦은 곳에서는 딱히 좋은 직업은 아니야.”

“그래서예요. 그래야 같이 오래 있잖아요.”

못마땅한 얼굴로 코로 한숨을 내쉰 권 회장이 와인 잔을 빙빙 돌리며 흘리듯이 중얼거렸다.

“회사 들어올 생각은 없고?”

“회사요?”

“그래. 그 옥상 정원 좋아하잖아. 아니야?”

“옥상 정원….”

윤조는 정한이 내밀어주는 치즈를 씹다가 권 회장이 말한 옥상 정원을 떠올렸다.

“거기가 회사였어요?”

권 회장이 혀를 찼다. 정한은 늘 있던 일인 양 조용히 웃기만 했다.

“됐어. 그냥 의사 해. 네 남편이랑 오래오래 붙어 있어.”

“네. 그럴 거예요.”

“그나저나, 그놈의 면허는 언제 딸 거야?”

“저 면허 못 딴 거 어떻게 아셨어요?”

묻는 게 민망하게도 권 회장이 제게 붙여 놓은 사람의 눈과 귀를 통해서 일찍이 들어갔을 소식이었다. 윤조는 머쓱하게 웃으며 할 말이 없어진 대신으로 와인 잔을 입술에 대었다.

“차고 비워 놔서 뭣 해. 자고로 사람이 기동성이 좋아야지.”

“네, 그렇지 않아도 기말 치고 나서 바로 딸 생각이었어요.”

“흥. 딸 수 있었음 벌써 땄겠지.”

“…혹시 제가 담벼락 박은 것도 아세요?”

“알다마다.”

“그러시구나…. 그래요, 아시니까 말씀드려요. 그거 박고 나서 자신이 없어졌어요.”

“그게 뭐 대수라고. 실컷 박아. 그러면서 배워.”

“…차가, 얼만데.”

“누가 돈 달래?”

“아뇨. 사장님도….”

윤조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사장님이라고 정한을 지칭할 때마다 권 회장이 은근한 눈짓을 주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의 앞에서는 호칭을 제대로 하는 게 좋을 듯했다.

뭐가 좋을까.

정한을 지칭하는 단어는 많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탈락하고 딱 하나만 떠올랐다. 카프에 가지 않았다면 얻을 수 없었던 말.

“정한 씨도, 그랬어요. 마음껏 박으라고.”

말을 하고 보니 어째 부자가 다 똑같은 소리만 할까 싶어, 윤조는 정한의 어깨에 기대며 웃었다.

“되게 닮았어. 이래서 피는 못 속이나 봐요. 정한 씨도 막 갖다 박으랬는데.”

“윤조야, 너 취했다.”

“취하려고 마시는 거 아니었어요?”

정한이 말을 잃었는지 크래커를 입에 물었다. 식사도 그냥저냥 하고, 와인은 운전해야 한다며 입에도 대지 않던 정한이 크래커를 물고 있는 모습이 귀여워 윤조는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우리 정한 씨, 손이 이만한데 요만한 과자 쥐고 있으니까 너무 귀여워요. 맞죠, 아버님. 아버님은 내 마음 알 거야.”

침묵한 사람들의 시선이 윤조에게 쏟아졌지만 취한 윤조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슬슬 바닥이 도는 듯했다. 이곳에서 정한과 섹스하면 안 된다는 정신만 남아 있던 윤조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와 섹스하고 싶었다.

“이제 가야겠는데. 나. 음… 오늘 약 안 먹었거든요.”

“약?”

“네. 저 무슨… 페로몬 불균형이래요. 하… 이건 모르셨구나.”

정한이 덧붙이듯 설명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윤조는 무거운 눈을 깜박였다. 이러다 잠들 것 같았다. 제 뺨을 매만지는 정한의 손길이 아니었다면, 두 눈에 졸음이 착 달라붙어 저를 꿈나라로 데려갔을지도 몰랐다.

“이만 가야겠습니다. 윤조 졸린 것 같아서.”

드디어 구실이 생긴 정한이 윤조를 부축하며 일으켰다. 권 회장이 할 말이 있다는 듯 정한을 향해 손짓을 해 보였다. 윤조는 무슨 일인가 해서 정한의 팔을 붙들고 권 회장을 보았다.

“사람이 계기가 있어야지.”

“계기요?”

“면허.”

“아아….”

뭘까. 이 느낌은.

윤조는 제게 면허 취득의 압박을 주는 듯한 권 회장의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방법은 달랐어도 꼭 입학시험 공부 때 정한이 제게 주던 압박감이 느껴졌다. 역시 부전자전, 하며 기말만 끝나면 따겠다고 했다.

“근데 아까 기말 끝나면 딴다고 말씀드렸는데.”

“그래. 그 계기.”

“아… 아버님 말씀 되게 어렵게 하신다.”

“그래? 그럼 따라와.”

권 회장이 향한 곳은 저택의 차고였다. 그리 길지 않은 저택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이 저택 집사였는데, 한 번도 와 보지 않은 장소라 윤조는 들떴다. 제집 차고와는 차원이 다르게 큰 규모에는 절로 입이 벌어졌다.

“여긴 뭐든 크네요?”

“정한이 엄마 취향이 그래.”

“아아, 그래서 회장님도 크시구나.”

커다란 권 회장의 웃음소리에 윤조는 따라 웃었다. 취한 탓인지 누구든 웃으면 따라 웃게 되었다.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가져가.”

“이거, 정한 씨 거 아니에요?”

“네 남편 건 저기 있고.”

권 회장이 가리킨 방향을 따라 등을 돌려보니 눈에 익은 차들이 주르륵 보였다. 윤조는 다시 몸을 바로 하고 권 회장이 전시해 놓은 차를 둘러보았다. 분명 여기는 개인 차고인데, 어딘가의 공설 주차장 같은 느낌이었다.

“이거 저 주시려구요?”

“그래.”

역시 부전자전. 채찍과 당근의 적절한 조화였다. 그나저나 이렇게 큰 당근을 받아도 되는 걸까. 코끝을 매만지기만 할 뿐, 도통 차를 고를 기색이 없는 윤조를 보며 권 회장이 다 가져도 좋다고 했다. 윤조는 서둘러 고개를 내저었다. 차고에 자리가 없었다.

“하나만요.”

“마음대로 해.”

어디를 받아도 튼튼해 보이는 차를 골라보았다. 추리고 추려서 두 후보가 윤조의 눈에 들어왔는데, 개중에서 어떤 걸 선택해야 좋을지 몰라 정한에게 작게 의견을 물었다. 그때, 귀 좋은 권 회장이 끼어들었다.

“뭘 고민해. 둘 다 좋으면 둘 다 해.”

“차고에….”

“자리 있어.”

불쑥 끼어든 정한의 말에 윤조는 잠시 멈칫했다. 대답을 기다리는 빤한 시선이 느껴졌다. 윤조는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 그래요?”

“어. 둘 다 해.”

“아… 그럼.”

그래도 두 대나 받는 건 제 배가 터져나갈 것 같아 주저하고 있자니 권 회장이 와인에 대한 답례라는 핑계를 덧붙여 두었다. 계기에다 답례라니. 그럼 두 대를 받을 만했다. 윤조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말이 끝난 뒤에 꼭 면허를 딸 것이라고.

* * *

권 회장의 답례와 계기 덕분일까. 차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지자 거침없어진 윤조는 어렵지 않게 면허를 따고 또 곧잘 운전할 수 있게 되었다.

정한은 면허 취득에 관해서는 저만큼이나 기뻐했지만, 일찍이 자신이 차를 주기도 했는데, 정작 권 회장이 계기가 된 게 조금 짜증 난 듯 보였다. 티를 내지 않으려는 게 어찌나 귀여운지. 윤조는 종종 일부러 그의 앞에서 무슨 차를 몰지 고민하는 척 놀려주고는 했다.

안전을 위해 정한이 있을 때만 차를 몰기로 했는데, 윤조는 때때로 약속을 저버리고 그가 늦는 날에는 슬그머니 차고로 향했다. 잠깐 머리를 식히고 돌아오면 정한이 와 있었고 이번에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어디라고?

물론 정한은 윤조가 저 몰래 차를 몰고 나가는 일을 알고 있었다. 다만, 찾아간 장소가 도무지 믿기지 않는 모양인지 재차 물음을 던졌다.

“저택이요. 이제 슬슬 갈까 해요. 자칫했다간 와인 달라고 조를 것 같아서.”

계획에는 없는 방문이었다. 보이는 길을 따라 달리다 보니 문득 저택이 보였고, 온 김에 벨을 눌러 밥을 얻어먹은 것이 다였다. 정한은 윤조의 태평한 설명에 헛웃음을 지었다.

“집이에요?”

-아니. 가는 길.

병원 주차장인지 정한의 목소리가 울렸다. 괜히 조급해지는 마음에 윤조는 서둘러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럼 또 올게요. 아버님!”

훌쩍 왔다가 저 좋은 것만 취하고 돌아가는 이를 그러려니 하고 배웅한 권 회장이 차창 너머로 멀어졌다. 윤조는 보안 요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저택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정한에게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오는 길이야?

“네. 저 운전 중이니까 혼자 말해요.”

인적도 차도 없는 길이었지만 운전 중에 대화를 이어나갈 만큼 능숙하지는 않았기에 윤조는 정한에게 혼자 떠들어 달라 청했다. 정한은 무슨 말을 할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책을 읽어주었다. 윤조는 책 내용이 아닌 정한의 목소리를 감상하며 무탈하게 집에 도착했다.

“왜 그렇게 봐요?”

차고에서 올라오자마자 정한이 제 어깨를 붙잡고 온몸을 훑어보았다. 앞뒤로 돌려가며 꼼꼼하게 살핀 그가 겨우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아버님이 저 어디 손댔을까 봐 그래요?”

“어.”

“에이.”

“그리고 그 아버님이라는 소리.”

“아버님 맞잖아요.”

“…….”

“회장님이라고 하기엔 난 직원도 아닌데….”

“…….”

“그렇다고 아저씨라 부를 수도 없고….”

“…….”

“아저씨가 아님 영감님인가? 그래도 아버님이 영감님 소리 들을 정도는 아니지 않아요?”

말릴 말을 찾지 못했는지 정한이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포기에 가까운 말이었다.

“약은.”

“먹어야 해요.”

잘 듣던 약이 요즘에는 효력이 떨어지는지, 혹은 몸이 적응한 건지 전과 같지 않았다. 기분 탓이려니 하며, 계속해서 같은 방법을 고수했다.

그 탓일까. 3학년의 마지막 시험인 기말고사가 끝난 이후로 경계했던 증세가 점차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밤에 제 옆구리가 찔린 정한이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면 불안했을지도 몰랐다. 윤조는 여유로운 정한을 보며 다 제 기분 탓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불현듯 찾아온 충동도 걱정스럽지 않았다. 예기치 않은 히트 사이클이 찾아왔을 때는 외면했던 불안과 걱정이 한꺼번에 밀려왔지만.

“아… 싫어. 여기서는, 싫어….”

오랜만에 정한의 병원에 들른 날이었다. 조만간 방학을 맞이하고 졸업식이 있을 예정이라 그때 저택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어 정한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말을 고민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찾아온 열기에 윤조는 당황스럽다 못해 억울해졌다.

열이 들끓는 제 몸을 끌어안다 가방을 뒤적였다. 불안과 걱정을 미뤄 두었다고는 해도 예기치 않은 사고에 대비해야 했기에 늘 약을 상비했다. 지금 먹는다고 해서 당장 효과가 나지 않겠지만, 정한을 곤란하게 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일념 하나로 윤조는 제 몸을 다스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손바닥 가득 배어난 땀은 계속해서 집히는 모든 것을 바닥으로 미끄러트리기만 했다. 윤조는 숨을 헐떡이며 전에 없이 빠르게 열이 오른 몸을 끌어안았다.

“흐… 흐으….”

이를 악물고 바닥에 떨어진 약병을 주워들었다. 열리는 대로 손에 약을 털어 입에 던져 넣고 마구잡이로 씹어 먹었다. 목을 긁고 넘어가는 약을 삼키고서 웅크리고 있자니 차차 열기가 가시는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바닥에 뺨을 비비며 땀에 절어 있기를 한참.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구두 소리가 몇 걸음 다가왔다. 잠시 멈칫한 걸음이 서둘러 다가와 저를 안아 들었다.

“윤조야!”

윤조는 정한의 팔에 축 늘어져 안겨 미소 지었다. 새파랗게 질린 제 얼굴도 모르고.

“힛싸 온 거야?”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바닥에 흩어진 약을 보던 정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윤조는 전신에 희미한 둔통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 * *

정한은 윤조의 곁에 앉아 그의 마른 입술을 가만히 쓸어 보았다. 옅은 호흡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소파와 테이블 사이에 쓰러져 있던 윤조를 발견한 순간 시야가 하얗게 물드는 듯했다. 정한은 모든 게 제 탓인 것만 같아 속이 탔다.

“좀 괜찮아?”

윤조가 입원한 지 사흘째. 첫날에 보고 간 승주가 짬이 났는지 근무 중에 찾아왔다. 곁에선 승주의 그림자가 윤조의 얼굴을 물들였다. 정한은 괜찮다고 대답하다가 승주가 고개를 내젓는 그림자를 보고 의아하게 보았다.

“너 말이야, 너.”

“난 왜.”

“몰라서 물어? 너 얼굴 하얗게 질린 거 주치의인 내가 보면 놀라, 안 놀라?”

“…….”

“심장 괜찮냐고. 안 떨어졌어? 어디 봐.”

승주가 간지럽히듯 몸에 손을 대는지라 정한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형….”

작은 목소리에 동작을 멈춘 두 사람은 동시에 윤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한은 윤조의 손을 다잡고 그의 눈을 확인했다.

“괜찮아?”

“형….”

“그래, 윤조야. 어디 불편한 덴 없어?”

“배….”

“배?”

“배고파….”

정한은 깊이 안도하고, 승주는 병실이 떠나가라 웃었다. 정한은 침상 밑으로 승주의 정강이를 가볍게 걷어차고 병실에서 쫓아 보낸 뒤, 윤조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배가 너무 고파요….”

“3일 내리 잠만 잤으니 배가 고플 수밖에.”

“나 3일이나 잤어요…?”

“어.”

“그럼, 학교는…?”

“방학했어.”

“아….”

복잡한 표정을 짓던 윤조가 이내 웃음을 보였다. 기대했던 학교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이렇게 끝나버렸어도 아쉽지 않은 듯했다.

정한은 윤조의 머리칼을 쓸어주며 무엇이 먹고 싶은지 물었다. 어찌나 먹고 싶은 게 많은지. 개중 지금 먹어도 될 만한 것들만 추려주자 너무한다고 우는소리를 내었다. 꼼짝없이 잠들어 제 속을 까맣게 태운 이가 전과 다를 바 없어 다행이었다.

“왜 그렇게 빤히 봐요?”

윤조가 급히 이불로 제 얼굴을 가렸다. 그래 봐야 삐죽삐죽한 머리가 이불 위로 나타났지만.

“그만 봐요… 나… 나, 더러운 것 같아. 씻을래요.”

“괜찮아, 예뻐.”

“예쁘긴….”

정한은 윤조의 이불을 내리고 콧잔등에 입을 맞추다 노크도 없이 들어온 무헌의 등장에 조용히 혀를 찼다. 바라지 않는 사실을 알려야 할 때가 온 듯했다.

* * *

그로부터 며칠간 윤조는 꼼짝없이 집에만 머물렀다. 정한이 없는 낮 동안에는 황 집사가 다녀갔다. 윤조는 제 일이 권 회장에게 자세하게 알려진 게 민망하면서도 황 집사를 보내어 신경 써주는 게 고맙기도 했다. 정한으로서는 어째 믿을 만한 이가 황 집사라는 게 어이없는 듯했지만.

“진찰 결과는 어찌 나오셨습니까.”

황 집사가 우려준 차는 과연 맛이 달랐다. 윤조는 이참에 배워 볼까 하다가 황 집사의 질문에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이걸 어떻게 얘기하면 좋단 말인가. 저도 듣기만 하고 정한과 그 후로 이야기하지 않고 있는 사실을 말이다.

“음… 그게….”

“불편하시면 말씀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윤조는 찻잔을 고쳐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정에 없던 히트 사이클이 일어난 이후로 무헌의 처방에 따라 약은 더 먹지 않고 있었다. 문득 몸이 근질거리기는 했지만 약을 먹을 때보다는 괜찮아진 것 같은 기묘한 상태였다. 다만, 무헌이 말하기로 이후가 문제일 거라고.

윤조는 무헌에게 진찰받은 날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황 집사의 의아한 시선이 닿았다.

“얼떨떨해서요.”

“네?”

“…약이 없대요.”

“아… 그럼….”

“임신하래요.”

귀를 의심하는 얼굴을 보며 윤조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게 약이 될 거라네요. …제 불균형을 맞춰줄, 유일한 약.”

황 집사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보았다. 윤조는 씁쓸히 웃으며 찻잔을 기울였다.

“저 사장님이랑 결혼한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 가요.”

“예, 시간이 참 빠르네요.”

“그러니까 한 1년 뒤쯤, 애를 가질까. 했거든요. 더 늦어도 되고. 딱 정해진 건 아니었어요.”

“그러셨군요.”

“사실 전 내심 10년 뒤쯤이나 가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때가 되어야 제가 어엿한 사람 구실을 할 것 같아서.”

“지금이 어떠셔서요. 훌륭히 학교도 다니시는데.”

“에이, 모자라요. 집사님이 보여주셨던 그 오메가들 저 아직도 생생한걸요?”

순간 어두운 낯빛을 띤 황 집사가 고개를 숙였다. 윤조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암튼, 되게 먼 미래의 일이라고만 여겼는데, 이게 숙제처럼 꼭 해야 할 일, 그것도 가까운 시일 내에 이뤄야 할 일이 되니까 당황스러워요.”

“도련님과는 말씀해 보셨습니까?”

“아뇨. 아직…. 실은 제가 피하고 있어요. 전 공부하고 싶고, 사장님은 그걸 잘 알고….”

“고민이 많으시겠습니다. 그래도 윤조 님, 비단 도련님만 곁에 계신다고 생각지 마시고, 저도 회장님도 있으니까요. 도움 드릴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드리겠습니다.”

“아이를 낳은 뒤의 일은 걱정 안 돼요. 제가 걱정하고 망설이는 건… 오로지 제가 감당해야 할 시간이 있으니까… 그게 또 짧지는 않잖아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황 집사의 얼굴에 씁쓸함이 번졌다.

“거기다, 제가 아프지 않으려고 애를 가지는 게, 애한테 좀 미안하기도 하고….”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전 두 분이 얼마나 사랑을 주실지 벌써 눈에 보입니다.”

“그냥 무서운 것 같기도 하고….”

“도련님께 말씀해 보세요. 무섭다, 두렵다, 걱정된다, 다 나누어 같이 짊어지는 게 부부 아니겠습니까?”

“그렇겠죠…?”

황 집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어차피 해야 할 일. 뒤로 미룬 채 입을 다물고 있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윤조는 최근 정한이 어땠는지 떠올렸다.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그는 자주 저를 응시하고는 했다. 그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윤조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조용한 지지가 그가 제게 보여준 해답이었다.

“고마워요, 황 집사님. 덕분에 연습 잘했어요.”

“네?”

“사장님이랑 얘기해 볼래요.”

“아…, 네. 잘 생각하셨어요.”

“아버님껜… 나중에 따로 말씀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윤조는 저녁까지 함께 있어준 황 집사를 배웅하고 정한을 맞이했다. 황 집사에게 이야기했을 때처럼 덤덤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가려던 윤조의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왜 울어.”

글쎄. 왜 눈물이 날까. 윤조는 정한의 어깨에 기대어 눈물을 뚝뚝 흘렸다.

“미안해.”

윤조는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사과가 어떤 뜻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에 잦아들던 눈물이 또 한참 흘러나왔다.

그치지 않는 눈물에 정한이 저를 아이처럼 들어 안고 등을 다독였다. 윤조는 제 젖은 얼굴을 닦아주는 정한의 손길에 기대어 조심스레 그를 올려다보았다. 계속 울기만 했더니 그가 보고 싶어졌다. 제 눈짓을 읽은 정한이 눈두덩 위로 가볍게 입술을 내렸다. 그 간지러운 접촉에 윤조는 그제야 눈물 대신 웃음을 흘렸다.

“다 울었어?”

“네….”

“속상하지?”

윤조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속상하고… 무서워요.”

“나도 무서워.”

“사장님도 무서워요?”

“어. 난 네가 어떻게 될까 봐 하루하루가 무서워.”

“내가 뭐… 어떻게 돼요?”

“너 내 방에 쓰러져 있었을 때, 약 얼마나 많이 먹은 줄 알아?”

“서너 알 먹었다고 들었는데.”

“아니. 너 스무 알도 넘게 먹었어. 위세척했다고.”

“위세척이요…?”

“그러고 3일 뒤에나 깨어났지. …죽겠더라.”

메라크의 늑대 숲. 그 방향 없는 숲을 헤치고 저를 찾아온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때도 죽겠다던 그였으니, 자신이 눈 감은 3일이 얼마나 끔찍했을까….

지옥 같은 시간을 홀로 보냈을 그가 안쓰러워져 윤조는 정한의 뺨을 가만히 쓰다듬어주었다. 그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윤조야.”

“네….”

“1년만. 딱 1년만 고생하자. 응? 일단 낫기만 해줘. 다른 건 내가 다 할게.”

예상했던 바였다. 할 수 없는 일을 제외하고 기꺼이 모든 것을 껴안겠다는 그의 대답은. 윤조는 정한을 보며 미소 지었다. 긍정이라 여긴 정한이 뺨을 쓸며 얼굴을 가까이했다.

윤조는 제게 입을 맞추는 정한을 보며 계속해서 웃었다. 그의 손과 입술, 또 눈빛처럼 따뜻한 기운이 몸에 피어올랐다.

“그럼, 언제…?”

“당분간 하고 싶은 대로 하자. 힛싸 올 때까지. 휴약기 가졌으니까 조만간 올 거야.”

“그럼 그때, 하는 거예요?”

정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맞추었다. 윤조는 제 입술에서 느릿하게 떨어지는 정한을 보다 혀를 내밀어 핥았다. 얼굴을 더듬는 그의 눈짓이 느껴졌다. 막 웃음이 터지려는데, 정한이 입술을 덮으며 혀를 찔러 넣었다. 윤조는 제 허리춤으로 들어오는 정한의 손을 느끼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 읏, 흐… 거기….”

매일 두 사람은 제약 없는 밤을 보냈다. 윤조는 본능에 충실한 정한과의 섹스가 꽤 마음에 들었다. 요즘은 대학 시험 공부보다 임신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임신 중일 때는 지금과 같은 격한 섹스는 어려운 탓에 마음껏 즐겨 놓고 싶었다.

“아아… 좋아….”

윤조는 쿠션 더미에 푹 파묻힌 채 제 가슴을 비틀어 쥔 정한의 손을 붙잡았다. 아직 임신도 하지 않았는데 유난하게 가슴이 발달한 느낌이었다. 책에서 보아하니, 임신한 남성체는 가슴 발달이 빠르다던데. 벌써 그렇게 된 것만 같았다.

“귀찮네, 이거.”

자꾸만 윤조의 얼굴을 가리는 쿠션 더미를 치우며 정한이 계속해서 허리를 쳐올렸다. 윤조는 제 얼굴 위로 떨어진 쿠션을 신경 쓸 사이가 없었다. 그가 말하는 사이도 아쉬웠다. 그의 혀가 필요했다.

“키, 키스… 으읍….”

주문 즉시 정한이 제 입술을 물려주었다. 윤조는 정한이 제 허리를 들어 전보다 더 깊게 삽입하는 힘에 놀라 그의 혀를 씹으며 몸을 떨었다.

“음! 흡… 흐… 읏….”

“끊어, 먹겠네. 윤조야, 적당, 히….”

정한이 움켜쥔 엉덩이를 벌려대었다. 제게는 적당히 하라면서 그는 사정없이 안을 찔러 들어왔다. 윤조는 제 질구를 두드리는 정한을 느끼고 어깨를 움츠렸다. 그가 곧 노팅 할 것만 같았다.

윤조는 허리 밑으로 힘을 빼고 늘어졌다. 정한이 노팅 하기 좋도록 다리를 벌리고 기다리는데, 문득 제 숨이 뜨겁게 느껴져 이마를 매만졌다. 젖은 이마가 진득하게 느껴졌다.

“추워?”

제 머리를 끌어안고 관자놀이에 입술을 묻은 정한이 그렇게 물었다. 춥다기보다는 더운데 그는 왜 춥냐고 물은 걸까. 윤조는 고개를 내젓다가 자신이 떨고 있는 것을 알았다. 익숙한 느낌이었다. 힛싸가 온 거다. 조금만 더 늦게 오지. 윤조는 아쉽게 생각하며 정한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자기…, 나, 흐….”

윤조의 히트 사이클을 눈치챈 정한이 눈을 맞추며 웃음을 지었다. 윤조는 더운 숨을 내쉬며 정한에게 입술을 내밀어 보였다. 가볍게 눌린다 싶더니 곧 뜨거운 혀가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다. 윤조는 제 깊숙한 곳을 혀로 휘젓는 정한의 페로몬을 맡으며 전보다 더 젖어 갔다.

“으, 음… 흡….”

목구멍까지 긁어댄 혀가 빠져나가며 입가에 흐른 침을 핥아 먹었다. 윤조는 가쁜 숨을 내쉬며 제게 이마를 기대고 빤히 보는 정한을 보았다. 그의 눈에서 많은 말이 읽혔다. 그 역시도 제게서 많은 말을 읽는 듯했다.

“하아, 하… 하아.”

박차를 가하는 그의 몸짓이 노팅을 예고하는 듯했다. 문득 두려움이 느껴질 때면 윤조는 정한을 응시했다. 배 속이 빠듯하게 그로 채워졌다. 윤조는 오로지 저만 담은 눈을 보며 몸을 떨었다. 얼굴로 쏟아지는 입술이 단비처럼 달콤했다.

* * *

2주 후, 졸업식 아침. 집을 나서기 전 윤조는 정한이 건네준 임신 테스트기를 가지고 화장실로 향했다.

히트 사이클 이후로 몸이 잠잠해져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선명한 두 줄을 확인하는 건 꽤 벅찬 일이었다. 그래도, 좀 천천히 찾아와도 좋았을 것을. 한 번에 성공한 임신에 윤조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다 했어?”

“네.”

“어때?”

화장실 앞에 서 있던 정한이 윤조가 내미는 테스트기를 받아들고 결과를 확인했다. 제 오답 노트를 살피는 것처럼 진지한 눈짓이었다. 괜히 머쓱한 기분이 들어 윤조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떻게 한 번에 되냐.”

“그러게요, 좀 천천히 와도 되는데.”

어쩜 저와 똑같은 감상일까.

윤조는 정한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그가 제 온몸을 끌어안아주었다.

“우리 윤조, 이제 고생하겠다.”

“나한테 잘해야겠죠?”

“어. 잘할게.”

기껏 차려입은 옷이 구겨지는 줄도 모르고 둘은 한참을 부둥켜안았다. 황 집사의 전화가 아니었다면 졸업식도 잊었을지 모른다.

“옷이 왜 그 모양이야?”

어찌나 눈썰미가 좋은지 권 회장이 둘을 보자마자 잔소리했다. 윤조는 제 옷을 탁탁 펴주는 정한의 손길에 몸이 흔들리다가 슬그머니 그에게 눈짓을 주었다. 정한은 아직 때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윤조는 입이 간지러워져 자꾸만 입술을 깨물었다.

조촐했던 새 가족의 잉태를 확인한 순간과 달리 졸업식은 화려했다. 윤조는 오랜만에 찾은 학교를 두리번거리며 제 반을 찾아갔다. 문득 뒤를 돌아보자 저를 보고 있는 정한과 권 회장, 또 황 집사와 이 비서가 보였다. 팔을 들어 높이 손을 흔들자 정한은 웃고 권 회장은 그런 정한을 보며, 황 집사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이 비서만이 작게 팔을 들어 손을 흔들어주었다.

윤조는 다시 인파에 섞여 반으로 찾아갔다. 방학 전에 입원으로 학교를 쉬었더니 반 아이들이 안부를 물어왔다. 대학 진로를 묻는 말에는 다음을 기약하겠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제 아랫배를 비밀스럽게 감쌌다.

“잠시 후, 제62회 중앙 고등학교 졸업식이 시작될 예정이오니, 학생과 가족 여러분은 제자리에 착석해주시길 바랍니다.”

강당에 울려 퍼지는 안내 방송에 윤조는 다시 뒤를 돌아 제 가족이 있는 자리를 살폈다. 거리가 멀어서 그런지 황 집사는 이마 위로만 보였고 키 큰 정한과 권 회장, 또 이 비서는 잘 보였다.

윤조의 웃음을 발견한 정한이 손을 들어 흔들어주었다. 윤조는 저도 인사를 하려다가 정한의 손짓에 앞을 보았다. 실망했던 것도 많지만 제게 새로운 경험을 안겨준 학교와의 작별이 시작되었다.

*

많은 이름이 불리었지만, 윤조의 이름은 호명되지 않았다. 고작 1년 남짓하게 다닌 학교에서 뚜렷한 성적을 낸 것도 특별한 활동을 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윤조는 저를 너무나 잘 알아서 섭섭할 사이도 없었다. 학교생활이 끝나서 그저 후련한 기분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식이 끝난 뒤, 몇몇 아이들과 사진을 찍고 윤조는 제 가족을 향해 달려갔다. 정한이 조금 질린 얼굴을 하고 있어 웃겼다.

“다들 울기 바쁜데 혼자 생글생글하니 학교생활이 영 끔찍했나 봐?”

“조금 재미없긴 했어요. 별거 아니더라구요.”

윤조의 말에 권 회장이 웃으며 이제 무얼 하면 좋으냐고 물었다. 그때 이 비서가 나서서 삼각대를 세우고 사진을 찍자고 하였다. 황 집사와 둘이서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지정하고 순서도 맞춰 세웠다.

“제가 가운데예요?”

“그럼요. 오늘 주인공이신데.”

정한과 권 회장 사이에 서서 멀뚱히 사진을 찍었다. 기념으로 할 만한 사진을 찍는 건 처음이라 저도 모르게 뻣뻣하게 있었더니 황 집사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로 다가와 대신해서 들고 있던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자, 웃으세요. 하나, 둘, 셋!”

황 집사의 지휘에 따라 윤조는 꽃다발도 들고 졸업장도 들어가며 정한과 권 회장 사이에서 방긋방긋 웃었다. 권 회장이 슬슬 지겹다는 듯이 말을 해도 무시하며 장소를 바꾸어 찍고, 황 집사와 이 비서도 함께 서서 찍기도 했다.

“원. 종일 사진만 찍을 거야!”

저도 슬슬 배가 고파진 터라 이만하면 좋겠다 싶었지만 오랜만에 권 회장의 사자후를 들은 탓일까, 윤조는 그만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졸업장을 떨어트렸다. 권 회장이 머쓱한 얼굴로 바닥에 떨어진 졸업장을 주워 탈탈 털었다.

“뭘 그리 놀라, 어디 하루 이틀 들어?”

윤조는 제 아랫배를 감싸며 졸업장을 꼼꼼하게 터는 권 회장을 향해 말했다.

“이번엔 제가 아니라 우리 애기가 놀란 거예요.”

“뭐?”

탁.

졸업장에서 마른 잔디를 털어낸 권 회장이 손을 멈추고 보았다. 그건 찍은 사진을 체크하고 있던 황 집사나 삼각대를 정리하던 이 비서도 다르지 않았다. 모두 행동을 정지한 채 윤조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아… 그….”

윤조는 정한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가 얕은 한숨을 내쉬며 웃음 지었다. 윤조의 시선을 따라 정한을 바라본 세 사람이 각자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가볍게 박수를 보내는 이 비서와 달리 황 집사는 감격한 듯 두 손을 모으고 있었고, 권 회장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윤조를 바라보기만 했다.

“너, 이… 이, 이 배에?”

“얼마 안 됐어요.”

“그러니까, 네가 지금… 정한이 애를.”

“아뇨. 저랑 사장, 흠… 저랑 정한 씨 애.”

“그래, 그러니까 정한이 애.”

“아니죠. 저랑 정한 씨 애죠.”

정한이 중재를 하듯 저와 권 회장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이렇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는 얼굴로. 윤조는 퍼뜩 정한에게서 물러나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축하드립니다, 도련님.”

“윤조 님, 축하드려요.”

눈치껏 축하 분위기로 쇄신하는 황 집사와 이 비서의 노력에도 정한과 권 회장의 대치는 한동안 이어졌다. 권 회장이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돌렸을 때는 대치가 아니라 무언의 축하임을 알았지만.

“이만 식사하러 가시지요.”

윤조는 황 집사의 뒤를 총총히 따랐다. 뒤늦게 따라붙은 정한과 권 회장이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데 주변 소음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저, 사진 좀 볼 수 있을까요?”

차를 나눠 타고 왔기에 황 집사에게 카메라를 받고 싶었다. 예약한 곳으로 가는 동안 차에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황 집사가 흔쾌히 카메라를 넘겨주었다.

“두 분이서 무슨 얘기 하셨어요?”

뒷자리에 꽃다발을 두고 차에 올라탄 정한이 윤조의 질문에 잠시 웃음을 지었다.

“너 너무 어리다고.”

“네?”

“왜 이렇게 일찍 가졌냐고 하시더라.”

“아….”

“그래서 설명해 드렸어. 근데 그건 왜 받아 왔어?”

차가 미끄러지듯 학교 앞을 떠났다. 윤조는 정한이 가리킨 카메라를 들고서 구경하려고 가져왔다고 답했다. 황 집사가 일러준 대로 사진을 하나씩 넘겨보고 있자니 점점 얼굴이 굳어 갔다. 정한이 왜 저보고 작다고 했는지, 이제야 제대로 된 깨달음을 얻었다.

“내, 내가… 이렇게 작았어요?”

잠시 신호가 걸린 사이로 정한이 넌지시 카메라를 들여다보았다. 그의 웃음에서 윤조는 깊은 절망을 느꼈다. 정한과 권 회장 사이에 서 있는 제 모습이 영락없는 꼬마 같았다. 어째 몸집도 이렇게 작아 보일까. 나름 반에서는 평균보다 큰 편에 속했는데 말이다.

윤조는 몰랐다. 애초에 정한이 선별해준 학교는 죄 알파 수가 적었다는 것을.

“귀엽네.”

“사… 사장님이랑 회장님이 엄청 커서 그래요. 맞죠?”

“어. 맞아.”

어째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순식간에 사진에 흥미를 잃은 윤조는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낯선 길을 달리고 있었다. 오늘부터 시작해 매일 마주하게 될 낯선 길이었다. 윤조는 손에 든 카메라를 움켜쥐며 부디 제 임신 기간이 학교생활보다는 즐겁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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