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배에 있을 때는 그렇게 크고 무겁게 느껴지더니, 어쩜 이렇게 작을 수 있을까. 윤조는 허무하리만큼 작은 존재의 무게를 느낄 때마다 그렇게 생각했다. 저를 쏙 빼닮은 얼굴은 신기하기도 했다.
‘혼도 못 내겠네, 이거.’
‘왜요?’
‘너랑 똑같잖아.’
‘나랑 똑같은 게 왜요? 사장님 나 잘 혼내잖아요. 나한테 채찍 막 휘두르면서!’
제 말에 순식간에 조용해진 주변을 둘러보며 윤조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그 채찍이 아니구요.’
당황스러운 마음에 서둘러 변명했지만, 권 회장이나 황 집사, 또 이 비서에게는 제 말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아직도 오해하고 계시겠다.”
괜히 그날이 떠올라 혼자 웃었다. 넌지시 제 몸을 살피던 권 회장이 정한에게 다가가 무어라 속삭여댔는데, 부디 그가 제대로 된 해명을 했길 바란다. 귀찮다고 아무렇게나 둘러대었다면 참 난감한 일일 테니.
“보고만 있으라니까.”
쌍둥이가 태어난 이후, 정한은 육아 휴직을 내고 집에 머물렀다. 윤조는 그와 처음 임신을 계획할 때 했던 약속대로 육아에서는 손을 떼고 본래 할 일을 시작했는데, 어째 보고만 있을 수 있을까. 안아도 보고 밥도 먹여보고 싶었다.
“가슴은 괜찮아?”
“아직 괜찮아요.”
여성체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로 작은 가슴은 아이를 밴 동안 열심히 발달해 제구실을 하긴 했다. 그렇지만 워낙에 작아 아이 입에 직접 물릴 수는 없었고, 자주 비워줘야 했다.
그 어떤 육아 관련 책도 읽지 않은 윤조였지만 [남성체의 수유 방법]만은 정독하고 실천했다. 물론 젖몸살이 나지 않게 저를 관리하는 것은 모두 정한이었지만.
“그래도 곧 2시간째니까 한 번 비우자.”
“서정이도 안아주고요.”
첫째는 서윤, 둘째는 서정이었다. 제 성과 그의 이름 한 글자. 또 제 이름 한 글자를 적절하게 섞은 이름은 이따금 주인을 잘못 찾아갈 때가 있었다. 실수하는 것은 주로 윤조였다. 제 배로 낳고도 누가 첫째인지 둘째인지 알지 못해, 정한이 첫째는 파란 옷을 둘째는 노란 옷을 입혀 구분하게 하였다.
“안아주는 거야, 안아보는 거야?”
“둘 다요.”
뭘 그렇게 열심인지 끙끙거리는 빨간 얼굴을 끌어안고 윤조는 아이의 숨 냄새나 따뜻한 체온을 느꼈다. 슬슬 울음이 올라와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시터에게 아이를 맡기고 정한과 방을 나섰다.
말이야 육아 휴직이지, 실질적으로 그가 하루 대부분 돌보는 이는 바로 저였다. 시터가 퇴근한 밤만 아니라면 윤조는 늘 정한의 보살핌을 받았다. 윤조는 정한이 병원에 가지 않고 항상 제 시야에 닿아 있는 게 좋았다. 임신 때보다도 더 극진한 대접을 받는 듯했다.
“앉아.”
정한이 긴 소파에 두 다리를 올리고 앉아 그 사이에 앉길 권했다. 윤조는 셔츠를 벗고 그의 앞에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등을 돌려 앉았다. 만삭에 가까워질 무렵부터는 그에게 늘 이런 식으로 기대어 잔 탓인지, 가슴을 매만지는 손길에도 잠이 솔솔 오곤 했다.
“아아…!”
그의 큰 손에 모아진 가슴에 압박이 가해졌을 때는 졸음도 순식간에 물러갔지만.
“봐, 그새 찼잖아.”
이 작은 것도 가슴이라고 그새 이렇게 고여서 부풀었다. 알람처럼 저를 챙기는 정한이 아니었다면 수시로 셔츠가 젖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윤조는 정한의 손바닥에 감싸인 제 두 가슴이 모였다가 풀어지는 걸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으으….”
유륜을 감싸 쥔 손이 유두 끝으로 당겨내듯 몇 차례 움직이자 그의 손끝에 물기가 새어 나왔다. 곧 시원해질 느낌을 기대하며 윤조는 정한의 위로 축 늘어졌다. 제 배를 끌어안은 정한의 팔이 힘을 주어 몸을 당겼다. 바짝 붙은 몸이 꼭 무언가를 의미하는 듯해 윤조는 퍼뜩 눈을 뜨고 정한을 보았다. 그가 웃고 있었다.
“지금 그거….”
“버릇이야.”
“네….”
윤조는 정한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유축이 끝나길 기다렸다. 두 아이의 배를 불리기에는 터무니없이 적은 양이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온전히 끝내고 싶은 윤조였다. 이도 얼마 가지 않아 점점 말라가는 통에 정한의 간식이나 되었지만.
“그거 알아?”
깊은 밤. 간식을 짜 먹기 전 정한이 말했다. 윤조는 저를 올라탄 정한을 보며 저릿한 아랫배를 느꼈다. 제 몸은 이제 완벽히 회복되었고, 아이들도 밤에 잘만 자는데, 이쯤 하면 해도 되지 않을까, 했다. 그런데 정한은 아직 간식만으로도 버틸 만한가 보다.
“뭘요…?”
“할까 싶은 날은 꼭 울어.”
“네?”
“봐. 곧 우니까.”
웃음을 지은 정한이 몸을 숙였다. 윤조는 제 가슴을 빠는 정한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그에게 제 몸을 비벼대었다. 이불만 바스락거리고, 그의 혀끝에서 젖꼭지가 튕기는 게 고작인데,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정한이 거 보라는 듯이 시선을 들어 보였다. 윤조는 도무지 믿기 어려워 눈을 깜박거렸다.
“그럼, 애들 울 때마다 하고 싶었던 거예요?”
가슴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정한이 고개만 끄덕여 대답했다. 윤조는 곧 몸을 일으킨 정한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아이를 안아서 달래는 그의 등에 미련이 덕지덕지 붙어 보였다.
“어떻게…?”
“페로몬.”
“이렇게 어린데 그걸 알아요?”
“알지, 그럼. 뜻은 몰라도 싫은 건 알 거야.”
윤조는 아득한 얼굴로 제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타인의 페로몬을 처음으로 느낀 게 언제였더라. 아마 꽤 자란 후였던 것 같다. 그런데 저 어린 몸으로 느끼다니. 과연, 정한과 같은 우성으로 태어난 쌍둥이다웠다.
“근데 왜 싫어요? 아빤데?”
“성페로몬이니까. 거기다 얘들은 알파라, 더 싫게 느꼈을 거야.”
근친을 막기 위해 혈연 간의 성 페로몬 교환은 거부감을 느끼게 되어 있었다. 익히 알고 있던 것이었지만 윤조는 새삼스레 놀라 말을 잃었다.
“왜 그렇게 놀란 얼굴이야. 몰랐어?”
“아뇨…. 집에, 같이 사는 사람이 생겼다는 게 이런 식으로도 체감되나 싶어서 놀란 것뿐이에요.”
공기나 다름없던 사촌 동생들을 떠올리며 윤조는 씁쓸히 웃었다. 아이의 울음을 진정시킨 정한이 곁에 와 앉았다. 그의 등에 붙어 있던 미련이 제 눈에 들러붙은 듯했다.
“자자. 내일도 바쁘잖아.”
“…네.”
아쉬운 마음에 정한이 빨고 간 가슴을 매만지며 윤조는 부루퉁한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것도 잠시, 곧 곤한 잠에 빠져 정한이 몇 번이나 깨어 아이를 달래고 젖을 먹인 것도 몰랐다.
* * *
꼼짝없이 갇혀 지내다 슬슬 좀이 쑤시기 시작한 어느 날, 윤조는 오랜만에 정한과 함께 집을 나섰다. 날도 풀렸는데 오붓하게 데이트라도 하라며 황 집사가 방문해준 덕이었다.
차의 시동이 걸리기도 전에 마주한 시선은 같은 것을 원하고 있었다. 윤조는 피어나는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가만히 윤조의 웃음을 보던 정한이 고개를 당겨 입을 맞추었다. 잠시 닿았다 떨어질 줄 알았던 입술을 가르고 뜨거운 혀가 침범해 들어왔다. 마치 섹스의 전초전처럼 진한 페로몬이 풍겼다.
“잠, 흐….”
목구멍을 긁어대며 엉킨 혀가 빠져나갔다. 아쉬운 듯 떨어진 입술이 한숨을 내쉬고 젖은 입술을 핥았다. 들썩이는 두 가슴이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서둘러 목적지를 정했다. 마음이 급했다.
차고에서부터 젖어 간 몸이 엘리베이터를 탈 땐 발끝까지 뻣뻣해질 정도로 주체가 안 되었다. 끈적하게 젖은 허벅지 안이 느껴졌다. 윤조는 짧은 숨을 내쉬며 제 페로몬을 갈무리하려 애썼다.
“되게 느리네.”
저만큼이나 다급해 보이는 정한의 말에 윤조는 희미하게 웃었다. 적당한 방을 달라고 할걸. 가장 가까운 방이라든가. 쓸데없이 크고 좋아서 높은 곳에 있었다. 윤조는 정한의 손을 고쳐 잡으며 그에게 몸을 기댔다. 아랫배가 뻐근하게 쑤셔 왔다.
띵.
도착을 알리는 엘리베이터의 전광판으로 둘의 시선이 동시에 닿았다. 이어 열린 문 너머에 긴 복도가 나타났다. 한 층에 하나밖에 없는 객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척 다급했다.
“으, 읍….”
두베 제일가는 호텔의 화려한 내부를 구경할 사이도 없이 서로에게 들러붙어 빨아대었다. 다 벗지 못한 옷을 아무렇게나 걸친 채, 넓은 침대를 다 쓰지도 못한 채, 둘은 서로의 몸을 엮고서 흔들렸다.
“더, 읏…, 응!”
제 배를 빠듯하게 채우고 들어온 정한이 너무 좋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윤조는 정한을 끌어안고서 그를 제게 더 깊이 넣기 위해 힘껏 당겼다.
“우, 으, 윽! 흐….”
윤조는 입을 벌린 채, 자신이 어떤 소리를 내는 줄도 모르고 흥분에 취했다.
“하, 하아, 하… 윤조야, 더 벌려야지.”
계속해서 다리를 모으는 윤조의 허벅지를 벌려 잡은 정한이 몸을 짓누르며 들어왔다. 윤조는 배가 꿰뚫리는 느낌에 시트를 붙잡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제 속을 가르며 계속해서 침입했다.
“아아…!”
“아파?”
“아니… 아파….”
“안 아프다고?”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자 맺혀 있던 눈물이 눈두덩으로 튀었다. 정한이 엄지로 눈가를 쓸며 입을 맞춰주었다. 윤조는 정한의 입 속에 밭은 숨을 뱉다가, 멀어지는 그의 입술을 아쉽게 보았다.
“아아…!!”
가슴을 움켜쥔 정한의 손길에 등허리가 저릿해졌다. 정한은 꼭 마사지하듯 저를 어루만졌다.
“그러다 나오, 면… 으응….”
이미 그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인 유두에서 유즙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정한이 가슴을 움켜쥐자 그의 손가락 사이로 길게 뿜어져 나오는 불투명한 물줄기가 보였다. 정한의 목덜미와 가슴 위로 튄 액체가 제 몸에도 뚝뚝 떨어졌다.
“왜 이렇게 나와?”
보다 못한 정한이 옷을 마저 다 벗기고 윤조의 몸을 일으켜 안았다. 윤조는 허리를 세우고 무릎으로 바닥을 지지한 채 아이처럼 제 가슴에 입술을 대고 힘껏 빠는 정한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제 가슴을 그러쥐고 앞으로 쥐어짜자 뻐근하던 둔통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아…, 이거, 되게….”
젖을 삼키느라 오르내리는 그의 목울대가 보였다. 윤조는 정한의 귓바퀴를 매만지며 더운 숨을 내쉬었다. 엘리베이터에서만큼 강렬한 충동이 치밀었다.
퍽.
압박하던 입술을 뗀 정한이 고개를 비틀어 다시 젖을 짜내었다. 아이들도 물어보지 못한 제 유두가 그의 입술에 깨물리고 혀에 짓눌렸다.
“으읏.”
정한이 팽팽하게 부풀어 있는 반대쪽 가슴을 그러쥐었다. 그의 손가락 틈새로 젖이 흘렀다. 힘줄이 돋아난 손등을 타고 백탁의 액체가 시트 위로 툭, 툭, 떨어졌다.
어느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그 광경을 바라보는 윤조의 목덜미가 두근두근 뛰었다. 거친 윤조의 숨소리에 정한이 눈을 들어 보았다. 윤조는 애가 타는 마음에 그의 얼굴을 붙잡고 입을 맞추었다. 아이의 냄새가 났다.
“으음….”
윤조는 정한의 위에 앉아 허리를 흔들어 가며 그의 성기를 찾아다녔다. 윤조에게 입술이 물린 정한이 밑을 어루만져주었다. 녹진하게 젖은 안을 벌리며 성기를 밀어 넣은 그가 마저 짜지 않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아아…!”
그의 손에서 쥐어짜진 백탁의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정한의 왼쪽 뺨에도 방울방울.
“아깝게 할래?”
그가 입가에서 중얼거렸다. 윤조는 정한의 뺨에서 눈을 떼고 그와 눈을 마주했다.
“맛, 있어요?”
“너잖아.”
정한이 웃으며 입술을 핥았다. 윤조는 제 입술 산을 따라 선을 그리는 정한의 혀끝이 간지러워 어깨를 떨었다. 더한 것을 바라는 그의 시선이 읽혔다.
“으응… 하… 아, 아….”
윤조의 몸을 꼼짝 못 하게 끌어안은 정한이 가슴을 물고 쥐어짜듯 빨아대었다. 그의 젖 마시는 소리가 꼭 제 온몸을 빠는 듯한 착각이 일게 했다.
배 속이 움찔거리며 그를 원했다. 윤조는 제 벌어진 다리 사이로 처박힌 그를 머금으려 허리를 흔들어대었다. 작고, 보잘것없는 움직임에 정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너만 못 참아?”
이건 무슨 말인가.
윤조는 제 ‘아니 아프다.’는 말만큼이나 그의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채 그의 말을 해석하기도 전에 윤조는 바닥에 엎드려, 바라는 것을 얻었다. 낯선 호텔 베개에 고개를 묻고 윤조는 채 말이 되지 못한 신음을 쏟았다.
*
황 집사는 소파 끝에 앉아 찻잔을 기울였다. 차의 향만큼이나 기분이 좋았다. 그동안 많이 희석되기는 했지만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마음의 짐이 오늘부로 꽤 가벼워진 듯했다.
정한이 제게 윤조를 맡기고, 또 아이까지 맡겼다. 그 사실만으로도 면죄부를 받은 기분이었다. 긴 한숨을 내쉬는 황 집사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돌았다.
“이리 와서 잠시 쉬어요. 내가 볼 테니.”
시터만 두고서는 절대 집을 비우지 않는 두 사람에게 겨우 휴식을 주었으니 지금쯤 꿀맛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테다. 황 집사는 금세 비운 찻잔을 내리고 시터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시터가 기꺼운 얼굴로 곁에 다가왔다.
한석이 괜찮은 사람을 소개해준 모양이다. 그 꼼꼼한 도련님의 눈 밖에 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황 집사는 제 나름의 기준으로 시터를 살피다가 조용히 몸을 떠는 휴대폰을 발견하고 시터에게 잠시 양해를 구했다.
“예, 회장님.”
-어디야.
“도련님 댁입니다.”
-거길 왜 가?
“두 분 데이트 보내 드리려고요.”
-그래서. 지금 혼자서 애 둘을 보고 있다는 거야?
“시터 있습니다.”
-흥, 그럼 된 거지. 왜 애를 봐주고 있어? 허리 나갈 일 있어?
“왜겠습니까.”
-어찌 그리 사람을 못 믿어서 꼼짝을 못 하는 거야?
“회장님이 하실 말씀은 아닌 듯합니다.”
-아무튼. 정한이 집이라는 거지?
“네.”
-알았어.
“오시려고요?”
-이 비서가 약속이 있다잖아, 그놈의 애인!
없는 애인도 만들고 싶지 않았을까.
황 집사는 이 비서를 측은하게 여기며 요즘 자주 적적해하는 권 회장을 떠올렸다.
“요즘 부쩍 혼자서 식사를 못 하시네요. 애도 아니고.”
-흥. 기다려.
손자를 보는 게 아닌 밥을 먹으러 오는 할아버지라니.
황 집사는 일찍이 권 회장이 정한의 자식에게 큰 관심이 없을 거라 예상했던 바였지만, 실제로 겪고 보니 자신이 더 섭섭해지고는 했다. 지독한 아내 사랑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잠시 어르신이 오셔서 식사 준비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 같이하시겠어요?”
“아. 그럼 저야 좋죠. 근데 그 전에 두 분, 오시지 않을까요? 그럼 꽤 많이 준비하셔야 할 텐데.”
황 집사는 조용히 미소만 짓고 등을 돌렸다. 꿀통에 빠지려면 제대로 빠져야지. 어설프게 불만 붙였다가는 뒤탈이 날지도 몰랐다.
막막하던 차에 잘되었다. 황 집사는 권 회장이 온다면 시터의 퇴근 시간이 되어도 넉넉하게 이 집에서 머물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을 했다. 할아버지 노릇 좀 하라며 이리저리 안기고 시켜 먹을 생각에 가벼운 콧노래를 부르며 주방으로 향했다.
식사를 다 차리고 나니 권 회장이 도착했다. 벨을 누르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기어이 벨을 눌러서 아이들을 깨워 울리더니 좀 달래라는 말을 하자 학을 떼고 싫어했다.
“이걸 어찌 안어!”
“왜 못 안으세요? 전에 병원에서도 못 안으시더니. 설마… 윤조 님만 닮았다고 그러시는 건 아니죠?”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그럼 왜 안지를 않으세요?”
“너무 작잖아!”
“도련님도 안아보셨잖아요?”
“그때야 아내가 힘들어하니 내가 안고 살았지. 안을 때마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부서지기라도 할까 봐 그러세요?”
“그럼!”
“안 예뻐하시는 줄 알았더니.”
“왜 안 예쁘겠어?”
“그럼 안으세요. 이리 와서 둥기둥기 하시라고요.”
황 집사는 권 회장과 쌍둥이를 돌보고 시터는 먼저 식사를 시작했다. 작은 몸을 조심스럽게 안고 있는 엉거주춤한 덩치의 사내를 보며 황 집사는 애써 웃음을 감추었다. 할아버지의 노력을 알았는지, 영영 그칠 것 같지 않던 울음이 차차 잦아들었다.
“이 발가락 좀 봐. 정한이를 쏙 닮았어.”
“예…?”
“이 두상은 어떻고. 우리 정한이 두상이 잘생겼지.”
“아….”
“가만 보면 입술도 좀 닮았어.”
“하하….”
“귀도 좀 닮은 것 같은데.”
닮은 점 찾기 삼매경에 빠진 권 회장을 두고 황 집사는 주방으로 가 시터에게 식사를 끝내고 돌아가도 된다고 일렀다. 분위기로 대략 짐작을 한 시터가 금세 밥을 비우고서 돌아갔다. 권 회장은 식사하는 것도 잊었는지 아기 돌보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침을 왜 이리 흘리는 게야. 우리 정한이는 얼마나 깔끔했는데. 이런 건 윤조 녀석을 닮았구만.”
말도 안 되는 권 회장의 말을 흘려들으며 황 집사는 식탁 의자에 느긋하게 등을 기대어 앉아 저무는 바깥을 보았다. 어쩐지 둘의 성격상 제게 미안해져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올 것 같아 미리 정한에게 메시지를 남겨 놓기로 했다. 새로운 시터를 집에 들였으니 천천히 돌아와도 된다고. 말미에는 혼자서 보기 아까운 권 회장의 시터 모습을 첨부했다.
오래지 않아 답장이 왔다. 정한이 아닌 윤조에게서였다. 하트 이모티콘 하나가 다였지만 둘의 마음이 오롯이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황 집사는 윤조에게 받은 연분홍빛의 하트를 매만지며 쌍둥이에게 제 회사 일을 설명하고 있는 권 회장을 보았다. 아무래도 쌍둥이의 미래가 벌써 정해진 것만 같았다.
* * *
이번 여름만큼은 절대 그냥 보낼 수 없다며 윤조는 미친 듯이 매진하던 공부도 잠시 미루고 내내 수영장에 들어가 있었다. 정한은 쌍둥이가 기어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전보다 조금 더 바빠졌기에 윤조를 가까이서 구경하고 싶은 마음은 잠시 뒤로하고 집 안에서 그를 관망할 수밖에 없었다.
시터를 하나 더 늘릴까.
지금 있는 시터만큼의 믿음이 생기려면 또 얼마나 긴장하며 지내야 할까.
차라리 애들을 저택에 보내버릴까.
아님, 황 집사를 고용해?
긴 낮 동안 빨갛게 타서 온 윤조의 하얀 엉덩이를 확인할 때마다 정한은 아이를 가진 보호자답지 않은 생각에 휩싸였다. 그렇다고 정말 정한이 아이들을 뒷전에 두는 것은 아니었다. 한눈을 자주 파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이리 와야지.”
가까이서 들리는 시터의 목소리에 정한은 창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려 보았다. 서윤이 딴에는 전속력으로 제게 기어 오는 중이었다. 정한은 시터에게 자신이 보겠다고 손짓을 해 보이고 서윤을 안아 들었다.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윤조를 빼닮았는데, 성격은 저를 똑 닮은 듯했다. 정한은 서윤이 원하는 것을 단번에 알아채고 서윤을 안은 채 같이 창밖을 보았다. 그새 바깥으로 밀려난 튜브가 보였다.
“서정아.”
어디 하나만 그럴까. 정한은 또 제게 맹렬히 기어 오는 서정을 들어 안았다. 시터에게 잠시 쉬라는 말을 남기고 정한은 쌍둥이와 함께 창밖의 윤조를 구경했다. 여름 볕보다 더 맹렬한 시선이 저를 좇고 있는 줄도 모르고 윤조는 홀로 여름을 즐겼다. 그렇게 윤조를 살피는 정한의 팔에 들린 무게가 지나는 시간보다도 빠르게 쑥쑥 늘어났다.
윤조는 쌍둥이도 낳았는데 못 할 게 뭐가 있냐며 전보다 공부에 자신감이 붙었다. 기동성이 생긴 쌍둥이와 공부에 열중인 윤조를 돌보느라 정한은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몰랐다. 제 육아 휴직이 끝난 후에는 조금 괜찮아지겠지, 막연히 그렇게만 여겼다. 과연 그 날이 올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드는 날에 친구들이 집에 쳐들어왔다.
“너 되게 바빠 보인다.”
아직 앉지도 못한 정한을 두고서 승주가 안쓰럽게 보았다. 윤조는 짧은 인사만 한 뒤 서재에 틀어박혔고, 오늘 시터는 일이 있어 오로지 정한 홀로 쌍둥이를 봐야 했다. 내심 승주와 무헌이 와서 도움이 될까 했더니, 어째 두 사람은 여름날 저와 쌍둥이처럼 바라보는 것만 할 줄 아는 필요 없는 인력이었다.
“바빠 보이면 알아서 좀 찾아 먹지?”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정한이 너도 어쩔 수 없구나. 애가 생기니까 그 번쩍번쩍하던 집이 애들 차지가 됐네.”
“안 그래도 저택에 보낼까 싶어.”
“저거 진심이다. 농담 아니야.”
승주가 웃으며 냉장고를 뒤적였다. 보고 있자니 저 먹을 음식을 알아서 챙기는 게 기특해 보였다. 저 당연한 것이 무어라고 정한은 스스로가 우스워졌다.
“이젠 혼자 웃네. 육아 스트레스가 대단한가 봐.”
“하긴, 둘이나 되니. 암만 네가 알파래도….”
“둘 아냐. 셋.”
“아. 윤조 씨 공부 봐주느라 그것도 힘들겠네”
“집에….”
개가 세 마리 있는 것 같아.
정한은 말을 다 잇지 않고 저를 빤히 보는 친구들을 향해 웃어 보였다.
“괜찮아. 힘들면 힘들다고 해.”
“아냐. …나쁘지 않아.”
조금도 믿지 않는 얼굴로 승주가 식탁에 음식을 늘어놓고, 무헌이 포장을 뜯어 정리했다. 정한은 두 팔로 쌍둥이를 모두 안은 채 저를 구경하며 먹는 두 사람을 보았다.
“입에 넣어줄까?”
“아니. 생각 없어.”
“그래. 그렇게 보여.”
왜 왔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정한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딘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이따금 문제를 물으러 서재에서 나오는 윤조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옹알이를 해석해 대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았으니까.
“힘내, 친구.”
정한은 웃기만 했다. 잠시 후, 서재를 나온 윤조가 승주의 맞은편에 털썩 앉아 엎드렸다. 저도 잠시 쉼이 필요하다며 중얼거리고는 배가 고프다고 또 벌떡 일어났다. 정한은 말없이 윤조를 바라보다 저를 살피는 두 친구의 시선에 또 웃어 보였다.
밥 먹는 시간이 아깝다며 최근 들어 영양 주스를 마시기 시작한 윤조가 주스를 반쯤 마시고서 다시 승주 앞에 앉았다.
“애들 낳으면서 다 까먹은 것 같아요. 왜 해도 해도 새롭죠?”
“좀 도와줄까요?”
무헌이 인심 좋은 얼굴로 참견했다.
“어? 저 공부 봐주시게요? 감당하실 수 있을까요?”
윤조의 말에 주춤하는 무헌을 승주가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윤조가 기세를 몰아 무헌의 앞자리로 이동하여 괜찮으시면 부탁하고 싶다고 하자, 무헌이 시선을 피하며 대답 대신 정한을 바라보았다. 무헌의 시선을 따라 윤조도 정한을 바라보았다.
“보시다시피 좀 바쁘거든요.”
마저 주스 병을 비운 윤조가 입맛을 다시며 생각난 듯 말했다.
“아님, 우리 쌍둥이 좀 봐주실래요?”
윤조의 시선이 무헌을 지나 승주에게도 향했다. 두 사람이 말렸다는 듯한 얼굴로 윤조를 향해 희미한 웃음을 보였다. 단순하게 해석할 윤조를 모르고 지은 웃음이었다.
“어? 좋아하시네요? 그럼 좀 부탁드려요. 의사 선생님들이니까 애들 잘못되진 않겠죠?”
“그럼요, 그럼요.”
무심결에 대답한 무헌의 팔을 승주가 꼬집는 게 보였다. 윤조가 냉큼 정한에 품에 안긴 쌍둥이를 두 사람에게 하나씩 배당했다. 그러고는 제 손을 잡아끌고 서재로 향했다. 정한은 서재에 들어서자마자 윤조가 제 입술을 씹어 물 거라 예상하고 허리를 안았다.
“어… 그것도 좋긴 한데.”
짧게 입만 맞춘 윤조가 가슴을 밀어내고 방금까지 자신이 보던 것을 펼쳐 보였다.
“이거 정말 몰라서요.”
정한은 윤조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웃었다.
“왜요?”
“아니. 그냥.”
테이블에 마주 앉아 윤조가 궁금해하는 것을 풀어주었다. 쌍둥이의 울음소리가 나지 않는 것을 보아 승주와 무헌이 잘 보고 있는 모양이다. 정한은 버릇처럼 바깥으로 계속 귀를 기울이며 그동안 윤조가 쌓아 놓았던 물음을 해결해나갔다.
“여보.”
마지막 문제가 남았을 때, 그가 불쑥 말을 걸었다. 윤조는 저를 지칭할 때 다양한 말로 주제와 감정을 대변했는데, ‘여보’는 주로 중대한 일이 있을 때, 제게 의견을 구하고자 할 때 부르는 말이었다.
정한은 잠시 펜을 내려놓고 윤조를 보았다. 그가 고심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여보 육휴도 곧 끝나가는데… 나 시험 전까지, 저택에 가 있지 않을래요?”
“시터를 하나 더 둘게.”
“그럼 해결이 되긴 하겠지만, 당분간 여보가 엄청 신경 쓸 테고… 나도 그렇고….”
“아버지나 황 집사님이 믿을 만하지.”
“그러니까요. 낮에 여보 출근하면 집사님한테 부탁드리면 되고, 저녁에 여보 늦으면 아버님께 맡기고. 지금 시터분한테는 기사 보내 드리면 되지 않을까요?”
어디를 보나 진심으로 하는 소리였다. 정한은 잠시 고민하다가 아버지와 황 집사의 의견을 물어보겠다는 결론을 내어주었다. 이렇게라도 마무리하지 않으면 그가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끙끙 앓아 댈 것을 알아서다.
“혹시나 거절해도 그럴 수 있다고 여겨. 알았어?”
“네. 애 보는 게 좀 쉬운 일도 아니구….”
“애가 아니라….”
정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저택에 살면 아버지와 부딪히는 일이 왕왕 있을 텐데, 그 사이에서 윤조의 등이 터지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아니 어쩌면, 두 사람 사이에 끼여 터지는 건 저일지도.
“아버님이랑 싸울까 봐 그래요?”
“아니. 애도 아니고 왜 싸워?”
“그렇죠? 애도 아니고.”
윤조가 의미 있게 웃으며 마지막 문제를 내밀었다. 정한은 다시 펜을 들었다. 하루하루 저를 다루는 게 능숙해지는 윤조였다.
* * *
그로부터 2주 후. 대대적인 가족의 이동이 있었다. 정한이 출근하게 된 관계로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몇 차례 차로 짐을 옮긴 뒤, 떠나는 날은 홀가분하게 나섰다.
이런 식으로 저택에 다시 돌아올 줄은 몰랐다. 되도록 이번 시험에서 가닥을 잡고, 무조건 내년에는 합격하겠다는 계산이었는데, 이왕이면 운이 좋아 이번에 합격하면 좋을 것 같았다. 쌍둥이도 낳았는데 못 할 게 무엇이 있을까. 윤조는 자신의 운을 믿고 싶었다. 이미 상당히 믿고 있었지만.
“이쯤 하면 되었겠지.”
이전에 정한과 쓰던 방이 네 식구의 방이 되었다. 그렇게 넓어 보이던 공간이 아이들의 물품으로 순식간에 가득 찬 것을 보며 윤조는 허탈하게 웃었다.
“애 키우면 다 그런 거지 뭐.”
제 마음을 읽은 듯이 권 회장이 말했다. 윤조는 꼼꼼하게 마무리된 가구 모서리와 아이들이 지내기에 알맞게 준비된 바닥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했다.
“모자란 게 있으면 언제든 황 집사한테 얘기해.”
윤조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시터를 비롯해 아이들을 봐줄 사람이 많아져 꼭 밥솥에 밥이 그득한 것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회장님. 잠시 오셔야겠습니다.”
황 집사의 호출에 아이들을 안아보려던 권 회장이 아쉬운 입맛을 다시고 방을 나섰다. 윤조는 아이들 사이에 등을 대고 누워 천장 조각을 바라보았다. 만감이 교차했다. 곧 제 얼굴을 때리는 손길이 들이닥쳐 느긋한 감상은 할 수 없었지만.
“어째 잠시도 가만히 있질 않냐.”
누굴 닮아 이렇게 활동적이야?
윤조는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 쌍둥이를 끌어안고서 통통한 볼에 연신 입을 맞추었다. 저와 꼭 닮은 얼굴이 까르르 웃어대었다.
“왔어요?”
짐 정리가 끝났는지 잠시 후 정한이 찾아왔다. 당연한 듯 곁에 앉은 그가 가까이 있는 아이를 데리고 가서 뺨을 쪽쪽거렸다. 윤조는 저도 입술을 내밀어 보였다. 빤히 저를 보던 정한이 웃음을 지으며 입을 맞춰주었다. 점점이 이어진 입맞춤이 조금씩 깊어졌다. 제 옷을 잡아당기는 손길이 없었다면 아이들이 있다는 것도 잊었을 테다.
“공부 시간이야.”
정한의 알람 같은 말 역시도.
“하….”
“오늘은 쉴래?”
“아뇨. 모처럼 저택에 왔는데, 합격 기운을 제대로 써야죠.”
“합격 기운?”
윤조는 저 혼자 꼭꼭 숨겨 왔던, 저택에 와야 하는 이유 한 가지를 발설한 제 입을 급히 틀어막았다.
“무슨 뜻이야?”
능숙하게 쌍둥이 둘을 한쪽 팔에 하나씩 안고 선 정한이 의아하게 물었다. 윤조는 시선을 헤매다 이실직고했다. 자신이 그를 속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여기서 공부해서 입학시험 합격했잖아요. 그 기운을 좀 받으려고요.”
“우리 집에서는 안 될 것 같았어?”
“아뇨!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여긴 경험이 있으니까….”
사실 그게 맞긴 했지만. 윤조는 애써 아니라고 부정했다. 미간을 좁힌 정한이 쌍둥이와 함께 방을 나섰다. 황 집사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제게 채찍을 휘두르러 오는 것일 테다.
“자꾸 같은 거 틀리는 건 일부러 그러는 거야?”
확실히 저택 서재의 분위기가 더 공부에 집중하기 좋았다. 정한이 전보다도 엄하게 저를 가르치고 통제하며, 저는 꼭 집사 때로 돌아간 듯이 그에게 쥐새끼처럼 굴었다. 이대로라면 합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똑똑.
늦은 밤. 제 공부를 다 봐준 정한이 아이들을 재우러 돌아가고, 저는 남아서 부족한 공부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노크를 해 왔다. 윤조는 고개를 들어 짧게 답했다. 슬그머니 열린 문 너머로 권 회장이 나타났다.
“곧 자정인데 여태인 게야?”
어쩐지 눈이 뻑뻑하더라니. 이곳에서 처음 공부하는 습관을 들였더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쉬엄쉬엄해. 그러다 몸 상하면 어쩌려고.”
윤조는 권 회장의 권유에 남은 공부를 내일로 미루기로 했다. 간단히 테이블을 정리하고 일어났다. 권 회장이 서재 문을 비스듬하게 열고서 보았다. 윤조는 그 사이로 쏙 빠져나갔다.
“근데 왜 아직 안 주무셨어요?”
“집이 북적북적해서.”
“애들이 울었어요?”
자신이 공부에 빠져 있어 듣지 못했나 했다. 권 회장은 고개를 내저으며 곧 나타난 방 앞에 저를 세웠다.
“어서 들어가.”
다정한 목소리였다. 막연하게 그가 정한과 싸울 일이 생길까 했던 마음은 기우인 듯했다.
“아버님!”
윤조는 어느새 둘을 넘어 셋, 아니, 넷과 다섯은 되는 듯한 권 회장을 다급히 불렀다. 그가 큰 덩치를 비스듬하게 돌리며 보았다.
“저 막무가내로 저택 들어오겠다고 했는데, 받아주셔서 감사해요.”
“막무가내는 무슨. 네가 여기 주인인데. 나야 세 들어 사는 인간이고.”
“에이….”
“편히 있어. 눈치 보지 말고.”
“저 눈치 안 봐요. 어떻게 하는 건지 까먹었어요.”
권 회장이 기가 찬 얼굴로 웃었다. 그 웃음이 예전에 자주 보았던 정한의 표정과 닮아 있어 어쩐지 반가웠다.
“그럼 주무세요.”
“오냐.”
돌아가는 권 회장을 바라보다 윤조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섰다. 보조 등이 켜져 있는 방 안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텅 비어 있는 침대를 발견하고 안전 가드 안쪽을 살폈다. 저 먼 창가에서 잠들어 있는 세 사람이 보였다. 윤조는 가드를 훌쩍 넘어 들어가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폭신폭신한 매트가 윤조의 발자국을 빠르게 흡수하고 또 뱉어내었다.
양쪽에 아이들을 두고 누운 정한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응급실에서 며칠 있다가 와도 끄떡없던 사람이 아이들을 돌보면서 자주 이렇게 깊은 잠에 빠지곤 했다. 언젠가 잠을 자지 못해 빨간 눈을 뜨고 다닐 때도 있었는데. 새삼스러운 기억에 윤조는 정한의 뺨을 매만지며 그의 입가에 조심스럽게 입술을 가져다 댔다.
“…왔어?”
깨어나지 않을 줄 알았더니 정한이 눈을 떴다. 윤조는 담요를 가져와 아이들의 몸을 덮고 또 정한의 몸에도 덮어주었다.
“넌 어디서 자게?”
설마하니 혼자 침대에서 자는 건 아니겠지, 하는 얼굴로 정한이 보았다. 윤조는 일찍이 찜해 둔 자리로 파고들었다. 제 팔을 베고 누운 윤조를 정한이 기껍게 안아주었다. 보통은 부모가 아이들을 사이에 두고 잔다는데. 어째 우리 집은 반대다, 하면서.
“아버님이 나 자라고 찾아오셨어요.”
“그랬어?”
“우리 와서 좋으신가 봐요.”
“아버지… 요즘 좀 적적하신 가봐. 자꾸 사람을 찾으시네.”
“그래요? 그럼 다행이다. 여기 느긋하게 있다가 가도 되겠어요.”
“음… 합격할 때까지?”
“하하하….”
잠 묻은 정한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윤조는 몸을 돌려 정한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그에게서 제가 좋아하는 향이 났다. 그의 페로몬, 또 아이들의 따뜻한 살냄새 같은 것들….
킁킁거리는 윤조의 턱을 붙잡고 정한이 입을 맞추었다. 녹진하고 뜨거운 혀가 부드럽게 안을 더듬었다. 윤조는 아이들이 깨지 않게끔 정한에게 조심스럽게 몸을 붙이고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으응….”
다리를 얽고서 서로의 성기를 비볐다. 윤조는 제 페로몬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단속하고, 또 단속하면서 정한과 아슬아슬한 패팅을 즐겼다. 속옷 아래로 빠듯하게 선 정한의 성기가 만져졌다. 그의 인내가 느껴지는 숨이 목덜미를 간질였다.
“여긴 넓으니까….”
더운 숨을 뱉어낸 살굿빛 얼굴. 그 속의 까만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윤조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정한과 침대로 향했다. 곤히 잠든 아이들을 두고 둘은 서둘러 아래만 벗어 던졌다.
침대 모서리에 겨우 등을 대고 누운 윤조의 위로 정한이 자리 잡았다. 누가 뭐라 할 사이도 없이 윤조는 다리를 벌렸고, 정한은 제 성기를 젖은 사이로 밀어 넣었다.
“하….”
“후….”
빠듯한 압박감에 둘은 동시에 긴 숨을 내쉬며 서로를 끌어안았다. 이어 정한이 콘돔을 떠올리지 않았다면 올해의 시험도 망쳤을지 모른다. 예기치 않은 셋째가 찾아왔을 테니.
“이러려고 온 건 아닌데… 이렇게 되니까, 좋아, 요….”
콘돔 두 개를 소비한 뒤에야 말문이 터졌다. 정한이 마저 하나를 뜯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윤조는 고개를 들어 저 멀리서 색색 잠들어 있는 두 아이를 보았다. 이제야 이성이 조금 돌아온 모양인지 괜히 발끝이 오므라들었다.
“뭐해, 나 안 보고.”
욕심을 감추지 않는 정한의 요구에 잠시 들었던 부끄러움을 잊었다. 윤조는 이따금 시야에 걸리는 천장 조각을 보며 웃었다. 아직 해야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으며, 아이들이 자라려면 또 한참 있어야 하지만, 모든 것이 완벽하게 느껴졌다.
“윤조야.”
천장 조각을 가리고 나타난 얼굴. 그는 한땐 저 창가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차갑게 말하는 저택의 주인이었고, 한때는 죽으려고 환장한 도련님이었으며, 그리고 한때는 저를 쥐새끼로 여기는 사장, 그리고 또 한때는 제게 고용된 치료사였다.
그리고 지금. 그는 제 첫사랑이었고, 연인이었으며, 제 남편, 제 아이의 아버지, 그리고 평생을 함께할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사랑해.”
제 모든 것을 거머쥔 남자가 사랑을 속삭였다. 윤조는 웃음을 띤 채 그를 응시했다.
“왜 웃기만 해?”
제 사랑을 갈구하는 남자의 두 뺨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안도한 그의 뜨거운 숨이 밀려왔다. 오로지 저로 인해 숨을 이어갈 수 있다는 듯 그는 제게 꼭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윤조는 정한의 허리에 감은 다리를 바짝 당기며 그를 꽉 끌어안았다. 밑이 눅눅하게 젖어 갔다. 도무지 식을 것 같지 않은 완벽한 밤이었다. 앞으로도 그와 보내는 모든 밤, 모든 낮, 모든 하루도 지금과 같이 완벽하리라, 윤조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