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Prologue. (1/18)

Prologue.

수많은 사람이 어우러진 공간이 제법 소란스럽다. 번쩍번쩍 빛을 내는 조명과 여러 대의 모니터 앞에는 카메라가 있었다. 엄브렐러를 씌운 조명이 카메라 셔터가 눌릴 때마다 팡, 팡 빛을 터뜨렸다.

수많은 발자국이 시끄럽게 오가는 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훤칠한 사내가 장내에 들어섰다. 애쉬톤의 찰랑거리는 머리카락과 뛰어난 이목구비로 주변의 시선을 홀리는 남자가 해사하게 웃자 장내에도 소소한 웃음이 내려앉았다.

“희찬아! 이번엔 조금 다른 포즈로 가 볼게.”

“네!”

희찬은 살인마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용서의 자격’ 촬영을 마친 후, 곧장 다른 스케줄에 돌입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패션 잡지의 첫 한국인 모델로 발탁된 희찬은 오랜 시간 이어지는 촬영에도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카메라 앞에 섰다. 벌써 수십 벌의 옷을 갈아입고, 수백 가지의 포즈를 취했지만, 또 다른 포즈를 요구하는 작가의 요청에 희찬은 어렵지 않게 색다른 포즈를 취해 냈다.

표정 하나, 손짓 하나로 분위기를 반전시킬 줄 아는 장희찬은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톱 배우였다. 7년 전, 하이틴 드라마의 조연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이후 줄곧 톱스타의 자리를 지키는 중이다.

또렷한 발음과 틀에 박히지 않은 연기를 펼쳐 내는 희찬은 독보적인 캐릭터 표현으로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는 배우였다. 처음에는 비슷한 이미지의 캐릭터만 맡아, ‘통통 튀는 캐릭터가 잘 어울린다.’라는 평판이 압도적이었으나, 최근 촬영을 마친 살인자 연기도 완벽하게 해냄으로써 사람들의 평을 한 번에 뒤집었다.

역시 장희찬.

결국엔 또 ‘역시 장희찬’이었다.

한참이나 진행된 촬영이 쉬는 시간을 맞았다. 삼삼오오 모인 스태프들은 끼니를 챙기는 동안, 희찬은 피곤한 몸을 축 늘어뜨린 채로 선풍기 앞에서 시원한 바람을 만끽했다. 온종일 조명 아래에 서 있었더니 얼굴에 열이 올라 후끈거렸다. 눈을 감은 채로 시원한 바람을 즐기던 희찬의 귀가 어느 스태프의 말에 번뜩 뜨였다.

“어, 이도준 배우 영화 개봉하나 보네요.”

“그거 이제 개봉해?”

“촬영 끝난 지는 얼마 안 됐다던데요?”

“그래? 그쪽도 워낙 핫해서 계속 얘기를 듣다 보니까 오래됐다고 생각했나 보다.”

“이번에도 난리 나겠네요. 미남 킬러래.”

“천만 찍는 소리 나만 들리냐.”

자신과는 항상 라이벌로 언급되는 또래의 다른 배우, 이도준의 소식이 귀에 닿기 무섭게 희찬이 고개를 홱 돌려 스태프들을 바라봤다. 한창 목소리를 높이며 즐겁게 떠들던 스태프들이 일순 희찬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표정에서는 아무런 악의도 묻어나지 않았으나 저들 스스로 먼저 입을 단속하는 바람에 희찬이 멋쩍은 웃음을 피웠다.

“희찬이랑은 앙숙이지?”

앙숙…….

스태프의 말을 곱씹은 희찬이 아무런 대답 없이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도준 배우 잘하죠.”

“그럼, 잘하지. 성격도 좋던데. 다른 동료들이랑 잘 안 어울려서 시샘하는 애들도 있긴 하더라. 싸가지 없다는 소리도 듣는 거 같던데?”

“그 얼굴로 안 놀아 주면 잔챙이들이 삐치지.”

희찬이 하는 말에는 왜인지 날카로운 가시가 돋은 것 같다. 낮게 읊조리는 말에 스태프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쳐다봤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격 좋은 배우’로 통하는 희찬은 상대가 누구든 그와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고, 당연히 누군가에게 적개심을 드러낸 적도 없었다.

“응?”

“하하……. 잘생겼잖아요, 이도준 배우.”

희찬이 맑게 웃으며 자신의 말을 무마했다. 그에 스태프들도 멋쩍었는지, 큰 웃음을 터뜨리며 희찬의 말에 동조했다. 자칫 냉랭해질 뻔한 분위기를 무사히 넘긴 희찬이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들었다.

온 포털을 뒤덮은 이야기는 그 잘난 이도준의 영화에 관한 얘기뿐이었다. 로맨스면 로맨스, 액션이면 액션, 하다못해 악역까지 자신이 가진 색깔로 다채롭게 표현할 줄 아는 이도준 역시, 희찬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영화계의 보물이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여름을 향했다. 오랜만에 휴식을 맞은 희찬은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둥둥 울리는 집에서 여유를 만끽하는 중이었다. 하루걸러 하루로 바쁜 스케줄에 치이던 중, 가끔 맞게 되는 휴식이 안기는 안정은 달콤하기 그지없다.

희찬은 지난밤 방영된 예능의 반응을 살피고자 휴대폰을 켰다. 오늘도 소란스러운 정치면을 지나, 연예면으로 들어서니 각양각색의 기사가 도배된 것을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었다.

<‘믿보 이도준’ 영화 ‘Killer’ 한국 영화 역사상 최단기간 1,000만 관객 돌파★>

<패션 잡지 Elia, 장희찬 효과? 예약판매 중, 역대 최대 부수 기록>

<30대가 기대되는 배우, 이도준-장희찬 공동 1위>

<이도준, 이한전자 광고 재계약, 이한 그룹도 탐내는 ‘이도준 버프’>

<장희찬, 탁월한 예능감 뽐낸 화제의 1분, 최고 시청률 32%>

<대한민국은 현재 킹★짱 앓이, 킹도준과 짱희찬의 거침없는 행보>

온 포털을 뒤덮은 이름은 또, 이도준과 장희찬이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일이라, 희찬의 입가에 뭉근한 미소가 피었다.

도준의 기사를 클릭했다. 도준의 이력을 장황하게 설명하다가 결국엔 칭찬으로 마무리하는 기사를 찬찬히 눈으로 훑었다.

그러던 희찬의 눈에 띄는 기사가 있었다.

<‘앙숙’ 이도준VS장희찬, 경쟁하듯 치고 오르는 인기>

앙숙. 또 그놈의 앙숙이었다.

희찬이 찌그러진 미간을 손가락으로 살살 긁었다. 탐탁지 않은 듯 휴대폰 화면을 끄고 허벅지에 휴대폰을 탁, 탁 내리치다가 소파에 벌렁 누웠다. 희찬의 옅은 눈이 단색 벽지를 따라 움직였다. 천장의 몰딩까지 다다른 희찬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앙숙은 무슨…….”

머릿속을 가득 메운 생각을 말로 뱉은 희찬이 벌떡 몸을 일으켜, 음악 소리를 조금 더 키웠다. 어지러운 머릿속을 잠재우는 데에는 시끄러운 음악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

빠른 비트를 따라 차분해지는 심장을 느낀 희찬이 다시 휴대폰을 뒤적거렸다. 그간 이것저것 촬영하느라 등한시했던 SNS에 올릴 사진은 없나, 살펴보는 희찬의 손가락이 분주하다. 이윽고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찾은 후에는 금세 SNS 앱을 켜 토독토독 소리를 내며 글자를 만들어 냈다.

heechanee 오랜만!

사진을 올리기 무섭게 알림창에 알림이 떴다.

좋아요 3,098,295개

heechanee 오랜만!

⤷ ㅁㅊ 짱희찬 용안

⤷ 희찬이ㅠㅠㅠㅠㅠㅠ❤️❤️❤️❤️❤️

⤷ 오늘도 독보적,,,,

⤷ 세상에 조각상이 SNS를 하네

댓글 19,245개 더보기

무서운 속도로 오르는 ‘좋아요’ 개수와 달리는 댓글들을 보던 희찬이 즐겁게 웃었다. 팬들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띄우던 휴대폰 화면에 다른 알림이 떴다.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문구에 거리낌 없이 메시지를 누른 희찬이 이전보다 조금 더 짙은 미소를 피워 냈다.

임 감독님

희찬아, 오늘 바쁘니?

별일 없으면 잠시 만날까.

데뷔를 꿈꾸던 아주 어린 시절부터 줄곧 좋은 관계를 맺어 온 감독의 연락에 희찬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임 감독의 요청이라면 웬만해서는 다 들어주고 싶은 것이 희찬의 마음이었고, 마침 일도 없으니 못 만날 이유도 없었다.

네, 지금 사무실로 갈게요.

짧은 답장을 마친 희찬은 금세 모자를 챙겨 눌러 쓰고 스마트 키를 챙겼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임 감독의 작품을 함께할 기회가 주어지려는 모양이다. 희찬은 즐거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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