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 승선 (2/18)

눈부신 항해 1권

01. 승선

<‘눈부신 항해’ 주연 배우로 이도준, 장희찬 ‘물망’>

<돌풍 예상 ‘눈부신 항해’ 본격 주인공 찾기 시작>

퀴어 드라마로 이목이 집중된 ‘눈부신 항해’의 주인공 예고 기사가 떴다. ‘퀴어 드라마’라는 간단한 설명뿐이었음에도 구체적인 배우가 거론된 지금, 사람들의 흥미는 한껏 솟구쳤다.

이도준과 장희찬. 두 사람의 이름이 같이 언급된 일이 전무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같은 작품을 선택하는 일은 지금까지 일절 없었다.

같은 작품에 이름이 거론되더라도, 어느 한쪽에서 확정 기사를 내면, 다른 한쪽은 부리나케 불발 소식을 안겼다. 방송에서 어쩌다 서로에 대한 인터뷰가 진행되면 입을 꾹 다물어 버리는 태도를 보이고는 했다.

연말 시상식은 또 어떤가.

함께 후보에 오르는 시상식은 둘 다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덕분에 어느새 ‘앙숙’이라는 소문이 기정사실이 된 두 배우였다.

드라마면 드라마, 영화면 영화.

찍었다 하면 대박을 터뜨리는 대한민국 명실상부 톱 배우들의 케미스트리를 기대하는 반응이 온라인을 점령했지만, 그 기대에 진심은 없었다.

더군다나 퀴어 드라마라니. 가당치도 않은 소리.

두 사람이 함께 나오면 여러 의미로 ‘대박’이겠지만, 그건 꿈에도 그릴 수 없는 상황인 듯했다.

“아, 무슨 전화가 이렇게 많이 왔어.”

마지막 스케줄을 끝내고 외국에서 휴가를 보낸 도준은 비행기에서 내림과 동시에 불티나게 울리는 휴대폰 진동에 미간을 좁혔다.

다양한 이름이 번갈아 새겨진 부재중 목록을 손가락으로 쭉 훑어 내리던 중 반가운 이름을 발견했다.

<임 감독님>

도준이 제대로 된 데뷔조차 하지 않았던 시절부터 도준을 꾸준히 작품에 캐스팅하는 고마운 은인이었다.

올 초 개봉한 영화 이후 별다른 일 없이 간간이 들어오는 광고만 촬영하던 도준에게 새로운 일거리가 주어질 모양이다. 도준은 즐거운 걸음을 놀려 입국장으로 향했다.

여름이 다 지나고 가을이 성큼 다가온 날씨에도 공항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서 입국 수속을 마친 도준은 커다란 유리를 통해 쏟아져 내리는 햇살을 맞으며 큰 숨을 들이켰다.

희경이

저 게이트 E 앞에 있어요.

울린 진동은 매니저의 문자였다. 평소의 휴가 같았으면 매니저나 소속사 대표도 동행했겠지만, 이번엔 오롯하게 혼자 즐기고 싶었기에 그들의 걱정을 뒤로하고 혼자 나선 휴가였다.

여기저기서 흘깃거리며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제는 대한민국에서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이도준이었으므로 그 시선 역시 도준에겐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이었다.

한 명이 ‘찰칵’ 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이어서 여러 명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사람들의 입에서 ‘이도준’ 세 글자가 오르내렸다. 그를 의식한 도준은 여유로운 걸음에 속도를 붙여 뚜벅뚜벅 나아갔다.

도준은 어렵지 않게 매니저가 말했던 ‘게이트 E’를 찾았다.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제게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도준은 저 멀리서 손을 흔드는 매니저를 발견하고 지체 없이 그에게 향했다.

이도준이 공항에 나타났다는 소식은 금세 온라인 전역에 퍼져 나갔다. 현장에 있는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 다가와 흥미로운 눈빛을 보이는 것에 도준은 그저 웃는 것으로 답할 뿐, 그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잘 다녀왔어요?”

“응, 너도 잘 지냈지?”

매니저는 능숙하게 주변 인파를 막아 냈다. 경호원이 대동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 도준이었기에, 인파를 막아 내는 것 정도는 득도한 수준이었다.

사람만 좀 적었어도, 사인을 요청하는 사람이나, 함께 사진을 찍고자 하는 사람들의 요구에 모두 응했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와, 오늘 공항에 사람 엄청 많네요.”

“그러게.”

“혹시 휴대폰은 좀 보셨어요?”

“아니, 왜? 뭐 떴어?”

매니저는 예상했다는 듯이 입술을 누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도준은 여전히 자신을 좇는 시선을 느꼈다. 집요한 대중의 시선이 싫지만은 않다. 대중 친화적이지 않은 데다 SNS는커녕, 작품 홍보 활동조차 하지 않는 도준이었기에 이렇게 맹목적으로 좇아오는 시선이 싫을 리가 없었다.

대중들은 도준에게 맹목적인 동경을 표했다. 도준은 미디어 노출이 극히 드문 배우에 속함에도 그가 입는 옷, 그가 착용한 액세서리 등. 고가의 물품도 이도준과 엮이면 연신 매진 세례를 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현상을 두고 ‘이도준 버프’라 칭했다.

그런 대중의 사랑을 여실히 느끼는 도준이었지만, 그렇다고 하나하나 반응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도준은 대충 차 주변을 에워싼 인파를 둘러본 뒤 가벼운 몸짓으로 차에 올라탔다.

“눈부신 항해 소식도 못 보셨죠?”

“응, 그게 뭐야?”

“이번에 임 감독님 신작인데요, 우리 회사에서 제작하고요. 형 주연 배우로 언급되더라고요.”

“그래?”

도준은 차에 오름과 동시에 안대를 쓰고 양 귀에 귀마개를 끼워 넣었다. 차창에는 온통 검은 가림막이 처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도준은 꼭 안대를 써야 한다는 것처럼 뒤통수를 의자에 기대고 안대를 내려 눈을 가렸다. 그건 마치 정해진 순서가 있는 듯 지독하게 일상적인 행동이었다.

백미러를 통해 도준의 행태를 살피던 매니저는 그 이상의 말을 아꼈다. 잘 때가 되면 내색하지 않아도 누구보다 예민해지는 도준이라는 것을 잘 아는 탓에 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부드럽게 움직이던 차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부드럽게 멈춰 섰다. 회사에 도착해 주차까지 완벽하게 마친 매니저가 조심스럽게 도준을 불러 깨웠다.

“형, 왔어요.”

“어…… 응. 고생했어.”

도준의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이 느릿한 동작으로 안대를 끌어 내렸다. 안대에 가려졌던 시야에 빛이 닿자 도준의 두 눈꺼풀이 천천히 끔뻑거렸다. 잘생긴 새까만 눈동자가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지는 광경은 흡사 흑진주를 머금은 조개를 보는 것 같았다.

회사로 들어서는 도준의 발걸음은 언제나처럼 가벼웠다. 만나는 사람들에겐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고, 그들이 건네는 인사 역시 상냥하게 받았다.

국내 최고의 대형 기획사로 통하는 K액터스는 그 위상을 자랑했다. 널찍한 로비에 소속 배우들의 거대한 포스터가 여기저기 걸려 의기양양한 기세를 내뿜었다. 그 포스터 한가운데에는 도준의 사진도 있었다. 마치 ‘우리는 이도준 있다.’라고 자랑하는 그 모양새는 언제 봐도 멋쩍은 것이라, 헛웃음이 나왔다.

“대표님은?”

“대표실에 계실 거예요.”

도준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발을 옮겼다. 투명한 엘리베이터가 바쁘게 오르내리는 곳에 서서 위로 향하는 화살표를 꾹 눌렀다.

대표실은 12층을 통째로 쓴다. 12층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검은 문에는 ‘대표실’ 세 글자가 고급스럽게 박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위압감이 느껴진다고도 하고, 대표님이 대표실로 오라고 하면 무섭다는 말을 하곤 했지만 적어도 도준은 그렇지 않았다.

마치 고향에 온 것만 같은 편안함을 느낀 도준은 대표실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손바닥에 닿는 차가운 쇳덩이가 돌아가고, 문이 열리자 회전의자에 앉은 중후한 남성이 도준을 반가운 기색으로 맞아들였다.

“대표님, 저 왔어요.”

“어, 도준아. 앉아.”

도준은 오래간 봐 온 남자에게 근사한 미소를 보였다. 남자도 의자를 빙글빙글 돌리던 것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도준이 앉은 자리 맞은편 소파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대표실은 남자의 나이대와는 다르게 제법 세련된 인테리어를 갖췄다. 차분한 베이지 톤을 기본에 깔고, 통창을 뚫은 탓에 화사한 분위기가 감도는 대표실은 따뜻함마저 느껴졌다.

눈을 굴려 대표실을 슥, 둘러보던 도준의 시선이 이내 산더미처럼 쌓인 대본에 닿았다.

“푹 쉬었어? 오랜만에 일하려니 좋은가 봐?”

도준은 별다른 대꾸 없이 그저 고개를 주억거리며 눈으로는 탁자에 놓인 제 몫의 대본들을 찬찬히 훑었다. 각양각색의 독특하고 창의적인 줄거리가 담긴 대본들은 하나같이 강하게 자기주장을 하는 중이었다.

도준은 제법 오랜 시간 흥미롭게 대본들을 살폈다. 매니저의 말로는 ‘눈부신 항해’라는 작품에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었다는데, 대표는 별다른 뜻이 없는 건지, 대본을 권하지 않았다. 그에 도준은 부담 없이 다른 대본들을 살피며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또는 도전해 보고 싶은 캐릭터가 담긴 대본들을 골라냈다.

그런 도준의 눈에 ‘눈부신 항해’가 적힌 대본이 들어왔다. 노란 종이 커버 위에 꾸밈없는 폰트로 커다랗게 ‘눈부신 항해’가 적혀 있는 것이 왜인지 괜히 떨떠름했다.

도준은 대본을 열어 보기도 전에 대표에게로 눈을 돌렸다. 대표는 마치 도준이 열어 보길 바라는 것처럼, 그것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도준에게 상냥한 눈길을 보였다.

“희경이한테 들었지?”

“네, 뭐…….”

왜인지 꺼려지는 대본이었기에, 대표가 원하는 작품이 아니길 바랐지만, 대표가 차기작으로 원하는 것은 그 ‘눈부신 항해’인 모양이다. 도준은 오른쪽 눈썹을 살짝 꿈틀거리며 자신의 내키지 않는 심정을 표했다.

“너 꼭 섭외하고 싶다더라.”

“……퀴어잖아요.”

“왜, 싫어?”

뒤이어 쫓아오는 대표의 말에 도준의 가슴에 의아함이 자리했다. 애초에 퀴어 드라마라는 장르 자체가 양지로 올라오는 것을 꺼리는 대중들의 저항이 있을 텐데, 대표는 그런 것쯤이야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것처럼 상쾌한 목소리를 냈으니 말이다.

“이거 우리 회사가 제작사라면서요, 그거 때문에 하라는 건 아니고요?”

“이야, 많이 듣고 왔네. 근데 너 그런 식으로 곡해하면 속상하다, 야.”

아니 뭔 또 속까지 상한다고…….

도준이 느슨하게 몸을 풀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대표의 작품 보는 눈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애초에 대형 기획사로 자리매김한 후에도 꾸준히 성장세를 이어 갈 수 있었던 것은 대표의 뛰어난 안목이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제작하는 족족 대박을 터뜨리는 탓에 이제는 배우 기획사를 겸한 ‘제작사’로 주객전도가 된 지경이었으니, 그를 의심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럼에도 내키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도준은 시큰둥한 낯빛을 가리지 않고 또렷한 눈으로 대표를 살폈다.

“이전에 몇 나왔던 퀴어랑은 달라. 내가 너 얼마나 생각하는지 알지? 너한테 안 좋은 걸 내가 왜 권하겠냐. 너하고 딱인 데다가, 스토리도 정말 괜찮아.”

“대표님 정말 죄송한데…… 안 하고 싶어요.”

도준은 단호하지만 정중하게 대표의 제안을 거절했다. 펄쩍 뛰며 격한 반응을 보일 것이라 생각했던 도준의 예상과 달리 대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차분한 눈동자로 도준을 지긋하게 바라봤다.

“퀴어라고 무시할 스토리가 아니라니까.”

“무시하는 게 아니라……. 아, 아무튼 대표님. 죄송해요, 다른 거 할게요.”

도준은 간절히 청하는 대표의 목소리에 난처한 낯을 보였다. 기다란 손가락으로 귀 뒤 어느 부근을 긁적이기도 했다가, 다시 눈썹을 만지는 등 자신이 느끼는 당혹스러움과 난감함을 숨기지 않는 도준의 행동은 솔직하기만 했다.

딱히 장르가 퀴어여서 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다. 아니, 사실 맞다. 이미지를 생각한다거나, 앞으로의 연기 생활을 고려하는 게 아니다. 그냥 ‘퀴어’라서 하기 싫다.

도준은 손에 쥔 ‘눈부신 항해’ 대본의 겉표지를 성의 없는 눈으로 대충 훑었다. 단출함에도 강렬한 제목 탓인지, 제목 외에 다른 글자들은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썼다 하면 대박 치는 흥행 작가의 차기작이라든가, 국제 시상식에서 상을 받은 감독의 영화라든가. 아니면 작품성이 뛰어난 드라마라든가. 좋은 시나리오가 쏟아지는데 왜 굳이 퀴어를…….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대표의 간곡한 요청을 애써 무시한 도준은 대본을 내려놓고 자신이 추려 둔 대본 더미에서 다른 작품을 고르려 했다.

“도준아, 이거 이미지가 딱 너라서 그래.”

“제 이미지가 어떤데요.”

“이거 스토리가 꼭 너를 두고 쓴 거 같다니까? 진짜 한번 보기만이라도 해 봐.”

“아…….”

하지만 이렇게까지 나오면 거절도 어려워지는 법이다. 도준은 자신에게 아버지나 다를 바 없는 대표가 이렇게까지 간청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없던 마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도준은 내려놓은 대본을 다시 집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애절한 눈빛을 보이는 대표와 시선을 마주했다.

“임 감독이 꼭 너여야 한대.”

아.

뒤따라 붙는 대표의 말을 들은 후에야 임 감독이 무수히 남겨 둔 부재중 전화가 떠올랐다. 도준은 은인으로 손에 꼽는 두 사람이 매달려 자신에게 어려운 부탁을 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꼈다. 자연스레 미간이 좁혀졌다. 아랫입술을 잘근 씹어 물고, 인상을 찌푸린 도준은 이내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아니, 그리고 내가 봐도 이거는 네 역할이야.”

도준의 시선이 탁자 위에 가지런히 놓인 대본 위에 닿았다. ‘눈부신 항해’ 그 표제가 주는 느낌과 비슷한 누리끼리한 대본 껍데기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준은 엄지를 세워 지끈거리는 관자놀이 부근을 꾹꾹 눌렀다. 얼마나 힘을 줘 누르는지, 도준의 손가락이 닿은 피부 표면이 새하얗게 질렸다가 다시 혈색을 찾았다.

“왜 저여야 하는데요.”

도준은 태도를 바꿨다. 얼토당토않은 대표의 말은 여전히 이해가 어려웠지만, 일단은 그들의 말을 진득하게 들어나 보기로 했다.

진지하게 도준을 설득하던 대표의 낯빛에 화색이 돌았다. 기회를 문 맹수의 낯을 본 도준은 다시 미간을 좁히고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자, 들어 봐.”

“네.”

“일단, 퀴어 드라마라서 이성 스캔들이 없는 배우여야 해. 너지?”

“네.”

“모험적인 장르다 보니까 이름 있는 배우였으면 좋겠어. 근데 캐릭터 특성상 사생활이 세세하게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어야 해.”

“…….”

대표가 줄줄 늘어놓는 조건에 도준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대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그 조건들은 도준이 들어도 자신과 딱 맞아떨어지는 조건이었다.

이성 스캔들 없는 거, 그게 이럴 때 이점으로 작용할 줄은 몰랐다. 의도치 않게 붙은 ‘신비주의’라는 말 역시 이렇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그저 어떠한 ‘극’이라는 것은 캐릭터의 이야기고, 따라서 캐릭터를 연기하는 사람은 돋보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캐릭터를 연기하는 사람이다 보니, 배우 ‘이도준’보다, 캐릭터에 이목이 쏠리길 바라는 마음에 자신을 무던히도 숨겨 온 도준이었다.

그런데 그 신조가 이렇게 발목을 잡을 줄이야.

도준은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집어삼키며 대표의 말을 하나하나 새겨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거.”

“네.”

대표는 앞서 줄 세운 조건들보다 가장 중요한 조건을 읊으려는 양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도준에게 향하는 대표의 시선에서는 사뭇 강직함이 묻어났다.

그 시선에서 부담스러움을 느낀 도준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깔고 괜히 바닥 문양을 헤아렸다. 왜인지 설득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최대한 도망치고자 하는 작은 몸부림이었다.

“얼굴. 얼굴이 잘생겨야 한대. 야, 대한민국에서 너만큼 잘생긴 배우가 어딨어.”

“아, 농담하지 마세요.”

대표의 장난스러운 조건에 도준이 펄쩍 뛰었다. 긴장했던 것과 달리 가벼운 조건은 허무함까지 느끼게 했다.

잘생긴 남자 배우가 지천으로 널렸는데, 어디 그런 조건을.

도준은 잘생긴 미간을 한껏 좁히며 탐탁지 않은 시선을 보였다. 주먹을 세게 말아 쥐고서는 대표가 억지로 손에 쥐여 주려는 대본을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힘을 주고 도준의 손가락을 펴려는 대표와 주먹을 꼭 쥐고 풀지 않으려는 도준의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어, 그래. 도준아. 피곤하다고? 아, 집에 가서 읽어 보고 연락해 주겠다고? 그래그래, 얼른 집에 가서 쉬면서 읽어 봐.”

“제가 언제.”

결국 도준의 주먹을 펴지 못한 대표는 도준의 가슴팍에 퍽 소리 나게 시나리오를 던져 주고는 능청스럽게 등을 떠밀었다.

“희경이 어딨냐? 희경이 불러서 집에 데려다 달라고 하고. 이야, 내가 오늘 들어온 애 붙잡고 너무 주절댔네.”

대표는 완전히 작전을 바꿨다. 도준의 말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속사포처럼 제 말을 쏟아 놓는 대표 덕분에 정신없이 대표실 밖으로 떠밀려 나온 도준의 손에는 어느새 ‘눈부신 항해’ 대본이 들린 채였다.

도준을 밀어낸 검은 문이 ‘쿵’ 묵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대표실 앞에서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환한 기색을 보이는 매니저가 도준을 반겼다. 매니저의 눈이 도준의 손에 닿았다. 놀란 듯 휘둥그레 뜨이는 눈은 흥미를 가득 머금었다.

“그거 하기로 하신 거예요?”

“아니.”

도준은 주차장으로 향하는 내내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마치 숙제를 하지 않아 부담을 갖고 학교에 가는 학생처럼,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옮겨 이동하는 도준의 잘생긴 얼굴은 줄곧 굳어 있었다.

“형이랑 잘 어울리는 거 같긴 했는데…….”

여기저기서 ‘잘 어울린다.’, ‘딱 네 역할이다.’ 하는 말을 해 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작 연기를 해야 하는 내가 싫다는데, 왜 이렇게 주변에서 안달복달하는 건지도 이해되지 않았다.

도준은 시큰둥한 눈으로 제 손에 들린 대본을 한 번 더 쳐다봤다.

‘눈부신 항해’

왜인지 제목마저 거부감이 드는 탓에 일그러진 미간이 아예 사이 공간 없이 바짝 쪼그라들었다.

차에 오른 도준은 이러저러한 말들을 쫑알거리는 매니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래도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대충 ‘눈부신 항해’에 관한 말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세간의 관심이 뜨겁다느니, 업계에서도 큰 기대를 하고 있다느니. 퀴어인데도 벌써 대기업의 광고 문의가 줄을 잇는다느니.

도준은 관심도, 흥미도 없는 말을 줄줄 늘어놓는 매니저에게는 조금의 반응도 하지 않았다.

도준은 집에 도착하기 무섭게 문을 열고 도망치듯 차에서 벗어났다. 찌뿌둥한 몸을 늘여 기지개를 켜는 중에도 도준의 손에는 시나리오가 들린 채였다. 잊을 만하면 생각나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희경아, 나 휴대폰 껐어. 일 있으면 집으로 와.”

“네. 쉬세요, 형.”

“응, 너도.”

생각이 어지럽게 흩어진 탓에 복잡해진 머리가 지끈거렸다. 도준은 차가 사라질 때까지 한자리에 서서 그를 지켜보다 엘리베이터에 올라서야 커다란 한숨을 토해 냈다.

‘휴대폰을 껐다.’라는 말과 달리 도준의 휴대폰은 계속 밝은 빛을 냈다. 끊이지 않고 쏟아지는 메시지가 귀찮을 지경이었다. ‘너 진짜로 할 거야?’를 시작으로 ‘기대한다.’라는 메시지까지 수두룩하게 쌓여 있는 메시지 창은 도준이 느끼는 심란함의 크기를 더했다.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말이 돈 건지 알 수 없으나, 그 메시지들이 말하는 말은 하나같이 ‘네가 확정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준은 가차 없이 휴대폰을 끄고 뒷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눈부신 항해…….”

집에 들어오기 무섭게 샤워부터 마친 도준은 머리 위에 수건을 얹은 상태로 태블릿 PC를 켰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앉히고, 자신을 잡아먹을 것처럼 몸을 빨아들이는 등받이에 등을 기대니 편안함이 몰려왔다.

대형 포털 사이트에 접속하자, 군데군데 도준의 이름이 도배되어 있었다. 이름이 실시간으로 오르내리거나, 여기저기 언급되고, 자신의 이름을 이용하여 시선을 끌기 위해 자극적으로 기사를 쏟아 내는 것에는 이미 이골이 났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장희찬, 이도준. ‘눈부항’으로 만날까>

‘Hot Topic’이라는 제목을 달고 제일 상단에 자리한 기사가 도준의 눈을 끌었다. 장희찬. 지독하게 엮이는 세 글자를 봤을 뿐인데 도준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눈부신 항해’에 장희찬이 함께 물망에 올랐다는 말은 대표에게선 미처 듣지 못한 말이었다. 의도적으로 빼먹은 것이 분명한 대표의 행동에 도준은 다시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불현듯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지구의 중력이 온몸을 끌어당기는 것처럼 몸이 무거워졌다. 머리가 핑 돌고, 시선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낀 도준은 소파에서 일어나다 말고 휘청거리다 이내 소파 위로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아…….”

넘어질 뻔한 것을 간신히 버텼다. 까딱 잘못 넘어져 날카로운 모서리에 얼굴이 찍힐 뻔했다. 도준은 손금 주변으로 아릿하게 울리는 통증에 입술을 말아 물었다.

편안하게 소파에 누운 도준은 이마를 짚은 채로 숨 가쁜 호흡을 거듭했다. 벅찬 호흡을 진정하는 데에는 제법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도준은 아득해진 시야에 다시 뚜렷한 상이 맺힐 때에야 내려놓은 태블릿 PC를 들었다. 환한 빛을 내는 태블릿 PC에서는 대중들이 쏟아 내는 실시간 SNS 반응이 빠르게 갱신되고 있었다.

순식간에 휙휙 바뀌는 화면을 좇아 눈을 굴리는 도준은 진지한 태도로 그들의 반응을 살폈다.

이도준 잘생긴거 쌉ㅇㅈ. 근데 뭔가 싸가지 없어보임

⤷ 싸가지 없어서 잘 어울리는 거임

⤷ 그 얼굴이면 나도 싸가지 없을듯ㅋㅋ

⤷ 근데 착하다던데 사진도 거절안한대 사인도 다해준다그랫음

⤷ god―벽☆

이도준이랑 장희찬 둘이 같이하면 명동에서 옷 벗고 붐바댄스 춤

⤷ 박제ㅋㅋㅋ

유쾌한 말장난이 오가는 SNS의 반응은 열렬했다. 기대하지 않는 듯한 투로 기대를 머금은 사람들의 반응을 마주한 도준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장희찬……. 장……희찬…….”

장희찬의 이름을 되뇌면 되뇔수록 도준은 심장이 무겁게 짓눌리는 것을 느꼈다. 가빠지는 호흡에 주먹을 말아쥔 도준은 몸을 축 늘어뜨렸다. 그리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움직이는 주먹에 맞춰 호흡을 가다듬으려 무던히도 노력했다.

도준은 휘청거리는 걸음을 어렵사리 옮겨 떨리는 손으로 하얀 약통을 쥐었다. 정해진 개수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입 안으로 털어 넣자 기분 탓인지 가슴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도준은 핏줄이 바짝 선 손으로 가까스로 탁자 귀퉁이를 잡고 제 몸을 지탱했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숨을 의도적으로 천천히 들이켠 후에는 터져 나오는 숨을 거칠게 토해 냈다.

***

[제가,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어두운 공간 가득 희미한 목소리가 울렸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그 목소리는 모든 걸 체념한 듯 매가리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에서는 참담함이 느껴졌다. 아주 미약하게나마 강단이 느껴지는 그 목소리는 도준에게 낯설지 않았다.

[다……번, ……있거든.]

같은 공간을 다른 목소리가 울렸다. 희미하고 여린 목소리 사이에 섞여든 굵직한 목소리는 단호했다. 비아냥이 묻어나는, 상대를 완전히 무시하는 투의 저열한 목소리 역시 도준에게 낯설지 않았다.

하얀 침대 위에 똑바로 누운 도준의 고운 인상이 일순간에 찌푸려졌다. 잘생긴 이마 위로 송골송골 맺힌 땀이 길을 그리며 흘렀고, 주름이 잡힐 정도로 세게 감긴 두 눈꺼풀 아래 자리한 기다란 속눈썹에도 물기가 맺혔다.

텅 빈 방 안을 도준의 아픈 신음이 차곡차곡 메웠다. 그 신음을 따라 도준의 탄탄한 가슴팍이 숨 가쁘게 오르내렸다.

“하……. 하아, 흐…… 아…….”

종잇장처럼 구겨지던 도준의 인상이 마침내 제자리를 찾았다. 번뜩 두 눈을 뜬 도준은 새하얀 천장을 올려 보며 힘든 숨을 터뜨렸다. 마치 갓난아이 첫 숨 트이듯 터진 숨은 단단하고 무거웠다.

힘겨운 호흡을 거듭 토해 내던 도준은 이불 끄트머리를 머리끝까지 끌어 올렸다. 푸근한 이불 속에서 온몸을 둥글게 만 채로 귓가에서 웅웅거리는 목소리를 지워 내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덜덜 떨리는 도준의 두 손이 귀를 세게 틀어막았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소리가 분명했지만, 그조차 어떻게든 막아 보려 애쓰는 도준의 손은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도준의 손등에 검붉은 힘줄이 도드라졌다. 그렇게 온 전신에 힘을 주고 바들바들 떠는 도준의 눈에선 기어코 눈물이 흘렀다.

투명한 눈물 줄기는 도준의 높은 콧대를 넘지 못했다. 눈가에 조금씩 고여 드는 눈물이 점차 쌓이는 동안에도 도준은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꾸역꾸역 삼켜 냈다.

“싫다…….”

도준은 한참이나 숨을 고르고, 울음을 삼켜 낸 뒤에야 비로소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힘겨운 호흡을 거듭하고,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억지로 삼켜 막았던 도준이 호흡을 가라앉힌 후에 한 말은 고작 ‘싫다.’ 두 글자였다.

악몽에 시달리는 것도, 그날의 그 아픈 장면이 머릿속에 도사리는 것도. 남자의 굵직한 목소리와 빈정거리는 말들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도 벌써 몇 년이나 묵은 지긋지긋한 괴로움이었다. 도무지 나아질 생각이 없는 듯 지독하게 괴롭히는 그날, 그 시간의 잔상은 매일 밤 도준을 끝도 없는 아득한 어둠 속으로 몰아넣었다.

축 늘어진 몸을 겨우겨우 곧추세운 도준은 조금의 기운도 남지 않은 다리를 침대 아래로 툭 떨어뜨렸다. 발바닥에 닿는 딱딱한 바닥이 생경했다.

바닥이 원래 이렇게 차가웠던가.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하는 머리는 멍하기만 했다.

도준은 하얗게 질린 얼굴을 들어 찬찬히 제 방을 둘러봤다. 미세한 소음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양, 그 흔한 시계조차 들이지 않은 도준의 방은 조금의 햇빛도 허용할 수 없는 듯 커다란 창을 모조리 암막 커튼으로 가려 둔 채였다. 덕분에 방은 컴컴하기만 했다. 그 어떠한 빛도 새지 않는 방에서는 오로지 도준의 숨소리만 새액, 새액 울릴 뿐이었다.

방은 혼자 쓰기는 큰 방이었다. 하지만 그 컴컴한 방은 침대만 덩그러니 놓인 채, 침대 외에 다른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스탠드는 고사하고, 그 흔한 책상이나, 의자조차 들이지 않은 방은 휑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도준의 방에서는 도준의 간절한 바람이 읽히는 것 같았다. 정말 잠만 자겠다는 듯, 아니, 잠이라도 편하게 자게 해 달라는 듯한 단출한 방은 도준의 소원을 담고 있었다.

맥이 풀린 몸에 힘이 들어가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없는 몸을 가만히 내버려 뒀던 도준은 일정 시간이 흐른 후에야 천천히 무릎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켰다. 차가운 바닥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겨울의 향이 달갑지 않았지만, 애써 무시했다.

숨을 들이켜고 내쉴 때마다 폐부를 가득 채우는 차가운 공기마저 불편했다. 느직한 걸음으로 그 기운을 꾹꾹 눌러 죽이는 도준의 눈은 조금의 생기도 담아내지 못했다.

천천히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새하얀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온 도준은 눈을 크게 떴다. 언제 왔는지, 쥐도 새도 모르게 남의 집에 들어온 대표는 마치 제집처럼 편안하게 소파에 앉아 있었다. 대표는 지난밤 도준이 내려놓은 시나리오와 태블릿 PC를 번갈아 살피는 중이었다.

자박거리는 발걸음 소리를 들은 대표가 눈을 들어 도준의 안색을 살폈다. 늦은 시간까지 기척이 없기에 오늘도 여지없이 악몽을 꾼다고 판단한 대표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하룻밤 새 부쩍 수척해진 도준의 모습에 울대를 울렁거렸다.

“도준아, 괜찮아?”

“……오셨어요.”

메마른 가뭄에 땅이 갈라지듯 쩍 갈라지는 도준의 목소리가 안쓰럽다. 듣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수분이 모조리 날아가는 것 같은 버쩍한 목소리에 대표의 낯에 금세 걱정이 드리웠다.

도준은 대표를 향해 고개를 까딱거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느릿한 동작으로 아주 천천히 시선을 들던 도준의 눈에 대표의 손에 들린 ‘눈부신 항해’의 시나리오가 들어왔다.

“괜찮은 거 맞아?”

도준에게 닿는 대표의 시선에선 오롯한 걱정이 묻어났다. 성큼성큼 도준에게 다가간 대표는 주저하지 않고 도준의 이마에 손을 얹어 열을 살폈다. 새하얗게 질린 도준의 몰골에선 조금의 핏기도 보이지 않았다.

“음……. 오늘 되게 바쁜데 안 되겠다. 집에만 있어야겠어.”

대표의 표정과 말투가 차분해졌다. 느릿한 행동으로 물을 따라 마시던 도준은 의아한 낯빛을 보였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같이 사는 줄 알겠다. 아주 자연스럽게 ‘집’이라고 칭하는 대표를 보던 도준은 물 잔을 내려놓고 대표를 빤히 쳐다봤다.

“우리 집에요?”

“응, 내가 진짜 너무 바쁘지만, 여기 있어야겠어.”

“가셔도 돼요.”

“밥은 먹었어? 지금 일어났으니까 안 먹었겠지? 와서 앉아.”

대표는 대체로 도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자신의 말을 모두 무시하는 대표의 행동은 도준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도준의 단단한 어깨를 두어 번 토닥인 대표는 손에 힘을 주고 도준을 끌어 식탁 앞에 꾹 눌러 앉혔다. 저항할 의지도, 생각도 없는 도준이었기에 그가 하라는 대로 고분고분 의자에 앉아 분주하게 움직이는 대표를 가만히 지켜봤다.

대표가 냉장고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냉장고 곳곳에 자리한 맛없는 풀때기가 탐탁지 않았다. 대표는 언젠가 조금씩 담아 주었던 반찬이 조금도 줄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냉장고의 형편없는 사정은 도준의 식습관을 대변하고 있었다. 먹는 것을 즐기지 않고, 맛에 대한 흥미를 잃은 도준은 아무거나 가리지 않고 먹었지만, 그건 살기 위한 섭취에 지나지 않았다.

그를 떠올린 대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도준을 바라봤다.

“밥을 먹는 게 낫겠지?”

“대표님, 가셔도 괜찮아요. 제가 챙겨 먹을게요.”

대표는 도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냉장고를 열어서 이것저것 꺼내는가 싶더니, 인덕션에 프라이팬을 올려 열을 올리고, 다시 찬장을 뒤적거리며 소스들을 꺼내는 대표의 행동은 한 치의 망설임도 묻어나지 않았다.

“거짓말하지 마. 이거 내가 준 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대로잖아.”

저렇게 애써서 맛있게 만들어 봤자, 다 부질없는 건데.

도준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어떠한 감흥도, 흥미도 느껴지지 않는 도준의 모습에 대표는 제법 애정 어린 매서운 눈빛을 보였다. 그의 올곧은 두 눈에서는 ‘으이구’ 핀잔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거 맛없던데요.”

“맛은 무슨. 도준아, 전화 온다.”

휴대폰이 울리는 줄도 모르고 대표와 시선을 나누던 도준은 대표의 말에 휴대폰을 쥐었다. 검은 화면 위에 떠 오른 ‘임 감독님’ 네 글자가 가 웬일로 부담스러웠다.

임 감독이 할 말은 뻔했다. 드라마 섭외 전화일 것이 분명해 전화를 받는 것도 꺼려졌다. 그의 전화라면 항상 감사히 받던 도준이었으나, 오늘은 이유가 분명한 한숨이 절로 나왔다.

“네, 감독님.”

― 너 하기 싫다고 했다며, 왜?

“네?”

다짜고짜 본론부터 말하는 임 감독의 목소리는 제법 날이 선 채였다. 항상 부드럽게 도준을 어르고 달래던 목소리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도준도 놀란 듯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 눈부신 항해 말이야. 왜 하기 싫은 거냐고.

“아…….”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가 도준을 다그쳤다. 도통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한, 어딘가 조급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도준은 답답하게 얹히는 공기의 무게를 느꼈다.

쉽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도 거절을 할 수 있다면 웬만해서는 피하고 싶었기에 도준은 거절할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

― 퀴어라서 그래? 너 스토리 안 봤지. 이건 기존 것들이랑 달라.

“아뇨, 그건 아니고…….”

도준이 난감한 듯 미간 사이를 살살 긁어냈다. 한껏 좁혀진 미간의 주름을 손가락으로 헤아리다 까슬한 눈썹 부근을 어루만지는 도준의 손에서 불편한 기색이 여실히 드러났다.

― 그럼, 장희찬 때문에?

“…….”

도준의 도톰한 입술이 꽉 다물렸다.

지난밤, SNS의 반응을 살폈던 도준은 ‘눈부신 항해’에 출연할 경우 얻게 될 득과 실을 객관적으로 따졌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분명 좋은 기회라는 것이었다.

장르 자체가 쉽게 도전할 수 없는 장르였고, 특히 드라마가 흥하든, 망하든 간에 장르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 것은 배우로서 접하기 힘든 기회이기도 했다. 더불어 이름 있는 배우가 나서지 않는다면, 이 장르는 영영 꺼리는 장르로 남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도준은 이 기회가 자신이 ‘이도준’이기에 주어진 기회라는 것 역시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눈부신 항해’의 장르는 ‘하기 싫은 이유’에서 배제하기로 했다. 사람이라면 비단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누구보다 배우라는 직업에 열망이 있는 도준으로서는 이 좋은 기회를 마다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도준이 망설이는 이유는 수화기 너머로 감독이 건넨 그 이름 세 글자. ‘장희찬’이었다. 도준은 가빠 오는 숨을 어렵사리 가다듬었다.

― 장희찬. 걔 나온다고 그래서 그러냐고.

“장희찬이 한다고 했어요?”

― 기사 안 봤어? 희찬이는 오케이 했어. 야, 너희 죽고 못 살 정도로 친했잖아.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냥…….

웅얼웅얼 길게 이어지는 감독의 뒷말은 도준의 귀에 닿지도 않았다. 도준은 당혹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눈으로 대표를 바라봤다. 바쁘게 요리하는 틈틈이 도준과 감독의 통화 내용에 귀를 기울이던 대표가 잽싸게 제 휴대폰을 찾아들고 기사를 살폈다.

도준이 아랫입술을 잘근 씹어 물었다. 제작사 대표라면서, 배우가 확정된 소식도 듣지 못하고 온 걸까. 단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일을 제쳐 놓고 자신에게 달려온 대표에게 내심 미안함을 느꼈다.

<‘눈부신 항해’ 장희찬 출연 확정, 이도준은?>

<‘눈부신 항해’ 장희찬 확정, 이도준은 불발?>

잠시간 화면을 살피던 대표는 재촉하는 도준의 손길에 도준에게 휴대폰을 들어 보여 주었다. 화면에 피어오른 까만 글씨들을 훑어 내리는 검은 눈동자에 작은 지진이 일었다.

“감독님, 죄송한데…….”

거절하려 했다. 자신의 의지를 굳게 담아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대표가 부리나케 도준의 휴대폰을 앗아 들었다. 호탕한 목소리로 제 할 말을 조곤조곤 전하는 대표는 감독과 돈독한 의를 자랑하며 능숙하게 감독을 어르고 들었다.

“어, 임 감독아. 나 곽 대표야. 내가 도준이랑 얘기해 보고 다시 전화해 줄게. 도준이도 생각할 시간은 있어야지? 얘 어제 한국 들어와서 시나리오도 못 봤어.”

대표의 대처가 못마땅한 듯 손가락 끝으로 식탁을 톡톡 두드리길 반복하는 도준의 화려한 얼굴에 수심이 드리웠다. 확실하게 거절하지 않으면 쫓아올 곤란함은 오로지 도준의 몫일 터였다. 수년간 연예계 생활을 하며 겪어 온 이 환경은 그러했다.

장희찬은 오케이 했다고…….

마른 입술을 혓바닥으로 쓸어 적시는 도준의 행동은 복잡한 심경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 드라마를 굳이. 내가 할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하겠다는 것은 나더러 피하라는 걸까, 아니면 피하지 말고 부딪쳐 보자는 걸까. 이제는 때가 되었으니 나오라는 걸까, 아니면 알아서 도망치라는 걸까.

도준은 지긋지긋한 통증이 자리한 곳을 꾹꾹 눌러 댔다. 그럼에도 두통은 좀처럼 나아지질 않았다. 오히려 더 날카롭게 찌르고 드는 것 같아 도준은 결국 테이블 위에 항상 자리를 지키는 약 더미에서 두통약을 꺼내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어느새 식탁 위에는 대표가 먹음직스럽게 차려 낸 식사가 놓였다. 물도 없이 약을 먹는 도준에게 물을 건네고, 도준의 맞은편에 앉은 대표는 걱정 어린 시선으로 도준의 기분을 살폈다.

장희찬 한대 ㄷㅂ

장희찬 나오면 이도준 안나오겠네 까비 둘 와꾸합 오지는데

–––––––––––—

⤷ ㅋㅋ22 나오면 좋은데

⤷ 나올수도잇지ㅋㅋㅋ 궁금하다

–––––––––––—

퀴어면 키스신도 있는거임?? 내가 지금 존잘남 둘이 키스하는 걸 보기 직전인데 이도준이 안나와서 못본다는 거임???

⤷ ㄹㅇ 이도준 와꾸 대체불가 이도준 장희찬 키스해(짝)

⤷ 숨참는다 (대충 백골사체 짤)

도준은 휴대폰 화면에 뜨는 실시간 반응들을 살폈다. 그저 장희찬의 확정 기사가 났을 뿐인데 인터넷 전역이 떠들썩했다. 퀴어 드라마라는 장르가 확실히 흥미롭긴 한 모양이다.

그러길 몇 번이나 거듭하던 도준은 결국 숟가락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괜히 시야가 아찔해졌다. 컴컴한 그늘이 시야를 완전히 차단하려는 것을 느낀 도준은 부러 눈을 감았다가 뜨길 반복했다.

“어제 약 먹고 잤어?”

“네.”

“그래도 혼자 잘 일어났네.”

오후 2시가 지나서야 겨우 일어났는데, 대표는 ‘잘 일어났다.’는 말로 도준을 칭찬했다. 나긋나긋한 대표의 말에선 애정과 따스함이 묻어났다.

“도준아, 천천히 생각해 봐. 시나리오라도 좀 읽어 보고. 희찬이가 한다고 했다고 바로 안 한다고 그러지 말고, 응? 시나리오 보면 너 하고 싶을 거야.”

대표의 간절한 말이 도준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이 작품은 다른 사람에게는 주기 싫다는 듯 간곡한 대표의 말에 도준이 한발 물러섰다. 대표와 감독이 꾸준히 권유하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의 청을 시나리오조차 보지 않고 매정하게 거절할 정도로 못된 심보를 지니진 않았다.

“……대표님, 언제까지 확답드려야 해요?”

도준이 고심 끝에 어물쩍 말을 건네었다. 시나리오는 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눈부신 항해’에 대해 아주 정보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득과 실을 따질 때는 정확한 정보를 토대로 따지고 싶었다. 그렇게 열심히 검색했을 때 보이는 정보들은 가히 탐스러웠다.

퀴어 드라마 역사상 최대의 투자가 진행되었고, 역대급 라인업의 제작진이 구성되었으며, 매니저가 언급했던 대로 대기업의 광고 문의가 줄을 잇고 있다고.

그 소식들은 하나같이 시끌시끌하기만 했다. 그건 결국 흥행이 보증된 드라마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했다.

당연히 욕심이 안 날 리가 없다. 아무리 ‘배우 이도준’이 아닌, 캐릭터가 각광받길 바라는 도준이라지만, 모두가 탐낼 만한 드라마의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은 것은 배우라면 누구나 품은 욕망일 것이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만, 너는 조금 더 시간 들여도 괜찮아. 희찬이 기사 뜨고 기다렸다는 듯이 반응 보이는 것보다, 고심했다는 걸 보여 주는 게 그림이 더 나을 테니까.”

“…….”

“아무튼, 충분히 고민하고, 따져 본 다음에 답을 줘. 그때는 수용할게. 근데 이왕이면 긍정적인 답이면 좋겠어.”

도준은 가만히 대표의 말을 곱씹었다. 약발이 도는 건지, 지끈거리던 두통도 멎어 들었다. 몰려오는 편안함에 도준은 대표의 말에 대답하는 것은 미뤄 두고, 다시 숟가락을 쥐었다. 의미 없는 식사였지만, 음식을 섭취하는 것에 의의를 둔 도준은 감흥 없는 숟가락질을 거듭했다.

대표는 대답이 없는 도준을 지켜봤다. 반찬도 없이 밥을 밀어 넣고, 꼭꼭 씹어 삼키는 그 행위는 잔잔한 다큐멘터리 속 한 장면 같았다.

챙겨 주지 않으면 밥을 먹지 않는 도준이 평소에 먹는 것이라고는 고작 샐러드 또는 간단한 과일 주스 따위가 다였다. 덕분에 몸이 좋아지는 것은 배우로서 아주 좋은 효과였지만, 도준을 아들처럼 키워 온 아버지 된 마음으로는 조금 더 자신을 돌보면 좋겠다는 염려가 도사렸다.

입으로 곧장 직행하려는 도준의 숟가락을 대표의 젓가락이 저지했다. 여전히 흰 쌀밥만 밀어 넣는 도준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입 안이 심심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대표는 허공에 멈춘 도준의 숟가락 위로 새빨간 진미채를 얹어 주었다. 도준의 양 눈썹이 까딱거렸다.

“소용없는 거 아시면서.”

“그래도 맛있게 먹어.”

도준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입 안으로 숟가락을 욱여넣었다. 밥알만 씹을 때보다는 조금 더 쫄깃한 식감이 느껴졌다.

“저녁까지 해 놓고 갈까?”

“안 가신다면서요.”

“야, 이놈아. 너 밥 먹이러 왔어. 내가 진짜로 너 하나 때문에 일도 다 내팽개칠까 봐?”

“안 그러셔도 된다니까. 대표님 너무 주책이에요.”

“안 그러도록 알아서 잘하든지.”

핀잔 어린 대표의 목소리에 오랜만에 도준의 입에서도 웃음이 터졌다. 입술을 활짝 열고 큰 웃음을 피운 도준은 아주 근사한 미모를 자랑했다. 화려하고 날렵한 인상의 도준이 웃을 때는 해맑은 면모가 보였다. 그 낯은 마주한 사람마저 웃게 하는 재주가 있다.

대표가 그랬다. 잘생긴 도준의 낯이 휘어지며 환한 빛을 머금자 대표의 두 눈도 부드럽게 휘어졌다. 대표의 두 눈이 도준의 화려한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뜯어 살폈다. 이도준은 신이 특별히 공들여 빚은 것이 분명한 완벽한 얼굴형을 가졌다.

도준은 하얗고, 빨갛고, 까맸다. 툭 튀어나온 눈썹뼈에 가지런히 앉은 검은 눈썹, 그 아래로 옅은 쌍꺼풀이 자리한 큰 눈과 오른쪽 눈 아래에 있는 눈물점. 콧대부터 우뚝 솟아 얼굴의 중앙을 지키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잘생긴 코하며, 그 아래에 꾹 다물린 빨간 입술까지. 가히 완벽한 얼굴이었다. 잘생겼다는 말이 부족한 외모였지만, 잘생겼다는 말 외에는 달리 붙일 수식어가 없다. 이도준은 정말로 잘생겼다.

당연히 욕심을 낼 수밖에 없었다. 도준이 데뷔하기 전, 단역 배우 판에서 그를 눈여겨보던 대표는 갑작스레 잠적한 도준을 찾기 위해 오만 곳에다 수소문을 했었다. 도준의 스타성은 의심한바 없는 부분이었고, 수차례 현장을 방문하며 지켜본 도준의 연기 역시 훌륭했다. 그래서 더 간절히 찾아다녔다. 놓을 수가 없었다. 대표가 어렵게 발굴한 보석, 그게 바로 이도준이었다.

“자주 좀 웃어. 맨날 표정 굳히고 있으니까 여기저기서 너더러 싸가지 없다 그러지.”

그 잘난 배우들 사이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외모를 자랑하는 도준은 동료들과 그다지 깊은 관계를 맺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탑이라 불리는 위치에 올라 그 누구와도 깊이 있는 관계를 만들지 않는 도준을 두고 수군대는 몇몇 사람들은 대부분 ‘싸가지 없다’는 주관적인 언어로 도준을 매도했다.

단지 제 입맛대로, 입 안의 혀처럼 굴지 않는다는 이유로. 또는 신인 주제에 단번에 주연을 꿰찼다는 이유로. 아무튼, 갖가지 지질하기 짝이 없는 이유로 도준에게 붙은 꼬리표는 아직도 유효했다. 그를 그 누구보다 표면적으로 느끼는 도준은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이내 식사를 마친 도준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식탁 위를 치웠다. 반찬 뚜껑을 닫아 냉장고에 밀어 넣고, 빈 그릇을 싱크대로 옮겨 놓는 도준의 행동은 재빨랐다.

“싸가지 없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만지는 것도 싫어해, 술도 같이 안 마셔 줘, 선배든 감독이든 밥도 같이 안 먹고. 이 정도 생겨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저 진작에 일 끊겼을걸요.”

싱크대 앞에 서서 제법 요란하게 설거지를 하던 도준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렀다.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조곤조곤 제 말을 전하는 도준의 입가엔 낮고 잔잔한 미소와 체념이 함께 핀 채였다.

그에 대표가 인상을 험상궂게 굳혔다. 눈썹을 씰룩거리며 불편한 기분을 여실히 드러내는 대표의 낯에 도준의 입꼬리가 장난스레 휘었다.

“이도준.”

“네.”

대표는 못마땅한 심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무겁게 도준을 불렀다. 때마침 설거지를 마친 도준은 가볍게 대답하며 대표를 바라봤다. 대표의 눈에선 사뭇 단호함이 느껴졌다.

“자학하지 마. 그거 다 너 잘생겨서 질투하는 거야. 오죽하겠어? 지들이 봐도 특출났는데. 뭐, 다른 사람 오징어 만들면서 살다가 지가 오징어 돼 보니까 못 견디겠나 보지. 그리고 네가 연기는 좀 잘하냐? 도무지 깔 게 있어야 말이지.”

남들은 도준을 두고 ‘얼굴값 한다’고 가볍게 얘기할지 모르겠으나, 실상은 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낼 수 없는 사정이 있는 도준이었기에, 도준이라도 스스로를 그런 식으로 값 낮춰 생각하지 않길 바랐다.

처음엔 나무라는 듯했던 대표의 잔소리가 장난으로 마무리되었다. 끝내 쓴소리는 못 하는 것인지, 결국엔 부드럽게 마무리되는 말이었지만 도준은 가슴 깊이 그 말을 새기고 또 새겼다.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잘생겼다.’라는 칭찬을 듣는 것에는 이골이 났다. 대표의 말마따나 ‘잘생겼다’는 이유로 타인을 시기 질투하는 사람들의 마음 역시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너 얼굴만 보고 그렇게 찾아다녔을 거 같아?”

“아, 잔소리가 너무 길어요, 대표님.”

“괘씸하잖아. 너는 재능충이라고.”

“그런 말도 쓰세요?”

현관에서 허리를 숙인 채로 신을 신다 말고 고개를 들어 한마디씩 툭툭 던지는 목소리에 심통이 가득하다. 오래간 신을 신던 대표의 손이 멈추고 “읏차.” 하고 허리가 들렸을 때 대표는 미처 하지 못한 잔소리를 마저 늘어놓았다.

“간다. 맛없어도 밥 챙겨 먹고. 무슨 일 있으면 곧장 전화하고.”

“네, 걱정하지 마세요.”

“시나리오는 꼭 읽어 보고. 알겠지? 어?”

갈 것처럼 발을 돌렸던 대표가 다시 몸을 훽 돌리고 자꾸만 말을 얹었다. 처음엔 쏟아지는 잔소리에 장난스레 대꾸하던 도준도 그 양이 많아지는 것을 느낀 후에는 눈썹을 긁적거렸다.

“대표님 지금 가신다고 현관에 계신 지 30분 지났어요.”

도준은 대표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대표의 등을 떠밀었다. 이제는 그만하라는 뜻이 확실하게 느껴지는 도준의 힘에 대표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랬어? 가야겠다. 나이 먹으니까 말이 많아져.”

“오늘 시나리오 읽어 보고 최대한 빨리 연락드릴게요.”

현관문 고리를 잡은 도준의 손은 단단했다. 대표가 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대표의 등을 떠밀고 곧장 문을 닫으려는 도준의 모습에 대표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일어난 직후에 보였던 모습과는 달리 상당히 개운해진 도준의 모습에 대표의 마음도 한껏 가벼워졌다.

도준의 연락이 닿지 않을 때면 어쩔 수 없이 불안해지는 마음인지라, 조금이라도 연락이 지연된다 싶으면 부리나케 달려오는 것도 이제는 일상이 되었다. 저 잘생긴 얼굴로 아픔도 겪지 않았다면 더없이 좋았을 텐데, 금세 씁쓸함을 느낀 대표는 도준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늦게 일어났다고 해서 도준의 하루가 짧은 것은 아니었다. 도준은 주어진 시간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거주하는 고급 빌라 단지 내에 있는 휘트니스 센터에서 운동을 마치고, 대표가 집에서 벗어나는 내내 신신당부하고 간 저녁도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혹시나 확인하려 들 대표를 위해 사진을 찍어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빠듯한 하루를 알차게 지내다 보니 창밖엔 금세 어스름이 내렸다. 거실을 훤히 밝히던 태양 빛이 가시자 집 안에도 어둠이 자리했다. 휘영청 밝은 달빛이 창가에 머물며 화려한 빛을 냈지만, 그 빛을 조명 삼아 시나리오를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소파에 죽은 듯 늘어져 있던 도준이 몸을 일으켜 탁자 위에 놓인 리모컨을 조작해 거실을 환히 밝혔다.

시나리오에는 손이 가질 않았다. 분명 읽어 보려 불을 켰건만, 도준은 눈에 밟히는 시나리오를 무시하고, 대신 전기 포트에 물을 끓였다. 자고로 심신을 안정시키는 데에 따뜻한 차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을 테다.

전기 포트가 보골보골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물을 끓이는 동안 도준은 약 더미 속에 숨은 영양제를 꺼냈다. 그마저도 대표가 사다 놓은 것이었다. 도준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영양제를 뜯어 입에다 문 채로 차를 내렸다.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차가 든 찻잔을 들고 다시 소파로 향했다. 유리 탁자와 유리컵이 부딪치자 날카로운 마찰음이 거실을 울렸다. 도준은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댄 후 다리를 꼬아 테이블 위로 쭉 뻗어 몸을 늘였다.

발치에 걸리는 시나리오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애써 시야 밖으로 시나리오를 밀어낸 도준은 목을 젖혀 영양제를 입 안으로 밀어 넣고 등받이에 목을 기댄 채로 생각을 가다듬었다. 턱관절에 힘을 주고 움직일 때마다 아래위로 오르내리는 울대는 퍽 감탄스러웠다.

도준은 한참이나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 그건 도준이 무언가를 고민할 때 저도 모르게 하는 오랜 버릇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그렇게 도준은 제법 오랜 시간을 허비했다.

“아, 봐야지.”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하기 싫은 것을 마주할 때 늑장을 부리는 것은 어느 사람이나 다 같을 것이다. 도준은 허리를 튕겨 윗몸을 곧추세우고 테이블 저 끝으로 밀려난 대본을 손에 쥐었다.

<눈부신 항해>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제의 시나리오를 손에 쥐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모른다. 도준은 누리끼리하고 두툼한 겉표지를 한참이나 가만히 바라봤다.

시나리오 표지를 가득 메운 커다란 표제 아래에 익숙한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 ‘임지훈’ 그 세 글자는 집요했던 임 감독의 섭외 전화를 단박에 이해시켰다.

“아, 시나리오를 감독님이 쓰신 거였구나.”

그 이름은 퀴어 드라마임에도 역대급 제작진을 자랑하고, 빗발치는 광고 문의를 이해하기에도 충분했다.

“임 감독님 이름 때문이었구나…….”

조용히 읊조리는 도준의 목소리에 한숨이 섞여 들었다. 잔잔한 백색 소음 사이사이를 비집고 드는 도준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큰 숨을 공기 중으로 흩뿌린 도준은 드디어 첫 장을 넘겼다. 엄지손가락으로 표제의 끄트머리를 천천히 넘기는 도준은 알 수 없는 긴장을 느꼈다.

도대체 어떤 스토리이기에, 맡아야 할 역할이 어떤 캐릭터이기에 그렇게들 ‘너 아니면 안 된다.’ 하고 입을 모아 말하는 걸까.

시나리오를 읽으면 읽을수록 페이지를 넘기는 도준의 손이 느릿해졌다. 문장을 마주할 때마다, 상황을 떠올릴 때마다 아득해지는 정신은 머릿속에 혼란을 남겼다. 도준은 아랫입술을 세게 짓이겨 물고 파르르 떨리는 숨을 간신히 뱉어 냈다.

“아…….”

같은 보육원에서 자란 두 소년이 배우의 꿈을 갖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찬란했다. 꿈을 좇을 수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오로지 꿈만 좇아 별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그려 낸 시나리오는 사뭇 아름답기까지 했다.

그렇게 예쁘고 따뜻한 시나리오에서 도준은 불현듯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 처음 접한 시나리오인데 내용을 모조리 읊을 수만 있을 것 같았다. 앞으로의 전개도 마치 제가 그려 낸 시나리오처럼 머릿속에 선명히 자리했다.

그래, 이 시나리오는 자신의 이야기 같았다. 도준의 어린 시절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입을 모아 ‘네 역할’이라고 말할 정도로 지독하게 이도준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도준은 가쁜 호흡을 다스리지 못했다. 조금씩 쌓이는 숨이 가슴을 짓누르고, 지겨운 두통이 머리를 감쌌다. 결국 도준이 두 눈을 질끈 감고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등장인물의 이름만 달랐을 뿐, 등장인물이 그려내는 이야기는 모두 도준이 갈망하던 꿈이었다. 캐릭터의 배경부터 성격까지 모든 것이 누군가 도준의 어린 시절을 써 그려 놓은 듯한 시나리오였다. 도준은 팔을 들어 두 눈을 가렸다. 도준의 꽉 닫힌 눈가엔 어느새 투명한 눈물이 차올라 기다란 속눈썹을 적셨다.

“하…….”

시나리오를 곱씹는 도준의 입에서 힘겨운 숨이 터졌다. 다른 사람이 보면 흔한 이야기라 쉽게 말할 수 있는 소재인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드문드문 새겨진 사소한 디테일이 완벽하게 도준의 것이었다. 희찬이 맡을 상대역 역시 그랬다. 그 캐릭터의 모든 것이 희찬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그래서 희찬이가 한다고 한 걸까.

도준은 복잡한 머릿속을 애써 갈무리하며 생각을 가다듬으려 노력했다.

아주 어린 시절 보육원에서 만난 두 아이가 열아홉 살에 보육원에서 나와 군대부터 다녀왔다는 것도, 수중에 쥔 돈이 얼마 되지 않아 가파른 언덕 위 다 무너져 가는 집에서 어렵게 생활한다는 것도.

시나리오 속 두 사람이 함께 휴대폰을 쓴다는 설정도, 희찬이 맡은 역이 먼저 대형 기획사와 계약 후 승승장구한다는 것도. 앞으로의 내용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이야기는 도준과 희찬의 과거 그대로였다.

도준은 저릿한 손끝을 다스리려 주먹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그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가쁜 숨을 진정시키려는 노력이었고,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의 아픔을 무시하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이게, 아……. 이게, 진짜…….”

세상에 이런 얘기가 또 있을까.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딱 들어맞는 이야기가 또 있을 수 있을까.

이 이야기는 등장인물의 이름만 다를 뿐이지, 지독하게 우리의 이야기였다.

이도준과 장희찬. 어렵고 힘든 와중에도 꿈을 이루겠다는 의지 하나로 먹고살았던 패기 넘치던 시절, 그 과거를 완벽하게 그려 낸 두 사람의 이야기였다.

도준이 손에 들었던 시나리오를 저 멀리 내던지자 날카로운 마찰음이 집 안에 울려 퍼졌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도준은 뜨거운 숨을 뱉으며 가슴을 두드렸다. 가쁜 숨이 입 밖으로 나올 때마다 공기의 무게를 더하는 듯했다. 도준은 몸을 잔뜩 움츠렸다가 펴길 반복하며 떨리는 숨을 차분히 내쉬었다.

가까스로 숨을 가다듬은 도준이 큰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시나리오 속 이야기대로만 이어졌다면, 나도 이 지경이 되진 않았을 텐데. 후회와 아쉬움이 범벅된 머릿속에서는 과거의 상황들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혼자 다스려 보려 했는데, 그럴 수 없었다. 참아 보려 했으나 그 역시 쉽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손발은 도준의 위태로운 상태를 단적으로 증명해 보였다. 이대로 곧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도준은 곧장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 도준아.

“대표님, 저…… 좀 와 주세요.”

― 지금 갈게.

약을 먹으면 괜찮아질까. 하지만 약을 가지러 가는 것조차 어려웠다. 무릎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키려 해도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 몸은 제 것이 아닌 듯했다.

움직이기를 포기한 도준은 잔뜩 웅크린 채로 시나리오를 곱씹었다.

그래도 시나리오가 아주 같지는 않았다. 두 주인공이 겪는 시련이란 게 ‘조금 더 잘되는 상대를 향한 질투’라는 것이 달랐다.

그래, 그들이 겪는 갈등은 누군가 더 잘되는 것에 대한 질투, 고작 그런 거였다. 고작……. 고작 그런 거였다. 우리의 갈등도 겨우 그런 갈등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도준은 어느새 새까만 머릿속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그 옛날의 아득한 잔상을 마주했다.

묵직한 남성의 목소리가 도준의 귓가에 울렸다. 악몽을 꿀 때면 항상 들리는 그 목소리는 이번에도 도준의 숨통을 죄었다.

이전과 같이 호흡이 어려워진 도준은 짓눌리는 가슴 위에 손을 펴 얹은 채로 자신의 가슴을 토닥토닥 달래며 유한 호흡을 유도했다.

도준은 희찬이의 성공을 질투한 적 없다. 오히려 그가 잘되길 간절히 바라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서 더욱 찬란하게 빛날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다.

문제는 그 마음이 발단이었다는 거다.

물기가 마른 듯했던 도준의 눈가에 다시 물기가 서렸다. 둥글게 뭉치다 이내 새하얀 피부를 따라 흐르는 눈물 줄기가 도준의 뺨 위에 길을 냈다.

[도준아, 우리 꼭 저기에 같이 광고 걸자.]

[응.]

[저기에 너랑 나, 나란히 꼭.]

[좋아.]

[되게 근사할 거야, 그치? 근데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어. 너는 다 할 수 있어.]

앳된 두 청년의 목소리가 도준의 귓가에 맴돌았다. 힘든 시절을 보내는 중에도 꿈을 쥔 채로 놓지 않았던 그 시간은 어느 때보다 힘들었고, 또 어느 때보다 행복했다. 장희찬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도준은 그랬다.

찌는 여름엔 몸이 녹을 것처럼 덥고, 살을 에는 겨울엔 온몸에 동상이 걸릴 것처럼 추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행복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 주머니 사정은 매번 넘을 수 없는 현실의 벽을 일깨웠으나, 그럼에도 우리는 함께여서 든든했다. 20대 초반, 파릇파릇한 그때에 우리는 ‘함께 꿈을 꾼다’는 사실 하나로 같이 웃고, 울었다.

아련한 과거를 떠올린 도준의 입꼬리가 멋들어지게 치솟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종잇장 구겨지듯 표정을 일그러뜨린 도준은 두 손바닥 위에 얼굴을 묻은 채로 서러운 울음을 터뜨렸다.

나도 시나리오 속 등장인물처럼 그저 시샘하고 부러워하기만 했다면, 지금처럼 끔찍한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을까. 매일 밤 편하게 자고, 즐거운 꿈을 꾸며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까.

후회와 아쉬움은 곧 등장인물을 향한 부러움으로 변질하였다.

현관 도어락이 몇 번이고 요란한 경고음을 냈다. 바깥에 선 사람은 잘못된 비밀번호를 거듭 입력하는 듯했다. 그건 상대가 얼마나 조급한지 단적으로 알려 주는 것 같았다.

이내 문이 열리고, 신을 벗는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도준은 그제야 꽉 막혔던 숨구멍이 트이는 것을 느꼈다. 뱉어 내지 못해 단단하게 뭉친 숨이 폭죽 터지듯 크게 터져 나왔다.

“도준아, 도준아!”

“아, 어흑…….”

“숨, 숨 쉬어야 해. 숨 쉬어, 도준아.”

도준의 전화를 받고 허겁지겁 달려온 대표는 평소보다 훨씬 숨 가쁘게 흐느끼는 도준을 품에 들였다. 그리고 큼직한 손으로 도준의 너른 등을 두드리며 정성껏 그의 호흡을 도왔다. 파르르 떨리는 도준의 몸이 안쓰럽다. 탄탄대로만 걸어도 모자랐을 시간에 남들은 쉽게 겪지 않을 아픔까지 이고 진 도준의 과거가 그렇게 애달프다.

대표는 비로소 후회를 머금었다.

못 하게 할걸. 아예 덮어 두고 모르는 척할걸. 이딴 시나리오 보지도 못하게 할걸.

이미 다 늦은 후회였지만, 그럼에도 대표는 후회를 곱씹었다. 시나리오를 마주했을 때 놀란 것은 대표도 마찬가지였다. 도준에게서 어렴풋이 전해 들었던 과거의 일과 아주 흡사한 시나리오는 분명 도준에게 잘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하여 다른 배우는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당연히 오롯한 행복만 그리는 이야기가 도준에게 아픔으로 닿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다.

혹시나 시나리오를 보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 실수였다. 도준의 등을 다독이는 대표의 손에 조금 더 힘이 실렸다. 묵직하게 닿았다 떨어지는 손길을 따라 호흡을 가다듬은 도준은 원망 섞인 눈을 들어 대표를 바라봤다.

“어떻게, 나한테 이런 걸 보게 해요…….”

“미안, 미안해. 미안하다, 도준아.”

물기를 머금은 도준의 목소리가 세찬 바람에 흔들리는 새싹처럼 떨렸다. 대표의 단단한 팔을 억세게 거머쥔 도준은 떨리는 몸을 주체하려 온몸에 힘을 주고 악에 받친 목소리를 냈다.

“하지 말자. 이 정도는 괜찮을 줄 알았어. 못 하겠다고 할게, 내가 잘못 생각했어. 미안.”

“아, 아으흑……. 아…….”

도준은 전신을 둥글게 웅크린 채로 서러운 울음을 토해 냈다. 두 손으로 귀를 막아 쥐고, 무릎을 접어 올린 도준은 이마를 무릎에 대고 멈출 수 없는 눈물을 쏟아 냈다.

대표의 진심 어린 사과는 도준에게 닿지 않았다. 그저 아까부터 수많은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리는 것이 괴로울 뿐이었다. 도준은 갑갑한 가슴을 쥐어뜯으려는 양 옷깃을 거머쥐고 손에 힘을 바짝 주었다. 억눌린 숨을 겨우겨우 쉬어 내는가 하면, 켜켜이 쌓인 서글픔을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 말자…….”

도준은 그렇게 힘겹게 과거를 견뎌 냈다. 아니 견뎌 내고자 무던히도 애를 썼다. ‘하지 말자.’라는 말로 도준을 달래려는 대표 역시 상당히 노력 중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도준의 머릿속에선 갈등이 일었다.

분명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운 과거였다. 그에는 이견이 없다. 매일 밤 악몽을 꾸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조차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린 지긋지긋한 아픔인 것도 분명했다.

하지만 이 마음은 또 다른 변덕을 안겼다. 같은 꿈을 꾸고, 함께 이겨 냈던 시간을 다른 사람과 그리는 장희찬을 보고 싶지 않다. ‘우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리를 떠올릴 그 소재로 다른 사람과 연기하는 희찬이를 마주하고 싶지 않다.

도준은 하도 깨물어 이미 부어 버린 아랫입술을 다시 한번 잘근 씹어 물었다. 물컹한 살덩이가 짓이겨지며 뭉근한 고통을 안겼지만, 그런 건 지금 겪는 혼란스러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도준은 한참을 운 뒤에야 숨이 조금이나마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억세게 주먹을 쥐고 있었던 탓에 새하얗게 질린 손바닥에는 네 개의 초승달 자국이 새겨졌다. 한껏 열이 오른 얼굴이 화끈거렸다. 도준은 두 손을 펴고 제 얼굴 위에 얹어 그 열을 꾹꾹 눌러 진정시켰다.

“희찬이는 너를 피하지 않는데, 유독 네가 희찬이를 피하는 것 같아서 그랬어.”

“후으…….”

“혹시라도 용기가 나질 않아서 그러는 걸까 싶어서……. 뭔가 두 사람 사이에 매개체를 만들어 주면 그거라도 핑계 삼아 희찬이한테 가라고.”

도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꽉 막힌 목구멍에선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저 대표의 진심 어린 사과를 들으며 뜨거운 숨을 뱉을 뿐이었다.

도준이 진정된 것을 확인한 대표는 따뜻한 차와 차가운 물, 그리고 도준이 먹어야만 잠을 잘 수 있는 약을 도준에게 건네었다. 도준은 의연하게 약을 입 안으로 밀어 넣고 주저 없이 찬물을 들이켰다. 그리고 아마도 대표의 마음이 가득 담겼을 따뜻한 차를 두 손으로 거머쥐었다.

찻잔이 머금은 따뜻한 온도가 도준의 손을 녹였다. 핏기가 가셨던 손에 혈색이 돌았다. 손부터 천천히 몸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낀 도준은 또 한 번 깊은 한숨을 내뿜었다.

대표는 대답이 늦어지는 도준을 재촉하지 않았다. 말수가 적은 도준이었지만, 하고자 하는 말은 꼭 하는 그였기에 기다리는 대답도 곧 들려줄 것이라 생각했다.

“……대표님 탓 아니에요.”

무거운 적막을 그보다 더 무거운 도준의 목소리가 깨트렸다. 아주 느릿하고 작은 목소리였지만, 적어도 대표에게는 천둥과 같은 큰 소리로 닿았다.

도준은 변덕이 이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단지 시나리오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큰 여파를 느낀다면 하지 않는 것이 좋겠지만…….

괜한 욕심이 마음을 들쑤시는 통에 도준은 입술을 꾹 물어 만 채로 가만히 시간을 헤아렸다.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결론에 다다를 즈음, 대표의 따스한 눈길이 도준에게 닿았다.

“네가 말한 ‘그때’는 아직인 거지?”

“아직…….”

아득한 과거의 어느 날, 쪽지 한 통 남겨 두고 희찬에게서 도망쳐야만 했던 그 아픈 날. 주먹을 말아 쥐고, 입술을 악물어도,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을 수는 없었던 그날. 도망치듯 희찬을 떠난 그날 정했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래.”

이제껏 도준이 희찬을 마주할 기회는 무수히도 많았다. 그럼에도 도준이 전력을 다해 그를 피한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대표는 그를 잘 안다는 듯 그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전적으로 도준을 존중하고, 그의 의사를 듣고자 하는 대표는 착잡한 표정으로 입술을 적셨다.

도준의 시선도 덩달아 차분해졌다.

“그래도, 해 볼게요.”

“하겠다고?”

대표의 눈이 크게 뜨였다. 확신의 거절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떨떠름한 승낙이 돌아온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되묻는 대표의 말에 도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음을 다스리고, 생각을 정리해 다다른 결론은 ‘해 보자.’였다.

“희찬이가 다른 사람이랑 하는 건…… 못 볼 거 같아요.”

“…….”

일전에 자신이 정했던 ‘그때’는 오지 않았지만, 역시 장희찬이 다른 사람과 ‘눈부신 항해’를 그려 내는 것은 볼 수 없다.

도준은 말로는 희찬을 피한다고 해 왔지만, 희찬의 모든 작품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챙겨 봤다. 그가 출연한 것이라면 영화고, 드라마고 빠짐없이 개봉 일을 챙기고, 본방송 시간을 사수했다. 장희찬이 표지로 나온 잡지는 꼭 사들였고, 그의 인터뷰 역시 한 자, 한 자를 아까워하며 눈으로 새기고, 마음에 담았다. 그렇게 7년이라는 긴 시간을 멀리서 응원하는 마음으로 희찬을 봐 온 도준이었기에 ‘포기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건, 내가 해야 한다.

결론을 내린 도준은 이전의 불안한 모습은 모두 지워 내고 할 수 있다는 의지를 담아 보였다.

“한다고 해 주세요, 하겠다고.”

“잘 생각했어, 도준아. 임 감독도 나만큼 너 잘 아니까, 촬영하면서 어려운 일은 없을 거야. 그리고 너 촬영할 때는 나도 무조건 같이 갈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안 그러셔도 괜찮아요.”

도준은 비로소 가벼운 목소리를 냈다. 약의 영향인진 몰라도, 복잡했던 마음이 놀랍도록 차분해졌다. 신기하리만치 개운해진 머리는 그제야 제 기능을 했다. 도준은 힘이 다 빠진 목소리를 냈지만, 그의 표정은 한껏 홀가분했다.

제목부터 마음에 들지 않아 피하려 했으나, 피하지 못했다. 결국에 마주한 시나리오는 마치 저를 희찬에게로 이끄는 것 같았다. 이제는 부딪쳐 보라는 것처럼, ‘때’가 되었다는 것처럼 말이다.

도준은 울대가 일렁거릴 정도로 침을 크게 삼켰다.

이렇게까지 우릴 만나게 하려는 운명이라면, 이 또한 받아들이는 게 맞는 거겠지.

그렇지, 희찬아.

차마 제 심중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어 조용히 말을 새긴 도준은 느릿하게 눈꺼풀을 내려 시야를 닫았다.

*

도준의 출연이 확정되기 무섭게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조연 배우 캐스팅은 진작 끝난 듯 금세 배우 간 상견례 날짜가 잡혔다. 문자로 통보받은 장소와 시간을 확인한 도준은 가뿐한 숨을 공기 중으로 흩뿌렸다.

이제는 정말 장희찬을 마주해야만 하는 때가 왔다.

차라리 하겠다고 마음을 정하니 속이 편해졌다. 며칠 밤을 내리 괴롭히던 악몽도 웬일로 잠잠해졌고, 덕분에 도준은 최근 들어 전에 없이 활발하게 생활하는 중이다. 심중이 편안해지니 자연스레 표정도 밝아져, 활기가 다 돌았다.

도준은 상견례를 위해 아침 일찍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여러 벌의 옷을 매치해 스타일을 정하고, 그에 어울리게 머리를 매만졌다. 고작 상견례일 뿐인데 과하게 꾸미는 것은 해가 될 수 있으니 적당히 꾸미기로 한 도준의 손길은 제법 신중했다.

“형, 지금 나가시면 시간 맞춰 갈 수 있어요.”

“응, 가자.”

도준은 상견례 시간에 맞춰 데리러 온 매니저의 말에 옷방 문을 닫고 나섰다. 멀끔하게 차려입은 도준에게선 평소보다 짙은 분위기가 풍겼다. 눈썹까지 가지런히 내려오는 앞머리를 예쁘게 만지고, 제게 잘 어울리는 스타일로 간편하게 갖춰 입은 도준은 가뿐한 걸음을 옮겼다.

역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다. 그건 이도준을 두고 하는 말이 분명했다. 도준의 빼어난 이목구비를 찬찬히 살피던 매니저는 연신 감탄을 터뜨렸다.

도준은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발을 까딱거리며 땅을 바라봤다. 오랜만에 다시 일을 시작한다는 설렘과 그보다 더 오랜만에 희찬을 마주한다는 것에 대한 긴장이 동시에 밀려왔다.

“기사 뜬 건 보셨어요?”

“아니. 왜, 반응이 별로야?”

“에이, 무슨요. 완전 난리 났어요.”

“그럼 됐지.”

도준은 자신에 관한 기사를 구태여 찾아보는 편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반응을 크게 신경 쓰지도 않았고, 당연히 반응을 일일이 살피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기자들의 구설에 오르내리는 것 자체를 반기지 않았다.

도준은 지하 주차장에서 차에 올라, 매니저의 말을 들은 후에야 포털을 살폈다. 기사를 훑는 도준의 눈은 심드렁하기 짝이 없었으나, 조금의 궁금증이 담겨 있었다. 장르도 장르인 데다, 장희찬 옆에 붙은 제 이름은 어떤 빛을 낼까, 그런 게 궁금한 탓이었다.

<‘눈부신 항해’ 이도준 출연 확정>

<‘눈부신 항해’ 이도준X장희찬 섭외 성공 축배>

무미건조한 기사 제목은 볼 것도 없었다. 제작사 또는 소속사에서 뿌린 보도 자료를 제목만 바꿔 각양각색의 이야기를 담은 척하는 기사는 보지 않아도 빤했다.

도준은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로 흥미 없이 스크롤을 내렸다. 그런 도준의 손가락이 멈춘 곳은 전과 같이 실시간 SNS 반응이 보이는 창이었다.

이도준 장희찬 붙으면 명동에서 옷 벗고 붐바댄스 춘다고 했던 놈 나와

––––––––––—

눈부항 안봤지만 벌써 내 인생드라마임 당연함 이도준 장희찬 나옴

나 때는 말이야 대한민국에 눈부항이라는 퀴어 드라마가 있었어.. 할머니! 그만 얘기하세요! 벌써 8857283958번째 말씀하고 계시다고요! (대충 기영이 할머니 짤)

⤷ ㅋㅋㅋㅋㅋㅋㅋㅋㄱㅇㄱㅋㅋㅋㅋㅋ

⤷ 그런데 이제 킹도준 짱희찬을 곁들인ㅋㅋㅋ

매니저의 말대로 반응이 나쁘진 않아 보였다. 나쁜 뉘앙스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도준은 스르르 눈을 감고, 차 한편에 항상 자리하고 있는 안대를 집어 썼다.

도준은 어깨를 쭉 펴고 몸을 쭉 늘인 후 숨을 고루 내쉬었다. 이동하는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차에서는 꼭 잠을 청하는 것은 도준의 케케묵은 버릇이었다.

사부작사부작 잘 준비를 하는 도준을 룸미러를 통해 힐끔 쳐다봤던 매니저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를 냈다.

“형, 다 왔어요. 잘 준비 안 하셔도 돼요.”

“아, 가깝네.”

도준은 멋쩍은 듯 귀 뒷부분을 긁적거리며 안대와 가림막을 걷어 낸 도준이 흥미로운 눈으로 창밖을 살폈다. 드문드문 승합차가 보이는 것이, 벌써 도착한 연기자들도 제법 되는 모양이다.

도준은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큰 숨을 들이켰다가 훅, 무겁게 뱉어 냈다. 그에 도준의 탄탄한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도준은 그러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저 차에서 내리면 되는 것을 망설이는 도준의 발은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형, 어디 안 좋아요?”

주저하는 도준에게 걱정 어린 매니저의 목소리가 닿았다. 그럼에도 도준은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미 상견례 시간이 촉박하게 다가오고 있는데, 도무지 발을 내디딜 수가 없다. 희찬을 만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실감한 도준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로 떨리는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누군가 도준의 차 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그에 화들짝 놀란 도준이 창밖에 보이는 얼굴을 확인했다. 임 감독이었다. 그가 차창에 얼굴을 밀착한 채로 차 문을 쾅쾅 내리치는 모습은 지독하게 익숙한 광경이었다.

“이거 누구야, 이도준 아니야? 야, 도준아. 문 열어 봐.”

도준은 문이 열리기 무섭게 반색을 보이는 감독에게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런 도준의 머리 위에 감독의 두툼한 손이 얹혔다.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 남자의 손은 애써 예쁘게 만져 놓은 도준의 머리를 한껏 흩트렸다.

도준은 감독의 손이 떠날 때까지 고분고분 머리를 내어 줬다. 어깨를 잔뜩 움츠렸지만, 그 행동 어디에서도 불편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이나 도준의 머리를 휘젓던 감독의 손이 도준의 너른 등을 토닥였다. 그에 도준도 반가운 기색을 보이며 화려한 낯을 휘어뜨렸다.

“이도준이, 얼굴 보기 힘들어?”

“하하, 잘 지내셨죠?”

“못 지냈어. 결국 할 거면서 왜 사람을 쫄리게 해? 내가 너 시나리오 보면 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했지?”

“죄송해요. 근데 정말 놀랐어요.”

감독은 친근하게 도준의 손을 잡아끌었다. 감독이 당기는 힘에 차 밖으로 나온 도준은 따가운 햇살에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맑은 미소를 피운 채로 감독과 발을 맞춰 걷는 도준이 건물 입구를 지나 서늘한 건물 복도에 닿았다. 여기저기서 스태프로 보이는 사람들이 감독에게 예의 바른 인사를 건네었고, 그에 도준도 함께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눴다.

“오늘 좀 잘생겼는데? 잘 잤나 봐?”

“아, 네. 뭐…… 그냥.”

대표의 말대로 감독은 도준의 상황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깊숙한 내막은 제대로 알지 못하는 듯했으나, 잠을 편하게 자지 못한다거나,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잘 아는 듯한 감독의 목소리에 도준은 희미한 웃음을 띠었다.

“야, 근데 도준아. 너 희찬이 얼마 만에 보는 거야? 왜 그렇게 됐어, 너희?”

“아…….”

“앙숙이 뭐야, 앙숙이.”

도준은 오늘따라 유독 집요하게 말을 붙이는 감독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앙숙. 그 두 글자가 왜 이렇게 어색하게 닿는지 모르겠다.

앙숙, 앙숙……. 사람들은 나와 장희찬을 두고 그렇게 말하던가.

도준의 꾹 다물린 입가에 씁쓸함이 맺혔다. 도준은 쉬지 않고 중얼거리는 감독에게 대꾸하는 대신 깊은숨을 뱉어 냈다. 그 숨에는 긴장과 두려움, 그리고 반가움과 설렘이 함께였다.

배우들이 모여 있을 장소에 가까워질수록 서늘한 공기가 도준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심하게 의식한 탓에 목 뒤에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도준은 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걸음을 옮기면서도 쿵쾅거리는 심장을 숨기지 못했다. 긴장한 탓에 바짝바짝 마르는 입술을 적시길 반복하던 도준은 이내 다다른 대회의실 앞에서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자자, 이도준 배우 왔습니다.”

감독과 함께 들어서는 도준에게로 이목이 집중되었다. 요란하게 자신을 소개하는 감독 덕분에 멋쩍음을 느꼈던 도준은 이내 예의 그 사람 대하는 표정으로 적당히 부드럽게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도준아, 왔어?”

“안녕하세요, 선배님.”

복잡하게 다가오는 인사에 가볍게 대꾸하는 도준은 입구에서부터 ‘이도준’ 제 이름이 적힌 자리까지 이동하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을 소요했다.

감독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자리에 도착한 도준은 가볍게 숨을 털어 내고서 자리에 앉아 머리를 털었다. 그러다 눈이 멎은 곳에는 ‘장희찬’ 세 글자가 정갈하게 쓰여 있었다.

도준이 눈을 번뜩 뜨고 이름 앞에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건지, 시선을 들기 무섭게 희찬과 시선이 마주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그의 옅은 눈동자에 별안간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장희찬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건 도준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소란스러운 공간에서 조용히 시선을 나눴다.

희찬의 엷은 눈동자를 올곧게 쳐다보던 도준의 검은 눈동자가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와 마주한 건 아주 잠깐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도준에겐 억겁과 같은 시간이었다. 도준은 침을 꼴깍 삼키며 요란하게 동요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감독님, 시작 전에 시간 있으면 저 잠시 담배 좀 피우고 와도 될까요?”

“어, 그래. 다녀와.”

희찬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졌다. 그래서 도준이 선택한 것은 도망이었다. 어차피 마주해야 할 사람인데 뭘 그렇게 도망가느냐 물어도 할 말은 없다. 도준은 감독의 승낙이 떨어지기 무섭게 발을 옮겨 장내에서 벗어났다. 등 뒤로 수군거리는 소리가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은 도준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흡연실에 도착한 도준은 여전히 거칠게 뛰는 심장 위에 손을 얹었다. 도무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슴을 토닥거리자 숨이 조금이나마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도준은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 물고, 달달 떨리는 입술에 힘을 줘 담배를 빨아들였다.

오랜만에 마주한 장희찬은 지독하게 그대로였다. 아니, 그새 더 예뻐졌다. 미디어를 통해 숱하게 접해 온 그였지만, 실물은 화면에 나오는 그 어떠한 모습보다 찬란했다.

백자 부럽지 않은 하얀 피부에, 갸름한 얼굴형에 박힌 이목구비는 환상적이었다. 오뚝하게 예쁜 콧등에 새겨진 미인점하며, 둥근 눈매에 갇힌 옅은 눈동자나, 새빨간 입술이 어울려 자아내는 화려한 분위기는 도준의 눈을 홀리고, 죽었던 심장을 뛰게 하기에 충분했다.

도준은 담배 연기를 내뿜는 것을 빙자한 심호흡을 했다. 둥근 형태를 그리며 뭉쳐져 나온 담배 연기가 도준의 시야를 희뿌옇게 가로막았다. 도준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 부근을 손목뼈로 꾹꾹 눌러 통증을 다스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약이라도 한 알 챙겨 올 걸 그랬다. 철저하지 못한 자신의 준비성을 탓한 도준은 이내 전신의 힘을 풀고 쪼그려 앉아 잔뜩 긴장한 몸을 부드럽게 풀어냈다.

도준이 장내를 벗어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희찬은 제 옆에 앉은 선배에게 심드렁한 말을 붙였다.

“선배님, 이도준이 싸가지가 없나요?”

“응?”

“다들 그렇게 얘기하길래.”

희찬은 삐걱 소리가 날 정도로 몸을 젖혀 의자 등받이를 밀었다. 드라마 출연을 확정 지었을 때, 여기저기서 들려온 말은 다름 아닌 이도준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응원과 격려보다 앞선 이도준을 향한 비난은 하나같이 졸렬해 보였다. ‘싸가지가 없으니 네가 고생 좀 할 거다.’라는 의견이 주를 이루는 그 목소리에 희찬은 의문을 품었었다.

그렇다고 업계 내 도준의 평판이 아주 나쁜 것은 또 아니었다. 도준을 두고 ‘싸가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고, 유독 그런 사람들의 목소리가 컸을 뿐, 도준은 선배들에게도, 감독들에게도 제법 예쁨받는 배우에 속했다.

그럼 저 사람들은 왜 이도준을 두고 싸가지 없다고 말하는 걸까. 아주 잠시였지만, 도준의 행동 어디에도 그들이 말하는 ‘싸가지 없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는데, 원래 그런 이미지가 강한 걸까.

그건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도준이 감독과 함께 장내에 들어섰을 땐 도준과 조금이라도 친밀해 보이려는 것처럼 살갑게 인사를 건네던 사람들도 도준이 사라지니 괜히 ‘싸가지 없다’는 말을 해 댔다.

“아, 글쎄. 도준이가 싸가지 없다기보단 붙임성이 없지. 애는 착해, 성실하고.”

“아, 그렇구나.”

역시 이도준.

적어도 희찬이 아는 도준은 심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좀 데면데면하게 굴긴 해도, 작정하고 못되게 구는 성품은 아니었다.

희찬은 하얀 손바닥 위에 턱을 괸 채로 잘 익은 체리처럼 새빨간 입술을 삐죽거렸다. 희찬의 엷고 투명한 눈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딘가 속내를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을 한 희찬은 여기저기 제자리에 앉아 시끄럽게 담소를 나누는 배우들을 훑어봤다.

사람들이 둘러앉은 곳엔 대체로 화기애애한 목소리가 어우러졌다. 저게 진심이건, 표면적인 다정함이건. 자기들끼리는 잘만 웃고 지내면서 이도준한텐 유독 야박했단 말이지.

감독과 같이 들어오던 도준을 떠올린 희찬은 도준을 향한 사람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티 나게 표정을 굳혔다. 도준이 장내에 들어섰을 땐 화기애애했던 분위기에 정적이 내려앉았었다. 금세 다시 분위기가 떠오르긴 했지만,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의기양양하게 저의 잘남을 뽐내던 배우들의 눈이 모두 도준에게로 쏠렸었다.

아, 그러니까 저 사람들은 이도준을 의식하고, 이도준을 질투하는 거구나.

이내 결론을 도출한 희찬의 눈에 새로운 흥미가 도사렸다. 희찬의 새빨간 입술이 끝이 포물선을 그리며 치솟았다.

“도준이가 자기 관리가 되게 철저해. 잘생겼지, 연기 잘하지, 인기 많지. 사람들이 시기하기 딱 좋은 캐릭터인데 너처럼 살갑게 구는 것도 아니고, 잘 어울리지도 않으니까 사람들이 더 그러는 거 같아.”

“흐응, 난 또……. 무슨 일 있었나 했어요.”

희찬은 다시 표정을 비워 내고 시큰둥한 목소리를 냈다. 희찬의 옆자리에 앉은 선배는 이도준 설명서라도 읊는 것처럼 구구절절 도준에 관한 얘기를 늘어놨다.

기자들의 관심을 싫어할 때부터 알아봤다느니, 쟤는 정말로 연기가 좋아서 하는 애라느니, 다른 배우들과는 달라도 뭔가 다르다느니.

도준을 오래 봐 왔다며, 궁금하지 않은 것까지 줄줄 읊는 선배의 목소리에서도 도준을 향한 애정이 잔뜩 묻어났다.

“그쵸, 이도준은 원래 그랬어요.”

희찬은 이도준에 대한 과한 정보가 쏟아지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싱그러움이 느껴지는 희찬의 두 눈에선 ‘그만해도 된다’는 말이 읽히는 듯했다.

“너 도준이랑 아는 사이야?”

“그냥 뭐…… 모를 수 없잖아요. 이도준.”

“그……렇긴 한데.”

굳이 이도준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싶지 않았던 희찬은 선배의 질문에는 아리송한 대답을 남겨 두고 샐룩 웃었다. 이도준이 밝히지 않는다면, 이쪽에서도 먼저 밝힐 생각은 없으니 답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따분한 시간을 헤아리던 희찬은 문득 장내에 다시 도사리는 긴장을 느꼈다. 눈을 들어 주변을 훑어보자 입구에서 도준이 들어오는 중이었다.

희찬의 입꼬리가 치솟으며 비소를 머금었다. 그렇게 잘만 씹어 대더니 정작 이도준이 나타나면 입을 딱 붙이는 사람들의 모양새가 지질하기 짝이 없었다.

희찬의 말간 눈동자가 맞은편에서 의자를 빼는 도준에게 닿았다.

고놈 참 잘생겼다.

육성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겨우겨우 틀어막았다.

어릴 때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홀리던 잘난 이도준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뛰어난 이목구비가 나이를 먹고 더욱 늠름해진 자태에 희찬은 절로 웃음이 나려는 것을 억지로 꾹 눌러 참았다.

“자자, 다들 오셨죠?”

웅성거리는 장내가 감독의 손뼉 소리에 잠잠해졌다. 감독은 능숙하게 사람들을 집중시켰다. 배우 또는 연출자 간의 간단한 인사차 진행되는 상견례장은 금세 잔잔한 긴장이 서렸다.

주연 배우부터 순서대로 인사를 진행하는 관례와 달리 저 끝에 자리한 조연 배우부터 인사가 진행되었다.

각자의 이름과 배역, 그 외 다른 것들을 간단히 소개하는 사람들의 인사가 끝날 때면 꼭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졌다. 더러는 환호성을 내기도 하고, 더러는 휘파람을 불기도 하며 최고의 이슈 작 ‘눈부신 항해’의 시작을 축하했다.

도준 역시 사람들의 인사가 끝날 때마다 미약하게나마 손뼉을 치는 것으로 그들을 환영했다. 소개하는 사람을 살펴보는 도준의 눈은 사뭇 진지했다.

어째 다들 베테랑으로 구성되었다. 화려한 참여진은 감독과 대표가 ‘눈부신 항해’의 캐스팅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보여 주는 듯했다. 지나가는 엑스트라 역마저 명품 조연으로 이름 날리는 배우들로 구성된 것에 도준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 다음은 이제 우리 주인공들.”

감독의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에 희찬과 도준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누가 먼저 할 건지 마치 의견이라도 나누는 듯 두 사람은 제법 오랜 시간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희찬의 옅은 눈동자가 휘어지는 눈꼬리에 사라졌다. 샐룩 웃었던 희찬은 기꺼이 자신이 먼저 하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더니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서서 사람들을 마주했다.

“안녕하세요, 주인공 중에서 인수 역 맡은 장희찬입니다. 퀴어는 처음이라 좀 떨리는데요, 잘 부탁드립니다.”

“희찬 배우 환영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자기소개를 마친 희찬은 특유의 넉살을 자랑했다. 희찬의 맑고 경쾌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을 때, 도준의 시선 역시 희찬에게 향했다. 하지만 정작 희찬의 말간 얼굴을 얼마간 쳐다보지도 못했다. 희찬에게 닿았던 그 짧은 순간에도 제 표정이 굳는 것을 느낀 도준은 금세 희찬의 뒤에 있는 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희찬 앞에서는 도무지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도준은 책상 아래로 주먹을 꽉 말아 쥐고 장희찬이 아닌 현재 상황에 집중하려 무던히도 애썼다.

“다음은 또 다른 주인공.”

간신히 표정을 가다듬은 도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저에게 닿은 시선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했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몰렸다. 그 시선 속에는 희찬의 속을 알 수 없는 시선도 함께였다.

“안녕하세요, 해인 역을 맡은 이도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도준은 나직하게 짧은 인사를 마쳤다. 슬그머니 다시 의자에 앉으려는 도준을 감독의 의아한 목소리가 붙잡았다.

“또 다른 할 말은? 항상 하던 말이 없네?”

도준이 멈칫했다. 생글 웃으며 저를 보는 감독의 눈에 곤란하다는 듯 입술을 말아 물었다. 얼굴이 뚫어져라 빤히 쳐다보는 희찬의 시선을 피해 갈 곳 잃은 눈동자가 장내에 자리한 다른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마음을 가다듬은 도준의 빨간 입술이 움찔거렸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도준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까.’라는 호기심을 담은 눈을 보였다.

“제가…… 악몽을 꾸면 다음 날 일을 못 합니다. 최대한 컨디션 조절해서 지장 없는 방향으로 할 예정입니다만, 혹시 모를 상황에 미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네.”

“당연히 촬영 중 회식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이 역시 너그러이 받아 주세요. 그래도 저 때문에 촬영이 지연되는 일은 없도록 촬영하는 중에는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희찬을 의식해 숨겨 두었던 도준의 조심스러운 말에 장내에 알 수 없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적막은 희찬이 먼저 손뼉을 치는 것으로 깨지며, 이전의 배우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도준은 눈알을 굴려 희찬을 흘깃 쳐다봤다. 희찬은 도준의 말을 듣는 내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희찬의 표정에 도준은 괜히 심장이 더욱더 거칠게 뛰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우리 이도준 배우 섭외하는 데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만큼 잘하는 배우니까, 사정은 다들 이해해 주는 걸로 합시다.”

“네!”

임 감독은 능숙하게 상황을 정리하며 뿌듯한 눈으로 희찬과 도준을 번갈아 쳐다봤다.

분명 이도준은 위험부담이 있는 배우였다. 언제 악몽을 꿀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처음엔 그를 꺼리는 감독들도 있었다. 하지만 도준이 가진 위험부담은 적어도 이도준에게는 그의 앞길을 막는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그의 경력이 쌓이면 쌓일수록 이도준은 매 드라마가 시작될 때마다 캐스팅 1순위로 손꼽혔다. 그건 도준이 앞서 말한 대로 ‘이도준 때문에’ 촬영이 지연되는 일이 없는 탓이었다.

뛰어난 연기력을 갖춘 도준은 촬영 중에 NG가 없는 배우로도 유명했다. 대본을 완벽하게 숙지하는 것은 물론, 독해력이 좋아 캐릭터의 감정과 생각을 제 것처럼 표현하는 도준은 감정 컨트롤 역시 확실했다. 덕분에 감독들은 ‘도준이 빠지는 날은 타 배우의 추가 촬영 시간을 버는 것’이라고 입을 모으기 시작했다.

배우 이도준은 단연 대단한 배우였다.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오늘 제작사인 ‘by the K’에서 회식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장소는 각 매니저 통해 미리 안내했으니까, 6시까지 늦지 않게 모이도록 합시다.”

마지막으로 드라마에 대한 간단한 소개까지 마친 감독은 가벼운 목소리로 사람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제작사에서 준비한 회식이라는 말에 도준의 미간이 찌그러졌다. 회식이라면 최대한 피하고 싶은 도준이었기에 감독의 말은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도준과 달리 사람들은 하나같이 환호를 질렀다. 마치 오늘 같은 날 회식은 당연하다는 것처럼, 장내를 벗어나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신속하고 가벼웠다.

늦은 시간까지 술자리가 이어질 것이 뻔한 회식을 떠올린 도준은 앉은 자리에서 꼼짝 않고 마른세수를 거듭했다. 사람들이 어느 정도 빠져나간 후에 감독에게 양해를 구하려는 심산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려앉은 정적에 도준은 조심스러운 눈을 들어 입을 움찔거렸다.

“감독님, 저는…….”

“안 돼. 곽 대표가 너 꼭 데리고 오라고 그랬어.”

“대표님이요?”

“응. 너 집에 가면 밥 안 먹고 풀때기 집어 먹는다며. 꼭 데리고 와서 밥 먹이라고 그랬어. 곽 대표가 회식 장소 지키고 있겠대.”

“아, 오지랖은.”

도준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나왔다. 난감함을 느낀 도준은 미간을 좁힌 채로 손가락을 들어 눈썹 부근을 살살 긁적거렸다. 그 손에선 난감함이 여실히 묻어났다.

맛에 대한 흥미가 없는 도준에게는 풀때기나, 고기나 큰 의미가 없다. 그저 ‘재미없는 음식’에 불과한 그걸 굳이 굳이 먹이려는 대표의 마음은 고마웠으나, 적어도 오늘은 그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너는 무조건 가는 거고. 희찬아, 너도 갈 거지?”

“저 가야죠. 배우님, 같이 가자. 맛없는 풀때기 말고, 맛있는 고기 먹자.”

장희찬은 이도준을 모르는 사람으로 대하기로 한 모양이다.

희찬의 입에서 나와 도준의 귀에 닿은 ‘배우님’이라는 호칭에 도준의 눈썹이 일순 일렁거렸다. 도준은 지난 7년간 무수히도 들어온 그 ‘배우님’이라는 호칭이 희찬의 입에서 나온 것이 못내 섭섭했다.

살가운 인사를 바란 것도,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희찬을 대할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가 전하는 말들은 도준의 가슴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도준은 조금씩 떨리는 손을 숨기려 말아 쥔 주먹을 주머니 속으로 밀어 넣었다.

아무리 그래도 ‘배우님’은…….

착잡한 심정이 드러나는 도준의 표정을 본 희찬의 입꼬리가 예쁘게 휘어졌다. 희찬은 도준이 굳이 콕 집어 설명하지 않아도, 무엇이 도준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정확하게 눈치챘다. 그리고 도준의 기분을 달래듯 맑은 목소리를 냈다.

“배우님이 마음에 안 들어? 그럼, 해인이라고 부를까?”

도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요즘의 날들은 온통 자신의 예상 밖에서 일어나는 일투성이였기에, 희찬이 자신을 두고 ‘배우님’이라고 부르건, 작중 인물의 이름인 ‘해인’이라고 부르건 크게 다르게 들리지도 않았다.

도준은 최대한 말을 아꼈다.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는 낯을 보이는 희찬은 마치 햇살을 머금은 것처럼 해사하기만 했다. 덕분에 온 세상이 맑게 개는 것 같았다.

도준은 아랫입술을 꾹 눌러 씹었다. 짓이겨지는 살덩이가 아릿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이도준에게 장희찬은 불가항력과 같은 존재였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도망칠 수 없고, 그의 이름이라면 정신이 벌떡 깨는 피할 수 없는 거대한 힘과 같았다.

당연히 희찬 앞에서 손도 못 쓰고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을 일들도 예상했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도준은 희찬 앞에서 그저 치기 어린 풋내기에 불과했다.

“가자, 밥 먹으러.”

담담히 그 사실을 받아들인 도준은 희찬의 말에 그저 고개를 주억거렸다. 희찬의 제안을 거절할 자신이 없었고, 희찬이 건네는 말을 거부할 재간도 없었다.

희찬은 마치 도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안다는 것처럼 행동했다. 차가 나란히 주차된 주차장에 와서도 꾸준히 말을 붙이며 살갑게 구는 희찬의 행동에 도준은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마치 목소리를 잃은 인어공주처럼, 도무지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희찬은 ‘배우님’이라는 호칭 대신, 도준이 맡은 역의 이름을 꾸준히 불러 댔다. 그에 도준은 그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제 의사를 표할 뿐이었다. 반갑지 않은 회식에 달갑지 않은 술자리였지만, 장희찬이 있는 곳이라면 가고 싶었다. 그런 어리숙한 생각은 줄곧 성장했다고 자신을 판단했던 도준의 심중을 완전히 뒤집어 놨다.

“해인아, 이따 식당에서 봐.”

“응.”

차에 오르기 직전까지 말을 붙이는 희찬은 도준의 확답을 얻은 후에야 가벼운 걸음을 옮겨 사뿐하게 자신의 차에 올랐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도준도 이내 차에 몸을 싣고 깊은숨을 푹 내쉬었다.

가게 바깥에서도 내부의 왁자지껄함이 여실히 느껴지는 회식 장소 앞에 선 도준은 가슴이 부풀 정도로 큰 숨을 들이켰다가, 다시 내쉬는 것을 반복하며 쉽사리 발을 떼지 못했다.

“형, 회식 후에는 대표님이 형 데려다주신다고 하셔서, 저 먼저 퇴근할게요.”

“그래, 고마워. 연락할게.”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도준은 꽤 오랜 시간을 함께했음에도 여전히 깍듯한 매니저에게 손을 흔드는 것으로 결심을 다졌다. 어차피 내린 거, 이제 와서 돌아가겠다고 떼를 쓰기도 멋쩍은 상황이 되어 버렸다.

매니저는 금방 가게 앞에서 사라졌다. 새까만 승합차가 저 멀리 떠나가는 것을 지켜본 후에도 도준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도준은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길 반복하다 가게 옆으로 난 골목으로 발을 돌렸다. 어느새 깜깜하게 내려앉은 땅거미를 드문드문 비추는 주황색 불빛 덕분에 골목은 제법 서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도준은 주머니에 찔러 둔 담배를 꺼내 물었다. 틱틱 귀를 긁는 소리에 이어 칙 가벼운 소리가 들렸다. 담배에 불을 붙인 도준은 폐부 깊이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도준의 귓가에 이름 모를 곤충의 속삭임이 찌르르 닿았다. 작고 고요한 소음을 새기며 연기를 빨았다가 뱉기를 반복하는 도준은 그저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 거듭했다.

아무래도 너무 즉흥적으로 움직인 것 같다. 장희찬에게 홀려, 그가 하자는 대로 그저 고개나 주억거리던 제 모습을 돌이켜 보니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도준은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는 핑계로 숨을 기다랗게 뿜어냈다. 눈앞에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희뿌연 담배 연기는 좋지 않은 냄새를 머금었다.

“도준이야?”

혼자 시간을 보내다 보니 금세 무거운 적막이 도준의 몸을 짓눌렀다. 발끝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아득함에 조금씩 잠식되어 가던 도준은 골목을 울리는 대표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칫했다가는 또 발작을 일으킬 뻔했다. 큰 숨을 토해 낸 도준의 귓가에 저벅저벅 걷는 대표의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켜켜이 쌓였다.

“야! 찾았잖아. 전화는 왜 안 받고.”

“죄송해요, 무음이었어요.”

도준은 대표의 말을 듣고서야 뒷주머니에 찔러 뒀던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 10통이나 쌓인 부재중을 확인한 도준은 미안한 기색을 보였다.

“담배를 몇 대를 피운 거야? 아이고, 이제는 폐암까지 얻으시려고? 나는 반대다, 그거.”

“아, 설마요.”

도준은 미간을 좁힌 채로 역정을 내는 대표에게 부러 환한 미소를 보였다. 도준은 손에 들었던 담배꽁초에서 불꽃을 능숙하게 튕겨 냈다.

담배꽁초에서 튕겨 나온 불꽃이 바닥에 닿는 순간 그 주변으로 불꽃이 흩어졌다. 새빨갛게 튀었다가 금세 사라지는 화염을 좇던 도준의 시선이 비로소 대표에게 닿았다.

대표의 핀잔 섞인 잔소리에 도준은 익숙하다는 듯 별 반응 없이 기지개를 쭉 켰다. 온몸을 유연하게 늘어뜨리며 스트레칭을 하는 도준의 입에서는 시원하게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왜, 상견례가 영 별로였어? 임 감독은 분위기 좋았다던데.”

“다 똑같죠, 뭐. 다를 거 없었어요.”

대표는 걱정하는 낯으로 도준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의 말에서는 도준이 오랜만에 희찬을 만났다는 것에 대한 염려가 가득 묻어났다.

도준은 말하지 않아도 걱정하는 바가 무언지 안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멋들어지게 올려 웃어 보였지만, 대표는 안심하지 못했다. 뭐든 일단 ‘괜찮다’고 말하고 보는 도준을 알아도 너무 잘 아는 탓이었고, 그게 쌓이고 쌓여 결국엔 악몽을 꾸는 도준 역시 짐작이 가능한 부분이었다. 도준의 어깨를 토닥이던 대표의 손은 도준의 너른 등을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희한하게도, 도준은 그 손길을 느끼기 무섭게 안정을 되찾았다. 정성 들여 자신을 달래는 대표의 모습은 도준의 온몸에 도사린 긴장을 풀어내기에 충분했다.

“가자, 안에 다 너 기다려.”

도준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뻔뻔한 표정으로 뻔뻔한 말을 하는 대표의 모습이 퍽 재밌었다.

“시끄러운 거 다 들었어요.”

“우리 도준이 귀도 밝네. 고기 다 구워 놨어.”

대표의 천연덕스러운 목소리에 도준의 입에서 큰 웃음이 터져 흘렀다. 그제야 대표도 환하게 웃으며 도준의 등을 어루만졌다. 손바닥에 닿는 단단한 근육이 뿌듯해, 도준이 몸을 비틀며 손을 피해도 집요하게 매만졌다.

“도준아, 여기!”

대표와 함께 식당으로 들어온 도준은 식당 내부 제일 안쪽에서 저를 부르는 감독의 목소리를 따라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이동하는 동안에도 제게로 쏘는 눈총들이 친절하지 않다는 것쯤이야,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도준은 그런 시선들에 일일이 응하지 않았다. 딱히 그들의 심중을 헤아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이 뒤에서 수군대는 말들도 결국엔 돌고 돌아 도준의 귀에 닿기 마련이었고, 그런 말들을 전해 듣는다고 해서 크게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도준은 그저 흥미 없는 표정으로 심심한 눈빛을 보였다.

도준이 대표의 손에 끌려 자리에 다다르자 희찬의 밝은 목소리가 도준을 반겼다. 감독이 앉은 테이블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희찬도 함께였다.

“해인아,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감독의 옆자리에 앉아 젓가락을 쥔 채로 허공에 손을 휘젓는 희찬을 본 도준은 울대가 들썩거릴 정도로 크게 침을 삼켰다. 도준은 대표의 옆, 그러니까 희찬의 맞은편에 앉아 눈짓으로 대충 희찬의 손짓에 대답을 건네었다.

“해인이?”

대표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의문을 제기했다. 자신과 희찬을 번갈아 보는 대표의 시선을 느낀 도준은 그저 어깨를 으쓱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 희찬이가 도준이 ‘해인’이라고 부르겠대. 도준이가 맡은 역 이름이야.”

“배우님이라고 부르니까 싫어하더라고요.”

“그럼, 도준이 너는 희찬이 뭐라고 부르기로 했어?”

“저는…….”

한 자리에 둘러앉은 네 사람의 목소리가 한 가지 주제로 어우러졌다. 대표는 제법 흥미를 느끼는 듯 도준과 희찬을 번갈아 쳐다봤다. 방실방실 예쁘게 웃는 희찬과 달리 도준의 표정은 무미건조했다.

“너는 나 인수라고 불러.”

도준이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희찬이 도준의 말을 가로막았다. 희찬이 도준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처럼, 도준 역시 희찬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려 했다. 그건 자신이 정한 ‘때’를 의식한 생각이었고, 희찬이 자신을 두고 ‘해인’이라 부르는 순간 도준 역시 희찬을 ‘인수’라 부르리라 다짐했었다.

도준의 곧은 시선이 희찬을 향했다. 턱을 괸 채로 얼굴을 꺾어 환하게 웃는 희찬을 본 후에는 다시 고개를 푹 수그렸다.

쉬지 않고 지저귀는 희찬의 목소리가 발랄하다. 도준은 공간을 빼곡하게 메우는 그 소리가 싫지 않았다. 이내 도준 역시 세 사람과 동화되어 즐거운 낯을 띠었다. 한쪽 입꼬리를 살짝 들고 웃는 도준의 모습은 근사함을 머금었다.

고기를 입 안으로 욱여넣거나, 큼직한 쌈을 싸서 먹는 동안에도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뭐가 그렇게 신나는 일들이 있는 건지, 한껏 들뜬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네 사람은 그저 즐거워 보였다.

그런 그들의 대화 속에는 다른 테이블에서 나누는 대화 소리도 틈틈이 들렸다. 워낙에 시끄러운 내부였기에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는 대놓고 도준을 안 좋게 얘기하는 소리도 들렸다.

다른 테이블 사람들의 시선 역시 자신들에게 쏠려 있다는 것을 인지한 도준은 이번에도 반응하지 않고 젓가락질만 했다. 아무런 감흥도 없는 손짓이었지만, 그럼에도 입 안으로 음식을 밀어 넣는 행위는 멈추지 않았다.

그저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차려진 음식을 집어 입 안으로 밀어 넣고 삼키길 반복하며 주변의 시선은 외면했다.

“도준아, 그거 맛있어? 무슨 맛으로 그걸 계속 먹어?”

“아무 맛 안 나요.”

도준은 쓰디쓴 풀을 질겅질겅 씹었다. 도준이 먹는 모습에 호기심을 느낀 감독이 젓가락을 놀려 도준을 따라 집어 먹었다. 이내 감독이 온 인상을 찌푸리며 혀를 삐죽 내밀었다.

“엑, 이거 엄청 쓴데? 너 쓴 거 잘 먹는구나.”

도준은 어깨를 으쓱이며 감독을 향해 가벼운 목소리를 냈다.

“그냥 먹는 거죠, 뭐.”

도준의 말은 시시하기 그지없었다. 대표는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희찬은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도준과 감독을 번갈아 쳐다봤다.

“고기도 좀 먹어.”

도준의 젓가락은 자꾸만 풀때기로 향했다. 파릇파릇한 채소가 제아무리 싱그럽다고는 하나, 그 맛은 고기만 못할 것이다. 희찬은 못마땅한 낯을 보이며 도준의 그릇 위에 노릇하게 잘 익은 고기를 얹어 줬다. 도준은 풀을 집으려던 젓가락을 멈추고 희찬을 지그시 바라봤다.

“안 본 새에 입맛이 변했나 봐. 옛날엔 되게 어린애 입맛이었는데.”

아득한 과거를 들먹이는 희찬의 목소리에 도준의 검은 눈동자에 얕은 지진이 일었다. 도준은 애써 집었던 음식을 내려놓고 얼른 손을 탁자 아래에 숨겼다. 허벅지 위에 놓인 도준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흔들리는 동공을 숨기고자 시선을 내리깐 도준은 가빠지는 숨을 티 나지 않게 고르며 자신을 달랬다.

그런 도준의 허벅지 위에 듬직한 손이 얹혔다. 옆자리에서 줄곧 도준과 희찬의 대화를 듣던 대표는 도준의 상태를 한눈에 파악했다. 안심하라는 듯 도준의 손을 세게 쥐자 도준도 제 손을 주무르는 손길을 따라 호흡을 가다듬었다.

“야, 희찬아.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옛날 얘기를 하고 그래.”

“아, 그런가요?”

희찬은 돌아오지 않는 도준의 대답에 씁쓸함을 표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옛날 얘기라……. 이도준도 그렇게 생각할까.

희찬의 옅은 눈이 도준에게 날카롭게 닿았다. 도준은 그런 시선에마저 응할 생각이 없는 듯 그저 마른 입술을 적실 뿐이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테이블 아래에 놓인 술병의 수도 늘었다. 도준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차오르는 흡연욕에 초조함을 느꼈다. 상쾌한 바람에 니코틴을 섞어 한껏 들이마시고 싶은 욕구가 간절했다.

“도준아, 담배 피우자.”

“네.”

어색함이 도사리는 것을 느낀 감독이 먼저 말을 건네었다. 도준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흔쾌히 자리에서 일어나 감독을 따랐다.

희찬은 고개를 들어 감독과 함께 일어나는 도준과 그 주변을 살피다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드문드문 들리는 말에 불편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도준이 오기 전에는 평온하기만 하던 식당에 도준이 나타나자 자꾸 심기에 거슬리는 말을 웅성거렸다. 정작 안쪽 테이블 사람들은 도준과 잘 지내는 것 같은데 말이다.

희찬이 표정을 굳히고 시끄러운 무리를 쳐다봤다. 그 사람들은 도준이 반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도준이 바깥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집요한 시선을 쏘았다. 그 시선들은 도준을 절대로 곱게 보내 주지 않았다.

아까부터 꾸준히 느꼈지만, 이상하게 사람들은 이도준에게 모질었다.

사람들은 이도준을 두고 ‘싸가지 없다.’라는 말에서 시작한 흉을 대놓고 보기 시작했다. 그들의 말미가 대체로 ‘그랬대.’로 끝나는 것을 보아하니 직접 겪어 보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이 판의 특성상 말이 옮겨지는 것이 물을 마시는 것보다 쉽다곤 하지만, 도준을 모르는 사람들이 도준에 대해 떠드는 말은 그보다 더 쉽고 가벼운 듯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도준을 두고 귀하게 자라 안하무인이라느니, 어느 회장님네 사생아라 자기 얘기를 안 하는 거라느니. 알지도 못하고 멋대로 지껄이는 말들이 퍽 우스웠다.

상견례 당시 비록 가벼운 목소리였으나, 이도준은 진지하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후엔 얼굴값 하느라 예민하게 군다느니, 도련님이라 어쩔 수 없다는 말이 붙었다. 하여튼, 어떻게든 ‘싸가지 없다’라는 말로 매도하려는 꼴이 제법 같잖았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는 이도준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상하고 화가 나는데, 이도준은 귀도 없는 걸까. 아니면 관심이 없는 걸까.

도준은 신기하리만치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같이 앉아 있을 때도 그랬다. 희찬의 귀에도 들리는 그 말들이 도준의 귀에 들리지 않을 리가 없는데, 도준은 그저 맛없는 풀때기만 꾸역꾸역 입으로 밀어 넣었다.

묵묵했던 도준의 모습을 떠올린 희찬은 고운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희찬의 잔잔했던 가슴에 커다란 너울이 자리했다. 뜨겁게 이는 불꽃을 머금은 그 너울은 이내 화로 올라 얼굴에 열을 더했다.

“감독 옆에 딱 끼고 의기양양하게 가는 것 좀 봐.”

이도준이 아예 사라지자 사람들의 목소리는 조금 더 커졌다. 도준을 아끼는 대표와 선배들이 장내에 있다는 것은 의식하지 못한 듯, 제작사 대표가 있는 자리에서 도준을 깎아내리는 사람들은 마치 물 만난 고기 같았다.

희찬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들의 말에 집중했다. 두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이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말을 듣고 있자니 가슴에 천불이 일었다. 희찬은 무리의 중심에서 이도준에 대한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는 남자를 직시했다.

“선배님.”

참다못한 희찬의 나직한 목소리가 실내를 울렸다. 대표의 낮은 눈이 희찬에게 닿았다. 희찬은 대표의 시선은 잠시 뒤로 두고, 남자에게 매서운 눈을 떠 보였다.

“어, 희찬아?”

“선배님이 좀 더 빨리 데뷔하셨다고, 이도준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권리가 생기나요?”

희찬은 무거운 톤으로 말을 읊조렸다. 그 어투는 분명 부드럽고, 친절했으나 그 말을 뱉어 내는 목소리는 날카롭기만 했다. 남자가 당황한 듯 입술을 움찔거렸다.

“무슨 말이야, 그게?”

남자의 어벙한 반응에 희찬이 보란 듯이 코웃음을 터뜨렸다. 남자에게 닿은 희찬의 눈빛에선 조금의 정도 묻어나지 않았다.

“제 말이 어려우셨습니까? 그렇게 불만이시면 이도준 불러다 면전에 대고 말씀하세요. 이도준 너 왜 그렇게 싸가지 없이 구냐고.”

생글 웃는 낯의 희찬이 전하는 말이 제법 살벌하다. 화가 뚝뚝 떨어지는 희찬의 목소리에 요란했던 장내가 일순 고요해졌다. 수십 명의 스태프와 십수 명의 배우가 한데 어우러져 시끄럽게 일궈 내던 목소리도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에 희찬의 입가에 비소가 담겼다. 치사하고 유치하기 이루 말할 데 없는 사람들 틈에서 가만히 지내자니 성질이 못 견디겠다.

돌아가는 상황을 주시하던 대표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서로 모르는 척, 과거는 전부 잊은 것처럼 굴더니 옛친구 욕하는 건 못 봐주겠다는 양 행동하는 희찬의 태도가 흥미로웠다. 대표는 팔짱을 낀 채로 등을 젖히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희찬에게 나긋한 목소리를 냈다.

“하하, 희찬아. 너 왜 그래.”

대표의 성의 없는 저지에 희찬은 아예 대표를 등지고, 남자 쪽으로 틀어 앉았다. 그런 상태에서 희찬의 말이 향한 곳은 무리가 아닌 대표였다.

“근데 대표님 이상하죠.”

“뭐가?”

이 상황에 흥미를 느끼는 대표는 적당히 희찬의 장단에 맞춰 주기로 했다.

“오늘은 이도준이 그렇게 크게 잘못한 것도 없거든요.”

희찬은 또렷하기로 소문난 발음을 자랑하며 또박또박 제 말을 전했다. 그에 대표도 나긋하게 그의 말에 동조했다.

“도준이가 원래 잘못은 안 하고 지내, 너도 잘 알 거 아냐? 애가 되바라지진 않았어.”

그렇지 않아도 도준을 두고 이 말, 저 말 함부로 떠들어 대는 것에 짜증이 나던 참이었다. 모두가 듣는 듯했으나, 정작 당사자인 이도준만 평온한 모습에 화가 솟구치기도 했다.

조용히 경고를 주려던 계획을 튼 대표는 아예 몸을 탁자 앞으로 가까이 대고서 희찬의 말에 집중했다. 한 번쯤은 저들의 저열함을 비웃어 주고 싶었다.

“그러니까요. 제가 누구보다 잘 알죠. 우리가 어떤 사인데.”

희찬은 자신이 도준을 잘 안다는 것에 유독 더 힘을 주었다. 그 말은 경고와도 같았다. 너희가 내 앞에서 아무리 이도준을 잘 안다고 떠들어 봐야 하등 소용없으니 이쯤 해 두라는 의미가 듬뿍 묻어나는 희찬의 말에 사람들이 놀란 눈을 떴다.

그래, 저들이 아는 정보는 ‘이도준과 장희찬은 앙숙이고, 서로를 지독하게 싫어한다.’라는 것이 다일 테니 그들이 놀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마 그래서 더 의기양양하게 떠들어 댄 것이겠지.

희찬은 눈썹을 일렁거리며 남자에게 붙여 둔 시선에 힘을 주었다.

“근데 선배님은 유독 이도준만 싫어하네요? 다른 선배님들이 도준이 예뻐하니까 질투라도 하시는 거예요?”

“뭐?”

“선배님. 이도준이 진짜로 싸가지가 없나요? 딱히 이도준이 잘못한 건 없는데 단지 잘나간다는 이유로 열등감 느끼시는 건 아니고요?”

남자의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제 말에 정곡이 찔린 듯 티 나게 온몸을 부르르 떨어 대는 남자에게서 흥미를 잃은 희찬은 얕은 숨을 툭 뱉어 냈다.

이도준은 뭐 귀가 없어서 가만히 있는 걸까.

상대할 가치가 없으니까 닥치고 있는 거지.

뒤따라 나오려는 말은 애써 붙이지 않았다. 희찬은 손에 쥔 젓가락을 더욱 세게 거머쥐었다. 주먹이 말린 희찬의 손등에는 퍼런 핏줄이 불룩 솟았다.

자기가 이도준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함부로 지껄이고 지랄이야.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여실히 드러낸 후에 찾아온 여파는 컸다. 떠들썩했던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냉랭해졌다. 이런 일에 희찬이 직접 나서서 쏘아붙이는 경우는 전무했기에 장내의 시선들이 조심스러워졌다.

희찬은 열을 낸 탓에 지끈거리는 관자놀이 부근을 엄지를 세워 꾹꾹 세게 눌렀다. 그런 희찬의 시야에 저 멀리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도준이 들어찼다.

도준을 발견한 희찬은 큼큼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건 ‘대충 이도준이 왔으니 알아서들 잘 행동해.’라는 신호와도 같았다. 희찬의 행동에 사람들은 여기저기 눈치 보기 바빴다.

상황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던 대표가 먼저 운을 떼 두 사람을 맞이했다.

“무슨 담배를 그렇게 오래 피워? 임 감독아, 우리 도준이 폐 썩겠어.”

두 사람이 합류한 테이블에는 담배 특유의 메케한 향이 진하게 내려앉았다. 대표는 장난스럽고 과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손으로 공기를 휘휘 저어 댔다.

“내가 피우라고 했어? 도준이는 원래 흡연자야. 근데, 분위기가 왜 이래? 다들 벌써 지치셨습니까?”

영문을 알 리가 없는 감독이 나서서 사람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덕분에 차갑게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금세 생기를 머금었고, 사람들은 이내 하하호호 즐거운 목소리를 냈다.

분위기는 전과 다를 것 없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도준을 두고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에 만족을 느낀 희찬은 가벼운 숨을 털어 내며 한껏 솟은 짜증을 갈무리했다. 예의 그 생글거리는 낯을 보이는 희찬 앞에 대표가 고기를 놓아 주었다. 그 고기에는 어느 정도의 온정과 위로가 담겼다. 희찬은 그를 알아챈 듯 조금 더 입꼬리를 깊이 패고 웃었다.

도준은 까맣고 강직한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다 테이블 아래에 내려 뒀던 손으로 젓가락을 쥐고는 불판 위에서 타닥타닥 먹음직스러운 소리를 내며 구워지는 고기를 집어 대표가 제게 그랬던 것처럼 희찬의 접시 위에 올렸다.

“뭐야?”

“뇌물.”

“뇌물?”

“……앞으로 잘해 보자고.”

이제 와서 뇌물은 무슨 뇌물.

도준의 말에 희찬의 낯이 일그러졌다.

*

꿈을 꿨다. 평소의 숨통을 옥죄는 아픈 꿈과는 전혀 다른 예쁜 꿈이었다. 잘생긴 눈을 감은 채로 편안하게 잠든 도준은 간만의 단잠을 즐겼다. 즐거운 꿈을 꾸는 도준의 표정은 편안하기 이루 말할 데 없었다.

꿈에서는 아주 어린 시절의 모습을 봤다. 좁지만 마냥 넓게만 보였던 운동장. 잔디 하나 없이 흙먼지가 날리는데도 그저 좋았던 그곳. 다 낡았지만 그럼에도 최고의 놀이기구 역할을 해냈던 운동기구. 무늬가 다 지워졌음에도 바람만 넣어 주면 잘만 굴러가던 축구공. 그리고 그물이 없어 뼈대만 앙상했던 골대.

운동장을 바쁘게 거니는 조그만 아이들은 누가 더하고, 덜할 것 없이 추레한 차림이었다. 그럼에도 아이들의 표정만큼은 세상 그 무엇보다 해맑고 밝았다. 청명한 하늘만큼 맑은 목소리를 내는 아이들은 공이 구르는 대로 바쁘게 뛰어다녔다. 이리저리 뛰는 아이들의 발 뒤로 흙먼지가 일었지만, 그마저 지독하게 아름다웠다.

아이들을 지켜보는 어른들은 콜록거리며 입을 가렸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에는 대체로 사랑이 묻어났고, 인자한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여기! 패스!]

무리 속에는 가장 선두에서 공을 놀리는 아이가 있었다. 활기찬 표정으로 역동적인 몸짓을 잇는 아이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을 향해 뛰었다.

[도준아!]

빠르게 뛰는 아이를 두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도준’이라 불렀다. 앳된 얼굴의 도준이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얼굴엔 천진한 미소가 자리했다.

도준은 제 옆에서 함께 뛰는 아이의 손을 거머쥐었다. 화창한 날씨와 잘 어울리는 두 아이의 얼굴 만면에는 오롯한 행복이 자리했다.

[이도준!]

전보다 조금 더 큰 목소리가 도준을 불렀다. 그 목소리는 훨씬 더 선명하고 가까운 곳에서 도준의 귀를 울렸다.

“도준아, 이제 일어나.”

앳된 목소리가 가셨다. 묵직한 남성의 음성이 자신을 깨우는 것에 도준은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떴다.

지독하게 조용한 방 안을 채운 적막이 도준을 반겼다. 도준은 덜 뜨인 눈으로 방을 훑었다. 침대 바로 옆에서는 대표가 인자한 표정으로 도준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도준은 천천히 눈을 끔뻑였다.

“밥 먹자, 12시 넘었어.”

대표의 두툼한 손이 도준의 가슴께를 토닥였다. 그에 도준은 허리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켜 앉아 멍한 표정을 보였다. 대표는 막 눈을 뜬 도준의 안색을 살폈다. 다행히 간밤에 푹 잔 모양새였다.

대표의 판단대로 도준은 실로 오랜만에 단잠을 잤다. 꿈속에서 그리던 과거의 끄트머리를 떠올린 도준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남들이 다 가진 부모가 없었음에도 남부럽지 않게 행복한 시절이었다. 또래 아이들이 그랬듯, 아무런 걱정 없이 매일 ‘오늘은 또 뭐 하고 놀까.’ 같은 해맑은 고민을 거듭하던 날이었다.

남들에게는 쉽지만, 도준에게는 어렵기만 한 단잠은 도준의 기분을 붕 띄워 놓았다. 도준은 가슴 가득 들어차는 안정감을 느끼며 두 팔을 머리 위로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이 기지개 역시 참 오랜만에 켜는 기지개였다.

대표가 나간 후에도 도준은 오랫동안 침대 위에서 뭉그적거렸다. 유연한 허리를 접어 발목을 쥐고 상체를 좌우로 비트는가 하면, 어깨를 돌리고, 목을 꺾어 요란하게 뼈 소리를 내기도 했다. 한참이나 공을 들여 찌뿌둥한 몸을 개운하게 깨운 도준은 느릿한 걸음을 옮겨 방 밖으로 향했다.

한눈에 들어오는 부엌 풍경은 익숙하고 동시에 낯설었다. 금세 차려진 따끈한 식사의 고소한 향이 도준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온 세상이 환하게 개는 듯한 파안대소를 피워 내는 도준의 모습에 대표도 기분 좋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적적하기만 한 집에 오랜만에 봄과 같은 기운이 풍겼다.

훈훈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도준은 가벼운 표정과 경쾌한 몸짓으로 식탁 앞에 자리했다. 코앞에 닿은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좋다. 음식을 즐기지 않았기에, 먹는 것에도 흥미를 갖지 않는 도준이었는데 오늘은 유독 그 냄새가 기분 좋았다.

도준은 몸을 앞으로 당겨 큰 숨을 들이켰다. 콧속으로 들어오는 향을 맡은 후에는 도준의 새빨간 입술 끝이 포물선을 그리며 멋지게 치솟았다.

식탁 한쪽에 놓인 수저통에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각각 인원수에 맞게 꺼낸 도준의 눈이 대표에게 닿았다. 도준은 하루걸러 하루는 꼭 제집으로 출근하는 대표에게 순수한 의문을 표했다.

“근데 대표님은 일이 없으세요?”

도준의 말에 대표가 인상을 찌푸렸다.

앞치마까지 두르고 한 손에는 뒤집개, 한 손에는 프라이팬을 쥔 탓에 조금도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아무튼.

“일이 없긴, 인마. 세상에서 내가 제일 바빠. 스케줄 없다고 늦잠 자는 배우보다 나은 거 같은데.”

대표의 뾰로통한 목소리에 도준이 눈썹을 으쓱였다. 혹시 회사 경영이 어려운 건 아니냐, 우리 회사 이대로 망하는 거냐. 장난스러운 말을 덧붙이려 했지만, 그랬다간 손에 든 뒤집개로 등짝을 얻어맞지 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

대표는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밥그릇을 도준의 앞에 내려놓았다. 손에 닿은 그릇이 뜨거운지 대표의 손이 잔뜩 오므라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먹음직스러운 향이 났지만, 역시나 음식을 먹는 것에는 흥미가 없다. 입 안에서 으깨지고, 흩어지는 밥알을 굴려 삼키는 도준의 표정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도준은 그저 해야만 하는 행위라는 것처럼 턱관절을 놀려 음식물을 분해하고 삼키는 것을 반복했다.

도준의 맞은편에 앉아 도준보다 훨씬 행복한 표정으로 밥을 푸던 대표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대표는 젓가락을 들어 도준의 밥그릇을 두드렸다. 그에 밥그릇과 젓가락이 부딪치며 쨍쨍,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도준은 놀란 듯 시선을 들고 대표를 마주했다.

“맛있게 좀 먹어.”

“맛이 없어요.”

도준의 심심한 목소리에 대표가 눈썹을 찡그러뜨렸다.

“내 요리가 그렇게 별로라고.”

“그런 뜻 아닌 거 아시면서.”

대표의 장난스럽게 쏘아붙이는 목소리에 도준이 싱그러운 미소를 뿜어냈다.

먹는 것에 대한 흥미는 언제 잃었더라. 아주 오래전 어느 날 갑자기 음식을 씹는 재미를 잃었다. 그런 도준에게 음식을 먹는 것은 그저 ‘살기 위한 섭취’에 불과했다.

그를 잘 아는 대표였기에 그 이상의 잔소리는 없었지만, 그의 눈총은 매서웠다. 맛이 없어도 맛있게 먹으라는 알 수 없는 요구에 도준은 억지로 젓가락을 놀려 빨갛고, 푸른 반찬을 집어 밥과 함께 씹었다. 그리고 아주 맛있는 것을 먹는 ‘척’이라도 보였다.

그제야 대표의 입가에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저 꿈꿨어요.”

젓가락과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만 가득한 공간을 도준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식탁을 훑던 대표의 시선이 삽시간에 진중해졌다. 음식에 만족을 느끼며 맛있게 씹던 턱도, 음식을 입 안으로 넣던 손짓도 느릿해졌다.

시선을 밥그릇에 고정한 채로 김치를 얹어 밥숟갈을 올리던 도준은 문득 상대가 조용해진 것을 느꼈다. 가볍게 뱉은 말이었는데 그에겐 가볍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고개를 들어 대표와 시선을 마주했다.

역시나, 사안을 진지하고 무겁게 받아들인 듯 한껏 어두워진 대표의 낯에 도준은 저도 모르게 큰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런 거 아니고요.”

도준의 가벼운 목소리에도 대표는 좁힌 미간을 풀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모양이다. 도준은 아예 숟가락을 내려놓고 적극적으로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진짜, 아니에요.”

도준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진심을 담아 밝은 음성을 전하자 그제야 대표의 낯에 드리운 그늘이 걷혔다. 악몽을 꾼 후에는 꼬박 하루를 내리 앓기만 하거나, 제대로 숨 쉬는 것조차 어려워 가슴을 부여잡고 아픈 울음을 토해 내는 도준이었기에 대표의 심중에 걱정이 도사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도준이 생글 웃는 낯을 보였다. 양손으로 턱을 받쳐 예쁜 포즈를 취한 도준은 고개를 양옆으로 까딱거리며 붕 뜬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대표의 입에서 비로소 안도의 숨이 터져 흘렀다.

“그럼, 뭔데. 무슨 꿈인데?”

대표는 상쾌한 도준의 목소리에 일부러 더 시큰둥한 목소리를 냈다. 걱정한 적 없다는 듯, 그러니 신경 쓰지 말라는 듯. 하지만 무심한 그의 목소리와 달리 그는 경청하겠다는 듯 숟가락을 내려놓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쥐었다.

손에 쥔 젓가락으로 고슬고슬한 흰 쌀밥을 뒤적거리는 도준은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자고로 아련한 추억이라는 것은 그 추억이 아름다울수록 말로 꺼내기가 어려운 법이다. 적어도 도준에겐 그랬다.

“어릴 때…… 희찬이랑 보육원에 같이 있었던 꿈이었어요.”

“예쁜 꿈이었겠네.”

“네, 같이 축구 했어요. 저 그때 축구 진짜 잘했거든요.”

“좋았겠다. 재밌었어?”

“네, 재밌었어요.”

도준의 입가에 희미한 향수가 피었다.

어린 시절을 생각할 때면 막연하게 떠오르는 색감이 있다. 맑은 연두색, 옅은 하늘색, 엷은 주황색. 그리고 아주 짙은 초록색과 또렷한 분홍색.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 시절을 떠올릴 때 연상되는 색들은 대부분 채도가 진하고 명도가 높은 색상들이었다. 미국 하이틴 영화에 나올 것만 같은 그런 색들 말이다.

오색 빛의 다양한 색상으로 이루어진 기억들은 대체로 찬란했다. 희한하게도 기억 속에 남은 어린 시절엔 비가 내리는 날이 없다. 온통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에 적당히 따사롭게 내리쬐는 태양만이 가득했다. 그렇게 푸르른 어린 시절을 상기한 도준은 뭉근한 노스탤지어를 느꼈다.

보육원의 나무 바닥은 발을 디딜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위에서 양말을 신은 채로 슬라이딩을 타다 발에 가시가 박히는 것도 부지기수였다. 원생들의 발바닥을 위해 왁스 칠을 할 때면 그 위에서 미끄러지는 일도 빈번했다. 그럼에도 보육원 복도는 누구 하나 우는 사람 없이 해맑은 웃음소리만 가득했다.

저녁 식사 후에 다 같이 샤워실에서 샤워할 때면 꼭 누군가 먼저 시작한 물장난에 샤워실이 온통 물바다가 되곤 했다. 미끄러운 타일 위에 물이 흥건히 고일 때쯤이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발바닥과 종아리에 힘을 빡 준 채로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를 하곤 했다.

물이 넘쳐 복도를 적실 정도가 되면 어떻게 알고 부리나케 달려온 원장님이 허리춤에 손을 얹고 날카로운 눈빛을 보였다. 매서운 잔소리를 들으며 원장님의 억센 팔에 붙잡혀 온몸에 비누칠을 당하고, 거친 어른의 손길에 벅벅 문질러졌지만, 그 모든 과정 역시 하나같이 즐겁기만 했었다.

“좋은 곳이었나 봐.”

“엄청요.”

“너 잘 키워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드리러 가야겠어.”

기분 좋게 피어오른 도준의 낯은 환상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잘생긴 얼굴에 자리한 희맑은 미소는 그의 외모를 더욱 빛내는 듯했다.

도준이가 기분 좋은 과거를 마주할 때는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대표는 가슴이 부풀어 오를 정도의 커다란 흐뭇함을 느꼈다. 아예 턱을 괸 채로 도준의 행복에 기꺼이 동참한 대표는 인자한 눈으로 도준을 향한 애정을 드러냈다.

“적어도 거기 있을 때는 부모 있는 애들 안 부러웠어요.”

“지금은?”

“음……. 가끔?”

도준의 낯이 장난을 머금고 휘어졌다. 잘생긴 눈을 접고 시원하게 입을 튼 채로 웃는 도준의 모습에 대표도 장난으로 응했다.

“이 자식이. 내 사랑이 부족해?”

턱을 괸 손을 빼고 도준의 얼굴을 세게 훑어 내리자 도준은 몸을 뒤로 물리며 대표의 손을 피하려는 시늉을 보였다.

[이도준-!]

어린아이들의 천진한 웃음소리가 도준의 귓가에 울렸다. 온 머릿속을 헤집는 그 앳된 웃음소리 중에서 단연 튀는 것은 희찬의 맑디맑은 목소리였다.

[도준아! 축구 하러 갈래?]

희찬의 명랑한 목소리가 도준의 귓바퀴를 타고 맴맴 돌았다.

뒤이어 얼마 전 다시 만났던 희찬의 모습이 떠올랐다.

장희찬은 잘생겼다. 그리고 예쁘다. 큰 키에 훤칠한 외모를 하고서 웃는 것은 또 어찌나 해맑은지, 때에 따라 다른 분위기를 풍겨 내는 희찬이는 예나 지금이나 대체로 맑은 느낌이었다. 선이 가느다란 잘생김으로 듬직함을 뽐내다가도, 이따금 입꼬리를 올려 웃을 때면 예쁘다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것은 장희찬의 크나큰 장점일 것이다.

희찬의 변하지 않은 모습을 떠올리던 도준의 표정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행복을 곱씹다 보니 그 꼬리는 결국 아픔으로 닿았다.

달갑지 않은 먹먹함이 도준을 잠식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감탄을 자아내는 근사함을 뽐내던 도준은 금세 입술을 말아 물고 제 감정을 마주했다.

대표는 도준의 표정이 단계를 밟듯이 차근차근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눈썹을 들썩거렸다. 한껏 밝은 표정과 기분 좋은 눈빛을 보이더니 금세 나라지는 것을 보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거기, 그 보육원 난리 났었다며.”

그래서 부러 밝은 목소리를 냈다. 또렷한 시선을 머금은 도준의 검은 눈동자가 대표에게 닿았다. 밑도 끝도 없는 우울한 감정에 깊게 발을 들이기 직전에 들리는 대표의 말은 의아하기만 했다.

“왜요?”

도준이 인상을 한껏 누볐다.

남들은 그저 안쓰럽게만 볼지 모를 보육원이었지만, 적어도 도준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고향이고, 소중한 집이었다.

미디어에서 흔하게 다루는 보편적인 이미지와 달리 선생님들은 온정으로 원생들을 보살폈다. 혹시라도 누구 하나 아플까, 누구 하나 엇나갈까. 노심초사하며 부모의 마음으로 원생들을 어르고, 달래던 그들이었다.

그 때문일까. 사춘기에 들어서서도 모든 원생이 형제처럼 잘 지냈었다. 가끔 싸우기도 하고, 그래서 혼이 나기도 했지만, 갓 태어났을 때부터 보육원에서 자란 도준에게는 그저 소중하기만 한 곳이었다. 덕분에 대표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난리 났다’라는 말은 탐탁지 않았다.

“대 배우 두 명이나 나와서.”

“아……. 놀랐잖아요.”

내심 긴장했던 도준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대표는 장난기가 진하게 묻어나는 눈빛을 보이며 도준의 하얀 쌀밥 위에 반찬을 얹어 주었다.

“암튼……. 며칠 전에 희찬이 본 게 마냥 나쁘기만 한 건 아닌 거 같아요.”

“그러게,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야.”

“그러니까 대표님.”

“응?”

“촬영장 안 쫓아오셔도 괜찮아요. 희경이도 있고, 또…….”

가벼운 목소리로 제 의사를 전하던 도준의 목소리가 멎어 들었다. 뒤따라 튀어나오려는 ‘희찬이도 있다’는 말은 입을 닫는 것으로 삼켰다.

“그래도 전부 지방 촬영이잖아. 다음 주에 세트 보러 가기로 했다며.”

“괜찮을 거예요.”

“확실해?”

도준은 못 미더운 대표의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말에 숟가락을 내려놓고, 의자 등받이에 느슨하게 몸을 기대었다. 팔짱을 끼고 대표를 바라보는 도준의 눈썹이 장난스레 움찔거렸다.

“대표님,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회사 망하고 있어요? 대표가 왜 이렇게 일이 없어요?”

또래와 다르지 않은 진한 장난기가 묻어나는 도준의 목소리에는 대표도 별수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대표는 도준을 향해 두 손바닥을 들고서 항복의 의사를 보였다. 촬영 중에도 상태가 저 정도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안심이련만.

“백수라는 오해받기 싫으시다면, 서울에 계세요. 저 괜찮아요.”

도준은 다시 제 목소리에 힘을 주고 또박또박 심중을 전했다. 우스갯소리로 ‘회사가 망하고 있는 건 아니냐.’ 하고 말한 도준이었지만, 대표가 바쁘다는 것쯤이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다 싶으면 곧바로 쫓아오는 대표였기에, 지방까지의 동행은 한사코 말리고 싶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