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 출항 (3/18)

02. 출항

새벽부터 바쁘게 달린 차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멈췄다. 서울과는 달리 한산한 동네에 들어선 차는 골목이 좁아지자 속도를 줄이고 서행하며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형, 다 왔어요.”

“으음……. 어디야?”

도준은 잔뜩 좁혔던 미간을 억지로 눌러 펴고 낯선 풍경을 살폈다.

“호텔이요.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촬영장 둘러본대요. 형 올라가서 조금 더 주무시면 될 거 같아요.”

“응, 고생했어.”

매니저가 지낼 호텔이라며 내려 준 곳은 서울의 고급 호텔 부럽지 않은 으리으리함을 자랑했다. 그 경관에 도준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 호텔로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집에서도 제대로 잘 수 없는데 호텔에서 제대로 잘 수 있을 리가 만무했지만, 지방으로 온 이상, 매일 서울로 올라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받아들여야만 하는 현실에 도준의 울대가 울렁거렸다. 주머니 속에 밀어 넣은 손은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빙글빙글 도는 회전문을 타고 호텔 로비로 들어왔을 때는 제법 부산한 광경이 도준을 반겼다. 먼저 도착한 배우들과 제작진들이 한곳에 어우러져 복작거리는 소란을 자아내는 중이었다.

“어, 도준이 왔어?”

“안녕하세요.”

도준은 멀리서부터 저를 알아보고 손을 흔드는 임 감독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네었다.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뎌 무리에게 다가갔다.

배우 중에는 도준에게 친근하게 대하는 사람도 있었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도준은 이번에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친근한 배우들에게 조금 더 살갑게 인사를 건네며 안부를 물었을 뿐이고, 제게 탐탁지 않은 사람들에겐 같은 태도를 보였을 뿐이다.

멀뚱히 서 있는 도준의 옆에 친근한 목소리를 내는 남자가 다가왔다. 상견례 때도 희찬의 옆에서 도준을 제법 잘 아는 것처럼 굴었던 남자는 그의 말대로 도준과 꽤 친밀해 보였다. 도준 역시 남자를 반겼다. 벌써 몇 개째 작품을 함께하며 의를 쌓아 온 좋은 동료였다.

“여기 호텔 촬영하는 동안 우리가 통으로 빌렸대.”

“아, 그래요?”

“역시 K액터스야, 그치?”

대표가 ‘눈부신 항해’에 애착이 있다는 것쯤이야 그간 그가 보이는 행동으로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출연진과 제작진의 숙소를 전부 제작사에서 해결했다는 말이 도준의 가슴에 크게 닿았다.

남자가 주절주절 전하는 모든 말들이 저를 향한 대표의 배려로만 느껴졌다면 과한 걸까. 도준은 불편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며 턱 부근을 만지작거렸다.

호텔도 이 근방에서 가장 좋은 호텔로 잡았다고 했다. 세트장은 호텔 주변의 허름한 동네 부지를 사들여 아예 새로 지었다고 했다. 그를 듣던 도준은 저도 모르게 큰 숨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객실에 올라가면 전화 한 통 드리는 게 좋겠지, 싶다.

“자, 도준이 방 키.”

감독이 도준에게 건넨 것은 선배가 쥔 하얀 카드키와는 조금 다른 형태의 키였다. 도준은 이리저리 뒤집어 보며 호수를 확인했다. 2300A. 23층이라는 건 알겠는데 숫자로 표기된 호수는 따로 없는 것이 의아했다.

도준의 까만 눈동자가 감독에게 닿았다. 감독은 도준의 의문이 무언지 아는 듯 그저 도준의 손등을 토닥이며 잠시 기다리라는 듯한 제스처를 보였다.

소란스럽게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자신의 방으로 흩어졌다. 그에 호텔 로비에는 금세 적막이 앉았다. 무거운 적막 위로 잔잔한 음악 소리가 섞였다. 사람들이 많을 때는 의식도 하지 못한 음악 소리였는데, 이제는 선명하게 닿는 그 선율이 청명한 바깥 날씨를 그대로 옮겨 온 것 같았다.

“곽 대표가 네 방 신경 쓰라고 얼마나 엄포를 두던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하면 또 차별한다고 할까 봐.”

“아, 네…….”

사람들이 사라진 후에야 감독은 조곤조곤 사정을 전했다. 생글 웃는 감독에게서는 인자함이 물씬 묻어났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그의 마음이 아주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촬영 전부터 분란을 조장하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 모든 배우를 공평하게 신경 써야 하는 감독으로서는 그 역시 신경 써야 하는 배우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조심스러울 터였다.

키를 받았으니 올라가면 되려나.

간밤에 제대로 된 잠을 자지 못한 데다, 차에서 워낙 정신없이 잔 탓에 목 관절이 욱신거렸다. 목을 어루만지고 주무르는 손에 힘을 주었던 도준은 저 멀리서 짐을 들고 올라오는 매니저를 발견하고 얼른 매니저에게 다가갔다.

“무겁지, 내가 좀 가져올걸.”

“아니에요. 형 목 아프세요?”

“너무 잘 잤나 봐. 올라갈까?”

“네.”

도준은 매니저의 양손에 묵직하게 들린 캐리어를 건네받았다. 손에 실리는 무게에서 안정감이 느껴졌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도준은 올라가는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며 잔잔한 음악을 귀에 담았다.

아까부터 호텔 내부에 도사린 호텔 특유의 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그 향은 어렴풋이 좋지 않은 느낌이 남아 도준의 살결을 훑는 듯했다. 도준의 인상이 점차 굳어 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크게 티를 내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할 뿐이었다.

그런 도준의 곁에 감독이 자리했다. 스태프들까지 전부 흩어진 로비에 남은 사람은 도준과 매니저 그리고 감독이 전부였다.

감독은 친근한 목소리로 매니저와 대화를 나눴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웅웅 무거운 울림을 남겼으나 이번에도 도준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들의 대화에 응할 기운이 없는 탓이었다.

“너 요즘도 다른 소리 들리면 잘 못 자나 봐?”

“뭐, 항상 그렇죠.”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소리마저 조용하다. 고급 호텔답게 모든 소음을 최소화한 공간은 번쩍번쩍 화려한 빛이 비산하며 호화스러움을 뽐내는 듯했다.

이윽고 띵, 맑고 경쾌한 종소리가 울렸다. 23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보기만 해도 탄성이 절로 나오는 우아하고 세련된 인테리어의 복도는 가장 최고층에 있는 스위트룸 라인의 찬란함을 머금은 채였다. 한 층에 두 개의 객실로만 구성된 곳은 언뜻 봐도 값비싼 예술품으로 그 위용을 자랑했다.

새빨간 카펫과 상반된 위에서 아래로 곧장 떨어지는 조명이 발이 딛는 길을 훤히 밝혔다.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조명이 곳곳에 자리한 유리 장식품에 부딪혀 오만 갈래로 흩어졌다. 표산하는 빛이 하얀 벽에 닿자 오색 빛의 오묘한 문양이 새겨졌다.

“이 층은 너랑 희찬이 둘만 쓸 거야. 아무튼 최소한만 지낼 거야.”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괜찮은데…….”

천천히 발을 내딛는 도준의 옆에서 다시 설명하는 투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준은 멋쩍은 듯 손끝으로 구레나룻 부근을 긁적거렸다.

“내가 한 거 아니고, 너희 대표가 한 거야. 여기는 네 방, 저쪽 끝은 희찬이 방. 아래층에 우리 있을 거니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네, 감사합니다.”

“이따가 희찬이랑 보기로 한 거 안 까먹었지? 이따 보자, 푹 쉬어.”

“네, 쉬세요.”

감독의 두툼한 손이 도준의 등을 퍽퍽 두드렸다. 거친 스킨십에서 애정을 느낀 도준은 부러 밝게 웃으며 고개를 푹 숙여 인사를 건네었다.

“여기 진짜 비쌀 거 같아요.”

“맞아, 그럴 거 같아.”

“형 덕분에 저도 이런 데서 지내 보네요.”

배우와 매니저가 함께 방을 쓰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촬영 중에는 도준의 상태를 가까이에서 볼 수 없다는 것에 우려를 느낀 대표는 도준이 매니저와 함께 방을 쓰기를 바라는 듯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는 것은 도준 역시 기꺼운지라, 흔쾌히 매니저와 함께 방 앞에 섰다.

“이런 데가 좋아?”

그저 신이 나 방방거리는 매니저를 보던 도준은 고개를 비스듬히 꺾어 매니저를 향해 고개를 절레 저어 보이고는 카드를 문 앞에 가져다 댔다.

이어서 카드와 문이 만나자 높은 톤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덜컥 이음새가 풀리는 소리도 들렸다. 도준은 느릿한 행동으로 문고리를 돌려 호텔 객실 문을 열었다.

호텔에 들어선 순간부터 기저에 깔려서 삐죽삐죽 고개를 내밀었던 좋지 않은 기분이 삽시간에 온몸을 덮었다. 문이 열린 후, 보이는 객실의 풍경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힌 도준은 속이 심하게 메슥거리는 것을 느꼈다.

객실이 좋지 않다는 게 아니다. 대표가 저를 생각해 마련해 준 객실은 매니저와 둘이 지내기엔 과하게 화려했고, 지나치게 넓었다. 한마디로 과분하다는 말이다.

[너 지낸다고 호텔을 얼마나 골랐는지 몰라.]

언젠가 들었던 대표의 목소리가 귓바퀴를 타고 맴돌았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화려한 빛을 머금은 객실은 호화로웠다. 다른 사람이 봤으면 입을 떡 벌리고 여기저기 구경하러 쏘다녔을지도 모르겠다. 도준의 매니저가 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도준은 그러지 못했다.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은 본드로 붙인 것처럼 현관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형! 뭐 해요, 현관에 뭐 있어요?”

“어, 아냐.”

매니저의 경쾌한 목소리가 도준을 잡아당겼다. 도준은 자칫하면 우울해질 뻔했던 것을 뿌리치고, 신을 벗었다.

“형, 형! 여기 보세요!”

가는 곳마다 탄성을 지르며 ‘우와’를 연발하던 매니저가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도준을 불렀다. 도준은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오……. 좋은데?”

“여기 형 방인 거죠?”

“그런가 봐.”

매니저와 도준의 발이 멎은 곳은 가장 안쪽의 침실이었다. 조용한 침실은 도준의 방과 같은 모습이었다. 채광을 전부 차단한 방은 화사한 다른 곳과 달리 어두웠고, 그 흔한 시계조차 들이지 않아 어떠한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도준은 그 안에서 안정감을 느꼈다. 조심스럽기만 하던 발걸음에 용기가 붙어 터벅터벅 주저 없이 발을 내디뎠다.

침대와 조금 떨어진 벽에 자리한 옷장, 구석 통로 안쪽으로 난 화장실, 커튼을 걷으면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통창이 있지만, 앞으로 걷힐 일은 없을 곳까지. 이 역시 대표의 세심한 배려일 것이다. 비로소 도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형, 저는 형 방에서 나오면 저기 바로 보이는 방에서 지낼게요.”

“응.”

“이따가 몇 시까지 감독님 방으로 가시면 돼요? 깨워 드릴까요?”

“아, 아냐. 내가 일어나서 갈게. 너도 쉬어.”

“네!”

매니저가 사라지자 적막이 도사렸다. 조용한 방에서 침대 위에 우두커니 앉아 시간을 헤아리니 금세 낯선 냄새가 도준의 코끝을 괴롭혔다.

그저 호텔 방을 봤을 뿐이고, 그 향을 맡았을 뿐인데 아득한 과거가 눈앞에 선명히 피었다. 분명 그때 그 호텔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음에도 호텔에서 나는 특유의 향은 도준의 목을 옥죄고 숨통을 틀어막았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시야를 차단한 도준은 이불을 틀어쥐고 편안하게 숨을 쉬려 노력했다. 무언가를 향해 혼신의 힘을 다해 저항하는 듯한 도준의 모습은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달갑지 않은 온도와 공기가 지겨워, 결국 잠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감독이 일러 준 시간이 가까이 온 것을 확인한 도준은 편안한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재촉했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이 호텔 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희경아, 갔다 올게.”

“어, 네. 형. 다녀오세요.”

매니저에게 자신의 외출을 알린 도준은 하얀 비니를 쓰고, 검은색 후드티의 후드까지 뒤집어쓴 채로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한 손에는 대본을 들고, 다른 한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고서 목을 이리저리 뚝뚝 꺾어 대는 모습은 그가 느끼는 따분함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그런 도준의 등을 퍽 소리 나게 때리는 손이 있었다.

“아!”

갑작스러운 통증에 가슴을 바짝 펴고 인상을 찌푸린 도준은 못마땅한 시선을 돌려 자신을 때린 사람을 바라봤다. 도준의 등 뒤에 선 것은 생글생글 웃는 낯의 희찬이었다. 그에 도준은 인상을 한껏 누비고서 등을 어루만졌다.

“야! 어깨 좀 펴!”

“아, 아파.”

“반가워서 그러지. 아팠어?”

도준의 널따란 등 위에서 두 사람의 손이 만났다. 한껏 찌그러진 도준의 얼굴을 본 희찬이 해맑게 웃으며 자신이 때린 도준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 앞에서는 짜증을 낼 수도, 심통을 부릴 수도 없었다. 도준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웃거나, 웃음을 참거나. 둘 중 하나가 다였다.

환하게 웃는 희찬을 보니 왜인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조막만 한 뽀얀 얼굴에 뚜렷한 이목구비가 자리한 희찬은 여지없이 예쁘기만 했다. 큰 키에 다부진 몸을 하고서 생글생글 웃어 대는 게 또 얼마나 귀여운지.

도준은 괜히 눈썹을 꿈틀거리며 희찬에게서 눈을 떼고 정면을 바라봤다. 엘리베이터 문 가득 두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왼쪽 문에는 도준이, 오른쪽 문에는 희찬이 꽉 메운 탓에 다른 배경은 보이지도 않았다.

“야, 너랑 나랑 옷 비슷하게 입었다.”

“그러게.”

“취향 어디 안 가나 봐. 이거 비니 나랑 잘 어울리지?”

희찬의 말대로 두 사람은 비슷하게 챙겨 입었다. 채도가 쨍한 파란색 비니를 쓰고, 멜란지 색의 후드티를 입은 희찬은 넓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어 댔다.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팔 사이에 대본을 끼운 채로 계속 장난을 거는 희찬 덕에 도준은 긴장 속에 편안함을 느꼈다.

장희찬은 변하지 않았다. 마냥 해맑고 밝았던 모습 그대로 자신을 대하는 희찬 덕분에 불편했던 기색은커녕 마음 가득 안정이 도사려 오랜만에 숨이 개운해지는 듯했다.

이윽고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환한 빛이 도사리는 곳에 동시에 발을 들인 두 사람은 이내 아무 말 없이 정면을 응시했다. 가끔 희찬의 곁눈질이 도준에게 닿았으나, 도준은 그에 응하지 않았다.

“아프게 때려서 짜증 났어?”

“그런 거 아냐.”

“맞는 거 같은데.”

그 잠깐의 정적도 희찬은 어색했던 모양이다. 희찬은 삐죽거리는 도준을 놀리려는 모양으로 윗몸을 숙이고 도준을 올려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닿기 무섭게 도준이 눈을 휙 피해 버렸다. 희찬은 그조차 놓치지 않고 집요하게 도준의 시선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아니라니까.”

도준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띵’ 맑고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고작 한 층 아래로 내려오는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그 시간은 마치 억겁의 시간 같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무섭게 도준이 희찬에게서 도망이라도 치듯 엘리베이터를 벗어났다.

2205호.

감독이 알려 준 호실을 찾아 움직이는 도준의 걸음은 분주했다. 희찬은 그런 도준의 뒤를 따르며 생글생글 즐거운 미소를 머금었다.

“감독님, 저희 왔어요.”

― 어, 잠시만.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동안에도 희찬의 짓궂은 장난은 멈추지 않았다. 그건 도준에게는 아주 익숙한 일이었다.

자고로 장희찬이라 하면, 응당 1분도 쉬지 않고 떠들어야 하는 것이 그의 본성이었고, 그 수다의 대부분은 장난이었다. 그를 떠올린 도준은 희찬의 장난에는 반응하지 않으면서도 은은한 미소를 피운 채로 희찬을 대했다.

철문 너머에서 우당탕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건지, 성큼성큼 문으로 걸어오는가 싶다가 다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안쪽은 제법 분주해 보였다.

그러다 문이 벌컥 열렸다.

“아악!”

문에다 귀를 바짝 대고 안쪽의 동향을 살피던 희찬을 도준이 잡아당겼다. 벌컥, 거칠게 열리는 철문에 혹시 다칠까 우려하는 마음이었으나, 희찬의 원망 어린 시선은 도준에게로 향했다.

무릎을 짚은 채로 거친 기침을 연달아 토하는 희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금세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도준을 올려다보는 희찬의 시선에서는 원망과 어이없음이 동시에 읽혔다. 도준은 은근슬쩍 후드를 쥐었던 손을 놓고 시선을 돌려 허공을 쳐다봤다.

선의에서 나온 행동이었는데 행동이 거칠었던 모양이다.

조금 민망해졌다.

“야, 친절할 거면 친절하고, 거칠 거면 거칠래? 이건 뭐 치킨도 아니고 반반이야.”

“놀래서 그랬지. 안 다쳤으면 됐잖아.”

“와, 방금 죽을 뻔했는데.”

희찬의 넉살 좋은 목소리에 도준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감독이 살짝 열어 놓고 간 문고리를 쥐고 활짝 열어젖힌 도준은 먼저 몸을 들이고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가 다시 희찬을 바라봤다.

하얀 피부에 새빨갛게 피가 몰렸다. 그에 도준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렇게 세게 당겼나. 잠시간 목을 만지며 다른 곳을 보던 희찬이 도준의 시선을 느끼고 장난스럽게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숱한 시간 동안 아무에게도 동하지 않았던 심장이 쿵쿵, 거칠게 뛰는 것을 느낀 도준이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언제 봐도 예쁜 장희찬은 예나 지금이나 본인의 화사한 빛을 잃지 않은 채였다. 오랜 세월을 피해 온 것이 무색하게, 그런 장희찬이 좋았다. 그건 저 역시 변하지 않은 부분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도준은 자신이 정한 ‘때’를 떠올리고서, 희찬과 마주한 시선에서 얼른 눈을 떼고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며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안 들어와?”

“아, 들어가.”

티격태격하며 들어오는 두 사람을 감독이 반갑게 맞이했다. 희찬을 피하는 듯했던 도준이 의외로 희찬과 잘 어울리고 있음에 감독도 이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음, 어울린다기보다 일방적으로 희찬이 치근덕대는 것 같았지만, 아무튼. 두 사람은 서로를 대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그래, 저 둘은 저렇게 묶어 놔야 비로소 진정한 하나가 된 모습을 보인다. 감독은 즐거운 미소를 띤 채로 두 사람에게 음료도 권했다.

감독은 두 사람을 앉혀 둔 채로 차근차근 차후 일정에 관해 설명했다. 촬영은 곧바로 시작해서 3월 초에 마무리할 예정이고, 여느 드라마 촬영장이 그러하듯 순서대로 촬영하는 것이 아닌 비슷한 장면은 모아서 한 번에 촬영하겠다고 했다.

설명을 듣는 도준은 그저 고개를 주억거리며 간간이 대본 위에 메모를 새겼다. 반면에 희찬은 그때그때 의문이 드는 것을 거침없이 물었다. 그러려니 넘어가는 도준과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이는 희찬 덕분에 도준이 얻어 내는 정보의 양도 많아졌다.

“근데, 도준아. 너 어디 불편해?”

“네?”

“왜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어. 뭐 마음에 안 드는 거 있어? 이해 안 가는 거나?”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인상이 또 어두워진 모양이다. 감독의 말에 도준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저 호텔의 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호텔이 좋은 것은 둘째치고, 어딘가 자꾸 불편한 것이 영 거슬렸다. 겪은 일이 있으니 드문드문 고개를 쳐드는 불안함에 신경이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됐고. 너희 키스 신은 괜찮지?”

“…….”

“…….”

감독의 질문에 도준은 물론이고, 내내 조잘거리던 희찬도 입을 꾹 다물었다. 별안간 얼굴이 화끈해졌다. 그건 희찬도 마찬가지였는지, 얼굴을 도준의 반대편으로 돌리고 부채질을 해 댔다. 감독 쪽에서는 헛웃음이 터졌다. 프로 의식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배우들이라면서, 그래도 친구라고 ‘키스 신’을 떠올리는 것은 제법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그 모습이 참 순수해 보였다. 이미 이 바닥에서 볼 장 다 보고 살았으면서, 새삼 쑥스러워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마냥 귀엽게만 보였다.

“이제 와서 내외하자는 건 아닐 테고? 그 정도는 다들 각오한 거 아냐?”

“그……렇긴 한데…….”

“그럼 됐지. 자, 오늘은 여기까지. 올라가서 푹 쉬어들.”

감독은 경쾌하게 박수를 두 번 치는 것으로 마무리를 알렸다. 그에 두 사람도 가벼운 몸을 일으켜 감독의 객실을 벗어났다.

내려올 때와는 달리 두 사람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골똘한 생각에 빠진 채로 초점 없는 시선으로 어딘가를 멍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해인아.”

“응.”

“잘 자.”

“……너도.”

희찬은 예의 그 맑은 목소리로 굿 나잇 인사를 건네었다. 간단한 말로 인사를 대신한 도준은 호텔 객실 문을 열고 들어오기 무섭게 큰 숨을 터뜨렸다.

통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어둑했다. 어느덧 어스름이 내린 하늘에 작은 별이 촘촘하게 박혀 들었다.

지난밤, 도준은 결국 호텔의 향을 이겨 내지 못하고 온몸을 떨어 가며 발작을 했다. 귓가에 도사리는 남자들의 무수한 목소리가 도준을 괴롭혔고, 그 후에는 기억이 없다. 그저 눈을 뜬 지금은 침대 위에 똑바로 누운 채라는 것이다.

덕분에 푹 잘 수 있었다. 이게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악몽을 꿀 새도 없이 정신을 잃은 탓에 휴대폰이 징징 울릴 때까지 고른 숨을 쉬며 쥐 죽은 듯이 편안한 잠을 잤다. 침대를 울리는 진동에 눈을 뜬 도준은 간만의 개운함에 기지개를 켰다.

금일 촬영 세트 사전답사 14시부터 진행합니다.

각자 점심 먹고 로비에서 만날게요.

간밤에 남겨 둔 연락은 없을까 찬찬히 훑는 도준은 눈에 띄는 메시지를 발견했다.

도준의 까만 눈이 휴대폰 화면의 가장자리로 향했다.

어느덧 10시가 훌쩍 넘어갔다. 도준은 모이기로 한 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인지하고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가뿐한 다리를 놀려 방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굳게 닫혔던 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방과 제일 가까운 벽에 붙은 소파 위에서 쪼그린 채로 잠든 매니저의 모습이 보였다. 분명 매니저도 함께 쓰는 객실이고, 맞은편 방에서 지내겠다고 말했던 매니저인데, 그는 거실에서 아주 피곤한 모습으로 잠든 채였다.

“희경아. 들어가서 자.”

도준의 단단한 손이 조심스레 매니저의 어깨를 쥐었다.

“네에…….”

도준의 손길에 닿자 매니저의 입에선 잠이 덜 깬 잠투정이 나왔다. 풋풋한 실소를 터뜨렸던 도준은 조금 더 힘을 주고 매니저의 어깨를 부드럽게 흔들었다.

“응? 희경아. 들어가서 자.”

“어, 형, 형. 괜찮아요?”

천천히 눈꺼풀을 들던 매니저의 눈이 번뜩 뜨였다.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킨 매니저는 두 눈을 비비적거리다가 금세 걱정으로 울먹거렸다.

“괜찮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저는 형 그렇게 심한 줄 모르고……. 죄송해요, 제가 진짜 잘 생각했어야 했는데.”

매니저는 다짜고짜 사과를 건네었다. 예상하지 못한 사과에 도준의 고개가 갸우뚱거렸다. 매니저를 바라보는 도준의 눈에서는 순수한 의문이 일었다.

“대표님이 형 아플 때 손대지 말라고 하셨었는데.”

“아…….”

“그거 진짜 제일 중요하다고 계속 말씀하셨거든요. 근데 제가 너무 놀라서…….”

매니저의 말을 듣던 도준의 입에서 별안간 낮은 웃음이 터졌다. 대표의 세심함은 도준의 예상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다. 몸에 타인의 손이 닿는 것을 싫어하는 도준을 알고, 매니저에게 당부를 거듭했을 대표를 떠올린 도준은 그저 웃는 것 말고는 별 달리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걱정에 절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매니저가 불현듯 귀여웠다. 도준은 매니저의 어깨를 토닥이던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손바닥에 닿아 까슬하게 느껴졌다.

“괜찮아, 네 탓 아니야. 들어가서 자.”

“형은 어디 가시려고요?”

“아. 이제 씻고 점심 먹으면 모일 시간일 거 같아서.”

“그럼 저도 같이 준비해야죠!”

가벼운 사전답사라 혼자 다녀와도 된다고 생각했건만, 매니저는 꼭 함께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구태여 그의 호의를 무시할 생각은 없었기에, 도준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려면 얼른 씻고 나와. 시간 없어.”

“네!”

매니저가 부리나케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도준은 나갈 채비를 하기에 앞서, 테라스 유리문을 활짝 열어 바깥 공기를 들였다.

기분 나쁜 호텔의 향이 많이 빠지긴 했으나, 여전히 잔잔하게 남은 탓에 숨을 편하게 쉬는 것이 어려웠다. 이왕이면 이 기분 나쁜 냄새가 다 빠져나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차가운 바람이 살결을 스쳤다. 상쾌한 공기와 함께 거실 바닥에 내려앉은 환한 햇살이 기분 좋은 오전의 향을 머금었다. 도준을 괴롭히던 축축한 기억의 향수도 금세 빠져나갔다. 그 대신 겨울 특유의 향이 온 호텔 객실을 가득 메웠다. 차갑지만 맑은 공기에 도준은 비로소 기분 좋은 미소를 만면에 피워 냈다.

“아, 맞다. 형.”

“응?”

샤워를 마치고 나온 도준을 매니저가 불러 세웠다. 샤워하면 족히 40분이 걸리는 도준을 기다렸다는 듯이 부르는 매니저는 어린아이 같은 눈빛을 보였다.

도준은 머리에 얹어 둔 수건으로 물기를 털어 내며 두 눈을 치켜떴다.

왼쪽, 오른쪽 혹은 뒷머리. 마르지 않은 곳을 찾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근육이 도준의 매력을 더했다.

“이따가 희찬이 형이 점심 같이 먹재요.”

“장희찬?”

도준의 기다란 눈이 날카롭게 뜨였다. 어느새 가지런히 놓인 옷을 입다 말고 매니저를 보는 도준의 눈빛이 곱지 않다. 매니저는 일순 움츠러드는 어깨를 부러 더 당당하게 폈다.

“네, 형 희찬이 형이랑 친하셨어요?”

“……내가 걔랑 친하기만 하겠어.”

도준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장희찬. 세 글자를 떠올리자 도준의 너른 가슴이 뭉근함을 머금었다.

희찬아, 부드럽게 혀를 굴려 곱씹을 때는 뭉근함이 설렘으로 바뀌었다.

찬아. 예쁜 애칭을 머금은 도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었다.

호기심이 가득 묻어나는 매니저의 시선은 애써 무시했다. 집요하게 얼굴에 닿는 검은 시선을 느꼈지만, 도준은 그에 응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내 이름은 장희찬이야! 빛날 희, 빛날 찬! 어디서든 빛나는 사람이 되라고 지어 준 이름이래, 내 이름 예쁘지?]

맑게 갠 희찬의 앳되고 명랑한 목소리가 도준의 귓전을 울렸다.

도준은 이내 팔을 들어 제 눈을 가렸다.

빛날 희, 빛날 찬.

그래, 그 환한 미소와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비출 도, 밝을 준.

뒤이어 자신의 이름을 떠올린 도준은 커다란 한숨을 들이켰다가 깊이 내뱉었다. 그 숨에는 도준의 아릿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

보육원에서 함께 지낼 때도 사람들은 두 사람을 묶어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입을 모았었다. 이름부터 운명이라느니, 어쩜 그렇게 잘 어울리냐느니 하는 말들은 덤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정말 그 사람들의 말처럼 최고의 한 쌍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감히 틈을 비집고 들어올 수도 없을 만큼 서로를 꽉 붙든 채로 놓지 않았던 당연한 세트였다.

누구보다 찬란한 빛을 내던 우리는 퍼즐 조각처럼 서로에게 딱 맞는 사람으로 예쁜 시간을 그렸었다.

너와 나는 이름부터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그래, 그랬었다.

아득한 과거 저 너머의 화사한 빛이 도준의 몸을 휘감았다. 황홀하기까지 한 그 기억에 도준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자리했다. 누군가 세게 짓누르는 듯한 감각에 도준은 일부러 잔 침을 삼키며 제 감정을 달래려 노력했다.

[도준아, 우리 꼭 성공하자.]

[응, 내가 나중에 꼭 너 비춰 줄게.]

[그럼 나는 밝게 빛나면 되겠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한 말이었지만,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 아주 어렸던 언젠가의 대화를 떠올린 도준은 감은 눈 위로 차오르는 희찬의 말간 미소를 마주했다.

그 형상은 마치 실제 같았다. 희찬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밝고 찬란했다.

도준의 입에서 커다란 한숨이 터져 흘렀다. 그에 매니저의 의아한 시선이 도준에게 닿았다. 도준은 이번에도 그 시선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희찬과의 추억을 곱씹고 되뇌며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에 힘을 줄 뿐이었다.

도준은 희찬의 매니저가 알려 준 약속 시각에 맞춰 매니저와 함께 로비로 나왔다. 먼저 나온 희찬의 높은 목소리가 로비에 울려 퍼졌다.

자연히 도준의 시선이 희찬에게 향했다. 희찬의 밝은 머리칼에 햇빛이 내려 반짝거렸다. 그건 마치 희찬을 휘감은 후광처럼 보였다. 희찬의 밝은 얼굴이 휘어져 피워 낸 미소는 더없이 화사했다.

“해인아, 너 못 잤어?”

“왜?”

도준은 저를 두고 ‘해인’이라 부르는 희찬에게 의연하게 반응했다. 그래도 어제 대화 좀 나눴다고, 희찬을 대하는 것이 마냥 어렵지는 않았다.

전혀 모르겠다는 것처럼, 고개를 비스듬하게 꺾고 갸우뚱거리자, 희찬의 고개도 같은 모양으로 돌아갔다.

“아니, 피곤해 보여서.”

“잘 잤어, 괜찮아.”

“그럼 말고.”

가벼운 도준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희찬이 생긋 예쁘게 웃었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발을 맞춰 걸었다. 회전문을 지나 호텔 밖으로 나오자 가슴이 뻥 뚫리는 상쾌한 바람이 몰려왔다.

기분 좋은 상쾌함에 입꼬리가 동시에 치솟았다. 부서지는 햇살이 속눈썹을 거닐고, 그에 눈이 부시는지 눈살을 찌푸렸던 두 사람은 또 동시에 손을 들어 눈 위를 가렸다. 그 모든 행동은 마치 한 사람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점심 뭐 먹을래? 여기 물회 유명하대. 너 물회 좋아했잖아?”

“아무거나 괜찮아. 배만 차면 돼.”

점심 메뉴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시큰둥한 도준의 대답에 희찬이 따가운 눈총을 쏘았다.

먹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는 이도준이라니.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반응이라 희찬이 눈썹을 들썩거렸다.

“그런 게 어딨어. 좋아, 싫어?”

“좋아.”

“그럼 좋다고 해야지, 뭘 아무거나 괜찮대.”

톡 쏘아붙이는 희찬의 말에도 도준은 대꾸하지 않았다. 마치 희찬의 그런 핀잔들이 지독하게 익숙하다는 것처럼. 어찌 보면 능청스러운 태도로 일관하는 도준에게서는 득도한 자의 느낌이 물씬 묻어났다.

목석같은 도준 옆에서 방방거리는 희찬의 모습은 마치 딱따구리 같았다. 뻣뻣한 도준에게서 어떻게든 원하는 대답을 얻어 내고, 제 마음대로 손쉽게 주무르는 희찬은 퍽 만족스러운 듯했다.

사이가 좋은 듯, 나쁜 듯. 헷갈리는 태도를 보이는 두 사람의 뒤를 의심 가득한 시선이 따랐다. 함께 밥을 먹기로 하고, 배우들의 뒤를 쫓는 매니저들의 것이었다.

언제부터 저렇게 친했을까.

의문을 품은 시선이 두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내 먼저 걷던 도준이 휙 뒤로 돌아 매니저를 바라봤다. 흠칫 놀란 매니저가 인상을 펴고 나긋하게 웃었다.

“희경아, 우리 물회 먹는대. 너 못 먹는 거 아니지?”

“네, 형! 저 괜찮아요.”

“조현아, 들었지! 해인이가 물회 괜찮대!”

“네―.”

두 사람은 이리 보고 저리 봐도 그저 친한 친구 같았다.

업계에 파다하게 퍼진 ‘앙숙’이라는 소문은 정말로 뜬 소문인 걸까.

서로에게 살가운 말투를 하거나, 다정한 행동들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서로에게 악감정이 있는 사람들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앙숙’도 아니면서, 왜 그에 대해 반박하지 않는 것인지. 왜 그렇게 인터뷰만 하면 서로의 이야기를 꺼린 것이며, 같은 작품은 왜 하지 않는 것인지. 그런 것들 말이다.

그렇다고 쉽게 질문을 건넬 수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의 입에서 상대의 이야기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금세 식사를 마친 도준과 희찬은 가게 앞에서 부른 배를 통통 두드렸다. 오래간만에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부드럽게 씹히는 육질이 좋았고, 혀에 닿는 차가운 육수도 만족스러웠다.

희찬은 주머니에 챙겨 둔 껌을 하나 꺼내 도준에게 건네었다. 받지 않으면 친히 까서 입으로 넣어 줄 기세에 도준이 껌을 받아 들었다.

“아아, 배불러.”

“잘 먹더라.”

“너도 좀 팍팍 먹지. 무슨 종이 씹는 것처럼 먹더라, 너. 어디 아픈 거 맞지?”

“아니, 배불러.”

다시 호텔로 돌아가는 동안에는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모르겠다. 희찬이 이야기의 문을 열면, 가만히 듣던 도준도 간간이 짧은 대답으로 응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이어지는 대화는 언뜻 보면 신기하다가도, 또 그들이어서 잘 어울리는 대화 방식인 듯했다.

“도준아, 희찬아! 얼른 와!”

희찬과 도준이 나란히 로비에 들어서자 한 무리의 사람이 두 사람을 반겼다. 그들은 간밤에 푹 쉬고, 새로운 촬영이 시작될 촬영 장소를 탐방하는 것에 제법 큰 설렘을 느끼는 모양인지, 하나같이 즐거운 모습이었다.

희찬은 무리를 향해 잽싸게 뛰었다. 그러고는 원래 무리 속에 있었다는 양 금세 그들과 하나 되어 즐거운 목소리로 담소를 나눴다. 그런 희찬의 뒤를 도준의 여유 있는 걸음이 따랐다.

무리가 도착한 곳은 호텔에서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나오는 산동네였다. 그곳에서는 세트장이라고 하여 여느 드라마 세트장처럼 집의 모양만 꾸며 뒀을 줄로만 알았던 두 사람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큰 투자가 이루어졌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실제의 판자촌을 그대로 재현한 동네는 도준과 희찬이 함께 지냈던 언덕까지 그대로였다.

이걸 다 새로 지은 걸까. 대표는 도준의 생각보다 훨씬 더 본격적이었다.

“와, 미쳤다. 완전 똑같아.”

두 사람은 연신 놀란 탄성을 터뜨리며 이 엄청난 경관을 눈으로 담으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네 곳곳을 기억 속 동네와 비교하며 살폈다.

다 쓰러져 가던 동네 구멍가게, 그 앞에서 항상 뒹굴던 투명한 초록색 유리병. 바람에 흩날리던 폐지들과 가끔 어린아이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널리 퍼지곤 했던 오락기까지. 어디 하나 섬세함을 놓지 않은 그 풍경에 어린 시절의 향수가 절로 피었다.

세트장을 살피던 도준이 바쁘게 주먹을 말았다가 펴길 반복했다. 핏줄이 솟을 정도로 세게 주먹을 말았다가 손바닥 가득 땀이 차오르면 다시 주먹을 펴 털어 댔다.

“희찬아, 도준아. 여기도 볼래?”

감독의 큰 목소리가 향수에 잠겨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두 사람의 적막을 깨부쉈다. 마치 다른 극에 끌리는 자석처럼 자신들을 끌어당기는 말에 두 사람은 어렵사리 걸음을 옮겨 감독에게 다가갔다.

“자, 여기가 이제 해인이, 인수 집으로 나오는 세트장이야.”

감독은 뿌듯한 목소리로 공간을 소개했다. 몸을 옆으로 돌려 손바닥을 쫙 펴고 “짜잔!” 외치는 목소리는 쾌활하기만 했다.

두 사람의 눈이 감독의 손을 따라 굴렀다.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마주하자, 희찬의 큰 눈이 더 크게 뜨였다.

“우와!”

희찬은 특유의 적응력을 자랑했다. 처음엔 놀란 낯을 보이더니, 금세 이 공간에 익숙해진 듯 밝은 목소리를 냈다. 곳곳을 바쁘게 휘젓는 희찬의 발걸음에는 즐거움이 그대로 묻어났다.

하지만 도준은 희찬과 같은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누군가 뒤에서 무릎을 친 것처럼 무릎 관절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씩 빠르게 뛰던 심장이 이제는 쿵쿵 거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도준은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메슥거리는 속에서 토악질이 솟구쳤다. 새빨갛게 피가 몰린 손이 파들파들 떨렸지만, 희찬 앞이었기에 손가락 끝까지 힘을 주고서 자신의 상태를 숨기려 무던히도 노력했다.

“와, 여기 우리 집이랑 진짜 똑같다. 그치, 옛날 생각나.”

“…….”

희찬이 팔꿈치로 도준의 몸을 쿡 찔렀다. 도준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감독님, 우리 집 온 적 있으세요? 진짜 대박이다!”

“완벽하지? 근데 도준이는 표정이 왜 그래? 별로야?”

세트장을 샅샅이 훑는 희찬은 연신 높은 목소리를 냈다. 떠오르는 추억을 마주하는 것에 부담이 없는지, 그의 목소리에서는 오롯한 즐거움만 느껴졌다.

그에 반해 도준의 안색은 파리하게 질려 버렸다. 도준은 목구멍을 비집고 나오려는 신음을 힘겹게 숨겼다. 한껏 풀어진 듯했던 전신에 숨 막히는 긴장이 다시금 도사렸다.

희찬의 말대로 세트장은 두 사람의 집을 그대로 그려 냈다. 지독하게 똑같은 풍경을 마주하니, 치미는 아릿함에 눈이 질끈 감겼다.

당연히 귓가에 소란스럽게 맺히는 감독이나, 희찬의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괜찮냐며 안부를 묻는 매니저에게도 응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주저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도준은 겨우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눈을 부릅떴다.

“아…….”

도준의 눈이 찬찬히 세트장의 구조를 훑었다. 보면 볼수록 기시감이 몰려왔다. 눈에 닿는 형상들은 하나같이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기주장을 해 댔다. 그 모습에 도준의 가슴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래, 저 창가에는 햇빛은커녕 가로등 불 하나도 들어오기 힘들었다. 어쩌다 휘영청 밝은 달빛이 방문할 때는 대부분 새벽 늦게까지 야간 잔업을 하고 온 뒤라 그 빛을 즐길 새가 없었다.

낮은 창가 옆에는 푹신한 것과는 거리가 먼 침대가 있었다. 아늑함은커녕, 등이 배길 것처럼 딱딱한 침대였지만, 그럼에도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에 행복을 느끼고는 했었다.

침대 위에는 사계절을 같이 보낸 해진 이불이 가지런히 펼쳐져 있었다. 밤에는 꼭 덮어야만 했기에, 일주일에 한 번씩 이른 아침부터 차가운 물에 빨래하고, 오후에는 널어 둬야 했던 얇은 이불이었다.

그 외에도 다 낡은 책상, 군데군데 녹슨 싱크대. 몇 개 없었던 그릇과 이가 나간 컵. 그리고 문밖으로 나와야만 사용할 수 있었던 화장실까지.

이 공간은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그 집을 완벽하게 담아냈다. 찌는 여름엔 몸이 녹을 것처럼 덥고, 추운 겨울엔 살을 에는 바람에 온몸에 동상이 걸릴 것만 같았던 그 시간이 그대로 녹아들었다.

이 공간에는 행복했던 우리의 웃음소리가, 노랫소리가, 대화 소리가 곳곳에 묻은 것 같았다. 쉴 새 없이 사랑을 속삭이고, 그 안에서 안정을 되찾곤 했던 어린 시절의 낭만이 스며들었다. 자연스레 아프고, 힘들고, 그럼에도 행복하고 즐거웠던. 그리고 결국엔 헤어져야만 했던 그날의 참담함이 떠올랐다.

발을 딛고 선 땅이 쑥 꺼지는 것 같았다.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하늘을 쨍하게 밝히던 태양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도준은 또 한 번 울컥 치미는 토악질을 참지 못하고 서둘러 세트장 밖으로 벗어났다.

“해인아? 야, 너 어디 가!”

뒤쫓아오는 희찬의 목소리에는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다급하게 쫓아온 매니저가 도준을 보살폈지만, 그조차 도준에겐 성가신 관심이었다. 그저 혼자 있고 싶었다. 그래서 매니저의 손길도 뿌리쳤다.

초주검이 되어 방으로 들어온 도준은 곧바로 침대에 몸을 뉘었다.

가슴이 쿵쿵 거칠게 울렸다. 가쁜 심박수는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했고, 초조함에 손톱을 톡톡 물어뜯기도 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렸다. 푸근한 이불 속에서 둥글게 몸을 만 도준은 무릎을 감싸 안은 채로 숨이 진정되길 바라고 또 바랐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일은커녕 희찬이한테도 갈 수 없는데…….

걱정하는 대표에게 ‘걱정하지 말라’ 호언장담했던 것과 달리 볼품없는 모습에 기운이 쑥 빠졌다. 무사히 해낼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초장부터 무너질 줄도 몰랐다. 앞으로의 날에 대한 자신도 없어졌다. 무수한 촬영이 진행될 그 공간에 익숙해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희찬으로부터 저를 감추게 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희찬에게서 도망쳤던 날, 도준은 ‘때’를 정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적어도 내가 무리 없이 너를 마주할 수 있을 때. 그때 희찬에게 돌아가겠노라고. 그렇게 다짐했었다.

하지만 이래서는 그때는 영영 다가오지 않을 것 같았다. 여전히 과거에 발목 잡혀 허덕거리는 자신의 모습이 못마땅했다. 장희찬은 저렇게 웃는데, 저는 여전히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담했다.

“어쩌지…….”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도준의 높은 콧대를 따라 투명한 물줄기가 흘렀다. 뜨뜻미지근한 그 열기가 다 식어 버린 도준의 의욕과 같았다.

지금이라도 촬영을 물릴까. 아니면 꾹 참고 해야만 할까. 서울에 올라가서 약을 조금 더 처방받는 게 좋을까. 차라리 그 세트장에서 먹고 지낸다고 할까.

복잡한 생각이 순서 없이 흩어지며 도준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또렷한 과거의 기억이 도준의 판단을 흩트렸다.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도준은 그저 후회로 얼룩진 잘못된 과거를 떠올리며 전신을 파르르 떨어 댔다. 부질없는 후회는 흐르는 눈물의 양을 더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도준은 숨을 죽인 채로 입술을 말아 물었다. 새빨간 도준의 입술이 치아에 짓이겨 핏기를 잃고 새하얀 색을 띠었다.

“해인아.”

문 너머에 선 사람은 희찬이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고 부드럽게 자신을 부르는 희찬의 목소리에 도준의 전신이 딱딱하게 굳었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가쁜 숨을 감히 터뜨리지도 못했다. 그저 애꿎은 이불만 세게 거머쥘 뿐이었다.

“희경이 보냈어. 나랑 얘기 좀 해.”

“…….”

“자?”

문을 타고 들어오느라 웅웅 울리던 희찬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닿았다. 아마 문을 열고 들어온 모양이다.

도준은 깜깜한 이불 속에서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직은 희찬과 대화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나 보네.”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 희찬의 무게에 눌린 침대가 푹 꺼졌다. 도준은 이불 속에서 갑갑한 호흡을 거듭했다. 희찬의 손이 제 몸 위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두꺼운 이불을 사이에 두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묵직하게 닿는 희찬의 손길은 퍽 부드러웠다.

“나는 이거 시나리오 보자마자 우리 얘기라고 생각하고 한다고 한 거였는데……. 그래서 너도 한다고 했을 때 드디어 우리가 같이 일할 수 있게 됐다고 되게 좋아했는데…….”

“…….”

“너는 아닌 거 같아서 조금 속상하기도 하고…….”

“…….”

“너도 알고 한 거겠지?”

침대맡에 앉은 희찬은 넋두리를 풀어놨다. 그의 목소리에는 그의 말대로 속상함과 약간의 착잡함, 그리고 깊은 한숨이 묻어났다. 도준은 희찬이 차근차근 전하는 진심을 귀담아들었다.

응, 맞아. 응, 그랬어.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대답은 그저 속으로만 읊조렸다.

“에휴, 자는 애 두고 뭐 하냐……. 준아, 잘자.”

이윽고 희찬의 손이 도준의 엉덩이를 토닥거렸다.

익숙하게 애칭을 부르는 희찬의 목소리가 정겹다.

도준은 울음이 터지려는 것을 겨우겨우 참아 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침대 끄트머리의 무게가 사라졌다.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도준은 비로소 케케묵은 한숨을 커다랗게 터뜨렸다. 도준의 뜨거운 숨이 이불 속을 뜨끈하게 데웠다. 온몸에 열이 도사리는 것이 느껴졌다. 도준은 객실의 철문이 닫히는 소리까지 들은 후에야 고개를 이불 밖으로 내밀어 차가운 공기를 마주했다.

살갗에 닿는 서늘한 공기가 달갑지 않다. 어느새 베개를 다 적실 정도로 흐른 눈물과 그 눈물 위로 닿는 차가운 공기에 볼이 시렸다. 도준은 터져 나오는 울음이 입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이를 꽉 깨물었다. 이가 부득 갈릴 정도로 세게 문 탓에 턱관절이 다 저렸다.

***

드라마 ‘눈부신 항해’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각자가 맡은 역할을 최선을 다해 소화해 내는 배우들은 하나같이 자신만의 빛을 찬란하게 밝히는 중이었다.

그건 도준과 희찬도 다르지 않았다. 주인공으로서 조금 더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촬영에 임하는 두 사람은 컷마다 온 힘을 다해 자신이 맡은 캐릭터를 소화하고자 노력했다.

덕분에 촬영은 순조로웠다. 캐릭터 소화능력이 탁월한 배우 이도준과 표현의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 장희찬의 만남은 다른 사람들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대단한 시너지를 냈다. 마치 드라마 속 인물 본인이 된 듯 말하고, 행동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단순한 ‘연기’로 치부하기에는 아까운 수준이었다.

S#13. 방송국 앞-밤. (감독과 해인, 인수 첫 만남)방송국 앞-밤

어두운 밤. 웅성거리는 무리. 사람들이 바쁘게 오르내리는 40인승 버스. 주변에 널브러진 촬영기기.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감독. 그 앞에 두 손을 모으고 선 인수와 해인.

감독 (손끝으로 종이를 팔락거리며, 인수를 바라보고) 네가 인수, (눈이 해인으로 향하며) 너는 해인이라고?

인수 네.

대답 대신 고개를 주억거리는 해인.

감독 (만족스러운 표정) 비주얼이 좋네. 오늘 바로 들어갈 수 있어? 마침 자리가 좀 비었거든.

휘어지는 인수와 해인의 눈꼬리. 즐거운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감독은 흡족한 모습.

감독(손가락으로 40인승 버스를 가리키며) 이따가 저 버스 타고 오면 돼. 잘해 보자?

사라지는 감독. 인수와 해인은 감독이 떠나기 무섭게 서로를 부둥켜안고 행복한 웃음을 짓는다.

해인과 인수의 해맑은 낯이 화사하게 휘어지니 주변의 공기가 달라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을 품고 무작정 엑스트라들이 모여 있는 집결지로 향한 두 사람은 다짜고짜 감독을 붙잡고 ‘연기를 시켜 달라’고 빌었었다.

그 당시 감독은 뭐든 하겠다는 두 사람의 의지보다는 두 사람의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단순히 엑스트라만 맡기기에는 상당히 비중 있는 인물이라 판단한 감독은 대사 한 줄짜리 역할을 흔쾌히 부여했다. 물론, 있을 수 없는 ‘기적’이었고, 지극히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그럼에도 퍽 만족스러운 결정이었다. 등만 보이는 엑스트라 몇 명을 골라 대사를 주려던 참에 훨씬 좋은 인물이 들어왔으니, 좋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인수와 해인이의 위대한 항해가 시작되었다. 배우라는 꿈을 안고 패기 넘치게 찾아간 촬영장에서 마주한 꿈의 어귀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오케이! 컷!”

극의 초반부 촬영이 진행 중이었지만, 희찬과 도준의 호흡은 대단했다. 두 사람은 마치 오래전부터 쌓고 쌓은 견고한 탑처럼 흔들리지 않는 조화를 자랑했다.

그건 두 사람에게도 만족을 안겼다. 컷 사인이 떨어지기 무섭게 촬영장 밖으로 나선 도준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두 사람이 함께한 시간이 끼치는 영향은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이 퍽 만족스러웠다.

더불어 분홍빛으로 피어오른 향수가 기분 좋았다. 오랜만에 처음 연기를 시작한 때가 떠올랐다. 그 시절의 그 패기는 다시 갖지 못할 것이기에, 기분 좋은 미소가 도준의 입가에 자리했다.

“점심 먹고 다시 모입니다!”

신명 나는 조감독의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시끄러운 장내를 조용히 벗어나는 도준의 어깨에 한 남성의 팔이 둘렸다. 단단하고 무거운 팔이 낯설어 도준은 저도 모르게 몸을 크게 움찔거렸다. 그에 자연스럽게 도준의 어깨에 둘린 팔도 거둬졌다. 도준은 굉장히 언짢은 표정으로 자신의 얼굴 가까이에 닿은 얼굴을 바라봤다.

희찬이었다.

도준의 눈에 띄는 큰 반응에 희찬은 의아함을 머금은 눈빛을 보였다. 희찬의 가지런한 눈썹이 거칠게 씰룩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성격 좋은 목소리가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점심 먹자.”

“나는 안 먹어.”

도준은 점심을 권하는 희찬에게 정중한 거절을 표했다. 도준이 식사를 즐기지 않는 건 촬영장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왜?”

“입맛 없어, 너 먹고 와.”

희찬이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희찬의 쾌활한 걸음과 발을 맞춰 걷던 도준도 걸음을 멈추고 희찬을 돌아봤다. 제 몸만 한 패딩을 걸쳐 입고, 앞머리에는 집게 핀을 꽂은 채로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 희찬의 얼굴 위에 햇살이 내려앉았다.

눈가를 거니는 햇살이 눈 부신 듯 희찬이 연신 눈을 찡긋거렸다. 가만히 그를 마주 보던 도준이 손바닥을 들어 희찬의 이마 부근에 가져다 댔다. 덕분에 희찬의 눈가에 친절한 그늘이 생겼다.

희찬의 빨간 입꼬리가 포물선을 그리며 예쁘게 치솟았다. 도준은 뒤늦게 제 행동을 자각하고 아차 했지만, 이제 와 손을 거둘 수는 없어 가만히 희찬을 바라봤다.

“아직도 속이 안 좋아? 내가 그때 소화제 두고 갔는데.”

“아, 그거 네가 두고 간 거였구나.”

희찬은 제법 걱정이 묻어나는 따스한 목소리를 냈다. 처음 세트장을 돌아봤던 날, 구역질하며 세트장에서 벗어났던 도준을 희찬이 찾아왔었다. 그리고 희찬이 떠난 자리에는 상비약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를 떠올린 도준은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여실히 드러내며 환한 미소를 보이는 도준의 모습은 근사하기만 했다.

“너 좀 이상해졌어.”

“뭐가?”

“먹는 거 되게 좋아했는데, 변했어.”

도준의 곧은 눈이 희찬을 바라봤다. 간혹가다 희찬이 과거 얘기를 꺼내는 일은 있었어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현재와 과거를 비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변했다’라니…….

자신의 상황을 달리 설명할 의지도, 생각도 없는 도준은 또 입을 꾹 다물었다. 생기를 머금었던 도준의 검은 눈동자는 어느새 차분히 가라앉은 채였다.

그 모습에 희찬의 가지런한 눈썹이 거세게 꿈틀거렸다. 마치 지금 도준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결국 도준이 희찬을 피해 다른 곳을 바라봤다. 도망과 회피는 도준에게 지독한 일상이었고, 그 모습 역시 희찬이 보기에는 ‘변한 모습’에 속하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됐어?”

따지듯 묻는 희찬의 말에 도준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희찬이 이 이상 캐묻지 않고, 토라진 채로 본인의 점심이나 챙기길 바랐다.

하지만 희찬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석상처럼 굳은 희찬은 요지부동이었다. 도준은 난감한 듯 미간을 긁적거렸다. 이 상황을 수습하고 싶었으나, 머릿속에는 도무지 그럴듯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따가 저녁 같이 먹자.”

결국 도준이 제 뜻을 굽히고 희찬을 얼렀다.

덕분에 희찬의 표정도 누그러졌다. 희찬의 옅은 눈빛은 여전히 매서웠지만 말이다.

“점심을 먹어야 오후 촬영도 힘내서 하지.”

“이따가……. 저녁 맛있게 먹자.”

“너…….”

운을 뗐던 희찬이 말을 고르는 듯 잘 익은 체리의 빛을 띤 입술이 열렸다가 닫히길 반복했다.

그를 지켜보는 도준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말아 물었다. 건조한 날씨에 바짝 마른 입술이 까슬하게 느껴졌다.

공중에서 맞닿은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레 얽혀들었다. 부드러운 시선에서는 따스한 온기가 묻어났다. 희찬은 가슴이 부풀 정도로 큰 숨을 들이켰다가 이내 체념한 듯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냐, 나중에 얘기해.”

“점심 맛있게 먹어.”

희찬은 제법 단호한 말을 건네었다. 희찬이 말하는 ‘나중에’라는 그 흔한 단어가 어찌나 무겁게 닿는지, 도준은 희찬이 사라지기 무섭게 떨리는 한숨을 쉬었다.

도준은 희찬이 제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세트장 바깥 구석에 마련된 흡연 구역으로 향했다. 희뿌연 연기가 가득 들어찬 투명한 부스는 매캐한 냄새를 머금었다.

좋지 않은 담배 냄새에 자연스레 도준이 미간을 좁혔다. 그 순간 아주 어릴 적, 희찬이 도준에게 핀잔주듯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도 담배 피우면서 담배 냄새 싫어하는 거 이기적이야.]

그 말은 틀린 것이 하나 없는 말이었다. 낮은 실소를 머금은 도준은 입술을 열고 담배를 씹어 필터에 숨어 있는 동그란 캡슐을 앞니로 톡 터뜨렸다. 상쾌한 멘톨 향이 입 안에 퍼졌다.

담배에 불을 붙여 빨아들이자 시원한 연기가 목젖을 때렸다. 기분 좋은 타격감에 도준의 입꼬리가 예쁜 포물선을 그렸다.

흡연실은 회전율이 좋은 편이다. 담배를 피우던 스태프들이 몇 번이 바뀌었다. 흡연실 한구석을 지박령처럼 지키는 도준만 빼고 말이다.

도준은 모든 사람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담배나 태우려 했다. 괜히 촬영장에서 희찬을 마주했다가, 부리나케 쫓아올지도 모를 따가운 눈총은 피하고 싶었다. 사람들의 분위기에 맞춰 어울리는 것 역시 즐기지 않았으니, 도준에게는 흡연실이 가장 마음 편한 공간이기도 했다.

“배우님, 이제 슬슬 모이는 거 같아요.”

“아, 고마워요.”

친절한 스태프의 말에 드디어 도준이 몸을 일으켰다. 흡연 구역에서 몇 발짝 나온 후에는 온 관절을 늘이며 스트레칭을 했다.

온종일 긴장하며 촬영한 탓에 온몸이 찌뿌둥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생각보다 촬영이 순조롭다는 거다. 직접 겪은 일을 자신의 말이 아닌 다른 대사로 그려 내는 것은 생각보다 더 재밌는 일이었다.

아마, 대사까지 같은 말이었다면 벌써 발작은 몇 번도 더 했겠지.

당연히 그럴 일은 없음에도, 머릿속에 떠오른 ‘혹시’가 도준의 입가에 쓴웃음을 앉혔다.

“어우, 냄새야…….”

흡연실에서 나온 도준은 팔을 크게 빙빙 휘저었다. 온몸에 밴 담배 냄새가 달갑지 않아, 머리를 탈탈 털기도 하고 차가운 바람에 팔을 대(大)자로 벌리고 서 있기도 했다.

어느 정도 냄새가 빠졌다고 판단한 도준은 안주머니에서 탈취제를 꺼냈다. 공중에 칙, 칙 분사하여 그 아래에서 한 바퀴 빙글 돌고, 다시 손목 안쪽과 옷 구석구석에 탈취제를 뿌려 담배 냄새를 완벽하게 가린 도준은 만족하는 듯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러던 중 자판기 앞에서 서성이는 스태프의 모습이 보였다. 무언가 고심하는 듯 손가락을 턱밑에 가져다 대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모습에 흥미가 생겼다.

스태프는 돈을 넣어 둔 채로 음료를 고르지 못하는 중이었다. 선뜻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갈팡질팡 헤매는 손가락에서는 깊은 고민이 묻어났다. 도준이 사뿐한 걸음을 놀려 스태프의 곁으로 다가갔다.

“뭐 고르세요?”

도준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스태프의 흔들리는 동공이 도준을 향했다. 스태프는 우물쭈물하며 말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 도준은 가만히 스태프의 말을 기다리며 말간 미소를 보였다.

“아, 배우님들이랑 감독님들 음료 고르는데 희찬 배우님이 뭐 드실지 말씀을 안 해 주셨어요.”

스태프의 고민을 전해 들은 도준의 눈도 자판기로 향했다. 이온 음료부터 탄산음료까지 각종 음료가 즐비한 가운데 도준의 눈에 띄는 음료가 있었다. 도준은 이내 입꼬리를 멋들어지게 올려 웃으며 긴 손가락을 뻗었다.

“이거, 인수 이거 좋아해요.”

“에? 이거요? 진짜요?”

“네, 이거 좋아해요.”

도준의 맑은 목소리에 스태프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 눈에서는 ‘그럴 리 없다’는 확실한 불신이 묻어났다.

도준은 낮은 웃음을 머금은 채로 스태프 대신 자신이 가리켰던 음료 하단의 버튼을 꾹 눌렀다. 버튼을 누르기 무섭게 ‘텅’ 떨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이어 데구루루 캔 구르는 소리가 났다. 자판기에서 음료를 꺼낸 도준은 뿌듯함을 머금은 채였다.

“믿으셔도 돼요. 입맛이 독특한 애라.”

“아……. 감사합니다…….”

스태프의 목소리에선 여전히 불신이 묻어났다. 도준이 건네는 하얀 배경에 소나무가 그려진 어른 입맛의 음료를 미심쩍게 받아든 스태프가 이내 먼저 세트장으로 향했다.

스태프의 반응이 아주 이해가 어려운 것도 아니다. 도준이야, 어릴 때부터 봐 왔기에 익숙하다지만, 아마 큰 후에 만났으면 남들처럼 인상을 찌푸렸을 거다.

장희찬은 특이한 입맛을 자랑했다. 남들은 ‘왜 먹느냐’며 질색하는 소나무 향 음료를 희찬은 매일 아침 찾아 마셨었다. 향이 독특해 싫다는 음식들은 모두 선두에서 맛을 보곤 하던 희찬이었다. 그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도준은 희찬의 입맛이 변하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럼 이제 희찬이 반응 보러 가야지.

도준은 전과 달리 싱그러운 낯으로 발을 옮겼다. 세트장 내부에 들어섰을 때는 스태프에게 음료를 건네받은 사람들이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는 중이었다.

희찬의 손에도 음료가 들렸다. 도준이 골라 준 그 음료였다. 희찬의 환한 낯이 예쁘게 휘어졌다.

“와! 이거 제일 좋아하는 건데!”

역시, 그럴 줄 알았다.

도준의 예상이 딱 들어맞았다. 도준은 높은 목소리를 내며 즐거워하는 희찬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희찬의 밝은 모습을 보는 것은 퍽 즐거운 일이었다.

“이도준 배우님이 희찬 배우님 그거 좋아한다고 하셨어요.”

“이야, 해인아. 기억하고 있었어?”

그걸 어떻게 잊어.

도준은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오려는 말을 애써 잡아 눌렀다. 그러고는 못 들은 척,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자리에 앉아 스태프들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촬영 시작이 다가오고 있으니, 머리를 만져야 했고, 촬영 장면에 맞는 의상으로 옷도 갈아입어야 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묻어 둔 희찬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지저귀었지만, 도준은 한마디도 응하지 않았다.

높은 톤으로 공간을 울리던 희찬의 목소리가 조용해졌다. 희찬은 금세 다른 생각을 하는 듯했다. 골똘히 생각하는 모양이 그대로 보이는 희찬의 옅은 눈동자가 이리저리 바쁘게 굴러다녔다. 그 시선은 대체로 도준의 얼굴에 머물렀다. 이번에도 도준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앞머리를 고정하기 위해 작은 집게 핀을 꽂은 도준은 의자에 앉은 채로 대본을 집어 들었다. 화려한 색으로 칠해 둔 형광펜이 영롱한 빛을 내는 대본은 이미 너덜너덜했다. 도준은 자신의 노력이 그대로 묻어나는 대본을 소중히 쥐고 조용한 목소리로 대사를 읊조렸다.

날씨가 추운 탓에 입이 굳어 발음이 둔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준은 입술을 부르르 털며 힘을 풀었다.

“너는 진짜 나한테 말을 한마디도 먼저 안 거네.”

언제 또 여기까지 온 거람.

도준이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희찬이 가까이 다가왔다. 덕분에 희찬의 목소리도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도준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눈을 치켜뜨고 희찬을 쳐다봤다. 희찬은 생글거리는 낯으로 도준을 내려 보고 있었다.

“너 나한테 할 말 되게 많을 텐데.”

공중에서 만나 부드럽게 얽히는 시선을 끊어 낸 것은 도준이었다. 희찬의 말을 듣는 순간 그 올곧은 눈빛을 마주할 자신이 사라졌다. 도준은 느릿하게 눈을 돌려 대본을 바라봤다.

“……아직 아니야.”

한동안 말이 없던 도준이 성대를 울려 낮은 목소리를 냈다. 그에 희찬은 무언가 생각하는 모양새를 보이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이도준의 똥고집이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다. 아무리 재촉해도 스스로 정한 적정 시기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것도 잘 안다.

희찬은 도준에게서 한 발 떨어진 곳에서 도준의 모습을 눈에다 담았다. 도준이 일에 열중하는 모습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대본에 집중하는 모습이나, 매 컷을 근사하게 그려 내는 도준에게 다른 수식어는 필요 없었다. 그저 근사하고, 매력적이었다.

그의 모습을 하나하나 보고 있자니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이 떠올랐다. 금세 도준의 곁에 선 희찬의 집요한 시선이 도준의 얼굴 곳곳에 닿았다. 이번엔 무시할 수 없었는지, 도준이 눈을 들어 희찬을 바라봤다.

“아직 아니라는 네 뜻은 알겠는데, 나는 너한테 계속 말 건다? 네가 나한테서 도망간 거니까. 내가 너를 피할 이유는 없잖아.”

희찬은 똑 부러지는 말을 전했다. 도준은 시선을 대본에 내리꽂은 채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희찬의 입에서 나온 ‘도망’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그 단어 외에 달리 붙일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또렷하게 눈에 콕 박히던 대본의 글씨들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는 듯한 환상이 보였다.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글자들을 담아 보려 노력했으나, 흩어진 활자는 그저 어떠한 모양을 이룰 뿐, 도무지 글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도준은 대본을 덮고 눈을 꾹 감아 버렸다.

“나중에 나한테 다 얘기해야 해. 지금은 내가 그냥 기다려 주는 거야.”

“…….”

“알겠어? 이도준.”

다른 사람 입을 통해 숱하게 듣는 이름 석 자였는데, 희찬이 읊조리는 그 이름은 의미가 남다르다. 무거운 쇳덩이처럼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차가운 목소리가 도준에게 한없이 묵직하게 닿았다.

도준의 꾹 감긴 눈이 뜨였다. 새까만 눈동자가 희찬에게 향하는가 했더니, 금세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응.”

도준은 한참의 시간을 헤아린 후에야 굳은 의지가 묻어나는 대답을 전했다. 그건 희찬이 도준의 이름을 불렀을 때와 비슷한 무게감을 지닌 말이었다.

터벅터벅 희찬의 걸음이 멀어졌다. 온 신경을 희찬에게로 쏟았던 도준은 비로소 큰 숨을 몰아 내쉬었다.

도망, 도망이라…….

도준은 그저 희찬이 내뱉은 말을 곱씹었다.

“어어, 오빠. 입술 그렇게 무시면 다시 발라야 해요.”

“아, 미안.”

“아유, 미안은 또 무슨. ‘우’ 해 주세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말아 물었던 도준이 스태프의 호통에 입술을 쭉 내밀자 부드러운 솔이 입술에 닿았다. 꼼꼼하게 입술 곳곳을 지나다니는 것을 느낀 도준은 ‘음마음마’ 스태프가 시키는 대로 입술을 열었다가 닫길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온통 희찬의 목소리가 윙윙 맴돌았다. 분명 궁금한 것이 많을 테다. 희찬이 콕 집었던 것처럼 변한 모습도 있을 거고, 함께 지낼 때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모습도 드문드문 보일 거다. 당연히 의문도 쌓일 것이다. 그럼에도 가만히 기다리겠다는 희찬의 말은 도준에게 희망적이기도 했고, 절망적이기도 했다.

희찬은 마치 도준의 마음을 다 아는 양했다. 희찬은 도준을 재촉하지 않았다. ‘기다리겠다’는 희찬의 말이 도준의 마음을 옥죄었지만, 그 말은 희찬에게도 무거운 말일 것이다.

도준의 탄탄한 가슴이 부풀었다가 다시 사그라졌다. 큰 숨이 들어왔다가 나가는 것이 여실히 보이는 그 형태는 도준이 품은 고민을 대변하는 듯했다.

*

조용하던 호텔 객실이 웬일로 분주해졌다. 며칠간 우천으로 촬영이 불가하다는 안내를 받은 대부분이 서울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건 도준도 마찬가지였다. 조금이라도 짬이 나면 서울로 오라는 대표의 전언이 있었고, 도준 역시 집으로 돌아가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아침 일찍 출발하자는 매니저의 말도 있었다. 그를 떠올린 도준은 조금 더 손을 바삐 놀렸다. 고작 한 달 남짓 지냈을 뿐인데, 챙겨야 할 짐이 제법 많았다. 평소 집을 어지르는 성격은 아닌 게 다행일 지경이었다. 틈틈이 정리하지 않았더라면, 밤새워 짐만 정리할 뻔했으니 말이다.

그런 도준의 옆에도 분주하게 움직이며 도준의 짐 정리를 돕는 매니저가 있었다. 자신의 짐 정리는 다 하고 돕는 건가, 도준이 고개를 휙 꺾어 매니저의 짐을 바라봤다.

가지런한 짐가방 세 개가 문 앞에 놓여 있었다. 그에 도준이 입꼬리를 올려 피식, 멋들어진 미소를 보였다.

“서울 가면 너도 좀 쉬어, 내 걱정하지 말고.”

“네, 형.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응, 걱정 안 해. 내려오기 전날에만 연락해 줘.”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두런두런 다정한 대화를 나눴다. 누군가 옷가지를 가지런히 개키면, 다른 한 사람은 액세서리를 정리했다. 두 사람이 함께하니 도준의 많아만 보이던 짐도 금세 정리가 되었다.

쾅쾅!

불친절한 파괴음이 객실을 울렸다. 소동물처럼 소곤소곤 담소를 나누던 두 사람의 산뜻한 목소리도 사라졌다. 도준과 매니저는 동시에 숨을 죽이고 서로를 동그란 눈으로 바라봤다.

쾅쾅!

철문을 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또 한 번 객실을 울렸다. 그에 도준의 고개가 비스듬히 꺾였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저 파괴음이 성가신 탓이었다.

문 옆에는 초인종이 있을 텐데 굳이 저렇게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이유가 뭘까.

상대의 무례한 행동에 도준의 인상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야! 문 좀 열어 봐!”

바깥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희찬의 것이었다. 성큼성큼 신경질적으로 현관으로 향하던 도준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해인이 너 요 앞까지 와서 고민하는 거 다 보인다, 빨리 열어!”

두꺼운 철문을 사이에 두고도 희찬은 도준의 행동을 정확히 읊었다.

장희찬은 천리안을 가진 모양이다.

도준은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서 걸음을 옮겼다. 희찬의 이런 돌발 행동에는 대응해 봐야 좋을 게 없다는 것처럼, 어차피 못 이길 것을 안다는 것처럼. 도준의 몸짓에는 금세 체념이 도사렸다.

그저 문고리를 잡아 돌렸을 뿐인데 바깥에서 세게 잡아당긴 탓에 벌컥, 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에 도준의 몸도 그 힘을 따라 휘청거렸다.

해맑은 표정의 희찬이 도준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도준은 심드렁한 눈으로 희찬을 바라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희찬은 금세 현관을 꿰찼다.

“뭘 이렇게 미적거려? 문 여는 데에 무슨 힘이 든다고.”

희찬은 저를 가로막은 도준의 너른 가슴을 가볍게 밀쳐 냈다. 도준의 반응은 희찬에게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다. 희찬은 그저 신발을 가볍게 툭툭 벗고서 성큼성큼 객실 안으로 향했다. 가뿐한 걸음을 놀리는 희찬의 몸이 통통 튀었다. 기분이 좋을 때 나오는 그 몸짓을 지켜보던 도준도 희찬의 뒤를 졸졸 쫓았다.

“여기는 방이 좀 다르네?”

이전에 왔을 때도 생각했지만, 도준이 지내는 객실은 희찬이 지내는 객실과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호텔 측에서는 나름대로 테마를 갖고 객실을 꾸미는 건지, 희찬의 객실보다 조금 더 클래식한 매력이 물씬 풍기는 도준의 객실이 퍽 마음에 들었다. 희찬은 이전에 보지 못한 방까지 둘러보며 즐거운 낯을 띠었다.

그런 희찬의 걸음을 좇는 네 개의 눈이 있었다. 도준과 그의 매니저는 희찬이 어디로 향하는지, 어디서 무슨 반응을 보이는지 하나하나 눈으로 담았다.

“야, 나 너 보러 온 거 아니야, 그렇게 집요하게 보지 마.”

“누가 뭐래…….”

희찬의 톡 쏘는 목소리가 도준을 향했다. 도준은 널브러진 희찬의 신발을 가지런히 모아 현관 앞에 내려 뒀다. 통통 튀는 걸음을 걷는 희찬의 몸짓은 멈추지 않았다. 방마다 들쑤시는 게, 여간 부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이 방에서 “우와!” 저 방에서 “우와!” 연발하는 희찬의 천진함이 객실을 울렸다. 듣기 좋은 환호에 도준은 고개를 숙인 채로 소소한 웃음을 삼켰다.

희찬이 처음 소속사와 계약하고, 첫 촬영에 다녀온 날 자신이 지냈던 고급 호텔에 대해 들뜬 목소리로 늘어놓던 것이 떠올랐다. 언젠가 우리가 같이 성공하면 꼭 그런 데에서 부자처럼 놀아 보자. 얘기하던 앳된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어찌 보면 이 상황도 그 꿈을 이룬 상황인데, 어째 개운하지 않다. 도준은 이내 입술을 말아 물고 착잡한 심정을 감추었다.

“이건 뭐야?”

과거를 회상하던 도준의 귓가에 또 한 번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눈을 들어 희찬을 바라본 도준의 눈이 크게 요동쳤다. 희찬은 해맑은 표정으로 약통을 들고 흔들었다. 희찬이 손을 흔들 때마다 약통 안에서 구르는 약이 딸깍딸깍 가벼운 소리를 냈다.

도준은 부리나케 일어나 희찬에게 다가갔다. 이윽고 희찬에게 닿았을 때 거침없이 그 손에서 약을 앗아 들고 펼쳐 놓은 캐리어 위로 툭 던져 버렸다.

희찬의 천진했던 얼굴이 삽시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유독 발끈하는 것처럼 보이는 도준의 행동이 수상했다. 도준의 거친 행동에 기분이 상한 희찬은 표정을 굳힌 채로 차가운 눈빛을 보였다.

“무슨 약인데.”

“그냥 영양제야, 다들 먹는 거.”

도준이 보이는 반응을 봐서는 저 하얀 약통에 든 것은 절대 영양제는 아닐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숨기기만 하는 도준의 태도에 화가 났다. 무거운 정적이 스몄다. 어떠한 것도 설명할 의지가 보이지 않는 도준의 태도에 희찬이 거친 숨을 쉬었다.

결국 이번에도 도준의 거짓말에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캐물어 봐야 제대로 답할 리 없는 도준이었고, 도준이 약속했던 그때를 기다리고, 돌아오겠다고 했던 말을 곱씹으며 가슴에 도사리는 화를 진정시키려 노력할 뿐이었다.

훈훈했던 분위기가 꽁꽁 얼어붙었다. 조용해진 장내에서 눈치를 살피는 것은 오로지 매니저뿐이었다.

도준이 머쓱하게 미간을 긁적거렸다. 희찬이 약통을 들었을 뿐인데, 벌거벗은 채로 그 앞에 나뒹구는 기분이 들었다. 희찬에게만은 절대로 숨기고 싶은 일이 낱낱이 까발려질 것만 같았다. 그건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아득함을 안겼다.

도준은 제게 닿는 희찬의 시선을 무시하고 다시 소파에 앉았다. 이렇게 된 이상, 희찬이 제 할 일을 마치고 얼른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를 가라앉히는 것에 온 힘을 쏟았던 희찬이 촬영이 진행되며 가까워진 도준의 매니저에게 친근한 목소리를 냈다.

“후으……. 희경아. 너희 서울에서 내려올 때 나도 좀 데리고 와 줘.”

원래는 도준에게 전하려던 말이었지만, 희찬은 대상을 바꿨다. 저에게 이전과 다른 태도를 보이는 도준과 더는 대화를 잇고 싶지 않았다. 경쾌한 목소리가 다시 공간을 울리자 무겁게 눌리는 듯했던 분위기도 한층 밝아졌다.

희찬의 목소리에 매니저의 또렷한 눈이 도준에게 향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도준은 답이 없었다. 그를 본 매니저의 눈이 다시 희찬에게로 향했다. 매니저의 곧은 두 눈에서는 난감함이 그대로 묻어났다.

희찬은 대답을 재촉하듯 화사한 미소를 피워 냈다. 희찬의 잘난 면모에 일순간 넋을 놓을 뻔했다. 매니저는 같은 남자임에도 매력적인 희찬의 황홀함에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그 잘생겼다는 이도준 옆에서도 덩달아 잘생겼다 칭찬받을 수 있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거였다.

한참이나 희찬의 미모를 감상하던 매니저는 문득 제게 닿는 따가운 눈총을 느꼈다. 삐걱 소리가 날 정도로 뻣뻣하게 고개를 돌려 눈빛의 근원을 바라보자 도준이 제법 매섭게 저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왜인지 오한이 들었다. 저에게 매번 친절했던 도준이 뿜어내는 냉기가 어색해 등골이 서늘해졌다.

“어어, 조현 씨는 못 오신대요?”

“조현이 그날 병원 예약이 있어서 시간 내기가 어렵대. 회사에서 차 대준다고 했는데, 번거로울 것 같거든. 너희 차 타고 같이 오는 건 어려워?”

“저……는 괜찮은데…….”

희찬은 주저하는 매니저의 목소리를 듣다 말고 또렷하게 도준을 바라봤다. 이도준의 냉기쯤이야, 희찬에게는 무서운 것도 아니었다.

“해인아, 괜찮지?”

“……마음대로 해. 나는 상관없어.”

도준의 눈빛이 유하게 풀렸다.

같은 말도 더 예쁘게 할 수 있을 텐데, 날 선 도준의 입에서 다정한 말을 바라는 것은 사치였을까.

그저 ‘상관없다’ 말하며 일어선 도준은 희찬을 지나쳐 식탁 위에 즐비한 약통을 캐리어에 쓸어 담았다. 몇 통인지 셀 수도 없을 많은 약통은 더러는 비었고, 더러는 꽉 차 알이 구르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약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도준은 약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다. 굳게 닫힌 도준의 입은 그의 의지를 담은 듯했다.

희찬은 이상하게 도사리는 얄미움을 느끼며 도준의 행동을 찬찬히 살폈다. 도준의 잘생긴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예전 같았으면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쳐 주었을 거다.

지금은 때릴 수 없으니, 그저 마음 깊이 나중에 꼭 한 대 때려 주고야 말 거라는 다짐을 새길 뿐이었다.

*

서울로 올라온 도준은 익숙한 공간에서 안정을 되찾아 갔다. 그래도 집이라고, 서울에서 지낸 사흘의 시간은 도준의 모든 상태를 회복하기에 충분했다.

촬영 시간에 대한 부담이 없기에 편하게 잠들었다가 편하게 눈 뜰 수 있어서 좋았다. 여전히 약은 필요했지만, 확실히 호텔에서 지낼 때보다는 적은 양으로도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혼자 지내는 집에서는 긴장할 일도 없었다. 컨디션이 눈에 띄게 좋아지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사이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었다. 그 시작과 동시에 이제는 제법 찬 바람이 기승을 부렸다.

오늘도 여지없이 느지막이 일어난 도준은 오랜만에 푹 잔 것에 만족하는 듯 개운한 기지개를 켰다. 오랜만에 만끽하는 여유가 더없이 좋아, 곧장 침대에서 벗어났다.

허기를 느낀 도준이 냉장고를 뒤적거렸다. 냉장고 속에서 파릇파릇한 풀때기가 도준을 반겼다. 한 끼 식사량에 맞게 잘 소분된 팩을 꺼낸 도준은 드레싱도 없이 채소를 우걱우걱 씹어 삼켰다. 싱그러운 채소 사이에 숨어든 닭가슴살이 씹힐 때는 고개를 까딱거리며 맛 표현을 대신했다.

“읏차.”

식사를 마친 후에는 가볍게 몸을 날려 소파에 드러누웠다. 도준의 가지런한 손에는 대본이 들려 있었다.

도준은 공간을 빼곡히 메우는 자잘한 소음을 느끼며 늘어지는 숨을 천천히 몰아쉬었다. 가벼운 숨을 들이켜고 내쉬는 것을 반복하던 도준은 이내 두 눈을 슬며시 감았다. 힘을 줘 쥐고 있던 대본도 스르르 바닥에 떨어졌다.

이대로 잠들면 딱 좋았을 텐데. 지잉 울리는 진동에 휴대폰을 든 도준은 상대를 확인하고 몸을 고쳐 앉았다.

― 병원 갔다 왔어?

대표였다. 도준은 바르게 곧추세웠던 허리를 느슨하게 풀고서 흥미 없는 표정을 지었다.

“네, 주의 사항도 다 듣고 왔어요.”

― 뭐래?

“그냥 뭐, 약 먹을 때 술 먹지 말고, 잠 안 오면 운동이라도 하고.”

― 약은?

도준은 서울에 도착하기 무섭게 병원부터 다녀왔다. 병원은 언제 가도 달갑지 않은 곳이었기에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표님, 저 이따가 회사 갈 거예요. 이렇게 전화로 안 해도 괜찮아요.”

― 아, 맞다. 너 서울이지.

어차피 회사에 가려던 참이었다. 드라마 이후의 일정도 조율해야 했고, 제의 들어온 다른 작품들도 검토해야 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호탕하게 터진 웃음소리에 도준도 함께 웃었다.

“대표님, 저 이제 대본 볼 거라 전화 끊을게요.”

― 어, 어. 이따가 몇 시에 올 거야?

“해 지기 전쯤?”

― 희경이 불러서 차 타고 와.

“네.”

본격적으로 대본을 보기 위해 어깨로 휴대폰을 받치고 고개를 꺾은 도준은 성의 없는 대답을 이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도준이 미간을 좁혔다.

“근데 대표님.”

― 응?

“저 면허 있고, 차도 있어요, 제가 갈 수 있는데.”

혼자 할 수 없는 것보다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졌는데, 여전히 모든 것을 매니저와 하길 바라는 대표의 태도가 달갑지 않았다. 도준의 입술이 삐죽거렸다.

― 그래도 안 돼. 그냥 희경이 차 타고 와.

하지만 대표의 말은 단호했다. 도준은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고, 간단한 인사를 남긴 채로 전화를 끊었다.

어느새 해져 버린 대본의 겉표지에서는 도준의 성실함이 물씬 묻어났다. 처음엔 그렇게 기피했던 대본이 이제는 자석처럼 도준의 손에 붙었다.

도준은 닳고 닳은 대본의 첫 장을 넘겼다. 팔랑거리는 소리와 종이가 스치며 사박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예민하게 닿았다.

대본은 형형색색의 형광펜과 도준의 정갈한 글씨로 새겨진 메모가 빈틈없이 자리했다. 도준의 하얗고 예쁜 엄지손가락이 메모들을 어루만졌다. 볼펜에 눌린 종이의 울퉁불퉁한 표면이 도준의 가슴에 커다란 뿌듯함을 남겼다.

“인수야, 이불 너 덮어.”

[희찬아, 이불 덮어. 나 담요 있어.]

대본을 읊는 도준의 목소리 뒤에 과거의 소리가 뒤따랐다.

“그럼 이렇게 안고 자자. 안 춥지?”

[내가 이렇게 안을게. 그럼 됐지?]

“…….”

촬영 세트장을 아는 탓인지, 유독 집요하게 달라붙는 소리에 도준은 입술을 부르르 털고서 대본을 내려놓았다.

희찬을 떠올린 도준은 고개를 젖혀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도준의 새까만 눈동자를 머금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도준이 턱관절을 움찔거리자, 매끈한 목 한가운데 톡 튀어나온 잘생긴 사과 조각이 아래위로 울렁거렸다.

“너무 예민했지…….”

약병을 들고 저를 바라보는 희찬에게 보였던 태도 말이다. 그렇게 예민하게 발끈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장희찬이어서 그게 어려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마음의 준비도 좀 해 놓고 지낼 걸 그랬다.

부질없는 후회가 켜켜이 쌓여 한숨을 터뜨렸다.

제게 도사린 모든 아픔을 딛고 일어섰을 때 희찬을 마주하고자 했는데, 미처 준비를 마치지 못한 지금이 그 ‘때’일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열심히 치료받을 걸 그랬다.”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도준의 목소리에 한탄이 섞였다.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였던 도준의 손에 힘이 실리고, 단단하게 주먹이 말렸다.

비상등도 켜지 않고 훅 치고 들어온 갑작스러운 만남이었지만, 그게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마주한 희찬에게서는 그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안정감이 있었다. 정처 없이 흩날리는 생각의 중심을 잡아 주고, 갈팡질팡 갈피를 잡지 못하는 걸음의 방향을 알려 주는 빛이 있었다.

그런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것은 오롯이 자신의 작음 때문이라, 도준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 모르겠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그 마음만큼 건강하게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발목을 쥐어 잡았다. 희찬을 마주하고서도 아프지 않고, 웃을 수 있을 때. 당당하게 두 팔을 벌려 그를 맞이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장희찬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니, 저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도준이 회사에 도착해 당장 결정할 수 있는 문제들을 처리하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표와 마주 앉아 다음 작품을 고르고, 광고 제의가 들어온 곳들을 살피는 일은 퍽 재밌었고, 한편으로는 지루했다.

“조심히 내려가고, 도착해서 무슨 일 있으면 곧장 전화하고.”

“걱정하지 마세요.”

“그게 네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일어서는 도준에게 대표의 잔소리가 붙었다.

듣는 사람도 지겨운 잔소리인데 하는 사람은 얼마나 지겨울까.

대표를 쳐다봤지만, 대표에게서는 지겨움이 묻어나지 않았다. 대표실 바깥까지 쫓아 나오는 것으로 모자라, 아예 로비까지 따라오는 대표에게 도준은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이제 그만해도 된다는 뜻이었고, 그를 찰떡같이 알아들은 대표는 이내 걸음을 뚝 멈추고서 도준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 아! 도준아.”

“네?”

“그, 이한 그룹 말이야.”

“아, 네.”

대표의 입에서 뜻밖의 이야기가 나왔다. 도준은 매니저가 기다리는 곳으로 걸음을 돌리려다 말고, 대표를 마주했다.

“너 이한 그룹 사생아라는 지라시 돈다더라. 그쪽에서 먼저 연락 왔더라고.”

“아……. 그래요?”

“그거 걔일 거 같지? 눈부항 같이 들어가 있는, 그…… 너한테 맨날 싸가지 없다고 하는.”

“그렇지 않을까요.”

도준은 심심한 표정을 지었다. 어떤 그룹 사생아라더라, 어느 회장님 스폰이 붙었다더라. 듣는 것만으로도 진저리가 나는 루머는 이미 지겹도록 들어왔다.

그 와중에 이한 그룹은 또 무슨 죄인가. 그저 이도준이라는 배우의 상품성을 높게 쳐 준 죄. 그뿐일 텐데.

국내 최대 재벌가로 손꼽히는 이한 그룹은 그저 모든 계열사에서 도준을 모델로 삼고자 하는 거대한 광고주일 뿐이었다. 이도준의 이미지가 곧 자신들의 이미지라 생각하여, ‘눈부신 항해’의 제작에도 막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 도준에게는 감사하기만 한 광고주일 뿐이었다.

“그쪽에서 네가 고소할 의사 있으면 도와주겠다고 하더라고. 고소할 거야?”

“음……. 일단은 제가 얘기 한번 해 볼게요.”

이한 그룹의 호의는 고마웠지만, 도준은 그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자꾸만 성질을 긁어 대는 탓에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한마디 쏘아붙이려던 참이었다.

도준은 가벼운 말을 남겨 두고 다시 휘적휘적 걸었다. 대표의 입가에는 왜인지 흥미로운 미소가 걸렸다.

[이도준 안 둔해요. 다 알면서 대꾸도 안 하는 거라고요.]

언젠가 희찬이 화가 잔뜩 난 채로 읊조리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 이도준은 둔하지 않다. 그저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여 가만히 있었던 것이니 그가 매섭게 쏘아붙이는 모습도 내심 기대가 되었다.

차에 오르면 항상 뒷자리에 앉아서 냅다 잘 준비부터 하던 도준이 웬일로 조수석에 올랐다. 안전띠를 매고, 긴 다리를 쭉 뻗은 도준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어, 형. 조수석 타시려고요?”

“응. 희경아, 저녁 먹고 갈래?”

매니저는 낯선 도준의 말에 두 눈을 크게 뜨고 도준을 바라봤다. 매니저 일을 시작하고, 도준으로 배정받을 때 대표에게 들은 몇 가지 주의 사항이 있다.

일단, 도준은 쉽게 잠을 잘 수 없는 예민한 성격이라 차에서는 꼭 잠을 잘 테니 잘 때는 절대로 건들지 말라는 것. 그리고 몇몇 가지의 다른 주의 사항과 함께 특이 사항으로 ‘먹는 것에 흥미가 없으니 식사를 과하게 권하지 말 것’이었다.

당연히 도준과 함께 밥을 먹는 일도 드물었다. 대표에게 들었던 대로, 도준은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않았다. 가끔 배가 고플 때는 이동 중에 건강음료를 먹거나 간단한 샐러드를 먹는 것으로 끼니를 때웠다.

당연히 도준의 집에서 함께 밥을 먹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의 호의에 응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내일 저희 새벽부터 움직여야 해서, 형도 일찍 쉬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일정이 야박했다.

조심스러운 매니저의 말에 도준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갑작스러운 말이었으니, 일정을 챙겨야 하는 매니저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준은 의자 등받이를 조절해 편안하게 몸을 기댔다. 차 안엔 적막이 편안하게 도사렸다. 문득 항상 잠을 청하는 저를 위해 노래도 듣지 못하는 매니저가 안쓰러워졌다. 도준은 기다란 손가락을 놀려 카 오디오를 조작했다. 스피커에서는 금세 잔잔한 노랫소리가 울렸다.

“노래 괜찮지?”

“좋아요.”

집까지 가는 길이 먼 것은 아니었으나, 그 잠깐의 시간이라도 즐겁게 보내고 싶었다. 가벼운 매니저의 답에 도준의 입꼬리도 치솟았다. 도준은 창틀에 팔을 대고 턱을 괸 채로 빠르게 변하는 바깥 풍경을 눈에 담았다.

번화가의 대로변을 지날 때는 높이 솟은 건물 벽에 달린 커다란 전광판이 도준의 눈에 들어왔다. 아주 어릴 적, 희찬과 나란히 버스를 타고 지나며 자주 봤던 전광판이었다. 그곳엔 희찬이 모델로 활동 중인 의류 브랜드의 광고가 휘황찬란하게 게첩 중이었다.

[도준아, 우리 꼭 저기에 같이 광고 걸자.]

희찬의 앳된 목소리가 도준의 귓가에 닿았다. 도준의 입꼬리가 빙그레 포물선을 그렸다. 희찬의 광고가 끝을 보이자 이어서 도준이 모델로 활동하는 남성 화장품의 광고가 나왔다.

[저기에 너랑 나, 나란히 꼭.]

“나란히는 아니지만…….”

나란히는 아니지만, 두 사람의 광고가 연이어 걸린 것은 그들이 말하던 ‘큰 성공’이었다.

언젠가는 나란히 걸릴 일도 있지 않을까. 어렴풋한 미래를 그리는 것도 이제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인산인해를 이루는 번화가에서 차가 벗어나는 것은 순식간이었지만, 광고의 잔상은 도준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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