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항해 2권
04. 흩어진 조각
어제 희찬이 전한 대로 창밖에는 주룩주룩 비가 내렸다. 청명하던 겨울 하늘이 먹구름에 가려졌다. 햇빛을 걷어 낸 구름은 온통 어두컴컴한 어둠을 내리깔았다.
줄기차게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고즈넉하다. 굳이 음악을 틀거나, TV를 틀지 않아도 공간을 차곡차곡 메우는 소리는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굳게 닫혔던 철문이 열렸다. 이제는 아예 키를 들고 다니는 건지, 도준의 호텔 객실 문을 연 것은 다름 아닌 희찬이었다.
“희찬이 왔어?”
그런 희찬을 대표가 반가운 낯으로 맞이했다. 거실 한가운데 위치한 탁자를 노트북이며 서류들로 한껏 어질러 놓고서 피곤한 얼굴을 한 대표의 모습에 희찬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였다.
“어! 대표님, 안 가셨어요?”
“어, 내가 있으려고.”
“희경이는요?”
“서울에 올려 보냈어. 영 부산스럽더라고. 어차피 나는 지방에서 업무 봐도 되니까.”
“아아, 도준이는요?”
희찬은 동그란 눈을 뜨고 바쁘게 눈알을 굴리며 도준을 찾아 댔다. 도준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겨우 결심하고 도준의 방으로 왔는데, 정작 보여야 할 이도준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희찬의 모습에 대표가 싱그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이렇게 서로를 찾고, 함께하려 하면서 그동안은 어떻게 그렇게 피해 다녔는지 모르겠다.
“도준이 담배 피우러 갔어. 너는? 웬일로?”
“에이, 빗소리나 같이 듣자 하려 했더니.”
“안 그래도 도준이도 저기 앉아서 한참 듣다 가더라. 내려가 봐. 도준이 있을걸.”
희찬의 눈이 대표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으로 닿았다. 소파 한구석에 닿은 희찬의 시선 끝에 도준의 형상이 피어올랐다. 이도준은 아마 소파 팔걸이에 팔을 대고, 턱을 그 위에 얹은 채로 두 눈을 감고 빗소리를 들었을 테다.
소파 끄트머리를 뚫어지게 훑던 희찬의 눈동자에 이내 힘이 실렸다. 무언가 결심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희찬은 대표를 향해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럼, 저 갔다 올게요, 아빠.”
“어, 아들. 조심히 갔다 와―. 도준이 담배 너무 많이 피우면 뺏어.”
희찬의 장난에는 대표도 장난으로 응했다. 기분 좋은 대화가 오간 자리에는 다시 적적한 빗소리가 자리했다. 대표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기분 좋은 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도준이가 정한 때는 도준이를 기다리지 않고 다가올 모양이지.
대표의 낮은 웃음소리가 빗소리를 기저에 깔고 공간을 부드럽게 울렸다.
흡연 부스에 앉은 도준은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담배를 물었다. 겨울비가 머금은 차갑지만 상쾌한 공기에 머리가 맑게 개는 것 같았다. 머릿속을 난잡하게 메운 생각들도 한 번에 물리치는 강한 바람에 뭉근하게 피어오르는 어릴 적 향수는 도준의 기분을 두둥실 띄웠다.
오늘은 제법 서정적인 촬영이 진행된다는 것으로 기억한다. 평상에 나란히 앉았다가, 인수가 해인의 무릎을 베고 누웠을 때, 해인이 인수에게 노래를 불러 주는 장면은 분명 인상적일 것이다.
그리고 그건 이내 또 다른 아릿한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준아, 너는 가수 해도 되겠다.]
[싫어.]
[왜?]
[너랑 같이 배우 할래.]
귓가에 울리는 맑은 목소리에 도준의 입꼬리가 싱그럽게 치솟았다. 단역 아르바이트를 막 시작했던 그 무렵, 그때는 배우라는 직업에 확신이 생기기도 전이었다.
그저 희찬과 함께하고 싶었던 어린 마음, 그 마음이 곧 꿈이 되어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두 사람이 함께 촬영장에 가는 날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따로였다. 단역 아르바이트를 하고 받는 돈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기에, 희찬이 단역 스케줄을 나가는 날이면 도준은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하고는 했었다.
그렇게 서로의 생계를 책임지던 우리였다. 촬영이 끝난 밤에는 식탁에 마주 앉아 참여하지 못한 상대에게 그날 촬영장에서 보고 배운 것들을 공유했다.
누구는 이 장면을 이렇게 연기하더라, 또 누구는 저렇게 표현하더라.
그런 세세한 것들 말이다. 현장에 함께하지 못한 상대를 위해 먼저 데뷔한 선배의 연기를 귀로 듣고, 눈으로 담아 열심히 익혀 알려 주던 우리였다.
“좋았지…….”
그 시절 우리는 그 누구보다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그 누구보다 열정을 불태웠다. 시간이 아깝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며 1분을 하루처럼 성실하게 살았다. 종일 아르바이트를 하고, 야간 잔업까지 한 날에도 ‘아침 일찍 와 줄 수 있냐’는 연락을 받으면 밤을 새우고서라도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쌓은 경험은 도준에게 한없이 값진 것이었다. 물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현실을 원망하며 울기도 많이 울었고, 좌절도 했다. 심지어 약이 없으면 잘 수 없는 지경까지 와 버렸다.
그럼에도 누군가 더없이 행복했던 순간을 꼽으라 말하면, 도준은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희찬이랑 같이 살았던 20대 초반’을 꼽을 것이다.
“야, 해인아!”
한참 추억을 곱씹던 도준의 눈앞에 행복이 드리웠다. 해사한 웃음을 피우고 경쾌한 걸음을 디디며 다가오는 행복은 우중충한 하늘의 색을 물리 칠만큼 화사한 빛을 머금었다.
희뿌연 연기로 가득 찼던 공간을 휘젓는 행복의 손은 하얗고 커다랬다. 하얀 손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흩어지는 연기 끝에는 비로소 행복의 본체가 자리했다. 도준은 저도 모르게 맑게 웃었다.
“여기가 빗소리 더 잘 들리네.”
“좋아, 여기.”
“그러게, 너 담배만 안 피우면 더 좋은데.”
희찬은 자연스럽게 도준의 옆에 앉았다. 희찬이 앉을 때는 두꺼운 점퍼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벤치 끄트머리를 잡고 다리를 곧게 쭉 뻗은 행복의 발끝이 까딱거렸다. 도준은 장난스레 희찬에게 담배를 권했다.
“됐거든. 너 딱 하나만 더 피워.”
“응.”
도준이 희찬에게 건네었던 담배는 도준의 입술 사이로 자리했다. 고개를 비스듬히 꺾고, 손을 들어 가지런히 바람을 막은 후에는 라이터의 부싯돌을 부딪쳤다. 틱틱, 긁히는 소리가 몇 번 나더니 이내 화륵 타오른 불꽃이 담배에 닿을 무렵,
“피우란다고 진짜 피우네.”
희찬의 큰 손이 도준의 입에 물려 있던 담배를 낚아챘다.
놀란 도준이 희찬을 바라봤다. 저러다 손이라도 데면 어쩌려고 그러는 건지. 걱정을 머금고 미간을 좁혔지만, 도준을 보는 희찬의 눈이 더 매서웠다.
“피우지 말라고 말을 하지 그랬어.”
“말은 잘하지. 뭐 하고 있었어?”
희찬은 손에 쥔 담배를 갈가리 분질렀다. 담뱃잎을 감싸고 있던 하얀 종이가 뜯어지며 갈색의 까슬한 속 재들이 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낙엽처럼 흩어지는 그것을 가만히 쳐다보던 도준은 손에 쥐었던 담뱃갑을 아예 점퍼 안쪽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손 안 데었어?”
“괜찮아. 뭐 하고 있었냐니까.”
“그냥, 촬영할 거 생각했어.”
“오늘 노래하는 거 있잖아, 뭐 부를 거야?”
도준은 눈썹과 어깨를 동시에 으쓱거렸다. 노래를 정하지 못했다. 혼자 빗소리를 들으며 노래나 정해 보려 했는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바람에 도준의 계획은 전부 물거품이 되었다.
희찬의 다리가 달랑거리자 벤치도 조금씩 삐걱거렸다. 엉덩이 아래에서 벤치의 나무 막대들이 삐걱, 삐걱 움직이는 것을 느끼던 도준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팔짱을 낀 채로 입을 꾹 다문 채로 오래간 말이 없었다.
도무지 적절한 노래가 떠오르지 않는다. 어쩌면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희찬과 시간을 보낼 때나 흥얼거리고는 했던 노래를 희찬과 헤어진 후에는 살아내는 것이 버거워 단 한 소절도 부르지 않고 지냈다. 당연히 노래가 퍼뜩 떠오를 리도 없다.
사라진 도준의 목소리 대신 빗소리가 공간을 차곡차곡 메웠다. 바깥에서 흡연 부스를 토독토독 두드리는 소리는 친절하고, 다정했다. 비 오는 날 특유의 물비린내가 푸근했고, 무겁게 가라앉은 비린내를 포장한 산 내음이 코끝을 간질였다. 흡연 부스를 가득 메웠던 담배 냄새가 금세 사라졌다.
“아직 안 정했어?”
“응, 생각나는 거 아무거나 부르려고 했는데……. 생각이 안 나네.”
희찬의 옅은 눈동자가 활기를 머금고 반짝거렸다. 평소 좋아하는 노래가 있는 건지, 금세 반색을 보이며 즐거운 목소리를 냈다.
“그거 어때, 그 날개를 어쩌고 하는 노래 있잖아. 네가 자주 불러 줬던 거.”
도준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희찬이에게 자주 불러주었던 노래, 날개가 나오는 노래. 꼭 가사가 희찬이 같아서 좋아하던 노래는 있다. 금세 제목을 떠올려 낸 도준은 희찬의 말간 얼굴에 또렷한 시선을 가져다 댔다.
“벅차도록 아름다운 그대여, 이거?”
투명한 플라스틱으로 사방이 막힌 공간을 도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고운 선율을 따라 어렵지 않게 오르내리는 목소리는 여전히 선명하고, 매혹적이었다. 금세 사람을 빠져들게 하는 매력을 가진 도준의 노래가 단 한 소절로 끝이 났다. 그에 아쉬움을 느낀 희찬이 울상을 지었다.
“어, 그거. 야, 너 노래 아직도 잘하네. 뒷부분 더 불러 줘.”
“아, 뭘 더 불러.”
“불러 줘. 오랜만이잖아.”
도준의 귀 끝이 붉게 물들었다. 오랜만에 듣는 칭찬이 어색한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도준의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그를 보던 희찬이 퍽 소리 나게 도준의 어깨를 쳤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맡겨 놓은 사람처럼 노래를 요구하는 희찬의 태도는 당당했다.
희찬은 몸을 도준에게 가까이 당겨 앉았다. 두 사람의 손가락 끝이 벤치 위에서 닿았지만, 누구도 닿은 손을 떼지 않았다. 바닥으로 툭 떨어졌던 도준의 고개가 들렸다.
희찬은 도준과 같은 방향을 보고 앉았던 몸을 아예 틀어 앉았다. 벤치 위에 발을 올려 가부좌를 틀고, 무릎에 팔꿈치를 대어 턱을 괬다. 아주 본격적으로 노래를 감상하겠다는 희찬의 태도에 도준은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태양처럼 빛을 내는 그대여, 이 세상에 거칠게 막아서도. 빛나는 사람아, 난 너를 사랑해. 널 세상이 볼 수 있게, 날아, 저 멀리.”
“응……. 좋다.”
그래, 이 노래의 가사는 꼭 희찬의 것이었다.
노래를 마친 도준은 울컥 치미는 감정을 느끼고 다시 고개를 떨궜다. 촬영할 때는 이 노래를 부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양처럼 빛나는 희찬이를 온 세상이 볼 수 있도록 멀리 날아갈 수 있도록 돕고 싶은 도준이었기에, 빛나는 희찬이를 온 세상이 볼 수 있도록 비추고 싶었던 이도준이었기에.
“……이거 말고 다른 거 불러야겠어.”
이 노래를 부를 때면 꼭 울 것만 같았다.
희찬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 치솟는 감정을 갈무리하려 했지만, 그것마저 벅찼다. 뻣뻣하게 당기는 목 아래 근육은 치미는 도준의 울음을 어렵사리 삭였다.
감정을 다스리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도준은 뻐근했던 턱관절 주변이 부드러워지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희찬의 또렷한 눈은 여전히 도준에게 닿은 채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전혀 알 수 없는 희찬의 눈앞에서 도준은 괜히 작아지는 자신을 느꼈다.
“다른 거 불러 줘.”
“뭐를.”
“노래. 그거 말고 다른 거 뭐 하려고?”
“생각 안 해 봤다니까…….”
무슨 노래를 해야 드라마 분위기에도 잘 어울리고, 감정이 크게 동요하지 않으며 무사히 촬영을 마칠 수 있을까.
도준은 기다란 목 한가운데에 톡 튀어나온 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도록 턱관절을 까딱거렸다.
뭐든 닥쳐서 떠올리면 더 생각이 나지 않기 마련이다.
지금 도준이 그랬다. 벤치 끄트머리를 손으로 거머쥐고 고개를 뒤로 젖혀 상체를 앞뒤로 흔들어 봐도 머릿속에는 적당한 노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사이 빗소리가 멎어 들었다.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사박거리는 소리로 바뀌기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러는 동안 희찬은 이것, 저것 많은 노래 제목을 읊었다. 도준은 입을 꾹 다문 채로 그 수많은 후보를 듣기만 했다.
크게 마음에 드는 노래가 없다. 그래도 이왕 하는 노래라면, 희찬이와 잘 어울리는 노래가 좋을 것 같은데…….
“근데, 이게 어쨌든 해인이랑 인수가 꿈을 찾는 얘기잖아.”
“응.”
“그럼 꿈에 관련된 노래는 어때? 너 나한테 불러 줬던 노래 중에 그런 거 많았는데.”
희찬의 제안에 머릿속에 번뜩 좋은 노래가 떠올랐다. 고개를 까딱이며 가사를 곱씹는 도준의 입꼬리가 둥근 포물선을 그리며 예쁘게 치솟았다.
“괜찮네.”
“생각났어? 불러 줘.”
“아, 뭘 자꾸 불러 달래.”
“너는 뭘 자꾸 튕겨. 빨리. 불러 줘.”
맡겨 놓은 것을 찾아가는 양 구는 희찬의 태도가 당돌하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원하는 노래의 버튼을 누른 사람처럼 내가 노래를 요구하면, 너는 노래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희찬의 눈빛에 도준은 할 말을 잃었다.
아무래도 장희찬의 저런 모습에는 당해낼 수가 없다. 도준은 이내 체념하듯 몸을 털고서 저를 또렷하게 쳐다보는 희찬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도준의 시선이 허공으로 향했다. 조금씩 툭, 툭 떨어지는 빗물이 천장에 닿아 동그란 원을 그리는 것을 가만히 쳐다봤다.
수줍은 도준의 목소리가 넌지시 노래를 읊었다. 그간 노래를 제대로 듣지도 않고 지냈는데, 어째 희찬에게 전하고자 하는 노래들은 하나같이 가사가 또렷하게 기억에 남았다.
“이 노래가 이렇게 슬펐나.”
“불러 달라며.”
“누가 그렇게 축축하게 부르래.”
분명 밝은 노래였는데. 잔잔하게 퐁실거리던 분위기가 이상하게 착 가라앉았다. 물에 젖은 바위에 엉겨 붙은 이끼처럼 질척해진 분위기가 달갑지 않은 것은 도준도 마찬가지였다.
희찬은 몸을 돌려 도준과 같은 방향을 보고 앉았다. 벤치 위에 올려 뒀던 다리를 내려 발꿈치를 땅에 대고 발가락 부분을 까딱까딱거렸다.
이윽고 다시 세찬 비가 내렸다. 위에서 아래로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줄기에 뚜렷하게 보이던 풍경도 흐릿해졌다. 마치 창을 가린 블라인드처럼 한 치 앞의 시야를 가린 폭우는 추위를 몰고 왔다. 으슬으슬해지는 것에 도준은 점퍼의 깃을 여미고 어깨를 움츠렸다.
얼마나 시간을 헤아렸을까. 오래 지나지 않았음에도 한기가 서렸다. 입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숨에는 희뿌연 입김이 함께였다.
두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입김이 한곳에서 뭉쳤다. 둥글게, 또는 기다란 용의 모양을 이루는 입김을 장난스럽게 후후 불어 대는 희찬 덕분에 가라앉았던 분위기도 상쾌한 공기처럼 가벼워졌다.
“어, 너희 같이 있었구나.”
“아. 안녕하세요, 선배님.”
누군가 빗속을 뚫고 흡연실로 들어왔다. 평소 도준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하고 다니는 선배의 등장에 희찬의 눈이 매섭게 뜨였다. 그 눈과 달리 두 사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사를 건네었다. 그것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 행동이었고, 버릇과도 같은 예의였다.
옆 벤치에 앉는 선배를 본 후에야 두 사람도 다시 나란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도준은 얼굴만 봐도 갑갑한 심정을 안기는 선배의 모습에 다시 담배를 찾았다. 더듬더듬 안쪽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는 도준의 손을 희찬이 잡아 내렸다. 날카로운 눈에서는 ‘씁’ 하고 혼내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너희는 커플 연기하더니, 진짜 커플 같네. 스캔들 없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나?”
왜인지 모르겠지만 선배의 말이 달갑지 않았다. 어느 장르를 촬영하든, 상대가 누구든 간에 로맨스로 엮일 때면 숱하게 듣는 ‘잘 어울린다’는 말이었는데, 이상하게 저 선배의 말은 영 기분이 나빴다. 분명 두 사람이 남자라는 것을 두고 놀리는 말이었을 테니 그건 당연한 감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하, 저희가 스캔들이라도 있어야 했나요, 선배님?”
“뭐, 너희는 스캔들 있어도 금방 막아 줄 소속사 있잖아? 특히 이도준.”
“선배님, 도준이한테 진짜 관심 많으시네요.”
희찬은 저도 모르게 뾰족한 목소리를 냈다. 피식 웃어넘긴 도준과 달리 날카로운 희찬의 반응에 도준이 놀란 눈을 떴다.
뭐라고 덧붙이려는 듯 입술을 움찔대는 희찬의 손을 도준의 큰 손이 덮었다. 힘을 줘 압박을 가하는 손에서는 그만하라는 의도가 읽히는 듯했다.
희찬의 눈이 도준에게 닿았다. 도준은 고개를 미세하게 절레절레 저어 제 의사를 전한 도준은 희찬의 손을 잡았던 손을 금방 떼었다.
희찬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선배와 도준의 사이를 떡하니 가로막고 선 희찬은 도준의 어깨를 툭 치며 말을 얹었다.
“해인아, 올라가자. 가서 대본 맞춰 보자.”
도준의 또렷한 눈이 희찬을 올려봤다. 우두커니 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는 도준을 재촉하듯 희찬의 고개가 까딱거렸다.
그럼에도 도준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희찬을 바라봤다. 의아한 희찬의 눈길이 닿았지만, 그조차 무시했다.
“먼저 올라가 있어.”
“먼저? 너는?”
“선배님 저랑 대화 좀, 잠시…….”
도준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나왔다. 희찬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좁히고 도준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도준은 그저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저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선배와 대화를 하고 싶었다. 대화라기보다는 일종의 경고 같은 거였지만, 아무튼. 흔쾌히 승낙하는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희찬은 여전히 도준의 시야를 가로막고 선 채로 비켜주지 않았다.
도준이 다시 고개를 들고 희찬을 바라봤다. 도준의 잘생긴 눈썹이 꿈틀거리는 모양새는 얼른 비키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준의 눈썹보다 희찬의 눈썹이 더욱 거세게 일렁거렸다.
잠시간 도준을 내려 보던 희찬은 상체를 숙이고 도준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댔다. 어차피 등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 희찬은 굳이 손을 들어 친절하게 입 모양을 가렸다.
“호구같이 있지 말고 얼른 들어와.”
희찬의 귓속말에 도준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도대체 나를 얼마나 핫바지로 보고 있는 건지. 얘는 내가 저에게만 관대하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다.
이번엔 도준이 손을 까딱거렸다. 그 손짓은 귀를 내놓으라는 뜻이었고, 그를 기가 막히게 알아들은 희찬은 도준의 입가에 귀를 가져다 댔다.
“나, 이도준이야.”
“알아, 이호구.”
“올라가 있어, 금방 갈게.”
한참 속닥거리는 두 사람에게 호기심 어린 시선이 닿았다. 그 시선을 느낀 도준이 희찬에게서 떨어졌다.
문득 지난 밤 대표가 한 말이 떠올랐다.
[너희 좀 친해졌다.]
그 말이 떠오르기 무섭게 도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었다.
그래, 결국엔 이럴 거였다. 불편하다고 생각하던 것도 금세 편해질 거였고, 한창 의식하다가도 평생지기로 지내 온 세월에 못 이겨 금방 서로를 편하게 대할 거였다.
그냥, 그 죽일 놈의 악몽만 좀 괜찮아지면 훨씬 좋을 텐데.
도준은 저도 모르게 히유, 낮은 한숨을 뱉었다.
“너, 올라올 때는 노래 정해서 올라와.”
“알겠어.”
희찬의 몸이 겨우겨우 시야에서 사라졌다. 흡연 부스를 떠나며 손을 흔드는 희찬에게 덩달아 손을 흔들어 준 도준은 얼굴 만면에 피웠던 부드러움을 거둬들이고 금세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희찬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도준도 담배를 물었다. 하얀 담배 끝에는 금방 불꽃이 붙었다.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고, 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추운 날씨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입김과 달리 담배 연기는 더 짙은 회색을 띠었다.
“할 말이 뭐냐, 도준아.”
도준의 차가운 눈이 선배에게 닿았다. 성난 가슴을 가라앉히려 피운 담배였는데, 옆에서 들리는 친근한 척 구는 목소리에 기분이 더 나빠졌다. 선배는 도준의 눈빛을 알아채지 못하고 으스대고 있었다.
“선배님.”
“어.”
“저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는 거 아는데요, 희찬이 앞에서는 안 그러셨으면 좋겠습니다.”
도준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더 가라앉았다. 선배의 입에서 기가 찬 숨이 터졌지만, 도준에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도준은 같잖다는 듯 씩 웃어 보였다.
굳이 희찬을 올려 보내고 선배와 독대하고 싶었던 이유가 있다.
“제가 진짜 다 괜찮은데, 누가 희찬이 짜증 나게 하는 건 못 봐서요.”
그러니까, 그 이유는 저 선배가 자꾸만 희찬의 성질을 긁는다는 거였다. 그게 짜증이 났다. 조곤조곤 부드럽게 말을 읊조리는 도준의 목소리는 친절하지 않았다. 화가 잔뜩 묻어나는 그의 차가운 목소리에 비로소 선배도 사태를 파악하고 표정을 굳혔다.
도준은 여유롭게 고개를 까딱였다. 선배라는 사람이 저를 보며 초조함을 드러내는 것은 드문 일도 아니었다. 이전에 희찬에게 말했던 대로, 대응할 가치도 없는 일이었기에 가만히 있었다. 항상 초조함으로 저를 대하는 것이 누가 봐도 열등감에 찌든 모습이라 상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저를 향한 비난이 희찬의 짜증으로 이어진다면, 말이 달라지는 일이다. 도준은 화로 인해 오르는 열을 느꼈다.
“이게 어디서 선배한테.”
꼰대처럼 쫓아오는 잔소리는 지겹지도 않다. 도준은 선배가 뭐라고 말을 하건 신경도 쓰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를 지져 껐다. 몇 모금 빨지도 않았는데 금세 다 타 버린 담배꽁초가 손가락에 남긴 잔향은 언제 맡아도 께름칙했다.
도준은 손가락을 비비적거렸다. 앉은 자리에서 저를 올려다보는 선배의 눈에서는 분함이 읽혔지만, 그 역시 온통 열등감에 범벅된 감정이었다. 자신의 빛은 보지 못하고 남의 빛을 차단하려 드는 선배에게 애잔함이 느껴졌다.
“아, 그리고 선배님.”
그렇게 출구 쪽으로 향하던 도준의 걸음이 멈췄다. 더는 말을 붙이지 않으려 했는데, 도준은 문득 저를 둘러싼 지라시를 떠올렸다.
느릿하게 걸음을 돌려 남자를 마주 봤다. 담배에 불을 붙이던 남자는 아니꼬운 시선으로 도준을 쳐다봤다. 도준의 입가에는 비소가 잔뜩 묻었다.
“저 이한 그룹 사생아 아니에요.”
“뭐?”
“고아거든요, 저.”
비소가 묻은 도준의 입가가 싱그럽게 치솟았다. 여유가 잔뜩 묻어나는 도준의 표정에 남자는 가슴 어딘가에서 무언가 울컥 치미는 것을 느꼈지만, 이렇다 할 대꾸는 하지 못했다.
도준은 자신을 둘러싼 좋지 않은 루머의 대부분이 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마저도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고, 굳이 말을 얹어서 일을 키울 필요도 느끼지 못했었다.
문제는 이한 그룹에서도 해당 소식을 접했다는 거다. 얼마 전 서울에 올라갔을 때, 대표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기꺼이 고소를 돕겠다고 했던가. 그러게, 차라리 진짜 사생아였다면 억울하지도 않을 터였다.
도준은 비릿한 웃음으로 상대를 비웃었다.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이따 촬영장에서 봬요.”
말을 마친 도준이 흡연 부스에서 벗어나며 침을 탁 뱉었다. 둥글게 뭉쳤던 타액 덩어리가 거센 빗줄기에 금세 흩어졌다. 기분 나쁜 감정을 모조리 뱉어 낸 것이었기에 도준의 걸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촬영 시간이 다가오자 신기하게도 비가 뚝 그쳤다. 아침부터 줄기차게 쏟아진 빗줄기가 몰고 온 한파에 사람들이 몸을 한껏 움츠렸다. 호텔 객실을 나서는 도준은 무릎까지 내려오는 패딩 점퍼를 입고, 손으로는 분주하게 핫팩의 포장재를 뜯었다.
자고로 핫팩은 주머니 속에 있을 때 제 열을 발하기 마련이다. 숱한 겨울 촬영으로 그를 익혀 둔 도준은 여러 개의 핫팩을 주머니 속에 욱여넣었다.
도준은 유독 추위에 약했다. 당연히 호텔을 벗어나면서도 인상은 험상궂게 굳힌 채였다. 하필이면 오늘 촬영하는 장면이 여름이 배경이다. 이 추운 날 반팔 차림으로 촬영을 해야 한다는 건 생각만 해도 뼈마디가 아렸다.
매니저 대신 대표와 함께 촬영장에 도착한 도준은 저도 모르게 깊은숨을 푹 내쉬었다. 언제 봐도 옛집과 똑같은 구조의 촬영장이 마냥 부담스러웠다.
군데군데에서 피어오르는 뭉근한 향수는 무시하고 싶다. 오늘은 노래까지 불러야 하는데, 이 이상 감성에 젖었다가는 촬영을 제대로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제 촬영도 망쳤는데, 오늘까지 망칠 수는 없지.
도준은 다짐을 되새기며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도준아, 난로 옆으로 와.”
“네.”
촬영을 준비하는 세트장이 분주했다.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은 도준은 금세 저를 부르는 대표의 목소리에 난로 앞으로 의자를 옮겨 앉았다.
주머니에 넣어 둔 핫팩이 금방 열을 냈다. 허벅지에 뜨끈하게 닿는 핫팩이 마음에 든 도준은 작은 행복을 느끼며 소소한 웃음을 띠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쪽에서 요란한 웅성거림이 들렸다. 보지 않아도 희찬이 온 것을 알 수 있는 분위기에 도준도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봤다. 도준의 예상대로 희찬이 경쾌한 인사를 건네며 장내로 들어오고 있었다. 한 손에는 커다란 보온병을 다른 손에는 대본을 든 희찬의 모습은 한 마리의 나비가 팔랑거리는 것 같았다.
“도준아, 여기 한번 앉아 볼래?”
도준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스태프를 바라봤다.
촬영이 진행되는 마당의 평상 위에 전기장판이 깔렸다. 스태프는 전기장판 위에 노란 장판을 얹고 평상 다리에 못을 박아 전기장판을 가렸다. 이 모든 것은 이 한파에 여름을 연기해야 하는 두 배우를 위한 것이었다.
“괜찮아? 따뜻해?”
“네, 좋아요. 감사합니다.”
“아냐, 겨우내 여기서 촬영해야 하는데 계속 추울 수도 없으니까. 엉덩이라도 따뜻하게 있어.”
도준은 뜨끈하게 열이 오른 장판에 시린 손등을 가져다 댔다. 언 손에 열이 닿자 살갗이 아릿하게 저렸다. 따갑기도 하고, 그러면서 또 따끈하기도 한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도준은 평상을 짚은 채로 고개를 올려 하늘을 봤다. 어느새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했다. 도준은 맑은 하늘 위에 그림이라도 그리듯 입김을 길게 뿜어냈다.
그런 도준의 눈앞에 불쑥 얼굴이 들이밀렸다. 언제 온 건지, 해사하게 웃는 낯을 들이민 것은 희찬이었다. 희찬의 얼굴에는 짙은 짓궂음이 자리했다.
희찬은 촬영 준비를 모두 끝낸 후였다. 그렇지 않아도 화려한 인상을 꾸며 놓은 덕에 도준의 시선은 희찬의 얼굴 밖으로 벗어날 길이 없었다.
“우와, 여기 따뜻하네?”
“여기 전기장판 깔아 주셨어.”
“대박. 완전 좋아. 이불만 있으면 잘 수 있을 것 같아.”
희찬은 뜨끈한 온도가 마음에 드는지, 발라당 드러누워 버렸다. 차가운 공기와 달리 등에 닿는 따뜻함에 몸이 절로 녹는 것만 같았다. 노곤함을 느낀 희찬이 눈을 끔뻑거렸다.
“희찬아, 일어나라! 스탠바이 하자!”
“네―.”
하지만 그것도 찰나였다. 금세라도 잠들 것처럼 눈을 꾹 감았다가 뜨길 반복하던 희찬은 저를 깨우는 감독의 목소리를 듣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긴 도준도 마찬가지였다. 패딩을 벗어 의자에 걸어 두자, 얇은 옷가지와 드러난 팔다리 위로 차가운 공기가 닿았다.
바람이 불지 않는 것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도준은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팔을 바쁘게 비비적거렸다.
어떻게든 추위를 이겨 보려는 도준의 모습이 퍽 애처롭다. 그를 본 희찬은 저 역시 떠는 중이었지만, “쯔쯧.” 혀 차는 소리를 냈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희찬의 우렁찬 인사에 주변에 소소한 웃음이 내려앉았다. 도준은 움츠렸던 몸에 힘을 주고 어깨를 쭉 펴고서 카메라를 응시했다.
“도준아, 추워도 조금만 참자! NG 없이 한 번에 가자!”
“네.”
“스탠바이!”
소소했던 웃음소리는 감독의 지휘하에 금세 사라졌다. 작은 소음도 들리지 않는 곳엔 작은 긴장이 도사렸다.
“액션!”
S#72. 해인, 인수의 집 앞-밤
평상 위에 앉아 정면을 보는 해인. 그 옆에 앉은 인수는 해인의 무릎을 베고 눕는다. 인수의 머리를 쓰다듬는 해인의 하얀 손. 인수의 눈이 들리고. 해인과 눈을 마주치는 인수.
인수 해인아. 노래 불러 줘.
해인 (인수의 볼을 쓰다듬으며) 음.
해인 고민하는 듯 하늘을 쳐다보고. 인수가 해인의 배를 콕 찌른다. 환하게 웃는 해인.
인수 응? 빨리. 나 노래 불러줘.
해인 인수의 앞머리를 만지작거린다. 눈썹 아래로 내려온 인수의 앞머리를 이마 뒤로 넘기고 이마에 입을 맞춘다. 입 맞춘 자리를 손으로 덮으며 노래 시작하는 해인.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인수 보기를 반복한다.
“NG! 야, 도준아! 왜 우냐! 내가 살다 살다 이도준 NG 내는 걸 다 보네.”
한창 진행되던 촬영이 멈췄다. 그에 촬영장에 부드럽게 감돌던 도준의 감미로운 노랫소리도 멎었다. 도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투명한 물기가 콧대를 따라 흐르다, 이내 코끝에 매달려 달랑거렸다.
어려우리라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감정이 북받칠 줄은 몰랐다. 울고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기에 도준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런 도준의 어깨에 패딩이 얹혔다. 두 볼에는 핫팩이 닿았다.
눈물을 흘린 탓에 공기가 더 차갑게만 느껴졌다. 따뜻한 것을 인지하고 고개를 들자 눈앞에는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대표가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옛날 생각이 났어요.”
그래, 옛날 생각이 났다. 희찬이와 함께 별이 뜬 밤하늘을 올려 보고, 다리를 달랑거리며 같이 노래를 부르던 때가 생각났다. 내가 노래를 부르면 희찬이는 살랑거리며 춤을 췄었다.
그래, 우리는 그렇게 행복을 쌓았다.
사과를 건넨 도준은 고개를 떨궜다. 평상 끄트머리를 쥐고 부들부들 떠는 도준의 손은 까득까득 나무 평상의 날카로운 부분을 긁어 댔다. 도준은 곧이어 촬영이 진행된다는 것도 잊은 채로 입술을 세게 짓이겨 물었다.
도준의 상태를 살피던 대표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건지, 임 감독을 불렀다.
“임 감독아, 조금만 끊었다가 가자.”
대표의 정중한 요청에 저벅저벅 다가오는 어른의 걸음 소리가 들렸다. 도준은 조금 더 고개를 숙이고 치솟는 눈물을 참아내려 애썼다.
“도준이 많이 울어? 어이고, 어릴 때 생각이 났어?”
“임 감독아, 조금만 끊었다가 가자.”
대표의 정중한 요청에 저벅저벅 다가오는 어른의 걸음 소리가 들렸다. 도준은 조금 더 고개를 숙이고 치솟는 눈물을 참아내려 애썼다.
“도준이 많이 울어? 어이고, 어릴 때 생각이 났어?”
“…….”
“얼레, 희찬아, 너까지 그러면 어떡해! 야, 니네 왜 그러냐. 둘 다 잘됐는데 뭘 울고 그래!”
결국 희찬도 눈물을 보였다. 주먹을 말아 쥐고 눈물을 꾹 참아 내는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한 사람의 것 같았다. 뭐가 그렇게 서러운 건지, 눈물을 찍어 내는 도준과 그 옆에서 울먹거리며 눈물을 참는 희찬이 안쓰럽다. 그들의 과거를 아는 대표와 감독은 그저 난감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달랠 뿐이었다.
이미 어엿한 성인이 된 두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마냥 어린아이 같았다. 고등학교 친구를 만나면 고등학생이 되고, 중학교 친구를 만나면 중학생이 되듯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두 사람은 금세 어린아이가 되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도준의 손끝에 희찬의 손이 닿았다. 도준은 희찬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희찬의 손가락이 도준의 손가락을 감아쥐었다. 도준은 그 역시 피하지 않았다. 울컥 치미는 감정에 NG가 날지도 모르겠다는 것은 염두에 뒀었다.
하지만 장희찬까지 울 줄은 몰랐다. 도준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고개를 들어 희찬을 볼 수 있었다. 희찬은 제법 서러운 낯으로 눈물을 줄줄 흘려 댔다.
“너 왜 울어?”
희찬의 입에서 억울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울먹거리는 희찬의 모습은 실로 오랜만이라, 가슴 어딘가 저릿한 것을 느끼고서야 도준은 그 원망이 저에게 향한 것을 알아챘다.
“그러는 너는 왜 우는데.”
도준은 눈물을 닦아 내며 삐뚠 대꾸를 건네었다. 울기는 같이 울고 있으면서, 왜 나만 원망하는 건지 조금 억울해졌다.
금세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대표와 감독은 두 사람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렇게 두 사람만 오롯하게 남은 곳에서는 씩씩거리는 희찬의 숨소리만 남아 공간을 울렸다.
“아, 나는! 나는, 너 나 몰라?”
……안다.
원망 어린 희찬의 목소리에 도준은 그저 손끝을 꼼지락거렸다.
“너 울면 나는 그냥 따라 운다고, 아 왜 울어서!”
모르겠다. 그냥 어릴 때부터 이도준이 우는 걸 보면 덩달아 눈물이 났다. 다른 사람이 우는 건 백 번을 봐도 괜찮았는데, 이도준이 우는 건 한 번이 괴롭다.
희찬이 매서운 눈으로 도준을 흘겨봤다. 여전히 눈꼬리에는 눈물방울이 대롱대롱 매달린 채였다.
눈물이 지난 자리가 붉게 달아올랐다. 가만히 서로를 쳐다보던 두 사람은 이내 팔을 들어 눈물을 벅벅 닦아 냈다. 덕분에 메이크업이 얼룩덜룩하게 번졌다. 애초에 아주 연하게 한 메이크업이었지만, 그조차 넘어갈 수 없었던 건지 금세 스태프들이 달려왔다.
조용했던 촬영장이 다시 분주해졌다. 차곡차곡 쌓이는 소란 위에는 대표와 감독의 목소리도 드문드문 얹혀 들렸다. 곧 촬영이 재개될 것을 직감한 두 사람은 뻣뻣하게 당기는 목 근육을 각자의 방법으로 풀며 치미는 감정을 추슬렀다.
“뭔데, 이거.”
적적한 기분을 도무지 풀어내지 못하는 희찬 앞에 떡하니 하얀 핫팩 두 개가 들이밀렸다. 그 손은 굳이 주인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도준의 것이었다. 희찬은 금세 부어 버린 눈에 차가운 아이스 팩을 대고 억지로 눈을 떠 도준을 올려봤다.
“핫팩. 너 얼굴 얼었어.”
“핫팩인 거 누가 몰라.”
“그냥 볼때기에 좀 대고 있어. 대사 NG 내지 말고.”
“그건 내가 할 말이고.”
얼핏 들으면 두 사람은 서로를 지독하게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의 눈길은 전혀 곱지 않았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사람이 뿜어내는 감정은 조금 다른 빛이었다. 툴툴거리면서도 볼에다가 핫팩을 눌러 주는 도준의 손이나, 줄곧 뾰족하게 대답하면서도 가만히 얼굴을 대고 있는 희찬의 모습은 서로에게 향하는 따스한 정이 없다면 보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도준아, 좀 괜찮아? 희찬이는?”
뚜벅뚜벅 무거운 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이내 크고 따뜻한 손이 도준의 이마에 닿았다. 손에 닿는 도준의 온도가 나쁘지 않다. 혹시 열이 올라 아픈 건 아닐까, 걱정했던 대표가 만족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그만 싸워. 안 그래도 앙숙이라고 소문났는데, 그거 뭐 사실이라고 못 박을래?”
“안 싸웠어요.”
“아빠, 저 얘랑 안 싸워요. 얘도 저랑은 못 싸워요.”
“그래, 이놈 새끼들. 싸우면 이놈 한다.”
별안간 헛웃음이 터졌다. 장희찬의 넉살은 쫓아가려야 쫓아갈 수 없을 것이다.
도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준의 몸을 감싸고 있던 패딩과 희찬이 뒤집어썼던 담요가 대표의 손에 걷혔다. 온몸을 휘감는 차가운 공기는 금세 익숙해졌다. 대표가 프레임 바깥으로 빠져나가자 스태프들이 일사불란하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는 정말 다시 촬영이 시작될 모양이다.
“자, 다시 갈게요. 너희 울지 마라!”
“해인아, 울지 마. 너 울면 나도 울어.”
“응.”
희찬은 이전 장면이 그대로 연결될 수 있도록 도준의 무릎을 베고 누워 도준의 날카로운 턱선을 손으로 훑었다. 그에 도준의 시선이 떨어지며 희찬과 마주했다. 고개를 주억거리는 도준에게선 사뭇 결연한 의지가 드러났다.
촬영이 시작되었다. 사근사근 들리던 대화 소리가 멎었고, 촬영이 시작된 주변에서는 그저 바람에 따라 사부작거리는 나뭇가지들이 부딪치는 소리만 울렸다.
S#73. 해인, 인수의 집 앞-밤
해인의 노랫소리에 따라 날리는 이파리. 바닥에 이는 작은 소용돌이. 인수의 다리가 달랑거린다. 해인의 노래를 들으며 고개를 까딱거리는 인수. 노래를 마친 해인도 이내 평상 위에 드러눕는다.
인수 (벌떡 몸을 일으키며) 너 노래 진짜 잘한다.
해인 너만 그렇게 생각해. (낮은 웃음소리)
인수 해인의 양 볼을 한 손으로 쥐고 주물럭거린다. 입술을 내미는 해인. 인수는 피식 웃었다가 해인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
인수 내일은 몇 시에 집합이래?
해인 8시. 우리 자야겠다.
불이 들어오는 인수의 휴대폰. 감독으로부터 온 문자를 확인한다. 반가운 기색을 피우는 인수. 환한 인수의 표정을 본 해인도 휴대폰을 함께 살핀다.
해인 어디로 오래?
인수 방송국 앞에서 버스 타면 된대. 감독님이 내일 끝나고 술 마시재.
해인 (볼을 주물럭대는 인수의 손을 마주 잡으며) 좋지.
인수의 목을 얼싸안는 해인. 힘을 줘 인수의 얼굴을 당기고 입을 맞춘다. 배시시 웃는 인수. 해인에게 손을 내민다.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키는 해인.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같이 집 안으로 사라진다.
삐걱거리는 철문. 잠금쇠 덜그럭거리는 소리. 스위치 내려가는 소리. 탁 꺼지는 집 안 불.
두 사람의 온기를 머금은 공간은 잔잔한 설렘이 감돌았다. 새까만 하늘에 뜬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빛을 내고, 달빛에 비친 풍경은 영롱하기 그지없었다. 반짝반짝 빛을 내는 별이 빼곡하게 수 놓인 하늘은 청명했고, 새까만 배경을 덧대어 별이 빛나기에 충분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기만 한 하늘은 두 청춘의 맑은 앞날을 예견하는 듯했다.
“오케이! 다음 씬 준비할게요!”
감독의 사인이 떨어지기 무섭게 삐걱거리는 문이 벌컥 열렸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 도준과 희찬은 금세 자신들의 스태프에게로 달려가 겉옷을 받아 입고 핫팩을 주물럭거렸다.
아무리 세트장이라지만 추워도 너무 춥다. 안쪽 공간은 미처 데워두지 못한 건지, 얼음장 같은 곳에서 달달 떨다 보니 턱관절이 다 저렸다.
“안에 많이 추워?”
“엄청요, 냉동탑차 같아요.”
“큰일 났네. 너희 저기 평상에 앉아 있어. 난로도 끌어다 두고.”
스태프들은 얼른 두 사람을 평상으로 밀었다. 따뜻한 신을 신고, 패딩을 입은 도준은 핫팩으로 추위가 서린 곳을 녹였다. 어느 정도 몸이 녹아 떨리는 것이 멈춘 후에는 어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겼다.
희찬은 평상에 엉덩이를 붙인 채로 스태프들과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다음 촬영이 진행될 집 안이 얼마나 추운지 손과 발을 이용하여 설명하자 스태프들도 열띤 리액션을 보였다.
희찬을 가만히 살피던 도준이 벌떡 일어나 슬금슬금 촬영장을 벗어나려 했다. 그에 희찬의 눈이 도준의 꽁무니를 좇았다.
촬영장 외부로 나가려는 도준의 의도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희찬은 스태프들과 나누던 대화를 멈추고, 부리나케 도준의 앞을 막고 섰다.
“어디 가게?”
“담배.”
“안 돼, 담배 피우지 마.”
“왜, 또.”
희찬은 능숙하게 도준의 손에 들린 담배를 낚아채더니 자신의 주머니 속으로 밀어 넣었다. 도준의 가지런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도준의 손은 담배를 거머쥔 모양으로 허공에 머문 채였다.
담배 피우고 싶은 것을 참고, 참고, 또 참아 이제야 겨우 한 번 나가는 건데, 그마저도 인상을 잔뜩 구기고서 막아서는 희찬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도준이 희찬 앞에서 고집을 부릴 수 있는 일은 없다. 결국 체념한 도준은 미간 사이를 긁적거리다 주머니 속으로 양손을 밀어 넣었다.
희찬은 도준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샐룩 웃어 보였다. 말간 얼굴에 새빨간 입꼬리가 예쁜 포물선을 그렸다. 동그란 눈이 반달로 접히며 대체로 옅은 색소로 화사한 미소를 피워 내니 불현듯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도준은 희찬을 바라봤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주머니에 밀어 넣었던 손으로 주먹을 말아 쥐고 얕은 한숨을 길게 뿜어냈다.
“너 담배 피우면 뽀뽀할 때 담배 냄새나.”
[아악! 담배 냄새!]
도준은 제 앞에 선 희찬의 모습 위로 앳된 희찬의 모습이 겹치는 듯한 환상을 봤다. 엄지와 검지로 콧방울을 잡아 쥐고, 미간을 가차 없이 찌푸린 어린 희찬은 도준을 향해 손을 훠이훠이 저어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어린 희찬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 싶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것은 더 이상 어린 희찬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도준은 주먹을 말았다 펴기를 반복하며 참고, 또 참았다.
쓰다듬어 줄 수 있을 때 많이 쓰다듬어 줄걸. 그런 부질없는 후회를 하면서 말이다.
“알겠어, 안 피울게. 담배 줘.”
달랑거리는 도준의 하얀 손바닥 위에 담배가 얹혔다. 줄락말락 밀고 당기는 희찬의 손에서 담배를 앗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담배를 빼앗긴 희찬은 이번에도 매서운 잔소리를 쏟아 냈다.
“그냥 아예 좀 끊어. 뭐 좋다고 계속 피우냐, 그걸?”
“담배 처음 가르쳐 준 게 누군데.”
“누군데? 어? 누군데.”
누구긴 누구야, 장희찬이지.
입 안에서 맴도는 말은 굳이 내뱉지 않았다. 도준은 제 앞을 딱 가리고 선 희찬을 살짝 밀어내고선 촬영장 밖으로 빠져나가려던 걸음을 돌려 다시 평상으로 향했다.
담배는 장희찬에게서 배웠다. 아니, 정확하게는 장희찬의 권유로 시작했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권유도 아니었다.
[너도 담배 피워 봐! 이도준 진짜 까리할 듯?]
그 가벼운 말 한마디에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담배가 익숙해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엔 으스대듯 재미로 시작한 것이 습관이 되고, 중독이 되어 이제는 ‘하지 말라’는 말에도 쉽게 응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무어든 나쁜 것이 정신을 갉아먹고, 몸을 잠식하는 것은 삽시간이다. 그리고 그 ‘나쁜 것’이 기분을 짓누르는 것 역시 금방이다. 아릿한 과거는 금세 도준의 기분을 가라앉혔다.
“야, 너희 아까 막 뽀뽀하는 거 보니까 어? 아주 익숙해? 어? 연애 안 한다면서 다 하고 있었던 거지?”
“임 감독아, 내가 얘네 키스 신 걱정했는데 뽀뽀하는 거 보니까 문제없겠더라. 아주 걱정 없어.”
바쁜 촬영장은 도준이 서글픔을 느낄 틈조차 주지 않았다. 감정의 무게에 눌려 근육이 푹 풀리려던 찰나, 감독과 대표의 장난스러운 대화에 도준의 눈이 뜨였다.
뽀뽀……. 잠시 눈을 굴리던 도준의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뽀뽀했다. 장희찬이랑.
너무 일상과도 같은 일이라, 아니 그랬던 일이라 뽀뽀했다는 사실을 미처 자각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자아내는 웅성거림은 닿지 않았다. 도준의 귀에는 그저 스산한 바람 소리와 그 속에서 웅웅 울리는 ‘뽀뽀할 때 담배 냄새난단 말이야.’ 하던 희찬의 투정이 가득했다.
잊고 있었다. 장희찬과 촬영 중인 작품이 ‘퀴어 드라마’라는 것을, 로맨스라는 것을.
불현듯 몸이 뜨거워졌다. 화끈거리는 몸 구석구석에서 빨갛게 피어나는 열꽃이 자기주장을 하며 생각을 한 곳으로 모았다. 그렇게 하나둘 모인 생각의 끄트머리에는 희찬과 매일 뽀뽀로 아침을 열고, 뽀뽀로 하루를 마무리하던 날들이 자리했다. 혹시라도 함께 집에 있는 날에는 서로의 몸을 부둥켜안고서 한시도 놓아주지 않았었다.
누가 먼저 ‘사귀자’ 말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누가 먼저 ‘헤어지자’ 말하지도 않았다. 그저 서로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항상 최선을 다해 사랑을 속삭였다.
과거를 곱씹는 도준의 손등에 시퍼런 핏줄이 솟았다. 그리고 그 위에 하얀 손등이 덮였다. 도준은 하얀 손이 제 손을 감싸 쥐는 것을 가만히 쳐다봤다. 시선을 들어 확인할 것도 없이 희찬의 손이었다.
“키스 신? 문제없죠. 그치, 해인아?”
“어려울 게 뭐가 있어요.”
“맞아, 이거 그냥 다 연기잖아요.”
뭉근하게 울리던 주변의 소음이 희찬의 또렷한 목소리로 깨어졌다. 가벼운 희찬의 목소리가 송곳처럼 도준의 가슴을 찔렀다. 찌릿한 감각이 달갑지 않다. 도준은 못마땅한 눈으로 희찬을 쳐다봤다. 희찬은 그저 해사하게 웃으며 어른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냥 다 연기라니. 근래 들은 말 중에 제일 마음에 안 드는 말이었다.
문득 희찬을 처음 다시 만난 날 저를 두고 ‘배우님’이라 칭하던 것을 떠올렸다. 도준은 입을 꾹 다물었다.
연기가 맞다. 맞는데, 싫다.
어린아이처럼 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 도준이 고개를 푹 수그렸다.
“왜 그래?”
도준의 눈앞에 희찬의 얼굴이 불쑥 들이밀렸다. 고개를 숙인 탓에 얼굴을 들이밀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자신의 기분을 의식하는 듯 행동하는 희찬의 태도에 도준은 괜히 눈을 돌렸다. 그 역시 희찬의 눈에는 그저 귀여운 투정이었다.
도준의 손등을 거머쥔 희찬의 손이 도준의 손가락을 쓰다듬었다. 손끝을 조몰락거렸다가, 다시 부드럽게 손등을 감싸 쥐었다.
그 손길은 마치 부드럽게 도준을 달래는 것만 같았다. 기분 상할 필요 없다는 것처럼, 나도 너랑 같은 마음이라는 것처럼 부드럽게 달래는 손짓에는 속절없이 마음이 녹아내렸다. 결국엔 또 장희찬 손에 휘둘리고야 마는 감정이었다.
“자, 이제 노가리 그만 까고. 촬영합시다. 해 뜨면 못 찍는다―.”
“아, 저 감독님, 저 잠시.”
“응. 5분 안에 돌아와!”
촬영을 재개하려는 감독의 말이 공간을 울렸다. 그 말을 듣기 무섭게 도준이 벌떡 일어섰다. 무언가 잊은 것이 있는 듯, 도준이 성큼성큼 걸음을 놀려 향한 곳은 제 패딩이 놓여 있는 곳이었다. 스태프들이 진을 친 곳 중 가장 따뜻한 곳에서 자리를 잡은 대표에게서 패딩을 받아 들었다. 도준의 손은 곧장 패딩 안 주머니로 향했다.
“약 먹으려고?”
“네.”
숨이 가빴다.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가슴을 누군가 쥐고 비트는 듯한 고통은 이렇게 불시에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근래에 감정 기복이 심해지긴 했다. 갑자기 눈물이 나질 않나, 금세 얼굴을 붉히고, 속상함을 느끼더니 또다시 안정을 느꼈다. 분 단위로 휙휙 바뀌는 감정은 기어코 불안정을 안겼다.
“물, 마셔.”
“아…….”
도준은 손바닥 아랫부분으로 가슴을 꾹꾹 눌러 댔다. 실로 오랜만에 느낀 가슴이 두근대는 감정은 기다렸다는 듯이 아픔으로 뒤바뀌어 ‘네 감정은 공포다.’ 하고 일깨우는 것 같았다.
방심하기 무섭게 쫓아오는 지긋지긋한 통증이 괴롭다.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린 도준은 떨리는 호흡을 천천히 가다듬었다. 대표는 불안하게 뿜어져 나오는 도준의 숨을 지켜보다 손을 들어 토닥토닥 단단한 어깨를 다독였다.
“괜찮아?”
“네.”
도준은 제 어깨에 얹힌 대표의 손을 끌어 내렸다. 위태로운 손이었지만, 그래도 금세 힘이 실렸다. 터덜터덜 힘없는 걸음을 옮기는 도준의 모습은 또 얼마나 아슬아슬한지 모른다. 도준은 자신의 그런 상태를 하나하나 초연하게 받아들였다.
약 기운 탓인지, 약에 의존하는 심리 탓인지. 순식간에 의연해진 도준의 눈앞에 햇살이 드리웠다. 분명 밤중의 깜깜한 주변이었으나, 유독 한 곳만 화사한 빛을 냈다. 희찬이 도준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그 낯을 본 도준은 가슴 깊은 곳에 도사린 불안이 가시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오늘은 그 무수한 날들보다 더 괜찮을 거다. 이 진절머리 나는 아픔들도 머지않아 나아질 거다.
도준의 걸음걸음에 힘이 실렸다.
S#92. 침대 위-밤
바람 부는 소리. 불 꺼진 방. 창을 통해 들어온 달빛이 머무는 침대. 얇은 홑이불과 베개 두 개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다.
인수의 젖은 머리. 웃통을 입지 않은 모습.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쓰고 머리를 털며 침대에 걸터앉는 인수. 뒤이어 옷을 입으며 침대로 다가가는 해인. 피곤한 표정의 두 사람. 서로를 향해 환하게 웃는다.
해인 (팔로 인수를 안으며) 인수야, 자자.
인수 나 머리만 말리고.
해인 말려 줄까?
인수 드라이기 고장 났어. 사야겠다.
해인이 인수의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 준다. 인수 해인에게 머리를 맡긴 채로 드라이기를 만지작거린다. 달그락거리는 소리. 콘센트를 꽂고 전원을 켜 보지만 잠깐 위잉 하다가 꺼지는 드라이기. 인수 속상한 듯 입술을 삐죽거리고, 해인은 피식 웃는다.
해인 (인수의 손에서 드라이기를 앗으며) 내일 일당 받으면 드라이기 사 올게.
인수 (해인을 마주 보며) 또 뭐 사야 하지?
해인 말없이 인수의 말랑한 볼을 꼬집는다.
인수 아파. (인상을 찌푸리고 볼을 문지른다.)
해인 내일 외식도 할까. 나 잔업 한 거 많아서 돈 많이 받을 거 같아.
인수 안 돼. 돈 모아서 이사 가야지.
해인 너 재미없어.
인수 예쁘게 웃으며 해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거머쥔다. 투정 부리듯 삐죽거리는 해인의 입술. 인수가 부드럽게 입을 맞추자 해인도 웃는다.
인수 이번 달 말에는 외식하자.
해인 (인수를 품에 가두고 누우며) 응, 자자.
얇은 이불을 나눠 덮는 두 사람. 인수 한기를 느끼는 듯 몸을 움츠린다. 그를 본 해인 자신이 덮은 이불을 인수에게 건네고, 침대 아래에 떨어진 담요를 침대 위로 올려 덮는다.
해인 인수야, 이불 너 덮어.
인수 아냐, 너 감기 걸려. 이거 같이 덮어.
해인 곰곰이 생각하는 모양. 잠시 눈을 굴리더니 몸을 돌려 인수를 꼭 끌어안는다. 인수의 이마 위에 입을 맞추는 해인.
해인 그럼 이렇게 안고 자자. 안 춥지?
인수 (해인의 품으로 파고들며) 응, 좋아.
인수 해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해인 인수의 등을 토닥인다. 눈을 감는 두 사람. 인수는 해인을 마주 안은 채로 잠든다. 인수를 안은 채로 천장을 올려 보던 해인. 쉽사리 잠을 청할 수 없는지 연신 한숨을 터뜨리다 이내 두 눈을 질끈 감고 잠을 청한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것이 빠듯해졌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함은 눈덩이 불어나듯 커지기만 했고, 자연스레 한숨도 늘었다. 같은 꿈을 꾸고, 같은 길을 함께 걷는다는 보람은 컸으나, 드높은 현실의 벽에 맞닥뜨릴 때마다 암담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함께 누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않았다. 마주 잡은 손에 힘을 더하고, 딛는 걸음에 용기를 걸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던데, 우리는 남들보다 조금 더 고생하는 중일 뿐이라고. 그러니 조금 더 찬란한 미래가 우리를 기다릴 것이라고. 어렴풋한 희망을 걸고 서로를 응원하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
촬영 장면 그대로 도준의 품에 안겨 잠든 희찬은 도무지 눈을 뜰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건 도준도 마찬가지였다. 희찬을 꼭 안은 채로 잠든 모습은 실로 편안해 보였다.
두 사람은 어두운 공간에서 아주 오랜만에 단잠에 들었다. 퍼즐처럼 꼭 맞는 몸으로, 서로의 품에 안긴 두 사람의 모습은 지독하게 익숙한 일상의 한 조각 같았다.
“쟤네 진짜 자는 건가? 왜 안 일어나지?”
“음……. 자나 본데.”
컷 사인이 떨어져도 두 사람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히 묻어나는 감독에게 대표가 대신 대답했다.
대표는 가슴 가득 차오르는 뿌듯함을 느꼈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는 이도준인데, 다른 사람과 한곳에 누워 잠을 청하기조차 어려운 이도준인데 그의 옆에 장희찬은 아무런 문제가 아닌 모양이다. 그게 그렇게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다.
처음 도준을 만났을 때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하루걸러 하루를 죽겠다며 용쓰는 도준을 돌보는 것은 대표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어려운 시간을 이겨 내는 도준에게 희찬은 큰 희망이었고, 매일의 이유였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도준은 평소에는 볼 수 없는 편안한 표정으로 잠들었다. 가슴 한편이 괜히 간질거렸다. 대표는 두 사람을 깨우려는 스태프의 손을 저지했다. 어차피 다음 신 촬영까지 준비 시간이 있으니, 쉽게 잘 수 없는 두 사람이 지금이라도 푹 자 두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준비 끝나면 나한테 말해, 내가 애들 깨울게.”
대표는 침대 맡에 걸터앉아 두 사람을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헐벗은 희찬의 몸 위에 담요를 한 겹 더 얹어 주고, 혹시나 추위를 느낄지 모를 두 사람을 위해 전기장판의 온도를 올려 주었다.
여전히 차가운 공기였지만, 두 사람에게 추운 날씨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닌 듯했다.
바쁘게 촬영을 진행하다 보니 어느새 동이 텄다. 해가 짧은 탓에 7시가 다 되어 빼꼼 해가 올랐다. 그를 본 감독은 그제야 오늘 촬영의 끝을 알렸다. 지난날, 도준의 갑작스러운 악몽으로 하루를 비운 것치고 오늘 밤 촬영한 분량이 많아 대부분 만족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촬영을 마친 도준 역시 홀가분한 표정을 보였다. 걱정했던 노래 부르는 신도 잘 넘어갔고, 저도 모르게 희찬을 안고 잠든 이후에는 유달리 개운했다.
“아침 먹고 두 시간 후에 오늘 씬 촬영 진행합니다. 주연 배우들은 저녁 5시에 집합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빠듯하게 촬영이 진행된 후에는 단 몇 시간이어도, 꼭 쉬는 시간을 주는 일정이 퍽 마음에 들었다. 촬영 회차가 거듭될수록 점점 촉박해지는 시간이었지만, 그럼에도 감독은 최대한 배우들의 편의를 배려했다. 배우의 컨디션이 좋아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믿는 감독의 신조 역시 아주 만족스러웠다.
무리 속에서 다 같이 아침을 먹자는 의견이 오갔다. 그에 한 걸음 떨어져 나온 도준은 담배를 물고 흡연 구역으로 향했다. 촬영하는 내내 희찬의 등쌀에 담배 한 대 피우지 못했으니, 지금의 담배는 그 어느 때보다 간절했다.
“도준아, 아침 먹고 들어갈래? 국밥 먹는다는데.”
“대표님 드세요. 저는 들어갈게요.”
“그럴래? 그럼 사 갈까?”
“괜찮아요. 방에서 챙겨 먹을게요.”
담배를 피우고 다시 세트장으로 돌아온 도준을 대표가 맞이했다. 다른 사람들의 계획을 전하는 대표에게 도준은 항상 그랬듯 반대하는 의사를 보였다. 사람들과 어울려 밥을 먹는 것은 항상 어려운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맛있게 먹을 자신도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런 도준과 대표를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어수선한 사람들 틈에 녹아든 희찬은 그들과 완전히 함께하는 것 같았으나, 신경은 온통 도준에게 향한 채였다. 희찬은 이번에도 함께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이는 도준의 태도에 인상을 찌푸렸다. 왜 저렇게까지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피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어려웠다.
확실히 변해도 너무 변했어.
키스 신을 두고 ‘연기잖아요.’라고 말했을 때, 삐치는 것이 역력히 드러나던 도준의 모습은 예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는데 말이다. 그 모습에 귀여움을 느끼기도 했으나 그것도 잠시, 지금 마주한 도준의 모습은 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활동적이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도준이었는데……. 자꾸만 과거의 모습과 비교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걸까.
촬영을 핑계로 서로를 껴안고, 입을 맞추는 일이 늘어나다 보니 과거의 일도 자연스레 떠올랐다.
“도준아, 푹 쉬어!”
“네, 고생하셨습니다.”
결국 도준은 감독에게 따로 인사를 남겨 두고 장내를 벗어났다. 터벅터벅 멀어지는 이도준의 등이 왜 그렇게 쓸쓸해 보이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쓸쓸함이 왜 그렇게 잘 어울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희찬은 미간을 한껏 좁힌 채로 도준이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봤다.
“대표님, 해인이는 안 먹어요?”
“어, 어. 도준이 사람들 많은 곳을 안 좋아해서. 들어가서 챙겨 먹는대.”
“왜 안 좋아하는데요? 연예인이 뭐 그래.”
“하하, 그러게 말이다. 그래서 인터뷰도 안 하잖아. 내가 까다로운 배우 데리고 있다.”
“고생하시겠어요.”
희찬은 감흥 없이 대꾸했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서 보는 내가 잘못된 걸까, 나는 그대로인데 너는 변한 것 같은 모습이 못내 속이 쓰리다.
희찬은 착잡한 심정을 여실히 드러내며 힘없는 걸음을 옮겼다. 촬영도 성공적이었고, 보람도 큰 오늘인데, 마무리가 껄끄러운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식당에 들어서자 먼저 도착한 스태프들이 자아내는 소란함이 가득했다. 익숙하게 가장 안쪽에 자리를 잡은 대표는 이어서 들어오는 희찬과 감독까지 자신의 테이블에 앉혀 두고 식사를 주문했다.
따끈한 김을 뿜어내는 먹음직스러운 국밥이 세 사람 앞에 놓였다. 맛있는 음식을 본 희찬은 눈을 반짝이며 곧장 숟가락을 들고 따뜻한 국물을 한입에 머금었다. 희찬의 넓고 탄탄한 어깨가 움츠러들며 만족하는 모습을 보였다.
“도준이도 너처럼 잘 먹으면 좋을 텐데.”
대표는 자신의 앞에서 맛있게 밥을 먹는 희찬에게 칭찬을 건네었다. 여러 가지 반찬을 얹어 든든하게 한 끼를 채우는 희찬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그런 희찬의 모습은 자연스레 도준과 비교가 되었다.
“도준이 원래 먹는 거 진짜 좋아했는데, 애가 영 이상해졌어요.”
“그랬어?”
처음 듣는 말에 대표가 크게 눈썹을 들썩거렸다. 잘 먹는 이도준이라. 대표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희찬은 예의 그 싱그러운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눈빛과 몸짓에는 묘하게 신뢰가 갔다.
“도준이는 뭐 좋아했어?”
“도준이는 먹는 거라면 다 좋아했어요. 걔가 원래 저보다 작았거든요?”
“그래?”
“근데 그렇게 막 먹더니 열여덟쯤부터 앞서나가더라고요.”
희찬에게서 듣는 도준의 이야기는 생소한 것들이었다. 모든 것을 털어놓은 줄로만 알았지만, 이런 사소한 부분은 접하지 못했기에 더욱 그랬다.
어릴 때 같이 학교에 가다가 중간에 오락실로 빠진 얘기, 박 터지게 싸우고서 엉엉 울며 화해한 얘기, 쌍으로 묶여서 혼났던 일에 대한 얘기, 보육원에서 나와 함께 집을 구하던 얘기 등등.
도준이 희찬을 얘기할 때처럼, 희찬도 한껏 즐거운 표정으로 도준과의 과거를 읊었다.
그를 본 대표는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피웠다.
임 감독으로부터 이도준과 장희찬은 세트라는 얘기를 무수히 들어 왔지만, 이렇게 똑같을 줄은 몰랐다.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사람이, 과거를 떠올리며 얘기할 땐 마치 한 사람이 얘기하는 것과 같은 착각이 일었다.
“희찬이 너, 도준이 많이 좋아하네.”
“하하, 그래 보여요?”
“도준이도 그래. 도준이가 네 얘기 할 때 딱 지금 네 표정 같았어.”
“…….”
희찬의 말간 얼굴 위에 삽시간에 그늘이 드리웠다. 항상 해맑고, 천진하게 웃는 줄로만 알았던 희찬의 표정이 바뀌는 것을 본 대표는 저도 모르게 함께 표정을 굳혔다.
그 얼굴 역시 도준의 것과 같았다.
과거를 떠올리고 아파할 때 도준에게서 나는 향과 지독하게 닮은 향이 희찬에게서 났다. 오래간 희찬의 표정을 살피던 대표는 이내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아, 희찬이도 도준이의 때를 기다리는구나.
도준이가 희찬이에게 가기 위해 무수한 시간을 노력한 만큼, 희찬이도 어렵게 도준이를 헤아리고, 기다리는구나.
그런 결론 말이다.
“곽 대표야, 얘네 덩치도 비슷하고, 키도 비슷하고, 생긴 게 좀 다르긴 해도 딱 퍼즐이라니까, 퍼즐.”
그래, 딱 퍼즐 같았다.
크기가 맞고, 같은 것을 그리는 조각끼리 맞물려야 비로소 완성되는 그림처럼, 서로의 빈자리를 다른 것으로 채우지 않고 짝을 기다리는 퍼즐 같았다.
임 감독의 경쾌한 말에 희찬이 금세 샐룩 웃었다. 그에 대표도 덩달아 인자한 표정으로 희찬을 바라봤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대표와 희찬이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대표의 손에는 도준을 위한 뜨끈한 국밥이 포장된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희찬과 나란히 서서 함께 정면을 응시하던 대표가 잠시 희찬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말을 아주 은밀하게 건네었다.
“희찬아, 내가 너희 얘기를 좀 알아서 하는 말인데.”
“네.”
“도준이도 노력하고 있어, 너무 힘들어하지 마.”
그건 위로였다.
희찬을 향한 한 통의 쪽지를 남기고 집에서 나왔다는 도준의 말이 생각났고, 도준이 무수히도 곱씹던 ‘때’가 뒤이어 떠올랐다. 때가 되면 희찬이에게 가겠다는 도준의 무수한 다짐처럼, 그 쪽지 하나 붙들고 여태껏 기다리는 희찬을 다독여 주고 싶었다.
차분하게 대표의 말을 듣던 희찬의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하하, 정말요? 빨리 오라고 대표님이 등 좀 떠밀어 주세요. 고집이 더럽게 세서 말을 들을지는 모르겠지만…….”
“하하, 그래, 희찬아. 내가 얼른 보낼게.”
도준의 객실 문 앞에서 두 사람이 헤어졌다.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넨 희찬이 저 멀리 자신의 객실을 향해 휘적휘적 나아갔다. 가만히 그를 지켜보던 대표는 시리도록 찬란한 두 청춘의 아픔을 상기하고 절로 터져 나오는 얕은 숨을 가볍게 뱉었다.
“도준아!”
객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면서 부러 커다란 목소리로 도준을 불러 젖히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방에서 어기적거리며 걸어 나오는 도준의 모습은 예상 그대로였다. 대표는 환하게 웃으며 비닐봉지를 얼굴 옆에 가져다 대고 흔들어 보였다.
“밥 먹자.”
“대표님, 저 자꾸 이렇게 안 챙기셔도 진짜 괜찮아요.”
“너 안 먹었잖아? 이리 와, 밥 먹게.”
대표의 듬직한 손이 도준의 등을 어루만졌다. 도준의 낯에도 희미한 실소가 퍼졌다.
도준과 대표가 마주 앉은 식탁엔 잔잔한 생활 소음이 머물렀다. 대표가 사 온 국밥을 퍼먹는 도준의 숟가락이 식기와 부딪치는 소리, 탁자 유리와 컵이 부딪치는 소리 또는 가끔가다 울리는 두 사람의 휴대폰 진동 소리 같은 것들 말이다.
도준은 일상의 잔잔함을 느끼며 기분 좋게 음식을 씹어 삼켰다. 밥을 먹지 않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분명 냉장고를 뒤적거렸고, 대표가 챙겨 온 갖가지 반찬들을 식탁에 올려 두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역시, 이번에도 먹는 것은 실패했다.
맛에 대한 재미가 없으니 먹는 재미도 없어지기 마련이다. 갖가지 찬들과 밥을 다시 냉장고에 넣어 두고, 풀때기나 꺼내 씹을까 했지만, 그조차 흥미가 없었다. 그냥 잠이나 자는 게 좋겠다고 판단하며 방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대표가 돌아왔다.
도준은 느릿한 숟가락질로 대표가 만족할 때까지 밥을 밀어 넣었다. 뜨끈한 국물에 젖은 밥알이 입 안을 휘저었다.
“고소하고, 짭짤한 맛이 괜찮더라고.”
“네, 아삭아삭하네요.”
대표가 맛을 설명하자, 도준은 식감을 표현했다. 대표는 웬일로 잘 먹는 도준을 뿌듯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따금 눈을 들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도준에게 맛있게 먹으라며, 인자한 미소를 보이기도 했다.
“여기가 콩나물국밥 맛집인가 봐. 다들 맛있다고 난리데.”
“음……. 저도 언젠가는 맛있게 먹겠죠? 조금 더 괜찮아지면?”
“그럼. 너 지금도 많이 괜찮아졌어.”
도준은 금세 한 그릇을 뚝딱 비워 냈다. 막상 먹이면 잘 먹는 도준이라는 것을 안다. 대표는 그것 보라는 듯, 핀잔 어린 눈빛을 쏘았다.
문득 희찬의 말이 떠올랐다. ‘먹는 것이라면 다 좋아하던 이도준이었다.’라는 말이 그럴듯했다.
지금도 막상 먹이면 저렇게 잘 먹는데, 예전엔 얼마나 잘 먹었을까.
그걸 보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다.
“차 드실래요? 어떤 걸로 드릴까요?”
“얼그레이. 있어?”
“있어요.”
식사를 마친 도준이 설거지까지 마친 후에는 찬장에서 차를 꺼냈다. 보기 드문 값비싼 차부터 흔하게 볼 수 있는 티백까지 완벽하게 준비된 찬장은 볼 때마다 놀라울 지경이었다.
대표가 요구한 얼그레이의 종류도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도준은 찬찬히 티백들을 살피며 향을 맡다가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꺼내고서 금세 차를 우려냈다.
“너도 자야 하는데 커피 말고 다른 걸로 마시지.”
“따뜻한 물 마시려고요.”
“오, 그거 간만에 좋은 생각.”
도준은 눈을 느릿하게 끔뻑거렸다. 작품 촬영 중에 일반인들과 전혀 다른 패턴으로 지내는 것은 익숙한 일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남들은 일어나서 외출을 준비할 시간에 잠을 청하는 것은 드문드문 새로움을 안겼다.
오늘이 그랬다. 해가 뜬 후에 잠을 청하는 게 낯선 일도 아닌데, 피곤한 와중에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내리쬐는 태양 빛이 사뿐사뿐 거실 바닥을 거닐었다. 턱을 괸 채로 가만히 햇살을 좇던 도준은 편안함에 얹히는 노곤함을 느꼈다.
“도준아.”
“네.”
“뜬금없을 수도 있는데, 너 갑자기 누가 네 부모라고 찾아오면 어떨 거 같아?”
“진짜 갑자기네요.”
대표는 이따금 뜬금없는 소리를 하곤 했다. 가끔가다 한 번씩 불쑥 튀어나오는 주제는 오늘도 여지없이 도준을 당황하게 했다.
“음……. 근데 저한테 부모님은 대표님이라서……. 생각 안 해 봤어요.”
달갑지 않은 주제다. 깊이 생각하는 것조차 싫었기에 도준은 애교스러운 눈빛을 보였다. 짓궂게 웃는 것으로 대화를 무마하려는 심산이었다.
처음 대표를 만났을 때, 대표는 도준에게 자신을 ‘장사치’라 소개했고, 그에 도준은 자신을 ‘상품’이라 말하며 대응했었다. 하지만, 그건 딱 그때까지였다.
‘장사치’가 ‘상품’을 계약한 것과 달리 대표는 도준을 키우기로 작정한 건지, 도준을 당장 숙소로 들였었다. 그리고 바로 곁에서 보살폈다.
그런 대표의 지극정성을 익히 아는 도준은 그의 말 문자 그대로 대표를 ‘아버지’라 생각하며 따랐다. 그러니 다른 부모의 사랑도 필요 없었다.
그런데 그 말을 가만히 곱씹고 보니 평소의 뜬금없는 말과는 결이 다른 것 같았다. 도준은 눈을 또렷하게 뜨고 대표를 바라봤다.
“혹시 누가 찾아오셨어요?”
“아니, 그냥 묻는 거지. 궁금해서.”
“저 소개해 달래요?”
“아니라니까.”
아니라고 힘주어 대답하는 대표였지만, 아닌 게 아닌 것 같았다. 도준은 입꼬리 한쪽을 씁쓸하게 올려 웃었다. 손으로는 찻잔의 끄트머리를 어루만졌다.
“……혹시 누가, 제 부모님이라고 오시면요. 저는 안 만나고 싶다고 전해 주세요. 저는 부모 없는 이도준으로 사는 게 더 좋아요.”
“…….”
도준의 말에 절로 입이 닫혔다. 대표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아무 말 없이 눈을 허공으로 돌렸다. 도준의 눈도 허공을 거닐었다. 도준이 전한 말은 조금의 거짓도 묻지 않은 오롯한 진실이었다.
그냥 이도준은 부모가 없는 것이 어울린다는 아픈 합리화를 해 온 인생이었다. 또래의 다른 친구들이 부모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한 발 한 발 쭉쭉 나아갈 때, 한 자리에 머물며 아등바등 발버둥 칠 때도 그냥 이런 것이 운명이겠거니,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부모에게 무엇을 바라겠느냐고 자신을 부단히 달래 온 도준이었다.
정작 어른이 필요했을 때는 조금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으면서. 나 몰라라 내버려 둘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무슨. 어쭙잖은 ‘부모 노릇’이라도 해 보겠다고 나타난 것이라면 그것만큼 치졸한 게 있을까.
“어릴 때, 원장님께 들은 말이 있거든요?”
“응.”
“1월 1일이었대요. 엄청 추운 겨울 새벽에 웬 고양이가 울어 댔대요. 무슨 고양이가 그렇게 우나 싶어서 밖에 나가봤더니, 고양이가 아니라 포대기에 싸인 아기가 울고 있었대요. 아기랑 고양이랑 우는 소리가 비슷하잖아요.”
“…….”
“옷도 없었대요. 그냥 적당히 두툼한 천 포대기 그 위에 쪽지 하나 있었대요. 부탁하는 쪽지도 아니고, 이름 석 자랑 생일 적혀 있는 쪽지……. 그렇게 버려진 게 저예요.”
“…….”
“제 생일이 12월 25일인데, 1월 1일에 버려졌어요. 태어난 지 딱 일주일 됐는데.”
태어나길 원한 적 없다. 그런 나를 낳아 놓고, 원하지 않아서 버린 부모를 이제 와서 찾을 생각도 없다.
찻잔을 어루만지던 도준의 손에 힘이 실렸다. 손등 위로 불룩 튀어나온 핏줄이 시퍼런 지도를 그렸다. 도준은 입술을 잘근 씹어 물었다. 치아가 입술을 짓이기자, 새빨간 입술이 핏기를 잃었다.
“저도 어른이 간절할 때가 있었거든요? 진짜 필요했거든요.”
도준의 목소리가 얕게 떨렸다. 희찬과 지낼 때, 두 사람이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그때 어른의 조언이 있었다면 지금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은 이제껏 골백번도 더 한 것이었다.
그 어려울 때 도준의 꿈은 그저 ‘희찬이와 함께하는 것’이었다. 배우를 할 수 없게 되더라도 희찬의 뒷바라지를 하는 것이 도준이 유일하게 바라던 것이었다. 하지만 눈앞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벽은 그 작고 희미한 꿈조차 짓밟았다.
희찬과 함께할 수 없다는 현실을 마주하고, 이제는 떠나 주는 것이 옳다는 결론을 내렸을 때. 몸이 다 망가지고, 눈을 뜨는 순간부터 감을 때까지 울기만 했던 그때. 도준은 처음으로 저를 버린 부모라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을 원망했었다.
“궁금하지는 않아? 부모님 중에 누굴 닮았을까, 뭐 그런 거.”
대표의 듬직한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도준의 하얀 손 위에 닿았다. 안심하라는 것처럼, 이제는 괜찮다는 것처럼. 능숙하게 도준을 안심시키는 그 손길에는 도준의 입술도 제 색을 되찾았다.
“대표님, 그냥 그 사람들은 저한테 없는 사람이에요. 제가 누구를 닮았는지, 부모가 뭐 하는 사람인지 하나도 안 궁금해요. 그냥, 저는 저예요.”
“그래…….”
대표는 엄지손가락으로 도준의 손을 쓰다듬었다. 대표의 손가락에서는 푸근한 애정이 묻어났다.
그에 분함과 억울함, 설움이 뒤엉킨 감정이 치밀었다.
도준은 쿵쿵 요란하게 울리는 심장을 다스리고자 했다. 하지만 그놈의 ‘부모’라는 존재가 주는 공백의 처참함은 잊고 지낸 과거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그 공백을 지워 내려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애초에 없던 것이니, 공백도 아닌 것을 두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당연한 것을 가지지 못했다고 손가락질을 해 댔었다. 그 기나긴 설움을 딛고 일어선 지금, 부모의 이야기가 달갑지 않은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대표님……. 저는 그냥, 그때 대표님처럼 좋은 어른 만난 걸로 만족해요. 다른 어른은 이제 없어도 괜찮아요.”
눈물이 치밀었다. 뻣뻣하게 당기는 턱관절이 도준의 말문을 틀어막았다. 가까스로 말을 남긴 도준은 이전보다 훨씬 더 힘겹게 숨을 삼켰다.
대표는 투명하게 차오르는 도준의 눈물에 깊은 한숨을 터뜨렸다. ‘고아’라는 뼈아픈 꼬리표가 도준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함께 노력해 온 대표였다. 도준의 사생활을 비밀에 부치고, 작품과 관련된 것 외에 다른 구설은 나오지도 않도록 언론에 신경 써 온 지난 시간이었다.
“그래, 그럼 됐어. 너 정말 잘 컸어, 도준아.”
도준의 손에 닿은 대표의 손에도 힘이 실렸다. 이상하게 도준을 처음 봤을 때부터 무조건 그를 데려오고 싶었다. 그가 가진 스타성이나 실력은 이미 단역판에서 증명된 것이었으니 둘째 치고, 처음으로 욕심을 부려 아슬아슬한 신인 이도준에게 말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조건을 내걸었다. 계약 후에는 갈 곳이 없다는 도준을 숙소로 데려와 먹이고, 재웠다.
덕분에 이도준은 K액터스 최초의 신인 배우가 되었다. 애초에 대형 배우들만 영입하는 것으로 소문난 K액터스의 유일한 신인이었으니, 그것도 이름난 걸출한 배우들보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 계약한 배우였으니, 대표가 도준에게 보이는 애착도 대단했다.
대표는 갖은 공을 들여 도준을 도왔다. 그리고 배우 이도준은 금세 사람들의 눈에 들고, 자신이 가진 역량을 펼쳐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갔다. 그렇게 힘겨운 시간을 함께 보내다 보니, 자연스레 두 사람 사이에는 ‘동료의 의리’가 아닌 ‘부자의 정’이 쌓였다.
그래서 지금 보이는 도준의 눈물이 대표의 가슴에는 아프게 닿았다. 시큰거리는 가슴께를 꾹 눌러 다스린 대표는 조금 더 부드럽게 도준의 손을 거머쥐었다.
“별다른 게 있는 건 아냐, 그냥……. 너를 이렇게 낳아 주신 부모님은 어떤 분들일까, 내가 궁금했어.”
가라앉은 분위기는 끝도 없이 무거워졌다. 공기의 무게가 달라진 것을 느낀 도준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팔을 뻗어 약병을 쥐고, 손바닥 위에 약을 털었다.
“그래도 고마운 건 하나 있어요.”
“어떤 거?”
이내 도준이 가벼운 목소리를 냈다. 도준의 눈가에 맺혔던 눈물도 쏙 들어갔다. 소매 끝으로 물기를 닦아 낸 도준은 손바닥에 놓인 약을 입 안으로 털어 넣고, 물을 마시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약을 삼킨 후에는 이전보다 짓궂은 표정을 잘생긴 얼굴 만면에 피워냈다.
“얼굴. 그거 말곤 없어요.”
도준은 엄지와 검지로 ‘V’를 만들어 턱 아래에 가져다 댔다. 저 잘난 것을 알고 제법 얼굴값을 하는 양 구는 도준의 태도에 대표의 입에서도 비로소 커다란 웃음이 터져 흘렀다.
“왜, 키도 크잖아.”
“그럼 두 개요. 아, 아니야. 키는 제가 진짜 운동 열심히 해서 큰 거예요.”
대표는 도준의 노력에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무거운 공기를 깨뜨린 도준의 목소리만큼 가벼운 말로 도준의 대화에 응한 대표는 이미 다 식어 버린 차를 홀짝거렸다.
“너 어릴 때는 희찬이보다 작았다며?”
“장희찬이 그래요? 없는 자리라고 말 막 하네.”
“아니야?”
“대표님, 저 이제 자야겠어요.”
“맞네, 맞아. 너 어릴 때는 희찬이보다 작았구나.”
“안녕히 주무세요.”
대표의 말에 정곡이 찔린 도준은 지체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문고리를 잡아 돌리고 방으로 들어가기까지 그의 뒤를 졸졸 쫓아온 대표는 끝까지 짓궂게 도준을 놀리고 들었다.
무거운 주제로 대화를 연 탓에 혹시 그가 악몽을 꾸는 건 아닐까, 잠시간 걱정했지만, 그 걱정도 금세 사라졌다.
분명 시나리오를 받을 당시에만 해도, 희찬이와 함께한 과거를 떠올리며 눈물짓던 도준이었다. 그의 이름이 짐인 것처럼, 아니 정확하게는 그의 이름에 뒤따르는 과거가 무거운 멍에였겠지만. 이제는 그 과거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듯한 도준의 변화가 퍽 긍정적이다.
기나긴 터널의 끝이 이제야 보이는 것 같다. 희미한 빛조차 들지 않던 도준의 깜깜한 시야에 비로소 틈이 생긴 모양이다.
도준이 들어간 방문을 닫고, 소파에 앉은 대표는 뭉근하게 피어오르는 소소한 즐거움을 만끽했다.
*
촬영장이 어수선해졌다. 제일 먼저 촬영장에 도착해 촬영을 준비하던 도준은 문득 소란한 촬영장을 느끼고 뒤늦게 사방을 둘러봤다.
항상 분주한 스태프들이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더 바빠 보였다. 별다른 장면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들의 행동이 수상쩍었다. 도준은 의심을 가득 담은 눈으로 그들의 행동을 좇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꽁무니를 쫓다가 게 중 그나마 한가해 보이는 스태프의 팔을 붙잡았다.
“무슨 일 있어요?”
우뚝 멈춰선 스태프는 가쁜 숨을 겨우겨우 몰아쉬었다. 도준은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큰 숨을 들이켰다가 내뱉는 모양을 가만히 지켜봤다. 수상함을 느낀 것은 도준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도준의 옆에 선 대표도 함께 스태프를 함께 바라봤다.
“아, 인수 오다가 다쳐서 잠시 상태 보러 간대요.”
스태프가 별일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남기는 말에 두 사람의 눈이 크게 뜨였다. 도준은 적잖이 놀란 듯 스태프의 소매를 세게 움켜쥐고 되물었다.
“다쳤다고요?”
“호텔에서 나와서 촬영장으로 오다가 사고 난 거 같은데 심각한 건 아니래요. 그래도 일단 병원 가 본다고 해서.”
“많이 다쳤대? 병원은 어디?”
대표가 다급하게 질문을 거듭하는 동안, 도준의 표정이 차츰차츰 가라앉았다. 심각한 건 아니라지만, 도준에게는 심각했다. 희찬이 다쳤다는 얘기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급해졌다. 당장에라도 상태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에 애꿎은 손가락 끝만 딱딱거리며 부딪쳤다.
“일단 해인이 단독 씬 몇 개 따는 건 할 거 같고요…….”
“그럼 도준이는 일단 대기, 야, 도준아! 어디 가!”
아랫입술을 씹어 물고, 대표와 스태프의 대화를 듣던 도준은 이윽고 자리를 박차고 촬영장에서 벗어났다. 볼 수 없다면 목소리라도 들어야 할 것 같았다.
“전화만 하고 금방 올게요.”
흡연실로 온 도준은 휴대폰 화면에 뜬 희찬의 번호를 보며 통화 버튼을 누를까, 말까 오래 고민했다.
번호를 저장하고 단 한 번도 먼저 전화를 건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목소리라도 들어야겠다며 호기롭게 촬영장에서 벗어났지만, 전화를 거는 데에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을 헤아렸을까, 도준은 드디어 용기를 내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희찬이 아프다는데, 그놈의 철칙은 하등 소용없는 것일 터였다. 자신이 악몽을 꾸고 촬영장에 나가지 못한 날 희찬이 먼저 전화를 건 것처럼 말이다.
― 응, 해인아.
신호음이 얼마 가지 않았는데 금방 희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껏 잠긴 목소리를 내는 희찬의 주변이 웅성거리는 것으로 보아, 발 빠른 스태프와 감독이 이미 병원에 도착해 희찬을 살피는 듯했다.
도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희찬의 목소리를 듣고자 했으니,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 가득 안심이 도사렸다.
― 야, 너는 굳이 전화해 놓고 왜 아무 말도 안 해. 진짜 어이없어.
수화기 너머 희찬의 목소리가 금세 장난을 머금었다. 이전보다 조금 높아진 톤의 목소리 위에는 웃음기가 얹힌 채였다.
“그냥, 괜찮은가 해서.”
― 걱정했어? 괜찮아. 발목 조금 부었고. 지금 다시 촬영장 갈 거야.
“그래도 오늘은 쉬는 게 낫지 않아? 너 원래 발목 안 좋잖아. 축구도 더럽게 못 하던 게.”
― 욕인지, 걱정인지 하나만 할래? 반반 무 많이 같은 새끼야.
그래도 크게 다친 건 아닌 모양이다. 장난스러운 희찬의 목소리에 도준도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희찬 덕분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도준은 잔뜩 긴장했던 몸을 누그러뜨리고, 편하게 담배를 입에 물었다. 딱 한 대 피우고 들어가면 되겠지, 싶다.
“너 안 와도 나 단독 씬 몇 컷 찍으면 된대. 그러니까 너도 쉬어. 내일 하면 되잖아.”
― 감독님하고 얘기해 볼게.
“응, 쉬어.”
도준은 끝까지 제 말을 강조했다. 담배에 불을 붙인 후 폐부가 부풀 정도로 크게 빨아들였다가, 다시 시원하게 내뱉었다. 담배를 피우다 보니 몸이 무거워졌다. 노곤하게 풀리는 몸을 느낀 도준은 느릿하게 스트레칭을 하며 촬영을 준비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쓸었다. 살갗에 닿는 차가운 온도에 어깨를 움츠리면서도, 몸은 따끈한 것이 좋았다. 자고로 겨울은 찬 공기를 느끼면서 몸은 따뜻하게 하는 것이 최고다.
도준이 촬영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어수선한 분위기가 어느 정도 가신 후였다. 어느새 돌아온 감독은 스태프들과 상의하며 현장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차분해진 분위기를 느낀 도준은 자신을 찾는 메이크업 스태프에게로 향했다. 아주 잠시 담배를 피웠는데, 그사이 도준의 단독 신만 촬영하기로 결정했다는 말이 전달됐다. 도준은 고개를 주억거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얼굴을 내주었다.
“해인아, 후다닥 찍고 쉬자!”
“네.”
도준은 익숙한 발을 놀려 프레임 안으로 들어섰다.
S#172. 사무실-낮 (스타엔터 대표, 해인 첫 만남)
모던한 분위기의 사무실. 탁자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 탁자 위에 계약서. 두 사람 앞에 놓인 따뜻한 차. 계약서를 팔랑거리며 살펴보는 대표. 해인은 긴장한 표정으로 대표의 눈치를 살핀다.
대표 (계약서를 보다가 눈을 들고 해인을 살펴보며) 계약 조항은 어때?
해인 (멋쩍은 듯 웃는다)
대표 (피식) 이런 거 잘 모르지?
해인 네……. (손가락 만지작)
내려앉은 적막. 계약서를 집어 드는 해인. 알 수 없는 조항이 여러 가지 적혀 있지만, 나쁘지는 않아 보임에 고개를 까딱거린다. 해인의 표정을 살피는 대표. 만족하는 양 인자하게 웃으며 펜을 건넨다.
대표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고.
해인 나중에 여쭤도 되는 건가요?
대표 (으스대듯 웃으며) 이미 계약하고 독소 조항 있으면 어쩌려고.
해인 아…….
주눅 드는 해인. 난감한 듯 미간 사이를 긁적거린다. 크게 웃는 대표. 솔직한 모습이 귀엽게 느껴진다.
대표 나쁜 거 없어.
해인 (고개를 끄덕이며) 네.
대표 여기 사인하면 돼.
해인 (펜을 받아 쥐며) 네.
슥슥 자신의 이름 옆에 사인하는 해인. 그런 해인을 보다 함께 도장을 찍는 대표. 가벼워진 분위기. 해인도 비로소 마주 웃는다. 해인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대표.
대표 앞으로 잘 부탁해.
해인 (손을 마주 잡고) 네, 잘 부탁드립니다.
해인의 어깨를 토닥이는 대표. 대표에게서 받은 명함을 소중한 보물 쓰다듬듯 만지작거리는 해인의 모습.
“컷! 바로 이어서 촬영할게요!”
세트장을 아예 한 동네에 지어 둔 것은 이럴 때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금세 촬영을 마친 도준은 다음 촬영이 진행될 세트장으로 발을 돌렸다.
한쪽이 해인과 인수가 지내던 달동네로 만들어졌다면 다른 한쪽은 번화가의 사무실 건물이 자리했다. 사무실 건물에서 나와 다른 곳으로 몇 걸음 이동하자, 해인과 인수가 헤어진 후에 각자가 사는 오피스텔 건물이 나왔다. 간소하게 지어진 건물이었으나 제대로 갖춘 구색이 제법 그럴싸했다.
촬영 현장을 둘러보는 대표는 자신이 지시한 작업이었음에도 뿌듯했는지, 고개를 한껏 젖힌 채로 경관을 눈에 담으며 연신 즐거운 목소리를 내었다.
“와, 인수 회사에서 좋은 집 해 줬네.”
“하하, 곽 대표가 지어 놓고 뭘 새삼.”
“도준아, 너 계약했을 때 나도 너한테 좋은 집 해 줬었다.”
대표는 제 옆에서 함께 세트장을 둘러보는 도준의 가슴께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그에 도준이 미간을 좁히며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아, 기억도 안 나요. 언제 적이야, 그게.”
“뭐? 이놈이?”
다분히 장난이 섞인 목소리였으나, 도준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찬찬히 촬영 현장을 살폈다. 일전에 세트장을 둘러볼 당시, 갑자기 닥쳐온 과거의 조각에 황급히 세트장을 벗어나느라 인수의 집으로 지어진 세트장은 보지도 못했었다.
그 시절 희찬이 홀로 지낸 집도 이랬을까.
당사자가 없어 물어볼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때도 큰 회사의 숙소에서 머물렀으니 이 정도로 좋은 집에서 지냈을 것이다.
어렴풋한 과거를 떠올린 도준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쓴 침을 꼴깍 삼켰다. 드라마 촬영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새롭게 마주하게 되는 과거가 이제는 마냥 부담스럽지만은 않았다.
생각보다 드라마 상황을 무난하게 받아들이는 자신이 대견한 한편, 일을 할 때만 느낄 수 있는 성취감이 몰려오기도 했으니 부담은 점점 후순위가 되었다. 무엇보다 일을 하는 순간만큼은 부담이고 뭐고, 자신을 괴롭히는 다른 것들은 다 잊을 수 있을 정도로 몰입하는 도준이었다.
“도준아, 기분 좋아 보이는데. 이번 씬 감정 씬이거든? 감정 잘 잡고.”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 안 하지.”
이번 촬영은 인수의 성공을 질투한 해인과 그런 해인을 이해하지 못한 인수가 헤어지고, 몇 달 후 다시 인수를 찾아온 해인의 모습을 담아내는 장면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의 성공은 기뻐하지 못했던 주제에, 저까지 좋은 기획사와 계약한 후 가장 좋은 소식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제일 먼저 알려 주려 쫓아온 해인의 감정은 후회와 초조함이 범벅된 것이었다.
대본을 꼼꼼히 파악한 도준은 관절을 쭉쭉 늘이며 몸을 풀었다. 여전히 극 중 해인의 감정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극에 녹아들어 카메라 앞에서 해인이 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자, 준비 다 됐으면, 스탠바이 할게요.”
“네.”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패딩을 받아 드는 대표의 모습에 도준은 문득 이제 희경이를 불러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보다 훨씬 잘 적응해서 지내는 중이고, 앞으로의 촬영 장면들을 고려했을 때 악몽을 꾸거나, 발작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 저 어른의 시간도 그만 빼앗아야 하지 않을까.
“자, 스탠바이!”
이내 촬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떨어졌다. 도준은 금세 감정을 다스려 잡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큐!”
S#175. 인수의 집 앞-낮
초인종 앞에서 머뭇거리는 해인의 손. 공동현관문 호출 번호를 누를까 말까 몇 번이고 접었다 펴길 반복한다. 고민하는 해인의 눈. 그런 해인의 주변으로 부는 살랑거리는 봄바람. 굳은 결심을 한 듯 말아 쥐는 해인의 주먹. 이내 마음을 다잡은 해인이 손가락을 뻗어 호출 버튼을 누른다.
버튼이 눌리는 소리. 호출 신호 소리. 인터폰 화면에 보이는 줄어드는 시간. 이윽고 뚝 끊기는 신호.
해인 (침울한 목소리) 없나…….
주먹을 쥔 해인의 손에는 구겨진 계약서가 들려 있다. 계약서를 들어 읽어 보는 해인. 한숨을 푹 쉰다.
다시 호수를 누르는 해인. 호출 버튼을 누른다. 이윽고 들리는 호출 신호 소리. 하지만 이번에도 응답이 없다.
불안해지는 해인의 표정. 아랫입술을 씹어 물고 큰 숨을 뱉는 해인. 이제 인수는 볼 수 없는 걸까. 암담함과 서글픔이 한 번에 몰려온다. 해인 울상을 짓는다.
몇 번이고 반복해 보지만 계속 답이 없는 인수. 휴대폰이라도 있으면 연락을 해 보겠지만, 해인은 휴대폰이 없다. 손끝을 뜯으며 초조함을 드러내는 해인. 이내 발을 돌려 인수의 집 앞에서 벗어난다.
“오케이! 아, 나 도준이 감정 진짜 사랑하잖아.”
감독은 감격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고작 두 음절뿐인 대사에도 감정을 녹여낸 도준 덕분에 촬영이 끝난 후에는 감탄이 연이어 튀어나왔다. 도준은 환하게 웃으며 그런 스태프들의 환호에 응했다. 눈가에 맺힌 듯했던 얕은 눈물도 금세 사라졌다.
“감정 그대로 이어서 다음 거까지 찍고 오늘 촬영 마무리하겠습니다!”
“감독님, 인수는 좀 괜찮아요?”
마지막 촬영이라는 감독의 말을 듣자 희찬이 떠올랐다. 도준은 숨기려 했으나 숨겨지지 않은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감독에게 희찬의 안부를 물었다. 통화할 때 목소리는 나쁘지 않았으나, 그도 배우라는 것을 생각하면 목소리 정도야 얼마든지 숨길 수 있을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하고 보니 문득 희찬이 괘씸해졌다.
“어, 희찬이 괜찮아. 발목 조금 부었고, 오늘 찜질하면 나을 거 같아.”
“아, 다행이네요.”
괘씸하다는 거 취소.
배우이기 전에 거짓말을 못 하는 장희찬이라는 것을 잠시 잊었다. 도준은 감독의 대답에 비로소 만족스러운 듯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도준은 스태프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따라 마지막 촬영 장소로 이동했다. 세트장 마을 입구에 주차된 마을버스는 아담한 사이즈를 자랑했다. 그에 도준은 어릴 때 마을을 누비던 작은 버스를 떠올렸다. 희찬과 함께 집으로 오기 위해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마을버스를 길게는 한 시간씩 기다려야 했었다. 그때는 그 한 시간도 참 즐거웠었다.
“도준아, 저쪽에 CG로 전광판 나오고 할 거야. 그냥 울어. 울면 돼.”
“아, 네.”
도준은 어렵지 않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감독의 요구는 자칫 어이없는 요구일 지도 모르겠으나, 영상 기술이 발달한 요즘은 심심찮게 들리는 요구였다.
마을버스에 올라 제일 뒷자리에 앉은 도준은 심호흡을 거듭하며 감정을 추슬렀다.
울기만 하면 된다라. 어렵지 않은 요구였다.
도준은 금세 감정을 다잡았다.
“자, 마지막입니다. 파이팅! 스탠바이! 액션!”
어느 때보다 활기찬 사인이 떨어졌다. 금세 카메라가 돌고, 주변의 소음이 멎어 들었다. 앵글에 잡힌 도준은 대본이 그렸던 아련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S#179. 버스 안-밤, 맑음
흔들거리는 버스. 텅 빈 버스 제일 뒷자리에 앉아 착잡한 표정을 보이는 해인. 빠르게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 이윽고 도심에 들어서자 보이는 여러 가지 전광판.
번쩍번쩍 화려한 빛을 내며 화려하게 내걸린 광고들이 해인의 눈을 사로잡는다. 창밖을 거니는 사람들을 지켜보다 눈을 들어 전광판을 바라보는 해인.
때마침 나오는 인수의 패션 의류 광고. 해인의 눈물에 조금씩 차오르는 눈물. 이내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흐른다.
해인 (흐느껴 우는 소리)
들썩이는 해인의 어깨. 이내 얼굴을 파묻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 눈물을 슥슥 닦아 보지만 계속 흐르는 눈물.
해인 (큰 숨을 터뜨리며 운다)
적막이 흐르는 버스 안. 덜컹거리는 버스. 브레이크 밟는 소리. 문이 열리는 소리. 한 무리가 웅성거리며 버스에 오른다. 해인 사람들을 의식하며 모자를 꾹 눌러 쓰고.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어느새 도심을 벗어난 버스. 인수와 함께 살던 집이 보인다. 버스에서 내리는 해인.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 운다.
후회로 점철된 감정은 눈물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성숙하지 못했던 자신의 태도에 원망을 더할 때쯤, 도착한 곳은 인수와 함께 지내던 허름한 집이었다.
감히 집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인수가 떠난 것도 벌써 몇 달이 지났는데, 이 공간은 도무지 익숙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해인은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지도 못했다. 그저 인수와 다시 닿을 수 있길,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졌다. 그 박수는 비단 도준의 연기를 향한 것만은 아니었다. 저녁 늦게까지 이어질 촬영이 오후 중으로 끝이 난 것에 대한 환호는 금세 소란으로 바뀌었다. 촬영 장비를 철수하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서 감정을 다독이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도준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을 하고서 터벅터벅 대표에게 향했다.
“어우, 잘하는데?”
“K액터스 대표님이 괜히 저랑 계약하셨겠어요.”
대표는 오늘따라 대견한 도준에게 칭찬에 칭찬을 거듭했다. 그에 도준도 능청스럽게 대꾸하며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윽고 하나둘씩 촬영장을 벗어나는 광경이 펼쳐졌다.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를 마친 도준은 대표와 발을 맞춰 호텔로 향했다.
호텔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겨울옷을 입었다. 촬영 스태프들만 지내는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호텔 측에서는 금세 갖가지 화려한 장식들로 연말의 따뜻함을 피워 냈다. 커다란 크리스마스가 휘황찬란하게 꾸며진 모습은 괜히 사람 마음을 간질이는 재주가 있다. 그를 느낀 도준은 코앞으로 성큼 다가온 크리스마스의 분위기에 기분 좋은 낯을 띠었다.
도준은 아직 대낮임에도 전구의 불을 켜 둔 탓에 빨갛고, 파란색으로 반짝거리는 장식들을 하염없이 쳐다봤다. 그러다 대표와 함께 호텔로 들어가려던 걸음을 우뚝 멈췄다.
“대표님, 저 잠시 약국 좀 들렀다 갈게요.”
“약국? 왜? 다쳤어?”
“아, 아뇨. 저 말고…….”
별안간 도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차마 희찬이에게 줄 약을 사러 간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대표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서 짓궂게 도준을 흘겨봤다.
“너어…….”
그 눈빛 앞에 괜히 벌거벗은 기분이 들었다. 도준은 애써 눈을 피하며 대표에게 손을 휘적휘적 저어 보였다.
“아, 주책이에요.”
“뭐가? 내가 뭘 했는데.”
“…….”
대표는 한마디 콕 쏘아붙이고서, 마치 부모님처럼 “저녁 먹기 전에 들어와.”라는 간단한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도준은 호텔 로비 어딘가에 있는 약국을 생각해 냈다. 이미 이렇다 할 조치는 다 취한 후겠지만, 그래도 성의 정도는, 아니 마음 정도는 표현하고 싶었다.
“파스랑 얼음 팩이랑 발목 보호대 주세요.”
“파스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따뜻한 게 있고, 시원한 게 있어요.”
“아……. 부었다는데, 뭐가 좋을까요?”
“그럼 시원한 걸로 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도준은 폐부 깊이 숨을 들이켜 잔잔하게 감도는 약국의 향을 맡으며 눈을 굴려 약국의 인테리어를 살폈다. 온통 새하얀 약국에도 크리스마스 전구를 달아 반짝, 반짝 잔잔한 빛이 비치는 게 퍽 귀여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약사가 건네는 하얀 비닐봉지를 건네받은 도준은 예의 그 멋들어진 미소를 보이며 약국을 벗어나려 했다.
“저기…….”
도준을 약사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약사의 손에는 종이와 펜이 쥐어져 있었다. 우물쭈물 주저하는 상대에게 도준이 환하게 웃으며 흔쾌히 손을 내밀었다.
“사인해 드릴까요?”
“그래도 돼요?”
“그럼요.”
“그럼 혹시 사진도?”
“아, 잠시만요.”
상대의 요청이 들리기 무섭게 도준은 뒤집어썼던 후드와 모자를 곧장 벗어 내고 머리를 털었다. 온 얼굴을 가렸던 마스크까지 내리고 친근하게 상대의 옆에 서서 그가 든 휴대폰 화면에 제 얼굴이 나오도록 키를 맞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도준은 확실히 대중 친화적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대중이 그에게 열광하는 것은 대외적으로 ‘싸가지 없다’는 이미지와 달리, 의외로 팬 서비스가 좋고, 가끔 도는 목격담에서는 그의 친절함이 돋보일 때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건 오늘도 같았다. 수줍게 요청하는 사인을 단 한 번도 거절하는 경우가 없었던 도준은 흔쾌히 같이 사진을 찍고, 사인까지 해 주었다. 그 후에는 허리를 숙여 감사 인사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약국을 벗어나는 도준의 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엘리베이터 앞에서는 괜히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단장을 했다.
23층.
순식간에 희찬과 도준의 객실이 있는 층에 도착한 도준은 엘리베이터에서 가장 가까운 자신의 객실을 지나쳐 안쪽에 있는 희찬의 객실로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복도에 깔린 푹신한 카펫이 도준의 발걸음 소리를 먹었다. 푹신한 길을 꾹꾹 눌러 밟는 도준의 걸음은 몇 발 가지 않아 금세 문 앞에 다다랐다.
거침없이 손을 뻗어 초인종을 누르려던 도준의 손이 멈칫했다.
기껏 약품도 다 사 왔는데 괜한 오지랖은 아닐까,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괜히 민망한 일만 생기는 것 아닐까.
머릿속에 자리한 쓸데없는 생각이 도준의 행동을 가로막은 탓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올 때까지만 해도 의기양양했던 기세는 전부 어디로 갔는지. 문 앞에서 제법 오랜 시간 머뭇거리는 도준은 돌아갈까, 말까. 갈팡질팡하는 걸음을 숨기지 못했다.
복잡함에 한숨을 푹 내쉰 도준이 초인종을 꾹 눌렀다. 어차피 방으로 돌아가 봐야 밤새 장희찬 생각하느라 뒤척일 것이 뻔했으니, 다음 촬영 스케줄을 위해서라도 장희찬은 보고 가야겠다는 결심이 선 덕이었다.
문이 열리는 데에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당연히 매니저가 있을 줄 알았는데, 문을 연 것은 잔뜩 찌그러진 표정의 희찬이었다.
“어?”
“엥?”
희찬도, 도준도 눈이 크게 뜨였다. 예상치 못한 희찬에 등장에 도준은 멍하니 서서 힘겹게 문을 지탱한 희찬을 바라봤다. 희찬의 낯이 휘어졌다. 화사함을 머금은 얼굴로 환하게 웃어 보이자 목석처럼 굳었던 도준도 그제야 눈을 끔뻑거렸다.
“아, 아아!”
“조심해.”
“아, 아파.”
“매니저는? 왜 너만 있어?”
문을 짚고 섰던 희찬이 미끄러졌다. 커다란 희찬의 몸이 위태롭게 휘청거리는 것을 본 도준은 잽싸게 움직여 희찬을 부축했다. 도준의 단단한 어깨를 붙잡고 어렵게 선 희찬은 지끈거리는 발목의 통증에 좁혀진 미간을 펴지도 못했다.
도준이 자연스럽게 희찬의 객실 안으로 향했다. 저와 비슷한 덩치의 희찬을 부축하고도 힘든 기색 하나 없이 방으로 들어온 도준은 희찬이 소파에 앉는 것까지 조심스러운 손길로 도왔다.
“매니저 어디 갔냐니까.”
“나 오늘 한 끼도 못 먹어서 밥 사러 갔어.”
여기고, 저기고 매니저가 문제구만. 아픈 배우 두고 룸서비스를 시켜도 모자랄 판에 밥을 사러 간 그 매니저나, 악몽을 꾸느라 촬영장에도 못 가는 배우를 두고 혼자 촬영장에 부리나케 달려간 이쪽 매니저나. 희찬이 제 매니저를 두고 쓴소리를 할 처지는 아닌 것 같았다.
“손에 든 건 뭐야?”
“아, 이거…….”
희찬의 시선이 도준의 손에 가지런히 들린 하얀 봉투로 향했다. 도무지 뭐가 들었는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고개를 들어 도준을 바라보자, 도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너 좀 앉아 봐. 올려 보는 거 목 아파.”
희찬의 말에 도준이 고분고분 앉았다. 그저 매니저에게 전달만 하고 돌아가려 했는데, 희찬이 나올 것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도준이 느끼는 멋쩍음은 배가되었다. 도준은 바스락거리는 비닐봉지를 차마 건네지 못하고 그저 손만 만지작거렸다.
주자니 민망하고, 그대로 가지고 가자니 멍청한 이 상황이 못내 답답하다.
“아, 뭔데. 나 움직이기 힘들어.”
재촉하는 목소리와 말간 눈에서 또렷하게 읽히는 궁금증을 본 도준은 비닐봉지를 거꾸로 쥐고 제가 사 온 약품들을 탁자 위에 와르르 쏟아 냈다. 파스가 얼마나 필요할지, 찜질은 또 얼마나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생각보다 많이 샀다. 그리고 그 약품의 양은 곧 쑥스러움으로 돌아왔다.
“이거 네가 사 온 거야? 여기 로비 약국에서?”
“응.”
“오, 해인이 나 걱정했나 본데.”
짓궂은 희찬의 목소리에 도준은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화끈거리는 얼굴은 붉어졌을 것이고, 감히 그 얼굴을 들고 희찬을 마주하자니 부끄럽기만 했다.
탁자 선단을 훑던 도준의 시야에 희찬의 발목이 자리했다. 빨갛게 열이 오른 발목은 언뜻 봐도 ‘괜찮음’의 상태가 아니었다.
“너 발 좀 봐 봐.”
“응?”
“이리 내놔 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도준은 희찬의 손을 쉽게 거둬 냈다. 그에 빨갛다 못해 본래의 형태를 잃고 어마어마하게 부은 발목이 드러났다. 도준의 얼굴이 조각조각 일그러졌다.
도준이 날카롭게 희찬을 쏘아봤다. 희찬은 머뭇거리는 손으로 바지 끝단을 잡아 자신의 상처를 숨기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건 부질없는 일이었다.
“아이, 괜찮다니까.”
“찜질하면 된다며. 찜질은 왜 안 해?”
“하다가 녹아서 넣어 놨어. 진짜 괜찮아.”
“이게 괜찮은 거냐?”
제법 매섭게 쏘아붙이고, 단호한 눈빛을 보이는 도준 앞에 희찬은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도준은 아예 자리를 옮겨 희찬의 옆에 붙어 앉았다. 앓는 소리를 내는 희찬은 무시하고, 다리를 번쩍 올려 자신의 허벅지 위로 올려 둔 후에는 세밀하게 희찬의 발목을 살폈다.
도대체 무슨 사고를 어떻게 당했으면 이 지경이 되었나 싶다. 그래도 입원이나 깁스까지 하진 않은 걸 보면 정말 심각한 건 아니려나. 하지만 그들이 뭐라건, 도준의 눈에는 심각한 부상으로만 보였다.
손이 닿을 때마다 아픈지, 희찬은 눈에 띄게 몸을 움찔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큰 덩치가 크게 휘청일 때는 붙잡고 있는 것도 버거울 지경이었다. 도준은 가지런한 미간을 한껏 좁힌 채로 희찬을 흘겨봤다.
“아, 아파.”
“아프라고 만졌다.”
“이왕 마음 쓰는 거 좀 곱게 쓰는 게 어때? 진짜 가끔 보면 되게 못됐어.”\
“아, 버둥거리지 말고 가만히 좀 있어 봐.”
희찬을 보는 도준의 눈은 매섭기만 했는데, 왜인지 희찬은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의 탄탄한 허벅지 위에 희찬의 발을 올려놓고 이리저리 만져 보고 또 살펴보는 도준에게선 다정함이 물씬 묻어났다. 다른 사람이 보면 어떨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희찬에게는 지극히 익숙한 모습이었다. 희찬은 빨간 입술의 끝을 예쁘게 올리고서 도준의 행동에 버금가는 다정한 눈빛을 보였다.
한참 발을 살피던 도준이 고개를 들고 희찬과 마주했다. 해사하게 웃는 희찬의 모습에 도준이 또 인상을 찌푸렸다.
뭐 좋다고 저렇게 웃어 대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하면.”
“아!”
“아프구나.”
“야! 아, 띵띵 부은 거 안 보여? 안 아프겠냐고.”
“아픈 거 좋아하는 거 같길래.”
도준의 짓궂은 손짓에 희찬이 다급하게 도준의 팔을 붙들었다. 발목을 쥐고 발등을 확 꺾어 버린 도준 덕분에 달갑지 않은 욱신거림이 몰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준은 꿋꿋하게 희찬의 발을 만지작거렸다. 문득 어릴 때 열심히 축구 하러 쏘다니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저기 다쳐 가며 터득한 마사지를 이럴 때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을 비틀어 가며 고통을 호소하던 희찬의 몸짓도 멎어 들었다. 마사지가 시원해졌는지, 거칠게 요동치던 몸이 차분해졌다.
희찬은 발을 한 손으로 붙들고 발목 부근을 조심스럽게, 그리고 세심하게 주무르는 도준의 손길을 느꼈다. 어느새 사라진 대화 대신 도사린 적막이 어색하다. 언제라고 끊이지 않는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었는데, 오늘따라 유독 어색한 그 공기에 희찬은 괜히 목 부근을 긁적거렸다.
도준에게 다리를 맡기고, 도준과 몸을 맞대고 있으니 절로 옛 생각이 났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아득한 과거의 향수에 희찬은 기분 좋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처음에는 발을 내보인다는 것이 쑥스러웠다. 예전이야 항상 살을 맞대고 살았으니 부끄러울 것 하나 없었지만, 오랜만에 다시 만난 도준에게 발을 보이는 건 퍽 민망한 일이었다.
그래서 감추려고 했다. 하지만 도준은 아주 익숙한 행위를 하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거리낌 없이 손을 뻗어 발을 쥐었다. 그게 참 좋았다.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난다.”
“…….”
도준은 못 들은 건지, 못 들은 척하는 건지 아무 말이 없었다.
분명히 들었는데, 확실히 들었을 텐데.
옛날의 ‘옛’ 자만 나와도 없는 말수를 더 줄이는 도준의 모습에 희찬이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어? 어? 듣고 있냐고.”
“뭐.”
“옛날 생각난다니까?”
“응, 난다. 옛날 생각.”
“재미없어.”
도준의 반응은 심심하기 짝이 없다. 처음 다시 만났을 때만 해도 옛일에 사리는 듯 굴더니,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아주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희찬은 인상을 한껏 누빈 채로 도준을 쳐다봤다. 그에 도준이 손으로 희찬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희찬의 발목을 정성스레 주무르던 도준의 손이 사라졌다. 이제는 괜찮다고 판단한 건지, 탁자 위에 어지럽게 널브러진 약품 더미를 뒤적거렸다. 이내 원하는 것을 찾은 도준의 손에는 얼음 팩이 들려 있었다.
꽝꽝 얼어 딱딱하고 차가운 얼음 팩이 희찬의 발목에 닿았다. 예기치 못한 차가움에 희찬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앗, 차가!”
“좀 있어.”
피식 웃었다. 도준이 그랬다는 말이다. 인상을 찌푸리고 자신이 느끼는 불편함을 여실히 드러내는 희찬의 모습에 도준은 입꼬리를 한쪽으로 멋들어지게 올려 웃어 보였다.
무뚝뚝한 말투와 달리 친절한 행동에 희찬은 도준이 하는 대로 그를 내버려 두기로 했다. 차가운 얼음팩을 쥔 도준의 손끝이 빨갛게 얼어 갔다. 손이 시릴 법도 한데 도준은 끝까지 얼음 팩을 쥐고 희찬의 발목 위에 얹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근데 도준아.”
이전과는 사뭇 다른 희찬의 목소리가 실내를 울렸다. 자신을 두고 ‘해인’이라고 부를 때와 ‘도준’이라 부를 때의 목소리가 다른 것은 도준도 익히 느끼던 바였다.
도준의 까만 눈동자가 희찬에게 닿았다. 희찬의 엷은 눈동자는 진지함을 한껏 머금은 채였다.
“너 아직 나한테 오는 중인 거지?”
“…….”
“나 계속 너 기다리면 되는 거지?”
가면 갈수록 거침없이 다가오는 희찬의 말에 도준이 말을 잃었다. 희찬을 만나면 자신의 신조가 금방 흔들릴 것은 진작부터 예상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 올 때는 도대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도준은 그저 얼음팩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아직인 거지? 그래서 안 오는 거지?”
“…….”
“대표님이 그러시더라, 너도 노력하고 있으니까 너무 힘들어하지 말라고.”
하여튼 오지랖은…….
희찬이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전하는 얘기를 가만히 듣던 도준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그래도 나름대로 멋있는 모습으로 돌아가려 노력하는 건데, 그걸 그렇게 뒤에서 다 말해 버리면 이제껏 한 노력은 다 뭐가 되냔 말이다.
그런 도준의 마음을 알 길이 없는 희찬은 어렴풋한 초조함을 머금은 눈으로 도준을 바라봤다. 마주 닿았던 시선이 떨어지고, 꾹 다물린 입술이 야속했다. 대답을 갈구하는 눈빛을 보였음에도, 저 똥고집 이도준은 또 입을 꾹 다문 채로 아무 말이 없다.
“하, 우리 해인이 입을 누가 꿰매 놨나 봐.”
“…….”
“진짜 답답해 죽겠어.”
응. 또는 아니.
간단한 답이라도 할 법한데 도준은 끝끝내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답답함을 토로하는 희찬의 마음도 십분 이해했으나, ‘가고 있으니 기다려 달라.’라는 말은 감히 할 수가 없었다.
“이거 얹고, 좀 가라앉으면 파스 붙이고 자. 나 갈게.”
도준은 이 공간을 벗어나기로 했다. 희찬과 더 붙어 있다간 주절주절 모든 것을 털어놓을 것만 같았다. 조금이라도 더 떳떳하게 그 앞에 설 수 있을 때 제 발로 희찬에게 가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도준이었기에, 결심을 내린 그의 행동은 거침없었다.
“아니, 이러고 간다고?”
금세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현관으로 향하는 도준의 등 뒤에 희찬의 못마땅한 목소리가 붙었다. 신을 신던 도준은 휙 등을 돌려 심드렁한 대꾸를 남겼다.
“가야지. 대표님이 저녁 먹기 전에 오라고 하셨어.”
안다, 어쭙잖은 핑계다. 그래도 댈 수 있는 핑계가 고작 이런 거였다.
도준은 부러 더 뻔뻔하게 낯짝을 들고서 희찬을 바라봤다.
“뭐야, 진짜 아들이야 뭐야.”
“아들이야. 간다.”
“뭐야, 지금 부모 생겼다고 자랑하는 거야 뭐야.”
희찬이 집요하게 말을 덧붙여도 도준은 금세 사라졌다. 방금까지 같은 소파에 앉아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눈 것은 마치 꿈이라는 것처럼 훅 사라진 도준의 모습에 희찬은 그저 아랫입술을 잘근 씹어 물었다.
도준이 어루만지던 발목 부근을 쓸어 만졌다. 여전히 아릿한 통증이 남은 곳에 가지런히 놓인 얼음팩이 못내 서글프다.
한 발짝 가까워졌다 싶으면 두 발짝 도망가는 도준이었지만, 그가 차츰차츰 자신을 편하게 대한다는 것쯤은 느낄 수 있었다. 처음 계단을 오르는 어린아이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천천히 다가오는 도준을 기다리느라 애가 닳는 것은 오로지 희찬의 몫이었다.
당연히 착잡한 마음을 숨길 수도 없었다. 돌아온다고 했는데.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이렇게 눈앞에 있는데도 데면데면하게 구는 도준의 행동이 영 속상했다.
보고 싶다. 도준이가.
안고 싶다. 도준이를.
그 검고 깊은 눈을 마주하고, 즐겁게 대화하며 하루를 진득하게 공유하고 싶다. 도준이랑.
아픈 만큼 찬란했고, 운만큼 웃었던. 함께여서 행복했고, 든든했고, 그래서 무서울 것 없었던 그날이 얼른 다시 돌아오기를. 희찬은 매일 바라는 중이다.
“하…….”
희찬의 입술 사이로 크고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다시 만나면 이것도 물어보고, 저것도 물어봐야지. 생각해 둔 것은 많은데 단 하나도 묻지 못했다. 물어볼 것도, 할 말도 많은데 도무지 틈을 주지 않는 도준의 옆에서 매일 초조함과 조급함을 번갈아 느끼는 것은 퍽 힘든 일이었다.
“이도준 빨리 와…….”
희찬이 느릿하게 읊조린 간절한 소원은 금세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
촬영이 진행되는 세트장 한구석에서 소곤소곤 대화 소리가 들렸다. 보통의 배우들이라 하면, 대기 시간 동안 차에 가 있거나, 근처의 숙소에서 시간을 보내기 마련이건만 도준과 희찬은 그러지 않았다.
두 사람은 스태프 중 누군가 가져온 보드게임에 사뭇 신중하게 임했다. 작은 플라스틱 망치를 이용해 플라스틱 얼음판을 깨야 하는 게임은 게임판 위에 우뚝 선 펭귄을 떨어뜨리는 사람이 지는 게임이었다.
“야, 그거 치면 깨져.”
“아, 네 말 안 들어.”
도준은 제 차례가 되어 얼음을 골랐다. 그의 눈빛은 아주 신중했고, 망치를 든 손 역시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희찬은 뾰로통한 눈을 도준에게 쏘았다. 이깟 게임, 빨리빨리 하고 끝낼 것이지 이도준은 이런 데에서 마저 신중했다.
“아, 빨리해!”
“쉿, 촬영 중이잖아.”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는 희찬의 입을 도준이 손으로 텁 막았다. 핀잔을 주는 듯한 도준의 모습에 희찬도 함께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누구 때문에 답답한데, 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주변 상황이나 신경 쓰는 것이 얄미웠다.
“아―. 답답해.”
희찬이 주먹을 쥔 손으로 가슴을 쾅쾅 내리쳤다. 아무래도 다음 판부터는 시간제한을 둬야지 이러다가는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한 판을 못 깰 것 같다.
“에이씨.”
결국 기다리지 못한 희찬이 제가 쥔 망치로 모든 판을 깨뜨렸다.
“다시 해. 너 진짜 너무 느려.”
“방금 치려고 했다고.”
“이게 뭐라고 그렇게 신중하게 해? 이런 건 빨리빨리 해야 한다고.”
“아, 안 해.”
도준은 기어코 망치를 내려 두고 일어섰다. 게임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처음부터 흥미를 갖고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스태프가 가져온 보드게임을 들고 해맑게 웃는 장희찬에게 홀렸을 뿐이다.
한 번 어울렸으니 되었다고 생각한 건지, 도준은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홀가분하게 벗어나는 도준의 등에는 희찬의 뾰로통한 시선이 내다 꽂혔다.
혼자 어른인 척하기는. 망치 들고 기대하는 거 다 봤다.
희찬도 분주하게 자리를 정리하고 도준이 향한 곳으로 발을 돌렸다. 한 손에 대본을 들고 나간 도준이었으니,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찾지 않아도 뻔했다. 희찬의 예상대로 도준은 세트장 중 그나마 따뜻한 실내를 자랑하는 식당에 앉아 대본을 보는 중이었다.
“대본 그거 지겹지도 않냐.”
“지겨운데, 나 오늘 대사 많아.”
“도와줄까?”
희찬은 자연스럽게 도준의 옆에 자리했다. 테이블에 팔을 올려 두고 다리를 꼰 채로 달랑거리는 희찬의 발이 도준의 눈에 들어왔다.
며칠 전 희찬이 발목을 다쳤던 사실이 떠올랐다. 도준은 집요한 눈으로 희찬의 발목을 살폈다. 본 모습을 잃고 띵띵 부었던 발목이 어느 정도 제 형태를 되찾은 것 같았지만, 제대로 보고 싶었다.
“발목 좀 봐 봐.”
“이제 괜찮아졌어. 잘 걷잖아.”
“내가 네 말은 대체로 안 믿어.”
“내가 할 말인데 그거, 아!”
쫑알거리는 희찬의 목소리는 무시했다. 도준은 손을 뻗어 희찬의 발을 덥석 잡고, 제 다리 위에 얹었다. 덕분에 희찬의 큰 몸이 기우뚱거렸다.
도준의 손에 신발도 훌렁 벗겨졌다. 발에 닿는 공기가 차가워, 희찬의 발가락이 한껏 오므라졌다. 도준이 장난스레 희찬의 발바닥을 두어 번 짝 소리 나게 쳤다.
제 형태를 되찾은 발목이 뿌듯했다. 도준의 가지런한 손가락이 예쁘게 도드라진 희찬의 아킬레스건을 조몰락거렸다.
예상하지 못한 자극에 희찬의 몸이 움찔거렸다. 희찬은 문득 이도준이 제 아킬레스건에 집착하던 것을 떠올렸다. 이도준은 어릴 때도 이렇게 앉아서는 연신 아킬레스건을 만져 댔었다. 희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네, 괜찮아졌네.”
“거봐. 괜찮아졌다니…… 악! 야!”
멋쩍게 발을 거두려던 희찬이 다시 몸을 비틀었다. 어딜 발을 빼려는 거냐, 다그치기라도 하듯 발목을 세게 쥔 도준이 희찬의 발을 거의 접다시피 세게 주물렀다. 희찬의 고운 인상이 가차 없이 일그러졌다. 도준은 제 어깨를 밀어내며 바들거리는 희찬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이건 여전히 아프고.”
장난기 어린 목소리를 잘도 낸다. 얄미움에 바들거리던 희찬은 결국 악에 받친 표정으로 도준에게 달려들었다.
“그거는 원래 다 아프거든? 네 발 내놔 봐.”
도준의 발을 낚아채고자 했지만, 이도준은 잽싸다. 도준의 발을 잡지 못한 희찬의 손이 도준의 볼을 세게 꼬집었다.
어찌나 세게 쥐어 잡았는지, 희찬의 손가락 주변이 새하얗게 질렸다. 엄지와 검지의 힘으로 볼을 비틀어 쥐는 희찬 덕분에 도준의 인상이 한껏 일그러졌다.
안 그렇게 생겨서 힘은 또 얼마나 센지 모른다. 아릿한 통증에 도준이 그의 손을 쳐 내고자 했지만, 악에 받친 희찬을 이겨 내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런 도준의 눈에 탈출구가 보였다. 촬영장 곳곳을 돌며 대기하는 배우들의 모습을 담는 카메라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아아, 야야, 저거 뭐야, 저거.”
“뭐, 뭐 이 새끼야.”
“메이킹, 메이킹!”
도준의 말에 희찬의 눈이 도준이 가리키는 향했다. 두 사람의 눈이 한 곳에 멎었다. 빨간불을 반짝이는 카메라가 두 사람을 담는 중이었다.
덕분에 희찬의 손이 헐레벌떡 떨어졌다. 도준은 뭉근한 통증이 서린 볼을 거머쥐었다. 볼에 뜨끈한 열이 올라 화끈거렸다. 인상을 한껏 찌푸리고서 희찬을 째려보자, 희찬은 예의 그 화사한 낯으로 헤벌쭉 웃어 댔다.
“아, 너 진짜 손가락 힘은.”
“어떡해, 멍드는 거 아니겠지?”
심통이 잔뜩 느껴지는 목소리에 희찬의 시선이 도준의 볼에 닿았다. 도준의 하얀 얼굴에 새빨간 꽃이 피었다. 그에 희찬이 놀란 듯, 크게 눈을 뜨고 도준의 얼굴을 세심하게 살폈다. 세게 꼬집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예상보다 빨갛게 오른 자리가 신경 쓰였다.
“거울 있어?”
“있겠어?”
“가져오는 성의는? 발도 나았다며.”
일단 얼굴의 열이라도 가라앉혀야 할 것 같았다. 도준은 핀잔 어린 목소리를 내며 얼굴을 탁자 위에 대고 엎드렸다. 차가운 유리가 도준의 볼에 닿았다. 반갑지 않은 온도에 흠칫, 몸이 떨렸다.
“아, 근데 진짜 부은 거 같아. 뜨거워.”
“얼음도 가져올까? 괜찮아지겠지?”
대충 넘겨 보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결국 도준의 입에서도 걱정이 담긴 목소리가 나왔다. 그에 희찬이 잽싸게 움직였다. 정말 멍이라도 생기면 큰일이었으니, 행동은 재빨라야 했다.
여기저기 바쁘게 쏘다니는 희찬의 모습이 도준의 눈앞에 그려졌다. 희찬은 주방에 있는 직원에게 양해를 구해 비닐봉지에 얼음을 담고 저쪽으로 쌩 달려가서 손거울을 얻었다.
이내 희찬이 헐떡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도준 앞에 섰다. 탁자에서 얼굴을 뗀 도준의 볼 위에 피어난 붉은 꽃이 전보다 조금 작아졌다. 다행이었다.
“그래도 멍은 안 들겠다.”
“멍들면 안 되지, 너 오늘 씬도 많은데.”
“앗, 차가워.”
“차가워도 어쩔 수 없어, 참아.”
희찬은 자신이 가져온 얼음을 도준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차가운 온도에 도준의 인상이 잔뜩 일그러졌지만 비닐봉지를 든 희찬의 손은 단호하기 그지없다. 어렴풋이 미안함도 느껴지는 희찬의 손길에 도준도 가만히 볼을 내주었다.
꼭 어린애들처럼 장난이 장난으로 끝나지 않고 이렇게 사고를 내고야 마는 이 상황이 웃겼다. 결국 거울을 보며 얼굴을 살피던 도준의 입에서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괜찮아?”
“응, 괜찮은 거 같아.”
작은 손거울에 두 사람의 얼굴이 함께 비쳤다. 도준의 눈이 거울 속 희찬에게 닿았다. 희찬의 시선 역시 거울 속 도준에게로 향했다. 두 사람의 순수한 시선이 거울 속에서 얽혀들었다. 거울을 통해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빛이 각자의 진심을 오롯하게 담아 냈다.
희찬의 시선이 도준을 탐했다. 가지런한 눈썹, 높은 콧대, 잘 빠진 하관을 차례로 핥았다. 그 노골적인 시선은 도준의 것도 같았다. 이마부터 아래로 천천히 예쁜 얼굴을 어루만지던 도준의 시선이 이내 희찬의 새빨간 입술에 닿았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미묘해졌다. 그저 거울을 통해 서로를 봤을 뿐인데 가슴이 간질거렸다. 심장에 내려앉은 작은 너울이 이내 커다란 두근거림으로 바뀌었다.
“대사…… 맞춰 준다고 했잖아.”
“아, 응.”
이대로는 뭔가 일이라도 칠 것 같았다. 뽀뽀를 한다거나, 키스를 한다거나. 아무튼, 뭐든 할 것 같은 분위기에 도준이 거울을 내려놨다. 그에 희찬도 번뜩 정신을 차리고 도준에게서 떨어졌다. 두 사람 사이에 서먹한 공기가 도사렸다.
“여기 해 보자.”
도준이 고른 장면은 해인이 단역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와 제가 보고 들은 것을 인수에게 공유하는 장면이었다. 어차피 희찬과 대사 연습을 할 거라면 함께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희찬의 대사가 있는 부분으로 고른 것이었다.
“오늘 선배님들 연기하시는 거 봤는데, 진짜 엄청나더라. 아우라가 느껴졌어.”
도준은 금세 이야기 속 인물이 되어 제가 느끼는 설렘을 한껏 표현했다. 적당히 절제된, 차분하지만 그의 흥분이 적절히 묻어나는 ‘해인’ 그 자체였다.
“어땠는데?”
“화내는 장면이 있었거든. 근데…….”
낮은 목소리로 대사를 읊는 도준을 희찬이 가로막았다.
“야, 잠시만.”
“왜.”
그에 도준의 또렷한 눈이 희찬에게 향했다. 뭔가 다른 것을 바라는 걸까. 희찬은 감정의 맥락이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는 달랐던 건지, 턱을 쥐고 고심하는 눈빛을 보였다.
“음……. 지금도 진짜 좋거든? 근데 조금 더 방방거려 봐.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내가 어땠는데?”
“너 그때는 진짜 신나 보였거든. 엄청 행복해 보였어.”
“…….”
“그렇게 해 봐, 해인아.”
희찬의 말 한마디로 삽시간에 푸르고 다채로운 과거를 마주한 도준의 울대가 울렁였다.
신나 보였구나. 행복해 보였구나. 그래, 행복했고, 신났다.
도준의 입꼬리가 멋들어지게 치솟았다. 희찬의 인상도 한껏 휘어졌다. 도준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늘 선배님들 연기하시는 거 봤는데, 진짜 엄청나더라? 아우라가 진짜.”
“어땠는데?”
“화내는 장면이 있었거든? 근데…….”
도준은 과거 제가 그랬던 것처럼 목소리의 톤을 높이고 몸짓의 크기를 키웠다. 표정 역시 환하게 웃는 어린아이의 천진함으로 뒤바뀌었다. 이전보다 훨씬 밝은 분위기로 대사를 읊어 내는 도준의 모습은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이전의 해인이가 차분하게 느낀 바를 공유하는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감동에 북받친 해인이가 자신이 느낀 감동을 전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이도준은 캐릭터의 모습을 그저 잠시간의 텀으로 휙휙 바꿔 댔다. 그에 희찬의 낯이 환하게 피었다. 지금 도준의 모습에서 아주 어릴 적, 무슨 일이 있어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던 도준의 모습이 보였다. 그게 그렇게 뭉클하고, 또 아련했다.
이도준은 변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벽으로 저를 꽁꽁 싸매고 있었지만, 이도준은 이도준이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제빛을 숨기지 않고 찬란하게 드러내는 도준을 마주할 때면 항상 느끼는 설렘이었다.
“너, 진짜 잘한다.”
“알아.”
“진짜…… 멋있어.”
도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너도 멋있어. 여전히 예뻐.”
“……알아.”
희찬의 고개가 푹 수그러졌다. 하얀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말이다.
*
아침부터 시끄럽게 울어 대는 휴대폰 진동이 도준을 깨웠다. 요즘은 약도 필요 없는 일정이 계속되었다.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다 보니 요즘의 도준은 머리만 대면 곧장 곯아떨어졌다.
오늘도 겨우 두 시간은 잤을까. 도준은 피곤에 절어 게슴츠레 눈을 떴다. 징징 시끄럽게 울리는 휴대폰이 있을 법한 곳을 더듬다 보면 손바닥에 딱딱한 물체가 닿았다. 도준은 휴대폰을 쥐고 쏟아지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휴대폰을 쥐고 화면을 들여다보는 동안에도 진동이 쉬지 않고 울렸다. 그 진동은 생일을 축하하는 메시지가 대부분이었다. 감흥 없는 도준의 눈이 휴대폰 달력으로 향했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였고, 도준의 생일이었다.
도준은 입 안 가득 공기를 머금었다. 빵빵하게 볼을 불리고서 메시지를 하나하나 눌러 ‘감사합니다’ 짧은 답장을 남겼다.
숨 쉬고 일만 했는데, 어느새 또 1년이 흘렀다. 도준은 이제 고작 일주일밖에 남지 않은 한 해를 곱씹었다. 올해도 열심히 살았다. 누구보다 매시간 최선을 다해 살았다. 그리고 누구보다 열심히 걸었다. 제가 정한 목표에 당도하기 위해,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생일이고, 크리스마스였지만, 아침 일찍부터 촬영 스케줄이 빼곡하게 잡힌 날이기도 했다. 생일을 감상하며 허비할 시간은 없다는 뜻이다.
“형! 생일 축하드려요!”
“응, 고마워. 잘 잤어?”
“완전 푹 잤어요. 호텔 너무 좋아요.”
촬영 준비를 마치고 나온 도준을 매니저의 높은 목소리가 반겼다. 도준의 옆에는 대표가 아닌 매니저가 다시 붙었다. 지난 촬영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갔던 도준은 이번에도 함께 내려오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대표를 떼어 놓고 매니저와 함께 내려왔다.
패딩을 건네는 매니저는 이전보다 더 신경 쓰려 노력하는 것 같았다. 하나하나 챙기고, 살펴보는 매니저의 행동에 도준이 환하게 웃었다.
“갈까?”
“네!”
함께 나서고자 했으나 매니저도, 도준도 섣불리 발을 떼지 못했다. 크리스마스라고 해서, 도준의 생일이라고 해서 매서운 한파가 사그라든 것은 아니었다. 덕분에 도준은 신을 신은 후에도 한동안 밖으로 발을 디딜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런 도준의 팔을 매니저가 잡아끌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듯한 그의 몸짓에 도준도 별수 없이 발을 놀려 매니저와 함께 객실을 벗어났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호텔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캐럴을 들었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이상하게 사람 마음을 데웠다. 매서운 한파에 벌써부터 움츠러드는 몸이 캐럴을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든든해졌다. 덕분인지 모르겠으나, 피곤도 싹 사라졌다.
“형, 어젯밤에 감독님이 글 올리신 거 때문에 지금 형 언급 많은데 시간 괜찮으시면 포털 반응 한 번 보세요.”
“무슨 사진?”
“형이랑 희찬이 형이랑 같이 자는 거요!”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희경의 말대로 감독의 SNS였다.
film_lim 내일 도준이 생일 기념? 사진 투척ㅎㅎ 해인이 인수 진짜 잠들었던 건 안비밀ㅋㅋ
#눈부신항해 #순항중 #지금보니까너희정말잘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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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희찬과 함께 촬영 중에 잠들었을 때 찍은 건지, 희찬을 꼭 안고 잠든 자신과 그 품에서 편하게 눈을 감은 희찬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드라마 촬영 중에 에피소드나 사진들을 감독이 공개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이번에도 그저 일상 중의 하나였을 뿐인데, 사진 속 주인공이 이도준과 장희찬이어서 화제가 된 모양이다.
<앙숙→절친, ‘눈부신 항해’ 순항 중>
<‘눈부항’ 장희찬, 이도준 품에 꼭 안긴 채>
<‘눈부신 항해’ 촬영 현장 공개, 누리꾼 ‘들썩’>
<‘눈부신 항해’ 이도준 오늘 생일, 한강에 불꽃쇼 뜬다>
이어서 감독의 SNS를 다룬 기사들을 살폈다. 당연하다는 듯이 온라인도 난리가 났다. 온 포털을 뒤덮은 기사들은 클릭을 유도하는 자극적인 제목이 대부분이었다. 간간이 보이는 팬들이 준비한 도준의 생일 이벤트 외에는 도준의 흥미를 끄는 기사가 없었다.
도준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스크롤을 내렸다. 희찬과 한 작품에 묶여 함께 기사가 뜨는 것은 여전히 어색하다. 익숙해질 법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묘하게 감도는 낯선 기운에 도준이 괜히 귀를 매만졌다.
한창 스크롤을 내리던 도준의 손이 멈췄다. 이른 아침부터 바쁘게 실시간 반응을 쏟아 내는 사람들의 반응이 도준의 눈을 사로잡았다.
나 이도준 봄ㅋㅋ 진짜 존나 잘생김 현실감 없음ㅋㅋ 일하는 곳이 눈부항 촬영지랑 가까워서 가끔 보는데 그냥 우리랑 종이 다름 이도준이고 장희찬이고 지나갈 때마다 눈 호강 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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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장희찬 다친 듯? 장희찬 매니저도 이거저거 사갔는데 이도준도 저녁에 와서 같은 거 사가더라ㅋㅋ 부었다고 말했음 그리고 엄청 착해 누가 킹도준 싸가지 없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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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인증ㅋㅋㅋㅋㅋ 내 얼굴은 가렸음 싸인도 받음!
⤷ ㅁㅊ 이도준 개존잘
⤷ 존잘도준 계속 잘생겨주세요
⤷ 짱희찬 어디아파ㅠㅠㅠㅠㅠ
⤷ 나 지금 시력 5.0됨 몽골인이 친구하자함
⤷ 히찬아 엄마가 아플게 우리 아덜 만수무강
며칠 전, 희찬이 다쳤을 때 약국에서 찍은 사진이 함께 게시된 글에 도준의 입꼬리가 치솟았다. 가끔 마주하게 되는 목격담에서 사람들의 기분 좋은 설렘을 느낄 때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아침부터 기자들의 구설에 오른 것에 불쾌했던 기분이 가실 정도로 말이다.
도준은 연이어 보이는 다른 반응을 살폈다. 인터넷 반응을 찾아보는 것은 도준과 거리가 먼 일이었지만, 언제든 한번 들여다보게 될 때는, 앉은 자리에서 몇 분이고 볼 정도로 중독성이 강했다.
둘이 안 친한 줄 알았는데 저번 서포트 인증도 그렇고 사석에서 대신 약 사러 갈 정도면 친한가봄??ㅎㅎㅎㅎ 짱친의 ♡키스♡ 기대해
⤷ ㅋㅋㅋㅋㅋ오늘부터 숨참음 (대충 지구의 공기가 풍부해지는 짤)
⤷ ㄹㅇ 끼리끼리는 킹도준 짱희찬 두고 말하는 거다 이 킹왕짱같은
신이 킹도준 짱희찬이라는 마스터피스를 만들려고 실패작으로 60억명 만들었다는거 ㅆㅇㅈ (사진 원본 허락받고 킹준이만 자름)
⤷ 미쳤나ㅋㅋㅋㅋㅋ
⤷ 육십억 번 연습 한 거면 인정해줘야 됨
사람들이 쏟아 내는 반응은 드라마 이야기를 제외하고도 여러 가지 주제로 어우러졌다. 그들의 말은 대체로 긍정적이었고, 그 속에는 도준의 생일 축하 해시태그도 함께 쓰여 있었다.
그나저나 불꽃놀이라. 대단한 이벤트를 준비한 팬들인데, 이건 또 어디서 고맙다고 말하는 게 좋을까. 도준은 울대를 까딱거리며 골똘히 머리를 굴렸다.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핀 채였다.
호텔을 벗어나기 무섭게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호텔에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촬영장까지 향하는 내내 몰아치는 바람에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조차 버거운 바람이 연신 몰아쳤다. 도준의 옆에서 도준과 발을 맞춰 걷던 매니저는 이따금 발을 멈추고 바람이 멎어 들기를 기다리기도 하고, 아예 등을 돌려 걷기도 했다.
그렇게 힘겹고 어렵게 촬영장에 도착한 도준은 생각과 달리 한산한 풍경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아무리 예정된 시간보다 먼저 도착하는 도준이라고는 하나, 항상 도준보다 먼저 온 스태프들이 바쁘게 현장을 누비고 있는 것이 평소의 광경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바쁜 스태프들조차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조용한 세트장을 둘러보던 도준의 눈이 의문을 품고 매니저를 바라보자, 매니저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도준을 마주 봤다.
“촬영 시간 변경됐다는 말 있었어?”
“그런 연락 없었는데요?”
“뭐지?”
“조감독님께 연락드려 볼게요. 형, 여기 난로 켰어요. 이리로 오세요.”
휑한 공간이 생소하다. 아주 작은 수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이 당연한 이 공간이 조용한 것이 여간 어색한 게 아니었다. 텅 빈 공간에 덩그러니 선 도준은 매니저가 켜둔 난로 곁으로 몸을 옮기고서 멀뚱히 공간을 살폈다.
스태프에게 전화해 보겠다는 매니저까지 사라지자 커다란 촬영 공간엔 오롯하게 도준만 남았다. 낯설고도 익숙한 고독감이 도준을 휘감았다. 도준은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고서 손에 쥔 대본을 살폈다.
오늘은 촬영이 빠듯하게 진행되는 만큼 대사의 양도 많다. 머릿속으로 세트장 상황을 그리기 시작한 도준은 금세 입으로 줄줄 대사를 외우며 발을 까딱거렸다. 언 입을 부르르 털기도 하고, 목청을 가다듬으며 스트레칭을 하던 중.
철컹.
무거운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어두웠던 공간에 문이 열린 틈으로 방대한 양의 햇살이 쏟아졌다. 도준이 활짝 열리는 철문을 바라봤다. 어디서 모인 건지, 우르르 쏟아져 들어오는 사람들의 손에는 팡파르와 케이크, 플래카드가 들려 있었다.
“아…….”
도준의 입에서 감탄 섞인 탄식이 흘렀다. 사람들 머리 위를 장식하는 플래카드에는 도준을 향한 생일 축하가 담겨 있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사랑하는 도-준-이, 생일 축-하- 합니다!”
몰래카메라, 뭐 그런 거였던 모양이다.
선두에 선 희찬이 맑게 웃으며 생일 축하 노래를 선창했다. 그에 군중이 한목소리로 우렁차게 따라 불렀다. 민망함과 고마움이 동시에 도사렸다.
팡파르를 터뜨리고, 신명 나게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은 이내 커다란 목소리로 도준의 생일을 축하했다. 불이 붙은 케이크가 도준의 앞에 들이밀렸다. 빨리 초를 끄라는 사람들의 재촉 어린 시선에 도준도 즐겁게 웃으며 입김을 훅 불었다.
예쁘게 피어올랐던 불이 한 번에 사라졌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실연기가 초의 탄내를 머금었다.
“해인아! 소원 빌어! 소원!”
밝고 맑은 희찬의 말에 도준은 실로 오랜만에 눈을 감고 소원을 빌었다. 뭉근하게 피어오르는 이 행복이 희찬에게도 닿게 해 달라는, 그런 소원 말이다.
이어서 아마도 곽 대표가 준비했을, 성대한 생일상이 들어왔다. 준비한 노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거대한 뷔페의 등장에 사람들이 환호를 내지르며 뿔뿔이 흩어졌다.
도준의 옆에 희찬이 섰다. 잔잔한 행복을 머금은 도준이 희찬을 바라보자, 희찬은 환하게 웃는 것으로 그 눈빛에 응했다.
“생일 축하해. 메리 크리스마스.”
희찬의 하얀 손이 도준의 앞에 불쑥 들이밀렸다. 희찬을 얼굴을 또렷하게 쳐다보던 도준의 눈빛이 희찬의 손으로 향했다.
“너도 메리 크리스마스.”
이번엔 그 손을 무시하지 않았다. 도준은 희찬의 손을 맞잡고서 느릿하게 손을 흔들었다. 가벼운 크리스마스 인사는 덤이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부드러운 미소를 나눴다. 부담 없이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드러낸 도준은 희찬이 건네는 마음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건, 생일 빵이다!”
“아!”
어쩐지. 답지 않게 조용히 넘어간다 했다.
예쁘게 미소 지었던 희찬의 얼굴에 짓궂음이 내려앉기 무섭게, 희찬의 손이 도준의 등을 아주 세게 내리쳤다. 그에 도준의 얼굴이 조각조각 일그러졌다. 희찬은 아주 즐거운 웃음소리를 냈다.
“아, 장희찬 잠시만 이리 와 봐.”
“어? 너 지금 나 장희찬이라고 불렀어.”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고. 잠시만 와 봐, 진짜.”
“내가 미쳤다고 가냐?”
이윽고 두 사람의 쫓고 쫓기는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도준은 저도 모르게 희찬의 이름을 있는 그대로 부르며 제게서 도망가는 희찬을 쫓아 발을 놀렸다. 큰 덩치의 두 사내가 잽싸게 몸을 놀리며 장내를 휘저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이미 익숙해진 스태프들은 그저 즐겁게 웃을 뿐이었다.
한바탕 소란을 피운 도준과 희찬은 어느 정도 사람이 빠진 식당으로 나란히 발을 돌렸다. 희찬과 함께 밥을 먹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진 도준은 식감 좋은 음식들을 담은 식판을 들고 자연스럽게 희찬의 옆에 앉았다.
각 테이블 중앙에는 케이크가 있었다. 분명 도준이 초를 분 케이크는 하얀 생크림 케이크였는데, 테이블 위에 올라온 케이크는 블루베리 맛 케이크였다. 도준의 생일이라면 가만히 못 넘어가는 대표의 성미가 드러나는 이 성대한 만찬에 절로 웃음이 났다.
“해인아.”
“응?”
희찬이 갑자기 도준을 불렀다. 그에 아무런 의심 없이 희찬을 돌아본 도준의 볼을 희찬의 손가락이 콕 찔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희찬이 든 휴대폰에서 카메라 셔터음이 들렸다.
찰칵.
찰나의 순간에 사진이 찍혔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도준의 검은 눈동자가 슬그머니 떨어지며 희찬의 손가락을 바라봤다. 볼을 찌른 손가락에는 생크림이 묻어 있었다. 이어서 희찬의 손가락이 떨어질 때는 한 번 더 찰칵 소리가 났다. 도준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뭐 하는 거야?”
“뭐 하긴, 너 생일 사진 찍지.”
“그러니까, 그런 거 왜 하냐고.”
“내 맘이야. 내 카메라로 내가 사진 찍는데 네가 왜 간섭이야?”
“날 찍었잖아.”
무논리를 논리로 펼치는 희찬의 해맑은 미소에 도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희찬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가 찍은 사진을 도준에게 보여 주었다. 화면 속에는 한쪽 볼에 곱게 생크림이 찍힌 채로 희찬을 바라보는 도준이 있었다.
“뭐 해?”
“이거, 이렇게 올려도 돼?”
곁눈으로 흘깃 도준을 바라본 희찬이 피식 웃으며 손에 쥔 휴대폰 화면을 도준의 눈앞에 다시 보여 주었다. 두 번의 찰칵 소리를 냈던 희찬은 찍은 사진 두 장을 모두 올려 뒀다. 도준은 사진을 넘겨 확인한 후 사진 아래 가지런히 적힌 캡션을 찬찬히 읽었다. 잠시 고민하는 듯 쉽사리 대답을 내놓지 않았던 도준은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진짜지? 올린다?”
“응.”
“그럼 이왕 올리는 거 얼굴 좀 대 봐. 같이 한 장만 찍게.”
어차피 아침부터 시끄러운 포털이었다. 희찬의 SNS가 조금 거든다고 해서 그 열기가 더할 것 같지도 않았다. 도준은 희찬의 요구에 고분고분 얼굴도 가져다 댔다. 이윽고 가볍게 찰칵하는 소리가 한 번 더 실내를 울렸다.
희찬의 얼굴 가득 만족이 드리웠다. 옆에서 신난 몸짓을 잇는 희찬을 가만히 내버려 둔 도준은 숟가락을 들고 뜨끈한 미역국을 한입 가득 머금었다. 온몸을 녹이는 듯한 뜨끈한 온도가 퍽 마음에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준의 휴대폰이 반짝 알림을 띄웠다. 식탁 옆에서 환한 빛을 내는 화면을 바라본 도준은 발신자가 바로 옆에 앉은 희찬인 것을 보고 의아한 눈을 떴다.
희찬이 보낸 것은 도준을 찍은 두 장의 사진과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이었다. 싫은 척, 관심 없는 척. 무관심으로 일관한 도준이었지만, 그런 행동과는 다르게 손가락은 저장 버튼을 눌러 사진을 저장했다. 도준의 입가에는 남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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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echanee 해인이 생일 축하해~ 앙숙 아니고 소꿉친구예요. 그리고 저 많이 안 다쳤어요 걱정시켜서 죄송ㅜㅜ 지금은 괜찮아요!
#기쁘다_킹도준오셨네
⤷ 헉ㄴㅇㄱ 상상도 못한 관계
⤷ 짱피셜 킹도준이랑 소꿉친구라니ㅠㅠ 누나는 그저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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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찬은 저와 도준을 두고 ‘앙숙’이라 부르는 게 줄곧 못마땅했다. 언젠가 꼭 아니라고 반박해야지, 생각하던 차에 좋은 기회가 왔다. 회사에서 전해온 커뮤니티의 목격담 속 팬의 걱정을 접한 희찬은 그에 대한 해명과 동시에 그놈의 ‘앙숙’이라는 말을 확실하게 정정했다.
금세 몰려오는 대중의 반응이 만족스럽다. 온갖 추측성 댓글이 난무했지만, 너무 깊이 언급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기에 희찬은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고, 이쯤에서 마무리했다.
희찬은 어느새 분주해진 주변을 느끼며 남은 식사를 마저 했다. 어느덧 식사를 마친 도준은 옆자리에 느긋하게 앉아 희찬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안 가?”
“너 혼자 먹는 거 싫어하잖아.”
“참나, 무슨 상관이세요.”
“저쪽은 추워. 이쪽이 따뜻해.”
“오늘 키스 신 있더라?”
큽, 거친 기침이 터졌다.
조각상처럼 잘생긴 도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희찬을 향해 당황스러운 눈빛을 쏘았다. 그에 희찬도 지지 않고 눈을 게슴츠레 떴다. 촬영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줄곧 대본만 봤으면서, 오늘 촬영 내용을 몰랐을 리도 없는데 도준의 반응이 참 신선했다.
촬영 준비는 항상 그랬듯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어느새 완벽하게 세팅된 세트장에서 프레임 안에 선 도준과 희찬은 각자의 방법으로 긴장을 풀고, 입을 풀었다.
“도준아, 생일 축하한다. 오늘도 빠르게 끝내고 쉬자!”
“네, 감사합니다.”
“희찬이도, 파이팅!”
“네!”
“스탠바이!”
감독의 가벼운 목소리가 촬영 시작을 알렸다. 착 달라붙어 장난칠 때는 언제고, 촬영 장면을 상기한 후에는 민망한 듯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감독의 사인에는 금세 대본에 적혔던 자세를 잡고 서로를 바라봤다.
“큐!”
S#143. 인수와 해인의 집-낮
쾌청한 하늘. 허름한 단칸방. 대문이 삐걱거리는 소리. 바람에 따라 흩날리는 나무이파리. 빨랫줄에 널린 빨래가 펄럭인다.
아무 말 없이 서로의 공간을 지키는 인수와 해인. 인수는 자신의 계약을 축하하지 않는 해인에게 서운함을 느낀다. 해인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다.
이윽고 먼저 운을 떼는 인수.
인수 해인아.
얼어붙은 분위기를 풀어 보고자 한다. 하지만 인수의 부름에도 애꿎은 이불만 팡팡 터는 해인. 이불이 더 세게 펄럭인다.
인수 해인아.
한 번 더 해인을 부르는 인수. 조금 더 격앙된 목소리. 고개만 살짝 틀어 인수를 바라보는 해인. 해인의 표정에서는 복잡한 심경이 여실히 드러난다.
인수 (머뭇거리며) 있잖아.
해인 (단호한 목소리로) 헤어지자.
크게 뜨이는 인수의 눈. 해인은 이내 똑바로 인수를 바라보며 옹졸한 심정을 드러낸다.
인수 (큰 목소리로) 헤어지자고?
해인 미안한데, 나보다 잘되는 너를 응원할 수가 없어. 네가 잘되는데 축하 한마디 못 하는 내가 비참해. 너는 잘되는 만큼 나를 무시할 거고,
인수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인수 (인상을 찌푸리며) 너, 왜 나를 그런 식으로 단정 지어?
분노로 파르르 떨리는 인수의 목소리. 예상치 않은 이별 통보가 충격적이다. 심하게 요동치는 인수의 눈.
해인은 인수의 눈을 마주한다. 울컥 치미는 해인의 감정.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주먹을 꽉 말아 쥔다.
해인 (인수의 말은 무시하며) 그때마다 미안해할 거잖아. 그럼 우리는 멀어질 수밖에 없어. 그럴 바에 그냥 여기서 정리하는 게 맞는 거 같아.
인수 야, 해인아.
해인의 어깨를 거머쥐는 인수의 손. 해인은 그런 인수의 손길을 거부하듯 어깨를 비틀어 인수의 손을 쳐 낸다.
해인 (시선을 떨구며, 떨리는 목소리로) 그만……하자.
물기가 서리는 해인의 목소리. 이내 해인은 등을 돌려 집 안으로 사라진다.
인수의 맑은 눈에 차오르는 투명한 눈물. 한 방울 툭 떨어진다.
이렇게 헤어질 줄은 몰랐다. 서로의 꿈을 응원한 우리가, 서로의 안녕을 기원한 우리가 이렇게 허무하게 헤어질 줄은 몰랐다. 해인의 입에서 나오는 무심한 안녕이 인수에게 닿을 때, 인수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그저 한발 앞섰을 뿐이다. 그 한발은 해인이 금세 쫓아올 수 있는 거리였다. 인수는 해인의 모든 걸음을 응원하고자 했으나, 해인은 자신의 작은 걸음은 보이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눈물이 치솟았다. 우리의 찬란하고, 화사한 연애가 이렇게 끝이 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컷!”
초반에 촬영했던 장면을 이어서 찍는 데도 두 사람의 연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감독의 컷 사인과 함께 도준과 희찬이 나란히 프레임에서 벗어났다.
희찬은 곧장 다음 촬영 준비를 위해 의상실을 향해 걸음을 놀렸다. 희찬이 단독 신이나, 다른 조연 배우의 신을 촬영하는 동안 도준에게는 잠깐의 대기 시간이 생겼다.
도준은 얼른 실내 대기실로 발을 돌렸다. 꽁꽁 언 몸을 조금이라도 빨리 녹이고 싶었다. 그런 도준의 몸 위에 따뜻한 패딩이 얹혔다. 헤실거리며 다가온 매니저가 얹어 준 패딩 주머니에는 핫팩이 들어 있었다.
“형, 어차피 오후 촬영인데 호텔로 가서 쉬시다가 나오는 건 어때요?”
“아, 그럴까?”
“그편이 훨씬 따뜻할 거 같아요.”
도준은 매니저의 말을 듣고서야 실내 대기실로 가는 거리나, 호텔로 가는 거리가 크게 차이가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럴 바에는 매니저의 말대로 숙소로 돌아가는 편이 훨씬 현명할 것 같았다. 도준의 큼지막한 손이 웬일로 똘똘한 매니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목적지를 정한 도준과 매니저는 총총걸음을 재촉했다. 옷깃을 파고드는 바람은 여전히 매서웠고, 덕분에 콧잔등이 아릿하게 얼었다.
“우리 저기 갈까.”
호텔 로비에 당도하자 도준의 손가락이 로비 한쪽에 있는 카페를 가리켰다. 도준의 곧은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던 매니저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카페요? 형 커피 드시고 싶으세요?”
“그건 아닌데, 트리 보고 싶어서.”
“아, 그럴까요?”
다소 생뚱맞은 말이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가 생일인 도준에게 트리는 또 다른 의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매니저는 흔쾌히 도준과 함께 카페로 향했다.
도준은 카페 한구석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 자리에서는 주황빛으로 물든 호텔 로비 한 가운데를 지키고 선 거대한 트리가 한눈에 보였다. 휘황찬란하게 치장하고서 오색의 화려한 빛을 내는 트리를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점점 가슴이 차분해졌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괜히 사람을 설레게 하는 재주가 있다. 보육원에서 지내던 당시, 매년 크리스마스에는 모 기업의 후원으로 선물을 받았었다. 그를 떠올린 도준이 피식 웃으며 귓가에 울리는 아이들의 천진한 웃음소리를 되새겼다. 제 생일에 친구들이 함께 선물을 받는다는 사실이 어린 도준에게는 참 행복한 일이었다. 아마, 그래서 보육원에서 보낸 생일이 더 좋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형, 팬분들이 보낸 선물 사무실에 도착했나 봐요. 형 집으로 선물 옮겨 두신대요.”
“응.”
“트리가 그렇게 좋으세요?”
“예쁘잖아. 보고 있으면 기분 좋고.”
“형은 그런 거 안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보통 공휴일이랑 생일 겹치면 선물 한 번만 받는다고 되게 안 좋아하잖아요.”
줄곧 트리로 향했던 도준의 시선이 매니저에게 닿았다. 인자함을 잔뜩 머금은 채로 턱을 괸 도준은 입꼬리를 올려 부드럽게 웃었다.
“나는 고아였잖아. 어차피 생일에는 선물 못 받았어. 그나마 크리스마스라서 선물 받았지.”
“아…….”
입이 방정이지.
도준이 고아라는 것을 잠시 잊었던 매니저는 저도 모르게 일상의 일들을 내뱉은 제 입을 몇 번이고 때려 주고 싶었다.
도준은 그저 웃었다. 고아라는 것을 말할 때면 다른 이들도 대체로 매니저와 같은 반응을 보였기에 그다지 기분이 상하지도 않았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도준은 다시 시선을 돌려 반짝거리는 트리를 바라봤다. 그 주변을 온화하게 감싸는 캐럴이 도준의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졌다.
가슴이 벅차오르고, 허한 속이 든든해지는 연말 특유의 분위기는 오늘따라 유달리 따스했다. 도준은 턱을 괴고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길고 곧게 뻗은 예쁜 손가락이 부드러운 선율을 따라 춤을 추는 듯했다.
밤에는 눈이 온다는 예보가 있었다. 눈이 오기 전에 촬영을 마쳐야 하는 스태프들은 바쁘게 마지막 장면 촬영을 준비했다.
반짝거리는 작은 별이 촘촘하게 박힌 하늘 아래, 프레임 안에서 감독의 지시를 듣는 희찬과 도준 사이에는 서먹함이 감돌았다. 키스 신이 코앞에 닥쳐오니 절로 긴장이 도사린 탓이었다.
“자, 일단 이거 하나씩 물고.”
그런 도준과 희찬에게 감독이 내민 것은 다름 아닌 얼음이었다. 이 추운 겨울에, 입에는 얼음을 머금으라는 지시에 두 사람의 인상이 곧장 울상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불쌍한 표정 지어도 어쩔 수 없어. 배경이 여름인데 입김 나면 안 되잖아.”
겨울에 촬영하는 여름 배경은 여러모로 곤혹스럽다. 어떻게든 입김을 죽여 볼 요량으로 커다란 얼음을 하나씩 건넨 감독의 표정에서는 미안함이 읽혔다.
그렇지 않아도 차가운 바람에 살갗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은데, 감독의 지시는 거부할 요량이 없었다. 도준의 손이 먼저 차가운 얼음을 집었다. 손끝에 닿는 것만으로도 전신에 차가움이 전이되는 것만 같았다.
도준은 얼음을 얼른 입에 머금었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소름이 돋았다.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인상을 찌푸리는 도준을 보던 희찬도 곧바로 얼음을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희찬의 표정도 한껏 찌푸려졌다.
“아, 어으 자가어. (아, 너무 차가워.)”
“탸마. (참아.)”
그렇지 않아도 서먹서먹하게 서 있던 두 사람의 몸이 꽁꽁 얼어붙었다.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 완전히 일자가 되어서 뚝딱거리는 두 사람 사이는 희찬의 투정이 녹였다.
“가오이, 더 쥬게어오. (감독님, 저 죽겠어요.)”
“희찬아, 미안한데 뭐라는 건지 모르겠어, 눈 내리기 전에 얼른 촬영하고 끝내자!”
이가 딱딱 부딪쳤다. 턱이 바르르 떨리고, 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큰 몸을 바들바들 떠는 두 배우에게 스태프들의 안쓰러운 시선이 닿았다.
“얼음 다 녹았어? 바로 간다, 레디!”
두 사람을 구제할 길은 오로지 촬영을 빨리 끝내는 일이었다. 커다란 얼음을 금세 녹인 두 사람은 혀가 빳빳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그럼에도 감독의 사인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표정을 풀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액션!”
S#202. 해인과 인수의 집 앞-밤
스산하게 부는 바람. 바람을 따라 나뭇잎이 쏟아지는 소리. 이따금 들리는 밤벌레 우는 소리. 잔잔하게 퍼지는 가로등 불빛. 그리고 마주 보고 선 두 사람.
해인 그토록 바라던 인수의 모습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인수의 손이 해인의 눈가를 매만진다. 인수의 손에 묻어나는 해인의 눈물. 자신의 볼을 거머쥔 인수의 손을 맞잡는 해인. 손을 끌어 내리며 깍지 끼고.
해인 (울먹이며) 내가 미안해.
인수 (예쁘게 웃으며) 뭐를.
해인 (고개를 떨군다) 내가 못났어. 한참 못나서 그랬어. 내가 미안해.
해인을 한 품에 안아 주는 인수. 인수의 손이 해인의 등을 토닥인다. 인수의 품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해인.
숨 가쁘게 우는 소리. 서러움이 묻어나는 울음소리에 인수가 해인을 달랜다. 등을 어루만지는 손.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쓸어 주다가 다시 다독거린다.
인수 (부드러운 목소리로) 우리 화해할 때 어떻게 하기로 했지?
해인 인수의 어깨에 묻었던 얼굴을 들어 인수를 바라본다. 부드러운 인수의 표정.
해인 (인수의 볼을 거머쥐고) 사랑해.
인수 (장난스레 해인을 흘겨보며) 그거 말고.
인수를 진지하게 쳐다보는 해인. 인수는 기다리는 것이 있는 듯 눈을 반짝인다. 점점 가까워지는 두 사람의 얼굴. 그에 천천히 감기는 인수의 눈.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진다. 해인 얼굴을 틀고, 인수는 해인의 반대편으로 얼굴을 튼다. 열리는 입술. 이어지는 딥키스.
인수의 볼을 쥔 해인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천천히 감기는 해인의 눈. 눈가에 맺힌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인수의 볼을 쥐었던 해인의 손이 인수의 목덜미로 향하고. 조금 더 진하게 이어지는 키스.
이윽고 입술이 떨어진다. 이전보다 훨씬 환한 표정으로 미소 짓는 인수. 해인의 표정도 한결 가벼워졌다.
인수 (해인을 꼭 껴안으며) 사랑해, 내가 너보다 더 사랑해.
해인 감격한 듯 인수의 입에 한 번 더 입을 맞춘다. 가볍게 떨어지는 입맞춤.
해인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인수 응, 다시는 그러지 마.
부드럽게 맞닿는 두 사람의 시선. 동시에 휘어지는 낯. 서로의 손을 쥔 두 사람이 이내 집 안으로 사라진다.
삐걱거리는 철문. 창 너머 깜깜했던 방에 불이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탁 꺼진다.
휘영청 밝은 달빛이 거니는 마당. 세찬 바람에 구르는 철 양동이. 펄럭이는 홑이불.
촬영은 단 한 번의 NG도 없이 마무리되었다. 감독의 컷 사인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당으로 나온 두 사람은 얼른 패딩부터 찾아 입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오랜만의 키스는 달콤했고, 아릿했다. 서로에게 ‘사랑한다’라는 대사를 전할 때에는 마치 해인과 인수가 아닌 도준과 희찬 본연의 모습 같았다. 덕분에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얼굴만 붉히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은 날이 너무 추웠고, 마지막 촬영이 끝난 촬영장은 분주했다.
희찬은 따끈하게 열이 오른 마당 평상 위에 앉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것을 지나, 지진이라도 난 듯 오들오들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매니저가 건넨 핫팩을 양 볼에 얹고, 온풍기를 틀어 몸을 녹여도 추위는 오래간 떠나지 않았다.
그건 도준도 마찬가지였다. 매니저가 건네는 핫팩을 받아 얼굴을 녹이고, 입술을 녹이고, 손을 녹이는 중에도 온몸이 겨울철 사시나무 떨리듯 거칠게 떨렸다. 그래도 도준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촬영 장면을 볼 수 있는 화면 앞이었다.
감독은 굉장히 만족하는 듯 연신 감탄을 터뜨려 댔다. 바로 옆에서 그의 칭찬을 듣자니 쑥스러움이 몰려왔다. 도준은 간단하게 모니터링을 한 후에 희찬의 곁으로 향했다.
“어때? 괜찮아?”
“응, 잘 나왔어.”
희찬의 목소리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다. 몸이 떨리는 것을 참아 보려는 듯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힘을 준 희찬은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말을 만들어 냈다. 그에 도준의 낯에 걱정이 드리웠다.
“얼른 숙소로 가는 게 낫지 않아?”
“눈 온다잖아, 화이트 크리스마스 보고 갈래.”
희찬의 말에 잠시간 골똘히 생각하던 도준도 이내 희찬의 옆에 털썩 함께 앉았다. 희찬의 눈이 도준을 쳐다봤다. 장난기가 진하게 묻어나는 희찬의 눈빛을 본 도준은 애꿎은 하늘만 주야장천 노려볼 뿐이었다.
촬영장이 정리될 때까지만 눈을 기다리기로 한 두 사람의 손에는 어느새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커피가 들려 있었다. 스태프가 보온병에 담아 건네준 커피 덕분에 꽁꽁 얼었던 두 사람의 몸도 조금씩 녹아내렸다.
잔잔하게 머무는 소음 위에 누군가 튼 캐럴이 울렸다. 그래도 크리스마스라고, 마지막까지 그 분위기를 만끽하겠다는 스태프들의 발악에 분위기가 훨씬 부드러워졌다.
그건 두 사람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잔잔한 캐럴을 듣는 희찬의 발끝이 까딱거렸고, 도준의 손가락은 경쾌한 선율을 따라 둥그런 선을 그렸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새까만 하늘만 바라봤다. 쏟아질 것처럼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이따금 조금 더 밝은 빛을 내며 반짝거리는 별을 보니 가슴이 몽글거렸다.
잔잔한 캐럴과 차분한 공기 그리고 별.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연말의 분위기에 희찬의 입꼬리가 예쁘게 치솟았다. 다리를 달랑거리던 희찬의 다리가 뚝 멈췄다. 평상을 짚은 채로 몸을 돌린 희찬은 또렷한 눈으로 도준을 응시했다.
“준아.”
도준의 눈이 번뜩 뜨였다. 이제껏 희찬이 도준을 향해 ‘이도준’, ‘도준아’ 부른 일은 있어도, ‘준아’ 하고 부르는 일은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도준의 고개가 살짝 돌아 희찬을 향했다.
“이렇게 부르는 거 오랜만이지. 너도 불러 봐.”
“…….”
“응? 한 번만. 아, 제발. 소원.”
“응, 찬아.”
소중한 애칭이기에 고이 담아 뒀던 말을 어렵사리 뱉었다. 도준의 입술이 달싹거리며 낸 두 음절에 희찬의 얼굴 가득 아련함이 피어올랐다.
도준이 희찬을 부르자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순식간에 펑펑 쏟아지는 눈발에 두 사람은 부랴부랴 처마 아래로 몸을 숨겼다.
도준은 고개를 들어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을 바라봤다. 위에서 아래로, 바람을 따라 하늘거리다 땅에 닿아 사라지는 눈을 헤아렸다. 가끔 세찬 바람이 불어 하늘로 다시 오르는 눈도 있었다. 그렇게 내리는 하얀 눈송이가 금세 소복소복 쌓이기 시작했다.
“나 노래 불러 줘.”
“이 와중에?”
“듣고 싶어. 캐럴 말고.”
도준의 새까만 눈동자가 도르르 굴렀다. 평소 같으면 못 들은 척 넘겼을지 모르겠으나, 오늘은 그냥 불러 주고 싶었다.
희찬은 먼 옛날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도준의 허벅지를 베고 천장을 바라본 채로 누웠다. 한쪽 다리를 세우고, 그 다리 위에 다른 다리를 올려 꼰 자세로 눈은 도준을 올려봤다. 희찬의 시선을 느낀 도준이 헛기침을 하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준의 시선이 툭 떨어져 희찬에게 향했다.
도준의 손이 부드럽게 희찬의 앞머리를 어루만졌다.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희찬의 앞머리가 살랑거리며 흐드러졌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도준의 다정한 손길에 희찬의 얼굴 만면에 즐거움이 피었다. 행복 또는 환희를 머금은 얼굴은 해사하기 그지없었다.
읊조리듯, 조곤조곤 노랫말을 뱉어 내는 도준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희찬의 두 눈이 예쁘게 감겼다. 도준의 손은 여전히 희찬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울렁거림, 또는 일렁거림. 아무튼 기분 좋게 속이 메슥거렸다.
켜켜이 쌓인 케케묵은 감정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도 익숙한 일이다. 희찬은 제 얼굴을 쉬지 않고 매만지는 도준의 손을 마주 잡았다. 도준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부드러운 빛을 머금은 채였다.
“너 노래 진짜 잘해.”
“잘 못 해.”
“겸손은…….”
희찬의 손이 도준의 턱을 툭 쳤다. 장난이 물씬 묻어나는 그 손길에 도준의 입꼬리가 멋들어지게 휘어졌다.
그사이 흩날리던 눈발이 제법 거세졌다. 어느새 스태프들이 몇 남지 않았다. 깜빡거리는 가로등이 두 사람을 비추었다. 저렇게 불규칙하게 깜빡거리는 것까지 제대로 표현한 세트장은 정말 옛날 두 사람이 살던 집, 딱 그대로였다.
뭉근하게 피어오르는 옛 과거를 마주한 두 사람은 아마 같은 설렘을 느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새까만 하늘에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눈발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정처 없이 흩날리는 하얀 눈송이가 참 예뻐 보였다.
“내가 지금 분위기를 타서 그런 건지 잘 모르겠는데…….”
희찬의 낮은 목소리가 적막을 깼다.
희찬의 머뭇거리는 목소리에 도준의 눈도 희찬에게로 떨어졌다. 검은 도준의 눈동자에 희찬의 모습이 선명하게 비쳤다.
“아무래도 우리가 어릴 때부터 부모 없이 아득바득 사느라, 가는 인연 안 잡고, 오는 사람 안 막고 살았잖아.”
“응, 그랬지.”
느릿한 희찬의 목소리만큼 도준의 말도 느릿했다. 머릿속에는 아주 먼 옛날부터 최근의 나날까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바빴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도준의 답에도 희찬은 오래간 말이 없었다. 뜸 들이는 희찬의 모습에 도준의 눈에는 의문이 앉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머뭇거리는 걸까.
희찬의 입이 굳게 다물리면 다물릴수록 도준의 고개는 점점 더 비스듬히 꺾였다.
“분명 너도 나를 두고 갔는데. 이상하게 너는 지나간 것 같지 않아.”
“…….”
“……도준아, 너 나한테서 지나갔어?”
이윽고 희찬의 또렷하고 옅은 눈이 도준에게 닿았다. 희찬과 마주한 도준의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항상 밝게 웃었던 희찬이었기에, 과거의 일쯤이야,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는 것처럼 성격 좋게 먼저 다가와 장난을 걸던 장희찬이었기에 괜찮은 줄 알았다.
도준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세게 짓이겨 물었다. 힘들어하는 희찬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편이 찌르르 울렸다. 아릿하게 몰려오는 통증에 희찬과 맞잡은 손을 빼낸 도준은 주먹을 세게 말아 쥐고 침을 꼴깍 삼켰다.
희찬은 도준의 대답을 기다렸다. 응. 또는 아니. 이번에도 그 간단한 대답이 떨어지기까지는 퍽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잠시 허공에 닿았던 도준의 시선이 다시 희찬에게 향했다.
또렷하게 희찬을 바라본 도준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레절레.
긴장이 도사렸던 희찬의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그를 본 도준은 떨리는 숨을 울대가 울렁거릴 정도로 크게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