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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서툰 항해 (1) (7/18)

06. 서툰 항해 (1)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분주하게 출근을 준비하던 도준은 띠링, 울리는 휴대폰을 들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금일 우천으로 현장 작업이 취소되었다는 메시지에 도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자꾸만 몰려오는 잠을 겨우 이겨 내고 눈을 떴는데, 메시지가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그대로 출근할 뻔했다.

너른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큰 숨을 들이켰던 도준은 다시 옷을 한 겹, 한 겹 벗고 가지런히 누운 희찬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쏴아아,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소리가 온 동네에 널리 퍼졌다.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눈이라도 한바탕 쏟아지려나 싶었더니, 눈은 시기상조였던 모양이다. 대신 눈 앞을 가릴 정도의 폭우가 골목골목을 쓸었다.

가파른 언덕길을 따라 빗물이 흘렀다. 세찬 빗물에 다 떨어진 낙엽이 실려 하수구로 빠져들었다. 삭막한 동네는 천덕스러운 장대비를 반갑게 맞이했다. 이렇게 비가 쏟아질 때면 더러운 거리가 깨끗하게 청소되는 것 같다나, 뭐라나. 아무튼 거센 비는 동네 주민들의 환영에 보답이라도 하듯 동네 곳곳의 쓰레기를 몰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도준의 귀에도 시원한 빗소리가 닿자, 유달리 비를 좋아하는 도준의 귀가 번뜩 뜨였다. 도준이 게슴츠레 눈을 뜨고 창밖을 바라봤다. 한 치 앞의 물체조차 선명하게 상이 맺히지 않을 정도로 쏟아져 내리는 비가 반가웠다. 도준은 얼른 몸을 일으켜 따뜻한 기모 안감의 맨투맨을 챙겨 입었다.

나갈 준비를 마친 도준의 손에는 같은 디자인의 색만 다른 맨투맨이 들려 있었다. 비를 좋아하는 것은 희찬도 매한가지였으니, 그를 깨워 함께 나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도준이 희찬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거칠게 흔들어도 희찬은 도무지 눈을 뜨지 않았다. 도준이 다시 희찬의 어깨를 퍽퍽 때렸다. 희찬은 미간만 좁힐 뿐이었다.

“희찬아, 희찬아.”

“으응.”

도준의 목소리에 희찬이 부스스 눈을 떴다. 무거운 눈꺼풀을 도통 뜨지 못하는 희찬의 모습에 도준의 큰 손이 희찬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비 와.”

“진짜?”

“응, 많이 와.”

비를 언급했을 뿐인데 희찬의 눈이 크게 뜨였다. 희찬은 도준이 그랬던 것처럼 얼른 몸을 일으켜 창밖을 바라봤다. 거침없이 쏟아지는 빗줄기에 속이 다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희찬이 도준의 손에 들린 티셔츠를 앗아 들고 부리나케 바지를 챙겨 입었다. 그 후에는 고개를 홱 꺾고서 도준을 바라봤다. 똘망똘망한 눈에서는 ‘안 나가고 뭐 해?’ 하는 말이 들리는 듯했다.

이내 도준이 희찬의 손을 맞잡았다. 희찬은 한껏 휘어지는 미소를 보이며 가벼운 걸음을 놀렸다.

“비 많이 온다.”

“좋지?”

“응, 좋아.”

확실히 날씨가 서늘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부쩍 기승을 부리던 추위가 이제는 코끝을 얼리고 살갗을 아프게 쓸었다. 도준이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목덜미를 파고드는 차가운 공기가 달갑지 않았다. 비까지 쏟아지니 날씨는 더 춥기만 했다.

그렇다고 비가 싫은 건 아니었다. 희찬은 바들바들 떠는 도준의 무릎을 탁탁 두드리더니 머리를 대고 누웠다.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탓에 희찬의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이제 진짜 겨울인가 봐.”

“응, 너는 스케줄 언제부터 나가?”

“아직 얘기 없는데, 다음 주에 사무실로 오라셔.”

“재밌겠다.”

그사이 희찬의 계약이 성사되었다. 계약서를 받고 방방거리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전속 매니저도 배정되었고, 스타일리스트도 생겼다.

회사에서는 희찬에게 숙소 생활을 권했다고 했다. 아직 연예계 생활이 익숙하지 않은 희찬을 배려하는 것 같았으나, 희찬은 도준과 함께 사는 이 달동네의 허름한 집을 고집했다.

도준은 그 사실이 좋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했다. 충분히 더 좋은 집에서, 일거수일투족을 돕는 사람들과 편하게 지낼 수 있음에도 굳이 자신을 선택해 이 어렵고 힘든 곳에서 지내겠다는 희찬의 마음이 고맙고 또 미안했다.

“임 감독님 연락 왔었어.”

희찬이 회사 사람들과 연락하는 일이 잦아지니, 두 사람이 함께 쓰던 휴대폰도 어느새 자연스럽게 희찬의 것이 되었다. 도준은 굳이 누군가와 연락할 일도, 필요도 없이 가끔 현장 소장님의 연락만 받으면 될 일이었으니 그러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다 보니 도준을 찾는 임 감독의 전화도 희찬이 받는 일도 종종 있었다.

“언제 갈 거야, 촬영장.”

“음…….”

“임 감독님이 너 왜 안 오냐고 자꾸 연락 와.”

희찬이 뾰로통한 잔소리를 했다. 도준은 잠시간 난감한 낯을 보이며 곰곰이 눈을 굴렸다.

“근데 지금 철이라, 알잖아. 딱 야간 잔업 많아서 돈 벌기 좋은 때야.”

“그렇긴 해도…….”

도준이 희찬의 삐죽거리는 입술에 손바닥을 대고 배시시 웃었다. 일부러 촬영장에 가지 않는 게 아니었다. 그저 일이 바빴다. 분명 연기를 하는 것이 더 재밌고, 흥미롭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드는 일이긴 했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것이 빠듯한 지금은 그저 조금이라도 돈을 더 주는 곳으로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너…… 연기 안 하려는 건 아니지?”

희찬의 말에 도준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갑자기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고개가 절로 갸웃거렸다.

“너 연기할 때 되게 멋있단 말이야.”

희찬은 불안했다. 자신의 계약 소식에 겉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큰 축하를 건네는 도준이, 혹시나 속으로는 의기소침해지는 건 아닐까, 도준이를 찾는 대표가 있다고 했는데, 일이 바빠 나가지 못하는 동안 그가 도준이를 놓아 버리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들 때문에 괜히 조바심이 나고, 다급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도준의 눈빛은 변함없이 다정하고, 살가웠다. 사랑이 서려 따뜻한 시선에는 희찬을 향한 질투나 시샘, 초조함 따위는 조금도 묻어나지 않았다.

도준이 희찬의 예쁜 이마를 어루만졌다. 세찬 바람에 차갑게 식은 이마에 따끈한 손바닥이 닿자 희찬의 입꼬리가 빙그레 치솟았다.

희찬의 손이 도준의 손을 거머쥐었다. 따뜻한 손바닥과 달리 손등은 빨갛게 얼어 있었다. 손바닥을 얼굴에 가져대고 비비적거렸다. 도준은 희찬이 하는 대로 가만히 손을 내어 주었다.

“얼른 너도 계약해서 같이 이사 가고 싶어.”

“응, 얼른 가자.”

희찬이 계약금으로 받은 돈은 일용직이나, 단역 아르바이트를 하며 평생 벌어도 모을 수 없는 금액이었다. 계약금을 받았던 날, ‘당장 더 좋은 집으로 이사 가자’고 방방거리던 희찬에게 도준은 ‘그러자’ 대답했었다. 하지만 희찬은 하룻밤 사이에 전혀 다른 태도를 보였었다.

[너도 계약금 받으면 그때 같이 가자.]

도준은 그저 고개를 주억거렸었다. 희찬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뻔히 보였다. 혹시 위축될까, 걱정하는 거고, 자신의 눈치를 보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부러 더 그렇지 않은 척, 당당하게 행동하려 노력했다. 실제로 위축되거나, 그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었으니 제 마음이 희찬에게 닿길 바라는 간절한 몸짓이었다.

“이제 배고프다.”

“아침 먹자, 아니 점심인가.”

쏟아지던 비가 어느새 그쳤다. 종일 쏟아질 것처럼 기세 좋게 퍼부을 때는 언제고, 화창하게 하늘이 개더니 바닥에 물웅덩이만 남았다.

“그러게, 너 웬일로 늦잠을 잤다?”

“아니, 아까 아침에 출근하려고 일어났었는데, 소장님이 우천 때문에 작업 취소됐다고 메시지 주셨더라고. 그래서 다시 잤어.”

“그랬어? 이제 출근하기도 힘들겠다. 점점 추워져서 어떡해? 패딩 사 줄까?”

희찬이 도준의 갸름한 턱을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비가 온 뒤라 그런지, 쌩쌩 부는 바람이 유달리 차가웠다. 그렇지 않아도 추위를 잘 타는 도준인데, 이번 겨울은 초입부터 유독 추운 것 같았다.

“돈 아껴. 쉽게 번 돈도 아닌데.”

“너는 나한테 돈 쓰는 거 아까워?”

“아니.”

“나도 똑같거든? 너한테 쓰는 건 하나도 안 아까워.”

도준이 입을 꾹 다물었다. 어차피 말로는 장희찬을 이길 재간이 없다.

도준은 그저 힘들게 온 기회에 귀하게 얻은 계약금을 허투루 쓰지 않길 바랐다. 추운 겨울이야, 둘이 꼭 껴안고 지내다 보면 이겨 낼 수 있을 거였고, 겨울은 사계절 중 하나일 뿐이었으니 크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돈은 꼭 희찬이 필요할 때, 희찬이 원하는 곳에 쓰길 바랐다.

“용돈 올릴까?”

“너 돈 생겼다고 그렇게 바로바로 쓰면 너 이사 가고 싶다는 집 못 사.”

“잔인해.”

도준의 무릎을 베고 누웠던 희찬이 고개를 바짝 들고 입술을 씰룩거렸다. 게슴츠레 뜬 눈으로는 도준을 노려봤다.

그에 단호했던 도준의 눈빛이 수그러들었다. 저를 원망하는 듯 보이는 희찬 앞에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 수 없었다.

도준이 고개를 푹 수그린 채로 손끝을 뜯었다. 희찬의 시선도 도준의 손가락에 멎었다. 가지런한 손가락의 살갗이 하얗게 올라 상처가 생기기 직전이었다.

희찬의 손이 도준의 손을 거머쥐었다. 그만하라는 뜻이었다.

“그러지 말고, 돈을 벌었는데 왜 쓰는 맛도 모르게 해? 돈 좀 쓰자! 그래야 또 힘내서 벌지.”

희찬의 맹랑한 목소리가 그의 굳센 의지를 담았다. 두 손으로 도준의 얼굴을 쥐어 올린 희찬이 집요하게 도준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에 도준도 별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도무지 장희찬은 이겨 낼 수가 없다.

“내가 널 어떻게 이겨.”

“그럼 옷 사게 해 줄 거지?”

도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희찬이 꼭 원하는 것이라면 그게 곧 제가 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도준의 체념은 빨랐고, 체념과 동시에 마음도 가벼워졌다.

도준의 승낙이 떨어지자 희찬이 즐겁게 웃었다. 얼굴 가득 만족을 얹고 도준의 입에 대고 입술을 꾹 찍어 눌렀다.

도준의 손도 희찬의 얼굴을 쥐었다. 차가운 손이 얼굴에 닿으니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맞닿은 입술이 열렸다. 자연스럽게 키스하려 하는 도준을 희찬의 하얀 손이 가로막았다.

“안 돼, 추워. 들어가서 하자.”

희찬의 단호한 목소리에 도준이 입술을 이죽거렸다. 비가 내릴 때 나는 특유의 물비린내에 쨍하게 내리쬐는 태양이 어우러진 분위기가 참 좋았는데, 그를 가로막은 희찬의 손이 아니꼬웠다.

“배고파.”

“오늘 점심 메뉴는 뭐야?”

“아, 오늘도 내가 해?”

“내가 하는 거 먹을래?”

“아니, 내가 할게.”

희맑은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희찬 덕분에 도준이 벌떡 일어섰다. 장희찬은 요리를 못 한다. 그것도 그냥 못 하는 게 아니라 더럽게 못 한다.

도준의 등 뒤에 희찬의 맑고 쾌활한 웃음소리가 닿았다. 승리가 도사린 아주 호탕한 웃음소리였다.

도준은 냉장고에서 며칠 전 동네 어른이 나눠 준 묵은지를 꺼내고, 스팸도 꺼냈다. 한참 머릿속의 레시피를 따라 요리하던 도준의 허리에 희찬의 손이 닿았다. 희찬이 바로 옆에서 도준의 몸 곳곳을 지분거리며 심심한 기색을 여실히 드러내는 중이었다.

“심심해?”

“응.”

“그럼 이거 썰어. 어떻게 써는지 알지? 좀 납작한 네모 모양으로, 우리 맨날 먹을 때…….”

“알아요, 알아요. 야, 내가 아무리 요리를 못 해도 그건 알거든?”

“그래, 그럼 그렇게 잘라. 자, 칼.”

한 사람이 서는 것도 벅찬 조리대 앞에 큰 덩치의 두 사람이 나란히 섰다. 움직이는 것이 버거워 손을 뻗는 것조차 조심스러웠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은 즐겁게 웃었다.

그저 행복했다. ‘너와 나’이기 때문에 즐거웠다. 어려운 환경에 도무지 꿈이라곤 꿀 수 없는 현실이었지만, 그래서 좋았다. 서로가 간절하고, 서로가 필요한 지금이 더없이 좋았다.

“도준아.”

“응?”

“사랑해.”

불현듯 행복을 만끽하던 희찬의 손이 도준의 엉덩이를 지분거렸다. 도준은 익숙한 일이라는 듯 엉덩이를 내어 준 채로 김치찌개 끓이는 것에 열중했다.

반응이 없는 도준이 심심했던 건지, 희찬이 도준의 귀 아래 턱 부근에 입을 맞췄다. 그제야 도준이 희찬을 바라봤다.

“갑자기, 또.”

“싫어?”

“……또 해 줘.”

“사랑한다고 하면.”

“사랑해.”

가스레인지에 불을 올리고, 따끈하게 열이 오르는 것을 보던 도준의 입에서도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다. 언제 들어도 황홀한 도준의 고백이 희찬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희찬은 도준의 목에 팔을 둘렀다. 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 맞닿았다. 들어가서 하자던 희찬의 말대로, 금세 입술이 벌어지고 혀가 뒤엉켰다. 두툼하고 축축한 살덩이가 질척거렸다. 그 행위 하나하나에 커다란 사랑이 앉아 서로를 다정하게 품었다.

식사를 마치기 무섭게 도준이 희찬의 하의를 훌렁 벗겨 버렸다. 여유로운 기색을 보이던 희찬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으응, 읏.”

희찬의 입에서 무거운 신음이 흘렀다. 차가운 공기가 예민하게 닿았다. 서늘한 공기와 달리 몸은 자꾸만 달아올랐다. 도준의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운 희찬의 몸이 흠칫거렸다.

희찬은 도준에게 엉덩이를 내어 준 채로 애꿎은 시트를 비틀어 쥐었다. 엉덩이 사이를 드나드는 축축한 살덩이가 몹시 이질적이다. 희찬은 엉덩이에 힘을 주고 움찔거렸다. 희찬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희찬의 커다란 페니스가 꺼떡거렸다. 그 끝에서 엷은 액체가 뚝, 뚝 떨어졌다. 자꾸만 다리가 오므라들었다. 엉덩이 사이를 적시는 도준의 혀가 움직일 때마다 희찬의 몸이 튀었다.

“아흐으, 싫…….”

희찬의 엉덩이 사이가 잔뜩 좁아졌다. 도준이 눈을 들어 희찬을 살폈다. 희찬의 하얗고 탱탱한 양 엉덩이를 거머쥔 도준의 손에 힘이 실렸다. 혓바닥 끝을 세워 구멍을 핥는 도준은 집요했다.

희찬의 발끝이 움츠러들었다. 새하얀 발바닥이 접히는 모양이 예뻤다. 도준은 희찬이 움찔거리는 것을 그대로 느끼며 정성스레 혀를 놀렸다. 구멍을 감싼 주름을 헤아리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흐으…….”

도준의 혀가 사라졌다. 타액이 묻은 자리에 차가운 공기가 닿아 한기가 서렸다. 희찬의 엉덩이가 잔잔하게 떨렸다. 그 위에 도준의 뜨거운 손이 닿았다.

뜨거운 살덩이가 예민한 구멍을 다시 침범했다. 속을 아무렇게나 휘젓는 물컹한 혓바닥에 뇌를 찌르는 전율이 일었다. 희찬의 허리가 아래로 휘었다가, 다시 튕겨 올랐다. 탄탄한 허벅지가 주체할 수 없는 자극에 부들부들 떨렸다.

“야, 이거, 이상, 흐읏. 윽.”

희찬의 손이 공중을 휘적거렸다. 버둥거리는 희찬의 손은 새하얗게 질린 채였다.

도준이 그 손을 꽉 움켜쥐었다. 열이 가득한 손바닥을 바들거리는 희찬의 허리 위에 얹었다. 도준의 손끝에 열꽃이 피었다. 빨갛게 피가 몰린 손등에 굵은 핏줄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다.

한참 후에야 도준의 입이 떨어져 나갔다. 희찬의 고개가 한껏 젖혀졌다. 혓바닥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생경했다. 도준의 혀가 빠져나올 때, 실선과 같은 타액이 주욱, 늘어났다.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희열에 잠식되어 죽을 뻔했다. 가파르게 부풀었다가 줄어들기를 반복하던 희찬의 흉통이 안정을 되찾았다. 희찬은 눈물을 매달고서 도준을 돌아봤다.

도준의 새빨간 입술이 번들거렸다. 그게 또 얼마나 자극적인지 모른다. 아랫배에 다시 소용돌이가 일었다. 방금 막 사정을 마친 페니스가 저릿저릿했다.

“맛있어? 응?”

“응, 맛있어.”

도준이 희찬의 엉덩이를 토닥거렸다. 말랑한 엉덩이가 손바닥에 달라붙는 감이 좋았다. 도준이 희찬의 가는 허리를 거머쥐고, 엉덩이 사이에 페니스를 비비적거렸다. 바지를 입은 채로 비비는 탓에 살갗에 바지의 거친 면이 까슬하게 닿았다.

두꺼운 바지 아래 갇힌 도준의 페니스가 묵직하다. 단단한 몽둥이가 짓누르는 느낌에 괜히 엉덩이가 벌름거렸다. 희찬은 당장에라도 페니스를 물고 싶어 뻐끔거리는 구멍이 부끄러웠다.

“그렇게 말고…….”

“어떻게 할까?”

“너 짓궂어.”

피식, 도준이 얕은 웃음을 터뜨렸다.

뭘 원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 시침을 떼는 모습이 마뜩잖았다. 희찬이 수그렸던 고개를 홱 꺾어 도준을 돌아봤다. 빙그레 웃음을 띠고 저를 쳐다보는 도준 덕에 불현듯 얼굴이 붉어졌다.

혼자만 여유로운 척하는 도준의 모습이 달갑지 않다. 희찬도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는 듯 야살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도준의 눈앞에 새하얀 엉덩이가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렸다.

“넣어 주세요.”

“…….”

“도준이 고추 넣어 줘.”

머릿속에서 무언가 뚝 끊겼다. 한껏 드리웠던 여유가 모조리 사라졌다. 도준은 단번에 웃옷을 벗어젖혔다. 바지 버클을 풀기 무섭게 바지와 드로어즈가 벗겨져 내렸다. 도준의 커다란 페니스가 오뚝이처럼 퉁 튕겨 올랐다. 도준이 여유를 잃었다. 그 모습을 본 희찬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뭉툭하고 딱딱한 페니스 끄트머리가 움찔거리는 구멍에 닿았다. 도준이 페니스 뿌리를 쥐고, 구멍 주변을 꾹꾹 눌렀다. 천천히 뭉근하게 닿는 도준의 페니스가 몹시 뜨거웠다.

비좁은 구멍 사이를 무지막지한 굵기의 페니스가 억지로 벌리고 들어왔다. 부드러우면서도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페니스에 희찬의 허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먼저 넣어 달라며 엉덩이를 흔들 때는 언제고, 희찬은 시트를 거머쥔 채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도준이 아랫입술을 잘근 씹어 물었다. 희찬의 모습과는 반대로, 희찬의 뜨거운 속은 도준의 페니스를 급하게 집어삼켰다.

“도준, 도준아, 잠, 깐만!”

“왜.”

“얼굴 보고 할래. 무서워, 무서워.”

“……무섭긴, 누가 너 죽인대.”

희찬의 하얀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도준은 마저 밀어 넣으려던 것을 멈추고, 부드럽게 희찬의 몸을 쓰다듬었다.

뜨거운 손바닥이 등을 어루만지고, 엉덩이를 주무르다 허벅지를 조몰락거렸다. 긴장을 풀어 주려는 손에서 사랑이 흠씬 묻어났다. 그래도 무서운 건 어쩔 수 없다. 희찬은 도준의 페니스를 제 속에 넣은 채로 조심스레 몸을 돌렸다.

도준의 단정한 낯이 조각조각 일그러졌다. 희찬이 움직이는 것이 살갗에 생생하게 느껴졌다. 꿈틀거리는 내벽이 도준의 페니스를 쓸었다. 귀두를 부드럽게 휘감았다가, 기둥을 품는 속살은 뜨겁고 아찔했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도준은 이를 악물고서 아득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부여잡았다. 희찬의 구멍이 조금 더 벌어졌다. 부피를 더한 도준의 페니스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희찬이 여린 숨을 연신 터뜨렸다. 도준이 희찬의 기다란 다리를 제 어깨 위에 올렸다. 이윽고 희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준비되었다는 신호였다. 도준이 냅다 희찬을 끌어안았다. 희찬의 몸을 안으려 허리를 숙이자 도준의 커다란 페니스가 한 번에 희찬의 속으로 밀려 들어갔다.

“아! 악!”

“후으…….”

페니스에 닿은 뜨거운 살갗이 거세게 요동쳤다. 페니스를 휘감고 움찔대던 내벽이 울렁거렸다. 그에 도준이 미간을 좁혔다. 이대로 희찬의 속에 제 페니스 형상을 찍어 주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도준의 허리 짓이 바빠졌다. 도준이 빠르게 치고 빠질수록, 그의 페니스가 희찬의 속을 함부로 휘저었다.

“흐윽, 흣! 아, 흐읏, 힉! 아!”

발끝이 저릿했다. 발바닥 어딘가에서 놀던 전율이 다리를 타고 올라 희찬의 다리가 공중으로 뻗쳤다. 버둥거리는 다리의 전율이 페니스에 닿았다. 도준의 페니스가 배 속 깊은 곳에 닿아 통증이 서릴 즈음에는 요도가 저렸다. 온몸을 집어삼킨 전율이 머리까지 짜릿하게 만들었다.

찔끔찔끔 투명한 액체가 비집고 나왔다. 금세 페니스 기둥을 타고 흐르는 액체가 양을 더해 희찬의 배를 축축하게 적셨다.

통증이 희열로 변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속이 다 망가지고 허물어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 역시 좋았다. 희찬은 고개를 젖힌 채로 전신을 바들바들 떨어 댔다.

“후읍!”

“흐, 아……. 흣.”

도준이 희찬의 고환을 거머쥐었다. 마치 터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세게 움켜쥐는 탓에 숨이 턱 막혔다. 이번엔 구슬 굴리듯 살살 음낭을 주물렀다. 농염한 도준의 손짓에 죽어나는 것은 희찬이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쳤다가, 덮쳐 오는 쾌락에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도준이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허리를 놀렸다. 어디 하나 섭섭하지 않게 찔러 주는 페니스가 친절하고 세심했다. 도준은 한 번에 훅 페니스를 빼며 희찬을 놀리기도 했다. 커다란 것을 머금었던 자리가 벌름거리는 사이로 빨간 속살이 보였다. 이내 다시 한 번에 내리꽂았다. 희찬의 몸이 뜨거운 열을 머금고 반달 모양으로 휘어 올랐다가 축, 처지기를 반복했다.

“하악! 아……! 흡, 하윽!”

고환을 거머쥐고 굴리던 도준의 손이 희찬의 회음부를 꾹 눌렀다. 그렇지 않아도 크고 굵은 것에 속이 다 눌려 숨이 턱턱 막히던 중이었다. 곧장 전립선을 찌르고 드는 자극에 감전된 사람처럼 파르르 몸을 떨었다. 아래위로 짓이겨지는 기분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희찬이 커다란 신음을 터뜨렸다. 몸을 휘어뜨리기 무섭게 빳빳하게 섰던 희찬의 페니스에서 새하얀 정액이 힘차게 분출했다. 둥근 포물선을 그리며 뿜어져 나온 진득한 액체가 간헐적으로 솟아오르는 모습이 가히 자극적이다.

도준도 허리 짓에 박차를 가했다. 귀두를 조이고, 기둥을 머금은 속살을 거침없이 휘저었다. 도준의 허벅지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근육이 탄탄한 엉덩이가 잔뜩 오므라든 후에는 도준도 사정을 맞았다.

도준의 큰 몸이 희찬의 몸 위로 풀썩 쓰러졌다. 어느새 눈물을 머금은 희찬이 가쁜 숨을 쉬며 울음을 참는 중이었다. 도준이 희찬의 얼굴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눈물이 닿은 자리에 입을 맞추고, 귓불을 머금었다가 귓바퀴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희찬의 듬직한 팔이 도준을 함께 끌어안았다. 너른 등을 쓸어 만지다가 탄탄한 엉덩이를 주물렀다.

“빼 줘.”

“아까처럼 말해 봐.”

“너 또 하려고?”

희찬이 도준을 노려봤다. 그에 도준이 싱긋 웃으며 희찬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아까는 정말 불알을 터뜨리는 줄 알고 겁이 났었다.

“안 할게.”

“도준이 고추 빼 주세요.”

“예쁘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도준의 입술이 희찬의 목선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도준은 쇄골을 다정하게 머금었다가 힘있게 빨아들여 기어코 자국을 남겼다. 그리고 만족한 듯 제가 남긴 흔적을 어루만졌다.

도준의 페니스가 빠져나간 자리가 허전하다. 뻐끔뻐끔, 금붕어 입처럼 오므라들었다가 벌어지길 반복하는 구멍 사이로 새하얀 액체가 흘렀다. 도준의 잘생긴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선홍빛 속살과 하얀 액체가 대비되어 상당한 자극으로 닿은 탓이었다.

“도준아, 사랑해.”

“응, 나도 사랑해.”

이내 두 사람이 몸을 겹쳐 누웠다. 전혀 다르게 생긴 몸이었지만, 두 사람이 맞물릴 때는 꼭 딱 맞는 퍼즐만 같았다.

*

도준은 오랜만에 집 안을 뒤엎었다. 희찬이 회사 호출을 받고 사무실로 간 오늘, 도준은 대청소를 결심했다. 청소를 등한시하지는 않았지만, 이래저래 일이 바빠 미루다 보니 어느새 집 안이 쓰레기장 버금가는 모습을 보였다.

도준은 싸리 빗자루를 들고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한 곳에 쓰레기와 먼지를 몰아 놓고, 쓰레받기로 쓸어 담는 행동은 마치 청소 전문가 같았다. 그 후에는 헤진 걸레를 들고 여기저기 빛이 나도록 닦아 댔다. 차가운 물로 걸레를 빨 때는 손가락이 다 으스러지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도준의 청소가 멈추는 것은 아니었다.

밀린 청소를 마친 후에는 이불을 빨았다. 분명 겨울에 덮기에는 상당히 얇은 홑이불이었지만, 그에 대한 불만은 없다. 빨간 대야에 물을 받아 세제를 풀어 거품을 내고, 이불을 담았다. 맨발로 물 온도를 확인한 도준이 어깨를 움츠렸다.

“어우, 존나 차가워.”

희찬이 보면 감기 걸린다고 한 소리 할 모습이었지만, 희찬이 없으니 지금이 적기다. 도준은 이를 악물고서 대야에 발을 밀어 넣었다. 살을 파고드는 차가운 온도에 발이 다 어는 것 같았다. 살갗을 찌르는 듯한 고통에 주먹을 말아 쥐고, 이불을 꾹꾹 밟다 보면 살을 에는 감각도 금세 사라졌다.

“……이거 이불 얼려나?”

날씨를 생각하지 못했다.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이불을 헹구고, 빨랫줄에 널어 둔 후에야 도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머리를 스치는 바람이 제법 차갑다. 머릿속에는 차가운 바람에 얼어 빳빳하게 굳은 이불의 모습이 그려졌다. 불현듯 웃음이 비집고 나왔지만 일단, 꽁꽁 언 손발을 녹이는 게 먼저일 것 같았다.

집으로 들어온 도준이 보일러를 켰다. 희찬이 돌아올 때도 되었으니 추운 집 안을 따뜻하게 데우려는 요량이었다. 희찬은 오늘 회사에서 앞으로의 활동에 대해 회의를 한다고 했다. 회사에서는 희찬에게 신인치고 좋은 대우를 해 주는 것 같았다. 도준은 흐뭇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희찬이 잘되는 것은 생각만 해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일이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희찬이, 환한 세상에서 화려한 제빛을 뽐내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눈물이 날 만큼 행복했다.

도준은 얼른 희찬이 돌아오길 바랐다. 조잘조잘 쉬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희찬의 목소리가 궁금했다. 무슨 일을 어떻게 결정했을까, 회사는 희찬이에게 어떤 것을 권했을까. 뭘 해도 잘할, 그리고 잘 어울릴 희찬이겠지만, 그래도 미치도록 궁금했다.

“아, 안 되겠다.”

침대에 걸터앉았던 도준이 벌떡 몸을 일으켜 서랍 한쪽 구석에 숨겨 둔 담배를 들고 성큼성큼 대문 밖으로 향했다. 담배 냄새를 지독하게 싫어하는 희찬 덕에 어쩌다 한 대 몰래 피우곤 했는데, 오늘은 초조함을 도무지 숨길 수가 없었다.

“도준아!”

이윽고 저 아래에서 희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준의 입꼬리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이도준!”

한 번 더 희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희찬의 하얀 손이 머리 위로 휘젓는 것이 보였다.

“준아!”

가까이 다가오는 희찬의 얼굴이 새하얗게 피었다. 도준은 손에 들고 있던 꽁초를 내던지고 성큼성큼 걸음을 놀려 희찬에게 다가갔다. 가파른 언덕길을 내달려 올라오는 희찬을 한 품에 안았다. 희찬의 볼에 입을 맞추고, 입술에 진한 키스를 할 때는 주변의 시선도 모두 잊을 만큼 큰 짜릿함이 몰려왔다.

도준의 눈앞에 나타난 희찬은 평소보다 더 화려한 기색을 뽐냈다. 까맣던 머리가 밝은 노란색으로 변해 있었다.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머리가 낯설기 그지없다. 도준이 의아한 듯 희찬을 바라보자 희찬이 고개를 예쁘게 꺾고서 환한 얼굴로 도준을 바라봤다.

“머리가 바뀌었네.”

“응, 회사에서 이미지가 밝은 머리가 더 잘 어울린다고, 오늘 탈색하고 다음 주에 조금 더 밝은색으로 염색하라고 하셔서.”

“그랬구나.”

도준은 서운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물론 밝은 머리도 한없이 잘 어울리는 희찬이었지만, 검은 머리의 희찬이 가지는 매혹적인 매력이 다 사라진 기분이었다. 멋쩍은 듯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희찬의 손을 도준이 거머쥐었다.

“예뻐.”

“그래?”

“응, 잘 어울려.”

방긋 웃는 희찬 면전에 대고 까만 머리가 더 잘 어울린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확실히 화려하게 생긴 얼굴을 꾸며 놓으니 더 예쁜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분명한 부분이었다.

이내 도준도 희찬과 함께 웃었다. 잠시간 도준의 눈치를 살피며 표정 변화를 관찰하던 희찬도 비로소 환하게 웃었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로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깔끔하게 정리된 마당에 희찬의 입이 떡 벌어졌다. 같이 하려고 했는데 부지런한 이도준은 잠시도 쉴 수 없었던 모양이다.

“청소했어?”

“응, 다 엎었어.”

“야, 이거 이불 얼겠는데?”

“역시, 그냥 걷는 게 낫겠지?”

도준이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확실히 아까보다 더 싸늘해진 온도에 이불이 얼 것 같기도 했다. 어깨를 으쓱거리자 희찬도 덩달아 어깨를 으쓱거렸다.

“응, 지금 걷자.”

희찬의 말에 도준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사이 빳빳하게 언 이불에 살얼음이 서렸다. 그에 희찬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살림을 잘한다고는 하나, 아직은 노하우가 부족한, 어쩔 수 없는 초보 살림꾼이었다.

가끔가다 한 번씩 보이는 도준의 허술한 모습이 좋다. 환하게 웃었던 희찬은 이불 끄트머리를 도준과 나눠 쥐고서 이불을 팡팡 털며 살얼음을 떨어뜨렸다. 차가운 이불을 꼭 쥐고 있었던 탓에 금세 손끝이 빨갛게 얼었다.

“같이 하지, 혼자 힘들었겠다.”

“아냐, 나 청소 잘하잖아.”

차가운 이불을 들고 들어온 집 안도 깨끗하긴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도준의 손이 거치고 나면 한없이 깔끔해지는 집이 만족스러웠다. 희찬이 도준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수고한 도준에게 전하는 감사와 위로였다. 도준이 뿌듯한 표정을 얼굴 만면에 피워 냈다.

그런 도준의 눈앞에 커다란 쇼핑백이 드리웠다. 아까부터 희찬이 들고 있던 쇼핑백이었다. 그에 도준이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희찬을 바라봤다. 희찬은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고 쇼핑백을 든 손을 달랑거렸다. 얼른 받으라는 듯 재촉하는 모양새에 도준이 쇼핑백을 건네받았다.

쇼핑백이 제법 묵직하다. 유명 브랜드의 상표가 떡하니 자리한 쇼핑백이 유독 크게 와닿았다. 도준은 쇼핑백을 열어 보지 않았다. 그저 하얗고 예쁜 희찬을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었다. 희찬이 다리를 달랑거리며 도준을 재촉했다.

“아, 빨리 열어 봐.”

“뭔데.”

“선물.”

“무슨 선물.”

“아, 선물! 내가 돈 쓰고 싶다고 했지.”

결국 희찬이 도준의 손에서 쇼핑백을 다시 앗아 들었다. 성격이 느릿느릿한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럴 때마저 신중하게 행동하는 도준이 못내 답답했다.

쇼핑백에서 나온 건 도준에게 잘 맞는 사이즈의 패딩 점퍼였다. 움직일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는 두툼한 패딩은 앞으로 몇 년을 입어도 문제없을 것처럼 보였다. 며칠 전, 패딩을 사 주고 싶다며 징징거리던 희찬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도준은 알 수 없는 감정에 표정을 굳혔다.

“입어 봐, 얼른.”

희찬의 성화에 못 이겨 옷을 입는 중에도 도준의 표정은 도무지 풀리지 않았다. 금세 따뜻한 온도가 꽁꽁 언 도준의 몸을 녹였다.

“역시, 잘 어울려. 너는 진짜 옷 사다 입힐 맛 난다니까.”

“고마워.”

“고맙긴. 뇌물이야, 계속 내 옆에 있으라고.”

“말이라고 하냐. 이런 거 없어도 네 옆에 있을 건데.”

“그치, 이도준 나밖에 모르잖아. 근데 진짜 잘 어울린다. 너는 몸이 예뻐서…….”

희찬은 조잘조잘 제가 느끼는 기쁨을 맘껏 표현했다. 확실히 얼굴이 되고, 마네킹이 되니까 입힐 맛이 난다. 뭘 걸쳐 놓아도 태가 나는 몸매는 어릴 때부터 또래들이 부러워하던 몸이었고, 잘생긴 낯으로 거지 같은 옷까지 소화하는 저 얼굴도 뭇 사람의 부러움을 사곤 했었다. 그러니 안 어울릴 옷도 없다.

희찬은 도준에게서 한 발 떨어져 팔짱을 낀 채로 자신이 꾸며 둔 도준을 샅샅이 살폈다. 다시 봐도 참 잘난 내 애인이다, 싶어 입매가 둥근 포물선을 그렸다.

언젠가 한 번 꼭 도준에게 좋은 옷을 사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 낸 지금, 그 누구도 희찬의 뿌듯함을 따라올 자는 없을 것이다.

“나중에 또 사 줄게.”

“…….”

도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마운 마음이 컸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미안함이 몰려왔다. 쉽게 만질 수 없는 돈을 계약금으로 받고, 자신이 버는 돈과는 차원이 다른 액수의 돈을 버는 희찬 앞에서 괜스레 작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게 마냥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지는 않았다. 도준은 이를 악물고 마음 깊이 다짐을 되새겼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는 말을 믿는다. 노력은 결과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도 믿는다. 그러니까 지금은 이렇게 힘들어도, 꾸준히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 빛 볼 날이 올 거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때는 꼭 희찬이가 갖고 싶어 하는 신발을 왕창 사 주고야 말 테다. 그런 다짐이나 했다.

“내 신발 사 줄 생각했지?”

“귀신이네, 귀신이야.”

“꼭 사 줘. 기다릴게.”

두 사람 모두 긍정적인 성향을 타고난 것은 퍽 다행인 일이었다. 한 치 앞의 날에도 드리운 어둠은 무시하기 어렵고, 퍽퍽한 생활고에 지칠 법도 했지만 두 사람은 참 긍정적이었다.

도준의 긍정적인 면모가 이럴 때 빛을 발한다는 것은 희찬도 잘 아는 바였다. 마냥 움츠러들고, 작아질 도준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비싼 패딩을 사는 데에도 부담이 없었다. 이도준은 이것 또한 계기로 삼고 한 발 더 빠르게 성장할 테다.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른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이도준의 성격은 그랬다. 긍정적이고, 해맑은 데다 성실하기까지 한 이도준은 하고자 하는 것은 꼭 이루어 내는 멋진 사람이었다. 그저 악착같이 사느라, 이 힘겹고 어려운 상황을 한 시라도 빨리 헤쳐 내려 자신의 그런 면을 다 숨기고 지낼 뿐이다.

적어도 평생을 가장 가까이에서 도준을 봐 온 희찬의 판단은 그러했다. 그리고, 그건 도준을 가장 완벽하고 정확하게 파악한 것이었다.

“고마워, 잘 입을게.”

진심이 잔뜩 묻어나는 도준의 말에 희찬이 도준의 머리 위에서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어디 한 번 돌아보라는 듯한 제스처에 도준이 빙글 돌았다.

“그거 입고 어디 갈 거야?”

“일하러……?”

“재미없어.”

희찬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어디 근사한 데 놀러 가자는 말은 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도준의 모습이 원망스러웠다.

도준은 그새 패딩을 벗었다. 가지런히 옷걸이에 걸어 두고 두 팔을 이용해 희찬을 가득 안았다.

“놀러 가고 싶다고?”

“귀신이다, 귀신.”

“끼리끼리가 괜히 끼리끼리야?”

도준이 희찬을 으스러질 듯이 꽉 안았다. 희찬이 고개를 쳐들고 입술을 내밀었다. 도준이 살짝 고개를 비틀어 입술을 맞췄다. 희찬이 만족하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다, 도준의 볼을 양손으로 잡고 진하게 입을 맞췄다.

희찬의 노란 머리가 살랑거렸다. 형광등 빛이 부딪쳐 반짝거리는 머리가 눈부셨다. 도준이 큰 손으로 희찬의 머리를 꾹꾹 누르며 쓰다듬었다.

확실히 검은 머리가 잘 어울리는 장희찬이지만, 예쁜 건 어쩔 수 없다.

“내가 저녁거리도 사 왔어. 앉아, 이거 그냥 바로 먹으면 돼.”

도준의 품에서 벗어난 희찬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도준에게 건네었던 쇼핑백 뒤에 가려져 보지 못했던 작은 쇼핑백에서 갖가지 음식들이 쏟아져 나왔다.

희찬은 오늘 제법 즐거운 쇼핑을 한 모양이다. 활달한 성격을 숨기지 못하고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상을 차리는 희찬의 몸짓에서는 즐거운 기분이 여실히 묻어났다.

상 위에는 이전에 도준이 먹고 싶다고 말했던 스파게티도 놓였다. 뿌듯한 기색을 만면에 피워 낸 희찬이 스파게티를 제 얼굴 옆에 대고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에 도준도 피식, 얕은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은 항상 그랬듯 마주 앉아 수저를 놀렸다. 먹성 좋은 청년들이 음식을 비워 내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금세 바닥을 드러낸 접시를 바라보던 도준이 한숨을 푹 쉬었다.

“하…….”

“웬 한숨?”

희찬이 마지막 스파게티 면발을 쪼롭, 빨아들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도준과 한숨이라니.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너 이제 TV 나오면 세상 사람들이 너 예쁜 거 다 알 텐데, 어떡하지.”

아하, 이도준의 입에서 나온 건 오랜만의 주접이었다.

희찬은 푸흐흐,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두 손바닥의 끝을 가지런히 맞대고 턱을 괬다. 기다랗고 예쁜 손가락을 샤라라, 까딱거리는 모습이 더없이 화사했다.

“왜, 네 애인 인기 많아지면 좋잖아.”

“나보다 더 잘생긴 사람이 장희찬 좋다고 쫓아다니면 어쩌냐……. 진짜 생각만 해도 아찔한데.”

도준이 괜히 입술을 삐죽거렸다. 인기 많은 장희찬이라. 새삼스럽지도 않다. 희찬은 원체 인기가 많았다. 초등학생 때도, 중학생 때도. 하다못해 촬영장에서도 희찬은 끊임없이 시선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니 딱히 새로울 것도 없다.

하지만 그게 방송에 나오는 거면 이제 말이 달라지지.

귀엽게 고개를 까딱거리며 애교를 떠는 희찬의 모습에 도준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희찬을 쳐다봤다. 그에 희찬이 큰 손으로 도준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너보다 잘생긴 사람이 어디 있어.”

“너, 내가 잘생겨서 좋아?”

“당연하지.”

“진짜?”

별안간 도준의 얼굴에 수심이 드리웠다. 세상에, 이런 것에 도준이 상처받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던 희찬이었기에 황당한 목소리를 냈다.

“뭐야, 새삼스럽게 상처받는 거야?”

하지만 도준은 정말로 실망하는 낯을 보였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희찬을 쳐다보는 시선에서 원망이 느껴졌다.

희찬이 부랴부랴 자리에서 일어나 도준의 옆자리에 앉았다. 꼼지락거리는 도준의 거친 손을 거머쥐고, 고개를 꺾어 시선을 맞추자 도준의 눈알이 데구루루 굴러 희찬을 바라봤다.

“장난이지. 왜 상처를 받고 그래?”

“가끔 진심 같아. 나 어쩌다가 얼굴 망가지면, 너 나 안 봐?”

“질투야, 아니면 불안한 거야?”

“둘 다야. 제대로 대답해.”

귀여워 죽겠다. 희찬이 도준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확실히 이도준은 놀리는 맛이 좋다. 진심으로 상처받은 표정이었지만, 그 역시 지독하게 귀엽고 사랑스러워 희찬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 말해 줘야 이도준이 풀릴까.

잠시 머리를 굴렸다. 답을 유추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희찬이 도준의 얼굴을 끌어 제 가슴에 안았다. 끌어당기면 당기는 대로 순순히 따라와 가슴에 콕 박힌 도준의 입체적인 이목구비가 하나하나 생생하게 느껴졌다.

“도준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 하나야. 세상에 둘도 없어.”

“진짜야?”

“너는 둘이야?”

“하나야.”

“그거 누구야.”

“너.”

“그래, 똑같아. 너랑 나는 다른 게 없잖아.”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는 데에는 이유가 없다. 으레 갓 태어난 아이가 부모에게 사랑을 느끼듯, 서로를 사랑하는 것을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그저 제일 처음 의지하게 된 사람이 서로였고, 제일 가까이에서 서로의 편이 되어 준 사람도 서로였다. 당연히 처음 느낀 사랑도 서로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건 희찬도 같았다.

우리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 어떠한 계기도, 과정도 없다. 그저 서로에게 유일한 ‘내 것’이었고, ‘내 사람’이었으며, ‘가족’이자, ‘친구’였고, ‘하나뿐인 연인’이었다. 그리고 그건 서로이기에 기꺼웠다.

두 사람은 그렇게 아가페와 플라토닉이 다채롭게 어우러진 사랑을 했다.

도준이 희찬을 마주 안았다. 처음엔 장난삼아 했던 질투 서린 말인데, 어째 얘기를 하다 보니 진심이 되었다. 자신을 향한 희찬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에 질투라곤 해 본 적도 없는데 불현듯 치민 치기가 부끄러워졌다.

도준은 희찬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로 볼을 비비적거리며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전의 상황은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진짜 웃기다.”

“누가, 네가?”

“응. 처음엔 장난이었거든. 근데 갑자기 진심 됐네.”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한 도준은 희찬의 품에 입술을 뭉개고 웅얼웅얼 목소리를 흘렸다.

희찬은 섬섬옥수 버금가는 예쁜 손가락으로 도준의 턱을 들어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날 사랑하니까?”

“그래, 그런 걸로 하자.”

침대에 누운 희찬은 도준과 함께 같은 영화나 드라마를 촬영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커다란 전광판에 걸린 영화 포스터 하단에 주연 배우로 같이 이름이 적혔으면 좋겠다. 당당하게 공동 주연 타이틀을 걸 것을 생각하면 세상을 다 얻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서로의 성공도 축하할 줄 아는 의젓한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처럼 말이다. 각자에게 잘 어울리는 배역은 양보해 주고, 양보한 배역으로 대박이 나도 기쁜 마음으로 박수를 쳐 주고 싶다. 그렇게 선의의 경쟁을 하며 서로의 성공을 축하하다 지독하게 사랑하는 연인이고 싶다.

희찬이 어느새 잠든 도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우리 꼭 같이 성공하자.”

희찬이 바라는 성공의 조건에는 다른 게 없다. 그저 모두 이도준과 함께이길,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

어느덧 완연한 겨울로 접어들었다. 기승을 부리는 추위는 정도를 모르고 사람을 몰아붙였다. 덕분에 그렇지 않아도 힘들었던 새벽 출근이 더 힘들어졌다. 도준은 도무지 뜨이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고 한숨을 쉬었다.

몸이 무겁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킬 생각도 하지 못한 도준은 제 옆에 누워 곤히 잠든 희찬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사이 노랗게 탈색했던 희찬의 머리가 하얀색으로 변했다. 그간 희찬은 소속사의 권유로 여러 드라마의 오디션을 봤다. 그중에는 사극도 있었고, 청춘 드라마도 있었고, 로맨스 코미디도 있었다.

희찬은 ‘사극을 하게 되면 기껏 예쁘게 염색한 머리를 다시 검은색으로 바꿔야 한다’며 툴툴거리기도 했지만, 얼굴에는 전반적으로 행복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를 보는 도준 역시 즐거운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요즘의 희찬은 아주 용수철을 달고 다니는 것처럼 통통 튀었다. 그게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도준이 희찬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잠결이겠지만, 희찬이 뭉그적대며 도준의 뒤통수를 끌어안고 그 위에 입을 맞추었다.

“너 안 늦었어?”

희찬이 한껏 잠긴 목소리를 냈다. 바깥은 아직 어두컴컴했지만, 첫 마을버스를 타야만 늦지 않고 도착하는 도준을 재촉하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다. 꼼지락, 꼼지락 도준이 희찬의 품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가기 싫다…….”

도준의 투정에 희찬이 얕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오늘 쉬어.”

“너 나 못 쉬는 거 알고 그러지.”

“쉬라고 해도 갈 거면서. 얼른 가, 버스 놓치면 어떡해.”

도준을 안고 부드럽게 어르던 희찬이 손에 힘을 주고 도준을 밀어냈다. 도준도 이번에는 군말 없이 몸을 일으켰다.

희찬의 말대로 시간이 없다. 옷을 편하게 갖춰 입은 후에는 희찬이 사 준 패딩을 둘러 입었다. 그를 지켜보던 희찬이 씨익 웃더니 손을 이불 밖으로 삐죽 내밀었다. 엄지를 치켜든 손이 만족을 머금었다.

“너는 오늘 회사 가?”

“응, 이따가 12시까지.”

“푹 자고, 옷 따뜻하게 입고 가.”

“응, 이따 저녁에 봐.”

희찬이 엄지를 치켜들었던 손을 펴 살랑살랑 흔들었다. 눈도 뜨지 못하는 주제에, 인사는 하겠다고 팔랑거리는 게 또 어찌나 귀여운지 모른다.

도준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을 때는 온통 새하얗게 변한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밤새 내린 눈이 소복하게 쌓인 전경은 마치 요정이 사는 동네 같았다.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은 중에도 가로등 불에 반짝반짝 빛이 나는 눈이 눈부셨다.

도준은 어떠한 자국도 남지 않은 눈 위에 제 발자국을 새겼다. 뽀송뽀송한 눈을 지르밟을 때마다 뿌식, 뿌식, 귀여운 소리가 났다.

어두운 새벽길을 달리는 버스에는 도준이 외에는 다른 사람이 없었다. 따뜻한 버스 안에서 잠들었던 도준이 버스가 서는 것을 느끼고 눈을 떴다.

“도준아, 이따가 집에 올 때는 힘들 수도 있겠다. 올라가야 하는데 눈 얼면 어쩌냐?”

“괜찮습니다, 기사님 오늘도 파이팅 하세요!”

“응, 너도.”

버스에서 내려 얼마간 걷다 보면 차츰차츰 어둠이 걷혔다. 어두웠던 세상에 햇살이 드리우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햇볕이 들어도 추운 것은 다름없었다. 도준은 컨테이너 박스에 있는 옷걸이에 패딩을 걸어 두고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으, 추워.”

형광색의 촌스러운 조끼를 입고, 다 낡은 헬멧을 쓴 후에는 신발 끈을 동여맸다. 컨테이너 박스에서 나와 걸음을 옮기다 보면 도준의 주변으로 중년의 남성들이 몰려들었다.

“하하, 참 부지런해. 잠도 없어?”

“하하, 졸려요.”

일용직 현장에서는 보기 드문 청년이 매일 쉬지 않고 나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은 분명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게다가 군더더기 없는 성격으로 어른들과도 쉽게 어울리는 도준이었으니,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들끓었다.

“참 성실해.”

“하하, 젊은 사람이 그렇게 돈 벌어서 뭐 어디다 쓰려고?”

도준은 아무 말 없이 싱긋 웃었다. 어디다 쓸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저 당장 세워 둔 짧은 계획이라면, 희찬이 드디어 첫 촬영을 시작할 때, 희찬이 갖고 싶다고 했던 신발을 사 주는 것. 그게 다였다.

이윽고 같은 복장을 한 사람들이 한 곳에 어우러졌다. 제일 앞에서 작업반장이 출석을 부르면 사람들이 손을 들어 자신이 왔다는 것을 알리고, 뒤이어 이름에 붙어 배당되는 작업지로 발을 돌렸다.

“이도준.”

제일 마지막에 도준의 이름이 불렸다. 구석에 앉아 자신의 이름을 기다리던 도준이 벌떡 일어나 손을 들었다.

“저 왔어요.”

“하하, 그래. 도준아, 오늘은 사무실에서 나랑 같이 재고 정리하자.”

“어, 저 사무실에서 일해요?”

“원래 하던 사람이 그만뒀는데, 네가 그나마 여기 제일 꾸준히 나왔으니까.”

“아, 네.”

나쁠 것 하나 없는 제안이었다. 무거운 벽돌이나 시멘트를 나르지 않아도 되고, 가파른 계단에 혹시라도 다칠까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 사무실은 히터가 나와 따뜻한 곳이었으니 겨울철 추위에 약한 도준에게는 더없이 좋은 제안이었다.

아르바이트가 구해질 때까지만 잠시 도와달라는 소장의 말에 도준이 고개를 흔쾌히 주억거렸다. 혹시 사무업무라 이전보다 일급이 작아지면 어떡하나, 걱정하던 것도 평소와 같은 일급을 주겠다는 말에 금세 사라졌다.

“이거 여기서 수량 보고, 여기 서류랑 맞는지 확인하면 돼. 아마 일은 오전 중에 끝날 거야.”

“그럼 저 끝나고 집에 가도 돼요?”

“그럼, 할 일 다 했는데 가야지.”

“앗싸.”

“근데 그거 숫자 틀리면 안 되니까 꼼꼼히 봐.”

“걱정하지 마세요.”

도준은 냉큼 어깨에 걸친 촌스러운 조끼를 벗고 희찬이 사 준 패딩을 입었다. 일이 다 끝나면 집으로 가도 좋다는 소장의 말이 도준의 손에 속도를 붙였다. 마우스를 딸깍거리며 파일을 확인하고, 책상에 산더미 같이 쌓인 서류를 들여다보며 숫자를 확인하는 도준의 눈이 바쁘게 굴렀다.

일은 어렵지 않았다. 설명만 들었을 때는 복잡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하고 보니 단순해도 이렇게 단순한 일이 있을 수 없다.

쉬지 않고 바쁘게 일하는 도준의 어깨를 어른의 듬직한 손이 쓰다듬었다.

“옷 벗고 하지? 안 둔해?”

“네, 저 추위를 많이 타서.”

도준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한 손에 자판기 커피를 든 소장이 도준을 즐겁게 바라봤다. 아무래도 저 옷은,

“희찬이가 사 줬어?”

“어떻게 아셨어요?”

그래, 장희찬이 사 준 거겠지.

소장은 속이 훤히 보이는 도준의 순수함이 마냥 귀엽기만 했다.

“너 희찬이가 해 주는 건 다 하고 다니잖아. 그러고 보니까 희찬이 잘된 거 축하도 못 해 줬네. 오늘 가서 맛있는 거 먹어.”

“아, 안 주셔도 괜찮은데.”

소장이 지갑에서 주섬주섬 노란 지폐 몇 장을 꺼내 도준에게 건네었다. 그에 도준이 질색하며 손사래를 쳤다. 사람과 쉽게 어울리는 성격이었지만, 사람들의 대가 없는 호의는 원하지 않는다. 그건 어릴 때부터 보육원에서 자라며, ‘불쌍하다.’라는 이유로 ‘불쌍한 사람을 돕는 멋진 나’에 취한 사람들에게서 받아 온 대가 없는 ‘척’하는 호의에 질린 탓이었다.

소장은 도준의 큰 손을 덥석 잡아 쥐고 가지런한 손바닥 위에 지폐를 얹어 주었다. 벌써 1년 넘게 도준을 봐 온 소장이었기에, 도준의 머릿속에 도사린 생각쯤이야, 굳이 묻지 않아도 뻔히 보였다.

“대가 없는 거 아니야. 희찬이 열심히 일했는데 너희는 일용이라 인센티브도 못 받았잖아. 그간 열심히 일한 대가라고 생각해.”

“감사합니다.”

하지만 어른이 이렇게까지 어르고 들면 이 이상은 거절하기도 어려워지는 법이다. 도준은 허리를 꾸벅 숙여 정중히 감사를 표하고, 소장이 쥐여 준 돈을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나중에 유명해지면 싸인이나 한 장 해 주라고. 너도. 배우로 잘되면 나 잊지 마?”

“아, 당연하죠.”

도준이 환하게 웃으며 어깨로 소장의 팔을 밀었다. 잔망을 떨어 대는 도준은 한없이 행복해 보였다.

잠시간 소장과 노닥거리며 가볍게 웃었던 도준은 다시 일에 집중했다. 금방이라도 모니터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도준의 눈이 이글거렸다.

희찬의 손에는 또 바리바리 쇼핑백이 들렸다. 그건 희찬이 산 것이 아닌, 회사에서 희찬에게 선물로 주는 것이었다. 그 속에는 고가의 옷도 있었고, 신발도 있었지만, 그중 가장 즐거운 것은 희찬의 손에 꼭 쥐어진 계약서였다.

그간 봐 온 오디션 중 제일 주목을 받고 있는 오디션에 합격했다. 그것도 주·조연급의 배역으로 말이다. 희찬은 자신이 걸어온 길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를 느꼈다. 자신이 잘하고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고, 도준 역시 기뻐해 줄 것이라는 생각에 즐거웠다.

방글방글 예쁘게 웃는 희찬의 머리를 두툼한 손이 쓰다듬었다.

“희찬이는 대본 나오는 대로 매니저 통해서 대본 보내 줄 테니까, 푹 쉬어. 너 촬영 들어가면 이제 못 쉰다?”

“네! 감사합니다!”

“네가 잘해서 딴 건데, 뭘. 들어갈 때 어떻게 갈 거야? 매니저 불러 줘?”

“아니에요, 버스 타고 갈게요.”

“그래, 조심히 들어가고. 휴대폰 끄지 말고 연락받아. 금방 연락 할게.”

“네!”

희찬은 얼른 사무실에서 벗어났다. 이럴 때면 꼭 텔레포트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었다. 단숨에 집으로 달려가 도준이를 부둥켜안고 제가 겪은 행복을 조금의 부족함도 없이 그대로 전하고 싶은 탓이었다.

집에 돌아오기 무섭게 희찬은 도준을 앉혀 두고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를 했다. 드라마가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도준의 낯이 환하게 피는 것이 환상적이었다. 뒤이어 드라마가 방영될 때는 광고도 촬영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자 도준이 제 일처럼 방방 뛰었다.

“대박이지?”

“완전! 너 진짜 잘됐다!”

“나 진짜 행복해.”

“나도 너무 행복해. 희찬아, 진짜 축하해. 어떡하지? 뭐 어떻게 축하해 주지?”

도준은 이름만 대면 모조리 아는 대형 소속사에서 갓 데뷔하는 신인을 이렇게까지 잘 챙겨 준다는 사실이 못내 행복했다. 혹시 대형 소속사라고 이것저것 불합리한 조건을 붙여 희찬을 괴롭히면 어떡하나 걱정했던 것도 다 사라졌다.

도준은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까지 하며 주체할 수 없는 감동에 희찬을 부둥켜안고 이리저리 몸을 흔들었다. 가슴이 간질거리는 이 기분을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다.

도준이 희찬의 볼을 부여잡고 진한 입맞춤을 했다. 입술을 떼어도 희찬은 입술을 쭉 내민 채로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또 해 줘?”

“응, 또 해 줘.”

희찬의 요구에 도준이 한 번 더 뽀뽀했다.

행복에 부푼 도준의 검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저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은 도준의 낯을 보는 것은 희찬에게도 큰 행복이었다.

“갖고 싶은 거 있어?”

도준은 희찬에게 커다란 선물을 주고 싶었다. 드라마가 확정된 오늘, 광고 소식까지 가져온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어든 선물해 주고 싶었다. 그에 희찬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여 예쁘게 웃었다.

“아니, 그거 말고.”

“응?”

“노래 불러 줘, 도준아.”

어렵지 않지. 지금이라면 발가벗고 동네를 누비라고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희찬의 요구에 도준이 목청을 가다듬었다. 무슨 노래가 좋을까, 고민하는 눈동자가 요리조리 바쁘게 굴렀다. 이내 노래를 정한 도준이 희찬을 향해 곧은 눈을 보였다. 사뭇 진지한 눈에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크기의 사랑이 느껴졌다.

도준이 전하는 희망찬 가사에 밝은 노랫말이 희찬의 가슴에 커다란 감동을 안겼다.

금세 울망거리는 눈으로 도준의 볼을 거머쥔 희찬이 울먹거렸다. 짧은 노랫말을 들었을 뿐인데 그간 어렵게 지냈던 일들이 눈앞에 스쳐 지나가듯 펼쳐졌다.

뒤이어 노래를 부르는 도준의 목소리에 희찬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전의 가사가 도준이 희찬에게 힘이라는 것을 말했다면, 이번엔 희찬도 도준에게 힘이라고 힘주어 전하는 노래가 기어코 희찬을 울렸다.

희찬의 무릎 위로 뚝, 뚝 투명한 눈물이 떨어졌다. 그런 희찬을 도준이 한 품 가득 안고 포근하게 보듬었다.

흔하디흔한, ‘함께라면 뭐든 할 수 있다.’라는 내용의 가사였지만, 역시 우리여서 크게 느끼는 것일 테다. 도준은 아무 말 없이 희찬을 달랬다. 굳이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손짓으로도 가뿐히 전할 수 있는 마음이었고, 그 마음의 크기는 두 사람의 것이 같았으니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수고했다, 고생했다. 이제 다 잘될 거고, 네가 먼저 간 길을 나도 곧 가겠다.

그런 말도 다 필요 없었다.

두 사람 앞에 밝은 빛이 드리웠다. 가야 할 길이 어디라고 정확하게 알려 주는 이정표처럼, 어둡기만 했던 삶의 곳곳에 따뜻한 볕이 들었다. 두 사람을 비추는 밝은 빛은 한없이 친절하고, 다정했다.

*

희찬의 드라마 촬영이 시작되었다. 새벽 일찍 스케줄에 맞춰 집에서 나갔다가, 밤을 새우고 들어오는 일이 허다한 스케줄에 희찬은 집에 와서도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그런 희찬의 옆에서 도준은 그의 손과 발이 되어 희찬을 도왔다. 하다못해 씻고, 밥 먹는 것까지도 말이다.

오늘도 희찬은 도준의 손에 제 몸을 맡겼다. 쏟아지는 졸음을 이겨 낼 기력이 없었다. 발가벗은 몸 위로 차가운 물이 와락 쏟아졌지만, 고개는 자꾸만 나자빠졌다. 그리고 그게 그렇게 속상했다.

촬영장에서 있었던 일을 공유하고, 연기 팁을 알려 주는 것은 일상의 가장 소중한 부분 중 하나였다.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스케줄로 피곤에 절어 그조차 할 수 없는 현실에 희찬이 도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었다.

“너한테 말해 주고 싶은 거 진짜 많은데…….”

“천천히 해도 돼, 너 피곤해 보여.”

희찬은 침대에 누워서도 줄곧 아쉬운 목소리를 냈다. 도준이 희찬의 가지런한 몸에 얇은 홑이불 대신 두툼한 오리털 이불을 덮어 주었다.

도준은 얼마 전, 공사장 소장님이 희찬이의 성공을 축하하며 건넨 돈으로 두툼한 겨울 이불을 샀다. 그건 촬영 중에는 호텔에서 지내다 집으로 돌아오는 희찬이 집에서도 편하게 잘 수 있길 바라는 도준의 극진한 사랑이었다.

희찬의 눈이 느릿하게 끔뻑거렸다. 포근한 이불에 몸을 묻으니 절로 잠이 몰려왔다. 게다가 정성스럽게 가슴을 토닥거리는 도준의 손이라니. 이는 더 없이 잠들기 좋은 조건이었다.

“그래도 이번 주까지만 바짝 촬영하면 당분간은 회차 없어.”

“그래?”

희찬이 출연하는 드라마는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교사와 학생들이 1년을 보내며 고군분투하는 얘기였다. 비중 있는 역 중, 일명 ‘양아치’로 출연하는 희찬은 학창 시절의 혈기를 있는 그대로 뽐내는 듯했다.

도준도 천천히 몸을 뉘었다. 마치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깝다는 것처럼,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 웅얼웅얼 말을 해 보려는 희찬의 눈 위에 도준이 손을 얹었다. 눈을 토닥토닥 두드리자 희찬의 말이 점점 느려졌다.

“응……. 주인공들 해외 촬영가거든.”

“너는 안 가고?”

“나는 한국에 있는 역할이야.”

애써 밝게, 그리고 또렷하게 말하려는 희찬의 모습이 마냥 귀여웠다. 어떻게든 같이 시간을 보내려 노력하는 희찬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의 행동에 사랑이 담긴 것은 분명했으니 말이다.

겨우겨우 눈을 뜬 희찬이 도준의 볼에 손을 얹었다. 말랑한 볼의 촉감이 좋아 두어 번 조몰락거렸다. 한참 도준의 볼을 주무르던 희찬의 손이 도준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쇼핑백을 가리켰다. 그에 도준의 시선도 희찬의 손가락을 좇아 뒤로 향했다.

“나 너랑 같이 집 꾸미려고 저것도 사 왔는데.”

도준이 피식 웃었다. 저 쇼핑백에는 며칠 전, 성큼 다가온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기 위해 희찬이 바리바리 사 온 각종 장식품이 들어 있다. 도준은 쇼핑백을 뒤집어 오만 것을 와르르 쏟아 내던 희찬을 떠올렸다. 어찌나 해맑았는지, 어이없는 것도 잊고 같이 웃어 버렸더랬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도준은 다시 시선을 돌려 희찬을 마주하고, 눈을 매섭게 떴다.

“장희찬, 돈 막 쓰지 마.”

도준의 손이 아프게 희찬의 코를 틀어쥐었다. 희찬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고개를 저어도 도준은 그 손을 풀어 주지 않았다.

“올해는 너 기분 좋으니까 봐주는데, 진짜 저런 거 사 오지 마.”

“안 그런 척해도 다 소용없거든. 너 크리스마스 좋아하는 거 다 알거든.”

이번엔 희찬이 도준의 코를 비틀었다. 우뚝 솟은 콧날이 빨갛게 물들 정도로 세게 쥐었지만, 도준은 인상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가늘게 뜨고 희찬을 흘겨볼 뿐이었다.

“안 좋아해.”

“이 거짓말쟁이야. 좋아하는 것도 좀 하고 살아. 너무 팍팍하게 살지 마, 도준아.”

갑자기 쫓아오는 진심 어린 말에 할 말이 없어졌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 도준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었다.

쇼핑백에서 아무렇게나 쏟아진 갖가지 장식품들은 그저 그런 장식품이 아니었다. 그건 도준과 함께 즐겁게 지내고 싶어 하는 희찬의 마음이었다. 도준은 그 마음을 그저 ‘돈 아까운 것’으로 치부한 자신이 문득 미워졌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래도 보육원에서 지낼 때는 가진 것에 만족하며 즐거워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사회로 나온 후에는 한시라도 빨리, 조금이라도 더 나은 곳에서 지내기 위해 그저 ‘팍팍하게’ 살아온 것 같다. 그게 또 미안해졌다.

도준이 희찬을 품에 안고 고개를 파묻었다.

평생을 함께, 어렵게만 지내 왔으니 도준의 입장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희찬은 그가 어릴 때의 천진함과 특유의 긍정적인 마음을 잃지 않길 바랐다. 그리고 말 그대로 욕심도 좀 내면서 살아가길 바랐다. 희찬은 낮은 웃음소리를 내며 도준의 뒤통수를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뭐든 천천히 해도 되니까, 조급해하지 말자, 도준아.”

“응.”

“왜, 걷다 보면 수월한 길이 나올 때도 있고, 좀 벅찬 길이 나올 때도 있잖아. 근데 그냥, 항상 걷던 대로 성실하게 열심히 걷다 보면 언젠가는 꼭 우리가 원하는 지점에 다다르잖아. 너무 빨리 가면 지금 볼 수 있는 건 못 봐.”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행복을 짚어 내는 희찬의 말에 도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의 행복은 지금만 누릴 수 있다고, 낮은 목소리로 강조하는 희찬이 고마웠다.

도준이 희찬의 가슴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피식, 얕게 터지는 희찬의 숨이 도준의 정수리에 닿았다. 그게 또 좋았다. 도준이 희찬의 다리 사이에 제 다리를 밀어 넣어 희찬을 옭아맸다.

“응, 그러자. 같이 걸어. 나 혼자 두고 가지 마, 장희찬.”

“너나 도망가지 마라.”

도준은 오랜만에 만났으니만큼, 대화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도준이 일부러 어린아이 같은 말을 하며 장난으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덕분에 자칫 무거워질 뻔했던 대화가 웃음으로 끝났다.

“근데, 찬아.”

희찬을 부르는 도준의 목소리가 부드럽다. 희찬은 잠이 다 달아난 또렷한 눈으로 도준을 쳐다봤다.

“응?”

“잠 깼지.”

“…….”

확신에 찬 도준의 말을 듣는 희찬의 머릿속에 스치는 것이 있다. 같이 저녁을 먹고, 아무렇게나 내버려 둔 설거짓거리들 말이다. 희찬이 대답 없이 눈을 굴렸다.

설마, 이 와중에, 이 분위기에 설거지나 하라고 하겠어?

난감한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가서 설거지하고 와.”

하지만 역시는 역시, 도준은 정확하게 설거지를 짚었다.

희찬이 인상을 찌푸렸다.

“야, 너는 이 와중에.”

“이 와중이 어떤 와중인데. 설거지해. 설거지는 네가 하는 거잖아.”

“나 일하고 왔는데?”

“나도 일하고 왔어. 얼른.”

도준이 희찬의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희찬을 일으켰다. 아무튼, 이상한 데서 양보하지 않는 도준은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질 수가 없다.

희찬이 터벅터벅 힘없는 걸음을 옮겨 싱크대 앞에 섰다. 도준은 희찬이 편하게 설거지를 할 수 있도록 집 안의 불을 훤히 밝혔다.

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는데. 그냥 잠들어 버릴 것을 괜히 쫑알쫑알 얘기하다가 잠이 다 깨버렸다.

툴툴거리는 희찬의 뒷모습에서 그가 느끼는 불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도준은 비죽비죽 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한참이나 희찬의 모습을 지켜봤다.

이내 희찬이 휙 몸을 돌려 도준과 마주했다. 표정은 여전히 뾰로통한 채였다.

“다 했어?”

“다 했다, 안아 줘라.”

“수고했어.”

뾰로통한 목소리를 내는 희찬은 언제 봐도 귀엽다. 도준이 흔쾌히 제 품을 열어 희찬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희찬은 주저하지 않고 도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퍽,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안기는 희찬 덕분에 도준의 몸이 일순 휘청거렸다.

키도 비슷하고, 덩치도 비슷한 두 사람의 몸이 퍼즐처럼 딱 들어맞았다. 희찬이 살짝 고개를 들어 도준을 바라봤다. 눈높이가 얼마 차이 나지 않는 데도, 이상하게 도준에게 안겨 있을 때면 꼭 올려 보게 되었다. 희찬이 도준의 허리를 단단하게 붙들었던 손을 내려 엉덩이를 조몰락거리자 도준이 여유롭게 웃었다.

“이제 진짜 잘까?”

“응, 나 내일도 새벽에 나가야 해.”

몇 발짝 걷지 않는 동안에도 희찬은 자신의 스케줄을 알리며 지친 목소리를 냈다. 그에 도준이 얼른 희찬을 끌어다 침대에 눕혔다.

“재워 줄게, 자자.”

“네, 여보.”

“그거 하지 마, 좀 꼴려.”

“응, 자기야.”

“하지 말라니까.”

도준이 희찬과 맞붙였던 하반신을 뒤로 쭉 빼고 누웠다. 희찬이 장난스레 도준에게 몸을 붙였다. 마주 보고 누운 두 사람 사이에 불편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몽둥이도 아니고, 텀블러도 아니고, 이게.

희찬이 얄궂게 웃으며 도준의 볼을 꼬집었다. 도준은 붉어진 얼굴을 희찬의 품에 묻고 애써 얼굴을 감추었다.

희찬은 다시 촬영장으로 돌아갔다. 이번엔 중간에 돌아오지 않고 오래간 호텔에 머물며 휴가 아닌 휴가 전까지 촬영에 집중한다고 했다.

덕분에 도준은 제법 오랜 시간을 홀로 보냈다. 그건 한가로운 와중에 문득 쓸쓸해지는 이상한 기분을 안겼다. 말수가 적어 평소에도 먼저 말을 꺼내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희찬이 없다고 생각해서일까. 이상하게 무슨 말이든 하고 싶은 매일이었다.

몹시 따분하고, 지루하고, 심심하기 그지없는 매일을 보내는 중이라는 말이다.

“10시다.”

도준은 희찬이 없는 날에는 매일 밤 10시를 기다렸다. 그리고 10시가 되기 무섭게 돈통에서 동전 몇 개를 챙겼다. 10시는 유일하게 희찬과 통화가 가능한 시간이었고, 도준은 그 시간을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도준은 추운 것도 모르고 언덕길을 내달렸다. 휴대폰이 없는 탓에 공중전화까지 가야 하는 길이 마냥 멀게만 느껴졌다. 공중전화 앞에 다다라서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숨을 헐떡이며 전화를 했다가는 ‘위험한데 또 뛰었다’며 잔소리를 들을 것이 뻔했으므로, 열심히 숨을 가다듬었다. 하루에 한 번, 쉽게 할 수 없는 통화인데 그깟 잔소리에 시간을 허비하기는 싫었다.

동전을 밀어 넣고, 숫자 버튼 하나하나를 정성 들여 눌렀다. 차가운 철제 버튼에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손끝이 어는 것 같았지만, 도준은 그저 헤실헤실 웃을 뿐이었다.

신호가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다. 벌써 이틀째 희찬과 통화하지 못했다. 시간이 엇갈리는 건지, 허탕 치는 일이 잦아지니 도준은 속이 상했다.

도준이 발을 동동 굴렀다. 이대로 시간이 흘러 오늘 밤에도 통화 못 하면 어떡하지, 그런 걱정이 도사렸다. 내일이면 다시 집으로 돌아올 희찬이었지만, 도준은 그저 희찬의 목소리가 간절했다.

― 어, 도준아!

이윽고 희찬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렸다. 밝은 목소리를 들으니 도준의 마음 가득 도사렸던 조급함이 모두 사라졌다.

“아, 장희찬 목소리 진짜 듣고 싶었어.”

― 잘 지냈어? 아픈 데는 없지? 밥은 잘 먹어? 뭐 하고 지내, 일은 잘하고 있어? 추운데, 보일러 틀고 지내지?

“하하, 뭐가 그렇게 급해. 하나씩 물어.”

한껏 여유를 찾은 도준과 달리 희찬의 목소리에서 다급함이 묻어났다. 지난 이틀, 통화하지 못한 것에 대해 불안했던 것은 희찬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게 어찌 그리 좋은지.

마음을 뭉근하게 울리는 안도에 도준이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수화기를 쥐었다.

“나 잘 지내고, 아픈 데 없고, 밥도 잘 먹어. 일하면서 지내고 있고, 보일러도 틀고 있어.”

― 그래도 착실하게 대답은 잘하네.

“너는, 지낼 만해? 호텔은 어때. 촬영장에서 감독님은 괜찮아? 저번에 너 싫어하는 거 같다던 선배는?”

희찬의 일거수일투족이 걱정되고, 궁금한 것은 도준도 마찬가지다. 희찬을 저지했던 것과 달리 도준도 이것저것 한꺼번에 수많은 양의 질문을 쏟아 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웃음이 동시에 터졌다. 떨어져 지내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우리이니만큼, 상대의 생활이 하나하나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역시 변하지 않는 마음을 일깨우는 것 같아 뭉근한 감동으로 닿았다.

― 하하, 너야말로 하나씩 물어. 나 다 괜찮아, 잘 지내고 있고, 선배는 아직 그대로이긴 한데 괜찮아.

“계속 괴롭혀? 내가 갈까?”

― 아서라, 너 오는 거 진짜 무섭거든? 이도준 성격 뒤집어지잖아. 안 돼, 내 앞길 다 막으려고.

장난스레 위협적으로 말을 했던 도준이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의 모든 면을 알아도 너무 잘 아는 희찬의 말이 쑥스럽다.

문득 혈기 왕성하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10대의 도준과 희찬은 무엇이 그렇게 불만이고, 어쩜 그렇게 겁이 없었는지,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닥치는 대로 들이받았더랬다.

그래서 고등학교에도 진학하지 않았다. 중학교 3학년도 겨우겨우 마쳤는데, 무슨 고등학교냐며 철없이 웃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도 도준은 희찬의 말이라면 모두 함께했다. ‘고등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먼저 선언한 희찬을 뒤이어 도준도 곧장 그와 뜻을 같이했으니 말이다.

소소한 웃음소리가 오갔다. 조금만 수가 틀려도 곧장 딴죽을 걸고넘어졌던 어린 시절의 치기가 떠오르니 자연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그때는 참 어리고, 어설프고, 서툴렀다.

하지만 도준에게는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어쨌든 이도준은 장희찬이 하는 건 뭐든 함께할 거였고, 하기 싫다는 건 같이 하지 않을 참이니 말이다.

“보고 싶어, 희찬아.”

― …….

“끊었어?”

― 아니, 안 끊었어. 나 오늘 촬영 끝나고 바로 올라갈게.

“안 그래도 돼. 자고 와. 벌써 10시잖아.”

도준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내며, 전화기 선을 빙글빙글 꼬아 쥐었다. 촬영이 끝나고 온다는 것은 아직도 촬영이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고, 그럼 또 새벽 늦게 촬영이 끝날 텐데 부랴부랴 올라오는 일정은 희찬에게 무리인 듯싶었다.

― 내일은 크리스마스이브고, 그다음 날은 네 생일이잖아. 우리 같이 보내자. 나도 너 보고 싶어.

“그래도 자고 올라와. 내가 내일 장 봐서 맛있는 거 해 줄게. 푹 자고 와. 와서 피곤하다고 누워 있지 말고.”

하여튼 이도준 고집은.

수화기 너머에서 희찬의 불퉁한 심통이 건너왔다. 그래도 도준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몇 번의 실랑이 후에는 결국 도준이 이겼다.

고작 몇 분 통화를 한 것 같지도 않은데 수화기에서 삐, 삐 소리가 들렸다. 깜빡거리는 빨간 등이 통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렸다. 주머니를 뒤적거렸으나, 남은 동전도 없었다. 도준은 아쉬운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쓴 침을 삼켰다.

― 이제 끊을 때 됐지?

“응…….”

― 잘 자, 우리 내일 만나자.

“응, 너도 잘 자. 어두운 거 무서우면 불 켜고 자고, 무슨 노래라도 좀 틀어 놓든지 아니면 매니저 형한테…….”

뚜, 뚜-.

이것저것, 따뜻한 인사를 나누려 했는데, 매정한 공중전화는 도준의 시간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말을 끝내기도 전에 끊긴 전화에 도준이 퍽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희찬이 집에 올 때마다 조는 것은, 혹시 호텔에서는 제대로 자지 못해서 그러는 건 아닐까, 걱정되었다. 다른 사람 눈치 보느라, 어두운 방구석에서 떨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런 걱정들 말이다.

도준은 가슴이 부풀 정도로 큰 숨을 들이켰다가, 길게 내뿜었다. 희찬이 돌아오기 전에 장을 보고, 오자마자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요리해야 한다는 계획이 생기니 간만에 생기가 돌았다.

뭘 해 주는 게 좋을까. 차라리 사다 먹일까. 희찬이가 좋아하는 메뉴를 고르고, 그에 대한 음식 재료를 생각하는 도준의 입꼬리가 둥글게 말려 올라갔다.

내일이면 드디어 장희찬이 돌아온다.

희찬과의 재회를 코앞에 둔 도준의 심장이 콩닥콩닥 수줍게 뛰었다. 4시에 온다면, 3시부터 설렐 거라던 동화 ‘어린 왕자’ 속 누군가의 말처럼, 내일 희찬이 올 것을 생각하니 오늘 밤부터 설레어 쉽게 잘 수 없을 것 같다.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도준의 걸음이 가볍다. 도준은 내리막을 내달리던 걸음보다 훨씬 가뿐하게 언덕을 올랐다.

도준은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하는 대신, 집 안 곳곳을 예쁘게 꾸몄다. 희찬이 사 둔 장식품들을 정성껏 달아 놓으니 적적했던 집이 퍽 포근해졌다.

빨갛고, 파란 장식들 틈틈이 박힌 전구가 깜빡깜빡 빛을 냈다. 식탁 위에 올려 둔 오르골에서 맑고 청아한 캐럴이 흘러나왔다.

공기 중에 흐르는 캐럴은 괜히 사람 마음을 간질이는 재주가 있다. 캐럴의 선율을 따라 까딱, 까딱 고갯짓을 하던 도준의 기분도 금세 둥둥 떠다녔다.

[너 크리스마스 좋아하는 거 다 알거든.]

희찬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귓가에 닿았다. 도준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맞다, 크리스마스를 좋아한다.

생일이 크리스마스였던 덕분에, 보육원에서 유일하게 생일을 축하받았다. 한 기업의 후원으로 매년 크리스마스에는 풍성한 선물이 들어오곤 했었다. 그 나이대에 꼭 필요한 물건으로 한가득 들어오는 그 선물들은 꼭 저를 위한 선물만 같았다.

당연히 크리스마스가 싫을 이유도 없다. 연말의 푸근한 분위기는 꽁꽁 얼어붙은 마음도 녹였고, 어려운 형편에도 괜히 다른 사람을 돌아보며 도울 것은 없나 찾게 했다.

“장희찬은 모르는 게 없어.”

도준은 캐럴을 들으며 빨갛고, 노랗고, 파란 불빛이 돌아가며 깜빡거리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머릿속을 복잡하게 메우던 생각을 비워 내고 아무 생각 없이 지켜보며 시간을 보내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러다 보니 시간도 훌쩍 흘렀다. 피곤할 겨를도 없었다. 금세 해가 떴고, 희찬을 만날 시간이 다가왔다.

창밖이 훤해진 것을 느낀 도준이 시계를 쳐다봤다. 조금 있으면 마을 아래에 있는 대형 마트가 오픈할 시간이었다.

도준은 혼자 모아 둔 돈이 든 박스를 열었다.

지난여름, 기분이나 내자고 갔던 백화점에서 희찬이 갖고 싶다며 탐냈던 신발은 대략 120만 원대였다. 남들에게는 어떻게 닿는 금액인지 모르겠으나, 도준이나 희찬에게는 상상도 못 할 가격대의 신발이었다. 하지만 물욕 없는 장희찬이 그렇게까지 눈을 반짝였다면, 도준에게도 말이 달라진다.

그날부터 도준이 용돈과 보너스를 아끼고 아껴서 모아 둔 돈이 어느새 92만 원이었다. 도준은 그중 10만 원을 꺼내 쥐었다.

“그래도 겨우내 일하면…….”

매일 일당을 받아 차곡차곡 모으면 봄이 오기 전에는 희찬과 잘 어울리는, 신상 신발을 사 줄 수 있을 것 같다.

시즌이 바뀔 때 120만 원대였으니, 신상으로 사 주려면 아마 돈은 조금 더 필요하지 않을까, 까지 계산하여 생각한 시일이었다.

열 손가락을 접어 가며 계산하던 도준이 몰려오는 뿌듯함에 즐겁게 웃었다. 한없이 기다렸던 ‘그날’이 도래할 날이 머지않았다. 갖고 싶었던 신발을 품에 안고 방방거릴 희찬의 모습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행복을 안겼다.

먹고 싶은 것을 참고, 갖고 싶은 것을 눈으로만 보며 어렵게 모은 돈이었지만, 희찬에게 한 번에 나간다는 것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도준은 뿌듯함에 사로잡혀 행복한 미소를 띠었다.

<3권에 계속>

눈부신 항해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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