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항해 3권
06. 서툰 항해 (2)
도준은 대형 마트를 온통 휘젓고 다니며, 평소와 달리, 오늘은 먹고 싶은 것을 모두 담았다. 다른 날도 아닌 크리스마스이브였고, 희찬이 오랜만에 집에 돌아오는 날이다. 이럴 때가 아니면 먹고 싶은 걸 언제 원 없이 먹겠냐는 말이다.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는 것조차 힘들지 않았다. 양 손등에 서슬 퍼런 핏줄이 불룩 솟을 정도로 무거운 비닐봉지들이었는데도, 기대되는 즐거운 시간에 그저 웃음만 나왔다.
“도준아, 희찬이 6시쯤 도착한대.”
“어, 연락 왔어요?”
“응, 너 휴대폰 좀 사라! 희찬이 맨날 슈퍼로 전화하잖아.”
“하하, 곧 살게요. 감사합니다!”
한 발, 한 발 정성스레 발을 놀리던 도준을 친절한 목소리가 붙잡았다. 휴대폰이 없는 탓에 도준이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희찬은 도준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희찬은 도준에게 전할 소식이 있을 때면 꼭 슈퍼 아주머니께 전화를 걸어 자신의 말을 남겼다. 흡연자인 도준이 담배를 사기 위해 이틀에 한 번은 슈퍼에 들를 것을 잘 아는 행동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몇 시쯤 도착하는지 궁금했던 차였는데, 제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의 일정을 알려 둔 희찬 덕분에 도준의 걸음이 더욱 바빠졌다.
“읏차.”
양손에 들린 묵직한 비닐봉지를 내려놓은 도준이 허리를 펴고 탄식을 터뜨렸다.
이제는 정말 미적거릴 시간이 없다. 희찬이 오기 전에 청소도 해야 했고, 밀린 빨래도 해야 했으며, 덜 꾸민 집 안 곳곳도 완벽하게 꾸며야 했다.
도준은 곧장 소매를 걷어붙였다. 평소에 질리도록 먹었던 달걀과 소시지는 냉장고 제일 안쪽으로 밀어 넣고, 사 온 재료들을 차곡차곡 쌓아 넣었다. 닫히지 않는 냉장고 문을 억지로 닫은 뒤, 책장 한편에 있는 레시피 책을 꺼냈다.
아무래도 서양 기념일이니, 양식을 먹는 게 좋겠지.
“리조또랑…….”
요리책을 넘기고 넘겨 양식 페이지를 봤다. 대체로 알 수 없는 메뉴들이 줄줄이 이어지는 것 중에 자신이 사 온 재료로 만들 수 있는 메뉴를 고르는 도준의 손이 거침없다. 메뉴를 정하고, 야채를 씻고, 재료를 손질하는 손길 역시 조금의 주저함도 묻어나지 않았다.
청소와 빨래, 요리를 마친 도준이 식탁 앞에 앉아 다리를 달랑거리며 희찬을 기다렸다. 희찬이 말한 6시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괜한 설렘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드디어 시침이 6시를 가리켰다. 도준은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아, 언제 와.”
고작 2분 지났다. 하지만 도준에게는 그 2분조차 억겁의 시간처럼 길었다. 도준의 발이 동동 굴렀다. 시간이 늦으면 늦어질수록, 마음이 조급해졌다.
희찬이 올 거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지만, 그래서 더 기다려졌다. 차라리 시간을 몰랐으면 덜 기다렸을까. 아까와는 전혀 다른 생각이 변덕을 안겼다.
이윽고 철문이 철컹 열렸다. 끼익, 요란한 소리가 나는 것에 고개를 돌렸던 도준은 해사한 희찬의 모습에 벌떡 일어나 한달음에 현관으로 달려갔다.
“나 왔지!”
“보고 싶었어!”
“나도, 나도 엄청 보고 싶었어.”
오랜만에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분주하게 입을 맞추는가 하면, 얼굴을 쥐고 그간 보지 못한 서로의 얼굴을 열심히 눈에 담았다.
도준은 한참이나 애정 행각을 벌인 후에야 뒤늦게 희찬의 차가운 온도를 느꼈다. 바깥이 춥다는 것을 떠올린 도준이 부리나케 희찬의 손을 끌어 집 안으로 들였다.
“뭐야, 집 다 꾸몄네? 같이하려고 했는데!”
희찬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스케줄에 갈 때까지만 해도 삭막했던 집인데, 오색 빛이 찬란한 집이 연말의 푸근한 분위기를 품은 것이 기분 좋았다.
“나 잘 꾸몄지? 너 이렇게 하려던 거 맞지?”
“응. 생각한 그대로야. 수고했네, 이도준.”
“예쁘더라. 어떻게 딱 예쁜 것만 골라서 사 왔어?”
“내가 또 안목이 있잖아.”
온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뱀이 허물 벗듯, 옷을 한 겹 한 겹 벗어 내던 희찬의 눈이 식탁 위에 닿았다. 먹음직스럽게 차린 음식들이 하나같이 다채로운 색을 뽐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아 허기지던 중이었던지라, 절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희찬이 저를 부둥켜안고 집요하게 입을 맞추는 도준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밀었다. 도준의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희찬이 또렷한 눈을 뜨고 도준과 마주했다.
“이거 다 네가 한 거야?”
“응. 맛있겠지?”
“완전! 너 돈 많이 썼겠는데? 이거 안 비쌌어?”
“장희찬 오는데 이 정도쯤이야.”
도준의 가지런한 얼굴 가득 피어난 뿌듯함이 희찬에게도 닿았다. 오랜 시간 혼자 고군분투했을 도준이 기특하다. 희찬이 손을 들어 도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에서 따뜻한 격려와 애정이 잔뜩 묻어났다.
희찬은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도준의 품에서 벗어났다. 저벅저벅 바쁜 걸음을 놀리더니 현관 앞에 둔 짐 더미를 뒤적거렸다. 찾는 게 있는지 한참 아래로 팔을 뻗었던 희찬이 끙끙거리며 꺼낸 것은.
“도준아, 이것도 봐. 짜잔!”
케이크였다.
도준의 생일을 잊지 않고 축하하려는 마음이 가득 담긴 것은 도준이 좋아하는 생크림 케이크였다. 도준의 눈이 크게 뜨였다. 놀란 듯했던 표정이 이내 부드럽게 휘어지며 감동을 머금었다.
보육원에서 나와 단둘이 지내기 시작하면서, 생일에 제대로 케이크를 먹어 본 기억이 없다. 생일날 사고로 부모를 잃은 희찬은 제 생일 챙기기를 지독하게 싫어했고, 도준의 생일은 하필이면 전 세계가 기념하는 크리스마스라 케이크 구하기가 어려웠다.
“야, 크리스마스라서 케이크 사기 힘들었을 텐데.”
도준이 뭉근한 감동을 머금은 채로 희찬을 끌어안았다. 도준의 반응이 마음에 드는지, 희찬도 빙긋 웃으며 도준을 마주 안았다.
“맛있겠지? 밥 다 먹고 이거 케이크 불자. 딱 12시 맞춰서 불까?”
“좋아.”
도준은 두 개의 접시를 각 자리에 놓았다. 그리고 양옆에 숟가락과 나이프, 포크를 뒀다. 이어서 손잡이가 없는 컵을 꺼내더니 젓가락을 담았다. 그건 마치 필요하면 꺼내 쓰라는 것 같았다.
한참 분주하게 움직이던 도준이 의자를 드륵, 끌어 뺐다. 그러더니 앉으라는 것처럼, 매너 좋은 모양새를 보였다.
아, 이도준은 레스토랑 흉내를 낼 모양이다.
숙련된 서비스직 종사자를 따라 하는 도준의 행동에 희찬이 짓궂게 눈을 뜨고 도준을 쳐다봤다.
이럴 때의 이도준은 제법 뻔뻔하다. 민망할 거 하나 없다는 듯, 하얀 수건을 냅킨처럼 팔에 두르고 고급 레스토랑의 웨이터처럼 행동하는 도준의 모습 하나하나가 그저 웃겼다.
“오늘 메인 디쉬는 뭔가요?”
희찬은 도준의 장단에 어울려 주기로 했다. 새침하게 눈을 뜨고 도준을 바라보며, 드라마에 나오는 부잣집 도련님 행세를 했다. 그에 도준이 입술을 말아 물고 웃음을 참았다. 하여튼 끼리끼리라는 게 괜히 나오는 말은 아니다.
“해물 크림 리조또가 준비되어 있고요. 에피타이저로 머쉬룸 수프 준비했습니다. 혹시 알레르기 있으신가요?”
“아뇨, 없습니다.”
“역시 막 자라서 아무거나 잘 드시네요.”
“아니, 지금 막말하시는 건가요? 여기 서비스가 영 별로네요?”
“뭐 도긴개긴 아니겠습니까? 좀 식었는데 그냥 드세요.”
진짜 헛웃음이 다 나온다.
희찬의 앞에 양송이버섯이 동동 뜬 수프가 차려졌다. 도준의 말대로 그릇은 뜨겁지 않았다. 희찬은 군말 없이 한 숟갈 맛있게 떠먹었다.
이도준은 요리에 퍽 재능이 있다. 생각보다 훨씬 맛이 좋아 희찬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준을 바라봤다. 그 눈에서는 ‘네가 어떻게 이런 맛을 내냐.’라는 말이 읽히는 것 같았다.
“아, 제가 만든 건 아니고요.”
“뭐예요, 그럼?”
희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팔던데요. 제가 버섯만 더 넣었어요. 문제 있어요?”
도준이 짓궂은 얼굴로 노란 인스턴트 수프 봉투를 달랑달랑 흔들었다. MSG가 잔뜩 들었을 테니, 입맛에 안 맞을 리도 없었다.
“요령이 좋네요, 이거 뭐 사기 아닌가.”
“대충 먹어, 아무거나 먹어도 다 맛있잖아.”
장난기 많은 청년들의 대화는 도무지 멈추질 않았다. 희찬은 앉은 자리에서 도준이 차려 주는 음식들을 맛있게 받아먹었다. 어찌나 정성 들여 만들었는지, 하나하나 간이 정확했고, 씹기 좋았고, 지독하게 맛있었다.
어느 정도 식사가 마무리될 때쯤, 도준이 다시 분주하게 움직였다. 무언가 챙겨 둔 것이 있는 듯, 냉장고 문을 열고 뒤적거리는 도준의 뒷모습에서 즐거움이 물씬 묻어났다.
그를 보는 희찬도 즐겁기는 매한가지였다. 희찬은 꼰 다리를 달랑거리며 도준이 꺼낼 것을 기대했다. 이윽고 희찬이 눈을 크게 뜨고 도준을 바라봤다.
도준이 냉장고에서 꺼낸 것은 다름 아닌 와인이었다. 값나가는 고급스러운 와인은 아니었어도, 크리스마스이브의 분위기를 만끽하기에는 충분했다.
“와인도 샀어?”
“응, 나 술 마실 줄 몰라서 논알콜.”
도준의 말에 희찬이 싱긋 웃었다. 항상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 퇴근하는 일정에 술을 먹을 시간이 없었으니 도준은 술을 접할 기회도 적었다. 게다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빠듯한 형편에 술에 돈을 쓰는 것은 사치였으니, 술을 마실 줄 모른다는 말은 귀여우면서도 아릿한 감정을 안겼다.
“나는 좀 마실 줄 아는데. 회식하면서 배웠어.”
“너 잘 마셔? 몇 병 마셔? 사람들은 막 소주로 까던데, 너도 그래?”
“다음에 좀 한가해지면 같이 술도 마시자.”
“그래. 아무튼, 오늘은 날도 날이니까 분위기 내보자고 샀는데 이거 어떻게 따는 거지.”
뭘 해 봤어야 말이지.
희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도준에게서 와인을 받아 들었다. 와인 오프너를 따로 갖춘 형편도 아니라, 두 사람은 먼저 와인 병을 따는 방법부터 궁리했다.
희찬이 떠올린 것은 코르크에 못을 박은 후,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해 망치 뒷부분으로 뽑는 것이었다. 그 아이디어가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도준이 즉각 실행에 옮겨 봤지만.
“아, 못만 나오는데?”
도준의 손에는 못만 덩그러니 들려 있었다. 그를 본 희찬이 턱을 쥔 채로 곰곰이 생각하며 눈을 굴렸다. 그러다 또 무언가 떠오른 듯 도준에게 이번에는 젓가락을 건네었다.
“거기에 젓가락 넣어 봐.”
못으로 미리 길을 내 둔 구멍에 젓가락을 밀어 넣었다. 힘으로 빼지 말고 젓가락과 코르크를 함께 돌린다는 생각으로 살살 빼라는 희찬의 지시를 따르며 도준은 코르크를 빼려 제법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젓가락을 넣으면 넣을수록 마개가 함께 와인 병 속으로 밀려 들어가는 바람에 도준이 난감한 듯 볼을 긁적이며 희찬을 바라봤다.
“……그냥 아예 다 밀어 넣고 먹을까? 코르크만 치우면 나오긴 할 거 아냐.”
“……그러자.”
머릿속에 그렸던 화려한 그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한 두 사람은 이내 환하게 웃으며 코르크를 아예 병 안으로 밀어 넣었다.
와인 입구에 냅킨을 대고, 쪼르륵, 맑은 소리를 내며 잔에 따랐다. 처음엔 코르크에 막혀 시냇물처럼 쫄쫄 흐르던 와인이 어느 정도 일정한 양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제 잔에 차곡차곡 차오르는 와인을 보던 도준이 호기심을 품고 한입 가득 와인을 머금었다가 이내 ‘으!’ 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으, 이걸 돈 주고 마신다고?”
“맛없지.”
“왜 마시는 거야? 이해가 안 되네. 다들 돈이 남아도나 봐.”
도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면서도 제 잔에 따라진 와인은 남김없이 마시는 도준의 모습에 희찬이 해맑게 웃으며 제 잔에 와인을 더 따랐다.
도준이 선선한 미소를 지으며 희찬의 행동을 지켜봤다. 그래도 바깥에 나가서 일 좀 한다고, 그새 술도 마시는 희찬의 모습이 제법 어른스럽게 닿아 괜히 가슴이 몽글거렸다.
“너 좀 낯설다.”
몸을 뒤로 물리고, 팔짱을 낀 도준이 나직한 음성을 내자 희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가?”
“술도 다 마시고. 다 키웠다.”
“네가 날 키웠냐? 내가 널 키웠지.”
“입이 삐뚤어져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너 키웠잖아. 밥도 해 먹이고, 나갔을 때 청소도 내가 다 하고. 어? 군대에 있을 때도, 읍.”
희찬이 벌떡 일어나 말이 길어지려는 도준의 입을 텁, 막았다. 그에 도준이 눈을 아래로 굴려 희찬의 손을 봤다가, 다시 눈을 들어 희찬과 시선을 마주했다.
“누가 누굴 키웠으면 어때, 오늘은 이도준 생일인데.”
“응. 상관없어.”
술을 먹으면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건지, 하얀 얼굴에 홍조가 핀 것이 예뻤다. 도준은 살면서 처음 보는 희찬의 모습을 또 하나 발견했다는 것에 희열을 느끼며 희찬을 한 품 가득 끌어안았다.
그렇게 요란스러운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싱크대에 나란히 서서 양치질을 했다. 집 밖에 있는 화장실까지 가기에는 바깥의 바람이 매서웠고, 살을 에는 겨울에 바들바들 떨면서 양치질을 하는 것만큼 곤욕스러운 일도 없었으니 싱크대 양치질은 퍽 탁월한 선택이었다.
“희찬아, 너 졸리지.”
“응, 나 졸려. 12시 기다려야 하는데.”
양치질을 마친 희찬은 노곤하게 몰려오는 잠에 눈을 끔뻑거렸다. 그건 도준도 마찬가지였다. 희찬이 온다는 사실 하나에 설레어 단 한숨도 자지 못했던 지난밤을 떠올렸다. 약속한 12시까지는 아직 네 시간이나 남았는데, 도무지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케이크 지금 먹고 얼른 잘까? 나 밤새웠어. 너 온다고 설레서 못 잤어.”
“웬일이래? 너 자꾸 나 이렇게 붕 띄울래?”
“진짜야.”
도준은 눈을 뜨는 것조차 힘겨운 듯 희찬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시린 눈자위에 눈꺼풀이 닿으니 시큰거려 절로 눈물이 맺혔다.
“케이크 내일 먹을까? 나 지금 배도 부르고……. 빨리 너랑 자고 싶어.”
느릿한 도준의 말을 듣던 희찬이 손을 들어 부드럽게 도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졸린 것은 저도 마찬가지였고, 도준을 안고 보니 당장에라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희찬은 촬영장에서 제대로 자지 못했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스케줄도 스케줄이었지만, 어두운 곳에 혼자 있는 것에 공포를 느끼는 탓에 조금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집에 오니 안정이 몰려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옆에는 든든한 도준이 있고, 도준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비웃지 않을 테니, 마음껏 무서워해도 된다는 사실에 못내 안도가 몰려왔다.
“그럼 그냥 잘까?”
잠을 이기지 못한 희찬이 먼저 스르르 몸을 뉘었다. 그를 본 도준은 부리나케 움직여 방 안의 불을 껐다.
“응, 도준아, 미리 생일 축하해.”
“올해도 제일 먼저 축하해 주네, 사랑해.”
“내가 더 사랑해.”
어둠이 내려앉은 공간에 반짝, 반짝 작은 전구들이 빛을 냈다. 희찬을 안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던 도준이 무언가 생각난 듯 머리맡을 만지작거렸다. 도준이 정성스레 만지는 것은 어느새 침대 옆으로 자리를 옮긴 오르골이었다.
이윽고 고운 선율의 캐럴이 방 안 가득 울렸다. 힘든 삶에 지친 동네는 크리스마스에도 삭막하기만 했으나, 꿈을 머금은 두 사람의 집만 오롯하게 화사한 빛을 냈다.
“희찬아, 우리 내년에도 철없자.”
“응, 우리 계속 철없이 살자.”
도준의 엉뚱한 말은 새삼스럽지도 않다. 마치 지금처럼 한결같이 지내자는 것을 그의 언어로 표현한 듯한 말에 희찬도 흔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
어느새 해가 바뀌었다. 지난 일주일간 희찬은 그간 못 잔 잠을 몰아 자는 듯 집에서 꼼짝없이 잠만 잤다. 그러는 동안에도 도준은 부지런히 일을 다녔다.
그래도 잔업은 하지 않았다. 집에 희찬이 있다는 사실은 도준으로 하여금 퇴근 시간을 기다리게 했고, 조금이라도 퇴근이 늦어지면, 희찬이 어딜 가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조급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두 사람은 오랜만에 침대 위에 엉겨 붙어 누운 채로 늦잠을 잤다. 연일 이어지는 한파로 길이 언 탓에 아래로 내려갈 수 없었던 도준도 오랜만의 휴가를 만끽했다. 마침 희찬도 촬영 분량이 없어 쉬는 날이었으니 작은 집 역시 오랜만에 사람의 온기로 꽉 찼다.
그래도 추운 건 추운 거다. 두 사람은 눈을 뜬 후에도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로 침대 밖으로 한 발짝도 내밀지 않았다. 코끝이 시렸다. 분명 집 안인데도 훈훈한 공기보다 창틀을 타고 들어오는 우풍이 더 크게 닿았다.
“추워…….”
이불 밖으로 삐죽 튀어 나간 발가락이 바짝 오므라들었다. 꼼지락거리며 도준의 품으로 파고든 희찬이 두툼한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 덮었다.
도준이 희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품으로 파고든 희찬의 코에서 나오는 잔잔한 숨결이 도준의 가슴에 닿았다. 도준이 으스러질 듯 희찬을 끌어안았다. 도준의 숨결이 희찬의 정수리에 닿았다.
도준이 희찬의 목덜미를 물었다. 촉촉한 살결로 단단한 어깨를 부드럽게 머금고 가볍게 빨아들였다가, 혀로 핥기를 반복했다.
희찬이 흠칫거렸다. 도준의 타액이 묻은 자리에 공기가 닿아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희찬이 도준의 입술에 닿은 쪽으로 고개를 움츠렸다. 그럴수록 집요하게 달라붙는 도준의 얼굴을 두 손으로 쥐고 떼어 냈다.
“호텔에서 지내다 집에 오면 불편하지 않아?”
“집이 괜히 집이야?”
“호텔보다 집이 더 편해?”
“응, 훨씬.”
도준의 손이 희찬의 얼굴 곳곳을 쿡쿡 찔렀다. 말랑한 복숭아 찌르듯 힘있게 누르는 손가락에 희찬이 인상을 찌푸렸다.
희찬이 도준의 손가락을 쥐고 입 안에 밀어 넣어 앞니로 아프지 않게 씹었다. 도준의 입꼬리가 한껏 치솟았다. 입 안에 쏙 들어간 손가락이 구부러지나 싶더니, 혓바닥을 살살 긁었다.
“그래도 호텔 좋더라. 나중에 우리 같이 호텔 가자.”
“거기 가면 진짜 거품 나오는 욕조 있어?”
천진한 도준의 질문이 귀엽다. 희찬은 예상하지 못한 도준의 순수함에 피식, 튀어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희찬이 빙글 몸을 돌려 엎드려 누웠다. 여전히 등을 대고 누운 채로 저를 올려 보는 도준의 잘생긴 코를 잡아 쥐자 도준의 미간이 좁아졌다.
“있어! 신기해.”
“너도 해 봤어?”
도준도 돌아누웠다. 베개를 가슴께에 끌어안고 누워 다리를 달랑거렸다. 도준의 발길질에 이불이 아래로 딸려 내려갔다. 금세 추위를 느낀 희찬이 다시 이불을 끌어 덮었다.
“아니, 무서워서 안 했어.”
“뭐가 무서워, 그냥 해 보지.”
“잘못 만져서 고장 나면 어떡해?”
“음, 모르는 척해야지.”
도준의 얼굴 만면에 장난기가 도사렸다. 턱을 괴고 누웠던 도준이 “아-.” 탄식을 내며 엎어졌다. 추운 날씨에 굳은 몸으로 침대에만 누워 있으려니 온몸이 찌뿌둥했다.
고개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몸을 풀던 도준이 무거운 팔을 희찬의 어깨에 턱 걸쳤다. 희찬과 여유롭게 침대에 누워 뒹굴대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도준이 희찬의 어깨를 꾹 눌렀다. 희찬이 입술을 쭉 내밀어 도준의 콧잔등에 입을 맞췄다. 도준의 손가락이 희찬의 목을 꾹 눌렀다. 희찬의 입술이 도준의 볼에 닿았다. 도준의 손가락이 희찬의 볼을 콕 찔렀다. 희찬의 입술이 도준의 입술에 닿았다.
두 사람 얼굴 가득 행복이 피었다.
“자판기세요?”
“네네, 또 어디에 해 드릴까요.”
“얼마에요?”
“이도준이요.”
“응?”
“이도준 주면 뽀뽀해 주지.”
도준이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말아 물었다. 가히 장희찬다운 대답이 만족스러웠다. 그에 희찬도 도준을 바라보며 애살스레 웃었다. 그 모습은 또 어찌나 이쁜지, 도준은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느끼며 고개를 베개에 처박았다.
“아, 어쩌지. 나한테 없는데.”
“왜 없어?”
“너한테 있잖아, 이미 네가 다 가졌는데 뭘 또 주냐고. 나 이제 너한테 뽀뽀 못 받아.”
“미친놈…….”
이도준은 미친놈이 분명하다.
정말로 속상한 듯 인상을 잔뜩 누비고서 아쉬운 목소리를 내는 도준의 모습에 희찬이 제 속마음을 참지 않고 뱉어 냈다. 도준이 샐룩 웃었다. 만족스러운 반응인 모양이다.
희찬이 도준의 엉덩이를 짝 소리 나게 때렸다. 도준의 큰 몸이 움찔거리며 희찬을 쳐다봤다. 희찬에게 맞은 엉덩이가 화끈거렸다. 손은 또 어찌나 매운지, 금세 불이 앉은 것 같았다.
“우리 카페 갈까?”
희찬의 제안에 도준이 눈을 크게 떴다. 평소 카페는 사치라고 입에 달고 살았던 희찬이었기에 그의 제안이 놀랍기만 했다.
“카페? 커피 마시고 싶어?”
“그게 아니라, 너랑 카페 가고 싶어.”
“음, 그럴까.”
도준이 엉덩이를 문지르던 손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나란히 나가서 바깥 공기도 쐬고, 맛있는 것도 먹을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희찬의 입술이 도준의 볼에 닿았다. 도준이 희찬을 바라봤다.
“이도준 받았습니다, 뽀뽀 드렸어요.”
“계산이 확실한 자판기네.”
장희찬의 뽀뽀 자판기는 죽지 않았다. 꽁냥꽁냥 행복을 느끼던 두 사람의 행동이 순식간에 분주해졌다. 오랜만에 같이 카페에 갈 생각에 두 사람의 행동이 재빨라졌다.
날카로운 바람이 볼을 찔렀다. 앞머리가 거침없이 휘날리고, 바람에 펄럭거리는 바지가 살갗에 닿을 때마다 허벅지가 아렸지만, 두 사람은 그저 웃었다.
두 사람은 아랫동네로 내려가는 버스도 마다하고 걸었다. 다행히 꽁꽁 얼었던 길도 햇볕에 녹았지만, 그래도 드문드문 살얼음이 낀 도로는 미끄러웠다. 희찬과 도준은 손바닥을 쫙 펴고 다리에 힘을 꾹 준 채로 조심스러운 걸음을 놀렸다.
조잘조잘, 신나게 대화를 나누며 걷다 보니 인적이 번잡한 동네가 나왔다. 저 위의 삭막한 동네와는 사뭇 다른 혈기를 머금은 도심이었다.
“저기 가자, 저기.”
희찬이 손가락이 허공에서 곧게 뻗었다. 희찬이 가리킨 곳은 트렌디한 인테리어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대형 프렌차이즈 카페였다.
“여기 허니브레드 맛있대. 엄청 달대.”
“허니브레드 하나랑요, 뭐 마실 거야?”
“어, 라벤더 오트 라떼.”
“이거 하나랑, 따뜻한 아메리카노요.”
도준이 주문을 하는 동안 희찬이 자리를 잡았다. 번화가의 카페라 그런지 평일 낮인데도 사람이 많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덜 닿는 곳에 자리를 잡은 희찬이 도준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계산을 마치고 두리번거리던 도준이 희찬을 발견하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카페에 들어왔을 때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집요하게 두 사람을 좇았다.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선은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것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마주 앉아 즐거운 이야기꽃을 피웠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입 가득 머금은 도준의 인상이 부드럽게 풀렸다. 카페인이 혈액을 타고 온몸으로 침투하는 느낌이 좋았다. 희찬은 허니브레드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혀끝을 자극하는 달달한 맛이 입 안에 번졌다. 희찬의 입가에도 만족하는 미소가 떠올랐다.
“맛있어?”
“응, 너도 먹어.”
“너 많이 먹어.”
희찬이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한껏 들뜬 기분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의 몸짓에 도준이 뿌듯함을 느꼈다.
도준과 함께 카페에 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일단은 여유가 없었고, 어쩌다 카페에 온다 하더라도 이렇게 각자 음료와 디저트를 주문하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 이도준은 돈을 아끼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맛있대.’ 하고 가볍게 말한 것을 흔쾌히 주문해 주고, 자신이 원하는 음료와 제 커피까지 주문한 도준의 모습은 흔히 볼 수 없는 모습이기도 하여, 희찬은 생글생글 웃어 댔다.
당연히 희찬의 기분은 두말할 것 없이 좋았다. 연초, 몽글몽글한 분위기에 사랑하는 연인과 여유로운 오후 한때를 보내는 것은 행복한 일상이 아닐 수 없다.
도준의 눈이 창밖에 멎었다. 환한 햇살이 드리운 거리에는 사람들이 총총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매서운 바람에 등 떠밀리듯 걷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바람을 이겨 내고 꿋꿋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더러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거리의 사람들은 대부분 화사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런 도준의 시선을 희찬의 하얀 손바닥이 휘저었다.
도준이 희찬을 바라봤다. 하얀 생크림을 입가에 묻히고 저를 또렷하게 보는 희찬의 모습이 귀엽다. 도준이 선뜻 손을 뻗어 희찬의 입가를 닦아 냈다.
“도준아, 귀 좀 이리 줘 봐.”
“응?”
희찬이 손을 팔락거렸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대 보라는 시늉이었다. 도준이 팔꿈치로 테이블을 짚고 몸을 앞으로 당겨 귀를 희찬에게 가져다 댔다. 희찬은 도르륵 소리가 날 것처럼 눈을 굴려 여기저기 살펴보더니 도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 여기 모델 된대.”
“뭐?”
“나. 여기. 모델. 된대.”
상상도 하지 못한 희찬의 말에 도준이 두 눈을 크게 뜨고 희찬을 바라봤다. 어안이 벙벙한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이내 입을 활짝 벌려 웃었다.
희찬이 별안간 카페에 가자고 했던 건, 자신이 광고 모델로 활동할 카페에 함께 와 보고 싶은 마음이었나 보다.
덕분에 가슴이 간질거렸다. 심장이 두근두근 수줍게 뛰었다. 숨이 가빠졌다. 벅찬 행복이 몰려온 탓이었다.
“언제부터?”
“그때, 드라마 방영될 때쯤 광고 들어간다고 한 거 있잖아. 그거 여기래.”
“희찬아, 너 진짜 대박이다. 완전 짱이잖아? 그럼 여기 앞에 저 패널에 이제 네 사진 있는 거야?”
“응!”
도준의 까만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저보다 더 좋아하는 도준의 모습에 희찬이 다리를 달랑거렸다.
“어떡해, 벌써 좋아. 여기 맨날 다녀야지. 맨날 종이 장희찬이랑 사진 찍어야지.”
호들갑을 떨어 대는 도준의 모습이 낯설다.
마냥 해맑기만 했던 이도준은 군 제대 후,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바쁜 현실에 악착같이 사느라 제 감정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그러니, 이렇게 한 번씩 자신의 천진한 면모를 있는 그대로 보이는 도준의 모습은 아릿함을 남겼다.
매일 저렇게 천진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그게 문득 미안해졌다. 희찬은 가슴 한쪽이 저린 것을 숨기고 환하게 웃었다.
“왜 종이랑 찍냐, 여기 실존이 있는데.”
“내 맘이야. 암튼, 진짜 잘됐다. 너 이제 유명해질 일만 남았네. 우리 TV 사야겠어. 장희찬 나오는 거 매일 돌려 봐야지. 휴대폰도 사야겠다. 사진 찍으려면 휴대폰 있어야 하잖아. 그리고 컴퓨터도 살까? 너 나오는 거 다 다운 받아 놔야 하는데……. 또…….”
“그만, 그만. 이도준 그만.”
도준의 잔망에 헛웃음이 터졌다. 희찬이 큰 손으로 도준의 입을 텁 막았다. 그동안 휴대폰을 그렇게 사라고, 사라고 말을 해도 사지 않던 이도준이었다. 그런 그가 휴대폰은 물론 고가의 가전제품까지 사겠다고 줄줄 허풍을 늘어놓는 모습이 퍽 웃겼다.
도준은 그저 즐거웠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순간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싶은 것은 어느 사람이나 같은 마음일 것이기에 도준은 곰곰이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 희찬의 모습을 담아 둘까 고민했다.
희찬의 주머니에 들었던 휴대폰이 지잉, 울렸다. 느릿한 동작으로 휴대폰을 꺼낸 희찬의 입가에 맑은 미소가 피었다. 희찬의 옅고 예쁜 눈동자가 도준에게 향했다. 도준은 두 손으로 예쁘게 턱을 괸 채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희찬을 바라봤다.
“도준아, 너 내일 일 안 나가지?”
“응.”
“너 촬영장 갈래? 임 감독님이 너 꼭 필요하다시는데.”
“그래?”
도준의 눈동자가 천장으로 향했다. 무언가를 고민할 때 나오는 도준의 버릇이었다. 희찬이 재촉하듯 탁자를 탁탁 두드렸다. 고민할 것이 뭐 있냐는 뜻이었다.
이내 도준이 입술을 말아 물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촬영장에 가는 게 싫은 것이 아니다. 그저 희찬이 여유로운 지금, 조금이라도 더 붙어 있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눈앞에 보이는 희찬의 표정이 퍽 단호했으므로, 도준은 마지못해 가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한편으로는 또 다른 설렘이 느껴지기도 했다. 함께 연기를 시작한 희찬이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도준에게도 큰 자극이었다.
그의 곁에서 그와 어울리고 싶다는 욕심. 내가 모르는 세상의 장희찬도 다 알고 싶다는 욕망. 그리고 언젠가 희찬과 함께 같은 작품을 하고, 공동으로 상을 받는 상상이 도준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도준이 없는 집은 휑하기 그지없다. 희찬은 오랜만에 촬영장으로 출근하는 도준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걸음이 어찌나 가볍던지,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이제껏 못 하게 했다는 죄책감이 몰려올 지경이었다.
이도준 본인은 잘 모르는 것 같지만, 이도준은 연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촬영장에서 다른 배우들을 관찰하고, 살피는 도준의 눈은 유달리 빛이 났고, 습득력이 뛰어나 금세 제 것으로 만드는 모습은 실로 신이 나 보였다.
굳이 아니라고, 아니라고. 지금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도준이었지만, 그래서 희찬은 도준을 더 촬영장에 보내고 싶었다. 이도준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으니 말이다.
부지런한 이도준은 바쁘게 나가는 중에도 아침상을 차려 놨다. 시간이 흘러 차갑게 식은 음식이었지만, 하나같이 정성이 묻어나 여전히 맛있어 보였다. 희찬이 음식 가까이에 손바닥을 대고 열기를 느꼈다. 차갑게 식은 음식은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렸다가 따뜻하게 먹어야 체하지 않는다는 도준의 목소리가 떠오른 탓이었다.
지잉, 울리는 진동에 휴대폰을 확인한 희찬이 부랴부랴 전화를 받았다. 상대는 오늘 도준을 촬영장으로 불러낸 임 감독이었다.
“네, 감독님!”
아, 휴대폰을 도준에게 들려 보낼 걸 그랬다.
혹시 촬영이 취소된 걸까. 그렇다면 도준은 한창 가는 중일 텐데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까.
상대의 이야기는 듣지도 않았는데 오만 걱정이 다 몰려왔다.
― 아, 휴대폰을 도준이가 안 들고 갔구나?
“네……. 깜빡했어요.”
― 아냐, 어디까지 왔는지 물어보려고 했어. 곧 도착하겠지?
“네! 도준이 시간 약속은 잘 지키니까요.”
다행히 촬영이 취소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희찬은 안도의 숨을 쉬며 편안하게 통화를 이었다.
― 그래, 너는. 어때? 첫 드라마 촬영 잘하고 있지? 들리는 얘기로는 벌써 칭찬이 자자하던데.
“아하하, 과찬이세요. 그냥 처음이다 보니까, 모르는 게 많아서……. 하나하나 배워 가고 있어요. 감독님 감사합니다.”
주변에 좋은 어른이 있다는 것은 실로 든든한 일이다. 부모가 없어 어른의 보살핌을 제대로 느껴 보지 못한 희찬이었기에 감독의 세심한 애정이 더 크게 닿았다.
― 그 드라마 내가 너 추천 좀 했어. 감독이 너랑 다른 배우랑 고민하고 있더라고? 잘하는데 너무 긴장하는 거 같아서 걱정된다길래, ‘카메라 앞에 세워 두면 멀쩡하다’고 딱 그렇게만 말했어.
“아, 정말요?”
― 어, 나 때문에 네가 된 거 아니고. 네가 될 자리인데 안 될까 봐 노심초사한 거니까 의기소침해하지 말고.
혹시라도 기분이 상할까, 섬세하게 자신을 배려하는 감독의 목소리에 희찬이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임 감독은 이 바닥에서 제법 저명한 명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연출을 맡는 작품마다 대박을 터뜨리는 감독이 든든하게 뒤를 지켜 준다는 생각에 촬영장에서 눈치 보느라 한껏 움츠렸던 마음이 삽시간에 편안해졌다.
“네, 더 열심히 할게요. 저 나중에 성공하면, 도준이랑 같이 감독님이 연출하시는 작품에 주연하고 싶어요.”
― 이야, 나야 너무 좋지. 곧 보자, 희찬아.
“네. 아, 감독님!”
― 응?
끊어지려는 통화를 희찬이 다급하게 붙잡았다. 희찬이 그 어느 것보다 간절하게 기다리는 소식이 있다. 자신이 계약서를 받았을 당시, 도준을 찾는다는 소속사가 있었다. 도준이 부지런히 촬영장에 나갔다면 벌써 계약까지 마쳤을지도 모르겠으나, 그 이후로 촬영장에 나가지 못한 이도준은 아직도 그 소식을 접하지 못했다.
활동하며 전문적인 손길의 세심한 보살핌을 받다 보니, 얼른 도준이 좋은 회사를 만나길 바라는 마음은 점점 커져만 갔다.
“오늘 도준이 K액터스 미팅하나요? 그쪽에서 도준이 오는 날만 기다린다고 하셨잖아요.”
― 아, 그러게? 내가 이거 촬영 막바지라 정신이 없어서 곽 대표한테 연락을 못 해 놨네. 연락 한번 해 보고, 오늘 오면 바로 미팅하고, 아니어도 다음에 또 기회 있으니까.
“네! 감사합니다.”
― 응, 도준이 왔다. 희찬아, 잘 지내고, 건강하고.
“네, 감독님! 오늘도 파이팅입니다! 도준이 잘 부탁드려요.”
통화를 마친 희찬의 입가에 몽실몽실 미소가 피었다. 감독의 말대로 오늘이 아니어도 도준이 계약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겠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그게 오늘이었으면 좋겠다.
혼자 촬영장에 가서 대기를 하다 보면 자연스레 도준이 떠올랐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희찬은 그저 도준의 시간이 아까웠다. 공사장에서 청춘을 허비할 때가 아닌데, 이도준은 촬영장이 아닌 공사장으로만 발을 놀렸다. 그렇다고 역정을 내며 연기에 집중하라고 말을 할 수도 없었다.
희찬은 그래서 더 조급했다. 오늘 곽 대표를 만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감독이 날을 잡아 도준에게 알려 주면 좋겠다는 작은 희망이 희찬의 마음속에 도사렸다.
“아, 시간 더럽게 안 가네.”
분주하게 움직인 희찬이 다 마른빨래를 개고, 옷장을 정리하고, 이불을 털었지만, 시간은 겨우 2시밖에 되지 않았다.
내가 없을 때 도준이는 이 작은 집에서 무얼 하면서 지낼까.
저 식탁 앞에 앉아 감독이 준 대본을 봤을까. 아닌 척하면서도 받은 대본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닳은 것을 보면 도준은 같은 대본을 보고 또 본 모양이다.
아마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밥도 챙겨 먹고, 그러다 10시가 되면 언덕 아래 공중전화까지 한달음에 달려와 전화를 걸었겠지. 통화가 안 되는 날에는 씁쓸한 걸음을 돌렸을 거고, 운 좋게 통화가 되는 날에는 즐겁게 돌아왔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다시 추운 집에 돌아와 혼자 저 침대에 누워 밤을 지새웠겠지. 아마 호텔에서 희찬이 그러듯, 도준도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되뇌다 잠들었을 거다.
집 안 곳곳에 남은 도준의 흔적을 헤아리던 희찬의 눈에 녹슨 철제 틴케이스가 닿았다. 침대맡에 가지런히 놓인 틴케이스 안에는 두 사람이 차곡차곡 모아 두는 생활비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돈도 많이 모였네.”
이도준은 착실하게 생활비를 채워 뒀다. 짜디짠 일급을 아끼고 아껴 제 용돈을 빼고도 제법 두툼하게 쌓아 둔 지폐가 희찬에게 유달리 무겁게 닿았다.
도준이 혼자 모아 둔 돈이 왜 그렇게 울컥하는지.
계약 이후, 희찬은 드라마 촬영을 다니면서 한 번도 돈통에 돈을 넣지 못했다. 희찬이 아랫입술을 말아 물고 말수를 줄였다.
희찬은 이 착잡한 상황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부러 미래를 걱정하며 지금의 행복을 참는 생활을 얼른 청산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도준이 더는 참지 않길 바랐다. 갖고 싶은 것은 갖고,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며 그렇게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길 바랐다.
그래서 이도준의 계약이 급했다. 도준이 하고 싶은 것을 해낸 그 날, 도준이 제게 그랬던 것처럼, 희찬은 도준에게 누구보다 큰 축하를 건네고 싶었다.
더는 참지 말라고, 꼭 말해 주고 싶었다.
천년 같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도준이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 이른 시간에 나갔는데, 촬영이 길어진 건지 도준이 돌아왔을 때는 땅거미에 잡아먹힌 동네가 어둑어둑해진 뒤였다.
희찬이 두 팔 벌려 도준을 맞이했다. 꽁꽁 언 도준의 몸이 바깥의 매서운 날씨를 알려 주는 것 같았다. 희찬이 한 품 가득 도준을 안아 주자 바들바들 몸을 떨던 도준의 몸이 안정되었다.
희찬이 도준의 뒤를 졸졸 쫓았다. 궁금한 것이 있는지, 집요하게 쫓아오는 희찬의 모습이 의아했다. 도준이 걸음을 우뚝 멈추고 뒤로 돌아 희찬을 바라봤다. 희찬을 보는 도준의 검은 눈동자에서 ‘왜?’ 하고 의문이 읽혔다.
“별일 없었어?”
“응, 아무 일도.”
“그래? 임 감독님이 다른 말씀 안 하셨어?”
도준은 그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의 몸짓에서는 그가 말한 ‘아무것도’가 여실히 드러났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걸까. 온종일 도준의 계약 소식을 기다린 희찬이었기에 절로 아쉬움이 몰려왔다.
“오늘 촬영장 너무 바쁘더라. 감독님도 처음 갔을 때만 뵀고, 그 뒤에는 따로 얘기 못 했어.”
“아아, 막바지라더니 정말 바쁘신가 보네.”
“왜? 할 얘기 있으시대?”
“아, 아니…….”
희찬은 근질거리는 입을 겨우겨우 다물었다. 영문을 알 리가 없는 도준의 눈에 의문이 서렸다. 희찬은 도준의 눈에 답하지 않았다. 중요한 일이면 먼저 말해 주겠거니, 가볍게 생각한 도준은 금세 침대 위에 몸을 날려 누웠다.
오랜만에 추운 현장을 바쁘게 다녔더니 몸이 으슬거렸다. 도준은 으슬으슬한 몸을 곧장 이불로 감쌌다.
“그렇게 추워? 따뜻한 차 좀 끓여 줄까?”
“아니, 더 좋은 방법 있어.”
이불 속에 숨었던 도준의 머리가 이불 밖으로 빼꼼 튀어나왔다. 눈만 내놓고 큰 눈을 끔뻑거리는 모양새가 퍽 귀여웠다. 희찬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눈썹을 씰룩거리며 입을 가린 채로 도준을 쳐다보자, 도준이 이불을 홱 젖혔다.
“너 여기 얼른 누워. 너 안고 있으면 괜찮아져.”
도준은 흔쾌히 자신의 품을 열었다. 그에 희찬이 주저하지 않고 침대로 달려들었다. 희찬이 발을 디뎌 몸을 공중에 붕 띄웠다가 착지한 곳은 정확하게 도준의 품 안이었다. 도준의 팔을 베고 도준을 마주 보고 누운 희찬이 싱글벙글 웃었다.
그래, 계약 좀 늦어지면 어때. 그동안 내가 먹여 살리면 되지.
희찬이 말갛게 웃으며 도준의 우뚝 솟은 콧날을 손끝으로 부드럽게 쓸어 만졌다.
“너 아까부터 자꾸 무슨 생각해.”
도준의 날카로운 질문에 희찬의 눈이 데구루루 굴렀다. 입술을 물고 눈썹을 씰룩거리자 도준의 가지런한 손가락이 희찬의 미간을 꾹 눌렀다.
하여튼 귀신이다.
다른 데 가면 속을 모르겠다는 말을 종종 듣는 희찬인데, 그 속이 이도준에게는 훤히 보이는 모양이다.
“나 아무 생각도 안 해. 이도준 존나 잘생겼다, 뭐 이런 거?”
“뭐, 하루 이틀이냐.”
뻔뻔한 도준의 모습이 새삼스럽지도 않다. 자신이 잘생긴 것은 익히 잘 아는 이도준은 이번에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는 듯, 귀를 후비적거렸다.
희찬이 꼼지락거리며 몸을 놀렸다. 도준의 티셔츠 안으로 손을 밀어 넣어 탄탄한 몸을 매만졌다. 그러다 꾸물꾸물 움직이며 아래로 내려갔다. 도준은 의아한 듯 희찬을 바라봤다. 희찬의 행동은 당최 예상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으므로, 대비하는 것도 어려웠다. 도준이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도준의 툭 튀어나온 매력적인 울대가 울렁거렸다.
희찬의 얼굴이 도준의 허리춤에 닿았다. 설마 이대로 오럴이라도 하려는 건가. 난감함이 서린 도준의 눈이 희찬의 정수리로 향했다.
아랫배가 간질거렸다. 금방이라도 희찬의 뜨거운 숨이 페니스에 닿을 것 같았다. 곧 다가올지도 모를 희열에 긴장이 도사렸다. 도준의 손이 희찬의 머리를 거머쥐었다.
“엥?”
하지만 희찬이 하는 행동은 도준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희찬은 도준의 긴장을 비웃기라도 하듯, 도준의 티셔츠 안으로 머리를 밀어 넣었다. 힘을 주어 꿈틀대더니 이내 티셔츠 목구멍으로 머리를 뿅 내밀었다. 덩치도 큰 두 사람이 티셔츠 한 장을 나눠 입은 꼴이 된 것이 어이가 없어, 도준이 크게 웃었다.
“이러면 더 따뜻하지?”
“응, 천재네.”
티셔츠 속에서 도준의 팔이 희찬의 맨몸을 끌어안았다. 도준과 맨살을 맞대고 누운 희찬이 도준의 볼에 제 볼을 비비적거렸다. 체온이 돌아오는 것을 느낀 도준의 눈이 느릿하게 끔뻑거렸다.
“너 무슨 생각 했어? 지금 다리 사이에 프링글즈 통 있어.”
“아무 생각도 안 했어, 생리현상이야.”
몸이 풀리니 노곤함이 몰려왔다. 손바닥에 닿은 희찬의 살결은 안정을 안겼고, 맞닿은 심장의 움직임은 설렘을 머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준이 고른 숨을 쉬었다. 잘생긴 눈을 꾹 감고 잠든 도준의 모습은 공들여 빚은 조각상 같았다.
희찬이 엄지손가락으로 도준의 새까만 눈썹을 어루만졌다.
“잘 자, 도준아.”
두런두런 많은 대화를 하고 싶었지만, 내일도 우리는 함께일 테니 아쉽지 않았다. 도준의 콧등에 입을 맞춘 희찬도 눈을 감았다.
그렇게 모든 것이 순탄할 줄 알았다. 정말 이제는 다 괜찮을 거라고, 빛이 드리울 날만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대단한 착각이었고, 엄청난 오산이었다.
두 사람은 늦잠을 자고 일어나, 아침 겸 점심 식사까지 마쳤다. 식탁을 가운데 두고 앉아 다정한 눈빛을 주고받다 보면 식탁 아래의 발도 바쁘게 움직였다. 맞닿은 서로의 발을 비비적대며 꽁냥거리는 두 사람은 즐거워 보였다.
“우리 오늘은 뭐 할까?”
함께 집에 있어도 이렇게 쉬기만 하는 것은 처음이라 뭘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그동안 카페도 다녔고, 같이 쇼핑도 했고, 영화도 보며 시간을 보냈다. 계획대로라면 오늘도 밖에 나가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지만, 오늘은 전례 없는 한파로 온 동네가 꽁꽁 얼어붙는다는 소식이 있었다.
“너 언제 또 촬영 간다고 했지?”
“다다음 주. 우리 일주일하고 3일밖에 시간 없어.”
도준은 희찬과 이렇게 진득하게 붙어 지내는 동안에도 시간이 흐르는 것이 마냥 아까웠다. 이제 또 며칠 안 있으면 떨어져 지내야 하는데, 그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 끔찍하게 싫었다.
“희찬아, 가지 마라.”
도준이 저도 모르게 마음에 없는 진심을 뱉었다. 그러니까 진실이기도 하고, 거짓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희찬이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분명 도준에게도 즐거운 일이었지만, 그것 때문에 며칠씩 보지 못한다는 것은 퍽 괴로운 일이었다.
도준의 우울한 목소리에 희찬이 고개를 예쁘게 꺾었다. 잔망스러운 표정을 한껏 피워 낸 뒤에는 손을 뻗어 부드럽게 도준의 볼을 어루만졌다.
희찬의 손길에서 지대한 사랑이 묻어났다. 다정하게 어르고, 부드럽게 달래는 희찬의 손에 도준이 입을 쪽, 쪽 맞추었다.
그러던 중 식탁에 놓인 휴대폰이 울렸다. 희찬의 소속사 대표로부터 온 전화였다.
“어, 잠시만.”
희찬이 도준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소속사 사람들과 통화하는 희찬의 모습이 문득 섹시했다.
사람들이 괜히 일 잘하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게 아닌가 보다. 희찬이 일할 때 풍기는 분위기는 사람을 설레게 하는 재주가 있다. 도준은 붕 뜨는 기분을 숨기지 못하고 즐겁게 웃으며 희찬을 바라봤다.
어쩐 일인지, 밝기만 했던 희찬의 표정이 차츰차츰 어두워졌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남성의 목소리도 퍽 무겁게 들렸다. 정확하게 무어라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도준은 직감했다. 지금 희찬이 받은 전화가 좋은 소식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회사에서 오래?”
“응, 잠깐. 나 얼른 갔다 올게.”
“응…….”
희찬은 조금의 시간도 허비하지 않았다. 통화를 마친 희찬은 부리나케 외투를 챙겨 들고 집에서 벗어났다. 도준이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조심히 갔다 와.”
“응, 추운데 얼른 들어가.”
희찬이 언덕길을 내려가는 것까지 배웅한 도준이 무거운 걸음을 돌려 집으로 들어왔다. 희찬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었는데, 무슨 일인지 묻지도 못했다. 왠지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았다. 당연히 별일 아닐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못 했다. 도준은 입 안에서만 머무는 말을 삼키고 낮은 한숨을 쉬었다.
아침부터 즐겁게 시간을 보내던 두 사람의 온기가 남은 집이 어색하다. 도준은 식탁 앞에 앉아 애꿎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출연 중이던 드라마에 일이 생긴 걸까. 아니면 광고 모델로 일하기로 한 곳에서 갑자기 말을 번복한 걸까.
“별일 아니면 좋겠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늘어뜨린 도준의 입에서 한탄 섞인 목소리가 나왔다.
그냥 이대로 그간 고생했던 것을 모두 보상받고, 햇빛이 드리우는 길만 걸었으면 좋겠는데.
고개를 한껏 젖힌 도준의 목 가운데 자리한 울대가 위아래로 울렁거렸다.
“혹시 그림자가 필요하다면…….”
그런 건 기꺼이 내가 할 테니까. 둘 다 잘되는 것이 어렵다면, 꼭 장희찬이 잘되었으면 좋겠다.
도준은 마주 잡은 두 손을 세게 움켜쥐고 터져 나오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괜히 심장이 쿵쿵 거칠게 뛰었다. 몰려오는 긴장감은 자꾸만 갈증을 안겼음에도 일어나서 물을 마실 생각도 하지 못했다. 마음 가득 도사린 이 불안함은 희찬이 와야만 해소되는 것이었으므로, 도준은 그저 앉은 자리에서 하염없이 희찬을 기다렸다.
아무래도 소속사가 생긴 것도 처음이고, 주기적으로 일을 하는 것도 처음인 데다 회사의 전화를 받고 부리나케 달려 나가는 희찬 역시 처음이었으니 모든 것이 불안하기만 했다.
전화를 해 볼까 생각도 했지만, 혹시 방해일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 시간이 흐르는 소리가 예민하게 귓가에 닿았고, 차가운 공기가 숨통을 죄듯 살갗을 쓸었다.
“아, 안 되겠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자꾸만 기분이 가라앉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도준이 일어나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일부러 몸을 움직여 생각을 분산시켜 보려는 심산이었다.
도준은 싸리 빗자루를 손에 들고 요란하게 청소를 시작했다. 대청소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깨끗하기만 한 집이었지만, 혹시 놓친 곳은 없을까, 구석구석 꼼꼼히 쓸었다.
틈틈이 새어 나오는 한숨은 애써 무시했다. 일부러 숨을 참고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도 해 봤으나 그건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결국 도준이 서랍 깊숙한 곳에서 담배를 찾아 쥐었다. 담배를 피우다 보면 깊은 심호흡을 하게 되는 탓에 조금이나마 안정을 되찾곤 했으니 도준으로서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평년에 비해 매서운 한파가 몰아칠 예정이라더니,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차가운 바람이 살을 파고들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살을 베어 내는 것 같은 아픔에 도준이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언 손으로 틱틱, 라이터 휠을 돌리자 화륵 불꽃이 피었다. 도준은 담배를 대고 한 모금 깊이 빨아들여 불을 붙였다. 꼬랑지에 붙은 담뱃불이 타닥타닥, 빠르게 타들어 갔다. 바람이 매섭게 부는 탓이었다.
담배는 도준이 빨아들이는 것보다 바람에 타는 양이 더 많았다. 한 대를 피워도 담배를 피운 기분을 느끼지 못한 도준이 다시 한 대를 꺼내 물었다.
이번에는 바람을 등지고 섰다. 폐부 깊이 들어오는 니코틴을 느끼고 싶었고, 목젖을 때리는 타격감에 안정을 찾고 싶었다.
“희찬이 옷은 제대로 입고 갔던가.”
급하게 나가느라 겉옷을 챙겼는지 보지 못했다. 어련히 잘 입고 나갔겠지만, 온 신경이 희찬에게로 향한 탓에 그런 자잘한 것조차 걱정이 되었다.
긴장 속에 시간을 보내는 것은 퍽 고된 일이다. 도준은 차라리 이대로 기절이나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눈을 떴을 때 희찬이 집으로 돌아오면 좋겠다고, 별일 아니었고, 간단하게 해결할 만한 일이었다고 전해 주길 바랐다.
아니, 이왕이면 좋은 일이었으면 좋겠다.
철컹, 무거운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침대에 앉아 하염없이 희찬을 기다리던 도준은 깜빡 잠이 들었다가 요란한 철문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바깥은 어스름이 진 후였다.
도준은 초조한 심정을 숨길 수 없었다. 저벅저벅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리기까지의 시간이 천년 같았다.
부디 눈앞에 보일 희찬의 얼굴에 미소가 만개하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역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온 희찬은 아무 말이 없었다. 희찬의 하얀 얼굴에 드문드문 붉은 산이 올랐다. 새빨간 열을 머금은 눈두덩은 방금까지 울다 온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퉁퉁 부은 채였다.
“……울었어?”
도준이 표정을 굳히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희찬을 바라봤다. 고개를 푹 수그린 희찬과 시선을 마주하려 허리를 숙이자 희찬이 홱 고개를 돌렸다. 우는 것을 감추고 싶어 하는 희찬의 모습이었다.
도준이 아랫입술을 씹었다. 평소 눈물과는 거리가 먼 장희찬인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운 건지 알고 싶었다.
“왜, 회사에서 뭐래.”
화가 나려 했다. 도준은 치미는 화를 겨우겨우 다스렸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 항상 긴장하고 지내는 희찬을 안다. 혹시 조금이라도 잘못될까, 노심초사하며 주변의 눈치를 살피는 것도 안다. 거침없이 쏟아붓는 성격을 죽이고, 자신을 몰아붙이는 상황에도 의연하게 대하려 노력하는 것도 안다. 그래서 희찬을 이렇게까지 울려 버린 회사가 미워졌다.
도준의 두툼한 팔이 희찬의 어깨를 거머쥐고 품에 안았다. 군말 없이 도준의 품에 안긴 희찬의 입에서 뜨거운 숨이 터져 나왔다. 축축한 물기가 묻어나는 숨이었다.
씨발.
도준은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욕을 가까스로 삼켰다. 신인인데도 잘 챙겨 준다며, 회사의 세심함을 높게 샀던 것도 다 취소한다.
감히 장희찬을 울려.
도준은 희찬을 안은 채로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서슬 퍼런 핏줄이 불끈 솟은 도준의 손등이 제법 험상궂다.
“일단 앉아, 희찬아.”
도준은 희찬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울음이 멎길 기다렸고, 천천히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길 바랐다.
희찬을 끌어 식탁 앞에 앉혀 두고, 희찬이 좋아하는 율무차를 끓였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찻잔을 그의 앞에 밀어 주었지만, 희찬의 눈은 초점 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도준은 그런 희찬의 모습이 한없이 불안했다. 입술을 얼마나 씹어 물었는지, 다 터진 희찬의 빨간 입술이 안쓰럽다. 도준은 왜인지 저미는 가슴에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희찬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도준이 느끼는 불안함도 커져 갔다. 숨이 거칠어지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래도 도준은 자신의 사정보다는 희찬을 고려했다. 직접 회사에서 얘기를 듣고 온 희찬의 심경은 더 복잡할 테니, 그가 진정되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아니, 그러려고 노력했다.
“……도준아.”
드디어 고대하던 희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희찬아.”
“나…….”
조금 안정이 된 듯 침착하게 말을 잇던 희찬은 몇 글자 뱉지 못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희찬의 둥글고 큰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희찬이 결국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무릎 위에 얹어진 희찬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를 본 도준이 희찬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희찬의 주먹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우리 키스하는 거 사진 찍혔대.”
“……!”
“대표님이 나보고. ……이거 기사 터지면 다 끝난다고…….”
도준의 새까만 동공이 크게 요동쳤다.
“스폰……이라도 해서, 기사 막아 볼 생각 없냐는데…….”
그러니까, 희찬이를 울려 버린 게.
“거기에 흔들리는 내가 너무 싫어. 어떡해? ……어떡해, 도준아.”
그러니까, 빛만 드리워도 모자랄 내 꿈이, 제일 처음 맞닥뜨린 고비의 원인이, 그게 나라니.
희찬이 한껏 젖은 목소리로 전하는 말은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동성애, 열애설, 스폰. 멀고도 가까운 단어들이 어지럽게 얽힌 문장이 하나하나 가시가 되어 도준의 가슴에 콕 박혔다.
희찬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그를 쥔 도준의 손에도 힘이 실렸다.
어쩐지 모든 것이 너무 순탄하게 흘러간다 했다. 원하는 것을 쉽게 손에 쥐여 준다 했다. 단 한 번도 내 편인 적 없는 하늘인데, 유달리 행복하다 싶었다.
“……쉽게 이루어 줄 리가 없지.”
도준은 저도 모르게 원망 섞인 말을 뱉었다.
그래, 나답지 않게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잘되어 간다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신을 믿지 않는 도준이었지만,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빌고 싶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그림자는 내가 할 테니까. 제발 희찬이를 괴롭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발.
도준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어 애꿎은 입술만 세게 씹어 물었다. 감히 손을 들어 희찬의 눈물을 닦아 줄 수도, 괜찮다고, 잘 해결될 거라고 위로할 수도 없었다.
*
회사에 도착한 희찬에게 온통 싸늘한 시선들이 닿았다. 전화로 간략하게 전해 들은 이야기도 그리 가볍지는 않았으니, 사무실의 분위기가 좋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희찬의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대표의 비서가 안내하는 대로 대표실로 향하면서 한숨을 얼마나 쉬었는지 모른다. 긴장이 도사린 탓에 자꾸만 무릎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희찬은 억지로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일부러 더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대표님, 저 왔어요.”
희찬이 무거운 문을 열고 대표실로 들어섰다. 종이를 팔락거리며 여러 가지 서류를 살피던 대표가 눈만 들어 희찬을 바라봤다. 그 시선은 마치 뱀의 것 같았다.
희찬을 바라보는 대표의 시선에는 아무런 감흥도 묻어나지 않았다. 손에 쥔 서류를 내려놓고, 삐걱 소리가 날 정도로 의자 등받이를 밀어젖힌 대표가 무심한 손가락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그에 희찬이 군말 없이 대표가 지시하는 곳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초조함이 몰려왔다. 희찬은 저도 모르게 까득까득, 손톱을 뜯었다. 도준에게는 회사에 관해 일부러 좋은 말만 했지만, 희찬은 사실 대표가 무섭다.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는 그 앞에서 희찬이 한없이 작아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희찬의 초조한 마음과 달리 대표는 오랜 시간 희찬을 방치했다. 대표는 마치 쳐다보기도 싫다는 것처럼, 희찬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덕분에 희찬은 잔뜩 위축되어 열심히 그의 눈치를 살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희찬의 눈앞에 한 장의 종이가 팔랑, 떨어졌다. 눈앞에서 흩날리는 종이를 보던 희찬이 대표를 바라봤다. 대표는 턱짓으로 종이를 가리켰다.
이윽고 희찬의 눈이 종이에 닿았을 때, 희찬의 표정이 차차 굳어 갔다.
“이게 왜…….”
대표가 희찬에게 내민 종이에는 어두컴컴한 풍경 사진이 있었다. 그 풍경 속에는 허름한 집 앞에서 진한 키스를 나누는 연인이 있었다.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예쁘기만 한 사진이었다. 다만, 입을 맞추는 두 사람이 남자라는 것과 그게 희찬과 도준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너, 이도준이랑 사귀는 거였니?”
대표도 도준의 존재를 익히 알고 있었다. 그저 좋은 친구 사이라고 임 감독으로부터 전해 들었고, 희찬이 그를 많이 의지한다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지만, 프린트된 사진 속 두 사람은 그 말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너 이제 드라마 들어가서 데뷔 목전에 둔 신인이야.”
“…….”
“기사 터뜨릴 거라는데, 어떡할래.”
희찬의 입술이 새하얗게 질렸다. 대표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리지 않았다.
희찬이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구겨 쥐었다. 그저 눈앞이 캄캄해지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를 본 대표가 눈썹을 씰룩거렸다. 느릿한 행동으로 희찬의 맞은편에 앉더니 다리를 꼬고 시가를 물었다.
희찬을 쳐다보는 대표의 두 눈에서는 성가심이 묻어났다. ‘너 때문에 귀찮은 일이 늘었다’고 말하는 듯한 대표의 눈에 희찬의 고개가 절로 조아렸다.
이번엔 다른 종이가 희찬 앞에 들이밀렸다. 조금 더 두툼한 두께를 자랑하는 종이 뭉치는 희찬의 서명이 새겨진 계약서였다. 탁자에 툭, 떨어진 종이가 무거웠다. 희찬의 떨리는 손이 계약서를 쥐었다. 계약서 위에는 무수히 많은 숫자가 적힌 노란색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기사 터졌을 때 네가 갚을 드라마 위약금, 광고 위약금 그리고 그 외 여러 가지 계산한 거야. 제일 아래 있는 숫자는 기자가 원하는 액수.”
이럴 줄 알았으면 임 감독이 계약서 검토를 도와준다고 할 때 그를 찾아갈 걸 그랬다.
바쁜 감독을 붙잡고 조언을 구하는 것이 못내 미안하여 도준과 함께 읽고, 혼자 판단하고, 섣부르게 계약을 했더니 기가 막힌 독소 조항이 있었던 모양이다.
희찬이 새빨간 입술을 세게 짓이겨 물었다. 동그란 눈에 차오른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지만, 닦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포스트잇에 적힌 수많은 숫자가 버거웠다.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액수가 숨통을 옥죄고 온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기사는 무조건 막아야 하지 않겠니? 게이라고 터지면 누가 널 데려다 쓰겠어. 미국도 아니고, 가뜩이나 대한민국인데.”
희찬에게는 다른 선택사항이 없다. 위약금들은 말도 안 되는 큰돈이었고, 그나마 상대적으로 적은, 기자가 원하는 돈을 쥐여 주고, 활동을 계속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이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형태가 다른 사랑을 하는 것뿐인데. 보편적이지 않다고 하여,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의 스킨십이 발목을 잡는다는 것이 못내 속상했다.
희찬의 턱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투명한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탁자 위로 툭툭 떨어졌다. 희찬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주먹을 말아 쥔 채로 서글픈 눈물을 흘렸다.
“네가 할 수 있는 게 있긴 있어.”
그래도 아주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대표의 말에 희망을 머금은 희찬이 어렵사리 눈을 들어 대표를 바라봤다.
“어떤…….”
그냥 뭐든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기사를 막든, 위약금을 내든, 어떻게든 이 사건을 해결하고 싶었다.
“스폰 뛰어. 너 돈 없잖아, 희찬아.”
하지만 이런 방법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괜찮은 척, 혼란스러운 머리를 제쳐 두고, 볕들 구멍이 있을 거라고, 최대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침착하게 머리를 굴리던 희찬이 대표의 말 한마디에 무너졌다.
스폰, 스폰이라니…….
희찬이 제 얼굴을 두 손바닥에 묻었다.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내리는 눈물을 닦아 내지도 못하고 거친 호흡을 거듭했다.
혐오스러운 와중에 원망스러운 것은 대표의 제안에 흔들리는 자신이었다. 분명 포스트잇에 적힌 금액은 쉽게 벌 수 없는 돈이었고, 그깟 스폰 몇 번에 이 빚이 해결된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희찬의 머리를 스쳤다.
이윽고 소름이 끼쳤다.
“흑…….”
기어코 희찬의 입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예전 같았으면 그 제안을 염두에 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기사가 터지건 말건, 고민도 하지 않았을 터였다. 도준과 연애하는 것이 사실이고, 우리의 연애가 동성애인 것도 사실이니 쿨하고 의연하게 넘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니, 달라졌다. 희찬은 성공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의 목전에서, 도준과 성공을 저울질하는 자신의 태도가 지독하게 경멸스러웠다. 열심과 성실을 무기 삼아, 꾀부리지 말고 미련하게 해 보자던 패기는 다 어디로 갔을까. 항상 이도준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던 마음은 또 어디로 갔을까.
나쁜 것을 먼저 배워 사랑하는 사람을 지우고, 지름길로 가려는 자신의 모습을 마주한 희찬은 도무지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이도준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의외로 우직하고, 강단 있는 그 성격에 기사가 터져도 괜찮다고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비교되어 가슴이 아팠다.
이런 상황의 너라면 당당하게 ‘우리 사귀는 게 어때서요.’라고 했을 것 같아서, 나는 그런 말을 하지 못하는 게 그렇게 속이 상했다.
*
희찬이 우는 모습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제법 곤욕스러운 일이다. 도준은 울먹거리는 희찬이 힘겹게 털어놓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희찬이 겪는 혼란스러움이나 스스로를 향한 경멸, 또는 자책과 죄책감들이 도준에게 생생하게 와닿았다. 그래서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얼마나 놀랐을까. 하루하루 팔랑거리며 미래를 그리기 바빴던 희찬인데, 예상치 못한 상황에 좌절하고 앞날을 포기하는 건 아닐까. 그런 걱정이 도사려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도준은 그저 큼직한 손으로 희찬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도준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나 기사 터지는 거 싫어, 도준아…….”
이해한다.
희찬의 간절한 목소리에 가슴이 시큰거렸다. 하지만 도준은 그저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 마시면서 천천히 얘기해.”
도준이 조급해 보이는 희찬에게 물을 건네었다. 이마저도 다정한 도준의 모습에 희찬이 또 한 번 왈칵 눈물을 쏟아 냈다.
착해 빠진 이도준은 ‘기사 터지는 게 싫다.’라는 희찬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다 알면서도 오로지 희찬만을 위했다. 희찬은 그런 도준의 모습이 사무치게 아팠다.
자신을 숨기겠다는 애인 앞에서, 그저 웃어야만 하는 저 속은 또 얼마나 문드러질까. 그렇지 않아도 힘든 우리에게 왜 이런 일까지 일어나는 걸까.
희찬이 눈물도 닦지 못하고 우는 동안 도준이 저벅저벅 발을 놀렸다. 도준의 표정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이런 상처쯤이야, 이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그의 태도가 희찬의 가슴에 아로새겨졌다.
휴지를 들고 와 정성스레 희찬의 얼굴을 닦아 줄 때도, 희찬의 부들부들 떨리는 손에 휴지를 쥐여 줄 때도. 도준은 그저 지독하게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마치 애초에 행복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구는 모습이 참 의젓하고, 괴로워 보였다.
나를 배려하는 것이 일상이 된 이도준은 이 순간에도 나를 최우선에 뒀다.
희찬은 성공과 사랑을 저울에 올려 두고 저울질하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모습이 마냥 하얗기만 한 도준의 모습 앞에 부끄러워졌다.
100년 된 느티나무처럼, 오롯하게 제자리를 지키며 변하지 않는 면모를 보이는 도준과 달리 자신만 속물이 되어 가는 것 같아 비참했다. 그래서 괜히 도준에게 화가 났다.
“도준아. 울고 싶으면 울어, 제발. 그렇게 아득바득 참지 말고, 같이 울어, 그냥……. 어?”
“…….”
“하나도 안 괜찮잖아, 너 지금 속이 문드러질 거 아냐……. 내가 너를 숨기겠다는데, 그게 어떻게 괜찮아…….”
정곡을 찌르는 희찬의 말에 도준의 울대가 울렁거렸다. 턱관절이 빳빳하게 당기는 것이 금세라도 울 것 같았다.
도준은 그저 희찬을 품에 안았다. 화가 나 미칠 것 같았지만, 화를 낼 수 없었다. 자신을 뒤로 제쳐 두고, 보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겠다는 희찬의 말에 속이 상했지만, 떼를 쓰며 울 수도 없었다.
도준은 그저 희찬이 잘못되는 것이 싫었다. 손가락질당하는 것도 싫고, 동성애자라는 색안경 때문에 가진 재능을 다 펼쳐 보기도 전에 어둡고 축축한 우물 안에 갇히는 것도 싫었다.
스폰 제안을 듣고 혹했다며 스스로를 질책하고, 가진 게 없어도 열심히 하면 누군가 알아줄 줄 알았다고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희찬에게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그깟 스폰 몇 번 할까 싶다가, 그래도 그건 너무 싫다며 괴로워하는 희찬 앞에서 마냥 어린아이처럼 ‘나도 속상하다’며 울 수는 없었다.
도준은 마음 같아서는 희찬의 회사 대표를 찾아가 성질대로 골을 부리고 싶었다. 잘못된 계약이니 물리라고 하고 싶었고, 위약금 그깟 거 내가 벌어다 주겠다고 호언장담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도준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가혹한 현실은 도준의 참담함을 일깨웠다. 가진 것이 없어도 희찬만 있으면 다 된다고 생각하고 살아온 지난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세상은 도준에게 가진 것을 모두 내놓아라, 요구했다.
턱 끝까지 숨통을 조이고 드는 각박한 현실에 숨이 턱 막혔다. 도준의 눈이 천장을 향했다. 누리끼리한 형광등 불빛 아래 흩어지는 빛을 바라보다가 얕은 숨을 쉬며 희찬을 으스러질 듯이 세게 안았다.
“희찬아.”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드디어 도준이 입을 뗐다. 도준의 품에 안겨 도준의 말을 기다리던 희찬이 당장 고개를 쳐들고 그를 바라봤다. 희찬을 내려다보는 도준의 눈빛은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오롯한 사랑만 담은 검은 눈동자에 희찬이 다시 눈물을 머금었다.
도준의 손이 희찬의 팔을 쓰다듬고,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의 어른스러운 손길에서는 너그러움과 인자함이 묻어났다.
“장희찬.”
“응…….”
도준의 부드러운 음성을 듣다 보니 안정이 몰려왔다. 희찬의 몸이 축 늘어졌다. 도준이 두 손으로 희찬의 얼굴을 그러쥐었다. 산이 올라 새빨갛게 부은 희찬의 예쁜 눈이 안쓰럽다. 도준이 희찬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방금까지 눈물을 흘렸던 희찬의 눈두덩에서 짭짤한 맛이 느껴졌다.
“나, 너 원망 안 해.”
도준은 희찬이 안정을 느낄 만한 말을 해 주었다. 애초에 키스는 같이한 것이고, 거대한 자본 앞에 무너져, 느끼지 않아도 될 죄책감에 힘겨워하는 희찬을 구해 주고 싶었다.
“흐윽, 끅…….”
“내가 어떻게 널 원망해. 나 숨겨도 괜찮아, 근데 스폰은 하지 마.”
“아니, 아……. 끄흡, 아흑.”
“돈은 내가 어떻게든 벌어 볼게, 희찬아. 스폰…… 하지 마.”
희찬의 입에서 이전보다 훨씬 큰 울음이 터져 흘렀다. 어린아이처럼 소매 끝으로 눈물을 닦아 내던 희찬이 결국 도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원망하지 않는다는 말이 왜 그렇게 무거울까. 다 괜찮지만, 스폰만은 하지 말라는 말이 왜 그렇게 처절할까. 감히 벌어 보겠다는 말도 나오지 않는 액수 앞에 자신이 해 보겠다는 저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이제는 주체할 수 없이 울음이 터져 흘렀다. 도준은 그저 아까와 같이 희찬을 토닥토닥 달래었다.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전보다 손에 힘이 더 실렸다는 정도, 그뿐이었다.
“희찬아, 내 꿈은…… 너야.”
“흡, 하윽.”
“네가 그랬지. 걷다 보면 수월한 길이 나올 때도 있고, 좀 벅찬 길이 나올 때도 있다고. 근데 그냥, 항상 걷던 대로 성실하게 열심히 걷다 보면 언젠가는 꼭 우리가 원하는 지점에 다다른다고.”
“응, 응. 끅, 응…….”
“네가 원한다면 돌아가도 괜찮고, 쉬었다가 가도 괜찮아. 조급할 거 없지, 그치, 희찬아.”
“흑, 으응.”
맞다, 도준이 말이 다 맞다.
희찬은 말을 덧붙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희찬의 얼굴을 도준이 소중한 보석 쥐듯 감싸 쥐었다. 여전히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눈물짓는 희찬이었지만, 가쁜 숨을 헐떡이며 뜨거운 호흡을 거듭하는 그였지만, 그 모든 모습이 못내 사랑스러웠다.
도준의 새까만 눈동자가 희찬의 가지런한 눈썹, 크고 맑은 눈, 잘생긴 콧대, 우뚝 솟은 콧등, 새빨갛고 예쁜 입술을 차례로 훑었다. 어디 하나 빼놓지 않고 빼어난 것이 감동적이었다.
도준이 싱긋 웃으며 희찬의 볼에 입을 맞췄다. 부르튼 희찬의 입술을 제 입으로 머금고 따뜻하게 핥았다가, 놓아주며 콧잔등을 비볐다.
“나는…… 내 꿈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볼 테니까, 너도 네 꿈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
“내 걱정 하지 말고, 내 생각 하지 말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해, 희찬아.”
잠잠해진 듯했던 희찬이 다시 큰 울음을 터뜨렸다.
이도준의 숭고한 사랑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도준의 절대적인 신뢰가, 무조건적인 사랑이, 감히 자신을 두고 ‘꿈’이라 말하는 고결한 소망이 그렇게 사무쳤다.
희찬은 치솟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터뜨리고 도준의 손을 꼭 잡아 쥔 채로 전신을 바들바들 떨었다.
눈물이 목구멍을 막고 숨통을 옥죄는 것 같았다. 덕분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고맙다든가, 사랑한다는 대답을 들려주고 싶었는데, 꽉 막힌 목구멍에서는 어떤 소리도 새어 나가지 않았다.
그 후로 두 사람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도준의 품에 안겨 울다 그치기를 반복하던 희찬이 잠들었고, 도준은 희찬을 조심스레 침대에 눕혔다.
“나한테라도 부모가 있었으면 우리가 덜 힘들었을까.”
집 안에 도사린 적막을 깬 것은 꾹 참았던 도준의 원망 어린 목소리였다. 도준에게 부모란 애초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부모를 원망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부모가 없다는 사실마저 미안하기만 했기에 그들이 한없이 원망스럽다.
부모가 있었다면 사정을 털어놓고 도움을 청해 볼 수 있었을 텐데. 동성애를 반대하건, 연기를 반대하건. 아무튼 무언가를 반대하는 보수적인 부모라고 하더라도 그들 앞에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가며 ‘제발 도와주세요.’라고 말 한마디라도 해 볼 수 있었을 텐데.
도준은 주변에 그런 도움 청할 어른이 하나 없다는 이 가혹한 현실이 새삼스레 서글퍼졌다. 그러게, 참 새삼스럽다. 언제라고 순탄하게 살았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도준이 열이 잔뜩 오른 희찬의 눈가를 매만졌다. 그러다 손바닥을 희찬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추운 날씨에 그렇게 울어 댔는데 혹시 감기라도 든 건 아닐까, 걱정하는 마음이었다.
도준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희찬의 앞머리를 만졌다. 부드럽게 쓸려 올라가던 앞머리가 민들레 홀씨 모양으로 피었다가 가지런히 내려오길 반복했다.
보면 볼수록 마음 아픈 희찬의 모습에 도준이 쓴 침을 삼켰다.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에 한탄이 절로 나왔다. 그럼에도 사랑해서 지켜 주고만 싶은 희찬 앞에 결국 눈물이 흘렀다.
“나는 배우 못 해도 괜찮아, 희찬아.”
볼품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도준의 진심을 품었다.
좋아하는 거 하나쯤 포기하고, 꿈을 지킬 수 있다면 그건 엄청나게 남는 장사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더니 이 슬프고 아픈 와중에도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그냥 내 꿈만 지키고 싶어.”
이것이 오롯한 진심이었으므로, 도준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내 존재가 네 앞길을 막는다면, 나는 언제고 기꺼이 비켜 줄 수 있으니 너는 쭉쭉 나아가길, 그것 하나만을 간절히 바라.
“그러니까, 나는 너만 괜찮으면 다 괜찮아.”
스르르 몸을 누인 도준이 희찬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어쩐지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애써 감추고, 입술 틈으로 비집고 흐르려는 울음을 억지로 삼켰다.
너를 위해서는 어두운 그림자도 기껍다. 네가 밝은 곳에서 찬란한 빛을 낼 수 있다면, 어두운 공간을 지키며 너를 비추는 것쯤이야, 아무런 아픔도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지금 이 일도 내가 어떻게든 해결해 보겠노라고, 그런 다짐을 무수히 곱씹었다.
지난밤 원 없이 운 탓일까. 희찬이 개운한 얼굴로 눈을 떴다. 항상 도준이 깨워야만 눈을 뜨곤 했는데, 먼저 번뜩 눈을 뜬 것은 희찬 본인도 낯선 일이었다.
희찬이 일찍 일어난 것에 반해 웬일로 도준이 늦잠을 잤다. 희찬의 손이 도준의 볼을 주무르자, 도준이 인상을 바짝 찌푸렸다. 도무지 눈을 뜨기가 어렵다는 것처럼, 눈을 감은
희찬이 검지와 중지로 도준의 미간을 꾹 눌렀다. 손가락을 벌려 양옆의 잘생긴 눈썹을 쓰다듬었다. 눈썹을 누른 채로 손가락을 아래로 내렸다. 도준의 기다란 속눈썹이 손가락에 닿아 간질거렸다.
“이도준, 일어나.”
“……나 어제 너무 늦게 잤어.”
도준이 희찬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희찬의 탄탄한 가슴 근육 사이에 콧등을 비비다가 머리를 들어 목덜미를 입술로 머금자, 희찬의 입에서 가지런한 웃음이 흘렀다.
“싱숭생숭했구나.”
“응…….”
쩍 갈라지는 도준의 목소리가 안쓰럽다. 희찬이 미안함을 담아 도준의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어젯밤 도준은 도무지 잘 수 없었다. 조심할 걸 그랬다는 생각과 희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자괴감에 머릿속이 복잡한 탓에 결국 해가 뜨는 것을 본 후에야 겨우겨우 눈을 붙이고 잠들었다. 그리고 꿈에서조차 숨통이 죄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집요하게 눈꺼풀을 매만지는 희찬의 손길에 도준이 억지로 눈을 떴다. 건조하게 말라붙은 눈자위가 시큰거렸다. 도준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뜨길 반복했다. 도준의 또렷한 눈동자 주변으로 빨간 핏발이 섰다. 그 역시 못내 미안한 희찬이었기에 도준의 눈꺼풀에 정성스레 입을 맞췄다.
“그래도 나는 기분 좀 괜찮아졌어.”
“그랬어?”
“응, 어제 울어서 풀렸나 봐.”
“다행이다.”
도준이 희찬의 입술을 물었다. 희찬이 개운한 목소리로 전하는 말대로 희찬의 표정에 안정이 서려 있었다. 지난밤, 자신을 끝없이 책망하고, 괴로워하던 도준의 마음도 한결 편안해졌다.
서로의 불우함을 위로하고, 의젓하게 상황을 대할 줄 아는 두 사람에게 찾아온 안정은 실로 대단한 힘을 지녔다.
물론, 여전히 떠오르는 해결책은 없다.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방안을 찾아보면 어떻게든 최선이라 말할 만한 좋은 해결책이 나오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가 생겼다.
도준은 뜨겁게 타오르는 머리와 반대로 차갑게 식는 가슴을 느꼈다. 어제는 그저 감정적으로 울기 바빴다면, 오늘은 감정은 제쳐 두고, 이성적으로 상황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 회사에 가 볼 거야?”
“응, 피하기만 할 수도 없잖아.”
희찬은 지난날, 잠시나마 도준을 숨기려 했던 것에 사죄하는 마음으로 이 모든 일을 자신이 해결하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기사가 터지도록 둘 수는 없었다. 같은 꿈을 꾸는 도준이었고, 그 기사가 훗날 도준의 발목을 잡을지도 모를 일이니, 그저 어떻게든 해결했으니, 도준을 감춘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은 잠시 미뤄 두려 했다.
“오, 장희찬. 용감한데.”
“나한테는 이도준이 있잖아.”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의 돈을, 그것도 자신이 갚아야 할 이유도 없는 돈을 선뜻 벌어 보겠다고 나서는 이도준 앞에 희찬이 못 할 것은 없었다.
희찬이 싱긋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화사한 낯이 휘어지며 윙크를 하는 순간 온 세상에 환해졌다. 특유의 맑은 매력을 한껏 발산하는 장희찬을 보는 것은 정말로 짜릿한 일이었다. 도준이 푸근한 이불 속에서 몸을 말아 누운 채로 희열을 느꼈다.
“도준아, 계속 내 옆에 있을 거지.”
“내가 어딜 가, 네 옆이 아니면 있을 곳도 없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옆에 있어, 알겠지.”
“응.”
여전히 희찬의 품에 안긴 채로 뭉그적거리는 도준이었지만, 그의 대답에서는 희찬과 같은 단단한 의지가 묻어났다. 그에 희찬은 한 끼 잘 챙겨 먹은 것처럼 속이 든든해지는 것을 느꼈다.
도준은 도무지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도준은 눈을 가까스로 뜨고서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는 희찬의 뒤꽁무니를 쫓았다. 희찬의 손짓, 발짓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어제의 무기력은 다 어디로 갔는지, 사뭇 다른 모습에 도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희찬아.”
“응?”
“너 멋있다.”
그래, 장희찬은 멋있다. 지금의 장희찬은 자신이 가진 빛을 한껏 발산하며 세상을 매료시킬 준비를 마친, 완벽하게 멋있는 모습이었다. 역시 사람은 자신에게 확신이 생겼을 때 가장 멋진 빛을 내기 마련이다.
앞으로의 날들에 기대가 얹혔다. 저렇게 찬란한 빛을 내는 희찬과 함께 걸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콩닥거렸다.
도준이 큰 숨을 들이켰다가 다시 뱉었다. 들이켰던 숨이 뿜어져 나올 때는 잔잔한 떨림이 함께였다.
나갈 준비를 마친 희찬이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자신의 매무시를 살폈다. 그러다 홱 몸을 돌려 도준을 바라봤다. 낮은 매트리스에 누워 애벌레처럼 이불을 말아 덮은 도준의 눈이 희찬에게 향했다.
“준아.”
“응?”
“안 그럴 거 아는데, 그래도 혹시나 해서.”
사뭇 진지한 희찬의 모습에 도준이 눈을 끔뻑거렸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진지한 눈을 뜨는 걸까.
“뭐가?”
“우리 사진 찍힌 거 네 탓 아니야. 조심할 걸 그랬다, 뭐 그런 거. 자책하지 마.”
희찬의 말을 듣는 순간 도준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지난밤,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도준을 괴롭혔던 생각이 희찬의 말 한마디에 모조리 사라졌다.
이내 도준이 벌떡 몸을 일으켜 뚜벅뚜벅 희찬에게 향했다. 도준의 건장한 체격과 떡 벌어진 어깨가 희찬의 눈을 홀렸다. 희찬이 만족하는 눈으로 도준의 몸을 훑었다. 길고 곧게 뻗은 다리는 도준이 움직일 때마다 쩍 갈라진 근육이 탐스럽게 요동쳤다. 예쁘게 자리한 가슴 근육과 그 아래로 갈래갈래 조각난 탄탄한 복근이 화려하다 생각될 지경이었다.
희찬에게 다가온 도준이 제 몸의 모든 부분을 이용해 희찬을 끌어안았다. 어디 하나 닿지 않는 부분이 없도록, 온 힘을 다해 사랑을 전했다.
“잘 갔다 와. 무서워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와.”
“응!”
사랑하는 사람이 전하는 응원에는 지대한 힘이 있다. 방금까지만 해도 떨리는 호흡을 숨기던 희찬이 도준의 작지만, 세상에서 가장 큰 응원에 샘솟는 용기를 느끼고 힘찬 걸음을 내디뎠다.
희찬은 회사로 가는 동안에는 내내 생각을 가다듬고 말을 정리했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논리정연하게 정리한 후에는 입으로 혼잣말을 읊조렸다. 조금이라도 빼놓지 않기 위함이었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의사를 전하고자 함이었다.
호기롭게 회사에 도착한 희찬이 곧장 대표의 사무실로 발을 놀렸다. 사무실 분위기가 어제보다는 많이 풀어져 있었다. 어제는 날카롭기만 하던 시선들이 유한 웃음으로 변한 것에 희찬의 마음도 편안해졌다.
“그래서, 이번에 기사 막아 주면 앞으로 1년 동안 네가 가져갈 정산금을 안 받고 일하겠다고?”
희찬이 대표에게 제안한 것은 도준이 힘주어 ‘하지 말라’고 말했던 스폰 대신, 앞으로의 정산에서 제 몫을 줄여 받겠다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은 기자에게 입금할 돈도, 광고나 드라마 계약에 대한 위약금을 낼 돈도 없었으니 먼저 해결해 주면, 앞으로 1년간은 거의 무보수로 일을 하겠다고 했다.
희찬이 계산했을 때는 대표에게 절대 손해 볼 장사가 아니었다. 드라마 회차당 받는 출연료라든가, 광고 계약금만 해도 일단 기자가 부른 금액보다 큰돈이었으니 말이다.
대표는 오래간 아무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듣길 바라는 희찬이 초조한 눈으로 대표를 바라봤다. 두 손을 모아 쥐고 턱을 괸 채로 무언가를 곰곰이 고민하는 듯했던 대표가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앗싸, 희찬은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쾌재를 겨우겨우 눌러 참았다. 희찬의 얼굴 가득 승리의 미소가 떠올랐다.
“앞으로 1년. 정산 비율은 9:1로 조정해. 계약서는 다시 보내 줄게. 그래도 밥은 먹고 살아야지, 너.”
“네.”
없는 돈도 다 뺏어 가는 주제에, 선심 쓰듯 얘기하는 대표의 태도에 짜증이 치솟았다. 하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희찬은 자신이 을 중의 을이라는 것을 이번 일을 통해 뼈저리게 깨달았고, 비뚤게 행동해 봐야 좋을 것 하나 없다는 사실도 완벽하게 깨달았다.
긴장이 풀리니 빳빳했던 몸도 편안하게 늘어졌다. 희찬은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저도 모르게 얕은 숨을 쉬었다. 그를 가만히 지켜보던 대표도 몸을 편안하게 등받이에 기대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매섭게 희찬을 쏘아보는 중이었다.
“이왕이면 헤어지지?”
아량을 베푸는 척, 재수 없게 구는 대표의 태도를 그냥 넘기는 데에도 정도가 있다. 대표가 도준을 언급하기 무섭게 희찬이 눈을 매섭게 치켜뜨고 그를 바라봤다.
“걔는 네 앞길에 걸림돌밖에 안 돼.”
이도준이 나를 위해 어떤 결정까지 했는데.
그를 두고 감히 ‘걸림돌’이라 표현하는 대표의 말에 희찬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별안간 심장이 쿵쿵 거칠게 뛰었다. 해결했다고 생각한 문제와 별개로 이도준을 두고 함부로 말하는 대표의 언행을 참을 수 없었다.
“도준이 걸림돌 아니에요.”
“희찬아, 지금 봐. 네가 뭘 할 수 있니? 그 얄팍한 사랑 지키려고 네가 할 수 있는 게 뭐냔 말이야. 너는 걔를 지킬 능력이 없잖니, 그럼 그건 걸림돌이야. 정작 너도 걔를 걸림돌이라고 생각해서 기사 막으려는 거 아니니?”
희찬이 이를 부득 씹어 물었다.
얄팍한 사랑이라니. 감히 그 누구도 우리의 감정을 두고 ‘얄팍하다’고 평가할 자격은 없다.
서로에게 가장 헌신적인 두 사람이었고, 상대를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희생도 기꺼운 것을 두고 쉽게 얘기하는 대표의 말에 가슴에 불덩이가 앉는 것 같았다.
“희찬아, 네가 남들이랑 다른 거 같니?”
“…….”
“아주 특출난 재능이 있는 거 같니? 있어, 재능. 근데 있으면 뭐 하겠니, 가진 게 없는데. 이 바닥도 다 가진 게 있어야 살아남는 거란다.”
자칫 다정하다 생각할 목소리로 사람을 찍어 누르며 있는 자존심, 없는 자존심 다 뭉개 버리는 대표 앞에 희찬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대표의 말은 요목조목 다 맞는 말인 것 같았다. ‘가진 것 없이 재능만 있는 네가 할 수 있는 게 뭐냐.’는라는 대표의 매정한 말이 희찬의 가슴을 후벼 팠다.
“이런 일이 다시 없을 거라는 보장 있니? 또 벌어지면, 그때는 어떡할래? 너 매번 이렇게 빚지고 갚는 식으로 일할 거니?”
“……”
“일단, 이번 일은 이렇게 넘어가는데 잘 생각해.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단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무조건 쫓아올 거 같니? 그게 따라 주면 사람들이 편법 같은 걸 왜 쓰겠어?”
“…….”
“유도리 있게 살아, 희찬아.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지. 나 잘되자고 하는 말 아니잖니.”
유도리는 시발…….
언제부터 인생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에 우선순위를 매기고, 순위가 떨어지는 것은 과감히 버리는 것을 두고 유도리라고 칭했던가.
그래, 설령 그런 걸 ‘유도리’라 칭한다 쳐도 이도준을 두고 타협하라 말하는 대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도준과 성공을 두고 저울질을 해 댄 것에 미안함을 느끼던 차였다. 대표의 말마따나 이도준을 감추려 드는 자신의 행동에 엄청나게 자괴감을 느끼던 중이었다.
희찬은 끝끝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긍정도, 부정도 말이다. 언젠가 모두의 앞에 성공한 사람이 되었을 때, 대표의 말을 당차게 부정할 수 있는 날 제대로 된 ‘부정의 답’을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체념은커녕,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이도준을 지키고, 나를 지키고. 그렇게 살아내 보겠노라고.
이도준과 장희찬이 가진 것은 모두가 칭찬하는 성실함, 열정 그리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타고난 피지컬과 외모. 게다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내 편인 서로였다.
희찬은 다들 열심히 하면 된다고 말하고 응원해 줄 때, 유일하게 초를 치는 작은 소리에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
사무실 밖으로 나온 희찬이 회사 건물을 향해 곧은 중지를 치켜들었다.
엿이나 처먹어.
“가진 거 없어도 잘 할 수 있다고, 내가 그랬고, 이도준이 그랬다.”
이도준이랑 나란히 보란 듯이 성공해서, 나를 무시했던 그 눈을 비웃어 줄 거라고, 가슴 깊숙이 다짐을 되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