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 등대 (9/18)

07. 등대

희찬은 도준에게 회사에서 무슨 얘기를 어떻게 하고 왔는지는 전하지 않았다. 그저 잘 해결되었다고 말했고, 앞으로 일을 하는 데에도 문제가 없다고만 전했다.

그러면 되었다. 도준은 정말 그걸로 만족했다.

회사와 대화를 마친 희찬은 이전의 생기를 오롯이 찾은 모습이었다. 희찬은 지난 며칠 바짝 기죽어 지내던 것을 모두 털어 내고, 최근 며칠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 활발하게 생활하는 중이었다. 그 모습은 실로 멋있었고, 근사했으며, 찬란했다.

희찬의 드라마 촬영도 무사히 진행되었다. 자칫 잘릴 뻔한 위기를 넘겨서일까. 희찬은 전보다 더 의욕적으로 촬영 준비에 임했다. 두 사람에게는 아주 기나긴 시간이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고작 며칠이었던 그 시간 동안 희찬과 도준은 또 성장했다.

“내일이면 촬영가겠네.”

“응. 나 이제 기 안 죽어, 알지?”

“그래, 그게 장희찬이지. 너다울 때 제일 멋있어.”

“어디 내가 주눅 드나 봐라.”

그사이 희찬의 휴가도 끝이 났다. 해외 촬영을 마치고 돌아온 촬영팀의 소식을 전해 들은 매니저에게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준이 희찬의 신발을 사 줄 날도 차차 다가오는 중이었다. 희찬이 자신의 페이스를 되찾는 동안 도준은 싱숭생숭한 마음을 공사장에서 달래었다. 바쁘게 움직이며 고된 노동을 하다 보면 마음을 짓누르는 무거운 생각도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열심히 일하는 만큼 두둑하게 돌아오는 일급이 반가웠다. 차곡차곡 모아 둔 돈이 액수를 불리면 불릴수록 도준의 마음도 부풀었다. 도준은 올겨울이 가기 전에 꼭 좋은 신발을 사 신기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희찬이 촬영장에서 자신의 빛을 맘껏 뽐내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스케줄을 통보받고 준비하는 희찬의 몸짓이 즐겁다. 도준은 바쁘게 움직이는 희찬의 꽁무니를 분주하게 쫓았다.

“짠. 예뻐?”

“응, 예쁘다.”

나갈 준비를 마친 희찬이 ‘짠’하고 도준 앞에 섰다. 마치 유치원 등원 준비를 마친 아이가 부모에게 마지막 점검을 받는 듯한 모양새에 도준이 싱그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추운 날씨에 걸맞게 따뜻하게 옷을 차려입고, 예쁘게 머리를 만진 희찬의 모습이 더없이 화사했다. 마침 바깥에 햇빛도 예쁘게 내려오는 중이었으니, 오늘 장희찬은 누구보다 화려할 테다.

도준이 손에 쥔 목도리를 희찬의 목에 둘러 주었다. 채도가 높은 목도리가 더없이 잘 어울렸다.

도준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희찬의 볼을 거머쥐었다. 희찬은 기다렸다는 듯이 입술을 쭉 내밀었다. 도준이 싱긋 웃으며 마중 나온 빨간 입술에 입을 맞췄다.

“이따 봐!”

“응, 조심히 갔다 와.”

희찬이 벗어난 집 안에 희찬 대신 따스한 온기가 남았다. 작은 창을 넘어 들어온 햇볕에 공기 중의 먼지가 거니는 것이 보였다. 도준이 저도 모르게 떨리는 숨을 깊이 쉬었다.

이렇게 또 한 번의 풍파를 이겨 냈다. 처음 딛는 발이라, 모든 것이 어렵고 새로운 일이라, 여전히 벅차고 어안이 벙벙했다. 그래도 거친 파도는 넘었으니, 이제는 조금 잔잔한 물결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노를 젓다 보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높은 파도겠지만, 그래도 한 번 이겨 낸 경험이 두 번째 파도를 이겨 내는 큰 밑거름이 될 거라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방 안을 내리쬐는 태양 빛이 따스하다. 도준은 기분 좋게 창문을 열고 상쾌한 바람과 청명한 햇살을 집에 들였다.

도준은 책장 한쪽에 고이 넣어 둔 대본을 쥐었다.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희찬을 보며 꿈의 크기가 점점 부풀었다. 남들이 하는 만큼 시간을 들이지 못할 거라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일을 나가지 않을 때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껴 대본을 읽어 보고, 캐릭터의 감정을 헤아리고, 주변 상황을 떠올려 보는 것이라도 해야 했다.

눈을 감고 대사를 곱씹는 도준의 머릿속에 분주하고 또 설레는 촬영장의 풍경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그것은 상상만 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설렘이 몰려와 가슴이 두근거렸다. 카메라 앞에서 감독의 신호를 받으며 자신만의 연기를 하는 배우들을 떠올렸다. 조바심이 생겼다. 조바심은 곧 추진력이 되어 도준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촬영장에 간다고 할 걸 그랬나…….”

턱을 괴고 대본을 팔랑거리던 도준이 얕은 숨을 쉬었다. 배역이 없어도 촬영장에 가면 항상 따뜻하게 맞아 주는 감독님이 있었고, 감독님은 다른 단역들이 대기하는 시간에도 도준을 불러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주연 배우들의 연기를 보게 해 주곤 했으니 말이다.

입술을 말아 문 채로 입꼬리를 씰룩거려 봤지만, 이미 늦었다.

“다음 주에는 촬영장에 가야지.”

의지를 다진 도준이 입술을 부르르 털었다. 이윽고 자세를 고쳐 앉은 도준은 다시 대본에 집중했다.

철컹, 쾅―.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본을 읊고, 발음을 연습하던 도준의 귀에 철문 소리가 들렸다. 그에 도준의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희찬이 나간 것은 고작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게다가 희찬이라면 대문을 열고 들어올 때부터 제 이름을 불러 젖힐 테니, 저벅저벅 걷는 걸음 소리는 희찬의 것이 아니었다.

쾅쾅.

묵직한 주먹이 집 문을 두드렸다. 얇은 유리와 철로 이루어진 문이 볼품없이 흔들렸다. 불투명한 유리 너머로 커다란 덩치가 보였다.

이 집에서 희찬과 둘이 지내며 다른 사람이 찾아오는 일은 드물었다. 간혹 동네 어른들이 인심을 베풀기 위해 찾아오는 것 말고는 절대로 없는 발길이었기에 더욱 이상했다. 도준이 식탁에서 일어나 의아한 걸음을 옮겼다.

“누구세요.”

“이도준 씨, 계십니까.”

도준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생전 처음 듣는 남성의 목소리였고, 그 음성은 곱지 않았다. 도준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문을 열었다. 문 너머에는 중후한 남성이 언뜻 봐도 비싼 정장을 차려입고 거만하게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서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의 행색을 훑어본 도준이 다시 남자를 바라봤다. 적어도 40대 초반, 많아 봐야 4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는 안경을 통해 도준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중이었다.

“제가 이도준인데요.”

“잘생겼네.”

“네?”

대뜸 저를 평가하는 남자의 말에 도준이 못마땅한 심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찾아와서 한다는 말에는 예의라거나 존중이 조금도 묻어나지 않았다.

도준이 날카로운 눈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돈을 처바른 행색에 절로 작아지는 것은 애써 무시했다. 남자가 불현듯 크게 웃었다. 팍 터지는 웃음은 대체로 도준을 향한 비웃음이었다.

도준은 울대가 울렁거릴 정도로 크게 침을 삼키고, 지지 않는 매서운 표정으로 상대를 마주했다.

“눈빛이 장희찬이랑 똑같아.”

“누구시냐고요.”

도준이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다. 매너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남자의 입에서 희찬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사람을 존중할 줄 모르고 다짜고짜 반말이나 지껄이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나이 대에 비해 키가 크고, 눈빛이 날카로운 남자는 마냥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도준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삐딱하게 서서 남자를 대했다. 남자의 날카로운 눈이 도준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패기도 있고.”

남자는 끝까지 도준의 질문에 이렇다 할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답답함은 물론, 성가심까지 느낀 도준이 귀찮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남자가 검지와 중지 사이에 작은 종이 한 장을 끼워 도준에게 건넸다.

R 엔터테인먼트 대표 전 광 진

남자가 건넨 것은 명함이었다. 찬찬히 명함을 읽던 도준의 눈이 크게 뜨였다. 희찬의 회사 대표였다. 그러니까, 얼마 전에 희찬을 수렁에 밀어 넣고 기어코 울려 보냈던 그 대표였다.

도준의 눈썹이 다시 일렁거렸다. 희찬의 말로는 모든 것이 잘 끝났다고 했는데, 여기까지 찾아온 저의는 무엇일까. 도준으로서는 남자의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희찬이 지금 없는데요.”

“내가 소속 배우 스케줄 하나 안 알아보고 이 후진 곳까지 온 것 같니?”

아, 진짜 희찬이네 대표만 아니었어도.

도준의 가슴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제는 아예 대놓고 자신들의 처지를 무시하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남자의 행동에 울화가 치밀었다.

도준은 희찬을 생각하며 가슴에 참을 인(忍)을 새겼다. 희찬이 회사와 대화를 끝낸 것은 며칠 되지 않는 일이고, 지금은 데뷔작도 방영되지 않는 시기인데다가, 희찬은 이제 막 걸음을 떼기 시작한 신인이었다. 그러니 희찬을 생각해서라도 그저 성격을 죽이고 꾹 참아야 했다.

“무슨 일이세요, 여기까지.”

“손님이 왔는데 이렇게 세워 두고 얘기하는 게 예의니?”

예의는 무슨, 시발. 엿이나 처먹어.

“아, 들어오세요.”

도준은 치미는 욕지거리를 겨우겨우 삼키고 막아섰던 길을 텄다. 남자는 구둣발로 뚜벅뚜벅 집 안에 발을 들였다. 왠지 집에 있고 싶더라니, 이 남자를 직접 만나려고 그랬나 보다.

남자는 도준이 식탁 의자를 빼 주었음에도 한참이나 서서 두 사람의 공간을 차근차근 눈에 담았다. 가끔 미간을 좁히기도 하고, 깔보는 웃음을 짓기도 하는 것이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지만, 도준은 군말 없이 남자가 마실 차를 끓였다.

분명 잘 해결되었다고 했는데, 남자가 이곳까지 찾아온 연유가 궁금했다. 도준이 떨리는 숨을 가다듬고 남자를 쳐다봤다. 집 안을 다 훑어본 남자가 구둣발로 저벅저벅 걸어 식탁 앞에 앉았다. 그 앞에는 도준이 끓여 낸 희찬이 좋아하는 율무차가 모락모락 뜨거운 김을 뿜어내는 중이었다.

“희찬이랑 언제 헤어질 거지?”

“네?”

남자는 단도직입적이었다. 구태여 다른 말을 붙이지도 않았다. 목적이 분명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지독한 행동에 도준이 미간을 좁혔다.

“너희 사랑이 그렇게 고결하고 대단하다면, 서로 앞길을 막지는 말아야지 않겠니.”

“제가…… 희찬이 앞길을 막았습니까?”

“존재가 걸림돌이지. 동성 애인이 있다는데,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 아니겠니?”

한껏 날카롭기만 했던 도준의 눈빛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작아지는 것을 애써 숨기려던 노력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남자의 말은 그 정도로 힘이 있었다. 타인이 전하는 희찬에게 걸림돌이라는 말이 도준에게 안기는 타격은 대단했다.

도준이 살면서 단 한 가지 바라 온 것이 있다면, 적어도 장희찬의 앞날에 폐가 되지 않는 것. 장희찬의 옆에서 그가 빛이 날 수 있도록 빛을 비추는 사람이 되는 것. 내 꿈이 자신의 꿈을 거침없이 펼쳐 가는 것을 그저 지켜만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걸림돌이라니.

불현듯 자신을 숨기고 싶어 했던 희찬의 모습이 떠올랐다. ‘성공’이라는 희망을 목전에 두고, 동성애에 발목 잡혀, ‘기사가 터지길 바라지 않는다’며 목놓아 울던 희찬이었다. 그 행동을 이해한다고 치부하며, 시큰거리는 가슴을 무시했었지만, 역시 희찬의 말대로 도준은 괜찮지 않았다.

도준이 입술을 짓이겨 물었다.

“걔는 너만 없으면 더 좋은 곳에서 지낼 거고, 회사의 든든한 보호 아래에서 더 대단한 일들을 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벌써부터 이렇게 길이 막혀서야, 원.”

성가신 것을 쳐 내듯 툭툭 내뱉는 전광진의 말이 하나하나 도준의 가슴에 박혀 들었다.

회사에서 권한 도심의 좋은 오피스텔도 마다하고 집으로 돌아온 희찬이 떠올랐다. 해사한 미소를 짓는 그 얼굴이 끝내 도준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자신을 위해 이 시궁창 같은 집에서 지내겠다는 희찬의 선택이 그의 큰 희생이었다는 것을 다른 사람의 입으로 전해 듣고 보니 사무치도록 아팠다.

전광진의 말대로 희찬의 좋은 일에 걸리는 것은 단 하나. 이도준, 본인이었다.

도준의 동공이 크게 요동쳤다. 잔잔한 물결일 것이라고 생각한 바다에 그보다 더 큰 파도가 덮쳐 올 것만 같은 느낌은 왜일까. 도준이 떨리는 숨을 감추지 못했다. 탁자 아래 말아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남자를 향한 도준의 반감이나 반항은 모두 사라진 뒤였다. 도준이 가졌던 모든 원망의 화살이 다시 자신에게로 향했다.

도준은 일부러 더 눈에 힘을 주고 남자를 직시했다. 작아지는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 더욱 대담하게 행동했다. 하늘이 무너지고, 세상이 저를 등지는 듯했지만, 모두 네 탓이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남자 앞에 약점을 드러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건 치열하게 살아온 도준이 터득한 일종의 본능이었다. 도준은 떨리는 숨을 의연하게 가다듬었다.

“희찬이는, 잘 해결됐다고 하던데요.”

도준의 말에 남자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작게 터졌던 웃음이 이내 커다란 폭소로 뒤바뀌었다. 작은 집이 그 웃음소리에 뒤흔들리는 것 같았다. 귀여운 사랑으로 예쁘게 가꾼 공간이 오염되는 느낌이었다.

“그래, 그렇게 알고 있겠지.”

남자의 비아냥에 도준의 인상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나도 신인을 몰아붙이고 싶지는 않아. 근데 그게 도무지 해결이 어려워서 말이지.”

남자는 뜨거운 차를 한입 홀짝거리더니 찻잔을 내려놓고 날카로운 눈으로 도준을 쳐다봤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연예인들의 스캔들 기사가 있고, 또 수많은 소속사에서 그 기사를 막아 낸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데 남자는 그를 두고 ‘어렵다’고 말했다.

업계를 주름잡는 사람이라면서 해결이 어려울 이유가 뭘까, 차분하게 생각해 보려 했지만 도준의 마음속에서는 울컥울컥 감정이 치밀었다.

도준은 그게 왜인지 제 탓인 것만 같았다. 남자가 뱉는 음절 하나하나가 도준을 짓눌렀다. 가쁘게 떨리는 도준의 숨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은 이 일을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곧 희찬이 돌아올 거고, 해맑게 웃는 희찬의 얼굴에 다시 먹구름이 드리우는 것은 죽어도 싫었다. 도준은 무언가 결심한 듯 주먹을 꽉 말아 쥐고 남자를 쳐다봤다. 도준의 검은 두 눈에 굳은 의지가 드러났다.

“그럼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됩니까.”

죽어도 희찬이랑 헤어지지는 못할 테니, 그 외에 다른 것을 하고 싶었다. 희찬을 위해서라면 무어든 기꺼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당연히 남자가 제안하는 것은 뭐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람 인생이라는 게, 원래 그렇게 다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도 없다. 더군다나 도준이라면 더욱 그런 삶을 살아왔다. 이제껏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보다, 포기하는 삶을 살았다. 누리는 것보다 잃는 것에 더 가까운 인생이었으니 조금 더 잃는다고 하여 그게 그렇게 크게 닿지도 않았다.

도준의 결연한 의지를 읽은 남자가 비소를 머금었다. 마치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된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게 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돈 좀 있니?”

“…….”

없는 것을 알고 묻는 목소리가 비열하기 그지없다.

도준이 아랫입술을 꽉 씹어 물었다.

“빽은?”

그 역시 있을 리 만무한 것이었다.

도준의 고개가 푹 수그러졌다.

“내가 봤을 때, 네가 가진 건…… 몸?”

도준이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봤을 때 남자가 흑심을 품은 눈으로 제 몸을 찬찬히 훑어보는 것을 느꼈다. 도준의 숨이 파르르 떨렸다.

“뭐 어떻게, 장기라도 팔아 올래?”

도준의 턱 부근이 불끈 솟았다. 탁자 아래 말아 쥔 주먹에 힘이 실린 탓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아프기보다 괴로웠다. 뭐 하나 있는 것 없어 ‘가졌다’고 답할 수 없는 현실이 그저 참담했다.

“네가 그렇게 장희찬을 쥐고 싶으면 뭐라도 해야지 않겠니?”

“네, 뭐라도…….”

도준이 남자의 말을 곱씹었다.

“나는 너한테 스폰을 권하고 싶은데. 굳이 희찬이 앞에서 알짱거리겠다면, 그런 거라도 해서 희찬이 지켜. 방패라도 될 기회를 주는 거란다.”

남자의 말이 조금 이상하다. 분명 강압적으로 권하고 있으면서, 하는 말의 뉘앙스는 꼭 자신이 대단한 아량을 베푸는 양했다.

하지만 도준에게는 이 모든 상황이 그저 좌절이었다. ‘알짱거린다.’라는 말이나, ‘걸림돌’이라는 말이 도저히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부인할 수도 없었다.

아무리 아니라고 생각하고, 희찬도 아니라고 말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걸림돌’이라면 그게 맞는 거 아닐까.

존재 자체가 걸림돌이라는 말만큼 도준의 가슴을 후벼파는 말이 있을까. 도준은 당장에라도 눈물이 치솟으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누구보다 희찬이 잘되길 응원했고, 그 옆에서 작게나마 도움이 되기 위해 발버둥 쳐온 지난날이 전부 부인당하는 기분이었다.

“네 몸이 아깝니?”

아까울 리가.

도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머릿속으로는 자신이 가진 것들을 헤아려봤다.

내가 가진 건 몸, 꿈, 장희찬.

내 꿈이 장희찬이고,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귀한 것이 장희찬이었으니 그 앞에 몸 따위가 아까울 리 없다.

도준이 떨리는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직면하고, 깨부술 수 없는 벽에 부딪혀 처절하게 조각나는 기분은 언제 느껴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시야가 가리는 느낌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꾸만 목구멍이 틀어 막히는 탓에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만약, 제가 안 한다고 하면…….”

도준이 눈물을 참고 겨우겨우 뱉은 말은 ‘혹시’였다. 희찬에게는 절대로 스폰은 하지 말라고 힘주어 말했는데 말이다. 그걸 자신이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희찬의 얼굴이 눈앞에 피어올랐다.

“그럼 희찬이가 해야지.”

“아…….”

눈물이 흘렀다.

자신이 아니면 희찬이 해야 한다는 것은 마치 정해져 있는 일이라는 것처럼, 가볍게 얘기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도준이 저도 모르게 탄식을 터뜨렸다.

이미 정해진 것이라면 도준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남자는 도준의 사정을 조금도 배려하지 않았다. 헤아릴 생각도 없어 보이는 사람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 빌 수도 없었다.

“희찬이도 몸이 예쁘거든. 너도 잘 알잖아.”

굳이 몸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그 스폰이라는 게 그저 밥이나 한 끼 먹어 주고, 애인 행세를 하는 그런 건 아닌가 보다.

“아, 흑.”

도준의 입에서 더 큰 울음이 터졌다. 강압적인 관계에 힘들어할 희찬은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여러 가지 상황에 힘겨워 생기를 잃는 희찬은 보고 싶지 않았다.

도준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마음에는 이미 결심이 섰다. 다만 그 결심을 입으로 내뱉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뿐이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래야지.”

“희찬이 말고, 제가…… 제가 하겠습니다.”

도준의 입에서 간절함이 비집고 나왔다. 결심을 곱씹고 다짐을 되새기듯 도준은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전의 자존심 강한 모습도 다 사라진 후였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도준은 희찬이 망가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이 났다. 당연히 자존심을 챙길 때도 아니었다. 돈도 없고, 희망도 없는데 꿈이라도 꿔서 잠깐이나마 행복했던 지난 시간이었다.

그리고 역시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아 아픔이 되어 돌아왔다.

남자가 탁자 끄트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 의자를 드륵, 소리 나게 끌어 일어섰다. 남자의 비정한 눈이 도준에게 향했다. 의기양양했던 도준의 어깨가 움츠러들고 잔뜩 수그러든 고개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일어나서 옷 좀 벗어 보겠니?”

도준이 고개를 들어 남자를 쳐다봤다. 눈물을 머금은 도준의 두 눈에는 설움이 가득 서려 있었다.

“그래야 스폰 돌릴 만한 몸인지 아닌지 보지.”

도준은 남자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느릿한 동작으로 일어선 도준이 손을 놀려 티셔츠를 벗었다. 남자의 눈이 흥미롭게 번뜩거렸다. 도준이 바지를 벗었다. 남자가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비틀어 꺾었다.

“속옷은 안 벗어도 돼. 좆 튼실한 거는 딱 봐도 알겠네.”

속옷까지 벗으려는 도준의 손을 남자가 저지했다. 도준은 아무 말 없이 마네킹처럼 가만히 서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돌아 볼래?”

남자의 말에 도준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남자가 한 발 물러서서 도준을 지그시 바라봤다. 선이 고운 와중에도 굵직한 근육이 들어찬 도준의 몸을 하나하나 뜯어보는 눈빛이 날카롭기 그지없다. 이내 만족한다는 듯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꼬리를 높여 웃었다.

“얼굴도 반반하고……. 너 몸이 정말 예쁘구나.”

달갑지 않은 칭찬이었다. 얼굴 못지않게 예쁜 몸은 도준에게도 자랑거리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조차 자랑이 되지 않았다.

도준은 울대가 울렁거릴 정도로 울음을 삼켰다. 턱관절이 빳빳하게 막히고 자꾸만 숨이 턱턱 막혀 왔지만, 두 눈에 힘을 준 도준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적어도 이 남자 앞에서는 그만 울고 싶었다.

도준의 몸짓은 처절했다. 비참하고, 참혹한 상황에서 무참히 짓밟힌 도준은 그저 이 가혹한 현실을 초연하게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다섯 번, 다섯 번이야.”

“…….”

“스폰에도 단가라는 게 있거든.”

건조한 남자의 말에 도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밥 먹고, 술 먹고 그러는 스폰은 아니야. 그것도 값나가는 애들이 하는 거고, 희찬이는 신인이라.”

남자가 도준의 얼굴 앞에 한 손으로 검지와 엄지를 말아 ‘O’자를 만들고, 다른 손으로 검지를 뻗어 그 가운데를 찔렀다. 성관계를 뜻하는 제스처에 도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괜찮지?”

“……네.”

안 괜찮아도 별수 없지 않은가.

도준이 겨우겨우 대답했다.

남자는 제 발치에 떨어진 도준의 옷을 툭, 건드려 도준에게 건넸다.

“그래도 대화가 잘 통해서 다행이네. 네 덕분에 희찬이는 광고도 잘 할거고, 영화도 하나 갈 거야.”

아니, 그건 내 덕이 아니라 희찬이가 원래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던 것들을 두고 ‘네 덕’이라 말하는 남자에게 도준은 역겨움을 느꼈다.

“너는…… 배우 못 할 수도 있고.”

옷을 입던 도준의 손이 멈칫했다. 가까스로 그친 울음이 다시 터질 뻔했다. 남자의 눈이 도준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다. 도준도 남자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렸다. 시야에 맺힌 것은 다름 아닌 너덜너덜해진 대본이었다.

“그 정도 각오는 했지?”

도준은 다시 치솟으려는 눈물을 가까스로 참고, 이내 굳은 의지를 담아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괜찮습니다.”

꿈을 위해 꿈을 버리는 것. 가슴이 시큰거렸지만, 도준은 그조차 괜찮다고 자신을 달래었다.

얼마 전, 좌절하는 희찬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배우 못 해도 괜찮아, 희찬아.]

좋아하는 거 하나쯤 포기하고, 꿈을 지킬 수 있다면 그건 엄청나게 남는 장사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애초에 부모에게마저 버려진 삶이었다. 장희찬을 손에 쥐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러니까, 다 잃어도 희찬이만 내 곁에 있을 수 있다면 괜찮다. 원래 ‘배우’라는 꿈도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장희찬이 잘되길 바랐으니, 다 괜찮다.

“여기는, 써 봤니?”

남자가 불쑥 도준의 엉덩이를 쥐었다. 곧은 손가락이 엉덩이 사이를 침범했다. 바지 위를 꾹 누르는 정도였지만,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아, 아니요.”

“탑 하려고?”

도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도준 고추 내 거야.]

희찬의 해맑은 목소리가 뇌리를 스친 탓이었다.

“바텀……. 하겠습니다.”

“좋지. 처음이 따먹기도 좋고, 맛도 좋고.”

남자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지만, 도준은 웃을 수 없었다.

“그럼 다음 주 월요일. 희찬이는 스케줄 때문에 없을 거고, 저 아래에서 기다릴 테니까 2시까지 나와.”

용건을 끝낸 남자는 가뿐하게 걸음을 놀렸다. 원하는 것을 손에 쥔 남자의 얼굴에는 만족이 가득 들어찼다.

“저, 부탁이 있습니다.”

저벅저벅 걸어 나가는 남자의 발을 도준의 간절한 목소리가 잡았다. 남자가 흔쾌히 뒤로 돌아 도준을 바라보았다. 원하는 것을 하나쯤은 들어줄 수 있다는 태도에 도준이 이를 세게 물었다.

“희찬이한테는 비밀로 해 주세요.”

이거 하나쯤은 바라도 괜찮지 않을까.

조심스레 말을 전하는 도준의 목소리가 위태롭게 떨렸다.

“희찬이가 저를 더럽다고 생각하는 게 무서운 건 아니고요…….”

이제는 저의 바닥을 숨길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지, 도준이 내뱉는 말은 하나하나가 힘겨웠다.

“희찬이가 자기 능력으로 해낸 것들인데 누군가 대신 희생해서 얻었다고 생각하면 자존심 상할 거예요. 스스로 경멸하고, 힘들어하다가 그만둘지도 모릅니다. ……부탁드립니다.”

간절한 도준의 목소리에 남자가 또 한 번 크게 웃었다.

“아주 눈물 나는 사랑이네.”

비웃는 소리가 도준을 또 한 번 짓밟았다. 도준의 또렷한 눈이 남자를 응시했다. 대답을 갈구하는 도준의 낯에 남자가 한참이나 시간을 들인 후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지.”

가벼운 대답을 남긴 남자는 금세 집에서 벗어났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발소리가 멀어지고, 철컹, 무거운 철문 소리가 난 후에야 도준이 한껏 도사린 긴장을 거둬 냈다.

벽을 타고 흐르듯 주저앉은 후에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모든 상황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주어진 상황에 불만 없이 잘만 지내 왔는데 지금은 모든 것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흐……. 끅, 흐윽…….”

희찬이 오기 전에 그쳐야 하는데, 한번 터져 흐르기 시작한 울음은 도무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걷잡을 수 없이 번져 가는 감정의 늪에서 허덕이는 도준은 그저 하염없이 울었다.

간절히 바라는 꿈을 지켰는데, 왜 이렇게 심장이 아픈지.

지끈거리는 심장의 통증이 손가락으로 이어왔다. 손이 저릿거리고 발끝이 아팠다. 온몸에 갈가리 찢기는 고통이 서렸다.

앞이 보이지 않아 깜깜한 어둠 속을 혼자 거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더 처절했다. 이 어둠은 희찬이 지독하게 무서워하는 것이었으므로, 오롯하게 혼자 견뎌야만 했다.

도준이 주먹을 말아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자신의 어깨를 토닥이고, 아픈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하며 스스로를 달래려 무던히도 노력했다.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그렇게 막연한 주문을 외면서 말이다.

도준은 희찬이 돌아오기 전 세수를 세 번이나 했다. 새빨간 열이 오른 눈가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방긋거릴 희찬에게 운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희찬과 함께 웃기 위해서.

덕분에 희찬을 마주하고도 함께 웃을 수 있었다. 스케줄을 마치고 돌아온 희찬은 내일이면 당장 며칠을 떨어져 지내야 한다며, 외식을 권했다. 평소 같으면 질색하며 손사래 칠 도준이었지만, 오늘은 그의 말에 따랐다. 그냥 그의 말을 다 들어주고 싶었다.

도준이 희찬과 함께 향한 곳은 가끔 도심에 나올 때면 눈길이 멎었던 레스토랑이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아주 고급스러운 곳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두 사람에게는 쉽게 갈 수 없는 가격대의 음식점이었다.

희찬은 주저하지 않고 도준이 좋아하는 음식들을 시켰다. 잘 먹는 도준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찬 감동을 느끼고는 했으니,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은 안중에 없었다. 그래서 도준이 희찬의 몫을 주문했다.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차례로 테이블에 올라왔다. 갖가지 풍미로 코끝을 자극하고, 화려한 비주얼로 시각을 자극해 침이 꼴깍 넘어가는 음식들이었지만, 도준은 음식에 흥미가 없었다.

“맛없어?”

깨작거리는 모습이 도준답지 않았다. 희찬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걱정하는 낯을 보였다.

“어, 아니…….”

“근데 왜 그렇게 먹어, 좀 팍팍 먹지.”

희찬의 핀잔에 도준은 그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도준의 마음과 달리 손은 그러지 못했다. 자꾸만 떠오르는 전광진의 말이, 전광진의 눈빛이, 전광진의 행동이 도준의 가슴을 쿡쿡 찔러 댔다.

도준은 애꿎은 주먹만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눈물이 나려 해서 무얼 씹을 수 없었고, 목이 메어 삼킬 수가 없었다. 손가락 근육이 아프게 땅길 정도로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가, 손바닥이 저릿거릴 즈음엔 손을 쭉 펴고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내일 몇 시에 가?”

도준이 애써 화두를 돌렸다. 해맑은 희찬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건네자 희찬이 고개를 예쁘게 꺾어 대답했다.

“아침에 일찍 갈 거 같아. 근데 너는 내일 일 안 가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왜?”

“너 아픈가 봐.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그제야 도준의 눈이 식탁 위를 훑었다. 그러게, 평소 같았으면 벌써 다 비웠을 양도 아직 한참이나 남아 식어 가는 중이었다. 도준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의도치 않은 곳에서 걱정을 안긴 것 같아 미안해졌다.

“나 내일 가면 네 옆에 못 있는데, 너 계속 아프면 어쩌지?”

“아픈 거 아니야, 열도 안 나.”

“근데 왜 못 먹어.”

“…….”

도준은 그저 입을 꾹 다물고,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을 뒤적거렸다.

“비싼 걸 못 먹고 자라서, 입에 안 맞으시나 봐요, 손님.”

언젠가, 도준이 희찬에게 쳤던 장난이 고스란히 도준에게 돌아왔다. 도준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은근히 자신의 기분을 살피며, 풀어 주려 노력하는 희찬의 모습이 그저 예뻤다.

도준은 몸을 편하게 등받이에 기대고서 희찬의 장난에 장단을 맞추었다.

“아, 주방장 나오라고 해. 여기 서비스가 왜 이래?”

“서비스라뇨? 오늘 이 식사는 여기 앉은 이 잘생긴 사람이 사는 거라.”

도준이 희찬을 바라봤다. 맛있는 디저트를 먹는 희찬의 입가에 소스가 묻어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혼란스러운 것도 다 잊고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잘생겼다기보다는…….”

도준이 말을 하다 말고 손을 뻗어 희찬의 입가를 슥 닦아 냈다. 손가락에 묻는 소스를 거리낌 없이 입으로 핥은 후에는 생긋 웃었다.

“예쁘지. 엄청.”

별안간 희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잘생긴 이도준이 웃는 것은 또 어찌나 근사한지, 어두운 조명으로 분위기를 낸 레스토랑이 죄다 환해지는 듯한 환상이 보일 정도였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이 느릿느릿 언덕길을 올랐다.

두 사람은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는 내내 쉴 새 없이 대화를 나눴다. 주로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희찬이었고, 도준은 잔잔한 웃음과 함께 짧은 말로 대답을 하곤 했다.

문득 도준이 주변을 둘러봤다. 어두컴컴한 골목길에는 희찬과 도준, 단둘뿐이었다. 도준이 희찬의 손을 꼭 거머쥐었다. 따뜻한 패딩 속으로 마주 잡은 손을 밀어 넣고, 손가락으로 희찬의 차가운 손등을 어루만졌다.

“이번에 가면 언제쯤 와?”

“다음 주 화요일! 월요일 밤까지 촬영하고, 화요일 오전에 올라올 거야.”

“그렇구나…….”

‘다음 주 월요일’을 언급하던 전광진이 떠올랐다.

전광진은 치밀했다. 정확하게 희찬의 스케줄을 노려 날을 잡은 그의 철두철미함에 도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주머니 속에서 희찬이 도준의 손을 꽉 쥐었다. 평소의 이도준이라면 언덕길을 오를 때는 항상 고개를 치켜들고 저 멀리 하늘을 바라보곤 했는데, 오늘 그의 시선은 바닥으로 향했다.

내딛는 발끝을 바라보고, 아주 천천히 나아가는 모양새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아슬아슬해 보이는 건지. 오늘의 이도준은 평소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희찬이 힐끔힐끔 도준의 눈치를 살폈다. 입에서는 무슨 일이 있냐는 질문이 맴맴 맴돌았다.

“아무 일도 없어, 그렇게 보지 마.”

하지만 희찬의 질문보다 도준의 대답이 빨랐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던 도준이 희찬의 집요한 시선에 피식 웃었다. 희찬의 걱정하는 낯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제는 걱정시키지 말아야지.

도준은 그런 다짐이나 되뇌었다. 저렇게 걱정해서는 잘되려던 일도 안 될 것 같았다. 이제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 일도 없는 척 의연하게 굴 테다. 그렇게 결심한 도준은 남모르게 떨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샤워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온 희찬이 도준을 기다렸다. 앞으로 며칠간 몸을 마주 대기는커녕, 얼굴을 보는 것조차 어려울 테니 오늘 밤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았다.

희찬은 달빛이 슬그머니 기어 들어오는 창 아래에서 티셔츠를 입에 물고, 가슴께를 지분거렸다. 도준이 오자마자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미리 몸을 풀어 두려는 심산이었다.

다리를 어깨 너비로 벌린 후, 무릎을 세워 공간을 만들었다. 바지를 엉덩이 아래까지 내리자 차가운 공기가 예민한 살결을 휘감았다.

희찬이 손가락 두 개를 곧게 펴서 엉덩이 사이 구멍 주변을 어루만졌다. 도준이 오기 전에 끝내고 싶은 행위였지만, 언제 도준이 올지 모른다는 기대 또는 설렘으로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으읏.”

손가락을 비집고 넣자 절로 신음이 났다. 빡빡한 구멍 사이를 휘저으려니 손가락 두 개도 빠듯했다. 희찬이 엉덩이에 힘을 풀고 호흡을 골랐다. 도준의 페니스와 달리 제 손가락은 거부감이 느껴졌다.

희찬이 이질적인 손가락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톡 튀어나온 전립선을 꾹 누르자 허리가 튀었다. 희찬은 티셔츠를 더 세게 짓이겨 물고 신음을 참았다. 희찬의 가지런한 미간이 조각조각 찌그러졌다.

허리를 바르작거렸다. 다리를 더 벌리고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엉덩이를 들어 손가락을 하나 더 밀어 넣었다. 세 번째 손가락은 수월하게 밀려 들어갔다.

“흡, 아…….”

조금 더 깊은 곳을 찌르고 싶은데, 손가락으로는 부족하다. 희찬의 숨이 점점 가빠졌다. 하지만 욕구는 차지 않아 발이 동동 굴렀다. 희찬이 아랫입술을 짓이겨 물었다. 손목에 힘을 주고 조금 더 안으로 밀어 넣고자 했지만, 역시 닿지 않았다.

“부족, 한데…….”

“응, 부족하지.”

“힉…….”

희찬이 낮게 읊조린 말에 대답이 돌아왔다. 희찬이 놀란 눈을 뜨고 소리 나는 곳을 쳐다봤다. 어느새 돌아온 도준이 짓궂게 웃는 낯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얇은 천 조각에 가려진 도준의 중심부가 불룩했다. 당장에라도 달려들 기세에 희찬이 침을 꼴깍 삼켰다.

도준은 주저 없이 바지를 벗었다. 도준의 커다란 페니스가 위용을 뽐내며 꺼떡거렸다. 페니스 끄트머리에서 투명한 액체가 새어 나오는 중이었다. 희찬의 손가락을 머금은 구멍이 움찔거렸다. 하얀 달빛에 비친 희찬의 모습은 더없이 자극적이었다.

도준이 희찬의 손가락을 한 번에 빼냈다. 희찬의 몸이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이윽고 도준의 페니스가 희찬의 구멍에 닿았다. 벌름거리는 구멍이 오므라들 때마다 도준의 페니스 끄트머리를 머금었다.

미끈거리는 페니스가 뜨겁다. 도준이 페니스 뿌리를 쥐고 희찬의 구멍에 비벼 댔다. 뭉툭하고 묵직한 페니스가 들어올 듯, 말 듯 망설였다.

“아, 빨리…….”

“희찬이, 급해?”

“으응, 급해…….”

희찬이 꾸물거리며 도준의 페니스에 제 엉덩이를 비볐다. 말랑한 엉덩이에 페니스가 닿자 페니스가 또 퉁 튕겼다. 굳이 만지지 않아도 꺼떡거리는 페니스가 다급했다. 도준이 희찬의 허리를 정성스레 쓰다듬었다.

“희찬아, 미안해.”

“뭐가, 악!”

도준은 아까부터 입에서 맴돌던 사과를 조심스레 건네며 동시에 희찬의 몸을 감싸 안고 한 번에 페니스를 찔러 넣었다. 희찬이 눈을 뒤집어 까고서 몸을 바르르 떨었다. 시트를 비틀어 쥔 손에 힘이 바짝 실렸다. 도준은 두 눈을 질끈 감고, 희찬의 허리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미안, 내가 미안해.”

“뭐, 아흣! 아! 도준, 도준! 아!”

“미안…….”

“히익! 끅, 아! 후읏!”

도준은 그저 미안하다는 말만 되뇌었다. 그건 거친 행위에 대한 사과가 아니었다. 희찬이 없는 사이에 더러운 계약을 한 것에 대한 사과였다. 가슴이 욱신거렸다. 제 앞에서 몸을 바르르 떨며 쾌락에 젖어 가는 희찬을 보는 게 오늘만큼 힘든 날도 없었다.

도준의 페니스가 빠질 때, 희찬의 새빨간 속살이 딸려 나왔다. 다시 한 번에 찔러 넣자, 희찬의 발가락이 한껏 오므라졌다.

희찬은 높은 신음을 내질렀다. 평소보다 훨씬 강하고 격하게 찌르고 들어오는 도준의 페니스가 버겁다. 마치 목을 뚫고 나올 것처럼 깊숙이 찔렀다가, 훅 빠져나가는 페니스가 속을 아무렇게나 휘저었다. 희찬은 전신을 지배하는 전율을 느꼈다.

희찬이 얇은 시트를 찢을 기세로 세게 비틀어 쥐었다. 오늘 도준의 몸짓은 평소와 달랐다. 마치 자신을 알아 달라는 듯, 간절하게까지 느껴지는 몸짓에 희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 그만, 아! 아파……. 아파!”

“후으, 하…….”

“도준, 끅……. 아……. 히익!”

희찬의 페니스에서 새하얀 정액이 울컥울컥 솟구쳤다. 힘차게 분출한 정액이 희찬의 턱 끝에도 닿았다. 감전된 것처럼 몸을 바르르 떨어 대는 희찬의 몸을 도준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미안……해, 미안해…….”

희찬의 상체를 부둥켜안은 도준도 이내 사정을 맞았다. 꿀렁꿀렁 쏟아져 나오는 도준의 정액이 희찬의 속에 범벅되었다.

도준은 사정 후에도 허리 짓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제 페니스에 희찬의 속을 각인시키려는 것처럼 말이다. 도준의 페니스가 다시 부풀었다. 제 안에서 크기를 더하는 것을 느낀 희찬이 허공에서 손을 휘저었다. 그만을 외치고 싶었지만, 도무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도준은 희찬의 허리를 붙잡은 채로 퍽퍽, 세게 처박았다. 하얀 정액이 뭉개졌다 늘어나길 반복하며 구멍 사이로 조금씩 흘러내렸다. 진득하고 하얀 액체가 도준의 페니스를 물들였다.

도준이 벌름거리는 구멍에 페니스를 처박았다. 희찬의 허벅지가 잔뜩 오므라들었다. 구멍과 페니스가 맞닿은 곳에 정액이 뭉쳤다. 도준의 페니스가 빠져나왔다. 희찬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정액에 비벼진 페니스 덕에 하얀 정액이 끈적하게 늘어났다.

새하얀 액체 덕에 미끄럽게 들어가 콱 처박히는 페니스가 안기는 쾌감은 실로 대단했다. 희찬은 온몸을 바르르 떨어 대며 넘어가는 숨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고통과 쾌감이 뒤범벅되어 전신을 지배했다. 희찬은 기어코 울음을 터뜨리고 신음을 흐느꼈다.

“후읏, 아! 흐으윽……. 끅. 아!”

“후……. 흐으…….”

“읍……. 끕, 하읏, 도준아아…….”

“사랑해, 희찬아.”

“으응, 사랑해……. 사랑해…….”

도준이 희찬의 입술을 거침없이 집어삼켰다. 희찬의 신음이 도준의 입 안에서 맴돌았다. 도준이 희찬의 윗입술을 씹어 물고 혀로 쓸었다가,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희찬의 말캉한 혀가 부드럽게 뒤엉켰다.

도준은 사정을 마친 예민한 페니스가 안기는 쾌감에 휩싸였다. 도준은 희찬이 울부짖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로 거친 행위를 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동시에 정액을 뿜어냈다. 진득한 액체를 희찬의 속에 한껏 내뿜은 도준이 큰 숨을 몰아쉬며 페니스를 조심스럽게 빼내었다.

도준의 페니스가 남았던 자리에서 하얀 액체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잔잔하게 떨리는 엉덩이 사이에서 흐르는 액체가 마치 폭포 같았다. 희찬의 가슴이 가쁘게 부풀었다가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도준이 눈물로 범벅 된 희찬의 작은 얼굴을 쥐고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았다. 희찬이 입술을 씰룩거리며 울먹였다.

“아팠지, 미안해.”

“왜 자꾸, 끅.”

“…….”

“왜, 자꾸 미안하다고 해……. 마음 아프게.”

도준은 바스러지는 마음을 애써 감추고 억지로 웃어 보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저 희찬의 몸을 일으켜 물티슈로 엉덩이 사이를 정성스레 닦아 주었다.

희찬이 어렵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몸에 남은 여운이 도무지 가시지 않았다. 오랜만에 격한 섹스를 했다. 그건 황홀하기도, 버겁기도 했다. 후희를 느끼는 희찬 앞에 도준이 가지런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희찬아.”

“응.”

“……박아 볼래?”

도준의 시선은 희찬에게 향하지 않았다. 도준은 얼굴도, 이름도 모를 남자들과 관계를 맺기 전에, 희찬과 하고 싶었다. 이제껏 자신의 모든 처음은 희찬이었으니, 이 처음도 희찬에게 주고 싶은, 전광진의 표현으로는 ‘알량한’ 사랑이었다.

“너, 큰 산 넘었으니까…….”

“…….”

“그것도 성공이잖아.”

도준은 절박했다. 집요하게 저를 쳐다보는 희찬의 시선에 마주할 자신이 없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지만, 그럼에도 도준의 목소리에서는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아슬아슬하게 희찬의 어깨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건네는 말에 희찬이 눈을 크게 떴다.

왜인지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성공하면 따먹겠다고 호언장담하며 아껴 둔 이도준인데, 왜인지 그가 위태로워 보였다.

“도준아.”

“응.”

“……너 계속 내 옆에 있을 거지?”

“응…….”

그런 도준의 모습이 왜 이렇게 불안한지 모르겠다. 희찬은 손에 쥐면 바스라질 것 같은 도준의 모습에 감히 그를 만지지도 못했다.

희찬이 겨우겨우 손을 뻗어 도준의 단단한 팔을 쥐었다. 뜨거운 손바닥이 닿기 무섭게 도준의 큰 몸이 움찔거렸다.

희찬은 마른 입술을 적셨다. 도준의 팔을 만지작거리다 용기 내어 도준의 얼굴을 쥐었다. 도준이 웃었다. 이상하게도, 그 웃음마저 가슴이 저릿했다.

“너랑 하고 싶어.”

“아껴 둔 건데.”

“지금 하자.”

“…….”

“찬아…….”

도준의 몸이 고꾸라지며 정수리가 희찬의 가슴에 닿았다. 절실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한 도준의 몸짓에 희찬이 아무 말 없이 도준의 어깨를 그러안았다.

희찬이 넓은 어깨를 쥐고 토닥토닥 그를 달래자 도준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터져 흘렀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한숨이었다. 한참이나 도준의 얼굴을 매만지던 희찬이 결심을 내렸다.

“누워 봐.”

도준이 희찬의 말에 따라 고분고분 엎드려 몸을 뉘었다. 도준의 숨이 얕은 진동을 머금었다. 처음 하는 행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어쩔 수 없었다.

도준의 가슴에 희찬의 손이 자리했다. 쿵쿵, 빠르게 뛰는 심장을 토닥토닥 달래며 한 손으로는 도준의 엉덩이 사이를 지분거렸다. 열린 적이 없어 꽉 닫힌 구멍이 움찔거렸다. 방금까지 격한 관계를 가졌기에 몸은 충분히 달았다.

희찬의 손가락 움직임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도준이 생소한 느낌에 호흡을 고루 쉬었다. 그저 손가락이 회음부를 문지르고, 구멍 주변을 지분거렸을 뿐인데 숨이 다 막히는 것 같았다. 민망함과 긴장에 자꾸만 다리가 오므라졌다.

도준의 가슴을 만지던 희찬의 손이 도준의 페니스를 쥐었다. 귀두를 움켜쥐고 벌어진 요도 부근을 문지르자 도준이 탄성을 터뜨렸다.

희찬이 도준의 귀두 아래를 쓰다듬었다. 우람한 페니스가 금세 불끈 솟았다. 페니스 끄트머리를 비집고 나오는 투명한 액으로 손을 적셨다. 아무것도 받아들인 적 없는 여린 살결을 달래기 위해서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넣는다.”

“응, 읏.”

“괜찮지?”

“응, 괜……찮아.”

손가락 하나가 불쑥 침범했다. 부드러운 내벽이 심하게 꿈틀거리며 희찬의 손가락을 감쌌다. 뜨거운 살결이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희찬은 내벽을 꾹꾹 누르며 도준이 무난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왔다.

손가락 끝을 바짝 조이는 주름들이 움찔거렸다. 희찬이 손가락을 구부려 비틀자, 도준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희찬이 조심스레 손가락을 하나 더 밀어 넣었다. 검지보다 기다란 중지가 침범하자 도준의 입에서 뜨거운 숨이 터졌다.

“흑, 아…….”

“여기? 여긴가?”

“으, 으읍.”

“이상해? 하지 말까?”

“아, 아니.”

느낌이 묘했다. 텅 비었던 속을 메운 손가락에 거부감이 들었지만, 어느 한 지점을 매만질 때는 찌릿한 전율이 올랐다. 좋지도, 싫지도 않은 어중간한 느낌에 도준이 입술을 짓이겨 물었다.

이렇게 이도 저도 아닐 바에야, 차라리…….

“그냥, 네 거 넣어.”

그래, 차라리 희찬의 것이 한 번에 들어오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안 돼, 아파.”

“괜찮아. 희찬아, 그냥 넣어. 그게 더 나을 거 같아.”

“이렇게 좁은데 어떻게 넣어…….”

“해 봐, 할 수 있어.”

도준이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희찬의 팔을 붙잡았다. 감질난 상태로 흥미를 잃을 바에야 차라리 한 번에 아프고, 금방 쾌감을 느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희찬이 편하게 삽입할 수 있도록, 도준이 다리를 벌렸다. 꺼떡거리는 희찬의 페니스가 달빛에 번들거렸다. 그저 바르작거리는 몸짓만으로도 흥분을 느끼는 건지, 한껏 부푼 페니스의 크기가 대단했다.

도준이 마른침을 삼켰다. 손가락 두 개도 빡빡하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근데 그 좁은 곳에 저 커다란 것이 들어올 수 있을까. 긴장이 서린 한숨이 비집고 흘렀다.

“아프면 말해, 알겠지?”

“응. 희찬아, 막혀도 멈추지 말고 한 번에 밀어 넣어. 그래야 너도, 나도 편해.”

도준이 첫 경험을 떠올리고 나름의 조언을 건넸다.

“알겠어.”

희찬이 비장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뜨거운 페니스를 손에 쥐고, 한 손으로는 도준의 허벅지를 눌러 벌렸다. 뻐끔거리는 구멍은 귀두를 머금는 것조차 벅차 보였다.

도준은 희찬이 페니스를 넣기 전에 몸을 돌려 엎드려 누웠다. 얼굴을 보고 하는 것이 좋겠지만, 희찬이 쉽게 넣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희찬이 이를 악물었다. 페니스 끄트머리에 닿은 주름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으, 흡, 윽!”

투둑, 여린 살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뜨끈한 액체가 희찬의 페니스에 닿았다. 귀두 끄트머리를 겨우 밀어 넣었을 뿐인데 비좁은 공간이 아무렇게나 벌어지며 피부가 찢어졌다. 새빨간 액체가 도준의 허벅지를 타고 흘렀다. 그를 본 희찬이 지레 겁을 먹고 허리 짓을 멈추었다.

“더, 읍, 더 넣…….”

“안, 안 들어가.”

“아냐, 아……. 안 돼, 넣……어야 돼.”

도준이 시트를 비틀어 쥐고 허리를 아래로 눌러 앉혔다. 도준이 움직이자 희찬의 페니스가 조금씩 도준의 안으로 들어갔다. 희찬의 덜덜 떨리는 손이 도준의 허리를 쥐었다. 힘겨운 도준의 숨이 아프게 닿았다. 희찬은 찔끔찔끔 잡아먹히는 제 페니스를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이제, 내가 움직일게.”

“하……. 으응…….”

도준의 몸짓이 힘겨워 보였다. 고통에 사무쳐 바들거리던 도준의 몸에 힘이 탁 풀렸다. 도준은 몸을 지탱하던 팔에도 힘을 줄 수 없는지 얼굴을 베개에 처박았다. 엉덩이만 치켜든 도준의 모습이 자극적으로 닿았다. 희찬은 이를 악문 채로 조금씩 허리를 움직여 도준의 속을 침범했다.

“헉, 아!”

“후으……. 다 들어갔어. 다 넣었어.”

“흐으으, 으읏.”

“아파? 도준아……. 아프지.”

“괜, 괜찮아.”

아니, 안 괜찮다.

무지막지한 것이 속에 들어와 숨통이 막혔다. 속을 꽉 메운 커다란 페니스가 꿈틀거리는 게 생경했다. 여린 살결을 누르며 안으로, 안으로 들어오는 뜨거운 살덩이가 묵직함을 더했다.

도준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겁이 났다. 희찬과 하는 것도 이렇게 벅찬데, 앞으로는 애정도 없는 사람들에게 몸을 내어 줘야 한다. 그 사실이 떠오르자 목이 멨다. 도준의 울대가 크게 울렁거렸다.

“……희찬아. 배 쪽으로, 찌르면…….”

“이렇게?”

“어, 아! 흐읏, 윽!”

“여기구나.”

“아, 어흣, 으…….”

알려 주는 대로 금방 따라 하는 희찬 덕분에 도준도 금세 신음을 내질렀다. 쾌감보다는 고통이 큰 행위였다. 커다란 페니스가 속 곳곳을 함부로 휘젓는 탓에 다 망가지는 것 같았다.

한 번 파헤친 구멍은 드나들기가 수월했다. 벌어진 틈으로 치고 빠지는 법을 익힌 희찬이 도준의 허리를 붙잡고 퍽퍽 세게 처박았다. 철썩철썩 요란하고 낯 뜨거운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고환과 고환이 부딪치고, 엉덩이와 허리가 맞닿으며 내는 소리는 제법 질척했다.

도준의 몸이 힘없이 흔들렸다. 허벅지 근육이 뻣뻣하게 섰다가 풀렸다. 하얀 엉덩이가 봉긋 솟았다. 한껏 힘을 주고 자신을 견뎌 내는 도준의 몸짓이 희찬의 눈에는 한없이 안쓰러웠다.

“흑, 아……. 으흣.”

“괜, 찮아, 도준아? 어?”

“아! 더, 더 해 봐, 흣.”

“너 왜 이렇게…….”

도준은 베개에 얼굴을 처박은 채로 참을 수 없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충분히 버거운 행위였지만, 그래도 도준은 ‘더’ 원했다.

도준은 희찬이 자신을 망가뜨려 놓길 바랐다. 희찬의 손에 처참히 무너지길 바랐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가져도 오롯하게 희찬만 떠올릴 수 있도록, 희찬의 페니스를 가득 남겨 두고 싶었다.

[너는…… 배우 못 할 수도 있고.]

이 와중에 그 말이 떠오를 건 또 뭔지.

도준이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았다. 자칫 신음이 터질 때 울음이 흘러나올까 걱정이 되었다. 목에 힘을 주고 참느라, 굵은 핏대가 불룩 솟았다. 가슴이 저릿했다. 전신을 지배한 아픈 쾌락보다도 온 심장이 발기발기 찢기는 고통이 더 컸다.

희찬의 힘에 흔들리는 몸만 느끼고 싶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을 만큼 희찬에게 닿고 싶었다. 자꾸만 비집고 흐르는 눈물이 오로지 쾌락만을 머금길 바랐다. 가슴이 저미는 아픔은 모두 잊고 싶었다.

“도준아, 왜 울어……. 응?”

“조, 좋아서. 흐읏, 더, 넣.”

아니, 좋아서 우는 것 같지 않았다.

희찬은 도준의 요구에 응하면서도 왜인지 조급하게 느껴지는 몸부림에 덩달아 불안함을 느꼈다.

힘이 바짝 들어가 딱딱하게 굳은 몸을 하고서 ‘더’ 넣어 달라 울부짖는 도준은 한없이 간절해 보였다. 단단한 허리를 붙잡고 뭉근하게 허리를 돌렸다. 희찬은 도준을 따라 눈물이 나려는 것을 애써 틀어막고, 페니스를 아주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이렇게?”

“응, 그렇, 아……!”

도준의 고개가 꺾였다가 다시 푹 수그러졌다. 말아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희찬이 페니스를 찔러 넣을 때마다 도준의 뱃가죽이 희찬의 페니스 모양으로 불룩, 불룩 솟았다.

그러는 중에도 희찬의 페니스는 착실하게 크기를 키워 갔다. 뜨거운 내벽이 우악스러운 페니스를 감쌌다. 꿀렁거리는 여린 살이 닿는 게 상당히 자극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예민한 페니스에 금세 사정감이 몰려왔다. 서둘러 허리를 뒤로 빼려던 희찬이 도준의 손에 틀어 막혔다. 희찬이 사정할 것을 안 도준이 희찬의 엉덩이를 쥐고 제 속으로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흐읍, 윽.”

“아, 아아…….”

“흐으, 후……. 아, 흐읏.”

몸속에서 힘차게 뿜어진 정액이 속에 가득 들어찼다. 희찬의 정액이 내벽을 적시는 게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도준의 몸이 간헐적으로 움찔거렸다. 희찬의 페니스가 빠져나갔다. 기다란 페니스가 빠질 때, 도준의 붉은 속살이 딸려 나왔다가 뻐끔거리며 다시 말려 들어갔다. 그 역시 대단한 시각적 자극을 안겼다.

도준은 황급히 눈물을 닦아 냈다. 자신이 울 때면 꼭 같이 울어 버리는 희찬이었으니, 그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만은 절대로 참아야 했다.

희찬이 도준의 터진 살 부근을 살살 문질렀다. 꿀렁꿀렁 새어 나오는 정액을 닦아 내고, 피가 맺힌 부분을 조심스레 닦아 내자 도준이 몸을 움찔거렸다.

“아…….”

“너 여기 터졌어.”

한참 정성스레 도준의 몸을 닦아 준 희찬이 도준의 품에 안겼다. 온몸이 땀에 절어 당장에라도 씻고 싶었지만, 둘 다 일어설 힘조차 없었다.

“장희찬, 네 고추도 내 거야. 알지.”

“모를 리가.”

왜인지 무거워진 분위기가 달갑지 않았다. 도준이 짓궂게 웃으며 가벼운 목소리를 내자 비로소 희찬이 웃었다. 희찬이 아무 말 없이 도준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어땠어? 처음 한 거잖아.”

“처음이니까 아팠어. 근데 또 해도 괜찮아. 이제 좋을 거 같아.”

그건 사실이었다.

희찬의 정액이 뿜어져 나올 때쯤, 도준의 몸도 바르르 떨렸다. 아무래도 처음이었으니, 타이밍이 안 맞았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지만, 곤히 잠든 희찬과 달리 도준은 도무지 잘 수 없었다. 밤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뒤숭숭해지는 마음은 자꾸만 오전의 일들을 떠올렸다.

심란함에 쉬지 않고 한숨이 흘렀다. 도준이 어렵게 몸을 일으켜 식탁 앞에 앉았다. 딱딱한 의자에 엉덩이가 닿기 무섭게 고통이 서렸다.

도준이 앉은 식탁 위에는 대본이 놓여 있었다. 휘영청 밝은 달빛을 맞아 유독 반짝반짝 빛이 나는 대본을 보니 다시 울컥 감정이 치밀었다.

도준이 조심스레 손을 뻗어 대본 표지를 만지작거렸다. 두툼한 종이가 너덜너덜해져 날카로웠던 모서리가 뭉툭해졌다. 닳고 닳도록 본 대본이 그렇게 속상했다. 도준은 새어 나오는 울음을 꾹 눌러 참고 대본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한 발 멀어진 꿈만큼, 한 발 가까워진 또 다른 꿈이 그렇게 서글프다. 자꾸만 치솟는 눈물에 도준이 고개를 푹 떨구었다.

배우는 할 수 없다는 말이 윙윙 울렸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정말 괜찮은데, 심장이 송곳에 콕콕 찔리는 것 같았다. 팔꿈치가 저리고, 손끝이 아렸다. 코끝이 찡하게 울리는가 싶더니 턱 끝이 빳빳하게 당겼다.

도준이 고개를 쳐들고 눈물을 참았다. 깜깜한 천장을 노려보던 도준의 눈이 데구루루 굴러 희찬에게 닿았다. 새하얀 얼굴이 새근새근 고른 숨을 쉬며 편안하게 자는 모습이 못내 사무쳤다.

“후으……. 아…….”

결국 울음이 터졌다.

그래도 모든 것을 너와 해서 다행이다. 처음을 네게 줄 기회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네가 아무것도 몰라서 다행이고, 앞으로도 너와 함께할 수 있어 다행이다.

파르르 떨리는 숨에 물기가 서렸다. 도준은 서글픈 시선을 희찬에게 둔 채로 투명한 눈물을 뚝뚝 흘려 댔다.

이렇게 우는 것도 나여서 다행이다. 앞으로도 우는 건 내가 다 할 테니까, 너는 예쁘게 웃어, 희찬아. 그것만이 내가 뼈저리게 바라는 것이므로.

도준의 주먹이 굳게 말렸다. 불끈 솟은 핏줄 위에 투명한 눈물이 툭, 툭 떨어졌다. 맑은 눈물에 달빛이 닿아 번들거렸다. 그조차도 서러운, 아프고, 괴로운 밤이었다.

*

도준은 희찬이 촬영을 위해 지방으로 간 날부터 지난 일주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공사장에 나가 일부러 강도 높은 업무를 배정받아 미친 듯이 몸을 혹사 시켰다. 그래야만 머릿속에 빼곡히 들어차는 잡념을 지울 수 있었다.

그리고 꼬박꼬박 밤 10시가 되면 희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시간에 공사장에 있다면, 소장실에 있는 전화기를 빌려 전화를 걸었다. 어쩌다 일이 빨리 끝나 집에 있을 때면 따뜻한 집도 다 내팽개치고, 언덕을 내달려 공중전화로 향했다.

그러다 보면 며칠은 통화를 할 수 있었고, 며칠은 통화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어제, 희찬은 도준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도준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저녁 6시가 되기도 전에 내려앉은 어둠은 아침 8시가 다 되어 물러났다. 덕분에 유달리 길게만 느껴졌던 지난밤이었다.

도준이 침대에 쪼그려 앉아 손톱을 똑, 똑 물어뜯었다. 어젯밤 희찬과 통화가 되지 않은 오늘, 하필이면 오늘이 전광진을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후으…….”

큰 숨을 쉬며 호흡을 가다듬어 봐도 떨리는 마음은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밀려오는 긴장에 턱이 덜덜 떨리고,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전광진은 도준에게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않았다. 그저 다섯 번, 그 횟수만 정확하게 새겨 주고 떠났다.

도준은 다섯 번이 섹스 다섯 번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그 ‘스폰’이라 부르는 모든 행위를 한 번으로 치는 건지도 알지 못했다. 무슨 일을 어떻게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압도적인 공포를 안겼다.

도준의 속도 모르고 흐르는 시간은 금세 정오를 향해 갔다. 평소 희찬을 기다리며 하염없는 시간을 헤아리던 것과 달리 오늘은 한달음에 오전이 흘렀다.

항상 마음과는 다르게 흐르는 시간이 야속하다. 도준이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일단 샤워를 좀…… 하고.”

사실, 오늘만 해도 샤워는 벌써 세 번째였다. 아직 제대로 뭘 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을 향한 ‘더럽다.’라는 생각이 자꾸만 몸을 씻는 것으로 표출되었다.

차가운 물을 맞으며 샤워를 하다 보면 정화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울적한 마음도 꽁꽁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래서 도준은 샤워를 거듭했다. 추운 날씨였음에도 차가운 물의 온도는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다.

야속한 시간은 흐르고 흘러, 약속한 시간이 10분도 채 남지 않았다. 언덕이 얼었으니 천천히 내려갈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 나가는 것도 늦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도준은 자신을 재촉하지 않았다. 조금은 늦어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도망을 가는 것도 아닌데. 그런 합리화를 하며 최대한 늦게 집에서 벗어났다.

도준이 잠기지 않는 철문을 걸어 닫고, 저벅저벅 걸음을 내디뎠다. 간밤에 내린 눈이 소복이 쌓인 새하얀 언덕이 유독 더 화사해 보였다. 도준에게 드리운 어둠과는 대비되는 빛이었다.

“도준아, 어디 가!”

땅을 보고 걷던 도준의 고개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니 인자한 표정의 어른들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붕어빵을 들고 환하게 웃는 중이었다. 도준이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건넸다. 오늘따라 동네 어른들의 온정도 지나칠 정도로 따뜻하게 느껴졌다.

“아, 저 일이 있어서요.”

“따뜻하게 입고 가지, 오늘 추운데.”

따뜻한 음성에 도준이 자신의 행색을 돌아봤다. 도준은 희찬이 사 준 패딩 대신, 얇은 외투 하나 걸친 채였다.

“하하, 금방 따뜻한 곳에 들어갈 거라, 괜찮습니다. 수고하세요.”

“그래, 조심히 다녀 와.”

도준은 재빠르게 걸음을 놀렸다. 이 순수하고, 작고, 따뜻한 동네에서 얼른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도준의 숨을 죄었다.

언덕을 모두 내려온 도준의 눈에 동네와는 어울리지 않는 승용차가 보였다. 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검은 세단이 도준의 눈에는 마치 블랙홀처럼 보였다.

도준이 걸음을 주춤거렸다. 나름대로 마음을 굳게 먹고 나왔는데, 막상 마주하니 숨이 절로 떨렸다. 저 차를 타면 앞으로 이곳으로는 돌아올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도준이 머뭇거리는 동안 운전석 문이 열렸다. 일전에 도준을 찾아와 비정한 말을 마구 쏟아 냈던 전광진이 도준 앞에 섰다.

도준이 느릿한 걸음으로 전광진에게 다가갔다. 전광진은 오늘도 여지없이 값비싼 정장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속을 꿰뚫는 듯한 날카로운 눈으로 도준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타.”

“…….”

전광진이 조수석 문을 열었다. 마치 이 정도 대우는 기꺼이 해 주겠다는 것처럼, 선심 쓰는 듯한 전광진의 손짓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준은 군말 없이 차에 올랐다. 그래도 큰 회사의 대표라는 사람이, 운전수도 없나. 괜히 그런 생각이나 하면서 말이다.

전광진의 차 내부는 드라마에서나 보던 회장님 차와 다르지 않았다. 전광진이 핸들을 쥐고 시동을 걸었지만, 차에서는 시동을 건 티도 나지 않았다. 시끄러운 엔진 소리를 듣고 자란 도준에게는 한없이 어색한 정적이었다.

“떨려?”

떨린다기보다 무서웠다.

하지만 전광진에게는 조금도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도준인지라,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전광진이 피식 웃었다. 도준의 행동을 단순히 사춘기 남학생쯤으로 치부하는 듯한 태도였다.

“그래도 우리는 손님 받을 때 다 성병 검사하고 해, 너는 좋은 스폰받는 줄 알어.”

풋, 헛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도준이 가까스로 참았다.

도준에게 전광진의 말은 그저 자신들의 비도덕적인 행위를 정당화하고, 포장하려는 정도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전광진의 차가 향한 곳은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있는 값비싼 5성급 호텔이었다. 이한 그룹의 로고가 중앙에 크게 박힌, 도준은 살면서 스쳐 보지도 못한 곳이었다.

전광진은 정문 앞에 차를 세웠다. 여기에 차를 세워도 되는 건가, 가볍게 생각하기 무섭게 발렛 주차를 담당한 호텔 직원이 나와 전광진에게서 키를 받았다.

그에 또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도준은 새빨간 입술이 하얗게 질리도록 세게 짓이겨 물었다.

전광진을 따라 한 발, 한 발 조심스러운 걸음을 옮겼다. 전광진은 고급스러운 호텔 내부에서도 가장 위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호출했다. 뭐가 그렇게 신이 나는지, 넥타이를 매만지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이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결국 와 버렸다. 도준은 쓴 침을 꼴깍 삼켰다. 코끝에 스미는 호텔 향이 지독하게 썼다. 마치 공기 중에 가시가 돋은 것처럼 코를 찌르고 드는 향은 대부분 그저 ‘좋다’ 칭할 향이었지만, 도준에게는 그저 아팠다.

숨을 쉬는 게 힘들어지니, 침을 삼키는 것도 어려워졌다.

침은 내가 삼켜야 넘어가는 거였나, 숨은 어떻게 쉬는 거더라.

의식조차 필요 없을 당연한 것들도 생소해졌다. 도준이 도사린 긴장 속에 혼란을 겪는 동안,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제일 위층에 있는 스위트룸 라인에 다다랐다. ‘띵’ 울리는 맑은 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도준이 전광진과 함께 들어선 객실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내부 곳곳을 훤히 비추는 밝은 빛이 온갖 가구에 부딪혀 비산되었다. 그 모습은 화려하다 못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과하다 생각될 정도로 치장된 객실의 장식품이 하나하나 무거웠다.

“후으…….”

도준이 저도 모르게 떨리는 숨을 크게 터뜨렸다. 도준의 눈이 머무는 곳은 쉽게 볼 수 없는 큰 사이즈의 침대였다. 온갖 구속구와 콘돔, 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구가 잔뜩 놓인 것을 보기 무섭게 정신이 아찔해졌다.

콘돔, 젤. 희찬과 관계를 할 때는 저마저도 살 돈이 없어 마찰열에 아파했는데.

작은 것들 하나하나가 도준에게는 모두 돈으로 닿아 마음을 짓눌렀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돈이 있었다면 도준이 이곳에 있을 이유도, 희찬이 그러한 협박을 받아야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게 그렇게 속상했다.

무거운 숨을 겨우겨우 내쉬는 도준 옆에 전광진이 섰다. 아까부터 거슬리는 향수 향을 풍기는 전광진의 냄새를 맡기 무섭게 도준이 흠칫 떨었다.

“옷부터 벗어야지. 너는 여기서 옷 못 입어.”

“……네.”

도준은 덤덤하게 행동하려 무던히도 노력했다. 이미 모든 치부를 드러냈지만, 그래도 자신의 아주 낮은 밑바닥까지는 보이고 싶지 않다는 오기였다. 그래서 옷도 부러 훌렁 벗었다. 이 행위에 큰 의미가 없다는 듯, 내 몸에 조금도 미련이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심정을 숨기려는 노력과 달리, 손끝은 바르르 떨려 자꾸만 헛손질을 해 댔다.

전광진은 그저 가만히 도준의 몸을 감상했다. 이전에 봤을 때도 참 잘 빠진 몸이라고 생각했지만, 화려한 조명 아래 세워 두니 마네킹이 울고 간다 말해도 부족함 없는 예쁜 몸이었다.

“그래도 얼굴은 가려 줄게, 얼굴이 이런 데서 팔리기는 좀…… 아깝거든.”

“…….”

이제 와서 위선은, 씨발.

도준은 뾰족한 마음에 툭 튀어나오려는 욕을 가까스로 삼켜 냈다.

“혹시 몰라? 배우 하게 될 수도 있잖아. 얼굴 팔리면 안 되지. 대신, 몸 잘 써.”

전광진이 손끝을 세워 도준의 가슴부터 아랫배까지 느릿하게 그어 내렸다. 긴장한 탓인지, 그 손길이 유달리 자극적이었다.

전광진이 우악스럽게 도준의 페니스를 쥐었다. 도준은 흥미로운 듯 제 페니스를 주물러 대는 전광진의 손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진짜 크네.”

“읍…….”

참고 참았던 신음이 비집고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도준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등 뒤로 모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한참이나 도준의 몸을 매만지던 전광진이 침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만히 전광진의 걸음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도준이 그가 집어 든 것을 본 후에는 큰 숨을 들이켰다. 그의 손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옥죄는 듯한 빨간 로프가 들려 있었다. 전광진은 도준의 반응을 그저 재밌는 영화 감상하는 양 유심히 살폈다.

“손 내밀어 봐.”

도준이 가지런히 손을 내밀었다.

“두 손.”

담백한 명령에 도준이 한 손을 더 내밀었다. 전광진은 아주 능숙하게 도준의 두 손을 묶었다.

도준은 아까부터 차곡차곡 차오르는 비참함을 또 한 번 억눌렀다. 끔찍한 현실에 눈물이 치솟으려는 것을 억지로 꾹 참고 주먹을 쥐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도움을 요청할 곳 하나 없다. 사방이 꽉 막힌 방 안에서 참담한 상황을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저 죽고만 싶었다.

그래도 도준은 정신을 다잡고 서서 의지를 다졌다.

내가 서야, 희찬이가 서고, 내가 견뎌야, 희찬이가 웃는다.

그 사실만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너는 네 좆 대가리 만지면 안 돼, 뒤로만 가는 거야.”

전광진의 말을 듣는 도준의 표정이 차츰차츰 가라앉았다. 이 악물고 견디는 것 같더니, 이제야 제 처지를 자각한 건지, 한껏 어두워진 도준의 표정이 금세라도 울 것 같았다.

전광진이 피식 웃었다. 도준의 큰 몸이 흠칫 떨렸다. 전광진은 정성스레 매듭을 엮어 도준의 손을 구속하는 동안 이러저러한 설명을 늘어놨다. 도준은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근데.”

전광진의 달라진 목소리에 도준이 눈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애꿎은 땅만 노려보느라 몰랐는데, 상이 흐릿한 걸 보니 기어코 눈물이 맺힌 모양이다. 도준은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부러 눈을 부릅떴다.

“못 느끼는 게 제일 좋아.”

도준이 이미 다 터진 입술을 또 한 번 세게 짓이겨 물었다. ‘억지로 하는 느낌’이 제일 좋다는 것을 뱅글 돌려 좋은 말로 표현하는 전광진의 말에 가슴이 다 찢어지는 것 같았다.

맞다, 나 합의된 강간당하러 온 거였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다 알고 있는 사실과 과정이었음에도 모든 것이 새롭게 닿았다. 도준은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숨기려 입술을 말아 물고 거친 숨을 쉬었다.

“이런 거 하는 사람들은 취향이 독특한 사람이 많아. 오죽하면 여리여리한 애들보다 너 같은 애들이 수요가 더 좋을 지경이거든.”

“…….”

“너처럼 덩치 좋고 체력 좋은 남자애랑은 하드한 플레이가 가능하지. 뭐든 견뎌 내니까, 데리고 놀 맛이 나.”

전광진이 로프 끄트머리를 끌어당겼다. 마치 따라오라는 듯한 행위에 도준이 첫발을 떼고 그가 끄는 곳으로 향했다. 로프에 묶인 손목이 저렸다. 전광진이 당기면 당길수록 빡빡하게 조이는 게 꼭 숨통이 틀어 막힌 자신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만 같았다.

“엎드려 누워, 다리 벌리고.”

도준은 고분고분 침대 위에 올랐다. 전광진이 명하는 대로 다리를 벌리고 엎어져 엉덩이를 내밀었다. 전광진의 큰 손이 괴팍하게 도준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도준이 숨을 들이켰다. 파르르 떨리는 호흡이 터져 나왔지만, 신음은 내지 않으려 목에 힘을 주었다. 도준의 울대가 울렁거렸다. 목에 솟은 핏대가 발악하며 도준의 처절함을 표해 냈다.

“너 진짜, 엉덩이가…… 환상이네.”

“……흣.”

“따먹고 싶게 생겼어.”

희찬에게 들을 때는 그저 좋은 칭찬이었는데, 같은 말을 전광진에게 듣는 것은 수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도준이 이를 악물고 목소리를 죽였다. 엉덩이를 조몰락거리던 전광진의 손이 떠났다. 곧이어 차가운 액체가 엉덩이 사이에 닿았다. 도준의 몸이 흠칫거렸다. 낯선 느낌은 이제 시작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 같았다.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삽시간에 도준을 집어삼킨 공포는 도준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읍……!”

“빡빡하네.”

얇은 라텍스 장갑을 낀 전광진의 손가락이 불쑥 도준의 안으로 들어왔다. 긴 손가락이 안기는 이질감에 도준이 허리를 비틀었다. 팔다리가 벌벌 떨렸다. 이럴 줄 알고 왔는데도, 실재가 되어 마주하니 참을 수 없는 눈물이 터져 흘렀다.

왜 이런 일은 꼭 우리에게만 일어나는 건지.

도준은 참혹한 현실을 원망했다. 자신이 아니면 희찬이 해야만 했을 거라는 전광진의 말이 맴맴 맴돌았다.

그렇지 않아도 가진 게 없어 서러운 인생이었다. 남들은 다 가진 부모조차 없는 제가 겨우겨우 손에 쥔, 몇 안 되는 그것마저도 모조리 앗아 가는 현실이 원망스럽다.

하늘은 견딜 수 있는 시련만 준다던데, 그거 다 개구라 아닐까. 평탄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 어쩌다 맞닥뜨린 어려움에 지어낸 듣기 좋은 소리인 것이 분명하다.

도준의 큰 손이 시트를 찢어발길 것처럼 힘을 주고 끌어당겼다. 뒤에서 손가락을 쑤셔 넣으며 자신을 희롱하는 전광진의 말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도준은 그저 암담한 현실에 소리죽여 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흑, 읍……. 흐윽.”

결국 참지 못했다. 도준의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설움은 크기를 더해 한이 서렸다.

짝―!

“흡!”

날카로운 파열음이 공간을 메우기 무섭게 도준의 몸이 흠칫 떨렸다.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울면 어떡하니.”

호통이 돌아왔지만, 울음을 그칠 수도 없었다. 도준은 몸을 지탱하던 팔에 힘이 탁 풀리는 것을 느끼고 몸을 처박았다.

나는, 견디고 싶어서 견디는 게 아니다. 그저 견디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어 억지로 견디는 중이었으므로, 하늘을 증오하며 우는 것 정도는 하고 싶다.

도준은 아득해지는 시야에서 굳이 상을 찾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고, 그저 시간이 흐르기만을 바랐다. 속도 모르고 흐르던 오전의 시간처럼, 이 시간도 체감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흘러가길, 간절히 빌었다.

“다음 주 월요일, 2시. 여기서 보자.”

해가 쨍쨍할 때 동네를 벗어났는데, 도준이 다시 돌아온 것은 해가 사라진 뒤였다. 남자는 만났던 곳에 도준을 내려놓고 손가락 네 개를 펴 흔들었다. 네 번 남았다는 것을 인지시키는 행동이었다.

도준은 다 잠긴 목으로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못했다. 어찌저찌 차에서 내리기는 했으나, 다리를 놀릴 수 없었다. 허리 아래로 모든 신체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도준이 겨우겨우 슈퍼 앞 평상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후들거리는 다리로는 도무지 언덕을 오를 수가 없었다. 잠시 쉬었다 가자고, 앉은 자리가 딱딱해 엉덩이가 아렸다. 깊이 뿜어내는 한숨이 무겁기 그지없다. 도준은 차가운 평상을 매만지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켰다.

“하…….”

도준의 입에서 떨리는 한숨이 뭉쳐 터졌다. 시간이 몇 시나 되었을까.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지 모르겠으나, 그래도 하루 만에 모든 것이 끝났다. 앞으로도 이렇게만 된다면 네 번쯤이야, 눈 꼭 감고 견디면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윽고 웃음이 터졌다. 하기 싫어 울고, 발버둥 치던 것은 언제고, 이제는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나 드는 게 퍽 어이없다.

“미쳐가지고…….”

다시금 처지를 깨달은 도준의 손이 벌벌 떨렸다. 감히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턱을 틀어 꺾고, 다리를 아무렇게나 벌리고, 팔을 비틀어 쥐던 우악스러운 손길들이 떠올랐다. 온몸에 남자들이 남긴 손자국이 새겨져 있을 것만 같아 마지막에는 제 몸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도준이었다.

비집고 나오려는 눈물이 형태를 드러내기 전에 도준의 손에 의해 사라졌다. 도준은 연거푸 마른세수를 하며, 자신을 다스리려 노력했다.

괜찮다, 괜찮다.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그렇게 생각이라도 해 보려 했다.

괜찮다고 연이어 얘기하다 보면 한 번쯤은 괜찮아지지 않을까.

터무니없는 바람도 함께였다.

그래도, 내일은 희찬이 오니까…….

시선을 내리깔아 바닥을 훑던 도준이 고개를 치켜들고 새까만 하늘을 봤다. 오늘따라 청명한 하늘에 별이 많이도 떴다. 시리도록 찬란한 별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저렸다.

희찬이는 저렇게 반짝반짝 빛이 날 텐데, 나는…….

도준이 다 터진 입술을 짓이겨 물었다. 그림자를 자처한 주제에, 제게도 빛이 드리우길 은연중에 바랐던 걸까. 기어코 눈물이 비집고 나와 도준의 볼을 타고 흘렀다.

아무래도,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소망을 가졌던 모양이다.

도준의 고개가 다시 바닥으로 홱 꺾였다.

얼마나 시간을 보내었을까. 몰아치는 찬 바람에 도준이 정신을 되찾았다. 저벅저벅 걷는 소리가 들렸다. 꽁꽁 언 볼을 한 도준이 자신을 의아하게 보는 남성과 마주했다.

“도준이 안녕.”

“안녕하세요.”

슈퍼에 살 것이 있는지, 발을 돌리던 남성이 살갑게 아는 척을 하며 말을 걸어오자, 도준도 부러 생긋 웃었다.

“공중전화 쓰려고?”

10시쯤, 도준이 공중전화를 쓴다는 사실은 마을 사람 모두가 아는 공공연한 것이었다. 도준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 몇 시예요, 아저씨?”

“10시 다 되어 가. 목소리가 왜 그러냐? 그러게, 따뜻하게 입으라니까.”

“네, 그럴게요.”

벌써 10시가 되었구나.

도준이 주섬주섬 주머니를 더듬어 동전을 찾았다. 짤랑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하니, 다행히 동전이 있는 모양이다.

공중전화는 멀지 않았다. 다섯 발자국 남짓 걸음을 옮기자 금세 공중전화에 다다랐다.

공중전화 앞에 선 도준은 차가운 수화기를 쥐었다가 내려놓길 반복하며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혹시 희찬이 목소리를 들으면 울지 않을까, 걱정이 몰려왔다.

그래서 선뜻 전화를 걸지도 못했다.

“후우…….”

도준은 한참이나 자신을 다스린 후에야 수화기를 들었다. 동전을 밀어 넣자 차가운 철 바닥에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도준이 전화번호를 하나하나 힘주어 눌렀다.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받길 바라는 마음과 받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치열하게 싸웠다.

― 네, 장희찬 휴대폰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희찬이 전화를 받을 수 없을 때 몇 번 통화했던 희찬의 매니저였다.

도준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쉬었다. 적어도 지금은 희찬이 목소리 듣고 울 일은 없을 것 같다.

“아, 안녕하세요. 이도준이라고 합니다.”

― 아, 도준이구나. 희찬이 지금 촬영 중인데 어쩌지? 이따가 12시쯤 다시 전화해 볼래?

“네……. 알겠습니다.”

자신의 말을 전한 남자는 매정하게 전화를 끊었다. 그에 도준도 덜컹 소리가 나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가슴이 부풀 정도로 큰 숨을 들이켰다가, 후, 뱉었다. 도준의 하얀 입김이 공기 중에 뭉게뭉게 피어 흩어졌다.

도준은 무너지려는 몸을 겨우겨우 추슬렀다. 다리에 힘이 없어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두 시간을 이 추운 곳에서 보낼 수는 없었다.

도준이 이를 악물고 무릎에 힘을 주었다. 딛는 걸음 한 발, 한 발이 힘겨웠다. 내린 눈이 낮 동안 녹지 않고 웅크려, 얼어 버린 언덕은 오르는 것이 평소보다 훨씬 힘들었다. 몸을 조금만 숙여도 찌르르 통증이 울리는 허리나, 엉덩이가 고통스러웠다.

빨리 집에 가서 씻어야지.

그런 생각만 곱씹었다. 호텔에서 충분히 씻고 나왔지만, 그래도 집에서 씻어야 마무리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샤워를 하는 동안 도준은 몇 번이고 제 몸을 돌아봤다. 혹시나 남자들이 남겨 둔 흔적은 없는지, 상처가 남은 건 없는지 확인하는 도준의 눈은 세심하고 조심스러웠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몸에는 흔적이 없었다. 원래 흔적은 남기지 않는 건지, 아니면 처음이라 봐준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일말의 ‘배려’로 희찬과 함께할 자신을 생각해 준 건지 그건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몸은 평소와 다름없이 백옥처럼 깨끗했다.

“이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나도 참…….”

어이가 없어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샤워를 마친 도준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식탁 위에는 도준이 아무렇게나 던져둔 연고가 있었다. 연고를 보기 무섭게 비아냥거리던 남자의 말이 떠올랐다.

[찢어졌을 테니까, 약 잘 바르고.]

끝까지 위선을 떨어 댔던 남자의 모습에 역겹다 못해 토악질이 치밀었다.

도준은 애꿎은 이불을 세게 쥐었다. 푹신한 이불이 불현듯 호텔의 것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집 안에서 호텔 향이 나는 것 같았다. 그저 희찬과 지내며 함께 사용하는 보디로션이나, 스킨 따위의 냄새가 가득한 집이었는데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아……. 씨발…….”

치미는 미시감은 안락함도 앗아 갔다.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괜찮다, 괜찮다 되뇌다 보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다섯 번 중 이제 고작 한 번 했다. 하지만 그조차 도준에게 미치는 영향은 지대했다.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저릿한 통증에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도준이 다급하게 희찬이 즐겨 입던 옷을 꺼내 들고 품에 안았다. 잘 빨아 둔 옷에서 희찬의 냄새가 날 리가 없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안정이 찾아오는 것 같았다. 가파르게 헐떡거리던 도준의 숨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졌다.

도준은 마치 놓치지 않을 거라는 의지를 불태우는 것처럼, 희찬의 옷을 세게 거머쥐었다.

보고 싶다, 희찬이가.

안고 싶다, 희찬이를.

종일 다른 남자들과 있으면서 머릿속으로는 얼마나 희찬을 곱씹었는지 모른다. 속으로 그저 ‘장희찬’ 세 글자를 되새기며 참고 또 참았던 고된 시간이었다.

하지만 네 번 남았다.

그 사실이 도준의 숨통을 틀어막고 존재를 비웃었다.

급격한 스트레스가 몰려왔다. 거대한 벽 앞에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짓밟히는 무력함이란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아득함이었다.

갑자기 눈앞이 새까맣게 비었다. 분명 환하게 불을 켜 둔 집이었는데, 그 어느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블랙아웃이라도 된 것처럼 머릿속도, 눈앞도 그저 깜깜했다.

도준은 멍하니 앉아 무기력한 호흡을 거듭했다. 세게 거머쥐었던 희찬의 옷은 침대 아래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었다. 대신, 도준의 손에는 작은 대본이 하나 들려 있었다. 희찬과 처음 같이 연기를 했던 극의 대본이었다.

“하…….”

깜깜한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도준을 괴롭히던 남자들의 목소리도 사라졌다.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괴롭히던 호텔의 형상도, 코끝을 아프게 찔렀던 호텔의 향도 모조리 사라졌다.

공기조차 없는 공간에 덩그러니 혼자 놓인 것 같았다. 아무도 찾지 않고, 누구도 나가지 않는 작은 밀실에 갇혀 버린 기분이었다.

달갑지 않았으나, 굳이 벗어날 이유도 모르겠다.

불현듯 찾아온 무력감은 순식간에 도준을 집어삼켰다.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의식하지 못한 순간에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동파된 수도처럼 많은 양이 터져 흘렀다. 금세 눈물이 범벅된 도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또 장희찬이었다.

“그래도…… 희찬이가 아니니까…….”

내가 해서 다행이지, 내가 해서 다행이다.

도준은 그런 생각만 내내 곱씹었다.

한 번 해 보니 알겠다. 희찬이는 이런 곳에 절대 발을 들여서는 안 된다는 걸 뼈저리게 알겠다. 그러니 이왕 더럽혀진 내가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을 잃어버린 도준이 결국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렸다. 그 울음소리는 세상 그 어느 것보다 힘겹고, 아픈 것이었다.

도무지 일어설 수가 없다. 남자들의 손에 함부로 다루어진 전신이 전에 없는 고통을 안겼다. 큰 수술 후 마취에서 깬 것처럼, 온몸 구석구석이 요란하게 발악을 해 댔다.

그럼에도 도준은 12시가 되기 무섭게 이를 악물고 일어나 동전을 챙겼다. 지금 희찬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정말로 죽을 것 같았다. 그 앞에 울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불과 몇 시간 전의 자신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 도준아!

맑은 희찬의 목소리가 도준의 귀를 깨웠다. 부정확한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던 귓가가 일순 조용해졌다. 도준은 울컥 치미는 감정을 겨우 가다듬었다.

“응, 희찬아. 잘하고 있어?”

가까스로 내뱉은 목소리가 볼품없다. 잔뜩 쉰 목이 낸 것은 본래 도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 응, 너는 밥 잘 먹고 있어? 잠은 잘 자고?

그러고 보니, 오늘 한 끼도 먹지 못했다. 그런데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아니, 입맛이 없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까.

거짓말은 할 수 없었던 모양인지, 도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 도준아?

“응, 듣고 있어.”

― 너 목소리가 왜 그래.

“…….”

― 울었어? 무슨 일 있어?

“울 일이 뭐가 있어. 아무 일도 없어.”

귀신같은 장희찬. 동네 어른은 그저 ‘감기’로 치부했던 목소리를 희찬은 기가 막히게 알아챘다.

도준은 결국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 거짓말이면 나 화내.

순식간에 험상궂은 목소리를 내는 희찬 덕에 도준이 큼큼, 목청을 가다듬었다. 가벼운 심호흡을 한 후에는 일부러 좋은 것을 생각하며 마음을 가볍게 먹었다. 억지로 웃고, 눈도 크게 뜨고서 말이다.

좋은 거……. 좋은 거…….

그 끝에 떠오른 것은 또 희찬의 말간 얼굴이었다. 도준이 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보고 싶어서 그래. 내일 언제쯤 와?”

다행히도 이번엔 밝은 목소리가 나왔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한숨이 들리는 것 같았지만, 도준은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 나 이제 다 끝나서, 음……. 지금 바로 출발할까?

“너 피곤하지 않아? 매니저 형도 쉬셔야지.”

― 아까 형도 오늘 올라갈 수 있으면 가자고 그랬었거든.

도준이 애꿎은 전화기 선을 배배 말아 꼬았다. 희찬이 온다는 것은 언제고 즐거운 일이었기에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도준에게는 희찬이 필요했다.

“그랬구나, 그럼.”

― 이도준.

“응?”

― 너는 나 보고 싶다면서 왜 자꾸 내가 피곤할 거만 생각해, 나도 너 보고 싶은데.

“…….”

― 그러지 마, 내가 지금 가는 게 좋으면 그러라고 해. 왜 자꾸 나만 배려하려고 해.

희찬이 매서운 잔소리를 쏟아 냈다. 나무라는 듯한 희찬 덕에 도준은 문득 억울함을 느꼈다.

“……너도 그러잖아.”

― 그래서 우리가 사랑하나 봐.

그에 도준이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종일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공기가 가벼워졌다.

같은 크기의 사랑으로 같은 형태를 만들어 내는 우리는 결국 서로를 배려하는 것으로 사랑을 드러냈다. 지금처럼 말이다.

도준은 오랜만에 느끼는 상쾌함에 저도 모르게 큰 한숨을 쉬었다. 수화기 너머 희찬이 ‘한숨은 웬 한숨이냐’며 핀잔을 주어도 도준은 그저 가뿐하기만 했다.

결국, 답은 장희찬이다.

마치 돌파구를 찾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힘에 부쳐 울부짖어도, 희찬의 목소리면 힘이 났다. 작은 빛조차 과분한 소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빛은 도준과 함께였다.

잘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잠든 모양이다. 희찬과 통화 후 놀랍도록 편안해진 마음이 기어코 잠을 몰고 왔나 보다. 새벽에 도착한다는 희찬의 말에 새벽까지 그를 기다리려 했던 의지와 달리, 도준은 침대에 똑바로 누운 채로 눈을 떴다.

눈을 뜨기 무섭게 허리가 아프고, 전신이 발악을 했지만 시야 가득 들어찬 환한 생명체에 웃음부터 비죽 튀어나왔다.

빛이 왔다. 내 세상이 돌아왔다. 그것만으로도 도준은 그저 행복했다.

도준의 품에 안긴 희찬은 고이 잠든 채였다. 늦은 시간까지 진행된 촬영을 마치고 곧장 올라온 것이 피곤하긴 했던 모양이다. 부스럭대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잠든 희찬은 새근새근 귀여운 숨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왜 그렇게 귀여운 건지.

도준은 치미는 사랑을 견딜 수 없어, 희찬의 앞머리를 손에 힘을 주고 쓸어 넘겼다. 도준의 힘에 이마가 밀린 희찬이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웅크렸다. 도준이 한 번 더 희찬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으으응.”

하지 말라는 듯, 희찬은 아예 도준의 가슴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아……. 귀여워.”

가만히 희찬을 보고 있자니 종일 힘들었던 어제의 일도 마치 지독한 악몽만 같았다. 그저 공포 속에 발발 떨며 지내었는데, 갑자기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그것들은 모두 허상이었다는 것처럼, 실제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할 환상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암담했던 미래는 그저 눈앞에 드리운 환한 빛으로 찬란해졌다.

“역시 나는…….”

역시, 나는 장희찬이면 된다.

도준이 얼굴을 괸 채로 한 손으로 희찬의 볼을 쿡쿡 찌르며 싱긋 웃었다.

“찌르지 마세요…….”

희찬이 눈을 감은 채로 미간을 찌푸렸다. 뾰로통한 목소리에 도준이 조금 더 힘을 주고 세게 눌렀다.

“복숭아세요.”

“자꾸 찌르면 잡아먹는다, 너.”

희찬이 도준의 손가락을 확 낚아챘다. 말 그대로 ‘잡아먹으’려는 것처럼 도준의 손을 앞니로 앙냥냥 깨물자 도준은 장단을 맞춰 아픈 시늉을 해 댔다.

희찬이 몸을 틀어 도준의 위에 올라탔다. 순식간에 전복되는 배처럼, 휙 뒤집힌 몸에 도준의 미간이 일순 좁혀졌다.

“아…….”

도준이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짧은 신음이 터져 흘렀다. 욱신거리는 허리와 엉덩이 부근이 안긴 통증 탓이었다.

“왜, 아파? 어디 박았어?”

“아, 아니.”

희찬은 금세 도준의 몸에 제 몸을 맞춰 눕고 도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쪽쪽, 귀여운 소리가 났다. 도준의 티셔츠 안으로 밀어 넣은 희찬의 손은 분주하게 도준을 어루만졌다.

도준이 부드럽게 희찬의 뒤통수를 거머쥐었다. 희찬의 뒷덜미에 팔을 두르고, 목을 집요하게 빨아들이는 희찬의 입술을 찾아 턱을 내리자, 희찬이 금세 도준의 입술을 말 그대로 잡아먹었다.

“멈출 거면 지금 말해.”

한참 입을 맞추던 희찬이 고개를 빠끔 들고 도준을 직시했다. 희찬의 옅은 눈동자에서 열망이 읽혔다. 도준은 부드럽게 표정을 풀고서 희찬의 얼굴을 거머쥐었다.

“해, 하고 싶어.”

“내가 넣고 싶어.”

희찬이 부드럽게 도준의 볼을 쓰다듬었다. 도준은 허공에 두었던 시선을 희찬과 마주하며 울대를 들썩거렸다.

“……응, 그렇게 해.”

도준은 기꺼이 희찬의 요구에 응했다. 희찬이라면 머릿속에 가득 도사린 공포를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희찬과 관계를 한다면 앞으로 며칠간은 그 남자들의 손길을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도준은 희찬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희찬은 도준의 승낙이 떨어지기 무섭게 도준의 티셔츠부터 벗겼다. 단 한 번의 손길로 단번에 벗겨진 티셔츠가 침대 아래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졌다.

차가운 공기 중에 두 사람의 몸이 한데 뒤엉켰다. 희찬은 짓이겨 누르듯 도준의 몸에 제 몸을 붙이고서, 도준의 아랫입술을 물고, 혀로 적셨다. 촉촉한 입술에 차가운 타액을 묻히자 도준의 따뜻한 입술이 희찬의 윗입술을 머금었다.

금방 혀가 뒤엉켰다. 서로의 입 안에 혀를 밀어 넣고, 입천장을 핥고, 치열을 훑는 행위가 이어졌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이 섞였다. 입술이 떨어지자, 기다란 실선 모양으로 늘어났다. 다시 혀가 붙었다. 마구잡이로 엉키는 뭉텅한 살덩어리에 야릇한 소음이 함께였다.

“후음…….”

“흡, 우읍…….”

입 안에 갇힌 신음이 웅웅 울렸다. 닿아 있음에도 탐하길 원하는 혀가 쉴 새 없이 상대를 안달 냈다. 숨통이 틀어막혀 가쁜 숨을 몰아쉬는 중에도, 잠시 입술이 떨어졌다 하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상대를 잡아당겼다.

“윽, 아……!”

도준의 고개가 한껏 뒤로 젖혔다. 퉁퉁 부은 엉덩이 사이로 예고도 없이 희찬의 손가락이 비집고 들어왔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아 빡빡한 살에 마찰이 일었다. 예민한 살갗이 쓸리고, 두툼한 것을 머금으니 달갑지 않은 고통이 밀려왔다.

“여기 부었네.”

“으응, 아…….”

“뭐 했어, 혼자서.”

“흐으, 흑. 아, 희찬…….”

희찬은 착실히 손가락 개수를 늘렸다. 도준의 내벽을 부드럽게 주무르며 달래던 희찬의 손가락이 세 개쯤 들어왔을까, 여러 갈래로 흩어진 손가락이 정신없이 도준의 속을 휘저었다.

도준은 그저 희찬의 손에 제 몸을 맡긴 채로, 끙끙 앓는 신음을 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도준의 손이 희찬의 튼튼한 어깨를 세게 쥐었다. 하도 힘을 준 탓에 도준의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희찬의 입술이 도준의 목덜미에 닿았다. 희찬은 자신이 남겨 둔 검붉은 흔적에 다정하게 입 맞추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도준의 커다란 페니스는 이미 크기를 다하고 핏줄까지 도드라진 상태였다. 아주 못 느끼던 이전과 달리 제법 쾌락을 찾는 모양새가 뿌듯했다.

“혼자 자위라도 했어?”

“흐으……. 아…….”

“기특해 죽겠어.”

도준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제게 있었던 일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하고, 마냥 기특해하는 희찬 앞에 대역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와 달리 몸은 점점 열을 냈다. 아프기만 했던 관계들이었는데, 이상하게 희찬의 손길 하나하나에 온몸이 소스라치게 반응했다.

“아!”

“그치, 여기였어.”

“흐, 흐읏, 아……. 아흡.”

희찬의 손가락이 어느 한 지점을 꾹 눌렀다. 도준의 허리가 용수철처럼 튀었다. 단단하게 솟은 페니스도 함께 꺼떡거렸다. 도준의 몸이 잔잔한 전율에 움찔거렸다.

희찬의 손가락이 한 번에 빠져나갔다. 참기 힘들다는 듯, 제 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 넘긴 희찬이 다급한 손으로 바지를 내렸다.

쿠퍼액에 잔뜩 젖은 희찬의 페니스가 번들거렸다. 희찬은 도준의 긴 다리를 가지런히 모아 한쪽 어깨에 걸쳤다. 벌름거리는 구멍이 희찬의 페니스를 갈구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도준의 치부가 예쁘다. 희찬이 엄지손가락에 침을 묻혀 구멍 주변의 주름을 문질렀다. 도준이 몸을 크게 흠칫거렸다.

“천천, 천천히.”

도준이 더듬더듬 희찬의 배를 막았다. 바로 밀어 넣으려는 모양새를 보이는 희찬을 저지하려는 행동이었다.

“응, 알겠어.”

“아파, 진짜로…….”

“아프기만 해?”

“…….”

희찬의 짓궂은 질문에 도준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쑥스러워하는 얼굴을 가리려는 심산이었는지 모르겠으나, 도준의 가려지지 않은 귀 끝도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였다.

도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희찬이 도준의 손등 위에 정성스레 입을 맞췄다. 페니스 끄트머리를 도준의 움찔거리는 구멍에 가져다 댔다. 도준의 구멍이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입을 열었다 다물기를 반복했다. 희찬이 페니스 기둥을 쥐고 비비적거렸다.

쑥스러움에 얼굴을 가렸던 도준이 눈을 곧게 뜨고 제게 다가오는 희찬의 어여쁜 얼굴을 살폈다. 오롯한 희찬의 얼굴이 가지각색으로 변하는 모양이 도준에게 커다란 안정을 안겼다.

조금씩 구멍이 벌어졌다. 아주 좁은 틈을 파헤치고, 비집고 들어오는 뭉툭한 귀두에 도준의 숨이 턱 틀어 막혔다.

“아, 아!”

“흐, 조금만…….”

“흐읏, 읍, 아흣, 아…….”

“아프지…….”

거대한 페니스가 천천히 밀고 들어오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단단한 페니스가 내벽을 짓누르고 여린 속을 마구 휘저었다. 희찬의 어깨에 얹힌 도준의 발끝이 새하얗게 질렸다.

드디어 희찬의 배와 도준의 엉덩이가 맞닿았다. 두 사람이 동시에 안도의 숨을 뿜었다. 헐떡이는 도준의 가슴이 가쁘게 오르내렸다. 희찬이 토닥토닥 도준을 달래자 도준이 피식 웃었다.

“이제는 여유도 있어?”

“너 존나 커.”

“어떻게 알아.”

“여기 있어, 지금.”

도준의 손이 배꼽 위, 가슴 아래 어딘가를 더듬었다.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장난은 잘도 쳐 댄다. 그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 희찬이 저항 없이 웃어 버렸다.

도준의 잘생긴 복근이 한껏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눈으로 보고 있자니 희찬에게 걷잡을 수 없는 희열이 몰려왔다. 도준의 다리를 거머쥐었던 희찬이 도준의 손이 가리킨 곳보다 조금 더 윗부분을 눌렀다. 도준의 고운 미간이 한껏 일그러졌다.

“너도 여기까지 들어와.”

“읏, 나도 크네.”

“아무래도…….”

“아, 악!”

“작진 않지.”

“흣, 끅, 아! 하윽, 읍!”

희찬이 체중을 실어 페니스를 내다 꽂았다. 거센 허리 짓에 도준은 신음을 참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공기 중으로 터지는 달뜬 신음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은밀한 부위의 살들이 철썩거리며 부딪쳤다.

함부로 찌르고 드는 커다란 페니스에 속이 다 망가지는 것 같았다. 도준이 얇은 시트를 세게 부여잡았다. 힘이 몰린 손등에 퍼런 핏줄이 울룩불룩 솟아났다.

희찬의 힘에 따라 페니스가 튕겼다. 희열을 맞은 내벽이 울렁거리며 거세게 희찬의 페니스를 빨아들였다. 뜨거운 살갗이 오므라들며 페니스를 휘감았다. 극도로 예민한 부분을 쿡 찌르자 도준의 몸이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튀었다.

아찔한 전율이 전신을 지배했다. 머리가 새하얘지는 쾌락에 도준이 바들바들 떨었다. 동공이 열리고, 요도가 저릿했다. 발끝이 절로 오므라들었다.

이미 가지런히 모인 다리였지만, 허벅지가 잔뜩 조였다. 커다란 근육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도준이 느끼는 쾌감을 여실히 표현했다.

희찬의 계속되는 추삽질에 꺼떡거리던 도준의 페니스에서 조금씩 희뿌연 액체가 스며 나왔다.

도준의 좁은 곳을 드나드는 페니스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마찰이 계속되며 이는 열에 화상이라도 입을 것 같았다.

희찬의 허리 짓은 멈추지 않았다. 깊은 곳까지 한 번에 밀고 들어가 콱 박았다가, 빠르게 빠지는 행위가 짜릿함을 안겼다.

도준의 흉통이 크게 부풀었다가 쪼그라들기를 반복했다. 신음을 내지르는 도준의 모습은 쾌락에 젖은 사람 그 자체였다. 고통이 쾌감으로 변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흡, 아! 흐으……. 읏!”

“하, 도준아……. 좋아, 응?”

“응, 조…… 좋아, 야, 아!”

희찬의 큰 손이 도준의 페니스를 덥석 잡았다. 핏줄이 불끈 솟은 페니스가 미끄덩거렸다. 희찬이 도준의 귀두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힘을 줘 처박기를 반복했다. 희찬의 커다란 페니스를 머금은 도준의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붉은 속살이 함께 밀려 나왔다가, 쑥 들어가 박히는 것이 시각적 자극이 대단했다.

희찬의 땀방울이 도준의 복근 위에 뚝뚝 떨어졌다. 투명한 물기가 아래로 흘러 도준의 쇄골에 닿았다.

“아, 갈 것 같…….”

도준의 몸이 간헐적으로 움찔거렸다. 사정을 맞은 모양이었으나, 도준의 페니스에서는 정액이 나오지 않았다.

희찬의 손이 도준의 페니스를 쥐고 아래위로 흔들었다. 뭉툭한 귀두 아랫부분을 집요하게 자극하고, 손끝으로 열린 요도를 문질렀다.

희찬의 손짓 하나하나에 도준이 자지러졌다. 도준이 큰 반응을 보일 때마다 요동치는 속내가 희찬의 페니스를 거세게 자극했다.

희찬의 얼굴이 조각조각 일그러졌다. 이마에 바짝 솟은 핏줄은 희찬의 인내심을 드러냈다. 희찬은 도준이 먼저 사정한 후에 사정하려 꿋꿋이 참는 중이었다.

“움직, 여.”

“너 사정부터 하고…….”

“괜찮으니까, 움직여.”

가쁜 숨을 쉬는 주제에 명령까지 해 댄다. 희찬이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윽!”

“후으, 존나 뜨거워.”

허리를 한껏 뒤로 뺐던 희찬이 힘을 다해 한 번에 페니스를 찔러 넣었다. 몸이 들린 탓인지, 도준의 복근 위에 희찬의 페니스 형상이 드러났다.

“흡, 아…….”

눈물이 났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자극과 죄의식이 점철된 감정에 도준이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관자놀이로 눈물이 흘렀다. 눈을 가렸음에도 투명한 액체가 흐르는 자리가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나 봐, 이도준.”

희찬의 뜨거운 손이 도준의 팔을 걷어 냈다. 새빨갛게 충혈된 도준의 눈이 심상치 않게 떨리는 중이었다. 희찬이 거센 추삽질을 멈추고 도준을 그러안았다.

왜인지 오늘따라 유달리 눈물을 흘리는 도준의 모습에 마음이 아렸다. 희찬은 도준의 몸을 안은 채로 하얀 살결 위에 정성을 다해 입을 맞추고, 사랑을 전하려 무던히 노력했다.

헐떡이는 도준의 숨이 뭉쳐 뜨겁게 터졌다. 분명 희찬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으나, 속에 든 희찬의 페니스는 사정이 달랐다. 자꾸만 크기를 더하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에 속이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굵은 페니스가 속살을 누르고, 숨통을 틀어막았다.

도준이 힘겨운 숨을 몰아쉬었다. 희찬은 마치 도준을 달래기라도 하듯, 도준을 안은 채로 하염없이 도준의 뒤통수, 목덜미, 등을 차례로 쓰다듬었다.

“후으……. 아, 흣…….”

“울지 마, 도준아…….”

도준도 덩달아 희찬을 부둥켜안았다. 눈물이 범벅된 얼굴에 거리낌 없이 입을 맞추는 희찬의 등 근육이 부산스럽다.

“다시…… 해.”

“왜 이렇게 보채.”

도준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도준의 입가에 희찬의 촉촉한 입술이 닿았다. 공포로 잠식되어 바들바들 떨리던 전신에 열꽃이 피는 것 같았다. 희찬과의 관계가 안기는 전율은 실로 대단했다.

머릿속을 가득 메웠던 잡생각이 모조리 달아나는 것 같았다. 남자들과 할 때는 울부짖기 바빴는데, 지금은 그저 좋았다. 그게 그렇게 신기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담아 하는 행위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더 소중했다. 도준은 그저 정신없이 처박히고, 아무런 생각도 못 할 정도로 망가지고 싶었다. 오로지 장희찬의 손에.

“사랑해. 사랑해, 희찬아. 사랑해.”

도준은 마치 주문이라도 외듯 사랑을 읊조렸다. 음절 하나, 하나가 힘겨웠다. 하지만 어떻게든 사랑을 전하고 싶어, 도준은 쉬지 않고 사랑을 읊었다.

내 모든 것을 다 내어 주어도 아깝지 않다. 그게 너라면 나는 그저 행복만 할 테니, 이런 나라도 괜찮다면 그저 사랑을 받아 주길 바라.

그런 마음을 담아 곱씹고 또 되뇌었다.

“그렇게 계속 얘기 안 해도, 다 알아.”

“그래도, 으음…….”

오늘따라 도준의 고백이 유달리 무거웠다. 관계할 때면 매번 쉬지 않고 사랑을 읊어 내는 도준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무언가 느낌이 달랐다. 괜히 가슴이 저미는 것 같아, 희찬이 도준의 입술을 막았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도준의 아랫입술을 물고, 혀로 치열을 훑으며 허리로는 도준의 속을 탐했다. 벌름거리는 구멍이 벌어졌다가 오므라들기를 반복하며 페니스를 조였다.

이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드나들기 시작한 페니스에도 속도가 붙었다. 뜨거운 속살을 마구잡이로 휘저었다. 이전에 하던 행위는 모두 연습이었다는 것처럼, 희찬은 본능이 이끄는 대로 아무렇게나 허리를 놀렸다.

강한 힘을 실어 한 번에 처박자 도준의 고개가 꺾였다. 허리를 빼고, 도준이 알려 줬던 대로 원을 그리며 부드럽게 밀어 넣었더니 이번에는 어깨에 얹힌 도준의 다리가 바르르 떨렸다.

희찬이 움직이는 대로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이는 도준의 몸이 재밌다. 그리고 또 자극적이었다. 아랫배에 저릿함이 앉았다.

요도에 닿는 살갗이 울렁거리며 희찬의 페니스를 자극했다. 부드럽게 감쌌다가 벌어지며 풀어 주길 반복하는 속살이 생생하다. 전신의 털이 곤두서고, 살갗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희찬의 엉덩이에 힘이 바짝 실렸다. 탄탄한 근육들이 잔뜩 쪼그라들었다. 도준의 예민한 속에 진득한 액체가 힘차게 뿜어져 나왔다.

입술이 부르트도록 도준의 입을 물고 놓아주지 않던 희찬도 비로소 입을 떼고 도준을 바라봤다. 눈썹을 가린 앞머리가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액체에 젖어 들러붙어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손으로 앞머리를 걷어 주자, 도준의 다 풀린 동공이 희찬을 올려 보았다.

“사랑해, 도준아.”

갑자기 도준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언제라고 하지 않았던 말도 아닌데 마치 처음 고백을 들은 사람 같았다. 이내 도준의 페니스에서도 하얀 정액이 힘차게 솟구쳤다.

“흐으, 흡, 아…….”

“이제 뒤로도 가네.”

“아…….”

전신을 휘감은 짜릿함에 도준이 다 갈라진 목소리를 내었다. 희찬이 빠져나간 구멍이 허전하게 느껴졌다. 벌름거리는 것이 부끄러워 다리를 오므리고 누웠다. 다리 사이에서 희찬의 정액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더럽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괜히 웃음이 났다.

장희찬은 장희찬이다.

혹시 다른 사람들 손에 쾌락을 느끼진 않을까, 그것만큼 속상한 일이 있을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도준의 몸은 오로지 희찬에게만 반응했다. 줄곧 죽은 채로 성욕이라는 건 느끼지도 못하던 사람 같았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뜨거움에 시달렸다.

그게 그렇게 행복했다.

희찬은 오래간 도준을 안은 채로 마음이 저릿할 정도로 무거웠던 도준의 모습을 곱씹고 되뇌었다. 그저 자신의 기분 탓이길 바라는 마음과 혹시나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뒤엉켰다. 괜히 뒤숭숭해져, 오랫동안 도준의 몸을 매만지고, 자신이 남겨 둔 검붉은 울혈 위에 입을 맞추었다.

“물 마실래?”

“응…….”

도준은 희찬이 건네는 물을 받았다. 하지만 도무지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결국 누운 채로 희찬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 주는 물을 받아 마셨다. 뇌를 깨우는 차가운 물과 희찬의 뜨끈한 혀가 함께 닿으니 그것 또한 미묘한 느낌을 안겼다.

“시트 갈아야겠다.”

“……나 지금 못 움직여.”

희찬이 시트를 잡아당겼지만, 도준은 철자 그대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잠시 고민하는 듯 눈을 굴리던 희찬이 도준 앞에 털썩 소리 나게 앉았다. 덕분에 침대 매트리스가 출렁거렸다.

“미안, 좀 세게 했지.”

“좋았어. ……잘하더라, 너.”

“내가 누구한테 배웠는데.”

희찬이 베개를 베고 누운 도준의 머리를 들어 제 허벅지 위에 올렸다. 다 풀린 눈을 하고서 느릿한 목소리를 내는 도준의 모습은 곧 잠들 모양이었다.

“내가 좀 하지.”

“나 맨날 울잖아, 너랑 하면.”

“너무 울지 마, 하는 사람 미안하게.”

“어, 그거 네가 할 말 아닌 거 같은데.”

“……나 졸려. 잘래.”

도준의 눈꺼풀이 스르르 감겼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졸린 와중에도 꿋꿋하게 대답을 잇는 도준의 모습이 마냥 사랑스러웠다. 희찬이 몸을 숙여 도준의 이마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었다. 도준의 입꼬리가 빙그레 치솟았다.

이불 밖으로 빼꼼 튀어나온 도준의 손이 희찬의 아킬레스건을 어루만졌다. 온몸이 예쁜 희찬이었지만, 도준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희찬의 아킬레스건이었다. 남들보다 도드라진 아킬레스건이 유독 예뻤다.

도준은 제 손을 희찬의 아킬레스건에 가져다 댄 채로 잠들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잡힌 희찬만 난감한 듯 귀 아래를 긁적거렸다.

곤히 잠든 도준을 보고 있으니 세상이 다 평화로워졌다. 몰려오는 커다란 안정에 희찬도 느릿한 숨을 몰아쉬었다.

촬영장에 있을 때는 항상 긴장하느라 온몸에 담이 걸릴 정도였다. 신인이라 제대로 된 대우도 받지 못하는 틈에서, 어떻게든 눈에 띄어 보겠다고 아등바등 발버둥 치기 바빴다. 그렇게 힘겨운 며칠을 보내다 집으로 돌아오면, 무슨 짓을 해도 그저 사랑만 해 주는 도준이 희찬을 반겼다.

그때 몰려오는 평온함이란…….

아마 이도준은 평생 모를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큰 안도가 되는지.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가도 벌떡벌떡 일으키는 힘을 가졌다는 것을, 이도준은 절대로 모를 것이다.

희찬도 스르르 몸을 눕혔다. 마음 가득 도사린 안정에 금세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이내 희찬 역시 고른 숨을 쉬며 아주 행복한 잠을 청했다.

*

시간은 도준이 행복 속에 즐거워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어느덧 도준은 벌써 세 번째 스폰을 앞두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도준은 아픔과 절망 속에 좌절하며 가까스로 삶을 견뎌 내야만 했다.

도준은 침대에 누운 채로 시간을 헤아렸다. 아니, 헤아린다기보다는 다가오는 공포에 잠식당하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그곳에서 도준은 도준이라 불리지 않았다. ‘배우 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던 전광진은 선심 쓰듯 도준의 이름에서 ‘ㄷ’과 ‘ㅈ’을 따, ‘다정’이라 불렀다. 그에 다른 남자들도 도준을 곧 다정이라 불렀다.

“……구려.”

다른 사람의 이름이라면 예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이 맞닥뜨린 현실 앞에 예명과도 같은 호칭은 결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몸이 아픈 것은 어느 정도 견딜 만했다. 애초에 아깝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몸이었으니, 어떻게 망가지든 상관없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려 노력했다. 그래야만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는 도준을 괴롭히는 것은 다름 아닌, 전광진의 무정한 말이었다.

[애초에 만나지 않았으면, 너도 희찬이도 힘들지 않았을 텐데. 장희찬은 무슨 죄냐.]

라든가.

[그러게 친구로 만족하고 지냈어야지, 분수에 넘치는 걸 탐하니 벌을 받는 거다.]

라는 말들 말이다.

무엇이든 도준을 탓하는 말들이 그를 한없이 작아지게 했다. 예전 같았으면 당장 희찬을 붙잡고 ‘너도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라고 물어봤을 도준이었지만, 이제는 희찬에게 솔직하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덕분에 도준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귓가에 어지럽게 얽혀드는 남자들의 묵직한 목소리가, 몸을 탐하는 손길들이 하나하나 생생하게 닿아 도준의 숨통을 죄었다.

“가기 싫다…….”

도준이 마른세수를 거듭했다.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몇 명의 사람들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도준의 발목을 쥐어 잡았다.

그동안 도준은 단 한 번도 촬영장에 나가지 않았다. 배우라는 꿈을 손에서 놓기로 한 이상, 더는 미련을 가지지 않기 위해, 대본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당연히 일거리가 있다는 연락이 와도 받지 않았다. 그저, 한 발 한 발 그 세계와 멀어지기 위해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런 도준에게 희찬은 줄곧 ‘촬영장에 나가라’며 잔소리를 해 대었다. 왜인지 희찬이 전전긍긍하는 것 같았지만, 도준은 그를 위로할 체력도 남지 않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그러다 보니 촬영장에 나가길 재촉하고, 채근하던 희찬의 목소리도 점차 줄었다.

대신, 도준은 미친 듯이 공사장으로 출근했다. 전신에 열이 올라 뜨거운 숨이 터지는 날에도, 거친 행위에 지친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는 날에도 꿋꿋하게 공사장으로 향했다. 공사장에서는 강도 높은 업무를 배정받아 일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일을 해야만, 귓가를 울리는 저급한 말들이 들리지 않았다.

도준이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전광진과 약속했던 시간이 머지않았다. 삭신이 악을 쓰며 자신의 아픈 것을 토해 냈다. 하지만 도준에게는 그런 몸을 돌볼 기력도 남지 않았다.

“세 번만 더.”

쩍 갈라진 도준의 목소리가 차가운 공간을 깨웠다. 세 번째였고, 그 말인즉슨 앞으로 오늘을 포함하여 세 번 더 남았다는 말이다.

전광진이 말한 ‘다섯 번’은 섹스 다섯 번의 의미가 아니었다. 도준이 정해진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에 도착하면, 집에 가는 시간 또는 날은 전광진이 정했다. 처음엔 하루였다. 일주일 간격을 두고 가졌던 두 번째는 이틀이었다. 그리고 또 일주일 간격을 두고 정해진 오늘, 이번에는 며칠일지 모른다.

그래도 전광진은 희찬이 돌아오기 전에는 꼬박꼬박 도준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건 다행이기도 했고, 절망적이기도 했다.

일이 끝나든, 스폰이 끝나든 도준은 집으로 돌아오면 곧장 침대에 누워 하염없는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러다 10시가 되면 벌떡 일어나 공중전화로 향했다.

삶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을 하나하나 내려놓는 도준이었지만, 꼭 붙들고 놓지 않는 것이 10시, 전화 통화였다. 그건 희찬이 꼭 해 달라고 한 것이었으므로, 그것만은 지키고 싶었다.

“하…….”

도준의 텅 빈 눈동자가 허공을 응시했다. 며칠간 도준은 아무런 의욕이 없었다. 밥을 먹을 생각도, 담배를 태울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극심한 스트레스 후유증에 시달렸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기도 하고, 먹은 것이 없음에도 속이 매스꺼워 토악질도 여러 번 했다. 희멀건 위액을 잔뜩 토해 낸 후에는 하염없이 울기도 했다. 그렇게 겨우겨우 누워만 지내다 보면 자신의 가치를 모조리 잃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건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도준은 애써 희찬의 밝은 목소리를 생각하며 힘을 냈다. ‘사랑해’라든가, ‘같이 성공하자’라는 말들을 떠올려야만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는 제게서 멀어진 성공이었지만, 자신을 지우면 지울수록 희찬의 성공이 가까워진다는 것이 도준이 느끼는 뼈저리게 아픈 유일한 행복이었다.

도준이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닫힌 철문을 돌아보고, 다시 시선을 거둬 언덕 아래를 내려다봤다. 도준의 걸음에는 조금의 매가리도 느껴지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처럼, 모든 기운을 잃은 채로 추운 바람에 몸을 움츠릴 뿐이었다.

“도준이 일하러 가냐?”

귓가에 닿는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에 도준이 멈칫했다. 예전 같으면 방긋 웃으며 해맑은 대답을 했겠지만, 도준이 대답을 만들어 내는 데에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왜 그래, 도준아. 어디 아파?”

가까이 다가오는 남성을 본 도준이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이제는 거리에서 남성만 마주쳐도 몸이 흠칫 떨렸다. 몸이 망가지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해 온 것과는 상반되는 반응이었다.

이내 도망치듯 남자에게서 벗어났다. 남자의 의아한 시선이 도준의 뒤꽁무니를 좇았으나, 도준은 금세 남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다. 전광진의 차에 올라, 정신을 좀먹는 지독한 호텔 향을 맡은 이후로 도준에게는 아무런 기억도 남지 않았다. 며칠이 흘렀는지, 몇 명을 거쳤는지도 말이다.

기억에도 없는 그 시간 내내 얼마나 빌었는지 모른다.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잘못했다 빌고, 살려 달라 애원하는 도준은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희찬과 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아픔이었다. 남자들은 다정하지 않았다. 부드럽지 않았다. 자신의 성욕을 해소하고자 하는 남자들은 도준의 성감 따위는 전혀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저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 도준의 사정을 헤아리지 않았다. 자위할 때 기구 상태를 돌아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제 아래에 깔린 아이가 울부짖든, 갈가리 찢기는 고통에 신음하든, 남자들에게는 하등 상관없는 것이었다. 남자들은 도준이 좌절하고 절규하며 울부짖는 것에 희열을 느끼고 강도 높은 행위로 도준을 짓밟았다. 울면 울수록 좋아했고, 고통에 짓이겨 몸을 떨면 쾌락을 느꼈다.

그때마다 도준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끝없는 수렁에 온몸이 잠식되어 처참히 죽어 가는 듯했다.

그럼에도 도준은 감히 못 하겠다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감히 그만하라고 빌지도 못했다. 그저 속으로 ‘장희찬’을 골백번도 더 아로새기며 견뎠다. 제 몸이 부서지는 만큼 밝게 빛날 장희찬이 도준에게는 유일한 힘이었다.

“정신 차려야지.”

“…….”

도준의 입술에 차가운 물이 닿았다. 겨우겨우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뜬 도준의 전신을 차가운 공기가 휘감았다. 다 쉬어 버린 목에서는 제대로 된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정 힘들면 말해, 지금이라도 희찬이…….”

희찬의 이름을 듣기 무섭게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도준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가지런히 모아 손바닥을 박박 비벼 댔다.

“제가, 끅……. 흡, 제가…….”

도준의 고개가 땅으로 처박혔다. 텅 비어 버린 검은 눈동자에서는 어떠한 애착도 읽히지 않았다.

전광진은 도준이 어떤 말에 반응하는지 정확하게 꿰고 있었다. 흩어지는 정신의 끄트머리를 부여잡을 힘도 남지 않았던 도준이 희찬의 이름을 듣기 무섭게 눈물을 쏟아 냈다. 전광진은 도준이 힘겨워할 때마다, 정신을 놓고 시들어 갈 때마다 희찬의 이름을 꺼내어 그를 깨웠다. 실로 잔인한 사람이었다.

도준이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전광진이 건네는 물을 받아 마셨다. 몽롱한 정신에 멍한 시야에는 그 어느 것도 명확한 상이 맺히지 않았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나에게 하는 저 말들이 어떤 뜻인지 그조차 제대로 깨닫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난리를 치던 것이 욱신거리는 정도를 지나 사지가 찢기는 고통이 전신을 지배했다. 억지로 벌어지고, 찢긴 몸 구석구석이 아우성을 쳐 댔다. 하지만 도준은 아프다는 것조차 인지가 어려웠다.

“그래, 그렇게 견뎌야지. 다 네가 잘못해서 일어난 일인데.”

“하윽, 흐…….”

그래, 다 내가 잘못했다. 탐해서는 안 될 것을 탐하고, 내 것이 아닌 것을 감히 내 것이라 생각하여 손에 쥐고 있었던 내가 어리석었다.

그럼에도 놓고 싶지 않았다. 이 힘겨운 시간이 지나면, 희찬과 함께 그렸던 ‘우리가 원하는 지점’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이런 내 욕심을, 내 꿈을, 저 남자는 자꾸 ‘걸림돌’이라 칭했다. 그게 그렇게 아팠다.

전광진의 손에 이끌려 호텔을 벗어나는 것도 익숙해졌다. 제 의지로는 다리를 놀릴 수 없는 도준이었기에, 전광진이 이끄는 대로 그저 질질 끌려다녔다.

차 뒷좌석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도준은 창밖으로 시선을 뒀다. 빠르게 바뀌는 도시의 전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둑해진 밤하늘 대신 온 거리의 간판이 환하게 길을 밝히는 게 문득 자신은 어울릴 수 없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다음 주에 만나자, 희찬이가 이번에는 서울 스케줄도 좀 있어서 계속 왔다 갔다 할 거거든.”

희찬은 최근 다른 스케줄로 이전보다 더 바빠졌다. 그렇지 않아도 드라마 촬영으로 제대로 얼굴도 보지 못하고 지내는데, 촬영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방영일이 다가오자 드라마 홍보 스케줄로 여기저기 바쁘게 쏘다니는 것 같았다.

매일 밤 희찬과 통화를 할 때면 희찬은 들뜬 목소리로 자신의 스케줄을 알렸다. 이것저것 다양한 매체에 잡힌 스케줄이 희찬에게는 큰 설렘인 모양이었다.

“다음 주 월요일에 이 번호로 전화해. 자세한 시간 알려 줄 테니까.”

전광진이 아무렇게나 휘갈긴 숫자가 적힌 종이를 도준에게 내밀었다. 도준의 눈이 툭 떨어져 종이를 바라보았다. 숫자가 둥둥 떠다니는 듯한 환상이 보였다. 도준이 힘없는 손을 뻗어 종이를 쥐었다.

겨우겨우 집에 돌아온 도준은 곧장 침대에 누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바스락거리는 두꺼운 이불에서 희찬의 향이 잔잔하게나마 나는 것 같았다. 이불에 코를 박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갈비뼈가 다 으스러지는 것 같은 고통이 밀려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도준의 발치에 커다란 베개가 걸렸다. 희찬을 껴안고 자는 것을 좋아하는 도준을 위해, 희찬이 사 준 바디필로우였다. 희찬보다 한참 작은 것이었지만, 꼭 껴안고 누워 있으면, 작은 안정이 밀려오기도 했다.

“끙…….”

도준이 움직이는 것조차 힘든 몸을 겨우겨우 움직여 바디필로우를 안았다. 코를 처박고 숨을 쉬다 보면 밋밋한 희찬의 향이 나는 것 같았다.

“희찬이 오늘 라디오 나온다고 그랬는데…….”

도준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머리맡에 있는 라디오를 켰다. 전파 상태가 좋지 않아 지지직거리기에 힘겹게 안테나를 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운 소리가 나왔다. 10시. 어째 희찬이 출연하는 라디오도 딱 10시에 시작한다. 그래도 두 시간은 나온다고 했으니, 오늘은 두 시간 동안 희찬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행복이 밀려왔다.

“아으.”

도준이 딱딱한 매트리스에 완전히 몸을 뉘었다. 입에서 절로 케케묵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시끄러운 라디오 로고송이 집 안을 뒤흔들었지만, 도준은 소리를 줄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시끄럽게 뒤엉키는 남자들의 목소리에 라디오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에 차츰차츰 도준의 눈이 감겼다. 잠을 청하지 못하는 대신, 정신을 놓아 버리는 것이 도준이 선택한 도망이었다.

― 안녕하세요, <애프터 스쿨>에서 강해준 역을 맡은 신인배우 장희찬입니다!

하지만 그조차 도준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전파를 타고 흘러온 해맑은 희찬의 목소리가 도준의 정신을 깨웠다.

희찬의 맑은 목소리 아래에 어둡고, 험상궂은 목소리들이 깔려 웅웅거렸다. 도준이 귀를 틀어막고 몸을 바르르 떨어도 남자들의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또 눈물이 터졌다. 희찬의 목소리만 오롯하게 듣고 싶은데, 도무지 사라지지 않는 정신없는 소음이 끝끝내 도준을 울렸다.

큰 몸을 웅크린 도준이 바디 필로우를 억세게 껴안았다. 세게 움켜쥔 두 손이 핏줄이 불룩 솟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도준은 위태로운 숨을 겨우겨우 내쉬었다. 치미는 눈물과 숨을 틀어막는 각박한 현실에 희찬의 목소리가 얹히니 이보다 더 처절할 수가 없다.

― 네, 이번에 <애프터 스쿨> 촬영을 진행하면서, 정말 즐거운 일이 많았는데요…….

“끅…….”

― 제가 지방에는 가 볼 기회가 없어서, 이번에 처음 가 봤거든요. 절친한 친구가 있는데 나중에 꼭 한 번 같이 가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저를 언급하는 희찬의 말에 도준의 귀가 번뜩 뜨였다. 끅, 끅 서러운 울음을 터뜨리던 도준이 숨을 틀어막고 희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스튜디오 내부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인 듯했다. 희찬의 말에 열띤 반응을 보이는 게스트들과 DJ는 하나같이 친절했다. 그게 또 기분이 좋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딜 가든 사랑받는다는 사실이 못내 행복했다.

― 어머. 희찬 씨, 혹시 연인이신 건 아니고요?

― 아하하…….

희찬의 난감한 웃음소리가 도준의 가슴에 저몄다. 도준은 쓴 침을 꼴깍 삼키며 희찬의 대답을 기다렸다.

물론, 애인이라고 말해 주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 부정을 안 하시네요?

― 아, 아니에요. 연인 아니고, 아주 어릴 때부터 친했던 친구예요.

“흑……. 아……. 아흐, 끅.”

왜 꼭 이런 말은 또렷하게 들리는 건지.

어쩔 수 없는 말이었겠지만, 그런 말을 하는 희찬이 당연하다는 것을 잘 아는 도준이었지만. ‘내 생각은 하지 말고 네 길을 나아가라.’라고 말했지만…….

망설이는 희찬의 목소리가 충분히 자신을 배려했다는 것도 안다. 도준은 도준의 꿈을 위해, 희찬은 희찬의 꿈을 위해 각자 최선을 다하기로 했었다.

그래, 정말 그거면 되는데, 왜 이렇게 아프지…….

도준이 몸을 잔뜩 웅크렸다.

“흡, 하아……. 흐윽, 끅, 흐으…….”

자신의 꿈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희찬은, 결국 자신의 배우 생활에서 ‘애인 이도준’을 지웠다. 그게 못내 사무쳐, 도준은 눈을 질끈 감은 채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 댔다.

그래, 이것이 도준이 바라던 것이었다. 희찬이 거침없이 자신을 지우고, 스스로를 그리며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다. 희찬이 자신과는 다른 세상에서 제가 뿜을 수 있는 찬란한 빛을 발하며 웃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장희찬은 그것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고, 도준 본인은 그저 어둠이 가까울 뿐이었으니, 희찬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도준이 욕심내는 것이 단 하나 있다면.

희찬이 이 어두운 동네에 돌아올 때, 어둠과 적막을 무서워하는 희찬을 위해 동네를 비추는 것. 그거 하나만이라도 자신이 할 수 있길 바랐다.

가슴 앞에 말아쥔 도준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도 힘을 주고 울음을 참은 탓에, 목을 따라 굵은 핏대가 섰다. 산소가 모두 사라지는 것 같았다.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워 가슴을 퍽퍽 내리쳤다.

도준을 에워싸고 끔찍하게 괴롭히던 주변의 소리가 하나둘씩 아득해졌다. 한참을 바들거리며 울던 도준의 몸이 일순 축 늘어졌다. 눈에는 미처 흐르지 못한 눈물이 한가득 고인 채였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도준이 눈을 떴다. 지난밤 어떻게 잠들었는지 생각할 틈도 없이 온몸이 갈가리 찢기는 고통에 신음부터 눌러 참았다.

아, 씻지도 못하고 기절을 했던가. 마지막에 들었던 목소리는 희찬의 것 같았는데, 희찬이가 오는 것을 보고 잠들었던가…….

꿈인지 생시인지 도무지 분간이 어려운 상황들을 곱씹자니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도준은 상황을 인지하는 것을 그만두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분주한 싱크대를 바라봤다.

도준의 눈에 낯익은 등이 보였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는 뒷모습은 엉덩이까지 씰룩거리고 있었다.

“일어났어?”

희찬이 홱 몸을 돌리고 도준을 바라보았다. 하얀 머리가 비산하는 형광등 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도준을 향해 생긋 웃는 희찬의 모습이 마치 환상 같았다. 도준이 눈을 비비적거렸다.

“너 되게 피곤했나 보더라. 기다린다더니, 자고 있대?”

도준을 쳐다봤던 희찬이 다시 싱크대로 몸을 돌렸다. 뭐가 그렇게 바쁜지 희찬은 쫑알쫑알 잔소리를 하면서도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밥을 왜 이렇게 안 먹었어? 반찬 다 먹고 다시 채운 건가?”

냉장고를 뒤적거리던 희찬이 못마땅한 얼굴로 이것저것 식탁 위에 꺼내놓았다. 희찬이 없는 동안 제대로 된 끼니도 챙기지 않았던 도준이었기에, 반찬통에 반찬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거 봐, 맛없다고 이런 거 남기고 그러면 안 된다니까. 골고루 먹어야 건강하지. 나 물 끓였는데 너도 따뜻한 차 마실래? 밖에 되게 추워. 오늘은 나가지 말고 나랑 있자.”

희찬은 쉬지 않고 지저귀었다. 무슨 말이 그렇게 하고 싶은 건지, 한 발 움직일 때마다 말을 툭툭 뱉어 내는 희찬의 모습은 유달리 기분이 좋아 보였다.

도준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희찬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지켜보았다. 여전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었다. 삭신에 도사린 끔찍한 고통도 차츰차츰 사라졌다. 그러니 더욱 꿈같았다.

도준은 이불 속에 숨은 몸을 더듬더듬 만져 봤다. 손에 닿는 살결이 생생한데, 희찬이 팔랑거리는 게 왜 이렇게 꿈 같은지 모르겠다. 희찬과 헤어져 있는 시간 보다 붙어 지내는 시간이 많았음에도, 떨어져 지내는 동안 겪는 일이 워낙에 힘겹다 보니 이제는 희찬과 함께하는 시간이 비현실로 느껴졌다.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릿한 통증이 서렸다. 이건, 현실이다.

이내 도준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내려앉았다. 제 앞에서 쉬지 않고 떠드는, 부산하게 움직이며 온 집 안을 뒤집어 놓는 희찬은 실제였다.

그에 별안간 눈물이 났다.

희찬이가 왔다. 그게 그렇게 좋았다.

“이도준, 정신 차려! 왜 말이 없어?”

희찬이 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내었다. 경쾌한 소리 뒤에 뒤따라 붙는 희찬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도준을 깨웠다. 도준의 텅 비었던 검은 눈동자가 또렷하게 희찬을 바라보았다.

“언제 왔어?”

“나 어제 왔지, 근데 너 자길래 그냥 안 깨웠어. 너는 무슨 옷도 다 입고 자더라. 보일러를 안 켜니까 춥지.”

“그랬나…….”

보일러를 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춥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으니,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저 희찬의 향이 묻은 침대를 찾기 바빴던 것 같다. 도무지 혼자서 움직이기 어려운 몸을 눕히고, 희찬의 라디오를 들으려 무던히도 애쓰던 밤이었다.

“너 오늘 일 나가지 말라고 일부러 안 깨웠어. 나랑 있을 거지?”

“응.”

그러고 보니 창밖에 해가 떴다. 희찬의 말에 바깥 풍경을 쳐다보았던 도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환하게 내리쬐는 태양이 자신의 치부를 다 드러내는 기분이었다.

도준이 이불을 끌어 제 몸을 가렸다. 전신에 새겨진, 보기만 해도 역겨운 검붉은 자국을 희찬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희찬의 말대로 옷을 입고 잠든 탓에 조금도 드러나지 않은 속살이었지만, 그래도 가리고만 싶은 마음이라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얼굴만 내놓았다.

“밥 먹을래?”

“아니, 아직 배 안 고파.”

“그래? 나 배고픈데…….”

“너 밥 먹고 싶어서 그렇게 다 뒤집는 거야?”

“응, 나 배고파, 도준아.”

“내가 해 줄게.”

활기차던 희찬이 한순간에 힘을 잃고 울상을 지었다. 뭐가 그렇게 바쁜가 했더니, 그저 배가 고파 온 집을 뒤집는 중이었나 보다.

도준이 피식 웃었다.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힘든 몸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켰다. 움직이기조차 버거웠던 것도 희찬 앞에서는 그저 힘이 났다.

“나 볶음밥 먹고 싶어.”

“채소가 좀 있나…….”

“내가 이만큼 꺼내 놨어.”

짜란, 희찬이 어지럽혀 둔 식탁 앞에서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멋쩍게 웃었다. 도준의 입에서도 웃음이 터졌다. 웃기 위해 숨을 들이켰다가, 뱉을 때마다 상체에 묵직한 통증이 서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 너 이거 씻을래? 나머지는 내가 해 줄게.”

“응, 너 씻고 옷 갈아입고 와. 그거 입고 잔 옷이잖아.”

“응.”

희찬의 소매를 친히 걷어 주고, 희찬에게 채소를 맡긴 도준이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희찬은 오랜만에 도준이 해 주는 맛있는 밥을 먹을 생각에 들뜬 기분을 숨기지 못했다. 1년간 돈을 받지 않겠다고 했더니, 대표는 미친 듯이 스케줄을 잡아 댔다. 잠을 잘 틈도 없이 바쁘게 돌아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끼니도 대충 때우는 게 요즘의 일상이었다.

이동하며 먹는 도시락은 적당히 맛있고, 적당히 맛없었다. 먹으면 먹을수록 도준의 손맛이 떠오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부모가 있는 친구들이 그렇게 ‘집밥’을 찾는 게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닌 모양이다. 희찬은 이제야 그들의 마음에 조금 공감이 되었다.

그런데 이도준은 돌아오지 않았다. 뭘 그렇게 오래 씻는 건지, 재빠른 샤워로 군대에서도 칭찬을 받던 이도준인데, 족히 30분이 지난 시간에도 도준은 오지 않았다.

“헉, 혹시 추워서 얼어 죽은 거 아니야?”

그런 터무니 없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후로도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야 도준이 돌아왔다. 추운 듯 어깨를 한껏 웅크리고 들어선 도준은 머리를 말리지도 않고 조리대 앞에 서서 금세 또각또각 칼 소리를 냈다.

손이 빠른 도준은 금방 먹음직스러운 볶음밥을 차려 냈다. 밥만 먹으면 갈증이 날 것이라고 생각한 건지, 남은 밥으로 누룽지까지 끓여 내놓는 도준의 센스에 희찬이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오랜만에 마주 앉아 식사하는 이 시간이 두 사람에게는 참 귀했다.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행복에 희찬은 고개를 까딱거리며 자신이 느끼는 즐거움을 한껏 표현해냈다.

그러던 중 희찬의 눈이 도준에게 향했다. 잔잔한 도준의 표정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으나, 느릿한 숟가락질이 어색했다.

오늘따라 이도준이 많이 차분하다. 평소라고 방방대던 것도 아니었지만, 오래 붙어 지낸 덕에 희찬은 도준의 기분이 아주 좋지는 않다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희찬이 도준의 눈치를 살피며 운을 뗐다. “음.” 하고 낮게 울리는 희찬의 목소리에 도준도 고개를 들고 희찬을 응시했다.

“어제 라디오 들었어? 어제, 내가 그렇게 얘기한 건 도준아…….”

희찬은 도준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 혹여나 지난밤, 라디오에서 자신이 도준을 두고 ‘절친한 친구’로 표현한 것에 대해 화가 난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그래서 자세를 고쳐 앉고, 적극적으로 해명하려 했는데,

“괜찮아.”

도준의 짧은 대답이 희찬의 말을 가로막았다.

희찬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준을 바라보았다. 도준은 다시 시선을 내려 깐 채로 애꿎은 볶음밥을 뒤적거렸다.

“응?”

“괜찮아, 희찬아. 연예인들 다 그렇게 하잖아. 신경 쓰지 마.”

“……안 괜찮았으면 좋겠는데.”

희찬은 차분한 도준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체념하는 모습에 도리어 화가 나려 했다.

또렷한 희찬의 눈이 냉정해졌다. 예상하지 못한 희찬의 대답에 잠시 눈을 들고 희찬과 마주했던 도준이 금세 고개를 수그렸다.

“체념하는 거 같잖아. 그렇게 자꾸 뒤로 물러서면…… 자꾸 괜찮다고 하면 내가 할 말이 없어지잖아. 그냥, 왜 그랬냐고 짜증 내고 화를 냈으면 좋겠어.”

도준은 할 수만 있다면 희찬과의 언쟁은 피하고 싶었다. 희희낙락한 시간을 보내며 사랑만 주고받아도 모자란 시간인데, 서로의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날을 세우거나 언성을 높이며 다투고 싶지 않았다.

지난밤 속상함에 눈물을 지었던 것쯤이야, 희찬이 굳이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희찬의 말에 마른침을 삼킨 도준은 숟가락을 굳게 쥐고 희찬을 직시했다.

“그래도 동성애는…… 힘든 거잖아. 그냥, 괜찮아. 그것만 괜찮아할게.”

“진짜 괜찮은 거 맞지.”

“……사실 안 괜찮은데, 그래도 어떡해. 괜찮아해야지. 희찬아, 그렇게 하나하나 다 신경 써서 언제 성공할래.”

도준은 시큰거리는 마음을 애써 다잡고,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그저 성공만 바라라며 다그치는 말을 전하자, 희찬의 표정도 한껏 누그러졌다. 제 존재마저 그저 미뤄 두라는 도준의 말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싸우고 싶지 않은 것은 희찬도 같은 마음이라, 도준의 말대로 성공부터 하고 본 후에 다시 얘기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보지 마, 무서워.”

희찬이 도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도준이 피식 웃으며 희찬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단단한 어깨를 토닥이고, 턱 부근에 입을 맞추자 희찬이 고개를 비비적거렸다.

“무섭긴 뭘 무서워. 희찬아, 일단 성공부터 해. 우리 다른 건 나중에 생각하자.”

“응, 그래도 미안한 건 미안해.”

“사랑해.”

“내가 더 사랑해.”

자칫 꽁꽁 얼어붙을 뻔했던 분위기가 사르르 녹았다. 희찬이 엄지를 꼼지락거리며 도준의 손을 쓰다듬었다. 그에 도준도 엄지를 뻗어 희찬의 엄지를 쓰다듬었다.

고작 엄지손가락 하나였지만, 그 행위에서 서로의 변하지 않은 마음을 알 수 있었다. 희찬이 한껏 웃으며 도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도준이 제 볼에 닿은 희찬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잔망을 떨어 댔다.

식사를 마친 도준은 식탁 앞에 앉아 희찬이 설거지하는 뒷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희찬의 옆에서는 작은 주전자가 폭폭, 귀여운 소리를 내며 물을 끓여 내는 중이었다. 도준이 앉은 식탁 앞에는 각자가 좋아하는 티백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희찬을 보다 보니 무슨 맛으로 밥을 먹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희찬과 마주했다는 것만으로도 긴장을 한 탓에 희찬이 맛있게 먹었는지 물어보는 것조차 깜빡했던 도준이 손가락으로 희찬의 허리를 쿡 찔렀다. 희찬이 몸을 움찔거리며 도준을 돌아보았다.

“밥 맛있었어?”

“응, 간도 좋았는데. 왜? 별로였어?”

“아니, 그냥.”

피곤한 탓인지, 스트레스 때문인지 아무런 맛이 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다. 그저 희찬과의 냉전을 피하려 그쪽으로만 신경을 쏟느라 밥맛을 살필 겨를이 없었던 모양이다.

도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때마침 제 할 일을 마친 주전자가 보글보글 끓는 소리를 냈다. 도준이 똑같이 생긴 두 개의 머그컵에 물을 나눠 따랐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에 향긋한 향이 함께였다.

설거지를 마친 희찬이 도준 앞에 앉았다. 율무차 티백을 세 개나 풀어 진하게 타 준 도준의 센스가 마음에 들었다. 희찬은 기분 좋게 율무차를 마시며 주섬주섬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도준아, 손.”

“응?”

“빨리, 손.”

희찬의 말에 도준이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슬그머니 손을 내밀었다.

“핸드크림이네.”

“응, 겨울에는 이런 거 발라야 한다더라.”

“이제 와서, 뭘.”

“너 가끔 손 가렵다고 하잖아. 그거 건조해서 그런 거래.”

희찬이 도준의 손등에 크림을 짜고, 두 손으로 정성스레 문질러 도준의 손에 핸드크림을 발라 줬다. 섬섬옥수보다 예쁜 손이 떠난 자리에 크림이 남아 건조하기만 하던 도준의 손이 번들거렸다.

“이거 여기 둘 테니까 챙겨 발라. 알겠지?”

“응.”

듣고 보니 조금 촉촉해진 것 같기도 하고.

도준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희찬이 아이고 예쁘다, 하고 도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등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던 도준의 인상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저와는 친하지 않은 인공적인 향이 어색했다.

도준이 침대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그 품에는 희찬이 파고들어 제 등을 도준의 가슴에 기대어 앉았다. 두 사람은 푹신한 침대 위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희찬은 지난 며칠간 촬영장에서 겪었던 일들을 상세히 늘어놓았다. 각양각색의 표정과 손짓으로 재미나게 얘기를 전하는 희찬의 모습은 대체로 해맑았다. 도준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잔잔하게 반응하며 희찬의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은 휴대폰을 사라는 희찬의 권유였다. 희찬이 다시 촬영을 시작하게 된 날부터 지금까지, 희찬은 꾸준히 도준에게 휴대폰을 권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녔다.

그저 연락하고 싶을 때 할 수 없다는 불편함이 있었고, 다른 연인들처럼 쉴 새 없이 연락을 주고받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으며, 도준을 찾는 임 감독의 연락을 전할 수 없다는 조급함이 있었다.

희찬은 임 감독에게서 전화가 올 때마다 K액터스의 의사를 물었다. 임 감독은 매번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야, 뭐 그렇게 쉽게 변하는 마음이겠어.’ 하고 가볍게 말을 하곤 했지만, 희찬이 처음 K액터스 소식을 접한 것도 벌써 몇 달이나 지난 일이었으니, 혹시라도 계약하고 싶은 마음을 무르지는 않을까 속이 탔다.

야속한 이도준은 그것도 모르고 이번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야, 우리 나이에 휴대폰 없는 애가 어디 있어.”

“여기. 유니크하고 좋지, 그치.”

도준이 짓궂게 웃으며 자신의 턱 아래에 ‘V’를 가져다 댔다. 그게 또 어찌나 얄미운지, 희찬이 몸을 튕기며 자신의 불만을 토로했다. 바짝 다가오는 도준의 얼굴을 밀어내고, 발악하는 희찬에게서 심통이 잔뜩 읽혔다.

“아오, 이 똥고집아!”

“조금만 이따가 살게. 지금은 진짜 필요 없어.”

도준이 희찬을 품에 안고 쪽쪽, 귀여운 소리를 냈다. 희찬의 귓바퀴, 귓불, 턱, 목덜미. 차례차례 입술로 머금었다가 혀로 핥고, 다시 뽀뽀하며 사랑을 남기자 희찬이 울상을 짓고 도준을 바라봤다.

“너, 이런다고 안 봐줘. 나중에 그냥 휴대폰 확 사 와 버린다.”

“그러지 마, 나 진짜 지금이 좋아. 어차피 휴대폰 번호 알려 줄 곳도 없어. 그냥 내가 더 부지런히 전화할게.”

“……너도 일하는데 어떻게 그래.”

“그럼 10시에 전화할 때 동전 더 많이 들고 내려갈게.”

도준의 품에 안긴 채로, 자신의 몸을 더듬는 도준의 손을 느끼던 희찬의 눈이 번뜩 뜨였다. 무언가 좋은 생각이 난 듯 몸을 홱 돌려 뒤에서 저를 안은 도준을 쳐다보는 희찬의 눈이 지나치게 반짝거렸다.

“도준아, 나 잠시 좀 나갔다 올게.”

희찬의 몸이 마치 용수철처럼 튕겨 올랐다. 침대에서 벗어난 희찬은 부리나케 외투를 챙겨 입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에 도준이 의아한 눈으로 희찬을 바라보았다.

“왜, 같이 있자며. 어디 가는데.”

“잠시만.”

“같이 가, 그럼.”

도준은 혼자 있는 건 죽어도 싫었다. 조용해진 공간을 시끄러운 남자들의 목소리가 메울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 목소리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애쓰고 싶지도 않았다. 희찬이라도 있어야 그나마 정상인 척, 웃을 수 있었기에 도준은 희찬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 속을 알 리가 없는 희찬은 금세 신발을 신고 현관에 섰다. 도준이 희찬을 따라나서기 위해 몸을 일으켰지만, 일순 허리를 울리는 진한 통증에 행동을 멈추고 가만히 희찬을 바라보았다.

“아냐, 잠시만 있어. 진짜 딱 30분만.”

“야, 희찬아.”

“30분만, 30분!”

금세 희찬이 사라졌다. 탁탁탁, 귀여운 걸음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철컹, 무거운 철문 소리가 이어서 들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기에 그렇게 부리나케 달려간 걸까.

환한 낯을 생각해 보면 나쁜 일은 아닐 텐데 말이다. 분명 제 딴에는 좋은 생각이라고 뛰쳐나간 것일 텐데……. 미리 좋아하는 척을 연습해 둬야겠다.

도준은 다시 침대에 몸을 앉혔다. 희찬 앞에서 괜찮은 척하느라 무던히도 애쓴 몸 구석구석이 요란하게 발악을 해 댔다.

30분이랬나, 조금 누워 있어도 괜찮겠지.

도준이 스르르 몸을 눕혔다. 방금까지 희찬이 함께 앉아 있었던 탓에 온 침대에서 희찬의 냄새가 났다.

그래도 희찬과 있으니 제게 드리운 어둠쯤이야, 아무런 문제가 아닌 듯했다. 이전에는 겪지도 못해 본 지독한 스트레스에 힘겨운 매일을 보내던 것도 희찬을 보기 무섭게 씻은 듯이 사라졌다.

방긋거리는 희찬을 보고 있노라면 남자가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하던 말들도 다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희찬의 앞길을 자신이 막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하던 것도 모두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간당간당하게 의지를 다잡던 중, 희찬을 보게 되는 것은 도준에게 있어, 삶의 이유를 일깨우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금방이라도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릴까 겁이 났다. 하지만 희찬의 경쾌한 목소리가 줄곧 귓가에 울리는 덕에 남자들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올 틈은 없었다.

도준의 가슴의 불안함을 다스리는 희찬은 틀어막힌 도준의 숨통을 터주는 산소호흡기와 같았다.

“그러니까, 이 정도쯤이야…….”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이 정도 아픔쯤이야, 희찬을 볼 수만 있다면 거뜬히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도준은 턱 끝까지 차오르는 아픈 숨을 가까스로 다스리며 희찬을 기다렸다.

빛이 사라지고 어둠만 남았다고 생각한 인생에 한 줄기 희망이 보였다. 어차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아프면 곧 끝날 것이니 희찬을 헤아리며 참아 보기로 했다.

“도준아, 도준아!”

30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잠시 누웠을 뿐인데 금세 저 창밖에서 도준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철문이 철컹 열리기 무섭게 마당에서부터 제 이름을 부르는 희찬의 목소리가 경쾌하기 그지없었다. 도준은 어렵게 몸을 일으켜 현관을 통해 들어올 희찬을 기다렸다.

“도준아, 이거 봐라!”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희찬은 아무렇게나 신발을 내던지고 서서 도준 앞에 귀여운 박스 하나를 들이밀었다. 아날로그 영화 속에 나올 것 같이 생긴 전화기가 그려진 박스였다. 도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희찬을 바라보았다. 희찬의 손에 들린 전화기가 뜬금없었다.

“……뭐야, 이게?”

“전화기 샀어! 그냥 집에서 전화해. 그럼 편하지? 이거 개통은 전화로 하면 된대서, 내가 오면서 전화했는데 다음 주에 오셔서 개통해 주신대. 괜찮지! 너 다음 주에 집에 있는 시간 알려 주면 내가 기사 아저씨 부를게.”

세상에, 왜 진작 이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뿌듯함을 머금은 희찬의 영특한 생각에 도준이 저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장희찬 날이 갈수록 똑똑해지네. 천재 아니야?”

오랜만에 도준의 입에서 장난이 툭 튀어나왔다. 도준이 희찬의 볼을 아프지 않게 쥐고 흔들었다. 빨갛게 열이 오른 자리에는 입을 맞춰 사랑을 남겼다.

“내가 또, 이도준이랑 뭘 하려고 하면 머리가 팽팽 돌아가지.”

비로소 본래의 모습을 보이는 듯한 도준의 말에 희찬도 빙긋 웃으며 넉살을 떨어 댔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희찬이 도준과 함께하는 시간을 지키려 마음먹으면, 그 어느 때보다 머리가 영특하게 굴렀다. 그건 옳고, 그름을 판단할 필요도 없었다.

그 덕에 희찬은 스폰을 권했던 전광진에게도 곧장 달려가 돈을 포기하겠다고 말할 수 있었다. 결국 땡전 한 푼 받지 못하고 일하는 중이었지만, 그래도 도준과 함께여서 행복했으니 돈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희찬도 도준의 얼굴을 쥐고 새빨간 입술에 입을 쪽쪽 맞추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전화기를 쳐다봤다. 도준이 콘센트를 꽂고, 희찬이 수화기를 들자 뚜, 뚜, 전자음이 들렸다. 희찬이 배시시 웃었다. 도준도 희찬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함께 웃었다.

이제는 침대에 누워서도 희찬과 통화할 수 있다. 희찬의 목소리가 듣고 싶으면 언제든지 전화를 걸 수 있다. 그리고 희찬 역시 이제는 도준의 전화를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시간이 어긋나 통화를 못 하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다른 사람들 삶에는 지극히 당연한 부분이었으나 두 사람에게는 그저 소중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도준이 희찬을 부둥켜안고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행복에 겨운 몸짓에 희찬의 얼굴 가득 뿌듯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굳이 추운 겨울에 바들바들 떨며 공중전화까지 내려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통화가 되지 않아 씁쓸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지독하게 좋았다.

희찬은 침대 머리맡에 있는 선반 위에 전화기를 올려놓았다. 의도하지 않았으나, 신식보다 구식이 많은 집에 잘 어울리는 앤티크한 전화기가 퍽 웃겼다.

그렇게 자칫 행복하다고 생각할 뻔했다. 하지만 역시 잠시간 도사렸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종일 희찬과 붙어 지내며 밥을 먹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도준은 저녁 식사 도중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무얼 씹어도 맛이 나지 않았다.

고슬고슬한 밥이야 원래 이렇다 할 맛이 나지 않으니 그렇다 쳐도, 자극적인 김치나, 케첩이 듬뿍 발린 달걀프라이에서도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젓가락을 쥔 도준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아니겠지, 그냥 너무 이것저것 신경 쓰고 살아서 그런 거겠지.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양념이 가장 진하게 묻은 김치를 입 안으로 넣었다.

하지만.

“왜 그래?”

“아, 아니…….”

역시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아침부터 아무런 맛을 느끼지 못했다. 볶음밥을 먹을 때도 무슨 맛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희찬에게 맛있었냐 물어봤었다.

그 후에 커피를 마실 때는 향이 또 괜찮았다. 하지만 향은 맛이 아니다.

도준은 떨리는 동공을 숨기지 못했다. 젓가락을 쥐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쇠붙이 부딪치는 소리가 날카롭게 도준의 귀를 긁었다.

희찬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도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도준은 그의 눈빛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어디 아파? 너 얼굴이 A4용지가 됐어.”

희찬의 큰 손이 거리낌 없이 도준의 얼굴을 매만졌다. 삽시간에 새하얗게 질린 도준의 안색이 불안해 보였다. 이마를 짚고 열을 재 보았지만, 딱히 열이 나진 않는 것 같았다.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도준이 희찬의 손을 끌어 내렸다. 희찬의 손바닥에 도준의 입술이 닿았다. 왜인지 도준의 손도 떨리는 것 같았다.

“내가 어디 아픈 거 봤냐.”

“그러니까. 내일 지구에 종말이 오려나.”

“안 아파, 괜찮아.”

도준은 쥐었던 희찬의 손을 내려놓고 다시 밥 먹는 것에 열중했다. 온 신경을 입 안에 쏟아붓고, 무슨 맛이든 나길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같았다. 입 안에 누군가 비닐을 씌워 둔 것처럼 음식물이 구르는 느낌이라든가, 치아 사이에서 짓이겨지는 감은 생생했으나, 맛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왜 이래, 진짜…….

도준이 점점 울상이 되어 가는 표정을 가까스로 숨기고 있을 무렵, 챙챙 날카로운 소리가 도준을 깨웠다.

희찬이 젓가락으로 도준의 밥그릇을 요란하게 두드린 것이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저를 골똘히 쳐다보는 눈앞에 도준이 표정을 가다듬고 희찬을 바라보았다.

“저기요, 이도준 씨. 안 아픈 김에 임 감독님하고 통화 좀 하고 와. 내가 여간 곤란한 게 아니거든?”

“아, 계속 전화 온다고 했었나?”

“응, 너한테 꼭 하실 말씀 있다고 했어.”

도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매번 자신을 배려해 주는 임 감독이 오래 기다리지 않도록, 제 생각을 제대로 전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도준 앞에 희찬의 휴대폰이 놓였다. 같이 쓰던 것인데 이제는 완전히 희찬의 것이 된 것처럼 낯설었다. 휴대폰을 쥔 도준의 손이 얕게 떨렸다. 남모를 심호흡을 마친 도준이 휴대폰을 들고 일어섰다.

“나 먼저 누워 있을게?”

“졸려?”

“응, 오늘 일찍 일어났더니…….”

“그래, 누워 있어.”

희찬을 두고 밖으로 나온 도준이 한껏 누그러진 겨울바람에 상쾌함을 느꼈다.

껌껌한 골목 어귀에서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자 타닥, 타닥 귀를 자극하는 소리가 들렸다. 도준은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 목을 때리고 내려가 가슴까지 치닫는 담배 연기에 속이 시원해졌다. 도준이 얼마간 입에 머금었던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하얀 입김에 섞인 희뿌연 담배 연기가 기다란 용을 그리며 밤하늘에 얼룩을 남겼다.

담배 한 대를 금방 태운 도준이 답답한 가슴에 인상을 구겼다.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저 일시적인 것이리라, 좋게 생각해 보려 해도 자꾸만 치미는 불안함에 공포가 도사렸다.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 희찬의 목소리가 사라지니, 이제야 자신의 모습을 오롯하게 마주할 수 있었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지난날과 어디 하나 망가지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로 방치했던 시간이 떠올랐다.

밥도 먹지 않았고,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았다. 아픈 몸을 이끌고 공사장에 나가서 그렇게 혹독하게 일을 해 댔으니, 망가지지 않는 게 이상하지. 하지만 이렇게 곧바로 증상이 나타날 줄은 몰랐다.

도준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주저앉아 허심탄회한 한숨을 터뜨렸다. 병원에 가 보는 게 좋을까, 차라리 주변에 어른이라도 있어서 무슨 조언이라도 받아 보면 한없이 좋을 텐데 말이다.

“그래도 일단은…….”

일단은 임 감독에게 전화하는 것이 먼저였다.

도준이 휴대폰 연락처에서 임 감독의 이름을 찾고, 통화 버튼을 누르기까지 퍽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배우’라는 꿈은 도준이 일평생 처음 가져 본 꿈이었다. 기꺼이 그 꿈을 포기하겠다고 다짐했으나, 다짐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마음을 다잡은 도준이 휴대폰을 귓가에 가져다 댔다. 몇 번의 신호음이 들리고 이어서 감독의 묵직하고 인자한 목소리가 들렸다.

― 어, 희찬이냐, 도준이냐.

“안녕하세요, 감독님. 도준입니다.”

― 이야, 이도준 살아 있어?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목소리가 도준을 반겼다. 가슴 가득 도사렸던 걱정도 한달음에 가실 법한 든든함이 몰려왔다.

도준은 제 사정도 잊고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하긴, 해가 바뀌는 동안에도 찾아뵙기는커녕 연락 한 번 하지 않았으니 임 감독의 호들갑스러운 반응은 어쩌면 당연했다.

“잘 지내시죠, 제가 요즘 다른 게 너무 바빠서 못 뵀어요.”

― 응, 잘 지내지. 도준아, 너 언제 한번 안 올래? 진짜 좋은 배역이 하나 있거든. 이건 회차 별로 다 나오는 거라, 너도 희찬이처럼 계속…….

“아, 저…….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감독님.”

임 감독은 도준과 통화가 되기 무섭게 본론을 쏟아 놓았다. 그에 도준이 다급하게 감독의 말을 가로막았다. 조금이라도 더 듣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혹해서 하겠다고 말할까 두려웠다.

― 응, 말해.

결심한 것을 말해야 하는데, 움찔거리는 입술은 아무런 말도 뱉어내지 못했다.

바쁜 사람의 시간을 빼앗으면 안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는데, 그래서 통화는 용건만 간단히 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아는데, 근데…….

― 도준아.

결국 저쪽에서 먼저 도준을 불렀다.

“네, 감독님.”

― 이제 안 하려고?

“…….”

― 무슨 일 있니?

감독은 마치 도준의 속을 다 아는 것 같았다.

어른의 세심한 친절에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빳빳하게 선 목 근육이 도준의 말을 틀어막았다. 도준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로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새빨간 입술이 새하얗게 질리도록 세게 짓이겨 물고서도 아픈 것도 몰랐다.

― 내가 걱정해야 하는 일이니?

“아뇨, 아닙니다.”

임 감독이 알게 되면 희찬에게 소식이 가는 것도 순식간일 것이다. 도준은 걱정하는 목소리를 내는 감독에게 거센 부정의 뜻을 보였다. 수화기 너머에서 커다란 한숨이 터져 도준의 귀를 자극했다.

― 그래…….

감독이 무언가 고민하는 듯, 으음, 소리를 냈다. 도준은 휴대폰을 귀에 댄 채로 담배를 물었다. 아무래도 연기를 그만두겠다는 말은 하지 못할 것 같으니, 나오라는 말에 확답이나 하지 말자는 다짐을 새겼다.

― 도준아, 그만두더라도 한 번만 나와. 나와서 딱 한 번만 더 하고 가.

“…….”

― 알겠지? 한 번만 하고 가.

하지만 그 다짐도 다 무너지게 생겼다. 업계에 저명한 명성을 가진 사람이 제대로 된 데뷔도 하지 않은 사람을 붙들고 이렇게까지 타이르는데 감히 누가 거절할 수 있을까.

도준은 쓴 침을 삼키며 대답을 아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자꾸만 아득해지는 시야에 그저 울컥울컥 설움이 몰려올 뿐이었다.

― 상황이 힘들면 다 내려놓고 싶을 때가 있어. 그래도 좋아하는 것 하나는 붙들고 있어야지. 그러니까 한 번만 나와서 해 보고, 영 아니다 싶으면 그때 놔. 그럼 나도 안 잡을게.

“네……. 감사합니다. 그럼, 연락드릴게요.”

― 응, 도준아. 기다릴게?

“네, 안녕히 주무세요.”

결국 도준은 하려던 말은 하나도 하지 못한 채로 통화를 끝내야만 했다. 나름대로 큰 결심을 하고 건 전화였는데, 그 내용은 허무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감독의 세심한 배려가 고맙긴 했다. 그만두겠다는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을 붙드는 감독의 목소리가 마치 잃어버린 가치를 깨닫게 하는 것 같았다.

도준이 주머니에서 잡히는 돈을 꺼냈다. 도준의 주머니에 든 돈은 고작 만 원이었다. 평소 같으면 만 원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오늘은 유독 그 만 원이 서글펐다.

남들은 지갑에 5만 원짜리도 몇 장씩 넣어 다니던데, 꼬깃꼬깃 접히다 못해 곧 찢어질 것 같은 형태를 간당간당하게 유지하는 낡은 지폐가 꼭 제 모습 같았다.

“지지리 궁상…….”

도준이 읊조린 말은 제게 딱 맞는 표현이었다.

슈퍼에 도착한 도준은 초콜릿과 작은 병에 든 식초, 소금, 보리차를 샀다. 별로 무겁지도 않은 것들인데 뭐가 그렇게 힘겨운지, 검은 봉투에 담아 들고 골목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천근의 철을 든 기분이었다.

집 앞에 다다른 도준은 환하게 불이 환하게 켜진 집 안을 한번 살펴봤다. 움직이는 인영이 보이지 않는 걸로 미루어, 희찬은 잠이 든 모양이었다. 도준은 조금 더 걸음을 놀려 사람의 발길이라곤 조금도 닿지 않는 곳으로 향했다.

어둡다 못해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곳은 작은 빛조차 스미지 않았다.

“이게 식초였나.”

도준이 바스락거리는 봉투에서 차가운 병을 꺼냈다. 보리차는 조금 큰 페트병에 들어 있으니, 아마 손에 쥔 것은 식초일 것이다. 식초는 맛이 강하니 제일 마지막으로 미룬 도준이 봉투를 휘저었다.

이윽고 도준이 보리차를 쥐었다. 두툼한 페트병을 쥐고, 손에 힘을 주어 뚜껑을 땄다. 한숨을 크게 들이키고, 물을 마신다는 생각으로 입에 가져다 댔다.

아무 맛이 나지 않았다.

“그래, 원래 보리차는 아무 맛도 안 나니까.”

보리차가 뿜어내는 고소함은 맛이 아니라 향일 것이다.

조금씩 콩닥거리는 심장을 애써 달랬다.

보리차를 비닐봉지에 넣은 도준이 다시 쥔 것은 딱딱한 초콜릿이었다. 포장재를 뜯어내고 한입 크게 베어 삼켰다. 초콜릿이 부러지며 똑, 경쾌한 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이번에도 아무 맛이 나지 않았다.

“……차가워서, 얼어서 그런 거겠지.”

본디 초콜릿이라는 게 차갑게 얼어 버리면 본연의 단맛도 내지 않기 십상이다.

도준은 차가운 초콜릿을 혀로 녹일 생각도 하지 않고 이로 아득아득 씹어 물었다. 떨리는 숨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도준의 잔잔하게 떨리는 손이 이번엔 작은 봉지를 집었다. 소금이었다. 끄트머리를 쥐고 이를 사용해 조금 뜯어내자 소금 알이 입 안으로 쏟아졌다.

“…….”

금방이라도 짜다며 인상을 찌푸려야겠지만, 평온함 그 자체였다. 그저 모래알이 구르는 기분 나쁜 느낌. 그조차도 금방 타액에 녹아 사라졌다.

짠맛이 나지 않았다.

도준의 검은 눈동자가 요동쳤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제일 처음 쥐었다가 내려 뒀던 작은 병을 집었다.

도준은 마음속으로 무수히 ‘제발’을 되뇌었다. 아무리 온 신경을 쓰느라 힘든 와중이라고 해도, 톡 쏘는 신맛을 못 느끼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

이번에도 같았다. 미간을 찌푸리기는커녕, 신맛의 ‘ㅅ’ 도 느껴지지 않았다.

도준의 손에 들린 모든 것이 한 번에 툭 떨어졌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데굴데굴 굴러가는 병들을 주울 생각도 하지 못했다. 도준의 발치에 떨어진 소금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하얀 밭을 이루었다.

“어떡하지.”

도준의 몸이 무너졌다. 바닥에 철퍽 주저앉은 도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몸이 망가져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야, 희찬의 성공에 비할 바가 못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이상 증세를 보이니 무서운 것은 어쩔 수 없다.

도준이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얼굴을 매만졌다. 차갑게 언 손끝과 볼이 닿으니 찌르르 아픈 통증이 밀려왔다.

“나…… 진짜 어떡하지…….”

언제라고 평탄한 길을 걷는 것도 아니었지만, 미래가 아예 사라진 것 같았다. 짧은 간격으로 되풀이되는 악몽은 심신이 회복될 틈도 없이 휘몰아쳤다. 당연히 온전하지 못한 정신과 성치 않은 몸으로 시간을 보내기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다 보면 문득문득 속이 쓰렸고, 저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구역질을 반복하다가, 귀를 틀어막고 울기도 했다. 30분이 넘는 시간을 허비하며 몸을 닦고, 또 닦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찬물을 맞으며 주저앉았다.

차츰차츰 시간을 잃고, 나를 잃어 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아마, 미각도 잃은 모양이다.

도준의 눈에서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솟구쳐 흘렀다. 펑펑 쏟아지는 눈물이 도준의 서글픔을 담아냈다.

그놈의 걸림돌이라는 말이, 모든 게 제 탓이라는 말이, 몸이 예뻐 수요가 있을 거라든가, 희찬이는 무슨 죄냐고 저를 추궁하던 말들이.

그럼에도 아주 억지로 떼어 놓지도 않고, 자꾸만 희찬을 마주하게 만들어 스폰의 이유를 되새기게 하는 전광진의 악랄함이, 방긋방긋 웃으며 저를 대하는 희찬이의 해맑음이, 그런 희찬 앞에서 어떻게든 깨끗한 사람인 척, 웃어 보려 했던 노력이 하나하나 정신을 갉아먹는 곰팡이가 되어 도준을 지배했다.

귀가 먹먹하고, 눈앞이 새까맣게 어두워져 잠시간 시력이 사라지다 돌아오고, 갑자기 코피가 쏟아지고, 이내 발작하며 쓰러져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단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나는, 괜찮지 않다.

끝끝내 도준의 입에서 커다란 울음이 터졌다. 희찬과 같은 시간을 걷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머지않아 희찬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암담함이 숨통을 옥죄었다.

하지만 이게 다 욕심이라면.

“괜, 괜찮……. 괜찮아, 괜찮아.”

도준은 폭포수처럼 터져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두 팔로 저를 감싸 안은 채로 제 어깨를 토닥거렸다.

바들바들 떨리는 도준의 몸은 추위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닥쳐오는 공포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둠이 금방이라도 도준을 집어삼킬 것 같았다.

그럼에도,

일단은 희찬이가 웃고 있으니까.

“괜찮다.”

스케줄도 많아졌고, 드라마도 정상적으로 방영된다고 했으니까.

“괜……찮다.”

희찬이는 내일도 촬영에 간다고 했다. 이제는 감독님과도 제법 친해져서 촬영장도 많이 편해졌다고 했다. 저를 미워하던 선배와도 나름대로 가까워졌다고 했다. 희찬이는 탄탄대로를 걸을 것이다.

그러니까,

“다, 괜찮아.”

괜찮다.

한참이나 호흡을 가다듬은 도준이 담배를 찾아 주머니에 손을 밀어 넣었다. 손바닥에 닿는 작은 종이 갑을 들고 뚜껑을 열었다. 하지만 빈 갑이었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반 갑이나 태웠다.

도준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거칠게 뛰는 심장은 외면하고 싶었고, 터져 나오는 울음도 삼키고 싶었다. 도준은 목에 힘을 주고 숨을 참았다.

“하…….”

얼마나 울었는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도준이 더듬더듬 휴대폰을 쥐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빛을 내는 화면 속 시간은 어느덧 자정이 넘어가고 있었다.

예상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흘렀다. 아픈 몸을 일으킨 도준이 느릿한 걸음을 옮겨 집으로 향했다.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울었더니 온 얼굴이 얼었다.

도준이 제대로 벌려지지도 않는 입술을 열어 아아, 소리를 냈다. 혹시 희찬이 깨어 있으면 정상적인 목소리를 내야 했으니 말이다.

느릿한 걸음으로 집까지 당도하는 건 또 왜 이렇게 빠른지. 피하고 싶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가까워지는 현실에 도준이 한탄을 토해 냈다.

집에 들어선 도준은 입고 있던 패딩만 벗어 두고 곧장 침대로 향했다. 도준이 벽을 보고 누운 희찬의 등을 끌어안고 얼굴을 그의 등에 묻었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냄새가 도준의 코에 닿았다.

“으응, 담배 냄새…….”

희찬이 몸을 뒤척거렸다. 어렵게 몸을 뒤집어 도준을 보고 누운 희찬은 미간을 잔뜩 좁힌 채로 도준을 나무라는 듯했다. 도준이 희찬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운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왜 벌써 자.”

“너 씻고 와, 담배 냄새나.”

“조금만 누워 있다가 씻고 올게.”

“지금까지 밖에 있었어? 얼굴이 다 얼었네…….”

희찬의 따뜻한 손이 도준을 감싸 안았다. 꽁꽁 언 귀 끝을 부드럽게 매만져 주고, 얼음장 같은 볼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자, 도준이 희찬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따뜻한 이불을 덮고 누우니 알 수 없는 안정이 찾아왔다. 방금까지 밖에서 공포에 도사려 오들오들 떨었던 주제에 휙휙 변하는 감정의 깊이가 어이없을 지경이었다.

이내 도준이 아픈 무릎을 짚고 겨우겨우 몸을 일으켰다. 바깥에 나가면 다시 차가운 바람이 쌩하고 불겠지만, 그래도 씻는 것을 미룰 수는 없었다.

희찬이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도준을 지켜봤다. 무슨 행동이 저리 느린지, 저러다 아침이 다 되어서야 자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우니까 너무 오래 씻지 마.”

“응.”

“기다릴 테니까, 얼른 와.”

“알겠어.”

몸을 일으켜 세운 희찬이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이불을 끌어 덮었다. 아침부터 부산하게 움직였더니 피곤이 몰려왔다. 이상하게 집에만 오면 솔솔 몰려오는 잠이 기분 좋았다.

도준이 씻으러 간 지 몇 분 되지도 않았는데 희찬이 꾸벅꾸벅 졸았다. 잠 앞에 장사 없다더니, 고개가 이리 꺾이고, 저리 꺾이는 것을 겨우겨우 추스른 희찬의 미간이 잔뜩 좁혀졌다.

당장 편하게 누워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희찬은 벽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다. 이러고 조금 눈 붙이고 있다가, 도준이 오면 잠든 적 없는 척이라도 하려는 요량이었다.

“아아, 왜 안 와.”

이도준은 이번에도 화장실을 만들어 씻는 모양이다. 희찬이 짜증 어린 투정을 부렸다. 감독과 전화를 하러 나간 것도 웬만하면 기다리려 했었다. 그런 희찬의 마음과 달리 어찌나 오랫동안 통화하는지, 도준은 돌아오지 않았었다.

희찬이 정신을 다잡았다. 돌아오지 않는 도준을 두고 먼저 잠든 것이 미안해 이번에는 꼭 기다리고 싶었다.

하지만 희찬의 그런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도준은 벽에 기대어 앉은 채로 잠든 희찬의 모습에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도무지 웃을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희찬만 보면 웃음이 났다. 그게 슬프기도 하고, 또 좋기도 하여, 도준이 성큼성큼 걸음을 디뎌 희찬을 고이 눕혔다.

“기다린다더니.”

깊이 잠든 희찬은 도준이 저를 만지는 것도 모르고 꿈속을 헤맸다. 이따금 찌푸려지는 희찬의 미간을 도준이 꾹 눌렀다. 희찬의 말랑한 볼을 쓰다듬고, 예쁜 입술을 어루만지는 도준의 손길은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너 때문에 살아, 내가.”

아니, 이건 틀린 말이다.

도준이 도리질을 쳤다.

“네 덕분에 살아, 희찬아.”

때문이 아닌, 덕분. 이것이 맞는 말이다.

도준이 쓴 침을 삼키며 희찬의 옆에 누웠다. 도준은 베개를 베고 누운 희찬의 목 아래에 제 팔을 밀어 넣었다. 다른 팔로 희찬의 어깨를 감싸 안자, 희찬이 꾸물꾸물 도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찬란하기만 한 희찬을 보고 있자니 조금씩 걱정이 밀려왔다.

내 존재가 네 발목을 잡지는 않을까, 지금이야 괜찮다고 환하게 웃는 너라지만, 나중에 내가 성가셔지면 어떡하지.

하고 또 해서 닳고 닳은 걱정이었지만, 걱정이 도사릴 때마다 그 크기는 매번 새롭기만 했다. 도준이 희찬의 머리를 억세게 끌어안은 채로 큰 한숨을 터뜨렸다.

“그래도 내가 계속 옆에 있을게, 희찬아.”

하염없는 사랑을 읊어 낸 도준도 이내 희찬을 안고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했다. 그래도 오늘은 악몽이 무섭지 않다. 희찬이 있으니 두려울 것이 조금도 없었다.

분주하게 준비를 마친 희찬이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집 앞에서 매니저를 기다렸다. 도준과 조금 더 붙어 있고 싶다는 마음이 컸으나, 아쉽게도 오늘은 스케줄이 잡힌 날이었다.

희찬은 지난밤 늦게까지 통화를 하고 들어와 아침이 되어도 도무지 일어나지 못하는 도준에게 뽀뽀만 남겨 두고 나온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지금이라도 들어가 인사를 할까, 무수히 고민하던 중, 희찬의 목에 부드러운 목도리가 닿았다.

“따뜻하게 다녀.”

도준이었다.

도준을 본 희찬이 환하게 웃었다. 퉁퉁 부은 눈을 하고서 몰려오는 잠을 이기지 못하는 도준의 모습이 마냥 귀여웠다. 희찬이 손을 뻗어 도준의 아무렇게나 뻗친 머리를 매만졌다.

“언제 다시 와?”

“내일모레면 올 거야.”

“응. 열심히 해, 희찬아. 열심히.”

도준은 한 글자, 한 글자에 유독 힘을 실었다. 이번 주와 다음 주는 서울과 지방을 왔다 갔다 하는 스케줄일 거라던 전광진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월요일에 전화하라고 했던가. 자칫하면 잊을 뻔했다.

저 멀리서 낯선 차가 언덕을 올라왔다. 새까만 승합차는 누가 봐도 희찬을 데리러 오는 매니저의 차였다. 차를 발견한 희찬이 울상을 지었다.

희찬의 머리를 도준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예쁜 얼굴이 환하게 피어나길 바랐다. 그리고 희찬은 그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만개하는 미소를 보였다.

“후회하지 않게, 열심히 해.”

“응, 전화기 개통하면 바로 전화해. 알겠지?”

“그럴게. 따뜻하게 하고 다녀. 목도리 풀지 말고, 핫팩도 꼭 챙기고.”

“알겠어. 너도 밥 잘 먹고! 다녀올게!”

차에 몸을 실은 희찬이 금세 사라졌다. 차의 뒤꽁무니가 마을 어귀를 벗어나는 것까지 선 자리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도준도 이윽고 발을 돌려 집 안으로 향했다.

집 안 가득 도사린 적막이 달갑지 않다. 도준은 굼뜬 행동으로 아주 천천히 아침상을 차렸다. 조금 일찍 일어나 희찬이 밥을 챙겨 먹일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그 후회는 곧 ‘알아서 잘 챙겨 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연기자가 벌어 올 돈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들이었으니 말이다.

도준은 조리대 앞에서 무얼 해 먹을까, 고민했다. 입맛이 없어 거를까 생각했지만, 희찬이 끝까지 강조하고 간 것이 그놈의 끼니였으니, 아침은 챙겨야 할 것 같았다.

새로운 소시지에 도전해 보겠다며 샀다가, 과하게 짭짤한 것이 입에 맞지 않아 냉장고 깊은 곳에 처박아 둔 것이 떠올랐다.

“혹시 몰라, 맛이 날 수도 있잖아.”

도준은 일부러 자극적인 메뉴를 선택했다. 매운 고추장을 꺼내 식은 밥과 비볐다. 고소한 참기름을 둘러 윤기를 낸 후에는 짜디짠 소시지를 반찬으로 삼았다.

큰 심호흡을 한 후에 한입 가득 밥을 밀어 넣었다. 맵다는 느낌은 있었으나, 고추장과 소시지의 짭짤한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퍽퍽한 모래를 씹는 기분이었다. 도준의 표정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혹시 예민했던 탓에 순간적으로 보인 증상이 아닐까 희망을 가졌던 것도 삽시간에 사라졌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희찬이 집을 비울 때면 느리게 흐르던 시간이었는데 이번은 달랐다.

그동안 도준은 일도 나가지 않고, 갖가지 음식들을 맛보며 자신의 미각을 시험했다. 그리고 단 한 가지의 음식에서도 맛을 느끼지 못했다.

처음엔 손이 파르르 떨리고, 숨이 턱턱 틀어 막혔다. 하지만 사람이 고통에 순응하고 체념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도준은 금방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받아들였다.

도준은 희찬이 오기 전 희찬을 먹일 음식들을 사 두었다. 예전 같았으면 식재료들을 사 직접 요리해 주었겠지만, 입맛을 잃은 지금은 요리에도 자신이 없어졌다.

“웬일로 인스턴트야?”

희찬의 말에 도준은 아무 말 없이 희찬 앞에 먹음직스러운 도시락을 내려놓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희찬에게는 그저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가끔은 이런 것도 좋지 않나, 싶어서. 싫어? 다시 밥해 줄까?”

“아니? 괜찮아. 그래, 맨날 밥하는 것도 귀찮잖아.”

“귀찮은 건 아닌데, 오늘은 이런 거 먹어 보고 싶었어.”

“너랑 먹는 건 다 좋아, 괜찮아.”

희찬이 다리를 달랑거렸다. 해맑게 웃는 낯에는 조금의 불편함도 보이지 않았다. 스케줄을 위해 이동하며 지겹도록 먹은 도시락이었지만, 도준과 함께여서 그저 좋았다. 희찬은 정말 맛있는 것을 먹는 양, 한입 가득 밥을 밀어 넣고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도준이 괜히 밥을 뒤적거리며 우물쭈물 말을 골랐다. 살면서 처음으로 ‘병원에 가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각을 잃었건, 일시적인 증상이건 간에 의사의 확실한 진단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도무지 희찬에게 ‘병원에 가겠다.’라는 말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도준은 애꿎은 김치를 찍어 누르며 마른침을 삼켰다.

식사를 마친 희찬은 곧장 나갈 채비를 했다. 오전이 다 지나고 오후에 돌아온 희찬이었지만, 내일 이른 아침 촬영을 위해 저녁에는 다시 나가야 한다고 했었다.

그 옆에서 희찬의 준비를 돕던 도준이 이내 결심한 듯 희찬을 바라봤다.

“희찬아.”

“응?”

“나, 병원에…… 좀, 가 볼까 봐.”

도준의 말에 희찬이 눈을 크게 뜨고 도준을 바라봤다. 희찬의 말간 얼굴에는 금세 걱정이 드리웠다.

“왜? 어디 아파? 너 어디 아픈데.”

“그냥, 몸이 좀 안 좋은 거 같은데, 약이라도 먹으면 낫지 않을까 하고.”

“야, 그럼 진작 갔어야지. 하여튼, 이도준 미련해.”

도준은 부러 가벼운 목소리를 내며 희찬을 안심시켰다. 정확하게 먹혀든 건지, 희찬이 다행이라는 듯 가볍게 도준을 나무랐다.

현관에 선 희찬이 도준을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마치 안아 달라는 모양을 보이는 것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다. 도준이 느릿느릿 걸음을 옮겨 희찬을 안았다. 품에 꼭 들어맞는 희찬의 몸을 으스러질 듯이 껴안자, 희찬이 켁켁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두 사람이 떨어졌다. 희찬은 어느새 얼굴 가득 미안한 표정을 지은 채였다. 그에 도준이 의아한 눈으로 희찬을 바라봤다. 도준의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얼마 못 보고 가서 미안해……. 그래도 금방 올 거야. 우리 이제 전화 자주 할 수 있으니까, 괜찮지?”

“응, 괜찮아.”

“추우니까 나오지 마. 나 촬영장 숙소 도착해서 바로 전화할게.”

“응, 안 받으면 자는 거니까 오래 기다리지 마.”

두 사람은 자신의 말을 마칠 때마다 상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서로의 허리를 안은 채로, 바르작거리는 몸짓에는 최대한의 사랑을 담았다.

혹시 서운함을 느끼지 않을까, 한껏 애정을 쏟는 희찬의 모습에 도준도 누그러졌다. 도준이 온몸에 도사린 긴장을 한풀 걷어 내고, 부드럽게 희찬을 달래며 희찬의 엉덩이를 주물럭거렸다. 그러자 희찬의 손도 아래로 내려와 도준의 엉덩이를 주물럭거렸다.

두 사람의 해맑은 웃음이 동시에 터졌다. 커다란 웃음소리가 온 집 안을 뒤흔들며 행복의 뿌리를 내렸다.

“너 병원 꼭 가고. 알겠지? 내일 바로 가서 주사 맞아. 혹시 안 좋으면 전화하고. 생전 감기 한번 안 앓더니, 요즘 춥긴 한가 봐.”

“그럴게.”

“옷도 따뜻하게 입고.”

“응.”

“도준아, 사랑해.”

“사랑해.”

밖에서 빵빵, 동네를 울리는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정말 가야 하는데 이상하게 희찬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희찬은 도준의 모습을 잊지 않으려는 것처럼 하나하나 눈으로 담았다. 희찬의 눈길을 느끼던 도준이 희찬의 촉촉한 윗입술을 따뜻하게 머금었다. 희찬의 입술이 벌어지며 혀가 빼끔 튀어나왔다. 두 사람의 축축한 살덩이가 금세 허공에서 뒤엉켰다. 질척거리는 야한 소음이 두 사람의 귀를 자극했다.

서로의 엉덩이를 쥔 손에 힘이 더해졌다. 금방이라도 엎어져 몸을 뒤섞을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빵―!’

바깥의 차는 성미가 급했다.

도준이 먼저 입술을 떼고 희찬을 마주했다. 흐트러진 희찬의 앞머리를 가지런히 만져주고, 희찬의 볼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얼른 가, 늦겠다.”

“응, 전화할게!”

이내 희찬이 사라졌다. 벌컥 열린 문이 쾅, 닫히기 무섭게 탁탁, 뛰어가는 희찬의 발소리가 오래간 도준의 귓가에 남아 맴맴 맴돌았다.

*

도준은 낯선 간판 앞에서 심호흡을 거듭했다.

<소망이비인후과>

살면서 병원이라고는 문턱 근처에도 가 보지 않은 도준이었기에 그 간판은 낯설기만 했다. 도준은 괜히 주변을 둘러보며 병원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살폈다.

어린아이가 부모님의 손을 잡고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기도 하고, 제 또래의 사람들이 드나들기도 하는 병원은 환자가 퍽 많아 보였다.

도준이 입 안 가득 바람을 넣었다가, 푸르르 소리를 내며 입을 풀었다. 왜인지 도사리는 긴장을 쉽게 무시할 수 없었다.

입맛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병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도준은 어느 병원으로 가야 하는지조차 갈피를 잡지 못했었다.

혹시 희찬의 귀에 들어갈까, 감히 동네 어른들에게 물어보지도 못하고 며칠을 고민하던 도준이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고 굴려 찾은 곳이 이곳, 이비인후과였다.

가만히 서서 한참이나 유리문 내부를 쳐다보던 도준이 겨우 걸음을 디뎠다. 신발 밑창에 닿는 땅의 감촉이 유달리 딱딱하게 느껴졌다.

들어선 병원은 바깥의 살벌한 추위와는 달리 포근함을 머금고 있었다. 네모난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사람들의 눈은 대부분 천장 부근에 달린 TV를 보는 중이었다. TV에서는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로봇 만화가 줄기차게 나오는 중이었다.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도준의 코에 닿았다. 낯선 향에 도준이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이윽고 도준의 눈이 정면을 향했다. 유니폼을 차려입은 간호사가 저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중이었다.

도준이 접수처로 다가갔다. 모니터와 도준을 번갈아 쳐다보던 간호사의 눈이 도준에게 닿았다.

“오늘 처음 오셨어요?”

“네.”

“여기 이름이랑 전화번호, 주민등록번호 쓰고 기다려 주세요.”

“네.”

간호사는 적당히 친절하고, 적당히 사무적인 어투로 도준에게 하얀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하얀 종이에는 ‘신규환자 등록카드’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도준은 데스크 앞에 서서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술술 써 내렸다. 그러다 전화번호 칸에서 막혀 손끝으로 탁자를 탁, 탁 두드렸다.

전화번호…….

희찬의 번호를 쓸까 했지만, 그에게 소식이 갈까 두려워 쓰지 못했다. 그렇다고 집 전화번호를 쓰자니 굳이 써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고민하던 도준은 전화번호 칸을 비웠다. 어차피 한 번 오고 다시는 오지 않을 병원이었다.

도준은 사람들이 엉겨 붙은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구석에 앉았다. 대기하는 환자들 틈에 섞여 차분히 차례를 기다리려니, 심장이 요란하게 달음박질을 해 댔다.

어떠한 진단이 나오던 의연하게 받아들이리라.

도준은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다. 하지만 심정과 다짐은 다르기 마련이다. 머리와는 달리 마음으로는 이왕이면 별일 아니라는 말을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현실은 으레 그렇듯, 이번에도 도준의 편이 아니었다.

“미각 상실이 의심됩니다.”

“아…….”

“후각은 이상이 없는데 미각만 손상되는 경우는 상당히 드문 케이스라, 조금 더 큰 병원에 가셔서 정밀 검사를 받아 보시는 게…….”

의사의 진단을 듣는 도준의 표정이 차츰차츰 가라앉았다. 그저 남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바랄 뿐인데, 하늘은 도준의 그 작은 소망조차 들어주지 않았다.

도준은 의사에게 아릿하게 웃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큰 병원, 말이 쉬워 큰 병원이지…….

‘큰 병원’이라는 말 자체가 도준에게는 부담이었다.

어차피 진단만 들으려 했다. 그러니 다른 검사는 필요 없었다. 도준은 차분히 가라앉은 마음을 애써 달래며 주먹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그래, 애초에 가진 것 하나 없는 인생이었다. 가진 것 중 뭐 하나 더 잃는다고 하여 크게 더 불행해지는 삶도 아니었다.

분명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쨍쨍한 햇살이 하늘 가운데에서 온 세상을 훤히 밝히는 중이었는데, 도준이 집으로 들어올 때는 해가 사라지고, 어둠이 내려앉은 후였다.

그저 병원에 다녀왔을 뿐인데 하루가 다 흘렀다.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자꾸만 멍해지는 탓에 버스에서 내릴 곳도 몇 번이나 놓쳤다.

도준은 저녁을 먹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미각을 잃고 보니 먹는 것에 대한 재미를 모두 잃었다. 당연히 끼니를 챙겨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침대를 찾아 몸을 뉘었다. 차가운 이불을 덮고, 몸을 웅크리자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이불 속에서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손끝이 저렸다. 가슴이 시큰거렸다. 저미고 나오는 눈물은 흐르기 전에 얼른 훔쳐 냈다.

“어차피, 이럴 거였던 거야.”

지독하게 체념하며 살아온 인생이었다. 이번에도 ‘원래 이렇게 되려던 인생이었겠거니’ 가볍게 생각하면 또 금방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세상은 손에 쥐여 주는 것보다 앗아 가는 것이 많았고, 희망보다 절망을 쉽게 안겨 줬다. 야박한 세상에서 잃은 것을 붙들고 아쉬워할 여유는 없었다.

*

숙소로 돌아온 희찬은 허망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침 첫 신 촬영 이후, 곧 다시 촬영에 들어갈 테니 계속 스탠바이 해 달라는 스태프의 말이 있었다. 그 말을 들은 희찬은 온종일 꼼짝없이 추운 차 안에서 얇은 교복만 입은 채로 호명을 기다렸었다. 하지만 웬걸, 끝내 희찬의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지친 희찬 대신 매니저가 조감독에게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냈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감독의 진심이라고는 조금도 묻어나지 않는 심드렁한 사과가 다였다.

희찬은 다른 토를 달 수도 없었다. 한낱 신인에게 사과까지 ‘해 준다.’라는 감독의 태도에 무슨 말을 더 하겠냐는 말이다. 희찬은 숙소로 이동하는 내내 그저 ‘집에 가고 싶다.’라는 생각만 무수히 되뇌었다.

그저 따뜻한 도준의 품이 간절했고, 뭘 해도 눈치 주지 않는 집이 그리웠다.

“오늘 수고했고, 내일 아침 일찍 움직이자. 얼른 자.”

“네, 형.”

매니저의 말을 마지막으로, 희찬은 조용한 방에 혼자 남겨졌다. 곧이어 어둠이 닥쳐올 것이라는 생각에 턱이 딱딱, 맞물렸다.

희찬은 얼른 움직여 불부터 켰다. 스위치 옆에 있는 TV도 켜 소리를 최대한 키웠다.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지만 희찬은 볼륨을 줄이지 않았다.

샤워를 마치고 누운 후에는 땅과 점점 가까워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이 무렵 마주하는 일몰은 제법 낭만적이었다. 언젠가 도준과 함께 올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원이 생길 정도였으니 말이다.

“아! 전화해야지.”

희찬이 침대 위를 엉금엉금 기어 휴대폰을 쥐었다. 오늘은 유달리 힘든 하루를 보내었으니, 도준과의 대화가 평소보다 훨씬 간절했다. 휴대폰을 켜자 곧바로 진동이 울렸다. 쏟아지는 연락은 스팸이 대부분이었다.

“어……?”

대수롭지 않게 메시지를 넘기던 희찬이 눈을 둥글게 떴다.

소장님

희찬아 도준이 무슨 일 있냐?

도준의 안부를 묻는 메시지는 다름 아닌, 도준이 일하러 나가는 공사장 소장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희찬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오늘도 일을 간다고 한 도준이었고, 분명 만났을 텐데 안부를 묻는 연락이 왜 제게 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소장님

도준이가 일주일째 출근을 안 하는데

연락 없이 빠지던 애가 아니니까 걱정되네

찬찬히 메시지를 읽는 희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도준과는 오늘 아침에도 통화를 했었다. 당시만 해도 도준은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목소리로 출근한다고 했었다.

그건 어제도, 엊그제도, 일주일 전도 같았다. 도통 거짓말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던 이도준인데 그런 그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쿵쿵 거칠게 뛰었다.

희찬이 휴대폰을 손바닥 위에 탁탁 두드렸다.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희찬은 사색에 잠긴 채였다. 희찬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가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생각이 깊어질 때면 나오는 버릇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최근의 도준은 평소와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했다. 잠들 때가 아니면 침대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던 도준이었으나, 요즘은 자주 침대에 누워 있었다. 병원이라고는 쳐다도 보지 않았으면서, 제 입으로 먼저 ‘병원에 가 봐야 할 것 같다’고 말을 했었다.

깨닫고 보니 문득 불안함이 몰려왔다.

“근데, 보통 낮에 전화하면 안 받던데…….”

낮은 말을 읊조렸던 희찬이 입을 텁 틀어막았다.

설마, 일한다고 거짓말하려고 낮에는 전화를 안 받은 거라면, 이거는 진짜…….

희찬은 자꾸만 깊어지는 생각을 뿌리치고 전화를 걸었다. 본디 의심은 불안을 먹고 자라기 마련이니 괜히 도준이 변한 건 아닐까 불안함을 느낄 바에, 도준과 통화를 하는 것이 백 번, 천 번 나을 것이다.

희찬은 가지런한 손을 놀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일정한 패턴의 신호음을 듣고 있으니 가슴이 차분해졌다.

― 응, 희찬아.

이윽고 도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도준의 평온한 목소리에 문득 할 말이 없어졌다. 희찬은 도준의 목소리가 들리는 휴대폰을 꾹 쥔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희찬아?

부드럽고 다정한 도준의 목소리가 희찬을 깨웠다. 희찬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큼, 목청을 가다듬었다.

“어, 도준아. 일하고 왔어? 아까 전화하니까 안 받더라.”

― 전화했었어? 언제?

“아까…… 한 12시쯤?”

― 아, 출근했었지. 아까 아침에 일하러 간다고 말했었잖아. 까먹었어?

도준의 가지런한 목소리 위에 얕은 웃음이 섞였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목소리에 안도가 밀려오던 것도 잠시, 희찬이 소장의 메시지를 떠올렸다.

“아아, 헷갈렸나 봐. 오늘도 소장님네 갔었어? 너 다른 일 하는 건 없지?”

― 응, 똑같지.

희찬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아니길 바랐으나, 이도준이 거짓말을 한다. 머릿속이 텅 비는 기분이 들었다.

차분하고 일상적인 어조로 거짓을 말하는 도준에게 해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두 사람 통화에 전에 없던 정적이 흘렀다.

이런 침묵이 흐를 때면 꼭 먼저 말을 걸곤 했던 도준도 오늘은 유달리 말이 없었다. 이상하게 분명 도준과 통화하는 중이었으나, 도준이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밥은 잘 먹지?”

따져 볼까, 고민했던 희찬이 결국 못 이기는 척 화두를 돌렸다.

지금은 도준의 목소리가 필요하고, 간절하니, 집에 가서 도준을 마주하고 차근차근 얘기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 응, 잘 먹어.

“저번에 간다던 병원은? 다녀왔어?”

― 너 내려가고 바로 갔다 왔지.

“왜 얘기 안 했어. 너 많이 안 좋대?”

― 아니, 감기래. 별거 아닌데 걱정할까 봐 얘기 안 했어.

머릿속에서 거짓말을 지워 내자 도준의 목소리가 한결 가볍게 들렸다.

희찬이 침대 헤드에 편하게 몸을 기댔다. 전화를 끊고 곧바로 자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느라 말을 하지 않았더니, 수화기 너머에서 도준의 목소리가 웅웅 거리며 들렸다.

“응? 뭐라고?”

― 너는 무슨 일 있냐고. 목소리가 왜 그래.

이도준은 귀신이다.

희찬은 말하지 않아도 제 상태를 한눈에 알아채는 도준의 세심함에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이도준이 거짓말을 했건, 말건 그건 이제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희찬에게는 도준의 온 신경이 자신에게 향한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희찬은 편안하게 한쪽으로 돌아누워 귀 위에 휴대폰을 얹어뒀다. 도준의 목소리를 듣기 무섭게 유달리 힘들었던 하루가 뇌리를 스쳤다. 희찬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와 불만을 머금었다.

“나 오늘 대기만 했어.”

― 왜?

“하, 몰라……. 곧 들어간다고 스탠바이 하래서 계속 기다렸는데, 결국 그냥 촬영 끝났어. 진짜 짜증 나…….”

희찬이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 덮은 채로 웅얼웅얼 불만을 토로했다. 힘겨움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에서도 도준의 깊은 한숨이 흘렀다.

― 괜찮아? 힘들었겠다.

역시 이도준은 이도준이다.

다른 상황보다 저를 먼저 챙기고 드는 도준의 목소리에 희찬은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을 느꼈다.

다정한 도준에게 괜히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졌다. 도준이 옆에 있었다면 당장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비비적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희찬은 괜히 발끝으로 이불을 돌돌 감싸며, 도준에게 투정 어린 목소리를 냈다.

“안 괜찮아.”

― 짜증 많이 났나 보다. 계속 추운 곳에 있었어? 핫팩은?

“차 안에 있었어. 담요 덮고, 옷도 따뜻하게 입고.”

― 다행이네. 무서워하지 말고, 거품 욕조에 들어가서 뜨끈한 물에 몸 좀 담가. 율무차 티백 있어? 없으면 따뜻한 차라도 좀 마시고.

상냥한 도준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노곤노곤 잠이 몰려왔다. 희찬이 자신을 걱정하는 도준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크게 하품했다.

“응……. 도준아.”

― 응.

“보고 싶어.”

잠들기 전 희찬이 가까스로 건넨 말은 결국 도준을 향한 갈망이었다. 다른 건 다 모르겠고, 희찬은 그저 도준이 보고 싶었다.

― ……나도 보고 싶어. 나도, 나도 지금 네가 너무 필요해.

도준의 목소리가 아득해졌다. 점차 잠에 빠져든 희찬은 왜인지 서글픈 도준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금세 잠들었다.

희찬이 도준과 통화하다 잠든 날로부터 다시 며칠이 흘렀다. 그사이 희찬은 촬영과 갖가지 스케줄을 소화하며 바쁜 시간을 보내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언덕을 오르는 희찬의 걸음이 경쾌하기 짝이 없다. 희찬은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부르며 걸음을 재촉했다. 희찬의 손에는 까만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봉투 안에는 도준이 좋아하는 주전부리와 희찬이 좋아하는 달콤한 간식이 담겨 있었다.

가파른 언덕 앞에 선 희찬이 허리에 손을 짚고 뚜두둑, 뼈 소리를 냈다. 예전에는 잘만 올라가던 길이었는데, 요 며칠 차만 타고 다녔다고, 그새 오르는 것이 퍽 버거워졌다.

희찬이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양옆으로 들어선 작은 집들을 가로질러 위로, 위로 올라가다 보면 왁자지껄한 소음이 들렸다.

유난히 따스한 햇볕이 드리운 오늘. 기승을 부리던 추위가 한껏 가시니 어른들이 기분 좋게 나와 슈퍼 앞 평상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어른들은 희찬을 발견하기 무섭게 휴가 나온 아들을 맞이하듯 두 팔 벌려 희찬을 반겼다.

“아이고, 희찬이 오네!”

“어, 희찬아. 촬영하고 오냐?”

“장희찬이, 유명해져도 가끔 놀러 와야 해?”

따뜻한 어른들의 정에 기분이 좋아진 희찬도 샐룩 웃었다.

“아하하, 안녕하세요. 아, 매일 와야죠. 도준이도 있는데.”

“야야, 그래, 희찬아. 도준이 무슨 일 있냐?”

슬금슬금 꽃게 걸음으로 집으로 향하던 희찬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또 이 소리.

요즘 들어 도준의 안부를 묻는 사람이 부쩍 많아졌다. 어른의 걱정 어린 목소리를 듣기 무섭게, 희찬은 잊고 지냈던 소장의 메시지를 떠올렸다.

그때 이도준은 ‘일하고 왔다’며 성격 좋은 목소리를 냈었다. 희찬의 밝았던 표정이 순식간에 찌푸려졌다.

“도준이 왜요?”

“도준이가 요즘 통 안 보이네? 집에만 있는 건지, 안 들어오는 건지 모르겠는데. 담배 사러도 안 오더라고.”

담배도 피우지 않는단다, 이도준이. 전화기가 없을 때는 도준에게 할 말을 슈퍼에 남겨 둘 정도로 꾸준히 담배를 피우던 도준인데 말이다.

집에만 있으면 좀이 쑤신다며, 일을 하러 가지 않는 날에도 꼭 동네 한 바퀴는 걷던 도준이었는데, 그가 집 밖으로는 나오지도 않는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희찬이 고개를 푹 수그리고 양옆으로 천천히 꺾어 뼈 소리를 내었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별일 아니겠거니, 가볍게 치부한 자신이 문득 원망스러웠다.

도준과는 촬영장에 있는 동안 매일 전화를 주고받았으니, 도준이 집에 들어오지 않은 것은 아닐 테다. 그럼 정말 집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걸까. 불현듯 희찬의 시야가 캄캄해졌다. 희찬은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세게 짓이겨 물고서 애꿎은 봉투만 세게 거머쥐었다.

“희찬아?”

“아, 도준이 병원 간다고 했어요. 몸이 많이 안 좋은가 봐요.”

“그래? 아이고, 좀 들여다볼 걸 그랬네.”

“아니에요, 제가 지금 가서 볼게요. 감사합니다!”

희찬은 어른들의 인사에는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하고 부리나케 발을 놀려 집으로 향했다.

희찬의 머릿속에는 소장의 메시지와 어른들의 말이 한 곳에 어우러지며 도준을 향한 걱정을 키웠다. 당연히 마음은 불안해졌다.

유독 누워만 지내던 도준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기운차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기도 했었다. 밥도 제대로 먹지 않는 것 같았고, 행동도 눈에 띄게 굼떴던 것 같다. 평소와 달랐던 도준의 행동들이 하나하나 퍼즐처럼 맞물렸다. 희찬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단순한 감기라는 게 거짓일까. 생각보다 몸이 많이 아픈 탓에 일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기에 목소리는 상당히 안정적이었는데 말이다.

“하…….”

결국 이 모든 고민의 결론은 한숨이었다.

지금이야, 도준의 얼굴을 마주하면 곧장 이것저것 물어보겠노라 생각할지 몰라도, 막상 도준을 마주하면 의외로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희찬은 대문 앞에 서서 한참이나 심호흡을 했다. 도준이 어떠한 반응을 보여도 의연하게 대꾸하고, 여유롭게 넘어가야지. 그런 다짐을 하고, 또 했다.

“왔어?”

희찬의 걱정과 달리 도준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안정된 모습이었다. 번쩍번쩍 빛이 날 정도로 청소까지 마쳐 둔 도준이 예쁜 옷을 갖춰 입고 환하게 웃으며 희찬을 반겼다.

식탁 위에는 병원에 다녀왔다는 도준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하얀 약 봉투가 있었다. 두껍지 않은 것을 보니 도준의 말대로 도준의 증상은 가벼웠던 모양이다.

희찬이 곧장 도준의 품에 안겨 도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립고 그리웠던 도준의 향이 코에 닿았다. 도준이 희찬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다정한 도준의 손길에 조금 전까지 큰 폭으로 널뛰던 희찬의 심장이 놀랍도록 차분해졌다.

희찬이 도준의 볼을 거머쥐었다. 군말 없이 희찬의 손에 얼굴이 잡힌 도준의 검은 눈동자가 희찬을 또렷하게 쳐다보았다. 이 역시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강직한 눈동자였다. 희찬의 눈이 예쁘게 휘었다.

역시, 막상 이도준의 얼굴을 보니 준비한 질문은 입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희찬은 집 안으로 들어서며 약 봉투를 쥐고 괜히 안을 들여다보았다. 병원을 다녀온 이후로 먹지도 않은 건지, 3일 치가 들어 있다는 메모와 약 봉투의 개수가 일치했다.

희찬은 손에 들었던 약 봉투를 내려놓고 도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퍼즐처럼 딱 들어맞는 몸을 느끼고 기분 좋게 웃으며 허리를 껴안자 도준도 생긋 웃었다.

“병원에서는 그냥 감기래? 다른 말 없었어?”

“응, 감기래. 그냥 스트레스 때문에 몸이 안 낫는 거 같다고 느끼는 거래.”

도준의 품에 안겼던 희찬의 고개가 홱 들렸다. 도준의 입에서 나온 ‘스트레스’라는 단어가 심각하게 이질적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도준을 바라보자, 도준이 멋쩍은 듯 턱 부근을 살살 긁으며 희찬의 시선을 피했다.

“너 스트레스 받아? 왜? 무슨 일 있어?”

“무슨 일 있을 게 뭐가 있어.”

이번에도 도준의 대답은 대수롭지 않았다. 도준은 희찬이 제게 그러는 것처럼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웅웅거리는 목소리를 냈다.

“그냥…… 모르겠어. 일이 힘든가.”

일 안 하고 있으면서…….

희찬은 불현듯 튀어나오려는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이렇게까지 숨기려 하는 이도준이라면, 구태여 캐내 봐야 도망만 칠 것이 분명했다. 그가 먼저 말하길 기다리는 게 더 좋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 희찬은 도준의 거짓말을 묻어 두기로 했다.

“일을 좀 쉬어 보는 건 어때.”

“아냐, 이제 괜찮아.”

에휴, 희찬이 얕은 한숨을 쉬었다. 도준이 의아한 듯 희찬과 눈을 마주쳤다. 희찬의 옅고 맑은 눈동자에 도준의 실루엣이 비쳤다. 도준이 비스듬히 희찬의 눈을 피하며 희찬의 볼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도준은 은근슬쩍 희찬의 눈치를 살폈다. 지난 일주일, 정확하게는 ‘미각 상실’ 진단을 받은 이후로 아무런 힘이 나지 않아 일도 가지 않고 집에만 콕 틀어 박혀 지냈다. 입맛을 잃어서인지, 의욕도 나지 않았다. 의욕이 없으니 자연히 힘도 없어졌다.

그렇게 가만히 누워 시간을 헤아리다 보면 자신의 가치를 잃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러다가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밀려올 정도로 말이다.

간혹 희찬에게서 걸려 온 전화가 울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희찬에게는 모든 것이 비밀이어야 했으므로, 낮에 걸려 오는 전화는 받지 않았다.

그건 도준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일을 가지 않았다고 말하면 희찬도 하루쯤이야, ‘그래, 쉬어.’ 하고 흔쾌한 대답을 해 줄지 모르겠으나, 그런 일이 지속된다면 당연히 이유를 물어 올 것이었다.

도준에게는 그 이유를 답할 자신이 없었다. 미각 상실이라는 소식을 전했을 때, 희찬의 얼굴에 드리울 수심은 보고 싶지 않았다. 어쩌다 그 지경이 되었냐 물어 온다면, 그에 대해 털어놓을 말도 없었다.

그러니 도준은 이 모든 것이 비밀에 부쳐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저 희찬은 제가 겪는 아픔을 눈곱만큼도 모르길 바랐다.

“뭐야? 도준아, 너 밥 안 먹고 지냈어?”

“어?”

“냉장고가 그대로야, 잘 먹고 지낸댔잖아.”

“…….”

하지만 거짓말은 하면 할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마련이다. 도준이 괜히 입술을 혀로 핥았다. 눈에 보이는 증거가 훤한 거짓말을 하려니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도준은 못 들은 척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을 게슴츠레 뜬 희찬의 따가운 눈총이 쫓아오는 것도 애써 무시했다.

“흐음, 이도준 이상해.”

“이상할 거 없어. 그냥 난…… 계속 여기 있어.”

“도준아, 나 너 믿어.”

희찬의 단단한 목소리에 도준이 입을 꾹 다물었다. 희찬은 더 이상 도준을 추궁하지 않았다.

쉬지 않고 어우러지던 목소리가 잠잠해졌다. 희찬이 까맣게 솟아오른 뿌리를 탈색하고 오겠다며 집을 비운 사이, 도준은 오랜만에 단잠에 들었다. 새근새근 고른 숨을 쉬는 도준의 표정이 두말할 것 없이 평온했다. 실로 오랜만에 깊은 잠을 청한 도준은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아, 고로케 사 왔는데.”

집에 돌아온 희찬이 허망한 웃음소리를 냈다.

이도준은 고로케를 좋아한다. 붕어빵보다, 계란빵보다 무조건 고로케였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맛있는 고로케 냄새를 맡고 도준과 함께 먹을 생각으로 즐겁게 고로케를 사 온 희찬이 제 손에 든 비닐봉지를 빙글 돌렸다.

“좀 더 자게 둘까…….”

종일 피곤해 보이던 도준이었으니, 자게 내버려 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희찬은 고로케를 냉장고 안에 밀어 두고, 도준이 누운 침대맡에 앉아 도준의 잘생긴 얼굴을 어루만졌다. 로션을 챙겨 바르지 않아도 부드러운 피부 결이 좋아, 계속 만지작거렸다. 조금 더 손을 들어 도준의 짧은 앞머리를 만졌다.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머리카락이 괜히 간지러웠다.

“음…….”

곤란한 듯, 희찬의 미간이 좁혀졌다. 도준이 자도록 내버려 두자니 시간이 아까웠고, 그렇다고 깨우자니 도준이 너무 곤히 자는 중이었다. 도무지 깨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

희찬의 손가락이 도준의 이마를 꾹 눌렀다. 도준의 미간에 내 천(川)자가 새겨졌다.

“도.”

이번엔 우뚝 솟은 콧잔등을 꾹 눌렀다. 날카롭게 잘생긴 코가 부드럽게 밀렸다가 다시 제 자리를 찾았다.

“준.”

희찬이 도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촉촉한 입술이 맞닿기 무섭게, 도준이 희찬의 뒤통수를 거머쥐었다.

도준이 입술을 열고 희찬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윗입술을 물고, 혀를 뻗어 희찬의 입 안을 탐했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던 희찬도 이내 살포시 눈을 감고 도준과의 키스를 즐겼다.

살덩이가 어지럽게 뒤엉키며 거친 호흡이 드나들었다. 혀와 혀가 맞닿아 만들어 내는 질척한 소리가 야릇하게 닿았다. 입술이 떨어지며 큰 숨을 터뜨리자 투명한 실선이 길게 늘어졌다.

희찬의 볼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자는 줄 알았던 이도준이 또렷하게 눈을 뜨고 저를 쳐다보는 게 못내 부끄러웠다. 도준의 엄지손가락이 희찬의 번들거리는 빨간 입술을 닦아 냈다.

잔뜩 상기된 희찬을 향해 도준이 해사한 웃음을 보였다. 오늘따라 유달리 예뻐 보이는 희찬의 모습이 마치 환상 같았다. 검은 뿌리가 나왔던 머리는 어느새 다시 노란 뿌리를 가졌다. 두피가 상하지는 않을까, 도준이 걱정하는 마음을 담아 머리를 매만지자, 희찬이 푹 고꾸라지며 도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자는 줄 알았잖아.”

“꾹꾹 눌러 대는데 어떻게 안 깨.”

“고로케 사 왔는데, 먹을래?”

“그럴까.”

도준은 말과 달리 희찬의 팔을 잡아당겼다. 도준의 힘에 희찬이 도준의 몸 위로 풀썩 쓰러졌다. 희찬과 몸을 마주 댄 도준이 희찬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도준의 입은 쉬지 않고 도준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너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니지? 애가 왜 이렇게 침대랑 친해졌어?”

“추워서 그런가 봐. 몸이 자꾸 움츠러들어. 어릴 때랑 달라.”

“누가 들으면 아저씨 다 된 줄. 일어나, 고로케 먹자.”

희찬이 도준의 가슴을 짚고 일어섰다. 희찬의 무게에 짓눌려 억, 하는 소리를 냈던 도준의 눈앞에 희찬의 가지런한 손이 내밀렸다. 잡고 일어나라는 듯 달랑거리는 손이 마냥 예뻤다.

도준은 일어나라는 희찬의 말에도 몸을 뉜 채로 희찬의 손바닥에 하염없이 뽀뽀를 퍼부었다.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질 때마다 손바닥이 간질거렸다. 이내 말간 미소를 피워 낸 희찬은 도준의 입술이 또 한 번 닿을 때 손바닥에 힘을 주고 도준의 얼굴을 밀었다.

“그만해, 간지러워.”

“찬아, 너 촬영장에서 인기 엄청 많겠지?”

“뭐지? 이 뜬금없는 애인 단속?”

희찬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도준을 쳐다봤다. 도준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마치 도준의 것이 아닌 듯했다.

웬일로 이도준이 질투를 다 한다.

희찬은 그게 좋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했다.

장난스레 눈을 게슴츠레 뜨고 도준을 쳐다봤다. 어느새 희찬을 따라 일어선 도준은 희찬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며 웅얼웅얼 작은 목소리를 내었다.

“단속 아니야.”

“그럼?”

“너 맨날 예쁨만 받으면 좋겠다는 거야.”

“나 충분히 예쁨 받고 있어. 너도 얼른 와, 내가 옆자리 비워 두고 있잖아.”

“응……. 가야지…….”

희찬이 부드럽게 도준의 볼을 쓰다듬었다. 오늘따라 잔망이 짙은 도준의 모습에 풋 웃음이 다 나왔다.

“고로케 말고, 우리 얘기하자.”

예상과 다른 반응을 보이는 도준의 모습에 희찬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준을 직시했다.

“무슨 얘기?”

“그냥, 이 얘기, 저 얘기. 우리 얘기 못 하고 지냈잖아.”

도준이 희찬의 손을 잡아끌고 식탁 앞에 앉혔다. 마주 보고 앉는 자리에 엉덩이를 붙인 후에는 두 손으로 가지런히 턱을 받치고서 얼굴을 까딱거렸다.

“우리 나중에 너 좀 한가해지면 원장님 뵈러 갈까.”

원장을 두고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거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도 결국엔 사람이었다. 보육원을 떠나는 두 사람의 손을 꼭 붙들고, 진심 어린 응원을 건네며 눈물까지 지었던 사람이니 말이다.

삶이 힘겨울 때면 간혹 떠오르고는 하는 원장의 얼굴에 도준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뭉근한 향수가 피어나는 도준의 목소리에 희찬도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지, 원장님 잘 지내시나?”

“그러게, 전화 한번 드려 볼걸.”

“아서라, 너네 성공하고 전화해! 하면서 화낼걸.”

차분하게 가라앉는 분위기 속에 희찬이 원장의 표정과 목소리를 흉내 냈다. 순간적으로 희찬의 예쁜 얼굴 위에 무섭게 성을 내는 원장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유쾌한 희찬의 장난에 도준이 허리를 꺾어 웃었다.

“하하, 방금 똑같았어. 한 번만 더 해 봐.”

“너네 성공하고 전화해!”

“미쳤나 봐, 싱크로율 무슨 일이야.”

오랜만에 큰 웃음을 터뜨리는 도준을 보고 있자니 희찬의 마음 가득 도사린 불안함도 사라졌다.

도준이 변한 건 아닐까, 자꾸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어렴풋한 걱정을 하던 것도 모조리 사라졌다.

당연히 기분도 좋아졌다. 해맑은 면모를 잃지 않은 도준이, 자신이 가진 화사함을 맘껏 드러내는 지금보다 희찬이 더 행복을 느끼는 때도 없었다.

“나 잘하지, 이거 나중에 예능 나가면 개인기로 할까?”

“원장님을 누가 안다고, 다른 거 개발해 봐.”

“너는 예능 나가면 노래하면 되겠다. 노래 잘하니까.”

“너는 춤 춰, 막춤 잘 추잖아.”

이윽고 도준의 입에서 장난기 서린 말이 나왔다. 잠시 눈을 굴린 희찬이 이내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도준을 노려봤다.

“놀리는 거지. 죽을래?”

“의외로 똑똑하네, 모를 줄 알았는데.”

“아, 이도준, 진짜 뒤져.”

약이 잔뜩 오른 희찬이 벌떡 일어나 도준을 퍽퍽 소리 나게 때렸다. 사정없이 떨어지는 희찬의 주먹에 도준이 의자를 뒤로 빼며 도망쳤지만, 희찬은 집요했다.

“아, 아파, 아파!”

“넌 좀 아파도 돼.”

“사랑으로 대하지 그래, 하나뿐인 애인인데.”

특유의 능글거림으로 상황을 모면해 보려 했으나, 희찬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희찬은 사랑한다는 말과 달리 꽉 말아쥔 주먹으로 도준의 어깨를 퍽퍽 내리쳤다.

“사랑해, 사랑해.”

이내 도준이 희찬의 손목을 잡고 주먹질을 막았다. 힘을 줘 손목을 당기자, 희찬의 몸이 힘없이 딸려 와 도준의 허벅지 위에 풀썩 앉았다.

도준이 희찬의 허리를 소중한 것을 품에 숨기듯 꼭 그러안았다. 희찬의 화려한 낯이 흐트러지는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도준이 희찬의 입술을 뭉갤 듯이 세게 입 맞췄다.

“사랑해.”

유달리 달콤한 도준의 고백에 희찬의 심통 난 표정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나는 이도준을 이길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한 희찬이 도준의 어깨를 감싸 안고 목덜미에 입술을 뭉개고 억울한 목소리를 냈다.

“또 내가 졌어.”

“이기고 지는 게 어딨어.”

도준이 부드럽게 희찬의 뒤통수를 쓰다듬자 희찬이 고개를 바짝 들고 도준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여전히 억울함이 가득했다.

“여기. 내가 항상 져, 너한테.”

“아냐, 희찬아. 너는 항상 날 이기고 있어.”

“사랑해.”

이내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부드럽게 맞닿은 시선은 한없이 따스했다. 어느 누구의 사랑도 작지 않았다. 또 누구 하나 더 크지도 않았다.

같은 크기의 사랑을 가진 두 사람은 오랜만에 도사리는 오롯한 행복에 간질거리는 가슴을 느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춘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

환한 조명이 실내 곳곳을 화사하게 비추는 호텔 방 안, 잔잔하게 울리는 선율 위에 사각사각, 조심스러운 소리가 얹혔다.

전광진은 도준의 몸 곳곳을 살피며 세심한 손길로 도준의 몸에 있는 털을 하나하나 밀어 내는 중이었다. 날카롭고 차가운 칼날이 살갗에 닿을 때마다 도준이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간지럽기도 하고, 야릇하기도 한 자극에 고개를 든 페니스가 수치스러웠다. 도준이 다리를 오므리며 성기를 가려 보려 했지만, 탁자에 엎드려 묶인 몸뚱어리는 자유롭지 못했다.

짝―!

“흣……!”

이윽고 날카로운 마찰음이 울렸다. 도준의 하얀 엉덩이가 빨갛게 물듦과 동시에 전광진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있어. 다친다.”

매서운 목소리에 도준이 애써 몸에 힘을 주고 떨림을 멈추어 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 역시 도준의 뜻대로 되는 바는 아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머리털을 제외하고 나머지를 전부 정리한 전광진은 만족하듯 웃었다. 도준이 눈물 맺힌 눈에 원망을 섞어 그를 바라보았다. 웃는 남자의 얼굴을 마주하기 무섭게 소름이 돋았다.

“너도 이제 다 예민해졌구나. 겨우 제모만 했는데 이렇게 바짝 서면 어떡하니.”

전광진의 두툼한 손이 한껏 예민해진 도준의 페니스를 툭 건드렸다.

“흡…….”

“기다려 봐, 싸고 싶어도 못 싸게 해 줄 테니까.”

낮고 잔잔한 전광진의 말에 도준이 몸을 움츠렸다. 다가오는 공포의 시간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쳐 봐야 하등 소용없다는 것을 깨우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도준은 금세 벌거벗겨진 채로 팔이 뒤로 묶이고, 눈이 가려졌다. 도준의 입에는 재갈이 물렸다. 그렇게 두 발로 세워 둔 도준의 모습은 천재 조각가가 정성 들여 빚어 놓은 조각상이나 다름없었다.

이윽고 시끄러운 구둣발 소리가 빼곡하게 들어찼다. 눈이 가려진 도준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엄습하는 공포에 몸을 바들바들 떨어 댔다.

전광진의 손에 이끌려 침대에 엎어져 엉덩이를 쳐든 도준의 모습은 색스럽기 그지없었다. 흐으, 흣, 하는 도준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방 안을 빼곡히 메웠지만, 도준을 지켜보는 남자들은 그 누구도 도준을 해방시켜 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들리는 건 오로지 이상한 번호를 매기는 소리, 욕구를 못 이긴 남자들이 더러운 좆 대가리를 꺼내고 요란하게 흔드는 소리가 다였다.

도준은 또 한 번 절망을 경험했다. 바이브레이터가 묶인 페니스가 카테터에 막혀 팽팽 부풀어 올랐다. 아찔한 진동에 몸을 바들바들 떨어 대던 도준이 결국 몸을 축 늘어뜨렸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몇 번이나 연달아 강제로 드라이 사정을 하게 만드는 어른들의 손짓 덕분에 이제는 쾌감이 아닌 고통이 몰려왔다. 도준은 처절하게 울었다. 아찔한 자극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몸뚱어리가 지독하게 원망스러웠다. 뇌를 찌르는 감각이 도준을 아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뜨렸다.

저벅저벅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긴장을 머금은 도준의 몸이 한껏 굳었다. 취향이 독특하다던 전광진의 말대로 도준이 상대하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악취미를 가졌다. 도준은 제게 다가오는 공포의 시간에 순응하고,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았다. 굳게 말아쥔 주먹만 바르르 떨릴 뿐이었다.

짝―!

날카로운 파열음이 방을 울렸다. 도준의 몸이 펄떡 뛰었다.

“으읍……!”

도준의 입에서 절로 아픈 신음이 흘렀다. 무어로 내리치는지 알 수 없었으나 맞은 부위에 홧홧하게 열이 오르고 곧이어 살결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도준의 목에 굵은 핏대가 섰다.

“다시.”

비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도준이 아득해지는 정신을 부여잡았다.

[소리 내면 다시 처음부터. 자세 흐트러지면 안 돼. 쓰러지지도 말고.]

소리를 내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다. 도준은 비참함에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힘겹게 삼키고 다시 엉덩이를 쳐들었다.

한 대, 한 대, 무자비한 매질이 이어졌다. 도준은 그저 목에 힘을 주고 주먹을 말아 쥔 채로 모든 소리를 참아냈다.

그렇게 도준은 또 한 발, 지옥과 가까워졌다.

“사장님, 다정이 죽겠습니다.”

이제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할 무렵 전광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성을 잃고 매를 휘두르던 남자의 매질도 멈추었다.

입술이 다 터질 정도로 이를 악물고, 시트를 비틀어 쥔 채로 모든 매를 맞았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잘못했다고 비는 것도 이제는 지긋지긋한 일이었다.

전광진과 남자가 무어라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옆에서 하는 대화였지만, 그 목소리는 선명하지 않았다.

이윽고 남자의 걸음이 멀어지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남자가 사라진 것을 느낀 도준이 무너지는 몸을 침대에 누인 채로 가쁜 숨을 헐떡거리자 도준의 커다란 흉통이 거칠게 들썩거렸다. 하도 운 탓에 눈을 가린 천이 축축하게 젖었다. 그런데도 도준의 눈물은 도무지 멈추지 않았다.

온몸이 다 아팠다. 감히 아프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모르는 남자의 손에서 오나홀 취급당하는 것도, 샌드백처럼 매를 맞는 것도,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만 같아 몸보다 마음이 아팠다. 그럼에도 도준은 해맑은 희찬의 얼굴을 떠올리며 자신을 다스렸다.

도준은 이렇게 우는 것이 자신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저항하지 못할 거대한 힘 앞에 처참히 무너지는 것이 희찬이 아니라 자신이어서 다행이었다. 무참히 짓밟히고, 처절하게 울부짖고, 그러다 간곡히 빌기도 하는 그 모든 행위를 자신이 해서 진심으로 다행이었다.

“이런……. 상처가 심하게 났네.”

“하아…….”

“넉넉하게 쉬어야겠다.”

어느새 다가온 전광진이 도준을 옭아맸던 구속구를 풀었다. 검붉다 못해 드문드문 피가 보이는 심한 상처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건 도준을 걱정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전광진은 그저 상품에 상처가 났다는 것을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도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움직일 수도 없었다. 전신이 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힘을 주고 움직이려 해도 몸은 제 말을 듣지 않았다.

픽픽 쓰러지는 도준을 보던 전광진이 피식, 웃었다. 마치 잘 만들어 둔 로봇의 힘겨운 첫걸음을 구경하는 모양으로 말이다.

도준은 자신을 일으키는 전광진의 손길에 몸을 일으키다 말고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다리 사이에서 흐르는 기분 나쁜 정액이 결국 도준을 무너뜨렸다.

“내가 뭐랬니.”

“…….”

“너처럼 체력 좋고, 덩치 좋은 애들은 어떻게든 견딘다니까. 거친 플레이가 가능해. 너 수요가 제법 좋아. 배우 말고 스폰을 계속해 볼 생각은 없니? 큰돈 만지게 해 줄게.”

남자의 비아냥거리는 말이 도준의 자존심을 있는 대로 다 짓밟았다. 도준은 고작 한 달 하고 몇 주 사이에 차근차근 생기를 잃어 갔다. 활력이 넘쳐 독기 어린 시선을 보내던 것도, 상처받은 표정으로도 꿋꿋하게 주먹을 말아쥐고 반항하던 것도 다 옛날 일이 되었다.

점점 시들해지는 도준은 애석하게도, 그래서 더욱 찾는 손이 많아졌다. 한 청년의 꿈을 짓밟고, 모든 것을 앗아 놓고도, 시체처럼 굳어 가는 모습에 그들은 열렬히 환호했다.

“어때, 괜찮은 제안 아니니?”

도준의 텅 비어 버린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렀다. 손이 바르르 떨리다 못해 무엇하나 제대로 집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무엇 하나 좋은 것 하나 없는 삶이었지만 이 정도로 바닥을 원한 적은 없었다. 한 줄기 햇빛조차 들지 않는 음지에 버려져, 사지가 썩어 가는 것 같았다.

“희찬이는 내일 올 거야.”

전광진의 입에서 나온 사무치는 이름에 도준이 굵은 눈물을 흘렸다. 이제는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린 희찬의 이름이 그렇게 아팠다.

그래도, 이제는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처음의 다섯 번에서 무사히 네 번을 해냈고, 이제는 마지막 한 번을 남겨 두고 있었으니, 이것만 잘 해내면 다 끝이라는 생각 하나로 도준은 다시 일어섰다.

지긋지긋한 호텔 향이 진하게 밴 호텔 방에서 벗어난 도준은 휘청거리기 일쑤였다.

최대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과 달리 다리는 자꾸 허공에서 헛발질을 해 댔다. 그게 참 암담하고 절망적이었다.

전광진이 도준의 팔을 제 어깨에 두르고, 단단한 손으로 도준의 허리를 붙들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비틀비틀, 힘겨운 걸음을 걷던 도준이 낯선 이와 부딪쳤다. 눈을 들어 상대를 확인한 도준의 검은 눈에 잔 지진이 일더니 이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어, 저기.”

도준과 부딪친 남자의 손이 도준의 팔을 단단하게 거머쥐었다. 도준은 남자의 손이 닿기 무섭게 큰 몸을 흠칫 떨었다. 남자의 다정한 눈이 도준의 안색을 살폈다. 도준이 남자의 팔을 뿌리쳤다. 조금의 매가리도 느껴지지 않는 미약한 몸부림이었다.

“저기, 괜찮아요?”

도준이 고개를 들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한 무리의 남성이 고급스러운 정장을 차려입고서 복도를 다 가로막고 있었다.

도준의 눈썹이 일순 씰룩거렸다. 남자들의 모습만 봐도 욕지기가 치미는 것 같았다. 도준의 시선이 어색하게 남자의 눈을 피해 텅 비어 버린 채로 허공을 둥둥 떠다녔다.

“부회장님, 지금 가셔야 합니다.”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를 재촉하는 남성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도준이 아예 고개를 푹 수그리고 뜨거운 숨을 힘겹게 몰아쉬었다.

“네, 압니다.”

“아니, 지금…….”

“제가 ‘압니다’라고 했잖습니까.”

아, 부회장님이라는 호칭은 내 손을 잡은 사람을 부르는 말이었구나.

도준의 검은 눈동자가 다시 남자에게 닿았다. 많아 봐야 40대 초반쯤 됐을까. 반듯한 얼굴로 도준을 붙잡은 남자는 무려 ‘부회장님’이라는 칭호로 불리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도준의 심정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도준이 느릿하게 눈을 끔뻑거렸다. 왜인지, 도준을 부축하는 전광진도 움직이지 않고 상대를 함께 바라보는 중이었다.

남자가 주섬주섬 자신의 상의 안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남자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값비싼 명품 지갑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얀 종이가 나왔다. 손바닥보다 작은 사이즈의 종이는 다름 아닌 명함이었다.

“혹시 도움 필요하면 저한테 연락 주세요.”

남자는 간곡한 부탁이라도 하듯 도준의 손을 친히 펴 명함을 쥐여 주고, 직접 도준의 손가락을 꾹 눌러 닫았다. 도준의 눈이 제 손을 쥔 남자의 손으로 향했다. 굵직한 뼈마디가 도드라진 남자의 손은 여전히 도준의 손을 쥔 거머쥔 채였다. 그 손에서 강한 힘이 느껴졌다.

전광진의 눈이 흥미롭게 들썩거렸다. 저 사람은 굳이 명함을 보지 않아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으레 다 알 수 있는…….

이한 그룹 부회장 이 선 재

대한민국 최고 재벌 이한 그룹의 후계자였다.

명함을 살피는 도준의 손가락이 힘없이 떨렸다. 명함을 받기 무섭게 ‘수요가 좋다’던 전광진의 말이 머릿속에서 웅웅 울렸다.

도준의 눈동자에 작은 울분이 일었다. 이제는 하다 하다 남자한테 명함도 다 받는다. 도준이 입술을 짓이겨 물었다. 이미 다 터져 버린 입술에서 금세 피가 터져 나왔다. 두 눈에도 눈물이 차올랐다. 흘리지 않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뜬 도준은 남자에게 어떠한 인사도 남기지 않고 절뚝절뚝 걸음을 옮겼다.

도준은 그저 제 처지가 경멸스러웠다. 단 한 번도 색스러운 얼굴이라고 생각한 적 없는 얼굴이 문득 원망스러워졌다. 남들이 입을 모아 잘생겼다 칭하는 것도 이제는 다 욕처럼 들렸다.

얼굴이 잘생기길 바란 적 없다. 타고나길 예쁜 몸도 원한 적 없다. 그저, 가끔은 부모의 사랑이 궁금했고, 누구보다 희찬과 행복하길 원했다. 그냥, 그런 평범한 것들을 누리고 싶었다.

그런데 왜…….

비참한 심정으로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도준은 전광진이 문을 열어 주는 뒷자리에 올라 낮은 탄식을 터뜨렸다. 몸이 어딘가에 닿을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몰려왔다. 도준이 문을 닫으려는 전광진의 손을 저지하고 제가 쥔 명함을 전광진에게 내밀었다. 명함은 이미 다 구겨진 채였다.

“……이런 거, 연락은 대표님 통해서 하는 게 맞는 거 같아서요.”

“아, 그래.”

눈썹을 한 번 들썩거렸던 전광진이 기꺼이 명함을 받았다. 부드러운 표정으로 문을 닫았던 전광진은 뒷좌석 문을 닫기 무섭게 명함을 제 발치에 던져 버렸다.

정·재계 대물과는 웬만하면 엮이지 않는 것이 좋다.

버려진 명함 위에 침을 탁, 뱉은 전광진이 지체 없이 운전석에 올라 차를 몰았다. 아무래도 다음에는 이한 호텔이 아닌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집으로 돌아온 도준은 집 안의 불을 켤 생각도 하지 못하고 한쪽 구석에 웅크려 앉아 몸을 벌벌 떨어 댔다. 유독 심하게 웅웅거리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도준의 맥을 쳤다.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환청이었으나, 오늘은 유달리 그 정도가 심했다. 남자들의 목소리가 짙어질수록 공기 중 산소가 다 사라지는 듯한 괴로움이 몰려왔다.

[어디서 저런 물건을 구했어.]

[이 몸 맛 모를 뻔했지.]

“끅……. 아, 살, 려…….”

[어디서 이런 요물이 나왔지.]

[다리 더 벌려, 엉덩이 들고.]

“아……. 끅. 흐윽……. 자, 잘못했…….”

도준이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주먹을 쥐고 머리를 퍽퍽 때려 봐도 음침한 목소리는 도무지 사라지지 않았다.

잘못한 것이 없었음에도 입에서는 절로 ‘잘못했다’는 말이 나왔다. 아, 아닌가. 어쩌면 존재 자체가 잘못일지도 모른다.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드문드문 고개를 들어, 도준은 딱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남자들과의 관계는 공포 그 자체였다. 묵직한 돌덩이에 깔려 짓이겨지는 공포, 끝도 없는 터널을 혼자 걷는 공포, 날카로운 칼끝으로 살점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 그에 따라 또 밀려오는 공포들 말이다.

마치 동물원에 갇혀 사람들의 욕구대로 몸을 움직이는 생명체가 된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비참할지도 모른다.

도준은 이를 악물고 몸을 더 웅크렸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흐르는 눈물은 인지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찢어진 피부가 욱신거렸다. 호텔에서도 몇 번이나 씻었지만, 집에 와서도 씻기를 반복했다. 그런데도 자꾸만 더럽다고 생각되는 몸을 다 잘라 버리고 싶었다.

이제는 희찬 앞에 떳떳하게 서지도 못할 것 같았다. 치미는 역겨움은 오로지 저에게 향했고, 그건 또 다행이었다.

살고 싶었고, 딱 그만큼 죽고 싶었다. 들쭉날쭉 변덕스러운 마음은 괴롭고 힘들었다. 그건 산소가 다 사라졌다가 또 숨통이 트이기도 하는 느낌이었다.

가슴을 함부로 죽죽 그어 대는 모진 말들에 상처받은 마음을 털어놓을 곳도 없었다. 어두운 곳에서 혼자 끙끙 앓다 보면 비죽비죽 눈물이 나왔다. 그리고 또 웃음이 났다.

도준은 지금 당장 희찬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이런 와중에도 도준은 희찬이 간절했다. 희찬이 있어야만 살고, 웃고, 숨 쉴 수 있었으므로,

“희찬, 희……찬…….”

도준이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수화기를 들었다. 무너지는 몸을 침대에 앉히고, 무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손가락으로 겨우겨우 희찬의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길게 이어지는 신호에 자꾸만 눈물이 났다. 머릿속 어딘가에서는 우는 것을 희찬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아우성쳤지만, 지금 도준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살아야만 희찬을 볼 수 있을 테니, 희찬의 목소리를 듣고 숨을 쉬어야만 했다.

― 응, 도준아.

이윽고 희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준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손바닥으로 틀어막고 희찬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었다.

― 도준아?

“응, 응……. 언제 와?”

― 나 내일 올라가! 보고 싶지?

“응,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

밝은 웃음을 띤 희찬의 목소리가 한없이 포근하고 따스했다. 덕분에 방금까지 어두컴컴했던 주변에 환한 빛이 드리우는 듯했다. 도준은 금방이라도 자신이 겪은 비참하고 잔혹한 현실을 모두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목소리가 왜 그래?

“……자다 깼어.”

― 계속 자지, 왜 깼어.

“네 목소리…….”

― 지금 누가 전화하냐!

― 아, 도준아. 나 지금 전화가 어려워서,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 자고 있어.

“…….”

― 죄송합니다!

제대로 된 대화는 나누지도 못했는데, 수화기 너머 날 선 목소리에 전화가 금세 끊겼다.

많은 걸 바란 게 아니었다. 그저 1분, 고작 그 짧은 시간만을 바랐을 뿐인데 유독 야박한 하늘은 그마저도 들어주지 않았다.

도준은 무릎을 끌어안은 채로 얼굴을 파묻었다. 희찬과의 통화가 어그러진 것과 별개로 혹시나 희찬이 많이 혼나진 않을까, 걱정이 몰려왔다.

그냥 좀 참을걸, 기다릴걸.

찰나의 욕심을 이겨 내지 못하고 제멋대로 행동한 것에 대한 지독한 후회가 밀려왔다.

피해 주고 싶지 않은데, 제 존재가 희찬에게 피해라는 생각을 도무지 지울 수 없었다.

“왜 사냐…….”

역시 그냥 민폐였다.

희찬에게 미약한 도움이라도 되고 싶어 어떻게든 견뎌 내는 중인데, 그 도움은 미약하다 못해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아 한탄만 몰려왔다.

울다 지쳐 잠든 도준은 자신을 만지는 남자의 손길에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좁은 숨구멍을 겨우 드나드는 가쁜 숨을 몰아쉬는 도준의 눈에 드리운 것은 다름 아닌 희찬이었다.

분명 내일 온다고 했는데. 희찬은 또 촬영이 끝나기 무섭게 부리나케 서울로 온 모양이다.

도준이 집요하게 제 몸을 더듬는 희찬의 손을 걷어 냈다.

“왜, 한번 하자. 나 하고 싶어.”

희찬과는 항상 하던 행위였는데, 희찬의 말을 듣기 무섭게 ‘수요가 좋다’던 전광진의 말이 떠올라 괴로웠다.

“……희찬아, 나 하기 싫어.”

희찬이 눈썹을 씰룩거렸다.

“튕기는 거야?”

“아니, 나 하기 싫어.”

도준은 다시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기 싫다. 희찬과 관계를 맺으면서도 그 남자들을 떠올릴 자신이 싫었다. 아니겠지만, 오자마자 섹스부터 하자는 희찬도 혹시 제 몸이 좋아 붙어 있는 건 아닐까, 가당치도 않은 생각에 자신을 향한 경멸이 몰려왔다.

희찬은 처음 보는 도준의 모습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장난이겠거니, 가볍게 치부하며 다시 도준의 티셔츠를 끌어 올렸다. 맨몸이 드러나기 무섭게 도준이 티셔츠를 팍 잡아 내렸다. 어딘가 신경질이 묻어나는 듯한 손길에 희찬이 표정을 굳혔다.

“하기 싫다잖아.”

“야, 왜 그렇게까지 정색을 해.”

단 한 번도 관계를 거부한 적이 없었던 도준이기에 희찬이 느끼는 민망함은 더욱 컸다. 사랑하는 애인과 오랜만에 만나 몸이 달뜨는 것은 오로지 저뿐일까. 도준은 이상할 정도로 펄쩍 뛰며 관계를 거부했다.

그게 왜 그렇게 민망하고 또 화가 나는지 모르겠다.

희찬이 도준에게서 떨어져 도준을 바라보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도준의 눈동자에 왜인지 울분이 섞여 있었다.

“싫다는데 왜 그래. 하기 싫다고. 몇 번을 말해, 싫다고. 싫어.”

“야.”

못을 박듯 몇 번이나 강조하는 도준의 모습이 이상하다. 하기 싫다고 힘주어 말하며 몸서리를 쳐 대는 것에 놀란 희찬이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희찬을 밀어내며 몸을 일으킨 도준이 고개를 푹 수그렸다. 희찬은 진지한 눈으로 영문을 알 수 없는 도준의 행동을 하나하나 살폈다.

적막이 내려앉았다. 매시간 사랑을 새기던 두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적막인지라, 어색함 속에 각자 다른 감정을 삼켰다.

도준의 떨리는 숨이 차곡차곡 쌓여 공기의 무게를 더했다. 시트를 틀어쥔 주먹은 어찌나 강한 힘이 실렸는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도준은 여전히 시선을 바닥에 둔 채로, 침을 꼴깍 삼켰다.

“너도…… 너도 나 강간하고 싶어?”

차마 믿을 수 없는 말이 도준의 입에서 나왔다. 희찬이 눈을 크게 떴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저를 보는 도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새까만 눈동자가 마치 헤어 나올 수 없는 암흑을 머금은 듯했다.

오로지 애정만 묻어나는 것이었는데, 그를 강간으로 치부하는 도준의 행동에 울화가 치밀었다. 희찬이 도준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뭐……? 강간?”

도준은 자신의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아니, 아니…….”

“누가 너를 강간하는데.”

희찬의 차가운 목소리가 뚝 떨어졌다.

“보고 싶다고 할 때는 언제고. 보고 싶다길래 나도 보고 싶어서 촬영 끝나자마자 올라왔는데.”

“…….”

“서울 가는 거 피곤하다는 매니저 형 꼬시고 꼬셔서 겨우 올라왔더니……. 뭐? 강간?”

“희찬아, 그게 아니라, 내가…….”

도준이 거세게 도리질을 쳤다.

아니, 말을 잘못했다. 너무 예민했다.

도준이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 희찬에게 다가갔다. 그러면 그럴수록 희찬은 한 발, 한 발 멀어졌다.

“됐어. 강간하려는 새끼랑 얘기나 하고 싶겠냐.”

“희찬아, 내 말 좀, 들어. 어?”

“나 갈게.”

“쉬었다가 가, 희찬아. 기껏 왔잖아.”

“……너 나랑 같이 있고 싶긴 해? 강간하려고 한 새낀데.”

희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돌아왔다. 가슴이 다 찢어지는 것 같았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도준이 후회를 거듭했다.

이 역시 모두 제 탓이었다. 함부로 입을 놀렸다. 도준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자신이 지독하게 원망스러웠다.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 희찬 앞에 한없는 죄인이 되어 버렸다.

도준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치솟는 눈물을 한없이 쏟아 냈다. 감히 고개를 들어 희찬을 마주할 수도 없었다. 저를 보는 눈에 서린 원망을 알고 싶지 않았다. 희찬이 받았을 상처를 견디기도 어려웠다. 그저, 제게 닥쳐 오는 모든 상황이 지독하게 저주스러울 뿐이었다.

바닥에 엎드린 도준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 위로 검붉은 핏줄이 불끈 솟았다.

“너 요즘 진짜 이상해. 알아? 나는 하루 종일 너만 생각하고, 하루라도 빨리 집에 오려고 오만 애를 다 쓰는데, 너는 아닌 거 같아. 내가 와도 너는 침대에만 누워 있잖아. 같이 밥 먹는데도 표정은 죽상이고. 너무 신경 쓰여. 알아?”

“…….”

“너, 나한테 거짓말도 하고 있잖아. 일 안 하고 있으면서 왜 일하러 간다고 해? 왜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해. 내가 모를 거 같았어? 내가 그렇게 우스워?”

연거푸 쏟아지는 희찬의 감정에 도준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일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면, 혹시 스폰하는 것도 알고 있을까. 하는 걱정이 먼저 도사렸다.

스폰 때문에 제가 떴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제게 능력이라곤 없는데 억지로 주어진 기회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그런, 걱정들 말이다.

“나만 그대로인가 봐. 사람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데, 네가 지금 그런 거 같아. 처음엔 불안했거든? 근데 이제 화가 나. 네 걱정 하다가 촬영장에서 혼나도 네 원망한 적 없는데, 이번 촬영은 너 좀 원망스러울 거 같아.”

“…….”

“어떻게 나한테 강간, 하……. 진짜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미안해, 희찬아, 내가 미안해. 가지 마, 어? 나랑 있자.”

도준이 더듬더듬 손을 뻗어 희찬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우는 얼굴로 희찬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그저 바닥에 시선을 처박은 채로 애원하듯 매달렸다.

하지만 상처받은 희찬은 도준을 안아 주지도, 일으켜 주지도 않았다. 바짓가랑이를 잡은 도준의 손을 쉽게 뿌리친 희찬이 다시 한발 물러서 도준에게서 멀어졌다. 각자에게 도사린 감정 앞에 두 사람은 한없이 어리고, 또 어렸다.

“너 지금 가면 또 1, 2주 있다가 올 거잖아. 제발……. 제발 나랑 있어 줘.”

“어차피 내일 저녁에 또 내려가야 했어. 이번에 갔다 왔을 때는, 네가 다시 돌아와 있었으면 좋겠다. 너 되게 화사하고 근사했는데, 요즘은 좀……. 우중충해.”

도준은 희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저 아팠다. 변했다느니, 이상하다느니. 제자리를 지키려 부단히 노력하는 중이었건만, 단 하나도 도준의 뜻대로 되지 않은 모양이다.

변해 가는 모습에 불안했다는 말이, 그리고 이제는 화가 난다는 말이. 결국 도움은커녕 짐만 되었다는 상실감을 안겼다.

“가지 마. 가지 마, 희찬아. 나 혼자 두지 마, 같이……. 같이 있어 줘, 제발.”

“잘 자.”

“나, 나 지금 너 필요해, 희찬아. 가지 마, 희찬.”

쾅.

도준이 처절하게 울부짖었지만, 희찬은 냉담한 걸음으로 집에서 벗어났다. 작은 집에서 메아리치는 문 닫히는 소리가 오늘처럼 서러웠던 날이 있을까. 당장 몸을 일으켜 쫓아나가 희찬을 붙잡고 싶었지만, 도준은 일어날 수 없었다.

허리도, 다리도, 하다못해 숨까지 도준이 제 의지로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엉금엉금 기어 현관까지 왔지만, 문을 열 수도 없었다.

손에 잡히지 않는 희찬을 붙잡으려 허공에서 손을 휘저어 봐도 희찬은 없었다.

빛이 사라졌다.

도준은 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하염없이 울었다.

“가지 마, 가지 마. 끅, 흐……. 희찬아, 가지 마…….”

무슨 말이라도 해 볼걸 그랬다.

“흐, 끅……. 아흐윽…….”

아니, 하지 않길 잘했다.

도준은 무너지는 속을 달랠 수 없었다. 아무 말이라도 해 볼걸 그랬다는 생각과 그러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첨예하게 부딪쳐 머리가 아팠다. 그리고 결국 말하지 않길 잘했다고 결론 내렸다.

버려진 몸뚱이가 시끄럽게 아우성을 쳐 댔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괴로움에 제 몸을 부여안은 도준의 입에서 한이 서린 울음만이 속절없이 터져 흘렀다.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이가 딱딱 부딪쳤다. 그마저도 아파 다시 눈물이 났다.

“아, 희찬……. 아끅.”

불현듯 전신에 한기가 도사렸다. 급격히 추워지는 온도에 도준의 낯이 파리하게 질렸다.

희찬에게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감히 아프다는 말도, 미각이 없어지고, 모르는 아저씨들에게 맞아 온몸에 상처가 났다는 말도, 그걸 보여 주기가 싫어, 관계를 거부했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힘들다는 말도, 혼자서는 잠도 잘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말도, 어떻게든 자 보려 매일 누워 있는 거라는 변명도 할 수 없었다.

당연히, 사랑한다는 말도, 이 모든 일을 겪는 것이 나라서 다행이라는 말도, 나 역시 매일 너를 그리고 너만 바라보며 산다는 고백도 할 수 없었다.

도준은 이 모든 상황이 원망스러웠다. 지독하게 한탄스러웠고, 사무치게 통탄스러웠다.

그저 남자에게 거부감이 생겼을 뿐이었다. 애초에 그 거부감은 희찬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엔 또 제 잘못이라, 도준은 목놓아 울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우는 중에도 남자들의 목소리는 쉬지 않고 도준을 괴롭혔다. 도준의 새하얗게 질린 주먹이 제 귀를 세게 내리쳤다.

그럼에도 소리는 멎지 않았다. 딱, 미칠 것 같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공기가 쓰게 느껴졌다. 불현듯 희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생각 하다가 촬영장에서 혼나도.]

[너무 신경 쓰여, 알아?]

아…….

도준은 저 때문에 촬영장에서 혼난다는 희찬의 말을 감히 무시할 수 없었다. 변해 버린 모습이 못내 짐이 되어, 그게 신경 쓰여 죽겠다는 투의 희찬의 말이 도준의 가슴을 후볐다.

[지금 누가 전화하냐!]

그렇게 무섭게 혼나던 희찬인데, 오늘도 저러고 나갔으니 앞으로는 또 얼마나 심란하게 지낼까. 그러면 또 혼날 텐데.

뛰어난 재능을 가진 희찬에 대해 혹평이 돌고, 그대로 주저앉지는 않을까, 염려가 가슴을 짓눌렀다.

진짜 내가 걸림돌인가 봐.

신경 쓰이지 않게 행동해도 모자랄 판에, 가뜩이나 신인이라 잔뜩 긴장하고 지내는 희찬의 마음에 짐만 얹은 것 같다.

도준은 이를 아득 물고 주먹을 말아 쥐었다. 손바닥에 피가 맺힐 정도로 손톱이 파고들었지만, 아픈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하필…….”

하필 너와 키스한 게 나여서.

계약서를 들고 해사하게 웃던 모습이, 첫 조연에 발탁되었다며 나폴대던 몸짓이, 바쁜 스케줄에 지친 와중에도 꾸역꾸역 사랑을 전하던 정성이 이윽고 전광진의 호출을 받고 상처받아 울던 모습으로, ‘기사 나는 게 싫다’며 사랑과 꿈을 저울질하던 몸짓으로, 이윽고 결국 분개하며 집을 뛰쳐나가 버리는 절망으로 바뀌어 도준을 짓눌렀다.

땅이 훅 꺼졌다. 발을 디딜 틈조차 남기지 않고 꺼진 땅 아래에서 암흑이 솟구쳐 도준을 집어삼켰다. 찬란하게 드리우던 빛도 모조리 사라졌다. 삽시간에 한기가 드리워 도준의 몸에 한을 남겼다.

나는, 네 옆에 있으면 안 되겠다.

“흑, 으흑, 아……. 끄읍, 하윽. 으…….”

결론을 내린 도준의 입에서 더 큰 울음이 터져 흘렀다.

그저 희찬의 옆에서 그와 함께 웃는 것 하나를 바랐는데 그게 그렇게 큰 욕심이었던 걸까. 그런 내 욕심 자체가 네게는 그저 악영향인 것 같아, 그게 그렇게 속상하다.

도준의 몸이 점점 뜨거워졌다. 덩달아 정신도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주변의 소음은 하나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집요하게 말을 걸며 괴롭히던 남자들의 목소리까지도 말이다. 그저 희찬의 또렷한 목소리 하나하나가 독이 발린 화살처럼 날아와 가슴에 꽂혔다.

탐해서는 안 될 것을 탐한 죄.

그게 이렇게 큰 죄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아니, 어쩌면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니라고 생각하려 했다. 극복해 보려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무서운 속도로 다가와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벽으로부터 도망치려 아등바등 발버둥 쳐 봐야 하등 소용없는 일이었음을, 그저 거대한 파도 앞에 어린아이 물장구에 지나지 않는 헛발질이었음을 이제는 뼈저리게 알겠다.

도준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어렵사리 벽에 등을 기대었다. 도준의 입에서 쉬지 않고 터지는 울음 섞인 탄식은 조금도 흩어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공기의 무게를 더했다.

도준이 질끈 감았던 눈을 떠 정면을 응시했다. 낮은 신발장 위에는 희찬과 도준이 함께 찍은 전역 후 사진이 있었다. 사진 속 희찬은 환하게 웃고 있었고, 도준은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사진 밖의 도준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희찬과 함께라면 무서울 것이 없었다. 무어든 결정하는 데에 거침없었고, 행동하는 데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럼에도 이제는 희찬을 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꾸만 저와 같이 어두워지는 희찬을 도저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를 비추는 것 정도만 하겠노라고 다짐했던 것과 달리, 비추기는커녕 앞길을 어둡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못내 사무쳤다.

도준의 울대가 크게 울렁거렸다. 멎은 듯했던 눈물이 이내 다시 치솟아 도준의 볼을 적셨다.

“나는, 나는…….”

나는 굳이 나를 선택해 이 구렁텅이 속에 있겠다는 네가 아팠다. 나와의 시간을 위해 밤새 달려오는 네가 슬펐다.

그래서 간절히 바랐다. 네가 더 좋은 곳에서 더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더 좋은 서포트를 받기를 말이다.

진심으로 너의 성공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행복하게 지내길,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끕, 아……. 끅.”

여전히 희찬의 성공을 바라고, 희찬의 안녕을 기원하는 도준이었지만, 마음만일 뿐이라 끝끝내 걸림돌이 되어 희찬의 발목을 잡는 자신의 존재가 더없이 한스러웠다.

어두운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온다고 하던데 내 새벽은 영영 오지 않을 모양이다.

그러니, 어둠을 머금은 나는 이만 떠나겠다.

몇 시간을 내리 운 도준의 몸이 결국 축 늘어졌다. 그렇게 쓰러진 도준은 미동도 없었다. 기다란 속눈썹에 맺힌 눈물이 툭, 떨어져 턱 끝에 달렸다.

희찬아, 나는 어둡고 조용한 곳에 혼자 있어도 괜찮아. 근데 너는 그러지 마. 너는 울지 말고, 웃으며 지내. 나를 잊고 한발, 한발 힘차게 나아가길 간절히 바라.

……그게 내 꿈이야.

희찬에게는 전하지도 못하는 고귀한 꿈을 품은 도준의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져 척박한 바닥을 적셨다.

<4권에 계속>

눈부신 항해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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