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항해 4권
08. 표류
날이 밝기 무섭게 도준이 마음을 가다듬고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백화점이었다. 도준의 목적은 다른 것이 아니다. 희찬이 좋아하는, 희찬에게 잘 어울릴 신발을 사는 것, 그것 하나만이 목적이었다.
어렵사리 걸음을 옮기던 도준이 우뚝 멈췄다. 화려한 조명 아래, 휘황찬란한 간판을 매단 명품매장의 고급스러움이 도준을 압도했다.
조심스레 매장에 들어섰다. 가지런한 유니폼을 갖춰 입은 직원들이 헐레벌떡 달려 나와 도준을 반겼다. 도준의 얼굴을 보고 환하게 피었던 직원들의 인상이 추레한 도준의 행색에 굳었다.
도준은 아랫입술을 잘근 씹어 물었지만 금방 벗어날 매장이었으니, 자신이 느끼는 감정 하나하나에 동요할 틈은 없었다.
도준이 저벅저벅 걸음을 놀려 진열된 제품들을 훑었다. 직원 한 명이 졸졸 따라와 이것저것 설명을 하며 귀찮게 굴었지만, 도준의 눈이 향하는 곳은 단 하나, 신발이었다.
도준이 희찬이 갖고 싶다고 말했던 신발 앞에 멈췄다. 지난여름, 희찬이 말한 신발과 비슷한 디자인을 하고서 신상이라고 나온 것이 퍽 웃겼지만, 어쨌든 희찬이 원하는 것이었으니 도준은 어렴풋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거, 270mm 있나요?”
도준이 몸을 돌려 제 뒤에서 자신을 주시하는 직원을 바라봤다. 도준의 황홀한 낯에 직원이 저도 모르게 파한 웃음을 피웠다.
“네, 고객님. 현재 저희 매장에 재고 남아 있습니다.”
“정 사이즈인가요? 혹시 조금 작게 나왔다거나…….”
“발볼이 넓으신가요?”
“아뇨, 그냥 평범한 발이에요.”
“그럼 정 사이즈로 구매하시면 되세요.”
“그럼 270mm 하나 주세요.”
조용한 매장에 고요한 소란이 앉았다. 그냥 가볍게 둘러보고 갈 줄 알았던 고객이 신상을 구매한다는 것에 놀라 수군거리는 소리였다.
분명 무례한 직원들의 태도였으나, 도준은 그들의 행동에 일절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이 쏟아지는 시선들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백화점에 오기까지 얼마나 큰 결심을 했는지 모른다. 무수히 많은 사람 속에는 낯선 남자들이 수두룩하게 섞여 있었고, 그들의 목소리나 몸짓만 봐도 정신이 아득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주먹을 말아쥐고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겨우겨우 숨을 가다듬은 도준은 매장 직원이 권하는 다른 것은 전부 무시하고, 고이 모아 둔 목돈을 꺼내어 카운터 위에 올려 뒀다.
“전액 현금 결제하시는 건가요?”
“네.”
“잠시만요.”
직원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도준이 올려 둔 하얀 봉투를 쥐었다. 제법 묵직한 봉투 안에는 만 원짜리 지폐와 오만 원짜리 지폐가 어지럽게 섞여 있었다.
직원이 돈을 바쁘게 셌다. 10만 원 단위로 끊어 신발 가격에 맞추다 보니 도준이 지난 반년간 악착같이 모은 돈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렇게 도준이 희찬에게 줄 신발과 함께 매장에 나올 때 손에 남은 돈은 고작 13,800원이었다.
1,430,000.
평소엔 상상도 하지 못할 액수가 적힌 영수증을 보는 도준의 마음이 이상하게 저릿했다. 이 예쁜 신발을 신고 방방거릴 희찬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못내 서글펐다. 도준은 이를 악물고 쇼핑백을 쥔 주먹에 힘을 준 채로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돌아온 도준은 온 정성을 들여 집 안을 꼼꼼하게 청소했다. 갈가리 찢기는 듯한 고통이 전신을 지배해 움직일 때마다 저도 모르게 신음이 비집고 흘렀지만, 도준의 청소는 멈추지 않았다.
침대 위 이불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베개 커버도 잘 빨아 둔 것으로 갈아 둔 도준은 희찬이 언제 옷장을 열어도 금방 옷을 찾아 입을 수 있도록 옷장을 정리해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두꺼운 외투를 한쪽으로 몰고, 바지도 바지걸이에 가지런히 걸어 두었다.
옷이 많지는 않았으나, 여름옷을 가장 깊숙이 넣어 두고, 곧 다가올 봄옷을 앞쪽으로 빼냈다.
다 마른빨래도 정성스레 개켰다. 흰옷은 흰옷끼리, 속옷은 속옷끼리. 검은 옷은 또 검은 옷끼리 모아 옷장 속에 넣어 두고, 부피가 큰 옷들은 옷걸이를 이용해 행거에 걸었다.
“아, 아윽…….”
한창 바쁘게 움직이던 도준은 몸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찢겨 발린 살갗이 요란하게 발악하기 무섭게 상처가 다시 터져 묵직한 고통이 밀려왔다.
도준은 청소하던 손을 멈추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도준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축축하게 젖은 채였다.
도준은 청소를 시작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도무지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숨을 쉬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지만, 도준은 다시 아픈 몸을 이끌고 엉금엉금 기어 청소를 이었다. 힘든 일정을 소화하고 돌아온 희찬이 굳이 청소를 하지 않아도 곧장 잠들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고 싶은 ‘얄팍한 사랑’이었다.
“하아…….”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청소를 마친 도준이 겨우 허리를 펴고 작은 집을 하염없이 살폈다.
머리를 숙여야 들어올 수 있는 낮은 현관문, 희찬과 도준이 함께 서는 것조차 버거운 좁은 현관. 허리 높이도 오지 않는 작은 신발장을 차례로 훑던 도준의 시선이 멎은 곳은 희찬과의 사진이 담겨 있는 손바닥만 한 액자였다. 도준이 조심스레 액자 속 희찬을 쓰다듬었다.
[우리 여기에 침대 놓을까?]
희찬의 맑은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도준의 입가에 아릿한 미소가 피는 것도 금방이었다.
입구부터 초라한 이 집을 열심히도 꾸몄다. 방이라고는 아주 작은 방 하나가 다여서, 두 사람의 몇 벌 되지 않는 옷을 정리하면 방이 꽉 찰 지경이었다. 그래서 싱크대 옆 빈 벽에 침대를 두고 지냈다. 침대는 프레임을 살 돈이 없어 그저 매트리스만 하나 덜렁 놓여 있었다. 그런데도 매트리스를 들일 때는 참 행복했었다.
싱크대와 아주 가까이에 있는 4인용 식탁이 집에 들어온 것도 얼마 되지 않는 일이다. 고물상 강 씨 아저씨가 아니었다면, 아직도 바닥에 앉아 철제 좌식 테이블을 놓고 식사를 할 텐데 말이다.
“후으…….”
태식을 터뜨린 도준의 입 주변에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막상 집을 나서려니 이상할 만큼 차분해졌다. 문득문득 정신이 아득해지고, 마음이 저리고, 전신이 아팠지만, 그래도 생각만큼 마구 서럽지만은 않았다.
쉴 새 없이 눈물이 흐르고, 의식하지 못한 순간에 뜨거운 숨이 터졌지만, 그래도 아주 죽을 것처럼 힘들지도 않았다.
지난밤 희찬을 떠나는 것이 그에게 유일한 도움이라고 결론을 내린 도준의 마음이 그랬다.
희찬만이 오로지 제 세상이었으므로, 산소를 빼앗기고 울부짖지 않을까 예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감정이었다.
“하, 후…….”
도준이 식탁 앞에 앉았다. 도준의 손에는 작은 편지지가 들려 있었다. 펜을 쥔 도준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정제되지 않은 숨이 터져 나올 때마다 가슴이 다 헐떡거렸다.
펜을 쥔 도준은 좀처럼 첫 운을 떼지 못했다. 또다시 비죽비죽 눈물이 흘렀다. 도준은 붉은 산이 올라 쓰라린 눈가를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 다스렸다.
둘이서 오롯하게 행복으로 가꾼 공간을 희찬이 혼자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숨이 턱턱 막혔다.
희찬이 혼자 있는 거 무서워하는데, 괜찮으려나…….
그런 생각이나 들어 어이가 없었다.
문득 거칠게 휘몰아치는 태풍 속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거친 풍파를 해칠 작은 뗏목 하나 없어 부표를 겨우 부여잡고 둥둥 떠 있는 것 같았다.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었다.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은 대단한 오산이었다.
“흑, 끕…….”
도준은 가슴을 거머쥔 채로 한 자, 한 자, 소중한 글자를 꾹꾹 눌러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인을 박듯 글자를 아로새기기 시작하자, 종일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던 모든 일이 이제야 생생하게 와닿았다.
나는, 장희찬을 떠나기로 했다.
누군가 심장을 쥐고 물에 젖은 행주를 비틀어 짜듯 쥐어 트는 것 같았다. 손발이 저리고, 팔꿈치가 송곳에 찔리듯이 아팠다.
편지는 고작 한 줄도 채 쓰지 못했는데, 터져 쏟아지는 눈물은 금세 강을 이루었다.
어렵게 편지를 마친 도준이 종이를 네모난 모양으로 접어 신발 상자 안에 밀어 넣었다. 혹시 희찬이 보지 못할 것을 대비하여 신발 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얹어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후, 후으…….”
전신에 오한이 들었다. 도준은 거칠게 떨리는 사지를 주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도준은 꿋꿋하게 신을 신었다. 희찬이 사 준 패딩은 옷장에 가지런히 걸어 두고, 입어도 입은 것 같지 않았던 외투를 걸쳤다.
이제 이 집에는 다시 올 수 없을 것이다.
현관문을 열기 직전, 도준이 몸을 돌려 희찬과 사랑으로 쌓은 공간을 다시 둘러봤다. 도준은 작은 것 하나 챙기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이루는 모든 것은 희찬이었으니, 모든 것을 희찬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천천히 눈을 옮기던 도준의 시야에 전화기가 들어왔다. 저 어이없는 것을 품에 안고 방방거리던 희찬의 모습이 눈앞에 훤했다. 전화기를 보기 무섭게 희찬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한 번만 듣고 갈까…….”
그 정도 욕심은 괜찮지 않을까.
지난밤 그렇게 나가 버린 희찬은 촬영장으로 갔는지, 촬영장으로 갔다면 잘 도착했는지, 밤은 어디서 지냈는지, 밥은 먹었는지. 그런 것들이 갑자기 마구 궁금해졌다.
도준이 수화기를 손에 쥐고 떨리는 호흡을 거듭하며 조심스레 희찬의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하지만 야속한 하늘은 이번에도 도준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길게 이어지는 신호음 끝에는 냉담한 기계음이 들렸다.
피식, 웃음이 났다.
“……뭘 바랐어.”
그러게, 뭘 바랐을까.
욕심내지 말고 이만 사라지라는 것처럼 자신을 내모는 상황에 도준이 체념하며 아픈 몸을 일으켰다.
현관을 나서기 전, 도준은 언제 돌아올지 모를 희찬을 위해 온 집 안의 불을 환하게 켜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세세하고 작은 부분까지 모두 희찬을 배려한 후에야 도준이 집에서 벗어났다.
터덕터덕, 언덕을 내려가는 도준의 표정이 차분하다. 발바닥과 딱딱한 아스팔트가 닿을 때마다 몸이 찌릿찌릿 아팠지만, 도준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이도준은 희찬에게서 조금씩 멀어졌다.
“도준아, 어디가. 버스 탈 거냐? 야, 너 옷이 그게 뭐야. 감기 걸려.”
도준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흠칫 몸을 떨었다. 무거운 마음과 달리 가벼운 도준의 걸음을 붙잡은 것은 항상 친근하게 도준과 인사를 주고받던 버스 기사였다.
상대가 저에게 악의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보이는 이제는 조건반사와도 같은 행동이었다. 도준이 그저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도준의 그런 모습은 남자에게는 지독하게 낯선 모습이었으므로, 남자가 눈살을 찌푸리고 도준을 바라보았다.
“버스 안 타고?”
“아, 저 그냥 걸어가겠습니다.”
“지금 시간도 늦었는데, 그냥 타고…….”
“……괜찮습니다.”
말을 뚝 자르고 드는 도준 덕에 별안간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남성은 왜인지 몹시 위태로워 보이는 도준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을 뻗어 도준의 팔을 잡아 보려 했지만, 도준이 몸을 휙 틀어 남자의 손을 피했다. 유달리 초연해 보이는 모습이 굉장히 불안했다.
“안녕히 계세요.”
“어?”
남자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그저 예의 바른 인사라 할지 모르겠으나 그 말을 뱉은 주체가 도준이어서 실로 이상한 말이었다.
도준은 이제껏 숱하게 버스에 오르내리면서 단 한 번도 ‘안녕히 계세요.’ 하고 인사한 적이 없었다. 세상에 몇 없는 소중한 인연인데, 굳이 안녕을 고하고 싶지는 않다던 그의 해맑은 목소리가 남자의 귓전을 때렸다.
도준이 한 발 한 발 멀어져 갔다. 세상에 미련이라고는 조금도 남지 않은 사람처럼, 훅 불면 사라질 것 같은 모습을 하고서 말이다.
“도준아!”
남자가 다시 도준을 불렀다. 도준이 우뚝 멈춰 서서 남자를 돌아보았다.
“도준아, 우리 또 보자? 어?”
주황빛 가로등 불 아래 도준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마저 조마조마하기 짝이 없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감사합니다.”
가지런한 인사를 남긴 도준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남자는 괜히 뒤숭숭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다.
마을을 완전히 벗어난 도준이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가파른 언덕을 돌아보았다. 이렇게 낮은 곳에서 올려다보면 마치 동화 속 세상의 입구에 선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지금처럼 어두운 하늘과 휘영청 밝은 달, 가로등 불이 잘 어우러질 때가 그러했다.
도준의 속과 달리 세상은 여전히 화사하고, 화려하고, 다채로웠다.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것들을 지켜 내는 구조물 하나하나가 대단해 보였다.
“나도…… 지킬 수 있을 때 다시 올게.”
듣는 이 없는 곳에서 도준이 자신의 다짐을 읊조렸다. 눈가에는 그새 또 눈물이 차올랐다. 오들오들 떨리는 몸에 힘을 꾹 주고,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터지는 울음을 어떻게든 막아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잘 지내, 희찬아.”
도준이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나는 이만 거품이 되어 기꺼이 네 곁에서 사라지기로 했다. 사랑하는 너의 행복을 위해, 너의 안녕을 위해. 네 앞의 안개는 모두 내가 감내하겠다.
그러니까 희찬아, 날아, 더 멀리.
도준이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 같은 몸을 겨우 곧추세우고 한 발 한 발 다시 걸었다.
안녕, 장희찬.
세상에서 가장 아픈 다섯 글자를 마음에 품은 도준의 걸음은 처절하기 그지없다.
아무것도 쥐지 못한 인생이었지만, 희찬이가 있어 좋았다. 희찬이와 함께라면 다른 건 전부 잃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내 전부를 장희찬에게 줄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전부를 위해 내 전부를 잃었다.
희찬을 위해 희찬을 잃어야 하는 아이러니한 암담함이 끝내 도준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도준은 따스한 온정이 도사린 공간에서 점점 멀어져, 이내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이도준은 ‘장희찬’이라는 제 꿈을 위해 ‘장희찬’이라는 제 세상을 등졌다.
***
어젯밤 도준과 싸우고 곧장 매니저를 만나 촬영장으로 내려온 희찬은 도준이 언급한 그놈의 ‘강간’이라는 단어가 쉴 새 없이 맴돌아 한숨도 잘 수 없었다.
한 번도 도준과의 관계에 있어서 누구 하나 강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뜬금없는 강간이라니. 당장 도준을 찾아가 이것저것 캐묻고 따지고 싶었지만, 자신의 화가 도준을 상처 입힐까, 그러지도 못했다.
그렇게 희찬은 밤새 마음을 가다듬고, 진정시킨 후에야 촬영에 임할 수 있었다. 가끔 조용해질 때면 드문드문 ‘너도 날 강간하고 싶냐.’라는 도준의 말이 떠올랐지만, 그보다 ‘후회하지 않게 열심히 하라’던 도준의 말이 우선이었다.
촬영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희찬이 휴대폰을 켰다. 휴대폰을 촬영장에 들고 가면 종일 도준의 연락을 기다릴 것 같아 숙소에 두고 간 것은 퍽 현명한 판단이었다.
휴대폰을 켜기 무섭게 부재중 알림이 떴다. 불과 몇 분 전에 찍힌 ‘도준이’라는 가지런한 세 글자가 못내 반가웠다.
“미안하긴 했나 보지?”
싱글벙글 즐거운 기색이 여실히 드러나는 목소리를 낸 희찬은 도준에게 전화하기에 앞서, 샤워부터 했다. 샤워를 마치고, 도준의 목소리를 들으며 자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린 탓이었다.
그렇게 속전속결로 샤워까지 마친 희찬은 편안하게 몸을 누인 후에야 도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질 뿐, 도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자나…….”
희찬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고작 8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라 의아했다.
“어디 나갔나…….”
휴대폰을 내려놓은 희찬이 손바닥에 휴대폰을 탁탁 부딪쳤다. 머릿속에는 지난밤, 어리숙한 감정이 부딪쳐 만들어 낸 달갑지 않은 상황들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이도준이 울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 울었다. 가지 말라며, 바짓가랑이를 붙든 손아귀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걔 진짜 왜 그랬지.”
도무지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이도준의 행동이었다. 희찬이 새빨간 입술이 하얗게 질리도록 잘근 씹어 물었다.
“안아 줄걸.”
이윽고 후회가 흘러나왔다.
힘들어 보였는데, 안아 줄걸. 많이 우는 것 같았는데 좀 달래 줄걸. 화가 난다고 곧장 뛰쳐나올 게 아니라, 조금 기다렸다가 대화라도 해 볼걸 그랬다.
촘촘한 스케줄에 쉬지 못하고 일만 하느라 지쳐, 사랑하는 사람을 돌보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후회는 무겁기만 했다.
“미루지 말걸.”
처음 이상함을 느꼈을 때 바로 붙잡고 물어볼 걸 그랬다. 그의 힘든 상황을 마주할 여력이 없어, 괜찮겠지, 안일하게 넘겼던 것에 미안함이 몰려왔다. 부정적인 감정에 표현이 인색한 이도준이, 그렇게 통곡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을 텐데 말이다.
희찬이 입 안 가득 바람을 불어넣고 입을 삐죽거렸다. 도준의 부재중에 좋아졌던 기분이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뜨거운 숨이 터져 나왔다. 꽁꽁 뭉친 한숨이 공기 중에 섞이지 못하고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희찬이 다시 도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도 신호음이 길었다. 그리고 도준은 또 전화를 받지 않았다. 초조함이 밀려왔다.
희찬이 손톱을 똑똑 물어뜯었다. 벌써 며칠째 도준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 슈퍼에 전화해 도준의 안부를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전부 ‘못 봤는데?’가 다였다. 공사장 소장에게 메시지를 보내도 ‘안 온 지 오래되었다.’라는 답만 돌아왔다.
이도준은 또 집에 틀어박혀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전화는 한 통도 받지 않았다. 정말 큰 일을 겪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도사렸다.
생기를 잃은 이도준이라니, 그 척박한 상황에서도 항상 긍정적이었던 이도준이 힘을 잃은 모습이라니.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저 심란하기만 했다.
희찬이 가만히 도준을 헤아리는 사이 희찬의 방문이 열렸다. 고개를 빼꼼 내민 것은 매니저였다.
“희찬아, 오늘 올라갈까?”
“어, 뒷부분 이어서 촬영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주연 배우 부상 때문에 촬영이 좀 늦어질 거 같다고 하네.”
“아, 네!”
주연 배우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희찬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부리나케 짐을 꾸렸다. 꼼짝없이 주말까지 연락이 닿지 않는 도준을 걱정만 해야 할 줄 알았는데, 당장 올라가자는 매니저의 말은 그 어느 때보다 반가웠다.
차에 오른 희찬의 심장 박동은 더 빨라졌다. 오만가지 부정적인 상황이 다채롭게 머릿속에 펼쳐졌다. 하나하나 나열하는 것조차 버거운 망상들에 희찬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하도 씹어 헤진 입술에서 곧 피가 날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할 때쯤이면 해가 뜰 테다. 희찬은 부디 도준이 아무 일 없이, 그저 투정 부리는 모양으로 자신을 맞이해 주길 바랐다. 걱정을 끼친 것에 대한 화도 내지 않을 테니, 그저 집에 있어 주기만을 바랐다.
매니저는 희찬을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가파른 언덕을 힘겹게 오른 차에서 폴짝 뛰어내린 희찬은 매니저가 알리는 다음 스케줄은 듣지도 않고 냉큼 대문을 열고 사라졌다.
저벅저벅 걸음을 놀려 현관문 앞에 다다랐을 때는 새삼 가슴이 떨렸다. 이것저것 오만가지 불안한 생각을 한 탓일까, 자꾸만 엄습해 오는 불길함에 희찬의 입술이 메말라 갔다.
집에 없지는 않겠지.
항상 내 옆이 아니면 갈 곳이 없다고 말하던 이도준이었으니, 옆에 있으라는 말에 늘 ‘응.’ 하고 확신을 안겨 준 도준이었으니 그것만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후우…….”
그렇게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한 후에야 희찬이 문고리를 쥐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문고리가 손바닥에 쩍 달라붙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비로소 문을 벌컥 열었다. 집 안의 풍경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다른 것이라고는 조금 더 깨끗하게 청소된 정도랄까. 모든 식기와 물건들이 처음 집을 꾸몄을 때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상하게 냉기가 가득한 집 안에 불현듯 미시감이 들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인 집은 사람의 온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단 한 번도 사람이 산 적 없다는 것처럼 생활의 흔적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희찬은 쿵쿵 거칠게 뛰는 심장을 겨우 가다듬었다. 금세라도 달려와 해사한 낯을 보여야 할 이도준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희찬의 옅은 눈동자에 삽시간에 불안이 앉았다.
“어디 간 거야…….”
연락도 없이 갑자기 집으로 오게 되었으니, 도준은 일하러 갔을지도 모른다. 희찬은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조심스러운 걸음을 놀려 침대맡에 걸터앉았다.
침대마저 차가웠다. 시트는 물론, 이불이 가지런히 쫙 펴져 있는 데다가, 베개까지 바르게 놓인 침대가 어색하기 그지없다. 이 역시 한 번도 사람이 누운 적 없다는 듯했다.
낯선 곳을 둘러보듯 눈을 굴리던 희찬의 시야에 정말 낯선 것이 들어왔다. 식탁 위에 올려져 있는 쇼핑백은 값비싼 브랜드의 상표가 그려져 있었다.
희찬이 저벅저벅 걸음을 놀려 쇼핑백을 열었다.
“아니, 얘는 무슨 돈이 있다고 이런 걸 샀어.”
희찬이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 앙큼한 이도준. 미안하다고 말하면 될 것을 이렇게 선물까지 준비해 뒀다. 덕분에 불안했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희찬은 신발 박스를 꺼내어 열어 보는 손길을 재촉했다.
“우와.”
진짜 신발이 있었다.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말로는 ‘사고 싶다’ 했어도 정말 가질 것은 꿈에도 그리지 않았던 신발이 제 눈앞에 있었다.
들뜬 마음으로 신을 꺼내, 발을 밀어 넣던 희찬의 발에 무언가 걸렸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희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종이 포장재는 모두 뺐는데, 뭐가 남았을까.
희찬의 손가락에 집힌 것은 네모나게 접힌 쪽지였다. 의아함이 가득한 눈으로 천천히 쪽지를 열어 글을 읽던 희찬의 표정이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도준, 도준…….”
맑은 희찬의 두 눈에 금세 투명한 눈물이 차올랐다. 의식할 틈도 없이 뜨거운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희찬은 신발을 신던 것도 벗어 두고 맨발로 뛰쳐나가 온 동네를 뒤집었다.
“도준아!”
희찬은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발바닥이 긁혀 상처가 나는 것도 모르고, 이리저리 정신없이 헤집었다. 무수한 동네의 골목 어귀 하나 빼놓지 않고 샅샅이 찾았다. 하지만 도준은 없었다.
“이도준!”
희찬의 목소리가 온 동네를 뒤흔들었다. 울부짖는 희찬의 목소리에 어른들이 나와 희찬을 달랬지만, 희찬은 그들의 손에 잡혀 있을 새가 없었다.
이도준을 찾아야 한다.
그 생각만이 온 정신을 지배했다. 희찬은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뛰고, 또 뛰었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가쁜 숨을 가다듬는 시간조차 사치였다.
[가지 마. 가지 마, 희찬아. 나 혼자 두지 마, 같이…… 같이 있어 줘, 제발.]
귓가에 도준의 목소리가 메아리쳐 울렸다.
이도준을 붙잡고, 뭐가 그렇게 처절했냐고 물어야 한다. 왜 그렇게 울었고, 어쩌다 이런 선택까지 하게 되었냐고 꼭 물어야 한다. 내가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오로지 나만 바랐던 너를 그렇게 두고 가면 안 되는 거였다고, 사과도 해야 했다.
“도준아, 도준아!”
희찬은 정신없이 사방을 헤맸다. 갔던 곳을 또 가고, 혹시 그사이 돌아왔을까, 집에 갔다가 나오기를 반복했다. 흐르는 눈물이 차가운 바람에 딱딱하게 얼어, 볼이 빳빳하게 시렸다.
종일 꽁꽁 언 아스팔트를 차고 다녔더니 양발에 감각도 없어졌다. 피가 맺히다 못해 터져 흐르는 발바닥의 고통도 잊었다. 이윽고 모든 기력을 소진한 희찬이 집 앞에 털썩 주저앉아 전신을 바들바들 떨었다.
“끅, 없…… 아, 왜……. 왜……. 흐윽, 끕.”
도무지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하고자 하는 말은 혀끝에서 맴돌아 다시 입 안으로 삼켜 들어갔다.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되었냐고, 붙잡고 탓할 사람이 없어 그저 눈물만 뚝뚝 흘렸다.
“희찬아, 일단 들어가서 기다려 보자. 응? 도준이 일하러 갔을 수도 있고…….”
어른들은 혼자 일어서지도 못하는 희찬을 집 안으로 부축했다. 냉기가 서린 집에 보일러를 켜고, 희찬을 현관 앞에 앉혀 둔 어른들은 토닥토닥 그를 달래기 바빴다.
어른들이 빠져나간 후에는 희찬이 치솟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로 찬찬히 집 안을 살폈다.
이도준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돈도, 옷도, 심지어 사진 한 장까지도 말이다. 마치 희찬이 없으면 다른 것도 가질 이유가 없다는 것처럼, 그렇게 모든 흔적을 고스란히 남겨 두고 홀로 사라졌다.
“아, 아흑, 끄읍, 아……! 도준아, 흐윽, 끅.”
희찬이 바닥을 퍽퍽 내리쳤다. 꾹 말아쥔 주먹에 피가 맺힐 정도로 바닥을 때리는데도 손이 아픈 것도 몰랐다.
희찬은 그저 당연하기만 했던 사실을 이제야 하나하나 깨우쳤다.
도준의 흔적을 쫓을 수 없는 현실이 통탄했다. 도준을 찾으려면 누구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 이도준은 자주 가는 곳도, 자주 연락하는 사람도, 자주 만나는 친구도 없었다.
두 사람이 함께 쓰던 것은 모두 희찬의 명의였다. 집도, 휴대폰도, 하다못해 계좌 하나까지도 말이다. 제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처럼, 모든 것을 두고 사라진 이도준이 단 하나 쥔 것이 바로 장희찬, 자신이었다.
이도준은 마치 언제든지 홀연히 떠날 준비를 해 온 사람 같았다. 애초에 자신은 세상에 남아서는 안 된다는 것처럼, 세상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제 흔적을 말끔하게 지웠다. 세상 모든 만물이 제자리를 지키며 환하게 빛을 내는 와중에 사라진 것은 오로지 도준 하나뿐이었다.
그 뼈아픈 상황이 당연하다는 듯이 세상은 잘만 굴러갔다. 도준을 지우고도 어색함 하나 없는 세상이 사무치게 원망스러웠다.
“아…… 아흐윽…….”
희찬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꾹 말아 쥐었던 쪽지를 다시 펼쳤다. 어찌나 꾹꾹 눌러 썼는지, 울퉁불퉁한 종이 표면에서 도준의 힘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희찬의 맑은 눈물방울이 종이를 적시자 글자의 잉크가 번져 종이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희찬이 소매를 들어 편지에 남은 물기를 꾹꾹 눌러 닦았다.
안녕, 희찬아. 편지는 처음 쓰는 거 같네ㅋㅋ
촬영 잘하고 있지? 어제 싸우고 나가서 혹시 촬영 망치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돼. 그래도 잘할 거야. 너는 항상 잘해 왔으니까.
희찬아, 사랑하는 희찬아.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대. 아무리 밤이 길어도, 새벽은 꼭 온대. 너는 빛나는 사람이니까, 어떤 어둠이 와도 거뜬히 이겨 낼 수 있을 거야.
나는 네가 더 높은 곳에서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한테 네가 가진 빛을 보여 줬으면 좋겠어. 충분히 그럴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나는 밝은 세상에서 밝게 빛날 너를 매일 기대하며 살아.
근데 희찬아.
지금은 내가 네 옆에 있는 게 도움이 안 되는 거 같아. 그래서 잠시 떨어져 지내려 해.
나 없다고 우는 거 아니지?ㅋㅋㅋ
나는 빛을 비추는 사람이고, 너는 밝게 빛나는 사람이잖아. 내가 너를 비출 수 있을 때, 내가 네게 조금이라도 힘이 될 수 있을 때 꼭 다시 돌아올게.
알지? 내 세상은 너잖아. 나는 네가 빛을 내는 세상에서 빨리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 최선을 다할게.
조금만……. 기다려줘.
근데 희찬아, 혹시 기다리기 싫으면 그냥 잊어도 좋아. 혹시 울고 있다면 그냥 나 잊고 오래 울지 마. 내가 다 울게. 너는 웃고만 살아.
가진 것도 없는 나를 사랑해 줘서 고마웠어.
희찬아,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사랑해, 희찬아. 건강하게 지내.
- p.s
이 신발 갖고 싶다고 한 거 맞지? 좋은 곳으로 다녀. 따뜻한 곳에서 사랑만 받고 지내.
나도 내내 사랑할게.
가슴을 누가 비틀어 쥐는 것 같다. 헐떡이는 숨이 가쁘게 드나들며 희찬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희찬은 숨을 제대로 쉬기조차 어려운 통증에 아프게 말아쥔 주먹으로 가슴을 퍽퍽 내리쳤다. 통곡에 오열이 쌓였다. 희찬이 한탄 섞인 울부짖음으로 온 집 안을 메워도 이도준은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려 달라는 말은 왜 지워 놨어. 왜.
진심도 아닌 잊으라는 말은 왜 써 놨어. 왜. 이러면 누가 좋아한다고.
희찬은 한참이나 바들거리며 편지를 읽었다. 한 자, 한 자 소중하게 눈으로 새기고, 가슴에 아로새겼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읊을 수 있을 정도로 들여다본 후에야 희찬은 깨달았다.
이도준이 떠났다.
내가 제 꿈이라던, 내가 제 세상이라던 이도준은 끝까지 아픈 말로 자신을 상처 내며 끝끝내 내게서 떠나갔다.
가진 것 없어도 위풍당당한 면모가 빛이 나던,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며 성실하게 살았던, 웃는 것이 근사하고, 정의로운 성격을 지녔던 그가 위축된 것이 믿기지 않았다.
왜, 왜 이렇게 됐어. 왜…….
이제는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만 되풀이되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냐고, 누가 널 그렇게 궁지로 내몰았느냐고. 왜 네 빛을 잃고, 자신을 죽여 버렸냐고.
그리고 왜 나를 떠나느냐고.
“너 없이 나는 어떻게 살라고……. 나는, 나는 어쩌라고…….”
이제는 눈물도 흐르지 않는 희찬의 공허한 눈동자가 바닥에 처박혔다. 처음 도준의 거짓말을 알아챘을 때 그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됐다.
자꾸만 침대와 가까워지는 것을 봤을 때, 어떻게든 더 밖으로 끌어냈어야 했다. 병원에 간다고 했을 때, 냉장고 속 음식들이 그대로 남아 있을 때, 스트레스를 언급했을 때, 기어코 눈물을 보이며 가지 말라고 자신을 잡았을 때, 미루지 말았어야 했다.
언제나 곁에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 안일했다. 일단은 눈앞에 닥친 힘든 상황에 익숙해지기에 급급했다. 제일 소중한 것이 차갑게 시들어 가는 것도 모르고, 그의 배려를 당연하게만 생각했다.
이건 다 내 잘못이다.
조금의 기력도 남지 않은 희찬이 눈을 스르르 감았다. 아득해지는 시야 속에 희미하게 도준의 형상이 보이는 듯했다. 희찬이 힘없이 손을 들어 허공을 저었다. 제 손길에 사라지는 도준의 환상이 희찬의 가슴을 찌르고 들었다.
*
세상은 가혹하기 짝이 없다. 고아에게는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해야만 하는 병역의 의무도 면제권을 주면서, 먹고 살길에 대한 자비는 내어 주지 않았다.
집에서 나온 도준은 몸과 마음을 추스를 틈도 없이 당장 잘 곳을 찾아야 했다. 참담했다. 이렇게 힘들고, 아프고, 어려운 와중에도 먹고사는 것은 알아서 해결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기댈 곳 하나 없는 인생이 기구하기 짝이 없다. 힘들 때는 언제든지 찾아오라던 보육원 원장의 말이 떠올랐지만, 쉽사리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의기양양하게 ‘성공해서 돌아오겠다’며 호언장담을 했는데, 이런 초라한 꼴로는 걱정만 끼칠 것이 분명했다. 도준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터져 흘렀다. 도준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몇 푼 되지 않는 돈을 만지작거렸다. 수중에 쥔 돈은 고작 13,800원이 다였다. 이 돈으로는 어느 식당을 가든, 두 끼가 끝일 터였다.
“하아…….”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까마득한 현실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호기롭게 ‘돌아오겠다.’라는 쪽지를 남기고 나온 주제에, 당장 하루를 살아내는 것조차 버거운 현실이 막막하기만 했다.
터덜터덜 걷는 도준의 눈이 초점 없이 허공을 맴돌았다. 아픈 걸음을 겨우 놀려 디딜 때마다 죽고 싶다는 생각과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시야에 들어오는 물체는 어느 것 하나 뚜렷한 상을 맺지 않았다.
“……이대로 죽으면 안 되는데.”
스폰도 한 번 남았고, 내가 못 했다고 그거 희찬이 시키면 어떡하지……. 나 죽는 거 아무도 몰라서, 희찬이한테 연락도 안 갈 텐데……. 혼자 하염없이 기다리면 우리 희찬이 불쌍해서 어떡하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별안간 웃음이 다 나왔다.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장희찬이 기다린다는 보장은 어딨어, 자신감은…….”
기다리지 말라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잘도 하고서, 그저 희찬이 기다리길 바라는 마음을 품은 것이 어이없다. 그렇게 당하고도, 여전히 희찬을 향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꼴이 웃겨, 도준의 입가에 아릿한 미소가 피었다.
그저 희찬을 떠올렸을 뿐인데 목 근육이 빳빳하게 땅겼다. 울컥 치미는 감정은 금세 투명한 눈물로 형태를 드러내어 볼을 타고 흘렀다.
길거리에서 우는 건 멋없는 거라고, 장희찬이 그랬다.
도준이 소매 끝으로 눈물을 훔쳐 닦았다.
정처 없이 떠돌던 도준이 길거리 벤치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딱딱하고 차가운 벤치에 몸이 닿기 무섭게 삭신이 아우성을 쳐 댔다. 그런 아픔조차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도준은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한참이나 허공을 떠돌던 도준의 시야에 들어온 글자가 있었다.
<알바 구함>
도준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건물을 살폈다. 낯선 동네 한구석에 콕 틀어박힌 작은 건물은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의 번쩍거리는 네온사인으로 존재감을 드러낸 대중목욕탕이었다. 깜빡거리는 불빛을 가만히 쳐다보던 도준이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물불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느릿한 걸음을 옮긴 도준이 어깨에 체중을 싣고 불투명한 시트지가 발린 유리문을 밀었다. 후끈한 열기가 꽝꽝 언 도준의 몸을 휘감았다. 대중탕은 또 처음 와 보는 도준이었기에 도준의 눈이 바쁘게 전경을 훑었다. 천천히 안쪽으로 향하자, 유리로 가로막힌 벽 아래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7세 이상 혼탕 금지>
생소한 문구가 적힌 초록색 표지판을 응시하던 도준이 사방을 둘러봤다. 여기가 카운터가 맞는 것 같은데, 지키는 사람이 없다. 멋쩍음에 턱 아귀를 긁적이던 도준의 눈이 크게 뜨였다. 갑자기 아래에서 사람이 뿅, 솟아오른 탓이었다.
“5천 원이요.”
“아, 그게 아니라. 저, 알바 구하신다고…….”
도준의 묵직한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조심스러운 도준의 말에 상대가 눈을 땡그랗게 뜨고 도준을 쳐다봤다. 그도 그럴 것이 도준 또래의 학생은 보통 카페나, PC방처럼 흥미를 끌 수 있는 곳에서 일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은가. 게다가 궂은 일이라고는 손도 대지 않고 곱게 자랐을 것처럼 생긴 청년이 선뜻 이 궂은일을 나서서 하겠다는 것이 의아했다.
“학생, 몇 살이에요?”
“스물두 살입니다.”
“아이고, 어리네……. 어린 학생은 이런 데서 일 잘 안 하려고 하는데. 우리는 새벽 타임 아르바이트 구해요, 시간 괜찮아요? 목욕탕 청소하는 일인데.”
“네, 괜찮습니다.”
사장으로 추정되는 여성은 도준에게 이것저것 설명을 늘어놓았다. 대부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일머리가 좋은 도준은 그다지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자고로 일이라 하면, 뭐든 일단 해 봐야 아는 법이었으니 말이다.
“그럼 이렇게 해서 같이 일하는 걸로 할까요?”
“네, 감사합니다.”
“딱 남탕 직원 구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잘생긴 학생이 다 들어오고? 우리 목욕탕 이제 대박 날 건가 봐!”
도준의 울대가 크게 울렁거렸다.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라고는 했지만, 역시 낯선 남성들이 우글거리는 곳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득한 절망을 안겼다.
여성은 상당히 붙임성이 좋았다. 도준의 등을 다정하게 쓰다듬고,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는 여성의 모습에 도준이 간신히 숨을 가다듬고 여성을 쳐다봤다. 안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여성이 무언가 떠오른 듯, 아차차, 손가락을 허공에 휘저으며 뒤로 돌아 도준을 바라봤다.
“매일 새벽 4시에 목욕탕 청소하는 거예요. 새벽 시간이라 손님은 거의 없어요. 3시 반까지 와서…….”
이윽고 덧붙는 설명에 도준이 안도의 숨을 쉬었다.
이제 지낼 곳만 구하면 될 것 같은데…….
가지런한 눈동자를 굴리던 도준의 눈에 계산을 위해 마련된 작은 방이 보였다.
“저, 사장님.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응, 말해요.”
“혹시…… 숙식도 가능한가요? 아르바이트비는 안 주셔도 괜찮습니다.”
도준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여성이 도준의 행색을 훑었다. 잘생긴 얼굴은 둘째치고,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모양이 알 수 없는 불안을 안겼다. 잠시 고민하는 듯했던 여성이 덥석 도준의 손을 쥐었다.
“아이고, 내가 반가워서 다른 건 설명도 못 했네. 이리 들어와 볼래요?”
“아, 네.”
도준을 데리고 목욕탕을 돌아다니던 여성이 도준을 끌어, 작은 방으로 향했다. 얇은 신을 벗고, 여성이 향하는 곳으로 들어선 도준이 낯선 공간을 찬찬히 살폈다.
계산을 위해 준비된 공간 뒤에는 작은 문이 하나 더 있었다. 문을 열자 딱 사람 한 명 누울 수 있는 크기의 작은 방이 도준의 눈앞에 펼쳐졌다.
여성을 따라 도준이 발을 옮겼다. 방 한편에는 이불장이 있었고, 반대쪽에는 옷을 몇 벌 걸 수 있는 행거가 있었다. 여성이 이불장에서 얇은 이부자리를 꺼내 펼쳐 놓았다. 겨울에 덮기에는 한없이 얇은 이불이었지만, 목욕탕 특유의 온기로 뜨끈한 방 안이었기에 문제 될 것도 없었다.
한참을 분주하게 움직이던 여성이 도준의 옆에 섰다.
“좀 작긴 한데, 그래도 먹고 자는 데에는 문제없을 거예요.”
도준이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하도 씹어 문 탓에 혀만 가져다 대도 시린 피 맛이 나는 것 같았다. 자신을 안쓰럽게 생각하는 어른들의 온정은 이미 익숙하다. 희찬과 함께 지내던 동네의 어른들처럼 다짜고짜 정을 건네는 사장의 손길 역시 그와 같았다. 도준이 저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감사합니다.”
“원래 숙식 제공 안 하는 건데…….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죠? 아르바이트비도 꼭 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저 넓은 탕을 혼자 청소하는데, 돈 안 주고 부려 먹을 수는 없지.”
여성은 초면임에도 아슬아슬한 면모를 보이는 도준을 꼭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건 다른 의미가 아니라, 그저 어른이 가진 쓸데없는 오지랖, 또는 도의적인 책임감 같은 것이었다.
돈은 필요 없으니 자는 것만이라도 도와달라는 청년에게 오래간 사용하지 않아 먼지가 쌓인 작은 방이라도 내어 주고, 돈을 쥐여 주고 싶었다.
그래서 사장은 지쳐 보이는 청년에게 돈도 주고, 밥도 주고, 정도 주기로 했다.
“대신, 매일 아침은 우리랑 같이 먹어요. 알겠죠?”
생긋 웃으며 저를 바라보는 여성에게 도준이 의아한 눈을 보였다. 돈도 주고, 잘 곳도 주는데 왜 대신에 붙는 조건이 ‘같이 밥 먹기’인지 알 수 없었다.
도준은 그저 고개를 주억거리며 여성의 말을 되새겼다.
“이름이 뭐예요?”
“이도준입니다.”
“그래요, 도준 학생. 앞으로 잘 부탁해요? 일단 지금은 낮이니까, 좀 쉬고. 이따가 새벽에 일하는 거 제대로 알려 줄게요.”
“네, 감사합니다.”
친절하게도 여성은 도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 창창한 나이에 왜 집도 없이 떠도느냐, 왜 학교도 다니지 않고 새벽 아르바이트를 찾느냐, 집이 없는데 짐은 또 왜 없느냐, 하는 것들 말이다. 도준은 그게 그저 고마웠다.
도준은 쉬라며 나가는 여성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뜨끈한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이내 무릎을 바짝 끌어안아, 쓰린 몸을 부둥켜안고 깊은숨을 터뜨렸다.
도준의 숨에는 앞으로의 날에 막막함과 갑갑함이 서렸다. 가야 할 길을 알고 있으나 어떻게 가야 하는지 방법을 알 수 없다. 아니, 어쩌면 길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희찬이 없는 미래는 그려 본 적도 없는 도준이었기에, 우왕좌왕 헤매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도준이 단단한 팔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머리가 멍멍하게 울리다 이내 얼얼해졌다.
“일단 다 끝나고 생각할까…….”
도준은 한 번 남은 스폰을 떠올리며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일도 그 뒤로 미루기로 했다. 한껏 웅크렸던 도준의 몸이 일순 축 늘어졌다. 다정하게 휘감기는 따뜻한 온도에 꽁꽁 얼었던 몸이 사르르 녹은 탓이었다.
몸에 도사린 긴장이 풀리고, 단단하게 움츠렸던 마음에 얕은 안정이 도사리니, 노곤노곤 잠이 몰려왔다. 도준은 사장이 깔아 주고 간 이부자리에 몸을 누이고 눈꺼풀을 느릿하게 끔뻑거렸다.
불현듯 시야에 희찬의 형상이 피어났다. 도준은 반갑기만 한 그 허상에 대고 손을 휘휘 저었다. 도준의 손길을 따라 형상이 흩어졌다가 뭉치기를 반복했다. 불투명한 형태로 공기 속에 녹아든 것처럼 보이는 모습에 도준이 한쪽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희찬아, 잘 자.”
이내 눈이 감겼다. 눈꺼풀이 가린 검은 시야에 오롯하게 환한 빛을 내는 점이 보였다. 닿을 수 없는 아득한 빛이었지만, 빛이 안기는 안정감은 커다랗기만 했다.
영리한 도준은 뭐든 배우면 제 것으로 만드는 데에 탁월한 소질이 있었다. 목욕탕 청소는 분명 처음 하는 일이었음에도, 금방 손에 익혀 제 방법으로 일을 하기 시작한 도준은 오늘도 동이 트기 직전에 일을 마치고 허리를 펴 뚜두둑, 뼈 소리를 내었다.
락커룸 정리까지 마칠 무렵에는 하나, 둘씩 낯선 남성들이 모습을 보였다. 훤칠하게 잘생긴 청년을 향한 남자들의 그저 사람 좋은 인사들이 이어졌지만, 도준은 단 하나도 응하지 않고 시선을 바닥에 박은 채로 걸음을 옮겨 목욕탕을 벗어났다.
목욕탕 뒤에는 작은 가정집이 하나 있다. 맛있는 반찬 냄새가 물씬 풍기는 집에 들어선 도준은 분주하게 아침을 준비하는 사장을 도와 능숙하게 상을 차려 냈다. 이윽고 방에서 사장의 딸인 선영이 나타났다.
“오빠, 안녕.”
“응, 일어났어?”
도준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는 선영에게 도준이 말간 미소를 보이며 함께 손을 흔들었다. 식탁에 둘러앉은 세 사람의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연신 이어졌다. 덩치와 달리 제대로 먹지 않는 도준의 밥 위에 사장이 쉴 새 없이 반찬을 올려 두었다. 도준은 민망한 듯 괜찮다는 의사를 보였지만, 사장의 손길은 단호하기만 했다.
그러던 중 도준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조심스레 사장을 쳐다봤다.
“왜?”
“저, 사장님. 죄송한데, 당분간 일을 못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어딜 좀 다녀와야 해서요.”
도준의 말에 사장과 선영의 눈이 동시에 도준에게 닿았다. 날카로운 인상으로 제법 뺀질거릴 것처럼 생긴 것과 달리, 놀랍도록 순하고, 성실한 도준은 아침을 먹은 후에는 다시 공사장으로 향하고는 했다. 그렇게 늦은 밤 돌아와 잠시 눈을 붙이고, 다시 일어나 일을 하는 도준의 우직하고 성실한 모양에 혀를 내두르기도 얼마나 내둘렀는지 모른다.
근데, 그런 도준이 일을 할 수 없다니.
놀라움과 이유에 대한 호기심이 어린 눈빛에 도준이 그저 입술을 말아 물고 사장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꾹 말아쥔 도준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를 숨기려 식탁 아래로 손을 감춘 도준이 괜히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댔다. 지난 스폰에서 엉덩이에 상처가 심하게 난 탓에 조금 쉬어야겠다고 말했던 전광진이 정한 마지막 스폰이 오늘이었다.
“며칠이나?”
“잘…… 모르겠습니다.”
도준이 마른 입술을 적셨다. 사장에게 전한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정말로 모른다. 며칠이나 그 남자들의 손에 잡혀 있어야 하는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버텨야 하는지 도준은 알 수 없다.
도준의 고개가 푹 수그러졌다. 사장은 처음 도준을 마주했을 때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도준의 낯에 불편한 기시감을 느꼈다.
“돌아오긴 할 거지?”
“네, 옵니다.”
“그럼 방은 계속 비워 둘 테니까, 조심히 다녀와요.”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게 왜 그렇게 위안이 되는 건지.
도준은 울컥 치미는 감정을 애써 가다듬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윽고 식사를 마친 선영이 학교에 늦었다며 헐레벌떡 집에서 벗어났다. 도준은 식사가 끝난 식탁 위를 정리하고, 설거지를 하며 계속 호흡을 가다듬었다.
사장은 TV 앞에 앉아서도 시선을 계속 분주하게 움직이는 도준의 등에다 꽂았다. 남들은 청춘이라 부르는 화창한 시기에, 그저 일만 하며 지내는 도준이 안쓰러웠다. 처연해 보이는 낯이 환하게 갤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어둠이 가득했으므로, 어떻게든 그를 위로하고 싶었다.
설거지를 마친 도준은 말없이 인사를 남기고, 금방 현관 앞에 섰다. 약속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조급한 것과 별개로, 자꾸만 숨이 땅으로 꺼지는 듯한 아득함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도준아!”
현관을 벗어나려던 도준이 자신을 부르는 사장의 목소리에 몸을 돌려 사장을 바라보았다. 사장의 손가락이 TV 화면을 가리켰다. 도준은 신을 벗고 다시 집 안으로 몸을 들여 사장 옆에서 화면을 쳐다봤다. TV 화면에서는 예쁘게 웃는 희찬의 모습이 방영되고 있었다.
어느새 희찬이 출연한 드라마도 방영이 시작되었다. 큰 인기를 끄는 드라마에서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희찬은 데뷔와 동시에 많은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그건 도준의 예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희찬을 마주한 도준의 얼굴 만면에 아릿한 웃음이 피었다. 심장이 저리고 손끝이 아려, 마른침을 꼴깍 삼킨 도준은 희찬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 배우 장희찬』
맑은 햇살을 받으며 환하게 웃는 희찬의 모습 아래 적힌 자막이 도준의 가슴을 간질였다. 최근의 이슈에 대해 다루는 시사 프로그램에서, 희찬의 인기와 연기를 언급하며,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되는 유망주라고 설명했다.
잘된 일이었다.
“좋아하는 배우, 맞지?”
“네, 맞아요.”
“참 의외란 말이야.”
“뭐가요?”
그냥 이도준은 모든 것이 의외였다. 큰 키에 TV에서도 볼 수 없는 빼어난 외모를 하고서, 하는 짓은 제법 소탈했다. 까탈스럽게 생긴 것과 달리 가끔가다 보이는, 아마도 원래의 성격으로 유추되는 모습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호쾌했다. 연예인이라고는 조금도 관심이 없을 것처럼 생겨 놓고서, 신인 배우 장희찬을 좋아하는 그 면이 참 순수했다.
“너도 연예인 해도 될 텐데. 그쪽으로는 꿈이 없어?”
“하하……. 네, 없습니다.”
“……그래, 됐어. 연예인 하지 마. 나만 보고 좋지 뭐.”
도준의 낯을 면밀하게 훑어 살피던 사장이 이내 흔쾌히 웃으며 도준의 단단한 어깨를 부여잡았다. 마치 아들을 대하는 듯한 행동에 도준이 그저 싱그럽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녀오겠습니다.”
“꼭 다시 와, 응? 꼭 와.”
“네, 꼭 올게요.”
TV 화면에서도 희찬이 사라졌다. 시간을 떠올린 도준은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실어 인사를 건넨 후 애써 씩씩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그래도 화면으로나마 희찬을 보아서일까, 괜히 힘이 났다. 누군들 제가 겪는 일련의 일들을 안 후에는 한숨부터 푹 내쉴 안쓰러운 상황이었건만, 희한하게도 웃음이 났다.
다행이지, 희찬아.
나도 오늘이 지나면, 이번만 잘 견뎌 내면, 네게 가기 위한 길을 궁리할 것이다.
실낱같은 희망을 쥐기조차 어려운 상황에도 도준에게는 그저 희찬이 길이고, 희망이었다. 도준은 제 가슴에 장희찬 세 글자를 아로새기며 차분하게 어둠 속으로 향했다.
*
도준은 자세히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얄팍한 숨을 겨우 쉬었다. 흉터 하나 없이 말끔했던 얼굴에 얼룩덜룩 상처가 새겨진 채였다.
머리채를 쥐어 틀고 얼굴을 터뜨릴 것처럼 뺨을 후려갈기는 손길이 있었다. 코피가 흐르고, 입술이 터져도 거친 손길은 멈추지 않았었다. 입 안에 감도는 비릿한 피 맛은 낯설지도 않다. 도준은 피가 범벅된 침을 겨우 삼켰다.
여러 명이 동시에 달려들어 자신들의 의지대로 우악스럽게 몸을 포박해 거친 행위를 할 때면 참고 싶어도 울음이 터져 흘렀다.
도준이 성대가 갈라질 것처럼 울부짖어도 그들의 행위는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살려 달라는 말 대신 죽여 달라 빌었다.
그냥 죽고 싶었다. 이대로는 더 살고 싶지 않았다.
회복되었던 몸에 다시 흉한 상처가 자리하고, 하얗기만 했던 살결에 울긋불긋 보기 싫은 자국이 빼곡하게 차는 동안 도준의 눈동자는 점점 초점을 잃고 텅 비어 갔다.
살아야 할 이유를 잃고, 존재의 의미를 놓은 도준은 생기까지 모두 빼앗겼다. 정말 자신의 몸이야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 아무런 반항도,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꼭 한 떨기의 죽은 꽃 같았다. 꿈과 희망으로 활달하던 20대 청년이 거대한 현실의 벽 앞에 가진 것을 모두 포기하고, 순응하는 모습은 처참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다.
도준은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숨을 억지로 내쉬었다. 수십 개의 굵직한 목소리가 어지럽게 얽혀들어 도준의 정신을 파괴했다. 소름 끼치도록 웃는 소리 아래에 입에 담기도 싫은 더러운 말들을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도준이 턱관절이 불룩 솟을 정도로 이를 악물고,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상처를 낼 정도로 세게 주먹을 말아 쥐어도 소리는 가시지 않았다.
두 눈을 질끈 감은 도준의 시야에 수십 개의 눈알이 둥둥 떠올랐다. 기이하게 찢어진 눈들이 하나같이 지독한 음흉함을 품고 있었다.
“흐읍, 흑.”
도준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숨을 들이켜기 무섭게 폐부 곳곳이 가시에 찔리는 것처럼 아팠다. 몸을 웅크릴 힘도 없어, 축 늘어진 몸으로 그저 기력 없는 발버둥을 쳤다.
그런 도준의 발목을 그러쥐는 우악스러운 힘이 있었다. 도준의 떨리는 동공이 남자를 바라봤다. 숱한 남자들과 수십 번의 관계를 가지는 동안 가지런히 정장을 입은 채로 그 모든 것을 지켜보던 전광진이 버클을 푸는 중이었다. 도준의 검은 눈동자에 얕은 파동이 일었다.
“다들 네 맛이 좋다던데.”
“흐으…… 아…….”
“나도 좀 볼까 봐, 그 맛.”
“우욱, 웁!”
흉물스러운 페니스를 꺼낸 남자가 강포하게 도준의 입 안으로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도준의 인상이 가차 없이 일그러졌다. 이미 다 찢어진 입 안에서 다시 피 맛이 났다. 뒤통수를 쥐고 아무렇게나 처박는 남자의 행동에 토악질이 치밀었다.
물컹했던 페니스가 점점 굵어졌다. 빳빳한 페니스로 입 안을 헤집는 남자를 저지하고 싶었으나, 도준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남자의 손에 머리채가 잡힌 채로 힘없이 흔들릴 뿐이었다.
이윽고 비릿한 정액이 도준의 입 안에 퍼졌다. 목구멍을 향해 줄기차게 뻗어 나가는 진득한 액체에 도준이 인상을 한껏 찌푸렸다. 역겨운 비린내가 코를 찌르기 무섭게 돌이킬 수 없는 암흑 속에 내던져졌다.
요란한 신음을 터뜨리며 사정을 마친 남자가 페니스로 도준의 멍든 뺨을 툭툭 쳤다. 도준의 눈가에 메마른 눈물이 차올랐다. 처연한 모양으로 흐르는 눈물 탓일까, 이런 몰골에도 도준의 미모는 빛을 냈다.
남자의 이마에 핏줄이 불룩 솟았다. 바르르 떨리는 전신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남자가 도준의 입가에 묻은 정액을 아무렇게나 닦아 내고, 도준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도준의 두 팔이 등 뒤에 붙들려 묶였다. 온몸을 구속하는 행위는 이제 진저리나도록 익숙해진 것이었다. 전광진이 도준의 허리를 툭툭 건드렸다.
그 손짓이 무얼 의미하는지 이제는 잘 아는 도준은 굳이 그가 목소리 내어 명하기 전에 억지로 무릎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켜 엎드렸다. 어깨와 얼굴을 베개에 처박고, 엉덩이를 치켜든 후에는 다리를 벌렸다.
뒤이어 닥쳐올 고통도 이제는 안다. 몇 번을 겪어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사지가 찢어지고 속이 꿰뚫리는 고통이 도사릴 것이다.
이내 전광진의 두툼한 손이 도준의 멍든 둔부를 그러쥐었다. 우악스럽게 잡아 억지로 벌리자, 그 사이에 자리한 작은 구멍이 뻐끔거렸다. 이내 딱딱하고 기분 나쁜 것이 도준의 엉덩이 사이를 함부로 침범했다.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는 페니스에 둥글게 말린 도준의 허리가 목석처럼 단단하게 굳었다.
“우읍, 읍……!”
도준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미 다 벌어져 벌름거리는 구멍 사이로 입이 떡 벌어지고 목에 핏대가 솟는 고통이 도사렸다. 재갈에 틀어막힌 신음이 목 안에서 웅웅거렸다.
“읍, 으읍!”
전신을 지배하는 끔찍한 고통에 도준의 허리가 처참하게 비틀렸다. 버둥거려 봐야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도준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쳐댔다.
“흡, 하윽, 아……!”
무슨 변덕인지 재갈이 풀렸다. 뒤통수에 있는 버클을 풀기 무섭게 툭 떨어진 재갈은 도준의 피와 타액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재갈이 떠나니 도준의 입에서는 아무렇게나 신음이 터져 흘렀다. 쾌락보다는 고통에 가까운 신음이었다.
“후윽, 아……. 끅, 아후윽…….”
커다란 몽둥이가 속을 짓이겨 눌렀다. 해진 속살이 너덜거리는 것 같았다. 사무치는 아픔에 눈물만 났다. 울고 싶지 않았으나, 의도와 다르게 흐르는 눈물은 도준의 처절함을 담아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이불을 적셨다.
얼마나 처박혀 있었을까.
무력하게 흔들리는 몸뚱이를 추스를 생각도 하지 못한 도준이 가지런한 숨을 쉬었다. 아픔도, 슬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소리가 아득해졌다. 정신이 희미해지고, 차츰차츰 숨소리가 옅어졌다.
이대로 죽으면 이제 딱인데.
스폰도 다 했다. 더이상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우려를 느끼지 않아도 된다. 그럼 이만 죽어도 괜찮지 않을까.
도준이 아득해지는 정신을 놓으려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 네, 대표님.
“희찬아, 밥 먹었니?”
수화기 너머 건너오는 소리는 희찬이었다.
페니스를 머금은 채로 바들거리는 도준의 몸을 쓰다듬던 전광진이 희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잔인한 전광진의 행동에 도준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와 동시에 다시 몸이 흔들렸다. 허리를 붙잡고 이전보다 훨씬 세게 박아넣는 전광진 덕에 도준은 온몸에 힘을 주고 신음을 참았다.
철썩철썩 민감한 부위의 살들이 부딪쳐 내는 소리가 온 공간을 울렸다. 수화기 너머 희찬은 아무 말이 없었다. 도준의 눈에서 서러운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장희찬.”
― 네, 먹었습니다.
며칠 전, TV를 볼 때와는 다른 목소리였다. 마냥 밝게 갠 얼굴로 화사한 곳에서 지내는 줄 알았더니, 희찬의 목소리는 울적하기 그지없었다.
도준은 베개에 얼굴을 처박은 채로 베갯잇을 지르 물었다. 그 어떠한 신음도 희찬에게 닿으면 안 되는 일이기에, 치아에 잔뜩 힘이 실렸다.
“다 먹은 거 또 토해 놨으면 혼난다, 너.”
― ……안 했어요.
희찬이는 잘 지내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간 먹은 것을 토하며 지냈다는 것을 알려 주는 듯한 대표의 말에 도준은 다른 의미로 속이 문드러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스케줄은, 갈 수 있겠니?”
― 네.
“아직도 이도준 때문에 힘들어?”
― …….
“헉, 읍……!”
도준을 언급하는 전광진이 아주 강하게 허리 짓을 했다. 일순 튕겨 오른 도준의 몸이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파르르 떨렸다. 허리를 둥글게 말고, 전신을 떨어 대는 도준의 모습에 전광진이 비소를 흘렸다.
도준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키려 무던히도 노력했다. 자신이 사라진 후에도 희찬을 괴롭히는 사람이 결국엔 자신이라는 사실이 사무치게 괴로웠다.
가쁜 숨이 터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또 참았다. 등 뒤에 가지런히 모인 도준의 손이 힘겹게 바들거렸다. 핏줄이 불룩 솟은 손목에는 울긋불긋한 상흔이 끔찍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전광진이 도준을 언급하기 무섭게, 수화기 너머 희찬이 엉엉 우는 소리를 내었다. 도준이가 어디 있는지 찾지 못하겠다며, 혹시 죽었으면 어떡하냐는 말을 하는 희찬의 우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도준의 가슴이 다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희찬의 울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제발 이도준을 찾아 달라며, 시키는 건 뭐든 하겠다는 희찬의 목소리에 전광진의 눈이 도준에게 닿았다.
전광진과 함께 희찬의 목소리를 듣던 도준이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치켜뜬 도준의 두 눈에 빨간 핏발이 섰다. 투명한 눈물이 가득 찬 도준의 눈가에 오랜만에 독기가 서렸다. 도준이 이를 악문 채로 전광진을 향해 거세게 도리질을 쳤다.
마냥 아픈 상황인 것이 분명한데, 이상하게 도준의 페니스가 꼿꼿하게 고개를 들었다. 수일 이어진 행위에 단 한 번도 발기하지 않았던 도준의 페니스는 장희찬에 반응했다. 남자의 손이 도준의 페니스를 툭 건드렸다. 도준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리를 잔뜩 오므렸다.
“찾아볼 테니까, 오늘 스케줄 잘하고 예쁘게 굴어, 예쁘게.”
― 네…….
한참이나 이어진 통화가 드디어 끝났다. 전광진은 전화기를 바닥에 툭 던져 두고, 다시 도준의 허리를 그악스럽게 쥐었다. 움켜쥔 손마디에서 강한 힘이 느껴졌다. 이내 퍽, 퍽 이전보다 훨씬 거친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남자의 허릿심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도준은 그저 눈을 질끈 감았다.
“끅, 아! 우윽……. 끅, 읍……!”
“훅, 후으…….”
“아흑, 흡……. 끅. 아! 후끅……. 끕, 읍, 으읍…….”
어마어마한 통증이 온몸을 헤집었다. 다 망가진 몸에서 금방이라도 핏덩어리가 꿀렁꿀렁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전광진의 행위는 조금도 친절하지 않았다. 그저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도준의 몸을 착취할 뿐이었다. 꼿꼿하게 섰던 도준의 페니스가 금방 죽었다. 축 늘어진 모양새가 생기를 잃은 제 주인과 같았다.
위에서 아래로 콱콱 찍어 박는 전광진의 행동에 점점 강한 힘이 실렸다. 듣기 싫은 신음에 도준이 도리질을 쳤다. 그가 무어라 웅얼웅얼, 명령하는 것 같았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도준은 눈도 뜨지 못한 채로 전광진이 쏟아 내는 정액이 제 속에 범벅되는 것을 느꼈다.
짝―!
이내 눈이 번쩍 뜨이고, 귀가 먹먹해졌다. 어느새 도준의 앞에 선 전광진이 도준의 머리채를 쥐고, 사정없이 뺨을 후려갈겼다. 도준이 목에 힘을 주고 신음을 참았다. 눈가에 맺힌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두 눈을 부릅떴지만, 차오른 눈물은 도준의 속도 모르고 주륵, 흘러내렸다.
그렇게 도준은 다시 아득한 나락에 빠졌다. 수차례 뺨을 맞고, 그러다 무자비한 발에 걷어차이기도 하고, 결국 울컥울컥 솟구치는 피를 토해 낸 후에는 다시 다리 사이에 무시무시한 고통이 서렸다.
기력을 다 쏟은 도준이 풀썩 쓰러졌다. 전광진의 페니스도 빠져나갔다. 벌어진 틈 사이로 꿀렁꿀렁 흘러나오는 정액이 색스러웠다.
마른 눈물을 줄줄 흘리는 도준은 아무 말이 없었다. 전신을 바르르 떨어 대며 힘겨워하는 도준에게서 몸을 뗀 전광진이 얇은 이불을 아무렇게나 던져 도준의 나신을 가렸다.
“안 헤어질 거라더니, 헤어졌더라.”
“…….”
“희찬이는 그 집에서 나왔어. 애가 도무지 제정신을 못 차리길래, 숙소로 옮겨서 계속 매니저랑 지냈어. 지금은 혼자 밥 정도는 먹고.”
남자는 도준에게 집요하게 희찬의 이야기를 전했다. 힘없이 웅크려 누운 채로 얘기를 듣는 도준은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도준에게서 장희찬을 앗았더니, 이도준이 사라졌다. 이도준을 잃은 장희찬도 시체가 되기 직전인데 말이다.
“너는, 앞으로 어떡할 거니?”
“…….”
“스폰을 더 해 보는 건 어때?”
“희……찬이…….”
오랜만에 도준의 입술이 열리고 목소리가 나왔다. 볼품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내는 말은 아슬아슬하기 그지없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수분이 다 빼앗기는 듯한 느낌에 전광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희찬이?”
“희……찬이가…… 또 이렇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연락, 주세요.”
힘겨운 도준의 말에 전광진의 인상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눈썹을 꿈틀거리던 전광진이 이윽고 흥미를 갖고 도준을 바라봤다.
“너 그러다 배우 못 해.”
여전히 꺼내기조차 어려운, 이미 저버린 꿈을 재차 언급하는 전광진의 목소리에 날카로운 가시가 돋은 것 같았다.
“……안 할 겁니다.”
가슴이 저몄다.
이내 도준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툭, 떨어졌다.
도준은 전광진이 문을 열어 줘야만 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전광진이 도준의 팔을 붙잡고 끌어 내리자 매가리 없는 도준의 발목이 아무렇게나 비틀렸다.
전광진은 낯선 목욕탕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준이 희찬을 떠나 찾은 곳이 목욕탕이라는 게 의아했다.
“여기서 지내니?”
“……네.”
전광진의 말에 도준의 눈동자도 정면을 응시했다. 새하얀 간판에 빨간색으로 적힌 ‘목욕탕’ 세 글자가 괜히 버거웠다. 전광진의 굳건한 손에 팔이 붙들린 채로 가까스로 선 도준이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건넸다.
“희찬이…….”
“…….”
“……희찬이, 예뻐해 주세요.”
이제, 정말 다 끝이 났다.
도준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무릎을 짚은 채로 숙인 허리에 힘을 줄 수 없었다. 후두두 떨어지는 도준의 눈물이 새까만 아스팔트를 적셨다.
그런 도준을 지켜보던 전광진이 상의 안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윽고 도준의 눈앞에 손을 내밀었다. 한껏 고개를 숙인 채로 정수리를 보였던 도준이 고개를 들고 전광진을 쳐다봤다.
그가 도준에게 건넨 것은 돈이었다.
돈.
“받아.”
“…….”
“싫으면 버리든지.”
도준의 힘없는 손에 돈이 쥐어졌다. 억지로 눌러 쥐게 만든 전광진의 행동에 도준이 아랫입술을 세게 짓이겨 물었다.
돈은 많지도, 적지도 않은 열 장, 10만 원이었다.
자잘한 돈이 모여 쉽게 흩어지는 모습이 꼭 제 처지 같았다. 고급스러운 수표도, 5만 원 권도 아닌 흔하디흔한 초록색 지폐가 꼭 다 해져 버린 구질구질한 제 모습만 같았다. 그리고 그 보잘것없는 10만 원에 희찬을 팔아넘기고, 자신을 덤으로 넘긴 것 같아 가슴이 찢어졌다.
결국 서러운 울음이 터졌다. 도준은 무너지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더럽고 치욕적이었다. 울분이 치밀어 받고 싶지 않았으나, 지금 도준에게는 단돈 만 원이 아쉬웠다. 그 사실이 서럽다 못해 비통했다.
이깟 돈, 이놈의 돈.
저 남자에게서는 쉽게 나오는 만 원짜리 몇 장이 없어 희찬과는 맛있는 것을 제대로 사 먹지도 못했다. 갖고 싶다는 것도 마음껏 사 주지 못했다. 그게 그렇게 미안하고, 아팠다.
괜히 내가 붙들어서. 그 옆에 나만 없었어도.
불쑥불쑥 고개를 드는 자괴감이 도준의 온 정신을 헤집었다. 전신에서 열꽃이 피는 것 같았다. 뜨거운 열이 뇌를 익히는 듯한 느낌이 몰려왔지만, 도준은 그저 울고, 또 울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저 멀리서 타닥타닥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도준아!”
익숙한 목소리에 도준이 몸을 흠칫 떨었다. 잽싸게 달려온 사람은 도준의 옆에 서 있던 전광진의 몸을 세게 밀어냈다. 그 힘에 주춤, 뒷걸음질을 쳤던 전광진이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지금 우리 애한테 뭐 하는 거예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적개심을 있는 대로 드러내는 사람은 목욕탕 사장이었다. 도준의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올리고 전광진을 향해 화를 내는 목소리가 어찌나 푸근하게 들리는지, 또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
“애?”
“저, 도준이 엄마입니다. 뭐예요?”
“하하……. 얘 부모 없는 새낀데.”
전광진이 사장을 비웃었다. 자신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양 구는 전광진의 목소리에 도준은 공기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 뭐요! 지금은 제가 데리고 있으니까, 제 아들이에요. 어디, 남의 아들을.”
“……사장님.”
이대로 전광진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혹시나 희찬에게 피해가 생길까, 우려를 머금은 도준이 힘없는 손으로 사장의 손을 움켜쥐었다.
“아니, 얼굴이 왜 이래?”
“…….”
“이게 뭐야, 얼굴이!”
힘겹게 일어선 도준의 얼굴을 사장이 그악스럽게 쥐었다. 도준의 인상이 조각조각 찌그러졌다. 꾹 눌러 쥐는 탓에 멍들고 터진 자리가 아프게 욱신거렸다.
도준은 그 와중에도 일단 전광진을 먼저 돌려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장을 제 등 뒤에 숨기고, 전광진을 마주한 도준은 뼈대가 다 아프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 쉬었다.
사뭇 단단해 보이는 도준의 모습에 전광진이 도준의 어깨를 툭툭, 다독였다.
“잘 지내라, 웬만하면 다시는 안 보는 게 제일 좋겠지?”
“제가 부탁드린 거, 잊으시면 안 됩니다.”
“뭐, 말하지 말라고 했던 거? 아니면 예뻐해 달라고 했던 거?”
“둘 다…….”
도준의 간절함에도 전광진은 그저 피식 웃었다. 가볍게 떨어지는 숨이 도준을 짓눌렀다. 대표는 끝내 아무런 대답도 남기지 않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빚쟁이야?”
빚. 빚이라면 빚이지.
도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장은 도준의 얼굴을 거머쥔 채로 이리저리 돌려보며 살폈다.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심한 상처가 가득한 잘생긴 얼굴이 마음 아팠다.
“밥은, 먹고 지냈니?”
다정한 사장의 질문에 도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들어가서 밥 먹자. 오늘은 일하지 말고, 그냥 푹 쉬어.”
사장이 손아귀 가득 힘을 주고 도준의 손을 꾹 쥐어 잡았다. 도준은 손바닥에 전해지는 따뜻한 체온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웃을 상황이 아닌데도 비집고 나오는 웃음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은 실로 커다란 안정감을 안겼다. 도준은 사장의 손을 맞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사장과 함께 목욕탕으로 들어섰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따뜻한 온도가 도준을 감싸 안았다. 그에 온몸에 도사렸던 공포가 사라졌다.
쉽게 떨쳐 낼 수 없을 지독한 기억들이겠지만, 도준은 실낱처럼 가느다란 희망 한 줌을 붙들고 일어섰다.
이제는 희찬이에게 가기 위해 걸어야 한다.
의지를 다잡은 도준의 발에 힘이 실렸다. 도준은 한 발, 한 발 걸음을 신중히 놀려 천천히 빛으로 나아갔다.
*
앙상한 가지에 새순이 트기 시작했다. 갈 빛의 막대기에 파릇파릇한 초록 점이 하나, 둘 눈을 뜨기 시작하는 지금, 유독 춥고 시리던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중이었다.
계절이 바뀌는 동안 도준은 몇 번의 고비를 넘겼다. 제대로 잘 수 없는 것은 차치하고, 낯선 남성의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그곳이 어디든 아득한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일쑤였다.
도무지 가시지 않는 환청과 환영에 몇 번이고 죽으려 했었다. 그때마다 도준의 몸에는 험한 상처가 생겼다. 그러다 정말로 숨이 꺼질 것처럼 멎어 들기도 했었다. 그런 도준의 호흡을 부여잡는 것은 이제는 거리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희찬의 사진, 희찬의 목소리, 희찬의 영상이었다.
인심 좋은 사장이 도준에게 내어 준 방에는 어느덧 각양각색의 희찬이 가득했다. 희찬이 표지로 나온 잡지, 희찬의 인터뷰가 실린 기사, 희찬이 모델로 활동하는 먹거리 같은 것들 말이다. 그것들은 모두 도준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하나, 하나 사 모은 것들이었다.
오늘도 어둠 속에서 허덕이다, 겨우 눈을 뜬 도준은 곧장 눈을 돌려 방 안 어딘가에 있는 희찬을 바라봤다. 희미한 불빛에 어두운 방이었지만, 그곳에서도 희찬은 밝은 빛을 내는 중이었다.
“오빠! TV에 장희찬 나와!”
문이 벌컥 열리고 쾌활한 선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희찬을 볼 때면 퀭한 도준의 눈에도 생기가 서리곤 했으니, 희찬이 TV에 나올 때마다 사장이나 선영이 도준을 찾는 것도 이제는 익숙한 일이다.
도준은 군말 없이 일어나 선영을 따랐다. 선영과 함께 집에 들어서니, 아늑한 공간이 도준을 반겼다.
“오늘은 웬일로 일을 안 나갔네?”
“응, 오늘은 쉬려고.”
분주한 선영을 도와 도준이 같이 상을 차렸다. 요즘 희찬은 부쩍 활발한 활동을 이어 가는 중이었다. TV만 틀었다 하면 얼굴이 보이는 희찬은 예능이나, 유명 가수의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하는 것은 물론, 각종 CF에도 얼굴을 내비쳤다.
그를 볼 때마다 혹시 쉬지 못하고 일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도사리기도 했다. 하지만 희찬을 자주 볼 수 있다는 것은 역시 좋은 일이라, 도준의 입가에 둥그런 미소가 피었다.
도준이 선영과 함께 준비한 아침상은 제법 풍성했다. 방금 막 지은 하얀 쌀밥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났다. 빨간 양념이 덧칠된 여러 반찬을 보면 침이 꼴깍, 넘어가는 것이 정상이겠지만 도준은 별 감흥이 없었다.
지난겨울, 집 나간 입맛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여전히 아무런 맛을 느끼지 못하는 도준이 상한 음식을 먹고 탈이 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당연히 먹는 양도 현저히 줄었다. 제대로 먹지 않는 도준을 걱정하기 시작한 사장은 도준을 억지로 앉혀 두고 밥을 먹이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사장이 보이지 않는다.
“사장님은?”
“할머니집 갔어.”
간단한 선영의 대답에 도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엄마가 오빠 이거 다 먹는지 지켜보래.”
“다 먹을게. 너도 많이 먹어, 선영아.”
도준이 싱긋, 웃었다. 사장을 대신해 잔소리를 늘어놓는 선영이 마냥 귀엽기만 했다. 잘 익은 김치를 선영의 밥 위에 올려 준 도준의 눈이 다시 TV 화면에 꽂혔다. 희찬이 출연한 예능이 재방송되는 중이었다. 화면 속 희찬은 활달한 성격을 있는 그대로 보이며 다른 출연진들과 즐겁게 어울렸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희찬의 물기 서린 목소리가 순간 귓전을 울렸다. 아랫입술을 잘근 씹어 문 도준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피었다.
그래도 잘 웃어서 다행이다.
“오빠, 그럼 오늘 여기 계속 있을 거야?”
“왜?”
도준의 눈이 데굴데굴 굴러 다시 선영에게 닿았다. 별안간 선영의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분명 평소 선영에게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기에 도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나 친구들한테 우리 집에 진짜 잘생긴 오빠 있다고 자랑했거든.”
“그래?”
“응, 친구들이 오빠 보러 오고 싶대. 오빠 여기 있을 거면 내 친구들 오라고 해도 돼? 엄마는 오빠 괴롭히지 말라고 못 데리고 오게 한단 말이야.”
“아…… 잘생긴 오빠가 나야?”
오랜만에 도준이 큰 웃음을 터뜨렸다. 저를 두고 하는 말인 줄은 상상도 하지 않았던 터였다. 선영이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자, 도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롯한 온정을 베푸는 선영과 사장인데, 얼굴 한 번 비치는 것쯤이야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진짜? 그럼 나 오늘 애들 데리고 온다?”
“응. 근데 오후에는 나갔다가 올 거라서, 저녁이어도 괜찮아?”
“응! 엄마 밤에 온대.”
“그래, 그럼 저녁 시간 맞춰 올게.”
이내 식사를 마친 도준이 빈 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준의 늠름한 자태를 좇던 선영의 시선에 문득 의문이 서렸다.
“근데 오빠 어디 가려고?”
“집.”
“집? 오빠 집 있어?”
선영의 맹랑한 질문에 도준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도준은 오랜만에 보육원에 가 볼 생각이다. 온정이 넘치는 사장과 지내다 보니, 문득 원장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래도 평생을 보고 자란 그 얼굴을 보고 오면 안정이 찾아오지 않을까, 무섭긴 했어도 사랑으로 길러 준 원장을 보고 오면 조금이라도 편하게 잘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으로 돌아온 도준은 서랍에 모아 둔 돈뭉치를 꺼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쉬지 않고 일한 대가가 어느새 두툼한 지폐로 쌓였다. 가지런히 모아 둔 돈 뭉치와 분리된 한편에는 꾸깃하게 접힌 열 장의 지폐가 있었다. 그건 마지막 스폰을 마친 도준에게 전 대표가 억지로 쥐여 준 돈이었다.
“후으…….”
돈을 마주하기 무섭게 정신이 아득해졌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 도준은 얼른 서랍을 닫아 10만 원을 제 시야 밖으로 밀어냈다.
“이래서 어느 세월에 희찬이한테 가지…….”
도준이 제 손에 쥔 지폐를 팔락였다.
가당치도 않은 꿈이겠지만, 도준은 희찬에게 가기 전에 번듯하지는 않더라도, 둘이서 지내기에 손색없는 집 하나 정도는 사고 싶었다. 하지만 서울 집값이라는 게 그렇게 하루 벌어 하루 모은다고 살 수 있는 가격이 아니었다. 벌어 모으는 것보다 오르는 것이 더 빠른 집값에 자연히 한숨이 나왔다.
도준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이 돈으로 할 수 있는 게 몇 되지 않는다는 현실이 암담하기만 했다.
그래도 오늘은 이 돈으로 보육원 아이들을 위해 장난감을 좀 사 볼 생각이다. 돈이야, 다시 모으면 되는 것이니 천진한 아이들에게 선물하는 것에 돈을 아끼고 싶지 않았다. 저 역시 새 축구공이 갖고 싶었고, 새 로봇으로 놀고 싶었고, 블록을 쌓으며 성을 짓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으니 말이다.
“가자, 가자.”
마음을 다잡은 도준이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선영과 약속한 저녁까지 돌아오려면 부지런히 움직여도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았다.
양손을 무겁게 한 도준이 보육원 앞에 도착했다. 꺄르르, 웃는 아이들의 청명한 웃음소리가 온 하늘을 뒤흔들었다. 여전히 낡은 축구공 하나를 갖고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니는 작은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콕 들어왔다.
천천히 입구에 들어서려던 도준의 눈에 원장의 모습이 드리웠다. 저 멀리 벤치에 앉아, 아이들이 뛰노는 것을 지켜보는 어른의 모습은 그 옛날 여느 때와 같이 따스했다.
그런 원장을 마주하기 무섭게 도준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기꺼운 마음으로 보육원을 찾은 것과 달리 온몸이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아…….”
도준이 문득 자신의 처지를 떠올렸다. 희찬에게서 벗어나, 집도 없이 일하는 곳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밤낮으로 일만 하느라 한껏 상해 버린 몰골을 깨우쳤다.
“……미쳤나 봐.”
어쩌자고 여길 와.
도준의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남자들의 목소리만 들어도 몸을 바들바들 떨어 대는 주제에. 하루가 멀다 하고 악몽에 시달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주제에. 시시때때로 환청과 환각에 시달리며 괴로워하는 주제에. 뭐 대단한 성공을 했다고 금의환향하듯 선물 보따리를 사서 왔는지 모르겠다.
변하지 않은 건물을 마주하기 무섭게 해사한 희찬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 보육원에 들어오던 희찬의 모습, 조금씩 마음을 열며 환하게 웃기 시작하던 모습, 초등학교 입학식, 졸업식, 팔이 짧은 교복을 물려받아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던 모습, 등등.
희찬과 함께 지낸 숱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기어코 도준을 울렸다. 살아온 세월에 희찬이 없었던 시간보다, 희찬과 함께한 시간이 더 많았다. 그렇게 모든 숨을 함께한 희찬은 이제 제 곁에 없다. 항상 깨닫고 사는 바였는데, 보육원을 마주하니 그 사실이 유달리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다.
도준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아이들을 위해 사 온 선물을 보육원 입구에 내던지듯 버려두고,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보육원에서 벗어났다.
도준이 허겁지겁 벗어나는 사이 한 남성이 보육원 앞으로 나왔다. 분명 도준의 모습을 본 것 같았는데,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가 선 자리에 무거운 장난감 더미가 잔뜩 쌓여 있었다.
“편하게 오라니까, 이런 걸 다 사 오고……. 얼굴이나 보여 주지.”
남자가 못내 아쉬운 소리를 냈다. 같이 나간 희찬은 간간이 TV에 얼굴을 비치며 소식이 들리는데, 그보다 더 오래 본 도준은 도무지 소식이 없으니 애가 탔다.
그저 두 아이 모두 잘 지내고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퍼즐처럼 꼭 맞물려 지내던 아이들이었으니, 지금도 이 각박한 세상에서 서로의 힘이 되어 행복하게 지내기를 바랐다. 언제와도 괜찮으니, 건강한 모습을 보여 주기를, 그것 하나만을 바랐다.
보육원에서 벗어난 도준은 그저 하염없이 걸었다. 선영과의 약속도 잊은 채로 걷다 보니 어느새 환한 빛이 다 가시고, 오롯한 암흑만이 남은 후였다.
괜히 갔다. 그래도 아침부터 희찬을 보고 개운하게 하루를 열었는데, 괜히 보육원을 가서, 그 좋았던 기분도 다 망쳤다.
귀에서는 지겹고 지겨운 남자들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도준은 손을 모아 쥐고, 까득까득 손톱을 뜯었다.
바늘구멍처럼 좁은 구멍 사이로 겨우겨우 숨을 쉬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큰 숨을 쉬어도 답답한 가슴에 도준이 저도 모르게 퍽퍽, 제 가슴을 내리쳤다.
당장이라도 주저앉아 울 것 같았다.
그런 도준의 눈앞에 또 빛이 드리웠다. 도준이 자신을 놓으려는 틈이 보이기 무섭게 길거리에 널린 희찬이 도준을 깨웠다.
“희찬이네.”
도준의 눈에 보이는 것은 번잡한 시내에서 홀로 빛이 나는 희찬의 판넬이었다. 그 언젠가, 희찬과 함께 갔던 카페에서, 자신이 이곳의 모델이 될 거라고 말하던 희찬의 모습이 떠올랐다.
참, 예뻤다.
아릿한 미소를 머금은 도준은 홀린 듯이 카페 안으로 향했다. 고운 선율이 울리는 카페에 들어선 도준은 메뉴판을 훑으며 장난감을 사고 남은 겨우 2만 원 남짓 되는 돈을 만지작거렸다.
그때 희찬이가 먹었던 것은…….
[나는 라벤더 오트 라떼.]
[여기 허니브레드 맛있대.]
“라벤더 오트 라떼 하나랑, 허니브레드 하나요.”
희찬이 주문했던 메뉴를 똑같이 주문한 도준이 아주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카페 내부에 있는 TV에서는 눈을 감은 채로 커피를 들이켰다가, 제 얼굴만 한 컵을 얼굴 옆에 가져다 대고 환하게 웃는 희찬의 모습이 쉴 새 없이 나오는 중이었다.
도준이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눈물이 또륵 흘렀다. 한 방울씩 볼을 타고 흐르기 시작한 눈물이 이내 양을 더해 쏟아져 내렸다.
희찬에게 가고자 했으나,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에게 닿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는 요즘이었으나, 그 방향조차 알 수 없어 허덕이기 바빴다.
희찬아, 나 어디로 가야 해.
묻고 싶어도 물을 수 없다.
도준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주변 사람이 흘깃거리며 쳐다보는 시선에도 의식하지 않았다.
도준의 앞에는 다 식은 음료와 디저트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맛도 느끼지 못하는 주제에, 희찬의 흔적을 쫓겠다고 시킨 메뉴가 퍽 어이없다.
간당간당하게 턱에 매달린 눈물이 뚝뚝 떨어져 커피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게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허덕이는 제 모습 같았다.
“저기…… 이도준 씨?”
어깨를 움츠리고 눈물을 흘리던 도준의 귀에 낯선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준이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거렸다.
푹 수그린 시선 끄트머리에 두툼한 남성의 손이 보였다. 도준이 찬찬히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봤다. 날카로운 인상의 잘생긴 남성은 어딘가 인자해 보였다.
“이도준, 맞죠?”
“……저를 어떻게 아세요.”
“아,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남자가 도준 앞에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
K액터스 대표 곽 수 한
도준의 새까만 눈이 일순 일렁거렸다.
남자는 지난가을, 임 감독이 ‘보여 주고 싶다’던 두 청년을 만나기 위해 촬영장에 갔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달리 빛이 나던 두 청년을 발견하고, 처음으로 신인을 향해 ‘키워 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어떠냐며, 호들갑을 떨어 대던 임 감독에게 당장에 계약 의사를 밝혔지만, 새 배우를 만나 계약할 생각은 없이, 가볍게 놀러 간 터라 준비된 계약서가 없었다. 남자가 아쉬운 낯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자, 임 감독은 아주 뿌듯한 목소리로 ‘다시 부를 테니 그때 꼭 와서 우리 애들 데려가.’라고 말을 했었다.
그 말만 철석같이 믿고 기다리던 어느 날, 탐내던 두 청년 중 한 청년이 JR 엔터테인먼트와 계약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아쉬움이 사무쳤지만, 추후에 계약이 만기되면 데려오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남은 한 청년이라도 잡아 보려 이 바닥을 이 잡듯 뒤졌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행방을 도무지 쫓을 수 없었다.
이도준.
이름 석 자로 그의 소식을 알아내기에는 서울 바닥에서 김 서방 찾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더 이상 촬영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건지, 어딜 가도 반짝이던 그 청년은 볼 수 없었다. 당연히 지치기도 했었다. 하지만 눈앞에 선한 그의 반짝거리던 모습이 자꾸만 의지를 일깨웠다.
그러던 중, 최근 임 감독으로부터 그의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말을 들었다. 꼭 붙어 지내던 희찬은 데뷔했는데, 그의 단짝인 이도준만 사라졌다는 말이 못내 마음에 걸려 불편했었다.
그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매일 고민했다.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차를 타고 이동하던 남자는 문득 돌아본 창 너머에서 도준을 발견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시간에 도준을 맞닥뜨린 남자는 부리나케 차에서 내려 도준이 앉아 있는 카페로 향했다. 도준 앞에 앉은 남자는 이번에는 도준을 놓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찬찬히 눈을 들어 남자를 보는 도준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된 채였다.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잘생긴 검은 눈이 눈물에 잠겨 서글픔을 머금었다.
그간 어떻게 지낸 건지, 그 잘난 얼굴이 다 상한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분명 촬영장에서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참 잘생긴 청년이라고 생각했다. 오죽하면 임 감독이 처음으로 얼굴로 살아남으려는 애들을 들이민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내 화사하게 웃는 모습에서 매력을 느꼈다.
꼭 붙어 있는 두 사람에게서는 의도하지 않아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들이는 스타성이 보였다. 이윽고 카메라 앞에 서서 아주 짧은 대사를 연기하는 모습은 철옹성 같았던 남자의 마음도 한 번에 녹여 버렸다.
그렇게 빛이 나던 사내였다.
그런데 그 찬란한 빛을 잃고, 드리운 어둠이 안쓰럽기 그지없다.
“자.”
남자가 친절하게 도준에게 냅킨을 건네었다.
떨리는 손으로 냅킨을 받아 든 도준의 새빨간 입술이 움찔거렸다. 생각을 읽을 수 없는 검은 눈동자가 잔 지진을 일으키더니 이내 툭 떨어져 탁자 선단을 기었다.
명함은 건넨 상대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도준에게 지독한 모멸감을 안겼다. 잠시 사라졌던 참담함이 그새 고개를 들고 치솟았다. 오랫동안 망설이던 도준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냈다.
“저, 스폰 안 합니다.”
도준의 여리지만 단단한 목소리에 남자가 고개를 갸웃 비틀었다. 일순 잘못 들었나, 도준의 말을 의심했다. 스폰이라니. 생각도 하지 못한 말이 돌아온 것이 퍽 황당했다.
누가 이 어린 청년에게 스폰을 권했을까. 데뷔를 빌미로 스폰을 권유받았던 걸까. 이 바닥의 갖가지 더러운 추태들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인상을 험상궂게 찌푸렸다.
“무슨 말입니까, 그게.”
“…….”
도준을 바라보는 눈이 날카롭다. 도준은 그 눈빛에 어떤 의미가 담겼건 간에 그저 벌거벗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저는 이도준 씨랑 계약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인데.”
예상치 못한 남자의 말에 도준이 휘둥그레 뜨였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마주한 남자의 강직한 눈동자에서는 그 어떠한 장난도 묻어나지 않았다.
“저를 왜…….”
자신감을 잃은 도준의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렸다. 전 대표의 사람들처럼, 그 역시 더러운 일을 바랄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에게 한심함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도준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아끼던 남자가 다시 몸을 당겨 앉았다. 테이블 위에 팔을 올리고, 도준에게 내다 꽂은 시선에는 인자함을 더했다.
“왜냐니. 탐이 납니다.”
“저를 어디서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연예인 할 생각이 없습니다.”
“좋아하잖아요, 연기하는 거.”
“안…… 좋아합니다.”
도준은 필사적으로 남자의 또렷한 시선을 피했다. 잊었던 욕심을 일깨우는 남자의 확신이 담긴 말에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이었다.
“다 봤습니다. 촬영장에서 눈이 반짝거리던데. 연기도 곧잘 한다고 칭찬 많이 들었습니다.”
“…….”
“소개만 듣고 이러는 것도 아니에요. 저, 이 업계에 어영부영 발 담그고 있는 거 아닙니다. 나는 내가 본 이도준 씨의 스타성과 재능을 믿어요.”
도준의 노력과 달리 남자는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도준의 짙은 눈이 크게 요동쳤다. 남자가 또박또박 전하는 말은 도망치려야 도망칠 수 없는 것의 연속이었다. 연예계에는 절대로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스타성’과 ‘재능’을 언급하며 간곡하게 청하는 남자의 말은 진심인 듯했다.
그렇다고 선뜻 ‘하겠다.’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예상할 수 없는 벽에 부딪혔을 때, 또다시 그 끔찍한 일을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도준의 입을 틀어막았다.
남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도준을 응시했다. 분명 연기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고, 성실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리고 그 모습을 보았는데 말이다. 지금 제 눈앞에 보이는 도준의 모습은 임 감독이 장황하게 늘어놓던 설명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은 것 같달까. 아무튼, 20대 초반의 파릇파릇한 청년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무력함이었다. 그 모습이 아슬아슬해 보였다. 밝은 에너지를 한껏 뿜어내던 생기는 어디로 가고, 당장에라도 삶을 포기할 사람처럼 보였다.
도대체 저 어린애가 무슨 일을 겪었길래 저렇게까지 기세가 꺾였을까.
남자는 괜히 쓴 침을 꼴깍 삼켰다.
“지금 몇 살이죠?”
“스물두 살입니다.”
“안 돼요.”
대뜸 단호한 목소리를 내는 남자의 말에 도준이 의아한 눈을 떴다.
“그 나이에 벌써 포기부터 배우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도준 씨가 그동안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래도 좋아하는 걸 쉽게 놓지는 마세요.”
남자의 단단한 말을 듣던 도준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이 하얗게 질리도록 세게 깨물었다. 울컥 치솟은 감정에 턱이 빳빳하게 당겼다. 그저 낯선 남자의 말을 들었을 뿐인데, 불현듯 아득한 어느 날, 임 감독이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상황이 힘들면 다 내려놓고 싶을 때가 있어. 그래도 좋아하는 것 하나는 붙들고 있어야지.]
하필 지금 그 말이 떠오를 건 뭐냐고.
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곱씹었건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자신이 연기를 좋아하는 게 다 보이는 모양이다.
도준의 표정이 차츰차츰 가라앉았다. 말간 얼굴에 어둠이 드리우는 것을 지켜보던 남자가 문득 울리는 휴대전화 진동에 “아.” 하고 깨닫는 소리를 내었다. 일정을 위해 이동하던 중이라는 것을 잠시 잊었다.
남자의 마음에 조급함이 앉았다. 이 위태로운 청년을 지금 놓치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떻게든 잡고 싶은데 지금은 계약서도, 그에 대해 아는 것도 없다. 남자가 조금 더 의자를 당겨 앉아 도준을 마주했다.
“지금은 계약서도 없고, 시간도 없는데 내일 다시 만나서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시간 괜찮을까요?”
도준의 양해를 구하는 남자의 눈동자에 그를 향한 신뢰는 없었다. 본디 도준 같은 성격이라면 약속을 지키지 않고 도망칠 것이라는 걸 잘 아는 바였다.
남자는 도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 있는 도준에게 제 휴대폰을 내밀었다. 명함에 있는 번호로 연락을 달라고 해도, 끝내 연락이 오지 않을 것도 잘 알기에 도준의 연락처를 받아두려는 심산이었다.
“전화번호 알려 줄래요?”
“저 휴대폰 없습니다.”
“그럼 집으로 갈게요. 집은 어딥니까?”
“집도…… 없습니다.”
묻는 것마다 없다는 도준의 답에 남자가 눈썹을 씰룩거렸다. 도준이 하는 말은 마냥 이 상황을 피하려 하는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다. 남자가 손가락 끝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도준의 낯을 샅샅이 훑었다.
“그럼 어디서 지내요.”
“…….”
“데려다줄게요, 지금 나가죠.”
“아니요, 제가 내일 나올게요. 몇 시까지 어디로 가면 되는지 알려 주세요.”
도준은 남자의 말을 가로막았다. 모르는 남자에게 자신이 지내는 곳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도준이 어렵사리 고개를 들어 남자를 마주하자, 남자의 눈썹이 심하게 일렁거리는 게 보였다. 도준의 고개가 다시 푹 수그러졌다.
“자꾸 이렇게 밀어내기만 하면 서운한데.”
남자는 진심으로 서운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도준은 까득까득, 손톱을 뜯을 뿐, 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남자가 부담스러웠다. 귀를 홀리는 제안이 마음을 흔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운데, 거기에다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몰아붙이는 남자의 말을 듣고 있으니 작은 거부감도 생겼다. 하지만 지친 도준은 그를 밀어낼 힘도 없었다. 결국 도준이 체념하듯 일어나 남자를 따라나섰다.
남자의 차는 전광진의 차보다 훨씬 고급스러웠다. 전광진은 대동하지 않았던 운전기사까지 있었으니, 큰 회사 대표는 확실히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게 도준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저 집요하게 계약을 권하는 덕에 가슴이 저몄고, 화창한 희찬의 앞길에 또 재를 뿌리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도사렸다. 무엇보다 제 옆에 앉은 남자가 저와 희찬을 갈라놓은 전광진과 달라 보이지도 않았다.
“도준이 왔니? 어…… 누구실까?”
목욕탕에 앞에 도착하기 무섭게 도준의 귓가에 낯익은 목소리가 닿았다. 외출 나갔던 사장이 돌아오는 것과 겹쳤는지, 부드러운 목소리에 도준이 옅은 미소를 띠었다.
남자를 바라보는 사장의 눈에 적개심이 가득했다. 이전의 일을 떠올린 건지, 저보다 훨씬 큰 도준을 자신의 뒤에 숨기고, 당장이라도 으르렁거릴 모양으로 매섭게 치켜뜬 사장의 눈에 도준이 손사래를 쳤다.
“아, 이분은…….”
“안녕하세요, K액터스 대표 곽수한이라고 합니다. 제가 도준이를 배우로 데뷔시키고 싶은데, 도준이가 제 말을 안 들어서요. 본의 아니게 여기까지 따라오게 됐습니다.”
가만히 서서 분위기를 읽던 남자가 성격 좋게 웃으며 사장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미심쩍은 눈으로 남자와 도준을 번갈아 쳐다보던 사장이 명함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K액터스. 연예계에 대해 잘 모르는 사장도 익히 들어 아는 대형 기획사였다.
“아아, 그러시구나.”
도준의 옆에 선 남자는 전에 봤던 빚쟁이와 달리 인상이 선해 보였다. 그를 증명이라도 하듯, 오늘은 도준의 얼굴에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기운이 없어 뵈기는 해도, 저번처럼 울고 있지도 않았다. 비로소 안심한 사장이 환하게 웃었다.
“도준이 돌봐 주시는 분이십니까?”
“네, 우리 집에서 지내요.”
“아, 그럼 뭐, 어머니시네요. 도준이가 계속 계약을 거절하는데, 혹시 설득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저, 도준이 톱 배우 만들 자신 있습니다.”
“아하하, 대표님 성격 좋으시네! 역시, 우리 도준이가 연예인 상이죠? 제가 얘기 잘해 볼게요.”
“네, 감사합니다. 이도준 씨, 우리는 내일 다시 봐요. 만나러 올게요.”
인사를 남긴 남자는 금방 두 사람의 앞에서 사라졌다. 자신의 말을 들을 의지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는 남자의 모습에 도준이 입술을 부르르 털며 한숨을 푹 쉬었다.
희찬에게 가려면 남자가 권한 길이 가장 빠르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지금은 빨리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도준은 희찬에게 말했던 대로, 희찬을 비출 수 있을 때 그에게 가고 싶었다.
당연히 이 몰골로는 갈 수 없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매시간 환청에 시달리다, 기어코 정신을 놓고야 마는 것을 희찬에게 보일 수는 없었다.
도준의 주먹이 다시 굳게 말렸다.
역시, 배우는 안 될 것 같다.
하지만 남자는 엄청난 끈기를 자랑했다. 다음 날 찾아오겠다던 남자는, 도준이 계약 의사를 보이지 않자, 매일매일 찾아오더니 이제는 아예 사장과 친구까지 먹고 아침부터 밤까지 도준을 구워삶으려 오만 노력을 해 대었다.
오늘도 공사장에서 고된 일을 마치고 돌아온 도준을 반기는 것은.
“왔어?”
이제는 아예 말을 놓고 도준을 대하는 남자였다.
그에 도준이 난감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왠지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이렇게 매일 찾아와 앉아 있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목욕탕도 장사하는 곳인데 매일 돈도 내지 않고 놀러 오는 남자는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민폐 같았다.
결국 도준이 한숨을 푹 쉬었다. 오늘은 기필코 저 남자를 떼어 내야겠다는 결심을 새겼다.
“대표님, 저랑 말씀 좀…….”
“이제 나랑 얘기해 주는 거야?”
사람이 이 정도 집요함은 있어야 사업을 하는 거구나.
도준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남자는 도준의 말에 화색을 보이며 곧장 일어섰다. 입구에서 머뭇거리는 도준의 팔을 쥐고, 같이 터벅터벅 걸어 나간 곳에는 남자의 고급스러운 세단이 서 있었다.
도준을 조수석에 앉힌 남자는 부드럽게 차를 몰아 초라한 동네를 벗어났다. 속도를 더해 금방 도심에 도착하더니, 이윽고 다다라 시동이 멈추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K액터스의 사옥이었다. 회사 로고가 눈을 홀릴 정도로 큼지막하게 박힌 화려한 건물이 도준의 기를 죽였다.
도준이 웅장하고 화사한 건물 내부를 훑으며 조심스레 남자의 뒤를 쫓았다. 집요하게 저를 쳐다보는 시선이나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달갑지 않았다. 괜히 움츠러드는 것 같았지만, 부러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다 낯선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면 도준은 저도 모르게 몸을 잔뜩 움츠리고 대표의 등 뒤로 숨었다. 그때마다 대표의 인상이 미묘하게 변하는 것은 당연히 보지 못했다.
대표가 도준을 데리고 도착한 곳은 대체로 모던한 분위기의 화사한 사무실이었다. ‘대표실’이라고 적힌 팻말이 크게 박혀 있는 것을 보아하니, 남자가 업무를 보는 공간인 듯했다. 괜히 짓눌리는 기분에 도준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남자는 친절하게 도준을 소파로 안내하고, 차를 건네기 전에 다짜고짜 계약서 뭉치부터 들이밀었다.
“한번 읽어 볼래?”
가벼운 종이 뭉치를 받아 든 도준이 입술을 순한 눈으로 글자를 읽었다. 계약서 곳곳에는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다는 것처럼 도준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흥미 반, 무심한 반. 딱 그런 마음으로 계약서를 들여다보던 도준의 눈이 한곳에 머물렀다. 계약기간이 명시된 곳에는 3년, 길지도, 짧지도 않은 기간이 적혀 있었다.
일순 도사렸던 욕심에 계약서를 즐겁게 훑어보던 마음이 금세 무거워졌다.
잠도 자지 못해 그저 하루가 끝없이 연장되는 중인데, 3년은 무슨…….
한숨을 깊이 내쉰 도준이 손에 쥐었던 계약서를 슥 밀어 다시 대표에게 건넸다. 대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도준을 바라보았지만, 도준은 대표의 고갯짓에 응하지 않았다.
“조건이 별로인가?”
“그게 아니고요, 대표님…….”
“응.”
“저는…… 내일이 없어요. 당연히 이 기간을 지킬 자신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저 말고, 다른…….”
“그럼 이건 어때.”
정중한 태도로 조심스럽게 거절하는 도준의 말을 대표가 무섭게 잘라 냈다. 대표는 몇 걸음 옮기지 않아 닿는 책장에서 비슷한 두께의 서류를 가져왔다.
이번에도 계약서였다. 도준이 얕은 숨을 내쉬었다. 안 된다고 말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건데,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남자 덕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니, 저…….”
“일단 그거까지 보고 얘기하자. 그건 좀 달라.”
대표의 말에 못 이겨 도준이 다시 계약서를 들여다봤다. 다를 것이 하나 없어 보이는 계약서였으나, 종이를 팔락, 넘기던 도준의 손이 순간적으로 멈추었다. 기간이 비워진 채였다.
도준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대표를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까지…….”
“도준아, 나는 장사치야. 잘 팔릴 상품의 독점권을 갖고 싶은 건 당연해.”
“…….”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을 두고 ‘장사치’라 소개하고, 도준을 향해 ‘상품’이라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그 내용과 달리 엄청나게 다정했다. 마음에도 없는 것을 마치 도준의 부담을 덜어 내기 위해 부러 가볍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남자의 말을 듣는 도준의 울대가 울렁거렸다. 고개를 떨군 도준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메운 것은 이래도 괜찮은가, 하는 망설임이었다.
날짜가 없는 계약서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당해 놓고 또 욕심이 생겨 오만 갈등이 일었다.
도준은 오래간 말이 없었다. 그런 도준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남자가 등받이에 편하게 몸을 기대고, 도준의 빼곡한 정수리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아무래도 기간이 문제일 것 같아, 나름대로 큰 고민을 하고 내린 엄청난 결정인데 말이다. 먹히지 않는 걸까, 걱정이 몰려오다가도 모로 가는 거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밑져야 본전인데 질러나 보자, 싶어 다시 몸을 곧추세웠다.
“네가 원하면 언제든지 계약 종료 가능하다는 말이야.”
회심의 일격이길 바라는데, 먹힌 걸까. 줄곧 바닥을 기던 도준의 시선이 남자와 마주했다. 왜인지 조금만 더 당기면 도준의 승낙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남자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당기면 안 된다. 과한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튕겨 나갈지도 모를 이도준이니, 살짝 밀어내기도 해야 한다. 오랜만에 계약 전에 밀당이 심한 아티스트를 만났다. 대표는 실력 좋은 포수가 된 기분으로 도준을 슬며시 제 손바닥 위에 올려 뒀다.
“당연히 내가 내키지 않아도 끝날 계약이야. 근데, 너나 내가 다른 말이 없으면 계약은 계속 유효해.”
“…….”
“너, 지금은 배우 하기 싫다고 했잖아. 일단은 마음도 좀 가다듬고, 연기도 전문적으로 배우고, 응? 운동도 하고 그러면서 생각해 보다가, 영 아니다, 싶으면 그때는 그만둬도 좋아. 안 잡을게.”
그래도 너무 밀어내면 안 되니, 적당히 이쪽의 의사를 드러내며 차분히 말을 전한 대표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드리웠다. 도준의 낯빛이 바뀌었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 일렁이는 눈동자에 어라, 갑자기 아련함이 앉았다.
그저 대표의 말을 들었을 뿐인데, 도준의 머릿속에는 같은 뉘앙스를 풍기던,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한 번만 나와서 해 보고, 영 아니다 싶으면 그때 놔. 그럼 나도 안 잡을게.]
도준의 머릿속에 떠오른 목소리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임 감독이었다. 임 감독과 친하다더니, 하는 말까지 똑같아 도준에게 큰 위로로 닿았다.
어른들로부터 얻을 것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이 어른들은 어떻게든 제 꿈을 지켜 주려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도준이 눈에 차오르는 눈물을 꾹 참아 내고, 큰 호흡을 거듭하며 자신을 다스렸다.
“우리랑 일하다가 다른 기획사에서 더 파격적인 제안으로 너를 데려가겠다고 하면, 충분히 저울질하고 그리로 가도 된다는 길도 열어 주고 있는 거고.”
남자의 말은 전부 진심이었다. 이도준은 분명 데뷔와 동시에 엄청난 이목을 끌 것이다. 당연히 성공도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직 발굴되지 않은 원석이니, 조금만 다듬어 주면 연기고, 뭐고 금방 톱이 될 것이 분명하다.
당연히 다른 회사에서도 엄청난 제안들이 쏟아질 것이다. 충분히 고민할 기회도 줘야 한다는 것이 남자의 생각이었다. 신인에게는 모든 것이 별천지일 세상이니 무엇이든 다 경험해 봐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놓아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 흑심은 잠시 숨겨 두고, 듣기 좋은 말들을 줄줄 늘어놓자, 도준이 다시 입술을 잘근 씹었다. 도대체 저에게 왜 이렇게까지 해 주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감사한 마음과는 별개로, 자신을 ‘장사치’라 소개한 사람의 말은 상식적이지 않았다.
그 대단한 K액터스에서 보잘것없는 신인 하나 붙잡으려 이렇게까지 매달린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 해 주나 싶지?”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읽는 대표의 말에 도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자존심이야.”
“…….”
“그리고 내 자신감이기도 해. 나만큼 너를 케어할 회사 없을 거고, 앞으로도 쭉 업계 최고로 대우해 줄 회사는 없을 거라는 자신감. 네가 먼저 회사를 떠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자존심.”
도준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에 굳은 의지와 확신이 담겼다. 남자는 또박또박 신중하게 말을 전하면서도, 도준의 눈을 조금도 피하지 않고 자신의 진심을 그대로 전달했다. 결국 도준이 고개를 느릿하게 주억거렸다.
“그럼…… 저 조금만 더 고민해 보고…….”
“아니, 도준아. 희찬이한테 가야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희찬의 이름을 마주한 도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도준이 눈을 부릅뜨고 남자를 쳐다보자, 남자가 싱긋 웃었다. 마치 도준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본다는 것처럼 말이다.
남자는 도준과의 계약을 준비하며 임 감독에게 이것저것 많은 것을 묻고 또 들었다. 도무지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며,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았을 때 임 감독은 한 가지 팁을 전했다.
[지금은 안 좋은 쪽으로 통할 수도 있는데. 이도준을 잡는 데에는 장희찬만 한 게 없지. 희찬이 얘기 한번 해 봐.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둘이 떨어져 지낸다는 거 같더라고.]
그 말 하나 믿고, 반신반의하며 던진 말에 도준의 낯이 변하는 것을 보니, 이번엔 제대로 먹힌 모양이다. 남자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도준을 마주했다.
“너희 둘 퍼즐이라며. 퍼즐은 맞물려서 그림을 완성해야지.”
“…….”
“도와줄게, 도준아. 무슨 일로 너희가 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도와줄게.”
대표는 마치 회심의 일격이라도 가하듯 도준의 마음속에 커다란 울림을 남겼다. 거듭 힘주어 도와주겠다는 대표의 말을 무시할 이유가 사라졌다. 왠지 대표의 도움이라면, 지긋지긋하게 저를 괴롭히는 상황에서도 조금 더 빨리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책임감을 요하지 않겠다잖아. 힘들면 그만둬도 된다잖아.
도준이 주먹을 불끈 말아쥐었다. 결국 도준의 손이 계약서 맨 마지막 장을 펼쳤다. 그곳에는 K액터스의 주소, 대표의 이름 같은 정보가 적혀 있었다. 대표의 이름 아래에는 도준의 이름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주소나 전화번호 칸은 비워진 채였다.
“이름 옆에 서명만 해.”
도준이 드디어 펜을 쥐었다. 도준이 제 이름 옆에 ‘이도준’ 세 글자를 갈겨쓴 후 고개를 들어 대표를 바라보자, 대표가 맞은편에 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그는 원하는 장난감을 손에 쥔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으며 도준의 서명을 도왔다.
“여기도 하고, 여기도. 혹시 계약 조항 외에 다른 거 원하는 거 있어?”
“저 하나 있는데…….”
“응, 편하게 말해 봐.”
계약서를 한 장, 한 장 접어 도준의 앞에 내밀며, 서명할 자리를 짚어 주는 대표가 도준의 조건을 들어 보려 귀를 기울였다. 도준은 대표의 손가락이 닿은 자리마다 서명하며 혀로 입술을 적셨다.
“기사가…… 안 났으면 좋겠습니다.”
“기사?”
“네. 그냥 사생활은 하나도 안 드러났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제가 활동을 하게 된다면, 그에 관련한 건 어쩔 수 없겠지만, 그 외에 저에 관한 다른 기사는 없었으면 합니다.”
“하하, 거참 희한하네.”
도준의 말은 뜻밖이었고, 그래서 웃음이 났다. 뭐가 어찌 되었든, 계약을 한 이상 통상적으로 어떻게든 매체의 관심을 받아 보려 아등바등하는 것이 보통인데 말이다.
이 패기 넘치는 신인은 그조차도 원하지 않는다는 게 못내 신기하고 또 좋았다. 남자가 싱그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도준의 제안은 들어주기 어려운 것도 아니었고, 들어주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언론을 통제하는 것? 대형 기획사에서 그것만큼 찰흙 주무르듯 쉬운 것도 없다.
“또 하나만 더.”
“그래, 말해.”
“스폰은 절대 안 해요. 안 좋은 기사 터지면, 그냥 그걸로 그만두고 싶습니다.”
우물쭈물 말을 전하는 도준의 목소리가 바닥을 기었다. 이상하게 스폰만 나오면 한껏 주눅이 드는 것이 안쓰러운 와중에도 대표는 도준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뜨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쓰는 이 바닥의 많은 젊은이를 봤다. 안타깝게도, 스스로 스폰서를 구해 자신의 출연권을 따내는 경우도 숱하게 봐 왔다. 그래서 신인은 받지 않겠다는 마음을 굳혔던 남자와 K액터스였다. 명예와 유명세에 눈이 먼 신인은 무엇이든 사고가 일어날 경우의 수가 늘기 마련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원하지 않는다는 도준의 강직함에 대표는 손뼉이라도 쳐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지만, 아무튼 유명세를 위해 허튼짓 할 위인은 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저 마음에 들었다.
내가 사람 참 잘 봤지, 뿌듯함에 웃음이 나오려는 것은 겨우 삼켰다.
“왜 그만둬? 극복해야지. 그리고 우리는 절대 스폰 안 해. 그것만큼 저급한 방법이 또 있어?”
단호한 대표의 말에 도준의 입에서 실소가 터졌다.
그래, 저급한 방법. 씨발…….
도준의 턱 아귀가 불끈 솟았다. 펜을 쥔 손이 덜덜 떨리려 하기에 힘을 주고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아무래도 희찬이는 업계에서 이름만 유명할 뿐, 속 알맹이는 저급한 회사랑 계약한 모양이다.
부아가 치밀었다. 풋내기들의 꿈을 짓밟은 전 대표를 향한 분노가 끓었다. 모두가 전 대표 같은 줄 알았더니 제 앞에 있는 남자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게 그렇게 한탄스러웠다. 희찬이를 가로챈 것이 이 남자였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말이다.
도준의 검은 눈동자에 힘이 실렸다. 혈기를 머금은 눈동자가 달빛을 받은 밤중의 호수처럼 번쩍거렸다. 순식간에 기세가 달라진 도준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대표가 도준이 서명을 마친 계약서를 쥐었다. 종이를 모아 정리하고, 도준을 쳐다보며 말을 골랐다.
“나도 조건 하나만 더 붙이자.”
“네.”
“오늘부터 목욕탕에서 지내는 거 정리하고 숙소로 들어와. 내가 너 어떻게 지내는지 좀 들여다봐야겠어.”
대표의 목소리는 이제껏 냈던 목소리 중 가장 단호했다. 대표는 외줄 타기를 하는 모양으로 아슬아슬한 모습을 보이는 도준을 더이상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계약서에 서명을 마친 이상, 이제는 돌봐야 할 연기자였으니 말이다.
사실, 이건 표면적인 이유고, 그냥 도준을 돌보고 싶었다. 아마도 옳지 못한 어른들의 악행에 된통 당한 듯했으니, 누군가에게 기대는 법도 알려 주고 싶다는 알량한 책임감이었다.
대표의 두 눈에서 자신을 향한 진심을 읽은 도준도 끝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도준에게는 나쁠 것 하나 없는 제안이었으므로,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이미 계약까지 했으니, 대표와 가까워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길로 대표는 곧장 도준과 함께 목욕탕으로 향해, 사장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사장은 아쉬운 목소리를 내는 한편 도준에게 진심 어린 응원을 건넸다.
도준이 대표의 손을 빌려 몇 없는 짐을 갖고 향한 곳은 회사 사옥과 가까운 곳에 있는 오피스텔이었다. 대표는 차를 몰면서도 오피스텔 맞은편에 있는 고급 아파트를 가리키며, 저쪽이 자신이 사는 곳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했다.
짐을 옮긴 후, 도준이 얕은 숨을 쉬었다. 완전히 낯선 공간에서 홀로 지내야 한다는 것이 탐탁지 않았지만, 애써 마음을 가볍게 먹으려 무던히도 노력했다.
“숙소 번호키는 내가 알고 있어도 괜찮지?”
“네.”
하나하나 도준의 의사를 살피며 신뢰를 더하는 대표의 말에 도준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대표가 흡족한 듯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해.”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도준이 대표의 손을 맞잡았다.
*
얼마간 숙소 생활을 하던 도준은 낯선 곳에서 조용한 시간에 스며드는 남자들의 목소리를 이겨 내지 못하고 여러 번 발작을 일으켰다. 휴대폰도 없는 탓에 대표에게 연락을 취할 수도 없었던 도준은 매번 기절한 상태로 대표를 마주해야만 했다.
결국 도준은 대표의 집으로 짐을 옮겼다. 아예 집에 두고, 바로 옆에서 지켜봐야겠다는 대표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몇 달간 도준의 옆에서 도준을 지켜본 대표는 몇 가지 사실을 알아갔다. 처음 도준이 말했던 대로 도준에게는 집도, 부모도 없다는 것, 밤마다 악몽에 시달린다는 것, 악몽에 몸부림치는 도준을 만지면 기어코 발작을 일으켜 기절까지 한다는 것, 미각을 잃었다는 것, 장희찬을 좋아하지만, 장희찬 얘기를 꺼내면 끝내 울고야 만다는 것들 말이다.
그 모든 사실은 의아했고, 또 그만큼 심각했다. 대표는 여러 번 도준을 붙잡고 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도준은 매번 대화를 피하기만 했다.
그러던 도준이 또 한 번 발작을 일으켰던 날, 대표는 도준에게 진심으로 걱정하는 낯을 보이며 병원 치료를 권했다. 도준 역시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대표의 모든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첫 치료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에서 도준은 대표에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자신이 겪은 모든 일을 털어놓았다. 적어도 자신에게 대가 없는 친절을 베푸는 대표에게 자신이 가진 위험 부담이나, 전 대표가 가진 사진 정도는 알려야 할 것 같았다.
모든 것을 털어놓고, 계약 파기 통보를 받아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던 도준에게 대표가 전한 말은,
“고생했네, 고생했어.”
그게 다였다.
나무라는 말도, 다그치는 말도 없었다. 그런 걸 왜 숨겼냐는 말도, 동성애에 대한 혐오도 없었다.
“너는 배우로서 네가 할 일만 해. 그것만 하면 돼.”
그게 왜 그렇게 울컥하는 건지.
“혹시 기사라도 뜨면 어떡해요…….”
“괜찮아, 그건 네가 걱정할 게 아니야.”
따뜻한 대표의 온정에 도준은 기어코 꺼이꺼이 울어 버렸다. 오랜만에 다가온 듬직한 어른의 모습이 사무치도록 서글펐다. 그저 각박하고 아프기만 했던 세상이 드디어 제게도 빛을 비추는 듯했다.
도준을 향해 ‘모두 네 탓이다.’라고 말하던 목소리가 사그라들었다. ‘너는 연기할 수 없다’며 꿈을 잘라 내던 목소리도 사라졌다.
아, 나도 내가 하고 싶은 걸 해도 되는 거구나.
그걸 깨닫기 무섭게 통곡이 흘렀다. 이제야 살 수 있을 것 같다. 짓눌렸던 마음이 트이고, 오래간 꽉 막혔던 숨통이 비로소 개운해졌다.
남자는 거친 울음을 토해 내는 도준을 제 품에 안고 토닥토닥 달래었다. 그래, 사람이 한순간에 그렇게 완전히 달라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도준으로부터 전해 들은 그 이유에는 진심으로 화가 났다.
대표는 도준을 달래는 와중에도 울화가 치밀어 거친 숨을 쉬었다. 가까이 두고 보니 생긴 것과 다르게 그저 착하고, 순한 이도준이었다. 그런 아이를 향해 적당히 겁만 주는 것도 아니고, 숨통을 옭아매고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들을 일삼은 전광진을 향해 분노가 차올랐다.
업계에서도 딱히 소문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소식은 알고 싶은 마음도 없어 귀담아듣지 않았지만, 신인을 ‘길들인다.’라는 명목으로 각종 약점을 잡아 제 손안에서 굴린다는 말을 얼핏 들은 기억이 있다.
그렇다고 해도 장희찬에게는 다를 줄 알았다. 가만히 둬도 알아서 성공할 재능 있는 배우였으니, 그 악랄한 전광진이라 해도 장희찬만은 애지중지 다룰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던 모양이다.
대표의 머릿속에는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는 장희찬이 떠올랐다. 아마 그 아이도 여느 신인들처럼 계약에 묶여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죽어라 일하는 중일 테다. 마치 기계 속 부품처럼 말이다.
그게 또 화가 났다.
어려운 와중에도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한 발, 한 발 어렵게 딛는 새싹 같은 아이들에게 응원은 못 해 줄망정, 어른의 탐욕이 드리운 그늘이 분하기만 했다.
대표는 가슴 한가운데 다른 의지를 품었다. 그건 이도준은 제 품으로 들였으니, 언젠가는 장희찬도 꼭 데려오겠다는 의지. 억지로 떨어진 이 퍼즐들을 다시 붙여 두겠다는 의지. 그리고 착한 아이들이 그려 내는 한 폭의 그림을 꼭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였다.
*
살랑살랑, 기분 좋은 봄바람이 불고, 어느덧 초록빛을 가득 띤 이파리가 바람에 맞춰 솨아, 시원한 소리를 내는 5월.
바람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설렘이 다가오고, 향긋한 봄 내음에 개운해지는 오늘.
“희찬이 생일이네.”
오늘은 희찬의 생일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대표의 권유로 시작한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도준은 달력을 보고 쓴웃음을 삼켰다. 여섯 살 생일날 부모님을 잃은 희찬은 생일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는지 데뷔 후에도 그는 생일을 밝히지 않았다.
“희찬이 생일이야? 인터넷 조용하던데.”
“네, 희찬이도 케이크 좋아하는데.”
“너도 좋아하나 보네.”
대표의 말에 도준이 싱긋 웃었다.
추운 겨울이 가시고, 봄이 완연해지는 동안 도준은 전문적으로 연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대표는 시간을 갖고 하나하나 해 보자고 강조했던 말 그대로, 조금도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저 도준의 속도에 맞춰 함께 단계를 밟아 갈 뿐이었다. 덕분에 도준은 남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겨를도 없이 바쁘게 생활했다.
무어든 배움이 빠른 도준은 배운 것을 금방 제 것으로 만드는 특기가 있었다. 액션을 배우면 금세 몸을 가볍게 놀렸고,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면 그 역시 금방 제 방식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 대견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하기 싫다더니, 연기 수업을 받고, 오디션을 준비하는 도준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하게 반짝거렸다. 그리고 대표는 그런 도준의 모습을 지켜보기를 상당히 좋아했다.
방금 막 집에 들어온 도준이었건만, 도준은 금세라도 다시 나갈 것처럼 겉옷을 챙겼다. 도준과 함께 점심이라도 먹으려 집에 왔던 대표가 폭폭 김을 뿜어내는 밥솥 앞에서 도준을 쳐다봤다.
“어디 가게?”
“저 잠시 산책 좀 다녀올게요.”
“너 방금 운동 갔다 왔는데?”
“밖에 날씨가 좋아요.”
“잠깐만, 도준아.”
기분 좋은 표정으로 현관을 나서려는 도준을 대표가 붙잡았다. 대표의 손에는 낯선 휴대폰이 하나 들려 있었다.
“이거, 네 거야.”
“저 휴대폰 필요 없는데…….”
“이제 스케줄 시작하면 필요해. 얼른.”
무엇이든 한 번에 받는 법이 없는 이도준이다. 대표는 그런 도준의 반응쯤이야 진작에 예상했다는 것처럼, 거절하는 도준을 재촉하듯 손을 달랑거렸다.
“뒷번호 1748, 너 좋아하는 숫자 맞지?”
“네, 감사합니다.”
“이제 전화 재깍재깍 받아.”
도준이 낯선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제일 인기가 좋다는 모델로 고민해서 사 왔을 대표의 마음이 보이는 선물이 못내 감사했다. 대표가 건넨 휴대폰에는 대표의 전화번호와 목욕탕 사장님의 전화번호, 그리고 언제 배정되었는지 모를 매니저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었다.
도준의 얼굴 만면에 아릿함이 드리웠다. 휴대폰 좀 사라며, 메시지를 주고받고 싶다던 희찬의 목소리가 도준의 머리를 울린 탓이었다. 도준의 울대가 크게 울렁거렸다. 종종 과거를 회상할 때면 보이는 모습이었기에, 대표는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고, 도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 다녀올게요.”
“올 때 메로나.”
“재미없어요.”
“어유, 저거. 진짜, 어우.”
이제 아주 편해졌다, 이거지.
기분 좋게 건넨 장난은 받아 주지도 않고서 금세 사라지는 도준의 등 뒤에 대고 대표가 장난스레 인상을 찌푸렸다. 그 낯은 곧 환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도준이 어쩌다 한 번씩, 저렇게 또래와 같은 모습을 보일 때면 그게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대표는 도준이 필기까지 해 가며 열심히 연습한 흔적이 보이는 대본을 쥐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빳빳했던 대본이 그새 너덜너덜해졌다. 그게 또 그렇게 뿌듯하다.
“이렇게 열심이면서 안 한다고 버티기는…….”
아무래도 내일은 사무실에서 다른 대본을 조금 더 가져다줘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대표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피었다.
도준은 성큼성큼 걸음을 놀려 단지 내 상가에 있는 베이커리로 향했다. 빵은 즐기지 않는 도준이었기에, 제일 작은 생크림 케이크를 고르고, 카운터 옆에 있는 작은 가판대에서 숫자 ‘2’ 모양의 초도 두 개 샀다.
계산을 마치고 가게 밖으로 나온 도준은 인적이 드문 놀이터로 향했다. 평일 낮, 고급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는 조용하기만 하다. 햇살이 따사로운 날, 놀지 못하고 학원으로 향하는 아이들에게는 작은 애도를 표한 도준은 벤치에 앉아 케이크에 초를 꽂고 불을 붙였다.
“장희찬이 행복하게 해 주세요.”
희찬의 생일에, 희찬의 생일 초를 꽂고, 희찬을 대신해 초를 분 도준은 희찬의 행복을 빌었다.
만약 장희찬의 행복을 이루는 요소에 내가 필요하다면, 나를 빨리 장희찬에게로 데려다 달라는 소원은 굳이 빌지 않았다.
도준은 자신이 희찬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을 때, 희찬을 향해 나아가고 싶었다.
“그러니까 만약 내가 필요하다면 희찬이가 조금 더 기다릴 수 있는 힘을 주세요.”
그런 소원이나 빌었다.
“뭐 하냐, 진짜…….”
도준이 결국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입에서는 연신 무거운 한숨이 푹푹 터져 나왔다. 병원 치료를 받고, 약을 먹으며 지내다 보니 남자들의 목소리가 많이 줄어들었다. 지금도 여전히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지만, 예전처럼 매 시간이 힘들지는 않았다.
이 짧은 기간에도 의지를 갖고 치료에 임하니 금방 효과가 보이는데, 생각보다 빨리 나아지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가 생겼다.
히유, 얕은 숨을 터뜨린 도준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대표가 준 휴대폰이었다. 도준이 느릿하게 입력한 번호는 다름 아닌 희찬의 것이었다. 뒷번호는 본의 아니게 같은 ‘1748’이었다.
연락할까, 말까 오래도 망설였다. 그림자의 위치가 변하는 시간 내내 휴대폰을 톡, 톡 두드리던 도준이 드디어 용기를 내었다.
나야, 생일 축하해.
나는 잘 지내고 있어.
걱정하지 말고, 너도 잘 지내.
곧 갈게.
와다다 메시지를 남긴 도준은 얼른 휴대폰을 엎었다. 한 글자, 한 글자에 정성을 담아 메시지를 보내는 동안 도준은 희찬의 답장이 돌아오지 않길 바랐다. 여기서 답장까지 받으면 곧장 희찬에게 달려가고 싶어질 테니 말이다. 그저 이 메시지로는 휴대폰이 생기면 가장 먼저 번호를 알려 주고 싶었던 마음만 전해지길 바랐다.
도준이 게슴츠레 눈을 뜨고 휴대폰을 다시 휙 돌렸다. 도준의 몸짓에는 사뭇 긴장이 서린 채였다. 메시지 창에는 ‘읽음’ 표시가 떠 있었다. 도준이 입을 틀어막았다. 장희찬과 얼마 만에 연락이 닿은 건지 모른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심장이 쿵쿵, 뛰었다.
답장을 입력하는 듯 ‘…’ 표시가 연신 떴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제발 답장하지 마.”
제발, 제발.
도준이 두 눈을 질끈 감고 두 손을 모아 간절한 말을 읊었다. 그리고 희찬은 그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입력 중이던 표시를 없앴다.
답장이 돌아오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기가 막히게 도준의 의도를 알아채는 희찬에게 이번에도 제 마음이 닿은 것 같아 도준이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편하게 몸을 늘어뜨린 도준은 자신이 마지막에 보낸 메시지를 곱씹었다.
곧 갈게, 곧 갈게.
“빨리 가서 안아 줘야지.”
도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딛는 걸음에는 이전보다 훨씬 강한 힘이 실렸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 대본을 보고, 운동도 하고, 약을 먹으며 치료에 정진해야 했다.
그래야만 하루빨리 희찬에게 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아직은 아프고, 마음보다 더디고, 생각보다 어려운 길이겠지만, 한 발 한 발 부지런히 걷다 보면 언젠가는 닿을 거라 확신했다.
도준은 그렇게 희찬에게 돌아가기 위한 항해의 첫 노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