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이어 붙인 해도
“분명 너도 나를 두고 갔는데. 근데 이상하게 너는 지나간 것 같지 않아.”
“…….”
“……도준아. 너 나한테서 지나갔어?”
희찬의 말에 도준이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준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희찬의 얼굴에 그 어느 때보다 화사한 미소가 피어났다.
도준이 또렷한 눈으로 희찬을 직시했다. 새까만 밤하늘을 닮은 도준의 눈동자에 희찬의 모습이 오롯하게 담겼다. 희찬도 도준의 검은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혀들었다.
한참이나 희찬의 모습을 담던 도준의 눈이 허공으로 향했다. 도준이 떨리는 호흡으로 길게 숨을 내뿜자, 새하얀 입김이 까만 하늘에 용을 그렸다.
“가고 있어. 조금만 더 기다려 줘.”
처음이었다. 과거를 되새기는 희찬의 말에 도준이 또렷하게 대답하는 것이 말이다.
희찬이 눈꼬리를 접어 예쁘게 웃었다. 너무 힘들면 기다리지 말라던 도준의 편지가 떠올랐다. 다시 만난 후에도 좀처럼 곁을 내어 주지 않는 도준이 불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도준은 그의 성격대로 아주 신중하게 다가오는 중인 모양이다. 비로소 안심이 도사려, 희찬의 목소리에도 힘이 실렸다.
“응, 네 발로 나한테 와. 꼭 와. 기다릴게.”
“응.”
“근데 너무 늦지 마, 나 되게 오래 기다리고 있어.”
“……거의 다 왔어. 조금만, 진짜 조금만 더 기다려 줘.”
목소리만큼 떨리는 도준의 손이 희찬의 볼에 닿았다. 차갑게 언 손끝이 볼에 닿기 무섭게, 희찬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슴 가득 뭉근한 울림이 퍼졌다. 희찬의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과거의 기억들이 하나하나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기억의 끝은 결국 도준이 남겨 둔 작은 편지였다.
희찬이 제 볼에 닿은 도준의 손을 거머쥐었다. 차갑게 언 손이 얕은 떨림을 머금은 채로 움찔거렸다. 그렇게 가만히 서로를 응시하는 두 사람은 오래간 시선을 맞추고 그 속에서 오롯한 안정을 느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조용해진 공간을 느낀 희찬이 줄곧 도준의 잘난 얼굴 위를 거닐던 시선을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쁘게 현장을 정리하던 스태프들이 몇 남지 않았다. 온 하늘에 하얀 점을 찍으며 쏟아져 내리던 눈도 그쳤다. 소복이 쌓인 하얀 눈에 가로등 불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오늘따라 유달리 환한 등불에 괜히 가슴이 간질거렸다.
“읏차.”
도준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던 희찬이 몸을 일으켰다. 신발을 고쳐 신고, 바짓단에 묻은 눈을 훌훌 털어 내는 희찬의 손짓은 촬영 전보다 훨씬 가벼운 모양이었다.
도준은 희찬의 그런 행동 하나하나를 전부 눈에 담았다. 어째 움직이는 모양이 프레임으로 나뉘어 컷, 컷이 저장되는 것 같았다.
벌떡 일어난 희찬이 도준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희찬을 올려다보자 그의 뒤로 검은 하늘과 하얀 눈밭, 그리고 주황빛 불빛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다.
“너.”
희찬이 곧은 손가락을 펴 도준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마치 나무라는 듯한 희찬의 행동에 도준이 눈에 힘을 풀고 순하게 희찬을 마주했다.
“오는 중이면 나 너무 피하지 마, 상처받아.”
상처를 주려던 의도는 아니었는데, 과하게 방어하느라 본의 아니게 상처를 입힌 모양이다.
도준의 얼굴 가득 착잡함이 드리웠다. 이목구비에 큰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심정에 변화가 있다는 것쯤은 쉽게 알아챈 희찬이 샐룩 웃었다.
“희찬이 형! 들어가요!”
저 멀리 군중 속에서 희찬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시간을 오래 지체한 탓에, 더는 희찬을 기다릴 수 없었던 매니저가 행동을 재촉하는 목소리였다.
희찬의 하얀 손바닥이 쫙 펼쳐져 도준의 눈앞에 들이밀렸다. 양옆으로 살랑살랑 흔들리던 손은 예나 지금이나 뽀얗고 예뻤다. 도준에게 인사를 남긴 희찬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뽀도독, 뽀도독 눈이 밟히는 소리가 났다. 희찬이 지난 자리에는 하얗게 쌓인 눈 위에 오롯하게 희찬의 발자국이 남았다.
“형, 저희도 들어갈까요?”
이어서 가만히 희찬의 발자국을 쳐다보던 도준을 찾는 목소리도 들렸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매니저가 도준에게 귀마개를 건네는 중이었다.
귀가 얼어 가는 것도 몰랐다. 도준이 귀마개를 받아 빨갛게 언 귀를 감쌌다. 삽시간에 몰려오는 따뜻함에 귀 끝에 아릿한 통증이 서렸다.
“추운데 두 분 무슨 얘기 하셨어요?”
“별 얘기 안 했어. 내일 몇 시부터 촬영한대?”
“여름 배경이라, 눈이 녹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내일 상황 보고 결정될 거 같아요.”
“그래.”
도준은 매니저와 함께 걷는 내내 땅을 보고 걸었다. 도준이 걷는 곳에는 먼저 촬영장을 빠져나간 희찬의 발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도준은 희찬이 남겨 둔 흔적에 보폭을 맞춰 희찬의 발자국 위에 제 발자국을 덧입혔다.
그렇게라도 같이 걷고 싶은 작은 마음이었다.
*
해가 바뀌었다. 어느덧 드라마 눈부신 항해의 촬영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한껏 기승을 부리던 추위가 사그라들고, 새싹이 조금씩 움트기 시작한 봄의 초입에 도준도 움츠렸던 몸을 펴고 기지개를 켰다.
줄곧 지방에서 이어졌던 촬영이 서울에서 진행되었다. 드라마 속 두 인물이 연예인이 되어 자신들의 꿈을 펼쳐 내는 장면을 그려 내는 스튜디오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분주했다.
무엇이든 한 작품을 시작하면 다른 스케줄을 잡지 않는 도준과 달리 희찬은 요즘 바쁜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드라마를 촬영하는 틈틈이, 이전에 촬영했던 영화 홍보를 위해 화보며, 예능이며, 갖은 스케줄을 소화해 내는 희찬은 근래 들어 가장 피곤한 모습을 보였다.
“희찬이는 또 자러 갔나?”
“차에 있는데, 데려올까요?”
“아냐, 조금 더 쉬게 내버려 둬.”
희찬은 조금의 틈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쉬는 시간이 생기기 무섭게 자러 갔다는 매니저의 말에, 희찬을 찾던 감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희찬이 잠든 사이, 도준이 제 몸에 꼭 맞는 스리 피스 슈트를 차려입고, 머리를 예쁘게 올린 채로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 촬영하는 장면에 맞는 의상으로 갈아입었을 뿐인데 여기저기서 감탄이 터졌다. 후줄근한 의상에도 빛이 나던 비주얼인데, 작정하고 꾸며 놓으니 ‘연예인의 연예인’이라는 그의 수식어가 생생하게 와닿았다.
기다란 다리를 놀려 휘적휘적 걷는 걸음마다 터지는 탄성에 도준이 쑥스러운 듯 눈을 굴렸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한 반응이었지만, 생생하게 접하는 반응은 언제 겪어도 낯뜨거운 것이었다.
“우리 도준이가 잘나긴 했지.”
도준의 바로 옆에서 묵직한 음성이 들렸다. 그에 도준의 고개가 픽 고꾸라졌다.
“제발 부추기지 마세요.”
“왜, 네가 K액터스 보물인데.”
“그런 말씀도 하지 마시고요.”
“이제 의연하게 좀 받아들여.”
“하…….”
대표가 저를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쯤이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왔지만, 이렇게 대놓고 자랑을 해 댈 때는 도무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도준의 귀 끝이 붉게 타올랐다. 그를 발견한 대표는 입가에 장난을 걸고서 더욱 집요하게 도준을 놀렸다.
“아, 진짜. 가까이 오지 마세요.”
결국 도준이 대표의 곁에서 벗어났다. 도준은 쏟아지는 시선은 애써 무시하고, 성큼성큼 제 자리를 찾았다. ‘이도준’ 세 글자가 정갈하게 적힌 의자에 앉아 대본을 펼친 도준이 두 귀에 귀마개를 꽂아 넣었다.
한참이나 대본을 들여다보던 도준의 어깨에 낯선 손이 닿았다. 누군가 건드는 것을 느낀 도준이 고개를 홱 꺾자 볼에 힘이 바짝 실린 손가락이 찔렸다. 도준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도준과 같은 모양의 슈트를 입은 희찬이 도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손가락을 뻗어 도준의 볼을 찌른 채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잘 잤어?”
상대를 확인한 도준이 귀에 꽂았던 귀마개를 빼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너무 피하지 말라’던 희찬의 말대로, 요즘의 도준은 제법 사근사근한 면모를 보이는 중이다. 상처받는다는 말이 충격이었던 걸까, 아무튼 고집을 꺾고 이제는 밀어내지 않는 도준의 모습이 희찬은 퍽 마음에 들었다.
“응, 푹 잤어.”
“가서 밥 먹고 와. 아직 남아 있을걸.”
“혼자 먹기 싫은데.”
희찬이 도준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닥에 있는 먼지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희찬의 행동 덕분에 희찬의 주변 스태프들이 ‘옷 더러워진다’며 성화였지만, 희찬은 어깨를 으쓱일 뿐,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반짝거리는 희찬의 옅은 눈이 집요하게 도준을 쳐다봤다. 시선을 마주한 도준은 그의 눈에서 ‘같이 가 달라’는 말을 읽고 눈썹을 씰룩거렸다. 잠시 고민하는 듯, 눈을 굴리던 도준이 결국 대본을 덮고 일어섰다. 희찬의 눈빛에 당해 낼 재간이 없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으므로, 그저 그가 하자는 대로 따를 뿐이었다.
키도, 덩치도 비슷한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때에는 주변의 공기가 달라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쫑알쫑알 즐겁게 말을 건네는 희찬의 옆에서 고갯짓으로 대답을 하던 도준이, 세트장에서 나오자마자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어깨를 한껏 움츠렸다.
그를 본 희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는 추위도 잘 타면서 맨날 왜 그렇게 대강 다녀?”
“내가 뭘.”
“옜다.”
뾰로통한 핀잔을 준 희찬이 도준에게 건넨 것은 패딩 안 주머니에 들어 있는 핫팩이었다. 희찬의 잔소리는 반갑지 않았지만, 그가 건네는 핫팩은 달가웠으므로 도준이 생긋 웃으며 핫팩을 받아 양 볼에 가져다 댔다.
“너는 밥 먹었어?”
“응, 먹었어.”
“진짜 먹었어?”
“먹었다니까.”
희찬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도준을 흘겨보며 도준의 어깨에 턱을 얹었다. 그에 도준이 미간을 좁히고 희찬의 얼굴을 밀어냈다.
“진짜야. 나 30분 전에 대표님한테 잡혀서 밥 먹었어.”
음, 대표님이면 할 말 없지.
제아무리 달라진 이도준이라 한들 대표님까지 끌어들여 거짓말을 할 심성은 아니었기에, 희찬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물러났다.
희찬과 함께 다시 식당을 찾은 도준은 희찬이 배식을 받는 동안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대다수의 스태프가 식사를 마친 덕에 촬영장보다 한적한 식당이 마음에 들었다. 도준은 식판 대신 대본을 올려 두고 진지하게 대사를 곱씹었다.
이윽고 식판을 가져온 희찬이 도준의 맞은편에 앉았다. 너덜너덜해진 도준의 대본을 본 희찬은 밥을 먹기도 전에 혀부터 내둘렀다.
“너 진짜 대본을 얼마나 본 거야?”
“원래 이 정도 봐.”
“잠 안 자고 대본만 보나 봐.”
“잠도 자. 너나 스케줄 좀 줄여. 뭘 그렇게 일만 해.”
도준의 잔소리에 희찬이 퍼뜩 인상을 찌푸렸다.
“너 보라고 일만 했다, 왜.”
“…….”
하여튼 장희찬, 무슨 말을 못 하겠다.
희찬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을 정확하게 파악한 도준은 괜히 뻑뻑해지는 가슴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덕분에 돈 많이 벌었어.”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희찬이 금세 가벼운 목소리를 냈다. 도준이 오랜만에 희찬을 똑바로 쳐다봤다. 혹시 힘들게 일한 건 아닐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생긋 웃는 희찬의 낯에는 어둠이 없다. 그건 그것 나름대로 다행이었다.
이내 두 사람 사이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 적막은 이전처럼 마냥 무겁지만은 않았다. 도준은 한가한 분위기 속에서 대본에 빠져들었고, 그 앞에서 희찬이 간간이 도준을 거들며 맛있는 식사를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벌컥, 식당 문이 거칠게 열리자, 도준과 희찬이 동시에 문을 열고 들어온 상대를 바라보았다.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던 남성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그에 도준이 식당 벽에 달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촬영 시간이 코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희찬아! 밥 다 먹었어?”
“네! 거의 다 먹었어요.”
“그래, 그럼 도준이 먼저 스탠바이 하자, 얼른 와!”
자신의 할 말을 마친 조감독은 금방 모습을 감추는 것을 본 도준도 대본을 덮고 희찬을 바라봤다. 거의 다 먹었다는 희찬의 말대로, 희찬의 식판은 거의 비워져 있었다. 도준이 드륵, 소리를 내며 의자를 끌고 일어섰다.
“먼저 간다? 남은 건 혼자 먹을 수 있지?”
“응, 가.”
희찬의 흔쾌한 대답에 도준이 희찬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다독였다. 별 의미가 묻어나지 않는 가벼운 행동이었지만, 희찬의 입가에는 빙그레 미소가 피었다.
도준의 때가 가까워졌다는 것이 피부에 와닿았다. 요즘의 도준은 피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기꺼이 제 곁을 내어 주기도 하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막연한 때를 기다리는 것보다, 눈앞에 보이는데 잡히지 않는 때를 기다리는 것이 더 힘든 일이었지만 희찬은 이제껏 기다렸던 긴 시간을 곱씹으며 조바심을 느끼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무던히 노력했다.
언젠가 이도준이 돌아온다면 따뜻하게 안아 줘야지. 어렸던 그때는 내 앞의 상황만 살피느라 제대로 달래 주지도 못했으니, 이제는 어른스럽게 꼭 달래 줘야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조감독의 호출에 현장에 들어선 도준의 시야에 광활한 세트장이 들어찼다. 몸을 빙 돌려 가며 촬영장을 둘러본 도준은 생각보다 훨씬 돈이 들어간 광경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현장을 세심하게 살폈다.
시상식 장면을 촬영한다던 감독의 말을 뒷받침하듯 관객석에는 보조출연자들이 촘촘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함께하는 촬영 현장은 어수선함 위에 긴장과 설렘을 동시에 머금고 있었다. 저벅저벅 늠름한 걸음을 놀려 촬영장 한가운데 당도한 도준은 스태프들 한 명, 한 명에게 예의 바른 인사를 건네었다.
폐부 깊이 숨을 들이켜니 희찬과 함께 처음 촬영장에 갔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촬영장에서는 특유의 향이 난다. 정확한 단어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아무튼 묘하게 이질적이면서도, 그만큼 설레는 향이었다. 오늘도 여지없이 도준의 코끝에 닿은 향수가 도준의 가슴을 뭉근하게 울렸다.
“자자, 이제 정말 막바지입니다! 다 같이 파이팅합시다!”
연일 이어지는 바쁜 촬영에 지치기는 스태프들도 마찬가지였다. 바쁘지만 느리게 움직이는 스태프들 사이에서 누군가의 파이팅에 금세 활기가 감돌았다.
도준은 오늘 촬영의 주요 무대가 될 단상 위에 올라 자신이 이동해야 하는 동선을 살폈다. 도준이 밟고 선 바닥에는 어느 장면을 촬영할 때 배우가 어디에 서야 가장 예쁜 그림이 나오는지 표시해 둔 형형색색의 테이프들이 붙어 있었다.
도준이 테이프를 따라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트로피를 쥐고, 카메라를 응시하며 대사를 하면 저쪽에서 인수가 달려올 것이다. 그리고 키스.
“하……. 키스…….”
대본 속 장면을 곱씹으며 움직이던 도준이 고개를 한껏 젖힌 채로 허심탄회한 한숨을 터뜨렸다. 역시 상대가 장희찬인지라, 키스를 생각하면 괜한 긴장이 도사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입술을 잘근 씹어 물고, 촘촘히 생각을 정리하던 도준의 시야에 새하얀 생명체가 팔랑거리는 것이 보였다. 평소보다 훨씬 좋은 컨디션으로 뛰어 들어오는 사람은 도준이 매일을 걸어가는 이유, 장희찬이었다. 도준이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려 환하게 웃어버렸다.
“오늘 키스 신!”
도준 앞에 당도한 희찬이 다짜고짜 키스 신을 외쳤다. 장내를 울리는 희찬의 목소리에 관객석 쪽에서 얕은 함성이 터지는 것 같았다.
“좋아?”
“싫어?”
가벼운 발걸음으로 금세 폴짝 뛰어 올라온 희찬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환한 미소를 피웠다. 그에 도준도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의 대화에 답은 없다. 오로지 질문으로만 이어지는 대화를 하는 중에도 두 사람은 그저 헤실헤실 웃어 댔다.
희찬이 도준의 얼굴에 대고 손을 팔락거렸다. 마치 얼굴을 가까이 대 보라는 듯한 희찬의 제스처에 도준이 거리낌 없이 희찬에게 다가갔다.
“―!”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졌을 뿐인데 관객석 쪽에서 큰 함성이 터졌다. 순간 놀란 도준이 주춤하며 몸을 물리고, 객석을 바라보았다. 객석 드문드문 자신을 응원하는 슬로건이 팔랑거리는 게 보였다.
도준이 의아함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킹도준은 해인이가 아니지 않나. 저게 여기 왜 들어와 있는 거지.
“오늘 팬분들도 신청해서 왔대.”
골똘히 머리를 굴리는 도준의 옆에서 명쾌한 답이 들렸다. 어느새 도준과 같은 곳을 보는 희찬은 진작 알고 있었다는 듯 의연한 태도였다.
“그렇구나.”
“저쪽이 네 팬이고, 여기가 내 팬인가 봐. 인사해.”
희찬이 손가락을 움직여 도준에게 설명을 덧붙였다. 왼쪽에는 도준의 팬들이, 오른쪽에는 희찬의 팬들이 들어차 관객석이 꽉 메워졌다는 설명에 자세히 보니 오른쪽에는 짱희찬 어쩌고 하는 것들이 적혀 있었다.
“네 팬한테 인사하라고?”
“그냥 인사하면 누구든 받겠지. 같이할까?”
어쨌든, 현장에서 팬들에게 직접 응원을 받는 일은 지극히 드문 일이었다. 흔쾌히 고개를 주억거린 도준이 희찬의 손을 맞잡았다. 잠시 놀란 듯 제 손을 쳐다본 희찬이 도준과 눈짓을 주고받은 뒤 동시에 허리를 숙여 관객석을 향해 인사했다.
장내에 이전보다 훨씬 큰 환호가 터졌다.
인사를 마친 두 사람은 이내 딱 달라붙어서 동선을 체크 했다. 이쪽에서 네가 올라오면 내가 저쪽에서 어떻게 하겠다,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은 전문가였고, 프로였다.
“근데 아까 무슨 말 하려고 했어?”
“아, 맞다. 귀 좀 대봐.”
문득 희찬이 자신에게 무언가 말하려고 했다는 것을 떠올린 도준이 희찬의 요청에 다시 얼굴을 가져다 댔다. 이전과 비슷한 함성이 터졌지만, 이번에는 가뿐하게 넘겼다.
“나 치약 딸기 맛 썼어.”
뜬금없는 희찬의 말에 도준이 희찬에게서 한 발 물러서며 희찬의 몸을 밀어냈다.
“아, 진짜 어쩌라고.”
도준의 질색하는 모습에 희찬이 방긋 웃었다.
“오늘 키스 신 찍잖아.”
귀를 파고든 희찬의 짓궂은 말을 이해하기 무섭게 도준의 얼굴이 화륵 타올랐다. 후끈거리는 열기에 도준이 고개를 푹 수그렸다.
희찬의 장난쯤이야, 아주 어릴 때부터 겪어와 충분한 면역을 가진 도준이었기에 지지 않고 받아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이렇게 스킨십을 논하는 희찬 앞에서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뻥이지.”
“아, 진짜 짜증 나, 너.”
얄궂은 희찬의 목소리에 바짝 약이 오른 도준이 인상을 팍 누비고서 희찬에게서 멀어졌다.
“감독님.”
“어, 도준아.”
“혹시 인수 데드엔딩으로 대본이 수정됐나요?”
“어? 무슨 말이야?”
감독에게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내는 도준이 눈썹을 꿈틀거리자, 희찬이 한 발 다가왔다. 그에 도준이 한 발 물러서자, 희찬이 두 발 더 뻗어 다가갔다.
“아무래도 오늘 해인이가 인수 죽이지 않을까, 싶.”
“어, 어어!”
터벅터벅 다가오는 희찬의 걸음에 맞춰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던 도준의 입에 희찬의 손이 닿았다. 뾰로통한 도준의 말을 막으려는 의도인 듯했으나, 희찬의 손이 닿기 무섭게 두 사람이 단상 위에서 사라졌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관객석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소란스럽기는 해도 대체로 고요하던 촬영장이 순식간에 요란해졌다.
스태프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던 감독이 깜짝 놀라 단상 위를 쳐다봤다. 단상 위에 있어야 할 두 사람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얘네 어디 갔어?”
임 감독이 당황하는 사이 멀리서 스태프 한 명이 뛰어왔다. 놀란 듯 거친 숨을 연신 몰아쉬는 스태프의 손가락이 단상을 가리켰다.
“감독님, 지금 배우님들 구덩이에 떨어진 거 같은데…….”
“야! 그럼 빨리 꺼내야지! 나한테 오면 어떡해!”
임 감독은 스태프가 언급하는 ‘구덩이’에 인상을 험상궂게 찌푸렸다. 조형물을 고정하기 위해 깊이 파 둔 구덩이는 분명 오전 중으로 메워 두라고 했는데, 촬영 직전에도 메워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일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스태프들을 향해 화가 나는 것은 둘째치고, 혹시라도 누구 하나 크게 다쳤으면 어떡하나, 걱정이 도사렸다.
대본을 세게 집어 던진 감독이 잽싸게 발을 놀려 구덩이를 향해 달렸다. 노심초사하며 도착한 구덩이 속에는.
“아아, 움직이지 마.”
“아니, 내가 움직이고 싶어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좁은 공간에 끼인 채로 서로를 밀어내며 여전히 아옹다옹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감독을 보기 무섭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멋쩍게 웃는 낯으로 올려 보는 두 사람의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다행히 둘 다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감독은 가슴이 크게 오르내릴 정도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이고야, 안 다쳤어?”
“네, 괜찮아요!”
“아, 너 밥을 얼마나 먹은 거야, 무거워.”
안위를 묻는 감독의 말에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희찬과 달리 그 아래에 깔린 도준에게서는 묵직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딱딱한 바닥에 곧장 허리부터 떨어져 버렸다. 지끈거리는 허리 통증에 도준의 인상은 점점 찌푸려져만 갔다. 그래도 일단은 아픈 것을 뒤로하고 희찬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 제 몸 위에 떨어진 희찬은 아무렇지 않은 듯, 불편한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이거 살 아니고 근육이야.”
“아닌데, 이거 살 같은데.”
희찬의 볼통한 대답에 도준이 손가락으로 희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갑자기 찌르고 들어오는 느낌에 희찬의 선이 예쁜 몸이 펄떡 뛰었다.
“아, 어딜 찔러, 이게!”
“아!”
눈을 세모나게 뜬 희찬이 곧장 손을 뻗어 도준의 볼을 세게 꼬집었다. 그렇지 않아도 펄떡거리는 희찬의 몸에 허리가 짓눌려 아프던 참인데 얼굴에까지 서리는 고통에 도준의 표정이 한껏 일그러졌다.
“이야……. 너희 좀 데면데면한가 싶더니, 이제 촬영 막바지라고 쉬지 않고 싸우는구나.”
“…….”
“…….”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던 감독이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문득 첫 상견례가 떠올랐다. 그때만 해도 저 퍼즐 같은 놈들이 서로 인사도 하지 않고 어색하게 굴기 바빴는데 말이다. 이제 희찬에게 먼저 장난도 거는 도준을 보는 것은 감독에게도 즐거운 일이라, 감독은 스태프들이 달려올 때까지 어린애들처럼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지그시 지켜봤다.
임 감독은 먼 옛날 언젠가 늦은 밤 걸려 왔던 도준의 전화를 기억한다. 그때의 이도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따라 기분이 묘했다. 마치 금방이라도 세상을 등지고 저 멀리 사라질 듯한 아득한 기운을 물씬 풍겼달까. 그래서 더 간절하게 도준을 잡기도 했었다.
기다리겠다고 했고, 돌아오겠다고 했었지만, 도준은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다. 도준이 감쪽같이 사라진 동안 그의 단짝이라는 희찬은 단물 빠진 껌처럼 납작해진 모습으로 촬영장을 전전했었다. 혹독하게 스케줄을 소화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어쩌다 희찬을 마주칠 때면 꼭 그를 근처 식당에 데려가 밥을 먹였었다. 그리고 그런 희찬에게서도 도준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이도준’을 입에 달고 살던 장희찬이 도준의 이야기만 나오면 어색하게 웃으며 대화를 피하기 일쑤였었다.
힘든 와중에도 둘이 꼭 붙어 함께 힘을 내는 두 사람을 기특해하던 감독은 착잡한 마음을 추스르지도 못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나 흘렀을까, 제법 시간이 흐른 후에야 감독은 뜻밖의 사람으로부터 도준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우리 회사 신인 구경하러 올래?]
오래간 연락이 없었던 곽 대표로부터의 연락이었다. 신인에는 관심도 없던 곽 대표였으니 그의 연락이 의아하기도 했었다. 이도준, 장희찬을 한 번에 놓치고 오기가 생겨 신인에게 관심을 가진 걸까, 온갖 추측을 하며 향했던 K액터스 사옥에서 임 감독은 그토록 기다렸던 도준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때의 그 반가움이란, 감히 쉽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감독이 아득한 옛날을 회상하는 사이 우르르 달려온 스태프들이 희찬과 도준을 차례로 구덩이에서 건져 올렸다. 혹시 다친 곳은 없는지, 두 사람의 몸을 샅샅이 살펴보는 눈길에는 그저 걱정이 가득했다.
희찬의 예쁜 아킬레스건에 연고가 발린 밴드가 붙었다. 다른 다친 곳은 없어 다행이지만, 옷이 더러워졌으니 의상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설명이 덧붙었다.
하지만 문제는 도준이었다.
“아.”
“못 서겠어?”
시멘트 바닥에 곧장 떨어진 도준은 부축을 받아서도 무릎에 힘을 주지 못했다.
도준의 사고 소식을 접한 대표가 저 멀리서 부리나케 달려왔다. 도준을 부축하는 스태프 대신, 제 어깨에 도준의 팔을 두른 대표가 짙은 걱정이 드러나는 낯으로 도준을 살폈다.
“도준이 일단 병원 가서 사진 찍어 보고, 희찬이 너는 진짜 다른 데 아픈 데 없냐?”
“네, 저 괜찮아요.”
“아니, 여기다가 구덩이를 파 두고 메우지도 않으면 어떡해. 촬영 임박해서 사람들 돌아다니는데, 큰 사고 났으면 어쩔 뻔했어?”
순식간에 촬영장이 엄숙해졌다. 큰 소리로 스태프를 호통치는 대표의 모습에 도준이 난감한 숨을 쉬었다. 불편한 기색은 보였어도 아픈 티는 내지 않았던 도준이었기에 구덩이 안에서도 편하게 장난을 쳤던 희찬의 얼굴에도 어둠이 드리웠다.
심상치 않은 현장 분위기에 관객석에도 웅성거림이 앉았다. 동요하는 팬들을 인지한 감독은 얼른 스태프들을 동원하여 팬들을 진정시켰다.
“현장 사진 SNS에 올리시면 안 됩니다. 도준 배우 병원 갔다가 돌아오는 대로 촬영 재개할 예정입니다! 시간이 조금 걸릴 수 있으니, 그사이 쉬셔도 되고, 혹시 다른 일정이 있으신 분들은 말씀해 주세요!”
주변의 소란을 살피던 도준이 마른 입술을 적셨다. 허리가 조금 불편하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무거워질 분위기도 아니지 않나 싶었다. 도준이 손을 들어 자신을 부축하며 움직이려는 대표를 저지했다.
“대표님, 저 병원까지는 안 가도 괜찮아요.”
“너 지금 제대로 서지도 못해.”
“그냥 근육이 좀 놀란 거 같은데…….”
“병원 가.”
도준과 대표가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를 듣던 희찬이 도준의 말을 자르고 들었다.
도대체 이도준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희찬은 걷는 것도 힘들어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으면서, 병원에 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이도준의 행동이 지독하게 못마땅했다.
희찬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도준이 입을 꾹 다물었다. 단호함을 머금은 희찬의 눈빛이 제법 매섭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아무런 대화 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도준의 짙은 시선과 희찬의 옅은 시선이 어우러진 공간에 사뭇 긴장이 도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준이 한숨을 푹 쉬었다. 도준에게 희찬의 말은 불가항력과 같은 것이었으므로, 그가 자신의 의지를 굽히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윽고 도준이 매니저와 대표의 부축을 받으며 현장을 벗어났다.
“희찬아, 단독 컷부터 따자.”
“네.”
도준이 없어도 촬영은 지연 없이 진행되어야 했다. 세기의 화제작, ‘눈부신 항해’의 방영일, 채널, 방영 시간이 결정된 지금,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촬영을 마친 희찬은 감독의 옆에 착 달라붙어 도준의 연락을 기다렸다. 시간이 상당히 지체된 탓에 오늘 예정되어 있었던 도준과 함께하는 촬영은 물 건너간 것 같았지만, 그나마 도준의 소식을 가장 빨리 들을 수 있는 곳이 감독일 것 같아 선택한 일이었다.
그리고 희찬의 그런 예상은 정확했다. 누군가의 전화를 받아 든 감독이 희찬을 바라봤다. 희찬의 옅은 눈에서는 도준을 향한 걱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도준이 바로 집으로 간다고 그러네.”
“크게 다쳤대요?”
“아니, 큰 부상은 아니라서 내일 바로 촬영 가능할 거 같대.”
오늘은 무리하지 말고, 누워 있으라 그랬대.
덧붙는 감독의 말에 희찬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전해 오는 소식은 정말 다행이었으나, 괜히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지독한 이도준.”
희찬이 저도 모르게 볼멘소리를 내었다. 도준은 구덩이에 떨어지는 그 찰나의 순간에도 희찬의 허리를 바싹 안은 채로 떨어졌다. 대단한 순발력이었지만, 그걸 칭찬하고 싶지는 않다.
희찬은 제 몸을 함부로 대하는 도준의 태도가 싫었다. 이제는 배우로서 몸을 끔찍이 해야 할 때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저를 더 위하는 것에 짜증이 치밀었다.
감독에게 인사를 남기고 대기실로 돌아온 희찬이 속이 꽉 막혀 오는 답답함에 저도 모르게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바로 옆에서 희찬의 기분을 살피던 매니저가 더 이상 희찬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건네었다.
“형, 저희도 이제 집에 갈까요? 내일 도준이 형 상태 보고 몰아서 촬영한대요.”
“나 내일 다른 스케줄 없나?”
“네. 앞으로 일주일 정도는 드라마 촬영만 하시면 될 거 같아요.”
희찬이 진한 한숨을 내뿜으며 기지개를 켰다. 목을 좌우로 꺾자, 뚜두둑, 뚜두둑 현란한 뼈 소리가 났다.
24시간을 빼곡하게 채우는 바쁜 스케줄은 희찬의 버릇과도 같은 일상이 되었다. 그건 인지할 틈도 없이 스며든 공기와 같았다. 첫 회사를 잘못 만나, 1년 동안 등골이 뽑혔더니 그게 버릇이 되어 도무지 일을 하지 않고는 좀이 쑤셔 참을 수가 없었다.
희찬이 쉬지 않고 일하는 데에는 도준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희찬은 저를 두고 간 도준이 있는 곳이 어디든 쉽게 자신을 볼 수 있길 바랐다. 돌아오겠다는 마음을 잊지 않도록, 네가 와야 할 곳은 여기라는 것을 계속 상기시켜 주고 싶었다. 그렇게 악착같이 스케줄을 소화하다 보면 거리 곳곳에 희찬의 사진이 내걸리고, TV만 틀었다 하면 희찬이 나왔다. 당연히 한국에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지 희찬을 볼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정신없이 몰아치는 스케줄을 소화하다 보면 힘에 부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오곤 했다. 정신을 잠식하듯 도사리는 아득한 어둠에서 희찬은, 꼭 도준을 떠올렸다.
“아으…….”
매니저를 따라 차에 오른 희찬의 입에서 뭉근한 숨이 터졌다. 무겁게 뭉친 숨은 공기 중으로 흩어지지 않고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도준이 크게 다친 거 아니어야 할 텐데.
머릿속을 가득 메운 걱정을 곱씹으며, 시트에 몸을 묻었던 희찬이 무언가 떠오른 듯 번뜩 눈을 뜨고 매니저를 바라봤다.
“너 희경이랑 친하지.”
“네, 친하죠.”
“희경이한테 이도준 집 어디냐고 좀 물어봐.”
아, 똑똑한 장희찬. 그래 이렇게 혼자 답답해할 바에, 직접 도준을 보는 것이 백번 나을 것이다.
희찬은 자신이 떠올린 아이디어가 제법 흡족했다. 그런 희찬과 달리 도준의 매니저를 언급하는 말에 매니저는 난감한 눈을 보였다.
“어…… 도준이 형, 형이랑 같은 빌라 살잖아요.”
“알아, 그러니까 몇 동, 몇 층인지 좀 물어봐.”
“아, 그……. 도준이 형 사생활 진짜 예민해서 그런 거 잘 안 알려 줄 텐데.”
“그러니까 물어보라고.”
희찬은 막무가내였다. 한발도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 희찬의 모습에 매니저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도준의 매니저에게 연락을 취했다.
이도준의 사생활 관리야 이 바닥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절친한 동료에게도 집을 알리지 않는 것은 물론, 전화번호 교환도 잘 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후자는 이번 드라마를 통해 부풀려진 소문이라는 걸 알았지만, 아무튼. 묻는다고 하여 돌아오지 않는 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메시지를 보내는 기분은 조마조마하기만 했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도준의 매니저는 예상대로 답이 없었다. 빌라 주차장에 도착해서도 내리지 않고 희경의 연락을 기다리던 희찬이 답답한 한숨을 뿜어냈다.
“형……. 일단 들어가시면 제가 답장 오는 대로 연락드릴게요.”
“에휴, 그래. 내가 너무 시간 뺏었다.”
“아니에요, 형. 내일 9시 스탠바이라, 6시까지 올게요.”
“응, 푹 쉬어.”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매니저를 더 붙잡아 두는 것도 미안한 일이었다. 결국 포기한 희찬이 차에서 내려 매니저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금방 벗어나는 차를 지켜보며 배웅하던 희찬도 천천히 걸음을 옮겨 공동 현관으로 향하려 발을 돌릴 때, 다시 주차장으로 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혹시나 하고 뒤로 돌아보자 익숙한 곽 대표의 차가 부드럽게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이도준이다.
희찬의 얼굴에 전에 없던 환한 미소가 걸렸다.
“대표님!”
“어, 희찬아. 너 이제 끝나서 집에 온 거야?”
“네, 단독 컷 땄어요. 해인이는 좀 괜찮아요?”
희찬이 대표와 인사를 나누는 동안 도준이 힘겹게 차에서 내렸다. 여전히 서 있는 것이 버거운 듯, 겨우 차에서 내린 도준은 어정쩡한 자세로 선 채였다. 희찬은 얼른 도준의 팔을 제 어깨에 두르고서 방긋 웃었다.
“어어, 잘됐다. 희찬아, 내가 지금 급하게 일이 있어서, 네가 도준이 집까지 좀 올려 줄래? 시간 있으면 이거, 허리에 좀 발라 주고.”
“아, 아니, 대표님. 제가.”
대표가 건네는 약을 받으려는 도준의 손을 희찬이 찰싹 소리 나게 내리쳤다. 따끔한 마찰에 도준이 일순 인상을 찌푸렸지만, 희찬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네! 제가 할게요.”
“제가 해도 되는데.”
“응, 안 돼.”
난감해 보이는 도준과 그 옆에서 방긋 웃는 희찬의 모습이 대비되어 참 재밌었다. 대표는 흥미로운 미소를 만면에 피운 채로 두 사람을 즐겁게 바라보았다.
다른 배우 같았으면 매니저에게 맡기고 홀랑 일을 보러 갔겠지만, 도준이어서 그러지 못했다. 매니저를 보내고, 도준과 돌아오는 동안에도 줄곧 일그러진 도준의 표정을 보며 착잡하던 중이었는데, 그 옆에 희찬이 있어 다행이었다.
제 몸을 희찬에게 기댄 도준이 제법 간절한 눈으로 ‘가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중이었으나, 오늘은 그 말을 들어줄 수 없다. 대표는 흔쾌히 손을 흔들어 보이고, 차에 올라 급하게 사라졌다.
도준을 부축한 희찬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도준은 대표보다 높아진 희찬의 어깨높이가 편해, 저도 모르게 몸을 기댄 채로 느릿한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적막이 앉았다. 긴장을 느낀 도준이 목 근육에 힘을 주었다가 풀기를 반복하자, 탐스러운 그의 울대가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그를 가만히 쳐다보던 희찬의 눈이 다시 정면을 향했다. 엘리베이터 문에 꽉 들어찬 두 사람의 모습은 퍽 다정해 보였다.
“너 여기 살 줄 알았어.”
“어떻게?”
“그냥. 여기 사는 게 우리 꿈이었잖아.”
희찬의 명랑한 말에 도준의 입꼬리가 멋들어지게 치솟았다. 기분 좋은 미소를 숨기려, 고개를 푹 숙이자 허리 근육이 땅겨 아릿한 통증이 도사렸다. 그렇다고 그 통증이 도준의 입가에 드리운 미소를 걷어 낼 수는 없었다.
맞다, 비싼 값을 자랑하는 이 빌라는 우리의 꿈이었다.
[우리 나중에 저기에 살자.]
언젠가 임 감독의 사무실에 갔던 날, 회사 근처의 근사한 빌라를 보며 희찬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냥 멋있는 집을 아무거나 집어 한 말이었겠지만, 그건 두 사람의 가슴에 꿈으로 남았다.
뒤이어 희찬과 헤어진 후, 희찬에게 다시 돌아갈 때는 근사한 집 하나 정도 해 가고 싶었던 어린 마음도 떠올랐다. 매일 이 빌라의 시세를 확인하며 좌절하던 그때가 어느새 아득한 과거가 되었다.
돈이라는 게 참 간사하다.
금방 손에 쥐어지는 듯했다가, 훅 빠져나가는 바닷가의 모래알 같았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지금에야 할 수 있는 생각이라, 도준의 입에서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데뷔하고 돈 모이자마자 여기로 이사 왔어.”
“그랬어? 나도 그랬는데. 근데 나는 너 한 번도 못 봤어.”
“나도 너 못 봤어.”
그건 그것대로 참 신기한 노릇이다.
몇 가구 되지 않는 이 빌라에서 온갖 주민을 다 마주쳤는데, 정작 두 사람은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것이 참 신기했다.
도준이 사는 층에 다다라, 엘리베이터에서 경쾌한 알림음이 났다. 엘리베이터와 현관문이 곧장 연결된 구조의 빌라는 엘리베이터 내부에서 현관 비밀번호를 입력해야만 연결된 현관문도 완전히 열리는 형태였다.
도준이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려 뼈마디가 굵은 손가락을 뻗었다. 그런 도준의 손가락을 희찬이 거머쥐었다.
“아니.”
“응?”
“내가 누를래.”
도준의 집 비밀번호를 들은 적은 없었지만, 희찬은 당당했다. 그에 도준이 흥미롭게 웃었다.
‘061748’
두 사람의 생일을 조합한 번호, 두 사람이 어릴 때부터 줄곧 사용하는 비밀번호였다.
그리고 정답이었다. 경쾌한 멜로디와 함께 현관문이 열리자, 희찬이 만족하는 듯 환한 웃음을 띠었다.
처음 들어서는 도준의 집에서는 익숙한 향이 났다. 막연하게 혼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깔끔한 풍경에 희찬은 연신 감탄을 터뜨렸다.
도준의 집은 세련되기 그지없었다. 예전의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군더더기 없는 인테리어에서 도준의 깔끔한 성격이 그대로 묻어나는 듯했다.
“이야, 너 지금도 엄청 깨끗하게 하고 사는구나?”
희찬은 넋을 놓은 채로 눈에 들어오는 전경을 샅샅이 훑었다. 저도 누구 못지않게 잘 꾸미고 지낸다고 생각했건만, 이도준은 인테리어에 제법 소질이 있어 보였다.
대체로 화사한 톤으로 꾸며진 내부는 최소한의 아이템으로 최대의 효과를 보이는 듯했다. 굳이 치렁치렁 꾸미지 않아도 근사함을 자아내는 이도준처럼 말이다.
희찬의 옆에 선 도준의 인상이 점점 구겨졌다. 서 있으려니 허리에서부터 찌릿, 통증이 울리는 탓이었다. 더는 서 있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도준은 희찬이 차분해지기를 기다리려던 것을 그만두고, 희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나 서 있기 힘들어.”
“아, 맞다. 미안.”
내가 이도준 집에 처음 와 봐서, 조금 신이 났네?
장희찬은 당연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잘도 해 댔다. 도준은 대꾸하기도 지쳤다는 듯, 희찬을 향해 대충 턱짓을 하며 그를 재촉했다. 희찬이 움직일 때마다 무거운 신음을 터뜨린 도준이 느릿한 동작으로 천천히 소파에 누운 후에는 힘겨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희찬은 도준을 소파에 눕혀둔 채로 약 봉투를 뒤적거렸다. 병원까지는 갈 필요 없다던 도준의 말대로 그저 근육이 놀랐을 뿐인 모양이다. 하얀 비닐봉지 속에는 파스와 연고, 찜질 팩만 들어 있었고, 그것들은 낯설지 않았다. 봉투를 살피던 희찬의 표정이 한결 개운해졌다. 걱정이 도사려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덕이었다.
“저번에 네가 사 온 거랑 비슷하네.”
희찬의 가벼운 말 한마디에 두 사람은 동시에 같은 날을 떠올렸다. 어째, 희찬이 발목을 다쳤을 때와 상황이 역전되었다. 다리를 다쳐 소파에 앉아 있던 희찬 대신 소파에 누운 도준과 그런 희찬의 발을 짓궂게 주무르며 놀리던 도준 대신 슬그머니 도준의 위에 올라타는 희찬.
도준은 문득 몰려오는 불안함을 무시하지 못했다. 그제야 ‘그때 좀 부드럽게 잘해 줄 걸 그랬다.’라는 부질없는 후회가 밀려 나왔다.
“옷 좀 올려봐. 파스 붙여 줄게.”
“나 아직 안 씻었는…….”
“아는데, 일단 붙여야지 어떡해. 아니면 뭐, 씻겨 줘?”
아니, 절대 그럴 수는 없지.
도준은 짓궂은 희찬의 말에 부리나케 티셔츠를 걷어 올렸다. 소파 쿠션을 가슴에 품고, 엎드려 누운 도준이 허리를 드러내자, 희찬의 손가락이 탄탄한 기립근을 쓸어내렸다.
예민하게 닿는 자극에 도준이 몸을 움찔거렸다. 힘이 실린 상체의 근육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유심히 관찰하던 희찬은 흥미로운 듯, 손가락을 세워 움푹 파인 척추를 따라 훑어 내렸다.
“아, 하지 마.”
“내가 뭘?”
“너 변태야?”
“변태라고 한들, 내가 너한테 뭘 하겠어? 아직 나한테 오지도 않은 이도준인데.”
요즘 희찬의 말에는 대체로 뼈가 있다.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으나 명치를 치고 드는 듯한 아픈 말에 도준이 입을 꾹 다물었다. 도준은 아예 입을 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애꿎은 쿠션에 얼굴을 파묻었다.
찰싹!
경쾌하고 날카로운 마찰음이 공간을 울렸다.
“아!”
희찬이 도준의 허리를 아프게 내리쳤다. 따가운 마찰에 도준이 고개를 바짝 들려다 말고 다시 푹 수그렸다. 목덜미에 힘을 주기 무섭게 허리가 아려, 목을 들 수 없었다.
통증이 가시길 기다리던 도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희찬을 쳐다봤다. 희찬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해사한 낯으로 도준을 마주했다. 도준의 검은 두 눈에서 ‘때리기는 왜 때리냐.’라는 말이 읽히는 듯했다. 희찬은 조금 더 짙은 미소를 띠었다.
“얄미워서 때렸다.”
“아, 너 그냥 파스 빨리 붙이고 가.”
“이게 지금, 호의를 베푸는 사람한테 보일 태도야? 어? 해인이 안 되겠어.”
도준을 무겁게 짓누르던 무게가 사라졌다. 희찬은 파스를 붙여 줄 생각이 없는지, 파스와 찜질 팩을 도준의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밀어 두고서 본격적으로 집 안을 돌아다녔다.
제일 먼저 향한 곳은 현관 왼편으로 난 통로에 있는 방이었다. 굳게 닫힌 문 중 하나를 열자, 수많은 옷장이 센스 있게 배열된 화려한 드레스룸이 희찬을 반겼다. 티셔츠와 바지가 계절과 분위기에 따라 빼곡하고 가지런히 정리된 옷방에 희찬이 입을 떡 벌렸다. 드레스룸 한가운데에는 고가의 액세서리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근엄한 자태를 뽐내는 중이었다.
“우와.”
분명 저도 이런 옷방을 갖고 있는데, 이상하게 탄성이 터졌다. 희찬은 한눈에 보이는 도준의 재력이 문득 낯설게 느껴졌다. 그의 몸값이야 굳이 상기하지 않아도 잘 아는 바였지만, 이렇게 가시적으로 보게 될 것은 구태여 상상하지 않았기에 더욱 크게 닿았다.
드레스룸을 벗어난 희찬은 맞은편에 있는 다른 방문을 열었다. 서재로 꾸며 둔 방에는 온 벽에 웬 책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필독서부터 에세이까지, 열을 맞춰 정리된 광경에 이번에도 희찬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도준과 책.
희찬에게는 그의 재력만큼 어색한 것이었다. 특유의 종이 냄새에 짓눌리는 기분은 달갑지 않다. 잠시 인상을 찌푸렸던 희찬이 고개를 빙 둘러 방 안을 살폈다. 최근 영어 공부를 시작한 건지, 테라스를 등진 책상 위에는 고등학교 영어 문제집이 펼쳐져 있었다. 삐뚤빼뚤한 도준의 글씨가 반가워, 희찬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아, 그만하고 와.”
도준이 부러 투정을 부렸다. 희찬이 온 집을 샅샅이 헤집는 것이 퍽 민망했고, 또 쑥스러웠다. 도준은 여기저기 어느 한 곳도 빼놓지 않고 분주하게 들락거리는 희찬의 발을 잡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허리만 아니었어도, 벌써 손목을 움켜쥐고서 소파에 눌러 앉혀 뒀을 것이다.
아, 허리가 아니었다면 장희찬이 집에 들어올 일도 없었겠지.
“인수야, 나 좀.”
생각을 곱씹던 도준이 다시 희찬을 불렀다. 도준의 묵직한 음성이 공간을 울렸지만, 희찬은 도준의 목소리를 가볍게 못 들은 체했다.
경쾌하기만 한 희찬의 걸음을 지켜보던 도준도 금세 희찬의 의중을 알아챘다.
장희찬은 집 구경이 끝나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도준은 다시 쿠션에 얼굴을 처박은 채로 끙, 무거운 신음을 흘렸다. 그냥 입원을 한다고 할 걸 그랬다. 차라리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내일 바로 출근하는 것이 백번 나을 뻔했다.
“해인아!”
후회에 후회를 거듭하는 도준의 귓가에 희찬의 맑은 음성이 들렸다. 방금까지 머릿속을 빼곡하게 메우던 갖가지 상황들이 모조리 흩어졌다. 도준이 아주 느릿하게 고개를 꺾어 희찬을 바라봤다. 희찬이 향한 곳은 어느새 거실을 지나쳐 오른편의 침실 앞이었다.
“여기 네 침실이야?”
“응.”
도준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희찬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제가 가진 모든 것은 곧 희찬의 것이었으므로, 도준은 희찬을 말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와……. 진짜 침대밖에 없네. 너 있던 호텔 방이랑 똑같이 생겼다.”
“잘 방에 침대만 있으면 됐지.”
“그럼 여기는?”
“거기도 옷방이야. 인수야, 나 진짜 허리가 아파.”
결국 도준이 직접 아픔을 언급한 후에야 희찬이 걸음을 멈추었다. 제 입에서 ‘아프다.’라는 언급이 나오는 일이 드문 만큼, 희찬에게도 타격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도준이 계산적으로 뱉은 말이었다. 도준의 예상대로 희찬이 한껏 굳은 표정으로 터벅터벅 도준에게 다가왔다.
희찬은 도준이 누운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도준의 엉덩이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로 거실의 전경을 둘러봤다. 환한 빛이 곧장 떨어지는 거실의 모습이 퍽 보기 좋았다. 커다란 평면 TV를 두고, 그 아래에는 벽난로 모양의 에탄올 난로를 가져다 둔 것이 어디 하나 튀는 곳 없고, 어디 하나 어색한 곳 없이 완벽하게 조화로운 인테리어였다.
도준과도 참 잘 어울리는 공간이 분명했으나, 이 집은 어딘가 냉랭한 기운을 머금었다. 분명히 도준이 지내는 공간인데, 생활흔이 거의 묻어나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 모습은 먼 옛날, 도준이 떠난 후의 집과 같은 분위기였다.
언제라도 떠날 준비를 마친 듯한 모습.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희찬이 쯧, 혀를 찼다. 가슴이 저릿하고 아픈 것은 애써 아랫입술을 씹어 무는 것으로 숨긴 채였다.
희찬은 못마땅한 표정 그대로 얼굴을 돌려 도준을 쳐다봤다. 쿠션에 얼굴을 처박은 도준의 잘생긴 뒤통수를 어루만지고 싶었으나, 이도준은 아직 제게 오지 않았다. 입술을 꾹 말아 문 희찬은 힘겹게 욕망을 다스렸다.
“너 돈 벌더니 보는 눈이 좋아졌다.”
“대표님이 도와주신 거야.”
“그래? 역시 아는 만큼 보이나 봐.”
“……새삼스럽네.”
그래, 새삼스럽다.
옛날의 우리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집에서, 가격만 들어도 ‘헤엑!’ 하며 질겁했을 비싼 가구들을 들여놓고, 그때의 표현으로 ‘떵떵거리며’ 사는 지금이 문득 참 새삼스럽다.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집이고, 차고 원하는 것을 턱턱 살 수 있는 지경이 되었으나 이상하게 이 생활은 행복과 거리가 멀었다.
그 이유는 아마…….
희찬과 도준의 시선이 마주했다. 같은 생각을 하는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드럽게 얽혀들어 서로를 탐했다.
도준은 무겁게 내려앉는 분위기를 기가 막히게 알아챘다. 희찬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쯤이야, 희찬이 제 속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도준 역시 훤히 보이는 것이라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이제 그만하고, 파스 대충 얹어 주고 얼른 가. 너 내일 촬영 안 해? 아침부터 한다던데.”
“맞아. 나 여기서 자고 갈까? 피곤한데.”
“나가.”
어쭈, 단호하기가 작두나 진배없다.
희찬이 뚝 떨어지는 도준의 거절에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괜히 도준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장난을 걸었다. 장희찬은 끊임없이 틈을 노렸고, 이도준은 조금도 틈을 주지 않았다. 타격감 좋게 치고 빠지는 두 사람의 대화는 뭐든 뚫을 수 있는 창과 무엇이든 막아 내는 방패의 싸움 같았다.
드디어 희찬이 몸을 벌떡 일으켜 도준의 다리 위에 올라탔다. 탄탄한 허벅지에 앉아, 도준의 가지런한 허리를 주무르자, 곧게 폈던 도준의 미간이 삽시간이 일그러졌다.
“아…….”
뭉근한 고통이 서린 신음이 터져 거실을 묵직하게 울렸다. 듣는 것만으로도 아픈 감각이 전이되는 듯해, 희찬이 어깨를 움츠렸다.
“어디가 아픈 거야? 정확하게 짚어 봐.”
“여기.”
도준은 희찬의 요구에 천천히 팔을 들어 엉덩이와 허리 사이 어딘가를 짚었다.
“그럼 바지 조금만 내릴게.”
희찬의 친절한 예고에 도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도준의 승낙이 떨어지자 희찬이 슬금슬금 도준의 바지를 내렸다. 이내 탄탄한 엉덩이골이 드러났다. 희찬이 허리와 이어지는 부근의 골반을 꾹 누르자 도준의 몸이 크게 튀었다.
“아, 아. 누르지 마.”
“엄살은.”
아슬아슬하게 드러난 도준의 엉덩이와 허리 사이에 파스를 붙이는 희찬의 손길이 신중하기 그지없다. 희찬의 손이 조심스러우면 조심스러울수록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게 다 느껴졌다. 도준은 베개를 꼭 그러안은 채로 차가운 파스가 허리에 붙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희찬의 손이 도준의 허리를 가로질러 슥슥 문질렀다. 만족스럽게 붙었는지, 그 손놀림이 퍽 가벼웠다.
“다 붙였어.”
“고마워.”
희찬은 도준의 탄탄한 허리 위에 파스를 세 장이나 연이어 붙였다.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나란히 붙은 파스가 마음에 들어 허리 위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희찬을 배웅하려 일어나려던 도준이 꼬리뼈에서부터 목 뒤까지 찌르고 드는 통증에 다시 풀썩 엎어졌다.
“일어나지 말고 조금 더 누워 있어.”
희찬이 다시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보려는 도준의 어깨를 꾹 누르자, 도준은 힘을 쓰지도 못하고 순순히 쓰러졌다.
희찬의 손에 도준의 바지가 조금 더 내려갔다. 도준은 예상치 못한 전개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틀어 희찬을 쳐다봤다.
“야, 뭐 하는…….”
“아, 다른 거 안 해. 마사지해 줄게.”
희찬이 다시 도준의 어깨를 꾹 눌렀다. 도준은 저항도 하지 못한 채로, 희찬의 아래에 깔려 불안한 호흡을 거듭했다. 희찬이 조금씩 도준의 바지를 내려 엉덩이 중앙부에 바지를 걸쳤다. 예나 지금이나 탄탄하고 예쁜 엉덩이에 당장에라도 입을 맞추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으나 희찬은 큰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기를 반복하며 자신을 다스렸다.
희찬은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짓궂게 놀리려는 거 아닐까, 걱정한 것과 달리 주먹을 쥔 희찬은 아픈 부위를 정성스럽게 마사지했다. 그에 도준도 편안하게 힘을 풀고 누워 희찬이 하는 대로 내버려 뒀다. 그러다 유달리 아픈 부위에 손이 닿을 때면 저도 모르게 앓는 신음을 터뜨렸다.
“읍…….”
“아파?”
“응, 아, 씁…….”
수년의 공백이 있었음에도, 서로에게 몸을 보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도준은 어느새 희찬의 손에 제 몸을 맡기고서 아픈 부위를 손으로 툭 건드렸다.
“여기가 아파.”
희찬은 도준이 어루만지는 곳으로 손을 옮겼다. 힘을 실어 꾹꾹 누르자, 도준의 입에서 연신 아픈 신음이 새어 나왔다. 쿠션을 부여잡은 도준의 손등에 시퍼런 핏줄이 어지럽게 얽힌 채로 불끈거렸다. 도준의 잘생긴 이마에도 굵은 핏줄이 솟았다. 턱 아귀가 맞물려 두드러진 교근을 보는 희찬은 점점 말수가 줄었다.
성격상 아픈 것을 드러내는 일도 드문 이도준인데, 게다가 제 앞에서는 꼭 아픈 것을 숨기던 도준이었는데 이렇게 여과 없이 아픈 것을 보여 주는 모습에 복잡 미묘한 기분이 도사렸다. 희찬이 도준의 엉덩이와 허리 주변을 마사지하던 손을 들어 도준의 턱을 거머쥐었다.
“해인아.”
“응.”
“아까처럼 몸 함부로 쓰지 마.”
“…….”
희찬이 건넨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 어투는 단호했다. 도준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다 하고 싶은 연기 오래 못 해. 나는 너 액션하는 거 좋던데.”
“응…….”
“……다른 말도 하고 싶은데, 그건 네가 오면 그때.”
할 말과 할 일을 모두 마친 희찬이 가뿐하게 도준의 위에서 내려왔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옷을 죄 벗겨서 이렇고, 저런 것들을 하고 싶었지만, 도준의 때를 기다리기로 한 이상 제 마음대로 행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희찬은 그 모든 것을 접어 두는 대신 도준의 얼굴이나 가까이에서 보기로 했다. 도준의 눈앞에 제 얼굴을 가져다 대고 한참이나 두 눈으로 도준의 잘생긴 얼굴을 뜯어 눈에 담았다. 웬일로 도준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도준의 검은 눈동자에 비친 희찬의 모습은 해사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었다.
희찬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가, 허공에서 멈칫했다. 뻗었던 손을 얼른 말아 쥐고, 벌떡 일어난 희찬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름 아닌.
“가야겠다.”
집에 간다는 소리였다.
도준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랜만에 가만히 희찬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쿵쿵 요동치는 탓에 숨이 가쁘던 차였다. 마음 같아서는 몸을 일으켜 배웅하고 싶었으나, 여전히 말을 듣지 않는 몸이라 도준은 그저 눈으로만 희찬을 좇았다.
“배웅 못 해, 얼른 가서 자. 피곤하겠다.”
“응. 너도 조금만 그러고 있다가 좀 괜찮아지면 씻고 자.”
“그래, 잘 자.”
“내일 봐.”
희찬이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바지를 추스르지도 못한 도준은 엉덩이를 훤히 내놓은 채로 고개만 들어 희찬을 배웅했다. 저벅저벅 걷는 희찬의 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이 열리는 전자음이 들리더니, 이내 다시 닫히는 소리가 났다.
“후으…….”
희찬이 사라졌을 뿐인데 집 안에 무거운 적막이 도사렸다. 어색하지도 않은 감각이라, 도준은 쿠션을 끌어안고 눈을 질끈 감았다.
검은 시야 틈틈이 희찬의 야무진 손길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불현듯 머리털이 곤두섰다. 전신에 도사리는 달갑지 않은 공기에 도준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울대가 울렁거릴 정도로 크게 침을 꼴깍거리는 도준은 두 눈을 감은 채로 희찬이 집 안 곳곳을 사뿐거리며 돌아다니던 것을 떠올렸다.
이내 까만 시야 가득 희찬의 화사함이 내려앉았다. 방문을 열 때마다 탄성을 터뜨리던 모습, 거실을 둘러보며 환하게 웃던 모습, 침실을 보더니 발을 동동 구르던 모습들이 연이어 떠올랐다. 비로소 도준의 숨도 가지런해졌다.
“……씻어야 하는데.”
굵고 낮은 도준의 목소리가 응어리가 되어 떨어졌다.
희찬의 앞에서 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가볍게 행동하려 노력했지만, 이제는 정말로 자신이 그리던 ‘때’가 코앞에 온 것 같았다.
희찬의 모습이 다시 눈앞에 펼쳐졌다. 한 편의 영화처럼 그려지는 희찬의 모습에 가슴이 둥둥, 울리는가 싶더니 긴장이 서려 마음이 무겁게 짓눌렸다.
들쑥날쑥, 심란한 마음과는 별개로, 결국 희찬을 떠올리면 피어오르는 행복이라, 금세 잠이 몰려왔다. 도준은 아픈 허리를 짚고, 겨우 일어서서 바지를 추켜올렸다. 이대로 거실에서 자다가는 내일 아침에도 꼼짝도 못 할 수 있으니, 천천히 침대로 향했다.
“아흐으, 아…….”
침대에 눕는 데에만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씻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지만, 도준은 지금 이 타이밍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희찬과 몇 분 붙어 있었다고, 잠시간 도사렸던 공포도 금세 사라졌다. 그뿐만 아니라, 오랜만에 약 없이 잘 수 있을 거라는 기대까지 생겼다.
침대에 누운 도준이 한참 동안 꼼지락거렸다. 아주 느린 행동의 연속이었지만, 꾸준히 움직여 옷을 벗은 도준의 입가에는 만족이 드리웠다. 비로소 속옷만 남았을 때, 도준은 아주 편안한 표정으로 이불을 목까지 끌어 덮었다.
푹신한 침대와 포근한 이불, 그 사이에 파묻힌 기분은 아늑하기만 했다.
*
단정한 흰 티에 검은 셋업을 갖춰 입은 도준이 가벼운 걸음으로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바다였다. 속이 뻥 뚫리는 듯한 상쾌함과 바다 특유의 짠 내음이 가득한 광경에 머리가 맑아지는 것과는 별개로 이제 막 봄에 들어선 날씨에 바닷바람은 차가웠다.
도준은 패딩을 걸친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로 저벅저벅 걸음을 내디뎠다. 해변에는 여러 촬영 장비가 갖춰져 있었다. 부산한 사람들 틈에서 가지런한 인사를 나누며 언제봐도 좋은 바다의 풍경을 마음에 담았다.
오늘은 드라마 촬영이 아닌, 눈부신 항해의 포스터를 촬영하는 날이다. 기껏 메이크업에 헤어까지 다 하고 왔는데, 세찬 바람이 머리를 자꾸만 핥아 올렸다. 몸을 돌려 바람을 등져 봤지만, 바람은 도준을 약 올리려는 듯, 도준이 움직이는 대로 방향을 바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에 도준의 인상이 한껏 찌푸려졌다. 이러면 촬영 전에 또 머리를 만져야 하고, 그럼 또 마네킹처럼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사투를 벌이는 도준의 모습이 제법 힘겨워 보였던 걸까. 그를 지켜보던 매니저가 손에 우산을 쥐고 나타났다.
“형! 이거 쓰면 좀 괜찮을 거 같아요.”
도준의 옆에 선 매니저가 팡! 소리 나게 우산을 펼쳐 금방 도준의 머리를 바람으로부터 지켰다. 우산 아래에 서자 바람을 타고 정처 없이 흩어지던 머리카락이 차분해졌다. 도준의 입가에 비로소 안정된 웃음이 피었다.
그러던 중 제 곁에 서는 인영을 느낀 도준이 두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도준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친근한 모습의 임 감독이 서 있었다. 일순 쿵쾅거리며 거칠게 뛰던 심장이 삽시간에 편안해졌다. 도준은 남모를 한숨을 속으로 삼키고, 애써 환하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응, 안녕하지. 허리는 좀 어때, 괜찮아졌어?”
“네, 이제 거뜬합니다.”
“다행이네, 다행이야. 근데 너…….”
도준과 같은 방향을 보고 섰던 감독이 몸을 틀어 도준을 바라봤다. 큰 키에 다부진 몸이 잘 깎아 놓은 조각상 같았다. 그 위에 멋진 옷가지를 걸쳐 놓으니, 화려하기가 비할 곳이 없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감탄을 터뜨렸다.
일단은 얼굴부터가 이도준이니까.
도준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에 악의는 읽히지 않았는데, 감독은 오래간 말이 없었다.
“너는 진짜 인형 같다, 야.”
생소한 감독의 말에 도준이 저도 모르게 눈썹을 휘어뜨렸다. 감독의 말이 의아하다. 잘생겼다는 말은 숱하게 들었어도, ‘인형 같다.’라는 표현은 또 처음이었다.
“예쁘다는 말씀이세요?”
“예쁜 인형만 있는 건 아니잖아. 아무튼, 났다는 뜻이야.”
“하하, 감사합니다.”
“뭘 나한테 감사해, 어디 계신지는 몰라도 낳아 주신 부모님한테 감사해야지. 저기 난 놈 하나 더 오네.”
온정이 넘치는 감독과 다정한 대화를 나누던 도준이 감독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항상 정해진 시간에 임박하여 도착하는 희찬이 차에서 폴짝 뛰어내린 후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것이 보였다.
인형은 저게 진짜 인형이지.
도준이 저도 모르게 싱긋 웃었다.
찬찬히 다가오는 희찬 역시 도준과 다르지 않은 차림이었다. 흰 티셔츠에 네이비 셋업을 입은 희찬은 오랜만에 보는 바다에 신이 난 듯, 평소보다 훨씬 팔랑거렸다.
그런 희찬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세상 만물이 희찬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었다. 청명한 하늘은 희찬을 밝히기 위해, 단단한 모랫바닥은 희찬을 지탱하기 위해 아주 오래전부터 신이 다져 놓은 기반 같았다. 저 멀리서 들리는 바다의 넘실거리는 파도 소리마저 희찬에게 닿기 위한 아우성만 같았다.
도준은 희찬이 가까이 다가오는 동안에도 도무지 희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새하얀 머리칼은 그새 탈색을 또 했는지, 이전보다 더 밝은 빛을 내고 있었다. 혹시 두피가 상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도사리기 무섭게 도준의 눈앞에 하얀 손바닥이 들이밀려 도준의 시선을 흩트렸다.
“왜 이렇게 멍해? 언제 왔어?”
“방금.”
희찬은 당연히 제 자리라는 듯 도준의 옆에 섰다. 도준은 구태여 희찬을 피하지 않고, 우산을 희찬 쪽으로 기울여 줬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의 시선이 같은 곳으로 향했다. 맑고 푸른빛을 띤 바다가 출렁거리는 모양이 커다란 울림을 안겼다. 이따금 큰 파도가 잔물결을 집어삼켜 하얀 거품이 일었다. 가만히 그를 보고 있노라면 넘실거리는 짙은 물결에 답답한 마음이 뻥 뚫리고 잔잔한 안정이 도사리는 듯했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폐부 깊이 숨을 들이켰다. 바다 특유의 비리한 냄새와 봄의 향이 가득한 상쾌함이 가슴 가득 들어찼다. 그리고 후, 길게 내뱉을 때는 가슴이 답답한 일들이 모두 물러나는 듯했다.
“감독님! 저 바다 사진 찍어서 올리고 싶은데, 오늘 눈부항 포스터 촬영했다고 올려도 돼요?”
“응, 그럼.”
감독의 승낙이 떨어지기 무섭게 찰칵, 찰칵 경쾌하고 날카로운 셔터 소리가 연신 울려 퍼졌다. 도준은 가만히 선 자리에서 희찬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양을 시선으로 좇았다.
작은 점이 될 때까지 멀어져 가던 희찬이 금방 이쪽으로 달려왔다. 가벼운 몸놀림이 그저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일까. 변하지 않은 그의 해맑은 면모가 좋아, 도준의 입가에는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 있었다.
희찬은 바다를 찍는 척, 이따금 도준을 찍기도 했다. 바다를 등지고 선 도준의 모습은 어떻게 찍어도 근사했다. 굳이 각도를 잡지 않아도, 구태여 어떠한 포즈를 취하지 않아도 한 폭의 그림이 완성되어 갤러리에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 마음에 쏙 들었다.
도준이 슬그머니 걸음을 옮겨 연신 사진을 찍는 희찬의 곁으로 향했다. 뭘 그렇게 찍는 건지, 쉬지 않고 셔터를 눌러 대는 희찬이 신기했다.
“너 원래 사진 찍는 거 좋아했었나?”
“아니, 딱히.”
“근데 왜 이렇게 찍어.”
“바다는 잘 못 오니까?”
도준은 풀썩, 쪼그려 앉아 흥미 없는 표정을 지었다. 도준이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로 희찬을 올려 보자 희찬도 금세 도준의 옆에 같은 자세로 앉았다.
도준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생긋 웃는 희찬 덕분에 도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싫으면 옆에 있지 않으면 될 것을, 굳이 희찬의 곁으로 찾아와 희찬의 옆에 붙어서 쑥스러워하는 제 꼴이 문득 우스웠다. 그런 도준의 시야에 새하얀 휴대폰이 들이밀렸다. 휴대폰 화면에는 희찬과 도준의 얼굴이 나란히 들어찼다.
“사진 찍자.”
“너 아까 계속 찍었잖아.”
도준이 몸을 휙 꺾어 화면 안에서 벗어났다.
“아니, 같이.”
“이따 포스터 찍을 건데 뭘 또.”
“알면서 튕기는 거 적당히 해, 재미없어.”
희찬이 도준의 귀를 잡아 제 얼굴 옆으로 끌어당겼다. 도준은 정말로 그저 튕겼던 건지, 순순히 희찬의 옆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희찬이 길게 뻗은 팔 덕분에 두 사람의 얼굴 주변으로 상쾌한 풍경이 드리웠다.
이윽고 몇 번 화면이 깜빡거리며 사진이 담겼다. 도준의 표정은 대체로 변하지 않았다. 제 옆에서 세상을 얻은 것처럼 해사한 미소를 지어 대는 희찬을 화면을 통해 보고 있자니, 괜한 수줍음이 몰려와 도무지 표정을 바꿀 수 없었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건진 듯, 희찬이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몇 번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희찬의 손짓에 이어 뒷주머니에 넣어 둔 도준의 휴대폰이 징징, 울렸다.
“보내 줄까?”
희찬의 말에 도준이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 속에는 이미 희찬이 보낸 사진이 주르륵 떠 있었다.
“보내 놓고, 뭘.”
도준은 그 뒤로도 한참이나 희찬에게 붙잡혀 사진을 찍었다. 아니, 정확히는 찍혔다. 희찬과 얼굴을 마주 대고 셀카를 찍는가 하면, 희찬의 요구에 희찬을 찍어 주기도 했다.
“야, 근데 너 휴대폰 좀 줘 봐.”
“또 왜.”
“아, 거 토 좀 달지 말자.”
“어, 너는 이유를 설명하자.”
지지 않고 받아치는 도준의 말과 달리 도준의 휴대폰은 순순히 희찬의 손에 들어왔다. 어렵지 않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희찬이 곧 마음에 드는 듯 휴대폰을 다시 도준에게 건네었다.
도준은 당장 잠금을 풀고, 희찬이 만진 것을 찾아보려 했다. 하지만 웬걸, 도준의 눈에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뭐 했어?”
“이따가 봐.”
“뭔데.”
“아, 이따가 보라고.”
두 사람이 꼭 붙어서 아웅다웅하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메이킹 카메라가 집요하게 두 사람을 쫓아다녔다. 배우들의 케미스트리가 중요한 드라마이니만큼, 드라마 중반부부터 촬영을 시작한 메이킹은 어떻게든 두 사람을 담아내고자, 무던히도 애쓰는 중이었다.
“얘들아, 이제 일하자.”
저 멀리서 두 사람을 부르는 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동시에 일어섰지만 도준은 여전히 휴대폰을 보는 중이었다.
“얘는 뭘 한 거……야…….”
도준의 말이 점점 느려지더니, 이내 큰 웃음이 터졌다. 도준의 웃음소리를 들은 희찬은 마치 도망이라도 치듯 도준에게서 멀어졌다. 누가 봐도 민망함을 느끼는 모습이었다.
‘장희찬’ 세 글자로 단출하게 저장해 뒀던 희찬의 이름이 ‘짱’으로 바뀌어 있었다. ‘장희찬’으로 저장된 제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그새 이름을 바꿔 둔 장희찬이 못내 귀여웠다.
아, 씹어 물고 싶다.
도준은 희찬 대신 아랫입술을 잘근 씹어 문 채로 얼른 걸음을 놀려 희찬과 보폭을 맞추었다.
“너 진짜 앙큼하다.”
“그래서, 다시 바꿨어?”
희찬이 매섭게 눈을 치켜떴다. 도준은 바꾸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이라도 시켜 주려는 듯, 제 휴대폰을 켜서 희찬의 눈앞에 보여 줬다.
“아니.”
희찬의 입가에 다시 행복이 피었다.
두 사람은 발을 잡아먹는 푹신한 모래를 카펫 삼아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모든 세팅이 완료된 촬영 현장이 두 사람을 반겼다.
“옷 자주 갈아입어야 할 거야. 생각보다 물이 많이 들어와서 옷이 젖을 거 같네.”
“네.”
“일단 저쪽에 간이 탈의실 설치해 뒀고, 그 옆에 전기도 끌어다 놨으니까 거기서 머리 만지고 하면 될 거 같아. 물이 차서 감기 걸릴 수 있으니까 최대한 빨리빨리 하자고.”
“네!”
“그럼 시안 1번부터 먼저 촬영 갈게요!”
촬영 감독의 우렁찬 목소리에 도준과 희찬이 시안을 확인했다. 누군가 졸라맨으로 그려 둔 구도를 눈으로 익히고, 몸으로 표현하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다.
솨아, 쏟아지는 시원한 바람 소리에 찰칵찰칵, 날카로운 셔터 소리가 얹혔다.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와 이따금 우는 갈매기 울음소리가 울리는 현장은 진지하고 또 온화했다.
다양한 구도로 오랜 시간 촬영하다 보니 조금씩 한기가 몰려왔다.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두 사람은 젖은 머리를 몇 번이나 말리고, 다시 만지기를 반복했다. 머리가 젖는 만큼 젖는 옷을 갈아입기도 몇 번, 드디어 마지막 시안이 두 사람의 눈앞에 들이밀렸다.
“자, 얼른 이것만 촬영하고 옷 편하게 갈아입자.”
“해인이 여기 누워요? 감기 걸리겠는데?”
“희찬아, 너 도준이 모르냐? 쟤 감기 안 걸려.”
“아, 맞다.”
“그러니까 후딱 찍자!”
도준은 저를 두고 하는 두 사람의 말에 그저 어깨를 으쓱거렸다. 감독의 말대로 감기에는 걸려 본 적이 없다. 그래도 추위는 지독하게 타는 체질인데 이 상황에 자신의 체질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였다.
도준은 그저 이 촬영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차가운 바닷물에 옷이 젖는 것도 찝찝했고, 소금물이 닿아 몸이 끈적거리는 것도 얼른 씻어 내고 싶었다.
도준은 시안대로 모래사장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시안에서 봤던 것처럼 한 손을 머리 아래에 두고, 공중에서 자신을 내려 찍는 카메라를 응시하자 희찬이 도준의 가슴을 베고 누웠다. 도준의 다른 손이 희찬의 손을 쥐었다. 희찬은 한 손은 도준에게 붙들린 채로, 다른 손으로 드라마 ‘눈부신 항해’의 대본을 쥐어 펼쳤다.
이윽고 다시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잔뜩 투정을 부리던 것과 달리 카메라 앞에서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도준의 시선이 바뀔 때마다 분위기가 달라졌다. 희찬의 손짓 하나에 공기가 바뀌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호흡을 맞추며 최상의 시너지를 냈다.
차가운 바닷물이 도준의 머리를 적시고, 어깨를 적셔 갈 무렵, 희찬이 몸을 움찔거렸다. 희찬의 허리에도 물이 닿아 방금 갈아입은 새 옷이 조금씩 젖어 가는 게 느껴졌다. 도준은 그저 마주 잡은 희찬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네! 좋습니다!”
촬영 감독의 사인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파도가 두 사람을 덮쳤다.
“읍!”
“악, 차가워!”
도준의 가슴까지 치고 들어온 파도에 희찬이 헐레벌떡 몸을 일으켰다. 도준은 다 젖은 머리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온 얼굴이 따가웠다. 차가운 물이 뺨을 때리고 지나가는 날카로운 마찰에 얼굴을 만질 생각도 하지 못한 도준은 몸을 일으키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야, 도준아, 뒤에 파도!”
이내 파도가 한 번 더 몰아쳤다. 도준은 앉은 자리에서 다시 파도를 맞고서야 어우, 하고 질색하는 목소리를 내었다.
“아이고, 속옷까지 다 젖었겠다.”
“도준이 눈 괜찮냐?”
“따가워요.”
“투정 부리는 거 보니까 살 만한가 보네. 얼른 일어나.”
“자.”
희찬이 가지런한 손을 도준에게 내밀었다. 도준은 잡고 일어나길 재촉하듯 파닥거리는 희찬의 손을 붙잡고 일어섰다. 옷이 다 젖어 몸에 쩍쩍 달라붙었다. 걷는 것이 찝찝해 어정쩡하게 걸었더니, 프레임 바깥에서 대기하던 매니저가 얼른 달려와 도준의 어깨에 패딩을 둘러 줬다.
“주연 배우 샤워하고 와서 인터뷰 진행할게요.”
“이야, 이거 사진 대박으로 나왔는데?”
“그쵸. 도준이, 희찬이 둘 다 딱 생긴 대로 잘 나와서 이걸로 픽스하면 될 거 같아요.”
“얘들아, 이거 사진 보고 가.”
어기적어기적 촬영장을 벗어나던 두 사람이 감독의 부름으로 모니터 앞에 섰다. 모니터에는 방금 찍었던 마지막 시안의 사진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햇살이 녹아드는 프레임 속에서 푸른 파도와 어우러진 두 사람의 모습이 눈부시다. 정면을 아슬아슬하게 엇나간 도준의 시선이나, 도준의 품에 안긴 채로 대본을 들여다보는 희찬의 모습은 그저 찬란하다는 단어 외에는 달리 설명할 것이 없었다.
이내 두 사람도 마음에 드는지 얼굴 만면에 만족을 표해 냈다. 하염없이 사진을 바라보며 감탄을 터뜨리던 감독은 이내 쩍, 쩍 손뼉까지 쳐댔다.
“브라보다, 브라보. 이거로 할게.”
“좋습니다.”
“자, 얼른 씻고 와. 메이킹 인터뷰만 하면 이제 집에 가도 돼.”
쉴 새 없이 촬영을 했는데 아직도 스케줄이 남았다. 감독은 두 사람의 엉덩이를 가볍게 토닥거리며 두 사람을 독려했다.
“해인아, 같이 씻을까?”
“아, 좀 떨어져. 뭘 같이 씻어.”
“왜, 나 얼마 전에 네 엉덩이도, 읍.”
도준의 큰 손이 희찬의 입을 텁, 틀어막았다. 사람 속도 모르고 불도저처럼 다가오는 희찬의 말에 얼마 전 엉덩이를 까놓고 그에게 마사지를 받았던 일이 떠올랐다.
“너 매니저 어디 있어. 빨리 매니저한테 가.”
도준은 자신의 매니저와 반대편에 서 있는 희찬의 매니저를 향해 희찬의 등을 떠밀었다. 희찬은 뾰로통한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도준은 얼른 희찬에게서 멀어져 매니저와 함께 근처 호텔로 향했다.
하여튼 장희찬, 한시도 틈을 줄 수가 없다.
두 사람이 저녁 식사까지 마치고 따뜻한 옷차림으로 다시 해변으로 나왔을 때는 하늘 위에서 땅을 내리쬐던 태양이 어느새 수평선과 가까워져 진한 따스함을 머금은 때였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은 노란빛의 파도가 넘실거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분명 추운 날씨였으나, 몸을 녹이는 따스함이 느껴지는 듯했다. 도준은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밀려들어 왔다가 다시 빠져나가는 물결을 하염없이 눈에 담았다.
“예쁘다, 그치.”
희찬의 맑은 목소리가 넘실거리는 파도 소리에 얹혔다. 지그시 바다로 향하던 도준의 시선이 희찬의 새하얀 얼굴에 닿았다.
“응, 예뻐.”
“머리 아예 새로 했네?”
“바닷물 빼느라 애먹었어. 너는, 탈색 그렇게 해 가지고 머리 괜찮아?”
“괜찮지, 그럼.”
희찬의 말대로 머리카락은 괜찮아 보였다. 뻣뻣해지고, 이리저리 뻗칠 법도 한데 희찬의 하얀 머리에서는 윤기가 흘렀다. 그건 다행이었으나, 역시나 희찬에게는 하얀 머리보다 검은 머리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중에는 검은 머리해.”
“왜? 너 검은 머리가 더 좋아?”
“……두피 상해.”
검은 머리가 더 예쁘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도준은 짧은 대답을 남겨 둔 채로 메이킹 인터뷰를 준비하는 스태프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준이 제게서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던 희찬은 괜한 심술을 느꼈다. 다른 말을 할 것처럼 눈을 굴려 놓고, 한다는 말이 고작 ‘두피 상해.’ 따위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희찬은 울퉁불퉁한 모래사장을 거침없이 달려 도준의 등을 쫓았다.
“야, 같이 가!”
희찬이 도준의 어깨에 있는 힘껏 팔을 둘러 몸에 힘을 실었다. 그에 도준의 큰 몸이 휘청거리며 앞으로 쏠리기 무섭게, 희찬이 도준의 목덜미를 잡아채 뒤로 당겼다.
“악, 야! 넘어질 뻔했잖아.”
“내가 잡아 줬잖아.”
“뭘 잡아 줘, 밀어 놓고.”
도준이 한껏 인상을 찌푸리고 목을 쓸었다. 희찬의 손이 울대를 강하게 친 탓에 헛기침이 새어 나오는 것을 인상을 찌푸린 채로 참았다.
같은 곳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던 두 사람이 금세 티격태격 싸워 댔다. 그 모습은 이제는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었으므로, 주변의 스태프들은 철부지 고등학생을 보는 양 실없게 웃어 댔다.
“왔어?”
인터뷰를 담당한 조연 배우가 두 사람을 반겼다. 일전에 상견례에서 희찬의 옆자리를 지키며 도준을 향해 두터운 신뢰를 보였던 선배였다. 두 사람이 환하게 웃으며 남자를 맞이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야, 너희 포스터 엄청 예쁘게 찍었더라. 사진 장난 아니던데?”
“하하, 잘 나왔나요? 찍느라 애먹었어요.”
“그랬겠어. 얼른 하고 쉬자. 인터뷰 별거 없어, 알지? 그냥 간단하게 논다고 생각하고.”
“네.”
인터뷰가 익숙하지 않은 도준이 입술을 부르르 털었다. 대중에게 캐릭터가 아닌 자신을 드러내기를 극히 꺼리는 도준이었기에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자! 드라마 눈부신 항해의 주역, 해인과 인수의 역을 맡은 배우님들을 모셨습니다!”
두 사람이 각자의 방법으로 입을 푸는 동안, 선배가 인터뷰의 시작을 알렸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얼굴 가득 드리웠던 긴장을 거둬 내고 정면을 응시했다. 빨간 불이 깜빡거리는 카메라가 두 사람을 한 프레임에 담아냈다.
“안녕하세요, 해인 역을 맡은 이도준입니다.”
“안녕하세요, 장희찬입니다.”
톤이 다른 두 사람의 가지런한 인사를 기점으로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인터뷰어의 질문에 착실하게 응했다. 희찬은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거침없는 대답을 하는 한편, 도준은 신중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를 내며 조심스러운 대답을 이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모습은 자연스러웠고, 또 편안해 보였다.
카메라 앞에만 세워 두면 사람이 달라지는 것이, 역시 연예인이 천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자, 이번에는 어……. 드라마 눈부신 항해를 여섯 글자로 표현하자면?”
인터뷰어의 질문이 도준의 눈동자가 데구르르 굴렀다. 여섯 글자. 은근히 애매한 글자 수라 쉽게 축약되지 않았다. 고심하는 듯한 도준의 모습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턱을 괴고 손가락으로 제 볼을 톡톡 치는 도준의 간절한 눈이 인터뷰어에게 향했다. 희찬 먼저 하면 안 되냐는 뜻이었으나,
“안 돼, 이번엔 네가 먼저 하는 차례잖아.”
남자는 단호했다. 도준이 두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음…….”
“해인이 얘기하면 바로 인수가 이어 가는 걸로 해 볼까?”
인터뷰어가 도준을 재촉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도준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쌀쌀한 바람에 딱딱하게 언 머리를 바쁘게 굴렸다.
여섯 글자, 여섯 글자…….
좌우로 돌아다니던 도준의 시선이 희찬에게 향했다. 희찬은 이미 준비되었다는 듯, 다리를 꼰 채로 도준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인수가 귀엽고.”
그저 희찬을 보았을 뿐인데 도준의 입에서 툭, 여섯 글자가 튀어나왔다. 희찬이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활처럼 휘어뜨려 웃었다.
“해인이 맛있다!”
큽.
희찬의 대답이 들리자 도준의 입에서 거친 기침이 터졌다.
일대에 일순 정적이 흘렀다. 도준은 마시던 커피를 가까스로 삼키고서 입을 가린 채로 연신 기침을 토해 냈다. 도준의 매니저가 얼른 달려와 등을 다독이며 물을 건넸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도준의 원망 어린 시선이 희찬에게 향했다.
희찬이라고 사정이 다른 건 아니다. 이번엔 의도한 바가 아니었던 건지, 희찬도 당황한 듯 다급하게 손사래를 쳐 댔다.
“아니, 아니! 멋있다! 멋있다예요!”
홍당무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희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제 말을 번복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변에서는 큰 웃음이 터졌다. 용수철처럼 펑펑 튀어 대며 적극적으로 해명하는 희찬의 모습은 그저 좋은 놀림감에 불과했다.
“그, 아무래도 사람이다 보니 맛은 그렇게 막…….”
호흡을 가다듬은 도준도 그들과 합세하여 희찬을 놀리고 들었다. 요즘의 도준에게 있어 희찬을 놀릴 기회는 흔치 않았기에, 물 만난 고기처럼 작정하고 놀렸다. 희찬은 다른 사람이 놀리는 것보다 도준이 놀리는 것에 더욱 바르르 떨어 댔다.
“아니, 진짜……. 아니, 그 맛있다 아니고 멋있다, 멋있다니까요.”
“나를 그렇게 보는 줄 몰랐어.”
“야! 아니라고!”
몸을 휙 돌려 도준을 향해 이글거리는 눈을 보이는가 싶더니, 다시 카메라를 향해 손사래를 치는 희찬이 펄쩍거렸다. 그 모습이 한 마리의 싱싱한 활어 같아, 도준은 내내 크게 웃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멋있다! 너 멋있다고!”
“하하, 말씀드렸죠. 인수가 귀엽다.”
결국 도준이 팔딱거리는 희찬의 손목을 쥐어 눌러 의자에 앉혔다. 어깨에 팔을 두르고, 희찬을 아주 능숙하게 달래는 도준의 모습에 순간 일대에 다시 정적이 앉았다.
주연 배우들의 케미스트리가 중요한 퀴어 드라마라고는 한다지만, 이렇게까지 진한 케미스트리가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희찬은 여전히 억울한 듯 꿍얼꿍얼 옹알이를 해 댔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니라느니, 그런 생각은 해 본 적도 없다느니, 쉬지 않고 변명을 늘어놓는 희찬의 머리를 도준이 정성스레 쓰다듬었다.
“알겠어, 알겠어. 이제 그만해.”
“나 진짜,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알았다고. 키스 신도 몇 번을 찍었는데, 맛있을 수도 있지.”
“야!”
한 대 얻어맞을 줄 알았다.
주변의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도준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다. 약이 바짝 오른 희찬이 단단한 주먹으로 도준의 너른 가슴 한가운데를 퍽, 소리 나게 쳤다.
방어할 틈도 없이 가슴을 얻어맞은 도준의 몸이 푹 고꾸라졌다. 컥, 아픈 숨을 토해 내자마자 명치가 저렸다. 찔끔 눈물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엄살은, 안 아픈 거 다 안다. 아프게 때리지도 않았다. 희찬은 여전히 도준을 흘겨보며 인상을 잔뜩 누빈 채였다.
“하하……. 니네 진짜 엄청 싸우네.”
“선배님 진짜 얘 얼마나 얄미운지 모르시죠. 더 맞아야 해.”
“아, 그만, 아! 좀!”
“야야, 질문 빨리 넘기자. 이러다가 도준이 장례식에 부조 내게 생겼네.”
“아, 선배님.”
장례식을 언급하며 거드는 선배의 목소리에 두 사람이 동시에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어느 순간부터 꼭 붙어서 한시도 허투루 보내지 않는 두 사람을 즐겁게 지켜봤다. 드라마 촬영도 막바지여서 그런지, 두 사람이 자아내는 분위기도 한층 부드러워졌다. 이런 점을 노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간 메이킹을 촬영하지 않다가 이제 와서 한꺼번에 촬영하는 감독이 영리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렇게 다시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기분이 상한 듯 보였던 희찬은 금세 생글생글 웃었고, 그 옆의 도준도 언제 맞았냐는 듯, 잔잔한 웃음을 띤 채로 인터뷰에 응했다.
“오늘 마지막 질문인데, 현재 대한민국 톱 배우로 입지를 굳건히 한, 두 사람! 퀴어 드라마라는 생소한 장르에 왜 도전하게 되었나요?”
질문이 제법 원초적이다. 도준은 촬영하는 동안 잊고 지냈던 그 ‘왜’라는 질문에 한참이나 대답을 고민했다.
사실 하기 싫었다. 대표의 거듭되는 설득에 억지로 하게 되었다는 대답을 할 수는 없으니 이건 패스하고. 그렇다고 장희찬 옆에 다른 사람이 내 대역으로 있는 게 싫었다는 말도 할 수 없었으니 입은 절로 꾹 다물렸다.
그러면 뭐라고 말하는 게 좋을까. 도준은 오랜 시간 동안 그럴듯한 대답을 고민했다.
그러던 중 희찬이 먼저 손을 들었다. 다행히, 카메라와 인터뷰어의 시선이 모두 희찬에게 향했다.
“저는 감독님께서 처음 드라마 구상하실 때 감독님을 뵀었는데요.”
“오, 그랬어?”
“그때 얘기 듣다가, 어? 싶었어요. 이게 해인이랑 저도 어릴 때부터 같은 꿈을 꿨고, 또 싸우기도 했고, 그러다가 떨어져 지냈는데, 지금은 어쨌든 둘 다 꿈을 이뤄서 잘 지내고 있으니까요. 그냥 읽어 봤는데 ‘내가 해야겠는데?’ 싶더라고요.”
“아, 그럼 섭외 전부터 그냥 하겠다고 했구나?”
“아, 확정은 아니었고, 그냥 감독님께 조금 더 조언을 해 드렸어요. 스토리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는데, 배경 같은 곳에 이런 디테일이 추가되면 더 현실성 있을 것 같다, 정도?”
희찬의 대답을 듣던 도준이 끼기긱, 소리라도 날 것 같은 어색한 몸짓으로 희찬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놀라게 했던 시나리오 디테일의 범인을 이제야 잡은 것 같다.
도준의 가지런한 눈썹이 심하게 요동쳤다. 감독이 무슨 신기라도 들려서 쓴 대본인 줄 알았더니, 조언자가 장희찬이란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들의 어린 시절을 낱낱이 알고 있는 임 감독이었으니, 디테일이 완벽한 시나리오를 어느 정도 납득하던 차에, 희찬의 말로 세트장의 풍경까지 완벽하게 이해되었다.
“범인이 너였구나.”
“응? 범인?”
“어쩐지, 너무 똑같더라.”
도준의 말에 인터뷰어가 의아한 듯 도준을 쳐다봤다. 도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희찬을 흘겨봤다. 그 눈빛이 의미하는 바가 무언지 아는 듯, 희찬이 눈동자를 위로 굴리며 슬그머니 도준의 눈을 피했다.
고개를 가볍게 절레절레 저었던 도준이 다시 정면을 응시하고 카메라와 인터뷰어를 쳐다봤다. 어깨를 으쓱이는 도준의 몸짓은 사뭇 홀가분해 보였다.
“아니, 저는 대본을 조금 늦게 봤거든요. 근데 누가 제 얘기를 써 놨더라고요. 그래서 되게 놀랐었고, 또 세트장 보는데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싶었는데……. 네가 범인이었어.”
“아하하, 맞습니다. 제가 범인입니다. 아, 근데 시나리오는 내가 쓴 거 아니야. 나 진짜 디테일만 진짜 조금 말했어.”
“디테일이 너무했어.”
희찬이 항복하듯 두 손바닥을 펴 보이며 샐룩 웃었다. 도준의 입에서는 어이없는 웃음이 헛헛하게 터져 흘렀다.
문득 처음 대본을 마주했을 때가 떠올랐다.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만 해도 아득한 과거에 허우적거리기 바빴다. 하지만 그 덕분에 희찬을 다시 볼 수 있었고, 희찬과 어울리다 보니 생각보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게다가 지금은 웃으며 장난도 칠 수 있다.
결국 어둠으로 내몰린 도준을 빛의 주변으로 끌어당긴 것은 또 장희찬이었다.
이내 도준이 빙그레 미소를 띤 채로 희찬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나는 너 아니면 안 되겠다.”
나는 장희찬이 아니면 안 된다.
희찬에게조차 들리지 않을 낮은 목소리를 읊조린 도준이 입술을 꾹 씹어 물었다.
이제는 희찬이에게 가야겠다. 자신을 끌어당기려 무던히 노력하는 희찬의 모습을 못 본 체하는 것도 이제는 그만하고 싶었다. 이렇게까지 나를 제 옆으로 돌려놓으려 노력하는 희찬이니, 나도 그의 성의에 보답하련다.
비로소 굳은 결심을 내린 도준이 주먹을 불끈 말아 쥐었다.
*
오랜만에 늦은 시각까지 푹 자고 일어난 희찬이 팔을 쭉 늘이며 기지개를 켰다. 어느덧 한껏 기승을 부리던 추위가 종적을 감추고, 화창한 봄에 접어들었다. 움트던 새싹들이 고개를 내밀고 푸르른 빛을 마구 발하는 요즘은 싱그러운 봄날의 연속이었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온 집 안을 가득 메웠다. 요란한 소음은 희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였다. 조용하게 내려앉는 적막이 싫다. 이전에는 그저 부모의 사고를 떠올리게 하는 정도였다면, 도준이 떠난 후에는 도준의 빈자리가 생생하게 드러나는 장치가 되었다. 덕분에 자기 전에만 틀어 놓았던 시끄러운 음악은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건 오늘도 같았다.
희찬은 소파에 엎드려 누운 채로 휴대폰을 살폈다. 희찬의 휴대폰 배경 화면에는 며칠 전, 포스터를 촬영하기 위해 갔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배경 화면을 들여다본 희찬이 생긋 웃었다. 오른쪽 하단 끄트머리에 도준이 찍혀 있는 것은 비밀이다. 희찬이 사진 속 도준을 쓰다듬었다. 손톱만 한 크기였음에도, 그의 훤칠한 키가 생생하게 담겨 있는 것이 퍽 뿌듯했다.
한참 도준을 들여다보던 희찬은 포털사이트를 켰다. 드라마 촬영이 마무리되어 가는 동안 스틸컷과 메이킹 필름이 하나둘씩 공개되기 시작됐으니, 그에 대한 반응을 살피려는 심산이었다.
‘퀴어 드라마’라는 생소한 장르에 대한 기대와 비난은 어마어마했다. 고리타분한 어른들의 ‘동성애 반대’ 시위도 있었으니 말이다. 드라마 방영을 막으려는 항의가 거세지자 팬들이 나서서 상황을 진압하는 일도 있었다고 전해 들었다.
이런저런 일들이 있어도 포털 메인을 가득 메운 소식은 드라마 ‘눈부신 항해’였다. 결국 가타부타 말 많은 드라마이긴 해도, 결국 대중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중이라는 뜻이다.
희찬이 스틸컷을 눌러 대중의 반응을 살폈다. 스틸컷에는 두 사람의 첫 키스 신이 담겨 있었다. 서로 다르게 생긴 두 사람이 입술을 마주치기 직전의 사진은 온라인 전역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희찬은 조심스레 눈을 내려 댓글을 읽었다. 희찬 역시 처음 도전하는 장르인 데다가, 무엇보다 도준과 함께하는 첫 작품이었으니 다른 작품들보다 대중의 반응이 더 신경 쓰였다.
댓글을 읽으며 클릭에 클릭을 거듭하다 보니 어느새 드라마 ‘눈부신 항해’를 응원하는 팬들이 모인 커뮤니티에까지 흘러들어왔다. 희찬은 열띤 반응을 보이는 게시글을 하나하나 눌러봤다.
야 이 더 큰 대한민국 뭐냐 가섬이 웅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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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숙인 줄 알았는데 짱이피셜 뽕알친구라잔아 ㅅㅂ 님들 킹짱 서사좀 먹어보셈
⤷ 22서사존맛 저 얼굴로 키스직전 사진까지 떴는데 어케 안처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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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짱XX비디오 소리만듣기 vs 340p로 소리없이 보기 이런말하지마까
⤷ ㅁㅊ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소리만듣기 누가 위임?
⤷⤷ 킹이가 위
⤷⤷ ㅁㅊ 340p 소리없이 보기
⤷⤷ 짱이가 위면?
⤷⤷ ㅅㅂ 340p 소리없이 보기
⤷⤷ 야; 소리만 듣는다매ㅋㅋㅋㅋㅋ
⤷ 니네 왜 진지한데ㅋㅋㅋㅋㅋ
⤷ 이거 성희롱임
⤷⤷ 22
⤷⤷ 333
⤷⤷ 넵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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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이 퍼 먹여주는 키스신ㅠ 다들 킹짱킹하자..ㅠ~~!
짱희찬 눈 감은 거 왜케 귀여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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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이 손 큰거 봐 짱희찬 얼굴 다 가리겟음
게이 키스 더러워
⤷ 그남들 지들로는 죽어도 안 퍼먹는데 킹짱 스틸컷으로 자들대는 거 걍 꼴사납고요 누가 니들로 먹는대? 우리도 입맛이 잇음ㅇㅇ
⤷ 탁..타닥..게..이..키스.. 아 엄마 나가라고~~!
⤷ 정작 당사자들은 그남 반응 별 신경 안쓰는 게 팩트임ㅋㅋㅋㅋ 하타치 인생 불쌍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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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짱 스케줄 알림 봇
18:00 드라마 <눈부신 항해> MAKING FILM #4 →
http://mytube.com/#/dazzlingvayage #눈부신항해 #이도준 #장희찬 #킹짱
⤷ ㅁㅊ 메이킹 또 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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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항 제작진 약간 그런느낌임ㅋㅋㅋㅋ 우리는 이도준 장희찬 있다 느그는 업지? 이런느낌ㅋㅋㅋㅋㅋㅋㅋㅋ 배우들 데려다가 뽕을 뽑으려는 게 보임ㅋㅋㅋ 오히려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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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ㅋㅋㅋㅋㅋㅋㅋㅋ내말그말 이게 딱임
⤷ 내가 임지훈 감독이었어도 애들 데리고 북치고 장구치고 다햇음 ㅋㅋㅋ
팬들이 쏟아 내는 반응은 언제 봐도 즐거운 것이었다. 희찬은 환한 미소를 만개한 채로 팬들이 남겨 둔 글을 재밌게 읽었다. 적나라한 단어들로 자신들의 욕망을 한껏 드러내는 반응들이었지만, 그마저도 재밌어, 희찬은 내내 웃고 있었다.
어떤 주제든, 자신의 이름 옆에 이도준의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이 좋았다. 붙었다 하면 앙숙이니, 라이벌이니 보기 싫은 단어들이 가득했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절친, 소꿉친구라는 단어가 당연하게 붙는 것이 참 좋았다.
“으아, 아이고, 몸아…….”
한참 커뮤니티를 훑던 희찬이 다리를 쭉 늘어뜨리며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어깨를 돌리고, 손깍지를 껴 뚜두둑 뼈 소리를 낸 후에는 눈꺼풀을 느릿하게 끔뻑거렸다. 그래도 오늘은 다른 스케줄이 없다. 며칠을 내리 시간을 쪼개도 모자랄 만큼 바쁜 일정을 보내었는데, 오늘은 회식에만 참여하면 된다.
따가운 눈을 비비적거리던 희찬이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로 목을 뒤로 젖혔다. 도준의 집에 다녀온 후라 그런지, 익숙하기만 했던 집 안 곳곳이 도준의 집과 겹쳐 보였다. 구조가 비슷한 탓일까. 도준의 집과 희찬의 집에는 엇비슷한 위치에 비스름한 것들이 있었다. 그게 참 좋기도 하고, 아련하기도 했다.
희찬이 허공으로 손을 뻗어, 손끝을 가지런히 세웠다. 며칠 전, 도준을 눕혀 둔 채로 도준의 탄탄한 허리를 따라 쓸어내렸던 감각이 손끝에서 살아났다. 가지런했던 희찬의 미간이 좁혀졌다. 갑자기 몰려온 혈기에 아랫배가 무거워졌다.
“……뽀뽀하고 싶다.”
두 눈을 질끈 감은 희찬의 입에서 뭉근한 소망이 터졌다. 도준과 함께라면 다른 것도 하고 싶었지만, 제일 하고 싶은 것은 역시나 뽀뽀였다.
매일 서로 부둥켜안고, 쉬지 않고 입을 맞추던 때가 떠올랐다. 뭉게뭉게 피어오른 기억의 끝을 쫓다 보면 다다르는 곳은 결국 도준이 떠나던 날 밤이었다.
울부짖는 도준을 안아 주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도준이 쪽지를 남기고 떠난 날 조금 더 열심히 찾지 않았던 것에 대한 후회가 켜켜이 쌓여 무겁게 밀려와 커다란 한숨으로 터졌다.
도준이 떠난 후에는 거의 시체처럼 지냈었다.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일하는 와중에도 아무것도 먹을 수 없어 말라 갔었다. 매니저의 손에 붙들려 억지로 음식물을 욱여넣은 후에는 다시 게워 내기 일쑤였다. 매일매일 죽은 것처럼 살던 어느 날, 도준에게서 메시지가 왔었다.
그렇게 챙기지 말라고, 말려도 말을 듣지 않던 이도준은 떠난 와중에도 생일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냈었다.
[네 생일은 네가 태어난 날인데, 내가 안 기쁠 리가 없잖아.]
매년 생일마다 울던 저를 달래던 도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리고 아마, 도준의 메시지를 받은 날을 기점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멀리했던 밥을 먹기 시작하고, 조금이라도 웃어 보려 노력했다.
그 후에는 나서서 스케줄을 잡아 댔다. 이도준이 있는 곳이 어디든, 돌아오는 길의 방향을 잃지 않도록 언제 어디서든 저를 볼 수 있길, 잊어버리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도준의 데뷔 소식을 접했을 때는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모른다. 이제 데뷔도 했겠다, 당장에라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도준을 다시 만나기까지는 7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마저도 희찬은 참 행복했었다.
희찬의 입에서 다시 기다랗고 큰 한숨이 터져 나왔다.
7년 전에도 곧 온다고 했던 도준은 얼마 전에 또 곧 온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곧’이 얼마나 남았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직감했다. 이제는 정말 ‘곧’이라고.
한참 도준을 헤아리던 희찬의 허벅지에서 진동이 울렸다. 지잉 울리는 휴대폰은 보지 않아도 매니저의 전화가 뻔했다. 희찬은 소파 등받이에 기댔던 몸을 스르르 뉘며 성의 없이 전화를 받았다.
“왜.”
― 형, 일어났어요?
“어, 일어나셨다.”
― 오늘 회식한다고 했던 거요, 지금부터 모인다는데. 지금 가실래요?
매니저의 말에 희찬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해가 쨍쨍하게 떴는데 벌써부터 회식은 무슨 회식. 창밖으로 향했던 눈을 돌려 시간을 보니, 고작 5시. 7시 이후에 만나자고 공지했던 것보다 훨씬 이른 시간이었다.
“왜 벌써 가?”
― 모르겠어요. 다들 모여 있나 보더라고요? 희경 씨도 지금 간다고 하길래,
“어? 희경이?”
― 네, 도준이 형네 매니저요.
“이도준 회식 참여 안 한다며, 온대?”
― 곽 대표님이 들들 볶았나 봐요.
음, 그렇다면 나도 늦게 갈 이유가 없지.
희찬이 벌떡 일어났다.
“그럼 우리도 지금 가자.”
― 네, 형. 10분 안에 도착해요.
희찬은 매니저와 전화를 끊기 무섭게 드레스 룸을 다 뒤집어엎었다. 이도준이 온다는데 그게 7시건, 5시건 무슨 소용이냔 말이다. 겉옷을 챙겨 입은 희찬이 거울 앞에서 머리를 훌훌 털었다.
“음, 옷이 좀 별론가…….”
그래도 사복 차림으로 도준을 만나는 것은 오랜만인데, 조금 더 꾸미는 것이 좋을까.
결국 희찬은 매니저가 도착했다는 전화를 울리기 전까지 옷을 몇 번이고 갈아입었다.
그렇게 도착한 식당은 북적북적했다.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곧장 온 조연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벌써 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는지, 왁자지껄한 것이 소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입구에서부터 감독 옆자리로 이동하기까지 수많은 사람과 성격 좋게 인사를 나눈 희찬의 눈에 드디어 도준이 보였다. 술을 하지 않는 도준 앞에는 소주나 맥주 대신 콜라가 놓여 있었다.
그를 보니 언젠가, 술을 할 줄 몰라 논알콜 와인을 사 왔던 도준의 앳된 모습이 떠올랐다. 희찬은 도준이 앉은 테이블로 다가가며 실없이 웃어버렸다.
“희찬이 왔어?”
“아니, 먼저 시작하기 있어요?”
통통 튀는 희찬이 들어서기 무섭게 시끄럽기만 했던 공간에 화사함이 내려앉았다. 그건 비단 도준만 느끼는 감상은 아닐 것이다.
“어차피 종방연 때 한 번 더 놀 건데 뭐. 앉아, 앉아.”
“에이, 아니지. 희찬이 여기 앉아. 내가 임 감독 옆에 앉을게.”
첫 회식 때처럼 도준은 대표의 옆에 있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감독의 옆에 앉으려던 희찬은 왜인지 갑자기 일어나 자리를 옮기는 대표 덕분에 도준의 옆에 앉게 되었다. 도준 역시 나쁘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희찬이 도준의 얼굴을 집요하게 쳐다봤다. 도준은 평소와 달리 메이크업이 짙었다. 드라마 촬영 중에도 진한 메이크업을 한 도준은 보지 못했던 터라 그의 화려한 이목구비가 돋보일 정도로 꾸며 둔 것이 낯설기도 하고, 또 설레기도 했다.
도준은 집요한 희찬의 눈길이 멋쩍은지 먹지도 않을 고기를 괜히 뒤적거렸다. 그러면 그럴수록 희찬의 눈이 집요해졌다. 고개를 이리 돌리면 이리 좇아오고, 저리 돌리면 저리 좇아오는 시선에 도준이 결국 젓가락을 내려놓고 아예 몸을 돌려 희찬을 마주했다.
“왜, 또 뭐.”
“메이크업이 왜 이렇게 진해?”
“스케줄 하고 왔어.”
“아, 드라마 끝나고 바로 또 스케줄 들어갔어?”
“그냥 화보.”
도준의 간단한 대답에 희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꾸며 놓으니 참 잘생겼다. 그렇지 않아도 잘생긴 얼굴에 화려함을 끼얹은 탓에 세상에 이도준만 홀로 빛나는 환상이 보였다.
희찬이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도준의 볼을 콕 찔렀다. 도준의 검은 눈동자가 뚝 떨어져 희찬의 손가락을 한 번 보더니 피식,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모두 들어오셨습니까. 다 같이 건배 한번 하고, 본격적으로 회식 시작하겠습니다!”
저 끄트머리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줄곧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이 눈을 돌려, 각자의 앞에 앉은 어른의 술잔에 투명한 술을 따랐다. 맞은편 감독과 대표 역시 그들의 성의에 보답이라도 하듯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술을 다시 따라 줬다.
이내 수십 개의 투명한 잔이 머리 위로 솟았다. 남자의 건배사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손에 즐거움이 앉아 투명한 액체가 넘실넘실 춤을 춰 댔다.
“눈부신 항해, 선창하겠습니다. 뒤이어 순항하자로 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눈부신 항해!”
“순항하자!”
다소 오글거리는 건배사 뒤에 수십 개의 잔이 일제히 부딪치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손에 든 술을 한입에 털어 마신 사람들의 젓가락이 바쁘게 움직이는 소리가 귀를 긁었다. 도준은 왁자지껄한 실내가 달갑지 않은 듯, 떨떠름한 표정을 보였다.
“도준아, 그거 먹는 거 아닌데.”
“아.”
하여튼, 아무거나 집어 먹기는.
대표가 장난스레 말을 덧붙이며 도준의 앞에서 먹을 수 없는 것들을 치워 상의 끄트머리로 밀어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도준은 완전히 흥미를 잃은 양,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뭘 씹어도 맛이 나지를 않으니, 먹으라고 내놓은 건지, 아닌지 분간하는 것 역시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한 잔이 두 잔 되고, 두 잔이 한 병이 되고, 정신이 멀쩡했던 사람도 고주망태가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금세 정신을 지배하는 알코올에 의존해 아무 말이나 요란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그건 도준이 앉은 테이블도 다르지 않았다. 촬영이 끝나 홀가분해진 걸까, 평소보다 술잔을 빠르게 꺾는 감독과 마음에 드는 퀄리티의 드라마가 나온 것에 즐거움을 느낀 대표는 금방 술에 취해 기분 좋은 주책들을 늘어놓았다.
“이야, 그림이다 그림.”
걸쭉하게 취한 감독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그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냥, 또 시작이다 싶었다.
나란히 앉은 도준과 희찬을 두고, 한 폭의 그림으로 치부하는 것은 이제 익숙한 일이다. 하지만 사람 면전에 대놓고 두 사람을 붙여 두길 잘했다느니, 캐스팅이 완벽해 대박은 따 놓은 당상이라느니, 아무튼 온갖 칭찬을 해 대는 통에 도준이 한숨을 쉬었다.
“근데, 너희는 왜 그렇게 피해 다녔냐. 그게 뭐 몇 작품도 아니고, 자그마치 몇 년이야? 어?”
“뭐 그런 걸 물어봐. 뭔 생각이 있었겠지.”
“궁금해서 그래애, 궁금해서. 어? 장희찬이, 쟤가 어? 얼마나 도준이를 싸고돌았는데. 이도준이는 뭐, 말할 것도 없고.”
술이 들어가니 자연스럽게 옛날 얘기가 나왔다. 과거가 언급되면 속이 답답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도준이 벗어 둔 겉옷을 챙겨 입었다.
“어디 나가게?”
“담배.”
“같이 나가자.”
답답하기는 희찬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담배 냄새는 기함하며 싫어하는 희찬의 말에 잠시 눈을 굴리던 도준이 이내 고개를 주억거리며 긍정의 의사를 보였다.
케케한 고기 냄새가 도사린 후끈한 장소에서 벗어나 맞은 바깥 공기는 상쾌했다. 으슥한 골목에 들어선 도준은 제 옆에서 벽에 몸을 기대는 희찬의 존재를 의식하고 두 발자국 정도 떨어져 담배를 물었다.
틱, 틱, 부싯돌 부딪치는 소리가 몇 번 나더니 이내 화륵, 화염이 솟았다. 불길에 담배를 가져간 도준이 숨을 깊이 빨아들이자 담배 끝에 붉은 불꽃이 앉았다. 폐부 깊이 담배를 빨아들이고, 다시 내뱉었다. 속에서 한 바퀴 돌아 입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숨에 속이 다 개운해지는 기분이었다.
도준은 아무 말 없이 제 곁을 지키는 희찬에게 구태여 말을 걸지 않았다. 새까만 하늘에 눈을 두고, 한 모금, 한 모금 담배를 피우다 보면 어느새 담배는 끝을 보였다.
아쉬움을 느낀 도준이 품 안에서 다시 담배를 꺼냈다. 또 불을 붙이려는 도준의 행동에 희찬이 기댔던 몸을 곧추세우고, 도준의 손에서 담배를 낚아챘다. 또렷한 눈으로 도준을 직시하는 희찬이 사뭇 진지하다. 그를 마주한 도준은 이번에는 희찬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왜 피했어?”
“뭘?”
“나랑 같이 작품 할 수 있을 때, 왜 피했어?”
“…….”
도준이 입을 꾹 다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오는 희찬의 음성은 단단했으나, 그렇다고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낮은 숨을 내쉰 도준이 열심히 희찬을 피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희찬 앞에 나설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희찬을 피하기 바빴다.
물론 지금이라고 그 생각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장희찬이라면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간의 행동이 그에게는 상처였던 걸까. 도준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어, 그저 희찬을 바라보기만 했다.
“대답 안 해도 돼. 무슨 말인지 알아.”
기껏 무겁게 분위기를 잡았던 희찬이 이번엔 가벼운 목소리를 냈다. 그에 희찬을 응시하던 도준이 고개를 비뚜름하게 틀었다.
“진짜 알아?”
“내가 너 하루 이틀 보냐.”
“…….”
“네가 생각한 때가 아니니까 안 온 거겠지. ……나도 네가 직접 오길 바라서 굳이 안 간 거야.”
역시 장희찬.
희찬의 말대로 만나려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다. 한쪽이 애써 피해도, 마주치려면 얼마든지 마주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오래간 마주치지 않았다. 역시 희찬도 같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희찬의 명쾌한 답에 도준이 소소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 오랜 시간을 떨어져 지내도 제 마음은 기가 막히게 알아채는 희찬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도준은 저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손을 들어 희찬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었다. 그리고 제 행동을 자각한 후에는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로봇이라도 된 양 삐걱거렸다.
도대체가,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버티고 있는 주제에 거리낌 없이 하는 행동이 퍽 어이가 없었다.
순식간에 뻣뻣해지는 도준을 본 희찬이 피식 웃었다. 마무리 짓지도 못할 스킨십은 매번 왜 하는 건지, 이제는 도준이 마냥 귀엽기만 했다.
“들어가자.”
“응, 손잡아도 돼?”
“안 돼.”
“일관성 한 번 줏대 있네.”
거, 손 한 번 잡는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마뜩잖은 도준의 행동에 희찬이 입술을 이죽거렸다. 도준은 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희찬에게서 한 걸음 떨어져 차분한 걸음을 옮기다 말고 문득 몸을 홱 돌려 희찬을 쳐다봤다.
“너, 혹시 아무한테나 손잡자고 그러냐?”
도준의 말에 희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못마땅해 보이는 표정과 말투에 웃음이 비집고 나오려는 것은 애써 꾹 참았다. 왜인지 똑바로 대답해 주기가 싫었다.
“그게 왜 궁금해?”
희찬은 대답을 남기지 않았다. 새침한 반문만 건넨 채로 금세 고깃집 안으로 사라지는 희찬 덕에 도준은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느꼈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장희찬은 기다린다고 했지, 연애를 계속하겠다고 하지는 않았다. 얼른 오라고 했지, 다시 예전처럼 지내자고는 하지 않았다.
도준의 잘생긴 이마에 굵은 핏줄이 불룩 솟았다.
“야, 장희찬. 야!”
도준은 인상을 한껏 누빈 채로 희찬을 쫓아 바쁜 걸음을 놀렸다.
테이블에 돌아온 도준의 접시 위에는 고기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도준이 먹는 속도보다 대표가 구워 얹는 속도가 빠른 탓이었는데, 그를 본 희찬이 요리조리 눈을 굴리며 살금살금 젓가락을 놀렸다. 희찬의 새하얀 젓가락이 불쑥 들어온 곳은 도준의 그릇 위였다. 적의 동태를 살피듯 조심스레 움직이던 희찬은 도준의 접시 위에 있는 고기를 쇽, 훔쳐 갔다.
한두 번도 아니고, 꾸준히 가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도준은 입술을 말아 물고, 웃음을 꾹 참았다.
도둑고양이도 아니고, 그냥 먹으면 될 것을 눈치는 또 왜 보는지 모르겠다.
“그냥 먹어.”
“네 거잖아.”
“그런 게 어딨어.”
“여기.”
“그럼 그렇게 계속 훔쳐 먹든지.”
도준은 퉁명스럽게 대꾸하면서도 제 접시에 놓인 고기들을 전부 희찬의 접시에 옮겨 놓았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는 눈과 못마땅하게 보는 눈이 공존했다. 전자는 감독의 것이었고, 후자는 대표의 것이었다. 대표는 저는 정작 몇 점 먹지도 않아 놓고, 모조리 희찬의 앞에 옮겨 놓는 도준의 행동이 못마땅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오후 내내 아무것도 먹지 않고 스케줄을 하고 온 이도준이었다. 회식에도 오지 않겠다는 것을 억지로 끌고 왔더니 그조차 제대로 먹지 않는 모습에 대표가 쯧, 혀를 찼다.
“이도준 밥 제대로 안 먹으면 회식 안 끝내.”
“왜 그러세요, 또.”
“또는 무슨, 이놈아. 밥 좀 먹어라.”
“저 밥 한 공기 비웠어요.”
“너 아까 밥 덜어 내는 거 다 봤어.”
에이, 안 속네.
도준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대표가 허, 어이없는 한숨을 터뜨리기 무섭게 대표의 옆에서는 감독의 큰 웃음이 터졌다.
서른 다 먹은 남성이 마냥 어린아이 같아 보였다. 반찬 투정을 심하게 하는, 눈에 훤히 보이는 행동으로 부모를 속이려 드는 열 살 언저리의 아이 말이다.
그런 도준의 모습이 밉지 않았던 감독이 인자한 표정으로 도준의 어깨를 툭툭 다독였다. 그건 마치 귀여운 조카의 투정을 다 받아 주는 백수 삼촌의 모습이었다.
이번엔 희찬의 짓궂은 눈이 도준에게 향했다. 희찬은 턱을 괸 채로 도준을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희찬과 눈을 마주한 도준이 미간을 좁혔다. 화려한 얼굴 가득 드리운 장난기가 괜히 탐탁지 않았다.
“해인이 밥 다 먹으면 내가 손잡아 주지.”
“내가 안 잡을 거라니까?”
“에이, 잡고 싶으면서.”
“아니라니까.”
장희찬은 막무가내였다. ‘아니’라고 힘주어 전하는 도준의 의사는 장희찬이라는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퉁퉁 튕겨 나오는 듯했다.
도준의 말은 들을 생각이 없는 희찬이 도준의 너른 등을 쓰다듬었다. 도준은 희찬의 손길이 닿기 무섭게 몸을 비틀며 희찬의 손을 뿌리쳤다. 희찬은 아랑곳하지 않고 집요하게 도준의 등을 어루만졌다.
“그래, 그래. 그렇게 말해도 아니라는 거 다 알아. 해인이 밥 먹을 거예요, 안 먹을 거예요.”
“아, 진짜.”
도준이 질색하며 테이블에서 몸을 물렸다. 여기저기서 밥 먹는 태도로 말을 얹는 것만큼 불편한 것도 없었다. ‘맛없게 먹는다’ 또는 ‘적게 먹는다’ 아무튼, 도준에게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도준의 먹는 모습에마저 모두 말을 얹어 댔다.
그런 핀잔들은 도준이 회식에 참여하지 않는 데에도 큰 몫을 해 왔다. 그런데 그를 잘 아는 대표도,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희찬도 전부 먹는 것으로 물고 늘어지니 도준의 표정이 점점 굳어만 갔다.
당연히 그 속을 알 리 없는 희찬이 하얀 쌀밥 위에 따끈한 고기를 얹은 숟가락을 도준의 입 앞에 들이밀었다.
“너 진짜…….”
“나 너한테 물어볼 거 되게 많은데 지금 참고 있는 거야.”
“…….”
희찬은 또 치트키를 썼다. 단호함이 물씬 묻어나는 희찬의 음성에 도준이 체념하듯 한숨을 푹 쉬었다. 숟가락을 든 희찬의 손이 달랑거렸다. 재촉하는 행동을 본 도준이 결국 입을 열고 희찬이 내민 밥을 받아먹었다.
종이 씹는 느낌. 고슬고슬한 쌀알이 구르는 느낌. 그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에 권태가 몰려왔다. 값비싼 고기를 질겅질겅 씹고, 밥을 으깨 무는 도준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하나둘씩, 회식 장소를 빠져나가고, 술에 취한 사람들이 인사불성 되어 떨어져 나가는 동안에도 네 사람이 둘러앉은 테이블은 시끌벅적하기만 했다. 끊임없이 술잔을 부딪치는 대표와 감독, 그리고 그 맞은편에서 쉴 새 없이 옥신각신하는 희찬과 도준이 그 주역이었다.
“아무래도 진짜 화해한 거 같지?”
줄곧 두 사람을 지켜보던 감독이 대표의 팔을 툭, 쳤다. 대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보기 좋네, 왜 임 감독이 둘이 꼭 붙여 놔야 한다고 하는지 알겠어.”
“곽 대표도 둘 다 탐냈잖아?”
“희찬이 아직도 언제 데려올지 살펴보는 중이야. 아니, 3년 전에 희찬이 JR이랑 계약 끝났을 때 데려오려고 했는데, 도준이 있어서 안 온다고 하더라고.”
“뭐지, 쟤네 진짜 싸웠던 건가?”
일찍이 도준으로부터 희찬과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대표는 그저 눈썹을 으쓱거렸다. 좋지도 않은 일인데 굳이 감독에게 이것저것 알려 줄 필요는 느끼지 못한 탓이었다.
두 사람이 한창 도준과 희찬을 두고 얘기하는 사이, 희찬과 도준은 연신 티격태격했다. 뭐가 그렇게 부딪치는지, 한쪽에서 볼멘소리가 나오면 다른 한쪽이 해사하게 웃었다가도 금방 전세가 역전되어 반대쪽이 볼멘소리를 내면 또 상대가 웃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함께 가게를 벗어났다. 그렇게 질색하며 피하다가도 꼭 붙어 지내는 모양이 정말로 보기 좋은 한 쌍이었다.
“그래도 희찬이 계약 얼마 안 남았대. 3년 전에 그러더라. ‘이번 계약 끝나면 꼭 K액터스로 갈게요.’”
“그래?”
“응. 알아보니까 슬슬 스케줄도 정리하는 거 같더라고. 연장 안 할 건가 봐.”
“아이, 내가 그때 JR만 안 줬어도. 그래도 JR도 대형이니까 괜찮겠다 싶었거든. 지금이야 이미지가 많이 안 좋아졌지만, 희찬이 때만 해도 그런 말 없었어.”
“알아. 근데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둘 다 내가 데려오고 싶다고.”
“그러게 누가 굼뜨래.”
두 사람이 사라진 후에도 감독과 대표의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옛일을 회상하는 두 사람의 얼굴에는 뭉근한 행복이 피어 소소한 웃음이 녹아났다.
“근데 도준이는 계약이 안 끝난다?”
“도준이 우리랑 종신 계약했어.”
“노예계약이라도 한 거야? 도준이 놔줘. K액터스에서 둘 다 데려가면 어떡해. 업계 부조리 아니야? 다른 회사도 살길 터 줘야지. 도준이도 다른 회사에서 계약하자는 말 많이 들을 텐데.”
“그 말 들을 때마다 나한테 와서 계약서 다시 쓰자 그래. 근데 이미 도준이는 업계 최고 대우라 더 쓸 것도 없어. 장난이나 치는 거지. 이도준도 다른 데로 갈 생각 없을걸?”
“얼씨구, 나도 좀 알자. 도대체 뭐로 이도준을 묶었어?”
“대외비야. 그리고 진짜로 어떤 회사여도 도준이 나처럼 케어할 회사 없어. 도준이는 내가 키웠어. 사람 만들어 놨지.”
대표의 거만한 목소리에 감독이 허, 어이없는 숨을 터뜨렸다. 팔꿈치로 대표를 툭, 친 감독이 처음 두 사람을 봤던 날을 떠올렸다.
대뜸 연기를 시켜 달라며 찾아왔던 두 청년은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젊은이 특유의 패기가 있었다. 힘든 와중에도 꺾이지 않았던 기개가 있었고, 꿈을 좇아 걷는 걸음이 더뎌도 지치지 않는 끈기가 있었다.
그게 참 예쁜 두 사람이었기에, 언젠가는 이렇게 빛을 볼 줄 알았다.
감독의 입가에 뭉근한 향수가 피었다.
“걔네는 원래 잘될 애들이었어. 애들이 얼마나 성실하고 잘했는데. 도준이는 임자 잘 만났지. 광고도 전부 이한 그룹 붙어 있고, K액터스에서 꽉 붙잡고 놔주지도 않고. 뭐든 대형이랑만 딱 붙어서 애가 브랜드 가치가 높잖아.”
“그거야, 이한 그룹이 도준이 데뷔하자마자 전 계열사 광고를 붙이니까 그렇지. 원래 같은 계열 광고는 이중으로 못 해.”
“그러니까. 나는 희찬이가 안타까워. 애가 너무 힘들었어. 쟤도 볼륨이 큰 배우인데 자꾸 소형으로만 가고. 무슨 일을 겪었는지 대형은 거들떠도 안 보는 거 같아서 좀 쓰려.”
감독의 암울한 목소리에 대표는 이번에도 말을 아꼈다. 희찬에게 일어났던 일도, 도준이 겪었던 일도 구태여 말을 전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본인들이 입을 열지 않는데, 제삼자인 본인이 입을 열어서 좋을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JR에서 다른 말은 없었고?”
“JR도 희찬이 얘기는 안 하더라고. 나는 도준이도 도준이지만, 희찬이가 정말 안타까워. 애가 초주검이 돼도 스케줄을 안 빼.”
신인 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이제는 안 그래도 되잖아.
착 가라앉은 감독의 말에 대표가 뭉근한 한숨을 터뜨렸다.
누구 하나 덜할 것 없이 둘 다 안타깝다. 탄탄대로만 걸어도 모자랄 시간에 돌고 돌아 겨우 제 길을 찾은 두 사람은 언제 봐도 아릿한 통증을 안겼다. 두 사람의 행복을 빌고, 그들이 즐겁게 살아가길 바라는 감독과 대표의 말이 줄었다.
사람들이 보기에 번듯한 성공을 한 두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채워지지 않은 공허함이 보였기에 그들이 온전한 행복을 거머쥐길 간절히 바랐다.
그사이 밖으로 나갔던 희찬과 도준도 돌아왔다. 바깥에서도 지겹도록 다툰 건지, 돌아온 도준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그 옆에 달랑 매달린 희찬은 여전히 해실해실 즐겁게 웃고 있었다.
누군가의 손에 놀아나는 도준의 모습은 보기 드문 것이었다. 놀아나기는커녕 오히려 사람을 제 손바닥에 올려놓고 주무르는 것이 훨씬 능한 도준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장희찬은 그런 이도준을 아주 능수능란하게 주물러 댔다. 그리고 그게 참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창 즐겁게 떠들던 대표와 감독의 시야에서 희찬이 사라졌다. 휘둥그레 눈을 뜬 대표가 도준의 눈앞에 손을 휘적휘적 저었다. 시원한 탄산음료를 마시던 도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표를 바라봤다.
“희찬이 어디 갔어?”
대표의 말에 도준은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제 아래를 가리켰다. 탁자를 짚고 몸을 일으켰던 대표는 눈에 보이는 재미난 광경에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피곤했던 건지, 어느새 희찬은 도준의 허벅지를 베고 자는 중이었다.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더니, 도준은 결국 또 얌전히 다리를 내어 줬다.
대표는 도준이 곧 희찬에게 돌아갈 것을 직감했다. 도준은 최근의 어느 날을 기점으로 희찬에게 관대했고, 너그러웠다. 희찬의 말이라면 금방이라도 제 모든 것을 내어 줄 것처럼 행동했다. 어찌 보면 위험한 반응이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제 곁을 내어 주지 않는 도준이었기에 그의 변화는 긍정적이기도 했다.
“희찬이 여기서 자면 안 되는데.”
“슬슬 갈까? 도준이는 희찬이 매니저 오면 그거 타고 가면 되겠다.”
“네.”
“희찬아, 일어나.”
“저 안 자요…….”
어른들의 목소리에 희찬이 어기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말로는 자지 않았다고 하지만, 목소리에는 잠이 잔뜩 묻어나는 것이 귀여워 도준이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그런 도준의 볼을 희찬의 손가락이 쿡 찔렀다. 도준이 희찬을 바라보자 희찬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도준을 마주했다.
“뭘 웃어.”
“내 맘이야.”
이내 희찬의 입꼬리에도 둥근 포물선이 피었다.
예정보다 일찍 시작된 회식이 이렇게 오래 이어질 줄은 몰랐다. 곧장 샤워부터 했음에도 욕실 밖으로 나왔을 때는 시간이 자정을 향하고 있었다. 몸에 묻은 물기를 털어 낸 도준은 휑한 거실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많지는 않아도 드문드문 놓여 있던 소품들이 전부 사라졌다. 희찬에게 가겠다고 마음을 잡은 도준은 가장 먼저 희찬과 함께 살 집부터 계약했다. 희찬에게 돌아간다면 희찬과 함께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니, 집부터 사야 한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문득 마음만 먹으면 집 하나쯤 거뜬하게 구매할 수 있다는 현실이 퍽 우스워졌다. 아무리 애걸복걸해도 절대 손에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았던 재물이 쥐어졌다는 것이 새삼스레 신기했다.
“오늘은…… 옷을 정리해 볼까.”
도준이 옷방에 들어섰다. 사방이 옷장으로 채워진 방 안에는 계절 별 입을 옷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다가오는 봄, 여름옷들을 제외하고, 지나가는 계절의 옷들부터 옷걸이에서 빼서 상자에 담았다.
그러다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예전에도 이렇게 정리한 적이 있나, 차근히 기억을 되짚던 도준의 손이 공중에 멈췄다.
“아…….”
울면서 집을 청소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도준의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여전히 아프기만 한 기억이라,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손에 든 옷깃을 부여잡았다. 정신이 아찔해졌다. 며칠간 잊고 지냈던 목소리가 다시 웅웅 울려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파들파들 떨리는 도준의 손에는 조금의 핏기도 없었다.
도준의 손톱이 부딪쳐 까득까득 귀를 긁는 소리가 났다. 주변의 다른 소리가 아득해질 즘에야 도준이 바닥을 세게 내리쳤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
도준은 오늘도 여지없이 해사했던 희찬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맞물린 도준의 턱 아귀에 교근이 불끈 솟았다.
겨우겨우 두꺼운 외투 정리를 마친 도준이 혹시 안쪽에 다른 옷이 있지 않을까, 옷장을 더듬었다. 옷장 안으로 한껏 밀어 넣은 손에 웬 봉투가 잡혔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의아한 표정으로 봉투를 꺼낸 도준은 낡은 흰 봉투 안에 든 10만 원을 마주했다.
“아주 날을 잡아라.”
겨우 가다듬었던 호흡이 다시 무거워졌다. 바들바들 떨리는 호흡에 도준이 옷장을 부여잡고서 고개를 푹 수그렸다. 스물두 살, 아프고 어렸던 그때 손에 쥐어진 10만 원은 한 장도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희찬과 저를 떨이로 팔아넘겼다고 생각되는 그 돈은 감히 쓸 생각도, 용기도 나지 않았다.
돈을 쥔 도준의 손에 걷잡을 수 없는 힘이 실렸다. 손가락 사이가 빠듯하게 당길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쥔 탓에 봉투가 볼품없이 찌그러졌다.
이내 탕! 요란한 소음이 났다. 옷장을 세게 내리친 도준은 손에 쥔 10만 원을 내팽개치고, 옷방에서 도망치듯 벗어났다.
약, 약이 필요했다. 거칠게 뛰는 심장을 잠재우고, 아득해지는 정신을 일깨울 약. 오늘도 악몽을 꿀 것이 불 보듯 뻔했으니, 꼭 약을 먹고 자야겠다.
비틀거리는 걸음을 겨우겨우 옮겨 식탁 앞에 섰다. 즐비한 하얀 병은 다 똑같은 모양이었으나, 도준은 정확하게 어느 병에 무슨 약이 들었는지 알고 있다. 손바닥에 일정량을 털어 낸 도준은 물도 없이 약을 삼켰다. 딱딱한 약 알이 식도를 넘어가는 느낌은 거북하기 짝이 없었지만, 도준은 그저 약이 급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래서는 희찬이에게 갈 수 없다.
조금 더 번듯한 모습으로 가고자 했으나,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현실에 절망이 도사렸다.
터덜터덜, 맥빠진 걸음을 침실로 옮긴 도준은 오로지 어둠만이 가득한 공간에 비로소 안정을 느꼈다. 아무도 자신을 해치지 못할 것이라는 안도감에 무겁기만 했던 숨도 금세 가뿐해졌다.
몸에 걸쳤던 옷가지를 훌훌 벗어 낸 도준은 금방 침대 위에 올라 잠을 청했다. 푹신한 베개에 머리를 대고, 따뜻한 이불을 끌어 덮은 도준은 부러 안정적인 생각을 하며, 마음을 편하게 먹으려 무던히도 노력했다.
*
요즘 도준은 언제쯤 희찬에게 가는 게 좋을까, 그날만 헤아리는 중이었다. 가야겠다는 결심은 진작에 섰으나, 도무지 때를 정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가고 싶다는 욕심과 이 마음이 불러올지도 모를 후환을 향한 걱정이 첨예하게 부딪쳐 싸우는 중이었다.
당연히 욕심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내 발로 갈 테니 기다려 달라.’ 하고 호언장담했지만,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정하려니 도무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
“차라리 무슨 빌미라도 생기면 좋겠네.”
도준이 허심탄회한 목소리를 냈다. 차라리 상황이 억지로라도 자신과 희찬을 붙여 두길 바랐다.
어릴 때부터 이렇게 신중한 성격은 아니었다. 예전 같으면 무턱대고 희찬을 찾아가 끌고 들어왔을 텐데 말이다. 도준이 인상을 잔뜩 누빈 채로 소파 등받이에 뒤통수를 댔다.
그거 뭐, 그냥 가면 되는 건데. 뭐가 그렇게 겁이 나서 하나하나 재고, 따지고, 걱정하는 건지.
못마땅한 제 모습에 도준이 깊은 한숨을 터뜨렸다. 툭 튀어나온 탐스러운 울대가 들썩거렸다. 한참을 곰곰이 고민하는 양, 검은 눈동자로 천장을 훑던 도준은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무릎을 탁, 쳤다.
도준이 선 거실은 이전보다 훨씬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생활에 꼭 필요한 몇 가지를 제외하고, 모두 넣어 둔 박스에는 도준의 성격을 닮은 깔끔한 글씨로 무엇을 담고 있는지 적혀 있었다.
누군가 들어와 이 거실의 풍경을 본다면.
“뭐야, 너 이사 가?”
라고 말할 것이 당연할 지경이었다.
도준은 바로 옆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몸을 홱 돌려 상대를 바라봤다. 언제 들어온 건지 모를 대표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집 안 풍경을 훑어보는 중이었다.
“아마도요?”
“왜? 여기 별로야? 보안은 괜찮은데.”
“아뇨, 단지 내에 조금 더 큰 곳으로 가려고요.”
도준은 담담한 대답을 전했다. 그에 대표가 흥미로운 듯, 눈썹을 들썩거렸다.
대표는 데뷔 이후 돈이 모이기 무섭게 이곳, 이 빌라의 전세를 알아보던 도준을 떠올렸다. 조금 더 큰 돈을 만지기 시작한 후에는 아예 매매를 하더니, 이제는 더 큰 집으로 이사 가겠다는 도준의 말에 당연하게 ‘장희찬’이라는 이유가 붙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한곳에서 벗어나지 않는 저 영역 동물이 구태여 집을 옮길 이유도 없었으니 말이다.
“정리는 거의 다 했네?”
“짐이 별로 없더라고요.”
도준이 저벅저벅 걸어 대표의 옆에 섰다. 그리 오래 정리하지도 않았는데, 금세 드문드문 빈 공간이 보였다. 짐이 별로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언제고 희찬에게 돌아갈 생각을 하며 지낸 이도준이었고, 그런 마음이 짐을 늘리지 말자는 데로 뻗쳐 꼭 필요한 것이 아니고서야 굳이 들여놓지 않았으니 말이다.
도준이 가볍게 어깨를 털어 내며 숨을 푹 내쉬었다. 통창을 통해 뻗쳐오는 햇살의 무게가 유달리 가벼웠다.
“희찬이랑 살려고?”
대표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정곡을 찔렀다. 그에 도준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표를 바라보았다. 도준의 새까만 눈동자에서는 대표를 향한 경이로움이 읽혔다.
“이도준 머릿속 훤히 보잖아, 내가.”
“아니실 텐데.”
“딱 희찬이 생각하는 중이네. 너 희찬이 생각할 때는 표정이 달라.”
“……그래서 왜 오셨어요?”
대표의 말마따나, 대표는 도준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민망함을 느낀 도준이 큼, 헛기침을 하며 이야기의 화두를 돌렸다.
오늘은 별다른 스케줄도 없다. 잠도 잘 잤고, 오전에는 운동도 하고 왔으며, 방금 막 점심도 먹었다. 연락이 되지 않으면 걱정하는 대표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 모든 행동을 메시지로 남겨 뒀는데 대뜸 찾아온 대표가 의아했다.
“오늘 눈부신 항해 광고 걸릴 곳 보러 간다는데, 같이 갈래?”
“이미 결정된 자리 아니에요?”
“맞는데, 가서 보면 너 되게 좋아할 거야.”
도준은 게슴츠레 뜨고 대표를 쳐다봤다. 이제껏 팬들이 걸어 준 광고를 보러 가는 일은 있어도, 제작사에서 내거는 드라마 광고를 보러 간 일은 없었다.
K액터스의 제작사 레이블인 ‘by the K’에서 제작하는 드라마에는 숱하게 출연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다. 당연히 굳이 광고를, 그것도 광고가 아직 걸리지도 않은 ‘자리’를 보러 가자는 대표의 제안이 이상하게까지 느껴졌다.
“안 가도 되는 거죠?”
“으응, 안 돼. 어차피 너 차기작도 정해야지. 회사 가서 시나리오 보는 김에 광고 자리도 보자.”
“아, 차기작.”
“너 액션 하고 싶다고 했었지? 액션 들어왔어, 이번엔 영화.”
잔잔했던 도준의 눈동자에 흥미가 일렁였다. 광고에는 별생각이 없는지, 조금의 감흥도 보이지 않던 낯이 환하게 빛을 내는 것을 본 대표가 만족하는 듯 도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데뷔 전부터 액션을 가르쳐 두길 잘했다. 생각보다 몸을 훨씬 잘 쓰는 도준은 액션도 그만의 색으로 기막히게 소화했다. 선이 깔끔하고, 몸짓이 크지 않음에도 모든 액션의 라인을 살려 내는 덕에 대중에게는 과하지 않지만, 맛이 좋은 액션을 선사했다.
그리고 도준 역시 액션을 좋아했다. 아무래도 활동하는 것을 즐기는 성격에 웅크려 지내다 보니, 그나마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는 액션 연기가 적성에 맞는 탓이었다.
“근데 저 전작도 액션이었는데, 또 액션 하면 지겹지 않을까요?”
“네 얼굴이 어디가 어떻게 지겨운데.”
“아, 좀.”
“너 그거 한 거, 그때는 스물여덟 살이었고, 지금 너는 서른 살인데. 성숙해진 액션을 보여 주란 말이야.”
“뭘 또 그새 성숙해져요.”
좋으면서 튕기기는.
대표가 팔꿈치로 도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에 도준의 입에서도 비죽비죽 웃음이 흘러나왔다.
“옷 입고 나올게요.”
“응, 아! 광고 희찬이도 보러 간대.”
흔쾌히 방으로 들어가던 도준이 걸음을 우뚝 멈췄다.
여기서 장희찬은 또 왜 나와?
눈을 크게 뜨고 대표를 바라보자 대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같이 보는 것도 좋잖아?”
하여튼, 저 어른은 우리를 못 붙여 둬서 안달이다.
도준이 입술에 힘을 주고 씰룩거렸다. 새빨간 입술이 오밀조밀 모여 주름을 만들었지만, 대표는 제 뜻을 무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방에 들어선 도준이 입고 있던 옷을 훌렁 벗어 냈다. 드러냈다 하면 사람들이 탐을 내는 보기 좋은 몸이 거울에 비치기 무섭게 도준은 금방 거울을 등지고 섰다. 남들은 감탄을 하고는 하는 몸이었지만, 제 몸을 오래간 보는 것은 도준에게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희찬을 의식한 이상, 아무렇게나 입을 수는 없었다. 도준은 제법 진지한 손으로 오랫동안 옷장을 뒤적거렸다.
가슴에 심플한 로고가 있는 하얀 티셔츠를 입고, 핏이 예쁜 데님 바지를 받쳐 입었다. 봄을 맞은 바깥 날씨는 춥지 않았지만, 혹시 저녁에는 추워질 수도 있으니 두께감 있는 레더 재킷을 걸친 도준은 액세서리 장을 열어 검은색 캡 모자도 꾹 눌러 썼다.
“음, 시계는…….”
걸음을 옮긴 도준이 값비싼 시계가 즐비한 유리장을 한참 들여다봤다. 이걸 차자니 과한 것 같고, 저걸 차자니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결국 도준의 단정한 손목에 자리한 것은 스마트 워치였다. 휴대폰을 잘 보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표가 강제로 도준의 손목에 채웠던 것이다.
도준은 살갗이 가려진 후에야 전신 거울 앞에 서서 몸을 휙 돌려 자신의 행색을 돌아봤다. 과하지 않게 잘 꾸민 것 같다. 이내 도준이 가뿐한 걸음을 놀려 거실로 돌아왔다.
타고난 몸 선이 예뻐, 무슨 옷을 걸쳐 놓아도 태가 난다는 소리를 숱하게 들었다. 휘익, 휘파람을 불어 가며 장난스레 환호하는 대표에게는 굳이 답하지 않았다. 양말까지 가지런히 신은 후에야 도준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준비가 다 되었다는 뜻이었다.
“왜, 피어싱도 하지.”
“그렇게까지요?”
“아주 양아치 같고 괜찮아.”
“칭찬이죠……?”
도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대표가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도준의 등을 퍽퍽 소리 나게 쳤다.
“당연하지. 그거 알지? 세련되고 잘생긴 애들이 꼭 양아치 역할 맡아.”
“가끔 보면, 대표님은 칭찬을 진짜 좀 묘하게 하시는 부분이 있어요.”
도무지 칭찬인지, 욕인지 알 수가 없단 말이지.
도준은 유달리 가벼운 마음에 걸음을 성큼성큼 내디뎠다. 그저 장희찬의 이름만 들었을 뿐인데 기분이 좋아져 버렸다. 내키지 않았던 ‘광고 자리 보러 가기’도 희찬이 온다는 말을 듣기 무섭게 기대로 변하였다.
대표와 함께 차에 올라, 빠르게 변하는 풍경을 살피던 도준이 불현듯 피식, 웃었다. 풋, 가볍게 터진 웃음이 이내 큰 웃음으로 번져 차 안을 가득 메웠다. 환하게 웃는 이도준이라니. 이도준이 이렇게 크게 웃을 일이 뭐가 있을까, 대표가 의아한 눈을 굴렸다.
“무슨 좋은 일 있어?”
“아, 아니 어이가 없어서요.”
대표가 인상을 찌푸렸다.
“왜?”
“드라마 촬영 전에는 장희찬 이름만 들어도 바들댔는데.”
“아.”
“지금은 장희찬 보러 간다고 기분이 좋잖아요. 웃기는 노릇이지.”
아, 이도준은 이제야 제 변화를 깨달은 모양이다.
도준의 주변에서는 이미 그 변화를 인지하고, 도준의 변화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중이었건만, 정작 본인은 이제야 자신의 변화를 마주한 듯했다.
이도준이 변한 것보다, 자신의 변화를 눈치챌 틈도 없이 희찬에게 끌려가는 도준의 모습이 더 흥미롭다.
대표가 힐끔, 곁눈질로 도준을 바라봤다가 이내 도준의 탄탄한 허벅지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이제 너도 희찬이한테 갈 때 됐지.”
대표의 말에 환하게 웃던 도준이 차분해졌다.
“그 정도 했으면 이제 가야지, 도준아.”
희찬이를 피하지 않아도 괜찮고, 오롯하게 마주할 수 있다면, 이제 가야지.
힘주어 반복해서 ‘때’를 알리는 대표의 말에 도준의 검은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무언가 깨달은 듯 확장했던 동공이 원래의 크기를 되찾더니 또렷한 빛을 머금었다.
그렇게 희찬에게 갈 만한 ‘그럴듯한’ 이유를 찾고, 빌미를 만들어 보려 아등바등 애썼는데, 대표의 말 한마디에 확신이 섰다.
그래, 이제는 가야만 한다.
장희찬의 옆에 이도준이 서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필요 없는 것이었다. 그 옆은 항상 도준의 자리였고, 애초에 도준의 것이었으며, 그곳에 도준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도준은 대표가 말하던 ‘광고 자리’에 당도할 때까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복잡한 생각을 정리한다기보다, 놀랍도록 차분해진 마음을 가다듬는 모양이었다. 그를 지켜보는 대표의 입에는 소소한 웃음이 자리했다.
그렇게 조용한 가운데 목적지에 도착한 도준의 입에서 탄식이 터졌다.
[도준아, 우리 꼭 저기에 같이 광고 걸자.]
언젠가 희찬과 함께 보았던 자리, 서울 한복판에서 가장 큰 전광판이었다.
“드라마 방영되는 내내 다른 광고 없이 눈부신 항해 포스터랑 티저, 예고편만 나올 거야.”
“아…….”
도준의 숨이 가쁘게 떨렸다.
저 커다란 전광판에 자신의 얼굴이 숱하게 걸릴 정도로 성공하긴 했어도, 희찬과 나란히 광고가 걸린 일은 없었다. 마치 두 사람의 사정을 알고, 그 꿈을 이루어 주겠다는 것처럼 막대한 돈을 들여 모든 광고 구좌를 잡아 두었다는 대표의 말에 도준이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이건 뭐, 장희찬한테 가라고 등 떠미는 수준 아닌가.
입술이 바짝 마르고 심장이 쿵쿵 거칠게 뛰었다.
이러려고 보러 가자고 한 거구나.
생뚱맞기까지 했던 대표의 제안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챈 도준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우리 드디어 저기에 광고 같이 건다, 그치.”
차마 얼굴을 들 생각도 하지 못하는 도준의 귓가에 희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역시 어린 날의 꿈을 잊지 않은 듯, 향수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도준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 희찬을 응시했다. 말간 얼굴에 피어난 화사함이 유독 돋보였다. 그 얼굴을 마주하기 무섭게 당장 희찬을 품에 안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었다. 아랫입술을 잘근 씹어 문 도준은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유동 인구가 많은 거리에 금방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미 도준과 희찬을 알아보기 시작한 사람들이 요란한 소음을 내며 사진을 찍어 댔다. 웅성거리는 소란이 점점 커지자 대표가 얼른 도준을 차에 태웠다. 희찬도 매니저와 함께 차에 오르는 것을 마지막으로, 차가 부드럽게 현장을 벗어났다.
회사에 도착해 제 앞으로 온 각종 시나리오를 보는 도준은 도통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희찬이는 잘 들어갔을까, 희찬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런 생각이 빼곡하게 들어찬 탓에 시나리오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지러운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 집중하려 해도, 흩어지는 생각은 모조리 희찬에게 향해, 도준의 입에서 답답한 한숨이 터졌다.
“시나리오 다음에 볼래?”
대표가 도준의 정신을 깨웠다. 대표가 보기에도 집중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도준이 벗어 둔 외투를 갖춰 입었다.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던 대표도 갈 채비를 하는 도준의 곁에 섰다. 대표는 산처럼 쌓인 도준 몫의 시나리오 중에서 파란빛을 내는 것을 꺼내 도준에게 건네었다.
“이거, 아까 말한 액션이거든? 내일 봐.”
“네, 연락드릴게요.”
“희경이 회사 왔다던데, 차 타고 가. 너 차 없이 왔잖아.”
두 사람은 나란히 엘리베이터 앞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도준의 검은 눈동자에는 사뭇 단단한 의지가 실렸다. 사뭇 단단해 보이는 그 모습에 대표가 도준의 너른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도준이 떨리는 숨을 가다듬으며 대표를 바라봤다.
“저 이제 가요.”
“응, 오래 헤맸다. 희찬이 목 빠지겠어.”
대표가 조심스레 손을 들어 한껏 헝클어진 도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주 오래전, 도준과 계약할 때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희찬이에게 갈 수 있도록 돕겠다고 했던 것 말이다. 드디어 그 말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오랜 시간을 헤매던 도준은 제 의지로 희찬에게 가겠다고 말했고, 드디어 그 걸음의 첫발을 디뎠다.
도준이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던 대표가 괜한 아련함을 느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아들을 처음 학교에 등교시키는 듯한 기분이 이는지. 기특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다.
“전화해.”
“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오랜만에 도준으로부터 감사 인사를 들었다. 대표는 아릿한 미소를 지은 채로 투명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 도준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로비에서 희경을 만난 후에도 도준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도준의 기분을 살피는 듯 연신 눈치를 보는 매니저가 신경 쓰였지만,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차에 오른 후에는 평소와 달리 잘 준비도 하지 않았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망설이는 모양을 보이던 도준이 끝내 결론을 내렸다.
희찬아
10분 뒤에 만날까
도준이 메시지를 보낸 상대는 다름 아닌 희찬이었다.
메시지를 보내기 무섭게 읽음 표시가 떴다. 이어서 답장을 입력하는 듯 ‘…’ 표시가 뜨더니 금방 답장이 도착했다.
짱
주차장으로 갈게
이내 도준의 심장이 쿵쿵 거칠게 뛰었다. 이제는 긴장이 아닌 설렘이 도사렸다.
아주 오랜 시간 돌고 돌아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것 같았다.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동경하는 위치에서도 아무런 만족을 느끼지 못했던 도준은 비로소 가슴 가득 차오르는 만족을 머금었다.
주차장에 들어서기 무섭게 희찬의 모습이 보였다. 공동 현관문 앞에서 서성이는 희찬을 본 도준은 차가 멈추기도 전에 뒷좌석 문을 벌컥 열었다. 놀란 듯 저지하는 매니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도준은 그 말을 들을 겨를도 없이 폴짝 차에서 뛰어 내렸다.
갈팡질팡하는 마음의 갈피를 잡고 행동하기로 마음먹은 지금,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희찬을 향해 성큼성큼 나아가는 도준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몇 발자국 되지 않는 거리를 내달리다시피 하여 희찬 앞에 당도한 도준이 가쁜 호흡을 가쁘게 내쉬었다.
희찬의 옅은 눈이 도준에게 닿았다. 따뜻하기만 한 그 눈빛에 도준의 입가에 황홀함이 내렸다.
“희찬아.”
도준의 입에서 드디어 오롯한 희찬의 이름이 나왔다. 성대를 울리는 소리에 울컥 감정이 치솟았다. 희찬의 옅은 눈에 파동이 일었다. 잔잔한 일렁임을 머금은 눈을 지그시 응시하던 도준이 가벼운 숨을 터뜨렸다.
“나 왔어.”
잠시 숨을 고른 도준이 비로소 제 의사를 건넸다. 희찬의 말간 눈가에 투명한 눈물이 차올랐다.
“늦어서 미안해.”
도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희찬이 도준을 세게 껴안았다. 오랫동안 그리고 또 그렸던 도준의 품이 비로소 닿았다. 도준의 두 팔이 희찬을 마주 껴안았다. 이제는 놓지 않겠다는 의지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단단함에 희찬이 도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누가 가출을 8년씩이나 해……. 누가 그러래.”
“미안…….”
“잘 왔어, 도준아. 기다렸어.”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상대의 얼굴을 거머쥐었다. 드라마를 촬영하는 동안 무수히 마주한 얼굴이었지만, 오늘은 달라 보이는 그 얼굴에 공허했던 세상이 완벽하게 채워지는 듯했다.
“들어가자.”
“응.”
희찬이 도준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하도 세게 쥔 탓에 도준의 손목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도준도, 희찬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희찬은 도준을 끌어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