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10. 정박 (2) (13/18)

눈부신 항해 5권

10. 정박 (2)

드라마 촬영이 끝난 후였지만, 두 사람은 모두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눈, 코 뜰 새 없는 매일을 보냈다. 도준은 그간 미뤘던 광고 촬영에 돌입했고, 희찬은 코앞으로 다가온 영화 개봉에 홍보 일정을 소화하기 바빴다.

덕분에 두 사람은 눈물겨운 재회를 한 후에도 여전히 마주칠 기회는 적었다.

“아오, 삭신이야…….”

예능 촬영을 마친 희찬이 허리를 통통 두드리며 차에 올랐다. 푹신한 시트에 몸을 묻고, 터져 나오는 탄식을 터뜨리자 매니저가 부리나케 구급상자를 가져와 희찬 앞에 들이밀었다.

“형, 파스 좀 드릴까요?”

“아냐, 괜찮아. 얼마나 가? 잘 시간 좀 있나?”

“그럼요, 주무세요.”

희찬이 얕은 한숨을 쉬었다.

이도준 붙잡고 얘기할 시간도 모자란데, 빠듯한 일정이 답답하다. 매일 붙어서 서로 어떻게 지냈냐고 회포를 풀어야 하는데 이제는 너무 바빠진 우리인지라, 얼굴을 볼 시간조차 부족했으니 성공한 것이 서운할 지경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나마 위안인 것은, 바쁜 스케줄에 얼굴 보는 것 대신 꾸준히 주고받는 메시지랄까.

어릴 때는 그게 그렇게 소원이었던 희찬이었기에, 요즘은 그 사소한 것이 그렇게 행복했다.

잔다며 눈을 감았던 희찬은 다시 눈을 뜨고 어느새 도준의 이름으로 도배된 통화 목록을 살폈다. 두 사람은 메시지를 주고받는 틈틈이 일어난 후, 스케줄에 들어가기 전, 스케줄이 끝난 후, 다시 잠들기 전. 시간이 날 때마다 짧게라도 통화를 했다.

가끔 시간이 맞지 않아 통화가 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그게 예전처럼 슬프지는 않았다.

스케줄이 끝났으니, 도준에게 전화를 걸려던 희찬이 허공에 손을 멈추었다. 도준은 오늘 또 광고 촬영이 있다고 했다. 지금은 한창 촬영 중이려나. 끝나고 전화한다고 했으니, 희찬은 일단 도준의 연락을 기다리기로 했다.

희찬은 도준과의 메시지 창에 머물며 그간 나눈 대화를 살펴보는 것으로 행복을 되새겼다. 그러던 중 아래 방향으로 향하는 화살표가 화면에 떠올랐다. 새로운 메시지가 온 것이다. 희찬은 얼른 화살표를 눌러 새 메시지를 확인했다.

준이

희찬아

C동 6층

도준에게서 온 메시지가 뜬금없다. 다짜고짜 C동이라니. 도준이 사는 집은 A동이고, 희찬이 사는 집은 B동이었으니, C동은 뜬금없었다.

인상을 찌푸리고 미간을 긁적거리던 희찬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우리집?

떨리는 손가락으로 메시지를 보낸 희찬이 휴대폰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준이

응.

나 아직 촬영중

이따가 C동에서 만나자

“미친, 이도준…….”

희찬이 제 입을 텁, 틀어막았다. 툭 떨어진 휴대폰이 발동을 찧었지만, 아픈 것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더듬더듬 바닥을 짚어 휴대폰을 들었다. 희찬의 고운 손가락은 이전보다 더 떨리는 중이었다.

샀어?

음……. 속물 같으려나. 하지만 궁금했으니 물어봐야만 했다.

메시지를 보내기 무섭게 읽음 표시가 뜨더니 ‘…’ 입력 중이라는 것을 알리는 창이 떴다.

촬영 중이라던 이도준은 아무래도 쉬는 중인 모양이다.

준이

응.

“미친놈!”

희찬이 쿵쿵, 거칠게 뛰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했다. 만 원 한 장이 없어 쩔쩔매던 이도준은 사라졌다. 촬영장 율무차가 비싸 울상을 짓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쌓이며 달라진 자신들의 처지가 크게 닿았다.

두 사람이 사는 고급 빌라는 B급 언론사에서 ‘억소리 나는 스타들의 집’이라는 주제로 다루는 기사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소문난 고가의 빌라였다. 그런데 합치자는 말과 동시에 집을 가져오는, 그것도 고급 빌라를 가져오는 이도준의 재력이 새삼스럽다.

희찬이 기분 좋게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매사에 신중하고, 덕분에 행동이 느린 이도준이었는데, 웬일로 재빠르게 집부터 산 걸까. 새로운 와중에 가슴이 뭉근하게 울렸다. 마치 오랫동안 굶주렸다는 듯한 이도준의 모습은 변하지 않은 사랑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덕분에 몰려오던 잠도 모조리 달아나 희찬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나도 집 살 돈 있는데.”

“네? 형, 뭐라고요?”

“아, 아냐.”

참을 수 없는 웃음이 비죽비죽 흘러나왔다. 이도준은 합치는 것에 한 달이라는 시간을 두었고, 희찬은 그동안 대화를 하면서 같이 집을 알아볼 생각이었다. 이도준이나, 저나 한곳에서 벗어나는 것을 즐기지 않는 성향이 짙었으니, 당연히 C동을 염두에 두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이도준이 빨랐다.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한 희찬은 싱글벙글 웃으며 타자를 두드렸다.

너 돈 많이 벌었나봐

준이

다 네 거야

미친놈이 따로 없네, 진짜.

너무 좋다 보니 자꾸만 격한 말이 나왔다.

여유가 물씬 묻어나는 도준의 모습이 치명적이다. 희찬은 아랫입술을 잘근 씹어 문 채로 흥미롭게 눈썹을 들썩거렸다.

돈 앞에 의연한 이도준을 보게 될 줄이야.

희찬은 히죽거리며 도준의 장난에 응하기로 했다.

얼마 있는데

그걸 알아야 나도 소비 규모를 잡지

준이

희찬아

너 혹시

난데없이 도준의 메시지가 끊겼다. 뒷말을 망설이는 건지, 다시 촬영을 시작한 건지 입력하는 표시는 계속 떠 있는데 메시지는 도무지 오지를 않았다.

희찬은 오랜만에 흥미로운 주제에 뚝 끊긴 대화가 심심하기만 했다. 차 바닥을 발로 툭, 툭 건드리며 도준의 답장을 기다리길 몇 분, 다시 진동이 울렸다.

준이

도박해?

이게 나를 뭐로 보고.

촬영 열심히 해라

그렇게 두 사람의 동거를 위한 이사가 시작되었다. C동에서 만나자던 도준과 함께 새집에 들어섰던 희찬은 화사하게 꾸며진 집 안을 둘러보며 싱글벙글 웃어 댔었다. 도준은 제법 그럴듯한 준비를 모두 마치고서 희찬에게 집을 알려 줬다. 필요한 가구들이 모두 갖춰진 집은 넓고, 화려하면서도 도준의 성격 그대로 심플하고, 또 단조로웠다.

커다란 침대가 들어선 침실이 마음에 들었고, 책장이 빼곡하게 들어선 서재도 좋았다. 아무래도 직업이 연예인이다 보니 옷과 액세서리가 많을 거라고 예상한 건지, 미로처럼 이어진 무수히 많은 방은 전부 드레스 룸으로 꾸며둔 센스도 만족스러웠다.

분주한 걸음으로 집 안 곳곳을 둘러본 희찬은 옮겨 온 짐들을 하나하나 정리했다. 별로 없다고 생각한 짐은 생각보다 양이 방대했다. 벌써 며칠째 이 집과 저 집을 오가며 짐을 나르고 정리하는 중이었지만, 아직도 희찬의 집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도준이 바쁜 스케줄 틈틈이 C동에 들러 도움을 주곤 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스케줄은 별로 없다던 도준의 말과 달리 요즘은 어째 도준의 스케줄이 더 바쁘기만 했다.

“어유, 이걸 언제 다 해.”

오늘도 짐을 한가득 싣고 들어온 희찬이 허리를 통통 두드렸다. 그래도 오늘이면 짐 정리가 끝날 것 같아, 지친 몸과 달리 마음만은 개운했다. 희찬은 도준이 스케줄을 마치고 돌아오기 전까지 정리를 마치는 것을 목표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각종 의류와 액세서리를 정리하던 희찬의 손짓이 멈추었다. 눈가에는 아련함이 피었다. 희찬의 손에는 새것이나 다름없는 신발이 들려 있었다. 도준이 남겨 두고 떠났던 이 신발은 혹시 밑창이 닳을까, 지저분해지지는 않을까 아까워 제대로 신지도 못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희찬이 축축한 한숨을 내쉬던 찰나,

“다 했어? 도와줄까?”

스케줄을 마친 도준이 나타났다.

터벅터벅 들어오던 도준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희찬의 손에 들린 신발을 마주한 도준의 검은 눈동자에 얕은 파동이 일었다. 아득한 과거를 마주한 도준은 삽시간에 덮쳐 오는 검은 물결에 아찔해지는 정신을 느꼈다.

“왔어?”

“응……. 그거 아직도 가지고 있네.”

도준이 애써 목청을 가다듬고 차분히 말했다.

“어떻게 버려, 네가 준 건데.”

“…….”

“이 얘기도…… 우리 곧 하자. 일단은 조금만 더 웃고, 이따가 같이 울자.”

도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어차피 해야만 하는 이야기였다. 어렵고 힘든 이야기일 것이 뻔해, 서로 모른 척, 아무렇지 않은 척 묻어 두며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지만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과거였다.

삽시간에 차분해지는 도준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희찬이 도준의 어깨를 툭, 쳤다.

“보고만 있을 거야?”

“응?”

“나 이거만 정리하면 되는데, 도와줄래?”

“아, 그래.”

도준이 발치에 너저분하게 늘어진 옷가지들을 살폈다. 그중에는 희찬이 도준에게 사 줬던 옷들도 몇 벌 포함되어 있었다. 장희찬은 과거의 잔재를 단 하나도 버리지 않았다. 그건 모두 두고 떠난 도준을 오롯이 껴안은 모양새였다.

숨이 떨렸지만, 일단은 희찬의 말대로 웃고 싶었다. 도준은 애써 의식하지 않는 척, 드레스룸을 바쁘게 드나들었다.

두 사람이 손을 합치니 정리도 금방 마무리되었다. 계절별로 공간을 나누어 옷을 걸다 보니 커다란 드레스룸에도 금세 빼곡하게 옷이 들어찼다.

가지런하게 정리된 옷들을 본 도준과 희찬이 동시에 뿌듯함을 머금었다. 빈곤하기만 했던 옛 옷장과 비교되는 모양이 아릿한 향수가 피어올랐다.

“이것도 아직도 있네.”

옷장 제일 앞에는 희찬이 도준에게 사 주었던 패딩도 걸려 있었다. 옷소매 끝을 조심스레 매만지는 도준의 입가에는 잔잔하고 아련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도준의 옆에서 함께 패딩을 쳐다보던 희찬이 부러 가벼운 목소리를 냈다.

“입으라고 사 줬더니 놓고 가는 멍청이가 있다?”

“미안…….”

무거운 과거였지만, 마냥 무겁게 지내고 싶지 않은 마음에 건넨 말은 효과적이었다. 금세 우울해지려는 도준을 어렵지 않게 달랜 희찬이 방긋 피어나는 웃음을 구태여 더 크게 지어 보였다.

“됐어. 이제 제대로 입어. 알겠지.”

“응.”

오랜 세월이 지나 숨이 다 죽어 버린 패딩이었지만, 소중한 추억이 담겨서일까. 여전히 기품이 살아 있는 듯한 느낌에 도준도 비로소 가벼운 숨을 내뿜었다.

정리가 끝난 줄 알았는데, 여전히 바닥에 놓인 새 옷들이 보였다. 도준은 텍도 떨어지지 않은 옷들을 들고 의아한 눈으로 희찬을 쳐다봤다.

“이건 뭐야? 왜 안 걸었어?”

“그거 다 네 거야.”

희찬의 대답이 뜻밖이다. 도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거라고? 나 이런 옷 없어.”

“……네가 사 준 신발에 맞는 옷을 사고 싶었는데. 백화점만 가면 자꾸 너한테 잘 어울릴 옷들이 보이잖아. 정신 차려 보면 나도 모르게 네 옷들을 사고 있더라.”

“…….”

희찬이 건네는 음절 하나하나가 도준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도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제 손에 쥔 옷을 만지작거렸다.

희찬이 이내 싱긋 웃었다. 도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쯤이야,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는 양 했다.

“이거 이제부터 다 입어, 알겠지?”

“응…….”

“이거는 나도 똑같은 거 있어.”

희찬은 자칫 가라앉을 뻔했던 분위기를 이번에도 어렵지 않게 띄웠다. 희찬은 도준이 든 것과 같은 티셔츠를 꺼내 제 얼굴 옆에 대고 팔랑팔랑 흔들었다.

해사하게 웃는 희찬의 머리카락에 부딪혀 비산하는 형광등 불빛이 유달리 눈부셨다. 그 아래 화려한 낯은 또 어찌나 예쁜지 모른다. 쿵쿵 빠르게 뛰는 심장의 고동이 버겁지 않다. 이전처럼 괴롭지도 않았다.

도준은 아무 말 없이 희찬을 으스러질 듯이 세게 끌어안았다. 코끝에 닿는 익숙한 희찬의 향에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매체를 통해 접했던 7년, 드디어 다시 만나 함께 드라마를 촬영하며 꼭 붙어 지냈던 지난 4개월. 매일 본 얼굴이었음에도 이렇게 마주 보는 얼굴은 또 다른 감정을 안겼다.

아직은 조심스러웠지만, 매사에 용기가 필요했지만, 그럼에도 제 곁에 희찬이 있어 참 다행이었다. 말랑한 희찬의 볼을 거머쥐고, 앵두보다 더 빨간 입술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춘 도준의 낯에도 근사함이 피었다.

몽글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부드럽게 얽힌 시선이 상냥하고, 따스하다. 서로를 향한 감정에 변함이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오롯한 사랑만 머금은 시선에 두 사람은 동시에 깊은숨을 내쉬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이윽고 큰 웃음이 터졌다. 결국 이도준이고, 장희찬이었다. 서로의 눈빛만 봐도 의중을 알고, 얼굴만 봐도 웃음이 터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도준이 조심스러운 손으로 희찬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찬아.”

“응?”

“신발 사러 가자.”

방금까지 환하게 웃으며 도준의 손을 맞잡았던 희찬이 질색하며 도준의 손을 뿌리쳤다. 도준의 입에서 나오는 ‘신발’이라는 단어가 몸서리치게 싫어져 버린 탓이었다.

“또 웬 뜬금없는 신발 타령이세요. 나 신발 안 좋아해.”

“다시 좋아하러 가자.”

희찬이 인상을 찌푸렸다. 희찬이 아는 도준이라면, 금세 알겠다며 자신의 의사를 접었을 텐데 웬일로 이도준이 말꼬리를 잡아가며 고집을 부렸다.

안 좋은 기억을 지워 주려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착각일까.

희찬이 인상을 잔뜩 누빈 채로 도준을 마주했다. 도준의 검은 눈동자는 맑기만 했다.

“나 신발 진짜 비싼 거 사 달라고 할 건데.”

희찬이 부러 뾰로통하게 얘기했다. 그에 도준은 문제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응.”

“150만 원짜리 열 켤레 사 달라고 할 거야.”

“그래, 200만 원짜리 백 켤레도 사 줄게.”

겁이나 주려 했던 말인데 도준은 희찬보다 더 큰 단위를 들먹였다. 덕분에 희찬이 할 말을 잃었다. 그렇지 않아도 매사에 느긋하고 당당하던 이도준이었다. 그런 그에게 경제적인 여유까지 생기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듬직함이 도사렸다.

희찬이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크게 숨을 내쉬었다. 체념하는 희찬의 모습에 도준이 입꼬리를 올려 여유롭게 웃었다.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어릴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큰돈을 벌게 되면서, 언젠가 희찬을 다시 만나면 꼭 그가 좋아하는 것들을 원 없이 하게 해 줄 거라는 꿈을 안고 지내 온 지난 날이었다.

그리고 도준은 오늘을 그 꿈을 이룰 날로 정했다.

“가자.”

“아, 잠깐만, 잠깐만.”

희찬의 손을 꼭 거머쥔 도준은 당장에라도 나갈 기세로 발을 놀렸다. 그런 도준의 가슴을 희찬의 손이 가로막았다. 진정하라는 듯,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리는 희찬의 손에 도준이 의아함을 머금었다.

“왜?”

“너만 돈 벌어? 나도 돈 벌어.”

이게 무슨 숨 쉬듯 당연한 말이지.

도준은 희찬의 맹랑한 말에 눈썹을 씰룩거렸다.

“알아.”

“너는 뭐 하고 싶어? 나도 돈 쓸래, 너한테. 나도 쓰게 해 줘.”

도준이 제게 흔쾌히 쓰는 돈쯤이야, 희찬 역시 도준에게 가뿐하게 쓸 수 있는 돈이었다. 그러니까, 200원이 모자라 율무차 자판기 앞에서 울상을 짓던 장희찬도 사라졌다는 말이다.

희찬도 도준이 제게 그랬던 것처럼 듬직함을 드러냈다. 굳은 의지가 드러나는 눈빛에 도준이 눈을 끔뻑거렸다. 뚫어지게 희찬을 훑는 도준의 시선이 집요하다. 희찬은 괜스레 몰려오는 쑥스러움에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나는…….”

느릿하게 말을 머금은 도준의 입술이 움찔거렸다.

“너 갖고 싶은데.”

“나? 이미 네 거잖아.”

희찬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이런 말을 이렇게까지 어렵게 하는지 모르겠다.

희찬의 생각과 달리 도준의 입가에는 장난이 앉았다.

“아니, 네 전 재산이 갖고 싶어.”

“……이거 봐라?”

얼씨구. 희찬이 어이없다는 듯 허, 헛웃음을 터뜨렸다.

도준은 비죽비죽 새어 나오는 웃음을 입꼬리에 건 채로 짓궂은 면모를 보였다. 희찬이 조금 더 과장된 모양으로 눈썹을 꿈틀거리자, 도준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제 뒷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도준의 손에 잡혀 있는 것은 지갑이었다. 도준의 지갑. 희찬은 도준과 지갑을 번갈아 쳐다봤다. 갑자기 지갑을 꺼낸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도준은 지갑을 그리 오래 살피지 않았다. 지갑을 다시 제 주머니에 밀어 넣은 도준의 손에 남은 것은 카드 한 장이었다.

“자, 이건 내 전 재산. 너 가져.”

도준의 가지런한 손가락 끝에 잡힌 카드가 희찬에게 들이밀렸다. 그를 지켜보던 희찬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혀로 적셨다.

얘를 진짜 어쩌면 좋지.

황당하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도준이라면 충분히 할 만한 행동이기도 해서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리고 또 아릿했다.

도준의 카드를 받아 든 희찬이 한동안 조용히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검은색의 단정한 카드가 이도준 본연의 모습 같았다. 카드 뒷면의 아래쪽에는 ‘check’라는 귀여운 글자가 적혀 있었다.

정말 전 재산이네, 싶었다.

“그럼…….”

이내 희찬도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어 카드를 뺐다. 그 카드는 도준에게 건네졌다.

네가 나를 감당하겠다면, 나 역시 같은 방법으로 너를 감당하겠다는 귀여운 다짐이었다.

희찬의 카드를 흔쾌히 받은 도준이 즐겁게 웃으며 카드의 앞, 뒷면을 돌려 살폈다. 카드 하단에 적혀 있는 ‘check’라는 글자가 자신의 의지와 같은 것을 머금은 듯했다.

“나 이거 그냥 막 쓴다?”

“어, 두고 봐라. 나도 되게 막 쓸 거야.”

서로의 카드를 쥔 두 사람은 잘 부리지도 못하는 허세를 한껏 부려 댔다. 열심히 일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카드를 상대의 손에 쥐여 준 두 사람의 얼굴에 뿌듯함이 드리웠다.

도준이 희찬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몸을 가까이 붙이고, 희찬의 귓불을 아프지 않게 잘근 씹었다. 입을 뗀 후에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근데, 진짜 도박하는 건 아니지?”

“야!”

이도준은 오늘 컨디션이 좋아도 너무 좋다.

금세 약을 올리고 드는 도준의 모습에 희찬이 발끈하며 도준의 너른 가슴을 퍽, 쳤다. 그 후에는 그의 말랑한 볼을 세게 움켜쥐었다. 드리우는 고통에 도준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어찌나 세게 꼬집었는지, 희찬의 손끝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 아, 아! 얼굴 안 돼, 얼굴 안 돼. 내일 촬영 있어!”

“내가 땜빵 간다고 해. 야, 너 진짜, 너.”

도준이 희찬의 손이 벗어난 자리를 문질렀다. 뺨이 닿은 손바닥에 뜨끈한 열이 느껴졌다. 도준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내일 아침 일찍부터 써야 하는 얼굴인데, 괜히 자국이라도 남았다가는 큰일이었다.

“안 하는 거 알고 그랬어. 근데, 희찬아.”

“또 뭐.”

“진짜 혹시 하는 거면 나한테만 살짝 말해. 내 돈으로 하는 거니까 나도 조심해야 하잖아.”

“뒤져, 이도준.”

결국 희찬의 단단한 주먹이 도준의 배 정 가운데에 꽂혔다. 희찬에게 잡힌 뺨과 얻어맞은 배에 묵직한 통증이 서렸지만, 입에서는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씩씩거리는 희찬을 보자니 도무지 놀리지 않고서야 배길 수 없었다.

이내 도준이 다시 희찬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주머니에서 스마트 키를 꺼내어 희찬의 눈앞에 살랑살랑 흔들자, 희찬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근데 내가 네 카드로 네 신발을 사면 네가 네 거를 사는 건가?”

“그럼 내가 네 카드로 내 신발을 사서 네가 내 거를 사 주는 걸로 하면 되지.”

어느새 현관문을 벗어나 엘리베이터 앞에 선 사람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다 도준이 희찬의 얼굴이 멀리 밀릴 정도로 세게 입을 맞추었다. 그에 희찬이 도준의 손을 움켜쥐고 그 손등 위에 쪽쪽, 쉴 새 없이 뽀뽀를 퍼부었다.

*

그 오랜 시간의 공백을 가졌음에도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데에는 조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 그들을 두고 흔히 ‘퍼즐’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두 사람은 떨어진 시간이 무색하도록 금방 편하게 대화를 나누고 서로를 꿰뚫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집 안의 풍경도 많이 달라졌다. 두 사람은 생활 습관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희찬은 온 방 안의 불을 훤히 켠 채로 시끄러운 음악을 들어야만 잘 수 있었고, 반대로 도준은 모든 빛을 차단하고 조금의 소음도 흐르지 않는 곳에서만 잘 수 있었다.

흐른 시간만큼 달라진 서로의 모습은 어색하기 그지없었으나, 두 사람은 각자 한 발씩 양보하는 것으로 서로를 보듬었다. 침실에는 도준을 위한 암막 커튼과 희찬을 위한 스피커가 공존했다. 어차피 스케줄 때문에 두 사람이 동시에 함께 침대에 눕는 일은 드물었고, 어쩌다 같이 눕게 된다면 도준은 귀마개를 끼는 것으로, 희찬은 도준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 것으로 각자가 무서워하는 것을 이겨 냈다.

침대 옆 협탁에는 ‘좋은 거 사서 하라’던 대표의 말대로 두 사람의 사이즈에 맞는 콘돔과 젤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도준의 수많은 약도 함께였다.

그렇게 서로의 변한 모습을 알아 가고, 익숙해지는 동안 이따금 과거의 일들에 관해 얘기하기도 했다. 서로 어떻게 지냈는지, 어떻게 대표를 만났는지, 어떻게 계약했고, 어떻게 그렇게 쉬지 않고 일할 수 있었는지 따위의 간단한 것들 말이다.

바쁜 스케줄로 떨어져 지낼 때는 각자의 휴대폰에 찍히는 상대의 카드 내역에 웃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희찬은 도준이 준 카드로 열심히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밥을 먹고, 쇼핑도 하고 그러다 한 번씩 거금을 지르기도 하면서, 도준의 시간에 자신을 새겼다.

[Web발신]

한국****승인 장*찬

160,800원 일시불

04 / ** 23:05 으뜸갈비

“준이 이제 밥 먹나 보네.”

그리고 그건 도준도 마찬가지였다. 의외로 씀씀이가 제법 큰 도준이 이번엔 웬일로 고기를 먹었다. 풀만 먹는 모습이 마뜩잖았던 터라, 희찬은 엄청난 만족을 머금었다.

이 늦은 시간에 밥을 먹은 걸 보면, 아침이 다 되어야 돌아올 모양이다.

희찬은 침실의 불을 밝히고 음악을 켰다. 침대에 누운 후에는 도준의 향을 되새기며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했다.

도준은 오늘도 여지없이 바쁜 스케줄에 아침이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지친 몸을 겨우겨우 움직여 침실 문을 활짝 열기 무섭게 요란한 음악 소리가 도준의 귀를 파고들었다.

머리가 일순 띵-울렸다. 도준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가 희찬이 똑바로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금세 환하게 웃었다.

도준은 씻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침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옷을 벗고 희찬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도준은 침대 헤드에 올려 둔 귀마개를 찾아 귀에다 꽂고, 희찬의 머리를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코끝에 닿는 도준의 향을 느낀 희찬이 금세 도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제 왔어?”

“응, 피곤해.”

“너 메이크업은. 그건 지우고 자.”

“지우고 왔어.”

“그럼 자, 얼른.”

희찬이 토닥토닥 도준의 너른 등을 다독였다. 희찬의 품에 안겨 몇 분 꼼지락거리던 도준이 이내 고른 숨을 내쉬었다. 도준이 편하게 잠드는 것을 지켜보던 희찬이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이 바쁘게 지내는 동안 차츰차츰 드라마 방영일도 다가오는 중이었다. 스태프들과 출연진이 모두 모인 단체 메시지 방에는 콘텐츠의 공개 스케줄이 바쁘게 오갔다.

지잉, 지잉 쉬지 않고 울리는 휴대폰 진동이 시끄럽다. 희찬은 도준이 편하게 잘 수 있도록 도준과 제 휴대폰을 동시에 쥐고, 음악까지 끈 후 침실 문을 꼭 닫고서 방으로 나왔다.

희찬은 오랜만에 맞은 휴식을 만끽하고 싶었다. 몰아치는 스케줄에 겨우 한숨 돌릴 틈이 생겼으니, 오늘을 누구보다 알차게 보내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었다.

“풀을 먹을까, 밥을 먹을까…….”

찬물을 시원하게 들이켠 희찬이 냉장고 문을 톡톡 두드리며 눈을 굴렸다. 냉장고 안은 정확히 반을 나눠, 도준이 먹는 맛없는 풀때기와 희찬이 먹는 건강식 인스턴트가 놓여 있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던 희찬은 결국 간편하게 먹기 좋은 인스턴트를 몇 팩 꺼내 들었다. 오늘은 풀이 당기지 않는다. 역시나 풀때기는 맛이 없었고, 풀을 먹으면서 체중을 관리할 바에 먹는 만큼 운동을 빡세게 하는 것이 더 편한 희찬이었다. 발끝으로 문을 툭 건드려 냉장고 문을 닫고서 가볍게 몸을 놀려 먹을 것을 준비했다.

희찬은 요리에 재능이 없다. 손재주도 좋은 도준과 달리 희찬은 신이 외면한 똥손 중의 똥손이었다. 그래서일까, 도준이 없는 동안 요리가 늘기는커녕 인스턴트가 익숙해져 버렸다.

“음, 맛있는 냄새.”

희찬은 인스턴트 속 재료들을 먹기 좋게 그릇에 옮겨 담은 후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냄비에 적당량의 물을 받고, 찌개의 맛을 내는 재료를 부어 얼마간 끓여 주자 금세 먹음직스러운 찌개가 완성되었다. 그렇게 준비된 반찬과 국을 지켜보던 희찬이 턱을 괴고서 고개를 삐딱하게 틀었다.

“준이…… 밥을 먹여…… 말어…….”

희찬이 고민을 거듭했다.

도대체 도준이 밥을 먹는 타이밍을 알 수가 없다. 지난 8년간, 떨어져 지내며 혼자 굳혔을 그의 생활 패턴을 아직 완전히 익히지 못했다. 당연히 지금 깨워서 밥을 먹인 후 다시 재우는 게 좋을지, 그냥 푹 자고 일어났을 때 먹이는 게 좋을지도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래도 오늘 스케줄 없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럼 역시 지금 먹이고 다시 재우는 게 낫겠다.

결론을 내린 희찬은 거침없이 방을 향했다. 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후끈한 열이 희찬을 휘감았다. 희찬이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방 안의 전경을 살폈다.

자신이 잘 때까지만 해도 선선한 방 안이었다. 일어나 밖으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침대에 똑바로 누워 있었던 도준이 어느새 몸을 둥글게 만 채로 끙끙 앓고 있었다. 바르르 떨리는 잔 진동에 이불이 바르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희찬이 얼른 걸음을 옮겨 도준에게 다가갔다. 도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방에 가득 찬 후끈한 기운은 전부 도준에게서 나오는 듯했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인상을 있는 대로 다 일그러뜨린 도준은 홀로 처절한 싸움을 하는 모습이었다.

전신에 힘을 주고 고개를 세차게 젓던 도준이 모든 기력을 다한 듯 몸을 축 늘어뜨렸다. 그러다 다시 꼼지락거리며 이내 완벽한 방어 형태를 갖추었다. 두 귀를 틀어막은 도준은 연신 중얼중얼 알 수 없는 말들을 했다. 제대로 들어 보려 했으나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는 도준의 말은 희찬의 가슴을 아프게 후벼팠다.

“준아, 준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본능이 희찬의 발을 끌었다. 희찬은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도준의 몸을 덮은 이불을 걷어 냈다. 드러난 그의 팔, 다리를 어루만지자 도준의 큰 몸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파들파들 떨어 댔다.

[다들 네 맛이……던데.]

“흐, 아……. 흐끅…….”

도준은 귓가에 들리는 어지러운 소리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묵직한 소리들이 여러 갈래로 흩어졌다가 다시 하나로 뭉치며 알 수 없는 말들을 웅얼거렸다. 목 뒤가 바짝 당길 정도로 머리를 조아리고, 몸을 웅크렸다. 그래도 자신을 해칠 것만 같은 아득한 어둠이 자꾸만 덮쳐 와 도무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직도 이도……문에 힘……어?]

몸이 피곤했던 탓일까, 기어코 악몽이 찾아왔다. 눈가에 차곡차곡 차오르던 투명한 눈물은 콧대를 넘지 못하고 모여들었다. 가쁜 숨을 터뜨리고, 주먹을 세게 말아쥐어도 그날, 그 호텔의 풍경은 도무지 사라지지 않았다.

새빨간 로프가 눈앞에서 어지럽게 얽혀 들었다. 분명 환상일 텐데, 이상하게 사지가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이물감에 턱 아귀가 불끈 솟도록 이를 악물었다. 자의로 숨을 참고, 전신을 바들거리던 도준이 이내 큰 숨을 터뜨리며 울었다.

“흡, 끅……. 아……! 흐윽…….”

[도, 준……끅, 찾아주……흐세요…….]

귓가에 들리는 남자들의 목소리 사이에 희찬의 목소리가 섞였다. 그건 생생하게 닿는 실제가 아닌,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아득한 전자음이었다. 엉엉 우는 희찬의 목소리가 도준의 뇌를 찌르고 들었다. 도준은 다시 이불을 움켜쥐고 주먹을 파들파들 떨었다.

“도준아, 약, 약 먹자. 응?”

“흐, 끕……. 아, 아끅…….”

희찬이 온 힘을 다해 파르르 떨리는 도준의 손을 잡은 채로 약병을 찾았다. 하지만 모두 같은 모양의 병에 든 덕에 도무지 무슨 약을 줘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희찬의 눈에도 빨갛게 산이 올랐다. 힘겨워 보이는 도준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민 탓이었다.

“어느 약 주면 돼, 어? 어떤 약 줄까……. 도준아…….”

희찬이 울먹거리며 약을 언급하기 무섭게 도준이 눈을 번뜩 떴다. 도준은 희찬의 손을 뿌리치고서 보지 않아도 안다는 듯, 약을 찾아 쥐었다. 도준의 눈에서는 투명한 눈물이 연신 흘렀다. 새빨갛게 충혈된 눈에 독기가 서려, 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느끼는 힘겨움을 알 것만 같았다.

기다란 도준의 목덜미에 굵은 핏대가 불룩 솟았다. 도준은 핏기도 없이 새하얗게 질린 손바닥에 약을 털어 물도 없이 곧장 약을 삼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희찬의 호흡이 가쁘게 차올랐다.

도준이 걱정되는 것과 별개로, 화가 났다.

도준을 향해 궁금한 것이 산더미였으나, 그 모든 것은 다 잊어버릴 정도로 화가 났다. 이 지경이 되도록 스스로를 방치한 이도준에게 화가 났고, 여전히 제 앞에서는 생긋 웃으며 아픈 모습을 숨기려 애쓰는 것이 화가 났다.

희찬은 도준이 숨기는 것을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눈물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던 이도준이 이렇게 우는 이유를 이제는 알아야겠다.

하지만 지금 당장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은 힘겨워하는 도준을 달래야 했고, 도준을 다시 재우든지 깨우든지 해야만 했다.

한숨을 크게 터뜨린 희찬이 다시 누운 도준을 꼭 껴안았다. 이도준이 제대로 정신을 차려야 무슨 얘기든 해 볼 수 있을 테니, 일단은 그의 진정을 도우려는 심산이었다.

“나야, 나야. 도준아.”

“살, 살……려, 아…….”

“나야, 준아……. 괜찮아, 괜찮아.”

희찬은 억지로 도준의 옆에 엉덩이를 밀어 앉았다. 땀에 젖은 도준의 머리를 허벅지에 올려놓고 정성스레 쓰다듬었다. 아프게 우는 도준의 모습이 희찬의 마음을 다 헤집어 놨지만, 희찬은 자신이 아픈 것보다 도준을 다독이기 바빴다.

“살…… 흑, 끅……. 후윽, 읍…….”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도준은 쉬지 않고 울었다. 희찬은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하지 못한 말을 전하며 도준을 달래었다.

“도준아……. 내가 너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흐, 흐으…….”

“너 그때 그렇게 울 때, 나보고 가지 말라고 했는데……. 그냥 두고 가서 미안해. 내가 미안해.”

“흡, 흐윽…….”

“이제 안 그럴게, 안 두고 갈게……. 네 옆에 있을게. 그러니까 괜찮아, 이제 괜찮아. 아무도 너 못 괴롭혀. 괜찮아……. 우리 괜찮아.”

희찬이 온몸에 힘을 주고 도준의 힘을 견뎠다. 누가 그렇게 저를 죽이려 드는지, 살려 달라는 말을 허공에 읊는 도준의 모습이 힘겨워 보였다. 그게 못내 사무쳤다. 희찬은 목이 빳빳하게 메는 것을 애써 무시하고, 도준의 가슴을 토닥토닥 다독였다.

한창 웅크린 채로 전신을 떨던 도준이 이내 큰 울음을 터뜨리며 희찬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희찬을 끌어안은 도준의 팔에도 희찬 못지않은 강한 힘이 실렸다. 마치 이제는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한 행위에 희찬도 마찬가지로 도준을 꼭 옭아맸다.

한참이나 힘겨루기 아닌 힘겨루기를 하니 진이 다 빠졌다. 어느새 희찬의 품에 안긴 도준은 버둥거리던 것을 멈추고 고른 숨을 쉬며 잠든 채였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힘들어…….”

전신에 힘을 주고 눈물을 흘리는 이도준이라니.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도준의 모습이라, 희찬이 저도 모르게 떨리는 한숨을 쉬었다.

문득 드라마를 촬영하던 당시, 도준의 호텔 방에서 처음 약병을 발견했을 때가 떠올랐다. 무슨 약이냐, 물었을 뿐인데 이도준은 낯빛을 바꾸고 예민하게 굴어 댔었다. 아주 매섭게 손에서 약병을 앗아 들고는 캐리어에 툭 던지기까지 했었다.

다시 화가 났다. 도대체 이렇게까지 힘들어하면서 왜 그렇게까지 숨기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만히 화만 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희찬은 차가운 물을 묻힌 수건을 가져와 도준의 전신을 정성스레 닦았다. 닦아도, 닦아도 땀을 흘리는 덕에 그의 몸을 개운하게 하기까지 퍽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참이나 정성을 들인 후에야 뽀송해진 도준의 팔과 다리를 다시 길게 늘어뜨려 놓고, 이불을 끌어 목까지 덮어 줬다. 탄탄한 가슴을 토닥토닥 다정하게 다독이던 희찬이 이내 조심스레 방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답도 없고, 입맛도 없고.”

선선한 공기가 기분 좋게 피부에 닿기 무섭게 차려 두고 먹지도 못한 음식이 보였다. 배가 고팠지만, 입맛이 없었다. 당연히 먹고자 하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희찬은 음식을 애써 눈 밖으로 밀어내고, 소파에 내던지듯이 몸을 날려 누웠다.

무거운 호흡이 연신 이어졌다. 도준이 일어나기 전에 감정을 다스리고 싶은데 자꾸만 화가 치밀어 머리가 어지러웠다.

“뭘 알아야 뭐든 물어보기라도 하지.”

분명 도준에게 물어볼 것들을 다 정리했었다. 하지만 그대로 다 잊어버렸다. 지금은 그저 두서없는 질문만 동동 떠올랐다.

무슨 일을 겪었으며,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어디서 무얼 하고 지냈고, 왜 그렇게 나를 떠나야 했는지. 그날 너는 왜 그렇게 울었고, 돌아왔을 때 너는 왜 없었는지. 누가 널 그렇게 만들었으며, 뭐가 그렇게 힘들었는지.

결국엔 하나로 연결되는 질문들이 순서 없이 얽히며 머릿속을 바짝 조이고 들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은 희찬의 입에서 뜨거운 숨이 터졌다. 아무래도 이제는 같이 울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도준의 아픈 모습이 눈앞에 빙빙 돌아 덩달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희찬이 하염없는 시간을 보내던 중 딸깍,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려 방 쪽을 바라보자 느릿한 걸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도준이 보였다. 이제는 좀 괜찮아진 건지, 터벅터벅 걸어오는 걸음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도준은 희찬의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줄곧 바닥을 응시하며 희찬에게 다가온 후에는 아무 말 없이 희찬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느린 몸짓으로 천천히 파고들었지만, 희찬을 옭아매는 도준의 손에는 굳센 힘이 실려 있었다.

“이제 괜찮아?”

“……너한테 안 보여 주고 싶은 모습이었는데.”

배에서 웅웅 울리는 도준의 목소리에 희찬이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자꾸만 주먹이 말리는 손을 애써 풀어 도준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었다. 진정했다고 생각했는데, 차분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도준의 말을 듣기 무섭게 다시 심장이 펄떡펄떡 뛰었다.

보여 주지 않으려 했다는 이도준의 말이 그저 열받아 돌아 버릴 것 같았다.

그래도 화는 내지 말아야지. 희찬은 가까스로 숨을 가다듬으며 도준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런 거 나한테 안 보여 주면 누구한테 보여 주게.”

“…….”

“도준아.”

“……응.”

도준의 머릿결을 쓰다듬은 희찬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희찬의 의중을 지레짐작한 도준도 입을 꾹 다물었다.

도준의 심장이 쿵덕쿵덕 거칠게 뛰었다. 그간 열심히 피해 온 시간을 이제는 마주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꼴깍,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귓가를 찌르고 드는 소리에는 긴장이 함께였다.

“……나한테 올 때는 다 얘기하려고 결심하고 온 거지?”

“…….”

“이제 얘기해. 너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제 다 얘기해.”

늦기 전에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 시간이 늦어질수록 희찬이 느낄 분노만 커진다는 것도 잘 아는데, 그래서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도 아는데.

도무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도준은 여전히 저를 괴롭히는 일들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이 버거웠다. 어렵사리 이야기를 전했을 때, 그 모든 일의 원인을 자신이라 생각하며 힘들어할지도 모를 희찬의 모습도 보고 싶지 않았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치솟아 숨통이 옥죄는데, 어떻게 말해야 가장 덜 아프게 말할 수 있을까. 그 갈피조차 잡을 수 없었다.

희찬은 대답이 늦어지는 도준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말을 고르는 듯한 모습에 착잡함이 몰려와 도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우리, 같이 울기로 했잖아.”

“응…….”

“나…… 아까 좀 화났어. 네가 이 지경이 되는 것도 모르고 네 옆에 없었던 나한테도 화났고, 네가 그렇게 되도록 방치한 너한테도 화가 났어.”

“…….”

“그러니까 말해. 네가 그날 왜 그렇게 울었는지, 왜 네가 나한테서 떠나야 했는지, 누가 너더러 도움이 안 된다고 말했는지……. 그리고 너 지금은 왜 이렇게 아픈 건지.”

희찬의 차분한 목소리만큼 도준의 가슴이 가라앉았다. 희찬의 허리에 두른 손에는 힘이 바짝 실려, 손등 위에 푸른 핏줄이 어지럽게 얽혀들었다.

“네 얘기 들려줘, 도준아. 응?”

희찬이 거듭 도준을 재촉했다. 이제는 간절하게까지 들리는 희찬의 말에 도준이 ‘후―.’ 길게 숨을 내뿜었다.

이윽고 도준이 어슬렁어슬렁 몸을 일으켜 앉았다. 도준이 희찬의 손을 거머쥐자, 희찬도 도준의 손을 꼭 붙들었다.

“……아파, 들으면.”

“…….”

“진짜…… 듣기 싫을 텐데.”

조심스레 소리를 낸 도준의 말에 얕은 파동이 일었다.

“같이 아프자, 할 수 있어.”

분명 같이 아프자고 말하는 희찬이었지만, 그 목소리에는 이미 화가 가득했다. 도준의 울대가 크게 울렁거렸다. 희미하게 허공을 좇던 도준의 눈동자가 명확한 제 모양을 갖추고, 희찬을 또렷하게 마주했다.

도준이 뜻을 정하면 그 후로는 거침없다는 것을 잘 아는 희찬이었기에, 그 역시 덩달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도준이 직접 ‘아프다’고 설명을 덧붙이는 그 이야기가 내심 두려웠다. 그래도 피할 생각은 없다.

그렇게 두 사람의 단단한 시선이 공중에 얽혔다. 두 사람 주변의 공기가 단단하게 뭉치는 듯한 느낌은 착각이 아닐 것이다.

어색한 적막에 도준이 움직일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희찬은 도준의 손을 꼭 마주 잡은 채로 도준의 말을 기다렸다. 도준은 울대가 울렁거릴 정도로 큰 숨을 들이켰다. 희찬에게 잡힌 손을 빼내고,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린 후에는 한참이고 눈을 껌뻑거렸다.

“음…….”

“고르지 마.”

“그러니까…….”

“말 고르지 말라니까.”

자신이 겪은 일 중 경한 것을 고르는 듯한 도준의 모양에 희찬이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다.

“고르는 게 아니라, 처음을 생각하는 거야.”

“아, 기다릴게.”

도준이 후, 한숨을 쉬었다. 입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숨이 파르르 떨리며 도준이 느끼는 긴장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쿵쿵, 빠르게 뛰는 심장을 숨길 길도 없다. 도준은 모아 쥔 손가락을 괜히 까득까득 뜯으며, 침을 크게 삼켰다.

이윽고 도준의 빨간 입술이 움찔거렸다. 드디어 말을 시작할 것 같은 모양에 희찬이 도준에게 집중했다.

“우리 그때 사진 찍혔다고, 너 회사 불려 갔다가 집에 온 날 있잖아.”

“응.”

“그때 막 울고, 그다음 날 다시 회사 갔었잖아. 잘 해결해 본다고.”

“……그랬어. 그거 내가 다 해결했었어.”

도준이 이야기를 시작하기 무섭게 희찬의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반면에 도준의 음성은 희찬의 것과 반대로 점점 작아졌다.

희찬이 큰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기를 반복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옅은 눈동자는 이미 열을 머금고 일렁이고 있었다.

“너 얘기 잘하고 오고, 며칠 뒤였나. 아무튼 너 다시 스케줄 간다고 갔었는데, 전광진이 나를 찾아왔었어.”

“뭐?”

아직 제대로 된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는데 희찬이 또 펄쩍 뛰었다.

그게 잘못됐을 리가 없다. 그 1년을 무슨 짓을 하며 살았는데.

희찬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에 도준이 아랫입술을 잘근 씹어 물었다. 이래서야, 본론은 꺼내지도 못하고 장희찬이 먼저 울 것 같았다.

“그만 얘기할까?”

도준의 묵직한 말에 희찬이 손사래를 쳤다.

“아냐, 미안. 나 조용히 할게.”

희찬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다리 사이에 손을 밀어 넣었다. 입은 꾹 다물고, 어깨를 움츠리더니 고개는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마치 자신을 스스로 옭아매는 듯한 희찬의 모습에 도준이 마른 입술을 적시고 조심스레 말을 다시 이었다.

“그게 한 번에 처리하기에는 일이 버겁다고 하더라고.”

“……응.”

“가진 게 뭐가 있냐고 묻더라. 돈 있냐고, 빽 있냐고……. 근데 내가 가진 게 뭐가 있어, 없잖아.”

“…….”

“그때 내가 가지고 있는 건……. 몸밖에 없었어.”

희찬의 숨이 삽시간에 가빠졌다.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모르겠다. 다음 말이 유추되었지만, 부디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입술을 말아 물고 도준을 바라봤다.

도준은 희찬의 시선에 응하지 않았다. 희찬과 반대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고서,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었잖아. 몸, 꿈, 너……. 나한테 소중한 세 개였는데.”

도준의 목소리에도 차츰차츰 파동이 앉았다. 마치 다시 그때로 돌아간 듯,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보인 도준은 한 마디, 한 마디를 어렵사리 만들어 냈다.

“그중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너지. 두 개를 포기해서 너를 지킬 수 있으면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하고 싶었어.”

이야기 시작도 전부터 도준이 왜 그렇게 ‘아프다.’라는 말을 강조했는지 이제야 알겠다. 초반부터 아프게 때리는 도준의 말에 정신이 다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나한테 스폰을 권하더라. 그래서 한다고 했어.”

“미친! 씨발, 뭐라고?”

결국 희찬의 입에서 거친 욕이 터졌다. 희찬은 바들바들 떨리는 주먹을 숨기지 못하고 꾹 말아 쥔 채로 거친 숨을 연신 뿜어내며 도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도준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희찬은 분노를 다스리지 못했다. 세게 말아쥔 주먹으로 소파를 내리치고, 가슴을 내리치다, 허벅지를 때렸다. 그런 희찬의 손을 도준이 거머쥐었다. 해하지 말라는 것처럼, 때리지 말라는 것처럼. 울면서 아픈 얘기를 털어놓는 주제에 화도 제대로 낼 수 없게 했다.

이상하게도, 희찬이 날뛸수록 도준은 차분해졌다. 저를 대신해 욕을 내뱉고, 고성을 지르고, 악을 쓰며 화를 내는 희찬의 모습에 마음이 점점 홀가분해졌다.

희찬의 하얀 눈가에 붉은 산이 올랐다. 차오르는 눈물에 흰자위가 빨간 선을 그리며 물들고,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낼 틈도 없이 희찬은 화를 냈다.

전광진의 협박에 뼈가 갈리는 것도 모르고 일만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치는 줄도 모르고, 상해 가는 줄도 모르고 일만 했다.

그런데 이도준도 같이 겪는 아픔이었다니.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남자들의 손에 붙잡혀 호되게 당해 부어 버린 도준의 몸을 두고 ‘자위라도 했냐’며 기특해했다. 하루하루 시들어 가는 도준을 보며 ‘기분이 좋지 않은가 보다’ 생각했었다. 아무리 도준이라 해도 매일 기분이 좋을 수만은 없을 테니 말이다. 급격한 스트레스로 미각을 잃은 것도 모르고, ‘좋아하는 것도 먹지 않는다’며, 컨디션이 좋지 않은가 보다 판단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손에 꼭 쥐고 견디던 몇 안 되는 소중한 것들을 내려놓는 줄도 몰랐다. 도준이 여전히 같은 꿈을 꾸고 있을 거라 생각하여, 그는 말만 들어도 버거울 것들을 억지로 들이밀기도 했었다.

“흐, 씨발…….”

무엇이든 최우선에 다른 것이 아닌 저, 장희찬을 두었던 이도준이었다. 마지막에 남겨 두고 갔던, 그 마음 아픈 편지에서 마저 ‘내 세상은 너’라는 말을 두고 떠났던 이도준이었다. 그런데도 그걸 원망만 했다. 그때는 고된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도준의 품에 안기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으므로, 그 낙을 없애 버린 이도준이 사무치게 미웠었다. 그리고 그리웠었다.

그 세상을 떠난 이유가 내게 있을 거라고는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저 각박한 세상을 원망하고, 어리석은 판단을 내린 이도준을 탓하기 이전에 제 주변을 돌아볼 생각은 왜 하지 못했을까.

이제 와 그게 후회가 되어 희찬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하……. 흑.”

회차를 거듭할수록 남자들의 목소리만 들어도 몸이 떨렸다는 이도준의 말이, 그 어려운 일을 견뎌 내는 중에도 밤 10시에는 꼭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는 순수함이, 그래서 그 시간은 어떻게든 지키려 애썼다는 사랑이, 마지막에는 결국 제 존재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 떠나기를 결심했다는 좌절이.

씻어도, 씻어도 더럽게만 느껴져 샤워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제 입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강간’을 언급하고, 남자들의 손에 제모를 당한 후에는 그들과 다른 모습에 조금이나마 만족해 지금도 왁싱샵을 찾으며, 지독한 악몽에는 여전히 그 남자들이 등장한다는 것이.

사람을 좋아하던 이도준이 사람을 멀리하고, 대중성을 포기하고서라도 기사를 차단하여 자신의 사생활을 철저하게 보호하며, 어른들의 억지에도 약을 먹어야 해 술 한잔하지 않고, 어떻게든 자야만 다음날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어 동료들과의 관계를 포기해야 했다는 것이.

그게 그렇게 분하고, 원통하고, 서러웠다.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그래,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해서.

어리고, 세상 물정 모르고, 그저 둘이 좋아 서로를 위하기만 했다.

도준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희찬은 걷잡을 수 없이 흐른 눈물에 안면이 모두 젖은 채였다.

하도 씹어 헤진 입술에서 찔끔찔끔 피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혀끝에 닿는 비리한 맛을 신경 쓸 틈도 없었다.

그저 화가 나 미칠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청년들을 상대로 사기를 친 전광진의 추악함에 화가 났고, 그 아프고 어려운 것을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이 오롯하게 혼자 견딘 이도준에게도 화가 났다.

무엇보다.

무엇보다 그렇게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가지 말라고 빌었던, 가장 아팠을 밤에 제발 같이 있어 달라던 도준을 혼자 둔 저에게 화가 났다.

그날 밤, 도준을 매몰차게 쳐 내고, 추궁하고, 책망하며 궁지로 몰아 나락으로 떨어뜨린 것은 다름 아닌 저, 이도준의 사랑해 마지않는 장희찬이었다.

그게,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흐, 개 씨발……. 씨……발, 하흑…….”

“…….”

울분에 잠식당한 희찬이 연신 험한 욕을 읊었다. 잊어 보려 무던히도 노력했던 과거가 모조리 되살아나 희찬의 뇌를 깨우쳤다.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도준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그때, 이도준은 그 무렵부터 생기를 잃었다.

먼저 장난도 치고, 짓궂게 놀리다가 금세 다가와 사랑한다며 안아 주던 이도준은 그 무렵부터 줄곧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불을 꽁꽁 동여매고, 전신을 가린 채로 누운 것을 들춰 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이도준은 추위를 잘 타니까 추워서 그런 거겠거니, 가볍게 넘겼다.

처음으로 이도준 입에서 병원에 가 보겠다는 말이 나왔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때도 도준의 상태를 제대로 알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유달리 춥고 씁쓸한 겨울이었으니, 답지 않게 감기에 걸린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기어코 얼굴도 봐주지 않았던 날. 도준에게 급기야 화를 내고 말았다. 그는 제멋대로 스스로를 두고 ‘더럽다’고 판단하여, 감히 안을 수 없는 고통을 삭이는 중이었건만, 그걸 두고 그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는다며 유치하게 화를 냈었다.

그렇게 이도준이 사라질 줄은 몰랐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하여, 그저 도움만 되고 싶었던 이도준은 제 존재가 걸림돌이라 여겨지는 상황을 견디지 못했다. 그렇게 사랑만 담고, 애환만 담은 눈물 묻은 편지 한 통과 언젠가 철없이 ‘갖고 싶다’고 말했던 신발을 전 재산을 털어 사 놓고,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었다.

그렇게 갔으면 잘 살기라도 하지.

이도준은 그 후로도 아팠다. 제 사랑의 행복은 그렇게 이 악물고 지켜 놓고, 제 꿈의 꿈은 그렇게 손에 쥐여 줘 놓고, 세상에 장희찬밖에 없었던 저 등신은 혼자 그렇게 울고, 사무치게 아팠다.

“어떻게 그래…….”

축축하게 젖은 희찬의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이도준의 세상은 나였다.

이도준의 꿈 역시 나였다.

이도준의 꿈 역시 나였다.

이도준의 인생이, 나였다.

그 세상을, 꿈을, 인생을 잃은 이도준은, 제 의지로 모든 것을 등졌던 이도준은 그 값을 톡톡히 치르고도, 여전히 아프다. 아직도 운다.

그게 그렇게 화가 났다.

차마 제게 돌아온 이도준의 용기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희찬은 그저 숨고만 싶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도준…….”

“…….”

“네가 어떻게 그래.”

도준의 과거를 곱씹으며 한참이나 울던 희찬이 기어코 설움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도준이 눈물을 뚝, 흘렸다. 희찬이 운 것만큼 울고 있음에도 새로운 눈물이 비죽 비집고 나와 볼을 타고 흘렀다.

희찬이 아랫입술을 짓이겨 물었다. 누가 감히 이도준에게 죄를 물을 수 있을까. 이도준은 아무런 죄가 없다. 그럼에도 구태여 꼭 하나를 고르라면, 단 하나. 그 일련의 일들을 겪고 그 지경이 되어 가는 동안 제게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것.

그것뿐이었다.

우리는 둘 다 어렸으니까. 고작 20대 초반, 막 사회로 향하던 시기였으니까. 가진 사랑이 커 서로를 생각하기 바빴으니까. 닥쳐오는 어려움 속에도 웃고자 노력했으니까.

안다. 발버둥 치기도 바빴던 그 시절, 도준에게 들이밀린 선택지는 선택이 아닌 강압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이해하는 부분이었지만, 희찬의 책망 어린 시선은 자꾸만 도준에게 향했다.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턱 끝에 달린 투명한 눈물방울이 바지를 축축하게 적셨으나 그 역시 신경 쓰지 못했다. 희찬은 주먹을 굳게 말아 쥐고서 마음 가득 도사린 화를 가다듬으려 노력했다.

도준과 꼭 붙어 앉아 있던 희찬이 도준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그에 도준의 검은 눈동자가 삽시간에 커다란 파동을 머금었다. 제게서 떨어져 나가는 희찬의 모습은 두 번은 보고 싶지 않은 것이었으므로, 도준의 눈동자는 희찬이 도준을 두고 가 버렸던 날 밤의 것과 같은 서글픔을 머금은 채였다.

도준에게서 한 발 떨어진 희찬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어 댔다.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희찬을 바라봤을 때는 채 가시지 않은 화가 여실히 드러났다.

“왜 그런 걸 나한테 말을 안 했어? 왜……. 왜, 어떻게……. 어떻게 그래, 네가. 어? 네가……. 어떻게 그래.”

“…….”

“내가 어떻게 네 얼굴을 봐.”

“……!”

도준이 퍼뜩 고개를 들고 희찬을 쳐다봤다. 이번에는 희찬의 시선이 도준을 지나쳐 허공에 멎었다. 희찬은 도준의 시선에 답하지 않았다. 불안한 기색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으나, 희찬은 그를 달래지 않았다.

“나 때문에 네가 그런 일까지 당했다는데, 내가 감히 너를 어떻게 봐…….”

“희찬, 희찬아, 희……찬아…….”

“그냥 잘 살지, 도준아……. 그냥, 그냥 그때 나 버리고 잘 살지 그랬어.”

너 없이 내가 어떻게 잘 살아.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희찬은 아예 소파 끄트머리에 몸을 기대고 울분을 토해 냈다.

“어떻게 다시 이 바닥에 와……. 내가 뭐라고, 내가 뭐라고……. 너 또 무슨 일 어떻게 당할 줄 알고, 나 하나 보고 여기까지 와…….”

악에 받친 희찬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도준이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리고 앉아 처절하게 떨었다. 낮게 읊조리는 희찬의 음성에 천지가 다 갈라지는 것 같았다.

“근데 왜 그걸 나한테 얘기 안 했어……? 네가 그런 일 당할 줄 알았으면, 그래서 네가 나한테서 없어질 줄 알았으면 나도 가만히 안 있었어. 나는, 나는……. 나는 나 때문에 네가 그렇게 아플 줄 알았으면…… 그럼, 너 그렇게 안 뒀어. 네가 그렇게 아픈데 나는…… 아무것도 몰랐어.”

희찬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도준 본인이어도 희찬이 자신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한다는 것을 알았으면 꿈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희찬을 돌봤을 것이고, 그건 희찬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그게 최선이었다.

겨우 제 길을 찾아 한 발 내딛는 애인의 발목을 잡을 수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계속 보고만 싶었다.

“희찬아…….”

도준이 어렵사리 손을 뻗어 희찬의 손을 쥐었다. 하지만 그 손에서 제 손을 빼낸 희찬의 옅은 두 눈은 울분이 가득했다.

도준을 보는 것만으로도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분명 새파란 하늘이었는데, 그 하늘이 다 노랗게 변하는 것 같았다. 불현듯 공기가 쓰게 느껴졌다. 코끝에 가시가 돋아 기어코 숨통을 옭아매, 머리가 띵, 울렸다.

“후으, 흑……. 흐으, 하…….”

두 사람의 축축하게 젖은 거친 호흡이 거실을 빼곡하게 메웠다. 희찬은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이를 부득 갈았다.

마치 도준의 꿈을 밟고 일어서 정상을 누리는 듯했다. 그의 피와 눈물과 청춘을 짓이겨 밟은 것이 저인 것 같았다. 이도준이 죽어 제 성공이 완성된 것 같았다.

“씨발, 후윽…….”

나는, 이런 성공을 바란 적 없다.

희찬이 고개를 푹 수그린 채로 주먹을 굳게 말아 쥐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찬아, 희찬아.”

“그 새끼들 다 죽이고 싶어. 네가 겪었던 것들 배로 갚아 주고 싶어. 근데, 근데……. 그게 나 때문이라잖아. 나는……. 나는 대갚음해 줄 자격도 없는 거잖아.”

희찬은 가슴이 부풀어 오를 정도로 크게 숨을 들이켰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나오는 대로 지껄이다 보면 도준이 상처받을 것이 분명했으니, 치미는 화를 그저 속으로 삭이고 또 삭였다.

“……연기도 못 할 것 같아. 내가 꿈을 꾼 게 잘못인 것 같아.”

희찬의 말에 도준이 두 눈을 크게 뜨고 희찬을 바라봤다. 희찬의 생기 넘치던 눈동자는 힘을 잃고 공허하게 비어 허공을 향했다. 그 모습이 꼭 그 시절의 저를 보는 것 같아, 도준이 희찬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다.

“제발, 희찬아……. 나 때문에 그러지 마, 제발…….”

죄가 없는 이도준은 빌고 또 빌었다.

희찬은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바깥의 상쾌한 바람을 쐬고, 생각을 환기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도준을 혼자 두고 갈 수 없다. 자신이 없는 사이, 또 무슨 짓을 어떻게 저지를지 모를 이도준이었으니 말이다.

희찬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뜨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쉬지 않고 눈물을 흘린 탓에 뺨이 다 쓰렸다.

도준은 감히 고개를 들어 희찬을 바라보지도 못했다. 여전히 시선은 바닥에 처박고, 제 머리를 쥐어뜯기도 하던 도준은 희찬의 바지를 붙잡고 간절하게 빌었다.

희찬의 입에서 ‘꿈을 꾼 게 잘못인 것 같다.’라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세상이 아득해졌다. 도준은 희찬이 꿈을 버리지 않길 바랐다. 무어든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자신이 가진 빛을 찬란하게 발하기를, 그거 하나를 간절히 바랐다.

도준의 눈앞에서 서성거리던 희찬의 걸음이 멀어졌다. 도준은 감히 손을 뻗어 희찬의 발을 잡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희찬을 마지막으로 봤던 그 날의 그 차가운 온도가 전신을 휘감았다.

도준이 다시 큰 울음을 터뜨렸다.

“희찬, 희찬아……. 끅, 희찬아…….”

희찬은 혹시라도 저도 모르게 날 선 목소리를 내어 그렇지 않아도 온통 상처투성이가 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한번 상처 입힐까 두려웠다.

도준을 지키려 한다는 명목으로 방으로 향하려던 희찬이었지만, 도준의 우는 목소리에 문득 과거의 마지막 날을 떠올렸다.

그날 그렇게 혼자 두고 갔던 탓에 이도준이 사라졌었다.

희찬은 방으로 향하려던 걸음을 돌려 도준과 조금 떨어진 곳에 쪼그려 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차마 이도준을 혼자 둘 수는 없었다.

“희찬아……. 나, 나 버리지 마……. 나, 끅, 나 버리지, 마…….”

시계 초침 돌아가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집 안에 도준의 울음소리가 울렸다. 적막 위에 얹힌 울음은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 도준에게 닿았다.

분명 따뜻한 실내인데 오한이 들었다. 도준은 전시에 도사리는 한기에 전신을 오들오들 떨었다. 그 아득함은 마치 8년 전, 그날로 되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도준은 바닥에 처박은 시선을 들어 저 멀리 떨어져 앉은 희찬을 바라봤다. 다행히 빛은 여전히 제 곁에 있었다. 하지만 저와 같은 모양으로 고개를 떨군 희찬의 모습에 끝없는 수렁에 빠져들어 헤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괜히 얘기했다.

그 어둠은 오로지 나의 몫이었는데, 그저 내가 오롯하게 견뎌야 할 아픔이었는데 괜히 털어놓았다.

상처받은 모습의 희찬이 도무지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도준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희찬아……. 제발…….”

감히 희찬에게 다가갈 수는 없어, 도준이 애절한 목소리로 간절함을 읊었다.

희찬은 가슴 가득 도사리는 분노와 그 사이에 스며드는 설움을 죽이려 부단히 노력했다. 어느새 해가 다 지고 어둠이 드리웠는데, 그토록 무서웠던 어둠마저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그저 도준이 전해 온 끔찍하기만 한 일들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그 아픈 와중에도 내가 아니라 저여서 다행이었다는 이도준이, 그 무서운 중에도 내 꿈은 지켜 행복했다는 이도준이. 그럼에도 내가 없어 울고, 나를 보지 못해 아팠다는 이도준이 못내 사무쳤다.

언제쯤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충분히 울었고, 이제는 웃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함께 울자고 말은 했지만, 그게 이렇게 아프다 못해 사무치는 수준일 줄은 몰랐다.

도준이 겪은 일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혼자 도준을 기다리며 무던히 노력해 온 지난날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 수치스럽고, 비참한 일들을 겪고도 자신이 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 아픈 걸음을 딛고 또 디뎠을 도준을 생각하는 희찬이 결국 다시 눈물을 터뜨렸다.

데뷔하지 말걸. 그냥 도준이랑 같이 제안받을 때까지 기다릴걸.

“흐…… 흑.”

안다, 그때로 돌아가면 또 같은 선택을 할 거란 걸. 그 시절 우리는 둘 중 누구라도 먼저 돈을 버는 게 급했다. 불안한 미래를 애써 무시하고 서로만 바라보며 웃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당연히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에 대한 갈망이 컸다. 하루 벌어 하루 먹기 빠듯한 생활에서 한 발이라도 더 나아가고 싶었다. 이도준이 몸을 함부로 놀리며 공사장에서 구르는 것도 싫었고, 집에 가려 택시를 잡아 놓고도 혹시나 돈이 모자랄까 전전긍긍하는 것도 싫었다.

언젠가 아주 무거운 목소리로 든든하게 자신의 말을 전하던 도준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내 꿈을 위해 최선을 다할 테니까, 너는 네 꿈을 위해 최선을 다해.]

그 말이 그런 뜻인 줄 알았으면 포기했을 거다.

아무리 아득바득 사는 것이 힘들다 해도, 가장 소중한 것은 도준이었으니 기꺼이 모든 것을 포기했을 거다. 도준이 제 꿈을 위해 다하겠다는 최선이, 그딴 거였다면 꿈은 꾸지도 않았을 거다.

희찬은 그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음을 가다듬은 희찬이 살그머니 도준의 곁으로 향했다. 도준은 차마 일어나지도 못하고, 쪼그려 앉은 채로 희찬을 올려봤다.

희찬이 도준과 눈높이를 맞추어 앉았다. 차가운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도준과 시선을 마주하자마자 도준의 새까만 눈동자에서 또 눈물이 흘렀다.

희찬이 도준의 턱을 들어 얼굴을 살펴도, 도준은 희찬과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거칠게 떨리는 동공이 자꾸만 시선을 피해 다른 곳으로 향하는 모습에 가슴이 저렸다.

“이도준, 나 봐.”

희찬의 말 한마디에 도준의 눈이 희찬에게 닿았다. 서러움을 머금은 검은 눈동자 위로 투명한 눈물이 차오르더니 이내 또 주륵, 흘렀다. 희찬은 문을 두드리고 긁느라 새빨갛게 피가 몰린 도준의 손을 거머쥐었다.

“누가 널 버린다고 그래, 내가 널 어떻게 버려.”

“……내가, 내가 미안해.”

“네가 왜 미안해. 뭐가 미안해. 도준아, 너 잘못한 거 없어……. 그만 울어, 어?”

희찬이 무너진 도준의 몸을 부둥켜안고 도준을 달랬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사과를 건네는 도준 덕에 희찬은 애써 가다듬은 마음이 거칠게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너른 등을 토닥토닥 다독이자 도준의 가쁜 숨도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희찬은 도준의 울음이 멎어 들길 한참이나 기다렸다. 이도준의 눈물에는 면역이 없는지라, 도준을 달래며 희찬도 한참이고 울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두 사람의 호흡이 잔잔해졌다. 희찬은 도준에게서 몸을 떼고, 도준을 직시했다. 새빨간 도준의 눈가가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여 손가락으로 매만지자, 도준이 눈을 찡긋거렸다. 손끝에는 차가운 눈물이 축축하게 묻었다.

“일단 우리 서로 진정 좀 하고 다시 얘기하자.”

가까스로 전한 말이었건만, 도준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냐. 더 얘기 안 해도 돼. 그만 얘기할래.”

“아니, 끝난 얘기 아니잖아. 너 아직 안 끝났잖아.”

“……나 이제 괜찮아.”

“너 안 괜찮아. 내가 다 알아야 너랑 뭐든 같이하지. 도준아, 우리 그때랑 다르게 지내야지.”

희찬은 다정한 어투로 단호한 말을 건네었다.

그때와 다르게 지내자.

무수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과거에 허덕이기 바빴던 지난날과 달리 희찬과 함께하니 다른 방향의 길이 보이는 듯해, 도준이 희찬의 말을 곱씹었다.

도준이 이내 입을 꾹 다물고 희찬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차갑게 식은 도준의 눈물이 희찬의 목덜미에 닿았다.

희찬이 잔잔한 떨림을 머금은 도준을 아주 다정하게 보듬었다. 희찬은 기력을 모두 소진하여 일어서기조차 힘들어하는 도준을 부축해 침대에 눕혔다. 종일 먹은 것도 없이 울기는 얼마나 울었는지, 옆에서 가슴을 몇 번 토닥여주니 도준은 까무룩 잠이 들었다.

희찬은 결국 긴 밤을 뜬눈으로 꼴딱 새웠다. 스케줄을 위해 주차장에 도착했다는 매니저의 말을 듣고 출근길에 오르면서도 도준의 안색을 살피는 것은 잊지 않았다.

지난밤 잠든 도준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새벽에 간혹 끙끙 앓기도 했으나, 언젠가 ‘손을 잡아 달라’던 그의 말대로 손을 잡아 주면 신기하리만치 숨이 단정해졌다.

차에 오른 후에는 희찬이 고민이라도 있는 듯, 혀를 똑똑 튕겨 댔다. 집에서 나오기 직전, 열을 내던 도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옆에 있어 줄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이라도 불러야 할 것 같은데 누가 좋을까. 잠시 고민하던 희찬은 이내 도준의 대표에게 연락을 취해, 도준이 아프다는 것을 알렸다.

“희찬아, 너 눈이 왜 이렇게 부었어?”

“아, 그쵸. 심한가?”

“아니, 금방 가라앉을 것 같긴 한데. 혹시 울었어? 무슨 일 있었어?”

메이크업 스태프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는 그저 웃었다. 울었다고 말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안 울었다고 거짓말을 하기에는 이미 하염없이 운 얼굴이었다.

희찬의 머릿속에는 전광진을 향한 분노가 도사렸다.

이도준을 망친 전광진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인형 놀이하듯 손바닥에 올려놓고 제 맘대로 주무른 그 사람에게 꼭 파멸을 안겨 주고 싶었다.

JR 엔터테인먼트는 신인이 많은 대형 기획사로 유명했다. 그럼에도 그 신인들이 JR 엔터테인먼트와 재계약을 하는 일은 지극히 드물었다.

하나같이 희찬의 경우처럼 약점이 잡혀 등골이 뽑히다 못해 너덜너덜해질 무렵 계약이 종료되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그럼에도 JR 엔터테인먼트의 만행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전광진이 여전히 저들의 약점을 쥐고 있는 탓이었다.

지금에야 조금씩 말이 나오기 시작해 신인들조차 계약을 꺼린다고는 하지만, JR의 위상은 여전했다. 여전히 그에게 약점이 잡히는 무수한 신인들이 있었고, 연예계 곳곳에 포진한 전광진의 인맥들이 이미지로 먹고사는 연예인들의 숨통을 틀어쥐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게 무섭지 않다. 이도준이 그렇게까지 망가졌다면, 저라도 나서서 JR 엔터테인먼트의 약점을 잡아야겠다는 생각만 도사렸다.

희찬은 교근이 불룩 솟을 정도로 이를 으깨 씹었다. 두 눈에는 투지가 타올라 이글거렸다.

그러던 희찬의 시야에 멀찍이서 다가오는 선배가 들어찼다. 연예계에서 제법 오랫동안 터줏대감으로 자리하며, 잡다한 소식을 모두 접했을 선배였기에 지금 이 고민을 털어놓기에는 아주 제격이었다. 희찬은 헐레벌떡 선배에게 달려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선배님, 선배님!”

“어, 희찬아. 먼저 왔네?”

“하하, 오늘 어쩌다 보니까 좀 빨리 왔어요. 선배님, 제가 다른 게 아니라 궁금한 게 좀 있는데요.”

“응, 뭔데?”

선배의 흔쾌함에 희찬이 주변의 시선을 돌아보았다. 선배에게 제 몸을 밀착한 희찬은 선배의 팔을 끌어 구석으로 향했다.

“혹시 JR 엔터테인먼트 전광진 대표님 아세요?”

“어, 알지. 왜?”

선배는 희찬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는 듯, 덧붙이는 질문에 약간의 의도를 품은 채였다. 그를 기가 막히게 알아챈 희찬은 이것저것 궁금한 것들을 묻기 시작했다.

“혹시 전광진에 대해서 정보 좀 얻을 수 있을까요?”

“어떤 정보?”

“약점이 될 만한 거요. 사실 제가 첫 데뷔를 JR 통해서 했는데, 그때 별거 아닌 걸로 약점 잡혀서 되게 굴렀거든요.”

“그치? 너 스케줄 되게 많았잖아, 그때.”

역시 선배는 희찬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데뷔 직후에도 여러 번 함께 스케줄을 했던 선배는 그 당시의 희찬을 떠올리고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희찬은 아릿한 미소를 피우며 상대를 바라봤다. 이제는 꽤 두터운 관계를 가진 선배였으니, 자신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는 데에 확신이 있었다.

“그래, 그때 좀 이상했어. 기성들을 굴리기는 해도, 신인을 그렇게 굴리는 회사는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너를 굴리더라고. 근데 그 뒤로 데뷔시키는 신인들 대부분이 그러더라.”

상대는 전광진의 이름만으로도 진저리가 난다는 듯 몸을 한껏 움츠리고서 부르르 떨어 댔다.

“네, 그래서 저도 이제 그만 참으려고요.”

“잘 생각했어. 너 정도 돼야 일이 진행되지.”

선배는 진심으로 환영하는 듯 희찬의 어깨를 다독였다. 제아무리 이 바닥의 터줏대감으로 이름을 날리는 선배라고는 하나, 신인들이 겪는 일에 자신이 직접 나서는 위험을 감수하기는 부담스러운 듯한 모양에 희찬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게 선배가 전하는 말은 아주 가관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인의 약점을 잡아 삶을 뒤흔드는 것은 이미 업계에 파다하게 퍼진 일이고, 상습 도박 및 마약에도 연루되어 있으나 백이 좋은 건지 매번 수사선상에서는 제외된다고 했다.

업계 내 평판이 좋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대형 기획사의 면모를 유지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계약하게 되는 신인들의 피와 땀 덕분이라는 말도 덧붙었다. 게다가 그가 구축해 둔 ‘전 라인’이라는 것이 여러 업계에 포진되어 있어, 사업 수완은 여전히 좋다고 했다.

거기까지 들은 희찬이 이를 부득, 갈았다.

아마 그 ‘전 라인’이라는 것이 도준을 망친 거겠지. 말아쥔 희찬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잘못 걸려서 망가진 애들이 불쌍하지.”

그 ‘신인들 굴리기’를 막 시작할 때 함께 전광진의 눈에 걸린 것이 희찬이었다. 하루에 두 시간이나 자면 다행이었다. 제대로 밥을 먹을 수 있는 것에 감사했고, 하루가 멀다 하고 철야 촬영이 이어지는 스케줄을 견뎌야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떠난 도준을 붙잡고 우느라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던 지난날이었다.

마음속에 도사린 화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 이제는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촬영 시작합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마무리되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촬영이 시작되었다. 영화 개봉 전 마지막 홍보 스케줄로, 관객들의 관람을 독려하는 스케줄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끝났다.

스케줄을 하는 동안 마음을 굳게 다진 희찬은 다소 비장한 눈으로 현장을 벗어났다. 집에서 멀지 않은 촬영장이었기에 집까지 오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당당한 걸음으로 집 앞에 당도한 후에는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보이는 것은 어두운 표정의 도준이었다.

지난밤 끙끙 앓고, 오늘 아침까지 열을 내던 도준은 제법 개운해 보였으나, 그의 잘생긴 얼굴 만면에는 침울함이 드리웠다.

희찬이 신발을 채 다 벗기도 전에 도준이 희찬을 덮쳤다. 쏟아지듯 다가오는 도준의 몸을 부둥켜안고, 신발장을 짚었던 희찬이 도준의 턱 아귀에 입을 맞추었다.

“이러다 넘어져.”

“희찬아, 희찬아…….”

도준은 그저 희찬의 이름을 하염없이 되뇌었다. 눈앞에 있는 희찬이었지만 당장에라도 멀어질까 무서웠다.

“도준아, 들어가서 안자. 들어가서.”

“희찬아, 가지 마. 나랑 있어. 응? 나랑 있어 줘.”

“내가 너랑 있지 어딜 가. 도준아, 괜찮아. 내가 계속 옆에 있겠다고 했잖아.”

“응…….”

이런 모습은 또 처음이었다. 마치 분리불안이라도 겪는 어린아이처럼, 좀처럼 떨어지지 않으려는 도준의 손을 희찬이 꼭 부여잡았다.

희찬의 손이 닿자 도준의 인상이 차분해졌다. 도준은 아무 말 없이 희찬이 이끄는 걸음을 뒤따랐다. 시선은 그저 땅에 처박힌 채로 희찬의 발뒤꿈치만 쫓을 뿐이었다.

“도준아.”

“응.”

“내가 생각을 해 봤어.”

“…….”

생각하지 말지.

그냥 모르는 척하지.

지독한 악몽에서 못 들을 얘기 들었다고 치부하고 넘겼으면 좋았을걸.

도준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도준아, 나 너 사랑해.”

“…….”

희찬의 간결한 고백에 눈물이 핑 돌았다. 희찬이 없는 동안 혹시 돌아오지 않는 건 아닐까, 이런 상처를 가진 내가 버거워 나는 또 버려지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수십 곱절로 쌓여 머리를 무겁게 했던 것에 대한 보답 같았다.

도준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꼭 쥔 희찬의 손등만 조심스레 매만질 뿐이었다.

“너는 항상 나더러 내가 네 꿈이라고 하는데…….”

“…….”

“나는……. 우리가 꿈이었어, 도준아.”

막상 도준을 마주하니 쿵쾅쿵쾅 거칠게 뛰던 심장이 놀랍도록 차분해졌다. 우는 도준을 보면 또 화가 나지 않을까, 당장 달려 나가 전광진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 걱정이 무색할 정도였다.

“근데 내가 그걸 너무 혼자서 간직했나 봐. 내가…… 본의 아니게 너한테 너무 많은 걸 떠넘긴 것 같아.”

희찬의 차분한 말에 도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우리가 같이 행복하길 바랐어. 같이 웃고, 같이 울고 뭐든 너랑 같이하고 싶었어.”

“…….”

“그래서 미안했어. 나만 배려하느라고 너는 자꾸 공사장으로 가는 게 계속 마음에 걸렸어. 그래서 조금이라도 빨리 계약해서…… 네가 굳이 공사장에 가지 않아도 우리가 편하게 하고 싶은 걸 하길 바랐어. 근데 그게 내 욕심이었나 봐.”

“아냐, 아냐. 욕심 아니야.”

최대한 감정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제 이야기를 하던 희찬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목 근육이 빠듯하게 땅겼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아 고개를 수그리자, 도준이 따스하게 희찬을 안았다.

도준의 단단한 팔을 붙드는 희찬의 손에 힘이 실렸다. 시퍼런 핏줄이 어지럽게 얽혀 손등에 지도를 그리는 동안에도 희찬은 도무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전광진에게 같이 복수하자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아직 도준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희찬은 굳게 닫힌 도준의 입을 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픈데도 용기 내서 나한테 와 줘서 고마워, 도준아. 내가 그때…… 네가 그렇게 가지 말라고 할 때 그냥 가 버려서 미안해.”

“아냐, 아냐…….”

“그러니까 다 얘기해. 이제 다른 사람이 너 못 괴롭히게 내가 옆에 있을게.”

가슴 가까운 곳에서 울리는 희찬의 음성이 도준의 가슴을 깨웠다. 제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희찬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던 도준이 이내 희찬과 같은 모양으로 희찬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이내 웅웅, 도준의 낮은 목소리가 희찬의 목덜미에서 울렸다. 희찬과 떨어져 지내는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어떤 생각을 했으며, 어떤 삶을 살았는지 말하는 도준의 목소리는 희찬과 마찬가지로 차분했다.

하지만 그 차분함도 오래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전광진을 만났던 날은 네 목소리를 들었다.’라는 도준의 말에 희찬이 결국 다시 눈물을 흘렸다. 굳게 말린 채로 부들거리는 희찬의 주먹 위에 도준의 손이 닿았다.

어느새 청년이 된 두 소년은 제 앞에서 울분을 토하는 사랑하는 사람을 아주 어른스럽게 달랬다.

“내가 언제 한 번 장난감을 엄청 사 들고 보육원에 갔었거든.”

“응.”

“근데 못 들어가겠는 거야. 옛날에는 그렇게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곳인데, 그냥……. 그냥 못 들어가겠더라고. 그래서 그걸 그냥 두고 왔어.”

희찬이 도준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고향 집 앞까지 갔다가, 용기가 나지 않아 돌아와야 하는 그 심정을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그냥 터덕터덕 걷는데, 네가 보이더라고. 근데 그날따라 되게 예쁘더라, 너. 간판 보니까 네가 모델 된다고 자랑하던 그 카페더라? 그래서 그냥 들어가서 맛도 못 느끼는 주제에 네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걸 시켰어. 그러고 앉아서 계속 쳐다만 봤어.”

“…….”

“근데 그 카페 TV에서 계속 너만 나오는 거야. 그게 너무 행복했어. 무슨 제사상처럼 음식 차려 놓고 한 입도 못 먹는데 너 보니까 그냥 좋더라.”

미친 새끼.

희찬은 욕이 불쑥 튀어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그저 모든 순간이 사랑인 도준의 말에 희찬이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겨우 삼킨 울음이었는데, 도준의 숭고한 사랑 앞에 울지 않고는 도무지 버틸 재간이 없었다.

희찬은 도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의 티셔츠가 다 젖도록 눈물을 쏟아 냈다. 도준은 그저 희찬의 등을 토닥토닥 다독였다. 그러면서도 잔잔한 음성으로 전하는 자신의 이야기는 멈추지 않았다.

“……희찬아, 너는 내 세상이야.”

아, 진짜 이도준…….

“내 이름이 가진 모든 시간에는 네가 있어.”

희찬이 눈을 질끈 감았다. 도준은 희찬의 볼에 입술을 뭉개고서 조곤조곤 사랑을 읊었다.

“그날 네가 나를 또 살렸잖아. 덕분에 거기서 대표님도 만났어. 그 뒤에는 나도 너한테 오려고 열심히 일했어. 좀 나아지면 가야지, 희찬이 볼 때는 건강해야 하니까, 꼭 괜찮아지면 가야지……. 그러다가 시간이 간 거야.”

이도준의 사랑은 무겁다. 형태도, 질감도 없는 그저 무수한 감정 중 하나였으나, 그럼에도 그의 사랑은 딱딱한 콘크리트가 켜켜이 쌓인 드럼통처럼 무거웠다.

“왜, 왜 그렇게까지 했어, 왜…….”

희찬의 물기 가득한 질문에 도준이 비로소 웃었다. 고개를 파묻고 엉엉 우는 희찬의 화끈거리는 뺨을 쥐었다. 그의 열기가 손바닥에 그대로 닿았다. 힘을 주고 얼굴을 들어 저를 보게 한 도준은 마치 성스러운 예식이라도 하듯 진중하게 입을 맞추었다.

“희찬아, 나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져서 사랑받고 자란 적이 없잖아.”

“흐, 끅…….”

“근데 네가 나를 사랑했고, 그 사랑받는 게 나는 그냥 행복했어.”

“하……. 흑, 씨발…….”

“그래서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사랑을 돌려주고 싶었어. 잘못된 방법이었다는 거 알아……. 그치, 근데 참 사랑해. 지금도 그래. 아마 그때로 다시 돌아가서 선택하라고 해도…… 나는 같은 선택을 할 거야.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너를 사랑할 거야.”

결국 희찬이 목놓아 울었다. 차분해진 도준 앞에서 감정을 다스리려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기어코 이도준은 장희찬을 울렸다.

그렇지 않아도 오만 부정적인 감정이 북받쳐 힘든 참이었다. 전광진에게 향하는 분노와 세상에 대한 원망 같은 것들이 점철된 감정이 이제는 서러움으로 표출되었다.

도준이 장난감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엉엉 우는 희찬을 소중히 껴안았다. 그리고 울음을 멈출 수 있도록 오랫동안 달래고 또 달래었다. 숨을 쉬기조차 힘들어 헐떡거리는 희찬의 호흡을 돕고, 그러다 차가운 물을 건네며 그의 갈증을 해소시키기도 하면서 말이다.

이야기를 모두 마쳤을 때는 적막이 도사렸다. 무거운 공기에는 간혹 흐느끼는 희찬의 울음소리가 맴돌았다.

“도준아…….”

“응.”

“이제 내가 계속 네 옆에 있을게.”

“응.”

“나 절대로 너 혼자 안 둬.”

가쁜 숨을 헐떡이는 중에도 희찬은 도준을 향한 꾸지람을 빼놓지 않았다. 도준은 자신의 의지를 굳게 담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도 잘 견뎠다고 해 줘, 응? 나 너한테 왔잖아. 잘했다고, 잘 버텼다고 해 줘.”

“잘한 건 아니야. 근데…… 잘 견뎠어. 버텨 줘서 고마워. 내가 몰라줘서 미안해.”

“미안해하지 마, 울지도 말고…….”

도준이 정성스레 희찬의 눈물을 닦았다. 새빨간 희찬의 입술에 입을 맞대자, 하도 울어 건조해진 입술이 열리고 뭉텅한 살덩어리가 비죽 뛰어나왔다. 도준은 기꺼이 희찬과 혀를 섞었다. 혀끝을 세워 치열을 훑고, 입천장을 쓸어 냈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신음이 서로의 입 안에서 메아리쳤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적막을 깨고, 타액이 섞이며 나뉜 따뜻한 체온이 서로의 몸을 부드럽게 녹였다.

이내 희찬이 도준의 몸 위에 풀썩 쓰러지며 도준을 덮쳤다. 희찬의 아래에 깔린 도준이 희찬을 향해 숨기지 못할 사랑을 드러내며 희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마음이 짓눌리는 것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기분은 많이 편안해졌다. 희찬은 두 팔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키고서, 한결 안정된 눈으로 도준을 내려 봤다.

도준이 손을 뻗어 희찬의 머리를 매만졌다. 잔잔한 검은 눈동자에는 얕은 파도가 일렁거렸다.

“사랑해.”

그때의 우리는 서로에게 미안하기만 했다. 서로를 생각하느라 자신이 겪는 아픔을 등한시했다. 행복한 모습만 보여 주고 싶어, 아픈 모습은 철저하게 숨기고 그렇게 거짓말을 해 댔다.

조금은 이기적으로 행동해도 된다는 것을 몰랐다. 용기가 부족했던 우리는 결국 헤어져야 했다.

너무 사랑해서, 너무 소중해서. 지독한 사랑이 가져온 처참한 결과였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 다른 사랑을 해야 한다.

“도준아.”

“응.”

희찬의 툭 튀어나온 울대가 울렁거렸다.

“……진짜 많이 사랑해. 이제 어디 가지 말고, 계속 내 옆에 있어.”

진심이 듬뿍 묻어나는 희찬의 말에 도준이 피식, 웃었다. 도준은 부러 소리를 내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도 방법은 바꿔. 네가 무너지면 안 돼, 그래야 오래오래 같이 이 세상, 저 세상 다 만들고, 부수고, 그러다 다시 쌓지.”

“응……. 사랑해.”

두 팔에 힘을 주고 버티던 희찬이 다시 도준의 가슴에 엎어졌다. 귓가에 닿은 도준의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전해져 따스함이 몰려왔다.

“울려서 미안해.”

도준이 희찬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백번 울려도 돼. 근데 이건 방법이 나빠.”

사랑의 형태가 비로소 온전해진 것 같다. 누군가 ‘퍼즐은 하나의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누누이 말했던 것처럼, 드디어 맞물린 퍼즐이 화려하기 그지없는 그림을 그려 냈다.

한 침대에 누운 두 사람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힘든 일을 견뎌 낸 후에 각자에게 녹아든 생활 습관을 나누고,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전하는 목소리는 조심스러웠지만, 이전처럼 마냥 아픈 소리는 아니었다.

오랜만에 완벽한 행복이 도사렸다. 살얼음 위를 걷는 듯 아슬아슬하던 것이 모두 가시니, 오롯한 행복이 찾아왔다. 두 팔 벌려 다가오는 행복을 마주한 두 사람의 입가에 잔잔한 편안함이 앉았다.

“그 목욕탕 가서 인사드려야겠다. 이도준 잘 돌봐 주셔서 감사하다고.”

“너 가면 되게 좋아하실걸.”

“스케줄 널널할 때가 언제야? 같이 가자.”

“응, 그 전에 보육원도 들를까?”

오랜만에 두 사람은 함께 미래를 그렸다. 아주 가까운 시일에 당도할 미래였지만, 그조차 두 사람에게는 크나큰 발전이었다.

도준의 큼지막한 손가락 사이로 희찬의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깍지를 끼는 모양으로 손을 쥔 희찬은 금세 생글생글 웃었다. 가슴에 도사리는 뭉근한 행복은 피차 마찬가지였으므로, 도준도 희찬의 손에 제 온기가 전해지도록 꼭 쥐었다.

희찬을 끌어안은 채로 잠든 도준은 희찬이 튼 시끄러운 음악도 듣지 못할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마치 오랜 짐을 드디어 내려놓았다는 것처럼 아주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그와 달리 희찬은 도무지 잠을 청할 수 없었다. 도준을 안은 채로 쉬지 않고 도준의 드러난 살결 곳곳에 입을 맞추었다. 아마 우리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서로 미안할 것이고, 오랫동안 괴로울 것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그런 것들이 기꺼웠다. 이제는 혼자가 아니었고, 무어든 함께하기로 했으니 무서울 것도 없었다.

도준은 오랜만에 개운하게 눈을 떴다. 지난밤,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고 희찬을 품은 채로 잠들었더니 약도 없이 악몽도 꾸지 않았고, 몸과 마음은 가벼웠다.

“잘 잤어?”

어느새 따라 일어난 희찬이 눈을 비비적거렸다.

“응, 굿모닝. 눈 부었다, 너.”

“누구 때문인데.”

희찬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도준은 희찬이 다른 말을 덧붙이기 전에 그의 입술을 입으로 막았다. 희찬의 인상이 찌푸려지나 싶더니, 이내 파한 미소가 피어났다.

다 됐다, 이도준이 홀가분하면 그걸로 끝이다.

그저 그렇게만 생각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꼭 껴안은 채로 함께 방에서 벗어났다. 오랜만에 오전 시간이 여유롭다. 오후에는 둘 다 스케줄이 있어 바쁘게 움직여야겠지만, 그래도 지금 이렇게 서로를 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반가운 여유였다.

그리고 그런 여유는 한껏 누려 줘야 제맛이다. 두 사람은 새하얀 식탁 앞에 마주 앉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잔잔한 분위기에 두 사람은 구태여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가시지 않은 어제의 여운도 남아 있었고, 가라앉지 않은 화가 드문드문 고개를 내밀어 감정이 울컥 치솟기도 했지만, 아무튼 평화로웠다.

“근데 너 그거 미각 잃은 거.”

조용한 적막은 오랫동안 무언가를 생각하던 희찬이 깨뜨렸다.

“그거 그때 병원 갔었잖아. 근데 그 뒤로 치료는 안 받았어?”

“아, 병원 갔었는데 후각은 살고, 미각만 죽는 경우가 드물어서 큰 병원 가서 검사받아 보라고 하더라고.”

“근데 왜 안 갔어. 너 병원 한 번만 갔었잖아.”

“……비쌀 거 같아서.”

희찬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말이 나올 때마다 안타깝기만 한 그 시절의 우리가 참 쓰렸다.

“근데 살다 보니까 그냥 익숙해지더라. 좀 덜 먹긴 해도, 이제 괜찮아졌어.”

“가자, 병원. 지금이라도 가서 검사받고…….”

“너 돌아왔으니까 입맛도 곧 돌아올 거야. 괜찮아, 희찬아.”

저건 도무지 착한 건지, 미련한 건지 알 수가 없다.

희찬이 인상을 한껏 찌푸리고 도준을 노려봤다. 마음 같아서는 저 잘생긴 머리통을 한 대 세게 때려 주고 싶었다.

“괜찮긴 시발. 난 그것도 모르고 맛있는 거 먹이겠다고 맨날…….”

비집고 나오는 욕을 툭 뱉으니 그나마 속이 후련해졌다.

옛날이었으면 당장 이도준을 데리고 병원에 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병원도 함부로 갈 수 없는 유명인이 되어 버렸다.

섣부르게 병원에 갔다가 혹시라도 그의 이름 뒤에 좋지 않은 수식어가 붙을지도 모를 일이고, 사람들은 함부로 동정 어린 시선을 쏟아 낼지도 모른다.

그게 싫다.

그들은 측은한 마음으로 건네는 애정 어린 위로일지 모르겠으나, 그 시선에는 이제 넌더리가 났다.

희찬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준이 희찬의 손을 거머쥐었다. 말랑한 손바닥 위에 입을 맞추고, 희찬을 마주한 도준의 시선이 부드럽다.

“미안해. 그때 내가 숨기면 안 됐는데…… 용기가 안 났어.”

“이해해. 나였어도 그랬을 거야.”

“…….”

“근데 도준아, 이제 그러면 안 돼. 뭐든 숨기지 마. 같이 무서워해. 같이 힘내고, 같이 울어. 알겠어?”

“응, 너도 그래야 해.”

“나는 항상 그랬어. 너랑 같이 울고, 같이 웃고, 같이 무서워했어. 앞으로도 그럴 거야.”

단호한 희찬의 목소리에 도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다, 장희찬은 항상 그랬다. 자신이 느끼는 것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을 줄 알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한 번도 숨긴 적 없었다.

“……나도 그럴게. 약속해.”

느릿하기는 해도, 그만큼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도준의 말에 희찬이 방긋 웃었다. 이윽고 희찬의 기다란 손가락이 도준의 새끼손가락을 휘감았다. 약속하는 모양으로 고리가 걸리자, 두 사람의 엄지가 맞닿았다.

누구 하나 힘에 밀리지 않는 두 사람인지라, 엄지가 맞닿자마자 장난스러운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마주 닿은 손가락은 오래간 떨어질 줄을 몰랐다. 엄지손가락 가운데 마디 관절이 아플 정도로 서로의 엄지를 세게 누르는 두 사람이었지만, 입가에는 미소만 피어 있었다. 그러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의 손가락이 동시에 떨어졌다.

“근데 준아, 이건 너 열받으라고 하는 말인데.”

“응.”

“나도 그때 전광진한테 돈 한 푼도 못 받고 일했어. 내가 전광진한테 건 조건이 그거였거든. 앞으로 1년 동안 돈 하나도 안 받겠다고.”

희찬의 말에 도준의 검은 눈썹이 거칠게 들썩거리더니 이내 눈이 날카롭게 뜨였다.

“그거 진짜 씨발 새끼네.”

도준이 살벌한 음성으로 욕을 뱉어 냈다. 그를 듣자마자 희찬이 한참이나 크게 웃었다. 감정에 기복이 있어도 그걸 드러내는 일이 극히 드문 이도준이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이다.

“그러니까 도준아, 우리 전광진한테 복수하자. 가만히 있지 말자.”

희찬의 말에 도준이 눈썹을 일렁거렸다. 전광진을 향한 복수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제야 겨우 마주하게 된 행복을 등지고 다시 불안을 떠안고 싶지 않았다.

그 악랄한 사람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았고, 손에 쥔 행복을 잃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아프고 힘든 과거는 시간의 흐름에 알아서 삭아 가도록 내버려 두고 싶었다.

빛바랜 과거 위에 찬란한 행복을 쌓으면 되지 않을까…….

마른침을 삼키던 도준이 몸을 느슨하게 늘어뜨리고서 희찬을 바라보았다.

“희찬아, 나는 그냥 이렇게 지내는 게 좋아.”

희찬을 타이르는 듯한 도준의 목소리가 부드럽기 그지없다. 희찬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고개를 비틀고 도준을 쳐다봤지만 도준의 시선은 그새 바닥으로 떨어진 후였다.

“너 다시 만났고, 우리 둘 다 잘됐고……. 괜히 건드렸다가 긁어 부스럼 만들면 어떡해. 또 그런 일 있으면…… 그때는 어떡해.”

“뭐가 걱정이야, 우리가 같이 있는데.”

바닥을 기어 다니던 도준의 시선이 다시 희찬에게 향했다. 검은 눈동자는 테두리가 둘린 듯 단단한 모양이었다.

“응, 우리가 같이 있잖아. 그럼 됐어.”

답답한 이도준…….

희찬이 입술을 씰룩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준은 두 손으로 희찬의 날렵하고, 예쁜 턱선을 쥐었다. 양 볼을 동시에 누르는 도준의 힘에 희찬의 빨간 입술이 삐죽 밀려 나왔다. 도준은 마치 도장이라도 새기듯이 희찬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대고 꾸욱 눌러 찍었다.

희찬의 새빨간 입꼬리가 하늘이라도 찌를 것처럼 예쁘게 치솟았다. 여전히 마음 한가득 전광진을 향한 분노가 도사렸지만, 이도준이 싫다는 것은 조금도 할 생각이 없다.

희찬은 일단 도준이 바라는 대로 그저 함께 행복하기로 결심했다.

*

봄이 완연해지는 동안 드라마 ‘눈부신 항해’ 방영도 시작되었다. 그렇게 ‘앙숙’이라 불리며,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던 이도준과 장희찬이 주연 배우로 발탁되고, 이후 촬영이 진행되며 하나, 둘씩 공개되기 시작하는 메이킹 필름이나 스틸컷들은 전례 없는 화제를 끌어모으며 ‘눈부신 항해’의 흥행을 보증했다.

<‘눈부신 항해’ 최고의 1분은?>

<이도준과 장희찬의 만남, ‘눈부신 항해’ 조회 수 2백만 뷰 달성……최단 기록>

공개되는 클립들이 단시간에 수백만 시청 수를 기록하는 것은 물론이고, 온갖 동영상 스트리밍 사이트에서는 방영과 동시에 부동의 1위를 거머쥐었다.

이도준 스킬 발동했다ㄷㄷ 무슨 시작부터 해인이 본인 같음ㅜ

⤷ 22 드라마 초반부터 필살기 가동함

⤷ [system: 킹도준님의 ‘캐릭터 본인화’ 필살기가 발동되었습니다]

* * *

진짜 킹도준 짱희찬 무슨 역을 맡겨놔도 자기 색 없이 캐릭터 그대로 연기해서 감독들이 연기 시킬 맛 나겠음

⤷ 22 ㄹㅇ 그전에 연기한 캐릭터 생각 안나게 연기함

⤷⤷ 어디서 이런 천재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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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항 존나 재밌다 첨엔 게이드라마래서 싫었는데 그런거 필요없고 킹짱존맛ㅋㅋㅋㅋㅋ

⤷ 미슐랭뭐함 맛집선정 제대로 하란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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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짱희찬 분명 현실성 때문에 조언했다고 하지 않았음??? 이게 뭐가 현실성 있어ㅠㅠ 걍 존나 잘생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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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도준 노래도 잘하네,, 현실 킹이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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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근데 킹짱 친구 맞지 이게 연기라고?

⤷ 너 눈치 어디갔어

⤷ 조용히 해

⤷ 디X패치도 게이는 안건든다ㅋ

⤷ 킹리적갓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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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이 눈빛 미쳤다 인수 꼬시랬더니 별안간 게이드라마 보는 여성을 꼬셔버림

⤷ 인수가 안기는 것도 개귀여움 ㅠㅠ 등치도 비슷한 것들끼리..

⤷⤷ 끼리끼리 사이언스 침대는 시X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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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었는데 얘네 진짜 그림체가ㅋㅋㅋㅋㅋㅋ 골라먹는 맛집같음

⤷ 나 오늘부터 임지훈감독 있는 방향으로 삼보일배함 이 둘을 붙여서 게이 드라마를 찍는다? 걍 칸으로 하이패스 주행하세요

⤷⤷ 칸 드라마도 보내줌?

⤷⤷ ㅁㄹ 걍 아무 말이나 한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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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짱 소식 알리미

18:00 드라마 OST, <이도준-눈부신 항해> 음원 발매 #눈부신항해 #킹도준 #짱희찬

온라인 전역도 뜨겁기 그지없다. 출근 준비를 마친 희찬은 소파에 벌렁 엎어져 누워 두 다리를 달랑거렸다. 눈이 시릴 정도로 밝은 휴대폰 화면에는 방대하게 쏟아져 내리는 네티즌들의 반응이 보였다.

그중에서 희찬이 가장 재밌게 보는 것은 이전에도 봤던 한 커뮤니티였다. 도준과 자신을 모두 좋아하는 팬들이 모여 있는 커뮤니티는 활발하기가 유명 아이돌 그룹 팬클럽 저리 가라 수준이었다.

팬들은 두 사람이 절친이라는 것을 밝히기 전에는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서로를 견제했었다. 앙숙이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상대 배우보다 더 좋은 것을 선물해 주려 이를 악무는 팬들 덕에 희찬은 제법 난감함을 느끼기도 했었다.

그런 그들의 경쟁은 어느새 연합이 되었다. 희찬은 도준과 친한 사이라는 것을 밝혀 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진작 밝히지 않았더라면 드라마가 방영되는 중에도 드라마에 관한 이야기는커녕, 서로의 연기만 언급하며 ‘내 배우가 더 잘났소’ 경쟁하느라 드라마의 내용은 전달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 말이다.

한참 휴대폰을 보던 희찬이 문이 닫히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또 팬들 반응 봐?”

출근 준비를 마치고 나온 도준이 희찬에게 다가왔다.

“응, 여기 재밌다니까. 같이 볼래?”

“아니, 난 그거 한 번 보면 시간이 너무 잘 가서 안 되겠더라.”

도준이 두 팔을 벌려 품을 열었다. 마치 안아 달라는 듯한 행동에 희찬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두 사람의 팔이 서로의 몸을 옭아맸다. 한참이나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로 시간을 보낸 후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잘하고 와.”

“너도, 몸조심해.”

희찬이 도준의 어깨를 안았던 손을 내려 엉덩이를 토닥였다. 도준도 그에 보답하듯 덩달아 손을 내려 희찬의 엉덩이를 조몰락거렸다. 이내 도준이 희찬에게서 떨어져 현관으로 향했다. 이미 많이 늦은 시간이었고, 주차장에서 기다리는 매니저에게서 지치지도 않고 전화가 오는 중이었다.

“준아, 도준아.”

“응?”

“이따가 시사회 올 거지?”

오늘은 희찬의 영화 시사회가 있는 날이다. 희찬은 당연하다는 듯이 도준을 초대했고, 도준은 아직도 그에 답하지 않았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희찬의 눈동자에 도준이 마른침을 꼴깍였다. 일단은 스케줄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이고, 자신의 스케줄이 아닌 이상, 공식 석상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았었다. 말주변이 없다는 허울 좋은 핑계를 대고 있지만, 괜한 구설에 오르지 않을까 우려하는 마음이 크게 자리한 탓이었다.

그래도 같이 드라마에 출연 중이니 괜찮으려나…….

잠시 눈을 굴리던 도준이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따 스케줄 보고 연락할게.”

도준의 입에서 어느 정도 긍정적인 대답이 나오자, 희찬의 낯이 환하게 피었다.

“꼭 와, 알겠지? 영화 재밌단 말이야.”

“네가 하는 건데 뭐든 안 재밌겠어.”

“오는 거로 안다?”

“못 가면 전화할게. 언제 끝날지 몰라.”

“암튼 와, 알겠지?”

희찬은 도준이 현관문을 벗어나 엘리베이터에 오를 때까지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렸다. 그런 희찬의 모습은 한없이 신나 보였고, 도준은 생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

희찬이 주연으로 나선 영화의 첫 공식 행사가 진행되는 장내는 시사회에 참여하는 수많은 연예인들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왁자지껄했다.

이번 시사회는 기존의 VIP 시사회와 달리 참여하는 스타들의 인터뷰가 함께 진행되었다. 팬들에게는 입구에서 배부하는 사인지에 사인을 받을 수 있는 기회도 주어졌다. 영화 행사에서는 가끔 있는 일이었지만, 그저 ‘VIP 시사회’라고 설명된 것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출연자로, 제일 먼저 등장해 쏟아지는 사인 요청에 일일이 응하고, 팬들과 셀카도 찍어 주며 친절한 팬 서비스를 선보이던 희찬이 포토월 앞에 섰다.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에 환한 낯으로 응한 후에는 인터뷰를 위해 마이크를 쥐었다.

정면에는 희찬을 응원하는 각종 플래카드와 팬들의 카메라가 빼곡하게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희찬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담아 두겠다는 심정으로 그들을 차분하게 살폈다.

“네! 희찬 씨, 이번 영화가 개봉도 전부터 아주 화제였는데요! 생각하시는 관람 포인트를 알려 주시죠!”

“어……. 일단 인물들 감정의 흐름에 대해 생각해 주시면 좋을 거 같고, 그리고 그 흐름에 따른 주변 색감의 변화도 좋은 눈요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희찬은 특유의 밝고, 경쾌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인터뷰어의 질문에 착실히 응했다. 희찬의 대답이 끝날 때마다 사람들은 우레와 같은 한호를 터뜨렸다.

그렇게 몇 가지 질문에 몇 번 더 응답한 후, 가지런한 걸음을 놀려 대기실로 돌아온 희찬은 입술을 비틀었다.

이런 분위기로 진행되는 시사회인 줄 알았더라면 도준을 부르지 않았을 거다. 사람 많은 곳을 질색하는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인터뷰까지 한다는 소식을 접하면 곤란해 할 것이 분명했다.

인상을 한껏 찌푸린 채로 고민하던 희찬이 휴대폰을 들었다. 아직 스케줄이 끝나지 않은 건지, 도준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마지막에 보낸 메시지에도 읽음 표시가 뜨지 않은 것을 보니 아직도 일하는 중인 모양이다. 혹시 하는 마음에 희찬이 도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도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휴대폰을 내려놓은 희찬은 바깥 상황이 생중계되는 TV 화면을 바라봤다. 오늘 이 광경은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무료 생중계까지 된다고 했다.

제작사가 유난이라는 말은 익히 들어 왔다만, 이렇게까지 난리를 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오랜만에 팬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좋았으므로, 희찬의 입가에는 예쁜 미소가 피었다.

“형, 이제 곧 상영 시작한다고 이동하시라는데요.”

“응, 가자.”

결국 이도준은 오지 않을 건가 보다. 못 오면 연락하겠다더니, 그 연락조차 할 시간이 없는지, 휴대폰은 이도준 빼고 오만 사람에게서 오는 연락으로 진동이 울려댔다.

바깥의 소란스러움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복도에서 대기실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큰 웅성거림이 느껴졌다. 유명 배우가 왔나 보다, 가볍게 생각하며 지나려던 차에 처음 희찬이 등장했을 때와 엇비슷한 크기의 함성이 터져 공간을 뒤흔들었다. 무거운 물이 풀썩 주저앉듯 울리는 커다란 환호에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장내가 흔들렸다.

희찬이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

“뭐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매니저를 쳐다봤다. 매니저도 어안이 벙벙한 듯, 어리둥절한 눈으로 사방을 살폈다. 그러다 시사회 진행을 위해 안쪽으로 들어오는 스태프를 맞닥뜨렸다. 희찬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남자의 팔을 붙들어 세웠다.

“밖에 무슨 일 있어요?”

“아, 이도준 왔어요.”

스태프도 예상하지 못한 듯, 그의 얼굴 만면에 즐거움이 가득했다. 희찬의 눈도 덩달아 휘둥그레 뜨였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보니, 깔끔한 정장 차림의 도준이 레드 카펫 앞에서 다른 배우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멀끔한 차림의 도준은 쏟아지는 조명 아래 자신이 가진 빛을 숨김없이 발산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위풍당당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다. 제 색을 되찾아 자신을 갖고 성큼성큼 걷는 도준에게서는 쉬이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아우라가 느껴졌다.

“아, 도준 씨! 사인하시면서 가셔야 해요!”

누군가의 설명에 도준이 당황한 듯 매니저를 바라봤다. 팬들이 내미는 사인지에 사인을 해 주고 싶어도, 도준의 손에는 펜이 없었다.

“희경아, 나 펜이 없어.”

“아, 형. 여기요.”

매니저가 얼른 주머니에서 매직을 꺼내 도준에게 건네었다. 도준은 펜을 받기 무섭게 빠른 속도로 사인을 해 댔다. 허리를 숙여 가며 팬의 이름을 듣고, 직접 이름까지 써서 건네는 사인에 환호성은 더욱 커져만 갔다. 사인을 하는 중에는 불쑥 들어오는 휴대폰도 있었다. 같이 사진을 찍자는 뜻이라는 걸 찰떡같이 알아챈 도준은 무릎을 구부려 얼굴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쏟아지는 사인지에 모두 사인을 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도준은 사인을 못 받는 뒷자리 사람에게는 괜히 미안함을 느끼고, 그 심정을 담은 눈빛을 보내는 것으로 사인을 대신했다.

도준은 포토월까지 향하는 데에만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었다. 겨우겨우 포토월 앞에 선 도준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번에 매료시키는 잘생긴 얼굴로, 기자들의 요구에 따라 방향을 바꿔 가며 카메라를 응시했다.

“도준 씨 이리로 오실게요.”

“아, 인터뷰도 있나요?”

인터뷰어를 지나치려던 도준이 저를 붙잡는 목소리에 난감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렇게 성대한 시사회라고는 전달을 받지 못했기에 입장하는 순간부터 당황의 연속이었다.

웅성거림이 돌고 돌아 귓가에 웅웅거리는 것이 달갑지 않다. 무거운 웅성거림 속에서 언제 튀어나올지 모를 남자들의 목소리에 긴장이 몰려왔다. 도준은 초조한 심정을 애써 감추고, 가지런한 낯으로 상대를 바라봤다.

“아니, 이도준 씨. 이런 곳에서는 또 처음 뵙니다. 평소 시사회에 참석하시더라도 포토월 패스하시고 바로 상영관으로 가시는 일이 허다했는데요.”

“네, 오늘 희찬이가 꼭 오라고 해서 오긴 왔는데……. 하하.”

“희찬 씨가 초대하셨군요! 혹시 희찬 씨한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까요?”

“아……. 따로 없습니다.”

살갑지는 않아도 적당히 웃는 얼굴로 인터뷰에 응하는 도준의 태도에서는 은근한 단호함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바닥에는 말을 옮기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수십 수백의 눈과 귀를 차치하더라도, 영상이 떠돌고 사진이 떠돌고 있음에도 제 마음대로 말을 바꾸어 나불거리다 이내 ‘아니면 말고’ 식으로 무마하는 일도 허다했다.

게다가 저 인터뷰어는 이전에 도준에 관련하여 질 나쁜 루머를 퍼뜨리던 선배와 절친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당연히 도준은 더욱 말을 아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시군요! 근데 이도준 씨, 도준 씨도 이번 영화에 주연으로 물망에 올랐었는데요, 그때 당시, 희찬 씨가 주연을 확정 지으면서 도준 씨는 배역을 거절하셨습니다. 혹시 영화가 잘되는 것에 배가 아프지는 않으세요?”

질문 수준이 어이가 없다. 도준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리며 인터뷰어를 직시했다. 당연히 앙숙을 언급하며 원래 친했던 사이냐고 물을 줄 알았더니, 다른 방향으로 비틀린 질문은 어딘가 꼬투리를 잡아 보려는 듯했다.

도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뇨, 이건 희찬이가 잘한 거고, 제가 했다고 해서 이 성적이 나온다는 보장은 없지 않나요?”

도준은 저도 모르게 날 선 목소리를 내었다. 인터뷰어의 질문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몇 명인지 가늠도 하기 어려운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저를 쳐다보고 있는 사실이 버거웠다.

드문드문 험상궂은 남자들의 얼굴도 보였고, 크게 외치는 굵직한 목소리도 들렸다. 점차 정신이 아득해지려는 것 같아, 도준은 주먹을 불끈 말아 쥐고, 정신을 가다듬으려 무던히도 노력했다.

인터뷰어와 도준의 대화를 듣던 희찬의 눈길이 점점 진지해졌다. 어딘가 뾰족하게 찌르고 드는 도준의 목소리에서 성가신 그의 심정이 그대로 느껴졌다.

고개를 빠끔 내밀고 도준을 바라봤다. 도준은 웃는 낯이었으나, 예상대로 눈빛이 곱지 않았다.

“형, 형! 어디 가세요, 형!”

희찬은 아까부터 상영관으로 가야 한다고 저를 재촉하는 매니저를 뒤로하고, 저벅저벅 걸음을 놀려 도준에게 향했다.

“도준아!”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드라마에 함께 출연하며, 한창 상승 주가를 달리고 있는, ‘앙숙’인 줄 알았으나 절친한 친구라는 두 톱 배우가 비로소 한 곳에 함께 섰다. 다시 엄청난 함성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사람들은 드라마 ‘눈부신 항해’의 눈부신 흥행으로 ‘혹시나 두 사람의 투샷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부응하는 상황에 아낌없이 찬사를 보내었다. 그 열기는 인기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를 방불케 했다.

“어! 앙숙인 줄 알았더니 절친이었던, 두 분의 투샷을 이렇게 보네요!”

자칫 불편한 심기를 표정에 내비칠 뻔했던 도준이 희찬을 보기 무섭게 안정을 되찾았다. 환한 미소로 희찬을 맞이한 도준은 덥석 제 손을 쥐는 희찬을 구태여 피하지 않았다.

귓가에 거닐던 웅성거리는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지고, 가까이 다가오는 듯했던 남자들의 시선도 사라졌다. 대신 시야에 빛이 드리웠다. 비로소 도준의 딱딱하게 굳어 가던 표정도 부드럽게 풀리며, 한층 여유로운 분위기가 내렸다.

희찬의 등장으로 인터뷰는 화기애애하게 마무리되었다. 유독 길었던 도준의 인터뷰가 끝나고, 모든 스타들이 내부로 이동하자 빼곡하게 모여들었던 사람들도 삼삼오오 흩어졌다.

장내는 언제 열기를 머금었냐는 듯 순식간에 한산해졌다. 환호하던 목소리만이 공간에 남아 메아리처럼 울리는 착각을 안길 뿐이었다.

영화 상영이 마치고, 출연자들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참석했던 연예인들도 모조리 흩어졌다.

마지막까지 현장에 남았던 도준과 희찬은 당연하다는 듯 함께 차에 오른 두 사람은 평소와 사뭇 다른 모습을 보였다. 차만 탔다 하면 잘 준비부터 했던 도준은 웬일로 눈을 말똥말똥 뜬 채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줄곧 창밖을 응시하며 노래를 듣던 희찬은 조용히 시간을 헤아렸다.

희찬이 도준을 향해 몸을 틀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도준은 희찬의 기척을 느끼고 덩달아 몸을 돌려 희찬을 바라봤다.

“영화 어땠어?”

“잘하더라. 너 진짜 잘해.”

영화에 대해 물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이도준이어서 뻔하디뻔한 감상이었다. 희찬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도준을 쳐다봤다.

“나만 봤어? 영화 어땠냐니까.”

“너만 봤어.”

하여튼, 이도준은 나를 너무 좋아해.

하지만 그게 싫지 않다. 희찬은 빙긋 웃으며 도준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도준의 매니저가 룸미러를 통해 두 사람을 쳐다봤다. 두 사람은 어느새 다정하게 손까지 잡은 채로 서로를 향해 제법 다정한 눈빛을 보이는 중이었다. 그에 매니저가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크게 한숨을 쉬었다.

저 형들이 저러다 어쩌려고 저러는지 몰라.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후에는 결심한 듯 다시 두 사람을 쳐다봤다.

“형들 제가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요.”

“응?”

“그렇게 자꾸 손잡고 계시면 다른 사람은 의심해요.”

도준과 희찬이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는 의심 안 해?”

희찬의 질문이 다소 도발적이다. 매니저의 반응이 궁금하기는 매한가지였으므로, 도준은 굳이 희찬을 말리지 않았다.

“두 분 같은 보육원 출신, 절친인 거 이미 알고 있어요. 그리고 지금은 같이 사는 것도!”

“그건 매니저면 당연히 아는 거고, 다른 거 말야. 사람들이 의심할 만한 거 너는 안 하냐고.”

희찬이 한 번 더 매니저를 도발했다. 이번에는 도준이 하지 말라는 듯, 희찬의 손을 꾹 쥐어 눌렀지만 희찬은 도준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어 보일 뿐이었다. 기다려 보라는 듯한 제스처에 도준이 입을 꾹 다물었다.

희찬의 말을 들은 매니저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아이, 형! 그래도 제가 눈치는 있거든요? 우리 형 남자 싫어해요.”

매니저의 단호한 목소리에 두 사람이 동시에 큰 웃음을 터뜨렸다.

문득 드라마 촬영 당시, 매니저를 두고 ‘눈치가 모자라 편하다’고 말하던 도준이 떠올랐다. 그의 말대로 매니저는 눈치가 살짝 모자라다. 매니저는 자신의 말에 확신이 있는 듯 보였지만, 완벽하게 틀린 대답에 두 사람은 굳이 설명을 붙이지 않았다. 그저 저들끼리 눈을 마주치며 킥킥, 즐겁게 웃을 뿐이었다.

“근데 신기하긴 해요, 도준이 형 진짜 다른 사람이 만지는 거 싫어하는데. 친구는 다른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매니저의 모습에 도준이 웃음기 어린 말을 얹었다.

“그래, 계속 궁금해해.”

“음, 네!”

희찬은 비로소 깨달았다. 도준이 왜 저 덜떨어진 매니저를 굳이 끼고 지내는지 말이다.

매니저는 많이 부족해 보였으나, 정말로 도준에게 가타부타 토를 달지 않았다. 하라면 하라는 대로, 하지 말라면 하지 말라는 대로. 그것이 자신의 본분이라는 것처럼 더 이상 캐묻지도 않고 입을 꾹 다문 도준의 매니저가 처음으로 마음에 들었다.

차창의 풍경이 빠르게 바뀌었다. 아주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시사회가 끝난 뒤여서일까, 거리는 인적이 드물었고, 빈 거리를 오로지 휘황찬란한 간판들이 비추는 중이었다. 늦은 시간에 이동하는 일이 잦은 두 사람에게는 굉장히 익숙한 풍경이었으나, 가끔은 지구에 덩그러니 놓인 기분이 들기도 했다.

“우리 광고 보고 들어갈래?”

차창 밖을 살펴보던 희찬이 홱 고개를 돌려 도준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광고가 걸린 후에는 가 보지도 못했다.

도준은 고민하는 듯 눈을 굴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희경아, 우리 드라마 광고 걸린 거 보고 가자.”

“어, 네! 여기 바로 다음 블록이에요.”

도준의 말에 매니저는 이번에도 아무런 토를 달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행선지 변경으로 짜증이 날 법했으나, 매니저는 그저 싱글벙글 웃어 댔다. 그를 유심히 살피던 희찬도 함께 웃었다.

이도준은 인복이 좋다. 착해서일까, 도준의 주변에는 항상 무해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게 내심 뿌듯해, 희찬이 도준의 손을 매만졌다.

힘차게 달리던 차가 금세 속도를 줄이더니 이윽고 정차했다. 이전에 봤던 전광판에는 드라마 ‘눈부신 항해’의 포스터가 사람들의 눈을 홀릴 정도로 화려한 면모를 뽐내는 중이었다. 차에서 내린 도준은 고개를 들어 희찬과 자신이 바닷물에 젖어 가며 촬영한 포스터를 바라봤다.

잠시 포스터를 보여 주던 전광판에서 눈부신 항해의 티저 영상이 나왔다. 1분가량 되는 영상이 지난 후에는 드라마가 방영될 때마다 바뀌는 건지, 방영된 회차 다음의 예고편이 나왔다.

도준은 그저 커다란 전광판을 가득 메운 광고를 하염없이 지켜봤다. 이 전광판에는 수없이 광고가 걸렸는데, 희찬과 함께여서일까 감회가 남달라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런 도준의 옆에 희찬이 섰다. 어깨를 툭 치는 희찬의 행동에 도준이 희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왜?”

“사진 찍자. 저기 봐.”

희찬의 손가락이 향한 곳에는 어느새 희찬의 휴대폰을 쥔 매니저가 아주 전문적인 포즈로 구도를 잡고 있었다. 그를 본 도준이 고개를 젖히며 웃었다. 한 번도 매니저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 말한 적 없는데 성격 좋은 장희찬은 그새 남의 매니저를 부려 먹는 중이었다.

“희경아! 저거 전광판 다 나오게! 뭔지 알지, 우리는 그냥 대충 개미만 해도 돼! 저거 다 나오게 찍어야 해!”

“네! 지금 구도 완전 최고예요. 형, 여기 봐요!”

매니저의 신호에 희찬이 머리 위로 손을 뻗어 광고판을 가리켰다. 도준은 그저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정면을 응시할 뿐, 별다른 포즈를 취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다양한 모습이 차곡차곡 휴대폰에 쌓였다. 몇 장이나 찍었을까, 두 사람은 문득 주변이 소란스러운 것을 느꼈다. 어느새 매니저의 뒤에는 꽤 많은 사람이 모여 도준과 희찬을 찍고 있었다. 한산한 거리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오가는 사람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람 더 몰리기 전에 가야 할 거 같아요, 형.”

“응, 가자.”

매니저의 재촉에 두 사람이 한 차에 몸을 실었다. 희찬은 문을 닫기 전에, 모여든 사람들을 향해 인사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부드럽게 달리는 차 안에서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함께 화면을 들여다봤다. 희찬은 손가락으로 사진을 휙휙 넘기며 도준의 답을 기다렸다. 다른 걸 찾는 게 아니다. 그저 희찬의 SNS에 올라갈 사진을 골라 주는 중이었다.

“이거.”

이윽고 도준의 입에서 승낙이 떨어졌다. 희찬의 요청대로 개미만 하게 나온 두 사람의 뒤로 찬란한 포스터가 예쁘게 찍혀 있었다. 포스터의 빛을 등진 탓에 두 사람은 어두운 그림자처럼 보였지만, 사진이 뿜어내는 분위기는 따스하고, 예뻤다.

heechanee 눈부신 해인이랑 인수

#눈부신항해

사진을 올린 희찬은 도준에게 캡션을 보여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두운 차 안을 훤히 비추는 밝은 화면에 잠시 눈을 찌푸렸던 도준이 빠르게 찍히는 ‘좋아요’를 보고 눈썹을 들썩거렸다.

좋아요 4,423,989개

heechanee 눈부신 해인이랑 인수

#눈부신항해

⤷ 더 큰 대한민국,,

⤷ 실시간!! 아까 광고 앞에서 킹짱 봤어요ㅠㅠㅠㅠㅠ

⤷ 10점.. 10점이요

⤷ 대한민국 이제 아기 네덜란드됨

⤷ 가슴이 웅장해져서 지금 E컵되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희찬아, 엄마다. 도준이랑 결혼한다며. 건조기랑 세탁기 견적 뽑아 놓았다. DM으로 집 주소 보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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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주접이 쏟아지는 댓글은 보는 맛이 좋다. 도준은 어느새 희찬과 함께 다시 머리를 마주 댄 채로 빠르게 바뀌는 화면을 살폈다.

문득 희찬이 올린 사진이 참 예뻐 보였다. 매니저가 이렇게 사진을 잘 찍는 줄은 몰랐는데, 오늘 또 희찬 덕분에 매니저의 새로운 재능을 발견했다.

“나도 사진 보내 줘.”

“너 사진 저장할 줄 알아?”

“너 진짜 내가 멍청이인 줄 알아?”

사이가 상당히 좋아 보였던 두 사람은 그새를 참지 못하고 티격태격했다. 룸미러를 통해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매니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 형, 되게 어른스러웠는데, 희찬이 형 옆에 있으면 딱 고등학생 같다.

달라붙어서 한 화면을 같이 볼 때는 언제고, 이제는 서로를 밀어내며 다투는 두 사람을 본 매니저의 감상이었다. 차마 입 밖으로 낼 수는 없는 것이었으므로, 속으로 꾹 삼킨 매니저는 운전에 집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참 시끄럽던 뒷자리가 다시 조용해졌다. 슬쩍 눈을 들어 룸미러를 본 매니저는 저도 모르게 턱이 빠진 사람처럼 입을 떡 벌렸다.

“허…….”

그새 잠든 두 사람의 모습이 어이가 없다. 하지만 그 모습이 싫지 않아 결국 매니저도 씨익, 웃어 버렸다.

과묵하고 신중한 성격의 도준이 희찬의 옆에 있을 때면 제가 알던 도준이 맞나 싶을 정도로 호쾌해졌다. 희찬의 옆에서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줄곧 웃는 상을 하고 있었고, 제법 다정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게 좋았다. 따뜻한 이도준이 뿜어내는 온기는 실로 친절했으니 말이다.

이내 매니저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즐거운 기색을 있는 대로 드러냈다.

뭐가 어찌 되었든, 우리 형 옆에 좋은 친구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니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매니저는 여전히 자신의 눈치가 모자라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샤워를 마친 도준이 허리에 커다란 수건을 두른 채로, 조각조각 갈라진 탐스러운 근육들을 자랑했다. 도준이 샤워를 마치고 나온 욕실 앞에는 작은 파우더 룸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스킨이나 로션 같은 것을 바르지 않았기 때문일까. 여전히 맨피부에 무언가를 바르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도준을 위해 희찬이 꾸며 둔 곳이었다.

주황빛 백열등이 따스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에 선 도준이 한참이나 눈을 굴렸다. 혼자 살 때는 바디오일과 수분크림. 딱 두 개만 올려 두고 지냈는데, 이제는 희찬의 것이 섞여 뭐가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주춤거리는 도준의 등에 맨살이 닿았다. 거실에 있는 욕실에서 샤워를 마친 희찬이 도준과 같은 차림으로 나타나 뒤에서 도준을 안았다.

“수분크림 찾아?”

“응, 어디 있지.”

도준의 턱에 입을 맞춘 희찬이 도준을 안은 채로 손을 뻗어 못 보던 디자인의 수분크림을 쥐었다.

“이거.”

“이거 내 거 아닌데?”

“내가 모델 하는 건데, 이거 좋아. 바꿔 봐.”

“내가 쓰던 거는?”

“다 썼던데?”

그랬나…….

도준이 희찬에게서 받아 들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희찬은 도준에게 건네주는 대신 자신이 뚜껑을 열고 투명한 수분크림을 제 손등에 덜었다.

희찬이 도준과 함께 거울을 들여다보며 정성스러운 손길로 도준의 두 뺨과 이마, 콧등 위에 찍어 발랐다. 발라 주겠다는 듯한 희찬의 행동에 도준이 몸을 돌려 희찬을 바라보자 희찬이 조심스레 도준의 얼굴을 매만지며 수분크림을 펴 발라 줬다.

잘생긴 얼굴에 수분이 내려 반짝거렸다. 마음에 드는지, 희찬이 도준의 두 뺨을 쥐고 빨간 입술 위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이거 좋대. 이번에 새로 나온 건데 괜찮다더라.”

“그래? 나는 잘 몰라.”

“그래 보여.”

“너는 뭘 그렇게 많이 발라? 안 끈적해?”

“익숙해졌어.”

희찬의 품에서 벗어난 도준이 뒤편에 있는 서랍장을 열어 뒤적거렸다. 같은 모양으로 갠 속옷이 가지런히 정리된 곳에서 제 속옷을 꺼낸 도준은 희찬의 것도 같이 꺼내 희찬에게 건네었다.

스스럼없이 허리에 두른 수건을 풀어내고, 속옷을 입는 도준의 모습을 희찬이 거울을 통해 지켜봤다. 여전히 매끈한 도준의 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자들과 차별을 두기 위해 체모를 없애기 시작했다는 게 참 마음 아팠다.

도준이 건네준 속옷을 입고, 터벅터벅 걸어 도준을 옭아매듯 안았다. 도준이 피식, 얕은 웃음을 터뜨렸다.

“너 이제 왁싱샵 가지 마.”

“왜.”

“모르는 사람이 네 몸 다 보는 거잖아.”

도준이 희찬의 손을 끌어 제 페니스에 가져다 댔다. 묵직한 도준의 앞섶에 희찬이 눈을 치켜뜨고 도준을 바라봤다.

“그래도 여기는 다 안 해.”

“아무튼. 싫어.”

“그럼 집에서 할까.”

곧 죽어도 체모는 정리해야겠나 보다. 도준의 그런 태도가 가슴을 쿡쿡 찔러 대는 통에 희찬이 두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다 뇌리를 스치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금세 반짝거리는 눈을 한 희찬이 도준을 짓궂게 쳐다봤다.

“내가 해 줄까?”

“아니.”

에이, 단호하기는.

새로운 것을 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건만, 도준은 아주 단호한 눈으로 희찬을 밀어 냈다. 삽시간에 희찬의 얼굴 가득 아쉬움이 드리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준은 희찬의 어깨를 밀어 내고 파우더 룸을 벗어났다.

어둠이 드리운 침실에 잔잔한 불빛이 비쳤다. 혼자 살 때는 그저 컴컴하기만 한 침실이었는데, 희찬이 온 뒤로는 불빛이 조금씩 스미는 것이 나쁘지 않다. 도준은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뉜 채로 잔잔한 웃음을 피웠다.

조금씩 예전으로 돌아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가끔 귀마개를 넘어 들어오는 음악이 있어도 그게 거슬리지 않았다. 뒤틀렸던 일상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뒤통수에 두 손을 댄 채로 천장을 바라보던 도준의 옆자리가 묵직해졌다. 온몸에 크림을 덕지덕지 바르고 온 희찬이 도준의 옆에 누워 그의 말랑한 볼을 콕콕 찔러 댔다.

“살살 찔러, 상해.”

“뭐야, 복숭아세요?”

“복숭아는 너지.”

이번엔 도준이 희찬의 볼을 콕 찔렀다. 말랑하게 감도가 좋은 피부가 도준의 손가락 끝에 딱 달라붙었다.

“먹어 볼래? 복숭아.”

“익었어?”

“음, 철이 아니긴 한데.”

맹랑한 희찬의 말이 재밌다. 도준은 손을 뻗어 엎드려 누운 희찬의 말랑한 엉덩이를 조몰락거렸다. 얇은 드로어즈 아래로 희찬의 탄탄한 엉덩이가 그대로 만져졌다. 희찬이 즐거운 듯 허리를 흔들어 엉덩이를 살랑거리자, 도준의 큰 손이 희찬의 엉덩이를 아프게 때렸다.

“아, 왜 때려.”

“철이 아닌 복숭아는 먹으면 배탈 나지.”

“때려서 빨갛게 익히는 거야?”

허. 도준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희찬은 오늘 작정을 한 모양이다. 야살스럽게 웃는 예쁜 낯에 도준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문득 아랫배가 저리고, 뜨겁게 피가 쏠리는 것 같았다.

“……나 내일 스케줄 있어. 그만해.”

“하, 그놈의 스케줄…….”

한껏 시무룩한 희찬의 목소리가 도준의 귀를 파고들었다. 희찬은 집요하게 도준의 몸에 팔을 두르고, 귓가에 조잘조잘 말을 속삭이며 도준을 자극했다.

“근데 나는 너랑 섹스 하고 싶어.”

“너 진짜.”

머릿속에서 무언가 뚝 끊겼다. 피가 몰린 도준의 페니스는 드로어즈를 뚫고 나올 것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고무 밴드 위로 대가리를 내미는 중이었다.

“우악!”

도준이 몸을 홱 돌려 희찬의 위로 올라탔다. 한 손으로 가볍게 희찬의 두 손을 잡아 쥐어 희찬의 머리 위로 올렸다. 다른 손으로 엉덩이를 주무르자, 희찬이 허리를 튕기며 몸을 배배 꼬았다.

“복숭아 잘 익었대?”

“까 봐야 알지.”

“언제 까 본대?”

“지금.”

말이 끝나기 무섭게 희찬의 드로어즈가 도준의 손에 가볍게 끌어 내려졌다. 퉁 튕겨 오르는 커다란 페니스가 번들거렸다. 언제부터 발기가 된 건지, 어지럽게 핏줄이 불거진 페니스는 새빨갛게 달아올라 열을 머금은 채였다.

도준이 희찬의 발목을 쥐어 다리를 들어 올렸다. 도준에게 맞은 엉덩이 한쪽이 홧홧하게 달아올라 빨간 손자국이 남은 것이 보였다. 그저 하얗기만 한 다른 한쪽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도준의 눈썹이 파도쳤다. 열망이 가득한 뜨거운 눈길에 희찬이 조금 더 얄궂게 웃었다.

“왜, 덜 익었어?”

“너 진짜 오늘 왜 그러냐.”

“몰라, 오늘은 이러고 싶어.”

“원한다면.”

발목을 쥔 손을 힘을 줘 휙 꺾는 도준의 손길 한 번에 희찬의 몸이 뒤집혔다. 희찬의 하얀 엉덩이가 천장을 향했다. 도준을 있는 대로 도발한 것은 희찬이었지만, 막상 엉덩이를 드러내고 누우니 긴장이 도사렸다.

도준의 손끝이 희찬의 엉덩이 둔덕을 따라 그 끝을 훑었다. 숨 가쁜 자극에 흡, 숨을 들이켠 희찬은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바르르 떨었다.

“너 왜 떨어.”

도준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희찬의 엉덩이를 주물렀다.

“쪽팔리게 꼭 그런 걸 말을 해.”

기어들어 가는 희찬의 목소리에 도준이 그의 하얀 엉덩이를 콱 깨물었다.

“악!”

도준의 타액이 묻어 번들거리는 주변에 새빨갛게 피가 몰려 이내 반대쪽 엉덩이와 같은 색을 띠었다.

바르작거리던 희찬의 허리가 뻣뻣하게 굳었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도사린 통증에 미간도 바짝 좁혀졌다.

“아파!”

도준의 곧은 손가락이 발악하는 희찬의 엉덩이 사이를 비집고 자리했다. 오밀조밀 모인 살결 주변을 부드럽게 쓸어 만지고, 꾹꾹 누르다, 다시 손끝에 힘을 주고 쿡 찌르는 도준의 행동에 희찬이 허리를 바르작거렸다.

도준은 부풀 대로 부푼 페니스를 이불에 비비적거리는 희찬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엉덩이 사이에서 손을 뗀 지도 오래건만, 희찬은 그런 것을 신경 쓸 틈도 없는지, 계속해서 험핑을 해 댔다.

희찬의 허리 짓에 점점 힘이 실렸다. 저 없이 성욕을 해소하는 희찬의 모습을 지켜보는 도준은 웃음을 꾹 참은 채로 언제쯤 희찬을 놀려야 희찬이 조금 더 큰 반응을 보일까, 그 시간만 노렸다.

그러다 희찬의 관자놀이에 굵은 핏줄이 불룩 솟았다. 지금이 때라는 것을 직감한 도준이 희찬의 엉덩이를 다시 아프게 내리쳤다.

“아!”

순식간에 희찬이 허리 짓을 멈추고 제 엉덩이를 부둥켜 쥐었다. 화끈거리는 엉덩이가 아파, 고개를 홱 꺾어 도준을 쳐다봤다. 도준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팔짱을 낀 채로 희찬을 내려 보는 중이었다.

“나 여기 있는데 왜 혼자 해.”

“내가, 언, 흑…….”

“나 지금 여기 망부석처럼 있는데, 너 혼자 계속 비비더라.”

“아니, 내가 언제!”

“지금. 지금. 네 고추 좀 봐. 싸기 직전이잖아.”

희찬의 새하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마치 엉덩이의 열기가 얼굴로 다 올라온 기분이었다. 베개를 끌어 제 얼굴을 가린 희찬이 슬그머니 다리를 벌려 도준의 앞에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하자는 사람 무안하게 할 생각이 없어 보여서 그랬지…….”

“누가 안 한대.”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다. 도준은 제 눈앞에 가득 들어차는 희찬의 탐스러운 엉덩이에 울대가 울렁거릴 정도로 침을 꼴깍 삼켰다.

이윽고 도준의 뜨거운 손이 희찬의 엉덩이를 거머쥐었다. 벌름거리는 엉덩이 사이가 마치 도준의 페니스를 갈구하는 것 같았다.

“읍!”

도준의 기다란 손가락이 불쑥, 희찬의 속으로 침범했다. 이미 열을 머금은 여린 살결이 거칠게 요동치며 도준의 손가락을 휘감았다. 뜨거운 열에 화상이라도 입을 것 같다. 도준은 금방이라도 끊길 것 같은 정신머리를 애써 가다듬으며, 희찬의 속을 헤집었다.

도준이 손가락을 구부려 갈고리 모양을 만들었다. 희찬이 허리를 비틀었지만, 도준의 손에 잡힌 허리는 뜻대로 비틀리지 않았다. 그저 속에 든 손가락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딱딱한 손가락이 내벽을 꾹꾹 눌러 댔다. 희찬이 느끼는 지점쯤이야 충분히 잘 아는 도준은 얄궂게도, 그 포인트만 비껴가며 애꿎은 곳을 눌러 댔다. 발끝이 오므라드는 저릿한 감각이 뇌를 찔렀다. 그러면서도 안달이 나, 다리가 절로 동동 굴렀다. 입에서는 자꾸만 울음소리가 났다. 애원하는 목소리를 내어도, 도준은 희찬이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았다.

“흐윽, 아, 거기 말고…….”

“응, 너 여기 좋아하잖아.”

“히익! 아! 으흣, 읏!”

그저 손가락 세 개일 뿐인데 안기는 쾌감이 어마어마하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포인트를 누르는 도준의 힘에 희찬의 허리가 거칠게 튀었다.

희찬의 허벅지가 오므라들었다가 부풀기를 반복했다. 근육이 수축했다 팽창하는 모양새를 보는 도준의 눈이 점점 단호해졌다. 목이 뻑뻑해졌다. 단단하게 부푼 페니스는 한계를 다해 뭉근한 아픔이 서렸다. 그럼에도 희찬의 속을 헤집는 손을 멈출 수는 없었다.

오물거리는 작은 구멍이 움찔거리며 손가락을 삼켰다가, 다시 뱉어 냈다. 희찬의 목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도준도 조급함을 느꼈다.

“흐, 아! 아흐읏!”

희찬의 엉덩이가 바짝 오므라들더니 커다란 페니스에서 하얀 액이 솟구쳤다. 뼈마디가 붉게 변한 손으로 시트를 한껏 움켜쥔 희찬이 가쁜 숨을 헐떡거렸다. 간헐적으로 튀는 몸은 뜨거운 열을 머금고 있었다.

이내 도준이 갇혀 있던 페니스를 꺼냈다. 커다란 페니스가 굵은 핏줄이 솟은 채로 꺼떡꺼떡 춤을 췄다.

도준이 미끄덩거리는 페니스를 쥐고, 움찔거리는 구멍에 비볐다. 움찔거리던 희찬의 몸이 펄떡 뛰었다.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린 도준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쿵쿵, 빠르게 뛰는 심장이 안기는 설렘이 대단했다.

도준이 한 손으로 희찬의 허리를 꾹 눌러 앉혔다. 둥글게 말렸던 희찬의 몸이 부드럽게 풀리며, 고운 선을 그렸다. 다른 손으로 희찬의 골반을 쥐었다. 도준의 뜨거운 손이 닿는 곳곳에 열꽃이 피는 것 같아, 희찬이 달뜬 숨소리를 내었다.

“넣는다.”

“으응……. 아, 아아!”

손가락과는 비교할 수 없는 굵은 것이 좁은 공간을 억지고 벌리고 들어왔다. 끝에서부터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두꺼워지는 귀두가 버겁다.

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굵은 것에 온 속이 다 짓눌리는 것 같았다. 천천히 뭉근하게, 그러나 힘 있게 찌르고 들어오는 것이 여린 살결을 꾹꾹 눌러 댔다. 그러면 그럴수록 희찬의 허리에 힘이 실렸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던 허리가 일자로 딱딱하게 굳어 갔다.

시트를 틀어쥔 손이 부들거리고, 허벅지가 오므라드는 동안 도준의 인상도 차츰 굳어 갔다. 빡빡하다. 겨우 중간 조금 더 밀어 넣었을 뿐인데, 오도 가도 못 하게 꽉 잡힌 것이 당황스럽다.

“흐앗, 으, 아흐읍.”

“희찬아, 힘을 좀…….”

“흡, 못, 못 빼겠어. 흑, 아!”

오늘따라 유달리 몸을 떨어 대는 희찬이 낯설다. 도준이 다정하게 희찬의 허리를 쥐자, 희찬이 다시 몸을 움찔거렸다. 도준이 허리에 힘을 풀고, 희찬의 엉덩이를 조몰락거렸다. 긴장한 듯 한껏 오므라든 엉덩이가 도준의 손길에 다시 말랑해졌다.

착 달라붙는 감이 좋아 몇 번이고 주무르던 도준의 손이 조금씩 앞으로 향해 희찬의 큼직한 페니스를 거머쥐었다. 뜨거운 열을 머금은 페니스가 끈적하다. 귀두 끝에서 뚝, 뚝 떨어지는 진득한 액체는 희찬이 느끼는 흥분을 고스란히 표해 냈다.

희찬의 페니스를 우악스럽게 쥔 도준이 손에 힘을 실어 귀두 끝을 문질렀다. 손아귀로 페니스를 조이고, 벌어진 요도를 쓰다듬자, 희찬의 몸이 거칠게 펄떡거렸다.

“아, 놔, 놔!”

침대를 짚었던 희찬의 몸이 앞으로 무너졌다. 시트를 쥐었던 손으로 도준의 손을 저지하는 희찬은 힘겨워 보였으나, 도준은 놓아줄 생각이 없다. 이미 한 번의 사정을 맞아 한껏 예민한 페니스에 도준의 손길 하나하나에 상상도 못 할 쾌감이 서렸다.

뇌가 저릿했다. 발끝이 절로 오므라들고, 도준의 페니스를 머금은 구멍이 자꾸만 벌름거렸다. 온몸에 도사리는 숨 가쁜 쾌감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눈앞이 시꺼멓게 변하다가, 다시 하얀 빛이 도사리기 무섭게 희찬의 고개가 뒤로 젖혔다.

“아……!”

“후으…….”

도준의 손에 새하얀 액체가 범벅되었다. 힘차게 뿜어져 나오는 정액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은 도준은 제 손에 묻은 희찬의 정액을 미처 다 들어가지 못한 제 페니스에 문질렀다.

희찬의 큰 몸이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파들거렸다. 전신을 휘감는 찌릿한 감각에 눈이 핑 도는 듯했다. 그런 희찬의 허리를 도준이 두 손으로 그러잡았다.

사정을 맞은 탓인지, 정액을 바른 탓인지 한층 수월하게 밀려 들어가는 페니스에 도준의 입에서도 뜨거운 숨이 터졌다. 뜨끈한 내부가 페니스를 집어삼키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익을 것처럼 뜨거운 열기에 정신이 잠식되는 것 같았다. 여린 살을 억지로 벌리고 들어선 우람한 페니스가 희찬의 속 곳곳을 부드럽게 짓이겼다.

“헉, 하윽, 읍!”

내장이 벌어지고, 뭉개지는 느낌에 희찬의 입이 떡 벌어졌다. 속에서 부풀어 오르는 도준의 페니스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불룩 솟은 아랫배가 도준이 움직이는 모양대로 판판해졌다가 솟기를 반복했다. 이내 도준이 허리에 힘을 실어 우악스러운 것을 마구 밀어 넣었다.

요란한 마찰음이 방 안을 빼곡하게 메웠다. 은밀한 부위의 살들이 부딪치며 내는 민망한 소리였건만 그조차 자극적이라, 도준과 희찬의 숨이 점점 가빠졌다.

희찬의 허리를 쥔 도준의 손에 핏줄이 불룩불룩 솟았다. 감당하기 힘든 쾌감에 젖어, 도준의 인상이 가차 없이 구겨졌다. 콱, 소리가 날 것처럼 세게 처박자 희찬의 고개가 홱 꺾였다. 머릿속에 가득 들어찬 흥분에 희찬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희찬은 저도 모르게 엉덩이에 힘을 주고 도준의 페니스를 조였다. 일순 전해지는 자극에 도준의 미간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아악! 아! 좋아, 더! 아!”

“흐, 후…….”

“흐으, 아후읏.”

깊숙한 곳까지 한 번에 찌르고 든 도준이 몸을 숙여 희찬을 꼭 껴안았다. 가슴에 닿은 희찬의 어깨 곳곳에 입을 맞추고, 여린 살결을 빨아들였다. 입술이 머물렀던 자리에 검붉은 자국이 새겨졌다. 마치 도장이라도 새기듯, 도준은 반복적으로 희찬의 몸에 자국을 남겼다.

희찬이 손을 뒤로 뻗어 더듬더듬 도준의 허벅지를 쥐었다. 탄탄한 허벅지의 근육이 요동치는 것을 느끼기 무섭게 다시 음낭이 부딪쳤다. 쩍 달라붙었다가 떨어지는 살결의 감각이 아찔했다. 희찬은 고개를 쳐든 채로, 아득해지는 시야의 끝에서 근사하게 웃는 듯한 도준의 환상을 봤다.

“도준, 아, 준, 준아.”

“흐, 응, 나, 여기.”

도준은 허공을 휘젓는 희찬의 손을 그러쥐고, 하얀 손바닥 위에 다정하게 입을 맞추었다.

손바닥에 닿는 도준의 입술과 허리는 달랐다. 흉포하게 몰아붙이는 도준의 허리 짓에 희찬이 윽, 윽 쾌락에 젖은 신음을 흘렸다. 뇌를 찌르고, 속을 짓누르는 자극에 벌어진 입이 도무지 다물어지지 않았다.

도준이 페니스를 끝까지 다 집어넣은 채로 허리를 놀려 원을 그리며 희찬의 속을 한껏 헤집었다. 오므라들었다가 벌어지는 내벽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번엔 엉덩이에 힘을 주고 세게 찔러 넣었다. 바르르 떨리던 몸이 활어처럼 펄떡 뛰더니 다시 무너졌다.

페니스에 눌어붙는 속살이 진득하다. 귀두를 세게 조이며 빨아들이다가, 기둥을 품으며 울렁거리는 내벽이 일순 거칠게 요동치더니 희찬의 몸이 축 늘어졌다.

도준은 휘몰아치는 쾌감에 정신을 놓고 처박았다. 배 속을 긁어내듯이 천천히 빼다가, 다시 힘을 줘 콱 박아 올리자 희찬이 허덕거렸다.

힘없이 흔들리는 희찬의 몸을 쥔 도준의 손에 힘이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허리가 빠듯해졌다. 아랫배에서 뜨거운 소용돌이가 일었다. 이내 도준의 미간이 잔뜩 일그러지더니 엉덩이가 오므라들며 몸이 바르르 떨렸다. 울컥울컥 정액이 솟구쳤다.

“하아, 흐, 아…….”

도준이 거친 숨을 터뜨리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쫀득하게 달라붙은 희찬의 속에서 조심스럽게 페니스를 빼내자, 페니스에 붙었던 빨간 속살이 함께 비집고 나왔다. 그러다 벌름거리는 구멍 사이로 쏙 숨는 것까지 지켜본 도준이 눈을 찡그렸다.

잔 지진을 머금고 움찔거리는 희찬의 엉덩이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희찬의 입에서 탄식과 엇비슷한 신음이 터졌다.

“콘돔을 사 놓고 또 안 썼네.”

도준의 말에 희찬이 피식 웃었다.

콘돔 쓰는 걸 또 깜빡했다. 이래서 처음부터 버릇을 잘 들여야 하는 건데 말이다. 콘돔 없이 하는 관계가 당연했던지라, 비싼 돈 주고 산 콘돔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저건 처음 샀을 때만 쓰고 맨날 저 자리에 있어.”

“다음엔 꼭 미리 생각할게.”

“으응…….”

희찬의 기다란 다리를 가지런히 놓아준 도준이 희찬의 둥근 엉덩이를 쥐고 우악스럽게 벌렸다. 벌름거리는 구멍 사이로 싸지른 새하얀 정액이 뭉개져 흐르고 있었다.

도준은 희찬을 눕혀 둔 채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아직 열이 식지 않은 페니스가 꼿꼿하게 고개를 쳐들고 흔들렸지만,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도준의 손에는 물에 적신 수건이 들려 있었다. 뒤처리를 하는 것은 일상과도 같은 일이었으므로, 희찬의 몸을 닦아 내고, 구멍 안으로 손을 밀어 넣어 정액을 긁어내는 도준의 손길은 능수능란했다.

“으읏, 아.”

“다 긁어낸 거 같은데, 찝찝하면 씻고 올래?”

“응…….”

도준의 다정한 말에 몸을 일으킨 희찬이 일순간 미간을 좁히며 허리를 짚었다. 마지막에 몰아붙일 때는 정말로 허리가 쪼개지는 줄 알았다.

원망 어린 시선으로 도준을 바라보자, 도준은 제 잘못이 무언지 안다는 듯 눈을 데구르르 굴려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퍽 웃겨, 침대에서 일어난 희찬이 도준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었다.

“너 이제 아주 발딱발딱 잘 서더라.”

희찬의 말에 도준이 눈을 들어 희찬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희찬은 도준이 아닌 도준의 사타구니를 보며 말하는 중이었다. 여전히 대가리를 치켜든 도준의 페니스는 다른 사람이 보면 질투할 만한 우람한 위용을 뽐내는 중이었다.

도준이 웃음을 터뜨리며 이불을 끌어다 제 페니스를 가렸다. 희찬과 첫 섹스 이후, 발기되기 시작한 페니스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한 번 발기하면 도무지 죽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동안 묵힌 걸 모두 해소하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희찬이 욕실로 사라진 후, 도준은 다시 속옷을 갖춰 입고 침대에 엎드려 누웠다. 팔을 침대 아래로 떨어뜨리고 손가락으로 바닥을 훑자 손끝에 딱딱한 것이 걸렸다. 도준이 시선을 툭 떨어뜨려 바닥을 내려다봤다. 손가락에 걸린 것은 희찬에게 들어온 시나리오였다.

흥미를 느낀 도준이 시나리오를 집어 들었다. 저쪽에서는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소리가 들렸다. 희찬이 샤워하는 소리를 배경 삼아 시나리오를 읽기 시작한 도준은 금세 이야기 속에 빠져들어 흥미롭게 시나리오를 훑었다.

얼마 읽은 것 같지도 않은데 어느새 마지막 장이었다.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도준의 얼굴을 살피던 희찬이 웃음기 서린 목소리를 내었다.

“재밌지?”

덕분에 희찬이 나온 것도 모르고 시나리오를 읽던 도준이 놀라며 희찬을 바라보았다. 샤워를 마친 희찬의 머리에서 마르지 않은 물기가 뚝, 뚝 떨어지는 중이었다.

도준은 얼른 시나리오를 내려놓고 몸을 일으켜 희찬의 머리에 얹힌 수건을 쥐었다. 희찬은 당연하다는 듯 침대맡에 앉아 머리를 도준에게 맡겼다.

“너는 서른인데 아직도 청춘이네.”

“나도 너처럼 간지나는 거 하고 싶은데.”

“생긴 게 이래서 험한 게 많이 들어와.”

“그거 잘생겼다는 뜻이잖아. 원래 양아치 역할 하는 애들이 잘생겼댔어.”

희찬이 하는 말이 낯설지 않다. 언젠가 대표에게 들은 기억이 떠올라 도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 대표님이 하신 말이지?”

“어떻게 알았어?”

“나한테 똑같은 말 했어. 근데 너는 로망인 거잖아. 너랑 나는 영역이 좀 다르지.”

정성스레 희찬의 머리를 털어 낸 도준이 다 되었다는 듯 작은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희찬이 몸을 돌려 도준을 마주했다. 양 검지를 세워 눈꼬리 끝을 눌러 위로 당겨 올려 험상궂은 인상을 만들었다.

“인상을 이렇게 하면?”

그에 도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희찬의 손을 끌어 내렸다.

“하지 마, 지금이 잘생겼고 예뻐.”

“알아.”

희찬이 벌렁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그에 도준도 희찬의 옆에 다시 엎드려 누운 채로 다리를 달랑거렸다. 희찬의 하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자, 희찬이 배시시 웃었다. 그의 화려하게 흩어지는 미소는 역시나 청춘에 가까운 맑음이었다.

그러다 희찬이 몸을 데굴 굴려 도준의 가슴을 베고 누웠다. 도준은 귀엽게 잔망을 부리는 희찬의 모습에 낮은 웃음을 머금은 채로 희찬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가만히 도준의 손길을 느끼던 희찬이 눈을 들어 도준을 쳐다봤다. 공중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부드럽게 얽혀들었다.

“음, 근데.”

“응?”

희찬이 몸을 뒤집어 엎드려 누웠다. 희찬의 손은 아래로 내려가 도준의 허벅지를 만지작거렸다.

“……아냐.”

그러다 체념하듯 손을 뗐다. 희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도준의 눈앞에는 누군가 희찬의 머릿속을 브리핑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생각이 훤히 보였다.

하고 싶은데 하자는 말을 아끼는 중이다. 아마 일전에 털어놓은 일을 신경 쓰는 모양이었다.

그건 웃음이 나오기도 했고, 아릿하기도 했다. 애초에 그 남자들과 희찬은 전혀 다른 영역의 사람인데, 그 사람들을 신경 써서 자신의 욕구를 누르는 희찬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저렸다.

도준이 몸을 돌려 누워 희찬의 손을 제 엉덩이 위에 얹었다. 희찬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너도 하고 싶지.”

“아냐, 괜찮아. 나 씻고 왔잖아.”

“나는 하고 싶은데.”

이미 내일 스케줄은 안중 없다. 아쉬운 것은 피차 마찬가지였으므로, 도준은 열이 가득 도사린 눈으로 희찬을 지그시 응시했다.

“또 악몽 꾸면 어떡해. 내일 스케줄 있다며.”

“너잖아.”

“…….”

“너랑 하는 건데 왜 악몽을 꿔. 밤새 내 옆에 있을 거잖아.”

“그치만…….”

“아, 장희찬 하고 싶어 하는 소리 나만 들리나.”

도준이 잔망스럽게 웃으며 귀를 후볐다. 희찬이 벌떡 일어나 도준의 위에 올라탔다. 도준은 엎어져 누웠던 몸을 돌려 희찬을 마주 보았다. 탄탄한 가슴 위에 희찬의 손이 얹혔다. 부드럽게 가슴을 쓰다듬다 톡 튀어나온 유두를 스칠 때는 도준의 인상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손끝을 세워 살살 유두를 굴렸다. 손장난하듯 깔짝거리다가 아프게 쥐자, 도준의 입에서 뭉근한 신음이 터졌다. 희찬이 허리를 숙이고 입술로 유두를 머금었다. 금세 도사리는 열기에 도준의 허리가 튀어 올랐다.

혀를 굴려 돌기를 건드렸다. 도준의 손이 우악스럽게 희찬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두피에 통증이 서렸지만, 희찬은 자신이 하는 행위에 집중할 뿐, 도준을 저지하지 않았다.

눈을 치켜들고 도준을 바라보자, 도준의 얼굴에는 그새 희열이 도사렸다. 자극을 있는 그대로 느끼며 인상을 찌푸린 도준의 모습에 아랫배가 묵직해졌다.

도준의 위에 앉은 채로 허리를 앞뒤로 움직였다. 부드러운 면 속에 갇힌 두 개의 묵직한 페니스가 아무렇게나 비벼지며 조금씩 크기를 더했다. 찔끔찔끔 스며 나오는 액에 속옷이 젖어갔다. 희찬은 집요하게 가슴을 물었던 입술을 떼고 도준의 얼굴을 거머쥐었다.

희찬이 슬그머니 도준의 아래로 내려갔다. 두 다리를 벌려 쥐고, 그 사이에 자리를 잡은 후에는 속옷 위로 도준의 은밀한 곳을 문질렀다. 도준의 입에서는 속절없이 얕은 숨이 터졌다.

“안 아프게 할게.”

“아픈 건 괜찮은데, 나 하나만.”

희찬의 손에 속옷이 끌어 내려지는 것을 느끼던 도준이 천천히 손을 뻗어 희찬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어딘가 불안함이 도사린 도준의 목소리에 희찬이 마른침을 삼켰다.

“내 눈, 가리지 마.”

“그럴게.”

“눈…… 가리면 무서워.”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도준이 건넨 말이 아프다. 연인이라면 기꺼운 이 관계에서 무섭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 끝내 희찬의 가슴을 비집고 들었다. 희찬은 대답 대신, 도준의 몸을 억세게 끌어안았다. 갸름하게 잘 빠진 턱선에 입술을 묻고 오물거리자 도준의 큰 손이 희찬의 뒤통수를 거머쥐었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 질척하게 벌린 틈 사이로 살덩이가 밀려들어 서로의 입 안을 거칠게 헤집었다. 뒤엉킨 혀가 축축한 소음을 냈다. 그러는 동안에도 희찬의 손은 분주했다. 벌려진 도준의 다리 사이를 지분거리며 회음부를 꾹꾹 누르는 통에, 도준의 신음이 희찬의 입 안에서 터졌다.

“바로 넣어.”

“너는 맨날 바로 넣으라더라.”

“그, 읏……. 그게 좋, 아.”

움찔거리는 구멍 위에 희찬의 페니스 끝이 닿았다. 단단하게 뭉친 귀두 끝이 안길 고통을 동반한 쾌감에 괜한 긴장을 느낀 도준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허리 아래에 베개를 깔았다. 사부작거리며 움직이는 도준을 보던 희찬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희찬이 액이 비집고 흐르는 페니스 끝으로 좁은 곳을 문지르자, 주름진 곳도 금방 번들거렸다.

희찬이 페니스 뿌리를 쥐고 천천히 허리에 힘을 줘 좁은 틈 안으로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작은 구멍이 빠듯하게 벌어지며 귀두를 머금는 동안 도준의 몸이 목석처럼 단단하게 굳었다.

아랫입술을 짓이겨 물고, 인상을 찌푸린 도준이 손끝으로 희찬의 등을 긁었다. 도준의 손가락이 지난 자리에는 붉은 줄이 죽, 그어 새겨졌다.

“아, 아읍…….”

“도준아, 숨 쉬어.”

“아, 잠, 깐만.”

“하…….”

도준의 기다란 목에 굵은 핏대가 불룩 솟았다. 입을 틀어막고 숨을 참는 도준은 경직된 근육을 풀어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어 댔다. 커다란 몽둥이가 속을 헤집는 것 같았다. 아무렇게나 짓이겨 눌리고 망가지는 느낌이 생경해 허벅지가 다 떨렸다.

희찬이 바들바들 떨리는 도준의 허벅지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단단하게 근육이 솟았던 허벅지가 희찬의 손길에 풀리는가 싶더니, 희찬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다시 뻣뻣하게 굳어 힘이 실렸다.

하지만 그런 도준의 반응과 달리 그의 페니스는 가열차게 꺼떡거렸다. 도준은 은밀한 곳을 침범하는 감각에 허덕이는 와중에도 쏟아져 내리는 쾌감에 숨을 헐떡였다.

“괜찮지, 괜찮아.”

“응, 아, 움직여.”

도준의 가슴이 들썩거렸다. 큰 숨을 몰아쉬기를 반복하다 이내 안정을 되찾은 도준의 눈가에 투명한 눈물이 차올라 있었다.

말할 수 없는 쾌락으로 인한 것임을 잘 아는 희찬이 손을 들어 도준의 눈물을 닦아 냈다. 우뚝 솟아 자기주장을 하는 콧등에 입을 맞추고, 천천히 페니스를 밀어 넣자 꿀렁거리는 속살이 희찬의 페니스를 휘감았다.

좁은 구멍과 기둥이 쓸리며 마찰열이 일었다. 금방이라도 화상을 입을 듯한 뜨거운 열에 희찬도 아랫입술을 잘근 씹어 물었다.

희찬의 뜨거운 손이 도준의 양 허벅지를 쥐었다. 힘을 주고 내리누르자, 허벅지가 양쪽으로 벌어지며 도준의 은밀한 부위가 훤히 드러났다. 희찬은 시선을 떨어뜨려 도준의 수줍은 곳이 제 페니스를 야금야금 집어삼키는 것을 눈으로 담았다. 뻐끔거리는 구멍이 안기는 시각적 자극에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철썩, 소리 한 번에 희찬의 페니스가 뿌리 끝까지 처박혔다. 도준의 고개가 한껏 젖히고,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함부로 벌어진 덕에 사지가 다 찢기는 듯했다. 몸에 도사린 열기는 달가웠으나, 속을 헤집는 것은 버거웠으므로, 도준은 신음조차 내지 못하고 희찬을 견뎠다.

딱딱한 것이 맞물린 속을 들쑤셨다. 전립선을 뭉근하게 짓이기는 통에 도준의 발끝이 쫙 펴졌다가 이내 오므라들었다.

배 속에서 크기를 더하는 딱딱한 것에 장기가 전부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흐물흐물 녹아내린 속에 뜨거운 열이 앉았다. 도준은 하얀 시트를 당장에라도 찢어발길 것처럼 우악스럽게 틀어쥐었다.

“아, 아! 윽, 읍!”

“으, 아…… 아.”

“좋아, 아 거기, 읏…….”

“여기, 그치……. 흣.”

“하윽…….”

희찬의 어깨에 걸친 다리가 희찬이 움직일 때마다 아무렇게나 덜렁거렸다. 더 깊이 찌르고 들어오는 페니스가 아픈 것도 잠시, 도준의 몸이 크게 튀며 바르르 떨렸다.

전신에 도사린 쾌락에 정신이 점멸했다. 순식간에 시야가 컴컴해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한껏 발기한 페니스에서 솟구친 정액이 도준의 가슴과 복부에 흩어졌다.

사정을 맞고, 정액을 뒤집어쓴 도준의 모습이 색스럽기 그지없다. 세상 그 어느 것보다 야한 도준의 모양에 희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꿀렁거리며 요동치는 속이 바짝 조였다가 물러났다. 페니스를 거세게 옭아매다가 조금씩 풀어지는 것에 희찬이 본격적으로 움직일 요량을 보였다.

이내 희찬은 퍽, 퍽 과격한 소리를 내며 이 행위에 박차를 가했다. 아무렇게나 흩어지는 도준의 신음이 자극적이다. 검은 시야에 화려한 불꽃이 팍팍 터지는 것 같았다.

“아! 아읏……. 흐으…… 윽!”

희찬이 힘을 실어 몸을 처박을 때마다 도준이 경련했다. 아득함을 넘어 황홀할 지경에 들어선 감각에 도준은 입에서 터지는 신음을 틀어막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느새 희찬의 허리 짓에 맞춰 도준이 허리를 움직였다. 더 큰 자극을 찾는 듯한 도준의 모습에 희찬도 충실히 응해, 더욱 열심히 허리를 놀렸다.

조금씩 사정감이 머리를 들었다. 페니스에 달라붙은 점막이 쩌적, 떨어지며 내는 질펀한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두 사람이 뿜어내는 뜨거운 숨이 방 안을 달궜다. 이내 희찬의 허벅지가 쪼그라들었다. 있는 힘껏 오므라진 엉덩이가 부르르 떨리더니, 희찬의 몸이 푹 고꾸라지며 도준의 몸 위로 쓰러졌다.

도준은 갈증이 일어 뻑뻑한 목을 가다듬으며 제 위에서 헐떡이는 희찬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희찬의 걱정과 달리 남자들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제는 제법 유려하게 몸을 쓰는 희찬 덕에 고통보다 쾌감이 짙은 교미였다.

“나, 이제 잘하지.”

희찬이 조금씩 허리를 물리며 천천히 페니스를 꺼냈다. 정액으로 뒤범벅된 하얀 페니스가 제법 색스러웠다.

“원래 잘했는데, 너.”

“너한테 배워서 그래.”

희찬의 말에 그저 웃음이 터졌다. 도준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고서, 그저 가쁜 숨을 고를 뿐이었다.

부드럽게 풀어 주다가, 찢어발길 듯이 몰아붙이는 희찬의 섹스 패턴이 저와 닮은 것 같기도 했다. 도준은 여전히 잔열이 남아 파들거리는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매번 이렇게 하면 요절하겠어.”

“그래서 싫어?”

“좋았어.”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도준이 지끈거리는 허리를 붙잡고 허심탄회한 말을 뱉었다. 매번 이렇게 번갈아 하다가는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희찬은 속도 모르고 해사하게 웃어 댔다.

다리 사이에서 무언가 흐르는 것은 여전히 기분 나쁜 일이라, 도준은 저를 닦아 주려는 희찬의 손을 저지하고 어기적대는 걸음을 옮겨 욕실로 향했다.

침대가 엉망이 되었다. 희찬은 가뿐한 걸음을 놀려 새 이불을 꺼냈다. 더러워진 시트를 갈고, 포근한 이불을 얹었다. 방금까지 거친 섹스를 한 탓에 방 안에 도사린 비릿한 냄새는 얼른 룸 스프레이를 뿌려 없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코를 자극하는 기분 좋은 향이 퍼졌다. 침대에 누운 채로 다리를 달랑거리며 콧노래를 부르는 희찬은 몰려오는 잠을 억지로 물리치며 도준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도준은 오늘도 한세월을 씻을 모양이다. 아까부터 끊이지 않고 물소리가 들리는데, 도준은 도무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후로 샤워 시간이 길어졌다던 도준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이 더럽게만 느껴진다는 그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더럽긴 누구 맘대로 더러워.

욱신거리는 가슴을 느낀 희찬이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쿵쿵, 거친 걸음을 놀렸다.

쾅쾅!

욕실 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하지만 도준은 답이 없다.

“야! 그만 씻고 좀 나와!”

희찬의 성난 고함에 안에서도 물소리가 멎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준이 모습을 보였다. 자신이 남긴 울긋불긋한 자국이 도드라진 도준의 하얀 몸에 희찬이 불현듯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이 의아해, 도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는 뭘 그렇게 오래 씻어.”

“빨리 씻으려고 해도 잘 안 돼.”

도준은 욕실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드라이기를 켜 머리를 말렸다. 그러는 동안 희찬은 도준의 온몸에 바디 오일을 발라 줬다. 희찬의 손이 지나간 자리가 반들반들해졌다. 도준은 기분 좋은 부드러움에 한껏 웃으며 희찬과 함께 침대로 향했다.

“자자. 내가 이불 갈아 놨어.”

“바빴겠네.”

희찬은 당연하다는 듯 도준에게 약을 건네었다. 도준은 생긋 웃으며 희찬의 손에서 약을 받아먹었다.

나란히 천장을 보고 누운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각자 필요한 것을 찾았다. 도준은 항상 그랬듯이 작은 귀마개를 귓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고, 희찬은 도준이 불을 끄기 무섭게 음악을 틀고, 도준의 가슴에 눈을 묻었다.

“꿈꾸지 말고 자. 너 어제도 불만 있는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더라.”

“응, 안아 줘.”

푹신한 매트리스에 몸을 뉘기 무섭게 노곤한 잠이 몰려왔다. 금방 무거워진 눈꺼풀은 쉽게 들 수 없었고, 눈을 감은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금세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를 내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서로를 옭아맨 채로 마주 보고 누워 잠들었다. 그게 본연의 모습이라는 것처럼, 그게 당연하다는 것처럼 서로를 각자의 품에 가둔 두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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