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다른 출항 (14/18)

11. 다른 출항

<‘눈부신 항해’, 순항하는 소년들의 행보>

<‘눈부신 항해’ 드라마 브랜드 평판 1위, 뒤이어 이도준, 장희찬 공동 1위>

드라마 ‘눈부신 항해’는 마치 예고된 성적이라도 있는 양 상승궤도를 그렸다. 퀴어 드라마라는 화제성과 임 감독의 연출력, 두 주연 배우의 스타성과 연기력이 삼박자로 딱 들어맞아 그려 낸 드라마는 대박, 그 자체였다.

그 인기를 증명하듯 매 회차가 끝날 때마다 희찬의 SNS 팔로워가 늘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국내 연예인 중 손가락에 꼽는 팔로워 수를 자랑하는 희찬이었는데 이제는 쫓아올 유명인이 없을 정도였다.

또, 온갖 SNS에는 눈부신 항해, 이도준, 장희찬 그 외 갖가지 드라마에 관련된 이슈들로 도배가 되었다. 도준이 부른 드라마 OST는 거리에서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고, 극 중에서 두 사람이 착용하는 액세서리나, 의상들은 불티나게 팔렸다.

이슈의 힘을 빌리고 싶은 광고주들은 두 주연 배우는 물론, 조연들에게까지 광고 제의를 넣기 바빴으며,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눈부신 항해’의 각종 패러디가 넘쳤다.

사람들은 모였다 하면 ‘눈부신 항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든 목소리가 고울 수는 없었지만, 화제의 중심이라는 것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는 드라마가 방영되는 동안 날씨는 조금씩 여름에 다가서는 중이었다. 화창하고 청명했던 봄이 주춤주춤 물러나고, 조금씩 드리우는 더위에 나무들은 한층 푸르른 내음을 발산했다. 파란 하늘이 높아지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 이어지며, 시원한 바람이라도 불면 코끝에 괜한 설렘이 도사리는 5월, 드디어 내일이 희찬의 생일이다.

그사이 두 사람은 서로의 변한 모습에도 조금씩 적응했다. 희찬이 도준의 변화된 모습 중 가장 먼저 적응한 것은 도준의 사라진 미각이었다. 악몽을 꾸는 도준을 안고, 달래는 것은 여전히 힘들었으나, 미각을 잃고 아무거나 주워 먹는 도준에게서 음식을 빼앗는 손은 점점 익숙해졌다.

그런 희찬의 노력에 부응이라도 하듯 도준은 차츰차츰 나아지는 모양새를 보였다. 악몽을 꾸면 꼼짝없이 스케줄을 취소해야 했던 예전과 달리 요즘은 악몽을 꾸더라도 다음 날 스케줄에 영향을 끼치는 일은 점점 줄었다.

지난밤, 희찬의 도움으로 무사히 악몽을 이겨 내고, 스케줄을 마친 도준은 오랜만에 욕조에 물을 받았다. 찌뿌둥한 몸을 푸는 데에는 반신욕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고, 마침 희찬이 오기까지는 시간도 넉넉하니 여유를 만끽해 보려는 심산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뜻한 물에 발끝을 적시고, 천천히 몸을 밀어 넣었다. 완전히 몸을 욕조에 밀어 넣고 앉자, 욕조 밖으로 밀려난 물이 바닥에 곧장 떨어져 철퍽, 욕실을 크게 울렸다.

도준은 욕조에 몸을 기대고 앉아 턱까지 물에 잠근 채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온몸을 휘감는 물결이 안기는 안정감이 좋다. 숨이 가쁠 정도로 뜨거운 물 속에 있다 보면 가슴이 답답해지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도준은 한껏 목을 젖히고, 울대를 까딱거리며 앞으로의 일정을 정리했다. 바쁜 스케줄은 얼추 마무리되었고, 앞으로 한동안은 한가한 시간을 보낼 것이다. 차기작으로 정한 액션 영화의 주, 조연 캐스팅이 완료되면 다시 바빠지겠지만, 그 역시 아직은 시간의 여유가 남은 미래의 일이었으므로 앞으로는 푹, 쉬는 일만 남았다.

마치 시즌을 끝낸 운동선수가 된 기분이었다. 잠시 쉬는 시간조차 아까워 쪽잠을 자고, 시간을 쪼개고, 쪼개 스케줄을 소화한 후에 몰려오는 휴식은 그 정도로 달콤한 것이었다.

“내일은 희찬이 케이크 사 줘야지.”

다시 만난 후 처음 챙기는 희찬의 생일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뭉근한 행복을 안겼다.

입꼬리를 올린 도준이 물 안에서 몸을 흔들었다. 도준이 움직일 때마다 출렁대는 물이 찰랑찰랑 경쾌한 소리를 내었다. 투명한 물 위로 발가락을 빼꼼 내밀었다가, 다시 뜨끈한 물 안으로 발을 넣었다. 공기와 만나 차갑게 식은 발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좋아 도준이 샐룩 웃었다. 도준의 잘생긴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들었다.

“준아!”

바깥에서 희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사박거리는 걸음걸이가 온 집 안을 헤집는 게 들렸다.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삼킨 도준은 희찬이 저를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도준아!”

소리가 조금 멀어졌다.

“도준아……? 준아……!”

그리고 다시 가까워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희찬의 목소리가 조급해졌다. 돌아다니는 걸음이 어찌나 다급한지, 이 방 저 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과격하기만 했다.

“어디 갔어, 이도준……. 준아아, 이도준!”

욕실 문은 열어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는 희찬이 왜인지 울먹거렸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아 울 것 같은 희찬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심각한 것을 느낀 도준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촤락 쏟아진 물이 거친 마찰음을 냈다. 다가간 도준이 문을 열기도 전에 문고리가 휙 돌아가며 희찬이 모습을 드러냈다.

“야!”

희찬의 얼굴에는 울음이 가득했다. 어느새 새빨갛게 충혈된 눈에 그렁그렁 고인 투명한 눈물이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당황스러웠다. 도준은 놀란 눈을 크게 뜨고 희찬을 바라봤다. 그를 안아 줄 생각도, 눈물을 닦아 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내가 부르는 거 못 들었어?”

“들었어.”

“근데 왜 대답을 안 해, 왜!”

희찬이 울부짖듯 따지고 들었다. 눈꼬리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렸던 눈물이 툭, 떨어지더니 희찬이 도준의 품에 파고들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희찬의 큰 몸에 잔 지진이 일었다. 바르르 떨리는 어깨를 도준이 끌어안고 토닥토닥 달래자, 희찬이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다.

“왜 그래, 희찬아. 어? 왜.”

“나는, 또, 너 없어진 줄 알고, 어…….”

“아……. 미안, 미안.”

웅얼웅얼 퍼지는 희찬의 목소리가 안타깝다. 희찬 역시 과거의 날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은 도준이 아랫입술을 잘근 씹어 물었다.

많이 좋아졌다. 그건 희찬이나, 자신이나 다름없이 분명했다. 하지만 예고도 없이 갑자기 도사리는 공포에 숨이 가쁜 것은 여전한 힘겨움이었다. 희찬에게는 어쩌다 한 번, 삽시간에 덮쳐오는 고독함이 그런 것일 테다.

“이런 장난 안 칠게, 미안해.”

“부르면 재깍재깍 대답해, 알았지.”

“응, 울지 마.”

도준이 희찬의 작은 얼굴을 거머쥐었다. 엄지손가락으로 눈가를 훔쳐 내자, 희찬이 귀엽게 눈을 찡긋거렸다.

“누가 운다고…….”

“코가 지금 완전 루돌프가 친구 하자고 달려오겠는데.”

“놀리지 마라.”

“같이 씻을래?”

희찬은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도준은 웃으면 안 되는 상황에도 비죽비죽 새어 나오는 웃음을 입술을 꾹 말아 참았다. 이건 장희찬이 너무 귀여운 탓이다. 한껏 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게 어찌나 귀여운지, 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도준이 능숙하게 손을 놀려 희찬의 탈의를 도왔다. 티셔츠를 벗겨 주고, 바지도 편하게 벗을 수 있도록 어깨를 내어 주자 희찬이 차츰차츰 나체가 되었다. 이내 두 사람이 함께 욕조에 앉았다. 희찬은 한시도 도준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도준의 품에 꼭 안긴 채였다.

“배 안 고파?”

“갑자기 웬 배.”

“울고 나면 배고프잖아.”

“나 진짜 아까 식겁했어. 너 그렇게 없어지지 마.”

조금 진정이 된 듯했던 희찬은 도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채로 도준이 사라졌던 날의 제 심경을 털어놓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고, 땅이 뒤흔들리다 못해 온 사방의 것들이 뒤엉켜 저를 덮치는 것 같았다고 했다. 부모를 잃고 손에 쥔 것은 이도준 하나였는데, 그조차 저를 떠났다는 생각에 저마저 저를 버리고 싶었다고 했다.

신을 믿지도 않는데, 매일매일 빌었다고 했다. 눈을 뜨면 이도준이 돌아와 있기를, 이 현실이 그저 끔찍한 악몽이기를 말이다. 꾸역꾸역 말을 전하던 희찬이 결국 또 울었다. 어깨에 닿는 뜨겁고 묽은 액체에 도준의 울대가 들썩거렸다.

우리는 언제쯤 그날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벗어날 수는 있는 걸까.

도준도 희찬과 마찬가지로 희찬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입술로 그의 승모근을 머금었다가, 다시 입을 맞추고, 팔로 너른 등을 쓰다듬으며 다독이자 희찬이 두 손으로 도준의 턱을 그러쥐었다.

“근데 이제 계속 같이 있을 거지, 우리.”

도준이 희찬의 손바닥에 정성 들여 입을 맞추었다.

“응.”

“그럼 괜찮아.”

“그래, 괜찮아.”

순식간에 안정이 도사렸다.

그래, 그때는 혼자였다. 각자가 있는 공간에서 홀로 사무치게 괴롭고, 처절하게 외로웠다. 하지만 이제는 둘이 되었다.

벗어날 수 없으면 뭐, 둘이서 같이 견디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희찬의 입가에도 잔잔한 미소가 피었다. 두 사람의 입술이 약속이라도 한 듯 포개어졌다.

도준의 입술이 희찬의 윗입술을 머금자, 희찬이 도준의 아랫입술을 머금었다. 물렁한 살덩어리가 오가고, 고개가 비틀릴 때마다 코끝이 스쳤다.

희찬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던 도준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 탄탄한 엉덩이를 쥐었다. 엉덩이 사이에 있는 은밀한 곳으로 손가락을 넣어 문지르자, 희찬이 허리를 비틀었다.

두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참방거리는 소리가 연신 울렸다. 맑고 경쾌한 소리 위에는 두 사람의 살결이 부딪치며 나는 묵직하고 야릇한 소리가 함께였다.

당장에라도 페니스를 밀어 넣을 듯한 도준의 행동에 희찬이 고개를 푹 수그러뜨렸다. 희찬의 하얀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준아, 나 더워.”

“응, 나가자.”

머리가 핑 돌 정도로 뜨거운 열기에 두 사람은 팽팽하게 부푼 페니스도 무시했다. 그저 조금이라도 빨리 밖으로 나가, 시원한 공기를 맞고 싶었고, 푹신한 침대에 누워 편하게 자고 싶었다.

다음 날, 눈을 뜬 도준은 제 옆에서 곤히 잠든 희찬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아침을 열었다. 귀에 꽂힌 귀마개를 빼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 두고, 슬그머니 발을 내려 천천히 침실을 벗어났다.

지난밤, 희찬이 울면서 전한 말이 여전히 가슴에 콕 박혀 있었지만, 오늘은 도준이 가장 좋아하는 5월 23일. 사랑하는 장희찬의 생일이었다.

장희찬은 꼭 저 같은 날 태어났다. 밝고 찬란한 그의 성격과 이름처럼, 환한 햇살이 소외당하는 곳 하나 없이 환하게 드리우는 이 봄날은 꼭 희찬과 같았다.

도준은 희찬이 깨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아침을 맞아 일어나는 희찬 앞에 새하얀 생크림 케이크를 들이밀고, 세상에서 가장 환한 얼굴로 생일을 축하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스마트 키를 챙기고, 모자를 꾹 눌러 쓴 후에는 마스크도 꼈다. 혹시 일어난 희찬이 저를 찾을지도 모르니, 휴대폰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핸들을 쥔 도준의 손가락이 까딱거렸다. 음악도 틀지 않아 조용하기만 한 차 안이었으나, 지금은 당장 춤이라도 출 수 있을 만큼 기분이 좋았다.

미리 알아둔 도심의 고급 디저트 가게에 들어선 도준은 매장에서 가장 비싸고, 가장 큰 케이크를 구매했다.

금가루가 올라갔네, 어쩌네, 하루에 하나만 만드는 케이크네, 어쩌네.

좋은 말을 얹어 설명하는 것은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 가격이 얼마든 그것도 상관없었다. 그저 희찬에게는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었고, 이제는 조금의 부담도 느끼지 않고 턱턱 해 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자신이 뿌듯할 뿐이었다.

“초는 몇 개 드릴까요?”

“아, 이거로 주세요.”

도준은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숫자 모양의 초를 샀다. 그때는 ‘2’를 두 개 사서, 혼자 불을 붙이고 소원을 빌었는데 말이다.

피식, 웃음이 났다.

“어떤 걸로요?”

“3이랑 0 주세요.”

그랬던 우리가 벌써 서른이 되었다.

도준은 누가 알아볼세라, 받아 든 초와 케이크를 들고 얼른 가게를 벗어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에는 선물도 사야 하나 고민했다. 그간 생일 선물로 주고받은 거라고는 그 어릴 때 어렵게 모은 돈 몇 푼으로 준비하는 것이 다였다.

“근데…… 내 카드 줬으니까 알아서 사고 싶은 거 사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이미 사고 싶은 건 다 사는 것 같지만 말이다.

도준이 집에 도착했을 때 희찬은 거실에 나와 소파 위에 웅크려 누워 있었다. 도준은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음을 옮겨 식탁 위에 케이크를 올려 두고, 곧장 소파로 향해 희찬의 얼굴 앞에 쪼그려 앉았다.

도준이 곧은 손가락을 뻗어 희찬의 오뚝하게 솟은 예쁜 콧방울을 꾹 눌렀다. 희찬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디 갔다 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도준의 손길에 희찬이 부스스 눈을 떴다.

“일어났으면 전화하지.”

“너 올 거 아니까 기다려 봤어.”

“그랬어, 기특하네. 깼으면 일어나 볼래?”

왜인지 한껏 들뜬 듯한 도준의 모습에 희찬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은 일어나 보라니 몸을 일으켜 앉았다. 불퉁한 표정으로 도준을 올려다보는 희찬의 눈에는 여전히 잠이 가득했다.

“일어났어.”

희찬이 몸을 일으키기 무섭게 도준이 냅다 희찬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도준이 이토록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일은 극히 드문지라, 희찬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도준이 이끄는 곳으로 걸음을 놀렸다.

식탁 위에는 못 보던 상자가 놓여 있었다. 하얗고 단단해 보이는 상자는 빨간색의 화려한 리본이 묶여 있었다.

“뭐야?”

“까 봐.”

“갑자기 뭔데…….”

“얼른.”

희찬을 무지막지한 힘으로 의자에 앉힌 도준은 금세 맞은편에 앉아 생글생글 웃었다. 희찬은 의아하기 그지없는 상황에 눈썹을 씰룩거리면서도, 도준이 하라는 대로 리본을 풀었다.

희찬의 손짓 한 번에 꽁꽁 묶였던 매듭이 샤르륵, 풀려 내렸다. 단단한 뚜껑을 위로 들어 올리자 커다란 케이크가 희찬을 반겼다. 금가루가 무수하게 묻은 케이크는 보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돌았다.

“케이크네?”

희찬이 케이크와 도준을 번갈아 쳐다봤다.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생일 축하해, 희찬아.”

아, 오늘 내 생일이구나.

희찬의 눈이 크게 뜨였다가 이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도준이 사라진 뒤로 그 누구에게도 생일을 축하받을 수 없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으나, 생일을 좋아하지 않는 저여도 한 명쯤에게는 축하받고 싶을 때가 있었다.

희찬 입술을 씰룩거렸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모양에 도준이 몸을 일으켜 냅다 입을 맞췄다.

“생일이 뭐가 중요하다고…….”

“네가 사랑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날이니까, 너도 같이 좋아해 주라.”

아무튼 이도준의 사랑 앞에는 할 말도 다 사라진다. 누구보다 기뻐해야 할 자신보다 더 방방거리는 도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잊었던 행복도 다 되돌아오는 듯했다.

“소원 빌래?”

“응.”

하얀 케이크 위에 숫자 ‘30’이 자리했다. 도준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어렵지 않게 불을 붙이고서 케이크를 희찬 앞에 떠밀었다.

“생일 축하 노래 불러줄까?”

“아니, 바로 소원 빌래.”

“나도 같이 빌어도 돼?”

“내 생일인데 네가 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날인데, 안 돼?”

이게 도대체 무슨 논리인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럴듯했으므로 희찬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긍정의 뜻을 보였다.

희찬이 후-, 길게 입김을 불어 초를 끄자 두 사람이 동시에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진지하게 소원을 빌었다. 서른이나 먹고 촛불 앞에서 소원을 비는 것은 유치하기 그지없었으나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소원을 빌어 보겠냐.

이내 두 사람의 눈이 뜨였다. 서로에게 꽂힌 시선은 따사롭기만 했다.

“선물은 네가 사고 싶은 거 사. 카드 너한테 있으니까.”

“응. 그럼 이 케이크는 내가 산 거네?”

“음,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그저 지갑에 있는 카드가 희찬의 것뿐이었으니 말이다. 도준이 어깨와 눈썹을 동시에 으쓱거리자 희찬이 환하게 웃었다.

비로소 웃는 희찬의 모습에 도준도 덩달아 멋들어진 미소를 보였다. 희찬이 웃는 얼굴에는 큰 힘이 있다. 저 얼굴만 볼 수 있으면, 세상의 모든 어두움도 다 이겨 낼 용기가 생기곤 했다.

아주 어릴 적, 고민 없이 기꺼이 무모한 선택을 했을 때처럼 말이다.

“고마워. 나 진짜 행복해.”

“웃고만 살아, 희찬아. 계속 웃게 해 줄게.”

“같이 웃자, 우리 매일 웃자.”

무언가 번뜩 떠올랐는지, 도준이 식탁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끈을 짚었다.

“뭐 하는 거야?”

“잠시만.”

도준은 빨간 희찬의 얼굴을 꾸몄다. 끈으로 턱을 두르고, 귀 뒤를 지나쳐 머리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도준의 손끝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호기심을 느낀 희찬이 눈을 위로 굴려 봤지만, 도준이 무얼 하는지는 볼 수 없었다.

도준의 손이 떠나고, 희찬이 더듬더듬 제 정수리를 짚었다. 이윽고 희찬 앞에 동그란 손거울이 들이밀렸다. 거울 속 제 모습을 마주한 희찬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야, 이게 뭐야!”

“예쁘지.”

“아, 진짜 이도준 골 때리네.”

거울 속 희찬은 하얀 얼굴에 새빨간 리본을 단 채였다. 머리 위에 예쁘게 달린 리본에 턱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끈이 어이없게도 퍽 잘 어울렸다.

어색한 듯 계속 리본을 만지작거리는 희찬의 손을 도준이 잡아 내렸다. 다시 맞은편에 앉아 새삼스레 사랑에 빠진 눈으로 저를 보는 도준 덕에 희찬의 두 볼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나 사진 찍어도 돼? 갖고 싶어, 장희찬.”

“나 이미 네 건데?”

희찬은 흔쾌히 도준 앞에 포즈를 취해 줬다. 양 팔꿈치를 식탁에 대고, 큰 손으로 꽃받침을 만든 후에는 그 위에 얼굴을 얹어 환한 미소를 피웠다.

이내 찰칵, 찰칵 셔터 음이 들렸다. 다섯 번 정도 연달아 사진을 찍은 도준의 입가에 만족이 드리웠다. 하염없이 화면을 들여다보는 도준의 눈에서 짙은 사랑이 묻어났다.

희찬이 몸을 벌떡 일으켜 도준이 찍은 사진을 바라봤다. 막 자다 깼음에도 화려한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야, 옷이 이게 뭐야.”

“그럼 다시 입고 나올래?”

“잠시만 기다려.”

옷이 영 별로였다.

저렇게 좋아하는 도준인데, 이왕 장단 맞출 거, 제대로 맞춰 주고 싶었다. 희찬은 금세 옷방으로 가 티셔츠를 갈아입은 후, 데님 재킷을 걸쳐 입고, 예쁜 시계까지 골라 착용했다.

거울을 보며 앞머리를 매만지고 돌아온 희찬은 바지는 입지 않았지만, 상의는 제대로 갖춰 입은 제법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도준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뭐 제대로 입고 나올 줄 알았더니, 정말 사진에만 잘 나오면 상관없다는 듯한 모습이 가히 장희찬다웠다.

희찬이 다시 이전과 같은 포즈를 취했다. 옷을 챙겨 입느라 망가진 리본을 다시 만져 준 도준이 곧 셔터 소리를 내었다.

“봐 봐.”

“어때?”

“좋아, 나 보내 줘.”

희찬이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리본은 풀 생각이 없는 건지, 박스에서 빵칼을 꺼내 케이크를 조각내는 희찬은 여전히 리본을 매단 채였다.

“너도 이제 팬들한테 생일 알려 줘. 너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축하받으면서 행복하게 지내.”

“으음…….”

“서른도 됐는데, 기념으로 터널에서 나오는 게 어때? 나랑 재밌게 노는 걸로 하자.”

희찬이 입을 꾹 다물었다. 사고의 기억을 잊고, 이제는 밖으로 나오라는 듯한 도준의 말이 무겁게 닿는 것과 별개로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케이크를 도준 앞에 덜어 준 희찬은 도준이 보내 준 사진을 저장하며 고민을 거듭했다.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가, 울대를 울렁거리는 모습은 그 고민의 깊이를 말하는 것 같았다.

도준은 희찬을 재촉하지 않고, 자신이 사 온 케이크를 한입 가득 머금었다. 달콤한 맛이 나지는 않았지만, 생크림이 살살 녹는다는 것과 빵이 푹신한 것이 비싼 값 한다는 것 정도는 알겠다.

한참 고민하던 희찬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이내 도준을 향해 제 휴대폰 화면을 보여 줬다. 희찬의 휴대폰 화면에는 SNS가 켜져 있었다.

heechanee 오늘 내 생일! 이도준이 8년만에 케이크사줌ㅎ

아유, 말 잘 듣는 장희찬.

도준이 환하게 웃었다.

“근데 내 얘기는 안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가?”

“응, 그냥 너 생일이라고만 하는 건 어때?”

“그래!”

희찬이 다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도도도독,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다시 환한 화면이 도준의 눈앞에 들이밀렸다. 마치 검사라도 받는 어린아이 같은 모양에 도준이 피식 웃었다.

heechanee 오늘 내 생일!

자신이 찍어 준 사진 아래 자리한 캡션이 마음에 들었다. 도준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희찬도 금세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희찬의 휴대폰이 쉬지 않고 징징 울었다. 분명 SNS 알림은 전부 꺼 두었는데 시끄럽게 울리는 휴대폰이 성가셔, 희찬이 미간을 찌푸린 채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희찬의 휴대폰에는 수많은 사람에게서 오는 축하 메시지가 쌓이고 있었다. 그새 SNS를 확인한 건지, 축하를 건네는 동료들의 메시지에 희찬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갔다.

그게 보기 좋았다. 마땅히 축하받아야 하는 날에 혼자 죄책감에 사로잡혀 우울하기를 자초하는 희찬이 이제는 어둠에 허덕이지 않기를 바랐다. 도준이 희찬의 머리를 가슴에 품고, 가지런한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이내 희찬이 도준의 허리를 부여안았다.

“고마워, 고마워.”

“우리 손 꼭 잡고, 밝은 데로 다니자.”

“응…….”

“사랑해, 희찬아.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나도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도준아.”

두 사람은 쉴 새 없이 서로를 향한 사랑을 속삭였다.

“오늘 스케줄 있어?”

“없어.”

“하고 싶은 건?”

“이도준이랑 뒹굴기.”

“콜. 나 죽부인처럼 누워 있을게.”

“침대로 가, 죽부인.”

희찬이 손가락을 뻗어 침실을 가리켰다. 마치 강아지에게 명령하는 듯한 모양에 도준이 군말 없이 침실로 향했다. 덕분에 도준의 허리에 매달린 희찬도 함께 침실로 향했다.

어느새 시원하게 옷을 벗은 두 사람은 속옷만 걸친 채로 말 그대로 침대 위에서 뒹굴었다. 같이 시나리오를 보기도 하고, 최근의 이슈에 관해 대화를 나누기도 하며 다정한 시간을 보내는 두 사람은 퍽 행복해 보였다.

좋아요 4,351,662개

heechanee 오늘 내 생일!

⤷ 세상에 희찬아 생일 축하해♡♡♡♡♡♡♡♡♡♡

⤷ 8년만에 밝혀진 짱이 생일ㅠㅠ 선물에 깔려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 있나? 일어날 수 있으니 각오해라

⤷ ♡#봄같은희찬Day♡

⤷ 너무 예쁘다ㅠㅠ 내배우 짱이 태어나줘서 고마워♡

댓글 119,823개 더보기

데뷔 이래 처음으로 생일을 밝힌 희찬의 SNS 반응도 몹시 뜨거웠다. 게시글이 뜨기 무섭게 온 포털을 장악한 기사에도 온통 축하하는 댓글이 달렸다. 그 이후에는 각종 SNS 실시간 트랜드를 희찬이 장악했다.

도준이 이끌어 빛을 향해 수줍게 한 발 내디딘 희찬을 세상은 열렬히 반기며 축하했고, 희찬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동에 비로소 생일 다운 생일을 맞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도준의 가슴을 베개 삼아 누운 희찬이 손을 머리 위로 올려 도준의 볼을 조몰락거렸다. 도준은 앞서 제가 말했듯 죽부인이라도 된 것처럼 희찬이 주무르는 대로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두 사람은 입을 맞췄다가, 콧잔등을 비비적거리고, 그러다 손을 쥐고, 서로의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 박동을 느끼며 온화한 시간을 보냈다.

“나 하고 싶은 거 생각났다!”

그러다 희찬이 도준의 가슴을 짚은 채로 퍼뜩 몸을 일으켰다. 희찬의 아래에 깔린 도준의 입에서 억, 무거운 신음이 났지만 희찬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떤 거?”

도준이 방 안에서 홀로 반짝반짝 빛이 나는 희찬의 눈을 바라봤다. 온 빛을 차단한 검은 방이 마치 밤하늘 같았고, 반짝이는 저 눈은 꼭 하늘의 별 같았다.

“라이브방송 하자.”

“그게 뭐야?”

도준의 질문에 희찬이 눈썹을 씰룩거렸다.

시대를 역행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휴대폰이랑 친하지 않다고 해도 그렇지, 이건 해도 해도 너무했다.

“너 솔직히 말해, 서른 아니지. 너는 혼자 80년대에 살아?”

“나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내가 모르냐? 어휴, 라이브 방송이 뭐냐면. 나 SNS 하잖아.”

“응.”

도준은 희찬의 설명에 집중했다. SNS에 방송을 켜면, 팬들과 실시간 소통이 가능하다는 게 그 기능의 다였다.

근데 왜 그렇게 어렵게 말하는 건데.

도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기 싫어?”

희찬의 순수한 질문에 도준이 눈을 굴렸다. 하기 싫은 것이 아니라, 조심스러웠다. 아무리 드라마가 전무후무할 성적을 거두며 흥행하고 있다지만…….

“음, 너 하고 싶어?”

“그냥 생일 기념 방송, 이런 느낌으로 가볍게 하는 거 어때. 이미 너랑 나랑 친하다고 사람들 다 아는데……. 진짜 딱 10분만 하자.”

“의심 안 할까?”

“절대 안 해. 진짜야. 편견이 강한 나라라고, 이 나라가.”

“이러고 있는데 사람들이 의심을 안 한다고? 대한민국 편견 그 정도라고?”

도준의 말에 희찬이 문득 시선을 내려 자신과 도준의 몸을 살폈다. 둘 다 헐벗은 채로 침대에서 살을 마주 대고 있었다. 도준의 손은 희찬의 엉덩이에 얹어져 있었고, 희찬의 손은 도준의 허벅지 안쪽을 조몰락거렸다.

음, 아무래도 이건 편견이 지켜 주지는 않을 것 같다.

결론을 내린 희찬이 도준의 몸 위에서 일어나, 도준의 가슴을 탁탁 두드렸다.

“옷 입고 와. 얼른.”

“아, 그렇게까지 하고 싶어?”

“응.”

희찬의 단호한 대답에 결국 도준이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나란히 드레스룸에 들어선 두 사람은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 말을 맞추었다. 거짓말은 아무래도 찜찜해, 라이브 방송은 ‘희찬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케이크를 사 온 도준이’라는 컨셉으로 정했다. 사실 그대로였으니, 거짓말을 한다는 죄책감도 없었다.

도준은 희찬이 분주하게 준비하는 것을 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살다 살다, 장희찬 덕분에 별의별 것을 다 해 본다, 싶었다.

“이거 이렇게 누르면 곧 뜰 거거든?”

“응, 나 가만히 있을 테니까 알아서 해.”

“아무 말도 하지 마. 나도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희찬의 말이 당황스럽다. 도준은 눈썹을 씰룩거리며 희찬을 홱 돌아봤다.

“그럼 방송을 도대체 왜 하는 거야?”

“그냥 얼굴 보여 주기. 나 처음으로 팬들한테 생일 축하 받았다고. 장단 맞춰.”

“알았어.”

이내 희찬이 라이브 방송을 시작했다. 방송을 켜기 무섭게 화면 상단의 시청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희찬은 화면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방긋 웃었다. 얼굴 옆에 손바닥을 펼쳐 살랑살랑 흔들자, 생일을 축하하는 댓글이 미친 듯이 쏟아졌다.

#짱희찬 생일 축하해♡♡♡

♡♡기쁘다 희찬데이♡♡

#happyheecahanee0523

생일기념 라방?ㅋㅋ 목소리 들려줘 짱아♡♡♡♡

생일 초 불었어? 맛있는 거 많이 먹어!!

“아, 케이크는 얘가 사 왔어요.”

줄곧 제 얼굴만 비치던 희찬이 슬쩍 화면을 돌려 시청자들을 약 올리듯 도준의 모습을 살짝 보여줬다. 이번엔 더 많은 댓글이 쏟아져 나왔다. 희찬은 낄낄거리며 즐거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옆에서 그런 희찬의 모습을 지켜보던 도준도 즐겁게 웃었다.

“뭘 그렇게 웃어.”

“방금 너 잠깐 비췄더니 더 보여 달래. 아까 이도준이 케이크 사 왔어요. 딸기 생크림 케이크. 너 얼굴 보여 달래.”

희찬이 읽는 댓글에 도준이 화답이라도 하듯 희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희찬은 팔을 쭉 뻗어 도준과 자신의 투 샷을 화면에 담아냈다.

휴대폰 화면 속에는 바쁘게 댓글이 올라오는 중이었다. 그조차 처음 보는 것이라, 도준은 그저 화면을 들여다보기 바빴다. 그러다 눈에 띄는 댓글 하나에 이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키스신 예고편 떴던데 기념으로 뽀뽀 한사바리 어떠신지

“왜? 뭐 봤어?”

“오늘 키스 신도 나오는데 뽀뽀나 한번 해 보래.”

도준의 곧은 손가락이 댓글을 가리켰다. 빠르게 올라가는 댓글 중 하나를 읽었더니 같은 댓글이 우르르 쏟아지기 시작했다. 도준의 눈이 크게 뜨였다. 행동하는 대로 재깍재깍 반응이 보이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다.

“너 지금 재밌지.”

“어, 신기해.”

도준의 눈이 도무지 화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예 얼굴을 가까이 가져대고 하나하나 눈으로 담는 도준은 희찬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면서도 팬들의 댓글은 하나하나 정성 들여 읽었다.

그 모습이 마치 처음 물가에 나온 어린아이 같았다. 모든 것이 신기하고 새로워, 눈을 반짝 빛내는 도준의 모습이 말이다.

“너도 해.”

“나는 이런 거 못 해.”

“아, 휴대폰을 왜 쓰냐?”

“너 전화하기만 해. 다시는 안 받아.”

“휴대폰 잘 쓰고 있구나.”

방송 중이라는 것도 잊고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이 다시 나란히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화면 속에는 희찬과 도준의 얼굴이 반반 나뉘어 들어찼다. 한 번 뽀뽀를 언급했던 탓인지, 이제는 온통 뽀뽀 얘기뿐이었다. 그에 희찬이 고개를 홱 꺾어 도준의 볼에 입을 맞췄다.

!!!!!

ㅁㅊㅁㅊㅁㅊㅁㅊㅁㅊ

놀란 것은 방송을 보는 사람들이나 도준이나 같았다. 도준이 펄쩍 튀더니 희찬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졌다.

“뭐 하는 거야?”

“뽀뽀하는 거 보여 달라시잖아.”

“아, 말을 하고 해. 놀랐잖아.”

화면 바깥에서 들리는 도준의 목소리는 당황한 기색이 잔뜩 묻어났으나, 그가 하는 말은 그 기색과는 달랐다. 혹시나 팬들을 의식해서 행동하면 그건 그것대로 의심스러울지도 모른다. 도준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이런 건 원래 하는 스킨십이라는 것처럼 넉살을 떨어 댔다. 영리하게 상황을 모면하는 도준의 모습에 희찬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ㅋㅋㅋ아니 짱킹 뽀뽀하는 건 상관없는거임?ㅋㅋㅋㅋ 그냥 미리 말만하고 하면 되는 거임?ㅋㅋㅋㅋㅋㅋㅋㅋ

이왕 이렇게 된 거 미리 말하고 한 번 더 ㄱ

희찬이 휴대폰을 들고 다시 도준의 옆에 앉았다. 이전과 달리 도준은 화면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괜히 팬들의 말에 휘둘려 통제력을 잃고 행동하지 않을까, 겁이 난 탓이었다.

“뽀뽀한다?”

“응.”

이번엔 도준이 순순히 볼을 내어 줬다. 이왕 한 거, 한 번 더 해 주는 것쯤이야 팬서비스나 드라마 홍보로는 아주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디어에 보이는 동성 간 스킨십의 농도가 점점 짙어지는 요즘, 드라마에서 키스 신도 나오는데 뽀뽀 두 번은 팬들도 대수롭지 않게 넘길 것 같았다.

뽀뽀 아무렇지도 않은 거 개발려

해인수는 ㄹㅇ이다

킹이 요즘 뭐 하고 지내요? 짱이는 계속 보이는데

희찬은 도준의 안부를 묻는 댓글을 발견하기 무섭게 도준을 쿡쿡 찔렀다. 줄곧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도준이 희찬을 바라봤다.

“너 요즘 뭐 하고 지내?”

“어제 화보 찍었어.”

“해인이 어제 화보 찍었대요. 그거 나 보내 주라, 내가 SNS에 올려 줄게.”

“안 찍어 왔는데, 물어볼게. 어, 대표님 전화 온다.”

이내 도준이 휴대폰을 들고 소파에서 일어섰다. 진지한 통화를 하는 듯 멀어지는 도준의 목소리가 이윽고 화면에서도 사라졌다.

굳이 듣지 않아도 일 얘기인 것이 뻔했다. 이내 희찬도 화면에 대고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방송 종료를 고했다.

“저도 내일 촬영 준비하러 가야 해서 이제 그만할게요. 오늘 생일이라서 한 번 켜 봤어요! 축하해 주셔서 감사해요. 눈부신 항해 재밌게 봐 주세요! 안녕!”

장황한 마지막 말을 남긴 희찬이 ‘방송 종료’ 버튼을 눌렀다. 도준과의 뽀뽀가 중계되었으니, 영상은 보관하지 않고 삭제하는 것으로 처리했다.

도준과의 뽀뽀는 구태여 변명하지 않았다. 말이 길어질수록 자신을 포장하기 위한 말밖에 되지 않을 것이고, 그 말은 나중에 발목을 잡는 말이 될 수 있으니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 탓이었다.

희찬이 방송을 마무리하는 사이, 복도 끝으로 가서 조용히 통화를 하던 도준이 다시 돌아왔다.

“왜?”

“아, 광고주 미팅하자고.”

“아아.”

방송이 끝난 것을 확인한 도준은 금세 입고 있던 옷을 전부 벗고 소파에 누웠다.

“나 눈부신 항해 3회? 까지밖에 못 봤는데, 같이 볼래?”

“좋아. 그거 다시 보기 되지?”

“응, 리모컨 줘 봐.”

희찬이 도준의 머리 아래에 제 허벅지를 들이밀었다. 편하게 희찬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도준이 리모컨을 만지작거렸다. 화면에 보이는 커서가 몇 번 움직이더니 이내 화면이 검게 변했다.

『눈부신 항해 -3화-』

익숙한 오프닝 사운드가 흐르며, 바닷물결이 출렁이는 효과가 보였다. 뒤이어 해사한 두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다.

“오프닝 타이틀 잘 뽑았어. 그치.”

“응, 예뻐.”

연기를 한 배우가 아닌, 시청자가 되어 드라마를 시청하는 두 사람은 즐거운 듯 연신 싱글벙글 웃어 댔다.

*

시간은 부지런히 흘렀다. 봄이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새 들이닥친 더위는 사람들의 옷을 한 풀, 한 풀 벗겨 냈다.

오랜만에 집이 조용했다. 늦은 시간까지 늦잠을 자고 정오가 가까워진 시간에 일어난 도준은 머리 위로 두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켜고서 뚜두둑, 현란하게 뼈 소리를 냈다.

혼자 살 때는 벌떡 일어나 침실을 벗어나던 것과 달리 요즘은 침대에 남은 희찬의 향이 좋아 누운 채로 뭉그적거리기 일쑤였다.

도준이 눈을 뜬 후 곧바로 쥔 것은 휴대폰이었다. 휴대폰에는 희찬이 남겨 둔 메시지가 가득했다. 2박 3일간 진행되는 힐링 예능 프로그램 촬영을 떠난 희찬은 벌써 이틀째 집에 오지 않는 중이었다.

출연자는 오로지 희찬 하나라고 했다. 스페셜이라나 뭐라나. 아무튼 팬들이 보면 획기적이라고 쌍수를 들고 환영할 구성이었지만, 적적한 것을 몸서리치게 싫어하는 희찬은 심심할 때마다 틈만 나면 도준에게 전화를 걸어 댔다.

일어나면 전화

언제 일어나

일어나!!!!

안 일어나?

나 심심해ㅠㅠ

무수히 쌓인 메시지를 본 도준의 입가가 포물선을 그리며 치솟았다. 도준은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다시 누워 희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 이어지는 신호음이 제법 길다. 다른 하는 일이 있나 싶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수화기 건너편에서 맑고 높은 희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준아! 일어났어?

“응, 잘 잤어?”

― 야, 너는 뭐 이렇게 오래 자냐?

“약 먹고 잤어.”

― 그랬어? 잘했어.

11시 30분.

시계를 본 도준은 곧장 몸을 일으켜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적당히 하지만 예쁘게 입고 나오라던 대표의 말을 떠올린 도준은 희찬과 통화를 하면서도 분주하게 옷을 골랐다.

오늘은 도준도 스케줄이 있다. 데뷔 때부터 꾸준히 광고 모델로 저를 선택해 다른 연예인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이한 그룹과 미팅을 하기로 했다. 수년간 모델로 활동하면서도 단 한 번도 직접 미팅한 적이 없는데, 이번엔 꼭 같이하고 싶다는 그들의 성화에 도준도 흔쾌히 응했다.

이한 그룹과는 지독한 연이 있다. 오죽하면 사생아라는 루머까지 돌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상하게 어딘가 익숙하단 말이지.

문득문득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들었지만, 그저 대기업이라 친숙한 것이겠거니, 넘겨 온 지난날이었다.

― 이제 나가?

“응, 이따가 다시 전화 걸게.”

― 이한 그룹이면 거기 홍보팀 사람들 만나는 건가?

“나도 몰라. 그냥 대표님이 나오래서 나가. 얼굴마담 같은 건가 봐.”

― 아하하, 네 입에서 그런 말 나오니까 어색하다.

“내가 또 K액터스 간판이지.”

― 그러니까.

도준이 현관문을 벗어나, 차에 오르는 동안에도 희찬의 맑은 웃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이윽고 차에 오른 도준은 희찬에게 다정한 인사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괜히 긴장이 몰려왔다.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여전히 어렵고 힘든 일이다. 볼을 빵빵하게 불렸던 도준이 입을 부르르 털었다.

도준이 도착한 곳은 왜인지 경비가 삼엄한 고급 한식집이었다. 주소를 받았을 때는 이한 호텔과 같은 동네이기에 혹시나 호텔에서 만나려나, 우려했던 것과 달리 눈에 펼쳐진 다른 전경이 퍽 마음에 들었다.

가게 앞에는 근사한 차림의 대표가 도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차를 마친 도준은 얼굴 만면에 반색을 띠며 대표에게 다가갔다. 날씨가 좋은 탓인지 오늘따라 유독 기분이 좋아 보이는 도준의 모습에 대표도 환하게 웃었다.

“잘 잤나 봐?”

“푹 잤어요.”

“잘했어. 들어가자.”

“아니, 근데 왜 이렇게 경비가 깔렸어요?”

“부회장이 직접 왔대.”

예상 못 한 대표의 대답에 도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한낱 광고 모델을 만나는데 마케팅 팀장도 아니고 무슨 부회장씩이나. 과한 처사가 불편함과 동시에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또 밀려왔다.

이한 그룹 부회장.

언론에서도 숱하게 듣고, 또 매체를 통해 자주 접해온 단어인데 왜 이렇게 다른 느낌으로 익숙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식당에 들어서서 직원들이 안내하는 예약된 룸에 들어섰을 때, 도준의 걸음이 우뚝 멈추어 섰다. 환한 날씨만큼 화려하게 빛이 나던 도준의 낯도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도준을 발견하고, 반갑게 일어선 남자가 도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모양이었지만, 도준은 그 손을 마주 잡을 수 없었다.

이상하게 남자의 얼굴도 익숙했다.

“도준아, 앉아.”

어느새 먼저 자리를 잡고 앉은 대표가 도준의 팔을 잡아당겼다. 앉히려는 힘이 느껴졌지만, 도준은 차마 앉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맞은편에 앉은 부부를 집요하게 뜯어봤다.

남자가 이상하게 저와 꼭 닮은 느낌이었다. 날카롭게 잘 빠진 눈이나, 콧대부터 우뚝 솟아 강한 자기주장을 하는 코나, 꾹 다물린 입술에 끝이 올라간 입꼬리까지. 자신의 것과 지독하게 같은 모양이라 어색할 지경이었다.

도준의 떨리는 동공이 남자의 옆에 있는 여자에게 향했다. 갸름한 턱선에 새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는 천하제일의 미인이었다.

도준의 눈썹이 거칠게 꿈틀거렸다. 혹시 부모인 걸까. 그렇다면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맞닥뜨린 것이기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자리에 앉은 도준은 잠시간 호흡을 가다듬으며 복잡해지는 머릿속을 비워 내려 노력했다. 저들을 부모로 단정 짓는 것은 섣부른 판단일 수 있으니, 공적으로 나온 자리에서 구태여 자신의 사적인 생각은 하지 않으려는 처사였다.

호흡을 가다듬은 도준은 제 허벅지를 주무르며 저를 달래는 대표의 손길에 한쪽 입꼬리를 올려 싱긋 웃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상대를 마주하고, 인사를 하려는데.

“잘…… 지냈습니까?”

도준의 인사보다 상대의 물기 어린 안부가 먼저 전해졌다.

그에 도준이 다시 인상을 굳혔다. 그건 가다듬을 틈도 없이 도사린 불편함이었다. 초면에 눈시울을 붉히고,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를 내는 남자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네. 안녕하세요, 처음 뵙습니다. 이도준입니다.”

그래도 일단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도준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기분 나쁜 어둠을 애써 웃는 낯으로 숨기고, 남자와 여자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도플갱어를 마주하면 이런 기분일까.

거푸집에 넣고 찍어 낸 것처럼 똑같이 생긴 모양이 불쾌하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호흡을 가다듬는 도준의 손을 맞은편의 남자가 덥석 쥐었다.

“어디, 아픈 데는 없어요?”

그렇지 않아도 ‘남자’라면 일단 불결함을 느끼는 도준은 달갑지 않은 스킨십에 퍼뜩 인상을 굳히고 억지로 손을 빼내었다.

“네, 괜찮습니다.”

무미건조한 답을 남기고, 대표를 바라봤다. 대표와 이한 그룹의 부회장은 제법 오랫동안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대표에게도 처음인 걸까. 대표 역시 이들의 모습이 의아한 듯 인상을 굳힌 채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중이었다.

도준이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다시 표정을 가다듬었다.

“보고 싶었어요.”

“아…… 네.”

“살아 있어 줘서,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남자는 두서없이 대뜸 고맙다는 말을 했다.

살아 있어 줘서 고맙다니. 그마저도 지독하게 상황과 맞지 않는 말이었다.

도준은 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에 아랫입술을 잘근 씹어 물었다. 이 공간에 들어선 순간부터 무시하려 무던히도 노력했던 생각들이 저 말에 꼭 들어맞는 기분이라,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죽은 줄, 알았…….”

기어코 남자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 옆에 앉은 여자는 이미 얼굴이 눈물로 범벅되어 있었다. 도준이 떨리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이제는 저들이 제 부모라는 생각을 무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에, 당연히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제가…… 지금 혼란스러워서 그러는데요.”

어렵사리 입을 뗀 도준에게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도준은 그 시선에 응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어느새 화가 도사린 눈으로 상대를 마주했다.

“제가 생각하는 게, 맞습니까?”

도준의 눈길에 가시가 돋쳤다. 굳이 부모냐 묻지 않았다. 구태여 정확한 말로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도준의 날카로운 눈길을 남자는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 그저 울대를 울렁거리며 주먹을 꾹 말아 쥘 뿐이었다.

그게 또 왜 그렇게 짜증이 나는 건지.

숨을 쉬는 중에도 가슴이 답답했다. 무거운 돌덩어리가 가슴을 누르고 으깨는 것 같아 인상이 자꾸만 찌푸려졌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부부는 입술을 파르르 떨어 대며 도준을 아주 슬픈 눈으로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 눈길조차 거북하기 짝이 없어, 도준이 한숨을 터뜨렸다. 옆자리의 대표가 진정하라는 듯 건네는 찬물을 받아 들고서 들이켜 식도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그런 도준을 쳐다보던 남자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할 말이 있는 듯한 모습에 도준은 몸을 뒤로 물리고, 등받이에 기댄 채로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듯한 눈빛을 보이자 남자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때……. 명함을 줬을 때는, 몰랐습니다. 진짜, 몰랐습니다.”

“명함이요?”

“이한 호텔에서.”

아.

도준이 아랫입술을 잘근 씹어 물었다.

이제야 이한 그룹을 마주할 때마다 밀려오던 기시감이 무언지 깨달았다. 도준은 식탁 아래에 내려 둔 손을 굳게 말아쥐었다. 힘이 잔뜩 실린 도준의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8년 전, 전광진의 손에 이끌려 호텔에서 벗어나던 중 한 남자에게서 명함을 받았던 일이 떠올랐다.

이한 그룹 부회장 이 선 재

그저 ‘명함’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뿐인데 그때 손에 쥐었던 명함의 모양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그와 동시에 호텔의 향기가 피어올라 도준을 덮쳤다. 도준이 큰 눈을 질끈 감고서 큰 숨을 어렵사리 내뱉었다. 상상도 하기 싫은 그날이 떠오르기 무섭게 아득한 수렁에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그런 도준의 변화를 눈치챈 대표가 부리나케 도준의 손을 쥐었다. 바르르 떨리는 주먹을 감싸고, 손바닥을 다독이며 달래자, 도준이 고개를 푹 수그리고 무거운 숨을 연신 터뜨렸다.

이내 도준의 검고 짙은 눈동자에 깊은 원망이 서렸다.

몰랐으면 그냥 넘어가지, 명함은 왜 줘서.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며, 어딘가 간절하게까지 보였던 그 모습을 두고 저는 그저 ‘어린애 뒤 따 보려 애쓴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스스로를 향한 혐오로 돌아와 이미 다른 사람의 손가락질에 힘든 본인에게 또 한 번 화살을 돌리고 아파했었다.

도준이 붉은 입술을 짓이겨 물었다. 치아가 닿은 자리가 제 색을 잃고 새하얗게 질려 가는 모양은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명함 받았었어?”

“네, 대표님 만나기 전에 호텔에서요.”

“아…….”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그때가 언제인지 잘 아는 대표가 도준과 마찬가지로 원망 어린 눈을 하고 남자를 쳐다봤다. 그건 도준도 같았다. 원망이 도사린 시선에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날카로운 칼이 스며 아프게 찌르고 드는 듯했다.

“이제 와서 왜 이러시는 겁니까?”

도준은 자신이 느끼는 반감을 여실히 드러냈다. 30년을 방치해 두고 이제 와서 찾는 이유는 뭘까. 데뷔 때부터 광고를 붙여 놓고, 여태 얼굴 한 번 보이지 않다가 이제야 눈물을 보이는 건 왜일까. 몰랐으면 모르는 대로 그냥 두지, 이제 와 부모 노릇이라도 해 보겠다는 걸까.

복잡한 생각이 뇌를 찌르고 들어 머리가 다 아팠다.

힘들게 지내 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다. 이렇게 번듯한 부모가 있는 줄도 모르고, ‘부모 없는 새끼’라며 손가락질당하는 서글픈 순간에도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저들은 알까. 엄마, 아빠. 어디다 불러 본 적이 없어 배우 이도준이 맡아 온 수많은 캐릭터는 단 한 번도 부모를 언급하지 않았다. 추운 겨울, 속옷만 입고 얼음물에 들어가는 것보다 하기 어려운 것이 ‘엄마, 아빠’ 네 글자를 입 밖으로 내는 것이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익숙할 그 단어가, 내기조차 어려웠다.

그걸 저 여유로운 사람들은 알까.

어른이 필요했던 순간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이제야 얼굴을 들이밀고 찾아와 눈물을 보이는 모습에 울화통이 터지려 했다. 머릿속에 차오르는 의문과 알 수 없는 설움, 그리고 원망이 뒤섞여 심장이 쿵쿵 거칠게 뛰었다.

도준은 상대의 답을 듣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큰 숨을 터뜨렸다. 남자가 헐레벌떡 도준을 따라 일어섰다. 제 팔을 잡으려 뻗는 손을 가볍게 뿌리친 도준은 두 눈으로 ‘만지지 말아라.’ 하고 아주 단호한 의사를 내비쳤다.

“제, 제 말 좀…….”

“아뇨, 아뇨. 제가 무슨 말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대표님, 저 먼저 갈게요. 전화 드릴게요.”

이들과는 잠시의 시간도 함께 보내기조차 싫어졌다. 도준은 남자가 꾸준히 보내오는 애틋한 시선은 모조리 무시하고, 대표에게 인사를 남기고서 곧장 음식점을 빠져나갔다.

그 뒤를 쫓으려는 남자를 대표가 붙잡았다. 대표의 눈에도 줄곧 의문과 분노가 서려 있어, 그 눈을 본 후에야 남자가 큰 숨을 터뜨렸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저한테 먼저 설명하십시오.”

“…….”

“지금 도준이 보호자는 저입니다.”

“하…….”

대표의 손에 저지된 남자가 대표의 말을 듣기 무섭게 털썩, 주저앉아 무거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 상황이 혼란스러운 것은 대표도 같았다. 이한 그룹과 K액터스는 10년이 넘는 시간을 알고 지내 온 돈독한 관계였다. 매번 광고는 K액터스 소속 배우들과 해 오던 이한 그룹이었고, 그마저도 도준이 데뷔한 후에는 도준에게만 광고를 붙여 오던 그들이었으니 말이다.

당연히 미팅도 셀 수 없이 많이 했다. 그러다 친해져, 가벼운 술자리도 가졌던 이한 그룹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부모라니. 죽은 줄 알았다니. 자신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아, 대표가 인상을 딱딱하게 누빈 채로 그들을 향해 냉정한 눈을 보였다.

설령 부모라 한들, 그 오랜 시간 이도준을 방치한 것에 합당한 사유가 없다면, 돈이고 뭐고 당장 이한 그룹과의 계약을 파기할 의사도 만만이었다.

*

추운 겨울이었다. 매서운 한파에 어깨를 움츠린 사람들이 총총걸음으로 거리를 거닐던, 잔잔한 캐럴이 공기 중에 스며들고, 추운 와중에도 설렘이 도사리는 뜨거운 가슴을 품게 되는 어느 크리스마스였다.

우렁찬 울음을 터뜨리며 건강하게 태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던 아이는 싸늘한 시신으로 품에 안겼다. 어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아이를 가진 두 사람의 허망한 눈동자가 정처 없이 허공을 맴돌았다.

“도준, 도준…….”

아이의 이름은 이도준. 비출 도(燾)에 밝을 준(晙)자를 써서 지은 소중한 이름을 불러 주지도 못했다.

재벌가의 ‘재벌은 재벌끼리 결혼해야 한다.’라는 고리타분한 사상에 부딪혀, 미성년의 나이에도 사랑의 결실을 지키고자 무던히 노력했던 것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그렇게 이선재와 박채령은 아이를 잃은 상실감에 영혼을 빼앗긴 시체가 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여전히 혼탁한 눈동자로 허공을 헤아리는 이선재의 어깨에 어른의 두툼한 손이 닿았다.

“선재야, 아이는 또 가지면 되지. 지금은 대학을 먼저 생각해야지 않겠니?”

“…….”

아이가 죽은 후에는 자신들의 결혼과 연애를 달가워하지 않았던 부모님까지 다른 사람처럼 두 사람을 부드럽게 대했다. 그건 역겨움에 토악질이 치미는 듯한 거북함을 안겼다.

제게서 아이를 앗아 간 것이 다 저 사람들의 농간 같았다. 아이를 임신한 채령을 모질게 대하지만 않았어도, 배 속의 아이가 위축되어 그렇게 태어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도사려 이선재는 도무지 부모를 부모로 대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이선재는 겉으로는 부모가 원하는 ‘장기판 위의 말’이 되어 갔다. 이한 그룹을 자신들의 핏줄에게 제대로 물려주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하는 부모를 대적하기 위해 자신의 자리를 구축하려 기를 썼다.

잘못된 분노일지도 모르겠으나, 어리석은 판단일지도 모르겠으나. 애초에 아이를 축복하지 않았던 부모였으니, 자신의 기쁨을 앗아 간 부모에게서도 그들의 기쁨을 앗고자 하는 복수심만 불타올랐다.

아마 우리 부모님은 내가 아들로 태어났을 때, 이한 그룹을 장남에게 물려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만 했을 것이다. 나를 사랑한다기보다 자신들의 업적을 사랑한 거겠지.

줄곧 의심만 해 왔던 것이 이번 일을 계기로 확신이 되어 부모와는 점점 거리를 두게 되었다.

부모를 원망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선재와 박채령은 도준의 생일을 기억하고, 그를 기리기 위해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보육원에 도준 또래의 아이들이 필요할 만한 것들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이한 재단에 속하지 않은 보육원 중, 도준 또래의 아이가 있는 곳으로 골라 선물을 보낼 때는 먹먹한 가슴을 숨길 수 없어 모두가 환하게 웃는 크리스마스를 매년 눈물로 지새우고는 했다.

성인이 된 이선재와 박채령은 각 집안의 어마어마한 반대를 무릅쓰고 마치 예정되었던 일이라는 양 결혼을 거행했다. 그리고 아이는 더 이상 갖지 않았다. 아니, 가질 수 없었다.

집안 어른들은 ‘후사’를 위해 아이를 가지라고 강요했지만, 그 모든 게 꼭 저와 제 아이가 이한을 위한 도구로 이용되는 것 같아 경멸스러웠다.

아니, 나는 맞지. 이미 이한의 존속을 위한 하나의 부품이었다.

그리고 준비되지 않은 때에 가진 아이마저 그 이름을 위해 희생당한 것만 같은 기분이라, 도저히 죄책감을 지워 낼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마음을 짓누르는 죄책감의 크기는 커지면 커졌지, 절대로 작아지지 않았다.

매일 밤 꿈에는 얼굴 없는 아이가 나타나 ‘아빠’, ‘엄마’ 부르기도 했고, 해맑은 웃음소리를 내며 손을 흔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쩌다 있는 일이고, 아이는 대부분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그날도 여지없이 악몽을 꾼 날이었다. 꿈속의 아이는 죽은 아이의 나이 대에 맞게 성장하여 어느새 성인이 되어 있었다. 며칠 전에는 해사하게 웃는 소리를 들려줬으면서, 오늘은 유달리 슬픈 울음소리를 내는 것이 못내 사무쳤다.

꾸역꾸역 출근한 이선재는 멍한 시선으로 서류를 들여다봤다. 아이가 죽기 전부터 제 곁에서 자신을 돌보았던 비서실장이 전해 주는 자양강장제를 마시는 이선재의 눈은 평소보다 훨씬 흐리멍덩했다.

“3시에 호텔에서 회의 있습니다. 곧장 가시겠습니까?”

“네.”

“……좀 주무셨습니까?”

“하하, 우리 부모님도 안 하는 걱정을 실장님은 하시네요.”

이선재가 피곤한 눈을 비비적거렸다. 잘 수 있었을 리가. 간밤에 아이가 그런 목소리를 내었는데, 편하게 잘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저 고개를 절레 저었더니, 남자가 얕은 한숨을 쉬었다.

“또 악몽입니까.”

“애가 나와서 울었어요. 얼굴은 못 봤는데, 울더라고요.”

“…….”

“……간 곳이 영 별로인가 봐요. 자꾸 우네요.”

이선재가 씁쓸한 미소를 피웠다. 살아 있었다면 이제는 장성한 청년이 되어 제 기세를 펼치고 있을 텐데 말이다.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사무치는 가슴이 저릿하게 울렸다.

어떤 모습일까. 어떻게 생겼을까. 채령이를 닮았을까, 나를 닮았을까. 부모가 모두 빼어난 외모를 가졌으니 그 아이 역시 뭇 사람들의 눈을 홀리는 화려한 외관을 자랑할 테다. 부모가 둘 다 키가 크니 우리 도준이도 키가 참 클 것이다.

……살아 있다면 말이다.

참을 수 없는 먹먹함이 몰려와 이선재가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렇게 호텔로 향하는 내내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선재가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뜻밖의 장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중후한 남성의 손에 붙들린 사내는 스쳐 보았을 뿐임에도 제 아들 또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기, 괜찮아요?”

이선재가 사내에게 안부를 물었다.

사내는 꿈에 나온 아이가 그랬던 것처럼 아무런 말이 없었다. 사내와 시선이 교차했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낀 이선재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씰룩거렸다.

우리 도준이도 살아 있다면 저 나이쯤 되었을 텐데. 저 사내처럼 잘생긴 얼굴을 하고 누구보다 행복하게 웃고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도사리자 잘생긴 얼굴로 웃기는커녕 저처럼 생기 없이 허공을 보는 모습이 안쓰러워 돕고 싶어졌다.

이선재가 상의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사내에게 건네었다. 사내는 명함을 쥘 힘조차 없는 건지, 닫히지 않는 주먹을 억지로 닫아 주자 사내의 검은 눈동자가 툭 떨어져 명함을 읽었다.

“혹시 도움 필요하면 저한테 연락 주세요.”

사내의 눈이 일순 일렁거리더니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사내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사내에게 베푼 동정은 그의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동정일 수 있으니, 이선재 역시 사내의 존재를 구태여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가끔 아이의 꿈을 꾼 후에 그 사내의 위태로운 모습이 연이어 생각나기도 했지만, 또래여서 그런 거겠거니 가볍게 생각하고 넘겼다.

그렇게 또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새 여름이 성큼 다가온 날씨에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시원한 바람이 감도는 집무실이었지만, 불편한 정장은 자꾸만 가슴을 옥죄고 들었다. 이선재가 불편한 넥타이를 거칠게 헝클어 풀었다.

똑, 똑.

정중한 노크 소리에 이어 비서실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툼한 서류철을 가지고 이선재에게 다가온 비서실장은 책상 위에 서류를 올려 두고 설명을 덧붙였다.

“광고 모델 리스트업 된 명단입니다.”

“아, 벌써 재계약 시즌인가요? 이전 모델들 연장 안 하고 새로 하는 겁니까?”

“마케팅 부서에서 새로운 얼굴을 찾은 모양입니다. K액터스 소속 신인이고.”

“신인? K액터스에서 신인이 나왔어요?”

이선재가 흥미롭다는 듯이 눈썹을 씰룩거렸다. K액터스의 곽수한 대표와는 오래간 연을 쌓아 왔다. 그도 그럴 것이 K액터스 소속의 배우들은 대체로 거물급이었고, 그들은 쌓아 둔 이미지도 탄탄해 광고 모델로는 아주 좋은 효과를 보였으니 말이다.

그런 배우들을 매니지먼트하는 곽수한 대표는 ‘신인은 절대로 키우지 않는다.’라는 신념을 가진 남자였다. 왜인지는 몰라도, 아무것도 모르는 신인보다 까탈스러운 거물급 기성을 돌보는 게 더 편하다나 뭐라나. 아무튼 그런 곳에서도 신인이 데뷔했다는 것이 놀라워, 이선재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그쪽이랑 하죠.”

“더 보지는 않으십니까?”

비서실장이 눈짓으로 서류철을 가리켰다. 그 눈짓을 따라 서류에다가 눈길을 줬던 이선재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곽 대표의 안목이야, 연예계고, 광고계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탁월함이었다. 그의 안목은 숱하게 검증되어 온바, 이선재는 그의 안목을 믿기로 했다.

“뭐……. 볼 필요 있습니까? 곽 대표가 신인을 데뷔시킬 정도면, 어련한 인재 아니겠어요?”

이선재의 가뿐한 대답에 비서실장이 울대를 들썩거렸다.

“……네, 그럼 진행하겠습니다.”

“아아, 실장님.”

무거운 대답을 남긴 비서실장이 부회장실을 벗어나려던 찰나, 이선재가 다시 불렀다.

이선재는 의자를 빙빙 돌리며 허공에다가 손가락을 휘저었다. K액터스의 유일한 신인. 또는 최초의 신인. 아무튼 그 명망 높은 곽수한 대표의 안목에 꼭 들어찬 신인. 그런 타이틀을 가진 배우가 왜인지 탐이 났다.

분명 대한민국을 아우르는 배우가 될 거고, 나중에는 계약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 올지도 모른다. 미리 잡아 두는 것이 좋을까. 이선재가 의자 목받이에 목을 기대고 울대를 까딱거렸다. 아래위로 들썩거리는 울대의 모양새는 제법 탐스러웠다.

이윽고 결론을 내린 이선재가 탁자를 탁, 내리쳤다.

“아아—. 곽 대표네 신인이라니까 너무 탐나네. 일단 계열사 하나만 붙여 보고 수완 괜찮으면 곧바로 전 계열사 광고하는 조건으로 타 계약 막아 두죠. 데뷔는 한 배우입니까?”

“박주열 감독 드라마 ‘열여덟’ 주연으로 캐스팅됐답니다.”

“오, 첫 데뷔작이 박 감독 드라마 주연인 겁니까? 대단한가 보네요. 그냥 바로 전 계열사 광고로 가죠.”

재능이 있어도 보통 재능을 가진 신인이 아닌 모양이다.

이선재가 흥미롭게 입꼬리를 추켜 올렸다.

어느새 제법 세력을 키운 이선재는 이한 그룹에서 차기 회장으로 이름이 거론되는 중이었다. 멍한 눈이기는 해도 주어진 일은 깔끔하게 해내고, 나서서 여러 가지 사업을 성공시키는 등 능력 있는 사업가의 기질을 보이는 이선재의 모습에 이사들도 이선재의 회장 취임을 환영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이선재가 입지를 다지고 제 위치를 굳혀 가는 사이, 30년 전 결혼을 가로막고, 아이의 탄생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어른들도 노쇠하여 하나둘씩 죽음을 맞기 시작했다. 이선재는 그들의 죽음이 조금도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리던 일이랄까.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아들이고, 손주고 모두 소모품으로 이용하는 그 악랄한 사람들의 끝을 슬퍼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삐—. 삐—.

높은 데시벨의 전자음이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는 중환자실에 들어선 이선재는 산소호흡기에 겨우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노인을 내려다봤다.

어릴 때는 우악스러운 손길로 저를 추궁하고, 나무라고, 벼랑 끝에 매달아 숨통을 조이던 공포의 존재였는데, 지금은 그저 종이 한 장에 지내지 않는 나약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문득 우스웠다.

임종을 준비하라는 말을 듣고 찾아온 병원이었지만, 결혼 후 일절 찾아뵙지도 않은 부모였으니 그 임종이 딱히 크게 닿지도 않았다. 병실에 들어서서 그가 누운 모양을 살펴보는 이선재의 눈길은 줄곧 심심하기 짝이 없었다.

“……제가 이렇게 온 건 뒤늦은 효도 나부랭이를 하려는 게 아니라요.”

아이를 잃은 이선재는 어른들이 원하는 대로 자랐다. 대학을 가라고 해서 대학을 갔고, 해외 유학을 다녀오라고 해서 그것도 했다. 학위를 따라고 해서 학위를 따고, 혹독한 스케줄을 소화하며 경영수업을 받았다. 그렇게 다른 핏줄에 이한을 넘겨주지 않으려는 어른들의 욕심 속에 핏줄 하나 타고났다는 이유만으로 뿌리 없는 나무처럼 휘둘려야 했다.

아이를 잃고 슬퍼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어른들이었다. ‘결혼은 마음대로 하게 해 줬으니, 너도 내가 원하는 것을 해 내라.’라는 투의 어른들은 마치 이선재에게 맡긴 것을 되찾는 양 했다.

그렇게 어른들이 원하는 대로 차근차근 이한을 제 것으로 만들던 이선재에게는 그들은 꿈도 꾸지 않았던 다른 생각이 있었다. 이선재는 오늘, 저 악랄한 노인의 임종에 앞서 그것을 알릴 생각이었다.

“저는 제가 회장이 되는 날…….”

“…….”

“이한 그룹에서 사직하고, 이한을 전문 경영인에게 넘겨줄 겁니다.”

일정한 속도로 잔잔하게 울리던 전자음이 가빠졌다. 그를 듣는 이선재의 입꼬리가 함께 치솟았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 저주해 가며 지키려 하셨던 그 대단한 회사, 제가 전문 경영인한테 잘 물려줘서 절대 망하지 않게 해 드릴게요.”

“…….”

“어차피 죽으면 손에 쥐지도 못하는 거, 미련 없이 가시라고 말씀드려요. 안녕히 가세요.”

이선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노인의 눈이 번쩍 뜨이더니 목덜미에 검붉은 핏대가 솟아올랐다. 이윽고 노인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다 축 늘어졌다. 일정한 등폭의 주파를 그리던 기계의 화면이 잔잔해지더니 이내 삐—— 날카로운 전자음이 병실을 울렸다.

사람이 죽는 것은 실로 허망한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섭게만 보이던 사람이 죽은 후에는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는 게 참 허무했다. 이선재는 노인을 발인하는 날까지 내내 우중충한 얼굴로 시간을 보내었다.

국내 대기업 총수의 사망으로 전 세계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시기였으니, 이선재는 자신의 표정이 어두컴컴한 것을 다행이라 여겼다. 저도 모르게 싱글벙글 웃었다가는 아주 난리가 날 뻔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모든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온 선재는 무거운 한숨을 터뜨렸다. 홀가분할 줄 알았던 기분은 이상하게 착 가라앉았다. 그건 노인의 죽음이 아쉬운 게 아니라.

“도준이는 장례도 못 치러 줬는데.”

여전히 가슴에 응어리로 남은 아이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떨리는 숨을 공기 중으로 길게 뿜어낸 이선재가 착잡한 걸음을 옮겼다. 넓은 집에는 적막이 도사려 시계 초침 흘러가는 소리조차 예민하게 귓가에 닿았다. 넓디넓은 거실 한가운데에 있는 소파에 풀썩, 소리 나게 주저앉은 이선재는 박채령을 품에 안고서, 무거운 숨을 연신 터뜨렸다.

“도준이도…….”

“응…….”

“도준이도 장례를 치러 줄 걸 그랬어.”

“…….”

“그럼 꿈에 나오는 도준이가 웃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때는 우리가 너무 어려서, 뭘 해야 하는 줄도 모르고 그냥 보내 버렸네.”

두 사람의 축축한 호흡이 공기를 뜨겁게 달구었다.

박채령도, 이선재도 누구 하나 도준의 죽음에서 자유롭지 않은지라, 목소리는 더욱 무거워져만 갔다.

그때 저 멀리서 딸깍,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어른들도 없는 집이라 들어올 사람이라고는 상주하는 가정부들 뿐인데, 장례 기간에는 휴가를 보내 두었기에 올 사람이 없었다. 이선재가 눈동자를 굴려 현관을 바라봤다.

유리로 이루어진 중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은 매일 제 곁을 지키는 비서실장이었다.

“실장님, 무슨 일이세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매일 듣는 말과 다르지 않은 어투, 다를 바 없는 문장인데 오늘따라 무겁게 닿았다. 이선재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고서 비서실장을 마주했다.

분명 평소와 다르지 않은 복장이었으나, 그의 표정은 달랐다. 그의 숨소리도 달랐다. 그의 손도 달랐다. 왜인지 떨리는 숨을 간신히 내쉬는 비서실장은 굳게 말린 주먹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거친 파동을 머금은 채였다.

무슨 일이 있구나.

단박에 알아챈 이선재가 박채령의 양해를 구하고 비서실장과 함께 응접실로 향했다. 구태여 음료를 챙기지도 않았다. 무언가 중한 이야기를 할 모양이었으니, 곧장 본론을 듣고자 함이었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앉히고 서로를 응시하는 눈빛에는 서로 다른 의미가 서려 있었다. 이선재는 저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남자의 눈에서 이유 모를 비장함을 느꼈다.

그에 고개를 갸웃 비틀었더니, 상대편의 앉은 남자가 대뜸 무릎을 풀썩 꿇어 앉았다. 저보다 훨씬 연배가 많은 남자의 행동이 당황스럽다. 놀란 이선재가 벌떡 일어나 비서실장의 팔을 붙잡았다.

“뭐 하시는 거예요.”

손에 힘을 주고 일으키려 했지만, 남자는 이선재의 손을 쥐고 부드럽게 떼어 냈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실장님.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남자는 울고 있었다. 먹먹하게 젖어 드는 목소리가 무겁게 떨어져 이선재의 발등을 찧었다. 이선재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아무 말도 듣지 않았는데 심장이 쿵쿵 거칠게 뛰는 탓에 머리가 어질할 지경이었다.

“제가, 용기가 없어 이제야 말씀드려요.”

“그러니까 뭘요. 왜 이러시는데요.”

“……도준이 살아 있습니다.”

묵직한 한마디에 쇠망치에 뒤통수를 맞은 듯한 얼얼함이 몰려왔다. 선재는 주춤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눈썹을 씰룩거렸다.

“뭐……라고…….”

“도준이, 이도준, 이도준 살아 있어요. 도준이 살아 있습니다…….”

남자는 무릎을 꿇은 채로 이선재는 감히 상상도 하지 않았던 일들을 줄줄 읊어 냈다.

30년 전, 도준이 태어났던 그날. 이선재의 부모는 남자에게 ‘선재의 앞길을 막을 아이’라며 이도준을 살해할 것을 지시했다. 이한 그룹의 혼사 상대로 박채령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부모는 이선재와 박채령 사이에 자식이 없기를 바랐고, 남자는 제 가족을 볼모로 잡혀 그 명령을 수행해야만 했다.

하지만 협박 이전에 남자도 사람이었다. 갓 태어난 어린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해사한 얼굴로 곤히 잠든 채였다. 그런 아이를 무참히 살해할 수는 없었다. 남자는 이한 그룹의 손이 닿지 않을 보육원을 찾아 아이의 이름과 생일을 적은 쪽지 한 통과 함께 보육원 원장실 창문 아래에 아이를 유기했다.

그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렇게 상심하고, 힘들어하는 이선재의 옆에서 성심성의껏 그를 돌보고, 후원할 보육원을 찾는 이선재에게 보육원 목록을 추려 간 것도 남자였다. 도준이 있는 희망원을 적극 권유한 것 역시 당연히 남자였다.

노인의 죽음으로 제 목을 옥죄던 손이 사라졌으니, 이제야 말한다는 남자는 연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듣는 이선재의 눈에서 분노에 찬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제 앞에서 잘못을 고하는 남자는 지난 세월 유일한 내 편이라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한테 어떻게 그래.

이선재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붉게 피가 몰린 손끝이 새하얗게 질리고 그의 손등 위로 검붉은 핏줄이 불끈 솟아났다.

“어떻게, 아저씨가 나한테 어떻게 그래.”

“죄송, 죄송합니다…….”

“어떻게 그래, 어떻게! 내가, 어? 내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다 봤으면서, 그걸 보고도 그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어? 어떻게? 어떻게!”

우레처럼 터지는 이선재의 고함에 바깥에 있던 박채령이 달려왔다. 이선재의 눈에서도, 남자의 눈에서도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각기 다른 감정을 흘려 내는 중이었다.

“그래서, 우리 도준이 어딨어? 내 아들 어디에 있냐고.”

“뭐……?”

뒤늦게 상황을 접한 채령이 당장 몸을 돌려 남자를 쳐다봤다.

“……K액터스 이도준. 그 아이가 부회장님 아들입니다.”

“뭐라고…….”

“8년 전, 부회장님이 호텔에서 명함을 준 아이도……. 도준입니다…….”

“아…….”

“선재야, 선재야!”

남자의 말에 이선재가 탄식을 터뜨리며 풀썩 주저앉았다. 머리가 핑-도는가 싶더니 눈앞이 컴컴하게 점멸하며 시야의 모든 상을 지워 냈다.

대한민국에서 배우 이도준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같은 이름을 쓰고, 닮은 모양을 하고 있음에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죽었다.’라는 확신이 눈을 가린 탓이었다.

그의 존재를 의심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만들어진 이미지일지 몰라도, 배우 이도준에게는 제법 고급스러운 수식어들이 붙어 있으니, 보육원에서 자랐을 거라는 생각도, 부모에게 버림받았을 거라는 생각도. 그리고 그날 호텔에서 만난 것이 그 ‘이도준’일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30년을 죽었다고 생각한 자식이었다. 그것 외에는 다른 경우를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이렇게 살아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와 돌이켜 보니 저와 꼭 닮은 것이었다. 배우 이도준은, 그 아팠던 이도준은 자신의 20대, 30대와 꼭 닮은 모양이었다. 배우 이도준은 나를 닮았고, 제 어미의 분위기를 지녔으며, 부모를 닮아 키가 컸다.

문득 언젠가 호텔에서 봤던 아이의 아픈 눈이 떠올랐다. 아무런 생기도 묻어나지 않는 검은 눈동자가 허공을 맴도는 것이 뭉게뭉게 피어 뇌리를 지끈하게 눌렀다. 상처투성이였다. 아이는 혼자 걷지도 못했었다. 선재의 입에서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오랫동안 적막이 도사렸다. 이선재는 화가 치밀어 감히 어떤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이선재와 박채령 앞에는 남자가 건넨 사직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하얀 봉투마저 가소로워, 이선재는 화가 잔뜩 서린 눈으로 남자를 노려봤다.

지금 이깟 사직서로 모두에게 상처였던, 무엇보다 그 어린 아이가 고통 속에 보냈을 30년을 대신하겠다는 건가.

헛웃음이 나 고개를 한껏 젖혔다. 눈꼬리에 매달렸던 눈물이 둥근 포물선을 그리며 볼을 타고 흘렀다.

이를 악문 이선재가 제 앞에 놓인 사직서를 구겨 쥐었다. 투명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은 붉은 핏발이 선 채였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담고서 불꽃이 튀었다.

“내 아들 다시 내 옆에 데려다 놔.”

“…….”

“그리고 아저씨도 곱게 죽지 마. 절대로 아프게 죽어. 내가 그렇게 하게 도와줄게. 아……. 어떻게 그런…….”

이선재는 하염없이 우는 남자에게 저주를 퍼붓고서 박채령을 데리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제아무리 곁에서 오래간 자신을 돌보아 준, 자신을 신경 써 준 단 하나뿐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그가 원망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선재는 당장 K액터스 곽수한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들 이도준을 마주하기 위함이었고, 자의든, 타의든 오래 돌아왔으니 지금이라도 전속력으로 그에게 다가가 그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

긴긴 이야기를 마친 이선재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어 문 채로 다시 도사린 울분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세 사람이 둘러앉은 방 안에는 거친 호흡이 뒤섞였다. 각자가 느끼는 감정 속에서 통일된 것은 분노, 그뿐이었다.

“그래서, 제가……. 도준이를 꼭 돕고 싶습니다.”

목청을 가다듬은 이선재가 자신의 굳은 의지를 보였다. 그 말은 기꺼웠지만, 시기가 아쉬웠다. 대표는 두 눈을 질끈 감고서 도준이 걸어왔던 가시만 잔뜩 돋아난 아픈 길을 떠올렸다.

진작 알아봤더라면.

그 호텔에서라도 도준이라는 것을 알아봤더라면.

제아무리 우매한 확신에 사로잡혀 아이를 알아볼 틈이 없었다 하더라도, 그래도 알아봤더라면.

철 지난 원망이 도사려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런 대표의 마음을 이선재의 간절한 목소리가 붙잡았다.

“도와주십시오.”

“제가 뭘 도울 수 있겠습니까. 도준이 심정은 상상도 안 되는데요.”

“…….”

“도준이는……. 부모 없는 이도준으로 사는 게 더 좋다고 했습니다.”

“하…….”

멎은 듯했던 눈물이 다시 길을 냈다. 이선재는 치미는 눈물을 참아 낼 도리가 없어 고개를 푹 수그린 채로 투명한 눈물을 뚝, 뚝 흘려 댔다.

눈물이 보이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은 사치였다. 그저 부모로서 할 도리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 진작 알아보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가 훨씬 크게 닿아 자신의 명예도 모두 잊은 채로 우는 이선재와 박채령은 잃었던 아이 앞에 죄스러움을 느끼는 부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호텔에서 만났을 때라도 알았더라면…….”

이선재의 입에서 사무친 후회가 흘렀다. 목 근육이 뻣뻣하게 땅기는 것은 대표도 같은 심정이라, 연신 마른침을 삼켜 댔다.

“그러게요, 그때라도 알아보셨더라면 도준이가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요.”

저들의 사정은 이해하겠으나, 제 눈으로 봐 온 도준의 아픔을 익히 아는 대표의 입에서는 좋은 말이 나올 리가 만무했다. 날이 선 목소리로 차분한 어투를 구사하는 대표에게서는 두 사람을 향한 짙은 울분이 느껴졌다.

이선재는 그 울분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염치없이 도준에 관한 것을 묻고 싶어, 차근차근 고개를 들고 조심스레 질문을 건네었다.

“……도준이는, 뭘 좋아하는지 여쭤도 되나요.”

“…….”

“어떨 때 행복해하고, 뭘 잘 먹나요. 좋아하는 음식은…….”

좋아하기는, 씨발.

불쑥 욕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대표는 굳센 주먹을 말아 쥐고 눈을 치켜떠 두 사람을 마주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저 사람들은 이도준의 아픔을 조금도 모르는 것 같았다. 호텔에서 봤다면서, 아픔은 그뿐이라 생각하는 걸까.

죽었다고 믿었던, 저들의 사내 정치에 휘말려 희생당한 어린아이의 아픔을 알리는 것이 저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처사일 것이라 생각한 곽 대표가 떨리는 숨을 가다듬으며 운을 떼었다.

“좋아하는 음식이 있겠습니까, 미각도 없는 아이인데.”

“뭐라고요.”

“도준이는 음식 맛을 모릅니다. 좋아하는 음식은커녕, 주변에서 맛없게 먹는다고 핀잔주는 게 싫어서 항상 혼자 먹습니다.”

“아니, 아…….”

“그러게 그때 알아보셨어야지요. 전광진 밑에서 고생하기 전에, 아이가 악몽을 꾸기 전에 알아보셨어야죠.”

대표의 말이 채찍처럼 살결을 후려치는 것 같았다. 아찔한 고통을 느낀 이선재가 주먹을 불끈 말아 쥐고 고개를 젖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정말 죽은 줄 아셨습니까. 찾아볼 생각은 조금도 안 하셨던 겁니까.”

대표의 책망하는 말에 이선재가 고개를 저었다.

30년 전, 아이의 시신을 안았었다. 차갑게 식은 팔다리를 만졌고, 눈을 감은 채로 뜨지 않는 아이의 얼굴을 매만졌었다. 당연히 그를 의심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럴 경황도 없었다. 하지만 그마저 변명이라면 변명이라 할 수 있는 일이라, 이선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마저 안일해 보였다. 대표는 조금 더 단호한 눈을 뜨고 두 사람을 직시했다. 잘못을 알았다면 이제라도 되돌릴 노력을 해야지, 이렇게 울고만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적어도 이도준을 위한다면, 정말로 이도준을 위해 무어든 할 생각이라면 이제는 이렇게 울기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도준이를 만나러 오실 때는 뭔가 결심을 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제가 뭘 못하겠습니까. 이 자리에 오기까지 나는 내 자식을 잃었어요. 죽은 줄 알았던 자식이 살아 있다는데, 그리고 그렇게 아팠다는데 제가 못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럼 울지만 마시고, 도준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걸 찾아보세요. 부회장님의 아들 이도준을 망가뜨린 건 JR 엔터테인먼트의 전광진입니다.”

대표가 단단한 목소리로 이선재에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렸다. 이도준을 위해서라면 그의 복수라도 하라는 듯한 대표의 목소리에 이선재가 매서운 눈을 치켜떴다.

우습게도, 이 상황이 감사했다. 차라리 이한 그룹의 차기 회장으로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 지금, 모든 이사들의 마음을 사고, 권력을 손에 제대로 쥔 지금, 아이를 위한 복수에 어려움은 조금도 없었다. 그건 반평생을 원망만 했던 부모를 향해 감사를 느끼게 할 정도였다.

이렇게 된 이상 이한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려던 계획은 수정하기로 했다. 이제는 이한을 이도준을 위한 도구로 사용할 것이다. 이도준이 이한을 위해 희생되었다면, 이한은 기꺼이 이도준을 지켜야 했다.

마음을 가다듬은 이선재가 눈물을 닦아 내고 대표를 마주했다. 이제 보니 도준이 쏙 빼닮은 날카로운 눈매에 갇힌 검은 눈동자가 확고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정말 웃기지만.”

“…….”

“이한이 가진 이름이 누굴 위해 존재하는지, 제가 보여 주겠습니다.”

이선재의 목소리에는 살의가 서렸다. 못할 것이 없다던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한 자 한 자 눌러 전하는 단어에는 묵직한 분노가 함께였다.

대표가 저도 모르게 큰 한숨을 내쉬었다. 제 빛을 만나 차차 밝아지는 도준이었지만, 그럼에도 어둠에 가리어 허덕이는 그가 이제는 오롯한 빛으로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안도가 도사렸다.

그러는 중에도 부모를 밀어내는 도준이 느끼는 혼란에 막연한 두려움이 서렸다. 이제야 제자리를 잡고 중심을 지키기 시작한 아이인데, 또다시 흔들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밀려와 그들의 도움을 마냥 반가워만 할 수도 없었다.

*

식당을 벗어난 도준은 씩씩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차에 올랐다. 다른 생각을 해 보려 해도 해도 불쑥불쑥 치미는 울화에 머리가 띵-, 울렸다.

그래서 희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길게 이어졌다. 희찬의 산뜻한 목소리가 고픈 지금, 도준의 손가락이 초조함에 까딱거렸다. 희찬의 목소리를 기다리는 동안, 도준은 내비게이션에 희찬이 보내 줬던 주소를 입력했다.

경치가 좋다며, 다음에 같이 오자고 주소를 남겨 둔 희찬이었지만, 그 주소를 지금 찍게 될 줄은 둘 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 어, 준아!

“희찬아.”

― 무슨 일 있어? 목소리가 왜 그래?

그저 희찬아, 한마디 했을 뿐인데 밝았던 희찬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해졌다.

막상 통화가 되니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복잡해졌다. 도준은 마른침을 꼴깍 삼킬 뿐, 도무지 입을 떼지 못했다.

“희찬아. 나 거기로 가도 돼?”

안 된다고 해도 갈 생각이지만, 당황할지도 모를 희찬을 위해 일단 질문을 건넸다.

― 지금?

“응.”

― 어…… 잠시만.

이윽고 희찬이 스태프들과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간간이 제 이름이 함께 들리는 것이, 도준이 와도 되는지 묻는 것 같았다. 희찬의 답을 듣기 전이었지만, 도준은 액셀을 밟았다. 스태프가 안 된다고 하면 근처에서라도 희찬을 만나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해, 다른 경우는 떠오르지도 않았다.

― 준아, 와도 된대. 근데 출연료는 못 준대.

“웬 출연료?”

― 너 오면 방송 출연하는 거니까.

“돈 벌러 가는 거 아니야. 나 지금 너 만나야 해.”

― 뭔데, 왜 그래. 너 이상해.

도준이 애타는 목소리를 내면 낼수록 희찬의 목소리도 덩달아 초조해졌다. 걱정하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희찬 덕에 도준은 도리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거 통화하는 거 방송에 녹음 들어가?”

― 아니.

어느새 차는 도심을 벗어나 고속도로에 올랐다. 시야를 가득 채우던 건물이 사라지니 드디어 숨통이 트이는 것만 같았다. 차창 밖의 환한 햇살이 보였고, 상쾌한 바람에 덩실덩실 춤을 추는 나뭇가지들이 보였다.

“나 부모 만났다.”

― 뭐라고?

“진짜 미친 소리 같지 않냐.”

― 아니, 잠깐만. 너 오늘 만난 사람들, 그……. 아니다, 와서 얘기해.

놀라고 당혹스러운 것은 희찬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격앙된 톤으로 큰 소리를 내질렀던 희찬은 금세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듯 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래도 저와 같이 호들갑을 떨어 주는 희찬의 목소리를 듣고 보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이내 희찬과의 통화를 마친 도준이 액셀을 세게 밟았다. 순간적으로 속도가 붙으며, 우웅, 요란한 소리가 났다.

도심을 누비던 차는 어느새 한적한 고속도로 위에 올랐다. 평일 낮, 생각보다 훨씬 텅텅 빈 도로에 도준의 차에는 속도가 붙었다.

*

도준의 전화를 받은 희찬은 전화가 끊긴 후에도 한참이나 허공을 쳐다봤다.

부모라니. 오늘 도준은 이한 그룹 사람들을 만난다고 했는데, 대뜸 부모를 만났다니.

어지럽게 뒤엉킨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으나, 그건 도준이 겪는 혼란스러움에 비하지도 못할 것이다. 희찬이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힐링 프로그램으로, 출연자에게 그 어느 것도 강요하지 않는 스태프들 덕에 처음엔 심심하기만 했으나, 이럴 때는 혼자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드높은 하늘은 사람 속도 모르고 청명하기만 했다. 솔솔 불어오는 얕은 바람에 구름이 조금씩 밀려나고, 특유의 맑은 산 내음이 가슴을 간지럽혔지만, 희찬의 인상은 점점 일그러졌다.

도준이 걱정되었다. 평생을 부모 없는 아이로, 사람들의 눈총을 이겨 내며 살아왔다. 어른의 도움이 간절했던 때에도 부모가 없어 모든 것을 오롯하게 혼자 견뎠던 이도준이었다.

이내 화가 났다.

이제 와서 왜. 그 오래간 내버려 둬 놓고, 도대체 왜.

아마 부모라는 사람들을 마주한 도준도 같은 심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를 생각하니 내쉬는 숨이 절로 떨렸다.

혹시라도 이도준을 흔들어 놨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생각이다. 이한 그룹이고 뭐고, 그대로 쫓아가서 다 뒤집어엎을 것이라고 다짐한 희찬은 초조한 마음으로 도준을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조용한 시골 동네에 차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엔진음이 거의 나지 않는 고급 승용차였으나, 저토록 거칠게 달려오는 것을 보니 운전하는 도준이 무슨 심정으로 오고 있는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영문도 모르고 도준이 온다는 사실 하나에 기대를 품은 스태프들이 하나같이 반색을 보였다. 멀리서 다가오는 차는 서울에서도 보기 드문 값비싼 차였으므로 굳이 희찬에게 묻지 않아도 도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윽고 도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SUV에서 내린 도준은 성큼성큼 걸음을 놀려 촬영장 안으로 진입했다. 도준은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도 잊은 채로 희찬을 발견하자마자 그를 와락 껴안았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도준의 동공을 본 희찬은 말없이 도준을 마주 안고, 그의 너른 등을 쓰다듬었다.

“괜찮아?”

“…….”

도준의 어깨 너머로 당황하는 스태프들의 모습이 보였다. 희찬은 눈짓으로 스태프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희찬을 옭아매는 도준의 손에 점점 힘이 실렸다. 바르르 떨리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손길에 희찬은 그저 쓴 침을 꼴깍 삼켰다.

“들어가서 얘기할까?”

“응.”

느릿하게 아래위로 흔들리는 도준의 고개를 보던 희찬이 침실로 이용하는 방으로 도준을 안내했다. 침대 하나 없는 작은 방이 정겹다. 도준은 희찬이 저를 밀어 넣은 방의 전경을 차곡차곡 눈에 담았다. 심란한 와중에도 이상하게 안정이 몰려왔다.

도준이 방을 구경하는 동안 희찬은 스태프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도준이와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현장 내 마이크를 모두 꺼 줄 수 있겠냐는 정중한 희찬의 말에 스태프들은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

“도준이 얘기만 하고 바로 갈 거 아니고, 아마 오늘 자고 갈 거예요. 대화 끝나면 그 뒤에 분량 뽑으면 괜찮지 않을까요?”

덧붙는 희찬의 말은 나쁠 것 하나 없는 제안이었다. 두 사람의 인기야 두말할 것 없이 최정상이었고, 그런 두 사람이 어울려 분량을 내주겠다는데 잠시 모든 마이크를 끄는 것쯤이야.

이내 감독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방으로 돌아온 희찬은 다시 도준을 꼭 안아 줬다. 뜨끈한 바닥에 앉아, 벽에 몸을 기댄 채로 허공을 응시하는 도준의 모습이 상당히 혼란스러워 보였다.

“많이 혼란스러워 보여.”

“…….”

“자기들이 부모래? 직접 그래? 너 낳았대?”

“나보고 살아 있어 줘서 고맙다더라…….”

희찬이 도준의 손을 그러쥐었다. 도준은 희찬의 품에 안겼던 몸을 숙여, 희찬의 어깨에 이마를 댄 채로 웅얼웅얼 흐릿한 말을 했다.

“남자가 나랑 똑같이 생겼어. 거울 보는 줄 알았어. 그 옆에 여자가 있는데, 그냥 느낌이 와. 아, 이 사람들이 내 부모구나.”

“…….”

“……죽은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잘살고 있더라. 존나 그렇게 가까이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는데.”

이도준 입에서 비속어가 다 나온다. 그의 격앙된 감정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단어에 희찬이 토닥토닥, 도준의 등을 다독였다.

“가진 적도 없는데 쥐었다 빼앗긴 기분이야.”

“……안아 줄까.”

“응…….”

이미 제 품에 안겨 있는 도준이었지만, 조금 더 힘차게 안아 주었다. 희찬은 있는 힘을 다 끌어 도준을 부둥켜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를 했다.

도준이 희찬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더 파고들 틈이 없음에도 희찬을 갈구하는 도준의 몸짓은 간절하기까지 했다. 희찬은 그저 도준에게 자신을 모두 내어 준 채로 도준이 안정을 되찾길 기다렸다.

도준은 오랫동안 느릿한 목소리로 천천히 자신의 감정을 읊었다. 당연히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이 저를 보며 눈물을 흘릴 때는 오만 감정이 교차했다고, 차라리 나타나지를 말지, 왜 나타나서 이런 혼란을 겪게 하는 거냐고.

짧은 시간 동안 빠르게 교차하는 많은 감정을 천천히 읊는 도준의 목소리가 조금씩 단정해졌다. 희찬은 정성스레 도준의 등을 어루만지고 쓰다듬으며 그를 달래었다.

“그래도 얘기는 좀 들어 볼까 그랬나 싶기도 하고……. 그냥 나오는 건 너무했나…….”

“그 정도는 해도 돼.”

“…….”

“너도 이렇게 속상하잖아, 지금. 그 사람들은 더 속상해도 돼.”

“……명함 줬을 때는 몰랐다더라. 그게 왜 그렇게 열 받는지 모르겠어.”

희찬의 눈이 번뜩 뜨였다.

그러게, 이도준은 8년 전 그 아픈 날 한 남자로부터 명함을 받았다고 했었다. 그걸 준 사람이 제 부모였다는 것을 안 이도준의 마음은 어떨까.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심정이라 희찬이 교근이 불끈 솟을 정도로 세게 이를 물었다. 부모는 100m밖에서도 자식을 알아본다던데 왜 몰라봤을까. 차라리 그때 알아보고 도와주지. 아등바등 힘들게 사는 이도준, 손이나 한번 꼭 잡아 주지.

애초에 돈만 있었다면 그런 일은 겪지도 않았을 거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제 부모라는 것을 알았다면 이도준은 제 몸을 담보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가슴이 저릿하게 아려, 희찬이 도준을 안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고 그의 너른 등을 다독였다.

“우리 도준이 속상했겠네.”

“아까는 진짜, 아…….”

“혼란스러워하지 마, 도준아. 부모면 뭐, 어쩌라고.”

“응…….”

도준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안타깝다. 희찬이 도준의 양 볼을 두 손에 쥐고서, 도준의 얼굴을 들어 저와 마주 보게 만들었다.

도준의 새까만 눈동자가 데굴데굴 구르는가 싶더니 이내 희찬과 마주했다. 도준을 바라보는 희찬의 눈은 다정하고, 또 따스했다. 혼란스러울 필요 없다는 듯이, 부드럽게 자신을 달래는 눈길에 도준의 숨이 편안하게 가라앉았다.

“물론 그 사람들을 과거에 알았다면 훨씬 편하게 지냈겠지만, 네 말대로 우리는 다시 행복해졌잖아.”

“응…….”

“굳이 신경 써서 괴로워하지 마. 그냥 지금처럼, 네 인생 살다가 가끔 떠오르면 그때 조금 생각해 보면 돼. 그러다 마음이 바뀌면 또 그때 가서 어떻게 할지 고민하면 돼. 지금 해결 안 해도 돼, 도준아.”

“……고마워. 좀 편해졌어.”

이내 도준의 이마가 희찬의 이마와 맞닿았다. 카메라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았다면, 당장 입술을 마주 대고 키스했을 텐데 말이다.

지잉, 지잉 돌아가는 기계음을 의식한 도준의 눈이 느릿하게 끔뻑거렸다. 그를 본 희찬이 피식, 웃었다. 희찬의 가지런한 손가락이 도준의 콧잔등을 아프지 않게 쥐고서 살살 흔들었다.

“졸려? 밥은 먹었어?”

“졸리고, 밥은 제대로 못 먹었어.”

“실컷 성내고, 운전하고 와서 털어놓으니까, 이제 졸려?”

“긴장했다가 풀려서 그래…….”

“이불 깔아 줄게.”

도준을 가만히 앉혀 둔 채로 벌떡 일어선 희찬이 바닥에 이불을 깔았다. 두툼한 요를 깔고, 그 위에 베개를 얹어 주자 도준이 피식 웃었다. 매트리스 없이 얇은 이불 위에서 희찬과 누워 서로의 허리를 주물러 주던 때가 떠오른 탓이었다.

“좀 자.”

스르르, 몸을 뉜 도준은 잠이 가득한 눈으로 희찬을 올려 보았다. 희찬은 도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다가 눈을 감기며 얼른 자라는 시늉을 했다.

“스태프분들한테 인사도 못 했다.”

“이따가 일어나서 해.”

희찬이 도준의 눈을 가린 손으로, 눈꺼풀을 토닥토닥 두드리자 도준의 숨이 점점 느릿해졌다. 억지로 말을 하던 도준의 입도 다물렸다. 희찬은 발치에 있던 이불을 도준의 목까지 끌어 덮어 줬다.

반복적으로 오르내리는 도준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혼란스러워 보였던 도준이 안정을 되찾은 것이 참 다행이었다. 혹시 흔들리지는 않았을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도준은 제법 의지가 굳세었다.

“착한 이도준……. 누가 너더러 싸가지 없대. 이렇게 착한데.”

그래, 참 착한 이도준이다. 이유야 어떻든, 30년을 내버려 둔 부모가 혼란스러워 그 현장을 그냥 빠져나왔다고, 원망을 느끼면서도 그들에게 모진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이도준은 참 착하기만 했다. 때로는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조금 더 거칠게 행동해도 될 텐데, 웬만해서는 그런 면을 드러내지를 않는 게 이도준다웠다.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 이도준의 모습은 아주 사납고 냉정하며, 싸가지 없다는 것. 그건 도준의 생김새와 살갑지 않은 태도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의외로 마음이 여린 이도준은 유약하게 흔들리는 것 같다가도 한번 마음을 다잡으면 거친 풍파가 몰려와도 이겨 낼 힘을 가졌다.

그래서 이도준이 좋다. 변하지 않는 선함으로 자신을 덮쳐 오는 악을 이겨 내려 노력하는 이도준이 참 좋았다.

도준을 재우고 밖으로 나오는 희찬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희찬은 오매불망 자신들을 기다리는 스태프들을 향해 멋쩍은 미소를 보였다.

저를 쳐다보는 감독의 눈에서 ‘이도준은?’ 하는 질문이 읽혔다. 그에 희찬이 조금 더 생글 웃었다.

“웃기는 새끼죠. 집에서 자면 되는 걸 굳이 여기까지 와 놓고, 운전해서 피곤하다고 잔대요.”

하하하!

부러 호탕한 웃음을 터뜨린 희찬이 표정을 펴고,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저는 그럼…… 이제 이도준이 먹으면 쓰러질 수도 있는 밥을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아니, 서울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밥도 안 먹고 와.”

2박 3일 동안 삼시 세끼 밥을 챙겨 먹고, 스케줄에 지친 심신을 돌아보는 컨셉으로 진행되는 힐링 프로그램답게, 희찬은 도준의 식사를 준비해 보기로 했다.

요리에 자신이 없고, 자신이 한 요리를 제대로 먹어 본 적도 없는 희찬이었지만, 요리하는 희찬의 손은 거침없었다.

“그거 먹을 수 있는 거예요?”

“모르겠어요, 간을 안 봤어요.”

“먹으면 진짜 쓰러지겠는데……?”

“괜찮아요, 이도준은 잘 먹을 거예요.”

한창 요리를 하던 희찬의 등 뒤에 기겁하는 질문이 따랐지만, 희찬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각종 조미료를 부어 맛을 내는 것도 거침없었다. 희찬이 이토록 요리에 자신 넘치게 행동하는 것도 이유가 있다.

이도준은 맛을 느끼지 못한다.

극복해야 할 아픔 중 하나였지만, 희찬은 더 이상 도준의 아픔을 무겁게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옛날과는 다른 사랑을 하기로 했으니 한곳에 머물며 아파하는 것도 접어 두기로 했다.

도준이 예전과 달라졌다고 하여, 이도준이 틀린 것은 아니니까. 이도준이 구태여 견디겠다고 하면 그저 조용히 같이 견뎌주면 될 일이었다.

“먼저 한번 드셔 보시는 건 어떠세요?”

“제가요? 이걸요? 왜요?”

“아니, 친구 드릴 거면서!”

“악! 싫어요, 저는 제가 한 음식 절대 안 먹어요.”

희찬이 질겁하며 방방 뛰는 모양에 스태프들이 즐겁게 웃었다. 보통은 자신이 먼저 먹어 보고 친구를 먹여 주지 않나. 하지만 그와는 전혀 다른 희찬의 모습에 스태프들은 의아함을 느끼는 한편, 장희찬이라서 잘 어울리는 모습이라 그저 웃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덧 뉘엿뉘엿 해가 지기 시작한 앞마당에 주황빛 노을이 내려앉았다. 도준은 여전히 잠든 채였고, 그동안 희찬은 스태프들과 장난도 치고, 해가 진 후에 도준과 함께 보낼 시간들을 준비하기도 했다.

마당 한편에는 희찬이 켜켜이 쌓아 둔 나무 장작들이 캠프파이어를 연상하게 하는 모양으로 자리했다. 그 옆에는 폭죽도 있었다. 처음 촬영하러 강원도로 들어올 때 혹시나 심심하지는 않을까, 서울에서 사 온 것들이었다.

못 쓰고 갈 줄 알았는데, 오늘을 위한 아이템이었나 보다. 희찬이 생글생글 웃었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푹 잔 듯 개운한 모습의 도준이 어렵사리 눈을 뜬 채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일어났어?”

마당에 펼쳐 둔 낚시 의자에 앉아 다리를 달랑거리던 희찬이 도준을 돌아봤다. 도준은 배가 다 보이도록 팔을 들어 올려 기지개를 켜다가 시선을 툭 떨어뜨려 자신의 바지를 봤다. 도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찬아, 너 바지 남는 거 있어?”

“옷 갈아입게?”

도준이 허리춤에 손가락을 넣더니 입술을 삐죽거렸다.

“응, 바지 불편해.”

“티셔츠도 줄까?”

“응, 나 주라.”

갓 잠에서 깬 이도준에게서는 어릴 때의 모습이 보일 때가 있다. 지금이 그랬다. 어리광을 부리듯, 귀여운 어투를 구사하는 도준 덕에 희찬이 환하게 웃었다.

“캐리어에 있어, 알아서 꺼내 가.”

도준이 희찬의 캐리어에서 자신이 입을 만한 편한 바지와 티셔츠, 그리고 속옷까지 꺼냈다. 도준의 모든 행동은 자연스럽기 그지없었고, 희찬 역시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당연히 스태프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도준은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곧장 걸음을 놀려 욕실로 향했다. 주방과 침실이 있는 집에서 분리된 화장실의 모양이 아득한 옛날 희찬과 함께 살던 집의 모양과 비슷했다.

도준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희찬이 대청마루 위에 누운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도준은 그제야 스태프들과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누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인사를 제대로 드리지 못했다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넨 도준의 입가에는 예의 그 근사한 미소가 피어 있었다.

인사를 마친 도준은 불편한 듯, 바지를 만지작거리며 저벅저벅 희찬에게 향했다.

“희찬아.”

“응?”

“너 키 줄었어?”

도준이 하는 말이 뜻밖이다. 희찬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아니, 갑자기?”

“이거 봐. 바지가 껑충 올라왔어.”

마루 위에 불쑥 올라온 도준의 다리 끝에는 뽀얀 복사뼈가 드러나 있었다.

“아, 이게 진짜. 겨우 3cm 큰 거 가지고 되게 생색이네.”

장난기가 가득한 도준의 모습에 희찬이 바락바락 성을 냈다. 어릴 때는 저보다 작아도 한참 작았으면서, 키 좀 더 컸다고 생색을 내는 모양에 약이 바짝 오른 탓이었다.

아니, 그리고 저 바지는 내가 입어도 짧은 거라고.

희찬이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골을 부리자 도준은 원하는 반응이었다는 듯, 큼지막한 웃음을 터뜨려 댔다.

결국 도준은 희찬의 캐리어에서 반바지를 꺼내 다시 바지를 갈아입었다. 도준의 길쭉한 다리가 훤히 드러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활동하기에는 훨씬 편할 것이니 희찬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발라당 드러누운 희찬의 머리가 들렸다. 도준은 자연스럽게 희찬의 머리를 제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쫀득한 희찬의 볼을 지점토 주무르듯 만지작거렸다.

가만히 도준의 손에 볼을 내어 줬던 희찬의 눈이 굴러 도준과 맞닿았다. 도준이 고개를 갸웃 비틀었다. 희찬의 고개도 같은 방향으로 휙 꺾였다.

“야, 근데 너 대표님한테 말은 했어? 여기 온다고?”

“아니.”

“너 혼나려고?”

“뭘 혼내, 아…….”

도준은 다시 치미는 열을 느끼고 이마를 짚었다. 보기 좋게 일그러진 도준의 잘생긴 얼굴에 희찬도 덩달아 인상을 굳혔다.

“아, 그래도 말도 안 하고 남의 스케줄에 오는 배우가 어딨어. 빨리 전화 드려.”

“응, 근데…….”

“또 뭐.”

미적거리는 꼴을 보아하니 어지간히 하기 싫은 모양이다. 하기 싫은 것을 최대한 미루는 습관은 고쳐지지 않은 듯 도준의 행동은 느릿하기만 했다.

그런 도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매는 먼저 맞자는 주의였기 때문에 희찬이 도준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손가락으로는 도준의 허벅지를 쿡쿡 찔렀다.

“여기 담배는 어디서 피워?”

이게 듣자 하니까.

인상을 한껏 누빈 희찬의 눈에 괘씸함이 도사렸다.

“야! 끊으라고 했잖아!”

희찬이 벌떡 몸을 일으키기 무섭게 희찬의 이마와 도준의 이마가 빡!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아!”

“이게 지금 나한테 담배를 어디서 피우냐고 물어봐? 어?”

도준이 이마를 감싸 쥐고 아픈 신음을 흘리며 열이 가득한 이마를 손바닥으로 내내 문질렀다. 혹이라도 난 건 아닌가,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던 도준은 이내 억울한 듯 눈썹을 누그러뜨리고, 잘못한 학생의 모양으로 무릎을 꿇어앉았다.

“솔직히 오늘은 이유가 있잖아. 오늘은 봐줘야 하잖아.”

“하……. 저 뒤에 가서 피워. 너 진짜 오늘만 봐주는 거야, 내일부터 끊는 거야.”

하지만 도준이 저렇게까지 나오면 희찬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까지 담배를 피우겠다는 도준에게 희찬은 스태프들이 담배를 피우는 곳을 알려 줬다. 그러면서 부러 눈을 매섭게 뜨는 것도 잊지 않았다.

희찬에게서 허락을 얻어 낸 도준이 곧장 몸을 일으켰다. 주머니 속에 넣어 둔 담배를 만지작거리며, 희찬이 말한 곳으로 향하던 도준은 무언가 깨달은 듯 몸을 휙 돌려 희찬을 바라봤다.

“근데 희찬아.”

“또. 왜.”

“나 예능 처음이야. 지금 깨달았어, 이거 예능이지? 우와.”

“우와…….”

진짜 어이가 없다.

희찬은 붕방거리는 도준의 행동에 아무런 성의가 묻어나지 않는 대답을 이었다. 그런 희찬의 반응은 아무런 타격이 없다. 도준은 예능에 첫 출연한 오늘이 그저 신기한 듯 평소보다 훨씬 가뿐한 몸짓을 보였다.

“우와, 세상에. 나 처음이야.”

“알겠고, 축하하고. 빨리 가서 담배를 피우든, 전화를 하든 하라고.”

자고 일어나더니 유달리 밝아 보이는 도준의 뒷모습이 보기 좋다. 희찬은 잔뜩 일그러뜨렸던 표정을 풀고서 이내 뭉근한 미소를 피웠다. 스태프들은 원래 이도준이 저렇게 밝냐는 질문을 했다. 희찬은 그저 어깨를 으쓱거리는 것으로 답했다.

본디 사람이라는 것이, 한 가지 색으로만 정의할 수도 없는 법이지 않겠는가. 희찬에게 보이는 모습도,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모습도 전부 도준의 모습이었으니, 알아서 판단하라는 의미였다.

희찬은 도준이 먹을 저녁상을 차렸다. 카메라가 쉽게 찍을 수 있는 마루 위에 식탁을 펼쳐 놓고, 도준의 몫으로 만들어 둔 음식을 올렸다. 그 옆에는 숟가락과 젓가락도 가지런히 뒀다. 반찬이 필요할까, 고개를 갸웃거리다 김치 정도는 괜찮겠지, 싶어 김치도 꺼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제 몫의 음식을 꺼냈다. 체중 관리에 돌입한 희찬은 온통 푸릇푸릇한 채소들을 적당량 덜어 맛있는 드레싱을 뿌렸다.

어느새 돌아온 도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맛을 느끼지 못한다지만, 이건 비주얼부터 너무했다. 오죽하면 희찬 앞에 있는 풀때기가 더 먹음직스러워 보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야, 이거 먹으라고 만든 거야?”

“응.”

“딱 봐도 무슨, 이야……. 이게.”

“아 먹기 싫으면 버리든지, 밥 안 먹었다며.”

기껏 차려 줬더니.

희찬이 말을 덧붙이며 눈썹을 씰룩거렸다. 그에 도준은 얼른 식탁 앞에 앉아 숟가락을 쥐었다.

“맛있게 먹을게. 설거지는 내가 해.”

“응! 그러라고 저만큼 쌓아 놨어.”

희찬의 손가락이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그에 숟가락을 입에 물고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던 도준의 미간이 가차 없이 좁혀졌다.

희찬이 가리킨 곳에는 정말로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짓거리가 있었다. 언제부터 설거지를 미룬 건지, 그 양이 많아 한숨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도준이 고슬고슬한 밥알을 씹어 삼키며, 눈을 가늘게 뜨고 희찬을 노려봤다. 희찬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두 손 위에 얼굴을 얹고서 환하게 웃었다.

도준이 큰 손으로 희찬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장희찬 주도면밀하네. 초등학생 때 칭찬스티커 꽤나 받으셨겠어요.”

“나 그거 진짜 많았잖아. 기억나?”

“기억나. 너는 진짜 그게 유독 많았어.”

도준은 금방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맛있기로 유명한 고급 한식집의 요리는 제대로 씹기조차 어려워 먹지도 못했는데 이상하게 장희찬이 만들어 둔 독이라도 든 것 같은 비주얼의 밥은 술술 잘도 넘어갔다.

희찬이 도준에게 투명한 물잔을 건넸다. 꽃이 그려진 예쁜 물잔에는 금방 구릿빛 보리차가 담겼다.

“그거 왜 그렇게?”

희찬이 따라 준 물까지 시원하게 들이켠 도준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시절 희찬은 유독 칭찬스티커가 많아 반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곤 했다. 반면에 자신은 아무리 칭찬을 받아도 스티커가 늘지를 않아, 선생님이 자신을 미워하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었다.

의문이 서린 눈으로 희찬을 바라보자, 희찬이 볼이 불현듯 붉어졌다. 참 의외인 반응이었다.

“사실은 내가 네 스티커 다 나한테 옮겼어.”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설거지를 위해 일어섰던 도준이 우뚝 멈춰 선 채로 희찬을 바라봤다.

“뭐라고?”

“나 그거 청포도 사탕, 맨날 먹고 싶었거든. 알잖아, 나는 청소도 잘 못 하고.”

“야! 나도 청포도 사탕 좋아했거든?”

“그래서 내가 반 쪼개 줬잖아.”

“아니, 원래 내 거였던 거잖아? 근데 나는 그걸 그렇게 고마워하면서 먹었다고?”

와, 세상에 이런 배신감이 있을까.

근 20년 만에 밝혀진 칭찬스티커 사건의 전말에 도준이 기함하며 눈과 입을 크게 벌렸다.

“야, 이 사기꾼아.”

“뭐?!”

“내가 그거 어? 선생님이 나 싫어하는 줄 알고 혼자서 얼마나, 어?”

“그랬어?”

제아무리 장희찬이어도 드문드문 비던 오디오가, 이도준이 오니 틈 없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쉴 새 없이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는 제작진들은 속으로 연신 ‘대박’을 외쳤다.

이도준과 함께 분량을 뽑아 주겠다던 장희찬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당연히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의기양양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희찬과 도준이 어울리며 미친 듯이 뽑아내는 분량은 재밌기까지 했다.

“그래! 내가 맨날 청소하고, 선생님이 나한테 시키는 심부름도 다 했는데 나한테만 칭찬스티커 안 줘서 내가 얼마나 땅굴을 팠는데!”

도준은 자신의 억울함을 끊임없이 어필하는 와중에도 부지런히 손을 놀려 식탁을 정리했다. 빈 그릇들을 들고 수돗가로 옮겨 온 도준의 옆에는 희찬이 착 달라붙어 있었다. 여전히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이었지만, 두 사람의 말에는 악감정이 조금도 묻어나지 않았다.

막역한 친구 사이. 딱 그래 보였다.

“그래서 결국 사탕 먹었어, 안 먹었어.”

“먹었어.”

“그럼 됐어, 안 됐어.”

“……됐어.”

뭔가 이상했지만, 일단은 됐으니 도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희찬은 도준을 나무라듯 검지를 곧게 세우고 도준의 눈앞에 들이밀어 달랑달랑 흔들었다.

“그럼 나한테 사기꾼이라고 한 거 미안해, 안 미안해.”

“미안…….”

“그래, 그럼 설거지 열심히 해.”

희찬이 도준의 어깨를 툭툭 치고서 도준의 옆에 앉아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아니, 진짜 좀 이상한데.

자꾸만 말리는 기분이었지만, 아무렴 어때. 어차피 설거지는 자신이 하기로 한 일이었고, 희찬의 말대로 사탕을 나눠 먹기는 했다.

도준은 잽싼 손을 자랑하며 빠르게 설거지를 했다. 설거지가 익숙해 보이는 도준에게 PD가 다가왔다. 그사이 희찬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바깥으로 나오는 중이었다.

“설거지가 익숙하신 거 같아요.”

“아, 네. 저 집안일 잘해요.”

“아까 대화 들어 보니까, 초등학생 때도 두 분 친구셨던 거 같은데.”

“저희 여섯 살 때부터 알고 지냈어요. 희찬이가 그때부터 저 괴롭혀요.”

PD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도준은 편안한 태도로 일관했다. 장난기가 다분한 도준의 모습에 PD는 줄곧 들어왔던 도준의 이미지가 상당히 왜곡되었다고 생각했다.

“저거 봐요, 또 바로 듣고 달려와서, 악! 야, 다쳐!”

PD가 잠시 숨을 돌린 틈에 두 사람이 다시 엉겨 붙어 투닥거렸다. 설거지를 마치고 일어난 도준의 목에 세게 팔을 두른 희찬 덕에 도준이 휘청거렸다. 그러면서도 넘어지며 희찬이 다치지 않도록 허리를 받쳐 쥐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참을 옥신각신하던 두 사람이 나란히 마당에 앉았다. 두 사람의 앞에는 희찬이 정성껏 쌓아 둔 장작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중이었다. 화염을 쏟아 내고, 불꽃을 터뜨리는 장작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멍하게 비어 갔다.

복잡한 머릿속이 개운해짐과 동시에 몸이 나른하게 풀리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도준이 연신 느릿하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희찬이 편안하게 몸을 늘어뜨리고, 도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도준의 큰 손이 희찬의 볼을 쓰다듬었다. 말랑한 볼이 착 달라붙는 감촉이 좋아, 도준의 손은 도무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장작이 검은 잿더미로 변해 가는 오랜 시간이 흐르자 눈이 따끔거렸다. 희찬이 고개를 돌려 도준의 어깨에 턱을 괬다.

“잘까?”

“그럴까.”

“너는 그렇게 자고 잠이 또 와?”

“응.”

“약 가져왔어?”

“그냥 바로 오느라 못 챙겼어. 없어.”

이번엔 도준이 희찬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제야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가 다시 떠올랐다. 희찬과 마주하고 웃고, 떠드느라 오후 내내 자신을 괴롭혔던 일도 잊고 있었다.

그때 희찬에게 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건, 희찬이라도 봐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집에 앉아 가만히 희찬을 기다렸다가는 아득한 절망 속에 빠져 허우적거릴 것 같았다. 약을 먹고 억지로 잔다고 한들, 금방이라도 자신을 집어삼킬 어둠 속에서 허덕거릴 것 같았다.

그래서 빛으로 오고 싶었다.

희찬의 품에 안긴 도준의 입가에 아릿한 미소가 피었다. 역시 장희찬이 약이다. 희찬의 옷깃을 부여잡은 도준의 손에도 조금 더 힘이 실렸다.

“나 꼭 안고 자.”

“응.”

“악몽 꿔도 되니까, 마음 편하게 자.”

“그럴게.”

이내 두 사람이 나란히 누웠다. 여전히 카메라가 돌아가는 공간이었지만, 어느새 상황에 적응한 도준은 처음처럼 카메라를 의식하지도 않았다.

도준이 몸을 돌려 희찬을 꼭 끌어안았다. 맞닿은 심장이 부딪치며 쿵쿵, 거친 박동을 안겼다. 희찬이 도준의 눈꺼풀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조심스레 도준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우리 내일 너 지냈던 곳 갈까?”

천천히 눈을 감았던 도준이 다시 눈을 떠 희찬을 바라봤다. 오후의 일을 위로하는 다정한 목소리에 도준이 피식 웃었다.

“목욕탕?”

“응. 저번에 인사드리러 가자고 해 놓고 여태 못 갔잖아.”

“너 내일 다른 스케줄 없어?”

“응, 이거 오전에 촬영 끝나면 다른 거 없어.”

마음 쓰는 게 어쩜 이렇게 예쁠까.

본인이었어도 희찬에게 어려운 일이 생겼다면 무슨 수를 동원해서라도 위로하겠지만, 희찬이 제게 하는 행동들은 하나같이 더욱 벅찬 감동을 안기곤 했다.

도준은 예쁘기만 한 희찬이 감격스러운 듯, 그를 가둔 팔에 힘을 주고, 으스러질 듯이 희찬을 껴안았다. 으으윽, 하고 일그러진 목소리가 났지만, 그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새빨간 입술을 잡아먹고 싶었지만, 다행히 도준은 이성적이었다. 수많은 카메라가 한꺼번에 돌아가는 이 방에서 입을 맞췄다가는 뒷일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도준이 희찬의 콧잔등을 살살 주물렀다. 말랑한 콧대가 도준의 손에 찌그러졌다가 다시 뽕긋 솟았다.

“그럴까, 그럼 같이 가 볼까.”

“좋아. 그럼 조현이한테 오지 말라고 해야겠다. 너 차 가져왔으니까 그거 타고 가자.”

희찬의 말에 도준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희찬과 내일을 그렸을 뿐인데 놀랍도록 커다란 설렘이 드리웠다. 도준은 희찬의 가슴에 대고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카메라가 닿지 않을 각도라는 것을 떠올린 후에는 콩닥콩닥 뛰는 심장 위에 입을 쪽 맞추었다.

이내 희찬의 손이 도준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낮은 목소리로 작게 속삭이는 희찬은 ‘악몽 꿔도 괜찮아, 내가 네 옆에 있으니까.’라며 끊임없이 도준을 달래고, 다독였다. 그 역시 약에 의존하는 성향이 짙은 도준을 달래려는 지독한 사랑이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드리웠다. 굳게 닫힌 유리문 틈 사이로 내리쬐는 햇볕이 두 사람의 얼굴 위를 거닐었다. 눈꺼풀을 간지럽히는 빛에 도준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낯선 풍경에 멍한 머리를 깨워 생각을 거듭했다.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은 낯선 것이 분명했으나, 제 품에 안긴 사람은 익숙했다. 도준은 곤히 잠든 희찬의 향을 맡으며 느릿하게 눈을 끔뻑거렸다.

아, 나 희찬이 촬영장 왔지.

편하게 꿈도 꾸라던 희찬의 말을 들어서일까, 낯선 곳이었음에도 푹 잤다. 꿈도 꾸지 않은 탓에 새벽녘에 희찬을 괴롭힐 일도 없었고, 혹시나 악몽에 시달리는 모습이 카메라에 담길까 노심초사했던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도준은 이불 밖으로 손을 뻗어 지난밤 벗어 둔 티셔츠를 갖춰 입고, 몸을 일으켰다. 헐벗고 자는 희찬의 몸은 이불로 꽁꽁 감춰 둔 후에는 개운하게 밖으로 나왔다. 마당에는 어느새 일어난 제작진들이 벌써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어제 낮잠도 자서 그런가 봐요. 안녕히 주무셨어요?”

“네, 저희도 푹 잤습니다.”

“혹시 여기 아침은 뭐로 해 먹나요?”

도준은 찬장을 뒤적거리며 질문을 거듭했다. 제작진은 직접 그린 것처럼 보이는 작은 지도를 건네었다. 지도 위에는 고추, 상추, 토마토를 비롯해 고구마, 감자 따위의 채소류가 어디에 있는지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찬찬히 지도를 훑던 도준의 눈이 번뜩 뜨였다. 감자, 장희찬은 감자를 좋아한다.

도준은 스태프들의 양해를 구하고 카메라도 없이 홀로 텃밭으로 향했다. 지난밤, 희찬의 성화에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직 대화를 끝내지 못했으므로 혼자 통화나 좀 해 보려던 참이었다.

― 야, 너 어제 그렇게 전화 끊고 속 편하게 잠이 오디?

“안녕히 주무셨어요, 저는 잘 잤어요.”

전화를 걸기 무섭게 들리는 대표의 핀잔에 도준은 넉살 좋게 대꾸했다. 지난밤, 대충 자신이 희찬에게 왔다는 간단한 설명만 남기고 전화를 뚝 끊었었다.

단 한 번도 그런 적 없었으니, 대표가 뒤숭숭한 마음으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을 것도 이해한다. 도준은 한껏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표와 통화를 이었다.

― 잘 잤다니까 다행이긴 한데.

“아니, 어제는 제가…… 너무 당황해서, 어제 그렇게 전화 끊은 건 죄송했습니다.”

― 뭘, 그럴 만했지.

“네.”

도준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대표의 말은 다정하기 그지없었고, 그 어투는 도준에게 위로로 닿아 도준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도준은 가슴이 크게 부풀 정도로 숨을 들이켰다가 후, 내뿜었다. 그건 수화기 너머의 대표도 같았다. 이내 대표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 그래서, 너 어디를 갔다고? 희찬이랑 뭐?

“아, 희찬이 강원도에서 예능 촬영하는데요. 저 어제 진짜 혼자 있으면 안 될 거 같아서 그냥 희찬이한테 왔어요.”

― 거기서 잠까지 잔 거야?

대표와 통화를 하는 동안 도준은 텃밭에 들어섰다. 초록 잎이 무성한 텃밭에서 원하는 채소를 고르는 것은 퍽 어려운 일이었다.

“네. 아, 출연료는…… 이게 감자인가?”

― 뭐? 감자로 준다고?

“아, 아뇨. 감자 캐느라. 아니, 못 준대요.”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잔뜩 쌓인 흙더미를 살살 걷어 내자 뭉툭하고 커다란 알맹이들이 보였다. 하지만 그게 감자라는 보장은 없어, 도준이 난감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 당연히 그렇겠지. 애초에 예산 측정에 이도준은 없었을 텐데 그 사람들은 얼마나 당황했겠어?

“그래서 돈 안 받는다고 했어요.”

― 잘했어. 그래, 잘했다. 희찬이랑 있었으면 좀 다행이네. 서울에는 언제 올라오려고.

“오늘 희찬이랑 같이 목욕탕 들렀다가, 어, 감자 맞다.”

조금 더 흙을 걷어 내자 흙이 잔뜩 묻은 노란 감자가 나왔다. 겉 뿌리에 붙은 감자를 발견한 도준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도준은 통화 중이라는 것도 잊은 채로 손에 든 모종삽으로 열심히 땅을 파헤쳤다.

삽질 몇 번에 감자 알맹이가 우르르 딸려 올라오는 것이 제법 뿌듯하다. 이래서 사람들이 귀농하고 농사를 짓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도준은 쉬지 않고 손을 놀리며, 감자를 새빨간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았다. 이미 대표와의 통화는 잊은 지 오래였다.

― 도준아, 감자를 캐든지, 통화를 하든지 하나만 할래?

“아, 죄송해요. 암튼 저 지내던 곳에 희찬이랑 인사드리러 가기로 했어요.”

― 그래, 그것도 잘 생각했어. 그러고 오려고?

원하는 양의 감자를 수확한 도준이 허리를 통통 두드리며 일어섰다. 감자전도 하고, 감자를 잘게 으깨어 매쉬 포테이토도 하고, 또…… 아무튼 이것저것 맛있게 먹을 희찬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어깨에 휴대폰을 걸친 채로 고개를 꺾어 통화하던 도준이 휴대폰을 제대로 쥐었다. 수화기 건너의 대표는 도준의 기분을 신경 쓰는 듯, 쉴 새 없이 질문을 건넸다.

도준은 얕은 한숨을 훅, 내뱉은 후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감자를 챙겨 들었다.

“근데 대표님.”

― 응, 말해.

“언제부터 알고 계셨어요? 저 진짜 어제 배신감에 치가 떨리고, 와, 대표님이 저한테 이럴 수 있나 싶고.”

― 알았으면 너 안 데려갔어.

장난스레 건넨 질문이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퍽 단호했다. 그에 도준도 허리를 펴고 대표의 말에 집중했다.

― 나도 어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너는 어떻겠냐, 감도 안 온다.

문득 돌아봤던 대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대표의 낯에서는 저와 비슷한 당황이 느껴졌었다. 그건 그 역시 몰랐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감독은 연이어 도준의 상태를 묻는 질문을 거듭했다. 같이 놀란 와중에도 오롯하게 저를 생각하고, 걱정하는 것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표의 말에 결국 도준이 어깨를 털어 내며 가볍게 숨을 쉬었다.

속상함을 토로해 봐야, 대표는 지은 죄도 없이 그저 미안할 것이고, 제 감정은 추슬러지지 않을 것이 뻔했다. 그냥 이쯤에서 대충 아무렇지도 않은 척 넘기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일 것이다.

“그래도 희찬이 봐서 괜찮아졌어요.”

― 와, 희찬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하하, 그러니까요. 대표님, 저 이제 끊어요.”

― 아, 도준아. 거기 감독이 누구시라고?

“황지언 감독님이요. 근데 왜요?”

― 왜는 인마. 갑자기 갔는데 얼마나 놀랐겠어. 연락해서 사정 설명해야지. 내가 전화할 테니까 이왕 간 거 편하게 있다가 와. 재밌게 놀고. 감자도 많이 캐고.

도준이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른들의 세계는 생각보다 복잡한 모양이다. 문득 부모님과 함께 살던 친구들이 떠올랐다. 친구를 집에 데려가기 전에 꼭 부모님께 여쭤보던 모습 말이다. 도준은 두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우리 애 잘 부탁합니다. 그런 인사인 건가. 뭐든 나쁘지 않다.

“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 감사는 무슨, 혹시 어려운 일 있으면 전화해. 감자는 대신 못 캐 준다. 그건 나도 몰라.

“아하하, 감자는 제가 캤어요. 서울 가서 봬요.”

호탕한 웃음으로 통화가 마무리되었다. 터벅터벅 촬영장으로 돌아온 도준의 시야에는 그새 누군가와 통화 중인 감독의 모습이 보였다.

감독이 통화하는 사이, 감자에 묻은 흙을 깨끗하게 씻어 낸 도준은 평상 위에 앉아 사각사각 감자 껍질을 벗겼다. 감자 칼을 이용하여 껍질을 깎아 내는 도준의 손길은 능숙하기 그지없었다.

이윽고 통화를 마친 감독이 저벅저벅 도준의 곁으로 다가왔다. 어제부터 줄곧 도준이 마음이 드는 듯, 인자한 표정을 보였던 감독의 낯이 어제보다 더 피어 있었다.

도준은 제 옆에 앉는 감독의 모습에 감자 칼을 내려놓고 그의 눈을 직시했다. 그의 눈에서는 조금의 부정적인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저를 보는 사람들의 눈은 대체로 그러했으므로, 도준이 생긋 웃었다.

“감독님, 제가 어제 경황없이 와 놓고 사정 설명도 제대로 못 했습니다. 당황하셨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어요. 죄송합니다.”

“어어? 아니에요. 우리야 좋죠.”

“양해 감사합니다.”

“방금 곽 대표님 전화는 받았어요. 출연료는 없이 하고, 그냥 내버려 두면 알아서 잘 지낼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감독은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혹시 다른 압박을 가하진 않았을까, 걱정한 것과 달리 감독의 표정은 홀가분해 보였다.

하긴, 그 성격에 누굴 압박하기는커녕 감독의 말대로 내버려 두라고 하는 것이 더 잘 어울린다.

도준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해사하게 웃었다.

그렇게 도준의 첫 예능이 무사히 마쳤다. 오전 시간 내내 희찬과 붙어 지내며, 대표와의 통화 내용을 알려 준 도준은 희찬의 짐 정리까지 도왔다.

두 사람은 스태프들에게 즐거웠다며, 신난 목소리로 인사를 남긴 후 금방 차에 올랐다. 도준의 차가 부드럽게 움직여 도로 위를 달렸다. 서울로 향하는 차 안에는 희찬의 들뜬 목소리가 가득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떠드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는데, 어느새 한적한 동네에 들어섰다. 두 사람이 어린 시절 함께 지내던 동네에서 멀지 않은 작은 동네는 낮은 건물이 줄지어 들어선 한산한 시내였다.

“여기서 지냈어?”

“응, 나는 여기 목욕탕 안에 쪽방에 있었고, 사장님 댁은 저쪽.”

“너 온다고 말씀드렸어?”

“아니, 근데 계실 거야.”

희찬은 우두커니 선 채로 2층 높이의 작은 목욕탕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하얀 간판에 반짝거리는 네온사인 불빛은 햇볕이 내리쬐는 탓에 그 빛을 제대로 발하지 못했다.

집 나간 이도준이 지낸 곳.

괜히 아련함이 피어올라, 희찬이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손톱을 짓이겨 뜯는 희찬의 모습에 도준이 그 손을 그러쥐었다. 혹시 아픈 기억을 되새기는 건 아닐까, 걱정하는 마음을 담아 다정한 눈빛을 보이자 희찬도 금세 홀가분한 시선을 보냈다.

“나 여기서 되게 사랑받았어.”

“그랬을 거 같아. 간판만 봤는데도 따뜻해.”

“너 들어가면 좋아하실 거야. 내가 네 팬인 줄 아시거든.”

“그래?”

“들어가자.”

도준이 희찬을 잡아당겼다. 불투명한 시트지가 발린 유리문을 열자 목욕탕의 후끈한 열기가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희찬에게는 그저 한없이 낯선 것이었지만, 도준에게는 정겨운 것이라 두 사람의 얼굴에는 상반된 표정이 피었다.

희찬은 그저 모든 것이 어색했다. 생전 목욕탕이라는 곳 자체를 처음 온 데다가, 눈에 보이는 광경은 하나같이 TV 속 드라마에서나 보던 세트장 같았다. 이곳저곳 둘러보는 희찬의 눈은 세심하고, 또 조심스러웠다. 희찬과 나란히 선 도준은 꼼꼼하게 살펴보는 희찬의 모습에 괜한 설렘을 느꼈다.

부모님께 남자 친구 소개시키는 기분이 이런 걸까.

손에 쥔 희찬의 손등을 어루만지자, 희찬이 멋쩍게 웃으며 도준을 돌아보았다.

“나 지금 완전 애인 집에 허락받으러 가는 기분이야.”

도준이 느끼는 것은 희찬도 같은 모양이었다. 희찬이 들뜬 목소리로 낸 말에 도준은 웃음을 감추고 장난스레 희찬을 흘겨봤다.

“해 본 것처럼 말한다, 너.”

“따지지 마.”

“응.”

도준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소 같으면 계산대 앞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사장님이 계셔야 하는데, 오늘은 계산대가 비어 있다. 손님이 없는 시간이라 잠시 청소하러 가신 걸까, 몸을 숙여 빼꼼 안쪽을 들여다본 도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어! 도준아!”

목욕탕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도준은 금세 화색을 띠고서 여성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에 희찬도 덩달아 헐레벌떡 허리를 숙였다.

도준을 바라보는 사장의 눈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온정이 가득한 눈이며, 온화한 표정까지 단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잘 지내셨죠?”

“아니, 이게 얼마 만이야! 잘 지냈지? 응? 아이구, 얼굴도 좋아졌네.”

“저는 잘 지냅니다. 아, 여기…… 장희찬이라고…….”

도준이 제 손을 쥔 희찬을 끌어 사장 앞에 세웠다. 희찬은 놀란 듯 퍼뜩 끌려 와서 생글생글 웃는 낯을 보였다. 줄곧 도준의 얼굴을 살피던 사장의 눈이 희찬에게 향했다. 허여멀건 얼굴로 환하게 휘어진 낯이 예뻐, 사장도 따스한 미소를 보였다.

“안녕하세요, 장희찬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어유. 실물로 보니까 더 예쁘네. 도준이가 엄청 좋아했어요.”

사장이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희찬에게 손을 내밀었다. 희찬은 어른의 손을 무시하지 않았다. 덥석 마주 잡고, 싱그러운 표정을 피워 보인 후에는 나긋한 목소리를 내었다.

“아하하…… 감사합니다. 도준이 통해서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꼭 인사드리고 싶었어요.”

두 사람의 발이 나란히 사장을 쫓았다. 도준이 없었던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조잘조잘 늘어놓는 사장은 더없이 즐거워 보였다. 초록색 페인트칠이 된 철문을 열자, 익숙한 가정집이 나타났다.

도준의 눈에 순식간에 아련함이 앉았다. 문득 마지막 스폰을 마치고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왔던 때가 떠올랐다. 길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던 도준을 외면하지 못한 사장은 목욕탕 쪽방이 아닌 집으로 도준을 데려왔었다.

도준이 아릿한 과거를 회상하는 사이, 희찬은 어느새 사장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특유의 밝은 면을 한껏 드러내며, 상대를 편하게 대하는 희찬은 저 없는 곳에서 지낸 도준의 이야기를 즐겁게 귀담아들었다.

“그럼 두 사람은 원래 친구였던 거고?”

“네! 아니, 그때 이도준이 집을 나갔다니까요. 제가 얼마나 식겁했는데.”

“아이고! 우리 도준이 가출 청년이었네!”

“근데 저는 찾을 수가 없어서. 아시다시피, 도준이가 그때는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나는 도준이가 TV만 보면 웃길래 엄청난 팬인 줄 알았지. 친구였구나, 친구였어.”

“도준이 잘 돌봐 주셔서 감사해요.”

사장이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갈빛의 반짝거리는 눈동자에서는 두 사람을 향한 기특함이 생생하게 드러났다.

사장은 도준을 다시 보게 된 것에 즐거움을 느꼈다. 도준은 데뷔한 이후에도 꾸준히 연락을 했었고, 매년 어버이날만 되면 찾아오곤 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스케줄이 한가할 때의 이야기지, 요즘처럼 바쁠 때는 종일 궁금한 것이 도준의 소식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도준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작년 이맘때쯤 봤을 때만 해도 어딘가 억지로 웃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오늘의 도준은 그러지 않았다. 사장과 눈을 마주쳐 웃다가도, 금세 도준의 검은 눈동자는 희찬에게 닿았다.

이내 사장이 아, 탄식을 터뜨렸다.

도준이가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그리고 저 아이도 도준이를 사랑하는구나.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빛은 친구를 보는 눈이 아니었다.

가만히 두 사람을 지켜보던 사장의 입가에 둥근 미소가 피었다. 도준이 하는 사랑이 어떤 형태든, 그 사랑이 도준을 해치지 않는다면 그를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슬슬 가자는 눈빛을 주고받던 두 사람이 슬그머니 일어나려던 차에, 벌컥 현관문이 열렸다. 당차게 들어오는 누군가의 모습에 희찬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러다 문을 부수겠는데, 생각하고 보면

“오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힘차게 들어온 여성은 곧장 신을 벗고 도준에게 다가왔다. 그를 본 도준이 반가운 기색을 표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 선영이 못 보고 갈 뻔했네. 안녕, 잘 지냈어?”

희찬은 그저 의아한 눈으로 도준과 여성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사이가 상당히 좋아 보이는 두 사람은 허물없이 지내는 듯, 금세 장난을 치고 있었다. 희찬이 눈썹을 씰룩거렸다.

이게 지금 나를 투명 인간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미간을 좁히고, 손끝으로 도준의 옆구리를 쿡 찌르자, 도준이 몸을 비틀었다.

“나도 소개해 줘.”

“아, 얘는 선영이야. 사장님 딸. 우리랑 다섯 살 차이. 선영아, 알지? 희찬이.”

희찬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도준의 옆에 섰다. 얼굴만 봐서는 예쁘장한 것이 왜소해 보여도 슥, 일어서면 도준과 엇비슷한 키와 덩치를 자랑하는 희찬을 따라 선영도 눈을 들어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불현듯 선영의 두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언젠가 제게도 보였던 선영의 모습에 도준이 장난스레 미간을 좁힌 채로 눈썹을 씰룩거렸다.

“아니, 저 진짜 팬이에요. 사실 아까부터 인사하고 싶었는데 오빠가 인사를 안 시켜 줘서, 쑥스러워서…….”

쑥스럽다던 선영은 말과 달리 희찬에게 불쑥 휴대폰을 내밀었다. 사진이라도 같이 찍자는 모양새에 도준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쑥스럽기는 무슨, 아주 집에 들어오면서부터 휴대폰에 카메라 켜져 있는 거 다 봤다.

희찬은 금세 화사하게 웃으며 함께 사진을 찍어 줬다. 한참 선영과 함께 사진을 찍는 희찬의 어깨에 도준이 팔을 둘렀다. 지친 듯, 무게를 실어 몸을 기대는 도준의 행동에 희찬이 자연스레 손을 올려 도준의 볼을 쓰다듬었다. 자신들을 지켜보는 눈이 있다는 것도 모조리 잊은 채로 말이다.

그렇게 몇 분 더 집에서 머무르던 두 사람이 나란히 차에 올랐다. 집이 아닌 곳에서 이틀이나 지낸 희찬이 부쩍 피곤해 보여, 예상보다 빨리 집에서 벗어났다.

차 앞까지 쫓아와 배웅하는 사장과 선영에게 다시 깍듯한 인사를 남긴 두 사람은 얼른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희찬은 의자를 한껏 뒤로 젖히고서, 편안하게 몸을 기대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너 선영이랑 많이 친했어?”

“친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 그냥 가족이지.”

“아, 이도준 좋겠다. 여동생도 있네. 나는 아무도 없는데.”

“너는 나 있잖아.”

이번엔 도준이 희찬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희찬이 제 얼굴을 주무르는 도준의 손을 끌어 손바닥 곳곳에 입을 맞췄다. 그에 도준이 불쑥 입술을 들이밀었다.

사장의 집에서 붙어 있는 내내 뽀뽀하고 싶어 죽는 줄 알았다. 어제부터 지켜보는 눈이 많아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 입술을 내밀었을 뿐임에도 금세 안달이 났다.

“형이라고 불러 봐. 내가 너보다 일곱 달 빠르잖아.”

“키나 더 크고 와서 형이라고 하라 해.”

“원래 돈 많은 사람이 더 형이야.”

그럴듯한 희찬의 말에 도준은 어렵지 않다는 듯 희찬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툭, 뱉어 줬다.

“네, 형.”

그에 희찬이 도준의 두 볼을 감싸 쥐고, 진하게 입을 맞췄다. 금방이라도 혀를 내밀고 타액을 섞을 듯했지만, 두 사람은 아직 이곳이 바깥이라는 것을 거듭 떠올리며 아쉽게 입을 뗐다.

“내가 더 많아?”

“몰라, 그냥 네가 형 해.”

도준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신의 통장 잔고도 모르는데, 희찬의 통장 잔고를 외울 리는 없었다.

“그래, 형아 말 잘 들어.”

“응, 안전벨트 매.”

“씁, 형이라고 해야지. 악!”

희찬이 나무라듯 손가락을 뻗어 도준의 앞에 들이밀자, 도준이 앞니로 희찬의 손가락을 콱 깨물었다. 형 소리가 그렇게 좋은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연신 싱글벙글 웃어대는 희찬 덕에 도준의 입에서도 실없는 웃음이 터졌다.

“형, 형. 안전벨트 좀 매.”

이내 도준이 몸을 숙여 희찬의 안전벨트를 끌어당겼다. 찰칵 소리 나게 버클을 걸고, 희찬을 바라보자 희찬이 금세 잠이 가득한 눈을 끔뻑거렸다. 도준의 울대가 들썩거렸다. 알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힌 눈동자는 짙은 빛을 머금고 이글거렸다.

도준이 몸을 틀어 희찬의 이마와 코, 입술에 정성스레 입을 맞추었다. 피식 웃는 희찬의 숨이 입술을 가르고 새어 나왔으나, 희찬은 감은 눈을 부러 뜨지도 않았다. 희찬이 편히 잠들 수 있도록 조용히 노래를 틀어 준 도준은 희찬이 완전히 잠들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이내 옆자리에서 새근새근 귀여운 숨소리가 들렸다. 도준이 큰 손을 활짝 펴 희찬의 눈앞을 휘휘 저었다. 미동도 보이지 않는 희찬의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도준의 차가 조용히 부드럽게 동네를 벗어났다.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곧장 샤워부터 했다. 침실에 딸린 욕실로 쑥 들어가는 도준을 본 희찬은 거실에 있는 욕실에서 금세 샤워를 마쳤다.

희찬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 위에 아무렇게나 수건을 얹은 채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희찬이 앉은 자리 앞에는 웬 흰 봉투에 든 10만 원이 놓여 있었다.

꼬깃한 것을 보아, 제법 오래된 돈 같은데 이 돈이 왜 여기에 있는 걸까.

그간 봐 온 도준은 현금을 쓰지 않았다. 카드만 달랑 들고 다니거나, 지갑을 챙겨도 그 속에는 카드 한 장 들어 있는 일이 허다했으니 이 돈은 도준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럼 이건 뭘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알 수 없는 돈이라, 희찬이 턱 아래에 V 모양의 손가락을 댄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도준이 희찬과 마찬가지로 머리에 수건을 얹은 모습으로 거실로 나오는 중이었다.

희찬이 고개를 홱 꺾어 도준을 바라봤다. 피곤함에 약을 찾던 도준이 저를 좇는 희찬의 눈길에 의아함을 품었다.

“왜?”

“이거 뭐야?”

“그게 뭔데?”

“10만 원.”

희찬이 비릿한 냄새가 나는 돈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약을 삼키던 도준이 행동을 멈추었다. 또렷하게 빛이 나던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도준의 변화를 단박에 알아챈 희찬이 눈썹을 씰룩거렸다.

저 반응은 좋지 않은데.

그냥 모른 척 넣어 둘걸 괜히 꺼냈나, 얕은 후회가 몰려왔다.

“그거…….”

“응.”

“……전광진이 준 거.”

“…….”

“마지막 날, 나한테 준 거…….”

이 사지를 다 찢어 죽일 새끼.

돈을 쥔 희찬의 주먹에 굵은 핏줄이 불끈 솟았다. 10만 원이라니. 돈을 쥐여 주는 것만으로도 생지옥을 경험했을 이도준인데, 준 돈이라는 게 고작 10만 원이라니.

희찬의 가슴이 가파르게 부풀었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삽시간에 거칠어진 숨은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어느새 희찬의 곁으로 돌아온 도준이 그의 손에서 10만 원을 앗았다. 도준의 손에 흰 봉투에 담긴 10만 원이 바닥으로 패대기쳐졌다.

“저걸 왜 그냥 갖고 있어. 왜 받았어, 왜.”

“그러게, 10만 원이 뭐라고……. 근데 나는 그때 그게 없었어.”

차라리 더 달라고 하지. 시발, 백만 원이고, 천만 원이고 달라고 해 보지.

고작 10만 원에 다 무너졌을 도준의 속을 생각하니 울분에 눈물이 다 치솟을 것 같았다.

“하루 벌어 하루 살아서는 너한테 갈 수가 없는데……. 당장 먹고사는 게 막막하니까 저 돈을 거절할 수도 없었어.”

“내가 그 새끼 진짜 죽일 거야.”

살벌한 말을 내뱉은 희찬의 목소리가 무섭도록 떨렸다.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는 도준은 그저 희찬을 꼭 안은 채로 자신이 느끼는 아득함을 잠재우려 노력했다.

희찬이 가쁜 숨을 억지로 가다듬으며 도준의 손을 토닥토닥 다독였다. 거친 숨에 어깨가 들썩거렸지만, 지금 도준 앞에서 화를 내는 것은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너, 10만 원 저거. 필요해?”

“아니.”

“그럼 내가 처리해도 되지.”

“응.”

가만히 두면 저 10만 원을 평생 끼고 살 이도준이라, 희찬은 자신이 처리하기로 했다.

이를 악문 채로 일어선 희찬이 돈을 쥐었다. 돈을 마주하기 무섭게 분노에 찬 눈물이 툭 떨어졌다. 도준이 지냈던 공간에 다녀온 뒤라 그런지, 도준이 겪었을 상처가 유달리 크게만 닿아 가슴을 짓눌렀다.

함께 극복하는 중이었는데. 우리는 나름대로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회복하는 중이었는데. 과거의 잔재를 마주하기 무섭게 그간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만 같았다.

“라이터 있어?”

“여기.”

도준이 손가락만 한 작은 라이터를 건넸다. 그를 받은 희찬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테라스로 나가 돈을 태웠다. 지난 8년, 도준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던 초록색 지폐 열 장이 재가 되어 날아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공중에서 사라지는 돈을 보고 있자니 씁쓸하기도 하고, 홀가분하기도 했다. 불꽃 한 번에 사라질 돈이 뭐라고 그걸 붙들고 그렇게 어려워했나, 싶다가 이제는 사라졌으니 다 되었다는 생각이 동시에 몰려왔다. 도준은 테라스 틀을 짚은 채로 고개를 푹 수그러뜨렸다.

그런 도준에게 희찬의 따뜻한 손이 닿았다. 새빨갛게 산이 오른 희찬의 눈가에는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를 본 도준이 희찬의 가느다란 허리를 휘어 안고 고개를 들어 촉촉하게 젖은 눈가에 입을 맞췄다.

“고마워.”

도준이 희찬에게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다였다. 오늘도 아득한 수렁에서 자신을 건져 준 희찬에게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고마움이 밀려와 도준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도준.”

“응.”

“나는 기회만 되면 그 새끼를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일 거야.”

희찬은 한 음절, 한 음절에 화를 꾹꾹 눌러 담았다. 옅은 눈동자가 불바다에 빠져 일렁거리는 듯한 모양에 도준은 그저 가슴이 착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잘 모르겠다.

다들 왜 전광진을 가만히 두느냐고 묻는데, 길거리의 똥은 그냥 똥으로 두고 싶었다. 얼굴도 보기 싫었고, 구태여 그의 인생을 박살 낸다고 해서 속이 편해질 것 같지도 않았다.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척. 주변에서 등신, 호구라고 함부로 지껄여도 그것도 들리지 않는 척.

저만 귀 닫고, 눈 감으면 될 일을 굳이 키우고 싶지도 않았다. 오랜 시간 공들여 쌓아 온 이 자리를 지키고 싶었고, 괜히 나섰다가 이전처럼 희찬이 피해 입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니까 가만히 있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네가 그 사람을 죽이러 가는 날에는, 희찬아.”

“응.”

“내가 먼저 가서 죽여 놓을 거야.”

장희찬의 손에 피를 묻히는 건 더 싫다.

혹시나 마음이 바뀌어 복수를 결심하게 된다면, 그때는 희찬의 손이 아닌 꼭 제 손으로 하고 싶었다.

도준이 처음으로 전광진의 일에 제 의지를 드러냈다. 굳은 결심이 느껴지는 말에 희찬의 울대가 들썩거렸다.

이도준은 둔하지 않다. 무디지도 않고, 순하지도 않다. 굳이 반응할 가치를 느끼지 못해 숨죽이고 있을 뿐, 그는 그리 고분고분하지 않다.

단호한 도준의 눈을 마주하기 무섭게 한기가 서렸다. 살갗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느낌에 희찬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그를 본 도준이 금세 눈에 힘을 풀었다. 다정한 손으로 희찬의 콧방울을 쥐고 조물조물 주무르자, 희찬이 불현듯 맑게 웃었다.

“울다가 웃으면 너…….”

도준이 희찬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곧은 손가락이 판판한 드로어즈 위에서 엉덩이 사이골을 꾹 눌렀다. 희찬이 게슴츠레 눈을 뜨고 도준을 흘겨봤다. 손바닥으로 도준의 어깨를 밀어내자, 푸흡, 즐거운 웃음이 터졌다.

“아, 됐거든.”

“갑자기 왜 웃었어?”

“그, 자적자 하는 새끼들은 겁대가리가 없어서 이도준을 함부로 말하고 다니는 거겠지? 지금 이도준 눈을 봤어야 하는데.”

“이야기가 왜 그리로 튀어.”

도준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애당초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의 말은 들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바, 그쪽에서 뭐라고 지껄이든 별로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내버려 둔 것이었는데, 희찬은 아닌 걸까. 도준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희찬과 시선을 마주했다.

“나는 네가 그 새끼들도 다 좆되게 했으면 좋겠어.”

“말 좀 예쁘게 써.”

예쁜 얼굴에 그렇지 못한 언행. 지금 보이는 희찬의 모습이 딱 그랬다. 도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희찬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그에 희찬이 도준을 꼭 껴안은 채로 웅얼웅얼 제 말을 이었다.

“나는, 별 볼 일 없는 새끼들이 내 거 함부로 말하고 다니는 게 뒤지게 싫어.”

“어휴…….”

제 말을 들을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이는 희찬의 모습에 도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그런 희찬의 반응이 마냥 싫은 것도 아니었다. 저라고 함부로 말하는 소리가 듣기 좋은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내가 언젠가 칼부림 한번 해, 진짜.”

“할 땐 내가 한다니까.”

“알아, 근데 나도 같이해.”

“……너랑 있으면 자꾸 나도 옛날로 돌아가는 거 같아.”

도준의 말에 희찬이 눈을 치켜들고 도준을 쳐다봤다. 생긋 웃는 도준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옛날이라. 도준이 말하는 옛날이 언제일까, 곱씹다가 조금 전 도준의 살벌한 모습이 떠올랐다. 희찬의 입꼬리가 다시 치솟았다.

“그것도 너잖아. 뭘 돌아가, 그냥 너는 넌데.”

그건 그렇지.

희찬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 없다.

도준이 가뿐한 숨을 터뜨리며 희찬의 머리를 매만졌다. 희찬과 붙어 있으면 꼭 무서울 게 없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먼저 나서서 시비를 걸지는 않아도, 선을 넘는 사람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던 혈기 왕성했던 그때 말이다.

그리고 그 역시 나쁘지 않다. 희찬의 말대로 그 모습 또한 자신의 모습이었고, 그동안 웅크려만 지냈으니 이제는 뭐든 해 봐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도사렸다.

“차 마실까?”

“응. 근데 생각해 보면 그 선배 촉 좋다. 이한 그룹 사생아, 그거.”

부러워서 아무렇게나 지껄인 말이겠지만, 어쨌든 사실이니까.

도준의 가벼운 말에 희찬이 뾰로통한 눈을 떴다.

“너는 성격이 좋은 거냐, 그냥 별생각이 없는 거냐.”

“나 성격 별로 안 좋아. 같잖아서 무시했는데 사실이니까 신기해.”

“사생아는 무슨 사생아야, 두 분 결혼 하셨다며.”

그건 또 그렇지. 굳이 따지자면 사생아보다는 잃어버린 아들일 것이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약을 먹었는데도 몰려오는 두통에 도준이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뭉근하게 몰려오는 통증은 그 오랜 시간을 겪었음에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도준은 이마를 짚은 채로 가만히 숨을 골랐다.

그를 보던 희찬이 도준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손바닥에 맞닿은 도준의 볼에서 뜨끈한 열이 느껴졌다. 희찬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준을 바라봤다. 도준은 자신의 몸 상태가 어떤지 모르는 것 같았다.

“너 열나는데?”

“그래?”

“야, 차 마실 때가 아니잖아. 빨리 누워.”

“괜찮아, 괜찮아져.”

“안 괜찮고, 아플 때는 쉬어야 해. 씁, 형 말 들어.”

훅, 내뱉은 도준의 숨이 뜨겁다. 희찬은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나 도준의 팔을 잡아당겼다. 뭉그적거리며 일어난 도준은 희찬에게 잡힌 채로 침대에 내던져졌다. 그러고 보니 몸이 좀 으슬으슬한 것 같기도 하고.

도준은 침대에 눕기 무섭게 무거워진 눈꺼풀을 끔뻑거리며 제 옆자리를 힘없이 툭, 툭 두드렸다.

도준의 손짓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챈 희찬이 얼른 도준의 옆에 누웠다. 미열인 줄 알았더니, 금방 높은 열을 내는 도준의 온몸이 불덩이 같았다.

도준이 희찬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차가운 희찬의 몸이 닿으니 뜨거운 몸이 조금이나마 식는 기분이었다. 희찬은 도준을 꼭 안은 채로, 도준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분명 괜찮았는데, 마음을 짓누르는 과거를 하나씩 털어 낼 때마다 몸살이 나는 걸까. 희찬이 머리를 곰곰이 굴렸다.

이도준은 나에게 돌아왔던 날 아팠고, 울면서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도 아팠다. 그리고 무거운 10만 원을 처리한 지금, 또 아프기 시작했다.

매번 과거를 털어 낼 때마다 몸살이 나는 거라면, 한 번 아플 때 확실하게 다 걷어 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희찬은 도준의 뺨에 입을 맞추며 다정한 목소리를 내었다.

“준아, 나 예민한 거 물어봐도 돼?”

“응.”

아프기 시작하더니, 금세 목소리도 잠겼다. 도준은 겨우겨우 비집고 나오는 목소리로 어렵사리 대답을 건넸다.

“데뷔할 때 안 무서웠어?”

“뭐가?”

“그 사람들이 네 얼굴 알아보지는 않을까, 이름을 듣고 찾아오지는 않을까. 그런 거.”

“…….”

“나는 무서웠을 거 같아. 내 숨통을 쥔 사람들인데, 매일매일 걱정하면서 지냈을 거 같아.”

“나는…….”

운을 뗀 도준의 목소리가 쩍 갈라졌다. 메마른 땅이 갈라지는 듯한 목소리에 희찬이 조금 더 힘을 줘 도준을 안았다. 도준은 희찬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거기서 도준이라고 안 불렸어.”

“…….”

“다정이었어, 다정이…….”

도준의 대답을 듣기 무섭게 희찬이 이를 빠득 씹어 물었다.

애를 데리고 좆같은 짓들을 했다.

이름이 안 불렸다는 것은 다행이지만, 예명처럼 붙여 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굴도, 안 보여 줬어.”

느릿한 도준의 말이 들릴 때마다 도준의 뜨거운 숨이 희찬의 가슴에 닿았다. 희찬은 느릿한 도준의 말만큼이나 느릿한 손으로 도준을 달래었다.

“……얼굴은 가려 준다고 했었거든. 우느라 그 사람들이 내 얼굴 보는지 확인할 정신도 없었지만.”

“많이 울었어?”

당연한 걸 물었다. 도준이 고개를 느릿하게 주억거렸다.

“어차피…… 그 사람들은 내 몸만 봐.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관심 없어.”

“…….”

“그냥, 굴리는 대로 구르는 몸뚱이가 좋은 거야……. 섹스토이처럼.”

씨발.

이도준의 과거를 걷어 주고자 했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화가 치밀었다. 도준을 안은 희찬의 팔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희찬은 혹시나 자신의 화가 도준을 상처 입히지는 않을까, 머리에 힘을 주고 화를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무래도 이도준이 죽이기 전에 내가 죽여야 속이 편할 것 같다.

희찬은 교근이 두드러지도록 이를 세게 씹어 물고서 거친 숨을 내쉬었다. 말을 마친 도준은 기다렸다는 듯이 까무룩 잠들었다. 들끓는 열이 버거운지, 이따금 미간을 좁히는 도준을 품에서 놓지 않은 희찬은 오늘 밤이 짧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전광진…….”

내 돈을 가져간 것은 상관없지만, 이도준의 청춘을 앗아 간 것은 도무지 용서가 어렵다. 당찬 청년의 기세를 꺾고, 근 10년이 다 되도록 악몽에 허덕일 아득한 고통 속에 심어 둔 그 사람을 나는,

“씨발.”

진짜 죽여 버릴 거다.

*

완연했던 봄이 물러나고 날씨는 무르익어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었다. 여름을 맞은 두 사람은 나란히 소파에 누워 에어컨 바람을 쐬는 중이었다.

<‘눈부신 항해’ 측 “포상 휴가 논의 중……참석 배우 미정”>

<연일 기록 갈아치우는 ‘눈부신 항해’, 포상 휴가 하와이로 떠난다>

<‘대박’ 눈부신 항해, 포상 휴가는 ‘특대박’>

연일 기록을 갱신하며 화제의 중심으로 오르내리는 ‘눈부신 항해’도 막바지를 향해 달렸다. 종방을 앞두고, 출연진과 스태프들 사이에서는 종방연 대신 포상 휴가가 논의되었다. 기사를 들여다보던 희찬이 고개를 들고 도준을 바라봤다. 도준은 눈을 감은 채로 누워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다들 포상 휴가 가나 봐.”

“그래?”

“응, 기사도 떴어. 하와이 간대.”

도준은 흥미 없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람이 많은 곳은 딱 질색이다. 게다가 휴가라면 그 많은 사람과 어울려야 한다는 말 아닌가. 이내 도준의 고개가 절레절레 도리질을 쳤다.

“가고 싶어?”

“가고 싶으면 뭘 해, 못 가는데.”

“이제 스케줄 없다며. 가고 싶으면 다녀와.”

“그날 방송 있어.”

희찬의 말에 도준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분명 지난 예능 촬영 이후로 스케줄을 줄이고, 이맘때쯤에는 스케줄이 없을 거라고 했는데 말이다. 그새 또 일을 하겠다며 제 몸을 혹사시키려는 희찬의 태도가 못마땅해, 도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희찬이 피식, 웃으며 큰 손으로 도준의 얼굴을 훑어내렸다.

“스케줄 아니고.”

“그럼 무슨 방송.”

“그날 예능 그거 방영해. 너 온 거.”

“아, 난 또.”

도준이 다시 털썩 누웠다. 단지 방송 보는 것이 문제라면 가서 봐도 되는 거 아닌가, 도준이 몸을 돌려 누워, 희찬의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아직 본격적인 여름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날이 더워도 너무 덥다. 기어코 티셔츠를 벗어 낸 도준은 가슴을 활짝 편 채로 탄식을 터뜨렸다. 더운 건 희찬도 마찬가지인지, 티셔츠를 팔랑거리는 손에서 성가심이 묻어났다.

“가서 보면 되잖아.”

“너랑 같이 볼 거야.”

이내 도준이 손을 뻗어 희찬의 턱을 그러쥐었다. 가느다란 턱을 쥐어 제 쪽으로 잡아당긴 도준은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어 희찬의 입술을 머금었다. 말랑한 입술을 물고, 혀를 내밀자 희찬의 혀가 빼꼼 마중 나왔다. 차가운 바람에 타액이 식어 시원함 감이 돌았다.

두 사람의 혀가 닿자 희찬이 눈을 스르르 감았다. 기다란 속눈썹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것을 본 도준의 입꼬리가 빙그레 치솟았다. 바쁘게 뒤엉키는 살덩이가 축축한 소음을 냈다. 혀끝을 세워 입천장을 훑고, 치열을 핥아 올리자, “우응” 귀여운 소리가 났다.

맞닿았던 입술이 떨어졌다. 새빨간 입술이 타액에 범벅되어 번들거리는 모양을 본 도준이 엄지로 희찬의 말랑한 입술을 스윽, 닦아 냈다. 이내 살포시 앉았던 희찬의 눈꺼풀이 뜨였다. 화려한 눈매에 갇힌 옅은 갈색빛의 눈동자가 유리구슬처럼 반짝거렸다.

“나중에 둘이서 여행 가자.”

“도대체 언제. 나 스케줄도 줄였는데.”

“너 계약이 언제까지라고 했지?”

“이번 달이면 끝나.”

도준이 고개를 갸웃 비틀었다. 재계약을 하겠다는 말도 없었는데, 다른 회사를 찾지도 않는 희찬의 모습이 의아했다.

“근데 왜 다른 회사 안 찾아.”

“그냥……. 귀찮아.”

희찬은 두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로 도준이 누운 소파에 턱을 괬다.

날씨가 더워서일까, 요즘 들어 유달리 지치고, 피곤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이미 많은 회사에서 연락이 오고 있었지만, 애써 그 연락에 응하지도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귀찮았고, 모든 것이 성가셨다.

번 아웃이라도 온 걸까. 하긴, 데뷔 이래 쉰 날이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희찬이 도준의 시선을 피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바깥이 훤히 보이는 통유리 창을 통해 드리운 빛에 거실 바닥에 무지개가 피었다. 손을 뻗어 무지개를 쥐었다. 희찬의 손등에 오색 빛의 찬란한 무지개가 드리웠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

희찬이 무심코 뱉은 말에 도준의 눈이 차분해졌다. 힘든 기색, 지친 기색 하나 보이지 않던 희찬의 눈이 문득 공허해 보였다. 도준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희찬의 볼을 쓰다듬었다. 부드럽게 닿는 손의 감촉에 희찬이 희미하게 웃으며 도준의 손에 제 얼굴을 기대었다.

“응, 너 열심히 했지.”

“응.”

“그럼 이제 안 할 거야?”

“아니……. 그래도 해야지.”

어째 목소리에 매가리가 하나도 없다. 그게 왜 그렇게 안쓰러운지, 도준은 안기라는 듯, 희찬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가만히 도준을 쳐다보던 희찬이 저를 향해 팔을 달랑거리는 도준의 품에 쏙 안겼다. 도준의 몸 위에 누워 어깨를 맞추고, 발끝을 맞추자, 도준의 단단한 팔이 희찬의 허리를 옭아맸다.

“쉬고 싶으면 좀 쉬어, 여태 못 쉬었잖아.”

“근데 또 그거 알지.”

“뭐?”

“쉬라고 하면 쉬기 싫어.”

희찬의 말에 도준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터진 웃음과 별개로, 희찬의 마음에는 공감이 되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상하게 뭘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누군가 하라고 말을 얹으면 금방 하기 싫어졌다. 마찬가지로 쉬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쉬어라 얘기하면 다시 일하고 싶었다.

그 마음은 어린아이 투정과 같은 것일 테다. 해야 할 일을 알고, 해낼 힘도 있지만 조금 쉬고 싶은 마음. 잠시 미뤄 두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도준의 목덜미에 희찬의 얄팍한 숨이 차갑게 닿았다. 도준이 어깨를 움츠리자, 희찬이 장난스레 도준의 목을 혀로 핥아 올렸다.

“그래도 좀 쉬어, 진짜 번 아웃 와.”

“응. 그래도 계약은 해 둬야지, 그래야 편하게 쉬지.”

“음…… 생각해 둔 회사 있어?”

희찬이 눈을 굴렸다. 계약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업계에 퍼지기 무섭게 K액터스에서 연락이 왔었다. 이제껏 계약 제안이 온 회사 중 가장 좋은 대우를 약속한 곳이었지만, 희찬은 계약을 망설였다.

3년 전, 처음 계약 제의가 왔을 때는 도준이 제게 오지 않았던 때라 피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여 제의를 거절했었다.

그리고 지금 고심하는 것은 혹시나 우리에게 또 어려움이 닥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퀴어 드라마에 함께 출연하며 대중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와중이었다. 근데 도준과 같은 회사로 간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그때는 또 다른 파장이 생기지 않을까, 문득 겁이 났다.

이제야 겨우 과거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한 도준인데, 그가 다시 아득한 수렁에 빠져 허덕거리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대답을 미루는 희찬의 귓불에 도준의 말랑한 입술이 닿았다. 귀 끝에서 턱으로 옮겨간 입술은 이내 희찬의 목을 따라 아래로 향해 쇄골에 닿았다.

“우리 회사 올 생각은 없어?”

도준의 단정한 목소리가 희찬의 목덜미에서 울렸다. 희찬은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눈을 끔뻑거렸다.

“대표님이 아무 말씀 없으셨어?”

“있었는데…….”

“근데 별로야?”

희찬이 도준의 품에서 벗어나 바닥으로 내려갔다. 소파를 등받이 삼아 몸을 기대고,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희찬의 목에서 뚜두둑, 뼈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이윽고 도준도 몸을 일으켜 앉았다. 희찬의 힘없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기운이 다 빠져 마음이 무거웠다.

“좋지, K액터스인데.”

배우만 전문적으로 매니지먼트하는 K액터스의 위상이 있는데, 대우가 좋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것이었다. 희찬은 말을 아끼며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도준의 큰 손이 희찬의 정수리에 닿았다. 도준 역시 더 이상의 질문은 건네지 않았다.

잠시간 적막이 내려앉았다. 조용한 공간에 울리는 소리라고는 에어컨에서 뿜어져 나오는 바람에 거실의 식물 이파리가 부딪치는 소리가 전부였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희찬은 자신의 고민을 숨기지 않기로 했다. 등을 돌려 도준을 마주 보자, 도준이 편안한 표정으로 무어든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만약에 내가 K액터스에 갔다가 우리가 너무 붙어 지내서, 또 이상한 기사가 터지면 어떡해?”

희찬의 질문에 도준이 무언가 고민하는 듯 눈을 굴렸다.

“내가 처음 계약할 때 대표님한테 그랬거든. 너랑 찍힌 사진이 있고, 그거 때문에 나는 스폰을 했고……. 내가 데뷔하면 그 기사가 터질 수도 있다고.”

“응.”

“그때 대표님이 뭐라 그러셨게.”

도준이 다정하게 희찬의 눈썹을 매만졌다. 그에 희찬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배우로서 할 일만 하래. 기사는 내가 걱정할 게 아니래.”

“…….”

“그러니까 너도 너무 많은 걸 걱정하지 마. 어딜 가도 너는 괜찮을 거야. 이왕이면 우리 회사 오면 더 좋고.”

또, 또 어른인 척하기는.

도준의 도준다운 위로가 고마운 것과는 별개로 피식 웃음이 나왔다. 희찬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우는 것을 본 도준이 비로소 편안한 마음으로 희찬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K액터스에서 연락이 갔다면, 아마 대표님은 장희찬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제게 그랬던 것처럼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희찬을 구워삶을 것이고, 아마 그 집요함은 장희찬도 못 당해 낼 것이다.

“아휴, 이도준 잔소리 안 들으려면 빨리 계약해야겠다.”

이윽고 희찬이 무언가 결심한 듯 홀가분한 목소리를 내었다. 이전보다 한껏 가벼워진 목소리에 도준은 제 마음도 덩달아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

드라마 눈부신 항해가 성황리에 종영했다. 일정이 맞는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기자들의 열띤 환호 속에 포상 휴가차 출국길에 올랐다.

덕분에 온 포털이 ‘눈부신 항해’로 도배되었고, 대중은 쏟아지는 기사 사진 속에서 도준과 희찬을 찾았지만, 아쉽게도 ‘눈부신 항해’의 주역으로 큰 활약을 펼쳤던 도준과 희찬은 어디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도준은 스태프들과의 포상 휴가 대신 ‘나 홀로 휴가’를 선택했다. 대표와 감독이 번갈아 전화를 걸어, ‘한번 갔다 오지?’ 하고 꾸준히 귀찮게 했지만, 역시나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희찬 역시 이전에 말했던 대로 휴가에서 빠졌다. 북적대는 사람들 틈 속에서 휴가를 보내기보다 도준과 함께 여유를 즐기길 바랐고, 처음으로 함께 촬영한 예능을 함께 보고 싶었던 탓이다.

주방 쪽에서는 쉬지 않고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함께 저녁을 먹으려는 듯, 분주하게 움직이는 도준을 뒤로한 희찬이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팬들의 반응을 살폈다. 일전에 도준이 대뜸 찾아와 함께 촬영했던 예능이 방영되는 오늘, 예고편을 접한 팬들의 반응은 뜨겁기만 했다.

킹짱이들은 빠진듯ㅠ

* * *

킹이는 원래 잘 안끼니까 그러려니 하는데 짱이 무슨일 ㅠㅠㅠㅠ

* * *

그래도 오늘 킹짱 투샷 볼 수 있어 8시 존버

⤷ 말모 누가 나 기절좀 시켜줘;

⤷ 시간 ㅈㄴ안감 8시 미치겠는데

⤷ 킹이 예능 핫데뷔 아님? 케미 ㅈㄴ 기대돼

기대하는 것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반응들 덕에 희찬의 마음에도 조금씩 기대가 샘솟았다. 이도준과 장희찬, 장희찬과 이도준. 불과 반년 전만 해도 ‘앙숙’이라는 수식어 없이는 볼 수 없었던 두 사람의 이름 앞에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이 ‘절친’이라는 단어가 붙었다.

도준이 희찬이 앉은 자리에 먹음직스러운 오므라이스를 내려놨다. TV 앞에 앉은 희찬은 이전에 말했던 대로, 도준과 함께 예능을 보기 위해 벌써부터 방영되는 채널을 틀어 둔 채였다. 그 마음을 아는 건지, 도준도 군말 없이 희찬의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도준의 앞에는 웬일로 희찬과 같은 밥이 놓여 있었다.

“밥 먹으려고?”

“응.”

단호하게 대답하는 이도준이 기특하다. 희찬이 도준의 머리를 쓰다듬자 도준이 피식, 웃었다.

도준은 제 옆자리에 그릇을 하나 더 내려놓았다. 사기그릇과 탁자의 유리가 부딪쳐 맑은 소음이 두 사람의 귀를 울렸다.

“이야, 이도준 요리 좀 하네?”

TV를 마주하고 앉은 두 사람의 등 뒤에서 중후한 음성이 울렸다. 희찬은 손의 물기를 닦으며 저벅저벅 걸어오는 남성에게 해사한 웃음을 보였다.

“도준이 요리 잘해요.”

“그래? 나는 도준이를 먹여 보기만 해서.”

희찬을 설득하기 위해 집으로 찾아왔던 대표는 당연하다는 듯이 도준의 옆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도준의 예상대로 대표는 막무가내였다.

계약을 미루는 희찬을 어르고 달래는 대표의 모습은 과거 자신을 집요하게 찾아오던 모습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덕분에 도준은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내내 그저 즐겁게 그들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장희찬도 만만치 않다. 대표가 무슨 말을 하든 쇽쇽, 잘만 빠져나가는 모양에 대표가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으니 말이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대표를 위해 도준이 밥을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예능이나 보자며 대표를 구워삶은 것은 또 희찬이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나란히 앉은 식탁 위에는 소소한 웃음이 자리했다. 이따금 쇠숟가락과 그릇이 부딪치며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지만, 세 사람은 개의치 않는 듯 즐겁게 식사했다.

오랜만에 밥이 잘 씹혔다. 잇새에서 으깨지는 밥알이 구르는 느낌이 좋아, 도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케첩의 달큼한 향이 코를 자극하고, 부드럽게 혀를 감는 달걀의 감촉을 느끼다 보면 밥 한 그릇쯤이야, 금세 비워 낼 수 있었다.

이윽고 넓은 화면 가득 희찬이 나타났다. 특유의 환한 얼굴로 즐겁게 웃는 모습이 클로즈업되었다가, 금방 강원도의 산뜻한 풍경으로 전환되는 화면에 세 사람이 모두 방송에 집중했다. 잔잔한 음악과 함께 시작된 예능은 힐링이라는 주제에 걸맞게 아주 편안했다.

오로지 TV에서만 나오는 소리가 거실을 빼곡하게 메우던 차에 대표가 넌지시 희찬을 툭 건드렸다.

“희찬이 우리 회사 오면 내가 진짜 예뻐해 줄 수 있는데. 아직 제대로 된 조건도 안 걸었는데 자꾸 밀어내면 섭섭해?”

어느새 소파에 올라앉았던 도준이 힐끔 눈을 돌려 대표와 희찬을 번갈아 살폈다. 원하는 것을 목전에 둔 대표의 모습이 마치 원하는 어종을 잡아 올릴 때까지 무수히 미끼를 던지는 낚시꾼 같아 보였다.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아 낸 도준의 눈이 이번엔 희찬에게 닿았다.

“하하……. 대표님 커피 드릴까요?”

능숙하게 대답을 피하는 희찬의 모습은 미꾸라지 같았다.

결국 도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대표는 나름대로 답답한 표정을 지었고, 희찬 역시 난감한 모습을 보였지만 이 상황이 도준에게는 마냥 재밌었다.

“커피는 무슨. 어유, 나는 가련다. 희찬아, 예능은 내가 집에 가서 마저 볼게. 힐링 예능인데 나는 이상하게 힐링이 안 되네. 장희찬이 나와서 그런가.”

대표가 장난스럽게 뽈통한 목소리를 내며 현관으로 향했다.

“하하, 대표님 제가 조금만 더 고민해 보고 연락드릴게요.”

이도준만 신중한 줄 알았더니, 장희찬도 못지않다. 하여튼 이런 것까지 똑 닮아서는. 희찬의 너스레에 대표가 결국 피식, 웃었다.

현관에서 신을 신던 대표가 문득 뒤를 돌아 나란히 선 두 사람을 쳐다봤다. 희찬과 다시 함께 살기 시작한 이후로 도준은 제 세상을 되찾은 것처럼 밝은 분위기를 유지했다. 대표가 아는 도준의 모습이 희찬과 살기 전, 후로 나뉠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희찬 역시 굉장히 편안해 보였다. 항상 밝은 낯으로 즐겁게 생활하는 듯 보여도, 어딘가 그늘져 보이던 희찬에게서는 더 이상 그늘을 찾을 수 없었다.

그게 참 좋았다. 짝을 찾은 두 사람이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게 참 좋았다. 어느새 대표의 입가에는 뭉근한 미소가 피었다.

대표를 배웅하고 돌아온 두 사람은 다시 TV 앞에 앉았다. 희찬은 방송을 보는 틈틈이 실시간으로 팬들의 반응을 살폈고, 도준은 예능에 비치는 제 모습이 신기한 듯 TV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니 서울에서 강원도까지 걍 오는데 이게 우정이라고? 별안간 나를 꼬신 이도준

* * *

칭찬스티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무슨일임ㅋㅋㅋㅋㅋㅋㅋㅋ

* * *

얘네 절친맞넼ㅋㅋㅋㅋㅋㅋㅋ 킹이 혼내는 짱이나, 다 알겠다는 납득킹이나

⤷ 납득킹 돌앗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 *

ㅋㅋㅋㅋㅋㅋㅋ짱이가 킹이 꽉 쥐고 잇네 졸귀다;;;

* * *

야 킹이가 짱이 캐리어에서 자연스럽게 옷 꺼내 입는거 나만 발림? 얘네 진짜 사귄다니까

⤷ 너 킹짱 오래 보고 싶으면 조용히 하라니까

⤷ 지금 다들 의리지키는 중이야

⤷ 쉿! 킹짱 연애중^.~

* * *

둘이 같이 있는 거 걍 드라마세요ㅠㅋㅋㅋㅋ 서사, 얼굴 맛집 보장

* * *

킹짱 예능 더 나오면 좋겟다 ㅠㅠ 둘이 같이 있는 걸로 ㅠㅠㅠㅠㅠㅠ

⤷ 2222 둘이서 관찰예능해 주라

* * *

서로 잘 아는 거 티 나서 더 발린다; ㅅㅂ오늘부터 이거 프레임 단위로 핥을거임

* * *

둘이 같이 있으니까 걍 애들같네ㅠㅠ귀엽고 청춘이고 걍 다 해 먹어줘

커뮤니티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성에 흥미를 느낀 것인지, 갑자기 가입자 수가 폭발했다. 게시글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쏟아져 내리는 글들을 희찬이 세세하게 살폈다. 혹시나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이었건만 다행히 사람들의 반응은 괜찮아 보였다.

이내 안도의 숨을 내쉰 희찬이 도준의 가슴에 뒤통수를 기대었다. 어느덧 예능도 끝나 CF가 이어져 나오는 중이었고, 종일 대표의 설득에 시달렸던 희찬이 피곤한 듯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다 도준의 새하얀 볼에 그보다 더 하얀 손가락이 닿았다. 콕, 볼을 찌르는 희찬의 행동에 도준의 검은 눈동자가 뚝 떨어져 희찬의 손가락을 쳐다봤다.

도준이 입을 앙, 벌려 희찬의 손가락을 입 안에 가두었다. 손가락에 닿는 뜨끈한 입김에 희찬이 인상을 찌푸리자 도준이 배시시 웃었다.

그렇게 이제는 평화만 가득할 거라고 생각했던 어느 여름날. 요란하게 울리는 휴대폰 진동에 눈을 뜬 도준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품에는 곤히 잠들었던 희찬이 몽롱한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검은 화면에 뜬 하얀 글자는 ‘대표님’ 세 글자였다. 다른 스케줄도 없는데 부재중이 쌓이기 무섭게 다시 울리는 전화에 도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몰려오는 불안함을 애써 무시한 도준이 무거운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네, 대표님.”

― 잤니?

“네.”

도준이 묵직한 숨을 터뜨리며 다시 누웠다. 귀에 휴대폰을 얹어 둔 채로 성의 없는 대답을 하자 건너편에서는 그보다 더 무거운 한숨이 터졌다. 문득 수화기 너머에서 주변의 소음이 들렸다. 대표는 뭐가 그렇게 분주한지, 소란한 사무실에서 도준에게 전화를 건 듯했다.

“무슨 일 있어요?”

― 어……. 도준아, 오늘 인터넷 보지 말고, 지금 너한테 갈 테니까.

“네?”

― 지금 갈 테니까 희찬이도 못 보게 해.

자신의 할 말을 마친 대표가 전화를 뚝 끊었다.

괜한 불안함이 도사렸다. 단 한 번도 이런 전화를 받은 적이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본디 사람이라는 것이, 하지 말라고 하면 더욱 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도준은 대표가 힘주어 당부한 말을 무시하고, 손가락을 놀려 포털 사이트를 켰다.

“왜?”

“인터넷 보지 말라시는데.”

“…….”

어느새 일어나 도준을 바라보던 희찬의 말간 눈동자에도 불안함이 서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봤던 도준의 눈이 크게 뜨이더니 이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심장이 쿵쿵 거칠게 뛰었다. 이러다 가죽을 찢고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거 아닐까, 허튼 걱정이 생길 정도로 심하게 속이 울렁거렸다.

<이도준♡장희찬, 친구 아닌 연인? 어두운 밤 길거리 KISS>

<드라마 ‘눈부신 항해’ 허구 아닌 리얼?>

<‘소꿉친구’라던 장희찬♡이도준, 친구사이에서 볼 수 없는 진한 스킨십>

<이도준♡장희찬, 스캔들도 남다른 스케일!>

이게 뭐야.

온 포털을 뒤덮은 것은 다름 아닌 스캔들이었다. 그것도 이도준과 장희찬을 필두로 세운 동성연애 스캔들.

도준의 검은 눈동자에 거친 풍파가 일었다. 입술을 가로질러 새어 나오는 숨은 점점 가빠져만 갔다. 의아함을 느낀 희찬이 함께 화면을 보려 몸을 일으키기 무섭게 희찬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 역시 희찬의 회사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

손에서 힘이 다 빠져나간 것을 느낀 도준이 휴대폰을 뚝, 떨구었다. 그 화면에는 익히 봐서 익숙한 사진 한 장이 크게 떠 있었다.

8년 전, 도준과 희찬을 수렁으로 밀어 넣은 키스 사진이었다.

<6권에 계속>

눈부신 항해 [5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