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권-12. 암초 (15/18)

눈부신 항해 6권 (완결)

12. 암초

회사에서 보내 준 경호원에 둘러싸인 희찬이 회사의 호출을 받고 회사로 간 후, 집에서 대표를 기다리는 도준은 쏟아지는 기사 내용을 하나하나 훑었다.

도준의 검은 눈동자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8년 전, 몸 바쳐 막은 기사였다. 그 어려운 일을 감당하고 이제야 겨우겨우 숨을 쉬는 지금, 인기가 정점을 찍고, 더 올라갈 곳이 없다고 생각되는 지금 기사를 터뜨린 전광진의 치졸함에 치가 떨렸다.

긁어 부스럼이 될까 복수도 포기했었다. 숨죽이며 살았고, 최대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해 온 지난 8년이었다. 이를 갈며 눈물을 떨구는 희찬의 손을 잡고, 우리는 그러지 말자고, 그냥 모른 척 살자고, 다시 만났으면 되었다고 그렇게 합리화를 했었다.

그런데, 왜.

이루 말할 수 없는 화가 도사렸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분노의 크기에 머리가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열이 올라 눈알이 팽팽하게 당기는 듯했다. 머리가 지끈거리더니, 이내 가슴이 답답해졌다. 말아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뭉친 숨은 뜨겁게 터졌다.

“이, 씨발…….”

가지런한 도준의 빨간 입술을 가르고 나온 말은 다름 아닌 욕이었다.

이내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성큼성큼 들어오는 걸음에는 화가 실려 쿵쿵 바닥을 시끄럽게 울렸다.

도준이 앉은 소파 옆자리가 푹 꺼졌다. 누군지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익숙한 향에 도준이 거친 숨을 터뜨렸다.

“희찬이는?”

“……회사 호출이요.”

도준의 허벅지에 두툼한 대표의 손이 닿았다. 그의 음성도 떨리는 걸 보아, 그 역시 상당히 화가 난 듯 보였다.

대표는 마른세수를 거듭하는 도준의 손을 끌어 내렸다. 상기된 얼굴과 그의 검은 눈동자에서 제가 느끼는 것에 버금가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괜찮아.”

“뭐가 괜찮아요, 어떻게 괜찮아요.”

“기사 오늘 중으로 다 내려가.”

“이미 다 퍼졌던데…….”

기사가 내려가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더럽게 빠르게 발전한 인터넷이라는 것은 한 번 올라온 정보는 지우기도 어려워 어디에든 흔적이 남기 마련이었으니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커다란 포털의 메인을 장식했고, 이미 검색어에는 쉴 새 없이 두 사람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차마 대중들의 반응은 볼 용기가 나지 않아 쳐다도 보지 못했다. 도준은 그저 이 모든 일이 또다시 자신이 희찬의 발목을 잡은 것만 같아 처참함이 몰려왔다.

대표는 오랜 시간에 걸쳐 꾸준히 성장한 도준이 순식간에 과거로 돌아가는 듯한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그 모습은 퍽 위험해 보였다. 도준의 검은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자신이 쥔 것을 모두 놓아 버릴 듯이 텅 비어 갔다. 그건 처음 도준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모양이었다.

그런 도준을 가만히 둘 수 없다. 기사가 터지면 그대로 다 그만두겠다고 했던 도준의 말이 떠올랐다. 이 젊고, 능력 있는 아이가 이렇게 무너지는 것은 지켜볼 수 없었다.

“도준아.”

잔 지진이 인 도준의 검은 눈동자가 대표를 향했다. 대표는 굳은 심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눈길로 도준을 향해 단호함을 내비쳤다.

“지금 일어난 이 모든 상황에 네 잘못은 조금도 없어.”

“…….”

“꼭 탓해야 할 상대를 찾아야겠다면 그 상대 제대로 찾아. 전광진이 잘못하고 있는 거야. 희찬이도, 너도 아무 잘못 없어. 네가 희찬이 발목 잡은 거 아니라고.”

“……네.”

발끝에서부터 스멀스멀 치미는 우울함이 대표의 단호함에 사라졌다. 이런 일이 있을 때면 ‘네 탓’이라며 몰아붙이던 남자들의 목소리가 있었는데, 그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이 뜨거워졌다. 귓가에는 언젠가 희찬과 서로 전광진을 죽이겠다며 복수심을 불태웠던 목소리가 윙윙 돌았다.

[네가 그 사람을 죽이러 가는 날에는 희찬아, 내가 먼저 가서 죽여 놓을 거야.]

이내 도준의 턱이 다물렸다. 교근이 두드러지게 솟더니, 도준의 눈동자에도 힘이 실렸다.

“그렇게 호언장담했는데 기사 미리 못 막은 거 미안해. 변명하자면, 우리 쪽에 컨텍 없이 바로 터졌어. 우리랑 커넥션 없는 하급 언론사에서 터진 거야. 금방 마무리될 거고, 우리는 너희 사생활에 대해 알려야 할 의무 없다는 입장으로 기사 낼 거야.”

“…….”

“배우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사람이고, 그치? 너희는 그 캐릭터를 소화하는 능력만 있으면 돼.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캐릭터 뒤에 있는 인물의 사생활이 밝혀질 필요 없어. 동의해?”

“네.”

도준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대표가 도준을 향해 안쓰러운 눈빛을 보였다. 집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화가 나 어찌할 줄 몰라 하던 모습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인터넷 반응이 예상만큼 표독스럽지는 않았다. 동성애에 관대하지 못한 이 나라에서 이미지 좋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두 사람의 동성연애 스캔들이 터졌는데, 사람들은 오히려 기사를 터뜨린 언론사를 향해 화를 내는 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범하지 않은 연애사였다. 애초에 ‘지켜 주자.’라는 의견이 압도적인 동성애를 터뜨린 언론사를 향해 사람들은 ‘선 넘었다’, ‘이건 알 권리가 아니라 명예훼손’이라며 두 사람을 두둔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쪽이 안쓰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이제야 아무 걱정 없이 노를 젓기 시작한 두 청년인데, 또다시 거친 파도가 몰아쳐 두 사람을 집어삼키려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표가 소파에서 일어서서 도준을 내려다봤다. 그에 도준이 고개를 들어 대표를 마주했다.

“나는 이제 전광진을 만나러 갈 건데.”

“같이 가고 싶어요.”

“괜찮겠어?”

도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굳은 의지가 묻어나는 도준의 모습에 대표가 쓴 침을 삼켰다. 도준이 저 결심을 세우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왕이면 아무 일 없이 결심을 할 수 있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기어코 일을 터뜨리는 전광진의 추악함에 다시 또 불끈 화가 치밀었다.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나온 도준의 모습에 대표가 눈썹을 씰룩거렸다. 그저 대충 모자를 눌러 쓰고 나올 줄 알았던 것과 달리 도준은 마치 중요한 미팅 자리에라도 나가는 것처럼 자신을 한껏 꾸민 채였다.

그건 도준의 결연한 의지일 것이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그때와 달리 자신을 놓지 않겠다는 의지, 당신이 가진 악랄함에 맞서겠다는 의지.

도준이 대표와 함께 도착한 JR 엔터테인먼트의 건물은 낯설었다. 대형 소속사라는 주변 인식에 걸맞게 커다란 건물 안에는 제법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도준이 화사한 로비에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도준에게 향했다. 대한민국 남성의 평균을 훨씬 웃도는 큰 키에 다부진 몸, 그리고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비주얼은 업계에서도 보기 드문 귀한 것이었다.

도준은 부러 제 얼굴을 감추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면 심장부터 쿵쿵거리고, 그중에 남자라도 있으면 시선이 자연스레 바닥을 기던 것과 달리 오늘은 그저 당당했다. 아니, 당당하다기보다 화가 나고, 치가 떨려 다른 사람을 의식할 틈이 없었다.

대표의 옆에 서서 그가 전광진에게 연락하는 것을 듣는 도준의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그 얼굴을 다시 마주할 시간이 코앞에 닥쳐오자 불현듯 시야가 아득해졌다. 나지도 않는 호텔의 향이 나는 것 같았다. 남자들의 목소리가 저 멀리에서 울려와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목소리들은 이내 도준의 가슴에 아찔함이 아닌 화를 앉혔다.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약이 없으면 잠도 못 잘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약속을 어긴 전광진을 향해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도사렸다.

“너, 더 잘생겨졌구나?”

전광진이 있는 대표실에 들어서자마자 도준이 들은 말은 이번에도 외모를 평가하는 말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제 얼굴과 몸을 샅샅이 뜯어보던 소름 끼치는 시선이 떠올랐다. 도준은 가슴에 힘을 주고, 떨리는 숨을 애써 고르게 내쉬었다.

“안…… 터뜨리기로 하셨잖습니까.”

도준은 치미는 화를 겨우겨우 다스렸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런 도준의 노력과는 달리 저쪽에서는 비웃음이 터졌다. 그에 도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누구는 화를 낼 줄 모르고, 비웃을 줄 몰라서 참고 있는 줄 아나. 성격을 죽이고, 발톱을 숨기려 애쓰는 중인데 그 모든 행동이 부질없다는 양, 하찮게 보는 전광진의 행동에 목덜미가 바짝 당겼다.

“그냥, 마음이 바뀌었어. 잘되는 꼴을 보니까 배알이 꼴리더라고.”

이걸 지금 말이라고.

도준의 주먹이 불끈 말렸다. 당장이라도 일어나 턱주가리를 한 대 쳐 올리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그래도 네가 한 스폰은 나도 못 터뜨려. 다행 아니니? 그거 터지면 성 매수가 터지는 거고, 그건 나도 자폭이잖니. 자폭은 나도 싫어서 말이지.”

하지만 이제는 참을 수 없다.

성 매수라니. 마치 자신을 남창 취급하는 듯한 말에 도준의 시야가 일순 새까맣게 암전되었다. 눈을 몇 번이고 감았다가 뜨길 반복했다. 한참이 흐른 후에야 차츰차츰 상이 맺혀 돌아왔다.

“아, 그거 아니? 그 사진은 내가 찍은 거였어. 기자는 무슨, 데뷔도 안 한 신인 기사를 누가 쓴다고.”

뒤이어 붙는 전광진의 말에 도준은 머릿속에서 무언가 뚝 끊기는 것을 느꼈다. 과거의 섣부른 선택이, 하지만 그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던 그 시절이 기어코 화를 터뜨려 도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내가, 그때 무슨 짓을 했는데.”

억눌린 도준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렸다. 두 눈을 치켜뜨고 전광진을 직시하는 눈에서는 전에는 보지 못했던 독기가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전광진은 편하게 몸을 기대어 앉아 피식,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내가 스폰이나 더 하라고 했었잖니?”

그걸 거절한 건 너였고.

전광진의 비아냥에 도준이 입술을 지르문 채로 바지 버클을 풀었다.

“자, 해요. 홀딱 벗겨 놓고 손 묶고 하는 거 좋아하시잖아요. 눈 가리고, 입 틀어막고, 죽기 직전까지 때린 다음에 시체 같은 거랑 하는 거 좋아하시잖아.”

“도준아, 도준아.”

도준이 상대를 도발하듯 강한 어투로 달려들었다. 위태롭기 짝이 없는 도준의 모습에 대표가 놀란 듯 도준을 저지했지만, 도준은 그런 대표의 손을 쳐 낼 뿐, 자신의 손을 멈추지 않았다. 도준의 날카로운 눈에서 눈물이 뚝, 뚝 떨어졌다.

전광진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간 자신이 해 왔던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 같아 그저 분하기만 했다.

“또 희찬이한테 전화 걸어요. 나랑 떡 치는 거 장희찬한테 또 들려주라고……. 흐, 씨발……. 나랑 장희찬을 그렇게 망가뜨려 놓고, 뭐? 배알이 꼴린다고?”

도준은 쏟아져 나오는 말들을 토해 내듯 뱉었다.

이런 남자를 믿고 몸뚱어리를 내어 줬다니. 이런 보잘것없는 남자를 부술 수 없는 벽이라 생각하고, 그 어려운 길을 걸었다니. 이 별 볼 일 없는 남자 한 명 때문에 장희찬을 등져야 했다니.

그저 통탄했다.

전광진은 도준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즐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호탕한 웃음소리가 고막을 찢고 들어오는 듯한 느낌에 도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새빨간 핏발이 선 눈가에는 투명한 눈물이 마르지 않고 차올랐다.

“하하, 곽 대표야. 너도 그때 봤어야 했어. 마지막 날 내가 장희찬한테 전화를 걸었었거든…….”

거기까지 듣고 도준은 귀를 닫았다. 아니, 자의는 아니었다. 다만 모든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져 그 어떤 말도 명확하게 들을 수 없었다.

이 사람에게 있어 자신이 무너뜨린 젊은 청춘은 그저 장난감에 불과한 모양이었다. 재미난 영웅담이라도 늘어놓는 양, 구구절절 스폰 당시의 일들을 떠벌리는 전광진의 모습에 가슴에서 울화가 터졌다.

문득 수화기 너머 울부짖던 희찬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전 대표는 그렇게 동시에 두 청춘을 짓밟아 놓고도 죄책감이라고는 조금도 느끼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게 역겹고, 비렸다. 당장에라도 토악질이 치밀 것 같아 도준이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함부로 떠벌리는 전광진의 입은 쉬지 않았다. 대표가 연신 힘주어 그만하라 명하고 있었지만, 그조차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이내 도준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자리했다.

“……내가 너무 착하게 살았네.”

이내 자조적인 목소리가 뚝 떨어졌다.

“내가, 등신같이 착하게 살았어. 쓰레기만도 못한 새끼인 걸 잊고 있었어.”

투명한 눈물 한 줄기가 볼을 타고 흘렀지만, 도준은 그 눈물을 굳이 닦아 내지도 않았다. 핏발이 선 도준의 눈에 악이 가득했다. 도준은 전광진에게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는 곽 대표를 제 뒤에 세우고 전광진을 마주했다.

도준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두 떨어졌다. 그건 비단 억울하고 서글픈 마음에서 나오는 눈물은 아니었다. 분노가 치밀어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울분을 견디지 못해 눈물이 흘렀다. 가슴에 도사리는 화가 마음을 무겁게 짓눌러, 말을 하지 않고는 도무지 견딜 수 없었다.

“그 사진 지워 줄 거라고 믿지는 않았는데.”

도준의 말에 상대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 반응마저 예상한 범위에 있는 반응이라, 도준이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도준이라고 속이 없어 참고 산 것이 아니었다. 성격이 없어 그냥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죽은 것처럼 가만히 있어야 자신과 희찬을 좀 놓아주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렇게 아픈 와중에도 전광진 이름 석 자는 생각하지 않으려 무던히도 노력했었다.

그렇게 어렵게 참는 중이었다. 상대를 향한 억하심정을 가져 봐야, 죽을 것처럼 힘든 것은 도준 본인이었으니까.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나온다면 더 이상 참아야 할 이유도, 참을 생각도 없어지는 게 본능 아니겠는가.

“시발, 내가 아직도 지 좆대로 휘두르면 휘둘리는 어린애인 줄 알고.”

도준의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말들은 단정한 와중에도 살벌했다. ‘사람’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어, 화를 내는 일도 드물었던 도준이었기에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도준의 모습은 한없이 낯설기만 했다.

대표는 당장 살인이라도 할 것처럼 행동하는 도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여 가만히 뒤로 물러나 있었지만, 이대로 두었다가는 정말로 전광진을 죽일 것 같았다.

얼핏 둘러본 전광진의 사무실 안에는 위험한 물건이 많아 보였다. 온통 유리로 된 탁자며 책장들도 도준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무기로 활용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대표는 이쯤에서 도준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준아, 정신 차려야 해.”

부들부들 떨리는 도준의 손을 거머쥔 대표가 도준의 호흡을 다스렸다. 울분이 가득한 도준의 두 눈은 대표 어깨 너머에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는 남성을 노려보고 있었다.

도준의 귀에는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남자들의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모두 사라진 대신, 대표가 전광진을 향해 화를 내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 소리 역시 제대로 닿지 않았다.

뇌가 익는 것 같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온몸의 혈관이 다 끊어져 피가 치솟을 것 같았다.

저 거만한 전광진의 목을 틀어쥐고 숨통을 죄는 형상이 눈앞에 드리웠다. 불룩 튀어나온 울대를 짓누르고, 코를 틀어막고 입을 가두고. 그렇게 죽여 버리는 상상을 했다.

이윽고 축 늘어진 시체가 갈기갈기 찢기는 영상이 도준의 눈앞에 펼쳐졌다. 환한 이 사무실이 온통 피바다가 되어 사람들의 경악 어린 비명 소리가 도준의 뇌를 찌를 때쯤.

“……준아, 이도준!”

대표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도준을 깨웠다.

“너. 허튼 생각하지 마. 가자.”

도준은 무어라 말을 덧붙일 틈도 없이 대표의 손에 끌려 JR 엔터테인먼트를 벗어났다. 대표가 전광진에게 무슨 경고를 어떻게 했는지 듣지도 못했다. 무슨 엄포를 놓을지 궁금했는데, 대표의 말을 빌려 ‘허튼 생각’을 하느라, 그의 말은 제대로 듣지도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래도 마지막에 나올 때는 그 여유만만했던 표정이 조금은 일그러져 있었던 것 같다. 더 이상 그의 손에 부들거리는 스물두 살이 아닌데, 자신이 성장하는 동안 성장은커녕, 퇴보한 듯한 전광진의 모습에 도준이 저도 모르게 쯧, 혀를 찼다.

“전광진이 한 말 귀담아듣지 마, 다 잊어버리라고. 성 매수니, 뭐니 하는 거.”

“성 매수는 무슨요. 집단 강간이었는데.”

차분하기 그지없는 도준의 목소리였으나 그가 한 말은 비수와 같았다. 가슴을 후벼파는 도준의 말에 대표가 핸들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도준이 몸에 힘을 풀고 등받이에 툭, 몸을 기댔다. 그의 눈에 다시 투명한 눈물이 차올랐다.

“희찬이, 1년을 내내 쉬지도 않고 일하면서 돈 한 푼 안 받았대요. 그래서 희찬이는, 자기가 잘 해결하고 있는 줄 알았대요.”

아무래도……. 죽여 버리는 게 낫겠는데.

뒤이어 붙는 도준의 말에 살기가 도사렸다. 대표는 착잡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도준의 굳게 말아 쥔 주먹을 탁탁 두드렸다.

무슨 말을 해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을 안다. 혹시나 이전처럼 어둠에 사로잡혀 울지는 않을까, 부들부들 몸을 떨며 두려워하진 않을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도준은 엄청나게 성장한 모습을 보였다.

문득 며칠 전, 이선재가 보였던 울분이 떠올랐다.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인 ‘이한’의 이름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보여 주겠다던 그의 결의가 이제야 고마웠다.

이제는 이 아이들이 숨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안도가 밀려왔다. 같은 일을 겪어도 다르게 대처할 힘이 생겼으니, 대표도 더 이상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이전에도 생각한 바 있었지만, 못된 어른의 손아귀에서 힘들었던 아이들이니만큼, 이제는 ‘너희를 지켜 줄 수 있는 어른들’의 도움을 받아 보아라, 말하고 싶었다.

그건 이도준과 장희찬. 웃을 시간도 부족한 이 청년들이 조금이라도 빨리 웃음을 되찾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어느새 날이 어둑해졌다. 대표와 헤어져 집에 돌아온 도준은 소파도 아니고, 거실 바닥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희찬을 발견하자마자 품에 안고 희찬을 달랬다.

두 사람은 오래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을 뒤죽박죽 어지럽게 메우는 생각들은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도준의 품에 안긴 희찬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첫 계약에 대한 후회는 이미 지독하게 해 왔다. 그럼에도 다시 밀려오는 후회의 크기는 이전보다 몸집이 크기만 했지, 절대 작지 않았다.

“회사에서 뭐래…….”

조용한 적막을 깨운 것은 도준의 목소리였다. 곽 대표와 이한 그룹은 도준에게 어떠한 것도 바라지 않았다. 계약을 파기한다거나, 그에 대한 위약금을 내놓으라는 말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하지만 희찬은 사정이 다를지도 모른다. 이미지를 잃은 연예인에게 광고사가 막대한 위약금을 요구하는 일은 허다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희찬이 몸담은 소형 기획사는 희찬을 막아 낼 방패가 되지 못할 것이 분명했으므로, 도준이 건넨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광고 계약 다 종료하고, 소속사 계약 연장 안 하는 걸로.”

“광고 위약금은 얼마나 있어? 도와줄게.”

“그런 거 없어.”

희찬의 말에 도준이 정말이냐, 의심이 담긴 눈초리를 쏘았다. 물기가 가득한 희찬의 얼굴에 아릿한 미소가 피었다.

“나…… JR이랑 계약한 이후로 다른 계약서 쓸 때 무조건 넣는 조항이 있어.”

“응.”

“혹시나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서 광고 외 다른 계약 건들에 대한 위약금을 물어야 할 때, 그건 전부 회사에서 책임지기로 하는 거.”

“…….”

“그래서 없어. 소속사 위약금도 없고.”

분명 누군가 들으면 감탄할 조항인데, 이상하게 도준은 속이 쓰리기만 했다.

이건 장희찬이 이뤄 낸 성장이겠지. 보란 듯이 톱 배우가 되어 어떠한 조건을 내걸었어도 소속사에서 흔쾌히 응했을 대단한 성장이었다.

그의 성장은 분명 뿌듯해야 하는데 도준은 아프기만 했다. 이왕이면 겪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일을 겪어, 방어하듯 성장한 그의 모습이 아프다 못해 쓰렸다.

다시 침묵이 앉았다. 두 사람은 구태여 서로를 위로하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같은 공간에서 함께 숨을 쉬고, 서로를 보듬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위로가 된다는 것을 잘 아는 탓이었다.

꼴깍, 누군가의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도준의 품에 안겨 한참의 시간을 헤아리던 희찬의 입에서 결국 울음이 터져 흘렀다.

이 모든 상황에 염증이 일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무언가를 해내고 싶다는 의욕조차 사라졌다. 뭘 위해 그렇게 달려왔는지도 모르겠다.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지금, 그저 망망대해에서 조난된 배가 된 것 같았다.

“도준아…….”

“응.”

“나, 이제 그만하고 싶어.”

“…….”

“꿈꾸는 것도, 그만하고 싶어.”

“……그래.”

상황에 질리고, 현실에 싫증을 느끼는 희찬에게 달리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희찬이 느끼는 감정이 무언지 누구보다 잘 아는 도준은 자신이 품은 희망을 희찬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게 누구보다 상처가 된다는 것을 잘 안다. 이미 겪었고, 이미 견뎌 냈으니, 지금 희찬에게는 그저 휴식만이 유일한 위로라는 것도 잘 안다.

도준은 애써 다른 말을 얹지 않고, 희찬의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었다. 그저 제 사랑은 변하지 않았음을 되새겨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 이제 그만할래……. 힘들다. 안 하고 싶어, 쉬고 싶어. 나, 너무 지쳐. 힘들어.”

희찬의 입에서 연신 흐르는 허심탄회한 말이 마음 아팠다. 속에 있는 응어리를 모두 쏟아 내는 희찬의 목소리는 줄곧 축축하게 젖은 채였다.

“그래, 쉬자. 하기 싫으면 아무것도 하지 마. 뭐라 할 사람 없어.”

“…….”

“내 옆에만 있어, 다른 데 가지 말고……. 나랑 있어.”

“응…….”

도준이 희찬을 안은 채로 바닥에 그대로 누웠다. 희찬은 도준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서, 가슴 가득 도사린 복잡한 감정을 헤아렸다.

화가 나는 것은 둘째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복수하겠다고 결심했는데.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오랜만에 만난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을 쌓느라 잠시 미뤘더니, 결국 당한 것은 전광진이 아닌 우리, 또 이도준과 장희찬이었다.

도준은 희찬의 울음이 멎길 기다리며 자신이 만나고 온 전광진에 관해 얘기했다. 왜 기사를 터뜨렸는지, 그 사진의 출처는 어떻게 되는지. 우리의 아픈 통화조차 비웃는 파렴치한 사람이었다는 도준의 말에 희찬의 모든 감정은 차근차근 분노로 뒤바뀌었다.

희찬은 머리를 울리는 분노를 뒤로하고, 지난 8년, 자신을 돌아보았다.

쉬지 않고 일을 했다. 데뷔 연차에 비해 빠르게 주연을 꿰찼고, 여기저기서 러브 콜을 받았다. 가파른 성장을 이루며 많은 팬이 생겼고, 그렇게 새로운 장르에 거침없이 도전할 수 있는 볼륨 있는 배우가 되었지만 결국 얻은 것은 계약 파기.

모두가 우러러보는 자리에 올라서도, 대중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뭘 해도 화제가 되는 위치에 올랐음에도 돌아온 것은 고작 ‘계약 파기’ 그게 다였다.

그게 참, 허탈하고 허망했다.

“나 진짜 8년 동안 1년에 이틀? 사흘? 쉬면서 일했는데……. 스케줄이 없는 날이 없었거든.”

“응.”

“처음에 너 집 나가고, 울고, 불고 실신하고 난리가 났는데, 그 새끼는 병원도 안 보내 주더라. 그냥 스케줄 보내. 일하다 보면 잊힌대. 근데 내가 너를 어떻게 잊어……. 우리는 그냥 둘이 붙어 있어야 하나가 되는데.”

천천히 과거를 곱씹는 희찬의 말에 도준의 울대가 들썩거렸다. 희찬을 옭아맨 팔에 힘을 주고, 그의 등을 다독이자 희찬이 도준을 얼싸안았다.

“그러다가 어떤 예능을 촬영하던 중에 울어 버렸어. 하필 또 음식이 스파게티더라. 너 그거 먹고 싶다고 했었잖아.”

“…….”

“몰랐는데 내가 울고 있더라고. 갑자기 감독님이 컷치고 나를 막 혼내는데, 내가……. 나는 눈물이 나는 줄도 몰랐으니까, 당황하면서 죄송하다고 그랬거든.”

“응…….”

“근데 거기 계시는 선배님이 애가 너무 힘들어 보이는데 다들 스케줄 괜찮으면 촬영을 하루만 미루면 안 되겠냐는 거야. 근데 또 되게 신기한 게, 다들 어떻게 다 스케줄이 맞았어. 그래서 하루 미루고 숙소에서 쉬는데……. 쉬는 게 더 힘들더라.”

희찬이 느꼈을 막막함이 제게로 전이되는 것 같았다. 다른 공간에서 다른 감정을 느끼며 지냈으면 좋았을 것을. 밝은 곳에서 웃으며 지내라고 보내 줬더니 비슷한 어둠 속에서 비슷하게 울고 지낸 희찬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도준은 심장이 다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냥 모든 호흡에 네가 있었어. 보고 싶어 미치겠는데 너는 흔적이 없잖아. 휴대폰이 있어, 집이 있어.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나는 너를 안아야 살겠는데, 너는 없어. 그냥 네가 두고 간 쪽지나 달달 외웠어.”

“그랬구나.”

“쪽지는 또 왜 그렇게 아프게 써 놨어……. 볼 때마다 울기만 엄청 울었는데. 써 놓은 말은 또 울지 말래. 울린 게 누군데.”

희찬이 옅은 눈을 치켜들고 도준을 노려봤다. 도준은 그저 미안함에 희찬의 콧잔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다음 날인가, 내 생일이었어. 너한테서 메시지가 온 거야. 생일을 축하한대, 이 속도 없이 맹랑한 놈이…….”

“…….”

“답장을 보낼까, 말까, 수십 번을 고민했는데, 네가 말한 대로 너는 네 발로 올 거니까. 답장이 안 오길 바랄 거 같더라고. 그래서 답장 안 했어.”

“잘했어.”

“그리고 숨돌릴 틈도 없이 일하는데, 너한테서 메시지 한 통 왔다고, 그게 좋아서 힘든 것도 다 잊고 즐거웠어. 나한테 온다던 네 다짐이 변하지 않았으니까, 그럼 나는 내 자리에서 일하면 되겠다, 하고. 그냥 즐겁게 일했어.”

그때는 어렸다. 그게 최선이라 생각했고, 그것만이 희찬을 돕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그 선택이 희찬을 더욱 아프게 했다는 것을 깨닫고 보니 홀로 견뎌 낸 희찬이 대견할 지경이었다.

“근데 이제 쉴래……. 쉬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견딘 희찬의 마지막 말은 ‘쉬고 싶다’였다.

좋아하는 일을 했고, 본인 스스로 즐거웠다고 말할 만큼 행복했던 일이 끝내 독이 발린 화살이 되어 돌아온 것에 희찬이 모든 것을 놓으려 했다. 그 모습이 참 아팠다.

도준은 희찬의 옅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희찬아.”

“…….”

“사람이 무력해지는 순간이 있어. 힘을 내서 뭐든 해 보면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힘이 안 날 때. 다른 사람들은 그냥 견디래, 견디다 보면 이겨 내 진대.”

“…….”

“근데, 힘을 꼭 내야 할까 싶어. 힘들면 쉬어, 그냥 쉬어. 힘 안 내도 돼. 그거 좀 쉰다고 사라질 거라면 힘을 내도 안 되는 거야. 내가 견뎌 봤는데 견디는 거 별로 안 좋더라. 어쩌면 도망치는 게 옳은 선택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네가 힘들면 그냥 쉬어.”

도준이 다정한 손길로 희찬의 머리를 매만졌다. 이내 위로를 받은 듯, 희찬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엉엉 울어 버렸다.

제게 닥쳐온 암담함에 좌절하는 희찬은 보고 싶지 않았다. 정신이 건강한 희찬이었으니 자신을 탓하며 우물을 파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닥쳐오는 어둠에 빠져들게 내버려 두고 싶지는 않았다.

도준은 하염없이 희찬을 달래었다. 그 힘들었던 때와 같은 상황에 놓인 지금, 지금은 그때와 같은 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이제는 잘 안다.

언젠가 희찬이 했던 말대로, 이제 그때와는 다른 사랑을 해야 한다. 조금 더 성숙하고 어른스럽게 대처해야 하고, 어떤 풍파 속에서도 서로를 놓지 않아야 한다. 혼자 두면 두 배로 힘들 우리였으니, 그저 꼭 붙어 함께 감내하는 것이 올바른 사랑일 것이다.

“사랑해, 희찬아.”

도준이 새삼 용기를 내어 사랑을 고백했다. 지금 이 순간, 이 사랑이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뭐든 해 보고 싶은 작은 마음이었다.

“고마워, 도준아. 사랑해.”

이윽고 희찬에게서도 물기 젖은 축축한 고백이 돌아왔다.

그에 갑자기 힘이 솟았다. 전광진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어떻게든 짓밟아 놓겠다고 다짐은 했어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막막하던 차였다. 하지만 지금은 무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장희찬만 있으면 정말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솟구쳤다.

<‘이도준♡’장희찬 침묵, 떠들썩한 팬덤…… 동성애 스캔들에도 ‘핫’하다>

<이도준♡장희찬, 과도한 사생활 침해에 몸살…… 아웃팅의 위험성>

<장희찬♡이도준 팬덤 성명서 발표 “한 사람의 민감한 사생활 알 권리 없다, 언론사는 사과하라”>

하루가 꼬박 지났지만, 온라인 전역은 여전히 떠들썩하기만 했다. 이도준과 장희찬의 이름은 온 포털을 뒤덮었고, 두 사람이 참여했던 모든 작품이 다시 떠올라 스트리밍 사이트를 뜨겁게 달구었다.

희찬의 SNS 팔로워가 급증했다. 더불어 두 사람의 소식을 함께 다루는 커뮤니티의 회원 수도 폭발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지난날, 도준과 함께 전광진을 만나고 돌아와 밤새 두 사람의 안위를 걱정한 대표의 입에서 한숨이 터졌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동성애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바뀐 지금 두 사람을 향한 시선은 생각보다 훨씬 너그러웠다.

덕분에 두 사람의 스캔들을 둘러싼 게시글마다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이 유교 국가에서 동성애 자체를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동성애를 떠나 두 사람의 사생활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는 의견이 첨예하게 부딪쳐 싸웠다.

연예계에는 이전에 없던 물결이 일었다. 이제는 스토킹과 같은 불법 촬영물로 인한 스캔들에 이골이 난 사람들이 도준과 희찬의 일로 하나둘씩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착하고, 성실한 두 사람을 좋게 보던 사람들이 두 사람을 두둔하고 나선 것이었다.

이 부분만 보면 분명 다행이었지만, 두 사람이 이미지에 타격을 입은 것은 분명했다. 도준이야 진작부터 모든 광고가 이한 그룹이 붙어 있었고, K액터스에서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니 그의 대우가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희찬이 문제였다.

작은 소속사에서는 희찬을 둘러싼 논란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는지 그에 대한 후속 조치를 조금도 하지 않는 듯했다. 도준의 기사는 K액터스에서 다 막아 내는 중이었지만, 희찬의 기사는 무분별하게 쏟아져 금방 온갖 루머가 떠돌았다.

처음엔 희찬이 있는 곳에서 알아서 잘 처리하겠거니 내버려 뒀었다. 하지만 전광진을 만나고 돌아왔을 때 보니 아주 가관이었다. 결국 희찬을 향한 악의적인 보도를 모두 막은 것도 K액터스였다.

대표가 한숨을 푹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도준은 몇 개 잡혀 있었던 화보 촬영 일정이 취소되었고, 차기작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던 영화 제작사에서도 보류 의사를 전해 왔다.

“이도준이 이 정도면 장희찬은…….”

장희찬은 모든 광고 계약이 불발되었을 거고, 도준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예정되었던 차기작들도 줄줄이 취소되었을 것이다.

[나는 희찬이가 안쓰러워.]

어느 날 임 감독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 그의 말대로 도준의 주변에는 도준을 꼭 붙들고 놓지 않을 사람들이 가득했지만, 희찬은 이 일마저 홀로 버텨야 했다.

그게 참 안쓰럽다.

시계를 본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첫 보도를 터뜨린 언론사에 손해배상과 명예훼손에 관한 내용증명 발송 지시를 마친 대표의 손에는 노란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서류 봉투 속에는 도준에게 내걸었던 조건과 같은 조건의, 이름만 ‘장희찬’으로 바뀐 계약서가 들어 있다. 이제는 일어났을 도준과 희찬이니, 집으로 가 희찬과 계약을 하려는 심산이었다.

안쓰럽고 안타까운 두 사람을 어떻게든 제 손으로 지켜 내겠다는 의지가 도사렸다, 이제는 정말로 아버지라도 된 양, 이상한 책임감이 생겨버렸다.

“네, 부회장님.”

차에 올라 곧장 출발하려 했던 대표에게 이선재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기꺼이 전화를 받아 든 대표는 잔뜩 화가 서린 이선재의 목소리를 마주할 수 있었다.

― 대표님, 제가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도준이한테 가려는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도준을 둘러싼 스캔들에 화가 난 것은 이한 그룹도 마찬가지였다. 기사를 보기 무섭게 당장 전화를 걸어 왔던 이선재는 ‘어떻게 이런 일을 가만히 당할 수만 있냐’며 도리어 대표를 나무랐었다.

이한의 이름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보여 주겠다더니, 이선재의 행보는 거침없었다. K액터스에서 기사를 내리면, 이한 그룹에서는 언론사에 압박을 가했다. 유명 언론사는 물론, 이제 막 기사 몇 개 쓰기 시작한 작은 언론사에까지 ‘이도준에 관한 기사 작성 시 선 보고 후 보도’ 지침을 내렸다.

그건 굳이 이한과 도준의 관계를 밝히지 않아도 가능한 압박이었다. 이도준은 이한 그룹의 오랜 모델이었고, 이도준의 이미지가 망가질 경우 그에 대한 타격을 감수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전하는 엄포에 언론은 벌벌 떨었다.

표면적으로 그럴듯한 명목을 가져다 댔다고 해도, 업계에서 말이 돌지 않을 리가 없는데 그조차 신경 쓰지 않는 이선재는 제 아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부모의 모습이었다.

― ……제가 가도 될까요. 도준이가 싫어할 텐데.

그런 일을 해 놓고도 이 사람은 아직도 도준의 눈치만 보고 있다. 그게 답답해, 대표가 저도 모르게 정곡을 찔렀다.

“아버지 아니십니까.”

― …….

“지금이 아니면 언제 가시려고요. 이럴 때 다독여 주고, 위로해 주는 게 부모입니다.”

― 주소 남겨주십시오, 지금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대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도준이 누굴 닮아 그렇게 조심스럽나 했더니, 제 아비를 똑 닮았다.

대표는 차를 몰기 전, 이선재에게 도준의 집 주소를 남겨 두고, 도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난밤 잘 잤냐는 인사는 할 수 없다. 잠은 좀 잤냐고 물어볼 수도 없다. 대신 할 수 있는 말은…….

“일어났어?”

고작 이게 다였다.

― 네, 일어났어요.

일어났다는 걸 보니 자긴 잔 모양이다. 대표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터뜨렸다.

“지금 희찬이한테 계약서 가지고 갈 건데, 희찬이 좀 어때.”

― 희찬이 아파요.

“아파?”

― 어제 자기 전에 많이 울었거든요. 몸살 났어요.

음……. 부회장한테 오지 말라고 해야 하나.

― 그리고…… 희찬이가 일 안 하고 싶대요.

이해한다.

8년을 쉬지 않고 일하며 쌓아 온 명성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은 말 그대로 공든 탑이 통째로 흔들리는 기분일 것이다. 더불어 그 이유가 처음 데뷔 때 저를 옭아맸던 것과 같은 이유라면 더더욱 그러지 않을까.

도준의 말에 대표는 아무 말 없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제대로 된 위로를 건넬 수는 없지만, 그래도 계약은 해야 했다. 그래야 장희찬을 지켜 낼 명분이 생기니 말이다.

“일단 가서 얘기하자.”

― 네.

“아, 그리고 도준아. 이한 그룹에서…….”

― ……네.

이한 그룹의 이름만 꺼냈을 뿐인데 도준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전광진 일로 너를 좀 보고 싶어 하시거든. 집으로 같이 갈까 하는데 괜찮겠어? 희찬이도 같이 얘기 들으면 더 좋을 거 같고.”

대표가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도준의 양해를 구했다. 말없이 부모가 있는 자리에 자신을 불러냈다는 오해를 하고 냅다 강원도까지 도망쳐 버린 그였으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 네, 그러세요.

의외로 돌아오는 대답이 흔쾌하다. 대표는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통화를 마친 대표가 속도를 올렸다.

이제껏 어른들이 뻗치는 악랄한 손길에 데일 만큼 데인 두 사람이었으니, 이제는 선한 손을 잡아 보라는 말도 할 것이다. 그리고 대표도 그와 같은 뜻을 보일 생각이었다.

대표와 전화를 마친 도준이 희찬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밤새 땀을 뻘뻘 흘려 가며 끙끙 앓았던 희찬의 숨이 가지런해진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밤사이 울다가 아프길 반복하던 희찬은 이제야 겨우 편하게 잠든 듯했다. 그런 와중에도 마주 잡은 손은 꼭 쥔 채로 놓지 않았었다.

“대표님 오신대?”

“응. 근데 너 아프면 그냥 누워 있어, 내가 얘기 듣고 알려 줄게.”

“아냐, 같이 봐야지…….”

“……이한 그룹 사람들도 온대.”

희찬의 뜨거운 손이 도준의 뺨에 닿았다. 그가 느끼는 착잡함은 말하지 않아도 잘 안다는 듯, 부드럽게 볼을 매만지는 손길은 한없이 다정했다.

이도준과 닮은 사람. 이도준이 보자마자 제 아버지인 것을 알아봤다는 사람은 어떤 느낌일까. 이렇게 잘생긴 이도준이 한 명 더 있을 수 있나.

아픈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들어 비죽비죽 웃음이 났다.

“좀 괜찮아?”

“응, 목말라.”

“물 가져다줄게. 대표님은 금방 오실 텐데, 별로 안 멀어서.”

“이한 그룹도 금방 올걸. 회사 얼마나 멀다고.”

“하…….”

도준이 희찬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물을 가져다주겠다더니, 일어나다 말고 도로 드러눕는 도준의 모습에 희찬이 힘없는 손으로 도준의 등을 토닥토닥 다독였다.

이래저래 참 심란하겠지.

그건 저도 마찬가지라, 별다른 위로의 말은 하지 않았다.

분명 어제부터 오늘까지 끊이지 않고 괴로운 현실이었으나 이상하게 편안했다. 적어도 이도준은 그때처럼 저를 떠나지 않았고, 도리어 ‘떠나지 말라’ 말했다. 연인 사이에 당연한 그 말이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그게 위안이 되고 힘이 되어 마음을 든든하게 붙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의 온기가 가득한 집에 방문자의 향이 얹혔다. 서류 뭉텅이를 가져온 대표를 뒤따라 들어온 이선재는 도준이 지내는 집의 풍경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이런 곳에서 지내는구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우가 되어 번듯한 집을 갖고 지내는 도준의 모습마저 이선재에게는 아픈 부분이었다.

도준을 처음 만났던 날, 이선재는 도준이 살아온 행적을 모조리 훑었다. 보육원에서 지내다 고등학교도 진학하지 않고 군대부터 다녀온 것, 교통편도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달동네에서 지냈던 것, 배우의 꿈을 꾸고 있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매일 시간을 쪼개어 열심히 일했던 것들 말이다.

건실한 청년으로 자란 것이 감사했지만, 그 숱한 시간들 속에 함께하지 못했다는 것이 마음 아팠다. 또래와 달리 편한 길은 주어지지 않아, 구불구불 휘어진 길을 따라 걸었을 그의 걸음이 괴로웠다.

그 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전광진의 손에 붙잡혀 당했던 일을 알고서는 전광진에 관한 정보를 모았고, 그의 손발을 자청하여 그를 돕는 경, 검 고위부의 숨통을 모조리 끊어 놓았다. 그 모든 일은 선재에게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쌓아 온 권력이 이런 식으로 도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 서글펐다. 애초에 겪지 않아도 되었을 일들을 겪고, 또래의 다른 청년이라면 생각도 못 할 일들을 견뎌 낸 도준의 모습이 사무쳐 이를 갈고 또 갈았다.

이내 식탁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은 사람들은 그 누구도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쉽게 입을 열 수 없는 주제였기에 망설임만 가득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준은 제 옆에 앉은 희찬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그의 상태를 확인하며 눈으로 대표와 이선재를 번갈아 쳐다봤다. 이 어색한 적막을 깨려면 자신이 입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쉽지는 않았다.

“안녕하세요, 이런 모습으로 뵈어 아쉬워요.”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희찬이었다. 다 잠긴 희찬의 목소리에 대표가 인상을 찌푸렸다. 건강하기로는 이도준 둘째가라면 서러울 장희찬이 스트레스가 터지긴 한 모양이었다.

대표는 자신의 집처럼 익숙한 공간에서 능숙하게 찬물과 약을 꺼내 희찬에게 건넸다. 희찬은 그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갯짓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도준이가…… 자기랑 똑같이 생겼다고 그러던데, 정말 닮았어요.”

“……너 목소리가 안 좋아. 들어가서 잘래?”

“아니, 여기 있을래.”

희찬이 도준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었다. 웅웅 울리는 머릿속이 무거워 도무지 가눌 수 없었다. 도준은 제게 안겨 들어오는 희찬을 따뜻하게 안고 단단한 어깨를 다독였다.

가만히 두 사람을 살펴보던 이선재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준비해 온 자료들을 식탁 위에 올린 후, 도준이 편하게 볼 수 있도록 밀어 주었다. 그에 도준의 검은 눈동자가 뚝 떨어져 하얀 종이 위에 빼곡하게 적힌 글씨들을 읽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제가 취할 조치부터 알릴게요.”

“네.”

“저는 전광진을 상습 도박 및 마약, 세금 탈루 등 그동안 저질렀던 범죄 사실을 모두 검찰에 직접 고발할 예정입니다. 그 안에는 희찬 배우가 겪었던 불공정 계약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광진이 그쪽에도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하던데요.”

도준 대신 희찬이 입을 열었다. 희찬이 이전에 선배를 통해 접했던 정보를 전하자, 이선재가 문제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전광진의 뒤를 받쳐 주는 라인보다 이한 그룹이 쌓아 온 라인이 더 단단합니다. 전광진 손, 발 자르는 건 문제가 아니죠.”

하긴, 저기는 이한 그룹이고, 전광진은 끽해 봐야 연예계에서 덩치 좀 있는 엔터테인먼트 대표에 불과하다. 희찬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광진은 아직 도준이와 제가 무슨 관계인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만…….”

이선재가 조심스레 도준을 쳐다봤다. 도준은 그런 남자의 눈에 응하지 않고, 계속 서류만 훑어 읽었다. 어려운 단어가 즐비한 문장들은 대체로 접하기 어려운 말들이었다. 그래도 대충 그게 무얼 뜻하는지는 유추가 되어, 갖가지 죄목을 붙여 그를 벌하겠다는 의도 정도는 파악했다.

이선재가 다시 희찬을 바라봤다. 이선재의 검은 눈동자는 도준이 화를 낼 때와 비슷한 모양으로 단호한 빛을 머금었다.

“저는 도준 배우와의 관계가 밝혀지는 것에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이선재의 칼로 잘라 내는 듯한 단호한 음성에 비로소 도준이 눈을 들어 상대를 바라봤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눈에 가득한 화는 오로지 전광진을 향했다.

거리낄 것이 없다니.

문득 몇 사람들이 저를 두고 수군거렸던 ‘이한 그룹 사생아’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한 그룹은 고소할 생각이 있다면 돕겠다는 의사를 보였었다.

‘사생아’라는 것은 이한 그룹에게도 달갑지 않은 단어일 테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사생아가 아닌 친자식이니,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다는 그의 말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도준의 눈빛이 일렁거렸다. 수년 전 받았던 명함을 버리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 명함을 전광진에게 주지 않았더라면. 그때 내가 연락을 했더라면 이 일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도사려 머리가 무거워졌다.

“도준아.”

“네.”

이번엔 대표가 도준을 불렀다. 줄곧 남자에게 향했던 도준의 시선이 대표에게 향했다.

대표는 전광진을 향해 살의를 드러내던 도준을 떠올렸다.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살인을 저지를 듯했던 도준의 섬뜩한 눈빛을 잊을 수 없다. 어느 쪽으로 복수를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그게 그릇된 방법으로 흘러가는 것은 볼 수 없었다. 대표가 도준을 향해 자신의 진심이 묻어나는 단단한 눈빛을 보였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고, 네가 그랬잖아.”

“…….”

“어둠을 어둠으로 이기려 하지 마. 너희가 가진 선함이 무기가 될 거고, 빛으로 어둠을 걷어 내. 나머지는 우리가 도울 테니까.”

심장이 목에서 뛰는 기분이었다. 하도 거칠게 뛰는 탓에 입 밖으로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도준이 거친 숨을 겨우겨우 가다듬었다. 도준의 허리에 팔을 두른 채로 도준에게 몸을 기대었던 희찬이 도준의 손을 맞잡았다.

“돕게 해 주세요. 돕고 싶습니다.”

대표의 말 뒤에 남자의 간절함이 덧붙었다. 여전히 도준에게 말을 놓지도 못하는 남자는 단정한 말투로 간곡함을 전했다.

그게 고맙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다.

도준은 괜히 마른침을 삼키며 희찬을 바라봤다. 희찬의 옅은 눈에는 열이 가득했지만, 도준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그보다 더 뜨거운 사랑이 서렸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희찬의 말이 혼란스러운 도준을 보듬었다.

“하지만 네가 하지 않으면, 내가 죽일 거야.”

희찬이 덧붙이는 말에 도준의 눈동자에 힘이 서렸다. 도준이 제 손을 맞잡은 희찬의 손을 세게 쥐었다.

“우리가 뭘 하면 됩니까.”

도준의 단정한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도준을 바라보던 모두의 시선이 크게 뜨였다.

드디어 이도준이 마음을 먹었다.

드디어 전광진에게 복수할 기회가 왔다. 나를 옭아매고, 이도준을 밀어낸 그 사람의 파멸을 볼 때가 드디어 왔다.

도준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은 희찬도 마찬가지였으므로, 그의 입가에도 미소가 피었다.

이선재는 두 사람이 웃음을 나누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도준이 하는 사랑의 형태에 말을 얹을 생각은 조금도 없다. 애초에 몸까지 버려 가며 지킨 사랑인데, 더 이상의 첨언이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그저 행복하면 됐다.

이선재는 편안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느긋한 모습을 보였다. 도준의 허락도 떨어졌는데, 조금도 급할 것이 없었다.

“일단은, 좀 쉬면서 사랑만 하세요.”

사뭇 결연했던 도준의 말에 돌아온 답이 간결하다. 두 사람은 비장한 각오와 달리 가벼운 대답에 눈을 같은 모양으로 휘둥그레 떴다.

“쉬면서 어른들의 보호를 받아 보세요. 이제껏 죽어라 견뎠으니까. 방패 뒤에 숨는 것도 해 보라는 말입니다.”

그저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좋게 돌려 말하는 것일 텐데 울컥 감정이 치솟는 것은 왜일까.

도준은 이선재를 마주할 수 없어, 시선을 떨군 채로 희찬의 손가락을 매만졌다.

어른들의 보호에 숨어 보아라.

감히 바라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평생 경험할 수 없는 ‘부모 있는 사람’의 특권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늦게나마 그간 하지 못했던 부모 노릇을 해 보겠다는 듯한 이선재의 말에 가슴이 먹먹해져 갔다.

“그 후에, 직접 복수할 기회를 주겠습니다.”

이선재의 뚝 떨어지는 목소리에 희찬이 도준의 가슴에 얼굴을 감췄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든든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도준은 가슴에 닿는 물기를 느끼고 희찬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제껏 잘만 쉬어온 숨인데 갑자기 숨통이 탁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껏 쉬어 왔던 숨은 모두 거짓이었다는 것처럼 트인 숨은 상쾌하고 또 달가웠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가벼워진 분위기를 느낀 이선재가 입 안에서 맴도는 사과를 무겁게 건네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도준의 짙은 시선과 희찬의 옅지만 강단 있는 눈빛이 동시에 이선재에게 향했다.

이선재는 울컥울컥 치미는 감정을 겨우 추스르며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고의든 아니든 혼자 두어서 미안합니다. 모르고 지내서 미안합니다. 이제야 부모 노릇이라도 해 보겠다고, 철 지난 권력을 행사해서……. 이조차 미안합니다.”

“…….”

“그래도, 그래도…….”

결국 이선재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젖어 갔다. 적막이 도사린 공간에 이선재가 큰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가득 울렸다.

도준은 제게 사과를 건네는 이선재의 모습을 차분하게 지켜봤다. 처음 마주했을 때는 그저 원망하기 바빴는데, 그가 건네는 사과는 큰 위로로 닿아 목이 뻣뻣하게 메어 왔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한시도 잊은 적 없습니다. 진심이에요. 다 늦은 변명일 수도 있습니다, 근데…….”

“…….”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직후부터 지금까지, 한시도 사랑하지 않은 시간이 없습니다. 힘들 때 옆에 못 있어 줘서, 힘든 줄도 모르고 그저 그리워만 해서,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몇 번이고 거듭 사과하는 이선재는 진심으로 뉘우치는 모양이었다. 그의 사정을 전부 알 수는 없었지만, 그에게서는 오롯한 진심이 묻어나 결국 도준의 눈가에도 눈물이 맺혀 들었다.

도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어 애꿎은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희망원에 있는 줄 알았으면 한번 가 볼걸,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도준 배우 생각하며 선물을 보냈어요. 몇 년이 지났으니 몇 살이겠지, 일부러 그 나이 대에 맞는 선물을 보냈습니다. ……그렇게라도 이도준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

“하지만, 하지만 직접 한 번 가지 않은 것도 미안합니다. 갔더라면 알았을 텐데. 그럼 희찬 배우도, 도준 배우도 그런 일을 겪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제가, 다 미안합니다.”

차분히 이선재의 말을 듣던 희찬이 다시 눈물을 머금었다.

그래, 그러고 보면 어린이날도 아닌 크리스마스에 꼭 고가의 선물이 쏟아졌다. 원장님은 그를 두고 ‘산타클로스가 보내는 선물’이라고 가볍게 얘기했지만, 그 선물들은 이선재의 말대로 ‘우리’ 나이대에 알맞은 선물이었다.

일곱 살 크리스마스에는 원생 모두가 학교 책가방을 선물로 받았었다. 열한 살 크리스마스에는 모두가 게임기를 받았었고, 열네 살 크리스마스에는 값비싼 브랜드의 패딩 점퍼를 받았었다. 열일곱 살 크리스마스에는 270mm 사이즈의 운동화가 들어왔었다. 보육원에서 그 사이즈의 신발을 신을 수 있는 사람은 이도준과 장희찬, 단둘뿐이었다.

그 산타클로스는 결국 도준을 추모하는 도준의 부모였던 모양이다. 그렇게라도 죽은 아들의 생일을 기리고 싶었던 애달픈 마음이었나 보다.

희찬이 아랫입술을 세게 짓이겨 물었다. 그건 도준도 다르지 않았다. 불끈 말린 도준의 주먹에는 시퍼런 핏줄이 불룩 솟아 어지럽게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이제껏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무어든 제가 도울 겁니다. 이미 다 커 버렸지만, 그럼에도 앞으로는 무조건 나설 겁니다.”

“아…….”

“부모의 권리를 주장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두 사람 다 우리의 자식으로 누릴 것은 누려 주세요.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걸 이도준과 장희찬 두 사람의 행복에 쓸 생각입니다. 이번 일도 도울 수 있게 해 줘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안이 되어서야 도움을 주게 된 것도 미안합니다.”

도준의 과거를 접한 이선재에게 장희찬은 이도준 못지않은 애틋한 아들이 되어 버렸다. 그 오랜 시간을 함께했고, 이도준의 유일한 빛이라는 그 아이를 이선재는 기꺼이 제 아들처럼 품기로 했다.

끝까지 미안하다 전하는 이선재의 말에 여러 가지 울음소리가 얽혀 들었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흐느낌은 과거의 통탄과 현재의 안도를 동시에 머금고 있었다.

분명 서러움이 가득한 공간이었으나 그 온도는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어른의 진정한 사과로 위로를 얻은 도준은 제 몸 구석구석의 잔뜩 굳어 있던 근육들이 일제히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힘든 일을 겪을 때면 누군가에게 기대어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득바득 이겨 내느라 온몸에 힘을 주고 견뎌 내기 바빴다. 그렇게 일분일초를 허투루 보내지 않았던 과거에 대한 사과에 전신이 느슨하게 풀어지는 것 같았다.

도준은 구태여 어떠한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이선재는 그의 마음이 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초면이나 다름없는 아들이었지만, 이상하게 그의 마음을 알 것만 같아 다시 눈물이 치밀었다.

하지만 이제는 일어나야 했다. 아들과의 눈물겨운 재회보다 그와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수렁에서 건져 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이선재는 얼굴을 축축하게 적신 눈물을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일단…….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마음 내키면 언제든지 찾아와요. 그때 다시 얘기해요. 기다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도준에게 닿았던 다정한 시선이 이번에는 희찬에게 향했다. 도준에게 보이는 것과 조금도 차이가 없는 따뜻한 어른의 눈빛이 희찬을 부드럽게 보듬었다.

“희찬 배우도, 건강하게 지내요. 마찬가지로 찾아오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와도 됩니다. 도준이 혼자 있을 때 옆에 있어 줘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그 부분에서 우리 부부한테 희찬 배우는 도준이나 다름없이 귀한 사람이에요.”

“……네, 감사합니다.”

할 말을 마친 이선재는 현관을 나서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며 검찰청을 언급했었다.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일을 진행하겠다는 듯한 그의 기세는 위풍당당하기 그지없었다.

그에 도준이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아마 우리가 했다면 저렇게까지는 못 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빼곡하게 들어찼다.

“울지 마, 응?”

“으응…….”

도준의 품에 안긴 희찬은 여전히 우는 중이었다. 자꾸만 눈물이 비집고 나와 도무지 멈추지를 않았다.

그저 이 모든 상황이 고마웠다. 착하게 살면 다 돌아온다더니, 그게 다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인가 싶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아득함은 이제 그만 알고 싶었다. 그런 저들에게 손을 내민 어른들은 아득함이 아니라, 헤쳐 나갈 길을 밝혀 주겠다고 했다.

그게, 참 든든했다.

“그럼 이제 내 차례. 희찬아, 이거 계약서야.”

도준이 이선재가 두고 간 서류를 정리하기 무섭게 이번에는 대표가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도준의 품에서 벗어난 희찬이 힘없는 손으로 서류 봉투를 열어 계약서를 읽었다.

“안 하고 싶어 한다는 말 들었어. 근데 나는 너를 놓치는 게 너무 아쉽다. 놓을 수가 없어. 너처럼 재능 있는 배우를 어떻게 놀게 내버려 두냐.”

“…….”

“당장 일하자는 거 아니야, 쉬고 싶은 만큼 쉬었다가 다시 천천히 해 보자는 거야.”

“……네.”

대표는 꾸준히 말을 얹었다. 마치 자신의 간절함을 알아 달라는 듯한 그 모습은 도준과 계약할 때의 모습과 같았다. ‘잘 팔릴 물건의 독점권을 갖고 싶은 장사치’라고 자신을 소개하던 대표를 떠올린 도준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대표가 잠시 도준을 쳐다보다가 다시 희찬을 바라봤다. 희찬은 아무 말 없이 계약서를 읽는 중이었다.

“도준이랑 같은 조건이야. 계약 기간 없이 서로 누구든 먼저 계약 파기를 원할 때는 언제든지 놓아주는 걸로.”

“…….”

참, 이도준다운 계약 조건이다, 싶었다.

희찬이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업계에 미스터리로 도는 도준의 계약 조건이 이거였구나. 하루하루가 위태로웠을 도준에게 더없이 반가운 조항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제게도 그 조항이 붙었다는 것은 지금 내 모습이 그때의 이도준처럼 불안해 보인다는 걸까. 희찬 마른 입술을 적셨다.

거절할 이유가 사라졌다. 어차피 지난밤 도준을 붙잡고 서러움을 토해 내며 씻겨 간 염증이었다. 하기 싫다는 생각을 걷어 내고, 천천히 생각해 봐야겠다고 다짐한 차에 어른들이 달려들어 도움을 건넸다.

우리가 간직해 온, 우리가 그려온 꿈을 어른들이 지켜 주겠다고 하는데 가만히 앉아서 그 꿈을 쳐다만 볼 수는 없었다. 이내 희찬이 볼펜을 쥐고 제 이름 옆에 서명을 휘갈겼다.

우리가 편하게 꿈을 이룰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주겠다는데, 가만히 그 세상이 만들어지도록 지켜만 보고 싶지는 않았다. 이왕이면 도준과 함께 나서서 주체적으로 세상을 꾸려 가고 싶었다. 그게 무슨 모양이든 말이다.

“희찬아, 빙빙 돌아왔지만, 앞으로 잘 부탁한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내 두 사람이 손을 맞잡았다. 어느새 눈물을 거둬 낸 희찬은 한결 편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해사한 미소를 피웠다. 비로소 도준도 환하게 웃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기어코 어둠이 닥쳐 빛을 위협한다면, 주변의 부산물을 에너지 삼아 더 강하게 빛을 발하면 될 일이다.

감사하게도 에너지가 되어 주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그저 빛만 내라고 한다면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어릴 때와는 다른 빛을 가진 우리였으니 말이다.

도준은 소파에 앉아 이선재와 대표, 희찬을 차례로 곱씹었다. 희찬은 도준의 뺨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혼자 생각하지 마.”

“응?”

“또 다른 데로 튈까 봐 불안해.”

“안 가. 네 옆에만 있을 거야.”

도준이 희찬을 마주 안았다.

이제는 도망칠 이유도, 생각도 없다. 불안해하는 희찬을 얼싸안고, 소파에 몸을 누인 도준은 다시 열이 오르는 희찬을 부드럽게 보듬었다.

이내 두 사람의 몸이 퍼즐처럼 딱 맞아떨어졌다. 서로를 놓을 생각이 없는 두 사람은 팔에 힘을 주고서 서로를 껴안았다.

사랑이라는 틀 안에서 서로를 아끼는 두 사람은 한 폭의 수려한 그림, 그 자체였다.

*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었음에도, 두 사람이 선택한 것은 휴식이었다. 꾸준히 도준과 희찬의 소식을 찾는 팬들의 성화가 있었으나, 희찬은 구태여 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사진이라도 한 장 올려 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자신을 돌봐야겠다는 생각만 간절했다. 찰나였지만 염증을 느꼈고, 맥이 탁 풀릴 정도로 허무함이 몰려왔으니, 조금 쉬어 줘야 다시 일을 시작하든, 조금 더 쉬든 갈피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사이 온 포털을 장식했던 장희찬과 이도준의 얼굴이 사라졌다. 어느 사이트를 들어가도 꼭 볼 수 있었던 두 사람의 사진이었지만, 이제는 두 사람을 모델로 한 광고는 모두 사라진 채였다.

대중의 반응이 나쁘지 않다고는 하나, 그건 ‘예상보다’ 나쁘지 않은 것일 뿐, 좋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들을 옹호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컸고, ‘과하다’는 의견이 절대적이긴 해도 역시나 동성애에 대한 시선이 마냥 관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눈이 닿을 만한 곳에서 순식간에 지워진 희찬과 도준은 무수히 많은 심경의 변화를 겪었다. 괜찮은가 싶다가도 불쑥불쑥 화가 치밀어 울기도 했고,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화를 냈다가 또 어느새 기력을 다해 축 늘어져 있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에 초연해진 두 사람은 어른들이 말했던 대로 일단은 사랑이나 하기로 했다. 나중에 복수할 기회를 주겠다고 했고, 어른들의 방패 뒤에 숨는 것도 배워 보라 했으니 그들의 말대로 그들이 알아서 하게끔 내버려 두고, 머리나 식히려는 심산이었다.

두 사람은 웃통을 훌렁 깐 채로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희찬은 도준의 다리 사이에 손을 넣어 허벅지 안쪽과 사타구니를 주물렀다. 자극적으로 구는 희찬 덕에 도준이 이따금 인상을 찌푸렸다.

“아, 너 손 빼.”

도준이 허리를 비틀었다. 페니스 끄트머리를 문지르며 자극하는 희찬의 손길이 불편했다. 그에 희찬이 두 눈을 짓궂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왜.”

“왜?”

“응, 왜.”

“아, 이거에 집중하라고.”

도준이 얄궂게 구는 희찬의 콧방울을 콱 깨물었다. 희찬은 갑자기 닥친 봉변에 인상을 한껏 찌푸리고 잘생긴 코를 매만졌다.

입술을 삐죽거리던 희찬은 다시 도준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다시 함께 들여다보던 것에 집중했다. 두 사람의 눈이 향한 곳에는 태블릿 PC가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생애 처음으로 함께하는 여행을 계획하는 중이었다. 요 며칠 전례 없는 휴가를 보내며 뒹굴거리던 희찬의 입에서 기어코 한숨이 터져 나왔었다. ‘뭘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라는 희찬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따분함이 녹아 있었다.

그에 도준이 희찬에게 여행을 제안했다. 미루고 미루던 여행이나 하자는 도준의 말에 희찬은 앞도 뒤도 재지 않고 당장 태블릿 PC를 켜, 각종 여행 사이트를 들여다봤다.

목적지, 일정, 숙소 그 어느 것도 정하지 않았지만, 희찬의 머리가 까딱까딱 리듬을 타며 움직였다. 그가 느끼는 설렘과 즐거움이 한눈에 보이는 몸짓에 도준이 희찬의 머리에 손을 턱, 얹고서 기분 좋게 웃었다.

“여행 가는 거 좋아?”

“완전 신나.”

희찬이 들뜬 목소리를 내며 다리를 달랑거렸다. 도준은 그런 희찬이 마냥 귀여운 듯, 어느새 검은 뿌리가 나오기 시작한 하얀 머리카락을 소중히 쓰다듬었다.

“너는 비행기 잘 타?”

“응.”

“진짜? 사람 많은 곳 싫어하잖아.”

“그래서 휴가철은 피해서 다녔었는데, 지금은 어딜 가도 시선 몰릴 거니까……. 아예 제일 빠른 비행기 타고 나가 버릴까? 사람 없을 때.”

“그럴까.”

희찬이 도준의 품에 안기듯 도준의 가슴 아래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근데 나 해외여행 처음 가 봐.”

설렘이 가득 도사린 희찬의 눈이 밝게 빛났다. 초롱초롱하고 또렷한 눈빛에 도준이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너는 그동안 돈 벌면서 여행 한번 안 가 보고 뭐 했냐.”

“그러니까. 뭐 하려고 그렇게 일만 했나 몰라. 나도 좀 놀면서 일할걸.”

“이제부터 나랑 자주 다녀.”

도준이 몸을 지탱하던 팔에 힘을 풀고, 희찬의 옆에 발라당 드러누웠다. 천장에는 커튼을 걷어 낸 큰 창을 통해 환한 빛이 드리우는 게 보였다. 희찬이 머리 위로 팔을 둘러 도준의 볼을 콕 찔렀다.

“너는 진짜 의외다. 집에만 처박혀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희찬의 말에 도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지금에야 밖으로 돌아다니는 일이 드물다지만, 희찬과 함께 살 때는 하루라도 나가지 않으면 좀이 쑤셔 견디지 못했는데 말이다. 당연히 요즘의 모습보다 옛날이 더 익숙할 희찬에게서 의외의 말이 나온 것이 신기했다.

“나도 이 바닥에 있으면서 들은 게 있거든? 너 완전 무슨 은둔형이라고 소문이 자자해. 나 그래서 이도준이 동명이인이 있나, 했잖아.”

“그래?”

“너 진짜 아무것도 안 듣고 살았구나.”

“뭘 굳이 들어. 좋은 얘기면 앞에 와서 했겠지.”

도준이 개의치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릴 때부터 저를 두고 수군거리는 목소리에는 이골이 났다. 고아에다가 가진 것도 하나 없는 저를 부러워하다 못해 시샘하고, 그러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말을 붙이는 것도 이제는 진저리가 났다.

어른이 되면 그러지 않을 줄 알았는데, 어째 이 연예계 바닥에는 그런 사람들만 모아 놓은 듯 모였다 하면 다른 사람의 뒷얘기를 해 댔다.

도준은 주로 그 이야깃거리의 중심이었고, 당연히 아무 반응하지 않았다.

반면에 살가운 성격에 모두와 잘 어울리는 희찬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일도 없었다. 마당발로 유명한 데다가, 누구와도 척 지는 일이 없고, 혹여 누군가 자신의 뒤에서 다른 말을 한다면 앞에서 톡 쏘아붙여 줬으니 말이다.

덕분에 도준의 안 좋은 소문을 잔뜩 들으며 지내 온 희찬과 달리, 도준은 희찬의 칭찬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었다.

“하긴. 아무튼 의외라고, 너. 비행기도 당연히 안 탈 줄 알았는데.”

“그냥……. 집에만 있으면 자꾸 그 아저씨들이 생각났거든.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외국에 나가는 게 낫더라고. 거기는 호텔도 한국이랑은 향이 다르니까.”

“그래?”

“응, 병원에서 선생님이 여행을 한번 다녀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해서 갔었는데 괜찮더라. 그 뒤로 작품 끝나면 꼭 여행 갔다 왔었어.”

“기특하네, 원래 환자는 의사 말 되게 안 듣잖아.”

희찬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서로가 가진 상처에 아파하지도 않았다. 나아갈 길이 분명하고, 나아갈 힘이 있으니 이제는 서로를 응원만 하기로 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도준은 차차 밝은 침실이 익숙해졌다. 희찬 역시 조용한 공간에서 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도준은 환한 빛과 소음 속에서도 편하게 잘 수 있었고, 희찬은 잔잔한 어둠과 사근대는 적막이 도사린 곳에서도 새근새근 고른 숨을 쉬었다.

두 사람은 족쇄와 같았던 과거에서 벗어나, 한 발 내디딘 걸음이 못내 뿌듯했다. 이제는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지도, 그 차이에 아파하지도, 서로에게 미안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한 번 실패한 선택과는 다른 사랑을 하고자 부단히 노력할 뿐이었다.

희찬이 꼼지락꼼지락 몸을 옮겨 도준의 가슴에 뒤통수를 댔다. 어느새 버릇이 되어 그의 행동은 지독하게 자연스러웠다.

“근데 나는 대체로 말을 좀 잘 듣는 편이잖아?”

“네가 무슨 말을 잘 들어. 너처럼 말 안 듣는 놈이 어디 있어.”

“내가 무슨 말을 안 들었어, 나처럼 네 말 잘 듣는 놈은 또 어디 있는데?”

도준이 손가락에 힘을 주고 희찬의 볼을 쿡 찔렀다. 그에 희찬이 아프게 찌르는 도준의 손을 쥐고 곧게 뻗은 손가락을 세게 앙, 물었다.

“아!”

도준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희찬의 머리를 밀어냈다. 짓궂은 희찬의 입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는 새빨간 치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이도준 내 거라고 자국 남았네.”

“하는 말이 그럴듯해, 아주.”

도준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희찬의 말이 나쁘지 않아, 오물거리는 빨간 입술에 입을 맞췄다.

쪽, 경쾌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 입술이 아쉽다. 희찬이 한 번 더 도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핀란드 가고 싶어.”

“오로라 보러?”

도준이 희찬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흔들거리는 손가락에 희찬의 얇은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춤을 췄다.

“응. 근데 지금은 여름이라 백야가 있어서 오로라 못 본대.”

“그럼 겨울에 갈까?”

“겨울 좋지. 그럼 이번에는 조금 서늘한 데로 갈까? 여기는 더우니까.”

“나는 아무 데나 좋아.”

“시-원한-고옷-.”

희찬이 아저씨처럼 말에 음을 붙여 흥얼거렸다. 천장을 향해 태블릿 PC를 치켜든 희찬은 사진만으로도 설레는 관광지를 바쁘게 눌러 댔다.

그러다 찾은 곳이 블라디보스토크였다. 시기상 우기이기는 했지만, 적당히 서늘하고 한국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것이 마음에 들었다. 아시아 속의 유럽이라 불린다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사진을 켰다. 비행기로 얼마 걸리지도 않는다는데, 한국과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 것이 참 신기했다.

“여기는 어때?”

희찬이 도준의 눈앞에 화면을 들이밀었다. 찬찬히 살펴보던 도준도 좋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 봤어?”

“아니.”

멀리 가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최대한 멀리 떠나곤 했던 해외여행이었다. 당연히 비행기로 네 시간 이상 떨어진 거리로만 찾아다녔기에 블라디보스토크는 생각도 해 본 적 없었다.

“그럼 여기 가자, 땅땅.”

희찬이 명쾌하게 결론을 내렸다. 홀가분해 보이는 희찬의 말간 얼굴 곳곳에 도준이 입을 맞추며 사랑을 전했다.

오전 시간 내도록 여행지만 골랐다. 나머지는 천천히 하자며, 태블릿 PC를 앗아 든 도준은 꼼지락거리는 희찬이 제 품에 파고드는 것을 품은 채로 화면을 들여다봤다.

태블릿 PC 화면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있었다. 유명한 음식점과 관광지가 나열된 곳의 끝에는 도준의 눈을 끄는 소개 문구가 하나 있었다.

「동네가 작아 걸어서도 충분히 다 둘러볼 수 있답니다^^.」

그게 참 마음에 들었다.

데뷔와 동시에 유명세를 거머쥔 두 사람이었다. 당연히 마음껏 거리를 활보할 수도 없었다. 쫓아오는 사람들의 시선은 마치 움직이는 CCTV 같았고, 의도치 않게 논란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자연히 밖으로 도는 일도 줄었었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괜찮지 않을까.

알아보는 사람은 훨씬 적을 것이고, 누군가 알아본다고 하더라도 한국에서처럼 집요하게 쫓아오지는 않을 것이니 말이다.

손을 잡고 거리를 활보할 수는 없다고 해도, 마스크나 모자 없이 희찬과 나란히 거리를 거닐 생각을 하니 그저 기분이 좋아졌다. 그저 상상만 했을 뿐임에도 청명한 숲에서 콧바람을 쐬는 듯한 상쾌함이 몰려왔다.

어느새 도준의 눈에도 설렘이 가득했다. 한 팔로 희찬의 얼굴을 안고, 머리에 입을 쪽쪽 맞추며 태블릿을 내려놓던 도준의 손이 멈칫했다.

<장희찬, ♡이도준과 한솥밥. K액터스로 이적>

도준이 진지하게 화면을 훑었다. 희찬이 계약을 마친 것은 벌써 며칠이나 지난 일이었는데, 이제야 기사가 터진 것을 보면 회사에서도 대중의 반응을 예민하게 살피는 듯했다.

쏟아져 나오는 기사 덕에 두 사람의 이름이 금방 실시간 이슈에 올랐다. 얕은 한숨을 터뜨린 도준은 스크롤을 올려 사람들의 실시간 반응을 살폈다. 기사가 터진 이후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실시간 반응이었지만, 희찬의 일이라면 또 무시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역시 곽아버지 ㅠㅠㅠㅠ 킹짱 품고 가네ㅠㅠㅠㅠㅠㅠ

* * *

ㅠㅠㅠㅠㅠ너무 잘됐고 그저 감사하고.. 킹짱 잘 쉬고 있겠지 ㅠㅠ

* * *

곽아버지 킹짱 무사하면 당근 좀 흔들어주세요ㅠㅠㅠㅠㅠㅠㅠ

* * *

으 게이새끼들 품고 가는 게이액터스도 알만하다;;

⤷ 나는 당신의 항문에 장우산을 넣고 펼칠 것이다

⤷ 피뎊 땄고 고소장 기다려;

⤷ 으 연애 한 번 못해본 니 와꾸 알만하다;;

⤷ 사귄다는 거 스스로 밝힌 것도 아니고 강제로 아웃팅 당했는데 피해자한테 할말 아닌듯

* * *

킹짱 걍 이참에 푹 쉬고 차기작으로 화려하게 컴백했으면ㅠ

⤷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예 뻔뻔하게 같이 활동하면 좋겠다

⤷⤷ 22222 같이 광고도 찍고 좀 뭐든!!!!! 동성애 그거 불법도 아닌데

* * *

그래도 둘 다 진짜 착하게 살았나보다 아웃팅 터지고 추가 폭로 하나도 없잖음 오히려 업계사람들 미담만 태백산맥이고 곽아버지가 짱희찬 바로 데려가는 거 보면 진짜 열심히 살았나봄

⤷ 222 진짜 착하게 살았나봄

⤷ 뫄뫄배우가 착한 애들 좀 내버려두라고 스토리도 올렸더라

⤷⤷ 우리 킹짱 선밴님들한테 예쁨받네ㅠ 내가 다 뿌듯하누

* * *

칭찬 스티커 얘기하면서 옥신각신하는 킹짱 본 게 엊그제 같은데…

⤷ ㅅㅂ 말나온 김에 정주행하러간다..

⤷ 나도 눈부항 메이킹이나 보련다

빠르게 바뀌는 실시간 반응은 보다 보면 쏙 빨려 들어가곤 했다. 이번에도 역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중의 반응을 살피던 도준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희찬이 이전에 넌지시 알려 줬던 곳으로 추정되는 두 사람을 좋아하는 팬 커뮤니티까지 흘러 들어 와 버린 후였다.

도준은 생각보다 많은 회원 수에 놀라고, 생각보다 적나라한 반응에 또 한 번 놀랐다. 공개된 곳이어서인지, 서로의 언행을 단속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또 직설적으로 자신들의 감상을 털어놓는 공간이 문득 위안이 되었다.

걱정하는 눈으로 태블릿 PC를 들여다보던 도준이 얕은 웃음을 피웠다. 화면을 끄고, 기지개를 켜자 개운함이 몰려왔다. 아직 언제쯤 다시 일을 시작할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지금은 딱히 하고 싶다는 마음도 들지 않았고, 그저 희찬과 꼭 붙어 행복만 새기고 싶었다.

그렇다고 일을 아예 그만둘 것도 아니다. 희찬과 함께 꿔 온 꿈이었고, 어렵게 이룬 꿈이었으니 쉽게 놓아줄 생각도 없다. 도준은 왜인지 두렵기보다 기대가 되는 미래에 콩닥콩닥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과거의 올무를 벗어 낸 마음은 가벼웠고, 미루고 미뤘던 여행 계획을 세우는 현재는 즐거웠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미래가 기대되는 것 또한 당연할 것이다.

***

<꼬리가 길면 밟힌다…… 전광진, 이번엔 빠져나갈 구멍 없어>

대표가 한숨을 터뜨리며 기지개를 켰다. 이한 그룹의 압박과 검찰의 발 빠른 대처로 전광진은 곧장 구속 기소되었다.

전광진은 자신이 구속될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 이선재의 말대로 이도준과 이한 그룹의 관계는 조금도 알지 못한 전광진은 온갖 발악을 하며 구속을 피하려 애를 써댔다.

하지만 상대는 이한 그룹이었다. 이선재는 어렵지 않게 경찰과 검찰을 압박하고, 전광진이 법꾸라지가 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들을 모조리 엮어 구속시켰다.

그러는 중에도 도준의 아픈 과거는 조금도 스며 나오지 않았다. 물론 이한 그룹이 개입했다는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세심한 이한 그룹은 혹시나 도준과 희찬에게 피해가 갈까 신중을 기하는 모양이었다.

이한 그룹은 마치 일상의 일을 처리하듯 대수롭지 않게 모든 것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관리했다. 대한민국 최고 재벌가,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이한 그룹은 그 이름이 누굴 위해 존재하는지도 단단히 보여 주는 모양새였다.

“에휴…….”

분명 속이 시원한 처리였지만,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이미 무수히 한 후회였지만, 이 조치가 보다 더 빨리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도무지 지워 낼 수 없었다.

인터넷은 또 한 번 후끈 달아올랐다. 전광진에게 당해온 무수히 많은 사람이 발 벗고 나서서 자신들의 피해 사실을 알리기 시작했다. 거기다 전광진이 도준과 희찬의 스캔들을 악의적으로 터뜨렸다는 사실까지 알려져, 전광진은 도리어 폭탄을 맞은 격이 되었다.

그동안 K액터스는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물밑 작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전광진의 일을 터뜨려도 아무도 동조하지 않거나, 오히려 도준과 희찬을 공격하고 들 것을 대비해 일명 ‘댓글 부대’를 준비해 두기도 했었다.

하지만 뿌린 대로 거둔다고 했다.

착하게 살아온 두 사람에게는 든든한 지원이 붙었고, 뿌린 죄가 많은 전광진은 악으로 돌려받았다.

귀찮게 손쓰지 않아도 알아서 일어난 사람들 덕분에 대표는 한결 수월하게 자신의 맡은 바를 해낼 수 있었다.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던 대표가 고개를 돌려 대표실에 앉아 있는 도준의 매니저를 쳐다봤다.

“애들 출국했대?”

오늘 두 사람은 해외여행을 간다고 했다. 단둘이 가는 여행은 처음이라며, 내내 호들갑을 떨던 도준을 떠올린 대표가 인자하게 웃었다.

“네, 오늘 아침 비행기로 나갔어요.”

“잘 나갔대? 사람들 안 몰렸고?”

“좀 몰린 거 같은데, 딱히 신경 안 쓰는 거 같아요.”

“다행이네. 휴대폰 보지 말고 그냥 재밌게 놀다가 오라고 해.”

“대표님은 형이 얼마나 휴대폰을 안 보는지 모르시는 거예요?”

저 새끼가.

도준에 대해 자신이 더 안다는 양 구는 매니저가 퍽 우습다. 헛웃음을 터뜨린 대표는 편안하게 몸을 기대며 앞으로 해야 할 일을 헤아렸다.

일단은 희찬의 이전 소속사에서 희찬의 매니저를 데려올 생각이다. 매니저가 바뀌면 익숙해지는 데에 시일이 걸리기 마련이니, 희찬이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최상의 조건을 마련해 주려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대표가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들여다봤다. 이한 그룹에서 보내온 서류에는 ‘광고 진행 기획서’라는 글이 가지런히 적혀 있었다.

이한 그룹은 K액터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도준과 희찬을 함께 품기로 한 모양이었다. 희찬과 도준을 함께 모델로 쓰겠다는 ‘공동 모델 제안서’에 대표는 울다가도 웃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한 그룹에서는 역대 최대 규모의 광고를 꾸려 왔다. 희찬과 도준을 주역으로 하여, 한 편의 드라마처럼 이한 그룹의 모든 계열사 제품을 등장시키는 형태의 광고는 촬영 분량부터, 광고 구좌까지 어마어마한 스케일을 자랑했다.

이도준과 장희찬, 두 사람의 행복에 가진 것을 모두 투자하겠다던 이선재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대단한 기획이었다. 이미 잘 날고 있는 두 배우였지만, 그 아래에 바람이라도 실어 주듯 디딤돌을 대어 주는 그들의 모습에 가슴이 아렸다.

이한 그룹은 자신의 핏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뚜렷한 자신의 빛을 가진 두 사람이 빛을 잃지 않도록 에너지 자원이 되어 주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는 양 하는 행동은 기꺼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도준의 입으로 그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지 못했다. 대표는 조금 누그러진 것 같아도 먼저 나서지 않는 도준의 심정이 못내 밟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부모에 대한 원망은 사그라진 듯했지만, 이제껏 혼자 커 온 이도준이 부모의 개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래서 이 기획을 전달해야 한다는 생각이 적잖은 부담으로 다가와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의자에서 삐걱 소리가 날 정도로 몸을 젖혔다. 대표는 혀를 튕겨 똑, 소리를 냈다. 답답한 마음에 자꾸만 한숨이 비집고 나왔다.

하여튼 재벌들이란…….

“에이씨…….”

어린 이선재와 그보다 더 어린 이도준을 게임판 위에 올려 두고 정치 놀음을 한 어른들을 향해 철 지난 원망만 마음 가득 도사렸다.

“근데 대표님은 그럼 원래 알고 계셨던 거예요?”

“뭘.”

“도준이 형이랑 희찬이 형이요. 저는 진짜 두 분 그냥 친한 친구인 줄 알았는데…….”

머리가 복잡한 와중에 큰 웃음이 터졌다.

그래, 저 맹한 매니저는 기사가 터지던 날 배신에 젖은 얼굴로 찾아왔었다. 어떻게 그런 걸 숨길 수 있냐며, 그럴 줄 알았으면 더 열심히 지켜 줬을 거라는 허무맹랑한 말을 했었다.

그래서 편하다던 도준의 말도 떠올랐다. 눈치가 없어, 일머리도 조금 느리지만 구태여 다른 사람의 사생활에 하나하나 참견하지 않는 모습이 좋다고 했었다.

“그걸 눈치 못 채는 너도, 참.”

대표의 핀잔에 매니저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말해 주지 않는데 어떻게 아냐는 모습에 대표도 덩달아 어깨를 으쓱거렸다.

“너 도준이 쉬는 동안 괜히 연락해서 귀찮게 하지 마. 도준이도 복잡해.”

“네에.”

“희찬이한테도 연락하지 말고.”

“희찬이 형은 번호 몰라요.”

한참 매니저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대표는 문득 매니저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 비틀었다.

이 매니저는 왜 내 사무실에 와 있는가.

여기는 일반 사무실이 아닌 대표만의 집무실, 대표실인데 말이다. 의아한 눈으로 매니저를 쳐다보자, 매니저가 빙그레 웃었다.

“근데 너 왜 여기 있냐?”

“아, 아까 사무실 갔다가 대표님 마주쳐서 졸졸 쫓아왔는데 그냥 들여보내 주셨어요.”

저거 진짜 미친놈 아닌가.

무슨 할 일이 있어 들어와 있는 줄 알았더니, 그건 또 아닌 모양이다. 대표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얼른 나가라는 손짓이었으나, 저 눈치 없는 매니저는 그것도 모르고 가까이 다가왔다.

“아니, 가라고.”

“아, 네. 퇴근하겠습니다!”

“그래, 괜히 회사 나오지 말고 너도 쉬어. 도준이 돌아오면 일 많이 해야 해. 이거 보이지?”

대표가 매니저의 눈앞에 종이 뭉치를 펄럭거렸다. 매니저는 놀랍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서류를 자세히 살펴봤다.

“헉, 이거 전부 도준이 형 일거리예요? 그래도 일이 계속 있네요?”

“야, 네가 데리고 다니는 배우 우리나라 톱에 있는 배우야. 일거리가 끊일 리가 있냐?”

“맞다, 맞다.”

“아, 빨리 가. 너 있으니까 머리 아파.”

“네! 대표님 파이팅하세요!”

매니저가 우렁찬 인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대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다시 서류를 찬찬히 살펴봤다.

희찬과 도준은 줄곧 쏟아지는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리를 누볐다. 한국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마음에 들었고, 코끝에 닿는 낯선 도시의 향이 괜한 설렘을 안겼다.

모자도, 마스크도 없이 거리를 활보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한국 공항에서는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 면세점도 둘러보지 못하고 곧장 비행기에 오르기 바빴던 것과 달리 이역만리 타국 땅은 자유 그 자체였다.

두 사람은 마주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여유를 만끽했다. 힐끔힐끔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고, 낯선 외국인이 어색한 발음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들렸지만, 구태여 돌아보지 않았다.

한차례 관광을 마친 두 사람은 물에 빠진 생쥐 꼴로 호텔에 도착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에 수건을 얹고, 곧장 욕실로 향해서는 서로의 몸에 비누 거품을 발라 주며 손장난도 했다.

“여기는 팬케이크를 주식으로 먹는대. 내일 아침에 먹으러 나갈까?”

“그래, 그러자.”

희찬은 도준에게 머리를 맡긴 채로 휴대폰을 뒤적거렸다. 머리를 말려 주는 도준의 손이 다정해 금세 노곤함이 몰려왔지만, 여행을 향한 설렘이 더 컸다.

팬케이크 종류를 둘러보는 희찬의 눈이 점점 커졌다. 세상에 팬케이크가 이렇게 다양한 줄도 몰랐고, 이렇게 맛있어 보이는 것도 처음이었다. 종일 방방거리며 신난 기색을 숨기지 않는 희찬의 모습을 보는 도준은 즐거움을 만끽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어려울 때 돈을 모아 신발을 사 줄 것이 아니라 데리고 여행이나 다닐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와, 여기는 꿀도 유명하대.”

“그래?”

“꿀이 무슨 종류가 이렇게 많아? 신기해!”

“나도 볼래, 같이 보자.”

이윽고 두 사람이 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희찬은 제 휴대폰 화면을 도준의 앞에 밀어 주며 도준을 얼싸안았다.

화면에는 정말 많은 종류의 꿀이 펼쳐져 있었다. 가뿐히 50여 가지는 되어 보이는 양에 도준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숱하게 해외여행을 다니면서도 관광지라거나, 지역의 특산물을 알아본 적은 없었다. 잡아둔 숙소 반경 500m 내외를 활보하던 것에 불과했던 지난 여행들과 달리 희찬과 함께하니 이것저것 볼 것이 많았다.

희찬은 그새 다른 관광지를 찾았다. 지도를 켜 거리를 살펴보더니 이내 들뜬 목소리를 냈다.

“이따가 여기 가 보자.”

“꺼지지 않는 불?”

“비 와도 안 꺼진대. 여기서 사진 찍자.”

희찬의 손가락을 따라 화면을 훑던 도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방금 막 씻었는데 다시 나가 비를 맞을 생각에 조금 찝찝해졌지만, 아무렴 어떠랴. 뭐든 때를 놓치면 후회로 남기 마련이었으니, 할 수 있을 때 다 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에휴.”

별안간 희찬의 입에서 가벼운 한숨이 터졌다. 그에 도준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희찬을 바라봤다.

“웬 한숨이야?”

“그냥……. 쉬는 거 좋은데, 찝찝하고 그래. 이렇게 쉬어 본 적이 없어서, 이렇게 쉬어도 되나 자꾸 의심만 생겨.”

“쉬어도 돼. 언제는 안 하고 싶다며.”

“그거는 투정이지. 안 하고 싶을 리가 있어? 너랑 같이할 수 있는데.”

그럼 그렇지, 장희찬이 일을 그만둘 리가 없다.

도준은 희찬을 품 안 가득 안고서 쪽, 쪽 귀엽게 입을 맞췄다. 푹신한 침대에 무게가 실리니 매트리스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화사한 조명이 방 안 곳곳을 빠짐없이 비추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바로 옆에서 온기를 나누는 희찬이 있어 행복했다.

도준은 희찬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고 속닥속닥, 은밀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조용히 속삭였다.

“불안해하지 마. 우리도 그냥 기분 전환하는 거야, 이참에.”

희찬이 도준의 뺨을 어루만졌다. 도준의 차분한 목소리에 불편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졌다. 드문드문 울적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걸 안다.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예상도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 감정의 기복도 그저 익숙해져야 할 일 중 하나겠지, 막연하기만 한 것이었지만 제 옆에는 도준이 있으니 뭐든 할 수 있을 거라는 용기가 생겼다.

“전광진 기사 떴네.”

“응…….”

“전광진 말야, 부모님이 힘 좀 쓰신 것 같은데 연락 안 드려 봐도 돼?”

“……번호 몰라.”

도준의 목소리에는 많은 고민이 묻어났다. 든든함과 고마움, 그리고 설움이 뒤섞여 제법 복잡해 보였다.

“아빠한테 물어봐 줄까?”

“아빠?”

“대표님. 우리 아빠잖아.”

“아 맞다, 그랬지.”

희찬이 생긋 웃었다. 분위기를 환기시켜 보려는 듯 부러 가볍게 전하는 그의 말에 도준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아냐, 나중에 내가 연락할게.”

도준이 희찬을 안은 채로 뒹굴, 몸을 굴렸다. 그들을 향한 앙금이나 원망은 지난 사과로 얼추 씻겨 나갔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무거운 그들의 존재였다.

그런 도준의 마음을 아는 건지, 희찬이 도준의 품에 안긴 채로 예쁘게 웃었다. 그의 잘생긴 이마를 매만졌다가, 말랑한 볼을 쥐고 주무르기도 하며 손끝에 담긴 애정을 전하는 희찬은 제법 정성스러웠다.

도준이 그 손을 쥐고 하얀 손가락 끝에 입을 맞췄다. 섬섬옥수보다 가지런한 손가락을 자랑하는 희찬의 손끝에서 쪽, 쪽 귀여운 소리가 났다.

“나중에 꼭 연락드려, 알겠지?”

“응. 일단 지금은 아니고…….”

“응. 네가 하고 싶을 때 해.”

이도준은 느리다.

저 같으면 벌써 그동안 힘들었던 것을 털어놓고, 사이를 회복했을 테지만 도준은 다르다.

그를 익히 잘 아는 희찬이 도준의 뺨에 입술을 댔다. 가만히 볼을 내어 준 도준이었지만, 그의 눈이 희찬에게 향하지는 않았다.

“이제 얘기 안 할게, 울적해지지 마.”

희찬이 도준의 볼에 입술을 댄 채로 웅얼웅얼 말을 건네었다. 손으로는 도준을 소중히 감싸 안고, 토닥토닥 등을 다독였다.

희찬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도준의 뺨에 입술을 댄 채로 뻐끔뻐끔 다양한 이야기를 전했다. 이도준이 좋아하는 축구 이야기, 일하며 겪었던 재미난 에피소드 같은 것들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준의 표정이 개운하게 갰다. 희찬을 향해 씨익, 근사한 미소를 보이자 희찬도 덩달아 웃으며 도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가자.”

이내 두 사람이 동시에 침대에서 일어나 겉옷을 갖춰 입었다. 호텔 방을 나서는 두 사람의 걸음은 경쾌하기 그지없었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걷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도준과 희찬은 정처 없이 그저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가게가 있으면 들어가 구경하기도 하고. 그러다 주변 사람들이 떠오르는 물건이 있으면 선물을 사기도 했다.

눈에 띄는 예쁜 카페가 있으면 괜히 들어가 빵 하나 더 사 먹었다. 사진으로 찍어 두고 싶은 건물이 있으면 곧장 휴대폰을 들어 사진으로 남겼다. 분위기 좋은 건물이 보이면 다짜고짜 상대를 세워 두고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 배가 고프면 근처 음식점을 검색해 밥을 먹었다.

타국에 있다 보니 휴대폰도 절로 멀리하게 되었다. 출국 날, 웬만하면 휴대폰을 보지 말라며 신신당부하던 대표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건 다 부질없는 걱정이었다.

두 사람은 정말로 편안하게 휴가를 보냈다. 밤이고, 낮이고 눈이 맞으면 몸을 섞었다. 그게 침대 위이건, 욕실이건, 소파 위이건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았다. 포지션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달라졌다. 그건 구태여 합의가 필요한 일도, 순서가 정해진 것도 아니었다. 그저 본능이 이끄는 대로, 욕구에 충실하게 응할 뿐이었다.

당장 눈앞에 닥친 일은 막막했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겠지만, 구태여 우울한 것들을 생각하지 않는 두 사람은 그저 행복했다.

그렇게 차곡차곡 예쁜 시간과 사랑을 쌓은 두 사람이 귀국길에 올랐다. 알아보는 사람 몇 없는 곳에서 온갖 여유를 만끽했으니, 이제는 돌아가 해야 할 일을 할 때가 되었다.

가뿐한 마음으로 즐겁게 한국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쏟아지는 이목을 느껴야 했다.

모자며, 마스크며 얼굴을 가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착용하고, 정체를 숨겼는데 어떻게 알아챈 걸까.

눈썰미가 좋은 사람들은 금세 도준과 희찬을 알아보며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이도준 아니야?”

“장희찬도 같이 있는 거 같은데?”

어딘가에서 터진 목소리는 금세 소란으로 번졌다. 사람들의 시선과 커지는 웅성거림을 체감한 두 사람은 얼른 입국장을 빠져나가려 했다.

집요하게 쫓아오는 시선을 무시하고, 가까이 다가오려는 것을 뿌리쳤다. 괜히 다른 곳을 쳐다보고, 더 딱 달라붙어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은 난감함을 느끼는 중이었지만, 애써 여유로운 척 자신들이 느끼는 초조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빨리 가자.”

“응.”

걸음을 재촉하는 두 사람의 시선은 줄곧 바닥을 향해 있었다. 떳떳하게 고개를 쳐들고 당당하게 행동해도 나무랄 사람 하나 없었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게 닿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여기저기서 응원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푹 쉬라는 말도 들렸고, 잘생겼다며 환호하는 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전부 불편한 소리에 불과했다. 예전 같으면 환하게 웃으며 응수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도준과 희찬은 카메라 셔터 소리에 그저 아랫입술을 잘근 씹어 물었다.

“형!”

바쁘게 게이트를 빠져나가는 도준과 희찬을 누군가의 밝은 목소리가 붙잡았다. 언제 도착한다고 알리지도 않았는데, 게이트 앞에는 매니저가 마중 나와 있었다. 그게 이렇게 반가울 수 있을까. 도준은 어느 때보다 반가운 매니저의 모습에 화색을 보였다. 도준의 옆에 선 희찬은 머리 위로 손을 붕붕 흔들어 댔다.

“어?”

“조현이도 있네?”

“아, 이름이 조현이였지.”

“그래, 내 매니저.”

도준의 매니저 옆에는 희찬과 오래간 호흡을 맞춰 온 희찬의 매니저도 함께였다. 어느새 K액터스로 둥지를 옮긴 건지, 희경과 함께 서 있는 모습이 제법 친근해 보였다. 그에 반가움을 느낀 희찬의 입가에도 미소가 피었다. 마스크에 가려져 있었지만, 조현은 희찬이 자신을 반가워한다는 것쯤이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두 매니저는 금방 자신의 배우에게로 달려가 손에 들린 캐리어를 빼앗다시피 가로챘다. 그러는 동안 주변에는 환호가 빼곡하게 자리했다. 뒤늦게 상황을 인식한 매니저들은 능숙하게 인파를 가로지르며 두 배우를 보호했다.

“어떻게 알고 왔어?”

“대표님이 형들 오면 공항 난리 날 거라고, 아침부터 가 있으라고 하셨어요.”

“그럼 연락하지. 도착하는 시간 알려 줬을 텐데.”

“대표님이 절대 연락하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아, 그래도 조현 씨랑 공항 탐방했어요. 재밌던데요?”

성격이 좋은 건지, 일하는 걸 좋아하는 건지, 아무튼 좋은 일이라 도준이 희경의 등을 쓰다듬었다.

“이번 달 월급 두 배로 달라 그래, 알겠지. 내가 주라고 그랬다 그래.”

“그럼 형 정산 덜 받는 거 아니에요?”

“그거 준다고 나 굶어 죽는 거 아니야. 꼭 얘기해.”

“네!”

주차장으로 향하는 희경의 걸음이 경쾌해졌다. 예상하지 않은 보너스를 얻게 되었으니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렵사리 도착한 주차장이었지만, 그곳도 공항과 사정이 다르지는 않았다. 이미 무수하게 몰린 인파는 어떻게 알았는지 희찬의 자차와 도준이 타는 승합차를 에워싸고 있었다.

시선을 의식한 두 사람은 공항에 올 때와 달리 희찬은 매니저와 함께 자차에, 도준은 매니저가 몰고 온 승합차에 몸을 실었다. 차 문을 닫고, 커튼까지 친 후에야 도준이 한숨을 푹 쉬었다.

“여행은 어떠셨어요?”

“좋았어. 캐리어에 네 선물도 있어.”

“헉. 형, 제 선물 사셨어요?”

“너 술 좋아하잖아, 그치.”

매니저가 눈을 반짝거렸다. 도준과 함께 지낸 지난 몇 년, 도준은 좀처럼 제 곁을 내어 주지 않았다. 덕분에 가까우면서도 먼 관계, 이도준을 잘 안다고 자부했지만 그만큼 모르는 관계로 지내었는데 그런 이도준이 건네는 선물이라니. 처음 받는 것이었고, 생각보다 저를 꿰뚫고 있는 도준의 모습이 놀랍기도 했다.

“나 때문에 술도 자주 못 마시는데, 집에서 마셔. 스케줄 없을 때.”

“형……. 진짜 감동이에요.”

“……응, 징그럽다. 근데 어디로 가는 거야?”

“회사요, 대표님이 형들 바로 회사로 잡아 오라고 하셨어요.”

“누가 보면 도망이라도 간 줄 알겠어.”

도준이 편안하게 시트에 몸을 기댔다. 비행기는 얼마 타지도 않았는데, 공항에 도착하기 무섭게 긴장부터 했더니 전신이 찌뿌둥했다. 그저 몸을 시트에 기댔을 뿐인데, 매니저는 도준이 잘 것을 예상했다. 차에 오르면 꼭 안대를 뒤집어쓰고 자던 도준이었으니, 이번에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얼레리 도준은 자지 않았다.

“형, 안 주무셔도 괜찮아요?”

“네, 안 주무셔도 괜찮아요.”

“웬일이에요? 차에서 맨날 주무셨잖아요.”

“나 요즘 잘 자거든. 괜찮아.”

사랑의 힘은 대단하다더니.

오랜만에 만난 도준은 정말로 편안한 모습이었다. 성격 자체가 느긋하고 여유로운데다가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 탓에 평소라고 크게 굳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의 모든 감정의 기저에는 예민함 또는 까칠함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예민함은커녕, 다정하다 느껴질 정도였으니 매니저가 혀를 내둘렀다.

제자리를 찾은 이도준은 엄청나게 안정적이었다. 오랜 시간 병원을 다녀도 잠을 자지 못해 힘들어하던 도준이었는데, 그저 희찬을 다시 만났다는 이유로 잠을 되찾았다는 게 참 신기했다.

도준은 빠르게 바뀌는 차창을 살피며 창 유리를 톡톡 두드렸다.

회사로 돌아가면 그동안 처리하지 못했던 일들을 처리해야 할 것이고, 그사이 새롭게 들어온…….

까지 생각한 도준이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새롭게 들어온 일거리가 있을 리가 있나. 아무리 인기가 많은 이도준이라도 그간 대중들이 마음대로 붙여 둔 국민 남친이니, 뭐니 하는 이미지가 다 없어졌을 테니 새로 들어온 건 없을 거다.

“후으…….”

한숨이 절로 나왔다. 희찬과 붙어 지내며, 울적해 하는 희찬을 달래느라 애써 무시해 왔던 씁쓸함이 밀려왔다.

고지에 머물다 보면 언젠가 내려가야 할 때가 온다는 것쯤이야 익히 알고 있었다. 처음엔 미련 없이 시작한 일이어도, 열심히 하는 만큼 따라오는 결과가 뿌듯해 점점 욕심이 생기기도 했었다.

최대한 오래 머물렀으면 좋겠다,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던 중 미끄러지는 것이 아닌 아예 벼랑 끝으로 떨어진 기분은 비단 희찬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도준이 착잡한 심정을 애써 감추며 두 볼에 빵빵하게 바람을 불었다. 문득, 창밖의 바쁜 풍경이 저와는 동떨어진 세상처럼 낯설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있는 곳에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새삼스레 부러웠다.

왜 우리만 순식간에 달라진 상황을 겪어야 하는 거지. 어릴 때부터 유독 자신들에게만 모진 세상이 미워졌다.

세상을 탓하는 동안 회사에 도착했다. 부드럽게 주차를 마친 차에서 내린 도준은 희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차피 집에 갈 때는 희찬과 함께 희찬의 차를 타고 가면 될 일이었으니, 아침부터 고생한 매니저는 이만 쉬어도 될 것 같았다.

주차장에서 희찬을 만나 대표실로 올라가는 내내 무수히 많은 시선이 두 사람을 뒤따랐다. 평소와 다름없이 친절한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었지만, 그 시선 속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희찬이는 회사 건물 처음 와 보지?”

“네. 건물 예쁘네요! 로비에 도준이 엄청 크게 걸려 있는 거 봤어요.”

“그 옆에 자리 빈 것도 봤어?”

“어, 그랬나?”

“응, 네 자리야.”

아하하!

희찬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도준의 사진이 크게 걸려 있었던 로비가 떠올랐다. 이도준을 가진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회사답게 어마어마하게 큰 포스터를 내걸었던 로비에는 다른 배우들의 사진도 함께였다. 그리고 도준의 옆에 제 자리를 내어 주겠다는 대표의 넉살이 꽁꽁 언 마음을 녹이는 듯해, 희찬이 싱글벙글 웃었다.

“K액터스에 드래곤볼 모으는 기분이야. 왕건이 두 명 건졌는데 동네방네 자랑해야지.”

“대표님 진짜 주책이세요.”

“어, 알겠고 그럼 바로 본론 해 볼까.”

도준의 핀잔에 대표가 표정을 가다듬고 두 사람 맞은편에 앉았다. 대표의 손에는 두툼한 서류가 들려 있었다. 그를 마주하자마자 도준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터뜨렸다. 그저 서류만 봤을 뿐인데 괜히 머리가 지끈거렸다.

“웬 한숨? 이거 좋은 건데.”

“뭐예요?”

도준 대신 희찬이 대표에게서 서류를 받았다.

“광고 계약서야. 이한 그룹 거고, 희찬이도 같이 계약하는 걸로.”

“…….”

“이건 기획안. 한번 볼래?”

두 사람의 울대가 동시에 들썩거렸다. 톡 튀어나온 사과 조각이 위아래로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던 대표가 느슨하게 몸을 풀고 두 사람을 마주했다.

희찬이 계약서를 쥐고 읽으면 읽을수록 도준이 기획안을 훑었다. 서류상의 기획은 막대한 자본이 투자되어 이제껏 듣도 보도 못한 스케일을 자랑하고 있었다. 분명 차분한 마음이었는데, 기획안을 읽는 동안 조금씩 숨이 거칠어졌다.

도준의 심경 변화를 빠르게 눈치챈 희찬이 계약서를 내려놓고 도준의 손에서 기획안을 앗았다. 도대체 뭐가 있길래, 의아한 눈으로 기획안을 훑던 희찬의 눈도 점점 크기를 더했다.

“이게 광고라고요?”

“대단하지?”

가볍게 대단하다,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미 광고 계약을 체결한 구좌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는 기획안에 머리가 띵, 울리는 것 같았다. 이제껏 이런 광고는 본 적이 없다. 그게 설령 이한 그룹의 광고였다고 해도 말이다.

이한 그룹의 모든 계열사가 동원되어 드라마 형태로 만들어지는 광고는 각 방송사의 인기 프로그램 앞뒤를 전부 장식할 예정이라고 했다. 서울은 물론, 전국 각지의 큰 전광판에 송출될 예정이며, 이후에도 공격적인 마케팅을 지속하며 이한 그룹의 이미지를 쇄신할 예정이라고 적혀 있었다.

“너희한테 광고 제의가 그것만 들어온 건 아니야. 저기 보이지?”

대표의 말에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대표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봤다. 대표의 책상으로 향한 시선에는 산처럼 쌓인 서류 더미가 놓여 있었다.

“저거 다 너희한테 들어온 거야.”

“…….”

“너희 이미지가 업계에서 아주 바닥을 친 건 아니야. 오히려 좀 더 신선해졌다고 할까. 대본도 뭐 계속 들어오고.”

대표의 말에 도준도 희찬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언젠가 대표가 했던 말대로 대표도, 이한 그룹도 장사치들이었다. 대중을 상대로 상품을 판매하는 지독한 사업자들 말이다. 당연히 스타성과 능력을 따질 것이고, 어느 모델을 써서 얼만큼의 이득을 뽑아내느냐 하는 것이 그들의 가장 큰 관심일 것이다.

다른 제의는 모두 거절하고, 이한 그룹의 광고 제의만 승낙한 대표 역시 가장 큰돈을 벌 수 있는 선택지를 고른 것이라는 것도 잘 안다.

아는데, 진짜 잘 아는데…….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르다.

[자식으로 누릴 것은 누려 주세요.]

간절히 청하던 이선재의 목소리가 떠오르자 마음이 무거웠다. 이미지가 나쁘지 않다는 말도, 오히려 두 사람의 관계가 좋은 매개체가 되었다는 말도, 일거리가 여전히 쏟아져 들어온다는 말도 하나같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럼 언제부터 촬영 시작해요? 이거, 광고요.”

“계약 체결하면 곧장. 그쪽에서는 벌써 촬영 준비하는 거 같아.”

머리가 둥둥 울렸다. 어느새 정신을 가다듬은 희찬은 여러 가지 궁금한 점을 대표에게 물었지만, 도준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였다.

부담스럽다고 해야 할까, 무겁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복잡한 마음에는 고마움과 억울함, 서러움이 뒤죽박죽 뒤섞여 가슴이 답답해졌다. 편법을 써서 성공할 생각은 해 본 적 없다. 다만, 이 모든 것이 쉬워만 보이는 이한 그룹을 마주하니 목 근육이 빳빳하게 땅기며 무슨 말도 할 수 없었다.

“도준아, 듣고 있어?”

“……아니요.”

얼씨구.

쓸데없이 솔직한 도준의 말에 대표가 어이없이 웃었다. 말이라도 듣는다고 하면 어디가 덧나나, 멍해 보이는 도준의 눈앞을 휘적휘적 휘저었더니 도준의 복잡한 눈동자가 대표를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였다. 앞으로 계속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안도감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에게까지 거액의 광고 계약을 건네는 부모의 모습에 복잡한 중일 것이다.

아무리 부모의 호의 또는 도움이라 해도 이도준, 장희찬이 아니라면 소화하기 힘든 스케일인 것이 분명했다. 이 광고는 배우 이도준, 배우 장희찬이어서 가능한 기획이었다.

그러니까 온전히 도준과 희찬의 능력만으로 해낸 일이기도 한 것인데, 도준은 착잡해 보였다. 그게 참 속이 쓰렸다.

“정신 차려. 놀 만큼 놀았으니까 이제 일해야지. 여름 다 간다.”

대표가 두 사람의 어깨를 턱턱 두드렸다. 어지간히 복잡해 보이는 도준의 모습에 희찬도 싱숭생숭한 기분을 느꼈다. 제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루어 놓고, 그걸 기꺼워하지 않는 도준의 모습이 착잡하다.

그렇다고 함께 축 처질 수는 없었다. 희찬이 손가락에 힘을 주고 도준의 허벅지를 쿡, 찌르자 도준이 다리를 오므리며 희찬을 바라봤다.

“뭘 그렇게 깊이 생각해. 너 이도준인데.”

“응.”

도준의 침울한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어려운 길로 돌아가더라도 자신의 힘으로 성공하길 바라는 것은 희찬도 마찬가지라, 도준이 느끼는 기분은 백 번이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이한 그룹이어서 할 수 있는 기획이라는 것을 안다. 이도준이 이선재의 아들이어서 들어온 제의라는 것을 마냥 아니라고만 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이런 어마어마한 스케일을 대중에게 납득시킬 수 있는 능력은 이도준과 장희찬, 성공한 배우에게 있는 것이다.

희찬은 몸을 돌려 도준의 암울한 시선을 마주했다.

“나는 장희찬이고. 이거 네 덕분에 받는 제의 아니고, 내 능력으로 따낸 일이야. 함부로 어른들이 준 기회라고 생각하지 마.”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어이고, 대단한 한 쌍 납셨다.

밑도 끝도 없이 우물을 파고 들어가는 도준을 희찬은 어렵지 않게 지상으로 끌어냈다. 대표는 수년간 자신이 노력해도 쉽게 할 수 없었던 것을 단번에 해내는 희찬의 모습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저러니 이도준이 좋아하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속내를 다 알아주고, 저만의 방식으로 도준을 위로하는 희찬의 모습이 참 매력적이었다. 그저 말수가 적은 도준 옆에서 그저 방방거리는 해맑은 청년이라고 생각했더니, 희찬의 멘탈은 보통 멘탈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내일 중으로 스케줄 정리해서 연락 갈 거니까, 열심히 해. 열심히. 너희 그런 기사 하나로 끝날 만한 어중간한 사이즈 아니야.”

“…….”

“누가 마음대로 끝을 정해. 도준아, 내가 너랑 계약할 때 말했다. 기사 터져도 괜찮고, 극복하면 된다고. 너희는 충분히 가능해. 동성애, 그게 뭐 어때서. 안 그래? 당당하게 다녀.”

“알겠어요.”

비로소 도준의 만면에 드리웠던 그늘이 사라졌다. 가벼운 대답을 남긴 도준은 대표가 제게 건네준 기획안을 말아 쥐고 탁탁 의자를 두드렸다. 아주 개운한 심정은 아니었지만, 마음을 짓누르던 무게는 조금이나마 가벼워진 듯했다.

도준이 괜찮아진 것을 본 희찬이 편안하게 앉아 다시 계약서를 들여다봤다. 차분한 두 사람을 지켜보던 대표가 부산스럽게 일어나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그래도 방금 막 한국에 들어온 두 사람인데 붙잡고 너무 일 얘기만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으면 놀 생각 하지 말고, 지금 가서 잠이나 한숨이라도 더 자.”

“네.”

“희찬이는 검은 머리가 확실히 잘 어울리긴 하네. 이제 탈색하지 말고 검은 머리로 활동하자.”

“네.”

데뷔 이후로 줄곧 밝은 머리를 고수하던 희찬이었으나, 확실히 검은 머리가 잘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이전에도 화려하게 생긴 탓에 사람들의 시선을 죄다 끌어당기는 매력이 돋보였는데 검은 머리를 하고 보니 어딘가 매혹적인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훨씬 더 묵직한 화려함을 뽐냈다.

대표의 마무리에 두 사람이 천천히 일어나 다리를 털었다. 허리를 비틀며 몸을 풀고, 어깨를 돌리던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교차했다. 서로를 향해 오롯한 사랑만 내비치는 시선은 따스하기 그지없었다.

이내 두 사람이 대표를 향해 가지런한 인사를 남기고 회사를 벗어났다. 희찬이 회사를 벗어나기 무섭게 도준과 같은 사이즈로 제작된 희찬의 현수막이 펄럭, 우렁찬 소리를 내며 걸렸다. 붙여 둔 것만으로도 엄청난 위압감을 뿜어내는 두 사람의 현수막이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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