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재정비 (16/18)

13. 재정비

집에 도착한 도준은 여전히 착잡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뒤숭숭함을 그대로 드러내며 소파에 앉아 입을 꾹 다문 도준의 모습에 희찬이 슬그머니 도준의 옆에 앉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희찬의 말에 허공을 응시하던 도준의 눈이 도르르 굴러 희찬에게 닿았다. 도준은 대답 대신 희찬의 품에 얼굴을 묻고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 응?”

“……모르겠어.”

“고르지 말고 그냥 말해 봐. 내가 정리해 줄게.”

희찬은 능숙하게 도준을 달랬다. 어떤 말을 하는 것이 도준의 심정을 끌어내는 데에 효과적인지 잘 안다는 듯, 편안한 목소리로 도준을 어르자 도준이 이번에는 가볍게 숨을 터뜨렸다.

희찬의 허리를 꼭 안은 도준의 귓가에 콩닥콩닥 뛰는 심장 고동이 느껴졌다. 조금 더 가까이 귀를 댄 채로 안정을 갈구하던 도준이 눈을 들어 희찬을 바라봤다.

희찬이 고개를 예쁘게 갸웃거렸다. 편안함을 유도하는 희찬의 몸짓에 도준이 침을 꼴깍 삼켰다.

“사실, 이제 그 사람들이 밉다기보다는 고마운 거 같은데…….”

“누구?”

“이한 그룹…….”

희찬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 까다로운 마케팅팀에서 자신과 도준을 모델로 원한다고 하더라도 윗선에서 자르려면 얼마든지 자를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따낸 일이니 함부로 생각하지 말라, 엄포를 놓았으나 윗선에서 승인한 것은 그들의 배려일 수도 있으니 도준의 마음은 십분 공감되었다.

“근데 나는 아직 서럽거든. 우리가 좀 힘들게 살았냐.”

“그치.”

“그래서 모르겠어. 그냥 가서 감사하다고 말을 하면 속은 편할 거 같은데, 자꾸 투정 부리게 돼.”

도준은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희찬이 부드럽게 도준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도준은 여전히 자신이 누군가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들이라면 응당 누릴 수 있는 것들마저 ‘내가 누려도 되는 것인가’ 갈팡질팡 고민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느껴져, 가슴이 뻐근해졌다.

다행히, 도준과 달리 희찬은 누군가의 아들로 살아 본 경험이 있다.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아주 어린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그때를 떠올리면 막연하게 연상되는 색감은 대체로 몽글몽글한 파스텔톤이었다. 그건 분명 부모의 사랑일 것이다.

희찬이 도준의 두 뺨을 쥐고, 저를 올려 보게 했다. 마주한 도준의 잘생긴 얼굴에는 혼란이 가득 드리운 채였다.

“도준아.”

“응.”

“너 그 사람들 아들이잖아.”

“…….”

“뭘 망설여, 네가 뭘 해도 예쁘게 생각하실 부모님인데.”

부모라는 단어가 낯설다. 더군다나 제게 붙는 말이라 더욱 그랬다.

도준은 괜히 귀를 찌르고 들어오는 그 단어에 어깨를 움츠렸다. 부모라……. 사실을 안 것도 벌써 몇 달이 지난 일인데 여전히 어색하기만 해 떨리는 숨이 절로 비집고 흘렀다.

“비록 키워주지는 않았지만, 다시 너를 찾으셨고 너를 응원하겠다고 하셨잖아. 기다리신다고 했잖아. 오고 싶으면 오라고 하셨잖아. 당연히 언제 가도 반겨 주실 거야. 그러니까 네가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으면 가서 말해. 솔직하게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와. 너는 마땅히 찾아가도 되는 아들이잖아.”

“…….”

“부모님이라고 부르기 어렵지, 당연해. 어머니, 아버지. 한 번도 안 해 본 말인데 어떻게 툭 튀어나와. 네가 원한다면 투정 부려, 짜증도 내. 그런 모습도 다 네 모습인데, 의젓하고 어른스러운 배우 이도준만 보여 줄 필요 없잖아.”

위로하는 희찬이 제법 어른스럽다. 그리고 그 말은 도준의 가슴에 큰 용기를 얹었다. 뭐든 해도 된다는 말이 어찌나 위로되는지 모른다. 서른 살이나 먹고 아직도 투정이나 부린다며 핀잔을 주지는 않을까, 막연하게 했던 걱정도 금세 사라졌다.

희찬의 턱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춘 도준은 자신의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는 고민을 남김없이 희찬에게 털어놓았다.

“……울면 어떡해. 말하다가 감정이 안 추슬러져서 막 추하게 울면 어떡해.”

유치하지만, 이런 게 걱정이 되었다.

대뜸 찾아가 아무 말이나 하다 보면 울컥 감정이 치밀지도 모를 일이고, 그러다 울면 그것만큼 추한 게 있을까. 별의별 생각을 하다 닿은 끄트머리에 말을 하고서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터졌다.

“뭐가 추해, 그것도 이도준인데. 너 우는 거 되게 예쁜데 너는 잘 모르나 보다.”

그리고 그 역시 희찬의 장난기 서린 위로로 정리되었다. 이내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이런 주제로 얘기할 날이 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낯설기는 희찬 역시 매한가지라, 제 품에 안긴 도준을 그저 꼬옥 품었다.

“그래도 준아.”

“응?”

“너 되게 건강해졌다.”

“뭐가?”

희찬의 입가에는 연신 행복이 걸려 있었다. 어딘가 뿌듯해 보이기도 하고, 동갑내기 주제에 저를 기특해하는 듯한 희찬의 눈빛에 도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예전 같으면 혼자 생각하겠다고 아무 말도 안 했을 건데, 이제 말하란다고 말도 하네. 많이 건강해졌어.”

“그런가. 너라서 그래.”

“아냐, 나한테도 은근히 숨기는 게 있었는데, 이제 안 숨기잖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어릴 때는 워낙 솔직한 성격이었다. 희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있는 대로 털어놓는 것은 익숙한 일인지라, 이번에도 그대로 했을 뿐이었지만, 확실히 속내를 드러내는 데에 예전보다 부담이 적어지기는 했다.

그리고 희찬은 그 익숙함 속에서도 도준의 회복을 알아챘다. 그에 도준은 사랑을 느꼈다. 애정을 갖고 주의 깊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모를 미세한 차이마저 기가 막히게 눈치채는 희찬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에게로 향한 것이었다.

도준이 눈에 힘을 풀고, 희찬의 목을 끌어안았다.

하긴, 요즘은 약이 없어도 곧잘 잠들었다. 지독하게 괴롭히던 악몽도 눈에 띄게 사라졌고, 악몽을 꾸더라도 금방 깨어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온몸에 힘을 주고 우는 일도 사라졌다. 이제는 눈을 뜨면 제 옆에 희찬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악몽을 꾸더라도 도사리는 적막에 허덕일 일도 없었다.

비가 온 뒤에는 더 단단해진다고 했던가.

제 모습이 딱 그 꼴이었다.

“……너랑 있어서 그래. 요즘 병원도 안 가고 약도 잘 안 먹는데 잠도 잘 자잖아.”

“나도 요즘 음악 없이 잘 자. 우리 되게 많이 좋아졌다.”

“응……. 사랑해.”

“내가 더 사랑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희찬의 말에 도준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매섭게 쏘아보는 도준의 눈빛이 당황스럽다. 희찬이 표정을 굳히자, 도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냐, 내가 더 사랑해.”

“아니거든. 네가 어떻게 알아. 너 내 마음속에 들어가 봤어?”

“아무튼 내가 더 사랑해.”

아니, 기껏 위로해 줬더니 이놈이.

다른 건 다 져도 사랑의 크기에서는 질 수 없어, 희찬도 덩달아 눈을 게슴츠레 떴다. 희찬이 굳게 말린 주먹을 내밀었다. 희찬의 옅은 눈과 마주하던 도준의 시선이 툭 떨어져 희찬의 주먹을 살폈다.

“가위 바위 보 해.”

희찬이 주먹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도준이 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다시 희찬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따뜻한 체온이 닿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가슴 가득 평안이 도사렸다.

“됐어, 그럼 오늘은 네가 더 사랑하는 걸로 해. 내일은 내가 더 사랑할게.”

“그래, 사이 좋게 번갈아 하기로 해.”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두 사람은 마치 국가 원수들이 대단한 회동이라도 한 것처럼 엄숙한 표정으로 손을 맞잡고 붕붕 흔들었다.

도준이 눈을 끔뻑거렸다. 머릿속으로는 부모를 찾아간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무수히 곱씹었다.

그저 고맙다고 하면 될까. 아니면 일전에 만났을 때 삐딱하게 굴었던 것도 사과하는 게 좋을까. 혹시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궁금해할까, 그럼 그것도 다 털어놓아야 하나.

한번 시작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급속도로 방대하게 뻗쳐 나갔다. 정리해 보려 했던 마음과 달리 다시 복잡해진 머리에 또 한숨이 터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희찬이 도준의 머리를 똑똑 두드렸다. 노크라도 하는 듯한 모양에 도준이 고개를 들고 희찬을 바라봤다.

“머리 굴리지 말고 그냥 갔다 와.”

“…….”

“어차피 혼자 생각하면 복잡하기만 해. 가기로 마음 정했으면 그냥 가서 얘기하고 와. 마음이 훨씬 편해질 거야.”

도준이 테라스 너머의 바깥을 살폈다. 아직 해도 지지 않았고, 시간은 겨우 5시가 조금 넘어가는 중이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옛말이 있는데, 희찬의 말대로 당장 찾아가는 것이 좋을까.

생각하기 무섭게 도준이 고개를 도리질 쳤다.

이건 뭐, 하나 해결하면 다른 하나가 곧장 고민거리로 치고 들어오니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도준은 평소 깊이 고민하던 습관을 버리고 희찬의 말대로 당장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들이 지내는 곳이 어딘지는 몰라도, 이한 그룹 본사로 가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한 생각을 했다.

“얘기 잘하고 와.”

“같이 갈래?”

“아니, 나중에 소개해 줘.”

“응. 쉬고 있어. 올 때 전화할게.”

이윽고 도준이 현관을 나섰다. 희찬은 의젓한 모습으로 사라지는 도준의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봤다. 누구보다 힘들게 살았던 이도준이니 남들보다 훨씬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 마음을 담아 괜히 하늘에다 또 빌었다.

도준이가 상처받지 않고 돌아오게 해 주세요,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오게 해 주세요. 그리고 이제 행복하게 해 주세요. 그런 순수하고 유치한 소원을 말이다.

도준은 집에서 벗어나며 대표에게서 이선재의 번호를 알아냈다. 그쪽에서는 번호를 알고 있었던 건지, 도준이 건 전화를 아주 따스하게 받았었다. ‘지금 회사로 가겠다.’라는 짧은 통보를 남겼지만, 그마저도 무거워 도준은 심호흡을 거듭했다.

여전히 머릿속에는 복잡한 말들이 둥둥 떠다녔다. 무엇부터 어떻게 털어놓아야 하는지 여전히 갈피가 잡히지 않았지만, 희찬이 말한 대로 가서 뭐든 말해 볼 생각이다.

저벅저벅 걸음을 놀려 로비에 들어섰다. 보안이 깐깐한 건물에는 수십 명의 경호원이 배치되어 있었다. 퇴근 시간을 맞은 분주한 로비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그 시선은 모두 도준에게 향한 채였다. 그제야 도준이 아차, 아랫입술을 씹었다.

그래도 숨겨진 아들인데, 너무 날것 그대로 왔나. 나름대로 옷은 제법 빼입었는데, 얼굴을 가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조금의 후회를 느낄 무렵 누군가 도준의 어깨를 덥석 쥐었다.

“이도준 씨.”

“네, 안녕하세요.”

“네. 부회장님 연락받았습니다. 지금 저랑 같이 올라가시면 됩니다.”

“네.”

남자의 안내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동안 도준은 머릿속을 정리했다. 생각이 거듭될수록 생각은 복잡해졌지만, 그걸 표정에 드러내지는 않으려 무척 노력했다.

묵직한 문이 열렸다. 브라운 톤의 무거운 분위기를 한 부회장실 내부에는 부부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가벼운 묵례를 남긴 남자가 벗어나자 쿵, 무거운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부부는 이전에 봤던 것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온화하고 여유로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도준은 울컥 치미는 감정을 느꼈다. 이럴 줄 알았다. 차분히 할 말만 하자고 마음먹은 것과 다른 감정은 불쑥불쑥 고개를 들이밀고 날뛰었다.

“여기 앉아요.”

박채령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도준을 잡아당겼다.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던 도준은 저벅저벅 걸음을 놀려 여자가 말하는 소파에 앉았다.

푹신한 소파가 순식간에 도준을 집어삼켰다. 땅으로 훅 밀려 내려갔다가 어느 적당한 지점에서 멈춘 듯한 느낌에 도준이 후, 떨리는 숨을 터뜨렸다.

“여행 잘 다녀왔어요?”

이번엔 이선재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을 번갈아 살펴보던 도준은 제 앞에 있는 탁자에 시선을 꽂았다. 굳게 말린 주먹 위에 푸른 핏줄이 솟았다. 긴장한 것이 역력히 드러나는 모습에 두 사람도 덩달아 마른침을 꼴깍였다.

이윽고 도준의 입에서 대답 대신 뚝, 떨어지듯 건조한 말이 나왔다.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혹시 모진 말을 듣지는 않을까, 함부로 돕고 나선다고 원망하지 않을까, 지레 겁부터 집어먹었던 것과 달리 차분한 도준의 말에 부부는 한시름 놓는다는 표정을 보였다.

“음? 무슨.”

“광고, 말입니다.”

“아아. 그거라면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말했잖아요, 우리는 이도준과 장희찬 두 사람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합니다.”

“…….”

“혹시 이런 호의가 부담스러운 거라면 가볍게 생각해 주세요. 두 배우의 팬이 두 배우의 가능성과 스타성을 높이 산 겁니다. 그저 광고주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거예요.”

어째 하는 말이 8년 전 대표님의 말과 다르지 않다. 부모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던 건지, 자신을 스스로 장사치라 후려치며 말하는 어른들의 목소리는 하나같이 따사로웠다.

도준은 목 근육이 바짝 땅기는 것을 느끼고 연신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솔직하게 그냥 하고 싶은 말하고 와, 너는 마땅히 찾아가도 되는 아들이잖아, 아마 기다리고 계실 거야.]

희찬의 말이 귓전에 울렸다. 목청을 가다듬고 해야 할 말을 고르던 머리가 순식간에 하얗게 비었다. 도준은 시선을 들어 저를 쳐다보는 네 개의 시선과 마주했다.

“사실 처음 뵀을 때는 가까워질 생각도 안 했습니다. 제가 워낙 힘들게 살아서, 차라리 부모가 죽은 존재이길 바랐거든요.”

도준이 말을 꺼내기 무섭게 두 사람의 동공이 잔 지진을 머금었다.

“근데 저번에 하시는 말씀 듣고 사정이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만 해도 일단은 알겠다 정도로 넘기려 했는데…….”

“…….”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맙다고 말씀드리는 게 맞는 거 같아서, 뵙고 싶다고 했습니다.”

조금도 정리되지 않은 말이었지만, 모두 진심이었다. 막상 말을 뱉고 보니 울컥 감정이 치밀었다. 그렇지 않아도 목이 메 볼품없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중이었는데, 점점 막혀 드는 목에 도준이 입을 꾹 다물었다.

감정을 추스르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이제껏 부모 도움 따위는 필요 없다고, 부모 없이도 이렇게 잘 클 수 있다고 자부하며 지냈다.

하지만 부모가 있는 것은 차원이 다른 안정감을 안겼다. 부모가 아니라면 어느 누가 흔쾌히 ‘어른들의 보호를 받아 보라’ 얘기해 주겠으며, ‘방패 뒤에 숨는 것도 해 봐라’ 말해 주겠는가.

도움을 주면서도 ‘이런 사안이 되어서야 도움을 주게 된 것도 미안하다’ 말하는 그들 앞에 힘겨운 세월이 눈 녹듯 씻겨 내려간 것도 사실이었다. 눈물을 보이며 거듭 미안하다 말하는 그의 사과에 위로를 받은 것 역시 사실이다.

눈앞에 닥친 버거운 일에 막막함을 느낄 때 숨통을 트여 준 것은 결국 부모였으므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투명한 눈물이 도준의 볼을 타고 흘렀다. 잔잔했던 부회장실 내의 분위기가 축축하게 가라앉았다. 도준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부부는 저릿한 가슴을 애써 감추고, 도준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눈에 담았다.

몸을 당겨 앉은 이선재가 조심스레 입술을 달싹거렸다.

“음, 말…… 놔도 됩니까?”

뭐 이런 거까지 조심스러워하냐고.

하나부터 열까지 마냥 조심스러워하는 이선재의 모습에 또 눈물이 터졌다. 도준은 떨리는 숨을 길게 뿜어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싫지 않다면.”

“…….”

“한 번만, 안아 봐도 될까…….”

이선재의 목소리도 먹먹하게 젖어 가는 것 같았다.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거리자, 이선재가 조심스레 다가와 도준을 품에 안았다.

도준은 아무런 거부 없이 남자에게 안겼다.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진한 애정이 묻어나 입술을 잘근 씹어 물었다.

울고 싶지 않은데. 어엿한 모습을 보이고 싶은데 자꾸만 눈물이 났다. 몸에 힘을 주고 울음을 참으려는 도준의 전신이 바들바들 떨렸다.

“고마워. 살아 있어 줘서 고맙고, 다시 얼굴 볼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워. 이렇게 근사하게 자라 준 것도 고맙고, 힘든 시간 견뎌 준 것도 고마워.”

이선재가 두어 번, 도준의 등을 토닥이며 부드럽게 달래자 결국 도준의 입에서 울음이 터졌다.

참아 보려 노력했지만, 그 역시 쉽지 않았다. 이렇게 잘 우는 성격이 아닌데, 막막한 현실에 한숨짓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 결국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

희찬과 함께해 가장 행복한 순간들이었지만, 당장 내일을 살아내는 것조차 버거워 허덕이던 어려운 시절이기도 했다.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 돌아와서도 쪽잠을 잔 후에는 다시 일하러 가야 했던 힘든 시간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에 만개하는 웃음 하나로 꾹 참고 견뎠던 아픈 시간이었다.

남들은 쉽게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며, 성실함을 칭찬했지만, 그저 청춘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려 편하게들 말하곤 했지만, 참 힘들었다.

기어코 희찬이 스폰 제의를 받아 왔을 때는 부모가 간절하기까지 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은 이선재의 손길과 사과에 모두 씻겼다. 어깨를 들썩거리다 전신을 떨고, 그러면서도 울음을 삼키려 무던히도 노력하는 도준을 이선재는 한참이나 안고 있었다. 비로소 도준의 눈물이 멎었을 때는 도준의 맞은편에 앉은 박채령의 얼굴도, 도준을 안고 있던 이선재의 얼굴도 모두 눈물범벅이었다.

이게 뭐야, 이렇게 다 울고. 장희찬이 보면 셋 다 울보라고 놀리겠다.

그런 생각이나 드는 것을 보니, 마음이 퍽 편안해진 모양이다.

“아무튼……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제 가야겠어요.”

실컷 울어 놓고 할 말을 마쳤으니 가겠단다.

군더더기 없는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도준의 행동에 남자가 인자한 미소를 머금었다.

“나중에……. 광고 촬영 다 끝나고 시간 날 때 희찬 배우랑 같이 와. 맛있는 거 사 줄게.”

“네.”

이선재의 말에 도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희찬도 정식으로 소개해 줄 것을 요청했으니, 언젠가 한 번 같이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전에 맛있는 거 느낄 수 있게, 병원에 가 보면 좋겠는데…….”

부회장실을 벗어나려는 도준의 등 뒤에 부드러운 박채령의 목소리가 닿았다. 도준이 몸을 돌려 박채령을 바라보자, 코를 훌쩍거리며 온화한 표정을 보였다.

“……나중에, 꼭 가 볼게요.”

도준은 박채령이 뿜어내는 분위기와 엇비슷한 분위기의 온화함을 머금었다. 그 모습에서는 얼핏 박채령을 닮은 얼굴도 보이는 것 같았다.

“도준아.”

“네.”

“우리는 항상 네 편이야. 부담스러워할 필요 없어. 미안하고, 고마운 건 우리니까 전부 다 당연하게 생각하고 지내.”

“…….”

“네가 하기 싫다는 건 우리도 안 할게. 근데 우리가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이용해 주면 좋겠어.”

조심스러운 남자의 목소리 끝이 떨렸다. 오랜 고민 끝에 건넨 말이라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도준이 울대가 들썩거릴 정도로 크게 침을 삼켰다.

“……연락드릴게요.”

“이번엔 꼭 연락해.”

“네.”

다시 인사를 남긴 도준이 이내 저벅저벅 걸음을 놀려 부회장실을 벗어났다.

마음을 짓누르던 모든 것이 사라지자 공기의 맛이 달라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상쾌하고, 신선하다 못해 달콤하기까지 한 공기에 도준이 어느 때보다 근사한 미소를 피웠다.

*

어느새 해가 많이 짧아졌다. 한껏 기승을 부리던 더위가 식어 가고, 정수리를 때리던 뙤약볕도 한껏 누그러들었다. 푸른 빛을 발산하던 이파리들은 조금씩 따스한 색으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거리를 누비는 사람들의 옷이 점점 길어지고, 에어컨이 없어도 한나절을 거뜬히 견딜 수 있는 요즘, 한발 물러난 여름의 뒤를 쫓아 가을이 오는 중이었다.

그사이 도준과 희찬은 무사히 광고 촬영을 마쳤다. 번쩍번쩍 빛을 내는 엄브렐러 조명 앞에서 감독이 원하는 대로 각양각색의 포즈를 취하고, 조명 온도에 찔끔 흐르는 땀을 닦아 내다 보면 금세 하루가 흘렀다.

그 혀를 내둘렀던,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광고 영상 촬영은 또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장면 전환이 잦고, 무수한 매일을 담아내야 하는 영상물이었기에 옷도 자주 갈아입어야 했고, 쉴 시간 없이 장소를 옮겨 가며 촬영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두 사람은 확실히 타고난 배우였다. 촬영장에 들어서기 무섭게 아우라를 뿜어내더니, 금세 자신이 가진 고유의 색으로 촬영장을 물들였다. 힘든 와중에도 지친 기색 없이 촬영에 임하는 두 사람이었지만, 카메라 앞에만 섰다 하면 기운이 달라졌다. 가진 매력을 있는 그대로 발산하는 두 사람 덕에 세트장에서는 연신 감독이 외치는 “오케이, 컷!” 소리만 울려 퍼졌다.

분명 숨 가쁘게 몰아치듯이 진행된 촬영이었지만, 힘든 만큼 행복했다. 피곤한 만큼 즐거웠다. 두 사람이 진심으로 즐겁게 응하니 촬영장의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화목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두 사람을 주연으로 한 이한 그룹의 영상 광고가 공개되었다. 광고는 인기 프로그램의 앞뒤 구좌를 모두 차지하며 대대적으로 송출되었다.

온라인상에는 두 사람이 등장하는 수십 개의 영상이 일제히 공개되었다. 한 시간짜리의 전체 영상과 10분 단위로 나뉜 영상, 그리고 NG와 메이킹까지. 두 사람의 다양한 모습이 촬영된 영상에 대중이 환호했다.

영상은 공개와 동시에 어마어마한 조회 수를 기록했다. 동시 접속한 사람의 수와 실시간으로 달리는 댓글의 수가 많아 서버가 버벅거릴 지경이었다.

<이한 그룹, ‘Pride-Festival’ 오픈 첫날부터 매진세례>

<이도준♡장희찬 내세운 ‘Pride-Life’, 역대 최단기 100만 뷰 달성>

<데뷔부터 연애까지 화끈하게…… ‘킹’도준, ‘짱’희찬의 ‘Pride-Life’>

<동성애 스캔들에도 HOT★, 이도준♡장희찬 ‘눈부신 효과’는 계속된다>

<킹짱효과? 이한 그룹, 돈쭐을 내주지! 2030의 반란>

<여전히 침묵 중인 장희찬, SNS에는 응원 댓글 쇄도>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두 사람의 소식에 언론사에서도 미친 듯이 기사를 뽑아냈다. 당연히 두 사람의 이름은 보란 듯이 실시간 이슈에 등장했다. 여러 구설수가 있었음에도 두 사람을 모두 품은 이한 그룹에게는 당연히 좋은 이미지가 덧입혔다.

사람은 존재만으로 빛이 날 수 있다는 기획을 기반으로 한 신제품 판매 행사 ‘Pride-festival’은 사이트가 마비될 정도로 큰 인기를 몰았다.

기존의 고급스럽지만, 명품 브랜드 특유의 친근하지 않은 이미지였던 이한 그룹은 두 사람을 모델로 동시에 내세움으로써, 다양성을 존중하고, 다름을 인정하는 이미지를 쇄신했다. 젊은 트랜드를 읽고, 새롭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젊은이들로부터 큰 환호를 얻었다.

당연히 이런 상세한 것까지 전부 기사로 대서특필되었다. 덕분에 온라인이 떠들썩했다. 오랜만에 접한 도준과 희찬의 소식에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들의 생각을 내비쳤다.

이한 어페럴 존나 이갈았다 룩북도 킹짱으로 다 찍었네

* * *

[킹짱LANKING] #눈부신항해 1위, #장희찬special 2위, #열여덟 3위, #첫사랑의색 3위 #킹짱 스트리밍 1-2-3위 석권

⤷ 팬들 주작 작작해; 스트리밍 갈 때마다 상위권에 7ㅔ이 있어서 불편함

⤷⤷ 주작이 아니라 대중픽인거임 븅신아

⤷⤷ 왜 니 배우 1등 못해서 열받음?ㅋㅋ

⤷⤷ 그럼 더 재밌는 거 가져와보던가ㅋ

[킹짱LANKING] 남자 연예인 브랜드 평판 공동 1위 이도준-장희찬

⤷ 쉬고 있는데도 계속 1위하는 거 개발림ㅋㅋㅋ

나는 진짜 형태가 다른 사랑을 한다고 킹짱 커리어 다 무시당하는 거 좀 킹받음 애초에 직접 앙숙이라고 한 적? 없음 걍 대중이 그렇게 생각함 동성애 안 한다고 한 적? 없음 걍 가만히 있었음

이상형 거짓말한 적? 없음 짱이 이상형 종합해 보면 키크고, 웃는 게 예쁘고, 묵직한 >사람< 좋아한댔음 = 킹 / 킹이는 아예 그런 인터뷰 한 적 없음

* * *

그렇다고 얘네가 동성애 하면서 게이클럽을 다님? 게이바를 다님? 문란하게 남자들끼고 보라빛 조명에서 헤벌레 사진 찍음? ㄴㄴ 그냥 어릴 때 같이 살던 집 앞에서 키스하다가 사진 찍힌 게 다임 = 이것도 짱이 멱살 잡으려고 전광진이 찍은거

* * *

요즘 같은 시대에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매도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음 알아서 사랑하게 냅두자 심지어 킹짱이들 드라마하고 예능하는 내내 둘이 사귀라고 말한 거 누구? 우리임

⤷ ㅇㄱㄹㅇ 킹짱은 거짓말 한 적 없음 까발려진 건데 커리어 후려치기 하는 거 열받음

⤷ 내가 킹짱이면 억울해 뒤졌음ㅠ.. 킹이야 원래 조용하다 해도 짱이 꼬박꼬박 사진 올려줬는데 거미줄쳤어

* * *

ㅠㅠ그냥 잘 지내고 있으면 좋겠다 여행 소식 이후로 소식 들리는 게 없으니 원..

* * *

킹이도 평소 같으면 벌써 차기작 소식 떴을 텐데 ㅠㅠ.. 짱이도 쉬길 바랏는데 강제로 쉬니까 좀 아쉬움 ㅠ

오늘도 난 걍 눈부항이나 돌려본다.. 곽아부지 킹짱이들 차기작 있으면 당근 흔들어주세요

왁자지껄한 인터넷과 달리 두 사람이 함께하는 집은 조용했다. 늦은 밤까지 영화를 몰아 보고, 아침이 다 되어서야 잠든 희찬을 두고 밖으로 나온 도준은 희찬이 먹을 밥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칼과 도마가 부딪치며 내는 또각거리는 소리가 기분 좋다. 보글보글 끓는 뜨거운 찌개의 향도 좋았다. 자글자글 기름이 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구수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한참 요리하던 도준이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맛봤다. 도준은 부모를 만나고 돌아온 이후로 조금씩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미각 상실에 관한 치료는 별다를 게 없었다. 스트레스로 인한 상실이었으니, 정신과 진료가 병행되었다. 정신과 치료는 이전부터 받고 있었으므로, 이비인후과에서는 싱거운 것부터 자꾸 맛을 떠올리는 연습을 해 보라고 했다.

“음, 무맛.”

역시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된장찌개의 맛을 잃은 지도 오래였으니 당연히 그 맛을 떠올릴 수 없었다.

쩝, 입맛을 다신 도준이 눈을 비비적거렸다. 자신은 아무 맛도 느낄 수 없었지만, 이 음식이 맛있을 거라는 데에는 자신이 있다.

“레시피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

유명한 셰프가 동영상으로 올려 준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 했으니 맛이 없을 리가 없다.

요리를 마친 도준은 식탁 앞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팬들이 올리는 염원 아닌 염원을 읽는 것도, 쏟아지는 기사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준아…….”

“응, 일어났어?”

“맛있는 냄새.”

“앉아, 밥 먹게.”

도준이 희찬의 팔을 잡아끌어 의자에 앉혔다. 맨몸이 드러난 상체에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수건을 둘러 턱받이 모양으로 만들어 주자, 희찬이 피식 웃었다.

“아, 이번엔 또 한식인가요.”

“입에 맞을지는 모르겠는데, 딱히 신경은 안 썼습니다.”

“네, 네. 그러시겠죠. 저기요, 셰프세요, 웨이터세요.”

“모르겠어요. 왜요.”

“저랑 데이트 하실래요, 오늘? 뮤지컬 초대를 받았는데.”

장난을 걸었던 도준의 눈이 크게 뜨였다. 난데없이 뮤지컬이라니. 고개를 갸웃거리자 희찬이 제 휴대폰 화면을 도준에게 보여 줬다. 두 사람의 열애설이 터졌을 당시, 제 일처럼 격분하며 게시글을 올렸던 선배로부터의 메시지가 보였다.

한진선배님

희찬아 오늘 시간있으면

도준이랑 뮤지컬 보러와

19시 30분 공연

초대표 있어

어 당일인데도 되는 거예요?

한진선배님

ㅇㅇㅇㅇ

올거면 말해 빼둘게

직접 빼 두기까지 한다는데 거절할 재간이 있나. 그렇지 않아도 감사 인사 정도는 하려 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시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다.

뮤지컬, 나쁘지 않지. 적적한 와중에 좋은 기분 전환일 것이다.

이내 도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희찬은 휴대폰을 다시 제 앞으로 돌려, 토도독 귀여운 소리를 내며 답장을 입력했다.

“7시까지 오면 된대. 로비로 오면 사람 많다고 돌아오라는데 길을 모르겠어.”

“그냥 로비를 빨리 가로질러 가자. 그리고 7시면…….”

이번엔 도준이 휴대폰을 들었다. 도준이 보여 주는 화면에는 도준이 누군가와 메시지를 나눈 것이 켜져 있었다.

이선재

오늘 저녁 시간 괜찮으면 희찬이랑 같이 밥 먹지 않을래?

메시지가 도착한 것은 제법 이른 아침 시간이었으나, 도준이 보낸 답장은 없었다. 그에 희찬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도준을 흘겨봤다. 희찬의 눈에서 정확하게 ‘으이구’ 세 글자가 읽혔다.

“장소랑 시간 여쭤보고 되면.”

“응.”

도준이 밥을 밀어 넣으며 다른 손으로 탁, 탁 느릿하게 답장을 보냈다. 그러다 도준이 문득 눈을 들었다. 희찬에게 닿은 눈빛에는 못마땅함이 서렸다. 희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밥만 잘 먹던 도준이 보이는 반응이 의아했다.

“너. 한진 선배랑 친해?”

“갑자기?”

“친하게 지내지 마. 그 선배 생긴 게 약간 나랑 결이 비슷하잖아.”

“도대체 어디가.”

희찬이 엄지와 검지를 곧게 펴 ‘V’자를 만들어 도준의 턱 아래에 가져다 댔다.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희찬의 손가락 위에 얼굴을 얹어 준 도준이 환하게 웃었다.

“내가 더 잘생겼어?”

순간 동공이 확장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화사하게 빛이 나고, 근사함을 머금은 도준의 잘생긴 얼굴이 눈부셨다. 희찬은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히고서 입을 꾹 다물었다.

“왜 대답을 안 해.”

“대답 안 해 줄래. 또 기고만장할 거지? 다 알아.”

이내 희찬이 도준의 턱 아래에서 손을 떼고, 밥을 맛있게 먹었다. 문득 처음 도준이 자신에게 좋아한다고 말했던 때가 떠올랐다.

열여덟 살쯤이었을까, 검정고시를 마치고 친구들과 어울려 축구를 하는 도준을 구경했었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빠르게 뛰어다니며 공을 놓치지 않는 도준은 먹이를 쫓는 맹수 같았다. 그런 이도준이 골을 넣은 후, 냅다 달려와 안은 것이 희찬, 자신이었다.

“너 처음에 나보고 좋아한다고 했을 때 진짜 당황스러웠는데.”

“그때는 무슨 정신이 그랬지, 어이가 없어서.”

“후회해?”

“아니.”

친구들이 학원이고, 과외고 뿔뿔이 흩어진 후에는 도준과 나란히 골목길을 걸었다. 보육원으로 향하는 길은 으슥하고 또 후졌다.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날 때도 있었고, 운이 안 좋으면 길 강아지 똥을 밟는 날도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해가 다 진 후에 노란 불빛이 앉은 거리를 천천히 거닐던 희찬이 도준에게 물었었다.

너는 왜 골만 넣으면 나한테 오냐고.

그리고 돌아온 도준의 답은 명쾌하기 짝이 없었다.

좋아하니까.

불현듯 그날의 어스름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온 세상을 훤히 밝히던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그림자가 길어지던 그 시간에 이도준은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흔쾌한 목소리를 냈었다.

“내가 고백해서 싫었어?”

“아니, 덕분에 나도 너 좋아한다는 거 알았으니까.”

“그랬어? 나는 네가 당연히 아는 줄 알았어.”

“왜?”

이번엔 도준이 뭉근한 추억 속에 잠겨 들었다. 그때의 장희찬은 흥미도 없는 축구를 꼭 보러 왔었다. 다른 남자애들과 살을 부대끼며 친하게 지내는 것도 싫어했고, 본인도 무리의 중심에 있으면서 도준의 주변으로 다른 친구들이 몰리면 티가 나게 기분 나빠 했었다. 기분 나쁘게 하는 상대에게 아르르, 이를 드러냈다가도 도준이 다가오면 샐쭉 웃는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희찬이 하는 것은 무어든 같이하고 싶었던 도준처럼 희찬도 도준이 하는 것은 뭐든 함께하려 했었다. 일찍이 감정을 깨닫고 적극적이었던 도준과 달리 자신의 감정을 우정에 치부하느라 그렇게 소극적이었던 모양이다.

“웃겨.”

“갑자기?”

“이제 와서 이런 얘기하는 게 어이없어.”

그러게, 분명 감회가 새로운 첫 고백과 장소였지만 이제는 아득한 과거인데 말이다.

어느새 식사를 마친 희찬의 머리를 도준이 거칠게 헝클었다. 어느새 새까맣게 변한 앞머리가 찰랑거리며 희찬의 미모에 빛을 더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막연하게 연상되는 색감이 있다. 맑은 연두색, 옅은 하늘색, 엷은 주황색. 그리고 아주 짙은 초록색과 또렷한 분홍색.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 시절을 떠올릴 때 연상되는 색들은 대부분 채도가 진하고 명도가 높은 색상들이었다. 가만히 보고 있자면 눈이 부시고, 이내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그런 색들 말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항상 두 소년이 있었다. 진하게 잘생긴 아이와 화려하게 예쁜 아이. 두 사람은 마치 서로 다른 극에 끌리는 자석처럼 함께였다. 서로의 옆에는 항상 서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당연했고, 그렇게 꼭 붙어 여러 색이 섞인 다채로운 추억을 공유했었다.

“오래.”

푸근하고 따뜻한 추억에 빠져들어 아득한 옛일을 생각하던 희찬을 도준이 깨웠다.

“응?”

“5시에 만나기로 했어. 주소는 메시지 주신대.”

희찬이 시간을 살폈다. 5시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희찬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드디어 오늘, 도준의 부모와 정식으로 인사를 나눌 수 있는 모양이다. 도준과 연애를 한 이후로 각자의 부모에게 서로를 소개해 줄 일이 없다는 것이 아쉬웠던 때가 있었다. 남들은 으레 다 하는 것을 우리는 할 수 없다는 것이 막연하게 안타까웠다.

그래서 도준과 함께 도준이 지냈던 목욕탕에 갔을 땐 괜한 설렘을 느끼기도 했었다. 어찌 보면 그 어린 도준에게는 부모나 진배없었을 사장이니 말이다.

심장이 콩콩, 귀엽게 뛰었다. 서른 살의 이도준과 쉰에 가까운 이도준(닮은 사람)을 동시에 두고 볼 생각을 하니 흥미가 도사렸다.

확실히 닮았었지.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던 도준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단박에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도준과 쏙 빼닮은 남자였다.

“아버지라고 불러 봤어?”

“아니.”

“그럼 뭐라고 불렀어?”

“안 불렀어. 그냥 말만 했어.”

“부회장님은 너 뭐라고 부르셔?”

“이제 도준이라고 해. 말 놓겠다고 하셨거든.”

참나, 누가 이도준 아니랄까 봐, 이도준은 이쪽과의 관계에서도 참 시간이 오래 걸린다.

아무튼 이도준이랑 엮이면 뭐든 느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던 희찬이 입꼬리를 올려 씨익, 예쁘게 웃었다.

그렇다면 내가 불을 붙여 주면 될 일이지.

도준이 가졌던 부모를 향한 악감정이 사라진 지도 오래였다. 그저 불쏘시개가 필요한 모양이니, 희찬은 기꺼이 그 역할을 자처하기로 했다.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에 도착한 도준과 희찬은 으리으리한 건물 앞에서 와, 탄성을 터뜨렸다. 돈 많은 사람들의 패턴에 조금은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음식점은 여전히 낯선 웅장함이었다.

조용한 음악이 잔잔하게 울리는 공간은 주황빛 불빛과 금빛의 찬란한 인테리어가 화려한 낯을 뽐내는 중이었다. 단정한 유니폼을 차려입고, 작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무언가를 설명하며 안내하는 종업원을 따라 걸었다. 가장 안쪽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화려함과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이 인자한 표정으로 희찬과 도준을 맞이했다.

“왔어요?”

“안녕하세요.”

도준은 제 부모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다. 그게 퍽 웃겨, 희찬이 피식 웃었다.

“희찬 배우는 처음 보네요, 반가워요.”

“아, 네. 처음 뵙겠습니다. 장희찬입니다.”

어딘가 도준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성은 아름답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희찬은 여성을 마주한 채로 생글생글 맑은 웃음을 보였다. 분명 초면인데 편안했다. 도준에게서 나는 분위기와 비슷한 탓일까, 아무튼 이 자리가 불편할 거라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과 달리 두 사람은 인자하고, 부드러웠다.

“여기는 간이 좀 슴슴해요. 도준이가 치료 중이라 이쪽으로 골랐는데 괜찮죠?”

“그럼요, 그럼요.”

희찬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도준의 치료를 돕겠다는데 의견을 달리할 이유도 없었다.

곧 임금님 수라상 부럽지 않은 화려한 반찬들이 나왔다. 듣도 보도 못한 음식부터,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식들까지 수십 가지의 반찬에 희찬이 화색을 피웠다.

“맛있겠다.”

“많이 먹어.”

도준이 희찬의 밥 위에 먹음직스러운 편육을 얹어 줬다. 잠시 눈을 들어 맞은편의 어른들 눈치를 살핀 희찬이 샐룩 웃으며 도준의 볼을 쓰다듬었다.

“응, 너한테서 먼 거 먹고 싶으면 말해. 집어 줄게.”

“이따 말할게.”

소꿉놀이하듯 꽁냥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이 못내 귀엽다. 서로 반찬을 집어 주고, 많이 먹으라며 엉덩이를 토닥거리는 모습이 풋풋해 이선재는 저도 모르게 풉,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들에게는 여전히 딱딱하게 구는 도준이었다. 그런 도준이 희찬에게는 한없이 흐물흐물하게 구는 것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진 탓이었다.

“잘 지내고?”

“네, 잘 지냅니다.”

“희찬 배우는 촬영할 만했어요?”

“네, 재밌게 촬영했습니다. 감사해요.”

“아, 고맙긴 무슨. 능력치가 워낙 좋아서 말이죠.”

소소한 웃음이 방 안에 테두리를 둘렀다. 그렇지 않아도 아늑한 분위기였는데, 공간을 잔잔하게 메우는 따스함에 희찬은 가슴이 몽글거리는 것을 느꼈다.

도준은 아무 말 없이 밥만 먹었다. 요즘 들어 먹는 것에 열의를 보이는 도준의 모습은 보기 좋은 모습 중 하나인지라, 희찬이 도준의 밥 위에 쉴 새 없이 반찬을 얹었다.

“너, 먹어. 내가 알아서 먹을게.”

“보기 좋아서 그러지.”

“아이, 좀.”

도준은 희찬이 제게 얹어 주는 만큼 반찬을 돌려줬다. 주거니, 받거니 아옹다옹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한 편의 시트콤 같았다. 사이좋게 서로 먹여 주다가 뭐가 또 어긋나 금세 틱틱거리는 두 사람을 지켜보는 것은 그 정도로 즐거웠다.

빙그레 웃음을 띠고 두 사람을 지켜보던 남자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도준을 바라봤다. 곧장 꽂히는 시선을 의식한 도준은 짓궂게 제게 얼굴을 들이미는 희찬의 뺨을 밀어내며 남자를 마주했다.

“혹시 전광진 얘기 좀 해도 될까?”

“그럼요.”

이어 들리는 반갑지 않은 이름에 희찬도 덩달아 남자를 쳐다봤다.

“전광진은 구속 기소된 상태에서 바로 재판 열렸어.”

“일이 되게 빨리 진행됐네요?”

“하하, 저도 그런 사람을 편하게 둘 수는 없어서요.”

“아아…….”

이어서 남자는 묵직한 목소리로 전광진의 형량을 알렸다. 이한 그룹은 차근차근 전광진의 모든 것을 앗았다. 그의 부와 명예, 사회적 체면까지 모두 말이다.

그건 통쾌하기도 하고, 찝찝하기도 했다. 복수는 직접 하고 싶었던 희찬이었으니 그 마음이 더 컸지만 도준은 의외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애초에 별생각이 없었다는 듯, 줄곧 심드렁한 눈빛을 보였다.

무거운 주제로 나누는 대화는 꽤 오래 이어졌다. 남자는 제법 살벌한 이야기들을 아무렇지 않게 전했다. 예를 들면,

“원하면 교도소에서 죽게 해 줄 수도 있어.”

같은 말들 말이다.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아 곧장 도리질을 친 희찬과 달리 도준의 눈은 진지했다. 여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아 놓고 전광진의 죽음에 흥미를 보이는 도준의 눈빛이 문득 위험해 보였다. 희찬이 도준의 눈 앞에 대고 손을 휘휘 저었다.

“왜?”

“너 허튼 생각하지 마.”

왜인지 잔뜩 겁을 먹은 듯한 희찬의 모습에 도준이 생긋 웃었다. 도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도준이 희찬의 콧방울을 쥐었다. 아프지 않게 살살 흔들자 희찬이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렸다.

“별생각 안 했어.”

남자의 말을 듣는 내내 도준의 머릿속에 울리는 말은 단 하나.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그게 다였다.

도준은 악을 악으로 이기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 내라던 대표의 조언을 수없이 되뇌었다.

잠시 적막이 앉았다. 어느새 희찬은 도준보다 훨씬 편하게 부부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넉살이 좋은 건지, 먼저 이야기 주제를 꺼내기도 하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도 하는 희찬의 모습에 도준이 피식, 웃었다.

그러다 7시까지 오라던 선배의 말이 퍼뜩 떠올랐다. 시간을 확인한 도준이 희찬의 허벅지를 어루만졌다.

“이제 가야겠다.”

“아, 그렇지. 오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엔 제가 대접하고 싶어요.”

희찬이 도준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서며 예의 바른 인사를 건넸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이런 음식도 얼마든지 대접할 수 있는 여유가 있으니, 도준의 부모와 꾸준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아이고, 우리는 이미 많이 받았는걸요.”

“하하, 말씀 편하게 하셔도 괜찮아요. 아……버님?”

희찬이 애교 섞인 미소를 보이며 활짝 웃었다. 잠시 멈칫했던 남자가 이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그거 듣기 좋네, 한 번만 더 말해 볼래요?”

“아버님, 어머님! 어렵지 않죠!”

“하하, 희찬 배우 성격이 정말 좋네요.”

“아무래도 도준이보다는 제가 낫죠? 얘는 가리는 게 너무 많아서.”

근데 이게 듣자 하니 웃긴 거다.

도준은 어느새 성격 좋게 ‘어머님, 아버님’ 부르며 부모와 편하게 지내는 희찬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더 내버려 뒀다가는 아주 절친한 친구 사이로 발전할 듯한 모습에 도준이 희찬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이만하고 제발 좀 가자는 뜻이었다.

“어머님, 아버님! 도준이가 연락 안 받으면 저한테 연락 주세요! 제가 단도리 할게요!”

“그래, 그래. 아이고, 밝은 거 보기 좋네. 도준아, 너도 희찬이처럼 좀 웃고 그래라.”

“아니, 이게 지금…….”

“뭐. 불만 있어?”

“그럴 리가. 가자.”

아주 잠깐의 시간이 더 흐르고 가게를 벗어날 때쯤, 세 사람은 도준의 우려대로 절친이 되어 있었다. 어느새 희찬에게 말을 놓는 부모나, 그 장단에 맞춰 팔랑거리는 희찬은 정말 친밀해 보였다.

그 모습이 싫은 게 아니다. 살갑지 않은 자신을 대신해 부모와 가까이 지내는 희찬의 모습은 실로 보기 좋았다.

희찬은 도준과 함께 차에 올라서도 조수석 창문을 내리고, 그들을 향해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 댔다. 무뚝뚝한 인사를 남기는 도준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부럽지.”

희찬의 목소리가 정곡을 찔렀다.

“부러운 건가 이게?”

희찬의 말을 곰곰이 되뇌던 도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럽다라. 어쩌면 희찬의 성격이 부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내 도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식당에서 뮤지컬 극장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촉박하게 출발했는데도 여유 있게 도착한 덕분에 도준은 느긋하게 주차 자리를 찾았다. 가장 아래층, 가장 구석진 곳에 주차를 마친 후에는 모자와 마스크를 썼다. 희찬은 기껏 예쁘게 만진 머리 다 망가진다며 볼멘소리를 내면서도 착실하게 제 얼굴을 가렸다.

“대표님한테는 말씀드렸어? 우리 여기 온다고?”

“응, 아까. 사람 몰려도 당황하지 말고 너랑 붙어 있으래.”

“너 대표님한테 하는 거 반만 부회장님한테 해 봐라.”

“나 낯가려.”

“아, 예…….”

참나, 희찬이 인상을 찌푸리고 입맛을 쩝, 다셨다.

처음 부모를 만났을 때야, 배신감이라든가 원망이라든가 아무튼 부정적인 감정으로 점철되어 다가갈 생각이 없으려니 했다. 하지만 최근 도준의 행동을 보면 부모를 밀어내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굼뜨게 행동하는 걸까.

역시 멋쩍은 걸까.

희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자 잘 써. 사람 몰려.”

“너나 잘 써.”

“나는 얼굴 작아서 괜찮아. 아, 너도 작지?”

“와, 진짜 어이없다.”

엘리베이터에 오르기 전, 두 사람은 서로의 상태를 체크했다. 도준이 꾹 눌러쓴 캡에 시야가 방해되어 잠시 올렸던 희찬의 모자를 다시 눌러 주었다. 희찬은 도준의 마스크를 잘생긴 콧대 위로 올려줬다. 그렇게 정체를 꽁꽁 감춘 두 사람은 만족한 듯 걸음을 놀렸다.

로비에는 예상대로 수많은 사람이 북적거리는 중이었다. 대기실로 곧장 들어오라는 선배의 말이 있었으나 도무지 대기실을 찾을 수 없어, 두 사람은 허둥거리기 바빴다.

혹시 누군가 알아보지는 않을까, 얼굴을 더 감추고 눈을 빼꼼 내밀어 돌아봤지만 그런 노력에도 사람들은 금세 도준과 희찬을 알아봤다. 그도 그럴 것이 일반인들과는 섞이기 힘든 부류의 비주얼이었다. 키도 큰데다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얼굴을 죄다 가리고 나타난 두 사람은 누가 봐도 연예인, 딱 연예인이었다.

“너 여기 있을래? 내가 가서 표 받아 올게.”

“그래, 둘이 같이 붙어 있으면 더 튀는 거 같아.”

“혼자 있을 수 있어?”

“내가 애냐.”

도준이 피식 웃으며 희찬의 등을 떠밀었다. 문득 그의 성장이 보이는 반응에 희찬이 해사함을 머금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아슬아슬한 면모를 보이던 이도준은 사라졌다. 자신을 해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정확하게 깨달은 도준은 이제는 다 괜찮다는 듯, 의젓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희찬이 초대 표를 받는 창구로 향하는 동안 도준은 주변에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근사한 미소를 보였다. 여기저기서 찰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도준과 희찬을 마주한 사람들은 연신 환호를 터뜨리며 그들을 향해 열띤 성화를 보였다.

“준아!”

멀리서 희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준에게로 쏠렸던 시선이 희찬의 목소리가 난 곳으로 향했다. 사람들을 가르고 성큼성큼 다가온 희찬이 도준에게 표를 들이밀었다.

“받았어?”

“응, 우리 자리 되게 좋다. 초대석이래서 뒷자리일 줄 알았는데.”

“이렇게 좋은 자리 빼 줘도 되나? 돈 내고 온 사람들은 아쉬워서 어떡해.”

“그러게? 그건 좀 미안하다.”

전혀 안 그래 보이는데.

즐거운 목소리가 동동 뜬 희찬의 기분을 대변했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나자, 극장의 로비는 두 사람의 팬미팅 장소를 방불케 하는 뜨거운 열기를 머금었다.

― 곧 뮤지컬이 시작되니, 극장 내에 계신 관객분들께서는 입장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극장 안에서는 극의 시작을 알리는 방송이 이어지는 중이었으나 사람들은 도무지 흩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도준과 희찬은 동시에 ‘더는 여기에 있으면 안 되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이러다가는 열심히 극을 준비한 배우들과 제작사에 민폐가 될 것 같았다.

도준과 희찬은 가지런한 인사를 남기고 얼른 발을 돌려 극장 안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개운한 기분으로 만난 팬들은 반가웠지만, 오늘은 초대받아 온 손님이었으므로 주객이 전도되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객석에 앉은 도준과 희찬은 객석의 조명이 모두 꺼진 후에야 마스크를 벗었다. 답답하게 숨통을 틀어막는 면을 걷어 내자 개운한 숨이 몰아쳤다.

“재밌게 보고 가자.”

“응, 재밌게 보고 가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정면에 시선을 두고 손을 마주 잡았다. 절대 놓지 않겠다는 것처럼 서로의 손가락을 옭아맨 손에는 굳센 힘이 서렸다.

뮤지컬은 서로를 의지하는 두 친구가 역경을 헤쳐 나가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그렸다. 홀로 모든 일을 견뎌 온 주인공에게 단 하나 남은 소중한 친구는 그에게 빛이었고, 그 친구에게 역시 주인공은 세상에 둘도 없는 희망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꼭 자신들의 이야기 같아, 도준과 희찬은 금방 뮤지컬에 빠져들었다.

*

“언제 일어날래.”

도준이 침대 앞에 쪼그려 앉은 채로 하얀 이불에 둘러싸인 희찬의 코를 콕 찔렀다. 요즘 들어 희찬의 아침잠이 늘었다. 그래도 10시쯤에는 꼭 일어나던 희찬이었는데, 점심시간이 다 되도록 눈을 뜨지 않는 희찬 덕에 도준이 느끼는 심심함만 커졌다.

“누르지 마…….”

“일어나, 나 진짜 심심해.”

도준이 희찬의 몸을 붙잡고 격하게 흔들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희찬은 몸을 이불 속에서 웅크릴 뿐, 도무지 일어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에 도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오전 내내 혼자서 청소도 하고, 그간 정리하지 못한 택배도 정리하고, 시나리오도 봤는데 또 혼자 시간을 보내려니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희찬이 불쑥 이불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하얀 이불과 잘 어울리는 하얀 손바닥에 도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준아 나 갖고 싶은 거 있어.”

“어떤 거.”

“고추.”

“뭐?”

이게 진짜 뭐라는 거지.

황당한 희찬의 말에 도준이 미간을 좁혔다. 희찬은 그저 즐겁다는 듯 눈꼬리를 휘어뜨려 환하게 웃었다.

“네 고추 줘.”

“너 술 마셨어?”

“아니, 안 마셨는데.”

“근데 뭘 달라고?”

어이가 없다.

대뜸 손을 내밀어 고추나 달라니.

예상 못 한 희찬의 말에 도준이 당황한 듯 어버버거리자, 희찬이 조금 더 짓궂게 웃었다.

“아, 줘. 네 고추 줘.”

도준이 귀 아래를 긁적거렸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기색을 보이자 희찬이 이불을 걷어 제 옆을 내어 줬다.

“여기 누워.”

“싫어. 안 누울 거야.”

“씁, 형 말 들어야지.”

“이럴 때만 형이지.”

그때 괜히 형이라고 불러 줬다.

눕기 전까지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희찬이라는 것을 아는 도준은 져 주는 심정으로 희찬의 옆에 몸을 뉘었다.

도준이 눕자마자 희찬의 손이 도준의 고환을 조몰락거렸다. 페니스 기둥을 쓰다듬었다가, 귀두를 훑고, 다시 아래로 내려가 고환을 만지는 손은 집요했다.

도준이 이를 꽉 물었다. 조금씩 아랫배가 간질거리는 것이 금방이라도 페니스가 고개를 들 것 같았다.

“그만해.”

“너는 내 엉덩이 만질래?”

“…….”

이번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도준은 아무 말 없이 손을 뻗어 손바닥에 닿는 희찬의 엉덩이를 만지작거렸다. 희찬이 얕은 웃음을 터뜨렸다. 귀가 빨갛게 달아오른 도준은 또 엉덩이는 거부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이구 착해.”

희찬이 몸을 돌려 도준을 마주 보고 누웠다.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는 도준의 모습이 새삼스럽다. 부드럽게 희찬의 뺨을 어루만지자, 도준이 아예 이불 속으로 숨어 버렸다.

“너 진짜 오늘 왜 그래.”

“장난친 거지, 재밌잖아.”

“재미없거든.”

희찬도 덩달아 이불 속에 숨었다. 몸을 웅크린 채로 얼굴을 가린 도준의 볼에 입을 맞추자, 도준이 콩벌레처럼 제 얼굴을 쏙 감추었다.

“고추 하면 고추 꺼내 줄 줄 알았더니.”

“이게 네 거냐? 내 거거든.”

“아닌데, 내가 8년 전에도 내 거라고 했는데.”

“아!”

희찬이 다시 우악스럽게 도준의 페니스를 쥐었다. 순식간에 도사린 아픔에 도준이 엉덩이를 쭉 빼고, 희찬의 손에서 벗어났다.

“누구 거야, 제대로 말해.”

“네 거야, 아, 다 가져.”

“응, 내 거야.”

“그러지 말고, 일어나자, 나 진짜 오전 내내 심심했어.”

“그랬어.”

이내 두 사람이 동시에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따뜻한 이불 속에서 그보다 더 따스한 웃음을 피워 낸 두 사람은 또 어느새 두 팔과 두 다리로 서로를 꼭 옭아맨 채였다.

희찬이 도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비비적거렸다. 입체적인 이목구비가 판판한 가슴에 닿아 움직이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도준이 희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검은 머리카락의 느낌이 퍽 부드러웠다.

“나 또 하고 싶은 거 있어.”

희찬이 살짝 고개를 들고, 눈을 빼꼼 올려 도준을 바라봤다. 분명 순수한 눈빛이었는데, 이상하게 긴장이 서려 도준이 침을 꼴깍 삼켰다.

“보드게임 하고 싶어.”

“또 웬 보드게임.”

“나 너랑 하려고 엄청 샀어. 다 왔을걸?”

그 많은 택배가 다 보드게임이었구나.

받는 사람 이름이 죄다 ‘이*준’으로 처리되어 있어 막연히 제 것인 줄 알았다.

“우리 어릴 때 하던 거 있잖아. 얼마 전에 심심해서 찾아봤는데 아직도 팔더라?”

“그래?”

“응, 그래서 다 샀어.”

희찬의 목소리가 경쾌하기 짝이 없다. 맹랑한 희찬의 모습을 본 도준은 허, 헛웃음을 터뜨렸다.

“도박하지 말랬더니, 도박 게임을 하려고 하네.”

“너 콱 깨물어 버린다.”

“잘못했어요.”

“그래야지. 이제 밥 먹자, 배고파.”

희찬이 벌떡 일어났다. 희찬이 일어남과 동시에 이불이 걷혀 차가운 바람이 도준의 몸을 휘감았다.

이내 두 사람이 나란히 방에서 벗어났다. 도준은 함께 아침을 먹기 위해 밥을 준비하고, 희찬은 도준이 한쪽으로 몰아 둔 택배 박스를 뒤적거리며 자신이 주문한 물건을 살폈다.

“춥다…….”

헐벗은 희찬이 웅얼웅얼 귀여운 목소리를 냈다. 도준이 희찬에게 바지와 티셔츠를 건넸다. 입기 싫은 듯, 희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늘따라 왜 저렇게 어린아이처럼 구는 건지, 그 모습이 나쁘지 않아 도준이 성큼성큼 걸음을 놀려 희찬에게 다가갔다.

“너 감기 걸려.”

“옷 입기 귀찮아.”

“하……. 진짜 왜 이러지.”

희찬이 도준의 손을 피해 이리저리 바쁘게 도망 다녔다. 도준은 인상을 한껏 찌푸린 채로 희찬을 팔을 잡아 억지로 옷을 입혔다. 두툼한 후드 티셔츠를 돌돌 말아 머리를 밀어 넣고, 팔을 잡아넣자 희찬이 못 이기는 척 팔을 길게 뻗었다.

이제는 반팔이 아닌 긴팔이 익숙한 계절이 왔다. 찾아왔던 가을은 금세 겨울에게 자리를 내어 줬고, 고개를 빼꼼 내민 초겨울의 추위는 집 안의 공기를 차게 식혔다.

“바지는 네가 입어.”

“이왕 입혀 준 거 다 입혀 줘.”

뭐, 못 할 거 없지.

응석을 부리는 희찬의 목소리가 귀엽다. 도준이 곧장 주저앉아 희찬의 발목을 잡고 바지에 밀어 넣었다. 부드러운 트레이닝복을 허벅지까지 끌어 올리자 희찬이 엉덩이를 들었다. 자기 의지로는 절대로 옷을 입지 않으려는 듯한 모습에 도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다 입었다. 아이고, 희찬이 잘했다.”

깔끔하게 옷을 갖춰 입은 희찬의 모습이 보기 좋다. 도준이 짓궂게 웃으며 어린아이 달래듯 희찬의 엉덩이를 토닥이자 희찬이 도준의 어깨를 잡았다.

“자기야, 나 잘했어?”

희찬이 고개를 비뚤게 꺾고, 샐룩 예쁘게 웃었다. 그에 도준이 저도 모르게 이를 꽉 깨물었다. 바지를 입혀 주느라 제 앞에 앉은 도준의 허벅지 위에 발을 올린 희찬은 꼼지락꼼지락, 발을 옮겨 도준의 페니스를 세게 짓눌렀다.

도준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발끝에 힘을 주고 요염하게 움직이는 덕분에 바지 위로 상당한 자극이 느껴졌다. 떨리는 숨을 터뜨린 도준이 무릎을 짚고 일어서서 희찬의 볼을 감싸 쥐었다. 잘생긴 이마에 정성스레 입을 맞춘 후에는 탄탄한 엉덩이를 토닥토닥 다독였다.

“밥 먹자.”

에이, 이 장난도 안 통하네.

희찬이 입술을 말아 물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식사를 마친 희찬과 도준은 아주 신중하게 서로를 살폈다. 탁자를 가운데에 두고, 탁자 위를 살피는 도준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가끔 눈을 들어 희찬의 옅은 눈을 봤다가, 그의 손에 들린 종이를 살폈다. 고개를 빼끔 들어 올리고 눈을 내리깔아 보이지 않는 면을 보려고 했으나,

“야, 치사하게 하지 말자.”

기가 막히게 도준의 의중을 알아차린 희찬이 손을 훽 꺾어 제가 가진 것을 가렸다.

“아, 못하겠어.”

도준이 철퍼덕, 자신이 쥔 것을 내려놓으며 목을 뒤로 젖혔다. 툭 튀어나온 탐스러운 울대가 까딱거리는 것이 그가 느끼는 따분함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중이었다.

“빨리 해, 30초 지나간다.”

희찬이 탁자 아래에서 발을 뻗어 도준의 다리를 톡톡 건드렸다. 도준은 정말 재미가 없다는 듯, 흥미 없는 눈을 보였으나 희찬은 그저 재밌었다.

두 사람의 앞에는 제법 머리를 써야 하는 게임이 놓여 있었다. 범인을 잡고 추리해야 하는 게임은 어릴 적, 보육원에서 하던 것이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시작했으나 게임은 어렵기만 했다. 이렇게 어려운 게임을 어릴 때는 어떻게 한 걸까, 그런 생각이나 들었다.

“빨리 11칸 가. 어디로 갈 건데.”

“음…….”

희찬의 재촉에 결국 도준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희찬은 게임에 상당한 흥미를 보이는 듯했으니 장단이나 맞추려는 심산이었다. 주사위 눈만큼 대충 말을 움직였다. 어차피 이 게임은 어릴 때부터 장희찬이 전공이었고, 도준은 항상 지던 게임이었다.

“이도준 성의가 조금도 없어?”

“아아, 어려워. 나 그만하고 싶어.”

도준이 탁자 위에 몸을 엎드렸다. 벌써 한 시간이 넘게 진행되는 게임이었는데, 희찬은 그저 즐겁기만 한 건지 도무지 게임을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애초에 보드게임이 하고 싶다며 방방거리는 희찬의 장단에 놀아나면 안 되는 거였다. 다리에 닿는 희찬의 발을 투정 부리듯 툭, 쳐 낸 도준이 한탄을 터뜨렸다.

희찬이 도준의 등을 쓰다듬었다. 탁자에 볼을 뭉개고 웅얼거리는 도준의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지자 도준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너는 꼭 이쯤 되면 안 하려고 하더라.”

“재미없어.”

“사람이 어떻게 재밌는 거만 하고 사냐?”

아니, 그래도 게임은 재밌자고 하는 거 아닌가.

도준은 탁자에 턱을 괸 채로 흥미 없는 눈을 보였다. 그러다 소파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이 지잉, 울었다. 이 타이밍에 울린 전화는 도준을 구원할 것이었으므로, 도준은 희찬에게 손바닥을 딱 들이밀어 보이고는 얼른 전화를 받았다.

이선재

여전히 아버지라는 단어는 붙지 않은 남자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네, 여보세요.”

도준이 전화를 받으며 은근슬쩍 말판 위의 말을 정리했다. 그런 도준의 손을 희찬이 짝! 소리 나게 내리쳤다. 도준이 퍼뜩 손을 오므렸다.

― 어, 바쁘니?

“아니요, 무슨 일이세요?”

― 전광진 출소할 거야.

“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생뚱맞은 말들만 들리는지 모르겠다.

도준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겨우겨우 얼굴 안 보고, 마주칠 걱정 없이 지낼 것이라 생각했는데 출소라니. 들어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새 출소라니. 도준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에 희찬이 의아한 듯 도준을 쳐다봤다. 무슨 일이냐고 거듭 물었지만, 도준은 대답 없이 입 모양으로 ‘잠깐만’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 내가 빼 줬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도준이 인상을 바짝 누비고서 휴대폰을 세게 움켜쥐었다.

*

희찬과 도준이 조금의 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차곡차곡 사랑을 새기는 동안 이한 그룹은 바쁘게 움직였다. 두 사람을 모델로 내세운 신제품은 이제껏 내놓았던 신제품 중 가장 높은 판매고를 올렸다.

지난 분기 매출 자료를 훑던 이선재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스스로 성장한 이도준과 장희찬은 보란 듯이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스타성을 자랑했다. 업계의 수많은 브랜드가 왜 그렇게 이도준과 장희찬을 잡으려고 아등바등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뿌듯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했다.

키워 주지는 못했지만, 혼자 자라서도 자신의 몫을 단단히 하는 모습이 여간 자랑스러운 게 아니었다.

똑똑, 묵직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한참 즐겁게 웃던 이선재는 금세 표정을 굳히고 문을 바라봤다. 뭐라고 응답하기 전에 두꺼운 문이 묵직하게 열렸다.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이도준을 유기하고, 이선재를 속였던 비서실장이었다.

처음 사실을 알았을 때는 남자를 저주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가족을 볼모로 잡혀 있었고, 그간 옆에서 자신이 다치지 않도록 보필해 준 정을 생각한 이선재는 그에게 아량을 베풀기로 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각서 작성은 덩달아 이어지는 당연한 행위였다.

가볍게 묵례를 한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선재는 한창 들여다보던 서류를 덮고, 남자를 올려봤다.

“부회장님, 지시하셨던 보석 준비되었습니다.”

이선재가 빙그레, 웃었다.

“바로 전광진 쪽으로 돈 넣어요.”

이선재의 명령에 남자는 다시 가벼운 인사를 남기고 떠나갔다. 이선재는 자신이 직접 처넣은 전광진을 위해 보석금을 준비했다. 교도소에 수감되자마자 빼내는 격이었기에,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내는 데에 제법 공을 들였다.

이선재는 전광진과 어울려 이도준과 장희찬의 꿈을 짓밟은 사람들도 하나하나 처단했다. 그 명단을 알아내는 일은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으므로, 일은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더러는 이도준의 속을 헤집은 생식기가 잘려 나갔고, 더러는 이도준의 신체를 탐한 눈이 파였다. 몇몇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고, 또 몇몇은 어디 이름 모를 섬에다 성노예로 팔아 버렸다.

흔적 없이 일을 처리하는 데에는 몇 가지 귀찮은 품이 들어야 했지만, 그 모든 것은 조금도 수고롭지 않았다. 그저 그들이 하하호호 경박하게 웃으며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행했던 그 모든 끔찍한 행위를 똑같이 대갚음해 주고 싶었다.

이 모든 일은 두 사람 모르게 진행되었다. 그들의 심성으로 보아,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행위는 극히 꺼리는 것 같았으니, 구태여 알려서 미움을 사는 것보다 표면으로는 전광진과 그의 수족을 처리하는 것만 보여도 충분하다고 판단한 탓이었다.

게다가 빛을 자처하는 아이들이었으니, 빛이 돋보일 단면 뒤의 어둠 또는 그림자 정도는 제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약속했던 대로 마지막 복수의 기회는 두 사람에게 주려 한다. 여전히 속이 부글부글 끓는 중이었지만, 전광진의 생존 여부는 두 사람의 손에 맡겨 두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았다.

이선재는 흥미롭다는 듯 웃으며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착한 청년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어떻게 처리할지 그의 대처가 궁금했다.

이선재가 테이블 위에 있는 전화의 버튼을 눌렀다. 곧장 비서와 연결되어 수화기 너머로 비서의 단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선재는 흥미로운 입꼬리를 눌려 앉힌 후,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전광진 나오면 사람 붙이세요.”

― 네, 알겠습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요.”

― 네, 명심하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이선재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서 허공에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입에서는 기분 좋은 콧노래가 절로 흘렀다.

이 소식을 도준이에게 알려 볼까.

이선재는 주저하지 않고 곧장 도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가지 않아 들리는 선량하고 잘 다듬어진 목소리에 이선재가 기분 좋게 웃었다.

“어, 바쁘니?”

― 아니요, 무슨 일이세요?

“전광진 출소할 거야.”

이선재는 아무런 설명도 붙이지 않고 대뜸 전광진의 출소 소식을 알렸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당황스러운 듯, 놀란 도준의 목소리가 이어 들렸다. 이선재는 삐걱 소리가 날 정도로 의자 등받이를 밀고서 혀를 튕겨 똑, 소리를 냈다.

“내가 빼 줬어.”

이번엔 아예 도준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그가 느끼는 복잡한 심경이 전파를 타고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공중에서 펜을 한 번 빙글 돌렸던 이선재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내가 복수할 기회 주겠다고 한 거 생각나?”

― 네.

“이제 너희 차례야.”

― …….

꼴깍,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말수가 적은 도준이 입을 아예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망설이는 걸까, 긴장하는 걸까. 아무튼 알 수 없는 그의 심정이었으므로, 이선재가 차분히 도준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도준은 끝내 대답이 없었다. 여전히 당황스럽기만 한 건지, 오래간 침묵으로 일관하는 도준의 모습에 이선재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당황스러워?”

― ……네, 조금.

“음……. 전광진처럼 통제하길 좋아하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벌이 뭔지 아니?”

― 아니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거야. 그게 제일 고통스럽고 힘든 일일 거야. 그것도 교도소처럼 폐쇄된 곳이 아닌, 해방되었고, 이제 다시 권력을 쥐었다고 생각할 때 자신의 행동이 제한당하는 경험을 하면 지옥을 살게 돼.”

― …….

“전광진이 가진 것은 내가 다 빼앗았으니까, 통제는 네가 해 봐. 네가 원하는 대로.”

이선재는 줄곧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도준에게서는 여전히 답이 없었으나, 그의 숨이 조금은 편안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당황스러운 일의 연속이었다. 도준은 마치 자신을 어르고 달래듯 얘기하는 이선재의 목소리에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복수.

처음 희찬이 얘기했을 때는 막연하게 미뤘던 것이고, 이후 기사가 터졌을 때는 간절히 하고 싶은 것이었다. 하지만 어른들의 말대로 있는 자리에서 희찬과 행복하게 지내다 보니 복수는 어느새 남 일이 되었다.

굳이 해야 하나.

내가 굳이 그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나.

쳐다보기 싫고, 마주하기도 싫었으므로 도준은 그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네……. 일단 생각해 볼게요.”

― 희찬이랑 얘기 잘해 봐. 자세하게 대화 나누고, 천천히 결정해.

“네, 연락드리겠습니다.”

― 그래, 또 보자.

통화를 마친 도준은 복잡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며 희찬을 바라봤다. 통화 내용이 궁금한 건지, 호기심을 비추는 낯에 도준이 손을 들어 희찬의 얼굴을 슥 훑어 내렸다.

“왜? 뭔데. 뭐라셔?”

뒤이어 와다다 질문이 쏟아졌다. 도준은 테이블에서 몸을 살짝 물리고서, 편안하게 소파에 등을 기댔다. 볼에 바람을 불려 입 안에서 굴리다 고개를 젖히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맞은편에 있던 희찬이 도준의 옆으로 다가왔다. 허벅지를 부드럽게 주무르며 타이르는 모양에 도준의 검은 눈동자가 데굴 굴러 희찬에게 닿았다.

“전광진 출소한대.”

“엥? 벌써?”

희찬이 인상을 찌푸리며 펄쩍 뛰었다. 분명 형량이 어쩌고 하는 기사를 봤는데, 그게 이렇게 짧았던 기억은 없다. 도준은 자신이 느끼던 심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희찬의 행동에 어깨를 으쓱거렸다.

“부회장님이 빼셨대. 이제 우리보고 복수하라고.”

“복수?”

“응……. 원하면 복수하라고.”

도준이 희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정리되지 않아 복잡하기만 한 심경을 담은 도준의 목소리가 거실을 웅웅 울려 댔다. 희찬도 고민이 되는 건지, 말을 줄이고 도준의 뺨을 쓰다듬었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손바닥에 도준이 입을 맞추었다.

“어떻게 하고 싶어?”

“나는 모르겠어. 너는?”

“음…….”

도준이라고 딱히 생각이 있는 건 아녔다. 희찬의 의사를 묻고, 그 역시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한다는 것에 도준은 그저 눈동자만 도르륵, 도르륵 굴려 댔다.

이미 모든 것을 빼앗겼다고 했는데, 굳이 나서서 무언가를 해야 할까.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싶어 하던 사람이 한평생 공들여 쌓아 온 모든 것을 손에서 빼앗겼는데, 그러면 알아서 자멸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복수할 의지도 사라졌다. 하지만 이렇게 가만히 덮어 두기도 찝찝한 일이다. 갈팡질팡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마음은 싱숭생숭하기만 했다.

어딘가 석연찮은 도준의 표정에 희찬이 도준의 머리를 꼭 끌어안았다. 작은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적잖이 복잡한 모양이었다. 대체로 단순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짙은 저와 달리, 도준은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고 판단하는 편이었다. 그러니 저 고민은 자신이 공감하지 못할 것이라, 그저 위로나 하고 싶었다.

“찝찝하면 뭐라도 하고…….”

“응?”

“그래도 범죄는 저지르지 마.”

도준이 피식 웃었다. 도대체 저를 어떻게 보면 이런 말을 다 하는가, 싶어 눈을 흘기자 희찬이 덩달아 웃었다.

“내가 범죄나 저지를 거 같아?”

“혹시 모르지. 너 저번에 전광진 찾아갔을 때 살벌했다며. 아빠가 식겁하셨대.”

“그때는 경우가 다르지.”

도대체 뭐가 다르다는 건지.

희찬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도준의 귓불을 살살 주물렀다. 두 사람의 대화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지만, 개운하지는 않았다.

도준의 머릿속에는 ‘이왕 이렇게 된 거 복수 한번 해 주자.’ 하는 생각과 ‘희찬이도 됐다는데 그냥 넘어가자.’ 하는 생각이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다.

그런 도준의 이마에 희찬의 촉촉한 입술이 닿았다. 도준이 눈을 빼끔 들어 희찬을 바라봤다.

“그럼 하던 거나 계속하자.”

“뭘?”

“이거. 아직 안 끝났는데?”

아. 어물쩍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희찬의 게임을 향한 열정은 죽지 않았다. 손끝으로 탁자를 가리키며 여전히 펼쳐져 있는 보드게임을 바라보는 희찬의 눈에는 열의가 가득했다.

도준이 표정을 굳히고 입맛을 쩝, 다셨다. 다른 게임을 하자고 해 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장희찬을 이길 수 있는 보드게임은 없다. 이상하게 모든 것이 운으로 진행되는 부루마블마저 도준은 꼭 희찬에게 졌다.

이왕 질 거라면, 하던 게임에서 깔끔하게 패배 후 얼른 게임을 접는 것이 좋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을 한 후에는 희찬이 준비 중인 탁자 앞에 몸을 붙여 앉았다.

“뭐야? 뭐야. 왜?”

도준이 희찬의 손목을 덥석 쥐었다. 희찬은 왜인지 말판 위에 있는 말을 전부 다시 원위치로 옮기고, 각자에게 나뉘어 있었던 힌트 카드를 거둬 새로 섞었다.

도준이 휘둥그레 눈을 뜨고 희찬을 바라봤다. 희찬은 뭘 그렇게 놀라냐는 듯, 대수롭지 않은 눈으로 도준을 마주했다.

“다시 해야지. 흐름 끊겼잖아. 아까 거 기억도 안 나.”

“아니, 아니…….”

“뭘 아니야, 너 다 기억해?”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진행이 되어 있어 금방 끝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희찬은 도준의 머리 밖에서 놀았다.

도준은 허망한 모습으로 희찬이 다시 세팅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만 봤다. 그러는 중에도 머릿속에는 이선재가 남겨 둔 ‘복수’라는 단어가 맴돌았다.

*

커다란 철문이 삐걱 열렸다.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 신분 대조를 마친 전광진이 철문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코끝에 닿는 겨울의 향이 상쾌하다. 교도소 안에서 맡는 퀴퀴한 기분 나쁜 냄새와는 사뭇 다른 개운함에 전광진의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미리 도착해 저를 기다리는 심복에게 짐 가방을 건네고, 차에 오른 후에는 담배부터 찾아 물었다. 교도소에서 지낸 지난 몇 달간 담배는 구경도 할 수 없었으므로 입에 물린 작고 둥근 막대의 느낌이 이질적이었다.

“누가 빼 주신 건지는 아십니까?”

“몰라. 내가 인생을 잘 살았나 봐.”

하하하!

작은 차 안에 전광진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교도소에서 자신이 신청하지도 않은 보석 소식을 접했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아마 오래간 함께 각자의 치부를 드러내며 지내 온 사람 중 하나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다른 연락도 없는 걸 보면 자신을 밝히는 게 꺼려지는 사람일 것이리라.

전광진은 대충 이제껏 자신이 범죄에 연루될 때마다 앞서서 일을 막아 주고는 했던 경검의 고위직 사람 중 한 명이 아닐까, 어렴풋이 예측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댁으로 가십니까?”

“이 좋은 날 집으로 곧장 갈 수 있나. 술이나 한잔 적시지.”

“네, 모시겠습니다.”

차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조금씩 떠오르는 해가 눈가를 간지럽히자, 전광진은 신경질을 부리며 차창을 가렸다.

그렇게 며칠은 평화로웠다. 하고 싶은 것을 누리며 살았고, 교도소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일상으로 돌아온 기분은 좋기만 했다. 손닿는 거리에 원하는 것이 있었고, 돈을 다 빼앗겼다고 해도 주변에서 돕는 사람이 있어 사고 싶은 물건, 먹고 싶은 음식을 만끽하며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분명 그랬다.

그런데 자꾸만 누군가 지켜보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골목길을 걸을 때면 꼭 한 발자국 더딘 걸음 소리가 들렸다. 차를 몰면 매번 차가 따라붙었고, 집에 돌아오면 자신이 두었던 물건이 제자리에 있지 않고 엉뚱한 곳에 가 있기도 했다.

처음엔 오랜만에 나와서 생활하느라 정신이 없는 것이겠거니, 막연하게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아니, 집 안이 왜 이 꼴이냐니까?”

“도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너 말고 우리 집에 누가 들어와!”

“대표님, CCTV를 한번 확인해 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며칠째 연달아 온 집 안의 물건이 제멋대로 자리를 바꾸었다. 거실에 있던 TV가 침실에 들어와 있었고, 침실에 있던 침대는 옷 방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기겁하며 심복을 부르고, 도무지 혼자 집 안에 있을 수 없어 잠시 나갔다 오니 또 보란 듯이 물건은 제자리를 찾아 돌아갔다.

아주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도발이라도 하듯 깨작깨작 긁어 대던 것들이 이제는 대놓고 제 위치에서 벗어나 있으니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심복이 전해 준 CCTV 영상을 봐도 보이는 게 없었다. 집으로 들어오는 사람도, 나가는 사람도 그 어느 것도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전광진은 발끝에 도사리는 공포를 느꼈다. 비로소 맛보게 된 자유를 다시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공포, 모든 상황을 제 입맛대로 주무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 같은 것들 말이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운 신음을 하던 전광진이 눈을 번뜩 떴다.

“이도준.”

이도준이다.

이도준이 일을 벌이는 것이 분명했다. 기사가 터지고, 자신을 찾아와 살기가 가득한 눈으로 저를 노려봤으니, 제게 이런 유치한 짓을 벌일 사람은 이도준 단 한 명뿐이었다.

전광진이 눈을 치켜뜨고 심복을 바라봤다. 며칠을 자지 못해 퀭한 눈에 가느다란 핏발이 선 채였다.

“이도준 왔다 갔지?”

“대표님, 보셨잖습니까. 아무도 안 왔습니다.”

“지금 내가 미치기라도 했다는 거니?”

전광진이 고함을 내지르자 심복이 한숨을 터뜨렸다.

전광진이 교도소에서 나온 지 얼마나 되었을까. 겨울 초입, 쌀쌀한 바람을 내뿜던 날씨는 어느새 완연한 겨울에 들어서 살갗이 아린 차가운 바람이 몰아쳤다. 다가오는 연말에 사람들은 추운 와중에도 따뜻한 마음을 머금었고, 짤랑짤랑 길가에 울리는 종소리가 사람들의 푸근한 마음을 갈구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전광진은 호기로운 모습을 잃었다. 호탕하게 웃으며 막무가내로 일을 저지르던 패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공포에 떠는 꼴이 한심하기 그지없다.

처음 전광진이 ‘주변에 누군가 있다.’라는 말을 했을 때는 그럴듯했다. 워낙 지은 죄가 많은 사람이었으니, 누군가 그를 해치려면 얼마든지 해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눈을 씻고 봐도 그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도준이라니. 터무니없는 추측이었다.

전광진은 그저 혼자 무서워했고, 혼자 공포에 떨었다. 처음 집 안의 배치가 바뀌었다며 벌벌 떠는 목소리로 전화를 했을 때 부리나케 달려왔었다. 그리고 보이는 광경은 그저 평소와 같은 모습의 집이었다.

전광진은 ‘네가 오는 동안 자신이 잠시 마당에 있을 때 누군가 다시 바꿔 둔 거다’라는 말을 했지만 가당치도 않았다. 이걸 눈에 띄지 않고 옮기는 것도 불가능했고, 그 소란을 떠는 동안 전광진이 아무것도 못 들었을 리도 없었으니 말이다.

무슨 닌자나 되면 모를까.

“대표님, 요즘 잠을 못 주무셔서 예민해지신 것 같습니다. 조금 쉬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너 나를 상당히 무시하고 있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나가.”

“네?”

“나가라고. 다시는 내 집에 오지 마!”

심복이 어이없는 숨을 공중에 터뜨렸다. 십수 년을 옆에서 보필했는데, 제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는 모습이 한심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별 볼 일 없는 사람인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원래 저런 사람이었다.

스무 살 남짓의 어린 애들을 데려다가 성 놀음을 하는 것도, 꿈을 가진 청년들의 약점을 잡아 돈을 뽑아 먹는 것도, 그러다 사람을 극한의 지경에 몰아넣는 것도. 그저 전광진이 가진 추악한 모습이었다.

뭐가 좋다고 붙어 있었던 건지.

심복은 전광진에게 인사 한마디 남기지 않고 집을 벗어났다. 대문을 나설 때는 그의 집 앞에 걸쭉한 침을 탁, 뱉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알아서 잘 지내 보라지. 이제는 얻을 것도 없는데, 돌아오라고 붙잡아도 오지 않을 것이다.

“네, 대표님. 술 한잔 괜찮으세요?”

심복은 어둑한 골목을 벗어나며 곧장 다른 돈줄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의 걸음 뒤에는 한 박자 늦는 발자국 소리가 어렴풋이 뒤따랐다.

*

환한 빛이 내리쬐는 백화점 안,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거니는 두 사람은 즐겁게 웃는 채였다. 도준과 희찬은 겨울을 맞아 오랜만에 쇼핑을 결심했다.

백화점 내부의 따뜻한 기온과 잔잔하게 흐르는 캐럴이 마음을 간질였다. 백화점 바깥에는 웅장한 트리가 세워졌다. 화려한 옷을 입고, 형형색색의 빛을 내며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모양은 사람들 마음에 괜한 설렘을 안겼다.

두 사람은 각자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의 카드로 결제하면서도 조금의 미안함이나 부담은 느끼지 않았다. 마땅히 이 정도는 누려야 한다는 것처럼, 우리는 이제 그 정도는 할 수 있다는 것처럼 두 사람의 행동은 거침없었다.

언젠가, 서로의 치부를 알고, 울고불고 언성을 높였던 그때 두 사람은 ‘다른 사랑’을 하기로 다짐했었다. 그리고 그 다른 사랑은 온전한 신뢰로 형성되어 두 사람의 마음에 든든함을 남겼다.

두 사람은 각자가 느끼는 불안함이나, 마음에 꿈틀거리는 불만, 또는 공포 따위의 이전에는 숨기기 급급했던 감정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행복과 사랑, 신뢰와 즐거움은 조금 더 크게 표현했다. 그렇게 허물 틈 없던 관계가 더욱 단단해지니 자연히 무서울 것도 없었다.

전광진이 출소 후, 자신의 집에서 편안하게 지낸다는 소식은 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언젠가 도준이 말했던 대로 두 사람은 더 이상 어리지 않았고, 서로를 배려하느라 자신을 돌볼 줄 모르던 미련한 사랑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온전해야 상대가 온전하고, 내가 서야 상대가 선다는 것을 완벽하게 자각한 요즘, 두 사람은 눈에 띄게 성장한 면모를 보였다.

“이거 잘 어울릴 거 같아.”

희찬이 도준에게 목도리를 들이밀었다. 무난한 색감의 아무런 무늬도 없는 목도리였지만 이도준의 얼굴을 만나니 눈에 띄게 화려해졌다.

도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 목덜미 근처로 다가온 희찬의 손을 끌어 내리고, 눈을 돌린 도준의 관심은 목도리가 아니었다.

“나 목도리 싫어.”

“추위도 잘 타는 게, 맨날 그렇게 훤히 내놓고 다니니까 춥지.”

“답답해, 목도리 하면.”

그런 두 사람을 집요하게 좇는 시선이 있었다. 어딜 가도 쫓아오는 시선이라면 그저 익숙해지는 것이 답이었다. 하나하나 싫어하고 도망쳐 봐야, 도망치려 노력하는 자신만 힘들 뿐이었으니 말이다.

이제는 일상에서도 모습을 종종 드러내는 희찬과 도준의 목격담은 연일 온라인상을 달구었고, 사람들의 눈길에 다시 익숙해진 두 사람은 편안하게 그들의 시선을 누렸다.

곧 쇼핑을 마친 두 사람은 저벅저벅 걸음을 놀렸다. 나란히 차에 오른 후에는 시동을 건 채로 가만히 시간을 헤아렸다.

“전광진 미쳤다던데.”

“응.”

고요하게 내려앉은 적막을 희찬이 깨트렸다. 같은 생각을 하던 도준이었기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남겼다.

오늘 아침, 전광진이 미쳐 날뛴다는 소식을 들었다. 모든 사람을 의심하고, 집 안에 틀어박혀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갑자기 고성을 내지르며 집 밖으로 뛰쳐나오기도 부지기수라고 했다. 그러다가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을 향해 폭언을 퍼붓기도 한다고 했다.

말 그대로 비참한 말로였다.

정작 전광진이 출소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미쳤다는 소식을 들으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도대체 그런 사람을 왜 무서워했을까,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 뭐가 그렇게 대단해서 서로를 놓아야만 했을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말 별거 아니었던 일이었기에, 과거의 선택이 이제는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게 참 허망했다. 절대로 부술 수 없는 벽이라고 생각하여 도망치기 바빴는데, 이렇게 와르르 무너질 모래성일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부딪쳐 보기라도 할걸. 주변에 도움이라도 요청해 볼걸. 그런 부질없는 후회가 밀려와 머리가 아팠다.

무엇보다 이렇게 쉽게 무너지는 사람 덕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20대를 아파하기만 하며 보냈다는 사실이 참 허무하고, 허탈했다.

그때 조금만 더 용기를 내어 볼걸. 희찬이를 믿고, 말이라도 해 볼걸.

도준이 한숨을 푹 쉬었다. 마주 잡은 희찬의 손에서 그의 온기가 느껴졌다. 희찬도 덩달아 손에 힘을 주고, 도준의 손가락을 옭아맸다. 느끼는 감정은 비슷할 것인지라, 구태여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은 나누지 않았다.

“그래도 한 번 가 볼까 봐.”

이내 도준이 가벼운 목소리를 터뜨렸다. 정면을 응시하던 시선을 돌려 다정한 눈으로 희찬을 바라봤다. 희찬은 그저 놀랍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도준을 살폈다.

“네가?”

“응.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못 하면 병날 거 같아.”

허…….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단호한 목소리를 내는 도준이었지만, 그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단정하고, 잘생긴 얼굴로 희찬을 바라보는 눈에는 애정만 가득했다.

희찬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고개를 비틀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거냐, 묻는 듯한 눈길에 도준이 희찬의 턱을 매만졌다.

“그냥, 별말 아니긴 한데.”

“그럼 알려 줘.”

“쑥스러워.”

“쪽팔린다는 뜻이야? 무슨 말을 할 거길, 읍.”

꼬치꼬치 캐묻는 희찬의 말은 입술로 막았다. 도준은 희찬의 턱을 쥔 손에 힘을 주고 끌어당겨, 제 입술을 희찬의 입술 위에 포개었다. 따뜻한 온기가 입술에 전해졌다. 살짝 벌어진 틈으로 혀를 밀어 넣자, 금세 부드럽게 뒤섞였다.

두 사람은 금세 질척한 타액을 나누고, 혀를 뒤섞었다. 물컹한 살덩어리가 빳빳하게 굳었다가 풀어지기를 반복하며 서로의 입 안을 거침없이 헤집었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신음이 서로의 입 안에서 울렸다.

숨이 가빠 입술을 떼었다. 도준의 뒤통수에 희찬의 두꺼운 손바닥이 닿았다. 잘생긴 뒤통수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던 희찬은 팔에 힘을 주고 도준의 머리를 당겨 다시 입을 맞추었다. 도준이 희찬의 허리를 감싸 안고 엉덩이를 지분거렸다. 도준의 손길에 따라 희찬이 움찔거렸지만, 두 사람의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은 을르 즐 그으?(안 알려 줄 거야?)”

희찬이 도준의 아랫입술을 잘근 문 채로 웅얼거렸다. 도준은 희찬의 잇새에 낀 아랫입술에 서린 통증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긍그므. (궁금해.)”

“아, 좀 놔 봐.”

“므르즐 그으?(말해 줄 거야?)”

장희찬은 놓아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도준은 희찬과 같은 모양으로 도준의 윗입술을 머금고, 세게 빨아들여 입술에 새빨간 자국을 남겼다. 이윽고 떨어진 두 사람의 입술은 퉁퉁 부어오른 채였다.

이내 도준이 시동을 걸고 차를 몰았다. 희찬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도준이 빨아들여 봉긋 솟은 윗입술을 연신 매만졌다.

해가 부쩍 짧아졌다. 자동차 헤드라이트에서 나오는 밝은 불빛들이 거리를 밝히고, 화려한 네온사인과 따스한 가로등 불이 사라진 태양 대신 세상을 비추었다. 굳이 창을 열지 않아도 스며들어오는 겨울의 향이 좋다. 희찬은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며, 겨울 특유의 그 기분을 만끽했다.

희찬은 겨울을 좋아한다. 겨울 하면 막연하게 떠오르는 채도가 짙고 쨍한 그 색감이 좋았다. 하얀색, 빨간색, 초록색, 금색 같은 화려하면서도 따스한 색들 말이다. 그리고 그 추운 겨울의 한중간에는 세상 모두가 기다리고, 즐거워하는 크리스마스가 있다.

희찬이 사랑해 마지않는, 도준의 생일이었다.

이상하게 도준과 연애한 뒤로 크리스마스가 더 즐거워졌다. 그건 매년 5월이 되면 질색하는 모습을 보여도 꿋꿋하게 생일을 챙겨 주는 도준과 같은 마음일 것이다.

부드럽게 움직인 차가 금방 두 사람의 집 주차장에 당도했다. 쇼핑한 것들을 바리바리 챙겨 내리는 희찬을 도준은 그저 앉은 채로 가만히 지켜봤다. 그에 희찬이 허리를 숙여 조수석을 통해 도준을 바라봤다. 도준은 안전띠조차 풀지 않은 채였다.

“안 내려?”

“응, 나 바로 전광진한테 갔다 올게. 짐 놓고 가, 내가 들고 올라갈게.”

도준의 뚝 떨어지는 단정한 목소리에서 그의 굳센 의지가 묻어났다. 왜인지 불안해 보이는 모습에 희찬이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잠시 머뭇거리던 희찬이 쇼핑백을 다시 뒷자리에 실었다. 그리고 조수석에 앉아서는 도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같이 가.”

“아냐, 나 얼른 갔다 올게.”

도준이 희찬의 팔을 밀어냈다. 그에 희찬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몸을 조수석 등받이에 기댔다. 애써 침착하는 모양이었지만, 찌그러진 미간 사이에서는 그의 심통이 읽히는 것 같았다.

“왜, 너 뭐 하게.”

“진짜 딱 한 마디만 하고 올 거야.”

“그럼 전화로 해.”

“아니, 얼굴 보고. 나 도망 안 간다고 말할 거야.”

이도준은 단단해졌다.

그가 변한 것은 숱하게 느껴 왔지만, 이도준은 더욱 굳세어졌다.

아주 어릴 적, 자신을 못살게 구는 사람들에게 숨겨 둔 발톱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던 도준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덕분에 마음 한구석 도사렸던 불안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정말 혼자 보내도 되는 건가, 걱정했던 것도 모조리 자취를 감추었다.

“되게 든든하고 좋긴 한데, 나도 할 말 있어. 같이 가.”

희찬의 강단이 묻어나는 단호한 목소리에 도준이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희찬을 바라봤다. 장희찬이라면 전광진을 떠올렸을 때 얼굴도 보기 싫다며 진저리를 쳐 왔기에 혼자 가려 했다.

하지만 저 못지않게 단단한 눈으로 할 말이 있다는 희찬을 밀어낼 이유는 없었다. 도준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서, 희찬을 태운 채로 핸들을 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광진의 집 앞에 도착한 도준은 으슥한 골목에 기분 나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어쩜, 집도 꼭 저 같은 골목에 있는 것이 여간 찝찝한 게 아니다.

도준은 으리으리한 주택 앞에 차를 세운 후 차에서 내려 담배를 입에 물었다. 평소의 희찬이라면 ‘아직도 안 끊었냐’며 잔소리를 하고 들 것이 분명했지만, 지금은 담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희찬도 아무 말 없이 도준을 지켜봤다.

폐부 깊이 숨을 들이켜자 까슬한 니코틴이 목을 긁는 느낌이 났다. 입 안에 잠시간 연기를 머금었다가, 길게 뿜어내자 입김이 섞인 담배 연기가 검은 하늘에 하얀 구름을 그렸다.

도준이 무겁고 짧은 숨을 터뜨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희찬에게는 ‘할 수 있다’며 호언장담했지만, 역시나 막상 마주하려니 가슴이 착잡했다.

띵―.

대문 앞에 있는 초인종을 누르자 가느다란 종소리가 울렸다. 전광진은 답이 없었다. 몇 번을 거듭 눌렀다. 전광진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도준은 한발 물러나 으리으리한 정문을 훑었다. 나무로 된 대문의 테두리는 철제가 감싸고 있어 철옹성 같은 보안을 자랑하는 듯 보였지만, 그 아래에는 작은 틈이 있었다.

“열린 건가?”

희찬이 손을 뻗어 문을 밀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입구를 굳게 지키는 듯 보였던 문이 희찬의 힘에 쉽게 밀려 공간을 내어 줬다. 두 사람은 침을 꼴깍 삼키고서 천천히 걸음을 옮겨 넓은 정원에 들어섰다.

아마도 화사한 빛을 머금었을 정원은 칙칙하기 그지없었다. 드문드문 놓여 있는 동그란 형태의 가로등마저 빛을 잃고, 거미가 집을 친 지 오래되어 보였다. 관리되지 않은 정원수들은 시들시들했다. 그 모습이 퍽 스산한 겨울 기운을 자아냈다.

잠시 정원을 돌아본 후에는 성큼성큼 걸음을 놀려 하얀 대문을 열었다. 이번에도 문이 쉽게 열렸다. 마치 오래간 열리지 않았던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끼익-’ 날카롭게 귀를 긁는 소리가 났다. 잠시 인상을 찌푸렸던 도준은 바깥보다 훨씬 차가운 공기가 살갗에 닿는 것이 소름 끼쳐,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어두컴컴한 집 안엔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마음을 굳게 먹고, 전광진을 만나러 온 것과 달리 전광진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신발을 신은 채로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낯선 구조의 집은 파리한 민낯을 보이는 듯했다.

걸을 때마다 저벅, 저벅 걸음 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유달리 크게 닿는 제 발소리에 두 사람의 귀가 예민하게 뜨였다. 술병이 나뒹구는 거실을 지나쳐 조금 더 안쪽으로 향했다. 아마도 침실로 추정되는 곳의 문만 굳게 닫힌 채였다.

도준이 문고리를 쥐었다. 차갑게 식은 쇠 문고리가 손바닥에 달라붙는 느낌은 달갑지 않았다.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기 전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에는 사뭇 긴장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 시선 어디에도 두려움은 없었다. 문을 열고 마주한 방 안은 집 안에 도사린 한기보다 더욱 짙은 차가움을 머금은 채였다. 그에 도준과 희찬이 저들도 모르게 인상을 한껏 누볐다.

“……전광진.”

두 사람의 걸음이 한 곳에서 우뚝 멈춰 섰다. 전광진은 침대도, 테이블 앞도 아닌 웬 옷장 속에 몸을 숨긴 채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면도도 하지 않아 수염이 덥수룩하고, 씻지 않아 거무튀튀한 몰골을 한 남자의 모습에 절로 인상이 누볐다.

“너……. 너,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어, 네가!”

전광진의 목소리가 볼품없이 흔들렸다. 큰 파동을 머금은 목소리는 쩍 갈라져 이리저리 튀는 소리를 내었다.

도준은 제게 삿대질을 하며 달려드는 전광진에게 탐탁지 않은 표정을 보였다. 고작 이런 남자였다. 이미 숱하게 생각해 왔지만, 이런 남자에게 치부를 보이고 바들바들 떨었던 것이 한심할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본 희찬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렇게 나약한 사람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지난날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와, 진짜 가관이다…….”

“나가, 나가! 네가 자꾸 날 지켜봐. 봐, 침대가 또 움직였어! 네가 오니까 온갖 가구들이 날뛰잖아!”

“추하다, 진짜…….”

진짜 미친놈이었다.

사람들이 숱하게 ‘전광진이 미쳤다’고 말한 그대로 정말로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멀쩡히 가만히 있는 가구를 가리키는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고, 두 사람을 보는 눈동자가 초점 없이 흔들렸다.

전광진의 눈에는 두 사람이 하나로 보였다. 둘로 나뉘었다가 곧장 하나로 뭉치며 거대한 형상을 그려내는 환상에 눈알이 핑글핑글 돌아 토악질이 치밀었다.

“우욱─!”

그를 보던 도준이 쯧, 혀를 찼다.

저 나이를 먹고도 자신의 문제는 돌아보지 않고, 애먼 사람에게 온갖 원망의 화살을 다 돌리는 모습이 같잖았다.

“날 좀 내버려 둬, 날 내버려 둬!”

발악하는 전광진 앞에, 도준이 쪼그려 앉아 전광진과 눈을 마주했다.

“하아, 하, 꺼지라고!”

남자의 백지장 같은 하얀 손이 도준의 눈앞에 휘적거렸다. 도준은 불쾌한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성가심이 그대로 묻어나는 손짓으로 티셔츠를 툭툭 털었다.

“진짜 우리한테 한 짓을 어떻게 갚아 줄까, 고민을 안 한 것도 아닌데…….”

“뭐, 흐, 흐으, 뭐라…….”

“저는, 아무것도 안 할 거예요. 그리고 도망가지도 않을 겁니다. 저는 제 자리에 있을 거예요. 뭐가 아쉬워서 굳이 내 손을 더럽혀.”

전광진이 바들바들 떨었다. 도준의 목소리가 뚝뚝 떨어질 때마다 마치 어딘가에 어딘가를 후려 맞는 사람처럼 몸을 휘청거렸다.

도준은 무릎을 짚고 일어서서 전광진을 내려봤다. 또렷한 눈으로 내려 보는 눈길에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느 것보다 차가운 눈빛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그쪽이랑 똑같은 사람이 되기에는 내가 너무 아깝더라고.”

가볍지만 단단한 말을 남긴 도준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속이 시원하기는커녕 더 찝찝해졌다. 꺼림칙함을 느낀 도준이 희찬을 바라보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도준이 한 발 물러나자 희찬이 전광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도준과 마찬가지로 전광진을 마주하고 앉은 희찬이 무거운 숨을 터뜨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그랬잖아요. 이도준은 걸림돌 아니라고. 우리는 서로 걸림돌인 적 없어요. 성공하면 꼭 이 얘기부터 하고 싶었는데, 이런 미친놈 앞에서 말하게 될 줄이야.”

“아아악! 아! 아악―!”

말을 마친 두 사람은 조금의 미련도 없이 곧장 발을 돌려 방을 벗어났다. 등 뒤에서 절규, 또는 분노 아무튼 소름 끼치도록 갈라지는 목소리가 울부짖는 것이 들렸지만 구태여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집에 돌아온 도준은 문을 열기 무섭게 희찬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모래성이 쓰러지듯 와르르 무너지는 도준을 받쳐 준 희찬이 놀란 모양을 보였지만 자신의 상태를 설명할 틈이 없었다.

“괜찮아?”

희찬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지만, 도준은 대답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분명 그에게 차가운 말을 하고, 침을 뱉고 나올 때까지만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희찬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니 이제야 눈물이 치솟았다.

이유를 몰라 당황스럽다.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났다. 잔잔한 해변을 삽시간에 집어삼키는 거친 파도처럼 몰아치는 감정에 순식간에 잠식되어 허덕이는 도준은 제법 오래간 눈물을 흘렸다.

이제 다 끝났다는 홀가분함일까. 발목을 옥죄던 족쇄가 풀린 것 같았다. 비로소 해방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발맞춰 꾸준히 걷다 보니 어느새 그 긴 터널의 끝에 닿은 것이다.

도준이 희찬을 얼싸안고 얼굴을 파묻었다. 희찬은 파고드는 도준의 등을 부드럽게 다독이며 그의 우울함을 달래려 무던히도 노력했다.

“고생했어, 수고했어.”

“응, 나…… 잘했어.”

“응, 너 잘했어.”

“……너도 잘했어, 희찬아. 잘했어.”

이내 희찬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축축하게 젖는 희찬의 목소리에 도준이 고개를 들어 희찬과 입을 맞추었다. 입술 사이로 흐르는 눈물이 차갑게 느껴졌다. 그 역시 감회가 새로운 것이라, 도준은 입술을 맞댄 채로 눈을 감고 눈물을 흘렸다.

희찬과 도준은 오랫동안 서로를 달랬다. 부서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현실의 벽이 허물어지고, 자신들을 궁지에 몰아넣었던 어둠이 사라지니 드디어 새벽이 오는 중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