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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비로소 눈부신 항해 (17/18)

14. 비로소 눈부신 항해

부산스러운 바깥 소음에 도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밖에서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웅웅,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낯선 목소리 여러 개가 어우러지는 가운데에는 희찬의 가지런한 목소리도 함께였다. 의아함을 느낀 도준은 벗어 둔 티셔츠를 챙겨 입고 일어나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었을 때 보이는 광경은 지독하게 낯선 것들이었다. 집에 들어온 남자들은 대부분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장갑을 낀 채로 바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뭐 하는 거야?”

“어, 일어났어?”

희찬이 화사하게 웃으며 도준을 반겼다. 도준은 영문을 알 수 없는 광경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희찬이 팔랑, 가볍게 몸을 옮겨 도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드르륵, 드릴이 돌아가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휘잉, 기계가 멈추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찰캉, 쇠붙이가 걸리는 소리가 나더니 기다란 레일이 천장에 걸렸다. 레일에는 길게 떨어지는 후크가 여러 개 달려 있었다.

“이게 뭐야?”

“내가 인테리어 좀 했지.”

희찬은 뿌듯한 기색을 만면에 피워 냈다. 희찬과 마찬가지로 희찬의 허리를 감싸 안은 도준이 희찬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다시 시선을 돌려 남자들이 움직이는 것을 쳐다봤다.

세로가 긴 액자가 후크에 연달아 걸렸다. 조각 난 사진들이 맞붙어 하나가 되었을 때 보이는 것은 얼마 전, 이한 그룹 광고를 촬영할 때, 룩북을 촬영하던 감독이 흔쾌히 찍어 준 두 사람의 사진이었다.

“저거 네가 주문한 거야?”

“응, 예쁘지?”

“그러게, 예쁘다. 이런 거 해 보고 싶었어?”

“막 드라마 보면 연예인들 집에 저런 거 나오잖아. 우리도 연예인 두 명 사는데 못 할 게 뭔가 싶었어.”

“잘했어.”

도준이 환하게 웃으며 즐거워하는 희찬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어느새 설치를 마친 액자가 화려함을 뽐냈다. 진하지 않은 메이크업이었지만 가진 이목구비가 빼어난 덕에 사진은 더없이 화사했다.

이윽고 일을 마친 남자들이 나간 집에 잔잔한 편안함이 도사렸다. 도준이 소파에 앉아 다리를 길게 뻗어 탁자에 얹었다. 그에 희찬도 다리를 쭉 뻗어 도준의 단단한 정강이 위에 제 다리를 얹었다.

도준이 피식, 웃었다. 얕게 터진 숨이 거실에 퍼졌다. 머리를 편안하게 희찬의 어깨에 기대자 희찬도 덩달아 얼굴을 도준의 머리에 댔다.

어쩌다 보니 거의 반년을 꼬박 놀기만 했다. 중간에 이한 그룹 광고 촬영이 있었다지만, 그건 정말 며칠 되지 않는 일이었기에 이제는 조금씩 심심함이 몰려왔다.

도준이 심심함을 느낄 정도였으니, 희찬은 오죽할까. 도준보다 스케줄이 많으면 몇 배로 많았던 희찬은 아예 따분함을 대놓고 표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슬슬 일거리 찾아볼래?”

“으음…….”

도준의 제안에 희찬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따분하기는 했으나 막상 일을 시작하려니 살짝 겁이 나기도 했다. 동성연애 낙인이 찍힌 이상 이제는 로맨스를 하지도 못할 것이다. 장르에 제약이 생길 것을 생각하니 답답해졌다.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은데……. 아쉬움이 몰려왔다.

도준이 희찬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마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것처럼, 인자한 눈으로 희찬을 바라보다, 희찬의 하얗고 말랑한 뺨 위에 입을 쪽 맞췄다.

입을 맞춘 후에는 떼지 않고, 그 위에서 웅얼웅얼 뭉개지는 말을 전했다. 두 사람이 서로의 기분을 달랠 때 주로 보이는 행동이었고, 도준의 다정함에 희찬이 빙그레 웃었다.

“액션은 어때? 너 살인마 연기 잘하던데.”

“나는 몸을 너처럼 못 쓰니까…….”

“너도 몸 잘 쓰잖아, 그냥 내가 좀 더 잘 쓰는 거고.”

도준의 말대로 어디 가서 몸 못 쓴다는 말을 듣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액션보다는 조금 더 잔잔한 걸 하고 싶었다. 희찬은 곰곰이 눈을 굴려 생각을 이었다. 그러다 퍼뜩,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금세 생기를 되찾은 희찬이 홱 몸을 돌려 도준을 쳐다봤다. 도준의 가랑이 사이에 엉덩이를 옮겨 앉은 희찬은 도준을 마주 본 채로 도준의 허벅지 위에 제 다리를 올려 두 팔과 다리로 도준을 옭아맸다.

뭘 이렇게 복잡하게 움직이나, 희찬을 지켜보던 도준이 그의 입가에 핀 싱그러운 미소에 불현듯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희찬이 활기를 되찾았다. 하고 싶은 것을 찾고,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희찬이 시동을 거는 모습이 사뭇 예뻐 보였다.

“나 아예 사극 해 볼까? 어때. 나 사극도 잘할 거 같지 않아?”

“대충 한번 좀 해 봐.”

사극이라니. 색이 다채로운 배우였으니 뭐든 잘 어울리겠지만, 역시나 희찬에게는 색다른 장르였으므로 도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리 오너라.”

발성 좋고.

도준이 만족하듯 웃었다.

“음……. 또 대사가 뭐 있지?”

희찬이 픽 고꾸라져 도준의 품에 안겼다.

생각보다 사극 발성도 괜찮은 희찬의 모습에 뿌듯함을 느꼈던 도준이 피식 웃으며 희찬의 등을 토닥토닥 다독였다.

“누굴 부려 먹어 보지를 않아서 명령도 기억이 안 나지?”

“뭐야, 지는 누굴 부려 먹고 살았나.”

“나 그래서 사극 안 해.”

“웃기시네, 야. 누가 너 윗사람 시켜 준대? 무슨 자신감이야, 진짜 웃겨.”

희찬이 파하게 웃었다. 도준의 쇄골을 머금고 쯉, 빨아들였다. 입술이 남았다가 떨어진 자리에 새빨간 자국이 생겼다. 도준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가 희찬의 입술에 입을 쪽 맞췄다.

“그러는 너는? 왜 명령부터 생각해. ‘예, 마님.’ 이런 거부터 해야지.”

“에이씨.”

“해 봐, 내가 상전이면 어떻게 할 거야?”

“안 해.”

도준을 꼭 안고 있던 희찬이 몸을 물리며 도준에게서 벗어났다. 짓궂은 낯으로 저를 놀리려는 도준에게는 입술을 삐죽여 주고, 도준의 옆에 앉아 휴대폰을 쥐었다.

심심함에 들여다본 포털 사이트에 뜻밖의 기사가 있었다. 희찬은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제 눈을 비비적거렸다.

<‘한국연기대상’ 대상부문 ‘이도준, 장희찬’ 포함 총 4인 발표>

<이도준♡장희찬, 거센 풍파에도 계속되는 ‘눈부신 항해’>

<‘한국연기대상’ 인기상, 올해의 드라마상, 베스트 커플상, 연출상, 최우수 연기상, 대상 등 총 6개 부문 ‘눈부신 항해’ 노미네이트>

<‘한국연기대상’ 대상에 오른 이도준♡장희찬, 참석할까>

대상이라니?

희찬이 고개를 꺾어 도준을 바라봤다. 드라마가 잘되었고, 퀴어라는 장르에도 일반 로맨스 드라마와 다르지 않은 좋은 성적을 낸 것은 알고 있지만, 시상식에서는 대중의 시선을 의식할 줄 알았다. 게다가 그런 논란까지 있었으니, 당연히 후보에서 배제될 줄 알았다.

그런데 대상 후보라니.

“왜 그래?”

“대상 후보라는데.”

“뭐가?”

“우리, 대상 후보래.”

도준의 입꼬리가 유려한 포물선을 그리며 치솟았다. 희찬의 눈은 놀란 듯 일렁거리는 중이었다. 하루, 이틀 후보에 오르는 것도 아닌데, 금세 울망대는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다.

하긴, 포기했으려나.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고, 그래도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도준을 위로하던 희찬이었는데 그의 마음에는 무거운 짐이 있었던 모양이다.

다른 형태의 사랑이었다면 겪지 않아도 됐을 논란을 겪고, 최상의 위치에서 밀려나는 참담함을 고스란히 느낀 후여서인지 더 크게 닿는 소식이 뭉클한 듯했다.

도준은 온몸을 이용해 희찬을 으스러질 듯 껴안았다. 이제껏 우리가 걸어온 길이 잘못되지 않았고, 우리는 앞으로도 해 온 것처럼 천천히 나아갈 거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을 몸으로 알려 주려는 양, 최선을 다해 희찬을 위로했다.

도준의 품에 안긴 희찬은 계속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어느새 성큼 다가온 크리스마스는 팬들에게는 스타의 생일로 남아 여기저기서 도준의 생일을 축하하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대로변 대형 광고판에 광고를 걸었다는 말이나, 카페나 영화관을 대관하여 도준의 사진으로 꾸몄다는 글이 못내 감동으로 닿아 희찬이 눈물지었다.

희찬이 도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눈물을 찍어 냈다. 자꾸만 흐려지는 시야에 도준을 향한 축하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팬들은 각종 인증샷을 올려 댔다. 도준의 생일 광고를 찍어 올리는 사람들 틈틈이 두 사람이 함께 후보에 오른 부문에 투표하고, 그 인증샷을 올리는 사람도 상당히 많았다.

그 마음이 하나하나 고마웠다. 데뷔 후에도 줄곧 저를 바라봐 주는 팬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느껴 왔지만, 이제는 ‘우리’를 향해 보이는 끝없는 애정이 참 무거웠다.

“울지 마, 왜 울고 그래.”

“누가 울었다고 그래.”

“이건 뭐지.”

도준이 희찬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차가운 물기가 입술에 닿아 짭짜래한 맛이 났다.

“짠데.”

“으응, 짜…… 뭐라고?”

희찬이 눈을 둥글게 떴다. 도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짜.”

“다시 말해 봐.”

“……짜.”

도준의 말이 느릿해졌다.

짜다.

짠맛이 났다.

미세했지만 분명 혀에 닿는 맛은 짠맛이었다. 도준의 눈이 크게 뜨였다. 희찬도 그 못지않게 둥근 눈을 크게 떴다.

희찬은 퍼뜩 몸을 일으켜 도준의 손목을 잡아 쥐고 그를 식탁 앞에 앉혔다. 냉장고 문을 거세게 열어젖히자 냉장고에 가득 들어찬, 곽 대표가 두고 간 반찬들이 두 사람을 반겼다.

그중 달걀말이를 꺼내 도준에게 건넸다. 바로 자극적인 것을 먹였다가는 다시 미각에 자극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으니, 가장 무난한 것을 고른 것이었다.

“이거 먹어 봐.”

도준이 군말 없이 입 안에 밀어 넣었다. 차갑지만 부드러운 달걀말이가 치아 사이에서 짓이기며 희미하게 짭짤한 맛을 냈다.

“맛있어.”

“맛이 나?”

“응.”

희찬이 화색을 피웠다. 당장 달걀말이 반찬통 뚜껑을 닫고, 한참 냉장고를 살폈다. 간을 내는 것은 대부분 짠맛이라, 다른 맛도 느낄 수 있는 건지 궁금했던 탓에 이번에는 달큼한 맛이 일품인 소불고기를 꺼냈다.

“먹어 봐.”

희찬의 명령 아닌 명령에 도준이 멋쩍게 웃었다.

“천천히 차근차근 먹어 보면 되지, 뭘.”

“아냐, 나 지금 궁금해. 응? 먹어 봐.”

희찬의 성화에 도준이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고기를 한 덩어리 집어 입으로 밀어 넣자, 혀에 닿기 무섭게 달짝지근한 맛이 퍼졌다.

희찬은 도무지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큰 눈을 반짝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떠하냐 묻는 듯한 행색에 도준이 환하게 웃었다.

얼마 만에 느껴 보는 맛인지 모르겠다. 음식을 먹는 기분이 이런 거였나. 맛이 느껴진다는 것을 의식하고 음식을 씹었더니 행복이 밀려왔다. 혀를 감싸고 있는 듯했던 보호막이 벗겨지고 비로소 완전한 맛을 느끼는 것에 도준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비로소 모든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난 듯했다.

망가졌던 몸이 하나하나 제자리를 찾으며 온전해지는 것이 실로 반갑다. 도준은 화색을 피워 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희찬이 탄식을 터뜨렸다. 조금씩 차오르던 투명한 눈물이 후두두 떨어지더니, 이내 흐느꼈다. 도준이 얼른 일어나 희찬을 끌어안았다. 자신의 회복을 누구보다 반가워하는 희찬의 모습에 도준도 울컥 치미는 감정을 느꼈다.

“나 이제 진짜 괜찮나 봐.”

두 사람이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피부와 피부가 닿고, 단단한 팔이 얽히며 두 사람의 사랑이 차곡차곡 빈 공간을 메워 갔다.

기나긴 터널에서 나와 드디어 빛을 보기 시작한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사랑을 보이는 동안, 인터넷에서는 또 다른 소식이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었다.

<‘惡의 비참한 말로’ JR 엔터테인먼트 前대표 전광진, 스스로 선택한 죽음>

찬란한 빛을 내는 세상에 꿈을 갖고 너른 바다를 항해하려는 두 소년에게 드리웠던 거친 파도가 드디어 잠잠해졌다. 오랜 시간 돌고 돌아 겨우 모든 재정비를 마친 지금, 두 사람은 비로소 새로운 출항을 준비했다.

*

유달리 해가 따스한 날이었다. 기승을 부리던 추위가 한 걸음 물러나고, 바람 대신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쬈다. 옷깃을 여미며 빠른 걸음을 재촉하던 사람들의 걸음이 여유로워지고, 길거리에는 오랜만에 따스하게 내려앉은 햇볕에 삼삼오오 모여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가득했다.

도준과 희찬은 오랜만에 분주하게 움직였다. 참석하지 않으려던 시상식이었으나 ‘이제는 밖으로 나올 때가 되었다.’라는 대표의 설득에 마음을 고쳐먹고 시상식에 참여하기로 했다.

팬들은 기대와 긴장을 동시에 머금었다. 참석하면 좋겠지만, 참석하지 않아도 이해한다는 의견이 주를 이루는 커뮤니티와 SNS는 여전히 두 사람을 향한 응원이 가득했다.

“일단 레드카펫은 패스하고, 소감은 만약에 대상 타면 대상에서만 하는 걸로 합의했어.”

샵으로 가기 전, 회사에 들른 두 사람은 대표가 전하는 말을 차분히 들었다. 두 사람이 노미네이트 된 부문은 인기상과 베스트 커플상, 대상이었다. 100% 온라인 사전투표로 이루어지는 인기상은 마감 직전까지 도준과 희찬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팬들은 공동 1위를 만들겠다며 하루는 희찬에게, 하루는 도준에게 투표하며 고군분투한 듯했다.

덕분에 두 사람은 마지막까지 결과를 알 수 없는 표를 얻었다. 마감 직전에는 고작 10표도 차이가 나지 않아 수상을 예측할 수 없었다.

“베스트 커플상도 감사하지만, 진짜로 사귄다고 기사가 난 마당에 둘이 올라가서 소감 말하기는 좀 뻘쭘하지?”

“아무래도 좀…….”

상에는 경중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대표의 말은 그럴듯했다. 퀴어 드라마를 촬영하고, 드라마 방영이 끝나기 무섭게 스캔들이 났다. 이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현재였다. 당연히 사귄다는 게 기정사실이 된 데다가, 연인인 것이 사실이었으니 나란히 올라가 수상 소감을 말하는 것처럼 웃긴 그림도 없을 것이었다.

물론, 대상을 받는다는 확신은 없다. 함께 후보에 오른 배우들도 쟁쟁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연기자들이었고, 설령 대상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위상이 높은 시상식에서 대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업적이었다.

“자, 그럼 움직여. 다른 건 생각하지 마. 응원해 주는 팬들이 있고, 그 팬들은 너희를 보고 싶어 하니까, 잘 지낸다고 인사만 한다는 생각으로 마음 가볍게 다녀와.”

대표의 경쾌한 결론에 두 사람이 무릎을 짚고 일어서서 가뿐한 숨을 터뜨렸다. 오랜만에 대중 앞에 선다고 하니 괜한 긴장이 몰려왔다.

시상식이 진행되는 장내에는 수많은 대중이 함께할 것이고, 자신들의 모습은 실시간으로 전파를 타고 세계 곳곳으로 퍼져 갈 것이니 긴장은 배가되었다. 첫 데뷔 후, 제작 발표회를 위해 기자들 앞에 섰을 때도 이렇게 떨리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다.

저도 모르게 숨이 떨렸다. 두 사람은 긴장이 가득한 시선을 나누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샵에 들러서 머리를 매만지고, 옅은 메이크업을 하고, 코디가 가져다주는 세련되고 단정한 정장까지 갈아입은 두 사람은 연예인, 딱 연예인이었다.

두 사람이 예쁘게 치장을 마치자 스태프들이 일제히 탄성을 내질렀다. 시상식 날 분주한 샵은 숱한 스타들이 거쳐 갔음에도 도준과 희찬만큼 빼어난 사람도 없었다. 참, 난 사람들이었다.

“예쁘다.”

희찬을 마주한 도준이 희찬의 귓가의 머리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의 짙고 검은 눈동자가 마치 분홍빛으로 물이 드는 것만 같았다. 오롯한 사랑만 묻어나는 다정함에 희찬이 생긋 웃었다.

“너도, 잘생겼어.”

희찬이 도준의 너른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탄탄한 가슴에 닿은 손바닥이 탄력 좋게 튕겨 올랐다.

샵을 벗어난 두 사람이 나란히 차에 올랐다. 희경이 운전하는 차 조수석에는 희찬의 매니저인 조현도 함께였다.

“형들 레드카펫은 패스한다는데 혹시 마음 변하셨어요?”

“아니, 그냥 바로 가자. 괜찮지?”

“응. 바로 가자, 희경아.”

차 안에 감도는 따뜻한 온도가 기분 좋게 몸을 녹였다. 얇은 옷가지를 파고드는 차가운 바람이 칼날 같았지만, 차가운 바람에 다친 살갗을 부드럽게 품어 주는 따뜻한 온도가 참 다정했다.

바닥으로 뚝 떨어진 두 사람의 손이 부드럽게 엉켰다. 맞잡은 두 손에 스며든 온기 역시 지독하게 다정하고, 친절했다.

상기된 표정으로 입을 부르르 털던 도준의 앞에 새하얀 휴대폰이 들이밀렸다. 화면 가득 들어차는 것은 희찬의 머리 끄트머리와 도준의 얼굴이었다. 또 사진을 찍자는 모양이다. 이제는 익숙해진 도준이 푸하하,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빨리 얼굴 내놔.”

“싫은데.”

“왜 싫어? 나랑 사진 찍기 싫다는 거야?”

“오늘 시상식 끝나면 맛있는 거 먹자. 진짜 맛있는 거.”

맛있는 것을 먼저 찾는 이도준이라니.

도준은 입맛을 되찾은 후로 예전의 식성도 되찾았다. 누구보다 좋은 먹성을 자랑하며, 맛있는 것을 찾아다니는 도준의 모습이 보기 좋다. 희찬이 생긋 웃었다.

“예쁜 얼굴 여기다 붙여 주면, 나도 맛있는 거 먹어 주지.”

희찬이 손가락으로 제 볼을 톡톡 두드렸다. 도준이 피식, 웃으며 희찬의 볼에 제 볼을 마주 댔다. 말랑한 살갗이 볼에 닿기 무섭게 찰칵, 찰칵 셔터 소리가 들렸다.

몇 번이나 화면이 깜빡거리더니 두 사람의 화려한 모습이 고스란히 화면에 담겼다. 마음에 드는 듯 희찬이 다리를 달랑거렸다. 새까만 구둣발이 마치 춤이라도 추듯 팔랑거리는 모양이 신난 그의 심정을 여실히 표해 냈다.

“어디 보내?”

“아버님.”

“아.”

겨울이 짙어지는 사이, 희찬은 도준의 부모와 제법 가까워졌다. 용건이 있는 게 아니면 굳이 연락하지 않는 도준과 달리 희찬은 일상 속에서도 편하게 도준의 부모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이번에도 사진을 찍기 무섭게 메시지를 보낸 희찬이 곧 도준의 눈앞에 화면을 들이밀었다. 새하얀 화면 안에는 오고 간 말풍선이 있었다.

아버님

예쁘네^^

잘 나왔죠?

지금 한국연기대상 시상식 가고 있어요

아버님

TV로 볼게

도준이 생일에는 둘이 데이트 하고

해 바뀌기 전에 한 번 더 보자

네 연락드리겠습니다ㅎㅎ

그 짧은 시간에 이만큼이나 오간 메시지가 신기할 지경이다. 도준은 저와는 달리 사람에게 살갑고 모두와 어렵지 않게 잘 지내는 희찬의 성격이 문득 신기했다.

같은 환경에서 같은 교육을 받으며 자랐는데 어쩜 이렇게 성격이 다를까.

흥미롭게 눈썹을 씰룩거리던 도준은 이내 희찬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행사가 진행되는 곳으로 들어섰다. 레드카펫을 가운데 두고 양 갈래로 흩어진 사람들은 환호를 내질렀다. 고급 승합차가 서고, 스타가 내릴 때마다 터지는 지천을 뒤흔드는 함성에 스타들은 뿌듯함을 머금었다.

희찬과 도준이 탄 차는 슬그머니 그 장을 지나, 뒤편에 있는 건물로 향했다. 대기실로 향하는 복도를 거니는 내내 여기저기서 시선이 다가와 부딪쳤다가 튕겨 나갔다. 예전에는 해사하게 웃으며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네던 사람들도 도준과 희찬이 함께하는 모습을 보고는 괜히 주춤거리며 물러서곤 했다.

그건 비단 두 사람을 둘러싼 풍문 탓만은 아니었다. 따로 다녀도 이목을 확실하게 사로잡는 두 사람이 딱 붙어서 내는 시너지는 대단했고 그건 주변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형들! 이제 들어가시면 돼요!”

한 대기실에서 꽁냥꽁냥 시간을 보내던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에 차분하게 일어서 촬영장으로 향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장내에 들어서자 저 멀리 있는 관객석에서 두 사람을 향한 환호가 터졌다.

저벅저벅 걷던 두 사람이 깜짝 놀라 뒤쪽을 돌아봤다. 관객석을 빼곡하게 메운 사람들이 두 사람을 응원하는 메시지를 담은 슬로건과 플래카드를 내걸고 있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울대가 울렁거릴 정도로 크게 침을 삼켰다. 유달리 무겁게 닿는 그들의 응원에 묵례를 남기자 더 큰 함성이 터졌다. 두 사람은 바쁘게 눈을 굴려 드라마 ‘눈부신 항해’ 팀이 모인 테이블을 찾았다. 임 감독은 아직 오지 않은 건지, 도무지 테이블 찾기가 쉽지 않았다.

“도준아! 희찬아!”

두리번거리는 두 사람의 등 뒤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데뷔부터 여러 작품을 함께하며 도준과 제법 친하게 지내던 선배였다. 희찬 역시 친한 사이인지, 희찬의 얼굴에도 화색이 피었다.

두 사람은 얼른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건네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이야, 너희 얼굴 보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 쉬는데 연락 좀 하지. 술이나 한잔하게!”

“하하, 연말인데 언제 한 번 봬요.”

“그래, 도준이도 곧 생일 아니야? 아니 그리고 너희 그렇게 앙숙인 것처럼 굴더니 역시?”

이 선배는 돌려 말하는 법이 없다.

곧장 허를 찌르고 드는 선배의 모습에 희찬이 멋쩍게 웃었다. 반면에 도준은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희찬의 허리를 부러 꼭 당겨 안더니 피식, 멋들어진 웃음을 보였다.

도준의 넉살에 마주 선 선배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도준의 이런 면모는 정말 편한 사람에게만 보여 주는 한정적인 모습이라, 그 모습이 참 편안해 보였다.

“잘 지냈어?”

“야, 니네 진짜 오랜만이다.”

“둘이 잘 어울려. 왜 이제 알았지?”

대 선배가 나서서 도준과 희찬에게 말을 걸기 시작하자 주변에서 눈치를 보던 사람들도 하나, 둘씩 다가와 반가운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깨를 만진다거나, 허리를 주무른다거나. 아무튼 친근하게 구는 모양에 희찬과 도준이 피식 웃었다.

친근하게 다가온 사람들 뒤에는 열등감을 느끼고 부들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전히 마뜩잖은 눈으로 흘겨보는 모양에는 도준도, 희찬도 굳이 반응하지 않았다.

이내 장내에 곧 생방송이 시작된다는 방송이 울렸다. 그에 도준과 희찬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던 사람들도 차츰차츰 제 자리를 찾아 흩어졌다.

“응원해, 이제 차기작 할 거지?”

“그럼요.”

마지막도 처음 말을 건넸던 선배가 남았다. 두 사람의 어깨를 동시에 토닥토닥 다독인 선배는 근사한 미소와 함께 단단한 응원을 남기고 사라졌다.

희찬과 도준이 동시에 홀가분한 숨을 쉬었다. 이상하게 가슴이 울렁거리는 게, 기분이 좋기도 하고 아무튼 묘했다.

환하게 불을 밝혔던 장내에 불이 꺼지고, 핀 조명이 무대를 강하게 쏘았다. 이윽고 웅장한 음악이 울려 퍼지더니, 한쪽에 자리한 트로피 모형이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화려한 로고가 전광판에서 나오고, 이윽고 MC들이 등장하자 자리에 앉은 배우들이 일제히 박수를 쏟아부었다.

『지금부터 제28회, 한국연기대상, 그 화려한 막을 올립니다!』

그렇게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성대한 막을 연 시상식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각 부문별로 시상과 수상이 반복되었다. 그 사이사이 축하 무대가 펼쳐지기도 했고,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의 명장면이나 NG 장면, 기대되는 영화의 예고편이 방영되기도 했다.

드라마 ‘눈부신 항해’는 후보에 오른 부문에서 모두 상을 쥐었다. 드라마 부문은 ‘눈부신 항해’를 위한 시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말이다.

그때마다 전광판에는 도준과 희찬의 모습이 비쳤다. 두 사람은 임 감독과 조연 배우들과 둘러앉은 원형 테이블에서 소소하게 수다를 떨기도 했고, 물을 마시기도 했으며, 시상이 진행될 때는 진심으로 손뼉을 치며 상대를 축하하기도 했다.

카메라는 누구를 잡았을 때 시청률이 오르는지 정확하게 아는 듯했다. 집요하게 도준과 희찬을 쫓는 카메라 덕분에 도준과 희찬은 편하게 앉아 있지도 못했다. 언제 저들도 모르게 손을 잡고 있을지 모르니, 일부러 서로를 쳐다보는 횟수를 최소화하며, 괜히 눈치를 살폈다.

― 지금부터 약 10분간 휴식 후, 다시 모이도록 하겠습니다.

1부가 끝이 났다. 도준은 긴 팔과 다리를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목을 이리로 꺾고, 저리로 꺾는 행동은 최대한 느릿하게 이어졌다.

그런 도준을 가만히 쳐다보던 희찬이 꼼지락꼼지락 의자를 옮겨 도준의 옆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보던 도준이 피식, 웃으며 희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희찬의 몸이 펄떡 뛰더니 탁자에 그대로 엎어져 도준을 올려 봤다. 비스듬히 올려 보는 도준의 비주얼은 가히 환상적이었으므로, 희찬이 손바닥으로 제 입 모양을 가리고, ‘사랑해’ 도준에게만 보일 말을 했다.

도준의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가 새하얗게 질렸다. 아랫배가 괜히 간질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두 볼을 쥐고 입을 맞추고 싶은데 보는 눈이 보통 많은 게 아니어, 아쉬웠다.

“2부에 베스트 커플상이랑, 인기상이랑 다 있나 봐.”

“응, 그런가 봐.”

“수줍어서 어떡하지.”

“왜 벌써 받는다고 생각해?”

“알았다, 알았다.”

하여튼, 이도준.

조금이라도 허튼 꿈을 꾼다 싶으면 곧장 차단해 버리는 게 여간 얄미운 게 아니다. 희찬이 인상을 한껏 찌푸리고 도준을 째려봤다. 그에 도준이 희찬을 달래듯 환하게 웃었다.

“알겠어, 알겠어.”

“뭘 알아.”

“어차피 수상 소감 아예 없이 간다고 했으니까 수줍어하지 마.”

희찬이 새침하게 고개를 홱 돌렸다. 동그란 뒤통수에서 솟아난 머리카락이 팔랑거렸다. 도준의 곧은 손가락이 희찬의 검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쉴 새 없이 웅성거리는 주변의 소음은 구태여 신경 쓰지 않았다.

『제28회 한국연기대상, 2부를 시작합니다!』

도준과 희찬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건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같은 모양이었다. 축하 무대로 화려한 막을 연 2부도 1부와 마찬가지로 속행되었다.

『인기상, 인기상은 100% 온라인 사전투표로 수상자가 정해집니다. 이번 한국연기대상에서는 특별히 많은 분들이 참여하여 주셨는데요.』

『수상자는…….』

『축하합니다! ‘눈부신 항해’의 장희찬, 이도준 공동 수상입니다!』

『베스트 커플상 수상자는…… 축하합니다! ‘눈부신 항해’ 해인-인수 커플입니다!』

연신 환호가 터졌다. 수상 소감 없이 진행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더니, 시상이 훨씬 빨리 진행되었다. 두 사람의 이름이 터질 때마다 우레와 같은 환호가 터졌지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아무런 표정도 지을 수 없었다. 그저 시선만 점점 아래로 떨어질 뿐이었다.

팬들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그저 고마웠다. 흔들리지 않는 지지가, 인권을 지키라는 아우성이 하나하나 공기의 무게를 더해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그런 희찬과 도준의 등에 따뜻한 손이 닿았다. 두 사람과 한 테이블에 앉아 그들의 심경을 고스란히 느끼는 임 감독이었다.

“너희 보답받는 거야.”

“…….”

“그동안 열심히 했다고, 잘했다고 다들 칭찬하는 거야. 잘했어, 잘했어.”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남겼다. 다른 말은 할 수도 없었다. 이미 장내는 1부보다 훨씬 열기가 뜨거웠다. 도준과 희찬의 이름이 연달아 호명되는 일이 잦아지고, 눈부신 항해가 상을 거머쥐는 회차를 거듭할수록 사람들의 기대는 점점 커지는 듯했다.

이윽고 둥둥둥, 무거운 북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울림이 장내를 가득 메우자 정면의 스크린에서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로고가 ‘대상’ 두 글자와 함께 빙글빙글 돌았다.

『드디어 대상입니다. 대상 후보, 먼저 만나 보시겠습니다!』

장내에 무거운 긴장이 도사렸다. 커다란 스크린에서는 후보를 소개하는 영상과 후보 배우들의 화려한 커리어를 읊는 소개가 연신 이어졌다.

상에 욕심은 없다고 말했으나, 도준과 희찬은 괜히 몰려오는 초조함에 자꾸만 손바닥에 땀이 차올랐다. 그러다 도준이 저도 모르게 희찬의 손을 거머쥐었다.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오는 도준의 손을 희찬이 힘있게 맞잡았다.

다시 북이 둥둥둥 울렸다. 대상 시상을 위해 두 배우가 앞으로 나와 마이크 앞에 섰다. 시상자들이 농담을 주고받는 소리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탁자 아래에서 마주 잡은 두 사람의 손에는 시간이 갈수록 힘이 실릴 뿐이었다.

『대상, 오! 저는 봤어요.』

『아, 너무 궁금한데요, 빨리 알려 주시죠.』

『제28회 한국연기대상, 대상!』

북이 이전보다 훨씬 빨리 울렸다. 도준의 톡 튀어나온 울대가 울렁거리고, 희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관객석에도 일제히 긴장이 앉았다. 팬들은 슬로건을 꼭 쥔 손에 힘을 주고, 떨리는 숨을 푹 내쉬었다.

『이거 처음 있는 일 아닌가요? 축하합니다! ‘눈부신 항해’의 이도준, 장희찬! 공동 수상입니다!』

호명되기 무섭게 희찬이 벌떡 일어났다. 희찬의 손에 붙들린 도준의 손도 덩달아 번쩍 들렸다. 도준은 그저 눈을 크게 뜬 채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심사 기준이 까다로워 단 한 번도 공동 수상이 이루어진 적 없는 시상식이었다. 그런데, 공동대상이라니. 도준은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느릿하게 꺾었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우렁찬 박수 소리가 장내를 가득 메웠다. 저쪽에서는 함성 아닌 고함이 그들을 향해 응원을 외쳤다. 무대 위에 선 시상자들이 두 사람을 인자한 눈으로 보고 있었고, 주변의 모든 사람이 벌떡 일어나 두 사람에게 환호를 내질렀지만, 도준은 움직일 수 없었다.

희찬이 주변을 의식할 틈도 없이 도준을 부둥켜안았다. 희찬의 옅은 눈가에는 투명한 눈물이 차올라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희찬의 향이 코에 닿은 후에야 도준이 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젖히고, 두 눈을 질끈 감은 후에는 상대를 알 수 없는 감사를 읊었다.

『하하, 이도준 배우 굉장히 놀란 것 같아요.』

『네, 그런 것 같네요. 이번 한국 연기 대상에서 대상을 거머쥔 두 배우는 퀴어 드라마라는 생소한 장르에서도 걸출한 연기력을 뽐내었는데요. 한국 드라마 역사에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가능성을 제시하며…….』

이내 도준도 몸을 일으켰다. 도준은 저를 껴안은 희찬을 마주 안았다. 등을 토닥토닥 달래며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자 희찬의 뜨거운 숨이 닿았다.

무수히 많은 카메라가 자신들을 찍는다는 사실도, 저 멀리서 쏟아지는 함성을 내지르는 수백 개의 입이 있다는 것까지 전부 인지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무대로 향하자 장내에 이도준과 장희찬, 이름이 연거푸 연호되었다. 시상자가 전하는 트로피를 받고, 여기저기서 건네는 꽃다발을 한 아름 품은 후에는 시상자가 진심으로 전하는 격려에 울컥 치미는 감정을 느꼈다.

두 사람은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한참이고 관객석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관객 그 아래에는 동료 배우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열화와 같은 박수를 보내는 중이었고, 정면의 관객석에는 희찬과 도준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힌 무수히 많은 슬로건이 일제히 팔락거렸다.

그 모습이 문득 바다의 물결 같았다. 저 멀리 끝도 보이지 않는 곳까지 밀려 갔다가, 삽시간에 덮쳐 오는 커다란 너울 말이다.

도준이 먼저 마이크 앞에 섰다. 넘실거리는 파도가 저를 덮쳐 오는 것이 무섭지 않았다. 그 파도 위에서 바람을 타고 흐르다 보면 언젠가는 원하는 지점에 다다르겠지, 지금이 꼭 그때인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배우 이도준입니다.”

도준의 가지런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사그라들고 이내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먼저…….”

보통이라면 감사한 사람들을 읊었겠지만, 지금은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다. 도준이 입을 꾹 다문 채로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슬로건 사이로 보이는 반짝거리는 눈빛들이 참 따뜻했다.

“이렇게 큰 상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보내 주시는 응원, 사랑, 지지에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도준의 두 눈은 카메라가 아닌 객석을 응시했다. 마치 관객석을 메운 팬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하겠다는 것처럼, 도준의 검은 눈동자가 천천히 그들의 눈빛을 살폈다.

“제 이름이, 비출 도, 밝을 준 자를 씁니다. 사람을 밝게 비추는 사람이 되라는 것 같아요. 이 상도 앞으로 더 잘하라고 주신 상으로 알고, 이름 그대로 제가 아닌 맡은 캐릭터를 빛내는 배우가, 사람을 밝게 비추는 사람이 되도록 항상 노력하고, 성장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도준이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단정하게 접힌 허리는 오래간 펴지지 않았다. 이내 도준이 물러서고 희찬이 마이크 앞에 섰다. 희찬의 화려한 낯은 이미 눈물에 젖어 반짝거리는 중이었다.

희찬은 오래간 입술을 잘근 씹어 문 채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도준이 희찬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금방이라도 다시 울음을 터뜨릴 듯한 희찬의 모습에 이제는 ‘울지 마’, ‘울지 마’ 일정한 박자에 맞춘 세 음절이 넘실거렸다.

“안녕하세요……. 장희찬입니다.”

도준이 희찬의 어깨를 주무르며 달래길 몇 분, 희찬이 어렵사리 입을 뗐다. 마이크에서 입을 떼고 목청을 한 번 가다듬은 후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입술을 부르르 털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실 다른 말이 뭐가 필요할까 싶어요. 항상 캐릭터와 함께 빛나는 배우가 되겠습니다. 보내 주시는 응원과 사랑에 연기로 보답하는 배우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희찬의 소감이 끝나기 무섭게 두 사람이 손을 마주 잡고 함께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어두운 공간에서 오롯하게 빛나는 두 사람 위로 따사로운 빛이 내리쬐었다.

이내 허리를 세운 두 사람이 서로를 오롯하게 마주했다. 근사한 낯을 보인 도준이 희찬의 얼굴을 거머쥐었고, 희찬은 행복이 가득한 웃음을 피워 냈다.

이내 두 사람이 주변의 시선은 무시하고, 화려하게 빛나는 무대 위에서 서로를 와락 껴안았다. 그에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큰 함성이 터졌다.

더디고, 아프고, 어려운 길이었다.

한 발, 한 발 걷다 보면 언젠가 닿으리라, 막연하게 생각하던 길이었다.

그렇게 서로에게 닿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고, 꿈을 향해 나아가려 쉴 새 없이 노를 저었다.

그리고 비로소 오늘,

두 사람의 눈부신 항해가 시작되었다.

Epilogue.

화사함을 머금은 집이 온화한 분위기를 풍겼다. 화이트를 베이스로 드문드문 포인트가 들어간 집 안 인테리어는 적당히 모던했고, 고급스럽고, 화사했다. 거실의 유리장에는 두 사람이 받아 온 트로피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금빛의 트로피가 반짝거리는 햇빛을 반사해 낼 즘, 요란한 알람이 울었다.

거실보다는 어두운 분위기였지만, 역시나 환한 침실에는 예쁘고, 잘생긴 두 사람이 나란히 누워 자는 중이었다. 새하얀 이불을 덮은 채로 도준의 팔을 벤 희찬이나, 그런 희찬을 꼭 안은 도준은 그저 편안하고 행복해 보였다.

침대 주변에는 정리되지 않은 대본들이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었다. 지난밤 집에 돌아오기 무섭게 잠든 것을 보여 주는 듯 벗어 둔 옷가지들도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누군가의 휴대폰이 울렸다. 시끄러운 진동에 눈을 뜨기 무섭게 다른 사람의 휴대폰도 울렸다. 이내 두 사람이 눈을 떴다. 시간을 확인하고 각자 매니저의 전화를 받은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분주하게 이 방, 저 방을 오가며 나갈 채비를 했다.

“잘하고 와.”

“너도.”

“끝나면 전화해.”

“응, 이따 봐. 사랑해.”

얼마 지나지 않아 집 안 가득 도사렸던 두 사람의 향이 사라졌다. 텅 빈 집 안이었으나, 허전하기는커녕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듯 더할 나위 없는 안정을 머금은 채였다.

협탁을 빼곡하게 메웠던 하얀 약통이 사라졌다. 침대 헤드에 항상 올려 두던 귀마개도 사라졌다. 침대 가까이 붙어 있던 스피커는 거실로 옮겨졌고, 침실 창에는 태양을 가리던 암막 커튼 대신 시폰 커튼이 자리했다.

희찬이 걸어 둔 커다란 액자는 어느새 두 사람의 새로운 사진으로 바뀌어 있었다. 원본은 가로가 긴 사진이었지만, 여덟 개로 조각나 퍼즐의 형태를 띤 사진은 맞물렸을 때 온전한 하나가 되는 두 사람의 모습과 같았다. 커다란 액자 속에는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웃는 두 사람이 함께였다.

가지런한 하얀 정장을 차려입고, 누군가는 꽃을 들고, 누군가는 상대의 허리를 쥔 채로 세상에서 가장 즐겁게 웃는 두 사람은 화려하기 이루 말할 데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있어 사랑해 마지않을 빛이었다.

눈이 부시다 못해, 시리도록 찬란한 빛.

끝을 알 수 없는 긴긴 터널 속의 이정표가 되어 주는 한줄기의 간절한, 처음 세상에 고개를 내민 새순을 다정하게 보듬는 따스한 빛 말이다.

<이도준 주연, 영화 ‘벙커’ 크랭크인>

<장희찬, 드라마 ‘더 네임’ 주연 발탁>

거친 풍랑에 좌절하고, 배를 잃고 표류하던 두 소년은 다시 바다로 향했다.

꿈을 꾸고, 사랑을 속삭이고, 아름답고 찬란한 시간을 쌓는 두 사람의 항해가 시작되었다. 넘실거리는 파도를 타고 바람 따라 흐르다 보면 어느새 원하던 꿈에 닿을 것이 분명한 눈부신 항해였다.

<끝>

눈부신 항해 [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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