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항해 7권 (외전)
외전. 1+1=田
<드라마 ‘눈부신 항해’ 극장으로 돌아온다>
<킹짱의 만남, ‘눈부신 항해’ 극장판 개봉 초읽기>
<이도준X장희찬, 눈부신 시너지! ‘눈부신 항해’ 길게 만난다>
이도준, 장희찬.
여전히 뜨거운 두 사람의 소식이 인터넷 전역을 뒤덮었다. 최근 크랭크인 된 영화 촬영으로 바쁜 도준과 주연으로 발탁된 드라마의 촬영을 준비하는 희찬은 몸 관리와 광고 촬영을 병행하며 이전보다 훨씬 바쁜 일상을 보내는 중이었다.
쏟아지는 기사에 열렬한 대중의 환호 역시 그대로였다. 동성애 스캔들이 터지고, 잠시 활동을 멈춘 두 사람이었기에 두 사람의 복귀는 사람들에게 반가운 소식이었고, 거침없는 그들의 행보는 여전히 커다란 파급력을 지니고 있었다.
눈부항 감독판 영화 뭐 거의 액기스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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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포스터 또 다른 걸로 나오나? 존나 기대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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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드라마로 끝내야지 사골 수준으로 우려먹네
⤷ 니를 고아 먹을 순 없잖아
⤷ ㅇㅇ하타치의 비겁한 열등감 잘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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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건 크게 보랫음 아이맥스 소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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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항해_영화 러닝타임 180분, 포스터 추가 촬영O, 굿즈 오픈 예정
⤷ ㅁㅊㅁㅊㅁㅊㅁㅊ
⤷ 굿즈 ㅅㅂ! 물량 넉넉히 제발요
⤷ 품절 존나 싫은데ㅠㅠ 선착순만 아니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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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 #Pride_Life 구매 고객 대상 이도준X장희찬 팬 사인회 예정, 자세한 내용 추후 공개
⤷ 내가 이러려고 적금 들었잖아
⤷ 킹짱데리고 고객 사은행사 없을 리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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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ㅂ킹짱 뽕찬다 일하는 거 개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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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눈부항 무대인사도 하나? 용병구함
⤷ 아맞네
⤷ 무조건 가야함;
드라마 ‘눈부신 항해’는 두 사람의 논란도 개의치 않고 엄청난 흥행을 끌었다. 해외로 팔려 나간 드라마는 해외에서도 열렬한 반응을 얻으며 두 사람의 연기력과 영향력을 입증했다. 뒤늦게 발매된 대본집과 감독판 DVD 역시 판매 오픈과 동시에 품절 사태가 일어나 엄청난 프리미엄 가격을 갱신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거래되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는 중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공식적으로는 사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열애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이 없었고, 간혹 인터뷰에서 관련 질문을 받을 때면 두 사람은 그저 빙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연애는 공식이었고, 공개적이었다. 조금씩 사진이 올라오기 시작한 희찬의 SNS에는 가끔 도준의 액세서리나 손이 등장했으며, 어쩌다 한 번씩 아예 도준의 사진이 올라오기도 했다.
팬으로서는 당연히 좋은 소식이었다. 별다른 활동이 없을 때는 죽은 게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조용한 도준이었기에 간간이 희찬이 올려 주는 사진은 메마른 땅의 단비와 같은 행복이었다.
대중들의 시선이 유연해졌다는 것을 몸소 느끼는 두 사람은 그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져 보다 활발한 모습을 보였다. 어느 새벽에 같이 영화관을 찾는 모습, 오전 이른 시간 함께 백화점 쇼핑에 나선 모습, 아마 사는 곳으로 추정되는 동네의 어느 카페에서 나란히 햇살을 만끽하는 모습들이 목격담으로 올라오는 것도 이제는 익숙한 일이었다.
늦은 새벽, 아니 이른 새벽. 아무튼 밤하늘을 가득 메웠던 어둠이 가시고 해가 수줍게 고개를 들어 여명이 밝아 올 무렵, 동살이 잡히고 푸르스름한 빛이 집 안을 빼곡하게 메울 때, 도준이 부쩍 피곤한 모습을 드러냈다.
영화 촬영으로 바쁜 요즘, 집에는 겨우 일주일에 한두 번 올까 말까 한 덕분에 희찬과 함께 누운 것도 벌써 오래전 일이었다. 도준은 곧장 희찬과 함께 눕고 싶은 몸을 겨우 추슬러, 억지로 욕실로 향했다. 침실에는 희찬이 자는 중일 테니, 그의 단잠을 방해하지 않으려면 행동은 최대한 조용히 해야 했다.
샤워는 10분 안으로.
희찬이 정해 준 시간에 맞게 샤워를 끝내려 도준이 분주하게 손을 놀렸다. 정수리부터 곧장 떨어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머리를 감고, 몸을 닦을 때는 기저에서 치미는 ‘더 씻어야 한다’는 생각을 애써 지워 내기 바빴다.
샤워를 마친 후, 짧은 머리를 수건으로 훌훌 털어 낸 도준은 얼른 침실로 향했다. 도준의 화려한 얼굴 만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뜨이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고,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는 도준은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것을 겨우겨우 추스르며, 어렵사리 침대까지 향했다.
그래도 내일은 한동안 영화 촬영이 없다고 했다.
아, 그것도 무슨 스케줄이 있다고 했던가.
스케줄을 따져 볼 기력조차 없었다. 도준은 복잡한 스케줄은 멍한 머리 뒤로 넘기며 얼른 침대에 올라 희찬의 품에 파고들었다. 뭉근하게 무너지는 생각의 끄트머리를 놓고, 머리를 비운 후에는 눈을 감고서 잠을 청하려 하자, 희찬의 단단한 팔이 제 몸을 옭아매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오는 거야?”
“응.”
“오늘도 수고했어.”
비비적거리는 인기척에 눈을 뜬 희찬이 제 품에 안긴 도준을 반겼다. 두 사람의 팔다리는 제 자리를 찾듯 익숙하게 맞물려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너무 졸려……. 아까 촬영하다가 졸았어.”
도준의 뭉개지는 투정에 희찬이 킥킥, 장난스럽게 웃었다. 희찬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웅얼거리던 도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진짜야. 눈이 안 떠져서 눈 감고 찍었어.”
“그래도 되는 씬이었나 보지?”
“살짝.”
“살짝이 뭐야,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지.”
진짠데…….
도준이 느릿하게 말을 잇다 이내 목소리를 줄였다. 일정한 희찬의 심장 박동을 듣던 도준은 말을 채 마치지도 못하고 까무룩 잠들었다.
희찬은 곤히 잠든 도준을 두고 조심스레 방에서 벗어나 분주하게 움직였다.
도준이 영화 촬영에 집중하는 동안, 희찬은 한 가지 제의를 받았었다. ‘눈부신 항해’가 전례 없는 흥행을 기록하며 종영했을 당시, 포상 휴가에는 참여하지 않은 희찬에게 임 감독이 제안한 것은 다름 아닌 ‘도준과 함께하는 힐링 예능’이었다.
‘드라마 감독이 웬 예능이냐’며, 곽 대표가 극구 말리기도 했었지만, 희찬에게는 나쁠 것 하나 없는 제안이었다. 이전에 잠깐 도준이 참여했던 예능은 엄청나게 반응이 좋았고, 다시 한번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은 도준도 하는 듯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뭐든 도준과 함께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고, 또 새로운 추억을 쌓을 생각에 기분만 좋았다.
그리고 도준은 이 모든 전말을 알지 못했다.
어쩌다 보니 희찬은 이 예능의 모든 일정과 목적지를 알게 되었지만, 임 감독이 두 사람을 위해 빌려 온 예능의 포맷은 원래 출연진에게 일정도, 목적지도 알리지 않은 채로 납치하듯 훌쩍 여행을 떠나는 것이 주 컨셉이었다. 그래서 곽 대표와 임 감독, 희찬은 이도준을 대상으로 이 예능의 포맷을 지키기로 했다.
이도준만 모르는 이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도준이 영화 촬영으로 바쁜 틈에 스타일리스트들이 집에 들러 도준의 짐과 희찬의 짐을 전달해 두고 갔고 매니저는 그 짐을 전부 도준의 차 트렁크에 실었다.
도준을 속이는 것에 진심으로 흥미를 보이는 도준의 매니저는 도준에게 ‘앞으로 일주일간 해외 로케 화보 촬영이 진행된다’는 거짓 스케줄을 알렸다. 이도준은 항상 그랬듯이 그저 고개를 주억거리며 스케줄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스타일리스트가 촬영 갈 때 입으라며 두고 간 옷을 챙겨 입은 희찬은 마지막으로 다시 침실에 들러 죽은 듯이 잠든 도준의 머리를 매만졌다. 희찬의 손길에 도준이 가지런한 미간을 좁히는가 싶더니, 눈도 뜨지도 못한 채로 희찬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도준아, 나 갔다 올게.”
“응.”
“일어나면 전화해.”
도준이 주억주억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전히 눈은 뜨지도 못하면서 꿋꿋하게 대답은 하는 모양이 못내 예뻐, 희찬이 도준의 말랑한 볼에 진하게 입을 맞추었다.
약속된 장소로 향하는 희찬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다. 매니저의 차에 올라서도, 사전 인터뷰 진행을 위해 스태프들이 진을 친 카페에 도착해서도 연신 싱글벙글 웃는 희찬은 자신이 느끼는 행복을 맘껏 표현하는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희찬의 밝은 목소리에 웅성거리던 일대가 조용해지며 희찬을 바라봤다. 찰랑거리는 새까만 머리카락에 햇빛이 비산했다. 햇살보다 더 밝은 미소를 띤 희찬의 모습은 그늘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오롯한 빛 본연이었다.
“왔어? 도준이한테는 비밀로 했지?”
“그럼요. 도준이 아직도 자고 있어요.”
시원한 커피를 쪼롭, 빨아들이는 희찬의 옆에 임 감독이 섰다. 최근 ‘눈부신 항해’ 극장판 준비로 바쁘다던 감독은 새롭게 도전하는 예능에 신이 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만면에 피어난 두근거림은 희찬의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연신 웃는 희찬의 둥근 눈매가 반달 모양으로 예쁘게 접히는 모습은 더없이 화려했다. 감독은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탄성을 애써 숨기지도 않았다.
“도준이는 언제 부르게?”
감독의 질문에 희찬이 데구르르 눈을 굴렸다. 집에서 나오기 전 본 도준의 모습은 피곤 그 자체였지만, 그렇다고 스케줄을 지체시킬 수는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던 희찬이 이내 샐룩 웃었다.
“이제 슬슬 부를까요?”
“그럼 지금부터 인터뷰할까?”
희찬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미리 카메라를 세팅해 둔 햇살이 쏟아지는 창가에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은 조금 어색한 듯 눈을 이리저리 굴려댔다. 그도 그럴 것이, 숱한 인터뷰를 했어도, 임 감독과 대면한 것은 처음이었다. 새삼스레 그의 앞에서는 쑥스러워지는 희찬이라, 턱 부근을 살살 긁었다.
감독은 미리 준비한 QnA 카드를 뒤적거렸다. 지금 상황에 잘 어울리는 질문을 찾는 듯한 모양에 희찬이 카메라를 응시했다.
“네, 눈부신 청춘을 촬영하기 위해 장희찬 배우 오셨는데, 기분이 어떠신지?”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감독이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에 희찬은 금방 카메라는 없는 존재라는 듯, 가볍게 자신의 시야 밖으로 밀어내며 자연스럽게 촬영에 임했다.
“하하, 신기해요. 그래도 예능은 몇 번 했었는데, 이건 또 새로운 거라 좀 떨리기도 하고요.”
인터뷰가 진행되며 시청자들에게 작은 정보가 함께 제공되었다. 이도준은 이 상황을 모른다는 것과 두 사람이 드라마 포상 휴가에 참여하지 못해 이번 예능이 기획되었다는 등 아주 간단한 사실들 말이다.
어느 정도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이 이내 눈짓을 주고받았다. 슬슬 도준을 깨울 때가 되었다는 듯한 희찬의 신호에 임 감독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편안하게 몸을 물렸다.
“도준이한테 전화할게요?”
“응, 도준이 일어나서 전화 받고 욕하는 거 아니지?”
“이도준 욕 안 해요. 좀 하고 살았으면 좋겠는데.”
감독의 노련한 장난에 희찬도 장난으로 응수했다. 휴대폰을 꺼낸 희찬은 스피커 모드로 전환해 마이크에도 통화 내용이 들어갈 수 있도록 스태프들을 배려했다.
도준에게 전화를 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호가 뚝 끊겼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전화가 끊긴 건가.
희찬이 의아한 눈으로 화면을 들여다봤다. 화면 속 통화 시간은 계속 흐르는 중이었다.
“도준아? 전화 받았어?”
─ …….
희찬의 질문에도 도준의 목소리가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 악몽이라도 꾼 걸까. 희찬이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최근 도준은 전에 없이 쾌적한 잠을 자는 듯했지만, 그렇다고 그의 발목을 쥔 악몽이 지우개로 지워 내듯이 말끔하게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희찬에게 감독이 손짓했다. 한 번 더 말을 해 보라는 듯한 제스처에 희찬이 마른 입술을 적시며 어렵사리 말을 냈다.
“준아, 일어났어?”
─ ……아니.
잠이 가득한 도준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묵직한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달아나는 걱정에 희찬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안 일어났어? 지금 전화 받은 거 누구야.”
희찬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에서도 도준이 얕게 웃었다. 그의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아, 희찬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 지금 전화 받고 깼어. 왜?
“너 어제 몇 시에 잤어?”
─ 나……. 몰라. 어제 기절한 거 같은데. 5시 반쯤 들어왔나?
“아이고, 어제가 아니라 오늘이네. 잘 잤어?”
이내 수화기 너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몸을 돌려 눕는 건지, 끙, 앓는 소리도 났다.
─ 희찬아. 너 뻘소리 할 거면 끊어, 나 자게.
“뭐? 뻐얼소오리이? 너 내 전화가 뻘소리야?”
도준이 다시 웃었다. 킥킥거리는 웃음에서 장난기가 가득 묻어나, 희찬이 눈썹을 씰룩거렸다.
─ 왜, 왜 전화했는데. 너 일하러 간 거 아니야? 어디야?
“나 지금 뭐 촬영하고 있는데, 너 여기 잠깐 올래?”
─ 내가 거기를 왜 가.
“오늘 날씨 되게 좋아. 잠깐 나와, 같이 커피 마시게. 별로 안 멀어.”
─ …….
도준의 목소리가 또 사라졌다. 움직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잠든 걸까. 희찬이 난감한 눈으로 감독을 바라봤다. 감독은 문제없다는 듯 그저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 도준아, 다시 자?”
─ 아니, 일어났어. 어디라고?
하지만 역시 이도준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지.
제 말이라면 피곤한 것도 뒤로하고 곧장 움직이는 도준의 모습에 희찬의 만면에 만족이 드리웠다. 몸을 뒤로 물리며 환하게 웃어 보인 희찬이 카페의 위치를 설명했다.
“아, 여기 어디냐면…….”
도준이 사부작거리며 움직이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더니 이내 ‘갈게.’하고 짧은 대답을 남기는 것으로 통화가 끝났다.
미션 아닌 미션을 성공한 희찬이 뿌듯함을 드러냈다. 어느새 바닥을 보이는 커피는 희찬이 빨대를 입에 물고 빨아들일 때마다 도르륵 얼음이 구르는 소리가 났다.
희찬은 도준이 오는 것을 기다리며 감독과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다. 촬영하면서 갈 여행지를 설명하는 감독의 말이 쌓이면 쌓일수록 희찬은 점점 큰 흥분을 느꼈다.
희찬은 이번 촬영에 큰 기대를 품었다.
이도준과 국내 여행이라니.
해외 여행이야, 일전에 잠시 다녀온 일은 있어도 국내 여행은 또 처음이었다. 직접 운전하고, 숙소를 고르고, 여러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중에도 스태프들의 보호 아래 안전하게 진행될 촬영이라는 점이 만족스러웠다.
희찬은 여러 가지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며 곧 나타날 도준을 헤아렸다. 소식을 듣고 당황할 도준을 떠올리니 저도 모르게 신이 났다. 이도준을 놀릴 기회는 흔하지 않았고, 그 모습이 방송을 타는 것은 더더욱 드문 일이었으니 자신만 아는 이도준의 귀여운 면모를 사람들에게도 보여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즐거웠다.
“도준이 오려면 얼마나 걸리려나?”
“10분이면 올걸요? 아까 준비 다 한 거 같던데.”
“도준이 화내는 거 아니겠지? 갑자기 촬영한다고?”
“아니, 이렇게 다 비밀로 해 놓고 이제야 그런 걱정을 하신다고요?”
희찬이 소소하게 웃었다. 내로라하는 연예인들의 숱한 변덕을 겪은 경험 때문인지, 이제 와서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이는 감독이 퍽 웃겼다.
게다가 이도준을 그렇게 오래 봐 왔으면서 아직도 이도준의 성격을 걱정하는 모습이라니.
희찬의 말에 감독도 순하디순한 도준을 떠올렸다. 하긴, 주변에서 누가 뭐라고 시비를 걸어도 의연하게 넘어가던 그였다.
“하하, 하긴.”
“도준이 화 안 내요. 걔 화내는 거 살면서 몇 번 못 봤어요. 걱정 안 하셔도 괜찮아요.”
인터뷰를 마친 희찬과 감독은 그 외에 다른 일들에 대해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차기작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현재 작업 중인 눈부신 항해 영화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카페가 조금씩 소란스러워지는 중이었다.
눈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자,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거리에는 도준의 고급 SUV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다. 직감적으로 도준의 차라는 것을 알아챈 스태프들은 하나같이 설렘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게 기분이 좋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를 가든 환대받는 모습은 희찬의 가슴을 뭉근하게 울렸다.
“왔다.”
햇살이 쏟아지는 도로에 도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캡 모자를 쓰고, 하얀 반팔 티셔츠에 편안한 청바지 차림으로 나타난 도준은 멀끔하고 단정한 모양이었지만, 가릴 수 없는 비주얼로 사람들의 시선을 한껏 홀리는 중이었다.
카페 간판을 확인하고 저벅저벅 들어오는 도준의 모습에 희찬이 얼른 눈을 돌려 카페 입구를 바라봤다. 모습을 드러낸 도준은 스태프들에게 둘러싸인 희찬을 향해 근사한 미소를 보였다.
“준아!”
희찬의 외침에 그와 감독의 주변에서 촬영을 하던 스태프들의 시선까지 일제히 도준에게 향했다. 도준은 말없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것으로 자신이 왔음을 알리고, 카운터 앞에서 희찬을 바라봤다.
“너 커피 마셨어?”
“응, 근데 하나 더 마실래.”
“아이스 아메리카노 큰 걸로 두 개요, 하나는 디카페인으로 주세요.”
“나 샷 빼고.”
“디카페인은 샷 하나 빼주세요.”
희찬의 음료까지 받아 든 도준은 주변 스태프들과 상냥하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희찬에게로 다가갔다. 희찬에게 커피를 건네다 임 감독을 발견한 후에는 눈을 크게 뜨고 반색을 표했다. 그보다 전에 얼른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감독님은 왜 여기 계세요?”
“희찬이랑 일하는 중이지.”
커피를 한입 가득 들이켜자 정신이 개운해졌다. 또렷해지는 시야에 머리를 턴 도준이 희찬에게 몰렸던 카메라가 제게 향하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뭐 촬영하는 거야?”
“응? 너랑 같이 여행하는 거.”
“나?”
“응, 너.”
“나 오늘 다른 스케줄 있는데?”
도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아무리 매니저가 눈치가 없다고는 하나, 일에 있어서 스케줄을 헷갈리는 실수는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희찬의 말이 그저 터무니없는 장난 같았다. 그런 도준의 어깨에 감독의 두툼한 손이 얹혔다.
도준이 고개를 돌려 감독을 쳐다봤다. 감독은 희찬과 마찬가지로 왜인지 흥미로운 미소를 지은 채였다.
“응, 도준아. 너 오늘은 화보 촬영 스케줄 있지.”
제 스케줄을 꿰뚫는 감독의 말이 놀라워, 도준이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단 한 번도 감독에게 자신의 스케줄을 알린 일이 없었기에 도준이 바쁘게 머리를 굴리며 희찬과 감독을 번갈아 쳐다봤다.
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하다.
제 옆에서 생글생글 웃는 희찬의 낯에는 왜인지 진한 장난이 스며 있었고, 감독은 여유가 만만한 모습으로 탁자에 팔을 올려 턱을 괸 채였다.
목덜미를 긁적거리며 그들의 기색을 살피던 도준이 스태프 뒤편의 누군가를 바라봤다.
“너는 왜 여기에 있어?”
도준의 매니저가 아주 자연스럽게 현장 스태프들과 어울려 서 있었다.
제게는 연락도 없었던 희경까지 현장에 있는 것을 발견한 도준이 이내 헛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그러니까, 다들 나를 상대로 다 같이 입을 맞추고 나를 속인 모양이지.
도준이 고개의 각을 틀어 꺾고 희찬을 바라봤다. 가지런한 눈썹이 씰룩거리는 게 사뭇 사나워, 희찬이 능청스럽게 손으로 도준의 눈을 가려 버렸다. 도준이 피식 웃으며 희찬의 손을 끌어 내렸다.
“대표님도 아시는 거고?”
“대표님 없이는 이런 거 못 짜지.”
“진짜 나만 모르고 이렇게 일을 벌였다고?”
“너 너무 바빴잖아.”
아니, 나만 바빴나. 바쁜 것으로는 장희찬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바빴다.
사건의 전말을 안 도준이 허무하다는 듯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희찬이 연신 즐겁게 웃으며 볼에 묻은 잔먼지를 털어 줘도, 정성스러운 손길로 얼굴을 매만져도 도준은 그저 눈을 찡그린 채로 생각에 잠겼다.
희찬과 무언가를 함께 한다는 것이 즐거운 한편, 갑작스러운 스케줄은 확실히 당황스러웠다.
하긴, 무슨 화보 촬영을 일주일이나 한다고 했을 때 알아봤어야 했던 걸까.
아무튼 짓궂은 대표와 감독과 장희찬의 삼박자는 제법 합이 좋았으므로, 도준이 가볍게 어깨를 털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못 살아, 내가.”
“왜, 싫어?”
도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 와 싫다고 한들 뭐가 달라지겠나, 싶다. 어차피 정해진 스케줄이라면 희찬과 함께 즐거울 것에 기대하는 것이 한결 좋을 것이라 생각한 도준의 낯은 퍽 근사했다.
그제야 감독이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준이 희찬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질문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동안 혹시나 이도준이 평소와 다르게 ‘안 하고 싶다’고 강하게 얘기하면 어떡해야 하나, 고민하느라 머리가 다 얼얼할 지경이었다.
“도준아, 지금부터 간단하게 설명해 줄게.”
“네.”
“예전에 몇 번 했던 포맷인데, 아무 일정도 안 알려 주고 갑자기 외국으로 여행 가는 예능 본 적 있어?”
“네, 한진 선배 나오는 거 봤어요.”
“그런 건데, 너희가 워낙 바쁘다 보니까 갑자기는 안 됐어. 그래서 지금 간다고 미리 알려 주는 거고.”
미리는 무슨, 당일에 통보하고 있으면서.
뻔뻔하게 ‘미리’ 알려 준다고 힘주어 말하는 감독의 말이 재밌다. 도준은 여전히 입꼬리를 올린 채로 즐겁게 감독의 말을 경청했다.
감독의 설명이 제법 길게 이어졌다. 일주일간 희찬과 국내를 여행하는 프로그램은 도준의 차로 직접 움직여야 한다고 한다. 그에 도준이 창밖을 돌아보자, 어느새 스태프들이 제 차에 카메라를 설치하는 모습이 보였다. 참 치밀한 사람들이다. 또 한 번 헛웃음이 터졌다.
“그럼 제 차로 계속 다니는 건가요? 지금 바로?”
“응, 지금 바로 출발.”
곧장 출발한다는 감독의 단호한 말에 도준이 단박에 인상을 누볐다. 이렇게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데다가, 직접 짐을 싼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괜한 불안함이 몰려왔다.
도준이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며 감독을 바라봤다. 무언가 요구할 것이 있는 듯한 도준의 모습에 감독도 도준에게 집중했다.
“저 집에 들러서 필요한 거 몇 개만 챙겨가도 괜찮을까요?”
“짐은 이미 트렁크에 다 실었을 텐데?”
도준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평소보다 차가 묵직하다 했다.
“안 챙긴 게 있어요. 대본이랑, 약이랑……. 너는 필요한 거 없어?”
도준의 질문에 희찬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필요한 거.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어 절레절레 도리질을 치자, 도준이 눈썹을 까딱거렸다.
“약? 왜, 너 어디 안 좋아?”
“그건 아닌데 잘 때 먹는 약이 있거든요. 자주 먹지는 않는데……. 혹시 모르니까요.”
덧붙는 설명에 감독은 도준이 작품을 시작할 때면 꼭 언급하는 ‘악몽’을 떠올리고 얼른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아, 그래. 그런 건 챙겨야겠네.”
도준이 감독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희찬은 자연스럽게 도준의 휴대폰으로 자동차 보험에 가입했다. 일주일 내내 도준이 혼자 운전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고, 같이 즐겁자고 가는 여행인데 이왕이면 누구 하나라도 피곤해서는 안 될 것 같아 내린 판단이었다. 힐끔힐끔 곁눈질로 희찬의 행동을 살피던 도준이 입가에 미소를 피운 채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중에는 아예 ‘잘했다’며 희찬의 얼굴까지 매만지는 도준의 행동에 왜인지 주변 스태프들이 얼굴을 붉혔다.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이 나란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준은 냉큼 제 곁으로 다가오는 매니저에게 부러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너 나한테 비밀 만들고 이러면 재미없어.”
“아이, 대표님이 절대 비밀이라고 하셨단 말이에요.”
“어쩐지, 오늘 스케줄이라면서 연락이 없더라.”
“하하, 형 재밌게 다녀오세요.”
멋쩍게 웃으며 도준을 대하는 매니저가 도준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에 도준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제 옆에 선 희찬을 바라봤다.
“이거 매니저도 안 가는 거야?”
도준의 질문에 희찬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거 우리만 가는 거래, 스태프들도 최소한만 참견한대.”
뒤쫓아 오는 희찬의 말에 도준이 허, 걱정이 담긴 한숨을 쉬었다.
괜찮을라나…….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일전에 다른 배우들이 촬영한 예능을 떠올린 도준은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둘 다 어른이고, 말이 통하는 한국에서 무서울 건 또 뭔가 싶었다. 도준이 다시 매니저를 바라봤다. 매니저는 일주일간 주어진 휴가가 마냥 기쁜지 해실해실 웃는 중이었다.
“행복해 보이네.”
“아이, 형. 그거 다녀오시면 또 바로 스케줄 있어요.”
“그러니까. 나는 계속 스케줄 있는데 너는 쉬어서 좋은가 봐.”
연신 매니저에게 틱틱거리는 도준의 허리에 희찬의 손이 닿았다. 단단한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은 희찬은 도준의 어깨에 턱을 괸 채로 화사한 낯을 자랑했다.
도준이 희찬을 바라봤다. 투명한 구슬처럼 반짝거리는 눈과 시선을 마주하기 무섭게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벌써 몇 년을 마주하는 희찬의 화려한 낯이지만, 야속하게도 그 얼굴은 볼 때마다 새로운 자극을 안겼다.
“이제 가자.”
“응, 희경아. 푹 쉬어.”
“네, 형! 연락드릴게요!”
이윽고 두 사람이 카페를 벗어나 나란히 차에 올랐다. 스태프들이 카메라를 달아 둔 탓에 차의 풍경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감독은 예능이 익숙하지 않은 두 사람에게 모든 것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알려 줬다. 조수석에 앉은 희찬은 감독이 전해 주는 목적지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했고, 그러는 동안 도준은 감독으로부터 주의 사항을 전해 들었다.
‘차 안에서 나누는 대화는 모두 마이크에 녹음될 거고, 모든 행동들도 카메라에 담길 것이니 혹시 수위 높은 대화나 행동은 삼가라’는 감독의 당부에 도준이 민망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서 다른 설명도 덧붙었다. 두 사람이 가는 식당은 스태프들도 따라가야 하는 데다가 촬영 허가도 받아야 하니 목적지를 정한 후에는 꼭 스태프들에게 공유해 달라는 말이었다. 그에 두 사람은 어렵지 않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뒤따라갈 테니까 천천히 움직여.”
“넵, 이따 뵙겠습니다.”
“어, 지금은 집으로 가는 거지?”
“네.”
감독이 한 발 물러서자, 도준이 부드럽게 운전을 시작했다. 카메라가 설치된 차는 제 것이 아닌 것처럼 어색했지만, 바로 옆에서 조잘조잘 떠드는 희찬의 존재에 안도를 느낀 도준의 입가에도 비로소 편안함이 피었다.
카페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집에는 금방 도착했다. 보안이 까다로운 탓에 도준의 차 뒤꽁무니를 촬영하는 카메라는 따라 들어올 수 없었다.
주차를 마친 도준은 희찬의 머리를 한껏 헝클어뜨린 후 천천히 문을 열어 집으로 향했다. 느릿한 걸음을 걷는 도준을 바라보던 희찬이 조수석 창문을 내려 도준을 재촉했다.
“얼른 내려와! 빨리 가게!”
“알겠어.”
도준은 금세 성큼성큼 걸음을 놀려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희찬은 차 안에서 도준을 기다리는 동안, 각종 포털을 들락날락하며 가는 길에 들를 법한 식당이 있는지 찾아봤다. 제법 귀찮을 법했지만, 까딱까딱 춤을 추는 그의 발끝은 귀찮음은커녕, 희찬이 느끼는 설렘을 머금은 채였다.
“요즘은 뭘 먹여도 잘 먹으니까…….”
입맛을 되찾은 도준은 바쁜 스케줄 중에 고된 운동을 하면서도 먹는 것을 놓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다. 수년 만에 되찾은 행복을 저지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으므로, 희찬은 그저 바로 곁에서 그의 관리를 돕거나 그가 먹자는 것을 함께 즐거워할 뿐이었다.
그런 이도준을 만족시킬 만한 믿음직스러운 식당.
최근 바쁜 촬영 스케줄로 제대로 먹이지도 못했으니, 이왕이면 촬영 기간 동안 최대한 다양한 음식을 먹여 주고 싶었기에 식당을 찾는 희찬의 눈은 사뭇 진지했다.
가지런한 희찬의 손가락이 스크롤을 내리며 신중하게 맛집 리스트를 추려 냈다. 마음에 드는 음식점이 있으면 캡쳐를 해두고, 주소는 복사해 메모장에 적어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하나둘씩 마음에 드는 음식점이 늘어 갈 무렵.
“응, 도준아.”
전화가 울렸다.
희찬은 팝업으로 뜨는 전화를 받아 들고서 편하게 시트에 몸을 기댔다. 시트 가죽이 부대끼는 소리가 나더니 희찬의 몸을 편안하게 받아들였다.
─ 너 필요한 거 없어?
“응, 나는 다 챙긴 거 같은데?”
─ 그럼 진짜 내 거만 챙긴다?
이도준은 꼼꼼하다.
몇 번이나 빼먹은 건 없는지 묻는 도준에게 희찬은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에도 도준의 질문은 끊이지 않았다. 그의 발이 향하는 곳이 어딘지, 무얼 보고 있는지 훤히 알 수 있는 질문이 연달아 이어졌다.
─ 귀마개는?
“있어.”
─ 이어폰, 면도기는?
“둘 다 챙겼어.”
─ 칫솔, 치약은?
“있어. 네 거 챙겨와.”
─ 응, 자기 두통약은?
“아, 그거 놓고 왔다. 자기가 챙겨!”
착실하게 대답을 들려주는 희찬은 어느새 카메라가 자신을 찍고 있다는 사실도, 자신들의 대화가 그대로 마이크를 타고 들어간다는 사실도 새까맣게 잊은 채였다. 의자를 뒤로 젖혀 편하게 통화를 하다 보니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최근 도준과 재미를 붙인 ‘자기’라는 호칭도 술술 나왔다.
그건 도준도 마찬가지였다. 촬영 같지 않은 촬영이 심하게 편했던 걸까.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주의 사항을 전달한 지는 또 몇 분이나 지났다고 그새 서로를 향해 애정 서린 호칭을 붙여 부르는 두 사람은 일상 그대로 편안한 모습이었다.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스피커를 통해 듣는 감독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수위 높은 대화 조심하라고 했더니, 아예 자기, 자기 하는 두 청년이 황당하다가도 못내 귀여워 그저 웃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나 지금 가.
“응, 얼른 와.”
─ 응. 아, 찬아, 찬아.
“응?”
게다가 이 두 사람의 대화는…….
─ 수분크림은 어디 갔어? 안 보여.
“내가 챙겼어.”
─ 아, 응. 갈게.
“빨리! 뛰어!”
누가 들어도 같이 사는 사람의 대화였다. 감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화를 끊은 후에야 희찬이 카메라를 의식했다. 분명 맛집을 고르고, 도준과 통화를 할 때까지만 해도 시야에 보이지 않던 카메라였는데 어째 전화를 끊기 무섭게 한구석에서 저를 향해 빨간 불빛을 쏘아 대는 카메라가 정면으로 보였다.
“아……. 카메라가 있었지, 참.”
순식간에 멋쩍음과 난감함을 동시에 느꼈던 희찬은 뒷덜미를 한 번 긁적이고는 에라 모르겠다, 시트에 발라당 누워버렸다. 이미 지난 과거의 대화를 걱정해 봐야, 마음의 짐만 늘 뿐이었으니 구태여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직 공식적으로 사귄다 말한 적 없고, 같이 산다는 사실을 알린 적도 없었지만 뭐 어쩌겠어. 임 감독님이 알아서 어련히 잘해 주실까. 그런 생각이나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에 날씨는 뜨겁기만 했으나, 저녁은 추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도준의 손에는 얇은 외투도 들려 있었다.
하여튼 이도준, 세심한 건 알아줘야 한다.
희찬이 피식 웃으며 도준을 향해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아버지한테는, 연락드렸어?”
“아니, 네가 한 거 아니었어?”
“했어.”
“잘했어.”
도준이 희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희찬은 이제 이선재를 아예 대놓고 ‘아버지’라 불렀다. 수줍은 듯 귀엽게 ‘아버님, 어머님’이라 칭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아예 ‘아버지, 어머니’라 부르며 도준보다 더욱 돈독한 관계를 자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런 희찬의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넉살이 좋아지는 희찬의 살가운 면을 인정하기로 한 후에는 그저 그 모든 광경을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갈까?”
“출발!”
때마침 오디오에서 출발을 알리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액셀을 밟는 도준은 능숙한 솜씨로 차를 운전해 지하 주차장을 벗어났다.
분명 매일 아침 보는 풍경이었으나, 오늘은 달랐다. 바쁜 걸음으로 길거리를 누비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머리를 쓰다듬듯 다정하게 쏟아지는 햇살, 살랑거리는 바람에 맞춰 춤을 추는 나무이파리 같은 것들이 환상의 조화를 이루어 완벽한 ‘좋은 날’을 만들어 냈다.
“짐을 숙소에 먼저 내려놓고 밥 먹으러 갈까?”
“좋아. 나 진짜 맛있는 거 먹고 싶어.”
도준의 말에 희찬이 도준의 얼굴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그렇지 않아도 살이 없는 이도준인데, 최근 들어 더욱 핼쑥해진 모습이 퍽 안쓰러웠다.
“스트레스받나 봐. 촬영이 많이 힘들어?”
“그건 아니고, 그냥.”
“뭐 먹고 싶어? 고기? 내가 가는 길에 식당을 좀 봤거든?”
“응, 갈 만한 데 있어?”
차창을 통해 부서지는 햇살에 두 사람이 동시에 눈을 찌푸렸다. 앞차에 반사되어 정면으로 때리는 빛에 두 사람이 얼른 선바이저를 내려 눈을 가렸다. 햇빛에 압박당하던 눈이 편안해진 것을 느낀 후에는 소소한 웃음을 흘렸다.
두 사람은 숙소로 향하는 내내 도란도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낮은 웃음을 띠기도 하고, 커다란 폭소를 터뜨리기도 하고, 서로를 향해 으르렁대는 듯하다가 다시 서로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서로를 어르기도 했다.
그렇게 다채로운 두 사람과 잘 어울리는 날씨가 좋다. 청명한 하늘에 드문드문 내려앉은 구름과 따뜻하게 감도는 기온이 더없이 좋은 오늘이었다.
스태프들이 두 사람을 위해 준비한 숙소는 아기자기하면서도 두 사람이 지내기에는 넓은 공간을 자랑했다.
거실 한가운데 떡하니 선 두 사람은 눈을 바쁘게 굴려 숙소 곳곳을 살펴봤다. SNS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곳으로 소개된 숙소는 감각적인 인테리어에 통 창으로 큰 빛을 받아들여 화사함을 머금었다.
성인 남성 한 명이 들어차면 적당한 크기의 조리대와 세련된 식탁이 있는 주방을 둘러보다 보면, 그 옆에 위치한 침실에는 두 사람이 뒹굴어도 부족함 없는 널따란 침대도 있었다.
“우와!”
희찬이 숙소 곳곳을 누비며 연신 환호를 터뜨렸다.
“숙소 좋다!”
“응, 좋다.”
“어, 여기 다락방도 있나 봐.”
잠깐 도준에게 다가왔던 희찬이 다시 우다다, 요란한 걸음 소리를 내며 2층으로 향했다. 2층에는 아늑함을 머금은 다락방이 마련되어 있었다. 허리를 펴고 앉기조차 버거울 정도로 천장이 낮았지만, 그만큼 가까운 천장은 온통 유리로 만들어져 하늘이 곧장 닿는 듯했다.
그에 희찬이 휘둥그레 눈을 뜨고 입꼬리를 크게 틔어 환하게 웃었다. 이대로라면 밤에는 달을 볼 수 있을 거고, 그 옆에서 반짝거리는 별도 볼 수 있을 거다.
“준아! 여기 와 봐!”
희찬이 납작 엎드려 바닥을 향해 소리쳤다. 희찬이 방방거리며 숙소를 돌아보는 동안 묵묵하게 캐리어를 정리하던 도준이 그제야 계단을 올려 봤다. 희찬의 하얀 손이 계단 위에서 얇은 손수건처럼 팔랑거리는 것이 보였다. 의아한 듯 주변을 둘러봤던 도준은 내려올 생각은 없이 자신을 부르기만 하는 희찬의 손짓에 흔쾌히 발을 놀려 다락방으로 향했다.
“와, 여기 뭐야.”
도준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환한 햇살이 쏟아지듯 내려앉는 공간은 화사함이 이루 말할 데 없었다. 희찬의 머리를 쓰다듬고, 하얀 볼을 어루만지다 도준에게까지 너그럽게 품을 벌리는 햇발에 도준도 희찬과 같은 모양으로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봤다.
분명 좁은 공간이었으나 그래서 더 무한하고 광활한 공간 같았다. 백지가 시야를 가리는 듯한 환상이 일었다. 새까맣게 암전되는 형태가 아닌, 모든 물체가 색을 잃어 하얗게 번지는 모습은 마냥 눈이 부셨다.
그렇게 눈자위가 시릴 정도로 하늘을 바라보던 도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돌아봤다. 아늑한 다락방 곳곳에는 즐길 거리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퍼즐, 보드게임, 우쿨렐레와 무드등, 거기다 귀여운 스케치북과 크레파스까지.
하나같이 다정하고, 따스한 모양에 도준이 저도 모르게 싱그러운 미소를 피웠다. 그렇지 않아도 시골 동네에 낮은 건물뿐이라, 밤에는 별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는데, 이 방은 별빛이 쏟아지는 밤을 즐기기에, 사랑을 속삭이기에 두말할 것 없이 적합한 장소였다.
“예쁘다, 그치.”
“응, 여기 있으면 밤에 별도 볼 수 있겠다.”
“이따가 간식 들고 올라와서 별 볼까?”
“아……. 나 뭐 많이 먹으면 안 되는데.”
도준은 이 촬영이 영화 촬영 중에 잡힌 것이 아쉬웠다. 차라리 다른 스케줄이 없을 때면 맘껏 먹고 양껏 운동해 관리를 하겠지만, 촬영 중에는 체형이 달라지는 것만큼 곤란한 일도 없었으니 몸이 더 커져서는 안 될 일이었다.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는 도준의 뺨을 희찬이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부드럽게 어르는 손짓이 제법 어른스럽다. 결국 도준이 입술을 말아 물고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아주 작은 치수를 표현하는 듯한 손 모양을 보였다. 그런 도준이 덧붙인 말은.
“나 요만큼만 먹을 거야. 더 먹으라고 하지 마.”
나름의 다짐이었다.
그에 희찬이 큰 웃음을 터뜨렸다.
“알겠어. 더 먹으라고 안 할게.”
카메라가 없는 공간에서 꽁냥꽁냥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두 사람이 나란히 거실로 내려왔다. 두 사람이 집을 구경하는 동안 스태프들은 분주하게 카메라를 설치해 놓았다. 욕실과 화장실을 제외한 모든 공간에 카메라가 빼곡하게 들어서는 것을 본 도준과 희찬은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렇게 숨 막히는 공간에서 다들 어떻게 그렇게 잘 지내는 건지.
먼저 촬영한 사람들에게 경외심이 일 정도였다.
“이거 24시간 돌아가는 거죠?”
“응, 그래도 편집은 알아서 잘해 줄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감독님이야 문제없죠.”
굳이 문제를 따지면 우리가 문제지.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모양으로 한쪽 볼에 바람을 넣은 채로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말했던 대로 감독의 편집이야 걱정할 일도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자신들에게는 절대로 나쁜 방향으로 편집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덕이었는데, 문제는 서로였다.
다른 곳에서는 철두철미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두 사람이었지만, 상대가 장희찬이고, 이도준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주변을 다 잊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드는 일이 허다한 두 사람은 마음을 다잡으며 서로를 단속하기로 했다.
“뽀뽀 금지.”
도준이 제 입을 가리고 희찬의 귓가에 속삭였다. 가만히 귀를 내어 줬던 희찬은 어이없다는 듯 하! 큰 숨을 터뜨리며 도준을 째려봤다.
“너 내 엉덩이 만지는 거 금지.”
희찬이 도준에게 되받아치자 도준이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희찬을 쳐다봤다.
“솔직히 내가 더 만지냐, 네가 더 만지냐.”
“아무튼.”
두 사람이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였다. 네가 먼저 만지네, 마네 아무튼 아슬아슬하게 수위를 넘나드는 대화를 서로의 귀에 속삭이는 두 사람은 제법 진지한 안건을 다루는 모양이었다.
“니네 아무리 조용히 속삭여도 다 들리거든?”
아무리 작게 대화를 나눠 봐야, 몸에 붙인 마이크를 통해 다 들어온다는 것을 예능이 익숙하지 않은 저 배우들은 아직도 인지하지 못한 모양이다. 게슴츠레 눈을 뜨고 두 사람을 지켜보던 임 감독이 뾰족한 핀잔을 얹자, 두 사람의 얼굴이 화륵 불타올랐다.
약속이라도 한 듯,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에게 등을 돌렸다. 로봇처럼 삐걱삐걱 앞으로 나아가서는 발치에 걸린 캐리어를 어색하게 끌고 다시 나란히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발랑 누운 채로 침대 아래로 떨어진 다리를 달랑거리던 희찬이 줄곧 천장을 바라보던 눈을 돌려 도준과 마주했다.
“자기.”
캐리어를 열고 옷장에 옷을 정리하던 도준이 경쾌한 희찬의 목소리에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우리 그냥 다른 숙소 잡지 말고, 여기서 일주일 지낸다고 할까?”
잠시 고민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도준이 이내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도 좋아, 움직이기 좀 그래.”
“그치, 우리 도준이 영역 동물이잖아.”
장난이 가득한 희찬의 목소리에 도준이 피식 웃으며 큰 폭으로 걸어 희찬의 앞에 섰다.
“너는 아닌 척하네.”
도준이 희찬의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그에 희찬도 덩달아 해사한 웃음을 보였다.
아무래도 낯선 곳은 부담이 있다. 요즘은 약 없이도 잘 자는 도준이었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불안함이 가슴에 도사려, 낯선 곳에서 촬영한다는 말을 들으면 의무적으로 약을 챙겼다. 슬금슬금 다가오다 기어코 발목을 잡는 불안함은 여전히 위험 요소였고, 언제든지 꿀 수 있는 악몽이라는 생각이 도준의 목을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희찬이 도준의 손을 거머쥐고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 속에서 감독을 찾았다.
“감독님, 감독님. 저희 그냥 여기서 일주일 지내도 될까요?”
희찬의 말에 감독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두 사람을 쳐다봤다.
“지루하지는 않겠어?”
“하하, 저희 원래 잘 안 움직이잖아요.”
“음,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당연히 감독의 입장에서는 나쁠 것 하나 없는 결정이었다. 매번 숙소를 이동할 때마다 카메라를 철수하고 다시 설치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사라질 테니 말이다. 두 사람과 협의를 마친 감독이 스태프에게 예약 기간을 늘릴 것을 지시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스태프들이 차츰차츰 걸음 소리를 줄였다. 정리가 마무리되어 가는 느낌에 희찬과 나란히 바깥을 둘러봤던 도준은 얼추 끝이 보이는 형태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꾸준히 캐리어를 준비하던 도준의 손에는 스타일리스트가 남겨 둔 메모가 들려 있었다. 곰곰이 읽는 눈은 또 얼마나 진지한지 모른다. 호기심을 느낀 희찬이 은근슬쩍 몸을 붙이고 메모를 함께 들여다봤다.
“왜, 뭐 입으라는 말 없어?”
“난 그런 거 없어.”
“왜 없어, 그게.”
희찬이 인상을 찌푸리며 메모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도준의 손에 들린 노란색 메모에 적힌 문구는 다소 발랄했다. 그를 찬찬히 읽던 희찬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도준과 메모를 번갈아 쳐다봤다.
오빠 옷은 넉넉하게 챙겨뒀고 그때그때 입고 싶은 대로 입으시면 돼요^^~ 중복 안됨XX 골고루 노출시켜주세요 브랜드 요청ㅠㅠ!!!! 오빠랑 희찬오빠한테만 단독으로 들어간 아이템들 있어요 (별표 스티커 붙여놨음!) 적절히 잘 섞어서 착용 부탁!!! 겉옷 중에 흰색 아노락은 오빠 단독이요 꼭꼭꼭 입어야함!!
뭘 입혀도 태가 나는 이도준은 타고난 센스도 좋아 알아서 옷을 잘 챙겨 입는 편이었다. 일할 때에도 그렇게 입는 것을 선호해 왔던 건지, 아예 코디를 짜 주지 않고 간단한 메모만 띡 남겨 둔 스타일리스트가 어이없다.
이래서 스타일리스트들이 그렇게 이도준이랑 같이 일하고 싶다고 입을 모았던 모양이다. 언젠가 자신의 스타일리스트로부터 ‘도준 오빠네 애들은 진짜 편하게 일한대요.’라며 볼멘소리를 내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고 하여 자신이 불편하게 한 것도 아니었는데, 뭐가 그렇게 부러웠는지, 이제는 알겠다.
희찬이 도준의 어깨에 턱을 괴고 곁눈질로 힐끔 그를 쳐다봤다.
“네가 이러니까 내가 까탈스러운 것 같잖아.”
“뭘 또 얘기가 그렇게 돼. 너는 너고 나는 나지.”
한참이나 웃던 희찬이 도준에게 하얀 티셔츠를 내밀었다.
“이거 어때.”
희찬이 건넨 것은 도준이 입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디자인이었다. 달라진 것이라면 등판에 커다란 로고가 새겨진 정도랄까. 도준은 나쁘지 않다는 듯 눈썹을 으쓱거리며 옷을 받았다.
“바지도 갈아입을 거야?”
“아니. 모자만 바꿔 쓰려고.”
“그럼 모자는 이거.”
옷을 맞춰 입는 센스라면 희찬 역시 도준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의기양양한 표정의 희찬의 손에는 도준의 피부톤과 찰떡같이 맞아떨어질 모자가 들려 있었다.
도준이 보기에도 나쁘지 않은 매치였는지, 도준은 금방 웃통을 훌렁 벗고서 티셔츠를 갈아입었다. 순식간에 드러났다가 사라진 도준의 탄탄한 몸은 못 본 새에 더 단단해져 있었다. 조각조각 갈라진 복근과 탐스러웠던 가슴이 드러났다가 사라진 게 아쉬워, 희찬이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너, 그거 금지.”
“내가 뭘?”
“내 몸 보고 침 삼키지 마.”
“아, 들켰네.”
“집에 가서 해, 여기서는 아무튼 안 돼.”
도준이 검지를 곧게 펴 희찬의 눈앞에 단호한 손짓을 했다. 마치 아이를 나무라는 어른의 모양으로, 아랫입술을 잘근 씹어 물고 눈을 매섭게 치켜뜬 도준의 모습이 퍽 웃겼다. 희찬은 모자를 꾹 눌러 쓰며 짓궂게 자신을 단속하는 도준 덕에 가슴이 가파르게 오르내리도록 크게 웃었다.
“너는 옷 안 갈아입어?”
“응? 나도 입어야지.”
도준의 말에 희찬도 도준의 옆에 캐리어를 펼쳤다. 도준의 캐리어와는 달리 티셔츠-바지-외투가 한 팩에 담겨 세트로 묶여 있었다. 의상을 담은 비닐 팩 위에는 노란 메모가 하나하나 정성스레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다른 배우들에 비하면 굉장히 약소한 편이었다.
오빠 악세 캐리어 앞주머니에 담아놨어요! 기분대로 원하는 대로 착용하세요! 도준 오빠랑 같이 들어간 단독 아이템은 별 표시 해뒀어요! 둘째 날 아침 상의 오빠 단독이에요. 꼭 노출해 주셔야 해요!
결국 희찬에게도 선택의 여지가 주어졌다. 알아서 착용하라는 메시지가 담긴 메모는 도준이 받은 것과 비슷한 모양이라, 도준도 소소한 웃음을 터뜨렸다. 멋쩍어진 걸까, 희찬이 귀 끝을 붉게 물들이며 수줍은 목소리를 냈다.
“악세는 내가 챙기는 게 편하잖아?”
“그치.”
그냥 누군가의 도움 없이 사는 게 익숙한 두 사람이라 스타일리스트의 손이 여전히 불편하다는 것이 솔직한 감상이다.
스타일리스트가 정해 준 옷으로 갈아입은 희찬이 여러 색상의 모자를 늘어놓고 턱 아래를 괸 채로 고민을 거듭했다. 도준에게는 찰떡같이 잘 어울리는 모자를 골라줘 놓고, 자신의 모자는 쉽사리 고르지 못하는 모습에 도준이 희찬의 옆에 같이 서서 손가락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도준의 손가락이 한 곳에 멈추었다. 그건 도준의 머리에 얹힌 모자와 같은 디자인의 색만 다른 모자였다. 이한 어패럴의 세련된 로고가 정 가운데 자리한 것을 보아, 두 사람이 이한 그룹의 모델이라는 것을 의식한 협찬인 것 같았다.
“오, 나한테도 이게 들어왔구나.”
“같은 아이템 들어왔다는 게 이런 건가 봐.”
도준이 별표 스티커를 붙여 뒀다던 스타일리스트의 말을 떠올리고 썼던 모자를 벗어 모자 안쪽을 살폈다. 스타일리스트의 말대로 모자 캡 안쪽에는 새까만 별이 그려진 작은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어때.”
“예뻐.”
같은 디자인의 다른 색상 모자를 착용한 두 사람은 서로를 아주 흐뭇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미 익숙해진 서로의 일하는 모습이었지만, 가끔 새삼스러운 구석이 있다.
희찬이 도준의 뺨을 습관적으로 쓰다듬었다. 그리고 도준 역시 습관적으로 그 손바닥에 입을 맞추려다 주변을 의식하고 뻣뻣하게 몸을 물렸다.
역시 문제는 다른 게 아닌 우리였다. 하마터면 카메라가 수십 대가 돌아가는 곳에서 뽀뽀를 할 뻔했다.
도준의 생각머리쯤이야 손쉽게 예측하는 희찬이 피식 웃었다.
이미 숙소에 들어와서부터 자기, 자기 다 불러 놓고 이제 와서 내외하는 이도준이 제법 귀여웠다.
숙소 근처의 작은 식당에 들어선 두 사람은 메뉴판도 보지 않고 곧장 ‘물회’를 주문했다. 드라마 ‘눈부신 항해’ 촬영을 위해 처음 호텔로 내려갔던 날, 오랜만에 다시 만난 두 사람이 선택한 메뉴도 ‘물회’였다.
도준은 종종 그때를 회상하며 ‘제대로 먹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말을 하고는 했었고, 그를 떠올린 희찬이 고른 메뉴가 오늘 저녁 식사였다.
도준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혼자 먹기에는 한 그릇의 양이 많을지도 모른다는 친절한 사장님의 설명이 붙었지만, 도준과 희찬은 개의치 않았다.
“아, 대박. 진짜 맛있겠다.”
두 사람 앞에 먹음직스러운 물회가 나왔다. 고급스러운 금색 놋그릇에 담긴 물회는 보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돌았다.
이내 두 사람은 대화도 없이 먹는 것에 집중했다. 희찬은 맛있게 먹는 도준의 모습을 하염없이 관찰했다. 그래, 저렇게 잘 먹는 이도준인데 밥을 안 먹고 지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잘 먹네. 뿌듯하게.”
“맛있어. 너는?”
“나도 맛있어. 피곤했나, 입맛 돌아.”
“보통 피곤하면 입맛이 없어지지 않나.”
“토 달지 마.”
희찬의 새침함에 도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다 무언가 고민하듯 눈을 이리저리 굴려 댔다. 어느새 한 그릇을 뚝딱 비워 낸 도준은 어딘가 아쉬워 보였다. 그건 희찬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혼자 한 그릇은 많다’던 사장님이었는데, 이상하게 두 사람에게는 양이 차지 않았다. 오히려 딱 한 그릇만 더 먹으면 과하지 않게 배부른 상태일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뒤엉켰다. 같은 의미를 지닌 서로의 눈빛에 도준이 저항 없이 웃으며 등받이에 편안하게 몸을 기댔다. 희찬도 덩달아 몸을 물리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조금 더 시킬까?”
“아……. 나 진짜 요만큼만 먹으려고 했는데.”
“안 될 줄 알았어.”
“요즘 내 자제력에 실망해. 아.”
도준이 제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진심 어린 고민이 묻어나는 도준의 목소리에 희찬이 인상을 굳히고 눈썹을 으쓱거렸다.
“너 지금 나 놀리냐?”
업계에서 이도준의 자기 관리법은 독종 중의 독종으로 분류되었다. 구설에 오르는 것이 싫어 아예 술을 마시지 않는 데다가, 바쁜 와중에도 운동은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그러다 근육량이나 체지방량이 바뀌기라도 하는 날에는 곧바로 모든 맛있는 음식을 끊고, 식단조절을 시작했다.
어찌나 독한지, 무슨 말로 꼬드겨도 절대 넘어오는 일이 없는 이도준이었다. 몇몇은 도준의 반응을 두고 내기까지 한다나 뭐라나. 아무튼 동료들 사이에서는 자기관리의 신의 경지에 올라 모두가 우러러보는 이도준인데, 자신의 자제력에 실망한다니.
이건 기만이나 다름없는 말이었으므로, 희찬이 도준을 노려봤다.
“아, 그래서 먹는다고 만다고.”
“먹는다.”
“그래, 먹어. 언제 또 시간 내서 나랑 이런 데 오겠어?”
도준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결심을 내린 두 사람은 거침없이 추가로 메뉴를 주문했다. 각자 물회를 하나씩 더 시키고, 떡갈비까지 하나 주문한 후에야 도준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푸짐한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숙소로 향했다. 어느새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거리에는 찌르르, 이름 모를 벌레가 우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 머리를 핥아 올리고, 코끝에 닿는 상쾌한 산내음이 마음 가득 여유로움을 안겼다.
희찬이 몸을 홱 돌려 도준을 바라봤다. 도준의 걸음에 속도를 맞춰 뒤로 걷는 희찬은 도준의 손을 꼭 쥔 채였다.
“내가 일정을 좀 짜 봤어.”
“올, 나름대로 계획을 좀 세웠어?”
“놀리는 거야?”
“아니, 놀라워하는 건, 악!”
자신이 세운 계획을 공유하려던 희찬이 도준의 볼을 아프게 꼬집었다. 아무리 평소 계획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지만, 기껏 알아보고 정리를 해 뒀더니 돌아오는 반응이 영 시원찮은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놔, 놔!”
“반응 제대로 해.”
희찬의 손이 떠난 자리가 얼얼하다. 화끈거리는 볼을 감싸 쥔 도준은 인상을 한껏 찌푸렸다. 어째 꼬집는 손가락 힘이 날이 갈수록 세지는 것 같았다. 도준이 아릿한 볼을 매만지며 희찬을 바라봤다.
“내일 계획은 어떻게 되는데, 그럼.”
“내일은 여기 주변에 되게 유명한 거리가 있대. 거기 가서 점심을 먹을 거야.”
“저녁에는?”
“그건 내일 점심에 생각할 거야.”
“……그래.”
이러니까 놀리지.
어딘가 반만 완성된 계획이 가히 희찬다웠다. 도준은 더 토를 달았다가는 양 볼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라고 직감하고, 생각을 속으로 삼키며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어서 희찬이 자신이 나름대로 세워 본 계획을 줄줄 읊었다. 일주일간 하루에 하나씩은 정해져 있는 관광지 또는 먹을 것에 결국 도준은 환하게 웃으며 희찬의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에 팔을 둘러 귀를 만지작거렸다.
이 정도면 장희찬으로서는 아주 훌륭한 계획이었다.
“계획 잘 짰지?”
“응, 잘 짰다. 그럼 내일 몇 시쯤 움직일까? 가서 점심을 먹으려면 11시쯤에 출발하면 되려나?”
“응, 그러면 될 듯? 내일 운전은 내가 할게.”
“그럼 내가 주변에 다른 거 좀 알아봐야겠다.”
희찬이 도준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도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는 희찬은 몰려오는 피곤에 눈을 끔뻑거리는 중이었다.
하긴,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빨빨거리고 돌아다닌 희찬이었다. 이동하는 동안에는 혹시 운전하는 도준이 피곤하지는 않을까 자지도 않고 조수석에서 내내 조잘거렸으니 졸리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강행군이었다.
“졸려?”
“응, 우리 밤에 노는 건 내일부터 하자.”
“응, 오늘은 얼른 가서 자자.”
서로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린 두 사람이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다음 날, 일정에 맞춰 예쁘게 옷을 차려입고 나온 두 사람은 희찬이 정해 둔 음식점으로 가기 위해 발을 재촉했다. 자연스럽게 운전석에 오른 희찬은 오랜만에 잡은 운전대가 어색한지 핸들을 쥔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조수석에 오른 도준이 불안한 눈으로 희찬을 바라봤다.
“너 운전 마지막으로 한 게 언제야?”
“몰라, 기억 안 나는데?”
“그냥 내가 운전할까?”
“야, 너 나 못 믿어?”
못 미덥지만.
쏘아붙이는 희찬의 말에 도준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조용히 하라는 듯 희찬이 예쁜 검지로 제 입술을 막았다. 도준은 자신감을 보이는 희찬에게 차를 맡기고서, 선바이저 거울을 들여다보며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영화 캐릭터 스타일에 맞춰 평소보다 훨씬 짧아진 머리에 도준의 화려한 이목구비가 가감 없이 드러났다. 조금도 가려지지 않은 눈매는 날카로웠고, 누구나 감탄을 자아내는 우뚝 솟은 콧대는 성형을 의심하게 했으며, 그 아래 예쁘게 다물린 입술은 탐스러웠다. 그렇게 자기주장이 강한 이목구비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그려 낸 도준은 이 시대에 따라올 자 없는 대단한 미모를 뽐내는 중이었다.
그를 가만히 지켜보던 희찬이 괜히 제 앞머리를 넘겨 자신의 얼굴을 훤히 드러냈다. 도준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생김새였지만, 크고 화려한 눈매에 반짝거리는 눈동자, 유려한 선을 그리는 오뚝한 콧방울, 그 아래 예쁘게 휘어져 올라간 새빨간 입꼬리가 어느 예쁜 것을 가져다 대도 손색없을 화려한 모습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웃음을 터뜨렸다. 너도, 나도 참 유난이다 싶었다.
― 너네 잘난 거 알겠으니까, 이제 출발 좀 할래?
결국 차 안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감독의 핀잔이 들렸다. 두 사람이 자신의 미모를 자랑하는 모습을 카메라로 지켜보던 감독의 애정 어린 목소리에 두 사람이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너 알아본 식당 메인 메뉴는 뭐래?”
“누룽지 삼계탕! 완전 맛있대. 평일 낮에도 줄 서서 먹는대.”
“진짜? 감독님, 여기 촬영 섭외하셨어요?”
― 촬영 허가는 받았는데 웨이팅 있을 수 있어. 차에서 기다리다가 들어가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고.
“네, 저희 출발할게요.”
이윽고 희찬이 운전하는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도준의 우려와 달리 노련하게 차를 모는 희찬은 아주 숙련된 운전 실력을 뽐냈다. 머리맡에 있는 손잡이를 부여잡고, 장난스럽게 오버를 떨었던 도준도 편하게 몸을 물리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잘하는데?”
“잘한다고 했지. 내가 또 거짓말은 안 해.”
차창의 낯선 풍경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부드럽게 거리를 거니는 바람에 몸을 맡긴 꽃잎들이 살랑살랑 춤을 추고, 나뭇잎이 부딪치며 시원하게 쏟아지는 풀 내음이 상쾌하기 그지없다. 창틀에 팔을 괴고, 하염없이 바깥을 살피던 도준은 문득 코에 닿는 신선함에 가슴이 부풀어 오를 정도로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푹, 내쉬었다.
“날씨 진짜 좋다.”
“그치. 우리 여기 오기 전에는 날씨 계속 어두컴두했는데.”
“그러게. 이런 날 촬영장에 있으면 우울할 뻔했어.”
“네가 우울하기도 해? 촬영하는데?”
“야외 촬영하면 좋은데 세트장에만 있으면 가끔 좀 막 이렇게 처지지 않아? 나만 그런가.”
도준이 마치 그 시간을 떠올린 것처럼 몸을 축 늘어뜨렸다. 팔까지 의자 아래로 떨어뜨리며, 울상을 짓는 모습이 고된 스케줄에 지친 여느 배우의 모습과 같아 희찬이 폭소를 터뜨렸다. 누가 배우 아니랄까 봐 표현력이 탁월하다.
하긴, 이렇게 좋은 날 일만 해야 하는 것에 우울함을 느끼는 것은 비단 배우만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화창한 날 사무실에 있어야 하는 회사원이나, 학교에 있어야 하는 학생들이나. 아무튼 거리를 누비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공감할 것이었으므로 두 사람이 동시에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 얼마 전에 진짜 웃긴 거 봤다?”
“어떤 거?”
“너에 관한 거였는데.”
방긋 웃는 희찬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는 듯 도준의 볼을 조물조물 주물렀다.
“너 외고 나왔대. 대학도 무슨 미국 어디 수석 졸업했대.”
물을 마시던 도준이 가당치도 않은 희찬의 말에 큽, 거친 기침을 터뜨렸다. 겨우 물을 삼키고 켈록켈록 힘겨운 기침을 거듭하는 도준의 너른 등을 희찬이 성의 없이 퍽퍽 두드렸다.
저를 둘러싼 터무니없는 루머가 존재한다는 것쯤이야 익히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했다. 게다가 데뷔를 스물두 살에 했는데,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할 겨를은 또 어디 있었겠는가. 고급스럽고 세련된 이미지 덕에 붙은 허울 좋은 말이었겠지만, 역시나 어색한 것이라 도준이 저도 모르게 진절머리를 쳤다.
“그런 게 있다고?”
“진짜 웃기지도 않아. 이도준이 공부를? 우와.”
“야, 억울해. 왜 나만 웃겨? 너도 만만치 않았잖아.”
“나 가만히 있잖아, 끌어들이지 마.”
먼저 말을 꺼낸 희찬이 도망치듯 말을 빼고 정면을 응시했다. 말을 섞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묻어나는 행동이었으나, 도준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도준은 잘생긴 눈을 게슴츠레 뜨고 희찬을 흘겨봤다.
내가 고등학교를 누구 때문에 안 갔는데.
“고등학교 안 갈 거라고 네가 먼저 말했었잖아.”
“아, 조용히 하라고.”
“내 이미지는 망쳐 놓고, 네 이미지는 챙기시겠다? 아주 장희찬답고 브라보다.”
짝, 짝, 짝.
도준이 끊어지는 박수를 치며 입술을 이죽거렸다. 곁눈질로 그 모습을 지켜본 희찬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운전석에 달린 카메라를 응시했다.
“아, 알겠어. 이 자리를 빌려 과거를 밝혀 보자면, 저희 둘 다 고등학교 안 나왔고, 검정고시 출신이에요. 됐냐?”
결국 희찬이 카메라에 대고 공평하게 과거를 밝혔다. 도준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희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정수리에 얹은 손을 뒤통수로 내리며 손가락을 벌리자 그 틈으로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파고들어 손가락을 간지럽혔다.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아, 도준은 몇 번이고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두 사람의 과거는 밝혀진 것보다 밝혀지지 않은 것이 더 많았다. 아니, 밝혀진 것이 전무하다고 하는 것이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밝혀서 이득 될 것 없는 사실을 구태여 밝힐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며 활동한 탓이었는데, 이렇게 뜬금없이 밝히게 될 줄은 몰랐다.
느긋하게 도준의 손길을 느끼던 희찬이 문득 언젠가 봤던 영화 ‘Killer’ 속 도준을 떠올렸다. 영어를 잘하는 킬러 역할의 도준은 원어민 못지않은 발음을 구사하며 어려운 영어 대사를 거침없이 뱉었었다.
그거 진짜 섹시했는데.
그때는 도준이 제게 오기도 전이라, 그 발음을 칭찬하지도 못했다.
“근데 너 영어 발음 되게 좋더라. 저번에 보니까 뭔 고등학교 자습서 풀고 있던데, 그거로 공부한 거야? 나도 해 볼까.”
희찬의 질문에 도준이 검은 눈동자를 굴렸다. 처음 데뷔를 준비할 때, 대표가 저를 앉혀 두고 영어, 중국어, 일본어를 배우게 했던 것이 떠올랐다. 데뷔와 동시에 해외로 뻗어 나갈 것이 분명하다며,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해야 하지 않겠냐고 나무라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도준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살면서 그때처럼 열심히 공부한 적도 없고, 힘들게 공부한 적도 없다.
덕분에 영어고, 일본어고, 중국어고 아무튼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는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역시 대표에게 고마운 부분이었으므로 도준이 싱그럽게 웃었다. 도준은 희찬이 볼 수 있도록 제 손바닥으로 대본의 모양을 만들어 희찬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대본에 이렇게 있잖아, 영어가.”
운전하던 희찬이 힐끔 눈을 돌려 도준의 손바닥을 보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이 말을 하는 내가 맡은 캐릭터는 영어를 잘한다는 거잖아. 걔는 내가 아니니까, 그 캐릭터 수준에 내가 맞춰야 하잖아.”
“그치. 근데 그 밑에 한글로.”
희찬이 말을 하다 말고 가슴이 들썩거릴 정도로 웃었다. 그에 도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글로, 발음 적혀 있잖아.”
아, 희찬이 웃는 이유를 깨달은 도준이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영어 문장 아래에 한글로 발음이 적혀 있는 것은 정직하고 또 우스꽝스러운 모양이었다. 예를 들어, ‘How are you?’라는 대사가 있다면, 그 아래에는 꼭 ‘(하우 아 유?)’라는 말이 붙어 있었으니 말이다.
문장이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그 아래 한글은 얼마나 재밌는 발음을 그려 내는지, 웃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었다.
“아, 아무튼.”
한참이나 웃던 도준이 숨을 고르고 희찬을 바라봤다.
“그 영어 대사 발음 교정받아.”
이내 희찬이 몸을 흔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뭔가 이도준은 이도준만의 방법이 있을까, 했더니. 다른 배우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그가 새삼스러웠다.
“근데 그거 그러다 보면 영어 공부 돼. 그치 않아?”
도준이 희찬의 허벅지를 조몰락거리며 말을 붙였다. 부드럽게 차를 돌리던 희찬이 피식, 얕은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 그거 영어 대사 옆에 무슨 뜻인지도 적혀 있잖아.”
“어, 그래서 영어 대사 외우면 그거 대충 무슨 상황에 써먹어야 하는지는 알겠더라.”
두 사람의 대화가 마무리되는 것과 엇비슷한 타이밍에 식당에 도착했다. 희찬의 말대로 인기가 좋은 식당은 벌써부터 길게 늘어선 줄이 보였다. 주차장 가장 안쪽에 주차를 마친 희찬이 두 손을 깍지 낀 채로 팔을 뻗어 뚜두둑, 뼈 소리를 냈다. 관절이 요란하게 터지는 소리에 도준이 퍼뜩 인상을 찌푸렸다.
“장희찬 봐 줄 거 손가락밖에 없는데 곱게 관리하지.”
“뭐? 이놈이.”
희찬이 눈썹을 현란하게 씰룩거렸다. 그를 본 도준은 희찬이 골을 부리며 쫓아오기 전에 얼른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켰다. 쏟아지는 햇살이 눈가를 거니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눈이 부셔 인상을 좁혔다가 바닥을 보며 목을 돌리자 도준의 목에서도 뚜둑, 뼈 소리가 났다.
감독의 안내를 기다리면서도 두 사람은 끊임없이 조잘조잘 대화를 나눴다. 무슨 할 말들이 그렇게 많은지, 비지 않고 빼곡하게 메워지는 오디오에 스태프들은 연신 혀를 내둘렀다.
말수가 적은 이도준이 장희찬 옆에 붙어 있으면 그렇게 수다쟁이가 되는 게 신기했다. 더불어 그렇지 않아도 해맑은 성격에 조잘거리는 것을 좋아하는 희찬이 도준과 붙어 있으면 더욱 즐겁게 지저귀었다. 그게 참 대단했다.
“얘들아, 들어가자!”
얼마나 기다렸을까, 드디어 안으로 들어가도 된다는 허락이 들렸다. 두 사람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식당 내부로 향했다.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이 도준과 희찬을 알아보고, 사진을 찍거나 환호를 하는 것도 이제는 익숙한 일이었다.
“……이걸 또 다 먹었어.”
어느새 식사를 마친 두 사람 앞에는 푸짐했던 상이 먹성 좋은 두 사람에 의해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그리고 이도준은 또, 자책하는 목소리를 냈다. 그에 희찬이 인상을 한껏 찌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되게 맛있게 먹을 때는 언제고 먹은 후에 후회하는 모습이 이제는 지겹지도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평소 같으면 담배를 물었을 도준이 담배 대신 얼른 막대사탕을 꺼내 입에 물었다. 최근 금연에 돌입한 도준은 희찬의 철저한 관리 하에 흡연 욕구를 잠재우며 단 것을 찾는 중이었다.
그 모습이 만족스러운지, 희찬이 해실해실 웃으며 불룩 솟은 도준의 볼을 쓰다듬었다. 도준은 마뜩잖은 표정이었지만, 그건 희찬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어느새 많은 사람이 두 사람 주변을 에워쌌다. 얼른 벗어나지 않으면 꼼짝없이 잡혀 있을 거라 생각한 두 사람은 점점 모여드는 사람들을 향해 양해를 구하고, 재빠르게 차에 올랐다. 차에 오른 후에도 한참이나 찰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울에서도 흔하게 볼 수 없는 연예인이 이 시골까지 와 있는 게 신기하고 또 반가운 마음인 듯했다.
집요한 관심을 표면으로 접하는 두 사람은 그 관심을 성가시다 생각할 법도 했지만, 그들의 태도에 귀찮음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이따 들어갈 때 맥주 사 갈까?”
다음 목적지를 고르며 휴대폰을 살피던 희찬이 뜻밖의 도준의 말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 진짜 적응 안 된다.”
“왜, 또.”
“이도준이 술이라니.”
이도준과 술.
성인이 되고서도 술을 가까이하지 않았던 이도준은 이후 다시 만났을 때는 약을 먹어야 해서 술을 멀리했다. 약을 끊은 후에도 술을 멀리하는 것은 같았기에 당연히 술을 마시는 이도준 역시 보기 드문 것이었다. 희찬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너랑 있는 거잖아.”
“그럼 딱 한 캔씩만 할까?”
“응, 진짜 딱 한 캔만.”
희찬의 허락을 얻어 낸 도준은 금세 싱글벙글 즐거운 미소를 피웠다. 가끔 희찬과 부딪치는 맥주 한 캔이 평소와는 다른 기분을 안길 때가 있다. 그리고 그 기분을 오늘도 만끽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아직 중천에 떠 있는 얼른 해가 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나 들었다.
시골 동네에서도 관광지로 손꼽히는 거리를 누비던 두 사람이 지친 모습으로 숙소에 돌아왔다. 평일이라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리 온 거리를 빼곡하게 메운 사람들 덕분에 가는 곳마다 인파에 치여 제대로 된 구경은 하지도 못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도준은 타고나길 탐스러운 맨몸이 카메라에 오래 잡히기 전에 얼른 옷을 갖춰 입었다. 작품을 하며 몸을 보이는 것은 익숙한 것이었으나, 이렇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역시나 어색했다.
조용히 자신을 지켜보는 수많은 카메라는 의식하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하는 도준은 두 다리를 곧게 뻗어 앉은 채로, 허리를 숙여 발목을 그러쥐었다. 그다음에는 어깨를 좌우로 돌리며 찌뿌드드한 몸을 스트레칭했다.
하루 종일 차에 앉아 있었더니 삭신이 쑤셨다. 역시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직성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던 무렵.
“이도준! 아직도 씻어?”
희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숙소를 울렸다.
“나 여기 있는데?”
도준이 빼꼼 고개를 내밀어 거실을 바라봤다. 넓고 예쁜 거실에 희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의아한 눈을 뜨고 거실 곳곳을 샅샅이 둘러봤다. 하지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어디서 소리가 들리는 건지.
그러다 도준의 눈이 저 위에서 팔랑거리는 작고 하얀 것에 머물렀다. 다섯 갈래로 흩어진 하얀 것이 샤라라, 부드럽게 움직이는가 싶더니 천장을 향해 까딱거렸다.
“올라와! 여기서 마시자!”
도준이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희찬의 손을 쫓아 움직였다. 허리를 숙이고 들어선 다락방은 희찬이 켜 둔 무드 등이 비좁은 공간을 밝히는 중이었다. 주황색 불빛이 은은하게 내려앉은 공간은 낮에 봤던 것보다 훨씬 아늑하고 다정했다.
그나마 천장이 가장 높은 곳에 담요를 방석 모양으로 깔아 둔 희찬이 제 옆의 담요를 탁탁 내리쳤다. 희찬의 앞에는 숙소로 돌아오면서 사 온 맥주가 놓여 있었고, 그 앞에는 하얀 접시에 먹기 좋게 잘라 둔 오징어도 함께였다. 도준이 환하게 웃으며 희찬의 옆자리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정면에는 새까만 하늘에 은은한 달빛이 서려 시린 온화함을 자아내는 중이었다.
“별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늘은 별 없나 봐.”
“오늘 밤에 날이 좀 흐리대.”
“우리 서울 가기 전에 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희찬이 아주 자연스럽게 도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미처 다 마르지 않아 차가운 물기를 머금은 머리카락이 목덜미에 닿았지만, 도준은 희찬을 밀어내지 않았다.
“짠?”
“짠.”
두 사람이 쥔 캔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캥, 경쾌한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두 사람이 동시에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켜고 만족을 피웠다. 오늘따라 혀끝에 남는 맥주의 잔향이 유달리 달았다. 목을 콕콕 찌르는 탄산의 느낌도 나쁘지 않았다.
은은한 불빛과 기분 좋은 분위기, 아늑한 공간.
삼박자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니 자연스레 스킨십이 늘었다. 연신 도준의 볼을 주무르는 희찬의 손을 의식할 틈도 없이 한참이나 희찬의 허리부터 엉덩이까지 쓰다듬던 도준이 불현듯 자신의 행동을 자각하고 얼른 손을 뗐다.
갈 곳을 잃은 도준의 손이 허공에서 어색하게 머물렀다.
“뭐 해.”
“어, 지금 촬영 중이잖아. 그치.”
“와, 이제 와서?”
“……자꾸 이러면 뽀뽀하고 싶을 거 같아. 내려가자.”
그러니까, 이도준은 반만 자각했다.
이렇게 만지작거리는 건 안 되고, ‘뽀뽀하고 싶다’고 말하는 건 되는 건가.
희찬이 피식 웃으며 일어나려는 도준의 손을 잡아 다시 앉혔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가자. 내려가면 바로 잘 거 같아.”
“너 지금도 잘 거 같은데.”
도준이 희찬의 볼을 콕, 찔렀다. 말랑한 볼이 도준의 손가락 힘에 쑥 밀려 들어갔다가 탄력 좋게 돌아오며 제자리를 찾았다.
“그래도, 바로 자는 건 아쉽잖아.”
도준은 홱, 고개를 돌려 곧장 제 손가락을 물려는 희찬에게서 얼른 손을 뺐다. 피식 웃었던 희찬은 편안한 베개라도 베는 것처럼 머리를 도준의 딱딱한 어깨에 기대고서 새까만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렇게 나란히 앉아 하늘을 볼 때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가진 것이 없어 수박화채 하나 마음대로 먹을 수 없었던 때. 꿈을 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행복해하며, 그저 하염없이 별이 뜬 밤하늘을 나란히 올려다보고는 했었다.
딱딱한 마루에 앉아 다리를 달랑거리다 보면 옆에서는 곧 도준의 노랫소리가 들리고는 했었다. 그의 노래는 항상 꿈을 그리는 내용이었다. 멀리 날아가자 라든가,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돕겠다는 투의 노랫말들은 매번 희찬의 가슴을 울렸었다.
분명 어두운 하늘이었으나 도준과 함께라면 그 하늘이 환하게 개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그건 ‘우리’가 함께여서 볼 수 있는 환상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그랬다. 불현듯 하늘이 환하게 개는 듯한 환상에 희찬이 입꼬리를 싱그럽게 올려 웃었다.
“우리 어릴 때 이렇게 하늘 보는 거 자주 했잖아.”
“응.”
“그때 생각났어. 여름에 너랑 같이 하늘 보는 거 되게 좋았는데.”
아련함이 물씬 묻어나는 희찬의 목소리에 도준도 고개를 까딱거렸다. 희찬이 느끼는 뭉근한 향수가 금세 전이되어 도준의 가슴을 둥둥 울렸다. 희찬이 도준의 손가락 끝을 깔짝깔짝 만져댔다. 귀엽게 전해지는 그의 사랑이 좋아, 도준은 손을 내어 준 채로 목청을 가다듬었다.
이윽고 작은 다락방을 도준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음률을 따라 어렵지 않게 오르내리는 그가 그려 내는 노랫말은 역시나 꿈이었다. 가진 것 없는 두 청년이 유일하게 마음대로 가질 수 있는 것이 그 ‘꿈’이었으니, 두 사람에게는 여전한 희망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내 희찬이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느릿하게 끔뻑거렸다. 아까부터 잠이 쏟아져 시리던 눈자위에 눈꺼풀이 닿자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다시 눈을 뜨는 것도 어려웠다. 희찬은 뜨이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고 도준을 바라봤다. 피곤함이 잔뜩 서린 탓에 쌍꺼풀이 조금 더 진하게 새겨져 있었다.
“안 되겠어.”
“응, 그래 보인다.”
“너무 졸려, 안 돼. 더는 못 버텨. 자야만 해. 자야 돼.”
희찬은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싸우는 것처럼 허공에 대고 연신 자신의 상태를 알렸다. 엉뚱한 희찬의 모습이 귀여워, 도준이 그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도준의 손에 머리카락이 흩어지는 중에도 희찬은 도무지 눈을 뜨지 못했다. 결국 먼저 일어난 희찬이 아슬아슬하게 다락방을 벗어났다. 금방이라도 고꾸라져 다칠 것처럼 위태로운 그 모습을 도준이 걱정 어린 시선으로 끝까지 좇았다.
희찬이 사라진 뒤에는 도준이 남아 다락방을 정리했다. 빈 캔을 비닐봉지에 담고, 남은 음식물은 혹시 몰라 가지고 올라온 작은 봉투에 따로 모아 담았다.
희찬이 먼저 올라와 방석 모양으로 만들어 둔 담요는 다시 예쁘게 개어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무드 등까지 끄자 오롯한 어둠이 서린 공간에 달빛이 스며들었다.
하늘을 향해 난 작은 창을 통해 올곧게 쏟아지는 달빛이 청명했다. 새하얗고 푸른 달빛 탓일까. 공기 속을 사뿐하게 거니는 먼지의 형태마저 그저 그림만 같았다.
아래로 내려오는 동안 혹시 머리라도 박을까 허리를 한껏 접은 채로 조심스러운 걸음을 내디뎠던 도준은 곧장 침실로 향해 먼저 누운 희찬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불이 접히고 펴지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예민하게 귀를 자극하다 익숙한 체온이 도준을 반겼다.
“잘 자, 자기.”
“응, 잘 자.”
“악몽 꿔도 되니까, 편하게 자…….”
두 사람의 몸이 한 침대 위에서 포개어졌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단단한 팔과 다리로 상대를 그러안은 두 사람은 금세 편안한 호흡을 나누었다. 항상 그랬듯 도준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희찬은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를 내었고,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감은 도준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잔잔한 숨을 쉬었다.
커다란 테라스 창을 통해 살그머니 침범한 달빛이 두 사람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
무겁게 가슴을 짓누르는 감각은 낯설지 않다. 도준은 숨통이 틀어 막히는 답답함에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눈을 떴다. 내리쬐는 빛에 뿌옇게 가신 시야가 새까맣게 가렸다. 가슴을 짓누르는 무거움은 도무지 적응하기가 어려웠고, 꽉 막힌 숨통은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조차 어렵게 했다.
“아…….”
그렇다고 그게 예전부터 앓던 그런 악몽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물리적인 압박이 가해졌을 뿐, 정신이 아득해지는 와중에 시끄럽게 웅웅거리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눈을 뜬 도준은 제 시야를 가득 가린 검은 머리를 헤집었다. 분명 옆에서 나란히 잔 것 같은데, 어느새 희찬은 또 도준의 위에 올라와 자는 중이었다.
“또 언제 올라왔대…….”
신기할 노릇이다.
푹신한 침대에서 자는 것보다 딱딱한 몸 위에서 자는 게 좋은가. 그저 안고 자면 될 것을 꼭 제 위로 올라오는 희찬이 귀엽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했다.
그래도 오늘은 올라온 모습이 양반이었다. 어쩌다 한 번은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은 방 안의 풍경이 아닌 드로어즈를 걸친 희찬의 엉덩이였을 때도 있었다. 십자가 모양으로 가로질러 눕는 것은 물론, 아예 반대로 포개어 잘 때도 있었다.
도준은 저를 짓누르는 희찬의 엉덩이를 찰싹, 찰싹 때렸다. 도준의 격한 손길에 희찬의 미간이 점점 찌푸려졌다.
“찬아, 찬아. 나 죽겠어.”
“우으응…….”
“내려와서 자자, 어?”
내려놓으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잠투정을 부리는 희찬이 도준의 목을 꼭 끌어안은 채로 다시 잠들어 버렸다. 그의 입술이 닿은 목덜미에 뜨거운 숨이 닿았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머리털이 쭈뼛 서는 아찔함에 도준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말아 물고 호흡을 다스렸다.
도준의 검은 눈동자가 지잉, 움직이는 카메라로 향했다. 저 검고 작은 것만 아녔어도 제 품에 안긴 희찬과 벌써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을 텐데 그게 못내 아쉽다.
그런 도준의 사정과 달리 희찬은 여전히 곤히 잠든 채였다. 하염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등을 토닥토닥 어르던 도준이 희찬을 침대에 내려놓고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벗어났다.
도준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어느새 천장을 바라보고 누운 희찬이 다리를 달랑거리며 도준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나름대로 엄청난 속도로 샤워를 하고 왔는데, 희찬은 그보다 더 먼저 샤워를 마친 모습이었다.
“안녕.”
희찬이 상냥하게 인사를 건네었다. 새하얀 손바닥이 살랑살랑 움직이는 것이 예뻐 도준이 빙긋, 웃었다.
“안녕.”
덩달아 인사를 건네는 도준의 곁에 희찬이 섰다. 건장한 체격을 자랑하는 두 사람이 나란히 서자 넓게만 보였던 방도 비좁아 보이는 착각이 일었다.
희찬은 항상 그랬듯 수분크림을 바르려는 도준의 손에서 크림을 앗아 들고 자신이 발라 주겠다는 뉘앙스를 보였다. 도준은 흔쾌히 몸을 내어 주고서 희찬을 마주 봤다.
“내가 너 또 눌렀어?”
“잘 누르더라. 레슬링 선수를 하지 그랬어?”
“컨디션 좋나 보네? 입이 살았어.”
도준의 장난에 희찬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응수했다. 도준의 얼굴에 수분크림을 발라 주던 희찬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 도준의 가슴을 매만졌다. 탄탄한 가슴이 닿는 감이 좋아, 집요하게 선을 따라 손을 놀리자 도준의 인상이 점점 찌푸려졌다.
손끝으로 유두를 건드렸다가, 다시 근육의 굴곡을 따라 아래로 향하는 희찬의 손장난은 멈추지 않았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연신 키득거리는 희찬은 아예 무릎을 꿇은 채로 도준을 올려다보며 도준의 몸 구석구석을 만지작거렸다.
희찬을 내려보는 도준의 이마에 굵은 핏줄이 솟았다. 분명 그럴 상황이 아닌데, 자꾸만 제 페니스를 물고 오럴을 하는 희찬의 모습이 그려져 도준이 결국 이마를 짚고 희찬을 밀어냈다.
“아, 아니. 야, 잠깐만.”
“너 무슨 생각 하냐.”
“아무 생각도 안 했어.”
아무 생각도 안 하기는, 이도준 머릿속이 너무 투명하게 보이는 탓에 두개골이 아니라 유리구슬을 보는 줄 알았다. 희찬이 도준의 페니스를 툭, 건드렸다.
“이건 아니라는데.”
어느새 빳빳하게 고개를 쳐든 페니스가 도준의 생각을 대놓고 보여 주는 것 같았다. 그에 도준이 얼른 제 사타구니를 가렸다.
“아, 좀…….”
이제는 희찬의 숨까지 예민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판단한 도준은 다시 욕실로 향해 성큼성큼 걷는 걸음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묻어나지 않았다. 희찬은 즐겁게 웃으며 도준의 탄탄한 등 근육이 현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그저 지켜만 봤다.
한차례 소동을 벌인 두 사람이 향한 곳은 뜨거운 날씨와 어울리지 않는 레일바이크였다.
레일바이크.
제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도준의 표정에 희찬이 해맑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원래 정해진 목적지는 이곳이 아니었다. 근처의 시원한 바닷바람이 부는 해변가에서 차가운 팥빙수를 먹기로 했었는데 말이다.
감독의 당부를 듣느라 희찬이 내비게이션에 다른 주소를 입력한 줄도 몰랐다. 자꾸만 산속으로 길을 안내하기에 바다가 보이는 산속의 팥빙수집인가 보다, 안일하게 생각했더니 이건 뭐, 거의 사기를 당한 수준이었다.
도준이 인상을 누비고 희찬을 바라봤다. 그렇지 않아도 더위는 쥐약인데, 이 햇발에 레일바이크를 타자는 희찬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진심 아니지?”
“진심인데.”
“이걸 어떻게 타, 지금. 너무 더워.”
진심이 아니길 바랐는데, 장희찬은 진심이었다. 도준은 사뭇 단호함이 묻어나는 희찬의 말에 투정을 부리며 눈썹을 씰룩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희찬은 도준의 턱을 쥐고 이쪽, 저쪽으로 얼굴을 휙휙 돌리며 도준의 피부를 살폈다.
“너 선크림은 다 발랐지? 피부 타면 안 되잖아.”
“응, 발랐어. 그리고 어차피 허허벌판에서 전쟁하는 내용이라 타는 건 상관 없…… 아니, 이게 아니고.”
하마터면 그냥 말려들 뻔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희찬의 대화 패턴에 녹아들던 도준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눈을 부릅떴다.
아무튼, 장희찬 조금도 틈을 줄 수가 없다.
“에이, 아쉽다.”
“그거 말이 좀 수상하네.”
“이도준 자연스럽게 넘길 수 있었는데, 아쉬워.”
희찬은 굳이 도준이 말릴 뻔했다는 것을 한 번 더 짚었다. 그저 재밌는 장난을 치는 양, 즐겁게 웃는 희찬의 모습에 도준은 결국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희찬의 말에 동조했다.
“원래 이런 거 타고 싶었어?”
직원에게 일정 값을 지불하고, 차례를 기다리는 중에도 도준은 계속 시큰둥한 목소리를 냈다.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아 보이는 도준의 모습에 희찬이 도준에게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아까 너 씻는 동안 찾아봤는데 재밌어 보이더라. 사람들 엄청 웃으면서 타, 이거 봐.”
희찬이 도준에게 보여 준 화면 속 인터넷 사이트에는 화사하게 웃으며 페달을 돌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를 본 도준이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다 쇼야. 너는 연기자가 그것도 모르냐.”
“자꾸 토 달래? 나에게 반기를 들겠다는 거야?”
“말투 뭐야, 너 드라마 현대극 아니었어?”
“요즘 재미 들린 말투야. 대충 그러려니 해.”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차피 무를 수도 없다. 볼멘소리를 내던 도준은 어쨌든 희찬과 ‘처음’ 하는 것이 또 생겼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희찬과 함께 나란히 앉은 레일바이크는 뜨거운 햇볕을 증명이라도 하듯 의자가 몹시 뜨거웠다. 얇은 면바지를 넘어 곧장 닿는 온도에 도준이 이를 악물었다.
“아냐, 하체 운동. 어, 하체 운동 하는 거다.”
“하다하다 별 마인드 컨트롤을 다 하네.”
“허벅지 조지기. 어, 그거 하는 거다.”
“도준아, 너 제정신이 아닌 거 같아.”
두 사람이 탄 레일바이크에 카메라가 설치되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그 모습은 이제 지독하게 익숙한 모습이라, 스태프들은 조금도 괘념치 않고 열심히 제 할 일을 충실하게 했다. 뒤이어 다른 레일바이크에 임 감독과 카메라 감독이 나누어 탔다.
재밌을 거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레일바이크는 제법 따분했다. 그저 열심히 페달을 굴려야만 했고, 그건 도준이 말한 대로 하체 운동을 하는 기분이었다. 펼쳐지는 풍경이 신선하고 상쾌하긴 했으나, 가림막을 넘어 들어오는 햇살이 기승을 부리는 덕에 두 사람의 미간이 점점 좁혀졌다.
게다가 바람은 또 얼마나 뜨거운지 모른다. 도무지 시원할 기미라고는 보이지 않는 바람은 마치 사방이 후끈거리는 뜨거운 찜질방 안에 누군가 옜다, 죽어 봐라, 하고 온풍기까지 튼 것 같았다. 덕분에 숨이 턱턱 막히는 듯했다.
“가위바위보 해서 한 명이 페달 굴리기 하자.”
이대로는 정말 기운만 잃겠다고 생각한 도준이 한 가지 게임을 제안했다. 슬슬 지겹다고 생각하던 희찬이 거 좋은 생각이라는 듯, 화색을 피우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위 바위 보!”
“가위 바위 보!”
“아!”
누군가 그랬다. 원래 가위바위보 같은 게임은 제안한 사람이 걸리기 마련이라고.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도준이 제 머리를 쥐어 잡은 반면, 희찬은 즐겁게 웃었다.
무릎에 얼굴을 처박은 도준은 진심 어린 탄식을 쏟아 냈다. 좀 쉽게 가려 했던 제안인데, 걸려도 하필이면 자신이 걸려 꼼짝없이 페달을 돌리게 생긴 상황이 마뜩잖았다.
“아, 아냐. 하체 운동.”
“그래, 촬영 기간 동안 운동도 못 하는데 운동한다고 생각해.”
“하…….”
찌는 더위에 몇 번이고 숨을 고루 쉰 도준이 허벅지에 힘을 줘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둘이서 밟을 때는 그나마 수월하게 나가던 것이 혼자 하려니 훨씬 무겁게만 느껴졌다.
도준이 묵묵하게 페달을 굴리는 동안 희찬은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힘들게 페달을 굴릴 때는 보이지 않았던 드넓은 녹음의 풍경이 이제야 눈에 닿았다. 푸르름이 짙어진 숲속에 지저귀는 새소리가 괜히 마음을 간질였다.
희찬이 의자를 꾹 쥔 채로 열심히 페달을 굴리는 도준의 손을 거머쥐었다. 손등에 닿는 뜨거운 온도에 답답함이 느껴져, 도준이 희찬의 손에서 슬그머니 제 손을 빼냈다. 하지만 희찬은 다시 도준의 손을 움켜쥐었다.
“더워, 손 좀 빼.”
“도준아, 우리 어릴 때는 이런 거 못 해 봤잖아.”
“……지금 옛날 생각 할 때 아니거든.”
“왜? 안 좋아? 저기 봐, 바람도 불어. 좋다.”
와, 팔자 좋다.
누구는 뭐 빠지게 페달을 굴리는 중인데 옆에서는 감동에 젖은 감상이나 늘어놓는 것이 못마땅했다. 도준은 굴리던 다리를 멈추고 희찬을 지그시 쳐다봤다. 레일 바이크가 멈춘 것도 모르고 한참이나 한 곳을 응시하던 희찬은 도준이 옆구리를 쿡 찌른 후에야 퍼뜩 도준을 돌아봤다.
“나 힘들어 죽겠어, 이제 네가 해.”
“이도준 하체 뭐야, 힘 뭐야.”
“네가 해 봐, 진짜 죽어.”
“이깟 거 뭐 힘들다고.”
하체라면 희찬도 도준 못지않게 자신 있다. 도준이 매일 운동하는 동안 희찬이라고 가만히 논 것도 아니다. 트레이너 손에 붙잡혀 하는 것들에는 하체 운동도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자신 있게 페달을 밟던 희찬의 얼굴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일그러졌다.
무거워도 너무 무거웠다. 이런 뻑뻑한 페달로 그 긴 코스를 완주하라는 업체가 점점 야속해졌다. 이건 적어도 ‘여유를 만끽하며 휴가를 즐기기 위해’ 온 사람들에게는 권할 것이 아닌 듯했다. 결국 희찬도 얼마 지나지 않아 페달을 멈추었다. 팔짱을 낀 채로 희찬을 지켜보던 도준이 피식, 얕은 웃음을 터뜨렸다.
“네 하체 문제없어. 미안해.”
희찬은 얼른 자신의 만행을 사과했다.
“그치? 힘들다니까.”
도준이 잔뜩 풀이 죽은 희찬의 머리를 정성스레 쓰다듬었다. 힘들어 보이는 두 사람에게 저벅저벅 다가온 스태프가 손잡이가 달린 작은 선풍기를 건네었다. 각 한 개씩 받아 든 후에는 바람을 제일 센 쪽으로 돌려 얼굴에 가져다 댔지만 날씨가 더운 탓일까, 그 바람의 효과도 미미했다.
“이거 우리 집에 있던 선풍기 같다.”
“아, 맞아.”
희찬의 가벼운 말 한마디에 두 사람이 동시에 달달거리며 시끄럽게 돌아가던 선풍기를 떠올렸다. 선풍기는 내는 소리와 달리 힘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오죽하면 그 더운 날 평상 위에서 바깥바람을 맞는 것이 더 시원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아득한 과거를 회상하던 두 사람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폭소를 터뜨렸다. 그때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지금의 생활이 별안간 더 큰 행복으로 닿아, 서로를 보는 눈빛에는 사랑이 가득 서렸다.
우여곡절 끝에 레일바이크 코스를 마친 두 사람은 손바닥을 맞부딪쳐 하이파이브를 했다. 힘들긴 했어도, 어쨌든 완주를 끝낸 서로를 향한 격려였다.
관광하는 것을 목표로 잡은 오늘이었기에, 두 사람은 분주하게 다음 관광지로 향했다. 산기슭 높은 곳에 위치한 전망대에 오를 때는 웬일로 희찬이 약한 모습을 보였다.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희찬이 혼자서는 한 걸음도 제대로 딛지 못하자 도준이 선뜻 손을 내미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도준은 그렇게 질색하는 더위에 손바닥에 땀이 나도 마주 잡은 희찬의 손을 놓지 않았다. 덕분에 용기를 얻고, 든든함을 느낀 희찬이 도준과 함께 발을 내디뎠다.
두 사람은 가는 곳마다 서로를 휴대폰에 담기 바빴다. 간혹 얼굴을 가까이 대고 같이 사진을 찍는 일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상대가 인지하지 못한 일상의 순간을 찍어 댔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하루 종일 관광지를 쏘다니며 행복을 적립했다. 연신 즐거워하는 모습은 전부 고스란히 카메라에 남아 기록되었다.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웃고 떠들다 보면 어느새 해거름이 성큼 다가왔다. 해넘이가 점점 가까워질 무렵, 거리에는 땅거미가 짙어지는 중이었다. 비로소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한 두 사람도 어스름이 완연해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와 서로의 허리를 눌러 주고, 팔을 잡아당기거나 다리를 잡아 주며 스트레칭을 했다.
샤워를 마친 후에는 식탁에 마주 앉아 각자 챙겨 온 대본을 들여다봤다. 도준은 대본 속의 어려운 상황을 희찬에게 보여 주며 연기에 대한 조언을 구하거나, 희찬과 함께 대사를 맞추며 대사를 외웠다.
그건 희찬도 다르지 않았다. 아직 촬영이 시작되지 않은 드라마였지만, 숱하게 해 왔던 배역과는 사뭇 다른 배역에 어려움을 느끼는 희찬에게 도준은 성심성의껏 조언을 건네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은 프로였고, 인기가 좋은 이유가 납득되는 성실한 배우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새 대본을 덮은 희찬이 식탁 위에 널브러져 발을 동동 굴렀다. 맞은편에 앉은 도준의 정강이에 발이 닿을 때마다 발끝으로 도준을 건드렸지만, 도준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대본 좀 그만 봐, 나 심심해.”
따분한 것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희찬의 목소리에 도준이 대본에서 눈을 떼고 그를 바라봤다. 검은 머리카락과 달리 반짝거리는 옅은 눈이 새삼 사랑스러웠다.
두 사람의 뜨거운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 들었다. 다정하고 친절한 시선이었으나 열망을 가득 머금은 두 시선은 서로를 향한 욕망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러다 문이 벌컥 열렸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 사람은 스태프뿐인지라,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현관으로 향했다.
“도준아, 희찬아.”
모습을 드러낸 것은 감독이었다. 감독은 따분해 보이는 두 사람에게 손에 쥔 큐 카드를 건네었다.
“이거 밤마다 하려고 챙겨 온 QnA 카드거든? 심심하면 이런 거 좀 해 봐.”
두 사람은 감독이 두고 간 큐 카드를 한참이나 살펴봤다. 오랜 데이터를 토대로 만들어졌을 질문에는 제법 참신한 것도 몇 개 섞여 있었지만, 대부분은 식상한 질문들이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흥미를 느꼈다. 도준이야, 인터뷰조차 드물어 본의 아니게 ‘신비주의’라는 수식어가 붙은 배우였으니 모든 질문이 팬들에게 재밌을 것이 분명했다. 또, 언론이며, 예능이며 노출이 잦음에도 웬만해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희찬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생소하기는 같았다.
“이거 엎어 놓고 뽑기 해서 답하기 할까?”
“좋아.”
도준이 자세를 고쳐 앉아 대본을 저 멀리 밀어 뒀다. 적극적으로 임하려는 도준의 태도에 맞은편에 앉았던 희찬도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아 도준이 큐카드를 뒤집는 것을 도왔다.
이내 두 사람이 조용해졌다. 작은 숨소리만 도사리는 공간에는 신중하게 똑같은 모양의 큐카드를 들여다보는 두 사람이 흥미롭게 상황을 즐기는 모습이 함께였다.
이런 순간에마저 지나치게 신중한 도준은 단 한 번의 기회라는 희찬의 말에 쉽사리 카드를 고르지 못하는 모양이라, 결국 희찬이 먼저 카드를 쥐었다.
“내가 먼저 질문할까?”
도준이 몸을 물리며 고개를 주억거리자 희찬이 카드를 돌려 질문을 확인했다.
“질문 예쁘다.”
“뭔데?”
“이도준에게 가장 눈부신 시간은?”
“오.”
도준이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들썩거렸다. 희찬 역시 만족하는 질문의 질에 질문을 곱씹었다.
“음, 예전 같았으면 고민도 안 하고 데뷔 전에 너랑 같이 살던 시간을 말했을 건데.”
“응, 지금은 바뀌었어?”
“지금은 지금인 거 같아.”
희찬이 눈을 크게 뜨고 도준을 바라봤다. 희찬 역시 도준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이라면, 제대 후 힘들어도 꿋꿋하게 서로를 의지하던 시간을 뽑을 것이라 생각했건만 도준에게서는 뜻밖의 답이 나왔다.
“그냥 현재 시간이 전부 눈부셔.”
“이야…….”
도준의 느긋한 말이 희찬의 가슴을 울렸다. 단단해졌다고는 생각했지만, 상당히 건강해졌다고 느끼는 요즘이었지만, 이도준은 또 한층 성장한 모습으로 여유를 보였다.
“나 이제 과거에 안 살려고. 현재에 살 거야. 과거는 과거고, 지금이 더 중요하니까.”
“간만에 만족스러운 대답이다.”
도준이 수줍은 듯 고개를 수그렸다. 쑥스러움을 느끼는 건지, 귀 끝이 붉게 달아오른 도준이 우물쭈물 입술을 말아 물고 희찬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러니까 너도 과거에 살지 마.”
“나는 과거에 산 적 없어, 미래에 살지.”
“오, 장희찬답고 좋아.”
두 사람 사이에 소소한 웃음이 앉았다. 서로의 단단한 내면을 드러내 보이는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변하지 않을 굳센 신뢰를 보였다.
등받이에 편안하게 몸을 기댔던 도준이 제 차례라는 것을 깨닫고 카드를 한 장 집었다. 질문을 확인하는 도준의 입가에도 희찬이 보였던 것과 엇비슷한 미소가 자리했다.
“장희찬에게 이도준이란?”
“뭐야, 진짜 그 질문 맞아?”
아쉽게도 질문이 식상했다. 곧바로 반문을 보내는 희찬에게 도준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카드를 보여 주었다.
‘Q. 서로에게 상대는 어떤 의미인지.’
질문을 확인한 희찬이 입술을 꾹 말아 물고서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장희찬에게 이도준이라. 또 다른 나, 나를 이루는 모든 것.
그것 외에는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아 한참이나 곰곰이 머리를 굴리며 답을 생각해 냈다.
도준은 턱을 괸 채로 희찬의 대답을 기다렸다. 희찬에게서 나올 예쁜 단어들이 만들어 낼 근사한 문장에 대한 기대가 몰려왔다.
“음……. 나한테 너는.”
“응.”
“나를 이루는 모든 것이고, 나를 힘 나게 하는 유일한 원동력이지.”
“…….”
“길을 잃고 헤맬 때 요술처럼 나타나서 바른길을 알려 주는 선한 이정표.”
변하지 않는 선함으로 악을 잠재우는 또렷한 빛.
연이어 덧붙는 희찬의 말에 도준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거창한 고백과 다르지 않은 희찬의 말이 불현듯 버거웠다.
도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하염없이 희찬을 바라봤다. 언젠가 희찬에게 울면서 고했던 사랑이 떠올랐다. 그때는 참 힘겨운 와중에 어렵사리 건넨 고백이었는데, 지금 한 번 더 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도준의 울대가 아래위로 요란하게 들썩이더니 이내 굳게 다물렸던 입술이 떨어져 나긋한 목소리가 흘렀다.
“너도 그래, 나한테.”
“알아.”
“내 세상은 너야, 희찬아. 내 이름이 가진 모든 시간에는 네가 있어.”
“……안다니까.”
가볍게 시작한 질의였건만 본의 아니게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거북하다기보다는 서로가 가진 커다란 사랑에 잠식되어 행복한 발버둥을 하는 기분이었다. 서로를 향해 자신들의 사랑을 가감 없이 드러낸 두 사람이 환하게 웃었다. 예능이니 조심하자던 초반의 다짐과는 달리 어느새 두 사람은 서로의 감정을 전 국민에게 공표하는 수준이었다.
“악!”
“으, 오글거려.”
두 사람이 동시에 주먹을 말아 쥐고 어깨를 움츠렸다. 배시시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는 게 새삼스레 낯이 달아올라 몸서리를 쳐 댔다. 그렇다고 그게 마구 거리끼지는 않았다. 희미한 미소를 띤 채로, 만면에 사랑을 담아낸 두 사람은 괜히 손끝으로 엎어진 카드를 깔짝거리며 다른 질문들을 확인했다.
“우리 이것도 답변해 볼까.”
“대답하는 거 되게 민망하니까 그냥 답을 써 볼까.”
“좋은 생각.”
역시 한 번은 아쉽다. 다시 두 손 두 발이 오그라드는 민망한 상황은 겪고 싶지 않았던 두 사람은 큐 카드를 쥐고 그 아래에 자신들의 글씨로 답을 남겼다.
Q. 서로의 신체 부위에서 가장 탐나는 부분은?
도준 : 희찬이 손
희찬 : 도준이 엉덩이ㅋㅋ
Q. 만약 제일 힘들었던 때로 다시 돌아가, 과거의 나를 만나게 된다면?
도준 : 안아 주고 싶다.
희찬 : 같이 자 줄 것 같음.
Q. 어릴 적 꿈은?
도준 : 없음 장희찬이랑 같이하는 거 전부
희찬 : 배우
답변을 마친 후에는 서로가 적어 둔 답을 보며 한참이나 대화를 나누었다. 희찬은 도준이 남겨 둔 답변 중, 어릴 적 꿈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거 생각났어.”
“뭐?”
“나 아홉 살 때였나? 아무튼, TV 보는데 엄청 재밌는 드라마가 나왔었거든. 그래서 내가 너한테 ‘야, 나도 배우 할 거다?’ 이랬는데 그때 네가 뭐라 그랬게.”
“내가? 뭐라고 했어?”
도준은 까마득한 옛일을 잊은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희찬의 꿈을 응원을 하면 했지, 다른 말을 한 기억은 없었으므로 그의 곧고 짙은 눈썹이 거칠게 요동쳤다.
그때의 희찬은 하루에 한 번씩 꿈이 바뀌었고, 그 이후로도 무수히 꿈이 바뀌었었다. 아마 그냥 웃지 않았을까.
딱히 눈에 띄는 반응은 한 기억이 없어 도준이 다시 희찬을 바라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희찬이 어이없다는 듯, 허, 허탈한 숨을 뱉었다.
“그때 네가 나 비웃었잖아.”
“야, 내가 언제 비웃었어. 이게 또 말을 막 지어내네, 나 그냥 웃었을걸?”
“그래, 왜 웃어, 웃긴. 응원은 못 해 줄망정.”
희찬이 눈을 새침하게 뜨고 도준을 흘겨보자 도준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희찬의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응원이 고픈 거라면 그까짓 응원 백 번, 천 번도 해 줄 수 있다.
“희찬아, 응원해. 너 진짜 잘할 듯.”
짓궂은 도준의 말에 희찬이 인상을 펴기는커녕 더 굳혔다. 장난으로 대충 얼버무리려는 도준의 태도가 괜히 얄미웠다.
“늦었어, 새끼야.”
“늦었어? 늦었지. 빨리 자자. 안아 줄게.”
도준은 이 사태를 능청스럽게 넘기려 했다. 꼬투리를 잡고 투정을 부리려면 얼마든지 부릴 수 있는 희찬이었지만, 도준의 말대로 시간이 늦기는 했다. 내일도 빨빨거리며 돌아다닐 일정이 있으니, 도준의 넉살에 못 이기는 척 잠드는 것이 현명할 것이라 판단했다.
이윽고 두 사람이 함께 일어나 서로를 품에 안은 채로 침실로 향했다. 숙소 곳곳에서 자신들을 향하는 카메라는 어느새 두 사람의 안중 밖이었다.
*
늦은 밤, 잠든 도준과 달리 희찬은 눈이 말똥말똥했다. 하루 종일 바쁘게 돌아다니고, 도준과 장난을 치다가 또 티격태격하느라 모든 체력을 소진하였음에도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희찬은 잠든 도준을 내버려 두고 밖으로 나와 도준의 대본을 뒤적거렸다. 캐릭터 분석을 위해 대사 주변에 빼곡하게 적혀 있는 도준의 가지런한 글씨가 대견했다. 희찬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는 채로 도준이 남긴 메모를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중요한 감정에는 형광펜을 칠해 두고, 표현하기 어려운 대사 아래에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적혀 있었다. 글씨체가 그다지 예쁘지 않은 도준이었지만, 이상하게 대본 위에 새겨진 도준의 글씨는 눈에 쏙쏙 들어올 정도로 차분하고 정확한 모습이었다.
“열심히 하네.”
새삼스럽게도 그런 게 좋았다.
이미 정상에 올라 자신의 입지를 탄탄히 한, 국내 내로라하는 배우 중 한 명이었지만 열심히 하는 도준의 모습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괜히 뿌듯했다.
오래간 탑의 자리를 지키는 도준을 두고, 더러는 얼굴로 승부한다, 더러는 운이 좋다 함부로들 말하던 때가 있었다. 그건 희찬 본인 역시 숱하게 들어 온 말이었고, 그 앞에서 아니라는 것을 인식시켜 주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도준은 구태여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렇게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서 꿋꿋하게 제 할 일을 다하는 도준의 모습이 진정한 힘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이도준이 가진 변하지 않을 힘. 꾸준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꼭 빛을 보는 도준의 유능함이었다.
그렇게 한참 도준의 흔적을 살피며 즐거워하던 희찬의 귓가에 어렴풋이 앓는 소리가 들렸다. 거실과 침실 사이를 가로막는 문이 없어 조금 더 생생하게 들리는 소리에 희찬이 눈썹을 씰룩거렸다.
희찬은 보던 대본을 내려놓고 얼른 방으로 향했다. 희찬의 눈가에는 긴장과 걱정이 반반 어우러져 있었다.
웬일로 낯선 곳에서도 잘 잔다 했더니.
피곤을 이겨 내지 못한 도준이 오랜만에 악몽을 꾸는 듯했다. 희찬은 얼른 도준을 품에 안고 토닥토닥, 이제는 숙련된 손길로 그를 달랬다.
“도준아, 나 왔어. 괜찮아, 괜찮아.”
전광진의 죽음과 동시에 도준의 아픔도 씻은 듯이 나았다면 더없이 좋았을 텐데.
요즘도 도준은 이따금 악몽을 꾸고는 했다. 집에서는 거의 꾸지 않는 것 같았지만, 숙소를 잡고 진행되는 촬영장에서는 꼭 첫날은 악몽을 꾸고 전화를 걸어 오는 덕에 밤새 휴대폰을 붙들고 통화를 해 주어야 했다.
그렇다고 도준이 예전처럼 마냥 아픔에 허덕이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가 아닌 ‘현재’에 살겠다고 다짐한 이도준은 예전처럼 무력하게 당하지도, 닥쳐오는 어둠에 가만히 잠식당하지도 않았다.
도준이 제 아픔을 꿋꿋하게 견디고 이겨 내는 동안 희찬도 상당히 성숙해졌다. 이제는 허둥대지도, 당황하지도 않았고, 그를 달랠 방법을 찾아 오롯하게 제 몫을 하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희찬의 허리를 강하게 옭아맨 도준은 연신 뜨거운 숨을 터뜨리며 눈물을 흘렸다. 갇혀 있던 호흡이 터지며 닿는 뜨거운 열기에 희찬이 이를 악물고 도준을 품었다. 기다란 속눈썹에 대롱대롱 매달린 눈물을 훔쳐 내고,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 주자 결국 도준이 흐느꼈다.
모니터를 통해 두 사람을 지켜보던 감독이 놀라 달려오고, 스태프들이 다가와 걱정 어린 목소리를 내는 동안에도 도준은 그저 희찬의 품에 안긴 채로 하염없이 울었다. 도준의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그를 꼭 안은 희찬은 침대에 앉은 채로 스태프들을 달래고 감독을 돌려보내기 바빴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가신 후에야 도준의 호흡이 차츰차츰 단정해졌다. 희찬은 비로소 옅은 미소를 띤 모습으로 도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오늘은 또 누가 내 이도준 괴롭혔어?”
“…….”
“약 줄까? 약 먹고 잘래?”
도준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약 없이 자는 잠의 가벼움을 알게 된 이상, 웬만해서 약은 먹고 싶지 않았다.
“미안…….”
“미안하긴 뭐가. 물 마실래? 목마르지.”
이번엔 고개를 끄덕거렸다. 희찬은 흔쾌히 일어나 시원한 물을 가져왔다. 도준에게서 벗어나면서도, 도준에게 다시 돌아오면서도 도준의 머리를 정성스럽게 쓰다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차가운 물을 시원하게 들이켠 도준이 조금이나마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혼이 다 나간 모습이었지만, 한결 편안해 보였으므로, 희찬이 빙긋 웃었다.
“괜찮아졌어?”
“응.”
괜찮긴 무슨.
아마 이도준은 오늘 밤 내내 악몽의 환상을 떠올리며 괴로워할 것이다. 그를 잘 아는 희찬이었지만,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그저 그의 손을 꼭 쥔 채로 함께 견뎌 줄 뿐이었다.
희찬의 예상대로 도준은 밤새 앓았다. 곤히 잠든 듯하다가도 불쑥 미간을 일그러뜨렸다가, 희찬의 품으로 파고들어 자신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나쁜 생각들을 떨쳐 내려 노력하는 몸짓은 그저 아프고 또 안쓰러웠다.
덕분에 희찬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이제는 대상을 찾을 수 없는 화가 가슴 가득 도사려, 돋을볕이 방 어귀를 거니는 것을 본 후에는 다시 잠든 도준을 눕혀 두고 거실로 나왔다.
희찬은 조리대 위에 도마를 올려두고 또각또각, 칼 소리를 냈다. 요리라고는 근처에도 가지 않았던 예전과 달리 도준과 함께 지내며 요리에 조금씩 재미를 붙인 희찬은 빈 도마 위를 또각또각 두드렸다. 불쑥불쑥 고개를 쳐드는 화를 가라앉히는 데에 일정한 간격으로 나는 칼질 소리가 답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건 제법 효과적이었다. 높낮이의 변화도 없겠다, 휘두르면 휘두르는 대로 소리가 나는 것은 희찬의 가슴을 진정시키고 머릿속을 공허하게 하는 데에 큰 힘을 실었다. 덕분에 연신 씩씩거리던 희찬의 숨도 가지런해졌다.
“이도준은 몸 관리한댔으니까.”
맛없는 풀때기 잔뜩.
“나는 열받았으니까.”
맛있는 소시지 잔뜩.
빈 도마를 두드리는 것을 멈춘 희찬은 곧 일어날 도준을 위해 아침상을 준비했다. 자긴 잤어도, 잔 것 같지 않은 것은 도준도 마찬가지일 테니, 밥이라도 든든하게 먹이려는 심산이었다.
맛없는 풀때기를 얹겠다는 말과 달리 도준 몫의 접시에는 먹음직스러운 것이 가득했다. 유명 브런치 매장 못지않게 화려한 플레이팅 솜씨를 뽐낸 희찬이었지만, 정작 제 접시는 딱히 꾸미지 않았다.
이윽고 침실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났다. 도준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챈 희찬은 헐레벌떡 침실로 들어가 도준의 상태를 살폈다. 어렵사리 윗몸을 일으키고,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도준이 느릿하게 눈을 끔뻑거렸다.
“일어났어?”
밝은 희찬의 인사에 도준은 말없이 두 팔을 벌려 제 품을 열었다. 마치 안기라는 듯, 아니 안아 달라는 듯한 도준의 모습에 희찬이 피식 웃으며 흔쾌히 도준의 품에 안겨 주었다. 허리를 안고, 배에 얼굴을 파묻은 도준은 희찬의 품에서 오랫동안 체향을 맡았다.
“너 또 못 잤지, 미안해.”
배에서 뭉근하게 울리는 도준의 낮은 목소리에 희찬이 피식 웃었다. 빼곡한 머리숱을 자랑하는 도준의 정수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진 희찬이 이윽고 도준을 꼭 안은 채로 사랑을 전했다.
“별걸 다 미안해. 좀 괜찮아? 잠은 좀 잤어?”
“너는, 좀 잤어?”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 질문이 이어졌다. 그리고 두 사람이 동시에 푸흐흐, 웃음을 터뜨렸다. 환하게 휘어지는 도준의 화려한 낯에 희찬이 저도 모르게 도준의 콧대에 입을 맞췄다. 오랜만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말캉한 살덩이에 도준이 조금 더 짙은 웃음을 보였다.
순식간에 방 안이 환하게 개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밝은 빛이 도사려 어느 구석에도 어둠은 존재하지 않는 행복에 파묻힌 느낌이었다. 그건 실로 개운한 일이었으므로, 희찬의 입가에도 도준에 버금가는 화려한 미소가 피었다.
“좀 더 누워 있을래?”
“아니, 움직여야지. 너 오늘도 가고 싶다고 한 곳 있잖아.”
“괜찮겠어?”
“약 먹으면 돼. 이럴 줄 알고 챙겨 왔지.”
“자랑이세요.”
희찬의 걱정이 짙어지기 전에 도준이 얼른 몸을 일으켰다. 이 이상 누워서 희찬의 걱정을 듣다가는 합법적으로 함께하는 시간이 허투루 흐를 것만 같았다.
얼른 욕실로 사라지는 도준의 모습을 지켜보던 희찬은 못마땅한 기색을 애써 감추지 않았다. 어차피 가고 싶은 곳은 얼추 다 돌아봤고, 오늘은 그냥 숙소에서 뒹굴거리다가 밤에 별이나 보면 딱 좋겠는데 말이다.
하지만 부지런한 이도준은, 아니 정확하게는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이도준은 오늘도 쉬지 않을 생각인 듯했다.
결국 한숨을 깊이 내쉰 희찬도 준비하는 손을 바쁘게 놀렸다. 한숨도 자지 못해 몸뚱어리가 다 무거웠지만, 눈자위가 시큰거리고 연신 하품이 나왔지만, 그런 건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피곤해 보인다, 너.”
“피곤해…….”
“가는 길에 운전 내가 할게.”
“응.”
그래도 도준 앞에서 나오는 투정은 어쩔 수 없다. 금세 식사를 마치고, 나란히 신을 신은 후에는 희찬이 무너지는 몸을 도준에게 기댄 채로 눈을 끔뻑거렸다. 바깥으로 나오니 쏟아지는 햇살에 눈가가 가려운 탓이었다.
그런 희찬의 머리를 도준이 힘 있게 쓰다듬었다. 도준의 손길에 홱 젖혀진 희찬의 고개가 다시 푹 꺾이며 힘을 잃었다. 전신을 도준에게 의지한 채로 어렵사리 걷는 희찬은 삽시간에 몰려오는 피곤을 이겨 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를 지켜보던 도준이 아주 다정한 손길로 희찬의 볼을 어루만졌다.
“그냥 쉴까?”
“준비 다 했는데 아깝잖아.”
“다락방에 보드게임 있던데, 좀 자고 일어나서 그거 하고 놀자. 어때.”
부드럽게 어르는 도준의 말에 결국 희찬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준비 다 했으면 뭐 어때. 브랜드 노출이 필요한 옷이라도, 실내에서 놀면서 노출해 주면 될 일이었다.
며칠 내내 쏘다니며 바쁘게 일정을 소화했으니, 이번에는 말 그대로 힐링을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희찬은 도준의 손에 잡혀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기껏 나갈 채비를 다 하고 다시 돌아오는 두 사람에게 스태프들의 의아한 눈이 닿았지만, 두 사람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희찬이 옷을 벗는 것을 돕고, 그가 잠들 때까지 그의 옆을 지키던 도준은 희찬이 깊이 잠든 후에야 일어나 널브러진 짐들을 깨끗하게 정리했다.
“도준아, 오늘 안 나가려고?”
“네, 희찬이 너무 피곤해해서 그냥 안에서 놀아 보려고요.”
“어, 괜찮지. 근데 너 어제는 왜 그런 거야? 그 악몽인가?”
“네……. 하하, 요즘은 많이 괜찮아졌는데 역시 낯선 곳은 아직 힘든가 봐요.”
도준이 멋쩍게 웃었다. 숱한 작품에 참여하며 자신의 악몽을 언급해 오는 도준이었지만, 그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않았기에 당황스러웠다.
남 일 얘기하듯 가볍게 얼버무리는 도준의 모습에 감독이 인상을 찌푸렸다. 두 사람이 어릴 때 심상치 않은 일을 겪었다는 것은 어쩌다 보니 대충 알게 됐다. 무슨 일을 겪었는지 자세히는 알지 못해도, 그게 이도준이 갑자기 잠적을 했던 것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래서 의연한 도준의 모습이 달갑지 않았다. 도준의 너른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은 감독은 도준을 향해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편집해 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말이 고작 이런 거라, 감독의 낯에는 미안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그에 도준이 미안해할 필요 없다는 듯, 생긋 웃었다.
“저 감독님 엄청 믿어요.”
“아, 갑자기 부담스럽네.”
감독이 장난스럽게 진저리 치는 모양을 보이며 두 사람의 숙소에서 벗어났다. 근사한 미소로 화답하던 도준은 금방 식탁에 앉아 사라락, 대본을 넘겼다. 얼추 다 외운 대본이었지만 역시나 마음에 들지 않는 감정이 있다. 겪어 보지 않아 애매한 감정들은 취재를 하러 다니면서 배우기도 했지만, 이번엔 그럴 시간이 없어 답답했다.
게다가 전쟁 중인 특수부대 사령관을 어디서 만나.
판타지나 다름없는 장르였으므로, 도준은 애꿎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감정을 살피려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다.
귀마개를 낀 채로 집중하다 보니 앞에 희찬이 앉는 것도 몰랐다. 어느새 잠에서 깬 희찬은 아까보다 훨씬 개운한 모습으로 도준과 함께 대본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새까만 머리는 아무 방향으로 삐죽삐죽 뻗쳐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다.
희찬의 앞에 앉아 있는 도준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새까만 머리를 하도 쥐어뜯어 아무렇게나 솟은 모습이 그의 짙은 고뇌를 담아냈다. 희찬이 피식 웃으며 도준의 머리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희찬의 다정한 손길에 도준이 눈을 들어 희찬을 바라봤다.
“뭐가 문젠데.”
“……배고파.”
“그래, 놀러 와서 일하지 말고 맛있는 거 먹자.”
희찬의 명쾌한 목소리에 고개를 주억거리던 도준이 다시 갸웃거렸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마냥 노는 건 아니지 않나, 여기도 일하러 온 것 아닌가. 하지만 일하러 와서 다른 일터의 일을 생각하는 것도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으므로, 도준은 냉큼 대본을 캐리어 안 가장 깊숙한 곳에 밀어 넣었다.
하루 종일 도준과 함께 붙어 지내며 활기를 되찾은 희찬은 금세 겉옷을 챙겨 입고 모자를 눌러 쓴 채로 도준을 향해 손끝을 파닥거렸다.
“얼른, 얼른! 빨리, 빨리!”
“다 했어.”
“나 야시장 처음 가!”
“나도. 사진으로만 봤는데, 재밌겠다.”
희찬이 방방거리며 신나는 목소리를 냈다. 스태프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야시장이 열렸다는 소식을 접한 도준과 희찬은 금방 나갈 채비를 마치고 차를 몰았다.
도준이나, 희찬이나 둘 다 야시장은 처음이었다. 일을 시작하고는 야시장은커녕, 전통 시장도 갈 수 없었기에 가슴 가득 막연한 기대가 피어올랐다.
야시장으로 이동하는 내내 희찬은 포털 사이트를 뒤적거리며 이 동네 야시장의 특색 있는 먹거리를 살폈다. 보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넘어가는지 꼴깍, 꼴깍 침을 삼켜 대는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그럼 녹두전이랑, 막걸리랑 좀 사 갈까?”
“좋아, 그거 이따가 별 보면서 마시면 되겠다. 저녁은 뭐 먹을래?”
“여기 국수가 유명하대.”
“너 국수로 괜찮겠어?”
“그거랑…… 음…….”
시장에 내리는 순간 사람이 몰릴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복잡한 사람들 속에서 혹시나 곤혹스러운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차에서 내리기 전 메뉴를 고르는 두 사람은 신중하게 대화를 나눴다.
“국숫집은 벌써 줄이 길다고 해서, 너희가 가는 것보다 우리가 사 올게.”
“아. 죄송해요.”
“죄송은?”
국수가 유명하다더니.
도준의 말대로 이 시장의 대표 음식인 건지, 국숫집 앞에는 벌써부터 줄이 길게 늘어섰다는 소식에 미안함을 느낀 도준과 희찬은 자신의 카드를 건네며 스태프들의 몫도 구매하라는 선심을 베풀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심상치 않은 비주얼의 두 사람이 한 차에서 내리고, 그들을 스태프가 둘러싸기 무섭게 온 시장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몰렸다. 이내 커다란 함성이 터지더니 가는 곳곳에서 두 사람을 알아보는 덕분에 두 사람은 오도 가도 못 한 채로 시장에 갇혀 버렸다.
자유를 만끽한다는 주제로 촬영이 진행되는 탓에 인파를 막아 줄 경호원은커녕, 매니저도 없었다. 카메라를 들고 있던 감독들이 도준과 희찬의 주변에 달라붙어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 것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사람 진짜 많네…….”
“오늘 금요일인 거 깜빡했다.”
주말 저녁, 예상보다 많은 젊은이들은 금방 두 사람의 사진을 찍어 실시간으로 목격담을 공유했다. 근처에 사는 친구들에게 연락해 ‘지금 야시장에 킹짱 떴다’는 소식을 나르자 한달음에 달려온 사람들로 인파가 더 모여들었다.
도준과 희찬은 사람들의 환호에 응하며 연신 웃는 중이었지만, 근사하게 웃는 낯 뒤에는 난감함을 숨긴 채였다. 이대로는 시장 상인들에게 피해만 끼칠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들어찰 무렵, 누군가 두 사람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도준이 깜짝 놀라 몸을 돌렸다. 낯선 사람의 손이라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바쁘게 머리를 굴리는 중에 시야에 들어온 것은 익숙한 임 감독이었다.
“얘들아, 그냥 숙소로 돌아가자. 먹을 거 스태프들이 사 오는 걸로 하고 너희는 여기서 빨리 나가는 게 좋을 거 같아.”
감독의 말에는 이견이 없다. 두 사람은 모든 스태프들이 총동원되어 인파를 뚫고 만들어 둔 길을 따라 발을 옮기며 연신 허리를 꾸벅꾸벅 숙여 댔다. 겨우겨우 시장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얼른 차에 올라 무거운 숨을 고루 쉬었다.
결국 야시장은 구경도 하지 못했다. 초입에 발을 들이밀기가 무섭게 알아보는 사람들의 눈썰미에 그저 멋쩍은 미소만 띨 뿐이었다.
“그래도 오긴 왔는데 그냥 가기 아쉬우니까.”
“응?”
“이도준, 얼굴 이리 가까이.”
창을 열어 손만 뻗은 채로 바깥 풍경 사진을 찍던 희찬이 이내 도준의 얼굴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보나 마나 같이 찍자는 뉘앙스였으므로, 도준이 흔쾌히 제 얼굴을 희찬의 옆에 가져다 댔다. 천장을 향해 길게 뻗은 희찬의 손에 잡힌 휴대폰 화면에 두 사람의 얼굴이 나란히 들어찼다.
정면을 바라보는 사진, 도준이 희찬의 볼에 뽀뽀하는 사진, 그러다 함께 입을 맞춘 사진. 아무튼 연속으로 좌라라락 찍히는 사진에는 다양한 모습이 담겨 희찬의 휴대폰 속에 저장되었다. 이로써 도준과의 색다른 추억이 또 하나 생성되었다는 것에 행복을 느낀 희찬이 이내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다.
“자기, 나 이거 올릴까?”
“응, 예쁘네.”
“너랑 같이 찍은 사진 올리는 건 처음인가?”
“아마 기사 터지고는 처음일걸.”
“음…….”
하긴, 도준만 나온 사진을 올리기는 했어도, 둘이서 찍은 사진을 올리는 것은 기사가 터진 후 처음이었다.
거침없이 손가락을 놀리던 희찬이 턱을 짚고 콧잔등을 찡그렸다. 고민하는 것이 역력히 드러나는 모습에 도준이 피식 웃으며 운전대를 잡았다.
희찬은 숙소에 도착해서도 계속 고민을 이었다. 간만에 도준과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고 싶었는데, 괜히 유난 떤다는 말을 듣지는 않을까 우려가 되었다. 그들의 그런 부정적인 반응은 도준에게까지 이어지는 영향이었으니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스태프들이 사 온 음식들을 먹기 좋게 그릇에 옮겨 담던 도준이 힐긋 눈을 돌려 희찬을 살폈다. 웬일로 길어지는 희찬의 고민이 낯설다. 평소의 장희찬이라면 일단 지르고 보자는 식으로 벌써 올렸을 텐데 말이다.
희찬이 앉아 있는 자리에 앞 접시를 내어 주고, 숟가락과 젓가락까지 가지런히 놓아 준 후에는 희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결이 좋은 머리카락이 손바닥에 닿자 부드럽게 흩어지며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올려, 괜찮아.”
“진짜 괜찮아? 또 기사 왕창 터질 거고, 미운 사람들 댓글 장난 아닐 텐데.”
“나는 신경 안 써. 너만 괜찮으면 올려도 돼.”
“그럼 올려야지.”
도준의 흔쾌한 말에 희찬이 드디어 결심을 내렸다. 휴대폰은 줄곧 SNS 화면을 켜 둔 건지, 금방 타자를 두드리는 희찬의 손끝에서 경쾌한 음표가 통통 튀어 오르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퍽 즐거운 일이다. 식사 준비를 마친 도준은 희찬의 맞은편에 앉아 희찬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봤다.
heechanee 야시장 처음 와 봐요!
사진을 올린 희찬은 금방 휴대폰을 엎어 두고 도준이 차려 준 음식들을 맛있게 먹었다. 고개를 양옆으로 살랑거릴 때마다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도준의 가슴을 간지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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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echanee 야시장 처음 와 봐요!
⤷ 처음이라니ㅠㅠㅠㅠㅠ
⤷ 아 어제 갔는데 덕계못 오늘도 영롱한 킹짱✶
⤷ 예능 촬영중인거에요???
⤷ 사람 많이 몰렸다던데 ㅠㅠ 안다쳤는지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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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사람들의 직접적인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희찬의 입가에 안도가 도사렸다. 인터넷에 파다하게 퍼졌을 자신들의 소식이 궁금해진 희찬이 포털 사이트에 킹도준, 짱희찬, 킹, 짱, 킹짱 등 자신들을 부르는 각종 애칭을 검색했다.
기사가 터진 이후로는 도무지 팬들의 반응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검색도 하지 않고 지냈는데, 도준과 함께 있어서일까 이상하게 용기가 났다.
킹짱 야시장옴 ㅠㅠ 근데 사람 너무 많아서 뭐 못하고 그냥 감 안쓰러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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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도준 존나 잘생겼더라 진심 세상 혼자 사는 외모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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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오늘 계속 박수침 킹이랑 짱이랑 나란히 서있는데 진심 그사세 오져;
⤷ ㄹㅇ 걍 한 폭의 명화였음
⤷ 존나 잘생겼더라ㅋㅋㅋㅋㅋㅋ 한남들 열폭할만함
⤷ 키도 존나 커ㅋㅋㅋㅋ 걍 딱 연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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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이 웃는 거 보는데 예뻐가지고 진짜 주변이 화사해지더라
자꾸 죄송하다고 인사하면서 감ㅠㅠㅠㅠㅠ 아냐 우리가 미안..
⤷ 22 우리가 미안..
⤷ 모른 척할걸 ㅠㅠ 이런 데 편하게도 못 올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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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나만 못봤어 #킹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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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킹짱 사진 올라옴 같이 셀카 찍은 거
⤷ ㅁㅊ 이 천사들
⤷ 이거 근데 무슨 예능인 건가? 둘이서 왜 온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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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짱 관찰 예능 찍는대 스태프가 알려줌 제목은 눈부신 청춘
⤷ ㅅㅂ존버
⤷ 미쳤다 정오기도 이루어짐
⤷ 아; 저번에 예능 둘이 나온 거 보고 꼭 다시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대박
⤷ 존나 좋아ㅠㅠㅠㅠ!!!!!!!
⤷ 프로그램 이름도 개찰떡 ㅅㅂ 킹짱은 걍 걸어 눈은 우리가 알아서 부실게;
⤷⤷ ㅈㄴ웃겨ㅋㅋㅋㅋㅋㅋㅋㅋㅋ근데 구구절절 맞말;
⤷⤷ ㅋㅋㅋㅋㄹㅇ 눈은 알아서 계속 구해볼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여러 가지 즐거운 단어들로 자신들을 반기는 팬들의 반응에 희찬의 입가에 화사함이 내려앉았다. 이제껏 걱정한 것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마음이 편안해진 희찬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도준과의 시간에 집중했다. 시장의 유명한 음식은 모두 사 온 스태프의 배려로 두 사람은 어느 하나 빼놓지 않고 맛을 음미하고, 표현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식사를 마친 도준과 희찬은 함께 다락방에 올라 작은 창문을 통해 하늘을 올려다봤다. 통유리를 통해 내려오는 은은한 달빛은 차가운 빛을 머금었음에도 알 수 없는 따스함을 지녔다. 두 사람의 하얀 얼굴이 달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거렸다. 눈가를 거니는 달빛은 햇빛과 다름없이 환했지만, 이상하게 대낮의 강렬한 햇빛처럼 눈이 부시지는 않았다.
그건 두 사람이 달빛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밝은 빛을 두 눈으로 오롯하게 마주할 수 있는 일. 그것처럼 두 사람을 자극하는 일도 없었으니 말이다.
영롱한 달빛을 검은 구름이 덮치는가 싶더니 구름이 물러나며 가려졌던 자리에 작은 별들이 빛났다. 비로소 보게 되는 맑은 하늘에 밝은 별들이 반가워, 두 사람의 입가에 완연한 미소가 피었다.
“별 예쁘다.”
도준이 잔잔한 목소리를 냈다. 또렷하지만 뭉근하게 퍼지는 목소리는 새삼스레 희찬의 심금을 울렸다. 희찬이 도준의 단단한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하늘에 시선을 둔 채로 방 안에 도사리는 따뜻한 온기를 느끼다 보니 가슴이 몽글거렸다.
그저 무섭다고만 생각하여 도망쳤던 어둠이 떠올랐다.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모래성과 같은 어둠이었지만, 그때는 그게 세상 그 무엇보다 무서웠다. 덕분에 나중에는 감히 하늘을 보고 걷지도 못했다. 고꾸라진 시선은 자꾸만 땅으로 향했고, 밤하늘의 영롱함이나, 쾌청함 따위는 마음에 담을 틈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드높은 하늘을 보면 가슴 벅찬 감동이 밀려왔고, 설렘이 도사려 금방이라도 무어든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용기가 샘솟았다.
도준이 희찬의 손을 굳세게 움켜쥐었다. 이제는 이 손을 놓지 않겠다는 다짐을 되새기는 듯, 따스하게 맞닿은 손바닥은 서로를 옭아맸다.
“옛날에 이러고 있으면 마냥 설레고 그랬었는데.”
“응. 지금은 안 설레어?”
“지금은 구체적으로 설레어.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정확하게 알고, 또 해야 할 일들도 있으니까. 막연한 일이 아니라서 좋아.”
희찬의 담담한 감상에 도준이 피식 웃었다. 희찬의 감상은 도준 역시 공감하는 바, 구태여 다른 말을 얹지도 않았다.
모든 시간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가 불현듯 소중함을 안겼다. 이때는 이런 생각을 했고, 저 때는 저런 생각을 했다는 걸 부러 설명하지 않아도 모든 순간을 함께 겪고, 공감하며 지내다 보니 어느새 당연해진 일 중 하나였다.
“유치한 거 해 볼까.”
희찬이 손가락으로 도준의 볼을 콕 찔렀다. 도준이 줄곧 하늘에 두었던 시선을 돌려 희찬을 바라봤다.
“어떤 거?”
하얀 얼굴에 달빛이 서려 평소보다 훨씬 반짝거리는 게 못내 예뻐 저도 모르게 희찬의 볼을 소중한 보석 쥐듯 어루만졌다. 희찬은 도준의 손이 닿을 때마다 눈을 움찔거리며 배시시 웃어 댔다. 예쁘게 올라간 입꼬리가 황홀해, 입을 맞출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저 달 바로 옆에 제일 반짝거리는 별 보여?”
희찬의 말에 도준이 다시 하늘을 바라봤다. 새하얀 초승달 옆에 유달리 반짝거리는 큰 별이 있었다. 도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거 이도준 별.”
“아, 진짜 유치한 거네.”
이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진짜로 할 줄은 몰랐다.
의외로 옛 감성을 가진 희찬의 입에서 유치한 말이 나오기 무섭게 도준이 풉,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그 옆에 있는 건 네 거야?”
“아니, 나는 팬들이 선물해 준 별 있어.”
“아, 네.”
제게는 유치한 말을 하고 발을 쏙 빼는 희찬의 모습에 도준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언젠가 생일을 밝히고, 다시 생일을 맞은 희찬에게 팬들은 별을 선물했다. 다섯 개의 별에는 각각의 이름이 정해졌고, 그 별은 봄철 어느 때 볼 수 있는 별이라고 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하늘로 향했다. 새까만 하늘을 도화지 삼아, 반짝반짝 빛을 내는 별들이 마치 어린아이들이 정성 들여 그려 둔 풍경화 같았다. 순수하고, 또 하얗기만 한 그림말이다. 아이의 순수함이 아니라면 그려 낼 수 없고, 어린아이의 시선이 아니라면 올려다볼 수 없는, 그런 무구함과 순백함이 아니라면 표현할 수 없는 순결함 같았다.
도준이 고개를 느슨하게 풀어 희찬의 어깨에 기대었다. 짧은 도준의 머리가 희찬의 목덜미에 까슬하게 닿았다. 희찬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얄팍한 웃음소리를 냈다.
“여유로운 거 좋다. 예능 안 해 봐서 몰랐는데, 일하는 중인데 일 안 하는 느낌이야.”
“그치, 나도 힐링 예능은 저번에 한 게 처음이었는데 편하고 괜찮더라.”
“다음에 이런 거 또 하게 해 달라고 하자, 대표님한테.”
도준은 힐링 예능이 진심으로 맘에 들었던 모양이다. 웬일로 작품이 아닌 ‘예능’을 언급하며 다음에 또 하고 싶다는 말을 하는 도준의 모습이 낯설었다. 희찬이 샐룩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혼자 하라고 하시면?”
“안 해.”
도준이 당장 인상을 찌푸리며 단호한 기색을 보였다. 이것도 다 장희찬이랑 함께해서 재밌는 거지, 혼자 하면 무슨 망부석처럼 가만히 앉아 있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근데 너 막상 제의 들어오면 또 안 할 거 내가 다 알아.”
희찬이 도준의 손등에 그림을 그리며 웃음기 서린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 말은 도준의 정곡을 찔렀다. 장희찬 앞에서는 절대 거짓말은 못 할 것 같다. 희찬의 손가락 끝을 따라 눈알을 굴리던 도준이 해사하게 웃으며 큰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 안 할 것 같아. 그냥 우리끼리 놀러 다니자.”
명쾌한 해답을 내린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혀들었다. 밤하늘을 닮은 새까만 도준의 눈과 그 안에서 은은하게 빛이 나는 달빛을 닮은 희찬의 옅은 눈이 서로를 향한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두 사람은 그 누구도 상대의 시선을 무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보다 더 큰 감정으로 보답했다.
*
그렇게 일주일간 진행된 예능 촬영도 마무리되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두 사람은 틈만 나면 입을 맞추었다. 지난 일주일 내내 얼마나 고팠던 뽀뽀고, 스킨십이었는지 모른다. 매시간 카메라가 자신들을 지켜본다는 생각에 이렇다 할 스킨십도 하지 못하고 지내니 마치 홍수 속의 가뭄 같았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도착하기 무섭게 샤워를 마치고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분명 몸도, 마음도 편안한 촬영이었지만, 그래도 역시 휴식을 취하는 데에는 집이 최고였다. 서로를 품에 꼭 안은 채로 천장을 올려다보는 두 사람의 가슴이 비슷하게 부풀었다가 내려앉기를 반복했다.
“너는 내일부터 다시 촬영 가는 거야?”
“응, 그래도 거의 끝나 가.”
“휴식 없이 바짝 달리는 거야?”
“아마도?”
“흐음…….”
도준의 스케줄을 체크한 희찬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썹을 씰룩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이도준의 바지를 벗겨 이것, 저것 다양한 것을 하고 싶었는데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도준이 맡은 역할은 몸을 심하게 많이 쓰는 캐릭터였다. 혹시나 괜히 무리시켰다가 다음날 촬영장에서 무수한 NG를 내며 촬영하는 동안 곤혹스러움을 느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 말이다.
삐죽거리는 희찬의 입술에 도준의 손바닥이 닿았다. 부드러운 감촉에 희찬이 눈을 굴려 도준을 바라봤다. 도준은 몸을 돌려 얼굴을 괸 채로 희찬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뭐.”
“머릿속이 너무 투명해서 말이지.”
도준의 능청스러운 목소리에 희찬이 다른 쪽으로 눈을 휙 돌렸다. 연인이라면 누구나 생각할 법한 스킨십을 가지고 놀리듯 하는 도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준은 무언가 결심한 듯 몸을 일으켜 곧장 희찬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말캉한 입술이 맞닿기 무섭게 틈이 벌어지며 축축한 살덩이가 뒤엉켰다.
오랜만에 하는 키스에 두 사람은 추스를 틈도 없이 신음을 흘렸다. 희찬의 신음이 도준의 목 안에서 울렸다. 도준은 그 신음마저 잡아먹을 기세로 희찬의 입술과 그 안을 거칠게 탐했다.
“그만하고 싶으면 지금 말해. 김 빼지 말고.”
“누가 할 소리를 하냐.”
희찬이 피식 웃었다. 머릿속을 들여다봤다면서, 중간에 멈추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읽지 못했던 모양이다.
희찬의 승낙과도 같은 말에 도준이 냅다 희찬의 바지를 벗겼다. 손길 한 번에 훌렁 벗겨져 나간 바지 안에는 드로어즈에 갇힌 페니스가 조금씩 고개를 드는 중이었다.
도준이 허리를 숙여 희찬의 페니스 위에 입을 맞췄다. 얇은 천이 가로막고 있었지만 그의 페니스가 단단하게 부풀었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도준은 아예 몸을 옮겨 희찬의 다리 사이에 앉았다. 매끈하고 긴 다리를 정성스럽게 매만지던 도준이 희찬의 드로어즈를 끌어 내렸다.
새빨갛게 피가 몰린 페니스가 도준을 반겼다. 이미 쿠퍼액이 흘러 번들거리는 귀두를 본 도준이 피식, 얕은 웃음을 흘렸다. 도준의 숨이 닿기 무섭게 희찬의 페니스가 퉁, 튕겨 올랐다. 자극을 받은 페니스는 희찬이 허리에 힘을 줄 때마다 위아래로 움직이며 꺼떡거렸다.
도준은 기꺼이 몸을 숙여 희찬의 페니스를 입 안에 머금었다. 귀두부터 천천히 삼키자, 희찬이 무거운 숨을 터뜨렸다. 한 손으로 희찬의 고환을 쥐고, 다른 손으로 희찬의 허리를 쓰다듬었다. 도준의 손바닥이 닿는 곳곳에서 뜨거운 열꽃이 피어 금방이라도 화상이 새겨질 것 같았다.
“흐으…… 으음…….”
뜨거운 입김이 도사리는 공간에 갇힌 페니스가 답답했다. 기둥까지 내려가지도 않고 혀를 빳빳하게 세워 집요하게 귀두를 핥는 도준의 얄궂음에 희찬의 허리가 절로 비틀렸다. 발끝에서 피어오른 전율이 삽시간에 온몸을 지배했다. 머리를 찌르고 드는 열기가 머릿속에 빼곡하게 들어찼던 모든 생각을 밀어냈다.
희찬이 도준의 어깨를 거머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허리를 쳐올려 도준의 목 깊은 곳까지 페니스를 처박고 싶었지만, 힘겹게 참고 또 참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희찬의 힘을 느낀 도준이 조금씩 희찬의 페니스를 집어삼켰다. 목구멍을 넘어 성대 깊은 곳까지 찌르고 들어온 단단한 페니스는 입 안에서 크기를 더해 머금는 것이 버거울 정도로 부풀었다.
“우읍……. 웁…….”
“후아, 으……. 흣……!”
도준의 입 안이 점점 뜨거워졌다. 이가 닿지 않도록 한껏 입을 벌린 채로 페니스를 머금은 도준이 퍽 힘겨워 보였으나, 그의 말랑한 혀와 뜨거운 입 안이 안기는 쾌감은 실로 대단했다.
희찬이 도준의 뒤통수를 그러쥐고 허리를 거세게 쳐올렸다. 도준의 울대가 불룩 솟더니, 단정한 인상이 가차 없이 일그러졌다.
“욱, 우욱! 웁!”
“아, 후으……. 흣, 후읏!”
“웁, 후윽, 욱!”
무지막지한 페니스가 목구멍 깊은 곳까지 거침없이 찌르고 들었다. 도준은 제멋대로 굴리던 혀를 움직이지도 못하고 희찬이 처박는 페니스를 감당하려 무던히도 노력했다.
뜨거운 페니스에 검붉은 핏줄이 어지럽게 얽혀들었다. 타액에 젖은 페니스가 도준의 입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한 번에 깊은 곳으로 처박히며 숨통을 짓눌렀다.
무자비한 행위였지만, 희찬이어서 행복했다. 쾌감에 젖어 가는 희찬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이 행위에 충분한 가치를 느끼는 도준은 희찬이 제 성욕을 해소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왔다.
희찬의 허리 짓이 점차 무르익을 무렵, 도준은 혀를 굴러 희찬의 행위에 맞춰 페니스를 핥고, 또 핥았다. 귀두가 빠져나갈 때는 입술에 힘을 주고 페니스를 조였다가, 다시 거침없이 침범해 올 때는 목구멍을 열어 그의 길이 수월하도록 했다.
“아, 아흣, 아……!”
이윽고 끈적한 액체가 목 안에 뿜어졌다. 비릿한 정액 냄새에 인상을 찌푸렸던 것도 잠시, 도준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쪽 입꼬리를 올려 근사한 미소를 피웠다.
도준은 땀이 송골송골 맺힌 열이 오른 얼굴로 희찬을 내려다봤다. 혀를 빼꼼 내밀고서 새빨간 입술 주변에 묻은 정액을 핥는 도준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자극적이었다. 희찬의 이마에 굵은 핏줄이 불끈 솟았다.
“아, 이도준 미쳤는데.”
희찬이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지르물었다. 새하얀 얼굴에 발갛게 열이 오른 도준은 희찬 못지않게 달뜬 모습이었다. 그게 왜 그렇게 자극이 되는 건지. 희찬이 눈썹을 씰룩거리자, 도준이 조금 더 짙게 웃었다.
도준이 짓궂게 희찬의 엉덩이 사이를 지분거렸다. 흥분에 젖어 이미 벌름거리는 구멍은 도준의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다 된 것 같았다.
도준의 다음 행동을 예상한 희찬이 여유롭게 웃으며 침대 옆 협탁에서 콘돔과 젤을 꺼냈다. 이전에는 두 사람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이라, 사 두고도 쓰지 않는 일이 허다했지만 요즘은 달랐다. 성장한 만큼 안전한 섹스를 추구하게 된 두 사람에게는 어느새 지독하게 익숙해진 것이었다.
콘돔과 젤을 건네받은 도준이 근사하게 웃었다. 손가락 위에 차가운 젤을 바르고, 희찬의 봉긋 솟은 엉덩이 사이에 젤을 짜내자 희찬의 몸이 흠칫 떨렸다. 몇 번을 느껴도 달갑지 않은 감각에 희찬의 허리가 뻣뻣하게 굳었다.
도준은 희찬의 움찔거리는 구멍 주변을 아주 다정하게 매만졌다. 마치 헤아리기라도 하려는 양, 손끝을 세워 주름을 건드리다가 굳게 다물린 근육을 꾹꾹 누르는 통에 희찬이 이를 까득 물었다.
“으흐음…….”
희찬의 울대가 들썩거리며 뭉근한 신음이 흘렀다. 도준이 하의를 훌렁 벗어 내고 꺼떡거리는 페니스를 움찔거리는 구멍 입구에 가져다 댔다. 단단한 귀두가 닿기 무섭게 희찬의 허벅지가 바르르 떨렸다.
경련하는 그 모양이 기특해, 도준이 부드럽게 희찬의 허벅지 안쪽을 정성스럽게 조몰락거렸다.
“하악!”
“흣.”
콘돔을 끼운 도준이 꼿꼿한 페니스를 예고도 없이 희찬의 안으로 불쑥 밀어 넣었다. 한 번에 뿌리까지 강하게 밀고 들어오는 페니스가 버거워 희찬의 허리가 튕겨 올랐다. 시트를 찢을 모양으로 세게 그러쥔 희찬이 주먹을 바들바들 떨었다. 새하얀 손등에는 서슬 퍼런 핏줄이 어지럽게 얽혀 지도를 그렸다.
두 눈을 곧게 뜨고 희찬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담던 도준이 페니스를 한 번에 밖으로 뺐다. 꽉 맞물렸던 페니스가 떨어져 나가며 크게 열린 구멍이 공허함에 뻐끔거렸다. 그를 눈으로 지켜본 도준이 한 번 더 세게 처박았다. 고개를 강하게 뒤로 젖힌 희찬의 발끝이 오므라들었다.
“아흐읏!”
“후으, 하…….”
희찬의 음낭이 도준의 아랫배에 뭉개졌다. 맞닿은 살이 움찔거리는 것을 느끼던 도준이 제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깊은숨을 터뜨렸다. 버둥거리는 희찬의 다리를 어깨 위에 가지런히 올린 도준이 천천히 움직였다.
울렁거리는 속살이 휘감는 느낌이 적나라하다. 페니스를 꽉 쥐었다가 억지로 놓아주며 딸려 나오는 것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자극을 안겼다. 도준이 허리를 처박을 때마다 희찬의 판판한 복근이 불룩불룩 솟아올랐다. 침범해서는 안 될 것 같은 곳까지 거침없이 파고드는 커다란 페니스가 불끈거려, 희찬이 도리질을 쳐댔다.
“아아, 아!”
“흣, 아…….”
“하악, 아! 아흡! 흐읏, 도, 준아!”
무자비하게 속을 헤집는 페니스가 야속하다. 하지만 그 페니스가 안기는 쾌락은 어마어마해, 아픈 것은 잊고 오롯한 쾌감에 잠식된 뇌가 하얗게 비어 가는 것 같았다.
은밀한 부위의 살들이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적나라한 그 소리가 낯 뜨거운 줄도 모르고 두 사람은 거친 신음을 토해 냈다. 점멸하는 시야에 희찬의 몸이 힘없이 흔들렸다. 여린 내벽을 함부로 짓누르고, 파고드는 페니스는 강포하면서도 다정하고 따스했다.
내벽이 다 갈라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움찔거리는 희찬의 속이 도준의 페니스를 물고 놓아주지 않아 도준의 허리에는 점점 강한 힘이 실렸다.
덕분에 죽어나는 것은 오로지 희찬이었다. 강하게 처박았다가 한 번에 빠져나가는 도준 덕분에 떡 벌어진 입은 도무지 다물리지 않았다.
꽉 맞물려 있음에도 더욱 큰 쾌락을 요하는 몸은 자꾸만 안달이 났다. 분명, 도준의 거친 허리 짓은 감당하기 어려웠으나 희찬은 마셔도, 마셔도 이는 갈증에 도준의 어깨를 쥐고 그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
버둥거리는 희찬의 몸짓이 자극적이다. 이미 양 눈에 눈물을 달고서 힘들어하는 중에도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원하는 희찬의 모습에 도준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비좁은 입구를 제 크기만큼 넓혀 놓고, 처박는 내내 앓는 신음을 하면서 부족해 안달을 내는 장희찬이라.
도준의 울대가 큰 폭으로 울렁거리더니 이내 희찬의 허리를 받쳐 들어 올렸다.
“하악! 아! 후읏, 야, 야, 이거!”
희찬은 아래에서 위로 곧장 꽂히는 도준의 페니스에 온몸에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도준이 저를 안고 일어선 탓에 그에게 바짝 안겨 버린 희찬은 그대로 도준이 제 허리를 쥐고 위아래로 흔드는 대로 도준의 페니스를 머금었다가 뱉어 내기를 반복했다.
자세 탓일까, 도준의 페니스가 더 깊은 곳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당장에라도 목을 뚫고 나올 기세로 들어오는 페니스는 감히 크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꽉, 꽉 잡아.”
“아! 흐윽, 흡, 히익……!”
몸이 꿰뚫리지는 않을까 괜한 걱정이 도사렸다. 단단한 도준의 귀두는 당장에라도 모든 것을 뚫을 기세로 희찬의 속에 꽂혀 들었다. 여린 살결이 도준의 페니스가 움직이는 대로 길을 냈다. 뜨거운 열을 머금은 페니스가 속 곳곳을 인두로 지지는 듯한 아찔한 감각에 희찬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찢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사치였다. 무서운 기세로 몰아붙이는 도준과 무지막지한 그의 페니스에 숨이 짓눌리는 듯한 압박을 느끼면서도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어마어마한 만족감에 희찬은 연신 가쁜 신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젖혔다.
“흐읏, 하악……!”
희찬의 페니스에서 하얀 액체가 솟구쳤다. 어찌나 강한 사정을 맞은 건지, 정액이 도준의 턱까지 다 튀었다. 희찬의 몸이 축 늘어졌지만, 야속하게도 도준은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방금 막 사정을 마친 희찬의 속이 도준의 페니스를 강하게 조이며 그를 더 자극했다.
안았던 희찬을 침대에 조심스레 내려 둔 도준은 페니스를 꽂은 채로 희찬의 몸을 돌려 희찬의 허리를 쥐었다. 끝낼 기미가 보이지 않는 도준 덕분에 희찬은 몰려오는 아찔함을 무시할 수 없었다.
허리를 쥔 도준의 손이 뜨겁기 그지없다. 그의 손바닥이 닿는 자리마다 검은 그을음이 남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그의 손이 뜨거웠다.
이내 도준이 다시 퍽퍽, 강하게 허리를 처박았다. 아무리 탐해도 모자라다는 듯 희찬을 안달 내는 것은 도준도 다르지 않았다.
“나, 나 방금, 아!”
“나, 아직, 후으…….”
“아, 안, 안 돼, 잠, 깐만!”
“돼, 흐…… 돼.”
내가 안 된다는데 왜 자기가 된대.
방금 막 사정을 마친 페니스가 기이할 정도로 저릿거렸다. 요도가 벌름거리는 느낌은 이상한 이뇨감을 몰고 와 희찬이 허리를 배배 꼬았다.
도준이 희찬의 페니스를 거머쥐었다. 귀두 끝의 갈라진 부분을 집요하게 문지르는 동시에 철썩, 철썩, 세게 치받는 탓에 희찬이 정신없이 신음을 내질렀다.
더는 안 될 것 같은데. 이제는 정액이 아니라 다른 게 나올 것 같았다.
귀두 끝이 간지러웠다. 저리다 못해 아리기까지 한 감각은 마치 귀두가 다 두근거리는 것 같았다. 희찬이 도망가듯 엉금엉금 기었지만, 그마저도 도준의 손에 저지당했다.
도준의 부푼 음낭과 희찬의 움찔거리는 음낭이 세게 부닥쳤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전신의 온갖 예민한 부분들이 다 맞물리며 몰려오는 쾌락에 희찬은 정신을 잡는 것조차 힘겨웠다.
“아윽, 아……! 아, 하읏! 후, 아!”
이내 숨통이 조이는 아득함이 몰려왔다. 사정의 쾌락을 지나 아프기까지 한 느낌에 새까맣게 암전되었던 시야가 돌아오기 무섭게 이번에는 투명하고 맑은 액체가 솟구쳐 시트를 축축하게 적셨다.
신음은 내지르지도 못했다.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쾌락에 목구멍이 다 틀어 막힌 탓이었다.
희찬의 몸이 축 늘어졌다. 결국 이런 것까지 하게 되는구나.
남자도 맑은 물을 뿜어낼 수 있다는 것은 익히 들어왔지만 그걸 제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희찬이 맑은 액체를 뿜어냄과 동시에 사정을 마친 도준이 희찬의 몸 위에 철퍼덕 엎어졌다. 온 힘을 다해 처박았더니 콘돔 속에 갇힌 페니스가 다 화끈거렸다.
도준은 한참이고 희찬의 속에 페니스를 넣어 둔 채로 벌름거리는 그의 속을 느꼈다. 부드럽고 뜨거운 속살이 페니스를 휘감았다가 쩌저적, 떨어져 나가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져 당장에라도 다시 사정할 것 같았다.
조심스레 페니스를 빼낸 도준이 벌름거리는 희찬의 구멍을 매만졌다. 얼굴을 시트에 처박은 채로 가쁜 숨을 고르기 바쁜 희찬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혹시 부끄러워하는 걸까. 맑은 물이 나올 때는 걷잡을 수 없는 쾌락이 밀려온다던데, 싫었을까. 뒤늦게 걱정이 몰려와 희찬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렸다.
“희찬아.”
“……대박이야.”
“응?”
하지만 장희찬은 항상 도준의 예상 밖의 대답을 내놓고는 했다.
희찬은 도준의 걱정과 달리 눈을 반짝이며 도준을 돌아봤다.
“또 하고 싶어. 대박이야, 미쳤어.”
“괜찮았어?”
“제일 좋았어. 진짜.”
걱정은 다 부질없는 거였다. 희찬은 말 그대로 만족한 듯, 얼굴 가득 화색을 머금은 채로 거친 호흡을 거듭했다. 새로운 경험을 한 것에 희열을 느낀 희찬의 페니스는 그새 또 부풀어 크기를 더하는 중이었다. 그를 본 도준이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장희찬은 앞으로도 절대 못 당하지 싶었다.
“부끄러워할 줄 알았더니.”
“네 앞인데 뭐가 부끄러워? 너도 각오해, 경험하게 해 줄 테니까.”
“아, 나는 사양하고 싶은데.”
도준이 난감한 듯 웃으며 희찬의 얼굴을 매만졌다. 격한 행위에 땀에 전 희찬의 얼굴이 유달리 예뻐 보였다. 이내 두 사람이 다시 입을 맞추고 서로를 다정하게 보듬었다. 서로의 몸을 탐하며 유두를 지분거리고, 탄탄한 복근 사이에 난 길을 매만지는 손길에는 그들의 사랑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근데 문제가 생겼어.”
“무슨 문제?”
눈, 코, 입, 귀, 목. 아무튼 눈에 보이는 곳곳에 입을 맞추며 후희를 즐기던 중 들리는 맹랑한 희찬의 목소리에 도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희찬을 바라봤다. 희찬은 제법 난감한 듯 미간을 긁적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못 일어나겠어.”
도준이 큰 웃음을 터뜨렸다. 몰려오는 쾌락에 다시 한번 하고 싶은 마음과 별개로 몸은 혹사당한 것이 사실이었다.
도준은 흔쾌히 희찬을 안고서 함께 욕실로 향했다. 서서 씻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인 듯했으니, 욕조에 따스한 물을 받아 희찬을 앉혀 두자 희찬이 배시시 웃었다.
“너도 들어와, 같이 씻자.”
“응.”
금방 받아진 욕조의 투명한 물이 찰랑거렸다. 욕실의 따스한 조명을 받아 반짝거리던 물이 도준을 머금자 욕조를 벗어나 바닥과 부딪치며 철퍽, 무거운 소리가 났다. 일렁거리는 물결 아래로 비치는 두 사람의 몸이 형태를 잃고 흐드러지는 양했다.
따뜻한 물 속에 목까지 묻은 채로 노곤함을 즐기는 희찬의 얼굴을 도준이 다정하게 매만졌다. 문득 희찬과 함께했던 지난 일주일이 꿈만 같았다. 일을 하면서도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편안했던 촬영은 ‘이래서 사람들이 예능에 출연하는구나.’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도준의 입가에 근사한 미소가 자리했다. 눈을 감은 채로 몸을 풀던 희찬이 눈을 뜨자마자 마주한 화려한 도준의 모습에 심장이 쿵쿵 거칠게 뛰었다.
물속에 파묻혔던 희찬이 몸을 들어 도준과 몸을 포갰다. 뜨거운 욕조 속에서 서로를 부둥켜안은 두 사람은 또다시 서로를 탐하며 긴긴밤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
한창 드라마 촬영 준비로 바쁜 희찬이 오랜만에 회사로 향했다. 할 말이 있을 때는 꼭 배우를 돌본다는 명목하에 집으로 찾아오는 일이 허다한 곽 대표가 웬일로 회사로 부르는 탓에 괜한 긴장이 서렸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이라는 게 본디 목적을 모르고 윗사람에게 불려 갈 때는 지레 겁을 먹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희찬은 괜히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무언가 잘못한 건 없는지 자신의 행적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말간 눈을 천장에 대고 좌, 우로 굴려 봐도 도무지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혹시 도준과 함께 예능을 촬영하며 뭔가 실수를 했나. 하지만 실수가 있었다면 임 감독이 직접 나무랐을 것이다. 그럼 역시 그때 뽀뽀를 괜히 했나. 하지만 하고 싶은 건 다 하라고 했는걸. 여러 가지 경우들이 새끼줄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희찬은 판판한 가슴이 높이 부풀었다가 내려앉을 정도로 큰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훅, 뿜어져 나오는 숨은 뜨거운 와중에도 가벼워 금방 공기와 섞여들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회사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웬걸, 영화 촬영으로 얼굴 보는 것조차 어려운 이도준이 차에서 내리는 중이었다. 도준을 발견하고 반가움을 느낀 희찬의 얼굴에 화사함이 피었다.
“준아!”
경쾌한 희찬의 목소리에 도준이 등을 돌려 희찬을 바라봤다. 희찬이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지, 도준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희찬을 마주했다. 검은 진주와 같은 도준의 눈이 반짝반짝 빛을 냈다. 오랜만에 본 희찬이 반갑기는 도준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오늘은 촬영 끝난 거야?”
“응, 오늘은 집에 갈 수 있어.”
“드디어!”
“그러니까. 이게 얼마 만이야.”
예능 촬영을 마친 후, 도준은 전보다 훨씬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촬영 스케줄을 빠듯하게 잡는 것으로 유명한 감독은 도준이 예능 촬영을 위해 일주일이나 현장을 비운 것을 못마땅해하는 눈치라고 했다. 덕분에 도준은 새벽 늦게까지 촬영하고, 겨우 두세 시간 눈을 붙인 후에는 다시 일어나는 강행군을 소화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희찬은 이 모든 얘기를 도준이 아닌 대표에게 전해 들었다. 언제는 이도준이 아니면 절대로 영화를 진행시킬 수 없다며, 도준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굴던 감독이 계약과 동시에 태도를 바꾸었다는 것도, 은근히 사람 심기를 살살 긁어 대는 탓에 촬영 쉬는 시간에 도준은 아예 귀마개를 끼고 다른 말은 듣지 않는다는 것도. 하나같이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아 희찬이 입술을 이죽거렸다.
도대체 감독들은 톱 배우 데려다가 기죽이는 것을 왜 이렇게 즐기는지 모르겠다.
그런다고 기가 죽을 이도준도 아니었지만, 아무튼.
“왜 그래?”
화사하게 피었던 희찬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도준이 고개의 각을 틀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에 희찬이 어깨를 털어 내며 응수했다.
“촬영장에서 별일 없어?”
“무슨 일?”
도준의 눈에는 순수한 질문이 서렸다.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도준의 태도에 희찬은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제아무리 별의별 사람 다 있다는 이 바닥이라지만, 유독 이도준에게는 그런 사람이 잘 꼬이는 것 같다는 생각을 도저히 지워 낼 수가 없었다.
“그 감독 되게 별로라던데?”
“감독님이? 그래?”
“뭐야, 너 진짜 모르는 거야?”
희찬이 인상을 한껏 찌푸리고 도준을 흘겨봤다. 순수한 기색이 역력한 눈동자가 아니꼽다. 몰라서 당하는 건지, 알면서도 당해 주는 건지 이제는 분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혼연일체가 되어 버린 저 성품이 답답할 지경이었다.
희찬의 눈동자에 서린 의문을 정확하게 파악한 도준이 옅은 웃음을 터뜨리며 희찬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내가 바보냐. 그것도 모르게.”
안다. 감독이 고집을 부리는 것도, 괜히 트집을 잡아 가며 굴리는 것도 다 안다. 하지만 그런 감독의 행패가 제게만 향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가 요구하는 것들은 그다지 어려운 일들도 아니었다. 몸이 좀 혹사당하여 좋은 작품이 나온다면 그것만큼 배우에게 좋은 일이 있을까. 도준은 보다 더 순하게 눈을 뜨고서 희찬을 마주했다.
“그냥 뭐……. 어떻게 나랑 잘 맞는 사람하고만 일하겠어.”
와, 인정. 이제는 진심으로 존경심이 일 지경이다.
희찬은 방금까지 입술을 삐죽거리던 자신을 반성하고, 쩍, 쩍, 쩍, 크게 박수를 쳤다. 누가 감히 이도준에게 싸가지 없다는 이미지를 입혔는가. 당장 이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는 생각이 도사렸다.
이건 뭐, 부처도 아니고.
착하다 못해 너그럽기까지 한 이도준은 그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희찬은 절로 고개를 도리질 쳤다.
인생 5회차, 뭐 이런 거 아닌지 몰라.
“반성한다.”
“뭘?”
“나도 이제 감독님 호불호 안 따지고 일하는 배우 해야지.”
“근데 너도 불호가 있어? 너는 그냥 다 잘 지내잖아. 나는 생긴 게 기가 세 보이나 봐. 다들 일단 싸움부터 걸더라. 하나하나 대꾸하는 것도 지겨워.”
이도준은 정말로 상황에 통달한 듯한 모습이었다. 이미 숱하게 경험해 온 일이라는 듯, 의연하고 초연하게 감독의 태도를 받아들이는 모습이 마뜩잖았지만 희찬이라고 별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대표실로 향하는 동안 두 사람은 그동안 나누지 못한 대화를 나누었다. 매일 그렇게 붙어 있으면서도, 며칠 떨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게 어찌나 반가운지 평소 말수가 많지 않은 도준도 오늘은 유달리 조잘거렸다.
희찬은 드라마 미팅을 하며 만난 어느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도준과 자신의 관계를 두고 말을 한마디씩 얹어 대는 것은 이제 익숙한 일이라 상관없었지만, 유치하게 배배 꼬아 대며 기분을 긁는 것은 여전히 참을 수 없다는 희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화가 나는 건지, 금세 낯빛이 붉어지는 것을 본 도준이 피식, 웃으며 희찬의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드라마 컨셉에 맞게 밝은 갈색으로 색을 뺀 희찬의 머리카락이 에어컨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래서 너 뭐라고 그랬어?”
“남이사 어떻게 살던 본인 인생 잘 살라고 했지.”
“에이, 너무 세게 얘기했어. 그러지 말지.”
“난 가만히 있었는데 먼저 와서 시비 걸잖아.”
장희찬을 누가 말려.
도준의 입꼬리가 유려한 포물선을 그리며 치솟았다. 다정한 손길로 희찬의 눈가에 묻은 머리카락을 떼어 주는 손길은 또 얼마나 다정한지 모른다.
그렇게 대표실에 도착한 두 사람은 다시 새로운 일을 마주해야 했다. 본래 작품을 시작하면 다른 일은 같이하지 않는 도준이었는데, 요즘은 이상하게 일이 자주 겹치는 것 같아 난감한 기색을 보이자 대표는 그보다 더 난처한 표정을 피웠다.
“어차피 영화 촬영 얼마 안 남았잖아, 그냥 조금 더 일찍 시작한다고 생각해.”
“눈부신 항해 영화도 곧 개봉 아니에요? 그것도 스케줄 있죠?”
“있지, 그럼.”
“우와. 그거는 무슨 행사 있어요? 저 드라마 스케줄이랑 조율이 다 되는 건가?”
“당연하지. 희찬아, 너는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돼. K액터스 일 잘하는 걸로 소문났는데, 이상하게 이도준이랑 장희찬은 우리를 못 믿는단 말이지.”
대표의 넉살에 희찬이 큰 웃음을 터뜨렸다. 희찬은 일할 수 있다는 사실에 상당한 즐거움을 느꼈다. 잠시 잊었던 행복이었다. 바쁘게 일을 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잊고 살았던,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그걸 되찾은 희찬은 요즘 그 어느 때보다 즐겁게 일하는 중이다.
“도준이 못 하겠어? 그럼 무르고.”
“아니에요, 못 할 건 없죠.”
“그래, 재밌을 거야. 어려운 행사 아니고 그냥 50명 정도? 팬 사인회만 하면 돼. 오랜만이잖아, 이런 거.”
도준이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팬들과 직접 만나 소통하는 행사는 드물다. 가끔 모델로 활동하다 보면 어쩌다 한 번, 가뭄에 콩 나는 모양으로 사은 행사가 있긴 했지만, 그 역시도 팬들과 가까이서 만나는 수준은 아니었다.
이한 그룹에서는 ‘Pride-Life s.2’를 기획하며 도준과 희찬에게 공동 팬 사인회를 제안했다. 이한 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인 IH백화점 본점 1층 광장에서 진행되는 팬 사인회는 ‘Pride-Life’ 컬렉션에 해당하는 제품을 일정 금액 이상 구매한 고객을 대상으로 추첨을 통해 진행된다고 했다.
“눈부신 항해 영화 일정은 곧 임 감독이 공유해 준다고 했으니까, 받는 대로 알려 줄게. 도준이는 오랜만에 서울 왔지?”
“네.”
“고생했어. 얼른 들어가서 쉬고. 희찬이는 어때, 준비 할 만해?”
대표의 질문에 희찬이 입을 합 다물고 배시시 웃었다. 도준에게 토로했던 스태프와의 마찰은 말하지 않으려는 듯, 샐룩 웃는 모습이 여간 요망한 게 아니었다. 대표가 준 시원한 차를 들이켜던 도준이 눈을 굴려 곁눈질로 희찬의 모습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싱그러운 얼굴을 하고서 대표를 대하는 게 어이가 없어 도준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다리를 꼰 채로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댄 도준이 희찬을 보던 눈을 굴려 대표와 마주했다.
“장희찬 아까 스태프랑 싸웠대요.”
“뭐?”
대표가 놀란 듯 몸을 펄쩍 뛰었다.
음, 싸웠다는 표현은 격한가. 하지만 그건 지극히 도준의 입장에서 싸운 거나 진배없는 상황이었다.
“야! 내가 뭘 싸워, 어린애냐?”
희찬은 억울한 듯 당장 몸을 돌려 도준의 멱살을 쥐었다. 이런 일마저 익숙하다는 듯 멱살이 잡힌 도준이 죽는시늉을 했지만, 희찬은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희찬의 모습이 새삼스럽다. 새빨간 동백꽃을 연상케 하는 모습에 도준이 피식, 웃으며 희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게 어디서 어물쩍 넘어가려고.”
“으응, 동의 없이 일러서 미안해. 우리 집 쌈닭.”
“야!”
쌈닭이라니. 이런 불명예가 있나.
성격 좋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본인이라 자신하는 희찬이었기에 이제는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팍 찌푸렸다.
“하하, 알겠어, 알겠어.”
반응이 큰 희찬을 놀리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도준은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희찬을 작정하고 놀렸다. 도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큰 폭으로 반응하는 희찬은 진심으로 약이 올랐다. 얄미움이 치밀어 당장에라도 도준의 머리를 다 쥐어뜯고 싶었지만, 군인 역할을 맡은 이도준의 머리는 짧아도 너무 짧았다.
두 사람이 바쁘게 티격태격하는 사이로 대표가 팔을 불쑥 밀어 넣었다. 도준의 멱살을 잡고 달려드는 희찬의 손을 떼어 내고, 희찬의 아래에 깔린 채로 희찬을 밀어내는 도준을 일으켜 앉힌 후에는 씩씩거리는 희찬에게 차가운 물을 건네었다.
서른하나 먹은 사내놈들이 아옹다옹하는 모습은 꼭 초등학교 갓 입학한 여덟 살 아이 같았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왜? 뭐가 있었어?”
“아니……. 싸운 게 아니고요, 대표님.”
“차근차근 말해 봐.”
희찬이 엄청난 억울함을 토로하며 자신이 겪었던 일을 설명했다. 도준이 ‘싸웠다’고 표현한 탓에 정말 큰 일이라도 있었던 건 아닐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촬영장에서는 숱하게 일어날 수 있는 가벼운 상황 중 하나였다.
나름대로 성격 있는 것으로 이도준에 지지 않는 희찬이었기에, 도준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큰 싸움이 난 건 아닐까 걱정했던 대표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는 별것도 아닌 걸 왜 그렇게 크게 말해. 놀랐잖아.”
“저도 기분은 나쁘죠. 누가 장희찬 성격을 건드려.”
“그 뜻 아닌데, 지금.”
“그것도 알아요.”
도준이 분위기를 무마시키려는 듯, 입꼬리를 올려 샐룩 웃었다. 이런 허무맹랑한 장난이나 치는 것을 보아하니, 고된 일정에도 도준의 컨디션은 제법 괜찮은 모양이다. 그래도 혹독하게 굴리는 감독 밑에서 토하나 달지 않고 묵묵히 스케줄을 소화한 덕분에 앞으로는 일정이 조금 여유 있을 거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반항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예상과 달리 온순하고 화내는 기준점이 높아 웬만해서는 문제를 만들지 않는 이도준을 감독은 몰라도 한참 몰랐다. 아무튼 무리 없이 둥글게 상황을 넘기는 도준 덕에 감독도 혼이 다 나간 상태라고 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도준을 굴린다고 하여, 본인이라고 쉴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게 함부로 그렇게 막 덤비는 것도 병인데.
대표는 저도 모르게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서 희찬과 도준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제 여기서 떠나 줄래?”
“필요할 때는 막 당장 오라고 찾으시다가, 하라는 거 하겠다니까 이제는 내쫓으시겠다, 뭐 이런 건가요?”
“그럼 있든가. 나는 너희 오랜만에 만났을 거고, 회포도 풀어야 할 텐데 너무 붙잡아 두는 거 아닌가 싶어서 그…….”
“안녕히 계세요.”
도준이 당장 희찬의 손을 거머쥐었다. 대표의 말은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 말을 다 끊고 벌떡 일어난 도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냉큼 대표실에서 벗어났다. 도준의 굳건한 손에 잡힌 희찬만 멋쩍게 웃으며 인사를 남길 뿐이었다.
아까는 장희찬이 이도준을 잡아먹을 것처럼 으르렁대더니, 이제는 이도준이 장희찬을 꾹 쥐고 있는 모습이 참 이도준, 장희찬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 그대로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퍼즐 조각들 같았다.
집에 돌아온 도준은 잔뜩 열망을 머금은 채로 대표실을 빠져나왔던 기세와 달리 그저 희찬을 꼭 안은 채로 소파에서 빈둥거릴 뿐이었다. 어깨를 맞추고 누워 그의 목덜미에 쪽, 쪽 입을 맞추다가 티셔츠를 훌렁 들어 그 안으로 고개를 밀어 넣고 예민하고 보드라운 살결을 핥기도 했지만, 그게 다였다.
언젠가 도준이 제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의지는 없는 것처럼 도준의 손에 붙들린 채로 제 몸을 내어 주었던 희찬의 눈이 데굴 굴러 TV 화면을 바라봤다. 화면 속에는 친근한 남자가 주연배우로 나오는 드라마가 막 방영되는 중이었다.
“준아, 준아.”
그에 희찬이 여전히 제 티셔츠 속에 얼굴을 파묻힌 도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에 라운드 넥 위로 도준의 머리가 쏙, 빠져나왔다. 마치 티셔츠 하나를 같이 입은 모양이 되어 희찬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잔망스럽게 구는지 모르겠다. 그저 귀엽고, 예뻤다.
“한진 선배 드라마 해.”
“아, 지금 해?”
“응. 좀 나와 줄래? 나 편하게 보고 싶어.”
도준이 엉금엉금 기어 희찬의 허리 아래로 내려갔다. 그대로 똑바로 앉을 줄 알았더니, 맹랑한 이도준은 희찬의 페니스에 입을 쪽 맞추고 허리를 세웠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껏 도준에게 희롱당한 몸이라, 잔뜩 부푼 페니스였는데 이도준의 입이 닿기 무섭게 희찬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안 돼.”
그를 본 도준이 손가락을 세워 희찬의 눈앞에 들이밀고서 좌우로 흔들었다. 희찬이 눈썹을 씰룩거렸다. 무얼 할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대뜸 안 된다고 말하는 이도준 덕분에 괜한 오기가 생겼다.
희찬이 짓궂게 웃으며 도준에게 접근했다. 엉금엉금 기어 한 발짝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잘생긴 도준의 면면에 희한하게 난감함이 서렸다. 앉은 자리에서 꿈쩍도 않고 그저 몸을 물리던 도준이 소파 위에 풀썩 쓰러졌다. 그 위를 덮치는 모양으로 올라탄 희찬이 도준의 선이 날카로운 얼굴을 매만졌다.
“진짜 안 돼. 오늘 아무것도 못 해.”
“왜? 네가 먼저 다 세워 놓고.”
“사실 허리가 아파. 어제 촬영하다가 다쳤어.”
도준이 가볍게 웃으며 자신의 부상을 알렸다. 누가 들으면 ‘아, 다쳤구나.’ 정도로 가볍게 넘길 일인 줄 알겠다. 하지만 이도준의 입에서 ‘아프다’는 말이 나온다는 것은 심각하게 드문 일이었으므로 희찬의 얼굴이 조각조각 일그러졌다.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 올린 희찬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당장 인상을 굳히고 단호한 눈으로 도준을 바라보자 도준은 눈을 마주할 자신조차 없는지 다른 곳을 바라봤다.
“또 빡치게 하네.”
“심하게 다친 건 아냐.”
“너 저번에도 심한 거 아니라고 했거든.”
“근데 진짜 괜찮아. 아까 잘 걷는 거 봤잖아.”
도준은 희찬을 진정시키려는 듯, 연신 웃는 얼굴로 희찬을 대했다.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화사한 빛의 테두리를 손으로 쥐고, 귀를 조몰락거렸다가 턱을 매만지고, 입술을 쓸었다가 콧등을 쥐자 희찬의 매서웠던 얼굴도 부드럽게 풀렸다.
“대표님은 아시고?”
“아마 지금쯤 희경이가 말했을 듯.”
결국 희찬이 도준을 이기지 못하고 도준의 널따란 가슴 위에 풀썩 쓰러졌다.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가슴을 느끼다 고개를 들고 그의 눈썹을 매만지자, 도준이 희찬의 손을 붙잡고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나 진짜 그 감독 진심으로 싫어졌어. 왜 출연자가 다칠 지경으로 현장을 만들어 놔?”
“그게 뭐 감독님 탓이냐. 내가 어제 몸이 너무 힘들었어.”
“그러니까. 왜 배우가 그렇게 힘들어할 때까지 굴려?”
“내가 더 조심할게.”
이번엔 희찬의 턱 아귀에 부드러운 살덩이가 닿았다가 떨어졌다. 어르고 달래는 다정한 스킨십이었지만, 희찬은 여전히 마뜩잖은 듯 인상을 누빈 채였다.
“몸이 아프고, 힘들면 못 하겠다고 말해. 그런다고 너 대체해서 다른 사람 쓸 것도 아닌데, 왜 굳이 견뎌?”
“그런 거 있잖아. 지금 힘들긴 한데, 그래도 하고 나면 와, 나 이럴 때도 할 거 다 하네, 이런 성취감.”
“성취감 그럴 때 느끼는 거 아니고. 한계인 것 같고, 아프고, 힘들면 그때는 쉬어야 더 오래 일하지. 네가 무슨 한계를 극복해야 하는 운동선수라도 되면 몰라. 너는 몸이 생명인 배우인데.”
“알겠어. 무리 안 할게.”
내가 저번에도 몸 함부로 쓰지 말라고 얘기했는데.
희찬이 도준의 가슴에 얼굴을 뭉갠 채로 웅얼웅얼 속상함을 쏟아 냈다. 그런 희찬의 둥근 뒤통수를 도준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어쨌든 자신을 위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걱정하는 사람이 있고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 사람이 장희찬이라니. 그저 충만한 행복이 밀려올 뿐이었다.
“도준아, 우리도 커플링 할까.”
“갑자기?”
“저 드라마 커플, 커플링 하네.”
뜬금없는 소리에 두 눈을 둥글게 떴던 도준이 희찬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화면으로 돌렸다. 풋풋한 연애를 시작한 드라마 속 선남선녀는 서로의 손가락에 예쁜 반지를 걸어 주며 웃고 있었다.
그를 본 도준이 저도 모르게 눈을 굴려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게. 희찬과 연애를 한 것이 그렇게 오래되었는데 왜 커플링 할 생각은 못 했을까. 서로의 재산을 공유하고, 세세한 시간까지 함께하긴 했지만, 드러나는 것을 함께한 적은 없었다.
“그럴까. 우리 커플링 할까.”
이왕 기사도 다 터진 마당에 같이 반지 하나 맞추는 것쯤이야 일도 아닐 것 같았다.
“근데 결혼반지면 더 좋겠다.”
“어느 나라가 동성혼이 되더라?”
“하하, 됐어. 뭘 외국까지 가. 그냥 우리가 오래오래 행복하면 되지.”
희찬이 호쾌하게 웃으며 도준의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도준을 깔고 누웠던 희찬이 일어나며 도준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묵직함이 서리는 것과 별개로 도준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의연하게 반응했지만, 희찬이 도준의 가슴에 남긴 ‘결혼’ 두 글자가 큰 울림을 안겼다.
결혼.
커플링과 마찬가지로 도준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냥 어릴 때부터 줄곧 그랬던 것처럼, 같이 부대끼며 살면서 청춘을 만끽하고, 서로 맞잡은 손 놓지 않고 함께 늙어 가는 것. 그거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그게 결혼과 다를 게 무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식은 못 하고, 혼인 신고도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그와 엇비슷한 건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같은 모양의 반지를 나누고, 서로를 향한 변하지 않을 사랑을 맹세하면 그게 결혼이지, 뭐.
이내 도준이 빙그레 미소를 피웠다. 또다시 희찬과 함께 새로운 것을 할 생각에 가슴이 두근두근 수줍게 뛰기 시작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도준의 표정을 가만히 지켜보던 희찬이 인상을 찌푸렸다. 좋아했다가, 고민했다가, 다시 행복을 피웠다가 또 머리를 굴리는 모습이 어딘가 심상치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어도, 보통 사달을 내려는 게 아닌 것 같아 눈을 게슴츠레 뜨고 도준의 콧대를 움켜쥐었다.
“너, 또 무슨 생각해. 또 어이없는 거 하려고 그러지.”
“아니야.”
도준이 결백하다는 듯, 선한 눈을 뜨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닌가, 그럼 말고.
희찬이 얼른 도준의 코를 놓아주고 말랑한 볼을 톡톡 두드렸다.
“그래서 반지 할 거야? 같이 보러 갈래?”
“나 촬영 스케줄 끝나면 한번 보러 가자.”
“응, 좋아.”
사실 반지는 예전부터 하고 싶었다. 그동안 기회가 없고, 말할 틈이 없어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을 뿐, 서로의 손가락에 서로의 사랑을 담은 반지 하나쯤은 꼭 끼워 주고 싶었던 희찬은 도준의 흔쾌한 반응에 기분 좋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상표 노출이 까다로운 방송이나 영화, 또 다른 스케줄에서 반지를 제대로 낄 수는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이도준과는 뭐든 같이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었으므로 매번 끼웠다가 빼는 귀찮음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렇게 조금씩 서로가 서로에게 묶여 있다는 것을 증명하며, 그저 행복하고 싶었다.
*
연일 이어지던 무더위가 한풀 꺾였다. 제대로 된 여름이 되지 않았음에도 기승을 부리는 더위에 지쳐 가던 사람들이 오랜만의 선선한 날씨에 화색을 피웠다.
고객 사은 행사가 진행되는 IH백화점의 풍경도 다르지 않았다. 손에 번호표를 들고 있거나, 당첨 인증 문자가 띄워진 휴대폰을 쥐고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설레는 기분을 만끽하며 소란을 자아내는 중이었다.
주말 낮, 가장 고객이 많이 몰리는 시간에 진행되는 두 사람의 팬 사인회에 모든 사람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팬 사인회에 당첨된 사람들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가 하면, 당첨되지 않은 사람들도 가이드라인 바깥에서 치열한 자리싸움을 벌였다.
그 외에 도준과 희찬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의 시선도 화려하고 웅장한 무대에 절로 시선을 뒀다. 연예인이 온다는 소식에 막연한 호기심을 갖고 힐끗힐끗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고, 행사장이 잘 보이는 카페 창가에 자리를 잡고 줄곧 무대를 응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렇듯,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을 온몸에 받는 두 사람은 간단하게 머리를 만지고, 의상을 갖춰 입기 위해 나란히 샵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두 사람의 의상은 모두 이한 어패럴의 신상으로 준비되었다. 채도가 높고, 화사한 톤이 잘 어울리는 희찬에게는 여름의 싱그러움을 닮은 의상이, 명도가 낮고 진한 색이 잘 어울리는 도준에게는 묵직한 무게가 느껴지는 의상이 주어졌다.
자신만의 색으로 의상을 무리 없이 소화한 두 사람은 스태프들에게 머리를 내어 준 채로 눈을 끔뻑거렸다. 더위에 지친 건지, 스케줄에 잠을 못 잔 건지, 아무튼 두 사람은 정오도 채 되지 않은 이 아침에도 피곤을 떨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어이, 눈 떠야지.”
오늘은 저도 한가하다며 쫓아온 대표가 두 사람의 귓가에 대고 손가락을 ‘딱’ 튕겼다. 크게 울리는 날카로운 소리에 두 사람이 깜짝 놀란 듯 인상을 찌푸렸다. 대표를 확인한 도준은 다시 눈을 끔뻑거리며 느릿한 목소리를 냈다.
“행사까지 시간 얼마나 남았어요?”
“두 시간 정도? 벌써 행사장 보이는 카페는 창가 자리가 다 찼대. 다들 너희 보면서 있을 건가 봐.”
“디너쇼 같은 느낌인 건가.”
시큰둥한 말을 툭 내뱉은 도준이 흥미 없는 눈을 굴려 대표를 바라봤다.
크게 멘트를 주고받지는 않겠지만, 고작 50명 정도밖에 안 되는 인원이라 금방 끝나겠지만, 아무튼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된다는 것은 제법 피곤한 일이다.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진행되는 행사에서는 수십 개의 CCTV가 지켜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들의 손에는 전문가용 카메라보다 더 무서운 휴대폰이 들려 있었고, 찍는 즉시 온 인터넷에 모든 소식이 퍼질 수 있으니 평소에는 서슴없었던 행동들도 50번은 족히 고민을 해야 한다.
이미 그 사실을 잘 아는 도준과 희찬이지만, 대표는 괜히 물가에 아이를 내놓는 기분이라 거듭 신신당부했다.
“절대로 스킨십 안 돼. 너희 아직 공식 인정 안 한 사이라는 거 항상 기억하고.”
“근데 이미 다 알잖아요?”
“그래도 못 박아 주는 거랑, 어영부영 넘어가는 건 느낌이 다르잖아.”
“네.”
도준이 그저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동안 희찬이 열심히 대꾸했다. 이제는 대표도 익숙해진 그림 중 하나가 바로 이 모습이었다.
딱히 별다른 토를 달지 않는 이도준과 공동의 이익을 위해 꾸준히 질문을 건네는 장희찬. 가만히 있는 이도준은 장희찬의 질문으로 얻어 가는 답변이 많았고, 희찬은 자신의 욕구를 풀어내는 듯했다.
참 상성이 잘 맞아떨어지는 두 사람이었다.
“그리고 곤란한 질문 있으면 그냥 씩 웃고 말아. 대답은 절대 하지 말고.”
“예를 들면 어떤 거요?”
“음……. 사귄 지 며칠 됐어요? 이런 거. 너희 연애에 대한 직접적인 질문.”
“아아, 네.”
이번에도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표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받아들이는 두 사람의 모습은 제법 고분고분했다. 오랜만에 한 번에 말을 듣는 두 사람을 보는 대표도 이내 기분 좋게 안도의 숨을 쉬었다.
‘오랜만에 팬들을 만나는데 내 마음대로 하겠다’며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지는 않을까 걱정을 하기도 했다. 물론 이제껏 단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은 도준이었지만, 사람 마음이란 원체 갈대 같은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도준도 희찬도, 역시 그저 순하고 착했다. 하지 말라는 것은 구태여 하지 않겠다는 듯 별 투정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게 못내 예뻤다.
“그리고 스킨십은…….”
“무슨 스킨십도 있어요?”
“아무래도 손잡아 달라는 말 정도는 하지 않을까? 팬들은 원래 그런 거 좋아하니까.”
“아, 그 정도는 괜찮……지 않겠다.”
수긍하는 듯했던 도준의 말이 유려한 U자를 그리며 돌아왔다. 대표를 향해 흔쾌한 목소리를 내다 말고 희찬과 눈이 마주친 도준은 자신을 노려보는 이글거리는 눈동자에 얼른 말을 바꿨다.
“스킨십 절대 안 돼. 하지 마.”
“알겠어.”
“그건 너희끼리 알아서 합의 보고 나한테 알려 줘. 그리고…….”
대표가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바스락거리는 종이를 꺼냈다. 무슨 주의 사항을 그렇게 적어 왔는지 종이에는 제법 많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형광등 빛에 반사되어 뒷면에 비치는 글씨를 읽어 보려 했지만, 대표의 글씨는 도준 못지않은 악필이었다. 읽어 보려 집중을 하면 할수록 눈만 더 아픈 덕에 희찬이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요즘 보니까 뭐 머리띠, 이런 거 잘 가져오는 거 같은데 그런 건 웬만하면 해 줘. 팬들이니까. 편지 같은 것도 주시면 감사합니다 넙죽 받고.”
“네.”
“대표님, 그 정도는 저희도 할 수 있어요. 이제 그만 알려 주셔도 괜찮아요.”
정작 행사에 참여하는 두 사람은 여유롭기 그지없는데, 대표는 왜인지 잔뜩 긴장한 채로 자꾸만 호들갑을 떨어 댔다. 그 모습이 재밌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하여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으나 이대로는 정신만 더 사나워질 것 같아, 도준이 대표를 진정시켰다.
환한 조명을 밝힌 거울 앞에서 일어난 도준은 앞머리에 집게 핀을 꽂은 채로 대표를 제자리에 앉혔다. 앉지 않으려는 대표의 어깨를 꾹 누르자 대표가 의자에 앉아서 무거운 한숨을 푹 터뜨렸다.
기사가 터진 후에도 드라마며, 영화며 곧장 일을 시켜 놓고 막상 대중 앞에 내놓으려니 긴장이 몰려온 모양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잘하니까.”
“그래, 너희는 잘할 건데 상황이 그렇게 되어야 말이지.”
“하하, 아빠! 뭘 그렇게 걱정하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는 두 사람이 양옆에 달라붙어 한참이나 달랜 후에야 조금 진정된 듯 차분한 숨을 쉬었다.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도록 커피를 마시고, 희찬의 유난스러운 손짓을 따라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기를 반복하면 요술처럼 마음이 차분해졌다.
“어유, 내가 유난이지.”
“그러니까요. 그냥 좀 주무세요. 그래서 어떻게 행사 보시려고요.”
“나 행사 안 볼 건데? 이따가 부회장님도 오신다고 해서 같이 점심 먹을 거야.”
“아아…….”
도준과 희찬이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고 보니 엄청나게 절친한 사이였던 두 사람은 오늘도 같이 밥을 먹는단다. 이제는 별로 놀랍지도 않은 소식이었다.
“너희 연락 못 받았어?”
“받았어요.”
휘둥그레 눈을 뜬 대표의 질문에 희찬이 대신 대답했다. 언제부터인가 도준과 희찬, 부회장 부부가 함께하는 단체 메시지 방이 생겼다. 처음에는 상당히 멋쩍은 단체 방이었지만, 희찬은 금세 적응해 부회장 부부와 사소한 것까지 연락을 주고받았다.
도준은 희찬의 대답을 들은 후에야 휴대폰을 켜 대화들을 확인했다. 메시지 속에는 시간이 맞으면 같이 밥을 먹자는 내용도 있었다. 도준이 희찬을 바라봤다. 희찬은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시간도 금세 흘렀다.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행사 시간에 백화점 한편에서 준비하던 희찬과 도준이 스태프의 안내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사람이 생각보다 많이 몰려서 뒤로 돌아서 들어갈게요.”
얼마나 모였길래. 그래도 백화점을 이용하러 온 고객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을 거고, 사람들을 적당히 잘 통제했을 텐데 원래 입장하려던 길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는 소식에 괜히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와—!”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백화점이 뒤흔들렸다. 엄청난 폭포수가 한 번에 쏟아져 무거운 마찰음을 내는 듯한 느낌을 안기는 큰 함성에 도준이 일순 우뚝 멈추어 섰다.
1층부터 5층까지. 광장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모든 곳에 사람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더러는 망원경을 들고, 더러는 휴대폰을 켜 동영상을 촬영하는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도준과 희찬, 두 사람에게 향한 채였다.
“괜찮아?”
“응, 가자.”
감개무량했다. 언제라고 팬들의 사랑이나 지지, 대중의 관심을 잊고 사는 건 아니었지만 오늘은 유달리 그 관심이, 애정이 크게 닿았다. 도준은 떨리는 숨을 의연하게 정리하며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무대 정 중앙에 선 두 사람을 향한 함성이 연이어 쏟아졌다. 악의적인 목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는, 오롯한 환호만 가득한 소리가 귀가 먹먹해지도록 울리는 것에 두 사람은 그저 싱그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두 사람의 손에 마이크가 들렸다. 자기소개를 하라는 듯한 스태프의 행동에 두 사람이 누가 먼저 할 것인가,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이런 일에서 물꼬를 트는 것은 항상 희찬 담당이었다.
“안녕하세요, 배우 장희찬입니다. 우와, 저는 이렇게 많이 오실 줄 몰랐는데 정말 많이 오셨네요. 다 뵙지 못해 아쉽고, 오늘 짧게나마 좋은 시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니, 얘가 이렇게 다 말해 버리면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하냐고.
도준이 난감한 듯 저도 모르게 혀를 삐죽 내밀어 아랫입술을 핥아 올렸다. 간단하게 인사만 하려고 했는데, 넉살이 좋은 희찬은 그 뒤에 다른 말을 덧붙여 능숙하게 사람들의 환호를 끌어냈다.
다음엔 내가 앞에 해야지, 안 되겠다.
―라는 생각이나 할 무렵 이번에는 도준이 마이크를 쥐어 올렸다.
“안녕하세요, 배우 이도준입니다. ‘Pride-Life’ 사인회에 참여하시는 분들, 또 아쉽게 참여하지 못하신 분들 모두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다 같이 즐거운 시간 보내요. 감사합니다.”
가지런한 인사를 건넨 두 사람은 무대 위에 책상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한 발 뒤로 물러서다 무대 바로 옆에서 자신들을 지켜보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뿌듯한 표정의 대표와 인자한 모습의 이선재가 나란히 서서 두 사람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희찬이 가볍게 묵례를 하며 환하게 웃었다. 이선재가 팔짱을 낀 채로 손만 빼꼼 들어 살랑살랑 흔들어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그를 본 도준이 눈썹을 씰룩거리며 싱긋 웃었다. 덩달아 점잖게 웃음을 피운 이선재는 도준을 향해서 밥 먹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에 도준이 그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마 같이 밥 먹을 생각 있냐는 질문이었을 거고, 생각해 보겠다는 답이었을 거다.
이내 대표와 이선재가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테이블 세팅도 완료되었다. 두 사람 앞에 나란히 물과 매직, 핸드크림이 놓였다.
이윽고 MC가 사인회의 시작을 알렸다. 잔잔한 음악이 퍼지기 시작하더니 도준이 부른 ‘눈부신 항해’의 OST가 백화점 로비를 울렸다. 도준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푹 수그렸지만, 팬들은 머리 위로 손을 흔들며 노래에 호응했다.
일렬로 줄을 선 사람들이 한 명씩 무대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도준보다 먼저 사인을 시작한 희찬은 예의 그 싱그러움을 한껏 표하며 생글생글 웃었다.
10명 단위로 끊어서 2분 정도 여유 시간을 주는 주최 측의 배려로 이따금 여유가 생기면 두 사람은 몸을 가까이 붙이고 귓속말을 했다.
“이따가 같이 밥 먹자고 할까.”
“그래도 좋아. 아버지 연락드렸어?”
“아직. 먹고 싶은 거 있어?”
“너 먹고 싶은 거 먹자.”
드라마 ‘눈부신 항해’의 흥행 탓일까, 두 사람을 필두로 다룬 기사 탓일까. 아무튼 두 사람이 가까이 붙어 대화를 나눌 때마다 사람들이 큰 환호를 터뜨렸다.
팬 사인회는 무리 없이 착착 진행되었다. 도준과 희찬은 팬 서비스가 무척 좋은 배우에 속했다. 가이드라인 바깥에서 자신을 향한 카메라를 발견하면 싱긋 웃어 주거나, 애살스러운 표정을 보이고 그러다 카메라 주인이 원하는 포즈를 외치면 그 포즈를 취해 주기도 했다.
대표의 말대로 머리띠나, 귀여운 모자를 가지고 올라오는 팬이 자신의 자리를 가리키며 ‘저쪽에 세워 둔 카메라를 향해 하트를 날려 달라’ 요구해도 두 사람은 흔쾌히 그에 응해 주었다.
원하는 PS는 꼭 써 주었고, 그림을 그려 달라거나, 부적을 써 달라는 등 기상천외한 요구가 몰려와도 무리 없이 호탕하게 웃으며 응했다.
“요즘은 팬덤 분위기가 아이돌 팬덤처럼 많이 바뀐다더니, 신기하다. 그치.”
“응. 근데 나는 원래 팬덤이 좀 아이돌 팬덤 느낌이었어.”
“그건 나도 그래.”
이내 두 사람이 푸흡,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워낙 배우 팬덤의 형태보다는 아이돌 팬덤의 형태를 지닌 두 사람의 팬들이었다. 오죽하면 도준이 처음 팬 사인회를 할 때는 배우의 팬 사인회가 아닌, 아이돌 팬 사인회 장면을 보여 주었던 곽 대표였다.
그건 참 현명한 선견지명이었다. 역시 괜히 K액터스의 수장이 아니었다.
별안간 치미는 그를 향한 존경에 도준이 어이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김연우요. 아, 진짜 팬이에요. 오빠 ‘열여덟’으로 데뷔할 때부터 좋아했어요, 그 전에 ‘After School’보고 희찬 오빠 팬이었는데 제가 킹짱 진짜 엄청 좋아했어요.”
“아하하, 정말요? 감사합니다. 엄청 오래됐네요, 열여덟이면.”
와다다 쏟아지는 팬의 사랑에 도준이 근사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팬은 그저 제 눈으로 직접 도준을 본다는 게 신기하고 신기한지, 연신 감탄을 터뜨리며 커다란 동작을 이었다.
도준은 아주 다정한 눈으로 팬과 눈을 마주했다. 손으로는 사인을 하면서도 팬과 시선을 맞춘 눈은 절대로 떼지 않았다. 사인을 끝내고,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로 팬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던 차에, 팬이 종이를 콕 가리켰다.
“저 여기 하트도 그려주세요.”
“아, 여기요?”
팬이 가리킨 위치는 사인지에 프린트된 도준과 희찬의 얼굴 사이에 있는 공백이었다. ‘킹짱’ 좋아한다더니, 그 말이 무언지 알 것만 같아 도준이 피식 웃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엄청 큰 하트요. 희찬 오빠가 여기 이렇게 하트 그려주셨거든요.”
미치겠다.
팬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내리자, 도준의 양 볼과 희찬의 양 볼에 작은 하트가 귀엽게 그려져 있었다. 짓궂게 눈썹을 씰룩거리며 오른쪽을 돌아봤다. 도준의 옆에 앉은 희찬은 어느새 사인을 모두 마치고 턱을 괸 채로 아예 몸을 돌려 도준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야, 이거 이렇게 하트 그리기 있어?”
도준이 부러 장난스럽게 뾰로통한 목소리를 냈다. 그에 희찬이 의자를 끌어 아예 도준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왜? 그려 달라고 하셨어. 그쵸, 연우 님?”
“헉, 제 이름 기억하시는 거예요?”
“아하하, 방금 가셨잖아요. 너도 빨리 그려.”
“저는 여기 그리면 되는 거죠?”
도준이 손가락으로 다시 가리켰다. 매직으로 곧장 그리는 것은 부담스러웠는지 손가락으로 크기를 어림짐작하는 이도준은 이 와중에도 신중했다. 변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희찬이 어이없다는 듯 즐겁게 웃었다.
참, 사람 변하는 거 아니라더니 이도준은 지독하게 이도준이었다.
“더 크게 그려, 더.”
“이만큼?”
“아뇨! 더 크게 그려 주세요!”
“어떻게 그려야 할지 감이 안 잡히네.”
도준이 난감하다는 듯 눈썹을 긁적거렸다. 얼마나 크게 그려달라는 건지 알 수 없다. 더 크게 그렸다가는 희찬이나 자신이 해둔 사인이 묻힐 것 같았고, 그렇다고 그보다 작게 그리자니 팬이 원하는 크기의 하트가 아닌 것 같았다.
그에 희찬이 샐룩 웃으며 도준을 쳐다봤다. 눈을 데굴 굴려 희찬과 시선을 마주한 도준의 눈에서는 진심 어린 난감함이 서려 있었다. 그에 희찬이 저도 모르게 도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도준이 미술학원 보내 줘야겠다.”
“아, 배우님들 저 지금 코피 터질 것 같아요.”
팬이 있다는 것도 잊은 채로 말이다.
도준은 대표가 신신당부하던 것을 떠올리고, 얼른 희찬을 밀어냈다. 그리고 등을 홱 돌려 저 멀리 서 있는 스태프를 향해 손짓으로 커다란 종이 모양을 만들었다.
“사인지 하나만 더 주세요.”
“아, 여기요.”
도준은 새로 받은 사인지에 사인지를 가득 메우는 크기의 하트를 그려주었다. 그에 희찬이 다시 두 사람의 양 볼에 하트를 그렸다.
그렇게 마지막 사인까지 마무리되었다. 아주 만족하는 모양으로 내려가는 팬의 모습을 지켜보던 두 사람도 이내 사람들에게 가려졌던 시야가 트이고, 자신들을 꾸준히 지켜보는 대중과 마주했다.
희찬이 하늘 위로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순식간에 찰칵거리는 소리가 온 좌중을 뒤엎었다. 놀란 듯 큰 눈을 더 크게 떴던 희찬이 고개의 각을 꺾어 도준을 바라봤다.
“같이 포즈 좀 취해 줄까.”
“뭐 하게.”
두 사람이 다시 붙어 이야기를 속닥거렸다. 제법 오랫동안 속닥거리던 두 사람은 이내 피식 웃으며 여러 가지 포즈를 취해 주었다. 희찬이 제안한 포즈를 힐끔힐끔 곁눈질로 따라 하는 도준은 제법 신이 난 모습이었다. 그건 희찬도 다르지 않았다. 도준과 함께하는 공개 행사는 오랜만이었고, 팬들이 보내 주는 응원이 신선한 에너지로 다가와 건강함을 되찾는 기분이었다.
이내 모든 행사가 끝이 났다. 마지막까지 예의 바른 인사를 남기고 무대 뒤로 돌아온 희찬과 도준은 손바닥을 ‘짝’ 소리 나게 부딪치며 성취감을 만끽했다.
두 사람은 곧장 대표와 이선재가 함께 식사 중이라는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 도착해, 이선재의 맞은편에 앉은 도준은 가슴이 부풀 정도로 큰 숨을 들이켰다가 천천히 내뿜었다. 즐겁게 임한 행사였지만, 역시나 팬들을 가까이서 마주하는 것은 긴장되는 일이라 뻣뻣하게 굳었던 몸이 풀리며 노곤함을 안긴 탓이었다.
한 테이블에 둘러앉은 네 사람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맛있는 식사를 함께했다. 애피타이저부터 메인 디쉬, 이어서 디저트가 나오는 동안에도 네 사람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한참 대화를 나누던 중 도준이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아아, 뜬금없는 목소리를 냈다.
그에 세 사람의 시선이 모두 도준에게 향했다. 도준은 식탁 아래에서 마주 잡은 희찬의 손을 제 머리 꼭대기까지 들어 올리고 살랑살랑 흔들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도준의 행동에 희찬의 눈에도 의아함이 서렸다.
“저 희찬이랑 결혼하고 싶어요.”
이건 무슨 뜬금없는…….
―까지 생각했던 희찬이 폭소를 터뜨렸다. 얼마 전, 커플링을 맞추자는 얘기를 하다가 결혼반지를 언급했던 일이 떠올랐다. 장난스레 지나가듯 한 말이었건만, 세심하고 다정한 이도준은 그걸 마음에 담아 두었던 모양이다.
호탕하게 터지는 희찬의 웃음 위에 어른들의 굵직한 웃음소리가 뒤엉켰다. 도준의 말은 선언과 같았다. 어른들의 허락은 필요 없고, 우리는 결혼을 할 것이니 알아 두라고 선포하는 듯한 도준의 태도는 평소의 도준답지 않았으나 그래서 도준다웠다.
“그래, 어디서 하려고.”
“식은 무리일 것 같고요.”
“왜? 하면 되지.”
근데 허무맹랑한 것은 저 어른도 마찬가지였다.
식은 생각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한 술 더 거드는 이선재의 말에 도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저렇게 현실성이 없어서야, 무슨 기업을 이끌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식은 다음에 여유가 생기면 하겠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들이시니까 알아 두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미리 알려 드려요.”
도준은 당당하게 이야기를 하다가도 ‘아버지들’을 언급할 때는 목소리를 줄였다. 도준은 아직도 이선재에게 ‘아버지’라 부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부회장님이라 부르기는 어색하여, 대충 얼버무리듯 말을 했더니 맞은편에 앉은 이선재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차분해졌다. 도준은 입술을 물어 만 채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고, 이선재는 도준이 전한 ‘아버지’라는 말에 감동받은 듯 마른침을 꼴깍 삼켜 대는 중이었다.
어렵지 않게 분위기를 읽어 낸 희찬은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루 종일 기분 좋게 지내는 중인데, 이 모임의 마무리도 유쾌하고 싶었다.
“진짜 어이없다. 내 의사는?”
희찬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선재도, 대표도 환하게 웃었다. 반면 도준은 인상을 있는 대로 누비고서 흔들리는 동공을 보였다.
“너 나랑 결혼하기 싫어?”
“나 지금 이도준 울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니, 그러지 말지.”
도준이 우물쭈물 말을 얼버무리며 희찬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짙은 애교가 다분히 묻어나는 그의 몸짓에 희찬이 파하게 웃으며 그의 말랑한 볼을 쓰다듬었다.
“저희 결혼해요, 두 분 꼭 오세요. 어머니도요.”
도준의 장단에 맞장구치며 말을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비로소 도준이 세상 그 어느 것보다 근사한 미소를 피웠다. 어른들 앞이라 뽀뽀를 하기는 멋쩍어, 희찬의 예쁜 얼굴을 하염없이 어루만지고 쓰다듬었다.
*
최근 드라마 촬영에 돌입한 희찬은 다시 바빠진 스케줄을 소화하며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반면 도준은 영화 촬영이 막바지에 접어들며 조금씩 여유를 되찾았다.
아주 늦은 오후 시간, 이불에 파묻힌 채로 눈을 뜬 도준은 몽롱한 눈으로 집 안을 살폈다. 자신이 없는 동안 희찬은 집을 알차게도 어질러 놨다. 그에 도준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청소와 장희찬은 친해질 수 없는 모양이다.
도준은 두 팔을 걷어붙이고 분주하게 다리를 놀렸다. 구석구석 남아 있는 희찬의 흔적들은 하나같이 지나치게 귀여웠다. 나름대로 깔끔하게 정리를 해 보려고 한 건지, 가끔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져 있는 엉뚱한 것들을 찾는 재미도 쏠쏠했다.
열심히 숙지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대본까지 주워 책꽂이에 꽂고 나서야 오랜만에 제법 힘들여 한 청소도 끝이 났다.
먼지를 뒤집어써, 찝찝한 몸을 곧장 욕실로 들였다. 어느새 후끈 달아오른 바깥 날씨에 시원한 물을 맞고 서 있었더니 정수리가 얼얼해졌다. 그래도 머리는 맑게 깨는 기분이라, 도준은 오랫동안 가만히 서서 물을 맞았다.
참 기분 좋은 여유였다.
“준아!”
마지막 비눗물을 막 헹궈 내던 중 문이 벌컥 열렸다. 어느새 촬영을 마치고 돌아온 희찬이 흥미로움이 가득 드리운 말간 얼굴을 보였다. 도준이 대답 없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제 일어난 거야? 너 뒤에 일정 없지?”
“응.”
도준의 옆에 바짝 달라붙은 희찬이 도준의 말랑하고 탄탄한 엉덩이를 조몰락거렸다. 희찬의 장난스러운 스킨십쯤이야, 이제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엉덩이를 내어 준 도준은 수건으로 머리를 훌훌 털었다.
“나랑 보육원 갈래?”
“갑자기?”
희찬의 말이 뜬금없다. 상상도 못 한 말에 도준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희찬을 바라봤다. 언젠가 한 번 찾아봬야지, 생각만 하고 감히 찾아가지 못했었다. 조금 더 성공했을 때, 조금 더 어엿해졌을 때.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때 가야 한다는 강박에 여전히 그 ‘때’가 되지 않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희찬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거리낄 것 없어 보이는 희찬의 모습을 보던 도준이 서랍장에서 속옷을 꺼내 입었다. 도준이 움직일 때마다 전신에 가득 들어찬 근육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래도, 우리 어릴 때 제일 잘 봐주신 분인데 우리 얘기 말씀드려야지.”
“음, 그런가.”
“되게 기다리실걸. 서운해하실 수도 있고.”
하긴, 마지막으로 보육원에 들렀을 때도 얼굴은 보여 주지도 못하고 도망쳐 나왔었다. 그게 벌써 10년 가까이 되어 가는 일이었으니 이제는 찾아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게다가 그때와 지금만 비교해 봐도 지금은 남들은 쉽게 탐할 수 없는 자리에까지 올라 승승장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만하면 제법 성공한 모양 아닐까.
마음을 다잡은 도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등을 돌려 희찬을 마주했을 때는 얕은 숨이 터져 그의 가뿐한 심정을 대변했다.
“지금 바로 가자는 거지?”
“응. 너 씻을 줄 알았으면 씻기 전에 얘기할걸.”
“아냐, 지금 시간은 저녁이긴 해도 나는 아침 샤워였어.”
도준이 피식 웃으며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렸다. 짧은 머리가 바람을 타고 살랑거리는 것을 지켜보던 희찬이 곧 도준에게 잘 어울릴 옷을 골랐다.
이왕이면 비슷하게 입고 가고 싶었지만, 원장이라면 그 매서운 눈으로 ‘커플이라고 티내냐!’ 역정을 부릴 것이 뻔했다. 사랑이 묻어나는 행동이라는 걸 잘 알지만, 그래도 민망하니까.
“너 이렇게 입을래?”
“그냥 편하게 입고 가려고 했는데……. 그럴까.”
“편하게 어떻게 입으려고. 대충 입고 가지는 마, 10년 넘게 못 뵀는데.”
웬일로 장희찬의 잔소리가 길다.
평소 같으면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대충 내버려 뒀을 텐데, 오늘 희찬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옷 방으로 들어서는 도준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좋고 싫음을 확실하게 전하는 희찬 덕분에 옷을 고르는 도준의 손에 부담이 실렸다.
결국 고른 것은 흰 티에 짙은 색의 민무늬 셔츠, 그리고 면바지였다. 막상 챙겨 입고 보니 차림이 제 앞에 선 희찬과 다르지 않았다. 그게 웃겨 피식 웃었더니, 희찬의 큰 손이 도준의 얼굴을 훑어 내렸다.
“뭘 웃어?”
“차림을 봐라, 안 웃게 생겼나. 그냥 비슷하게 입고 싶다고 하지 그랬어?”
“엇, 입혀 두고 보니까 그렇네.”
의도한 바는 아니야.
희찬이 맹랑한 말을 덧붙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에 도준도 별생각 없다는 듯 덩달아 어깨를 으쓱거렸다. 희찬은 자신을 돋보이게 해 줄 아이템을 찰떡같이 알아채는 편이다. 목에는 어느새 반짝거리는 목걸이를 하고 도준을 돌아보는 희찬 덕에 도준은 눈이 부시다는 듯 손바닥을 들어 눈을 가리는 시늉을 보였다.
오로지 희찬의 기분을 붕 띄우기 위한 행동이었기에, 희찬이 호탕한 웃음소리를 들려주는 것으로 만족했다. 각자에게 잘 어울리는 시계를 착용하고, 신발까지 오랜 시간에 걸쳐 고른 두 사람이 이번엔 희찬의 차에 올랐다. 어릴 때부터 줄곧 비슷했던 취향은 커서도 달라지지 않은 건지, 희찬의 차도 도준의 것과 비슷한 SUV 차량이었다.
조수석에 앉은 도준은 얼마간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편해진 건지 안전벨트를 매고 내비게이션에 ‘희망원’을 검색했다.
주소를 마주하기 무섭게 아릿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건 보육원을 향한 감정이 아니었다.
“이따가 집에 오기 전에 우리 전에 살던 곳도 돌아볼까. 얼마나 바뀌었나.”
가슴이 뻐근해지고, 코끝이 아렸다가, 이내 온몸이 노곤해지는 아련함은 보육원을 벗어나 희찬과 함께 살던 그 작고 따스한 동네를 향한 감정이었다.
“오, 그럴까?”
“그냥 내리지 말고, 살짝 둘러만 보고 오자.”
“난 좋아. 너 괜찮아? 싫어서 도망간 거였잖아.”
희찬이 부드럽게 액셀을 밟으며 부러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그에 도준이 퍼뜩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거 아니거든. 알면서 꼭 말을 그렇게 해.”
“어유, 도준이 삐졌어요?”
“앞에 봐, 사고 난다.”
도준은 자신의 턱 아래를 간질거리는 희찬의 손을 뿌리치고서 등받이에 편안하게 몸을 기대었다. 차창 밖으로 빠르게 변하는 풍경들은 조금도 낯설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보육원으로 간다는 생각에 설렘이 도사려 가슴이 쿵쾅거렸다.
오랜만에 만나는 원장님은 어떤 모습일까. 가장 최근에 봤을 때는 그다지 변한 것이 없는 모습이었는데, 이제는 시간이 제법 흘러 흰 머리가 희끗희끗할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이렇게 장성하는 동안 그는 허리가 휘고, 다리에 힘을 주는 것도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아, 이건 너무 갔나. 아무튼.
“뭐라도 좀 사 올걸 그랬나?”
한참을 달려 서울 변두리의 옛날과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거리에 들어서서야 문득 체면치레를 해야 하나, 고민이 생겼다. 도준의 말에 희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저 얼른 뵙고 싶은 마음에 다른 건 생각하지 못했다.
“용돈을 좀 뽑아 갈까? 어때?”
“와, 진짜 건방지다고 욕 엄청 먹을 거 같은데.”
“애기들 선물을 사갈까?”
“일단 지금은 늦었으니까, 아예 선물을 보내자. 그리로.”
좋은 생각인 것 같다.
아이들이 가지고 놀 장난감이나, 아이들이 좋아하는 먹거리는 많아도 부족한 것이었으니 언젠가 이한 그룹에서 풍성한 선물을 보냈던 것처럼 우리도 마음껏 선물을 보내는 것이 원장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더욱 좋은 일일 듯했다.
그렇게 보육원에 도착했을 때는 조금씩 해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해가 짱짱하게 길어졌음에도 어둑해지는 하늘에 주황빛 놀이 지며 해거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우와.”
“되게 작다. 엄청 커 보였었는데.”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찬찬히 보육원의 외관을 살폈다. 그물은커녕, 드문드문 칠이 벗겨져 있었던 골대는 새 옷을 입고 튼튼한 그물을 건 채였다. 드문드문 녹이 슬었던 운동기구들도 아이들이 놀기에 안전한 플라스틱 소재로 바뀌어 있었고, 달리기에 서툰 아이들이 넘어져도 크게 다치지 않도록 우레탄 소재로 된 바닥이 길게 이어져 있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기시감이 들었다.
어릴 때 느꼈던 그 기분이 선명하게 피어오르는 것이 못내 반가워,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가슴에 담았다. 저쪽에서 공을 차면, 바람이 빠진 공은 얼마 굴러가지 못하고 퍽, 엎어지곤 했다. 그럴 때면 꼭 그걸 지켜보던 원장님이 공을 들고 자전거 가게로 가 바람을 넣어 왔었다.
그리고 낯선 미끄럼틀이 있는 자리에는 구름다리가 있었다. 구름다리를 탈 때는 꼭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었다.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거라고, 서로의 손바닥에 있는 물집의 개수를 헤아리며 누가 더 낫네, 의미 없는 키 재기를 했었다.
정글짐을 빠르게 오르내리며 서로를 잡으러 다니던 때도 있었다. 미끄러운 쇠 봉을 잡아 밟고 넘어 다니다 보면 저 멀리서 ‘너희 그러다 불알 터진다!’라는 섬뜩한 말을 하던 원장이 있었다.
균형 감각이 좋아 다행이지, 혹시라도 넘어졌으면 그 말이 그대로 실현될 뻔했다.
같은 생각을 한 건지 희찬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희찬의 모습은 다분히 짓궂었다.
“많이 바뀌었다, 그치.”
“응, 저기 정자도 칠을 새로 했네.”
“우리가 있었을 때가 제일 구졌었나 봐.”
“괜히 억울하네.”
도준이 장난스레 대꾸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게 한참이나 입구에서 서성거리며 주변을 돌아보다 보니 저 멀리서 누군가 헐레벌떡 달려 나오는 것이 보였다.
“맞네, 맞아! 도준아! 희찬아!”
반갑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두 사람이 동시에 환하게 웃으며 달려오는 상대를 맞이했다. 예상보다 나이가 덜 든 원장은 여전히 정정함을 뽐내며 건강한 관절을 자유롭게 놀리는 중이었다.
두 사람에게 다가온 남자는 얼른 두 사람을 한 번에 품에 안고 벅찬 감정을 추스르는 모습을 보였다. 양손으로 두 사람의 볼을 동시에 쓰다듬는 원장은 어느새 어엿한 어른이 된 두 사람의 모습에서 어릴 적의 천진난만했던 모습을 보았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더니, 껑충 자라 올려 보는 것만으로도 목이 아플 정도로 커버린 두 사람이었지만, 원장의 품에 쏙 안겨들 때는 어린아이의 여린 뼈대와 다르지 않은 착각이 일었다.
“원장님, 잘 지내셨어요?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해요.”
“아냐, 아냐. 너희는…… 좀 괜찮니? 기사 뜨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저희는 괜찮습니다. 잘 지내요.”
“그래, 들어가자. 들어가서 얘기하자. 그럴 시간은 되지?”
세 사람은 나란히 발을 맞춰 원장실로 향했다. 뭉근한 향수를 머금고 들어선 보육원 건물은 생각보다 천장이 낮았다. 고등학생 때까지 지내던 곳이었는데, 그럼에도 마냥 작아만 보이는 게 신기했다.
삐걱거리던 나무 복도도 대리석으로 바뀌어 있었다. 보육원을 생각할 때면 막연하게 니스칠을 하며 즐겁게 놀던 것을 떠올렸는데, 이제 니스칠은 필요 없어 보였다.
원장실로 향하는 동안 두 사람은 원장으로부터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간 보육원에는 이한 그룹의 지속적인 후원이 있었고, 덕분에 아이들은 아직도 크리스마스 선물은 성대하게 받는다고 했다. 도준과 희찬이 보육원에 있을 때 함께 지내던 선생님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갔고, 지금은 전부 새로운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그래, 그때 도준이가 왔었던 거지? 내가 분명히 너를 봤는데 나가니까 없더라고. 힘들어 보였는데, 집 찾아온 거일 텐데 들어오지도 못하고 갔다고 생각하니까 얼마나 가슴 아팠는지 몰라. 왔으면 얼굴이나 보여 주고 갈 것이지.”
“아하하……. 그때는 제가 정말 못났을 때라.”
“그런 게 어딨어. 너희는 내가 키웠는데 언제 와도 반갑고 예쁘지.”
정정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나이를 먹긴 먹은 모양이다. 살가운 말이라고는 조금도 하지 않던 원장이 두 사람을 앉혀 두고 구구절절 애정 어린 말들을 해, 두 사람은 살짝 어색함을 느꼈다.
원장은 두 사람이 나오는 모든 기사와 드라마, 영화를 스크랩했다고 했다. 커다란 액자에 넣어 둔 드라마, 영화 포스터를 비롯해 노트에 곱게 잘라 붙인 기사들은 두 사람의 활동기를 전부 기록해 둔 소중한 애정이었다.
팔락, 팔락 종이를 넘겨 가며 그를 보는 희찬의 눈에 말간 눈물이 차올랐다. 부모가 없다고 하여 부러 기죽어 지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원장이 보이는 사랑은 부모의 것과 다를 바 없었으므로, 아마 부모가 살아 있었다면 부모님이 이런 걸 해 주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든 탓이었다.
그래서 참 고맙고, 귀했다.
“울어?”
“뭘 울어.”
“우는데, 지금.”
“아, 조용히 해. 너 진짜 무드 없어.”
희찬이 짓궂게 놀리고 드는 도준의 어깨를 세게 밀쳤다. 사귄다고 하여 조금 다정해졌을까, 생각했더니 두 사람은 어릴 때 모습 그대로였다. 꼭 붙어 서로의 필요를 채우고, 결핍을 채우고, 남들과는 다른 우정을 보이던 두 사람의 모습은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퍽 뿌듯한 모습이라, 원장은 팔짱을 낀 채로 편안하게 등을 기대고 두 사람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두 사람이 등진 커다란 창을 통해 내려앉는 볕이 스미고 들었지만 그조차 두 사람을 위한 후광 같아 눈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너희 어릴 때 사진도 볼래? 여기 다 있어.”
“네! 볼래요. 원장님, 이거 하나도 안 버리고 다 모아 두시는 거예요?”
“그럼, 내가 어떻게 버려. 너희 추억인데.”
원장은 두 사람의 사진이 어디에 있는지 단박에 찾아 꺼내왔다. 그 행동마저 두 사람을 향한 애정을 표하는 것 같아 도준의 울대가 거칠게 들썩거렸다. 목이 메는 것은 희찬과 다르지 않았다. 굳이 눈물을 보이지 않을 뿐, 가슴이 뻐근하게 뭉쳐오는 느낌이었다.
원장이 대접해 주는 따뜻한 차를 한입 홀짝인 도준은 눈 앞에 펼쳐진 앨범에 시선을 꽂았다. 사진 속에는 잊고 지냈던 여러 얼굴이 함께였다. 더러는 입양을 가고, 누구는 파양되어 다시 돌아오는 일도 있었다. 아주 해외로 떠나는 친구도 있었고, 그러다 나이가 차, 도준과 희찬처럼 독립하듯 보육원을 벗어나는 사람도 있었다.
“와, 이때 이도준 진짜 예뻤는데.”
“네가 더 예뻐. 이거 봐. 애가 무슨 인형이냐.”
“지금은?”
“응, 지금도 인형이야. 예뻐.”
“영혼이 없어, 좀 진심을 담아서 얘기해 봐.”
“예에뻐어.”
하하하!
유심히 앨범을 들여다보는 두 사람을 지켜보던 원장이 호탕하게 웃었다. 사진 속 두 사람은 그때도 사람들의 시선을 홀리는 독보적인 미모를 자랑했었다. 또렷한 눈매에 해사함을 머금은 희찬과 그 옆에서 조금 무뚝뚝하지만 감탄을 자아내는 도준은 어느 사진에라도 꼭 붙어 있었다.
원장도 오랜만에 도준과 희찬의 어린 시절을 마주했다. 세월의 풍파를 맞아 빛이 바랜 사진이었지만 그만큼 몽글몽글한 예쁜 과거인지라, 사진 속 두 사람의 모습은 마냥 귀엽고 예쁘게만 보였다.
나란히 무릎을 꿇고 벌을 서는 사진, 엉망진창으로 지저분해진 모습, 골을 넣고 만세 하는 도준이나 그 옆에서 덩달아 웃는 희찬, 그러다 싸워서 둘 다 우는 장면까지. 그저 사진을 마주했을 뿐이었지만 그 시절을 엿본 것처럼 모든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원장님, 저 혹시 이거 찍어 가도 괜찮아요?”
“그럼. 이런 거 요즘 스캔해 주는 곳도 있을 텐데.”
“에이, 그냥 제가 찍어 갈게요. 사진 상하면 아까우니까.”
“응, 그래. 그래서 너희는 요즘 어떻게 지내. 둘이 정말 사귀는 거고?”
찬찬히 안부를 묻는 원장의 말에 두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합 다물었다. 아무리 뻔뻔하게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귀는 것을 구태여 숨기지 않는 요즘이라지만, 역시나 가까운 사람에게 사실을 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눈짓을 주고받았다. 누가 먼저 말하려는지, 마치 떠 미루는 듯한 모습에 원장은 입가에 밋밋한 미소를 띤 채로 두 사람의 말을 기다렸다. 결국 도준이 큼, 목청을 가다듬었다. 잘생긴 울대가 위아래로 들썩거리더니 이내 새빨간 입술이 열렸다.
“네, 저희 음……. 보육원 나오기 직전쯤부터 사귀고 있었어요. 잠깐 헤어졌다가 최근에 다시 만났는데, 기사가 터져서…….”
“그랬구나.”
“말씀드리기에 좀 예민한 문제라 말씀 못 드렸습니다.”
“아냐, 헤어졌었다니. 그게 더 힘들었겠는걸. 너희가 어떻게 헤어지냐.”
역시 두 사람의 모든 것을 꿰뚫은 원장은 사귀는 건 문제가 아니라는 양, 그저 이미 다 지나 버린 두 사람의 과거를 걱정했다. 저 자석 같은 것들이 헤어진 시기가 있다니. 게다가 다시 만난 것이 최근이라니. 그 긴 시간을 각자의 공간에서 미친 듯이 괴로워했을 것이 눈앞에 훤해 가슴이 다 뻐근해졌다.
“그래서 지금은 제가 이도준 도망가지 말라고 꽉 잡고 있어요.”
“그래, 이도준이 워낙 좀 튀어야 말이지. 그치? 희찬이가 고생이 많겠어.”
이 먹먹한 대화도 곧 희찬의 넉살로 마무리되었다.
“원장님, 저희 결혼하려고요.”
그리고 이어서 들리는 목소리는 또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아직 동성혼이 허용되지 않은 나라인데, 도대체 어떻게 결혼을 하겠다는 건지 자신의 머리로는 해결방안이 떠오르지 않아, 원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식을 하는 건 아니고요, 그냥 가벼운 언약식 정도로 할까 해요.”
“원장님 시간 되시면 오시면 좋겠는데, 혹시 어려우시면 거절하셔도 괜찮아요.”
“아. 그런 거 괜찮다. 그러게, 날짜 정해지면 연락줄래? 시간 보고 갈 수 있으면 가도록 할게.”
원장은 흔쾌한 대답을 들려줬다. 가볍게 웃으며 몸을 젖힌 원장은 두 사람을 데리고 오래간 대화를 나누었다.
헤어질 때 있었던 일, 도준이 부모를 만난 일, 두 사람이 ‘눈부신 항해’를 촬영하며 겪었던 여러 가지 에피소드와 여러 번 연락을 하려 했으나 염치가 없어 연락하지 못했다는 심정들을 털어놓자 원장은 간혹 도준의 머리를 쓰다듬기도 하고, 희찬의 어깨를 다독이기도 하며 그들의 아픈 과거를 위로하고 화려한 오늘을 축하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을 보내고 밖으로 나올 때는 온 세상이 어둠에 잡아먹힌 후였다. 하늘에 박혀 든 밝은 별들이 점점이 빛을 내고, 휘영청 밝은 달이 태양을 대신하여 운동장을 비추자 은은한 따스함이 몰려와 가슴이 간지러웠다.
“언제든지 와. 편하게. 응?”
“그럴게요. 원장님, 이거 제 전화번호인데 편하게 연락주세요.”
“그래, 자주 연락하고 지내자.”
“아! 저희 애들 선물도 보내고 싶은데. 그냥 아무거나 사서 보내도 괜찮은 거예요? 원생은 몇 명이나 있어요?”
“뭘 또 그런 걸 보내. 너희 먹고사는 데에 펑펑 써. 아끼지 말고 다 써. 여기는 신경 쓰지 말고 너희한테 써.”
원장의 단호한 모습에 두 사람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자신들의 의견을 굽힐 생각은 없는 두 사람이었고, 원장 역시 그를 잘 아는바 ‘그렇게 궁금하면 이한 그룹에 물어봐라.’ 하고 대충 상황을 떠넘겼다.
이윽고 두 사람을 실은 차가 보육원을 벗어났다. 일순 흙먼지가 일었지만 그조차도 금방 잔잔하게 가라앉아, 먼지가 가신 자리에는 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이 잔상을 남긴 채였다.
가슴 가득 벅차오르는 감동에 원장은 두 사람이 떠난 후에도 하염없이 바깥을 응시했다. 새까만 밤하늘에 먹혀 들어가듯 작은 점이 되도록 멀리 사라지는 차가 이내 모습을 감출 때까지 하염없이, 하염없이 바라봤다.
돌아오는 길의 운전대는 도준이 잡았다. 이제는 서로의 것이 구분 없고, 내 것이 네 것, 네 것이 내 것이 된 두 사람은 어느새 서로의 차에도 공동 보험을 들어 둔 지 오래였다.
조수석에 앉아 사부작사부작 휴대폰을 만지던 희찬이 빨간불에 차가 서기 무섭게 도준에게 휴대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순간적으로 환하게 비추는 빛에 도준이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아차 했던 희찬이 다시 밝기를 조금 낮추고 다시 도준에게 화면을 보여 주었다.
“나 이거 사진 올릴까?”
“야, 그거 나 울고 있잖아.”
“나 되게 씩씩해 보이잖아.”
희찬이 보여 준 건 다름 아닌 두 사람의 어릴 적 사진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하는 사진 속 도준은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서럽게 우는 중이었고, 그 옆에 선 희찬은 솜방망이를 들고 씩씩거리는 중이었다.
“다른 거. 그거 안 돼.”
사진 속 두 아이는 누가 봐도 장희찬과 이도준이었으므로, 도준은 자신의 이미지를 위해 불허했다.
귀여운데…….
돌아오는 말에 아쉬움이 서려 있었지만, 양보할 수는 없었다.
희찬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다른 사진을 찾았다. 이윽고 마음에 드는 것을 찾은 희찬이 다시 환하게 웃으며 도준에게 화면을 들이밀었다.
“이거는?”
사진 속 두 사람은 고작 여덟 살쯤 됐을까, 의기양양하게 카메라를 쳐다보며 매서운 기세를 뽐내는 모습이었다. 장난꾸러기처럼 모자를 뒤로 돌려쓴 희찬과 희찬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삐딱하게 선 도준은 동네의 소문난 악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모습이었다.
참 귀엽고 천진해 보였다. 이번 사진은 도준도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거 귀엽다.”
“둘 다 엄청 당돌해 보여, 무슨 골목대장처럼.”
“하하, 그러게. 동네 어른들 고생 제법 시켰을 것 같지.”
“그치. 아주 안 시키지는 않았지, 또. 으음, 뭐라고 올리지.”
희찬의 고민이 이어지는 동안 도준은 다른 대꾸는 하지 않고, 부드럽게 차를 몰아 집으로 향했다. 어찌나 운전을 잘하는지 커브를 도는 동안에도, 신호를 받고 멈추었다가 다시 출발하는 동안에도 편안하게 휴대폰을 본 희찬은 싱글벙글 웃는 채였다.
“멀미 안 나? 이따가 해.”
“아냐, 다 했어.”
점점 아래로 내려갔던 희찬의 몸이 다시 뿅 솟아올랐다. 무언가에 집중할 때는 자세가 흐트러지는 경향이 있는 희찬이 고민을 끝냄과 동시에 자세를 고쳐 앉은 것이었다.
“킹짱.”
“응?”
“이렇게만 올리려고.”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도준의 허락이 떨어질 때, 두 사람도 집에 도착했다. 지하 주차장에 들어선 차가 지정된 자리를 찾아 돌았다. 어렵지 않게 주차까지 마친 도준은 여전히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희찬을 멀거니 바라봤다.
환한 빛이 눈부시지도 않는 건지, 희찬은 밝기만 한 화면을 잘도 들여다봤다.
“휴대폰 화면 그렇게 밝게 하면 망막에 구멍 생긴대. 밝기 좀 줄여.”
“넹.”
순식간에 희찬의 얼굴을 비추던 빛이 어두워졌다. 만족하는 듯, 도준이 시트에 편하게 몸을 기댄 채로 희찬이 할 일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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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echanee 킹짱 아마도 여덟살?
⤷ ㄷㅂ 졸라 귀엽다;
⤷ 어릴 때부터 그림체 다른 거 ㅠㅠㅠㅠㅠㅠㅠ
⤷ 걍 애기때부터 세상을 평정하셨세요
⤷ 이게 어케 여덟살 저때부터 완성형
⤷ 아니 어떻게 장희찬 이도준은 이름도 장희찬 이도준임? 이게 말이 됨? 저 얼굴로 장희찬 이도준인게? 게다가 별명은 어떻게 킹짱임?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함? 이도준 장희찬인게? 짱희찬 킹도준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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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어린 시절 사진은 그 어느 때보다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는 조금도 밝혀지지 않은 두 사람이었으니, 두 사람의 과거에 호기심을 갖고 목마름을 느끼던 팬들의 니즈를 완벽하게 충족시켜 준 사진이었다.
“나도 사진 다 보내 줘.”
“배경 화면 한다고 하면 보내 주지.”
“할게.”
웬일로 이도준이 고분고분했다. 희찬은 곧장 ‘하겠다’는 말을 들려주는 도준의 모습에 만족을 느끼며 도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징, 징 쉬지 않고 진동이 울렸다. 도준은 쏟아지는 사진들 중, 처음 희찬이 제게 보여 주었던 사진을 골라 희찬이 보는 앞에서 당장 휴대폰 배경 화면으로 설정했다.
우는 모습이라 올리지 말라고 했던 이 사진은 초등학생 시절, 아무리 청소를 해도 칭찬 스티커를 주지 않는 선생님에게 분함을 느껴 우는 도준과 그의 옆에서 (칭찬 스티커를 훔쳐 간 주제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의기양양하게 솜방망이를 들고서 다른 친구들이 우는 도준의 옆으로 오지 못하도록 저를 지키는 희찬의 모습이었다.
당연히, 싫을 리 없는 사진이었고, 도준의 눈에는 가장 장희찬다운 면모가 보이는 사진이었으므로 배경 화면을 하염없이 들여다봤다.
<아기시절 킹짱, 영롱한 미모는 고대로>
<장희찬, 이도준과 어린 시절 공개 ‘완성형 미모’>
<예나 지금이나 비주얼 시너지는 그대로, ‘눈부신’ 이도준-장희찬>
희찬이 SNS를 올리기 무섭게 기사가 포털 사이트를 점령했다. 마치 먹잇감을 찾는 하이에나처럼 희찬의 SNS를 들여다본 듯 SNS가 올라오는 시각과 거의 동시에 등록된 기사는 다음 날이 되어도 상위권에서 내려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SNS를 올릴 때마다 포털을 가득 메우는 기사는 이제 별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희찬은 가볍게 기사를 넘기고, 도준과 나란히 엎드려 누운 채로 골똘히 생각을 거듭했다.
희망원에는 장난감을 보내려 했지만, 그보다 후원금을 보내는 게 더 이롭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성격이 다른 아이들은 저마다 필요한 것도, 원하는 것도 다를 것이다.
공평을 추구하며 한 명이 사탕을 가지면, 다른 한 명도 억지로 사탕을 받게 되곤 하는 것이 보육원의 환경이었으니 그보다는 차라리 넉넉한 재정을 지원해 아이들 개개인에게 어울리는 선물을 선생님들이 직접 고르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두 사람에게 다른 고민이 찾아왔다.
“얼마 하지…….”
두 사람이 머리를 마주 대고 고민하는 것은 금액이었다. 어쭙잖은 금액은 사용처에 대한 고민만 늘릴 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을 알고, 그렇다고 큰돈을 선뜻 쾌척하기에는 원장이 부리나케 전화를 걸어 날카로운 잔소리만 할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 고민하던 희찬이 결국 아아아, 탄식을 뱉으며 벌러덩 몸을 뒤집었다. 도준은 희찬의 티셔츠 안으로 손을 밀어 넣어 그의 맨들맨들한 살결을 매만졌다.
“그냥 가볍게 할까?”
“가볍게 얼마.”
“한 1억……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둘이서?”
“아니, 각각.”
희찬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도준을 쳐다봤다.
200원이 아쉬워서 자판기 앞에서 징징대던 우리였는데, 언제 이렇게 커서 1억이 가벼운 돈이 되었을까.
쉬운 돈은 아니었지만 어려운 돈도 아닌 그 1억의 금액에 희찬이 피식, 웃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정확한 수치로 무언가를 판가름 할 수 있는 지금, 도준의 성장과 여유가 훨씬 더 크게 와 닿았다.
“자기, 진짜 눈부신 성장을 했구나.”
“말투 징그럽다.”
“자기는 도저히 틈을 주지 않는구나.”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할 거면 지금 후원계좌 찾아보고.”
도준이 희찬의 정수리에 대고 딱딱딱, 치아를 부딪쳤다. 덕분에 머리가 웅웅 울리는 느낌이라, 희찬이 진저리를 치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래, 좋아.”
반평생이 넘는 시간을 보낸 곳에 1억은 아깝지 않다.
“어린이날마다 선물 보내 주는 것도 괜찮겠다. 크리스마스 선물은 이한 그룹에서 보낸다고 하니까.”
“응, 그러자.”
희찬의 의견이 대견했다. 도준은 흔쾌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희찬의 부드러운 볼을 쓰다듬었다.
희망원 홈페이지에 접속한 도준이 어렵지 않게 후원계좌를 찾았다. 두 사람은 같은 화면을 띄워 둔 채로 금방 돈을 입금했다.
그렇게 돈을 입금한 후에는 순식간에 몰려오는 뿌듯함에 잠식되어 두 사람의 입꼬리가 둥근 포물선을 그렸다. 어느덧 어엿한 어른이 되어서 살던 곳에 기부도 다 한다. 예전에도 하려면 얼마든지 했겠지만, 이제야 이런 것을 한다는 것도, 적지 않은 돈을 어렵지 않게 쓸 수 있다는 것도 하나 같이 참 새로운 기분이었다.
“밥 먹을까?”
“좋아. 파스타 먹자, 나 파스타 먹고 싶어.”
희찬이 다리를 달랑거리며 애교를 떨어 댔다. 귀염성이 짙은 목소리에 도준이 피식 웃으며 희찬의 옆에 같은 모양으로 발라당 드러누웠다.
“어떤 거?”
“나! 페스카토레!”
“나는 알리오올리오. 시킬래, 해 먹을래?”
“해 먹는 거 귀찮고 오래 걸리니까 시켜 먹자.”
주제를 정한 두 사람은 금방 다시 엎어져 누워 같은 화면을 들여다봤다. 두 사람이 사는 고급 빌라 입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홈서비스 어플을 켠 두 사람은 주저하지 않고 ‘양식’ 탭을 눌러 각자가 좋아하는 파스타를 주문했다.
이렇게 주문하면 입주민 전용 라운지에 있는 식당에서 전문 셰프가 직접 요리를 해다 주는 홈서비스를 두 사람은 최근에야 알았다.
며칠 전, 먹을 것을 잔뜩 사서 집으로 들어오는 도준과 희찬에게 관리사무소장이 말을 걸었었다. ‘홈 서비스도 있는데 왜 계속 밖에서 음식을 사 오는 거냐’고. ‘혹시 서비스 품질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거면 고객 소리함도 있다’고. 그제야 두 사람은 부랴부랴 홈서비스 어플을 깔아 신세계를 맛봤다.
역시, 사람은 놀던 물에서 놀아야 한다고, 이런 서비스는 상상도 하지 않고 살다 보니 당연히 모든 것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만 생각했었다.
“20분 걸린대.”
“대박이다. 아, 맛있겠다.”
희찬이 몸을 다시 데굴 굴려 도준의 너른 가슴을 베고 누웠다. 천장을 보고 누운 채로 다리를 세우고, 반대편 다리를 무릎에 올린 희찬의 발끝이 달랑거렸다. 상쾌한 기분이 여실히 드러나는 그의 행동에 도준도 기분 좋게 웃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다 침대 위에 나란히 놓인 휴대폰 중 하나가 지잉-, 지잉-. 시끄럽게 진동을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도준은 제게로 온 전화인 것을 알고 퍼뜩 인상을 찌푸렸다.
원장님
원장은 그새 두 사람이 보낸 돈을 확인한 모양이었다.
“어, 원장님 전화 와. 이거 벌써 알림 갔나 봐.”
“원장님 진짜 부지런하시다, 그새 알림을 봤다고?”
“나 받기 싫어. 네가 받을래?”
“네가 받아. 너한테 전화 온 거잖아.”
평소라면 반갑다며 전화를 받았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분명 ‘무슨 돈을 그렇게 많이 보내냐’며 득달같이 잔소리를 할 것이 뻔했다. 그리고 그런 잔소리는 웬만해서 피하고 싶은 두 사람이라 전화를 서로에게 미루기만 했다.
그러다 전화가 뚝 끊겼다.
“어, 끊겼다.”
순식간에 편안한 표정을 되찾은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민망한 낯을 보였다.
하지만 안심하기는 일렀다. 이내 원장은 희찬에게 전화를 걸어 그가 받을 때까지 집요하게 진동을 울려 댔다. 결국 전화를 받은 것은 희찬이었다. 희찬은 스피커 모드로 통화를 전환해 함께 잔소리를 듣는 방법을 선택했다.
아무튼 뭐라도 같이하기로 했으니, 혼나는 것도 같이 혼나는 게 진정한 연인이지 않나, 그런 희한한 논리도 함께였다.
― 야, 너희는 돈이 이렇게, 어?
“그냥 쓰셨으면 좋겠어요, 효도하는 거예요.”
― 효도를 겨우 이만큼만 해?
어라, 잔소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틀었다.
“네?”
― 더 있으면 더 보내, 안 그래도 이번 달 보수 공사해야 하는데 고맙다.
능청스러운 원장의 목소리는 어제처럼 향수에 젖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느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원장은 한껏 날카로운 목소리로 틱틱거리며 그 아래에 애정을 깔고 표현했다.
“아니, 언제는 우리 먹고 쓰는 데에만 집중하라고 하셨잖아요.”
도준이 목소리를 내자 수화기 건너편에서 허, 헛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곧장 ‘전화는 받지도 않더니 바로 옆에 있었냐’는 매서운 잔소리가 쏟아졌다. 도준은 진저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희찬의 품에 파고들었다.
― 그래서 내가 선물을 하나 할까 해. 너희한테 선물일지는 모르겠는데.
“어떤 거요?”
― 이거 기자한테 얘기할까 봐. 너희가 기부했다고.
“아.”
보이지 않는 선행을 하고 싶었던 마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기자에게 연락하겠다는 말이 반가운 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시선을 마주하고 눈알을 같은 방향으로 굴렸다.
하긴, 숱한 연예인들의 기부 소식이 기사로 터지는 일도 허다하니 괜찮으려나. 그러다가도 괜히 생색을 내는 건 아닐까, 그런 걱정이 들어 두 사람은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 그냥 해. 좋은 거, 잘한 거 좀 알리고 살아. 너희 잘하고 좋은 건 너무 안 알리더라.
“그래요?”
― 그래. 내가 너희 데뷔 때부터 기사를 다 모아 놨잖아. 너무 축약돼서 전달되고 있어. 너희 착한 거, 그런 거 좀 널리 알려. 아무튼, 나는 기자한테 알릴 거니까 기사 터져도 놀라지 말고.
“어, 어. 원장님.”
마치 통보를 하는 것처럼 두 사람의 의견은 듣지도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마친 원장은 금방 전화를 끊으려는 양했다. 그런 원장을 도준이 다급하게 붙잡았다.
“기사 내시는 건 괜찮은데, 혹시라도 기자가 저희가 무슨 인연이 있냐고 물어보면…….”
도준이 말하려는 건 다른 게 아니었다. 부모 없는 고아로 자란 것이 부끄러운 적은 없었으나, 그래도 더 이상 사람들의 동정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으레 그렇듯 항상 ‘고아’라는 말만 하면 당사자는 원하지도 않는 동정을 함부로 건네곤 했으니 말이다.
그건 희찬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숨겨 달라는 말을 하려 했는데.
― 야야, 알아. 에이, 내가 그 정도 눈치도 없을까 봐?
수화기 너머에서는 상당히 기분이 상한 듯한 원장이 시큰둥한 목소리를 냈다. 그에 두 사람이 환하게 웃었다. 역시 굳이 짚을 필요는 없었던 모양이다.
“혹시 모르잖아요.”
― 나도 너희가 무슨 이미지로 사는지, 뭘 숨기고 사는지 정도는 알아. 이것들이 나를 아주 뒷방 늙은이 취급을 하네? 그냥 선행이라고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결국 그 뒤로도 한참이나 잔소리를 들은 후에야 통화가 끝이 났다. 통화를 마친 두 사람은 혼이 쏙 빠진 낯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음식이 문 앞에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
핼쑥했던 희찬의 얼굴에 금세 웃음이 피었다. 방금까지 귀가 먹먹하도록 들은 잔소리는 제 것이 아니었다는 것처럼, 용수철 튕기듯 몸을 일으킨 희찬은 후다닥 현관으로 달려 나가 뜨끈한 파스타 두 접시를 들고 들어왔다.
먹음직스러운 식사를 하는 동안 두 사람은 앞으로의 스케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먼저 영화로 개봉하는 ‘눈부신 항해’는 모든 오프라인 행사가 취소되었다는 소식이 있었다. 도준의 영화 촬영과 희찬의 드라마 촬영이 동시에 진행되다 보니 도저히 두 사람과 행사장의 시간을 맞출 수 없었던 것이 큰 이유였다.
대신 팬들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 모든 관객들에게 도준과 희찬의 사인이 인쇄된 스페셜 티켓을 증정한다고 했다. 앞면에는 영화 포스터가, 뒷면에는 영화가 상영된 날짜, 시간, 영화관의 이름, 그리고 두 사람의 작은 인사말과 사인이 인쇄된 티켓 시안은 보기만 해도 소유욕을 불러일으키는 세련된 디자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도 이거 갖고 싶다.”
“달라고 하면 안 줄까? 우리도 가서 봐야 하나?”
“하루 보고 올까?”
“괜찮을 거 같아. 아, 오늘 같이 쉬는 날 딱 개봉했어야 하는데.”
희찬이 아쉬운 듯 입술을 댓 발 내밀고서 다리를 까딱거렸다. 포크를 돌돌 말아 한 입 가득 파스타를 넣으면서도 아쉬운 것은 가시지 않는지, 여전히 삐죽거리는 모양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너 스케줄 좀 빨리 끝나는 날 심야라도 보러 가면 되지. 뭘 그렇게 삐죽거려.”
“아쉬워서 그러지. 너는 아쉽지도 않아?”
뾰족한 희찬의 질문에 도준은 그저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실 왜 아쉬운지 이해가 어려웠다. 우리는 같은 꿈을 가졌고, 그 꿈을 이루었고, 행복한 생활을 하는 중이었으니 약간의 피해가 있다 하더라도 그게 아쉬움을 안길만큼 크지 않았다.
무엇보다 볼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조조든, 심야든 시간이 맞을 때 같이 가면 될 일이었으니 딱히 못 할 것이라는 아쉬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밥을 먹던 희찬이 곧장 포크를 내려놓고 도준의 볼을 아프게 꼬집었다. 누구는 저와 영화를 본 후에는 같이 밥을 먹고, 커피도 한 잔 마시면서 느긋하게 드라이브까지 하고 싶은데 말이다. 이도준은 정말로 ‘영화’만 생각하는 것 같아 그게 못내 얄미웠다.
“아파, 아파! 놔!”
“너. 내가 시간 된다고 하는 날 무조건 스케줄 빼. 알겠어?”
희찬이 매서운 눈빛으로 도준의 눈앞에 가지런히 손가락을 들이밀고서 엄포를 놓듯 나무랐다. 그에 도준이 뜨겁게 열이 오른 볼을 매만지며 억울한 눈빛을 보였다.
“그거 갑질이야, 어떻게 그래?”
“이게 꼬박꼬박 말대꾸야? 내가 진짜로 빼라고 하겠냐? 그냥 알겠다는 대답이 필요한 거라고.”
결국 도준이 알겠다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전히 잘 모를 희찬의 포인트였지만, 아무튼 일단은 희찬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제야 희찬이 만족한 듯 두 손을 탁탁 털며 다시 포크를 쥐었다. 스파게티 면을 돌돌 예쁘게 말아 앙 벌린 입 안으로 밀어 넣은 후에는 살랑살랑 고개를 까딱거리며 입 안에서 퍼지는 행복을 만끽했다.
*
희찬이 스케줄을 간 어느 오후, 도준은 한참을 거울 앞에서 서성거리며 옷을 골랐다. 뭘 입어도 태가 나는 몸이라는 것은 진작부터 인정하는 바였지만, 오늘은 괜히 조금 더 꾸미고 싶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을 들여 예쁘게 꾸민 후에는 짧은 머리와 씨름했다. 평소에도 머리가 긴 편은 아니었지만, 역할 때문에 아주 바짝 짧아진 머리는 어떻게 만져도 마음에 들지 않아 도준이 심통을 부렸다.
아무래도 도준은 자신이 꾸며도, 꾸미지 않아도 그저 화려하다는 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당차게 집을 나선 도준은 곧장 백화점으로 향했다. 오늘 저녁에는 희찬과 함께 저녁을 먹고, 심야에는 그렇게 벼르던 ‘눈부신 항해’ 영화를 보기로 했다. 그 후에는 강변에서 드라이브를 하며 여유를 만끽하기로 했다.
“어서 오십시요.”
“안녕하세요. 이전에 전화로 주문했었는데요.”
“아, 고객님 제품 바로 준비 도와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그 설레는 데이트 전에, 도준은 작은 선물을 사고 싶었다. 도준이 성큼성큼 걸어 향한 곳은 유명 브랜드의 액세서리 매장이었다. 화려한 보석이 빛을 내는 장식장은 그보다 더 화사한 조명이 여러 가지 액세서리들을 비추는 중이었다.
찬찬히 장을 둘러보는 도준의 입가에 행복이 피었다. 행복은 도준의 근사한 낯과 만나 눈앞의 그 어떤 화려한 보석보다 더욱 다채로운 빛을 내는 중이었다.
그런 도준의 눈앞에 두 개의 반지 케이스가 들이밀렸다. 자신의 시야를 가로막는 케이스를 본 도준이 눈을 들어 직원과 시선을 마주했다.
“먼저 주문하신 반지 여기 있습니다.”
도준은 희찬이 없는 동안 부지런히 반지를 주문했었다. 커플링을 맞추고 싶다는 희찬의 말을 허투루 넘길 생각은 조금도 없었고, 이왕 선물하는 거 가장 예쁘고 비싼 걸로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고르고 고른 심플하지만 화려한 디자인의 반지 안쪽에는 상징과도 같은 ‘061748’을 각인해 달라 요청했다.
자신의 안목을 마주한 도준은 이전보다 훨씬 짙은 미소를 피우며 반지를 세심하게 살폈다.
“오, 오. 예쁘게 잘 나왔네요.”
“각인 요청하신 것도 안쪽에 하자 없이 예쁘게 나왔어요.”
“그러네요.”
“상자 안쪽에 보증서 넣어 두었습니다. 보증기간 확인하시고, 또 필요하신 거 있으실까요?”
“제가 그냥 조금 더 둘러볼게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도준은 희찬에게 잘 어울릴 팔찌까지 고른 후에야 모두 계산을 마치고 매장을 벗어났다. 느지막한 시간에 움직였더니 백화점 내부에서 금방 폐점 시간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로 위층에 있는 라운지 식당으로 향하는 도준의 시선은 줄곧 작은 쇼핑백에 꽂혀 있었다.
백금의 하얀 반지는 희찬에게 필히 잘 어울릴 것이다. 그 새하얗고, 섬섬옥수보다 고운 손가락에서 자신의 빛을 찬란하게 낼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반지를 낀 도준은 반지를 볼 때마다 희찬을 떠올릴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매시간 연결된 것처럼 사랑을 그릴 것이다.
그게 그렇게 행복했다.
“준아!”
먼저 식당에 도착한 희찬이 예약된 룸에서 나와 도준을 반겼다. 도준은 제게로 달려오는 희찬을 거뜬히 받아 내고서 싱긋 웃었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방금 왔어. 손에 뭐야?”
희찬이 환하게 웃다 말고 허리를 꺾어 도준의 손에 들린 작은 쇼핑백을 들여다봤다. 도준은 희찬이 무언지 제대로 알아채기도 전에 얼른 쇼핑백을 허리 뒤로 감추었다.
“이따가 보여 줄게.”
“그래, 배고프다. 음식은 내가 그냥 코스로 시켰는데 괜찮지? 영화 시간까지 시간 좀 남았더라고.”
“음식점 영업시간 괜찮은가?”
“괜찮대!”
두 사람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예약한 방으로 향했다.
음식은 애피타이저부터 아주 진수성찬이었다. 역시 한번 시간을 내어 이런 곳을 올 때가 아니면 제대로 된 식사는 하지 못하는 기분이라, 두 사람은 거창하게 나오는 음식이 마음에 들어 연신 싱글벙글 웃었다.
상대가 좋아하는 음식을 접시에 얹어 주고, 그러다가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은 상대의 것도 뺏어 오며 즐겁게 식사를 하는 두 사람이 나누는 얘기는 스케줄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희찬은 일전에 말다툼을 했던 스태프와 원만하게 합의를 봤다며 최근엔 ‘형, 동생’으로 서로를 부르며 아주 친하게 지낸다고 했다.
과연 장희찬다운 결론이었다.
도준은 빙긋 웃으며 자신이 영화 촬영장에서 겪는 일들도 낱낱이 알려 주었다. 도준을 굴리고, 또 굴리던 감독이 최근 도준의 끈기에 못 이겨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도준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은 희찬의 가슴을 크게 울렸다.
역시 이도준, 근성으로는 어디서 뒤지지 않는 그다웠다.
오손도손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컨디션을 생각하다 보니 금세 식사도 끝이 났다. 어느새 성큼 다가온 영화 상영 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나던 희찬은 겉옷을 챙겨 입으며 작은 쇼핑백을 소중하게 챙기는 도준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거 뭔데, 왜 자꾸 안 보여 줘.”
“이따가 영화관 올라가서 보여 줄게.”
“아 뭔데!”
“기다려. 기다리면 더 행복해질 거야.”
자꾸만 시간을 미루는 도준의 모습에 희찬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어차피 줄 거, 미리 주면 더 좋을 텐데 그놈의 ‘이도준의 시간’은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차피 제시간이 오지 않으면 절대로 행동하지 않을 도준이라, 희찬은 마뜩잖은 마음을 머금은 채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예매한 영화표와 함께 스페셜 티켓까지 손에 쥔 희찬은 뾰로통했던 것도 모조리 잊고 즐겁게 웃었다. 영화 포스터도 마음에 들게 나와 행복한 와중이었는데, 스페셜 티켓도 시안보다 훨씬 예쁘게 나온 것이 흡족해 도준의 몫까지 두 장을 한 번에 쥐고 사진을 찍었다.
영화가 시작되기 직전 조명이 껌껌하게 암전된 후에야 자리를 찾아 들어온 두 사람은 맨 뒷줄 가장 끄트머리 자리에 앉아 웅장하게 울리는 OST를 들었다. 이윽고 스크린을 가득 메우는 커다란 영화 로고가 현란하게 움직이며 사람들의 시선을 홀렸다. 그를 보는 희찬은 가슴이 뻐근해지는 감동을 느끼며 편안하게 턱을 괴었다.
한때는 이도준과 함께 영화를 찍는 게 꿈이었다. 여전히 도준과 함께 촬영한 영화는 전무했지만, 어쨌든 공동 주연의 타이틀을 건 영화가 상영되는 것만으로도 꿈을 이룬 듯한 행복이 도사렸다.
불쑥 도준이 희찬의 손을 잡아챘다. 도준에게 붙잡힌 왼손을 내버려 뒀던 희찬은 자신의 네 번째 손가락에 알 수 없는 딱딱한 것이 끼워지는 이질적인 느낌에 도준을 돌아봤다.
희찬의 손가락에는 예쁜 반지가 영화관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중이었다.
희찬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도준을 바라봤다. 반지를 선물한 이도준은 이제 와서 쑥스러운 건지, 시선을 스크린에 두고서 두 뺨을 조금씩 붉게 물들이는 중이었다.
그런 도준과 자신의 손가락을 몇 번이고 번갈아 살피던 희찬이 눈부시게 환한 미소를 띠었다. 아무리 집요하게 쳐다봐도 자신을 봐줄 생각이 없는 듯한 도준의 모습에 희찬이 도준의 귓가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희찬의 가지런한 숨이 귓가에 닿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극적이라, 도준이 어깨를 움츠렸다.
“나랑 결혼해 줘서 고마워, 도준아.”
담담하지만 두근거림이 그대로 전해지는 희찬의 말에 도준이 고개를 푹 조아렸다. 결혼. 감히 상상도 하지 않았던 것이라 더욱 크게만 닿았다. 도준은 제 손을 쥐고 손가락을 부드럽게 매만지는 희찬의 애정 어린 손짓에 숨을 크게 들이켰다.
“나랑 오래오래 행복하자.”
“그거 말고, 우리 매일 하는 말. 그거 해 줘.”
수줍게 건넨 고백이 거절당했다. 도준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희찬을 마주하고서 눈썹을 씰룩거렸다.
우리가 매일 하는 말.
사랑한다는 말을 원하는 걸까. 아니, 장희찬은 조금 더 특별한 말이 듣고 싶은 것일 테다. 그럼 내 세상은 너라는 말을 원하는 걸까. 아니, 그것도 싫을 테다.
그럼 뭘까.
도준이 골똘히 머리를 굴리는 모습이 희찬의 눈앞에 펼쳐졌다. 두 사람은 이미 시작된 영화에는 눈도 두지 않은 채로 서로를 오롯하게 바라봤다.
이윽고 도준이 무언가 깨달은 듯 환한 미소를 피워 냈다. 스크린의 밝은 빛에 반만 밝혀진 얼굴이었으나 그 모습은 근사하기 그지없었다.
“우리 계속 철없자, 같이 재밌게 놀자.”
원하는 고백이었다. ‘우리’여서 할 수 있는 ‘철없이 지내자’는 말은 천진하면서도 우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말이라, 희찬에게는 가장 좋은 고백이었다.
이내 두 사람의 입술이 부드럽게 포개었다가 가볍게 떨어졌다.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극장에는 꽤 많은 관객이 있었고, 덕분에 제일 뒷자리, 아주 구석진 곳에서 이루어지는 스킨십이어도 그저 조심스러웠다.
두 사람의 입술이 같은 모양으로 움찔거렸다. 서로를 향해 ‘사랑해’ 세상에서 가장 흔하지만, 가장 어려운 세 글자를 건넨 두 사람은 동시에 시선을 돌려 스크린을 응시했다.
스크린 속 해인과 인수도 서로에게 사랑을 전하는 장면이 이어졌다. 해인과 인수의 아래에는 나란히 ‘주연 이도준, 장희찬’ 그토록 바라던 이름이 자막으로 나오는 중이었다.
내가 헛것을 본게아니라면 오늘킹짱 눈부항보러왓음
⤷ 헛것아님나도봄
⤷ 나도봄 ㅠㅠㅠㅠㅠㅠ 재밋게 보고 가라고 아는척 안함
* * *
킹짱 진짜 만화같이 생겼더라 실물 처음 봤어ㅠㅠ
⤷ 개부럽다..
* * *
나 머글인데 어제 영화관 갔다가 이도준 장희찬 봄 다 가리고 왔는데 안 가려지는 아우라가 있음ㅋㅋㅋ 괜히 킹도준 짱희찬 하는 게 아니더라 그냥 사람이 아니던데?; 그리고 ㅈㄴ친해보였음
⤷ 당연함 현실임
⤷ 부러워서 짜증난다
***
질척하게 타액이 섞이는 소리가 온 공간을 빼곡하게 메웠다.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상대를 거칠게 탐하며 이제껏 참았던 욕망을 한껏 드러냈다. 도준의 손이 희찬의 티셔츠 속으로 불쑥 침범하자 희찬은 도준의 목덜미를 물고 야릇한 신음을 냈다.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길 반복하는 와중에도 두 사람의 손은 거침없이 상대의 몸을 익혀 갔다.
후끈한 열기가 삽시간에 공간을 데웠다. 덮쳐 오는 뜨거운 온도에 가쁜 숨을 터뜨린 두 사람은 침실로 가지도 못했다. 힘으로 상대를 밀어붙이고, 상대의 힘에 밀리기를 반복하던 두 사람이 동시에 소파에 풀썩 쓰러졌다.
더듬더듬 희찬의 가슴을 어루만지는 도준의 손이 뜨겁다. 단단한 근육을 부드럽게 문지르다가 수줍게 솟아오른 돌기를 건드리니 희찬의 허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도준의 허리에 올라타, 그의 어깨를 쥐고 허리를 놀리며 도준을 자극하는 희찬의 얼굴에 새빨간 홍조가 앉았다.
도준은 피식, 터지는 웃음을 애써 감추지 않고 희찬의 허리를 어루만지며 티셔츠 속으로 머리를 밀어 넣었다. 두근두근, 가파르게 뛰는 심장의 고동이 생생하게 들리는 듯했다. 도준은 탐스러운 희찬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혀를 놀려 그의 돌기를 거침없이 탐했다.
“으응……. 흐음, 아…….”
성대를 울리는 희찬의 신음 소리가 자극적이다. 도준의 입술이 닿는 자리에 뜨거운 열꽃이 피는 듯했다. 열기가 남아 살갗을 파고들어 기어코 핏줄을 터뜨리는 듯한 감각에 뇌가 뜨겁게 익는 것 같았다.
오래간 도준에게 붙잡혀 있던 희찬이 문득 제 사타구니에 닿는 도준의 단단한 페니스를 느꼈다. 얇은 면바지 위로 불룩 솟아 우람한 형태를 드러낸 페니스의 열기가 제게까지 전해지는 듯했다.
공중에서 얽혀 든 시선에 열망이 가득 읽혔다. 서로를 향한 뜨거운 사랑을 담은 눈빛은 이글거리는 불꽃이 파바박, 요란하게 튀는 듯했다. 이내 희찬이 도준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았던 몸을 물려 소파 아래로 내려갔다. 무겁게 짓누르던 희찬의 무게가 사라지자, 도준이 의아한 눈으로 희찬을 바라봤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희찬은 도준의 시선에 응하지 않고 곧장 손을 뻗어 도준의 사타구니를 움켜쥐었다. 희찬이 무얼 하려는지 정확하게 파악한 도준은 허리를 느슨하게 풀고 앉았다.
그게 신호였다. 희찬은 느릿하게 움직이던 손을 바쁘게 놀려 도준의 지퍼를 풀어내고 그의 우람한 페니스를 꺼내 두 손으로 쥐었다. 뜨거운 열기를 머금은 페니스에 두툼한 핏줄이 울룩불룩 솟아 있는 형태가 가히 대단했다. 주인만큼 잘생긴 페니스가 꺼떡거리며 춤을 추는 모양에 희찬이 피식, 얕은 웃음을 터뜨렸다.
“우읍…….”
희찬의 뜨거운 입김이 페니스에 닿았다. 마치 용암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에 도준이 저도 모르게 인상을 한껏 찌푸렸다. 이내 뜨거운 입 안에 페니스가 갇혀 버렸다. 말랑한 살덩어리가 귀두를 훑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기둥을 건드리는 것이 적나라하다. 도준은 저도 모르게 희찬의 머리를 움켜쥔 손에 힘을 실었다.
목구멍을 열어 기다란 목 안으로 도준의 페니스를 받아들인 희찬이 조금씩 머리를 움직여 삼켰다가 뱉어 내기를 반복했다. 목 안으로 깊이 찌르고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는 페니스는 점점 크기를 더했다.
혀끝에 힘을 주고 귀두 끝을 할짝거리자 도준의 엉덩이가 바짝 오므라들었다. 예민한 곳을 집요하게 핥아 올리는 희찬이 짓궂다. 치켜뜬 눈을 도준에게 꽂은 희찬은 빨간 입술을 열심히 움찔거리며 최선을 다해 입을 놀렸다.
“흐읍, 아…….”
“후윽, 욱……. 웁……!”
참을 수 없는 자극이 도준의 이성을 죽였다. 도준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튕겨 페니스를 내다 꽂았다. 희찬의 울대가 불룩 솟았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 아래 기다란 목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새빨간 입술이 오므라졌다가 파하고 커다란 숨을 터뜨리기 무섭게 페니스가 침입했다.
다시 숨통이 막혔다. 전기에 감전된 듯 찌르르, 뇌가 저릴 무렵 끈적한 액체가 목을 적셨다. 거친 숨을 터뜨리며 도준의 페니스를 뱉어 낸 희찬은 입 안에 남은 도준의 정액을 꿀꺽 삼키며 제 입가를 닦아 냈다. 새하얀 정액이 얼룩덜룩 묻은 빨간 입술을 본 도준은 이마에 불끈 힘줄이 솟는 것을 느꼈다.
“우악!”
벌떡 일어난 도준이 희찬의 팔을 우악스럽게 붙잡고 잡아당겼다. 큰 몸이 휘청거리며 소파에 풀럭 넘어지자 한 손에 바지를 벗긴 도준은 어느새 번들거리는 희찬의 구멍에 제 페니스를 대고 비볐다.
뻐끔거리는 구멍이 벌어졌다가 오므라지며 도준의 페니스 끝을 자극했다. 도준은 뜨거운 숨을 가다듬으며 페니스 뿌리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로 희찬의 탄탄한 엉덩이를 쥐자 희찬이 허리를 비틀었다.
금방이라도 비집고 들어올 듯한 페니스는 좀처럼 안으로 들어오지를 않았다. 안달이 난 희찬이 허리를 살살 흔들며 도준을 돌아봤다. 한껏 여유가 드리운 도준은 느긋하게 웃는 중이었다. 괜히 약이 올라 인상을 찌푸리자, 도준이 우악스럽게 희찬의 페니스를 쥐었다.
“아아, 하지 마…… 악!”
희찬의 애원하는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퍽, 도준이 허리를 처박았다. 비좁은 구멍을 우악스럽게 벌리고, 한 번에 끝까지 침범한 페니스가 버겁다. 일순 온몸을 채우는 묵직함에 희찬이 버둥거리며 소파 끄트머리를 부여잡았다.
꿀렁거리는 여린 속살이 페니스를 휘감았다. 뜨거운 속은 도준이 움직이지 않아도 스스로 움직이며 자극을 찾는 듯했다. 살금살금 허리를 빼었다가, 한 번 더 세게 처박았다. 희찬의 몸이 한껏 뒤로 젖혔다가 다시 푹 고꾸라졌다.
“아악, 아! 후윽, 흡! 흑……. 아! 하악, 흑!”
두 손으로 단단하게 희찬의 허리를 부여잡은 도준이 본격적으로 퍽퍽 치받았다. 두 사람의 은밀한 부위가 부딪치며 내는 야릇한 소리가 빼곡하게 들어차고, 거친 숨이 어지럽게 뒤엉켜 그렇지 않아도 뜨거운 집 안의 열기를 한층 더 데웠다.
무심한 듯 집요하게 전립선을 건들고, 들어와서는 안 될 곳까지 거침없이 진입한 페니스는 아무렇게나 속을 헤집었다. 빠져나갔다가 들어오며 포만감을 안기다가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쾌락을 전하는 몸짓에 시야가 암전되었다가 돌아오는 듯한 환상이 보였다.
철썩, 철썩.
고환과 고환이 부딪치며 더해지는 감각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솜털까지 빠지지 않고 쭈뼛 서는 듯한 서늘한 감각이 도사렸다가, 적나라한 감각에 지배된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도준의 몸짓에 희찬의 커다란 페니스가 주체 없이 꺼떡꺼떡 춤을 췄다.
덜덜 떨리는 희찬의 몸을 부여안고, 엉덩이에 힘을 줘 강하게 처박는 도준은 희찬의 목덜미에 진한 키스를 남겼다. 단단한 뼈가 도드라진 뒷덜미를 강하게 빨아들여 자국을 남기고, 가지런한 척추를 따라 입을 맞추고, 손으로는 가슴을 희롱하며 그가 희열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왔다.
덕분에 비죽비죽 눈물이 치밀었다. 쾌락에 잠식당한 전신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온 곳에서 발악을 하며 더 큰 자극을 원했다. 도준은 그런 희찬의 마음을 잘 안다는 듯, 희찬의 페니스를 쥐고 강하게 조였다가 살살 풀어주며 문질렀다.
희찬의 전신에 바짝 힘이 실렸다가 한순간에 축 늘어졌다. 귀두를 꽉 움켜쥔 도준의 손이 떨어지고 몰려오는 허전함에 발을 버둥거렸다.
도준이 피식 웃었다. 페니스를 쭉 빼내어 귀두만 담갔다가, 다시 한 번에 강포하게 밀어 넣으며 동시에 회음부를 꾹 눌렀다.
“헉, 하악! 흡!”
뇌를 찌르는 듯한 짜릿한 감각에 펄떡 뛰었던 희찬의 몸이 바르르 떨리며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잔지진을 일으켰다. 동시에 페니스에서는 새하얀 정액이 힘 있게 분출했다. 새까만 소파 커버에 자극적으로 무늬를 새긴 정액이 색스럽기 그지없었다.
도준은 거칠게 제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선, 희찬의 속에서 페니스를 빼내었다. 불끈거리는 페니스를 몇 번 어루만지자, 금세 하얀 정액이 뿜어져 나와 희찬의 엉덩이와 허리를 더럽혔다. 제가 뿜어낸 정액을 페니스에 비벼 묻힌 도준은 뜨거운 숨을 내뿜었다.
“넣는다.”
“후윽, 응……. 아, 좀만, 살살…….”
이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페니스가 밀려 들어갔다. 이미 길이 난 공간에서 다른 방향으로 길을 내는 페니스는 새로운 자극을 안겼다. 분명 사정을 했음에도 죽기는커녕 오히려 활기를 머금은 딱딱한 페니스는 다시 정신없이 희찬의 속을 헤집었다.
이전보다 훨씬 큰 폭으로 움찔거리며 요동치는 속살이 안기는 느낌이 적나라하다. 뜨겁게 꿀렁거리다가 세게 조이는 속살에 도준이 아랫입술을 잘근 씹어 물었다. 페니스를 잘라 먹을 것처럼 빠듯하게 조였다가 놓아주는 보드라운 살결에 도준이 이를 악물고 희찬을 몰아붙였다.
“흑, 아! 우흑, 윽, 학, 후읍……!”
“후으, 아……. 흣…….”
“으흣, 힉, 아! 도, 준아, 준아……!”
희찬이 쾌락에 젖어 고개를 도리질 쳤다. 온몸을 휘감은 형용 못 할 저릿함에 발끝이 절로 오므라들고, 허리가 팽팽하게 솟아올랐다. 도준의 페니스가 드나들 때마다 희찬의 가지런한 복근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요동쳤다. 함부로 헤집어지는 살결이 허름한 종잇장처럼 갈가리 찢길까 봐 겁이 날 지경이었다.
“읏, 아!”
이내 도준의 엉덩이가 한껏 힘이 실리며 오므라들었다. 희찬의 고개도 동시에 젖혀져 희열을 머금었다. 이윽고 동시에 사정을 맞은 두 사람이 정액을 분출했다. 이미 몇 번이고 사정을 한 탓에 흩어지는 정액은 묽고 희었다.
도준이 거친 숨을 터뜨리며 희찬의 몸 위에 엎어졌다. 들썩거리는 두 사람의 흉통이 탐스럽게 부풀었다가 쪼그라들기를 반복했다. 여전히 희찬의 속에 갇힌 페니스는 꺼낼 생각도 하지 않았다. 희찬도 구태여 몸을 움직여 빼내려 하지 않았다.
도준은 페니스를 넣은 채로 희찬의 몸을 돌려 그와 마주 안았다. 잔뜩 열이 올라 예민한 살갗에 마찰열이 일어 어마어마한 자극을 안겼다. 그래도 움직일 수는 없었다. 이제는 기력이 다한 듯, 희찬을 어루만지는 도준의 손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아, 후으……. 힘들어.”
“응……. 고생했어.”
“아파……. 속이 다 허물어진 것 같아.”
“좋았잖아, 그치?”
“으응…….”
순식간에 몰려오는 나른함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일어설 기력이 없어 여전히 도준의 몸 위에 제 몸을 밀착시킨 채로 누운 희찬이 느릿하게 눈을 끔뻑거렸다.
금방이라도 잠이 들것 같은 희찬의 모습에 도준이 희찬의 등을 부드럽게 다독였다. 토닥토닥 두드리는 손짓이 정성스럽다. 박자에 맞춰 일정한 간격으로 다독이는 손길에 맞춰 숨을 고르던 희찬의 눈꺼풀이 슬금슬금 내려앉더니 이내 옅은 눈동자를 가렸다.
“흐응, 잠들면 안 되는데……. 이거, 이도준 고추 빼야 하는데…….”
도준의 가슴에 입술을 맞댄 희찬이 뭉근한 목소리를 냈다. 아침부터 스케줄로 바빴고, 쉴 틈 없이 저녁을 먹고, 영화를 봤으니 피곤한 것도 당연했다.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서 반짝거리는 반지 위에 입을 쪽, 맞춰 준 도준이 희찬의 눈을 억지로 가리고, 뒤통수를 거머쥐었다.
“자, 희찬아. 자.”
“씻어야 되는데…….”
“자자, 자자.”
희찬의 목소리가 도준의 손짓을 따라 조금씩 사그라지는 것 같더니 이내 아예 사라졌다. 희찬은 차분하게 오르내리는 도준의 가슴 위에 제 몸을 딱 붙인 채로 까무룩 잠들었다. 희찬의 등을 고르게 다독거리던 도준의 손이 점점 느려졌다. 노곤하기는 도준도 마찬가지라, 그의 눈꺼풀도 천근만근 무거웠다.
도준의 큰 손이 희찬의 뒤통수에 멈추었다. 소중한 보석 쥐듯 희찬의 둥그런 뒤통수를 쥔 도준도 금세 잠들어 고른 숨소리를 내었다.
페니스를 빡빡하게 조이는 달갑지 않은 이질감에 도준이 인상을 찌푸린 채로 눈을 떴다. 평소와 달리 아침부터 몸이 찌뿌둥했다. 눈앞에는 희찬의 예쁜 뒤통수가 있었고, 어느새 옆으로 돌아누운 채 희찬의 등을 꼭 껴안고 잠든 것은 익숙한 시야였다.
하지만 페니스가 답답한 것은 왜일까.
눈을 내려 제 페니스를 본 도준은 저도 모르게 헉, 큰 숨을 터뜨리며 입을 틀어막았다. 허리에 바짝 닿은 희찬의 엉덩이에 갇힌 페니스는 완벽하게 결합되어 옴짝달싹할 수 없을 정도로 잡혀 있었다.
도준이 슬그머니 엉덩이를 뒤로 빼보려 했다. 하지만 빡빡하게 들어맞은 페니스는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도무지 빠질 생각을 하지 않아 도준이 난감한 기색을 피워 냈다.
분명 자기 전에는 희찬을 제 위에 올려 둔 채로 잔 것 같은데 말이다. 서로 몸을 뒤척이고, 희찬이 돌아눕는 동안에도 빠지지 않은 건지, 페니스는 여전히 희찬의 속에 자리한 채였다.
이럴 때는 커다란 페니스가 조금 난감했다. 다른 남자들의 그저 그런 사이즈였으면 벌써 빠졌을 텐데 말이다.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아 올린 도준은 다시 희찬을 안은 팔에 힘을 주고, 조심스레 엉덩이를 뒤로 빼어 아주 천천히 자신의 페니스를 꺼내려 무던히 노력했다.
희찬이 깨지 않도록 숨을 참고, 천천히 엉덩이를 물리자 희찬의 속살이 덩달아 딸려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희찬이 깰 것이 분명했기에 도준의 모든 행동은 아주 느릿하고 신중하게 진행되었다.
이윽고 뜨거운 희찬의 속에서 빠져나온 페니스에 시원한 기온이 닿았다. 한참 진땀을 뺀 탓에 도준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다 맺혀 있었다.
“후으…….”
희찬 몰래 숨을 돌린 도준은 희찬이 편하게 잘 수 있도록 내버려 두고 얼른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미지근한 물을 맞으며 샤워를 하는 동안에는 아침 메뉴를 생각했다.
최근 몸 관리에 돌입한 희찬은 평소 먹던 것은 마치 꿈에서 본 환상이라는 것처럼 아주 독하게 식단을 관리했다. 단백질의 양을 따지고, 탄수화물의 비율을 따져 가며 기계처럼 음식을 섭취하는 모습은 도준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도준이 관리하는 것을 보고 혀를 내두를 주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희찬을 위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있는 것을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 도준은 체지방에 영향을 주지 않는 만찬을 열심히 고민했다. 각종 신선한 재료와 현미를 섞은 비빔밥을 떠올렸지만, 그건 본인이 원하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
“냉장고에 뭐가 있더라…….”
신선 칸에는 목살이 있었던 것 같고, 소고기 안심 부위도 있었던 것 같다. 최근 제법 피곤한 기색을 보이는 희찬이었으니, 아침부터 고기를 먹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한 도준은 중지와 엄지를 튕겨 ‘딱’ 소리를 낸 후 메뉴를 정했다.
샤워를 마친 도준은 방에서 이불을 끌고 와 희찬의 맨몸 위에 얹어 준 뒤, 하려던 것도 다 잊고 희찬의 예쁜 얼굴을 한참이나 감상했다. 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볼 때마다 새로운 감상을 안기는 희찬의 모습에 도준의 입가에는 포물선이 앉았다.
마지막으로 희찬의 기다란 속눈썹을 손끝으로 톡, 건드려준 도준이 무릎을 짚고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현미를 꺼내 정성스레 씻어 불리는 동안 딱딱하게 언 고기도 실온에 꺼내 녹였다.
적당히 분 쌀을 밥솥에 안치고, 어느 정도 해동된 고기를 잘 달궈진 프라이팬 위에 올리자 치익, 먹음직스러운 소리가 났다. 돼지고기는 충분히 익혀 주고, 소고기는 너무 질기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익히다 보면 금세 맛있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도준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난감한 기색을 드러냈다. 언제 맡아도 향기로운 고기 냄새는 입맛을 되찾은 이후로는 참기 힘든 식욕을 불러오는 탓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런 도준의 등에 맨살이 닿았다. 뒤에서부터 뻗어 온 긴 팔이 목을 얼싸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는 것은 방금 막 일어난 희찬이었다.
“일어났어?”
고기에 집중하느라 희찬이 일어난 줄도 몰랐다. 눈앞에서 맞물려 떨어지는 희찬의 양손을 보던 도준의 눈을 반짝, 일순 부신 빛이 찔렀다. 삽시간에 인상을 바짝 좁혔던 도준은 희찬의 손에 끼워 준 반지에서 낸 빛이라는 것을 깨닫고 빙그레 미소를 피웠다. 손에 쥐었던 집게를 내려놓은 도준이 희찬의 얼굴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그의 턱에 대고 입을 맞췄다.
“배고파.”
“거의 다 구웠어.”
“으응…….”
희찬이 도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서 쪽, 쪽 귀여운 소리를 냈다. 여린 살결을 세게 빨아들였다가, 놓아주며 새빨간 자국이 남은 자리를 혀로 핥자 도준이 어깨를 움츠렸다. 희찬이 얼굴을 파묻은 쪽으로 고개를 꺾고 허리를 비틀며 희찬을 밀어내도 희찬은 집요했다.
도준의 목을 감쌌던 희찬의 팔이 내려와 도준의 허리를 거머쥐었다. 드러난 살결에 대고 질척한 소음을 내며 입을 맞추는 희찬이 도준의 엉덩이에 허리를 바르작댔다. 팽팽하게 부푼 페니스가 엉덩이에 닿는 것을 느낀 도준은 두 눈을 크게 뜨고 희찬을 바라봤다.
어깨에 입술을 묻고서 눈을 치켜떠 도준을 마주한 희찬의 큰 눈에는 뜨거운 욕망이 가득했다.
“위험해, 불 앞이잖아.”
도준이 몸을 비틀며 희찬에게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희찬은 도준을 놓아주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게 손가락을 놀려 한창 타오른 인덕션의 전원을 끈 희찬은 도준의 허리를 꽉 움켜쥔 채로 걸음을 놀려 도준을 식탁 앞으로 데려갔다.
결국 도준이 체념의 의미를 담은 한숨을 푹 쉬었다. 희찬은 제가 느끼는 욕구를 어떻게든 해소하려는 듯했고, 놓아줄 기미는 보이지 않았으니 더 거부해 봐야 시간만 늦어질 것 같았다.
도준이 희찬의 팔 안에 갇혔던 몸을 돌려 희찬을 마주했다. 두 손으로 희찬의 양 볼을 쥐고, 빨간 입술 위에 입을 맞추자 희찬이 샐룩, 예쁘게 웃었다.
“어떻게 할까.”
“가만히 있어, 내가 할게.”
“그래.”
도준의 승낙이 떨어지자마자 희찬은 기다렸다는 듯이 가뿐하게 도준을 들어 식탁 위에 앉혔다. 의자에 있는 방석을 식탁에 올려 허리가 닿는 부분에 깔아 주더니, 도준을 눕혀 손쉽게 그의 바지까지 벗겨 버렸다.
그저 빠르게만 움직이는 희찬의 손이 조급해 보였다. 도준은 낮은 웃음을 터뜨리며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고서, 희찬의 얼굴을 매만지며 여유로운 음성을 냈다.
“희찬아, 뭐가 이렇게 급해.”
“나……. 고추 터질 거 같아.”
“무서운 소리를 예쁘게 하네.”
도준이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답답해 보이는 희찬은 도준의 어깨를 눌러 눕힌 후, 도준의 가지런한 다리를 제 어깨에 올리고, 딱딱하게 솟아오른 페니스를 그의 구멍에 가져다 댔다. 단단한 끄트머리가 닿자 도준이 몸을 편하게 뉘었다. 금방이라도 속을 헤집을 것처럼 구멍 주변을 꾹꾹 누르는 뜨거운 몽둥이에 가쁜 숨을 터뜨렸다.
“아, 아읏. 아!”
“좁……아. 아…….”
도준의 탄탄한 허벅지를 움켜쥔 희찬이 천천히 허리에 힘을 주고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페팅도 없이 불쑥 들어오는 페니스가 버겁다. 도준은 저도 모르게 허리에 한껏 힘을 주고서 미간을 좁혔다. 빡빡한 곳에 억지로 페니스를 밀어 넣으려니 살갗이 쓰렸다.
“아, 안 돼. 넣, 지마.”
도준이 희찬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저지했다. 억지로 벌리고 들어오려는 페니스가 움직일 때마다 마찰이 일어 불편한 고통이 도사린 탓이었다.
“살살, 할게.”
“아……. 천천히.”
“응.”
도준이 다시 몸을 눕혔다. 희찬은 검붉은 핏줄이 도드라진 도준의 페니스 끄트머리에서 조금씩 비집고 나오는 쿠퍼액을 제 페니스에 비벼 바르며 조금씩 허리를 밀어 넣었다.
차츰차츰 안으로 들어오는 페니스는 친절하고 다정했다. 희찬이 보였던 조급함과는 사뭇 다른 행동에 도준도 차분하게 가라앉힌 숨을 고루 내쉬었다. 꽉 다물린 속살이 부드럽게 벌어지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좁은 속을 억지로 벌리고 들어온 페니스는 끝도 없이 자꾸만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흐, 아…….”
“괜찮지.”
“응, 괜찮, 아, 흣.”
“뜨거워. 데일 거 같아.”
“아! 하지, 아, 잠, 아!”
희찬은 가만히 있었지만, 도준이 자지러졌다. 희찬의 어깨에 걸친 발이 한껏 오므라들더니 이내 식탁을 부여잡은 도준의 손등에 서슬 퍼런 핏줄이 불끈 솟아올랐다. 희찬이 장난스레 아랫배에 힘을 주자 탄력을 받은 페니스가 도준의 속에서 꺼떡거리며 튀더니 여린 살결을 자극한 탓이다.
도준의 허벅지가 잔뜩 조여들다가 전신이 파들거렸다. 도준의 불끈 솟은 복근을 손바닥으로 어루만진 희찬이 슬그머니 허리를 뺐다가 다시 강포하게 처박았다. 도준의 허리가 펄떡 뛰었다가 가라앉으며 탄성과 같은 신음을 터뜨렸다.
고개를 한껏 젖힌 도준의 울대가 들썩거렸다. 도준의 모든 몸짓이 시각적 자극으로 닿는 탓에 희찬도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울대를 울렁거렸다.
부드러웠던 허리 짓에 힘이 실리며 점점 속도가 붙었다. 부드럽지만 힘있게 처박혔다가 도장을 새기듯이 꾹 누른 후에는 다시 빠져나가는 페니스가 점점 거칠어졌다. 희찬의 몸짓에 하릴없이 흔들리는 도준은 허리에 딱딱한 식탁이 닿는 게 못내 불편해 인상을 바짝 일그러뜨렸다.
“아파?”
“으, 아…….”
“잠, 깐만.”
희찬이 도준의 허리를 다시 번쩍 안아 들었다. 덕분에 한 번에 훅 찌르고 들어오는 페니스가 생생하게 느껴져 도준이 기겁하며 희찬을 얼싸안았다.
“흣, 아! 야, 희찬, 찬아.”
“으응, 괜찮아.”
도준을 안은 채로 식탁 위에 올려 둔 방석을 다시 만진 희찬이 도준을 내려놓았다. 도준의 얼굴은 어느새 홍조가 내려앉아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였다. 도준의 속에 밀어 둔 페니스가 꿈틀거리며 착실하게 크기를 키웠다.
도준이 편한 자세를 취할 수 있도록 기다렸던 희찬은 도준의 가슴이 평온하게 들썩거리는 모양을 확인하고 다시 허벅지를 부여잡았다. 천천히 도준의 속을 파고들자 꿀렁거리는 속살이 부드럽게 희찬의 페니스를 머금었다. 이전보다 한결 수월하게 밀려가 내다 꽂힌 페니스는 도준의 속을 달구고, 자극하여 기어코 과한 쾌락을 안겼다.
주먹을 말아쥔 도준의 손이 점점 세게 맞물렸다. 손바닥에 네 개의 초승달이 박힐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쥐었던 도준은 이내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에 젖어 어지러운 신음을 내질렀다. 행위가 거칠어지면 거칠어질수록 희찬의 허리 짓도 빨라졌다.
“아!”
“후으, 아, 흣…….”
“읍, 흣, 후으……. 아흐읏.”
퍽, 퍽 야릇한 소리가 공간을 빈틈없이 메워 갔다. 거친 숨과 어지러운 신음이 복잡하게 얽히며 절정에 치달을 때쯤,
“아, 하읏!”
“흣……!”
비슷한 때에 오르가슴을 느낀 두 사람이 질척한 정액을 뿜어내며 숨을 헐떡였다.
“…….”
가쁜 숨을 쉬는 도준이 허공을 바라봤다. 나른하게 풀어진 시선이 초점 없이 흔들리는 게 퍽 힘겨워 보였다. 희찬이 도준의 속에 갇힌 페니스를 천천히 빼내며 도준의 허벅지 안쪽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준아, 괜찮아?”
“하…….”
도준은 말없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방금까지 속을 가득 메웠던 커다란 페니스가 빠져나가자 속으로 바람이 들어오는 듯한 공허함이 밀려왔다. 뻐끔거리는 구멍 사이로 희찬의 정액이 꿀렁꿀렁 쏟아져 나왔다. 미끈한 액체가 꼬리뼈를 타고 흐르는 감각에 도준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정신을 차린 희찬이 볼을 긁적거리며 도준을 바라봤다. 허공을 맴돌던 도준의 시선이 드디어 희찬을 향했다. 혹시 아침부터 가진 격한 섹스에 허망함을 느끼지는 않을까, 문득 미안함이 몰려와 도준의 손을 거머쥔 희찬이 조심스레 운을 뗐다.
“……씻겨 줄까?”
상냥한 희찬의 말에 도준이 피식 웃었다.
“……고기 다 식었겠다.”
어느새 코를 간지럽히던 먹음직스러운 음식 냄새도 다 사라진 후였다. 두 사람이 소소한 웃음을 터뜨렸다. 끙끙거리는 도준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켜 준 희찬은 자신의 손에 갇힌 도준의 손가락에 정성스럽게 입을 맞췄다. 도준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는 희찬과 같은 모양의 반지가 반짝거리며 빛을 내고 있었다.
그에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언제라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반지 하나 주고받았다고 천년 묵힌 욕정이 불타오르는 것처럼 서로를 탐한 자신들이 새삼스러웠다.
***
<이도준-장희찬, 기부도 넉넉하게! 희망원에 나란히 2억 원 쾌척>
<킹짱의 선한 영향력, 팬들도 기부행렬에 동참!>
며칠 전, 원장이 예고했던 대로 두 사람의 기부에 관한 기사가 떴다. 액수가 낱낱이 공개된 기사는 낯이 뜨거움과 동시에 뿌듯함을 안겼다.
두 사람의 기부 소식이 인터넷에 퍼지기 무섭게 팬들도 여기저기서 기부 릴레이를 펼쳤다. 기부한 금액은 가린 채로 인증샷이 여럿 올라오는 SNS는 도준과 희찬이 끼친 영향력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모습이었다.
그건 두 사람의 가슴을 크게 울리는 일이었다. 자신들의 영향력을 모르고 산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일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게 못내 뿌듯했다.
“으아아아.”
그사이 본격적으로 드라마 촬영에 돌입한 희찬은 늘어지는 탄식을 터뜨리며 찌뿌드드한 몸을 풀었다. 얼마만의 휴식인지, 몇 신이나 쉬지 않고 연달아 촬영하는 바람에 온몸 구석구석이 요란하게 쑤셔 댔다. 목을 오른쪽으로 꺾자, 목 관절이 늘어나며 뚜두둑 묵직한 뼈 소리가 났다. 팔을 쭉 뻗어 어깨 관절을 늘이자 허리에서도 뚝, 뚝 뼈마디 터지는 소리가 났다.
“형, 앞으로 세 시간 정도 쉴 수 있어요. 숙소로 가실래요? 아니면…….”
“나 차에 있을래.”
“차에서 자도 괜찮겠어요?”
“응, 숙소까지 왔다 갔다 하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아.”
촬영장에서 멀지 않은 숙소였지만, 침대에 눕는다고 생각하면 괜히 이것저것 귀찮은 것들이 따라와 부담을 안겼다. 침대에 눕기 전에는 꼭 씻어야 했고, 옷을 벗고 잠시 누운 후에는 다시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를 만져야 했다. 그러면 쉬는 시간은 현저히 줄어들 테니, 차에서 쉬는 것이 백번이고 더 나을 것이다.
차에 오른 희찬은 의자를 뒤로 젖히고 편안하게 누워 한쪽에 내던져진 목 베개를 끼우고 노곤하게 눈을 감았다. 그러다 도준을 떠올리고, 시린 눈을 감은 채로 주머니를 뒤적거려 휴대폰을 꺼내 곧장 도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느 한쪽이 한가해지면,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사람이 바빠지는 이 꼬일 때로 꼬인 타이밍이 마뜩잖다. 희찬은 인상을 가차 없이 구긴 채로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올 도준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왜 안 받아…….”
오늘도 촬영 스케줄이 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그건 저녁이라고 했는데. 아직 스케줄 시간이 되지 않았을 텐데 오래간 전화를 받지 않는 도준 덕분에 희찬의 입에서 짜증 서린 목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반지를 본 희찬이 저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피워 냈다. 공중에 손가락을 펴고, 살랑살랑 움직이자 움직일 때마다 다방면으로 비산하는 빛이 차 안을 예쁘게 물들였다.
희찬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는 도준이 끼워 준 반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촬영을 할 때는 빼내어 주머니 속에 넣어 뒀다가, 컷 사인이 떨어지면 곧장 다시 찾아 끼고는 하는 반지가 햇살을 받아 다채롭게 반짝거렸다.
다이아몬드가 부담스럽지 않게 디자인된 반지는 이도준의 심플한 성격과 퍽 닮아 있었다. 단정하면서도 자신의 미모를 숨기지 못해 기어코 화려함을 뽐내고야 마는 그 반지는 참 우리 둘을 적절히 섞어 둔 듯한 모습이었다.
“이런 건 또 언제 준비했고……. 진짜 예뻐 죽겠어.”
평소에는 느리기만 한 이도준이 한 번 물꼬를 터 주면 마하의 속도로 실행하는 모습이 좋다. 이번에도 누구보다 빨리 반지를 주문하고, 제 손가락에 끼워 준 도준의 행동을 떠올린 희찬은 연신 햇살보다 더욱 다정하고 화사한 미소를 피워 냈다.
― 응, 희찬아.
한 번 전화를 끊고, 다시 걸었을 때야 도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희찬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응, 어디야?”
― 어, 잠시만.
“무슨 잠시만? 집 아니야?”
― 응, 나 집 아니고…….
문득 도준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희찬이 미간을 찌푸리며 전화기를 들여다봤다. 도준의 목소리가 멀어지는 것과 달리 통화 시간은 계속 흐르는 중이었다.
“준아?”
다시 도준을 불렀다. 하지만 도준은 대답이 없었다.
“뭐야.”
피곤함에 시큰둥한 목소리가 절로 나왔다. 희찬은 고쳐 앉았던 몸을 다시 뒤로 물리고, 편안하게 등받이에 기대어 다리를 꼬았다. 까딱까딱 아래위로 성의 없이 움직이는 발끝이 그의 탐탁지 않은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러다 문이 벌컥 열렸다. 드륵, 열리며 쏟아지는 환한 햇살에 깜짝 놀란 희찬이 얼른 몸을 돌려 문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휴대폰을 든 도준이 해사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뭐야?”
희찬이 놀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도준은 희찬에게 대답하기도 전에 가벼운 몸짓으로 얼른 차에 올라 다시 문을 닫았다. 도준이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희찬의 매니저가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 모든 행동은 약속이라도 된 것처럼 지독하게 자연스러웠다.
“뭐냐니까?”
희찬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도준을 바라봤다. 조금 더 환하게 반겨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시큰둥한 희찬의 반응에 도준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긴 뭐야, 여보 보러 왔지.”
희찬이 아예 고개를 90도 각도로 삐딱하게 꺾었다. 분명 ‘여보’라고 말하는 이도준은 반지를 교환한 후 서로를 ‘여보’라 부르기로 한 것을 착실하게 이행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들썩거리는 희찬의 눈썹은 여전히 무언가 받아들일 수 없는 모양이었다.
도준은 마치 조각상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희찬을 응시했다. 지금 장희찬은 시간이 필요해 보였고, 그를 기다려 주려는 마음이었다.
너무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싶었다. 희찬은 갑자기 제 눈앞에 드리운 도준의 모습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질문을 건네었다.
“진짜 이도준이야?”
“희찬아, 많이 피곤해?”
“찔러 봐도 돼?”
도준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희찬이 더듬더듬 손을 뻗어 도준의 우뚝 솟은 콧날 위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말랑한 살이 꾹 누르는 힘에 밀려 들어갔다. 손가락을 뗄 때는 쫀득한 살이 그대로 딸려 올라와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이도준이다. 진짜 이도준이다.
실체를 깨달은 희찬이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마냥 허상 같았던 도준의 모습에 정확한 테두리가 그려지더니 이내 사랑해 마지않을 이도준의 근사하고 화려한 면모가 오롯하게 시야에 들어찼다.
“준아!”
희찬은 곧바로 큰 몸을 튕겨 도준에게 안겼다. 도준은 퍽, 소리 나게 안겨 오는 희찬을 부둥켜안고서 그의 너른 등을 토닥토닥 다독였다.
“나를 못 알아볼 정도로 못 잔 거야? 그렇게 바빴어?”
“진짜 나 보러 온 거야? 웬일이야?”
희찬이 기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도준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메이크업을 한 탓에 희찬의 피부톤과 잘 맞는 파운데이션이 티셔츠에 묻어났지만, 도준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그의 귓가에 쪽, 쪽 입을 맞추었다.
“응? 진짜 나 보러 왔냐니까.”
도준의 품에 안긴 채로 고개를 빼꼼 들어 도준을 올려보는 희찬의 모습이 꼭 한 마리의 살쾡이 같았다. 도준은 어딘가 야무지면서도 귀여운 희찬의 모습에 싱그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겸사겸사. 일도 하고, 너도 보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성스레 매만져 주는 도준의 손길을 느끼는 동안 희찬은 에너지가 차곡차곡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까만 해도 금방이라도 쓰러져 잘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에너지 드링크라도 마신 것처럼 전신에서 힘이 치솟았다.
“여보, 여기 무슨 일 하러 왔는데.”
“아마 너 다음 컷 나랑 하는 거일걸.”
돌아오는 도준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이도준과의 호흡이라니. 촬영하는 드라마는 도준과는 조금도 관계없는 드라마였고, 도준의 카메오 소식 역시 듣지 못했기에 희찬은 얼른 대본을 꺼내 들고 다음 장면을 살폈다.
“이거 너라고?”
희찬이 눈썹을 씰룩거리며 대본을 도준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잠시 대본을 살피던 도준이 환하게 웃었다.
“응, 이거 나야.”
“왜?”
“여보 지원사격 왔어요.”
“악, 대박!”
도준이 맡은 역은 이름도, 분량도 없는 퀵 서비스 배달원이었다. 대사라고는 고작 세 마디는 될까. 이슈 몰이를 하는 것은 퀵 서비스 배달 후 헬멧을 벗고 하는 작은 대사가 다였음에도 기꺼이 달려온 도준은 희찬에게는 그야말로 선물, 그 자체였다.
“보고 싶어서 내가 왔어.”
“완전 보고 싶었어. 아니, 그런데 언제 결정됐어? 왜 안 알려 줬어? 너 스케줄은, 오늘도 촬영 있다고 했잖아.”
“촬영 있잖아, 까메오 촬영.”
세상에 이런 응원이 있을까.
아무리 촬영 스케줄이 한가해졌다고는 하나, 바쁘기는 매한가지였다. 잠시 주어지는 시간은 휴식에 쓰는 것만으로도 부족할 텐데, 그 시간마저 자신을 보기 위해 할애했다는 그의 마음이 내심 고마웠다.
“너 대사도 별로 없는데.”
“뭐 어때. 헬멧 벗고 머리 터는 게 제일 임팩트 있을걸.”
“이도준 자기 잘난 거 알 때 존나 섹시해.”
“말 좀 예쁘게 하래도.”
“으응, 싫어.”
희찬이 짓궂게 웃으며 새침한 눈을 떴다. 여전히 품에 안긴 채로 야살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희찬은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생각보다 훨씬 행복한 모습으로 반겨 주는 희찬 덕분에 도준도 뿌듯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환하게 웃었다.
도준이 희찬의 드라마에 출연을 확정지은 것은 며칠 되지 않은 일이었다. 갑자기 바빠진 탓에 서로의 얼굴을 보는 것이 어려워지고,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이 줄어듦에 따라 피곤함을 해소하지 못하는 것은 비단 희찬뿐만이 아니었다.
도준은 도무지 해소되지 않는 피곤에 그의 촬영 스케줄을 방해하지 않고, 자신의 스케줄에도 피해를 주지 않고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다방면으로 머리를 굴렸었다. 그러던 중 희찬의 드라마 연출을 맡은 감독이 우스갯소리로 ‘도준이 우리 드라마 까메오 할래?’ 물어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배역이 뭔지, 희찬이와는 어떻게 만나는 건지, 그런 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그저 장희찬이 보고 싶었고, 장희찬과 함께 일하고 싶었기에 당장 승낙했다.
그렇게 촬영장에 와서야 대본을 받았다. 어차피 한 신 촬영 후 빠지는 역할이라, 대사를 외울 시간도 크게 필요하지 않았다. 대본을 숙지하다 문득 눈을 돌렸을 때 터덜터덜 힘없이 차로 향하는 희찬을 발견하고 냉큼 희찬에게 온 것이었다.
참, 잘한 결정이지 싶다.
“여보, 잘 거야?”
“아니, 잠 다 깼어.”
“그럼 나랑 밖에 나가자, 오늘 날씨 되게 좋아.”
“그럴까?”
방금까지 조금이라도 더 쉬어 보려 아등바등 발버둥을 쳤었는데, 이도준이 오기 무섭게 피곤이 도망갔다. 역시 이도준을 보지 못해 쌓인 피로였다는 것을 깨달은 희찬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도준이 손을 쫙 펴 희찬에게 내밀었다. 마치 잡으라는 듯한 모습에 희찬이 ‘짝’ 소리 나게 도준의 손을 맞잡고 몸을 일으켰다.
차에서 내려 마주한 사방으로 번진 햇발은 온 세상을 빈틈없이 따스하게 비추는 중이었다. 이어지는 좋은 날에 사람들도 기분이 좋은지 연신 콧노래를 불렀다. 그들의 기분 좋은 상쾌함 역시 이제야 와 닿아, 희찬은 마주 잡은 도준의 손을 꼭 쥐었다.
두 사람은 걸음의 속도를 맞춰 천천히 촬영장 주변을 배회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 밝게 인사를 건네 오는 일이 허다했지만, 두 사람은 부러 손을 뺀다거나, 모르는 척 떨어져 걷지 않았다.
“밥은 먹었어? 며칠 못 본 사이에 살이 좀 빠진 것 같은데.”
“아니, 아직 안 먹었어.”
“저기 가 볼래?”
정면을 바라보던 희찬이 도준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봤다. 잘생긴 손가락에 콕 짚은 곳의 끝에는 왜인지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이 웅성임을 자아내는 중이었다.
“간식 차 왔나?”
“가 볼래? 뭐라도 좀 먹어야지.”
“그럴까. 단 게 좀 당기는 것 같기도 하고.”
두 사람이 방향을 틀어 저벅저벅 걸음을 내디뎠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희찬의 눈은 점점 커졌고 도준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장희찬 잘 부탁드립니다.
- 배우 이도준 드림 (align-right)
두 사람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그저 그런 커피차가 아니었다. 커피부터 시작해 무수히 많은 종류의 디저트류를 다루는 커다란 푸드 트럭 다섯 대가 늘어선 모양에 희찬이 입을 떡 벌리고 제 입을 틀어막았다.
커다란 푸드트럭 곳곳에는 희찬의 사진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전부 도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노골적으로 저를 응원하고 드는 도준의 모습에 얼굴을 붉힌 희찬은 바쁘게 그 광경을 눈으로 담았다.
그러다 고개를 홱 돌려 도준을 바라봤다. 도준은 생글생글 웃으며 희찬을 마주했다.
“야, 너!”
“어때, 남편 진짜 멋있어 죽겠지.”
도준이 짓궂게 속삭였다. 사근사근 간지럽게 들어오는 소리에 어깨를 움츠린 희찬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도저히 감출 수 없어, 입술을 지르문 채로 도준의 가슴을 퍽, 소리 나게 때렸다.
“야……. 뭐 이런 걸 해 줘. 우리 공개 연애하는 것도 아닌데.”
“뭐, 업계 사람들은 다 아니까. 그리고 배우들끼리 이런 거 주고받는 건 예삿일도 아니잖아?”
그렇긴 해도…….
아무래도 이도준은 우리가 사귄다는 사실을 숨길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아무리 사람들이 모두 ‘사귄다’고 결론 지은 사이라지만, 대표님은 그렇게 ‘조심하라’라고 신신당부하셨는데 말이다. 그와 달리 점점 대범해지는 도준의 행동이 희찬은,
“존나 좋아.”
그저 좋았다.
처음 기사가 터졌을 때 사람들의 시선은 대부분 ‘호기심’이었다. 흔하지 않은 동성연애였으니, 그에 대해 따라오는 막연한 시선들이 참 불편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른 지금, 마주치는 사람들은 별다른 의미 없는 시선을 보냈다. 일반적인 열애설이 터진 연예인에게 으레 그러듯이 상대의 안부를 묻는 말이 따라왔고, 동성애라고 하여 크게 연연하지도 않았다. 현장에서 누구보다 그 시선들을 생생하게 느끼는 두 사람은 차츰차츰 편안해지는 환경에 만족을 느끼는 중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우리는 이렇게 공개적으로 비공식적인 연애를 할 것이다. 누구 하나 ‘사귀는 중이다’ 확언하지 않겠지만, 누가 봐도 사랑하는 사이처럼, 뭇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며 살아갈 것이다.
문득 도사린 그 생각이 얼마나 큰 안심이 되는지.
희찬은 도준의 손을 잡은 손아귀에 핏줄이 불룩 솟을 정도로 강하게 힘을 주었다. 손가락 마디사이에 갇힌 반지가 짓누르는 압박감이 들었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이윽고 푸드 트럭에 다다른 두 사람은 원하는 디저트와 취향에 맞는 음료를 들고 근처의 벤치로 향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희찬은 각 푸드 트럭의 모습을 정성스럽게 사진으로 담아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도준 배우님! 간식차 감사해요! 잘 먹겠습니다!”
“네, 맛있게 드세요.”
주변에서 들려오는 인사들에는 도준이 웬일로 넉살 좋게 대꾸했다. 평소 같으면 수줍게 웃으며 고개나 까딱거릴 이도준이, 희찬의 일이라고 어른스럽게 행동하는 것이 못내 만족스러웠다.
희찬은 마지막으로 자신이 받은 디저트와 커피까지 사진 찍은 후, 사방을 둘러봤다.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벤치 주변에는 인적이 보이지 않았다.
희찬의 입술이 빠르고 정확하게 도준의 볼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말랑한 살덩어리가 부딪쳤다가 떨어질 때는 ‘쪽’ 귀여운 소리가 났다.
“고마워, 나 지금 진짜 기분 좋아.”
“다행이다. 율무차도 넣어 달라고 했는데.”
“짠, 율무차 받았지.”
“잘했어.”
도준이 희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율무차를 유독 좋아하는 희찬을 위해 커피차를 주문하면서 꼭 율무차를 넣어 달라 당부를 했었다.
준비하는 과정이 조금 번거롭기는 했으나, 희찬의 말간 얼굴을 보니 그조차 보람이 느껴져 그간의 수고는 모두 잊혀졌다.
“이도준 앙큼해.”
“내가?”
“이런 걸 다 준비하고. 나는 너 영화 촬영장에 아무것도 안 보냈는데.”
“다음에 배로 더 많이 해 줘.”
도준이 머리를 희찬의 어깨에 기대며 뭉근한 목소리를 냈다. 애교를 부리며 파고드는 도준의 행동에 희찬이 손에 입을 맞추고, 그 손을 도준의 입술에 가져다 대는 것으로 뽀뽀를 대신했다.
“너 차기작 언제 해?”
“아직 지금 것도 안 끝났어.”
“지금부터 생각해야 더 크게 해 주지. 뭘 해 줄까.”
잔뜩 신이 나서 방방거리는 희찬이 옅은 눈을 이리저리 바쁘게 굴려 댔다. 입가에 생크림이 묻은 것도 모르고 조잘거리는 희찬을 보던 도준이 엄지손가락으로 희찬의 입가를 닦아 내며 행복을 드러냈다.
“하하, 됐거든. 나 어차피 간식도 잘 안 먹고.”
손가락에 묻은 생크림을 거리낌 없이 핥은 도준이 싱긋 웃었다. 그 모습이 왜 그렇게 야하게 보이는 건지. 희찬은 문득 치솟는 욕망에 눈썹을 씰룩거렸다.
희찬의 예쁜 얼굴 근육이 움직이는 것을 본 도준이 불안함을 예감하고 희찬에게서 조금 떨어져 앉았다. 그러자 희찬이 한 칸 당겨 도준과 바짝 붙어 앉았다. 도준이 다시 도망갔다. 희찬은 아예 도준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제 다리를 도준의 허벅지 위에 올려 앉았다.
“아, 진짜.”
도준이 난감한 듯 고개를 뒤로 젖히고 울대를 울렁거렸다.
“왜?”
“때와 장소는 가리자, 우리.”
곧바로 도준의 단호한 말이 쫓아왔지만, 희찬은 도준의 의중은 신경 쓰지 않고 도준의 두 볼을 단단하게 거머쥐었다. 당장에라도 입술을 부딪칠 것처럼 거침없이 다가오는 희찬의 모습에 도준이 슬금슬금 몸을 뒤로 물릴 무렵.
“배우님들! 동선 체크할게요! 지금 오시면 됩니다!”
두 사람을 찾는 스태프의 음성이 귓전을 때렸다.
도준은 얼른 희찬을 밀어내고 벌떡 일어나 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저벅저벅 멀어지는 도준의 뒤를 희찬이 얼른 쫓아 도준의 허리를 감싸 안고 옆구리를 꼬집었다. 갑자기 옆구리를 찌르는 아픔에 도준이 허리를 비틀었다.
“같이 가.”
“어, 먹은 거 챙겨 와야지. 저거 누가 버려.”
“아, 깜빡한 거거든?”
“그래, 얼른 챙겨 와.”
저도 모르게 먹은 것을 그대로 벤치에 두고 일어났던 희찬이 도준의 꾸지람에 후다닥 다시 벤치로 달려가 자신이 먹고 남은 쓰레기들을 챙겼다. 혹시나 자신이 챙기는 동안 도준이 먼저 가지는 않을까, 계속 고개를 돌려 도준을 쳐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치 어린아이가 보호자가 먼저 갈까 불안해하는 듯한 희찬의 귀여운 면에 도준이 결국 허리를 젖혀 크게 웃었다.
진짜 장희찬 귀여워서 어떡하지.
도준은 자신의 옆구리를 파고들어 안기는 희찬의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기껏 만져 둔 머리가 어지럽게 헝클어지는 것에도 희찬은 그저 싱글벙글 웃었다.
도준과 희찬이 나란히 촬영장에 도착했을 때는 먼저 준비를 마친 스태프들이 두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프레임 안에 들어선 두 사람은 금방 동선을 숙지했다.
“여기서 정차하셔서 내리시면 됩니다.”
“시동도 아예 다 끄는 거죠?”
“네. 선배님 바이크 운전은 할 줄 아시죠?”
“아, 네. 압니다.”
도준은 꼼꼼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체크했다. 블럭 끝에서 부드럽게 오토바이를 몰고 들어와 건물 앞에서 정차한 뒤, 희찬에게 물건을 건넨 도준에게 희찬이 얼굴을 보여 달라, 요구하고 그에 헬멧을 벗어 자신의 얼굴을 보여 주는 것으로 존재를 인식시키면 도준의 분량은 끝이 난다.
도준의 대사는 고작.
“김지언 씨?”, “사인해 주시고요.”, “도대체 얼굴은 왜 보여 달라는 건지……. 이러면 됐습니까?”가 다였다.
아주 작은 배역이었지만 도준은 진지하게 배역에 임했다. 자신의 동선을 모두 익힌 희찬은 스태프들과 진중하게 대화를 나누는 도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문득 아주 어릴 적, 단역 아르바이트를 하던 모습이 보였다. 그때도 지금처럼 아주 짧은 대사 한두 줄을 받고는 했었다. 그럼에도 그게 좋아 참 성실하게 연습하고, 동선을 익히던 이도준이었다.
“아……. 너무 좋은데.”
희찬은 가슴이 간질거리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매니저에게 맡겨 뒀던 휴대폰을 받아 카메라를 켠 후에는 몇 번이고 세심하게 대사와 장비를 체크하는 도준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다시는 그때의 풋풋한 모습을 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이도준은 지독하게 그대로였다. 주어진 일은 그 크기가 어떻든 간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무슨 일이든 성실하게 임하는 그의 태도는 처음과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게 그렇게 좋았다.
희찬이 감상에 젖어 들 무렵, 주변이 분주해졌다. 드디어 준비를 마친 감독과 스태프들은 금방이라도 촬영에 돌입할 기세였다. 달라진 주변의 공기를 느낀 희찬도 의기양양하게 프레임 안에 들어섰다.
도준과 희찬은 감독의 사인이 울리기 전에 허공에서 손바닥을 부딪쳤다. ‘짝’ 소리 나게 맞닿은 손바닥은 떨어지지 않고, 기다란 손가락이 서로의 손을 옭아맸다.
“화이팅, 얼른 끝내자.”
“한 번에 콜이지.”
잘하는 일에 자신을 보이는 사람은 매력적이기 마련이다.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빛을 발하는 두 사람이 이내 자신들의 색으로 주변을 물들였다. 부드럽게 섞여 들어 다정하게 서로를 물들인 두 사람의 손이 떨어졌다.
“자, 이도준 배우 저쪽으로 이동하고, 하이!”
감독의 컷 사인이 떨어지기 직전, 장내에는 무거운 적막이 앉았다. 그 어떠한 소음도 허용하지 않는 공간에서 두 사람은 새삼스레 호흡을 가다듬었다.
“큐!”
이내 큐 사인이 떨어졌다. 정해진 동선대로 움직이고, 짧은 대사를 주고받는 카메라 속 두 사람은 세상 누구보다 밝게 빛나는 배우 이도준과 장희찬이었다.
***
이도준, 카메오 도전……장희찬 주연 ‘더 네임’ 지원사격
* * *
사진=이도준, 영화 ‘벙커’ 스틸이미지
영화 ‘벙커’의 주연으로 활약 중인 배우 이도준이 열애설의 상대 장희찬 주연의 드라마 ‘더 네임’에 지원 사격을 나섰다. 이도준이 맡은 배역은 퀵 서비스 배달원으로, ‘더 네임’을 담당하고 있는 오해원 PD는 “이도준이 흔쾌히 카메오 촬영에 응해 주어 고마웠다.”라며 “그저 그런 퀵서비스 배달원이 엄청난 미남이 되어 버렸다”고 웃음을 자아냈다.
이도준의 카메오 출연으로 기대를 더하는 ‘더 네임’은 100% 사전제작 드라마로, 올가을 안방극장을 찾을 예정이다.
도준이 카메오로 희찬의 촬영을 도왔다는 소식이 금방 기사로 퍼졌다. 드라마 홍보에 혈안을 올리는 홍보 관계자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도준이 촬영장에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기자들에게 배포했다. 어느새 하나인 것이 당연해진 두 사람은 기사 속 사진에서도 자신들이 가진 시너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촬영장을 압도하는 모습이었다.
오랜만에 휴식이 겹친 두 사람은 오랜만에 나란히 엎어져 누워 메모장에 무언가를 끄적거리는 중이었다. 머리를 맞댄 두 사람은 이따금 천장을 바라보기도 하고, 상대의 볼에 입을 맞추기도 하며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원장님은 못 오신다고 했으니까…….”
“임 감독님도 해외 올 로케 있대.”
“그럼 이렇게만 할까?”
“희경이랑 조현이 초대하는 건 별로야?”
작은 종이 위에 사람들의 이름을 술술 적어 내려가는 도준의 손은 거침없었고, 의견을 보태는 희찬의 목소리는 경쾌했다.
“괜찮지.”
“그럼 걔네도.”
두 사람이 추려 낸 이름은 다른 게 아니었다. 결혼식 대신 언약식을 선택한 두 사람은 아마 평생에 한 번뿐일 언약식에 초대할 사람의 명단을 적어 보는 중이었다. 두 사람의 사이에 놓인 종이를 희찬이 찬찬히 살폈다.
, 조현이, 희경이
원장님, 감독님
부회장님 부부, 대표님, 사장님, 선영이,
단출하지만 뼈대 있게 잡힌 리스트가 마음에 들었다. 희찬이 만족하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하얀 손바닥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 도준이 ‘짝’ 소리 나게 손뼉을 쳤다.
희찬과 관련된 어른이 없다는 것은 사뭇 씁쓸한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게 마구 슬프지만은 않았다. 리스트 속 어른들은 이미 도준 못지않게 희찬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고, 도준에게 그랬던 것처럼 희찬이라면 무엇을 해도 예뻐할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장희찬은 고작 이런 일에 서글퍼하지 않았다.
“그럼 이거 곧장 초청장 같은 거 만들어서 뿌릴까?”
“응. 식당은 예약했고…… 또 준비할 거 있나?”
“글쎄. 다른 사람들은 서약 뭐 이런 거 하나?”
“설마 우리도 그런 거 해야 해?”
뭘 해 봤어야지.
결혼식이야, 정해진 틀이 있다고는 하지만 언약식은 보통 비공개로 진행되는 일이 허다했으니 도통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뭐라도 좀 알아보려 인터넷에 검색도 해 봤지만, 비밀리에 결혼한 연예인들이 결혼식 대신 언약식을 했다는 기사나, ‘언약식’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노래만 주야장천 나올 뿐이었다.
이내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한 채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잘 모르겠고, 뭐든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그게 장땡 아닐까 싶었다.
***
가뿐한 한숨을 푹 내쉰 대표가 천천히 몸을 뒤로 물리며 손에 쥔 종이를 만지작거렸다. 몇 장 만들어지지 않았을 종이는 제법 두툼했고, 알록달록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나름대로 신경을 쓴 건지, 업체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종이에는 화려한 박이 자리해 빛을 받을 때마다 여러 방향으로 오색 빛의 홀로그램이 번져 흘렀다.
<초청장>
간단한 문구로 자신을 소개하는 종이에는 날짜와 시간, 장소가 적혀 있었다.
<이도준과 장희찬의 언약식에 초대합니다.>
화려한 미사여구 없이 단정한 문장은 두 사람의 군더더기 없는 성격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대표의 입가에 뭉근한 미소가 피었다. 얼마 전 대뜸 결혼을 하겠다더니, 결혼식 대신 언약식을 선택한 것마저 지독하게 이도준과 장희찬다웠다.
드디어 두 사람은 진짜 하나가 되기로 했다. 짙은 푸른색의 단정한 봉투를 수줍게 건네던 희찬의 모습을 떠올린 대표는 그들에게 잘 어울릴 선물을 고민했다. 이미 가질 만큼 가진 두 사람이고, 누군가 굳이 선물하지 않아도 원하는 것을 척척 구매할 수 있는 재력도 지녔지만 그럼에도 무언가를 해 주고 싶은 것은 기꺼운 마음일 것이다.
“누구누구 오려나.”
대표는 등받이에 편하게 몸을 기댄 채로 라인업을 구상해 봤다. 이한 그룹 부회장 부부는 당연히 올 것이고, 이도준의 성격이라면 목욕탕 사장님과 그의 딸도 오려나. 희찬이 쪽 어른이 없다는 것을 고려해 보육원 원장님까지 초청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평소 친하게 지내는 동료들에게까지 비밀에 부쳤을 두 사람은 측근 중에서도 최측근으로 사람을 추리고 추려 단출하지만 그럼에도 제법 짜임새가 있는 언약식을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갈 채비를 마친 도준은 바쁜 걸음을 재촉하며 스마트키와 휴대폰, 지갑을 챙겼다. 언약식 때 입을 옷은 희찬의 스케줄이 끝나고 함께 샵에 들러 갈아입기로 했으니, 일단은 편안한 복장이었다.
모자를 꾹 눌러쓰고, 가볍게 걸음을 놀린 도준은 차에 오르기 무섭게 액셀을 밟아 빠른 속도로 동네를 벗어났다.
거침없이 내달린 도준이 도착한 곳은 익숙하고도 정겨운 목욕탕 앞이었다. 반짝반짝 빛을 내는 간판이 햇살에 부딪혀 자신의 색을 제대로 보이지도 못하다가 뚝 꺼졌다.
곧이어 반가운 모습의 사장과 선영이 나타났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두 사람을 발견한 도준은 얼른 차에서 내려 두 사람을 반겼다.
“도준아! 안 데리러 와도 괜찮다니까.”
“아니에요, 오가기 불편하시니까……. 선영아, 잘 지냈어?”
“오빠, 대박. 언약식 완전 멋있어!”
“희찬이 볼 생각에 신난 건 아니고?”
“아니거든.”
처음 두 사람의 언약식 소식을 접한 사장은 모든 장사를 접고 당장 달려오겠다는 의사를 보였었다. 동성연애를 향한 불편함은커녕, 그저 도준과 희찬의 일이라면 두 팔 벗고 나서는 사장의 따스함이 그저 감사했다.
두 사람의 열애 기사가 터지고 곧장 도준에게 연락을 취했던 사장은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기도 했었다. 사람들 관심은 금방 사그라들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그저 건강하게만 지내라고 꾸준히 자신과 희찬을 달래던 사장의 위로는 도준에게 여전히 큰 감사로 남은 부분이었다.
그건 희찬도 마찬가지였는지, 저녁 늦은 시간에 잡힌 언약식에 혹시 두 사람이 오가는 길이 불편하지 않을까, 호텔을 잡아 주자고 의견을 냈었다. 도준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두 사람을 위해 흔쾌히 언약식 장소와 멀지 않은 호텔에 가장 좋은 방을 잡아 뒀다.
도준은 행선지를 알리지 않고 차를 몰다, 호텔 근처에 다다라서야 그 사실을 알렸다.
“사장님, 저희가 호텔을 하나 잡았거든요? 저녁에 돌아가시기 힘드니까, 선영이랑 같이 주무시고 내일 아침에 택시 타고 가세요.”
“뭐? 아이고, 부담스러워서 안 돼!”
“부담은요, 사장님. 저한테 방도 주셨었잖아요. 그거랑 비슷한 거예요.”
“왜! 엄마 나는 좋아. 오빠 고마워, 우리 재밌게 잘게!”
“응, 선영아. 꼭 자고 가.”
도준이 소소한 웃음을 띠었다. 룸 미러를 통해 선영과 눈을 마주하고 눈썹을 찡긋거리자, 선영이 거세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굳센 의지를 보였다. 그에 도준도 만족하는 듯 웃었다. 그런 두 사람이 마뜩잖은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사장의 모습도 보였지만, 그건 구태여 신경 쓰지 않았다.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기로 했어?”
“아, 아직 못 정했어요. 지금 희찬이도 촬영 때문에 바쁘고, 저도 아직 스케줄 중이라. 나중에 한가해지면 천천히 생각해 보려고요.”
“좋은 데로 가. 좋은 데로 가서 먹고 싶은 거 왕창 먹고 놀고 싶은 대로 놀아.”
“하하, 꼭 그럴게요. 오면서 선물도 사 올게요.”
웅장한 호텔의 한 중심에는 이한 그룹의 로고가 걸려 있었다. 서울에서 가장 좋은 호텔로 손에 꼽히는 호텔의 경관에 두 사람이 입을 떡 벌리고 도준을 바라봤다.
도준도 감회가 새롭다는 듯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오를 정도로 숨을 들이켰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이제는 이한 호텔을 마주해도 마구 아프지 않았다. 아직 호텔에서 묵을 생각은 하지 못하지만, 이대로라면 언젠가는 이한 호텔에서도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될 정도로 상당히 좋아졌다.
“들어가셔서 체크인하시면 돼요. 제가 도와드리고 싶은데, 이제 저는 준비하러 가야 할 것 같아서요.”
“응, 들어가서 네 이름 말하면 돼?”
“네. 그럼 이따 봬요. 선영아, 이따 보자.”
“응!”
두 사람이 호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본 도준이 부드럽게 차를 몰아 호텔을 벗어났다. 이제는 희찬과 만나, 예쁘게 머리를 매만지고, 잘 어울리는 정장으로 갈아입은 후에 누구보다 근사한 모습으로 어른들을 마주할 시간이 왔다.
처음 희찬과 언약식을 생각할 때만 해도 별다른 생각 없이 막연한 설렘을 느꼈었는데, 이제는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마치 성대한 결혼식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도준의 입꼬리가 쿵쾅거리는 심장과는 다르게 여유롭게 치솟았다. 긴장이 몰려오는 것은 그거고, 아무튼 설레는 일인 것은 분명했다.
희찬은 연신 퀭한 눈으로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오늘 언약식을 위해 조금 무리해서 빠듯하게 스케줄을 소화했더니 정작 제일 중요한 오늘 심각한 피곤이 몰려왔다. 나이를 먹어 그런가, 예전 같지 않은 체력이 야속할 지경이었다.
머리를 다시 만지는 동안 꾸벅꾸벅 조는 희찬을 도준이 즐겁게 쳐다봤다. 사진을 찍을까 했지만, 장희찬이 알면 노발대발 화를 낼 것이 분명했으므로, 그저 눈으로 담고 또 담았다.
“이제 좀 일어나. 왜 이렇게 졸아?”
“나 어제 못 잤어…….”
희찬이 억울한 듯 잔뜩 칭얼거리는 목소리를 냈다. 눈을 뜨려 해도 눈이 시큰거려 도무지 뜰 수가 있어야지 말이다. 미간을 찡그리고 입술을 삐죽 내민 희찬은 진심으로 피곤해 보였다.
그에 도준이 희찬을 토닥토닥 달래며 시간을 살폈다. 쪽잠을 즐기지 않는 도준은 종종 ‘어설프게 잠들었다가 더 피곤하기만 하다’는 말을 하곤 했지만, 희찬은 ‘잠깐이라도 자는 게 낫다’는 말을 하고는 했었다.
그럼 조금이라도 재우는 게 좋을까.
눈을 굴리며 곰곰이 생각하던 도준이 이내 결론을 내린 듯 실장에게 다가갔다.
“실장님, 희찬이 재우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의상은 그냥 집에서 입어야 할 것 같아요.”
도준의 정중한 요청에 화려한 인상의 여자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도준은 한쪽 옆구리에 희찬을 낀 채로 그와 함께 고급 양장점에서 맞춘 정장 두 벌을 받아 들었다.
도준의 옆구리에 붙들린 희찬은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도저히 눈을 뜰 수 없는 듯 인상을 한껏 찌푸린 채로 칭얼거리는 희찬의 등을 도준이 다정하게 토닥이며 샵을 벗어났다.
집으로 돌아온 희찬은 침대에 몸을 앉히기 무섭게 다시 잠들었다. 혹시라도 기껏 만진 머리가 망가질까,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댄 채로 앉아서 자는 희찬의 모습이 안쓰럽다. 한참 그를 지켜보던 도준이 희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잠든 듯했던 희찬이 인상을 누비고 몸을 비틀었다.
“하지 마.”
“그냥 똑바로 누워서 자, 머리 죽으면 내가 만져 줄게.”
“시간 얼마나 남았어?”
“한 시간은 더 잘 수 있어.”
“그럼…….”
희찬이 비척비척 몸을 돌려 제대로 누웠다. 목을 꼿꼿하게 세우고 잔다고 한들, 제대로 잔 것 같지도 않아 몸은 여전히 피곤할 터였다. 그럴 바에 머리가 망가지더라도, 도준의 말대로 제대로 자는 것이 제일 좋을 것 같았다.
결국 베개를 베고 똑바로 누운 희찬이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힘없이 쳤다. 같이 눕자는 듯한 희찬의 몸짓에 도준이 흔쾌히 침대에 올랐다.
도준이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고 기다란 다리를 쭉 펴 앉자, 희찬은 꾸물꾸물 움직여 도준의 단단한 허벅지를 베고 눈을 감았다. 도준은 희찬이 편하게 잘 수 있도록 하염없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작은 귀를 조몰락거렸다.
그렇게 도준은 꼬박 한 시간을 희찬의 얼굴을 감상하는 데에 썼다. 사실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 기다란 속눈썹의 개수를 헤아릴 기세로 뚫어지게 쳐다보다, 그 옆에 입체적으로 솟은 잘생긴 코를 살피며 그의 고른 숨소리를 들었다. 가지런하고 예쁜 인중을 따라 시선을 옮겨 새빨간 입술을 눈으로 탐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흘러 희찬이 일어나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도준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희찬의 말랑한 양 볼을 한 손으로 쥐고, 주물주물 힘을 줘 만지자 희찬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가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짓궂은 도준의 손에도 희찬은 도무지 깨지를 않았다. 마치 저주를 받아 100년간 잠을 자야 했던 동화 속 주인공처럼 말이다.
결국 도준이 억지로 희찬의 몸을 일으켜 앉혔다.
“일어나.”
“으응…….”
“좀 개운해? 앉아 봐, 머리 만져 줄게.”
희찬이 푹신한 매트리스를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헤드에 기대어 앉았다. 여전히 눈은 제대로 뜨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아까처럼 몸을 못 가눌 지경은 아니었다. 역시나 쪽잠이 안기는 개운함은 반갑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푹 잔 덕분에 몸이 가벼워진 것이 기분 좋아, 희찬이 해실해실 웃어 댔다.
그사이 도준은 파우더룸에서 즐겨 쓰는 왁스를 챙겨 와 희찬을 마주 보고 앉았다. 그래도 생각보다 머리가 많이 눌리지는 않았다. 머리를 망가뜨리지 않고 자는 기술은 도준도 어디 가서 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희찬 역시 경력을 허투루 쌓은 것은 아닌 모양이다. 피식, 웃었던 도준은 왁스를 손에 펴 바르고 정성스럽게 희찬의 머리를 만져 주었다. 실장이 미리 길을 내놓은 것을 따라 과하지 않게 머리를 쌓아 주자 희찬이 빙그레 웃었다.
“머리 좀 만지나 봐?”
“나 잘해. 가끔 샵에 안 가고 그냥 내가 해.”
“진짜? 곽 대표님 그런 거 용납 못 하실 줄 알았는데.”
“용납 못 하셔서 내가 몰래 해. 샵에 간 척하고.”
희찬이 피식 웃었다. 아직 K액터스에서 일한 것은 몇 달 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배우의 편의와 이미지를 지독하게 생각하는 대표는 작은 일에도 꼭 샵을 보내고는 했었다. 집에서 해도 된다는 말을 몇 번 한 적도 있었지만, 대표는 그걸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었다.
도준도 그런가 싶어, 그저 고분고분 샵으로 향했던 희찬과 달리 도준은 종종 중간에 튄다고 했다. 샵으로 가면 몇 시간을 잡혀 해야 하는 머리를 제 손으로 하면 20분 안에 끝낼 수 있었으니 도준의 심정도 이해가 되었다.
도준이 짝! 크게 손뼉을 쳤다. 마음에 들게 만졌는지, 흡족함이 묻어나는 그의 만면에 희찬이 흥미롭게 거울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제 머리를 살폈다. 전문가 못지않은 손길로 머리를 만진 이도준 덕분에 샵에서 나올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마음에 들어?”
도준의 뿌듯한 질문에 희찬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건 뭐, 굳이 샵에 가지 않고 매번 이도준에게 머리를 맡겨도 될 지경이었다. 희찬이 거울을 통해 도준을 바라봤다.
“너 진짜 잘 만지는구나. 머리도 짧은데 언제 그렇게 머리를 만져 댔대?”
“그냥 타고났나 봐. 자, 옷. 얼른 입고 가자, 늦겠어.”
“아, 그치.”
잊었던 심장의 콩닥거림이 다시 느껴졌다. 당장에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거칠게 뛰는 덕분에 손에 땀이 차고 가쁜 숨이 절로 나왔다.
각자에게 잘 어울리는 정장을 빼입은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싱그럽게 웃었다. 마음에 드는 상대의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다, 손을 꼭 마주 잡고 함께 집을 나서는 두 사람의 걸음은 위풍당당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었다.
조용한 공간에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은 고풍스러웠고, 환하지는 않지만 다정한 불빛이 밝히는 공간은 친절했다.
언약식이 진행되는 곳에서는 적당히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길고 큰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은 사람들은 작은 소음을 자아냈다.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은 서로를 소개하며, 상대를 파악했고, 그래도 안면이 있어 편하게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은 최근의 근황을 나누며 소소한 담소를 나누었다.
도준과 희찬은 여전히 모습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이한 그룹 부부가 등장했다. 오지 못한다고 했지만 기꺼이 참석한 보육원 원장과 곽 대표는 이한 그룹 부부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어디서 봤더라.’ 하고 곰곰이 머리를 굴렸다. 유독 누군가와 닮아 보이는 남자의 모습과 분위기가 친숙한 여자의 모습은 친근하기 그지없었다.
“이쪽은 도준이 어려울 때 잘 돌봐 주신 목욕탕 사장님이십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이한 그룹 부회장 이선재라고 합니다. 도준이 친부입니다.”
“네?”
불현듯 튀어나온 단말마의 놀란 음성은 사장이 아닌, 희경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이었다. 저 매니저는 여전히 도준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하는 건지 눈이며 입이며, 있는 대로 확장한 채로 부부를 샅샅이 훑었다.
“대박, 진짜 도준이 형 부모님이시라고요?”
호들갑을 떠는 희경의 모습에 이선재가 대표를 바라봤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서는 상대에 대한 의문이 묻어나는 것 같아, 대표가 멋쩍게 웃으며 희경의 등을 퍽퍽 소리 나게 때렸다.
“도준이 매니저입니다. 너 도준이랑 몇 년 됐지?”
“6년째예요. 와, 형 진짜 저한테 이런 거 너무 말 안 해 준다고요.”
“굳이 뭐 하러 말해.”
“하하, 안녕하세요. 도준이 잘 부탁드립니다. 희찬이도요.”
선재가 인자하게 웃으며 희경에게 손을 불쑥 내밀었다. 가지런한 손까지 도준의 손과 닮은 것 같아 희경이 쭈뼛쭈뼛 선재의 손을 맞잡았다.
언젠가 이도준의 화려한 이목구비를 보며 ‘저 사람의 부모님은 어떻게 생겼을까.’ 하고 궁금해했던 적이 있다. 직접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 그 호기심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아 머릿속으로 막연하게 그의 부모를 그려 보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상상을 뒤엎은 존재가 나타난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도준을 둘러싼 루머 중에는 ‘이한 그룹 사생아’라는 루머도 있었던 것 같다.
세상에, 그게 루머가 아니라 사실이었던 거야?
희경이 입을 떡 벌리고 교양 있는 걸음으로 자리를 찾아 앉는 두 사람을 지켜봤다. 벌어진 입은 도무지 닫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내 직원들이 하나둘씩 식당으로 들어와 조금씩 식을 준비했다. 편한 자리를 찾아 앉은 사람들 앞에 고급스러운 테이블보를 깔고, 반짝거리는 식기들을 내려놓았다. 조용하게 바퀴 구르는 소리가 나더니 마치 로봇처럼 정해진 위치에 애피타이저가 준비되어 나왔다. 사람들 앞에 놓인 접시는 아직은 비어 있는 두 자리에도 놓여 주인을 기다렸다.
이윽고 다시 문이 열리더니 그 어느 때보다 근사하고 화려한 모습의 두 사람이 나타났다. 서로의 손을 꼭 쥔 채로 식당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수줍은 듯 얼굴에 옅은 홍조를 피운 채였다. 누군가 먼저 쩍, 쩍 크게 손뼉 소리를 냈다. 하나, 둘 손뼉 소리가 얹히더니 이내 작은 인원에도 큰 박수가 터져 공간을 빼곡하게 메웠다.
“누가 주연 배우들 아니랄까 봐 엄청 늦게 오죠?”
“하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기꺼이 시간 내어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와 동시에 장내에는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마치 식을 거행하는 듯한 분위기에 사람들이 가슴 가득 들어찬 설렘을 느끼며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자리에 앉기 전, 두 사람은 참여한 사람들과 번갈아 악수를 나누며 인사를 주고받았다.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 당당히 제빛을 드러낸 두 사람을 향해 어른들은 진심 어린 덕담을 건네었고, 두 사람은 연신 감사를 표했다. 그렇게 아주 천천히 자리로 이동하다 보면 두 사람의 자리로 추정되는 곳 뒤에는 엄청난 선물이 쌓여 있는 게 보였다. 희찬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몸을 돌려 사람들을 바라봤다. 대부분 온화한 표정이었으나 유독 뿌듯한 표정을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희경아, 이거 네가 산 거야?”
도준의 매니저와 희찬의 매니저였다.
제아무리 뿌듯한 표정을 짓는 조현이라 하더라도, 조현은 이런 일을 할 위인이 되지 않았으므로 희경을 의심했다. 하지만 희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에 희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샀어.”
목소리의 주인은 대표였다. 그러고 보니 평소보다 짙은 뿌듯함이 묻어나는 듯했다.
“그래도 너희 이제 부부라는데 뭐라도 해 줘야지.”
대표의 말에 희찬이 팔랑거리며 기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단정한 스리 피스 정장을 입은 희찬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해맑은 모습이었으므로 장내에 소소한 웃음이 앉았다.
“이거 지금 뜯어 봐도 돼요?”
“밥 먹고 뜯어 보자.”
당장에라도 선물에 달려들려는 희찬을 도준이 가로막았다. 아무리 이것저것 거추장스럽게 정하지 않은 언약식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자신들의 새 출발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자리하는 곳이었으니, 일단 식이라는 것은 해야 할 것 같았다.
그에 희찬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도준과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기다란 테이블의 제일 끝, 모여든 사람들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정 중앙에 앉아 자신들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하나하나 시선을 나누었다.
왼쪽 도준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는 이선재와 박채령이 나란히 앉았고, 오른쪽 희찬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는 곽 대표와 보육원 원장이 앉았다. 박채령의 옆에는 목욕탕 사장과 선영이, 그 맞은편에는 조현과 희경이 둘러앉아 제법 안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를 쓱, 둘러본 희찬의 입가에 뭉게뭉게 웃음이 피었다. 예전에는 도와주는 어른이 하나 없어, 아득바득 혼자 견디고, 혼자 이겨 내기 바빴는데 이제는 애써 손을 뻗지 않아도 먼저 손을 내밀어 주는 친근한 어른들이 제 옆에 있다는 것이 참 행복했다.
그건 도준도 마찬가지였다. 찬찬히 그들의 모습을 살피는 도준의 입가에 뭉근한 미소가 피었다. 이렇게 하나하나, 면모를 따져보니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완전한 가족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는 낳아 주신 부모님이 있고, 키워 주신 부모님이 있으며, 온전한 성인이 될 수 있도록 챙겨 주신 부모가 있고, 이제는 장성한 성인이 되어 제 길을 나아가는 우리를 지켜봐 주는 부모가 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우리는 부모가 없는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저 눈앞에 확실한 형태를 보이지 않았을 뿐, 우리에게는 남들보다 훨씬 많은 부모가 있었다.
식탁 위에서 마주 잡은 두 사람의 손에 힘이 실렸다. 서로를 강하게 옭아맨 손가락 힘에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보였다.
사근사근 대화가 오가는 자리에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얹혔다.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주제는 주로 도준과 희찬의 과거가 대부분이었다.
도준은 오손도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다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준비한 것이 없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복잡한 머릿속을 가다듬는 중이었다.
“따로 준비한 건 없고요, 그냥 다 같이 밥이나 먹고 싶었어요.”
도준의 가지런한 입술을 비집고 나온 것은 꾸밈없는 솔직함이었다. 그에 주변 사람들이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모양이었지만, 희경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손을 번쩍 들어 사람들의 시선을 모은 희경은 사뭇 비장한 모습을 보였다.
“반지 교환 같은 거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아, 미안. 그건 이미 했어.”
도준이 희찬의 손을 잡고 살랑살랑 흔들었다. 희찬의 네 번째 손가락에 자리한 반지가 화려한 조명 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이 났다. 그에 희경이 제 이마를 퍽, 소리 나게 짚었다.
“와, 저건 또 언제 하셨어.”
“도준아, 너 매니저한테 너무 공유를 안 하나 봐. 희경이가 아까부터 계속 배신감 느껴.”
“충분히 공유하고 있어요. 희경이가 눈치를 못 채서 그래요.”
대표의 꾸지람에 도준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실제로 도준은 희경에게 무엇도 숨긴 적이 없다. 구태여 드러내서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반지를 숨긴 적도 없었고, 희찬과 사귀는 것을 숨긴 적도 없었다.
오히려 요즘은 이전보다 훨씬 더 드러내는 중인데도 희경은 그 눈치 없는 면모를 숨기지 않고, 홀로 상처를 받는 중임에 도준이 낮게 웃었다.
어느새 식사 코스가 마무리되어 갔다. 희경과 조현은 그새 선영과 친해진 건지, 선영에게 자신들이 연예계에서 겪은 경험담들을 마치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중이었고, 이선재 부부는 도준과 희찬을 전적으로 케어해 온 다른 어른들과 근황에 대해 얘기하는 중이었다.
도준과 희찬은 그저 가만히 그들을 지켜만 봤다. 도준의 말대로 그저 사랑이 가득한 따뜻한 사람들을 한데 모아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희찬이었기에, 맛있는 음식이 나올 때마다 도준의 그릇 위에 반찬을 더 얹어 주며 사랑을 보일 뿐이었다.
도준은 멋쩍은 듯 뒷덜미를 긁적거리며 희찬이 좋아하는 음식을 희찬에게 얹어 주었다. 그에 희찬이 배시시 웃으며 도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많이 먹어, 잘 먹는 거 보기 좋아.”
“너도 많이 먹어. 나 아까부터 많이 먹고 있어.”
“나는 관리 중이잖아.”
희찬이 아쉬운 목소리를 냈다. 맛있는 것을 눈앞에 두고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심정은 통탄 그 자체였다. 희찬은 도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입술을 씰룩거렸다.
그에 도준이 얼른 제가 희찬의 그릇 위에 올려 주었던 것을 다시 제 그릇 위로 옮겼다. 괜한 희망 고문은 괴롭기만 하다는 것을 익히 잘 아는 탓이었지만, 도준의 행동에 희찬이 아예 울상을 지었다.
“드라마 끝나면 진짜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나 기대한다?”
도준이 흔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잘사는 사람들은 우동 먹으러 일본에도 간다던데, 그런 식으로 아예 1년 정도 휴가를 잡고 세계 일주 식도락여행을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번엔 도준이 희찬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오뚝한 희찬의 코끝에 입을 맞추고, 다정한 눈빛을 보이자 희찬이 샐룩,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점잖은 척,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의젓하게 앉아 있던 두 사람이 자신들의 세상에 빠져드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애정행각에 물꼬를 튼 두 사람은 무심한 듯 세심하게 서로를 살피며 손을 만지작거리고, 가끔 입을 맞추고, 그러다 서로의 품에 안기기도 했다. 주변 사람의 시선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몸짓이었다.
어느새 모두가 도준과 희찬만 바라보는 것을 느낀 대표는 사랑 놀음에 빠져 말 없는 도준, 수줍어하는 희찬 대신 대화를 주도했다.
“부회장님께서는 도준이, 희찬이한테 무슨 선물 준비하셨습니까? 그게 제일 궁금합니다.”
주제 선택이 탁월했다. 일순 모두의 시선이 이선재 부부에게로 향했다. 그건 희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도준의 시선도, 도준의 얼굴을 매만지는 희찬의 시선도 같았다.
우아하게 밥을 먹던 부부가 식기를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벼운 표정의 박채령이 느긋하게 몸을 뒤로 물리며 환하게 웃자, 이선재가 도준과 똑같은 근사한 미소를 머금었다.
두 사람이 눈짓을 주고받더니, 가방에서 웬 서류 봉투를 꺼냈다. 살포시 들이밀리는 서류 봉투를 본 도준이 눈을 씰룩거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누런 봉투가 괜히 의심스러웠다.
“뭐 해 줄까 고민 많이 했는데, 아무래도 두 사람을 제대로 보호하는 게 가장 좋은 선물 아닐까 해서요.”
이선재의 말에 도준이 부스럭거리며 봉투를 열었다. 봉투에서 나온 것은 두 장의 서류였다. 상단에 적힌 글자를 읽은 도준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입양신고서>
한 장에는 이도준의 이름이, 다른 한 장에는 장희찬의 이름이 적힌 두 장의 입양 신고서였다. 주소와 주민등록번호 칸이 비어 있는 것은 그들의 의사를 존중하겠다는 배려 같았다.
곁눈질로 종이를 보던 희찬도 덩달아 눈을 크게 뜨고 종이와 도준의 부모를 번갈아 쳐다봤다. 희찬과 도준의 반응을 살핀 이선재는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며 말을 덧붙였다.
“선물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원하지 않으면 안 해도 돼. 다만 법적으로 엮이는 게 너희를 더 수월하게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서 생각한 거야.”
이선재의 묵직한 말에 도준이 고개를 울대를 들썩거렸다.
“만약 제가 하게 되면…….”
그럼 연기는 못 하는 걸까.
그래도 재벌가 아들이 되는 건데, 상속이라든가 아무튼 여러 가지 문제가 얽히는 건 아닐까. 짧은 시간에도 무수한 생각이 스쳐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선재는 그런 도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풋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터지는 얕은 숨에 도준이 이선재를 쳐다봤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부모로서 권리를 주장할 생각은 없어. 법적으로 묶였다 뿐이지, 우리가 너희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지는 않을 거야.”
도준이 무거운 숨을 내뱉으며 몸을 등받이에 기대었다. 시간이 흐르며 부모의 사정도 알게 되었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지냈는지, 자신이 없는 동안 어떤 일을 겪었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그들도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알고 난 후였고, 그들이 얼마나 자신들을 위하는지 깨달았으니 이 제안이 마냥 싫지 않았다. 하지만 도준은 희찬의 심정이 궁금했다. 친부모를 사고로 잃은 희찬이 이 상황을 달가워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으니 말이다.
줄곧 종이를 들여다보던 도준의 시선이 희찬에게 향했다. 희찬의 옅은 눈은 아무런 생각도 없는 듯 그저 도준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턱을 괸 채로 종이와 도준을 번갈아 쳐다보는 희찬의 눈에서는 알 수 없는 심경이 묻어났다.
아, 그 역시 복잡한 모양이었다.
도준이 슬쩍 손을 들어 희찬의 말랑한 뺨을 어루만졌다. 희찬은 붉은 입꼬리를 예쁘게 올리며 화려한 미소를 보였다.
“어떻게 하고 싶어?”
“나는 다 좋아. 그걸 하면 너랑 내가 가족이 되는 거잖아. 진짜 가족. 만약 네가 싫어서 안 한다고 해도 해도 우리는 우리니까.”
“나는 네 생각이 궁금한 건데. 다 좋다는 거 말고, 네가 원하는 거.”
“그 전에.”
대표가 갑자기 두 사람의 말을 끊고 들었다. 서로의 심정을 헤아리며 상대를 마냥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던 희찬과 도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표를 바라봤다.
“부회장님, 희찬이는 저한테 양보하셔야겠습니다. 희찬이가 제 아들이라서요.”
대표가 희찬의 앞에 이선재가 내민 것과 같은 봉투를 내밀었다. 그 봉투 속에는 이선재가 도준, 희찬에게 건넨 입양신고서가 들어 있었다.
도준과 희찬이 휘둥그레 뜬 눈을 그대로 대표를 바라봤다. 대표는 인자한 얼굴로 그들을 한 번씩 훑어보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멋진 말을 부회장님께서 다 하셔서 제가 달리 할 말은 없습니다만, 나도 너희를 조금 더 잘 지켜 주고 싶은 마음이야. 도준이야, 친 부모님이 오셨으니까 내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지만, 희찬이는 내가 정말 아들 삼고 싶어.”
“…….”
“생각만 했었는데, 이제야 실행에 옮기네. 마찬가지로 원하지 않으면 안 해도 돼.”
대표와 이선재가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선재는 희찬까지 본인이 지키고 싶다는 의사를 보였으나, 대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준을 처음 제 품으로 들일 때 결심한 것이 있다. 언젠가는 장희찬을 꼭 K액터스로 데려오겠다는 것. 그 결심을 이뤄 내고 희찬을 곁에 두고 지켜보니 그의 주변에는 그를 위한 어른이 없었다. 그건 희찬을 안타까워했던 임 감독의 목소리가 증명했다.
그래서 대표는 ‘아빠, 아들’하고 장난치는 것을 그만두고 증명할 수 있는 서류로 희찬을 제 품에 들이기로 했다. 어른들 없이도 어엿하게 성장한 도준과 희찬이었으니, 그대로 두어도 문제없겠지만, 위급한 상황에 꼭 힘이 되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대표의 검은 눈동자에서 그 진심을 읽은 이선재가 피식, 웃었다.
“부모 마음이 다 같은가 봅니다.”
이선재의 말을 듣던 도준이 표정을 부드럽게 풀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자신과 희찬을 돌보던 대표의 모습을 기억하는 도준의 입꼬리가 멋들어지게 치솟았다. 곽 대표라면 믿을 수 있는 듬직한 어른이었으니, 희찬이 원한다면 그와 부자지간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고민하는 듯했던 희찬이 이내 환하게 웃었다. 줄곧 바쁘게 눈을 굴리며 서류를 훑던 옅은 눈동자에 힘이 실리기 무섭게 그 시선은 대표에게로 향했다.
“그럼 나는 곽 아빠.”
장내에 희찬의 경쾌한 목소리가 울렸다. 불편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희찬은 동봉되어 있는 볼펜으로 기꺼이 자신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적었다.
“이래야 우리가 근친이 아니지.”
서명을 마친 희찬이 도준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도준이 눈을 크게 떴다. 근친이라니. 상상도 하지 못한 희찬의 말이 당황스러웠다. 그런 도준과 달리 장내에는 폭소가 앉았다.
“아빠! 잘 부탁해요!”
“그래, 아들. 이제 아빠 믿고 뭐든 해 봐.”
“이미 다 하고 있지만, 조금 더 해 볼게요?”
“그거 좋지.”
희찬과 대표의 대화에 사람들이 소소하게 웃었다. 희찬은 자신이 가진 색으로 상황을 유연하게 환기시켰고, 덕분에 사뭇 긴장감이 감돌았던 장내의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렸다.
도준과 희찬을 향한 사람들의 눈빛은 따스하기 그지없었다. 사람들의 애정 어린 시선을 하나하나 훑어보던 이선재는 도준과 희찬의 앞에 작은 박스 두 개를 더 올려 뒀다.
“뇌물은 아니고, 아무래도 어릴 때는 장난감, 커서는 차 아니겠나 싶어서.”
두 눈을 크게 뜬 도준과 희찬이 느릿한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스마트키가 하나씩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우와…….”
희찬이 탄성을 터뜨렸다. 아무리 몸값이 억만금인 도준과 희찬이라 하더라도 마음먹지 않으면 쉽게 살 수 없는 비싼 브랜드의 로고가 박힌 차 키에 두 사람이 금세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거렸다.
키를 들고 만지작거리며 즐거워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부부가 뿌듯하게 웃었다. 역시 좋아할 줄 알았다. 좋은 차를 타기로 유명한 두 사람이라기에 혹시 필요 없는 선물을 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기뻐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부부의 입가에도 덩달아 환한 미소가 피었다.
그리고 이선재는 때를 놓치지 않았다. 희찬의 것과 자신의 것을 번갈아 살피며 희찬과 속닥속닥 이야기를 주고받는 도준을 향해 다시 입을 떼었다.
“네가 서류를 작성하고, 아들이 된다고 해서 우리 아들이라는 사실은 구태여 알리지 않으려고 해. 근데 혹시라도 이한이 필요하다 생각하면 언제든지 밝혀도 좋아.”
“아닙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서류 쪼가리 하나로 가족이 되고, 말고 웃기지? 근데 이게 참 중요한 거더라.”
이선재와 박채령이 번갈아 도준을 설득하듯 거듭 말을 덧붙였다. 그를 듣던 도준의 눈이 손에 들린 차 키로 향했다. 이선재는 뇌물이 아니라고 했지만, 타이밍이 딱 뇌물이었다.
결국 도준도 피식 웃으며 서류에 자신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적었다. 박채령의 말대로 서류 하나에 가족이 되고, 또 남이 되는 것이 퍽 웃겼지만, 어른들의 보호를 받고 그들의 따뜻한 온정을 느낀 이상 이 호의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도준아, 희찬아! 너무 잘됐다!”
“축하해요, 형!”
두 사람이 작성을 마치기 무섭게 환호가 터졌다. 목욕탕 사장의 축하를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박수에 도준과 희찬이 근사한 미소를 피워 냈다.
오로지 서로를 의지하며 불안하기 짝이 없는 길을 걸어온 것에 대한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그 어릴 때는 어른들의 도움과 보호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며 홀로 견뎌 보려 안간힘을 쓰기도 했었다.
뒤늦게 찾아온 온정이었지만, 그 맛은 제법 달콤했고, 기꺼웠다. 앞으로도 어려운 일은 직접 나서 부딪쳐 볼 생각이지만, 그래도 어른들이 도움을 건넨다면, 그것이 비겁하지 않은 방법이라면 이제는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렇게 자리에 둘러앉은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이 준비해 온 선물을 두 사람에게 건네었다.
보육원 원장은 두 사람의 어릴 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앨범을 전했다. 이전에 보육원을 찾아갔을 때만 해도 절대 못 주는 보물이라며 기함을 했었는데, 이제는 흔쾌히 내어 주는 그 덕분에 희찬의 둥글고 큰 눈에 투명한 눈물이 차올랐다.
목욕탕 사장과 선영은 진심이 가득 담긴 편지를 건네었다. 도준과 희찬에게 쓴 편지는 무려 5장이나 되는 장문이었고, 모든 문장에 사랑이 서려 편지를 읽는 내내 두 사람은 울컥 치미는 감정을 추스르기 바빴다.
마지막으로 두 매니저는 준비한 것이 없다며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모처럼 쉬는 날, 시간을 내어 나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두 사람이었기에 어른스럽게 두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소소하지만 성대한 언약식이 막을 내렸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두 사람은 가족을 얻었다. 두 사람은 마지막까지 남아 장내를 벗어나는 사람들을 배웅하며 가슴 가득 도사린 안식을 되새겼다.
“행복하다, 그치.”
도준의 단단한 허리를 움켜 안은 희찬이 도준의 귓가에 행복을 속삭였다. 도준이 희찬을 한 품 가득 안으며 희찬의 말랑한 볼에 입을 맞췄다.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질 때마다 쪽, 쪽 귀여운 소리가 났다.
그러다 입술이 맞닿았다. 부드러운 살결이 뭉개지며 닿았다가, 입술이 벌어지며 축축한 살덩어리가 부드럽게 뒤엉켰다. 서로의 속을 헤집는 혀는 부드럽고, 친절하였으나 탐욕스럽기도 했다. 입술이 떨어질 때는 길쭉하게 타액이 늘어나고, 다시 입술이 부닥치니 안에서 웅웅 신음이 울었다.
“사랑해, 진짜 많이.”
이내 두 사람이 코끝을 비비적거리며 서로를 향한 가감 없는 사랑을 드러냈다.
*
어느새 희찬의 드라마 촬영이 마무리되었다. 처음 도전한 장르에서도 자신의 연기력을 가감 없이 뽐낸 희찬은 수많은 평론가와 업계 전문가들로부터 ‘장희찬이 있어 기대되는 드라마’라는 호평을 끌어냈다. 그 결과 희찬이 주연으로 참여한 드라마 ‘더 네임’은 안방의 새로운 화제로 떠올라 관심이 집중된 화제작으로 언급되는 중이었다.
그사이 도준을 주연으로 내세운 영화 ‘벙커’의 시사회가 진행되며 어마어마한 흥행을 예고했다. 덕분에 도준은 동성애 논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명실상부 충무로 간판스타’라는 버거우면서도 익숙한 칭호를 달고서, 배우로서의 입지를 단단히 하고, 다시 한번 대중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성황리에 영화 스케줄을 마친 도준은 최근 굉장히 한가한 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하고, 오후에는 다음 작품을 위해 필요할지도 모를 외국어 공부를 했다. 그러다 저녁이 되어 희찬이 돌아오면 한시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사랑을 나누었다.
그렇게 한가하면서도 알찬 시간을 지내던 도준은 오랜만에 잡힌 스케줄에 기분 좋게 집을 나섰다. 평소 같으면 스케줄 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을 매니저와 함께 촬영장으로 이동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직접 운전해서 촬영장으로 가겠다고 통보한 도준은 부모로부터 선물 받은 차 중, 단정한 색상의 SUV를 골라 운전대에 올랐다.
어느덧 가을에 접어든 날씨가 청명하다. 드높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함을 자랑했고, 선선하게 부는 바람에 도준이 선루프를 열었다. 쏟아지는 신선한 바람이 차 안을 시원하게 훑었다. 핸들을 쥔 손을 기분 좋게 까딱거리는 도준은 당장에 노래라도 부를 기세였다.
그러다 문득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2시. 최근 드라마 홍보 스케줄로 바쁜 매일을 보내는 희찬이 라디오에 출연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떠올린 도준이 얼른 채널을 돌려 희찬의 목소리를 찾았다.
어느새 시작한 라디오에서는 호탕한 희찬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라디오는 제법 호쾌하게 진행되었다. 드라마 이야기를 주로, 게임도 하고 에피소드들도 나누던 라디오에서는 어느새 도준의 이야기가 오가는 중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라디오를 듣던 도준이 곧장 귀에 꽂히는 제 이름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 아, 지금 희찬 씨, 도준 씨 얘기 나오니까 계속 웃고 계시거든요. 아무리 인정도, 부정도 안 하셨다지만 표정이 너무 솔직하세요!
― 아, 제가 그랬나요?
― 뭐, 어떻게. 이 자리에서 음성 편지라도 해 보시겠어요? 듣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 하하, 그럴까요? 도준이 듣고 있을 텐데.
― 어머, 정말요?
― 그래도 제 스케줄은 다 챙기는 것 같더라고요.
DJ와 희찬은 연신 크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난 건지, 환하게 웃는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를 정도로 즐겁게 웃는 희찬의 목소리에 도준도 피식,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8년 전, 희찬의 라디오를 들으며 혼자 울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저 ‘절친한 친구’로 치부되어 연인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희찬의 목소리가 야속하면서도 당연한 일이라며 괜찮다고 스스로를 달래기 바빴는데 말이다.
문득 달라진 우리가 와 닿았다. DJ의 말대로 인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서로를 숨기지도 않았다.
우리는 닥쳐올 미래를 무서워하지 않기로 했고, 더 이상 어둠에 사무쳐 발버둥 치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잡은 손을 꼭 쥐고 함께 걷기로 했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지레 겁먹지 않기로 했다.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숨김없이 털어놓기로 했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함께 해결해 나가기로 했다.
도준의 입가에 드리운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 또 막상 하려니까 민망하네…….
― 하하! 그냥 한번 해 보세요, 뭐 어떻습니까?
― 그럼, 음…… 준아, 안녕! 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내 꿈 지켜 줘서 고맙고, 지금처럼 서로 돕고, 의지하면서, 계속 같이 재밌게 지내자. 항상 응원하고, 기대하고…… 사랑해!
― 와! 와!! 아니, 희찬 씨! 와!
― 아하하! 미치겠다. 도준아, 이제 라디오 꺼도 돼. 너도 일해.
희찬의 음성 편지가 들리기 무섭게 스튜디오가 왁자지껄해진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호들갑을 떠는 DJ와 주변 출연자들의 목소리를 기분 좋게 듣던 도준은 희찬의 말대로 라디오를 끄고서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큰 웃음을 터뜨렸다.
8년 전, 내 꿈은 장희찬이었다. 그리고 장희찬의 꿈은 ‘우리’라고 했었다.
지금 내 꿈은 우리가 되었다. 장희찬의 꿈은 ‘우리가 계속 꿈을 꾸는 것’이므로,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 꿈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촬영장에 다다랐다. 화보 촬영을 위해 촬영장을 찾은 도준은 자신을 반기는 매니저의 모습에 환하게 웃으며 부드럽게 차를 몰아 주차까지 마쳤다. 그리고 차에서 내리려던 찰나, 대표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아마 희찬의 음성 메시지로 인터넷에는 미친 듯이 기사가 쏟아지는 중일 테고, 그를 본 대표가 부리나케 전화를 건 것일 테다.
“네, 대표님.”
― 어, 그래. 내가 지금 라디오를 들어서 말인데.
도준의 예상대로 대표는 희찬의 라디오를 언급했다. 아예 안 숨기기로 했냐는 질문에는 한 번도 숨긴 적 없다, 대답했다. 기사를 걱정하는 그에게는 악의적인 것만 컨트롤 해 달라 부탁했다.
그리고 이어서 들려오는.
― 보기 좋다, 너희 그렇게 딱 정면 승부하는 거. 되게 보기 좋아.
“대표님, 저희 계속 감당해 주셔야 해요.”
뿌듯함이 물씬 묻어나는 대표의 짓궂은 사랑에 도준은 장난으로 응수했다.
덕분에 수화기 너머에서 큰 한숨이 터졌다.
“그래도 오늘처럼 대책 없이 행동하지는 않을게요. 오늘은 희찬이 기분이 많이 좋은가 봐요.”
혹시 난감함을 겪고 있을지도 모를 대표였으므로, 그를 달래기 위해 건넨 말이었지만, 대표는 도리어 상관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데뷔 이후 꾸준히 사생활을 숨겨왔던 두 사람이 연애 소식을 굳이 숨기지 않고 행동하는 것은 과한 것도 아니었다. 어쩌다 한 번씩, 뜨문뜨문 자신들의 솔직한 면을 보이는 두 사람에게 대중은 환호를 보내었다.
그러니까, 이 정도는 괜찮았다. 아슬아슬해 보여도 알아서 선을 지킬 줄 아는 두 사람이었고, 두 사람은 자신들이 정해 둔 선은 절대로 넘지 않았다. 그 기준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과하지 않은 수준이었으므로 대표로서는 딱히 두 사람을 말릴 이유도 없었다.
― 촬영장에는 다 도착했어?
“네, 이제 막 왔어요.”
― 그래, 오늘도 건강히 잘하고 와.
“네, 이따가 다시 전화드릴게요. 오늘 저녁 같이 어떠세요?”
― 그래. 식당 찾아볼게.
이내 통화를 마친 도준은 차에서 내려 제게 다가온 희경과 인사를 나누었다.
화보 촬영장은 상당히 분주해 보였다. 한쪽에는 의상실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밝은 조명이 수십 개가 달린 거울이 있었다. 의상실 옆에는 도준이 하루 종일 갈아입어야 할 수십 가지 의상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엄브렐러 조명이 카메라와 같은 방향을 바라볼 때.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어느새 메이크업과 헤어를 마친 도준이 훤칠한 키와 완벽한 몸매, 화려한 비주얼을 뽐내며 카메라 앞에 섰다.
“얼른 하고 퇴근합시다. 정면이요!”
이윽고 화보 촬영이 시작되었다. 도준은 자신이 입은 의상의 컨셉을 생각하며 손끝 하나, 표정 하나로 감독이 원하는 다양한 분위기를 자유롭게 자아냈다. 셔터 한 번에 달라지는 포즈는 수십 가지였다. 뜨거운 조명 아래 삐질삐질 땀이 흘렀으나 도준의 인상에는 힘든 기색 하나 묻어나지 않았다.
이도준과 장희찬은 더 이상 과거에 살지 않기로 했다.
현재를 사는 이도준과 미래를 사는 장희찬이 함께 그리는 그 중간의 어딘가에서 두 사람은 매일을 다채로운 색으로 꾸며 갈 것이다. 그들의 청춘은 눈부시게 찬란한 빛을 뿜어낼 것이 분명했다.
이도준과 장희찬은 잘못된 것을 하나하나 고쳐 나갈 때, 비로소 찾아오는 온전하고 눈부신 행복을 기꺼이 맞이하기로 했다.
아직 완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차차 나아질 것이라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꼭 잡은 채로, 함께 용기를 내어 내딛는 걸음은 아름답다 못해 찬란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외전 끝>
눈부신 항해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