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6화
“형 그러다 문이 형한테 또 맞는다?”
잼 바른 식빵을 우물우물 씹어 삼킨 차율이 눈을 가늘게 뜨며 낄낄 웃었다. 뜬금없이 나오던 사극 말투가 이번에는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아무래도 일정한 패턴 없이 기분 따라 바뀌는 모양이다.
“내가 언제 맞았다고 그래?”
휘건이 자세를 고쳐 잡으며 헛웃음을 흘렸다.
“맞았잖아, 이렇게!”
“아! 차율 너 이리 안 와?”
등짝을 퍽 치고 방으로 쪼르르 도망가는 차율을 따라 휘건 역시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방문을 잠가 버린 탓에 거실엔 문 두드리는 소리와 휘건의 짜증 섞인 외침만 울렸다.
“근데, 요리 좋아하는 멤버 있어?”
“웅?”
두 사람이 그러거나 말거나 볼이 터져라 식빵을 욱여넣던 시찬이 대답 대신 눈만 동그랗게 떴다. 열아홉이면 한창 성장기라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플 때지. 고작 식빵 몇 장에 계란 조금으로는 기별도 안 갈 것이다.
“……천천히 먹어. 더 구워 줄까?”
“우우웅. 아엉어으어야.”
시찬이 손에 붙은 빵가루를 털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오물오물 잘도 씹어 삼키는 모습이 꼭 햄스터 같았다.
“라면 먹을 거라고?”
다 뭉개지는 발음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게 기분 좋은지 눈꼬리를 살살 접으며 웃는다.
우유까지 한 잔 쭈욱 들이킨 시찬이 푸하- 하며 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으로 동선을 쫓으니 자연스럽게 찬장에서 라면과 냄비를 꺼낸다.
“또 혼나는 거 아니야?”
“괜찮아. 아침은 많이 먹어도 돼.”
아예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냄비에 물을 담는다.
이왕이면 좀 더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으면 좋을 텐데. 생각해 보면 강문 역시 학창 시절 밥보다 군것질에 환장했었다.
“아 참, 뭐 물어봤었지, 형?”
가스 불을 켜고 마지막 한 톨의 스프가루까지 탈탈 털어 넣은 시찬이 고개만 뒤로 돌아보며 물었다. 강문은 자리에서 일어나 비워진 접시들을 정리하며 다시 물었다.
“조리 도구도 많고 냉장고도 깨끗하길래. 혹시 요리 좋아하는 애가 있나 해서.”
카운터에 삐딱하게 기대서서 물이 끓어오르길 기다리던 시찬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가 다시 돌아왔다.
“아아~ 휘건이 형.”
대박. 어쩜 취미까지 완벽하지?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강문과는 달리 때마침 끓어오른 물에 면을 집어넣는 시찬의 목소리는 감추려는 노력이 무색하게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가장 가까이에서 생활을 공유하던 멤버들 중 하나가 기억을 전부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그리 쉽게 받아들여질 리 없을 것이다.
얘는 감정을 숨기는 게 서툰 타입이구나.
강문은 머릿속으로 시찬에 대한 정보를 하나 더 추가하며 말없이 싱크대에 설거지거리를 쌓았다. 이럴 때는 괜히 말을 얹어 부추기는 것보다 스스로 정리하길 기다려주는 게 낫다.
“너 이 새끼, 이리 와.”
“아아! 아무것도 안 한다며!”
“넌 맨날 속냐?”
살살 구슬리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휘건이 문을 열고 나온 차율의 목덜미를 붙잡고 식탁으로 돌아왔다. 멋없이 붙잡혀 있는 차율의 얼굴엔 억울함과 배신감이 가득했다.
“자, 빨리.”
여전히 휘건에게 뒷목을 붙잡힌 차율이 시찬과 강문 쪽으로 툭 밀렸다. 아마 애들이 보는 앞에서 사과하면 봐주겠다고 회유한 모양이었다.
“죽여주시옵소서.”
“장난 말고 똑바로 안 해?”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밥상머리에서 장난치지 않겠습니다.”
차율의 허리가 예의 바르게 꾸벅 숙여졌다. 그 모습에 휘건이 만족스러운 듯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래. 472번째 사과 잘 들었다.”
“그걸 왜 세고 있어! 징그러워, 진짜…….”
제 뒷덜미를 움켜쥔 손을 파드득 떨쳐낸 차율이 질색하며 몸을 털었고, 휘건은 낄낄거리며 냉장고에서 물을 꺼냈다.
“둘이 죽이 잘 맞네?”
“잘 맞긴. 내가 놀아 주는 거지.”
휘건의 말에 차율이 시찬의 옆에 꼭 붙어 고개만 내밀고 으엑, 하는 소리를 냈다. 그에 휘건은 한쪽 눈썹을 까딱거리며 말없이 오른손 중지만 기다랗게 세웠다. 매사에 무덤덤할 것처럼 생겨 가지고는, 하는 짓은 영락없는 이십 대 초반 남자애라 그게 또 매력 있었다.
“제대로 치였네…….”
그렇다. 이제 강문의 눈은 휘건이 어떤 행동을 하든 매력적으로 볼 수밖에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강문은 다시금 자연스레 올라가는 광대를 억지로 꾹꾹 눌러 내렸다.
“뭐라고?”
“아니야, 아무것도.”
아하하 하고 웃어넘기는데, 완전히 닫히지 않고 살짝 열려 있던 문이 열리며 호재가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왔다. 까치집이 된 머리가 기발한 모양새로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굉장히 멋진 수면을 취했나 보다.
“웬일로 다 같이 앉아 있…….”
“호, 호재 형! 형도 라면 같이 먹을래? 내가 특별히 한 젓가락만 줄게.”
이제 막 조리가 끝난 라면을 한 젓가락 뜨던 시찬이 황급히 호재의 말을 끊었다. 시찬의 얼굴과 그 앞의 라면을 번갈아 쳐다본 호재가 코웃음을 쳤다.
“됐어.”
이어서 그 큼지막한 손으로 시찬의 머리카락을 한 번 헝클어트리고는 냉장고 앞에 섰다. 탄산수 한 병을 꺼내 드는 호재를 따라 시선을 움직이는 강문의 눈앞에 익숙한 퀘스트 창이 나타났다.
띠리링♬
차율과 함께 안무 연습실로 가세요.
[확인]
강문은 이제 제법 덤덤하게 확인 버튼을 눌렀다. 착실하게 메인 퀘스트를 따라가야 무사히 엔딩까지 도달할 수 있겠지. 그리고 운이 좋으면 휘건에 대한 정보도 조금은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율아. 괜찮으면 나 안무 좀 가르쳐 줄래?”
“어? 나?”
휘건의 눈치를 살살 살피며 발끝을 까딱거리던 차율이 갑자기 튀어나온 제 이름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놀란 것도 잠시, 신나서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당연히 괜찮지! 지금 당장 가자, 형! 한시가 급하다고!”
그 얼굴은 꼭 놀이공원에 가자는 말을 들은 어린아이 같았다. 안무 연습 좀 도와달라는 게 그리 신날 일인지 잘 이해는 가지 않지만.
강문은 그 꼴이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 눈썹을 구부리며 작게 웃었다.
“일단 좀 씻고. 지금 7분이니까 딱 30분 되면 나가자.”
“응! 호재, 나 화장실 좀 쓸게!”
대답과 동시에 차율이 호재의 방으로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자신은 호재와 휘건의 방에 딸린 화장실을 쓸 테니, 거실에 있는 큰 욕실에서 편하게 씻으라는 배려였다.
“신났네, 신났어.”
잔뜩 기분 좋아진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은 호재가 탄산수 병을 입에 물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라면을 입에 문 시찬의 입꼬리도 비죽비죽 끌려 올라가고 있었다.
“……?”
영문을 알 수 없는 강문의 머릿속에 자그마한 물음표 하나가 자리 잡았다.
* * *
“우리 먼저 간다! 이따 맞춰서 올라갈게.”
“어엉.”
현관 밖으로 나서니 햇살이 머리 위로 기세 좋게 부서져 내리며 이제 막 따뜻해지기 시작한 3월 중순의 날씨가 두 사람을 반겼다.
“연습실 여기서 멀어?”
“가까워. 걸어서 10분 정도?”
뛰어서는 5분이면 간다는 말도 덧붙었지만, 땀을 흘리러 가는 마당에 가면서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아 강문은 그냥 못 들은 척했다. 차율 역시 뛸 마음은 없었는지 별다른 말은 없었다.
“노래는 들어 봤어?”
“으음…… 아니.”
“하긴. 형도 어제부터 정신없었겠지.”
사실 휴대폰에 파일이 있는지 찾아보려다 실패했다는 말이 더 맞았다. 그래서 나오기 전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던 악보를 대충 훑어보긴 했는데, 음악적 지식이라고는 중고등학생 때 학교에서 배운 게 전부라 그다지 소용없었다.
“그…… 아침 차려 줘서 고마워, 형.”
“별거 아니라니까 자꾸 그래.”
“그래도. 좋으니까 그러지. 헤헤.”
차율이 팔을 과장스럽게 앞뒤로 흔들며 배시시 웃었다. 도대체 얘네는 사이가 좋았던 거야 나빴던 거야? 혼란스러움에 강문의 고개가 한쪽으로 갸우뚱 기울었다.
시답잖은 잡담을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랐다. 이름 없는 작은 회사라 허름한 외관을 상상했는데, 의외로 멀끔해 조금 놀랐다. 대표가 돈이 많은가?
“오…….”
사무실은 3층, 연습실은 지하 2층에 있다는 말을 들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는 강문의 표정을 살핀 차율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괜찮지? 나도 처음 봤을 때 좀 의외라고 생각했어.”
“아니, 뭐…….”
속마음을 그대로 다 들켜 버린 것 같았던 강문은 멋쩍게 말을 얼버무렸다. 조금 어색한 태도로 방황하던 시선이 층별 안내 사인의 ‘ST Entertainment’라는 글자 근처에서 멈추었다.
“근데 왜 ST야? 무슨 의미가 있어?”
“대표님 이름이 주상태라서.”
“상태…… 아…….”
뭔가 대단한 의미가 있는 네이밍인 줄 알았는데, 대표 이름의 약자일 줄이야. W.A.IN은 어떤 의미인지 물어보려다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2층에 내려오자 바로 앞에 커다란 유리문이 나타났다. 차율이 도어락에 비밀번호를 누르자 반투명한 문이 스르륵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기다란 복도를 사이에 두고 왼쪽에 하나, 오른쪽에 세 개의 문이 보였다. 입구 근처 구석에는 나름의 휴게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여기는 보컬 연습실이고, 안무 연습실은 여기야.”
오른쪽의 문들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알려 준 차율이 왼쪽의 문을 밀었다. 문이 열리자 벽을 빼곡히 채운 전신거울에 두 사람의 모습이 비쳤고, 이내 연습이 용이하도록 뻥 뚫린 공간에 발소리만 뚜벅뚜벅 울렸다.
“가방은 옆에 그냥 놔두고, 잠시만!”
문 옆의 기다란 소파에 강문을 앉힌 차율이 거울 앞 스피커로 쏜살같이 뛰어가 전원을 켰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자 이내 커다란 소리로 음악이 흘러나왔다.
강문은 조용히 눈을 감고 감상에 집중했다. 그러자 신인 아이돌의 타이틀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세련된 사운드가 넘실거리며 귀를 파고들었다.
[이 길 끝에 선 내게 오는 네게 끌리는 나-]
후렴부가 시작되는 순간, 강문의 머릿속에 조명이 번쩍이는 무대가 펼쳐졌다. 단정하면서도 청량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의상. 귀에 쏙쏙 박히는 멜로디 라인. 한번 들으면 저도 모르게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로 중독성 있는 후크.
[발끝을 세워 넌 내 앞의 선을 지워-]
적절한 군무와, 각자의 개성을 매력적으로 뿜어내는 외모가 카메라 앵글마다 가득하다. 현장에 있는 팬들은 응원봉을 흔들며 환호하고, 가끔 눈이 마주칠 때면 웃어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무대가 끝나기 무섭게 SNS에 프리뷰가 쏟아지고, 프레임 단위로 핥고 앓는 팬들의 후기가 그득하다. 그야말로 케이팝 역사에 길이 남을 성공적인 데뷔였다.
이건 절대 망할 수가 없다.
뼛속까지 대중적인 취향을 가진 강문의 심장이 확신을 던졌다. W.A.IN의 데뷔곡엔 흔히들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자본주의의 맛이 있었다.
“노래 좋지? 이게 우리 데뷔 타이틀이래.”
차율의 얼굴에는 설렘이 가득했다. 미래에 대한 확신과 기대를 품은 얼굴은 사람을 한층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연습하면서 자꾸 듣다 보면 노래도 금방 다시 익을 거야. 그럼 시작할까, 형?”
“잠깐. 그 전에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강문은 문득 처음 이곳에서 눈을 떴을 때 상태 창에서 보았던 문구를 떠올렸다. 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혹시 우리 컨셉…… 양아치야?”
“어떻게 알았어? 휘건이 형이 말해줬나? 세상을 등지고 살던, 어두운 과거를 가진 양아치에게 어느 날 찾아온 사랑이…….”
“아악!”
듣자마자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는 걸 느낀 강문이 미간을 팍 구기며 소리 질렀다. 저게 무슨 90년대 팬픽 감성이람! 이러다 아주 ‘쿨워터 향’도 나오겠다 싶은 절망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우선은 저 컨셉부터 어떻게 해야 한다. 멤버 비주얼도 좋고, 노래도 이렇게 잘 뽑아 놨으니, 이걸 잘 활용하기만 하면 된다.
“율아. 형 믿지?”
강문이 제법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묻자 마주한 차율의 눈이 동그래졌다.
“당연히 믿지……?”
물끄러미 차율을 바라보던 강문이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퀘스트가 왜 ‘안무 연습을 하세요.’가 아니라 ‘안무 연습실에 가세요.’였는지 이제야 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