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10화 (10/82)

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10화

“청량하고 순수한 이미지로 가는 게 곡이랑 더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요.”

키워드를 제시한 탓인지 입이 제 의도와는 상관없이 멋대로 움직였다.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하긴. 원래 컨셉이 곡에 비해 좀 겉도는 느낌이 있긴 하지.”

의외로 대표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잠시, 살짝 내리깔았던 눈이 날카롭게 강문에게 꽂혔다.

“근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청량함은 분위기지, 이미지가 아니잖아?”

생각보다 날카로운 지적에 강문의 어깨가 움찔했다. 대충 맞는 키워드만 제시하면 끝인 줄 알았는데.

“우린 처음에 어린 학생들이 소위 잘나가는 학생들을 선망하는 심리를 노리고 양아치 이미지를 기획했어. 주 타겟층이 10대 청소년들이었다는 소리야.”

양아치 컨셉에 그런 의미가 있었다니. 마냥 촌스러운 감성이 아니었다는 게 좀 놀라워 강문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청량한 거 좋지. 풋풋하고, 신인 때만 느낄 수 있는, 때가 덜 묻은 감성도 있고. 근데 어떤 이미지로 갈 건데? 타겟이 누구야?”

대표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분위기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정확한 이미지와 타겟층을 정하는 게 마케팅의 가장 기본이었다.

그래도 이대로 양아치 컨셉을 가지고 갈 수는 없었다. 컨셉을 바꾸지 않으면 연예계를 떠들썩하게 만들 학폭 관련 과거 폭로와 더불어 컨셉 때문에 이미지가 굳어져 변명도 한 번 하지 못하고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릴 텐데,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지.

다들 순해 보였기에 그럴 리는 없다고 믿고 싶지만, 아주 만약에, 정말 멤버 중 학폭 과거를 숨긴 사람이 있는 경우엔 더 문제가 될 것이고.

잠시 고민하던 강문은 다시 보유 카드 목록을 확인했다. 조금 전 제시했던 것을 제외한 9개의 키워드 중 아무리 찾아봐도 상황을 뒤집을 만한 키워드가 없었다.

이렇게 실패하는 건가 싶어 낙심하려던 찰나, 안내 메시지가 떴다. 튜토리얼이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같은 등급의 카드 두 개를 합성하여 새로운 키워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때 낮은 확률로 더 높은 등급의 키워드가 등장합니다.

단, 한 번 합성에 사용한 카드는 다시 합성할 수 없습니다. 합성 실패 시 확률적으로 사용한 카드가 사라질 수 있으며, 성공 시에는 그대로 유지됩니다.

[확인]

카드 합성 시스템까지 구현되다니, 좀 신기했다. 안내 메시지가 사라지며 보유 카드 목록 상단에 ‘카드 합성’이라는 버튼이 추가됐다.

합성 메뉴에 들어간 강문은 아까부터 계속 거슬렸던 B등급 ‘흑염룡’과 ‘두통약’ 카드를 골라서 넣었다. 합성에 성공해서 새 키워드를 얻으면 가장 좋지만, 실패해도 눈에 거슬리던 카드 두 장을 지워 버릴 수 있으니 썩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이걸 누르면…….”

합성 버튼을 누르자 카드 두 장이 빙글빙글 돌아가다 빛나는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다. 무언가 경쾌한 효과음과 함께 새로운 한 장의 카드가 나타났다. 합성에 성공한 듯했다.

강문은 살짝 기대하는 마음으로 카드를 슬며시 뒤집어 보았다.

“……뭐야?”

카드에는 [안경 닦이 (B)]라고 적혀 있었다. 어째 흑염룡보다 더 쓸모없어 보이는 키워드라 맥이 쭉 빠졌다. 이게 왜 B등급씩이나 되는지 이해도 안 됐다.

“다시, 다시.”

애써 희망을 그러모은 강문이 이번엔 C등급의 ‘귀농’ 카드와 ‘사탕 껍질’ 카드를 눌렀다. 가장 낮은 등급의 카드를 합성하면 등급 업그레이드도 기대하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A등급 카드를 쓰기엔 좀 아까웠다. 만약 실패하게 된다면 그나마 있던 카드마저 사라지니까.

이번에도 합성 버튼을 누르자 현란한 효과와 함께 새로운 카드가 나타났다. 강문은 눈을 질끈 감고 카드를 집어 들었다. 괜히 손끝에 닿는 감촉이 조금 전과 다른 것 같아 심장이 두근거렸다.

“제발……!”

슬금슬금 실눈을 뜬 강문의 시야에 얼핏 황금색 테두리가 보였다. 설마…….

[키링남 (R)]

“와악!”

강문은 너무 기쁜 나머지 입을 틀어막으며 소리를 질렀다. 청량한 분위기의 키링남이라니. 이건 실패할 수가 없는 조합이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키링남’ 카드를 제시하자 이번에도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청량하고 풋풋한 키링남 이미지는 어떠세요?”

“키링남?”

대표의 미간이 미심쩍다는 듯 찌푸려졌다.

“요즘은 마초적인 감성보다 말 잘 듣는 키링남이 대세잖아요. 그런 점을 이용해서 어필하면 분명 성공할 수 있을 거예요. 대신!”

강문이 괜스레 비장하게 손가락 하나를 척 들어 올리며 덧붙였다.

“유약한 이미지는 절대 안 돼요. 무조건 피지컬은 좋아야 해요.”

이번엔 대표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마초적인 감성은 안 먹힌다며?”

“그거랑 이건 다르죠!”

답답함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강문이 옆에 멀뚱히 서 있던 휘건의 어깨를 잡고 대표 앞으로 척 들이밀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휘건은 다분히 얼떨떨해 보였다.

“난 왜…….”

“자, 보세요. 지금도 나쁘지 않지만, 몸 좀 더 키우면 훨씬 보기 좋겠죠?”

“지금 무슨 말…….”

“아, 좀. 가만히 있어 봐.”

강문이 불편한 듯 꿈지럭거리는 휘건의 등짝을 내리쳐 가만히 있게 만들었다. 휘건의 표정에 얘가 진짜 미쳤나, 하는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몸도 좋고, 운동도 잘 하고, 성격도 크게 모난 데 없고, 세상 잘난 맛에 사는 그런 애가 나한테만 쩔쩔매. 그게 먹히는 거라고요.”

그 열띤 설명에 대표가 계속해 보라는 듯 고개를 살짝 치켜들며 팔짱을 꼈다.

“특히 얘는 얼굴에 ‘나 예민함’이라고 써 있잖아요? 이런 애가 얼굴 붉히면서 웃어준다? 나한테 막 수줍게 손 덜덜 떨면서 내민다? 이 반전 매력! 아시겠어요?”

휘건이 가장 장신이기는 하지만, 저를 포함한 다른 멤버들도 다들 180cm는 넘는 키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조건은 조물주의 선택을 받지 않는 이상 얻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날 때부터 타고나야 한다는 말이다.

다행히 멤버들 모두 인간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기본 조건을 잘 타고났고, 이제 이를 잘 이용하기만 하면 되었다. 완벽한 키링남 아이돌의 탄생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다른 구체적인 문제들은 저도 잘 모르지만…… 이렇게만 말씀드려도 대표님은 다 아시겠죠. 프로시잖아요.”

강문이 다시 휘건의 옆에 서서 어깨를 탁탁 털어 주며 능청스레 웃었다. 휘건은 물론, 대표 역시 조금 놀란 듯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우리 문이가 휘건이를 이렇게 좋아하는지 몰랐네?”

“아…… 하하.”

자신이 너무 오버한 건 아닌지 뒤늦게 신경 쓰여 강문이 멋쩍게 뒤통수를 슬슬 긁었다.

혹시 너무 주제넘게 굴었나 싶어 대표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 대답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인지 퍽 밝아 보였다.

“좋아! 우리 문이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안무부터 하나씩 다 수정해 보자고.”

대표가 만족한 얼굴로 손뼉을 짝 부딪히자 퀘스트 성공을 알리는 메시지가 떴다.

키워드 제시 대성공!

컨셉 변경에 성공했습니다!

보상 : 대표 신뢰도 +20

[확인]

시스템 창을 보고서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뭐든 첫 단추가 중요한 법이니, 앞으로는 흐름만 잘 타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 많이 바빠질 테니까, 그때까지 좀 쉬고 있어. 문이도 몸 잘 추스르는 데에 집중하고. 최 실장, 야근 괜찮지?”

“……안 괜찮은데요.”

안 괜찮다는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낄낄 웃은 대표가 성수를 끌고 연습실 밖으로 사라졌다. 어깨를 붙잡혀 끌려 나가는 성수의 얼굴에 그늘이 가득 내려왔다.

그 듬직한 모습에 강문은 두 사람의 뒷모습에 대고 꾸벅 가볍게 묵례했다.

“후우…… 기절하는 줄 알았네.”

그렇게 두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강문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당차게 말을 늘어놓기는 했지만, 고작 연습생 신분으로 대표에게 따박따박 제안하는 건 역시 쉽지 않았다.

그래도 대표가 영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은 아니라 다행이었다. 부디 제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고 잘 준비해 주면 좋으련만.

“우리도 이만 가자.”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일이 휘리릭 지나가 피곤해진 강문이 휘건에게 손짓했다. 얼른 숙소로 돌아가 많이 놀랐을 차율도 달래 줘야 했다.

“야.”

소파에 널브러져 있던 가방을 챙기려는데, 뒤에서 가라앉은 휘건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제법 친절하게 굴던 어제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휘건이 저를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다.

“날 그렇게 보고 있는 줄은 몰랐네?”

“어…… 어?”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우악스럽게 멱살이 잡혔다. 손에 챙겨 들었던 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내용물이 와르르 쏟아졌다.

“진작 말하지. 그럼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줬을 텐데.”

“잠깐, 왜 그…….”

“무슨 속셈이야, 너. 사람 가지고 노는 게 그렇게 재밌어?”

휘건은 화가 많이 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강문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휘건이 화를 낼 만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갑자기 태도가 돌변해버린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당황스러운 탓에 말이 나오지 않아 입만 벙긋거렸다. 그러자 저를 노려보던 그의 시선이 미세하게 아래로 향했다. 한쪽 눈썹을 까딱인 휘건의 입술이 부딪혀 온 건 한순간이었다.

“읍……!”

예상치 못했던 전개에 몸이 굳어 버렸다. 키스도 뭣도 아닌 입맞춤이 짧으면서도 긴 애매한 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사고가 정지된 가운데 딱 한 가지 생각만 엉뚱하게 떠올랐다.

얘 입술 진짜 부드럽고 따뜻하다. 안 그러게 생겨서는.

“……!”

예상 외로 휘건이 먼저 서둘러 입술을 떼고 멀찍이 몸을 떨어트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건지, 가만있다 뽀뽀를 당한 건 이쪽인데, 어째 자신이 더 당황한 듯 동공을 사정없이 흔들고 있었다.

강문은 소파에 반쯤 누운 채로 멀뚱히 눈만 깜빡거렸다. 아무 말이 없는 강문을 보던 휘건의 얼굴에 점점 붉은 기가 물들었다.

“……씨발.”

작게 욕을 뱉은 휘건이 도망치듯 연습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요란스럽게 문이 닫히는 소리 뒤로 뛰어가는 발소리가 옅게 사라졌다.

멍하니 문 쪽만 바라보고 있던 강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입술에 닿던 따뜻한 촉감이 아직 선연했다.

“씨발, 뭐지? 뭐지……?”

좀 전까지만 해도 소란스러웠던 연습실엔 물음표 백만 개를 떠안은 강문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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