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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17화 (17/82)

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17화

다시 들어도 역시 데뷔곡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히게 좋았다. 어느 정도냐 하면, 훗날 탑급 아이돌로 완벽히 자리 잡은 뒤 시상식 특별 무대에서 이 곡으로 공연하는 후배 아이돌을 보며 흐뭇하게 박수를 치는 광경까지 촤르륵 떠올랐다.

눈만 마주쳤는데 상상 속에서 벌써 결혼에 애까지 셋 낳았다는 사람들을 보고 미친 거 아닌가 했는데, 그와 비슷한 심정이었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한국 시상식은 물론 저 멀리 해외 시상식의 상까지 전부 쓸어 담고 있었다.

“노래 진짜 좋다…….”

이어폰으로 들으니 안무 연습실에서 스피커로 들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라 새로웠다. 청량한 파도 같기도, 푸르게 펼쳐진 별들이 가득한 밤하늘 같기도 한 신비로운 분위기의 사운드가 귀에 더 콕콕 박혔다. 아무리 들어도 그저 그런 신인 작곡가나 프로듀서의 솜씨는 아니었다. 돈깨나 썼겠다 싶었다.

[발끝을 세워 넌 내 앞의 선을 지워-]

가만히 눈을 감고 감상에 집중하던 강문의 귓가에 소름 끼치도록 환상적인 목소리가 지나갔다. 거칠고 낮게 울리는 허스키한 음성에 부드러움이 공존하는 게 신기했다. 그리고 이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독보적인 음색의 주인은 당연 휘건이었다.

처음 목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예상하긴 했지만, 역시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매력적이었다. 이 정도라면 여자들이 제일 기피한다는, 남자들의 노래방 애창곡을 불러도 다 넘어오고도 남을 것 같았다.

“넌 진짜…… 다 가졌네, 다 가졌어.”

이 외모에, 이 피지컬에, 노래까지 잘하다니, 진짜 반칙이잖아. 음정, 박자 등 실력은 노력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해도 목소리는 정말 타고나야 하는 건데.

조물주, 아니, 이 게임의 디렉터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박휘건에게 이런 사기급 능력치를 전부 몰아서 준 걸까? 역시 진짜 주인공은 강문이 아니라 박휘건이었던 게 아닐까?

“헛소리 그만하고 곡이나 익혀.”

“예, 예.”

휘건은 아마 자신의 틱틱대는 말투마저 강문에겐 감미롭게 들린다는 걸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것이다. 괜히 기분이 좋아져 히히 웃고 있으니 곡이 자연스레 다음 트랙으로 넘어갔다.

“이건 뭐야?”

“홀로그램. 4번 트랙.”

간결한 대답에 강문이 아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트랙 순서대로 넘어가는 줄 알았으면 아예 첫 트랙부터 들었을 텐데. 뭐, 한 바퀴 돌고 다시 돌아가서 들으면 되니까.

“…….”

앨범 전체곡을 쭉 들으면서 든 생각은, 신생 기획사의 첫 아이돌치고는 그 퀄리티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대표가 재력이 정말 좋아서 돈을 쏟아부었거나, 아니면 인맥이 정말 넓어서 그 덕을 받은 게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퀄리티였다.

흔히 대형으로 꼽히는 기획사에서 나올 법한, 대중들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해 나온 사운드였다. 앨범 전체의 커다란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각 곡의 특색이 뚜렷해 쉽게 질리지 않을 것 같다. 이런 장르가 취향인 코어 층은 물론 대중성까지 다 잡은 명반이었다.

그래서 더욱, 왜 이런 앨범과 이런 애들을 가지고 망해버렸는지 이해가 안 갔다. 학폭 이슈가 뭐 어떻게 터졌기에, 그렇게 한 순간에 가라앉아 버린 건지.

혹시 배경과 등장인물만 같은 전혀 새로운 게임 속은 아닌지 조금 혼란스러웠다. 마치 게임의 시스템과 모든 배경 장치들이 W.A.IN이 해체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왜 그래?”

갑자기 심각해지는 강문의 표정을 살핀 휘건이 조용히 물었다. 코로 숨을 크게 내쉰 강문이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냥 가상현실 게임을 즐기는 중이라고 틈날 때마다 스스로를 세뇌시키고 있기는 하지만,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에이, 몰라! 연습이나 하자!”

손뼉을 두 번 크게 짝짝 마주친 강문이 어깨를 가볍게 돌리고 피아노 건반 위로 손을 올렸다. 댄스곡을 왜 피아노 앞에서 연습하는 건지 처음엔 이해가 안 갔는데, 정확한 음정을 맞추기 위해서라고 아까 방에서 업데이트 된 음악적 지식이 알려줬다.

“타이틀이 급하니까, 이거 먼저 해 볼까?”

눈을 가늘게 뜨고 악보를 훑어보니 순식간에 머릿속으로 멜로디가 들어왔다. 거기에 빼곡히 적어둔 메모들까지 더해지니 어떤 부분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선명하게 그려졌다.

건반소리를 따라 천천히 열린 입에서 깨끗하면서도 단단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스스로 낸 목소리가 놀라워 강문의 눈이 조금 커졌다. 주인공은 이런 목소리를 가졌었구나. 따로 성우가 없는 게임이라 늘 상상만 했었는데.

메인 보컬이라는 포지션에 걸맞는 무척 매력적인 음성이 귓가에 부드럽게 흘렀다. 꼭 하프 같기도 하고 플룻 같기도 했다. 노래를 한다기보단 악기를 연주한다는 게 더 잘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뭐야. 나 잘하잖아?”

후렴구 한 소절을 무사히 마친 강문이 만족스러운 듯 눈썹을 까딱이며 씨익 웃었다.

원래 가지고 있던 능력치만 그대로고 나머지는 스스로 채워 가야 할까 봐 좀 걱정했는데, 이번에도 몸이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곡을 잘 외우기만 한다면 따로 더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절로 나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악보를 넘기는데, 옆에 앉아 있는 휘건이 이상하게 조용했다. 고개를 슬쩍 옆으로 틀어 바라보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왜?”

“아니…….”

왜인지 휘건은 말문이 막힌 듯 입만 몇 번 벙긋거렸다. 강문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자 무언가 곤란한 듯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그냥. 오랜만에 듣는다 싶어서.”

강문의 고개가 이번엔 반대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었다. 재작년에 휘건이 연습생으로 들어왔다고 했으니 적어도 2년은 같이 굴렀을 텐데, 오랜만이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리둥절해 하는 걸 눈치챘는지 휘건이 제 뒷목을 슬슬 긁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너 내가 들어온 뒤에 내 앞에서 노래한 적 한 번도 없거든.”

“뭐? 그럼 녹음은?”

“너만 항상 따로 했어.”

“그게 가능해?”

강문의 고개가 한층 더 의문으로 기울어졌다. 무슨 이미 정상에 오른 탑 스타도 아니고, 고작 데뷔를 앞둔 연습생이 그렇게 멋대로 군다고? 제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뭐 어디 있는 집 자식이라도 되나? 그런 설정은 없었는데…….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짚고 갸웃거리는 강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휘건이 픽 바람 빠지듯 웃었다.

“그러게. 가능하더라고, 너는. 그게 뭐든.”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목소리에 ‘넌 뭐든 그렇게 다 네 맘대로지?’하던 어제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도대체 이 세계관에서의 주인공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감조차 안 잡혔다.

강문이 알고 있는 주인공은 사려 깊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눈앞의 이득을 챙기기보단 사람과의 관계를 더 중요시하고, 조금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미련하다 싶을 정도로 묵묵히 임했다. 그런 답답함이 나름의 매력으로 작용했는데, 여기서 들은 얘기를 종합해 보면…….

“나 혹시…… 뭐라도 돼?”

맹하니 던져지는 질문에 휘건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러고보면 휘건의 입장에선 너무나도 당연한 대답이었다. 물론 여기서 나보다 날 더 잘 알기에 이것도 아는 줄 알았다며 놀리고 싶은 마음이 조금 들었지만,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까 봐 꾹꾹 눌러 참았다.

“괜찮아. 앞으로 많이 불러주면 되지 뭐.”

어쨌든 강문은 과거의 주인공과 똑같이 행동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자고로 아이돌이라면 같이 연습도 하고 으쌰으쌰 하면서 열심히 달려가는 게 미덕 아니겠어? 팬들이 그런 관계성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게다가 두 사람은 고등학생 때 부부라고 불릴 정도로 붙어 다녔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건 어디서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관계성이다. 제대로 이용해도 모자랄 텐데, 굴러 들어온 복을 뻥 걷어찰 수는 없지.

“이 엉아가 말했지? 내 노래 평생 듣게 해 주겠다고. 나만 믿어.”

강문이 제 왼쪽 가슴을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리며 씨익 웃었다. 비록 지금은 스물한 살의 몸에 들어와 있지만 실제로는 네 살이나 많으니, 엉아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야. 강문.”

“어엉?”

다시 연습을 시작하려는데, 조금 전보다 한참은 더 가라앉은 목소리가 강문을 불렀다. 갑자기 왜 무게를 잡나 싶어 아리송해 하며 고개를 돌리니 짙게 깔린 눈동자가 저를 마주했다.

휘건의 표정은 속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 보였다. 속에 있는 두 개의 자아가 싸우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존나 이상한 거 아는데…….”

이번에도 강문의 타고난 눈치가 기지를 발휘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휘건의 입에서 어떤 단어가 나올지 예상이 되었다. 그리고 무슨 포인트에서 버튼이 눌려버렸는지도.

“키스해도 돼?”

역시 제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이번엔 어제와 같은 실수는 하기 싫은 모양인지 물어보는 시늉이라도 하는 게 씹어 먹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당연히 못 할 것도 없지만, 순순히 내어주기엔 또 뭔가 아쉬웠다. 흐음, 하고 숨을 내쉬곤 턱을 비스듬히 치켜 올린 강문이 시선을 슬쩍 내리깔고 씨익 웃었다.

“하고 잊어버릴 거면 해도 돼.”

말이 끝나기 무섭게 휘건의 커다란 손이 강문의 뒤통수를 휘어 감쌌다. 이번엔 단순한 입술 박치기가 아니라, 제대로 혀를 섞는 키스였다.

이 짜릿한 감각은 성적인 쾌감 그 이상의, 일종의 성취감이었다. 박휘건이라는 인물은 늘 저에게 질 수밖에 없다는 성취감. 그거면 모든 게 다 충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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