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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18화 (18/82)

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18화

휘건은 하고 잊어버릴 거면 해도 된다는 강문의 말을 생각보다 더 착실하게 지켰다. 짧은 키스 후 아무렇지 않은 척 연습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이번에도 강문은 왜 덜컥 키스를 하고 싶어졌는지 묻지 않았다. 어렴풋이 짐작이 가서이기도 했고, 굳이 이유를 알아야 하나 싶어서이기도 했다. 그리고 게임을 하다 보면 캐릭터랑 키스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 그보다 더한 것도 가능할 텐데.

아무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묘하게 굳어 있는 휘건의 얼굴은 딱 강문에게만 티가 날 정도라 다른 멤버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휘둘릴 생각이 없다며 으름장을 놓았던 게 무의미했다. 그게 또 못 견디게 귀여워서, 그날 밤 강문은 잠들기 전에 베개를 백 번은 때렸다.

“존나 귀엽네, 진짜……. 표정 뭐야?”

불이 꺼진 천장에 최대한 어색함을 숨기려 노력하던 휘건의 얼굴이 둥둥 떠다녔다. 데뷔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연애 사업에나 힘쓰고 싶어지는 위험한 얼굴이었다.

물론 이왕 게임 속에 들어온 만큼 이것저것 다 즐겨도 나쁠 건 없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자신이 들어온 이 게임은 엄연히 ‘육성 시뮬레이션’이고, 즐기는 것도 좋지만 일단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게 우선이다.

근데…… 장르가 육성 시뮬레이션이 맞기는 한 거겠지?

“알고 보면 그냥 뽑기 게임인 거 아니야?”

어디다 써야 할지 감도 안 잡히는 키워드들을 떠올린 강문이 작게 투덜거렸다. 가뜩이나 뽑기 이용권은 퀘스트 보상으로만 얻을 수 있어 막막한데, 그마저도 유용한 키워드가 손에 꼽힐 정도라 게임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아, 맞다.”

투덜거리던 강문은 문득 어제 휘건에 대한 퀘스트를 완료하고 받은 뽑기 이용권을 기억해 냈다. 나중에 또 키워드 제시 이벤트가 떴을 때 써도 되겠지만, 미리 뽑아서 대충 어떻게 써먹을 수 있을지 밑그림이라도 그려두는 게 더 좋을 거라고 판단했다.

“휴대폰으로도 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휴대폰 어플 서랍을 뒤적이던 강문이 세 번째 페이지에서 ‘캔디 머신’이라는 어플을 발견했다. 알록달록한 아이콘을 누르자 뽑기 탭에서 봤던 것과 같은 캔디 머신이 화면 가득 크게 들어찼다.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되는지, 숨을 한번 크게 고르고 10회 뽑기 버튼을 눌렀다. 색색의 구슬들이 캔디 머신 안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애니메이션이 지나가고, 번쩍거리는 빛과 함께 카드 열 장이 주르륵 나열되었다. 마찬가지로 하나씩 뒤집히며 키워드가 등장했다.

[밴드 사운드 (S)]

[마린 룩 (A)]

[슬라임 (C)]

[단정함 (A)]

[비비드 (A)]

[일렉트로닉 (B)]

[인공 눈물 (C)]

[블랙 수트 (R)]

[눈 (A)]

[중2병 (C)]

처음 뽑기를 했을 때보다는 괜찮게 뽑힌 것 같다고 생각하며 살펴보다, 중2병이라는 키워드에서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저번엔 흑염룡이더니, 꼭 이상한 게 하나씩 끼어 있네. 슬라임은 또 뭐야?”

저게 애들이 가지고 노는 그 말랑말랑한 장난감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게임에 흔히 등장하는 몬스터를 말하는 건지 아리송했다. 어느 쪽이든 사용할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밴드 사운드’나 ‘블랙 수트’처럼 꽤 유용한 키워드도 얻어서 퍽 만족스러웠다. 조금 더 연차가 쌓이면 깔끔하게 떨어지는 쓰리 피스 정장을 입고 섹시한 컨셉으로 가도 좋을 듯했다.

“……뭐래.”

분명 그룹의 해체를 막아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가는 게 최종 목표인데, 자연스레 몇 년 뒤의 미래까지 생각하는 게 좀 우습다고 생각하며 휴대폰 화면을 껐다. 옆으로 돌아누운 뒤통수에 생각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 * *

전체 컨셉을 다 뒤엎는 작업이라 정리되기까지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일이 더 빠르게 진행되었다. 엔터 업계가 원래 이렇게 굴러가는 건지 아니면 이 회사가 유별난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강문이 가출을 빙자한 산책을 다녀온 지 딱 5일째 되던 날, 안무 시안이 새로 나왔다며 단톡방에 동영상이 올라왔다. 안무가 선생님과의 연습은 며칠 후에 시작하겠지만 미리 눈으로라도 익히고 있으라는 말과 함께.

“오오…….”

침대 헤드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강문이 휴대폰 화면 속 동영상을 집중해서 보았다. 발랄하고 가벼운 데다 난이도도 적당해 곡의 분위기와 딱 잘 어울렸다. 게다가 후크 부분의 안무가 눈에 확 들어오는 게, 댄스 커버도 꽤 많이 뜨겠다 싶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키 때문인지 휘건이 너무 뒤쪽에만 수납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금 만들어진 안무는 자신을 센터로 밀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계획은 휘건을 메인 댄서로 두는 것이라 이렇게 되면 균형이 맞지 않는다.

“나중에 수정하자고 해야겠다.”

자신이 기대했던 것만큼 춤 실력이 좋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원래 잘생기면 다 용서가 된다. 외모도 엄연히 실력이니까.

“형! 안무 나온 거 봤어?”

거실로 나가자 주말이라 소파에 드러누워 TV를 보고 있던 시찬이 강문에게 말을 걸어왔다. 옆에 앉은 호재는 기꺼이 시찬에게 제 무릎을 내어 주고 있었다.

“응. 괜찮던데?”

“너무 쉽지 않아? 좀 더 팍 터지는 맛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 안무 나오면 할 수는 있고?”

“당연하지! 나 춤 완전 잘 추거든?”

호재의 무릎을 베고 누운 시찬이 그대로 팔만 들어 구불구불 웨이브를 선보였다.

슈우우 소리까지 내는 게 귀여워 하하 웃어주고는 냉장고에서 생수 한 병을 꺼냈다. 간밤에 건조했던 모양인지 목이 쩍쩍 갈라졌다.

“아. 1시 쯤 성수 형이 데리러 온대.”

“왜? 연습 다음 주부터라며.”

“뭐 회의한다던데? 그리고 대표님이 맛있는 거 사준대.”

강문은 차가운 물을 천천히 삼키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회의지 그냥 밥 한 끼 사 먹이려는 것일 수도 있고,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힌 새로운 컨셉에 대해 일러주려는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리 무거운 분위기는 아닐 것이다.

“아아악! 그만! 찢어지겠소!”

“이거 봐. 하면 된다니까?”

“하지 말, 아악!”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거실이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인가 싶어 서둘러 다가가 보니 대뜸 거실 바닥에서 다리를 찢고 있는 차율과 그런 차율의 몸을 누르고 있는 휘건이 보였다. 시찬과 호재는 거의 울부짖다시피 하는 차율을 보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뭐해……?”

도대체 이게 뭐 하는 광경인가 싶었던 강문의 미간이 좁혀졌다. 시선을 틀어 강문을 슬쩍 본 휘건이 차율의 등을 툭툭 두드리고 상체를 일으켰다.

“시발…… 내 다리……. 나는 이제 다리가 없소…….”

입으로 흑흑 소리를 내며 쓰러진 차율이 허벅지 안쪽을 주물렀다. 그 옆에 선 시찬이 언제 가져온 건지 감자 칩을 와삭와삭 씹으며 까르르 웃고는 강문에게 설명해 주었다.

“율이 형이 자기 몸 다 굳은 것 같다고 해서 도와주고 있었어.”

도와준다기보다는 괴롭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아무래도 말 한번 잘못했다가 얼떨결에 장난에 말려든 모양이었다.

“나 원래도 다리는 못 찢었거든?”

차율이 억울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한데, 입꼬리는 또 미세하게 올라가 있는 걸 보니 짜증과는 별개로 이 꼴이 스스로도 웃기긴 한 듯했다.

“아니야. 너 원래 되게 잘했어.”

“내가 언제!”

“난 너를 믿는다, 친구야.”

호재가 진지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그러나 눈에 장난기가 그득한 게 누가 봐도 놀리는 것이었다. 차율이 얄미워 죽겠다며 제 머리를 양손으로 쥐어뜯었다.

“그만 징징거리고 가서 씻어. 깡문 나오면 먼저 씻는다며?”

“불가능하오. 나 지금 갓 태어난 기린 새끼야.”

“새끼 기린이겠지.”

“그거나 그거나.”

휘건에게 혀를 쭈욱 내밀고는 다시 바닥에 드러누운 차율이 팔다리만 휘적거렸다. 야무진 손길로 갑자 칩 봉지 입구를 신기하게 접어서 닫은 시찬이 끙차, 소리를 내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 먼저 씻는다?”

“오냐.”

시찬이 욕실로 들어가고, 빈자리에 강문이 슬쩍 앉았다.

휘건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옆에 누워 있는 차율의 허벅지를 쿡쿡 찔렀다. 손가락이 한 번 쿡 찌를 때마다 차율이 손등으로 쳐내기를 반복했다.

“아 참, 휘건이 너 춤 얼마나 춰?”

“형 거의 연체동물 수준이야. 엄청 유연해.”

차율이 바닥에 누운 채로 몸을 꾸물꾸물 움직였다. 며칠동안 멤버들도 강문이 기억하고 있는 게 전혀 없다는 사실에 나름 적응한 모양인지, 이런 질문을 던져도 더 이상 동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약간 그,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 손만 뻗어도 뭔가 있어 보여, 형은. 잘생겨서 그런가.”

호재 역시 공감하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갑작스러운 칭찬에 민망한지 휘건이 눈동자를 데굴 굴리며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역시…… 메인으로 세우기 아주 딱이야.

강문이 잘 큰 손자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처럼 인자하고 흐뭇한 미소를 휘건에게 지어 보였다. 그런 강문과 눈이 마주친 휘건이 흠칫했다.

“……뭔데. 왜 그렇게 보는데.”

“아니야. 아무것도.”

물론 휘건은 그 말을 믿지 않았고, 강문도 할아버지 미소를 얼굴에서 지우지 않았다. 중간에 낀 차율만 두 사람을 번갈아서 쳐다보다 호재에게 형들이 왜 저러냐며 눈빛으로 물어 보았지만, 호재 역시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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