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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19화 (19/82)

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19화

안무 얘기도 하고 이런저런 잡담도 나누며 떠들다 보니 어느새 약속 시간이 다가왔다. 성수는 며칠 사이에 무척이나 핼쑥해져 있었지만 그래도 기분은 꽤 좋아 보였다. 바쁜 것과는 별개로 일이 나름 잘 진행되고 있는 듯했다.

“괜히 나 때문에 일만 많아진 것 같아서 미안하네…….”

다들 데이터 조각에 불과하니, 멤버들 외에는 정을 주지 말자고 되뇌곤 했지만, 그 사이 강문의 마음에 조금의 변화가 있었다. 가상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곳도 하나의 세계이고, 저들에게는 여기가 현실일 테니 저 또한 그들과 동화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쪽으로.

“뭐가 미안하냐? 다 같이 잘 되자고 하는 일인데.”

그리고 이렇게 마냥 친절히 대해주는 모습을 보면 아무리 강문이라도 냉정해 질 수가 없었다. 자칫하면 외롭고 무서울 수도 있는 상황을 이들 덕분에 유쾌하게 버텨내고 있는 중이니까.

“덕분에 컨셉도 진짜 어마어마하게 잘 뽑혔으니까 기대하기나 해.”

차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성수는 시종일관 싱글벙글이었다. 야근에, 야근에, 또 야근을 할 정도로 바쁜 와중에도 저리 기분이 좋다니. 성수 역시 멤버들만큼이나 W.A.IN의 성공에 진심인 게 다분히 느껴졌다.

“와……. 여기 뭐야?”

“나 이런 데 처음 와 봐.”

차로 30분 정도 걸려 도착한 곳은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고급 한정식집이었다. 대문 앞에 선 시찬과 차율이 감탄하며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주변이 한적하고 조용한 것을 보니 집값이 비싼 동네인 듯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으리으리한 대문을 지나니 정원엔 커다란 인공 연못이 자리하고 있었고, 정원과 식당 건물 사이를 작은 목조 다리가 연결하고 있었다. 다리 난간엔 조명이 달려 있어, 해가 지고 난 뒤 온다면 경관이 예술일 것 같았다.

정원을 들어서자 바닥에 깔린 자잘한 자갈들이 자박자박 밟혔다. 목조 다리를 건너며 연못을 슬쩍 내려다보니 색색의 커다란 잉어들이 느릿느릿 헤엄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일행이 먼저 자리해 계실 텐데…….”

“일행 분 성함이 어떻게 되실까요?”

“주상태요.”

진짜 대표 이름이 주상태가 맞았구나. 사실 차율이 농담한 건 아닌지 살짝 의심하고 있었는데. 강문은 강렬한 하와이안 셔츠로 박혀 있는 대표의 첫인상을 떠올리며 직원의 안내를 받는 성수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어서 와, 베이비들!”

복도 끄트머리에 있는 룸의 문이 열리자 상석에 앉아 있던 대표가 양팔을 벌리며 반겼다. 푸석푸석해진 성수와는 달리 대표의 얼굴은 그때나 지금이나 반질반질한 게 마치 깐 달걀 같았다.

“앉아, 앉아. 잘 쉬고 있었어?”

꾸벅 인사하는 멤버들에게 대표가 활짝 웃으며 손짓했다. 쪼르르 일렬로 들어가 안쪽부터 차례로 착석했다.

상석과 가장 가까운 자리는 성수와 호재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고, 그 옆에 강문과 휘건이 마주 보고 앉았다. 차율과 시찬은 각각 테이블 말석에 자리했다.

“배고프지? 일단 뭐 좀 먹고 얘기하든지 하자.”

대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커다란 카트를 끌고 온 직원이 테이블 위로 접시를 늘어놓았다. 개인 접시에 놓인 에피타이저부터 커다란 접시에 놓인 메인 요리까지 종류가 아주 다양했다.

테이블에 빈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푸짐하게 차려진 요리들에서 먹음직스러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아침도 걸러서인지 식욕이 느껴졌다.

“원래 코스인데 그냥 한 번에 달라고 했어. 얘기하는데 왔다 갔다 하면 정신 사납잖아.”

대표가 껄껄 웃고는 필요하면 부르겠다며 직원을 내보냈다. 재킷을 벗자 하와이안 셔츠만큼은 아니지만 그에 못지않게 화려한 무늬의 셔츠가 나타났다. 취향 하나는 정말 확고했다.

재킷을 받아 들려는 매니저를 다시 앉힌 대표가 구석에 있는 옷걸이에 재킷을 걸어 두고 다시 돌아와 앉았다. 손뼉을 가볍게 한 번 짝 맞부딪히고 손바닥을 슬슬 문질렀다.

“자! 그럼 식사 좀 해 볼까? 시찬이도 오늘은 눈치 보지 말고 실컷 먹어. 부족하면 얘기하고.”

“와, 진짜여?”

“그럼, 그럼.”

그 말에 시찬이 눈을 반짝이며 젓가락을 들었다. 그런 시찬이 귀여운 듯 대표가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웃었다. 성수가 대표의 앞접시에 육회를 덜어 주며 식사가 시작되었다.

“우리 깡문이. 몸은 좀 어때?”

양배추 롤로 보이는 에피타이저를 젓가락으로 쿡 찔러보던 강문에게 대표가 물었다. 강문이 고개를 들자 제법 걱정스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컨디션이야 뭐 게임 속으로 들어온 첫날부터 나쁘지 않았으니, 잃어버린 기억에 대해 묻는 거였다. 앞으로 쭉 돌아올 일이 없는 주인공의 기억.

“괜찮아요. 딱히 달라진 것도 없고…….”

강문이 말끝을 흐리며 젓가락으로 양배추 롤을 집어 들었다. 백 번 물어봐도 백 번 똑같은 대답을 해야 한다는 게 벌써부터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스스로 잡은 설정인걸.

“휘건이도 별일 없고?”

“네, 뭐.”

짧게 대답한 휘건의 시선이 오물오물 움직이고 있는 강문의 입술에 닿았다가 황급히 떨어져 나갔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은 강문은 비죽비죽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겨우 끌어내렸다.

처음엔 마냥 예민한 아기 고양이 같다고 생각했는데, 휘건은 의외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다 드러나는 타입이었다. 특히 제 앞에서는 더 그랬다. 미련이 뚝뚝 떨어지니 어쩔 수 없는 건가 싶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참 안쓰럽기도 하고.

“호재랑 율이는. 시찬이 학교는 잘 나가고 있나?”

“저 완전 모범생이에여.”

시찬이 제법 뿌듯한 얼굴로 오른손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대표는 그마저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막내라 그런지 확실히 시찬은 애교가 흘러넘쳤다.

“수능은? 보기로 했어?”

“네, 보려구여. 공부한 거 아깝잖아여.”

“기특하네, 우리 시찬이.”

어쩐지 대화가 명절 때 친척 어르신과 나누는 것처럼 흘러간다고 생각하는데, 익숙한 효과음과 함께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지금부터 이 방에서 나누는 대화의 방향에 따라 게임의 분기점이 결정됩니다. 가이드라인은 제공되지 않으니 자신의 직감을 믿으세요!

[확인]

“그렇단 말이지…….”

이번엔 시스템이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단번에 이해되었다. 아마 자신을 센터로 두느냐 휘건을 센터로 두느냐에 따라 진행 방향이 달라진다는 말이겠지. 공식적인 첫 엔딩 분기점인 셈이었다.

첫 엔딩 분기점이라니, 조금 긴장됐지만, 그래도 강문은 여전히 제 감을 믿었다. 물론 자신도 센터로 두기에 아주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지만, 휘건만큼은 아니다. 주관적으로 보나 객관적으로 보나 화제성은 분명히 휘건이 더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저…… 대표님.”

“응?”

대표가 도미 조림을 썰며 짧게 대답했다.

원래는 안무 연습이 시작될 때 즈음 의견을 어필하려고 했는데, 이왕 이렇게 자리가 깔린 김에 말을 꺼내도 좋겠지. 그럼 대표도 충분히 긍정적으로 생각할 시간이 생길 테고.

“저희 안무 동선이랑 파트 좀 바꿀 수 있나요?”

“왜. 어디 맘에 안 들어?”

잘 잘라낸 도미 살을 입으로 가져가는 대표의 표정은 생각보다 평온했다. 하긴, 컨셉 얘기를 꺼냈을 때도 대표는 마냥 태평하긴 했다.

“저 말고 휘건이가 센터로 가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요.”

의견을 말하며 강문은 머릿속으로 한 번 더 그림을 그렸다. 오전에 본 안무 영상에서 센터에 있던 댄서에게 붙어 있던 ‘문’이라는 이름표를 ‘휘건’으로 슬쩍 바꿨다.

고개를 들어 올리는 안무에서 윙크를 한번 해 주고, 그걸 원샷으로 잡아 준다면 파급력은 꽤 클 것이다. 휘건의 파트가 시작되는 시간을 계산해 ‘몇 분 몇 초’가 대명사처럼 따라다닐지도 모른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우리 문이가?”

대표가 꽤 흥미로운 얼굴로 턱을 괴고 강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벤트 상황 중이니 당연히 선택지가 뜰 거라 생각하고 멍하니 있다가, 의미 없는 정적이 계속되자 당황한 강문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어…… 그게 그룹 이미지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요.”

“이상하네. 우리 문이는 자기가 센터 아니면 안 하겠다고 했었는데.”

“……제가요? 왜요?”

대표의 말에 미간을 살풋 구긴 강문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주인공이 그런 말을 했다고? 도대체 왜?

“이렇게 완벽한 애가 있는데, 그런 고집을 부렸다고요?”

강문이 휘건을 향해 손을 뻗어 보이자 대표가 말없이 끄덕거렸다. 정말이지, 알면 알수록 주인공의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제정신인가, 진짜…….”

정보가 생길수록 점점 더 인성이 쓰레기였다는 결론에 가까워지는 것 같은 이 느낌은 뭐지. 영 찝찝한데.

“휘건이는 어떻게 생각해? 문이가 너보고 아주 완벽한 센터라는데.”

갑작스레 자신에게 돌아온 화살에 휘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강문과 대표를 한 번씩 찍은 시선이 다시 관심 없다는 듯 테이블로 떨어졌다.

“저는 뭐……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그으래?”

휘건의 반응을 살핀 대표가 눈을 가늘게 뜨며 씨익 웃었다.

“일단 알겠어.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는 쪽으로 하지.”

말을 끝마치고는 손을 휘휘 저으며 먹어, 먹어 한다.

그러고는 조용히 성수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가까이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성수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귀를 가져다 대자 소곤소곤 귓속말을 속삭였다.

“최 실장. 어떡하지?”

“……왜요?”

“나 지금 문이가 너무 마음에 들어. 애가 더 괜찮아졌어.”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아픈 애한테…….”

철없이 키득키득 웃는 대표를 보며 성수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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