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21화
“그럼, 키스 정도는 얼마든지 해도 된다는 의미로 들리는데.”
느릿느릿 이어지는 휘건의 말이 몸을 휘감는다고 느껴질 만큼 끈적했다. 이렇게 바짝 오른 섹슈얼한 텐션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저도 모르게 아래로 피가 몰려 등줄기가 짜릿했다.
“어때? 아니야?”
물러섰던 만큼 다시 가까이 다가온 휘건과 코끝이 부딪쳤다.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공기를 간지럽히며 안달 나게 만들었다. 위험한 긴장감에 서늘한 복도는 이미 한여름의 뙤약볕 아래만큼 뜨겁게 느껴졌다.
강문이 무어라 대답할 틈도 없이 이번엔 휘건이 먼저 입을 맞췄다.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통통한 입술이 얼른 혀를 내어 빨아 달라 재촉했다.
그러자 더위에 내몰린 사람처럼 저 깊은 곳에서부터 갈증이 치솟았다. 마지못해 입술을 벌리며 강문은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1차원적인 쾌락에 약한 사람이었나, 하고.
“으응…….”
뭐, 아무렴 어떤가.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 이 불확실하고 불안한 고통을 견뎌내지.
그게 누군가의 순수한 마음을 이용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자신에겐 기댈 곳이 필요했다. 의연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차분히 대처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속은 그게 아니었다. 밤마다 찾아오는 악몽은 강문을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눈이 아플 정도로 밝게 비추던 그 날로 자꾸만 돌려보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돌아갈 수 없다는 것처럼.
그러니 키스보다 더한 것도 주겠다는 미끼는 휘건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 향한 것이기도 했다. 지금 당장 다 끝내버리고 싶은 걸 참아내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어야 버틸 수 있을 테니까.
“하…….”
미약한 손짓으로 휘건의 옷자락을 그러쥐자 몸을 더 붙여 온 휘건이 양손으로 그의 뺨을 감쌌다. 완전히 얼굴이 붙들리자 숨이 더욱 깊어졌다. 혀끝을 세워 집요하게 입 안쪽의 여린 살을 헤집는 탓에 강문의 머리가 녹아버릴 것처럼 어지러웠다.
비로소 제 안을 괴롭히던 걱정과 불안함이 깨끗이 지워졌다. 이 낯선 곳에서 강문이 찾은 유일한 탈출구는 휘건과 체온을 나누는 것이었다.
“…….”
“…….”
한참이나 붙어 있던 입술은 아래층에서 인기척이 들리고 나서야 겨우 떨어졌다. 물 먹은 눈동자는 그 간격이 벌어진 뒤에도 꽤 오랫동안 서로를 담았다.
“……휘건아.”
강문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휘건을 불렀다.
애정을 갈구하는 눈빛을 보고 있자니 어쩔 수 없이 죄책감이 차올랐다. 비슷한 마음이기는 하지만, 결코 같은 마음이 되어 줄 수는 없다. 휘건은 눈앞에 있는 저 자신이 아닌 그 너머의 주인공을 바라보고 있으니, 처음부터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없는 마음이었다.
자신은 언젠가 떠나야 할 사람이다. 그리고 그때가 된다면 휘건은 저를 잊어버릴까, 아니면 주인공이 잠시 조금 이상했던 시기로 기억할까.
“나 너무 미워하지 마.”
그래도 분명 휘건은 행복할 것이다. 비록 자신은 아니지만 주인공이 곁에 있고, 그를 사랑해주는 많은 사람들도 함께일 테니. 어쩌면 저를 잊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왜?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휘건이 조금 전 강문이 내뱉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며 씨익 웃었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따라 한쪽 눈이 찡긋거렸다. 언제 봐도 참 시원하고 매력적인 미소였다.
반질반질 빛나는 얼굴을 보고 있던 강문의 머릿속에 잊고 있던 의문이 문득 떠올랐다.
벽에 등을 기대로 주르륵 미끄러져 앉은 강문이 휘건을 올려다보며 제 옆자리를 툭툭 쳤다. 키스도 좋지만, 앉아서 얘기 좀 하다 가자는 의미였다. 그 행동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휘건이 입맛을 쩝 다시며 강문의 옆자리에 앉았다. 휘건의 옆얼굴을 보던 강문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제 입술을 슬슬 문질러 닦았다.
이러고 있으니 꼭 야간 자율학습을 몰래 빠져나와 시간을 죽이고 있는 고등학생이 된 것 같았다.
“우리 왜 헤어졌는지 물어봐도 돼?”
준비 없이 치고 들어오는 질문에 휘건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조금 전까지 분위기 좋았는데, 이렇게 대뜸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꺼내게 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얘기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돼.”
사실 강문에게는 정말로 묻고 싶은 게 따로 있었기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자연스레 다른 주제로 넘어가려는데, 휘건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냥…… 마음의 깊이가 달랐던 거지. 그게 다야.”
허공을 응시하던 휘건의 시선이 무릎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강문의 손가락에 닿았다가, 다시 바닥 언저리로 떨어졌다.
“네가 대표님 앞에서 날 치켜세우듯이 말할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 넌 한 번도 그런 적 없었거든.”
휘건의 목소리는 조금 시무룩해져 있었다. 강문이 몸을 틀고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휘건을 바라보았다.
“한 번도? 진짜?”
눈을 반 바퀴 정도 슬쩍 돌려 시선을 피한 휘건이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강문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강문은 친구들에게 ‘네 이상형은 인간이 아니라 유니콘이다.’라는 말을 들어 왔을 정도로 눈이 높았다. 정말 잘생겼다고 생각했던 연예인도 한 손에 겨우 꼽혔다.
그런 자신이 처음 보자마자 입을 틀어막을 정도의 외모인데, 단 한 번도 칭찬을 안 해줬다고? 나였으면 그냥 업고 다니면서 동네방네 자랑했을 텐데?
“왜지……?”
의문을 주렁주렁 매달은 고개가 사뭇 심각하게 갸우뚱 기울었다.
주인공 이 새끼, 도대체 뭐지? 너 뭐냐?
“글쎄. 나도 좀 물어보고 싶네.”
갸웃거리는 모습도 귀엽다는 듯 휘건이 푸스스 웃었다.
웃는 모습도 참 햇살처럼 환하기도 하지. 휘건의 미소는 세상의 모든 번민과 화를 눈처럼 사르르 녹아버리게 했다.
“나 다른 것도 더 물어봐도 돼? 대답하기 싫으면 그냥 넘겨. 알아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 테니까.”
강문이 휘건 곁에 조금 더 붙어 앉으며 그를 따라 배시시 웃었다.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표정과 달리 휘건의 목소리는 확실히 떨리고 있었다. 귀엽기도 해라. 다음 질문을 들으면 더 당황할 텐데.
“우리 혹시 체육 창고에서 키스한 적 있어?”
“……뭐?”
역시나 당황한 휘건의 동공에 사정없이 지진이 났다. 자연스레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입술을 말아 물고 꾹 참아낸 강문이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사실 휘건을 볼 때마다 꼭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학창 시절에만 즐길 수 있는 로망 같은 거라고나 할까. 그런 간질간질한 연애는 경험해보지 못해 더욱 궁금했다. 물론, 놀리고 싶은 마음도 아주 없지는 않고.
강문이 대답을 기대하듯 눈을 반짝이자 휘건이 마지못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대답하면서도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이었다.
“없어? 아쉽다. 좋았을 것 같은데.”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도 로망을 버리지 못한 강문이 다시 눈을 더 반짝이며 휘건을 바라보았다. 강문의 앉은키가 조금 더 작아 시선이 살짝 위로 향해 있었다.
“아니면 미술실? 음악실? 애들 다 가고 아무도 없는 교실은?”
어느 것이든 하나만 걸리라는 심정인지 와르르 쏟아내는 말들에 휘건의 눈썹이 미심쩍은 듯 휘었다.
“도대체 나한테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거야?”
결국 참지 못한 휘건이 더 이상의 쓸데없는 질문을 차단했다. 강문은 그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그냥. 교복 입은 우리는 어땠나 해서. 난 하나도 모르니까.”
지금도 이렇게 잘났는데, 교복을 입은 조금 더 어린 시절의 두 사람은 분명 더 그림 같고 예뻤겠지. 한 편의 청춘 드라마가 따로 없었을 것이다. 교내뿐만 아니라 근방에서 유명했다던 말이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기억…… 돌아왔으면 좋겠어?”
“글쎄? 왜?”
어차피 자신이 주인공의 몸을 쓰고 있는 동안은 돌아올 리 없기에 강문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휘건이 무언가 말을 이어가려 입술을 달싹이더니, 이내 다시 입을 꾸욱 다물었다.
“……아니야. 내가 너무 쓰레기 같다.”
한숨 섞인 자조적인 웃음이 허공에 흩어졌지만 강문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눈만 깜빡거렸다.
“다른 건 더 궁금한 거 없어?”
자연스레 화제를 돌린 휘건이 다시 고개를 돌려 강문을 바라보았다. 말을 꺼낼까 말까 잠시 고민한 강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영…… 왜 그만뒀어?”
호재에게 두 사람의 과거를 전해 들은 뒤 강문은 인터넷에 박휘건이라는 이름을 검색해본 적이 있었다. 기껏해야 학교 대표로 대회에 나갔다는 정도의 작은 기사를 생각했는데, 휘건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더 촉망받던 선수였다. 다 내려놓고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게 조금 아깝다고 여겨질 만큼.
강문은 그래서 더욱 궁금했다. 그렇게 잘하고 좋아하던 수영을 왜 덜컥 그만둬버린 건지. 혹시 주인공 때문인지. 이제 와서 후회되지는 않는지.
물끄러미 강문의 얼굴을 응시하던 휘건이 픽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이어 가슴이 볼록해지도록 크게 숨을 고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가자. 너무 늦기 전에.”
강문에게 뻗어 오는 손이 대답을 대신했다. 빈말이라도 하면 될 것을, 휘건은 도무지 말을 꾸며낼 줄 몰랐다. 강문은 그게 어쩐지 조금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다.
강문이 제 앞으로 내밀어진 손을 잡자 휘건이 팔에 힘을 주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높아진 시선이 다시 한 번 마주치자 바보처럼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이번에도 잊어버려야 되냐?”
잊어버릴 거면 해도 된다던 연습실에서의 키스를 떠올린 휘건의 질문에 강문이 한쪽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아니. 제대로 기억해.”
손바닥부터 시작된 뜨끈한 열기가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이 정도면 동기 부여는 차고 넘치도록 되었으니, 이제 정말 성공을 향해 갈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