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29화 (29/82)

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29화

“Nächste1)”

그사이 벌써 다 씻었는지 차율이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욕실에서 나왔다. 소파에 걸터앉아있던 시찬이 차율이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냉큼 일어났다. 독일어엔 까막눈이라 잘 모르겠지만, 발음이 ‘next’와 비슷한 걸 보니 다음이라고 말한 듯했다.

“형 먼저 씻을래?”

속옷을 가지러 방에 들어가던 시찬이 뒤를 돌아 강문에게 물었다. 순서 논쟁에서 멀찍이 떨어져 보고만 있는 게 아무래도 조금 신경 쓰이는 얼굴이었다.

강문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손짓했다. 시찬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 방에서 속옷을 챙겨 욕실로 갔다.

“내 휴대폰으로 시켰지?”

“당연하지.”

“그럴 줄 알았어.”

방에서 가벼운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차율이 소파 팔걸이에 엎어져 있는 제 휴대폰을 집어 들며 작게 웃었다. 시찬은 나름 골려주려는 생각이었겠지만, 다 예상할 수 있는 범위였던 모양이다.

그것도 잠시, 카드 결제 문자를 확인한 차율이 깜짝 놀란 듯 입을 떡하니 벌렸다.

“야! 뭘 얼마나 시켰길래 5만 원이 넘어?”

호재는 대답 대신 ‘내가 어떻게 아냐’는 표정으로 어깨만 한번 으쓱거렸다. 얼마나 주문해야 그 금액이 나오는지 궁금해 강문도 슬쩍 일어나 차율의 옆으로 다가갔다. 차율이 기가 막힌다는 듯 탄성을 토해내며 배달 어플 주문 목록을 확인했다.

떡볶이는 물론이고, 한 번도 먹어볼 생각을 못 했던 사이드 메뉴들까지 참 알차게도 주문되어 있었다. 그 중 강문이 제일 이해할 수 없던 것은 ‘어묵튀김’이었다. 어묵은 이미 튀겨서 만드는 음식인데, 그걸 한 번 더 튀긴다니. 늘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쳐다도 안 봤던 메뉴였다.

“차라리 이 돈으로 고기를 사 먹겠다…….”

차율이 소파 구석에 털썩 주저앉으며 맥없이 중얼거렸다. 하긴, 5만 원이면 삼겹살이 몇 그램이야. 분식 메뉴로 탕진하기엔 아까운 금액이기는 했다.

심심한 위로를 담아 어깨를 토닥여주는데, 갑자기 연습실에서 차율이 꺼냈던 말이 떠올랐다. 시찬이 너무 긴장한 나머지 바이크를 넘어트려 주인공이 다칠 뻔했다는 말. 도대체 뭘 찍었길래 바이크까지 소품으로 등장했던 거야?

“저기, 우리 원래 찍었던 뮤직비디오 볼 수 있어?”

“아. 형은 못 봤지?”

‘양아치’ 컨셉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미리 촬영했다던 자켓 사진이나 뮤직비디오 등은 한 번도 확인할 생각을 못 했다. 어차피 새로 다 찍을 거고, 굳이 봐서 뭐 하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퍽 궁금해졌다. 나중에 토크 프로그램 등에서 에피소드로 써먹기도 좋을 듯하고.

“이리 와 봐. 내가 틀어 줄게.”

차율이 자신과 호재 사이의 빈자리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툭툭 쳤다. 조금 비좁기는 하지만 나란히 끼여 앉자 차율이 휴대폰과 거실 TV를 연결시켰다. 호재가 강문이 앉기 편하도록 자리를 바깥쪽으로 조금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인트로와 함께 낯선 영상이 화면에서 재생되었다. 타이틀 폰트부터 경악스러워 말이 나오지 않는, 그 청량하고 싱그러운 노래의 뮤직비디오라고는 믿고 싶지 않은 그런 영상이었다.

강문은 뮤직비디오를 보는 내내 자신이 혹시 90년대 초반으로 떨어진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언제 적 유행인지 모를 스모키 메이크업을 얹은 멤버들의 얼굴은 제대로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였고, 여기저기 체인이 주렁주렁 달린 교복은 보기만 해도 참담해졌다.

그뿐인가. 영상 속 멤버들은 우르르 몰려다니다가, 갑자기 싸우고는 또 뜬금없이 눈물을 쏟으며 우정의 맹세를 했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없는 공터에서 각자 바이크를 한 대씩 잡고 폼을 잡더니, 다음 화면에선 석양이 지는 강가를 웃으며 달렸다.

“으…….”

자연스레 미간을 찌푸리며 혐오 섞인 감탄사를 내뱉었다. 세기말 청춘 드라마도 이보다는 덜 촌스러울 것 같았다. 이럴 바엔 차라리 흑염룡이 낫지.

“…….”

30분 같던 3분 47초가 지나고, 거실은 정적에 휩싸였다. 고개를 떨구고 이마를 짚은 강문의 한숨 소리만 그사이를 가로지를 뿐이었다.

“너네…… 찍으면서 이상하지 않았어?”

“아하하…….”

차율이 멋쩍게 웃으며 티비를 껐다. 호재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상당히 민망한 듯 아예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었다.

“우리야, 뭐…… 잘 모르니까.”

그렇게 말하는 차율의 목소리가 제법 시무룩했다. 하긴, 알아도 어떻게 말을 꺼냈겠어. 이제 고작 데뷔를 앞둔 연습생일 뿐인데, 시키는 대로 열심히 잘 따르는 게 고작이었겠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잖아. 주상태인지 깐 달걀인지, 대표 취향 도대체 무슨 일이야?

처음엔 학폭으로 데뷔 멤버 한 명을 퇴출시키기까지 했다면서 왜 ‘양아치’ 컨셉을 고수하나 했는데, 이건 컨셉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구렸다.

“너희 진짜 나한테 감사해야 돼. 알아? 이걸 지금 컨셉이라고……. 하, 참 나.”

“왜? 무슨 일인데.”

샤워를 끝마치고 편한 차림으로 나온 휘건이 급격하게 가라앉아버린 분위기가 의아한 듯 물었다.

강문은 물기 어린 뽀얗고 잘생긴 얼굴을 보니 애써 가라앉힌 화가 다시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 얼굴을! 저 잘생긴 얼굴을 스모키로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체인 주렁주렁 달린 이상한 교복 위에 가죽 재킷이나 입히고! 이게 말이 돼?”

“저기, 형. 진정…….”

“이런 국가적 손실이 어디 있냐고!”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강문이 휘건을 가리키며 분하다는 듯 소리쳤다. 차율이 옷자락을 붙잡으며 진정시켜보려 했지만 그다지 소용은 없었다.

“차라리 지금 저대로 뮤비 찍는 게 훨씬 낫겠어. 얼마나 보기 좋아? 씻겨만 놔도 번쩍번쩍 빛이 나는데.”

거기까지 말을 마친 강문이 씩씩거리며 숨을 내뱉었다.

대표가 저만 믿으라며 큰 소리를 떵떵 내질렀지만, 내일 또 어떤 컨셉이 기다리고 있을지 새삼 불안해진 탓이었다.

“…….”

강문의 폭주를 가만히 서서 멀뚱멀뚱 보고 있던 휘건의 얼굴이 별안간 미묘하게 달아올랐다. 따뜻한 물로 샤워하느라 열이 오른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쟤는 또 왜 저래.

조금 감정을 가라앉힌 강문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휘건이 수상하게 뚝딱거리며 방으로 다시 들어가더니 문을 쾅 닫아버렸다.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호재가 튕겨 오르듯 일어나 방문 앞으로 달려갔다. 문고리를 잡고 돌려 보았지만 철컥철컥 소리만 날뿐이었다.

“야! 문은 왜 잠그고 난리야? 난 어떻게 씻으라고!”

“몰라. 밖에서 씻든지.”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작게 들렸다. 기가 찬다는 듯 호재가 인상을 팍 구기며 문을 쾅쾅 두드렸다.

“미친, 문 안 열어? 야! 박휘건!”

“왜 이렇게 시끄러워?”

강문과 차율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자 현관 앞에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성수가 커다란 비닐봉지를 한 손에 들고 서 있었다.

갑자기 뚝딱거리며 방에 들어가더니 문을 걸어 잠근 휘건과 졸지에 씻지도 못하게 생긴 호재를 구경하느라 성수가 들어오는 줄도 몰랐다.

“어, 형. 그거 혹시…….”

차율이 성수의 손에 들린 하얗고 큰 봉투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아니겠지’ 라는 바람이 목소리에 그대로 묻어났다.

“너희 떡볶이 시켰냐, 설마?”

역시. 하필 도착한 배달원과 숙소 앞에서 마주쳤던 모양이다. 차율이 끄응 앓는 소리를 내고는 입을 합 다물고 성수의 눈치를 봤다.

“하아……. 이럴 줄 알았어, 내가. 내일이 촬영인데 제정신이야? 굶어서 바싹 말려도 모자랄 판에!”

“아니, 그게…….”

“쓰읍! 떡볶이에 튀김에 순대에, 많이도 시켰네. 이건 압수야.”

차율이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고는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여전히 문 앞에 붙어 있는 호재와 시무룩해진 차율, 그리고 그 사이에 어정쩡하게 낀 강문을 스윽 둘러본 성수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너네 데뷔 앨범 뮤비랑 자켓 촬영이야. 물론 컨셉 바꾸느라 두 번째기는 하지만, 그래도 평생 남을 첫 앨범이라고. 좀 열심히 해야겠다는 자각이 없어? 도대체 이거 누가 먹자고 했냐? 또 이시찬이야?”

눈만 스르륵 굴리며 눈치를 보던 강문이 느릿느릿 손을 들었다. 전혀 예상 못했던 인물인지 성수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깡문이가?”

강문이 입술을 꾹꾹 말아 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수는 차마 아픈 애한테 화를 내기에는 마음이 영 불편해 보였다.

“크, 크흠. 아무튼, 샐러드 이쪽으로 배달시켜 놨으니까 오면 그거 먹고. 이건 내가 가져간다.”

그렇다고 잘했다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성수는 자리를 벗어나는 것을 택했다. 도망치듯 사라지는 성수의 뒷모습을 보며 강문이 뒷덜미를 슬슬 긁었다.

굳은 분위기를 풀기 위해 급하게 떠올린 게 시찬이 좋아하는 떡볶이였는데, 성수의 말도 맞았다. 저렇게 자극적인 음식을 먹고 자면 내일 얼굴이 퉁퉁 부어 있을 게 뻔하니까. 거기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자신이 조금 한심했다.

“뭐야? 누구 왔었어? 성수 형?”

속옷 하나만 걸친 시찬이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며 욕실에서 나왔다. 평소라면 옷 좀 입고 다니라며 타박했겠지만, 지금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내 5만 원…….”

“미안……. 내가 줄게.”

“됐소. 형님이 무슨 죄가 있겠소. 주려면 이시찬이 줘야지…….”

“그래도 내가 먼저 얘기 꺼내서 이렇게 된 거니까…….”

땅으로 꺼질 듯 축 처진 차율의 어깨를 강문이 끌어 올려주며 연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호재는 휘건이 듣든지 말든지 두 손을 동그랗게 말아 방문에 대고 작게 무어라 중얼거리는 중이었다. 들리지는 않지만, 아마 욕을 하고 있는 듯했다.

“……분위기 왜 이래? 저 형은 또 왜 저러고 있고.”

샤워를 하는 몇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어 시찬의 미간이 살풋 구겨졌다. 왜 자기만 왕따 시키냐고 따져 물으려는데, 마침 초인종이 울렸다.

속옷 바람으로 현관문을 열려는 시찬에 기함한 강문이 벌떡 일어나 대신 음식을 받아왔다. 떡볶이를 먹을 생각에 신이 난 시찬이 그 뒤를 졸졸 따랐다.

“뭐야! 떡볶이 아니잖아?”

식탁 위로 하나 둘 꺼내지는 음식의 정체를 확인한 시찬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자신이 주문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시찬의 등을 강문이 씁쓸하게 웃으며 툭툭 두드렸다.

“……그렇게 됐다.”

시찬은 벙찐 얼굴로 강문을 한번, 차율을 한번, 마지막으로 호재까지 한번 쳐다보고는 미간을 한층 더 구겼다.

“뭐야? 뭔데! 왜 나만 모르는데! 내 떡볶이 어디 갔어!”

이거라도 많이 먹으라며 자리에 앉아 제 몫의 샐러드를 덜어주고 있는 강문의 뒤통수 너머로 시찬이 빼액 소리를 질렀다. 웃으면 안 되는 상황인데 어쩐지 우스워서, 강문은 볼을 꾹꾹 씹으며 겨우 웃음을 참아냈다.

1) 다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