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72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휘건이 문을 살짝 열고는 틈사이로 얼굴만 빼꼼히 들이밀었다. 강문은 말없이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무슨 일인데?”
문을 닫고 들어온 휘건이 얼굴을 살피며 다가왔다. 강문은 제 앞에 쪼그리고 앉은 휘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연습실에서 휘건이 도망쳤던 날 이후 이렇게 단둘이만 있는 건 처음이었다. 의도적으로 피한 것도 있지만, 바쁜 스케줄 덕에 틈이 나지 않았다.
강문은 더 이상 휘건을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제 이익만 쏙 챙기고 주변은 생각하지 않는다면 더 편하기는 하겠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깊은 관계로 발전할수록 괴로워질 게 뻔한데, 모르는 척 단물만 빼 먹고 나 몰라라 하기엔 성정이 그러지 못했다.
그래도 이렇게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온몸을 덮쳐올 때면, 어쩔 수 없이 휘건이 생각났다.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은 이곳에서 찾은 유일한 안식처가 바로 휘건과 체온을 나누는 것이었으니까. 함께 입술을 맞대고 있을 때만큼은 그 어떤 걱정과 두려움도 제 머릿속을 괴롭히지 못하니까.
“휘건아.”
나지막한 부름에 휘건은 응, 하고 낮게 대답하며 강문의 손등을 살살 쓸었다. 그 손길이 너무 다정하고 부드러워 목구멍이 뜨끈해졌다.
“나…… 키스 하고 싶어.”
강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아무런 맥락 없이 튀어나온 말이지만, 휘건은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무릎을 펴고 일어선 휘건이 강문의 두 뺨을 소중하게 감싸 쥐었다. 마주친 두 눈빛이 파도를 머금은 듯 일렁였다.
휘건의 무게가 실리며 강문의 뒤통수가 푹신한 이불에 닿았다. 서로를 끌어안으며 나누어 가지는 호흡이 너무 애달파서, 입술이 닿고 혀가 섞이는 동안 울지 않으려 눈을 꼭 감고 노력했다.
이렇게 지나가는 밤이 부디 그리 길지 않기를 바라면서.
* * *
후속곡 활동 시작에 맞춰 라디오 출연 스케줄이 잡혔다. 생방송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말실수라도 했다간 정말 큰일이라 평소보다 더 긴장되었다. 강문은 방송국으로 이동하는 내내 시찬과 차율을 붙잡고 ‘할까 말까 헷갈리는 말은 그냥 하지 마’ 라며 신신당부했다.
“왜 우리한테만 그래?”
“맞아! 억울해!”
자신들을 꼭 문제아 취급하는 것 같다며 시찬과 차율이 불만을 토로했다. 그런 건 당연히 아니었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들이니 악의 없이 아무 말이나 뱉어 상처로 돌아올까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게 평소에 잘 했어야지.”
따져 드는 아이들을 보며 휘건이 불난 집에 부채질을 했다. 그러자 타겟을 휘건으로 바꾼 시찬과 차율이 ‘내가 형보다 못한 게 뭔데’를 시전하며 괴롭혔다. 물론 휘건은 ‘안 들려, 안 들려’ 하며 더욱 얄밉게 놀려댔다.
“안녕하세요!”
방송국에 도착한 멤버들을 라디오 작가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원고를 전달받은 뒤 대기실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숙지하고,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미리 도착해 대기하고 있던 김채고가 멤버들이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오늘 출연하는 라디오는 김채고가 DJ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내가 와인을 만나는구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한달음에 달려온 김채고가 서둘러 악수를 청했다. 다섯 개의 손이 동시에 내밀렸다가, 다들 머쓱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눈을 반짝이며 제일 왼쪽에 서 있던 호재부터 차례로 악수를 나눈 김채고는 감격한 표정으로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진짜 진짜 팬이에요. 제가 계속 게스트로 모시자고 졸랐는데, 너무 오래 걸렸네요.”
“저희도 이렇게 선배님 뵙게 돼서 너무 영광이에요.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곳의 김채고는 강문이 살던 곳의 TV 속 김채고와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제 기억 속의 그는 같은 배우 외의 인맥은 절대 쌓지 않으며 제 잘난 맛에 살다 갑질 논란으로 인기가 한풀 꺾인 연예인이었는데,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일단 그런 것과는 거리가 한참은 멀어 보였다.
저번에 들은 걸로는 ALN의 청평과도 친분이 깊다 했으니 제 취향의 잘생긴 아이돌을 친분 망태기에 수집하는 게 취미인 모양이다. 멤버들 중 누가 김채고의 팬들이 말하는 ‘채이더’에 포착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역시 참 운이 좋았구나 싶었다.
“근데, 저기 밖에 있는 사람들은 다 누구예요?”
스튜디오 한쪽 편 통유리 바깥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사람들을 발견한 차율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물었다. 꽤나 순수한 물음이 귀여운 듯 김채고가 작게 웃었다.
“오늘 보이는 라디오잖아요. 저기 계시는 분들 다 와이너리인데, 인사 한번 해 주세요.”
“헉…… 진짜요?”
차율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시금 사람들을 살폈다. 강문 역시 조금 놀라 통유리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제야 멤버들의 이름을 딴 슬로건이나 부채 등을 들고 흔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첫 데뷔 무대 출근길에서 ‘우리도 저렇게 기다려 주는 팬들이 생기겠지’ 하며 두근거렸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정말 자신들을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인연이라는 게 새삼 참 신기해서, 어쩐지 조금 울컥하기도 했다.
“와이너리, 안녕!”
반갑게 손을 붕붕 흔드는 차율을 따라 강문도 환하게 웃으며 팬들에게 인사했다. 다른 멤버들 역시 소리를 듣지 못할 팬들을 위해 최대한 몸으로 반가움을 표현했다.
멤버들이 움직일 때마다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발을 동동거리는 모습이 참 귀여웠다. 언제 또 이런 사랑을 받아보나 하는 생각에 아쉽기까지 했다.
“긴장하지 말고, 들어오기 전에 대본 다 봤죠?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니까 너무 걱정할 거 없어요.”
함께 사진도 찍고 셀카도 찍는 사이 어느새 방송 시간이 다가왔다. 자리에 앉아 얼어 있는 멤버들을 보며 김채고가 선배다운 면모로 멤버들을 다독였다.
‘ON AIR’ 버튼에 불이 들어오고, 드디어 첫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었다. 강문은 계속해서 속으로 ‘지금 생방송이다’를 반복하며 큰 실수 없이 지나가길 바랐다.
그러다 문득 ‘넌 너무 걱정이 많아’ 하고 제 볼을 늘리던 휘건이 생각나 픽 웃음이 나왔다. 확실히 이곳에 오고부터 원래 성격과 달리 걱정이 많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태평하게 있는 게 더 이상하기는 하겠지만.
“김채고와 함께 하는 청춘낭만! 오늘은 특별한 게스트분들을 모셨는데요, 제가 너무너무 뵙고 싶어 하던 분들이라 살짝 떨립니다. 데뷔곡 ‘마그넷’으로 가요계를 평정한 슈퍼 루키, 자타공인 대세 아이돌! W.A.IN의 다섯 분 모시겠습니다. 안녕하세요~”
“We are insane! 안녕하세요, 와인입니다. 반갑습니다!”
신인다운 우렁찬 인사에 김채고가 환호하며 박수를 보냈다. 쑥스러워하며 웃는 멤버들의 모습이 카메라를 통해 보이는 라디오로 송출되었다.
“와…… 다들 미모가 출중해서 자꾸 쳐다보게 되네요. 키도 크시고, 지금 청취자분들도 보고 계시겠지만 스튜디오가 꽉꽉 찼어요.”
“아하하, 감사합니다.”
“제가 이 분들 노래 처음 딱 듣자마자 반해가지고, SNS에 추천 글도 쓰고 그랬거든요. 정말 정말 반갑습니다.
“저희야말로 너무 영광이었어요. 선배님 덕분에 관심도 더 받게 된 것 같아요.”
“에이, 다 와인 분들이 잘나서 그런 거죠. 저는 한 게 없어요.”
서로 좋은 말을 주고받는 훈훈한 모습을 보여준 뒤 간단한 소개와 인사 시간을 가졌다. 나름 ‘슈퍼 루키’ 타이틀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아이돌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당연히 모를 수 있으니, 최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강문 씨랑 차율 씨는 이름이 외자인 걸로 알고 있는데, 혹시 두 분만 성을 붙여서 활동명으로 쓰는 이유가 있을까요?”
소개가 끝난 뒤, 김채고가 돌발적인 질문을 하나 던졌다. 보통 자기소개 뒤에는 휘건과 강문의 학창시절에 대한 질문이 바로 따라왔는데, 이런 질문은 처음이라 새로웠다. 대본에 없던 질문이었지만 확실히 센스가 돋보였다.
“큰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요, 다들 두 글자 이름이잖아요. 저희만 한 글자면 좀 이상할 것 같고 예명도 만들기 싫어서, 그냥 성을 붙여서 맞추기로 했어요.”
“사실 저는 율무로 하고 싶었어요. 근데 다들 말리더라구요.”
차율의 농담에 김채고가 웃음을 터트렸다. 모니터링용 화면으로 보이는 채팅 창에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하는 웃음이 도배되었다. 가끔 튀어나오는 차율의 엉뚱함이 이럴 때는 꽤 도움이 되었다.
“와인이라는 이름이 무슨 뜻인지 궁금하다는 채팅이 많은데, 짧게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와인은 저희 팀 구호인 ‘We are insane’이라는 문장의 앞글자를 따서 만든 이름인데요, 음악에 제대로 미쳐서 보는 팬 여러분들께도 ‘와, 미쳤다!’라는 감탄사를 자아내는 그룹이 되겠다는 각오가 담겨 있습니다.”
호재는 대답을 끝마치고는 자신들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찾아 주먹을 꾹 쥐어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결연한 모습에 강문과 휘건이 마주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오오. 상당히 공격적인 의미네요? 뭔가 도전적인 정신이 잘 드러나서 저는 아주 마음에 들어요.”
“감사합니다. 저희도 그룹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잘 드러나는 이름이라고 생각해요.”
강문이 동의를 표하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엔 김채고의 말대로 대본과 크게 달라지는 부분 없이 진행되었고, 멤버들의 긴장도 서서히 풀려갔다. 생각보다 더 즐거워서, 강문은 나중에 늦은 밤에 진행되는 라디오를 하나 맡아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다 머리를 휘휘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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