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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77화 (77/82)

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77화

“손 크기 한 번만 재볼 수 있어요?”

“저 손 진짜 큰데.”

손을 잡아달라고 대놓고 말하는 건 쑥스러운 건지, 손바닥을 맞대 보자는 팬들이 꽤 많았다. 처음엔 좀 당황했지만 이젠 익숙하게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며 손을 맞대다 못해 깍지까지 낀다. 그리고는 ‘이걸 원한 거지?’ 하는 표정으로 씨익 웃으면 다들 환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화살 하트 한번만 해 주세요.”

“어떻게 하는 거예요? 알려주시면 해 볼게요.”

휘건의 말에 팬이 직접 시범을 보이며 화살 하트를 가르쳐 주었다. 열심히 따라해 보던 휘건은 문득 연습실에서 온갖 하트를 만들어 날리던 강문이 떠올라 작게 웃었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미소에 또 한 번 셔터 소리가 시끄럽게 터졌다.

“안녕하…….”

다음 순서로 넘어온 팬과 인사를 나누려는데, 아무 말 없이 휘건을 건너뛴 팬이 그대로 호재의 앞으로 가 앉았다. 휘건은 눈이 동그래진 채로 머쓱하게 입술을 삐죽였다. 좀 서운하기는 하지만, 호재를 많이 좋아하나 보다 싶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단 오히려 옆에 앉은 호재가 더 안절부절 못했다.

“어, 제 차례 아니신데…….”

“호재야 너무 보고 싶었어. 나 기억나?”

그러거나 말거나 팬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신나게 떠들었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씨큐리티가 불쑥 손을 들이밀어 호재와 팬 사이를 가로막았다.

“순서대로 이동하세요.”

“아, 씨…….”

작게 욕을 중얼거린 팬이 씨큐리티의 안내를 따라 다시 휘건 앞으로 와 앉았다.

휘건은 혹시나 팬이 무안하지 않도록 생글생글 웃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넘치면 그럴 수도 있으니, 충분히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호재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네, 뭐.”

휘건의 노력이 무색하게 그 팬은 얼굴을 호재 쪽으로 틀고 오로지 그 쪽만 바라보았다. 앞에 앉아 있기는 하지만 딱 그 뿐, 온 신경이 호재에게 쏠려 있는 게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저…… 앨범을 주셔야 사인을 해드릴 수 있어서요.”

그렇다고 같이 멀뚱멀뚱 있을 수는 없으니 휘건이 손가락으로 앨범을 가리켰다. 저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사인회에 왔으니 사인 정도는 해줘야 마땅하다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팬은 휘건을 짜증스레 슬쩍 쳐다보고는 앨범을 테이블 위에 던지듯 올려 두었다. 참 예의 없는 행동이지만, 휘건은 이를 악물고 애써 웃었다.

“이름이 어떻게…….”

“그냥 공란으로 주세요. 어차피 제가 안 가질 거라서요. ps에 사랑합니다만 써 주세요.”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와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본래 성정이라면 ‘싸가지 없게 뭐 하는 짓이냐’며 정색을 해도 모자랐겠지만, 그 정도로 사리분별이 되지 않는 사람은 아니었다.

한숨과 함께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고 펜을 들었다. 제 독사진이 자리한 페이지를 펼쳐 ‘To’ 부분을 공란으로 두고 크게 사인한 뒤 ‘사랑합니다’라는 ps 뒤에 하트까지 야무지게 그렸다. 누구일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인을 가지게 될 사람이 조금이라도 만족하길 바라면서.

“근데 진짜 강문이랑 사겨요?”

“어…… 네?”

“알 사람은 다 알던데. 애인이랑 같이 아이돌 활동하는 거 팬 기만 아니에요? 팬들 만나는 자리인데 이렇게 옆에 딱 붙어있고.”

다시 앨범을 건네는데, 팔짱을 끼고 있던 팬이 홱 낚아채가며 퉁명스레 물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이라, 휘건은 어안이 벙벙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어버버거렸다.

“대답 못하는 거 보니까 맞네.”

“사적인 질문 금지입니다. 한 번만 더 규정 어기시면 퇴장이에요.”

돌발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아 예의주시하고 있던 시큐리티가 단호하게 말하며 두 사람 사이를 손으로 가로막자 입술을 삐죽이며 입을 다물었다. 휘건은 여전히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지만, 정작 말을 꺼낸 당사자는 이동하라는 말에 기다렸다는 듯 냉큼 옆자리로 가버렸다.

“호재야, 나 진짜 기억 안나?”

“아하하…… 저희가 아직 데뷔한지 얼마 안 되어서요.”

“그럼 더 잘 기억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너 학교 다닐 때부터 따라다녔는데, 너무하네.”

팬은 호재에게 가서도 여전히 막무가내였다. 세상에는 이상한 사람이 정말 많구나 하고 속으로 고개를 젓는데,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음 사람이 의자에 앉았다.

“휘건아, 널 위해 준비했어.”

팬은 손바닥 두개를 합친 크기의 장난감 청소기를 건넸다. 꽃이나 직접 만든 선물은 앞에서 많이 받았지만 장난감은 처음이라 휘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청소기?”

“이 세상에서 널 괴롭히는 말들은 전부 내가 이 청소기로 빨아들여서 없애줄게. 우리 휘건이는 예쁘고 좋은 말만 들어!”

비장하게 말하며 작동 버튼을 누르자 위이잉 하고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휘건이 상황을 파악하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기발하면서도 든든한 사랑 고백이었다.

“와…… 너무 감동인데요? 저 눈물 날 뻔 했어요.”

조금 과장을 보태기는 했지만 확실히 진심이었다. 자신이 시찬이나 차율처럼 눈물샘이 수도꼭지였다면 바로 울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많은 힘이 되는 말이었다.

“잘하고 있으니까 의심하지 말고 앞만 보고 가. 알겠지? 뒤는 내가 책임질게.”

바로 앞의 그 예의 없던 사람이 마음에 걸린 건지 팬은 이동하는 순간까지도 끝까지 좋을 말만 해주며 넘어갔다. 그 응원에 찝찝하던 기분이 거짓말처럼 전부 다 괜찮아지니 신기했다. 그리고 저렇게 든든한 팬이 곁에 있다는 게 참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휘건아. 혹시 반말로 얘기해줄 수 있어?”

“어…… 그래!”

다음 차례의 팬은 반말로 친밀하게 대화하기를 원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제법 어색한 ‘그래!’ 라는 대답에 팬과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귀여워…….’ 하고 작게 앓으며 허벅지를 퍽퍽 때리는 모습에 조금 부끄러워졌다.

“휘건이는 이번 앨범에서 어떤 노래가 제일 좋아?”

“음…… 네버랜드? 춤이 마음에 들어. 무대 할 때 재미있기도 하고.”

“헐, 나도 그런데! 우리 통했네.”

팬이 하이파이브를 요청하며 손바닥을 펼쳐 들었다. 휘건이 시원하게 웃으며 손바닥을 부딪히자 짝하고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그럼 한 소절만 부탁해도 될까?”

“안될 건 없지.”

휘건은 가볍게 제 파트를 한 소절 불러주고는 사인을 마저 이어 갔다. 무반주로도 어쩜 이렇게 잘 하냐며 침이 마르도록 터져 나오는 칭찬에 귀끝이 점점 달아올랐다. 아무래도 저 낯간지러운 칭찬에 익숙해지는 건 시간이 좀 더 많이 필요할 것 같았다.

“휘건아, 고마워! 항상 건강해야 해~”

“누나도 항상 행복하고 건강하세요.”

마지막 번호의 팬까지 사인을 마치고, 뒤에 남은 멤버들이 사인하는 동안 숨을 고르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작에 사인을 끝낸 강문은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고 있는 팬들을 향해 다양한 포즈를 취하며 팬 서비스를 하고 있었다.

행여 팬들과 함께 하는 모습까지 질투하는 꼴사나운 사람이 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마냥 귀엽기만 했다. 열심히 이것저것 해 보이는 강문도, 그걸 보고 입을 틀어막으며 좋아하는 팬들도.

“야, 잠깐만.”

휘건이 가까이 다가오라고 손짓하자 강문이 왜 그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끼 부리는 건 타고난 거야?”

입모양이 보이지 않도록 손으로 가리고 작게 속삭이자 강문이 질색하는 표정으로 웃으며 등짝을 퍽퍽 내리쳤다. 맞으면서도 좋다고 낄낄 웃는 모습에 객석에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지막 팬까지 무대에서 내려가고, 멤버들이 서로를 마주보며 자축의 박수를 보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스태프들이 재빠르게 테이블과 의자를 치우고 마이크를 건네주었다.

“어…… 첫 사인회라 사실 저희 모두 긴장을 많이 했는데, 사고 없이 무사히 끝나서 정말 뿌듯하고 다행이에요.”

강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저 아까 물 마셨어요.’ 같은 시답잖은 말만 한다 해도 입이 마르게 칭찬할 듯한 분위기에 강문이 입을 가리고 쑥스러운 듯 웃었다.

……씨발. 쟨 뭐가 저렇게 예뻐.

휘건은 애써 시선을 객석으로 돌리며 또 속으로 애국가를 불렀다. 거의 랩을 하듯 빠르게 불러 세 바퀴쯤 돌았을 때, 자신이 소감을 말할 차례가 다가왔다.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기회가 더 자주 있었으면 좋겠고요, 여러분이 해주신 좋은 말들 다 가슴에 새기고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반짝이며 저만 바라보는 눈동자들에 다시금 가슴이 벅차올랐다.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감사를 표하는 제 머리 위로 쏟아지는 환호성에 등줄기가 짜릿해졌다. 이후 준비한 무대를 보여주고 사인회장에서 나와 남은 스케줄을 소화하는 동안에도 붕붕 떠오른 기분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고단한 몸을 이끌고 새벽 늦게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사인회에서 들었던 말들을 곱씹다가 뜬금없이 ‘애인이랑 같이 아이돌 활동 하는 거 팬 기만 아니에요?’ 하고 쏘아 붙이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어서 혼란스러운 것도 있지만, 더 신경 쓰이는 건 불현듯 떠오른 한 가지 의문이었다.

나와 강문은 어떤 사이지?

생각보다 답은 금방 나왔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든, 곧 눈물의 이별을 할 사이인 거라고.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강문과 저 사이의 허물 수 없는 벽의 두께가 새삼 실감나서, 가슴 한켠이 서글프도록 뻐근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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