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78화
샤워 후 터덜터덜 방으로 들어온 강문이 머리를 말릴 기운도 없어 그대로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배어나온 물기가 베개와 이불을 축축하게 적셨지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역대급으로 빡빡했던 스케줄에 체력이 단 한 톨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으어어…… 피곤해…….”
좀비처럼 ‘피곤해, 피곤해’만 중얼거리다 손을 뻗어 더듬더듬 휴대폰을 찾았다. 졸음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첫 팬 사인회에 대한 반응이 궁금했다. 자신은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행복했지만, 팬들은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니까.
“보자…….”
강문은 엎드려 있던 몸을 돌려 눕고는 SNS에 ‘와인 팬싸’라는 단어를 검색했다. 얼마나 많은 게시글이 올라왔는지, 스크롤이 짧아지다 못해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휘파람총 @gnlqkfkachd
2X0928 명동 팬싸
나 : 휘건아 널 위해 준비했어 (장난감청소기 보여줌)
건 : 청소기?
나 : 이 세상에서 널 괴롭히는 말들은 전부 내가 이 청소기로 빨아들여서 없애줄게. 우리 휘건이는 예쁘고 좋은 말만 들어! (청소기 작동)
건 : (존나 예쁘게 웃으뮤ㅠㅠ) 와아…… 너무 감동인데요? 저 눈물날 뻔 했어요.
나 : 잘하고 있으니까 의심하지 말고 앞만 보고 가. 알겠지? 뒤는 내가 책임질게.
건 : 그럼 누나 뒤는 내가 지켜줘야겠다.
내 앞에 정병악개 있어서 뒤통수 후리고싶던거 깍참고 예쁜말 좋은말 잔뜩 해주고 왔으뮤ㅠㅠㅠㅠㅠㅠ 하 진짜 그년 다른 오프에서 걸리기만 해봐라 가만안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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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빵순 @bbanggams
어제 머선일이 있었던거죠…… 탐라 다들 화나계시던데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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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파람총 @gnlqkfkachd
빵순니뮤ㅠㅠㅠㅠ 뎀드릴게여ㅠㅠㅠㅠㅠ
산삼뿌리 @healthy_ssbr
오늘 명동팬싸 갖다온 분들 토끼머리띠 사진 꼭 부탁드립니다........ 저 진짜 손 덜덜 떨면서 건넸어요……다흐흑
빠쉐 @dabbushow
오늘 진짜 최고로 행복했다 애들 다 방긋방긋 예쁘게 웃어주고 해달라는거 거의 다 해주고ㅠㅠㅠㅠㅠㅠ 율이는 나 덜덜 떨어서 말 못하고 있으니까 할말 다 하고 가라면서 앨범 잡고 안주고 시찬이는 피에쓰에 곰돌이 그려달라고 했는데 진짜 귀엽게 그려줬어ㅠㅠㅠㅠㅠㅠ 이 사랑둥이들 평생 지켜ㅠㅠㅠㅠㅠㅠㅠㅠ
곰차 @bearchachaa
2X0928 명동 팬싸
나 : 호재야 얼굴에 김 묻었어
호 : 잘생김이요? 식상하네요 불합격 드리겠습니다
나 : 패자부활전 없어?
호 : 으음…… 호재야 사랑해 한번 해주면 생각해볼게요
나 : 백 번도 말할 수 있어 호재야 사랑해
호 : 어, 나도 사랑해
나 : (씨발시발나ㅓㄴ어ㅏ알ㄴ아ㅏ끼발씨발 아아아악!!!!!)
강호재 유죄 강호재 유재 시팔 결혼해ㅠㅠ
수많은 후기 글을 보는 동안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다른 멤버들에 대한 후기들에도 다들 사랑이 넘쳐서,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원래도 늘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전보다 더 끈끈한 유대감이 생긴 것 같았다.
“…….”
분명 숨만 겨우 쉴 정도로 체력이 바닥났었는데, 어느새 피로가 사르르 풀렸다. 평범하게 살던 자신은 꿈도 꿀 수 없던 이 경험이 너무 값지고 소중해서 이대로 잠들기 아까웠다.
어떻게 이 감정을 해소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강문은 별스타에 접속했다. 한참을 머뭇거리다 ‘라이브 방송’ 버튼을 눌렀다.
kmoon_wain님이 라이브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늦은 새벽이라 누가 볼까 싶기는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강문은 화면 가득 비친 제 얼굴과 소소하게 들어오는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와…… 안녕하세요. 솔직히 시간이 너무 늦어서 아무도 안 보실 줄 알았는데…….”
[문아 왜 안자ㅠㅠㅠㅠㅠㅠ]
[우리애기 피곤해보이네……]
[Hello in canada]
[아이고 목 다 잠겼네ㅠㅠ]
평소보다 사람이 적어서 그런지 오히려 채팅을 살피기에는 더 편했다. 짧은 인사 뒤 올라오는 채팅들을 말없이 쳐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냥 보고 싶어서 켰어요. 뭔가, 가까이서 만나고 나니까 더 보고 싶고, 고맙고 그래서요. 어떤 순간을 같은 감정으로 공유한다는 게 참 멋진 일이더라고요.”
첫 쇼케이스와 데뷔 무대 때도 그랬지만, 오늘은 전보다 더 많은 감정들을 느꼈다. 일 대 다수로 만나는 것과 일 대 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팬들의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심장 한 켠이 시큰해졌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바라봐주는 팬들을 두고 돌아갈 생각만 하는 자신이 조금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든 이 모든 경험은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주인공이 누렸어야 했을 모든 벅찬 순간들을 빼앗았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잠깐 빌리고 다시 잘 돌려줄게’라며 애써 합리화 해 보아도 찜찜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애기 우니? 울지마로라…… 누나 가섬 찢어진다]
[내가 더 고마워 문아]
[하…… 이 시간에 눈물나게 하는 거 반칙 아니냐ㅠ]
[ㅜㅜㅜㅠㅠㅠㅠㅠㅠㅠㅠ]
[miss you]
여러 생각들이 겹쳐 시큰해진 코를 훌쩍이자 채팅이 눈물로 도배가 되었다.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는 그 모습이 귀여워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저 안 울어요. 오늘 진짜 행복했는데…… 더 많은 분들이랑 함께할 수 있는 기회가 앞으로 더 생기겠죠?”
[와기야ㅠㅠㅠㅠㅠ허어유ㅠ유ㅠㅠ]
[누나가 개같이 벌어볼게]
[나도 너무 좋았어ㅠㅠ 말랑찹쌀떡 절대지켜ㅠㅠㅠㅠ]
“다들 오늘 하루는 어땠어요? 우리 와이너리도 행복한 하루 보냈어요? 힘들었던 기억도 좋았던 기억도 다 저한테 얘기해 주세요. 다 들어 줄게요.”
마음 같아서는 한 명 한 명 다 붙잡고 고맙다며 인사를 건네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으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이렇게 들어주는 건 얼마든지 해줄 수 있으니 언제든 나를 찾아도 돼, 하고.
주르륵 올라오는 채팅엔 정말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다. 팬 사인회에 당첨되어 행복했다는 사람도 있었고, 개인적인 일이 너무 힘들어 한참이나 울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최대한 많이 읽고 리액션해주고 싶어 열심히 눈을 굴렸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지난 뒤, 어쩔 수 없이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눈을 깜빡거리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 게 느껴졌다.
[애기 졸리구나 ㅋㅋㅋ]
[문아 가서 자 괜찮아]
[눈 점점 감기는거봐 커여워……]
[어떻게 애가 저렇게 말랑하냐ㅠ 호로롭 하구 싶내]
“아니에요……. 안 졸려요…….”
하지만 한번 몰려오기 시작한 졸음을 이기는 건 쉽지 않았다. 버티고 버티다 어느새 까무룩 잠들어버린 덕에 라이브 방송 화면엔 눈을 감은 강문의 얼굴과 새근새근 고르는 숨소리만 송출되었다.
[이거 우리가 보고 있어도 되는거니……]
[자는 것도 예쁘자너]
[문아 고마워 덕분에 나도 꿀잠잘거같애]
[사랑해 문아 예쁘고 고운 꿈 꿔]
고요하게 채팅만 올라가고 있는 가운데 갑자기 철컥 하고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방문이 열렸다. 예상치 못한 얼굴이 등장하자 채팅창이 가볍게 소란스러워졌다.
“머리도 안 말리고…….”
안쓰럽다는 얼굴로 중얼거린 휘건이 휴대폰 쪽으로 다가오더니, 씨익 웃으며 ‘쉿’ 하고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갑작스러운 휘건의 등장에 흥분하는 팬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라이브 방송이 종료되었다. 잠들어버린 강문 대신 휘건이 방송을 꺼준 것이다.
코로 숨을 한번 크게 내쉰 휘건이 엎드린 채로 잠든 강문을 제대로 눕히고 이불까지 덮어 주었다. 많이 피곤했던 모양인지 그러는 와중에도 강문은 깨지 않고 잘도 잤다.
“…….”
휘건은 침대 맡에 걸터앉아 잠든 강문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눈썹 끝을 간지럽히는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자 무슨 꿈을 꾸는지 입술을 오물거리는 게, ‘말랑말랑’이라는 단어를 사람으로 만든 것 같아 미치도록 귀여웠다.
“행복하다면서 떠날 생각만 하냐, 너는…….”
한숨 섞인 목소리가 공기 중에 공허하게 흩어졌다. ‘오늘 정말 행복했다’고 말하는 강문의 눈에서 휘건은 많은 감정을 읽었다. 그게 참 밉고 서운하다가도,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모든 선택의 우선순위가 자신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이해하려고 노력은 하는데…… 그게 잘 안 돼.”
아래로 스르륵 내려온 손가락이 강문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었다. 가볍게 굿나잇 키스를 하며 울컥 눈물이 터지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 * *
“에휴…….”
공식 홈페이지 프롬 게시판에 짧은 사과 글을 올린 강문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냥 얌전히 잠이나 잘 것이지, 괜히 라이브 방송을 켠 게 부끄러워 속으로 백 번은 넘게 자책했다. 팬들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줬다며 좋아했지만, 강문은 당연히 알 턱이 없었다.
시무룩하게 방 밖으로 나가니 휘건이 부엌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오늘은 오전 스케줄이 없고 늦은 오후에 대학교 축제 축하 공연만 있어 다들 간만에 늦잠을 즐기는 모양이었다.
“잘 잤어?”
휘건은 고개만 끄덕여 대답하고는 커피를 마시겠냐고 물었다. 아이스로 부탁한다며 식탁 의자에 앉으니 코끝에 커피 향기가 기분 좋게 스쳤다.
“넌 뭐 라방 하다가 잠들고 그러냐.”
새 캡슐을 머신에 넣으며 휘건이 가볍게 쯧, 하고 혀를 찼다. 머쓱해서 허허 웃다가 문득, 이제 막 글을 올렸는데 커피를 내리고 있던 휘건이 어떻게 알고 있나 싶었다.
“근데 어떻게 알아?”
“니가 어떻게 그렇게 얌전히 잘 누워서 자고 있겠어?”
엉뚱한 대답에 곰곰이 생각하던 강문은 그제야 지난 밤 방송을 끄고 이불을 덮어주고 나간 게 휘건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쩐지 갑자기 잠든 것 치고는 얌전히 자고 있더라니, 휘건의 도움이었던 것이다.
“머리도 안 말리고 말이야. 가서 세수부터 하고 와서 마셔.”
휘건은 완성된 커피를 가지고 오는 순간까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세수를 하고 오라는 말에 꿍얼거리며 화장실로 가 거울을 보니 머리가 아주 가관이었다. 꼭 자면서 누구랑 대판 싸우기라도 한 것 같았다.
“와……. 이렇게까지 된다고?”
폭탄을 맞거나 실험에 실패한 미친 박사가 떠올라 어이없는 웃음이 터졌다. 어차피 나중에 나가기 전에 씻을 테니 가볍게 세수만 하고 머리는 따로 정리하진 않았다.
“헐. 이거 진짜 맛있다.”
“괜찮지? 여기 캡슐이 맛있어.”
오랜만에 여유로운 오전을 만끽하며 커피를 마시다 보니 불현듯 어제의 무례했던 팬이 떠올랐다.
친한 사람들한테야 장난도 잘 걸지만, 모두에게 살가운 성격이 아니라 솔직히 좀 걱정했었다. 행여 큰 소리라도 오가는 건 아닌지 신경이 곤두섰는데, 의외로 휘건은 제 생각보다 훨씬 더 어른스럽게 대처했다.
팬 서비스를 해주는 모습도 그렇고, 거의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 정도라, 역시 수영 선수로 남았으면 참 아까웠겠다 싶었다.
“어제 너 완전 프로 아이돌이더라? 팬들 엄청 좋았겠어.”
“그러는 너는. 그리고 나도 고마운 건 알거든?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지.”
칭찬이라기엔 조금 애매한 칭찬을 나눈 두 사람이 마주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비록 간밤에 작은 흑역사를 만들기는 했지만, 포근한 날씨만큼 기분 좋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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