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 쪼렙의 길은 험난하다 (3/21)

02. 쪼렙의 길은 험난하다

개나소나의 주캐는 마법사인 듯했다. 레벨 150부터 속성 선택이 가능했기 때문에 레벨 130인 개나소나는 아직 무속성의 기본 캐릭터였는데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면 스킬은 기억난다.

원거리 딜러답게 평타는 미니 파이어볼이고, 주요 스킬은 스턴 마법. 지뢰처럼 설치해 둔 마법진에 적군이 걸리면 상태 이상이 생기는 스킬이었다. 그 상태에서 보통은 아군이 지원 오거나 마법사가 직접 평타로 죽이기도 했다.

난이도가 높지 않은 데 반해 공격력은 강한 편이라 대다수의 유저들이 선호하는 캐릭터였다.

궁극기는 모든 캐릭터 중에서 가장 넓은 광역기를 선사하는데, 바닥에서 솟아오른 화산이 폭발하는 이미지와 함께 하늘에서 불로 뒤덮인 바위들이 쏟아져 내리고 일정 범위 내의 바닥에도 용암이 흐른다.

시전 속도가 다소 길다는 단점이 있지만 범위가 넓어서 시전되면 적군에게는 확실한 대미지를 줄 수 있는 공격이었다.

‘첫 번째랑 두 번째 게임에서는 거의 학살에 가까워서 실력은 제대로 못 보긴 했지만…….’

저렇게까지 입방정을 떠는 걸 보면 나름 잘하는 거겠지? 얼마나 잘하나 두고 보자, 라는 심정으로 물 정령을 선택했다. 그러자 아군의 기지 안에서 유일하게 홀로 빙그르르 돌며 물방울을 터뜨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팀] 발굴쓰레기: 오

[팀] 발굴쓰레기: 레어네

신규 캐릭터의 레어 코스튬 효과를 처음 본 모양인지 발굴쓰레기가 감탄을 했다. 화려하게 펼쳐지는 무지개 뒤로 개나소나의 캐릭터가 얼굴을 들이민다.

이 자식이?

[팀] 개나소나: 돼지 목에 진주

[팀] 발굴쓰레기: ? 아까부터 시비터네

[팀] 할미꽃돼지: 듣는 돼지 기분 나쁘네?

원래 이렇게 시비가 걸리면 대부분은 무시를 하거나 같이 조롱하는 유저들이 많은 편인데 발굴쓰레기는 조금 전에도 느꼈지만 꽤나 착한 유저인 듯싶었다. 할미꽃돼지는 그냥 웃자고 끼어든 것 같지만.

[팀] 발굴쓰레기: 무시ㄱ

[팀] 염소구더기: ㅎㅎㅎ누가 무슨 말을 했나요?

[팀] 발굴쓰레기: ㅋㅋ

[팀] 개나소나: ㅋㅋㅋㅋㅋ?

이후로는 개나소나의 시비가 조금 줄어들었다. 내가 크게 반응도 하지 않고 동조해 주는 유저도 없으니 그런 거겠지. 더 시비를 걸면 그냥 신고하려고 했는데.

발굴쓰레기의 레벨도 109였는데 그에 반해 할미꽃돼지의 레벨은 56이었다. 상대편 중에도 레벨 5 유저가 있는걸 보아하니 레벨이 낮은 유저와 파티를 이뤄서 매칭된 모양이었다.

“마법사, 정령사에 전사 둘, 궁수. 탱커랑 힐러가 없네.”

물 정령의 스킬에 치유가 있기는 했지만 너무 소량인데. 게다가 딜러 네 명에 어시 한 명 조합이라니. 좋은 조합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원거리 딜러와 근거리 딜러가 섞여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도 제대로 해야 딜이 나오는 거지, 그게 아니면 순식간에 당할지도.

[팀] 발굴쓰레기: 흠

[팀] 발굴쓰레기: 구더기님 역할이 크네요

[팀] 발굴쓰레기: 힐 부탁

[팀] 염소구더기: 넵! 최선을 다해볼게여

궁수 캐릭터를 선택한 할미꽃돼지는 뒤에서 지원할 테니 치유 스킬은 가능하면 전사들에게 몰아주라고 부탁했다. 실제로 근거리에서 전투를 할 캐릭터들이 빨리 죽지 않아야 우리에게 승률이 있을 테니깐.

알겠다고 대답하려는데 개나소나가 툭 말을 내뱉는다.

[팀] 개나소나: 거지 같은 어시 스킬만 있는데 그거 좀 받는다고 뭐가 달라짐?

[팀] 염소구더기: 어디서 개나 소가 짖나

[팀] 개나소나: ㅋㅋㅋㅋ구더기 많이 컸네~

어휴. 반응해 주니까 좋아하는 거 봐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은 하지 않았다. 분명히 나이도 어린 유저일 텐데 진지하게 상대하지 말자.

게임이 시작되었다. 적군의 건물을 부수기 위해 달려가는데 개나소나 혼자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모습이 보인다.

뭐지? 초반에는 건물을 하나씩 부수고 서로 싸우는 전개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혼자서 뭔 짓을 하려고 저러나 싶어 인상을 찌푸렸다.

아군기지를 부수기 위해 몰려 있는 적군들.

…설마? 초반부터 킬을 노린다고?

잘하면 대박. 하지만 반대로 들켜서 죽는다면 제대로 쪽팔리는 짓이었다. 그래서 보통은 은신 스킬이 있는 도적 캐릭터들만 해볼 법한 행동인데 마법사가 시도를 한다고?

적군이 몰려 있는 곳에 도착한 개나소나가 사각지대에서 적군의 힐러 앞에 스턴 마법을 걸었다. 큰 대미지는 없지만 일시적으로 멈춘 캐릭터. 하지만 다른 네 명의 적군들이 눈치채고 개나소나에게 달려가려는 순간.

볼케이노!!

마법사 캐릭터의 강한 외침과 함께 궁극기가 시전됐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미친……. 제발……!”

잘하지 마라, 잘하지 마라!

미친 듯이 속으로 외쳤지만 이미 직감이 스킬의 성공률을 확신하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개나소나의 궁극기 공격에 적군 세 명이 순식간에 죽는 모습이 보인다.

처음에 힐러에게 먼저 스턴 마법을 시전한 것이 좋은 판단이었는지 적군들은 무서운 속도로 HP가 줄어들고 있었다.

[팀] 발굴쓰레기: ㄱㄱㄱ

아군 쪽에서도 다급하게 지원을 가자는 채팅이 올라온다. 나는 좌절하는 와중에도 착실히 조작키를 누르면서 울상을 지었다.

게임에서 제일 좋은 건 내가 독보적으로 잘해서 팀을 승리로 이끌었을 때고, 게임에서 제일 싫은 건 나한테 시비 건 놈이 적군이든 아군이든 잘했을 때다.

비록 아군이긴 하지만 개나소나의 활약에 우울해졌다.

남은 적군은 두 명.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탱커와 힐러 조합이다.

적군들도 우리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것을 직감한 듯했다. 스턴 마법에서 풀린 적군 힐러가 서둘러 뒤로 몸을 뺀다. 그 앞을 막아서는 탱커.

탱커는 물론이고 힐러도 웬만하면 체력을 높게 설정해서 그런지 개나소나의 궁극기에도 살아남은 모양이다. 저것도 얼마나 버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몰려가는데 과연 쟤들이 버틸 수 있을까?

우리 팀도 같은 생각을 하는지 할미꽃돼지가 열심히 달려가며 채팅을 친다.

[팀] 할미꽃돼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채팅으로 봐도 얼마나 신났는지 알 것 같아.

그래, 초반부터 적팀 다섯 명을 전부 해치우고 시작하면 기분이 좋긴 하지. 우리한테 상황도 훨씬 유리하게 돌아갈 테고.

가자마자 개나소나에게 힐을 줘야 할 생각을 하는 나 역시 이번 전투는 이긴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아직 너희의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어!

“아니, 미친? 이 타이밍에서 힐러 궁극기를 쓴다고?”

“왜? 왜?”

나의 어이없어하는 탄성에 이제 막 게임을 끝낸 임해서가 게임을 들여다보았다.

대충 훑어보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것 같았다. 입을 막으며 “개쩔어”라고 감탄하는 소리가 작게 들려온다.

“적군 탱커 완전 환호하고 있을 듯. 힐러 순간 판단 쩔었네.”

보통 힐러들은 치유 스킬을 자주 사용하기는 하지만 궁극기는 가능하면 아군들이 많이 있고 위험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를 대비해 아끼는 경향이 있다. 치열한 전투에서 힐러의 궁극기가 있으면 이길 확률이 높은 확률로 올라가니깐.

그런데 그런 누구보다 중요한 힐러의 궁극기를 탱커 한 명을 위해 사용한다고?

[팀] 개나소나: ㅁㅊ;; 1인궁 쩌네;;

[팀] 발굴쓰레기: 아 그래도 빨리 왔는데

힐러가 망설임이 없었구나. 어쩌면 좋은 판단일 수도 있었다.

탱커는 무서운 속도로 체력을 회복하고 있었고, 그 뒤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힐러도 HP를 회복한 채 스킬로 꾸준히 탱커를 회복시키고 있었다.

힐러의 궁극기로 인해 그들의 몸에서는 환한 빛이 터져 나오며 머리 위에 천사의 링이 생겼다. HP 회복뿐만 아니라 적군의 디버프 스킬도 상쇄시키며 회복된 일정량의 HP는 10초간 무적이다. 절대 닳지 않는다.

10초. 짧으면서도 긴 시간.

적군의 탱커가 개나소나를 발견하고 다굴하는 모습이 보였다. 방어력이 높은 캐릭터라서 공격력이 강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놓아주지도 않는다.

일정하게 조금씩 HP가 닳는 개나소나가 다급히 채팅을 올렸다.

[팀] 개나소나: 힣히힣힐!

얼마나 급했으면 채팅을 저따위로 미친 것처럼 쳐놓은 걸까. 어이가 없으면서도 서둘러 개나소나에게 치유 스킬을 걸었다. 하지만 힐러가 아닌 정령사의 치유 스킬은 소량 회복이 될 뿐,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아군들이 서둘러 탱커를 떼어내려 공격을 해보았지만 탱커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개나소나를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팀] 할미꽃돼지: 버려. 시간 최대한 끄는 동안 힐러라도 죽여야 함

[팀] 발굴쓰레기: ㅇㅇ최대한 버텨주삼

[팀] 개나소나: 조금 더 노력하는 모습이라도 해 줘ㅋㅋㅋㅋㅋㅋ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시비를 걸지 않는 모습을 보아하니 본인도 제 운명을 직감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탱커가 저렇게 대놓고 한 놈만 죽어라 패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렇다고 탱커한테 궁극기를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깝고, 다른 적군들이 부활해서 돌아오기 전에 힐러를 죽이는 게 현명했으니까.

개나소나는 이제 피하려는 시늉도 하지 않고 맞고만 있었다. 여전히 치유 스킬은 걸려 있지만 어쩐지 저 녀석의 캐릭터 주변에 맴도는 요정들이 벅차하는 느낌이랄까.

나는 치유 스킬을 개나소나에게 거는 대신에 적군 탱커에게 평타를 날리기 시작했다.

[팀] 개나소나: ? 머함

딜러들의 공격에도 제대로 타격을 받지 않는 탱커가 어시캐 정령사의 평타에 죽을 리가 없지.

예상대로 별다른 타격도 받지 않는 모습에 개나소나가 오히려 뭐하냐며 채팅을 올렸다. 그걸 무시하고 계속해서 평타를 날렸다.

다행히 적군 탱커가 가만히 있는 걸 보아하니 신규 캐릭터인 물 정령사의 평타 스킬 효과를 제대로 모르는 모양이다.

물 정령의 평타는 5회 연속적중 시 3초 시력 상실.

“5회 다 맞혔다!”

“과연 저 마법사가 알아차리고 나올까?”

임해서가 화면을 보며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다.

고작 3초이기는 하지만 그 타이밍을 노려 저 구석에서 빠져나오기라도 하면 좋은데.

물 정령의 패시브 스킬에 탱커가 일시적으로 멈칫한다. 그리고 그대로 평타를 때리는데 어쩐지 허우적거리는 느낌. 시야가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일단 때리고 보는 느낌이다. 패시브 스킬이 제대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 타이밍에 개나소나는 본능적으로 눈치챈 듯, 탱커가 다시 공격하려는 순간에 옆으로 몸을 날려 피했다.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몸을 재빠르게 피한 개나소나에게 다시 치유 스킬을 걸어주고 그는 서둘러 다시 시력이 돌아온 적군 탱커에게 스턴 마법을 걸었다.

[팀] 개나소나:ㄱㄱ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개나소나의 채팅에 힐러를 막 처치한 아군들이 돌아왔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스턴 마법에 걸려 있는 탱커를 발견하고 서둘러 다굴을 하기 시작했다.

졸지에 구석에 갇혀 맞기 시작하는 탱커의 HP가 빠른 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영 못하는 놈은 아닌가 보네.”

“그래서 더 재수 없어.”

일단 같은 편이라서 도와주기는 했지만.

상황을 모르는 아군들은 탱커가 죽자 기뻐했다. 우습게도 개나소나가 혼자 공격에서 빠져나온 줄 알고 칭찬 폭탄이 이어졌다.

[팀] 할미꽃돼지: 오오오 법사님 잘하시네요? 그대로 죽을 줄 알았는데!

[팀] 발굴쓰레기: 아까 궁도 멋있었음

[팀] 개나소나: ㅋㅋㅋ

[팀] 뽕뿡: 굿

역시 염소구더기 덕분에 빠져나왔다는 소리는 하지도 않네.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한 개나소나를 뒤로 하고 다른 아군들에게 치유 스킬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 내 캐릭터를 마법사 캐릭터가 뒤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는 줄은 모르고 말이다.

그 뒤로 개나소나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돌아다녔다. 초반에 승기를 잡은 것 때문에 흐름을 탄 모양이다. 적군들은 그대로 판을 뒤엎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힐러는 좀 잘하는 것 같긴 했지만 힐러가 치유 스킬을 쓰기도 전에 같은 편들이 죽으니 제대로 대전이 이루어질 리가.

결국 승리는 우리에게 돌아왔다.

[팀] 발굴쓰레기: ㅅㄱ 물 정령 괜춘하시네요. 법사님도 잘하셨고

발굴쓰레기는 마지막까지 신사였다. 별다른 존재감도 드러내지 못한 나를 굳이 언급하며 칭찬해 준 건 물론이고 상대적으로 활약이 컸던 개나소나도 확실히 칭찬했으니.

[팀] 개나소나: ㅇㅇ

잔뜩 좋아하며 또 나를 걸고 딴지를 걸 줄 알았던 개나소나는 의외로 차분히 칭찬을 받아들였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게 처음 한타 이후로 나에 대한 시비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 집중한다고 그런 건가?

조금은 찜찜했지만 굳이 드러내지는 않고 인사를 했다.

[팀] 염소구더기: 수고하셨습니다

게임 화면이 꺼진다. 종료 버튼을 누른 나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고작 세 판밖에 하지 않았는데 힘들다.

“피곤함?”

“엉. 게임보다 유저 때문에.”

“게임이 그 맛에 하는 거지, 뭐. 너도 같이 욕해.”

“난 욕은 하지 않는다.”

다리를 꼬고 근엄한 목소리를 흉내 내니 임해서가 토하는 시늉을 한다.

그러든가 말든가. 녀석이 하는 게임 화면을 보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사촌 형이었다.

“여보세요?”

―어디야?

다짜고짜 전화를 해서 어디냐니. 잠깐 고민하다가 이제는 뭐 찔릴 것도 없으니 당당하게 얘기했다.

“친구랑 피시방 왔어.”

―피시방? 또 게임 한다고?

“또는 무슨! 형 때문에 내가 1년 동안 못한 거 이제 좀 하겠다는데.”

―네가 게임 폐인처럼 하니까 그렇지. 아, 됐고 나 부탁 좀.

아, 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귀찮음이 몰려오는데?

황급히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그런 나를 눈치챈 사촌 형이 서둘러 말했다.

―끊으면 죽는다.

“아씨. 무슨 부탁인데?”

―자취방 가서 바퀴벌레 좀 잡아줘.

“……?”

이게 무슨 신박한 부탁이지?

사촌 형의 전화가 맞나 싶어서 다시 발신인을 확인하는데 그런 나의 반응을 예상하듯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벌레는 무슨, 귀신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바퀴벌레를 잡아달라고?

사촌 형은 화를 억누르는 목소리로 한숨을 푹 내쉬며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자취방에 친구 놈 있는데 내가 잠깐 나온 사이에 바퀴벌레가 나타났다고 존나 지랄하잖아. 지금 스무 통 넘게 전화 왔어.

“그래서? 여자 친구야?”

―나보다 물건 실한 놈이거든. 어쨌든 내가 지금 여친 달래주느라 갈 상황이 아니라서 한 번만 부탁할게. 나중에 밥 사 줄 테니까! 잡아줄 때까지 계속 전화할 놈이란 말이야.

“아니, 그 형은 벌레가 싫으면 집에서 나오면 되잖아?”

―현관문 앞에 있단다. X발.

오. 그래서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그 좁은 방에 갇혀 있다고?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스타일인 것 같았다.

잡지도 못하고 나오지도 못하니 집주인 피곤하게 하는구나. 근데 사촌 형은 또 여자 친구랑 싸운 건지 갈 상황이 안 되는 거고?

자취방이 이 근처이기는 하지만 귀찮은데.

잠깐 고민하던 나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알겠어. 잡아주고 그냥 바로 나온다.”

―오케이. 그럼 나 끊는다.

수화기 너머로 이 상황에 누구랑 전화하냐고 여자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여자 친구한테도 쪼이고 친구한테도 쪼이고 바쁘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모자를 푹 눌러쓰는데 그런 나를 임해서가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벌써 가려고?”

“아니, 나 잠깐 갔다가 올게. 사촌 형 부탁 때문에. 오래 안 걸림.”

“엉. 빨리 와.”

뒤도 돌아보지 않는 임해서를 보며 컴퓨터를 일시 정지 해둔 뒤에 피시방에서 나왔다.

덥다. 한여름이라서 쨍쨍한 햇살이 반겨준다.

사촌 형 친구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바퀴벌레 하나 못 잡아서 나를 이렇게까지 귀찮게 하는 거지?

이를 갈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같은 대학교 졸업반에 있는 사촌 형의 자취방은 학교와 가깝기는 했으나 좁은 원룸이었다. 좁지만 않았더라면 더부살이 좀 할 수 있었을 텐데.

익숙하게 발걸음을 옮기니 어느새 자취방 앞이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고리를 돌리려고 하는데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열지 마!!”

굉장히 다급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문고리를 돌리던 손을 멈추는데 또다시 목소리가 이어져 들려온다.

“아니, 열어! 열지 마! 으아아아가!! 또 움직인다아아아가가!!”

“…….”

누가 들으면 안에서 쥐새끼라도 있는 줄 알겠네. 사촌 형이 내쉰 한숨의 의미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망설임 없이 현관문을 열자 좁은 원룸 안을 사정없이 돌아다니는 검은 물체가 보인다. 그리고 책상 위에 올라가 까치발로 서있는 커다란 남성 한 명.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아이보리 셔츠를 걸쳐 입은 남성은 얼핏 봐도 나보다 큰 덩치의 소유자였다. 사실 밑에 기어 다니는 놈보다 책상 위에 까치발로 서있는 저 사람이 더 무서웠다.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지켜보는데 남자의 다양한 표정 변화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내가 사촌 형이 아니라서 놀람과 동시에 구세주라는 복합적인 감정이 섞인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표정 변화도 참 요란한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지우 형 부탁으로 바퀴벌레 청부 살생 온 사람인데요.”

“청부 살인이든 살생이든! 어서 저거 좀 치워줘!”

“네, 잠시만요.”

신발장에서 사촌 형의 신발을 꺼내 들고 익숙하게 다가가는데 남자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간다.

“너 설마 신발로 잡으려고……?”

“…네.”

뭘 당연한 걸 묻냐는 의미로 멀뚱히 올려다보는데 이번에는 파랗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간다.

“하지 마. 바퀴벌레 터뜨리면 사방으로 알이 퍼진다고 했단 말이야!”

“그렇게 세게 누르진 않을게요.”

“으악, 쟤 피도 보기 싫어!”

“…….”

참 피곤한 스타일이네.

이름도 모르는 남자를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보는데 그동안 바퀴벌레는 유유히 나를 지나쳐 열어둔 현관문 쪽으로 사라졌다.

머리도 좋네. 죽일 놈이 와서 본능적으로 피한 건가?

혹여나 다시 들어올까 싶어서 문을 닫는데 그제야 뒤에서 안도의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아, 그냥 나도 같이 나갈걸. 아무 생각도 없이 남았네.’

아직까지 내 손은 문고리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냥 다시 나가자. 괜히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실례했습니…….”

“잠깐만!”

어느새 다가온 건지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그리고 내 손 위로 포개어지는 커다란 손이 내 손을 꽉 잡았다.

힘 한번 세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는데 아까와는 달리 눈높이가 맞는다. 그래도 여전히 나보다 키가 컸지만.

입을 다물고 있으니 조금 차가워 보이기도 한 이미지라서 방금까지 칠색 팔색을 하던 남자가 맞는가 의아해졌다. 그는 이내 문고리에서 내 손을 떼어내더니 손목을 잡고 안쪽으로 데려간다.

“진짜 미안한데, 조금만 있다가 나가면 안 될까?”

“네?”

“걔도 멀리 나갈 시간적 여유를 줘야지…….”

지랄이 풍년이었다.

걔라면 바퀴벌레를 말하는 걸까. 설마 문 연 사이에 또 들어올까 봐 겁나서 막은 걸 줄이야. 초면이 사람한테 ‘장난하세요?’라고 묻기에는 그 정도로 몰상식한 사람은 아니라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눈꼬리를 접으며 환하게 웃는 남자.

웃으니까 인상이 확 달라지네. 커다란 강아지가 꼬리를 흔드는 줄.

“아까 지우 부탁으로 왔다고 했지? 지우 동생?”

“정확히는 사촌 동생이에요. 때마침 이 근처에 있었거든요.”

“그랬구나. 내 이름은 문정하. 너는?”

“…손지언이요.”

“이름도 멋있네!!”

“…….”

생각보다 사교성이 좋은 사람이라고 할지……. 아니면 바퀴벌레에게서 구해줬다고 호감도가 최고치를 찍은 건가.

편하게 앉으라며 마치 본인 집처럼 나를 자취방 중앙에 데려온 그는 방석도 손수 펼쳐주었다.

“지우가 없을 때 그런 상황이 생겨서 얼마나 식겁했는지. 덩치도 큰 놈이 별 지랄이지?”

“뭘요. 싫어할 수도 있죠.”

별다른 관심이 없어서 집 안을 둘러보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어색하고 불편해.

책상 위에 있는 노트북 화면이 얼핏 보인다. 아까 문정하라는 남자의 호들갑으로 이리저리 치인 모양인지 구석에 볼품없이 밀려나 있었는데 어쩐지 어렴풋이 보이는 화면이 익숙하다.

‘저거 더 세이렌 아닌가?’

사촌 형 노트북은 맞는 것 같기는 한데. 형은 게임은 건 안 할 텐데? 잘못 본 건가 싶어서 인상을 찌푸리는데 문정하가 내 시선의 방향을 눈치채고 서둘러 노트북을 종료시킨다.

“손지우한테 비밀로 해 줘. 노트북으로 게임하지 말라고 했었거든.”

저 사람이 하던 거구나.

더 세이렌이냐고 물어볼까 하다가 관뒀다.

어차피 이번만 보고 더는 안 볼 사람인데 뭐. 얼른 바퀴벌레나 멀리멀리 갔으면 좋겠다. 이 어색한 공간 좀 빨리 빠져나가게.

첫인상은 중요하다.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심리 때문인지 첫인상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경우가 많은데 첫인상이 호감이었다면 잘못을 하더라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라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첫인상이 비호감이었다면? 무언가 잘하거나 배려를 해도 ‘웬일로?’, ‘그래봤자지.’라는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첫인상을 좋게 하고 싶어 하는 이들은 대부분 본능적으로 미소를 짓고, 사근사근한 말투를 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멀뚱히 바라보는데 문정하가 부산스럽게 이불을 찾기 시작했다. 여름이라서 이불 따위 필요 없는데.

‘설마 바퀴벌레 퇴치로 저렇게 호감도를 올릴 줄이야.’

조금 쌀쌀맞을 정도로 이불을 거절했는데도 불구하고 눈을 반짝이며 나를 보는 그는 어느새 마실 것도 내온 상태다. 누가 보면 여기가 본인 집인 줄 알겠다.

“저 이제 가면 되나요?”

“잠깐만, 5분만. 부탁이야. 5분만 더 있으면 안 될까?”

벌써 다섯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똑같았다. 1분, 2분, 3분……. 묻는 횟수에 따라 시간이 늘어났을 뿐.

“곤란한데요.”

“제발, 지언아.”

귀찮아서 이번에는 제법 단호하게 대답하니 커다란 덩치를 쭈그려 앉아 이불에 턱을 올려놓고 올려다본다.

네, 그래봤자 하나도 귀엽지 않아요. 하지만 이건 친하지 않으니 속으로만 생각하는 걸로.

“저도 친구가 피시방에서 기다리고 있는데요. 노파심에 여쭤보는 거지만 설마 다른 바퀴벌레가 나타날까 봐 지우 형이 올 때까지 잡아두려는 건 아니겠죠?”

천장을 바라보며 무덤덤하고 빠르게 내뱉은 말들은 제법 핵심을 짚었다.

너무나도 속이 뻔히 보여서 모른 척하고 기다려 줄까 했지만 임해서가 어디냐고 카톡을 보내오니 어쩔 수 없었다. 사실은 일시 정지 해둔 피시방 금액이 오르는 게 제일 신경 쓰여서지만.

“…안 돼?”

“네.”

애처롭게 말하는 문정하에게 단호히 대답하며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에어컨 바람과 편히 누워 있는 몸뚱이. 저도 모르게 졸음이 몰려와 하품을 하니 그런 나의 상태를 빠르게 눈치챈 문정하가 간사하게도 본인의 셔츠를 벗어 내 배 위에 덮어준다.

“그건 덥지 않을 거야.”

확실히 얇은 옷감은 덥지도 않고 딱 좋았다. 커다란 덩치 탓에 옷 사이즈도 커서 배를 포함해 허벅지 절반도 가리니 안성맞춤이다.

“그럼 저 5분만 잘 테니까 깨워주세요. 지우 형보고 여친 버리고 빨리 오라고 얘기해 주시고요.”

“알겠어. 내가 손지우한테 빨리 달려오라고 잔소리할게. 걱정하지 말고 얼른 자.”

당신이 나를 깨우지 않을까 봐 그게 제일 걱정되는데. 하지만 그렇게 말할 정신도 없이 점점 눈이 감겼다.

문정하는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까보다 목소리 톤을 낮춰 소곤소곤 얘기했다. 그 낮은 음성이 자장가 같았다.

아, 내 피시방비…….

그렇게 나는 꿀잠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무언가 문을 세게 닫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들려온 뒤였다. 놀라서 눈을 번쩍 뜨니 그런 나를 눈치챈 사촌 형이 쳐다보았다.

“쏘리, 놀라서 깼냐?”

신발장 앞에 있는 것을 보아하니 신발을 넣고 문을 닫을 때 실수로 세게 닫은 모양이었다.

몸을 일으키는데 문정하가 덮어준 옷이 그대로 흘러내린다. 아직 잠을 덜 깨서 그것을 빤히 쳐다보다가 주변을 둘러보는데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놈 옷은 대충 바닥에 던져놔. 고급 걸레처럼 사용하고 있으면 알아서 찾아가겠지.”

친구 옷인데 고급 걸레라니.

하지만 사촌 형의 말을 잘 듣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구석 바닥에 사뿐히 내려놓았다.

“갔어?”

“응. 나 오자마자 갔음. 너한테 고맙다고 전해달라던데.”

“…지금 몇 신데?”

방 안에 시계가 없어서 불안한 마음으로 물어보니 사촌 형이 느리게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7시 30분?”

“아, 미친.”

“왜?”

5분 뒤에 깨워 달라고 했는데 왜 1시간이 지난 거야.

마른세수를 하며 짜증스럽게 까치집이 된 머리 위로 모자를 덮어썼다.

“아니, 내가 분명히 5분 뒤에 깨워달라고 했는데 왜 말도 없이 그냥 가? 미안하다고 얘기라도 하든가.”

“눈치 보여서 자리 피한 듯. 보나 마나 혼자 있을 때 또 바퀴벌레 나올까 봐 어떻게든 너 붙잡아 두려던 거겠지. 내가 여기 자주 나온다고 겁줬거든.”

“그럼 밖에 나가서 기다리면 될 것이지. 아, 짜증 나.”

“그래도 덕분에 너 완전 찍힌 것 같더라.”

찍혀?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인상을 찡그리고 쳐다보니 그가 기분 나쁘게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어 보였다.

“완전 극호감으로.”

“그딴 거 필요 없어.”

“응, 그렇긴 할 것 같은데 네가 거부해도 이미 늦음. 걔 아무한테나 정주는 놈 아닌데 특이 케이스네. 마음에 든 애들한테는 잘해 줘. 돈 많아서 물질적으로 이것저것 사 주려고 하지.”

“관심 없어. 어차피 또 볼 사이도 아닌데.”

“네 번호 물어보던데?”

침대에서 일어나다가 멈칫거리며 사촌 형을 바라보았다.

설마…….

태연스럽게 마주 보는 시선에 설마 하는 마음에 물었다.

“가르쳐 줬어?”

“노. 친한 놈이긴 하지만 내 정보도 아니고 네 개인 정보인데.”

“형이 웬일로 상식적인 소리를 하니 다행이네.”

“같은 대학이라는 건 알려줌. 1학년이니까 과는 알아서 찾아보라고 했지. 아마 일주일 안에 찾아낼걸?”

자신 있게 말하는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설마 그렇게 정성스럽게 찾으려고. 됐고 내 피시방비 내놔. 형 때문에 이렇게 된 거잖아.”

“자.”

생각보다 순순히 올려진 만 원을 의심스럽게 쳐다보니 사촌 형이 화사하게 웃는다.

“너 맛있는 거 사 주라고 문정하가 5만 원 줌.”

“근데 왜 만 원만 내놔?”

“너 어차피 피시방 바로 갈 거잖아.”

“내 말뜻은 그게 아닐 텐데. 눈치도 빠른 사람이 왜 못 알아듣는 척이지?”

게다가 마치 본인 돈처럼 선심 쓰듯 주고 말이야.

하지만 사촌 형은 내 등을 밀어내며 손수 현관문까지 열어줬다. 졸지에 쫓겨난 내 손에는 달랑 만 원만 들려 있었다.

아니, 똥은 내가 치웠는데?

* * *

피시방으로 돌아가니 내 인기척을 느낀 임해서가 홱 돌아보며 노려본다.

“뭘 봐.”

“금방 다녀온다더니 무정한 사람! 한 시간이나 날 외롭게 하고!”

“알아서 잘 먹고 잘 놀았네.”

그의 테이블에는 이미 텅 빈 라면 그릇과 초라한 핫바 껍질이 놓여있었다. 게다가 한 시간이면 게임 두 판 정도 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을 테고.

임해서도 장난이었던 모양인지 크게 신경 쓰는 기색은 아니었다. 컴퓨터 일시 정지를 풀고 있는데 그가 물었다.

“뭐 하다가 이렇게 늦음?”

“바퀴벌레 잡다가.”

“몇십 마리였길래 한 시간이나 걸려? 네 몸에 붙어온 거 아님?”

임해서가 질색하며 의자 바퀴를 굴려 내게서 멀어진다.

얘도 벌레 싫어하나?

물 정령의 스킬 정보를 한 번 더 홈페이지에서 찾아보며 물었다.

“너도 바퀴벌레 무서워해?”

“무서워하는 건 아니지만 혐오는 하지. 존나 징그럽잖아.”

“그래도 잡을 수는 있지?”

“엉. 누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음. 내가 살아야 하니까.”

위로 두 명의 누나가 있는 임해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징그러운 바퀴벌레를 잡는 게 차라리 낫지. 누나한테 죽는 것보다야.

“그래? 난 그냥 모기처럼 별 감흥 없는데. 둘 다 그냥 때려잡으면 되잖아.”

“사이즈랑 비주얼이 다르잖아! 어쨌든 왜 그렇게 늦었는데?”

“사실 깜빡 잠들었음.”

“야, 이 개X끼야.”

찰지게 들려오는 욕설에 작게 웃었다.

라면을 하나 주문해 놓고 임해서에게 물었다.

“몇 시까지 할래?”

“내일 어차피 주말인데 좀 더 하자. 나 오늘 너희 집에서 자도 됨?”

“마음대로 해. 근데 칫솔은 사 와야 할걸.”

“안 씻으면 됨.”

당당하네. 마음대로 하라고 얘기하고 게임에 다시 접속했다. 더 세이렌의 문구가 커다랗게 띄워지며 곧이어 신규 캐릭터인 물 정령사와 얼음 전사의 이미지가 나타났다.

‘레벨 30은 어차피 하루 만에 달성하니깐.’

빨리 거너를 연습해야 하는데. 1년 동안 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실력이 예전 같지는 않을 것이다.

거너로 못하면 욕은 두 배로 먹으니까 하루빨리 적응해 내야지.

오늘 안에 레벨 30을 찍어보리라 다짐하고 익숙하게 물 정령사를 선택했다. 이벤트 때문에 유저가 많은 모양인지 빠르게 매칭됐다.

게임 준비 화면에 아군과 적군의 캐릭터들과 레벨이 보여 아무 생각없이 바라보다 의문이 들었다.

레벨 23, 31, 14 등등…….

이제 겨우 레벨 4인 나보다는 높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낮은 레벨이었다. 물론 비슷한 수준의 유저들이 매칭되는 거니까 당연한 결과이긴 하지만.

그동안 너무 레벨이 높은 애들이랑 매칭되긴 했어. 여기서는 어시캐라도 잘하면 킬을 제법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미소를 짓던 나는 게임을 진행할수록 점점 미소를 잃어갔다.

화면 속의 물 정령사는 뒤에서 다가온 적군의 기습 한 방에 피를 쏟으며 전사했다. 그리고 또다시 이어지는 적군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아군은 당황하지도 않고 회피기를 쓰며 궁극기를 사용한다.

궁극기를 시행하는 중에 평타 한 대만 맞아도 캔슬될 텐데도 불구하고 망설이지도 않는 저 자세!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거 고인물 부캐들의 파티구나.’

돌아다니지도 않고 바로 직진하는 모습에 부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신규 유저이고 레벨 30 근방이라면 하루 이틀 정도 게임을 한 사람들일 텐데도 불구하고 망설임이 너무 적긴 했지.

나는 게임 초반에 뭐가 뭔지 몰라서 많이 헤매면서 부모님을 찾는 욕도 그렇게 많이 들었는데…….

그런 본인의 과거와는 너무 달리 그들은 기다렸다는 것처럼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적팀의 건물을 부수기 위해 달려가는 모습에 본인을 뺀 나머지가 파티인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들 정도로.

‘스킬 콤보도 제법 잘 쓰고.’

게다가 초보라면 아직은 서툴 법한 콤보도 제법 익숙하게 사용한다. 물론 홈페이지나 유저들이 올린 영상으로 사용 방법 등은 숙지할 수는 있긴 하지만 직접 하는 것과는 다르다.

게임 화면을 바라보는 내 눈이 가늘어졌다. 물론 그 와중에도 그의 캐릭터인 물의 정령사는 열심히 평타를 날리며 건물을 때리는 중이었다.

다행히 적군도 아군의 건물을 부수는 중인 모양인지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보통 이게 더 세이렌의 초반 진행 상황이긴 하다. 양 사이드에 위치한 건물을 부숴놔야 움직이기 더 수월하니까.

[아군의 방어력이 감소합니다.]

[적군의 방어력이 감소합니다.]

각 건물을 부수자마자 서로의 캐릭터 방어력이 떨어졌다는 알림이 뜬다.

현재 조합은 딜러 네 명에 어시 한 명. 좋은 조합은 아니다. 심지어 그 어시가 물 정령사다. 버프 스킬도 없고 치유 스킬도 극소량인.

조합만 봐서는 이길 가능성이 높지는 않다 생각하며 아군의 뒤에 거리를 두고 따라다녔다.

“주문하신 라면 나왔습니다.”

때마침 라면이 나왔다. 가져다주는 알바생에게 눈짓으로 감사하다고 인사하고는 라면을 받아 모니터 화면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한가한 타이밍에 먹으려고 젓가락을 들어 올리려는 순간,

[팀] wksth: 지뢰밭ㄱㄱ

[팀] 빵치기소녀: ㅇㅇ

“미친?”

앞에 있던 세 명의 캐릭터가 망설임 없이 조금 돌아서 부서진 아군의 건물 근방으로 달려간다. 뒤늦게 따라가는 얼음 전사 캐릭터와 그 뒤를 따라가는 물 정령.

커다란 나뭇잎을 두 손으로 쥔 채 달려가는 캐릭터를 보며 나무젓가락을 입에 물고 질겅질겅 씹었다.

아군이 말한 지뢰밭이란, 양 사이드에 존재하는 암흑 지역이다. 바로 앞에 서있는 게 아니라면 적군인지 아군인지 분간도 어려운 좁은 골목길. 심지어 그곳에 있으면 독기에 중독되어 소량이지만 HP가 감소된다.

그래서 보통은 적군을 그곳으로 유인하거나 스킬로 던져서 조금 더 효율적으로 킬을 따내는 곳인데… 지금 그런 곳에 가자고?

[팀] 모타리: 아파요 여기 아픈데요?ㅠㅠㅠ

돌아서 암흑 지역에 진입하니 역시 아군의 HP가 조금씩 줄어드는 게 보인다. 게다가 일렬로 쭉 늘어서서 움직이는데도 불구하고 바로 앞에 사람밖에 보이지 않는 상황. 깜깜하다.

바로 앞에 얼음 전사 유저가 여기는 처음인 모양인지 허둥지둥하며 왔다 갔다 한다.

뉴비인 척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 당황한 건지 조금 헷갈리지만 일단 치유 스킬을 써주는데도 여전히 채팅으로 울상을 지었다. 덕분에 캐릭터의 울음소리가 작게 들려 인상을 찌푸렸다.

이러면 숨어서 돌아가는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바로 매섭게 다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팀] 빵치기소녀: ㅅ1ㅂ 처울지좀마. 소리에 들키겠네

[팀] 빵치기소녀: 생각좀해라

[팀]모타리: ㅜㅜㅜ죄송합니다

[팀] 빵치기소녀: 뉴비인 척 엿먹이지 말고 해

‘누구 하나는 지랄할 줄 알았다.’

혀를 차며 젓가락을 라면 위에 올려놓았다. 한 입도 먹지 못한 라면이 퉁퉁 불어가는 모습을 안쓰럽게 쳐다보며 바로 앞에 있는 얼음 전사에게 치유 스킬을 걸어 주었다.

암흑 지역 끝자락에서는 한타가 있을 것 같으니 더 이상 쓰면 안 되겠지만 얼음 전사가 안쓰럽기도 하니까. 저게 뛰어난 연기가 아니라면 진짜 뉴비인 것 같기도 하고……. 나머지는 뉴비는 아니겠네.

저와 같은 부캐라고 추측하며 라면 먹을 타이밍만 보고 있는데 앞에서 움직이던 얼음 전사가 뒤를 돌아본다. 그러고는 감사하다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아니, 글쎄 그런 모션도 적한테 소리가 들릴 수 있다니까 제정신인가?

[팀] 빵치기소녀: ?

[팀] 빵치기소녀: 돌대가리세요?

역시나 바로 무섭게 빵치기소녀가 아니라 양아치소녀가 태클을 걸어온다.

얼음 전사도 모션을 하고 나서 제 실수를 알았던 모양인지 채팅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다.

어쩐지 풀이 죽어 보이는 건 착각이겠지?

[팀] 염소구더기: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걍 ㄱㄱ

[팀] 빵치기소녀: 애들 들었을 것 같은데

그래도 말리는 행동에 죽자고 달려드는 모습은 없어서 다행이다. 개나소나 같은 스타일은 아닌가 보네.

다행히도 모타리의 실수는 적군들에게 들리지 않은 모양이다.

암흑 지역은 같이 있는 아군들도 서로 분간하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은신을 하기에는 좋은 환경이었다.

아군 건물을 부수고 난 뒤에도 남아있는 적군은 세 명. 그들을 발견하자마자 선두에 있던 기본 전사 캐릭터가 앞을 치고 나간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적군들도 당황해서 도망치려는 모습. 하지만 이미 한 명은 전사에게 잡힌 상태고 나머지 두 명은 뒤이어 등장하는 우리들의 모습에 도와주지도 못하고 돌아섰다.

[팀] 빵치기소녀: 얼려

궁수 캐릭터의 빵치기소녀가 그런 그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스킬을 써 이동 속도를 느리게 만들었다.

맞으면서도 계속 벗어나려고 하는 모습에 혹여나 놓칠까 싶어 다급하게 채팅을 올리는데 그건 누가 봐도 얼음 전사를 겨냥해서 한 말이었다.

평타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스킬은 원거리라고 들었는데, 그 스킬 중에는 적을 얼리는 기술도 있는 모양이다.

잠깐이라도 얼릴 수 있다면 확실히 도망치는 두 명도 잡을 수 있는 기회이긴 하지.

고개를 끄덕이며 전사가 잡고 있는 적을 평타로 때리고 있는데 머뭇거리던 얼음 전사가 서둘러 궁수 쪽으로 향한다. 그러고는 얼음으로 만들어진 검을 창처럼 던진다.

검사가 검을 왜 던져? 스킬 참 이상하게도 만들어 놨다고 생각하며 어이없이 쳐다보는데 호기롭게 날아간 검은 도망가는 적이 왼쪽으로 움직이자 그대로 바닥에 꽂혀버렸다.

바닥 주변이 동그란 원을 형성하며 얼음을 생성했는데 아마도 그 검을 맞으면 적도 얼어버리는 모양이다.

[팀] 빵치기소녀: 님아;;

[팀] 빵치기소녀: 그것도 못 맞춤?

[팀] 모타리: ㅠㅠ 죄송해요…… 초보라서…….

[팀] 빵치기소녀: 아니, 아까부터 뉴비인 척 하는데 그렇다고 봐주는 줄 알아?

[팀] 빵치기소녀: 이런 망겜에 신규 유저가 왜 들어와

[팀] 모타리: ㅠㅠㅠ 친구가 추천해 줘서…….

결국 모타리가 맞히지 못한 적은 스킬을 이용해 도망가 버리고, 남은 적도 혹여나 놓칠까 싶었던 빵치기소녀가 궁수의 궁극기를 사용했다.

하늘에서 무수히 많은 화살이 떨어져 내리는 궁극기는 적의 인원수가 많을 때 사용하면 효과적인 기술인데 저걸 적 한 명 잡자고 쓰다니.

물론 그렇다고 놓치기에는 배가 아팠겠지만.

뒤늦게 또 다른 아군 마법사 캐릭터가 빵치기소녀를 도와 한 명의 적을 무사히 해치울 수 있었다. 전사가 상대하던 적군도 갑작스러운 공격에 제대로 된 반격도 해보지 못하고 쓰러진 참이었고.

셋 중에 두 명. 나쁘지는 않다. 다만 다섯 명이 움직여서 반격당할 위험이 있었던 거에 비해 큰 이득은 없을 뿐.

아까 그 한 명도 잡았으면 좋았을 텐데. 저도 모르게 아쉬움이 남아서 아군의 핵심 건물로 이동하는데 그 와중에서도 빵치기소녀의 손은 부지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팀] 빵치기소녀: 이래서 신규 캐릭터 쓰는 부캐들은 극혐

[팀] 빵치기소녀: 못하면 바로 뉴비 코스프레ㅋ

[팀] 모타리: ……ㅜㅜ

[팀] 빵치기소녀: 게임 때려치워. 같이 게임하는 사람 혈압 오르니깐

[팀] wksth: ㅇㅇ 인정. 못하긴 하네

[팀] 모타리: 죄송합니다…….

아쉬운 건 아쉬운 건데, 그래도 너무 사람을 몰아가네.

모타리도 제 잘못을 아는 모양이라서 사과만 하고 있었지만, 기가 죽은 모습이 확연히 보였다.

마법사 유저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건지, 아니면 살벌한 상황에 겁이 나서 회피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조용했고.

어쩔까. 무관심으로 넘어갈까 했지만 계속 사과를 하는 모타리의 모습이 조금 안쓰럽기는 했다.

보통 저렇게 몰아가면 화나서 같이 적반하장으로 욕하는 유저가 대부분이라 관심을 끄려고 했는데 과거의 내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해서 괜히 마음이 쓰였다.

‘나도 욕 많이 먹기는 했지.’

[팀] 염소구더기: 놔둬요. 진짜 뉴비인 것 같은데

[팀] 빵치기소녀: 님도 잘하는 건 아님

[팀] 염소구더기: ㅇㅇ 알면 님이 더 잘해보세요. 저희는 뒤에서 보조할테니

[팀] 빵치기소녀: 얼음전사로 보조한다고?ㅋㅋㅋㅋㅋ

[팀] 염소구더기: 평타빼고 원거리 스킬임. 그것도 몰랐음?

대답이 없는 걸 보아하니 정말 몰랐던 모양이다.

[팀] 빵치기소녀: ㅋㅋㅋㅋㅋㅋ얼마나 잘하나 보자

[팀] 염소구더기: 보던가 말던가

라면을 크게 한 입 넣으며 대충 대답해 줬다.

게임을 하면 별별 사람을 다양하게 만난다. 대부분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시비를 걸거나 욕하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예전에 거너 연습을 하면서 욕을 많이 먹어본 터라 이 정도는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아 빵치기소녀가 채팅을 여러 개 올리는 동안 라면을 먹었다.

불어도 맛있네.

빵치기소녀를 차단하자 그제야 시끄러웠던 채팅이 사라졌다. 내가 대답하지 않으면 혹시나 또 모타리에게 시비를 걸까 싶어서 그에게도 귓말을 하나 날려주었다.

[귓말] 염소구더기: 빵치기소녀 차단ㄱ

[귓말] 염소구더기: 설정에 들어가서 찾아보면 있어요

[귓말] 모타리: 감사합니다 천사님ㅠㅠ

천사? 웃긴 호칭이었지만 진심으로 감사하는 듯한 행동에 그저 작게 웃었다.

그래, 난 모르겠지만 저 사람한테는 고마울 수도 있지.

그러려니 하고 답장은 하지 않고 다시 게임에 집중하려는데 이제는 놀랄 때마다 귓말로 얘기를 해온다.

[귓말] 모타리: 으악ㅠㅠㅠ 뒤에서 칼 맞았어여

[귓말] 모타리: 적 궁수 너무 아픈데여?ㅠㅠㅠ 저만 아파요?

[귓말] 모타리: 형 위험하면 제가 바로 갈게요!

[귓말] 모타리: 아, 혹시 누님이세요?

[귓말] 염소구더기: 제발 집중 좀…….

[귓말] 모타리: 넹! ㅎㅎ

괜히 도와줬나. 물 정령의 뒤를 부지런히 따라오는 얼음 전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판에서는 계속 따라다닐 모양이다. 말투를 보니 아직 나이도 어린 모양인데 귀찮다고 대놓고 얘기하기에도 찝찝하고. 설마 초딩은 아니겠지?

찝찝한 생각을 거두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뭐, 어차피 이 판만 끝나면 볼 일 없으니까 내버려 두자.’

그 착각이 깨지는 것은 게임이 끝난 직후라는 것은 깨닫지도 못한 채.

추측하건대 모타리를 제외한 전원은 부캐 유저다. 그것은 적군을 포함한 말.

그래서 뉴비가 있는 아군이 금방 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잘 버티면서 시간이 오래 연장되고 있었다.

평균 게임 시간은 한 판당 약 25분 정도. 대부분 20분 안에 서로의 핵심 건물이 부서져 깨지거나 정말 학살당하듯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쪽이 기권을 눌러서 그 이전에 끝내기도 한다.

한국인들의 게임은 스피드 하다. 이기거나 지거나. 질질 끄는 것을 못 버티는 편이긴 한데 이 한 판이 벌써 30분째라니. 심심해서 잠깐 빵치기소녀의 차단을 풀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팀] 빵치기소녀: 힘들다

[팀] wksth: 저쪽 탱커가 둘에 힐러 하나라서 그런듯

[팀] wksth: 궁극기를 써도 죽지를 않아ㄷㄷ

전면전에 적군 탱커가 한 명 나서고 있어서 빵치기소녀가 뒤로 돌아 암살을 하려고 해도 그 뒤에도 탱커가 한 명 더 버티고 있었다.

물론 나머지 둘은 딜러 한 명, 어시 한 명이라서 죽이긴 쉽긴 하지만… 그 둘을 죽이고 저 세 명이 자꾸 남아버리니 돌아버릴 지경.

저쪽도 자꾸 딜러가 죽으니 버틸 수는 있지만, 우리를 죽이지는 못해서 어지간히도 답답할 것이다.

[팀] wksth: 그나마 딜러가 못해서 다행

[팀] wksth: 그러고 보니 님들 곧 35분인데

[팀] 빵치기소녀: 저 시간 보고 궁극기 살려둠ㅋㅋㅋ

시간?

복귀하기 전에, 게임 시간이 35분이 넘어가면 특별 이벤트가 진행됐었다.

게임 한 판이 35분이 넘어가면 딜레이 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운영자들이 개입해 놓은 시스템이 있다. 예전에 있던 길드의 마스터는 그것을 어시군이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랜덤으로 등장하는 캐릭터는 해치울 경우, 아군의 공격력 대폭 상승, 방어력 상승, 이동 속도 증가 등의 버프도 랜덤으로 부여된다.

마지막 한타에서는 꽤 요긴한 존재였기 때문에 중요하지. 하지만 굳이 그거 때문에 아까운 궁극기를 쓴다고?

[전체] 빵치기소녀: 얘들아 곧 35분이다

[전체] 박정식: 알거든ㅗ

[전체] 빵치기소녀: 정식이 말도 곱게 하네 ^^ 뉘집 아들인지 참

[전체] 박정식: 내가 싫어하는 놈 이름ㅋ 마음껏 욕해

[전체] 빵치기소녀: 또라이 아냐ㅋㅋㅋㅋㅋ

빵치기소녀가 전체 채팅으로 얘기를 하자 기다렸다는 듯 적군도 화답을 한다. 저들도 35분이라는 시간을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뭐지? 내가 복귀하기 전에 뭔가 바뀐 시스템이라도 있었던 건가? 하지만 차마 그걸 빵치기소녀에게 물어볼 정도의 뻔뻔함은 없어서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모타리에게 귓말이 도착했다.

[귓말] 모타리: 형, 저게 무슨 말이예요?

[귓말] 모타리: 35분에 전쟁이라도 해요? 0_0 ?!

[귓말] 염소구더기: 그건 모르겠고 무슨 시스템 생기는데 그거 잡으면 버프 줘요

[귓말] 모타리: 아하, 역시 형은 모르는 게 없네요!!

혹시나 했지만 역시 모타리한테 제대로 된 정보를 얻지는 못하는구나.

귓말로 오는 채팅을 보며 무시할까 하다가 손을 움직였다.

[귓말] 염소구더기: 그보다 형이라는 소리 좀 그만하면 안되나요

[귓말] 모타리: 헉 죄송해요 ㅠㅠㅠ혹시 누나였나요??

[귓말] 염소구더기: 그게 아니라 그냥 염소님이라고 불러주시던가 부르지 말아줬으면 해서요. 제가 그쪽보다 어릴 수도 있는 거고

[귓말] 모타리: 헐……. 저보다 어리면 완전 애긴데?

도대체 몇 살이길래?

나이라도 물어볼까 하다가 굳이 엮이고 싶지 않아서 무시했다.

어쨌든 나보다 나이가 많지는 않겠네. 많아봤자 동갑이거나 중, 고딩일 지도. 초딩이면… 모르겠다. 어차피 또 만날 놈도 아니고.

물 정령으로 치유 스킬을 사용하면서 보조하는데 뒤에서 무언가가 확 튀어나왔다. 적군의 탱커다. 아무래도 방어력이 낮고 치유 스킬도 있는 물 정령이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탱커라도 맞으면 아픈 건 당연한 사실. 커다란 덩치의 무투가 캐릭터가 물 정령을 향해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두른다.

“어떻게 한 놈도 돌아보는 놈이 없어?”

상대하고 있는 적군 탱커와 딜러들을 상대하느라 뒤에서 아군이 맞아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모양이다.

이대로 죽겠네. 차라리 탱커 한 명 붙잡고 있는 동안 적군들을 모두 해치우기를 바라며 포기하고 있는데 물 정령 뒤에서 무언가가 날아온다.

얼어버린 검이 냉기를 흩뿌리며 날아가는 저 모습은 누가 봐도 얼음 전사의 궁극기다.

상대가 탱커이다 보니 큰 위력은 없었지만, 움직임을 멈추는 것은 성공이었다. 움직이지 못하고 그대로 동상처럼 굳어버린 모습에 서둘러 키보드를 눌러 캐릭터를 움직였다.

살았다, 살았어!!

감출 수 없는 흥분에 콧김을 세게 뿜었다. 그도 그럴 것이 HP가 극소량으로 남은 상태로 살아났으니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탱커가 쫓아올까 봐 서둘러 아군의 핵심 건물로 부지런히 움직였다. 핵심 건물까지 쫓아오지는 않을 테고 나 역시 거기에 있으면 체력이 회복되니까 이대로 몸을 좀 숨겨야겠네.

한숨을 돌리며 핵심 건물 앞에 주저앉는 행동을 취하는 물 정령. 커다란 나뭇잎을 엉덩이에 깔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한숨을 내쉰다.

한숨이 나오냐? 나도 나온다. 그래도 그것이 안도의 한숨이었기에 예의상 모타리에게 고맙다고 귓말을 보내려고 하는데 누군가 핵심 건물로 들어섰다.

순간적으로 적군 탱커가 여기까지 따라왔나 싶어서 긴장하고 쳐다보는데 곧이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잘생긴 얼음 전사 캐릭터다.

[귓말] 모타리: 구더기님!! ㅠㅠㅠㅠㅠㅠㅠ

[귓말] 염소구더기: 여긴 왜 오셨어요?

[귓말] 모타리: 돌아가셨나 싶어서 걱정돼서ㅠㅠㅠ 괜찮으시죠? 저 돌아가시는 줄 알고 엄청 놀랐어요!

[귓말] 염소구더기: 아니 진짜 죽는 것도 아니고 다시 부활하는데;;

[귓말] 염소구더기: 가셔서 한타 하셔야죠

[귓말] 모타리: 게임보다 구더기님 안전이 중요하죠 ㅠㅠㅠ

“…또라이 아냐?”

저러다가 또 욕먹겠네.

진심으로 어이가 없어서 잠시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놓고 멍청히 있었다. 그러자 금방 갈 줄 알았던 얼음 전사도 옆으로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물 정령 자리 옆에 털썩 주저앉는 것이 아닌가.

[귓말] 염소구더기: 뭐 하세요

[귓말] 모타리: 놀란 가슴 진정시켜야 하는데 그때 누가 쳐들어오면 안되잖아요!

그렇구나……. 그런 깊은 뜻이 있었구나.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모타리는 애타게 헬프를 치는 빵치기소녀의 후환이 두렵지도 않은 걸까.

[팀] wksth: ㅅㅂ 머하냐고 소풍 왔냐고

[팀] wksth: 제발

[팀] wksth: 좀 와

[팀] wksth: 하나라도 좀! 내가 잘못했으니까

[팀] wksth: 라고 얘기하네요, 빵치기소녀님이. 답장 없는 거 보니 차단하셨죠? 둘 다

정확히는 차단했다가 나는 다시 풀었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 우리 둘이 빠졌으니까 5대 3으로 싸우고 있겠네. 체력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는데 가능하면 다 채우고 나가고 싶었지만 안 될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니까 얼음 전사가 서둘러 일어나서 내 앞으로 다가온다. 마치 내 앞길을 막는 것처럼 말이다.

오른쪽으로 비켜서 가려니 오른쪽을 막고 왼쪽으로 움직이니 왼쪽으로 따라오고.

‘뭐 하자는 거지?’

[귓말] 염소구더기: ?

[귓말] 모타리: 안가면 안돼요……? ㅜㅜ

[귓말] 염소구더기: 욕 먹으라고요?

[귓말] 모타리: 어차피 차단했잖아요. 아픈데 무리하는 모습 보기 싫어요…….

[귓말] 염소구더기: …제정신으로 하는 말씀이에요?

뭐지, 이 뉴비. 평범한 뉴비가 아니라 또라이였나. 드라마에 과몰입하는 사람은 봤어도 게임에 과몰입하는 사람은 처음인데.

차마 초면인 사람한테 미쳤냐고 물을 수는 없어서 무시하고 핵심 건물에서 나왔다. 그러자 우는 채팅을 하면서도 묵묵히 따라 나오는 얼음 전사.

저 새끼, 진짜 이상하네. 이 판을 마지막으로 절대 안 마주쳤으면 좋겠는데.

어쨌든 잘 버티고 있던 아군들은 다행히 우리들의 합류로 전멸은 면할 수 있었다. 잠시 서로 물러선 이들은 잠시 눈치를 살필 뿐 싸우지는 않았다. 왜지?

[전체] wksth: 시간 됨

아군의 전체 채팅에 게임 내에서 경고음이 사방으로 울린다. 35분이 되었다는 알림으로 동시에 버프 효과를 주는 시스템이 곧 등장한다는 알림이다.

그러자 아군과 적군들이 행동을 멈춘다. 때마침 우리가 있던 장소가 그 시스템이 등장하는 곳이다.

아군과 적군 중 한 명이라도 중앙 무대에 있어야 등장하는 시스템.

아이러니하게도 양쪽 팀 전원이 모여있었다.

다만 서로를 상대하기보다는 시스템을 노리는 모양인지 공격은 하지 않고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화려한 분수대가 바닥으로 가라앉고 그 위로 시스템이 떠오른다. 천사 날개를 가진 동상 모양이다.

아무래도 저 동상을 먼저 부수는 쪽이 강한 치유 버프를 가져가겠지.

이제 저 동상을 부수려고 하던 순간이었다.

아직 너희의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어!

적군 힐러가 갑자기 중앙 무대에 궁극기를 시전했다. 예고도 없이 행해진 행동에 눈을 크게 뜨고 당황했다.

궁극기 버튼을 잘못 눌렀나? 이 타이밍에 왜 궁극기를 쓰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사방에서 궁극기를 시전하는 소리들이 터져 나온다.

볼케이노!!

내 칼이 오늘도 붉게 물들겠군.

당신들이 살아나갈 구멍은 없어!

이 한 몸 바쳐 동료를 지키겠다.

너희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화려한 궁들이 나를 감싸네.

멍하니 게임 화면을 바라보니 덩달아 유난히 작아 보이는 물 정령도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는 모습이 보인다.

궁수의 궁극기로 하늘에서 화살이 쏟아지고, 마법사의 궁극기로 발밑은 용암이 흘러내리고 전사의 적 꿰뚫기 궁극기도 시전 중이었다.

적군에서는 전면전에 탱커 두 명을 세워놓고 힐러는 그들에게 궁극기를 시전해 둔 상태이며, 적군의 유일한 딜러 한 명과 어시 한 명도 질세라 궁극기를 펼치는데…….

‘궁 파티네, 궁 파티. 미친 아군들아, 이런 눈치 게임이 있었으면 진즉에 얘기를 해줬어야지.’

애초에 이들에게는 버프를 주는 시스템 따위는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조금이라도 방심한 적들이 한곳에 모여있는 순간을 노려 전멸을 시키려던 계획이었던 모양이니까.

[아군, 염소구더기 님이 사망하셨습니다.]

제법 눈치가 빠른 모타리는 아군들이 궁극기를 쓰자마자 본인도 거리를 벌려 원거리 스킬을 시전하고 있었다.

덕분에 적팀의 탱커 한 명은 꽁꽁 얼려진다.

[귓말] 모타리: 구더기님!! ㅠ0ㅠ

그 와중에도 내가 죽었다고 애처롭게 우는 꼴이라니.

‘가증스러운 놈.’

식고 퉁퉁 불어버린 라면을 꾸역꾸역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세상은 눈치 없는 자들에게 냉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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