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3. 거너 신고식 (4/21)

03. 거너 신고식

머리를 의자에 기댄 채 최대한 뒤로 젖혔다.

화면은 여전히 난장판으로 어지러웠고 나를 이어 모타리도 죽자 아군들도 하나씩 죽어가기 시작했다.

아군이 전부 죽자 곧바로 핵심 건물로 들이닥치는 적군들. 결말은 허무했다. 35분이 넘도록 시간을 질질 끌었던 것 치고는 순식간에 끝이 나버렸으니까.

“다했어? 이제 갈래?”

먼저 게임을 끝냈던 모양인지 기다리고 있던 임해서가 물어왔다.

나는 별로 하지 않았지만 임해서는 기다리는 동안도 계속했으니 제법 지겨울 만도 하다. 고개를 끄덕이고 게임을 끄려고 하는데 대기 화면에서 올라오는 채팅창.

[귓말] 모타리: 구더기님!

[귓말] 모타리: 친추해도 되나요? 이렇게 헤어지기 너무 아쉬워요 ㅠㅠ

얜 또 뭐야. 게임에서 아쉬울 게 또 뭐람.

나는 답장도 하지 않고 게임을 꺼버렸다.

* * *

토요일에 우리 집에서 지낸 임해서는 일요일도 자고 가려다가 술자리 약속이 생겼다며 미련 없이 가버렸다. 그래서 아무것도 할 일이 없던 나는 더 세이렌이나 하려고 게임을 켰다.

사촌 형이 준 노트북. 본인은 새로운 노트북을 샀다며 준 중고이긴 하지만 나름 쓸 만하니 괜찮았다.

“오늘은 레벨 30까지 올려서 거너나 연습해야겠네.”

그리고 임해서 입이나 떡 벌어지게 놀라게 해줘야지.

뿌듯한 상상을 하며 웃다가 곧 켜진 화면에서 깜빡이는 알림에 점점 표정을 굳혔다. 이벤트 알림 때나 사용하던 우편함이 가득 찼기 때문이다.

50통을 채울 수 있는 우편함이 꽉 찼다니…….

[우편] 모타리: 구더기님 ㅠㅠ언제 들어오세요?

[우편] 모타리: 바쁘셔서 갔나부다……. 제 쪽지 못 보신거죠? ㅜ0ㅜ

[우편] 모타리: 저 친추했는데 보시면 꼭 받아주세요!

[우편] 모타리: 저는 구더기님께 도움이 되려고 더 연습 중이에요!!

[우편] 모타리: 구더기님 없으니까 재미없고 욕하는 사람도 많네요 ㅠㅠ역시 구더기님처럼 착한 분은 없어요.

[우편] 모타리: 근데 진짜 몇 살이세요? 성별도 궁금한데ㅎㅎ 저는 남자입니다!

형이라고 부르는 거 보면 당연히 남자인 거 알지.

깊은 한숨이 터져 나온다. 이쯤 되면 단순 또라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소름 끼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친해졌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 아무리 착각해도 이렇게까지 보내지는 않을 텐데?’

연락하지 말라고 답장을 할까 말까 하다가 관뒀다. 이런 건 오히려 반응을 하면 더 좋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무시로 일관하는 게 답이다.

어차피 나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니까 쪽지를 보내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은 없겠지. 그러다 보면 지쳐서 이 짓도 금방 그만둘 것이다.

나보다 더 친절하고 반응 잘해주는 유저한테 넘어가면 제일 베스트고.

[개나소나 님의 친구 추가 요청이 있습니다.]

“…하?”

이건 또 뭐야.

모타리로 잘못 봤나 싶었지만 친구 추가 요청은 두 개였다. 그것도 한 명은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한 인물.

뭐지? 신종 괴롭힘인가? 아니면 내가 들어오는 걸 확인했다가 계속 시비 걸려고? 요즘 더 세이렌 물이 많이 더러워졌네.

어쩐지 게임을 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져서 우편함을 다 비워냈다.

친구 요청이 온 것도 정성스레 거절 버튼을 두 번 눌러주고 노트북을 덮었다.

게임을 하기도 전에 멘탈이 지쳤어. 월요일은 9시 강의니까 오늘 하루 종일 잠이나 자고 가자.

사촌 형이 잠 귀신이 붙었냐고 할 정도로 평소 잠이 많은 나는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얼마나 푹 잤냐면, 다음 날 임해서가 전화해서 깨우기 전까지는 날이 밝은 것도 몰랐을 정도였다.

“…여보세요.”

―잠긴 목소리가 섹시한 친구님 안 오세요? 오늘 조별로 하는 수업인 거 알지?

잔뜩 잠긴 목소리로 대답하니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주변에서는 왜 안 오냐고 불평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멍청하게 듣고 있다가 휴대폰을 떼고 시간을 확인했다.

9시 5분.

…망했네.

―이 교수 조별 인원들 전원 출석하는지도 지켜보는 거 알지?

―야, 임해서. 나 바꿔.

―잠깐, 미친놈아. 진정하고……!

―야.

목소리가 바뀌었네. 그러고 보니 조원은 사교성이 좋은 임해서가 알아서 짜놓은 거라 아직 누가 있는지도 제대로 모른다.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일 텐데 첫 수업부터 늦었으니 첫인상이 바닥이겠군.

임해서의 휴대폰을 뺏은 놈은 아마 같은 강의를 듣는 놈이고 같은 조로 구성된 사람이겠지. 플러스로 나한테 엄청 빡친 상태고.

―손지언이 너지? 씻을 생각 말고 당장 뛰어와.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 끼치지 말고.

“알겠어.”

그나마 다행인 건 자취방이 학교와 가까워서 다행이라는 점.

책상 위에 있던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서둘러 잠옷으로 입던 후줄근한 티셔츠를 벗고 옷을 갈아입었다.

1, 2교시가 같은 강의이니 그 수업 끝나고 자취방에 와서 다시 씻든가 해야겠네.

한숨을 내쉬며 청바지를 입는데 아직도 끊기지 않은 전화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온다.

―시간 흘러간다. 빨리 빨리해.

“알아서 할 테니까 일단 끊어줄래?”

―재촉을 해야 빨리 올 거 아니야. 다행히 교수님은 볼일 있어서 5분 정도 늦는다고 했으니까 빨리 튀어와.

“솔직하게 5분 안에는 무리일 것 같은데 노력해 볼게.”

신발을 신고 서둘러 집에서 나왔다.

나오고 나서야 가방이나 필기구를 전혀 챙기지 않은 것이 떠올랐지만 가서 임해서한테 빌리면 되겠지. 일단 머릿수만 채우자.

서둘러 뛰어가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학교가 멀게 느껴졌다. 숨을 헐떡이며 뛰는데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에서는 계속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물론 스피커폰을 해놓지 않아서 제대로 들리지는 않지만.

통화를 끊을 정신도 없어서 핸드폰을 쥔 채 계속 뛰어가는데 바닥을 내려다보니 신발도 짝짝이로 신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신이 없긴 하네. 그나마 둘 다 검은색이라 다행이다.’

이래서 조별 과제가 싫은데! 하필이면 출석률도 조별 점수에 포함시켜서 이렇게 개고생을 하고 있는 건지.

“손지언! 야, 너 진짜 빠르다. 날아왔어?”

“교, 교수… 교수님은?”

강의실 문을 열자마자 임해서가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숨을 몰아 내쉬며 교수님에 대해 물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듯 어깨를 토닥인다.

“아직 안 오셨어. 그래도 금방 올 것 같으니까 자리에 앉는 게 좋을 듯. 너 숨넘어가겠다.”

“오랜만에 이렇게 뛰어보는 것 같아.”

“그러게, 누가 늦잠 자래?”

임해서랑 대화를 나누는데 뾰족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리에 앉고 고개를 들어 올리니 모자챙 밑으로 팔짱을 끼고 있는 낯선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고개를 더 들어 올리니 보이는 것은 못마땅하다는 듯 구겨져 있는 새침한 인상.

마른 체구에 예쁘장한 외모가 모델 같은 포스를 풍기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머리는 핑크.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 피부가 하얘서 그런가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임해서가 옆에서 소곤거리며 귓속말을 해온다.

“황보욱이라고 같은 조원. 아까 내 휴대폰 뺏은 놈.”

“너랑 친구야?”

“친구의 친군데. 소개해 준 친구는 다른 강의실에 있음.”

그럼 별로 친한 건 아니라는 거네.

삐딱한 저 말투는 듣기 싫었지만 그래도 잘못한 건 인정하므로 순순히 사과했다.

“미안, 보욱아. 내가 오늘 알람 소리를 제대로 못 듣고 자느라…….”

“지언아, 보욱이가 아니라 욱이.”

“아까 황보욱이라며.”

“그니까 성이 황보.”

그럼 진즉에 그렇게 얘기해 줄 것이지.

거지 같은 임해서의 어시 스킬에 한숨을 내쉬는데 그럴수록 맞은 편의 핑크 머리도 기분이 안 좋은지 인상을 찡그린다.

앞으로 같은 조별 과제 하는 동안 쟤랑 친해지긴 글렀네. 본능적으로 그렇게 직감하고 다시 한번 사과했다.

“욱아, 미안해. 다음부터 조별 수업 때는 안 늦을게.”

“앞으로 남한테 피해 끼치지 마. 그리고 징그러우니까 이름도 그렇게 부르지 마. 그냥 황보욱이라고 불러.”

…내가 잘못한 건 맞지만 이 새끼가 계속 사람을 긁네? 사과도 했는데. 물론 사과를 받아줘야 할 이유는 없지만, 교수님 오시기 전에 도착했는데 뭐가 저렇게 삐딱선이야?

나는 임해서가 질겁할 정도로 해맑게 웃었다. 아마 모자 때문에 황보욱 입장에서는 입만 보이겠지만 내가 얼마나 보란 듯이 웃고 있는지는 잘 보이겠지.

“그래, 우기야.”

“…황보욱이라고 부르라고.”

“알겠어, 우기우기야.”

“미친. 야 너 일부러 나 엿 먹이려고 그러는 거지?”

“응. 티 나라고 한 거니까 당연히 눈치채야겠지?”

“또라이 아니야, 이거.”

“칭찬 고마워, 우기우기.”

“…….”

황보욱이 입을 꾹 다문다. 그러고는 의자를 옆으로 옮겨 멀리 떨어진다. 어이없다는 그 눈빛 속에는 황당함과 경멸이 담겨있었다.

뭐, 어쩌라고.

옆에서 임해서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수업 시간 내내 꽃받침으로 턱을 받치며 핑크 머리만 바라보았다. 진하지도 않고 연한 머리 색이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얄밉기만 했던 얼굴도 옆모습으로 보니 괜찮은 것도 같다. 임해서처럼 턱이 두 개도 아니고 임해서처럼 코가 낮지도 않고.

“야… 손지언. 그만 봐. 황보욱 완전 얼굴 하얗게 질렸어.”

“설마. 우리 우기는 공부에 너무 집중하느라 전혀 모를 텐데, 뭘.”

“…무서운 놈.”

임해서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교수님이 시선을 줄 때면 자연스레 앞으로 고개를 돌렸고 틈날 때마다 황보욱에게 다시 시선을 주니 그가 무섭게 노려본다.

그러더니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고 무언가를 열심히 쓰는 게 아닌가. 뭔가 싶어서 쳐다보니 이내 종이 모서리 끝을 찢어서 곱게 접어 내게 던진다.

뭐지. 행운의 편지인가?

[좋은 말 할 때 그만해라.]

행운의 편지는 아니고 협박 편지군. 그보다 글씨 한번 더럽게 못 쓰네.

어쩔까. 이제 슬슬 꽃받침도 힘들어서 그만두려고 했는데 이렇게 나오니 관두기가 싫어지는데? 게다가 본인도 이제 관둘 걸 직감했는지 긴장했던 어깨가 편하게 내려왔고.

‘나도 몰랐는데 괴롭히는 걸 좋아하는 쪽이었나.’

미소를 씨익 지었다. 모자 밑으로 보이는 웃는 입 모양새에 긴장을 풀었던 황보욱이 흠칫 떨며 사색이 되는 모습이 보인다.

저 모습에 최근에 개나소나랑 모타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게 조금 풀리는 것 같기도 하고.

[우리 우기가 원한다면. ^^]

“X발…….”

“방금 누가 욕했어?”

쪽지를 쥔 황보욱의 손에 힘줄이 튀어나온다. 귓속말로 ‘오빠, 야성미 쩐다.’라고 얘기할까 하다가 교수님의 지적에 관뒀다. 그러게, 누가 신성한 강의 시간에 욕을 하는지.

“지언아, 그만해. 너 그러다 뒤에서 돌 맞아.”

“성깔은 있어 보이지만, 그렇게 위험해 보이지는 않는데.”

“그렇긴 할 것 같은데……. 그래도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려. 방금 내 친구한테 물어보니까 물 수도 있으니까 적당히 괴롭히래.”

강의가 끝나고 황보욱이 교수님에게 불려 나간 사이에 임해서가 적당히 하라며 충고했다. 황보욱을 소개해 줬다던 친구랑 연락이라도 한 모양이다.

“물기만 하면 다행이네.”

“너도 네가 얼마나 얄미웠는지 알기는 하는구나?”

어깨를 가볍게 으쓱해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냐고 눈짓으로 묻는 임해서의 모습에 머리를 가리켰다.

“감으러. 어차피 오늘은 이게 끝이었어.”

“좋겠다. 난 다음 강의 또 있는데. 나 강의 끝나고 피방 갈래?”

“그래. 끝나면 전화해.”

가방도 없이 가볍게 휴대폰만 손에 쥐고 강의실 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 앞에 버티듯 서있는 커다란 덩치에 나가지도 못하고 멀뚱히 있게 되었다.

뭐지? 한참을 기다려도 비키지 않는 상대방에 인상을 찌푸리며 슬쩍 몸을 비켰다. 지나가라는 의미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뭔가 이상해서 고개를 들어 올렸는데, 곧바로 후회가 밀려들어 왔다.

“간호과였구나.”

“…여기 무슨 볼일로 오셨어요?“

연한 핑크 머리의 소유자였던 황보욱이랑은 달리 새까만 머리칼. 그와 더불어 까만 눈동자가 나를 정확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문정하. 사촌 형의 친구. 바퀴벌레 못 잡는 사람. 그리고 귀찮을 것 같은 사람.

“모르겠는데 별로 알고 싶지는 않네요. 그럼 수고하세요.”

“일부러 너 보려고 찾아왔는데 너무 매정한 거 아니야?”

“작업은 여성분한테 거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작업이 아니라 내가 미안한 것도 있고, 직접 사과해야 할 것 같아서 찾아다닌 거야. 손지우가 번호는 가르쳐 주지 않더라고.”

“그게 정상인데요.”

그렇긴 하지.

문정하는 할 말이 없는 듯 목을 매만지며 어색하게 웃었다.

차갑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조금 멍충미가 있는 선배구나. 그래도 사과를 하러 찾아왔다고 하니 매몰차게 보내기도 그렇고, 이대로 계속 강의실 앞에서 얘기하기도 애매했다.

뒤통수가 따끔거리는 걸 보아하니 강의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쳐다보는 모양이다. 주목받는 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라서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기니 문정하가 긴 다리로 바로 따라잡아 내 옆에서 걷는다.

“그때는 바로 깨워주지 못해서 미안해.”

“됐어요. 이미 지나간 일이고 지우 형한테 얘기는 대충 들었어요.”

“그래도 5분 뒤에 깨워 달라고 했는데 내가 민폐를 끼쳤으니까.”

“괜찮아요.”

그보다 언제까지 따라올 생각이지? 조금 더 속도를 내며 빠르게 걷는데도 불구하고 다리가 길어서 그런지 별달리 힘든 내색도 없이 웃으며 내 옆을 걷는다.

“용서해 줘서 고마워.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네가 화가 많이 났으면 어쩌나 걱정했거든.”

“화가 나진 않았지만 별로 친하게 지낼 마음은 없는데요.”

“왜? 역시 화가 아직도 안 풀린 거야?”

“제가 선배님이랑 친하게 지내야 할 이유가 있나요?”

같은 과도 아니라 부딪힐 일도 딱히 없는데?

진심으로 의아해서 걸음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혹시나 싶어서 덧붙였다.

“저 지우 형이랑 그렇게 안 친해요. 그러니까 굳이 저랑 친해질 필요 없어요.”

“손지우랑 사촌이라서 친해지고 싶다는 게 아니라 내가 호감이 생겨서 그래. 인간적인 호감. 친해지고 싶어서!”

“굉장히 적극적이고 부담스럽네요.”

“…너 손지우랑 사촌은 맞구나. 엄청 직설적이네.”

문정하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렇게 대놓고 거부를 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하지만 친하게 지내자는 제안에 무조건 동의하고 어울릴 필요는 없잖아?

지우 형은 호감이 있는 상대에게 잘해주는 스타일이라서 친해지면 나쁠 건 없다고 하긴 했지만, 굳이 그런 사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단 내가 피곤할 것 같은 스타일이야.

“혹시 내가 불편해?”

눈치는 빠르네.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러자 조금 놀란 듯도 하고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이 되었다.

커다란 덩치랑은 어울리지 않는 표정인데 의외로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잠깐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자 문정하도 고개를 삐딱하게 꺾으며 울상을 지은 채 마주 본다.

“네. 진짜 불편해요.”

“…우리 지언이는 거짓말을 못 하는구나. 그것도 매력 있지만.”

“거짓말을 할 생각이 없는 거예요.”

“그렇구나, 솔직한 것도 매력 있다.”

문정하는 그렇게 조용히 중얼거리며 뒷머리를 긁적인다. 그리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길래 이제 가나보다 싶어서 돌아서려는데 문정하가 미소를 지었다.

“네가 싫어하면 찾아오지 않을게. 불편하게 해서 미안해.”

“…괜찮아요.”

생각보다 말귀가 통하는 사람이었나?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는 없어서 삐딱하게 바라보던 시선을 고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말귀가 통하는 사람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무례하게 굴 생각도 없고. 지우 형이 눈앞의 사람에 대해 좀 오버해서 얘기한 모양이다. 내가 오해했었나 보네.

“맛있는 건 못 먹었지만 만 원으로 피시방비는 해결했어요.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만 원?”

무슨 소리인가 인상을 찌푸리던 문정하가 이내 상황을 대충 이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짧은 탄성과 함께 미간을 더 찌푸리는 것을 보면.

그래, 지우 형이랑 친구면 그가 어떤 성격인지도 알겠지.

“그래. 그럼 다음에는 남은 금액만큼 맛있는 밥 사 줄게. 다음에 봐.”

“네? 아뇨,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

대답도 안 듣고 그냥 가버리네. 발걸음이 빠른 걸 보니 일부러 말이 다 끝나기 전에 간 걸지도.

뭘까, 우편함에 가득하던 모타리의 쪽지에 이어 막타로 세게 골 때리게 한 개나소나의 친구 추가 요청. 그 상황이랑 느낌이 비슷한 것 같은데. 단순한 기분 탓이겠거니 생각하며 자취방으로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간지럽던 머리를 감고 샤워도 끝마쳤다.

“살겠네.”

켜둔 에어컨 앞에 가서 서니 지상낙원이 따로 없다.

맨살에 닿는 시원한 바람을 기분 좋게 느끼며 침대 위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임해서에게 온 메시지에 강의가 끝나서 피시방에 가자고 연락한 건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전혀 다른 내용이다.

[야야, 손지언. 큰일남.]

[황보욱 겁나 빡침. 돌아오자마자 너 어딨냐고 완전 난리던데. 네 번호 가르쳐달라 하고.]

여기나 저기나 왜 이렇게 내 휴대폰 번호에 관심들이 많은 건지.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답장을 보내니 금세 연락이 온다.

[당연히 가르쳐줬지. 난 엮이기 싫다.]

“못생긴 너굴이 자식.”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너무나도 당당한 발언에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보자마자 전화가 걸려온다. 모르는 전화번호. 빤히 쳐다보다가 손가락으로 가볍게 화면을 터치했다.

[지금은 회의 중이니 전화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정중한 전화 거절 멘트.

그래도 정중하게 거절한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하며 휴대폰을 침대 구석으로 던져버렸다.

* * *

“넌 뒷감당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피시방에 먼저 와있던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임해서가 내뱉은 말이었다. 무슨 뜻이냐는 의미로 쳐다보니 한숨을 푹 내쉰다.

“황보욱이 너 전화 안 받는다고 집 주소 불러달라고 해서 식겁해서 도망쳤잖아.”

“집 주소까지 알려줬으면 내가 널 가만 안 뒀을 듯.”

“나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거든. 어쨌든 단단히 벼르고 있는 것 같은데. 다음 주에도 볼 텐데 너무 신경 긁은 거 아니야? 물론 걔도 필요 이상으로 네 신경을 건드리긴 했지만.”

“몰라. 이미 지나간 거 후회해서 뭐 해. 그리고 반응이 재밌잖아.”

“그건 그래. 나도 걔가 그런 성격인 줄 몰랐음.”

배가 고프다며 오자마자 게임보다는 식사류를 보는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 레벨 얼마 정도 올려야 너랑 같이 할 수 있지?”

“지금이라도 가능은 하지 싶은데 그럼 네가 힘들걸. 내 수준에 맞는 레벨들이랑 붙게 될 테니깐. 당분간은 캐릭터 연습 좀 해봐. 물 정령사만 쓸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레어 코스튬이 좀 아깝긴 하지만.”

“한 방이 부족한 캐릭터니까 솔직히 좀 심심하잖아.”

고개를 끄덕였다. 한 방. 꼭 딜을 넣지 않더라도 아군을 지켜줄 수 있는 단단한 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뛰어난 치유 스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크게 주목받지도 못하는 캐릭터.

물론 평타만 잘 넣으면 욕은 먹지는 않겠지만… 심심하긴 하지.

“오늘이면 레벨 30 찍을 것 같은데, 다른 캐릭터도 할 수 있는 거 알지?”

“응. 거너랑 힐러랑 도적이었나. 뭐 새로 나온 거 있어?”

“어시 캐릭터 한 명 더 생겼는데 그건 무시해. 쓰레기임.”

“오케이. 속성은 레벨 150으로 올려야 선택할 수 있다고 했으니까 부지런히 해야겠네.”

“엉. 속성빨 무시 못 함. 속성별로 강화되는 것들이 있어서 좋거든.”

거너는 어떤 속성이 있으려나. 그런데 걔는 어차피 속성이 틀려도 결국 저격하는 건 똑같지 않나?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아직 멀었으니까 레벨이나 올리자고 생각하며 게임을 시작했다.

일요일에 비워서 깨끗해진 우편함은 마음에 들었다.

이대로 개나소나랑 모타리는 안 마주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익숙하게 물 정령사를 클릭했다. 지금이 레벨 6이니깐… 몇 시간 안에 30은 되겠네. 초반 레벨은 잘 오르니깐.

소녀의 어항 속으로 초대할게요.

그래도 이제는 제법 물 정령사의 궁극기로 어시도 제법 하는 편이다. 원래 거너 제외하고는 똥손이라서 민폐만 끼쳤었는데 나름 어시에도 소질 있을지도?

[팀] 가재깡: 물 정령 궁 잘쓰네

[팀] 염소구더기: ㄱㅅㄱㅅ

게다가 심심찮게 칭찬도 들려와서 입꼬리가 씰룩거리며 올라갔다.

유저들은 빈말로라도 칭찬은 하지 않는다. 그러니 정말로 딜러가 잘해서 적군들을 썰며 다니거나 힐러가 죽기 직전 아군들을 살려낼 때 보통 칭찬을 많이 받는다.

내가 받는 칭찬의 경우는 적군들의 발을 묶어 아군들이 딜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그 이외에도 평타로 시력을 잃게 만들면 기다렸다는 듯 아군들이 썰어버리니 그들 입장에서는 편하게 죽일 수 있어서 좋을 것이다.

킬 수가 무슨 혜택을 주는 건 아니지만 킬을 많이 할수록 성취감을 느끼는 건 사실이니깐.

[팀] 가재깡: 레벨도 낮은데. 부캐?

[팀] 염소구더기: ㅇㅇ +복귀

[팀] 가재깡: ㅋㅋ원래 주캐는 뭐임?

어, 이걸 말해도 되나. 잠깐 망설이다가 이내 상관없겠지, 싶어서 채팅을 쳤다. 벌써 내 레벨은 29. 아마 이 판을 마지막으로 레벨 30이 될 것이다.

[팀] 염소구더기: 거너

[팀] 가재깡: 오오

[팀] 가재깡: 거너 겁나 어려운데 렙 몇이었는데?

[팀] 염소구더기: 260

[팀] 가재깡: 그럼 진짜 잘했겠네;; 레벨 보니 담판부터 거너 가능할 것 같은데

[팀] 가재깡: 파티하실?

[팀] 염소구더기: ㄴㄴ 복귀라 연습해야 함

[팀] 가재깡: 그래도 몸이 기억하겠지

아군의 거너가 잘하면 확실히 그 팀의 승리율은 올라간다.

사각지대에서 암살도 할 수 있고 한타가 이뤄질 때 거너는 뒤에서 몇 번만 저격해 줘도 공격력이 높아서 수월해지니깐.

하지만 그건 잘하는 사람들 얘기고.

한때 거너 랭커였다는 소리를 안 한 것을 다행이라고 여기며 한 번 더 거절했다.

[팀] 가재깡: 아쉽ㅠ 그럼 적으로는 만나지 말자

[팀] 염소구더기: 그 정도는 아님;;

게임이 끝났다. 나와 가재깡의 예상대로 레벨이 30으로 오르며 새로운 캐릭터를 더 고를 수 있다는 문구가 떴다. 그리고 그 위로 보이는 네 가지 캐릭터.

[거너 / 힐러 / 도적 / 비행사]

‘비행사가 임해서가 말한 쓰레기 캐릭터인가.’

특수 직업일 것 같기는 한데 크게 끌리는 캐릭터는 아니었다.

직업 위로는 캐릭터들의 이미지가 멋있는 일러스트로 표현되어 있었다. 힐러는 성스러운 사제복을 입은 여성 캐릭터로, 도적은 날래 보이는 움직임을 보여주는 일러스트였다. 거너는 저격을 하는 모습으로 유저를 겨냥하듯 바라보고 있는 모습.

똑같다. 기억 속의 모습이랑 똑같아서 조금 안심이 되었다. 눈을 가리는 앞머리 사이에서 섬뜩한 붉은 눈동자가 빛나고 코까지 가린 검은 목티는 캐릭터를 음침하게 보이게 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분위기가 멋있다면 말 다 했지.

“임해서, 너 혹시 거너 아이템 있어?”

“거너? 너 거너 하려고? 그거 엄청 어려울 텐데?”

“연습이야. 있어?”

“잠깐만.”

화면을 바라보던 임해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도 거너는 안 키워서 좋은 건 없는데 그래도 레어템은 있음. 이거라도 줄까?”

“엉. 나 하나도 없어.”

“닉네임 뭔데?”

“염소구더기.”

“구더기가 뭐냐, 구더기가…….”

“귀엽잖아.”

임해서가 어이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화면을 보며 마우스를 클릭하면서 중얼거린다.

“황보욱을 귀여워하는 취향이 있을 때부터 심상치 않다고 생각은 했지만.”

“내가 예전에 염소똥이라고 욕먹었거든. 염소똥에 염소구더기, 염소돼지야 라고 하는데 귀엽지 않아?”

과거 거너가 익숙해지기 전에 궁극기로 엉뚱한 곳만 맞히던 내게 욕하던 길드 마스터를 떠올렸다.

그때는 같은 길드가 될 줄도 몰랐는데 나보고 레벨은 높으면서 왜 거너로 스파이짓 하냐고 뭐라고 했었지. 욕하는 것도 신박해서 기억에 남았는데 설마 나중에 거너 랭커가 되어서 같은 길드에서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고.

‘그 형은 세이렌 복귀했으려나.’

그래도 유일하게 스스럼없이 친하게 지냈던 형이라서 다시 보고 싶기도 한데 아쉽다.

그 형도 수능 준비한다고 접속률이 뜸했었으니까 지금은 복귀했을 수도 있겠네. 나보다 1년 먼저 수능 준비를 했으니까 내가 계정 삭제한 뒤에 복귀했으려나.

우편함 쪽지라도 보내볼까 고민하는데 임해서가 말했다.

“야, 보냈어. 우편함 확인해 봐.”

“땡큐.”

제일 좋은 아이템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기 때문에 임해서가 보낸 쪽지를 확인했다.

거너 초보 패키지. 이벤트 할 때 받은 모양이다. 정말 기본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패키지 구성품을 보고 한숨을 내쉬며 착용했다.

‘본캐는 개고생해서 무과금으로 다 유니크템을 맞춰놨었는데……!’

아직도 망설임 없이 계정을 삭제하던 지우 형만 떠올리면 이가 갈린다.

본인은 게임을 하지를 않아서 그게 얼마나 끔찍한 짓인지 모르겠지. 이렇게 욕해 봤자 삭제된 계정이 돌아오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포기하고 게임을 다시 시작했다.

이번에는 여유가 있으면 현질도 좀 해서 코스튬도 그럴듯하게 맞출 생각을 하며 생각보다 빨리 매칭된 화면에 집중하던 순간이었다.

[전체] 가재깡: 염소님 ㅎㅇ

망했다. 하필 전 판 아군이었던 가재깡을 적군으로 만나게 될 줄이야. 심지어 주캐가 거너였다고 말했던 인물이었다.

[전체] 가재깡: ㄷㄷㄷ역시 거너 선택했네

[전체] 홍메리: 잘함?

아냐, 제발 그러지 마. 나는 서둘러 전체 채팅을 쳤다.

[전체] 염소구더기: ㄴㄴㄴ 연습임.

[전체] 가재깡: 복귀 유저인데 과거 주캐 거너였데ㅋ

쾅, 하고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치는 모습에 임해서가 호들갑스럽게 놀라며 왜 그러냐고 묻는다.

벌써 거너로 욕먹어서 그런 거냐고, 그러게,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냐고 호들갑을 떠는데 그 입을 막고 싶었다.

“망했어.”

“그러게, 거너는 연습캐로 안 좋다니깐? 욕 제일 많이 먹는 캐릭터 1순위야.”

[전체] 홍메리: ㅇㅎ그럼 연습이어도 기대해도 되겠네

[전체] 염소구더기: ㄴㄴㄴ스파이임. 기대 ㄴㄴ

[전체] 홍메리: ㅋㅋㅋㅋㅋ

아군인 홍메리가 농담을 들은 것처럼 가볍게 웃는다. 농담이 아니라고 진지하게 다시 얘기하고 싶었지만 이미 대기 시간은 지나고 게임은 시작해 버렸다.

정신 차리자.

황급히 허리를 펴고 키보드와 마우스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부캐로 첫 거너 데뷔전이다. 심지어 적군도 과거 거너 주캐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견제가 심하게 들어올지도 몰랐다.

공격력은 사기적일 정도로 강한―물론 맞힌다는 전제하에―캐릭터지만 그에 비례하듯 체력은 엄청난 쓰레기다. 어지간한 딜러가 몇 번만 공격해도 죽는 종이 몸.

심지어 저격을 들고 있을 때는 뒤에서 누가 다가와도 모르니, 이렇게 견제를 받게 되면 움직이기 엄청 힘들어진다.

‘제발 똥만 싸지 말자.’

마우스를 쥔 손이 긴장감으로 축축해지고 있었다.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

‘확실히 레어템이라 공격력도 그렇고 공격 속도도 느려.’

하지만 나는 좀 탓해야겠다. 장인이 아니니깐.

울상을 지으며 적군의 건물을 부수기 위해 달려갔다. 물 정령과 달리 키가 큰 거너 캐릭터가 시원시원하게 달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모든 것이 검은색으로 무장되어 있는 캐릭터에게 유일하게 색이 있는 곳은 두 가지다. 적을 노리는 섬뜩한 적안과 금빛과 검은빛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무기.

검은 장갑을 낀 채 붉은 눈동자를 마주친 적들은 가끔 소스라치게 놀랄 때도 있었다.

아군의 조합은 탱커 두 명과 어시 두 명, 그리고 원거리 딜러 한 명.

하필 그 원거리 딜러가 거너 캐릭터인 나다.

‘얘들아, 조합 좀 보고 선택을 했어야지……!’

물론 랭킹전도 아니니까 연습을 하려는 애들도 있고, 나도 실제로 연습이기는 하지만! 이 부담감 어쩔 거야.

딜러가 없다 보니 건물을 부수는 속도가 현저히 느렸다. 그사이에 적군들은 아군의 건물을 부수는 것에 성공한 모양인지 알림 메시지가 뜬다.

[아군의 건물이 파괴되었습니다.]

[아군의 방어력이 감소합니다.]

‘망했네. 이 상태에서 제대로 궁극기 맞으면 한 방이다.’

적군은 분명히 아직 건물을 부수지 못한 우리를 견제하기 위해 이쪽으로 달려올 터였다. 탱커 한 명이 그걸 계산하고 적군이 올 만한 방향에서 대기를 타고 기다리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우리 팀 힐러와 물 정령사를 선택한 유저도 긴장한 채 대기를 하는 모습에 순간적으로 욱해서 한마디 하려다가 말았다.

탱커가 시간 끌 때까지 건물은 그래도 좀 부숴야지!!

초반에 건물을 부수지 못하면 앞으로의 한타가 힘들어진다. 우리는 방어력이 감소됐는데 적들은 아니라면? 심지어 제대로 딜을 넣을 캐릭터도 나뿐이다.

적팀의 조합은 전사, 비행사, 도적, 물 정령사, 힐러. 다행히 탱커는 없다. 그렇다면 궁극기만 제대로 맞으면 킬을 따기는 쉬울 터.

이론적으로는 말이다.

[팀] 홍메리: 옴

대기를 하던 탱커, 홍메리가 궁극기를 시전했다.

이 한 몸 바쳐 동료를 지키겠다.

탱커의 온몸이 불에 달궈진 쇳덩이로 변했다. 방어력을 중심으로 한 궁극기였는데 달궈진 쇳덩이로 변한 몸 때문에 근접 딜러들은 닿으면 일정량의 화상 대미지를 받게 된다.

홍메리가 중앙 무대 방향으로 뛰쳐나가자 예상대로 이쪽으로 향해 오던 적군 네 명이 시야에 보였다.

갑작스러운 홍메리의 등장에 적군들도 당황한 모양인지 시선이 홍메리에게 쏠렸다. 그 틈에 사각지대에 위치한 물 정령사가 지속적으로 평타를 날렸다.

힐러는 홍메리에게 집중적으로 치유 스킬을 사용하고 있었고, 나는 뒤로 빠져 스킬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거너의 궁극기 스킬은 저격. 심플하고도 강력한 기술이다.

그 이외의 스킬은 두 가지. 저격 시 시야 거리를 더 멀리 볼 수 있도록 센서를 장착하는 스킬과 근접으로 누군가 다가왔을 때 회피기술로 던지는 연막탄.

스킬로 적을 죽이기는 힘들다.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버려라.

궁극기 사용 가능 횟수는 다섯 번.

스킬로 센서를 장착하니 거너의 눈 위로 연녹색의 홀로그램이 비친다. 처음 봤을 때는 손X공에 나오는 베X터가 착용하는 게 연상되어 구리다고 생각했었지만 궁극기 사용 시에는 필참이지.

저 멀리서 싸우고 있는 풍경들이 마치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잘 보인다.

적군 네 명이 홍메리에게 집중적으로 공격을 퍼붓고, 홍메리는 열심히 잘 버티고 있었다.

‘우선 힐러.’

딜러를 죽여도 힐러가 회복시킨다면 궁극기만 낭비하게 된다.

딜러의 조금 뒤에서 치유 스킬을 사용하고 있는 적군 힐러의 머리를 겨냥했다. 몸을 맞혀도 되지만 머리를 맞힐 수 있다면 머리를 맞히는 게 제일 좋다.

1Kill.

화면 위에 뜨는 붉은 글씨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헤드샷 한 방에 힐러가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전체] 힐러만할꺼여: 아놔; 거너 있는거 깜빡했네ㅎ

몸을 맞히는 것보다 머리를 제대로 맞힌다면 더 큰 대미지가 들어가니까.

방어력 아이템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모양인지 힐러가 전체 채팅으로 투덜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힐러가 죽자 홍메리를 공격하던 적군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거너가 있다는 것을 그제야 제대로 인식한 모양이다.

하긴 초반 레벨대에는 거너를 만날 일이 거의 없을 테니까.

‘한 놈만 더 죽여야지.’

힐러 다음으로 체력이 낮은 캐릭터는 물 정령사와 도적이다. 물 정령사는 있어도 크게 위협은 되지 않으니 도적을 먼저 죽이려고 둘러보는데… 보이지 않는다?

가만, 그러고 보니 처음에 홍메리에게 다가갔던 적군도 네 명이었던 것 같은데?

뒤는 항상 조심해야지.

아뿔싸. 저격을 하는 동안에는 주변 풍경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뒤로 적군이 다가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황급히 궁극기를 거두어들였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도적의 궁극기에 이미 걸렸다. 영원한이등병 때 보았던 궁극기와 흡사하다.

다만 암속성은 아니라서 주변을 덮치는 검은 그림자는 없었고 허공에서 빠르게 거너를 노리며 달려드는 도적의 모습이 보인다.

날카로운 단검을 이용하며 눈으로 좇기도 힘들 만큼의 빠른 속도로 공격하는 모습.

당연히 방어 기술도 없고 방어력도 낮은 거너가 버티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체력에 서둘러 연막탄 스킬을 써보려고 했지만 쓸 틈을 주지 않는다.

이대로 죽는 건가. 한 명이라도 따고 죽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닐지.

하지만 바로 그때 거너의 앞으로 커다란 덩치가 모습을 드러낸다. 무투가다. 적군 건물을 마지막까지 부수려 했던 탱커. 그 탱커가 아직까지 근방에 있었던 모양이다.

너희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리고 즉시 시전되는 무투가의 궁극기. 단단하고 커다란 몸이 풍선에 바람을 불어 넣은 것처럼 점점 더 커지기 시작한다.

무투가의 종류는 두 가지다. 방어력 중심의 아시안 캐릭터와 체력, 방어력, 속도가 균형적인 노인 캐릭터.

처음 적들을 향해 나갔던 젊은 남자 캐릭터는 궁극기로 방어력을 최대로 높여 묵묵히 앞을 지켜냄으로써 선봉을 차지하는 스타일이고 지금 내 앞을 지키는 무투가는 나이가 있는 남자 캐릭터다.

마치 고된 훈련을 한 것처럼 칼자국이 있는 험한 몸은 궁극기로 인해 팽창하여 모든 적을 내려다볼 정도로 큰 덩치가 된다.

그리고 그 덩치로 전장을 휘저으며 적들이 공격하거나 도망치려는 타이밍을 방해하는 데 특화되었다.

궁극기로 인해 커다랗게 변한 몸이 거너의 앞을 막으며 도적의 공격을 맞아주었다. 중간에 주먹을 휘둘러 도적을 공격하려고도 했다.

[팀] 도리두리: 염소님

응? 도적의 공격을 맞고 있는 무투가 캐릭터가 나를 불렀다. 그런데 묘하게 닉네임이 익숙했다. 잠깐 멈칫거리니 다시 채팅이 올라온다.

[팀] 도리두리: ㄴㄴ 가던 길 가시고

[팀] 도리두리: 도적 좀 죽여주세요. 어차피 제가 못 죽일 것 같으니까 움직임만 최대한 막아볼게요

[팀] 염소구더기: 넵

나를 따라오려는 도적을 막아낸 도리두리가 주먹을 크게 내지른다. 하필이면 도적 궁극기 시전 시간도 끝난 모양인지 때마침 바닥으로 내려오려던 도적은 그 공격을 맞고 구석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잠깐 동안의 기절 상태.

지금이다.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버려라.

서둘러 저격을 시전했다. 시야를 넓히는 스킬을 쓰지 않아도 거리가 가까워서 잘 조준할 수 있었고, 기절 상태가 풀리기 전에 서둘러 머리를 노렸다.

2Kill.

도적이 사망했다는 표시가 뜨고 캐릭터가 사라진다. 부활하기 전까지 시간을 벌었다.

도리두리는 궁극기 쿨타임이 꺼지기 전에 서둘러 아군들이 싸우는 곳으로 달려갔다.

[팀] 도리두리: 물 정령사 아니어서 못 알아봤네요

[팀] 염소구더기: 헐, 저도 몰랐어요ㅜㅜ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팀] 도리두리: ㅇ

설마 했는데 정말 맨 처음 난입에 들어갔을 때 같은 팀이었던 도리두리였구나. 시크하게 대답하는 모습에 그제야 익숙해 보인다.

도리두리까지 합세하자 적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나는 뒤에서 보조를 하려고 궁극기를 켜둔 상태였다. 하지만 저격을 하는 소리가 들렸던 모양인지 적군의 비행사 캐릭터가 서둘러 궁극기를 쓰는 모습이 보인다.

비행사 캐릭터는 처음 봤는데, 로봇 같은 천사 날개를 펼친 채 하늘을 나는구나.

설마 저대로 폭탄이나 총 같은 걸 난사하나 싶어서 긴장하는데 곧바로 탱커들을 피해 내가 있는 방향으로 날아온다.

하늘을 나는 적을 막을 수가 없으니, 비행사 캐릭터는 아무런 방해 없이 숨어있던 나에게 날아와 나를 잡아 들어 올린다.

[팀] 염소구더기: ?

궁극기 기술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잡아놓고 높은 데서 떨어뜨리는 건가?

시야가 점점 높아진다. 중앙 무대가 환하게 보일 정도라서 남은 두 명의 적의 위치도 잘 보인다. 한 명은 숨어있고 한 명은 도망치는 중이고.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현재 궁극기를 여전히 켜둔 상태였다. 비행사에게 잡혀 올라가도 궁극기가 캔슬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적군 건물 방향으로 도망치는 전사가 보인다. 움직이는 적을 노리는 건 어렵다. 게다가 이렇게 높은 곳에서 저격을 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딱히 놓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버려라.

일직선으로 도망치는 전사의 앞 방향으로 저격을 했다. 붉은 잔광이 하늘을 가르며 남는다. 정확히 몸이 꿰뚫린 전사가 사망을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즉시 방향을 바꿨다.

3Kill.

놀라서 하늘을 보고 있는 아군들의 눈치를 보다가 사각지대에 숨어있는 적군의 얼음 전사를 발견했다. 조금 애매한 위치긴 하지만, 닿는다.

4Kill.

나를 데리고 날고 있는 비행사를 제외한 적군 전원이 사망했다.

[전체] 가재깡: ;;;;내가 스파이였나;;; 나 이거 첨 써봐서 어떻게 떨어뜨리는지 몰겠음;;

[전체] 총각귀신은콩깍쟁이야: 야 잌ㅋㅋㅋㅁ1친 놈앜ㅋㅋㅋㅋㅋㅋㅋ

[전체] 총각귀신은콩깍쟁이야: 거너를 거기 왜 데리고 가서 경치 구경시켜주냐고ㅠㅠㅠ 도망쳤다고 좋아했는데

[전체] 가재깡: 아니 님아;; 나도 잘못인데 여기서 설마 저격할 줄은 몰랐지. 맞추는 게 더 신기

[전체] 홍메리: 우리팀 거너 굿ㅎ 혼자 다 죽였네

역시 비행사 궁극기 기술이 납치해서 높이 올라간 다음에 떨어뜨려 죽이는 거구나. 잔인하기도 하네. 높긴 높은데… 과연 되려나.

어차피 가재깡이 떨어뜨려 죽으나 뻘짓을 해서 죽으나 똑같다.

남은 궁극기 기술은 한 번. 궁극기를 취소하고 연막탄 스킬을 사용했다. 당황하며 허둥지둥하던 가재깡이 나를 놓았다.

높은 허공에서 점점 멀어지는 가재깡. 커다란 날개 덕분에 그의 존재감이 더욱 커다랗게 보인다.

[전체] 가재깡: 와 알았다!! R키 누르면 떨어뜨리는 거구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버려라.

추락하면서 궁극기를 시전시켰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날개만 보이는 위를 향했다. 날개밖에 보이지 않지만, 양쪽 날개 중앙이 몸이겠지. 맞히든 못 맞히든 죽는 건 똑같다. 맞으면 땡큐지.

5Kill.

[염소구더기 님의 활약으로 적군이 전멸하였습니다.]

[아군의 사기가 올라 공격력이 상승합니다.]

비행사가 몸이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모습이 허공에서 얼핏 보인다. 거너 캐릭터가 저격을 그만두는 행동을 취했다. 다섯 번의 탄환이 다 소진되었기 때문이다.

거너의 몸이 볼품없이 바닥으로 추락하고 아군들이 서 있는 중앙 무대에 안착한다. 아군들이 거너를 중심으로 둘러싸며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염소구더기 님이 사망하였습니다.]

다른 캐릭터 같았으면 극소량의 체력으로 살아남았을지도 모르겠지만, 거너는 종이 몸이니깐!

나는 마우스를 손에서 놓고 입을 가렸다. 가려진 입이 씰룩거리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후, 그래도 좋은 최후였다.

[팀] 홍메리: 진짜 대박. 이 레벨판에서 이런 장면들을 볼 줄이야

[팀] 쭈리: 거너님 진짜 멋있어요 ㅠㅠㅠ대박

홍메리와 물 정령사를 하고 있던 쭈리가 거너가 죽은 중앙 무대를 잠깐 보다가 얘기했다. 그러고는 서둘러 적군들이 살아나기 전에 건물을 부수려는 모양인지 아까 다 부수지 못한 적군 건물 쪽으로 향한다.

[팀] 쭈리: 거너 컨트롤 어렵다고 해서 한 번도 안해봤는데ㄷㄷ 저도 나중에 한 번 해봐야겠네요

[팀] 홍메리: ㅋㅋㅋㅋㅋㅋ 쉽진 않을걸요

[팀] 홍메리: 적 비행사 지금쯤 다굴 당하고 있을 듯

그러고 보니 가재깡이 채팅을 다 치기도 전에 죽여버린 터라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놓고 천천히 채팅을 입력했다.

[팀] 염소구더기: 우연ㅎㅎ 도리두리님이랑 다들 잘해 주셔서 그래요

[팀] 도리두리: ㄴㄴ잘하셨음

[팀] 홍메리: 겸손따위 구더기한테나 줘버려요

[팀] 염소구더기: ㅋㅋㅋㅋ감사합니다

유쾌한 사람들이네. 최근에 개나소나랑 모타리 같은 유저들만 만나서 그런가, 지금 분위기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적군이 한 명씩 부활하기 시작하고 제일 마지막에 남은 것은 비행사. 아무래도 나와 비슷하게 부활하게 될 비행사는 우리 둘을 제외한 나머지 유저들이 싸우는 것을 보며 전체 채팅으로 우는소리를 했다.

[전체] 가재깡: 염소님, 구더기님ㅠㅠ

[전체] 염소구더기: ?

[전체] 가재깡: 미운사람……ㅜㅜ 하지만 멋있는 사람…… 저 쥐죽은 듯이 있을 테니까 죽이지 말아주세요

[전체] 염소구더기: ㅎㅎㅎ아까는 우연이었어요.

[전체] 가재깡: 뻥치지마요ㅠㅠ 저 아직도 손 떨려요

[전체] 가재깡: 거의 점이 되어서 사라져가는 부근에서 반짝이는 뭔가가 왔다 싶었더니!!

[전체] 가재깡: 제 하트를 박살내써…… 제 하트 돌려내세요! ㅜㅜ

[전체] 염소구더기: ㅎㅎㅎㅎ; 죄송합니다 그럼 다음에는 브레인을 가져가볼게요

[전체] 가재깡: ㅇㅁㅇ……?!

[전체] 힐러만할꺼여: ㅋㅋㅋㅋㅋㅋㅋㅋ우리팀 비행사 헤드샷 경고 받음. ㅅㄱ 제 힐은 다른 분들에게 갑니다

가재깡이 식겁하는 것과 동시에 부활을 해버렸다. 그래서 더 이상 채팅이 올라오진 않았지만 이미 적군의 힐러를 포함한 유저들은 웃음바다였다.

[전체] 총각귀신은콩깍쟁이야: ㅋㅋㅋㅋㅋㅋ아싸, 힐 경쟁자 줄었슴

[전체] 힐러만할꺼여: ㅎ 이놈의 인기란

[전체] 가재깡: 저 버리지 마세요ㄷㄷ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좀 지린 것 같은데…….

[전체] 홍메리: 중앙 무대에 캐릭터 세워놓고 다녀오삼ㅋㅋㅋㅋㅋ

[전체] 가재깡: ㄷㄷ형님들…… 저분들 무서워요 ㅠㅠ

[적군의 건물이 파괴되었습니다.]

[적군의 방어력이 감소합니다.]

거너가 부활하는 것과 동시에 적군 건물이 부서졌다는 알림이 울린다. 적군의 방어력도 이제 아군과 동일해졌다.

하지만 우리는 방금 적군을 전멸시킨 버프로 공격력 상승 상태.

좋네.

서둘러 아군들과 합류하기 위해 걸어가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긴 기럭지의 소유자인 거너가 제자리에 멈춰서서 총을 손질하는 행동을 취한다.

‘거너로 합류하는 건 별로 도움이 안 될 것 같은데. 중앙 무대는 너무 탁 트여있고.’

저격을 하는 동안 도적이 또다시 뒤치기를 노리든가 다른 근접 캐릭터가 다가오면 막을 능력이 없다.

도적 캐릭터가 근접 암살 캐릭터라면 거너는 원거리 암살 캐릭터다.

몸을 숨기자.

그렇게 생각한 나는 아군과 적군의 위치를 살폈다. 중앙 무대를 중심으로 양쪽에서 서로의 눈치를 보며 견제 중이다.

아마 적군들은 가재깡의 합류를 기다리는 거겠지.

도적이 중간에 있는 암흑 지역을 왔다 갔다 하며 촐랑거리는데 아무래도 견제만 하는 상황이 심심했던 모양이다.

암흑 지역, 통칭 지뢰밭. 큰 피해를 받는 것도 아니고 그저 거슬리는 정도로 생각하는 맵의 일부분.

가끔씩 그곳을 통해 암살을 시도하는 유저들도 있지만 오래 있기에는 힘든 곳이라서 기피하는 곳이다.

[팀] 홍메리: 덕분에 초반 진행은 잘 될 듯. 딜러가 한 명이라서 걱정했었는데

[팀] 도리두리: ㅇㅇ혹시 모르니 물 정령님도 딜 중심으로 어시 부탁드림

[팀] 쭈리: 넵!

아군들도 거너의 합류를 기다리는 모양인지 홍메리가 제일 앞장서서 적군을 견제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 모습에 나는 서둘러 파티로 얘기했다.

[팀] 염소구더기: 님들

[팀] 홍메리: ??

[팀] 염소구더기: 저 탄환 2개 정도 생겼는데 옆으로 돌아가려고 하거든요

[팀] 염소구더기: 시선 좀 끌어줄 수 있으세요?

[팀] 도리두리: 어디 쪽으로 가실거임?

[팀] 염소구더기: 적군 건물 쪽 지뢰밭이요

[팀] 홍메리: 헐ㅋㅋㅋㅋ

아군이 모여있는 방향은 우측. 적군이 모여있는 방향은 좌측. 그리고 내가 숨어들어 갈 암흑 지역 역시 좌측.

몸을 숨기기에는 최고였지만 가뜩이나 체력이 약한 거너가 암흑 지역에 오래 있기는 힘들다. 게다가 위치를 들킨다면 거리가 가까워서 바로 죽을 수도 있는 곳.

위험한 도박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아군들은 흔쾌히 내 의견을 들어주었다.

[팀] 홍메리: ㅇㅋ 지금 궁 남은 게 물 정령이랑 힐러네

[팀] 도리두리: 힐러 궁 깔고 버티면 그래도 오래 버틸 듯?

[팀] 홍메리: ㅇㅇㅇ일단 들어가면 제가 적들 시선 끌테니까, 도리두리님은 적 힐러 좀 집중 마킹 해주세요. 궁 못 쓰게

[팀] 홍메리: 물 정령은 가능하면 도적 평타로 때려서 움직임 제한 좀 만들어주고요

[팀] 홍메리: 상황 보고 물 정령도 1인궁도 괜찮으니까 궁ㄱㄱ 킬 욕심보다 한 명이라도 잡아두는 목적으로

[팀] 쭈리: 넵!!

[팀] 도리두리: ㅇㅇ

빠르게 아군들에게 지시를 내린 홍메리를 선두로 아군이 중앙 무대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우리들의 돌격에 적군들이 당황하다가 이내 두 명이 홍메리를 막아 세웠지만, 그 뒤를 바짝 따라온 도리두리에 의해 적군의 대열이 흩어진다.

아직 너희의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어!

[전체] 힐러만할꺼여: ?????

아군 힐러가 갑자기 궁극기를 사용하자 적군의 힐러가 당황한다. 그러더니 이내 이곳에서 제대로 한타를 하려는 탱커들을 위한 것임을 깨닫고 본인도 궁극기를 사용하려고 하는데, 그 앞으로 들이닥치는 도리두리.

칼자국이 있는 커다란 아저씨의 등장에 적군 힐러가 멈칫하자 도리두리가 평타로 천천히 한 대씩 때리기 시작했다.

[전체] 힐러만할꺼여: 아니, 잠만

[전체] 힐러만할꺼여: 나 좀 도와줘;;

그래, 천천히.

정말 적군 힐러가 스킬을 쓸 타이밍이 없을 정도로만 평타를 때리는 모습에 도망치지도 못하고 돕지도 못하는 적군 힐러가 울상을 지었다.

도적이 도와주려고 했으나 그런 그를 막는 물 정령사.

그 때문에 도적의 목표가 물 정령사로 옮겨졌다. 빠르게 달려오는 도적의 행동에 도망치는 걸 실패한 물 정령사의 HP가 빠른 속도로 닳았다. 힐러 궁극기를 받는 중인데도 큰 대미지를 받고 있다.

저대로라면 죽는다. 도적도 그걸 직감했는지 조금 더 활발하게 움직이려던 때, 정수리에 스치듯 지나가는 붉은 점.

표적이 되었을 때 보이는 빛에 서둘러 몸을 피하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붉은 점이 사라지는 동시에 도적이 바닥에 풀썩 쓰러진다.

[전체] 총각귀신은콩깍쟁이야: 아니 어디서 쏜거임?

죽고 나서 황당했던 모양인지 도적이 전체 채팅으로 물었지만 대답해 주는 이는 없었다.

목숨을 보전한 물 정령사가 서둘러 적군의 힐러에게 궁극기를 사용했다.

소녀의 어항 속으로 초대할게요.

거대한 어항 속에는 물이 가득 차고 그 안에서 숨이 막힌다는 행동을 하는 적군 힐러. 체력은 조금씩 닳고 있지만 궁극기에 당하고 있어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다.

덕분에 적군은 힐러가 있지만 치유 스킬도 받지 못한 채 지속적으로 체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전체] 힐러만할꺼여: 아니 1인궁이라뇨ㅋㅋㅋㅋㅋ 나만 집중 마크하네

[전체] 총각귀신은콩깍쟁이야: 치유스킬도 못쓰게 하고 궁극기도 못쓰게 하고……ㅎㅎ 힐러한테 야박하네

[전체] 힐러만할꺼여: 어쩔수없네 여기서 비행사 헤드샷 당하는 거나 구경해야지

[전체] 총각귀신은콩깍쟁이야: ㅋㅋㅋㅋㅋㅋ저도 가재깡만 집중 마크해서 보는 중

[전체] 가재깡: 님들아;; 그 전에 저 죽을 듯요

노선을 바꾼 도리두리가 가재깡이 궁극기를 써서 도망치지 못하게 아까처럼 평타를 지속적으로 때리고 있었다.

옆으로 회피해도 따라붙어서 때리고, 뒤로 피해도 찰싹 달라붙고. 험상궂은 아저씨의 집중 마크를 받는 소녀 비행사 캐릭터의 모습은 불쌍해 보였지만 동정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어느새 계속되는 공격으로 체력이 거의 바닥난 가재깡이 거의 포기한 상태로 있을 때였다. 마지막 타격을 준비하며 스킬을 사용하는 도리두리.

하지만 그보다 빠른 속도로 가재깡의 이마를 조준한 탄환이 빠르게 날아가 박혔다.

[전체] 힐러만할꺼여: 와 쩔었다. 실시간으로 보니 꿀잼

[전체] 총각귀신은콩깍쟁이야: 헤드샷 경고대로 이뤄짐ㅋㅋㅋㅋㅋ아니 그보다 어디 숨어있나 했더니 지뢰밭에 있었네;;;

[전체] 힐러만할꺼여: 헐??? 저런 곳에서 은신하고 있었다고?

[전체] 가재깡: ……ㅠㅜ구더기형님, 왜 그런 위험한 곳에서 제 브레인을 노리세요…… 저 또 지렸어요

[전체] 염소구더기: ㅎㅎ 아늑하네요

바로 앞의 유저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판단하기도 힘든 암흑 지역. 하지만 거너 스킬로 시야를 확대하니 큰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탄환을 전부 소모하자 자연스레 궁극기 모드가 풀렸고 나는 서둘러 암흑 지역에서 나와 물 정령사 쪽으로 향했다.

때마침 궁극기 시전이 끝나 적군의 힐러가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과 동시에 연막탄 스킬을 사용하니 물 정령사도 기다렸다는 듯 평타를 때리기 시작한다.

[전체] 힐러만할꺼여: 아이고, 세상사람들 보소! 집단폭력이오!

[전체] 가재깡: 포기하고 제 품으로 오세요…… 어차피 살아날 가망 따위 보이지 않으니깐.

[전체] 힐러만할꺼여: ㅋㅋㅋㅋㅋ ㅇㅋ 금방 가겠음

방어력이 감소한 상태에서 공격력 버프를 받은 적을 상대하기란 쉽지 않겠지.

적군들은 이후에도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당연히 아군의 승리.

거너 신고식은 그래도 잘 해냈네.

[전체] 가재깡: 수고하셨습니다! 구더기님 저희 다음에는 만나지 말아요!!

[전체] 총각귀신은콩깍쟁이야: 미투. 수고

[전체] 홍메리: ㅂㅂ

[전체] 도리두리: ㅅㄱ

[전체] 쭈리: 수고하셨습니다!!

아군이랑 적군 모두 유쾌한 사람들이라서 더 재밌었던 것 같기도 하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음 게임도 바로 시작하려던 순간이었다.

“야.”

머리 위에서 서늘한 음성이 들려온다. 설마 나를 불렀겠거니 싶어서 무시하는데 어깨 위에 올려지는 손.

손 모델처럼 길고 예쁜 손을 힐끔 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그러자 어두운 피시방에도 불구하고 밝은 핑크 머리가 눈에 들어온다.

“너 나 좀 보자.”

표정을 숨길 생각도 없이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황보욱. 임해서를 바라보니 본인은 아니라며 극구 부정하는 행동을 취해 보인다.

임해서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나를 찾아왔다고?

나를 찾으려 여기저기 돌아다닌 모양인지 어깨를 짚는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하다.

설마 나 하나 찾자고 지금까지 돌아다녔을 줄이야. 무섭기보다는 어이가 없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나마 게임이 끝난 참이라서 다행이었다.

“잠깐만, 일시 정지 좀 하고.”

황보욱이 게임을 대기 화면으로 돌리는 내 모습을 보며 인상을 찌푸린다. 더 세이렌 대기 화면에 멀뚱히 서있는 거너 캐릭터.

잠깐 시선을 줬던 황보욱은 이내 고개를 돌리고는 밖으로 나오라며 턱짓을 한번 해보인다. 그러고는 저 혼자 말도 없이 피시방 밖을 빠져나가 버렸다.

“너 또 한 시간 넘게 있다 올 거 아니지?”

일시 정지를 시켜놨다가 낮잠도 자고 온 전적이 있어서 임해서가 농담 반, 걱정 반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냐고 묻는 눈빛에 별다른 생각 없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설마 죽기라도 하려고.

태평하게 하품을 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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