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온라인 스토커 주의보
저녁 식사 시간쯤이라서 그럴까. 황보욱을 따라서 피시방 밖으로 나오니 기름진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대학로라서 근처에 식당이 많긴 하지.
고기 냄새가 사방에서 진동을 하니 황보욱과 이야기를 끝낸 뒤 임해서를 꼬셔서 같이 먹을까 고민되었다. 먼저 밖에 나가 있던 황보욱이 담배를 입에 무는 것이 보인다.
눈을 내리깔고 라이터를 켜며 불을 붙이는 모습이 어쩐지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 같았다. 주변에 저렇게 눈에 띄는 미남이 없던 터라 좀 적응이 되지 않는 건 사실이다.
지우 형 친구라던 문정하도 굳이 따지면 잘생긴 타입이긴 하지만. 뭐랄까. 둘이 분위기가 다르네.
문정하가 서늘해 보이기는 해도 한복 등의 동양적인 이미지가 어울리는, 선이 굵은 남자다운 느낌이라면 황보욱은 서양 제복도 위화감 없이 소화해 낼 법한 화려한 이미지다.
둘 다 재수 없이 잘생긴 건 똑같지만.
“재수 없어.”
“뭐?”
실수로 속마음이 밖으로 튀어나온 모양이다. 황보욱의 찡그려진 미간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표정도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우리 우기 담배 때문에 폐 망가질까 봐 마음 아프다고.”
얼핏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모양인지 황보욱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러고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다가오지 않는 내 모습에 인상을 찌푸리길래 나는 가볍게 코를 막았다.
“담배 냄새 싫어해.”
“그래? 임해서도 골초길래 너도 담배 피울 줄 알았더니.”
황보욱은 싫어한다는 말에 얼마 피우지도 않은 담배를 바닥에 던져 꺼뜨렸다.
“손지언.”
“엉.”
“내가 아침에 화가 나서 좀 예민했던 것 같았는데, 그건 너도 잘못한 거니까 서로 넘어갔으면 좋겠어.”
“…….”
예상하지 못했던 말에 당황해서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래봤자 나보다 키가 큰 황보욱은 모자를 쓴 내 정수리밖에 보이지 않겠지.
잠깐 고민하다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잘못했으니까. 하지만 너도 지나치긴 했어.”
“…그래, 인정할게. 어이없이 점수 까일까 봐 그랬어. 그럼 이제 아까 같은 짓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난 네가 지각만 안 하고 조별 강의 참석만 잘하면 상관없으니까.”
“진짜 싫었나 보네. 너도 나 어니라고 불러도 돼.”
“미쳤냐.”
황보욱에 대한 정보를 하나 얻었다. 그는 생각보다 쿨하게 잘못을 인정하기도 하고 오그라드는 것을 정말 싫어한다. 그리고 놀리는 재미가 있는 놈이다.
“알았어.”
“정말로?”
본인이 제안해 놓고 내가 순순하게 받아들이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다.
웃긴 놈이네. 본인도 제 실수를 눈치채고 민망한지 헛기침을 하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나 지금 번호 따이는 건가?”
“넌 헛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구나. 나 조장이니까 조원들 번호는 알고 있어야지.”
“네가 왜 조장이야? 나 빼고 투표했어?”
“지원했어. 아무도 원하는 사람은 없었고 임해서가 너도 그런 거 관심 없다고 했었거든.”
그건 그렇지만.
조금 떨떠름하긴 했지만 휴대폰을 받아 들고는 번호를 입력하다가 멈칫거렸다. 그러고보니 임해서가 멋대로 번호를 줬다고 했던 것 같은데 착각이었나? 전화번호를 입력해도 저장된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니 황보욱이 왜 그러냐는 듯 쳐다보았다.
“임해서 너한테 번호 알려줬다고 들은 것 같은데.”
“물어보기는 했는데, 본인 동의 없이 저장하기 찝찝해서 안 했어.”
쓸데없이 정직한 놈이었다. 하지만 그런 점이 싫지는 않아서 고개를 대충 끄덕이며 휴대폰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조장도 불만 있으면 네가 해도 돼.”
“노, 난 주목받는 거 안 좋아해.”
“그럼 내가 할 테니까 앞으로 피해 주는 일 없이 잘 따라오길 바랄게, 조원님.”
“너는 재수 없음을 몸에 달고 다니는구나.”
“뭐?”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조장님.”
“못 들어서 되물은 거 아니거든.”
“그럼 뭐하러 입 아프게 한 번 더 물어?”
황보욱이 황당하다는 듯 입을 꾹 다문다. 그 얼굴이 마치 ‘정말 나랑 안 맞네’라는 생각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아서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나도 너랑 안 맞아, 재수탱이야.
* * *
“생각보다 빨리 왔네?”
임해서가 나를 되돌아보며 물었다. 하지만 이내 뚱한 내 표정에 상황을 짐작한 듯 실실 웃으며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걔 너랑 안 맞지?”
“엄청.”
“놀 것 같이 생겼는데 외모랑 달리 무뚝뚝한 스타일이더라고. 농담도 잘 안 받아줌. 하지만 성격이 나쁜 애는 아니래.”
“그럴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나랑은 안 맞아.”
“네 장난을 안 받아줘서 그렇겠지. 이해해. 걔가 학점에 목숨을 건다더라. 걔는 우리처럼 게임도 안 하고 공부만 하고 살걸?”
“공부 잘해?”
내 출석에 왜 그렇게 예민한가 했더니 학점에 예민한 놈이었구나. 그렇다면 본인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점수에 영향을 받게 되면 짜증이 나긴 하겠지.
내 물음에 임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걔랑 친한 애가 나랑 아는 사이거든. 뭐… 사정이 있어서 학점 신경 쓴다더라.”
“걔 친구는…….”
“응?”
“성격 어때? 황보욱이랑 똑같아?”
어떤 성격이길래 황보욱이랑 친하게 지낼 수 있는 거지? 진지하게 묻자 임해서가 덩달아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평범해. 걍 고딩 때부터 잘 알고 지낸 사이라서 경계심 없이 편하게 지낸대.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인 듯.”
“할 말 다 하면서?”
“지언아,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너도 할 말 다 하는 성격이야. 내 친구지만 솔직하게 얘기해 주고 싶구나.”
어깨를 툭툭 건드리는 손길에 훌훌 털어냈다.
“그보다 왜 말 안 했어? 황보욱 조장인 거.”
“어차피 너 안 할 거잖아.”
“그거랑 이거는 다르잖아.”
“네가 안 할 거면 누가 하든 무슨 상관이야. 이제 황보욱한테 날 선 거 좀 진정시켜. 이제 싫든 좋든 매주 봐야 하는 사이인데.”
그건 그렇지만.
오늘따라 맞는 말만 하는 임해서가 얄미워 아랫입술을 툭 내밀자 임해서가 낄낄 웃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좀 친해져 봐. 혹시 알아? 알고 보니 잘 맞아서 절친이 될지.”
“그럴 일은 없을 듯.”
“아님 말고. 거너는 이제 좀 할 만해?”
“생각보다는 괜찮긴 한데 템이 좀 아쉽네.”
“더 좋은 거로 맞추려면 현질하거나 이벤트 있을 때 해야 할 거야.”
고개를 끄덕거리며 휴대폰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아까 저장해 둔 황보욱의 번호가 보인다. [조장]이라고 멋없게 저장된 멘트도 함께 보여서 잠깐 바라보다가 이내 뒤집어 놓았다.
얘랑은 친해질 것 같지는 않아.
“나랑 같이할래? 레벨 좀 높은 애들 들어올 텐데.”
“한번 해보자. 어차피 지금 애들 거의 다 부캐라서 완전 뉴비는 없더라.”
“그래? 그럼 나도 더 세이렌 들어갈게. 기다려.”
하던 다른 게임을 종료하고 더 세이렌을 켜는 임해서를 보다가 컴퓨터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임해서가 들어오면 레벨 150이 넘는 애들이랑도 마주칠 테고 그러면 속성별로 다양한 캐릭터를 만나겠지.
기본 캐릭터들만 보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속성 캐릭터들은 어떨까 궁금했다. 속성 있는 거너를 만나면 참고가 될 테니 좋을 텐데.
[귓말] 개나소나: 야
행복한 생각을 하며 황보욱으로 인해 떨어졌던 텐션을 애써 올리고 있는데 텐션을 떨어뜨리는 귓말 하나.
익숙한 닉네임이다. 순간 잘못 봤나 싶어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다시 귓말이 온다.
[귓말] 개나소나: 야
‘이 새끼 뭐지?’
시비를 걸려고 귓말까지 하나?
친구 추가 신청이 왔을 때만 해도 잘못 보낸 거겠지, 하고 애써 무시했는데 저렇게 직접 귓말로 아는 척을 해올 줄이야.
아니, 왜? 너무나도 이해 안 되는 상황에 화면을 노려보듯 쳐다보았다.
[귓말] 개나소나: 잠수 아닌 거 아니까 대답ㄱㄱ
[귓말] 염소구더기: ?
[귓말] 개나소나: 역시 잠수 아니네ㅋ
일단 부른 이유가 궁금해서 짧게 답장을 보냈다. 그러자 빠른 속도로 돌아오는 대답.
[귓말] 개나소나: 왜 친추 쌩깜?
[귓말] 염소구더기: ?
[귓말] 개나소나: 말 못 함?
[귓말] 염소구더기: ㅇ
[귓말] 개나소나: 더럽게 못하는데 심심할 때 렙 올리는 거 도와줄까 해서 연락줬더니ㅋ
[귓말] 염소구더기: ㅋ관심꺼
[귓말] 개나소나: 자존심으로 랭커라고 하는 게 안타까워서 아량을 베푸는 거지ㅋㅋㅋㅋㅋ
“아량 같은 개소리 하네.”
“왜?”
“저번에 나한테 시비 걸었던 놈 귓말 왔는데.”
“엉.”
“나 더럽게 못 한다고 레벨 올리는 거 도와주겠대.”
임해서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아이디를 입력하며 말했다.
“너 엿 먹이는 거네.”
“그렇지? 굳이 귓말까지 해서 신경 건드리네.”
“아님 초대해 봐. 내가 찍소리도 못하게 발라줄게.”
그러고 보니 임해서 레벨이 개나소나보다 더 높았지?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얘기하는 걸 보면 임해서도 못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조금 찝찝한 건 개나소나도 저번의 활약을 보면 그렇게 못하는 편은 아니라는 것. 잠깐 고민하다가 그래도 레벨이 높은 점을 높이 평가하며 임해서에게 다시 물었다.
“네가 한 말 책임져.”
“당근당근.”
조금 찝찝한 마음으로 개나소나에게 귓말을 보냈다.
사실 차단을 하고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 선택지도 있긴 했지만, 저 얄미운 놈을 짓밟아 주고 싶긴 하다. 그리고 아까처럼 잘하는 내 거너 모습을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
[귓말] 염소구더기: 그렇게 자신 있으면 해보든가
[염소구더기 님이 파티에 초대하였습니다.]
[개나소나 님이 파티 신청을 수락하였습니다.]
전 판을 생각보다 수월하게 이긴 탓에 조금 자신만만해진 것이 잘못이었다.
임해서랑 개나소나랑 같은 파티를 이루고 게임을 하면 레벨부터가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고 행동했어야 했는데…….
“야, 나 들어왔어.”
“닉네임 뭔데?”
“솔로면봐줌.”
임해서랑 어울리는 닉네임이군.
고개를 끄덕이며 친구 추가 후 바로 파티에 초대했다.
[염소구더기 님이 파티에 초대하였습니다.]
[솔로면봐줌 님이 파티 신청을 수락하였습니다.]
“개나소나가 말했던 걔임?”
“엉. 완전 싸가지.”
“게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말 좀 험하게 하긴 하지.”
이제는 면역력이 생겼다면서 임해서는 키보드에 손을 올려놓고 채팅을 쳤다.
[파티] 솔로면봐줌: ㅎㅇㅎㅇ
[파티] 개나소나: ㅎㅇ
“그래도 인사는 받아주네.”
“…그러네?”
솔직히 쌩깔 줄 알았는데.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게임 시작을 눌렀다. 그리고 캐릭터를 거너로 선택하니 임해서의 고개가 홱 소리가 날 정도로 돌아본다.
“너 거너 하려고? 미쳤음?”
“나 전판 괜찮게 했어.”
“아니, 그건 너랑 비슷한 레벨이었잖아. 애기들 가지고 논 거고.”
“다들 부캐인데?”
“아니. 아무리 그래도 본캐 애들이랑 하는데!”
“네가 있잖아.”
임해서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믿는다는 듯 씨익 웃어 보이니 콧방귀를 낀다. 그러고는 알아서 하라며 탱커를 고르는 녀석.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는 임해서를 무시하며 개나소나가 고른 캐릭터를 바라보았다.
‘역시 마법사가 주캐인가 보네.’
그리고 남은 두 명은 힐러와 얼음 전사.
나쁘지 않은 조합이네. 메인 딜러는 아마 나와 얼음 전사가 하겠지.
아까처럼만 하자고 다짐하며 시작하는 게임 화면에 집중했다.
[팀] ㅡ뚀미ㅡ: 엥? 거너 레벨이 왜 그럼?
[팀] 솔로면봐줌: 뉴비인데 연습임. 욕 좀 자제해 주삼
[팀] ㅡ뚀미ㅡ: ?? 에반데
대부분 레벨이 세 자리 숫자인 것에 비교해 내 레벨은 고작 32. 상대적으로 낮다고 하고 말하기에도 우스울 정도로 귀여운 숫자였다.
[팀] 염소구더기: 열심히 할게요
[팀] ㅡ뚀미ㅡ: ㅋㅋ 일단 파이팅
그래도 초반부터 욕을 하지는 않는구나. 조금 떨떠름해 보이기는 하지만.
게임이 시작하자마자 아군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당연히 적군 건물로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임해서를 중심으로 다들 아군 건물로 향하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아군 건물을 공격하러 오는 적군을 기습하려는 모양이었다.
가장 뒤에서 따라가며 상황을 지켜보는데 임해서가 다급히 얘기했다.
“야야, 손지언! 뒤에 한 명 돌아간다! 걔 잡아!”
적군 네 명이 모여있는 것을 확인하고 어그로를 끌고 있던 임해서가 그 와중에 놓친 한 명이 가는 방향을 지켜보며 말했다.
서둘러 궁극기를 켜고 뒤를 돌아보았다.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버려라.
보인다. 임해서의 말대로 뒤를 돌아오던 궁수 캐릭터의 모습.
그쪽도 저격 중인 나를 눈치챈 모양인지 서둘러 좌우로 현란하게 스텝을 밟았다. 저격에 맞지 않게 견제하는 거겠지.
‘아, 미친놈. 더럽게 빠르네!’
덕분에 겨냥하고 있던 거너의 총구도 좌우를 왔다 갔다 하는데 그러는 도중에도 궁수는 점점 가까워진다. 조급한 마음에 저격을 두 번 날렸지만 한 발도 맞지 않는다.
적군 궁수의 레벨은 160. 속성은 나무. 낡아 보이는 나무 활을 움직이면서 나를 겨냥한 궁수는 점프를 했다. 순식간에 머리 위로 뛰어오른 녀석이 사정없이 스킬을 퍼붓는다.
둔탁해 보이는 나무 화살이 연달아 위에서 내리꽂히자 자동으로 궁극기가 풀렸다.
망했다.
서둘러 연막탄이라도 날려보려고 했지만 거너 체력은 그보다 빠른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한다. 뒤늦게 눈치챈 힐러가 뒤로 다가왔지만 버티기는 힘들 것 같고.
“나 죽겠다.”
“미친, 적 따라니까 반대로 따이냐.”
[염소구더기 님이 사망하였습니다.]
임해서의 핀잔을 듣는 것과 동시에 거너 캐릭터가 볼품없이 바닥에 드러누웠다. 나와 임해서가 동시에 앓는 소리를 냈다.
아마 아군들도 동시에 앓는 소리를 냈겠지.
거너는 초반부 활약이 중요한 캐릭터였다. 상대가 거너를 의식하는 순간부터는 사각지대에 숨거나 뒤로 돌아와 거너를 먼저 처리하려고 하기 때문에 초반에 최대한 많이 죽여야 했다. 그렇게 해야 했는데…….
[팀] 개나소나: 잘한다
“젠장……”
“그냥 무난한 캐릭터나 고르지.”
임해서는 적군과 대치 중인 모양인지 다 네 업보라며 혀를 차는 와중에도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탱커를 하는 녀석을 중심으로 아군들이 모여있었고 적군과는 그래도 용케 잘 싸우는 중이었다.
잘하면 이길지도?
조금 기대하며 리스폰이 되기 전까지 구경하고 있는데 알림이 뜬다.
[개나소나 님이 사망하였습니다.]
[ㅡ뚀미ㅡ 님이 사망하였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 더블킬.
빠른 속도로 사라진 아군의 모습에 당황하며 힐러가 궁극기를 쓰려던 참이었다.
아직 너희의 죽음을 허락…….
[형제님자매님 님이 사망하였습니다.]
“…와…….”
세상에서 제일 짜증 난다는 궁극기 캔슬! 줄여서 궁캔이라고 부르는 상황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미 궁극기를 사용하던 상황에서 죽어버린 터라 다음 궁극기 쿨타임이 채워지기 전까지는 쓰지도 못한다. 억울하고 열받는 상황.
[팀] ㅡ뚀미ㅡ: 적팀 거너있네… 하
[팀] 개나소나: 우리 팀처럼 못하는 놈은 아닌 듯
[팀] ㅡ뚀미ㅡ: 놔둬요 뉴비라는디
[팀] ㅡ뚀미ㅡ: 어차피 랭크 걸린 게임도 아니니까 쩝
“그래도 쟤는 착하네.”
“그러게. 물론 내가 계속 뻘짓하면 같이 욕하겠지만.”
“그건 인정.”
고개를 끄덕이며 솔로면봐줌이 서둘러 아군 건물로 돌아오는 걸 지켜보았다. 동시에 거너 리스폰 시간도 끝나 살아나는데 전체 채팅에 적군 거너의 말이 올라온다.
[전체] 내고환한짝이다: ㅋㅋㅋㅋㅋ이 맛에 거너하지
[전체] 내고환한짝이다: 거너는 헤드샷이 진리
[전체] 내고환한짝이다: 적 거너 레벨 보니 강제 매칭인가봄? 오늘 형님한테 많이 배우고 가라
배우긴 뭘 배워.
굳이 대답을 하지 않고 무시했다. HP를 회복하는 솔로면봐줌 옆에서 기습을 올지도 모르는 적을 견제하고 있는데 붉은 점이 희미하게 스쳐 지나간다. 순간적으로 몸을 옆으로 피하는데 총성이 들려왔다.
[전체] 내고환한짝이다: 오호, 이걸 피해?
[전체] 내고환한짝이다: 어떻게든 살려고 아등바등 하는 모습이 보기 좋군
“쟤 말투 왜 저래.”
“놔둬. 컨셉인가 봄.”
게임에서는 워낙 별의별 사람이 많아서 그러려니 하긴 하지만 저렇게 오그라드는 말투라니. 쟤는 100% 학생이다.
솜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라 팔을 한 번 매만지고는 사각지대에서 서둘러 궁극기를 켰다. 적군 거너가 여전히 궁극기를 켠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 쟤 도망치기 전에 시선 좀 끌어봐.”
“오케이.”
아직 HP를 다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어차피 곧 힐러가 살아날 테니 괜찮을 거라 생각한 솔로면봐줌이 내 앞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러자 돌아가려던 적군 거너의 총구가 솔로면봐줌 쪽으로 돌아갔다.
한 방, 두 방. 거너의 궁극기는 총 다섯 번. 나한테 한 번 쓰고 솔로면봐줌에게 두 번을 썼으니 남은 건 두 번뿐.
나는 서둘러 적군 거너를 향해 총구를 겨냥했다. 멀어서 더 희미해진 붉은 점이 그의 머리에 닿는 순간 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 진짜 얄밉네.”
거너로 탱커를 죽이기는 힘들고 아군 리스폰 시간도 다 되어가니 돌아가려는 모양이었다.
무리하지 않고 재빨리 몸을 빼는 모습에 궁극기를 거두어들였다.
[전체] 내고환한짝이다: ㅋㅋㅋㅋㅋ염소야, 나 타깃팅 하려고 했지?
[전체] 내고환한짝이다: 형님 예지력이 좀 있단다
[전체] 내고환한짝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염소 궁에는 쉽게 맞아줄 수 없지~
계속 도발하는 적군 거너의 모습에 분노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다른 건 욕해도 상관없는데 게임 실력이 무시당하면 왜 이렇게 열이 뻗치는 거지?
[전체] 염소구더기: 내가 한번은 꼭 니 맞춰서 죽임
[전체] 내고환한짝이다: ㅋㅋㅋㅋㅋㅋ그 컨으로? 헤드샷 못 맞출 것 같은데. 몸뚱이만 맞추면 나 한 번에 안 죽을걸?
[전체] 염소구더기: 더 아픈 한방 노림
[전체] 내고환한짝이다: 헤드샷 노리는 것보다 무서운 게 있긴 함? ㅋㅋㅋㅋㅋㅋ
[전체] 염소구더기: 니 고환
잠깐의 침묵. 이내 적군 거너가 분명히 눈으로 읽는 채팅임에도 불구하고 시끄럽게 소리를 질렀다.
[전체] 내고환한짝이다: 끄아아아악!! 아재요 다메요!
[전체] 염소구더기: 남은 하나도 ㅅㄱ
[전체] 솔로면봐줌: ㅋㅋㅋㅋㅋㅋ앜ㅋㅋㅋ미칰ㅋㅋㅋㅋㅋㅋ
[전체] ㅡ뚀미ㅡ: ㅠㅠㅠㅋㅋㅋㅋㅋㅋ아 존나 너무 웃겨서 실수로 궁 써버림ㅋㅋ큐큐큐큐큐ㅠㅠㅠ그렇지만 후회는 없다
[전체] 형제님자매님: 더 세이렌은 15세 이용가입니다.
이 와중에 딴지를 거는 듯한 형제님자매님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다시 채팅이 올라온다.
[전체] 형제님자매님: 그러니 고환 소지는 용서치 못합니다.
[전체] 염소구더기: 할렐루야 종교의 허락도 받았습니다
[전체] 내고환한짝이다: ㅠㅠㅠㅠ아니, 시밬ㅋㅋㅋㅠㅠㅠㅠ내 허락을 받으라고 미칭놈들아!!
어지간히도 당황한 모양인지 아니면 웃겨서 상황에 어울려 주려는 건지는 몰라도 내고환한짝이다는 그러지 말라며 징징거렸다.
[팀] ㅡ뚀미ㅡ: 하 오랜만에 실컷 웃었네ㅋㅋㅋㅋㅋㅋ
[팀] ㅡ뚀미ㅡ: 이번 판은 예능 팟임? ㅋㅋㅋㅋㅋ
이제 막 리스폰 된 얼음 전사의 궁극기를 허무하게 날렸음에도 아군에서 뭐라고 하는 이들은 없었다. 긴장했던 분위기가 한결 풀려서 그럴까.
[팀] 형제님자매님: 형제님들 저 이제부터 방 타겠습니다.
더 세이렌은 유저 레벨과는 달리 각 게임을 시작할 때마다 선택하는 캐릭터들의 레벨 또한 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 레벨을 올리는 순서에 따라 초반에 공격 타입이 될지 방어 타입이 될지 또는 밸런스 타입이 될지 선택할 수 있다.
당연히 딜러들은 공격력을 향상시켜 주는 아이템을 먼저 선택함으로써 공격 캐릭터가 되고, 탱커들은 방어력을 향상시켜 주는 아이템을 먼저 선택하면서 방어 캐릭터가 된다.
힐러는 대체로 밸런스나 방어를 선택하는데 아무래도 적군에 거너가 있는 것이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아군 힐러인 형제님자매님은 방어를 올리겠다고 선언했고 다들 그 의견에 찬성했다.
힐러가 빨리 죽으면 쓸모가 없으니 방어력을 높여 최대한 오래 살아남아야 아군들도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지니깐. 현명한 판단이다.
[팀] 솔로면봐줌: ㅇㅇ 다른 분들은 그대로 공 계속 가세요. 제가 최대한 앞에서 막아봄
[팀] ㅡ뚀미ㅡ: 저랑 거너님은 최대한 뒤에 빠져있을게요.
거너가 종이 몸인 이유는 캐릭터 레벨을 대체로 방어력을 하나도 안 찍는 공격력 올인으로 하기 때문이다.
몸을 숨기고 원거리 공격에 성공하면 대미지는 확실히 들어간다. 들키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팀] 개나소나: 거너 보이는 대로 스턴 쓰겠음
근딜이 있거나 탱커가 한 명 더 있었다면 적군 뒤로 돌아가서 거너를 견제할 수 있었을 텐데. 그건 좀 아쉽네.
“그래도 다행이네.”
“뭐가?”
“이제 너는 적들이 견제 안 할 듯.”
“…개자식.”
“그래도 부정 못 하는 거 보소.”
이제부터 적 궁수를 대표로 한 놈씩 번갈아 가며 뒤치기를 노리겠지. 만만한 거너를 잡기 위해서, 하.
“알아서 잘 살아남아 봐. 너 계속 잘리면 우리 팀 져. 알지?”
“엉. 노력해 봄.”
임해서의 경고 같은 조언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입을 다물고 컴퓨터 화면에 집중했다.
모든 아군들이 살아난 상태. 이번 한타를 지면 앞으로의 게임 역전은 더 어려워지게 된다.
적을 죽일수록 캐릭터 레벨을 올릴 수 있는 코인을 얻게 되는데, 당연한 소리겠지만 캐릭터 레벨을 먼저 빨리 올리는 팀원들이 이길 확률이 높아지는 법.
하는 일 없이 적군에게 죽기만 하는 유저를 코인 셔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걸어 다니는 코인. 나만 아니면 되는데 이 판에서는 어쩐지 내가 될 것 같네.
[팀] 솔로면봐줌: 적군 건물에 몰려있을 듯
현재 상황은 아군 건물은 부서지고 적군 건물만 건재한 상황.
우리 팀은 적군 건물을 부수러 가야 하니, 적군 건물 주변에 매복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팀] 개나소나: 탱커 앞에서 시간 끌고 있으면
[팀] 개나소나: 뒤로 가겠음
[팀] 개나소나: 그 타이밍에 얼음 전사가 앞에서 딜 넣을 수 있으면 넣고
[팀] 개나소나: 힐 들어오고 ㅇㅋ?
[팀] 형제님자매님: 모든 것은 형제님 뜻대로 해봅시다.
[팀] ㅡ뚀미ㅡ: 거너는요?
[팀] 개나소나: ㅋㅋㅋㅋ? 우리팀에 거너도 있었음?
[팀] ㅡ뚀미ㅡ: ?? 둘이 뭐임? 친구? 아, 파티네
파티지만 친구는 아니고 원수지간인데요.
하지만 말해도 믿을 것 같지는 않아서 개나소나를 무시하기로 했다.
[팀] 염소구더기: 저는 지뢰밭에 숨어서 저격 노려볼게요
[팀] ㅡ뚀미ㅡ: 지뢰밭에서 저격질을?
[팀] ㅡ뚀미ㅡ: 진심?
[팀] 형제님자매님: 형제님 그러다가 골로 갑니다
[팀] 염소구더기: 어차피 전 별로 쓸모 없을 것 같아서 한 놈이라도 노려볼게요
[팀] 개나소나: 그건 인정
[팀] ㅡ뚀미ㅡ: ㅋㅋㅋㅋㅋㅋ 둘이 커플은 아니죠?
뒤로 돌아가는 개나소나와 지뢰밭 쪽으로 몸을 움직이던 나는 동시에 그 채팅을 보고 정색을 했다. ㅡ뚀미ㅡ에게는 이게 사랑싸움으로 보이는 걸까.
[팀] 염소구더기: 죄송한데 실례되는 발언 자제 좀 해 주세요
[팀] 개나소나: ㅁㅊ
[팀] 개나소나: 이 판 던질까
개나소나는 한술 더 떠서 고의 트롤짓을 할까 진지하게 선언했다.
[팀] ㅡ뚀미ㅡ: ㅋㅋㅋㅋㅋㅈㅅㅈㅅ 발언 자제할게요
[팀] 솔로면봐줌: 수다 그만하고 집중ㄱ
솔로면봐줌이 지나간 곳에 적군이 매복해 있는 모습이 얼핏 보였다가 사라진다. 아마도 솔로면봐줌과 그 뒤를 따라오는 형제님자매님을 보고 뒤로 발을 뺀 모양이다.
하지만 솔로면봐줌은 그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서둘러 이동 속도를 올려 달려갔다.
너희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솔로면봐줌의 무투가 캐릭터가 궁극기를 통해 몸이 거대하게 팽창된다. 그러고는 고함 같은 기합을 내지르며 빠른 속도로 달려가 도망가는 적을 공격해 넘어뜨린다.
넘어뜨린 적을 확인하고 곧바로 다음 적을 향해 달려가는 솔로면봐줌. 탱커라서 적을 죽이지는 못하고 아군이 쉽게 죽일 수 있게 적군의 퇴로를 막으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이 냉기가 당신에게 좀 버거울지도 모르겠군요?
눕혀진 적이 일어나려는 타이밍을 노려 뒤늦게 합류한 ㅡ뚀미ㅡ가 망설이지 않고 궁극기를 사용했다.
얼음 전사의 궁극기. 얼어버린 검이 냉기를 흩날리며 적의 몸을 꿰뚫고 적 궁수는 일시적으로 캐릭터가 얼어 붙는다.
주변 바닥에 고드름이 생성되고 주변 공기도 냉기가 생긴 듯 뿌예졌다. 솔로면봐줌이 도망치던 적군을 잡아 그곳으로 던져버린다.
얼음 전사가 사용한 궁극기에 적이 닿으면 일시적으로 어는 모양. 졸지에 두 명이나 얼어 있자 ㅡ뚀미ㅡ와 형제님자매님이 부지런히 평타와 기술을 섞어 때리기 시작했다.
[팀] 솔로면봐줌: 더 데리고옴
나도 서둘러 합류해서 얼음 전사의 궁극기가 끝나기 전에 공격을 하는데 솔로면봐줌은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뒤에서 도와줄까 말까 고민하는 적군을 발견했나?
솔로면봐줌이 향하는 쪽으로 시야를 넓히는 스킬과 동시에 궁극기를 사용했다.
궁극기 사용으로 화면이 확대되며 숨어있는 적들의 모습이 크게 보인다. 거너의 궁극기는 공격용으로도 좋지만 이렇게 견제로 사용해도 좋았다.
‘적 팀 거너는 어디에 숨어있지?’
빨리 처리를 하지 않으면 방심하고 있다가 죽을 수도 있었다. 다행히 얼음 전사의 궁극기에 오래 버티지 못한 적군 두 명이 죽었다는 알림이 뜬다.
[팀] 솔로면봐줌: 얘들아, 아빠가 맘마 가져왔다!
솔로면봐줌이 멱살을 잡고 기어코 적군 한 명을 던져주었다. 순식간에 세 명 앞에 던져진 적군이 전의를 상실한 얼굴로 두들겨 맞기 시작했다.
[팀] 개나소나: 지뢰밭ㄱㄱ
남은 두 명은 궁수와 거너. 어디에 있는 건가 싶어서 위치를 옮겨 저격 시점으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때 올라온 것이 개나소나의 채팅.
나는 서둘러 뒤에 있는 지뢰밭에 연막탄을 던지고 저격을 다시 들었다. 연막탄을 맞고 일시적으로 궁극기가 해제된 적 거너의 모습이 확대되어서 보인다.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버려라.
뒤로 도망치려는 거너의 모습에 망설이지 않고 저격했다. 한 방, 두 방. 머리를 바로 맞히지 못해서 높은 대미지가 들어가지 않아 궁극기 두 번을 맞고서야 죽는다.
[염소구더기 님이 적군을 처리하였습니다.]
내가 거너를 죽인 것과 동시에 다른 이들도 남은 적들을 소탕한 건지 연속된 알림이 이어졌다.
다행히 이번 한타는 이겼구나. 비록 적 거너를 시원스럽게 이기지 못하고 개나소나의 언질이 있어서 죽이긴 했지만……! 그래서 조금 억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솔로면봐줌이 적군들 사이를 헤집으며 우리에게 한 명씩 던져주고, 차려진 밥상을 우리가 열심히 떠먹는 동안 적군들 사이에서 홀로 버티는 작전이 잘 먹히고 있었다.
아군들도 적 거너가 못하는 놈은 아니라는 걸 알아서 그 뒤부터는 견제를 해서 크게 연달아 죽는 일도 없었고.
‘…12데스. 이기기는 했지만… 2킬 12데스?’
물론 나 빼고 말이다.
다른 아군들이 쉽게 죽지를 않자 거너는 죽어라 나만 노렸고 결과적으로 내 데스는 아군, 적군을 통틀어 독보적이었다.
결과는 어쨌든 승리이긴 하지만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네.
마무리한 게임에 모두들 한마디씩 수고했다고 얘기를 남기는 걸 보며 나도 채팅을 하려는데 화면 위로 떠오르는 귓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야, 나 엄마 호출이라서 지금 가 봐야 할 듯. 넌 더 할 거임?”
“…됐어. 할 마음 사라짐. 같이 가.”
임해서가 휴대폰을 확인하고 사색이 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나에게 어떡할 거냐고 묻는 말에 나도 따라 일어서며 게임을 종료했다.
방금 귓말 덕분에 게임 할 기분이 쑥 꺼졌다.
요금을 계산하려고 계산대 앞으로 가니 알바생이 금액을 알려주며 팔을 뻗는다. 카드를 꺼내는데 뒤에서 가방을 챙기고 따라온 임해서가 얘기했다.
“나 개나소나랑 친추함.”
“뭐?!”
생각지도 못한 신박한 개소리에 계산을 하려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피시방 알바생이 당황하며 나를 부르는 소리가 얼핏 들려왔지만, 신경 쓸 정신이 아니다.
그저 덩달아 놀란 얼굴의 임해서에게만 온 신경이 집중해 있었으니깐.
“아니, 탱커 잘한다면서 귓말로 칭찬 왔길래 고맙다고 하다가… 뭐 어쩌다 보니?”
“그것밖에 못 하냐면서 비꼰 거 아니야? 제대로 생각해봐!”
“딱히 그런 뉘앙스는 아니었음. 무례한 어투도 없었고 나름 괜찮던데?”
알바생이 애처롭게 내 뒤통수를 보는 걸 본 모양인지 임해서가 먼저 나서 계산을 한다.
“너무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지 마. 마음에 드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
“그 아닌 사람이 나라고?”
“그렇지. 네가 뭔 큰 잘못을 한 건 아니지만 그냥 반응이 재밌어서 괜히 시비 더 거는 거 아니야?”
표정이 일그러진다. 그러다가 울상으로 쳐다보는 알바생의 모습에 정신을 차리고 카드를 건네었다.
마지막으로 왔던 개나소나의 귓말이 새삼 다시 떠올랐다.
[귓말] 개나소나: 거너 자신있게 픽 하길래 본캐가 거너 랭커인 줄 알았더니ㅋㅋㅋㅋ
[귓말] 개나소나: 양심 있으면 다시는 들지마라
짜증 나서 무시하는 상대한테 저렇게 시비 거는 놈을 보고 뭐라고? 반응이 재밌어서 시비 거는 걸지도 모른다고?
임해서는 한참이나 잘못 생각하고 있다. 개나소나는 닉네임처럼 그냥 개 같은 놈이다.
‘앞으로 거너만 죽어라 연습해서 그놈 머리통을 날려주고 만다.’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개나소나를 이제까지 참고 무시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놈이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시비를 거는 나쁜 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사람을 차별하다니. 심지어 실력으로 차별한다고?
전에도 얘기했지만 나는 다른 건 몰라도 게임 실력으로 무시당하는 걸 정말 싫어한다. 특히 거너 한정으로 지독하게. 한때 거너 랭커였던 자존심 때문이겠지.
길마 형이 들으면 그저 우습게 여기겠지만.
개나소나는 나에게 확실히 게임 폐인으로 살아갈 목표를 제공해 주었다.
임해서랑 헤어지고 바로 집으로 왔다. 원래 같았으면 바로 잤을 테지만, 나는 빠른 속도로 샤워를 하고 나와서 머리도 말리지 않은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밥을 먹을 때나 쓰는 작은 탁자를 펼쳐 그 위에 노트북을 올려두었다.
노트북 화면은 더 세이렌의 홈페이지를 띄우고 있었다.
“다음에는 찍소리도 못 하게 해주마.”
음산하게 웃으며 개나소나를 향한 분노 섞인 말을 중얼거렸다.
노트북이라서 피시방보다는 마우스 감도가 떨어질지는 모르겠지만, 게임은 어쨌든 연습이다! 천재적인 재능이 없다면 부지런하게 연습할 뿐! 게임 실력은 투자한 시간에 비례하니깐!
다행히 집에 오는 동안 개나소나는 접속을 종료한 모양인지 로그아웃 상태였다.
또 시비를 걸면 혈압이 오를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그나마 다행이네.
‘우선 템부터.’
게임은 아이템 빨을 무시하지 못한다. 좋은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건 기본 중의 기본. 그 뒤부터는 컨트롤만 차이가 있을 뿐. 나는 아직 기본도 안 된 햇병아리였다.
홈페이지에 거래되고 있는 템들을 보며 신중하게 골랐다.
사실 유니크 아이템을 거래하려고 올리는 놈들은 거의 없지만, 거너는 워낙 많은 사람이 자신만만하게 시도했다가 접는 경우가 많은 터라 다른 캐릭터들보다는 아이템 거래가 활발했다.
‘1년 동안 새로 나온 것도 있네.’
같은 유니크 아이템이라도 부가적인 옵션들은 다르다. 예를 들어 이동 속도 증가, 치명타 확률 증가, 공격 속도 증가 등 적용되는 것들이 달랐으니까.
거너에게 역시 좋은 부가 옵션이라면 치명타 확률 증가, 공격 속도 증가다.
여유가 된다면 도망칠 때를 대비한 회피 증가를 옵션으로 해둔 걸 사면 좋을 테고.
체력 증가 같은 옵션은 필요 없다. 다른 놈들은 모르겠지만 내가 추구하는 거너는 내 살을 내어줄 테니 네 머리를 두 동강 내겠다는 주의다.
무조건 공격력에 올인.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지만 그만큼 잘하면 재밌다.
‘비전투 시 치명타 확률 증가, 이거다.’
거너가 한타 시에 활약할 수 있는 기회는 그렇게 많지는 않다. 주로 비전투 시에 기습적으로 적들을 공격해 킬을 따오는 것으로 활약한다. 그러니 지금 보고 있는 부가 옵션은 거너보다 어울리는 캐릭터는 없을 것이다.
거래로 올려놓은 금액을 보며 조금 인상을 찌푸리다가 망설임 없이 현질을 했다. 큰 돈은 아니지만 그래도 게임에는 돈을 쓰지 않는 주의인데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나도 어지간히 화가 난 듯했다.
자조적으로 웃으며 생각보다 손쉽게 이루어진 거래에 반짝반짝하게 빛나는 인벤토리를 바라보았다.
아이템 중에서 가장 좋은 유니크 아이템. 일반 템들과는 달리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유니크 아이템을 장착하니 가슴이 웅장해진다.
지우 형이 본다면 지랄한다고 하겠지만. 그 형도 게임을 해봐야 내 마음을 알 텐데!
“와, 미친. 겁나 멋있어.”
게임 화면에 서있는 거너 캐릭터 옆으로 아이템을 조회하자 전부 반짝거린다. 덩달아 거너 캐릭터도 화려하게 빛난다.
내가 돈이 조금 더 있다면 코스튬도 샀겠지만, 그건 조금만 뒤로 미루자!
아이템을 바꿨으니 이제 핑계댈 건 없다. 남은 건 내 컨트롤 향상뿐.
망설이지 않고 게임에 접속했다. 한 판에 소요되는 시간은 평균 20분 정도.
몇 시간 정도 할까, 아주 잠깐 고민하다가 곧 지워냈다. 그냥 내가 질릴 때까지 하지, 뭐.
* * *
폐인. 그것은 하나에 심취해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무언가에 몰두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아직 게임 폐인이 되기에는 수양이 많이 부족한 모양이다. 게임을 시작한 지 6시간이 지났다는 경고 메시지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하품을 했다.
‘전성기에는 밤새면서 해도 끄떡없었는데.’
1년 사이에 체력이 떨어졌나? 아니면 공부가 하기 싫어서 더 게임에 집중할 수 있었던 건가?
몰려오는 잠기운에 시간을 보니 벌써 새벽 1시였다.
[팀] 소낙: 거너님 집중 좀
[팀] 염소구더기: ㅈㅅ 잠와서
[팀] 소낙: 학생임? 셧다운 안걸림?
[팀] 염소구더기: ㄴㄴ 성인
[팀] 소낙: 그럼 정신 줄 붙잡고 해ㅋㅋ
매정하긴. 그래도 잠깐 한타에 한눈을 팔았어도 크게 뭐라고 하지 않는 걸 보아하니 지금 거너 플레이가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다.
초반에는 계속 1~2킬, 운이 좋으면 5킬 정도를 하던 플레이가 시간이 지날수록 평균 5킬은 넘어가고 있었다. 적팀 조합에 따라 10킬이 넘은 적도 있었지.
물론 임해서랑 같이 했던 게임과는 달리 적군들 레벨이 낮아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팀] 소낙: 뒤에서 저격ㄱ 앞에서 깽판치겠음
[팀] 염소구더기: ㅇㅋ
이제는 어느 정도 딜을 하리라 믿는 모양인지 저렇게 대놓고 미션을 주기도 한다.
저렇게 밥상을 차려주는데 못 먹으면 욕을 한 사발 얻어먹겠지.
최대한 사각지대를 선점하여 거리를 벌려서 궁을 켰다. 간혹 잘하는 유저들은 거너 궁극기 소리만 듣고 도망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일부러 멀리서 켠 것이다. 거리가 멀면 소리는 들리지 않을 테니까.
물론 이렇게 하면 나도 저격을 할 수 있는 시야가 닿지 않을 수도 있어 위험하지만, 지금처럼 아군이 적군들 사이를 휘젓고 다녀주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아군이 있는 곳을 포함해서 일정 기간 시야는 더 넓어지니까.
붉은 잔상이 허공을 가르고 적을 향해 나아갔다.
[전체] 박민석: 아놔, 또 헤드샷
1Kill.
[전체] 박민석: 탱커 겁나 거슬리네;; 도망치지도 못하게 휘저으니까 거너 밥되네.
2Kill.
[전체] 졸라탱: 쿠X, 맛있는 밥이 취사되었습니다! 탱커가 차려준 밥상을 거너가 잘 ㅊㅓ먹고 있습니다!
[전체] 박민석: 해맑게 죽은 거 알리지 말라고 ㅋㅋㅋ
3Kill.
한 번은 빗나갔다. 남아있던 탄환은 네 개뿐이었기 때문에 궁극기는 자동으로 꺼졌고, 나는 얼핏 들려오는 발소리에 서둘러 뒤를 돌았다.
반사적으로 연막탄 스킬을 사용하니 때마침 기술을 사용하려던 적군의 스킬이 캔슬되는 모습이 보인다.
탱커들 사이에 적군이 네 명밖에 보이지 않아서 기습을 올 거란 예상은 했다. 머리가 굴러간다면 전멸될 법한 상황에서는 도망가거나 아니면 용감하게 뒤로 기습을 해올 거라고 생각했으니깐.
발소리가 들려서 다행이네.
기습을 눈치챈 아군들이 서둘러 뒤로 몰려온다. 어느새 남은 한 명도 죽이고 온 모양이었다.
[아군이 적군을 처리하였습니다.]
[적군의 전멸로 아군의 사기가 올라 공격력이 상승합니다.]
현재 스코어는 7킬 5데스.
그래도 아직 부족하네. 조금 더 손발이 잘 맞는 파티가 있으면 수월할 것 같은데……. 그렇다고 임해서랑 하기에는 유저들의 숙련도가 너무 높다.
우선 연습은 레벨이 낮은 유저들이랑 하고 싶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나, 싶어서 남은 게임을 진행하는데 채팅이 올라온다. 귓말이었다.
[귓말] 모타리: 구더기님이다!
스토커다. 저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이 판을 마지막으로 이제 자려고 했는데 하필 이 타이밍에 저놈을 만나게 될 줄이야.
그냥 마지막 판은 하지 말고 좀 더 일찍 잤어야 했는데. 아니, 그보다 쟤 학생 아니야? 왜 이 시간에 접속하는 거지?
[귓말] 모타리: 보고싶었어요 ㅠㅠ 제가 보낸 쪽지들 보셨어여?
[귓말] 모타리: 게임중이에요? 저도 같이 하고 싶어요!
[귓말] 모타리: 숨 돌릴 겸 잠깐 접속했는데ㅎㅎㅎ 진즉 들어올 걸!
[귓말] 염소구더기: ㄴ 막판
[귓말] 모타리: 아, 왜요~ ㅜ 저랑 한 판만 하면 안돼요?
[귓말] 염소구더기: 피곤함
[귓말] 모타리: ㅠㅠ
[팀] 소낙: 거너야 거너야 집중집중! ㅡㅡ
잠깐 답장을 하려던 게 시간을 잡아먹었는지 그새 또 한타가 이뤄지고 있었다.
아니, 전투 민족이야? 뭐 이리 싸움을 단기간에 또 걸어?
궁극기 탄환은 아직 두 개밖에 안 찼는데,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그래도 까라면 까야지.
막타라도 먹을 생각으로 서둘러 궁극기를 켜고 신중하게 두 발을 날리기 위해 집중하는데 채팅이 계속 올라왔다.
[귓말] 모타리: 구더기니임 ㅠㅠㅠ
[귓말] 모타리: 저 혼자 하다가 또 욕 먹을까봐 무서워요
[귓말] 모타리: 다들 구더기님처럼 착하지 않아요 ㅠㅠ
어쩌라고. 그럼 게임 끄고 잠이나 자든가.
저격에 집중해야 하는데 계속 올라오는 채팅이 신경 거슬렸다.
내가 답장도 안 하는데 지쳐서 나가떨어지지도 않나? 대답도 없는 상대를 붙잡고 뭐하는 거야.
[귓말] 모타리: 피곤하면 저랑 얘기 좀 하다가 자면 안 돼요?
[귓말] 모타리: 저 오늘 완전 재수탱이 만나서 열 받았는데
[귓말] 모타리: 구더기님한테 힐링 받고 싶어요!
[귓말] 염소구더기: ㄴ
내가 힐러냐? 현실에서 스트레스받은 걸 왜 나한테 풀고 지랄이야. 그 재수탱이나 스트레스받게 할 것이지.
그 뒤로 채팅을 무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모타리는 포기할 줄 몰랐다.
계속 올라오는 채팅들이 어찌나 빠른지 무시하려고 해도 계속 신경이 쓰인다. 저놈이 내 욕을 하고 있는 건지 계속 칭얼거리며 매달리고 있는 건지.
‘한 판만 더 하고 자려고 했는데.’
분명히 접속 종료했다는 알림이 뜨기 전까지 계속 귓말을 보내오겠지.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게임이 종료된 창을 보다가 시계를 바라보았다.
새벽 시간대에는 유저도 많이 없고 파티를 한 채 매칭을 돌리면 조금 더 쉽게 매칭이 될 것도 같은데. 조금 귀찮기는 하지만 잘 대해 주는 게 나뿐이라고 얘기하는 모타리가 조금 신경 쓰이기도 했다.
분명히 감이 얘는 뉴비가 맞다고 얘기해 주고 있는데, 뉴비한테 모질게 굴기는 힘들단 말이야. 게다가 요즘처럼 다른 게임에 유저가 빠져나가는 추세라면 더 소중하지.
스토커는 싫지만 더 세이렌은 좋다. 더 세이렌의 발전을 위해서 희생한다는 생각으로 나는 게임 대기 중인 거너를 보다가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모타리 님에게 친구 요청을 하였습니다.]
[모타리 님이 친구 요청을 수락하였습니다.]
왜 보내는 거냐고 묻지도 않고 잘도 받네.
친구가 되자마자 채팅 색깔이 노란색으로 변했다. 모타리는 그런 색깔 변화도 처음 보는 모양인지 우는 이모티콘을 쓰며 감격했다.
[파티] 모타리: 뭐예요, 구더기님 ㅜㅜ 완전 감동. 저 이제 그만 포기하고 자려고 했는데 밀당하셨던 거예요?
자려고 했다고? 하, 좀만 기다릴걸.
순간적으로 나온 탄식에 잠깐 멈칫하다가 이내 포기하고 채팅에 대답해 주었다.
[파티] 염소구더기: 나 거너 연습할건데 괜춘?
[파티] 모타리: 당연하죠! ㅎㅎ 하고 싶은 거 전부 하세요!
[파티] 염소구더기: 넌 머할거임?
[파티] 모타리: 음 저는 아직 캐릭터들 잘 몰라서…… 추천해 주실래요?
[파티] 염소구더기: 취향이 딜러? 탱?
[파티] 모타리: 상관없어요ㅎㅎ 저 게임은 이게 처음이라서 잘 몰라서요
남자 같은데 게임이 처음이라고? 물론 그럴 수도 있긴 하지만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케이스네. 공부는 못해도 게임은 잘해야 K-청소년이라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파티] 염소구더기: 그럼 탱ㄱㄱ 거너가 물몸이라서 앞에서 좀 지켜줘
[파티] 모타리: 와 제가 지켜주는 역할이에요? 떨린다
[파티] 모타리: 저 정말 최선을 다해서 지켜드릴게요!
[파티] 염소구더기: ㅋㅋ나 숨어서 저격하니까 따라다니지마 욕먹는다
게임 자체가 처음이라면 스킬 콤보가 그렇게 어렵지 않은 게 좋겠지. 레벨도 낮으니까 속성 선택은 못 할 테고, 기본 스킬 콤보가 그나마 쉬운 게…….
[파티] 염소구더기: 무투가 중에서 아시아인 골라서 하면 될 듯
[파티] 모타리: 검은 머리 말하는 거죠??
[파티] 염소구더기: ㅇㅇ
모타리가 알겠다고 얘기하고는 바로 시작하자고 말했다. 스킬 콤보가 어떤 건지 정보를 찾아보지도 않고 시작하는 저 패기라니… 멋있네. 누구는 처음에 물 정령사 할 때 스킬이랑 궁극기 정보 하나도 몰라서 쩔쩔맸었는데.
[방을 찾고 있습니다.]
[진행 중인 방에 입장하게 되었습니다.]
아, 미친 난입. 새벽에 하는 2인 파티인데 난입이라니.
흔하지 않은 이벤트 발생에 절로 앓는 소리가 나온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으면 다행이긴 하지만.
하필이면 연습 중인 거너랑 탱커 처음인 뉴비가 파티인데……. 같은 편으로 만나게 될 사람들에게 미안해졌다.
두 명이나 나간 게임이라면 지고 있는 판일 확률이 높겠지?
[파티] 모타리: 저 중간에 들어가는 건 첨인데ㅎㅎ
[파티] 염소구더기: 여기서 욕먹어도 맘에 담아두지마
[파티] 모타리: 넵!
난입을 기다리는 팀원들의 조합은 근딜 한 명, 원딜 두 명. 심지어 탱커도 없는 가시밭길이라니.
이런 내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타리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내가 추천해 준 캐릭터를 선택했다.
잘생긴 근육질의 아시아인 탱커 캐릭터. 궁극기는 온몸이 불에 달궈진 쇳덩이로 변해서 방어력을 극한으로 올리는 기술이다.
원거리 딜러의 스킬에도 별로 체력이 닳지 않고 근거리 딜러와 탱커들은 접촉 시 화상 대미지 때문에 섣불리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한다.
잘 쓰면 매력적이긴 하지.
[파티] 염소구더기: 아까도 말했지만 나 따라다니지마.
[파티] 모타리: 넵 열심히 커서 후반부에 지켜드릴게요!ㅎㅎ
방어구 아이템 위주로 캐릭터 레벨을 올리며 모타리가 선두로 나섰다.
난입된 게임의 상황을 살펴보니 아군이 눈에 띄게 지고 있었다. 아군 건물은 부서지고 적군들은 벌써 아군의 핵심 건물 근처까지 쳐들어온 후였다.
애매하게 방어와 공격을 같이 올리는 것보다 공격력으로 올인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캐릭터 레벨을 서둘러 올렸다.
거너와 탱커의 등장에 우리 팀은 잠깐 희망을 가지다가 이내 탱커의 레벨을 보고 실망하는 모습을 보였다.
[팀] 노랭줄무늬: 탱커 레벨;; 극혐;
[팀] 노랭줄무늬: 아무리 진 판이라고는 하지만ㅠㅠ 그래도 좀 기대했는데
[팀] 모타리: 연습캐요
[팀] 노랭줄무늬: 레벨 보면 연습인 거 알아요…….
이제 막 죽은 노랭줄무늬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모니터 너머로 전해지는 실망감에 웃으며 핵심 아군 건물로 밀고 들어오는 적군들을 바라보았다.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버려라.
난입이 두 명 들어오자 상황을 지켜보려는 모양인지 적군들이 뒤로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중 두 명을 아군 궁수가 활을 한방씩 맞혔다.
그 덕분에 적군의 남은 HP가 보였다.
완전 땡큐네.
둘 중 적은 체력을 가진 적을 타깃팅 하고 망설임 없이 저격을 했다. 연속 두 방.
밀리고 있는 상황이라서 캐릭터 레벨은 적군이 더 높았다. 그래서 방어력도 상대적으로 더 높았지만, 현재 내 거너는 방어력은 다 포기하고 공격력에 올인한 상태.
1Kill.
당연히 제대로 맞아 들어간 저격의 대미지는 적지 않았다. 근딜이 본능적으로 다른 도망치는 적군들을 쫓아가기 시작했고 모타리도 달려갔다.
나는 상단에 있는 미니맵을 통해 아군과 적군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아군이 있는 곳에서는 적군의 위치도 노출된다. 시야를 밝히는 것이 탱커의 역할. 다행히 모타리는 제일 선두에 서서 그 역할을 잘해내고 있었다. 의도를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임해서처럼 야들야들한 딜러들 던져주면 잘 받아먹을 자신 있는데.’
그런 요령을 바라기에는 모타리가 아직 너무 신생아지?
알아서 주워 먹을 생각을 하며 도망치는 방향 쪽에 위치한 암흑 지역으로 걸어갔다. 암흑으로 가득 찬 곳에 발을 내딛자마자 거너의 체력이 무섭도록 줄어드는 게 보였다.
오래 있으면 안 되겠네. 모타리가 적군 한 명을 문 모양인지 한타가 이뤄졌다.
적군은 네 명. 숨어있는 거너를 제외하고 한타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모타리와 궁수, 전사.
집중 마크 되어 두들겨 맞고 있는 모타리의 위치를 확인하고 서둘러 시야를 넓히는 스킬을 사용했다. 동시에 궁극기를 켰다.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버려라.
궁극기를 사용할 때마다 울리는 성우의 목소리. 아마 한타가 이뤄져서 적군들은 제대로 캐치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타리에게 들러붙은 적군을 먼저 공격하려고 타깃팅을 하는데 갑자기 모타리가 스킬을 사용했다. 밀어붙이기 스킬. 보통은 도망치지 못하게 적군을 구석 쪽으로 밀거나 아군 쪽으로 밀어줄 때 사용하는 스킬이다.
타격은 크지 않지만, 적군을 원하는 방향으로 밀어 버릴 수 있어 꽤 유용하다.
하지만 모타리는 아군 딜러들이 있는 방향으로 밀지 않고 암흑 지역 쪽으로 밀었다. 그래, 거너가 저격을 하고 있는 지점 앞으로.
영문도 모르고 다시 일어서는 적군을 서둘러 공격했다. 그리고 다운된 적군을 한 번 더 저격하자 다운 공격 대미지가 제대로 적용되어 큰 출혈을 토하며 죽는다.
2Kill.
[팀] 염소구더기: 야
[팀] 모타리: 넵?
팀 채팅으로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저를 부른 건 잘도 눈치챈다. 빠르게 올라온 모타리의 대답에 나는 여전히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물었다.
[팀] 염소구더기: 나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고 던졌어?
물론 어느 정도 게임 좀 하는 유저들이라면 상단에 있는 미니맵을 보고 아군의 위치 정도는 짐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막 시작한 뉴비가 상단 미니맵을 신경 쓰면서 게임을 한다고? 그리고 거너 위치에 맞게 적을 배달한다고?
거너가 제대로 죽이지 못했다면 방금 그 적은 암흑 지역으로 몸을 피해 도망쳤을 것이 분명했다.
암흑 지역으로 도망치면 가까이 가지 않는 한 제대로 시야가 보이지 않으니 잡기 힘들 테니까.
궁극기를 유지한 채로 끈질기게 모타리를 공격하는 적의 탱커 머리를 노렸다.
적군이 다운되자마자 우리 팀 전사가 좋다고 달려들었고, 그 타이밍에 모타리가 대답했다.
[팀] 모타리: 아
[팀] 모타리: 저격 소리가 들려서요
다가오는 적을 발견한 모양인지 급하게 대답했지만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는 이해했다.
뭐? 저격 소리가 들려서 적군을 여기로 던져줬다고? 착각한 거였으면 그대로 적군을 살려서 보내주는 무모한 일인데?
이건 미니맵을 보고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행동이다.
게임 센스. 예전에 길마 형이 내게는 거너 빼고는 게임 센스가 똥이라고 했을 때는 왜 그런지 이해를 못 했는데… 저런 걸 보고 게임 센스가 있다고 하는 거구나.
[팀] 모타리: 구더기님?
[팀] 염소구더기: 걍 편하게 형이라 불러
[팀] 염소구더기: 호칭 길잖아
[팀] 염소구더기: 탱 하는데 흐름 끊길라
게임 잘하는 탱커는 많다. 하지만 게임 센스는 타고나는 거지. 저놈이 과연 우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거너 연습을 하는데 비슷한 레벨 대에 게임 센스 있는 탱커가 있다?
‘탱 노예 주웠다.’
솔직한 욕망을 숨기지 못하고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