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그놈이 그놈이다
[팀] 자세히봐야몬생김: 물 정령 레어 코스튬 뜨신 분 맞죠? 닉넴이 특이해서 기억나네요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자세히봐야몬생김이 말을 이었다.
그래, 기억난다. 물 정령 레어 코스튬을 얻자마자 귓속말을 걸어오던 유저.
본인도 부캐인데 땡땡이 코스튬이 나왔다며 부럽다고 했지. 동시에 여성 유저가 아니면 그런 코스튬은 쓰기 힘들 것 같다고 막말한 유저. 닉네임을 보자마자 바로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끙, 앓는 소리를 내다가 이내 묵비권을 행사하고 적군 건물 쪽으로 뒤늦게 달려갔다. 얼음 전사가 유유히 따라 달려온다.
[팀] 자세히봐야몬생김: 친추 해도 된다고 말씀해주셨으면서
무시하자.
[팀] 자세히봐야몬생김: 저 농락한 거예요? ^^
…차단한 척할까. 그러면 아무 소리도 못 들은 척 행동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팀] 자세히봐야몬생김: 차단한 척하지 마세요.
눈치는 더럽게 빠른 놈.
적군 건물 근처에 매복하여 궁극기를 켰다. 확 넓어진 사거리에 닿는 적군은 없다. 몰래 기습을 하러 오는 놈은 없는 건가?
그동안 적군들은 유유히 적군 건물을 부수고 있었고 얼음 전사도 평타를 때리면서 채팅을 계속 올렸다.
[팀] 자세히봐야몬생김: 솔직히 조금 실망이에요
[팀] 자세히봐야몬생김: 친해지고 싶어서 친추 권유한 건 처음이었는데 이렇게 무시당할 줄은 몰랐거든요
[팀] 개나소나: 말 많네. 건물이나 쳐
[팀] 개나소나: 작업 걸다가 실패한 찌질이처럼 왜 그럼?
오, 굿.
모타리와 비슷하면서도 약간 더 찝찝한 질척거림에 진짜 진지하게 차단을 할까 싶었는데 개나소나가 대신 한마디를 던져주었다.
[파티] 염소구더기: 나이스! 좀 더 ㄱㄱ
[파티] 개나소나: 나 청개구리임 ㅅㄱ
그래서 좀 더 부추겼더니 바로 저 짓거리라니. 저 새끼는 도대체 정체가 뭘까? 실제로 아는 인간이라면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쥐어박고 싶네. 진짜 초딩인가?
[팀] 자세히봐야몬생김: ? 건물치고 있는데요? 눈은 장식인가?
[팀] 개나소나: ㅋ? 스킬은 안쓰고 평타만 느리게 때리면서 어느 세월에 건물 부수려고? 장난침?
[팀] 자세히봐야몬생김: 적 견제하면서 하잖아요
[팀] 개나소나: 적 견제는 지금 거너가 하잖아. 넌 채팅한다고 손이 느려진 거 뿐이고
[팀] 자세히봐야몬생김: 염소구더기님 때문에 제가 혼났네요
이렇게 가만히 있는 나를 걸고넘어진다고? 그래도 처음에는 신사 같은 이미지여서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그보다 저 자식 닉네임이 보면 볼수록 찝찝하다.
분명히 레어 코스튬 받자마자 만났던 때 말고도 다른 곳에서 닉네임을 본 것 같았는데? 착각인가?
[팀] 가재깡: 아니 왜 우리 구더기님 핑계를 대요? ㅡ,.ㅡ어이 없네
[팀] 가재깡: 보니까 이미 차단당하신 것 같은데 구질구질하게 굴지 말고 저 멀리 가셔요
[팀] 자세히봐야몬생김: 염소구더기님. 저 구질구질해요?
어, 존나. 쟤는 아까부터 나를 걸고넘어지는 거에 재미라도 들렸나. 고작 친추 하나 안 받아줬다고 왜 저렇게 질척거리는 거지?
[아군의 건물이 부서졌습니다.]
[아군의 방어력이 감소됩니다.]
아군들이 쓸데없는 말을 주고받는 동안 부지런히 건물을 부수던 적군은 이윽고 아군 건물을 먼저 부숴버렸다. 아직 적군 건물은 파괴도가 50%나 넘게 남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궁극기인 저격 시야로 적군들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팀] 염소구더기: 오는 중
겁도 없이 가장 먼저 달려오던 적 물 정령의 머리를 맞혔다. 물 정령이 힘없이 널브러지자 주변에 있던 적군들이 황급히 사각지대로 숨는 모습이 보였다.
물 정령을 한 번 더 맞히고 이제 빼려는데 두 전사가 앞으로 달려나갔다. 왼쪽에는 개나소나의 기본 전사 캐릭터가 있었고 오른쪽에는 자세히봐야몬생김의 얼음 전사가 있었다.
둘이 마치 짜 맞춘 것처럼 달려가는 게 신기해서 멀뚱히 쳐다보는데 개나소나가 넘어져 있는 물 정령을 제치고 그 뒤에 숨어있는 적 힐러에게 달려갔다.
당황한 힐러가 서둘러 도망치려고 하자 그 옆에 있던 적 탱커가 개나소나를 공격하려는 자세를 취했다. 개나소나가 적들이 서있는 빈 곳을 향해 높이 뛰어오른다.
엉뚱한 행동에 무슨 짓인가 싶어 저격을 켜고 보는데 개나소나는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 찰나에 궁극기를 사용했다.
내 칼이 오늘도 붉게 물들겠군.
적 탱커가 서둘러 방어 기술을 사용했지만, 같이 맞은 적 힐러는 제대로 치명타가 들어간 모습이었다.
와, 저 점프 내려오면서 궁극기가 사용 가능한 거였어? 근데 타이밍 맞추기 엄청 까다로울 것 같은데?
[개나소나 님이 적군을 처리하였습니다.]
적 힐러가 개나소나의 손에 순식간에 죽었다. 탱커는 아직 HP가 높은 편이었지만, 치유를 해줄 힐러가 없으니 다시 회복되기는 힘들겠지. 나는 그사이에 이제 막 일어서려는 물 정령에게 마저 저격을 사용했다.
1Kill.
[염소구더기 님이 적군을 처리하였습니다.]
[자세히봐야몬생김 님이 적군을 처리하였습니다.]
[자세히봐야몬생김 님이 적군을 처리하였습니다.]
그때였다. 물 정령을 죽인 것과 동시에 울리는 메시지.
아군의 더블킬 신호. 오른쪽으로 달려가던 자세히봐야몬생김의 더블킬이었다.
‘궁극기 보이스도 못 들었는데? 궁극기 없이 두 명이나 죽였다고?’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쉬운 일도 아니었다.
얼떨떨한 얼굴로 아군의 전적을 바라보니 개나소나와 내 킬 수는 1. 자세히봐야몬생김의 킬 수는 2.
[팀] 자세히봐야몬생김: 궁극기로 한 명밖에 못 잡네요? ^^
저건 내게 하는 말일까, 개나소나에게 하는 말일까. 누구에게 했든 비꼬고자 하는 의도는 확실히 느껴졌다.
도망치는 탱커를 따라가려던 개나소나는 너무 무리하지 않고 다시 돌아가다가―무리해서 죽으면 손해라서―그 채팅을 보고 상당히 열 받은 모양이었다.
[파티] 개나소나: 저 웃는 이모티콘 진짜 거슬리네
[파티] 염소구더기: 미투
[파티] 개나소나: 야, 앞으로 저놈 킬 무조건 막타 다 먹어
[파티] 개나소나: 내가 먹게 해줄 테니깐
그렇게 얘기한 개나소나는 정말 그 말대로 악착같이 자세히봐야몬생김만 따라다녔다. 바로 옆에 적군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시하고 자세히봐야몬생김이 거의 딸피로 만들어 놓은 적군에게 던지기 스킬을 사용했으니까.
그리고 순간적으로 멀어진 적에 황급히 따라붙으려고 했지만 이미 그 적군은 거너의 궁극기에 맞고 죽은 뒤였다.
2Kill.
[팀] 자세히봐야몬생김: ?
[팀] 개나소나: ^^
처음에는 의아하게만 보고 넘어갔던 자세히봐야몬생김은 계속 이어지는 비슷한 상황에 결국 개나소나의 질 나쁜 행동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눈치 못 채는 게 어려울 정도로 집요하게 따라붙기는 했지. 쓰레기도일한다가 왜 저런 쓰레기 짓을? 하고 감탄할 지경이었으니까.
4Kill.
그리고 그런 개나소나의 행동을 막지 않고 넙죽넙죽 주워먹던 나도 양심에 찔리기는 했지만 저지하지는 않았다. 둘 다 신경전을 벌이면서도 적군은 잘 물어오니까.
가만 보면 자세히봐야몬생김은 낮은 레벨임에도 잘하는 편이었다. 얼음 전사는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캐릭터였음에도 불구하고.
[팀] 자세히봐야몬생김: 자꾸 이런 식이면 곤란한데요
결국 6킬이나 내어주고 나서 제자리에 멈춰선 자세히봐야몬생김은 입을 열었다. 물론 뻔뻔한 개나소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지만.
[팀] 개나소나: 뭐
[팀] 자세히봐야몬생김: 염소구더기님
[팀] 자세히봐야몬생김: 이러면 저희 길드에 받아줄 수 없어요
길드? 덧붙인 말에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인상을 찌푸리는데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 하나. WINNER 길드원 모집 글을 올렸던 작성자 이름, 자세히봐도잘생김.
그리고 저 녀석은 자세히봐야몬생김이고 저번에 부캐라고 얘기했던 적도 있었다.
“아, X발.”
망했다. 면접 보기도 전에 인사팀장한테 찍힌 기분이다. 설마 저 부캐를 하는 얼음 전사가 WINNER 길드원이었을 줄이야. 내가 있었을 때는 저런 놈이 없었는데? 그사이에 핵심 멤버로 치고 올라온 건가?
[팀] 염소구더기: 본캐 위너 소속임?
[팀] 자세히봐야몬생김: 이제 말씀하시네요^^
[팀] 염소구더기: ?
[팀] 자세히봐야몬생김: 말했잖아요. 닉네임이 평범하지 않아서 기억났었다고
아니, 염소구더기가 뭐가 그리 특이하다고! …특이한가? 결국 알면서도 모른 척 떠본 듯한 행동에 기분이 나빠 인상을 찌푸렸다.
[파티] 개나소나: 위너가 더쎄에서 알아주는 길드 아니었나
[파티] 개나소나: 저놈 보니까 길드원들은 별로일 것 같은데
[파티] 염소구더기: 그래도 예전 길마는 착했음…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고렙 유저들만 받은 길드라서 인성은 크게 안 봤던 터라 인성이 좋지 못한 유저들도 있긴 했지.
[팀] 가재깡: ㅇㅎ 이거 면접판이었어여? 몰랐넹
[팀] 염소구더기: ㄴㄴ 우연으로 마주침
[팀] 쓰레기도일한다: 위너면 내가 아는 그 위너? 거기 아무나 못 들어가지 않나ㅋ
[팀] 개나소나: 길드원 보니까 아무나 들어가겠네
[팀] 자세히봐야몬생김: ^^?
게임은 집중을 하지 않고 쉴 틈 없이 채팅창이 올라가고 있었다. 게임 화면보다 채팅 화면에 더 시선이 갈 정도로.
[개나소나 님이 적군을 처리하였습니다.]
그 와중에도 개나소나는 숨어있는 적들을 잘 알아차리고 몰래 기습으로 죽이고 있었다.
[팀] 염소구더기: 어차피 결정권은 님한테 없는 걸로 아는데? 길마도 부길마도 아니잖아요
[팀] 자세히봐야몬생김: 그래도 의사전달은 할 수 있죠ㅎ 염소구더기님 얘기는 들었어요
[팀] 자세히봐야몬생김: 예전에 위너 소속이었다면서요?
[팀] 가재깡: ????헐??
[팀] 쓰레기도일한다: ;;;; 개에바네
설마 이걸 여기서 얘기할 줄이야.
개나소나의 플레이를 지켜보며 게임을 하던 나는 마우스를 쥐고 있던 손에 무의식적으로 힘을 꽉 쥐었다.
이거 혹시 은근히 엿 먹이는 건가?
[팀] 염소구더기: 누구한테 들었는데요
[팀] 자세히봐야몬생김: 마스터님이요ㅎㅎ
지금 WINNER 길마? 길마 형이 다시 복귀했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럼 길마 형이 얘기했다는 걸까? 하지만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길드원한테 무슨 이유로 내 얘기를 한 거지?
[팀] 자세히봐야몬생김: 농담이고 나중에 따로 연락 갈 거예요. 전적 보고 괜찮다 싶은 분들은 따로 연락 돌릴 테니까
[팀] 개나소나: 염소 전적 개똥일텐데
[팀] 자세히봐야몬생김: 다른 염소 전적은 달라서요
다른 염소 전적. 거너 랭커였을 때 사용하던 아이디, 염소똥이었을 때를 말하는 거겠지. 염소 관련 닉네임이 흔한 건 아닐 테니깐.
[파티] 개나소나: 본캐 랭커라더니 리얼이었네
개나소나도 약간 의외라는 뉘앙스로 얘기했다. 그가 얄밉기는 했지만, 솔직히 물 정령 하는 솜씨를 보면 나 같아도 본캐 랭커라는 소리가 안 믿기긴 할 거 같다.
게임이 끝났다. 대기 화면으로 넘어가고 자세히봐야몬생김의 친구 요청이 또다시 들어왔지만 망설임 없이 거절 버튼을 눌렀다.
‘괜히 찜찜하네. 내가 염소구더기가 부캐라는 걸 알았으면 길마 형이 쪽지를 보냈을 것 같은데.’
정작 길마 형의 닉네임을 확인해 봤지만 여전히 오프라인으로 잡혀있다. 틈틈이 확인을 했었지만 게임을 접속했다는 알림은 전무할 정도였고.
게임에 들어오기는 하는 건가? 길마 형이 돌아왔다는 건 루머였나?
쪽지를 보내볼까 하다가 포기했다. 과거에 말도 없이 게임을 접어서 미안하기도 하고 찔리기도 했으니까.
이제 와서 아는 척을 한다고 해도 좋아해 주지는 않겠지. 그 뒤에 길드전 일정도 잡혀있었는데 빠진 거니까.
[파티] 개나소나: 야
개나소나는 가만히 있는 걸 못 하는 모양이었다. 잠깐 동안 입 다물고 있었는데 그새를 못 참고 채팅으로 불렀다. 아님 관종인가?
[파티] 염소구더기: ?
[파티] 개나소나: 채팅으로 의사 전달 하려니까 답답한데 디X 하실?
키보드에 올려두었던 손이 멈칫했다.
개나소나 목소리를 직접 듣고 게임을 한다고? 물론 친한 사람들끼리 파티로 게임을 하면 자주 사용하는 프로그램이기는 했다.
게임에서는 크게 드문 일이 아닐 뿐더러, 얼굴을 몰라도 크게 상관없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상대방이 개나소나면 조금 찝찝하긴 한데.
[파티] 개나소나: 아 또 밀당하지 말고ㅡㅡ
[파티] 염소구더기: 부탁합니다, 하면 해줌
[파티] 개나소나: 부탁은 아닌데?
[파티] 염소구더기: 그럼 뭐가 예쁘다고 해주지?
[파티] 개나소나: 너도 겜생에서만 이렇게 성질 더럽냐? 설마 현생도 이러면 누가 예뻐해 주긴 함?
[파티] 염소구더기: 돈 많은 남자
[파티] 개나소나: ㅁ1친넘…….
뭐, 최근에 점심 식사 거하게 사주는 돈 많은 선배가 있긴 했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 구구절절 말할 필요 없다는 생각에 그 뒤로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개나소나는 그래도 연습을 해야 한다는 말은 진심이었던 모양인지 또 한 번 칭얼거렸다. 물론, 정확하게는 화를 꾹 참고 다시 한번 권유한 거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칭얼거리는 초딩이나 다름없었다.
[파티] 개나소나: 좋게 말할 때 하자고
[파티] 염소구더기: 좋게 말하는 꼴을 못 봤음
[파티] 개나소나: 나같이 좋게 얘기하는 놈이 어디 있다고? 그리고 너도 같이 하니까 할 만했잖아. 레벨도 올릴 거면 같이 하면 좋겠더만
[파티] 염소구더기: 그건 그런데… 나는 다정한 남자가 좋아…….
[파티] 개나소나: 아니 ㅅ1ㅂ 그놈의 돈 많고 다정한 남자 어디서 만나고 왔길래 여기서 지111랄 이냐고
결국에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열불을 토해내는 개나소나의 모습에 웃었다.
그래도 나름 참으면서 얘기하는 것 같기는 한데 화를 완전히 억누르지는 못하네. 그게 더 재미있긴 하지만.
[파티] 개나소나: 그냥 내가 얘기하는 거 듣기만 해라 입 안 열어도 되니까
[파티] 염소구더기: ㅋㅋㅋㅋ지시대로만 따르라고?
[파티] 개나소나: 네 마음대로 싸돌아다녀도 되니깐 내가 먹으라고 주는 거 잘 캐치하라는 뜻
[파티] 염소구더기: 그렇게 애원한다면야 뭐. ㅇㅇ못해줄 건 없지
[파티] 개나소나: 아니 애원이 아니라
[파티] 개나소나: 하… 네 마음대로 생각해라
[파티] 염소구더기: ㅇㅇ ㅎ
큰일 났네. 이제는 개나소나의 삐뚠 말투도 재밌었다. 현실에서는 소심하고 친구도 제대로 없는 사람일 테니 잘해 주리라 마음을 먹긴 했지만, 마음가짐이 달라져서 그런 걸까?
헤드셋을 준비하고 온다던 개나소나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디X는 잘 즐기지 않는다고 해서 못할 줄 알았는데 방법은 아는 모양이었다.
‘목소리는 어떠려나. 나보다 어리려나? 하는 짓은 보면 딱 초딩인데.’
마이크 기능은 꺼놓고 나도 준비를 했다. 어쩌다 보니 개나소나랑 파티까지 짜서 본격적으로 함께 게임을 하게 되었지만, 어차피 레벨을 빠르게 올리려면 같이 하는 파티원이 잘할수록 좋으니까.
게다가 현실 인생은 소극적이고 찌질할 것 같은 개나소나한테 잘해 주기로 마음먹은 참이었으니깐.
[파티] 개나소나: 켬?
[파티] 염소구더기: ㅇㅇ
―들려?
채팅에 대답을 하자마자 노트북에서 성인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어차피 자취방에서 혼자 하는 거라서―어차피 헤드셋도 없고―그냥 스피커로 켜놨는데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놀라고 말았다. 생각보다 볼륨이 크기도 했고 그리고…….
‘초딩이 아니잖아?’
목소리가 이제 막 변성기를 지난 학생의 것도 아닌 듯했다. 낮은 음성은 듣기 좋은 편이었는데 개나소나의 이미지랑 달리 점잖아서 연결이 잘못된 건 아닌지 아이디를 다시 확인했을 정도였다.
―안 들려?
[파티] 염소구더기: ㄴㄴ 들림. 초딩이 아니라서 놀랐네
―내가 초딩인 줄 알았다고?
황당했던 모양인지 헛웃음을 짓는 소리도 들려왔다.
어색해. 개나소나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채팅처럼 재수 없게 말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평범하게 대화를 해서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근데 느낌은 어쩐지 묘한데? 노트북에서 울리는 그 목소리가 묘하게 낯설지가 않았다.
―헛소리하지 말고 게임이나 하자, 염소야.
개나소나가 게임 시작을 누른 모양인지 게임을 시작하겠냐는 문구가 떴다. 수락을 누르며 채팅을 쳤다.
[파티] 염소구더기: 다정하게 부르지 마;; 토할 듯
―취급이 한결같네. 다정한 남자가 좋다며? 원하는 대로 해주고 있잖아.
[파티] 염소구더기: 그게 개나소나라면 파티 탈주
―구더기라고 부르기에는 길어. 멀쩡한 닉네임들 놔두고 왜 그런 걸로 한 거니, 염소야?
이 새끼 일부러 염소야, 하고 덧붙이네. 말투는 평범해도 역시 그 속은 어디 안 간다.
한 번이라도 좋게 넘어가지를 않네.
[파티] 염소구더기: 게임에서 이렇게 욕먹고 커서
[파티] 염소구더기: 초심을 잃지 않으려는 형님의 기특한 뜻이지
―초심이라는 단어도 알고, 그게 더 기특하네.
개새끼.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읊조리며 이를 갈았다.
게임 시작 화면으로 넘어갔다. 캐릭터를 선택하라는 문구가 뜨길래 거너를 선택했는데 그동안에도 개나소나는 캐릭터를 고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뭔 짓인가 싶어서 기다리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너 여자 아니었어?
[파티] 염소구더기: ?
이건 또 무슨 개소리지. 내가 하는 말투가 여성스럽다는 뜻은 아닐 텐데.
―아니, 네가 돈 많은 남자랑 다정한 남자가 좋다며.
[파티] 염소구더기: 돈 많고 다정한 사람 싫어하는 놈도 있음?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미친놈아.
[파티] 염소구더기: 그럼 나 여자인 줄 알고 적극적으로 디X 하려고 한 거임? 그렇게 안 봤는데 참…….
개나소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착실히 전사 캐릭터를 선택하는 걸 보고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여자에 환장한 놈은 아니야. 네가 오해 소지 있게 말해서 놀란 거지.
[파티] 염소구더기: ㅋㅋㅋㅋㅋㅋ? 아니, 근데 반대로 생각해도 내가 놀랍네. 내가 여자인 줄 알았으면서도 그렇게 시비를 걸었다고?
―그게 뭔 상관이야. 여자인 줄 알았다고 갑자기 다정하게 대해 주는 새끼가 이상한 놈이지.
그것도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다. 개나소나는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모두에게 평등하게 재수 없는 놈이었다.
이런 놈도 좋아하는 애한테는 다정하게 대하려나.
다정한 개나소나라니. 얼굴도 모르지만, 괜히 속이 울렁거려서 헛구역질이 나올 뻔했다.
[파티] 염소구더기: 한결같은 싸가지라서 조금 안심이네
[파티] 염소구더기: 같이 게임 하려는 그분한테도 지금처럼 행동함? ㅋㅋ
“같이 게임 하려는?” 하고 중얼거리던 개나소나가 순간 무슨 말인가 생각하는 듯했다. 이내 본인이 보조해 주고 싶다던 원거리 딜러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게임을 시작하고 개나소나가 아군 건물 방향으로 향했다. 적군 건물이 아닌 적군들이 몰려오는 아군 건물로. 그 뒤를 거너 캐릭터가 자연스럽게 따라갔다.
―그럴 리가. 내가 얼마나 내숭을 잘 떨고 있는데.
와, 자기 입으로 내숭이라고 했어. 얼마나 성격을 바꿔서 행동하길래? 움직이는 중이라서 채팅에는 대답하지 않고 목소리만 듣고 있었다.
방금 그 말은 조금 다정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던 터라 더 묘했다.
그나저나 정말 낯설지 않은 목소리란 말이야?
―근데 생각만큼 가까워지지를 못해서 고민 중인데… 보통 어린 애들은 먹을 거 사주면 좋아하지 않아?
아니, 같이 할 원거리 딜러가 대체 누구길래 갑자기 연애 상담질이야. 여자 친구는 아니라고 했으니 그냥 관심 있는 여자애인가.
아군 건물을 공격하는 적군들의 모습이 보였다.
개나소나의 스피드가 갑자기 올라갔다. 이동 속도를 올리는 아이템을 먹은 거겠지. 그리고 이렇게 기습을 가는 걸 보면 공격력을 올리는 아이템도 먹었을 테고.
미친놈, 초반부터 도핑질이네.
질세라 나도 공격력을 올리는 아이템을 먹고 적당한 거리까지 이동해 궁극기를 켰다.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버려라.
갑작스러운 개나소나의 등장에 거너 궁극기 보이스를 눈치챈 적군은 없을 것이다.
개나소나를 발견한 적군들이 건물에서 시선을 떼고 공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걸 예상하고 이동 속도를 올린 개나소나는 바로 앞에 있는 원딜부터 공격했다.
―잘 먹는 걸 보면 먹는 건 참 좋아하는 것 같던데.
원딜이 공격받자 적 힐러가 궁극기를 쓰려는 모습이 보였다. 고작 원딜을 위해 궁극기를 쓰려는 것도 어이없긴 하지만, 그래도 저걸 그냥 봐줘서는 안 되겠지.
적 힐러에게 붉은 점이 닿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붉은 섬광이 연달아 두 번 스쳐 지나갔다.
1Kill.
[염소구더기 님이 적군을 처리하였습니다.]
개나소나가 넘어진 원딜을 스쳐 지나가 가까이 다가오는 탱커를 피했고, 그사이에 원딜이 주섬주섬 일어나 도망치려 했다.
2Kill.
도망치려고 한 발자국 떼자마자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슬쩍 희망을 품고 도망가려던 적을 죽이는 쾌감도 좋지. 지금쯤 적 원딜은 현실에서 온갖 욕을 다 중얼거리고 있을 거다.
―다음에도 밥 사 준다고 하면 같이 가려나? 드라이브도 좀 하면서 좋은 곳에 데려가고 싶은데. 저번에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비싼 걸 못 사줘서 신경 쓰여.
탱커를 피해 가던 개나소나가 도망치는 나머지 적군 둘을 힐끔 바라보았다. 하지만 무리하게 쫓아가지는 않았다. 초반 리스폰이 짧으니 금방 부활할 적을 경계하는 거겠지.
무리하게 쫓아가면 바로 버리려고 했는데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쉽다고 해야 할지.
탱커에게 달려가 연막탄 스킬을 사용했다. 그 틈에 개나소나가 지속적으로 평타를 때리며 대미지를 주는 모습이 보였다.
[적군의 건물이 파괴되었습니다.]
[적군의 방어력이 감소됩니다.]
남은 아군들도 착실하게 적군 건물을 부수고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 모습을 보니 탱커에게 궁극기를 무리하게 사용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틈틈이 연막탄만 던져주며 개나소나의 플레이를 구경했다.
―사람이 말하면 듣는 시늉이라도 해줄래?
게임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디X를 하자던 개나소나는 게임 관련 말은 단 한마디도 안 하고 연애 상담질만 하면서 뻔뻔하기까지 했다. 연애 상담질이 아니라 본인 혼자 썰 풀고 한숨만 내쉰 거지만.
[파티] 염소구더기: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나였으면 님 엄청 귀찮고 싫을 듯
물론 그렇게 관심을 가지고 맛있는 것도 사주면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물론 개나소나가 내 개인적인 의견을 존중해 줄 위인은 아니었다.
―너한테 그럴 일 없으니까 그런 걱정은 염소 똥에 버리렴, 구더기야.
저것 봐. 기껏 대답해 줘도 말 하나는 참 예쁘게도 해요. 듣기 좋은 목소리 때문에 잠깐씩 깜빡하지만 저건 망할 개나소나다. 정신 차려라, 손지언.
[파티] 염소구더기: 차라리 염소라고 불러 네가 하면 욕같아
―염소라고 불러도 뭐라고 하고, 구더기라고 불러도 욕 같다고 하고.
[파티] 염소구더기: 그냥 입 다물어
―그럼 안 돼, 염소야. 그러면 디X를 켠 보람이 없잖아?
다정한 목소리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럼 다시 끄든가, 미친놈아.
하지만 개나소나는 그 뒤로도 계속해서 연애 상담을 빙자한 본인의 고민만 토로했다. 게임에 관련한 내용은 ‘아, 그걸 놓쳐?’라는 핀잔의 내용만 있을 뿐.
덕분에 정말 진지하게 몇 번이나 스피커를 끌까 말까 고민했었다.
“아, 피곤해.”
그래도 개나소나랑 함께 하는 게임들의 승률이 혼자 할 때보다는 확연히 높았기 때문에 새벽까지 달리고 말았다.
피곤한 눈을 문지르며 강의실로 들어서는데 임해서가 아는 척을 해온다.
“왜 이렇게 피곤해 보여? 네가 밤샘 공부를 했을 리가 없고.”
“더쎄 레벨 올린다고.”
“오, 생각보다 열심히 하네? 거너로 계속 올인하는 거야?”
“응. 내 취향은 거너야.”
“뭐 잘하면 그만큼 멋있는 캐릭터가 없긴 하지. 레벨 업 하는 거 도와줄까?”
“괜찮아. 지금 같이 하는 사람 생겼어.”
임해서가 오? 하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의외라는 느낌도 있고 기특하다는 느낌도 있었다.
“별일이네. 낯가림도 있으면서. 게임이라서 그런가?”
“얼굴을 직접 보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나 낯가림 별로 안 심한데.”
“가슴에 손을 올리고 말해 봐. 너랑 친해지려고 다가오는 사람들 완전 경계하는 주제에.”
얼굴은 순한데 성격은 예민해, 하면서 임해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대로 모르는 타인을 경계하는 건 당연한 건 아닌가? 그런 생각에 인상을 찌푸리는데 임해서가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교수님이 오신 모양이었다.
전공 서적을 펼치고 시큰둥하게 수업 준비를 하는데, 시야에 눈에 띄는 머리 색이 들어온다.
현실에서 보기 드문 분홍 머리. 우리 실습 조장.
‘진짜 생긴 거랑 따로 노는 놈이란 말이지.’
앞자리에 앉아서 집중을 하고 있는 뒤통수는 열심히 필기를 따라 쓰는 듯 살짝 숙인 채였다.
밝게 탈색한 머리에 시선을 끄는 화려한 외모. 담배를 피우는 모습도 자연스러워서 학점은 신경도 안 쓰고 놀러만 다닐 거 같은 스타일인데.
저런 애들은 공부만 한다고 게임도 안 하겠지. 역시 나랑 안 맞아, 라고 생각하면서 휴대폰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몰래 보고 있을 때였다. 무음으로 메시지가 왔다는 알림 이미지가 보인다.
‘지우 형?’
강의 시간엔 휴대폰을 안 보는 형이 웬일로 메시지를 보낸 거지. 의아한 마음에 메시지를 클릭해서 읽어 내려가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사촌: 함께 점심 식사 해주실 손지언 님을 구합니다, 라고 전달하래.]
[사촌: 너 오면 나도 사준다는데.]
“…….”
분명히 문정하라는 그 사람이 부탁한 거겠지. 안 봐도 뻔하다. 지우 형 성격으로는 공짜로 밥을 얻어먹을 수 있으니 나를 꼬시는 걸 테고.
그래도 이번에는 둘이서가 아닌 지우 형도 같이 먹는 거니까 조금 덜 부담되기는 하는데. 동시에 이렇게 계속 엮여도 되나 싶기도 하고.
아니, 그놈의 바퀴벌레 한 번 잡았다고 왜 이렇게 들이대는 거지?
[나: 그럼 메뉴는 내가 정할래.]
잠깐 고민하다가 답장을 보냈다. 조금은 변덕일지도 모르겠다. 경계심이 많다는 임해서의 말 때문에 그런 건 절대 아니고.
* * *
오늘은 오전 강의만 있는 날이었기 때문에 자리를 정리하던 임해서가 나를 향해 물었다.
“피시방 갈래?”
“오늘은 패스. 나 지우 형이랑 밥 먹기로 했어.”
“배신자. 나도 데리고 가!”
“지우 형 친구도 있는데?”
“너 그 형이랑 친해?”
“아니.”
“그럼 괜찮아. 너보다 친해질 자신 있음.”
이 자식이 내 사교성을 완전 바닥으로 보네?
하지만 자신만만한 임해서에게 차마 단호하게 아니라고 할 수는 없어서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민은 짧았다. 지우 형도 어차피 임해서를 알고 있고 문정하 그 사람도 딱히 뭐라고 할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내 수락에 임해서가 웃으며 뭘 먹으러 가냐고 물었다. 고기나 구우러 가자는 말에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비싸.”
“응? 지우 형이 사 주는 거 아니야? 더치페이임?”
“국밥. 다른 메뉴는 허용 못 함.”
“아니, 왜 많은 메뉴 중에 하필 국밥을? 국밥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좀 김새는데.”
임해서가 불만스럽게 칭얼거렸지만 한 귀로 듣고 무시하며 걸음을 옮겼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왔는데, 두 사람은 벌써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우 형님!”
“응? 뭐야, 해서도 같이 온 거야?”
마치 본인이 사촌 동생인 것처럼 신나서 달려가는 임해서의 모습에 손지우가 아는 척을 해왔다. 그리고 그 옆에 서있는 문정하. 갑작스러운 임해서의 합류에도 불구하고 그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고 걸어오는 내게 시선 고정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차가운 인상의 미남이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하나로 분위기가 달라지니, 참 신기할 정도였다.
“지언아, 안녕.”
“…안녕하세요.”
잠깐의 텀을 주고 고개를 가볍게 꾸벅이며 인사를 하니 문정하가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고작 인사 한 번에 그런 반응이라니,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뭐 먹으러 갈래? 먹고 싶은 거 말해 봐.”
문정하가 자연스레 옆으로 다가와 다정히 질문하자, 임해서가 우리 둘을 번갈아 본다. 손지우는 그러려니 하는 얼굴이었고.
한 명은 누가 봐도 호감 있는 얼굴이고, 한 명은 불편하다는 얼굴로 시선을 미묘하게 피하고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국밥이요. 이 근처에 맛있는 데 알아요.”
“국밥? 더 비싼 거 먹어도 되는데.”
“저 국밥 좋아해요.”
“그래? 그럼 지언이가 좋아하는 걸로 먹으러 가야지.”
국밥 얘기를 하자마자 손지우는 몇 번 함께 가본 적이 있는 국밥집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얼떨결에 따라가던 임해서가 힐끔힐끔 나를 쳐다본다. 그제야 문정하에게 임해서를 소개해 주지도 않은 걸 깨달았다.
“선배님, 쟤는 제 친구 임해서라고 하는데 오늘 같이 밥 먹어도 되죠?”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간호학과 임해서라고 합니다!”
임해서가 씩씩하게 허리를 숙여 보이며 인사를 했다. 타과이기는 해도 어쨌든 같은 학교에 다니는 선배였으니 좋게 보여서 나쁠 건 없다는 생각 때문이겠지.
임해서의 인사를 시큰둥하게 바라보던 문정하는 이내 올려다보는 내 시선에 아차, 싶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주었다.
“문정하. 지언이 친구면 당연히 같이 먹어도 돼.”
임해서에게 짤막이 이름만 내뱉고는 이내 다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너무나 상반됐다.
얼떨떨해하는 우리들의 모습에 손지우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해서야, 저놈은 신경 쓰지 마. 원래 인성이 곱지 못한 놈이야. 지언이가 좀 특이 케이스고.”
“…제가 혹시 눈치 없이 끼어들었나요?”
“아니. 그런 걸 신경 쓰는 놈은 아니니까 편하게 있어. 너한테 아예 관심조차 없을 테니까.”
“아하.”
임해서와 시선이 마주쳤다. 나 역시 나를 대할 때와는 너무나도 다른 태도에 조금 얼떨떨한 참이라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어이없는 얼굴로 문정하를 올려다보니 왜 그러냐는 듯 웃음을 짓는다.
“왜?”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영양가 없는 대답에도 문정하는 그렇구나, 하고 눈을 곱게 접으며 웃었다.
뭘까, 이 사람. 왜 이렇게 나를 다정하게 대하는 걸까.
휴대폰을 꺼내 손지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문정하가 관심 있게 보고 있었지만, 다행히 무례하게 메시지를 훔쳐보는 짓은 하지 않았다.
[나: 형.]
[사촌: 왜?]
임해서와 대화를 하면서 휴대폰을 보고 있던 참이라 손지우의 답장은 빨랐다.
그에게 서둘러 메시지를 보냈다.
[나: 혹시 이 선배 나한테 잘해주는 이유 말이야.]
[사촌; ?]
[나: 내 장기를 노리는 건 아니겠지? 그럼 돈 많은 것도 이해되는데.]
“풉! 푸하하학!!”
“지우 형?! 갑자기 왜 그래?”
갑자기 잘만 대화를 나누던 손지우가 실성한 듯 웃어대자 놀란 임해서가 잔뜩 당황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포복절도를 하는 그 뒷모습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남은 진지하게 상담하는데 저렇게 웃어?
“저 새끼가 미쳤나…….”
그때 마찬가지로 인상을 찌푸리며 손지우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문정하의 입에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내게 얘기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온도에 놀라 쳐다보니 내 시선을 눈치챈 그가 태연하게 왜 그러냐는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아니, 순간적으로 개나소나 느낌이랑 엄청 비슷했는데. 내 착각이겠지?
“아직 근딜 필요하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방금 욕을 했던 일은 없었던 것처럼 태연히 새로운 화제를 꺼내는 문정하. 게다가 꺼내는 화제가 하필 그놈의 더쎄 이야기다.
“네, 안 해봤는데요. 같이 하는 사람도 있어서 괜찮아요.”
최근에 구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개나소나의 성격을 빼고 실력으로만 따지자면 나쁘지 않은 조력자였다. 나름 합이 잘 맞기도 했고.
“저번에 말했던 탱커?”
아, 그러고 보니 요즘 모타리가 잘 안 들어오네. 애초에 게임 접속을 잘하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기는 했다. 게임을 자주 하는 스타일도 아닌 것 같았고.
벌써 접었나, 싶기도 했지만 어쩐지 그놈 성격상 접으면 접는다고 구구절절 쪽지함을 채워놨을 것 같으니 그건 아닐 것 같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문정하에게 조금 찔리기는 한다.
개나소나는 엄밀히 말해서 근딜이니까. 마법사가 주캐인 줄 알았지만 전사가 주캐이고 생각보다 킬에 욕심도 내지 않고 팀의 승리만 보고 움직이는 유저.
말하는 모양새가 재수 없고 첫인상이 최악이었지만, 요즘은 나름 그럭저럭 손발이 맞아가는 파티원이긴 하지.
“그럼 새로운 사람이랑 하는 거야? 나 1번 후보 아니었어?”
문정하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표정인데 또 어울리기도 해서 묘하게 죄책감이 들었다.
“조건이 있었던 걸로 아는데요.”
“아.”
문정하가 앞서 걸어가는 손지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미미하게 찌푸려지는 인상에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나도 고딩 때 지우 형을 계속 게임의 세계로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지. 저래 봬도 공부만 하는 범생이였고 기왕 쉰다면 활동적인 운동을 선호했다. 그러니 게임 같은 건 애초에 관심 밖이었지.
“너무 어려운 조건인 것 같은데.”
“힘내세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어느새 가게 앞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손지우는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가까운 테이블 의자를 빼내며 얘기했다.
“사장님. 여기 돼지 둘, 따로 하나, 순대 하나요!”
“손지언 너는 순대국밥 맞지?”
“응.”
내가 자주 먹는 메뉴는 임해서랑 손지우 둘 다 잘 알고 있으니 알아서 시킨 거겠지. 따로국밥은 손지우 메뉴일 테니 문정하는 돼지국밥인가? 뭔가 저번에 사 준 씀씀이를 봐서 국밥을 먹는 모습이 잘 매칭이 안 되기는 한다. 국밥을 먹어보기는 했겠지?
“밥 먹고 뭐 할래? 피시방 가서 더쎄 할래?”
음식을 기다리면서 수저를 꺼내던 임해서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솔깃한 제안이긴 했지만 손지우가 바로 인상을 구기며 끼어들었다.
“날씨도 좋은데 뭔 피시방이야.”
“아, 형! 피시방은 이런 날씨에 가야 더 좋다고요!”
“신박한 소리를 그럴듯하게 하네. 너희도 이제 애들도 아닌데 게임 같은 건 그만해. 문정하도 게임 얘기하던데 설마 셋이 같은 게임 하는 건 아니지?”
입을 꾹 다물었다. 엄밀히 말하면 맞긴 하지? 같이 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내 반응에 임해서는 요령 좋게 문정하도 더 세이렌을 하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다. 아까까지 불편해하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눈을 빛내며 문정하를 바라봤으니깐.
“형님도 더쎄 하세요? 레벨 몇인데요?”
“138.”
“오, 그럼 좀 오래 하셨네요! 손지언도 제가 끌어들여서 얼마 전부터 시작했거든요! 이제 레벨 30은 됐으려나?”
레벨 56이거든. 하지만 중요한 것도 아니라서 굳이 정정해 주지 않았다.
아니, 문정하가 레벨을 듣자마자 귀엽다는 듯 쳐다보는 시선에 다시 정정할까 고민했지만, 어차피 138 앞에서는 레벨이 30이든 56이든 똑같은 잔챙이겠지.
‘그러고 보니 개나소나 레벨도 138이었던 것 같은데.’
별 이상한 우연이라고 생각하며 음식이 나오는 걸 기다렸다. 국밥이라서 그런지 확실히 금세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순대국밥이 앞에 놓였다.
순대를 식혀서 먹으려고 뚜껑에 따로 옮기고 있는데 임해서는 문정하에게 계속 더쎄에 관해 물어댔다.
저 미친 사교성. 이제는 문정하가 단답을 하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모양이다.
“혹시 길드는 가입하셨어요? 제가 있는 길드에 들어오실래요?”
“지언이도 있어?”
“아니요! 길드 제한이 레벨 120 이상이라서.”
“그럼 됐어. 남들이랑 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해.”
“아쉽네요. 그럼 주로 하시는 캐릭터는 뭐예요? 저는 탱커고 손지언은 원딜이에요!”
남의 정보를 왜 저렇게 묻지도 않았는데 알려줘? 손지우는 내 순대 한 개를 당당하게 훔쳐 가며 게임 얘기를 하는 둘을 보며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한심한 대화겠지. 역시 저런 사람을 피시방으로 데려가는 건 무리가 있어.
“주로 하는 건 원딜이고 잘하는 건 전사.”
“엥? 잘하는 건 근딜인데 왜 원딜을 주로 하세요?”
“못하니까 연습하려고. 하지만 요새는 다시 전사로 하고 있어.”
응? 순대를 입에 넣으며 문정하를 돌아보았다. 내 시선에 무표정하던 그가 눈웃음을 한 번 짓고는 물잔을 건네주었다.
아니, 물 달라는 뜻으로 쳐다본 건 아니었는데.
‘아까부터 묘하게 개나소나랑 겹친단 말이야?’
레벨도 그렇고 요즘 전사로 플레이한다는 사실도 그렇고. 게다가 개나소나도 문정하랑 똑같이 마법사 캐릭터는 못해서 하는 거라고 얘기했었다.
이게 단순히 우연인 걸까?
“그럼 조합 괜찮네! 저희랑 같이 피시방 가요!”
“저희?”
“네! 어차피 손지언은 피시방 가자고 하면 무조건 오케이거든요.”
“그래? 좋아. 대신에 손지우도 같이 데리고 가면 갈게.”
“미친놈아, 거기에 나는 왜 끼워 넣어?”
손지우가 인상을 확 구겼다. 게임 이야기만 하는 것도 참고 기다려 줬는데 이제는 피시방도 같이 가서 게임을 하잔다.
게임이라고는 휴대폰으로 테트리스 같은 거나 몇 번 해본 게 전부였기에 손지우는 그들이 말하는 원딜, 근딜, 탱커라는 개념도 잘 모르는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을 데리고 피시방을 가자고?
“형, 같이 가요. 제가 가르쳐 줄게요! 피시방비도 손지언이 대신 낼 거예요!”
“나 돈 없어.”
“그럼 내가 내줄게.”
어쭈? 문정하가 미소를 지으며 은근슬쩍 임해서를 지원 사격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손지우를 피시방으로 인도하시겠다?
임해서는 어느새 손지우의 팔에 매달리기까지 했다.
“혀엉. 저희 다 피시방 갈 건데 형만 먼저 집으로 보낼 순 없어요! 제 마음이 너무 아프잖아요!”
“해서야, 헛소리 하지 마라. 피시방 갈 거면 나는 혼자 집에 가서 복습할 거야.”
“이렇게 화창한 날씨에 공부라니! 지우 형, 진지하게 미쳤어요?”
“게임에 미친 네가 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아, 그럼 딱 한 시간만! 한 시간만 하고 그래도 재미없으면 다 같이 나오는 걸로 해요! 어때요?”
한 시간? 고작 게임 한 시간을 누구 코에 붙이라고?
더 세이렌은 게임 한 판에 약 15~20분 정도 소요된다. 한 시간이면 고작 세 판 정도밖에 못 한다는 이야기,
하지만 이런 나와는 달리 손지우는 ‘한 시간씩이나?’라는 얼굴로 기겁을 했다.
“무슨 게임을 한 시간씩이나 해? 됐어, 너희들끼리 가.”
“형! 저 저번에 형이 주기로 한 생일 선물 아직 못 받았는데.”
“…그거 내가 나중에 따로 밥 사주기로 했잖아.”
“밥은 됐고 피시방 1시간! 지우 형의 시간을 선물로 받을게요. 이 정도면 땡잡은 거 아니에요? 피시방비도 내줘, 생일 선물은 돈도 안 들고!”
손지우가 입을 다물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돈이 부족한 건 아니지만, 자취도 하고 여자 친구도 있으니 돈을 아낄수록 좋은 입장이라서 그런 걸까.
잠깐 고민하던 손지우는 이내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한 시간만이야.”
“아싸! 그럼 밥 얼른 먹고 게임 하러 가요!”
미쳤네. 그 손지우가 피시방을 간다고? 그것도 프린트 목적이 아니라 게임을 하러?
황당한 마음에 숟가락만 쥐고 멍하니 있는데 숟가락 위로 두툼한 돼지고기가 하나 올려진다. 문정하는 젓가락을 든 채 얄미울 정도로 잘생긴 얼굴로 웃고 있었다.
“뭐 해? 게임 하러 가야 하는데 얼른 밥 먹어야지.”
“…이것도 조건 클리어로 처리되나요?”
“어쨌든 피시방비는 내가 내주기로 했으니까.”
이런 젠장. 손도 안 대고 코를 풀어버린 문정하의 모습에 돼지고기를 신경질적으로 입에 넣어 씹어 먹었다. 물론 그 모습마저 귀엽다는 듯 바라보는 문정하는 미친놈 같았지만.
피시방에 도착한 임해서는 신나게 뛰어 들어갔고 그 뒤를 자연스레 문정하가 따라 들어갔다.
“뭐야, 다들 이거는 안 가져가?”
그동안 프린트를 하러 피시방을 왔었던 손지우가 입구 앞에 있는 비회원 카드를 집으며 당황한 어조로 물었다. 우리 몫까지 들고 오려는 모습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렸다.
“됐어. 나랑 임해서는 이미 회원이고 형도 자리에 가서 바로 회원 가입 하면 돼. 그게 더 저렴해.”
“회원 가입? 어차피 오래 할 것도 아닌데.”
“더 세이렌은 유료 게임이라서 회원 가입 하는 게 나아.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그냥 내 말 들어, 형.”
손지우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착하게 비회원 카드는 내려놓고 따라오는 걸 보니 다행이다.
솔직히 친구라서 문정하가 손지우를 챙기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럴 기색은 전혀 없어 보였다.
“지우 형! 여기 앉아!”
임해서와 문정하는 가운데 두 자리를 비워놓고 앉은 상태였다.
손지우가 임해서의 부름에 자연스레 그의 옆에 가서 앉자 당연히 남는 자리는 문정하 옆. 친절하게도 웃으며 의자를 빼내 주어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더 세이렌 할거지? 내가 친구 초대할게.”
“전 일단 지우 형 좀 가르쳐 주고 들어갈게요. 임해서랑 먼저 하고 계세요.”
“형님! 저랑 손 좀 풀고 있어요!”
내 말에 이어 임해서가 신난 목소리로 얘기했다. 문정하가 미미하게 찌푸려지는 인상을 애써 펴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큰소리로 서로 대화를 주고 받는―주로 임해서가 말할 뿐이었지만―모습에 자리를 양보해 줄까 싶었지만, 일어나려는 기색을 보이면 문정하가 바로 쳐다보는 바람에 그러기도 힘들었다.
아니, 본인 친구나 챙길 것이지 왜 나한테 질척거리는 거야.
귀찮음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는 손지우 컴퓨터를 보며 얘기했다.
“우선 얼마나 할지 모르니까 임해서 부캐로 들어갈 건데, 조작 방법만 간단하게 알려줄게. 간단하게 원하는 캐릭터를 선택해서 적군 건물을 모두 부수면 이기는 게임이야.”
“건물을 부순다고? 폭탄 같은 걸 설치하는 거야?”
“그건 아니고, 총이나 검 또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캐릭터들 힘으로 건물을 부수는 거야. 그리고 그걸 방해하는 적군과 싸워서 죽이면 되고.”
“…….”
“아니, 그렇게 봐도 게임이라는 게 원래 서로 죽고 죽이는 거지. 별로 잔인하지는 않거든?”
서로 죽인다니. 손지우가 심각한 표정으로 컴퓨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손지우를 보자니 머리가 아프다.
요즘 세상에 게임을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진짜 여러 의미로 대단한 형이네.
“형, 그냥 가볍게 생각해요. 이것도 은근히 머리를 굴려가면서 하는 전략 게임이라서 오히려 형한테 맞을지도 몰라요.”
부캐 아이디를 대신 입력해 준 임해서가 가볍게 생각하라며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다. 그리고 제 닉네임을 문정하에게 알려주곤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문정하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솔로면봐줌?”
“넹. 왜요? 혹시 저랑 마주친 적 있으세요?”
하긴 둘 다 레벨이 높을 정도로 더 세이렌을 좀 하던 인물들이니 우연히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문정하가 미간을 찌푸린 채 대답 없이 가만히 있자 고개를 갸웃거리던 임해서는 컴퓨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고 이내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눈을 깜빡했다. 그리고 몰래 내 팔꿈치를 툭툭 두드리는 손길.
“왜?”
“야. 개나소나 접속해 있음. 친구라서 접속 중인 게 보이네.”
내가 개나소나랑 같이 파티를 하는 걸 모르는 임해서는 아직도 내가 그를 많이 껄끄러워한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손지우는 우리의 대화는 듣지도 않고 연습장에서 열심히 캐릭터를 움직이는 중이었고 문정하는 못 들었는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개나소나라……. 그 새끼는 하루 종일 게임만 하나?
묘하게 들어갈 때마다 보이는 듯한 느낌이라고 생각하며 임해서의 말에 대답하려고 할 때였다.
“초대 받아.”
“넵! …네에?”
문정하가 무뚝뚝하게 얘기했다. 그 말을 잘 캐치한 임해서가 콧노래를 부르며 마우스를 움직였다. 동시에 굳어지는 모습.
[개나소나 님이 파티를 초대하였습니다.]
“어, 형님? 혹시 죄송한데 더쎄 아이디가……”
“네 눈앞에 보이는 그대로.”
임해서는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어색하게 웃었다.
마우스를 쥔 손이 당혹감으로 덜덜 떨리는 게 보였고 나는 컴퓨터 화면을 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문정하를 등지고 있는 내 얼굴 또한 임해서 못지않게 당혹감으로 잔뜩 물들어 있었다.
‘아니, 잠깐만. 이게 정말 실화라고? 문정하 선배가 그 개나소나? 내가 아는 그 재수 없는 개나소나라고?’
캐릭터 레벨이랑 주캐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 쎄한 느낌은 있었지만, 그래도 설마설마했었는데.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미쳤네.”
짧지만 현재 상황에 대한 진심이 담긴 한마디.
“헐, 그럼 저번에 저랑 친추 했던 개나소나가 형님이셨어요?”
“그놈의 형님 소리는 그만하고 그냥 선배라고 불러. 그래, 저번에 염소구더기가 데리고 온 놈이 너 맞지?”
염소구더기라는 소리에 손지우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나를 쳐다보려는 기색이 보이자 서둘러 화면에 얼굴을 바짝 붙이며 얘기했다.
손지우의 저 좋은 머리가 예전에 내가 염소똥이라는 닉네임을 썼다는 걸 잊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비슷한 이름이 들려오니 쳐다보려고 한 거겠지.
“아, 형. 우선은 게임 들어가자마자 캐릭터 레벨을 올려야 하는데 공격으로 갈지 방어로 갈지 선택해야 하거든.”
“공격? 방어?”
그나마 다행인 건 임해서가 당황하긴 했지만, 노골적으로 나를 쳐다보거나 하는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는 것.
덕분에 우연히 솔로면봐줌을 마주쳤다고 생각한 문정하는 찝찝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설명을 듣기 시작했다.
“네엡. 염소구더기가… 저랑 아는 사이라서. 물론 지금 여기에는 없지만!”
저 새끼가 제정신인가. 아주 대놓고 광고를 해라, 광고를.
문정하가 입가를 만지더니 이내 고개를 돌린다. 그린 듯한 미소가 정말 잘생겼는데 지금은 그저 섬뜩할 뿐이었다.
“지언아, 언제 들어올 거야?”
“…저 지우 형 좀 봐주고요.”
“게임은 원래 실전이잖아. 욕먹으면서 알아서 배우라고 해. 어차피 자주 하지도 않을 건데.”
“그래도 하나도 모르니까 한 판 정도는 봐줘야죠. 선배 먼저 하고 계세요.”
“형이라고 불러도 되는데.”
“네네, 선배님. 게임 시작 중인데 얼른 하시죠.”
은근히 게임을 접속할 것을 권유하는 문정하의 속셈을 가늠할 수가 없어서 무섭다.
눈치가 없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으니 뭔가 눈치를 채고 확인을 하려는 거겠지.
더 세이렌을 한다고 했고 원딜이라고 했다. 그리고 친구는 저번에 같이 했던 솔로면봐줌.
‘게임이랑 현실이랑 말투가 달라서 매치가 잘 안 됐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피시방 가자고 할 때 빠질걸.’
힐끔 바라본 문정하의 컴퓨터 화면에는 익숙한 전사 캐릭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떠 있는 문구.
[Lv. 138 개나소나]
‘아, 정말 싫다.’
첫 만남부터 시비 걸던 유저. 그리고 최근에는 보조해야 하는 원딜이 있다면서 근딜을 연습하던 개나소나. 현실에서는 바퀴벌레 한 마리 잡아줬다고 극호감을 보이며 자상하게 대해 주는 문정하.
나를 대하는 태도나 말투가 다르니 당연히 쉽게 연결할 수가 없지. 게다가 누가 게임에서 만난 사람을 주변 인물이라고 쉽게 생각하겠어.
솔직히 지금은 어느 정도 개나소나랑은 합을 맞추고 있는 상태라 염소구더기라는 걸 밝혀도 상관없긴 하다. 상관없긴 한데…….
‘지금보다 더 들러붙을 것 같아.’
게임에서도 현실에서도 말이다.
스트레스를 풀려고 하는 게임에서 스트레스를 가져올 필요는 없지. 나는 서둘러 휴대폰을 쥐고 문정하를 등진 채 빠르게 메시지를 작성했다.
다행히 무음으로 설정해 두었는지 진동은 울리지 않았다. 임해서가 게임을 하다가 반짝이는 휴대폰 화면에 시선을 주는 것이 보였다.
[나: 다른 부캐 없음?]
[나: 염소구더기라는 거 밝혀지면 죽음]
[임해서: ㅇ잠만]
시비를 걸던 유저와 만나는 게 꺼려서 그런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임해서는 생각보다 굉장히 협조적이었다. 누군가와 열심히 메시지를 주고받던 임해서는 이내 누군가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다.
[임해서: 내 거는 없고. 나랑 친한 애 부캐임. 코스튬만 받으려고 만들었는데 지금은 다른 애 빌려주는 아이디라서 잠깐 정도는 써도 된대.]
[나: ㅇㅋ 땡큐]
다행이다. 한시름 놓고 서둘러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외우고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아직도 연습장에서 끙끙 앓는 손지우를 내버려 두고 내가 아이디를 입력하자 문정하가 관심을 보여왔다.
“이제 가르쳐 주는 건 끝났어?”
“네. 어차피 저 형은 글렀어요. 저도 못 하니까 선배님이 버스 좀 태워주세요.”
“나도 잘 못 하는데 큰일 났네.”
개소리하네.
그 레벨 대에서는 보기 힘든 마스터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으면서 능청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다.
나는 개나소나를 처음 본 거니까 진정하자. 들키면 안 돼. 들키는 순간 내 겜생은 끝나는 거야. 다시 부캐를 팔 수는 없잖아.
“금방 끝날 것 같아요?”
“응. 마지막 한타만 하면 끝날 것 같네.”
문정하의 컴퓨터를 힐끔 보니 그의 캐릭터가 17Kill 수를 기록한 것이 눈에 띄었다. 반면에 데스는 고작 2.
임해서가 대박대박, 하면서 눈을 반짝이는 것을 보아하니 혼자서 싹 쓸어 담은 모양이었다.
저러면서 못한다고 밑밥을 깐다고?
“그거 끝나면 초대해 주세요.”
“그래. 아이디는 뭔데?”
기다려 봐, 나도 모르니까.
입을 꾹 다물고 로딩 화면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조금 뒤에 로딩이 끝나가고 화면이 깜빡거리며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눈에 들어오는 기본 코스튬을 입고 있는 무투가.
탱커를 하는 유저인가 보네, 하고 심드렁하게 대표 캐릭터로 설정된 무투가를 보다가 머리 위에 떠있는 아이디를 보았다.
[Lv. 22 모타리]
아이디를 확인하자마자 머리를 떨궜다. 자꾸 헛것이 보인다. 아무래도 눈알을 빼서 씻고 와야 할 것 같다.
지금 당장이라도 임해서한테 도대체 누구 아이디를 빌린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동시에 무서웠다.
이 녀석도 알고 보면 내 주변 인물이라는 거잖아. 설마 같은 대학은 아니겠지?
“지언아?”
“…모타리요.”
“모타리?”
잠깐 컴퓨터 화면에 시선을 준 문정하는 정말 레벨 22의 캐릭터를 보더니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표정 변화가 없으니 어떤 생각을 하는지 파악하기가 어렵다. 사실 무표정이라서 조금 쫄리기도 하고.
나를 대하는 태도나 다른 사람들 대하는 태도가 전혀 다른 걸 보면 아마 후자가 본인 성격이겠지. 그다지 웃음이 많은 스타일도 아닌 것 같고.
차라리 나를 임해서처럼 대해주면 좋을 텐데…….
[개나소나 님이 파티를 초대하였습니다.]
익숙한 문구가 뜨는 것을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똑같은 파티지만 염소구더기로 하는 게 아니라서 어색하긴 하네.
“야, 손지우. 파티 받아.”
“파티? 게임에서 파티를 해?”
“아니, 형. 그게 아니라 같이 게임을 하는 멤버를 파티원이라고 해요. 문정하 선배님이 초대한 게 그 멤버로 같이 싸우자는 거고.”
문정하의 말에 어리둥절해하는 손지우를 돕는 건 옆자리에 앉은 죄인 임해서였다.
나는 옆자리에 앉기는 했지만 내 코가 석 자인 입장이라 도와주기도 힘들지.
아까부터 본인의 컴퓨터 화면은 보지도 않고 내 컴퓨터 화면만 뚫어져라 쳐다보던 문정하는 턱을 괴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곱게 휜 눈웃음이 매력적이었지만 왜 자꾸 등골이 서늘할까.
“원딜을 자주 한다고 했는데 대표 캐릭터는 탱커네.”
“얘가 잘생겨서요.”
“주로 하는 원딜은 뭔데?”
“물 정령이요.”
“근데 왜 물 정령 레벨은 1이야?”
아뿔싸. 전체 레벨과 달리 플레이하는 횟수가 많은 캐릭터들은 별도로 레벨이 올라간다. 그러면서 그 캐릭터의 속성이 더 강화되기도 하고.
원딜이고 주로 하는 캐릭터가 물 정령이라고 했으면서 물 정령 레벨은 1이다?
이건 더 세이렌을 좀 아는 유저들은 헛소리하네, 하고 콧방귀를 뀔 만한 상황. 내가 반대 입장이었으면 단번에 미쳤냐고 얘기할 법한 상황이었지만,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대답했다.
“게임을 그렇게 즐겨 하는 편은 아니라서요.”
“그래도 초반 레벨은 잘 올라갈 텐데.”
“자주 안 하고 골고루 했어요.”
“탱커를 제일 자주 했나 봐.”
“네, 잘생겨서요.”
“지언이는 잘생긴 거 좋아해?”
문정하가 고개를 기울여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끼를 부리는 고양이 같은 행동에 입을 꾹 다물었다.
이거 분명히 본인 잘생긴 거 알고 던진 질문이다. 나는 화제를 돌렸다.
“게임 시작합니다. 지우 형은 알아서 잘 살아남고 너무 앞으로 가지 마.”
“아씨, 너희들 너무 한 거 아니야?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바로 실전이라니.”
“게임은 원래 실전이야.”
[솔로면봐줌: 무투가(탱커)
개나소나: 전사(근딜)
모타리: 물 정령사(보조)
호로쯉로록: 무투가(탱커)
인생대노잼: 사제(힐러)]
잠깐 손지우가 선택한 탱커를 보고 눈을 깜빡였다가 시선을 돌려 손지우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왜?”라고 묻길래 입을 꾹 다물었다.
“왜 하필 탱커야?”
“맞으면 아프잖아.”
“아니, 미친. 누가 형이 직접 맞아? 임해서가 이미 탱커로 있는데……!”
탱커2, 어시1, 힐러1, 딜러1. 이 상황이 말이 되냐고!
차마 거너를 잡을 수는 없어서 물 정령을 하기는 했는데 상황이 아주 안 좋다. 이런 개똥 같은 조합이라니.
하지만 조합 같은 걸 알 리 없는 손지우는 그저 순수하게 마음에 드는 캐릭터를 선택한 모양이었다.
“됐어, 형한테 뭐라 하지 마. 처음 하는 거니까 우리가 잘해야지. 아, 물 정령도 없는 셈 쳐야겠네.”
“조용히 해라, 임해서.”
“문정하 선배님이 버스 태워주시겠지! 아까도 엄청 잘하시던데!”
글쎄. 저번에도 4원딜, 1근딜 조합일 때 제대로 빡쳤던 것 같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입은 다물고 있지만 문정하의 눈이 가라앉아 있었다.
분명 내가 염소구더기였다면 나한테 파티 채팅으로 엄청 욕했겠지. 그나마 지금은 속으로 욕하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팀] 인생대노잼: ㅋㅋㅋㅋㅋ딜러 1명? 조합 죽이네
“딜러가 공격하는 사람이지?”
“응. 아까 말해 준 것처럼 아이템을 처음에 공격을 먼저 찍을지, 방어를 찍을지 결정하면서 하는데 전사가 기본적으로 공격캐야.”
“그렇구나.”
그래도 같이 게임 하는 사람들이 옆에 있으니 의견 전달하기는 편하네.
게임이 시작된다는 알림이 뜨자마자 캐릭터들이 일제히 적군 건물을 향해 달려갔다. 손지우의 캐릭터도 눈치껏 아군을 따라 달린다.
“그거 캐릭터 기술 콤보는 연습해 봤어?”
“지언아. 형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지마라.”
“…알겠어. 그냥 즐겜해, 형.”
콤보가 뭔지도 모르겠다는 눈으로 멍하니 게임 화면을 쫓아가는 손지우의 모습에 관심을 끄기로 했다.
가르쳐 주려면 끝도 없을 것 같아.
“궁수 돌아올 것 같은데.”
문정하가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아군 건물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아군 건물 근방에 있는 적군들은 멀리 있어도 건물에 노출되어 모습이 인식되는데 덕분에 몇 명이 건물을 부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적군 건물에 모여 있는 아군은 다섯 명.
아군 건물에 모여 있는 적군은 세 명.
‘두 명은 기습하러 오겠네.’
개나소나의 전사 캐릭터가 암흑 지역에 몸을 숨겼다. 적군 건물 근방에 있어도 암흑 지역에 몸을 숨기면 적군에게 위치가 노출되지 않는다. 대신에 HP는 지속적으로 닳기 때문에 선호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오른쪽에 적 와요!”
시야를 보고 있던 임해서가 적을 발견한 모양인지 우리에게 알려주며 그쪽으로 향했다. 기다리는 것보다 탱커는 앞으로 나서서 적의 움직임을 묶고 있어야 한다. 힐러 또한 거리를 두기 위해 재빨리 뒤로 움직였다.
그 와중에도 손지우의 캐릭터는 멀뚱히 있었다.
“궁수 궁캔 했음!”
궁극기 캔슬. 적이 궁극기를 사용하려는 순간을 방해한 모양인지 임해서가 씩씩하게 말했다. 덕분에 적의 궁극기 하나가 허무하게 날아갔다.
임해서가 궁수를 잡고 있는 동안 서둘러 달려간 물 정령은 평타를 때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레어 코스튬이 아니라서 이동 속도가 좀 느리긴 하네.
“선배님도 빨리 와서 거들어요. 물 정령 딜량 거지라서…….”
1Kill.
[개나소나 님이 적군을 처리하였습니다.]
“……?”
문정하를 쳐다보자 느긋하게 마우스를 움직이고 있다. 분명히 방금 옆에 컴퓨터에서 1킬을 하는 알림이 나왔는데? 방금 적을 죽인 것치고는 상당히 여유롭다.
“지언아, 왼쪽.”
암흑 지역에 몸을 숨긴 문정하가 빙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조언대로 왼쪽을 바라보자 어느새 아군 건물 부수는 걸 포기하고 협력하러 온 적군이 눈에 띈다.
문정하가 얘기해 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암살당했겠네.
“임해서, 애들 몰려온다!”
“아씨, 건물이나 부술 것이지. 왜 이렇게 한꺼번에 몰려와?!”
물 정령을 죽이려 달려오는 적군의 전사 캐릭터를 보며 평타를 날렸다. 스킬을 맞지 않으려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면서 오기는 하지만 평타는 논타깃팅이라 저렇게 움직여 봤자 피할 수 없다.
평타 다섯 번을 맞혔을 때, 적군 전사가 좀 전보다 정신 사납게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마 갑작스럽게 시야가 가려져서 적군의 공격을 피하려는 움직임일 것이다. 물 정령 평타야 맞아봤자 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하지만.
소녀의 어항 속으로 초대할게요.
거대한 어항이 나타나며 적군의 전사 캐릭터를 가둬 버렸다. 가득 채워진 물에 HP가 아주 조금씩 닳으며 허우적거리는 모습.
물 정령의 궁극기는 범위는 넓고 지속적인 대미지를 줄 수는 있지만 큰 살상력은 없다. 별 볼 일 없는 궁극기라고 할 수는 있지만 물 정령의 캐릭터 속성은 어시스트.
어시스트의 궁극기도 딜러가 곁에 있다면 상황이 달라지지.
어항 표면으로 개나소나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그래서 아직 시전 시간이 남은 궁극기를 강제로 해제했다. 적군 전사가 떨어지는 순간에 옆 컴퓨터에서 궁극기 보이스가 들려왔다.
내 칼이 오늘도 붉게 물들겠군.
개나소나 캐릭터의 검이 커다랗게 휘둘러지며 잔상을 남긴다.
성인 버전의 적군 캐릭터에서는 유혈사태가 일어나며 아주 미세하게 남았던 HP도 출혈 대미지로 결국 바닥이 나 버린다.
2Kill.
[개나소나 님이 적군을 처리하였습니다.]
제대로 발을 디디기도 전에 적군을 처리한 문정하는 여유롭게 탱커가 붙잡고 있는 궁수에게 향했다.
저건 분명히 개나소나인데……! 나한테 시비만 걸던 개나소나가 맞긴 한데!
‘기분 나쁠 정도로 멋있고 든든하네.’
바퀴벌레는 여유롭게 못 잡으면서 게임은 왜 저렇게 잘하는 거야? 특히나 주캐인 거너를 못 하는 상태에서 개나소나를 아군으로 만나니 이렇게 든든할 줄이야.
손지언은 입술을 깨물며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이 기분으로 부르면 100%로 선배가 아닌 형이라고 호칭을 바꿔서 부를 거라고 확신했으니까.
“뭔데? 지금 문정하가 잘하고 있는 거야?”
“아, 형도 참. 엄청 잘하고 있는 거야!”
상황을 모르고 그저 아군을 따라가기 바쁜 손지우가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우리에게 물었다. 왼쪽에 있던 내가 게임에만 집중하고 대답을 하지 않자 오른쪽에 있던 임해서가 열심히 손을 움직이며 대답해 주었다.
“그럼 손지언은?”
“똥은 안 싸고 있는 정도? 저도 평타는 치는 것 같고.”
“나는?”
“형은 그냥 살아있는 거에 의미를 두세요.”
“…….”
손지우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 차라리 탱커를 골라서 덜 죽으니까 덜 방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차피 딜러를 해봤자 적군은 해치우기도 힘들고 그냥 맞기만 했을 테니까.
세 사람 모두 손지우에 대한 신뢰가 없어 아무도 변호해 주지 않았다. 물론 손지우도 딱히 부정은 못 하겠는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역시 게임은 하는 이유를 모르겠네. 시간 낭비야.”
“게임 폐인들 앞에 두고 그런 소리 하면 벌 받아.”
“너도 요새 게임 해? 너 옛날에 수험생일 때 공부 안하고 게임만 하길래 계정 삭제한 거는 기억나는데. 그때 닉네임이 뭐였지? 엄청 이상했던 것 같았는데 염……”
“집중, 집중. 게임에 집중하셔야죠!”
설마 했지만 정말로 염소똥 닉네임을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서둘러 말을 끊어놓고 불안함에 손지우를 힐끔 쳐다보니 다행히 별달리 신경 쓰는 기색은 아니었다.
다만.
“염?”
왼쪽에 문정하가 있는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약간의 장난기가 들어가 있는 의문문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럼 지금 사용하는 건 새로 만들었어?”
“네, 뭐.”
“그전에 닉네임이 뭔데?”
“…왜요.”
“혹시 내가 아는 유저였을 수도 있잖아.”
“아뇨. 저 엄청 가끔씩 하고 레벨도 낮아서 모르셨을 거예요.”
“그래서 뭐였는데? 궁금해서 묻는 건데.”
“너무 오래전이라서 기억이 잘 안 나네요.”
“그래? 그럼 손지우가 기억하는 것 같던데 물어보지, 뭐.”
아, 진짜!
고개를 돌리고 문정하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문정하는 눈을 곱게 접고 미소를 지은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게 왜 이렇게 얄미운지.
진짜 알고 저러나? 아니면 내 반응보고 놀리기 좋아서 그런가?
뭐든 모르겠지만 내 입으로 내가 염소구더기라고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최대한 무해하고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형. 저 버스 태워준다면서요.”
X발. 내가 이 짓거리까지 해야 하나. 아니, 이 짓거리가 통하기는 하나.
웃으면서 현타가 온다. 마주 보고 있는 문정하의 눈이 동그래진다. 그러고는 이내 컴퓨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지, 통했나?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는데 문정하가 이내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린다.
“심장 떨려서 게임에 집중이 안 돼.”
[개나소나 님이 사망하였습니다.]
[모타리 님이 사망하였습니다.]
“…저 새끼들 뭐하냐.”
“…제가 묻고 싶은데요.”
갑자기 캐릭터를 멈춘 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니 적군들이 신나서 연달아 2Kill을 가져가 버린다.
게임에 대해 잘 모르는 손지우도 이 상황이 말도 안 된다는 건 아는 모양인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누군가의 워너비 2권에서 계속)
누군가의 워너비 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