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동경의 대상
모타리는 그 뒤로도 연락이 없었다.
결국 게임을 종료하기 전에 오메가원과 영원한이등병에 다른 이가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솔직히 황보욱이 모타리라는 걸 알았으니 굳이 데리고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기도 하고. 이대로 계속 거리를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야.”
근데 왜 인생은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걸까.
게임에서 거리를 두려고 마음먹으려는데 현실에서 먼저 아는 척을 해오는 분홍 머리. 여전히 저 말도 안 되는 솜사탕 같은 머리가 잘 어울리는 화려한 외모의 황보욱이 인상을 확 찌푸리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제 개나소나가 일찍 접속 가능하다고 말해서 조별 과제가 있는 강의를 출석만 하고 몰래 뒷문으로 나가려던 걸 딱 들켰다.
“응?”
“모르는 척 웃지 말고. 너 어디 가는데? 이제 곧 강의 시작하는 거 안 보여?”
“…내 강의 시간 내가 빠지겠다는데 무슨 참견이야. 출석은 했으니까 조별 강의에 피해 주는 건 없잖아.”
“수업을 들어야 혹시나 과제가 나왔을 때 바로 이해를 할 거 아니야.”
“그래봤자 실습이나 ppt 만들어 오기 같은 거겠지. 다른 조는 누가 빠지든 출석만 하면 신경 안 쓰는데 왜 그래?”
황보욱이 미간을 찌푸렸다.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래, 솔직히 내가 잘한 건 없긴 하지. 저놈이 조장이기도 하고 학점에 진심인 듯했으니까 조금이라도 피해를 입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걸 거다.
머리로는 알겠지만 내 딴에는 억울한걸!
‘아니, 그래서 출석에는 꼬박꼬박 참여하잖아. 교수님도 한 명이 잘못했다고 조별 연대 책임을 묻는 것도 아니고, 나만 학점이 낮게 나올 텐데. 내가 내 손해 감수하고 나가겠다는데 굳이 이렇게 태클을 걸어야 해?’
게다가 강의실 동기들이 다 보는 앞에서 굳이?
이미 출석만 하고 몰래 화장실을 가는 척하고 나간 이도 있었다. 반면에 나는 1시간 수업은 듣고 교수님이 잠깐 자리를 비우셨을 때 몰래 나가려는 거였는데!
황보욱을 마주 보는 나도 인상을 팍 찡그렸다.
“내 학점 내가 알아서 관리해. 네 학점에 영향 주는 일 없으니까 넌 네 학점이나 신경 써.”
“누가 네 학점을 걱정해? 남한테 피해 끼치고 살지 말라는 거지.”
“하.”
황보욱 입장을 배려하고 싶은데 이렇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고, 이렇게 시비 거는 태도로 나오니…….
누가 이런 태도에 좋은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
같이 나가려고 짐을 챙기던 임해서가 힐끔힐끔 불안하게 우리 둘을 살피고 있었다. 차마 나를 따라 같이 나간다는 소리를 지금 상황에서 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존나 피해망상인가.”
“뭐?”
결국 욱해서 나도 시비를 걸었다. 그러자 황보욱이 바로 한 발자국 다가와서 허리를 숙이고 바로 앞에서 노려본다. 금방이라도 멱살을 잡고 밀쳐버릴 것 같은 기세였다.
“얘들아, 그만! 그만! 이러다가 치고받고 싸우겠네! 우리 지언이 내가 감시할 테니까 황보욱 너도 지언이한테 시비 걸지 마! 둘이 그냥 서로 무시하고 지내! 응?”
보다 못한 임해서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내가 먼저 놈의 멱살을 잡아챘을지도 몰랐다.
사람을 죽일 기세로 노려보던 나를 임해서가 어르고 달래서 다시 자리에 앉혔다.
성격상 그대로 강의실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그냥 나가기가 좀 그랬다.
결국 갈 곳은 피시방인데, 조장이 저렇게 눈치를 주며 말리는데 나가는 조원이라고? 같은 조원 사람들도 눈치를 보면서도 은연중에 불만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것 봐, 이런 분위기로 만들었는데 어떻게 나가냐고.
“X발.”
“지언아, 제발 참아. 어쨌든 조별 수업이니까 이 강의만 좀 참자. 응?”
강의실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 출석 체크만 한다면 조원 중 누가 나가도 같은 조원들이 굳이 피해 볼 상황은 아니라는 걸. 하지만 분위기를 이렇게 만드니 꾸역꾸역 나간다고 하는 나만 나쁜 놈이 되어버렸다.
그래, 잘한 일은 아니긴 한데 그래도 피해 끼치는 일은 없잖아! 내 입장에서는 나름 억울했지만 어디 가서 억울하다고 얘기도 못 하고!
임해서가 그나마 이해를 해주었지만 그럼 뭐하나.
한숨을 내쉬는데 메시지가 도착했다.
[개소: 지언아, 뭐해? 오늘 같이 밥 먹을래? 내가 사줄게ㅎㅎ]
개나소나였다. 대놓고 저장하기에는 혹시나 싶어서 줄여서 저장한 이름은 조금 어색하기도 하다. 그래도 정하 형, 문정하 선배님 따위보다는 낫지만.
여전히 현실의 문정하는 적응이 되지 않는다.
‘아니, 나랑 오늘 같이 게임 하기로 약속했었으면서 왜 밥 먹자고 해? 내가 염소구더기인 것도 모르면서 게임 약속은 무시하나?’
조금 삐딱한 생각도 들었지만 때마침 잘됐다.
게임 약속에도 늦을 것 같으니 에둘러서 말해야지.
[나: 저 오늘 조별 수업 때문에 못 가요. 강의 째려고 했는데 조장놈한테 잡혔어요.]
[개소: 그래? 어차피 출석만 하고 나오면 상관없을텐데.]
내 말이!
이를 갈며 어느새 다시 자리에 앉은 황보욱을 노려보았다.
학점을 신경 쓰면서 열심히 할 거면 본인이나 알아서 챙길 것이지. 왜 남한테 지랄이야?
[나: 그러니까요. 재수탱이에요. 피해 끼치지 말라면서 대놓고 말하니까 조원들 다 보는데 나가기도 힘들어서 지금 앉았어요.]
[개소: 일부러 그럴 분위기로 만든 것 같은데?]
[나: 제 생각도 그래요. 본인 학점은 본인만 잘하면 되는데!]
[개소: 그렇구나. 지언이가 많이 화났겠네.]
그래, 중요한 게임 이벤트가 곧 다가오니 조금이라도 레벨을 올려야 하는데! 거너 연습도 해야 하는데! 방해받아서 열 받아 죽겠다.
게다가 저게 모타리라니 더 배신감이 들기도 하고.
게임에서는 나이도 모른 채 형형, 부르면서 따라다니며 귀찮게 하더니 현실에서는 완전 재수탱이가 따로 없어. 저런 놈인 줄 알았으면 뉴비 때 욕먹더라도 그냥 내버려 둘 걸.
그래도 이렇게 불평을 받아주는 이가 있어서 어쩐지 조금 화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손지우가 여자 친구가 화났을 때는 그냥 맞장구치면서 들어주기만 하면 된다고 했을 때 그게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이런 거였구나.
[개소: 그럼 더 맛있는 거 먹어야겠네. 형이 사줄게.]
[나: 먹는 걸로 꼬시지 마세요. 저 오늘 일정 바빠요.]
[개소: 왜 바쁜데? 게임 하러 가야 해? 그때 말했던 이벤트 때문에?]
[나: 네. 한 달만 하는 거라서 부지런하게 해야 해요.]
[개소: 그렇구나. 그런데 어제는 왜 안 들어왔어? 친구 신청도 보냈는데 안 받아주고.]
휴대폰을 들고 있던 손이 그대로 굳었다.
친구 신청을 보냈다고? 누구한테? 당연히 모타리한테. 그리고 모타리는 누구지?
시선을 들어 올렸다. 턱을 괴고 강의를 준비하던 황보욱과 눈이 마주쳤고 서로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저 재수 없는 놈이 모타리다.
…설마 친구 신청 보내면서 쪽지도 같이 보냈나? 내 실명도 언급했나?
갑작스러운 불안감에 식은땀이 흘렀다.
[나: ㅎㅎ 제가 요즘 다른 부캐로 접속해서요. 그건 잘 안 쓰니까 쪽지 같은 거 보내셔도 잘 못 봐요.]
[개소: 그럼 부캐 아이디는 뭔데? 친추 보낼게.]
[나: 제 부캐를 왜 선배님이 신경 쓰시는지?ㅎ 그냥 따로 게임하죠?]
[개소: 왜. 내가 도와줄게ㅎㅎ 원딜 한다고 했으니까 주캐가 물 정령이야? 아님 궁수? 그것도 아니면 거너일까?]
[나: ㅎㅎ 저 게임은 혼자 하는 주의라서 부담스럽네요. 제가 너무 못해서 알려드리기도 힘들고.]
그러니까 관심 꺼, 제발!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황보욱이 휴대폰만 보고 있는 내게 눈치를 줬지만 마주 노려보니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자리에는 앉아있지만 착실하게 강의 듣는다는 말은 안 했다. 임해서도 신경 끄라는 뜻으로 황보욱에게 손을 내저어 보였다.
다행히 강의 시간에는 시비를 걸 생각은 없는 모양인지 인상을 찌푸린 황보욱은 고개를 돌렸다.
그런 놈의 뒤통수에 엿을 들어 올려 보이고는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개소: 우리 지언이 외롭게 게임 하는 모습을 내가 어떻게 보니.]
“미친놈…….”
작게 욕을 중얼거렸다.
다행히 들은 사람은 없는 모양인지 이상하게 쳐다보는 이는 없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임해서가 이상하게 보든 말든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나: ㅎㅎ 선배는 사람 부담스럽게 하는데 선수네요. 친해지기 어려운 분이라서 좋은 것 같아요.]
[개소: 그럼 안 되는데. 더 친해질 수 있게 게임으로 돈독해지는 건?]
[나: 정말 싫네요. ㅎㅎ]
[개소: 지언이는 그래도 문자에서는 자주 웃네. 형이라고 불러주면 더 좋을 것 같은데. 게임 같이 안 해도 친해진 기분일 것 같고.]
욕하고 싶을 때마다 ㅎㅎ를 붙이고 있다는 건 모르겠지. 그보다 게임 하자는 소리 듣기 싫으면 형이라고 부르라는 건가?
은근 다정한 척하면서 본인이 원하는 대로 머리를 잘 굴려서 행동하는 놈이었다. 짜증이 나 이를 갈았지만 그래도 정체를 들키는 것보다는 나았다.
나는 느리고 신경질적으로 메시지를 입력했다.
[나: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형ㅎ 오늘 강의 끝나고 밥이나 먹어요. 강의 언제 끝나세요.]
[개소: 너랑 비슷하게 끝날 것 같은데 내가 끝나고 너희 건물로 갈게.]
[나: 네ㅎㅎ]
[개소: 아쉽지만 밥만 먹고 헤어져야 할 거 같아. 나도 다른 약속이 있어서.]
[나: 중요한 약속이신가 봐요?]
[개소: 그건 아닌데, 가지 말까?]
뭐, 이 새끼야?
인상을 구겼다. 원딜 보조하는 연습 해야 한다고 먼저 매달린 게 누군데! 뒤에 게임 약속이 있는 걸 내가 뻔히 아는데! 가지 말까~?
[나: 그래도 약속은 지켜야죠. 상대는 애타게 기다릴지도 모르는데. 친한 사람 아니에요?]
[개소: 아니?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개소: 게임 약속인데 못하는 거너야. 나중에 지언이는 거너하면 얘보다는 잘할 것 같다.]
뭐? 나는 그래도 나름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이렇게 배신을 때려? 그리고 못하는 거너?!
[나: 그렇구나ㅎㅎ 그래도 거너는 잘하는 사람들만 하는 거잖아요.]
[개소: 응, 그래서 얘가 왜 거너를 하는지 모르겠네.]
하. 머릿속에서 황보욱이 날아가고 그 자리에 문정하가 가득 찼다. 물론 그 옆에는 욕이 한가득 자리 잡고 있었다.
실습 시간까지 포함해서 연속으로 같은 과목을 세 시간 들으니까 죽을 것 같았다.
실제로는 크게 집중해서 듣지 않고는 있지만, 지루한 과목을 들으니 힘들기는 하지. 하품을 하며 책상에 드러누워 있는데 가방을 정리하던 임해서가 물었다.
“어떡할래? 바로 피방으로 갈래?”
“아니, 나 약속 있음.”
“파티원들?”
“비슷해.”
“게임 할 시간에 공부나 하지.”
마찬가지로 가방을 챙기던 황보욱이 우리 대화를 듣고 중얼거렸다. 중얼거렸지만 일부러 들으라는 듯 비꼬는 목소리에 헛웃음을 지었다.
남의 대화에 끼어든 것도 모자라서 웬 시비인지.
“그렇게 공부가 좋으면 왜 여기로 오셨어요. 의대나 가시지. 아, 의대 갈 머리는 아니었나?”
“시비 걸지 마.”
“먼저 시비 건 게 누굴까? 우리 우기우기가 아니었나?”
황보욱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뭐, 뭐!
그런 놈에게 질세라 인상을 찡그리고 노려보자 임해서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유치하게 싸우기는 한데 또 분위기는 살벌해서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우기우기는 공부만 해서 게임은 더럽게 못할 것 같네.”
실제로 모타리가 못하기는 했다. 그리고 눈치도 없이 행동하는 탓에 욕도 많이 먹기도 했고.
그런 놈의 과거를 떠올리며 히죽 웃으니 그가 인상을 찌푸린다. 살랑거리는 분홍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노려보는데 재수 없게 잘생겼네.
문정하랑은 다른 잘생김이다. 그래도 나는 더 차분한 느낌의 문정하가 더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둘 다 싫지만 그래도 황보욱이 더 싫으니까. 딱히 문정하가 좋아서 편을 들어준 건 아니었다.
“내가 게임을 못하는지 아닌지는 네가 어떻게 아는데?”
“관상만 봐도 알지. 우기우기 관상은 게임 겁나 못해서 팀원들에게 극딜로 욕먹을 상임.”
“…미친놈.”
하지만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는 걸 보니 본인도 찔리는 건 있는 모양이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웃긴 놈이네. 게임하지 말고 공부나 하라고 했으면서 정작 본인도 게임을 하지 않았던가. 물론 자주 하는 건 아니었지만 저렇게 말하면서 하는 건 우스운 꼴이었다.
그냥 네가 모타리라는 걸 안다고 밝혀버려? 놈에게 수치심을 주느냐, 아니면 내 정체를 들키지 않고 영원히 모른 척하느냐로 저울질하고 있는데 문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어깨를 툭툭 건드리는 임해서의 다급한 손길.
“야야, 문정하 선배님 오심. 너 보러 오신 거 아니야?”
“엉?”
데리러 온다더니 진짜 왔나 보네.
고개를 돌리니 문정하가 뒷문 쪽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었다. 그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미소를 짓고는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눈썹을 살짝 덮은 검은 머리가 남들이 하면 평범해 보이는데 이상하게 저 얼굴에 하니까 섹시해 보이네. 게임만 하더니 시력이 맛이 간 모양이다.
“응. 아까 같이 밥 먹기로 했는데 같이 갈래?”
“노노. 눈치 없이 끼었다고 눈으로 욕먹기 싫음. 나 어차피 길드원들이랑 만나기로 해서 피방 감. 내일 보자.”
“그래.”
미련 없이 떠나는 임해서에게 손을 내저어 보이고는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어쨌든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 조급해져서 조금 서둘렀는데, 황보욱은 여전히 자리를 떠나지 않은 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금방 말도 없이 떠날 줄 알았던 놈이 왜 그냥 있는 거지? 의아한 마음에 쳐다보니 그가 인상을 찌푸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야.”
“뭐.”
“…네가 하는 게임이 더 세이렌 맞아?”
그걸 이놈이 어떻게 알지, 하고 생각하다가 저번에 피시방까지 찾아온 황보욱을 떠올렸다. 그때 켜져있던 컴퓨터 화면을 본 거구나.
딱히 숨길 거는 아니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 거에 관심을 가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번에 보니까 거너 하는 것 같던데 하지 마.”
“뭐? 무슨 개소리야.”
“너 같은 놈이 써도 되는 캐릭터가 아니니까.”
그럼 거너는 허락 받은 특별한 놈들만 쓰는 캐릭터냐?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을 벌리고 놈을 쳐다보는데 그는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여전히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개소리를 하고 있는 건 본인이면서 표정만 보면 본인이 개소리를 들은 것 같다.
“그리고 나 게임 잘한다고 칭찬받았거든.”
“어쩌라고.”
“너랑 다르게 엄청 잘하는 거너한테.”
잠깐만…….
콧방귀를 뀌고 제 할 말만 하고 자리를 떠나는 황보욱의 등은 기세등등해 보였다. 마치 제대로 엿을 먹이고 뿌듯해하는 것 같아서 차마 더 이상 붙잡을 수 없었다. 아니, 붙잡아도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지만.
‘그거 내 얘기 하는 것 같은데…….’
나를 욕보이려고 했는데 실상 알고 보니 나를 칭찬하네?
묘한 기분에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는데 막상 거너 잘한다는 소리를 들으니 좋긴 하다. 문정하한테 거너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들은 직후라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지언아, 다 정리했어?”
기다리다가 지친 모양인지 문정하가 강의실 안으로 들어와서 물었다.
우리 과에서는 보지 못하는 미남이라서 사람들이 웅성거렸던 모양이다. 하긴 눈에 띄는 외모이긴 하지.
고개를 끄덕이고 가방을 챙겼다. 거너 못한다고 욕한 놈의 지갑을 탈탈 털어서 배부르게 먹어야지.
“저 비싼 거 먹고 싶어요.”
“그래. 뭐 먹을래?”
조금이라도 움찔하며 눈치를 보는 모습이 보고 싶었는데 문정하는 너무나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손지우가 얘 돈 많다고 했던가. 좋아하는 애한테 물질적으로 잘해 준다고 했던 것 같은데. 금수저인가? 가만 보면 걸치고 있는 옷이나 시계 등이 명품 같아 보이기도 하고. 아니면 얼굴이 잘나서 옷이 있어 보이는 건가.
명품에 대해 잘 모르니 저 사람이 걸치고 있는 게 좋은 건지 아닌 건지도 모르겠다. 일단 싸구려는 아니겠지.
“찜갈비! 양 많이요!”
“…응?”
“찜갈비! 고기 먹을래요!”
눈을 동그랗게 뜨던 문정하가 빠르게 이어 붙이는 내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찜갈비 무시해? 양은 쥐꼬리만큼 주는데 가격은 착하지 않아서 배부르게 먹어본 적도 없는 그 메뉴를 무시하냐고.
인상을 찡그리고 쳐다보자 문정하가 입가를 가리며 겨우 웃음을 참았다. 비싼 거 먹고 싶다고 당당하게 말하더니 그 뒤에 이어진 메뉴가 너무 참신했던 모양이다.
“그래, 지언이 너 먹고 싶은 걸로 많이 먹자.”
“그거 양 엄청 적게 나오는데 5인분 시켜도 돼요? 2인분도 적던데.”
“마음대로 해.”
“오예. 저 계란찜도 시켜주세요, 형.”
“그래.”
문정하가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그의 손길에 따라 부드럽게 움직였지만 내버려 두었다. 밥을 사 준다는데 머리쯤이야.
그래도 눈앞의 인물이 개나소나라는 걸 알아서 그런 걸까. 어쩐지 대하는 게 조금 편해진 것 같은 기분이다.
게임 하면서 개나소나한테 워낙 함부로 대하기도 했고, 현실에서도 문정하가 잘 받아주니까 편하기는 하지. 밥 잘 사 주는 선배라 나쁘지 않을지도?
아무 말도 안 하니 계속 머리에 손을 얹고 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아 미련 없이 내렸다. 시무룩한 얼굴이었지만 어쩌라고. 시간 오버야.
“저 질문 있는데.”
“뭔데?”
“원래 바퀴벌레만 잡아주면 누구한테나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요?”
바퀴벌레라는 소리에 바로 움찔하는 모습이 보였다.
진짜 싫어하긴 싫어하는구나.
집안 사람들이나 주변에 벌레를 그렇게 무서워하는 사람이 없어서 조금 신선하기도 하다. 게다가 저보다 한참이나 큰 문정하가 그러고 있으니깐.
“음, 꼭 그런 건 아닌데 지언이 네가 덤덤하게 퇴치해 주는 모습이 좀 멋있긴 했어.”
“지우 형도 잘 잡는데요.”
“그 새끼는 내가 놀라는 거 보고 한참 놀리다가 인심 쓴다는 듯 잡을걸?”
그 말에는 딱히 부정할 수가 없다. 손지우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 문정하의 안목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사람 보는 눈은 있네.
“그리고 처음 보는 사이에 내가 가지 말라고 귀찮게 떼써도 들어줬잖아.”
“역시 그거 떼쓴 거 맞죠?”
문정하는 말없이 웃었다. 부정하지 않는 걸 보니 맞는 모양이다.
나쁜 놈. 그 뒤로 임해서한테 혼났구먼.
“툴툴거리면서도 들어주는 게 귀여웠어. 내가 또 귀여운 거에 약하거든.”
“저 안 귀여운데요.”
“귀여운데. 키도 작고 머리도 복슬복슬하고. 먹을 때 음식 많이 넣으면 햄스터 같기도 해.”
욕하는 것 같은데?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보았지만 표정을 보니 놀리려고 하는 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잘도 하는구나. 어쨌든 문정하에게 내 첫인상이 무척이나 좋았다는 건 알겠다. 별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게임은 이벤트 하시려고요?”
“응. 같이 할 사람들 일단 네 명까지는 됐어.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다행히 영원한이등병이랑 오메가원이 합격점이었던 모양이다. 그 둘이 장난스럽게 말은 해도 즐겜러답지 않게 게임은 잘하기는 했지.
“열심히 하세요. 저는 딱히 관심이 없어서요.”
“코스튬도 준다던데.”
“저는 옷에 욕심 없어요.”
그래, 욕심은 염소구더기가 잔뜩 있지.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했지만 문정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러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의심하지 않는 모양새라 다행이었다.
“나중에 혹시 길드 만들면 지언이 너도 들어와.”
“길드 만드시려고요?”
“아니, 내가 만들 건 아니고 만들라고 하려고. 여럿이서 하는 것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기도 하고. 다른 길드에 들어가면 나랑 안 놀아줄 것 같으니까 미리 선수 쳐야지.”
“그러지 말고 원래 있는 대형 길드에 신청해 보시는 건 어때요? 형 실력이면 될 것 같은데.”
“어디? 위너?”
“네. 거기 괜찮아요. 예전부터 실력 있는 유저만 받아서 파티 구성하기도 좋고 길마가 착하거든요.”
“아는 사이야?”
음. 이건 딱히 말해 줘도 상관없겠지. 딱히 염소구더기라는 걸 유추할 만한 정보는 아니라서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네, 잠깐 친하게 지내면서 게임 플레이 스타일도 배우고 그랬어요. 거기 길마 형이 거너 장인이라서 진짜 잘하거든요.”
그 사람한테 많이 배워서 실제로 거너 랭커까지 올라가는 데 많은 도움을 얻기도 했다. WINNER 길드에 데리고 가 준 것도 길마 형이었고.
그때는 진짜 많이 의지하고 내 워너비였는데.
조금 그리운 추억이기도 해서 미소를 짓는데 그런 나를 문정하가 미묘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많이 친했나 보네.”
“네. 제가 그 형 엄청 좋아해서 잘 따랐거든요. 거너 잘하는 거 엄청 멋있기도 했고.”
“그렇구나. 조금 질투 나네.”
“질투를 왜 해요? 웃긴 형이네.”
“그렇지만 그 길마 엄청 좋아했다며. 나도 지언이가 그렇게 좋아하면서 따라주면 엄청 잘해줄 자신 있는데.”
아니, 그렇게 눈웃음치면서 봐도 좋은 대답 안 나가거든요?
같은 남자가 봐도 눈이 호강하는 눈웃음에 시선을 피했다. 이 형이 왜 남자를 꼬셔.
“전 돈 많은 형도 좋으니까 밥이나 사주세요.”
“그래, 처음은 쉽게 가야지. 돈 많은 건 쉬운 조건이니까 다음은 뭘 하면 돼? 거너 연습을 해야 하나? 아니면 다정하게 대해줘야 하나?”
“저 말 없는 사람도 좋아하니까 입 좀 다물어 주셔도 될 것 같아요.”
“그건 곤란한데.”
무례할 수도 있는 말에도 불구하고 문정하는 귀엽다는 듯 또다시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정말! 한 번 내버려 뒀다고 틈만 나면 이제 머리에 손을 올리려고 하네.
나름 매섭게 노려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귀엽단다.
…차라리 현실도 개나소나처럼 시비를 거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 * *
그래도 다행히 문정하도 염소구더기와의 약속을 아주 망각한 건 아니었던 모양인지 밥을 먹고 바로 헤어지자고 했다.
그 말에 나 또한 밝은 얼굴로 찬성했다. 얼른 게임에 접속해서 레벨을 올리고 싶었으니까.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켰다. 접속되는 동안 양치질을 하며 양말을 벗고 있는데 바뀐 화면 위로 우체통 표시가 보였다. 누군가가 쪽지를 보낸 모양이었다.
그리고 쪽지의 주인공은…….
[우편] 모타리: 완전 좋아요! 같이 할래요!'ㅅ'!!
재수탱이 모타리였다. 아니, 황보욱은 공부나 하라면서 게임 한다고 눈치 줄 때는 언제고 본인은 게임을 해?
어이가 없어서 어쩔까 고민하다가 이내 히죽 웃었다. 게임에서는 염소구더기가 손지언인 걸 모르고 좋아하며 잘 따르는데 제대로 놀려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놓고 나중에 내가 염소구더기였다는 걸 알면 엄청 열 받아 하겠지.
[우편] 염소구더기: ㅇ같이 하자
한 번 더 말하겠다. 이때의 나는 멍청하게도 개나소나와 모타리가 엮여서는 안 된다는 걸 아직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똥멍청이였다.
모타리는 온라인 상태여서 쪽지를 보내자마자 귓말이 무섭게 올라왔다.
[귓말] 모타리: 형!
[귓말] 모타리: 오랜만이네요 ㅎㅎ 제가 게임은 자주 안 들어와서 ㅠㅠ
황보욱의 까칠한 얼굴로 이렇게 애교 있는 말투라니. 너무나 발랄하게 형이라고 부르는 태도에 잠깐 키보드 위에서 멈칫했던 손가락을 다시 움직였다.
[귓말] 염소구더기: ㅇ 근데 이벤트 하면 한 달 동안 매일 들어와서 연습하고 게임 해야 하는데 괜춘?
[귓말] 모타리: 아 정말요??
고민하나. 지금 시험 기간이 아니긴 하지만, 학점에 신경을 많이 쓰는 놈 같긴 했지.
과제가 없어도 알아서 독서실에 가서 공부할 스타일이기는 했다. 머리는 분홍색으로 물들여 놓고 의외로 모범생 스타일이란 말이야?
[귓말] 모타리: 음, 한 달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아요ㅎㅎ 아직 시험 기간은 아니니까
[귓말] 염소구더기: ㅇㅇ 그럼 같은 팀원들 있는데 파티 초대해 줄게
[귓말] 모타리: 넹~
그래도 생각보다 빠른 긍정적인 답변에 의외였다.
조금 더 고민하거나 거절할 줄 알았는데. 얘는 원래 게임상에서는 누구한테나 이런 태도일까? 아니면 정말 단순히 뉴비일 때 욕먹는 거 도와줘서 그런 걸까.
황보욱이라는 걸 알았으면서도 여전히 믿기지가 않았다. 하긴 문정하가 개나소나 아이디를 실제로 쓰고 있는 걸 봤어도 믿기 힘들긴 했지.
‘잠깐만. 가만 생각해 보니 이거 내 무덤 내가 파는 꼴인데?’
모타리는 몰라도 개나소나는 모타리가 나인 줄 알고 있잖아.
식은땀이 흘렀다. 이미 채팅창에는 새로운 멤버를 구했다고 알린 뒤였다. 모타리에게도 초대하겠다고 한 뒤고.
[파티] 개나소나: ? 초대 안 함?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문정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게임 할 때보다 더 현란한 속도였다.
[나: 형 지금 게임 중??]
[개소: 응 왜? 나갈까?]
신성한 게임 시간에 나가긴 어딜 나가.
다행히 게임 화면만 보고 있을 줄 알았던 문정하에게서 빠르게 답장이 왔다. 너무 빠르고 지금이라도 게임을 끄고 나올 태세에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나는 키보드와 휴대폰 자판을 부지런히 눌렀다.
[파티] 염소구더기: ㅇㅇ 기다리삼 곧 초대함
[나: 친구한테 더쎄 아이디 빌려줬는데 혹시 형이 저인 줄 알고 아는 척 하실까봐서요ㅎㅎ 혹시나 보여도 그냥 쌩까세요.]
왜 이번에는 답장이 바로 안 오지?
불안함에 손톱 끝을 잘근잘근 물어뜯는데 개나소나 답장은 여전히 없었지만 문정하에게서는 대답이 돌아왔다.
[개소: 그래ㅎㅎ]
개나소나는 말을 씹는데 문정하는 다정한 척 잘하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나쁘지 않아서 그런 가식적인 문정하가 마음에 들었다. 감사하다고 즐겜하라고 마지막 메시지를 보낸 뒤에 모타리를 초대했다.
[모타리 님이 파티 초대를 수락하였습니다.]
[파티] 영원한이등병: 라호~ 하이요
[파티] 오메가원: 라호~ 안녕하세요~
[파티] 개나소나: 라호~
쟤도 물들었나.
의미불명의 라호 대 집합에 당황했는지 모타리가 가만히 있자 서둘러 간단히 소개를 시켜주었다.
[파티] 염소구더기: 저랑 몇 번 게임한 유저인데 아직 뉴비임
[파티] 염소구더기: 그래도 탱커 나름 소질 있는 것 같아서요
[파티] 모타리: 안녕하세요ㅎㅎ 라호가 인사인가요?
[파티] 오메가원: 저희 파티원들만 쓸 수 있는 특별한 인사입니다……. 어서오세요… 저희 라호 파티에…….
[파티] 영원한이등병: ㅋㅋㅋㅋㅋ이상한 콘셉트 잡지마세요, 형님! 걍 인사하는 거예요.
[파티] 모타리: 넵 ㅎㅎ
[파티] 개나소나: 친구 아이디인데 자주 접속할 수 있음?
[파티] 모타리: ? 넵ㅎㅎ
순간적으로 식겁했다. 모타리도 이상하다 싶은 듯했지만 실제로 황보욱도 친구 아이디를 빌려서 사용하는 거라고 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지.
혹여나 실명이라도 언급할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개나소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크게 관심이 없다고 보는 게 더 맞는 표현이겠지.
[파티] 염소구더기: 그럼 다섯 명 다 모였겠다
[파티] 염소구더기: 다음 주부터 열리는 이벤트전 빡세게 돌아봅시다! 코스튬을 위해!
[파티] 개나소나: 코스튬에 진심이네
[파티] 오메가원: 즐겜은 어디에……?
[파티] 염소구더기: 이벤트전 하는 한 달 동안 즐겜은 없습니다! 무조건 스파르타!
[파티] 영원한이등병: ㅋㅋㅋㅋㅋㅋ막내가 스파르타가 됐어 ㅠㅠ 개나소나 형님 탓이야
바로 게임을 시작 버튼을 눌렀다. 매칭을 기다리는 동안 모타리에게 보내는 귓말을 서둘러 보냈다.
[귓말] 염소구더기: 개나소나 이상한 놈이니까 웬만하면 말 섞지 마삼 ㄴㄴ
[귓말] 모타리: 그럼 왜 같이 게임을 해요??
[귓말] 염소구더기: 칼질은 좀 잘하는 것 같아서?
뭐 거짓말은 아니니까.
모타리는 의아한 눈치였지만 그래도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황보욱이라는 것만 몰랐으면 이 대견한 모습에 예쁘다고 칭찬을 해 줬을 텐데.
[파티] 염소구더기: 모타리 탱커 해도 괜춘?
[파티] 모타리: 넵 저번에 했던 아시아인 맞죠?
[파티] 염소구더기: ㅇㅇ
[파티] 모타리: 열심히 할게요~ ㅎㅎ
[파티] 염소구더기: 저번에 했던 것처럼 적군 한 명 지정해놓고 노리니까 도움이 되는 것 같던데 그렇게 할까요?
[파티] 개나소나: ㅇ
적군들의 캐릭터를 보며 누구를 지목하냐 고민하고 있는데 전체 채팅이 올라왔다.
[전체] 연애도현실이다: 님들
[전체] 연애도현실이다: 괜찮으면 이번 공지 올라온 이벤트전처럼 게임 해보실 생각 있음?
[전체] 영원한이등병: ? 지목해서 하는 거?
[전체] 연애도현실이다: ㅇㅇ 각자 적군 한 명 지목해서 이벤트전처럼 그놈만 노리는 거
[전체] 연애도현실이다: 우리 팀 이벤트 나갈 거라서 연습 필요하거든
[파티] 영원한이등병: 어떻게 할까여?
[파티] 염소구더기: 어차피 저희도 그런 식으로 할 생각이니까 상관없을 것 같긴 한데요.
[파티] 염소구더기: 남은 분들 괜찮으면 ㄱㄱ
[파티] 개나소나: ㄱ
[전체] 영원한이등병: ㅇㅋ 저희 팀 대장이 허락함
마치 우리 생각을 읽은 것처럼 이벤트전을 염두에 둔 적군의 제안에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서로 합의를 한 상태로 진행을 하면 더 연습이 잘될 것 같기는 할 테니까.
문제는 적군이 우리 아군 중 누구를 고르냐고 문제였다. 탱커를 선택한 모타리는 죽이기 힘들 테고 근딜이라서 근접 기술이 많은 전사도 피할 것 같지.
자가 치유 기술이 있는 암힐러도 피할 테고.
‘도적 아니면 거너 선택하겠네.’
둘 다 공격력은 최상위권의 캐릭터지만 놀랍게도 방어력 역시 최상위권이었다. 밑에서. 오죽하면 걸어 다니는 종이 몸이라고 불릴 정도였지.
적군의 선택을 기다리며 화면을 쳐다보던 나는 점점 불안해졌다.
만약 내가 적군이었다면 도적이랑 거너 중에서 거너를 선택할 것 같은데? 도적은 종이 몸이라도 이동 속도가 빨라서 회피가 잘될 테지만 거너는 공격력 몰빵인 캐릭터라 방어력 및 이동 속도 둘 다 낮았다.
[전체] 연애도현실이다: 저희는 거너 선택할게요
역시나. 조금이라도 캐릭터 기술이나 특성을 안다면 맞는 선택이긴 하지. 여기 이벤트전에서 거너는 피해야 하는 캐릭터였나? 인상을 쓰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내 속은 아는지 모르는지 파티원들은 누구를 골라야 할지 의견이 분분했다.
[파티] 영원한이등병: 힐러 할까요?
[파티] 오메가원: ㄴㄴ힐러가 생각보다 방어력 찍으면 몸 단단함
[파티] 오메가원: 적팀이 조합 잘 짰네. 탱커2, 힐러1, 근딜1, 원딜1.
[파티] 개나소나: 그나마 있는 원딜도 비행사라서 거너 말고는 잡기 힘들듯
비행사 캐릭터는 궁극기 기술로 전장을 높이 날아다닐 수 있었다. 큰 공격력은 발휘하지 못하지만, 회피와 시야 확보 용도로 뛰어난 궁극기. 이외의 스킬들도 도약이나 아주 짧지만, 뒤로 날며 회피하는 기술들이 있었다.
그래서 적군에 잘하는 비행사가 있으면 근딜이나 탱커들이 제대로 상대를 못 하지.
[파티] 개나소나: 암힐 디버프 스킬 있지 않음?
[파티] 개나소나: 그나마 적 힐러가 따기 쉬울 것 같으니까 자가 치유 못 하도록 디버트 걸고 때려잡는 수밖에
[파티] 오메가원: 옛쓰
[파티] 영원한이등병: ㅇㅇㅇ그게 나을 것 같아요
[파티] 영원한이등병: 막내님이랑 신입님도 괜찮으신가요?
[파티] 염소구더기: 넵 괜찮아요
[파티] 모타리: 넹
아직 게임 캐릭터나 이벤트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모타리는 말수가 적었다.
설명해 주는 것보다 직접 경험해 보는 게 이해가 빠르겠지. 캐릭터 특성들도 당해 보면 더 잘 알 테고.
기왕이면 홈페이지에 올려져 있는 각 캐릭터들의 특성을 파악이라도 해 오면 좋겠지만 황보욱이 그렇게까지 게임에 진심으로 임할 것 같지는 않았다. 솔직히 이번 한 달도 제대로 열심히 할지 의문이기도 하고.
[전체] 영원한이등병: 저희는 적 힐러 선택
[전체] 연애도현실이다: 오케이! 이벤트전 맵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이랑 다를 것 같으니까 서로 핵심 건물에서 너무 숨어있지만 말기로 합시다
아, 그러고 보니 이벤트전은 맵도 달라질 수도 있겠구나.
건물을 부술 필요가 없으니 지금 맵은 불필요한 요소가 많았다. 설마 그냥 평평한 지형에서 눈에 띄게 싸우라고 할 것 같지는 않고… 몸을 숨길만 한 사각지대를 많이 주겠지?
[파티] 오메가원: 아쉽네. 이벤트전 맵은 거너 놀기 좋을 것 같은데
[파티] 영원한이등병: 그렇긴 해도 거너하는 사람들 거의 없을 듯요 ㅠㅠ 거너 하면 바로 픽당할 테니까 솔직히 더럽게 물몸이고 회피기도 없잖아요
[파티] 개나소나: 애초에 사각지대 많은 맵 나와도 염소 솜씨로 놀기는 힘들 듯
[파티] 염소구더기: ^^?
꼭 저렇게 밉게 한마디를 덧붙이더라. 진짜 언젠가 개나소나 앞에서 보란 듯이 학살하고 다니고 만다, 진짜.
[파티] 모타리: 저기
[파티] 모타리: 그럼 저는 어떻게 하면 되나요?
[파티] 영원한이등병: 신입님은 막내님만 잘 지켜주십시오. 공격은 저희가 할게요.
[파티] 영원한이등병: 저희는 계속 죽어도 되는데 거너는 한 번 죽으면 끝이에요.
[파티] 모타리: 아하ㅎㅎ 공주님 지키는 기사 같네요!
뭐? 예상하지도 못한 비유에 마우스를 움직이려던 움직임이 멈췄다. 동시에 앞으로 걸어가던 거너도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거너는 어디를 보나 남자답고 키도 크고 신비스러운 분위기의 미남 캐인데!!
[파티] 개나소나: ㅋㅋㅋㅋㅋㅋ공줔ㅋㅋㅋㅋㅋㅋ
[파티] 영원한이등병: ㅋㅋㅋㅋㅋ막내님 공주되셨네요
[파티] 오메가원: 집사람한테도 안 부르는 호칭을 여기서 부르네…….
[파티] 오메가원: 공주님, 저희가 잘 모시겠습니다
[파티] 개나소나: ㅋㅋㅋㅋㅋ나대지말고 안에만 대기타라 공주야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바로 호칭을 정리해 버리는 모습에 마우스를 던지려다가 참았다. 역시 황보욱은 현실이나 게임에서나 나를 엿 먹이는 데 선수였다.
아군 핵심 건물에만 있다면 솔직히 안전하다. 무리하게 들어오려고 하면 건물가 견제하고 있으니 위치도 발각되기 쉬울 테고.
하지만 그렇게 안에만 숨어있으면 솔직히 게임이 재미가 없으니 우리는 최소한의 조건을 내걸기로 했다.
첫째, 지목된 상대는 아군 핵심 건물에 1분 이상 대기하지 않는다.
둘째, 지목된 상대의 목숨은 최대 세 번까지이고 세 번을 죽은 팀은 기권패를 누르고 게임을 종료한다.
이벤트전과 달리 적을 한 번 죽인다고 해서 바로 게임이 끝나지는 않으니까 진 팀이 기권이라도 해야겠지.
[파티] 오메가원: 일단 공주님을 중심으로 양 사이드로 전사랑 도적이 움직이기로 하죠.
오메가원의 캐릭터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차례대로 개나소나와 영원한이등병 캐릭터 위로 검은 꽃이 피어났다. 이동 속도 증가의 버프를 받은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양 사이드로 찢어져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에 남은 것은 여유롭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시야를 확보하고 있는 오메가원과 거너 캐릭터 옆에 찰싹 붙어있는 모타리.
[파티] 오메가원: 이벤트 맵이 어떻게 나올지가 관건이긴 한데
[파티] 오메가원: 오히려 사각지대가 많은 맵이면 좋을 것 같음 우리도 숨기 편하고
[파티] 염소구더기: 아무래도 거너가 거의 대부분 픽 당하겠죠?
[파티] 오메가원: 그럴 듯. 생각이 있으면 탱커랑 전사를 고르지는 않을 테고 암힐러도 적 해치우면 HP가 회복되니까
[파티] 오메가원: 도적이랑 거너 위주로 많이 연구해야할 듯
[파티] 개나소나: 비행사 궁극기 소리 들렸음
궁극기?
개나소나의 말에 모타리가 서둘러 거너의 앞을 가렸다. 하지만 비행사의 궁극기라면 역시 위겠지.
비행사의 궁극기는 적을 납치해 높은 상공까지 데리고 올라갔다가 떨어뜨리는 것.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버려라.
[공격 속도가 증가합니다.]
오메가원의 버프로 거너의 위에도 검은 꽃이 피어올랐다. 켜진 저격 레이더망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니 역시 아군 핵심 건물 방향으로 날아오는 거대한 날개가 보인다.
어쩌면 이벤트에서 비행사 캐릭터는 상당히 좋을지도 모른다. 높은 상공에서 여유롭게 적의 위치를 살펴볼 수 있고 운 좋게 타깃을 발견하면 본인들의 기지로 납치할 수 있으니까.
설령 떨어뜨린 걸로 즉사시키지 못해도 그곳에 적군들이 많으면 타깃은 힘없이 죽겠지. 사실상 저렇게 높이 떠있는 캐릭터를 공격할 수 있는 캐릭터가 얼마 없기도 하고.
오메가원의 버프 탓일까. 탄환이 평소보다 빠르게 날아가 비행사의 날개를 맞혔다. 커다란 날개만 보이고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그 위로 붉은 HP가 절반 이상 떨어진 게 보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저격으로 맞히니 HP가 소멸되고 바닥으로 추락하는 모습이 보인다.
1Kill.
[염소구더기 님이 적군을 처리하였습니다.]
[파티] 모타리: 멋있어요!!
[파티] 영원한이등병: 오오, 막내님~
[파티] 오메가원: 비행사 너무 당당하게 날아왔음 거너 밥이지
[파티] 개나소나: ㅋ 그래도 저격 솜씨가 좀 늘긴 했나보네
순수한 감탄과 약간의 비꼼이 있기는 했지만 어떠하리.
비행사가 죽은 뒤 적군을 발견한 모양인지 영원한이등병이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우리 셋은 달려가지 않고 자리에 서있었다. 어차피 반대편에서 개나소나가 달려가고 있었으니까.
영원한 이등병을 피해서 반대쪽으로 달려가던 일행들이 몸을 숨기기 위해 암흑 지역으로 향한다. 하지만 그 앞에서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는 날 선 칼날은 보지 못했겠지.
내 칼이 오늘도 붉게 물들겠군.
개나소나의 궁극기 소리가 들려왔고 잠시 후 알림이 떠오른다.
1Kill.
2Kill.
3Kill.
Triple Kill!
짧은 시간에 연속으로 세 명을 죽이자 개나소나의 닉네임과 함께 트리플 킬 알림이 울렸다. 힐러의 머리 위에도 어느새 사망했다는 표시가 떠올랐다.
[파티] 영원한이등병: 아앗… 양치기 소년이 되어버렸다…….
졸지에 적들을 개나소나에게 몰아준 영원한이등병이 아쉬움을 호소했다. 지금 당장은 적 힐러를 죽인다고 얻는 혜택은 없긴 하지만 딜러들이라면 저런 킬 알림이 뿌듯하긴 할 테니까.
[파티] 오메가원: 누구 남음?
[파티] 영원한이등병: 탱커 한 명이요! 금방 녹일 듯요!
영원한이등병의 채팅과 동시에 곧이어 적군을 처리하였다는 알림 메시지가 울렸다. 그것도 개나소나의 손에 의해.
쿼드라 킬이라는 알림이 울리자 복귀하는 영원한이등병은 울상을 지었다.
[파티] 영원한이등병: 개나소나 형님이 막타 먹었어요! 마지막 놈은 제가 거의 다 때렸는데!
[파티] 개나소나: 막타도 실력임ㅅㄱ
[파티] 오메가원: 그건 인정
[파티] 염소구더기: 인정
[파티] 영원한이등병: 젠장, 여긴 천상 딜러들 뿐이야! 신입님은 제 마음 이해해주시죠?!
[파티] 모타리: ……? 저는 탱커라서 누가 죽이든 상관없어요.
[파티] 영원한이등병: 어떻게 킬에 욕심이 없을 수가 있지? 탱커 마인드는 전부 이런가요……?
뭐, 영원한이등병이 속 쓰린 이유는 알겠지만 게임에서 누군가에게 킬을 양보한다는 것도 웃기고. 솔직히 예전부터 거너 궁극기로 막타를 먹은 적은 많았기 때문에 나도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영원한이등병도 장난이었던 모양인지 그 뒤로 속상하다는 식으로 말하긴 했지만 크게 개나소나에게 따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런 걸로 따지면 파티를 오래 유지할 수 없기도 하고.
모타리를 제외한 캐릭터가 전부 공격형이라서 밸런스가 나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런 걱정이 우습게도 승기는 쉽게 거머쥘 수 있었다.
특히 적팀 비행사가 못해서 궁극기를 너무 대놓고 쓰고 천천히 오니 제거하기 쉬웠다.
[파티] 모타리: 저 캐릭터는 궁극기가 비행이 전부인가요?
오죽하면 비행사의 궁극기를 한 번도 보지 못한 모타리가 저렇게 물었을까.
가끔씩 개나소나와 영원한이등병의 눈을 피해 접근한 탱커도 있었지만, 오메가원의 디버프 스킬에 속도가 느려지면 다가오지 못하게 모타리가 평타를 때렸다.
둘만 있었으면 딜이 크게 안 들어갔겠지만 아쉽게도 공주님 역할이 딜에만 올인을 했으니.
[파티] 개나소나: 어째 열심히 뛰어다닌 우리랑 가만히 있던 거너 킬 수가 별반 다르지를 않다?
[파티] 오메가원: 좀 걱정했는데 이 조합도 재미있을 듯
무려 그 잠깐 사이에 6킬을 한 거너의 전적을 보고 개나소나가 헛웃음을 지었다.
적 힐러가 세 번 죽으면 끝이니 게임이 무척 빨리 끝났는데, 그사이에 6킬이면 많이 했지.
심지어 중간에 대신 죽은 모타리를 제외하면 오메가원과 나는 한 번도 죽지 않았다. 너무 쉽게 죽으면 어쩌나 했는데도.
[파티] 개나소나: 이거 막판. 할 일 있음
[파티] 영원한이등병: 저도 저녁 먹으러 오래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그 뒤로도 이 조합으로 게임을 하는데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본격적인 게임은 다음 주부터.
다 같이 만날 시간을 정한 뒤 빠르게 사라지는 개나소나를 따라서 영원한이등병도 다음에 보자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는 파티를 떠났다.
[파티] 염소구더기: 두 분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파티] 오메가원: 집사람 오면 외식하기로 해서 한 판 더 해도 될 듯. 조금 늦는다고 하네
[파티] 모타리: 저도 한 번 더 하고 종료할게요ㅎㅎ
그럼 셋이서 하는 건가. 다섯 명이 아니니 이번에는 이벤트전과는 상관없이 편하게 즐기자고 얘기하고는 게임을 시작했다.
대기 시간 동안 우리는 채팅을 하면서 가볍게 대화를 나눴다. 저녁 약속이 있다던 오메가원이 모타리에게는 저녁을 먹으러 가지 않아도 되냐고 묻는 타이밍이었다.
[파티] 모타리: 아ㅎㅎ 저는 저녁은 잘 안 먹어요. 먹으면 새벽에 공부할 때 졸려서요
[파티] 오메가원: 새벽에 공부를… 한다고? 게임이… 아니라?
[파티] 모타리: 네, 오늘은 게임도 했으니 그 시간 채워서 더 해야죠!
[파티] 오메가원: 혹시 고3?
[파티] 모타리: 아니요 대학생인데 장학금을 목표로 하고 있어서요ㅎㅎ 부모님한테 최대한 폐 끼치지 않으려고요.
아니, 설마 저렇게까지 공부를 열심히 할 줄은 몰랐는데. 게다가 지금은 시험 기간도 아닌데 새벽까지 공부를 하겠다니.
수능 준비 이후로는 제대로 된 공부를 해본 적이 없던 나는 놀라 입을 뻐끔거렸다.
물론 대학 입시 난이도도 어려웠으니 여기서 장학금을 타려면 엄청 공부를 하긴 해야겠지.
나는 그냥 입학과 졸업에 의미를 두는 것뿐이라서 크게 신경 쓰지는 않지만 다른 과인 손지우도 열심히 하기는 했다. 그래도 장학금은 못 타고 상위권만 유지하고 있는데.
[파티] 염소구더기: 그렇게 무리해서까지 게임 할 필요는 없는데
[파티] 모타리: 아니에요. 생각보다 재미있기도 하고 염소형이랑 같이 하고 싶어요!
[파티] 오메가원: 올, 신입님이 염소구더기님 많이 따르는 모양이네
[파티] 오메가원: 친함?
[파티] 모타리: 저 아무것도 모르고 게임에서 욕먹고 있을 때 도와줬어요!
[파티] 모타리: 정말 멋있었어요ㅎㅅㅎ
그렇게까지 특별히 잘해 주진 않은 것 같았는데.
어쩐지 민망해서 대답은 하지 않았다. 황보욱이라는 걸 알아서 상냥하게 대답해 주기에도 뭔가 좀 이상했고.
게임이 매칭이 되었다는 알림과 함께 새 게임에 접속되었다. 그리고 캐릭터를 선택하라는 알림과 함께 익숙하게 탱커와 암힐러를 선택하는 팀원들. 나 역시 거너를 선택하려고 할 때였다.
[팀] 자세히봐야몬생김: 설마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네요.
개나소나와 영원한이등병 대신에 랜덤으로 들어오게 된 두 명도 파티인 모양이었던지 푸른 테두리로 감싸여 있다. 게다가 말을 거는 인물은 저번에 만났던 WINNER 소속이라고 하던 인물.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당황해서 캐릭터를 고르지 못하는 사이, 아군 쪽에서 거너를 선택했다.
아군이 거너를 선택했으니 나는 다른 걸 선택해야 하는데 거너를 선택한 이의 프로필이 너무 익숙해서 멍청하게 지켜보기만 했던 것 같다.
[팀] 믄님: ?
믄님이다.
거너 캐릭터 사용법을 알려주고 게임에 정을 붙일 수 있도록 챙겨줬던 인물이자 WINNER의 길드 마스터, 믄님.
내게는 워너비 같던 존재와의 만남이었다.
[팀] 자세히봐야몬생김: 믄님. 제가 저번에 말했던 염소님 부캐요
[팀] 믄님: ?
답답할 정도로 한결같은 대답이었지만 자세히봐야몬생김은 평온했다. 짜증을 내지도 않고 어색하게 웃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있는데 믄님을 잘 알고 있는 지인이라는 게 느껴졌다. 그야 믄님은 원래 저런 식으로 대답하니까.
진짜 믄님이다.
채팅창에 올라오는 걸 보면서도 믿기지 않아 입을 막은 채 아무 채팅도 치지 않고 있는데, 파티 채팅창도 열심히 올라온다.
[파티] 모타리: 형, 아는 사람이에요?
[파티] 오메가원: ㄷㄷ 믄님이라면 예전 전성기 위너 길마 아님???
[파티] 모타리: 위너?
게임에 대해 잘 모르는 모타리는 WINNER가 얼마나 대형 길드인지 잘 모르겠지. 반면에 오메가원은 레벨이 높은 만큼 그동안 더 세이렌의 유명한 소식들은 어느 정도 꿰차고 있는 모양이었다.
대형 길드의 마스터 닉네임까지 기억할 줄은 몰랐지만 한편으로는 이해도 갔다. 믄님은 알아주는 거너 랭커 최상위권이었으니까.
WINNER라는 길드를 몰라도 더 세이렌에서 거너를 하는 유저라면 믄님 영상을 한 번씩 참고했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팀] 믄님: 아
[팀] 믄님: 오랜만이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연락을 못 했는데 담백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런 표현도 믄님 입장에서는 굉장히 반갑다는 표시임을 알기에 나는 오두방정을 떨고 싶은 것을 겨우겨우 꾹 참으며 채팅을 쳤다.
[팀] 염소구더기: 믄님 ㅠㅠㅠㅠ 진짜 너무 오랜만인데 생존 신고 좀 해주시지ㅜㅜ
[팀] 믄님: 친추 하지
[팀] 염소구더기: 친추 하도 많이 와서 예전에 전체 거부했다고 했잖아요ㅜㅜ!! 필요한 사람들은 먼저 믄님이 걸고!
물론 오두방정을 꾹 참은 채팅이라는 걸 남들은 모르겠지만. 이런 내 반응이 익숙한지 믄님은 ㅋㅋㅋ, 라고 짧게 웃었다. 하지만 평소에는 ㅋ, 하고만 웃는걸! ㅋㅋㅋ, 는 잘 쓰지 않는데 내게는 자주 써주시는 편이었다.
그게 같은 거너 제자로서, 믄님을 존경하는 유저로서, 같은 길드원(과거)으로서 얼마나 뿌듯했는데!!
[팀] 오메가원: 막내님 인맥이 장난아니네
[팀] 오메가원: 과거 랭커라는 소리 찐이었군요
파티 채팅으로 대답하지 않는 내 태도에 서운해할 법도 한데, 착한 오메가원 님은 별다른 말씀 없이 팀 채팅으로 바꿔서 얘기했다. 그사이에 캐릭터를 선택하라는 재촉이 이어졌고 나는 서둘러 물 정령을 선택했다.
그러자 곧바로 시작된 게임.
게임이 시작되자 오랜만에 등장한 물 정령이 제자리에 빙그르르 돌면서 물방울을 주변에 터뜨렸다. 그리고 환하게 펼쳐지는 무지개. 옆에서 쓸데없이 자세히봐야몬생김이 박수 치는 모션을 취했다.
[팀] 자세히봐야몬생김: 염소구더기님이 과거에 다른 염소님으로 거너 랭커이기는 했죠.
[팀] 자세히봐야몬생김: 그 실력으로 WINNER 길드에 있었고
[팀] 자세히봐야몬생김: 저는 당시에 없었지만 소문으로는 부길마와 싸웠다면서요?
[팀] 염소구더기: 싸운 게 아니라 불경한눈깔 놈이 시비를 걸었어요
[팀] 자세히봐야몬생김: 아하, 부길마는 미끼를 던졌고
[팀] 자세히봐야몬생김: 염소님은 그것을 덥석 물었다?
[팀] 염소구더기: ㅡㅡ
전부터 생각했지만 쟤는 참 살살 사람을 잘 긁네. 저것도 재능인가. 저게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악의가 없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개나소나랑 비슷한 듯 다른 매력이 있네, 참.
[팀] 믄님: 하지마
[팀] 자세히봐야몬생김: 오케이
그래도 믄님 말은 잘 듣네.
감싸준 믄님에게 감동하고 있는데 오메가원이 정신 차리라며 암힐러가 앞을 얼쩡거렸다.
아오, 깜짝이야.
[팀] 오메가원: 집중
[팀] 자세히봐야몬생김: 건물 치러 갑시다
아군의 포지션은.
염소구더기: 정령사(어시/물)
오메가원: 힐러(힐러/암흑)
모타리: 무투가(탱커)
자세히봐야몬생김: 전사(근딜/얼음)
믄님: 거너(원딜)
실제로 딜러를 할 수 있는 인물은 얼음 전사와 거너뿐.
모타리가 죽지 않게 잘 보호하면 괜찮은 싸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건물을 치고 있던 얼음 전사가 얘기했다.
[팀] 자세히봐야몬생김: 탱 갑니다
[팀] 오메가원: 공
적을 죽이거나 피해를 입힐수록 스스로 회복하는 암힐러 특성상 공격을 타는 유저는 많았지만, 얼음 전사로 탱커라니? 사실상 초반 세팅을 공격이 아닌 방어 위주로 하겠다는 뜻이었다.
아군에 탱커가 없으면 어쩔 수 없이 근딜이 그렇게 하는 경우도 종종 있긴 하지만 탱커가 있는데 굳이 그런 무리수를?
아니, 무리수는 아닌가.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버려라.
건물을 치던 믄님이 별안간 등을 돌리더니 암흑 지역으로 궁극기를 시전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나아가는 탄환.
1Kill.
[믄님 님이 아군이 적군을 처리하였습니다.]
적팀의 도적 캐릭터가 죽었다는 데스 알림이 에 떴다. 너무나도 빠르게, 그것도 단번에 죽은 적군.
아무리 도적이 종이 몸이라고는 하지만 저렇게 한 번에 죽일 수 있는 건 정확히 헤드 샷을 맞혔을 때뿐이다.
믄님은 바로 궁극기를 끄고 건물을 쳤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 일을 진행하는 모습이 너무 멋있다.
이건 합리적인 사랑 맞지? 그렇지?
[팀] 오메가원: 와 어떻게 알고 바로 쏨?
[팀] 믄님: 도적 캐릭터 걷다가 중간에 점프할 때 들리는 바람 소리가 좀 다름
믄님은 설명해 줄 때만 유일하게 길게 얘기한다. 그런데 그 설명을 이해하는 게 믄님 한정이라서 다들 쉽게 해내지 못하는 게 문제였지만.
그래서 거너 공식 영상에도 ‘ㄹㅇ 믄님 아니면 아무도 못 함’이라는 댓글로 도배된 게 많을 정도였다.
‘도적이 점프할 때 들리는 소리가 다르다고? 그랬나?’
다음에 영원한이등병이 접속하면 한번 물어봐야지. 하지만 건물을 치는 아군 캐릭터의 평타 소리 속에 섞일 텐데 캐치를 할 수 있을까.
확신했다. 본인은 알아도 저렇게 절대 못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더 밀려들어 오는 존경심.
‘내가 이래서 믄님을 워너비로 여겼는데……!’
거너 유저들 사이에서는 믄님을 종교처럼 떠받들고 모시는 유저들도 많았다. 그만큼 신들린 플레이를 보여주었고, 그를 따라서 거너를 도전하는 유저들도 많았으니까.
닉네임마저 신성해.
사촌 형인 손지우가 들었다면 질색하며 당장 게임을 끊으라고 할 법한 발언이었다.
[팀] 모타리: 거너는 우리 염소형이 더 잘해요!
[팀] 믄님: ?
[팀] 염소구더기: ?
[팀] 오메가원: ?
[팀] 자세히봐야몬생김: ㅋㅋㅋㅋㅋㅋㅋ
여기서 제일 믄님의 실력, 대형 길드 WINNER의 존재, 거너 최상위권이라는 사실을 유일하게 알지 못하는 모타리의 의기양양한 말이 순간 정적을 불러일으켰다.